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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사라진 아이들(4)

다이온 공국 국경 영지 발카스 변경백령.

제국과 국경을 맞대는 최전선 영지이지만 200년 동안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 발카스 변경백령에는 5만에 달하는 공국군이 모였다. 제국의 진군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공국 전체가 산악 지형이 허다하였으며, 제국은 발카스 영지를 지나지 않으면 결코 수도로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반드시 여기서 적들의 진격을 막아야 한다.

펄럭! 펄럭!

서리가 내려앉은 아침, 성벽 위에는 공국의 국기가 펄럭거리고 있었다.

최전선에서 제국의 진격을 막아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발카스 백작은 성벽을 시찰하였다.

지난 10년 이상 공국은 독립 전쟁을 위하여 준비해 왔다.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다.

"충성!"

척!

발카스 백작은 굳은 얼굴로 병사들의 경례를 받았다.

그의 뒤로는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새벽이 되어서야 5만의 병력이 모두 배치되었다.

곧바로 발카스는 3교대 경계 근무를 지시하였으며 병사들은 쉴 틈 없이 성벽을 오갔다.

제국의 선전 포고문이 도착하였기에 공국을 오가는 모든 통행은 제한되었다.

극히 일부의 상인들만이 공국으로 입성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감히 상행을 하겠다고 설치는 상단은 거의 없기도 했다.

해가 뜨고 서리가 녹기 시작하자 발카스 백작이 지시한 대로, 전 병력이 성벽 뒤로 사열하였다.

공국의 운명이 발카스 백작에게 쥐어졌다.

"각하, 준비 끝났습니다."

"가지."

그의 걸음은 성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휘부로 향했다.

기사들이 철저하게 그의 신변을 보호했다.

이번 전쟁에서 제국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다면 그의 신분은 수직으로 상승한다. 어쩌면 제국의 남동부 지역을 완전히 취하고 공국의 영토가 몇 배나 확장될지도 모른다.

이번 전쟁은 발카스 가문의 운명까지 가르게 될 것이다.

발카스 백작은 병사들을 내려다봤다.

병장기를 쥐고 있는 병사들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공국 전체가 자주국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열풍에 휩싸여 있는 이때, 정치권에서는 더욱 이러한 감정에 불을 붙였다.

"제국이 진군 중이다. 모두 들었을 터."

"...."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제국은 천 년의 시간 동안 천천히 썩어 왔으며, 이제 제 몸집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황제가 친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이 겨우 4만의 병력을 지원한 것만 보아도 이것이 황제가 가진 역량의 한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착각.

공국은 그러한 사실을 병사들에게 주입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결코 제정신을 유지하고 전투에 임할 수 없기에.

"우리 왕가는 제국을 무너뜨릴 책략이 있으며,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이번에 진격하는 제국의 6만 병력은 그들이 가진 최후의 역량을 쥐어짠 것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징집병이며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않았다."

병사들의 눈동자에도 힘이 들어갔다.

제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이제 무너질 때가 되었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대의 아들들에게, 손자들에게 오늘의 위대한 전투에 참여하였음을 이야기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자주국이 되었음을, 제국을 무너뜨렸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라."

쿵! 쿵!

병사들이 병장기로 바닥을 찍으며 호응했다.

발카스 백작은 연설의 방점을 찍었다.

"다이온 왕국을 위하여!"

"왕국을 위하여!"

그들은 다이온 공국이 아닌 왕국을 바라고 있었다.

그 시각.

황제의 병력은 꾸준히 행군하여 그 끝이 보이지 않을 거대한 산맥 아래까지 진격했다.

고도 6천 미터에 이르는, 한겨울이 아니더라도 결코 넘을 생각을 하지 않는 죽음의 산맥.

마땅히 길도 없었으며,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이곳으로 무려 6만의 제국군이 산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전에, 타로스는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고자 하였다.

황제의 연설.

태업을 일삼았던 황제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아니라 드래곤을 죽이기 위한 수련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불멸왕의 연설에 모든 장병들이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역사의 페이지를 다시 쓰기 위해 왔다."

"...."

"공국은 썩었다. 악마에게 침식되어 우리의 자식들을 제물로 끌고 갔다. 제군들은 제국의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절대 두고 보지 못합니다!"

"짐은 무리하여 이곳에 왔다. 내년, 기근을 타파할 전쟁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우리들의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이 생과 사의 기로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터. 제군들의 후손들에게,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기억하게 하라."

"와아아아!"

"진군한다."

병사들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누구도 쓰러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휘이이잉!

차가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산맥.

과연 알키나 산맥의 명성은 헛되지 않았다.

길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과 극저온의 날씨에 손발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한 걸음씩 진격했다.

제후들은 원시 산맥을 개척하며 길을 만들었고, 그 뒤로 줄줄이 병사들이 걸음을 내딛었다.

방한복을 충분히 지급하였지만 이제는 동사하는 자들이 하나둘 생기고 있었다.

"폐하, 이제는 한계입니다."

라탄 백작이 타로스에게 보고해 왔다.

타로스도 알고 있었다.

동상 환자들이 속출하였고, 거액을 주고 고용한 사제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점점 한계가 오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여기까지 수십 명의 사상자만 내고 온 것도 기적이었다.

병사들의 의지가 없었으면 절대 불가능하였던 일.

그러나 때때로는 인간의 의지로도 불가능한 일이 있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산맥을 넘으려 한다면 2만 이상의 병력이 증발할 것이다.

"리카드로 후작과 그랑카인 후작을 불러라."

"존명!"

곧 방한복으로 몸을 꽁꽁 싸고 있는 노마법사 두 명이 다가왔다.

부복은 생략한다. 가뜩이나 무릎도 좋지 않은 노인들이 다치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다.

"찾으셨습니까?"

"후욱,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노인들의 콧수염에 고드름이 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타로스는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일단 마법이 발현되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어갈 것이고, 마석을 갈아 만든 마나 포션을 섭취하면서 진군해야 한다.

마나 포션의 가격은 일반 포션의 무려 30배에 달한다.

타로스는 그걸 물처럼 마시며 진격하라 명령할 수 없었다. 마나 포션의 보유량은 한계가 있었으니까.

"아무런 조치도 없이 더 이상 진군한다면 수많은 병사들이 죽게 될 것이다."

"저희들도 유의 깊게 보고 있었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마법을 써야 할 때가 왔다고 여겼지요."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 위하여 황실 마법사들을 불렀다. 곳곳에 마법사들을 배치하여 기온을 올려라."

"존명!"

두 현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곧 기온이 10도 이상 올라갔다.

병사들은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라가라! 동료를 믿고 어깨를 내어 주거라. 마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니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빨리 올라가!"

서두르면 낙상자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서둘러 넘지 않으면 마법사들까지 마력이 고갈되어 모두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가라! 아이들이 기다린다!"

기사들은 곳곳에서 병사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극한의 기후에서는 분노의 감정조차 올라오지 않기 마련이었지만, 아이들이라는 소리에 병사들은 눈을 반짝이며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시각, 다이온 공국 진영.

설마하니 제국의 군대가 죽음의 산맥을, 그것도 한겨울에 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발카스 백작의 눈에는 이채가 흐르고 있었다.

3일 전에 도착한 제국군은 진영을 꾸리고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공성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의 부관인 란돌이 말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3일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고 있다니.... 설마 지원군을 기다리는 걸까요?"

"이렇게까지 빠르게 병력이 갖추어졌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거지.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맞다."

황제의 어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친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다면 타로스 황제는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만다.

황권이 약해지고 있는 중이었으니, 움직임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상인들에게 듣기로는 황제가 드래곤을 죽였느니, 제국의 위협들을 하나씩 쳐부수고 있느니 하였으나 그 역시 황제의 꼼수로 여겨지고 있었다.

제국은 분열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진군해야 했는데, 진채를 꾸린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저것이 정상일까?

"주기적으로 정찰은 하나?"

"정찰병들은 모두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설마... 땅굴을 파는 것 아닌가?"

"...!"

발카스 백작의 한마디에 란돌 자작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몸이 굳었다.

"그, 그럴 수 있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이란, 토성을 쌓거나 땅굴을 파는 것뿐이다. 그러나 땅이 얼어 토성을 쌓기에는 무리가 있지."

"땅굴이라면 지하의 상온에서 파들어 가기에 상대적으로 쓰기 쉬운 전략입니다."

"저들이 도착한 지 3일이 흘렀다. 침투까지 4일 정도 남았다고 보면 되나?"

"그렇게 보입니다."

"대비하라. 대나무를 박고 진동을 감지하라 일러라!"

"예!"

성벽 위가 분주해졌다.

5천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허장성세를 꾸미는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제1기사단장이다.

제후들은 전리품 때문이라도 직접 참전하기를 원했고, 오직 황제에게 충성하며 기사도를 지키는 기사들이 용병을 이끌어야 했다.

각지에서 끌어모은 용병들은 제론 휘하로 들어갔다.

그들은 허수아비들을 끌고 진격하였으며, 베이스캠프를 꾸린 후에는 전방에 적들의 습격을 막는 목책을 세우는 등의 작업을 했다.

그리고 시작된 본격적인 허장성세.

곳곳에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밤낮으로 밥 짓은 연기를 피웠다. 또한 유격대를 꾸려 오직 적들의 정찰병만 잡도록 했다.

이들이 도착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아마 황제는 지금쯤 중대한 고비를 맞으며 정상을 넘어가고 있을 것이다.

제론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거, 정말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요?"

용병들의 대표를 맡고 있는 특급 용병 존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불만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냥 가만히 버티고 있으면서 전투 수당을 챙겨도 되는 것인가 해서 말이지. 게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전속력으로 후퇴하라면서?"

"그것이 너희들의 역할이다. 시간만 끌면 되거든."

제론이 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41화. 사라진 아이들(5)

알키나 산맥 정상 부근.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등반은 드디어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알키나 산맥은 지금껏 그 어떤 군대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한 발악이었는지 정상으로 향하면 할수록 어마어마한 바람이 휘몰아쳤으며, 눈보라도 심해지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모두 얼어 죽었을 만큼이나 강추위였다.

투명한 실드에서는 연신 날카로운 고드름 조각들이 날아와 틀어박혔고, 기온 조작까지 해야 하는 마법사들은 마력 고갈에 연신 고가의 마나 포션을 퍼마셨다.

냉기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는 마도구로 몸을 두르고 있는 타로스조차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진저리를 칠 무렵.

척후병으로 나가 길을 인도하고 있던 라모젠 남작이 돌아왔다.

"폐하! 정상의 만년설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만년설이 붕괴하려 한다?"

"예! 이대로 만년설이 붕괴하면 연쇄 작용을 일으켜 수많은 병사들이 매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병사는커녕 기사들도 길잡이 역할을 하기가 어려워 제후를 내보냈던 타로스였다.

제후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나오자 전염병이 돌듯 빠른 속도로 라모젠의 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불굴의 의지로 버티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절망적인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술렁거림은 군대 전체로 퍼져 나갔다.

"폐하! 바로 대책을 강구해야 하옵니다!"

쿠구구구!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땅이 흔들리자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이는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알키나 산맥에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개척을 하며 전진하다 보니 통로가 좁고 병력은 길게 늘어졌다.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천 길 낭떠러지.

그나마 기사들은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제후들의 얼굴에도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만약 여기서 타로스가 포기를 한다면?

그때에는 군대 전체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콰과과과!

천천히,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산맥 전체가 울부짖으며 만년설이 동강 날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만년설은 순식간에 산맥 전체를 휩쓸어 버릴 기세다.

그랑카인이 급하게 외쳤다.

"폐하! 마법사들에게 기온 조작을 중지시키고 전원 실드를 펼치는데 주력하라 이르겠사옵니다!"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이...."

"산맥은 분노하고 있는 것이나 이 역시 자연재해에 불과한 것. 인간의 의지로 돌파하지 못할 것은 없다."

"폐하?"

"짐이 처리한다."

"하오나 폐하! 저 거대한 만년설을 어찌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쿠구구구!

지진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틀림없다.

이대로 5분만 흘러도 만년설이 흘러내리며 그것은 곧 눈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군대 전체가 매몰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마법사들이 실드를 친다고 해도 거대한 눈덩이들이 짓누르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타로스는 가타부타 설명할 겨를도 없이 몸을 날렸다.

웅성웅성!

군대는 어마어마한 동요를 일으켰다.

동시에 온갖 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발길이 허락되지 않은 곳을 우리가 넘으려 하였기에 산맥이 분노한 거야!"

"도망을 쳐야...."

"도망? 어디로?"

"우리는 다 죽을 거야!"

병사들로부터 퍼져 나오기 시작한 죽음이란 단어가 순식간에 산맥 전체를 잠식해 버렸다.

매서운 칼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극저온의 기온까지.

좁은 길을 따라 의지력 하나만 믿고 오르던 병사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옥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공포로 인하여 병력 전체가 요동칠 때, 그랑카인 후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놈들! 도대체 무엇이 두려우냐!"

"우리는 다 죽을 거요!"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합니다!"

"폐하에 대한 믿음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더냐? 황제께서는 드래곤을 쳐 죽이고 제국 내의 모든 위협들을 제거하셨다. 모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마력을 머금은 그랑카인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병사들의 동요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황제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주문.

병사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산맥을 넘고 있는 것은 모두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백성들마저 긍휼히 여기는 황제가 병사들을 버릴 리 없었다.

그랑카인이 한마디를 더했다.

"폐하께서 나서셨으며 상황을 처리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대안이 있으시다."

술렁거림이 잦아들었다.

불멸왕에게는 대안이 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왔던 황제라면, 자연재해조차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번쩍!

그와 동시에 그랑카인의 말을 뒷받침하듯 산 정상에서 오색의 찬연한 빛이 만년설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타로스는 순식간에 산맥 정상으로 이동했다.

스모크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을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타로스의 마력은 1,000에 맞춰져 있었고, 정확하게 파워드 킬 10번을 뿌릴 수 있는 양이다.

가로세로 10m 내의 모든 것을 '삭제'하는 스킬이었으므로 10번을 뿌리면 100m 내의 모든 만년설을 삭제시킬 수 있었다.

산맥 정상부터 시작해서 100m 아래까지.

계산만 잘 하면 6~7번 정도의 스킬로 만년설 전체를 제거할 수 있다.

쿠구구구구!

지금 이 순간에도 만년설은 통째로 떨어져 나가 눈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충격은 아래에서 위로 퍼져야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 안 된다.

타로스는 고속으로 이동하며 100m 아래부터 스킬을 위로 뿌리며 올라갔다.

쾅! 콰과과과광!

소리는 요란하였지만 정확하게 스킬은 만년설들을 삭제해 나가고 있었다.

아랫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자 타로스는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연속으로 스킬들을 뿌려 댔다.

콰과과과과!

마력이 급속하게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오 원소는 만년설들을 집어삼켰다.

완전히 분해가 되어 사라지는 그 광경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장면이었다.

제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한 눈보라 때문에 병사들은 이 위의 세상이 어찌 정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제후들이나 기사들은 예외였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의 표정에는 경악이 떠올라 있었으며, 도저히 어떤 말을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타로스는 마지막 여섯 방째의 파워드 킬을 뿌렸다.

최대한 충격을 줄이고자 하였으나 미약한 눈사태가 일어나더니 길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규모 눈사태는 아니었지만, 길을 따라 눈사태가 일어나면 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타로스는 곧바로 고속 이동을 통하여 제후들의 앞으로 돌아왔다.

"폐, 폐하!"

"물러나라."

콰과과!

산맥 전체가 붕괴되는 것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길을 따라 쓸려 내려오는 눈사태의 모양은 실로 거대해 보였다.

