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천재 행정가(1)
주력군을 격파한 제국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왕국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40만을 완성하였고, 왕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을 쏟아부은 결과물이 격파됐다.
더 이상은 병력이 나올 여력도 없었으며, 극히 일부의 방어군을 제외하면 모두 전쟁터에 내보냈기에 제국군을 가로막을 자는 거의 없다시피 한 형편이다.
거침없는 진격.
이미 전쟁에 참전하였던 왕국의 제후들은 모두 죽음을 당한 상태다.
곳곳에 백기가 걸렸고, 타로스는 영지의 식량 창고를 털어 구휼을 하는 한편, 남는 식량들은 제국으로 보냈다.
이것으로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왕국을 치는데 대외적인 명분이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첫 번째 목적은 제국에 기근이 들어 왕국을 털어 충당하겠다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국토도 넓히고 영구적인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하여 대륙 정벌을 선언하였으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율리우스 왕국의 완벽한 병탄.
이를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으나 타로스가 기대하는 인재를 얻을 수 있다면 시간은 당겨질 것이다.
'베이너스 백작.'
율리우스 왕국 내 최고의 인재.
타로스는 기획자 시절에 밸런스 붕괴라고 불릴 정도의 행정가를 심어 두었다.
타로스 황제가 최강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행정 쪽으로는 대륙 최고 수준의 인재를 율리우스 왕국의 중립파 귀족으로 만들었다.
이제 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폐하! 베이너스 백작성에서 백기가 올라왔사옵니다!"
"그런가."
"베이너스 백작은 전쟁을 반대하는 중립파 귀족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끝내 병력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부한 귀족들의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제국은 진격하며 항병을 받아들이고 몸집을 불렸다.
개전 당시에는 40만이었던 군대가 지금은 60만에 이르고 있었으며, 병탄이 완전히 끝나면 그 병력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고, 율리우스의 영토는 제국의 50%에 이른다.
치안을 유지하고 국경에 배치되어야 하는 병력만 해도 40만을 훌쩍 넘어갈 것이다.
제국이 움직였으니 이제 주변국은 모조리 가상 적국으로 규정해야 했다. 모든 방면에 군대를 배치해야 하니 군대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두두두두!
저 멀리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백기를 든 기사단이었는데, 그 기사단을 이끄는 자는 설정한 그대로 동양풍의 차림을 가진 학사였다.
하리온 베이너스 백작.
20년 전, 실크 로드에서 넘어와 왕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재.
율리우스 왕국의 선왕이 하리온의 능력을 알아보고 등용하여 백작위까지 받았다.
왕국의 재상까지 지냈지만 선왕이 승하한 이후에는 낙향하여 영지를 돌보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전쟁이 터졌으나 끝까지 제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며 외교적으로 풀어 보자고 주장했던 자다.
분명히 전쟁 쪽으로는 보수적이지만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탁월한 천재다.
펑퍼짐한 장삼에 수염을 허리까지 기르고 있는 50대 초반의 남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으며, 이곳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인종이었다.
지구로 치면 동양인, 포비아 킹덤 세계관에서는 서양인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제국의 예법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귀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절대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자.
타로스가 베이너스 백작을 얻는다면 제국과 왕국의 병탄 과정이나 제국 내 행정 체계는 신속하게 정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에 강경한 평화주의자라 설득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경이 바로 천재 행정가라 불리는 베이너스 백작인가. 가문의 시조로군."
"그저 선왕께서 저를 높게 평가하여 과분한 자리를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 경은 제국에 귀부하겠는가?"
"왕국은 거대한 파도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신의 가족들과 백성들의 안위만 보장해 주신다면 귀부하겠습니다."
"들어가지."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귀부였다.
평화를 추구하기에 어쩔 수 없이 제국에 귀부를 하는 것이라고 할까.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제국의 귀족들이 다소 불만을 드러냈다.
"오만한 작자입니다, 폐하. 명령을 내려 주시면 바로 쓸어버리겠사옵니다."
랭턴 공작이 조용히 청해 왔다.
어쩐지 찜찜하다는 뜻이었다.
타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찜찜함은 백작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고 나서 죽여도 충분하다. 뭔가 꾸미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숙청하는 것이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짐의 융합 정책에 스스로 반대하는 꼴이니 이는 모순이다."
"그러나 약간의 증좌라도 나온다면 신을 소 잡는 칼로 써 주셨으면 하옵니다."
"그러지."
랭턴도 그제야 안심하고 물러났다.
타로스는 도시 밖에 제국군을 주둔시키고, 함께하고 있는 제후들과 호위 기사들만 대동한 채로 본성에 들어섰다.
베이너스 영지의 수도 카페온.
카페온 내부의 분위기는 다른 영지와는 사뭇 달랐다.
대체적으로 지금까지 지나온 영지의 영지민들은 지배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했다.
그저 제국군이 해만 입히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는 행동이었고, 구휼을 하자 오히려 제국을 환영했었다.
하지만 카페온은 달랐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지만 제국군을 침략자로 대하는 눈빛이었다.
백성들의 상태도 양호하다.
깨끗했고, 다른 영지의 백성들처럼 마르지 않았다.
거리 역시 청결하였으며, 치안은 매우 안정되어 보였다.
'역시 천재 행정가인가.'
한때 왕국 전체를 경영하며 경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명재상이 바로 베이너스 백작이었다.
그가 낙향을 하여 영지에만 집중하니 백성들이 영주를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카드로 후작이 그 광경을 보더니 감탄했다.
"왕국 내에도 제대로 된 귀족이 없는 것은 아니군요."
"경도 그리 생각하나."
"백성들의 눈빛은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불안함이 뒤섞여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영지와는 좀 다릅니다."
"그만한 인재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지."
황제와 그 일행들은 영주성으로 입성했다.
입성 후에도 백작가의 형식적인 행동들이 이어졌다.
영주는 물론이고 가신들과 병사들, 기사들, 게다가 백성들까지 웬만하면 제국이 그냥 물러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으며, 마이페이스를 이어 갔던 영지다.
봉건제 사회였기에 이런 쇄국 정책이 가능했던 것이다. 외부의 세력은 일절 들이지 않고 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영지만 먹고 살면 된다는 그런 느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투박하지 않을 정도로 식사가 대접된다.
타로스는 상석에, 제국의 제후들이 좌측에, 우측에는 영주와 가신들, 영주의 가족들이 자리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영지를 보니 지금까지 얼마나 잘 관리가 되어 있는지 알겠더군."
"황공하옵니다."
"경은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제후 중 하나이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전쟁은 만악의 근원이옵니다. 국토를 넓힌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이렇게 멸망을 맞이하게 되어 있지요."
"전쟁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이구나."
"그저 수많은 목숨들이 덧없이 스러지고, 국가 내 막대한 피해를 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필요하다. 외적이 침입한다면 어쩔 텐가?"
"내부의 힘을 키우고 대항할 정도로 국력을 신장시킨다면 점령될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떠한가.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짐은 외적을 이끄는 수괴일 터."
"그건."
제국의 제후들은 무심한 표정의 베이너스 백작을 황제가 탐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쟁 중 이 정도로 영지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능력이다.
과거의 이력에서 그가 왕국을 몇 번이나 경제 위기에서 구해 냈는지 알고 있었기에 황제가 설득을 시도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쟁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평화주의자 베이너스 백작.
그리고 대륙 정벌을 선언하고 율리우스 왕국을 멸망시킨 황제.
제후들은 조금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이번 전쟁은 조금 다릅니다. 반드시 왕국이 패할 것을 알았기에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에게는 애국심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저 미증유의 위협이 닥친다면 온전하게 백성들을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미증유의 힘이라."
"대륙의 그 누가 제국을 감당하겠사옵니까."
톡. 톡. 톡.
타로스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괜히 제후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하여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로스가 이러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포비아 킹덤 최고의 행정가를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다.
무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제국의 제후들에게 있어 상대방을 논파해 버린다는 자체가 매우 드문 일.
그러니 제후들은 백작을 논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타로스가 입을 열었다.
"경은 전형적인 평화주의자로군. 전쟁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건가."
"필요한 경우에는 전쟁이 필요하나, 막을 수 없다면 백성을 챙기는 것이 낫습니다."
"조국이 멸망하지 않았나."
"중앙 집권 체제의 국가에서는 애국이 최고의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봉건제 사회가 아니겠사옵니까. 영지의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챙겨야 합니다."
"경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힘이 없는 평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는 바, 오직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역사적으로 그러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역사란 인간이 만들어 나가는 것. 짐은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모순이라 생각하나?"
"제가 이 대륙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륙은 반드시 일통과 쪼개짐을 반복한다."
"그 말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사옵니다. 그렇기에 인연이 닿는 자들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지요."
"경은 합쳐진 대륙이 쪼개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강력한 힘을 가진 국왕이 승하하면 그 당시에 정비되어 있던 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무리 완벽한 제도도 부패하기 마련이니, 이를 완벽하게 통솔할 군주가 부재한다면 반드시 왕국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경의 말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노라."
타로스가 입꼬리를 살짝 뒤틀었다.
이 강경해 보이는 행정가를 논파할 틈이 생겼다.
#제70화. 천재 행정가(2)
"모순이라니요?"
"경이 말한 전제 조건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 붕어하는 것이다. 아무리 제도를 잘 정비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무능한 왕이 탄생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면 왕권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지. 맞나?"
"맞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짐도 동의한다. 대륙을 일통한다고 하더라도 짐의 사후에 내 자식들이 제국을 잘못 경영하면 내부부터 썩어 들어갈 것인즉, 경이 살던 곳에서는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라는 고사대로 되겠지."
"...!"
베이너스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양 문화권, 그러니까 포비아 킹덤에서는 서양으로 불리는 대사막 너머의 국가들은 이런 철학적인 선문답을 많이 하고는 했다.
그런 이야기가 황제에게서 툭 튀어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왕권이 부패하면 왕국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며 강력했던 왕들의 업적들도 스러질 수 있음이야."
"...그렇습니다."
"그러나 백작, 짐은 불멸한다."
"...."
"영원한 평화를 이룩할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1만 년 정도의 평화를 유지할 순 있지. 인간에게 있어 이 시간은 거의 영구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인간이 어찌 1만 년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짐은 300년 전, 수련을 끝내고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에 불멸의 생명을 얻었다. 드래곤의 정수를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불멸왕이라는 칭호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까?"
"짐의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건."
제국 황실은 신비에 휩싸여 있었다.
수백 년이나 타로스 황제가 집권하였고, 워낙 오랫동안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 태업하게 되었다고.
그러한 소문들이 있었지만, 이는 모두 제국에서 정치적인 수를 썼다고 여겨졌다.
진정 인간이 수백 년이나 통치를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러나 제국의 제후들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말이다.
"랭턴 공작."
"예, 폐하."
"경은 오랜 시간 짐을 보아왔지. 경이 보기에 짐은 나이가 들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베이너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멸왕에 대한 진실.
사실 주변국에서는 이것이 제국을 미화시키기 위하여 꾸며 낸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복어가 몸을 부풀리듯 제국 역시 끊임없이 모든 부분을 부풀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영속하는 황제이기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베이너스 백작 역시 불멸왕에 대한 소문은 들었으나 이 역시 흘려들었다.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랭턴이 증인으로 나서서 그 사실을 증명했다.
"폐하를 처음 뵈었을 당시, 제 나이가 7세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무려 40년 전의 이야기이지요."
"40년 전이라니...."
베이너스 백작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공작은 담담하게 과거를 회상했다.
"그 당시에도 폐하의 외모는 20대 중반 정도에 머물러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폐하를 뵈었었고 신이 공작위를 받은 것이 어느덧 20년 전의 일입니다."
"그동안 짐의 제위가 바뀌었느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짐은 300년 전에 제위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일곱 번이나 황후가 바뀌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식을 가질 생각은 하지 않았느니라.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지. 이러한 기조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짐이 일인 황권을 유지하며 만 년을 살아간다면 과연 황권이 흔들리겠느냐. 베이너스 백작, 경이 말해 보라."
"그것은."
베이너스는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영속하는 황제.
인간의 머리로 생각하기에 1만 년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시간이다.
황제는 제위를 물려받기 전에도 200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벌써 나이가 500살이라고.
저렇게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도, 어떤 것에도 감흥이 없는 이유도 너무 오랜 세월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베이너스가 말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한 가지 간과하고 계신 점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그 오랜 세월 동안 지금의 생각이 바뀌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감정의 마모를 걱정하는 것이더냐."
"맞습니다."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제국이 분열될 일이 없으니, 감정의 마모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하오나, 수천 년을 살아가다 보면 흔들리는 날도 오지 않겠습니까."
"맹약으로 보증할 수 있다."
"으음."
침음이 흐른다.
황제는 자신의 감정이 마모되더라도 제국이 분열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정말로 대륙은 하나가 되어 영구적인 평화를 누릴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변수도 있을 수 있으며, 반드시 1만 년의 평화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마음가짐이 그렇다면 최소한 수천 년 동안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러하다면.
베이너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연유가 있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있지."
"하명하시지요."
"제국의 궁정 귀족이 되어라. 재상부에 속하여 통일 제국의 수많은 과업들을 수행하도록 하라."
"허어!"
"그런 과분한 일이라니."
다들 놀랐다.
과연 황제는 무엇을 보고 이런 중임을 맡기는 걸까.
베이너스 본인도 그리 생각했다.
"제가 그런 중임을 맡기에는 부족합니다."
"경은 부족하지 않다."
"그걸 어찌 자신하십니까?"
"짐은 500년을 살아왔다. 사람 보는 안목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황제의 말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50년도 아니고 500년이나 살아온 사람의 안목은 과연 어떤 걸까.
상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제가 반역이라도 일으킨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반역?"
타로스가 무심한 눈으로 베이너스를 바라봤다.
그 눈길을 받은 백작이 괜히 몸을 떨었다.
"진압하면 그뿐이다."
자신감 어린 발언이었다.
이미 대륙 최강의 실력을 가진 황제가 어마어마한 권력까지 가지고 있다면 반역을 일으킨다고 해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
암살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면 신속하게 진압하면 된다.
굳어 있던 백작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베이너스는 일어나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쿵!
그러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폐하의 대업에 동참하겠습니다."
그날 밤.
베이너스 백작은 가신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모았다.
오늘 황제와의 저녁 식사는 베이너스의 운명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베이너스는 망설임 없이 선언했다.
"우리는 제국의 수도로 간다."
"아, 아버님! 갑자기 제국의 수도라니요?"
"폐하께서 영지는 계속해서 유지시켜 주시기로 했다. 그러나 제국에는 강자만이 제후가 될 수 있지. 귀족의 작위를 유지하려면 궁정 귀족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면 한 대에 한해서는 영지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
물론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한 것이었고, 베이너스는 좀 더 큰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대에서 대륙이 통일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대륙은 워낙에 넓으며 폐하께서 율리우스 왕국을 멸망시켰다고 하여도 그것은 대륙 중앙부의 패권을 쥔 것뿐이다. 대륙에는 포비아 제국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앞으로 상당한 시일이 걸리겠으나 그 기반을 만드는 것만 해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평화주의자가 아니셨습니까?"
"그렇기에 폐하를 수행하려는 것이지."
자신을 닮아 검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소영주 가르니아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제국의 법을 따라야 한다.
제국이 율리우스 왕국을 병합하는 순간 예견되었던 일이다.
제국 휘하에는 무려 60만이 있다.
항병들은 제국의 물결에 동참하였으며, 많은 영주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군사 강국 포비아 제국은 순식간에 주변국을 병합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황제는 500년이나 살아오면서 막대한 경험을 쌓고 있었다.
전쟁은 물론이고 오만 가지 학문에 통달해 있다.
서양의 고사를 읊을 때에는 온몸에서 전율이 이는 듯했다.
영속하는 황제이기에 의미가 있는 일.
막연한 미래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갈 것이다. 영지는 네가 맡아서 운영하여라."
"아버님."
"영주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영주가 되려 하거든 그만한 실력을 키워야 한다. 제국의 법도가 그러하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약육강식을 실제로 적용하는 국가에 충성한다니요."
"이러한 제도로 제국을 이루었지. 대륙 중앙의 패자인 율리우스 왕국이 제국에는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제국이 강병인 이유.
일반인이 병사가 되어 기사로 발전할 수도, 더 나아가서는 귀족 가문을 탄생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어떤 가문이라고 해도 영속할 수가 없었다.
제국에서는 황제조차 바뀔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어떻게든 노력을 감행했고 기사나 제후들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폐하를 따라나설 것이니 그리 알거라."
이제 각자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
영지에 있거나, 세상의 중심이 될 제국의 수도 브론티아로 가거나.
다음 날 아침.
타로스는 바로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국왕은 죽었고 칙령으로 율리우스 왕국이 멸망하였지만, 수도가 점령되지 않은 이상 온전하게 멸망을 논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최단기간 안에 수도를 점령해야 한다.
수도에 제국의 국기가 꽂혀야 율리우스를 완전하게 병탄한 것이라 선언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율리우스 전역에 제국군을 뿌리고, 행정관을 파견하는 등의 업무가 남아 있었으나 수도까지 가면 좀 더 안정적으로 병탄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이다.
10만 대군이 영지 앞에 도열하고 있었다.
타로스는 천천히 영주성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이 뒤를 따랐고 제후들이 어가를 호종한다.
베이너스 백작이 황제를 따르기로 한 이상, 백성들 역시 황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백성들이 영주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뜻이었다.
"베이너스."
"예, 폐하!"
황제의 어가로 베이너스가 달려왔다.
타로스는 그에게 세제 개편안을 건네줬다.
"이것이 제국의 세법이다. 얼마 전에 짐이 개정했지. 잘 읽어 보고 점령지 전체에 적용하기 바란다."
"존명!"
개편안을 들여다보는 베이너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고대의 국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개편안이었기 때문이다.
베이너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타로스가 영지 밖으로 나와 병사들을 한 번 슥 훑어보더니 말했다.
"율리우스라는 이름을 완전히 지울 것이다. 수도로 진격한다."
#제71화. 천재 행정가(3)
율리우스 왕국의 수도 베논.
지난 500년 동안 찬란한 역사를 이어 온 베논이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슬슬 날씨는 더위가 시작되는 6월 중순이다.
개전 두 달 만에 강국 율리우스가 멸망하고 베논에는 제국의 국기가 펄럭거렸다.
타로스는 이곳을 점령하기 위하여 20만 대군을 끌고 왔지만 베논의 성문은 힘없이 열렸다.
이미 베논의 수비대는 자취를 감추었고, 무정부 상태가 되어 거리에는 황량함만 감돌고 있었다.
"이곳이 왕국의 고도 베논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꼴이 말이 아니군."
"왕가의 사람들과 궁정 귀족들은 모두 재산을 정리하여 급하게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타로스보다 앞서 베논으로 진공하였던 랭턴 공작의 보고였다.
거리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으로 군대의 행군을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도저히 일국의 수도라고는 결코 볼 수가 없는 광경.
타로스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랭턴이 계속해서 보고했다.
