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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

* * *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폭발에 휘말려 죽은 것일까?

모르겠다.

데일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기억이 휙휙 스쳐지나간다.

잠들지 못한 수많은 밤 동안, 몇 번이고 봐왔던 기억들이다.

기억 속에는 조부가 있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있고, 고향의 풍경이 있다.

조부는 항상 데일을 향해 훈계한다. 당신이 삶에서 얻은 교훈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한다.

데일은 그런 조언을 전부 가슴에 새기려 했다.

늘 따를 수는 없다. 하지만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조부는 데일의 우상이요, 그가 아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

데일은 조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부는 데일의 삶을 이끌어주는 멘토이자 버팀목이었다.

데일은 모든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 가지는 생각처럼.

조부가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서서 이끌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그 생각은 갑자기 깨지게 되었다.

쏴아아.

어느새 주위 풍경이 변하며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보는 기억이다.

데일은 언제나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 떠올리려 애쓰곤 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에.

이 낯선 세계에서 벗어나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기에 항상 좋은 추억만을 회상했다.

하지만 데일은 안다.

그게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을.

그날은 지독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조부와 데일은 함께 검은 우산을 쓰고, 인도를 걷고 있었다.

아마 밤중에 출출해진 데일이 편의점을 가겠다고 했고. 조부가 손자랑 산책이나 할 겸 같이 나오겠노라 했던 것 같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늘 그렇듯. 조부는 말했고. 데일은 경청했다.

빗방울이 우산에 타닥이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데일은 고개를 내렸다.

조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데일은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았다.

속으로 외치고 싶었다.

'피해야 해.'

하지만 이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과거는 결코 바꿀 수 없다.

다음 순간.

환한 빛이 온 사위를 밝힌다.

고개를 돌리니 회색 세단이 인도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눈부신 상향등을 마주한 데일의 몸이 굳어버렸다.

시간이 느려진다. 모든 게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데일은 그때, 분명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조부가 몸을 힘껏 던져 데일을 밀쳤다.

늘 관절이 아프다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분이시다. 그 찰나의 순간. 데일을 힘껏 밀친 건 그의 운동능력을 초월한 움직임이었다.

데일은 멍하니 밀려났다.

오른손을 조부를 향해 뻗었다.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회색 세단이 지나간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조부의 앙상한 몸이 하늘을 날았다.

"할아버지!"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제 속도를 되찾는다.

데일은 조부에게 달려갔다.

엉망이다. 데일은 눈물을 흘리며 조부를 업으려 했다.

곧장 병원으로 가면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조부는 이미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아...."

조부가 데일의 이름을 힘겹게 부른다. 데일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 조금만 참으세요! 제발."

그런 데일의 애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부는 손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마지막 조언들을 건네려 했다.

"용서... 사람의 도리... 가족에게로... 돌아...."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

조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심장은 더는 뛰지 않았다.

데일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 밤 내내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다시 풍경이 바뀐다.

데일은 재판장에 서 있었다.

상대는 회색 세단의 운전자였다.

사고 당시. 뺑소니를 치고 도망간 운전자는 머지않아 경찰에 자수했다.

앳된 얼굴이었다.

데일과 비슷한 연배일까?

그는 몹시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의 변호사는 운전자가 평소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으며,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친 것도 그 때문이라 주장했다.

아니었다.

데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놈은 분명 만취한 채로 운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달아나 그 사실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길고 긴 재판이 이어졌다.

비싼 변호사들이 상대를 변호했다.

데일이 선임한 국선 변호사는 그다지 의욕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상대측에게 무언가를 받아먹었을 수도.

결과가 나왔다.

집행 유예와 사회 봉사.

판사는 길고 어려운 단어들로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데일이 알아들은 건 하나였다.

한 번의 실수로 젊은 청년의 앞길을 막는 건 너무 가혹하단다.

상대편 변호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전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절절한 사과문까지 쓰지 않았던가?

저게 어찌 반성하는 사람의 표정인가.

데일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칼부림을 벌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 데일은 덤벼드는 모두를 힘으로 제압한 뒤, 그들에게 판결을 내린다.

운전자와 그 변호사. 그리고 판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현실의 데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갑옷을 입은 기사도. 일당백의 전사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아니. 소시민일지라 하더라도 분명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복수.

그 단어가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구석에서는 조부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넘쳐나지만, 너만은 사람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라.'

심지어 마지막 유언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마도. 데일의 짐작일 뿐이지만. 조부를 죽인 저 파렴치한 작자를 용서하라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손자가 부질없는 감정에 불태워질 걸 염려했을지도.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종교인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의문이 들었다.

'사람의 도리라.'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란 게 대체 무엇인가.

사람이 무어 그리 특별한 존재라고. 조금 똑똑할 뿐인 짐승밖에 더 되던가?

적어도 저 앞에서 시시덕거리는 작자들은 조금도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두 발로 걷는 금수일 뿐.

데일은 사람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는 문득.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초라한 사내는 텅 빈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무기질적이고. 무감정한 얼굴.

데일은 조부와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 틀어박혔다.

하루 종일 그저 벽을 보고 멍하니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죽은 듯이 있었다.

에스델이 물었던가.

버팀목을 잃었을 때, 어떻게 우뚝 설 수 있냐고.

데일은 모른다. 데일은 넘어졌으니까.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했으니까.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육원의 아이들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데일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그러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은 포기했다.

하지만 그중 한 아이가 말했다.

"형. 멍하니 있지 말고, 뭐라도 해. 힘들 때는 뭔가에 집중하는 게 좋데."

그러고는 컴퓨터에 웬 게임을 하나 깔아주었다.

어두운 배경의 게임이었다.

악마와 그 하수인들의 침공해오고, 사람들은 저항한다.

하지만 아무리 저항한다 하더라도 멸망은 계속해 다가온다.

발버둥 쳐도 남는 건 죽음뿐인 이 암울한 세계가 오히려 데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데일은 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우울한 기분에 시작했던 게임이었지만, 데일은 어느샌가 이 게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기사가 되어. 마법사가 되어. 용병과 성직자가 되어 모험을 펼치고 악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데일은 한 번도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없었다.

'그래. 마치 내 인생처럼.'

4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데일은 포기를 결심했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애초에 클리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게임이 아닐 것이다.

데일은 다시 평소처럼 벽이나 보고 있기로 했다.

그편이 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미련이 자꾸만 데일을 잡아끌었다.

'...한 번만 더해볼까.'

마침 새로운 캐릭터 생성창이 보였다.

그곳에는 다섯 번째 직업이 보였다.

검은 갑주와 대검으로 무장한 기사.

'반인 반언데드의 기사인가. 성능은 강력하지만 제약이 많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늘 밝은 편에 서서 게임을 공략하려 했다.

그리고 전부 실패했다.

그렇다면 변화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 밤의 여신을 따르는 기사는 어딘가 꺼림칙하지만... 마지막이니만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데일은 '생성' 버튼에 마우스를 가져다댔다.

이 이후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채....

그걸로 이 기억은 끝이었다.

주위 풍경이 변하고. 텅 비어버린 공간에 데일 혼자만이 서 있었다.

데일은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의식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슬슬 깨어날 때인 것이다.

'이런 악몽은 꾸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제 끝이다.

데일은 눈을 감고 감각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꿈에서 깨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이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존재감을 느꼈다.

데일이 눈을 뜨자, 텅 비어 버린 공간에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은빛 갑옷의 사내.

"...."

늘 그렇듯. 데일이 죽인 이들이 귀신이 되어 들러붙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의 혼을 흡수해 문제가 생긴 걸까?

둘 다 아니었다.

사내는 얼굴을 투구로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데일은 어째선지 이 사내가 낯익다.

사내 역시 데일을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너는...."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내 친우들을 만난다면, 안부나 전해주시오."

"너는... 아렌?"

중후한 목소리가 투구 안을 웅웅 울렸다. 데일은 사내에게 말을 걸려 했다.

하지만 데일의 의식은 계속해서 지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데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오. 조금만 더 힘내시오.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우여."

주변의 풍경이 변한다.

* * *

꿈을 꾸었다.

긴긴 꿈이었다.

악몽이었고. 별로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데일은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여기는....'

끈적한 물과 사방에 퍼진 악취.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시체나 썩은 나뭇잎.

'늪?'

데일은 기억을 되돌렸다.

마지막 순간에 데일은 두르핀을 안고 협곡으로 뛰어들었다.

성대한 폭발이 있었고. 데일은 죽음 그 직전까지 다다랐었다.

데일이 의식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다.

아마 온몸이 터져나가, 머리통 정도만이 남지 않았을까?

데일은 계속 상황을 상상했다.

'그대로 협곡에 쓸려 내려갔겠군.'

거친 물살이다.

산산이 부서진 데일의 몸 따위는 쉽게도 휩쓸렸을 것이다.

당연히 동료들이 데일을 건져 내는 건 불가능했을 거고.

'내가 죽은 줄 아려나?'

그편이 차라리 낫다.

괜히 데일을 찾자고 강가를 뒤적여봤자 시간 낭비밖에 안 됐을 테니.

'그래도 악마를 처리해서 다행이군.'

두르핀이 죽었으니, 동료들은 무사히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 이후는 뭐....

'알아서 잘했겠지.'

그렇다면 데일은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분명 데일은 반쯤 죽은 상태로 강물에 떠내려갔을 테고, 강의 지류인 이곳 늪지까지 흘러왔을 것이다.

지금 데일의 몸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지만, 적어도 의식이 돌아올 정도로는 회복되었다.

아직 팔다리는 움직이지 않지만 그래도 천천히 상태가 나아지고 있었다.

'몸이 알아서 생기를 흡수한 걸까? 어디서?'

주위에 운 좋게 짐승 시체라도 있었나?

그렇게 의문을 가지며 눈알을 또르르 굴린 데일은 이내 늪지대에 둥둥 떠다니는 뼈다귀들을 발견했다.

'아.'

데일은 깨달았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생물이 죽고, 푹 썩어버린 이 늪은 시체 죽이나 다름없다.

데일의 몸은 늪에 남은 조금의 생기를 흡수했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회복했을 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우거진 나무 사이로 쏟아져 오는 햇살이 꽤나 따갑다. 아마 여름일까?

알 수 없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확인도 할 수도 없다. 답답하다.

데일은 꽤나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 처음이었다.

그때는 늪지가 아닌 서릿발이 날리는 설산이었지만....

'큰일이군.'

이대로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문제는 늪에서 생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점이다.

이 속도라면 겨울은 되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곤란한데.'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안다고 그때까지 기다린단 말인가.

하지만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지금 데일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다못해 마력이라도 제대로 회복되었다면....'

쥐꼬리만큼 남은 마력으로 당장 뭘 해보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어찌하지도 못하고 늪 속에 파묻힌 채로 며칠이 지났다.

데일은 체념한 채,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명상에 잠기는 건 의외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지구에서도 그렇게 살았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멍하니 있던 데일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

대단히 사뿐한 발소리다.

암살자의 발걸음처럼 은밀하고, 가볍다.

데일이 아니었으면 알아차리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짐승은 아닌데.'

데일은 호기심이 일었다.

저 발소리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만약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어쩌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큰일이 나거나.

데일은 조용히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발소리의 주인이 데일을 지나쳤다.

맨발. 어깨까지 기른 잿빛 머리카락. 아름다운 외모. 등에 멘 짧은 활. 그리고 허리에 찬 도끼와 한 손 검.

데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이엘프.'

재수도 없지.

데일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하이엘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 * *

'대체 왜 하이엘프가 이런 남쪽 늪에 있는 거야.'

데일은 기본적으로 모든 엘프를 싫어하지만, 그중 특히 더 싫어하는 엘프들이 있다.

바로 하이 엘프. 혹은 고산 엘프라 불리는 이들이다.

설산을 누비는 이 거친 엘프들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이다.

강한 이가 있다면 한판 뜨자며 무기부터 드는 작자들.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야만인들과 마주치는 건 사양이다.

데일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하이엘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사뿐히 달리던 하이엘프는 그대로 지나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돌연. 하이엘프가 걸음을 멈췄다.

"...."

하이엘프는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기다란 귀가 아래위로 쫑긋거렸다.

"강자의 냄새가 난다."

하이엘프가 휙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데일이 누워있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하이엘프는 등에 멘 활을 꺼낸 뒤. 시위에 화살을 걸며, 조심스레 다가왔다.

"너는 누구지? 이런 곳에 있을 만한 놈은 아닌데."

데일이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은 척해서 상대를 그냥 보낼 생각이었다.

...이미 반쯤은 죽어있었지만.

하지만 하이엘프는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데일을 향해 점점 다가왔다.

"죽은 척해도 소용없다. 숨을 쉬지 않아도. 너는 분명 살아있다."

"...."

"셋 셀 때까지 말하지 않으면 화살을 쏘겠다. 셋."

"알겠다. 알았으니, 활은 내려놔라."

퉁!

시위에서 화살이 떠났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데일을 두들겼다.

하이엘프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미안하다. 갑자기 말해서 놀랐다. 그러게 왜 사람을 깜짝 놀래키나."

데일은 벌써 이 엘프를 죽이고 싶어졌다.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하이엘프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움직이지 못하고, 늪에 파묻힌 데일을 이리저리 살폈다.

"신기한 몸이군. 언데드?"

"흑기사에 대해 모르나?"

"흑기사?"

하이엘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진짜 모르는 모양.

"밤의 여신에게 힘을 내려받은 반인 반언데드다. 교단으로 치면 성기사 같은 개념이고."

"그렇군."

"이해했나?"

"아니. 잘 모르겠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데일은 새삼 이 하이엘프를 다시 살폈다.

엘프답게 꽤나 아름다운 외모였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그 복장이다.

사슴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고, 속에도 짐승 가죽을 대충 잘라 만든 원시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신발은 당연히 맨발.

'야만인이 따로 없군.'

하이엘프라도 문명에 녹아든 이들은 제대로 된 의복을 갖추었다.

반대로 말하면. 눈앞의 이 하이엘프는 문명과는 영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하이엘프의 얼굴에 딱히 적대적인 감정은 없다는 정도일까?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일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바로 앞에 다가온 하이엘프가 데일의 투구를 벗겼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오오! 이 투구! 꽤 괜찮은 물건이군. 고맙다."

"...난 준다고도 안 했는데?"

약탈과 사냥은 하이엘프들의 주된 수입원이다.

하이엘프는 데일의 말을 무시하고. 데일의 투구를 멋대로 가져가 머리에 쓰려고 했다.

하지만 투구에 서린 음산한 기운에 화들짝 놀라, 곧장 투구를 바닥에 던졌다.

"뭐, 뭐야 이건! 투구를 쓰니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 영혼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야 밤의 신성이 깃들어 있을 테니까."

"쯧. 모처럼의 수확이었는데. 아쉽군."

하이엘프의 호기심이 급격하게 식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데일은 얼른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다."

"부탁?"

"나는 지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몸을 회복하려면 시체가 필요하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시체를 좀 구해다 줄 수 있겠나?"

"으음. 어려운 일은 아니군. 근데."

하이엘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왜 힘들게 사냥한 사냥감을 너한테 건네주어야 하지?"

딱히 거래를 위해 포석을 까는 건 아니다. 데일을 약올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이 하이엘프는 순수하게 궁금했고, 질문한 것이다.

자신이 왜 데일을 도와야 하는가.

"원하는 게 있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최대한 들어주겠다."

"흠. 원하는 거라."

"원한다면 결투를 해주어도 좋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다만. 나는 실력이 있는 편이니까."

