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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

동아리실에 들어선 나는 자욱한 먼지에 코를 가렸다.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진득한 먼지가 이곳을 사용했던 이들의 추억처럼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가 저희 동아실이에요!"

"동아리실이겠지."

"제가 혀가 좀 짧아서... 아무튼! 여기에 부교수님 서명만 해 주시면 스프링윈드에도 바이크 동아리가 탄생이에요!"

이곳처럼 안 쓰는 강의실들은 꽤 존재하는 편이었다. 이리 보니 학생 수가 부족하다는 게 실감이 난다. 이렇듯 전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 간 뒤였다.

승인 신청서를 건네받은 내가 앞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낸 순간이었다.

"...잠깐. 왜 내가 고문 교수야?"

"당연히 서명을 하셨으니 고문이겠죠?"

오호라....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한 하셰요!"

사라는 혀가 꼬였는지도 모르고 눈을 빛냈다. 그렇게나 좋은가.

"내가 이 동아리의 고문 교수가 되는 대신. 나는 어떠한 간섭을 하지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원하던 바예요. 저희도 저희끼리 즐기고 싶을 뿐이니까. 그래도 가끔 부탁해도 되죠?"

"또 하나. 아무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게 주의할 것."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 두 가지 사항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고문(顧問)이 아닌 고문(拷問)이 되어 주마."

나는 퇴근 준비를 위해 서명을 서두르려 했다.

이유는 오늘 아침 그레이스에게서 받은 샌드위치.

꼬륵⸺

그걸 맛있게 먹으려고 점심까지 걸렀다.

그때였다.

콰앙!

난데없이 들려오는 굉음.

그것도 이 근처다.

"동아리 승인은 잠시 보류다."

"네? 부교수님! 부교수님! 아 나... 우리도 따라가자!"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내가 읽지 않은... '페이지'가.

* * *

"아무래도 놓친 거 같아요."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아리엘이 오러를 해제하며 미하엘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친 데는 없느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매로 코를 가린 미하엘이 무릎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H처럼 생긴 로고가 그려진 검은색 포장지. 미하엘이 소매를 거두고 포장지를 코에 가져간 순간이었다.

"...쯧."

화르륵!

미하엘이 인상을 쓰자 들고 있던 포장지가 흔적도 없이 타올랐다.

그때 근처에서 소란을 듣고 달려온 로한과 시스터즈가 안으로 들어서다 매캐한 냄새에 코를 막았다.

로한이 미하엘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여전히 대답 없는 미하엘. 경멸로 가득한 그의 눈빛은 커튼이 펄럭이는 창문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로한에게 다가온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지금 학교 곳곳에서 출처 미상의 약들이 발견되고 있어요."

"역시...."

그 순간 로한의 곁을 거칠게 지나쳐 가던 미하엘이 말을 흘렸다.

"이건 '블랙 캔디'다."

그가 분노하고 있었다.

* * *

교직원 전체가 소집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검은 포장지들이 각자의 책상 앞에 놓여 있었다.

그걸 본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슬퍼했으며, 누군가는 평온했다.

회실 끝자락, 홀로 단상처럼 한 계단 올라간 자리에 앉아 있던 코넬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인지하고 있던 사람 있나요?"

침묵. 그리고 또 침묵.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의 모습이 어린아이였기에 교수들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그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요? 고개 드세요. 여기 당신들 심문하는 취조실 아니니까."

그때 13개의 좌석 중 오른쪽 중간 열에 앉아 있던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저, 총장님. 제가 잠시 포장지의 맛을 봤는데, 아무래도 이거 '호마(Homa)'가 맞는 거 같습니다. 예...."

포션·제조학과의 교수, 토마스 베이컨의 발언에 회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마?

호마라고?

그런 물건이 왜 학교에 있어?

누가? 왜! 이런 발칙한 것들...!

"...시끄럽다."

그 소란 속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가 입을 열자 모두가 입을 닫았다.

"오늘 내가 발견한 건 호마를 이용해 만든 '블랙 캔디'였소. 요즘 대륙 곳곳에서 은밀히 유행하고 있다던데. 그 전에 코넬리아 총장. 기술국의 전 부국장이었던 그대에게 묻겠소. 호마든 블랙 캔디든, 모두 그대가 개발한 '소마'에서 파생된 것들 아니오?"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코넬리아에게 쏠렸다. 그녀는 무심히 미하엘에게 응수했다.

"그 말은, 이번 사건의 원흉이 나라는 말인가요?"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총장님께서 학교에 그런 물품을 유통한다니... 리펜슈타인 교수. 이번엔 말씀이 지나쳤습니다."

"맞아요, 맞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총장님이 그런 짓을 벌일 리 없잖아요? 교수님도 참...."

토마스 교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교수들이 총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미하엘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총장을 의심한다는 말이 아니오. 다만 의심이 가는 것이 있겠지."

"...유감이지만 나도 몰라요. 기술국에서 버려지다시피 부국장 자리를 내려놓고 이곳의 총장으로 부임한 게 전부니까."

코넬리아가 제국을 위해 희생한 대가가 바로 이 자리였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죄스러웠다.

코넬리아가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런 물건이 학교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에요. 일단 이 사실을 관리국에 보고...."

그 순간 나와 미하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되오."

"안 됩니다."

나를 돌아보는 미하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군.

그러다 그레이스의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발견한 중립마나학과 교수, 윌리엄 버켓이 물었다.

"그런데 유클리드 교수는 어디 가고 로한 부교수가 앉아 있는 겐가?"

"유클리드 교수님께서는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셨습니다. 하여 검술학과 부교수인 제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뭐 규정상 학과 교수가 부재중이면 그 부교수가 직무 대리를 맡는 게 맞지...."

사실 그레이스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그저 내겐 '가문에서 호출 받았다'는 문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가문의 호출이면... 그 할머니를 만나러 간 건가.

각설하고 기회다 싶었던 내가 코넬리아에게 말했다.

"관리국에서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되면 '그들'은 손전등을 비춘 바퀴벌레처럼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겁니다. 또한 수사가 진행되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질뿐더러, 학생들의 수업에도 차질을 빚게 되겠죠."

"어쩔 수 없는 결과예요. 로한 부교수. 그럼 당신의 의견은 이 사건을 '묻자'는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썩은 부분이 생겼다면 반드시 찾아서 도려내야 전체를 지킬 수 있죠. 때문에 총장님께 청합니다. 이번 사건의 수사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번 사건이 귀찮은 일이라는 것은 확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나서는 이유는 하나였다.

〔 서브스트림 : 불행해질 권리 〕

✵ 소기 목표 : '블랙 캔디'의 유포자를 체포하시오.

- 실패 " 당신의 죽음

- 성공 " '40 P'

오랜만에 포인트를 벌 기회가 생겼다.

또한 실패 시 내가 죽는다고 떡하니 쓰여져 있는데 하는 수밖에.

잠시 고민하던 코넬리아가 미하엘에게 눈길을 옮겼다.

"리펜슈타인 교수도 같은 생각인가요?"

"...."

"좋아요. 그럼 현장의 최초 발견자인 로한 부교수, 리펜슈타인 교수 그리고 아리엘 리펜슈타인 학생에게 이번 사건의 수사를 위임하죠. 대신 제 판단하에 수사에 진척이 없거나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경우, 그 즉시 관리국에 이 사실을 알릴 거예요."

그 순간 코넬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어딘가 서러운 듯한 비애가 그녀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부디 두 분께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길 바랄게요. 이상 소집을 해제합니다."

§ 환각 (2)

지금 내 기분이 어떻냐면.

"우리가 그들을 습격했을 때 발동한 건 함정 계열 술식이었다."

뒤통수가 보일 때마다 후려쳐 주고 싶은 직장 상사 둘과 앉아 있을 때.

딱 그 기분이다.

"나조차 발동 직전까지 감지하지 못했으니, 적어도 학생의 솜씨는 아니다. 이는 외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거의 외부자라고 단정 지은 미하엘의 태도에 내가 반박했다.

"당장 카렌 디 아릴레리아만 해도 술식에 관해서라면 수준급입니다. 그건 리펜슈타인 교수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카렌 디 아릴레리아.

현 학생회의 회장이자 훗날 아크메이지가 될 인물.

아무리 지잡대라 불리며 위상이 떨어졌다 한들, 스프링윈드에는 그런 괴물 같은 존재들이 다수 존재한다.

미하엘이 곧바로 기술국으로 가지 않고 이곳의 마법방어학과 교수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네 말이 옳다. 아직은 누가 범인이라 단정할 수 없지. 그건 로한 너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란 소리다."

그 말대로 모두가 용의자였다.

뿐만 아니라 총장도 배제해선 안 된다. 블랙 캔디의 뿌리가 되는 '소마'를 개발한 건 그녀였으니까.

내가 아리엘에게 물었다.

"그때 도망친 인물들은 총 몇 명이었지? 아, 리펜슈타인 교수님. 지금 제 신분은 부교수이니 아리엘을 학생으로 대해도 되겠죠?"

"...마음대로 해."

미하엘이 눈썹을 꿈틀거린 것도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아리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정 계열뿐만 아니라 왜곡 계열의 술식도 펼쳐져 있었습니다."

"왜곡?"

"네. 밖에서 봤을 때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문을 연 순간 발동한 함정 너머로도 보이는 건 없었어요."

"그럼 너는 어떻게 알고 그들을 습격한 거지?"

그러자 아리엘이 꺼낸 스마트폰의 화면을 나에게 보여 줬다.

화면 속에는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익명의 문자 한 통이 띄워져 있었다.

<알 수 없음>

:금일 여섯 시. 제2별관 4층 임시 창고에서 출처 미상의 약이 거래될 예정.

미하엘이 첨언했다.

"나도 아리엘이 이 문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를 문자였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내부 고발? 아니.

내부 고발이라기엔 함정이 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이 인물 또한 범인들이 거래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거래 장소에는 왜곡 계열의 술식까지 행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수준 높은, 미하엘조차 감지하지 못할 실력으로.

그런데 이 밀고자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었을까.

순간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적어도 거래 과정에서 배신자가 발생한 건 아니다. 우리에게 밀고를 했다면 당연히 체포까지 염두에 두었겠고, 그렇다는 건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을 거다."

"그럼 눈치를 챈 범인들이 거래를 깨고 먼저 도망쳤겠군요."

오히려 추리에 추리를 거듭할수록 사건은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블랙 캔디.

수준급의 술식.

그리고 정체불명의 밀고자.

이 세 가지 단서가 머리카락에 붙은 껌처럼 끊임없이 엉켜들 무렵이었다.

띠링⸺

아리엘의 스마트폰이 알림을 토해 냈다.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이번에도 익명으로.

숨을 들이마신 아리엘은 문자를 열었다.

<알 수 없음>

:이틀 후 새벽 여섯 시. 본관 6층 마법방어학 강의실에서 출처 미상의 약이 거래될 예정.

...이제야 대충 감이 온다.

이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반지를 쓸어내리던 마법방어학과 교수, 미하엘 리펜슈타인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게 도전하는 것인가."

* * *

그 뒤로 자택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을 열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서랍. 그 밑바닥을 들어내자 감춰진 공간 속에 놓인 노트를 꺼냈다.

달칵.

스탠드 조명 아래로 이 세상의 미래가 쓰여져 있었다.

이전에 내가 썼던, '전개 노트'.

나는 그 내용을 처음부터 차근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무렵 책장을 덮었다.

"...역시 읽지 않았어."

'블랙 캔디'에 관한 내용은 노트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원작에는 이 에피소드가 분명 등장했었다.

다만 내가 읽지 않았을 뿐이다.

왜 읽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나라고 이 소설에 빙의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랬다면 진작에 읽었지.

내가 이 페이지를 읽지 않은 건, 그냥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개도 예상하기 힘들고, 괜히 머리만 아파서, 어차피 안 읽어도 다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건 내 선택이었다.

그래도 호마라던가, 블랙 캔디라던가 하는 것들이 중간중간 언급이 되긴 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실제로 블랙 캔디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었고, 미하엘조차 그 범인을 잡지 못했다.

"아리엘에게 온 문자는 명백한 함정이었다."

마치 미하엘을 '유인'하려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니 대놓고 그런 분위기를 유도했다.

문자를 미하엘이 아닌 아리엘에게 보낸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결정됐다.

"그럼 누가... 미하엘을 죽이려고 하는 걸까."

...그 자식 적을 너무 많이 두긴 했지.

당장 코넬리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래도 그는 주인공이다.

그가 죽는다면 그레이스는 슬퍼할 것이고, 나는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다만 궁금할 뿐이다.

주인공이 없는 소설은, 아니 세계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 * *

"그레이스 교수님."

"...어?"

"차 한잔 어떠십니까? 저번에 좋은 원두를 선물 받았는데, 어제의 보답도 할 겸 말이죠."

실은 그레이스가 준 샌드위치가 너무나 고마워서 오늘 아침 최고급 원두를 질러 버렸다.

그런데 걱정이다. 가문의 호출을 받은 이후, 그레이스가 어딘가 멍해 보였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아마도 집으로 불려가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었겠지.

뭐 그레이스 정도 나이가 되면 듣는 뻔한 잔소리들 있지 않은가.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 기부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언제 돈을 모을 것이냐, 네가 걱정되어 이 할미가 눈을 감지 못한다, 카드 줄 테니까 제복만 입고 다니지 말고 사복 좀 사 입어라, 하는 짓이 네 어머니를 쏙 빼닮았구나, 데이지, 와서 내 터진 복장 좀 꿰매라....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 할머니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런 그레이스를 위로해 주고 싶지만, 지금 나서는 건 어쭙잖은 참견일 뿐이다.

또한 그레이스도 조금만 지나면 훌훌 털어 내고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거다.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그렇게 견뎌 왔으니까.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책상에 내려놓자 그레이스가 눈인사로 화답했다.

"잘 마실게."

"아닙니다. 참, 이 원두가 어떤 원두인지 아십니까?"

"응?"

내 물음에 그레이스가 커피가 담긴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던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마나가 비옥하기로 알려진 스톡베리에서 재배한, 마법의 원두입니다."

"마법의 원두...?"

"예.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모든 근심이 날아가고 마음이 편안해지며, 곧 현실을 잊고 행복하게 되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하여 마법의 원두라 부르더군요."

저번에 내가 어떤 그림 보고 '너울지는 풍경'이라고 했던가?

그거랑 같다.

"그거 참 신기하구나."

"일단 드셔 보십시오."

잔을 입에 가져다 댄 그레이스는 커피를 천천히 홀짝거렸다.

대충 그런 거 있잖아.

괜히 비싸면 막 몸에 좋을 거 같고, 먹어 보니 진짜 좋아진 거 같기도 하고.

그런 플라시보 효과.

비록 거짓이라도, 그레이스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있다.

"향이 참 좋구나.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어. 고마워, 로한."

...이제 나는 아가씨의 표정만 봐도 대략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그시 나를 비추는 눈동자.

물안개에 가려진 듯 희미하게 번진 미소.

...온전히 나를 위한 거짓.

오히려 거짓말은 아가씨가 나를 위해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교수님."

이러니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 * *

이튿날 새벽.

나와 미하엘 그리고 아리엘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그의 강의실로 향했다.

품위도 잊은 채 성큼성큼 걷던 미하엘의 발자취를 따라 분노로 짓눌린 마나가 물기처럼 흘러내렸다.

꽤 열이 받은 모양이다.

하긴 대놓고 도전장을 받았는데, 미하엘의 성격상 침착한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미하엘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리 모습을 드러내다니, 겁도 없구나."

저 멀리, 불 꺼진 복도 끝으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실루엣만 봐서는 덩치가 꽤 커 보였다. 키는 작은데, 웬만한 성인 남자 둘의 몸집을 한데 합쳐 놓은 모양새였다.

화르륵⸺!

일순 술식을 발현한 미하엘의 전방으로 폭염이 휘몰아쳤다.

강의실의 창문을 차례대로 밝히며 쏘아지는 불덩이.

그 실루엣에 다다른 순간 눈에 마나를 집중하고 있던 내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부교수님?"

나는 아리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불덩이를 앞질렀다. 뽑아 든 검에 오러를 두른 순간이었다.

파앙!

한순간에 엮어 낸 술식임에도 불덩이를 받아친 팔이 화끈거렸다. 저걸 정면으로 맞는다면 나도 장담할 수 없을 위력이었다.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 불덩이를 보고 술식을 해제한 미하엘.

그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로한."

나는 검을 거두고 뒤에서 옹기종기 움츠리고 있던 실루엣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저희가 오인한 듯싶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스위치를 눌러 복도에 불을 밝혔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그 '실루엣들'의 정체는,

"사라 왓슨."

왈가닥 시스터즈였다.

그래도 리더라고 그래빗과 로라를 품에 꼭 끌어안은 사라가 떨리는 입술 사이로 울음을 토해냈다.

"부, 부, 부, 부겨슈님...!"

* * *

우리는 시스터즈를 심문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왔다.

쿵!

미하엘이 크게 발을 구르자 지금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사라가 화들짝 몸을 떨었다.

"지, 진짜예요! 그게 다예요! 저희는 그냥 교수님들을 돕고 싶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랬다.

사건이 일어나 교수들이 소집됐던 날, 내게 서명을 받기 위해 기다리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그러나 미하엘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회실의 방음은 내가 설계한 이상 완벽하다. 그런데 그걸 고작 '기부 학생'인 너희가 어떻게 도청했다는 말이냐."

