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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보스의 구원자가 되었다

- 심씀

( 운명선 줄 맞춤은 글자크기 조절하면 됩니다. )

§ 프롤로그

「그저....」

한때 무너진 제국의 기사이자 검술의 대가라 불렸던 웨펀 마스터 그레이스 유클리드.

새빨갛게 피어난 죽음 속에서,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나를 돌아봐 주길....」

세상 모든 것에 한 번쯤 스쳐 가던 눈길이, 끝내 자신에겐 오지 않은 것에 서러웠다.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길....」

곁에 있는 이들의 모든 이름이 떠나가 혼자가 되어도, 그레이스, 그 네 음절만큼은 결코 불러 주지 않은 것에 원망스러웠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모든 일은, 단 한 번의 눈길과 그리고 단 한 번의 호명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그레이스는 자신의 텅 빈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단순한 은유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엔 정말로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이가 만든,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였다.

입술 사이로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그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섞인 피눈물 속에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응시했다.

「...바랐다.」

서서히 생기를 잃어 가는 그레이스의 눈동자 위로는 오직 한 사람만이 떠올라 있다.

그레이스가 일생을 바쳐 지켜 온 제국을 몰락시킨 마법사, '미하엘 리펜슈타인'.

인생을 몇 번이나 되돌려도 자신과 절대 닿을 수 없을 '그'.

그레이스는 생의 마지막 순간조차 그를 사랑하며 죽었다.

"뭐야 이게...."

나는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해 봐도 내가 읽은 건 변하지 않았다.

"뭐냐고 이게."

선명히 상상되는 그레이스의 죽음을 곱씹었다.

말이 안 되는 전개였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레이스를 이딴 식으로 소비해?"

이건 독자에 대한 모욕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동안 '그레이스 유클리드'라는 인물을 응원했던 독자에 대한 모욕이란 말이다!

"작가 이 개새...."

예정대로라면 그레이스는 이렇게 죽어서도 안 되며 죽을 수도 없었다.

그레이스는 본디 목숨을 바쳐 '하블다운' 제국과 평민들을 지켜 온 선인(善人).

그녀의 인생을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한 점의 증오도 분노도 없는, 평화를 수호하며 평생토록 인의를 배워 가던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람의 초상화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불안불안 하더니 결국...."

...그랬던 그레이스가 어긋나기 시작한 건 새로운 '히로인'이 등장한 시점부터였다.

이른바 '히로인 밀어주기'의 최대 피해자.

갑자기 등장한 '아리엘 리펜슈타인'이라는 인물로 인해 공기 취급당한 것도 모자라, 아예 중반엔 평화고 인의고 뭐고 피아 구분 없이 전부 죽여 버리는 복수귀로 만들어 설정 붕괴까지 일으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미하엘 리펜슈타인'은 또 어떤 자식이냐면.

일단 그레이스와 제국 검마대학인 '스프링윈드'를 함께 졸업한 동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어렸을 때 서로의 가문의 동의하에 결혼까지 약속된, 즉 '소꿉친구'란 말이다.

아무튼 이 자식은 갑자기 등장한 아리엘인가 뭔가한테 반해서 지 약혼녀도 버리고 티키타카....

"...생각할수록 열받네."

아무튼 그레이스는 이렇게 죽어선 안 된다.

"신쓴 넌 오늘 뒤졌어. 자기 작품에 애정 있는 독자가 돌변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준다."

그냥 막 댓글에 휘둘린 작가가 소통한답시고 그동안 서사를 오지게 쌓아 온 주역 하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린 거나 다름없다.

나는 댓글창을 켰다. 그리고 분노를 담아 엄지를 두들겼다.

[그레이스친위대 : 그동안 잘 읽고 있던 독자 중 한 명입니다. 근데 꼭 그레이스를 죽여야 했나요? 137화에서 그레이스 갑자기 왼팔을 잃는 것도, 다음 화인 138화에서 이제 검도 제대로 못 휘두르는 그레이스를 제자들이 비웃는 것도, 152화에서 자신을 습격한 게 누아르 가주의 사주란 걸 알아 버린 그레이스가 흑화해서 복수귀가 되는 것도, 155화에서 그레이스가 악마와 계약을 위해 평생토록 지켜온 평민들을 대거 학살할 때도 전 다 참았습니다. 왼팔을 잃는 전개부터 너무 어이없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멘탈이 나갔다 해도 애초에 웨펀 마스터가 고작 오러 유저의 습격으로 왼팔을 잃는 전개라니? 설정 붕괴도 나름이지 이건 너무하잖아요. 아무튼 참고 읽었습니다. 그래도 그레이스가 메인 히로인인데 죽이진 않겠지 싶었습니다. 근데 죽이셨더군요. 오늘. 그것도 쉽게. 진짜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동안 작가님이 2절 3절에 뇌절까지 하는 거 다 참았는데 오늘은 진짜 못 참겠네요.]

나는 전봇대를 부둥켜안고 토를 하는 취객처럼, 거침없이 분노를 게워 냈다.

내가 이 소설을 애정하는 만큼, 활자로 치환된 분노는 댓글 한 페이지를 꽉 채울 만큼 아득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는 알림이 떴다.

ㄴ[선발대원999호 : 못 참으면 어쩔건데요? ㅋ]

"이 새끼가?"

하지만 그 답글은 시작에 불과했다.

ㄴ[무야호 : 오늘 화 개쩔었는데 님 취향이 이상한 거 아님???]

ㄴ[입대날에상태창외쳐봄 : 악질새끼 독자인 척 지적질하는 거 개역겹죠? 빌드업 졸라 잘됐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댓글단 티 내지마라 ㅉㅉ]

ㄴ[데이지의노예 : 솔까 저도 그레이스 죽은 거 좀 안타깝긴한데 죽을만 했어요. 민간인 학살까지 했는데 안 죽는게 더 이상하죠.]

ㄴ[qRuRup : 아리엘로 대세 기울어진지가 언젠데ㅋㅋㅋ케]

ㅤㄴ[아리엘친위대 :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그레이스 아웃!]

어느새 댓글은 나를 욕하는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네가 글을 제대로 안 읽었다는 둥, 원래부터 진히로인은 아리엘이었다는 둥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전부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는 순식간에 욕설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혼자서는 다수를 상대할 순 없었다.

금세 욕설 신고를 당한 내 댓글은 블라인드 처리됐고, 눈을 뜬 채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었다.

"에라이 씨발!"

스마트폰을 거칠게 집어 던진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전혀 진정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그레이스의 죽음과 독자들의 반응이 겹쳐 오며 토할 것만 같은 치욕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는 겨우 웹소설 따위에 왜 화내고 폭발하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

하지만, 이 소설.

「스프링윈드의 천재 마법사」는 내게 겨우 '웹소설 따위'가 아니다.

이 소설은 내게, '어느 날'이었다.

"...."

3년째 취업에 실패하고 있던 어느 날.

여자친구 한 번 사귄 경험 없이 친구들 결혼식장 자리나 채워 주던 어느 날.

겨우 취업한 회사에서 싸이코 같은 사수를 만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어느 날.

하루 두 시간을 넘게 멍하니 서 있던 지하철, 퇴근 후 나를 반기는 원룸, 어질러진 외로움 속에서 잠이 들던 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실수해야만 했던 업무, 그 실수로 "너는 이것밖에 안 되는 새끼야"라며 내게 욕을 하던 사수, 언제나 홀로 똑같은 도시락을 비워 내던 점심, 그렇게 반복되던... 어느 날.

이 소설은 내게 그런 '어느 날'을 살아갈 이유였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그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때 연재 횟수가 10화였던가.

내가 그레이스를 읽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그녀.

점심에 도시락을 먹으며 그녀를 읽었다.

퇴근길 지하철 구석에서 그녀를 읽었다.

어질러진 외로움 속에서 그녀를 읽었다.

나는 언제나 그녀를 읽었다.

모든 순간에 그녀가 있었다.

오직 그녀가 있기에 버텼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힘들었던 어느 날엔, 북마크 했던 페이지의 그녀를 찾아가 읽고 또 읽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녀는 내 인생의 구원자였다.

그녀는 비록 활자에 지나지 않지만, 내 망막 위로 아로새겨진 그녀의 묘사들은 너무나 선명하다.

가끔 피로에 지쳐 눈을 감거나 혹은 꿈속에서, 그녀는 내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렇기에 그레이스가 무너져 갈 때마다 나 역시 붕괴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 그레이스를 너희가 죽인 거다.

[그레이스는 주인공의 약혼녀다. 거기다 예쁘다.]

[그레이스가 없으면 제국은 누가 지키냐. 거기다 예쁘다.]

[그레이스가 없는 이 소설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난 하차할 테니 넌 상하차나 하러 가라.]

처음에는 나를 포함한 독자 대부분이 이런 댓글들로 반발했다.

하지만 소설은 작가의 세계다.

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잘나가던 인물 하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인간 말종으로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 의미다.

웨펀 마스터였던 그레이스가 겨우 오러 유저인 아리엘에게 기습당해 왼팔이 잘렸을 때, 나는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레이스가 새로운 힘을 얻게 될 작가의 빌드 업이란 걸 믿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게 된 그레이스가 흑화하고 복수귀가 될 때, 나는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 복수의 칼날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걸 믿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가 악마와의 계약을 위해 평민들을 학살할 때도, 결국 주인공과 대립하며 관계가 산산조각 날 때도, 자신의 제자까지 먹어 치우며 점점 괴물처럼 변해 갈 때도, 그러면서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떡밥을 깔 때도, 과거의 모습으로 갱생할 여지가 있었음에도 돌아가지 않았을 때도, 사실 페이크 최종 보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그러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진 최종 보스한테 개연성 없이 바로 붙어 버렸을 때도.

그렇게 그레이스가 모두를 버렸을 때, 그리고 모두가 그레이스를 버렸을 때.

오직, 나만이 그레이스를 버린 적 없었다.

단 한 순간 조차. 그 한 순간 조차 믿고 있었다.

나의 그레이스는, 언제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그게 모든 이야기가 끝난, 에필로그여도 좋다고....

...믿고 있었다고 이 작가 새끼야.

"하아⸺"

가슴 깊이 차오른 회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가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리고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그래. 아직 이 소설은 끝나지 않았다.

제법 인기 있는 소설이니까 적어도 에필로그, 아니 외전에서만큼은 그레이스가 살아 돌아오길 기도해 보는 수밖에....

댓글을 지우기 위해 로그인한 순간이었다.

"응?"

그사이 알림이 떠 있었다.

또 플랫폼 광고겠거니 넘기려다, 내가 쓴 댓글을 떠올리곤 알림을 확인했다.

['1개'의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쪽지?

[보낸 이 : 신쓴]

...작가였다.

「스프링윈드의 천재 마법사」의 작가, 신쓴.

그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제목 : 안녕하세요. 신쓴입니다.]

작가에게 쪽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흔한 공지 한 번 쓴 적 없던 인간이 갑자기 왜... 그사이 내 댓글을 읽은 건가?

[한번 당신이 바꿔 보시겠습니까?]

바꿔?

뭘.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을.]

그레이스의 운명이라고...?

[아마도 당신이라면,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바꿀 수 있는 건 작가인 너잖아!

네가 수정만 하면 그레이스는....

[부디 그녀를 구원해 주세요.]

...뭐?

파앗⸻

마치 책장을 덮어 버린 듯, 순간 시야가 반으로 접혔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펼쳐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부교수 (1)

"편히 앉거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기사가 내게 눈길을 돌렸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들리지 않았다.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음성을, 나는 들을 수 없었다.

"⸺이번 의회에서⸻"

어느 화사한 봄날, 눈앞을 스쳐 간 꽃잎처럼, 그녀는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많은 고민 끝에⸻"

차분한 분위기를 대변하듯 가지런히 정돈된 생머리.

말로는 다하지 못할 애화(哀話)를 간직한 히아신스를 닮은 보라색 머리칼.

"그리하여 너를 내⸻"

어떤 보석조차 간직하지 못한 고아(高雅)한 빛깔을 머금은 눈동자.

그와 반대로 기쁨도 슬픔도 공존할 수 없는 창백한 음성이 흘러나온 입술.

그 모든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미의 기준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라고.

틀림없다고.

"...지금 듣고 있어?"

"예... 예?!"

한순간 백설기 같은 피부가 찬물을 끼얹듯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아까부터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던 기분 좋은 향기가 짙어졌다.

초점을 맞추자 그녀, 그레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정갈하게 차려입은 제복과 달리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흐트러져 나왔다.

그레이스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모른다.

작가의 쪽지를 읽다 사위가 암전된 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를 내려놓는 대가로 받는 것이 고작 내 옆자리니까. 하물며 다른 자리도 아닌 고작 '부교수'직...."

아주 찰나였지만, 정교하게 세공된 이목구비가 흐트러졌다.

한순간 그레이스의 얼굴에 스쳐 간 건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게 등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실례했다.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또각또각⸺

그녀가 멀어져 간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허구와 실재가 혼잡하게 뒤섞인 현실에서 가늘고 긴 호흡을 반복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끼익― 쿵.

그레이스가 떠나자 나를 속박한 것들이 사라진 것처럼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먼저 손발을 움직여 봤다.

일어나 보기도 하고, 다시 앉아 보기도 했다.

그렇게 십여 분.

나는 깨달았다.

"허 씨⸺"

['로한'은 언행이 정갈한 인물입니다. 욕설을 입에 담기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씨앗을 심기도 전에 열매를 바라는 마음은 당신답지 않으셨습니다, 그레이스 아가씨."

[평소 '로한'의 언행과 일치합니다.]

['로한'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 '1P (Probability)' 획득 〕

내가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의 등장인물, '로한'이 되었다는 것을.

* * *

하루가 훌쩍 지났다.

'부단장'이란 직책처럼, 나의 거처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웹소설만 읽던 내 방에 비하면 가히 열 배는 넓다.

때마다 하인들이 가져오는 식사는, 음식이라면 개처럼 아무거나 다 처먹는 나 같은 인간에게도 미식가의 정신을 일깨울 정도로 맛있다.

이 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가 다 안타까울 만큼.

그 외에도 만족스러운 건 많다.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최신식 마공학 도구가 갖춰진 책상, 그 책상에서 바로 고개를 돌리면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 미지근한 유리창 너머로는 중세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고층 빌딩들이 보이고, 그 혼재의 미학 속에서 자동차와 비공정은 현대와 다름없이 달리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라면, 지금 내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이 검 자루다.

사실 문제랄 것도 없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중세 판타지와 근현대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 것이 바로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의 배경이다.

이곳은 마법이 곧 과학이며, 검술은 곧 무력이다.

이 소설은 그런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로한'이란 이름으로 이런 소설에 살아가게 됐다, 는 게 지금까지 내가 도출해 낸 결론이다.

"...혼란스럽네."

밤을 꼬박 새워도 내가 이 소설에 빙의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각몽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생생하다.