타로스는 모든 이들의 앞에서 파워드 킬을 뿌렸다.

콰과과광!

10m 내의 모든 눈덩어리들이 삭제되었다.

콰과과!

그 충격에 눈사태의 경로가 비틀어졌다. 그러나 타로스는 그나마도 남아서 내려오던 눈사태에 파워드 킬을 두 방 더 뿌렸다.

이제는 마력 고갈이었다.

급작스럽게 마력을 소모한 대가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그러나 타로스의 강인한 정신력은 육체적인 현상마저 찍어 눌렀다.

휘이이잉!

그리고 마침내, 모든 재해가 물러갔다.

눈덩어리들이 바로 앞에서 멈추어 버렸지만, 길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후들이라면 충분히 길을 낼 수 있을 것이므로.

"...."

그 충격적인 장면에 제후들과 기사들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을 뛰어넘는 해결 방식이었다. 그 누가 나섰다고 해도 불가능하였던 일.

가장 먼저 그랑카인의 노구가 꺾였다.

쿵!

그리고 무릎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그랑카인을 시작으로 제후들이, 그리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미노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표정에 드러난 것은 경외감이었다.

가슴 떨리는 위업을 이루어 낸 황제를 찬양하는 경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무심하게 무릎 꿇은 자들을 내려다보던 타로스는 한마디를 하였을 뿐이다.

"길을 뚫어라."

"조, 존명!"

제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병 교육대에 갓 입대한 신병들처럼 제후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길을 내기 시작했다.

군대는 산맥 정상을 밟았다.

이곳 정상에는 거대한 분지가 형성됐다.

도저히 자연적으로는 형성되기 힘든 모습이었으며, 황제가 만들어 낸 걸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동안 제후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특히나 귀족파 귀족들이 그랬다.

외부의 위협 때문에 귀족들은 파벌을 가리지 않고 참전하였으나, 지금 황제의 모습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귀족파 진영의 막사.

베르나 백작을 필두로 기욤 자작과 라모젠 남작까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따듯한 차로 몸을 덥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는 얼굴들이다.

"오늘, 진정한 괴물을 보았다."

"...."

베르나 백작의 말에 기욤 자작과 라모젠 남작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라는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재단을 할 수가 없었다.

태업을 일삼고 있을 때만 해도 귀족파 귀족들은 금방 정권을 잡을 줄 알았지만, 황제의 행보가 이어질수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오늘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제의 무력을 직접 실감하니, 이건 가능성이 희박함을 넘어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였다.

"드래곤을 단박에 죽였다는 소문은 들었지. 그러나 과장된 면이 있다고 여겼다. 어떻게 에인션트 드래곤을 한 방에 찢어 죽일 수 있을까."

"아마 사실일 겁니다. 오늘의 무용을 다들 보셨으니.... 제가 오늘 길잡이를 맡았고, 직접 만년설을 확인했습니다. 그걸 완전히 날려 버린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연환계 마법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산맥은 붕괴를 면치 못하였을 겁니다."

몸이 떨린다.

인간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만, 적이 된다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쓸어버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였지만, 황제는 자국민을 잡아갔다는 이유로 직접 본인이 군대를 이끌고 죽음의 산맥을 넘었다.

그 의지와 발상은 인간 이상의 것이었다.

이쯤 되자 황제는 제국의 모든 귀족들을 시험 무대에 올려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베르나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

"항명은 죽음이라. 우리 귀족들은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다. 폐하께서는 그저 시험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제42화. 사라진 아이들(6)

죽음의 산맥을 넘어 군대는 평야 지역에 들어섰다.

산성이 즐비하고 대체적으로 영토가 산악 지형인 공국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야 지대가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성립하기 어렵다.

각종 천연자원들을 수출하고 곡물을 수입한다지만, 자체적으로 식량이 생산되지 않는다면 존립 자체가 힘들었으니까.

제국의 군대가 그런 분지로 접어들었다.

거대한 산을 넘어 불가능한 업적을 이룬 병사들은 오히려 지금의 기온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황제는 산을 넘어오자마자 하루 휴식을 선언하고, 바로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앞으로의 방향성을 논하기 위해서였다.

지휘부 막사로 타로스가 입장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추-웅!"

제후들과 각 기사단장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댔다.

그들의 표정에는 자부심과 함께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했다.

내심 황제를 언젠가 쳐 내야 할 존재로 여겼던 귀족파 귀족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포기의 감정이 올라왔다.

어떤 위협도 황제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군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알키나 산맥을 넘어 공국의 영역으로 들어섰으니,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황제는 단순히 육체의 강함만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음을 이 자리에서 증명하였다.

그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러한 감정들이 귀족들 내에서 형성되자 황제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존재로 인식되었다.

타로스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상석에 앉았다.

"평신."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타로스의 한마디가 장내를 휩쓴다.

"우리는 죽음의 산맥을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수백의 희생이 있었으나,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

불가피한 사고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란 늘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법.

이러한 대역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수백 명이 죽었다는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타로스가 손짓하자 로빈슨 단장이 직접 지도를 가져와 폈다.

복잡한 표식들이 즐비한 군사 지도.

타로스는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봤다.

과연 황제에게서 어떤 전략이 튀어나올 것인가. 허락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모두가 침만 꼴깍 삼키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타로스의 입이 열렸다.

"적들은 우리가 공국의 여러 산성들을 점령하며 진군할 거라 여기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의 목표는 공국의 수도 마키나다. 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제국의 아이들은 공국 전체로 흩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수도 마키나로 끌려갔지."

분노가 되살아난다.

수천에 이르는 제국의 아이들이 마키나로 끌려갔다.

황제는 어떤 경위로 조사를 하였는지, 이 정보가 사실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아도 제후들은 믿고 있었다.

산맥을 넘어옴으로 인하여 황제에 대한 신뢰가 단단해졌다.

지금은 황제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우리는 최단기간 안에 공국을 관통한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산성은 공략을 해야겠으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후들이 나선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의견이 있다면 개진하라."

황제의 의견은 타당했다.

공국 내부로 들어온 병력은 6만에 불과하였지만 수도 마키나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병력은 배치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다이온 공국은 이미 한계까지 병력을 끌어모았다. 대부분은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고, 제국의 군대가 내부를 휩쓴다고 해도 쉽게 국경의 군대가 회군하지 못한다. 그 순간 제국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속전속결로 수도를 끝장내고 난 이후에는 국경의 적들도 줄줄이 항복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전략가로 명성이 높은 베르나 백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의견이 실로 가한 줄 아옵니다. 더 이상 전략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제국군이 죽음의 산맥을 넘은 이상 진격만 남았을 뿐, 복잡한 전략은 오히려 적들에게 시간만 주고 말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맞습니다."

타로스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려는 것을 참았다.

산맥에서 실력 행사를 한 번 했더니 제후들은 순한 양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분노에만 휩싸여 있을 뿐이었는데, 이제는 황제에 대한 두려움까지 함께 갖게 되었다.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역심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내일부터 전속력으로 진군할 것이니, 다들 체력을 비축하도록 하라. 이만 파한다."

"존명!"

2월 중순.

추위도 한풀 꺾인 국경 지대에는 지루한 대치만 이어지고 있었다.

벌써 몇 주일째.

낮에는 눈이 녹기 시작했고, 기온은 5도 안팎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는 나른해지기 시작했고, 전쟁 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꾸벅꾸벅 졸았다.

상황이야 어쨌든 전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연일 사령관이 외쳐 대고 있었기에 3교대 근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금 와서는 이게 전쟁을 하는 것인지, 눈싸움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순찰을 하고 있는 기사들도 힘이 꽤 빠져 있었다.

"그만 졸아라."

"근무 중 이상 무!"

"전방 주시해라.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예!"

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적들은 언제 쳐들어올 것인가.

대략적으로 이야기는 들었다. 황제가 친정을 한 이상 제국은 성과를 내야 하며, 언제라도 쳐들어올 수 있음을 말이다.

그러나 적들은 몇 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정상일까?

"사령관께서 오십니다!"

졸고 있던 병사들이 각을 잡았다.

기사들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으음, 그것이."

사령관의 말에도 란돌 남작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틀림없이 적들이 땅굴을 파서 들어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2교대 근무로 변경한 적도 있었다.

성벽 아래로 대나무를 박아 넣고 진동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견시병이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재수가 없었던 건지 미약한 지진 때문에 군 전체에 비상이 걸리는 쇼도 벌였다.

그러나 끝내 적들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란돌 남작은 부관의 자격으로 사령관에게 조언을 했다.

"적들의 숫자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있으며 꾸준히 정찰병만 잡아 대고 있습니다. 꿍꿍이를 꾸미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전투는 피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그래서?"

"기만책일 수 있습니다."

"기만책이라? 도대체 어떤 기만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그건...."

확신할 수 없다.

이 갑갑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계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급보가 도착했다.

"마키나에서 긴급 회신입니다!"

"마키나에서?"

"저, 적 대군이 수도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뭣이!?"

그야말로 충격적인 보고였다.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은 도대체 어떻게 눈앞에 있던 적들이 공국 수도 앞마당까지 진출을 했는가 하는 거였다.

어마어마한 가정이 내부를 뒤흔들었다.

"군대가 알키나 산맥을 넘었다면."

"뭣이!?"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지금 시점에 수도까지 적들이 진출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여름에도 넘기 힘든 산맥을 어찌 한겨울에 넘어간다는 말인가!?"

"...."

제국군이 산맥을 넘었다면 눈앞의 적들은?

"빌어먹을! 공격이다! 저놈들은 위장이야! 다 쓸어버려!"

뿌우!

적들의 기만책에 분노한 발카스 백작은 바로 군대를 이끌고 적들의 진영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적들은 부리나케 도주를 했다. 성문이 열리는 순간 이미 진영을 버리고 사라진 것이다.

사령관은 보았다.

곳곳에 세워진 허수아비들과 사방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조리 기구들을 말이다.

2월 중순.

알키나 산맥을 넘은 제국군을 막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산성들이 있다고 해도 가능하면 규모가 큰 곳은 피했다. 또한 산세가 험하거나 굳이 마주칠 필요가 없는 곳들은 죄다 지나쳤다.

속전속결.

산성이 나타나면 제후들이 직접 침투하여 적들의 마법 시설부터 파괴해 버리고, 사령관과 지휘관들의 목을 땄다.

그사이에 군대는 산성을 포위하고 전서구나 전령을 잡아 죽였다.

그 결과, 급작스럽게 6만에 이르는 대군이 수도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다이온 공국의 수도 마키나는 대군의 출현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땡! 땡! 땡! 땡!

비상종을 치고 있었고, 급하게 병력이 성벽 위에 세워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한눈에 보아도 무장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적들이 놀랐다는 뜻이다.

이미 수도에 나타나기도 전에 타로스는 회의를 통하여 전략을 모두 수립했다.

제국의 강점인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한 작전이었다.

만약 수도에 수만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면 문제가 좀 되었겠지만, 기껏해야 수도에도 수천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죄다 국경 지대로 밀어 넣었다. 국경만 잘 틀어막으면 제국이 진군할 수 없다고 여긴 듯했다.

아직도 혼란에 빠진 공국의 수도는 전 병력이 몰려온 것도 아니었으며 무장도 부실했다.

타로스의 전략은 속전속결.

황제를 필두로 제후들이 달려가 성문을 파괴한다. 그리고 바로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가 학살을 시작하면 본대가 들이닥쳐 점령한다.

황제가 직접 검을 들고 성문을 부순다는 전략은 타국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국이기에 가능했다.

제국의 최강자이자 대륙 최강자로 여겨지는 황제가 직접 나선다면 무장도 갖추어지지 않은 병사들을 상대로는 속전속결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었으므로 타로스는 가타부타 말없이 검을 뽑았다.

"작전대로 간다!"

"뒤따르겠사옵니다!"

"진격하라!"

"와아아아아!"

타로스와 제후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강탈한 말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놈의 등에 올라타고 빠르게 진군하였다.

"쏴라! 저자가 황제다! 황제만 잡으면 승리할 수 있다!"

"쏴라!"

핑핑핑!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쏘아졌다.

과연 공국의 최정예들인지 무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화살을 쏘아 댔다.

타로스는 화살과 화살 사이를 피해 냈다. 그건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타로스야 기마술 스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강함이 귀족의 조건인 제국에 있어 제후들은 괴물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도 진격하자 타로스는 말에서 뛰어내려 스모크를 펼쳐 순식간에 성문까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거침없이 궁극기 파워드 킬을 쏟아 냈다.

#제43화. 사라진 아이들(7)

다이온 공국 공왕궁.

현재 다이온 공국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국의 품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국을 이루고, 심지어 영토까지 확장하여 패권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여론이 공국 전체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왕을 소환하려는 마령회의 움직임도 가속화됐다.

왕궁 지하 감옥에서는 연일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들의 생명력을 정기로 전환하여 소환 마법진에 지속적으로 흡수시켰다.

이제 소환까지 머지않은 상태다.

다행스럽게도 제국은 내부 상황 때문인지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고 신경전만 계속 펼치고 있다고 국경에서 보고해 왔다.

이제 일주일만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가 되면 다이온 공국이 대륙의 신성으로 떠오를 것이다.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피하다니?"

공왕은 공왕비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마녀 탈라스는 요사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공왕을 유혹하고 있었고, 그들은 둘 다 약에 취한 상태였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술병과 인간의 정신을 흩트리는 연기들은 환락의 끝을 보여 주고 있었다.

보고를 해 오는 기사는 더욱 다급해졌다.

"제국입니다! 제국에서 쳐들어왔습니다!"

"하하하! 지금 장난을 치는 것이냐? 과인에게 장난질을 하는 기사가 있는데, 왕비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호호호! 그런 자는 참수해야죠!"

"참수다! 저 녀석을 참수해라!"

콰아아아앙!

그들의 웃음은 끝가지 이어지지 않았다.

다이온 공왕이 잠시 멍해지더니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테라스로 나갔다.

신선한 공기가 확 밀려 들어왔다.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더욱 정신은 또렷해진다.

공왕은 보았다.

성벽이 순식간에 파괴되고, 그 위에서 병사들이 학살되고 있는 과정을 말이다.

"아니 저건?"

"화, 황제입니다! 황제와 제후가 직접 쳐들어왔고 성벽은 보다시피 허물어졌사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믿을 수 없는 제국의 공식 발표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국과 주변국을 괴롭혀 왔던 드래곤 카이너스를 황제가 직접 나서서 단숨에 찢어 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주변국의 국왕들은 믿지 않았다.

이 시대의 정치라는 것이 그랬다.

단 1%의 진실과 99%의 거짓이 섞여 나돌았고, 이는 적대국에 취할 수 있는 당연한 기만책이었다.

그랬어야 하는데,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은 두 눈을 의심케 했다.

"과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가?"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근위 기사는 강하게 말했다.

황제와 제후들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순식간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성벽 아래에서 화살을 날려 보지만 화려한 갑옷을 입은 황제는 그것을 모조리 피한 후에 기사들마저 처리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그리고 저 멀리 대군이 단숨에 수도를 집어삼킬 것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이런 상황에서도 마녀이자 공왕비인 탈라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비스듬하게 누워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찌 걱정이 안 되겠소? 제국에서 쳐들어왔지 않소."

"이미 의식은 거의 끝났답니다."

탈라스는 곰방대를 재떨이에 털어 내고 일어났다.

아름다운 나신이 기사들의 눈을 현혹했다. 그녀는 옷도 입지 않은 채로 공왕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키스.

공왕의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린다.

"크흠, 크흠."

매우 민망한 상황이었다.

공왕과 공왕비가 사랑을 나누는 것이 뭐가 문제이겠느냐만,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부적절했다.