"그래빗, 그래빗의 귀가 밝은 편이에요!"

이윽고 미하엘의 시선이 그래빗에게 쏠렸다. 그의 괄시를 한 몸에 받던 그래빗이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르르 떨었다.

흡사 토끼와 같은 그래빗의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본 미하엘이 턱을 매만졌다.

"아젤 가문의 핏줄인가."

"저, 저희 가문을 아세요...?"

"너희 가문의 활약은 익히 알고 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군."

이내 문으로 돌아선 미하엘이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돌아가라. 너희 같은 '문제아'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저 자식 또 적을 만드는구만.

문제아란 단어를 듣자 당사자가 아닌 나조차 오러가 끓어올랐다.

"학생이 학교를 지키는 게 잘못된 일입니까?"

우발적이었다.

"저 학생들은 문제아가 아닙니다. 똑같은 스프링윈드 학생입니다. 비록 기부금을 내고 들어왔다 해도, 저와 교수님께서 가르치는 똑같은 학생이란 말입니다."

내가 읽지 않은 페이지에서도 변함없는 미하엘의 태도에, 화가 났다.

"대체 '문제아'라는 단어에 담긴 저의가 무엇입니까? 그저 엘리스처럼, 교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부 문제아인 겁니까?"

"문제아란, '쓸모가 없음'을 말한다."

"쓸모가 없다고요...?"

그 말을 곱씹었다. 끊임없이, 그 말만 곱씹었다.

나 역시 지금껏 살아오며 나의 '쓸모'를 찾아 헤맸다.

나는 어디에 쓰여야 하는 것인지, 어디에 쓰이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 고민했다.

그렇게 어느 날,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진정으로 쓸모가 없는 건, 그래빗에게 파훼된 교수님의 술식이 아닙니까?"

"지금 뭐라 하였느냐."

"비록 이 아이들이 검술이나 마법에 재능이 없다 하여도, 저마다 잘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리펜슈타인 교수님께 다시 묻겠습니다. 아직도 저 학생들이, 문제아로 보이십니까?"

"...."

걸음을 멈춘 미하엘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시스터즈를 돌아봤다.

일그러진 그의 눈매에 시스터즈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미하엘이 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대신 방해가 된다면, 그 즉시 너희들을 창밖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그의 승낙에 시스터즈의 얼굴이 밝아졌다.

순간 내게 달려든 시스터즈가 내 허리에 옹기종기 매달렸다.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사라가 중얼거리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그래.

§ 환각 (3)

먼저 강의실로 들어가 숨어 있기로 결정한 우리는 뒷문에 도착했다.

아리엘이 문을 열려던 순간, 미하엘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멈추거라."

"가주님?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미하엘의 표정. 그가 문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우우웅⸺

미하엘이 마나를 방출하자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술식이 연기에 닿은 레이저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96개의 현 그리고 103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술식은 수많은 원소가 뒤섞인 것을 넘어, 이 순간에도 원소들끼리 충돌해 핵분열을 일으키듯 연쇄하고 있다.

이게 바로 '함정 계열'의 술식인가.

마법에는 무지했던 탓에 기하학적인 이 술식의 문양은 내겐 너무나 복잡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서클의 흐름을 읽어 보니 꽤 강한 위력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은 됐다.

대충 이 강의실 정도는 가볍게 날려 버릴 위력. 상당히 위험하다.

그때였다.

툭―

미하엘이 손끝을 까딱인 순간 술식을 이루던 선 하나가 힘없이 끊어졌다.

다음 순간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듯 술식 위를 두들겼다.

투두두둑⸺

순식간에 해체된 술식.

거짓말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시스터즈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하간 괴물 같은 자식이다.

"들어가지."

미하엘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강의실의 풍경이 고즈넉이 밀려왔다.

가지런히 정돈된 기구, 반듯하게 정렬된 책상,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청결함.

마법 방어학과 강의실의 모습은 이곳의 주인과 닮아 있었다.

숨어 있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내가 옷장만 한 도구함을 가리켰다.

"우선 저곳에 숨어 상황을...."

사사삭

그때 내 손끝에서 벌레가 자라나는 게 보였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벌레는 수백, 수천 마리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밧⸺!

이윽고 벌레는 내 온몸을 뒤덮었다.

또 다른 술식이 존재했던 건가?

이건 설마... 환혹 계열?

미하엘 이 쓸모없는 자식!

"모두 조심...!"

꺄아아악⸺!

곁에 붙어 있던 시스터즈가 비명을 터트렸다.

겁에 질린 사라와 그래빗이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미하엘이나 아리엘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화륵!

츠즈즈즈...!

미하엘을 보호하듯 생성된 술식들이 뇌화(雷火)를 일으켰고, 자리에 웅크린 아리엘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클라우디아. 네가 어떻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환각. 모두가 환각을 보고 있었다.

나는 환각에서 깨어나기 위해 체내에서 오러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

이명이 나를 덮쳐 왔고, 사방이 암전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파앗!

한순간 이명이 사라지며 귀가 뜨였다. 귓구멍이 뜨거웠다. 뇌가 녹아내린 듯, 무언가, 서서히... 흘러내린다.

"...."

그 어둠 속 한가운데,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게 뭐야...."」

묘사.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그 '묘사'였다.

「"뭐냐고 이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페이지 속에서 걸음을 힘겹게 내딛는다.

마침내 '그녀' 앞에 도달한 나는 무릎을 꿇었다.

"...."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반마(半魔)가 된 제국의 웨펀 마스터.

언제나 혼자였던, 그러나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었던 한 사람.

...그레이스 유클리드.

여기, 그녀가 죽어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새빨갛게 피어난 죽음의 늪에서, 그녀가....

"...큭!"

일순 새카맣게 죽어 버린 그레이스의 손이 내 목을 졸랐다.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속, 어느새 눈을 뜬 그녀가 충혈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귀를 뜯어낸 자리에 입술을 밀어 넣고 말하듯, 그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너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그리고 다시, 이명이 찾아왔다.

"네가 읽고 싶은 페이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

"몇 번이고 이 세상을 다시 읽어도, 너는 나를 구원할 수 없어."

⸺...⸺…⸺··⸺·.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환각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 말처럼 그녀를 구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주어진 페이지를 읽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운명 속에서, 주어진 기회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기회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기회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기회를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기회를....

"...이건 아니야."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정신이 한 조각, 한 조각.

다시 머릿속에서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런 건 내가 원했던 페이지가 아니야."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그제야 이 모든 것이 나의 환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오직 '독자'였기에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동시에 이 소설을 사랑했기에, 누구보다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전개를 거부한다."

쩌저적⸺!

나를 가두고 있던 공간에 금이 일었다.

조각조각 떨어지는 어둠. 내가 다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부교수님!"

되찾은 현실 속에서 사라가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 * *

숙취가 밀려온 것처럼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때 사라가 숨만 헉헉대던 나의 손등에 술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이내 팔목을 타고 이어진 술식이 내 어깨까지 뻗쳤다.

오러도 서클도 아닌 '퓨어 마나'를 필요로 하는 회복 계열의 술식, 「큐어」.

그 기술은 하급에 속했지만, 이 순간에는 어느 마법보다 절실히 느껴졌다.

사라는 그조차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 강인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봐... 이런데 왜 쓸모가 없어...."

그 말을 들은 사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리한테 그런 말 해 준 사람 부교수님이 처음이에요 아무튼 조금만 참아요!"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지하에서 그녀가 나를 부르고 있... 방심했군."

쓰러진 미하엘과 아리엘에게 걸린 환혹 마법을 로라가 해체하고 있었다. 솜씨로 봐서는 환혹 계열의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 보였다.

그때였다.

"아...."

들려오는 탄식에 고개를 돌리자 강단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인물에게 초점을 맞췄다.

서서히 선명해지는 얼굴.

우리들을 구경하던 코린느가 멍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건 각본에 없었는데."

역시 너였구나.

처음에 긴가민가했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다.

...퀘오스.

하지만 저건, '그들'의 본체가 아닐 것이다.

나는 사라를 뒤로 물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이윽고 환혹에서 완전히 풀려난 미하엘이 아리엘에게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누, 누구야?!"

"나다, 아리엘. 정신을―"

"건드리지 마...!"

"...."

아리엘은 여전히... 저 상태로는 안 되겠군.

미하엘이 시스터즈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희를 문제아라고 부른 건 철회하겠다."

오러를 방출한 내가 코린느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저 학생, 마나의 뒤틀림이 심상치 않습니다."

"약 때문이다. 아무리 소마의 위작(僞作)이라 해도, 그 효과는 무시 못 할 수준이니까."

와작―!

코린느가 공깃돌처럼 손에 쥐고 있던 블랙 캔디를 씹은 순간이었다.

"이 각본에서는 누군가가 죽기로 되어 있었는데."

와작와작⸺!

말을 마친 코린느가 꺼낸 블랙 캔디들을 무차별적으로 먹어 치웠다.

잠시 후 그녀는 입가에 검은 부스러기를 한가득 묻힌 채 웃었다.

"...그래서 누가 죽을래?"

* * *

세상과 함께 사람들도 미쳐 버린 걸까, 아니면 이미 미쳐 있던 사람들이 세상이 미치기만을 기다린 걸까.

퀘오스,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에 속했다.

"잘 들어, 사라."

사계 봄을 발현하던 내가 속삭였다.

"너희는 당장 아리엘을 데리고 이곳에서 도망쳐. 그리고 안전하다 싶으면 바로 총장님께 연락해."

"싫어요. 저희도 도움이...."

"너희는 충분히 도움이 됐어."

비산하는 불꽃 속에서 내가 사라를 돌아보았다.

이런 것까지 학생들에게 맡기기엔 너무나....

"지금은 부끄러운 어른들한테 맡기는 거야. 알겠지?"

소마에서 호마와 블랙 캔디가 파생된 것도,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의 손에 닿게 된 것도.

전부 제국의 업보다.

그리고 이제, 진짜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그래빗, 로라!"

고민하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사라가 그들에게 달려갔다.

아리엘을 둘러업고 출구로 향하는 시스터즈. 그들을 지켜보던 코린느의 앞으로 붉은 술식이 떠올랐다.

"설마 도망치는 거야? 배우가 무대를 떠나면 쓰나."

이윽고 순식간에 사출된 화염이 시스터즈를 향해 맹렬히 나아갔다.

그러나 화염은 미하엘의 손짓 한 번에 소멸했다.

"흥미가 동하는군. 환대는 이만하면 충분한 거 같은데, 이제 네가 떠들던 무대의 막을 올려 보지 그래?"

...잊고 있었다.

미하엘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란 것을.

지금 저 미친놈 중 하나가 내 편이라 다행이었다.

그사이 내가「식스 센스」를 발동했다.

우웅... 웅! 우우웅... 웅웅!

역시 마나의 파장이 심상치 않다.

어쩔 땐 약하다가도, 또 어쩔 땐 미하엘의 수준으로 치솟기도 했다.

"리펜슈타인 교수님. 절대 죽이지 마십시오."

"글쎄."

그리고는 다섯 개의 술식을 연달아 펼치며 코린느에게 달려가는 미하엘.

그는 강의실의 절반을 집어삼키는 염화 아래서 말을 이었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데, 누군가는 죽어야지."

하여튼 저 빌어먹을 자식....

콰아앙!

휘몰아치는 염화에 나는 서둘러 불씨로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건 우려였을까.

미하엘의 염화는 내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상, 벽, 하물며 창가에 올려진 화분까지 그을림 하나 없이 멀쩡했다.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의 '천재 마법사'.

맹렬하면서도 차분하고, 뜨겁게 끓어오르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은, 중도(中道)의 절제.

그가 부리는 마법, 그것은 예술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염화가 통째로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 강의실에는 피부가 플라스틱처럼 녹아내린 코린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하엘이 같잖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만만하더니 그것뿐이더냐."

...아직 끝이 아니다.

저 '복제'의 끝은 저게 아니니까.

피와 살이 엉겨 붙은 그녀가 반쯤 남은 입으로 웅얼거렸다.

"여, 여, 역시, 시, 시, 시, 아, 안, 안 돼, 돼, 돼, 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척까지 도약한 나는 지금까지 준비하고 있던 술식을 발현했다.

복제의 끝은 '자폭'이다.

그리고 이게 폭발하는 순간, 강의실뿐만 아니라 층 전체가 날아갈 것이다.

보조 계열인 「밴」의 술식이 마치 상자처럼 사방에서 그녀를 속박했다.

내 행동을 이해하고 일거에 달려온 미하엘이 「에드」로 술식을 재배열했다.

순식간에 상위 기술인 「시간 동결」을 구현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으로 돌아섰다.

"그럼 정리를 부탁하지."

강의실에 홀로 남은 나는 술식 안에서 멈춰 버린 코린느, 아니... 퀘오스의 '호문쿨루스'를 내려다보았다.

§ 변화 (1)

"코린느의 소행일 줄이야...."

모든 사실을 보고 받은 코넬리아는 코린느가 봉인된 술식을 망연히 바라봤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코린느는 카렌 디 아릴레리아가 회장을 맡고 있는 '학생회'의 임원이었다.

그리고 학생회는, 총장의 소관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파르카스탈 총장. 스스로 그대의 부덕함을 탓하지 마시오."

놀랍게도 미하엘이 건넨 것은 위로였다.

"이것의 정체는 호문쿨루스. 제국의 수많은 금기 중 하나지. 당신이 제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소."

「호문쿨루스」.

현대의 말을 빌리자면, '복제 인간' 정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마나를 기원으로 하는 마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과학인 세상에서도 '인간의 복제'만큼은 불가능에 가까운, 「신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우리 눈앞에 놓인 이 '복제'는 스프링윈드 모두를 속일 만큼,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이 사실을 관리국에 보고하겠소. 블랙 캔디는... 당분간 '반역자'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이 제국에서 관리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을 터이니."

저벅, 저벅⸺

대답 없는 코넬리아를 응시하던 미하엘이 이내 총장실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코넬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금기까지 어기며, 제국에 '반역'을 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에게 말이다.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던 코넬리아가 여린 숨을 흘렸다.

"...로한 부교수도 이만 돌아가세요. 이 문제는 이제 제국이 해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을 했지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힘을 잃고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그녀가 홀로 감당하기엔 버거울 것이다.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끼익―

총장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미하엘과 마주쳤다.

나는 문을 닫음과 동시에 그를 불렀다.

"리펜슈타인 교수님."

내 부름에도 미하엘은 침묵했다.

그랬던 미하엘의 입이 열린 건 복도 끝자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올 무렵이었다.

"넌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어를 고르던 내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를 고했다.

"제국은 모든 책임을 총장에게 떠넘기려 할 겁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언론이 이 사건을 전국에 공표할 것이 명백하죠."

"...그런가."

그래. 제국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오점을 지워 나갔으니까.

"그렇게 되면 파르카스탈 님은 총장직에서 해임될 게 분명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고개를 돌린 미하엘이 벽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더는 그녀에게 기댈 곳이 없다. 또한 그녀보다 이곳의 학생들을 위하는 이도 없지."

학생들도 코넬리아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학생 하나하나의 이름까지 기억하며 누구보다 스프링윈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바로 코넬리아 린 파르카스탈, 그녀였으니까.

내게서 돌아선 미하엘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추락한 스프링윈드의 위상을 복구해야만 한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 기회는 한 번뿐이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면서도, 자신과 함께했던 사람 만큼은 누구보다 아끼는 인물.

겉으로는 무관심과 냉혈을 표방하지만, 안으로는 그들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내.

미하엘 리펜슈타인.

"반드시 2위에 랭크해라."

그는 역시 주인공이었다.

* * *

[바이크 동아리]

나는 한껏 꾸민 글씨체 아래서 서명을 마쳤다.

신청서를 건네받은 사라가 그래빗과 로라를 끌어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얏호! 드디어 바이크 동아리가 생겼어!"

"자, 잠깐만!"

바둥거리며 스마트폰을 꺼낸 그래빗이 화면을 두들겼다.

빠밤⸺!

녀석들, 겨우 동아리가 생긴 걸로 저렇게 좋아하다니.

그러고 보면 나도 저럴 때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장기 동아리를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놀곤 했다.

알바한 돈으로 장기판을 사고, 꼴에 시합 기보도 수집하고,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수를 연구하고.

그렇게 나만의 동아리를 만들어 가던 순간들.

아무것도 없던 동아리실을 하나하나 채워 가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었다. 그땐⸺ 정말 즐거웠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 4학년이 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 즈음. 내게 더 이상 동아리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몰래 안을 들여다봤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곳에 나만 없었다. 전혀 어색함이 없이.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장기 동아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동안 내가 쌓아 온 추억들은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

요즘엔 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사라졌으려나.

"부교수님! 부교수님!"

"응? 왜."

한참 추억에 잠겨 있던 나는 사라의 부름에 눈길을 돌렸다.

사라가 그래빗의 스마트폰을 가리키며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우리 같이 사진 찍어요!"

"사진?"

"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해야죠! 어서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어느 날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러자."

나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사라가, 왼쪽엔 그래빗과 로라가 옹기종기 모였다.

로라가 「염동」으로 스마트폰을 허공에 띄웠다.

두근― 순간 가슴이 한차례 크게 설레였다.

