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 * *

떠날 채비를 마친 그레이스가 배웅하던 내게 돌아섰다.

"로한.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

외투를 갈무리하던 나는 그 말에 멈칫했다.

"내일 리펜슈타인 님과 저녁 약속이 있는데, 거기서 너를 내 수행 기사로 대동하고 싶어."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리펜슈타인'.

한때 내가 빠져 지냈던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내가 언젠가 마주해야 할 그레이스의 '님'.

'미하엘 리펜슈타인'은 현재 스프링윈드 대학의 마법방어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미하엘과 조우하지 않은 건, 그가 자주 다니는 동선을 일부러 피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들려온 그레이스의 음성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로한?"

"죄송합니다. 잠시 일정을 생각 중이었습니다."

"어려우면 거절해도 좋아. 로한은 이제 내 부하가 아니니까."

"아닙니다. 저 로한, 그레이스 교수님의 수행 기사로서 임무에 충실하겠습니다."

내가 각까지 잡고 예를 갖추자 그레이스가 만류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말이 수행 기사지, 로한도 저녁에 초대하고 싶어서."

"그래도 의무를 저버리는 건 기사로서 도리에 어긋납니다."

"이런 면은 여전하구나."

어쩔 수 없다.

그레이스가 미하엘과 만난 순간 운명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기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개는, 다행히 내가 아는 그 '전개'다.

오랜만에 미하엘과 재회한 그레이스가 다시 한번 얼음장 같은 냉대를 되새기게 되는 그 사건.

내 기억으로 내일 그 자리는 그레이스가 업무상의 이유로 미하엘에게 매달린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아 낸 저녁 식사 자리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그 자리에서조차 그레이스에게 어떠한 눈길도 그리고 인사도 건네지 않는다.

미하엘이 참석한 이유는 오직 하나.

그레이스에게 직접 '파혼'을 받아 내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파혼까지도... 막아야만 되는가.

"그레이스 교수님."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리펜슈타인 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레이스 당신에게, 미하엘이 어떤 존재냐고는 차마 묻지 못했다. 물을 수 없었다.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그레이스는 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가 답했다.

"권위적이고 냉철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국민을 아끼는 분이셔."

당연하다. 그는 '주인공'이니까.

"그리고 자상한 면도 있어. 오래전엔 늘 웃음으로 화답하시곤 했었지. 아주 오래전에는 말이야...."

그렇기에 당신은 리펜슈타인을 사랑하게 '설정'된 것이다. 그는 '주인공'이니까.

"나는 리펜슈타인 님이 이 제국을 지켜 줄 거라고 믿어. 내가 갑자기 죽어도 안심할 수 있을 만큼."

그래.

그는 주인공이다.

그에 비해 나는 비중도 없는, 언제 사라져도 모를 '등장인물 344' 정도에 지나지 않고.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의문도 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 * *

그 의문은 내가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올랐다.

'어째서 나는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아닌, 로한으로 빙의했는가'.

처음부터 내가 미하엘이었다면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레이스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저 바라던 '눈길'과 '한마디'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이곳으로 보낸 작가의 농간이었을까?

나를 이 세계에 던져 놓고 내가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 구경이라도 할 셈인가?

그렇다고 댓글에 욕을 한 바가지 갈겨 놓은 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다.

오히려 좋다.

지금 내가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그때 모두 전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다.

어째서 내가 미하엘이, 주인공이 아닌지 말이다.

"이쪽이야, 로한."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자 어느새 그레이스와 약속한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수줍게 손을 들어 올린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벌써 도착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게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더 일찍―"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 말에 나는 그레이스의 시선을 쫓아 하늘을 우러렀다.

푸른 어스름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그 아래로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정말 '날씨가 좋았다'.

또한 어떤 '예상'을 지워 내기 위해서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

그러다 나는 그레이스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나의 그레이스는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울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언제나처럼 소설을 읽듯, 당신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부웅⸺

그사이 호화로운 리무진 한 대가 식당 앞에 정차했다.

나와 그레이스는 서둘러 내려 뒷문을 열고 있는 기사를 주시했다.

저벅.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내가 수없이도 읽었던, 그 '묘사'였다.

번화가의 조명처럼 한차례 점멸하는 그레이스의 미소.

'그'를 따라 내린 또 다른 인물, 아리엘 리펜슈타인.

모든 묘사가 그를 위해 쓰여지듯,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우릴 보고 미간을 좁히는 미하엘 리펜슈타인.

마침내 이 페이지에 '진짜' 주인공이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 주인공 (5)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직도 소변을 가리지 못해 반 친구들을 따라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조금 모자랐던 탓에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고, 덩치에 맞지 않게 성격은 또 내성적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이렇듯, 나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조연'의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이들의 '배경'이자, 그들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조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성년자라는 가림막 없이 마주하게 된 사회는 더욱 철저히 '주인공'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었다.

"오랜만이다, 로한. 못 본 사이에 부쩍 성장한 것 같군."

지금 내 기분이 그랬다.

다시금, 그 현실을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던 미하엘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미하엘은 그레이스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그녀의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갔다.

...빌어먹을 자식.

"리펜슈타인 님."

"왜 그러지 로한? 곧 예약 시간이다. 대화는 안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아."

"아뇨. 아직 유클리드 님과 인사를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뭐라?"

더 이상 이 '페이지'를 읽고만 있지 않겠다.

네가 내 눈앞에서 그레이스를 무시하는 건 설령 그것이 나에게 득이 되는 행동이라 해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전개'라 해도.

나는 결코 좌시할 수 없다.

"...."

미하엘은 검지에 낀 반지를 어루만지며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던 내가 재차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런 수행인을 둔 것은 조금 부럽군."

그러면서 조소인지 실소인지 알지 못할 웃음을 흘린 미하엘.

어처구니가 없는 듯한 그의 표정은 천천히 그레이스를 향했다.

"오랜만이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가주님은 잘 계신가?"

"가주님께서는 늘 그렇듯 건강하십니다. 리펜슈타인 님도 그동안 어떻게⸺"

"들어가지. 저녁 바람이 차갑다."

무시된 그레이스의 인사를 뒤로한 채 돌아선 미하엘은 아리엘을 다정히 인도했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리펜슈타인들.

길을 잃은 미아처럼 얼굴이 파리해진 그레이스는 그저 입술만 옴짝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레이스를 보자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지금 미하엘을 죽이고 북마크를 사용할까 하는, 그런 생각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이런 게 익숙한 사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나를 마주한다....

"우리도 들어가자."

"...제가 모시겠습니다."

* * *

아리엘의 예상은 정확했다.

'역시 로한 님을 만나게 될 줄 알았어.'

식당 앞에 서 있는 로한을 본 순간 아리엘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순간 로한을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곁에 당연하다는 듯이 붙어 있는 그레이스를 보자 기쁜 만큼 불쾌감도 들었다.

그리고 그 '불쾌감'은, 약혼자인 그레이스를 대하는 미하엘의 태도에 '쾌감'으로 변해 갔다.

"리펜슈타인 님."

"...."

"이전에 제가 듣기로는, '올해의 멀린'상의 후보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수상하시면 연속 10년째이시니 제가 다 기쁜⸺"

"식사 중이다."

미하엘 특유의 날이 선 목소리가 그레이스의 말을 단칼에 잘라 냈다.

그러나.

"식사 중 담소는 입맛을 돋우기도 하죠. 리펜슈타인 님, 이곳은 장례식장이 아닙니다."

"...장례식?"

미하엘의 미간이 구겨지던 찰나 로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리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귀녀(貴女)분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네? 저 말씀이신가요?"

갑작스런 호명에 당황한 아리엘은 하마터면 나이프를 놓칠 뻔했다.

"저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음식도 음미할 수 있게 되고, 대화야말로 최상의 조미료니까요."

아리엘에게 답변을 받아 낸 로한은 "네 동생도 그렇다는데?"라는 표정으로 미하엘을 바라봤다.

순간 미하엘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아리엘의 시선에 화를 내지도 못했다.

미하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너답지 않다, 로한. 그새 많이 변한 모양이로군.'

그레이스가 미하엘에게 말을 걸 때마다, 미하엘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로한의 입이 열렸다.

그 말들은 모두 간결하고 직설적인 것들뿐이라 듣고 있노라면 화가 나는데, 언뜻 들어 보면 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섣불리 언성을 높이지도 못했다.

더 이상한 건 아리엘이 계속 로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치 그의 편인 것처럼.

'내가 저런 사소한 것에 휘둘리다니....'

이러한 상황은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파혼을 받아 내러 온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자.'

평정을 되찾은 미하엘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내며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황실 친위대장 자리를 직접 내려놓았다 들었다."

"예. 아직 제국에는 제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되어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제야 자신에게 향한 미하엘의 눈길에 그레이스는 반색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정 그 자리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

"반응을 보아하니 진심이었던 모양이군."

순간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고결한 눈빛으로 차분히 말을 잇는 미하엘의 모습에 지켜보던 아리엘까지 긴장했다.

"그대는 여전히, 내게 실망만을 안겨 주는구나."

그레이스의 얼굴에 묘한 슬픔이 감도는 것을 본 로한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레이스가 로한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가씨...?'

그레이스의 제지에 로한은 당황했다.

마치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저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 로한도 일단 더 참아 보기로 했다.

그사이 다시 고개를 돌린 미하엘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3년 후 나는 '제국 마법 기술국'의 국장으로 부임한다. 현 의장(議長)인 '슈바인 하브기어'와도 이야기를 마쳤지. 이게 무슨 의미인지, 그대도 가늠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토록 원하는 대화에도, 그레이스는 침묵했다.

미하엘의 말처럼 그레이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의미를 깨달았다.

'미하엘 님과는 영원히... 닿을 수 없다는 뜻입니까....'

모든 마법사가 꿈꾸는 직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제국 마법 기술국'은 황실 직속 기관이다.

그리고 그곳에 속한다는 건 '황제의 소유'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제국의 법에 따라 나 미하엘 리펜슈타인은, 리펜슈타인 가문의 사람이 아닌 히스토리아 황실의 소유가 된다. 그건 그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황제의 소유가 된다는 것.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수많은 특혜를 거머쥐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반대로 그에 따른 책임, 즉 '제약'도 존재했다.

미하엘은 그 제약 중 하나를 빌미로,

"황실에 속한 남자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와도 혼인할 수 없다. 하여 이 자리에서 나는 그대에게 '파혼'을 통보한다."

그레이스에게 이별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건 내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다."

리펜슈타인 가문의 일방적인 파혼이라면, 유클리드 가문은 명성까지 유지하며 별다른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미하엘이 '배려'라고 말한 이유였다.

그러나 배려는, 「강자」만이 「약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다.

모든 리스크를 미하엘이 떠안는다는 건 그의 가문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고, 그레이스보다 미하엘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부디 그대의 명성처럼, 그대가 나를 너그럽게 용서⸺"

"미하엘 님."

그의 이름을 부른 그레이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 거짓말 같은 현실을 멈추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허나 현실은 미하엘의 눈동자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흔들림 없이 선명하다.

"만일 제가 붙잡는다면... 그 자리를 거절하실 겁니까?"

"대의를 위해서이다. 그러니 그대의 거절을 거절한다."

"그럼 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미하엘의 눈이 감겼다.

그에게도 그레이스와 함께하며 좋았던 순간은 남아 있었다.

"...그대는 예전에도 내게 방법을 묻곤 했었지."

이제는 희석된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추억이듯 버리고 싶지 않은 과거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레이스 유클리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미하엘의 가슴 속에서 과거의 그레이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제국의 꼭두각시일 뿐.'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방법이 없구나."

그때 로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펜슈타인 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더는 한계였다.

* * *

화륵⸺

미하엘의 손끝에서 일어난 불씨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테라스룸에 앉은 그는 난간 너머로 도시의 야경을 응시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곳이 불타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미하엘 리펜슈타인 또한 지난 인마 대전에 참전했던 영웅이다.

그레이스에 비한다면 그의 공적은 초라하지만, 그 또한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리펜슈타인 님이 설계한 방어 술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곳도 여느 지역들처럼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데 여념이 없었겠죠."

"과찬이군. 그래, 로한. 내게 하고 싶다던 말은?"

나를 돌아보는 미하엘.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내가 아까부터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어째서 그레이스 님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간단하다. 그녀를 사랑한 적 없으니까."

손에 힘이 실렸다.

그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대사'였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겨우 그런 이유였습니까."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저 야경에 미하엘의 살점을 뿌리고 싶을 만큼.

"그래. 나와 유클리드의 관계는 가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거부할 새도 없었지. 처음부터 우리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어째서 그레이스 님은 당신을 사랑... 하는 겁니까?"

"글쎄, 그만큼 가벼운 사랑이라는 의미겠지."

꽈악⸺

나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가벼운 사랑이라고?

아니, 너를 향한 그레이스의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너는 모르겠지.

네가 고개를 들고 진실을 마주한 순간 감당해야 될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그리고 홀로 그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그레이스가,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레이스는, 아가씨는,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를 바라며 죽었다.

그것도 서럽게, 네가 아닌 자신을 원망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조차 너를 사랑했다.

「'그저....'」

떠오르는 페이지 속에서, 나는 말했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희한한 일이야. 내가 아는 로한은 수다와는 거리가 먼⸺"

"제가 리펜슈타인 님에게서 아가씨를 빼앗아 가도 되겠습니까?"

"...뭐라?"

「'나를 돌아봐 주길....'」

"아가씨의 눈길."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길....'」

"아가씨의 말 한마디."

「'...바랐다.'」

"그 모든 것을, 제가 가져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

더 이상, 조연으로 살지 않겠다.

§ 맹세 (1)

나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알고 있다.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그게 인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잔혹하며 절망적이다.

"저는 아가씨를 불행하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겠다.

전력을 다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차지하겠다.

멋모르고 달려들기부터 했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그녀에 대한 너의 마음은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다, 로한."

재떨이에 담배를 꺼트린 미하엘은 등받이 깊이 몸을 묻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너는 이미 죽었겠지."

...그래.

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은혜와 연민을 혼동하지 마라. 너의 감정은 보답이고, 그녀는 그 감정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이용... 리펜슈타인 님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까?"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나다. 그러니 마음 또한...."

"그렇다면 어째서 저는, 아직도 리펜슈타인 님에게 아가씨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미하엘.

그의 시선 속에는 비릿한 살기가 섞여 있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레이스 아가씨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당신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우리의 파혼을 알리기 위함⸺"

"실은 아가씨가 걱정돼서 오신 거 아닙니까?"

"...."

['미하엘 리펜슈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하엘이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차가운 빙벽처럼 느껴졌다.

맞닿은 순간 얼어붙고, 부딪히는 순간 산산이 깨져 버릴 것만 같은 위압감.

이런 기세를 품은 걸 보니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언제나, 이런 벽을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떠들어 봐."

"아가씨의 시선을 피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건, 리펜슈타인 님께서 더 이상 아가씨를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정의가 있고 목적이 있으며, 그에 따른 「설정」과 「서사」가 존재한다.

미하엘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소시오패스 같은 면모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람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그의 정의는 '세상의 수호(守護)'고, 목표는 '잃어버린 것들의 행복'이다.

지금 그레이스는 그가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다.

그러나 되찾고 싶어도 서로의 정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사명은 「제국의 존속」인 반면, 미하엘 리펜슈타인의 사명은 「제국의 몰락」이었다.

모두가 '국민'을 기원으로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념은 너무나 다르다.

때문에 미하엘은 그레이스를 포기했다.

그레이스가 스스로 신념을 포기하게 만드는 건, 미하엘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보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거부하고 나아가 미워하게 된 '설정'이다.

"그래서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자리에 참석하시고, 아가씨가 헛된 희망으로 고통받기 전에 냉혈을 자처하셨죠."

['미하엘 리펜슈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얼마 전까지 그를 응원했던 사람으로서 물었다.

"제 말 중 틀린 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전개가 수정되었다고 해도, 이러한 설정까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걸 확신할 수 있던 건, 그가 '정의로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미하엘이 표정을 풀었다.

"형편없는 추리는 그게 다인가? 네가 선을 어디까지 넘는지 일부러 지켜보았는데, 그래도 역시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래, 내가 '그것'까지 말하게 된다면 너는 미쳐서 날뛰게 되겠지.

네가 아리엘을 의붓동생으로 맞이한, 진짜 이유를 말이야.

"내게서 유클리드를 빼앗아가겠다고 했나? 너는 내게 통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내게 선전을 포고하는 것인가?"

"리펜슈타인 님의 확답을 받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여나 변심할 수 있으니까요."

"변심이라...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가장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아닌가?"

미하엘은 여유로웠다.

마치 바라는 일들을 반드시 실현할 것만 같은, 모든 것에서 우러나오는 여유였다.

그에 비해 나에겐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꿔야만 하고, 그렇지 못하면 나는 물론 그녀까지 죽는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미하엘의 앞에서만큼은 여유 좀 부릴 수 있다.

"제 짧은 경험으로 헤아려 보건대, 무언가 변했다고 느껴진다면 보통 자신이 변한 것이더군요."

나는, 미하엘의 여유를 어떻게 하면 부술 수 있을지 전부 알고 있다.

그것을 넘어 그를 그레이스보다 더욱 처절하게 몰락시키는 방법까지도.