내가 미쳐 망상을 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세상 너머 어딘가, 내 원래 세상에서의 '나'는 그리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모든 개연성을 배제한 채, 단 한 가지 이유를 꼽는다면.

이 소설의 작가, 신쓴.

"그자가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그 쪽지를 읽을 땐 단순히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저 화난 독자를 위한, 작가의 애교라고 생각했다.

혹은 기만이거나.

아니었다.

"로한. 끝까지 그레이스 아가씨의 곁을 지키다 죽어 간 충성심 강한 부하...."

흑화한 그레이스가 페이크 최종 보스라면, 로한은 그녀를 따라 세상을 등진 인물이다.

그러나 로한의 운명 또한 그레이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복수에 눈이 먼 그레이스는 오직 앞만 보며 증오로 벼려 낸 칼날을 휘둘렀다.

모두가 자신을 저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직 로한만이,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그레이스를 부르며, 그레이스를 지켰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런 로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주인공인 '미하엘 리펜슈타인'에게 당한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로한에게 똑같이 새겼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레이스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의 모든 원흉은 미하엘, 그 자식이 자초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의 아가씨는 절대 나를 상처 입힌 게 아니⸺

"⸺어?"

지금 뭔가 이상한 거 같은데?

왜 자꾸 그레이스를 아가씨라고....

그리고 미하엘 씹새끼를 자꾸 그 자식이라고 순화해서 생각하는 건 또 왜....

"...설마 개연성 때문인가?"

이 세계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약을 걸어 놓았다.

길게 설명 않겠다.

그건 바로,

"미하엘 씹⸺"

[욕설을 입에 담기엔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이거다.

'로한'이 아가씨, 아니 그레이스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정의 있고 정갈한 '기사'란 건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설정이었으니까.

이제 나는 로한이다. ―아마도 그렇게 납득해야만, 내가 편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고 저 메시지까지 고려하자면.

"결국 '로한'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래도 생각까지 컨트롤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씨팔!

...빡쳐서 밀어붙이니까 되긴 되네?

벌컥!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어디선가 읽어본 인상을 가진 남자가 이태리 명품관에서 팔 것 같은 고풍스러운 그리브를 철컥이며 방으로 들어섰다.

"새벽 수련은커녕 아침 수련까지 불참하다니. 그 볼썽사나운 낯빛 하며, 오늘따라 너답지 않군. 로한."

순간 나다운 게 뭔데, 라며 반박하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생각할 것이 있어 잠시...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데니스 단장님."

아 기억난다.

프롤로그였나?

아무튼 5화 내에 잠깐 등장했다가 다신 등장하지 않았던, 에클라트 기사단의 단장.

'데니스 에클라트.'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로한'이 몸담고 있는 곳이 바로 데니스의 기사단이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책에서 읽었던 묘사대로 예를 갖추자.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까다로운 곳이, 바로 여기 기사단이니까.

"곧 수련을 하러 나갈 참이었습니다. 그보다 어쩐 일이십니까? "

"어쩐 일이냐니. 자네도 '그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게 아닌가?"

"그 일이라면...."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나는 일단 로한이지만, 로한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로한에 관한 기억은 내가 읽었던 텍스트가 전부고, 엊그제 로한이 뭘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 도처까지 다가온 데니스는 얼핏 눈가를 일그렸다.

"유클리드 님. 그레이스 유클리드 님의 권유 말이야. 아아, 이제 그레이스 교수님이라 불러야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 아가씨께서 내게....

...살짝 엿 된 거 같다.

이거, 내가 아는 전개와 다르다.

"그레이스 교수님이 자네에게 왜 부교수직을 권했겠나? 수련보다 때로는 가르치며 배우는 것이 더...."

아 일단 닥치고.

아무튼, 원래 전개라면 '로한'은 그 「스프링윈드」대학의 부교수직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것도 그레이스가 제안한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그러니까,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구나.

이 대사도,

―실례했다.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줘.

아니 이 말도.

원래는 없었어야 했다.

그때였다.

[ 메인스트림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 ]

✵ 소기 목표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권유를 따라 '스프링윈드' 대학의 '부교수'가 되시오.

- 실패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 악화

- 성공 " '10P '

"그런데 말이지, 그레이스 교수님께서 자네가 거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야. 다른 인재를 찾아본다고는 하셨는데, 그렇게까지 시무룩해진 어깨는 정말이지, '그때' 이후 처음이었어."

...아 씨앗.

* * *

째깍....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

이 소설에는 회빙환이나 상태창 같은 설정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판타지.

그중에서도 퓨전 판타지에 가깝다.

때문에 지금 보이는 메시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또한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째깍....

"그때 거절한 줄 알았는데."

'윌로우가(Willow Street)'가 내려다보이는 '로만 로드'에 세워진 한 카페.

잔에 담긴 맑은 물 위로 그레이스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그 표정이 좋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재판장 한복판에 선 변호사처럼 열변을 토했다.

그럴수록 아가씨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이미 선고가 결정된 기분이었다.

"맞아.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었지. 처음부터 네게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다, 로한."

째깍....

이건 아니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다른 부교수를 구했다니.

그 순간이었다.

째깍⸺

고개 숙인 그레이스의 머리 위로 이상한 게이지 같은 게 떠오른 건.

ㅤㅤ[그레이스의 운명]

○━━━━◑━━━━●

그리고 그 게이지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소기 목표 달성 실패. ]

ㅤㅤ[그레이스의 운명]

○━━━━━●━━━●

대칭을 이루던 명암이 까맣게 변하며 멈춰 선 원.

한순간 그레이스가 등지고 있던 배경이 어그러지며 뭉개지는 착각이 일었다.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 악화됩니다. ]

나는 망연한 기분이 되어 그저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한 채 실패했다는 사실에 몸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감각이 중력을 거스르며 붕 떠올랐다.

내 시선은 한 단어만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다.

[ ...악화.... ]

야.

너 여기 왜 온 거야?

[ …악화…. ]

그레이스를 구하기 위해.

그 엿 같은 전개를 바꾸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런데 더,

[ 악화. ]

더 악화시키면 어쩌자는 거야....

····[ 「북마크」 기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북마크?

[ 「북마크」를 사용할 시 이전 페이지로 전이할 수 있습니다. ]

뭐야.

그럼 이 상황을.

아니 이 전개를, 되돌릴 수 있다고?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향해 서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롭게 조합된 활자들 속에서 그레이스를 포함한 카페의 실내가 페이지처럼 넘어가기 시작했다.

차라라락⸻

나는 어느 페이지 앞에서 계속 눈만 감았다 떴다.

그리고 나의 눈동자는 카메라 렌즈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사람을 쉼 없이 찍어 대고 있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그레이스가 말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 스프링윈드 대학의 부교수직으로 부임해 주길 바라서이다."

처음처럼.

§ 부교수 (2)

이것이야말로 정말 꿈만 같다.

모든 게 내 망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도 두근거리는 이 심장과, 한 번의 몸짓도 놓치지 않으려는 내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번 의회에서 공석인 스프링윈드 대학의 검술학과 교수직에 나를 지명했다. 물론 제자를 양성함에 힘쓰는 것이 마땅하나,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상태지."

그레이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현재 황실 친위대장 자리에서 제국을 위해 이바지하고 있다.

막연히 황실 친위대장, 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오겠지만.

현대 장성급 장교 중 4스타, 쉽게 말해 '합동참모의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랬던 인물이 일개 지잡대(독자들 사이에선 '스프링윈드' 대학을 지잡대라 불렀다)의 교수직으로 부임한다는 의미는 하나다.

"허나 많은 고민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이후로 많은 인재들이 죽었고, 부족한 자리를 메꾸는 데 노력하는 것 또한 내 일이니까."

여기서 저 '그때'란, 제국력 939년부터 945년까지 이어진 '제2차 인마 대전(人魔 大戰)'을 뜻한다.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의 배경은 그로부터 약 5년이 흐른 시점이다.

보이는 것과 달리 이곳, '하블다운'의 수도인 '블린'을 벗어나 위성 도시로 가게 된다면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일단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건, 아가씨가 어떤 이유로 친위대장 자리에서 일개 교수직으로 '좌천'도 아닌 '강등'당했느냐 , 다.

이유는 하나다.

아가씨는 정치와 아주 밀접한 자리에 있음에도, 정치를 소홀히 했다.

그저 제국을 수호하고, 민중을 보호하며, 민생을 되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살아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평판은 어떤 인물과도 견줄 수 없다.

사람들은 전쟁 영웅이자 자신들을 위해 수명을 깎아 가며 노력하는 그레이스를 아낌없이 좋아했다.

당장 인터넷에 접속해 '그레이스 유클리드', 아니 '그느님'이라고 검색만 해도 칭찬하는 댓글과 게시물들로 일색이다.

그러나 아가씨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

누구를 곁에 두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멀리해야 하는지 모른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바로 아가씨다.

어쩌면 아가씨의 저러한 성격은 전쟁이 아닌, 같은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또 그레이스를 아가씨라 부르고 있었구만.

"그리하여 너를 내 보좌, 그러니까 부교수로 두고 싶다."

그런 아가, 아니 그레이스라도 유일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로한."

그게 바로 나다.

"지금 듣고 있...."

"하겠습니다."

"...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직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저를 써 주신다면 죽기로써 최선을 다해 그레이스 아가씨를 보좌하겠습니다."

메시지 속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 소기 목표 달성 ]

나의 눈앞에는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미소가 쓰여져 있었다.

"그래만 준다면...."

그것은 한 번쯤 읽어 보고 싶었던 문장이었다.

"무척 기쁘겠구나."

연연히 웃는 그레이스.

그 모습이 너무나 갸륵하여,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 *

[ 현재 보유한 개연성 : 12P ]

무사히 소기 목표를 달성한 덕에 얻은 '10P' 외에도 내가 그레이스에게 한 답변이 '로한'과 일치했는지 추가적인 「이해도」 상승과 '1P'까지 획득했다.

근데 뭐 어쩌라고.

정작 나는 이 P, 「개연성」이 뭔지도 모르는데.

설마 '욕설 12회 사용 가능', 이딴 건 아닐 거 아니야.

"내일모레인가."

이틀 후면, 나는 그레이스를 따라 지잡대의 부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물론 그 대학이 정말 지잡대는 아니다.

말이 지잡대지 세계관 내에선 세계 최고의 교육 기관이다.

이 세계의 중추(中樞)라 불리는 인물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관문.

'스프링윈드 황립대학교(Springwind Imperial University).'

제국의 현 여제인 '아델라 히스토리아'나 '반달리 기사단'의 전신이라 불리는 '볼드윈 반달리'도 이 지잡대를 졸업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메인 빌런 격인 '퀘오스 뤼미에르 듀 누아르', 훗날 '캔터베리'의 알파(α) 등위 아크메이지가 될 '카렌 디 아릴레리아'조차 현재 재학 중이다.

이로써 전설적인 인물들을 저글링 찍어 내듯 배출한, 얼핏 보기엔 무시 못 할 명문대 중의 명문대로 보이겠지만.

독자들이 스프링윈드 대학을 지잡대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돈만 내면 개나 소나 입학할 수 있는 곳이 됐지."

이건 그 대학을 지잡대라 부르는 것을 반대하는 독자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데니스 에클라트의 딸조차 기부 명목으로 거액을 지불하고 입학했으니 말 다 했지 .

여하튼 개연성 외에도 나를 의문에 빠트리는 건 아직도 많았다.

"일종의 회귀 같은 건가."

「북마크」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한 순간 발동한 이능(異能).

이 세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건이 터진 탓에 나는 무방비하게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만회하게 만든 게 바로 이 기능이었다.

"...."

나는 한 번 더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은연중 마음속 으로 되돌리고 싶다고 바랐을 때를.

「북마크」 ⸺ 고유 기능

✵설명

- 현재 읽고 있는 페이지를 저장하여 다시 불러올 수 있다.

- 아무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을 시 최근 일어난 사건의 시발점으로 되돌린다.

오?

이번엔 기능이 사용되는 대신 정보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 때나 사용이 가능한 건 아닌 모양이다.

[ 다음 사용까지 남은 시간 : 355시간 21분 49초. ]

보통 사기적인 스킬 같은 건 제약으로 밸런스를 맞추니 쿨타임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이후 거의 4시간 정도가 지났으니, 쿨타임은 15일인 건가.

그리고 이 15일이 뜻하는 바는,

'그사이 내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되돌릴 수도 없다'이다.

내가 죽음에 관해 고민하기도 전에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

ㅤㅤㅤ ㅤ [북마크]

ㅤ「없음」ㅤ「잠김」ㅤ「잠김」

ㅤ ┣━━━━━╋━━━━━┫

ㅤ「잠김」ㅤ「잠김」ㅤ「잠김」

하나의 없음과 다섯 개의 잠김.

아하, 이게 북마크의 '슬롯'인가.

어린아이가 봐도 최대 여섯 개까지 저장되는 건 알겠다.

문제는 나머지 다섯 개를 어떻게 해금하냐는 거다.

"일단 지금을 세이브."

[ 현재 페이지가 저장되었습니다. ]

성공적으로 소기 목표를 달성한 지금이야말로 세이브하기 가장 적합한 지점이다.

나는 혹시 세이브에도 쿨타임이 있나 싶어 다시 한번 사용해 봤다.

[ 현재 페이지가 저장되었습니다. ]

다행히 세이브는 자유롭게 가능한 듯하다.

이제 다시 「개연성」.

나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읽고 싶은 단어를 되뇌었다.

「개연성」 ⸺ 고유 기능

✵설명

- 설정 상점의 화폐.

너무나 짧고 명료한 문장이지만, 나는 이걸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설정 상점?

그딴 게 있단 말이야?

"서... 설정 상점 오픈?"

[ 「설정 상점」 기능을 활성화하려면 '25P '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

아니 무슨 상점을 여는 데도 코스트가 필요해?

벌컥!

그 사이 문이 열렸다.

부단장실의 방문을 벌컥 열 수 있는 인물은 이 기사단 내에서 한 사람뿐이다.

"단장님."

나는 데니스를 바라보며 경례를 올렸다.

그는 경례도 거른 채 무작정 내 어깨를 붙들었다.

"축하해, 로한! 그레이스 유클리드 님. 아아, 이제 그레이스 교수님이라 불러야겠군. 아무튼 그레이스 교수님을 따라 스프링윈드 대학의 검술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교수긴 한데, 부교수일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데니스, 그가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 대충 감이 온다.

"우리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는 자네가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리고 있을 걸세."

"그렇게 말씀하시니 무척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말인데... 로한."

"편히 말씀하십시오."

뭐 입 안에서 잡곡밥이라도 짓듯 한참 뜸 들이던 데니스가 내 눈치를 살폈다.

"엘리 알지?"

"따님인 엘리스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그래! 그래! 내 딸 엘리스! 아무튼 지금 엘리가 자네가 부임하려는 검술학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씨익 웃었다.