"하나, 둘, 셋하면 다 같이 '바이크' 하고 웃는 거예요!"

...아마도 너희들의 이 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나."

하지만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영원할 것만 같은 이 순간.

"둘."

너희들만의

찬란히 빛나는 추억으로,

이곳을 장식해라.

"셋! 바이크~"

어느 날.

너희가 이 순간을 돌이켰을 때.

찰칵⸺!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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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브스트림 완료 〕

〔 40P 획득 〕

드디어 내가 읽지 않은 페이지가 지나갔다.

무사히 넘긴 거 같은데,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뭐 그레이스의 운명에 급급한 내가 '완벽'이니 '통제'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원래 페이지의 내용은 어땠을까 싶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이제, 그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 메인스트림을 준비할 때다.

나는 그 에피소드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상기했다.

...미하엘은 원래 챔피언십에 출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전혀.

어차피 홍보야 그레이스 혼자서도 충분하고, 우정 출연 격인 미하엘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랬던 미하엘의 생각이 180도 바뀌게 된 건 바로 지난 사건 덕분이었다.

내가 '다시 쓴' 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나만의 이야기'로 장식한 페이지 때문에 말이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아마도 사건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은 듯하다.

―반드시 2위에 랭크해라.

그런데 이 자식 웃기네.

그 말은 본인이 1위를 하겠다는 말이잖아?

"그렇게는 안 되지."

앞뒤 다 떠나서 그의 손에 '이터널 스톤'이 넘어가는 건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이터널 스톤」.

수백 년에 한 번씩, 우주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외계의 물질'.

그것의 정체는 유성의 잔재, 즉 '천운석(天隕石)'이다.

한 번 제련된 이상 아무리 부딪혀도 손상되지 않으며, 아무리 마나를 주입해도 부서지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이 천운석에 담긴 힘은 '영원'하다. 때문에 이름 또한 '이터널 스톤'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그 무기 앞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터널 스톤을 내가 차지해야만 한다.

그래도 코넬리아를 위해서, 미하엘이 2위 정도는 할 수 있게 도와야겠지.

띠링―

알림 소리에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함을 열었다. 발신자는 발드였다.

<발드>

:로한 님께서 부탁하신 바이크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배송 도착일은 이틀 후입니다.

발드에게 커스텀 메이드를 의뢰한 지 일주일 만에 온 문자였다.

당일 배송이라 해도 9일인데. 직원도 세 명밖에 안 보이던데 고생 꽤 했겠군.

발드에게 고맙다는 문자를 보낸 나는 바로 엘리에게 통화를 걸었다.

[나 지금 훈련 중이야. 용건만... 말해.]

메디테이션 중이었던지 엘리의 목소리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이번에 나와 그레이스 교수님이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

[알아. 그래서 뭐.]

하긴 엘리가 모를 리 없지.

나는 빨리 통화를 끊고 싶어 하는 엘리에게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너, 그 챔피언십 참가할래?"

[뭐?! 아 씨 마나 역류... 잠깐만....]

얼마나 놀란 것인지 마나 역류를 일으킨 엘리가 고통스러워했다.

괜찮냐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당연히 그레이스 교수님과 한 팀이지?]

"응. 네가 오케이만 하면 그레이스 교수님이랑 너, 그리고 나랑 한 팀이야."

[콜! 무조건 할게! 무조건! 혹시 로한이랑 교수님 장비 필요해? 잠만 기다려. 지금 당장 최고급으로 준비...!]

역시 그레이스라면 사족을 못 쓴다.

나는 흥분해서 스마트폰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엘리를 진정시켰다.

"나랑 교수님 장비는 있어. 너만 준비하면 돼."

[나야 당연히 있지. 내 취미가 로드바이크인 거 몰라?]

확실히 엘리는 바이크에 관해서라면 전문가급이다.

내가 엘리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무엇보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은, '실력겜'이니까.

"그럼 이야기 끝났네. 3일 후에 우리 집으로 와. 장비 다 착용하고."

[3일 후? 3일 후면 토요일이네. 알았어. 와 근데 세상에, 내가 그레이스 교수님과 함께 챔피언십에 출전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기쁠까. 엘리는 미친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탓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통화를 마쳤다.

* * *

"감사합니다."

물품을 배달하고 떠나가는 기사를 뒤로한 채, 나는 앞에 놓인 두 대의 자전거를 자세히 살폈다.

공기 역학적으로 매끈하게 뻗은 디자인, 우아함과 강도에 있어 궤를 달리하는 얼티밋 넘버링 시리즈로 제작된 프레임.

거기에 부스터와 브레이크, 순간 가속을 포함한 9개의 기능이 내장된 핸들바 그리고 휠 대신 술식의 베이스가 그려진 바퀴까지.

"...와우."

언젠가 미래에 도달해 바이크를 보게 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리라 생각이 될 만큼 경이로운 자태였다.

그때 발드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건은 잘 전달 받았습니다. 역시 아콜 바이커스, 소문대로더군요."

[만족하셨다면 다행입니다. 만들고 보니 이러한 역작을 다시 만들지 못할 것 같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연락을 드린 건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주의 사항이란 말에 내가 귀를 기울였다.

[당연히 공식 대회인 챔피언십에서 마나 제어기를 제거하는 건 위반 사항입니다. 그래서 부착은 하되, 그 기능을 끄는 버튼을 달아 두었습니다.]

"버튼이요?"

[예. 보시면 마나 제어기의 커버 색깔이 한쪽은 파란색이고 다른 쪽은 보라색일 겁니다.]

그 말에 마나 제어기를 확인했다. 정말 둘의 색깔이 달랐다.

[그중 로한님이 요청한 사항이 적용된 건 파란색입니다. 이제 파란색 제어기가 부착된 바이크의 핸들바를 봐 주십시오.]

"예. 지금 보고 있습니다."

[핸들바가 스템(Stem)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텐데, 그 부분에 로한 님의 지문을 인식하면 제어기가 온·오프가 될 겁니다.]

"그래서 저번에 제 지문을...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더 좋은 바이크를 완성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만, 저번에 따로 부탁하신 '그거' 말인데... 눈 딱 감고 질러 버렸습니다.]

'그거'라면... 아.

미하엘의 바이크.

원작에서도 미하엘은 아콜 바이커스에서 바이크를 의뢰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미리 손을 써 뒀는데, 약간 좆 된 거 같다.

처음 내 계획은 미하엘을 1등이 아닌 뒤에서 1등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챔피언십에 코넬리아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이상 그와의 경쟁은 물 건너갔다.

빌어먹을. 그 스노우볼이 여기까지 굴러오다니.

"혹시 그 바이크, 배송했습니까?"

[아직입니다. 아마 내일모레면 완성될 듯싶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원래대로 돌려 주십시오. 사정이 생겨 계획을 취소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아쉽네요. 리펜슈타인 가문은 저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편이었는데.]

...스노우볼이 한두 개가 아니었구만. 넌 진짜 주인공만 아니었어도 진작 죽었을 거다, 미하엘.

그때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그레이스의 머리카락을 확인한 내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로한. 나 왔어."

"...아시겠죠? 제가 지금 일이, 어서 오십시오."

통화를 끊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레이스를 맞이했다.

내게 인사를 건네다 주차된 바이크를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바이크?"

"예. 사실 제가 그레이스 교수님을 위해 바이크를 장만해 봤습니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애뮬러 바이크는 고가일 텐데...."

"걱정 마십시오. 이렇게 생겨도 한 대당 10만 링 정도였습니다."

...이거 한 대에 3,450만 링이 들었다는 건 때려 죽어도 말 못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제 봉급이 나왔으니, 오늘은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 줄게."

이 바이크를 선물한 대가로 그레이스가 사 주는 저녁이라....

이득이다.

그것도 개이득.

"긴장하십시오. 아시다시피 제가 보통 먹성이 아니니까요."

내가 미소로 화답하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클라트는?"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팀의 '팀장'은 그레이스다.

다행히 엘리를 팀에 집어넣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엔 위험하다며 그레이스가 망설였지만, 나와 당신이 있는데 뭐가 위험하냐는 식으로 설득해 엘리의 영입을 마쳤다.

시간을 확인하던 내가 현관문을 열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도록 하죠."

그러자 그레이스가 머뭇거렸다.

"...미안해, 로한. 깜빡하고 빈손으로 왔어."

"그레이스 교수님에겐 충분히 대접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저녁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알았어. 그럼 실례할게."

그레이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바이크를 힐끗 돌아봤다.

아직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거 어떻게 타더라."

난 자전거를 못 탄다.

§ 변화 (2)

"날씨 좋고. 바이크 타기 딱이네."

촤륵!

브레이크를 밟으며 옆으로 미끄러지는 엘리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기어를 조절하던 그녀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와 로한! ...저 멍청이 어떡하지 진짜."

"어, 어어... 간다, 가아아악!"

철푸덕⸺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겨우 시속 180킬로미터도 견디지 못한 내가 바이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빙글빙글.

아프진 않았다. 대신 아프도록 쪽팔렸다. 이대로 목이라도 부러져 죽으면 이 쪽팔림이 덜했을까.

아.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선, 내가 자전거를 못 타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그저 미하엘을 이기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

"괜찮아? 자."

멍청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자 다가온 그레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무사합니다."

명색이 소드 마스터라 그런지 떨어질 때 반사적으로 오러를 몸에 둘러 다친 데는 없었다.

그레이스의 도움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바이크를 바로 세웠다. 그러나 고개는 들 수 없었다.

자전거도 못 타는 인간이, 무슨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쨌거나 바이크를 타는 건 가능했다.

반사 신경이나 동체 시력을 포함한 '로한'의 신체가 그 정도는 커버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이 문제였다.

챔피언십의 트랙은 매우 험난하다.

이딴 장난 수준의 실력으로 도전했다간 완주는 고사하고 리타이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엘리."

"응? 누가 날 불렀나?"

"장난하지 말고."

"뭐라구? 바이크도 못 타는 바보라 잘 안 들리는데에?"

....

"...교수님이랑 잠깐만 놀고 있어. 난 연습 좀 하고 올 테니까."

"그게 하루 이틀 한다고 실력이! 아 몰라. 로한 알아서 해. 뭐 정 안 된다 싶음 나한테 말하던가. 대충 알려 줄 수는 있으니까."

"필요하면 말할게. 그럼 부탁 좀 하자."

"알았어. 교수님~ 저랑 한 바퀴 돌고 올까요?"

엘리는 그레이스를 이끌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나도 바이크를 손으로 밀며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 * *

「"나 자전거 못 타."」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으레 친구들이 비웃곤 했다.

그 나이 먹을 동안 자전거도 안 배우고 뭐 했냐, 그럼 택시 타고 다니나? 돈 많나 보네, 부르주아 자식.

나라고 자전거를 못 타고 싶었을까.

그냥 기회가 없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내 형편은 좋지 못했다.

자전거는커녕 교통비 한 푼 없어 걸어 다녀야만 했다.

중학교 때까지 2시간 걸리는 거리를 걸어 등교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럼 친구 자전거라도 빌려서 배우지 그랬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친구도 없었다.

있긴 했는데 나와 사정이 비슷한 아이들뿐이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 있지 않은가.

아무튼 나는 그런 이유로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고 형편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수능이다 취업이다 뭐다 하면서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건 소설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되면 좋겠는데...."

제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맥, 몬 마운틴스(Mourne mountains).

대관령 같은 광활한 녹음(綠陰)이 아낌없이 펼쳐진 저 풍경은 자전거도 타지 못하는 인간에겐 너무나 아까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나는 안장에 올라타 「성장」을 발동했다. 그러나.

〔 발동 취소 〕

〔 「성장」 가능성 없음 〕

메시지가 내게 알린 것은 절망이었다.

내가 상정한 최악의 경우다.

아무래도 내가 저 '성장'에 담긴 의미를 너무 포괄적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검술에는 적용이 되나, 일상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아직 절망하긴 이르다.

〔 보유한 「개연성」 : 63 P 〕

서브스트림을 클리어하고 획득한 개연성, 40.

거기에 한 번 더 전개가 수정되며 추가로 획득한 개연성까지.

지금 내겐 꽤 많은 개연성이 모였다.

원래는 이걸로 「상태창」 설정을 개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번 에피소드는 「상태창」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가장 간절한 '설정'은 무엇일까.

으레 모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어떤 '열쇠'를 쥐고 있어야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설정 상점 오픈.

[ '40 P'를 지불합니다. ]

〔 설정 강화 : 「성장」 〕

〔 「성장」 Lv.1 ⸺> Lv.2 〕

그리고는 핸들바를 감싸 쥐고 페달에 발을 올리자 그동안 내 멱살을 쥐고 흔들던 초조함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진다.

누군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무수히 보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교하는 학생, 새벽녘 잠든 골목길을 깨우는 신문 배달원, 화면 속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는 선수, 스크린에서 보았던 바이크 액션까지도.

〔 성장 특화 적용 〕

이제 나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되어, 페달을 굴렸다.

우우웅⸺

바이크에 마나를 주입할 때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시속 50, 60, 70....

그렇게 300킬로미터까지 도달했을 때.

끊어진 절벽을 눈앞에 두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익!

울퉁불퉁한 바닥에 밀린 바퀴가 마모되며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핸들을 꺾은 나는 바이크와 함께 하늘로 힘껏 도약했다.

동시에 부스터 버튼을 누르자 후면부에 내장된 마나 터빈이 무한궤도를 그리며 푸르게 달아올랐다.

파앙⸺!

푸르고 긴 꼬리를 남기며 가파르게 추락하는 바이크.

속도계를 보니 770킬로미터에 육박해 있었다.

가슴이 아찔하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짜릿하다.

나는 온몸이 감전된 듯한 쾌감 속에서 부스터를 끄고 앞바퀴를 들어 올렸다.

...덜컹!

그렇게 무사히 착지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얼마나 멀리 달려온 것인지 내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충격을 떠올리곤 바이크의 상태를 확인했다.

"돈 쓴 보람이 있네."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음에도 바이크는 멀쩡했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내가 숨을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성장 완료 : 탈것·바이크 〕

* * *

그늘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무렵, 그레이스와 데이트를 마치고 온 엘리가 내게 신나게 달려왔다.

나는 꺼낸 스마트폰 화면에 트랙의 지도를 띄우며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우선 '포지션'과 '진형'을 결정해야 합니다."

3인 1조로 한 팀을 이루는 챔피언십의 특성상 각각 정해진 포지션과 그에 따른 역할이 존재한다.

챔피언십의 구조를 잘 모르고 있을 그레이스를 위해 내가 친절히 설명했다.

"포지션의 종류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팀의 중심이 되는 선수, '러너'. 보통은 팀에서 가장 빠른 선수가 맡게 됩니다."

세 명 모두 트랙을 달린다고 하지만, 그중 가장 빠른 한 명의 기록만 스플릿 타임으로 인정해 준다.

쉽게 말해 다른 두 명이 뒤쳐져 있어도 치고 나간 한 명이 골인하기만 하면 완주가 인정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러너'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바이크 숙련도뿐만 아니라 페이스 조절을 위한 상당한 마나 컨트롤이 요구된다.

애뮬러 바이크의 연비는 진짜 욕 나오는 수준이다. 동시에 좋은 부품을 맞추는 이유이기도 하고.

마나에 자신 있는 마법사라 해도 경기를 한 번 마치면 며칠간 방전될 정도이니, 막판 스퍼트까지 쏟아부으며 달리려면 웬만한 역량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 팀에서 러너는 당연히....

"하여 러너는 교수님이 맡아 주셨으면 싶습니다."

"내가?"

"예. 저희 중에서 보유한 마나양도 가장 많으시고, 무엇보다 상대 팀이 타겟을 결정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게 바로 러너니까요."

챔피언십의 규정상 '공격 계열' 마법을 포함한 선수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모든 마·검술은 사용이 금지된다.

그러나 반대로 허용되는 기술들도 존재한다.

합성 원소를 이용해 상대 팀이 달리고 있는 라인을 얼린다든가, 바람의 술식을 변형해 가파른 절벽에서 강풍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등.

이러한 간접적인 방해 기술은 사용이 가능하다.

평상시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는 기술들이지만, 시속 300킬로미터 이상의, 그것도 연속 커브가 포함되거나 '구름다리'와 같이 폭 2미터 이하의 고위험 코스를 달릴 경우 엄청난 위협이 된다.

그 속도에서 상대방의 술식을 해체하는 것만으로 웬만한 난이도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 아예 대처가 불가능하니까.

뭐 그레이스나 미하엘 정도면 그 이상의 상황에서도 괜찮을 거다. 그들은 상식이란 게 적용되지 않는 인물이니까 말이다.

바이크를 한 번 돌아본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 볼게."

"감사합니다."

그럼 이걸로 러너는 결정됐고.

"다음 포지션은 '파이터'입니다. 파이터는 상대팀을 교란하거나 우리팀의 러너가 방해 없이 주행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입니다. 이 경우 술식의 이해도가 뛰어나야 하는데, 지난 경기 영상을 보니 몸으로 막아 주는 경우도 많더군요. 제가 샌드백은 자신 있으니 파이터를 맡겠습니다."

술식의 이해도야 강의 자료를 위해 수많은 이론을 연구한 덕에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였다.

지난번 '환혹'이나 '함정' 계열의 술식을 알아볼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로한, 언제나 말했듯 소드 마스터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시속 320인 바이크에서 좀 굴렀다고 죽을 인재가 아니란 말이다.

