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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폭풍 전야(3)

황제의 집무실.

타로스는 정무에 복귀하여 라팅 자작과 마주했다.

"지시를 한 지 일주일 만에 조사를 끝내다니. 어사대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이 아닌가."

"황공하옵게도 이번에는 특수 정보부의 제이나 부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를 지휘하였사옵니다."

"제이나 부장이?"

"아주 거침이 없더군요. 가히 어사대에 비견이 될 만합니다."

극찬이다.

라팅 자작은 밑바닥부터 시작한 어사 출신에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자작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대단했는데, 그런 그가 비슷한 분야에 속한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추켜세우기는 처음이었다.

"제이나 부장은 폐하께서 여행 중에 천거한 인재로 알고 있습니다. 어사들 내에서도 제이나 양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인정했습니다."

"특수 정보부 자체가 여러 가지 공작에 특화되어 있지."

"그녀가 조사한 정보에 따르면 해외의 상단들이 인시드강을 통과하면서 그들에게 일종의 통행세를 바쳤사옵니다."

"통행세라."

"일반적으로 1할 정도의 통행세를 걷는 정도라면 이걸 비리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오나 그들은 무려 원가의 100% 수준의 뇌물을 받았고, 제국 중앙으로 물건이 넘어오니 원가의 300%까지 가격이 치솟은 것입니다."

"지나치게 가격이 오른 이유가 여기 있었군. 돼지 같은 작자들이다."

"욕심이 지나치다 못해 제국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사옵니다."

톡. 톡. 톡.

타로스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자 라팅 자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황제가 장고에 빠지고 나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뿌리를 뽑아 버리려는 황제의 성격상, 이만한 비리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의 아이들이 사라지자 기어코 추격하여 그 뿌리까지 발본색원한 황제였다. 그 과정에서 대전쟁이 미루어졌지만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장고 끝에 타로스는 결단을 내렸다.

"무도회를 핑계로 제도 근방의 제후들을 모조리 초대해라."

"명분이 필요하옵니다."

"선발대를 선정한다는 명분이면 충분할 터. 좋은 땅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길 것이니 한 명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선발대에 대한 관련된 칙령이 제국에 떨어졌다.

선발대란 제국군 40만 중에서 10만 정도만 미리 이끌어 국경 영지에 자리를 잡은 후,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을 말한다.

그들에게는 전진 기지 건설, 정보 수집, 세작의 파견 등의 임무도 주어지는데 선발대로 제후가 선정된다면 여러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빠른 공을 내세워 노른자위 땅을 선점할 수 있다.

핵심적인 땅은 먼저 황가에서 선점하겠지만, 2순위로 영토가 배정된다는 이점은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다.

영토가 곧 권력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대다.

선발대로 선정된 제후는 제도에서 가까워야 했으므로 브론티아 근방의 제후들은 모두 황제의 명령에 응했다.

귀족파 일부인 오로스 후작 파벌은 인시드강에 배를 띄워 단 하루 만에 제도에 내렸다.

전 세계에서도 꼽아 주는 대항구인 브론티아 항에는 끊임없이 물자들이 쌓이고 있었다.

물자가 쌓이는 즉시 전쟁 관리국 관료들이 인부를 부려 수레에 싣고 사라졌다.

그 밖에도 상인들과 전쟁의 냄새를 맡은 용병들까지 오가면서 유래 없는 대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반년 만에 더욱 발전한 브론티아 항을 보며 오로스 후작은 침을 삼켰다.

"제도를 경영하는 자가 대륙을 경영하게 될 것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말입니다."

잠깐이지만 귀족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스쳐 간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는 행위였기에 그들은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었다.

마차 6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된 도로에는 끊임없이 물자가 통행되었고, 황궁으로 이어지는 관도 근처에서는 신병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군사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황제가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군요."

"당연한 일이지. 제국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상 병력의 증강은 필수적이다. 15만으로 제국 전체를 통치한다는 것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의 특수성으로 유지되었을 뿐. 그나마도 한계에 부딪쳤으니 증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앙군 전체에서 중앙 3기사단의 기사들을 뽑는다는 공문이 내려왔답니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려면 최소한 30만 중앙군에 5개 기사단은 필요하다. 그 역시 자연스러운 일."

오로스 후작은 이러한 군사력 증강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명색이 대륙 일통을 선언한 황제였다.

그만한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력이 필요하다. 다만 황실 재정이 열악한지라 한계까지 쥐어짜도 5만의 병력을 증강시키는데 그칠 뿐.

"영토가 확장된다면 언젠가 기회를 노려 볼 수 있다. 황제가 대륙 전체를 두고 싸운다면 분명 한계의 상황이 온다."

오로스 휘하 귀족들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국이 분열된다면 그때를 노려야 했다. 그걸 위하여 최대한 많은 영토와 인구를 보유해야 한다.

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병력을 증강하고 육성한다.

노른자위 땅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이 선발대가 되어야 했다.

발톱을 감추고 미래를 대비하려는 자들.

오로스 후작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3월 중순.

대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시기였다.

제국 각지의 제후들은 변방에서부터 먼저 병력을 출발시켰다.

동부에 위치한 제후들은 이미 각자의 병력을 구성하고 물자를 실어 브론티아로 진군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국 전체가 전쟁에 관심이 쏠려 있는 이때, 황제는 선발대 선정을 이유로 무도회를 열었다.

귀족 회의가 아니라 일부 제후들만 모이는 것이었기에 작은 무도회의 형식을 빌려 발표할 것이다.

제후들의 관심은 온통 이곳에 쏠려 있었다.

선발대가 가지는 특권을 생각하면 반드시 선정이 되어야 한다.

제후들은 가족들과도 함께 참석하였는데, 아직도 2황후의 자리가 공석인지라 어떻게 해서든 외척이 되어 보기 위하여 영애들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노력했다.

여러 정치적인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는 가운데 무도회가 열렸다.

전쟁 직전이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음식도 최대한 간소하게 준비되어 있었지만, 귀족들은 그다지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황제가 등장했다.

"만국의 왕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철컥.

"헉!"

"어찌 폐하의 복장이...."

황제를 본 귀족들이 바로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무도회에 온다는 사람이 갑옷을 입고 들어오니 침음을 흘렸다.

척척!

그 이후 기사들이 무도회장을 봉쇄하였으며, 병사들이 외부로 둘러싸며 철저하게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거기까지 일이 진행되자 제후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뭔가 일이 터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웅성웅성.

황제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는 그 특유의 무심함 때문에 어떤 감정을 읽어 내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일을 벌이자 제후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대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제후를 압박하는 것은 황제라고 해도 정치적인 부담이 심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벌인다는 것.

오로스 후작과 그 일파는 설마 하는 마음을 가졌다.

'아니겠지.'

황제가 그러한 일로 칼을 빼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오늘 짐이 경들을 부른 것은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선발대를 이끌 제후를 선정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그 전에 제국을 좀먹는 쓰레기들을 치우기 위함이기도 하지. 라팅 자작."

"예, 폐하!"

어사대장 라팅 자작이 걸어 나왔다.

최근 황권이 강화되면서 고위 귀족들을 감찰하는 어사대의 힘도 강화되었다.

어사대까지 등장하자 귀족들은 정말로 뭔가 일이 터졌다고 여겼다.

황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스스로 제국을 분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한 명분이 있기에 움직이는 거라 예상했다.

"조사한 바를 발표하라."

"이번 전쟁은 다들 알다시피 제국의 식량난을 타파하기 위함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거국적인 결단인 것이지요. 이에 황실에서는 어마어마한 채무를 감당하면서까지 대전쟁을 주도하고자 하였사옵니다."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전쟁 자체가 황실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음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대전쟁에서 율리우스 왕국을 멸망시키지 못하거나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황실이 파산할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경제 자체가 빚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

조금 더 라팅 자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현실을 빤히 알면서도 일부 제후들이 해외 상단과 결탁하여 최대 물자의 100%에 이르는 뇌물을 받고 해당 상단에서는 원가의 300%에 이르는 값을 책정하여 공급한 정황이 있습니다."

"...!"

"어떤 미친 작자들이!?"

"폐하! 정신이 나간 놈들입니다! 신에게 검을 쥐여 주신다면 바로 썰어 버리겠나이다!"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전 병력을 동원하여 해당 영지를 쓸어버리겠습니다!"

"반역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정숙하시오! 폐하께서 계신 자리요."

라팅 자작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제후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제후들은 황제가 무도회라는 형식을 빌려 초대한 이유를 알게 됐다.

반역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 가문 자체를 멸해 버리기 위하여 무도회를 연 것이다.

빠지직!

그때, 황제의 손에서 뇌전이 흐르며 눈앞의 테이블이 박살 났다.

황제의 분노가 작렬했다.

"짐은 이 사태를 두고 볼 수가 없다. 전쟁 중에 부정을 일삼은 자의 형벌은 어찌 되느냐."

"즉참이옵니다!"

황제가 검을 들었다.

"헉! 폐하! 살려 주십시오!"

그야말로 초강경 대응이었다.

설마하니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황제가 직접 검을 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오로스 후작 일파는 경악한 채로 죄를 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검을 들어라. 너희들은 즉참을 해야 마땅하나 지금까지 제국에 헌신하였던 노력을 생각하여 짐과 생사결을 할 기회를 주겠노라."

"비, 빌어먹을!"

"선택하라. 이 자리에서 반항도 못 한 채로 죽을 테냐, 짐의 제안에 따르겠느냐."

"어찌하여 폐하와 결투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

황제의 말은 타당했다.

제국은 전시 체제였고, 전시 행정부가 구성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자의 가격을 후려치고 결국에는 제국의 보급망에 타격을 주었다. 이는 반역죄로 다스려야 하는 중죄였다.

법률이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른 법이다.

오직 황제만이 법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로스 후작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이번 일에 가담한 제후들을 한꺼번에 상대하실 수 있으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얼마든지 덤벼라."

#제54화. 폭풍 전야(4)

황제의 파격적인 행보.

제후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움직이자 오로스 후작 일파는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황제는 죄인들을 궁지로 몰아갔고, 결국 오로스 일파의 몰락은 예견이 되어 있었다.

체포된 제후들은 곧바로 콜로세움으로 끌려왔다.

무려 5만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급작스럽게 발표된 제후들의 도전으로 꽉 차기 시작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모여들고 있는 군중을 바라보며, 오로스 후작이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황제가 대낮부터 무도회를 연 이유가 이것이었나."

"이길 수 있겠습니까?"

으드득!

"황제는 혼자고 우리는 제후가 넷이다. 아무리 황제가 대륙의 최강자로 불리는 존재라고는 하나."

오로스 후작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워낙 황제의 대처가 빨라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멸문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제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 괴물 같은 놈을 콜로세움에서 공식적으로 몰아낸다면, 제국은 곧바로 분열된다.

후계자가 마땅히 없는 상황이었으며, 원래 제국 황실이란 제국 최강자가 지배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존재가 사라지면 제국이 무너지거나 새롭게 황제를 뽑는 대회가 개최될 것이다.

돌파구는 분명 있었지만 란데스 백작, 벤자민 백작, 한스 자작 모두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왜들 그리 죽상인가!"

"황제는 드래곤과 지옥의 대군주까지 박살 낸 인물입니다! 우리가 어찌 이기겠습니까? 모두 여기서 죽을 겁니다. 크흐흑."

"그래서!? 원거리에서 황제를 타격하고 거리를 벌린 채로 연환계로 공격한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음이다. 우리도 평생 무학을 수련한 자들이 아닌가? 경들은 남자로서의 기개도 없나?"

제국에서 제후가 된다는 것은 타국의 영주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병사부터 시작하여 기사를 거친 자들이 있을 만큼 노력하는 인간들이다.

유서가 깊은 가문이라고 하여도 노력하지 않는 자는 제후가 될 수 없다. 제국에서 가문이란 조금 더 효율적으로 수련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양성 기관일 뿐이었다.

물론 황제라는 이름 때문에 위축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우리는 이긴다. 그리하여 제국을 분할한다."

제후들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5만의 관중이 다 들어차는 데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황제의 실력을 생각하면 단 5분 안에라도 네 명의 제후들은 끝장을 낼 수 있다고 봤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콜로세움 한복판으로 라팅 자작이 올라왔다.

"우리 어사대는 제국을 좀먹고 있는 쓰레기들을 포착하였다. 저기 저놈들은 황실의 재정 부담이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외세와 결탁하여 물가를 올리고,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 체계를 망가뜨렸다."

웅성웅성.

줄줄이 귀족파의 죄목들이 열거되었다.

오로스 후작은 귀족파 수장격의 인물이었고, 비옥한 토지와 교역 도시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니, 사형이 맞다.

특히나 전시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노라."

"반역자를 죽여라!"

"참수하라!"

"황제 폐하의 은혜를 배반한 놈들!"

백성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황제는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세제를 혁파하여 백성들의 삶이 체감될 정도로 좋아졌을 뿐만이 아니라 제국 내 여러 위협들을 없앰으로 민심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이런 가운데 황제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중죄였다.

물론 제후들은 좀 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바라봤다.

"허허, 폐하께서 이런 식으로 황권을 강화하시는군."

"그렇다고 해도 워낙에 명분이 뚜렷하지 않습니까. 감히 전시에 부정 뇌물을 축제하다니.... 황실의 상황을 생각하면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중죄는 맞지요."

"이건 본보기야. 다른 생각일랑은 아예 접으라는 뜻이지."

"...부정은 못 하겠군요."

제후들이 느끼기에는 이 사건 자체가 황제의 한 수로 생각됐다.

정치적으로 너무 깔끔한 수였다.

오직 황제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완벽한 명분이 있었기에 귀족파 제후들을 위에서부터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들의 가문을 모조리 황실로 회수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이다.

기사단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며, 부족한 자금도 어느 정도 충당된다.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저벅저벅.

모두의 시선이 어사대에 머물러 있을 때, 황제가 움직였다.

연무장으로 올라온 황제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모두 풀어 줘라."

네 명의 제후들이 연무장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검을 쥐었고 황제 역시 비스듬하게 검을 내려 쥐었다.

황제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국을 위해 헌신한 노고를 생각하여 명예로운 죽음을 선고하노라."

팟!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제후들이 황제보다 먼저 움직였다.

콰과과과광!

연신 공격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공격들은 타로스의 몸에 닿지 않았다.

타로스는 마나를 무려 4천이나 보유했다.

몇 가지 매직 아이템들을 추가하였고, 유물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이 2천이나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20방, 그리고 파워드 킬은 무려 40번이나 쓸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덤덤하게 그들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화려한 검강들이 연신 실드를 타격했다.

폭발의 범위가 연무장 밖까지 미쳤다.

마법사들은 전체 실드를 적용하여 전투의 여파가 더 크게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래도 안 되면 기사들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격을 쳐 냈다.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닌 네 명의 제후들이 무차별로 공격을 쏟아붓자 화려한 폭발에 황제의 모습이 가려질 정도였다.

30초 정도가 흘렀을까.

다소 힘이 빠진 제후들이 타로스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런 미친!"

"저런 괴물이...."

"와아아아!"

공격하던 제후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타로스를 바라봤고, 이곳에 모인 관중들은 환호성을 쏟아 냈다.

왜 황제가 대륙 최강자로 불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타로스는 파워드 킬을 사용하여 5미터 내에 있는 오로스 후작부터 날려 버렸다.

콰아아앙!

푸하하학!

오색의 찬연한 빛이 오로스 후작에게 닿았다.

동시에 오로스 후작은 다소 잔인한 모습으로 찢어져 널브러졌다.

"으아아!"

오로스 후작의 일가는 그 모습을 보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제후들 사이에서는 공포가 뇌를 지배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란데스 백작이 달려들었다.

스슷.

타로스는 공간을 도약하여 란데스 백작의 머리 위로 나타났고, 단숨에 머리통을 쪼개 버렸다.

서걱.

툭.

란데스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제 벤자민과 한스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어떤 공격도 황제에게 먹히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저 괴물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저벅저벅.

타로스가 천천히 벤자민 백작에게 걸어갔다.

연신 벤자민은 뒷걸음질을 쳤다.

"오, 오지 마!"

타로스는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 그리고 뇌전검결을 사용하여 그대로 놈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빠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철퍽.

육편 조각이 바닥으로 흘러내리자, 이제 마지막으로 한스 자작만 남았다.

한스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렸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자 싸울 의지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놈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쿠웅!

쿵! 쿵!

연무장 바닥이 박살 날 정도로 머리를 박아 대자 한스 자작의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흘렀다.

"폐하! 부디 이 반역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허한다."

"저희 귀족파 일부가 미래에 반역을 획책한 것은 사실이나, 부디 가족들의 목숨만큼은 보존해 주시기를 간청 드리옵니다!"

"...!"

웅성웅성.

딱히 타로스가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한스 자작은 알아서 본인의 죄를 토설했다.

미래에 반역을 획책했다는 것.

지금은 아니지만 힘을 쌓아 제국이 흔들리는 틈을 타서 제국 자체를 분열시키려 하였다는 뜻이었다.

반역이란 역심을 품은 것만으로도 3족이 멸해지는 중죄다.

황제가 될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이 있었기에 제국에서는 반역을 더욱 엄하게 다스렸다.

만약 타로스가 저들의 3족을 멸한다고 해도 그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심하면 9족까지 멸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한스 자작의 청은 그저 황제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타로스가 검을 늘어뜨렸다.

"네 죄를 인정하는 것이더냐."

"인정합니다! 오직 황제 폐하의 자비만을 바랄 뿐입니다!"

"짐은 경들의 명예를 생각하여 도전할 기회를 주었다. 도전자의 가족은 자유민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 바, 경은 걱정 말라."

쿵! 쿵!

한스 자작은 다시 머리를 바닥에 두 번이나 처박았다.

그러고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황제 폐하 만세! 제국이여, 영원하라!"

푸욱!

푸확!

자작의 검은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었고 다량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결국 한스 자작은 자결했다.

이 어마어마한 퍼포먼스에 시민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곧 어사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포감은 카타르시스로 전환되었다.

"위대한 황제 폐하 만세!"

"와아아아!"

함성의 물결이 요동쳤다.

황제는 무적이라는 인식.

지금껏 황권이 떨어졌던 것은 오직 황제가 제국을 구하기 위한 수련 때문이었으며, 태업을 깨고 제국을 경영하게 된 이상 제국이 위대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영구적인 평화를 이룩할 위대한 군주.

광풍이 콜로세움을 휩쓸었다.

황궁 어전.

타로스는 황실 기사단과 병무대신 로무스 백작을 불렀다.

"로무스 백작."

"예, 폐하!"

로무스 백작의 눈에 정기가 돌았다.

중앙군을 움직이는 로무스 백작은 궁정 귀족이었지만 제국 후작급의 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오직 황제에 대한 충심으로 똘똘 뭉친 자.

다소 머리 쓰는 일에는 둔감하여 문제이지, 무력, 병법, 통솔 등 군제에 대해서는 전혀 나무랄 것이 없는 인물이다.

타로스는 그에게 영지 회수 건을 맡겼다.

"오로스 후작가와 란데스 백작가, 벤자민 백작가, 한스 자작가를 회수하고 봉신 계약을 파기한다. 중앙군 5만을 동원하여 차례대로 그들의 영지를 접수하도록 하라. 반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

"존명!"

"로빈슨 단장."

"예!"

"백작을 보조하라."

"황명을 받드옵니다!"

척!

로무스 백작은 거대한 그레이트 액스를 어깨에 짊어졌다.

"간만에 몸 좀 풀어 보자고! 크하하하!"

제국 중앙군이 회수된 영지를 수습하기 위하여 움직였다.

#제55화. 폭풍 전야(5)

랭턴 공작의 영지.