"백성들은 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이 도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지하 세력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하 세력? 암흑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왕가에서 도시를 떠나고 공권력이 사라지면서 힘 있는 자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지요."
"꼴이 말이 아니겠군."
"약탈과 강도는 일상적이며, 부녀자들은 집 밖으로 나오는 것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수도의 물가는 300% 이상 폭등하였고 상점가는 죄다 털려 고리대가 성행하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암흑가의 지배를 받으며 수많은 노예들을 양산하고 있사오며, 이미 지하 경제가 도시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
세기말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제후들은 저마다 랭턴의 보고를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십 년 동안 왕국의 재상으로 있으며, 일개 왕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전 재상 베이너스 백작의 분노는 더 했다.
"외적이 침입한다면 마땅히 힘을 모으거나 최후를 함께해야 하는데, 이렇듯 꼬리를 말고 도망치니 참으로 답이 없는 작자들이옵니다."
제국으로 귀부한 귀족 베이너스.
그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만약 공권력이 조금이라도 기능하여 도시 내 남아 있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궁의 상태는 더욱 심했다.
성벽은 무너지고 곳곳이 불탄 자국으로 가득했다.
약탈과 함께 방화까지 일어난 흔적들이다.
창고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완전히 털려 버렸고, 병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몇몇 시종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오갈 데가 없어서 숨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타로스는 어전으로 접어들었다.
한때 왕국의 중심부였을 어전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왕좌의 보석들을 이리저리 빼내어 폐물을 연상케 한다.
그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제후들이 마차에서 통째로 옥좌를 떼어 와 설치했다.
타로스는 천천히 걸어가 옥좌에 앉았다.
제후들은 부복하였으며 기사들은 흉흉한 기세로 주변을 경계했다.
"평신."
의자도 없어 제후들은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시종장도 도주하였나."
"아닙니다. 시종장은 남아 있었습니다."
"데려와라."
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장년의 남자가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카, 칼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시종장 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라."
"그것이...."
"어허! 폐하의 앞이다. 어서 고하라!"
랭턴이 윽박을 지르자 칼은 더욱 몸을 낮게 움츠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으로부터 보름 전, 제국이 수도를 향하여 빠르게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새롭게 왕으로 추대된 제임슨 국왕이 바로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일주일 전 왕궁을 떠났다.
남아 있던 수도 경비대와 기사들, 궁정 귀족들과 시녀들까지 박박 긁어모아 북쪽으로 향했고, 찬란했던 베논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그 이후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피난민들이 수도 없이 발생하였고, 도시에는 방화와 약탈, 강간, 강도 등이 끊이지 않으며 지옥도가 펼쳐졌다.
의외로 이런 혼란을 정리한 것이 바로 암흑가 세력들이었다.
도시에는 원래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암흑가들이 있었다.
자르, 칼트, 막시안이라는 세 조직이 각각 구역을 나누어서 피난민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수도의 물가는 치솟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백성들은 그들이 운영하는 고리대에 손을 대고 식량을 받아 갔으며, 며칠 전부터는 과중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속출했다.
"...노예 상인들이 얼마 전에 도착하여 노예들을 쓸어 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정보다 빠르게 제국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그들은 지하 세계로 숨어들었습니다."
"지하 세계?"
"이 도시의 지하수로를 이름입니다. 또한 뒷골목과 빈민가를 어울러 지하 세계라고 불리옵니다."
"개판이군."
타로스가 한마디로 감상평을 내렸다.
제국의 수도 브론티아는 암흑가가 설칠 수가 없는 구조였다.
황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암흑가를 굉장히 경멸하였는데, 태업의 와중에도 암흑가 세력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면 곧바로 군대를 동원하여 쓸어버렸다.
그렇게 몇 차례 뿌리를 뽑아 버리자 아예 제국의 암흑가 세력은 준동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노예 제도도 마찬가지다.
제국에서는 스스로 노예가 되거나 전쟁에서 발생한 노예들만 인정한다. 다른 나머지가 적발되면 가문까지 멸문시켰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과 고리대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노예가 늘어나면 세금을 낼 백성들이 줄어들고, 그만큼 손실이 온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그건...."
"신이 설명 드리겠습니다."
왕국의 귀족이자 재상이었던 베이너스 백작이었다.
타로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신이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끊임없이 이 문제를 근절시키려 노력하였사옵니다만, 쉽지 않았습니다. 왕국에서는 힘 있는 귀족들이 스스로 고리대를 놓았고, 그리하여 수많은 노예들을 확보했었습니다. 아예 고리대를 왕가에서 놓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신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끊임없이 재기하여 바로잡았으나 끝내 제도화되지 않아 노예의 양산을 막지 못했습니다."
"왕국 내 노예의 비율은?"
"20% 정도입니다."
"허어."
제국의 제후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스스로 살을 깎아 내는 짓을 왜 할까.
이런 인식의 차이는 바로 제국과 왕국의 정치 체계에서 발생한다.
한 대에서 끝나는 가문들이 많은 제국에서는 굳이 많은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양민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국은 달랐다.
노예의 자식은 노예가 되었고, 더 많은 노예를 양산한다.
그 노예들은 귀족들이 권력을 세습하며 대물림되니, 이런 문제들이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국민의 20%가 노예라는 것은 고대의 기준으로 보면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짐은 원래부터 암흑가 세력을 경멸한다. 그저 사회를 좀먹는 쓰레기들이지. 앞으로 율리우스 왕국의 법은 없다. 철저하게 제국의 법을 적용시킨다. 고리대는 연 30%로 고정하고, 고리대로 인하여 발생한 노예들은 모두 면천한다. 암흑가 세력은 알아서 신고를 하고 모든 사업체를 정리하여 합법화한다. 계도 기간은 3일이다. 그 안에 정리하지 못한다면 무차별 진압할 것이라 포고해라."
"존명!"
"이에 대한 정리는 베이너스 백작이 맡는다."
"맡겨만 주십시오!"
베이너스 백작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타로스는 이를 위하여 백작에게 3만의 병력과 1개 기사단을 맡겼다.
베논의 지하수로.
이 오래된 지하수로가 처음 건설을 시작한 것은 500년 전이다.
그 당시에는 인구가 이렇게까지 많지도 않았고, 도시의 크기 역시 지금의 3할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는 늘어났고, 계속하여 증축을 하다 보니 지하수로도 꽤 복잡해졌다.
폐쇄된 지하수로가 즐비하였기에 이곳은 암흑가 세력들의 거주지가 됐다.
베논 암흑가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그동안 수많은 암흑가 세력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였으며, 지상의 이권과도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지하수로는 상당히 복잡했고, 외부에서 개입하기 어려운 구조였으므로 오히려 땅값(?)이 지상보다 비싼 곳도 있었다.
베논 남부를 영역으로 하고 있는 자르의 총본부.
곳곳에 숨어 있는 어쌔신들이나 화려한 지하의 저택, 그리고 전문적으로 수련을 하여 조직원을 양성하고 있는 자르는 예사 집단이 아니었다.
자르의 보스 피엘은 제도 곳곳에 나붙은 최후 통첩문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황제라는 작자도 미쳤군. 본인이 지상에서나 황제이지, 그 힘이 지하에까지 미칠 거라 생각하나."
"보스, 가볍게 생각할 일만은 아닙니다."
"어째서?"
"제국은 허약한 왕국군과는 그 궤를 달리합니다. 40만 대군 중 1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제는 항병들까지 흡수했다고 합니다. 제후들이나 기사들은 괴물 같은 실력을 지니고 있고, 십인장 정도의 병사가 왕국 기사 수준의 무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어느 정도 타협을 생각해 보시는 것도."
"이게 나이를 처먹더니 미쳤나!?"
조직의 머리이자 2인자인 잽슨에게 보스가 소리를 질렀다.
포고문대로라면 그냥 죽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지하 세계의 모든 이권을 내려놓고 합법으로 사업체를 전환한다면 남아날 사업체가 없었다.
기껏해야 도박장이나 유흥 관련 시설 몇 개만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노예의 면천.
이건 좀 타격이 크다.
고리대의 이율 역시 연 30%로 고정한다.
일주일에 30%를 받아도 부족할 판에 월도 아니고, 연이율이 30%라고 한다. 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도대체 왜 고리대를 놓는단 말인가? 그냥 백성을 구휼하는 의적이 되고 말지.
화룡점정은 조직을 해체하고 국가에 보고한다는 것.
아예 모든 이권을 내려놓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포고문은 헛소리를 그럴싸하게 늘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촥! 촤좌좌작!
보스는 포고문을 찢어 버렸다.
몇몇 간부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보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진노하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두렵지만, 그렇다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는 없다. 인간이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오히려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가진 것을 잃는 것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문다.
대체적으로 모든 조직들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
황제의 포고문 따위는 뒷간의 휴지로 사용하고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3일이 흘렀다.
#제72화. 천재 행정가(4)
황제의 포고문이 붙은 지 3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정말로 황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암흑가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포기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황제의 포고문을 지킨 암흑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포고문을 지킬 정도라면 암흑가에서 버티지 못한다. 바로 다른 암흑가 세력에 먹혀 버리고 만다.
암흑가란 공권력에 반대하는 세력들.
그들은 그저 숨을 죽인 채로 기다렸고, 4일째가 되어서도 황제가 움직이지 않자 조금씩 지상으로 올라와 채무 불이행자들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자르의 중간 간부인 체이슨은 이번 주 채무 불이행자들을 확인해 보더니 낄낄 웃었다.
"오늘도 먹잇감들이 꽤 많군!"
"헤헤, 형님. 과일 가게 주인의 딸이 꽤 반반하던데 한번 맛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녀석은 눈이 꽤 낮군. 나는 대장간 딸내미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촤륵.
체이슨은 명부를 넘겼다.
일주일 이자 50%.
당장 먹고살기가 빡빡한 백성들에게, 귀족가 저택을 털거나 간 크게 왕궁을 털어 마련한 식량들로 고리대를 놓았다.
백성들이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전쟁을 준비할 당시에 식량이란 식량은 모조리 긁어 갔기에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피폐해졌고, 어쩔 수 없이 고리대를 썼다.
수도를 점령한 황제가 조금씩 구휼미를 풀기 시작했다지만 겨우 풀칠만 할 수 있는 수준.
백성들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몰려왔고, 순식간에 암흑가들은 많은 노예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황량한 거리.
'체르나 과일 가게'라고 쓰인 가게로 조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주인장! 오늘이 이자를 갚는 날인데 말이야!"
"아이고, 어르신! 제발 일주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주일? 일주일이면 원금의 두 배가 넘어가는데 말이야. 우리는 어디 땅 파서 장사하나?"
아니다.
그들은 귀족가나 왕가의 부스러기들을 털어 장사한다.
전쟁으로 물가가 상승하기 전에는 대량의 식량을 저장하여 대비했었다. 그리고 백성들을 수탈했다.
"그럼 계약서대로 네놈의 딸을 노예로 데려간다."
"뭣이라고요!? 그런 조약이 있을 리가...."
"여기에 수결하지 않았냐."
"아니, 그런 조약은 분명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계약서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놈이군! 어서 데려와라!"
"예, 형님!"
곧바로 가게들이 박살 나고, 조직원들은 잠옷을 입고 있는 10대 후반의 소녀를 질질 끌고 왔다.
머리채가 잡힌 채 끌려 온 여인은 꽤나 반반하였는데, 상인의 눈에는 절망의 빛이 어렸다.
"제발.... 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딸년 하나뿐입니다. 부디 제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네놈 인생은 인생이고, 우리 인생은 시궁창이냐? 어서 끌고 가라!"
"예, 형님!"
곳곳에서 행패가 벌어졌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
이쯤 되자 백성들은 황제를 찾았다.
"황제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까지는 제국을 그저 침략자로 여겼으나 유일하게 이들을 진압할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황제였다.
게다가 황제는 대륙 최강자로 이름이 높았고, 휘하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하나같이 강병이었다.
이런 암흑가 쓰레기들 따위야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백성들의 목소리가 황제에게 닿은 것인가.
순식간에 일단의 무리들이 건물을 둘러쌌다.
하나같이 검을 잡은 정예병들.
정예병을 이끄는 자는 매우 아름다워 보이는 여기사였다.
서걱.
여기사는 단숨에 도약하여 체이슨의 목을 날려 버렸다.
즉결 처형.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으며 병사들은 가타부타 말없이 달려들어 나머지 조직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끄아아악!"
수십의 병사들이 방진을 이루며 달려들었고, 기계처럼 조직원들을 썰어 버렸다.
가게의 주인은 물론이고 소란을 듣고 모여든 백성들의 시선이 여기사에게 쏠렸다.
"나는 황실 기사단의 기사 레베카다. 폐하께서는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셨으나 너희들은 추상과 같은 황제 폐하의 말씀을 어겼다. 이는 반역에 준하는 바, 즉결 처형한다."
담담한 포고였다.
이미 포고를 듣는 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돌리며 가게 주인을 바라봤다.
"지금 이 시간부로 고리대를 쓴 자들의 이자는 모두 탕감되었다. 원금은 제국 황실로 이관되었으며 무이자로 갚으면 된다. 기한은 정해지지 않았으며 추후 사정이 나아지는 대로 상환해라."
"...."
백성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여기사를 바라봤다.
이자의 탕감은 황제가 움직였으니 그렇다고 치고, 원금을 무기한으로 갚아도 된다는 것은 사실상 채무의 면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리대를 쓰지 않는 백성들을 우려한 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레베카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내용들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암흑가가 행동하는 조짐을 보인다면 신고하라. 신고한 자에겐 후한 포상이 있을 것이다. 곧 황실에서 대대적인 구휼을 시작하며, 그래도 부족하다면 제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은행을 이용하라. 여러 상황에 따라 최대 연 30%의 이율만 적용되며, 이는 노동으로 탕감이 가능하다."
"...!"
"농사지을 땅이 없거나 집이 없는 자들도 제국은행으로 오라. 노동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토지와 건물의 이율은 연 10% 수준이다."
"와아아아!"
백성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 환호했다.
황제가 수도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도저히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노예가 되거나 전쟁 노예가 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노예를 면천한다. 이상."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환호의 물결이 널리 퍼져 나갔다.
백성들에게는 최대한 관대하지만, 암흑가는 절망적인 황제의 선언이었다.
지하수로 암흑가 자르의 본거지.
보스 피엘은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듣고 있었다.
"뭐라!? 수금을 나갔던 애들이 모두 죽어!"
"그 자리에서 죄다 참수 당했고, 재빠르게 항복한 놈들만 경비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런 미친놈들! 재판도 없이 참수란 말이냐!"
"제국에서는 황제의 칙령이 곧 법이라고 합니다. 유예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니 반역죄에 준하는 죄를 씌운다고...."
보고하는 간부들의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황제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무려 3만의 병력과 1개 기사단을 투입했다. 그래도 진압이 되지 않는다면 병력을 두 배로 늘린다고 한다.
제국 중앙군이 움직였다.
이번 전쟁에 제후들까지 동원된다고 했다.
"암흑가가 대체 뭐라고 제후들까지...."
콰아앙!
가까운 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창밖을 보니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대검에서 오러를 내뿜으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마스터급의 기사.
저 정도면 제후가 등장한 것이 맞다.
제국의 제후는 한마디로 괴물들이다. 실력으로 귀족 작위를 주는 정신 나간 병영 국가가 바로 포비아 제국이었으니까.
그곳의 제후는 하나같이 마스터급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
암흑가가 감당할 수가 없는 놈들이라는 뜻이다.
수천에 달하는 병력이 완전히 포위했다.
"크하하하, 뭐 하냐! 화살을 장식으로 쓰게? 쏴 버려!"
"예!"
와장창!
퍼어억!
"커어어억!"
제국 궁병들이 화살을 쏘아 대고 있었다.
동네 시정잡배가 아니라 제대로 훈련된 괴물들이 전쟁에서 볼 법한 무기들로 본부를 박살 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말도 안 되는 광경들이 더 보였다.
쿠구구구!
"마, 마법사입니다!"
"뭐라고!?"
자르의 보스 피엘의 눈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어떤 군주가 암흑가를 청소한다고 마법사까지 보낸다는 말인가?
율리우스 왕국에서는 마법사를 보기가 힘들었다. 영지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자들이 마법사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마법사들의 집단이 마법진을 사용한 연환계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마법이 작렬하자 간부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피엘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다 부릅떠졌다.
퍼어억!
"으읍!"
오직 원거리에서 화살을 퍼붓는 것만으로 미간이 꿰뚫리고 만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단 이틀.
제후와 기사들, 마법사단까지 동원된 대대적인 청소 작업이었다.
진압대는 간을 보고 있던 암흑가 세력을 단숨에 뿌리 뽑아 버렸다.
마법사들까지 나섰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오직 황제의 명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잔당 소탕 작업에 들어가 있다.
적의 주력들이 뿌리 뽑히자 도주를 감행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기병을 동원하여 속속 잡아들였고, 도시 내부에 스며든 자들은 신고 포상 제도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 후에 실시된 베이너스 백작의 정책들.
서류들을 읽어 내려가던 타로스가 그것을 로빈슨 단장에게 넘겨주었다.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이다."
"신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노동 담보 대출이라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500년 세월 동안 짐 역시 처음 보는 정책이다."
베이너스 백작이 천재는 천재였다.
노동 담보 대출이란, 노동을 담보로 일단 대출을 받고 국책 사업에 투입되어 천천히 부채를 탕감하는 방식이다.
어차피 타로스는 몰수한 땅이나 주택들을 보급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출을 하면 국가에서는 당당하게 막대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노동으로 부채를 갚는다고 해도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은 준다.
전쟁 후에는 국토를 복구해야 하고, 제국이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대사업들도 병행되어야 했기에 실로 획기적인 수였다.
"암흑가 세력들을 뿌리 뽑으니 막대한 양의 자금과 식량들을 환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수도에서의 대출 자금이나 여러 가지 사업들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베이너스 백작은 뭘 하고 있나?"
"은행을 꾸리느라 정신이 없사옵니다."
"은행이라. 제국은행을 여기서 바로 꾸리다니."
"실로 대단한 행정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곧 있으면 수도도 안정을 되찾을 것 같았다.
베이너스 백작이 있기에 다소 무리가 있는 정책이나 공사도 가능해진다.
타로스는 보고서를 접었다.
"그건 그렇고, 짐이 지시한 일은 어찌 되었나?"
"안 그래도 보고 드리려 하였사옵니다. 분명히 찾으시는 것이 시공검결이라는 낡은 고서적 맞사옵니까?"
"맞다."
"지하 창고 구석의 비밀 금고에서 고서적이 발견되었사온데, 고대 문자로 쓰여 있어 그것이 시공검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타로스의 입술이 살짝 씰룩거렸다.
포커페이스가 잠시 풀리려 했다.
분명히 로빈슨은 제대로 찾은 것이 맞았다.
공간을 초월하여 휘두르는 정체불명의 검술.
스토리 중반부에 사용하고도 남을 신화급 스킬을 드디어 얻을 수 있게 됐다.