적들의 군대가 바로 코앞까지 쇄도했고, 그마저도 수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긴급하게 대피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직접 검을 들든지 해야 하는데 한없이 여유롭기만 했다.

탈라스의 입술이 공왕에게서 떨어졌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 주세요, 내 사랑."

"정말 가능하겠소?"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거든요. 아이들의 정혈을 더 뽑아 좀 더 안정적으로 소환을 하려 했었는데 상황이 이러하니."

탈라스가 돌아섰다.

그녀의 전신에 새겨진 검은 문신에서는 마기가 꿈틀거렸다.

대악마 소환이 머지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마왕의 소환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지옥 사대 천왕 중 하나는 소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황제가 강하다고는 해도 지옥의 대악마가 나타나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

그때가 되면 악마의 군대까지 소환하여 역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그대만 믿소. 과인의 갑옷을 준비하라."

"예!"

공왕은 최대한 적들의 진격을 저지시켜 보기로 했다.

앞으로 30분.

탈라스가 제시한 시간이었다.

황제의 진격.

제후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그 모습에 감명 받아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미 황제의 무용은 산맥에서 증명된 바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으며, 최전방에서 검을 휘두르니 사기가 오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성문이 뚫린 요새는 더 이상 요새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순식간에 성난 군대가 마키나를 휩쓸었다.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삼고, 반항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

겨우 3천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6만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무력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제국과 공국 병사들의 차이도 확실했다.

제국군 평균 레벨은 50대 중반.

하나같이 철기로 무장하였고 그 수련 또한 깊었다.

병사들의 지상 목표가 기사를 거쳐 제후가 되는 것인 이상, 징집되어 간신히 숫자나 채우고 있는 공국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율리우스 왕국과 전쟁이 터진다고 해도 제국이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와아아아! 쓸어 내라! 폐하께서 함께하신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타로스와 제후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공국의 수도가 반 이상 점령되었을 때, 레베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이제 나머지는 병사들에게 맡겨도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런가."

타로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마력이 들지 않는 초공간 이동과 단순한 칼질만으로 적들을 주살해 왔다.

아마 다른 자들이 보기에는 타로스가 잔상을 남기며 고속 이동을 하였기에 무슨 대단한 검술을 펼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황제의 검을 제대로 본 자들도 적었고, 단순한 칼질만으로도 병사들을 썰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타로스가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기사들이 호위를 했다.

제후들도 황제를 쫓아 돌아왔다.

"폐하! 대승을 감축 드리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는 전장.

제후들은 피를 뒤집어쓰고 흥분에 겨워했다.

황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또다시 날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하나같이 괴물 같은 자들.

이런 야생마 같은 놈들이었지만, 일말의 자제심은 있었다. 그래도 제후였기에 피에 미쳐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공왕궁만 남았는가."

"저곳도 금세 점령될 것으로 보이옵니다."

이제 타로스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 베르나 백작이 보고를 해 왔다.

귀족파 귀족들의 표정 자체가 변해 있었다.

황제가 산맥에서 실력을 보이고 더욱이 성벽까지 단숨에 날려 버리는 것을 본 이후에는 대적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타로스는 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타로스가 손짓을 하자 바로 의자가 대령된다.

황제의 뒤로 제후들이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서 있자 마치 지옥의 사령관이 악마들을 보내 공국을 정벌하는 모양새다.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늦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순식간에 도시까지 점령해 버리고 각종 주요 건물들을 불태웠다.

공국 기사들은 전멸했고, 병사들은 항복을 하기에 바빴다.

이제 남은 것은 공왕궁뿐이었다.

"음?"

그러던 어느 순간에 타로스는 왕궁에서 어마어마한 마기가 뿜어지는 것을 보았다.

쿠구구구!

지진이 일어난 듯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타로스는 바로 진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전속력으로 퇴각하라 일러라! 최소한 짐이 앉아 있는 선 뒤로 물러나야 한다!"

"예!"

뿌우!

퇴각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자 살육에 미쳐 있던 병사들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은 병사들에게 고함을 쳤고, 전 병력은 그대로 선회하여 이동했다.

제국에서 이곳까지.

악마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액을 들여 고용한 사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검은 연기까지 피어 올리고 있는 공왕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오, 가이아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자비로우신 어머니! 저들을 벌하소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소환 의식이 성공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한 현상은 말이 되지 않았다.

타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늦었는가."

쿠구구구구!

콰아아앙!

공왕궁이 박살 나며 거대한 몸체를 가진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근육질의 화염 악마가 나타나자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화염의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입에서는 푸른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괴물.

한 손에는 철퇴를, 한 손에는 불타는 채찍을 쥐었으며, 거대한 뿔을 달고 있는 진정한 악마였다.

타로스가 설정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힘의 대악마 발로그의 강림이다.

발로그 LV. 100

지옥의 4대 군주

실로 경악스러울 만큼의 설명이었다.

지옥의 군주 중 하나.

레벨이 100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레벨 표시는 100이 한계였으니까.

원작에서는 타로스 황제가 단숨에 썰어 버렸지만, 사실 지옥의 군주는 지상의 대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의미로 보면 타로스가 원정 중에 죽였던 카이너스보다 더한 존재였다.

-꾸와와와왁!

"큭!"

"크윽!"

발로그의 비명에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였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나마 제후들이나 기사들은 간신히 그러한 공포감을 견뎌 내고 있었다.

발로그가 거대한 철퇴를 치켜들고 외쳤다.

-지상에 지옥이 도래하리라. 영겁의 저주가 내릴 것이며, 모든 영혼은 불타는 화염에서 고통을 받으리라.

타로스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가 천천히 이동하자 발로그도 그 존재를 알아봤다.

대악마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타로스를 바라봤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이 땅을 다스리고 있었구나. 그러나 이제 그대의 놀이도 끝이다. 지상에는 진정한 지옥이 강림할 것이니.

타로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유언은 끝났느냐?"

#제44화. 사라진 아이들(8)

다이온 공왕궁 지하 감옥.

음습하게 흐르고 있는 마기, 축축한 공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광경들까지.

인세의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곳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드는 가운데 한 마녀가 미친 듯이 광소를 흘렸다.

"꺄하하하하! 드디어 위대하신 분이 소환됐어! 그래, 나는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거야. 자비로우신 마왕 폐하의 은혜로!"

탈라스의 모습은 광기 어린 마녀 그대로였다.

양손에는 심장을 쥐었으며,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나신으로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미천한 신분에서부터 공왕비까지.

그녀에게 악마가 속삭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탈라스는 세상을 가졌다.

제국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지옥의 군대가 소환된다면 순식간에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여 버릴 수 있었을 것이므로.

지옥의 문이 대악마를 소환한 후유증으로 일렁거렸다.

그 안에서는 강대한 마기가 흘렀으며, 마령회에 소속되어 있던 어둠의 사제들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하 감옥은 이제 지하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지옥의 대군주 발로그가 소환된 이후 뚫려 버렸으니까.

공국의 군대를 지휘하던 다이온 공왕과 탈라스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너 따위는 문제도 아니지."

"뭣이!?"

"이, 나의 손에 세상이 들어올 테니까."

"지금 뭐라고...."

다이온 공왕이 허탈한 표정으로 탈라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거대한 발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건 바로 발로그의 묵직한 발이었고, 연약한 여성이 결코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선사할 터였다.

그러나 완전히 이성이 나간 탈라스는 그것이 마신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공왕비 전하! 피하십시오!"

"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을 벗고 새로운 육체를 주시려 함이니."

"전하!"

콰앙!

꽈직!

그대로 탈라스의 육체는 한 줌의 핏물이 되었다.

"...."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마녀가 죽자, 공왕의 눈에서 정기가 돌며 암시에서 깨어났다.

다이온은 채찍을 들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30미터 크기의 거대한 덩치의 발로그를 바라봤다.

무지막지한 화염이 일렁거렸고, 지옥의 불은 점차 사방으로 번져 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탈라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을 소환한 악마의 하수인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는 듯, 그대로 밟아서 뭉갰다.

그녀가 부활하지 않자, 다이온 국왕은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지, 진정한 악마.... 도대체 우리는 뭐였던가."

가만히 제국을 자극하지 않고 있었다면 제후국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다.

비록 나라는 가난했지만 명맥을 유지하며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공국은 오늘 멸망한다.

제국군 진영.

제국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 제후들, 심지어 공국의 백성들까지 모두 얼음이 됐다.

제국에 대적하여 왕국으로 격상하고 진격하자는 여론에 광분했던 백성들은 공왕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애초에 마령회 자체가 공왕가와 귀족들을 중심으로 퍼진 것이었기에 지옥의 군주가 이 세상에 소환되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차피 도망을 친다고 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 확실했다. 저런 거대한 존재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유일하게 황제만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아니, 원래부터 황제는 권태로움에 둘러싸인 존재였는데, 지금 이런 순간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침묵을 깨고 베르나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도저히...."

"닥치게."

"하지만."

"폐하께서는 승리하실 것이니."

그랑카인 후작이 베르나 백작의 입을 막아 버렸다.

비록 그랑카인 후작이 궁정 귀족이었지만, 실력으로 따지자면 베르나 백작의 한 수 위였다.

궁정 귀족과 제후는 그 성격이 달랐지만, 제국은 강자를 우선시하는 국가.

연배로 보나 마법에 통달한 그랑카인 후작의 무력으로 보나 베르나 백작이 밀린다. 그렇기 때문인지 베르나 백작은 궁정 귀족의 역정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위험성에 대해 말할 뿐이었다.

"드래곤이 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강자라면, 지옥의 군주는 대륙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존재입니다.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폐하께서는 승리하신다."

파아앙!

황제에 대한 믿음과 죽음의 공포가 공존하고 있는 제국군 진영.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순간, 황제가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발로그와 거리를 좁혀 한 건물의 외벽 위로 올라섬과 동시에 발로그의 철퇴가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쩌저정!

"큭!"

차라리 베르나 백작은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빤히 보이는 황제의 패배였다.

마기가 잔뜩 실려 있는 발로그의 철퇴를 막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하였으리라.

"...."

그러나 어디에서도 절망적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워하는 발로그의 목소리.

그 이후 온갖 공격들이 황제에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황제의 주변은 폐허가 되어 갔다. 화염이 치솟고 채찍이 작렬하며 거대한 마기가 내리꽂혔다.

먼지가 자욱해진다.

그 사이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가 끝이라면 실망인데?"

-이럴 리가 없다! 분명히 나는 지옥의 4대 군주....

"할 말이 이리도 없느냐. 네놈은 창의력을 키우는 연습부터 하거라."

황제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다.

이제 황제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오색의 원소가 발록의 몸에 닿는 모습을.

쿠아아아앙!

"허어!"

"뭐, 이런!?"

단번에 발로그의 몸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드래곤이 그랬던 것처럼, 사막의 왕이 그러했고, 지금까지 황제에게 도전해 왔던 온갖 괴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발로그는 검은 핏물이 되어 쏟아졌다.

촤아아아아!

타로스는 검은 비를 앱솔루트 배리어로 막고 있었다.

딱히 발로그의 피가 유해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마기로 옷이 얼룩이 지면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다.

'레벨이 꽤 올랐는데.'

타로스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뒤틀었다.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해도 레벨이 잘 오르지 않았다.

고레벨의 몬스터를 죽여도, 오늘 전투에서 수많은 기사들을 도륙했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레벨이 5개나 올랐다.

보너스 스탯은 20개.

마력으로 환산하면 200이나 되었기에 이번에는 모조리 마력으로 밀어 넣었다.

공왕궁은 완전히 반파가 되었다.

이래서야 공왕가의 보물인 유물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이런 사소한(?)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에 그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마계의 4대 군주 중 하나가 직접 튀어나올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고,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일개 인간이 처리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놀람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오늘 이후로 소문이 번져 나갈 테지만, 타국의 귀족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만큼 말도 되지 않는 업적이었다.

그 경외감에 제후들이 먼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기사들의 부복이 이루어졌고, 병사들 그리고 심지어는 적으로 싸우던 공왕가의 군인들도 황제에게 머리를 숙였다.

상황을 인지한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빈슨 단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이러한 구호는 한참이나 이어졌지만, 타로스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황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이 한둘도 아니었기에 일제히 입을 다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황제의 움직임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타로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이들을 구하라. 아직 제군들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천인공노할 놈들. 짐은 오늘 공왕가를 멸망시키리라."

사후 처리가 시작됐다.

이제 백성들은 공왕가의 배후에 마령회가 있었음을 인식했다.

최근 들어 공국의 아이들도 대거 사라지는 현상을 보였는데, 아이들이 구출되기 시작하자 그런 짓을 자행한 놈들이 누군지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마계의 군주가 소환된 장면을 보았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마령회가 어떤 놈들인지, 공왕가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일은 소문이 충분히 나서 공국 전체로 퍼져 나가야 하지만, 수도의 백성들은 제국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공왕가가 다시 지배하여 공국 전체를 악마에게 팔아 버리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순순히 제국에 항복했고, 또한 귀부를 요청하였다.

지금껏 악마의 하수인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신의 자식들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타로스는 마키나의 중앙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보고를 받았다.

"폐하! 제국과 공국의 아이들을 포함하여 2천 명을 구조하였사옵니다."

"2천 명이라. 나머지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모두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아아!"

모든 사람들이 탄식했다.

제후들부터 시작하여 백성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공국의 공왕이 이런 짓을 한 것에 대해 분노했다.

황제가 막았기에 망정이지 발로그를 죽이는데 실패하였다면, 그 충격이 대륙 전역을 휩쓸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대륙의 멸망을 걱정해야 한다.

발로그를 소환한 마녀가 단숨에 악마에게 밟혀 죽었다는 말이 퍼지자 이러한 가정은 확신이 되었다.

악마 놈들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이용의 대상이었으며, 이용하고 난 이후에는 팽한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본성인 것이다.

타로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작의 타로스가 보았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저 일개 인간인 그로서는 이번의 사건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대사제."

"예, 신의 사도이시여!"

사제복을 걸친 늙수레한 노인이 타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신을 모시는 사제가 신을 제외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계의 군주를 죽여 버린 황제는 신의 사도라고 불러도 어색함이 없었다.

"희생된 아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제를 준비하라. 그들이 지옥으로 가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대사제가 책임지고 인도하라."

쿵!

대사제가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조아렸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빈슨 단장이 물어왔다.

"폐하, 공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찌할까요?"

"화형을 시켜라."

타로스는 담담하게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제45화. 사후 처리(1)

공국에 대한 사후 처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지금은 2월 중순.

사후 처리를 모두 마치고 제도로 복귀하면 3월 초는 될 것으로 예상됐다.

결국 율리우스 왕국과의 개전은 한 달 정도는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최대한 시기를 앞당길 필요는 있었다.

먼저 수도 마키나에 남아 있는 왕가의 인물들과 귀족들은 모조리 잡아 화형 시켰다.

이에 타로스는 공국의 멸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제국으로 편입했다.

정식 명칭은 다이온 직할령.

황제 직할령에 편입되는 것이었으며, 수도의 백성들은 이를 반겼다.

사후 처리의 두 번째는 구휼이다.

이곳 다이온은 원래 제국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우던 국가였다. 평야 지역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산악 지형이 대다수라 곡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올해 제국은 기근이 들었기에 다이온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타로스는 수도의 귀족들과 공국 창고를 털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들의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하였다는 사실은 곧 백성들을 분노케 하였고, 누구도 공왕가를 지지하지 않았다.

독립 여론을 펴던 작자들도 대악마를 눈앞에서 보고 나니 도저히 공국을 지지할 수 없게 됐다.