제국 서쪽에 치우쳐 있는지라 아직 출병에서 여유로운 랭턴 공작은 최대한 병사들의 훈련도를 높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영지의 영혼까지 끌어모아 8만의 병력을 출병시키기로 하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어온 전보.

황제파로 전향한 랭턴은 제국 전체를 떨어 울리고 있는 소식에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하! 그 녀석들이 꼼수를 부리다가 골로 갔구나!"

"실로 파격적인 행보입니다. 폐하께서는 제국의 비리를 캐내고 네 명의 제후들을 동시에 상대하여 죽였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에는 중앙군을 동원하여 4개 영지를 환수했습니다."

"당연한 결과다. 지금 시국에 그런 미련한 짓을 벌였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지."

"귀족파에서는 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 정계의 대대적인 개편이 있을 터. 우리 비욘가는 황제파의 수장으로 국정을 주도하게 되겠지."

황제파로 전향한 대가다.

황제에게 충성하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코 권력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국시는 대륙 정벌과 약육강식.

이러한 기조는 무려 천 년을 이어 왔다.

잠시 황제가 태업하였다고 하나, 제국을 넘어 대륙 최강자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면 귀족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제국에서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랭턴이 기대감을 드러낸 채로 물었다.

"선발대는?"

"각하이십니다."

"폐하께서 이 몸의 충심을 알아주시는구나!"

"경하 드립니다. 국토의 확장이 머지않았습니다."

전쟁의 결과로 몇몇 제후들이 탄생할 것이지만, 가장 큰 특혜는 랭턴 공작이 입게 될 것이다.

"저희도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폐하께 충성을 다한다는 모습을 보여야겠지. 옳거니! 그게 좋겠구나. 가문의 가보인 란데스의 검을 진상하라."

"예!? 하지만 그것은...."

"가문의 시조께서 초대 황제께 받은 검이다.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일 뿐."

"음.... 알겠습니다."

랭턴 공작은 황제에게 충심을 보이기 위하여 집안의 가보를 진상하기로 결정했다.

황제의 집무실.

타로스는 대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하여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제국에서 황제가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추후 공격할 빌미밖에는 제공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제후들이라면 어떻게든 숙청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이다.

파격적인 행보의 대가였는지 수도 내 물가는 예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내려갔다. 외국의 군상들도 평시의 20% 마진만 붙여 납품을 시작했다.

황실에 바치는 관세와 각 영지에 납부하는 통행료를 제외하면 최소한의 마진만으로 납품한 것이다.

외국 상인들의 움직임이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황제가 대륙 정벌을 선언하였으니 미래에는 자신들의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을까 짐작하고 알아서 투명하게 가격을 공개한 것이다.

"제국을 좀먹는 쓰레기들이 꽤 있었다는 뜻이군?"

"비리에 가담하지 않은 귀족들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제 안정이 되었고."

"맞습니다."

처음부터 사건을 조사하였던 제이나가 지금까지의 일을 간추려 보고했다.

그녀는 전쟁 특수를 노려 과도하게 통행세를 올려 받았던 제후들의 명단을 가져왔지만, 타로스는 이번 일을 묻어 두기로 했다.

"더 이상의 처벌은 없을 것이다."

"폐하의 관대함에 여러 제후들이 전쟁 특별세를 자진 납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먹은 차액을 토해 내는 것이겠지."

"맞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

황제는 제국을 좀먹는 자들을 쓸어버렸다. 공개적으로.

이런 행보에 겁을 먹지 않은 제후들은 없었고, 막대한 자금이 다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이나의 공로가 꽤 컸다.

"큰일을 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준남작에 봉한다는 교서가 내려갈 것이다."

쿵!

제이나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로서는 그저 특수 정보부가 창설된 목적에 따라 움직인 것뿐이었지만, 황제는 바로 공을 치하하고 작위를 하사했다.

비록 궁정 귀족이었지만, 제국의 강역이 넓어지고 황권이 강화되면 궁정 귀족의 지위도 수직으로 격상된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야심만만한 여자인 제이나는 감격에 몸을 떨었다.

"충심을 다하겠사옵니다!"

"더 높이 올라오라. 짐이 지켜보겠으니."

"존명!"

출병 일주일 전.

제후들이 군대를 몰아 제도에 속속 도착했다.

이에 타로스는 마지막으로 상황을 점검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모아 대회의를 주최했다.

전시 행정부 총감이자 재상인 라터스 후작이 보고했다.

"랭턴 공작의 군대가 국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가 됐지."

"공작이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 진상품을 올렸나이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공작이 진상을?"

공작의 심정은 이해가 됐지만 의외다.

황제파에 가담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황제파의 수반으로 올라서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충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그런 이유의 진상품이라면 이해는 된다.

제국 내에서는 제2의 실력자이며 제후인 랭턴이 어떤 물건을 진상하였을지 기대가 모아지는 가운데.

"가져와라."

끼이익!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고풍스러운 목합을 가져왔다.

길쭉한 목합이 열리자 온통 검은색 일변인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후들은 이 검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란데스의 검!"

"오호."

기욤 가문의 시조인 란데스 공작에게 초대 황제가 하사한 검이다.

이 검이 특별한 이유는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죄다 운철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명 오리하르콘.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미스릴을 뛰어넘는 항마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웬만한 마법 공격을 쪼개 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에게 추가 대미지가 들어가며 그 단단함도 상상을 초월한다.

랭턴 공작으로서는 가보로 내려오는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갈 수가 없어 지금까지 보관해 왔던 것이지만, 타로스에게는 꽤 도움이 된다.

란데스의 검

등급: 유니크

착용 조건: 힘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무제한

파괴되지 않음.

모든 원소 저항력 +20%

힘 +50

몬스터에 대한 대미지 30% 증가

초대 황제가 란데스에게 하사한 검.

강렬한 항마력이 느껴진다.

후웅!

타로스는 란데스의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50이나 올라갔기에 몸이 매우 가벼워진다.

이 정도면 중후반까지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마땅한 유물을 파밍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검이기도 했다.

가보가 괜히 가보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랭턴 공작에게 충심은 확인되었노라, 전해라."

"존명!"

교지는 바로 작성되어 전방으로 보내질 것이다.

타로스는 뜻밖의 선물을 받아 기분이 꽤 좋아졌다.

속으로는 입이 찢어질 정도였지만, 역시나 권태로움을 상징하는 황제답게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회의를 이어 나갔다.

보급 상황이나 진격로, 그 밖에 수도의 점령과 병탄 계획까지.

모든 것은 1차 회전에서 적들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린다는 것을 전제로 짜여졌다. 그리고 그 누구도 제국군이 회전에서 패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전방에서 직접 적들의 편제를 확인해 보기는 해야겠지만 승리는 이미 확정된 것으로 여겨졌다.

타로스가 황가에 귀속될 직할령을 정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급히 보고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시종장이 급하게 달려왔다.

타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하라."

"용병왕 아론이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뭣이!?"

"이런 미친 작자가!?"

웅성웅성.

타로스는 입을 다물었지만 제후들은 극렬하게 비판을 쏟아 냈다.

이번 전쟁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 짐작되는 자가 바로 용병왕 아론이었다.

무려 5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참전할 것이며, 많은 제후들이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제국이 패하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변수라도 만들어 내는 것을 제후들이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그였다.

제후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병무대신 로무스 백작부터가 격노했다.

"이런 미친 작자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불러라! 이 몸이 폐하를 대신하여 징치할 것이니!"

"폐하! 이번 기회에 제거해야 하옵니다!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신 등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간이 크다 못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다.

용병들은 어디라도 소속될 수 있었지만, 제국과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직접 찾아오는 짓은 웬만한 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고 이야기도 들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들라 하라."

끼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 해제된 30대 중반의 남자가 어전으로 들어왔다.

체형은 타로스와 비슷하였고, 얼굴은 특징 없이 평범했다. 언뜻 보면 그냥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기사 같았다.

쾌검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체형까지 평범했으나 레벨이 97에 이르는 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검술을 구사할 것이 뻔했다.

유저들을 도와 타로스를 정벌하는 운명을 가진 자.

하지만 타로스가 전쟁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일찍 대면하게 되었다.

아론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노오오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것이더냐!"

"이런 쳐 죽일! 썩 꺼지지 못할까!"

"제국을 악의 축이라 비난하던 놈이 예가 어디라고 온 것이야!"

제후들의 말을 타로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담이 큰 놈이군.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올 줄이야."

"폐하께서는 대륙 최강자로 불리시는 분입니다. 이미 폐하께서 이루신 업적들이 대륙을 진동하고 있지요."

"타국에서 믿는 자가 있는지는 의문인데."

"당시에 있었던 용병들이나 상인들에게 들었습니다. 드래곤을 단숨에 찢어 버리신 일, 그리고 대악마가 지옥으로 도망쳤다는 일화까지. 증인이 없었다면 저라고 해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적을 살려 주실 이유는 없으시니."

"정확하게 보았다. 다시 만난다면 그대의 목숨은 사라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타로스는 비스듬하게 턱을 괴었다.

어디 한번 찾아온 이유를 말해 보라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는데, 아론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부디 전쟁 후 불문율을 지켜 주십사 청하옵니다."

"짐이 그래야 할 이유는?"

"누구보다 공명정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명정대라."

"그저 용병 포로들을 살려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타로스는 피식 웃었다.

"핏줄의 연을 끊지 못해 출전하는 건가."

"...!"

아론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론의 핏줄.

나름대로 용병왕이 참전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아론은 율리우스 왕가의 왕자였기에 어쩔 수 없이 참전을 해야 한다. 그것이 귀족이 의무였으므로.

자유로움을 추구하여 용병이 되었으나 국운을 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론을 살려 두면 추후 반란 세력의 핵심이 될 수 있었기에 놈을 회유할 생각은 없었다.

타로스는 전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불문율을 깰 생각은 없다. 언젠가 그들도 짐의 백성이 되어야 하니. 왕자를 살려 둘 수는 없으니 그대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쿵!

아론이 머리를 바닥에 댔다.

용병치고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폐하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리옵니다! 그럼 전장에서 뵙겠습니다!"

#제56화. 폭풍 전야(6)

4월 초.

출병식 아침이 밝았다.

오늘 출병을 하는 날이었으나 황후는 전장으로 나가는 남편을 위로한다고 밤새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사랑일까, 투철한 직업(?) 정신일까.

타로스는 다소 피로감을 느끼며 옷을 추슬렀다.

촤악!

커튼을 걷고 문을 열자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어 온다.

상념에 빠져드는 아침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국 내부를 청소하였고, 제국 내 인플레이션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쟁이 시작되는 와중에도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예전보다 안정되었다.

전시 행정부의 행정 관료들을 갈아 넣고 돌린 결과물이다.

창밖을 내려다보자 백성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여론 조사 결과, 99% 이상의 백성들이 제국이 승리한다고 자신했다.

1%는 무응답자이거나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전쟁 관리국에서 이 신박한 민심 조사 방법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출병이군요."

"그렇게 됐군."

"요즘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왜 폐하께서는 후궁을 들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보통의 군주라면 3명의 황후와 6명의 후궁은 기본일 텐데요."

나신의 황후가 이불을 끌어안고 앉았다.

타로스는 '왜?'라는 나타샤의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유가 있었나?'

레벨 80대에 이르는 황후에게 매일 시달리는 타로스로서는 더 이상의 여자를 감당하기 힘들어서다.

하지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대답해서야 진정한 남자라고 할 수 없다.

"짐은 그대의 죽음조차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지."

"예?"

"언젠가 그대는 죽어 흙이 될 터. 정략이 필요하다면 하겠으나 내게 여자는 당신 하나로 족하오."

"폐하...!"

갑자기 황후가 달려와 와락 안겼다.

사실, 초감각을 켜지 않는 이상 불시의 기습은 피할 수가 없었다.

타로스는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나타샤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폐하의 아내인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어요!"

"아, 그게."

"사랑해요."

"...."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

타로스는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피곤하다니까....'

출병 당일 아침까지 황후에게 시달리던 타로스는 간신히 정무 회의에 맞춰 등청하였다.

전시였기에 궁정의 행정 관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갑옷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전방의 제후들을 제외하면 모두 제도로 모여든 상태다.

오늘 출병하는 병력만 해도 30만에 달하며, 그 통수권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제국은 전시가 되면 황권이 가장 강해진다.

미리 반역을 모의하지 않는 이상 군 통수권자인 황제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제국에서, 대륙 최강자로 인식되어 있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아마 반역을 모의했다고 해도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장내는 매우 엄숙했다.

곧 출병이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사안들을 잠시 확인하는 것으로 출병식이 거행될 것이다.

"재상."

"하명하십시오!"

궁정 귀족들도 바짝 군기가 들어가 있다.

전쟁 준비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개전을 하게 되었기에 군령은 매우 엄해진다. 이런 시기에 까딱 잘못하면 바로 군법에 회부되거나 그 자리에서 즉참이다.

귀족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황제에게 반박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물자의 준비는 어찌 되었느냐."

"당장 전쟁을 수행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옵니다. 세 달 치 물자를 준비하였으며, 계획대로라면 적들의 영지들을 접수하는 즉시 징발하여 충당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적들이 청야 전술을 편다면 제국에서 비축하고 있는 비상 물자들을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그렇게 비축된 물자는 40만이 3개월을 버틸 수 있는 양이옵니다."

40만 대군이 6개월을 버틸 수 있는 물자들을 황실과 제국 전역의 제후들이 준비했다는 뜻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전투 부대 40만과 예비대 겸 보급 수송 부대 10만이 따로 편성되었으니, 실질적으로는 50만 이상이 동원되는 셈이다.

그래도 징집을 하지 않고 전문적인 군인들로만 40만을 채웠다는 것은 제국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전략부, 진격로까지 방해물은?"

"제국 내 진격로는 완전히 정비되었사옵니다. 예상컨대 보름 정도면 국경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선발대는 활동에 들어갔나?"

"그렇사옵니다. 미리 논의된 모든 부분에 대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보부 수장인 레인 자작이 그렇게 말하며 물러났다.

전략부 역시 전시에 한정하여 운영되는 기관이었으며, 그들은 뒤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전쟁 중에는 적국뿐만이 아니라 가상 적국의 움직임도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전쟁을 틈타 타국에서 공격이 들어올 수 있었으므로 그걸 예방하고 사전에 찾아내 보고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물론 실시간으로 전방과 통신을 하며 적절한 작전을 제안하는 일도 맡았다.

"제국 내부의 여론은?"

"여전히 90% 이상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가이아 신전에서 지지를 한 것이 큰 요인이었습니다."

라팅 자작이 보고했다.

민심을 알아보기 위하여 새롭게 펼치는 정책인 '여론 조사'는 다방면으로 제국 정책에 관여하고 있었다.

황제는 민심을 잡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며, 전쟁 중에 민란이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주력군이 국내에 상주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도중이라면 군을 빼기 어렵기 때문이다.

황실과 제후들은 일정 수준의 자경대와 2차 예비대를 영지에 남겨 두었지만, 민란은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한다고 하니 민란도 안심이다.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한가."

"군종들이 전쟁의 당위성을 충분히 설파하였사옵니다. 그 덕분에 사기는 충만합니다."

"좋아. 이번 전쟁은 대륙 평화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더 이상의 안건은 없나?"

"...."

제후들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개전 당일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제국 관료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제국은 천 년이 유지되어 온 만큼 부패는 있어도 관료 체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타로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출병식을 거행한다."

제도 브란티아 대로 한복판.

병사들은 제도 밖에서 사열하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혹시나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두 줄로 쭉 늘어서 황제를 비롯한 제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근무 중이었다.

지휘부가 지나가면 기사들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레베카 역시 근무에 동원됐다.

제후들이 있는 이상 황제의 호위에는 문제가 없다.

물론 제후들이 없다고 해도 황제의 신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대륙 최강자를 암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으므로.

그녀의 머리 위로 꽃잎이 뿌려졌다.

전쟁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

한 소녀였다.

성인들은 대로변의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어 있었기에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꽃잎을 깔고 있었다.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오호, 대견하구나. 그런 생각은 어떻게 갖게 된 것이냐?"

"폐하가 전쟁에 나서는 것은 우리가 잘 살게 하기 위해서래요. 그러니까 승리하셔야 해요."

레베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민심의 힘이었다.

백성들이 일치단결하여 황실을 지지하는 것.

어쩌면 황제가 가진 진정한 힘은 무력이 아니라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제국 주력군이 패주한다고 해도 백성들이 알아서 군대에 지원하여 적들을 막을 것이다.

후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레베카는 이제야 황제가 왜 민심에 그토록 신경을 썼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뿌우!

저음의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주변이 엄숙해졌다.

백마에 탄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를 제후들이 따랐다.

황제가 지나가자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께서 나오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무심한 황제의 얼굴.

예전 같았으면 저 표정이 태업의 증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군주이기에 감정을 숨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황제가 보여 왔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괜히 울컥해지는 레베카였다.

황제가 지나가고 기사들이 뒤를 따르자 백성들도 그 뒤를 쫓아왔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놀랍도록 엄청난 환호의 물결이 일었다.

기사들은 가슴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기사들이 정문을 통과했다.

그러자 끝도 보이지 않는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일체화가 된 모습.

제국군 안에는 영지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제국의 병사들은 다 같은 진법을 훈련했고 실력도 뛰어났다. 기사들의 꿈인 만큼이나 개인 무력이 모든 왕국을 뛰어넘었다.

그 때문에 계급을 부여하고 뒤섞어 재배치를 했고, 제후들은 자신들이 동원한 군대만큼 병력을 할당받았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실력에 따라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 순이었고 병사들의 계급은 그보다 좀 더 세밀화 돼 있었다.

저벅저벅.

황제가 성벽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이제 환호성은 멎고 연설을 듣기 위하여 장내가 침묵에 잠겨 들었다.

황제는 무심한 얼굴로 제도 내부와 성벽 밖을 살폈다.

끝도 없이 늘어선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봤다.

레베카는 황제가 신의 존재를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곧 황제의 입이 열렸다.

"죽음이 두려운 자, 떠나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묻지 않을 것인즉."

"...."

황제의 목소리가 음성 증폭기를 통하여 울려 퍼졌다.

담담한 감정을 실었으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국의 군인이 전쟁을 피한다는 것은 수치로 여겨진다. 오히려 병사들은 이번에 군공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군인들의 지상 목표가 바로 제후였고, 전쟁은 군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다.

"제국의 역사는 제군들을 기록할 것이다. 후손들이 제군들의 피로써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라."

황제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출병하라!"

"와아아아아!"

대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제57화. 서막(1)

진격 일주일째.

제국군은 율리우스 왕국을 향하여 착실하게 서진했다.

작년부터 대전쟁을 준비해 왔기에 관도는 잘 닦여 있었고, 물자가 부족할 일도 없었다.

다만 병사들의 피로도가 문제였다.

"폐하, 병사들이 꽤나 지쳤사옵니다. 하루 정도는 쉬어 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런가."

대군사 겸 마법사단장인 리카드로 후작이 건의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타로스 역시 꽤 지친 상태다.

유일하게 말이 아닌 마차를, 그것도 공중 부양을 하는 마차를 타고 있었지만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이동한다는 것은 꽤나 피로한 일이었다.

이쯤에서 중간 점검을 하고 쉬어 가는 여유가 필요했다.

"지휘부를 소집하라."

"존명!"

진군은 멈추었고 제후들이 소집되었다.

수십에 이르는 제후들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집중된다.

"대군사의 건의에 따라 하루 쉬어 간다."

"실로 가한 의견인 줄 아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병사들의 피로도가 상당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후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강철과 같은 체력을 가진 제후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행군에 정신적인 피로감을 호소하던 참이다.

타로스가 제후들을 돌아본다.

"곧 아인 후작령인가."

"예! 신의 영지입니다."

"병력은 도시 밖에 주둔하여 피해 없도록 하라. 짐과 제후들 역시 도시 밖에서 머문다."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청이라?"