엘리스 에클라트.

검술 방면에선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긴 해도,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 내에서 귀엽기로는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또한 엘리는 그레이스를 존경하는 것을 넘어 사랑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걱정 마세요. 엘리스는 제가 책임지고 졸업시키겠습니다."

이 딸바보 데니스를 쥐고 움직이는, 에클라트 기사단의 진짜 주인이다.

데니스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그와 기사단에 내재된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도 103화쯤에 일어날 '그 사건'에서도 미하엘을 도와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앞으로의 전개를 생각해 본다면 그레이스의 운명은 나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속박한 운명은 너무나 잔혹하고, 또 어려워서, 많은 이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 이제 좀 안심이 되는구만. 짐은 다 챙겼나?"

"거의 다 챙겼습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테니, 불필요한 건 가져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지. 그래도 막상 자네가 떠난다니 많이 아쉽네. 수련 끝에 술잔을 나누며 자네가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말이야. 이거 참 내가 방해한 모양이군. 마저 짐 싸게."

"못다 한 이야기는 다시 돌아왔을 때 전부 듣도록 하겠습니다."

청탁을 마치고 떠난 데니스를 뒤로 한 채 캐리어에 마저 물건을 담았다.

여벌 옷과 빛바랜 오르골, 쥐기만 해도 내 손과 하나가 된 듯한 검 자루 몇 개를 담고 보니 어느새 짐을 다 챙겼다.

그때 문득, 책상 한 귀퉁이에 놓인 손바닥만 한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 속에 보관된 사진.

그 사진 속에는 한 쌍의 남녀가 폐허가 된 세상을 등진 채 무표정히 서 있었다.

"아가씨...."

사진 속 모습은 어느 날의 '로한'과 '그레이스'였다.

말라붙은 피가 옷과 함께 피부에 눌어붙은, 그들이 겪어 온 참상이 고스란히 박제된 모습.

산발이 된 그레이스의 깨진 갑옷 사이로 크고 작은 상처가 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은 어딘가 개운해 보인다.

아마도 전쟁이 막 끝난 직후이리라.

그때였다.

[ '로한'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

"...저는 아직 그날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억들이 밀물이 되어 내게 밀려오고 있다.

"모두가 당신을 저버렸을 때, 저는 당신을 끝까지 놓지 않겠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와 함께 제도로 가자. 모든 걸 잊고, 거기서 새로....」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로한이 말하고 있었다.

"...저 또한 아가씨를 지키겠습니다."

「...'로한'....」

그것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로한과 그레이스의 어느 날이었다.

§ 부교수 (3)

일주일 후, 스프링윈드 검술학과.

"얘, 그 소문 들었어?"

"그느님이 우리 검술학과 교수님으로 온다는 거? 당연하지!"

온 강의실이 떠들썩댔다.

묘한 흥분과 두근거림으로 점철된 소란 속에서도 주제는 온통 하나였다.

"아~ 맨날 화면 속으로 봤던 그레이스 님을 실제로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아. 그것도 매주!"

"내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레이스 교수님이 신(新)기사들을 육성하기 위해 친위대장 자리까지 자진 내려놓으셨대!"

"리얼? 와... 괜히 그느님, 그느님 하는 게 아니었구나...."

강의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까지도 그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나 기사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그레이스 유클리드'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멈춘 건 앞문이 조용히 열린 순간이었다.

"...."

한 걸음 내딛는 그레이스를, 학생들은 설레임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그런 그레이스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계단식의, 300명 정도는 너끈히 수용 가능한 강의실 내부를 둘러보자 새삼 추억이 되살아난다.

아,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학생들 사이에서 앉아 있었는데.

"...반갑습니다."

단상에 올라선 그레이스가 뒷짐을 쥐고 섰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 나를 포함한 학생 모두는 바짝 긴장했다.

"앞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칠 그레이스 유클리드라고 합니다."

제국에도 몇 없는 웨펀 마스터라던가, 모든 기사들의 드림이라 불리는 황실 친위대장이라던가, 제2차 인마 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던가 하는 수식들은 필요가 없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레이스가 이룬 위업(偉業)은 어떤 칭호로 장식할 수 없으며, 흠잡을 데 없는 외모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억지로 붙이려 하면 되레 그 단어들이 초라해지고, 그녀의 이름과 성에 담긴 의미만 퇴색시킬 뿐이다.

그녀의 몸태를 따라 고고히 흐르는 기품은 유클리드 가문의 전통이었다.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와 완벽한 조화(調和)를 이루는, 그레이스만이 가진 고유한 미(美)처럼.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가르쳐 드리죠."

그 인사를 받아 주는 학생은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온전히 숨을 멈춘 채, 1초라도 더 많이 그레이스를 눈동자 속에 새기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혹시 질문 사항... 은 없는 듯하군요."

침묵으로 휩싸인 장내에 곤란한 듯 신음하던 그레이스가 나를 힐끔거렸다.

학생들을 따라 그레이스에게 매혹되어 있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반갑다. 나는 그레이스 교수님을 보좌해 너희들을 가르치게 된, 부교수 로한...."

"미친, 진짜 그레이스 님이 교수님으로 오게 될 줄이야..."

"이거 몰래카메라 같은 건 아니겠지...?"

"괜히 엄마가 스프링윈드 가라고 날 괴롭혔던 게 아니었어...."

...당최 내 말을 듣고 있질 않다.

강의실 내에서 나의 존재는 공기였다.

오직 그레이스만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런 그레이스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고.

나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내가 아니라도 '로한'이란 인물이 이런 사람이었고,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웨펀 마스터라는 명암에는 당연히 가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보다 여긴 중요한 대목이다.

어쩌면 모든 일이,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미리 한 가지 스포일러 하자면,

"그럼...."

이 강의를 계기로 그레이스를 향한 학생들의 시선이 180도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시작하겠습니다."

허리춤에 찬 실습용 검에 손을 가져가는 그레이스.

곧 뽑아 든 검을 눈앞으로 바로 세운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츠즈즛!

시작부터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오러'를 거침없이 방출해 내고 있었다.

* * *

그것은 자연이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듯, 선선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어온 순간.

우리는 자비 없는 폭풍우를 맞이했다.

사방으로 번진 마나가 얼굴과 어깨를 적셨고, 그것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폭풍이 밀려와 우리를 덮쳤다.

그녀 앞에서 우리는 허수아비였다.

폭풍우 앞에서 언제 발목이 부서질지 모를 허수아비들은 도저히 예상하기 힘든 「오러 스톰」 속에서 휘청이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고난이 끝났을 무렵에는 마나로 젖은 몸이 하얗게 얼어붙어 갔다.

한 떨기의 눈송이가 허공에 피어난 듯한 착각은 착각이 아니었으며, 그녀의 칼날은 고요 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바닥에 떨어져 내린 마나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이것이 제가 주로 사용하는 「사계(Four Seasons)」입니다."

찰나였지만, 격동적인 검무를 펼쳤음에도 그레이스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렇게 사용하면 됩니다."

그 말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학생 하나가 생각 없이 손을 들었다.

아마도 저 학생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본인이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어... 어떻게요?"

한순간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로 통일됐다.

나는 물음표로 떡칠이 된 학생들을 바라보며 한숨 지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완벽한 그녀조차 완벽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러니까."

츠즈즛⸺

⸺파앙!

"이렇게."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다는 것이다.

"이해했습니까?"

전혀.

* * *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특별하게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언제나 소수였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소수이기에, 결코 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수가 나쁜 것일까?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고유(固有)를 억지로 이해한 척,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일까?

오늘 강의실에서 보았던 분위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로한."

"예, 교수님."

집무실 소파에서 수그리고 있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위축된 어깨와 움츠러든 손마디.

그 몇몇의 제스처가 그녀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그녀는 언제나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강의... 네가 보기엔 어땠어?"

이해한 척을 해야 될까, 아니면 나 역시 학생들과 같은 시선으로 대답해야 할까.

진짜 로한이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사실 집무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날아 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구나."

그레이스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젠장, 가슴이 저려 온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어쩌면 이것이,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반 레온하트가 제국력 743년 무렵에 그렸던 '너울치는 풍경'이란 그림을 알고 계십니까?"

내 물음에 그레이스는 나를 응시했다.

그녀를 빗겨 간 내 시선은 집무실 한쪽 벽을 향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 벽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던 그레이스가 갸웃거렸다.

"이 그림?"

"예."

"처음 봐."

"그럼 처음 보셨을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응?"

큰일이다.

눈으로만 읽었던 그레이스의 '기운 빠진 모습'을 실제로 접하니 진정이 되질 않는다.

힘없는 이목구비로 나를 바라보는 게 어찌나 애달프면서도 귀엽던지....

...정신 차리자. 나는 지금 로한이다. 최대한 로한답게 행동해야 해.

"이 그림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가늠할 수 있으십니까?"

내 질문에 그레이스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저 주름은 그레이스가 엄청나게 집중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나도 모른다.

저 그림이 뭔지, 언제 그려진 건지, 또 누가 그린 건지.

이반 레온하트도, 너울치는 풍경도, 제국력 740... 아무튼.

다 지어낸 얘기였다.

"모르겠어. 그냥 아름다운 그림... 같아."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느꼈던 기분이 바로 그럴 겁니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진실은 차가운 현실이 되어 그녀를 얼려 버렸다.

밀로의 비너스처럼 동상이 되어 버린 그녀를 바라보던 내가 말을 이었다.

"하나도 모르겠지만, 아름답다는 건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죠."

소위 천재란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 모르는 것처럼, 어디서부터 시작된 마나가 어디를 거쳐 어디로 사출되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천재란, 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더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다.

모두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있을 때, 오직 그만이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고찰했다.

"오늘 그레이스 교수님의 「사계」는 언제나처럼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보여 줘야 할 건 '어떻게 휘두르고 찌르느냐'지,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리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그레이스는 작게 꿈틀거렸다.

내 말이 불편할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이 더 이해가 되지 않겠지.

당연하다.

우리가 그레이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레이스 또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그레이스의 속마음은 대충 이럴 것이다.

'왜 이걸 이해 못 하는 거지?'

사고의 오류.

내가 아는 것을, 당연히 남들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일반화'.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무릇 '교수'란, 자신의 '앎'을 강요하는 자리가 아니다.

무지를 이해하고 나아가 지식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레이스가 앉아 있는 자리의 존재 이유다.

그리고 내가 그레이스의 옆자리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내가 어떤 식으로 강의를 해야 해?"

그레이스가 내게로 온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아찔했다.

"그레이스 교수님께선 오늘처럼 하시면 됩니다."

흥미를 이끄는 건 이만하면 됐다.

자칫 아무런 명분 없이 내가 나섰다간 그레이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기는 건 물론 '부교수'라는 직함에도 어울리지 않다.

나의 계획은 그저,

"대신 설명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그레이스가 자발적으로 내게 강의를 위임하는 것이다.

"로한이 설명을?"

"예. 제 짧은 식견으로 보건대, 그레이스 교수님께서 이번 강의의 주제를 사계로 잡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 말이 옳아."

"다행입니다. 마침 제가 곁에서 사계를 많이 지켜봤으니, 설명하는 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레이스는 팔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고민을 했다.

그와 동시에 미안한 시선도 잠깐이지만 나를 스쳐 갔다.

이런 상황을 그레이스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더욱이 내게 부교수직을 권하던 순간에도 미안해할 정도로 망설였는데, 되레 자신이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더 미안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로한."

됐다.

이것으로 앞으로의 전개를 다르게....

그때였다.

〔 전개 수정 〕

그 메시지를 읽은 순간.

〔 10P 획득 〕

한 가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마도 언젠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읽고 있지 않을까.

그런 기이한 생각이었다.

§ 부교수 (4)

첫 번째 문제는 해결했다.

무사히 그레이스를 따라 스프링윈드의 부교수가 되었고, 그녀의 부족한 강의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설명도 내가 맡았다.

그러나 아직 애매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한담...."

지금 나는 급했지만, 내게 주어진 문제는 급하다는 이유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3포인트가 모자라."

지금 내가 가진 「개연성」은 22개.

진짜 딱 3만 더 모으면 「설정 상점」을 개방할 수 있을 텐데.

"큼, 큼."

일단 목을 가다듬었다.

포인트를 벌 수 있는 방법은 전개에 순응하거나 수정하는 거 외에도 한 가지 더 있다.

그건 바로.

"오늘 아가씨의 강의는 경직되어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탓일까."

분명 '로한'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로한은 지금처럼 말했다.

그게 로한에게 부여된 '설정'이니까.

「"...학생들이 교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모두 검을 처음 쥐어 본 이들처럼 경직되어 있더군요. 이렇게 해선 안 됩니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읊고 싶은데, 저건 그레이스를 면전에 두고 하는 말이다.

설정상 로한은 직설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그 성격은 나와 맞지 않다.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아마도 명료함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보고 체계의 버릇이겠지.

그래서인지 로한은 이따금 그레이스에게 남몰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티를 잘 안 내서 그렇지, 그녀 또한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왜 지금까지 깜깜무소식이지?

포인트가 안 오른다.

내 예상대로라면 언행이 일치한다 어쩐다 하면서 포인트가 올라야 될 텐데.

...잠깐.

그러고 보니 로한의 「이해도」라는 건 또 뭐지?

생각할 게 너무 많아 잠시 미뤄 두고 있었는데,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이해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뜨곤 했다.

그래 봤자 두세 번 정도긴 해도, 그냥 그러려니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일단 정보를 확인해 보는 수밖에.

어쨌든 이것도 개연성만큼이나 중요한 설정일지도 모르니.

「이해도」 ⸺ 로한

✵설명

- 로한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를 나타낸다.

- 이해도가 쌓일 시 대상을 더 명확히 알게 된다.

✵현재 이해도 : 0.1%

...아무리 읽어 봐도 모르겠다.

이해도를 나타내는 건 알겠다.

근데 뭐.

더 명확히 알게 되면 뭐가 좋은 거냐고.

난 이미 이 소설, 아니 이 세상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는데.

역시 중요한 게 아니었나....

"...하아."

우선 현실을 직시하자.

다음 강의는 이틀 뒤.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계」의 도입부를 연구해야만 한다.

답답한 마음에 자신 있게 저질러 버리긴 했는데, 이젠 내가 문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나도 처음일뿐더러 , 명색이 '부교수'인데 기본적인 소양은 갖춰야 하지 않겠나.

나는 '로한'이지만, 로한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육체는 완성되어 있는데 기술이 미완이란 말이다.

그레이스가 떠난 집무실에 홀로 서 있던 나는 책장 유리에 반사된 남자를 마주했다.

평범한 인상. 그래도 꾸미면 잘생길 것 같은 얼굴.

반듯한 어깨 하며 단번에 봐도 오랫동안 수련했다는 걸 알 수 있는 몸.