엘프란 족속은 스스로를 검으로 여기며, 그 검을 단련해나가는 걸 삶의 목표로 삶는다.

강한 적수나 괴물과의 싸움은 언제나 엘프 전사들의 피를 끓게 했다.

데일의 제안에 하이엘프는 혹한 기색이었다.

"확실히. 너에게서는 강한 전사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하지만 지금 너는 약하다."

"?"

"강한 전사는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남에게 도움을 받아 위기를 헤쳐나온다면. 그건 더는 강한 전사가 아니다. 강한 전사가 아니라면, 내가 왜 결투를 해야 하지?"

"??"

뭔 개소리야.

데일은 당장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엘프들의 생각을 문명인의 기준으로 이해해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데일이 을이고 저쪽이 갑이다.

화를 삭여야 한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거지?"

"기다리겠다."

"뭐?"

"네가 스스로 위기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결투하겠다."

"...."

결국.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였다.

'넌 내가 몸이 멀쩡해지면 보자.'

"혹시 방금 속으로 내 욕하지 않았나?"

"...그럴 리가."

쓸데없이 감만 좋은 엘프였다.

결국. 하이엘프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쌩하고 사라졌다.

데일은 다시 늪 안에 파묻힌 채로 지내야 했다.

밤이 오고. 별이 뜨고. 달이 지고. 다시 아침이 온다.

혼자서 명상으로 보내던 데일은 슬슬 지루함을 느꼈다. 아무리 데일이라도 인내심에 한계는 있기 마련이니.

데일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위를 관찰하는 데에 집중을 쏟기 시작했다.

주의를 기울이면, 이 고요한 늪에도 생명들이 약동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썩은 물에는 벌레들이 알을 깠고. 그런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부리가 노란 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 새들을 잡아먹기 위해 표범이나 맹수 따위가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데일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늪의 일부가 되어. 그 모든 과정을 두 눈에 남았다.

어느 날은 개구리 한 마리가 데일이머리 위에 앉아 개굴개굴 울어댔다.

짝을 찾는 것일까?

개구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요란한 구애의 노래는 포식자를 끌어들였다.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쌩 하고 개구리를 낚아채 갔다.

가끔은 리자드맨 같은 상위의 몬스터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가끔은 이리와 표범 같은 맹수들이 목숨을 걸고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고요해 보이던 늪은, 그 나름대로 치열하고 필사적인 경쟁의 장이었다.

인간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그게 때로는 누군가를 죽이며, 또 때로는 누군가를 살리기도 한다.

그 자연의 순환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어이없는 말이지만, 데일은 무언가 편안함을 느꼈다.

'이것도... 나쁘지만은 않군.'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데일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조부가 죽은 그날 이후로 처음으로 느껴보는 심적 여유다.

조부가 그토록 말하던 해탈이라는 경지일까? 다만. 그런 데일의 정신적 성취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거기서라!! 내 점심아!!"

사슴 한 마리가 쌩하고 지나간 뒤. 그 뒤를 하이엘프가 쫓는다.

사슴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하이엘프도 그 못지않게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언제 발이 빠질지 모르는 늪 길을 사뿐히 뛰었다.

그렇게 추격을 계속하다 등에 멘 사냥용 활을 꺼냈다. 화살을 시위에 걸었고. 주저 없이 쏘아 보냈다.

팍!

사슴의 목덜미에 정확히 화살이 꽂혔다. 사슴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달리면서 활을 쏘는 묘기라.'

저런 게 가능한 건 타고난 전사인 하이엘프들밖에 없으리라.

하이엘프는 바닥에 쓰러진 사슴을 향해 다가갔다.

피를 뺀 뒤 능숙히 해체했고.

칼로 살을 잘라내,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음. 싱싱하군."

하이엘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과 하이엘프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이엘프는 고기를 몸 뒤로 가렸다.

"안 줄 거다."

"기대도 안 했다."

하이엘프는 매일 데일이 있는 곳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다.

데일이 회복되었는지. 다시 강한 전사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거란다.

데일은 이제 하이엘프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하이엘프들은 한 번 뱉은 말을 꺾는 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군.'

역시 하이엘프라 할까.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웬만한 기사들보다도 훨씬 강하지 않을까?

데일이 보기에 이 하이엘프는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였다.

우선 하이엘프는 보통 북쪽의 고산지대에 살지, 이런 덥고 습한 늪지에 살지 않는다.

그리고 하이엘프는 기본적으로 부족을 이뤄 생활한다.

실력을 기르기 위해 대륙을 방랑하는 떠돌이도 있지만,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실력을 쌓았다면. 이제 자랑도 하고, 남들의 칭송도 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뛰어난 하이엘프 전사는 이 늪지대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상하군.'

데일은 하이엘프 사회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처음으로 마주했던 게 바로 그들이었으니까.

그런 데일이 보기에 이 늪지대의 하이엘프는 실로 이상한 존재였다.

그래서 주위를 구경하는 김에 이 하이엘프도 관찰했다.

하이엘프는 매일같이 사냥을 위해 뛰어다녔다.

먹는 양이 어지간히 많은 모양.

사냥감을 찾아 분주히 뛰어다니고, 때로는 사냥한 짐승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고, 때로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참으로 원시적이지만, 어찌 보면 충실한 삶.

하이엘프는 이 늪의 생태계에 완벽히 녹아들어 있었다.

...데일이 보기에는 짐승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데일은 그렇게 주위를 관찰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슬슬 데일의 마음이 대자연에 녹아들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던 어느 날.

기회는 불현듯 다가왔다.

"거기서라!!!"

오늘도 하이엘프가 호탕하게 외치며, 늪을 달렸다.

그녀가 쫓는 건 토끼 무리였다.

토끼 세 마리가 깡충깡충 뛰며 급히 도망 다녔다.

토끼와 하이엘프는 빠르게 데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도망쳤던 토끼 한 마리가 데일의 앞에 되돌아왔다.

하이엘프의 추적을 뿌리치기 위해, 왔던 곳으로 요령 좋게 되돌아온 것.

'제법 영리한 놈이군.'

토끼는 지쳤는지. 비틀거리며 데일을 향해 다가왔다.

말없이 누워 있는 데일은 이미 이 늪지대의 배경 중 하나였다. 바위나 나무 따위와 다름없었다.

데일은 토끼를 멍하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회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벌레나 개구리 몇이 다가왔을 뿐이다.

이 정도의 짐승이 다가온 건 처음이다.

데일이 기회를 엿보자 토끼가 흠칫했다. 그러고는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이런.'

순간 데일이 뿜어내는 기세를 알아차린 걸까.

데일은 얼른 마음을 안정시켰다.

지금껏 이 늪지대에 파묻혀서 얻은 해탈의 경지.

명경지수의 마음.

생각을 비우면, 지금의 데일은 바위와도 다름없다.

데일이 마음을 가라앉히자, 토끼는 다시 안심하고 데일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데일은 눈을 감고. 청각만으로 토끼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눈을 떴다가는 마음이 평온이 깨져 토끼를 놀라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토끼가 충분히 가까워진 그때.

'지금!'

데일은 쥐꼬리만큼 남은 마력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이 정도의 마력을 회복하는 데에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술이 저 토끼에게 닿는 데에만 집중했다.

"!"

화들짝 놀란 토끼가 곧바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마력이 토기의 머리에 닿는다.

영혼 지배.

짐승의 의식을 지배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눈이 탁 풀린 토끼가 데일을 향해 걸어왔다.

데일은 토끼를 물어뜯었다.

마력이 사라져 지배가 풀린 토끼가 화들짝 놀라 버둥거렸다.

하지만 데일은 토끼를 절대 놓치지 않고, 조금 남은 생기까지 전부 빨아들였다.

데일의 몸 일부가 회복했다.

두 다리가 생겨났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앙상한 다리다.

토끼가 가진 생기가 너무 적었다.

'아직 한참 부족해.'

데일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느리게라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데일은 천천히 움직이며, 보이는 짐승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했다.

처음에는 개구리 따위의 작고 잡기 쉬운 동물부터 노렸다.

그렇게 해서 몸이 더 회복하자, 그 다음에는 더 큰 동물을 사냥했다.

토끼와 쥐를 노렸고. 둥지에서 쉬고 있던 새들을 노렸다.

데일은 그간 유심히 지켜봐 왔던 이 늪지대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쉼 없이 사냥을 계속했다.

바위의 위치에서 개구리로. 개구리에서 토끼로.

토끼에서 표범의 위치까지.

생태계의 지위를 순식간에 올려 나갔다.

마침내 표범과 리자드맨을 사냥해 흡수했을 때.

데일은 온전한 기량의 7할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 생태계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오오! 드디어 회복한 건가!"

하이엘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일의 회복이 진심으로 기꺼운 모양.

데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데일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좀 맞자."

되갚아줄 시간이다.

* * *

"바로 결투라니! 성미도 급하군!"

하이엘프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데일은 성큼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하이엘프는 곧장 화살을 쏘아보냈다.

연이어 쏘아낸 화살 3대가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다.

데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텅. 터텅!

건틀렛에 부딪힌 화살이 한꺼번에 쳐내어졌다.

하이엘프는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녀는 곧장 활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데일 상대로 화살이 의미가 없다는 걸 곧장 깨달은 것이다.

대신 허리춤에 달고 있던 한손검과 손도끼를 꺼내, 양손에 각각 들었다.

데일도 마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을 더듬었고 이내 깨달았다.

'쯧. 그러고 보니 다 잃어버렸군.'

두르핀의 폭발에 휘말려 몸이 조각나던 그때. 마법 반사 망토도. 마검도. 유물 장갑과 배낭도 전부 날아가 버렸다.

웬만한 물건은 전부 녹아버렸을 것이고 마검이나 망토는 강물에 떠밀려 늪지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검이나 망토보다는 배낭을 잃어버린 게 더 뼈아팠다.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가령. 깃털펜이라거나.

아쉬워해봤자 어쩔 수 없다.

데일은 마치 복싱을 하듯. 양팔을 들어 올려 하이엘프에게 접근했다.

적은 손도끼와 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상관없다. 데일에게는 단단한 갑옷이 있으니.

둘이 천천히 거리감을 재고 있던 그때.

데일은 기습적으로 땅을 박차며 하이엘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하이엘프는 당황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검을 뻗었다. 검 끝이 노리는 건 갑옷과 투구 사이의 이음매.

데일은 피하지 않았다.

그냥 검이 목을 파고들게 내두었다.

"어?"

당연히 피할 줄 알았던 하이엘프는 당황했다. 흑기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몰랐기에 나온 반응이다.

데일은 목에 검이 꽂힌 채로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꽝!

하이엘프는 급하게 도끼를 되돌려 방어해냈다. 하지만 그 안에 실린 충격까지 전부 흘려낼 수는 없었다.

뒤로 크게 밀려난 하이엘프는 공중제비를 돌며 다시 바닥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멋쩍게 말했다.

"그.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검을 좀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싫어."

그러고는 목에 꽂힌 검을 뽑아, 그대로 저 늪 멀리 던져버렸다.

"앗. 아앗. 내 검이... 너무한 거 아닌가? 너를 좋은 전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좋은 전사를 늪 속에 파묻혀 있게 내버려 두나?"

"결국엔 이렇게 스스로 잘 빠져나오지 않았나? 내가 옳았다는 게 아닌가?"

이 하이엘프. 어째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한다.

데일은 귀찮게 입씨름하는 대신, 다시 거리를 좁혔다.

하이엘프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검을 잃었지만, 전의를 잃지는 않았다.

투박한 도끼가 흉흉하게 반짝였다.

순식간에 하이엘프 앞으로 당도한 데일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도끼로 응수하려던 하이엘프는 돌연. 도끼를 데일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쿵.

데일이 쳐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하이엘프의 양손이 데일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었다.

팔을 겨드랑이에 낀 하이엘프는 그대로 관절의 반대 방향을 향해 힘을 주었다.

갑옷이 방어하고 있어, 본래라면 터무니없는 시도겠지만....

드득.

하이엘프의 근력이 예상보다 더 강하다.

게다가 힘을 어느 방향. 어느 각도로 넣어야 극대화가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이엘프들의 무투술.'

이런 식으로 관절기를 걸어오는 상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일 것이다.

데일은 발을 걸어 하이엘프의 균형을 무너트린 뒤, 그대로 정확히 반대 힘을 주어 상대의 관절기를 풀어버렸다.

"오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게 대처하냐는 질문.

당장 죽을 위기에서 묻기에는 너무나 한가한 의문이기도 했다.

데일은 대답 없이 손을 뻗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대로 명치를 후려칠 생각이었다.

하이엘프가 급히 외쳤다.

"천둥아!"

그 순간. 허공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팔면체의 반투명한 생명체가 나타났다.

꽈아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온 늪이 들썩였다.

충격파 탓에 데일의 일격에 실린 힘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데일은 끝끝내 팔을 뻗었다.

그리고 하이엘프의 명치 부위를 가격했다.

"컥!"

하이엘프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걸로 싸움은 끝.

데일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에 막았다?'

무조건 명치에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 팔을 교차해 막아냈다.

역시 이 하이엘프.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데일은 바닥에 널브러져 낑낑대는 하이엘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마지막 그거. 천둥 정령인가?"

허공에 나타나서 갑작스럽게 충격파를 터트리던 생명체.

천둥 정령은 소수의 하이엘프 전사만이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데일 역시 천둥 정령을 다룰 수는 없었다. 정령들은 데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이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실력이 대단하군. 정말 놀랄 정도다. 부족의 가장 강한 전사도 너보다는 약할 텐데... 자. 이제 나를 죽여라. 훌륭한 전사에게 죽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왜지? 나를 죽이고 싶어하던 거 아니었나?"

사실 맞다.

데일이 엘프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하이엘프는 살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명치를 향해 일격을 날린 것도, 반쯤은 죽으라는 의지를 담아 뻗은 공격이다.

다만 하이엘프는 데일의 생각 이상으로 실력이 뛰어났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리고 하이엘프 사회에서는 더 강하고, 지혜로운 전사의 말이 곧 법이었다.

한번 확실히 꺾어놓은 이상.

이 하이엘프는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이다.

무엇보다.

"난 이 늪의 지리를 모른다. 빠져나가는 길도 당연히 모르고."

울창한 나무와 질척이는 바닥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에서는 방향조차 잡기 어려웠다.

길치인 데일은 과장이 아니라, 영원히 이곳을 헤맬 수도 있었다.

하이엘프는 수긍했다.

"흠. 그렇군. 알았다. 도와주겠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군."

데일은 손을 뻗었다. 하이엘프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일에게 얻어맞은 부위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내심 부러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이 하이엘프는 튼튼했다.

"난 라그나다. 코리의 딸, 라그나. 너는?"

"데일이다."

"데일? 진짜로 그 이름인가?"

라그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니. 우리 한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라... 그러고보니 싸우는 것도 어딘가 하이엘프스럽기도 했고. 딱딱 끊어 말하는 억양이나 말하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야 너희들한테서 이것저것 배웠으니까."

"진짜인가?!"

라그나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느 부족과 함께했나?"

"이름이 분명... 나라트 부족이었던가."

"나라트 부족이라! 설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이들 아닌가! 허. 그렇군. 알고 봤더니 동향 친구나 다름없었군. 잘 부탁한다."

라그나가 부쩍 친한 척을 하며 데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다.

데일은 그 손을 툭 쳐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이 얘기는 그만하겠다."

"왜. 설산 얘기 재밌지 않는...."

데일이 싸늘하게 노려보자 라그나가 입을 다물었다.

하이엘프에 대한 주제는 데일에게는 썩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라그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의미 없는 대화는 더는 사양이다.