세 번째는 다이온 각지에 대악마의 출현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상단과 통신구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왕가와 귀족들이 지옥의 대군주 발로그를 소환했다는 사실을 퍼뜨렸다.

공국과 제국의 아이들이 희생된 이유는 대군주 소환 때문이라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국 전체에 여론이 들끓었다.

단숨에 민란이 일어났으며, 병력이란 병력은 죄다 국경으로 밀어 넣은 귀족들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황제는 그렇게 알아서 상황이 정리된 영지들을 보며 흡족해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치하하고 귀족들이 영지에 축적해 두었던 식량들은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타로스의 명령으로 공국 전역을 휩쓸었던 베르나 백작의 보고였다.

그 밖에도 각 영지들과 공왕가의 창고를 털어 끌어모은 자금도 상당할 것이다.

"전리품은?"

"각 상단에 현물로 매각한다고 가정하면 현 시세로 대략 1억 골드에 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1억 골드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제국 황실의 한 해 예산이 2억에서 3억 골드 사이다.

황실이 지고 있는 부채가 거의 10억 골드에 육박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인 것이다.

그래도 공국치고는 알차게 모은 편이다.

"5천만 골드는 황가에 귀속하고, 나머지는 분배한다."

"존명!"

타로스는 시원하게 자금을 사용했다.

공국 각지를 털며 알게 모르게 제후들이나 기사들, 병사들이 호주머니를 채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타로스는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문제들까지 단속한다면 누구도 전쟁에 나서려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귀족들이 꽤 있을 터."

"예, 정리 중에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서두르겠사옵니다."

타로스는 다음 행보를 시작했다.

원작의 황제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군주라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취했다.

먼저 아이들에 대한 건이다.

공국의 아이들은 모두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제국의 아이들 1,500명은 타로스가 복귀를 할 때 함께 데려가기로 했다.

그 전까지 천 명 정도의 아이들은 위탁 가정의 형식으로 맡겨 두었다. 제국에서 자금을 지원하여 아이들을 몇 주일 정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공국의 백성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명 정도의 아이들은 오갈 곳이 없었다. 최대한 병영 등에 수용한 후, 그래도 안 되면 신전에 맡겼다.

그리고 오늘.

타로스는 가이아 신전을 찾아 몇 가지 부탁을 하기로 했다.

호위로 세실리아와 레베카를 포함한 수십의 병력만 동원한 후에 간식거리들을 수레에 가득 싣고 왔다.

신전의 마당에서 아이들은 타로스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왔다.

"황제 폐하다!"

"우와아아!"

레베카와 세실리아가 앞을 가로막으려 하였지만, 타로스가 그녀들의 어깨를 짚었다.

"그냥 두어라."

"하오나."

"아이들이 짐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겠는가. 저 아이들 역시 짐의 백성이다."

"...예."

레베카와 세실리아의 눈에 이채의 빛이 흘렀다.

항상 권태감에 절어 있던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지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알기로 황제가 이 정도까지 감정을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보인 다음 행동에서 그녀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헉!"

"아니, 폐하께서 무릎을...."

아이들이 타로스에게 안겼다.

제국의 아이들은 풍문으로라도 타로스가 자신들을 위하여 죽음의 산맥을 넘어 단숨에 진격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을 뻔한 위기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 극적인 순간에 구조됐다.

이는 단숨에 황제와 백성들 사이에 있던 간극을 좁혀 주는 계기가 됐다.

"자, 여기 간식을 가져왔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많이 먹어라. 돌아가기 전까지 사제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네!"

타로스는 아이 둘을 양팔에 안았다.

사탕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는 아이들에게 타로스가 물었다.

"빵은 잘 먹고 있느냐?"

"네, 사제님들이 아주 잘해 주고 있어요."

"그래, 앞으로도 씩씩하게 있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덕분에 살았어요."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황제가 보이고 있는 의외의 모습에 기사들도, 병사들도 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콧등이 시큰해진다.

황제는 분명히 이번 사건을 무시할 수 있었다.

대전쟁까지 예고된 상황에서 재정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병력을 동원하고 직접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였다.

공국은 추후 응징을 해도 되었으나, 황제는 바로 선전 포고를 날리고 죽음의 산맥을 넘었다.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이런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황제는 제국의 아이들을 위하여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것만 해도 위대한 결정이라 할 만하였으나 이번에 타로스는 가이아 신전에 통 큰 기부까지 했다.

아이들을 맡기면서 잘 부탁한다고 무려 10만 골드나 전달했던 것이다.

지옥의 대군주를 처치한 타로스는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신경을 써 주니 황제의 인덕이 대단하다고 사제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자자했다.

병사들이 감격에 젖어 있을 무렵, 저 멀리서 다이온 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대사제 맥시온이 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허허허! 성인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성인이라니. 가당치 않다."

"대악마를 무찌르시고 이런 선정을 베푸시니, 이미 가이아 신전에서는 폐하를 성인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앞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짐이다."

"결국 그것은 영구적인 평화를 위함이 아니겠는지요?"

"...."

분명히 타로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대륙을 일통한 후에 일체의 분쟁을 없애 버리겠다고.

불멸왕이 존재하는 이상 다시 대륙은 분열되지 않을 것이고, 가이아 신전에서는 아예 타로스를 지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원작에서 가이아 신전은 플레이어를 도와 제국을 정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지금은 타로스의 행보로 인하여 그 반대가 된 모양이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다.

"맥시온 사제, 짐이 부탁을 하나 하려 한다."

"하시지요."

"마령회는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이니 성기사와 사제들을 동원하여 공국 각지와 제국에 스며든 일부 세력들을 청소할 것을 청한다."

"빛을 모시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이아 신전 총본단에서 성기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죠."

"두 번째, 죽은 아이들은 최대한 신원을 파악하여 화장해 유골이라도 가져가려 한다. 묻히더라도 고향에서 묻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맥시온은 깊게 허리를 굽혔다.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다."

"폐하, 이번에는 가이아 신전에서 온 소식을 전합니다."

"가이아 신전에서?"

"저희 가이아 신전에서는 폐하의 전쟁을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마령회라는 곳은 공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바, 모조리 뿌리를 뽑아 버리고 영구적인 평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보조하겠다는 입장이지요."

"그래?"

"윤허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의외의 참전이었다.

단순히 타로스를 지지한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전쟁에 동원되겠다고 말할 줄이야.

"신전의 도움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황제의 뜻을 받들어 위령제가 시작됐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죽은 아이들과 병사들까지.

가이아 신전은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제사를 지냈다.

제국의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이를 황제의 당연한 행보로 보았으나,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기사들은 황제의 행보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레베카 님, 폐하께서 정말로 애민 정신이 있는 걸까요?"

"보면 모르겠나."

"너무 급작스러워서.... 감정이란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는데 말이죠."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설마 경은 인간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황제는 위령제가 진행되는 내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화됐다.

저 냉혈한처럼 보이는 겉모습 안에는 따듯한 마음이 있을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위령제가 무사히 끝나고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는 울음바다였다.

백성들부터 시작된 슬픔은 병사들에게, 그리고 기사들에게, 끝내 제후들에게까지도 전염시켰다.

유일하게 황제만이 무심한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제국의 백성들이여, 오늘 우리는 악의 잔재를 보았으며 그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는지 보았다."

"...."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령회로 인한 피해는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타로스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일어나라, 백성들이여. 악마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이런 슬픔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은 선언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악마들이 존재하는 모든 땅을 뒤집어 정화할 것을.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장내가 숙연해진다.

이것을 정치적인 행보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말로 악마들에게 원수가 진 사람처럼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고 선언한 황제.

그 모습에 감화된 누군가가 외쳤다.

"폐하의 행보에 동참하게 해 주세요!"

"동참하겠습니다!"

"참전을 허락하소서!"

"참전하겠습니다!"

타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할 일은 있을 터. 그 마음이라도 함께한다면 이 땅에 악은 뿌리 뽑히고 영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제46화. 사후 처리(2)

지난 일주일은 그야말로 폭풍과 같았다.

구 다이온 공국 내에서는 급격한 변화들이 이루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났으며,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파견되어 정화 작업을 단행하였다.

가장 큰 변화는 국경 영지다.

공왕가나 귀족들 사이에 마령회가 깊숙하게 침투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가이아 신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사들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방어 사령관인 발카스 백작과 그 일가는 반항도 못 하고 처형됐다.

그 이후 5만의 병력이 제국에 귀부하였으며, 타로스는 그들을 자치군으로 편성하고 각지로 파견하였다.

직할령 전체가 안정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위협은 남아 있었다.

왕제 루드비히 공작이 여전히 토벌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타로스는 루드비히 공작을 치기 위한 병력을 구성하고 물자를 모으는 등 한 번 더 진격할 준비를 시작했다.

루드비히 공작령을 정리하는 것을 끝으로 환궁할 계획도 세웠다.

시간은 흘러 2월 말.

제국 직할령으로 편입된 다이온 영지에 관료를 파견하는 한편, 여러 가지 지원책을 마련하는 등의 정무를 끝낼 즈음이었다.

"폐하, 지시하신 인물을 찾아냈습니다."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이... 다이온 영지의 수도인 마키나의 한 허름한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마키나에?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황공하옵니다."

타로스는 구 공국을 해체하고 병합하는 작업을 하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황실 기사들에게 지시하였다.

하나는 공국의 보물인 현자의 팔찌를 찾아내는 것과 미래의 대연금술사인 제스를 찾는 일이었다.

현자의 팔찌는 무너진 공왕궁 지하에 처박혀 있을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열심히 병사들이 삽질을 하고 있었고, 대연금술사 제스는 이름과 특징만 황실 기사들에게 알려 주고 찾으라고 명령했다.

현자의 팔찌는 기간 내에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지만, 대연금술사 제스는 어디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마키나에서 작은 포션 상점을 운영한다는 제보가 있었다.

"안내하라."

"예? 데려오라 명령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직접 가겠다."

"존명."

보고를 올리는 레베카는 도대체 황제가 왜 직접 행차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명령이기에 따랐다.

황실 직할령 다이온의 수도 마키나 상점가.

타로스가 공국을 멸망시킨 이후로 상인들의 얼굴도 꽤 펴졌다.

잘못하면 공국 전체가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도 있었고, 심하면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황제가 공국을 구해 냈기 때문이다.

제국 내에서 개편된 세금 개정안은 이곳 직할령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세금 부담이 줄어들었다.

가뜩이나 흉년에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이었으나 구휼을 하고 세금을 낮추었으니, 곳곳에서 노래까지 울려 퍼지는 상황이다.

도저히 몇 주 만에 이루어 낸 일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성과였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행차를 시작하자 백성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했다.

"황제 폐하의 행차시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타로스의 표정은 무심하였으나 그 겉모습에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체적으로 군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으나 내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스의 상점]

"여긴가."

"황공하옵니다. 이렇게 대놓고 상점을 열고 있으리라고는...."

"됐다. 제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둘도 아니었을 테니."

타로스는 이제라도 찾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미래, 대연금술사로 명성을 드날리게 되는 제스가 고작 이런 허름한 가게를 열어 생활하고 있을 줄은 타로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딸랑! 딸랑!

바깥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연금술사 제스는 딸랑이가 울리자 습관처럼 외쳤다.

"어서 오세요! 뭐든 치료할 수 있는 제스의 상점입니다!"

"그대가 연금술사 제스인가?"

"네, 그런데 누구.... 헛!?"

구부정한 자세로 뭔가를 연구하고 있던 여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허름한 복장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거리를 나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이미지였다. 이름까지 흔하기 짝이 없어 찾는데 오래 걸렸던 것이다.

제스는 타로스의 복장과 기사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바깥에는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도 보았다.

"어어엇! 폐하!"

제스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것이 그대가 만든 포션들인가."

"네, 네! 고급 포션은 이쪽으로...."

"괜찮다."

하급 포션부터 고급 포션까지.

하급 힐링 포션은 아무렇게나 진열되어 있었고, 고급 포션은 유리관에 들어 있었다.

그중 희귀하다는 마나 포션은 아예 이곳에는 진열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서민들에게는 하급 힐링 포션조차 귀했으니까.

"레베카, 질을 확인해라."

"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에 상처를 내더니 하급 힐링 포션을 콸콸 부었다.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상처가 아물었다.

"매개체의 함유량에 비하여 뛰어난 품질입니다."

"그렇다는군."

"아, 예. 나름대로 제가 연구한 방법으로 제조해서 서민들 사이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편이죠."

"이곳 포션이 이름났다는 말은 들었노라."

"가, 감사합니다."

"이제 곧 짐은 대륙 정벌에 나선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대역사지."

"이야기 들었어요. 가이아 신전까지 함께하기로 하셨다고...."

"영구적인 평화의 정착을 위하여 참전하는 것이지."

"하온데 이곳에는 어째서...."

"앞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포션이 필요하게 될 것이니,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왔다."

"네!?"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제의 제안.

도대체 어떤 연금술사가 황제의 제안을 직접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곳 직할령에서 황제의 명성은 도저히 범접하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백성을 구하고 대악마를 처치한 의인.

더욱이 위령제에서 황제의 모습은 많은 백성들을 감동시켰다. 제스 역시 감동한 백성 중 하나였다.

타로스는 대륙에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명분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명분을 신전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제스는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미천한 여자일 뿐이에요. 어떻게 그런 중책을 맡기려 하시나요?"

"제국은 남녀평등의 사회를 구현한 곳이다. 여제후까지 존재하지. 여성이라고 해서 제약받을 이유는 없다."

"네? 하지만."

"제국 전쟁 관리국 산하로 들어오라. 제국의 수도에서 상점을 하고 싶다면 열어도 좋다. 연구도 마음껏 하라. 그저 그대는 좋은 포션을 제공하면 된다."

제스의 몸이 떨렸다.

황제가 직접 와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고 있는 중이다.

명성이 이렇게까지 드높은 상태에서 완벽한 명분까지 제시하니 제스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 이런 미천한 몸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신명을 받아 모시겠습니다."

"레베카."

"옛, 폐하!"

"귀환 길에 제스도 함께할 것이다."

"존명!"

황제가 빠져나간 자리.

제스는 곧바로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리며 다시 쓰러졌다.

"어엇?"

쿵!

"괜찮으신지요?"

"아, 기사님.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죠?"

"꿈이라니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 같은 미천한 여자가 어떻게 황제 폐하의 방문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제스의 말에 레베카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도 제스는 여자가 미천하다느니 관직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느니 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가 기사인 것을 보면 모르겠나요?"

"어.... 그러고 보니."

"실력만 있으면 제후까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제국이죠. 그저 실력에 따라 판가름이 날 뿐."

제스가 눈을 빛냈다.

여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구 공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실력만 있으면 가능하답니다. 어쩌면 저는 미래의 전쟁 관리 국장과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당치도 않아요! 제 주제에 무슨."

꽈악!

레베카는 그녀의 어깨를 꾹 짚었다.

살짝 멍이 들 정도로 압박한 후에 레베카가 또박또박 말했다.

"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니 본인 스스로 미천하다거나 깎아내리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하죠. 본인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남들도 당신을 귀하게 여길 테니까요."

제스는 고개를 숙였지만, 레베카는 그 안에서 야망을 읽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제스가 야망을 가진 것은 아주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너진 공왕궁.

타로스는 하루에 한 번씩 현장을 방문하였지만, 여전히 매몰된 지역의 복원은 요원하기만 했다.

발로그 놈이 얼마나 난장판을 쳐 놓았는지 보물 창고가 깊게 매몰되어 발굴이 쉽지 않았다.

기사들도 도왔고 마법사들도 동원되었지만, 괜히 보물이 손상될 우려가 있어 대부분은 인력으로 잔해들을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타로스는 공왕궁으로 행차했다.