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운동선수고, 이곳의 관점에서 보면 기사 그 이하, 이상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로한은 강한 인물이다.

그레이스처럼 웨펀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소드 마스터 정도는 된다.

하지만 '웨펀 마스터'나 '소드 마스터' 그리고 '아크메이지' 같은 건 단순한 '칭호'에 불과하다.

이 세계에는 기사고 마법사고 구분 없이 등급을 나누는 다섯 개의 등위가 존재한다.

현재 그레이스와 같은, 등급 내에서 가장 높은 등위.

알파(α).

알파 등위의 경우 제국의 의사에 개입할 만큼 입김도 상당할뿐더러 그 한 사람을 따라 최소 수십만 명이 움직이게 된다.

알파라는 문자 그대로 첫 번째에 위치하는, 세상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존재를 뜻하는 등위니까.

그레이스가 정말 예외적인 존재긴 하지만, 그건 그레이스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다음 으로 베타(β), 감마(γ), 델타(δ), 엡실론(ε).

스프링윈드에 입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엡실론이고, 로한인 나는 감마 등위 정도 된다.

아마도 이 감마 등위가 로한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일 것이다.

그것은 여느 일반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로한은 평민이었다.

하물며 성조차 없는 평민.

심지어 약쟁이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로한이 과거를 회상할 적에(당시 읽었을 땐 두세 줄 정도였던 것 같다) 아편굴 같은 곳에서 좀 굴러다녔다는 말도 했었다.

...그랬던 로한을 구제한 게 바로 그레이스다.

이렇게 되새겨 보니 로한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어째서 그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은 채, 목숨을 다해 끝까지 충성했는지를.

그레이스....

...당신은 로한의 구원자였구나.

['로한'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그 순간 메시지 속에서 지난번과 같은 어떤 기억이 내게 밀려들고 있었다.

「"...로한...."」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어떤 기억 속에서, 그레이스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너 또한...."」

이 순간만큼은 내가 로한이고, 로한이 나였다.

그건 착각이었다.

「"...포기하지 마...."」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없는, 너무나 선명한... 착각.

*그레이스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그것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술은커녕 이론조차 모른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쇠붙이라면 혼자 먹을 요리를 하며 식칼을 잡아 본 게 전부다. 내가 살던 현실은 이곳과 달리 평화로운 세상이었으니까.

그래도 작가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를 이 세상에 던져 놓진 않았을 텐데.

"그걸 개방하는 방법밖엔 없는 건가."

「설정 상점」

이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무려 「개연성」을 코스트로 소모하는 기능이다.

개연성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확실한 가능성이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이 「개연성」은 그 '가능성'을 '인위적'으로 올리는 것.

이렇게 보니 개연성이 아니라 이거 완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니냐?

"안녕하세여, 교수님."

생각에 잠겨 복도를 걷고 있자 모르는 학생이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낯설기도 하고, 아직 익숙지 않아 그 인사를 받아 주지 못했다.

뭐 인사야 다음에 만나면....

"잠깐."

나는 그 학생을 도로 불러 세웠다.

내게 돌아선 학생은 「마나 이해·고급편」이라는 전공 서적을 품에 안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한 가지 묻겠다."

이거 버릇이 되게 중요하구나.

억양이나 말투 하며 , 이제 보니 나 완전 로한이네.

"엘리스 에클라트라는 학생을 알고 있나?"

"엘리요? 알죠."

환한 얼굴로 반색하는 학생.

다행히도 엘리를 아는 모양이다.

"지금 엘리... 에클라트는 어디 있지?"

"강의 시간도 끝났으니 아마 대학가에 있지 않을까여?"

"대학가?"

아.

스프링윈드의 대학가라면 '리틀 히스(Little Heath)'인가.

내가 알기로도 이따금 등장인물들이 이 거리에서 식사를 해결하거나 여가 생활을 즐기곤 했다.

인싸 중의 인싸인 엘리가 이 시간에 혼자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을 리는 없겠고.

다행히 금방 찾을 수 있겠다.

"도움이 되었다. 가라."

"넹...."

일단 엘리를 만나자.

엘리와 호감을 쌓아 놓으면 언젠가 내게 힘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귀엽고.

또한 그레이스라면 사족을 못 쓰니, 그레이스를 이용하면 쉬울 거다. 게다가 귀엽고.

어쩌면 등장인물과 대화를 하며 개연성을 얻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귀엽고.

문제라면 그레이스를 이성 수준으로 좋아한다는 건데, 귀여우니 상관없나.

"교수님."

그때 다시 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나를 부른 학생에게 내가 돌아섰다.

말없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우물거리던 학생이 지그시 물어왔다.

"저기여, 이번에 새로 오신 교수님이시져?"

"부교수다. 검술학과의."

"아! 부교수님이셨구나...."

"용건만 간단히. 바쁘다."

빨리 가야 한다.

엘리가 취해서 '그 상태'에 돌입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저기...."

"지금 '저기'만 세 번째다."

"그게 그러니까, 성함이... 뭐예여?"

"로한."

"그렇구나... 아, 죄송해여. 그럼 안녕히 계세여. 아니지 안녕히 가세여? 어라, 이게 맞나? 헤헤...."

어딘가 모자란 아이인가?

스프링윈드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 여기 돈만 내면 개나 소나 들어올 수 있었지.

빌어먹을 인마 대전만 안 일어났어도....

"가겠다."

더 얘기했다간 나까지 이상해지겠다.

* * *

오늘 막 부임한 부교수가 개인적으로 학생을 찾아간다는 건 꽤 섬찟한 이야기지만, 명분이 안 서는 건 아니다.

나는 검술학과 부교수 이전에,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과거형이긴 해도 데니스가 부단장 자리를 맡아 놓는다고 호언장담한 것도 있고.

어쨌든 지금 나는 부교수가 아닌 부단장의 입장에서 엘리를 찾아가는 거다.

근데 어딨을까.

도대체 어디서, 술 나발을 불고 있을까.

아직 해도 저물지 않았는데.

"전화."

현대적인 도시에 중세풍 의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잠시 시대적 배경을 잊고 있었다.

내겐 스마트폰이 있다.

그렇다면 부단장의 딸인 엘리의 전화번호도 틀림없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엘리스가 몇 번...."

1. 그레이스 유클리드 님

2. 데니스 에클라트 단장

3. 엘리스 에클라트

...?

왜 연락처에 저장된 번호가 단 3개지?

로한 너도 참... 외로운 인생을 살았겠구나.

나도 저장된 연락처는 7개뿐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낫네.

각설하고 곧장 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리가 전화를 받은 건 연결음이 시작되고 한참이 지난 뒤였다.

"엘리⸺"

[오늘 아무도 못 나가! 무저껀 마셔! 무저꺼어어어언⸺ 네, 엘리스 에클라트입니다.]

방금 뭐지?

"엘리스 님. 접니다."

[누구라고요? 아 시끄러. 조용히 좀 해 봐! 잘 안 들리잖아! 여보세요?]

"엘리스 님 저 로한...."

[이여어어어어얼⸺! 술고래 수잔 흑장뮈이이이⸺!]

환장하겠군.

"...지금 에클라트 단장님과 함께 있습니다."

뚝⸺

그 순간 끊긴 전화.

뭐지 싶어 다시 연결하려던 순간 엘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한 차례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로한? 지금 아빠 옆에 있어?]

이전과 달리 고요해진 통화.

또렷해진 엘리의 음성에 나는 쓰게 웃었다.

"일단 어디십니까? 제가 그쪽으로⸺"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내가! 내가 그쪽으로 갈게! 어디, 어디서 만날까?!]

당연히 딸바보 데니스라도 거액의 기부금까지 내놓으면서까지 공부하라고 보낸 자식이 오후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본다면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각혈할 것이다.

엘리도 그 사실을 아는지 단번에 술이 깬 모양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의 시선이 한 식당에서 멈춰 섰다.

"그럼 '10서클 대마법사 할매 스튜'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단 밥 좀 먹자. 이 대책 없는 아가씨 해장도 시킬 겸.

[알았어! 금방 갈게! 제발 아빠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지?!]

"참으로 어련하십니다, 엘리스 님."

[....]

〔 '1P' 획득 〕

§ 부교수 (5)

엘리스 에클라트.

그녀는 짧지만 강렬한 인물이다.

스프링윈드 대학을 자퇴한 50화 이후부터는 등장이 뜸하긴 해도, 그 이전 화에서 보여 준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엘리를 추억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씨...."

스튜가 식을 때까지 손도 대지 않던 엘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한 듯 한쪽 눈가를 가볍게 찡그린 시선은 나를 향했다.

정말 읽기 쉬운 표정이다. 엘리는 그만큼 순수한 아이였다.

"나한테 구라쳤네?"

"구라가 아니라 거짓말입니다. 부디 언행을 단정히 하십시오."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

쿵.

"...됐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손목으로 식탁을 사뿐히 내려친 엘리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꽤 열이 받을 거다.

지금쯤이면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일 텐데, 그걸 내가 방해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엘리에게는 가불기인, 데니스까지 들먹이면서.

한숨을 내뱉던 엘리가 주변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빠 진짜 안 온 거 맞지?"

역시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혼자입니다."

"로한이 싱글인 건 나도 알고. 그래서 왜, 왜 갑자기 찾아온 거야? 며칠 안 봤다고 내가 보고 싶어진 건 아닐 테고."

저 근본 없는 농담 그리고 자신에게 취한 듯한 잘난 말투까지.

그레이스에 이어 엘리까지 마주하니 정말 내가 소설 속에 들어온 게 실감이 났다.

아니 이제 현실인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오늘 강의에 출석하지 않으셨더군요. 그것도 어제부터, 하루 종일."

그 말에 엘리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찔리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오늘 그레이스의 강의에서 엘리는 찾을 수 없었다.

오후부터 술 마실 작정이었으면 오전부터 준비했겠고,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어제도 빠진 것까지 추리하는 건 내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근데 그걸 로한이 어떻게 알아? 기사단은? 부단장이 이런 일로 부재해도 되는 거야? 설마 아버지가 나 감시하라고 몰래 보냈어?"

데니스가 딸바보인 건 엘리가 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녀의 아버지를 들먹였을 때 허둥지둥한 것도 그 때문이고.

엘리의 방황은 단순한 반항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내면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는 최대한 신중하게 말해야 한다.

"단장님께선 언제나처럼 엘리스 님을 걱정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렇다고 부하에게 믿음직스러운 따님을 감시하라고 명할 분은 아니시죠."

"그럼 뭐, 휴가야?"

"늦게 전하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만, 저는 이제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이 아닙니다. 잠시 부단장 자리를 내려놓고 그레이스 교수님과 함께 검술학과의 부교수로 지내게 되었...."

순간 엘리의 눈이 최대로 커졌다.

"그, 그, 그, 그, 그레이스 니이이이임⸺?"

이런 반응일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이야.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로한 네 말은, 그레이스 님이 검술학과의 교수님으로 오셨단 말이야?!"

"예."

"왜!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아니지! 왜 강의에 나 안 불렀어!"

"연락이야 술자리 소음에 묻혔을 테고, 강의에 출석하지 않은 건 엘리스 님의 선택이지 않습니까?"

"...."

흥분했던 엘리스는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는지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쳤다.

그녀가 이내 물었다.

"로한이 검술학과의 부교수로 올 줄이야... 생각도 못 했어. 그 전에 아빠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뭐야 그 눈빛? 왜 날 그렇게 봐? 말할 거야? 말할 거지! 야!"

나는 혼자 거품을 무는 엘리를 말없이 주시했다.

'로한'과 엘리는 서로 5년 넘게 본 사이지만, 그렇다고 이번 일로 그녀를 꾸짖을 생각은 없다.

"엘리스 님."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건, 엘리에게도 존재했으니까.

"오늘따라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이십니다."

"...네가 뭘 알아."

엘리는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고.

그래.

이전의 로한이라면 아무것도 몰랐겠지.

하지만 난 이전의 로한이 아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엘리.

네가 왜 오후부터 술을 마셨는지.

어째서 그 넓은 이마에 '고민'이란 단어가 깊게 패였는지.

지금 네가, 어떤 고민을 떠안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까지도....

"엘리스 님께선 어렸을 때부터 검과 친하지 않으셨죠."

오기 어린 엘리의 눈망울이 나를 향한다.

반쯤 열린 입술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알코올이 섞인 여린 숨만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엘리스 님은 노력하셨습니다. 그 희고 작은 손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엘리가 식탁에 올려놓았던 손을 아래로 감췄다.

허나 그 노력은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걷지도 못하셔서 제가 화장실까지도 업어다 드려야만 했었죠."

부끄러웠던지 엘리는 풍성하고 붉은 단발 사이로 얼굴을 반쯤 감췄다.

미미하게 떠오른 홍조는 어느 날의 어린 엘리와 닮아 있다.

나는 그녀를 읽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모든 묘사와 행동 그리고 아픔을.

"엘리스 님이 스프링윈드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셨던 날,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꿈이란 단어가 조롱거리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오직 엘리스 님만이 꿈을 꾸고 계셨으니까요."

그제야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엘리.

고집스럽게 느껴지던 이목구비는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한결 풀어져 붕 떠오른 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엘리는 현실을 직시할 때다.

"감히 청컨대, 검을 포기하십시오."

"...지금 뭐라 그랬어?"

나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분명 엘리는 제대로 들었다.

엘리는 검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녀에게는, 재능이란 게 없으니까.

"너 지금...!"

금방이라도 내 면상에 스튜를 엎어 버릴 것 같은 엘리의 기세에도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엘리스 님은 검과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엘리는 당차고 쾌활한 모습과 달리, 마음만큼은 어떤 등장인물보다 여리고 순수하다.

아마도 이 한마디가 엘리를 무너트릴지도 모른다.

아니, 무너트려야만 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쌓기 위해선.

「"포기해라."」

그리고 이 말은, 그레이스가 엘리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너에겐 재능이 없다, 엘리스 에클라트."」

그레이스에게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들은 순간 엘리는 자신의 세상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진실.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듣는, 가장 잔인한 말

그것이 바로 엘리가 스프링윈드를 자퇴하는 계기다.

"저는 엘리스 님이 스프링윈드를 무사히 졸업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레이스가 내 0순위라면, 엘리는 내게 1순위다.

어쩌면 같잖은 동정일지도 모른다. 어쭙잖은 참견이고 간섭일지도 모른다.

재능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꿈을 접어야만 했던 '나'를.

그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했던 '현실'을.

...엘리에게 투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하여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엘리 또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지랄하지 마...."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엘리.

그 표정에는 지금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너무나 잘 읽혔다.

나는 그런 엘리를 응수하며, 그녀의 꿈에 작별을 고했다.

"대신 마법을 배우십시오."

엘리스 에클라트.

훗날 아크메이지가 되어 미하엘의 대의에 크게 기여하게 될 인물.

"그것만이 기사가 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선, 내게 그녀가 필요하다.