#제73화. 시공검결
시공검결.
신화급의 스킬로 공간을 뛰어넘어 적을 타격하는 기술이다.
그 효용성은 이루 설명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타로스가 시공검결을 완전하게 펼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도 타로스를 막을 수 있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포비아 킹덤'에 출현하는 중반부의 개체들까지는 지금도 모두 감당할 수 있었으며, 시공검결을 익힘으로 인하여 후반에 출현하는 적들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시공검결의 최대 장점은 공간을 뛰어넘어 파워드 킬을 시전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고서적을 태워 익히자마자 머릿속으로 수많은 지식들이 흘러들어 와 그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타로스 본인이 설정하였으나 게임 내의 밸런스를 크게 해칠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검술을 깨우친 후에 타로스는 연무장 한가운데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 율리우스 왕국의 병탄이 진행 중에 있었고, 각지로 병력이 진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율리우스 왕국은 본대가 무너졌으므로 머지않아 완전히 점령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제후들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까지 타로스의 수련은 종종 회자되어 왔고, 소문으로만 접해 왔기에 이번 기회에 확실히 황제가 수련하는 장면을 눈에 담고자 하였다.
"황제께서 정신 수양을 하시는 중이다. 다들 조용히 하고 지켜보라."
"알겠습니다, 각하."
랭턴 공작이 제후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타로스는 정좌를 한 채로 지금까지 얻어 온 것들을 관조했다.
'너무 바빠서 무엇을 얻었고, 어떻게 내가 발전하고 있는지 관조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껏 타로스는 신화와 유물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고, 전쟁 중에는 수많은 적들을 쓰러뜨리면서 레벨을 올렸다.
현재 타로스의 레벨은 65를 달성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자들도 레벨 90을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우선 타로스는 지금까지 얻은 유물이나 아이템들을 살펴봤다.
드래곤 로드의 인장
등급: 유물
착용 조건: 힘 60/레벨 제한 40
내구도: 무제한
모든 스탯 30% 증가
드래곤 로드의 절대적인 상징.
여신 가이아의 눈물로 제작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유목민의 인장
등급: 유물
착용 조건: 민첩 60/레벨 제한 40
내구도: 무제한
민첩 +30
완벽한 기마[패시브]
호루루 부족장의 인장.
부족의 시조인 가브엘이 제작했다.
***
대현자의 팔찌
등급: 유물
착용 조건: 마력 40/레벨 제한 50
내구도: 무제한
마력 +50
MP 저장: 0/2,000
대현자 아케인이 제작한 팔찌.
강렬한 마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
오우거 건틀렛
등급: 매직
착용 조건: 힘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30/30
힘+15
대장장이 루헨스가 말년에 제작한 건틀렛.
오우거의 피가 함유되어 있다.
***
깃털 장화
등급: 매직
착용 조건: 민첩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20/20
달리기 속도 +20%
스태미나 회복 속도 +20%
대마도사 아케인이 취미로 만든 장화.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
란데스의 검
등급: 유니크
착용 조건: 힘 60/레벨 제한 50
내구도: 무제한
파괴되지 않음.
모든 원소 저항력 +20%
힘 +50
몬스터에 대한 대미지 30% 증가
초대 황제가 란데스에게 하사한 검.
강렬한 항마력이 느껴진다.
유물 세 점과 유니크 한 점, 매직 아이템이 두 점이다.
무기와 같은 경우에는 후반까지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내구도도 무제한이었다.
그 밖에 세 점의 유물들은 모두 액세서리였고, 이 역시 내구도가 무제한이라 파괴되지 않는다.
매직 아이템 두 점은 아직 그보다 좋은 아이템을 찾지 못하였기에 임시로 착용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지금 시점이 게임의 초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훌륭한 세팅을 하였다고 볼 수 있었지만, 이미 역사의 축이 비틀리기 시작하였기에 후반에 나타날 적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변수가 있을 수 있다.
대군주의 강림이 그러했고, 아론의 등장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실질적인 레벨이 100이 넘어가는 놈들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었기에 웬만하면 갑옷과 투구, 각반 정도는 유물로 갖추는 편이 좋았다.
'시간이 날지 모르겠는데.'
타로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로서 정무를 보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업무의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나서 유물이나 신화를 찾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이다.
율리우스 왕국을 정벌하였으니, 당분간 제국은 거대한 영토를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최소한 2년 정도는 제국을 안정시켜야 하지 않을까.
율리우스 왕국에서 회군을 결정하고 제국으로 돌아가는 몇 달이 적기다.
황제의 힘이 일시적이지만 절정에 달해 있는 그 순간이야말로 개인적으로 몇 달이나 걸리는 여행을 소화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타로스가 빠지면 재상부에서 꽤 고생을 하겠지만, 이곳 세계관에서 황제는 원래부터 태업을 일삼았다.
지금 정도의 정무만으로도 재상부는 감지덕지해야 한다.
아이템에 대한 고찰을 끝내고 지금까지 얻은 스킬들을 확인했다.
파워드 킬
일직선 10m 내의 모든 사물을 파괴한다.
마력이 주입된 상대를 즉사시킨다.
MP 100 소모
***
진실의 눈[패시브]
단일 상대의 레벨, 아이템의 고유 능력을 확인한다.
***
무너지지 않는 이성[패시브]
모든 정신 공격을 무효로 되돌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한다.
***
앱솔루트 배리어
10초 동안 모든 공격을 방어한다.
배리어가 작동하는 동안 움직이면 마법은 캔슬된다.
MP 200 소모
***
초감각[패시브]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의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한다.
수련을 통하여 시간의 축을 더욱 느리게 비틀 수 있다.
***
스모크
최대 10m의 공간을 도약한다.
MP 소모: 30
***
뇌전검결[패시브+액티브]
체내의 마나를 외부의 뇌전 원소와 결합하여 파괴력을 낸다.
뇌전의 파괴력에 따라 마나의 소모량이 결정된다.
수련을 통하여 마나의 소모량이 줄어들 수 있다.
***
시공검결
시공을 뛰어넘어 적을 타격한다.
수련을 통하여 뛰어넘는 공간이 비례하여 늘어난다.
지금까지 얻은 스킬들은 대단히 뛰어났지만, 여전히 후반부의 적까지 바라본다면 부족했다.
우선 마법은 하나도 익히지 못했다.
제국의 황제가 된 이상 필수적으로 전쟁터를 전전해야 했으나, 대량 살상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젠가는 한계가 드러날 것이다.
타로스가 여행을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후반까지 쓸 만한 무구와 범위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여정은 필수적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타로스는 레벨과 스탯을 확인했다.
타로스 LV. 65
제국의 황제
[체력: 82(+25) 힘: 82(+99) 민첩: 82(+64) 마력: 87(+91)]
'어마어마한데.'
처음 이 세계로 들어와 스탯을 확인하였을 때의 절망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각종 아이템이 스탯을 높여 주었고, 특히나 드래곤 로드의 인장은 일괄적으로 스탯을 30%나 높여 주었으므로 앞으로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리고 유물을 얻어 착용할수록 스탯은 고속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다소 마력이나 힘에 치중된 스탯은 아쉬웠고, 체력은 웬만한 기사를 쫓아가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선 보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었으며 게임으로 치면 초반이라는 것을 생각하였을 때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치다.
타로스는 관조를 마치고 눈을 떴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를 따라 이동하는 눈동자들이 느껴졌다.
제후들은 타로스가 관조하는 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강함이 미덕이 되는 사회에서 타로스의 수련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타로스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수련을 하는 이유는 제후들이 쉽사리 역심을 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어디까지나 타로스가 시전하려는 것은 신화급의 스킬이었고, 세상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니까.
연무장 한복판에는 허수아비들이 쭉 세워져 있었다.
타로스는 허수아비와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볍게 검을 그었다.
서걱.
"...!"
공간이 일렁이며 허수아비가 반으로 갈라진다.
시공검결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다만, 아직 '시공'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시공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말일 것이다.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건 이해가 되었는데, 시공을 뛰어넘는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타로스는 시공검결과 뇌전검결을 합쳐 사용해 봤다.
이번에는 15m의 거리다.
후우웅.
콰과과과광!
"허억!"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진다.
공간을 뛰어넘은 검이 이번에는 뇌전까지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로스는 점점 더 활용의 폭을 늘려 갔다.
검술들을 조합하였다면 이번에는 다른 스킬들도 조합을 해야 했다.
***
쾅! 콰과과광!
구 율리우스 왕궁의 연무장에서는 허수아비들이 뭉개지고, 사방이 초토화되는 중이었다.
어쩌다가 구경을 나왔던 마법사들이 진땀을 흘리며 왕궁이 무너지지 않도록 실드를 쳐야만 했다.
율리우스 왕국에서 귀부한 중앙 기사단장 델카로스는 우연한 기회에 황제가 수련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세상에 나돌고 있는 황제에 대한 소문은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을 죽이고 지옥의 대군주를 처치하였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무용들이 전설처럼 떠돌고 있었다.
홀로 적진을 돌파하였다느니, 검을 한 번 내려치자 기적처럼 진영이 갈라졌다느니 하는 소문들도 돌았다.
'어느 정도의 무용은 인정을 하지만.'
델카로스는 진정한 무인이었다.
강함을 숭상하는 제국의 기조는 델카로스의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제국에서는 오직 강함이 전부였으며, 목숨을 걸고 도전한다면 제후, 심지어는 황제가 되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영토를 넓히는 수단일 뿐, 작위는 전부 개인의 강함으로 결정되었다.
그 정점에 서 있는 황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무용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처음, 황제는 그저 관조를 하는 듯 정좌한 채로 앉아 있었으나 몸을 일으키더니 가볍게 검을 그었다.
마나조차 실리지 않은 일검이었기에 그저 몸을 푸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검이 공간을 뛰어넘더니 허수아비를 베었다.
"세상에!"
그 광경에 율리우스 왕국 출신 기사들은 입을 쩍 벌렸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점점 황제는 몸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이리저리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공간을 뛰어넘는 검술을 선보였다.
순식간에 장내가 초토화되었다.
심지어는 제국의 제후들조차 어처구니를 상실한 표정이었다.
"허허, 이것 참. 폐하께서 보여 주신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였거늘. 함부로 폐하를 재단하는 것이 큰 오만이었음이야."
제국의 2인자 랭턴 공작의 중얼거림에 제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황제가 제국의 정점에 있는 이상, 결코 황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기사들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런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제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74화. 제국은행
충격과 경악 속에서 진행된 황제의 수련.
타로스의 수련은 연무장 전체를 박살 내고 나서야 끝났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다들 박수를 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먼저 랭턴 공작이 말했다.
"폐하, 신 랭턴 공작! 가르침을 청합니다!"
"신, 라이너스 후작도 가르침을 청합니다!"
"저 역시...."
그야말로 난리가 난 상황이다.
타로스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쫓기 위하여 대련을 청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는데, 베이너스 궁정 백작이 보고를 해 왔다.
"폐하! 명을 받들어 제국은행 분점을 왕국 구 수도인 베논에 개설하였사옵니다!"
"그러한가."
"개설식을 앞두고 폐하의 윤허가 필요한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경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군."
"아아!"
"공무가 다망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제국의 제후들은 아쉬움을 뒤로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베이너스 백작에게 눈총을 보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일축할 뿐이었다.
"수련도 중요하지만 공무가 더 급한 법 아니겠습니까?"
"경의 말이 옳다."
천재 행정가라는 명성답게 베이너스 백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타로스는 레베카가 건네주는 수건과 물을 받았다.
"폐하! 감명 깊게 보았사옵니다! 부디 언젠가는 제게도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당연하지. 경은 짐의 측근이 아닌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제후들은 레베카를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기사들의 시선도 그녀에게로 향했다.
타로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황실 기사단으로 들어가고자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타로스는 무심하게 연무장을 퇴장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 여러 호위들을 거느리고 베논 시내를 활보했다.
"물렀거라! 황제 폐하의 행차시다!"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눈에는 존경이 묻어나고 있었다.
타로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도시는 무주공산에 암흑가의 패악질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무법천지가 도래하였고 그 때문에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로스가 베논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유랑하던 유민들도 돌아오기 시작했고, 암흑가는 아예 뿌리가 뽑혔다.
태업을 일삼던 시절에도 암흑가라면 치를 떨며 토벌해 버렸던 타로스 황제의 명성이 이곳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황제가 지나감으로 인하여 모든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으나 그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타로스에게 깔려 있는 명성에 비하여 그의 행적이 서민 친화적이었고, 강도 높은 민심 안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시행된 정책 하나.
천재 행정가 베이너스의 조언으로 제국은행이 탄생하였고, 여러 영지에서 발생한 고리대의 폐단까지 뿌리 뽑고자 한 것이다.
"폐하의 은혜로 인하여 도시가 정상적인 활기를 찾아가고 있사옵니다. 오히려 왕가가 도시를 지배하던 시절보다 더 활기차지요."
"그러한가."
"이러한 영구적인 평화라면 신의 영혼까지 바쳐 폐하를 보조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런 이유라면 거부할 도리가 없군."
제법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토록 입조를 거부하였던 백작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이를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했다.
'폐하께서 가시는 길에 감명을 받지 않은 귀족이라면 제국의 귀족으로서 자격이 없다.'
기사들에게 있어 타로스는 신적인 존재 그 이상이었다.
오히려 베이너스가 타로스를 칭송하지 않았다면 이상하게 보았을 정도로 말이다.
타로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걸었고, 베이너스는 열심히 은행과 계좌의 개념에 대해 설명했다.
"폐하, 은행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제국의 고리대를 뿌리 뽑는데 있지만, 상호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해서, 계좌의 개설과 이자의 지급이 필요합니다."
"계좌와 이자?"
몇몇 제후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자를 받는 것이야 은행의 목적과 부합하지만, 계좌라는 개념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현대인이었던 타로스는 계좌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이 계좌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
누가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좌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가히 그 인간은 일반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계좌란 은행에 돈을 맡기고 받는 일종의 증표와 같습니다. 증표에는 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내역을 상세하게 기재하고, 해당 금액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야 하옵니다. 마법 통신을 이용하여 각 지부마다 장부에 기록하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폐단을 막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자를 지급한다니. 돈을 맡기고 보관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제국의 재상 로터스 후작마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베이너스가 말을 이었다.
"돈을 맡기고 약간의 이자라도 지급을 해야 사람을 모을 수 있습니다. 대략 3% 정도의 이자를 책정하고 있으며, 은행에서 놓는 대출의 이자는 최대 10%를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대출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허어, 제국은행은 흥하겠군."
"물론입니다."
로터스 후작도 제국의 재상인 만큼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여기에 타로스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로 인하여 제국의 재정 적자를 지탱하게 될 것이며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다. 수표라는 개념을 도입한다면 상계에서는 무거운 금화를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지. 여기에 계좌 이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면 어찌 되겠나?"
"...!"
"계좌에서 계좌로 돈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며, 이를 은행이 보증한다. 그렇다면 상계는 더욱 활성화되고 서민층까지 계좌의 개념이 자리를 잡으며 상공업이 활성화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안 그런가, 백작."
"그, 그렇사옵니다. 실로 놀라운 통찰력이옵니다! 계좌 이체의 개념까지는 소신도 생각하지 못하였나이다."
타로스야 현대에 도입되어 있는 개념을 그대로 읊은 것이지만, 이제야 막 은행이 태동하고 있는 시기에 이 정도의 통찰력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베이너스는 타로스를 괴물 바라보듯 했다.
"내 나이가 몇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세상의 모든 지식에 통달할 때도 됐지."
"화, 황공하옵니다."
"경이 짐에게 원하는 것은 아마도 지급 보증의 문제겠지."
"거, 거기까지 짐작하셨사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황실이 지급 보증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돈을 맡기려 하겠는가. 짐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최소한 1만 년 정도는 지급 보증을 해야 은행이 기능을 하겠지."
"바로 보셨사옵니다."
재상부의 귀족들조차 타로스의 식견에 혀를 내둘렀다.
제국의 황제는 단순히 무력만 강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행 베논 지점 앞.
베논 시내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한복판에 제국은행이 개설되었다.
은행의 개설식에 참석한 상계의 상인들이나 이제 제국의 백성들이 된 시민들, 그리고 여러 제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은행 은행장이 된 베이너스 백작은 은행의 기능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분, 지금껏 우리는 돈을 빌리기 위해 고리대를 써야만 했습니다. 심하면 일주일에 30%까지 이율을 받아 챙기는 놈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노예들이 발생하였으며, 집안이 망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리대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이나 극심했다.
오죽하면 제국에서도 고리대를 경계하며 최대 이율을 제한하였을 정도다.
"이에 제국 황실에서는 제국은행을 개설하게 되었으며, 최대 이율은 연 10%를 넘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
웅성웅성.
술렁이는 장내.
월이율이 10%도 아니고 연이율이 10%를 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혁신이었기 때문이다.
타로스는 이것이 금융업의 진정한 태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 시대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금융을 법제화한다는 것.
그건 사상 최초로 일어나는 경제계의 혁명과 같았다.
"신용 등급에 따라 5~10%의 이율을 적용할 것이며, 은행에 돈을 맡기면 3%의 이자를 지급합니다."
"이자를 준다는 말씀입니까!?"
"보관료가 아닌 이자입니다. 그렇게 만든 증서가 계좌이며, 계좌 간의 이체를 통하여 상공업을 활성화시키고 상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짝짝짝짝!
상인들이 박수갈채를 쏟아 냈다.
특히나 전쟁상인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상계의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밖에도 베이너스 백작은 여러 가지 안전장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계좌가 움직이면 은행 모든 지점에 기록이 되어 위조할 수 없으며, 이를 제국 황실이 보증하기에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타로스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은행의 설립자이신 황제 폐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타로스는 베이너스의 자리에 섰다.
무심한 표정과 압도적인 기세.
다들 무릎을 꿇으려는 것을 타로스가 제지하였다.
현 제국에서 타로스가 가지고 있는 명성은 신의 경지에 필적한다.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것이다.
"짐이 제국은행을 승인한 것은 암암리에 박혀 있는 고리대를 뿌리 뽑기 위함이다.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이 사업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합법화하고자 한다. 현 시간부로 대출 업무는 제국은행에서 한다. 개인적인 대출은 불법으로 규정하며, 입금액에 대한 보증은 황실과 황제인 짐이 직접 한다."
"...!"
황제인 타로스가 지급 보증을 선언하였다.
이는 은행의 총제가 황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좌에도 황제의 인장이 찍힐 것이며,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황실에서 판결을 내리게 될 것이다.
또한 입금액을 황실이 보증하기에 누군가가 장난을 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반역죄로 목이 날아갈 테니까.
은행의 설립이 선언되자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좌를 개설하였다.
마법 기록 장치인 계좌는 은행에 가야만 돈을 찾거나 맡길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에는 혁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먼저 상인들이 계좌를 텄고, 제후들과 시민들까지 나서서 계좌를 개설하였다.
황제가 지급을 보증한 이상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황리에 영업(?)되고 있는 광경을 보며 어사대장 라팅 자작이 조금 불안한 듯 물었다.