데일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정보 수집이다.

우선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여름이니까... 기껏해야 3개월 정도 지났으려나?'

데일이 물었다.

"지금이 몇 월 며칠인지 아나?"

"몇 월?"

라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멍청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여름이다."

"여름인 건 나도 알아. 몇월이냐고."

"으음. 그런 건 안 센지 오래라서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눈앞의 엘프는 야만인과 다름없다.

외부와의 교류가 없다면, 제국에서 사용하는 날짜를 모른다 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시간이나 계절이 흐르는 걸 어떻게 알지?"

"태양과 별의 위치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흠."

데일은 질문을 바꿔보았다.

"그러면 네가 보기에 가을이 올 때까지는 몇 번째 밤이 필요할 것 같나."

"몇 번째. 음... 아. 달이 두 번 차고 기울고. 해가 다섯 번 떠오르면 가을이 될 것 같다."

'가을을 대충 10월로 두면. 지금이 8월쯤인가?'

그렇다면 계산상으로는 4개월이 흘렀다는 게 된다.

'4개월이라.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

4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거인산에 있던 동료들은 어디로 향했을까.

또. 황제와 하늘을 나는 이레네. 그리고 악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일단 이 늪을 벗어나야 한다.

데일이 물었다.

"이 늪을 나가고 싶은데. 안내 좀 해줬으면 좋겠군."

"앗. 바로 나가는 건가? 으음. 더 있다 가도 좋지 않나? 여기 늪도 살기 나쁘지 않다. 따뜻하고. 먹을 것도 많고."

라그나는 늪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데일이 떠나는 걸 원치 않는 모양.

하지만 데일은 냉정했다.

"됐고. 여기서 늪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늪지 마을이라고 아나?"

늪지 마을. 하켄의 고향.

이 늪에서는 가장 가까운 인간 마을이다.

'마을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곳을 목적지로 삼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데일의 단호함에 침울해진 라그나가 말했다.

"나흘만 걸으면 될 거다."

"나흘... 멀리도 떠밀려 왔군."

늪은 생각보다 더 광활했다.

라그나가 없었으면 정말로 곤란할 뻔했다.

"아. 그리고 불길하게 생긴 검을 못 봤나? 검은색이고, 롱소드보다 길고 대검보다는 좀 짧은데. 사자가 그려진 망토나 유물 장갑도."

"불길한 검? 사자가 그려진 망토? 장갑?"

고개를 갸우뚱한 라그나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주워서 쓰지 않았겠나?"

"그건... 그렇군."

마검은 몰라도, 망토를 발견했다 분명 라그나가 착용하고 돌아다녔을 거다.

'곤란하군.'

마검도. 바이만의 망토도. 유물 장갑이나 발튼이 만들어준 갈고리도.

전부 유용하게 사용하던 물건이다.

기왕이면 찾고 싶었지만....

'이 넓은 늪에서 찾는 건 어렵겠군.'

아쉬움을 삼키고.

데일은 라그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라그나는 늪의 지리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어디로 발을 디디면 늪에 빨려들지 알았고, 어디가 위험한지도 잘 알았다.

그 능숙한 모습에, 데일은 라그나가 그간 보였던 짜증 나는 행동들을 모두 용서하기로 했다.

둘은 온종일 걸었다.

데일은 무한한 체력을 지녔고, 라그나 역시 만만치 않게 체력이 좋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지루하게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데일은 하이 엘프에 대한 이야기만 아니면 신경 쓰지 않았고, 라그나도 오랜만에 듣는 바깥의 이야기에 즐거워했다.

"악마가 이레네까지 점령하다니. 큰일이군."

"이레네를 아나?"

"옛날에 들러본 적이 있다. 매우 번창한 도시였지."

라그나도 여느 하이엘프처럼 설산이 고향일 것이고, 이곳 남부 늪지대까지 오려면 자연스레 이레네를 경유했을 수밖에 없다.

데일은 문득 궁금했다.

'이 녀석은 왜 이런 늪지에서 혼자 살고 있는 거지.'

처음부터 느꼈던 의문점이다.

하지만 데일은 구태여 그 부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데일과 라그나는 이제 갓 만난 사이다.

친하지도 않았고. 가까워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뿐히 앞서가던 라그나는 돌연. 어느 커다란 나무에서 멈춰 섰다.

나무줄기에는 쇠붙이로 긁어낸 듯한 표식이 나 있었다.

"아. 여기서는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그러지?"

"이곳부터는 검은 이빨의 영역이다."

"검은 이빨? 뭘 말하는 거지?"

"직접 보면 안다."

라그나는 갑자기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돌발 행동은 익숙하다.

데일도 라그나를 따라 나무를 올랐다.

둘은 꽤 높이까지 오른 뒤, 나뭇가지 중 하나에 걸터앉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늪이 저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라그나는 바로 근처를 가리켰다.

나무들이 거의 없는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한 무리의 리자드맨들이 모여 있었다.

'검은 이빨은 리자드맨을 말한 건가.'

라그나가 리자드맨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놈. 저 덩치 큰 놈이 바로 검은 이빨이다. 몇 번 사냥하려 했지만, 놈의 부하가 많아서 번번이 실패했다."

"흠."

"저놈들은 철을 좋아해서 바닥에 떨어진 쇳덩이는 뭐든 줍는다. 내 무기도 저놈들한테 뺏길뻔했다."

데일은 라그나의 말을 흘려들으며, 시력에 집중했다.

확실히. 이빨이 새까맣고 덩치가 유달리 큰 녀석이 하나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일까?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몬스터들이 살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때.

검은 이빨이 바닥의 진흙을 휘적이더니, 그 아래서 무언가 기다란 걸 꺼내 하늘에 들어 올렸다.

그러자 휘하 리자드맨들이 검은 이빨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성물이라도 모시는 신자와도 같은 경건한 태도다.

근데. 놈들이 숭배하는 저 물건이 어쩐지 낯이 익다.

'...저게 왜 저깄지?'

마검이 태양 빛을 반사해, 음울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 * *

라그나는 검은 이빨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검은 이빨은 이 근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리자드맨 무리를 이끄는 놈이다.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무리의 숫자만 100이 넘는다. 게다가 본인도 나이가 많고, 교활하지. 건드리면 귀찮아질 거다."

"그래?"

"그렇다."

"그러면 저놈을 죽이자."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라그나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데일은 마검을 발견해버린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성장의 기회를 구태여 피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데일은 백 마디 말로 라그나를 설득하는 대신, 짧게 물었다.

"혹시 겁먹었나? 그럼 나 혼자 가겠다."

"무슨 그런 모욕을!! 내가 겁먹었을 것 같나?"

발끈하는 라그나에게 데일이 말했다.

"겁먹은 거 아니라면, 어서 가자고."

"...알겠다."

그제야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 와서 안 가겠다고 해봤자 겁쟁이 소리밖에 안 들을 터.

그리고 라그나는 죽으면 죽었지, 겁쟁이라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데일이 라그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기 하나만 빌려줘라."

"뭐?"

"활도 있고, 도끼도 있고, 칼도 있잖아. 도끼나 칼 중에서 하나만 빌려줘."

라그나가 검을 휙 끌어안고, 뒷걸음질했다.

"...무기는 부부끼리도 안 빌려주는 거라고 배웠다."

"...."

데일은 손을 펼친 채 말없이 라그나를 노려보았다.

둘은 잠시간 눈싸움을 벌였지만, 데일은 눈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다.

결국. 라그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검을 내밀었다.

마치 자기 자식이라도 내어주는 듯한 태도였다.

"우리 리리에를 잘 부탁한다. 소중히 다뤄야 해!"

"검한테 붙이기에는 너무 귀여운 이름 같은데."

데일은 라그나가 건네준 투박한 검을 붕붕 휘둘렀다.

날이 많이 상해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 가자. 리자드맨 죽이러."

"으음. 알았다."

둘은 우거진 나무를 헤치며 걸었다.

라그나가 앞장서고 데일이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데일은 갑옷 때문에 금방 들켜버리는 반면. 라그나는 은밀하게 적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조용히 해라. 내가 우선 몇 놈을 저격하겠다."

"그래."

훤히 뚫린 공터에서 여전히 리자드맨들은 검은 이빨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검은 이빨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란 혀를 내빼, 마검의 옆면을 핥았다.

까드득.

데일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었다.

라그나가 휙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않았나."

"...실수했다."

데일은 다시 놈들을 살폈다.

저 공터는 리자드맨들의 둥지로 보였다.

한구석에는 동물의 시체와 뼈 따위가 가득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사람의 뼈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아마 늪에 잘못 발을 디딘 운 없는 여행자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쇠붙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검이나 창 따위의 무기부터 시작해, 농기구나 장식품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쇳조각만 모으는 게 아니라, 금속이면 전부 좋아하는 건가.'

물건 대부분은 늪의 습기에 녹이 슬었거나 부식되어 사용할 게 못 되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제법 상태가 괜찮은 것들도 섞여 있었다.

데일이 리자드맨들을 관찰하는 사이. 라그나는 천천히 놈들의 둥지로 다가갔다.

맨발로 사뿐히 걷는 라그나는 숙련된 암살자처럼 기척을 지웠다.

시위에 화살 세 개를 동시에 걸었다.

그리고는 데일 쪽으로 시선을 한번 준 뒤, 시위를 놓았다.

퉁!

"카악!"

"크르르!"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급소를 꿰뚫었다.

리자드맨 셋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저 활 솜씨는 언제봐도 묘기 같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이 땅을 박찼다. 포효를 지르며 혼란에 빠진 놈들에게로 뛰어들어갔다.

"우아아아아!"

그에 공명하듯. 라그나도 전투 함성을 내지르며 도끼를 들고 뛰쳐나왔다.

데일이 외쳤다.

"뒤에서 화살로 계속 저격이나 할 것이지, 왜 튀어나온 거냐!"

"내 마음이다!"

데일은 검을 휘둘러 가장 앞서 있던 리자드맨의 머리를 쪼갰다.

리자드맨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제야 검은 이빨도 혼란에서 벗어나 외쳤다.

"카! 카락! 카룸!!"

저 새끼를 죽여!! 따위의 말이 아니었을까?

퍼뜩 정신을 차린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손에는 나무 창, 녹슨 곡도, 반쯤 쪼개진 방패 따위를 들고 덤볐다.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어.'

다수의 약한 적들은 흑기사에게는 먹잇감에 불과할지니.

데일은 마력을 움직였다.

"물러나라 라그나."

"뭐?"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얼마 전 팔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시절.

데일은 적은 양의 마력을 이용해 사냥감들을 사로잡아야 했다.

한 번의 실패가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던 절박한 사냥은 데일이 마력을 다루는 솜씨를 더욱 향상시켜주었다.

정확하게 뻗어나간 마력이 리자드맨들의 머리에 닿았다.

정신지배.

"카르... 륵."

"...그륵."

리자맨들의 동공이 탁 풀렸다.

지능도 낮고, 정신력이 낮은 놈들답게 지배가 정확히 먹혀들었다.

데일은 명령을 내렸다.

"죽여."

그러자, 지배에 걸린 리자드맨들이 동료의 몸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배신은 몬스터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많은 리자드맨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 압도적인 광경에 라그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데일 너... 주문쟁이였나?"

"...."

그 표정은 동료에게 배가 꿰뚫린 리자드맨들보다도 더 큰 배신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어쨌거나 싸움은 순조롭다.

이대로는 데일을 따르는 리자드맨이 적보다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카라아악!!!"

검은 이빨이 하늘을 향해 쩌렁쩌렁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지배에 빠져 있던 리자드맨들이 제정신을 되찾았다.

데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로어인가?'

몇몇 강력한 몬스터는 울음소리에도 특별한 힘이 있으니. 그걸 로어라고 불렀다.

검은 이빨의 포효로 제정신을 찾은 리자드맨들이 다시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에는 이전보다 독기가 서려 있었다.

감히 동료를 찌르게 만든 데일에 대한 적의가 묻어나왔다.

'어쩔 수 없군. 우선 우두머리 놈부터 노려야겠어.'

데일은 라그나에게 말했다.

"잠시 리자드맨들을 맡고 있어라."

"뭣? 나 혼자?"

데일은 땅을 박차 검은 이빨의 앞에 안착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은 이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리자드맨보다 족히 두 배는 큰 체구에 무서울 정도로 근육질이었다.

데일은 곧장 찌르기를 찔러넣었다. 심장을 꿰뚫어 한 방에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캉!

검은 이빨이 마검을 비스듬히 세워, 데일의 검을 튕겨냈다.

'어쭈. 막아?'

운일까?

데일은 기세를 살려 연속해서 검을 찔러 들어갔다.

빠르고, 정확한 데다, 강력한 일격이다.

다섯 번 정도 찌르면 한 방은 맞을 거라 생각했다.

캉! 캉! 캉! 캉! 캉!

그런데. 이 리자드맨. 심상치 않다.

수려한 움직임으로 찌르기를 전부 막아낸 데다가, 도리어 반격까지 해버리는 것 아닌가.

갑작스레 휘둘러져 오는 횡베기에 데일이 반사적으로 방어동작을 취했다.

마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데일은 곧장 반격을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콰창!

항상 무시무시할 정도로 튼튼한 마검을 사용해서 잊고 있었지만, 데일의 괴력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검은 이빨도 만만치 않게 힘이 센 녀석이었다.

괴력과 괴력의 맞부딪힘에 라그나의 검은 산산이 조각났다.

"내 리리에가!!"

라그나가 절규를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팽개친 데일은 곧장 새벽 안개를 전개했다.

그대로 검은 이빨을 공포 속에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소롭다는 듯.

리자드맨이 마검을 붕 휘둘렀다.

마검에 닿은 어둠은 너무나 쉽게 잘렸다.

검은 이빨은 이죽거리며 외쳤다.

"카룸! 카카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웃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귀찮게 됐군.'

지금껏 사용할 때는 몰랐지만 이 마검이라는 무기. 생각보다 까다롭다.

'주문 계열은 전부 베어내다니. 사기 아닌가?'

이제야 자신을 상대하던 적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일이었다.

게다가 마검의 사용자 역시 심상치 않다.

이 리자드맨.

믿기지는 않지만, 검을 다루는 게 수준급이다.

리자드맨은 굳어 있는 데일을 향해 검을 까딱였다.

빨리 덤비라는 뜻이었다.

"어지간히도 자신 있나 보군."

늪지에 사는 검의 달인 리자드맨은 꽤 어처구니 없는 존재였지만, 데일은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세상은 넓으니까.

애초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도마뱀 새끼 주제에."

"카락...!"

상대가 마검을 사용하고, 검술의 기량이 뛰어나면 뭐 어떤가.

데일은 검은 이빨을 향해 느긋하게 접근했다. 마치 놀리듯이. 조롱하듯이.

무시당했다 느낀 검은 이빨은 미간을 좁혔다.

녀석은 이내 괴성을 내지르며, 데일을 향해 마검을 내리쳤다.

데일은 손을 뻗었다.

놈의 팔을 텁. 하고 붙잡아버렸다.

"카룸...?"

검은 이빨은 힘으로 데일의 손을 풀어내려 했다. 자기 힘에 자신이 있었다.

틀렸다.

검은 이빨은 처음부터 잡히면 안 되었다. 그 잘난 검술로 거리를 벌려야 했다.

데일은 점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검은 이빨이 끔찍한 고통에 안간힘을 썼지만, 도무지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카르. 카락!"

검은 이빨은 다급히 외쳤다.