* * *

칙―

목욕을 마친 엘리스는 기숙사 침대에 걸터앉아 들고 있던 캔맥주를 땄다.

고개를 들어 단숨에 반까지 들이킨 그녀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

로한이 바라보던 것과 달리, 엘리스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그저 멍했다.

머릿속에서는 식당에서 로한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고장난 카세트 테잎처럼 반복되고 있다.

― 지금부터라도 염동을 배우세요. 엘리스 님의 재능은 그쪽에 있습니다.

「염동」은 중급 마법이다.

그렇긴 해도 마법 좀 다룬다는 스프링윈드의 학생들에겐 자다 깨도 발현할 수 있는, 거들떠보지 않는 잔재주일 뿐이다.

비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결국 검을 포기하고 택한 게 그런 마법이냐며 조롱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겨우 잔재주 따위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란 건 로한이 더 잘 알잖아...."

그런 세상에서 엘리스가 검을 쥐고 싶은 이유는 하나다.

인마 대전 때처럼, 어머니를 잃어버렸을 때와 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그녀의 어머니는 인마 전쟁 당시 죽었다.

전쟁에서 죽음은 흔한 경우였다. 사지가 멀쩡하게 죽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하지만 엘리스의 어머니는 경우가 달랐다. 그 죽음만큼은 막을 수 있던 것이었다.

― 도망가 엘리! 어서!

그 말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자 유언이었다.

엘리스의 눈앞으로 그날이 생생하도록 펼쳐졌다.

폐허가 된 거리에서, 발목이 부러져 뛸 수 없었던, 자신을 위해 악마들과 싸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나는 기사가 되어야만 해."

베타 등위의 기사인 아빠의 피를 물려받았으니까, 나도 기사가 될 수 있어. 로한 같은 바보도 기사가 됐는데 나라고 못 하겠어?

틀림없이.

틀림없이 나는 기사가....

― 마법을 배우십시오.

쩌저저적⸺!

그 순간 엘리스가 들고 있던 캔맥주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네가 뭘 알아!"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완전히 얼어 버린 캔은 손에 힘을 준 순간 깨진 얼음처럼 부서져 내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같이 얼어 버린 맥주만 간신히 들고 있던 엘리스는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로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보고 있노라면 늘 듬직하고 장난을 치고 싶던 얼굴이 오늘따라 얄미웠다.

"...로한."

우웅⸺

대기에서 공명하는 마나들.

두둥실 떠오른 날카로운 캔 조각들이 엘리스의 눈앞에서 불규칙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넌 언제나 내게 옳은 말만 했었지. 오늘처럼."

로한이 엘리스에게 했던 조언들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더욱이 자신에게 검을 가르친 것도 로한, 바로 그였다.

지금까지 그녀가 검을 놓지 않은 것은 로한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로한은 그녀에게 이미 친오빠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하라는 거야...?"

흐려지는 말끝처럼 마나가 사라지자 갈피를 잃은 캔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부 옳은 말이라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엘리스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누군가가 확실히 말해 주기 전까진 최대한 부정하고 있었을 뿐.

"나보고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구...!"

그랬던 불완전한 확신이 오늘에서야 처참히 부정당한 것이었다.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침대에 웅크린 엘리스는 밀려오는 슬픔에 저항하지 못했다.

"...엄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방황 속에서 끝나 버린 하루.

어디든 도망치고 싶은 밤이었다.

§ 미묘함 (1)

후회가 된다.

그 후회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이전의 나였더라면 자다가 일어나 이불을 걷어찼을 수준의 민망함이 몰려왔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검을, 꿈을 포기하라고 말해 버렸으니...."

눈을 감자 엘리의 얼굴이 생생하도록 그려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슬픔으로 얼룩진 그 눈망울이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조금 성급했던 걸까.

그래도 북마크를 사용해 페이지를 되돌릴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 해야 할 말이었고, 언젠가 엘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다만 그게 조금 더 빨리 도래했을 뿐.

무엇보다 내 예상과 다른 전개였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득까지 생겼다.

〔 전개 수정 〕

〔 10P 획득 〕

또다시, 내가 모르는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엘리의 무언가가, 내가 의도한 대로 변화하겠지.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미묘하다. 어딘가 미묘하게...."

...다르다.

엘리는 내가 기억하는 엘리가 아니었다.

'로한'은 데니스의 부하다.

그것도 에클라트 기사단의 부단장.

나와 엘리가 안면이 있긴 해도, 그녀가 내게 말을 놓진 않았다.

그런 설정 따윈 없었다.

"이런 의미인가."

전개가 수정된다는 게, 이런 식으로 결과가 바뀐다는 뜻이었나.

이렇게 되면 「이해도」라는 게 중요해질 수도 있다.

계속해서 전개를 수정하다 보면 언젠가 나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읽고 있을 테니까.

또한 변화는 엘리 외에도 있었다.

내가 모르는 기억들.

오직 '로한'과 얽힌 기억들.

― 하루는 걷지도 못하셔서 제가 화장실까지도 업어다 드려야만 했었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마치 내가 겪은 양,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이런 장면을 읽어 본 기억이 없었다.

「이해도」 ⸺ 로한

✵현재 이해도 : 1.1%

로한의 이해도가 이전보다 대폭 상승한 탓일까.

내 일부분이, 그러니까 손가락 끝부분도 되지 않는 작은 일부가 '로한'의 것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실제로 그게 느껴지고 있다.

이 사이에 낀 고기처럼 은근히 찝찝하면서도 불편하게.

이러다 내가 진짜 로한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지...

...아, 이미 난 로한이구나.

설정 상점 오픈.

머릿속으로 「설정 상점」을 떠올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엘리를 만난 덕분에 'P'도 35나 모였다.

이제 나는 이 기능을 개방할 수 있다.

부디 운명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 나오길....

[ '25P'를 지불합니다. ]

[ 「설정 상점」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

ㅤㅤㅤㅤㅤㅤ[설정 상점]

「성장」ㅤㅤ「식스 센스」ㅤㅤ「북마크 추가」

「상태창」ㅤ「이해도 추가」ㅤ「설정 상점 강화」

[ 기능 개방 특전으로 한 가지 설정을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이 기분.

이번엔 뭔가 게임에서나 보던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일단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려 특전으로 저 여섯 가지의 설정 중 한 가지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럼 그렇지.

괜히 25P나 필요할 리 없겠지.

일단 신중하게. 흥분하지 말자.

처음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살펴보는 거야.

「성장 Lv.1」 ⸺ 설정

✵설명

- 육체적 한계를 돌파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 레벨 증가 시 성장 속도 증가 및 여러 가능성이 열린다.

이거다.

이거야!

이거면 나도 그레이스만큼, 아니 그레이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어차피 '로한'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금 가진 힘으로는 그레이스의 운명을 절대 바꿀 수 없다.

나는 그레이스의 운명이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까지 상정해야만 한다.

그레이스가 악마와 계약해 이 세계의 '종말'이 되었을 때.

그레이스를 지키고 나아가 그녀를 도와 세상을 '멸망' 시키기 위해선 말이다.

...이건 진짜 최악의 경우다.

내가 그레이스의 운명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을 때 선택해야만 하는.

'세상의 악(惡)'이 되어 버리는 전개.

어찌 됐든 나는, 그레이스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이해할 것이다. 원작의 '로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 미친 듯이 구르는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 이 설정은 킵하고, 다른 것도 살펴보자.

혹시 더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식스 센스 Lv.1」 ⸺ 설정

✵설명

- 오감을 초월한 감각을 사용하여 평소 느낄 수 없던 것을 감지하게 된다.

- 운명을 보다 명확히 가늠하게 된다.

- 레벨 증가 시 감지 능력이 증가한다.

"이건 좀...."

애매하다.

뭐 식스 센스, 육감 하면 지금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는 그게 전부잖아.

'운명을 보다 명확하게 가늠하게 된다'. 이게 좀 혹하긴 하는데, 특전까지 걸기엔 불확실한 도박이다.

그 외에 「북마크 추가」, 「설정 상점 강화」, 「이해도 추가」는 내 '고유 기능'과 관련된 설정들이었다.

북마크 하나 추가하는데 30P. 이건 우선 패스

설정 상점 강화 500... 어후 패스.

그중에서도 이해도 추가는 어떤 대상의 이해도를 10P를 주고 0.1% 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필요한 기능이긴 한데, 이것도 지금 내겐 너무 비싸다.

다른 거 다 제쳐 두더라도 이 설정이 가장 문제다.

아... 이거 사야 되나.

아무리 나라도 이 설정 들어간 소설은 진짜 꿀잼 아니면 피했는데.

「상태창 Lv.1」 ⸺ 설정

- 인물 및 사물의 정보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게 된다.

- 레벨 증가 시 수치의 명확성이 증가하고 보다 상세해진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맞는 거 같다.

이게 막상 현실이 되니 무조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상태창이란 설정을 싫어했던 것도, 읽기도 개같고 페이지나 잡아먹는 낭비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도 좀... 이 설정은 사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고. 생각을.

예를 들어, 저 새끼가 나보다 얼마나 센지 어떻게 알아.

회귀를 한 힘숨찐인지 환생을 한 힘숨찐인지 뭐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장비.

상태창으로 딱 볼 수 있으면 적어도 사기당할 일은 없잖아?

그리고 봐!

그냥 '수백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전설 스태프를 든 대마법사가 우로보로스를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날려 버렸다',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지만.

'팔로워 100만 명의 대마법사가 마공 35만짜리 스태프로 우로보로스를 원킬 냈다', 하면.

'이야 그거 참 개쩌는 BJ대마법사구나!' 하고 물개 박수 치잖아.

이게 팩트... 에휴 내가 지금 왜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거냐.

그래도 언젠가 사긴 사야 하는 설정이다.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선 내 척추로 검을 만들어 바쳐도 모자란 마당이니까.

"...우선 내가 강해져야만 한다."

현재 내 목표와 가장 부합하는 설정.

나는 그 설정을 선택했다.

〔 설정 추가 : 「성장」 〕

'P'가 소모된 것 외엔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달라졌나 싶기도 하면서, 달라진 거 같기도 하다.

"방법은 수련뿐인가. 수련하지 않은 지도 꽤 오래...."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아니 내가 운동을 하겠다는 거야 지금?

...허튼소리 .

움직이는 게 싫어서 웹소설을 읽는 게 취미였던 게 바로 나다.

그랬던 내가 운동을 한다? 이게 말이 돼?

한 2만 개연성은 들고 와야 말이 된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수련을 하는 건 당장 다음날 지구가 멸망한다는 신호와 다름없다.

그만큼 나에겐 심각한 변화지만....

"...하지만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못할 건 없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나부터 달라져야만 한다.

나조차 바꿀 수 없는데 대체 무엇을 바꾼단 말인가.

"그래도 당장은 사계를 연구해야만 하니, 아쉽지만 수련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P 올랐냐?

안 올랐어?

지랄 크윽....

내가 일부러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혹시라도 포인트가 오를까.

지금 나는 극악의 재화 매니징을 해야 될 처지다.

상점에서 성장 외에도 살 게 아직도 많다.

북마크도 추가해야 되고, 식스 센스도 사야 되고, 성장 레벨도 올려야 되고, 상태창도....

아무튼 각설하고.

지금은 P를 획득하는 데 집중할 때다.

이것이 내가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열쇠일 테니.

"그럼 지금은 예정대로 사계를 연구하는 수밖에."

현재 P를 획득하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무작정 내 맘대로 전개를 수정하고 다니다가 어딘가 꼬여서 북마크를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사계의 시작은 바람과 불의 원소 혼합이다. 먼저 바람의 원소부터 시작...."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듯 내가 강단에 올라섰다는 가정하에 가상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해도」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우웅⸺

습관처럼, 언제나 그래왔듯, 자연스럽게 사출되는 마나들.

〔 현재 '로한'과 동화율 : 1.1% 〕

잠들었던 기억들이 눈앞으로 떠오른 순간 술식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중지 끝에서 시작된 가늘고 푸른 선들이 허공에 수놓였다.

한순간 내 눈앞에 놓인 것은 「바람의 술식」이었다.

진(陳) 형태의 술식을 바라보고 있자 어렸을 때 서프라이즈에서 보던 미스터리 서클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 저 술식은 내게 미스터리한 것이 아니었다.

"9개의 현(弦)과 6개의 곡(曲). 아가씨의 사계는 이 술식에서 3개의 현과 6개의 곡을 추가하여 봄을 재현했다."

반듯한 직선의 「현」은 문자 그대로 시위다.

술식에선 단순히 선을 나열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디서 얼마나 교차시킬지에 따라 사용하려는 술식 위력이 달라지게 된다. 이는 활의 시위와 역할이 같아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현」이 시위라면, 연속적인 점들의 집합인 「곡」은 활대다.

「곡」은 술식의 '형태'를 분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선'이다. 아무리 정교한 「현」을 만들어 내도 「곡」이 부실하다면 그 술식은 발현되지 않는다.

...내가 이걸 알고 있는 게 신기하다.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에도 이러한 내용은 없었는데.

"새로 추가된 이 3개의 현은 '불의 술식'. 그리고 다음 6개의 현은 '물의 술식'... 아가씨의 봄은 이곳에서 불어오고 있었구나."

인마 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 불리는 그레이스의 주력기임에도 그 도입부가 심히 초라했다.

단순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변호할 여지도 없이 정말 초라한 수준이었다.

바람과 불의 원소가 연결된 이 술식은 문자 그대로 그냥 '따듯한 바람'이다.

거기에 물의 원소를 추가하니 우리가 보았던 일렁이는 봄바람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따듯한 봄바람. 그게 전부다.

"교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아무 위력도 없는 걸 검에 담아 휘둘렀을까."

적은커녕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위력이었다.

가령 이런 술식들도 존재하긴 했다. 대외 행사용처럼 보여주기식 술식도 더러 있다. 예를 들면 폭죽 대용이라던가.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었다.

「사계」는 그레이스의 주력기. 그 의미는 그녀의 전부라고도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의문은 자꾸만 차올랐다.

"분명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그 의문을 해결하고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여름으로 이어질 372개의 현과 261개의 곡을 추가....

"...음?"

방금 몇 개라고?

§ 미묘함 (2)

강단에 올라선 그레이스가 나를 힐끔거렸다.

오늘은 그녀의 손에 검 대신 두터운 페이퍼들이 들려 있었다.

내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할 수 있도록.

"지난 강의 때 본 사계를 기억하십니까?"

장내는 고요했다.

필히 모두가 기억하고 있으리라. 아 엘리는 제외하고.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하는 건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조차 저 연구 자료를 작성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날밤을 새우며, 식사도 거른 채.

"여러분들이 당장 익히기엔 약간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여러분들의 수준에 맞춰 사계를 간추리되 더욱 상세하게 가르칠 예정입니다. 또한 하나인 사계를 네 개로 분할하여 각각 별도의 기술로 구성했습니다."