뭐... 아픈 건 매한가지긴 한데... 그레이스가 아픈 것보단 낫잖아?

"그래. 파이터는 그럼 로한이 해. 바이크 못 타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안 그래?"

"...조용히 해. 그리고 나 이제 잘 타."

"겨우 한두 시간 연습했다고 그게 달라지겠어? 뭐야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그냥 '엘리스 님 부탁드려용~'하면 내가 어련히 가르쳐 줄 것을 말이야."

꿀밤.

꿀밤이 너무 마렵다.

그래. 떠들 수 있을 때 떠들어 놔라.

그 요망한 주둥이, 지구 반대편까지 찢어지도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설명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서포터'. 서포터는 엘리가 맡아 줘. 바이크 숙련도도 수준급이고, 술식에 대한 이해도도 높으니까."

"아 나 서포터 싫은데. 거의 뒤에서만 달리잖아. 그냥 나도 파이터하면 안 돼? 'V진형'으로 파이터 둘에 러너 하나. 어때? 좋은 생각 같은데."

"V진형을 채용하기엔 러너인 그레이스 님이 너무 압도적이야. V진형은 러너와 파이터들의 역량이 비슷할 때 효과가 증폭되는 구조니까."

포지션의 분배는 진형에 따라서 변경되기도 한다.

엘리가 말한 V 진형은 러너를 앞세운 여느 진형들과 반대로 파이터가 전열에 배치된다.

이는 소위 '불도저 전략'을 취할 때 주로 사용되는 진형이다.

선수 역량 다 떠나서 초반에 정말 강력한 조합이지만, 그 유지력을 후반까지 가져가려면 역설적이게도 역량이 엄청나게 중요해진다.

나는 뾰로통해진 엘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서포터가 가장 뒤에서 달린다고 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포지션이 아니야. 뒤를 믿고 달리려면 그만큼 서포터가 받쳐 줘야만 하니까."

"...치, 알았어. 내가 서포터 할게."

엘리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은지 나와 그레이스를 힐끔거렸다.

그럼 포지션도 정해졌겠다, 이제 진형을 결정할 차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가 바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교수님. 진형은 호흡을 맞추며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먼저 저희 조합에 어울리는 진형은 'A', 'I', 'L'이니, 이중에서 골라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연습하러 갈까?"

나와 엘리는 선두로 출발한 그레이스를 따라 연습을 시작했다.

앞으로 29일.

코스를 이해하는 데만 집중해도 빠듯한 기간이다.

그러나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그리고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다.

§ 변화 (3)

차 안을 가득 채운 블루스 록.

규칙적으로 심장을 때리는 비트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호송대 신참, 오웬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호송 차량이 비포장도로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덜컹!

"헉!"

파도에 휩쓸린 듯이 차체가 출렁거렸다. 손잡이를 목숨처럼 움켜쥔 오웬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운전대를 잡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고개를 까딱이던 드미트리가 그를 힐끗거렸다.

"뭘 그렇게 놀라 인마?"

"아, 아닙니다...."

오웬의 상태는 불안정했다.

한 시간 전.

그는 관리국의 지시를 받고 호송대와 함께 스프링윈드에 도착했다.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그가 본 것은 술식으로 봉인된 정체불명의 '무언가'였다.

너무나 강렬한 인상이었다.

신체 곳곳이 녹아내려 있는데, 이상하게도 피 한 방울 흘린 자국 없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악마'를 연상케 하는 그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오웬은 손발에 식은땀이 차올랐다.

격리판에 뚫린 창문을 힐끗거리던 오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드미트리 씨."

"왜, 끝나고 '루시드'나 가자고? 가만, 나도 물 뺀 지 꽤 됐네."

"아뇨, 그게 아니라... 느낌이 너무 안 좋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헛소리 말고 거기 도넛이나 가져와."

사수의 질책에 오웬은 하는 수 없이 글로브 박스를 열어 도넛을 꺼냈다.

그러나 오웬의 불안은 좀처럼 떨쳐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왜 이러지. 느낌이 너무 안 좋아. 이런 느낌....'

...틀린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뒤로는 별탈 없이 잘 살아왔는데, 오늘에서야 그날의 불안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 고개를 앞으로 기울인 드미트리가 무언가를 주시하며 인상을 썼다.

"저거 뭐야?"

비포장도로 한복판.

검은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 눈동자, 하물며 셔츠에 구두까지 검은색으로 도배되어 있던 그에게도 다른 색은 있었다.

타이 바(Tie bar). 그것만은 하얀색으로, 유독 눈에 띄었다.

남자가 길을 막고 있던 탓에 선두를 따라 속도를 늦추던 호송 차량들은 결국 정차했다.

볼륨을 줄이고 창문을 내린 드미트리가 거칠게 소리쳤다.

"어이, 지금 '반역자'를 호송 중인데 좀 비키지?"

그러자 남자가 가볍게 뒷짐을 쥐었다.

"돌려주세요."

그 말에 드미트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가? 야, 오웬. 방금 뭐라는지 들었어?"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이상한 낌새에 조수석을 돌아봤다.

무언가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오웬이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너 왜 그래 인마?"

"츠, 츠, 츠, 츠, 츠...!"

"뭐? 똑바로 말해 이 새끼―"

"차 돌리라고요!"

갑작스레 고함을 친 오웬.

황당함에 한순간 멍해진 드미트리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새끼도 글렀네."

그리고는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문 드미트리가 콘솔 박스 위에 올려진 라이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리 관리국 소속이야. 그 '로렌' 가문도 갈아 버린 관리국 소속이라고. 그런데 뭐가 무서⸺"

드미트리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그가 듣던 음악만이 아주 작은 소리로 들려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느낀 오웬이 운전석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그가 마주한 건, 상체가 말끔히 소멸한 드미트리의 하반신이었다.

"...!"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내장이 드러나 보이는 절단면에서 넘쳐흐른 피가 시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오웬은 생각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ㅤ대체,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무슨 일이,

ㅤㅤ뭐야?ㅤㅤㅤ 일어난 거야?

ㅤㅤㅤㅤㅤㅤ 왜?

ㅤ죽었어? ㅤㅤㅤㅤㅤㅤ몰라.

ㅤㅤㅤㅤㅤ모르겠어....

똑똑똑⸺

조수석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오웬이 머리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다.

똑똑⸺

한 번 더 들려오는 노크 소리.

평소에는 잊고 살던 죽음이 자신을 찾아온 것만 같았다.

이윽고.

달칵, 문이 열렸다.

오웬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국의 관리국 소속이라 해도, 죽음 앞에선 발밑을 기어 다니다 깔려 죽는 벌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딸, 여기에 있죠?"

"!"

'딸'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엔 너무나 젊은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웬은 호기심이 동했다.

으레 동물들이 호기심이라는 '본능'에 이끌려 멍청하게 죽어 가듯 말이다.

"...."

오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에 익은 새하얀 타이 바가 보였다.

그게 끝이었다.

오웬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다.

* * *

그레이스와 함께 산맥 정상에 도착한 나는 꺼낸 물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레이스 교수님."

"고마워, 로한."

평온한 얼굴로 물을 머금는 그레이스와 달리, 나는 숨이 차올랐다.

지금이 오후 6시.

아침 10시부터 연습을 시작했으니 거의 8시간을 달렸다.

체내에 남은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 있었다.

'로한'의 마나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내 마나 컨트롤이 미숙할 뿐이었다.

좀 더 '성장'이 필요하겠어.

"어우 씨, 로한! 나 손 좀 잡아 줘."

조금 지나자 앞으로 손을 뻗은 엘리가 오르막길을 올라왔다.

달려가 손을 잡아 주자 엘리가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또 뭐."

"아니, 갑자기 나보다 잘 타게 된다는 게 말이 돼?"

"네가 소드 마스터를 얕봤구나."

확실히 성장을 발동한 결과 거의 엘리와 맞먹을 정도로 바이크의 숙련도가 올라갔다.

거기에 마나량을 포함한 로한의 육체적인 능력까지 더해지니, 이제는 그레이스와 나란히 달릴 정도까지 되었다.

그나저나 그레이스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페이스에 변함이 없다.

거기다 달리면 달릴수록 코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인지 더욱 과감하게 라인을 파고들었다.

과연 웨펀 마스터. 실로 놀랍다. 저게 재능이라는 것이겠지.

"교수님. 날도 어두워졌으니 이만 하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더 어두워지면 위험할 것 같구나."

"그리고 파이터인 제가 엘리까지 보호하려면 L 진형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자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엘리가 고개만 까딱 들어 성을 냈다.

"I 진형으로 안 하고? I가 제일 스피드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I는 안정성이 떨어져. 자칫 앞에서 사고라도 나는 순간 우리까지 무너질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교수님은 어떻게...."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어딘가 머나먼 세상을 바라보듯 순풍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전부 읽은 것들이었지만, 내겐 늘 새로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모든 순간을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지금도 종종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알고는 싶은데, 「식스 센스」같은 편법만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만'하는 행위니까.

이내 눈썹을 들썩인 그레이스가 우리를 돌아봤다.

"...어? 미안해. 못 들었어."

"아닙니다. 아, 진형을 결정하려 하는데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A나 L이 좋을 거 같은데, 며칠 더 타 보고 결정하면 어떨까?"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서두른 모양입니다. 그럼 이만 내려가도록 하죠."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 바이크를 몰았다.

그녀를 따라 산맥을 내려가고 있던 내 곁으로 엘리가 바짝 다가와 붙었다.

"로한, 아까 봤어?"

"뭘?"

"그레이스 님 완전 예뻤잖아. 나 순간 심장 멎는 줄 알았다니까? 어쩜 그렇게 완벽하실 수가 있지?"

"호들갑 떨지 마."

"모야 모야!"

나는 엘리의 이마를 콕 찌르고 속력을 높였다. 엘리가 나를 죽일 듯이 따라오고 있었다.

* * *

"너 진짜 변했구나? 잭."

코넬리아가 사탕 바구니를 집어 던질 듯이 움켜쥐었다.

그러나 차마 던지지 못한 그녀는 입술만 깨물었다.

총장실 한편에서 코넬리아를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남자, 잭 클라우드가 답했다.

"어쩔 수 없어."

잭 클라우드는 관리국의 고위급 간부이자, 코넬리아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코넬리아의 지인이 아닌, 관리국의 간부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체포한 반역자를 이송하던 호송대원들이 전멸했다. 거기에 반역자까지 탈취당했고."

"그렇다고 '감시자'들을 붙인다니? 여기 스프링윈드야. 제국에서도 영향력 있다는 가문의 자제들이 진학 중인 곳이라고. 그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최소 아릴레리아 가주가 이 일을 문제 삼는 순간 아무리 관리국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러니까 비밀리에 붙인다고 몇 번을 말해."

"비밀? 언제부터 비밀이란 단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남 사생활 캐고 다닌다는 뜻이 됐어? 너 내가 이런 모습으로 있으니까 정말 애새끼로 보이니?"

클라우드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금기를 어긴 이상 제국의 알파 등위라 해도 무사할 수 없다. 만일 이 사건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황실이 못 할 것은 없었다.

거기다 호문쿨루스는 황실에서도 현실의 맨해튼 프로젝트급으로 아주 극비리에 연구 중인 기밀이었다.

그사이 고민하던 코넬리아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너희 마음대로 해. 황실 직속 기관인 관리국의 명을 고작 나 따위 퇴물이 어떻게 거역하겠어."

"...넌 제국의 영웅이다. 스스로를 낮추지 마."

그 말에 코넬리아가 같잖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놈의 영웅... 영웅 좋아하시네."

'영웅'이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인간을 뜻한다면, 자신은 영웅이 맞았다.

이윽고 의자와 함께 몸을 돌린 코넬리아가 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는 즉시 이번 일을 공론화할 거야. 아, 여기서 공론화는 '전 세계'를 말하는 거야. 알지?"

"그럴 일 없어. 그리고 그건 너와 나 모두를 죽이는 짓이다."

그 말에 코넬리아가 코웃음 쳤다.

"미안한데 이제 내가 잃을 게 없어. 가진 것도 없어서 학생들에게 줄 것도 없고, 힘도 잃어서 지켜 주지도 못해."

무력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도록.

"그래도 내가 아직 각국에 연줄이 남아 있거든? 내 목숨 건 한마디면 관리국 간부들 모가지는 아니어도 팔다리 하나씩은 자를 수 있다고."

"린, 제발. 나도 먹고살자."

더는 코넬리아가 기억하던 잭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안쓰러운 시선 속에서 그녀가 답했다.

"...너도 수많은 장기말 중 하나일 뿐이지. 언제 버려질지 모를. 어쩌다 그 지경이 됐니. 이 가여운 사람아."

잭은 어금니를 물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입 안 가득 차오른 그 말을 뱉지 못한 채 삼켜 냈다.

그사이 눈을 감은 코넬리아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건 하나야.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 주는 거.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야...."

§ 결전 (1)

대륙을 관통하는 산맥의 이름은 수없이 많다.

제도 근처에서 시작되는 '몬 마운틴스'.

비교적 손쉬운 난이도로 많은 등산인에게 사랑받는 '피레네'.

종종 마수들이 출몰하여 곳곳에 기사단들이 상주하고 있는 '에르츠 중앙고지대'.

우중충한 하늘 아래 말라비틀어진 초목이 즐비해 죽은 자들의 땅이라 불리우는 '울프 마운틴스'.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산맥의 종착지인 '와이트피쉬 레인지'까지.

사람들은 이 모든 산맥을 아울러 '알레스' 혹은 '대륙의 척추'라고 불렀다.

그중 챔피언십의 트랙에 속한 산맥은 몬 마운틴스, 에르츠 중앙고지대, 울프 마운틴스다.

"엘리! 속도를 높여! 흘릴 수 있는 술식은 과감히 무시해. 모든 술식을 해체할 필요는 없어."

[나도 알아! 소드 마스터 주제에 너무 전력으로 덤비는 거 아니냐구!]

몬 마운틴스와 에르츠 중앙고지대의 코스를 숙지한 우리는 현재 울프 마운틴스의 복합 굴절 구간을 달리고 있었다.

엘리와 거리를 두고 나란히 달리던 내가 술식을 전개했다.

우우웅―!

동시에 방출된 오러가 트랙을 얼리며 그레이스를 향해 뻗어 나갔다.

쩌저저적!

이 방해는 유효할 것이다.

방금 전 엘리는 내가 전개한 술식들을 방어하느라 감속이 된 상태였다.

그 순간 내게 고개를 튼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역시."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술식이 해체되며 내가 방출했던 오러가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방금 그레이스가 행한 건 술식의 해체가 아니었다.

「캔슬」.

간섭 계열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얼마 전 강의실에서 미하엘이 아리엘을 보호하기 위해 발동했던 그 기술이었다.

「캔슬」의 경우 술식을 해석해서 해체하는 것이 아닌, 시전자의 역량으로 상대방의 마나를 말 그대로 찍어 누르는 방식이다.

이 기술을 발동하는 데도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할 텐데.

그래, 명색이 '최종 보스'였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때였다.

미끌―

순간 핸들이 왼쪽으로 확 틀어지며 바이크가 내 제어에서 벗어났다.

황급히 바닥을 살피자 어느새 얼음이 깔려 있었다.

귀에 끼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엘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해체하긴 늦었을걸?]

오히려 내가 공격하려던 방식을 역이용당했다.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

몸이 붕 떠오른다 싶더니 곧바로 바이크와 함께 돌벽에 부딪혔다.

콰앙!

이렇듯 1초만 방심해도 바로 리타이어다.

그때 바이크를 멈춤과 동시에 달려온 그레이스가 내 안위를 살폈다.

"로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무너져 내린 돌들을 치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곤 말했는데, 꽤 심하게 부딪혔는지 오러를 둘렀음에도 등 전체가 고통스러웠다.

등뼈가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 느낌이었다.

다행히 로한의 몸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튼튼한 편이었다.

그레이스의 곁으로 다가온 엘리가 미안한 듯이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러게 잘 피했어야지...."

"잘했어, 엘리."

"응?"

"상대방이 공격할 때 생기는 빈틈을 아주 잘 파고들었어. 경기 때 아까처럼만 해 줘."

지금은 훈련이다.

방금은 내가 상대팀 파이터 역할로 그레이스와 엘리를 공격하는 모의 시합이었다.

그리고 엘리는 서포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냈다.

내가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엘리는 오히려 칭찬을 받자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녀가 나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그... 안 아파?"

"아파."

"거봐, 표정부터 아파 보였다니까! 어디야? 내가 봐 줄게."

"됐어. 너나 교수님이 아픈 것보단 나으니까."

"...."

그리고는 내가 충돌한 자리 옆으로 함께 처박힌 바이크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이건 진짜 안 부서지네.

이 정도 사고에도 바이크는 멀쩡했다.

이렇게 다뤘는데도 겨우 흠집 몇 개가 고작이라니.

지금까지 몇 번 수리할 정도로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바이크'만' 무사했다.

아무래도 발드가 신경을 많이 써 준 모양이었다.

챔피언십 때 아콜 바이커스 로고를 페인팅해서 홍보 좀 해 줘야겠군.

눈망울에 걱정이 그득해진 그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이만 마무리 짓고 돌아갈까?"