"폐하, 금융이라는 제도가 시작된 것은 좋지만 큰돈이 움직이는 만큼 비리가 판을 칠 것이라 우려되옵니다."
"비리? 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시, 신이 감찰을 맡습니까?"
"그럼 누가 맡겠는가. 짐은 경을 신뢰한다."
"화, 황공하옵니다!"
라팅 자작은 바로 부복하였고 타로스는 그를 일으켜 어깨를 두드렸다.
"충의를 다하라."
"존명!"
#제75화. 자이언트 오우거(1)
고즈넉한 적막이 흐르고 있는 실내.
구 율리우스 왕국의 국왕 집무실에서 타로스는 조용히 앉아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타로스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고 있는 세실리아와 레베카는 망부석처럼 서 있었고, 몇몇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타로스는 펜을 내려놓았다.
"들어오라."
재상 로터스 후작이었다.
그는 매우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업무 중에 찾아뵙게 되어 황송하옵니다."
"경과 마주하는 것도 정무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황공할 따름입니다."
로터스 후작은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재상이 된 이후 지금까지 타로스가 직접 정무를 보았던 것은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뭔가 윤허를 받을 때에도 지속적으로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어야 간신히 서류를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떠한가.
황제는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하루에 두 시간 정도였으나 이것만 해도 재상부의 부담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황제가 정무에 참여함으로써 중요한 안건들은 바로 처리가 되었으니까.
"그래, 재상. 무슨 일인가."
"채무 보고입니다."
"율리우스 왕국을 병탄한 이후 채무가 좀 줄었나."
"전쟁 전 3500%까지 치솟았던 채무가 1500%로 감소하였나이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공치사는 되었다. 사실 1500%도 위험한 수준이지."
"그것은."
황제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얼마 전까지 제국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황가에서는 빚을 너무 많이 져서 파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으며,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황권이 강력해질수록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높아진다.
"제국 내 기근은?"
"과연 폐하의 혜안이 적중하였사옵니다. 제국 내 백성들은 기근을 넘겼사옵니다. 이에 어느 정도의 식량을 확보하여 병력을 충원하고, 여러 사업에 사용될 자금을 확보한 상황입니다."
"자금의 확보라."
재상부의 입장에서는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황실의 채무가 탕감되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여러 기반 산업들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했다.
이에 타로스는 구상하고 있던 바를 이야기했다.
"재상, 장기적으로 볼 때 대사막의 실크 로드를 여는 것과 검은 숲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문제에 대해 어찌 생각하나."
"단기적으로는 매우 큰 자금이 소모되겠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제국의 세수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사료되옵니다. 검은 숲이나 대사막에 접근하지 못하였던 것은 각각의 위험 지역에 도사리고 있는 재앙 때문이었지요. 그런 재앙들이 사라진 지금은 추진하지 못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검은 숲과 대사막에 관도를 깐다. 그리고 여러 영지들을 개척할 것이니, 그에 대한 자금 안을 마련하도록 하라."
"예, 폐하."
"병력은?"
"중앙군은 50만까지 회복하였사옵니다. 이에 5개 기사단을 완편하는 중이나 다소의 출혈은 예상되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채무를 2000%까지 다시 늘리는 한이 있어도 완편하도록 하라."
"군부에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일단 올해는 전쟁을 멈출 것이다. 내년의 전쟁에 대해 논할 것이며, 재상부에서는 이번 전쟁의 논공행상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라."
"예!?"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터스 후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논공행상을 재상부에서 논하라니?
물론 군사적인 부분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는 재상부였고, 그로 인하여 형평성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너무 큰 권한을 주는 것은 아닌지 의아했다.
"시, 신이 그 일을 처리해도 되겠사옵니까?"
"우선 초안만 작성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최종 결제는 짐이 한다."
"화, 황명을 받드옵니다."
타로스는 재상부의 권위를 세워 주었다.
논공행상은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였다.
논공행상에 따라 제국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 것은 당연한 사실.
이를 제후들이 모를 리 없었다.
로터스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다.
***
제국 임시 재상부.
타로스가 구 왕궁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기에 임시 재상부도 왕궁에 설치되었다.
과거, 율리우스 왕국의 재상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기에 임시로 사용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문제라면 아침나절부터 재상부 앞에서 로터스 후작을 기다리고 있는 제후들이었다.
"재상 각하! 오늘도 일찍 출근하시는군요!"
남부 국경 영지의 영주인 그란달 남작이었다.
제국에서는 최약체로 불리는 제후였지만, 문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후라고 불리는 순간 괴물 확정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황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지 않던가.
"그란달 남작, 어쩐 일인가?"
"헤헤, 그저 공무를 보시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보약을 가져왔습니다."
"보약?"
"이 보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남부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나는 야자수를 달인 것으로 정력에 좋다는 평이 자자합지요."
"가지고 돌아가게!"
"각하! 무슨 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허허, 모든 일은 공과대로 처리될 것이야."
재상의 말에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제후들이 멈칫거렸다.
다들 그런 목적으로 찾아왔다.
황제는 재상부에 논공행상에 대한 초안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물론 최종 결제는 황제가 하겠지만, 초안 작성자에게 어마어마한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재상을 신뢰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초안서 대로 결제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재상을 공략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터스 후작은 뇌물을 딱 잘라 거절했다.
다른 제후들도 아쉽다는 듯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재상부에 들어와서다.
"아니, 이게 다 무엇인가?"
"그게...."
"내, 분명 뇌물은 받지 말라고 지시했을 텐데?"
"죄송해요! 막무가내로 제후님들이 놓고 가시는 바람에...."
재상부 시녀들은 울상을 지었다.
그녀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국을 이끌어 가는 30인의 제후들은 하늘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 제국의 제후들이 보통 인간들이던가?
하늘 위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주는 산증인들이었으며, 전투에 환장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나마 귀족이라는 체면 때문에 예의를 차리는 것이지, 기본적인 속성은 매우 호전적이었다.
일개 시녀 따위가 제후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로터스 후작이 탄식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허어, 폐하께서 신뢰를 주시는 것은 좋으나 너무 많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내가 너무 많은 힘이 실리는데."
타로스가 정무를 보는 것은 하루에 딱 두 시간이다.
그 어떤 중요한 안건이라도 두 시간이 지나면 다음 날로 미룬다.
물론 궁정 귀족들은 아쉬워했지만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기에 타로스의 행동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았다.
괜히 압박을 했다가 과거처럼 정무에 손을 떼어 버리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왕궁의 정원.
일명 국왕의 정원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전쟁 통에도 무사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정원을 휘적휘적 걸으며 타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황후는 잘 있으려나?"
"황후마마께서는 오매불망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신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말을 해 놓고도 타로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매일 밤 정기를 빨려야 한다.
남편으로서 의무 방어전(?)을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어떻게 나타샤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온 걸까.
그녀에 대한 생각은 머리에서 지우고 내년의 일정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율리우스 왕국에서 전쟁이 끝났고, 아직 제국의 주변국들은 사태를 관망하는 중이지. 이번 전쟁은 제국의 위기를 넘기는 정도의 전쟁이었으니."
"...."
호위 기사들은 타로스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각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이었다.
기사들은 그저 침을 삼키며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
"허나 다른 전쟁이 일어나면 연합 전선이 구축될 확률이 높겠지. 어디를 쳐야 가장 효율적일까."
당연이 그건 누구도 정할 수가 없는 문제다.
타로스가 결정을 하고 난다면 제후들은 따를 뿐이었다.
그에 따라 기사들의 전장도 결정될 것이다.
타로스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정원으로 어사대장 라팅 자작이 찾아왔다.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왔느냐."
"명하신 대로 각 제후들을 감찰하고 있사옵니다. 적당히 전리품을 챙겨 가는 정황을 포착하였사오나, 그리 심한 편은 아니라 폐하의 명대로 눈을 감아 주었습니다."
"그래야지. 너무 딱딱하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로터스 후작은?"
"제후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사옵니다만, 모든 뇌물을 거부하였사옵니다. 생각보다 더 청렴한 자이옵니다."
"적당히 챙겨도 될 텐데, 꼼수라고는 부리지 못하는 자로군."
타로스는 은근히 혀를 찼다.
재상부의 권위가 세워져야 제후들도 무시하지 못한다.
이놈의 제국은 너무 문관들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에 논공행상의 초안을 맡긴 것이었는데, 로터스 후작은 청렴함의 대명사였다.
그 많은 뇌물을 거부하다니.
"그 밖에 다른 소식은?"
"폐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옵니다만."
"말하라."
"베논 부근 금역에서 자이언트 오우거가 자주 내려온다고 하옵니다. 때문에 금역 부근의 마을들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자이언트 오우거? 이곳은 구 왕국의 수도 아니던가. 수도 부근에 금역을 방치했다는 말인가."
"오우거 킹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여...."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군."
타로스는 진심으로 혀를 찼다.
제국이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고작(?) 레벨 80대 중반의 오우거 킹이라면 제후들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직접 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오우거 가죽을 다 벗겨 버렸을 것이다.
"가만."
"...."
"자이언트 오우거라면 극상품의 갑옷을 제작할 수 있는 재료 아니더냐."
"경갑 제작에는 상당히 좋은 재료이기는 하옵니다."
"나쁘지 않군. 오우거 킹이야 말할 것도 없고."
타로스는 이미 그들이 모두 죽어 가죽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습득한 시공검결을 연습하는데 제격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사옵니다. 오우거 킹이라면 경갑에 있어서는 최상의 재료이기는 하옵니다."
"경의 갑옷이 상당히 낡았던데."
"신은 괜찮사옵니다."
"짐이 한 벌 선물하도록 하지."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겸사겸사 외유를 나가야 할 듯했다.
가뜩이나 궁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던 판이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지원할 제후들이 있으면 지원하라고 명하고, 1개 기사단과 2천의 병력을 준비하라."
"존명!"
#제76화. 자이언트 오우거(2)
토벌 당일.
타로스가 금역을 치기 위하여 한 개 기사단과 2천의 병력을 동원하자 너도나도 지원을 했다.
사실, 율리우스 왕국은 이제 거의 정리되었다고 보는 편이다.
점령은 대부분이 끝나 있었으며, 완전히 복속되는 과정만 남았다.
이는 몇몇 제후들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고, 지금껏 제후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영토를 분배받기 위해서였다.
주변국에서는 제국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이고 아직 움직임은 없다.
그 이유는 하나.
제국의 병력이 모여 있는 가운데 괜히 자극을 한다면 50만 이상의 군대가 들이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내전 와중에도 외침을 받으면 똘똘 뭉쳐 대응하기로 유명했다.
괜히 기세가 오른 제국을 건드렸다가 분노를 받으면 결코 진군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몇몇 제후들이 진격을 하여 점령하는 중이었으나 그 공과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구 왕국의 수도에 남아 수련을 하거나 소일거리로 보내는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타로스가 직접 외유를 나가겠다고 선언하니, 제후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수도에 남아 있던 제후 모두가 모였다.
실로 막강한 전력.
제국의 제후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나온 베이너스 백작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금역 토벌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풍 가듯이 나오다니...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의 말에 랭턴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소풍이 맞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군란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오우거 킹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풍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제국의 제후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나?"
"상당한 실력자들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저기 보이나? 제국 최약체라고 불리는 그란달 남작 말이다."
"아, 물론입니다. 도저히 강자라고는 볼 수가 없는 언행을 가지고 있지요."
"그 무슨 말인가. 그란달 남작도 나름대로 자신의 영지에서는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다네. 그 흉포한 기세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지경이지."
"그, 그렇습니까?"
베이너스 백작은 그란달 남작이 이리저리 다니며 손을 비벼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절대자의 모습이라는 말인가.
랭턴 공작이 베이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직접 보게. 제국 최약체라고 불리는 그란달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일세."
"아, 예...."
여전히 베이너스는 제국의 제후들이 어느 정도의 강자들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괴물 같은 황제야 워낙에 유명하니 그렇다고 치고, 그란달 남작이 과연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까?
타로스가 랭턴과 눈이 마주쳤다.
타로스 역시 희미하게 입가를 꿈틀거렸는데, 제후들이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소풍을 나왔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짝! 짝!
레베카가 손뼉을 쳤다.
"모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폐하께서 사냥에 나가기에 앞서 상품을 걸고자 하십니다."
"오오!"
제후들의 눈이 반짝였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거는 상품이니, 단순한 것일 리가 없었다.
이제 제국의 위상은 과거와 달라졌다.
대륙 정벌을 선언하였고, 실제로 대륙 중앙의 강국인 율리우스 왕국을 일거에 쓸어버렸으니까.
"다들 뼈가 쑤시는 줄로 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율리우스 왕국이 완전히 병합되어야 영토를 분배하든지 말든지 할 테니 말이다."
"하하하!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모습을 보려니, 참으로 지루하기 짝이 없었사옵니다."
"그 때문에 사냥 대회를 열었다. 자이언트 오우거 정도면 아주 훌륭한 사냥감이 아니겠는가."
"사냥 대회 상품이 무엇입니까!?"
"우승자에게는 모든 사냥감의 판매 권리를 주겠노라."
"정말 대단한 상품이옵니다!"
"또한 짐이 사재를 털어 200만 골드를 상금으로 걸겠다."
"와아아!"
제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눈을 빛냈다.
연간 운영비가 2~3억 골드에 이르는 황실에서야 200만 골드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 정도 자금이면 웬만한 자작령의 반년 운영비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타로스의 입장에서야 제후들의 사기 진작 비용이라고 한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단,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사냥감에는 한계가 없으나 오우거 킹은 짐의 것이다. 직접 상대할 것이니, 나머지 놈들을 얼마나 사냥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이다."
"존명!"
"출발한다!"
베논에서 출발한 병력은 빠르게 진군하였다.
가로막는 모든 것은 기사들 선에서 처리하였다.
제후들이 나서려면 자이언트 오우거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외의 사냥감은 기사들이 척살을 하며 나아갔다.
일반 오우거들이나 트롤들은 기사들에게 찍소리도 못 하고 죽어 나갔다.
"허어, 뭔 기사들이 저렇게."
"음? 겨우 오우거에 트롤이지 않습니까."
"왕국에서는 최소한 기사단 한 개 분대가 나서야 했었는데...."
"에이, 거짓말 마세요.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되는 놈을 가지고 기사단 한 개 분대라니요?"
베이너스 백작의 말에 그란달 남작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는데 그란달 남작의 말에 베이너스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 기사들은 예비 제후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의 지상 목표가 제후가 되는 것이었기에 수련이 일상이었고, 제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제압하기에는 조금 어려워 보이는 트윈헤드 오우거가 나타났다.
신궁으로 불리는 란투스 자작이 그란달 남작을 불렀다.
"막내야!"
"네, 자작님!"
그란달 남작은 베이너스 백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진정한 제후들의 막내는 바바 준남작이었지만 현재 왕국을 경락하느라 짬 처리(?)에 나가 있는 중이었다.
이 중에서 제국 서열 마지막에 자리한 제후는 그란달이 맞았기에 잽싸게 튀어 나간 것이다.
베이너스는 그 광경을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그란달이 그 앞에 서서 경직되었다.
"뭐 하고 있냐? 저딴 것을 우리가 처리해야겠느냐. 스코어는 자이언트 오우거부터인데."
"넵!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란달 남작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이언트 오우거에게 쇄도하였다.
그 이후에는 어마어마한 검강을 내뿜어 자이언트 오우거의 심장 부분을 통째로 베어 내 버렸다.
서걱!
"꾸에에엑!"
두 개의 오우거 머리에서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란달은 가볍게 처리를 하자, 베이너스 백작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제국의 막내 서열 제후가 저 정도라고?'
베이너스가 느끼기에 그란달 남작 역시 괴물급의 검객이 따로 없었다.
란투스 자작은 트윈헤드 오우거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그란달을 타박했다.
"하! 장난하나? 저렇게 죽어 버리면 가죽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없지 않냐!"
"크으, 죄송합니다! 제가 좀 흥분을 해서...."
"쯧쯧, 똑바로 해라."
"예! 시정하겠습니다!"
"...."
제국 기사들이나 제후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율리우스 왕국 출신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확실한 위계 서열은 둘째 치고 그란달 남작 같은 괴물이 저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란달 남작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금역 베논 산맥.
구 왕국의 수도 근방이었으나 도저히 토벌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곳이다.
금역이 왜 금역인가.
국가의 역량으로도 토벌하기가 어렵고, 차라리 경계를 철저히 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베논 산맥의 악명이 자자하였기에 수도의 서쪽은 상인들도 발길을 자제하였다. 주로 빈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고, 타로스는 시공검결을 시험할 겸, 제후들과 친목도 다질 겸 하여 여행하듯 주변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폐하, 이렇게 걸으니 대사막을 종횡하던 때가 생각나옵니다."
"그런가."
"이런 날이 또 언제 올지 모르겠사옵니다. 이번에는 제후들이 함께하니 더욱 평화로운 광경이군요."
그란달은 추억을 회상하듯이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제후들이 이 정도까지 협력하며 모이는 것이 언제 또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하긴, 제후 한 명, 한 명이 괴물이었으니,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흔할까.
타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이런 날이 올 것이다."
"정말입니까?"
"제후들이 함께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것이니, 언제고 이런 친목의 장이 열리지 않겠느냐."
"기대하고 있겠사옵니다!"
그란달의 말대로 지금의 외유에는 괴물 같은 강자들이 함께하고 있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걸어 다니는 재앙 덩어리였다.
그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목을 도모한다?
쉽게 그려지는 장면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란달 정도의 남자가 막내 취급을 받으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매우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이번에 경의 활약이 대단히 컸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소신은 그저 소와 말처럼 일하며 분골쇄신할 뿐이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제후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꾸어어어!"
몇몇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출몰하였고 제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냥터에 도착했다!"
"저놈은 나의 것이다!"
"하! 제가 찜하였습니다!"
"흥! 먼저 죽이는 놈이 임자 아니겠느냐!"
피융!
자이언트 오우거를 두고 제후들이 눈치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빛과 같은 화살이 쏘아져 사냥감의 미간을 꿰뚫었다.
란투스 자작이 제후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선배님들,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의 우승은 제가 될 것 같습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오늘은 위아래가 없을 것 같군요."
제후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한때 수도를 공포로 물들였던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사냥감으로 전락하여 죽어 나갔다.
콰광!
콰르르르릉!
천지가 격동한다.
25명의 제후들이 날뛰며 검강을 뿌려 대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 따로 없었다.
평생 한 번도 만나기 힘들다는 마스터급의 기사들이 찬연한 오러를 내뿜었고 지형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가 고작 길을 개척하는데 사용되었다.
정작 자이언트 오우거의 사냥은 맨손 혹은 눈알을 뚫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오우거의 두개골을 깨거나 눈과 연결되어 있는 뇌를 휘저어 즉사시키는 것이다.
토벌대의 뒤쪽에서 조용히 쫓아오고 있던 상단 관계자들은 그렇게 죽어 나가는 오우거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런 상처도 없는 자이언트 오우거의 가죽이라니!?"