그레이스는 언제나처럼 한결같다.

한결같이, 무표정으로 학생들을 대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 그레이스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해서 이번 학기의 주제는 사계, 그중에서도 「봄」으로 정정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강의.

그레이스는 「사계·봄」을 설명하기 앞서, '원소 합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원소 합성은 마법이나 검술 가리지 않고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 중 하나였다.

"검술도 마법도 모두 마나를 기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속성으로도 꾸며져 있지 않은, 체내에 축적된 마나를 우리는 '퓨어 마나'라고 부르죠. 속성은 퓨어 마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 불, 바람 마지막으로 흙. 이 네 가지 원소는 어떤 변형도 거치지 않았다 하여 기본원소, 혹은 순수원소라 칭합니다."

지금 그레이스가 하는 설명은 학생들 모두 일찍이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들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사칙연산을 대학교, 그것도 명문대 중에 명문대인 스프링윈드에서 가르치고 있는 셈이었다.

"원소 합성? 우리들 앉혀 놓고 설명한다는 게 고작 합성 원소야...?"

"에이 설마... 그냥 환기시킬 겸 선행 이론 설명해 주는 거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합성 원소도 모르고 여기 입학한 사람이 어딨어?"

"지금 우리 무시하나... 그래도 나 레벤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인데."

웅성웅성

학생들의 반응은 알기 쉬웠다.

표정은 제각기 달랐지만, 의문이나 불만 따위가 공통되어 있었다.

솔직히 나도 이걸 서두에 포함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가르칠 건 '1+1'=2 따위가 아닌, 1+1이 '2'가 되는 '이유'였으니까.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나와 그레이스의 시선이 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손끝에서 맞닿은 순간이었다.

"죄송한데 그거, 저희도 이미 배운 건데요."

그 말에 학생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말없이 그 학생을 응시했다.

학생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당황한 건 학생 쪽이었다.

아마도 그레이스가 두려울 거다.

첫 강의 때, 그런 엄청난 걸 자랑해 버렸으니.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레이스가 기 싸움으로 저 학생을 눌러 버린 게 아니다.

고작 학생과 기 싸움을 할 성격도 아니고.

그레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아니 하지 못한 건....

"로한."

"예. 교수님."

"거기 물 좀...."

...그냥 긴장해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 가슴이 떨릴 정도인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그레이스는 내가 가져다준 500ml 생수 한 병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나저나 너무 긴장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순 없고....

"...때문에 수많은 합성원소를 구현하기 위해선 네 가지의 기본원소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설명을 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보니 그건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이미 첫 강의 때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변했다.

사진 혹은 영상에서만 보던 그들의 우상이, 사실 재능만 믿고 나대는 재수덩어리로 변해 가는 중이다.

원래 이런 전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순한 인간의 심리다.

나보다 잘난 놈 날개 부러뜨리고, 발목 걷어차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138화에서 왼팔을 상실한 그레이스를 본 제자들은 비웃었으니까.

그 화에 동정은 없었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오직 통쾌함 뿐이었다.

「"더 망가져라, 더."」

나보다 잘난 건 허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아집.

그런 시기와 질투들.

그리고 천재와 범인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괴리감.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레이스가 학생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는 대신, 존경과 신뢰를 얻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레이스를 '교수'로 만들어야만 한다.

"'사계·봄'의 도입부는 바람의 술식에 물 그리고 불의 술식을 혼합하는 합성원소로 시작됩니다."

그레이스의 시선을 따라 사출된 마나가 실타래들처럼 허공에 늘어졌다.

이윽고 팽팽하게 당겨진 마나는 내가 이전에 재현한 '따듯한 바람'의 술식이 되었다.

"첫 강의 때 여러분들에게 실례한 사과의 의미를 담아, 오늘은 이 술식을 아주 상세하게 해부해 보겠습니다."

가시처럼 따가웠던 시선들이 점점 초롱초롱해지고 있었다.

처음, 학생들이 그레이스를 만났던 그 순간처럼.

* * *

힘들다.

오히려 지켜보고 있던 내가 더 떨리고 긴장이 됐다.

혹여나 말실수를 하지 않을지, 내가 작성한 자료가 틀리진 않았을지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나라고 누구를 가르쳐 본 기억이 있을까.

그러나 강의가 끝난 순간.

학생들의 환해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나의 불안은 단숨에 씻겨 나갔다.

"네 덕분이다. 로한."

집무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던 내게 그레이스가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오늘 아침 전달한 「사계·봄」의 강의 자료가 들려 있었다.

"언제 이런 걸... 시간이 없었을 텐데."

"설명은 제가 하겠다고 약속드렸으니, 저는 그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그레이스는 조용히 나를 마주했다.

내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아마도 속으로 이런저런 말들을 내게 하고 있겠지.

그레이스는 속마음이 참 많은 사람....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

"네게 도움을 주어도 모자란 마당에, 내가 도움을 받고 있으니 이루 할 말이 없구나."

...아마도 당신은 모를 거다.

당신이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게 얼마나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지.

당신이란 존재가 내 인생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당신을....

「"살아."」

...어째서 이토록 살리고 싶어 하는지.

그때였다.

[ '그레이스 유클리드'의 운명이 변화합니다. ]

그때처럼, 그레이스의 머리 위로 기이한 것이 떠올랐다.

ㅤㅤ[그레이스의 운명]

○━━━○━━━━━●

마침내 그레이스의 운명이 변화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 15P 획득 〕

꽤 많은 개연성도 확보했고, 그레이스도 전보단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이제 막 한고비, 소설로 치면 '프롤로그'를 넘긴 셈이니까.

아직 나는 이 소설의,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조차 조우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퀘오스 뤼미에르 듀 누아르'도, 주인공의 의붓동생이자 만악의 근원인 '아리엘 리펜슈타인'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이 개입하게 되는 순간, 저 운명이 어떻게 될진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교수님."

"듣고 있다."

이 페이지를, 조금 즐겨도 되겠지.

"둘이 있을 때만큼은 편히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무슨 말이지?"

그레이스는 어떤 난색도 표하지 않은 채 내게 되물었다.

아니 왜 그거 있잖아.

아가씨 시무룩했을 때, 말투 딱딱하지도 않고 사근사근하던 거.

"저와 있을 땐 아가씨도 편히 계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끔은 그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아가씨와 저 사이에 어떠한 허물도 없이, 그저 마음 편히 이야기를 주고받던...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방금 이야기는 못 들으신 걸로⸺"

"아니다. 아니... 아니야."

그 말과 달리 머뭇거리는 그레이스.

금방이라도 미소를 피울 것처럼 수줍어하는 모습까지 나는 달가웠다.

하긴 우리 전개상 10년 이상을 알고 지내 왔는데, 아무리 상관 부하 관계라지만 말 놓는 건 아니라도 편하게 말할 땐 됐잖아?

"이러면 될까, 로한."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나는 아가씨의 이 모습이 좋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건, 아가씨와 맞지 않다.

그때였다.

"피곤해 보이네."

그것은 어느 날의 햇살처럼, 내 눈가에 불쑥 드리웠다.

그것은 그레이스의 손길이었다.

"날 위해 많이 고생했구나."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희고 가느다란 엄지가 내 눈 밑을 쓸어내렸다.

나의 생각은 모조리 증발했다. 그 빈자리에는 오직 '그레이스'라는 이름만 가득 차올랐다.

두근두근.

집무실이 고요했던 탓인지 내 심장 소리가 공사장 드릴처럼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커피? 응, 좋아."

"그럼 제가 가서 사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는 주체할 수 없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나는 대학가 카페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거리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이런 우둔한 놈...."

참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내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50cm의 간극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대로 조금만 더 있다간 그레이스의 향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쁘지 않군."

오히려 좋았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다는 느낌이 얼마만이었더라.

되게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게, 너무 좋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치.

"...허나 시작일 뿐이다."

다시 현실을 직시했다.

그레이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내가 아니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레이스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언젠가 나는 그레이스가 내 곁을 떠나는 순간을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레이스를 위한 운명이니까.

...빌어먹을.

"부교수님."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 새로 오신 부교수님 맞으시죠? 검술학과의."

"...."

「그녀가 걸어갈 때마다 찰랑이는 은백색 머리카락은 5월에 눈이 내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잊을 수 없는 묘사였다.

아니, 그것은 잊어선 안 되는 묘사였다.

"성함이 로한, 이라고 하셨던가요?"

「희망도 절망도 섞이지 않은 음성 속에서, 감히 이름도 붙이지 못할 어둠이 깃든 눈동자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반가워요. 전 스프링윈드 대학에 재학 중인 1학년⸺"

「흔들리는 가문, 무너져 가는 제국. 그 속에서 찾아낸 나의 유일한 희망. 그리고 내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존재.」

"아리엘이에요."

「내가 명명한 그 이름. '아리엘 리펜슈타인'. 그녀가 올해 스프링윈드에 입학했다.」

§ 주인공 (1)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할 것만 같은 입술에 나의 사고는 정지한다.

"로한 님?"

침착. 침착하자.

평정을 잃어선 안 돼.

"로한 님?"

어째서 이 시점에 아리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뒤바뀐 전개로 인해....

"로한 님."

어느새 아리엘의 얼굴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그 동공은 미묘하게 생기를 잃은, 흡사 죽어 버린 눈 같았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네, 말씀하세요."

"무례하다."

"...네?"

내가 한걸음 물러섰다.

나의 발언에 아리엘의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거기서 나는 그치지 않았다.

물러선 거리만큼, 오히려 그녀를 몰아붙였다.

"스프링윈드의 부교수 이전에 제국의 감마 등위인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되어 있던가?"

침묵하는 아리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인물은 그레이스의 왼팔을 날려 버린 장본인이 아니다.

하물며 훗날 그레이스의 뒤를 이어 하블다운 '공화국'의 웨펀 마스터가 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인마 대전 참전 기사이자 감마 등위의 '영웅'이다.

그러니까 너는, 내게 그저 '아리엘 리펜슈타인'일 뿐이다.

고작 엡실론 등위의, 내가 가르치는 수많은 학생 중 하나인 너 따위가 맞먹을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실례했습니다, 부교수님."

순간 아리엘이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가슴에 오른손을 가지런히 올린 아리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례를 범한 점,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를...."

예상외의 반응이랄 것까진 없다.

아리엘은 원래 이런 인물이니까.

자신의 의중을 철저히 숨긴 채, 상대가 누구든 비위를 맞춰 주며,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위선.

하지만 지금 넌 모르겠지.

너보다 더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는 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 내 눈에 비치고 있는 너는 그저, 위선자(僞善者)일 뿐이다.

"일어나라. 나를 갑질이나 부리는 폐(廢)기사로 만들 심산인가? 내 말의 의도는 네 입에서 나온 '미안하다',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이 나와 아리엘을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하블다운 제국에 존재하는 '귀족'이란 개념은 중세 시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 세계관 내에서는 아무리 감마 등위의, 귀족이라 불리는 기사라 해도 평민들을 벌하거나 억압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건 오직 '황제'와 '황실'에 속한 직계 존속들뿐이다.

다만 등위란 명예 그리고 힘의 크기를 나타낸다.

존엄과 품위, 무력과 재력.

그 무형과 유형의 권력들.

그것을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기에 감히 무시할 수도 없다.

"...."

그런데 이 녀석 봐라.

아리엘은 내 말을 듣고도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되려 보란 듯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 화를 더욱 부추겼다.

"일어나라 말했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너는 내 명예를 욕보일 생각...."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교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했으니 더욱 사죄를 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식으로 기 싸움을 하겠다 이거지.

그것도 고작 학생이 부교수를 상대로.

"죄송합니다. 부교수님."

...내가 바라는 '진짜' 사과는 이런 게 아니다.

진정성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은, 허울뿐인 사과로 너를 향한 나의 증오를 지울 순 없다.

더구나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찍혀서 인터넷이나 학교 게시판에 올려지는 날엔 끝장이다.

나한테 무슨 원수가 있어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네게 묻겠다."

"말씀하세요."

아리엘 리펜슈타인.

내가 읽었던 그녀의 묘사를, 설정을, 행적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진심으로, 내게 시비를 걸려고 한 것인가?"

"네?"

그러자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표정엔 당황이 차올랐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이런 묘사는 읽어 본 기억이 없는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일부러 내 명예를 깎아내리기 위해 모함한 것이냐고 물었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아, 아니에요. 저는 절대 그런 목적으로...!"

"그렇다면 네가 왜 사과를 하고 있지?"

나는 어깨를 부축해 아리엘을 일으켰다.

일단 돌아가면 화장실부터 가자.

불결한 걸 만진 손을 당장이라도 씻어 내고 싶다.

"전투 도중 실수로 아군에게 해를 입혔을 때 사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사과를 하지 않는지 말해 봐."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무는 아리엘.

이제 내 말의 의미를, 그녀도 알 것이다.

아리엘이 입을 연 건 희미하게 떨리던 옷자락이 멎은 순간이었다.

"실수... 니까요."

"그렇다. 실수였기에 사과를 하지 않는 것. 해를 받은 당사자 또한 실수인 걸 알기에 넘어가는 것이고. 너는 고의로 내게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다. 고로 너는 잘못하지 않았다."

너를 상대하는 방법쯤이야 이미 알고 있다.

그 하잘것없는 위선을 벗겨 낼 방법 또한.

"그러니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된다. 되려 사과를 해야 하는 건 지위를 이용해 너를 고압적으로 대한 나다."

"네? 그게 무슨 말씀...."

"부디 용서를 바란다."

나는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는 기사의 방식대로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심장 위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미안하다."

어쩌면 이 사과는,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너의 앞날을 읽은, 어느 한 독자의 사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젠가 나는, 너를 죽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을 때.

사과를 해야....

"괜찮아요."

창백한 체온이 나의 손을 감싸 안는다.

그저 내린 시선 속에는 작고 가느다란 손마디가 나의 주먹을 감싸 쥐고 있었다.

"부교수님도 아무 잘못 없어요. 저처럼요."

고개를 들자 눈부신 미소가 나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죠?"

잊고 있었다.

아리엘이 어떻게 그레이스를 밀어내고 독자들의 사랑을 차지했는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마음 밑바닥부터 응어리진 감정들이 모두 녹아내리는 착각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레이스 님."」

너의 위선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모두를 속일 만큼.

「"이제부터 제가 지킬 테니."」

하물며 행하고 있는 자신까지도....

* * *

자택으로 돌아온 나는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한순간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아리엘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것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말이다.

"현혹 마법에라도 당한 기분이군...."

마나의 이동은 없었다. 그걸 내가 감지하지 못할 수준도 아니었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상태창」 설정부터 먼저 구매하는 건데.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아이다.

강한 듯하면서도 손 닿는 즉시 깨질 듯이 유약하고, 약한 듯하면서도 감마 등위의 기사를 마주하면서도 굽힘이 없다.