인부들이 예를 취하였으나 손짓을 하여 바로 작업하도록 하였다.

타로스의 곁으로 그란달이 달려왔다.

"아이고, 폐하께서 오셨군요!"

공사의 총책임자는 제국의 제후 중 한 명인 그란달이었다.

구 공국 최후의 적인 왕제 루드비히를 치기 전까지는 그란달이 공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 역시 바닥에 깔려 있는 보물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므로 어떻게든 빠르게 공사를 끝내려 하였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란달 남작, 아직인가?"

"으으, 죄송합니다. 얼마나 깊게 파묻혔는지 파도, 파도 끝이 없사옵니다."

"서둘러야 한다. 이제 며칠 후면 우리는 돌아가야 하니까. 경도 여기서 몇 푼이라도 더 건지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건.... 에헴, 솔직히 그렇습니다. 전쟁에 돈이 한두 푼 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란달 남작도 꽤나 솔직해졌다.

타로스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현장을 전체적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흙을 퍼 올리고 있었고, 꽤 값비싼 물건들이 출토되고 있었지만, 공국의 지하 창고에는 닿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디그 마법은 소용이 없나?"

"처음에는 꽤 빠르게 파들어 갔지만, 지금은 보물들이 완전히 박살 날 수가 있어 마법사들도 몸을 사리고 있는 형편입지요."

"어쩔 수 없지."

타로스는 몸을 돌렸다.

유물의 출토 작업은 닦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유물이 박살 나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개고생을 한 꼴이었으니까.

타로스가 환궁을 하려 할 때였다.

"폐하! 폐하아아아!"

그란달이 눈썹을 휘날리며 흥분한 채 달려오고 있었다.

역시나 황제 앞에서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그란달이다. 전투에서는 피에 미친 살귀처럼 굴더니만.

그란달이 웬 팔찌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파묻혀 있었던 것인지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지만, 백금에 드래곤이 음각되어 있는 모습은 보통 진귀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했다.

타로스는 진실의 눈을 켰다.

대현자의 팔찌

등급: 유물

착용 조건: 마력 40/레벨 제한 50

내구도: 무제한

마력 +50

MP 저장: 0/2,000

대현자 아케인이 제작한 팔찌.

강렬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타로스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군."

#제47화. 사후 처리(3)

다이온 황실 직할령 내에서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타로스는 대현자의 팔찌에 대해 고찰했다.

무려 MP를 500이나 올려 주는 것도 그랬지만, 마력을 저장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초반의 큰 메리트다.

현재 타로스의 마나는 1,800. 여기에 더하여 MP를 2,000이나 저장할 수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마나가 3,800이나 된다고 봐야 한다.

이 정도라면 파워드 킬을 38방이나 뿌릴 수 있는 수치였으며, 앱솔루트 배리어는 19번이나 사용할 수 있다.

최소한 전투를 하는 내내 마력이 고갈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스토리가 중반 이후로 넘어간다면 쓸모가 별로 없게 되겠지만, 그때에는 또 그 당시에 맞는 유물과 신화들이 있었으니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타로스는 유물에 마력을 충전한다.

스스스슷.

MP 저장: 2,000/2,000

마력이 완충됐다.

본인의 마력과 저장된 마력을 구분하는 것은 의지로 가능하다.

타로스가 본인의 마력을 쓰고자 한다면, 팔찌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공왕궁 뒤뜰 연무장에 타로스는 가만히 검을 든 채로 서 있었고, 그 주변을 기사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제후들도 숨을 죽인 채 황제의 수련을 보고 있는 중이다.

타로스는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을 켰다.

시간이 축 늘어지며 느리게 흘렀고, 주변의 사물들이 슬로 모션처럼 흘렀다.

전방에는 허수아비들이 쭉 세워져 있었는데, 몸을 날리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아진다.

"오오!"

"역시나."

흐르는 탄성.

기사들이나 제후들의 목소리도 축 늘어지고 있는 가운데 저장된 MP를 사용하여 연속으로 파워드 킬을 날렸다.

쾅! 콰과과과광!

천지를 흔드는 폭음.

허수아비 다섯 마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연무장 바닥도 완전히 박살 나 가루가 되었다.

타로스는 다시 제자리로 복귀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가 중간이라는 것이 없으니.'

검술이라는 자체를 알지 못하는 타로스였다.

고속으로 이동하며 위급 상황에서는 앱솔루트 배리어를 쳤으며, 필요할 때에 파워드 킬을 뿌려 죄다 박살을 냈다.

지금까지는 모두 죽여야 할 대상에게 즉사기를 뿌렸으나 전쟁이 시작되면 주야장천 파워드 킬만 사용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의 체면에 검술 하나 배우지 않은 것도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검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적당한 검술이 있어야겠는데.'

원작의 황제는 제왕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수백 년이나 이 검술을 수련하였고, 종국에는 무적에 이르렀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타로스는 그렇게 오랜 시간 검술을 익힐 상황이 아니었다. 신화급의 스킬로 무장을 해야만 한다.

초반에 쓰기에 적절한 신화급 스킬은 바로 천지검결.

지금 당장 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율리우스 왕국을 점령하고 나면 그들이 지니고 있던 보물을 털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대전쟁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검술이 필요하기는 했다.

'아쉬운 대로 루드비히 왕제의 검술을 사용해야 하나.'

루드비히 왕제의 영지에는 뇌전검결이 서책 형태로 있었고, 원작의 타로스는 그걸 휘하 기사들에게 던져 준다.

지금의 타로스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은 검술이다.

마력이 늘어나도 즉사기 하나만 들고 대전쟁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타로스는 다시금 사용한 마력을 완충한다.

몸에서 대량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MP 저장: 2,000/2,000

사용된 마나는 천천히 회복을 시작하였다.

필요하다면 마나 포션을 사용하여 급속하게 채울 수도 있었지만,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나 포션 사용은 자제하는 편이 좋다.

마석 자체도 고가였지만 사용 후에는 어지럼증 등을 동반했으니까.

"폐하!"

연무장을 가득 채우며 로빈슨 단장이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가득하였다.

"무슨 일인가."

"반역자 루드비히가 소환 마법진을 완성하였다는 소식이옵니다!"

"...!"

웅성웅성.

술렁거림이 일었다.

지옥 4대 천왕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던 발로그의 등장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때맞춰서 타로스가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공국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기사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폐하! 당장 출격해야 하옵니다!"

"시간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악마의 하수인 놈이 참회를 해도 부족할 판에 일을 키웠군."

"어찌할까요?"

아직 병력 1만이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타로스가 데려온 병력은 영지 전체로 흩어져 귀족들의 병사들을 인계받고 반항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등의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루드비히의 영지는 완파될 것이다.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고, 지옥의 문이라도 열리면 처리가 곤란해진다.

"출격 가능한 병력은?"

"5천입니다!"

"전원 말을 지급할 수 있나?"

"예! 공국 전역에서 군마를 끌고 왔고, 5천의 기병을 편성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줄로 아옵니다."

제국군이 가진 이점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제국군의 레벨은 높았고, 웬만한 자들은 승마를 익히고 있었다.

전문적으로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몰라도 이동하는 것이야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병력을 1만 정도를 모아 루드비히의 영지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일이 급하게 되었다.

"출병 준비를 서둘러라."

"존명!"

직할령 수도 마키나의 성채 앞.

5천에 이르는 기병이 출격을 명령받아 대기하고 있었고, 가이아 신전에서 지원을 나온 성기사 1백, 그리고 사제 20명이 합류했다.

성벽 위는 물론이고 성채 밖까지.

구 공국에 마지막 남은 망령을 제거하는 출병식을 보기 위해 백성들이 죄다 몰려나와 있었다.

타로스는 굳이 백성들을 말리지 않았다.

지금 치안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으며, 타로스가 신의 대리자이자 성인이라는 인식이 뿌리박히고 있었으니까.

타로스는 성벽 위로 올라왔다.

원래부터 황제는 연설을 길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제군들은 들어라."

"...."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렸다.

사명감이 가득한 얼굴.

패할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보다는 최대한 빨리 루드비히 공작령에 도달하여 악마 추종자의 마지막 남은 수괴이자 반역자의 목을 따는 것만 생각했다.

타로스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악의 마지막 씨앗을 제거한다. 루드비히 왕제를 타도하고 놈을 화형시켜 대륙의 평화에 이바지하리라. 출병한다."

"출병하라!"

"추-웅!"

병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악을 박멸하고자 하는 황제의 행보에 백성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두두두두!

5천에 달하는 병력이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북진하였다.

루드비히 공작령은 구 공국에서도 가장 북쪽에 처박혀 있었다.

전 왕은 왕좌에 위협 때문에 자신의 동생을 유배 보내듯 북쪽으로 보냈었다.

마령회는 마치 암 덩어리와 같아 공국의 모든 왕족과 귀족들을 전염시켰다. 그건 루드비히도 마찬가지였다.

루드비히는 다른 왕족들을 뛰어넘는 광신도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대학살이 벌어질 것이 확실하다.

다들 죽어라 말을 달리고 있는 가운데, 기사들은 비교적 여유롭게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기사와 병사의 승마술이 같을 수는 없었다.

성기사들도 병사들과 속도를 맞추었기에 여유로운 기동을 보였다.

로빈슨 단장은 후방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곁에는 성기사단장 에반이 함께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지옥의 4대 천왕이 황제 폐하의 손에 박살이 났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도 믿음이 부족해서야."

"하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신을 모시는 자가 기사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폐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단 한 방에 지옥의 군주를 보내 버렸다는 것이 믿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어느 정도 전투가 격렬하게 펼쳐지지 않았을까 싶어."

"나름대로 조사를 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러니 더 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옥의 4대 군주 중 하나가 죽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마왕이 강림한다고 해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마 가능할 겁니다."

로빈슨 단장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황제가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성기사단장은 그런 로빈슨을 바라보며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단장께서 믿으시니, 저 역시 성인으로 추대된 폐하를 믿어 보겠습니다."

"믿음에 배신당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두두두!

그들의 목소리는 흙먼지에 파묻혔다.

5천의 군대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북진하여 단 이틀 만에 공작령 초입에 들어섰다.

루드비히 공작령.

마령회의 광신도인 루드비히의 영지는 이름만 거창하게 공작령이었지, 사실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겨우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수준이었으며, 영지를 지키는 군대도 고작해야 1천에 불과했다.

이는 제국 준남작령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전 공왕이 얼마나 루드비히를 경계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작은 도시에는 극도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인구도 적고 지대도 높아 제국의 칼날이 비교적 늦게 닿고 있는 바람에 미치광이 공작의 폭정은 더욱 심해졌다.

모든 백성들이 노역이나 병사로 징집되었으며,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람들이 사라졌다.

제국의 포고문이 여기까지 나돌고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이아 신전에서 참전하였고, 마령회를 공식적인 적으로 지정하였으며, 공국 전체가 악마와 관련이 깊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절망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징집병으로 나무창 하나만 지급받은 채 성벽 위로 내몰린 병사들은 저 멀리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제국군이다! 비상종을 울려라!"

영지 기사가 흙먼지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

그러나 어떤 병사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황제께서 오신다!"

"오오!"

"이 잡것들이? 어서 명령대로 움직여라!"

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미 병사들의 눈동자는 반쯤 돌아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한 병사가 기사를 기습하여 목젖을 창으로 찔러 버렸다.

퍼억!

푸하하학!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반란은 큰 불꽃이 되어 영지 전역에 번져 나갔다.

"황제께서 오신다! 성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와아아아!"

"깨어나라, 신의 자식들이여!"

"끄아아악!"

"아아아악!"

성난 군중들이 영지군을 덮쳤다.

#제48화. 사후 처리(3)

영지의 수도 마키나에서 반역자의 영지까지 고작 3일.

공국 전체가 제국에 귀속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지막 하나 남은 영지의 영주인 루드비히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루드비히는 가이아 신전의 적으로도 선포된 상태였다.

제국의 군대는 거침이 없었으며, 순식간에 루드비히의 본성까지 접근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누구도 제국군을 막지 못했다.

애초에 인구 5만에 1천 정도의 병력을 보유한 루드비히의 군대가 제국군을 막을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기도 만무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루하드 산성이었는데, 산성의 군대 역시 황제와 가이아의 깃발을 보자마자 문을 열었다.

무혈입성 후 재정비한 후에 다시 여기까지 달렸다.

저 멀리 불타는 도시가 보였다.

척후병이 빠르게 달려와 보고했다.

"폐하! 도시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신의 사도들이 악마의 군대를 붕괴시키고 있사옵니다!"

"알아서 무너지고 있는가."

"지금까지 잠잠했던 것은 제국군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으로 사료되옵니다."

타로스는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가 사명감에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특히나 성기사들이나 사제들은 당장이라도 적들을 도살해 버릴 것만 같았다.

"적들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빠르게 돌파하여 악마의 수괴를 잡는다."

"존명!"

"폐하께서 악마를 화형시키라 명하셨다! 진군한다!"

"와아아아!"

분노한 군대가 곧바로 도시 내부로 들어가 휩쓸었다.

이미 도시 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혼란에 휩싸인 상태.

병사들은 말에 탄 그대로 루드비히의 군대를 쓸어버렸다.

꽈직!

푸하하학!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는 군대는 이미 군대라고 말할 수 없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루드비히 영지군은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쓰러졌으며, 징집병들뿐만이 아니라 영지 내 속해 있던 병사들이나 기사들도 항복해 왔다.

"살려 주십시오! 저희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저 살기 위해 검을 들었을 뿐입니다!"

"닥치고 포박을 받아라! 너희들의 죄는 심판을 통하여 밝혀질 것인즉!"

병사들이 거칠게 영지군을 추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타로스나 제후들이 나설 필요도 없어졌다.

"괜한 걱정이었나."

"그러나 지금쯤 악마 소환 의식이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줄로 아옵니다.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그럴 필요 있나. 악마가 튀어나오면 죽이면 그뿐이다. 지옥의 악마는 하나라도 줄어드는 편이 낫지."

"...!"

에반의 말에 타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악마가 나타나면 죽여 버린다는 것.

그편이 세상에 이롭지 않겠냐는 뜻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 그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폐하께서 악마를 죽이실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줄 아옵니다."

성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이동한다. 악마가 소환된다면 짐이 직접 상대할 것이다."

루드비히 공작령 지하 감옥.

음습한 기운과 함께 진득한 마기가 흘렀다.

마법진에서는 연신 요사스러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고, 마기에 중독된 자들은 눈을 부릅뜨며 마신을 찬양했다.

"위대하신 악의 근원이시여, 이렇게 엎드려 청하니 이 땅에 강림하시여 그 위대함을 보이소서!"

"마신을 찬양하나이다!"

스스스슷!

피를 머금은 마법진에서는 뭉클뭉클 마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오오, 악의 근원이여!"

마기가 수직으로 솟구치며 주변의 모든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실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왕제 루드비히 공작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떨었다.

"오라, 어둠이 대륙을 잠식하고 짐은 만인의 지배자가 되리니! 만백성이 떨어 울며 짐을 찬양하게 되리라. 크하하하!"

공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완전히 눈알이 뒤집히기 직전이었으며, 온몸의 핏줄이 도드라진 채 광소하고 있었다. 마녀보다 더한 모습이었다.

폭발로 구멍이 뚫리자 훤하게 지하 감옥이 드러났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황제를 비롯한 성기사들과 기사들, 제후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성기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이미 늦었는가."

쿠구구구!

빠직! 빠지지직!

강렬한 뇌전.

지옥에서 올라오고 있는 거대한 악마의 모습에 일순간 전투가 멎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마법진에 집중되었다.