아인 후작이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부디 신이 폐하께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하소서."

"어렵지 않은 일이지."

"황공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전투 식량에 질려 가던 참이었다.

진군 중이라고 해서 황제가 특권을 누린다면 시기심이 쌓이기 마련이다. 타로스로서도 이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으므로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병사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다만, 화려한 마차에 올라 이동하는 것은 대신들이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을 뿐이다.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말을 타고 이동하면 위엄에 손상이 간다고.

만약 일주일 동안 말을 타고 이동했다면 타로스도 꽤나 피로감이 누적되었을 것이다.

"저녁에 아인 후작령에 닿을 수 있도록 하고, 내일 하루는 부대를 정비한다."

"존명!"

30만의 군대가 아인 후작령에 도착했다.

칙령으로 군대 내 모든 지휘관들과 병력은 도시 밖에 대기하였고, 황제를 비롯한 제후들만 식사에 초대되었다.

단 한 끼.

황제는 당일 저녁에 한정하여 아인 후작의 초대에 응하기로 하였으며, 저녁부터는 다시 병영으로 돌아와 숙식할 예정이었다.

아인 후작령의 수도 데르온 성채 앞으로 영지의 가신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수십여 명에 이르는 가신들과 아인 후작의 일가들이 무릎을 꿇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인 후작에게는 어린 딸들도 있었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녀까지 부복을 하자 타로스가 말에서 내려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네! 감사합니다!"

소녀가 타로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분명히 이름이 로즈라고 하였지.'

게임 중반에 등장하는 네임드다.

지금은 아홉 살로, 현대로 치면 겨우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하였지만 수련을 거듭하여 결국 아인 후작으로 등극하게 된다.

황가에 대한 충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꽤 까다롭고 레벨도 높은 네임드였다.

물론 아직은 꿈나무다.

기획자로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씩씩함이로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로즈라고 합니다."

로즈 아인 LV. 20

아인 후작가의 막내 영애.

아홉 살 아이의 레벨이 벌써 20이었다.

역시나 미래의 네임드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해야 할까.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긴 것을 보니 세 살부터 검을 잡았다는 설정이 그대로 적용된 것 같았다.

"타거라."

"네!"

"폐, 폐하! 아이의 버릇이 잘못될까 우려되옵니다."

아인 후작이 기겁을 했지만, 타로스는 무심하게 반박했다.

"짐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잊었나?"

"그건...."

"들어가지."

황제가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제후들은 제국의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던 얼마 전의 기억을 상기하였다.

무한에 가까운 수명 때문에 자식을 갖지 않는 황제였지만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때 증명되었다.

백마 앞에 로즈를 태운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오히려 황제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제후들은 어쩌면 이런 황제의 행동도 정치적인 행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를 선두로 제후들과 가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도시로 들어서자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에게 보이는 감정은 경외.

제도의 백성들은 황제가 서민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음을 자주 보았지만, 여전히 변방의 영지에서는 절대적인 상징으로 통한다.

무려 40만 대군을 일으킨 군 통수권자.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타로스와 제후들은 도시를 통과하여 영주성에 이르렀다.

아인 후작령 영주성 내 식당.

후작령 정도 되면 영주성의 크기가 대저택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작은 영지의 무도회장 만큼이나 넓었고, 귀족들은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삼삼오오 모여 현 정세를 논하기에 바빴다.

"금번에 폐하의 병력이 10만은 늘어났는가."

"총 15만은 늘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라이톤 공작의 영지도 직할령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순식간에 중앙군이 35만으로 늘어났군."

얼마 전 귀족파 내 오로스 후작 일파가 숙청되면서 가뜩이나 열세에 몰려 있던 귀족파의 입지는 더욱 축소되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중립 파벌들의 상당 부분이 황제파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황실 중앙군은 두 배 이상 확장됐다.

황제가 직접 중앙군을 늘린 것은 5만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전자들이나 역모에 준하는 죄를 지은 자들의 영지를 회수하면서 자연적으로 병력과 기사단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중앙군은 총병력 35만, 총 5개 기사단을 보유하게 되었고 최근 들어 1개 기사단을 창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항병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황실 중앙군은 50만까지 충원될지도 몰랐다.

황제가 태업을 깨고 나오자 황권이 예전의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저 명분에 따른 움직임이었고 숙청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황권이 지방을 찍어 누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금 황제의 권력은 일시적이지만 정점을 찍고 있었다.

"이제 각하께서 저희 귀족파의 희망이십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작의 좌가 두 자리나 비어 있습니다."

세론 백작이 은근히 가젤 후작을 부채질했다.

귀족파의 수장이 되어 다시금 파벌을 재건하는 것.

지금이야 숨을 죽여야 하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승작이 논의될 수도 있었다.

물론 제후의 승작이라는 것은 그만한 실력의 상승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분명 가젤 후작은 공작이 되고도 남는 검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껍데기만 남은 공작이 되지 않으려면 필수적으로 노른자위 영지를 얻어야 한다.

"대군사께 어떻게 해서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론 백작은 제국 내의 전략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런 백작의 건의라면, 대군사의 전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할지도 몰랐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제후들이 긴 테이블에 착석하였다.

곧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정치에 대해 논하던 제후들의 입에 침이 고였다.

황제가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니 그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전투 식량을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황제가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들지."

제국의 제후들 중 70%가 황제와 함께하고 있는 상황.

원래 제후들은 많이 먹는다. 전쟁 중에는 더 많은 음식들을 먹어 치웠는데 보통은 5인분, 대식가들은 10인분을 혼자 먹기도 한다.

그릇과 접시들이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의 형편에 식사 한 끼도 제공하지 못할 정도면 가문이 망해서 기울어 가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영주성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제후들의 어마어마한 먹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타로스 역시 많이 먹기는 했지만, 이 괴물들과 같은 급은 아니다.

신화급 스킬과 유물을 보유한 것을 제외하면 병사들과 같은 수준이었기에 겨우(?) 3인분을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티타임.

제국의 절대자인 황제가 있었기에 함부로 이런저런 말들은 나돌지 않았고, 대부분은 황제가 이야기를 하면 제후들이 받는 형태였다.

"아인 후작, 만찬을 준비하느라 노고가 컸다."

"아닙니다. 신의 영지에 들어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식사 한 끼 대접하지 못한다면 세인들이 손가락질을 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경에게는 아들이 없나?"

"그것이.... 보다시피 실패하였사옵니다."

"딸들을 잘 키워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모든 딸들이 검을 잡고 수련하고 있사옵니다."

"짐이 보기에는 로즈가 수련을 꽤 열심히 하는 모양이던데. 자세만 보아도 알 수 있지."

"과찬이십니다."

불행하게도 아인 후작에게는 딸이 여섯이나 되었다.

아들을 하나 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여성이 작위를 이어받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몇 배나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족력 설정은 타로스가 한 것이었기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짐이 이러한 대접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할 터. 바라는 것이 있느냐?"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제국에 충성하는 제후로서 어찌 폐하께 밥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가."

타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작의 집안 자체가 황제파의 유서 깊은 가문이었고, 미래의 가주인 로즈 역시 충성심이 깊었다.

그냥 두어도 황가에 대한 충심으로 황제를 도울 것이지만 오늘 이후 로즈를 보려면 10년은 지나야 한다.

그러니 타로스의 입장에서는 로즈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좋았다.

"로즈, 가까이 오거라."

"네!"

타로스는 로즈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

"네 아비는 짐에게 소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군주가 내뱉은 말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지.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짐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음...."

로즈는 꽤나 고심하는 듯 보였다.

나이답지 않게 조숙한 성격이었기에 아인 후작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막내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바랐던 일이 있어요!"

"허, 네가 어린 시절이면 몇 살 때를 이르는 것이더냐?"

"다섯 살 때부터요!"

"하하하하!"

제후들이 파안대소했다.

아홉 살 아이가 어린 시절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타로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구나. 어린 시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보거라."

"폐하와 대련을 해 보는 것이 꿈이었어요!"

"...!"

"뭣이!?"

제후들은 꽤 놀랐고 아인 후작은 노성을 터뜨렸다.

아인 후작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 딸아이가 철이 없어 실언을 하였사옵니다."

"아니다. 짐 역시 검을 잡아 이 자리에 올라왔다. 같은 길을 걷는 검객으로서 대련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오늘, 짐은 어린 검객에게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

#제58화. 서막(2)

영주성 1층 실내 수련장.

제후들이 모두 모여 맹랑한 꼬마와 황제와의 대련을 지켜보고자 모였다.

이것은 황제의 자비로 시작된 여흥이었다.

로즈는 진지한 얼굴로 목검을 잡았고, 타로스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기대 반, 호기심 반.

제후들의 표정은 딱 그것이다.

과연 황제가 관심을 가지는 어린 소녀가 어느 정도의 검술을 구사할 것인가.

이건 후작가의 교육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제국은 제후 가문이라고 해도 작위가 세습되지는 않는다. 실력에 따라 후작가가 다음 대의 백작가가 되기도 하고, 운이 없으면 몰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제후들의 자식 농사는 본인의 실력 향상과 함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된다.

타로스가 입을 열었다.

"공격하거라."

"그럼 조심하세요! 야압!"

로즈는 빠르게 쇄도했다.

나름대로 후작가의 검술인 월광검결의 보법을 밟은 것이다.

세 살부터 수련했다면 무려 6년이나 검을 잡고 수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레벨에 비하여 보법의 체계가 상당히 잘 잡혀 있었다.

다만, 아직 힘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쐐액!

월광검결의 검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굳이 여기서 초감각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지만, 만약에라도 방심해서 한 방을 허용하면 황제의 이미지가 박살이 나기에 타로스는 초감각을 이용, 로즈의 목검 끝을 쳐서 가볍게 검로를 비틀어 냈다.

"과연, 폐하시군."

"아무리 꼬맹이의 검술이라고 해도 검 끝만 저렇게 찌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

"자네 못 들었나? 폐하께서는 신궁 란투스 자작의 화살 끝도 쪼개 버리는 분이시네."

제후들의 눈동자가 란투스 자작에게 쏠렸다.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허허, 참으로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이로군."

탁! 탁!

타로스는 가볍게 꼬마의 검을 쳐 냈고, 결국 로즈는 제 풀에 꺾여 헥헥거렸다.

"좋은 자세다. 깔끔한 보법에 검로까지. 과연 아인 후작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켰음이 느껴지는구나."

"황공하옵니다."

아인 후작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타로스는 아는 그대로 가르침을 내렸다.

"월광검결은 달빛이 흐르는 모습처럼 검로가 흘러가는 것이 강점이다. 중검보다는 쾌검에 가깝지. 로즈 영애는 무거운 목검보다는 가벼운 레이피어로 수련을 쌓는 것이 낫겠다."

"감사합니다!"

로즈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타로스는 몇 가지 조언을 로즈에게 더 해 주었다.

대부분은 타로스의 경험이 아니라 아인 가문을 디자인하면서 월광검결의 장단점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그에 맞는 조언을 하였을 뿐이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아인 후작은 깊게 새겨들었다.

20분 후, 로즈는 간신히 서 있을 정도의 체력만 남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헥! 헥! 폐하! 한 가지 여쭤보아도 되나요?"

로즈의 질문에 아인 후작은 딸이 또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할까 싶어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즈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튀어나왔다.

"제 꿈은 2황후가 되는 것인데요, 가능할까요?"

"헉!"

"2황후라니!?"

제후들도 꽤 놀란 표정이었다.

치기 어린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아인 후작이 무릎을 꿇고 사죄하려는데, 타로스가 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10년은 이르구나. 다 자라면 다시 숙고하여라. 짐이 보기에 너는 능히 가문을 이을 인재니라."

"네!"

이틀 후, 군대는 진군하기 위하여 도열하였다.

타로스는 영지의 가신들의 배웅을 받았다.

특히나 로즈는 타로스가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폐하!"

이틀 동안 로즈는 타로스의 곁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기사들이 제지할 수도 있었지만, 타로스가 그것을 막았다.

앞으로 10년, 타로스에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로즈가 장성하여 분명히 가문을 이어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이 나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타로스의 정치적인 수였으나,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짐은 이제 정벌에 나서야 하느니라."

"전쟁이 끝나고 황궁으로 놀러가도 되나요!?"

"안 될 것 없지."

"그럼 꼭 찾아갈게요!"

타로스는 로즈와 인사를 나눈 후에 돌아섰다.

군대는 다시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똑똑.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아인 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폐하, 제 딸아이가 너무 무례하게 굴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덕분에 짐도 즐거웠느니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로즈를 잘 키우도록 하라. 짐은 로즈의 재능이 경을 뛰어넘을 것이라 생각한다."

"...!"

아인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실 후작도 막내딸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장성한 딸들도 대단한 실력을 가졌지만, 역시 후작가를 이어받을 정도는 되지 않는다. 아마 작위가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로즈의 수련을 직접 지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름 오랜 시간 지켜본 아버지의 입장이 그러했는데, 황제는 단번에 로즈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다.

"어쩌면 제국 최초의 여후작이 나올지도 모르지."

여백작까지는 역사적으로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여후작이 탄생한 적은 없었다.

아인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가 이렇게 단언할 정도라면 정말로 로즈의 재능이 머지않아 개화될지 몰랐다.

국경까지 3일을 남겨 둔 시점.

아인 후작령에서 일주일을 이동했고, 어제 하루 휴식을 취한 후에 막 발을 뗐을 때였다.

레베카가 타로스에게 심상치 않은 보고를 해 왔다.

"폐하, 한 무리의 유랑민이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물론 레베카는 다소 황망하다는 표정이었다.

대전쟁이 코앞이었고, 진군을 하고 있는 마당에 겨우 유랑민 따위의 청을 황제에게 보고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깊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타로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곧 전쟁이라는 사실을 유랑민들이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아직 전쟁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유랑민이 발생한다는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다.

게임 내 스토리를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것도 없었다.

이 전쟁 자체가 스토리를 벗어난 일이었기에 어떤 파급력이 미칠지는 타로스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었다.

"진군을 멈추어라.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겠다."

"전군! 행군 정지!"

칙령이 전달되자 모든 병력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유랑민은 황제의 어가 앞에 꿇어 엎드렸다.

끼이익.

마차가 열리며 타로스가 천천히 내려왔다.

슬쩍 저 멀리 바라보니 유랑민의 숫자가 수십은 되었다.

눈앞에 꿇어 엎드린 노인은 유랑민들의 대표로 보였다.

주름진 노안에서는 경외감과 공포감, 그리고 기대감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네가 짐을 보고자 하였느냐."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세월의 풍파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차림새가 상당히 꼬질꼬질한 행색이었다.

노인은 할 말이 간절한 표정이다.

"알현을 청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크흐, 폐하! 부디 야만인 무리를 소탕해 주시기를 간청 드리나이다!"

"야만인?"

웅성웅성.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제후들도 몰려와 있었는데, 갑자기 야만인 무리가 등장했다고 하니 당혹스러워했다.

타로스도 마찬가지였다.

"야만인? 자세하게 설명하라."

"예! 그놈들.... 델족이 나타나 저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나이다! 모든 재산을 털어 간 것은 물론이고,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끌고 가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뭣이!?"

"맙소사, 델족이라니."

제후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정이었다.

제국 서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델족은 숲이 울창한 지대에서 유랑하는 방랑 민족이다.

율리우스 왕국도 꽤나 골치로 여기고 있는 족속들이었는데, 토벌대를 보내면 미리 예측하여 깊게 숨어 버리고 식량이 필요할 때에는 다시 나타나 괴롭혔다.

그래도 제국으로 약탈을 나오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황제가 분노하면 수십만을 동원하여 끝까지 추격해 쓸어버릴 것이 두려워서다.

"전쟁을 노리는 것인가."

"부디, 끌려간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노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제국은 변방이라고 해도 제후들이 철저하게 통치를 하기에 이민족이 난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노인이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짐의 부덕함이로다."

"화, 황공합니다!"

"대군사!"

"예, 폐하!"

리카드로 후작이 빠르게 달려와 부복했다.

누가 보아도 황제의 표정은 싸늘했고, 뭔가 일이 터질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제후들 사이에서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중이다.

"가까운 직할령에 이들을 정착시키고 정착금을 지원하라."

"존명!"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타로스는 엎드려 있는 노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걱정 말거라. 이미 죽은 자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잡혀 간 백성들은 반드시 구할 것이다. 또한 델족은 반드시 대륙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야."

군대는 당장 진군을 멈추었다.

급하게 구성된 긴급회의.

제후들은 황제가 무시무시하게 분노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전 포고를 하고 정식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난입하여 본국을 약탈하는 행위는 굳이 황제가 아니라고 해도 분노할 일이었다.

톡. 톡. 톡.

타로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꿀꺽!

제후들은 침을 삼켰다.

반드시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황제가 장고에 빠질 때에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제국 주변 전도를 가져와라."

"존명!"

회의에 참석해 있던 로빈슨 단장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가 지도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에 제국 전역과 주변국들이 표시된 지도가 펼쳐졌다.

"이곳 어둠 숲이 놈들의 본거지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둠 숲.

비록 금역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이다.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곳으로, 그나마 델족이 어렵게 개간을 했지만 몬스터들이 이동을 하면서 괴롭히는지라 그들도 떠돌아다니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델족의 숫자는 대략 20만으로 추정됐다.

그중에서 전사들이 3만.

유랑민들의 말을 들어 보면 수만에 달하는 델족 놈들이 침입을 하였다고 하니,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사들을 동원한 것이 다름없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황제가 결단을 내렸다.

"라무스 백작!"

"예!"

"경이 제국 최정예 백마 기병대 5천을 끌고 가서 적의 본거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대지에 소금을 뿌려라."

"조, 존명!"

"바바."

"네!"

거대한 덩치의 바바 준남작이 넙죽 엎드렸다.

"경이 경기병 3만을 이끌고 델족을 추적, 섬멸하라."

"와! 맡겨만 주십쇼!"

쾅!

쩌저적!

타로스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뇌전이 흐르며 테이블이 박살 나 쪼개졌다.

"감히 제국을 약탈한 자, 철저하게 짓밟히리라."

#제59화. 서막(3)

제국 서부 국경 영지 벨가른.

어둠 숲과 인접하고 있는 이 영지의 마을들은 초토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벨가른 변경백의 병력은 3만 정도.

평시라면 결코 델족이 기습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제국이 대전쟁에 사활을 걸었고 변경백의 수비병은 1만에 용병 2천 정도가 남아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다.

무려 3만이나 되는 델족 전사들이 영지를 휩쓰니, 영주와 주력 병력이 빠져나간 마당에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벨가른의 대리 영주인 총관은 급하게 전 마을에 소개령을 내렸지만, 중간중간에서 백성들이 약탈을 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어둠 숲과 인접한 그랑 마을의 촌장은 그래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으로, 도시로 이어지는 경로가 아닌 영지 외곽으로 빙 돌아 제국 내륙으로 도주를 감행하고 있었다.

300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도주하였지만 끈질긴 델족은 결국 그들의 뒤를 잡았다.

척후로 나가 있던 마을 자경대가 급하게 돌아와 외쳤다.

"촌장님! 적들이 저희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격 중에 있습니다!"

"이런 끈질긴 놈들!"

웅성웅성.

유랑하던 마을 사람들 사이로 공포감이 번져 나갔다.

델족의 무서움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워낙에 사후 처리가 잔인하여 그 공포감이 더했다.

노인은 죄다 죽이고 무기를 든 남자들은 구덩이에 생매장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노예로 끌고 간다.

특히나 여자들은 그 자리에서 강간을 당하고 성노예로 전락했다.

그랑 마을의 촌장 론은 짐마차로 바리케이드를 펼치라 명령했다.

마을 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제국의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검술을 배운다.