"한마디를 지려 하지 않는군."

"패배에 익숙해져선 전장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훌륭하다. 그 태도는 칭찬하마. 칭찬할 건 칭찬해야지."

"배려 감사합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한결 누그러진 미하엘의 태도에 나도 긴장이 풀렸다.

자칫 검이라도 뽑아야 되나 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직은 내가 미하엘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때 내 곁을 지나쳐 가던 미하엘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가지고 싶다면 가져가라."

뒤를 돌아보자 흐트러짐 없는 그의 뒷모습이 목소리와 함께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 전개 수정 〕

···[ 당신의 운명이 악화됩니다. ]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많은 기억이 뇌리를 스쳐 갔고, 모든 순간이 원인인 것만 같다.

분명한 사실은, 어떠한 선택들이 모여 현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레이스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레이스 님."

로한과 미하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접시만을 아득히 들여다보던 그레이스는 아리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리엘이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닦으시지요."

"...?"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던 그레이스는 이내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묻어나오는 물기.

미지근하고 축축한 감촉에 그레이스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 한 방울을 닦아 내는 동안, 손수건을 거둔 아리엘이 깍지를 낀 손 위로 턱을 살포시 얹었다.

"얼마 전 스프링윈드 검술학과의 교수로 부임하셨다 들었습니다. 우연이네요. 저도 며칠 전에 스프링윈드에 입학 수속을 마쳤는데."

"희소식이구나."

"이제 자주 만나게 되겠네요⸺."

마음을 추스린 그레이스가 반갑게 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우리."

아리엘의 얼굴을 바로 본 그레이스는 순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미소는 어딘가 섬짓했다.

분명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와 다르게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

힘없이 풀린 눈매 속에서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어둠을 본 그레이스는 등골이 작열감으로 휩싸였다.

'어째서 이 느낌이....'

불패의 화신이라 불리던 그레이스조차 전쟁터에서 만큼은 한 가지 감정을 피해 가지 못했다.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이질적이고 소름 끼치는 감각.

그것의 정체는 '죽음'이었다.

"소문대로 과묵한 편이시군요. 괜찮아요. 제게 침묵은 익숙하니까. 참, 저도 기사를 꿈꾸고 있어요. 그레이스 교수님처럼 아름답고 눈부신, 그런 기사를."

그것도 잠시.

아리엘이 미소를 거두자 그 감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한 그레이스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답했다.

"그리 될 거야. 나 또한 그리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지난번 강의엔 제가 참석하지 못했지만, 학생들 사이로는 대단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강의 주제가 '사계'의 변형이라 들었는데. 그건 교수님의 전력이 아니신가요?"

"그저 나는 내 모든 것을 가르칠 뿐, 그러지 않으면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가 없⸺"

"그 가르침 때문에 교수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허리를 곧게 편 아리엘은 자세를 다소곳이 고쳤다.

점점 흐트러지는 그레이스의 얼굴에 아리엘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자신의 책갈피로 만들어 쓰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직선적이고 차가운 어조 속에서,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모두들 그 이름 앞에 영광스러운 칭호들이 따르는 걸 부러워하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

"...."

"그런데 말이에요.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가, 그 칭호에 묻어 있을까요?"

수많은 이들의 피로 칠해진 것이 바로 그레이스의 수식이다.

'제일의 웨펀 마스터'이자 '알파 등위의 검신(劍神)'.

그 외에도 많은 수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를 묻힌 칭호는 바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앗아 갔을지... 교수님. 몇 명까지 죽여 보셨어요?"

하블다운 제국 제9 군단의 '군단장'이었다.

"...!"

그렇게 '그레이스 유클리드'라는 이름에 칠해진 붉음은 도도한 삼도천을 수놓는 노을보다 공포스럽고, 전장에 얼룩진 피보다 짙어 모두가 그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은 유명인인 그레이스에게 어떠한 이들도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이자, 그녀가 '혼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모두는 알고 있다.

그레이스가 제국을,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앙하고, 받들어졌다.

그러나 눈앞을 뒤덮는 피처럼, 그레이스의 가슴 한편은 말 못 할 죄책감들로 물들어갔다.

"기억은 나세요? 당신이 죽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또 누구의 '가족'이었는지 알고 계시냐고요!"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언성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잠시 흥분한 모양이에요. 아직 미숙한 저를 부디 용서⸺"

"네 말이 옳다."

그레이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와 반대로 식탁 아래로 감춰진 그녀의 손틈 사이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많은 이들을 죽였다."

어느 때보다 담담한 고백이, 아리엘의 가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군이 달라서, 목표가 달라서, 신념이 달라서, 정의가 달라서, 그리고 국가와 종족이,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서 죽여야만 했다."

그레이스의 눈동자 위로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검 아래 숨을 거둔 이들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들의 얼굴 모두를...

...잊은 적 없었다.

"신념, 정의, 목표... 그런 게 다르면, 모두 죽어야만 하는 건가요?"

"내게 지켜야만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당신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 나라와 국민, 그리고 내가 아끼는 이들을 나는 지키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가슴 아픈 얼굴들이 지나간 자리에 가슴 뛰는 얼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때였다.

'로한...?'

몇 없는 얼굴 속에서, 오직 로한의 얼굴만이 유독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늘 되새기던 마지막 얼굴은 언제나 미하엘이었을 터인데....

그러자 혼란스러웠다.

로한은 그레이스가 아끼는 전우임은 틀림없었지만, 이 정도까지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진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로한이라는 이름의 「싹」이 튼 지 오래였다.

이내 로한의 얼굴을 지워 낸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엘의 곁으로 다가섰다.

"뭐 하시는 거죠? 앉으세요! 가까이 오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것을 빼앗았다. 그리고...."

아리엘의 눈동자 속에서 그레이스가 서서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처음 기사가 되었던 날처럼 맹세를 하듯 아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로 인해 네 소중한 것을 잃었다면, 그래서 상처받았다면. 지금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 줘."

"그만... 그만하세요."

"속죄하고 싶어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리엘이 바란 건 이런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뭐가 어쨌냐.

어차피 나약했기에 죽은 것이다.

분수도 모르는, 멍청한 족속들.

이런 대답을 바랐다.

그래야 편지의 내용을 따라 그레이스를 죽이게 될 때.

'나는 당신을... 미워해야만 해.'

조금은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명성 그대로의 아니, 오히려 대중들에게 알려진 명성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수하고 나약한... 한 사람의 진심이었다.

"그러니 부디 이 지옥에서...."

그레이스에게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살아 있는 걸 허락해 주길 바라."

그러자 아리엘은 무엇이 진실인지 또다시 알 수 없게 되었다.

§ 맹세 (2)

우리가 식사하던 개인실로 들어선 나는 말없이 멈춘 미하엘의 시선을 좇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그레이스가 아리엘의 곁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불안감이 내 목덜미를 타고 음습하게 기어올랐다.

"유클리⸺!"

내가 다급히 외치던 순간이었다.

"식사는 끝났다. 아리엘."

미하엘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은 그에게 다가가 살포시 손을 얹었다.

"네, 가주님."

"돌아가자."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어딜 봐서 저게 오빠가 동생을 대하는 태도인지.

그가 아리엘을 대하는 태도는 귀족의 격식이라 부르기엔 모든 행동들이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기 쉬울 만큼.

마치, 누군가에게, 대놓고, 보란 듯이.

"유클리드."

인사도 없이 식당에서 떠나려던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돌아봤다.

바닥에 버려져 있던 그레이스의 시선이 서서히 그를 향했다.

"번복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오늘 우리의 파혼은 보류하도록 하지."

"예? 그렇다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미하엘은 그레이스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식당을 떠났다.

"...가십시오. 리펜슈타인 님."

얼마 후 열린 문 너머에서 리무진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어지는 엔진 소리.

나와 단둘이 남은 그레이스의 모습은 한바탕 전투를 마치고 탈진한 병사와 다름없었다.

그저 바닥에는 피와 시체 대신 한 사람의 한숨과 고민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사이 나는 그레이스를 살폈다.

ㅤㅤ[그레이스의 운명]

○━━━○━━━━━●

다행이다.

그레이스의 운명에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털썩.

아리엘이 앉았던 자리에 주저앉은 그레이스가 팔걸이 아래로 두 팔을 늘어놓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가슴 밑바닥부터 미지근한 감정이 스멀거렸다.

"나...."

불완전하게 떨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 속에서, 나는 등 뒤로 감춘 주먹을 깨질 듯 쥐었다.

"...배고파, 로한."

지켜봐야만 하는 슬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노.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 * *

반짝이는 야경이 스쳐 가는 차장으로 비치는 미하엘의 얼굴.

그것을 마주하고 있던 미하엘은 사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한.'

미하엘이 알고 있는 로한은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늘 우직하고 충실한, 그레이스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기사였다.

미하엘은 그런 로한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야말로 기사라는 수식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였다.

때문에 언젠가 '대의'를 실행할 때 필요한 인재 중 하나로 로한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제가 가져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로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네가 유클리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이상,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레이스를 '남 주긴 아깝고, 자신이 갖기엔 싫다' 같은 얄팍한 욕심 때문이 아니다.

'언젠가 그레이스는 나의 가장 큰 적이 된다. 그 순간 너도 그녀를 따라 내게 검을 겨누게 되겠지.'

인마 대전 이후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귀재(鬼才)들은 제국에도 200명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에 국한되지 않고 대륙을 놓고 봐도 기껏해야 500명. 물론 힘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도 많이 존재하지만, 그런 자들은 논외다.

'너만 한 전력을 잃는 것을 넘어 적으로 돌리게 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뿐더러 미래를 전망하기 어렵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로한은 상위에 속하는, '웨펀 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존재 중 하나였다.

그런 존재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실수다. 그리고 미하엘은 실수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전에 너희의 사이를 찢어 놓아야 된다.'

그래서 미하엘은 파혼을 보류했다.

그가 가진 세력으로 로한 같은 감마 등위 따위는 단번에 짓밟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오늘은 너에게 말미를 내어 주겠다. 큰 힘을 부수는 데는 더 큰 힘이 필요하지만, 자신보다 나약한 자를 무너트리는 건 자비니까.'

그가 품고 있는 대의는 아득하다.

어쩌면 영원히 쫓아도 달성조차 기약할 수 없는 난관에 시간은 무의미했다.

더욱이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근시안적으로 행동해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저는 아가씨를 불행하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너의 목표는 그것인가....'

미하엘은 로한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눈동자 위로 전쟁의 역사를 잊은 채 찬란하게 빛나는 도시의 전경이 비치고 있었다.

'...초라하군.'

그 어떤 것과 비교해도 초라했다.

로한, 그가 가진 힘에 비한다면 볼품없을 정도로 사소한 희망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미하엘은 로한의 존재가 더욱 화려해 보였다.

'그래도 너는 여전히 가치 있다. 목표를 달성하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는 법. 무엇보다....'

미하엘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아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은 부러질지도 모를 내 「검」을 위해서 너는 반드시 필요하다.'

곧 생각을 밀어낸 미하엘이 부드럽게 물었다.

"식사는 즐거웠느냐."

"덕분에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어 기뻤어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식당에서 그레이스에게 보였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미하엘은 평소보다 시무룩해진 아리엘의 이목구비를 응시했다.

"⸺유클리드와는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이냐? 그리 심란한 얼굴은 처음 보는구나."

"...."

아리엘은 침묵했다.

미하엘이 로한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아리엘 또한 그레이스의 말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아리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거둔 미하엘의 호의 역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미하엘,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리펜슈타인 가문의 일원으로 맞이했다는 것쯤은 아리엘도 알고 있었다.

"유클리드 님이 저희 학교 검술학과의 교수님이셨더군요. 그래서 잘 부탁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녀가 어떻게 답하디?"

그러자 아리엘은 거짓으로, 가장 진실에 가깝게 미소했다.

"사력을 다해, 부단히 노력하시겠다고 답하셨어요."

"그런가. 그렇다면 안심이 되는구나."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한참이 지나고, 운전기사가 거의 다 떨어진 리무진의 마력(魔力)을 확인하고 있을 무렵.

아리엘이 끊어졌던 대화를 조심스럽게 이어 붙였다.

"가주님.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요."

"편히 묻거라."

"어째서 유클리드 님과의 혼약을 깨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주 오래된... 두 분만의 약속이 아니셨나요?"

아리엘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미하엘에게 혼약은 듣는 순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아주 민감한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하엘은 어떠한 분노도 그리고 미련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지키기엔 버거운 존재니까."

그리고는 아리엘을 오래토록 응시했다.

* * *

치익―

나는 그레이스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방금 딴 캔맥주를 그녀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러나 그레이스는 캔맥주를 두 손으로 붙들고 있을 뿐,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원래 그레이스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마시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제약을 자신에게 걸어 두었다.

일종의 자기 관리인 셈이다.

그랬던 그레이스가 지금 술을 마신다는 건... 맨정신으로 눈을 뜨고 있기엔 버겁다는 의미겠지.

"정말 이거면 되겠습니까?"

"이거면 충분해."

지금 물은 것도 두 번째였다.

내게 배고프다고 말한 그레이스는 식당의 음식 대신 편의점 샌드위치와 맥주를 원했다.

아까는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리펜슈타인 님을 설득한 거야?"

달빛만이 일렁이는 호수.

그 수면 속으로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가라앉기 전에 나는 답했다.

"그분의 결정입니다. 저는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미하엘에게 그레이스를 내가 가지겠다 말했다고는 절대 말 못 한다.

그때는 그저 그레이스가 무시당하는 게 싫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레이스를 보며,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가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당신의 불행을 지켜보기만 해선 운명을 바꿀 수 없을 테니까.

"저는 싫습니다."

"...어?"

"교수님께서 무시 받는 것도, 그래서 아파하시는 것도, 그러면서도 닿을 때까지 계속 나아가시는 것도 전부...."

말하고 보니 아차 싶었다.

이건 마치, 내가 그레이스를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만 같잖아!

"그러니까 제 말은, 한때 제 상관이셨던 그레이스 님이 겨우 그런 사람한테 쩔쩔매시는 모습이 낯설어서, 전장을 휩쓰시던 그 모습과는 괴리가, 원래 그레이스 님은 강하신 분...."

...횡설수설하지 마!

일단 진정하자. 진정하고....

"⸺풋!"

...그것은 어떤 페이지에서도 쓰여지지 않았던, 묘사였다.

"로한이 이렇게 재밌는 사람인지 처음 알았어."

아롱아롱 쏟아지는 달빛 아래.

만개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로한의 말이 옳아. 어째서인지 그분 앞에만 서면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눈앞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돼."

내가 그렇다.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도, 언제나 마찬가지다.

"리펜슈타인 님이 나를 싫어하신다는 걸 알아. 그 이유도. 그래도 언젠가, 내 선택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어."

눈빛, 목소리, 향기.

그녀의 모든 것에 나의 오래된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어느덧 8년이 지났는데도 그분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어. 그저 그때처럼, 나를 멀리멀리, 밀어내고 계셔."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던, 억누르다 못해 넘쳐 버린 단 하나의 감정.

...고독.

그 감정이 그레이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 그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만큼, 이 제국을 지키고 싶으니까."

멍울진 가슴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를,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노래하는 감정에, 내가 섞일 부분은 없다.

"로한."

그 부름은 나를 전율케 했다.

이미 넘쳐 버린 감정들이 다시 넘칠 듯 그 공간마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우리의 현실이 그 감정들을 타고 떠올랐다.

"어째서 내 곁을 떠나지 않았어? 내게 한 맹세 때문이야? 대답해 줘."

그 말들이 쓰라렸다.

그것은 '로한'에게 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자 숨을 쉴 수 없었다.

내게 이 대답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

"기사에게 맹세는 목숨과 같습니다."

가슴 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내 목소리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러나 입을 연 순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지 못했다.

"그러니 저는, 아가씨의 곁을 영원히 지킬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맹세다.

§ 방해 (1)

방 안으로 스며드는 여명에 고개를 든다.

그제야 나는 아침이 왔다는 걸 깨닫는다.

"일단 여기까지."

펜을 내려놓고 내 앞에 펼쳐진 노트를 덮었다.

노트에는 나만이 알아 볼 수 있는 내용이 암호로 적혀 있었다.

모두 이 세상과 관련된 정보들이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날 이벤트는 5일 후 '아나바다'에서 진행될 경매...."

...여기서 나는, '사탕 반지'를 구매해야 된다.

정확히는 미하엘에게서 그 반지를 가로채야만 한다.

뭔 갑자기 '아나바다'에서 '사탕 반지'를 가로채냐 싶겠지만, 이것들은 전부 내가 만들어 낸 암호다.

'아나바다'는 「황실 경매」, '사탕 반지'는 「호라이즌 펜던트」.

이런 식으로 나만 이해할 수 있게 이름을 바꾼 건 누군가 이 노트를 읽게 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내 기억력은 유한하다.

한계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증발하고 있다.

그러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미하엘과 관련된 사건들은 빠짐없이 기록해야만 한다.

그를 무너트리고 그레이스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선 말이다.

"펜던트. 그게 미하엘의 손에 넘어가선 안 돼."

호라이즌 펜던트는 이름 그대로 호라이즌 가문의 펜던트다.