루드비히와 어둠의 사제들이 꿇어 엎드렸다.

"악을 찬양하라!"

"만세!"

"이 세상은 마신 폐하의 대리자인 짐의 것이니! 숭배하라, 만악의 근원을!"

곧이어 대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뿔. 그리고 땅에 닿을 듯한 양쪽 팔과 어마어마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지옥의 뇌전까지.

대악마 마몬이 등장했다.

탐욕을 상징하는 대악마 마몬.

지옥의 4군주 아래 7대 대악마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마몬은 그 중 일좌를 차지한다.

지옥에 떨어진 타락 천사들이 신에 대한 반격을 결의한 후에 만마전을 세웠고, 마몬은 그 한복판에 자리 잡은 후에도 땅을 파고들어 가 금괴를 캤다고 한다. 실로 탐욕의 악마라는 별칭이 잘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아름답던 천사의 얼굴은 변형되어 뱀을 닮은 요괴와 같았으며, 온몸이 검은 비늘로 덮여 있어 절로 혐오감이 들었다.

지옥에서 소환된 대악마를 직접 본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일제히 성호를 그으며 신을 찾았다.

"여신 가이아이시여, 저희에게 악을 멸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소서!"

"악마가 현신하였으되 신께서 저희를 보우하시니 악을 멸할 수 있으리라."

"...."

가이아 신전의 군종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으나 타로스를 비롯한 제후들, 기사들, 병사들은 말없이 뇌전에 휩싸인 마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모두가 황제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지옥의 대군주조차 황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 하수인이라 볼 수 있는 대악마 따위(?)는 단숨에 죽여 버릴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실제로 타로스는 마몬이 현신을 끝내자마자 초공간 도약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즉사기를 선사하려 하였다.

"기다려라. 놈의 현신이 끝나지 않았다."

"예!"

타로스는 검을 뽑아 바닥에 늘어뜨렸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긴장감이 장내를 타고 흘렀다.

꿀꺽!

악을 멸하는 선봉대인 성기사들조차 이 엄청난 광경에는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그나마 독실한 신심에 육체가 무너지려는 것을 방지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이 몸을 소환하였는가.

"오, 지옥의 대악마시여, 제가 당신을 소환하였나이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구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제 루드비히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껏 악마를 소환해 놓았더니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소환 의식을 하기 위하여 희생된 정남 정녀가 무려 1천에 달했다.

그만한 피가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대악마 소환진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소환된 대악마는 현신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말투였다.

-우리 대악마들은 물론이고 대군주들조차 지상계로의 소환이 금지됐다.

"...뭐라고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대군주의 일좌를 차지하신 발로그 님께서 지상계의 황제에게 단 일검에 즉사당하시자 마왕께서 당분간 지상계의 일에 관여치 말라는 명령을 내린 바.

"허어!"

"뭐라고!?"

웅성웅성.

마몬의 입에서 충격적이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타로스가 발로그를 죽인 이후에 마계에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회의를 했다는 뜻이었다.

대군주가 힘도 쓰지 못하고 한 방에 격살되었으니 도저히 그 힘이 무엇인지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예 지상계로의 관여를 금지한 것이다.

하급 악마들이 일개 개인과 계약하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존재들은 소환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마몬의 눈동자가 황제에게 닿았다.

-그대가 바로 위대한 황제인가.

"인간의 왕인 것은 맞다."

-그대는 인간의 왕이되, 경의를 표하노라.

"그거 아쉬운데. 현신하여 한바탕 붙어 볼 줄 알았다."

-나 역시 죽음이 두려운 자. 굳이 절대자와 붙어 명을 재촉할 필요는 없지. 당분간 대악마들은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오라. 짐이 상대할 것이니."

-오늘은 물러가나, 황제여 두려워하라. 마왕 폐하께서 진격을 명하신 날, 중간계가 멸망할 것인즉.

스스스슷!

마몬이 마법진을 통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이미 제국군에 포위된 루드비히는 크게 당황했다.

"돌아와라! 대악마가 줄행랑을 치느냐!"

-소환자여, 거대한 파도를 거스르지 말지어다.

"...."

"허, 저런 미친 새끼가...!"

루드비히의 몸에 축적되어 있던 마기가 빠져나가자 놈 역시 제정신을 찾았다.

소환 의식을 진행하였던 암흑사제들도 크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악마가 두려워 중간계에 나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완전히 마기가 사라지고 제국군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가자 루드비히의 광증이 갑작스럽게 도졌다.

"이런 씨발 새끼야! 내가 이걸 준비한다고 얼마나 많은 백성들을 죽였는지 아느냐!"

사실 황당하기는 여기까지 군대를 몰고 온 기사들이나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7대 악마로 이름이 드높은 대악마가 지옥으로 줄행랑을 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폐, 폐하.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로빈슨 단장이 경외감 어린 표정으로 타로스에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타로스에게 향했다.

"싱겁군. 루드비히를 포박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즉참하라."

"존명!"

"오지 마! 오지 마, 이 새끼들아! 아아아악!"

루드비히의 처절한 외침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다이온 공국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제 공국이라는 이름은 역사서에만 등장하게 되었으며, 모든 강역이 제국으로 편입됐다.

정식 명칭은 다이온 황실 직할령.

직할령에서 최후까지 발악하던 루드비히 공작은 체포되었으며, 마기에 잠식되어 있던 땅은 정화됐다.

오늘, 이곳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백성들부터 제후에 이르기까지.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라도 했을 만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악마의 역소환.

황제의 행보로 인하여 일검에 죽어 버린 발로그 덕분에 대악마급 이상의 악마들은 아예 중간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공언까지 해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일개 도시로 전락한 루드비히의 대로 한복판.

악마에게 크게 뒤통수를 맞은 얼뜨기로 기록될 루드비히 공작의 화형식이 진행됐다.

백성들은 모두 몰려나왔으며 황제는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루드비히의 최후를 지켜봤다.

로빈슨 단장이 외쳤다.

"폐하!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악마의 추종자에게 내려지는 판결은 화형이다."

"죄인을 끌고 와라!"

"읍! 으으읍!"

몇 시간 사이에 사람이 10년은 늙어 버린 루드비히가 포박을 당한 채 질질 끌려왔다.

워낙에 저주의 말들을 퍼붓는지라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으나 최후의 발악인지 몸부림을 치기 위하여 파닥거렸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우악스러운 기사들의 손에서 그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십자가에 루드비히가 묶이자 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짚단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륵!

죄인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재갈이 타 버리자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불쌍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

지옥의 문까지 닫아 버렸으며 악마들을 벌벌 떨게 만든 황제에게 경외의 외침이 터져 나갔다.

"황제 폐하 만세!"

"신의 대리자 만세!"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타로스는 사람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무교인데 말이야."

#제49화. 회군(1)

타로스는 조금 망연자실해진 표정으로 영주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단한 상식으로 영지의 자금이 운영되고, 귀중품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는 지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금괴가 문제가 아니라 타로스가 여기서 취하려고 하는 것은 검술서 원본이었다.

대전쟁을 오직 파워드 킬 하나로 끝낼 수는 없었기에 급한 대로 초반에 쓸 만한 검술이 필요했다.

뇌전검결은 5대 원소 중에서 번개를 사용하며, 검기에 주입된 마나를 변환시켜 주는 나름 신묘한 검술이다.

구 다이온 공왕가에서 루드비히 공작이 분리되어 나가면서 유산으로 받은 고서적이었으며,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주성 자체가 폭삭 주저앉아 버려 찾기가 요원해 보인다.

찾는다 해도 온전하지 않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악마 놈들은 다 부숴 버리는 것이 취미인가."

"황공하옵니다."

레베카는 매우 황송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경이 미안할 필요는 없지."

"지금 영지의 총관이었던 마를로스 남작을 데리고 오는 중입니다. 어쩌면 귀중품들이 다른 장소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라도 기대를 걸어 보아야 하는가."

레베카와 기사들은 타로스가 전쟁 자금 때문에 아쉬워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까지 황제가 보여 준 모습들을 종합해 보면, 타로스는 결코 인간이 이룩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루었기에.

드래곤이 박살 나고 지옥의 군주가 찢겨 죽었으며, 대악마가 소환을 거절할 지경이었으니 설마 검술 하나조차 모를 거라고는 여기지 않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의 손에 마를로스 남작이 질질 끌려왔다.

낭패한 기색의 노인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소신은 그저 역적이 시키는 대로 행하였을 따름입니다!"

"이자는 어디서 찾았느냐?"

"재물을 챙겨 도주하려던 것을 병사들이 체포하였습니다."

로빈슨 단장이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병사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시민들은 병사들을 신의 군대라며 치켜세워 주었고, 그 덕분에 그들은 사명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타로스가 악마를 처치함으로써 얻게 된 긍정적인 변화다.

"단장은 공을 세운 병사들을 보상하라."

"존명!"

"그리고, 너는 마를로스라고 하였느냐."

"예, 예! 죄인 마를로스입니다! 부디 목숨만은!"

"영지의 총관이라면 반역자의 자산을 관리하였을 터."

"살려 주십시오!"

"그걸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지하에 파묻혀 있는 창고 이외에도 분명히 비밀 창고들이 존재하고 있을 터. 영지의 자산들을 찾는데 협조한다면 자유민으로 지위를 격하시키고 목숨은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

"가, 감사합니다!"

생사여탈권을 쥔 황제가 목숨을 보존시켰다.

제국 내에서는 황제의 말이 법이었기에 그 한마디로 마를로스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타로스는 마를로스를 한 번 떠봤다.

"그러니 안내하거라."

"예, 예.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총관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로스는 생각보다 많은 재산이 별장에 보관되어 있음을 알게 됐다.

한적한 호숫가.

호수 앞 별장은 도저히 인구 5만에 불과한 영지의 영주가 가질 수 없는 규모다.

나름대로 루드비히 공왕이 본가에서 분리되면서 재산을 가지고 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5층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대저택.

그 앞은 인공 호수와 잔디, 조경수들로 꾸며져 있었으며 높은 담장이 가로막고 있었다.

다만, 그 안에는 개미새끼 하나 없었다.

일하던 사람들은 공작가가 멸문을 하자마자 짐을 챙겨 떠났으니까.

루드비히의 비밀 창고는 이곳 지하에 파묻혀 있었다.

마를로스가 능숙하게 무언가를 꺼냈다.

"열쇠도 있었나."

"이곳도 소인이 관리하였사옵니다."

"용케 창고의 돈까지 챙길 생각은 못 하였군."

"화, 황공하옵니다."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별장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마를로스가 이렇게 잡힌 이유도 급하게 본인의 재산을 처분하여 늦은 탓이니, 이 노인의 욕심도 상당했다.

철컹!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그 안쪽에 금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무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기다려라."

"존명!"

도대체 왜 황제가 먼저 들어가려 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기사들은 명령을 내렸기에 들을 뿐이다.

저벅저벅.

타로스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는 지하 창고를 걸었다.

한쪽에는 상당한 양의 금괴가 쌓여 있었다. 족히 100만 골드는 되는 금액이다.

이 작은 영지에서 이 정도 자금을 모았다는 것은 공왕가에서 분리될 때 가져온 자금도 있었지만, 수탈이 심각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백성들의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한 자들이 많았으니 세율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제국과 같은 세율을 적용한다고 하였을 때 바로 백성들의 마음도 돌아선 것이다.

굳이 타로스가 신전의 지지를 받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을 것이 분명하다.

타로스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금괴 뒤에 쌓인 무구들.

풀 플레이트 메일 한 벌, 몇 가지 무기와 갑옷류, 건틀렛 등이 있다.

매직 등급 중에서는 꽤 쓸 만한 것이 있어 건틀렛과 깃털 장화 하나씩을 챙겼다.

오우거 건틀렛

등급: 매직

착용 조건: 힘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30/30

힘+15

대장장이 루헨스가 말년에 제작한 건틀렛.

오우거의 피가 함유되어 있다.

깃털 장화

등급: 매직

착용 조건: 민첩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20/20

달리기 속도 +20%

스태미나 회복 속도 +20%

대마도사 아케인이 취미로 만든 장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쁘지 않은데."

의외의 수확이다.

죄다 매직 아이템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스토리 초반부터 큰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유물급의 아이템들이야 타로스가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발굴하여 사용하는 것이지만, 원래 게임에서는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개발자의 특전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가 없었던 내용들.

타로스는 건틀렛과 장화를 챙긴 후, 앞으로 더 나아갔다.

유리관 안에 담긴 보석이나 골동품들이 보였다. 역사적인 가치를 담고 있거나 미관상으로 아름다운 장식들이지만, 역시 타로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창고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고서적 한 권을 발견했다.

타로스는 진실의 눈을 켰다.

[뇌전검결]

고대어로 쓰여 있는 뇌전검결의 원본이다.

촤륵!

서책을 넘기니 알 수 없는 형식의 글자들이 배열되어 있었고, 어떤 형태로 수련을 하는지 행동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느 정도는 주석까지 달려 있었으나 역시 루드비히는 완벽하게 해석을 끝내지 못한 것 같았다.

만약 이걸 보고 수련하려 하였다면 바로 포기했을 만큼이나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로스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화르륵!

망설임 없이 서책을 태웠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뇌전검결이 각인됐다.

검술을 전혀 모르던 타로스는 이제 검을 쥐는 방법부터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 마나를 운용하고, 어떻게 뇌전이 형성되는지, 기본적인 공격법과 방어를 위한 자세까지.

모든 것이 각인된다.

"수련이 필요하겠는데."

급한 경우라면 수련 없이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검술에는 숙련도라는 것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하여도 직접 펼치며 몸에 익혀야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익히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위력을 발휘하는 신화급 스킬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적은 양의 마력으로 오랫동안 검술을 펼칠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타로스는 밖으로 나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비밀 창고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재물들을 매각한다."

"존명!"

영지가 안정화되고 중앙군이 퇴각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한 떼의 인마가 대로를 가로질렀다.

기사들이 향하는 곳은 성벽이다.

황제가 직접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영지의 기틀은 빠르게 잡혀 나가고 있었다.

성벽 위에도 근무가 제대로 시작되었으며, 영지 내부는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검문소에 황실 기사단장이 나타나자 병사들의 몸에 바짝 군기가 들어갔다.

"추웅!"

"별문제 없나?"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칙령이다. 백인장 레이븐은 어디에 있느냐."

"치, 칙령!? 백인장님을 모셔 와라!"

"예!"

3분도 지나지 않아 상당히 피로해 보이는 남자가 무장을 갖추고 달려왔다.

로빈슨은 레이븐 백인장이 어제 당직 근무로 인하여 지금까지 잠을 자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은 지엄한 법.

레이븐이 뻣뻣한 자세로 경례했다.

"충! 백인장 레이븐입니다. 칙령을 받들어 왔습니다!"

"그대가 레이븐인가."

"옛!"

백인장은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

단순히 상부에서 부른 것이 아니라 칙령이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최근 황제의 위상은 제국 내에서도 대단했지만, 공국을 단숨에 쓸어버리고 악마들의 군주를 처치한 그 위명은 일개 백인장이 범접하기 힘들었다.

감히 병사는 쳐다볼 수 없는 절대자.

황제가 불렀다는 것은 단순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폐하께서 찾으신다. 가자."

"알겠습니다!"

오라를 받은 것도 아니고 분위기도 썩 나쁘지 않았다.

레이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타로스는 다이온 직할령에서의 마지막 이벤트를 준비했다.

여기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아이들도 구출했고 악마들을 처치하였으며, 유물과 검술도 얻었다. 매직에 불과하지만 쓸 만한 아이템을 얻은 것도 소소한 이득이다.

이제는 회군을 해야 한다.