어린 시절부터 수련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실력 있는 자들은 모두 영지군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병사가 되지 않는 남자들이라고 해서 전혀 무기를 쓸 줄 모르는 무부인 것은 아니었다.

제국은 강자를 존경하는 사회였고, 언젠가는 제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수련을 쌓아 그럭저럭 무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제국 내의 백성들은 체력도 남달랐다.

순식간에 바리케이드가 형성되었다.

마차 위로 마을 장정들이 죽창을 들고 방어선을 형성하였으며, 여자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날랐다.

물론 최선을 다해도 3만이나 되는 병력이 뭉쳐 다니는 델족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두두두!

"옵니다!"

론은 죽음을 직감했다.

"저 버러지 같은 놈들.... 평시에는 감히 제국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못 하는 것들이."

저들이 약탈을 한다고 해도 율리우스 왕국으로 쳐들어갈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었다.

언제고 제국이 전쟁을 끝내고 나면 곧바로 쳐들어가서 죄다 쓸어버릴 것이 확실했기에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델족 놈들은 간 크게 제국으로 쳐들어왔다.

벌써 수천이나 되는 백성들이 잡혀 가거나 죽었다.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간다!"

"예!"

마을 장정들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적들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여자들도 나름 각오를 다졌다.

성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나았기에.

"크아아아아!"

"다 죽여라! 약탈하라!"

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갑조차 걸치지 않고 달려오는 야만인들.

도끼와 창, 메이스 등 전혀 통일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하나같이 악마들로 보였다.

마을 장정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을 무렵.

촤아아아!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론은 태양이 구름에 가려져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겼다. 죽기 좋은 날씨라고.

그러나 검게 물든 하늘에서 해가 뜨자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퍽퍽퍽퍽!

"끄아아악!"

"아아아악!"

야만인들이 달려오는 그대로 꺼꾸러졌다.

확인을 해 보니 하나같이 화살에 맞아 뒹굴고 있었다.

몇 번에 걸쳐서 화살 세례가 더 쏟아졌다.

그제야 론은 놈들의 옆구리를 향하여 찔러 들어오는 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국군이다!"

"와아아아아!"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설마하니 전쟁 와중에 황제가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호루루루루!

어디선가 익숙하지 않은 외침이 들렸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기병창을 들고 그대로 델족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 뒤로 3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적들을 닥치는 대로 휩쓸었다.

그렇게 한차례의 충격을 가하고 물러난 후, 제국군은 다시 화살 비를 뿌렸다.

솨아아아!

죽음의 비가 내렸다.

론은 적들이 박살 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들이 힘없이 쓸려가는 듯한 현장.

예비대를 이끌며 대기하고 있던 로빈슨 황실 기사단장은 마치 죽음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엄청난 화살 공격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대단하군. 폐하께서 호루루 족장을 포섭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화살로 대열이 무너지면 돌격하는 전술이군요."

"그래. 저런 화살이 분명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을 거다. 하늘 높게 쏘아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군대의 사기는 엉망이 되지."

로빈슨 단장은 기사들에게 저 전술이 가진 위력을 설명해 주었다.

기사들은 지휘관들의 인물들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기가 떨어진 적들에게 돌격하여 단숨에 적진을 와해시킨다.

자세히 살펴보면 굉장히 기술적인 전술임을 알 수 있다.

화살을 퍼부을 때에는 20명씩 돌아가면서 쏟아부으며 선회한다.

100명을 한 중대로 편성하고 다섯 번이나 선회하여 화살을 쏟아붓는 것이다.

별동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바바 준남작은 출발 전에 1인당 화살을 60발이나 지급하였는데, 지금 보니 이러한 이유였다.

선회하며 화살을 쏟아붓다 보니 지금도 거의 30분 동안 줄기차게 화살만 쏘아 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돌격하여 적진을 휩쓸고 지나간다.

로빈슨 단장은 백병전을 철저하게 피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돌격은 그저 적들의 사기를 무너뜨리고 전형을 흩트리는데 사용한다.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다."

뿌우!

바바의 진영 쪽에서 돌격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왔다.

적들의 숫자는 30분 동안 1만 이상 줄어들었다. 사기도 바닥이었고, 이제야 돌격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백병전을 하더라도 철저하게 짓밟아 버린 후 들어간다.

이미 적들의 진영에는 도망자들이 속출했다.

차앙!

로빈슨 단장이 검을 뽑았다.

"가자! 겁먹은 쥐새끼들을 사냥한다!"

대승이었다.

3만의 이르는 적들은 1만으로 줄어들었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에 바바는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였으며, 로빈슨 단장은 1만의 경기병을 받아 잔당을 소탕하고 영지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1만이 도주하였다고 하여서 그들이 질서 정연하게 전장을 빠져나간 것은 아니다.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가운데 바바는 주력군을 쫓아갔다. 소규모 부대들은 로빈슨이 추격해야 한다.

그렇다면 적들은 수백에서 수십으로 잘게 쪼개져 도주할 것이었기에, 병력을 천 명의 한 개 군으로 쪼개서 보낸다.

휘하 기사들을 임시 천인장으로 임명하여 병력을 재편성하는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와 엎드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앞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로빈슨이 감사의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충성스러운 기사였으며, 그저 군주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폐하께서 우리를 보내셨다."

"폐하께서 말인가요!?"

"감히 제국의 백성을 약탈한 대가를 치르게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셨다."

"진정으로 폐하께서는...."

백성들이 감격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 이렇게까지 백성들에게 신경을 쓰는 군주가 있을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이번 전쟁에서 율리우스 왕국이 40만이나 달하는 대군을 배치하였다는 것은 알음알음으로 제국에도 퍼진 사실이다.

황제가 동원한 병력 역시 40만이었다.

산술적으로도 여기서 병력을 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눈앞의 대전쟁이 중요한 것이지 백성이 몇 천 정도 죽는 것은 추후에 따져도 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황제는 기어코 3만의 병력을 빼내어 약탈자들을 섬멸했다.

보통 전쟁에서는 전 병력의 30%만 죽여도 전멸로 보았다.

50%가 죽으면 섬멸한 것이며, 지금처럼 30%만 남기고 모조리 죽였다면 전쟁 자체가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적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로 도주한 것이지 다시 병력을 모아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황제에게 애민 정신이 없다면 결코 행할 수가 없는 일.

백성들은 황제가 있을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만세!"

두두두두!

피투성이가 된 군대가 빠르게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델족의 족장 카루드는 길게 베인 팔에 천 조각을 대충 질끈 묶었다.

적들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벌렸다고 생각이 들 때, 그는 살아남은 자들을 확인했다.

"어째 전사들이 5천도 되어 보이지 않는 것이냐."

"...아군은 전멸 이상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전멸...."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물론 남은 병력이 5천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흩어져 각자도생을 할 것이니.

델족의 병력 3만 중에서 2만이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약탈로 생계를 유지하는 델족으로서는 향후 10년이 지나도 복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피해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 마경을 넘어야 한다.

성난 제국군이 검은 숲 끝까지 쫓아올 것이니, 아예 금역을 넘어 버리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른 판단이었다."

델족 장로들의 말을 들은 것이 실책이었다.

분명히 카루드는 제국만큼은 건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쟁 중이라고는 해도 제국 내에는 많은 병력이 있었으며, 사생결단을 낼 각오가 아니라면 제국을 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고.

그러나 장로들의 생각은 달랐다.

제국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막대한 물자들을 수입하고 있었고, 국경 영지에서는 보급을 위한 물자들이 쌓여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대전쟁 중이었으니 제국은 겨를이 없을 거라고.

추후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내전이 터져 수습을 못 할 것이니 걱정 말라고 장로들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믿고 제국을 약탈하려 하였으나 단맛을 미처 다 보기도 전에 전사들의 목이 죄다 떨어졌다.

"호루루루루!"

"족장! 놈들이 옵니다!"

"이런 지독한 놈들!"

전사들은 호루루라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켰다.

멀리서 지쳐 죽을 때까지 화살을 쏟아붓는 녀석들이다. 또한 얼마나 끈질긴지 아무리 빠르게 도주를 해도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여기 먹잇감이 있다! 죄다 죽이고 귀를 잘라 와라!"

"호루루루루-!"

#제60화. 서막(4)

국경 영지 가스펠.

가스펠 국경 지대는 대륙 중앙의 강국 율리우스 왕국과 인접하고 있다.

영지 서쪽 지대는 완전히 군사 요새화가 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도시들은 전부 군사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중앙군 2만이 항시 주둔하는 곳이었으며, 변경백 가스펠의 영지군 3만 역시 이곳에 배치되어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곳으로 8만의 병력이 추가되었다.

가스펠의 병력은 총 13만.

저 멀리 보이는 평야에는 적들의 깃발이 빼곡했다.

제국군의 동원이 끝난 만큼 율리우스 왕국도 동원이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적들은 함부로 공성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황제의 병력이 진군 중이라는 소식은 그들도 알고 있었고, 공성 중에 옆구리를 얻어맞으면 그대로 전쟁이 끝날 수도 있는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곧 대규모 회전이 있을 것이다.

한 방의 전투가 일어날 것이기에 가스펠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은 방첩 임무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황제의 군대가 도착했다.

뿌우-!

제국 방향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의 대군이었다.

최근 100년 동안 이만한 숫자의 군대가 동원된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다.

승리한다면 제국은 다시금 위대해질 것이나, 패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물론 그 누구도 황제가 패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화려해 보이는 황제의 어가.

30만 대군이 후방에 도열하고 있는 가운데 홍해의 기적처럼 병력이 갈라지며 어가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스펠에서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던 랭턴 공작은 휘하 제후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갔다.

스르르륵.

어가가 공중 부양 상태에서 내려왔다.

모든 제후들이 무릎을 꿇는다.

끼이익.

황제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등장했다.

"황제 폐하 만세!"

"랭턴 공작, 별일 없었나."

"폐하의 위엄에 적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적들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모았나."

"미리 예상하였던 그대로입니다. 용병왕 아론이 5만의 군대를 이끌어 참전한 것은 조금 문제가 되겠으나 40만 중에서 50%가 징집병이옵니다. 제국과는 그 격이 낮습니다."

"그래, 나머지 이야기는 전략 회의에서 하도록 하지."

"예!"

"오늘 길에 델족 놈들을 잡았다."

"델족...!?"

"그들이 짐의 강역을 강탈하고 있었느니라."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이!"

벨가른 영지에서는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영지 내에서 처리를 해야지, 델족이 쳐들어왔다고 하여 대전쟁을 앞두고 있는 병력을 빼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황제는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끌고 와라!"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이민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야만족이 바로 이번에 제국에 편입된 호루루 부족이다.

호루루 준남작은 적들의 부족장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아악! 놔라! 놔라, 이놈아!"

빠악!

바바는 끌고 오는 와중에 죄인의 머리통을 쳤고, 델족의 족장은 뇌진탕이 잠시 일어났는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쿵!

바바는 놈을 대동댕이치고 익숙하지 않은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령, 이행했슴다!"

"고생했다."

"하하, 이런 약골들이야 별거 아니었슴다."

"끄응."

바바를 지켜보는 제후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황제의 명령에 의거하여 앞으로 융합 정책을 펼칠 것이다.

대륙을 일통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황제가 밝혔고, 대륙 전체가 융합되어야 하기에 이런 모습은 앞으로도 종종 일어날 일이다.

"바바 준남작, 주력은 격파하였느냐."

"한 2천 정도가 살아 돌아갔슴다."

"고생했다."

"별말을."

국경에서 방첩 업무를 수행하던 가스펠 백작이 달려왔다.

"이런 죽일 놈이! 감히 내 백성들을!"

"가스펠 백작, 네가 직접 목을 쳐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서-걱.

격분한 가스펠 백작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야만족 족장의 목을 날려 버렸다.

여전히 가스펠 백작은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황제가 빠르게 수습을 해 준 덕분에 피해가 수천으로 그친 것이다. 잘못하면 수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죽어 나갈 수도 있었다.

황제는 잘린 목을 무심하게 한 번 보더니 손짓했다.

"전략 회의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행군한 병사들을 푹 쉬게 하라."

"존명!"

실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제후들은 역사적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오늘의 전략 회의에서 전쟁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모든 것은 황제의 손에 달려 있다.

최근 황제가 태업하기는 하였으나 그 누구보다 전쟁 경험이 많았다. 300년 동안 황제의 손에 병탄된 국가만 5개국이 넘었다.

국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전쟁터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수십 년.

또한 그러한 역사적인 전쟁 이후 위협을 느낀 주변국이 연합하여 쳐들어오길 수차례였다.

황제는 모든 적들을 격파하고 이 자리까지 왔다. 제후들이 난다 긴다 해도 황제보다는 전쟁 경험이 적다는 뜻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제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타로스는 전략 회의실로 들어오며 엄숙한 분위기가 내부를 휘감고 있음을 느꼈다.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 기사들의 몸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모두가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있으면 제국의 운명을 가를 승부가 시작된다는 것을.

"평신."

총 30여 명의 제후들.

동원된 병력 40만.

제국의 주력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전쟁에서 황제가 패하면 제국은 무너진다. 당장 제국은 분열되고, 주변국에서 가만두고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늙은 이무기가 될 것인지, 드래곤이 될 것인지 이 한 방으로 결정된다.

촤악!

지도를 편 랭턴 공작이 대군사와 함께 나란히 섰다.

현장의 전략을 건의하는 것은 리카드로 후작이었지만, 선봉장은 랭턴 공작이다.

또한 선발대의 총수라는 직함을 달고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가 꽤 있을 것이다.

타로스의 입이 열렸다.

"적들의 동향은?"

"지금까지 저희 제국군은 철저한 방첩망을 구성하였으며, 내부의 첩자들을 다수 잡아 죽이거나 역으로 정보를 수집해 왔습니다. 그러나 역정보일 가능성이 높음에 따라 유의미한 수준의 정보는 캐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흔한 수법이지."

"척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국경 영지를 염탐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치혈한 첩보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타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일종의 신경전이었다.

제국은 선전 포고를 하였고, 율리우스 왕국에서도 정보의 수집이 중요하였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부로 뚫고 들어오려 하였다.

제국에서도 물론 첩자들을 대거 파견했고, 그 안에서 죽은 자들도 많을 것이다.

선발대의 역할도 쉬운 건 아니었다.

"적들의 병력 구성은 나왔나."

"기병 10만, 궁병 5만이 정예병이며, 용병왕 아론의 군대 5만은 전원 창병입니다. 나머지 20만은 징집병이며 그 역시 창병이 다수입니다."

"아군의 돌파력을 염려한 구성이로군."

"맞습니다. 제국은 개인적인 무력을 중시하기에 검병이 꽤 많은 편입니다. 그에 비하여 적들은 징집병이 많아 창병이 다수 포착되었습니다."

"창병은 3개월만 제대로 수련해도 꽤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지."

"기병으로 돌파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톡. 톡. 톡.

타로스는 생각에 잠겼다.

용병왕 아론의 군대는 팔랑크스 방진을 운용한다.

그곳으로 기병을 들이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제국군은 개인적인 무용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상극이 되는 병력을 운용했다가는 밀릴 것이다.

"제국군의 구성은?"

"기병 15만, 궁병 5만, 보병 20만입니다. 보병 중 창병이 10만이며 나머지는 검병입니다. 그래도 저희 군대는 대다수가 활을 사용할 수 있으며, 급하면 창병이 검병이 되며, 검병이 창병이 되는 등 운용이 자유롭습니다."

"검병에게 3단창을 보급했나?"

"그렇사옵니다."

검을 사용하되, 필요하다면 휴대하고 있는 창을 조립하여 사용한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이 가진 최고의 강점이다. 게다가 전문적인 기병들은 모두 파르티안 샷을 구사한다.

개인적인 무용이 뛰어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짐의 경험으로 보아 이만한 대군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대부분의 전략은 소용이 없게 된다. 강 대 강(强對强)의 전투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 전술이라는 것도 수만 대 수만의 전투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수십만이 동원된 전투에서라면 병력을 한 몸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 전술을 구사하기 힘들다.

"그러나 제국군은 다르다. 훈련 상태는 충분하고 개인적인 무력이 강하기에 전술을 족히 사용할 만하다."

"폐하께서 구상하신 전술이 있으십니까?"

"기본적인 전략은 전방의 위장 공격과 기병을 이용한 후방의 타격이다. 제국의 기병 전력이 우위에 있으므로 적 기병만 처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적들을 유린할 수 있다."

"과연."

오직 제국의 무력을 믿기에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다.

"적 기병들이 무력화된다면 위장 공격과 선회 전술을 기본으로 시도한다. 80명의 경기병과 20명의 중기병을 하나의 백인대로 구성하며, 20명씩 선회하며 화살을 날리다가 적들의 결속이 무너지면 그대로 돌파하여 돌아온다."

"기병의 역할이 중요하겠습니다."

"적들의 기병이 제국군 기병을 압도하기는 힘들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초적으로 보이지만 15만에 이르는 기병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면 이보다 위협적인 전략은 없다.

대규모 회전이기에 복잡한 전술보다는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최대한 병력 손실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

"만약 적 기병과의 격차를 줄이기 힘들다면 위장 후퇴와 스텝 전투의 기초 전술을 적용한다. 약간의 병력으로 돌격, 후퇴를 지속하여 추격전을 유도하며 매복하여 섬멸한다. 가능한 한 포위 전술을 사용할 것이며, 포위망이 형성된다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병사들의 개인 무용이 뛰어나기에 시도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포위 전술.

적들을 거대한 그물망 안에 넣을 수만 있다면 손쉽게 섬멸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포위망을 형성하는 동안 적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며, 지형지물을 이용한다면 포위가 어렵다.

포위를 하려면 압도적으로 적들을 유린해야 하는데, 창병이 대다수인 적들을 그렇게 밀어붙이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타로스는 용병왕 아론만 사라져 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다.

"개전과 동시에 짐은 용병왕 아론과 일전을 벌일 것이다. 놈이 일대일 대결에 응해 준다면 용병들의 사기도 떨어질 터. 그 이후 짐이 직접 중기병을 이끌고 타격할 것이다. 모든 전략은 그 이후에 적용한다."

"존명!"

"리카드로 후작은 짐이 제시한 기본적인 전략에 착안하여 최적의 대안을 마련하라."

"예!"

제후들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의 말대로 된다면 이 전쟁은 손쉽게 승리할 것이다.

#제61화. 개전(1)

국경 지대 대평야.

이 거대한 분지는 일부만 농지로 개발되고, 대부분은 양국이 신경전을 벌이는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제국에서의 공식 명칭은 가스펠 분경지.

왕국에서의 공식 명칭은 칸스 분경지다.

같은 땅을 두고 제국과 왕국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렀고, 소유권을 주장해 왔다.

농사를 짓는다면 상당한 소출이 나오는 땅이었으나 인간이 그어 놓은 국경선 때문에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평시에는 전방 초소들이 다닥다닥 약간의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을 것이나 대전쟁이 예고되면서 초소들은 모두 퇴거 조치되었다.

뿐만 아니다.

제국의 선전 포고 이후로 국지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으며, 양측 정보부와 레인저들이 각축을 벌였다.

영지 하나가 세워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비옥한 땅 위에 양측 도합 100만에 가까운 군대가 도열하고 있었다.

대륙 사에서도 이만한 군대가 부딪친 적은 손에 꼽는다.

양국 모두 이 전쟁에 사활을 걸었으며, 전시 경제로 간신히 전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므로 패하는 순간 몰락은 기정사실이다.

타로스는 긴장이 흐르는 전장의 공기를 느끼며 선두에 섰다.

대군사 리카드로 후작 역시 다소의 긴장을 머금고 있었다.

"대평야 분지는 작은 언덕들이 꽤 있습니다. 완만한 형태의 오름들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지요."