상인들이 경악하고 있는 와중에 황제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가. 좋은 갑옷을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나?"
#제77화. 자이언트 오우거(3)
황제의 질문을 받은 상인은 화들짝 놀라며 부복했다.
"무, 물론이옵니다, 폐하!"
"그대는 구 왕국에서 꽤나 유명한 상인이라지?"
"황공하옵니다. 어쩌다 보니 졸부가 되어 과분한 허명을 얻었사옵니다."
"상인이라면 뛰어난 가죽 장인과 대장장이를 알 것이라고 믿는다."
"예!"
황제는 몸을 돌려 누군가를 호출했다.
아름다운 여기사가 부복하자 황제는 무심한 듯이 명령을 내렸다.
"짐이 오우거 킹을 잡거든 가죽을 여기 상인에게 주어라."
"명을 받드옵니다."
저벅저벅.
방금 전 황제의 명령을 받은 여기사가 델리온에게 걸어왔다.
희한하게도 왕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여성 기사였으나, 제국에서는 여기사와 여병사가 꽤나 많이 보인다.
황제를 호위하는 여기사는 엄청난 미모였고, 그녀가 평범할 리 없다는 것을 델리온 상단주는 잘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제후들은 마스터 이상의 고수들이었고, 기사들 중에서도 마스터급의 괴물들이 즐비하다고 들었다.
특히나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기사라면 여자라고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무력을 지녔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사는 살벌하게 말했다.
"폐하의 경갑을 제작할 무두장이와 대장장이를 섭외해야 할 거야. 만약 품질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기군망상 죄로 3대가 멸족될 것이다."
"예, 예.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 뿐입니다요."
"폐하께서 흡족해하신다면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여기사는 그렇게 말한 후, 다시 황제의 주변에서 그림자처럼 섰다.
산맥 중턱쯤 왔을까.
황제는 여기까지 가져온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제후들이 사냥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간이 하품을 하며 늘어져 있는 것이 도대체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쿠아아앙!
주변을 둘러보면 제후들이 산맥을 갈아엎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여기까지 쫓아온 병사들은 짐꾼으로 사용될 뿐이었다.
제후들이 사냥한 사냥감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더니, 그 숫자가 벌써 수백에 이르고 있었다.
"단주님?"
"...."
"단주님! 안 들리십니까?"
"어어?"
대행수의 외침에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뭘 그리 깊게 생각하십니까?"
"넋이 나간게지."
"하기야...."
상단의 행수들도 혀를 내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금역을 무슨 사냥터처럼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황제가 오만하다 못하여 정신이 나간 것 아닌가 생각하였지만, 실제로 소문만 무성하던 절대 강자들의 집단을 보니 소문은 오히려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저런 괴물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황제는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인가.
"단주님, 재상부 관료가 오우거 사체를 감정해 달라고 합니다."
"등급은?"
"특등급이지요. 와서 보세요. 상처 하나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공포였기에 자이언트 오우거의 사체는 엉망진창인 경우가 많았다.
그것도 용병들이나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잡아 나오는 부산물이 전부.
사체들을 확인한 델리온은 혀를 내둘렀다.
"상단의 자금이 거덜 나겠는데."
***
켜켜이 몬스터들의 사체가 쌓여 가는 중이었다.
타로스는 뒷짐을 진 채로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베논 산맥은 지형이 완전히 새롭게 다져지고 있었다. 없던 길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위험 요소들은 자동으로 제거되었다.
제후들을 쫓아다니는 기사들도 나름대로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제후들이 자이언트 오우거를 토벌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면, 기사들은 그 이외의 몬스터들을 잡아 죽여 자기들끼리 내기를 하기도 했다.
어느덧 황제의 어가는 산맥 중턱까지 이동하였다.
길잡이로 고용된 모험가가 타로스에게 불려 왔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험가는 타로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다.
그의 눈에는 도저히 제후들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타로스는 괴물의 왕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조, 존명!"
베논 토박이라는 이 모험가는 한 해 전, 자이언트 오우거 사냥에 나갔다가 혼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오우거 킹을 보았다고 말했고, 그 덕분에 거금을 들여 고용했다.
카빌리안 LV. 60
모험가
레벨 60이라면 제국의 십인장급의 무력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제국 자체가 병영 국가였으므로 일반 모험가가 이 정도의 레벨이라면 상당한 실력자라고 봐야 했다.
"저곳이 오우거 킹의 서식처인가."
"그러하옵니다."
"다소 특이한 형태로군?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간은 아니야."
"클클, 마도 제국의 유적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도 제국의 유적지?"
가만히 타로스를 따르던 그랑카인 후작이 지형의 형태를 미루어 추론했다.
산맥 중턱에서 갑자기 지형이 변하며 꽤 큰 분지가 나타났는데, 이게 어찌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일까.
대마도사이자 현자인 그랑카인 후작조차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 이곳은 심상치 않은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카빌리안,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그건... 저도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대륙의 현자도 모르는 일을 길잡이가 알 수 있을 턱이 있나.
그러나 카빌리안은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수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만 저곳은 고대에 광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의 광산?"
"누군가는 금광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미스릴이라고 하기도 했사옵니다. 해서, 저희 모험가 집단도 여기까지 왔으나 도저히 저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살아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지."
"그, 그렇습니다."
자이언트 오우거의 레벨을 생각하면 레벨 50~60대의 모험가 파티로는 공략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임을 디자인한 타로스조차 광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광산이라. 그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전설에 불과하다고 해도 마도 제국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니 조사해 볼 가치는 있겠다."
마법사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저곳이 광산이든 고대 마도 제국의 유적지이던 간에 마법사들에게는 가치가 있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
고대 산맥의 깊은 지하.
오우거 킹은 동족의 사체를 우걱우걱 씹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이언트 오우거들을 훑어봤다.
부르르.
거대한 덩치를 가진 오우거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가는 언제 저 배 속으로 들어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먹이! 부족하다!"
"...."
자이언트 오우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웬만하면 자이언트 오우거들도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가 약탈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인간의 군대가 모이면 굉장히 강력했고, 몇몇이 내려갔다가 사냥을 당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웬만하면 산맥에서 자급자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산맥의 사냥감들이 씨가 마르고 있는 형편이었고, 자이언트 오우거들은 자신들이 잡혀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인간을 사냥하여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잡아 왔던 인간이 다 떨어졌고 오우거 킹은 두 마리나 동족을 포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스러운 식탐을 자랑하며 먹을 것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쿵! 쿵! 쿵!
적막을 깨며 자이언트 오우거 한 마리가 뛰어 들어온다.
'죽는다, 저러다가.'
모두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감히 왕이 역정을 내는 와중에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 인간! 온다!"
"인간, 온다고? 몇 마리나?"
"많다! 아주 많아!"
고개를 처박고 있던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인간들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산맥을 내려가면 놈들의 기상천외한 전술에 당하고 마는 그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이곳은 그들의 서식지였으며 앞마당이다.
싸운다면 패할 리가 없었다.
굶주린 것은 오우거 킹만이 아니다. 자이언트 오우거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거대한 쇠몽둥이를 어깨에 들쳐 메고 일어났다.
"오늘, 포식한다!"
"꾸어어어어!"
쿵쿵쿵!
어마어마한 숫자의 오우거 떼들이 동굴을 뛰쳐나갔다.
드드드드!
수백 마리에 달하는 자이언트 오우거들이 일제히 뛰쳐나가자 산맥 전체가 떨어 울었다.
인간들은 순식간에 찢겨 나가고 먹이로 전락하리라.
"...?"
분명히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오우거 킹은 뭔가 사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녹색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들이 되레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사냥감이다!"
퍽!
"꾸억!"
빠아아악!
"꾸에에엑!"
겨우 수십의 인간들이 달려들어 자이언트 오우거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있었다.
오우거 킹은 생각했다.
'이, 이러다 죽는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인간들과 충돌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말이다.
그러나 오우거 킹은 서식지 안으로 도주하지 못했다. 투명한 막이 동굴 입구 전체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마법사들.
오우거 킹은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왔기에 인간 마법사들이 얼마나 까다로운 존재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노마법사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클클, 어디를 도망가려 하느냐? 네놈은 폐하의 사냥감이다."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자이언트 오우거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괴물 같은 제후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자이언트 오우거 LV. 80
마나의 이상으로 변이한 오우거.
기사들이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제후들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저 사냥하는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하였으며, 경쟁적으로 박살을 낸 결과 오우거 킹만 남겨 놓고 있었다.
이마저도 타로스가 본인의 사냥감이라고 지정해서 멀쩡한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죽고도 남았다.
타로스는 놈의 레벨을 확인했다.
오우거 킹 LV. 90
오랜 시간 마나를 축적하여 변이한 오우거.
과연 네임드 몬스터다운 스펙이었다.
오우거 레벨이 90이라니.
그란달 남작과 같은 수준이었으며 둘이 싸운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제후들과 기사들이 물러났고, 마법사들은 오우거 킹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을 쳤다.
곳곳에서 내기가 벌어졌다.
"5초 안에 끝난다는 것에 100골드 걸지."
"지금 장난하나? 폐하이시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것이 아니라면 3초면 충분하지."
"어허, 1초면 가능할 것이네."
"...."
상인들의 눈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오우거 킹을 앞두고 1초 만에 죽는다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오우거 킹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대가 타로스임을 알아봤다.
"인간! 죽인다!"
타로스는 순수하게 시공검결만을 사용하여 오우거 킹을 죽여 보고자 하였다.
손에 든 것은 작은 단검이다.
제후들이 오우거 사체에 상처 하나 내지 않았는데, 황제인 타로스가 상처를 내면 그만한 개망신이 따로 없을 것이다.
사냥을 나오기 전에 나름대로 수련을 거쳤다.
쿵쿵쿵!
오우거 킹이 달려오기 시작하자 타로스는 시공검결을 사용하여 단검을 던졌다.
쐐애액!
어느 순간, 공간이 일렁이더니 단검이 오우거 킹의 눈동자에 정확하게 박혔다.
쿵!
달려오는 순간에 넘어지며 오우거 킹이 즉사했다.
순간적으로 터지는 탄성.
"와! 우리가 다 틀렸군? 한 0.5초 정도 걸렸나?"
#제78화. 마도 제국의 연구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상인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으나, 제후들이나 제국의 기사들은 당연한 결과라고 봤다.
오우거 킹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으나 몇 초 컷을 당할지에 대해 내기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타로스가 몇 초 안에 오우거 킹을 잡을지에 대해서는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단검을 던지는 순간에 픽 하고 쓰러졌으니 체감상, 1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사기적인데.'
타로스는 내심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함을 유지하였다.
제국의 황제라면 이 정도의 무력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에 동요해서야 이런 괴물들을 이끄는 수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델리온."
"예, 예! 가옵니다!"
상단주 델리온이 빠르게 달려와 부복했다.
델리온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국에 괴물들이 즐비하며 황제의 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우거 킹이 1초도 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아마 이대로 산맥을 내려가 동료 상인들에게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면 좋은 갑옷을 만들 수 있겠느냐?"
"물론이옵니다!"
"최대한 많은 갑옷을 만들도록 해라."
"조, 존명!"
하나는 타로스가 입을 갑옷이었고, 나머지는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다음 사냥 대회 상품으로 걸 작정이었다.
동굴 내부에 몇 마리의 오우거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타로스는 이쯤에서 대회를 끝내기로 했다.
"리카드로 후작은 보고하라. 누가 우승인가?"
"우승자는 란투스 자작입니다!"
"으으, 제길. 활을 좀 더 연습했어야 했는데."
"저 괴물을 활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사냥 대회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타로스는 란투스 자작을 불렀다.
"자작은 앞으로."
"예!"
척!
란투스 자작은 타로스의 발치에 바로 부복했다.
"경에게 오늘 잡은 사냥감을 처분할 권리와 100만 골드를 하사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짝짝짝짝
제후들이 박수를 쳤다.
비록 란투스 자작에게 우승을 내어주기는 하였으나 고작 이런 일로 분노하는 속 좁은 인간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사냥 대회는 친목이 목적이었다.
"경들은 너무 서운해 말라.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지 않나."
"...!"
제후들도 오는 길에 얼핏 들었다.
이곳 분지와 동굴은 고대 마도 제국 시절에 지어진 것이며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말이다.
"저 안에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균등하게 분배할 것이다. 물론 마법적인 사료 가치가 있는 것들은 황실 마법사들에게 귀속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제후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저 안에서 대단한 물건들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꽤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타로스는 제후들을 앞세우고 동굴을 탐험해 보기로 했다.
동굴 입구.
시작부터 마법사들이 기대감을 드러냈다.
특히나 리카드로 후작과 그랑카인 후작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다.
"발광석이옵니다! 이렇게 많은 발광석이라니! 비록 마나로 충전을 하는 것이기는 하나 사치품으로 상당한 가격에 거래될 것이옵니다."
"그래? 제후들이 용돈벌이를 했군."
발광석이 드문드문 쭉 박혀 있었다.
최소한 1인 당 몇 개씩은 돌아갈 것이니 란투스 자작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주머니가 두둑해질 것이다.
리카드로 후작은 곳곳에 설치된 마정석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자연적으로 마정석이 충전되는 방식이며 발광석에 마나회로가 연결되어 있사옵니다."
"연구 가치가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마정석을 매개로 한다면 야밤에도 밝은 불을 사용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마도학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학술적인 가치가 상당하군."
"예!"
마법사들은 흥분하였지만, 제후들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제후 대부분은 기사 출신이었다. 마법으로 제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들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마법사들은 연구실에 틀어박히기를 좋아해 영주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학문이야 고리타분한 마법사들이나 좋아하는 것으로 심지어 하품까지 하는 제후들도 있었다.
저벅저벅.
마법사들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불을 켰다.
곧이어 도착한 거대한 공동.
한쪽에는 사람이나 몬스터, 짐승들의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오우거 특유의 짐승 냄새가 심하게 났다.
스아아!
바로 마법사들이 정화 마법을 펼쳐 내부를 청소했다.
환경이 쾌적해지자 제후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내부를 구경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구경을 하는 것이었고 마법사들은 동굴 내부를 자세하게 탐사하였다.
타로스 역시 휘적휘적 움직이며 동굴 내부를 살폈는데, 마법진과 회로들이 복잡하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어떤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연구가 무엇인지는 마법사들도 알 수가 없었다. 이곳에 상주하면서 연구해 보아야 알 수 있는 일.
20분 정도 흐르자 슬슬 구경은 끝났다.
이대로 나가야 하나 싶었는데 리카드로 후작이 빠르게 달려오더니 보고했다.
"폐하! 고대 연구실을 발견했사옵니다!"
"고대 연구실?"
"예!"
제후들의 관심이 다시 쏟아진다.
이곳이 일종의 던전이라고 보면 보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건 타로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포비아 킹덤 자체가 게임으로 디자인되었으니 이곳이 던전이고 보상의 방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고대 마법사의 연구실.
최소한 타로스가 이곳을 디자인한 기억은 없었으니 회사의 다른 직원이 디자인을 했다고 봐야 한다.
연구실에는 여러 서적들을 비롯하여 마도구들이 존재했다.
다만, 마도구들은 전투에 특화된 것이 아니라 제작에 특화된 장비들이었다.
마법사들은 흥분했고 제후들은 반쯤은 포기를 한 상황이다.
발광석을 분배받은 것만 해도 오늘의 사냥은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오오! 이것은, 고대 베르타스 마나 집적 회로 원본!?"
"이건 고대 술식이 아닌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는 이곳이 천국인 것 같았다.
타로스는 무심한 척 주변을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만약 이곳이 보상의 방이라면 분명히 유저에게 주는 보상이 있을 것이다. 혹시나 비밀 통로나 비밀 창고 같은 것이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폐하! 여기 특이한 나침반이 있사옵니다."
리카드로 후작의 보고였다.
타로스는 무심결에 나침반을 받았으나 그걸 확인하고는 떨어뜨릴 뻔했다.
'푸아온의 나침반?'
푸아온의 나침반.
타로스는 이 세계의 수많은 아이템들을 디자인했고, 던전이나 유물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포비아 킹덤이 게임인 이상 던전과 보상, 유물 지도가 나오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게임 기획 당시, 유물 지도들은 수도 없이 만들어 휘하 직원들에게 처리하라고 일렀고, 그중 하나가 바로 푸아온의 나침반이었다.
나침반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의외였으나, 레벨 90대 던전이었으니 이런 보상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푸아온의 나침반
등급: 유물
착용 조건: 없음
내구도: 무제한
시야 +2
고대 마도 제국의 황실 마법사 푸아온이 제작한 나침반.
비밀을 풀면 유물로 향하는 지도가 나타난다.
등급에 비하여 능력치는 보잘것없었다.
시야가 +2 올라간다는 것은 좀 더 멀리 사물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으니, 전투에서는 크게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전쟁터에 나가서는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전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아이템으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정작 중요한 기능은 유물 지도다.
타로스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며 푸아온의 나침반이 가르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상기해 보았다.
'갑옷이었나? 유물 등급의 갑주였던 것 같은데.'
당연히 타로스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초반 기획 당시에 휙 만들어 부하 직원들에게 짬 처리를 시킨 아이템이라면 더더욱.
"희한한 형태로군."
"상당히 고풍스러운 멋이 살아 있는 게, 폐하께 잘 어울리는 물건 같사옵니다."
"잘 쓰지."
타로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침반을 품에 넣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나침반이었다. 다만, 고대 마도 제국 시절에 만들어졌기에 그 양식이 달라 상당히 특이해 보일 뿐이었다.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야 제국에서도 널렸으니 누군가가 욕심을 낼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타로스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은 것이다.
'단순한 여행에서 유물을 얻다니. 상당한 이득이다.'
이로써 타로스가 다음 전쟁 전에 시간을 내서 여행을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베논 산맥 앞.
유적지 안에서 마법사들이 다소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하산이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제후들은 대부분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여러 제후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장이었다.
사냥 대회라는 것이 이런 유대감을 만들어 주기에 열리는 것이다.
특히나 황제와 함께 사냥을 나온 것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황가에 대한 충심을 드러내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수확이 꽤 높다.
'푸아온의 나침반이 향하는 곳에서 유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이다.'
타로스는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찍어 눌렀다.
이런 때 보면 황제라는 직업도 참으로 할 짓이 못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으니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제후들이 타로스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전에는 딱딱한 기계를 연상케 하였다면, 이제는 좀 사람 같다고 할까.
제후들과 헤어지기 전, 커다란 바위 앞으로 귀족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누가 병영 사회 아니라고 할까 봐 서열대로 각을 잡고 섰으며, 그 덕분에 기사들이나 병사들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열했다.
그 모습에 상인들이 위압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모두 고생했다."
"폐하를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사옵니다!"
"자주 이런 자리를 가졌으면 하옵니다!"
"물론이다. 대륙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경들과는 지속적으로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제후들.
황제는 허언을 하지 않는 존재였고, 타로스의 성격상 대륙을 일통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곧 각지로 나갔던 제후들이 돌아온다. 일주일 내로 논공행상이 있을 것이니 조금만 더 고생하도록 하라."