일개 도시로 전락한 루드비히에서 영지의 수도인 마키나까지.

군대가 철수한 후에는 바로 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공국은 제국 직할령이었으나 엄연히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던 국가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고, 실력 있는 병사가 기사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타로스는 낙후된 이 사회에 인식의 변화를 주려 했다.

평민도 제후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말이다.

대로변 한복판.

타로스에게 백인장 레이븐이 당도했다.

레이븐 LV. 70

제국 직할군 백인장.

물론 타로스가 아무에게나 기사 작위를 주려는 건 아니다.

레이븐 정도면 제국에서 준기사 정도의 실력은 되었고, 이번에 큰 공을 세웠기에 수련 기사로 임명하려는 것이다.

굳은 표정의 병사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다소 과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대가 바로 혁명군을 이끌었던 백인장 레이븐인가."

"미천한 병사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타로스는 피식 웃었다.

제법 아부도 할 줄 안다.

"제국은 공을 세운 자를 우대하며, 병사도 제후가 될 수 있는 체계를 갖춘 곳이다. 큰 공을 세운 레이븐에게 수련 기사의 작위를 내린다."

"헉! 가,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만세!"

웅성웅성.

평민도 제후가 될 수 있다는 황제의 선언.

많은 사람들의 눈이 뭔가에 대한 갈증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제50화. 회군(2)

황제의 어가는 직할령 수도인 마키나에 도착했다.

시간은 흘러 이제 3월 초.

수도로 복귀를 하고 개전을 시작하면 4월 중순에서 5월 초는 될 것이라 계산되고 있었다.

다이온 공국을 멸망시키고 편입하는 과정에서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이번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제국은 배후에서 큰 위협을 상대할 뻔했다.

악마의 군대가 후방을 위협한다면 제국의 군대는 바로 회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후방을 안정화시켰으니, 황제의 행차는 단순한 공국의 병탄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타로스는 회군 전에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임시 관청에서 이번 전쟁에 참전한 제후들과 기사들,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분배하고 황가에 귀속될 재물들을 정리했다.

"아몬."

"예, 폐하!"

말석에 앉아 있던 아몬이 임시로 마련된 황좌 앞에 부복했다.

"이제 곧 각지에서 군상들이 몰려올 것이다. 구 공국에서 나온 재물들이 상당한 바, 경이 협상해라."

"맡겨만 주십시오!"

아몬의 눈이 반짝거렸다.

제국은 능력을 우선시한다.

무력이 강하다면 제후로, 그 이외에 다른 능력이 있다면 궁정 귀족이 될 수 있다.

타로스가 대륙 정벌을 선언하였으므로 곧 국토는 팽창하고 궁정 귀족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남자라면 야망을 갖는 것이 당연한 법.

기왕 제국 상단에 발을 들였으니 쭉쭉 승진하여 궁정 귀족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이 시험이다.

공국에서 털어 낸 전리품을 제값에 매각하는 것.

협상의 결과에 따라 금액도 달라질 것이니, 아몬의 입장에서는 막중한 임무다.

"경은 협상 후에 제도로 귀환하라."

"존명!"

"제론 경."

"예, 폐하!"

제국 1기사단장 제론이 군례를 취했다.

"다이온 직할령은 꽤 안정이 되었으나 제국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바, 경이 군정을 펼쳐 완전히 반군의 뿌리를 뽑도록 하라."

"존명!"

전쟁만큼이나 제국의 배후를 안정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제후를 이곳에 둘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적당한 행정관이 파견되기 전까지 제론 단장이 직할령을 관리하며 군정을 펴기로 했다.

"어사들은 나오라."

"예!"

제국의 어사들.

제국 어사대는 타로스가 알고 있는 조선의 암행어사에서 착안했다.

어사대는 내, 외부의 위협을 감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등의 역할을 한다. 현대의 정보국과 부패 수사국이 합쳐진 형태라고 보면 된다.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사건의 일등 공신들이다.

"6품 어사 다이로 경을 4품 어사에, 7품 어사 레빈을 5품 어사에 봉한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빈슨 단장에게 명했다.

"제국에 귀부한 직할군 중에서 참전을 원하는 자들을 추린다. 2만을 동원할 것이다."

"존명!"

이만하면 되었다.

타로스는 회의 종료를 선언했다.

"오늘 오후, 회군한다."

직할령 수도 마키나 성벽 앞.

제국군은 회군을 하기 위하여 모였고, 거리마다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황제를 배웅하였다.

타로스가 지나갈 때마다 만세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만세!"

"와아아아!"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황제의 뒤로 황실 기사들이 호종하고 제후들이 뒤따른다. 그리고 줄줄이 병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꽃송이들이 흩날렸다.

3월 중순이었으니 꽃이 피는 계절.

마키나 전역에 꽃송이가 휘날리는 것은 자연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백성들이 황제의 회군을 아쉬워하며 뿌리고 있는 것이 더욱 많았다.

"민심을 잡으셨습니다, 폐하."

로빈슨이 흐뭇하게 웃으며 돌아봤다.

"민심은 천심이 아니겠느냐."

"저는 잘 몰랐습니다. 백성의 힘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이번 원정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꺾일 수 있으나 그것이 모이면 쉬이 꺾이지 않는 법이지. 백성이 있어야 국가도 있다. 짐이 군림할 수 있는 이유도 백성들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들은 제국의 근간이 된다."

"심오한 뜻이로군요."

"물론 경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이는 군주의 몫이니."

타로스는 곧바로 회군하려 하였지만, 백성들이 워낙 열렬하게 지지를 보내는 통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성벽 밖으로 사열하고, 백성들의 눈동자가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타로스는 천천히 성벽에 올랐다.

저벅저벅.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대감에 가득한 표정들이 보였다.

황제가 통치를 시작하였으니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고.

"다들 고생 많았다. 특히나 마음고생이 심하였을 터."

"폐하...."

타로스의 표정은 무심하였지만 본심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이런 황제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회군하는 마당에 굳이 길게 연설을 할 필요는 없었기에 타로스는 최대한 짧게 이야기를 간추렸다.

"그대들은 짐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타로스는 그렇게 돌아섰다.

그 뒤로 백성들의 환호성이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제국과 구 공국의 경계, 발카스 영지.

제국군은 전속력으로 주파를 하여 3일 만에 발카스 영지에 다다랐다.

타로스는 여기서 제후들과 헤어지기로 했다.

"모두 돌아가 물자와 병력을 준비하고 제도에서 만난다."

"크윽! 폐하!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 섭섭합니다."

그란달이 오버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상당히 그란달과 친해진 란투스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아악! 왜 그러십니까!"

"참전 안 할 거냐? 한 달 후에 다시 뵙게 될 것이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이것이 폐하에 대한 충심으로 보이지는 않는 겁니까!"

"충심이 아니라 아부로 보인다."

"됐다. 그란달 남작, 한 달 후에 보겠다."

"예! 부디 살펴 가시기를! 다시 만나는 날까지 강녕하십시오!"

타로스는 여러 제후들과 인사를 나눴다.

곧 만날 사이들이었지만, 헤어짐은 늘 아쉬운 법이다.

특히나 여행을 하며 친분을 쌓았던 제후들이 아쉬워하였다.

"황제! 곧 본다! 아니, 봅니다!"

거기에는 바바도 빠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란달이 바바의 뒤통수를 쳤다.

빠악!

"컥! 왜 때려!?"

"그 말투 좀 고쳐라! 언제까지 폐하께 반말을 지껄일 거야? 엉!?"

"죽고 싶어!?"

"가능은 하고?"

제후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민족들이 대거 융합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바바와 같은 자들의 모습은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고 제국 이외의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제후들의 인식도 변화해야 한다.

타로스가 선언했다.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타로스는 중앙군을 몰아 서진했다.

돌아올 때에는 보병이 다수였지만, 회군할 때는 전원이 말을 타고 있어 빠르게 기동했다. 아무래도 타로스는 빠르게 돌아가 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구 공국에서 강탈한 말들을 이용하여 빠른 회군을 택했던 것이다.

두두두두!

제국의 병력이 일제히 질주했다.

곧 있으면 또다시 전쟁이 있을 터이지만, 타로스는 섭섭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이것으로 긴 여행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은 끝났다.

제국의 국토가 넓어지고 전쟁에 집중하다 보면 이렇게까지 길게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을 것이다.

스토리 중반으로 넘어가야 또 이런 기회가 올까.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그 덕분에 제후들의 마음을 얻지 않으셨습니까."

"일부는 그렇지."

기사들은 현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았지만, 타로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의 설정이 제후들의 '역심'이었다.

전쟁 중이야 어쩔 수 없이 역심을 드러내지는 않을 테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공국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항상 공존하는 것이다.

레베카가 눈을 반짝이며 타로스를 바라봤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소신이 곁을 지키겠사옵니다."

"든든하구나."

제국군은 빠르게 진격하였으며 3월 말경이 되어서야 제도에 입성했다.

천년 제국의 고도 브론티아.

타로스와 중앙군은 무려 보름 동안이나 열심히 달려 제도에 닿았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며 황제를 환영하는 인파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다.

지난 반년 동안 황제는 폭풍과 같은 행보를 보였다.

제국을 위협하는 대부분의 적들을 부숴 버린 것이다.

드래곤이 그러했고, 여러 네임드 보스들이 그러했으며, 마지막에는 마계의 개입까지 막았다.

악마들의 군주인 발로그를 죽인 공로로 성인으로 추앙까지 받으며,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가호를 받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과정 중에 얻은 어마어마한 자금들이 풀리며 그 어느 때보다 브론티아의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자금은 오히려 더 늘어 황실 재정이 휘청거리기는 하였지만 백성들의 삶은 나아졌다.

여기에 세금 감면까지.

완전히 뒤바뀐 분위기에 기사들마저 적응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와아아아!"

환호하는 백성들.

그들은 황제가 나타나면 그저 두려워하기에 바빴었다.

그러나 황제가 불가능한 위업을 이룰 때마다 그 소식이 도착하였고, 백성들은 오히려 황제를 기다리는 상태까지 되었다.

민심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다면 80점 정도는 된다고 해야 할까.

타로스는 당당하게 백마를 타고 입성했다.

황궁 앞에는 궁정 귀족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심을 경하 드리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경들도 고생 많았다."

"아니옵니다. 폐하의 은혜로 제국이 상당히 안정되어 가고 있어 소신들도 일할 맛이 났사옵니다."

"그런가."

재상의 얼굴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타로스는 대전쟁을 선언하고 나서 바로 여행길에 올랐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의 위협들을 없애 버렸지만, 재상부와 궁정 귀족들에게 가해지는 업무량은 가히 살인적이었을 것이다.

공작령급이 넘어가는 두 영지가 황실 직할령으로 편입되면서 늘어난 일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아카데미 학생들을 일찍 졸업시켜 충원한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그런 지시가 아니었다면 죄다 과로사하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로스는 고생한 귀족들에게 위로금을 내리며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와락 안겨 들었다.

"폐하! 보고 싶었사옵니다!"

"잘 지냈소?"

황제와 황후의 만남.

많은 사람들이 흐뭇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타샤의 귓속말이 타로스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오늘 밤은 주무시지 못할 거예요."

"그건...."

괜히 식은땀이 흐르는 타로스였다.

#제51화. 폭풍 전야(1)

다음 날 오전.

타로스는 밤새도록 황후에게 시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해방(?) 될 수 있었다.

세계 최강자라고 불리는 그였으나 기껏해야 신화 스킬 몇 개로 인하여 부풀려진 것에 불과했고, 기초적인 체력은 레벨 80대에 이르는 나타샤에 근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 체면을 구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열심히 밤일에 열중하다 보니 피골이 상접해졌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으나 이미 전시 행정부가 구성된 상태였고,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가 태업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어쩔 수 없이 피곤함을 삼키며 등청했다.

"황제 폐하께서 등청하십니다!"

"황제 폐하 만세!"

경외감이 가득한 궁정 귀족들.

그들은 이번 전쟁 이후 궁정의 귀족이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전시 행정 총감으로 재수된 라터스 후작이 덕담을 늘어놨다.

"황제 폐하의 은혜로 제국은 평안하며, 만백성은 황실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사옵니다."

"모두 경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망극하옵니다!"

귀족들은 황제가 달라졌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였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에 반쯤은 황좌에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었지만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황제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제국 전체를 하나로 뭉치게 하였고, 율리우스 왕국을 병탄하겠다는 목표로 움직였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어전에 넘치는 가운데 타로스가 라터스에게 물었다.

"물자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총 80%가 완료되었습니다. 저희 행정부의 능력이 부족하여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신의 능력 부족이옵니다."

"아니, 경은 충분히 노력했다."

노구가 굽어졌다.

재상은 자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환갑이 갓 넘었지만 80대로 보이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의 고생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로스는 재상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세종 대왕이 황희의 사직을 한사코 만류하며 부려 먹었던 것처럼, 죽기 직전까지 이용해 먹을 생각이다.

"또한 이는 제국 중앙군의 충원에서 비롯된 것이니 경들을 탓할 생각은 없노라."

"황공하옵니다."

"선전 포고문은 작성됐나?"

"예, 명령하시면 바로 전달할 예정입니다."

"선전 포고문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국의 움직임에 율리우스 왕국도 가만있지는 않을 터."

"그렇사옵니다. 국경에는 병력이 충원 중이며 저희 정보부에서는 총 40만에 이르는 대군이 모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각국의 전쟁 물자들의 가격은 치솟고, 물자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제국 내 물가가 30%만 올랐다는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다.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돈 후, 율리우스 왕국에는 비상 체제가 선포되었고 운명을 건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전시 동원령을 내렸다.

어떻게 해서든 기초 군사 훈련을 시켜 내보내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물자들을 소모하였는데 가히 블랙홀이 따로 없다고 한다.

제국과 율리우스 두 강국이 대륙 중부의 패권을 다투기 위하여 움직이자 각종 물가들이 치솟기 시작하였다.

율리우스 왕국 내의 물가는 무려 100%나 급등하였다 했다.

"폐하, 발언을 청하옵니다."

어사대장 라팅 자작이었다.

타로스는 먼저 라팅 자작의 노고를 치하했다.

"허한다. 경의 발 빠른 대처로 제국의 아이들을 구하고 마계의 침입을 사전에 차단하였으니 이는 큰 공이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폐하의 은혜가 바다와 같사옵니다."

라팅 자작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는 전쟁에 관련된 문제를 이야기했다.

"율리우스로 파견된 세작에 의하면 이번 전쟁에 용병왕 아론이 참전한다고 합니다."

"용병왕 아론?"

장내가 술렁거렸다.

아론은 용병계의 절대자로 군림한다.

율리우스 북쪽 경계 너머에 자유 도시를 영지로 가지고 있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령 한마디에 움직일 수 있는 용병은 무려 10만이 넘었다.

용병도 문제였지만, 아론의 실력도 대단하다.

이는 게임 초기 설정에 유저들을 돕는 대표적인 NPC였기 때문이다.

'레벨이 97에 이르렀던가. 어마어마한 쾌검을 사용하는 바람에 꽤나 까다로운 적에 해당하지.'

원작에서라면 타로스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니, 용병왕 아론이 이렇게 빨리 등장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타로스는 생존을 위하여 선전 포고를 감행하려 했다.

아론과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휘하의 용병 5만을 이끌고 참전하였사옵니다."

"이유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소 황망한지라...."

"있는 그대로 말하라."

"대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의 제국을 징벌한다는 이유입니다."

"웃기는 놈이군. 그 녀석은 이미 명분에서부터 지고 들어간다. 짐은 마계의 침입을 막았다. 또한 가이아 신전에서 지지를 표명했지. 제국이 악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안 그런가, 햄슨 추기경."