"저 언덕 너머에 승리의 열쇠가 있다."

"그렇사옵니다."

"적들 역시 머리가 있는 이상 전략을 구사하려 할 터. 전략가들의 싸움이 될 수도 있겠다."

"걱정하지 않사옵니다."

대현자 리카드로 후작.

대륙 마법사계의 전설로 불리는 거인 둘이 제국에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리카드로였다. 나머지 한 명은 얼마 전에 귀부한 그랑카인 후작이다.

그랑카인은 워낙 마법에 특화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 마법사단 전체를 이끈다.

반대로 리카드로는 마법적인 지식과 소양뿐만이 아니라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필요할 때에 화력 지원을 하고, 황제의 곁에서 전략 전술을 진언하며 전체적인 전장의 머리가 된다.

다그닥! 다그닥!

전장의 기운을 뚫고 백마를 탄 화려한 갑옷의 남자가 양 진영 한복판으로 나왔다.

호위라고는 달랑 기사 둘을 대동했고, 머리에 왕관이 씌워진 것으로 봐서는 율리우스 왕국의 국왕이 틀림없었다.

발렌 율리우스 6세.

타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발렌 국왕을 향해 이동했다.

그 뒤를 레베카와 리카드로가 호종한다.

"쓸데없는 말을 할 것이 분명할 터. 짐은 오랜 세월 전장에서 지휘를 해 왔으나 이런 퍼포먼스는 도대체 왜 하는 건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전장의 로망 아니겠습니까."

발렌은 꽤 젊은 국왕이다.

많아 봤자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날카로운 눈동자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 표정,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려는 모습까지.

전형적인 군주의 얼굴이다.

타로스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발렌과 대면했다.

발렌이 노성을 터뜨렸다.

"황제여, 이 명분 없는 전쟁을 무슨 연유로 일으킨 것인가!? 지금이라도 물러가라! 멸망의 단계를 밟고 싶지 않다면!"

본능적으로 레베카의 손이 검집에 닿았다.

동시에 적 기사들도 검을 뽑아 당장 전투라도 벌일 기세였다.

쓸데없는 신경전이 오갔다.

타로스는 피식 웃었다.

"명분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일 터. 제국에서 전쟁을 왜 일으켰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명분 없는 전쟁은 침략에 불과하다!"

"침략, 맞다."

타로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놈이 명분을 원하니 읊어 주기는 해야 한다.

타로스가 손짓하자 리카드로가 마나를 일으켜 소리쳤다.

"악마들의 왕국, 율리우스의 백성들은 들어라. 짐은 악이 스며든 왕국을 징치하고자, 이 땅에 평화를 선고하고자 군대를 일으켰다. 이미 악마의 대군주 발로그가 짐의 손에 박살이 났으며, 제국과 주변국을 위협하던 드래곤조차 섬멸했다. 짐은 오랫동안 악마들을 추격하고 있었노라. 최근 악마들이 율리우스 왕국으로 스며들었음을 포착한 바, 지금이라도 무장을 해제하고 제국의 큰 뜻에 협조하라. 성실하게 조사에 응한다면 자비를 베풀 것인즉."

"...!"

"이런 미친놈이 감히 뭐라고...."

발렌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타로스의 무심한 목소리가 발렌에게 닿았다.

"명분을 원한 것은 네놈 아니었느냐. 짐은 가이아 신전의 사제들까지 데려왔다. 그들이 원해서지."

"모함이다! 모함이야!"

"그럼 전장에서 보지."

"빌어먹을! 황제여, 네놈은 짐에게 무릎 꿇게 될 것이야."

양국의 왕은 각 진영으로 돌아왔다.

개전 직전.

발렌 국왕은 진영으로 복귀하는 즉시 열심히 연설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타로스는 그보다 사기를 끌어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설이라면 이미 충분히 했다.

그렇다면, 적들의 망치부터 깨부순다.

"그랑카인 후작."

"예, 폐하!"

그랑카인이 빠르게 달려와 부복했다.

그는 황제의 어가 후면에서 마법사단을 이끌고 있는 중이었다.

"음성 확장을 펼쳐라."

"존명!"

마나가 한 번 휘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타로스는 최대한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왕 아론, 율리우스 왕국의 왕자이자 그랜드 마스터. 경이 왕국 최강자임을 알고 있노라. 짐과 겨룰 준비는 되었느냐?"

"...."

제후들과 기사들, 병사들의 눈이 반짝인다.

긴장이 흥분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국의 군인이라면 누구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를 바란다. 징집병 자체가 없었고, 일반인들도 검을 잡고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제국은 스파르타에 버금가는 병영 사회다.

"대륙 최강을 논할 것인가, 겁쟁이로 남을 것인가. 선택하라."

군인들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왕국 진영.

대륙 최강을 논한다는 황제의 한마디에 아론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분명히 아론은 황제에 미치지 못함을 느끼고 있었다.

드래곤을 죽이고, 악마 대군주를 격살한 인간 역사상 최강자.

발렌 국왕조차 아론을 만류했다.

"굳이 휘말릴 필요 없다."

"보내 주십시오."

"어허, 너를 이리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노라."

"폐하, 이만한 대군이 동원된 전쟁이라면 사기가 모든 것입니다.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기세에서 밀리게 되고 순식간에 쓸려 나갑니다. 지금 황제의 의도는 왕국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것이지요."

아론의 말에 발렌 국왕이 군대를 돌아봤다.

진영 전체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왕국은 겁쟁이라는 인식이 박히고 만다.

적진에서는 황제가 직접 나온다. 황제만 죽인다면 이 전쟁은 쉽게 승리할 수 있다. 어쩌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복잡한 생각이 발렌 국왕에게 스치는 가운데, 황제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짐은 이 자리에 있다.]

황제가 여유롭게 걸어와 양 진영 한복판에 섰다.

황금빛 갑주를 입고 있었기에 유난히도 그 모습이 잘 보였다.

여기서 일대일 대결을 거절하면?

발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진에 가이아 신전이 직접 참전했다는 말이 나돌고, 황제가 왕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자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전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용병왕의 말대로 대병력의 전투는 기세다.

발렌 국왕은 전장이라는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의문의 1패를 당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밀리면 도주할 것을 명한다."

"존명!"

저벅저벅.

검은 갑주를 입은 남자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타로스는 가만히 서서 아론을 맞이했다.

"대륙 최강의 자리라는 말에 혹한 것은 아닙니다."

"왕국을 위한 충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노라."

"약속은 지켜 주십시오."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죽어도 용병을 핍박하지는 말아 달라는 약속이었다.

용병들은 중립적인 존재였기에 잡히면 몸값을 받고 풀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타로스는 약속했고, 군주의 선언은 지켜질 것이다.

아론은 후련한 표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대와 같은 인재를 구하기는 힘든 법이 아니겠느냐. 제국으로 귀부하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쉽군."

더 이상은 타로스도 권하지 않았다.

휘하로 거둘 것이 아니라면, 죽인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대륙 최강자의 검술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와라. 경이 진정한 쾌검의 달인이라고 들었노라. 그 검을 견식하겠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파앙!

아론의 몸이 굉장한 속도로 움직였다.

타로스 역시 초감각을 켜고 초공간 이동을 시작하였다.

스스슷!

초감각을 켰음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몸은 빨랐다.

타로스의 레벨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조금 힘들었을 정도로.

그러나 타로스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황제는 고속으로 이동하며 이따금 뇌전을 뿌렸다.

콰과과과광!

아론이 기겁하며 피해 냈고, 곡예를 한다.

동시에 날아오는 검강의 다발들.

쿠아아아앙!

대지에 크레이터가 파였다.

서로 간을 보는 행위가 끝나자 거침없이 검강들이 뿌려졌다.

타로스는 초공간 이동을 사용해 뇌전검결을 뿌리면서 원 없이 검술을 펼쳐 냈다.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뇌전과 폭음, 이글거리는 공간, 박살아 나고 있는 대지까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순간들이 연속으로 펼쳐졌다.

꽈릉! 꽈르르릉!

콰아아앙!

제국군 진영.

기사들은 그저 황제의 잔상을 쫓기에 바빴다.

황제뿐만이 아니다. 아론 역시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우리들의 상대가 아니다."

로빈슨 단장은 손에 땀을 쥐었다.

레베카 역시 두 사람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공간에 멸망이 내리는 것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치솟으며 뇌전과 검강이 흐른다. 이미 저건 인간의 싸움이라 볼 수가 없었다.

곧 이어지는 황제의 트레이드마크.

오색의 찬연한 빛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사방의 공간들이 '삭제'된다.

그러나 간신히 아론의 몸이 빠져나가 나뒹굴었다.

콰아아아앙!

"폐하의 공격을 피하다니. 도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서?"

"경들의 눈에는 폐하와 용병왕의 실력이 대등하다고 보이나?"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랭턴 공작이 로빈슨에게 다가왔다.

기사들은 황제와 용병왕의 궤적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랭턴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오히려 상대가 되지 않음이다."

"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니요? 지금까지 폐하와 마주한 적들 중 그 누구보다 오래 버티고 있습니다."

"그거야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지."

"그렇다면 각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로빈슨의 말에 공작은 피식 웃었다.

랭턴은 제후의 정점이었다.

공식 서열 2위였으며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랭턴의 무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런 랭턴 공작의 해석이라면 믿을 수 있다.

"지금 폐하께서는 즐기고 계신다."

"예!?"

"그게 사실입니까!?"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의 눈에 두 사람의 궤적은 보이지도 않았고, 인간의 대결이 아닌 것처럼 닥치는 대로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다.

황제와 대등한 실력이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랭턴의 해설에는 상상을 초월한 반전이 있었다.

"무인이 대결을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경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아!"

"지금껏 폐하의 궤적을 쫓을 수 있는 인간이 없었기에 일검에 박살을 내오신 것이다. 그러나 용병왕 저 작자는 폐하의 발치에라도 이를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게지."

#제62화. 개전(2)

제후들은 타로스가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쯤은 맞는 말이다.

목숨을 내건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는 전투가 미친 듯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마약과도 같은 쾌락.

그러나 이대로 상황이 지속된다면 타로스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슬슬 끝을 낼 때가 왔다.

콰앙!

그들의 검이 허공에서 한차례 부딪치고 내려왔다.

"후욱! 후욱!"

아론의 입에서 거친 숨이 뱉어진다.

그에 비해 타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아론이 체력을 사용한 것에 비하여 타로스는 스킬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플레이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특권이다.

"과연 명불허전이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실력을 쏟아부은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군요."

"그런가."

"이런 강자와 겨룰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짐은 경을 기억할 것이다."

"경이라....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만."

"충분한 자격이 있다."

"폐하께서 인정을 해 주시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아까운 인재로군."

아론은 자신이 가진 비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어마어마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 공격을 막고 나면 전투는 끝난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적국의 왕자를 휘하로 둘 수는 없는 노릇. 더욱이 귀부할 의사가 없는 왕자를 억지로 거두었다가는 두고두고 후환이 된다.

푸르게 보일 정도로 마력이 응집되자 아론은 총알처럼 튕겨져 나왔다.

그 미증유의 위력에 타로스는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콰아아아아앙!

검강의 다발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것이 바로 아론이 가지고 있는 최강의 검격 '펄스 스워드(Falls sword)'다.

푸른 물결이 타로스의 전신을 쓸어 냈다.

타로스가 서 있는 곳을 제외한 수십 미터의 대지가 완전히 박살 났다.

콰과과과!

그 여파가 작은 지진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앱솔루트 배리어를 강타하고 난 이후에는 후속타가 끊임없이 들어갔다.

타로스는 보았다.

아론의 눈동자에 절망이 어리는 것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넣었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여 절망했다.

그 짧은 순간.

아론의 내뿜은 빛이 명멸하고 타로스가 뻗은 검격이 직격되었다.

콰아아아앙!

이번에는 아론도 막을 수가 없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론은 검막을 쳐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 하였지만, 파워드 킬은 자연의 모든 물리적인 법칙을 무시하는 재해다.

퍼어엉!

아론의 몸이 박살 나 잔해가 된다.

후두두둑.

드래곤이 그랬고 네임드 보스들이 그랬으며, 발로그조차 찢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규격 외의 스킬이 난무했다.

"...."

아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를 정상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 충격적이고 끔찍한 광경에 적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타로스는 천천히 진영으로 복귀했다.

"와아아아아!"

쏟아지는 환호성.

제국의 군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치켜들었다.

대륙 최강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전투가 방금 끝났다.

이곳이 전쟁이 아니었다면 황제가 복귀한 즉시 부복의 물결이 이어졌을 것이다.

타로스는 말 위에 올라 중장기병을 이끌었다.

"개전(開戰)!"

"존명!"

두두두두!

어마어마하게 날카로운 창이 왕국군 전체를 찌르고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다.

타로스의 남은 마력은 1,500.

그마저도 본체의 마력은 그대로였고, 유물의 마력을 500 정도 끌어다 썼을 뿐이다.

5만에 이르는 중장기병이 그대로 쐐기처럼 돌격하였고, 적들은 정신을 차리고 팔랑크스 방진을 구성했다.

방진을 구성한 자들은 아론을 쫓아온 용병들이다.

그들은 나름 중갑으로 무장하였고, 거대한 장창을 땅에 박고 방패까지 앞세웠다.

대기병전에 있어서는 최강의 방어진으로 손꼽히는 기술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벽하진 않았다. 용병왕이 죽어 버린 충격으로 용병대 전체의 사기가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용병왕을 죽인 황제가 선두에서 돌격해 오고 있었다.

"막아! 막아야 한다!"

왕국군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타인을 위한 것인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고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활을 들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타로스는 전방에 세 방이나 파워드 킬을 뿌렸다.

찬란한 빛이 전방을 휩쓸자, 사방 30미터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나 삭제됐다.

보이는 것은 오직 산산조각 난 파편뿐이었다.

콰아아아앙!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

타로스는 검을 들고 뇌전검격을 뿌렸다.

워낙에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서일까.

그대로 적진은 꿰뚫렸고 중갑기병들은 적진을 남북으로 쭉 쪼개며 들어갔다.

가로막는 병사들은 몇 되지 않았다.

황금빛 갑주가 이동하는 곳마다 홍해의 기적처럼 병력이 쩍 갈라졌다.

황제에게 닿는 즉시 온몸이 터져 죽을 거라는 말들이 전장 전체로 흘러 들어가면서 적들의 사기는 전체적으로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작 타로스의 기병창에 찔려 죽는 병사들은 몇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명성이 가진 힘이었다.

용병왕이 죽고 기사단들이 통째로 찢겨 나가는 것을 보았기에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중갑기병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왕국군 지휘부.

후방에서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한 발렌 율리우스 6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제를 선두로 한 중갑기병들이 아군의 진영을 멋대로 휘젓고 다녔다.

황제가 가는 곳마다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대열이 무너지자 적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뭐 저런 괴물이!?"

한 인간이 전장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끊임없는 반문이 이어졌다.

인간 한 명이 처리할 수 있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 전쟁에는 무려 40만의 전투병들이 동원됐다.

그 병력들이 황제 한 사람에 의하여 사기가 땅에 처박히고 있는 전율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군주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황제는 강하다. 그러나 너무 실력이 부풀어 있다."

발렌은 황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땅으로 떨어지고 황제의 명성이 워낙에 드높아 지레 겁을 먹은 것이지 그 역시 한 인간에 불과했다.

검술이야 세계 최강을 논할 수 있겠지만, 수백 명을 단숨에 썰어 버린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를 저대로 두면 왕국은 결국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개전에서 패배할 것이다.

제후들도 국왕과 같은 생각이었다.

"소신에게 기사단을 내어 주십시오!"

"제가 막아 보겠나이다!"

"...."

발렌은 숙고했다.

어떻게 해야 황제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일국의 통수권자가 전장을 휘젓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발렌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특무 기사단을 보낸다!"

"예!"

뿌우-!

나팔 소리와 함께 지휘부에서 적기가 올라갔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특무 기사단이 움직였다.

그들이 창설된 목적은 단 하나, 오직 황제를 죽이기 위하여 훈련한 자들이다.

10년이라는 고난의 시간 동안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수련한 괴물들이었다.

왕국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특수 병기들이라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시각.

타로스는 왕국군 내부를 마음껏 휘젓고 있었다.

다만, 워낙에 인간들이 많기는 했다.

전장이 넓어 슬슬 말도, 사람도 지쳐 가고 있다.

이건 중기병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다.

수련을 매일 하는 병사들이야 크게 지칠 일이 없었지만, 마갑을 껴입은 말들은 쉽게 지쳤다.

슬슬 돌아가 말들을 쉬게 하지 않으면 다음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젤 후작이 회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폐하! 다음 돌격은 남쪽으로 하여 진영으로 복귀해야 하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군."

타로스의 군대는 북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한 바퀴 선회를 하여 남쪽으로 내달리려 하였다.

그때, 검은 경갑을 껴입은 기사단이 출격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가젤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트, 특무 기사단입니다!"

"짐을 잡기 위해 창설되었다는 집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특무 기사단이 창설된 지 무려 10년이다.

왕국에서는 공공연하게 특무 기사단의 존재를 알려 왔는데, 만약 전쟁이 터지더라도 그들이 타로스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광고했다.

정치적인 한 수였겠지만 그 덕분에 제국도 특무 기사단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황제 역시 상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터.

탓!

타로스는 좀 더 앞으로 돌출되었다.

가젤 후작은 기겁했다.

"폐, 폐하! 위험합니다!"

"진격 속도를 유지해라. 저들은 짐이 처리한다."

타로스는 마나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빠르게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후방으로 돌아가 잠시 요양해야겠지만, 저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마력이 회복되었다.

핑! 핑! 핑! 핑!

타로스가 달려가자 각종 암기들이 쏟아졌다.

화살을 비롯하여 표창과 듣지도 보지도 못한 투창들까지.

그러나 타로스는 기예를 선보이며 피해 냈다.

모두 완벽한 기마 스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방에서 감탄의 빛이 흐르는 가운데 이번에는 수많은 그물들과 마법이 날아왔다.

타로스는 달리는 말 위에서 튕겨져 나가며 움직임을 갑자기 멈춘 후,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다.

콰과과과과광!

주변이 초토화되었다.

황제 사냥에 나선 특무 기사단이 등장하자 주변의 적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타로스와 특무 기사단의 독무대가 마련된다.

놈들이 거대한 기병창을 들고 돌격했다.

기병창의 창끝에는 하얀빛이 발하고 있었다.

저건 마도구가 확실했다. 오직 타로스를 죽이기 위해 창설됐고, 왕국에서는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물.

놈들이 돌격하자 타로스는 그대로 블랭크를 시전하여 사방으로 파워드 킬을 뿌렸다.

쿠아아아앙!

"...!"

쿠구구!

사방 50미터가 완전히 삭제되고 특무 기사단은 오체분시 됐다.

10년이나 수련한 것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으아아!"

"괴, 괴물!"

적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타로스는 달려오는 말 위에 올라탔다.

"회군한다!"

"존명!"

중기병은 다시금 적들을 반으로 쪼개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타로스의 이마에도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극한 직업이 따로 없군.'

전황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면서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애초에 제국에서 황제라는 존재는 직접 검을 들고 군대를 이끄는 자였다.

약육강식이라는 특이한 피라미드 구조 사회에서 황제가 군대를 직접 이끌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

그렇기에 대군사라는 직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황제가 짜 놓은 전체적인 틀을 유지하면서 후방에서 군대를 지휘한다.

보통은 충성심 강한 궁정 귀족이 맡는다.

그런 이유로 타로스는 직접 전선을 지휘하며 적진 내부를 휘저어야 했다.

전쟁에 한해서는 황제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독재자의 또 다른 이름은 업무의 노예였으므로.

중갑기병들이 후방으로 복귀했다.

여러 제후들의 외침이 쏟아졌다.