그러나 호라이즌 가문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마공학 명가'다.

이 세계에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석탄이나 석유로 불리는 에너지원조차 없다.

그 대신 마나가 깃든, 흔히 신의 돌이라 부르는 '에테르 스톤'이 존재한다.

에테르 스톤은 마나가 풍부한 동굴이나 지층에서 발견되는 돌인데, 이 돌이 오랜 시간 마나를 흡수하며 생겨난 일종의 천연 배터리다.

그리고 모든 마공학은 에테르 스톤을 기반으로 한다.

때문에 내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형광등에 사용되는 에너지 모두 이 에테르 스톤의 마나로 작동하고 있다.

아무튼, 펜던트는 마공학자 중에서도 탑이라 불리는 '루나·호라이즌'이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공학 병기」다.

그깟 펜던트가 무슨 병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 펜던트는 착용자를 「병기」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병기. 그게 아리엘의 목에 걸려선 안 돼."

펜던트를 구매하는 건 미하엘이지만, 그는 그걸 아리엘에게 선물한다.

그렇게 된다면 그레이스는 또다시 왼팔을 잃게 된다.

일시적이지만, 그 힘은 상대가 웨펀 마스터라 할지라도 위협적이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나."

되새겨 보니 작가는 처음부터 아리엘이 그레이스의 팔을 자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 말은 구상 단계부터 예정돼 있었다는 말인데.

아, 신쓴 이 망할....

띵― 동―

초인종 소리에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레이스인가?

주말도 아닌데 어쩐 일이지?

띵― 동―!

거울 앞에 선 나는 옷깃을 정돈했다.

그리고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서 오... 엘리스 님."

"아 더럽게 늦게 나오네. 뭐야 그 표정은? 왜 날 보자마자 실망부터 해?"

"...아닙니다. 그보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것도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자 눈앞으로 블라우스가 살랑거렸다.

뒷짐을 쥐고 서 있던 엘리의 눈초리가 의심스럽게 변했다.

"왜, 여자라도 숨겨 놨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칼을 물겠습니다."

"그렇다고 자결할 것까지야. 괜히 호들갑은. 그럼 들어가도 되지?"

엘리는 내가 답하기도 전에 나를 슬며시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거면 왜 물어봤을까.

약간 강렬한 장미 향 속에서 나는 엘리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신발을 정리하고 거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뒷짐을 쥐고 집안을 둘러보던 엘리가 거치대로 다가서며 말했다.

"밖에서 보던 것처럼 집이 아담하네? 남자 혼자 사는 집치곤 깨끗하고. 이 거치대 어디서 샀어? 인터넷? 아님 공방? 디자인 괜찮다."

"오래되어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크레스켄트(Crescent)에 있는 하블다운 공방일 겁니다. 그리고 지내는 공간은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니 청결하게 유지, 아니 정말 왜 오셨습니까?"

하마터면 엘리의 분위기에 휘말릴 뻔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묻자 엘리는 걸어간 소파에 걸터앉았다.

"부탁이 있어서."

또 부탁인가.

그레이스의 부탁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지난번에 그레이스 님 강의. 그거 요약본 좀."

"정말 어⸺"

"또 어련하십니다 하면 죽어."

"...."

소파 깊이 몸을 묻은 엘리가 목만 기울여 나를 올려다봤다.

"다른 애들한테 사려고 했는데 파는 사람이 있어야지. 하여튼 지들만 잘났고 지들만 중요해. 아~ 각박한 년들."

정말이지 대책이 없는데, 그 모습이 꾸밈없이 솔직해서 미워할 수가 없다.

그레이스가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우라면, 쟤는 그냥 스코빌 지수 1만짜리의 매운 사탕 같다.

매워서 뱉고 싶은데도 계속 입에 머금고 있게 되는, 그런 사탕 말이다.

"요약본은 저에게도 없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잘 수강했어야죠."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아니 한 장만. 세 줄 요약도 좋아!"

"두 번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아이~~ 진짜! 로한 핸드폰에 아빠 번호 뜨게 만들어 줘?"

"한 번만 말씀드릴 테니 잘 받아 적으십시오."

엘리가 데니스에게 한마디라도 하는 순간 괜히 귀찮아질 거다.

무엇보다 이전에 청탁을 받은 것도 있고, 나도 엘리만큼은 어떻게서든 스프링윈드를 졸업시키고 싶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지난 강의의 핵심만을 추려 이야기했다.

"아 잠깐만. 됐다. 계속해."

뭘 하나 싶어 보니 엘리가 스마트폰을 꺼내 내 말을 녹음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런 부분은 빠삭하다니까.

"...여기까지입니다."

"미친... 나 빼고 그레이스 님의 사계를 배웠다고? 그것도 전부 다?"

"사계·봄의 수정 사항이 있어 다음 강의 때 그 부분만 보완해서 다시 가르칠 겁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엘리스 님도 필히 참석 바랍니다. 학점은 채우셔야죠?"

"진짜? 다행이다! 아 이제 좀 살겠네. ...근데 나한테 언제까지 존대할 거야?"

갈증이 나 부엌으로 향하던 나는 잠시 멈춰 엘리를 돌아봤다.

엘리의 경우 전개가 수정되며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앞서 말했듯 원래라면 엘리도 내게 존대를 해야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로한은 이제 날 가르치는 선생님이잖아? 근데 선생이 학생한테 존대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건 자신의 학생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이제 다 성인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너무 딱딱하잖아. 로한, 까놓고 우리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둘만 있을 땐 말 놓고 친구 할 때 되지 않았어?"

"...그리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엘리가 이성이나 제자가 아닌 친구로 느끼고 있었다.

엘리가 친화력이 좋은 것도 한몫했지만, 내가 그녀를 읽던 시절에 은연중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둘만 있을 땐 놓을게. 공사는 구별해야지."

"난 상관없는데. 뭐 로한 좋을 대로 해. 이제 나도 편하네. 계속 친오빠 같은 사람이 뭐만 하면 맨날 '입니다' '하셨습니까?', 이러는 거 좀 부담스러웠거든."

누군가 엘리에게 말할 땐 늘 존댓말이었을 것이다.

에클라트 기사단을 이끄는 데니스가 웬만큼 부유했던 탓이었다.

때문에 엘리의 이름은 언제나 '님'이라는 형식적인 명사에 의존해야만 했고, 쾌활하고 답답한 건 못 참는 그녀의 성격상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엘리가 입을 열었다.

"근데 언제 출근해?"

"그야 슬슬... 지금이 몇 시지?"

"7시. 그리고 58분."

빌어먹을!

이러면 그레이스보다 늦게 출근이다.

여기서 바로 오는 열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최소 30분은....

"혼자 뭘 그렇게 심각해? 나 차 가지고 왔어. 태워 줄게. 내 부탁도 들어줬으니까. 히―"

그리고는 올해 출시한 신형 하이퍼카인 '인페르노'의 리모컨 키를 흔들어 보이는 엘리.

이래서 친구를 잘 둬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기다려. 금방 올게."

"나 출출한데. 뭐 없어?"

"냉장고 두 번째 칸!"

서둘러 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나는 다급한 것도 잠시 엘리를 한동안 바라봤다.

"...엘리."

"오, 이젠 완전 애칭으로 부르기로 한 거야? 좋아."

"마음이 바뀌었어."

"응?"

"차는 필요 없어. 대신 다른 부탁이 있다."

방금 펜던트의 주인이 정해졌다.

* * *

「호라이즌 펜던트」

세간에서는 그 펜던트를 「루나의 역작」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132년 전.

대륙에서도 희소한 최상급 에테르 스톤과 명장의 혼을 갈아 넣어 만든 결과, 세상에 다신 없을 괴랄한 보물이 탄생하고 말았다.

―지키고자 하면 지킬 것이고, 죽이고자 하면 죽일 것이다.

펜던트를 완성한 루나 호라이즌은 제국의 역사 한 페이지에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력 873년, 가을. 미쳐 버린 호라이즌의 가주가 일족을 모두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은 펜던트에 깃든 저주로 밝혀졌다.」

유감이지만 루나가 가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물건은 오히려 가문을 멸문시켰다.

"사탕 반지는 착용자의 잠재의식을 증폭하는 물건...."

품고 있는 마음이 순수하다면, 그 힘은 순수하다.

반대로 품고 있는 마음이 악하다면, 그 또한 악해진다.

때문에 그릇된 마음을 품고 있던 호라이즌 가문의 차대 가주가 그 펜던트를 계승한 순간 폭주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하여 호라이즌 가문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 바로 그 펜던트였다.

"그리고 그 반지가 이번 아나바다에 출품된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살 수 있을까."

펜던트의 가격이 더럽게 비싸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미하엘이 낙찰받은 가격은 300억 링.

참고로 편의점 샌드위치 하나에 600링이다.

그만큼 엄청난 액수라는 의미다.

실제로 로한이 가진 돈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

오늘 아침 엘리의 고집에 못 이겨 인페르노를 타고(승차감이 어마어마했다) 별관에 도착한 나는 집무실에 도착해 가장 먼저 계좌를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 결과는.

[ 예금액 : 13,642,090,050 ℛ ]

136억 정도.

이게 내가 가진 전 재산이다.

이전에 인마 대전에 참전했고, 그 후로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역임한 결과였다.

솔직히 참전 영웅치고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

실제로 인마 대전에서 웬만한 공적을 쌓았던 기사나 마법사들은 그때 받은 포상금으로 지금 엄청나게 잘살고 있다.

그 상관에 그 부하라고, 계좌 내역을 살펴보니 내가 빙의하기 전 로한이 여러 복지 시설에 기부금을 보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육원 같은 시설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도, 로한의 '과거' 때문이겠지.

이래서는 펜던트는커녕 펜던트 줄이나 살까 말까다.

그래도 그레이스보다 네가 낫구나.

다행히 결혼 자금 정도는 남겨 뒀으니.

아무튼 그래서 떠올린 게 바로 엘리다.

300억 정도야 계좌에 0이 썩어 나는 에클라트 가문에겐 약간의 결심만 한다면 모바일 게임에 현질하듯 질러 버릴 수 있는 돈이다.

엘리는 그런 데니스의 딸이고.

문제는 엘리가 이 '쇼핑'을 수락하냐인데....

띠링―

일순 울리는 알림에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엘리>

: 가자. 어차피 나 이제 술 끊기로 해서 한가하니까

됐다!

이렇게 되면...!

<엘리>

: 대신 맘에 안 들면 로한 내 발닦개로 만들 거야

농담도 참....

<엘리>

: 농담 같아? 황실 경매 때 보여 줄게. 기대해 ^^

...오케이.

§ 방해 (2)

〔 보유한 개연성 : 31 P 〕

나도 모르는 사이 이래저래 많이도 모였다.

아마도 미하엘을 상대하며 다시 한번 전개를 수정한 덕분인 거 같은데, 한동안 정신이 없어 이제야 확인했다.

그럼 나도 쇼핑을 해 볼까.

「설정 상점」을 불러오자 가물가물해진 인터페이스가 눈앞으로 나타났다.

내가 구매할 수 있는 건 500P가 필요한 「설정 상점 강화」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개.

그중에서 「성장」은 이미 구매했으니 남은 건 네 개다.

이미 구매한 설정의 레벨을 올리고 싶지만, 일단은 여러 설정을 가지고 있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해도 추가... 이건 일단 제외."

아직 「이해도」가 간절한 시기는 아니다.

이 설정이 내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전부 파악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해도」 ⸺ 미하엘 리펜슈타인

✵현재 이해도 : 5.3%

미하엘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올랐음에도 어떠한 변화는 없었다.

'로한'의 이해도가 올랐을 때처럼 어떤 기억이 밀려온다던가, 좀 더 몸에 익숙해진다는 느낌조차 없다.

예상해 보자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는 살짝 다르게 작용한다는 말인데... 일단 패스.

그리하여 남은 것이 바로.

「북마크 추가」

「식스 센스」

「상태창」

이 세 가지다.

일단 차근차근 추려 보자고.

「북마크 추가」.

이게 참 애매하다.

예비 슬롯(일종의 세이브 포인트)이야 많으면 좋긴 하지만, 아직은 필요를 못 느끼겠다.

지금까지 내가 잘해 오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고 싶어도 지난 일요일.

'내 운명'이 악화됐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그레이스처럼 나의 운명 또한 악화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좋지 않은 변화다.

그런데.

내 운명에 얽매여 발버둥 칠 생각은 없다.

나의 목표는 하나다.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구원.

그녀를 구제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때문에 나의 운명이 악화된다 하더라도, 그녀의 운명이 밝은 쪽으로 기운다면, 그것을 '악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배제한 채, 모든 것을 그레이스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에 흔들릴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도, 살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이기심은 하나다.

그레이스의 행복.

오직 그것뿐이다.

...생각이 길어진 걸 보니 나도 심란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목숨이 직결되어 있으니 당연하겠지.

여하튼 결론은 '아직 북마크를 추가할 필요는 없다'이다.

그러니 이 설정은 후순위로 밀어 두자.

다음에 볼 것은 「식스 센스」.

이 설정을 대략 설명하자면 '육감을 개방해 평소 느낄 수 없는 것을 감지한다' 정도다.

또한 운명도 정확히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가시화된 그레이스의 운명을 볼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변화를 가늠하는 정도고 그녀를 제외한 나는 물론 타인의 운명 또한 볼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내게 필요한 정보가 섞여 있다면, 개연성을 지불하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설정이다.

무엇보다 평소 느낄 수 없던 위험 같은 것들을 감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문제는 「성장」처럼 직접 사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상태창」....

...그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온 결과, 이 설정은 무조건 사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말이 상태창이지 이걸 전투력 측정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내가 현재 미하엘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아리엘이 그레이스에게 어느 정도 위협이 되는지까지 파악하게 된다.

다 보이니까.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나는 또 얼마나 약한지, 그 모든 걸 객관적인 수치로 알게 되니까 말이다.

언젠가 나는⸺ 아니 우리는, 리펜슈타인들에게 검을 겨눠야만 한다.

그들의 목표가 제국의 몰락이고, 그레이스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상태창을 사용한다면 그 타이밍을 예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결정을 마치고 설정을 구매하려던 순간이었다.

[「설정 : 상태창」을 구매하기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아니 이런 씨앗?

[ 해당 설정의 코스트는 '50P'입니다. ]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성장처럼 다 똑같이 25P가 아니었어?

뭐야.

그럼 설정에도 '등급'이란 게 있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남은 건 하나다.

반대로 선택지는 두 개로 나뉜다.

지금 식스 센스를 구매할 것인가, 개연성을 더 모을 것인가....

[ '25P'를 지불합니다. ]

...이렇게까지 고민했는데 더는 못 참지.

당장 그 타이밍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 설정 추가 : 「식스 센스」 〕

처음 설정이 추가됐을 때처럼 그다지 달라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선다느니, 이전과 다르게 느낄 수 없던 것들이 느껴진다느니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다.

그렇다고 당혹스럽거나 허무하진 않다.

나는 이미 「성장」이란 설정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모든 설정은, '액티브'란 사실을.

집무실에 앉아 있던 나는 그레이스를 돌아봤다.

"여기 술식을 이 이론으로 설명하면...."

연구 자료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 그레이스.

화보 같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정을 사용했다.

〔 「식스 센스 Lv.1」 발동 〕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바라보는 풍경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집무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형형색색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은 총천연색으로 칠해진 만화경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ㅤㅤㅤㅤ[그레이스의 운명⸺17페이지]

『생존』 "━━━╋━━○━━━━╋━━━" 『사망』

ㅤㅤㅤㅤㅤ 「분기점」ㅤㅤㅤㅤ 「분기점」

오... 이런 의미였구나.

확실히 이전보다 명확해졌다.

더구나 「분기점」이라는 것까지 보이게 됐다.

사건의 분기점, 이런 거 같은데.

아마도 중요한 지점이란 의미겠지.

"로한."

그 순간 들려오는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가만 보면 나는 늘,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했다.

"예?"

"할 말이 있어 보여서."

"아닙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금세 까먹었습니다."

"그래. 다시 기억이 나면 말해 줘. 꼭."

"감사드립니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설정을 사용한다는 생각에, 실상은 그레이스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망각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책상으로 몸을 돌렸지만, 쿵쿵 울리는 이 심장과 화끈거리는 얼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

책상에 올려진 작은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ㅤㅤㅤㅤㅤ[당신의 운명⸺17페이지]

나의 운명과 함께.

* * *

우리는 보강한 내용을 새로 강의하고 그에 맞춰 이론을 연구했다.

그레이스는 더욱 업무에 열중했다.

나는 무언가를 애써 잊으려는 듯한 그녀를 종종 힐끔거렸다.

그러는 사이 평일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부아앙⸺!

마침내 황실 경매 당일.

"도―착!"

나와 엘리를 실은 인페르노는 금방이라도 축제가 시작될 것만 같은 거리로 들어섰다.

차창 밖에는 꽤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싱싱한 주말 아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초식동물처럼 평화롭고 온화하다.

저 여유는 마음이 아닌, 통장에서 나오는 여유다.

제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찬란한 거리, 블린 우즈(Blean woods).

그러나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부르주아들의 성역(聖域)이다.

"브런치로 뭐가 좋을까~ 요?"