녀석은 이 말도 안 되는 괴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늪지대에서 놈의 힘을 능가하는 적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저 짜증 나는 하이 엘프조차 자신에게는 한 수 접어주건만!

검은 이빨은 모른다.

상대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적을 쓰러트려왔다는 걸. 악마조차 사냥해본 적이 있는 기사라는 걸.

우물 안 도마뱀의 한계였다.

드드득!

검은 이빨의 양팔이 동시에 뽑혀나왔다. 더운 피가 후두둑 흩러내렸다.

'압도적인 힘 차이 앞에서는 기술도 의미가 없는 법이지.'

데일은 놈의 팔을 쓰레기처럼 버린 뒤.

마검을 쥐었다.

데일은 마검에 대고 말했다.

"그래. 나 말고 다른 주인에게 사용되니까, 기분이 좋았나?"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데일은 흠칫했다.

'잠깐. 지금 나, 검에 말을 건 거야?'

그건... 엘프나 할 짓거리 아닌가.

아무래도 라그나랑 함께하다보니 물들어버린 모양이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마검에 귀여운 이름을 붙여주는 자신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데일은 상념을 지웠고. 마검을 들어 고통스럽게 땅을 구르는 검은 이빨에게 향했다.

"카라? 카룸...?"

놈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땅에서 버르작거렸다.

"뭐가 억울한 거지?"

강한 자는 먹고, 약한 자는 먹힌다.

그게 이 늪의 법칙 아닌가.

검은 이빨에게도 차례가 왔을 뿐이다.

퍼걱!

마검이 검은 이빨의 머리를 반으로 쪼갰다.

놈의 몸이 허물어졌다.

데일은 시체에 건틀렛을 박아 넣어 생기를 흡수했다.

아직 불안정하던 몸이 이제야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제 나머지 리자드맨만 무리만 처리하면 그걸로 끝.

오랜만에 마검을 들고 몸이나 빙글빙글 돌릴까 생각하던 데일은 멈칫했다.

라그나가 싸우다 말고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리자드맨들은... 어째선지 데일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 * *

왜인지 리자드맨들은 싸우다 말고 데일을 향해 엎드리고 있었다.

몇몇은 깊은 두려움에 몸을 부들댔다.

데일이 라그나에게 물었다.

"얘들. 왜 이러는 거지?"

"리자드맨 무리는 서열 다툼을 통해 우두머리를 정한다. 데일 네가 검은 이빨을 쓰러트렸으니 이제 네가 서열 1위다."

"...보통 다른 종족을 우두머리로 삼나?"

그 점은 라그나도 의아한지 멍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그 검을 들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검? 마검을 말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니 라그나의 말이 꽤 일리가 있었다.

당장 이곳에 오기 전.

리자드맨들은 마검을 든 검은 이빨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던가.

'그게 만약 검은 이빨이 아니라 마검을 숭상하는 거였다면?'

쇠로 된 건 뭐든 좋아하는 리자드맨들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마검은 어떻게 비춰질까.

놀라울 정도의 날카로움에 튼튼함.

습한 늪지대에서도 녹이 슬지 않는 신비로움.

검 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

마지막으로, 모든 주문을 갈라내는 불길하고 오싹한 기운.

어쩌면 리자드맨들은 이 마검을 종교적인 의미로 숭배한 게 아닐까?

'검은 이빨은 그걸 교묘히 이용한 거고.'

적어도 검은 이빨만큼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신앙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검을 휘두르지도 못했을 테니.

그때. 리자드맨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카룸. 카락. 카. 카으."

"뭐라는 거야."

라그나가 해석해주었다.

"그 새카만 칼은 오로지 검은 이빨만이 다룰 수 있던 특별한 물건이었다 한다. 우두머리의 상징이었지. 그러니 이제 새로 칼 님께 선택받은 네가 무리를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너. 리자드맨 언어도 할 줄 아나?"

"아니? 그냥 대충 눈치껏 이해했다."

라그나는 뻔뻔하게 대꾸했지만, 그 말이 딱히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라그나가 물었다.

"그래서 데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제일 깔끔한 건 역시 그냥 죽여버리는 거다. 죽일 건가? 당연히 죽이겠지?"

잔뜩 흥분해 얼굴을 들이미는 라그나를 밀쳐낸 뒤. 데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60마리가 넘는 리자드맨들이라.'

리자드맨들은 뛰어난 사냥꾼들이다. 데일을 따른다는데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한 가지 시킬 일도 있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뭐! 대체 왜냐!"

"이래저래 쓸모가 있을 것 같거든. 우선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데...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데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리자드맨에게 다가갔다.

그 머리를 덥썩 붙잡았다.

"카락! 카칵!"

당황한 리자드맨이 발버둥을 쳤다.

데일이 그대로 자기 머리를 으깨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데일은 마력을 일으켰다.

영혼 지배.

리자드맨의 동공이 탁 풀렸다.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리면 되지.'

데일은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사자가 그려진 망토를 찾아라. 이 늪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한 쪽짜리 유물 장갑도 찾아오고.'

장갑은 워낙 작아 찾기 힘들 수도 있지만, 망토는 운이 좋다면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일은 마력을 거뒀다.

지배가 풀리자 제정신으로 돌아온 리자드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데일이 물었다.

"이해했나?"

리자드맨이 급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대충 데일이 말하는 바를 의미한 것 같았다.

"그럼 당장 부하들을 데리고 찾으러 가라."

명령을 받은 리자드맨은 다른 리자맨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한 뒤,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 지시할 건 다 해놨으니 전리품을 챙길 시간이다.

데일은 리자드맨들이 쌓아놓은 쇳덩이들을 살폈다.

대부분 영 상태가 아니었지만, 개중에는 썩 쓸만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데일은 그중 몇 개를 추려냈다.

그 사이.

뒤쪽에 있던 라그나는 쏘아보낸 화살을 회수하고, 부러진 검을 쥐고는 울상을 지었다.

"아아, 리리에...! 흑. 리리에는 좋은 아이였다. 너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거나 받아."

징징거리는 게 듣기 싫어 데일은 제일 상태가 괜찮은 바이킹 소드를 던져주었다.

리리에라고 부르던 투박한 검보다 훨씬 좋은 물건이었다.

라그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홀한 표정을 짓던 라그나는 이내 망가진 검손잡이를 내팽개치고, 바이킹 소드를 하늘 높이 들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클라라다. 우리 평생 헤어지지 말자 클라라!"

"그것도 검에 붙이기에는 너무 귀여운 이름 같은데."

그래도 마음에 드니 다행이다.

이 하이엘프한테는 미우나 고우나 도움받은 게 있으니 말이다.

어느새 해가 졌다.

나무가 울창한 늪에는 밤이 빨리 찾아왔다.

데일은 일단 오늘 밤은 리자드맨의 둥지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동과 전투로 라그나가 지치기도 했고. 리자드맨들이 망토를 찾아올 때까지 시간도 필요했다.

축축한 바닥을 피해 굵은 나무에 올라간 라그나가 말했다.

"그럼. 나는 조금만 자겠다. 데일도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라."

"그래. 잘 자라."

"!"

라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지?"

"아니. 딱히. 음. 그냥, 누군가에게 잘 자라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어봐서...."

그러고는 수줍은 표정으로 외쳤다.

"데일도 잘 자라!"

라그나는 사슴 가죽 망토를 덮고 금방 곯아떨어졌다.

라그나가 요란하게 코를 고는 소리를 들으며 데일도 눈을 감았다.

데일은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라그나랑 온종일 같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이엘프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건. 데일이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기억이다.

기억은 이윽고 현실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해졌다.

데일은 이걸 꿈이라 불렀다.

'...또 악몽을 꾸는군.'

주위는 설산이었다. 세찬 바람이 몰아쳤고 눈은 허리까지 쌓였다.

사람의 온기와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험지.

그곳에서 데일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켰지만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방 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설산이라니?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

아니면 역시 꿈인 걸까?

후자 쪽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주위 배경은 눈발이 흩날리는 설산인데 자신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추위도. 아픔도. 아무런 감각도 없다.

데일은 자기 몸을 둘러보았다.

불길한 흑색 갑옷에 차가운 피부.

게임으로만 봐오던 흑기사의 그것.

꽤 질 나쁜 악몽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처음. 데일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자각몽 속을 열심히 탐험하기에는 데일이 너무 무기력했다.

어서 꿈이 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질 때까지도 데일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때 처음 데일은 위기감을 느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어쩌면 이게 꿈이 아닌 게 아닐까?

확실한 건, 이렇게 가만히 있어봤자 꿈에서는 깨어날 수 없다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통을 느끼면 꿈에서 깨어난다는데 몸이라도 찔러볼까?

하지만 지금은 감각이 없는데?

영화에서 본 것처럼 물속에서 뛰어들까?

하지만 이 추운 설산 어디에 물웅덩이가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워 갈피를 못 잡던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발을 헤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데일은 살았다는 생각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가오는 이들의 생김새를 보고 굳어버렸다.

뾰족한 귀에 잿빛 머리. 아름다운 외향.

현실성이 없는 광경에 데일이 중얼거렸다.

"역시 꿈인가?"

늙은 엘프가 앞으로 다가왔다.

무리의 인솔자인 듯했다.

늙은 엘프는 자세를 낮춰 데일과 눈높이를 맞췄다.

"겨우 찾아냈군. 이런 곳에서 잠드셨을 줄이야."

"...?"

당연히 데일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다행이란 점은 적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까.

늙은 엘프가 물었다.

"말을 할 수 있나? 이름은?"

"대체 뭐라는 거야."

"이런. 아무래도 가르쳐야 할 게 많을 것 같군. 영웅께서 생각보다 큰 짐을 맡기셨다."

늙은 엘프가 손을 휙휙 저었다. 빨리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따라와라. 너를 전사로 만들어주겠다."

데일은 여전히 늙은 엘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눈빛과 몸짓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이 엘프들을 따라가는 게 맞을까?

엘프들은 게임에서도 지랄 맞은 종족이었는데?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데일은 더는 이 설산에서 홀로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이미 엘프들은 데일을 두고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매정한 자들이었다.

데일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신체도 원래 몸과 달랐고,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데일은 엘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데일이 이 세상에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 * *

"데일."

"...."

"데일!"

"음? 아. 라그나. 벌써 아침인가?"

"전장에서 그렇게 곤히 잠들면 어떡하나."

"전장은 무슨."

늪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고 있다. 아침이 오는 것이다.

"리자드맨들은?"

"아직 안 왔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하긴. 하루 이틀 만에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그러면 데일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건가?"

"그래야지? 왜. 싫나?"

라그나는 고개를 붕붕 저은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좋다! 그동안 내가 늪을 구경시켜 주겠다."

"별로 늪을 구경할 생각은 없는데."

"달리 할 일이 있나?"

"없지는 않지."

데일은 마검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오래도록 검을 휘두르지 않았으니 감이 죽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데일은 루드비히가 선보였던 동작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그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검을 들어 가볍게 옆으로 휘두르는 횡베기.

부웅!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데일은 그 단순하고 평범한 동작을 한번 한번 반복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검술 연습. 이백만 번을 채우기로 약속했거든."

"이, 이백만 번? 뭔가, 안 어울린다."

데일이 라그나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안 어울린다고?"

"실력은 실전을 통해 성장한다.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면 실력은 저절로 늘게 되어 있어. 그게 하이엘프의 방식이고."

"그거 잘됐군. 난 하이엘프가 아니다."

"하이엘프처럼 말하고 하이엘프처럼 싸우고, 하이엘프처럼 행동하면 그게 하이엘프다."

하이엘프를 닮았다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방해하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

"쯧."

데일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끝없이 반복하되, 단 한 번도 대충 휘두르지는 않았다.

집중을 담아 제대로 휘둘러야만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다.

데일이 진지하게 수련을 임하자, 라그나도 더 잔소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더운 오후의 기온에 늪지대가 찜통이 되어가던 그쯤.

리자드맨들이 되돌아왔다.

데일이 명령을 내린 리자드맨이 땅에 엎드리며 말했다.

"카락. 카륵. 카라르."

"뭐라는 거냐."

"어. 망토를 찾았다는 것 같다."

"...뭐?"

벌써?

이건 조금 예상외였다.

이렇게 단기간에 넓은 늪지대를 수색해 망토를 찾아내다니.

'이 리자드맨들. 엄청 유능한 건가?'

데일이 말했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는데."

"카룩. 카칵!"

"어. 마법이 깃든 물건이라, 그런 걸 좋아하는 놈을 찾아갔고, 아니나 다를까 놈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누군데."

리자드맨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두려운 듯. 몸을 떨면서 말했다.

"카라람!"

"뭐?!"

라그나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일만이 이야기를 못 따라가 미간을 좁혔다.

"뭔데 그러나."

"죽음의 지배자! 죽음의 지배자에게 망토가 들려 있다고 한다!"

"죽음의 지배자?"

늘 용감하던 라그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데일. 아무래도 망토는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갑자기 뭔 소리냐. 죽음의 지배자가 뭔데."

"놈은...! 아주아주 사악한 사령술사다!"

"사령술사?"

"이 늪지대의 남부에는 오래된 사원이 하나 있다. 죽음의 지배자는 그곳을 오래도록 점거하고 있는 녀석인데, 성질이 아주아주 더럽다!"

라그나가 데일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놈과 맞붙으면 반드시 죽고 말 거다! 심지어 죽어서도 놈을 위해 싸우는 언데드 병사가 되겠지! 그깟 망토 따위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카룸. 카락!"

"카리움!"

라그나와 더불어 리자드맨들까지 데일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 늪지에서는 그 죽음의 지배자라는 게 어지간히도 두려운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나는 데일 네가 용기 있는 전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때로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단 말이지?"

* * *

"목숨이든 보물이든 전부 드리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만신창이가 된 죽음의 지배자가 데일 앞에 넙죽 엎드렸다.

데일은 마검을 땅에 짓누르며 말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

그 모습을 보고 라그나와 리자드맨들은 말을 잃었다.

* * *

이 '죽음의 지배자'라는 분에 넘치는 별명을 지닌 사령술사는 리치였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언데드가 된 흑마법사.

죽음의 지배자는 리치답게 상당한 수준의 사령술사였다.

낡은 사원에는 그가 만들어낸 다종다양한 언데드가 우글거렸다.

개중에는 거대한 몬스터의 시체로 만든 언데드도 있었으니, 리자드맨과 라그나가 두려움에 벌벌 떤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언데드에도 격의 차이는 있는 법.

웬만한 언데드는 데일의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게다가 데일은 영혼 지배로 언데드의 제어권을 빼앗을 수도 있다.

데일은 수많은 언데드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고.

리치가 흑마법을 시전하려 하면 가차 없이 마검으로 베어냈다.

그리하여, 데일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이 뼈다귀 마법사를 무릎 꿇리는 데에 성공했다.

리치는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비굴하게 말했다.

"평생을 주인님으로 섬기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정말이지 엄청난 굴욕이다!

이 늪지대에는 적수가 없어 왕처럼 군림하던 리치가 이렇게 초라하게 엎드려 절해야 하다니.

뼈다귀로 이루어진 몸만 아니었더라면 이미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을 거다.

하지만 체면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만 있으면 상관없다.

애초에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죽음을 거부한 리치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

그런 리치에게 데일이 무심하게 물었다.

"리치라고? 사령술사고? 그럼 밤의 신도인가?"

"예, 예. 물론입니다. 경처럼 밤의 여신을 따르는 자입니다. 같은 신앙의 형제로서,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리치는 이때다 싶어 종교를 들먹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시커먼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 나를 노예로 부려라. 기회를 봐서 네놈에게 복수하겠다! 아니. 네놈을 지배해 내 수족으로 부리는 것도 좋겠지. 지금 마음껏 승리에 취해 있어라! 그게 네 마지막 기쁨일 테니!'