"대승이옵니다!"

#제63화. 개전(3)

지휘부 막사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개전 첫 전투 직후 제후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피에 흠뻑 취한 채 웃고 있어, 그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타로스 역시 사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오늘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피를 뒤집어쓴 타로스였으니까.

전쟁이 벌어지고 승기가 잡히기 전까지는 황제가 가장 많이 뛰어다녀야 한다. 그것이 제국에서 벌이는 전쟁의 모습이다.

"대군사."

"예!"

리카드로 후작의 목소리에서도 힘이 들어갔다.

70대 노인 같지 않게 우렁찼다.

"오늘의 전과를 보고하라."

"폐하께서 분투해 주신 결과로 적들의 진영은 요동쳤으며,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사옵니다. 무려 첫 전투에서 2만을 죽이고, 1만을 포로로 잡았으니 이만한 대승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건 당연한 일이지. 폐하의 적들이 살아남을 리가."

타로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랭턴 공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질세라 라이너스 후작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한번 검을 휘두르니 성서의 기적이 재현되는 듯하였사옵니다. 신 등이 멀리서 지켜본 바, 적들이 두 동강, 세 동강으로 나뉘고 종국에는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사옵니다."

"맞습니다. 오직 폐하의 무용으로 이루어 낸 결과이옵니다."

"공치사가 심하군."

"사실입니다."

모든 제후들이 황제의 공을 인정했다.

이건 아부가 아닌 사실이다.

제후들은 개전 시작도 전부터 용병왕 아론에 대해 걱정했었다. 제국의 황제와 더불어 대륙 최강을 다투는 존재였으니까.

그런 아론이 황제의 여흥거리로 전락했다.

리카드로 후작이 전황을 분석해 나갔다.

"먼저, 폐하께서 용병왕을 제거하신 이후 적들의 사기가 요동쳤사옵니다. 그 이후 중기병이 진영을 쪼개 버리니 용맹한 제국군이 돌격하여 수많은 적들을 사살하였습니다. 비록 적들을 에워싸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이는 대단한 전과입니다."

"적 진영이 그 와중에 움직였나."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포위를 당했다면 그대로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적진에도 꽤 머리를 쓰는 군사가 있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겠지."

율리우스 왕국은 제국의 50%에 달하는 국토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국만 해도 수많은 인재들이 널려 있었는데, 왕국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머리 쓰는 일은 율리우스 왕국이 더 뛰어날지 모른다.

가젤 후작이 외쳤다.

"적들은 두려움에 떨며 목책 안으로 틀어박혔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지금이 적기이옵니다!"

"신에게 군대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허락하시옵소서!"

제후들이 서로에게 선봉을 맡겨 달라고 난리를 쳤다.

타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정신 차려라.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전쟁은 감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라."

"허험, 황공하옵니다."

그제야 제후들이 정신을 차렸다.

다들 오랜만에 피 맛을 보더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이 좋아 제후이지 피에 미친 살인마적인 성향이 기본이었다. 매일 검만 잡고 수련하며 실력을 확인하고 싶어 난리였으니.

잠시 후 상황이 진정되자 타로스가 입을 열었다.

"적들이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거로군."

"예, 적들의 숫자가 줄었다지만 30만 이상이 남았습니다. 그만한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성은 그 어디에도 없사옵니다."

성 내부를 비운다면 가능하겠지만 어떤 도시도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지어지지 않는다.

백성들이 있고 어느 정도는 생산이 가능해야만 한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해도 백성들이 있었기에 그들 모두에게 소개령을 내리지 않는 이상 쉽게 성에 틀어박힐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쳐도, 만약 대군이 농성을 하다가 배후로 쳐들어간 적들에게 수도가 함락된다면 그 즉시 사기는 곤두박질친다.

어쨌든.

적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요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전략을 펴겠나?"

"우선 목책을 두른 채로 내부의 분위기를 수습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성과를 내기 전에는 사기 회복이 어렵습니다. 증원을 받는다거나 외국의 참전을 유도하면 그때야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 안에 든 쥐라."

톡. 톡. 톡.

타로스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들어갔다.

동시에 지도를 바라본다.

놈들은 성을 등진 채로 목책을 치고 있었다. 여차하면 백성들을 후방으로 소개하고 퇴각할 수 있는 퇴각로를 만든 것이다.

"라무스 백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

"예! 얼마 전 마법 통신이 들어왔사온데, 어둠 숲 끝까지라도 추격하여 야만인들을 주살한다고 하옵니다."

"그렇군."

제국 최정예로 불리는 백마 기병대다.

다른 병종은 몰라도 기병에 있어서는 라무스 백작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리카드로 후작이 말했다.

"불러들일까요?"

"아니다. 이미 먼 곳까지 추격해 들어갔을 테고, 이참에 야만인의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짐 역시 동의하는 바."

이런 상황에도 타로스는 최정예 기병대를 빼지 않았다.

제후들은 이번 야만인 사건이 얼마나 황제의 분노를 크게 일으켰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전쟁을 하다가 병사들이 상하는 것이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외부 세력이 제국 내부를 휘저으며 양민을 학살하는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렇게 쳐들어온 적을 완전히 뿌리 뽑아 버려야 본보기를 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쓸 수밖에. 바바 준남작."

"네! 불렀슴까!"

"경이 실력을 보일 때가 왔다. 짐은 분명히 이번 전쟁의 승패가 기병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특히나 적들이 위축되었을 때에는 더욱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지. 최고의 기병 전문가인 라무스 백작이 있다면 그에게 기병 지휘권을 주었겠으나 차선책으로 바바 준남작에게 10만 기병의 지휘권을 주겠다. 그중 2만은 중갑기병이며 8만은 경기병이다. 바바, 잘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쇼! 적들을 박살 내 버리겠슴다!"

"레일 남작."

"옛!"

설마 자신의 이름이 불릴지 몰랐는지 레일 남작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경은 바바 준남작과 상의하여 매복 섬멸의 역할을 맡는다. 5만의 병력을 주겠다."

"조, 존명!"

타로스는 귀족파라고 하여 출전을 가로막지 않았다.

어차피 추후에는 전부 황제파로 돌아설 것이 확실하였기에 제후들이 어떤 면에서 뛰어난지 알 필요가 있었다.

개인적인 실력이 아니라 전술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줄기차게 적들의 정면을 공격한다. 나머지 기병은 랭턴 공작이 직접 맡아 운용하면서 적들의 측면을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라."

"존명!"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며 승리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율리우스만 점령하고 끝낼 것이 아니지 않은가."

"폐하의 꿈, 신들이 이루어 드리겠사옵니다!"

제후들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가 대륙 정벌을 선언했고, 또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제국이 작정하고 대륙을 정벌하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을 거라고 제후들은 생각했다.

제국의 강역이 넓어질수록 제후들의 권력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니,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미명이 어슴푸레 떠오르고 있는 아침.

왕국군 진영은 꽤 어수선했다.

지난 3일 동안 왕국군에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적들을 타격해 보려 했다.

기병대를 운용하여 측면을 타격하고, 위장 전술을 동원하여 역 포위를 시도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모든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국군 자체의 무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병사들조차 노력하면 제후가 될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 매일 혹독하게 수련했다.

정면 승부로는 도저히 답도 없는 무력이기에 정보부에서 왜 그토록 만류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창병들이 많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발렌 6세는 며칠째 잠조차 자지 못한 채로 전략 회의에 몰두하였다.

조금씩 병력이 갉아 먹혀 남은 병력은 이제 30만.

얼마 전 기병을 운용하다가 랭턴 공작에게 대파당해 버리는 바람에 큰 손실이 있었다.

더욱이 칸스 영지 후방에서 적 기병대가 어슬렁거리며 끊임없이 성벽 위로 화살을 쏴 대고 있었기에 그 피로감이 말도 못했다.

"분명히 방법은 있다."

"...."

전략부의 제후들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병력 증원과 타국을 개입시키자는 의견밖에는 개진을 할 수가 없었다.

적들은 점점 더 포위망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정면 승부를 했다가는 한 방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다만 그럴수록 조금씩 병력이 갉혀 먹히고 있었다.

"젤가드 왕국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는가?"

"없습니다. 주변국들은 개입하지 않은 채 숨죽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자신들이라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건가."

"참전했다가는 바로 다음 먹잇감이 될 거라 여기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참모 총장 레비안 공작이 허리를 굽히며 이야기했다.

왕궁에서는 끊임없이 외국과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신은 없는 상태다.

무엇보다 가이아 신전이 제국을 돕고 있다는 것에 참전을 꺼렸다.

"어떻게든 역 포위를 해야 한다. 성채를 이용하여 역 포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나?"

"그런 시도를 하였다가는 정말 고립되고 말 것이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유일한 방법은 측면을 돌파하여 포위망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일단 포위하기만 하면...."

호루루루-

어디선가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이제 왕국군 수뇌부는 호루루라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켰다.

"저 약삭빠른 새끼들! 또다시!"

제국군 기병대였다.

모두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자들.

놈들은 후방, 측면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화살을 교대로 쏘아 아군의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추격하면 도주하는 기만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놈들에 의하여 3일 동안 야금야금 갉아 먹힌 병력만 해도 몇 만은 되었다.

계속해서 주변을 서성거리며 타격을 가하는 통에 피로는 누적되고 병사들의 사기는 3일 전보다 더욱 떨어졌다.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호루루라는 소리에 병사들마저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기병대장 렉탄 후작이 나섰다.

"폐하! 신에게 군대를 내어 주십시오! 반드시 저 호루루 놈을 죽이겠사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지금 보이는 놈들은 3만이라고 하옵니다!"

"5만을 주겠다! 반드시 잡아 죽여라! 특히나 저 호루루 소리를 내는 놈들의 적장을 잡아 와라! 그래야만 사기가 올라간다!"

"존명!"

지금까지 누적된 피로감 때문인지 발렌 국왕의 명령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제64화. 개전(4)

2천에 달하는 선두의 기병들이 특이한 소리를 내며 돌진한다.

대사막에서 살아남은 부족들은 하나같이 강철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3일 밤낮으로 적들을 괴롭혔는데, 심하면 2시간을 자고 일어나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제국군 기병들이었다.

황제가 대륙 일통을 선언하고 민족의 융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도저히 저 강철과 같은 체력과 의지를 쫓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바바 준남작은 제국군 출신 기병들에게 6시간의 수면을 보장했고, 새벽에는 2천의 병력만 대동하고 적들에게 화살을 날리고 돌아왔다.

공격을 하는 입장에서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일이었는데, 받는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병대 백인장 루카는 적들에게 화살을 날리고 욕설을 퍼붓고 있는 대사막 출신 기병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병신들에게 전방 함성 발사!"

"두더지 같은 새끼들아! 굴에서 나와라!"

"우리는 고양이! 두더지를 사냥한다! 으하하하!"

"이런 개의 자식들아! 오늘 내가 너희들의 모견에게 먹이를 주고 왔노라!"

어설픈 제국어였기에 더욱 약이 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열이 받는데 말이야."

"오늘은 양반이죠. 어제 일을 생각하면...."

휘하 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3일 동안 쏟아부었던 욕들에 의하면 적들은 천하의 호래자식들이었고, 동물들과 교접하여 태어난 변종이었으며 눈이 한 10개쯤 달린 몬스터였다.

그들은 화살 공격과 함께 욕을 퍼붓고 사라졌다.

3일 동안이나 일방적으로 당하며 피로가 누적된 적들은 드디어 터졌다.

목책이 열리며 5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선회! 선회한다!"

"호루루루!"

빠르게 퇴각하는 바바 준남작의 뒤를 기병대가 뒤따랐다.

그야말로 꽁지가 빠지는 후퇴 아닌가.

바바 준남작은 철저하게 회전을 피했다.

그 대신 달리는 말 위에서 돌아 배사를 감행한다.

쐐애애액!

수천 발의 화살들이 적들을 꺼꾸러뜨렸다.

"이런 쳐 죽일 놈들!"

"병신들이 뿔났다!"

"튀어!"

"...."

이런 저속한 단어들이 적들을 열 받게 하고 하나의 계책을 완성한다.

도저히 제국군 출신 제후라면 상상할 수 없는 작전.

적들의 눈은 반쯤 뒤집혀 있었다.

바바 준남작이 외쳤다.

"뒤돌아 쏜다!"

으득! 배사

"그게 말이 쉽지!"

"대충 쏴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야!"

한마디로 사람 열 받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1만 발 정도의 화살이 후면으로 날아갔다.

그중 수천 발이 또다시 적들에게 명중하였다.

눈이 달리지 않은 화살은 적 병사들과 군마를 가리지 않았다.

군마에 화살이 맞으면 그대로 낙사다.

이만큼 말이 빠르게 달리고 있는 와중에 낙마하면 뒤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에 그대로 짓밟히게 되는 것이다.

꽈직!

"끄아아악!"

"아아아악!"

후방에 메아리치는 비명 소리.

그러나 적들은 더욱 열을 냈다.

"오체를 분시하지 않으면 내, 사람 새끼가 아니다!"

"파하하! 그럼 동물로 전향해라! 우리가 키우던 개가 있는데 그 개의 자식으로 입적시켜 주마!"

"저 자식을 잡아! 금 10관을 상으로 내리겠다!"

두두두두!

적들은 눈이 뒤집혔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갈대밭이었다.

그리고.

갈대밭에 매복된 병력이 움직였다.

고요하게 일렁거리고 있는 갈대밭.

황제의 명령을 받아 5만의 정병을 받아 온 레일 남작은 미리 이곳에 당도하여 함정을 설치하였다.

바바 준남작과는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다.

준남작의 군대가 지나가는 즉시, 대기병 트랩이라 할 수 있는 철질려(鐵蒺藜)들을 던진다. 그 이후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발리스타들과 석궁을 이용하여 적들에게 무차별 타격을 가한다.

아마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두두두두!

미악하게 땅바닥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레일 남작은 귀를 바닥에 댔다.

"온다. 준비를 하라 일러라."

"적들이 곧 온다!"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철질려들을 준비했다.

기병들이 이걸 밟으면 꺼꾸러질 것이다. 그때 화살을 퍼붓는다.

조금이라도 경로가 틀어지면 적들이 매복되어 있는 병력을 휩쓸 수도 있는 전략이다.

바바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말했었다.

[남작! 나만 믿어! 경로가 틀어지는 일은 없어!]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황제가 명령한 일이다.

전장에서 군령은 지엄한 법.

상대방이 마음에 조금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군령을 어기면 바로 모가지가 떨어진다.

제후들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숙청을 원한다면 전쟁 중에 처리하는 것이 가장 합법적이고 쉬운 일이었으므로.

지진은 더욱 가까워졌다.

호루루루루-

곧 호루루 부족 특유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매복된 병력 앞을 지나쳐 간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길이 생겼다.

"뿌려라!"

곧 있으면 적들도 이곳을 지나칠 것이다.

제국의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교육된 정병들.

제국 내에서 병사들이 갖는 위상은 꽤 높았다. 나름대로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하나가 예비 기사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실제로 제국 백인장 정도 되면 타국의 기사 정도는 찜 쪄 먹는다고 봐야 한다.

촤악!

철질려들이 뿌려졌다.

발리스타는 이미 장전되어 있었고 석궁들도 마찬가지다.

철컥.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악에 받친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새끼들! 포를 떠서 개 먹이로 던져 주마!"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아니, 남작님.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걸까요."

"호루루 준남작을 봐라. 사람 열 받게 할 상이잖아."

남작과 부관의 잡담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 적들이 철질려들을 밟고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히이이잉!

"끄아아악!"

"아아아악!"

"후퇴! 퇴각한다! 함정이다!"

"지금! 쏴라!"

핑핑핑핑!

석궁들이 무차별적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공성용 발리스타들이 쏘아지면서 통째로 몇 마리의 말들이 꿰어 날아갔다.

지옥도의 시작이다.

바바 준남작은 작전에 성공했음을 알았다.

맹렬하게 쫓아오던 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뒤로 펼쳐지는 지옥의 광경.

적들이 무너지고 화살이 쏟아부어지면서 아주 난장판이 되었다.

바바가 씩 웃었다.

"포위 섬멸이다! 화살만 쏴! 아군이 다칠 정도의 거리는 배제해라!"

"예!"

바바는 곧바로 적들을 에워싸며 포위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들은 여기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화살을 쏴 대자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바바는 레일 남작과 마주했다.

"수고!"

"큭! 상관에게 말을 그따위로...."

"응? 수고했다고."

"아휴, 말을 말아야지."

"여기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알겠다. 우리는 도망가는 놈들을 사냥하지."

완벽한 포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들의 전멸은 기정사실이었지만, 그 틈을 뚫고 도망가는 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다만 죄다 진영이 무너져 말을 타고 도주할 수는 없을 테니, 레일 남작은 달아나려 하는 자들을 포로로 잡거나 죽이는 임무를 맡는 것이다.

이 역시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다.

레일 남작은 갈대밭으로 넓게 퍼졌고, 바바는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이놈들! 이 씹어 먹을 새끼들아! 말에서 내려라!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응, 싫어."

피융!

바바는 적 지휘관에게 화살을 날려 머리에 꽂아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국군 출신 기병들이 혀를 내둘렀다.

"우리 이번에 사망자가 있나?"

"그, 글쎄? 아마도 재수 없게 낙마한 몇 명 정도?"

호루루 부족 출신은 한 명도 낙마하지 않았다.

괴물 같은 놈들.

더욱이 바바 준남작은 병사 하나하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가능하면 회전을 피하고 철저하게 화살로 짓뭉갠다.

승기가 완전히 잡힌 이후에만 돌격하여 적들을 끝장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마저도 아니었다.

바닥에는 철질려가 깔려 있었으므로 그걸 밟으면 아군도 타격을 입는다. 그저 멀리서 원거리 공격만 감행했다.

이 작전을 위하여 개인당 석궁 화살 50발씩을 보급 받았으니, 지극히 치밀한 한 수였다.

타로스는 언덕 위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초감각을 일으켜 보면 어떤 식으로 판도가 돌아가는지, 그리고 사람이 움직이는 것까지는 보일 정도는 됐다.

타로스의 눈에 적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식별된다.

"게거품을 물고 있군."

"허, 참.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요?"

"온갖 비속적인 욕이 난무했을 거라 생각된다."

"크, 크흠. 대충 소문은 들었습니다."

지난 3일 동안 바바 준남작은 끈질기게 적들을 괴롭혔다.

2시간에 한 번씩 꾸준하게 공격하면서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욕의 수준이 차마 보고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대충은 예상이 됐다.

"하나만 말해 보거라."

"그게.... 허험, 이미 왕국군은 인간의 자식들이 아니라 개 배 속에서 태어난 놈들이랍니다."

"허어, 간단하게 하나만 나열했음에도 복장이 뒤집힐 말이로군."

"실제로는 더 비속적인...."

리카드로 후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눈깔이 뒤집힌 적들이 갈대밭으로 들어섰고, 그대로 섬멸되었다.

이 와중에도 적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저들을 잡아 항병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전향하지는 않을 것 같군."

"그거야.... 지금은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소 마음이 가라앉을 겁니다. 제국이 왕국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게 되면."

"생각이 바뀔 거라 이건가."

"호루루 준남작이 적일 때는 아주 얄밉지만, 아군이 된다고 생각하면 든든하지요."

"흠, 그런가?"

"드, 든든하지 않으십니까?"

"생각해 보니 든든한 것 같기도...."

"...."

하여간 특이한 놈이 아닐 수 없다고 타로스는 생각했다.

호루루 부족을 설정한 직원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적들은 처참하게 박살 났다.

몇 시간이 흐르자 수천에 이르는 적들만 생포하였고 나머지는 몰살되었다.

실로 엄청난 공이 아닐 수 없었다.

줄줄이 포로들이 끌려오자 제국군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호루루루루!"