그 말에 나는 바이크의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두 밤만 자면 챔피언십이 열린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훈련은 기본에 강의 자료 준비, 거기다 과제에 시험 준비까지 겹치니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빌어먹을 부교수직. 그레이스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텐데.

그래도 진형도 정했고, 합도 맞추고, 트랙까지 숙달했으니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우승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었다.

그때 신이 난 엘리가 산맥 아래로 자그마하게 보이는 번화가를 가리켰다.

"그럼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오다가 봤는데 저쪽에 진짜 유명한 피자 전문점 있더라구. 오늘은 피자 콜? 교수님도 콜? 나도 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고 있다 정말.

엘리를 돌아본 그레이스가 사근사근히 물었다.

"에클라트는 피자를 좋아하나 보구나. 나도 좋아해."

"네! 저도 완전 좋아해... 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엘리의 뺨이 선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에클라트?"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레이스와 나란히 걷는 엘리는 첫사랑을 맞이한 소녀 같았다.

나는 우리 주변에서 빛나는 것들을 응시했다.

하늘을 물들이는 수줍음, 깨지지 않는 순수, 꿈결 같은 노을, 따스하게 얼어붙은 그레이스 그리고 나의 미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행복이자, 우리를 위한 시(詩)처럼 느껴졌다.

* * *

ㅤ ㅤㅤ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ㅤ ㅤㅤㅤ ㅤㅤㅤ E - World

ㅤ ㅤㅤㅤ ㅤ ㅤChampionship

ㅤ ㅤㅤㅤ ㅤㅤ ㅤSpring 951

ㅤ ㅤㅤㅤ ㅤㅤ ㅤ ㅤFINAL

ㅤ ㅤㅤ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

경기장은 사람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두가 전쟁의 아픔을 잊어버린 듯, 혹은 잊으려 노력하듯 아침부터 힘찬 함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은 언제나 최고였습니다.

사방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드라이아이스처럼 내리깔리는 그의 목소리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열기가 차츰 가라앉는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안타까운 사건으로 우리는 무려 16년간 땀과 열정, 눈물 그리고 절망과 희망으로 뒤섞인 이들의 드라마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이가 좀 있는, 전쟁의 세월을 겪어 온 중년 이상의 팬들이 비탄을 짓씹었다.

어떤 이들에게 챔피언십은 삶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공백은 삶의 일부가 도려져 나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번 951년 봄! 전 세계 팬들이 주목하는 지금!

해설자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멱살을 움켜쥐듯 울려 퍼졌다.

―이번 챔피언십은 그 어떤 회차보다 찬란할 것이고!

번쩍, 형형색색의 스포트라이트들이 태풍이 멎은 후 쏟아지는 한 줄기의 빛처럼 경기장을 밝혔다.

―어떤 회차보다 두근거릴 것이며!

둥― 두둥!

ㅤㅤㅤㅤ...둥!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의 오프닝 곡인 '날개'가 연주되던 순간이었다.

―...어떤 회차보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기억될 겁니다.

펑! 퍼퍼펑⸺!

챔피언십의 로고가 띄워진 초대형 스크린 뒤로 폭죽이 잇달아 솟아올랐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개막을 알리는 축포들이 하늘을 눈부시게 수놓았다. 사람들은 다시 전장을 방불케 하는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

'스프링윈드 1팀'의 대기실.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이 대기실을 뒤흔들었다.

바이크를 정비하던 엘리가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와 깜짝이야...! 장난 아니다 진짜. 로한은 긴장 안 돼? 교수님은요?"

그레이스는 그저 무표정히 끄덕일 뿐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온 그녀에게 이 정도의 긴장감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대답 없이 앉아 있자 그레이스가 나를 불렀다.

"로한."

"...."

경기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고 있던 내 손등 위로 그레이스의 체온이 겹쳐 온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내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생각 중이었습니다."

"로한은 오늘도 생각이 많구나."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오히려 그레이스는 입을 닫았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대강 짐작이 된다.

어제, 코넬리아가 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제국은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오직 '블랙 캔디'만 '마약'으로 바꿔 제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공표했다.

당연히 국민들은 분노했다.

사건이 그 어디도 아닌 '스프링윈드'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난할 대상을 물색했다.

가장 힘이 없는 동시에 높은 위치에 자리한 사람.

코넬리아, 그녀는 그렇게 희생되었다.

"저희는 반드시 우승할 겁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실추된 스프링윈드의 위상을 회복하고, 코넬리아 총장님의 복직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나의 확언에 그제야 그레이스가 잔잔히 미소했다.

"그래, 우승하자."

"예."

그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챔피언십 관리자였다.

"스프링윈드 1팀 인원 확인했습니다. 5분 후 경기가 시작되니 슬슬 준비해 주세요. 아, 혹시 이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곧 이동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부디 건승을."

관리자가 떠난 후 우리는 착용하고 있던 장비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내가 엘리에게 당부했다.

"'리콜' 점검 확실히 해 둬. 그거 고장 나는 순간 사고 났을 때 경기가 아니라 인생에서 리타이어 될 수 있으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바보야! 괜히 상상되잖아...."

가슴에 부착된 '리콜'은 트랙에서 장외가 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경우 곧바로 회복실로 워프 시켜 주는 안전장치다.

그나마 이 리콜이 있어 선수들이 덜 죽긴 했는데,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상을 입거나 과격한 몸싸움 도중 고장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많이 개량되어 내구도나 안정성이 높아졌다고는 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글쎄다.

"가자."

점검을 마친 우리는 마침내 바이크를 이끌고 대기실을 나섰다.

약간은 어두운 게이트의 분위기.

선수들이 복도 끝 트랙이 어른거리는 출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를 느낀 그레이스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리펜슈타인 님."

스프링윈드 1팀 대기실 바로 옆이 미하엘이 속한 2팀이었다.

그 이름에 나와 엘리도 그들을 돌아봤다.

미하엘의 저 바이크, 녀석도 돈 꽤나 쓴 모양이다. 내 것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그러다 2팀의 맴버가 눈에 밟혔다.

예상대로 엘리 자리는 아리엘이 채웠고... 카렌 디 아리렐리아? 네가 왜 여깄어?

"유클리드 교수님. 그리고 로한 부교수님."

카렌이 나와 그레이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러나 나는 인사도 받지 못했다.

퀘오스는?

원작대로라면 그도 챔피언십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아 전개 수정.

그거라면 어쩔 수 없지.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카렌에게 물었다.

"학생회장인 네가 참여한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저도 총장님의 복직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리펜슈타인 교수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런가. 알겠다. 응원하지."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미하엘이 팀원을 이끌고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레이스는 오늘도 인사하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레이스 옆으로 나란히 걷던 내가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그레이스 교수님."

"...응."

"화 안 나십니까?"

"어?"

그레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던 그레이스에게 내가 속삭였다.

"레이스에선 몸싸움도 자주 일어나죠. 그러다 실수로 뒤통수 같은 곳 후려쳐도 별일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어디까지 '몸싸움'이니까요."

"...."

그 말에 그레이스는 다시 미하엘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핸들바를 움켜쥔 그녀의 손에 서서히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도 사람이다.

무시당하면 짜증도 나고, 화도 날 거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아 왔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참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 내 옆으로 바짝 따라붙은 엘리가 이를 갈았다.

"씨팰스타인, 넌 오늘 뒤졌어."

미하엘이 조금 불쌍해질 거 같은데, 난 뒤통수 한 대만 때려야겠다.

그렇게 우리가 미하엘의 뒤통수만을 노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힘찬 함성과 응원으로 선수들을 맞이해 주십시오!

어느덧 도착한 스타트 라인이 보였다.

거의 낙하산급으로 출전하게 된 스프링윈드 팀들의 출발 지점은 최후방이었다.

순위로 따지면 우리 팀이 99위, 미하엘 팀이 100위.

총 100팀이 출전하니, 그냥 시작부터 꼴찌다.

―하블다운 제국, 겐트 왕국, 샤를로아 왕국, 슈타이테 공국, 비보르 왕국 등, 총 19개국에서 출전한 300명의 선수들! 이제 지난 세월 동안 그들이 날카롭게 벼려 온 실력을 눈으로 확인할 시간입니다!

안장에 올라탄 우리는 서로와 이어폰을 연결했다.

[서포터 엘리 테스트.]

[하나, 둘, 셋. 들려?]

ㅤㅤㅤㅤㅤㅤㅤ<파이터 로한. 수신 양호.>

{러너 그레이스. 확인.}

그 순간 전광판에서 시작된 카운트다운.

5, 4, 3....

눈으로만 읽었던 챔피언십.

...2, 1!

이제 나는, 그 에피소드 한가운데에 서 있다.

§ 결전 (2)

―현재 모든 선수들이 A코스인 모트 공원으로 들어선 상황.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의 특성상 라인이 좁아 중상위권 팀들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됩니다!

[라인에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어.]

엘리의 음성에 내가 다음 코너를 주목했다.

<그레이스 님. 지금이 기회입니다. 여기서 격차가 더 벌어지면 최소 C코스까진 순위가 고정될 겁니다.>

{내가 라인을 팔게. 따라와.}

그레이스의 바이크가 순식간에 선수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코너를 준비하던 선수들이 당황했다.

―스프링윈드 1팀의 그레이스 유클리드 선수! 과감한 몸싸움으로 선전 포고를 선언합니다!

그것도 잠시, 한 팀의 선수들이 그레이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나 역시 속도를 올리며 엘리에게 외쳤다.

<엘리, 스피드 업!>

[오케이!]

엘리의 바이크에서 사출된 서클이 나와 그레이스를 휘어 감았다.

이윽고 엘리의 서클이 우리들의 휠에 술식을 새겨 넣기 시작했다.

우우웅―!

보조 계열의 술식인 「헤이스트」가 발동한 순간 바이크가 가벼워지며 속도계가 치솟았다.

그레이스가 핸들을 꺾으며 외쳤다.

{부스터!}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하는 마나 터빈.

그레이스가 푸른 잔상을 남기며 라인을 한계까지 파고들었다.

끼이이익⸺!

거기에 드리프트까지 더해지자 관성을 이겨 내지 못한 다른 선수들이 아웃코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레이스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엘리에게 소리쳤다.

<더 치고 나간다, 브레이크 잡지 말고 감속 관리해!>

―놀랍습니다! 홍보 차원으로 출전한 줄 알았던 스프링윈드 1팀이 방금 비보르 왕국의 라이트닝 팀을 제치며 68위로 올라섭니다!

[교수님 최고예요! 방금 완전 멋있었어요!]

<나머지 팀들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만 달리죠.>

이윽고 직선코스로 진입한 우리는 진형을 정비했다.

경기 시작 20분째.

99위에서 68위까지 올라오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차피 목표는 1위다. 그 미만은 의미가 없다.

"...C코스."

에르츠 중앙고지대.

거기서 승부를 본다.

* * *

―방금 센텀 팀의 파이터가 이레귤러 팀의 러너를 테이크 다운시켰습니다! 리콜! 센텀 팀의 파이터 선수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A코스인 모트 공원을 통과한 팀들이 하나둘씩 B코스인 리드 빌리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54위로 B코스에 진입한 스프링윈드 2팀의 러너, 미하엘이 뒤를 돌아봤다.

'...느리군.'

미하엘의 팀은 시작부터 V 진형을 사용한 덕에 단숨에 중위권까지 치고 나갈 수 있었다.

스프링윈드의 천재 마법사인 그가 함께하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스프링윈드의 수석 입학생인 카렌 디 아릴레리아까지 함께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뒤처지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미하엘은 무표정히 달리고 있는 아리엘에게 음성을 보냈다.

[아리엘,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

회신조차 하지 않는 아리엘의 모습에 미하엘이 작게 한숨지었다.

'아직도 심란한 것인가. 산책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거늘....'

그날 이후 아리엘은 어딘가 변했다.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당신을 따라가면, 저 살 수 있나요?"」

그 모습은 미하엘이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보았던 것이었다.

'그 얼룩을 지우기 위해 그동안 노력했건만. 쉽지 않군.'

"...쯧."

[아릴레리아.]

[예. 교수님.]

[속도를 올린다. 아리엘을 잘 보호하며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우우웅―

미하엘은 속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다.

지금은 아리엘보다 우승에 집중해야 했다.

코넬리아. 그녀를 복직시키지 않으면 그가 세운 계획에도 차질을 빚게 될 것이었다.

'스프링윈드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기게 둘 순 없다. 훗날 내 중요한 거점이 될 테니까.'

그렇게 모든 선수가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결승점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 * *

청록빛으로 너울지는 에르츠 중앙고지대.

경기가 중반부로 다다르자 선수들의 움직임이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갔다.

센텀 팀의 팀장이자 파이터, 슈바인스 학센이 후방을 확인하며 말했다.

[정리 끝. 16년 만에 열리는 챔피언십이라고 잔뜩 긴장했더만 별 거 없구만?]

슈타이텐 공국 소속인 센텀 팀의 순위는 현재 60위.

선두 팀과의 격차가 조금 벌어진 상태였지만, 따라잡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못 좁힐 격차는 아니었다.

V 진형의 왼쪽 포지션을 맡고 있던 또 다른 파이터, 프레첼이 슈바인스를 꾸짖었다.

[적당히 나대. 지금부터 페이스 조절 잘못하면 바로 리타이어야.]

[걱정 꺼. 아직 보유한 마나의 반도 사용하지 않았어. 슈타이텐의 어부가 피라미를 낚는 데 전력을 다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잖아.]

[현재 트랙 리더가 하블다운 제국의 블랙아웃 팀. 그 팀까지 꺾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전략대로 움직여야 돼.]

프레첼이 뭐라 하든 말든, 슈바인스는 먹잇감을 물색하는 포식자의 눈으로 근처 팀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전략? 내 전략은 하나야. 제국의 개들을 전부 자빠트리는 거. ...주목. 방금 우리 뒤로 제국의 풋내기 놈들이 접근하고 있다.]

뒤에서 새롭게 나타난 팀, 스프링윈드 1팀을 포착한 슈바인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팀의 명성이라면 그들도 익히 알고 있다.

하블다운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로한과 전장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레이스 유클리드가 속한 '홍보팀'.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웨펀 마스터와 소드 마스터가 한 팀이라는 건데, 여긴 전쟁터가 아니다.'

이곳은 트랙 위다.

당연히 일대일 전투라면 슈바인스에게 승산이 없겠지만, 속도를 겨루는 경주라면 상대가 웨펀 마스터라도 자신이 있었다.

슈바인스 학센, 그가 바로 슈타이텐 공국의 애뮬러 챔피언이었다.

곧바로 브레이크를 잡은 슈바인스가 로한의 팀과 거리를 줄이는 모습에 프레첼이 경악했다.

[내 말 못 들었어? 가뜩이나 여긴 에르츠 중앙고지대⸺]

[닥쳐. 팀장은 나야. 판단은 내가 내린다.]

음성을 무시한 슈바인스가 그레이스의 옆으로 바이크를 붙였다.

슈바인스는 그레이스의 레이싱복에 그려진 제국의 국기를 본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우리 공국을 배신한 하블다운 제국을 그냥 둘 순 없지.'

제2차 인마 대전 당시.

적에게 포위를 당한 슈타이텐 공국 소속의 연합군은 근처에 있던 하블다운 제국 2군단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요청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제2 군단의 군단장은 어차피 전멸할 상황이라면, 그들이 희생당하는 동안 적진의 빈틈을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슈타이텐 공국의 군대는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슈바인스 학센은, 그 지옥 속에서 살아 돌아온 슈타이텐 공국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그랬던 그가 챔피언십에 참가한 진정한 목적은 하블다운 제국의 모든 팀을 리타이어 시키는 것.

[행동 개시!]

우우웅!

슈바인스의 베이스에 술식이 점차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격 술식의 배열이었다.

명백한 위반 행위라는 것을 슈바인스 또한 잘 알고 있지만, 죽어 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라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제국 놈들... 이건 정당한 복수다!'

이윽고 술식이 발동되며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아이스 티스」들이 그레이스를 향해 쇄도했다.

쎄에엑!

그러자 그레이스의 주변으로 수많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불씨에 닿은 순간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는 얼음 송곳을 본 슈바인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야 저거?"

저토록 아름답고 방어적인 기술은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슈바인스가 잊고 있던 '웨펀 마스터'라는 칭호를 떠올린 순간이었다.

"야."

그들 사이로 파고든 로한이 슈바인스의 헬멧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슈바인스의 머리가 오러를 머금은 로한의 팔을 따라 핸들바에 그대로 처박혔다.

쾅―!

박살 난 바이크와 함께 트랙 위를 처참히 구르는 슈바인스.

리콜되는 슈바인스를 흘겨보던 로한이 싸늘하게 말했다.

"넌 방금 선을 넘었다."

* * *

에르츠 중앙고지대의 언덕으로 접어든 나는 고글에 표시된 순위표를 확인했다.

"아직도 51위인가...."

지금까지도 많은 팀을 제쳤다고 생각했는데.

99위로 스타트한 게 화근이었다.

처음부터 상위권으로 시작한 팀들은 지금도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앞에는 50개의 팀, 머릿수로 따지면 150명이 앞서고 있었다.

"아직 낙담하긴 이르다."

경기는 이제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고, 아직 이 코스에서 추월할 기회는 많이 남았다.

그때였다.

"저 뒤통수는...."

저 멀리, 아주 탐스러운 뒤통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하엘이 이끄는 스프링윈드 2팀.