사람들을 피해 살살 운전을 하던 엘리가 식당을 찾아 앞 유리창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단호하게 답했다.

"식사할 시간 없어. 30분 후 경매 시작이다. 10분 전에 미리 가서 신원 확인을 마쳐야 해."

"뭐? 경매 기본이 3시간이잖아. 그동안 내 허기는 어쩌라고?"

"아침을 거른 대가지."

"로한 저기 햄버거 맛있겠다!"

"안 돼."

"좋아. 오늘은 햄버거다."

...귀에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는 필터 같은 게 달려 있는 건가?

엘리는 곧바로 핸들을 돌려 드라이브 스루에 정차했다.

"스페셜 치즈버거 세트 두 개랑 치즈 스틱 빨리요."

[합해 6,700링입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어코 햄버거를 주문한 엘리.

하여튼 자기 마음대로다.

우리는 주문한 음식을 받고 다시 거리에 진입했다. 내가 경매가 진행되는 건물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즈기기 겅메가 얼리눈 긋이댜. 군물 아페서 세...."

"뭐라구?"

꿀꺽

"...저 건물이다."

"이렇게 먹고 싶은데 어떻게 참았데. 하여튼 로한은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치?"

"버리기에 아까우니 먹은 것뿐이다. 지금도 제국에선 굶어 죽어 가는 이들로 산을...."

"정말 어련하세요."

"...."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 * *

건물로 들어선 우리는 데스크에서 신분증을 내밀었다.

신원 확인이 끝나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엘리스 에클라트 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그 말에 엘리가 나를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럼 로한은?"

"로한 님은 황실 경매 특별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석으로 배정될 예정입니다."

그러자 무언가 떠올린 엘리가 알겠다는 듯이 이마를 문질렀다.

"맞다. 우리 아빠 여기 특별 회원일 거야. 너무 오랜만에 와 봐서 까먹고 있었어."

"그럼 난 일반석으로 갈게. 중간에 연락할 테니 손에 스마트폰―"

"왜? 로한도 같이 가자."

그리고는 안내원에게 돌아선 엘리.

그녀가 싱긋 웃자 안내원은 곤란하다는 듯이 손을 모았다.

"로한 님은 에클라트 가문에 속하신 분이 아니시기에 불...."

"아빠가 지금까지 여기에 얼마 쓰셨더라. 오백? 아니지 한 천억 링 정도는 쓰셨지 아마?"

"...가능합니다."

"안 된다고? 로한, 나 이마 붉어졌지?"

자세히 보니 좀 붉어진 거 같기도 하고...?

"로한도 기억해 둬. 내 이마가 붉어지면 열받았다는 뜻이니까."

순간 발닦개가 떠오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내원이 손을 바르르 떨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가능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잠시 특별 회원의 경우 동반 1인까지 입장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잊고 있었군요...."

답변을 받아 낸 엘리가 믿음직스러운 미소로 나를 힐끗거렸다.

이래서 사람이 성공해야 되는구나.

나는 엘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물었다.

"준비됐어? 엘리?"

"물론이지, 로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지도 모를 에피소드.

이 페이지를, 이제 제대로 즐겨 볼 시간이다.

"그럼 두 분 다 특별석으로...."

그때였다.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이야."

당분간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울림.

그레이스의 마음을 사정없이 할퀴고 상처 냈던 목소리.

"기묘한 우연이구나, 로한."

미하엘 리펜슈타인.

뒤를 돌아보자 그가 고급스러운 정장을 한껏 뽐내며 서 있었다.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빌어먹게도 시간이 겹친 모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인사만 나누고 튀자.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아, 재수 없게...."

갑작스럽게 끼어드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린다.

"웬만하면 보고 싶지가 않았는데, 그 얼굴."

야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미하엘을 노려보는 엘리.

하얗던 그녀의 이마가 정말 붉어져 있었다.

"아무튼 반가워요? ...라푼쇼타인 교수님."

"리펜슈타인이다. 스프링윈드의 문제아, 엘리스 에클라트."

§ 방해 (3)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간다.

기뻐도 웃지 않으며, 슬퍼도 울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개인의 '평범'을 유지하기 위해선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나 마음은, 그 자리에서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다.

"문제아? 지금 나한테 문제아라고 하셨어요?"

엘리스 에클라트, 그녀는 달랐다.

"진짜 문제는 약혼 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그쪽⸺!"

"엘리."

엘리는 감정을 다루는 데 서투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감정을 숨기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수련하느라 지쳤을 텐데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응?"

내가 끼어들자 눈이 동그래진 엘리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엘리가 이득 같은 걸 신경 쓰지 않더라도, 그 상대가 미하엘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부탁할게, 엘리."

엘리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이내 내 뜻을 알아들은 엘리가 주억거렸다.

"...알았어. 그럼 먼저 가서 전망 좋은 데로 맡아 놓을 테니까 빨리 와."

"부탁할게."

"프랑켄슈타인 교수님도 재밌게 놀다 가세요. 그럼 이만."

"내 이름은 리펜... 여전히 제멋대로군."

엘리는 미하엘이 반박하기도 전에 스커트를 힘차게 털어 내고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엘리. 나는 레이저 같은 눈빛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미하엘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인사 드립니다. 리펜슈타인 교수님."

"교수라... 그래, 로한 부교수. 한데 기이한 일이군. 저 문제아와 대단히 친해 보이던데."

전개 초반. 미하엘과 엘리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래서 늘 미하엘은 엘리를 '문제아'라고 불렀고, 엘리는 미하엘의 성을 일부러 틀리게 말했다.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엘리스는 제가 특별히 아끼는 제자입니다."

무엇보다 앞으로의 전개라면 엘리는 미하엘의 편에 서게 된다.

그건 막아야만 했다. 저 자식에게 엘리를 빼앗길 순 없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 네가 부임한 지 이제 보름이거늘. 아하, 그렇군.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모양이야. 하기야 에클라트 기사단의 단장이 되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지."

그걸 이런 식으로 엮어?

이런 식으로 나를, 성공에 눈이 먼 그런 인간으로 깎아내리겠다 이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엘리스는 특별합니다. 아직 이끌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해서 그렇지, 그녀는 제국에서 누구보다 그리고 어떤 등위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다음 순간 그가 나의 확언을 조롱하듯 답했다.

"검술 성적 형편없음."

그 다음에 이어진 말들은 사회가 엘리에게 낙인한 '평가'였다.

"출석률 저조, 학점 미달, 평소 행실을 포함한 태도 불량. 그나마 장점은 원만한 교우 관계 정도겠군. 스프링윈드의 부교수인 너에게 묻겠다. 이것이 기사를 목표로 하는 자라고 볼 수 있겠나?"

"그 전에 리펜슈타인 교수님께 묻겠습니다."

나는 들이마신 숨을 잠시 멈췄다.

이런 자식한테 내 소중한 페이지를 할애해야 된다니.

"기사를 목표로 하는 자는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겁니까?"

"나는 기사가 아니기에 모른다. 허나 누구나 그렇듯, 예상은 할 수 있지."

"엘리스는 지금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 어리니까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나아가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형편없군."

"...리펜슈타인 교수님. 저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내 말의 논지는 하나다.

"그 길의 이정표가 되어 주는 것. 그렇지 못한다면 존재하는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엘리가 스프링윈드의 문제아가 된 것은, "바로 너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엘리를 비하하거나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은커녕, 부끄러워 해야 된다.

미하엘은 아무 말 없이 반지를 어루만졌다. 좁혀진 미간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곧 황실 경매가 시작됩니다. 자리를 비운 참가자분들께서는 지금 즉시 착석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안내 방송이 건물에 울려 퍼졌다.

내가 몸을 돌린 순간 미하엘의 음성이 어깨에 닿았다.

"오늘 일, 기억하겠다."

고개를 돌리자 미하엘의 옷깃이 내 눈앞을 스쳐 갔다.

나는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가만히 좇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 * *

긴장과 흥분 그리고 웃음소리가 적절히 섞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혼자 심술이 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내 곁에 앉아 있던 엘리였다.

"아 술 마렵네. 끝나고 한잔할래?"

"끊었다면서."

"몰라. 그렇게 좋은 안주를 봤는데 어떻게 참아."

"뭐든 끊을 때 확실히 끊어야 미련이 안 남는다. 끊어."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엘리를 뒤로한 나는 주변을 훑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경매다 보니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는 얼굴은 몇 없군."

읽어 본 묘사들이 간간이 보이기는 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사람 쇼핑은 글렀다. 혹시나 도움이 될만한 인물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제162회 황실 경매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경매를 주관하시는 폐하께서는 안타깝게도 개인 일정이 겹쳐 참관하지 못하셨습니다. 부디 고매하신 여러분들의 아량으로 이해 바랍니다.

스포트라이트가 경매사 왼편을 밝혔다. 그곳에는 명품관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 한 벌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늘 출품된 87개의 경매품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이 드레스입니다! 먼저 10만 링에 시작해서 5천 링씩 호가....

그때 경매사 뒤로 위치한 스크린에 누군가의 번호가 떠올랐다.

[1321번 ― 20만 ℛ]

우리와 함께 2층 특별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번호를 토대로 입찰자를 찾아 주위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나는 팔짱을 낀 채 스크린에 띄워진 번호만을 주시했다.

"...역시 시작부터 세게 나오네."

2층에서 저 번호의 주인은 볼 수 없다.

1321번. 그 주인은 바로 3층 프라이빗 룸에 앉아 모든 것을 괄시하고 있는 '미하엘 리펜슈타인이다'.

경매사가 갖은 미사여구를 곁들여 드레스의 설명을 나열하고 있는 사이 엘리가 고개를 저었다.

"디자인이 영 꽝이네. 패스."

그리고는 팔걸이에 결합된 터치패드에서 손을 거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엘리. 저 1321번, 누굴 거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 그 표정은 또 뭐야. 혹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 사악한 웃음을 지은 엘리가 패드에 손을 가져갔다.

―아! 놀랍게도 방금 652번분께서 25만 링으로 최고가를 갱신하셨습니다!

위층에서 반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나도 패드를 터치했다.

"계속 올려."

"오케이."

―이번엔 653번분께서 30만 링! 출품자분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습니다!

그에게 복수할 시간이다.

* * *

경매가 무르익어 갈수록 미하엘이 보내는 시간은 끔찍해졌다.

"...흐음."

길게 늘어지는 한숨 아래로 미하엘이 패드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황실 경매에 참여한 이유는 아리엘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로 출품된 드레스.

아리엘이 입으면 너무나 잘 어울릴 거 같아 시작가의 두 배인 20만으로 입찰했다.

그러나 그가 낙찰받은 가격은 그 열 배가 넘는, 210만 링이었다.

'도대체 어떤 종자들이 감히.'

마음 같아선 600번대 자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엉덩이를 무겁게 잡아당기는 '프라이빗 룸'의 주인은 체면을 지켜야만 했다.

늘어가는 낙찰액처럼 미하엘의 근심이 불어 가던 순간.

―653번분께서 1억 1,801만 링으로 다시 한번 상회 입찰하십니다! 과연 67번째 경매품인 '트리니티 크라운'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꽈악⸺

왼손을 말아 쥔 미하엘이 스크린을 뚫을 듯이 주시했다.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미하엘이 낙찰받으려는 순간마다 계속 652번과 653번이 근소한 차이로 입찰액을 상회하고 있었다.

맞지도 않은 뺨이 얼얼하다.

저 숫자들이 자신의 뺨을 올려 치는 도전장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물러설 미하엘이 아니었다.

―2억! 1321번분께서 다시 한번 2억 링으로 격의 차이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시군요.

그제야 미하엘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기어올라 봐라. 몇 번이고 짓밟아 줄 테니.'

아직 총알은 넘친다.

여기 있는 자들의 돈이 아무리 많아 봤자 절대 나의 재산을 따라오진 못한다.

그런 오만함에 취해 가던 미하엘은 자신의 선물을 받은 아리엘의 얼굴을 상상했다.

'기뻐, 해 주겠지.'

그때였다.

―아아 652번분께서 2억 2,100만 링! 아직은! 집에! 갈 수 없습니다!

까드득!

이윽고 평정심이 완전히 박살 난 미하엘이 패드를 연타했다.

"...그 도전, 기꺼이 받아 주마."

* * *

저 얼간이.

본인이 작업에 걸린 줄도 모르고 좋다고 사 간다.

「식스 센스」를 활성화해 둔 내가 엘리에게 속삭였다.

"멈춰. 여기까지."

3층에서부터 희미하게 흘러내리는 검은 아우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얀색이었다.

다음에 미하엘이 이제 한계라는 걸 내 육감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리타이어 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그 이전에 포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 몰랐는데, 나름 유용한 설정이었다.

나는 아까부터 계산하고 있던 미하엘의 낙찰액을 계산해 봤다.

대충 100억 정도 쓴 거 같은데.

누구는 10억을 기부하는 마당에 누구는 100억을 사치에 쏟아붓고 있다니.

―85번째 경매품인 '찬탈자의 말로'는 1597번분께 32억 8천만 링에 최종 낙찰되었습니다.

확실히 70번대가 넘어가니 미하엘이 낙찰받는 수가 줄어들었다.

원래라면 미하엘은 이번 경매에서 펜던트 가격을 포함해 530억 정도를 사용한다.

그런데 벌써 100억이 넘어갔으니, 나름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복수였다.

그때 원래 목적인 펜던트 차례까지 쉬려던 내 눈길을 무언가가 사로잡았다.

―이제 두 개의 물품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시대에 올려진 작은 케이스.

눈에 마나를 집중하자 그 모습이 확대되어 보였다.

―이번 물품의 판매 금액은 소외 계층을 돕기 위해 전액 기부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물품에 하자가 있어선 안 되겠죠? 안심하세요. 이 반지는 하블다운 공방 최고장인, 토니 퍼거슨이 손수 제작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징표. ...'소리 없는 약속'입니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테두리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이어진 디자인.

때 묻지 않은 마음이 그대로 실체화된다면 저런 모습이리라고 생각될 만큼, 단순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순수의 미학.

그것을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레이스를 떠올리고 만다.

―이번 물건은 여러분들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1링부터 시작....

다음 순간 스크린에 숫자가 떠올랐다.

[653번 ―]

경매사를 포함한 2층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1억 ℛ]

§ 운명 (1)

"로한. 왤케 무리해?"

내 형편을 알고 있던 엘리의 말이 빨라졌다. 그녀와 달리 나는 평온했다.

"마음에 들어서."

그 말이 전부는 아니었다.

「소리 없는 약속」

원작대로라면 이 반지는 황실 경매에서 출품될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원작 107화의 그레이스가 미하엘에게 선물하기 위해 공방에 직접 의뢰를 맡긴 반지였다.

그랬던 반지가 이곳에, 원작보다 일찍 출현했다는 의미는 하나다.

전개 수정.

「...아마도 언젠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읽고 있지 않을까.」

그 기이한 생각이 현실이 되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벌써 세 번의 전개가 뒤바뀌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1억. 653번분께서 주저하지 않고 1억에 입찰하셨습니다. 아직 제국은 살 만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저 반지를 미하엘이 탐내느냐다.

나는 그 문제의 답을 어렴풋이 추리할 수 있었다.

"...들어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1321번 ― 1억 1천만 ℛ]

기부를 빙자한 진정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 * *

저 반지의 원가는 의뢰 비용까지 계산해도 1만 링 이하다.

그러나 그 속의 가치는, 한 사람의 전 재산을 지불해도 모자라다.

―653번분, 5억 7천만 링. 아, 395번분께서 고개를 젓고 있습니다.

시작 때 1링이었던 반지가 어느새 6억에 육박해 있었다.

그 사이 미하엘 외에도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패드에서 손을 거둔 뒤였다.

이곳에 모인 모두는 저 반지의 가치를 알고 있다.

아무리 비싸게 쳐줘도 10만 링.

그것을 수십, 수백 배 이상의 가격으로 구매한다는 것은 오직 '기부'라는 명목뿐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스크린에 숫자가 떠올랐다.

―1321번분께서 6억 링! 6억 링으로 기부왕의 왕좌를 찬탈합니다!

가열돼 가는 경쟁을 따라 좌중들의 분위기도 고조되어 갔다.

도대체 저 반지를 얼마에 살 것인가.

도대체 얼마를, 쓸모없는 하층민들에게 지불할 것인가.

"6억이면 신형 인페르노가 대체 몇 대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저 돈이면 웬만한 미술품 대여섯 점은 가져올 수 있는데 말이야."

다른 이들이 더 이상 입찰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아직은 이 제국이 쓰레기 수준까지 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저 사람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로한 아닌가? 오, 평민들을 위해 저렇게까지 힘쓰다니. 유클리드 님을 잇는 귀감이로다."

"지금은 유클리드 님을 따라 스프링윈드의 부교수로 임하고 있다더군요. 유클리드 님이 스프링윈드로 가신 것도 국민들을 위해서라던데, 정말 제국에 헌신적인 사람들이에요."

"그렇지. 저런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진 않아야 할 텐데...."

그러는 동안에도 반지의 가격은 끝도 없이 올라갔다.

7억, 8억, 마침내 10억을 돌파했을 때 사람들이 탄성을 발했다.

나는 잠시 눈길을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하얀색이다.