이미 바바에게 중독된 병사들이 반쯤은 장난으로 호루루 소리를 따라서 부르기도 한다.

그야말로 호루루 광풍.

바바는 한껏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으하하! 내가 이 정도야!"

타로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마중을 나갔다.

바바와 레일 남작이 무릎을 꿇었다.

"명령, 완수했슴다!"

"폐하! 적들을 섬멸하였사옵니다!"

"고생했다. 경들의 공은 추후 공식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니 서기관들은 이를 기록하라."

"예!"

"적들의 기병들을 모조리 섬멸하였으니, 이제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3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다."

#제65화. 어둠 숲의 사람들(1)

율리우스 왕국 진영.

일주일 전, 주력 기병이 전멸한 이후 왕국군의 상황은 극도로 나빠졌다.

이만한 대전쟁의 상황에서는 기병의 부재가 치명타로 작용할 수 있었다.

기동력을 상실하였다는 것.

율리우스 왕국군은 호루루 준남작이 이끄는 기병 부대에 의해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있었고, 조금이라도 건들면 터질 것 같은 불만들이 팽배했다.

왕국군의 규모는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폐하, 보고 드립니다."

"이제 보고를 받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황공하옵니다."

발렌 국왕의 말에 레비안 공작은 황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참모 총장 직위를 가지고 있는 레비안 공작은 괴물과 같은 제국의 저력을 맛봤다.

병사 하나하나가 정예하였으며, 어떻게 해서든 공적을 쌓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논공행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그에 비하여 왕국은 제대로 된 공이라는 것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으니 사기는 뚝뚝 떨어지고 신경질만 늘었다.

발렌 국왕의 얼굴은 붉어져 있다.

스트레스에 이명까지 들렸고, 매일 어의가 찾아와 약을 처방해야만 했다.

"이제 왕국군의 규모가 25만 이하로 줄었사옵니다."

"빌어먹을!"

"그에 비하여 적들의 피해는 1만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첩보에 의하면 제국의 최정예 기병대는 도착 전이라고 하옵니다."

"뭣이!?"

발렌의 눈동자가 좌우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아직 제국의 저력이 남아 있다?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그들은 사람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고 있는 호루루 준남작의 전략 전술에 모두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전략은 제국군 머리에서 나왔을 수 있었지만, 준남작의 기병 운용은 신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천부적인 재능까지.

준남작의 말에 의하면 율리우스 왕국의 태생 자체가 개의 혈통이다.

국왕들은 대대로 동물의 배 속에서 태어난 것은 물론이고, 악마들에게 세례를 받아 밤에는 끔찍한 괴물로 변신한다.

그 밖에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끊임없이 지어 냈고, 왕국군 병사들은 노이로제에 걸렸다.

그런 기병들에 의하여 야금야금 병력이 갉아 먹혀 이제는 40만에 이르던 제국군이 25만 이하로 형편없이 쪼그라든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 최정예 기병이 도착도 전이라니.

객관적으로 봐도 지극히 왕국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는 법.

"그러나 실질적인 타격은 적습니다. 왕국 정예 병력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니 말입니다. 대다수의 사상자는 노예병이나 징집병들이옵니다."

"마지막 한 방은 남아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않아도 전략을 준비 중에 있사옵니다."

"어떤 전략인가? 만약 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참모 총장은 그 목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차피 전쟁에서 패하면 왕족과 고위 귀족들은 남아날 수 없다.

제국 황제의 성격으로 봐서는 죄다 숙청해 버릴 것이 뻔했다.

평생 도망자로 살 것이 아니라면 깔끔하게 죽는 편이 낫다.

죽을 각오를 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진다.

공작은 담담하게 전략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결국 전면전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포위 전술에 번번이 실패하였으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화공까지 준비를 마쳤습니다."

"화공이라?"

그제야 국왕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번 전술은 들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다.

모든 것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는 전략.

왕국군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기회였다.

개전 한 달째.

지난 한 달 동안 제국은 왕국군의 병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한 방에 적들을 다 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타로스는 최대한 제국군을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분명히 타로스는 선포했었다.

대전쟁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물론 대전쟁 직후 피폐된 재정을 복원하고 다시 물자를 준비하며 육체의 강화와 여러 가지 제국 내 문제들을 처리해야겠지만, 병사들을 뽑고 훈련시키는 것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일이다.

제국군 전체는 강병이다.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이나 무학을 수련한 병사들이 즐비했다.

신병들은 절대 선임 병사들을 쫓아갈 수 없었기에 최대한 병력을 보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루루 준남작을 적극 기용한 결과, 적들의 사기는 꺾이다 못해 바닥이었고 병력도 거의 반타작이 났다.

승기는 제국에 완전히 넘어온 상황.

타로스는 리카드로 후작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적들의 후방에서 대규모 물자 이동이 포착되었사옵니다."

"물자 이동이라?"

수상한 일이다.

바바가 적들의 물자 보급 기지를 불태우고 보급 창고를 습격하는 등 분투하고 있었지만, 병력이 줄어든 만큼이나 물자의 소모량도 줄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물자가 들어온다.

한 달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대전쟁의 경우에는 최소한 6개월은 잡아야 했다.

제국군조차 3개월 이상의 물자를 비축해 왔다. 나머지는 현지에서 보급할 작정으로 말이다.

지금 시기에 대규모 물자 보급이 있다?

"물자는 죄다 오크통이었사옵니다. 검게 칠해져 있었으며 척후의 말에 따르면 역청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고 합니다."

"화공인가."

"그렇게 추정되옵니다."

"하는 짓이 빤한 놈들이군."

타로스가 무심하게 지도를 보며 말했다.

전략부가 합심하여 낸 결론.

적들이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으며, 역 포위망을 구성하여 화공을 퍼부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타로스도 그 의견이 합당하다고 봤다.

적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제국군 관료들의 능력이 꽤나 탁월하여 그런 전략 전술을 사전에 간파해 버렸다.

"마지막 한 수는 준비를 하고 있는가. 준비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최소한 2주에서 3주 정도입니다."

"우리들의 숫자가 꽤 많기 때문이겠지."

"예, 그리고 그동안 저희 제국군은 끊임없이 적들을 타격하여 그 숫자를 20만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말입니다."

"저번에 적들에게 빼앗은 군마들이 있지 않나?"

"많이 남아 있사옵니다."

"병사들 중에서 기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추려 임시 기병대를 편성하라."

"예!"

"그 안에 백마 기병이 오면 금상첨화일 것인데. 그들에게 연락은 없나?"

"최후까지 도주하는 적들을 곧 처단할 것이라고 하옵니다."

"좋아. 라무스 백작이 잘해 주었군."

타로스는 지도에 표기된 어둠 숲을 응시한다.

지금쯤 렌족은 마지막 숨을 뱉어 내고 있을 것이다.

검은 숲. 마경의 경계.

지금껏 20만에 달하는 렌족은 대부분 죽거나 노예로 잡혀갔다.

살아남은 부족은 기껏해야 2천이었다.

예전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을 지경이다.

족장은 첫 전투에서 전사했고, 주력 부대는 모조리 격파됐다.

겨우 소규모 부대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도저히 적들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제국 최강의 기병대라 불리는 백마 기병대.

그들을 이끄는 라무스 백작의 이름을 렌족이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괴물들에게 2만의 병력이 주어졌다.

백마 기병대는 어둠 숲을 이 잡듯이 뒤졌고, 렌족으로 추정되는 자들이라면 모조리 쳐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렌족은 마경의 경계까지 이르렀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입니다!"

"그럼 그냥 여기서 죽자는 뜻이냐!?"

"저긴 마경입니다! 금역이 괜히 금역이겠습니까?"

새롭게 부족장으로 선출된 젊은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장로들은 마경으로 들어가자고 하였고,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어둠 숲 경계에서 버텨야 된다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늙은 장로들은 갑갑함에 가슴을 쳤다.

"저들은 지옥의 악마들이다! 우리를 끝까지 쫓아올 터!"

"그렇다고 자살을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겨우 2천 명만 남은 부족 내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장로 울루스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캠프를 옮겨 다녔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백마 기병대가 타격을 하여 죄다 캠프를 불태웠다.

이제 그들은 나뭇잎을 깔고 흙바닥 위에서 잠을 자는 처지였다.

두두두두!

"으아아! 적들입니다! 백마들이 옵니다!"

"이런 악마들!"

"꺄아아악!"

사람들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다.

대장로 울루스는 과거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제국의 이빨은 빠졌으며 율리우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거나 극심한 타격을 입을 거라고 봤다.

그들을 약탈한다고 해도 제국이 반격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제국은 분열을 앞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제국은 약탈에 분노하였으며 전쟁 중에도 자신들을 죽이기 위하여 최정예 기병대를 보냈다.

이 악마들은 복수를 위하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 맹목적인 복수심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지옥의 악마들이 지상을 뚫고 올라왔다.

"렌족 놈들이다! 모두 죽여라!"

"복수를 위하여!"

"백성들의 핏값을 받아 내라!"

"와아아아!"

순식간에 백마들이 달려와 그들을 짓밟았다.

퍼억!

푸확!

병사들이 땅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들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확인 사살이었다.

가끔 죽은 척을 하고 있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절명했다.

라무스 백작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끝까지 적들을 추격했다. 그리고 보이는 족족 죄다 죽여 버렸다.

죽인 자들의 목을 베어 나무창에 꽂아 효수하고, 나무에 사체들을 매달아 놓기도 했다.

검은 숲에는 렌족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소규모 부족 단위의 야만인들도 있었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유목민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도 생각되었으나 제국의 백성들이 죽어 나가지 않으려면 본보기는 필수였다.

자비란 없다는 것을 봐야만 제국을 넘보는 자들이 없을 테니까.

라무스 백작은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복수는 완료된 것으로 보였다.

별동대로 나갔던 자들이 몇몇 부족원들의 목을 잘라 왔다.

"도망친 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고생했다."

"충!"

렌족의 박멸.

그는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오랜 강행군으로 지쳐 있는 마법사가 간신히 통신 마법을 걸었다.

통신구 너머로 황제가 보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의 모습을 본 백작은 물론이고 기사들, 병사들까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라무스 백작, 고생했다.

"아니옵니다! 신은 그저 제국의 복수를 하였을 뿐. 이는 신의 사명이기도 하였사옵니다."

-복수는 끝났는가.

"예! 임무 완수하였사옵니다!"

-최대한 빠르게 복귀하라. 현재 전쟁은 막바지다. 적들은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짐은 경이 공을 세우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고생한 제군들도 마찬가지다.

"존명!"

역시 황제다.

전쟁은 빠르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벌써 율리우스 왕국군이 무너지고 있을 줄이야.

라무스가 외쳤다.

"최대한 빠르게 복귀한다!"

"히익!"

통신 마법사의 얼굴이 검게 죽어 갔다.

#제66화. 어둠 숲의 사람들(2)

두두두두!

2만에 달하는 백마들이 어둠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둠 숲의 악명은 조금 과장된 면이 있었다.

제국은 어둠 숲에 렌족만 살아가고 있었으며, 소수의 부족만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심심치 않게 사람들이 모여 부족을 이루고 있었고, 심지어는 유목민도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숲을 벌목하여 빛을 만들고 개간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길이 있기 마련.

어둠 숲은 길이 조금 복잡하였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레인저들이 지도를 만들었고 지금 상황에서는 매우 유용했다.

진군 3일째.

라무스 백작에게 척후병이 보고를 해 왔다.

"각하! 3km 전방에 란 부족의 족장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란 부족이라."

"어둠 숲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은 강렬한 빛을 뿌리며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최정예 기병들이라고 해도 밤에는 쉬어 가야 하는 법.

빨리 와서 공을 세우라는 황제의 말이 걸렸으나 그래도 병력은 온존하게 보전해야 한다. 그것이 귀족의 의무였다.

"쉬어 간다."

"존명!"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움막 같은 집에서 숲을 개간하여 살아가는 정착 부족이다.

그 숫자는 기껏해야 수천.

라무스 백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숫자였다.

제국군이 공터로 들어오자 부족장을 비롯하여 장로들과 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제국, 만세!"

라무스 백작이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젊은 족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렌족을 이끌고 있는 족장 태진이다. 아니, 입니다."

어설픈 제국어가 흘러나왔다.

라무스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내심 놀랐다.

이놈들이 제국의 언어를 한다?

그건 제국에서 목숨을 걸고 어둠 숲과 교역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마도 돈에 혈안이 된 상인들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제국의 제후 라무스다."

"백마 기병대의 명성, 익히 들어왔다. 입니다."

"그런가."

"특히나, 최근에는 그 위세가 대단하다입니다. 저희가 당신을 위해 한 끼 대답하겠다입니다."

"가지."

그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명하고 그들의 초대에 따랐다.

나름대로 깔끔한 움막과 그 안에는 호피 가죽이 깔려 있었다.

렌족을 지배하는 자, 태진의 막사다.

주변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통돼지가 바비큐로 나왔다.

그들은 과실주를 함께 내왔는데, 전혀 해할 의사가 없는 듯 먼저 과실주를 마셨다.

"아무 이상, 없다입니다."

"잘 먹도록 하지."

식사가 시작되었다.

라무스 백작은 이들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꽤 만족스러운 반응이다.

최초의 목적은 렌족의 섬멸이었으나 검은 숲을 종횡무진하면서 여러 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제국의 백성을 약탈하고 해한 자들은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고 말겠다는 집념을 보여 주었다.

이는 황제의 의지를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족장."

"네!"

태진이 놀라서 소리쳤다.

라무스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너희들은 제국의 상단과 교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상품들을 교역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뿐."

"주로 동물 가죽이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쌀이나 여러 생필품을 수입한다."

"그랬나."

라무스는 곳곳에 걸려 있는 보석들을 살폈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금을 비롯하여 다이아몬드까지.

저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다닌다.

"이것들은 뭔가?"

"장식. 이다입니다."

"장식? 가치가 꽤 나가는 물건들인데."

"제국에서도 좋아한다입니다. 검은 숲, 이런 것들 많다."

"오호, 그래?"

"원한다면 공식 교역을 통해 줄 수 있다입니다."

교역을 하는 것이 좋은가, 제국이 통째로 접수하는 것이 좋은가.

그건 황제가 결정할 일이다.

다만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싼값에 공급받을 수 있다면 교역이 나을 수도 있다. 검은 숲까지 제국민들을 보내기에는 여의치가 않으니. 죄수와 노예라면 모를까.'

나름대로 그는 생각을 마쳤다.

어떤 방식이든 제국에는 이익이다.

그건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국이 움직이면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너희들은 야만인들로 불린다. 그건 알고 있나?"

"알고 있다입니다."

"제국에 귀부할 생각은 없나?"

"제국에서 받아 줄까?"

"폐하께 상신해 보겠다."

"그, 그래 준다면 좋을 것 같다! 입니다!"

"자자, 기쁜 날이군. 들지."

"감사입니다!"

라무스 백작은 제국의 달라진 위상을 체감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들은 검은 숲을 뒤덮고 있는 소문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황제가 용병왕을 죽였고, 왕국군은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인들은 오갔고, 그들은 어둠 숲 밖의 소식을 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제국군의 강력함을 다시금 각인시켰고, 대전쟁에서 강국인 율리우스를 박살 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니 이들은 제국군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기병을 파견하여 복수했는데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스르면 분노한 황제가 어둠 숲 전체를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여겼다.

라무스 백작은 그들의 생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어둠 숲 주민들이 제국에 두려움을 가지면 그만큼 제국에는 이익이었으니까.

다음 날 아침.

황제에게 내려진 명령은 복귀를 서두르라는 것이었다.

그 내심에는 공을 세우라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오지에서 고생을 하였으니 마무리에서라도 공을 세우라는 것.

병사들 사이에서도 공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스스로 회군할 준비를 했다.

라무스도 마찬가지다.

마치 갓 입대한 신병처럼 새벽에 눈이 떠졌고, 해가 뜨기도 전부터 분주한 병사들 덕분에 갑옷을 챙겨 입었다.

여명이 어슴푸레 깔리기 시작하자 군대는 완벽하게 도열했다.

"총원 2만 123명, 전원 준비를 마쳤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라무스 백작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출발...."

"각하!"

저 멀리서 태진이 웬 궤짝을 들고 왔다.

쿵!

그러곤 궤짝을 바닥에 내려놨다.

"이게 무엇인가."

"황제께, 진상!"

"진상품이라는 건가."

"응!"

끼이익!

궤짝이 열렸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류들이 들어 있었는데, 비교적 가치가 없는 옥석들도 들어 있었다.

상당한 진상품이었으며 일종의 뇌물이기도 했다.

"우리, 제국으로 가고 싶다!"

"폐하께 진상하겠다."

"부탁한다입니다!"

"나는 제국의 제후이며 반드시 약속은 지킨다."

"고맙다입니다!"

"출발한다!"

두두두두!

곧바로 병사들이 행군을 시작했다.

백마 기병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진군이었다.

보석은 기사들이 나누어 짊어졌고, 그들은 빠른 속도로 어둠 숲을 주파했다.

해가 중천에 걸린 오후.

2시까지 진격한 군대는 어둠 숲의 한복판에서 자리 잡고 휴식을 취했다.

중간에 부족들이 나와서 가축을 제공했고, 덕분에 병사들은 쉬는 동안 손질된 고기를 구웠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라무스 백작도 고기를 한 움큼 뜯었다.

아무래도 군인이다 보니 엄청나게 많이 먹었고, 순식간에 동물의 뼈들이 수북하게 쌓여 갔다.

식사를 마치고 입에 묻은 기름을 닦아 낼 무렵이었다.

"각하, 웬 상인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상인이?"

그렇지 않아도 궁금함이 치솟던 그였다.

어둠 숲에는 도대체 어떤 상인들이 다니는 걸까.

상인이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그는 잠시 군대가 정돈되는 동안 만나 보기로 했다.

"데려와라."

차가 끓는 동안 웬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다가왔다.

상단은 군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라무스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유창한 제국어다.

눈앞의 노인은 제국의 상인이라는 뜻이다.

"과연 누가 어둠 숲으로 목숨을 걸고 넘어오나 싶었더니 평범한 행색이군."

"송구한 일입니다."

"그래, 내게 왔다는 것은 떳떳하게 활동하고 있는 상인이라는 말일 터."

"물론입니다. 제대로 세금을 신고하고 상행을 하고 있사옵니다."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금번 제국군의 위세가 진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곧 전쟁은 끝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왕국 주력군이 곧 격파될 것이다. 상인이니 잘 알고 있겠지."

"예! 적들은 반으로 줄었다고. 그에 비해 제국의 피해는 미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인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제국은 군사 강국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국이 40만 대군을 일으켰을 때부터 이미 율리우스 왕국은 저런 꼴이 될 것이라고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상인이 제국인이었기에 통하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내게 할 말은? 보다시피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회군 중이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도열을 마친 상태였다.

시간을 아끼려면 10분 안에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정식으로 어둠 숲과 교역로를 열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식 교역로라?"

"역참을 만들고 어둠 숲 근방에 작은 상설 시장을 열어 주신다면 제국의 이익이 클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자네들이 상행을 하려면 어둠 숲 내부도 어느 정도 청소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기는 한다만."

"어둠 숲 내부에 작은 도시를 만들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기는 합니다. 어둠 숲은 잠재적인 가치가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부탁은 그것으로 끝인가?"

"또한 공식 자격을 부여해 주신다면...."

"알겠다."

"예!?"

"알겠다고 했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폐하께 상신해 보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좀 걸릴 터. 전쟁이 끝나고 제국은 재정비에 들어갈 것이다. 국토가 50%나 넓어지니 갈음할 시간이 필요하지. 인지하는가?"

"예! 하오나 그만큼 노예가 많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이용한다면 손쉽게 축조가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시세를 보는 눈이 꽤 있는데."