마치 도깨비 같은 힘.

거역할 수 없는, 매력(魅力).

"어디서부터 속이고 있는지...."

아니, 어디서부터 속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도 잊을 만큼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온 게 아리엘 리펜슈타인이라는 인물이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아리엘은 이 시점에 등장할 인물도 아니며 등장해서도 안 되는 인물이다.

"아리엘 리펜슈타인. 20세. 제국 남부 '포크스톤(Folkestone)' 출신. 원래 이름은... 불명."

아리엘 리펜슈타인은 그녀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진짜 정체는 제2차 인마 대전 당시 민족을 배반한 친악파(親惡派)이자 제국의 알파 등위였던 '알렌 리더스톤'의 '딸'이다.

그 외의 정보는 전무하다.

그녀의 본명이 무엇인지,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아오다가 미하엘 리펜슈타인의 동생이 되었는지, 어째서 그레이스를 증오하는지 등등.

사실 그레이스를 증오하는 이유가 밝혀지긴 했다.

아니, 「스프링윈드의 천재마법사」를 읽던 독자들이 유추해 냈다.

그때 가장 유력하던 가설 중 하나가....

"...아가씨께서 알렌 리더스톤을 처형하셨던 것."

인마 대전 당시 알렌 리더스톤은 제국의 9군단장이었던 그레이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승기는 제국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악마들조차 자신들의 차원으로 퇴각하는 마당에 제국을 등진 배신자들의 처우는 시대를 막론하고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아리엘이 친악파(현실로 따지면 친일파 정도) 부모의 원수나 갚는, 반성도 모르는 파렴치한이란 낙인이 찍히게 된다.

처음엔 독자들도 많이 반발했다.

저 가설이 맞다면 친악파인 딸이 복수하는 전개가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그 또한 제국의 '실체'가 드러나며 묻히게 된다.

제국의 실체를 알게 된 독자들 사이에서는 친악파로 변절하지 않은 그레이스를 향한 동정 여론까지 생기기도 했다.

뭐 작가가 하도 내용을 꼬아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결국 그 또한 흐지부지돼 버렸지만.

어쨌든 정리하자면.

아리엘은 친악파인 '알렌 리더스톤'의 딸이었고, 지금은 그녀를 거둔 '미하엘 리펜슈타인'의 의붓동생이며, 그레이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프링윈드에 입학했다, 정도다.

"그러나 그 시기가 틀리다."

아리엘이 스프링윈드에 입학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이다.

계속되는 미하엘의 무시.

교수로서의 무능한 자질.

그렇게 점점 고립되어 가던 그레이스가 서서히 망가진 그 순간.

원래는 그 페이지에서 등장을 해야 정상이란 말이다.

...어쩌면 내가 전개를 수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두 번의 전개를 수정했다.

그 결과 엘리 또한 변화가 있었고, 엘리처럼 아리엘이 지금 이 시점에 등장하는 것도 결국은 '예상 안'의 일이란 이야기다.

문제는 이 변수가 '그레이스의 운명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가'이다.

여기에 미하엘 문제까지 겹치면 운명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도 있다.

"어쩌면 나라는 변수가 개입했기 때문일지도...."

모종의 인과율이 작용한 결과, 운명이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해진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리고 나를 방해하기 위해.

세계가, 이를 조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처음부터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면, 작가가 나를 이곳에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여차하면 「북마크」를 이용해 운명을 바꿀 때까지 '무한 회귀'를 하는 수밖에.

비록 15일에 한 번이지만, 나한테는 페이지를,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있으니까.

"그 전에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게 먼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 세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의 죽음도 '현실'이다.

촤르륵⸺

수도꼭지를 돌려 쏟아진 물을 받아 얼굴에 끼얹었다.

찬물이 닿자 뜨거워진 머리가 식으며 생각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운명을 바꿀 계획이라면 대강 기틀은 잡아 놓았다.

"...나만의 방법을 개척한다."

이 새로운 설정, 「성장」을 토대로 말이다.

§ 주인공 (2)

"...모든 게 완벽하다."

완벽하다.

도저히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검 자루는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무게의 중심은 어디에 실어야 하는지, 얼마만큼의 마나를 이용해 오러를 사출하는 부분까지.

그것은 내가 제국에서도 몇 없는, '소드 마스터'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욕심이 생겼다. 아주 원초적인 욕심이었다.

이 세계관에서 소드 마스터도 상당히 강한 수준이다.

인간은 욕심의 화신.

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욕심이었다.

"여기서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러나 성장이란 한계가 한층 높아졌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다 해도 감히 상상되지 않았다.

이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고?

그런 의심이 들 만큼 '로한'이 이뤄 낸 경지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여기서 그 '어딘가'란, '기술의 이해'였다.

나는 로한이되, 로한이 아니다.

수십 년간 휘둘러왔던 검술이 몸에 습관처럼 남아 있다지만, 나는 검술을 사용할 때마다 마치 처음 본 책의 서두를 읽듯 새로운 기분이었다.

때문에 나의 검술은 완벽한 듯하면서도 은연중 엉성한, 미완(未完)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마·검술 모두 기본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객관적인 시점으로 말하자면, 나는 기본이 있되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더 쉽게 말하면 게임 속 성능캐를 이제 갓 시작한 뉴비가 플레이하고 있는 셈.

스킬이야 쓸 줄 알아도, 그걸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른단 이야기다.

나는 자택 서재에 들어와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찌름의 미학」, 「휘두르는 기쁨」...."

일단 이 두 권의 책이 그나마 가장 '기본적'인 검술 서적이었다.

나머지는 「검술·역학(力學)」이나 「마나와 오러의 등가 원리」등, 제목만 읽어 봐선 절대 모를 심화 이론들뿐이었다.

아무리 내가 이 세상을 읽었다 해도 그것들은 전부 '서사'에 불과하다.

어떤 이론이 존재하는지 또 그 이론을 통해 어떻게 술식이 발현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제 내가 할 건 '다시 읽는 것'.

읽는 거라면 자신 있다.

"'찌르기'는 '베기'와 '막기'에 이어 기사에게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인 동작이다. 중심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단순히 대상을 관통하는 「피어스」가 될 수도, 대상의 내부에서부터 오러를 폭발시켜 치명상을 입히는 「오러 폭격(爆擊)」이 될 수도 있다...."

가져온 책을 책상에 내려놓은 나는 먼저 '찌름의 미학'을 펼쳤다.

그리고 읽고 있는 지점에 검지 끝을 가져다 댄 채 일부러 소리 내어 읽었다. 경험상 이렇게 공부하면 잘 외워지더라고.

책에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었다.

「이해도」만큼 로한의 기억이 나에게 흡수되고 있었고, 지금도 그의 과거가 전부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떠올랐다.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책이 '기초'만 이야기하고 있던 것도 한몫했다.

"...이걸로 이론은 대충 알겠고."

그렇게 세 시간쯤이 지났을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설정집을 읽는다 생각하니 머릿속에 쑥쑥 들어왔다.

이론을 습득했으면 이제 실전으로 옮길 차례.

거실로 나와 거치대에 눕혀진 검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검을 뽑는다."

스릉⸺

형광등 불빛이 반사된 검신이 서늘하게 울었다. 익숙하게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손이 아직은 낯설었다.

나는 다음 내용을 떠올렸다.

"두 번째. 자세를 잡⸺"

그때였다.

〔 「성장 Lv.1」 발동 〕

떠오른 메시지와 동시에 나의 자세가 자동적으로 교정됐다.

그것은 책에서 읽은 자세가 아니었다.

내용에 따르면 뒤로 물린 왼발을 기준으로 몸을 사선으로 기울여 왼팔로 중심을 잡은 채 곧게 뻗은 오른손으로 대상을 겨누라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취한 자세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오른발이 전진했다. 두 손으로 그러쥔 검 자루는 눈높이와 수평을 그리고 중심점은... 단전."

앞으로 나아간 오른발.

상대의 급소인 목과 가슴을 목표로 한 검 끝.

중심점이 오러의 핵(Core) 중 하나인 단전이라는 것은 필살(必殺)의 의미이기도 하다.

다분히 공격적인 자세였다.

내가 읽은 내용에서 찌르기는 '베기'의 대응, 즉 수비라고 배웠는데 말이다.

그때 어떠한 호기심이 나를 자극했다.

이대로 검을 내지르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새 나의 호기심은 신경계를 자극해 근육을 움직이고 있었다.

쎄에엑⸺!

공기를 짓이기는 소음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찌르고 돌아온 검.

빠르다.

사용자인 나조차 볼 수 없을 빠르기였다.

그 순간 검의 궤적에 머물러 있던 오러가 비산했고, 곧 광풍이 온 거실에 몰아쳤다.

파앙!

나는 엉망이 된 거실을 둘러보았다.

"만일 이 오러가 상대의 몸속에서 폭발했다면...."

...놀라웠다.

직접 사용해 보니 이보다 찌르기에 최적화된 자세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아니 '설정'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것을 내게 전했다.

〔 성장 특화 적용 〕

그 메시지 속에서, 수많은 찌르기 이론들이 내 머릿속에서 새로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전부 하나의 찌르기 자세에서 파생되고 재구성되기를 반복했다.

단순한 '찌르기' 하나였지만, 그 지식의 양은 너무나 방대했다.

이윽고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나'는 무수히 뚫렸고, 무수히 뚫었다.

"...큭!"

너무나 현실 같은 이미지 트레이닝.

정말로 내 근육과 오러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수십 년의 수련을 단 몇 초 만에 끝내 버린 것처럼, 「성장」이 멈추자 땀으로 범벅된 몸이 무너져 내렸다.

"...하."

그러나 나는 되레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 성장 완료 : 검술·찌르기 〕

나의 선택을 보상받은 순간이었다.

* * *

밤이 드리운 방. 어둠을 고독처럼 뒤집어쓴 인물이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버님...."

그 인물은 아리엘 리펜슈타인이었다.

편지를 든 아리엘의 손 위로 스탠드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편지 위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현 황제 '아델라 히스토리아'는 비밀을 감추고 있단다. 나의 사랑스러운 '보물'아. 이건 너를 위한 진실이다.]

읽을 때마다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면, 아마도 이제는 읽지 못할 문장이었다.

편지는 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친악파가 아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제국을 등졌을 뿐이다.]

그 작은 편지 위로 제국이 저지른 거대한 '악행'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결코 바꿀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진실 속에서 아리엘의 눈이 감겼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가락들이 그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그래 봤자 나는 반역자의 딸이야.'

단 한 순간 조차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모의 죄를 짊어진 그녀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크고 작은 아픔들은 그녀의 몸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고, 기록되지 못한 아픔들은 그녀의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아버님이 틀렸어요. 진실은 모두가 믿는 게 진실이에요. ...설혹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승리한 자들에 의해 쓰인 것이 제국의 역사였다.

사람들을 죽이고 병탄했다 할지라도 승리했다면, 그는 영웅이 된다.

반대로 사람들을 살리고 빼앗긴 것을 되돌려줬다 할지라도 패배했다면, 그는 악인이다.

제국의 역사는 언제나 그랬다.

그런 거짓들로 쓰여진 것이 바로 작금의 '하블다운 제국'이었다.

"그레이스 유클리드...."

아리엘은 죽음을 속삭이듯, 그 이름을 내뱉었다.

"...거짓말쟁이."

사람들을 속이고, 제국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허위뿐인 여자.

아리엘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그녀조차 몰랐다.

아리엘에게 세상은, 모든 게 거짓이었으니까.

편지의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을 무렵 아리엘은 그리운 호칭을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님...."

[부디 그레이스 유클리드, 그녀를 죽여라.]

'도대체 몇이나 더 죽어야.'

[그렇게만 한다면 잘린 그녀의 목은 종이 되어 세상에 진실을 울릴 것이고.]

'이 전쟁이 끝나는 걸까요.'

[우리 '리더스톤'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거다. 너를 믿는다.]

'설마 이 문장들도 다 거짓인가요? ...모르겠어요.'

[⸺나의 보물, '도로시 리더스톤'에게.]

"...이제 저는, 도로시가 아니니까요...."

아리엘의 방처럼 말끔하게 정리된 외로움 속에서 그녀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살아 있는 미라처럼 모든 감정은 이미 메말라 있다.

그럼에도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로한... 님."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허무한 가슴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얼굴이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한참이 지난 오늘까지도 결코 잊지 못할 기억.

굶주림 속에서 상처 입고 죽어 가던 어느 날.

"돌려주고... 싶었는데."

눕혀진 고개를 따라 굴러간 아리엘의 시선이 책상 한편에 놓인 포장지에 부딪혔다.

주위에 그녀의 시선이 너저분하게 흩어진 포장지 안에는 그를 떠올리며 산 식빵이 들어 있었다.

―부디 용서를 바란다.

"...."

―미안하다.

그때도 그랬다.

―이런 세상밖에 약속하지 못해....

그때도 내게,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우리 가문을 망가트린 사람의 동료...."

...그리고 나의 구원자, 로한.

몇 번이고 끊어 내고 싶던 삶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숨을 도려내고 싶었다.

자신을 향해 세상이 던지는 고통은 아무리 견뎌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싶던 삶을 간신히 붙잡고 있을 수 있던 건 그날 들었던 '미안하다', 그 한 마디 덕분이었다.

'로한 님만 가질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가문의 '복수', 세상의 '진실', 잃어버린 '나'.

그것들이 어찌 되든 아리엘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그레이스."

로한이 그레이스의 곁에 있는 것을 본 순간, 아리엘은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을 불행 속에 던져 놓고 당신만 그렇게 행복한 건 불공평해.'

불공평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신과 달리 그레이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삶의 의의'까지 독차지하고 있다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돼.'

오랜 증오와 원망이 들끓었다.

텅 비어 있던 그녀의 공허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결코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는... 복수로.

'그 사람만큼은 안 돼.'

눈동자 속에 깃든 어둠이 고요히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나'였다.

'더는 상처 입고 싶지 않아.'

더는,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

이제 과거의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하엘 리펜슈타인. 그를 만났던 순간.

그날 도로시는 악취로 가득한 쓰레기 더미 위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자신은 지워졌다. 그녀는 이제 '아리엘'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세상이니까.'

§ 주인공 (3)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일부러 읽지 않았다.

「―끝.」

혹은 「완결」이라 적힌 최후의 단어를 읽은 순간.

그 책을 읽으며 할애한 모든 시간이 허무해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이야기가 끝나며 덮어 둔 현실이 밀려오는 것을.

"얼마나 잔 거지...."

나는 견디기 어려웠다.

"...집부터 치워야겠군."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방, 여느 날과 다름없는 햇살, 도저히 소설이라 느껴지지 않는 현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어떤 기억들이 가물거렸지만, 너무나 희미했던 탓에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대수롭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가끔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눈을 뜬 순간 급속도로 잊혀 가는 어느 꿈....

"...밖에서 할 걸 그랬나."