저 하얀색의 아우라는, 10억을 돌파한 순간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미하엘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653번 ― 20억 ℛ]

[1321번 ― 25억 ℛ]

[653번 ― 30억 ℛ]

...

[1321번 ― 50억 ℛ]

마침내 단위가 10억씩 오르기 시작했다.

겨우 숫자 하나가 바뀔 때마다 흥분한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중간중간, 나를 향해 작은 응원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침내.

[653번 ― 136억 ℛ]

나의 전 재산에 도달했다.

여기서 더 올라간다면, 나는 미하엘에게 패배한다.

그리고 저 아우라는, 여전히 하얗다.

〔 전개 수정 〕

그때였다.

―136억, 136억, 136억! 86번째 경매품인 '소리 없는 약속'은 653번분께 낙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우라는 여전히 하얀색이었다.

미하엘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했다.

왜.

그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이번 경매품은 황실에서 준비한 작은 이벤트였습니다. 하여 황실에서 대신 지불할 136억 링은 653번분의 성함으로 소외 계층에게 전액 기부될 예정입니다. 황실을 대신해 여러분의 진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럼 바로 마지막 경매품을 소개...!

진이 빠진 나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내가 모르는 이야기.

썩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 * *

"여기 엘리스 에클라트 님께서 낙찰받은 '호라이즌 펜던트'와 보증서입니다."

초승달 같은 생김새. 그 위로 호라이즌 가문의 인장이 입체적으로 각인된 펜던트의 모양은 내가 읽었던 그대로였다.

눈앞으로 펜던트를 늘어트린 엘리가 정교하게 세공된 에테르 스톤을 들여다봤다.

"50억이라, 괜찮네. 마음에 들어."

우리는 이 펜던트를 300억이 아닌, 50억 링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미하엘이 갑자기 입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6번째 경매가 끝나자마자 나가 버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어때? 어울려?"

내 어깨를 톡톡 두들긴 엘리가 목에 건 펜던트를 자랑했다. 내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비싼 값 하네. 너랑 잘 어울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씨익 웃는 엘리.

엘리가 저 펜던트를 가지고 있다면 안심이다. 그레이스를 향한 마음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엘리스 에클라트, 바로 너니까.

그때 살짝 인상을 찌푸린 엘리가 허벅지 사이를 좁혔다.

"아 씨 잠깐만."

"...뭐야. 왜 그래?"

설마 펜던트의 부작용이⸺

"나 화장실 좀. 몇 시간 동안 참았더니... 금방 갔다 올게!"

...걱정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다음으로 직원에게 다가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아! 653번분이 로한 님이셨군요! 여기, 낙찰받으신 물품입니다. 136억이라니. 아까 진짜 멋있었어요. 최고, 최고!"

"감사합니다."

때아닌 칭찬에 대충 얼버무린 나는 반지가 들어 있는 새하얀 케이스를 건네받았다.

야, 케이스도 잘 만들었네.

이런 걸 공짜로 얻게 될 줄이야. 역시 인생은 도박....

"653번."

내 번호를 부르는 음성에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뒤를 돌아봤다.

"그게 너였나, 로한."

그곳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미하엘이 할로윈 시리즈의 마이클 마이어스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이 자식 없는 거 다 확인하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들켜 버리면 낭패다.

"1321번. 낙찰품 수령은 택배로."

"...."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하엘은 내게 어떤 질책도 던지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대놓고 화를 내진 않더라도, 내게 최소한 한마디는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다.

괜히 더 찝찝하게.

또각― 또각―

멀어져 가는 미하엘 리펜슈타인.

발목을 붙잡은 건, 오히려 나였다.

"리펜슈타인 님."

내 부름에 잠시 멈춰 있던 미하엘이 고개만 돌려 이쪽을 응시했다.

"86번째 경매품. 왜 포기하셨습니까?"

어딘가 진정된 미하엘의 표정.

반대로 내 손에 들린 케이스를 향한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글쎄."

저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말버릇하고는.

알고 싶음 직접 알아내라는 뜻....

"절박함이 느껴졌다."

"...?"

"고작 136이라는 숫자에 담긴 마음을, 나는 짓밟고 싶지 않았다."

...그래.

누군가에겐 최선인 숫자가, 너에겐 '고작'으로 느껴졌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목도한 나에게 그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그 마음,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내가 그레이스를 위하는 행동, 말, 눈짓 그리고 표정.

그 모든 마음가짐이 아리엘을 향한 미하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윽고 고개를 바로 돌린 미하엘이 그대로 말을 이었다.

"다만 그게 너라는 걸 알았더라면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쉽군. 그래도 네가 내게 한 장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에 긴장하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비긴 걸로 하지."

또각― 또각⸺

미하엘은 그렇게 경매장을 떠났다.

* * *

우리는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왔다.

엘리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 여기선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고구마 에반데."」

나는 그를 욕하고.

「"...새끼 멋있네."」

때로는 칭찬하고.

「"저 새끼 반갈죽 시켜 제발."」

그리고 응원하고

「"왜, 그레이스를 포기해야만 하는 건데...."」

원망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 날'을 살아왔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는 어느 날 나의 주인공이 되었다.

가끔은 너의 대사를 따라 읊어 보기도 하고, 네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는지 고민도 해 봤다.

그때마다 나는 내 인생의 답을 찾았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 모두가 나의 답안지였다.

어쩌면 그레이스가 사랑하는 네가 부러워서, 너를 닮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로한!"

선연한 노을빛으로 이지러지는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는 상념을 털어 내고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엘리가 들어 올린 메뉴판이 눈앞에 꽉 찼다.

"뭐 먹을 거냐구. 아까부터 넋 잃은 사람처럼 표정이 그게 뭐야? 아― 아까 쫌 아찔하긴 했지?"

"아찔하긴. 뭐 시켰어?"

"로한 때문에 나도 못 시키고 있잖아. 빨리 골라. 난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

"...그거 시켜서 나눠 먹자."

주문을 마친 나는 뻐근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잊고 있던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엘리가 말했다.

"그거 누구 줄 거야?"

"응?"

엘리의 눈동자가 내 주머니로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까부터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뺐다.

"도대체 누굴까? 로한의 전 재산과 맞바꿀 뻔한 반지를 받게 될 사람이. 솔직히 말해 봐. 그거 나지?"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아,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그리고는 불쌍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엘리.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물론 비밀이지만."

나도 알아. 그레이스잖아.

"그래. 나랑 로한이랑 오래 봤으니까 그런 마음을 품을 수도 있어. 무엇보다 난... 너무 사랑스럽잖아?"

...개연성 1P 지불하고 저거 꿀밤 한 대만 때릴 수 있나?

설정 상점 오픈!

"우리 가여운 로한 불쌍해서 어떡해. 기껏 반지까지 장만했는데 줄 사람이 없다니. 좋아! 내가 인심 썼다. 내 손에 한 번 끼워 보게는 해 줄게. 자."

...결국 한 번 껴 보고 싶다는 말이었나.

"안 돼."

"기회 준다니까?"

"안 돼."

"아 딱 한 번만."

"안 된다 했어."

"아 치사해. 됐어, 됐어. 이 쫌생이."

"뭐?"

"퉤."

하여간 귀여운 녀석.

마음 같아선 껴 보라 하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이 반지를 처음 낄 사람은 따로 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전해 주지?

"로한."

"보기보다 끈질기구나."

"그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어?"

"...뭘?"

"그거 있잖아. 나 새벽 수련 시작한 거...."

부끄러웠는지 엘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실 그냥 엘리가 미하엘에게 욕먹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던져 본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던진 말은 아니다.

"널 믿으니까."

"어?"

"너라면 그럴 거라고 믿었어. 내가 아는 엘리스 에클라트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뭐야 그게... 바보가...."

어쩔 줄 몰라 하던 엘리는 이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 저 안에 감춰져 있을 얼굴이 상상이 갔다.

그러던 나는 슬쩍 눈길을 돌려 유리창에 비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ㅤㅤㅤㅤㅤ[당신의 운명⸺19페이지]

『사망』 "━━━╋━━━━━●━╋━━━" 『사망』

ㅤㅤㅤㅤㅤㅤ「사망」 ㅤㅤㅤㅤㅤ 「사망」

§ 운명 (2)

...내 운명이고 나발이고 지금 나는 엄청난 문제와 직면하고 있었다.

"책상이냐 서랍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새벽 6시부터 출근한 나는 그레이스의 책상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 고민은 바로 '이 반지를 그레이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한가로운 고민이지만.

나한테는 엄청 중요한 문제라고.

"몰래 주는 선물은 서랍이 낫겠지."

결정을 굳힌 나는 선조들이 전통적으로 선물을 전달했던 방식인 '서랍 드롭'을 채택했다.

그리고 서랍을 연 순간.

"...."

엄청난 양의 선물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모두 그레이스의 팬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게 다 똑같을 수가. 이런 진부한 인간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역시 너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나.

저벅, 저벅⸺

그때 내 귓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지만 흐트러짐 없이 직선적인 울림.

이건 틀림없이 그레이스의 발자국이었다.

드르륵.

"좋은 아침, 로한."

"어서 오십시오. 그레이스 교수님. 지난밤 편히 보내셨습니까?"

그 찰나의 순간, 테이블에 올려진 커피잔을 낚아챈 나는 창가로 달려가 이스트 강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이하는 뉴요커처럼 폼을 잡고 서 있었다.

내게 차분한 눈인사로 화답한 그레이스가 자리에 앉다 말고 입을 열었다.

"로한?"

"말씀하십시오."

"혹시 사탕이 필요해?"

"...예?"

그 말에 잔을 들여다보니 각설탕들이 벽돌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집어 든 각설탕을 입에 넣었다.

"근래 머리를 많이 쓰다 보니 부족한 당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교수님도 하나 드시겠습니까?"

"좋아."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그레이스.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바닥에 각설탕을 올려 주었다.

"잘 먹을게."

...이걸 속아 주다니.

그레이스의 마음이 너무나 달콤했던 탓일까, 각설탕을 머금고 있는 입 안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참. 어제 기사 봤어."

"어떤 기사 말씀이십니까?"

다시 자리에 앉아 각설탕을 우물거리던 그레이스가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많은 돈을 기부했더구나."

아, 황실 경매 일이었나.

하긴 136억이면 노른자 땅에 올려진 건물 몇 채는 살 수 있는 돈이다.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국민을 위해 선택해 줘서 고마워."

...당신의 그런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그 선택을 반복할 수 있다.

"예. 대단히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을 얻을 수 있다면, 설령 수백억이라 해도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다.

"그리고 일생을 바쳐 모은 돈을, 누군가에게 선뜻 베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새삼 교수님이 존경스럽더군요."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은, 1mm조차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니까.

"교수님은 언제나, 그런 어려운 선택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결정하셨죠."

"...."

무표정히 그리고 말없이 나를 마주하는 그레이스.

그러나 양손을 모은 채 한쪽 검지를 쥐고 있던 그녀의 모습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오늘... 오늘 강의 몇 시라고 했었지?"

"열 시입니다. 오늘은 심화 학습을 위해 별관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랬지 참. 고마워 로한."

"그저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언제든 물어만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그레이스는 이내 자료에 열중했다.

나도 자리로 돌아가 케이스를 내 서랍에 몰래 넣었다.

고민을 너무 했던 탓에 선물을 전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뭐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언젠가 전하게 될 때가 오겠지.

그래. 언젠가는.

* * *

"시작하세요."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실습동 전체로 뻗어 나갔다.

술식을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엘리스는 그저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아... 그레이스 님이 내 교수님이라니."

꿈만 같다.

잠자리에 들기 전 종종 떠올리곤 했던 망상이 현실로 다가오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때 엘리스의 근처에 있던 수잔이 투덜거렸다.

"엘리! 엘리이이―!"

"아 왜에."

"멍 때리고 뭐해? 부교수님이 너 지켜보고 있어!"

"엉?"

그레이스에게서 눈길을 돌리자 팔짱을 낀 로한이 엘리를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친오빠 같았던 분위기는 없이, 그 눈빛은 오직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아카데미 교관의 그것이었다.

엘리스 또한 스프링윈드에 입학하기 전 '하츠다운(Hartsdown) 아카데미'를 수료했기 때문에 교관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뭐 어때. 저렇게 멀리 있는데. 괜찮⸺"

―널 믿으니까.

"...."

―내가 아는 엘리스 에클라트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 자신을 믿고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엘리스는 오러를 운용했다.

"...치, 어쩔 수 없네."

이윽고 술식을 떠올리는 엘리스.

우우웅⸺

그녀의 손짓을 따라 흘러나온 오러가 사계·봄의 술식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람과 불을 잇는 현이 어긋나지 않도록, 이 부분은 최대한 정교하고 천천히.'

그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수련에 매달린 결과, 그녀의 술식은 약간 부족하지만 완벽에 가까웠다.

원래부터 엘리스는 술식에 관한 거라면 빠삭한 편이었다.

'합성 원소쯤이야 껌이지.'

잠시 후 다른 학생들을 따라 엘리스의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꽃잎들.

그 양은 그레이스가 직접 구현한 것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지만, 학생들 수준에서 본다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 이후가 문제였다.

치지지직⸺

"어, 어라?"

술식이 발현된 순간, 그녀의 주변으로 흩날리던 불씨들이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 버린 봄.

엘리스는 서둘러 술식을 확인했다. 술식을 이루는 대부분의 현과 곡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었다.

'또 이러잖아....'

어제, 아니 오늘 새벽에 연습할 때까지만 해도 술식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그 성공이 수천 번 시도한 끝에 '한 번' 얻어걸린 우연이란 것을 미처 몰랐다.

'대체 왜....'

그때였다.

"우와."

절망에 빠진 그녀의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학생들의 시선을 좇던 엘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쟤, 아리엘 리펜슈타인이지?"

"응응. 역시 리펜슈타인 교수님의 동생답네."

"원래는 저렇게 아름다웠구나... 저 술식을 보고 내 걸 보니 초라하네."

아리엘은 만개한 봄 한가운데서 떨어지는 꽃잎을 받아 내듯 불씨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전에 그레이스가 재현했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러자 엘리스는 질투가 샘솟았다.

자신보다 우월한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엘리스는 자신의 주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그런 사람들을 옹졸한 질투가 아닌, 마땅히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봤다.

그럼에도 질투가 나는 건 하필 저 우월한 인간이 리펜슈타인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리펜슈타인.

엘리스는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만큼 그들을 싫어했다.

"잘난 체하기는."

다분히 큰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엘리스에게 쏠렸다.

"누가 리펜슈타인 가문 아니랄까 봐 꼭 재수 없는 티를 내요. 안 그래 수잔?"

"어? 어어! 재수 꽝이지. ...그 교수."

다음 순간.

"...."

마침내 아리엘의 어둠도 엘리스를 향했다. 그러나 아리엘은 슬쩍 쳐다만 보고는, 다시 술식에 집중했다.

묘한 무시였다.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떠들어 볼 테면 더 떠들어 보라는 시선.

"저게 씨...."

그래서 더 열이 올랐다.

이마가 붉어진 엘리스가 허리에 손을 얹고 주변 학생들에게, 아니 아리엘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하긴, 저런 거라도 잘해야지. 나라도 다시 버려지기 싫겠다. 그치 수잔?"

"어? 어― 그렇긴 한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너답지 않게 갑자기 왜 그...."

수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술식을 해제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리엘 때문이었다.

이윽고 수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 엘리스와 아리엘.

엘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리엘이 수잔에게 물었다.

"당신, 저 사람이 방금 뭐라 그랬나요?"

"그, 그게. 그러니까... 예쁘다 그랬어! 네 술식이 너무 예쁘다고. 하, 하하하...."

그러자 아리엘을 응수하던 엘리스가 수잔에게 말했다.

"수잔.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나라도 다시 버려지기 싫다'고 말했지."

"엘리...."

둘 사이에 낀 수잔이 울상이 되어 엘리스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러나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엘리스의 모습에 수잔은 하는 수 없이 아리엘에게 돌아섰다.

"엘리스가 뭐라 그랬냐면...."

"비키세요."

"으응?"

눈을 아래로 깐 아리엘이 수잔을 깔보듯 내려다봤다.

"비키라고."

머리카락을 갉아 먹는 듯한 어떤 공포 속에서 수잔이 헤매고 있을 무렵, 엘리스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수잔, 잠시 자리 좀 비켜 줄 수 있어? 미안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엘리스의 음성에 마음이 진정된 수잔이 멀찍이 물러났다.

그들을 지켜보던 수잔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엘리가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닌데....'

그녀가 아는 엘리는 언제나 활기 넘치고 호탕하며 때로는 자상하기도 한, 그런 '좋은 친구'였다.

다른 학생들도 그런 면에 반해 엘리를 따랐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수잔이 아는 엘리는 없었다.

"뭐가 그리 잘나서 우리 수잔을 겁박해? 너 설마 디펜스타인 교수 믿고 깝치니?"

"우리 가주님 이름을 함부로 바꾸지 마세요. 부디 고귀한 에클라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시죠. 발정 난 가축처럼 굴지 말고."

"뭐? 가축? 이게 씨⸺"

순간 욱할 뻔했던 엘리스는 제국의 슬럼가라고도 불리는 본닝턴 시민들의 표준어를 구사할 뻔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엘리스는 자신의 이미지(웬만한 학생들은 거의 다 알고 있지만)를 생각해 한 번 참았다.