초반부터 치고 나간 덕분에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이제야 따라잡은 것이었다.

속도를 올린 우리는 미하엘의 팀 곁으로 따라붙었다.

우리를 힐끗 확인한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웨펀 마스터와 소드 마스터가 함께인 팀치곤 거북이가 따로 없군."

"그러는 리펜슈타인 교수님의 팀도 실망적인데요?"

입을 삐쭉 내민 엘리가 미하엘을 비꼬았다.

"올해의 멀린 후보가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카렌 회장의 서포터를 받으며 고작 50위라니. 힘들지 카렌? 네가 좀 참아. 참! 교수님도 천재 마법사였죠? 이런 걸 뭐라 그랬더라? 퇴물? 어 맞아, 퇴물!"

"...다음 과제는 상대론적 관점의 마법학 정의다. 그럼 기대하지, 엘리스 에클라트."

"치사해. 누가 쫌생이 아니랄까 봐."

"뭐라? 방금 뭐라 하였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어, 조심조심! 전방 주시하셔야죠?"

"...."

아무리 올해의 멀린상에 노미네이트 된 미하엘이라 해도 엘리의 독사 같은 혓바닥을 따라갈 재간은 없었다.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미하엘이 분을 삭히고 내게 말했다.

"이제부터 협력해서 돌파한다. 목표는 D코스 진입 전 30위."

"저는 파이터입니다 교수님. 저희 팀의 팀장인 그레이스 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유클리드. 계획을 설명하겠다."

그제야 미하엘이 그레이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 말을 그레이스가 경청하고 있는 사이, 앞에서 비명 섞인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악!"

"마, 마수가 출현했다!"

우리를 앞서고 있던 3개의 팀이 피를 흘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스무 마리의 마수들.

크르르....

컹! 컹컹!

그것들의 정체는 에르츠 중앙고지대의 포식자 중 하나인 '검울음늑대'들이었다.

흑연색의 털들로 뒤덮인 검울음늑대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늑대였지만, 그 크기가 웬만한 자동차와 맞먹었다.

저 마수는 나도 알고 있는 마수다.

늑대답지 않게 개체 수도 상당할뿐더러 조금만 불리해져도 하울링으로 동족을 소집하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특성은 다 갖춘 녀석들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무시하고 돌파한다."

그러자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선수들이 위험합니다."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나, 해임된 총장과 스프링윈드를 생각하라. 우리에게 저들을 도와줄 여력은 없다."

그 말에 그레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엔 미하엘의 말이 옳았다.

저런 사고도 경기의 변수에 포함되고, 대비하지 못했다면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그레이스를 탐탁지 않게 힐끗거리던 미하엘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죽진 않을 것이다. 리콜이 될 터이니. 다만 뒤에서 오는 선수들이 위험해지겠지. 피를 맡고 더 많은 마수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래서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안전장치가 있다고 한들 혹시라도...!"

"유클리드. 답답한 네 성격은 변함이 없구나."

"...."

이를 악문 그레이스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래.

지금 그레이스의 행동은 답답한 것이다.

소설의 페이지로 따지자면, 틀림없이 고구마다.

나 역시 지금은 미하엘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제가 막고 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 내겐 더 고구마다.

놀란 그레이스가 나를 돌아봤다.

미하엘도 나를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리는 마수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검울음늑대 무리라면 저 혼자서 5분이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경기에서 5분은 5시간과 다르지 않다. 파이터인 네가 빠지면 너희 팀이 곤란하게 될 텐데."

"저는 그레이스 님과 엘리를 믿습니다. 거기다 리펜슈타인 교수님까지 계시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는 손아귀에 오러를 집결했다.

이윽고 오러가 검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 30일을 바이크 훈련만 하며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성장」.

이 설정의 레벨을 올린 나는 새벽잠까지 줄여 가며 나의 힘을 끌어 올리는 데 노력했다.

이 「오러 블레이드」는 그러한 노력의 결실 중 하나였다.

마수들 앞에 도달하자 우리를 발견한 녀석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는 동시에 달려드는 마수의 허리를 베어 넘겼다.

"여긴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고마워, 로한. 그리고... 미안해."

나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웃어 보였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가씨. 금방 따라붙겠습니다."

아우우!

동족의 죽음을 본 검울음늑대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정차한 바이크에서 내려선 내가 사계의 원형을 준비하려던 순간이었다.

"저도 도울게요."

내 곁으로 달려와 바이크를 멈춰 세운 아리엘이 검은 마나를 흩뿌리며 말을 이었다.

"대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 결전 (3)

세상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물질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 마나는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논제다.

마나에 종속된 건 인간만이 아니다.

식물 또한 마나를 활용하며 살아 숨 쉬고,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마수(魔獸).

마나에 영향을 받은 것을 넘어 이를 본능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짐승들.

동시에 본능적이기에, 인간에게 위협이 되곤 했다.

문명 초기만 해도 대륙 곳곳마다 마수와 어렵지 않게 조우할 수 있었고, 용감한 탐험자나 모험가들의 조상이 되는 이들은 어김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사단과 마탑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결속은 인간의 본능이다.

소수의 인간과 마수가 싸운다면 마수가 이긴다.

그러나 100만 명의 인간과 100만 마리의 마수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인간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이 일어난다.

인간은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

반대로 마수는 살아남되 인간이 살아가지 못하거나 살지 않는 미개척 지역으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마수들은 여전히 인간과 밀접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

가령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농사를 망치는 일처럼 말이다.

크르르....

에르츠 중앙고지대에 서식하는 검울음늑대가 그랬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간신히 버텨 낸 늑대들은 몹시 굶주려 있었다.

그런 늑대들에게 챔피언십을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운동한 인간들은 뷔페와 다르지 않았다.

컹컹컹!

굶주린 늑대들이 로한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에 튀긴 피를 닦아 내던 그는 자신을 엄습하는 세 마리의 늑대에게 칼끝을 겨눴다.

"조심...."

호신강기를 두른 아리엘이 늑대 한 마리를 쓰러트리고 로한을 돌아봤다.

그는 빠르게 세 번 찌를 뿐이었다. 그러자 달려든 늑대들의 머리가 풍선처럼 터졌다.

파앙!

아리엘은 숨을 고르며 검울음늑대들을 도륙하는 로한을 지켜보았다.

한 번 찌를 때마다 반드시 한 마리가 죽었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

자연스럽게 '소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위용.

도로 위 로한은 제국의 감마 등위이자 소드 마스터, 그 자체였다.

로한의 오러 블레이드에 스무 마리의 검울음늑대가 죽임을 당하는 데까진 불과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늑대들은 하울링으로 동족을 부를 틈도 없이 죽어 갔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로한. 아리엘은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직도 강하셔. 그때처럼.'

그날도 자신을 이렇게 구했다.

나를 죽이려던 제국의 기사 세 명의 목을 단칼에 날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바이크 안장에 올라탄 로한이 아리엘에게 말했다.

"서두르자."

그러나 아리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아리엘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은 순간이었다.

"왜 날 구했죠?"

알고 싶었다.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세상이 지옥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낳아 준 부모님도 없이 그리고 그 누구도 없이 홀로 독방 같은 세상을 살아왔었다.

힘이 들었다. 지쳐 쓰러지면 그 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않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리엘은 그 음성을 되새기며 일어서곤 했었다.

―미안하다.

그와 재회했을 때 다시 한번 듣게 된, 한마디.

"왜, 왜 반역자의 자식인 나를...!"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다. 경기에 집중⸺"

"아니. 오늘은 꼭 들어야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로한은 그녀를 무시하고 출발하려 했다.

이 경기에 메인스트림과 자신의 '사망 분기점'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는 아리엘의 얼굴을 본 순간, 로한은 가슴 한편에 금이 이는 것만 같았다.

"나, 더는 살아 있을 자신이 없어요."

로한이 알고 있는 위선은 없었다.

깨진 가면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리엘이란 거짓된 존재가 아닌, 아직 통성명도 나누지 못한 누군가였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로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너는 이런 인물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중을 철저히 숨기며 사람들을 속이는, 하물며 자신마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었다."

로한은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그녀를 외면해야만 했다.

무심히 고개를 돌린 로한은 페달에 발을 올렸다.

"답변이 되었길 바란다. 출발하지."

그렇게 로한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홀로 남겨진 아리엘은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 이유... 없었다...."

메마른 눈물 대신, 잘끈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 * *

팀과 너무 떨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지문을 인식해 마나 제어기를 오프했다.

우웅―

출력 제한이 해제되자 단숨에 속도가 400을 돌파했다.

오러를 눈에 집중한 나는 빠르게 스쳐 가는 배경 속에서 아리엘의 말을 떠올린다.

―왜 날 구했어요?

....

―왜, 왜 반역자의 자식인 나를...!

...널 구한 건 내가 아니다.

널 구한 건, '로한'이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떠오르는 로한의 기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아이 하나 구하지 못하는 기사가, 대체 뭘 구할 수 있을까?"」

그게 로한이 아리엘을 구한 이유였다.

지금껏 살아오며 자신이 입었던 은혜 때문일까, 로한은 아주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구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나와, 조금 닮아 있었다.

아리엘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로한의 기억을 그대로 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이 소설에 내가 빙의한 지 두 달째.

나는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는 것을 넘어, 다른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

그 어떤 페이지도 빌리지 않은 채, 온전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로한'이 아닌, '나'로서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챔피언십 관리자 둘이 사이드카를 몰며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관리자를 확인한 나는 서둘러 마나 제어기를 작동시켰다.

속도를 늦춘 내가 곁으로 나란히 달리던 관리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C코스 사고로 인한 변경 사항을 안내해 드리고자 왔습니다. 스프링윈드 1팀의 로한 님께서 마수들을 처리하시는 모습은 모니터로 보았습니다. 먼저 챔피언십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관리자들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코스가 약간 변경되었습니다."

"변경이요?"

"예. 협회에서 논의 결과, 현재 상위권과 하위권과의 격차가 심각한 상황이라 로한 님을 포함한 52위 이하의 팀들에게 지름길을 제공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변경된 경로는 헬멧으로 전송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여하튼 자칫 큰 사고로 번져 경기가 중단될 뻔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관리자들이 떠나는 사이 전송된 경로를 확인했다.

변경된 경로는 지름길을 통해 D코스인 기센 평야를 스킵하는 루트였다.

바로 다음 코스인 E코스가 몬 마운틴스 구간.

"...이거 잘만하면 우승할 수 있겠어."

아직은 할 만했다.

* * *

[조심하세요, 교수님!]

타이어가 갈리는 소음 속에서 엘리가 소리쳤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향해 충돌하는 선수들을 바라봤다.

겐트 왕국 소속 신디케이트 팀의 파이터 둘이 그레이스를 공략하고 나섰다.

우우웅!

상대팀 파이터들의 마나가 서로 공명했다.

그 순간 몰아친 강풍과 물보라가 그녀를 덮쳤다.

"...."

어떤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레이스.

물에 흠뻑 젖은 그레이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다음 순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파이터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

'여, 역시 제국의 웨펀 마스터...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이거 엿 된 거 같은데? 망할... 우리가 너무 얕봤다.'

홍보팀인 스프링윈드 1, 2팀이 10위권대까지 치고 올라온 것을 본 선수들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몸을 부딪쳐 보니 그게 아니었다.

순간 그레이스의 술식 베이스가 빛을 내뿜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 위로 얼음 결정이 하얗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대체 뭘...!"

상대팀 파이터가 중얼거린 순간 날카로운 얼음 갑옷을 몸에 두른 그레이스가 다른 파이터의 옆을 들이박았다.

쿵!

―저 팀 홍보 차원에서 출전한 거 맞습니까? 아무튼 그레이스 선수 정말 놀랍습니다! 신디케이트 팀의 파이터 한 명을 단숨에 테이크 다운시켰습니다!

똑같은 기술이었다.

자신들과 똑같이 보조와 간섭 계열의 술식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대륙에도 몇 존재하지 않는 웨펀 마스터.

마나의 농도부터 술식의 이해도 그리고 경험의 차이까지.

그레이스는 모든 선수를 월등히 압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경기에 익숙해진 듯 바이크의 숙련도까지 끊임없이 상승하고 있었다.

엘리와 카렌의 보조를 받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그레이스.

홀로 남은 센디케이트의 파이터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 사람들 괴물이야...!'

쿵―!

마침내 그 또한 팀원들을 따라 리콜되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신디케이트 팀마저 전원 리타이어! 일제히 그레이스 유클리드를 부르짖기 시작한 관중들! 그녀가 함께하는 이상 스프링윈드 팀은 무적입니다!

뒤따라 구경하고 있던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추월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한 팀. 제국의 블랙아웃 팀만 꺾으면 우리가 1위다."

"알겠습니다."

어느새 그들의 순위는 2위와 3위까지 도달해 있었다.

모두 그레이스와 미하엘의 활약 덕분이었다.

거기에 엘리와 카렌의 서포트까지 더해지자 그들은 문자 그대로 무적이었다.

그레이스는 차분히 바이크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러다 문득 미하엘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

그리고 로한의 말이 재생되었다.

―레이스에선 몸싸움도 자주 일어나죠. 그러다 실수로 뒤통수 같은 곳 한 대 후려쳐도 뭐, 별일 없을 겁니다.

꾸욱.

그레이스의 손에 힘이 실렸다.

로한의 말이 옳다.

가끔은 나를 무시하는 미하엘 님이 사무치게 원망스럽다.

처음엔 슬펐다.

그러나 이제 나를 이해하지 않는 그가...

...조금씩 미워진다.

"...."

그레이스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목표는 뒤통수.

자신을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았던, 그렇기에 그동안 지켜만 봐야 했던, 너무나 얄궂은 뒤통수였다.

그때였다.

...파앗!

순간 사위가 암전되며 팀원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

그제야 뒤를 돌아본 미하엘이 외쳤다.

"함정⸺!"

끼이이이익⸺ 터엉!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충돌한 엘리의 몸이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닥을 구르는 바이크. 엘리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에클라트!"

팀장이었던 그레이스는 서둘러 엘리의 리콜을 발동시켰다.

미간을 무섭도록 좁힌 미하엘이 서클을 거칠게 발산했다.

사방으로 비산한 그의 서클이 어둠에 달라붙더니 술식을 그리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쩌저적!

이윽고 어둠이 걷히며 주변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때 카렌이 앞을 가리켰다.

"블랙아웃 팀입니다."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저들이 왜... 매복할 이유가 없을 텐데."

"이유야 상관없다. 방해한다면, 제거할 뿐이다."

미하엘이 자신의 술식 베이스를 넘어 허공에 술식을 발현한 순간이었다.

부웅!

갑자기 중력을 거스른 카렌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카렌의 몸이 그레이스의 눈동자 속에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콰앙!

거기에 속도까지 더해져 있던 카렌의 몸이 다시 한번 튀어 올랐다.

"리펜슈타인 님!"

그레이스의 외침과 동시에 미하엘이 카렌의 리콜을 발동했다.

블랙아웃 팀을 돌아보던 미하엘의 머리 위로 거대한 술식이 수놓이기 시작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 알고 싶은 것 (1)

"리펜슈타인 님!"

그레이스는 바이크까지 집어 던지고 손아귀로 허공을 움켜쥔 미하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미하엘은 블랙아웃 팀의 선수 하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그만하십시오. 그러다 죽겠습니다!"

그럼에도 미하엘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서클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날이 선 「마나 체인」으로 상대의 전신을 옭아맨 미하엘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온다.

"저들은 규칙을 어겼다."

"부디 진정하세요.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대는 느끼지 못한 건가?"

"...예?"

"자세히 보아라.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길목을 가로막은 블랙아웃 팀을 돌아봤다.

그사이 미하엘은 한 달 전 자신의 강의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나의 파장이 그때와 다르지 않다. 호문쿨루스. 반역자들이 여기까지 개입했을 줄이야....'

블랙아웃 팀.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호문쿨루스였다.

어떻게 저들이 하블다운 제국의 애뮬러 챔피언 팀으로 위장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놓고 이빨을 드러낸 이상 좌시할 수는 없었다.

"검을 뻗어라, 유클리드."

"...알겠습니다."

우우웅.

이윽고 그레이스의 손아귀를 따라 오러가 검의 형상을 갖췄다.

순간 호문쿨루스들의 앞으로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전에 보았던 함정 계열 술식과 비슷한 배열.

그러나 이번엔 그 수준이 한 단계 더 높아져 있었다.

미하엘이 같잖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더냐."

일순 미하엘의 머리 위로 완성되어 있던 거대한 술식이 마나를 폭포처럼 토해 냈다.

「앱솔루트」.

오직 미하엘 리펜슈타인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482개의 현과 539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대마법 방어술.

포화 속에서 제국을 지켜 낸 방어 마법의 대가이자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미하엘의 방어는 절대적이었다.

츠즈즛...!

미하엘의 마나에 휩쓸린 호문쿨루스의 술식들이 산화되듯 그대로 녹아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그레이스가 순식간에 적 앞에 당도해 검을 뻗었다.

푹!

무언가를 찌른 감각이 검신을 타고 피부로 전해져 온 순간 그레이스는 깨달았다.

'...달라. 정말 인간이 아니야.'

그제야 그레이스가 전의를 가다듬었다.

오러를 차분히 발산하던 그녀가 미하엘에게 물었다.

"제압합니까? 아니면... 사살합니까?"