리치는 데일이 자기를 받아들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이런 유능한 사령술사를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데, 그 누가 마다할까!

하지만 리치를 흘낏 살핀 데일은 냉정히 말했다.

"싫어."

"...예?"

"왠지 밤에 기습할 것 같은데."

"데일. 나도 동의한다. 이 음흉한 뼈다귀는 반드시 널 배신할 거다. 주문쟁이는 절대 믿어서 안 돼."

'이 빌어먹을 귀쟁이가!!'

평소에도 가끔 활을 들고 찾아와 귀찮게 하던 하이엘프가, 중요한 순간에 초를 치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데일의 반응도 생각보다 더 심드렁하다.

아니. 은은한 적의마저 엿보였다.

'대체 왜지?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데일은 사령술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리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리치는 다시 땅에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제발! 제가 경을 위해 봉사하게 해주십시오! 경 같은 강력한 언데드의 아래에서 일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일 것입니다!"

"언데드?"

순간 데일의 안광이 거세게 타올랐다. 데일은 그대로 리치의 오른팔을 가볍게 밟았다.

뼈다귀는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부러졌다.

"...저, 저기.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나를 언데드라 부르지 마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면."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리치는 절절히 외쳤다.

나올 리 없는 식은땀이 두개골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다.

대체 언데드라 부른 게 무엇이 문제인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숨을 쥐고 있는 건 데일이다.

까라면 까야 했다.

데일은 고민에 잠겼다.

'부하라.'

데일이 없는 사이.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미지수다.

확실한 건 이전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데일은 분명 강하다.

하지만 악마들 역시 강하다.

그리고 악마는 항상 하수인들을 대동하고 다닌다.

'내가 악마를 상대할 동안, 다른 하수인들을 상대할 놈들이 있으면 나쁘지 않을지도.'

데일은 이 늪을 벗어나면 적당히 리자드맨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굳이 뒤꽁무니에 몬스터를 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자신을 추종한다는데 쳐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눈앞의 리치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노예가 되겠단다.

그럼 적당히 잘 써먹으면 그만 아닐까?

물론. 데일도 바보는 아니다.

이 리치가 순수한 의도를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좋다. 너를 하인으로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그전에 맹세를 했으면 좋겠는데."

"맹세. 말씀이십니까?"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주문에 걸고 맹세하고. 밤의 여신한테도 맹세해라."

주문에 걸고 하는 맹세는 마법사들에게 의미가 깊었고, 신에게 하는 맹세는 신자로서 의미가 있었다.

물론.

리치의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을 수도 있다.

데일처럼 그저 대가를 바치고 힘을 주고받는 계약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 실존하는 세계에서, 대놓고 신에게 한 맹세를 어기는 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 음."

어느 쪽 맹세가 마음에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리치가 갈등했다.

그것만으로도 리치가 맹세를 가볍지 않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왜 그러지? 맹세하기 싫나?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데일이 마검에 손을 가져가자, 리치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목이 타, 잠시 침을 삼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너, 뼈다귀잖아."

리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큼큼. 절대 주인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주문에 걸고 맹세하며, 밤의 신께 맹세하겠습니다. 저 역시 어둠을 따르는 자. 이 맹세는 제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질 것입니다."

"생이 다할 때까지가 아니라, 생이 다하고 나서도. 겠지?"

데일은 리치의 말장난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은근슬쩍 수작을 부리려던 리치는 거듭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흑기사는 무슨 눈치가 이리 빨라! 다른 멍청한 흑기사랑은 전혀 다르잖아.'

리치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흠흠. 제가 실수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생이 다하고 나서도 맹세는 지켜질 것입니다."

데일은 손을 뻗어 리치의 남은 한팔을 가볍게 쥐었다.

뼈는 똑!하는 소리와 함께 깔끔히 부러졌다.

"..."

"이제부터 한 번이라도 더 실수하면 그때는 끝이다. 알겠나?"

"무, 물론입니다."

"리치. 이름이 뭐지?"

"무르하탈입니다. 아울로의 아들 무르하탈."

"나는 데일이다. 열심히 하도록. 무르하탈."

"섬기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인님."

늪지대를 호령하던 사악한 리치가 데일을 따르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드러냈다.

"리자드맨도 모자라. 리치까지. 데일 대체 그대는... 지옥의 군대라도 만들 생각인가?"

라그나는 혼란스러워했고.

"카락! 카룸!"

""카룸!""

리자드맨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보여준 놀라운 무위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광을 불태우며 불안스레 주위를 살펴본 무르하탈이 물었다.

"저 실례지만 주인님. 저 멍청한 도마뱀 놈들도 함께 다니는 겁니까?"

"그래. 네 선배니까, 깍듯하게 대하도록."

"서, 선배?"

불과 하루 차이지만, 엄연히 선배는 선배였다.

데일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무르하탈에게서 마법 반사 망토 마저 빼앗았다.

앙상한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 더 처량하게 보였다.

물론.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망토를 툭툭 턴 뒤. 어깨에 걸쳤다.

'음. 이제야 좀 괜찮군.'

설마 잃었던 유물들을 이리 빨리 되찾을 줄이야.

다른 기타 잡다한 무구들은 잃어버렸지만, 이 정도만 해도 꼭 필요한 건 모두 얻은 셈이다.

목표를 모두 이룬 데일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르하탈이 점거하고 있던 낡은 사원은 곳곳이 무너져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이 단순히 폐허라서 그런 분위기가 흐르는 건 아니었다.

데일은 이 사원에서 낯익은 기운이 풍긴다는 걸 알아챘다.

"여긴 뭘 섬기는 사원이었지? 늪의 몬스터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라기에는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나는데."

"알아보시는군요. 이곳은 밤의 여신을 모시는 사원입니다."

"뭐?"

무르하탈의 말에 데일이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듣고 보니 이레네에 있던 밤의 신전과도 비슷한 느낌이 났다.

건축 양식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밤의 신도들은 모진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런 위험한 곳까지 도망쳐야 했지요. 그렇게 숨어 사는 와중에도 신앙을 잃지 않았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데일은 사원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여신을 숭배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데일은 눈을 서늘하게 빛내며 무르하탈을 쳐다봤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 갔지? 설마 네가 전부 죽였나?"

데일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려 하자, 무르하탈이 황급히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어찌 신앙의 형제를 해코지하겠습니까. 제가 왔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가장 상태가 좋은 시체도 죽은 지 백 년은 지났더군요. 언데드로 되살리지도 못했습니다."

"마치 시도해봤다는 듯한 말투군."

"그, 그럴 리가요."

움찔대는 리치에게서 시선을 돌린 데일은 생각했다.

'가만. 이곳이 밤의 신전이라면 밤의 여신을 만나는 것도 가능한가?'

그렇다면 뜻밖의 행운이다.

바깥의 상황도 들을 수 있고, 제물도 바칠 수 있을 테니.

"여기 기도실은 어디 있지?"

"아. 저기 무너진 잔해 옆에 나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기둥이 무너져 잔해에 파묻힌 기도실 쪽에 사람 하나가 드나들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쯧. 좀 치우고 살아라."

"...예."

무르하탈에게 핀잔을 준 데일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구조의 복도가 보였다.

데일은 복도를 지나쳐 적당한 기도실 하나를 열고 들어갔다.

기도실 안은 이레네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 부분은 똑같군.'

제단과 은 촛대. 그리고 양초 세 개.

데일이 땅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왔습니다."

"...."

아무런 대답이 없다.

제대로 못 들은 것일까?

데일은 좀 더 크게 말했다.

"왔습니다!"

그제야 양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평소랑은 다르다.

연기는 매우 흐릿해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다.

데일의 고개를 절로 숙이게 했던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래라면 여신의 형상을 이루어야 했던 연기는 대신, 허공에 글자를 만들었다.

[살아. 다행. 반갑. 기쁨.]

데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글자에 집중한 뒤, 물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겁니까?"

[긍정.]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소통해야 하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거군요."

[힘. 감소. 권능. 부족.]

데일은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글자들을 해석했다.

"힘이 약해져서 목소리도 제대로 못 들려준다는 거군요."

[비통.]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불가. 제약. 힘. 부족.]

아무래도 여신에게 무언가 정보를 얻는 건 힘들어 보였다.

'결국은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건가?'

[공물. 힘. 하사. 가능.]

다행히 데일이 공물을 바치면 힘을 내려주는 건 여전히 가능한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걸 위해 다른 권능들은 포기했을지도.

데일은 생기와 잔혼을 바쳤다.

두르핀에게서 산 채로 흡수했었던 잔혼이 여전히 조금 남아 있었다.

"능력치는 골고루 투자하겠습니다."

두르핀에게서 온전히 생기와 잔혼을 흡수해 바쳤다면 곧바로 등급 상승도 노려볼 만했으련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 정도의 생기와 잔혼이 없었다.

하지만 적은 양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검은 이빨을 비롯해 이것저것 사냥하고 다녔으니.

여신이 데일에게 힘을 내려주었다.

데일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5

직업: 암흑기사

근력: 114

내구: 70

마력: 64

체력: ―

정신력: 54

[보유 기술 목록]

생기 강탈

새벽의 안개

영혼 지배

해골마 소환

[특성]

반인 반언데드

어둠의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별이 되어버린 숭고한 영웅

'음?'

상승한 능력치를 흡족하게 확인하던 데일의 시선이, 마지막 칭호 부분에 멈췄다.

그곳에는 '별이 되어버린 숭고한 영웅'이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악마 살해자란 훌륭한 별명은 어디 가고, 웬 해괴한 별명이 생겨난 것일까.

'설마.'

사람들은 데일이 모두를 위해 희색하고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빨리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계십시오."

[아들. 신뢰.]

"그럼 이만."

그때. 고개를 돌리려는 데일의 눈앞에 단어들이 다급히 떠올랐다.

[사원. 중앙. 바닥.]

"예?"

[사원. 중앙. 바닥.]

"이곳 사원의 바닥을 파보시라는 말씀이신가요?"

[긍정.]

숨겨진 유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한번 파보겠습니다."

[아들. 데일. 사랑. 사랑. 사랑.]

마지막의 부담스러운 애정 표현은 무시하며. 데일은 다시 사원으로 나왔다.

무르하탈과 리자드맨. 그리고 라그나는 서로 어색하게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데일은 주위를 둘러본 뒤, 여신이 말한 중앙 부분을 찾았다.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유난히 단단한 판석으로 이루어진 곳이 있었으니까.

데일은 바닥 위에서 힘껏 발을 굴렀다.

쩌저적.

단단한 바닥이 쉽게도 깨져나갔다. 무르하탈이 당황해 물었다.

"대, 대체 왜 그러시는지."

"이 아래에 뭔가 있다고 여신이 말하더군."

"예, 예? 여신께서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신 겁니까?"

강한 건 알았지만, 그 정도로 대단한 흑기사였다고?

무르하탈이 놀라거나 말거나.

데일은 깨진 판석을 집어서 치웠다.

머지않아 바닥 아래 숨겨져 있던 금고가 드러났다.

무르하탈이 끼어들었다.

"굉장히 단단해보이는 금고군요. 제가 열 방법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우드득.

데일은 금고를 힘으로 뜯어냈다. 그리고 무르하탈에게 말했다.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고 문을 뜯어낸 데일은 안쪽을 살폈다.

제법 큼지막한 금고였지만, 그 안에 든 건 자그마한 물건 하나였다.

창백한 빛을 내는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

'이건... 성물?'

펜던트에서는 심상치 않은 힘이 느껴졌다.

그냥 성물이 아니다.

굉장히 강력한 성물이다.

* * *

데일은 펜던트를 쥐어보았다.

밤의 신성이 느껴졌다.

성물. 그것도 그저 그런 하급 성물이 아니라, 강력한 힘이 깃든 녀석이었다.

'이런 곳에 성물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늪지대에 버려진 사원. 그 아래에 이런 물건이 파묻혀 있을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성물에서 풍기는 기운에 리자드맨과 라그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가장 크게 반응한 건 리치 무르하탈이었다.

"신이시여. 맙소사. 저는 백 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이런 강력한 성물은 살면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정도인가?"

"예. 틀림없습니다."

"혹시 무슨 효과인 줄도 짐작이 가나?"

"그것까지는 저도 잘...."

데일은 무르하탈에게서 시선을 떼고 초승달 모양의 펜던트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펜던드에서 뿜어지는 창백한 빛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데일의 의식이 문득. 펜던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뭐야.'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온 세상을 덮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초승달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데일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손에 쥔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이 성물은 자신이 지닌 힘을 데일에게 알려준 것이다.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긴 하군.'

성물의 이름은 '밤의 펜던트'.

이 펜던트의 힘을 사용하면... 한낮에도 밤을 불러낼 수 있다.

* * *

새옹지마라 했던가.

데일은 몇 가지 유용한 무기들을 잃었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한 성물을 손에 넣었다.

그는 밤의 펜던트를 목에 걸어 갑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으로 이 사원에서 볼 일은 끝이 났다.

데일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원을 벗어났다.

그 뒤를 리자드맨 무리와 라그나.

리치 무르하탈과 그 휘하 언데들이 뒤따랐다.

무르하탈은 총명한 자였다.

데일이 좋든 싫든, 앞으로 한동안은 데일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앙상한 손을 비비며 물었다.

"주인님.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이 늪의 지배자가 되실 생각이겠지요? 아니면 인간들의 도시를 정복하는 것도 좋겠지요. 이 무르하탈이 지혜를 짜내보겠습니다. 이래 봬도 전쟁에 여러 번 종군해봤습니다. 참모나 책사로서 주인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이제 무르하탈은 이 흑기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다른 흑기사처럼 언데드의 본능에 잡아먹혀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잘 알았고.

'게다가 여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정도면, 필시 대단한 자일 것이다.'

교단으로 치면 최고 성기사쯤 되지 않을까?

그런 데일에게 맞서는 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란 행위다.

무르하탈은 차라리 데일의 눈에 들기로 결심했다.

'이런 흑기사가 꾸미려는 일은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빛의 교단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제국을 무너트리라는 명령을 받았을까? 아니면 밤의 신도만을 위한 국가를 건설하라는 사명이 있을지도. 어느 쪽이든 미리 점수를 따놓으면 좋겠지.'

미리 좋게 보여놔야 훗날 데일이 성공했을 때 자신이 이인자로서 떵떵거릴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저 도마뱀 새끼들이 내 선배라고? 그럴 수는 없지!'

그토록 무시하던 리자드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무르하탈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데일의 신뢰를 사, 이 무리에서 서열을 높일 생각이었다.

그런 무르하탈의 불타는 안광에 리자드맨들은 불만스레 혀를 쉭쉭 내밀었다.

리자드맨들도 검님(마검)께 선택받은 이 강력한 부족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무르하탈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해버렸다.

리자드맨들은 무르하탈을 보며,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해서 죽여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뼈다귀 마법사와 이족보행 도마뱀이 서로를 향해 경쟁심을 불태우는 사이.

데일은 무르하탈의 질문에 답했다.

"어떡할까라... 일단 늪지대를 벗어나야겠지."

무르하탈이 곧장 굽신거리며 아부를 떨었다.

"과연. 주인님 같은 위대하신 분을 담기에, 이 늪지대는 너무나 작은 그릇이지요. 역시 제국을 무너트릴 생각이십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제국은 이미 멸망했다."

"...예?"

"악마에게 이레네를 내주었고, 황제는 성을 하늘로 띄워서 도망쳤다."