거실로 나오자 어제 찌르기를 연습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주 엉망이었다.

탁자와 소파는 뒤집어졌고, 열린 서랍 속에서 떨어진 물건들이 바닥에 누워 나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부서진 게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탈진한 덕에 정리할 새도 없이 잠이 든 게 화근이었다.

쓰윽― 쓰윽―

15분가량 청소를 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쏟아진 화분을 쓸고 닦아 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탈진해서 쓰러진 사람치곤 몸이 쑤시거나 뻐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다.

평소 근질거리던 부분을 잠이 든 사이 누군가 긁어 주기라도 한 것처럼, 개운하면서도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역시 제국의 소드 마스터답군."

모두가 로한이나 그레이스처럼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검과 마법이 공존하고, 그것이 보편화된 세상이라도 일반인은 존재한다.

오히려 일반인이 절대 다수였다.

또한 기사나 마법사도 육체적 한계를 지닌 사람인 건 마찬가지다.

현실처럼 격렬한 운동을 하면 근육통에 시달리고, 오랫동안 공부를 하면 두통과 피로감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인 범주에 속해 있지 않다.

탈피를 하듯 몇 번이고 한계를 초월한 육신이 고작 한두 시간 수련한 것으로 힘겨워할 리 없다.

되려 이 몸은 강해지는 고통을 먹어 치우며 성장하는 걸 넘어 기뻐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몸이었다. 이런 몸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렇게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띵― 동―

초인종 소리에 나는 자연스럽게 시계를 확인했다.

[7:03 AM / Sat.]

오늘이 토요일이었던가?

시간 참 빠르군.

스프링윈드의 부교수로 부임했던 월요일이 바로 어제 같았는데.

띵― 동―

...나는 신경을 긁어 대는 초인종 소리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제국의 감마 등위인 로한 님의 자택을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만들다니, 내 친히 돌아가는 길엔 오동나무 코트를 입혀―"

벌컥.

"―그레이스 교수님."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의 눈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제복 차림을 한 그레이스가 한 손에 비닐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더 무표정해 보였다.

"이리 일찍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란 걸 알지만, 로한과 긴히 상의할 것이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감고 있는 것처럼 앞이 캄캄하다.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주말. 그것도 아침부터 그레이스가 집까지 찾아올 거라는 걸.

"로한?"

그레이스의 음성에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전혀 현실 같지 않은 전경 속에서 그녀가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괜찮아?"

"아, 괜찮습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가슴 속에선 심장이 요동치고 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레이스를 거실로 안내했다.

자리에 멈춘 그레이스가 다소곳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적을 밝히기에 앞서 갑작스럽게 방문한 사과를...."

말끝을 흐리던 그레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맑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영문을 모른 내가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이었다.

"여긴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혹시 기습이라도 받은 거야?"

"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레이스가 내 뺨에 손을 얹고 있었다.

36도 언저리.

늘 불안하게만 느껴지던 그 체온이 내게 닿은 순간 붕 떠올랐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괜찮습니다. 아마 수련하다가 살짝 긁힌 듯합니다."

서둘러 고개를 틀었다. 어제 오러가 꽤 날카롭게 폭발했던 탓에 거실뿐만 아니라 내 뺨에도 잔흔이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레이스가 안심할 수 있도록 살며시 미소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참,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미안해. 미리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저기 있다.

소파 사이에 처박혀 있으니 내가 듣질 못했지.

그레이스가 더 미안해하기 전에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자료를 가리켰다.

"혹시 절 찾아오신 게 이것 때문입니까?"

그것은 내가 연구하고 작성한 「사계·봄」의 이론이었다.

"응, 맞아. 밤새 읽어 봤는데 상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상의라면 어떤 것을...?"

"술식의 보완."

보완?

음, 확실히.

사력을 다했더라도 고작 이틀만에 급하게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론도 부족하게 주워 담은 게 전부였고, 술식의 분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나 또한 자료의 퇴고를 검토하려던 참이었다.

"잠시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나는 그레이스가 건넨 자료를 바라봤다.

얼마나 읽어 본 것인지 그녀의 손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내심 고마웠다.

무엇보다 자료 사이마다 알록달록한 플래그로 표시되어 있는 게 그레이스답지 않게 귀엽게 느껴졌다.

자료를 천천히 살피던 내가 첫 번째 플래그가 달린 페이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 더 아래. 그래 거기. 현과 곡을 몇 가지만 더 추가하면 방어 기술인 '사계·봄'의 위력을 좀 더 강화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레이스의 기술인 「사계」를 네 개로 분할한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사계, 그중에서도 「봄」은 다른 계절과 달리 '방어'에 특화된 기술로 재구성하였다.

이유야 간단하다.

'따듯한 바람'으로는 도저히 적을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로한이 설계한 사계·봄의 술식은 물의 장력을 이루는 현과 곡을 바람의 술식에 추가한 형태, 맞지?"

"바로 보셨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장력을 갖춘 바람이 물리·마법적인 공격을 최소한의 충격으로 튕겨 낼 수 있게 되죠."

그레이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한 번 힐끗거리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파훼법이 있어. 그것도 너무 쉽게."

"예?"

쉽게. 그것도 '너무'란 수식까지 덧붙여서 말하는 걸 들었기 때문일까.

파훼법이 있다는 것을 이미 예상했는데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이스가 현관을 향해 손짓했다.

"따라와 줘."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를 따라 대문 앞 골목길로 나오자 거리를 둔 그녀가 나를 마주했다.

내가 멀뚱거리며 지켜보고 있자 그레이스의 입술이 움직였다.

"봄을 사용해."

그리고는 오러를 가다듬는 그레이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술식을 파훼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 방법이 몹시 궁금했던 나는 일단 그녀의 말대로 오러를 사출해 술식을 구성했다.

사아아아.

술식이 완성되자 내 주위로 봄을 알릴 것만 같은 바람이 은은하게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봄도 아닐 뿐더러, 단순한 봄바람도 아니다.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로한이 만든 봄은 「배리어」나 「실드」처럼 사위에 오러를 둘러 시전자를 방어하는 술식이지. 문제는 바로 그거야."

그레이스의 말처럼 보이진 않아도 분명하게 흐르고 있는 이 바람은 어떤 방향이라 할지라도 나를 노리는 모든 공격을 방어해 줄 것이다.

설혹 그게 심장을 노리는 검이나 대상이 사라질 때까지 연소하려 드는 「체인 엠버」라 할지라도 말이다.

애초에 바람의 술식에 물의 현과 곡을 더한 사계의 봄은 배리어 같은 방어 술식을 변형해 만든 것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조심해."

온몸이 섬짓거리며 배한이 차오른 것은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배리어를 관통한 순간이었다.

"지금부터 사계·봄을 파훼할 테니까."

절로 긴장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파훼를 한다는 것일까.

설마 「리무버」 같은 '교란 계열' 마법으로 배열을 흐트릴 작정이라면―

사아아아아!

일순 잔잔하던 배리어가, 바람이 나를 옥죄었다.

동시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내부의 공기가 완전히 증발하며 진공 상태로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배리어를 '깨트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오히려 나의 배리어를 더욱 강화했다.

어느새 뒤바뀐 술식을 확인한 내가 중얼거렸다.

"말씀하신 파훼법이란 게... 「에드」였습니까."

이제 나를 보호하던 배리어는 되레 나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조여들고 있었다.

「에드」는 '보조 계열'의 기술로, 마·기사 할 것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기초' 다.

그런 기초 기술에 내가 고안한 술식의 체계가 무너진 것이었다.

상대의 마나를 역류케 만들거나 술식을 손상시키는 '교란'이나 '간섭' 계열은 숙련 난이도가 까다로운 탓에 상위 기술에 속했다.

그러나 상대의 마나에 순응하는 '보조 계열'의 사용법은 훨씬 더 간단하다.

짧은 시간 내에 마나의 흐름을 읽어 내고 상대의 술식을 해체해야 되는 교란 계열과 달리, 보조 계열은 단순히 출력이 10이란 값으로 설정된 술식에 새로운 현과 곡을 추가해 위력을 강화하는 게 전부니까 말이다.

때문에 「에드」로 강화된 배리어가 밀폐된 내부의 공기를 흡수하면서 되레 나를 공격해 온 것이었다.

"로한은 어떻게 생각해?"

"그레이스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쉽게 파훼되다니... 이건 술식이라 부르기도 어렵겠군요."

그레이스는 내 의견에 어떠한 제스처도 보이지 않았지만, 살며시 감긴 눈꺼풀과 함께 이어진 침묵은 동의를 의미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이것도 다시 처음부터....

"그래서 말인데, 내가 살짝 보완을 해 봤어."

"이미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역시 웨펀 마스터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술식의 파훼와 보완을 동시에 마쳤다니.

"응. 로한이 보고 어떤지 답변해 주길 바라."

이윽고 사출된 그레이스의 오러가 잔잔히 휘몰아쳤다.

여기까진 사계·봄의 이전 부분과 동일했다.

하지만 변화는 그 다음부터였다.

"아...."

처음은 탄식이었다.

저 풍경을, 내가 가진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던 안타까움이었다.

진정한 봄 한가운데, 그레이스가 내게 물었다.

"어때? 로한."

그녀를 중심으로 무수한 꽃잎이 흩날렸다.

자세히 보니 내가 꽃잎이라 착각한 것들은 전부 푸른 빛깔의 눈부신 '불꽃'이었다.

망막 위로 사무치는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답해 버렸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청춘(靑春).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푸른 봄'이었다.

§ 주인공 (4)

다시 거실로 돌아온 우리는 오후가 되도록 자료 수정에 몰두했다.

그레이스와 함께 상의하며 자료를 검토한 결과 수정해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완해 온 대로 수정하다 보니 내용이 거의 새로워졌다.

마침내 자판에서 손을 거둔 나는 뻐근해진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이걸로 수정은 끝났습니다."

"고생했어."

나는 수정한 파일을 저장하고 우리가 둘러앉은 테이블을 훑었다.

내 주위에는 상당한 양의 검술 이론서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지고 엎어져 있었다.

아... 내 과제 할 때도 이 정도는 안 했는데.

어차피 지나간 시간이다.

보완한 자료를 수정할 때 읽은 이론들도 내게 도움이 되었고, 다음 강의까지 생각한다면 유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배고프지?"

그레이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오래도록 볼 수 있었고 말이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멍청히 지켜보고 있던 내가 화들짝 입을 열었다.

"슬슬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아침은 물론 점심까지 걸렀다.

자료에 몰입했던 탓인지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레이스가 들고 왔던 비닐 봉투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비닐 봉투 속에 든 것은 샌드위치와 미지근해진 우유 한 팩이 전부였다.

"먹어. 빈손으로 오긴 그래서."

그런데....

"...제 것만 사 오신 겁니까?"

사람은 두 명인데, 샌드위치와 우유는 하나였다.

그레이스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

순간 나는 잊고 있던 그레이스의 '설정'을 기억해 냈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 편의점에 하나밖에 없었어."

...거짓이다.

그레이스는 처음부터 두 개를 살 돈이 없었을 거다.

제국의 알파 등위이자 웨펀 마스터.

그것도 얼마 전까지 황실 친위대장으로 근무했던 그레이스에게 돈이 없다?

단순히 듣는다면 의아한 게 맞다. 의아한 걸 넘어 명백한 설정 오류다.

하지만 내막을 알게 된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레이스 유클리드, 전쟁고아와 난민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던 사실 숨겨..., 천사는 실존했는가....

⸺ 그레이스 유클리드, 제국구호학교에 장학금 10억 링(Ring) 기부.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야 된다"며 삭막해진 제국의 민심에 경종을 울리다....

⸺ 그레이스 유클리드, 또 기부....

이렇듯 내가 아는 기부만 해도 스무 가지가 넘는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기부로 다 써 버리는 탓에 그레이스는 귀족이되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카페에서도 맹물만 마시고 있었지....

아무튼 이러한 면모는 그레이스가 '그느님'이라고 불리는 이유이자,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어디가? 아 컵이라면 내가...."

"아뇨. 그레이스 님께선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이전에 미리 설치해 둔 선반에서 파스타를 꺼내고 냄비에 물을 받아 조리기에 올렸다.

마음 같아선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싶지만, 여긴 대한민국이 아닌, 하블다운 제국.

자택에 김치는커녕 리소토를 만들 쌀도 없다.

보글보글⸺

그래서 지금 만들고 있는 건 스파게티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의외로 스파게티가 라면보다 만들기 쉽다.

면 삶고, 만들어진 소스 그냥 붓고, 그걸 올리브유 좀 두른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주기만 하면 끝이다.

"죄송하지만 테이블 정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알았어."

내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그레이스가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사이 스파게티는 착실히 완성되어 갔다.

"샌드위치로는 양이 부족할 거 같아 스파게티를 만들어 봤습니다. 그레이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보통 먹성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앞접시에 예쁘게 담은 스파게티를 들고 그레이스에게 돌아갔다.

그레이스는 의문투성이인 눈동자로 내 행동을 세세히 주시했다.

"내 것까지 요리한 거야?"

"혼자 먹긴 심심하니까요. 이번엔 제가 부탁할 차례입니다."

그리고는 그레이스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한가로운 오후.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사.

그것이 내 부탁의 전부다.

뭐 부교수인 내가 그레이스의 일을 도와주는 건 당연하지만, 빼앗긴 주말 아침을 이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군말하지 않고 포크를 들어 스파게티 한 가닥을 감아 입에 넣었다.

"맛은... 어떠십니까?"

긴장한 내가 마음 졸이던 사이, 서서히 동공이 확장되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가게에서 파는 거 같아. 맛있어."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나는 마음 편히 식사를 시작했다.

두 개가 들어 있던 샌드위치도 나눠 먹으며.

식사는 대체로 조용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몰래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는 내 눈알 소리만이 지배적이었다.

스파게티를 반쯤 먹었을 때, 미트볼을 찍은 포크를 내려놓은 그레이스가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요리는 언제 배웠어?"

"혼자살이가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아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사실 이 스파게티는 내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된다면 먹여 주고 싶어 평소 틈틈이 연마했던 것이었다.

기쁘게도 그 소망은, 지금 이루어졌다.

"로한."

"말씀하십시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구나."

"예?"

"그래서 나는 기뻐."

...지그시 나를 보는 저 눈길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말수도 많아졌고, 가끔은 곧잘 웃기도 하고. 나는 네가 나와 닮아 가는 게 아니었는지 늘 걱정이었는데... 괜한 걱정을 한 듯싶구나."

무안을 감추기 위한 흐릿한 저 미소조차 '나'를 향한 것이 아니란 걸....

그래도 나는 상관없다.

그레이스를 이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내가 누구든....

"아가씨께서 제가 변했다 느끼셨거든, 제가 변한 게 맞겠지요."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그래도 저는 언제나 '로한'일 뿐입니다."

그런 것 따위 상관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