"감사합니다."

노예의 대량 양산.

전쟁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다.

사노비도 있겠지만 공노비들도 굉장히 늘어날 것이다.

노동력이 확충된다면 어둠 숲을 일부 개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인이기에 상인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노인, 자네의 이름은?"

"갈리온. 그저 상인 갈리온이라고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제국에서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상인 갈리온. 기억하겠다."

라무스는 그렇게 돌아섰다.

군대는 빠르게 질주하여 어둠 숲을 빠져나왔다.

그는 잠시 어둠 숲을 응시했다.

그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

앞으로 라무스가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황제가 관심을 갖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국 바로 북서쪽에 엄청난 잠재 가치를 가진 어둠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라면 아마 이번 일에 큰 관심을 가질 거라고 여겼다.

#제67화. 왕국의 여명(1)

5월 중순.

왕국군은 20만 규모로 쪼그라들었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제국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제국을 약탈하였던 적들을 토벌한 라무스 백작이 복귀했다.

완전한 복수를 완성한 라무스 백작을 제국군은 열렬하게 환호했다.

"와아아아!"

타로스는 영웅의 귀환을 마중 나갔다.

백마를 타고 진영으로 당당하게 복귀하고 있는 라무스 백작.

그 뒤로 굉장한 숫자의 백마들이 보인다.

보통 기병들이라면 최소한 2~3마리의 말을 이끈다.

기동을 할 때에도 그렇고, 전쟁 중에도 예비 마들이 있어야 하기에 마구간은 따로 말을 관리하는 직책까지 있을 정도다.

사방을 하얗게 채우고 있는 백마들을 이끈 라무스 백작은 진정한 제국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황제 폐하 만세! 폐하의 명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라무스 백작이 말하는 '완수'란 렌족을 완전히 평정하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몇몇 정도는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감히 복수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전멸하였을 것이다.

제후에게 명령의 완수란 그런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 연회까지는 무리였지만, 간단하게 술과 고기를 곁들여 환영 파티를 벌였다.

지금까지 고생을 많이 했기에, 백작은 꽤 초췌해 보였다.

새끼 돼지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어 치워 버리는 먹성에 제후들이 혀를 내두를 무렵.

황제의 배려로 식사부터 마친 백작이 의관을 정제하고 보고를 올렸다.

"폐하! 신이 본 바로, 검은 숲은 자원의 보고였습니다."

"자원의 보고라?"

"각종 천연자원들이 노지에 널려 있었고, 생각보다 많은 자들이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사옵니다."

"그랬나."

타로스가 알고 있을 턱이 없다.

검은 숲에 대한 설정은 전적으로 직원들에게 하달되었고, 이곳에 떨어지고 난 이후에도 검은 숲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검은 숲에서 렌족이 쳐들어올 일도 없었다.

그러니 검은 숲에 대해서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라무스 백작의 입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상인들이 검은 숲을 개발하거나 최소한 그들과 교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편이었사옵니다."

"상인들이 목숨을 건 상행을 한 모양이로군."

"대사막까지 건너는 족속들입니다."

"그도 그렇군."

타로스가 이 세계에 넘어온 이후에 본 것은 돈을 향한 인간의 집념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검은 숲은 양호한 편이다.

온갖 위험들이 도사리는 대사막을 넘는 상인까지 존재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실크 로드 개척을 위하여 제국에서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지뢰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것이 진상품입니다."

백마 기병대의 기사들이 자루들을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후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천연자원의 범위에는 보석들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몇 부족들이 귀부를 청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나쁘지 않은데."

"최소한 어둠 숲 근방에 상설 시장을, 최선으로는 어둠 숲 일부를 개발하여 축조하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상당한 이익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로군."

"맞습니다. 어둠 숲에 영지를 만들게 된다면 많은 부족들이 귀부해 올 것으로 보입니다."

톡. 톡. 톡.

타로스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전쟁 중이었지만, 곧 있으면 적들의 주력이 격파된다. 그리된다면 바로 영토 병합에 들어가고 다음 전쟁을 위한 대비를 한다.

어둠 숲에서 상당한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니, 제국 재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검은 숲 일부를 개발하여 영지로 삼는다."

"오오!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 일을 경에게 맡겨도 되겠나?"

"예!?"

"경은 어둠 숲 전체를 헤집고 다녔다. 경만큼이나 검은 숲에 잘 아는 자도 드물 터. 공을 세운 자에게는 그만한 상을 내려야 하는 법이다."

쿵!

라무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댔다.

설마하니 어둠 숲 개발을 맡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발을 하고 나면 얻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비록 황실에서 관여하여 지분을 나누기야 하겠지만, 그것은 황실에게 보이는 당연한 성의였다.

제국의 강역은 모두 황제의 것이다.

어둠 숲도 지도상으로는 제국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다만 워낙에 후미진 곳이라 그 가치를 모르고 있었을 뿐.

"그 일은 전쟁이 끝난 후에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지. 지금은 눈앞의 적을 격파하는 것이 먼저다."

"물론이옵니다."

"적들은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고 있다. 예상되는 전략으로는 화공계가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역청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지."

"화공이 확실합니다."

"이에 우리도 대응하는 전략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이중 포위 섬멸이지."

왕국에서 계획을 세우는 만큼, 제국의 전략가들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다.

전쟁이란 경제력, 병력, 장수들의 무용과 지략을 겨루는 종합적인 능력 평가의 장이다.

비록 제후들이 무력에 치중되어 있어 지장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제국에는 전략부라는 곳이 따로 존재했다.

마법사들과 뛰어난 행정가들이 전략을 논하는 부서다.

전략부에서는 철저하게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대전략을 완성하였다.

한 번에 적들을 끝장낼 수 있는 계책.

그것이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찬 바람에 그 머리칼을 감추게 되는 계절.

왕국군은 대대적인 움직임을 감행했다.

20만에 이르는 대군이 왕국의 운명을 건 기동을 하기 전이었다.

적들을 포위하고 화공을 퍼붓는다는 계책.

운이 좋아 바람의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적들은 순식간에 타오를 것이다.

이를 위하여 공성 병기를 제작하여 해체해 두었으며, 수많은 발리스타들이 제작되었다.

투석기와 발리스타 등으로 역청을 날린다. 그리고 화공을 시도한다.

모든 것은 포위가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칸스 성채 사령부.

성채 아래로 수많은 눈들이 발렌 국왕에게 향하고 있었다.

발렌 국왕은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다. 바람도 적절하게 불고 있었고, 시기만 잘 맞아떨어진다면 단숨에 역전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운명을 건 승부.

그 누구도 오늘 전투에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제군들이여!"

발렌이 입을 열었다.

사기는 바닥을 쳤고, 한 달 보름을 시달렸기에 다들 피로에 지쳐 있었다.

사령부에서 뭔가를 열심히 준비했고, 보급 물자들도 속속 도착했다.

뭔가 큰 한 방을 터뜨리지 않으면 왕국은 오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율리우스 왕국의 500년 역사의 분기점에 섰다. 이대로 왕국의 역사를 끝낼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 왕국을 구해 낸 영웅으로 평가받을 것인가. 그 모든 평가들이 제군들의 손에 달렸다!"

"...."

발렌이 목청 터지게 연설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는 좀처럼 끌어 올리지 못했다.

국왕은 꽤 오랜만에 당혹스러워했다.

병사들이 환호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런 싸늘한 반응이라니.

발렌이 이를 악물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짐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다! 적들의 머리를 가져오라! 포상할 것인즉,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금화를 한 아름 안고 돌아가리라."

"와아아아."

병사들은 조금 혹했지만 그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어떤 준비를 한다고 해도 역전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출진한다!"

높게 솟은 사령탑.

바람이 조금 거세게 불고 있었지만, 언덕에 세워진 사령탑에서는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늘의 전투는 무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술을 사용한 전략.

제국군은 일부러 언덕에 걸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덕 뒤는 적들이 확인할 수 없을 것이고, 20만에 달하는 기병은 이미 우회를 하고 있었다.

둥! 둥! 둥!

"적들이 진격합니다!"

"신호를 보내라."

펄럭!

청기가 올라간다.

제국군은 빠르게 퇴각을 시작했다. 행여나 왕국에 꼬리가 잡힐까 재빠르게 움직였다.

언덕 너머로 제국군이 사라져 간다.

왕국군은 조금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나팔을 불어 더욱 빠르게 진격했다.

언덕 너머로, 제국군은 넓게 포진하기 시작했다.

포위를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자 적들은 더욱 넓게 포진했다. 어떻게 해서든 제국을 포위해 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건 실책이었다.

적들에게는 기병이 없었고, 제국에는 기병이 있었다.

그것도 증강을 하여 20만이나 된다.

보병 20만에 기병 20만.

이 기형적인 구조가 가능한 것은 보병도 승마가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말 위에서 잘 싸울 필요는 없다. 기동을 하여 적들을 압박하기만 해도 되니까.

퉁! 퉁퉁!

어느 정도 진격한 적들이 기름 주머니들을 날렸다.

그때,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다.

적들은 서에서 동으로 쳐들어오고 있었는데 서풍이 불었다.

그러자 기름 주머니들이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처박혔다.

"성공입니다! 연환계가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마법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마법을 구현했다.

리카드로와 그랑카인.

두 현자들은 양측에서 윈드 스톰을 시전했고, 두 마법진이 강렬하게 빛나며 서풍을 만들어 냈다.

당혹스러워하는 적들을 그냥 두고 제국군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불화살들이 떨어졌다.

화르르륵!

제국군과 왕국군을 기점으로 긴 불이 일어났다.

인명 피해는 아직 없었지만, 적들은 불길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호루루루-

두두두두!

바바 준남작이 이끄는 기병대와 라무스 백작이 이끄는 기병대가 적들을 역 포위하였다.

뒤로 물러난 보병들이 석궁을 들고 쏘았다.

핑핑핑핑!

하늘로 치솟는 화살.

기병들은 본격적으로 적들을 학살했고, 화살까지 날아와 틀어박히는 통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성공입니다!"

참모부 관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비록 이들을 이끄는 리카드로 후작은 마법사단에 동원됐지만 이미 사전에 다 작전을 숙지하고 움직인 일이다.

생각보다 윈드 스톰의 범위가 넓고 강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적들의 패인이라면 아군의 마법사단을 등한시한 것.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효과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기병의 압도적인 무력에 적들은 불구덩이로 밀려났다.

뒤에서는 창병들이 찔러 대고 있는 중이었다.

타로스는 검을 뽑았다.

"마무리할 때가 됐다."

#제68화. 왕국의 여명(2)

"끄악!"

"아아아악!"

비명 소리만 메아리치는 전장.

발렌은 절망했다.

즉위 3년 차.

젊음과 열정으로 일하였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제국을 무너뜨리고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즈음 제국에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태업을 일삼던 황제가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다고.

율리우스 왕국은 그때부터 영혼까지 끌어모아 전쟁을 준비했다.

무너지는 제국에서는 무려 40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한다 하였고, 최소한 숫자는 맞춰야 했기에 왕국의 모든 것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시작된 전쟁.

그의 이복동생인 용병왕 아론이 참전하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으나 믿었던 칼은 단숨에 무너졌다.

그때부터 지옥의 나날이었다.

호루루 준남작의 끈질긴 도발에 넘어가 주력 기병을 잃어버린 것이 패인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지속적으로 병력이 줄었으며, 결국 그들은 극단적인 전략을 앞세웠다.

적들을 포위하고 화공계를 사용하는 것.

작전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국에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것도 대현자가 둘이나 되었고 각각 황실 마법사단과 구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윈드 스톰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포위 작전에는 실패했고, 역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호루루루-

호루루 준남작이 이끄는 기병들과 제국 최강의 백마 기병대의 합동 공격.

하늘에서는 화살이 떨어지고 전방으로는 전진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불길을 사그라지고 있었으나 후방에는 제국군이 장창을 앞세워 밀어내고 있었다.

속절없이 병력이 줄어 갔다.

"아아!"

발렌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정, 왕국의 여명이 보인다.

"활로를 찾아야 한다!"

"폐하! 전장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우선 칸스 성채로 물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잔존 병력을 수습하여 농성해야 합니다!"

레비안 공작이 외쳤다.

"빌어먹을!"

"폐하! 이곳 전장은 신이 수습해 보겠나이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고 종묘사직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발렌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농성을 하다 보면 황제가 강화를 추진할지도 모른다.

왕국의 명맥만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심기일전하여 제국을 정벌할 수 있으리라.

"호위 기사들은 짐을 따른다!"

"예!"

"활로를 뚫어라!"

레비안 공작이 검을 잡고 소리쳤다.

국왕이 죽으면 왕국은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다.

수도에 왕족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국왕을 잃은 충격은 좀처럼 가시지 않을 것이 뻔했다.

두두두두!

"폐하! 활로가 열렸습니다!"

신기하게도 제국군의 병력이 갈라지며 활로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곳을 향하여 황금빛 갑주를 입은 기사가 고속 이동을 해 오고 있었다. 빛보다 빠르게.

도저히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다.

이제야 국왕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활로가 아닌 사로(死路)라는 것을.

"어디를 도주하느냐!"

"화, 황제를 막아라!"

충성심으로 뭉친 호위 기사들이 뛰쳐나갔다.

전방으로 빛무리가 뿌려진다.

오색찬란한, 그러나 죽음을 확실하게 담고 있는 황제의 검술.

쿠아아앙!

단숨에 수십 미터 방위가 박살 나며 기사들이 육편 조각으로 찢어진다.

그제야 제후들은 알게 되었다.

황제가 지금까지 유예 기한을 두었던 것은 왕국의 사정을 고려해서도, 제국이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제국은 완벽한 승리를 원하였을 뿐이다.

황제가 대륙 일통을 선언하였기에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려 했다.

조금씩 병력을 갉아먹었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황제가 순식간에 국왕의 눈앞에 나타났다.

"으아, 으으으."

발렌의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도주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하지만, 지박령처럼 그 자리에 꽉 붙어 버린 것이다.

호위 기사들이 완전히 무너지자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은 좀처럼 황제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접근하는 순간 죽는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여 아무도 수십 미터 반경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저벅저벅.

황제가 고속 이동을 멈추고 여유롭게 다가왔다.

투구 안쪽에 드러나 있는 얼굴은 무저갱 그 자체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척.

황제가 검을 겨누었다.

"왕이여,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최종 선고다.

발렌은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전쟁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제국이라는 벽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대륙 일통, 정말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했다.

제국에 황제가 있는 이상 대륙 일통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륙에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영구적으로 정착되는 순간이 반드시 오리라.

발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창한 날씨에 구름 한 점이 떠가다가 태양을 가렸다.

순식간에 전장은 어두워졌으나 다시 강렬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왕국의 여명이라."

"...."

황제는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전장은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국왕이 황제에게 잡혔다는 소식이 전장 전체로 퍼져 나갔고,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조차 잃고 말았다.

국왕이 죽으면 누구를 위해 싸운단 말인가.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왕국이 멸망할 것은 자명한 사실.

발렌이 천천히 황제를 응시하였다.

"왕국의 백성들을 잘 부탁하오."

"그럴 것이다."

"혹시 짐의 가족들을 양민으로 풀어 줄 수는 없겠소."

"그건 불가하다. 반란의 싹을 키울 수는 노릇이지."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 법이다.

오직 황제는 진실만을 말했다.

하기야, 발렌 자신이 제국을 정벌하였다고 해도 분란의 씨앗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발렌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군주답게 죽여주시오!"

"그러지."

팟!

발렌의 검술이 펼쳐졌으나, 황제가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앞에서 황제가 사라졌다. 그리고 목에 서늘한 감촉이 지나갔다.

그것으로 발렌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잠시간 차가운 바닥에 머리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국왕이 죽었다!"

"와아아아!"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한 세대를 풍미하였던 거인이 죽었다.

더 이상 전투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전장 전체를 지배하며 메아리쳤다.

"무기를 든 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쨍그랑!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무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주변에서 시작된 항복의 물결이 왕국군 전체로 번져 나갔다.

타로스는 그저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국왕의 목을 친 후에 달려드는 몇몇 제후들을 베어 넘겼다.

발렌은 예의를 갖추어 목만 쳤지만,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놈들은 오체분시를 해 버렸다.

하나씩 무너지는 병사들.

적병들이 황제의 주변으로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무릎을 꿇는 적들로 인하여 황제를 중심으로 원이 형성되었다. 그 원은 빠르게 번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남은 적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을 때, 제국의 병사들이 군례를 취하며 경의를 표했다.

지금은 전쟁터 한복판이기에 무릎을 꿇지 않을 뿐.

만약 아군만 가득한 상황이었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황제를 경외하며 부복하였을 것이다.

대략 10만이 넘는 적들이 항복했다.

그 짧은 사이에 5만이 넘는 적들이 죽어 나간 것이다.

타로스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율리우스 왕국은 멸망했다. 제국군을 막는 자들은 반역도로 규정하고 참수할 것인즉."

"...."

모든 사람들의 눈이 황제에게 쏠렸다.

종전 선언.

지금 이 시간부로 나타나는 적들은 제국과 대등한 권리를 가진 자들이 아니다.

"토벌할 것이다."

"오오!"

"제국이여, 내달려라. 짐에게 왕국의 강역을 가져오라."

"와아아아!"

환호의 물결이 길게 퍼지고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율리우스 왕국의 강역을 향하여 진격했다.

구 율리우스 왕국의 국경 영지 칸스 변경백.

성문은 거침없이 열렸다.

국왕이 죽고 전 병력이 몰살당했으며, 항복한 상황에서 칸스 변경백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많지 않았다.

농성을 하며 버틴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농성할 수 있는 병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백성들이 꿇어 엎드렸다.

칸스 변경백의 가신들 역시 뛰쳐나와 무릎을 꿇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척살되었다.

변경백 기사들이나 왕실 기사들은 끝까지 반항하였으나 황실 기사단을 투입하여 단숨에 쓸어버렸다.

제국의 기사들은, 특히나 황실 기사단은 다른 기사들과 차원이 다른 무력을 보유했다.

그 하나하나가 예비 제후들이었으며, 만약 전쟁 중에 하급 제후가 전사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여 실력이 일취월장하면 바로 제후로 등극할 수 있는 자들의 집단이었다.

그런 괴물들이 휩쓸자 거리에는 피가 뿌려지고 영주성은 단숨에 전복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황실 기사단은 황제를 호종했다.

백성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기사들이면 몰라도 일반 백성들은 누가 자신들을 지배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금보다 나아지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었다.

영지의 가신들이 타로스 앞에 무릎 꿇고 외쳤다.

"위대한 만국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기사들이 타로스를 바라본다.

이들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모든 것은 황제의 뜻에 달려 있었다.

만약 이대로 싹 쓸어버리면 마음이야 편하겠지만, 추후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다분했다.

황제가 가는 길에 피만 뿌려진다면 그 누구도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타로스는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성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이민족 융합 정책에 있다. 다 쓸어버려도 토착 세력들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금이 간다.'

"일어나라."

"화, 황공하옵니다!"

"짐은 대륙을 정벌한 것인즉,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그만한 자비를 내릴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에게 순순히 무릎을 꿇는 자들이 있다면 그와 반대되는 자들도 있었다.

왕실 기사단을 비롯한 무리들과 제후들이다.

대부분 쓸려 나갔지만, 체포된 자들도 꽤 있었다.

대군사 리카드로 후작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 반역자들은 어찌 처리하오리까?"

"짐은 율리우스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였으며 짐의 강역으로 선포했다. 짐의 의지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극형이다."

"황명을 집행하라!"

"존명!"

곧바로 말들이 동원되고 차례대로 기사들과 제후들이 오체분시 되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영지 전체로 퍼져 나가는 비명 소리.

황제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제69화. 천재 행정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