"허."

믿기 어려운 얘기에 무르하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악마들이 위험한 존재라는 건 그도 알았다. 수십 년 전에는 전장에도 섰고, 그 두려움을 똑똑히 목도했다.

그 정도의 사령술사가 이런 늪지대에 은거한 건, 그런 두려운 존재와 마주치고 싶지 않겠다는 공포도 한몫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국이 멸망했다고?'

얘기하는 게 데일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저주를 먹여주었을 것이다.

"너도 느꼈을 것 아닌가. 여신의 힘이 약해졌다는 걸.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말이야."

"...여신께서는 원래 대부분의 신도에게는 말을 걸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어쨌든 일단 늪을 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데일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고. 동료들의 소식을 들은 다음, 데일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압축하면.

"악마를 죽여야지."

"...예? 뭐, 뭐를 죽인다고요?"

"제대로 들었으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라."

데일은 무르하탈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악마를 죽인다. 너도 동참해야 하고."

"어. 으."

"잘 부탁한다. 앞으로 머리도 열심히 굴려주고. 책사, 무르하탈."

악마를 죽이러 간다니! 제정신인가? 목숨이 두렵지 않은가?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는 무르하탈이었지만, 입 밖에 흘러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이 무르하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멀리 있는 악마보다는 가까이 있는 데일이 더 위협적이었다.

* * *

일행은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이틀간의 이어진 행군 속에서 딱히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불길한 사령술사와 리자드맨 무리. 그리고 흑기사와 엘프가 함께하는 이 무리를 습격할 간 큰 적은 없었다.

해가 졌을 때.

일행은 늪의 외곽에 도착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 나가면 드디어 단단한 땅이 있는 평야였다.

지긋지긋한 늪도 이제 끝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다시 이동하겠다."

"예, 주인님. 언데드를 부려 주위를 경계하겠습니다."

"카룸."

리자드맨과 무르하탈이 떠나갔고.

라그나와 둘만 남게 되었다.

라그나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지 위에 요령 좋게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나무 사이로 드러나는 밤하늘의 한 자락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이 늪지대를 벗어난다.

어쩌면 헤어짐이 다가왔을 수도.

그래서 그런지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가 흘렀다.

그런 분위기를 깬 건 라그나였다.

"나는 이 늪이 좋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엘프들의 충동적인 성격에 익숙했다.

"이런 끈적한 곳을 좋아하다니. 취향도 별나군."

"헤헤. 고맙다."

"칭찬 아니다."

배시시 웃은 라그나가 말했다.

"난 이 늪이 좋다. 새들이 지저귀는 것도 좋고, 벌레가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도. 생명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좋다. 평생 이곳에서 살다가, 언젠가 이곳에 묻혀 죽고 싶다. 내 시체를 벌레와 동물들이 물어뜯어 먹어주면 좋겠다. 그 벌레와 동물을 또 다른 동물들이 잡아먹고, 그렇게 영원히 이 늪의 일부가 되고 싶다."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누가 보면 늪이 고향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꼭 태어난 곳만 고향이란 법은 없지 않나. 이곳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데일을 향해 라그나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데일. 이곳에서 나랑 함께 살자."

프러포즈... 는 아니다.

만약 라그나가 데일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면, 좀 더 저돌적으로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그게 엘프들의 방식이다.

라그나는 그저 동료를 원했다.

그리고 데일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싫어."

단호한 대답에 라그나가 물었다.

"데일은 내가 싫나? 아니. 데일은 처음부터 나를 마음에 안 들어했었지. 혹시 데일은 엘프가 싫은 게 아닌가?"

"...."

라그나는 엘프답게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파고 들어왔다.

그 눈동자에는 대답을 반드시 듣겠다는 열망이 빛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대충 무시하려든 데일도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하이엘프랑 이렇게 길게 대화한 게 얼마 만이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항상 속에 품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해본 적 없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설산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 처음 나를 발견해 준 게 하이엘프 부족이었지. 좀 나사가 빠지긴 했어도,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언어를 가르쳐주고, 싸우는 법이랑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 줬지."

처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미숙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흑기사의 몸에 빙의했다고 해도 갑작스럽게 사람들을 숭숭 썰어버리는 인간 백정이 될 수는 없었다.

반년간 싸우는 법을 배웠다.

검을 쥐는 법부터 무기를 투척하는 것까지.

전사로서 필요한 모든 걸 전수해주었다.

그 당시 데일은... 솔직히 그런 생활이 즐거웠다.

조부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이런 새로운 생활은 기이한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과거 같은 건 잊고. 설산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기게 되었다.

하이엘프들은 데일에게 또 다른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게다가 데일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싸움의 재능이.

데일은 엘프들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했다. 그는 금방 뛰어난 사냥꾼이자 전사가 되었다.

온 종족이 뛰어난 전사들인 하이엘프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익숙해지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하이엘프들은 부족끼리 싸움이 빈번하더군. 나도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근데...."

"근데?"

"적을 벨 수 없었다."

그때의 데일은 지금보다 인간적이었다.

신념도 훨씬 강했다.

조부가 남긴 조언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런 데일에게 같은 사람을 베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반 언데드의 몸은 그런 부분에 전혀 거리낄 게 없었지만... 데일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았다.

데일은 사람을 죽이지 못했고, 생기를 흡수하지도 않았다.

사람의 시체에서 생기와 잔혼을 흡수하라니.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데일은 언데드의 본능이 발하는 갈증과 살의를 참아내며, 스스로의 도덕을 지키려 했다.

"적 하이엘프를 넘어트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차마 그 목까지 벨 수는 없었다. 나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말했지."

"하지만 항복하지 않았겠군."

하이엘프는 죽으면 죽었지만, 비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놈은 곧장 일어나 나를 공격했다. 내가 자기를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거지. 그때 내 동료가 끼어들었고, 놈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 역시 크게 다쳤고."

"그렇군."

그때부터였을 거다.

동료였던 하이엘프들의 반응이 냉담해진걸.

그날 이후 하이엘프들은 데일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거리를 두었다.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한참 상의하더니 데일에게 통보했다.

"나를 추방하겠다더군. 하루 안에 떠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가족이라 생각했었던 이들의 배신. 하지만 데일은 그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설산을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이 더 잘하면 마음을 돌려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들은 한번 뱉은 말을 꺾는 법이 없다.

하루가 지났고. 그들은 데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살기가 깃든 제대로 된 일격이었다.

데일은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래도 갑옷으로 화살을 막아가면서 도망치니까 어찌어찌 살아지더군.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나를 계속 추격하면서 정령이랑 활로 죽이려 하더군. 마지막에는 직접 칼로 맞부딪혀 왔고 말이다."

끝도 없는 침엽수림과 바닥에 무릎까지 오는 새하얀 눈.

거리를 두고 공격해오는 전투의 달인들.

데일에게는 가장 힘겨운 전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데일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나에게 유독 친절하던 엘프였지. 놈이 도끼를 들고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때 난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녀석을 찌르고, 생기를 취하고 있더군."

"...그렇군."

그렇게 데일은 전사가 되었다.

"엘프를 싫어하냐 물었나? 글쎄."

데일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저 마주하는 게 두려웠을 뿐.

'또다시 배신당할까봐 두려웠던 거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친해지기 전에 밀어내었다.

라그나도 그런 감정을 눈치챈 듯하다.

가끔 멍청하게 행동해도, 이 하이엘프는 놀랄 만큼 날카로웠으니.

시종일관 진지하게 듣던 라그나가 물었다.

"데일 이라는 이름도 그들이 지어준 것인가?"

"아니. 왠지 모르지만 내가 가까스로 설산을 벗어나려 할 때 일제히 그 단어를 외쳐대더군. 뭐. 내가 모르는 욕설 정도 되지 않겠나? 마음에 들어서 그냥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흐음."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두려움이라는 녀석은 전사가 꺾어야 할 필생의 적이다. 무시무시한 적이지. 하지만. 조금만 달리 바라보면, 그 강력해 보이던 적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갑자기 뭔 소리지?"

"데일이라는 단어는 고대 엘프어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단어지. 무슨 뜻인지 아나?"

"뭔데."

라그나가 힘을 주어 또박또박 외쳤다.

"위대한 전사!"

* * *

둘은 그 뒤로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데일이 침묵을 깬 건 한참 후였다.

"앞으로 강적들과 싸울 생각이다. 악마는 끔찍한 괴물들이지. 뛰어난 전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데일이 라그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함께하겠나?"

지금껏 라그나가 했던 것과 정반대의 제안.

라그나는 데일과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입이 열리고 흘러나온 말은, 데일의 제안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라그나가 순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자라, 데일!"

"...그래. 너도 잘 자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늪을 사랑하던 하이엘프는 없었다.

데일은 라그나가 사라진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새 부하들에게 말했다.

"가자."

"예, 주인님."

"카룸."

과거에 잠겨 있을 시간은 끝이다.

이제 늪을 벗어나 세상으로 돌아올 때다.

황혼

* * *

데일은 늪 밖으로 나왔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 있던 여름 햇볕이 따갑게 내리쬈다.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햇빛은 불쾌했다.

하지만 무르하탈과 그 언데드들은 불쾌해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다.

격 낮은 언데드들은 햇빛에 녹아 사라져가고, 무르하탈은 괴로워했다.

"주, 주인님. 햇빛이 몹시 따갑습니다. 제 언데드들은 햇빛 아래에서는 평소 힘의 절반 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되도록 밤에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카룸. 카락."

리자드맨은 그런 무르하탈을 비웃었다.

그들은 과시하듯이 햇살을 쬐며, 몸을 따뜻하게 덥혔다.

무르하탈은 감히 자신을 도발하는 리자드맨을 죽여서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데일이 보는 앞에서 내분을 벌일 수는 없는 법.

무르하탈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역시 낮보다는 밤을 선호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알았다. 다음부터는 되도록 밤에 다니지.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들러야 하니, 괴로워도 참아라."

"자비로운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데일은 하켄의 고향인 늪지 마을을 방문할 생각이었다.

거기서 소식도 좀 듣고, 돌아가는 정세도 알아봐야 한다.

'어쩌면 하켄이 있을지도 모르니.'

마을에 들르려면 되도록 낮시간이 나았다.

만약 해가 지고 나서 흑기사가 이끄는 언데드와 리자드맨 무리가 다가온다면, 마을 사람들이 괜한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무르하탈. 네가 방향을 잡아라. 나는 길 찾는 데에 재주가 없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고개를 조아린 무르하탈이 앞장섰다.

데일이 그 뒤를 따랐고, 그다음에는 리저드맨 무리가.

마지막으로 무르하탈이 일으킨 언데드 군세가 느릿느릿 걸었다.

따가운 햇빛에 낙오하는 언데드가 꽤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게 반나절 가량을 이동하니 멀리서 늪지 마을이 보였다.

"저기인 것 같은데... 흐음. 고요하군요."

무르하탈의 말대로다.

늪지 마을은 깊은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목책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밭도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이레네가 무너지면서 대륙 중부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날뛰던 악마들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혼란을 퍼트렸을 것이다.

늪지 마을도 그 위협에서 빗겨나갈 수는 없었을 터.

데일은 늪지 마을로 들어섰다.

하켄과 같이 방문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한때 미치광이 마법사를 기다리던 망루가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공터가 있었으며, 다 같이 연회를 즐기던 회관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무르하탈은 날카롭게 안광을 빛내며 주위를 관찰했다.

"시체도, 전투의 흔적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도망간 것 같습니다."

"그래."

아마 하켄이 주민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 저는 따로 챙길 게 있나 이 일대를 수색해보겠습니다. 필요한 식량과 무기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식량과 무기?"

"예. 주인님께서는 이제 군대를 조직하실 것 아닙니까? 혹자는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잘 훈련된 병사와 엄격한 규율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급입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보급 마차를 수송하는 임무에 참여했었기에, 보급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저와 제 언데드들은 딱히 식량이 필요 없지요. 하지만 숫자가 60이 넘는 저 도마뱀들은 아닙니다. 식량 확보는 필수입니다. 또, 무기 수급 역시 중요합니다. 가장 하찮은 스켈레톤에게도 무기를 쥐여주는 것과 맨손으로 싸우게 하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앞으로 군대의 규모를 키워나가실 거라면, 그 부분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규율 없는 병사들은 싸울 수 있지만, 굶주리고 무기 없는 병사들은 싸우지 못합니다."

무르하탈의 조언을 곱씹은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이다. 무르하탈."

데일이 리자드맨과 무르하탈을 받아들인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냥 데리고 다니면 악마를 상대하는 데에 쓸만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숫자가 불어나면 당연히 염두에 둬야 할 것도 생긴다.

무르하탈은 그 점을 잘 지적해주었다.

"앞으로도 좋은 의견이 있으면 부탁하겠다."

"클클클. 물론입니다. 이 무르하탈. 책사로서 주인님을 위해 지혜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무르하탈은 일부러 '책사'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시퍼런 안광이 희열로 일렁였다.

무르하탈은 리자드맨들을 휙 쳐다봤다.

그러고는 비웃는듯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멍청한 도마뱀들아. 네놈들이 유일하게 잘하는, 쇳조각 찾을 시간이다."

"카락! 카!"

리자드맨들이 항의했다.

왜 너 같은 뼈다귀가 지시를 내리냐는 불만이었다.

어째선지 도마뱀들의 말을 이해하는 무르하탈이 사악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클클. 그야, 이 몸은 주인님의 책사니 너희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지."

"카락!"

"불만이 있으면 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해보던가!"

둘이 싸울 기미를 보이자, 데일이 한소리했다.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라."

"물론입니다."

"카룸."

리자드맨 무리와 무르하탈은 경쟁적으로 흩어졌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찾아 데일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열성이었다.

데일은 마을의 회관 안에 남았다.

귀찮은 걸 자기들이 다 해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확실히 부하가 있으니까 편하긴 하군.'

여유가 생긴 데일은 회관 안을 둘러보았다.

방치되어서 그런지 먼지가 가득했고, 곳곳에는 거미줄이 붙어 있었다.

'고작 몇 달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폐허가 되다니.'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한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다른 식탁과 의자들은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유독 한 식탁만이 회관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식탁 위에 큼지막한 맥주잔 하나가 거꾸로 덮여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데일은 식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펄럭.

누리끼리한 종이 한 장이 원탁 위로 흘러내렸다.

데일은 종이에 쓰인 글자를 눈에 담았다.

[만약 경께서 어딘가에 사라계신다면. 분명 이고세 들리시라 믿습니다. 저희는 서쪽으로 감니다. 꼭 찾아오시리라 믿고 있슴니다. ―하켄]

그건 하켄의 편지였다.

'글씨를 더럽게도 못쓰는군. 맞춤법도 개판이고. 나중에 글이나 가르쳐줘야겠어.'

그런 더러운 글씨와 엉망진창인 맞춤법이 도리어 이게 하켄의 편지임을 증명해주었다.

'그래. 살아있었군.'

내심 걱정했었다.

또 다른 악마의 추격이 있었을 수도 있고, 거인이 배신했었을 수도 있으니.

다행히 하켄은 무사히 이곳까지 도달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안심이 되었다.

수색을 떠났던 부하들이 돌아왔다.

무르하탈이 보고했다.

"반쯤 썩은 식량과 무기로 사용할만한 농기구 몇 개. 그리고 의류를 조금 구했습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이건 주인님께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왔습니다."

무르하탈이 가방을 내밀었다.

허리에 매는 형식의 가죽 가방이었다.

"그래.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락! 카칵!"