"허허허, 그렇습니다."

귀족들의 시선이 추기경 햄슨에게 쏠렸다.

지금껏 신전은 그 어떤 국가의 분쟁에도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타로스가 마계의 문을 막아 버리고, 4대 군주 중 하나인 발로그를 처리해 버렸다.

이는 천계에서조차 관심을 가질 정도로 지대한 사건으로, 교황청에서는 타로스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영구적인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대의에 동참했다.

대륙에는 피가 흐르겠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타로스의 수명은 거의 영구적이라 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신전에서는 병력을 얼마나 동원하나?"

"성기사단 1천과 전투 사제 백 명입니다. 전례가 없을 규모이지요."

"교황청의 추기경 입장에서 볼 때, 용병왕 아론의 주장은 가한가?"

"어떤 명분도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이렇다는군. 어사대에서는 이러한 신전의 입장을 퍼뜨리도록 하라."

"존명!"

"용병왕 아론이 참전한다고 하여 긴장할 필요 없다. 그놈이 드래곤에 비하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렇다고 발로그에 비하겠느냐. 짐이 처리할 것이다."

경외의 빛이 흐른다.

황제의 단일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다.

전쟁이란 혼자 수행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황제 혼자 모든 적을 쳐부숴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일대일 전투에서는 누구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한 달 안에 개전한다. 그 전까지는 준비를 마쳐야 하는 바, 경들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존명!"

전쟁 준비에 대한 여러 가지 안건들이 처리된다.

전시 행정부에서는 황제가 이 순간, 태업을 일삼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황제가 나서지 않는다면 일들을 우회적으로 처리하여야 했는데, 그 절차도 까다롭고 업무량도 어마어마하였기 때문이다.

준비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전쟁 관리국 산하 제국 상단.

전쟁 관리국이란 전쟁에 관련된 모든 준비와 지원을 하는 곳이다.

물자의 준비부터 시작하여 정보의 수집, 세작의 파견까지.

어떻게 보면 전쟁 관리국은 전쟁 중이라는 가정하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 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제국 상단에 속하게 된 아몬은 7품 관리직으로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배워 나갔다.

그의 수하들은 9품 관리직으로 등용됐고, 일단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위에서 지시하는 일들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타로스는 단순히 아몬이 적응을 잘 하고 있는지 들른 것인데,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가의 치솟는 속도가 비정상적이라고?"

"네, 네!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물증이 있나?"

"물증은 없으나 심증은 있죠."

"경의 생각을 말해 봐라."

아몬은 미래의 대상인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헛소리쯤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상인의 눈에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아몬은 여러 가지 경제 관련 차트를 늘어놓았다.

"재상부에서 갖은 노력을 하여 제국 내 인플레이션을 30%에 멈추게 하였다는 것은 실로 괄목상대할 만한 변화죠. 하지만 외국에서 들여오는 물자들이 문제입니다."

"그야 특수를 노리는 상인들 때문이겠지. 짐이 경제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쟁이 터지면 물가가 폭등하고, 상인들이 어느 정도 가격을 후려치는 것은 언제나 있어 왔던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느냐? 그것도 불가하다. 평시보다 어느 정도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하지."

"물자의 가격이 오르는 거야 당연한 일이며, 그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도 3배는 너무합니다."

"3배?"

"평시의 이문 3배라면 몰라도 물가 자체가 3배나 올랐다는 건 중간에서 누군가가 가격을 후려치고.... 험험, 중간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경의 판단에 의하면 제국 내부에 누군가가 외국의 상단들의 뒤를 봐주며 의도적으로 가격을 올려 중간 마진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군."

"과, 과연 영명하십니다."

지금 시대에 타로스 만큼의 식견을 가지고 있는 군주는 없었다.

군주란 숲을 보는 존재이지, 나무를 보는 존재가 아니다.

경제학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식견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했다. 군주가 신경 써야 할 일은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몬이 놀란 것은 이 때문이었다.

톡. 톡. 톡.

타로스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는 황제가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습관이었기에 아몬은 숨죽여 다음에 튀어나올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보면 황제가 손을 대는 순간,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진다. 타로스는 성격상 모든 문제를 뿌리 뽑아 버리려고 했으니까.

황제는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어사대장을 불러라."

"바로 칙명을 전달하겠습니다!"

'과연.'

아몬은 황제 특유의 집요함이 발동했다고 봤다.

대전쟁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사대장을 부른다?

아예 본격적으로 사건을 파헤쳐 버리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이었지만 어사대장 라팅 자작은 만사를 제치고 달려왔다.

"신, 라팅. 폐하의 부르심을 받고 대령하였사옵니다!"

깊게 부복하는 라팅 자작.

타로스는 지금까지 아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간략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라팅 자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어떤 놈들이 황실의 자산을!?"

아몬은 일이 커질 것을 직감했다.

"제국 내 쥐새끼들이 서식한다. 황실의 곳간을 파먹고 있는 버러지들이 있으니 쥐약을 쳐서라도 박멸해야지."

#제52화. 폭풍 전야(2)

그믐달이 구름에 미약하게 깜빡이고 있는 밤.

귀족파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오로스 후작의 영지에서 대회합이 열렸다.

오후 내내 화려한 연회를 벌이고 밤이 되어서야 비밀스러운 야합을 할 수 있었다.

이 자리는 오로스 후작을 비롯하여 란데스 백작, 벤자민 백작, 한스 자작 등이 함께하고 있다.

오늘 모인 자들은 인더스강을 끼고 발달한 영지들의 영주였다.

담합을 위한 모임.

그들은 전쟁 특수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황제가 어마어마한 무력을 선보이며 제국을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덕분에 직접적인 반기는 들지 않았지만, 권력을 위한 욕심에는 그 끝이 없는 법이다.

권좌에 눈이 돌아간 몇몇 귀족들은 미래를 위하여 최대한 많은 자금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손을 대고 말았다.

"황실의 재정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오로스 후작의 말에 세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누가 봐도 황실에서는 무리를 하고 있었다.

라이톤 공작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드래곤 레어와 다이온 공국을 탈탈 털었기에망정이지, 그리하지 않았다면 결코 전쟁 준비를 마치지 못하였을 정도다.

황실은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었기에 전쟁 기간 내내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날 것이다.

전쟁을 마친 황제는 무엇을 할까.

권좌에 미친 자들은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간다.

란데스 백작이 황제의 행동을 예측했다.

"결국 황제는 노른자위 땅까지 매각하려 할 것입니다. 공로에 따라 영지를 분배하고 나서도 말이지요. 보통 전쟁 후에는 하나 정도의 영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황제는 매각을 통해 대량의 영토를 분할할 겁니다."

"그래. 그렇게 예상되기에 우리는 자금을 모아 두어야 한다."

당장 반란은 불가능하더라도 권력의 축을 비트는 정도는 가능하다.

권력이란 곧 영토와 군사력에서 나오는 법.

제국의 체계가 좀 비정상적이라 강한 순으로 영지를 분배하고 권력을 쥐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같은 계급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영토를 보유하였느냐에 따라 발언권이 달라진다.

파워 게임을 제대로 하려 한다면 영토는 무조건 크고 봐야 했다.

"혹시나 황제가 전쟁 전에 우리를 타격하기 위해 움직이지는 않을까요?"

"자네는 왜 이렇게 새가슴인가?"

한스 자작의 말에 귀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한스 자작은 이 파워 게임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상상도 할 수 없이 강력한 무력을 가진 황제라면 귀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너무 대놓고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닌지...."

"황제는 경제에 별 관심이 없지. 오죽하면 전쟁으로 재정난을 극복하려 하겠나. 군주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것 봤나?"

"그거야."

"빠지고 싶으면 빠지게."

"크, 크흠.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걱정이 돼서 그렇지요."

"쯧쯧, 전쟁 후가 중요하네. 그때, 제국 권력의 판도가 바뀔 것이니."

그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직접 움직이기 위하여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른 아침.

타로스는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 역시 새벽까지 황후에게 시달렸지만, 그렇다고 수련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개전까지는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전쟁에서 주야장천 파워드 킬만 날릴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검술의 숙련도를 올려놓아야 한다.

뇌전검결 안에는 원소를 검술에 접목시키는 것을 넘어 기본기와 무학의 전반적인 이해가 담겨 있었다.

머리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육체에 맞게 수련하고 익숙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보는 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련을 하려는 것이다.

황제가 새로운 검술을 수련하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어려서부터 검술에 푹 빠져 지냈으며 기사가 꿈이었던 황후까지 구경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나왔다.

'조금 부담이 되는데.'

수많은 눈이 타로스에게 꽂혀 있었다.

기사들은 수십 년이나 검을 수련한 전문가들이다.

그들이 검의 초보인 타로스가 수련하는 모습을 본다면 자칫 이상한 소문이 나돌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황제는 대륙 최강자로 남아야 하는 법.

타로스는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을 병합하여 수련을 하려 했다.

무심하게 내려앉은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가 없다.

이를 두고 기사들은 무아의 경지라느니, 몰아일체의 경지라느니 하는 말들을 쏟아 냈다.

"과연, 이것이 폐하의 수련인가."

"정신을 수양하고 계시는 것 아닌가?"

"이미 머릿속으로는 저 허수아비들을 무한하게 도륙하셨겠지. 검로를 예측하고 계신 게야."

"검술이 미숙한 저로서는 폐하의 의도조차 예측을 할 수 없군요."

"...."

타로스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구경꾼은 황제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련.

파앙!

타로스의 몸이 사라졌다.

슬로 모션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는 육체를 느낀다.

빠지지직!

타로스는 빠르게 움직이며 검술을 쏟아 냈다.

뇌전검결의 원소를 마력을 이용하여 구현하고 정해진 검로에 따라 검을 찔러 넣는다.

콰아앙!

허수아비들이 차례대로 타서 가루가 되었다.

검을 들고 찌르는 타로스도 놀랄 정도의 위력이었다.

"와아!"

"과연 폐하의 검술이시다!"

단순한 찌르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들.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은 듯이 중얼거렸다.

"결국 검로라는 것은 군더더기를 빼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 깨달음의 소유자가 누군지 보니, 제국 기사들의 정점인 로빈슨 단장이었다.

레베카가 곁에서 극하게 공감했다.

이번에는 황실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실리아가 물었다.

"단장님, 폐하의 검에서 나간 것이 무엇인가요?"

"원소다."

"검기에 원소를 주입할 수 있나요?"

"저건 검기의 형태가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를 최대한 자제한 형태인 것 같은데. 너무 빨라서 자세히는 못 봤다."

"와.... 여행하면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역시 인간을 초월한 영역이네요."

"하하! 대악마가 두려워 지옥으로 줄행랑을 치지 않았나. 어찌 폐하를 일개 인간과 비교하겠나? 그 자체가 불충이네."

"네, 단장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이라면 타로스가 워낙에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검로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이 아니라면 간파 당했을 실력이었다.

팟팟!

타로스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초감각과 초공간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을 해야 했고, 검술이 접목되니 도저히 평범한 검술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 허수아비를 가격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황후가 경외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목검을 잡았다.

"폐하! 가르침을 청해요!"

"무엇이?"

"저도 기사를 추구하던 몸이에요. 지금은 비록 국모가 되었지만, 한시도 검을 놓지 않고 있었답니다."

타로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평생 검을 수련한 황후와 대련을 한다?

대륙 최강자로 불리는 타로스의 입장에서 보면 승리는 무조건 전제되어야 하고 가르침 역시 내려야 했다.

제국에 아무리 남녀평등의 기조가 깔렸다지만 신체적으로 남성이 우월했고, 아내를 가볍게 찍어 누르지 못한다면 위엄에 손상이 간다.

타로스는 오늘 처음 검법을 펼친 것에 불과했다.

"어찌하여 짐과 대련을 하려 하시오. 여기 기사들도 많지 않소."

"폐하께 배우고 싶어서요. 기사들이 제대로 알려 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황후가 황제를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존경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은 맞다.

팬심이라고 해야 할까.

기사들의 눈에서도 기대감이 흘렀다.

'실전에서 검술을 써야 실력이 는다고는 하였지만.'

평범하게 대련해서는 이길 수 없다.

파워드 킬이 아닌 검술만을 이용한 대결이라면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타로스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화급 스킬들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가 없나. 검을 드시오."

"감사합니다!"

그녀는 꽤나 신이 나 있었다.

잠시 흥분하였지만 대련이 시작되자 황후는 날카롭게 찔러 왔다.

타로스는 초감각과 초공간 이동을 켜고 매우 사소한 움직임만으로 그녀의 검을 모조리 피했다.

허공을 가르는 황후의 검.

파공성에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보니 황후도 예사 실력은 아니다.

신화급 스킬들이 아니었다면 크게 낭패를 할 뻔했다.

황후가 기사급 실력을 가졌다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다.

여기서 단 한 방이라도 허용하면 그만한 개망신도 없다.

퍼어엉!

"꺄악!"

황후의 목검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기사들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검을 직접 맞대지 않고 있다가 단 한 방에 상대방의 검을 조각내 버렸기 때문이다.

"역시나 폐하시군!"

"황후마마께서도 꽤 오래 수련을 하신 모양이지만 역시 폐하께는."

타로스는 내심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무시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황후의 검술은 너무 공격에 치중되어 있소."

"그런가요?"

"검술이란 조화로움이 강점이오. 공격에만 치중하려거든 창을 들었어야지."

"네!"

황후의 기는 전혀 죽지 않았다.

타로스는 대륙 최강자로 알려진 인물이니, 그런 사람에게 패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 검을 부딪치자 타로스도 배우는 바가 있었고, 어차피 신화 스킬이 있는 이상 기사급 인물들에게는 패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황후와의 대련이 끝나자 한 기사가 용기를 내서 외쳤다.

"폐하! 신에게도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저도...."

"저 역시 부탁드립니다!"

무심한 타로스의 눈동자가 기사들에게 닿았다.

"한꺼번에 덤벼라."

열기가 가득 찬 연무장.

황제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기사들은 튕겨져 나가 연무장 밖으로 처박혔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돌아가며 황제를 공격하였으나 역시나 난공불락이었다.

사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황제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아가기 어려웠다.

"쯧쯧, 감히 폐하께 대련을 청하다니. 황후마마야 그렇다고 치고."

"저러다가 전쟁하기도 전에 다들 의무실에 실려 가는 건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로빈슨과 레베카, 그리고 세실리아가 대결을 관전하고 있는 중이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새롭게 로빈슨의 종자가 된 레이븐이 황제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퍼엉!

"끄아아악!"

빠아악!

"아아악!"

기사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큰 타격을 입지 않은 기사들은 다시 달려들었고, 황제에게 맞아 쓰러지기를 수십 차례.

결국 이 난리는 어사대장 라팅 자작에 의해 끝났다.

"폐하! 급한 보고가 있사옵니다!"

"혹시 일주일 전 짐이 직접 조사하라 명령한 내용인가?"

"그렇사옵니다!"

타로스가 목검을 내밀자 로빈슨 단장이 빠르게 달려와 받았다.

워낙에 많은 기사들이 덤벼들다 보니 땀도 약간 났는데,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낸 후에 물을 한 잔 머금었다.

"경과는?"

"조사가 꽤나 빨리 끝났사옵니다. 그 결과는 폐하께서 예상하신 그대로입니다."

다소 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이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꺼려졌다.

그걸 알기에 라팅 자작도 기사들 앞에서 조심하는 것이었다.

문서를 읽던 타로스의 입꼬리가 슬쩍 뒤틀렸다.

"이 쥐새끼들을 어떻게 요리한다?"

#제53화. 폭풍 전야(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