"그대가 판단하라."

연이어 「헬파이어」까지 발현한 미하엘이 말을 이었다.

"나는 죽이겠―"

다음 순간 말을 잇지 못한 미하엘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푸욱!

어느새 미하엘의 뒤를 붙잡은 호문쿨루스.

그는 자신의 어깨를 관통한 단검을 힐끗거렸다.

"...쥐새끼마냥 기척을 지우는 거 하나는 인정하지."

"리펜슈타인 님!"

미하엘의 부상에 그레이스가 흔들린 사이 그녀를 밀어낸 호문쿨루스가 모습을 감췄다.

이윽고 다른 호문쿨루스들도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한걸음에 달려온 그레이스가 미하엘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당장 응급팀을 호출하겠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시간이 지체되었군. 즉시 출발...."

털썩.

바이크로 걸어가던 미하엘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관통당한 부위를 확인했다.

'이건....'

어느새 검은 꽃 한 송이가 상처 위로 피어 있었다.

'...유포리아군.'

유포리아.

기생 식물로 잘 알려진 이 꽃은 제국에서도 재배를 금한 식물 중 하나였다.

꽃의 형태를 한 유포리아의 사냥 방식은 독.

그 독에 중독될 경우 상처에 꽃이 자라는 동시에 감염자의 마나를 양분 삼아 끊임없이 성장한다.

심지어 자라난 꽃이 뼈에 뿌리를 내려 손으로 뽑아낼 수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사망하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는 것과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것 정도.

미하엘이 이 정도로 죽을 그릇은 아니었지만, 경기를 지속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우선 미하엘을 데리고 갓길로 이동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고르던 미하엘이 말했다.

"가라. 이제 달릴 수 있는 건 그대뿐이다."

미하엘의 시선이 트랙 위로 향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결승점이었다.

"안 됩니다. 그들이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새 우리의 목적을 잊은 건가? 파르카스탈 총장의 복직이 걸려 있다. 또한 나를 암살하려 했다면 유포리아의 독이 아닌 히드라의 독을 사용했겠지. 이건 그저... 무언의 경고인 듯싶군."

"하지만...."

"우유부단한 것도 여전하구나."

그제야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똑바로 주시했다.

올곧은 그의 시선에 되려 그레이스가 눈을 피했다.

미하엘이 말했다.

"그대에게 묻겠다."

그것은 언젠가 미하엘이 그레이스에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대가 진정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국? 황실? 국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네 목적을 모르겠다."

"...그게, 저를 싫어하시는 이유였습니까?"

"극히 일부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렇기에 침묵하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숨결이 떨려 나왔다.

"리펜슈타인 님."

"말하라."

"한 대만 때려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퍽!

순간 주먹을 들어 올린 그레이스가 미하엘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그레이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대만 더."

"자, 잠깐...!"

퍽!

"죄송합니다. 한 대만 더 때리겠습니다."

"그대가 잊었나 본데 나는 지금 환자―"

퍽!

흠씬 두들겨 맞은 미하엘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아직도 분이 덜 풀린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제가 뭘 지키고 싶었냐고요? 제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건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나는...!"

이윽고 지난 수십 년간 쌓여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눈물이 차오른 그레이스의 뒤로 어느새 도착한 선수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당신이 사랑했던 클라우디아를 닮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유클리드 가주님께서 제게 재능이 없으니 십자수나 연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렇게 웨펀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그레이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그녀가 겪은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그런데... 그런데 그걸 당신마저 몰라주면 지금까지의 저는 대체 무엇이 되는 겁니까...?"

훈련하다 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는 날도 허다했다.

어떤 날은 너무 아파서, 혼자 이불 속에 웅크려 울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마음이 꺾이는 날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레이스는 허공에 대고 묻곤 했다.

클라우디아.

부디 대답해 줘.

이제 나는 네가 되었는데, 어째서 미하엘 님이 미소를 되찾지 않으시는 거야?

어째서....

그 순간 저 멀리, 수많은 폭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펑! 퍼퍼펑!

이윽고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해설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금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의 우승자가 결정되었습니다! 1위는 바로 스프링윈드 1팀의 로한 선수! 16년 만에 열린 챔피언십의 왕좌는 스프링윈드 1팀이 차지하게 되었...!

그녀의 슬픔과 달리 세상은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름답게,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미하엘의 곁으로 주저앉은 그레이스는 세상을 화려하게 물들이는 폭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저도 지쳤습니다."

그 말에 미하엘이 그레이스를 돌아봤다.

실컷 얻어맞았던 탓인지, 아니면 알지 못한 진심을 들었던 탓인지 이제야 그녀가 조금 색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하엘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유클리드. 나는―"

"미하엘 리펜슈타인 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하는 그레이스.

"저와 파혼해 주십시오."

그녀를 바라보던 미하엘은 처음으로 후회를 느꼈다.

* * *

스프링윈드 총장실.

짐짓 뒷짐을 쥐고 돌아선 코넬리아가 역대 총장들의 사진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뭘 어떻게 한 거예요?"

그레이스와 미하엘 사이에 서 있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답했다.

"저희는 그저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뿐입니다."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의 상품은 이터널 스톤만이 아니었다.

중립 자원 지대.

모든 국가가 에테르 스톤을 채굴하는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때문에 그곳에서 얻은 에테르 스톤은 모든 국가 공평하게 나눠 가졌다.

이는 제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욕심을 부렸다간 전 세계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중립 자원 지대를 일시적으로 차지할 단 하나의 방법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올림피아 제전이나 하이런던 게임 그리고 애뮬러 월드 챔피언십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

우승 상품은 바로 중립 자원 지대의 일부를 4년간 소유할 수 있는 권리였고, 이번에 우리가 우승한 덕분에 제국은 50헥타르(약 15만 평)의 자원 지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거기에 그레이스와 미하엘이 나서서 코넬리아의 복직을 소원한 결과, 코넬리아는 다시 스프링윈드의 총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 짧은 시간 만에 프로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자 미하엘이 반지를 어루만졌다.

"그 어떤 문장이든 '미하엘 리펜슈타인'을 넣으면 말이 되지."

"지랄하지 마세요.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나 또한 농담을 즐기는 성미는 아니오. 그저 그대의 수준에 맞춰 설명한 것뿐이오."

"꼭 말을 해도 진짜! 내가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고 몇 번을...!"

순간 코넬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얼굴을 일그러트린 건 기쁨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고마워요, 모두...."

...지금까진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거다.

쓸모를 다한 부품처럼, 그저 폐기될 뿐이라고 아파했겠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에 나도, 그레이스도 그리고 미하엘도 당신을 위해 노력한 거다.

다시금 우리에게 돌아선 코넬리아가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곤 미하엘의 얼굴을 가리켰다.

"근데 얼굴은 또 왜 그래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코넬리아의 말처럼 미하엘의 얼굴 한쪽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경기 중 넘어졌소. 그럼 난 이만. 곧 수업 예정이라."

서둘러 돌아선 미하엘이 총장실을 떠났다.

이내 코넬리아가 나와 그레이스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대신 말을 이었다.

"리펜슈타인 교수의 말은 그만큼 저희가 노력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나도 알아요. 그냥 나는... 너무 미안해서."

"미안해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희의 독단이었습니다. 그저 총장님께서 더 나은 스프링윈드를 만들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

그 순간 코넬리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평정을 되찾은 코넬리아는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고맙다는 인사... 안 할래."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도 곧 강의가 예정되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와 그레이스는 인사를 올리고 문으로 향했다.

그때 코넬리아의 목소리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내가 지금 어린애처럼 도움만 받고 있는 걸로 보여도, 한때 기술국의 부국장이었던 몸이니까."

"감사합니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참, 그리고 조심하세요."

"예?"

"...실은 관리국에서 학교에 감시자들을 파견한 모양이에요."

감시자들이란 말에 그레이스가 움찔거렸다.

"저번 코린느도 그렇고, 이번에 블랙아웃 팀도 그렇고 호문쿨루스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이상 관리국의 감시가 더 심해질 거예요."

잠시 말을 멈춘 코넬리아가 창밖으로 비치는 정원을 응시했다. 스프링윈드는 여느 때처럼 평화롭기만 했다.

"그쪽 간부가 해는 끼치지 않겠다고는 말했는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멀쩡한 가문도 반역자로 몰아서 지워 버리는 게 관리국이니까."

* * *

〔 메인 스트림 완료 〕

〔 150P 획득 〕

챔피언십이 끝난 이틀 후.

내 자택으로 한 통의 택배가 도착했다.

발신인 불명.

어디서, 누가 보낸지도 모를 택배의 포장을 뜯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터널 스톤 2킬로그램이었다.

아마도 이게 메인스트림의 또 다른 보상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연성을 채울 줄이야.

그래도 내 앞으로 운석이 뚝 떨어지는 것보단 나았다.

바이크를 타고 하블다운 공방에 도착한 나는 이터널 스톤 3킬로그램으로 나와 그레이스의 검 제작을 의뢰했다.

"이터널 스톤은 가공이 까다로운 터라 최소 보름은 걸릴 겁니다. 의뢰비는 걱정 마십시오. 애뮬러 챔피언을 위해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라는 황실의 지시가 있었거든요."

여기까지 예상하고 있었다니, 역시 황실답다고 생각해야 되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후 다시 자택으로 향하던 나는 그날을 떠올렸다.

그레이스와 미하엘이 블랙아웃 팀에게 습격을 받았던 것은 나도 보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상황은 이미 정리된 듯 보였고, 나까지 멈춘다면 우승은 물 건너갔을 테니까.

"문제는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냐는 건데...."

상당한 오러를 방출해 집중하며 달리고 있던 덕분에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스쳐 들을 수 있었다.

―...클라우디아를 닮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유클리드 가주님께서 제게....

...클라우디아 로렌.

나도 그녀를 알고 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수십 년 전, 클라우디아는 제2차 인마 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망했으니까.

"미하엘이 아리엘을 의붓동생으로 맞이한 이유이자, 그레이스가 웨펀 마스터가 된 원인...."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너무 단편적이었다.

미하엘이 사랑하는 사람은 원래 클라우디아, 그레이스와 함께 소꿉친구 중 한 명이었던 그녀였다.

미하엘이 천재 마법사였다면 클라우디아는 천재 기사였다.

12살의 나이로 소드 마스터에 오른 걸 보면 할 말은 다한 셈이었으니까.

그랬던 클라우디아가 죽게 된 건 관리국이 로렌 가문을 반역자로 지목한 시점이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로렌 가문은 전부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미하엘이 개자식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지."

클라우디아를 죽인 제국에게 증오를 품게 된 미하엘.

클라우디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그레이스.

그녀가 바로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작금의 비극을 낳게 되었으니까....

"...일단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그대로 핸들을 돌린 나는 제도의 국립묘지로 향했다.

§ 알고 싶은 것 (2)

방 끄트머리, 아리엘은 쓸쓸히 웅크리고 있었다.

어두운 손길들이 창밖을 두들겼다. 쿵, 쿵, 떨리는 창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손길들이 밤이라는 것을 아득히 깨닫는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언제나 그녀는 텅 비어 있었다. 공허한 눈동자처럼.

―아무 이유 없었다.

위태로웠던 그녀의 세상은 로한의 그 한마디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어쩌면 그녀 또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철저히 거부했을 뿐.

그럼에도 마주한 진실은, 거짓에 목이 졸린 채 질식해 가던 아리엘에겐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거짓말쟁이...."

...모두가 다 거짓말쟁이야.

모두가 다, 나를 속이고 있어.

생각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전부 말라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흐르고야 말았다.

피 같은 눈물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살고 싶어,

몸부림치며 보내는 신호.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

아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 * *

언제나 그랬다.

"여긴 어딜 가나 똑같네...."

세상에서 웃음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면 바로 이곳, 묘지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이곳에 당도하는 순간 입꼬리를 내리고 미소를 지워야 한다.

망자에 대한 예우다.

혹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이곳에 묻힐 자신을 위한 준비거나.

사아아아....

곳곳마다 먼저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눈물로 멍울져 있었다.

아직도 생생한 꽃다발, 속으로 삼킨 말들의 무게에 깊게 파인 발자국, 언제나 묵묵히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묘비.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불투명한 이곳에서 우리는 저승의 이야기를 묻곤 했다.

그렇게 망자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장소가 바로 여기, '메모리아 국립묘지'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클라우디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클라우디아...."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부르듯 그녀를 찾아 헤맸다.

그러길 몇 분.

질서 정연하게 설치된 단단하고 차가운 비석들 사이로 웃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ㅤㅤ╱ㅤㅤㅤㅤㅤㅤㅤ ㅤ╲

ㅤㅤㅤ 클라우디아 로렌

ㅤㅤ ㅤ ㅤ918 - 933.

ㅤㅤㅤㅤ ㅤ세상에서

ㅤㅤㅤ가장 아름다운 보물

ㅤㅤㅤ ㅤ여기에 잠들다

ㅤㅤㅤ ㅤㅤㅤㅤㅤㅤㅤ

ㅤㅤ╲ㅤㅤ ㅤ ㅤㅤㅤㅤㅤ╱

그녀의 묘비는 주위의 다른 비석과 달리 이끼 하나 끼어 있지 않았다.

매일같이 묘비에 다녀가는 누군가의 관리 덕분이었을까. 바람이나 시간의 흔적 같은 얼룩 하나 보이지 않았다.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자리 잡은 묘비 중앙에는 한 소녀의 얼굴이 각인되어 있었다.

돌아선 모습으로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솜씨 좋은 세공사가 만들었는지 정교했고, 이마부터 등 아래까지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마치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듯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묘사처럼 그녀의 이름 밑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음절마다 그녀의 모습을 아름다운 보물이라 비유했던 이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만큼 부모에게 이 아이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소중했으리라.

"...아리엘 리펜슈타인."

그 모든 것을 마주한 순간 내가 내뱉은 이름은 클라우디아가 아니었다.

"정말 닮았어."

미하엘이 아리엘을 의붓동생으로 맞이한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클라우디아의 어린 시절 모습은, 아리엘과 굉장히 흡사했다

나 역시 죽었던 그녀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미하엘, 너는 무슨 생각으로...."

...아리엘을 클라우디아의 대역으로 삼은 거냐.

이 사실을 알게 될 아리엘이 얼마나 큰 슬픔을 감내하게 될지 너도 알잖아.

너의 그 선택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부수고 있다는 것조차⸺

"그 사람이 누군가요?"

가슴을 에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어른이 된 묘비 속 소녀가 내게 묻고 있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보고 계신 건가요... 부교수님."

* * *

미하엘은 가로수가 깔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얼마나 오간 것인지 이젠 눈을 감고도 찾아올 수 있는 장소였다.

매일같이 이곳을 다녀갔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녀를 만난다.

늘 새롭다. 그녀는 늘 새롭게, 미소하고 있다.

"...."

오고 싶지 않던 날도 많았다.

너를 보게 되면 너를 잃던 날이 떠올라서.

너를 보게 되면 너를 지키지 못한 내가 떠올라서.

너를 보게 되면 너를 추억하던 모든 순간이...

...허무해진다.

잠시 걸음을 멈춘 미하엘은 숨을 골랐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의 코끝을 살며시 건드렸다.

어서 오라는, 클라우디아의 부름처럼.

"지하에도 봄이 왔을까...."

봄이 오면 언제나 지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지하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기다려라, 클라우디아. 대의를 달성한 순간 내가 너에게...."

...가겠다.

당장은 클라우디아를 만나러 가지 못한다.

복수.

클라우디아를 죽인 제국에게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레이스, 그녀를... 죽여야 한다.

―저와 파혼해 주십시오.

그레이스가 지쳐 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생기를 잃어 가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미하엘은 말없이 늘 눈빛만으로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이만하면 되었다.

힘들면 포기하라.

너는 나를 가질 수 없다.

영원히

ㅤㅤㅤ영원히

ㅤㅤㅤㅤㅤㅤ영원히.

"...."

미하엘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아직도 맞은 곳이 얼얼하다. 무식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래도 자신이 얼마나 미웠으면 오죽하다 때렸나 싶었다.

일반인을 그 정도 힘을 실어 때렸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으로 되었겠지.'

마침내 그레이스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포기했다는 것에 안심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엔, 그는 너무나 자비로운 주인공이었다.

'클라우디아. 이 반지에 박힌 보석처럼, 너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영원하다.'

늘 미하엘의 마음은 오직 한 곳만을 향했다.

그러다 문득 아리엘이 떠올랐다.

그녀는 클라우디아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미하엘은 클라우디아를 그리워하던 자신이 미쳐 버린 줄만 알았다.

미쳐서 환영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클라우디아가 아니다.'

미하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유일한 존재여야만 한다.

그 명제를 부정하는 순간, 그의 사랑은 참이 아닌 거짓이 될 것이었다.

'아리엘은 나의 도구다. 언젠가 대의를 위해 제국의 목을 칠, 부러지지 않는 「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잘 지켜지지가 않는다.

지난 황실 경매에서도 그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리엘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경매장에 들어와 있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아리엘의 미소를 떠올리며 입찰 패드를 연타하고 있었다.

'이것은 연민이다. 너야말로 사랑과 연민을 혼동하지 마라, 미하엘.'

두 달 전.

미하엘은 식당에서 로한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자신이야말로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버렸다.

멍청하게도.

생각은 자연스레 그레이스와 로한으로 연결되었다.