"발정 난 가축이 뭐야, 격 떨어지게. 그런 말을 입에 담기엔 리펜슈타인 가문도 너무 고매하지 않니? 그동안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인다 얘."

"당신이 뭘 아는데."

"뻔하지. 안 그래 얘들아?"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이며 학생들을 둘러보는 엘리.

그러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두가 엘리스의 친구였고, 모두가 엘리스의 편이었다.

그와 달리 이곳에 아리엘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뒷짐을 쥔 엘리스가 아리엘에게 한 걸음 내디뎌 눈을 치켜떴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지금부터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게 좋을 거야. 내 입에서 이 이름 한 번 더 나온 순간, 남은 네 캠퍼스 생활 다 찢어 버릴 테니까."

"...자신 있어?"

지지 않겠다는 듯이 엘리스를 따라 걸음을 내디딘 아리엘.

엘리스를 코앞에서 내려다보던 아리엘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의 인생 찢고 싶으면, 본인 인생도 베팅해야 되는 거 알지?"

"같잖은 존대는 그만두기로 했나 봐? 이제야 좀 볼만하네. 그럼 누가 먼저 올인하려나. 우리 내기할래? 콜?"

그들의 관계가 점점 전쟁으로 치달으려 하자 학생들이 그들을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그만."

아리엘의 얼굴에서 달아나는 어둠과 달리, 엘리스의 등 뒤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이냐."

엘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이를 악문 로한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레이스 교수님의 강의 시간에."

§ 상처 (1)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엘리를 바라봐도 「식스 센스」는 그녀의 운명을 비추지 않았다.

우려와 달리 아무의 운명이나 볼 수 있는 건 아닌가.

그럼 다행이다. 괜히 여러 운명을 볼 수 있어 봤자 나만 귀찮아지겠지.

그때 여러 색으로 뒤섞인 엘리의 아우라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파란색?"

하양과 검정 이후 파란색으로 빛나는 아우라는 처음이다.

그리고 엘리에게 다가오는 아리엘의 아우라 또한 파랗게 물결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 귀에 마나를 집중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나라도 다시 버려지기 싫다'고 말했지. 전해 줘."

"엘리...."

설마 쟤들 싸우는 건가?

하긴 엘리 성격에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일이지.

다행히도 이건 내가 읽은 전개다.

그 시기가 아리엘의 등장으로 앞당겨져서 그렇지, 원작에서도 엘리는 아리엘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

다만 이 에피소드의 결말이 '엘리의 자퇴'로 이어지는 게 문제다.

그건 막아야 한다.

"...."

그레이스도 이 상황을 인지한 듯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저 손만 쥐락펴락하며 어쩔 줄 모르는 그레이스.

전술과 전투에 도가 튼 그녀라 해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른이'들의 감정싸움에는 문외한이다.

"교수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해."

여기선 내가 나서야 된다.

그레이스가 나서서 '미하엘의 동생' 편을 들기 전에, 엘리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뒤틀려 버리기 전에.

"그만."

이 결말을 막아야 한다.

* * *

본관 뒤편에 녹지로 뒤덮인 쉼터.

나는 대리석 벤치에 앉은 엘리와 아리엘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이유 없이 싸울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말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는 두 사람.

이유야 이미 알고 있다.

자격지심(自激之心).

서로와 너무나 다른 둘이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번 일을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야만 해."

"저기...."

그제야 고개를 힐끔 들어 올리는 엘리.

내가 시선을 옮기자 엘리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몸을 떨었다.

"말해."

"그러니까... 겨우 이런 일로 징계 위원회라니, 좀 과한...."

"겨우? 오늘 너희 둘 때문에 수업에 차질을 빚었다. 그 결과 이백에 가까운 네 친구들이 피해를 보았고. 이래도 '겨우'인 것 같나?"

그때였다.

"저 때문이에요."

아리엘의 말에 엘리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먼저 에클라트의 술식을 보고 형편없다고 말했어요. 먼저 시비를 건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저예요."

...그래.

너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엘리스. 저 말이 사실이야?"

"...."

입을 꾹 다문 엘리는 어떤 말도 그리고 어떤 제스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묘한 눈빛으로 아리엘을 보고 있을 뿐.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화해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그것까지 주선하기엔, 너희는 너무 어른이니까."

그리고는 그대로 쉼터를 벗어났다.

저들 사이로 감도는 침묵 위로 내 발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본관에 도착한 나는 문 앞에 멈춰 잠시 그들을 힐끗거렸다.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

...그래서 어른인 척하는 아이 둘.

그 불완전함은 이렇듯 언젠가 터져 버리고 만다.

시간을 알 수 없는, 폭탄처럼.

* * *

로한이 떠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야!"

멈춰선 아리엘이 자신에게 달려온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스가 물었다.

"왜 거짓말해?"

그 말에 아리엘은 실습동에서 본 로한을 떠올렸다.

그때 아리엘은 그의 귓가에서 마나의 흐름을 읽었다.

'로한 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셔. 그럼에도 책임을 추궁했다는 건....'

시험.

로한이 자신들을 시험했다는 것을 아리엘은 바로 알았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부교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챘으니까.

"부교수님께서 우릴 어린애 취급한 거, 아직도 모르겠어?"

"뭐...?"

아리엘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런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을 벌였으니 혼나는 거라고 엘리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사과한 거야. 난 어린애가 아니니까."

아무리 둔한 엘리스라도, 아리엘의 저의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른이고, 나는 어린애라 이거야?"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렇게 들렸다면,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그때 아리엘이 엘리스에게 완전히 돌아섰다.

"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인다 그랬지? 말해 봐."

무저갱 같은 어둠이 엘리스를 집어삼킬 듯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 거 같아?"

그 정체는 아리엘의 눈동자였다.

형언할 수 없는 공허.

그 공허는 너무나 깊고 깊어서, 한 번 발을 헛디뎠다간 영원히 추락할 것만 같았다.

'뭐야 얘. 눈빛이 왜 이렇게 섬뜩해...?'

비슷한 나이, 그리고 비슷한 시간.

그런데도 아리엘의 눈동자에서는 혼자서만 다른 시간을, 아니 느리게 살아온 듯한 어떠한 세월이 느껴졌다.

"!"

그 격차가 목을 압박하듯 숨을 쉬기 힘들었다.

엘리스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건 시선을 거둔 아리엘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홀로 남겨진 엘리스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엘리스는 친구들의 위로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괜찮아.

너 잘못한 거 없어.

괜찮을 거야.

괜찮다는 말을 하루 종일 들으니, 오히려 괜찮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모든 강의를 마친 엘리스는 한잔하자는 친구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홀로 후문으로 나아갔다.

"하아...."

무겁게 흘러내리는 한숨.

땅만 보며 걷고 있던 엘리스의 눈앞에 익숙한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선홍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로한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자상했던 '로한'은 이곳에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오직 제국의 '영웅'이자 '감마' 등위의 '소드 마스터' 그리고 스프링윈드 검술학과의 '부교수'.

반듯하게 모든 것을 이룬 '어른'이었다.

"에클라트."

"...응."

"네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할 줄 알았어."

"...!"

쿵― 그 한마디에 주저앉은 심장이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니더구나."

다시 쿵― 이번에 들려온 소리는 로한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동안 자신이 누군가에게 쌓아 온, '신뢰'였다.

"다 알고 있던 거야...?"

로한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이번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것처럼.

엘리스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실망했어? 아, 지금까지 몰랐구나, 로한?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보다 잘난 건 못 참고, 나보다 못난 건 더 못 참는 그런 애라고!"

여전히 침묵하는 로한.

그 모습이, 엘리스에겐 어떤 말보다 아팠다.

차라리 혼이라도 내 주면, 그걸 빌미로 잠시나마 로한을 미워할 수 있을 텐데....

그녀는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나쁜 말들을 쏟아 냈다.

"어차피 난 안 돼. 죽어라 노력해도 안 돼. 왜? 그냥 안 되니까. 처음부터 안 되게 태어났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엘리."

"로한 같은 사람들은 절대 모르겠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엘리."

"날 믿었단 말도 거짓말이지...? 나한테 잘해 줬던 것도... 그냥 우리 아빠 눈에 띄고 싶어서⸺"

"엘리스!"

로한이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엘리스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숨죽여 우는 엘리스에게 로한이 말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로한'이 아닌.

"네가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자신과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 왔는지 알아."

그동안 그녀를 읽어 온, 한 사람의 '독자'였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노력하고, 저항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자신을 바꾸려고 했지."

어쩌면 그가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던 건, '엘리스 에클라트'라는 인물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미래가 뒤바뀐 그녀의 선례는, 그에게 희망이었다.

"엘리. 이전과 달리 네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너는 모를 거야. 네가 악착같이 매달린 끝에, 네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도."

"...."

"포기하지만 않으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엘리는 다짐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 엘리."

자신을 향한 믿음을, 자신도 믿어 보기로.

* * *

캔터베리 남동쪽에 위치한 '화이트홀(White hole)'.

화이트홀은 제2차 인마 대전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쟁 기념관'이었다.

"여긴 왜?"

"네가 잠시 무언가를 잊은 거 같아서."

"아... 이런 곳 별론데."

엘리는 이곳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전쟁 당시 어머니를 잃었으니 당연하겠지.

그럼에도 엘리와 함께 이곳에 온 건, 그녀가 잊은 것을 되찾아 주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평일 저녁. 화이트홀의 내부는 전쟁을 잊어 가는 사람들의 기억처럼 한산했다.

뚱해 있던 것도 잠시 전시장을 기웃거리던 엘리가 신이 난 듯 어딘가를 가리켰다.

"로한! 여기 기억나? 여기서 로한이 그레이스 님이랑 한 건 했잖아."

"애슈퍼드(Ashford) 탈환 작전? 그땐 정말 끔찍했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어."

...사실 잘 모르겠다.

전쟁을 겪은 건 내가 아닌, '로한'이니까.

그래도 제국의 전쟁사에 관해선 중간중간 읽어 본 기억이 있어 그날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에클라트 기사단의 증원이 없었더라면 9군단 전체가 고립될 뻔했어. 그럼 난 여기 없고, 그레이스 님도 검술학과 교수로 부임하는 일도 없었겠지. 종전 후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은 것도 그때 입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지."

"나 엘리스 님을 흠모해서 온 게 아니구?"

"까분다 또."

배시시 웃던 엘리가 전시창 가까이 다가섰다. 유리 위로 비치는 그녀의 미소가 흐릿해져 갔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그레이스 님이 다 박살 내면서 들어갔다던데."

"입을 거칠 때마다 와전되는 게 소문이다. 그레이스 님도 그때 전사할 뻔했어. 그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단 말이지."

"근데 로한은 용케 잘 살아남았네?"

"나 로한, 제국의 소드 마스터다. 우습게 보지 마."

"어련하세요, 정말."

농담도 잠시, 2관으로 들어서자 당시 참혹했던 전장의 참상이 돔 형태의 거대한 유리판 너머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리가 미간을 좁혔다.

"...여전하네. 여전히, 끔찍해."

엘리 또한 전쟁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끔찍했던 그 날의 현장은 그녀의 기억 어딘가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물었다.

"다 거짓말 같지?"

"응.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폭력적인 세상이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세상엔 아직도 폭력이 많아. 그걸 막기 위해서 나 같은 기사들이 있는 거고."

"알아. 그래서 나도 기사가 되고 싶은 거니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엘리를 바라봤다.

내 시선을 느낀 엘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을 전시해 놓고 비웃는 일도 엄연한 폭력이다. 오늘 네가 아리엘에게 한 짓처럼."

"...."

아리엘의 아픔을 먼저 건드린 것은 엘리다.

아리엘이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녀가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은 이상, 그녀의 상처는 보호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내가 아직 아리엘을 두고 보는 이유다.

"나는 네가 실수한 거라고 믿어. 실수는 누구나 하니까."

"...내일 가서 걔한테 사과하란 말이지? 치, 알았어."

상처를 건드는 데 꿈틀거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 상처가 더 깊고 곪아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 마음, 나도 마찬가지니까.

아리엘에 대한 미하엘의 마음은, 내가 그레이스에게 느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상처 입고 돌아온다면, 이미 입었던 상처가 터진 채로 눈물 같은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돌아온다면....

...그 마음을 알기에, 나도 이번만 비겨 주는 것이다. 리펜슈타인.

§ 상처 (2)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저마다 주어진 길은 존재한다.

그리고 길은 누구나 나아갈 수 있기에, 길이다.

「최종 면접 결과 귀하의 뛰어난 자질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때는 잠시 멈춰,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님께서 선발되지 못하였음을....」

내 경험상, 그 방식이 잘못되어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알려드립니다.」

...부지기수였으니까.

"네가 사용하는 건 '오러'가 아니라 '서클'에 가까워."

나와 엘리는 제3 훈련동 2층 311호실에서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착용한 방마복(防魔服)의 벨트를 조이던 엘리가 갸웃거렸다.

"서클이면,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그 서클?"

"맞아. 그 결과 술식을 이루는 건 안정적이지만 결과가 계속 어긋났을 거다. 예를 들면, 발현 이후 현이나 곡에 뒤틀림 현상이 나타난다던가."

"오 정확해... 역시 소드 마스터는 다르구나."

놀라워하는 엘리를 뒤로한 채 나는 지난 강의 때 눈여겨본 그녀의 술식을 떠올렸다.

술식에 관한 엘리의 이해도는 뛰어난 편이다.

현과 곡의 배치뿐만 아니라 기울기, 교정 같은 부분도 교과서적으로 완벽했다.

그러나 그 술식의 원동력, 즉 '마나의 종류'가 문제였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마나가 존재한다.

첫 번째, 그냥 「마나」.

이 세상의 학문적인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마나 또한 무수한 '원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마나와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쉽게 말해 마나는 '생명', 그 일부다.

다음으로는 이 마나를 기원으로 하는 「오러」와 「서클」이 존재한다.

둘은 비슷하지만, 절대 같다고 말할 수 없는 성질을 띠고 있다.

마·기사 모두 술식을 사용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어떤 마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술식을 구성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마나 운용>―<술식 준비>―<현·곡 배치>―<술식 발현>=「오러」.

<마나 운용>―<술식 준비>―<현·곡 배치>―<좌표 계산>―<술식 발현>―<사출>=「서클」.

술식의 발현 과정을 단순히 나열해 본다면 서클보다 오러가 사용하기 용이해 보인다.

당연한 일이다.

술식에서 오러와 서클은 작용점이 완전히 다르다.

애초부터 오러니 서클이니 하는 건 마법이나 검술을 보다 쉽게 사용하기 위해 진화된 방법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검이나 육체 따위에 '발현' 혹은 '응집'되는 성질을 가진 오러와 달리, 서클은 '사출'과 '번짐' 같이 여러 성질이 맞물려 있다.

아 그만하자.

로한의 기억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알진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마법에 재능이 있는 엘리의 마나는 오러보다 서클에 가깝다.

이것은 선천적인 재능이다. 태초부터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능력.

...아니, '설정'.

이것이 엘리가 '기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이제 술식을 발현해 봐. 이번엔 마나를 억지로 오러로 치환하지 말고."

"...거기까지 알고 있었어?"

"대충은."

"알았어. 그럼 잠깐 떨어져. 집중해야 되니까."

대여섯 발자국 물러선 나는 혹시 몰라 「식스 센스」를 사용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엘리가 그대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부우웅⸺

소리도, 하물며 색과 파장마저 달라진 엘리의 마나. 분명한 서클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술식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그 부분 다시. 서클로 이루어진 술식의 결괏값을 오러와 동일하게 만들려면 바람과 불을 잇는 여섯 번째 현과 두 번째 곡을 반대로 배열해야 돼."

"알고... 있다구...."

엘리의 목소리가 힘겨운 듯 떨리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엘리는 마치 본능적으로 기존의 술식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엘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술식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지금까진 순조롭게 구성되는 술식이 그 증거였다.

"이제 마지막이야."

엘리를 지켜보고 있는 나 또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당사자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걸음마처럼 고수해 온 습관을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고 있었으니까.

"...."

그 순간 엘리의 손이 축 늘어졌다.

숨소리 하나 없는 고요. 그 속에서 불씨가 그녀의 눈앞으로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사아아아아⸺

불현듯 이는 바람 속에서 하나였던 불씨가 수많은 꽃잎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훈련실 내부를 가득 채운 새하얀 불씨들.

"나... 됐어."

그것은 서클도 오러도 아닌, 한 사람의 절실한 마음이 일궈 낸 결실이었다.

엘리는 화사한 목련으로 가득한 봄 한가운데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했다, 엘리."

* * *

그 뒤로 신이 난 엘리가 「메모라이즈」에 매달린 사이, 나 역시 수련을 하러 옆 호실 훈련실로 향했다. 나도 요즘 틈틈이 수련한 결과, 검술 이해도가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훈련실 앞에 도착한 나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끼익― 열리는 문. 넓어지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

은하수처럼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이 살랑거린 순간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그녀도 이곳에 있었을 줄은 몰랐다.