리자드맨은 왜 자기들이 구해온 걸 무르하탈이 생색내냐고 화를 냈다.

데일이 리자드맨에게 말했다.

"너희도 수고 많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카르! 카략!"

"카리악이라 불러달라고 하는군요."

"그래. 카리악. 수고했다."

"카룸!"

카리악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수그렸다.

데일은 배낭을 허리에 매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비운 건 다시 채워나가면 그만이지.'

데일은 그 안에 하켄의 쪽지를 집어넣었다.

"자. 다시 이동할 시간이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서쪽으로."

* * *

데일 일행은 여행자들이 자주 다니는 큰길로 들어섰다.

'세상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을 거야. 군단도 건재하고, 각지의 성들도 있으니까.'

물론 4개의 군단이 아군의 편이냐 묻는다면 그건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전부 배신하지는 않았을 거야.'

당장 4군단에서도 적에게 돌아선 건 전체 병력의 절반이었다.

여전히 이쪽에 우호적인 군단과 병사들이 있을 거다.

어쩌면 성을 하늘로 띄워 올린 황제가 그들과 접촉할지도 모를 일이고.

어쨌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데일에게 당장 필요한 건 정보다.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굳이 큰길로 당당히 걷는 이유였다.

아무래도 큰길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마련이고, 큰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근데... 좀처럼 보기가 힘들군.'

벌써 하루를 꼬박 이동했건만.

사람은커녕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무르하탈도 당황했다.

"허. 정말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했답니까. 아무리 늪 근처가 대륙의 오지라지만,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군요."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다."

"정말 무슨 일인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데일은 이내 무언가를 알아챘다.

"아."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사람을 마주치기 위해 큰길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죠."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아!"

데일의 의중을 이해한 듯, 무르하탈도 탄성을 내질렀다.

데일이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악마가 이 근방을 주름잡고 있다고 치면 그 하수인와 추종자들도 돌아다니겠지. 그리고 놈들이 사용할 길은...."

"큰길이군요!"

악마 숭배자와 하수인에게 사람이란 먹잇감이다.

그렇다면 그 먹이를 경쟁자보다 빠르게 잡아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큰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고, 큰길을 끼고 있는 마을도 많아. 그러니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하수인들은 큰길을 위주로 돌았을 거야.'

데일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큰길을 순찰했을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잘 닦인 길 대신 산이나 숲으로 숨어들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악마 하수인 역시 큰길을 이용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먹이가 줄어들면 자연히 사냥꾼도 줄어드는 법이니까.'

늪지대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무르하탈이 데일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주인님은 총명하시군요. 이 무르하탈. 감읍, 또 감읍했습니다!"

"아부는 그만 떨고."

지금이라도 산이나 숲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건 그것대로 썩 효율적이지 못한데.'

고민하던 데일은 결론을 내렸다.

"계속 이 길로 간다."

"오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일단 아부부터 내뱉은 무르하탈이 물었다.

"혹시 이유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제 와서 무작정 산이나 숲을 뒤지는 것도 못 할 짓이야.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그래도 악마의 끄나풀 하나둘 정도는 마주치지 않겠나?"

"그렇...죠?"

"그러면 그놈들을 붙잡아 사람들이 사는 곳을 물어볼 생각이다."

"과연. 근데. 생각 있는 놈들은 이쪽의 숫자를 보면 일단 도망치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군. 그렇다면...."

데일은 로브 하나를 무르하탈에게 건네주었다.

"입어. 그리고 혼자 앞으로 나가라."

"...예?"

"멀리서 보면 몸도 앙상하니, 여성처럼 보이겠지. 그리고 악마의 끄나풀들은 혼자 다니는 인간 여자를 절대 지나치지 않는다."

일종의 미인계라 해야 할까.

"...진심이십니까?"

"내가 너랑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무르하탈이 발끈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계획입니다! 분명 실패할 거라고요! 애초에 저를 보고 여자로 착각한다니! 이 무르하탈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기운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겁니다. 내기해도 좋습니다!!"

* * *

"여자다! 잡아!!"

"킬킬. 운이 좋군!"

"...."

습격자들이 가녀린 무르하탈을 향해 달려들었다.

황혼

* * *

무르하탈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로브를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여자로 오해받다니!

물론 언데드에게 성별은 의미가 없다.

다 같은 시체일 뿐. 생식이 불가능한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무르하탈의 정신은 여전히 인간 남자의 그것이다.

무르하탈은 깊은 굴욕을 느꼈다.

그리고 그 굴욕에 대한 적의는 습격자들에게 향했다.

"이 노옴드을!! 감히 이 무르하탈에게!"

무르하탈이 달려드는 습격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앙상한 뼈다귀 손이 시퍼렇게 빛났다.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습격자들이 급하게 멈춰서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무르하탈의 저주가 습격자들에게 적중했다.

"커어억."

"그윽."

습격자의 피부가 순식간에 푸석푸석해지고,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부가 녹아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습격자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도저히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부패의 저주.

수준 높은 흑마법에 습격자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죽어! 죽어! 하하하! 감히 나에게 굴욕을 선사한 대가다!"

무르하탈은 리치답게 사악한 광소를 터트렸다.

"클클클! 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

"멈춰라."

"넵."

데일이 오자 무르하탈은 얼른 공손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저주를 거두었다.

정보를 얻으려면 죽여서는 안 된다.

데일은 바닥에 널브러진 습격자들에게 다가갔다.

그 외향을 살폈다.

'악마 숭배자인가? 꽤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상당히 강한 악마를 섬기는 것 같은데. 근데, 그런 것치고는 거의 인간 모습 그대로고.'

숭배자든 하수인이든, 악마에게 더 강한 힘을 받을수록 그 모습은 흉하게 뒤틀린다.

하지만 지금 사로잡은 자들은 요사하게 빛나는 눈만 제외하면,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데일이 다가서자 습격자가 외쳤다.

"네놈! 네놈들은 대체 뭐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우리의 동지들이 네놈을 찢어죽일 것이다!"

"어째 너희들은 하는 말이 죄다 비슷한지 모르겠군. 같이 대본이라도 읽고 연습이라도 하나?"

"뭐?"

무르하탈이 끼어들며 성을 냈다.

"이노오옴! 감히 주인님께 건방지게 굴다니! 조금이라도 편하게 죽고 싶다면, 지금 이 근방에 누가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부 불어라!"

"크하! 멍청한 뼈다귀 놈아! 그런 한심한 협박에 내가 입을 열 것 같나! 편한 죽음이라고? 마음껏 고문해라! 나는 오히려 고통을 즐긴다!"

"이 녀석이!"

데일은 무르하탈을 저지했다.

"그만."

"하지만...."

"어차피 순순히 털어놓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어."

악마 숭배자나 하수인들은 독하기 그지없는 놈들이다.

고문 같은 건 의미 없다.

대신, 데일은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내 눈을 봐라."

"뭐? 크으으윽."

데일은 습격자의 머리를 덥석 붙잡았다.

마력이 뿜어져 나와 습격자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습격자는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잇따른 성장으로 정신력이 몹시 강해진 데일이다.

그리고 영혼지배는 서로 간에 정신력 차이가 클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머지않아 습격자의 동공이 탁 풀렸다.

녀석의 입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놓으면 된다. 알겠나?"

"알겠... 습니다."

데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우선. 이 근처에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있나?"

"예... 저희가 관리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너희가 관리한다고?"

악마 숭배자들이 마을을 관리한다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보통은 강제로 악마를 따르게 시키거나, 반항하면 제물로 사용해버리는데 말이다.

그런 데일의 의문에 추종자가 답했다.

"저희는 인간의 편입니다... 어찌 같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겠습니까."

"음. 살면서 들어본 가장 해괴한 말이군."

인간의 편이라고?

악마 숭배자가?

영혼 지배가 먹힌 상태니 거짓말은 아니다.

습격자는 진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질문하는 걸 잊고 있었는데, 너. 어떤 악마를 섬기는 거냐."

"저는... 악마를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황혼의 추종자. 제가 섬기는 건 오직 하나. '황혼'님뿐입니다."

데일은 미간을 좁혔다.

황혼.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가 게임을 할 적에도 황혼이라는 별명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항상 인류의 적은 악마들이었다.

"황혼이 뭔데. 새로운 악마냐?"

"그분은... 가장 위대한 인간입니다. 이제 더는 신을 섬겨야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악마를 섬겨야 하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지요... 사람 위에 설 수 있는 건... 오직 사람뿐입니다."

"더 자세히 말해라."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인간을!"

그 후. 추종자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말만을 내뱉었다.

영혼 지배를 너무 강하게 사용해, 머리가 엉망이 되어버린 듯했다.

무르하탈이 중얼거렸다.

"신을 저버리다니. 그렇다고 악마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섬긴다? 정말 이상한 놈들이군요. 저 하늘의 위대한 존재들에게 거슬러봤자, 좋을 게 어디 있단 말입니까."

"...."

"주인님께서도 들어보셨겠죠. 신에게 대항했다 멸망해버린 어리석은 드워프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요."

"알다마다. 이 마검이 그들이 만든 물건이니까."

"엑."

화들짝 놀란 무르하탈이 새삼 데일의 마검을 살폈다.

대단한 물건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전설 속의 무기였을 줄이야.

'잠깐. 근데 드워프 왕이 만들어낸 검은, 오직 불신자만이 다룰 수 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눈앞의 흑기사는 여신의 기사가 아닌가?

역시 소문이 잘못된 걸까?

무르하탈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데일은 고장 나버린 황혼 추종자의 숨통을 끊은 뒤.

녀석의 목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생기, 잔혼과 함께 기억도 흘러들어왔다.

여느 다른 추종자와 같이 대부분 혼란스럽고 끔찍한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가령. 추종자들이 관리한다던 마을의 위치라거나.

'여기서 멀지 않군.'

데일은 자리에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르하탈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놈들이 관리하는 마을로 간다. 여기서 북쪽으로 좀 더 가면 있더군."

"오오. 기억을 읽으신 겁니까. 대단하십니다. 근데...."

무르하탈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쪽은 북쪽이 아닙니다만."

* * *

"한눈팔지 말고 일해라!"

"채찍질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여!"

찰싹!

험상궂게 생긴 황혼의 추종자가 채찍을 바닥에 내리쳤다.

사람의 피와 살점이 달라붙어 흉흉한 기운을 흩뿌리는 채찍이다.

더욱 두려운 건, 저 피와 살점이 묻은 지 얼마 안 된 녀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부르르 떨며.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남자들은 채석장에서 일했다.

노인이고 어린아이고 가리지 않고 바위를 옮겨야 했다.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언덕에서 미끄러진 바위가 번번이 사람들을 깔아뭉갰고, 무거운 바위를 들다 다치는 경우도 많았다.

몇몇은 탈진해 바닥에 쓰러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추종자가 다가와 채찍을 휘둘렀다.

"게으름 부리지 마라 하찮은 녀석! 아니. 너 같은 버러지는 필요 없다. 그냥 죽어라!"

"아악! 살려주십쇼! 잘못했습니다! 제발...!"

추종자는 잔인하게 채찍을 휘둘러, 가엾은 사내를 피떡으로 만들었다.

사내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사내를 잔인하게 죽인 추종자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주위 주민들에게 말했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지? 너희도 같은 꼴이 되고 싶은가? 어서 일해 버러지들아!!"

사내들은 다시 이를 악물고 바위를 옮겼다.

다른 한편. 여자들은 농사일과 길쌈을 비롯한 일을 해야 했다.

남자들보다 나은 건 없었다.

추종자는 식량을 넉넉히 주지 않았고, 여자라고 채찍을 더 부드럽게 휘두르지도 않았다.

이따금 음심에 물든 추종자에게 어딘가로 끌려가는 건 덤이었다.

원래도 고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레네와 함께 질서와 평화가 무너진 지금.

삶은 지옥이 되었다.

그런 고단한 일과지만, 가뭄의 단비처럼 쉬는 시간도 주어졌다.

"모여라!"

"전부 일을 멈추고 모여라!"

매일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기 직전인 그 황혼의 시간.

추종자들은 사람들을 제단 앞에 모았다.

채석장에서 옮긴 돌을 깎아 만든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석상의 인물은 기묘한 생김새를 가졌다.

여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남자처럼 억세며.

마법사처럼 현명해보이기도 하지만, 전사처럼 강인해보이며, 사제처럼 인자해 보이기도 한다.

무어라 딱 잘라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석상을 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인물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 자를 사랑하든, 증오하든 말이다.

추종자가 외쳤다.

"우리 인류를 해방시켜준 위대한 분께 예를 취해라!"

그러자 사람들은 석상을 향해 모두 엎드려 절했다.

때마침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 석상 앞으로 긴 그림자가 생겨났다.

빛을 등진 탓에 석상의 얼굴은 어둠에 잠겨 있지만, 그 뒤는 마치 주황색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늘 황혼께 감사하라! 우리가 온전히 인간으로서 당당히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된 건 모두 이분 덕분이다! 항상 감사하고, 경배하라!"

"경배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앞다퉈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를 느껴 그리 행동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추종자의 서슬 퍼런 눈빛 때문에 강제로 행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요란한 경배가 끝나면. 추종자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내주었다.

"왕께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습관적으로 외쳐댄 사람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며 허기진 속을 채웠다.

아침과 점심은 빈약하지만, 저녁 식사는 제법 제대로 된 편이었다.

적은 양이지만 고기가 둥둥 떠다니는 수프를 먹을 수 있으니.

그 감미로운 국물이 뱃속으로 들어가 위장을 따뜻하게 뎁히는 걸 느끼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그 황혼이라는 이가 내려준 은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나날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정말로 황혼을 섬기게 될 것이었다.

그게 추종자들이 노리는 것이었고.

"자! 해가 졌다!"

"모두 돌아가 잠에 들도록!"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져 숙소로 향했다.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누워 자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해도 사람들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푹 자고,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해야 내일을 버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모여들었다.

학식 있어 보이는 사내가 숨겨둔 양초를 꺼내 불을 켰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반드시 아침은 찾아오는 법입니다. 신께서는 여전히 저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빛의 신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내는 신도들을 타일렀다.

"형제님들. 용기를 가지십시오. 오늘이야말로 저 간악한 무리에게서 벗어나, 신앙을 되찾을 때입니다."

신도들은 굳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도록 준비해온 탈출이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짐과 무기를 챙겼다.

짐이라 해봤자 다 헤진 의류 몇 벌만이 있었고, 무기라 해봤자 나무를 깎아 만든 조잡한 단창이다.

하지만 추종자들의 감시를 피해 이렇게 준비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공할 수 있을까.'

추종자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탈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탈출에 시도했다 실패한 이에게는 모진 고문만이 기다렸다.

저번 탈출 실패자들은 말뚝에 묶여 일주일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받았다.

온 마을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던 비명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의지를 굳힌 사내는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하늘에서 지상을 밝혀주는 분이시여. 부디 우리에게 어둠을 헤쳐나갈 한 줄기 빛을 내려주소서... 갑시다."

사내가 사람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다른 숙소에서는 여자들이 몰려나왔다.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두 무리는 이내 하나로 합쳐져, 은밀히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이 시간이 놈들의 감시가 가장 덜해.'

일행은 두터운 목책 아래로 다가가 바닥에 깔린 목판을 치웠다.

그 아래에 사람 한 명이 드나들 개구멍이 드러났다.

작업 도중 틈틈이 파놓은 구멍이었다.

"자. 몸이 작은 분들부터 차례로 들어가세요."

작은 구멍이었지만 사람들은 무리 없이 지나갔다.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에 다들 몸이 앙상한 덕이었다.