#제79화. 논공행상
얼마 전 사냥으로 인하여 화합을 다진 귀족들이었으나, 다시 내부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각 파벌이 나뉘어 뭔가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그러한 소식이 타로스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사적인 모임이라."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논공행상 이후의 세력도에 대해 논하는 것 같사옵니다."
"앞으로 세력도는 별 의미가 없을 텐데?"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옵니다."
어사대장 라팅 자작의 보고였다.
논공행상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하여 각 귀족들은 산하 정보부까지 돌리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논공행상에 결과에 따라 지각 변동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그냥 두어라."
"괜찮겠사옵니까?"
"귀족들이 모조리 합심하여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짐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명에 따르옵니다."
굉장히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오직 제국에서 타로스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중앙군 50만에 5개 기사단, 그리고 황제파를 휘하로 거느리고 있는 타로스였다.
여기에 더하여 속속 중립 파벌 귀족들이 타로스의 휘하로 들어오고 있었으니, 그 세력은 예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래도 반역이 발생하면 곤란하니 다음 전쟁으로 눈을 돌리는 수밖에.'
타로스는 누가 반역을 일으켜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역을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것이 좋다.
아직 제국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타로스가 라팅 자작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빈슨 단장이 달려와 보고했다.
"폐하! 각지로 영토를 병탄하시던 제후들이 복귀하고 있사옵니다."
"알겠다."
타로스는 직접 몸을 일으켰다.
로빈슨 단장과 라팅 자작이 깜짝 놀랐다.
"직접 가십니까?"
"안 될 이유가 있나."
"그게... 조금 의외라서 그랬사옵니다."
"한 100년 쉬었으면 되었지."
구 율리우스 왕국의 수도 베논.
베논의 모습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안 될 정도로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후들이 개선하는 와중에 황제가 직접 맞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십니다!"
"...!"
웅성웅성.
이는 제후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과거, 타로스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이런 귀찮은 행사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타로스의 행동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직접 개선장군들을 맞이하자 분위기가 꽤나 훈훈해졌다.
"충! 신 가비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정벌을 완료하였나이다!"
"추웅! 바바, 명령 받들었슴다!"
군례를 취하는 제후들.
이번 정벌은 다 끝난 전쟁이었기에 자작급에서 두 명, 남작이 둘, 마지막으로 바바 준남작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율리우스 왕국의 나머지 영토들을 병탄하고 돌아왔다.
타로스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고생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저 한마디뿐이었지만, 이 한마디가 남긴 파급력은 대단했다.
여전히 권태감에 절어 있는 모습이었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황제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타로스는 돌아서며 말했다.
"국무 회의를 열어라. 논공행상을 진행하겠노라."
"오오!"
드디어 제후들이 고대하던 시간이 왔다.
전쟁에 참여한 30인의 제후들은 그만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임시 행궁에서는 황제가 등청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과열된 양상을 보였다.
이번 논공행상에 따라 권력이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기존 제국의 영토에 비해 50%나 확장되었고, 제후들은 공과에 따라 영토를 분배받게 될 것이다.
한 개 영지 수준의 보상이 돌아갈 것이며, 전리품도 분배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황제의 영토 매각이었다.
"이번에 폐하께서 영토를 매각하겠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미 황실이 지고 있는 재정 적자는 한계를 초월한 수준이니 말입니다."
"어허, 말씀 삼가시오. 지금 황실의 재정은 예전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회복했소. 폐하께서 영토를 매각하지는 않으실 거요."
"영토를 매각하지 않으면? 다음 전쟁은 뭐로 진행한다는 말인가."
"올해 제국은 풍년을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이며, 늘어난 황실 직할령에서도 세수가 걷힐 것이니 충분히 감당 가능합니다."
"과연 그럴까?"
"그 부분은 후작께서 관여하실 부분이 아닙니다."
웅성웅성.
온통 관심이 그 부분에 쏠려 있었다.
전쟁 전, 황실의 채무는 3500%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쟁 직후 1500%에 근접했고 병력의 모병, 여러 기반 산업을 일으킨 덕분에 2000%까지 다시 치솟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키면 황실 재정은 감당이 힘들 것이라고 봤다.
남아 있는 황제의 패는 영토를 매각하여 전비를 충당하는 것.
이미 황제가 영토를 매각할 것에 대비하여 각 가문들에서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만들어 운용하려 하고 있었다.
제후들은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상 로터스 후작을 비롯한 여러 재상부 관료들은 제후들을 내심 비웃었다.
'너희들은 은행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지.'
제후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금융의 파급력이었다.
황제는 얼마 전, 기축 통화에 대한 개념과 금융에 대한 강의를 재상부 관료들에게 해 주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금융과 기축 통화를 이용하여 전비를 무한정으로 충당한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금융이 활성화되고 제국에서 세계의 화폐를 지배하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한 재정 적자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후들은 지금껏 현물로만 전비를 충당해 왔고, 빚을 낸다고 해도 현물로 갚아야 하는 개념이었다.
그들이 재상부 관료들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이런저런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황제가 등청했다.
"만국의 지배자,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황제 폐하 만세!"
허리를 굽히는 제후들의 눈이 빛났다.
이제 그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진득한 긴장이 흐르는 장내.
타로스는 직감적으로 제후들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오늘 아침까지 타로스는 고민을 거듭하였다.
재상 로터스 후작에게는 최대한 공정하게 기록된 전과에 따라 논공행상의 초안을 작성하라 일렀고, 그는 명령에 충실하였다.
그 어떤 누락도 없이 매우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매우 후한 논공행상이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편파적이지도 않았고 황실에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을 초안이었다.
타로스가 영지의 매각만 결정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황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초안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제후들의 공적을 깎는다면?
분명히 다음 전쟁에서 분란이 일어난다.
지금 제후들의 생각은 전쟁을 통하여 영지를 확장하고, 더 나아가 영향력을 강화시킬 생각이었다.
타로스가 친정을 함에 따라 비교적 손쉽게 율리우스 왕국을 병탄할 수 있었으니, 사실 이 전쟁에 있어 최대의 수혜자는 황제인 그가 되어야 한다.
로터스 후작은 타로스의 공적에 대해서도 나열하였으며, 최대한의 영토를 부여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만, 다른 제후들이 납득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면 최악의 경우 반란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신중해야 했다.
결국 타로스가 택한 것은 전공에 맞는 배분이었다.
"논공행상을 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상벌이다. 철저하게 검증된 기록에 의해서만 논공을 행할 것이며, 이는 파벌을 가리지 않는다."
"...."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시에는 황제파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었지만, 전시에 그래서는 안 된다.
그 부분을 제후들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먼저 랭턴 공작, 앞으로."
척!
랭턴 공작이 부리나케 달려와 부복하였다.
타로스가 지시하자 로터스 후작이 랭턴의 전공을 나열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길, 랭턴 공작은 적의 주력을 반으로 가르고 적 사령관의 머리를 취하는 대공을 세웠다. 주요 지휘관들의 수급 15두를 취하였으며, 공식적으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적 기사 150명, 적 병사 500여의 수급을 베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전공에 의한 바로...."
줄줄이 나열되는 전공들.
전쟁을 기록하는 마법사들이 세세하게 전장을 기록하였으며, 누락된 부분은 증언에 의해 채워졌다.
전공에 대해 평가를 받고 있는 랭턴 공작의 얼굴은 매우 담담하였는데,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평가가 끝나자 랭턴은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랭턴 공작, 위에 나열된 전공 중에서 누락되거나 더해진 부분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라."
"매우 공명정대한 평가입니다. 어느 한곳도 누락되고 더해진 점이 없사옵니다. 적을 얼마나 베었는지는 제 기억보다 더 정확합니다."
"불만이 있는 부분은 없나."
"없사옵니다."
"랭턴 공작에게 율리우스 왕국 남부 리타 영지를 하사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랭턴 공작이 물러가고 제2 전공자인 라이너스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길, 라이너스 후작. 경은 수도에 가장 먼저 입성하였으며 적 왕가를 격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개전 이후 본대와의 전투에서 우군을 지휘하여 초전 박살하였으며, 적 기사 100여 명, 병사 400여의 수급을 베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전공으로...."
라이너스 후작 역시 담담하게 타로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후들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기록된 전공에 놀랐다.
마법사들이 대거 동원되었고, 그들의 상당 부분이 전장을 기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니 빠진 내용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너스 후작에게는 레이넌 영지를 하사한다."
"황제 폐하! 만세! 그 은혜가 하늘과 같아 신이 감히 감당키 어렵사옵니다."
"다음, 가젤 후작."
"예, 폐하!"
하나씩 전공이 나열된다.
정말로 귀족파 수장이라고 해서 전공에서 누락된 부분이 없었다. 그건 중립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제후들은 공적에 따라 영지 전체나, 영지 일부의 땅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이후 타로스의 공적이 나열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제국의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드래곤을 죽이는 여정부터 시작이 되었으니까.
원래부터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는 황가에서 50% 정도를 가져가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타로스가 이번 전쟁에서 총 영토의 60%를 획득하였다고 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비록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전공 평가였다고 제후들은 생각했다.
"이것으로 논공행상을 종료한다. 내년에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것인즉, 언제라도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상이다."
"...?"
제후들의 눈에 의문이 들어앉았다.
타로스의 어떤 말에도 영토 매각에 대한 소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80화. 델리안 공국(1)
임시 행궁 대전.
황제가 퇴청을 한 이후에도 제후들은 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 결과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영토를 매각하지 않으셨다. 로터스 후작,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말을 했을 텐데요. 황실의 자금 사정이 영토를 매각할 만큼 급박하지가 않습니다."
"아니, 내년 전쟁까지 버틸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미 제국 황실의 채무가 3000%였을 때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채무는 2000% 밑으로 떨어진 상태이며, 이는 전 국토를 잇는 도로 공사나 대사막 개척, 검은 숲 개척 비용이 합쳐진 채무입니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귀족파 귀족들은 다소 황망한 표정이었다.
물론 논공행상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오히려 황제의 논공행상은 박했다.
드래곤을 박살 내고 제국의 여러 위협들을 제거한 것이 어디 보통 위업이던가?
여기에 더하여 황제의 기책과 직접적인 움직임으로 전쟁은 손쉽게 끝난 편이었다.
문제라면 귀족들의 예상이 전부 빗나간 것에 있었다.
로터스 후작이 귀족파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논공행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며, 폐하께서는 적법한 영토를 취하신 것뿐입니다. 애초에 제국의 모든 것은 폐하의 것. 문제를 삼으시려 한다면 폐하께 직접 상주하시기 바랍니다."
"으음."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제국에서 알아서 채무를 감당한다고 하는데, 귀족들이 거기에 대고 황제에게 영토를 매각하라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바로 반역자의 낙인이 찍힌다.
제국 중앙군은 50만이 넘어가고 있었고, 여기에 황제파 귀족들과 중립 파벌까지 나선다면 역사상 최대의 수치인 100만 대군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귀족파 귀족들은 황제에게 제국 권력의 추가 상당히 기울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각성하여 행보를 보인 이후로 정말 순식간에 황권이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에게 반기를 든다?
드래곤을 죽여 버리고 마계의 마왕조차 나서기를 꺼려하는 판국에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병력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병력이 철수하는 것은 아니었고, 구 왕국의 영토를 방어하고 혹시나 모를 반란에 대비하며 치안 병력을 구성하기 위하여 총 20만을 주둔시켰다.
중앙군이 10만, 각자 배분받은 영지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후들의 병력 10만이 남겨지게 된다.
타로스는 철수에 앞서 최종적으로 명령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재상이 올린 상소 하나를 보게 되었다.
절대 황권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는 제국에서 상소를 보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는데, 애초에 제후들은 황제에게 상소 따위를 올릴 생각은 못 했다.
황제의 뜻에 반발을 하거나, 찬성하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는데 이는 궁정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올라온 상소였기에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폐하, 소신은 오직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상소를 올리나이다.
현재 제국은 폐하의 위업으로 인하여 국토를 50% 이상 확장하였으며, 기근을 해결하는 등 유례가 없을 정도의 안정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중략…
하오나 현재 영토 분배에 있어서는 각 제후들의 다툼이 예상되는 바, 정확한 측량을 위해서는 당분간 지방관을 파견하고 각 영지들을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하옵니다.
복원의 과정에도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는 바, 어느 정도는 황실의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며, 각 제후들의 자금을 각출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오직 소신의 의견일 뿐이오니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충심으로 봉행하겠나이다.]
"오호."
타로스는 희미하게 감정을 드러냈다.
세실리아와 레베카가 움찔거릴 정도로 말이다.
"너희들은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느냐?"
"감히 어찌 기사 따위가 제국의 운영에 관여하겠나이까?"
"기사라고 해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을 것 아니냐. 그저 참고하기 위함이니 이걸 읽고 의견을 개진해 보거라."
"명령이시라면."
"명이다."
세실리아와 레베카는 각자 상소를 읽어 내려갔는데, 처음에는 감히 황제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여겼으나, 이대로라면 각지에서 분쟁을 발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소신이 뭘 알겠습니까만... 형평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면 영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있다고 보옵니다."
"레베카 경은?"
"저는... 상소 자체가 매우 불충하지만 내년에 전쟁이 예정되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질 수 있는 생각이라 봅니다."
"그런가."
타로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모든 제후들을 소집하라 명했다.
이번이 구 율리우스 왕국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국무 회의다.
제후들은 곧 있으면 철군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같이 제후들이 모여 앞으로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타로스는 어전에 도착하여 몇 가지 문제를 짚었다.
"짐이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이대로 철군하고 영토를 바로 분배하는 것은 이런저런 문제들을 발생시킨다고 봤다."
"...."
제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로스의 의견에 공감했다.
전쟁 중에는 어떻게든 전공을 세우고 많은 영토를 분배받겠다는 생각에 전투에 임하였으나 사실 전쟁은 사전 준비와 사후 처리 과정이 매우 중요했다.
잘못하면 승전을 하고도 전쟁하기 전보다 상황이 악화되는 수도 있었다.
"제국의 영지에서도 종종 측량이 잘못되어 영토 분쟁이 나는 경우가 있다. 대륙 제일의 측량법과 산술을 보유하고 있는 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데, 이번 전쟁 이후에는 영토를 병합하여 분배하고 뒤섞이는 등 영토 분쟁이 저절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폐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논점을 정확하게 짚으셨사옵니다."
제후들도 전쟁이 끝나고 머리가 식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함을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타로스는 여기서 좀 더 파고들어 갔다.
"더욱 큰 문제는 대미지 컨트롤이다. 어느 영지는 폐허가 됐고 어느 영지는 멀쩡하다. 폐허가 된 영지를 받은 제후들의 마음은 어떻겠느냐. 이는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총 1억 골드를 모금하여 각 영지들을 복원하는 자금으로 사용할 것이다."
"...!"
제후들은 눈을 번쩍 떴다.
1억 골드면 제국의 춘궁기 반년 치 운영비다.
보통 영지의 운영비가 적게는 200만 골드, 많으면 500만 골드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임이 틀림없었다.
타로스가 총 영토의 60% 정도를 보유하게 되었으므로 6000만 골드를 내기로 했다.
"짐이 6000만 골드를 낼 것이니, 각 제후들은 영지의 크기와 규모에 비례하여 모금하라. 그리고 정확하게 자금을 분배하여 3개월 동안 영지의 복원을 진행한다. 그 정도로 모든 복원을 끝낼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러나 만사가 공평할 수 없으므로 나머지 부분은 각 영주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제후들이 황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결정에 소신들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영민하신 판단이십니다!"
"제후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세력을 늘리기 위함이 아니더냐. 내부에서 싸움이 만연하는 것보다는 일치단결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이번 사업은 투명하게 진행할 것이며, 내역은 공개된다. 궁정 귀족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측량하고,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는 작업을 할 것이다."
제후들은 꽤나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태업을 일삼는 황제였으나 전쟁 이후의 처리에 대해서는 이보다 공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후들은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내놓게 되겠지만, 망가진 영토를 복원하는 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므로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멀쩡한 영토를 받았다고 해서 타 제후들에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전쟁을 3개월 미룰 수밖에 없지. 개전은 내년 추수 이후가 될 것이다. 어쩌면 한 해를 더 미루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너무 급하게 이루어지는 전쟁이라고는 생각했었사옵니다."
"전쟁을 조금 미루더라도 좀 더 확실하게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과정을 거치는 편이 낫사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조금 남아 짐은 여행을 겸하여 외유를 나가려 한다."
"외유라면...?"
제후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인해 제후들은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다 함께 모이기가 어려웠기에,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차피 새로운 영토에 대한 복원과 측량은 황실에서 하는 것이었으니 제후들의 시간도 꽤 남았다.
타로스는?
모든 일을 궁정 귀족들에게 전가하였던 황제가 이제 와서 정력적으로 일을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궁정 귀족들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로 인하여 그들의 힘도 강화되는 것이었으니 서로 윈윈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타로스가 라팅 자작을 불렀다.
"어사대장."
"예, 폐하!"
라팅 자작이 나와 부복했다.
"델리안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그렇사옵니다. 델리안 동부에서 언데드 킹이 발생하였고, 그 탓에 몇 개의 마을들이 폐허로 변하고 주민들이 언데드화 되었다고 하옵니다. 지금은 동부 국경 도시가 공격받고 있으며 공국군의 피해도 크다고 하옵니다."
몇 개의 마을이 언데드로 인하여 쑥대밭이 되는 일이야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벌이는 개체가 언데드 킹이라는 것이 문제다.
잘못하면 델리안은 동부 전체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델리안 공국은 제국의 충실한 제후국이다. 공물도 충분히 보내고 있고, 전시가 되면 병력도 파견하고 있지. 물론 이번 전쟁은 오직 제국을 위한 전쟁이었으므로 제외했었다."
제후들이 눈을 반짝였다.
충분히 타로스의 의도가 읽혀지고 있었다.
이만하면 전쟁이 아니라 정말로 여행이나 외유를 나가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언데드 킹이라면 다들 심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에쉬드에 비해 약골(?)이며 자작급 정도에서도 처리가 가능했다.
"짐은 델리안으로 향하려 한다. 함께 나설 제후가 있으면 나서거라. 가는 길에 던전도 몇 개 발굴할 생각이니 운이 좋다면 용돈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척!
가장 먼저 랭턴 공작이 나섰다.
"폐하께서 제후국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할진대 신하가 되어 어찌 그 발자취를 쫓지 않겠사옵니까? 소신은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소신도 따르겠사옵니다!"
"소신도 데려가 주시옵소서!"
타로스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델리안의 언데드 킹을 처치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푸아온의 나침반이 델리안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가려는 것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레벨이 높은 일꾼들을 동원할 수 있었으니, 꽤 편안한 여정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81화. 델리안 공국(2)
델리안 공국.