하긴, 그녀도 엄연히 스프링윈드의 학생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

다만 의문은 수많은 훈련실을 놔두고 하필이면 왜 우리들 바로 옆방이냐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부교수님."

달갑지 않은 인사에 고개만 끄덕이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뭘 말이지?"

"부교수님의 개인 교습이요."

...훈련실의 방음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나라 해도, 이 방음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우연히 부교수님과 에클라트가 함께 들어가는 모습을 봤어요."

살이 에는 듯한 한기가 밀려온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사람의 목소리에 이토록 한기가 서릴 수 있는 것일까.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온 아리엘이 서서히 문을 닫았다.

"부교수님."

"...."

"저는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저만 안 되는 건가요?"

목적이 뭘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접근하는 걸까.

아리엘과 엮이는 건, 내게 굉장히 꺼림칙한 일이다.

"...말해.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 테니."

"정말요?"

그리고는 환하게 기뻐하는 아리엘.

그 순수한 모습이, 너의 '가면'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다만, 너 또한 나의 학생이니 차별을 두진 않겠다.

"그럼, 자세 교정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떤 자세 말이지?"

"찌르기. 제가 기본기가 부족한 거 같아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준비해."

"네, 부교수님."

나는 아리엘을 따라 거치대에서 훈련용 검을 집어 들었다.

나를 슬쩍 들여다보던 아리엘이 의미 모를 미소를 그리며 찌르기 자세를 갖췄다.

"어떤 거 같나요?"

저 자세, 「찌름의 미학」에서 본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아리엘의 자세는 몇 군데에서 흠이 보였다.

이미 알고 있는 걸 일부러 틀린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교정을 바라듯이.

그런데 아리엘....

"...다 틀렸다."

"네?"

탁―!

나는 망설임 없이 아리엘의 검을 내려쳤다. 그 반동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아리엘을 내려다보며, 칼끝으로 널브러진 아리엘의 검을 가리켰다.

"검을 집어라, 아리엘."

내 오늘 너에게 찌르기의 정수를 가르쳐 주마.

* * *

'왜 내가 아니야?'

일부러 거짓말까지 했다.

그렇게 시험을, 자신이 '통과'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엘리스 에클라트....'

후문에서 울고 있는 엘리스를 달래고 있는 로한을 본 순간 아리엘은 손끝이 떨려 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리엘도 엘리스와 로한의 관계가 '에클라트 기사단'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에서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엘은 일부러 엘리스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엘리스를 '가해자'로 만들고 자신이 '피해자'가 된다면, 그토록 바랐던 로한의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날 저녁 화이트홀로 다정히 들어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아리엘의 마음은 크게 삐걱거렸다.

어떤 '못된 망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자꾸만 괴롭혔다.

그래도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훈련실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자 더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안 돼....'

두터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로한과 엘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투는 점점 다른 감정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로한 님만은 절대 안 돼.'

아리엘이 아주 '나쁜 마음'을 먹기로 다짐한 순간이었다.

끼익

열리는 문 너머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토록 바라던 그 사람의 눈빛이었다.

유독 자신을 볼 때만 한없이 차갑고 무감정하던....

'로한 님이 여길 어떻게?'

터질 것만 같은 기쁨을 주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장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싶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 게 너무나 힘들다.

그리고 변질을 마친 감정이, 어떠한 감정이 되어 아리엘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저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기서 접점을 만들어야 돼.

지금 승부수를 띄우지 못하면, 다시는 나한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거야.

저렇게 멋진 분이니까, 인기가 많은 것도 어쩔 수 없지.

...완전 제멋대로인 착각이었지만, 아리엘은 그 착각을 기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르기라면 로한 님의 손길을... 좋아. 지금부터 연기 잘해 도로, 아니 아리엘. 넌 할 수 있어. 넌 지금부터 초보야.'

그렇게 자기 암시까지 하며 곧 다가올 로한의 손길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다 틀렸다."

탁.

"검을 집어라, 아리엘."

그녀의 생각과 달리 완전히 교육자의 눈빛으로 돌변한 로한.

"검신은 시선과 수평으로. 제대로 뻗어라."

탁.

"왜 검에 오러를 집중하는 거지? 찌르기의 중심은 검이 아닌 단전이다."

탁.

"완전 틀렸다. 다시!"

탁⸺!

거듭되는 교정과 훈련에 땀범벅이 된 아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 낸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로한을 훔쳐보았다.

'이게 아닌데...?'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반대로 그 변화는 그녀에게 색다른 기분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게 아니긴 한데, 이런 자세는 처음이야. 찌르기가 원래 이런 기술이었다니....'

아리엘이 배우고 있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지만, 로한이 가르치던 것은 기본이 아니었다.

마치 수십 년간 오직 찌르기만을 연구한 사람처럼, 로한이 가르치는 기술은 검술의 정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궁극(窮極)'이었다.

때문에 로한의 찌르기를 단시간에 습득하기엔 아리엘의 재능으로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분 몰라....'

전혀 모르던 것을 배우는, 무언가를 알아 가는 기쁨.

그 쾌감에 아리엘은 몸이 떨려 왔다.

"그만하면 휴식은 충분하겠지. 일어나."

"네!"

어느새 본래의 목적도 잊고 훈련에 빠져 버린 그녀의 목소리는 파이팅으로 넘쳤다.

그러던 아리엘의 몸이 휘청거린 건 다시 검을 고쳐 잡던 순간이었다.

"어?"

강도 높은 훈련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 원인이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눈앞은 이미 몸과 함께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아리엘은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풀썩.

그러나 얼굴에 닿은 건 차가운 훈련실 바닥 대신, 어딘가 부드럽고 단단한 그리고 따듯한 감촉이었다.

슬며시 감았던 눈을 뜬 아리엘의 눈앞으로 익숙한 옷깃이 보였다.

"...아."

코끝을 간질이는 익숙한 향. 그 향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그녀는 오래된 망상처럼 로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준비 (1)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아리엘.

너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난 장소에서 그리고 시점에서 나의 가슴을 박동하게 한다.

그날 너를 처음 봤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었더라면 너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는 너를 증오했고, 위태로운 그레이스의 운명엔 독이 되기에.

"완전 틀렸다. 다시!"

"네!"

그녀의 땀방울이 눈앞으로 튀어 올랐다.

진정으로 육체를 움직이며 흘리는 노력의 눈물.

내게 보이는 너의 노력이, 나는 거짓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이 순간. 진심으로 무언가에 열중하는 너의 모습까지, 나는, 거짓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

컵에 떨어트린 물감처럼 번지던 감정들이 한순간 투명해진 건 쓰러지던 아리엘에게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아리엘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태엽을 감아 달라는 듯한 눈빛으로, 숨마저 멈춘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속아선 안 된다.

아리엘은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그레이스에게 위협이 될, 그녀의 운명을 붉게 물들일 적.

그렇기에 너와 나는 함께 할 수 없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네?"

"똑바로 서."

"죄송합니다. 잠시 그만...."

초점이 돌아온 아리엘이 내 품에서 떨어졌다.

나는 등을 보이고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돌린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 훈련은 이것으로 마치겠다. 오늘 가르침을 잊지 말도록."

운명은 지금도 나를 방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호라이즌 펜던트가 너에게 가지 않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변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되새기며 훈련실을 떠났다.

* * *

<엘리>

[머야? 언제 가 버린거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나>

ㅤㅤㅤㅤ [급한 업무가 생겨서 먼저 갔어.

ㅤㅤㅤㅤㅤ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미안.]

<엘리>

[그것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 바보야!]

엘리와 문자를 마친 나는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야.

네가 지금 한가롭게 아리엘이랑 어울리고 있을 때야?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히든 피스 같은 거 찾으러 돌아다녀도 모자란 마당에.

"...나도 알아."

그런데.

오늘 아리엘을 가까이서 본 순간 무언가를 알아 버리고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

어딘가 익숙한 눈동자.

그건 나와 닮아 있었다.

그레이스를 떠올리며 샤워를 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나와 마주했을 때.

나도, 그런 눈이었다.

"어쩌면 아리엘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레이스의 운명처럼, 아리엘의 운명도 바꿀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여유로운 생각.

버려라.

"...나는, 아가씨를 선택했다."

거기에 엘리 정도를 추가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내게 버겁다.

나는 내 운명까지 걸어가며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만."

...확실히 아리엘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그뿐이다.

[잠시 후 마게이트(Margate) 행 열차가 도착하오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일단 '아콜(Acol)'로 가자.

곧 내 운명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운명이 더 악화된다 해도 개연성 없이 갑작스레 심장 마비 따위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운명을 대비하기 위해선, 곧 도래할 위협을 준비하기 위해선. 그리고 그레이스를 지키기 위해선.

내가 무장할 필요가 있다.

* * *

서재에서 이론을 공부하던 그레이스는 순간 명치 끝이 아려 왔다.

그동안 이런 적은 없었다. 아니, 너무나 오래되어 잊었다고 생각했다.

"로한...."

그레이스는 창밖을 바라봤다. 풍경 대신 그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을까.'

늘 자신을 돕느라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로한.

다른 교수들 다 쉼터에서 쉬고 있을 때, 로한만큼은 그녀의 곁을 지키며 연구를 도왔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로한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부교수로서 직분을 다했을 뿐입니다"라는 대답만 들려주었다.

그의 듬직함에 교수로 부임하기 전 가득했던 그레이스의 걱정은 말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만일 로한이 없었더라면.'

그녀도 자신이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안다.

첫 강의 때 일어난 사건을 아직 잊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 그날 학생들의 시선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시선이 좋았다.

저마다의 꿈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더 열심히, 더 많이 가르치자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게, 로한이 있어서였다.

'내일은 샌드위치를 사 가야겠어. 분명 로한이 기뻐....'

화악⸺

순간 로한의 미소를 떠올린 그레이스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요즘 들어 자꾸만 이런다. 환절기라 그런지 열병에 걸린 것일까.

생각해 보니 오늘 리펜슈타인 님을 몇 번 떠올렸더라.

열 번? 아니야. 다섯 번?

"...."

두 번이었다.

미하엘을 다섯 번 이하로 떠올린 건 그레이스에겐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루에 18시간 넘게 수련을 할 때도 미하엘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에 비해 로한을 떠올리는 순간은 자꾸만 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그레이스는 서재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 그레이스.

그녀는 머리맡에서 자신을 반기던 분홍색 토끼 인형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피피...."

웨펀 마스터인 내가 열병에 걸리다니.

아무래도 신종 열병인 거 같다.

오늘은 이만 잠에 들고 내일 생각하자.

"...로한."

그래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는 그의 미소를 떠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 * *

"커스텀 메이드?"

"예. 가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머리를 시원하게 왁싱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발드'다.

그리고 나의 '무장'을 의뢰할 명장이기도 하다.

하블다운 공방으로 갈까 생각했지만, 거긴 단가도 너무 비쌀뿐더러 인기도 많아 내가 정한 기일을 맞추기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발드의 솜씨는 미하엘도 인정할 정도로 최고 수준이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바로 이곳, '아콜 바이커스'다.

예상하는 그 바이커가 맞다.

그것도 '자전거'의 바이커.

아니 뭔 무장을 하겠다더니 자전거 매장에 와 있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지금 나한테 필요한 무장은 이게 맞다.

내 검을 만들 진짜 '재료'를 얻기 위해선 이곳에서 성능 좋은 바이크를 얻어야 된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

뭐 거창한 이름 같아 보이긴 한데.

쉽게 말하면 '자전거 국제 대회'다.

그래도 그냥 자전거 대회는 아니다.

이곳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사용하는 모든 자전거들은 마공학을 접목해 탄생한 '애뮬러 바이크'를 사용한다.

애뮬러 바이크의 역사는 꽤 길다.

애뮬러 바이크는 지금으로부터 230여년 전, '이오시프 애뮬러'라는 자전거에 미친 인간이 처음 개발한 레이싱 전용 자전거다.

최대 속도 320km/h.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는 불과 3.1초.

믿기 힘들겠지만 이게 '자전거'의 제원이다.

심지어 구동 방식은 페달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실의 '전동 자전거'와 비슷하다.

모두 출력이 전기가 아닌 '마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발드가 작업대를 턱짓했다.

"한번 그려 보슈."

일단 생각해 둔 도안은 있다.

이 경기에서 '주인공 팀'을 이기기 위해서 말이다.

스윽― 스윽⸺

스케치는 근처에 어질러져 있던 다른 도안들을 참고해서 그렸다.

곁으로 다가와 내가 그리던 도안을 지켜보던 발드가 턱을 매만졌다.

"오...."

역시 명장은 단박에 알아보는⸺

"그림에 소질이 없구만?"

....

"그래도 대충 윤곽은 알겠네. 그런데 이 부품들을 사용하면 단가가 너무 비쌀 텐데? 이 골재는 얼티밋 넘버링 시리즈야. 자전거 버전 인페르노라도 만들 생각인가?"

"상관없습니다."

"당장 견적만 뽑아 봐도 최소 천만 링... 진짜 괜찮수?"

어차피 우승 상품의 가치는 최소 수억 링 이상이다.

이 정도의 투자야 어차피 감안해야 되는 부분이다.

"이천이고 삼천이고 상관없습니다. 이대로만, 아니 부족한 부분을 더 보충해서 제작해 주시면 좋고요."

"그래서 기간은 얼마나?"

"한 달, 아니 보름."

"...보름? 에이 씨 장난하나. 이걸 보름만에 어떻게⸺!"

"제작비 따블."

"⸺잘 만들어서 손님 차고에 모셔 드리겠습니다."

역시 돈이 최고군.

순식간에 장사치로 변한 발드에게 나는 한 가지 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도안에는 없지만, 한 가지 사항을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예예, 말씀만 하십셔!"

"마나 제어기를 제거하고 싶은데, 가능하죠?"

"...예?"

부품도 부품이지만, 애뮬러 바이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용자의 역량이다.

사용자의 마나가 강하면 강할수록, 바이크의 속도 또한 빨라진다.

좋은 부품을 사용하는 건 장거리전인 경기에서 소모되는 마나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이다.

누군가 1의 마나를 사용에 1킬로미터를 가고 있을 때, 누군가는 10킬로미터까지 갈 수 있는 건 절대적으로 유리하니까.

그러나 반대로 단점도 존재한다.

출력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다보니 엔진의 안정성이 저하된다.

또한 사용자가 마나를 과도하게 들이붓다 보면 자칫 자전거를 탄 상태로 폭발할 수도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엔진 하단부에 위치한 마나 제어기, 즉 '안전장치'이다.

미하엘은 마법사다.

당연히 마법사가 가진 마나는 기사보다 월등하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췄다 하더라도, 그의 마나 컨트롤을 따라갈 순 없을 거다.

거기다 '주인공 보정'.

원작대로라면 미하엘은 곧 열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게 된다.

그런 그를 꺾기 위해선, 나는 이 전개를 뛰어넘는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건 안 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발드가 겸연쩍이 말을 이었다.

"그러다 사람 죽을 수도 있수. 만에 하나라지만, 나는 그 만에 하나에 장사는 물론 인생까지 접게 될 수도 있다고."

그 말에 나는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내밀었다.

"제가 이걸 깜빡했군요."

"갑자기 신분증은 왜...."

내 신분증을 확인한 발드가 손을 부들거렸다.

"소, 소드 마스터 로한?!"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국의 감마...."

다음 순간 말아 쥔 주먹을 심장 위로 얹은 발드가 고개를 숙였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응?

"9군단 정비관 발드!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오호라... 이 부분까진 몰랐다.

나는 새로 올라온 화를 클릭하는 독자의 마음으로 발드를 바라보았다.

"제2 전선 교전 당시 유클리드 군단장님과 로한 님께서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셨지 않습니까. 자, 여기 보십시오!"

흥분한 발드가 왼쪽 다리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의족이었다.

"아콜이 워낙 외지다 보니 소식에 무지하여 감히 몰라뵈었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발드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저 또한 당신과 똑같은 제국의 국민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제가 구한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감정에 북받친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보람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원가만 받겠습니다."

...오케이.

"보름이라고 하셨습니까? 열흘 이내에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그 대답에도 고개를 젓는 발드.

"은인에게 장사를 할 순 없죠. 제 목숨값을 생각하면 무료로 만들어 드리고 싶지만, 저 또한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함을 헤아려 주십시오."

"아닙니다. ...하아, 그럼 어쩔 수 없죠. 부탁드립니다."

"이제야 그 보답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선행은 베풀면 다시 돌아오게 돼 있다.

로한 이 자식. 썩 괜찮은 인생을 살아왔구만.

대금을 지불하려던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발드에게 말했다.

"참, 한 대가 더 필요할 거 같습니다. 한쪽은 제어기를 부착한 걸로요."

그러자 발드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물론 원가로 팔면 발드의 생활이 힘들어질 테니, 제작 의뢰비를 포함해 두 대를 정가에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 준비 (2)

여전히 지난 달에 머물러 있는 달력을 넘겼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감회가 새롭다.

얼마나 몰두했던 것인지 시간이란 감각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현실에서도 이렇게까지 살았던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40일...."

챔피언십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여기에 의뢰한 바이크를 기다릴 시간을 빼면 한 달.

30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우리는 코스 숙지, 전략 구성, 그리고 연습 등 말도 안 되는 과정들을 완료해야만 했다.