무사히 목책 밖을 빠져나온 일행은 그대로 숲으로 향했다.

'흔적을 지우고 추격을 피하려면, 중간에 강을 한번 지나쳐야 해.'

일행은 재빨리 움직여 숲으로 향했다.

밤의 숲은 위험하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이곳보다는 안전할 터.

사람들은 숲으로 들어가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사, 살았다. 드디어 그 지옥에서 벗어난 거야."

"흑. 흐흑."

"사제님도 기쁘시죠?"

사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에... 다만. 너무 순조로워서 도리어 더 불안하군요."

"하하. 무슨 말입니까 사제님. 다 신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사람들이 안도하던 그때였다.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신 타령을 하는 버러지들이 남아 있었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일행은 고개를 들었다.

나무 위에서 무언가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

"그래. 산책은 즐거웠나?"

추종자들이 일행을 에워쌌다.

사내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그러자 일행 중 하나가 눈치를 보다 추종자 편으로 이동했다.

"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잘했다. 돌아가면 포상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놈! 우리를 배신한 거냐?"

성난 목소리에 배신자가 움찔했다. 그 얼굴에 미약한 죄책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되돌리더니, 도리어 성을 냈다.

"그, 그 잘난 신이 정말 우리를 위했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겠지! 난 이제 황혼 님을 따를 거야."

"너...."

추종자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 말대로다. 두 여신은 너희를 버렸다. 설령 버리지 않았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놈들을 섬길 필요가 어딨단 말이냐."

"저, 적어도 너희가 섬기는 그 황혼인지 뭔지 하는 괴물보다는 낫다! 놈은 악마를 부하로 부린다고 들었다! 악마 따위를 숭배하지 마라 이 더러운 것들아!"

사내가 외치자, 추종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적당히 봐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선을 넘는군."

추종자가 채찍을 꺼냈다.

피로 물든 채찍이 달빛을 받아 새빨갛게 번들거렸다.

"어디 네놈의 신에게 간절히 기도해봐라. 살려달라고 말이야. 흐흐. 흐...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나?"

추종자가 옆에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냄새 말입니까?"

"시체 썩은 냄새 같은 게 나는데."

"글쎄 저는 잘... 어. 진짜네."

고약한 악취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나무가 울창해 유독 어둠에 휩싸인 한 부분.

그저 어둡기만 한 그곳에 돌연. 푸른 안광이 하나둘 나타났다.

안광은 이내 수백 쌍이 되었고, 점점 이쪽과 가까워졌다.

미약한 달빛에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백의 언데드 군세.

그 선두에 서 있던 무르하탈이 어둠에 잠겨 있는 데일에게 공손히 물었다.

"주인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안 봐도 뻔한 상황이군."

데일은 짧게 답했다.

"쓸어버려."

"알겠습니다. 자, 시체들아."

리치 무르하탈이 앙상한 손아귀를 내밀며 외쳤다.

"밥 먹을 시간이다!"

황혼

* * *

무르하탈의 언데드 군세가 상대를 덮쳤다.

이 갑작스러운 공세에 추종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무, 무슨!"

"피 냄새가 언데드들을 불러모은 건가?"

"언데드 무리가 이 근방에 돌아다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어쨌거나 맞서 싸워야 한다.

추종자의 우두머리 격 되는 사내가 언데드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쌔액!

공기를 찢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채찍 날이 달려오던 좀비의 몸을 반 토막 냈다.

무르하탈이 감탄했다.

"오호. 제법."

그러고는 데일에게 물었다.

"주인님. 일이 끝나면 저놈을 제가 시체로 되살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자 시체들아! 더욱 몰아쳐라!"

언데드의 무시무시한 점은 두려움을 모른다는 점과 그 압도적인 숫자다.

아무리 하급 언데드라도 그 수가 수백에 달하면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언데드가 쏟아져 오자 탈출을 감행하던 주민들도 절망에 빠졌다.

"신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도망친 곳에 언데드라니... 정녕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단 말인가."

실의에 빠진 주민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항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이윽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데드 무리가 이쪽에 다가오다가 이내 추종자들을 향해 휙 방향을 틀었다.

마치 주민들한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뭐, 뭐지?"

"글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도 추종자들은 하나가 되어 언데드에 맞섰다.

데일은 추종자들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무르하탈에게 싸움을 맡겼다.

'제법인데.'

대열을 이룬 황혼의 추종자들은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훌륭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개개인의 실력이 매우 뛰어난데다가 합도 잘 맞는다.

'그리고 악마의 힘을 받은 자들 특유의 광기도 옅어.'

이성적이고 차가운 전사들.

데일의 본능이 말했다.

황혼이라는 걸 섬기는 자들은 악마 숭배자나 하수인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그보다는 밤의 신도나 빛의 신도에 더 가까운 느낌인데.'

제물을 바쳐 등급을 올리는 신도들과 비슷한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렇게 데일이 상대를 분석하는 사이에도 언데드들은 속절없이 스러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데일이 한마디 했다.

"내가 도와줘야 하나? 벌써 30은 쓸려 나간 것 같은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 하급 언데드는 언제든 충원할 수 있는 소모품입니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칼받이. 진짜는 이제부터죠. 클클."

무르하탈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불길한 마력이 휘몰아치다, 전장으로 퍼져나갔다.

마력이 내려앉은 곳은 바닥 곳곳에 토막난 시체들이었다.

이윽고 마력을 빨아들인 시체가 빵빵하게 부풀기 시작했고....

펑! 퍼펑!

성대하게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어억!"

시체 폭발.

폭발과 함께 뼛조각과 살점이 휘날리며 추종자를 덮쳤다.

뼛조각이 후두둑 박혀 들었다.

뼈 자체는 따끔할 뿐이다. 칼이나 화살에 비해서는 견딜만했다.

문제는. 이게 평범한 뼈가 아니라는 점이다.

"커. 커어억!"

피부가 푸르딩딩하게 변한 추종자가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뼈에 깃든 시체 독이 순식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무르하탈은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어떠십니까 주인님. 흑마법으로 증폭시킨 시체 독입니다. 제 장기입지요."

"나쁘지 않군."

"클클클. 감사합니다. 놈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통에 몸부림칠 겁니다."

데일은 사악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무르하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왠지 우리가 나쁜 놈인 것처럼 보이는데.'

어쨌든, 잘 싸우면 그만이었다.

무르하탈이 활약하는 사이.

리자드맨들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카리악이 동료들을 이끌고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늪지대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이들은 기척을 죽이는 법을 잘 알았다.

타고난 암살자인 것이다.

리자드맨들은 수풀을 경유해 추종자들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마침 그곳에는 뒤로 물러난 주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리자드맨의 등장에 경악했다.

"어, 언데드로도 모자라 이번엔 리자드맨이라니!"

"시, 신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를...!"

하지만 이번에도 리자드맨들은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닥치라는 뜻으로 혀를 날름거린 리자드맨들은 사람들을 지나쳐 추종자들에게 향했다.

"어?"

이번에도 주민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그렇게 추종자들에게 접근한 리자드맨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가장 바깥쪽에 있던 추종자에게 달려들었고, 그를 대열에서 낚아챘다.

"어어, 뭐 뭐야!"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추종자를 낚아챈 리자드맨들은 그를 순식간에 둘러싼 뒤 난도질했다.

추종자의 우두머리는 당황했다.

"이 도마뱀들은 또 뭐야!!"

하지만 그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상황이 극도로 불리했다.

'하다못해 목책을 끼고 싸웠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마을 안에 남아 있는 다른 동지들이라도 있었으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적을 예상치 못한 시점에 맞닥뜨렸다.

그 불운에 대한 대가로 추종자들은 전부 죽을 위기였다.

우두머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 이 상황을 이해해야만 했다.

'갑자기 언데드 무리와 리자드맨이 덤벼들다니. 게다가 둘이 함께한다고? 부자연스러워. 분명 놈들을 하나로 묶어놓는 우두머리가 있을 거다.'

정답이었다.

'그런 걸 할만한 놈은... 그래! 저 리치가 이곳의 우두머리인 거야!'

오답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오해기도 하다.

언데드 군세를 조종하고, 시체를 펑펑 터트린 건 모두 저 리치였으니.

당연히 무르하탈을 이 흉측한 무리의 지도자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을 친다!'

사령술사의 가장 큰 강점은 혼자서 수천의 병력을 부릴 수 있다는 것.

단점은 본신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령술사가 죽으면 그가 소환한 언데드는 죽음으로 돌아가던가, 제어를 잃고 날뛰게 된다.

마음을 먹은 추종자가 흉측한 기세를 터트렸다.

쐐애액!

그는 연거푸 채찍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길을 뚫었다.

빈 공간을 향해 맹수처럼 뛰어들었고, 놀라운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무르하탈에게 다다랐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당황한 무르하탈이 급하게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추종자의 입가가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휘어졌다.

추종자는 채찍을 버리고. 품에서 검을 꺼내 곧장 무르하탈에게 내질렀다.

"이걸로 끝이다! 죽음으로 되돌아가라!"

혼신의 일격을 담은 찌르기.

그 검날은 분명 무르하탈의 머리를 부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텁.

일격은 중간에 저지당했다.

너무나 허무하게.

"거기까지."

데일은 추종자의 팔을 붙잡았다.

당황한 추종자가 안간힘을 쓰려했지만, 팔을 빼낼 수는 없었다.

"너희들의 수준. 적당히 알 것 같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별거 없군."

* * *

우두머리가 사로잡힌 순간부터는 끝이었다.

남은 추종자들은 압도적인 물량 앞에 휩쓸려버렸고, 이내 언데드로 되살아나, 무르하탈의 부하로서 함께 싸우게 되었다.

데일은 우두머리를 붙잡았다.

사지가 모두 부러진 우두머리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크윽! 흑기사? 밤의 여신을 따르는 노예가 이런 곳에 남아 있었다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나? 내 동지들이 너를 산 채로 찢어버려, 개 먹이로...."

"너희들은 래퍼토리를 좀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군."

"뭐?"

"일단 사람들을 불러와라."

"예, 주인님."

그때까지도 벌벌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무르하탈이 다가갔다.

그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하찮은 인간들아. 뭘 하고 있느냐.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신 주인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아, 아으."

"무고한 사람들에게 겁주지 마라. 허리를 분질러 버리기 전에."

"죄, 죄송합니다."

데일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살벌한 생김새의 흑기사가 다가오자 아무리 간 큰 사람이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생긴 게.'

'기분 탓인가. 갑자기 추워진 듯한 기분이 들어....'

'투구 옆에 난 뿔 같은 건 또 뭐야. 악마. 역시 악마인가?'

사람들의 리더 격인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마음속으로 신께 한번 기도한 뒤, 애써 용기를 쥐어짜 데일의 앞에 섰다.

"다, 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론.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도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데일은 그런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경건한 분위기.

"교단의 사제요?"

생각보다 정중한 어조에 사내는 간신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네, 네. 맞습니다. 스스로 사제라고 하기에도 뭣할 정도로 말단이었지만... 그래도 신의 말씀을 공부했었지요. 당신은... 혹시 흑기사입니까? 밤의 여신의 기사인?"

"맞소."

"어. 흑기사는 대부분 이성이 없어, 대화가 안 통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좀 특이한 편이긴 하지."

그 말대로였다.

눈앞의 흑기사는 사제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잠깐. 대화가 통하고, 말이 통하는 흑기사?'

사제는 분명 그 비슷한 소문을 이전에 들었던 적이 있다.

잠시 머릿속 기억을 뒤집던 사제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경의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데일이오."

"데일? 저, 정말 데일 경이 맞습니까? 수많은 업적을 세우고, 악마까지 살해한 영웅, 데일 경이요!"

"영웅은 아니고. 악마살해자라고 불리기는 했소."

"허어!"

사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 하지만 제가 듣기로, 경께서 악마와 함께 장렬히 폭사하시고 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별로 만들어버리고 있어.'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소.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지. 근데 내가 없는 몇 개월간,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소."

"예. 많은 게 변했지요... 근데, 몇 개월이라니요?"

"왜 그러시오."

데일이 의아해하자, 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경께서 사라지신 지 1년이 훌쩍 넘기셨잖아요."

* * *

데일이 두르핀의 자폭에 휘말린 건 봄.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다.

데일은 당연히 3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3개월이 아니라, 1년하고도 3개월이라고?'

시간은 생각보다 더 많이 흘러가 있었다.

충격에 빠져 있기에는 시간과 장소가 좋지 않았다.

사제에게 더 자세한 사정을 듣기 위해. 그리고 사로잡은 우두머리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우선은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마을에는 여전히 추종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제 갓 해가 떠오르고 하루를 시작한 시간.

전날 밤에 일을 떠난 동지들이 돌아오지 않자, 추종자들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데일은 무르하탈에게 말했다.

"정리해."

"해가 뜨기 전에 마무리하겠습니다."

언데드 무리가 목책을 향해 달려들었다.

땡땡땡!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민들은 혼란에 빠지고, 추종자들도 우왕좌왕했다.

그런 혼란 속에 언데드와 리자드맨이 공세를 펼쳤다.

"어, 어디서 몬스터들이!"

"아아악!"

이미 우두머리도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마당에, 몇 안 남은 추종자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얼추 상황이 마무리되고.

무르하탈이 고개를 숙이며 팔을 내밀었다.

"자. 가시지요 주인님."

"수고했다."

"이 정도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래. 어려운 상대는 아니긴 했지."

"...."

데일을 필두로 리자드맨과 언데드 무리, 그리고 함께 온 주민들이 마을로 들어섰다.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벌벌 떨다, 데일이 선두로 들어오자 더욱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오는 주민들을 보며 화색을 띠었다.

"사제님!"

"어떻게 된 거예요!"

"저분과 그 동료들이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저 괴물들이요?"

"쉿. 말조심하세요."

주민들이 웅성거렸지만 이런 반응은 익숙하다.

데일은 사제에게 말했다.

"우선 그 황혼이라는 놈을 보고 싶은데."

"아. 여기로 따라오시죠."

주민들이 매일 저녁 감사를 올려야 했던 황혼의 석상은 마을 중앙에 있었다.

석상은 마치 신전처럼 회색 석조 건물 안에 있었다. 꾀죄죄한 주민들의 모습과는 대비될 정도로 웅장한 모습이었다.

'신을 모시는 제단 같은 느낌인데.'

채석장에서 돌을 잘라다 날랐던 건, 모두 이 건물을 짓기 위해서였다.

데일은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석상과 눈을 마주쳤다.

'이놈이 황혼?'

데일도 아는 얼굴이다.

아르구르의 기억을 엿봤을 때, 아르구르에게 명령을 내리던 괴인이다.

아마도 이레네의 멸망의 주범이자 기사단장을 죽음으로 이끌었을 인간.

처음 보지만, 묘하게 낯이 익은 존재.

이 웅장한 석상 아래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를 굽어살피는 건 빛도 밤도 아닌, 오직 황혼뿐이다.]

뒤늦게 끌려온 추종자 우두머리가 석상을 보며 황홀감에 젖었다.

"아아.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여. 언제봐도 아름답습니다."

"이게 네 우두머리냐?"

"아니. 우리 모두의 우두머리이자 너 같은 괴물을 단죄할 분이지!"

추종자는 왜인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 모습이 조금 띠꺼웠다.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쥐었고. 그대로 석상의 목을 향해 내질렀다.

꽈릉!

아무리 단단하게 만든 석상이라도, 데일의 주먹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황혼의 머리 부분이 뚝, 떨어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

데일은 벙쪄 있는 추종자에게 석상의 머리를 내밀었다.

"선물이다."

황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