약 200년 전, 델리안 왕국은 제국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그 당시 왕가였던 델리안가는 황제에게 입조를 청함으로써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영토는 제국의 후작령 내지는 공작령 수준으로 축소됐고, 제국의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바치고 전시에 군대를 제공하는 등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황제가 태업을 일삼으면서 몇몇 제후국들이 등을 돌렸지만, 델리안 공국은 그렇지 않았다.
워낙에 제국의 영토와 밀접하게 붙어 있고 사방이 고립되어, 어쩔 수 없이 그 관계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업이나 농업을 기반으로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공국이었으나, 최근 발생한 언데드 사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마을 하나가 또 사라졌다던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척후의 보고에 의하면 동부 변경 도시 울라카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옵니다."
"버틸 수는 있겠나."
"그게...."
보고를 올리는 공국 정보부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한가."
"그, 그렇습니다."
"변경의 군대로도 막지 못했다는 말인가."
"전멸이옵니다."
"...."
공국의 병력 3천이 증발했다.
총 병력 3만에 불과한 공국에서 3천이 날아간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중앙군 전체를 쏟아부어야 하는가."
"황공하옵니다."
이번 일을 잘못 처리하면 공국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물론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상 누가 건드리진 않겠지만, 자멸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이 시대의 언데드 사태는 한 번 터졌다 하면 대량의 사상자를 만들어 냈고, 작은 왕국은 멸망을 하여 대륙에 큰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공왕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던 신하들은 갑자기 뛰어온 근위 기사 때문에 깜짝 놀랐다.
"전하! 제국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습니다!"
"뭣이!?"
제국의 군대가 왜?
신하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지금 제국은 어마어마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강국 율리우스 왕국을 단숨에 격파하고 모조리 자국의 영토로 흡수하였다.
제국이라면 좀 더 큰 왕국을 노려야 정상 아닐까?
"황제께서 직접 제후들을 거느리고 1만의 군대를 동원하였습니다. 이번 언데드 사태를 직접 해결하신다고...."
"허어, 군대는 그렇다고 치고 제후들을 거느리다니?"
"모, 모든 제후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설마 여행을 겸하여...?"
다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국의 입장에서는 멸망당할 사태였지만 제국에 있어 언데드 킹은 단순한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델리안 공국으로 원정이 준비되고 있었다.
구 율리우스 왕국의 수도 베논, 가젤 후작의 저택으로 귀족파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오로스 후작이 숙청된 이후 가젤 후작이 귀족파의 수장을 자처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세력은 예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황제가 각성하기 전에는 분명히 귀족파가 득세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황제파에 압도되었다.
제국 황실은 이제 50만 중앙군과 5개 기사단을 회복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더욱 병력을 증강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에 황제파를 분리해 놓고 생각한다고 해도 황제를 찍어 누를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영토 분배에서 율리우스 왕국의 60%를 황실이 가져갔으며, 이조차도 황제의 공적을 깎아 냈기에 가능했다.
이래저래 귀족파에게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가젤 후작에게 불만 어린 목소리가 쇄도하였다.
"각하, 이제 우리도 돌아가 다음 전쟁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이번 원정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연유입니까?"
"우리만 가지 않으면?"
"가지 않는 거지요."
"손가락질 받을 일 있나. 황제파 귀족들과 중립 귀족들 모두 함께하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만 빠지면 도대체 꼴이 뭐가 되겠나. 게다가 황제의 눈 밖에 나면 내년의 원정에서 힘들어진다."
"설마요. 황제는 제법 공정하게 전쟁을 주도하는 것으로 보였는데요."
"미래도 생각을 해야지."
"...."
귀족들은 탄식했다.
황제의 세력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성장하자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젤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이런 식으로 처리하고 싶겠나. 허나 시세를 파악해야지. 전쟁 중에 황제의 권력은 도저히 우리가 어찌하지 못할 지경이야. 경들은 황제와 황제파, 그리고 중립 세력의 군대를 상대할 재간이 있나."
"그거야."
"없지. 우리는 먼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어떻게든 꼬리를 내리고 살아남아 최대한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 것이야."
"끄응."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현실이다.
결국 가젤 후작의 말에 따라 나머지 귀족들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
여정이 시작되었다.
겨우 1만의 중앙군과 1개 기사단이 움직였지만, 누구도 허약한 전력이라고 보지 않았다.
1만의 중앙군은 그야말로 제국 최정예다.
그 하나하나가 타국 기사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군 1군단에서는 심심치 않게 기사들이 배출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기사단은 황제 직속의 중앙 1기사단이다.
예비 제후급의 전력이 100명이었고, 이번에는 모든 제후들이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일단 황제가 함께하는 이상 그 누구도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으며 암살 자체가 불가능하다.
제후들의 실력이나 기본이 마스터였으며, 후작 이상은 그랜드 마스터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만하면 작은 왕국 정도는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전쟁의 제왕으로 불리는 두 명의 대마법사가 동행하고 있었으니 웬만한 무리들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제후국의 변고였기에 전원 말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격했다.
이런 속도라면 일주일 안에 델리안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아무리 제후국의 일이라고 해도 국내의 일이 아닌 만큼 해가 진 이후까지 급하게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마를 개인당 세 마리씩 지급한 것만 해도 상당한 자비를 보여 준 것이다.
여기저기서 모닥불이 피워지고 마법사들이 부비 트랩을 설치했다.
최소한의 경계 병력을 제외하고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타로스를 중심으로 모닥불이 설치되었고, 레인저들이 사냥을 해 온 멧돼지가 10마리나 구워지고 있었다.
"다들 들어라."
"예!"
제후들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상당한 양의 식량을 짊어지고 왔지만 고기까지 가져가기는 힘들었기에 병력은 산이나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일부는 자급자족을 했다.
졸지에 제후들이나 기사들이 사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랭턴 공작이 포도주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의 묘미가 이런 것이겠지요."
"경은 용병을 꿈꿨었나?"
"젊은 시절에는 대륙을 주유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허나 작위를 받고 영지를 다스리게 되니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더군요. 무엇보다 작위의 유지를 위해서는 매일같이 수련을 해야 하니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였습니다."
"각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여러 제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제후들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에 임하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마치 용병들이 여행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란달 남작이 씩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용병 단장이시라면 저희는 대륙 최강의 용병단인 셈이군요."
"하하하! 그럼. 일국을 박살 낼 수 있는 전력이니."
제후들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천지에 이만한 전력을 가진 용병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순식간에 멧돼지 10마리를 먹어 치운 제후들은 아직 모자람을 호소하였다.
란투스 자작이 바로 그란달을 불렀다.
"막내야!"
"예? 이거 섭섭합니다. 저에게도 후임이 들어왔습니다! 막내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이봐, 막내!"
"응? 왜 불러?"
"새끼가. 지금 선임 분들 배고프신 것 안 보이냐? 가서 멧돼지 잡아 와라!"
"내가 혼자? 우리, 같이 간다!"
"나도 좀 쉬어 보자!"
"우리는 막내. 함께한다."
"하하하! '막내들'아! 가서 멧돼지 잡아 와라!"
그란달 남작은 란투스 자작의 말에 울상을 지으며 바바와 몇몇 기사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멧돼지를 사냥하던 그란달 남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러워서 빨리 자작으로 승작을 하든가 해야지."
그러나 그란달은 그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제후들은 인간의 수준을 진즉에 뛰어넘었고, 바바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란달은 호구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델리안 국경 알타보 변경백령.
제국과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영지였기에 일반적인 변경백령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이곳을 지키는 병력은 고작해야 2천이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3교대로 근무했다.
제후들을 비롯한 제국 최정예 병력은 빠른 속도로 동진하여 일주일 만에 알타보 영지에 도착했다.
변경백령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 떼의 인마가 부리나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대충 병력이 3천은 되어 보였고, 번쩍거리는 갑주를 입은 자가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랄프 델리안 대공.
공국 내에서는 공왕으로 불리지만 대외적으로는 대공으로 불린다.
델리안 대공이 50미터 앞에 말을 세우고 달려와 부복했다.
"만국의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델리안 대공, 오랜만이군. 30년 정도 되었나?"
"그렇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하나도 늙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허허."
타로스가 불멸왕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위에 오른 이후 얼굴의 변화가 없었다. 노화가 중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공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늙었군. 이번에 고생이 심하였는가."
"부끄럽게도 수련을 등한시하여 이런 몸이 되었사옵니다."
제국에서 검을 잡는 자들이 배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을 실력으로 판단하는 병영 국가에서 수련을 등한시하고 배까지 나온다? 제후는커녕 병사로도 입대할 수 없다.
"가지."
"소신이 호종하겠나이다!"
대공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공국의 군대와 제국의 군대는 질적으로 달랐다.
호위는 그냥 구실일 뿐이고, 뒤를 따를 뿐이다.
다만, 대공은 타로스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변경백령에 들어선 타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이곳 백성들이 겁에 질려 있거나 부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 수준이 처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공국의 사정이 좋지 않은가."
"2년째 기근이 이어지고 최근에는 도적 떼와 몬스터, 심지어는 언데드 사태까지 터지는 바람에 파산 직전이나이다."
"상황이 좋지 않다면 어떻게든 내년 전쟁에 참전하라."
#제82화. 델리안 공국(3)
"...!"
델리안 대공은 놀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제국 황제가 주도하는 전쟁에 제후국이 한 발 걸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소, 소신이 참전을 해도 되겠사옵니까?"
"대공,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을 되묻지 마십시오."
라이너스 후작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위계상 대공이 윗줄이었지만, 엄연하게 따지면 후작의 힘만으로도 공국은 찜 쪄 먹을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델리안 대공은 상당히 위축됐다.
"기꺼이 참전하겠사옵니다만, 제가 실력이 될지."
"그거야 경의 실력에 달려 있지."
"허락만 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제후들도 공국의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울타리에 완전히 편입되었다면 황실의 도움이나 다른 제후들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혼자 여기서 고립되어 있다 보니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여기에 더하여 제국에 세금도 내야 하고 여러 위협에 맞서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국의 귀족이 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지만, 그건 제국의 풍조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사급의 실력도 갖지 못한 자가 제국의 제후가 된다?
지나가다 돌 맞을 일이다.
델리안 대공은 분위기를 보며 이번 일은 제국의 2인자인 랭턴 공작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상담이 필요하군.'
그날 밤.
델리안 대공은 랭턴 공작을 찾았다.
대부분의 제후들은 잠이 들기 직전까지 수련을 했다.
조금이라도 수련을 게을리하면 아랫줄의 제후들이 언제 치고 올라올지 몰랐기에 저녁을 먹은 후 서너 시간은 반드시 수련해야 했다.
평시에는 6시간 이상 수련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니, 제국의 제후로 살아가는 것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공작님."
"델리안 각하 아니십니까."
랭턴은 땀을 닦아 냈다.
엄연히 따지면 랭턴 공작은 델리안에 비해 윗줄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제국법상 제후국 국왕은 제국 공작 이상의 대우를 받았으므로 존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대공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댓말을 썼다.
그들은 한적한 정자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내년의 전쟁에 참전을 해도 될지 상담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상담이요? 이미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다른 제후들과 경쟁이 될지...."
랭턴 공작은 그제야 델리안 대공의 심정을 이해했다.
황제는 분명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워낙 공국의 사정이 좋지 않으니,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고 영토를 분배받아 매각한다면 그럭저럭 사정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참전을 하는 즉시 제후들과 경쟁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제국 제후들이 어떤 인간들인가?
전투 병기인 기사들을 썰어 버릴 수 있는 힘들을 갖추고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대륙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자들과 공을 겨룬다?
전쟁을 하다가 파산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저에게는 전쟁을 준비할 여력도 없습니다."
"무엇이 걱정인지 알겠습니다."
공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보급 업무를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보급이요?"
"3만 정도 병력을 동원하여 보급대로 지원하면, 그 공로를 인정해 주실 겁니다. 영토까지는 모르겠지만 전리품을 배분받을 수 있을 것이고 투자 이상은 거둘 수 있지요."
"허나 그 3만의 병력을 출병시킬 자금이...."
"그건 제국은행에서 대출을 받으시지요."
"고리대를 쓰라는 말씀입니까!?"
"연 5% 정도의 저리 대출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공국을 담보로 잡긴 하겠습니다만."
"연 5%요?"
대공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어떤 고리대가 연 5%라는 말인가?
이 시대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되지 않을 만큼 저렴한 금리였다.
이미 대공의 머릿속에 '담보'라는 말은 지워졌다.
연 5%라면 거의 공짜가 아니던가.
게다가 몇 년은 이자만 내다가 원금과 함께 균등 상환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자면 우선 제국은행이 공국에 입점을 해야겠습니다만."
"해야지요! 전쟁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면 마땅히 그러겠습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은행장인 베이너스 백작에게 상담을 받아 보시기 권합니다."
"그 역시 함께 왔습니까?"
"아니요. 베이너스 백작은 궁정 귀족이니 조만간 제도로 복귀할 겁니다. 그때 제도로 복귀하여 은행 지점 개설과 대출 상담을 받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작께서는 은인이십니다."
"별말씀을."
그들의 대화는 언뜻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공작조차 대출의 무서움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게다가 제국은행은 반드시 무언가를 담보로 잡는다.
노동자 대출도 노동자의 '노동'을 담보로 잡을 만큼이나 철저한 기준이 있었다.
대출을 받는 것도 좋지만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받게 된다면 담보로 잡은 물건이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은 즉, 영토를 담보로 잡았다가는 영토를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델리안 공국의 수도 아툰.
최근 들어 델리안 공국 전체로 기이한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공국이 멸망지경에 이른다는 것.
비록 델리안 공국에는 3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동부 지역이 무너지고 언데드가 서진하기 시작한다면 도저히 공국의 병력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전 병력을 일으키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2년 연속으로 흉작이 들었고, 거리에는 굶어 죽는 자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그만한 병력을 일으키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는다.
이는 굉장한 딜레마였다.
공국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그때, 전쟁을 마친 황제가 모든 제후들을 이끌고 신속하게 입성하였다.
군대는 1만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은 제국 1군단 최정예였고 기사들의 실력도 제후급에 이를 만큼이나 대단했다.
더욱이 제국의 30인 제후들이 모두 참여하였다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황제는 악명이 자자하였지만 이번 한 방으로 인기가 치솟았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환호의 물결이 이어진다.
삶이 고달파 보이는 백성들이 언데드 사태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상황이 절망적이었는데, 황제가 직접 온 이상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번졌다.
율리우스 왕국을 단숨에 박살 낸 황제였다.
아직 언데드 사태는 초기였고 황제가 빠르게 이동한다면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끝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랭턴 공작."
"찾으셨사옵니까!"
"재무관에게 일러 은화를 뿌리라고 일러라."
"예?"
"백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다들 피골이 상접한 것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수도가 이 꼴이라면 나머지 영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상태를 알겠구나. 명색이 황제가 직접 왔는데 이런 꼴을 보고 지나칠 수 있나."
"명을 받듭니다!"
황실 재무 관료가 은화를 뿌리자 제후들도 나서서 은화를 뿌렸고, 그에 감화된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주머니를 털어 약간의 돈을 뿌렸다.
공국은 제국 경제권에 종속되어 있다.
당연히 화폐도 제국의 것을 사용하였으니 바로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더욱 환호성이 거세졌다.
타로스는 굳이 공국에서까지 인기를 누릴 필요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인기가 하늘을 찌르게 됐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심심하면 황제가 금화를 뿌렸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공왕궁.
나름대로 궁전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고, 한때에는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기에 그럴싸해 보인다.
제국의 제후들은 어좌의 왼편에, 공국의 귀족들은 오른쪽에 섰다.
공국 귀족들의 눈은 매우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곳에는 30인의 제후가 모두 모였고 그 하나하나가 공국을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최약체라고 불리는 그란달 남작조차 1만이 넘는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공국은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그런 괴물들을 죄다 끌고 왔으니 공국 귀족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좌에 앉은 타로스는 바로 공국 전도를 가져오라 명했다.
촤악!
공국 전도.
당연히 타국에 유출이 되어서는 안 되는 극비다.
하지만 이곳에는 황제가 강림해 있었고, 그의 한마디에 공국의 운명이 갈릴 것이니 지도 따위가 문제는 아니었다.
평지가 많은 공국은 언데드 사태가 터지면 급속하게 번질 우려가 있었다.
"대공, 국경 수비대가 전멸했다고 했나."
"그, 그렇사옵니다."
"울라카 영지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그것이...."
"솔직하게 말하라."
"국경 수비대를 제외한 울라카 영지의 병력은 3천 남짓이옵니다. 공국 정보부에서 예측한 자료에 따르면.... 이미 울라카 대다수가 점령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통계가 나왔사옵니다."
"그런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경의 잘못은 아니다. 기근이 겹쳐 병력을 내지 못한 것이 아니더냐."
대공은 그저 부복하여 머리를 박고 있을 뿐이다.
타로스는 병력을 이끌고 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공국이 위험할 뻔했음을 알았다.
이래서야 유물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공국 전체가 언데드 소굴로 변하여 내년 전쟁에 지장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아직 퍼지지 않았을 때 진압해야 한다.
"그나마 다음 도시까지는 거리가 있으니 울라카만 쓸어버리면 되는 일인가."
"그, 그렇사옵니다."
"울라카까지 넉넉잡아 3일인가."
"예!"
"이틀 안에 진격할 것이다. 당장 채비를 하고 공왕은 기병 5천을 준비하도록 하라."
"명에 따르옵니다!"
반박은 없었다.
고작 기병 5천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싸게 먹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에서 출발한 병력은 직선으로 달렸다.
언데드 사태의 발원지인 국경 울라카까지 이틀.
타로스는 제후들을 이끌고 울라카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우선은 사태를 확인해야만 어디로, 어떻게 공격을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국경 마을들은 폐허가 됐고 울라카 본성도 점령이 됐다.
그나마 울라카 서쪽의 작은 군사 도시에서 언데드를 막아 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언제 뚫릴지 알 수 없어 보인다.
그 광경을 본 대공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본성이 넘어간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으나 아직 울라카 군사 요새가 버티고 있었고 다른 영지로까지 전염이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로스는 뒤로 몸을 돌렸다.
"우선 요새를 구원하고 울라카 본성을 쳐야겠다. 병력은 5천씩 주겠다. 누가 가겠나?"
"소신을 보내 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모든 제후들이 서로가 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언데드들을 죽이고 나오는 전리품 따위는 없었으나 이곳을 정리한 이후에는 던전 탐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오는 전리품을 가장 먼저 분배받기 위하여 서로를 보내 달라고 경쟁이 치열했다.
#제83화. 델리안 공국(4)
울라카 군사 요새.
울라카 변경백은 언데드들이 쳐들어온 직후 어떻게든 진격을 막아 보고자 노력했다.
마을 몇 개를 잃었을 때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도중 언데드 킹이 직접 언데드 군단을 이끌어 쳐들어왔고 연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언데드 킹을 처치하여 근원을 없애기 위하여 특수 작전을 시행하였으나 모조리 실패하였으며 본성까지 잃었다.
결국 공왕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후 군사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을 시작했다.
그에게 남은 병력은 고작해야 천오백.