이를 미리 알고 대비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전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길게 잡아 봤자 주어진 시간에서 +10일 정도.

원작에서도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메인 에피소드였으니, 전개 수정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똑똑⸺

강의 중이던 나와 그레이스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십시오."

그레이스가 답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문.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민 건 언젠가 한 번 복도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그레이스 교수님. 아, 로한 부교수님도 계셨구나. 안녕하세여."

그 학생이다.

스프링윈드에 어떻게 입학했을까 싶었던, 약간 모자라 보였던 학생.

이름은 모르겠다. 저런 묘사는 읽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아니면 읽지 않았다던가.

일단 검술학은 수강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마법사 지망생인가?

그레이스가 물었다.

"지금은 수업 중입니다. 무슨 용무죠?"

"총장님이 찾으세여. 급한 일이라고 지금 와 달라 하시는데."

슬슬 총장이 부를 때가 됐다.

그런데 그 총장... 괜찮으려나.

"곧 마치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만 돌아가 보세요."

"네에."

내가 총장에 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아주 오랜만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메인스트림 : 승리를 향한 스타트 라인 ]

✵ 소기 목표 : '그레이스 유클리드'를 도와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시오.

- 실패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 악화, 당신의 사망 분기점 도달

- 성공 " '150 P', '이터널 스톤 2kg'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내가 처음 본 것은 그레이스였다.

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지금과 같은 메시지가 나타났었다.

이번 목표는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것.

지난번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다.

물론 우승할 생각이지만,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원작에서조차 주인공 팀이 우승하지 못 할 뻔했으니.

아무튼 '주인공 팀'의 구성은 이렇다.

미하엘, 퀘오스, 엘리.

...퀘오스.

이제 그 인물이 등장할 때가 된 건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팀에서 나는 반드시 엘리를 빼 올 거다.

엘리는 그레이스의 뒤를 이을 핵심 전력 중 하나다.

취미로 바이크를 타고 있다지만 엘리의 실력은 전문가 수준이다. 애초에 애뮬러 바이크는 중상층들의 스포츠였으니까.

그리하여 우리 팀의 구성은 그레이스, 엘리 그리고 나.

그렇게 엘리가 우리 팀으로 오게 된다면 변수인 아리엘이 그 빈자리를 메꿀 것이 명명백백하다.

다만 문제는 아리엘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느냐인데.

개연성을 더 모을 수 있었다면 「상태창」까지 얻을 수 있었을 터.

시간이 지나도 「개연성」은 부족한....

"...뭐지?"

"넹?"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느껴지는 시선에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던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 달리 저 눈빛이 멍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전할 말이 더 남았나?"

"아녀. 아무것도 아녜여. 네, 아무것도. 그럼 가 볼게여. 안녕히...."

서둘러 떠나려던 그녀를 내가 붙잡았다.

"잠깐."

뱃속 밑바닥부터 원인 모를 기시감이 꾸역꾸역 차오르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저여? 잉... 쫌 서운하네여."

어딘가 멍청해 보이는 미소.

어떤 페이지를 떠올린 순간 저 미소가 섬뜩하리만치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답했다.

"코린느."

이제 기억났다.

저 어수룩하고 멍한 듯한, '묘사'가.

"교수님이 학생 이름도 모르시면 어떡해여, 헤헤."

...그때 자세히 읽었어야만 했다.

* * *

벽면에 나열된 역대 총장들의 사진. 모두가 이름만 들어도 감탄을 참기 힘들 위인이었다.

스프링윈드가 어떤 역사를 지녔는지는 그 사진 속의 인물들만 봐도 가늠할 수 있었다.

마치 후손들을 감시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 속에서 총장이 말했다.

"두 분께 중요한 부탁을 하고 싶어요."

나와 그레이스는 이 커다란 총장실을 홀로 쓰기엔 너무나 작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2차 인마 대전이 끝나고, 드디어 5년 만에 황실에서 국제 대회 금지령을 풀었어요."

금방이라도 "사탕 주세요"하고 말할 것 같은 아기자기한 눈망울.

인형처럼 곱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덕분에 중단된 '올림피아 제전'이라던가 '하이런던 게임',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 같은 국제 대회도 다시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 하나 먹을래요?"

총장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탕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괜찮습니다."

나는 정중히 사양하고 아이, 아니 총장을 관찰했다.

보기엔 열 살 정도의 외모로, 대학이 아닌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이 아이가 바로 스프링윈드 대학의 26대 총장, '코넬리아 린 파르카스탈'이다.

그렇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녀의 겉모습을 비웃어서도 안 된다.

한때 '제국 마법 기술국'의 부국장이었던 코넬리아가 저런 모습이 된 건 모두 인마 전쟁 탓이었으니까.

"자꾸 먹지도 않는 사탕은 왜 가져다 주는 건지... 몸은 적응이 됐는데 도무지 시선은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코넬리아가 사탕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모두 총장을 귀여워하던 교수들과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것들이었다.

"아 혼잣말. 신경 쓰지 말아요. 요즘 좀 외로워서."

그녀가 저런 모습이 된 이유는 제국을 위해서였다.

하블다운의 수도, 블린이 공습받던 날, 미하엘이 방어술식을 완성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는 자신이 제조한 '약'을 복용했다.

그 약의 이름은 '소마(Soma)'.

먹는 즉시 현재에서 미래를 초월하게 되는 궁극의 증폭제.

그러나 그런 엄청난 힘만큼이나 크나큰 부작용이 따랐다.

그 부작용은 바로, 약의 작용이 끝나면 '홀로' 시간을 '역행'한다는 것이다.

한때 그 약효와 부작용으로 인해 제국에서 금기로 지정하려고도 했다.

지금도 기술국에서 비밀리에 소마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똑똑⸺

"들어가겠소."

곧바로 총장실로 들어온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레이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바로 내 곁을 지나쳐 간 그는 코넬리아 앞에 섰다.

"나를 찾았다 들었소. 파르카스탈 총장."

"마침 잘 왔어요. 오늘 세 분을 부른 건 긴히 할 이야기 있어서예요."

책상으로 몸을 기울인 코넬리아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챔피언십을 주관하는 외교부 쪽에서 이번 대회에 그레이스 유클리드 교수와 미하엘 리펜슈타인 교수가 참여할 수 있게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 말에 턱을 쓸어내리던 미하엘이 언짢은 듯이 혀를 찼다.

"홍보 효과를 노리는 건가. 괜한 짓을 벌이다니... 외교부 관리들의 뇌가 귀딱지만 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미하엘은 품위에 맞춰 얌전히 으르렁거렸다.

그의 성격상 국제 대회를 '괜히 호들갑스럽고 냄새나는 운동회'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외교부는 황실 직속 기관이다. 이는 곧 황실의 명령과 같다. 그리고 미하엘은 황실과 관련된 것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그레이스가 물었다.

"저희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딱히 임무라 할 것까진 없고, 가서 얼굴만 비추고 오면 돼요. 그냥 자전거 타고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말이죠."

"알겠습니다. 제국을 위한 일이니, 기꺼이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좋아요. 역시 그레이스 교수는 명성대로군요. 누구랑은 달리."

마치 비교하듯 미하엘을 스쳐보던 코넬리아의 눈망울이 이번엔 내게 향했다.

"로한 부교수도 괜찮죠?"

"예."

"그럼 리펜슈타인 교수. 이제 당신만 남았네요. 어떡할래요? 나도 강요는 안 해요. 어디까지나 이건 권유니까."

코넬리아와 함께 수도를 지켰던 미하엘은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반지를 어루만지며 코넬리아를 주시하던 미하엘이 결국 미간을 구겼다.

"...알겠소. 거절했다간 그대가 대회 끝날 때까지 내 일상을 괴롭히려 들겠지. 그 짧은 팔다리로 말이오."

"짧은 팔다리? 짧은 팔다리한테 맞아 볼래요?"

"유감이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이오."

입술을 깨문 코넬리아가 아기자기한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하엘이 저 주먹에 반죽이 되기 전에 내가 일부러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자각한 코넬리아가 화를 가라앉혔다.

"그럼 세 분 모두 승낙한 거예요?"

"대신 이번만이오. 다음은 없소. 내가 없게 만들 거니까."

코넬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저리가 난 모양이다. 보는 나도 열이 받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알았어요, 알았어. 애뮬러 바이크를 포함한 장비는 대회 측에서 준비⸺"

쾅.

"...하여튼 저 재수 없는 인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미하엘은 총장실을 떠났다. 오늘도 미하엘은 그레이스에게 어떠한 눈길도 그리고 말도 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개가 수정되며 너도 좀 달라졌으리라 생각했건만....

순간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코넬리아가 그레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옆에 있는 걸 깜빡했네."

"...이제 익숙합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그레이스와 달리 길게 호흡한 코넬리아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하아. 말이 나와서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저런 사람이랑... 아니다. 또 미안해요. 내가 주제를 넘었네. 내가 뭐라고."

코넬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분을 삭혔다.

미하엘 저 자식, 주인공이랍시고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두고 다닌다.

진짜 저 성격에 주인공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맞아 죽었을 텐데.

가만 보면 주인공이 제일 악질이다.

"아무튼 열심히 해 봐요. 혹시 몰라. 그레이스 교수 정도면 충분히 우승하고 남을 실력이잖아요? 거기다 유망주였던 로한도 곁에 있고. 특별히 이번 우승 상품으로 이터널 스톤 1킬로그램을 준비했대요. 잘되면 우리 학교의 위상도 높일 수 있고, 흔치 않은 기회예요."

"알겠습니다."

메인스트림 보상으로도 2킬로그램을 받으니, 우승하면 총 3킬로그램인가.

나는 조용히 그레이스의 허리춤을 힐끔거렸다. 이제 바꿀 시기가 된 검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이거 잘만하면 그레이스의 무기까지 만들어 줄 수도 있겠다.

인사를 마치고 떠나려던 우리에게 까치발까지 들고 일어난 코넬리아가 경고하듯 일렀다.

"아 그리고 리펜슈타인 교수. 다른 건 몰라도 그 교수한테는 절대 지지 말아요. 꼭이에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어째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사탕을 주고 가는지 조금 알 거 같다.

§ 환각 (1)

나는 읽고 싶은 글만 읽는 사람이었다.

내가 예상한 전개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어김없이 책장을 덮었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책을 펴 읽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페이지만 지나쳐서.

대부분 어느 한 고비만 넘기면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나의 독서 방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되어 버린 소설 속에서, 그런 부분을 마주했을 때 내게 덮을 책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마."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스프링윈드가 '지잡대'로 불리게 되는 대표적인 대목.

나는 어느새 이 페이지까지 마주하게 된 건가.

빌어먹을. 그때 대충 읽는 게 아니었는데.

빠밤⸺!

방심한 순간 고막을 두들기는 흥겨운 멜로디.

뭐야 이건?

어디서 게임 효과음 같은 게....

"로한 부겨슈님!"

복도를 걷고 있던 나는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세 명의 학생이 옹기종기 모여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혀 꼬였다. 아! 안녕하세요, 로한 부교수님!"

"너희는...."

왼쪽 학생은 머리카락을 롭이어처럼 묶어 늘어트렸고, 가운데 학생은 어디선가 본 말썽꾸러기처럼 생겼고, 마지막 학생은 로브를 고독처럼 뒤집어쓴 채....

하나 같이 처음 보는 묘사들이다.

그럼 비중이 있는 녀석들은 아니란 말인데.

그때 혀가 꼬였던 가운데 학생이 말했다.

"저는 왈가닥 시스터즈의 리더 사라 왓슨이고, 토끼처럼 생긴 얘는 그래빗 아젤. 좀 음침~해 보이는 이 친구는 글라샬라볼라스 사브나크 그레모리예요. 줄여서 로라!"

"그러니까 네가 사라, 왼쪽이 그래빗, 오른쪽이 글라샬랍... 뭐?"

"로라요! 로라!"

"그래 로라. ...로라?"

그러니까 '샬라볼라스 사브나크 그레모리'.

여기서 뭘 어떻게 줄여야 로라가 되는 거지?

뭘까.

왈가닥 시스터즈?

원작에 그런 등장인물이 있었나?

아니.

내 기억에는 없다.

설마 전개가 수정되며 등장한 인물들인가?

그렇다면 내가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들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인데....

"아무튼 말이죠. 이번에 교수님들 중에서 챔피언십에 출전하신다는 소문을 제가 어렵~ 게 입수했거덩요?"

"그래서?"

"그, 래, 서, 그중 한 분이 로한 부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말이죠!"

빠밤⸺!

...저 효과음의 근원지는 그래빗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었다.

"그리고?"

"그, 리, 고, 저희도 이번 챔피언십에 참여하고 십사⸺"

"바쁘다. 잘 가."

"아이 잠깐만요!"

나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그러자 부리나케 뛰어온 왈가닥 시스터즈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더는 이 녀석들과 엮이기 싫었던 나는 미하엘의 싸가지를 불러와 내 몸에 빙의했다.

"이유를 묻기 전에 세 가지를 말하겠다. 첫 번째. 출전 팀의 최대 인원은 세 명이다."

빠밤⸺!

"야! 그래빗! 분위기 안 좋은 타이밍에 틀면 어떡해!"

"미,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빠밤― 빠밤― 빠밤― 빠밤― 빠밤⸺!

"이, 이거 고장났나 봐...!"

"그냥 꺼! 가운데 버튼 꾹 눌러서 끄라니까! ...휴. 됐다."

...나는 언제까지 이 촌극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이런 것까지 부교수가 감당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다.

"...두 번째. 선수는 이미 정해졌다."

"한 번만 더 재고해 주세요! 저희도 충분히 강⸺"

"세 번째. 너희는 약하다."

"...."

이렇게 손쉽게 저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니.

어째서 미하엘이 이 화법을 고수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포식자를 조우한 토끼처럼 잔뜩 움츠려 있던 그래빗이 내게 조심스럽게 외쳤다.

"저, 저희는 약하지 않아요! 저희는… 강하단 말이에요...."

그런 나약한 모습으로는 설득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답했다.

"서클이든 오러든 좋으니 아무거나 보여 봐."

"좋아. 다 비켜 봐. 내가 할게."

그리고는 자신 있게 나선 사라가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래빗이 나 몰래 사라에게 속삭였다.

"역시 로라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집중하게 조용히 해."

그사이 나는 사라의 서클을 바라봤다. 유심히 볼 필요도 없었다.

마치 새벽 안개처럼 흐릿한 사라의 마나.

이걸 보고 있자니 정말 스프링윈드가 지잡대처럼 느껴져 한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청춘을 즐기는 건 좋다.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뭐든 도전해 보고 싶겠지."

오히려 긍정적인 나의 대답에 시스터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허나 부족한 능력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너희는 스프링윈드를 어디까지 망신시켜야 만족할 셈인가?"

"...!"

사라가 이를 드러내고 나를 노려보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도 서투르다.

불합리함에 대항하기 위해선,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이성적인 분노라는 것도 모른다.

더 볼 필요도 없겠군.

"그러니 포기해라. 챔피언십은 장난도 놀이도 아니다."

"알겠... 습니다."

그래도 참을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분노로 몸서리치는 시스터즈를 뒤로한 채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 * *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이것이, 너희를 위한 선택이다.

챔피언십은 '놀이'가 아니다.

그 또한, 치열한 전장의 연장선이다.

"경험을 위해 목숨을 걸기엔... 하찮다."

결코 너희들의 목숨이 그리고 노력이 하찮다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에 비한다면 챔피언십은 '고작 하찮은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서 사망한 선수, 1,081명.

규정상 레이스가 진행되는 트랙의 거리, 388km.

그것도 단순히 평면적인 코스가 아닌 대륙을 가로지르는 산맥이 포함된 고위험 코스다.

거기에 각 팀들 간의 충돌까지 빈번히 일어나니,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다.

물론 그에 대한 안전 장비도 갖춰져 있다. 그래도 너희는 그 안전장치가 발동하는 '순간'까지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왈가닥 시스터즈를 매몰차게 내친 이유다.

"...그래도 좀 과했나."

미하엘의 싸가지까지 빙의하는 건 좀 심했나 싶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아무리 내가 모르는, 지금 이 페이지에 불필요한 이름들이라 해도.

스스로 죽겠다는 걸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10서클 대마법사 할매 스튜 가서 밥이라도 한 끼 사 주지 뭐.

빠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내 책상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를 몰래 지켜보던 시스터즈와 눈이 마주쳤다.

"너희 언제... 아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

하마터면 욕설을 터트리고 개연성이 깎일 뻔했다. 다행히 그레이스는 자리에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진 사라가 벌떡 일어나 내게 말했다.

"부교수님!"

"뭐, 뭐야?"

최종 결전을 나서는 기사의 얼굴도 저보다 비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라가 포기라곤 절대 쓰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바이크 동아리라도 만들게 해 주세요!"

"바이크 동아리?"

"네. 거기서 연습해서, 다음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은 반드시 출전할 거예요!"

"...."

순간 깨달았다.

너희들의 목표는 만용도, 어리석음도 아닌... 꿈이라는 것을.

...같잖은 훈수질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너희들의 꿈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

빠밤⸺!

"...스마트폰 2주 압수. 때 되면 알아서 찾아가라."

"너, 너무해요 부교수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