'슬슬 말미에 도달할 때가 되었군.'

지금까지 미하엘이 그들의 사이를 방해하지 않은 건 '배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라면 로한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레이스를 세상에서 외톨이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저도 지쳤습니다.

그런 나약한 모습을 한 그레이스가 더는 자신의 적수로 보이지 않았다.

클라우디아의 말처럼, 아직도 그레이스는 그저 새장 속에 갇힌 작고 연약한 새일 뿐이다.

「"주인을 위해 하염없이 지저귀는, 혼자서는 날아갈 수 없는 새."」

「"그레이스는 그런 아이야. 미하엘,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줘야 해. 알았지?"」

'...하는 수 없군. 조금 더 말미를―'

그때였다.

"그 사람이 누군가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들뜨던, 그 음성.

미하엘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보고 계신 건가요... 부교수님."

클라우디아의 묘비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 * *

"...아리엘."

그녀도 이곳에 왔으리라곤 생각 못했다.

내가 아는 페이지에서 아리엘이 묘지에 왔던 장면은 없었으니까.

아마도 지금 이 페이지는, 내가 모르는 페이지겠지.

"누구냐고 물었어요, 내가."

재차 묻는 아리엘.

나는 하는 수 없이 거짓을 입에 담았다.

"어렸을 때 잠깐 연이 닿았던―"

"거짓말."

뭐지?

이제 내 생각까지 읽을 수 있게 된 건가?

아니 그럴 만한 설정은 아리엘에게 없을 텐데....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그렇죠?"

싱긋 웃는 아리엘.

나는 깨닫는다. 내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나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당연히 당신을 만나러 왔죠. 로한 님."

"그걸 어떻게 알고?"

그러자 아리엘은 미소를 지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마나를 더 잘 느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 말은 내 마나를 추적했단 말인가?"

"정답이에요."

그날도 아리엘이 느닷없이 나타난 이유가 이거였나.

순간 아리엘이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시선이 들고 있던 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럼 이것도 맞춰 볼래요?"

스윽.

아리엘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들어 올린 칼끝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나랑 당신 둘 중에 누가 죽을까?"

"...여긴 묘지다. 망자들을 욕보일 셈이냐."

"이미 죽은 사람들이에요. 죽었는데 무슨 명예가 있고 마음이 있겠어요?"

"그 명예와 마음을 살아 있는 자가 부정하는 순간 망자는 진정으로 죽는 것이다."

"그래요...?"

일순 아리엘이 오러를 방출했다.

고요히 휘몰아치는 검은 오러.

그것이 내 눈앞을 스쳐 간 순간이었다.

[ 당신의 운명이 악화됩니다. ]

[ 메인스트림 : 사망 분기 ]

✵ 소기 목표 : 아리엘 리펜슈타인의 죽음.

- 실패 " 당신의 사망

- 성공 " '100P'

그 메시지 속에서 그녀가 창백히 웃는다.

"그럼 전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네요."

말을 마친 아리엘이 손목을 비틀더니 검끝을 자신에게 겨눴다.

그리고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내 앞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한순간 오러를 폭발시켜 아리엘의 지척까지 도약한 내가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내 눈앞에서, 망설임조차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한 가지만,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 목소리가 새벽녘 별빛보다 아스라이 멀게 느껴진다.

지금 이 팔목을 놓는다면, 그녀가 영영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었나요...?"

아리엘을 바라보던 나는 처음으로 의심을 했다.

이 아이가 정말, 악인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내 마음대로, 너의 삶을 재단해 버린 것은 아닐까.

"대답해 주세요."

툭.

검을 떨어트린 그녀가 울고 있었다.

내 가슴을 움켜쥐고서 눈물만을 하염없이 쏟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 모습을 완상(惋傷)하던 나는 불현듯 너를 묘사할 낱말이 떠올랐다.

소외(疏外).

비로소 나는 네 눈동자의 의미를 알았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내 기억 속의 너는 그레이스를 죽인, 악인이었다.

죽어 가는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안심하라고 말하던 너.

나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너.

그게 내가 기억하는 너의 전부다.

...하지만.

만일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 이유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우려 때문이라면.

"너는,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

이 전개를 거부하겠다.

§ 알고 싶은 것 (3)

나는 늘 인정받고 싶었다.

'잘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 매일을 열심히 살아왔다.

그렇게 나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 정말인가요...?"

그조차도 찾지 않는다면, 내가 태어난 이유는 고작 우연이었다는 게 전부였으니까.

"정말이야."

모두가 그렇듯, 아리엘 또한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확언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누군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관점의 변화였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말고 너를 믿어. 네가 믿는 모든 것. 그게 진실이다."

그 방법은 스스로가 자신의 의미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누군가 나를 인정한다고 해도, 무의미해질 테니까.

"로한 님...."

어느새 아리엘이 미소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핀 매화처럼, 하얗고 연연하게....

처음부터 이 소설에 악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모두가 살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닿고 싶어,

다시 바람이 불어오길 기다리는...

저 발밑에 핀 꽃처럼.

* * *

걸을 때마다 시선이 발끝에 툭툭 치였다.

땅바닥만 보던 아리엘은 추위를 타듯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검을 집은 순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끊어진 필름처럼 중간중간 기억나는 건 그리운 마나를 따라 어디론가 향하는 자신의 모습뿐.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사람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 멍청이, 바보...."

해선 안 될 짓을 해 버렸다.

그것도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의 앞에서 말이다.

부끄러웠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데, 이제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생겨 버렸다.

―너는,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다.

그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한마디.

그 한마디에 아리엘은 기쁜 동시에 슬펐다.

'...아리엘이 아닌, 도로시였다면 어땠을까.'

태어날 때부터 불리던, 그녀의 진짜 이름.

'아리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을 때, '도로시'란 이름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진짜 이름이 간절했다.

그녀의 이름은 언제나 반역자, 배신자, 악마의 노예 따위의 수식이 뒤따랐다.

늘 눈물과 증오로 뒤덮여 있었고,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이름표를 뜯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아리엘도 도로시도 아닌 '나'를 진정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말고 너를 믿어.

그 사람은 자신을 믿어 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리엘, 스스로를 믿으라 말했다.

무언가를 믿으라는 말은, 그 사람이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로한 님은 나를 믿고 계셨던 거야.'

제국의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신자 그리고 악마의 노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믿었기에, 그때도 나를 구해 준 거야.

오늘처럼.

'하지만 그 말조차 거짓말이라면....'

불안정한 마음처럼,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의해 또다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

그 자리에 알처럼 웅크린 아리엘 리펜슈타인.

메마른 숨이 입술 사이로 떨려 나온다.

야옹.

앙증맞은 울음소리에도 아리엘은 기겁을 하듯 몸을 떨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시체처럼 늘어진 그녀의 손등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의 목에는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순간 아리엘은 그 글씨가 '도로시'로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너도 버려졌구나... 나처럼."

무언가를 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줄 수 없었다.

검조차 로한의 앞에 버리고 와 버렸는데, 이제 그녀가 가진 게 무엇이 있을까.

야옹?

그 순간 주변을 살피던 길고양이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아리엘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기다려!"

골목길로 숨어든 길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

뻗은 아리엘의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손끝이 쓰라렸다.

그러자 로한의 음성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네가 믿는 모든 것. 그게 진실이다.

오늘 아리엘의 모든 생각은 로한에게 부정당했다.

그 부정 속에서 아리엘이 마주한 진실을 하나였다.

'나는 의미 있고, 내가 믿는 것이 진실이다....'

고개를 든 아리엘은 세상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유난히 반짝이고, 달은 눈동자처럼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

"고양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하늘이 커다란 고양이 같아.'

손끝으로 별들을 잇자 검은 고양이 하나가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

이윽고 숨을 터트린 아리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설혹 그것이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도, 그녀가 믿는다면 밤하늘은 검은 고양이라는 것을.

'이런 의미였구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 * *

아리엘을 떠나보낸 나는 묘지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이제 난 죽었다."

마침내 내 운명이 사망 분기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래도 분하진 않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 메인스트림 실패 〕

이제는 사라진 그 메시지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처음 북마크를 사용했을 때를 제외하고, 나는 언제나 메인스트림을 완료해 왔다.

거창하게 메인스트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내겐 그레이스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마지막 이야기였고, 마지막 운명이었으며, 마지막 사랑이었으니까.

"아리엘...."

손에 들린 그녀의 검은 완벽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너는 죽었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아리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도」 ⸺ 아리엘 리펜슈타인

✵ 현재 이해도 : 31.3%

...어느새 나는 너를 이렇게나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 해도 묘지에서 보았던 아리엘의 마음 하나 모를 만큼 둔감하진 않다.

처음에는 설마 싶었다.

내가 아는 아리엘은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언가를 사랑하기엔,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는 수정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오만한 생각 때문에 나는 지금 이 페이지에 서 있다.

문득 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너를 경멸하며 고압적으로 대하던 나.

너를 죽이게 될 미래를 위해 미안하다고 말하던 나.

그게 네가 기억하는 나의 전부였을 텐데.

"빌어먹을 전개 수정...."

그레이스도 미하엘도 하물며 아리엘까지.

모두가 현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 엘리가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게 다행이지만, 그뿐이다.

"...이제 도망칠 곳도 없군."

북마크도 사용할 수도 없다.

페이지를 다시 돌린다 해도, 전개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리엘이 죽는다.

그것을 내가 막았고, 그녀를 살림으로써 나는 죽음에 다가섰다.

내가 선택한 운명이다.

그렇다고 나는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만 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대비를 해야겠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내 운명의 끝, 「사망」을 향해 나아가야겠지....

...빌어먹을 운명 같으니.

"로한."

불현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내가 떠올린 건 개연성이었다.

지난 메인스트림을 완료해 획득한 보상은 '택배'로 왔다.

그렇다면 내 죽음은 어떤 식으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

어떤 식으로 다가와야, 가장 개연성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뒤섞인 질문 속에서 내가 뒤를 돌아본다.

"...리펜슈타인 교수님."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개연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운명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

빠르게, 이 세상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모든 묘사가 그를 위해 쓰여지듯,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이 페이지 위로 쓰여지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 근처로 다가온 미하엘이 클라우디아의 묘비를 내려다봤다.

"하긴 그렇군. 이 제국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

상대는 미하엘이다.

스프링윈드의 천재 마법사이자, 이 세상의 주인공.

그런 그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당장은 답이 없다.

"아리엘을 만났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미하엘.

내가 지금 던지는 건, 무리수가 아닌 승부수다.

"...."

이 녀석, 나와 아리엘이 함께 있는 걸 본 거다.

...저렇게나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 순간 미하엘이 입을 열었다.

"클라우디아 로렌."

"...?"

"네가 서 있던 묘비 아래 묻힌 사람의 이름이자,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이다."

알고 있다.

그래도 너만큼은 모른다.

내가 읽은 건 너의 단편적인 슬픔들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제 네가 답할 차례다, 로한."

"말씀하십시오."

"아리엘과 나눈 대화를 말하라."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이 녀석 앞에서 만큼은 아리엘을 건드려선 안 된다.

그러니 최대한 신중히⸺

"말하라! 어째서 아리엘이 네 앞에서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츠즈즈즈!

미하엘의 몸태를 따라 마나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일그러진 얼굴,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귀족의 품격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미하엘은, 아리엘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 앞에 서 있을 뿐이다.

"말하지 않겠다면 널 죽이겠다."

번쩍!

이윽고 사방으로 번진 스파크가 내 몸을 속박했다.

술식의 발현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마나만으로도 나를 제압하고 있었다.

"큭...!"

명색이 소드 마스터인 나조차 저항이 불가능했다.

이것이 미하엘의 진정한 힘.

진정으로, 상대를 죽이겠다고 생각했을 때 폭발하는 위상.

"마지막 기회다."

저 자식, 완전히 눈깔이 돌아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대로면 죽는다.

"말하라."

점점 조여 오는 속박 속에서 내가 외쳤다.

"아리엘은!"

그녀의 이름에 순간적으로 미하엘의 마나가 느슨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호신강기를 사용해 몸을 보호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클라우디아 로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있을 생각이십니까? 언제까지 망자의 체온 속에서 살아가실 생각이냔 말입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리엘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천만에! 아리엘은 리펜슈타인 가문의 일원이 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제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자신을 도구로 삼았다는 것도! 죽은 연인의 대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조차 전부!"

너는 그레이스뿐만 아니라 아리엘까지 망가트리고 있다.

빌어먹을 너의 가스라이팅으로 말이다.

"아리엘이 왜 죽으려 했냐고? 그건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이 행복했다면, 아리엘이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어."

"기어이 여기에 아리엘의 시체가 있어야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막지 않았다면, 아리엘은 오늘 죽었을 겁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나는 천천히 미하엘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 아리엘의 검을 쥐여 주며 말했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면 이 검으로 저를 죽이십시오."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는 미하엘.

그가 쥔 검신이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미하엘이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었다.

"아리엘은 클라우디아 로렌이⸺"

푹.

"...."

고개를 내리자 내 몸을 관통한 검신이 보였다.

울컥,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

...너라면 이럴 줄 알았다, 미하엘.

§ 밤 (1)

...이건 최악의 전개다.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여져야 할 전개이기도 했다.

모든 책에 마지막 페이지가 존재하듯, 나 또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미하엘 리펜슈타인이라면.

정의를 알고, 목표가 있으며, 신중을 기하는 인물이라면.

"이게... 당신의 대답입니까?"

그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네 말이 옳다, 로한."

미하엘이 내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았다.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빗겨 간 탓에 당장은 죽지 않을 부상이었다.

그때였다.

"유클리드, 그녀를 구하고 싶다면 지금 나를 베어라."

미하엘은 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예상외의 답변이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대로 돌아갔을 터.

어딘가, 그가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처음 페이지를 펼쳤던, 이 이야기의 프롤로그처럼.

"네가 유클리드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

"네 성격상 그 마음이 흔들릴 일은 없겠지. 너만큼 고지식한 인물을 나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나를 죽여라. 그렇지 않는다면...."

그 순간 내가 읽은 것은 허무였다.

미하엘의 눈빛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 주인공처럼, 이제 쉬고 싶다는 기색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는다."

...내가 살기 위해 아무도 죽이지 않겠지만.

그레이스를 살리기 위해선 그 누구라도 죽일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건네받았다.

지금 이 검을 휘두르면, 미하엘은 죽는다.

그렇게 이 세상의 주인공은 사라진다.

이제 반대로 세상의 모든 개연성이 내게 종용하고 있었다.

그를 죽이고 주인공의 자리를 찬탈하라.

너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그레이스 유클리드를 위하여....

"미하엘 리펜슈타인 님."

다음 순간, 나는 검을 부러뜨렸다.

뚝.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나 봅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군."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없습니다."

너를 죽일 수 있었다면 진작에 죽였을 것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보다 약해서가 아니다.

네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너는, 너조차도 지키고 싶어하는 그레이스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미하엘.

그레이스가 너를 사랑하는 이상, 나는 너를 영원히 죽일 수 없다.

원망스럽도록 변하지 않는 사실 속에서 내가 웃으며 물었다.

"치료 마법 사용하실 줄 아십니까?"

"유감이지만 내가 퓨어 마나엔 재능이 없어서."

"올해의 멀린상도 이제 끝물인가 봅니다."

"건방진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클라우디아의 묘비 앞으로 다가선 미하엘이 말을 이었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다음에 이야기하지. 가라. 나는 잠시 머물다 갈 테니. 그리고...."

한쪽 무릎을 굽힌 미하엘은 클라우디아의 초상(肖像)을 쓸어내렸다.

"너는 네가 지킬 수 있는 것을 지켜라.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킬 테니."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나는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예."

* * *

자택으로 돌아온 나는 소독한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고 있었다.

"이것으로 되었을까...."

그보다 이거 너무 아픈데?

칼에 찔려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나마 로한의 몸이 전투에 익숙해서 망정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미하엘에게 찔린 순간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락되었다.

나는 살았다.

조금 더 안 좋은 방향으로.

[ 당신의 운명이 악화됩니다. ]

운명 악화.

그게 내 유일한 돌파구였다.

일정한 운명선에 도달해 사망 분기가 발생한 것이라면, 그 운명을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내가 미하엘을 도발한 이유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식스 센스」를 발동했다.

ㅤㅤㅤㅤㅤ[당신의 운명⸺37페이지]

『사망』 "━━━╋━━━━━━━╋●━━" 『사?』

ㅤㅤㅤㅤㅤㅤ「사망」 ㅤㅤㅤㅤㅤ「사망」

다음 사망까지 남은 악화는 두세 번 정도.

저 끝에 도착하면 이번처럼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다.

근데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어떻게 전부 다 사망으로 되어 있을 수가 있어?

빌어먹을 작가 놈....

"...응?"

뭐지?

내 운명을 다시 확인해 보니 무슨 오류가 난 것처럼 '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 되어 있었다.

물음표는 또 뭘까.

내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던 순간이었다.

띠리링.

울리는 벨소리.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님.'

무슨 일이지?

아, 다음 강의 논의하려고 전화한 건가.

"로한입니다. ...그레이스 님?"

수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등허리를 섬찟하게 타고 오르는 불안감.

설마 무슨 일이...!

[...로한.]

"예, 말씀―!"

[나 와써. 열어 조 이거....]

쿵, 쿵, 쿵....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