어둠이 내려앉고 언데드 군단이 성벽에 구멍을 내기 시작하자 울라카 백작은 절망하고 말았다.
"황제께서는 아직인가!?"
"소식이 도착한 지 이틀입니다! 최소한 하루는 더 버텨야 합니다!"
가신들의 말에 울라카 백작의 눈이 흔들렸다.
얼마 전, 기적이 일어나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는 전서구를 받았다.
그게 이틀 전이었으나 군대가 이동하고 있다면 아무리 빨라야 3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언데드들이 사다리를 대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제길! 저게 어딜 봐서 언데드라는 말인가!?"
단순한 언데드였다면 본성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시가 무너지는 것은 내부에서 언데드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에 한한 것이고,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달랐다.
군 생활을 하던 놈들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어설프지만 공성용 사다리를 제작하고 충차까지 만들어서 돌격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숫자가 많아 치명적이다.
성문은 물론 성벽까지 구멍이 뚫리기 직전이었고 언데드가 하나둘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크르륵."
"꾸에에엑!"
"젠장! 조금만 더 버텨라! 황제께서 오신다!"
"죽어!"
검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만약 언데드의 피에 감염이라도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고 말 것이다.
성벽 위로 꾸역꾸역 언데드가 몰리자 울라카 백작은 직접 검을 들어 적들을 썰어 버렸다.
하지만 성벽이 얼마나 버틸까?
황제가 오고 있다는 희망으로 어떻게든 버텨 내고 있었으나 그것도 이제 한계점에 다다라 보였다.
후우웅.
그때였다.
거대한 화염구들이 성벽을 넘어 언데드들이 집중된 구역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아아앙!
꽈드드득!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파이어 필드가 형성되어 화염의 회오리를 만들었고, 그 안으로 언데드들이 빨려 들어가며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 지원이다!"
두두두두!
뒤를 돌아보자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기가 펄럭거렸다.
그곳에서는 마법사들이 끊임없이 마법을 쏘아 대고 있었으며, 순식간에 요새 주변을 포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돌격.
"와아아아!"
병사들은 보았다.
고작 수천의 병력이 순식간에 언데드를 정리해 나가는 것을 말이다.
제국군 최정예 1군단.
그들은 장창을 이용하여 진격했고, 뾰족한 창끝이 정확하게 언데드를 타격하고 있었다.
마치 진영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감탄이 나왔다.
"차원이... 다르다."
울라카 백작은 제국의 정예군을 보며 몸을 떨었다.
타로스의 군대는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였다.
울라카 병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을 것이다.
한눈에 봐도 군사 요새는 뚫리기 직전이었으니까.
허름해 보이는 막사에 들어와 상석에 앉자 울라카 백작은 매우 황송하다는 표정이었다.
"귀하신 옥체를 이런 허름한 곳에 모시게 되어 황송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그만큼 경이 검소하다는 의미 아니겠느냐. 개의치 말라."
"망극하옵니다."
30인의 제후들, 대공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자리했다.
"언데드 사태가 벌어졌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잘 막아 주었다."
"아닙니다. 신은 본성을 버린 죄인에 불과할 따름이옵니다."
울라카 백작은 충분히 자신의 공을 내세울 만함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타로스가 보기에도 썩 괜찮았고 제후들도 그를 좋게 봤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여 기뻐하던 것도 잠시, 요새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무너지고 기반을 잃어버린 울라카 백작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멀리서 보니 상당히 당혹스럽더군. 놈들이 공성 병기를 사용했나."
"그렇사옵니다. 그놈의 공성 병기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본성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울라카 백작이 참았던 분노를 토해 냈다.
언데드 사태가 내부에서 벌어졌다면 이토록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리치 킹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은 일정 부분 인간의 군대를 흉내 냈다.
이것만 봐도 리치 킹의 힘이 상당하며 지능까지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에쉬드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다.
'경험치도 꽤 들어오려나.'
타로스가 직접 움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경험치 수급 때문이었다.
유물도 유물이지만 최근 들어 레벨이 정체되어 있었다. 강력한 놈들을 사냥하며 레벨을 올려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었다.
물론 타로스가 아는 미래대로 용사가 나타나 내려올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만 했다.
"지금 제국군은 상당히 지쳐 있다.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지. 해서,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다."
"지당하신 분부이십니다."
"다만 경이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하교하시옵소서."
"본성이 완전히 점령되었다면 최소한 10만 이상의 언데드 군단이 우글거릴 것으로 보인다. 맞느냐."
"예, 척후를 운용하여 살펴본 결과 주변 마을에 번진 언데드까지 모조리 본성으로 몰려갔습니다. 그 숫자가 12만에 달하옵니다."
"12만이라."
"...."
꽤 부담되는 숫자다.
물론 언데드 킹이 제거되고 나면 제국군의 힘으로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다수의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타로스는 언제나 전력을 보존하는 쪽으로 전쟁을 해 왔다.
그건 언데드 사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이곳은 타국이다.
아무리 제국에 입조한 공국이라고 해도 본국과는 다르다. 그만한 희생을 입으면서까지 정벌할 생각은 없었다.
"빠르게 공국을 구원해야 하므로 1만의 병력만 이끌고 왔다. 이 병력으로 시가전을 벌인다면 꽤 큰 피해가 예상되는 바, 본성 전체를 태워야 할 수도 있다."
"그건...."
"문제가 있느냐."
"아닙니다! 더 이상 언데드 사태가 번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옵니다."
대공이 급하게 나섰다.
울라카 백작의 입장에서 보면 기반을 태워 버리는 일이었지만, 본국도 아니고 제국의 병력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구원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울라카 백작이 거부하면 타로스로서도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다행히 울라카 백작은 바로 동의했다.
"언데드 군단의 무서운 점은 전염성이지요. 시가전을 벌였다가 병영 내에 전염병이 퍼지면 전멸을 면키 어려운 바, 화공이 상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울라카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상당히 떨렸다.
이번 정벌이 끝나면 그는 영지를 잃고 궁중 귀족으로 전락할 것이다.
타로스가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경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제국으로 귀화하는 것도 고려해 보라. 전쟁이 시작되면 영토가 확장되고 새로운 제후들이 탄생할 수도 있으니."
"그건."
울라카 백작이 대공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의외로 대공은 쿨하게 답했다.
"그리해도 된다. 영지를 잃은 귀족이 어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전하."
"어차피 공국은 제후국이 아니던가. 제국으로 귀화한다고 해도 우리가 남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깊게 고려해 보겠나이다."
울라카 백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지켜봐야 한다.
타로스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도시를 남긴다고 해도 문제가 크다. 정화하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사태가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지. 참고로 제국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도 사제들을 동원하여 완전히 정화하거나 태워 버려야 한다. 경도 알 것이다. 그만한 사제를 동원할 비용이라면 재건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말이야."
"이미 잊었습니다."
"리카드로, 그리고 그랑카인."
"예!"
"하교하소서."
"경들이 활약해야 할 것이야."
타로스의 부름에 대공과 백작은 물론이고 공국의 모든 귀족들이 경악했다.
리카드로 후작과 그랑카인 후작은 대륙 전체에 위명이 자자했다.
기사로 치면 그랜드 마스터급이었으며 대륙에 단둘만 있는 대마도사였다.
그런 자들을 데려왔으니 그들이 놀랄 수밖에.
다음 날 아침.
타로스는 일어나자마자 군대를 동원하였다.
요새에서 본성으로 넘어가는 동안 잔당을 처리하였는데, 전원 기병이었기에 이리저리 종횡무진하며 비척비척 걸어 다니는 언데드들을 베었다.
본성에 거의 다다라 점심을 먹고 본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본성 근처에 남아 있는 그나마 온전한 초소였다.
역시나 멀리서 보던 것과 다르지 않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언데드들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힘을 잃은 인영들이 돌아다녔다.
울라카 백작은 상당히 침통한 얼굴이다.
한때 자신의 백성이었던 자들이 모조리 언데드가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새롭게 영지를 얻으려면 제국으로 귀화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물론 제국에서 제후가 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랑카인 후작, 경이라면 어떤 마법을 사용하겠나?"
"도시의 재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파이어 레인이 적당하겠습니다."
"리카드로 후작과 함께라면 도시를 다 덮을 수 있나?"
"시간만 충분하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옵니다."
파이어 레인.
말 그대로 불의 비가 떨어지는 구름을 일으켜 광범위한 지역에 타격을 주는 마법이다.
실제 전쟁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는데, 먹구름이 일어나는데 최소한 30분이 걸렸고 한 지역 전체에 마나가 휘몰아치는 상황이 일어나 직격이 되기도 전에 군대는 대피를 한다.
또한 생각보다는 대미지가 크지 않아 튼튼한 건물로 들어가면 피해가 생각보다 크지도 않았다.
오직 광범위한 지역에 정화를 할 때 사용하며 군대가 마법사들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성을 타격할 때에 사용하기는 했다.
"파이어 레인을 시전하는 동안 언데드 킹이 가만있지는 않겠지."
"소신이 처리하겠습니다!"
"소신을 보내 주십시오!"
제후들은 서로 언데드 킹을 처리하겠다고 난리였다.
타로스는 손을 들어 그들의 의견을 막았다.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갔다가 괜히 감염되면 골치 아프다. 언데드 킹은 짐이 처리한다."
#제84화. 언데드 킹(1)
라무스 산맥 한 동굴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언데드 킹이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왔다고 했느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마땅히 마중을 나가야지. 원수의 핏줄이라면.
언데드 킹의 목소리가 뚝뚝 끊겨 동굴 안을 울렸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라무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라무스 폰 라드비히는 당시 포비아 왕국에게 멸망했다.
흑마법을 다루던 라무스는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의 몸을 리치로 만든 후, 산맥에 은거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힘을 불려 나가며 세력을 확장했다.
언젠가 제국을 넘어 대륙을 질타하는 언데드의 왕국을 세우리라 다짐하면서.
그렇게 천 년이었다.
라무스는 그 시간 동안 복수심만으로 버텨 왔다.
그리고 얼마 전, 칼을 뽑아 들었다.
가장 먼저 주변의 국가인 델리안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확장하여 수십만의 군세로 제국의 영토를 하나씩 집어삼킬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만들어 낸 언데드 군대는 물경 15만.
직접 군단을 이끌어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흡수했다.
델리안 공국 따위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이후 라무스는 흑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은거지로 돌아왔고, 전방에 나가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황제를 발견하고 보고해 온 것이다.
라무스는 동굴 밖을 나와 어두침침한 하늘을 바라봤다.
달빛이 뜬 밤만큼은 아니었으나 태양이 구름의 저편으로 가려지고 나면 흑마법은 빛을 발한다.
제국 황제가 소수의 군대만 이끌고 왔다는 보고를 들었으니 이번 기회에 적들의 머리를 치고 나아갈 것이다.
-도시로 병력을 집결시키라. 짐이 친히 군을 지휘하리라.
-존명!
12기의 데스 나이트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복창했다.
울라카 본성.
본성의 백성들이 모두 언데드로 변하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라무스 산맥에서 속속 언데드 군단이 합류하고 있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수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온 델리안 공왕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심장이 옥죄어지는 것을 느꼈다.
"산맥에 저만한 언데드 군단이 더 존재했었다니!"
온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 모여 있는 언데드 군세만 해도 10만이 넘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마법사단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대륙의 현자라 불리는 대마도사들은 외유라도 나온 사람들처럼 담담하게 그 광경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제는 어떠한가.
옥좌에 반쯤 기울어진 몸을 지탱하며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델리안 공왕이 랭턴 공작을 찾았다.
"공작, 이대로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각개 격파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적들에게 이만한 시간을 준다는 것은."
"아직 언데드 킹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놈이 힘을 회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입니까!?"
"그게 덜 번거로우니 말입니다."
"...."
공왕을 비롯한 공국의 귀족들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들의 숫자는 10만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고작 1만 5천의 군대를 가지고 와서 각개 격파를 하지 않는다?
아무리 1군단이 정예이며 마법사들이 합류하였다고는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 이상 생각이 나아가는 것은 불충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폐하께서 실패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허어."
쿠구구구구!
군대가 도시에 입성하자 저 멀리서 압도적인 흑마기를 두른 언데드 킹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인간의 왕이여, 이곳이 네 무덤이 될 것이니라.
대략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신에 검은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붉은 안광이 인상적인 해골이 갑옷 위에 올려져 있다.
투구까지 썼다면 언데드가 아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암흑 기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무료해 보이는 황제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때였다.
"마법사들은 짐이 언데드 킹을 처리하는 즉시 파이어 레인을 시전하라."
"예!"
팟!
황제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광경.
황제의 몸이 고속으로 이동하는 것도 모자라 공간을 뛰어넘으며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
공왕을 비롯한 사람들은 몸을 떨어야만 했다.
파스슷!
타로스의 몸은 거칠 것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어 성벽을 밟은 후, 주택과 주택 사이를 건너뛰었다.
초공간 이동과 초감각, 스모크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보일 수 있는 신기였다.
도시는 이미 언데드 군단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으며, 좀비와 스켈레톤, 듀라한 등 종류를 불문하고 수많은 언데드가 아우성을 쳤다.
이미 언데드 킹에 의해 타로스의 척살이 떨어졌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달려들고 있었으나 종적을 잡으려고 할 즈음에는 이미 그 자리를 이동한 이후였다.
성벽 앞에서 언데드 킹이 지휘를 하는 수뇌부까지 걸린 시간은 채 몇 분이 되지 않았다.
인간의 뼈를 엮어 만든 옥좌에서 일어난 언데드 킹이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인간의 왕이여, 비장의 한 수는 남기고 있었구나. 감히 짐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하려 하느냐.
언데드 킹을 호위하던 데스 나이트들이 달려들었다.
데스 나이트는 언데드 군단장급의 몬스터였고 여기서 처리하지 않으면 토벌에 힘들 수도 있었다.
타로스는 여기까지 온 김에 데스 나이트를 죽여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죽음의 사자들이여, 땅으로 돌아가라!"
쿠르르르릉!
사방으로 뇌전이 소용돌이쳤다.
타로스가 가지고 있는 마력은 1,800.
여기에 더하여 마력을 2,000이나 저장할 수 있었기에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근 4천에 이른다.
이만한 마력이라면 언데드 킹과 전투를 벌이더라도 남아돌았으며, 데스 나이트 12기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뇌전검결과 시공검결을 함께 사용하자 뇌전의 검강들이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허공을 격하여 벼락의 검강이 떨어지자 한동안 데스 나이트들은 멈칫거렸으며, 순식간에 3마리의 목을 베어 버린다.
-끄아아악! 주군! 이렇게 먼저 가는 미천한 신하를 용서하소서!
타로스는 순식간에 놈들을 처리하고자 하였다.
주변으로 꾸역꾸역 언데드 군단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뭉쳐 오는 데스 나이트들에게 파워드 킬을 세 방 뿌린다.
퍼어어엉!
오색의 찬연한 폭발과 동시에 데스 나이트들이 산산조각 났다.
결국 타로스는 놈들을 모두 처리하고 언데드 킹 앞에 설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로운 표정(적어도 타로스는 그렇게 느꼈다)을 짓고 있던 언데드 킹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전체적으로 해골의 얼굴이었기에 당혹감이 나타나는 것이 인간과는 달랐지만, 붉은 안광이 깜빡거리는 것을 보면 상당히 당황하지 않았을까.
언데드 킹은 리치라는 것이 무색하게 검을 들었다.
놈에게서 고대의 검술이 펼쳐졌다.
쿠아아앙!
주변의 모든 것이 파괴된다.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던 언데드들도 잠시 멈추었다.
괜히 휘말린다면 모조리 분쇄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앱솔루트 배리어를 친 후에 초감각으로 화려한 고대 검술을 견식한다.
'도저히 틈이 없을 지경이군.'
언데드 킹 LV. 91
고대 왕국 라무스의 왕.
레벨이 91이라는 것은 제국의 자작급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스킬이 동원되지 않는 이상 타로스가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 타로스도 검술을 익히게 되었으니, 혹시나 언데드 킹의 검술의 일부를 배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휘어지는 검은 검강들.
수도 없이 많은 칼질이 앱솔루트 배리어를 때렸고, 10초가 지날 즈음에는 다시 앱솔루트 배리어를 치며 검술을 견식했다.
그러던 와중 타로스는 고대 왕국의 검술이 시공검결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휘어지게 하여 타격하는 것이었으며 저절로 그 원리를 깨닫게 됐다.
고대 왕국의 검술은 시공검결의 하위 호환이다.
머릿속으로 검술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새겨 넣었다.
한편, 언데드 킹 라무스는 아무리 검강을 날려도 깨어지지 않는 무형의 막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노오오옴! 감히 본 왕을 능멸하는 것이냐!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실망인데."
이 정도면 고대 왕국의 검술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
마력이 무한하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검술을 견식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타로스의 마력은 이미 2,500을 소모하고 있었다.
여기서 빠져나갈 마력까지 생각하면 슬슬 끝장을 내야 하는 것이다.
놈이 멈칫거리는 순간, 승부는 결정되었다.
타로스는 스모크와 초공간 이동을 사용하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아쉽지만, 이만 죽을 때가 됐다."
쾅! 콰르르르릉!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제후들은 물론이고 공국의 귀족들은 저 멀리 보이는 전투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에 황제가 불가사의한 모습을 보여 왔기에 제후들이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당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지만, 공왕이나 공국의 귀족들은 아니었다.
도저히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기동성과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를 날려 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투명한 막을 펼치며 가만히 언데드 킹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간이 어찌 저런...?"
델리안 공왕은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드래곤은 물론 마계의 대군주조차 죽여 버렸다는 황제였다.
소문이야 무성하였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공국 내에서도 논쟁이었다.
과연 황제는 정말로 드래곤을 뛰어넘었는가?
인류 최강자로서 자리 매김을 했는가?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공국 내에서도 황제의 실력이 어느 정도는 거품이 끼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니 도저히 거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공국 사람들은 그저 지금 상황에 놀라기 바빴지만, 제후들은 황제가 정확하게 무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언데드 킹의 검술을 보고 계신다."
"...!"
"과연. 언데드 킹이라면 매우 오래 전부터 살아남았을 것이고, 리치 주제에 검강을 사용하며 검술을 펼치니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파악하고자 함입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랭턴 공작과 제후들의 평가에 공국 사람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승부를 벌여도 부족할 판국에, 언데드 킹이 펼치는 검술의 구조를 파악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1분 이상 흘렀을까.
당연하게도 언데드 킹의 검은 황제의 옷깃도 스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황제가 움직였다.
"아아!"
그들은 보았다.
황제의 몸이 이리저리 공간을 넘어 다가가는 광경을.
그렇게 잠시 후.
쿠아아아앙!
언데드 킹의 몸이 조각조각 나 흩어졌다.
"역시 폐하시군."
랭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제후들.
놈이 죽자마자 마법사들이 파이어 레인을 시전하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파이어 레인은 시전이 되는데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사이, 황제는 언데드 킹을 끝장내고 유유히 도시를 빠져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