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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 * *

똑 잘린 석상의 머리를 받은 추종자는 멍하니 있다, 발작하듯이 외쳤다.

"가, 가, 가, 감히!!"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한 태세.

하지만 추종자의 사지는 이미 분질러진 상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데일은 발광하는 추종자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거. 그냥 평범한 석상은 아니군. 그렇지?"

그 차가운 눈빛에 추종자는 얼어붙었다.

"...."

"밤의 신전에 있는 제단이나, 교단의 본당이랑 비슷한 느낌이라 해야 할까. 듣기로는 매일 같은 시각에 석상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지?"

"기도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마땅한 예를 표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이 마을뿐만은 아닐 테고?"

"그래! 이미 이 땅의 대부분은 우리 동지들이 점령했다! 네깟놈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설령 내가 여기서 무너져도, 곧 동지들이 복수하러 올 것이다!"

데일은 생각을 정리했다.

'대륙 곳곳에 이런 식으로 석상을 만들어서 숭배하게 시킨다니. 이 황혼이라는 놈이 만약 악마라면... 좋지 않군.'

데일은 '황혼'을 일단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악마들을 발아래에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힘이 없으면 악마를 부릴 수 없어. 그리고 인간이 그 정도의 힘을 얻는 건 어려운 얘기지.'

다만 의문은 남는다.

데일은 왜 이 황혼의 얼굴에서 익숙함을 느끼는 걸까.

'분명 이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게다가 이 추종자들은 이제 신을 섬기는 게 아니라 인간을 섬겨야 한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마치 오르단처럼 말이다.

황혼을 인간이라 믿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전략일까?

만약 그렇다면 황혼은 대단히 교활한 악마일 것이다.

'모르겠군.'

어쨌든.

대륙 곳곳에서 이 황혼이라는 자의 석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사람들을 억지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장 많은 숭배자를 둔 악마가 탄생할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해.'

데일에게는 찰나로 느껴졌던 1년간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만큼. 데일은 더 분주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 * *

데일은 추종자를 죽여 그 생기와 잔혼을 흡수했다.

기억을 읽어보려 했지만, 유용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이곳 변두리 마을에서는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그 역시 크게 보면 말단에 불과했다.

데일의 등장에 주민들은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었다.

흉측한 언데드와 리자드맨이 마을을 배회하니, 겁을 먹을 수밖에.

하지만 사제에게 사정을 전해들은 이들은 이내 환호성을 터트렸다.

"데, 데일 경이라고? 그 흑기사 데일 경? 살아계셨어?"

"와아아아! 살았다!"

"데일 경 만세!"

오래도록 가혹한 노동과 잔인한 대우에 혹사당하던 주민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 빌어먹을 석상을 부수자!"

"와아아!!"

그들은 황혼의 석상을 향해 한 몸처럼 몰려갔다.

그리고 채석장에서 돌을 자르던 도구를 들고 석상을 마구 두들겼다.

쿠구구구.

석상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석상이 있던 자리에 주황색 빛무리가 회오리쳤다.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현상에 주춤했다.

하지만 빛무리는 이내 하늘로 솟구치더니, 그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주민들은 빛무리가 사라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그냥 석상은 아니라 이건가.'

어쨌거나 이로써 주민들은 진정으로 자유가 되었다.

주민들은 추종자들이 머물던 숙소로 쳐들어갔다.

놈들의 숙소에는 모든 물자가 저장되어 있었다.

무기. 술. 식량.

삶에 필요한 모든 것.

주민들은 술과 식량을 꺼내 축제를 즐겼다.

오랜만에 마음껏 먹고 마시며, 자신을 황혼의 추종자들에게서 해방시켜준 데일을 칭송했다.

"쯧. 시끄럽군. 이래서 심장이 뛰는 것들이란."

리치 무르하탈은 그런 소란이 싫다는 듯이 적당한 집으로 들어갔고.

"도마뱀 형씨도 마셔봐!"

"카룸!"

"카락! 카카!"

리자드맨들은 처음 먹어보는 맥주가 마음에 드는지, 금방 축제에 어우러졌다.

너무 과하게 마셔 사방에 토사물을 뱉어낸 건 덤이다.

한편. 데일은 사제와 둘이서 면담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가 간절한 눈으로 부탁했다.

"혹.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남아 저희와 함께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황혼의 추종자들이 언제 이곳을 습격할지 모르는지라...."

"이곳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이오?"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미 대부분의 지역은 황혼의 추종자나, 도적떼, 악마들이 점령했습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니 경께서 함께해주신다면...."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없소. 동료를 만나러 서쪽으로 가야 하오."

"아아...."

"차라리 사람들을 이끌고 나와 함께 가는 게 어떻소. 여기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잠시 고심하던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해 경과 함께 가고 싶은 이들을 추려내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혹한 학대에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경과 함께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데일이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계속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신 데일은 한 가지 방책을 제안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좀 가면 버려진 마을이 있소. 늪지 마을이라고 불리던 곳인데, 그곳으로 가는 게 어떻소?"

"늪지 마을... 말씀이십니까?"

"오지에 있다 보니 습격에서는 좀 더 자유로울 거요. 그리고 위험이 생기면 늪으로 잠시 대피할 수도 있소."

구미가 당기는 얘기인 듯. 심각하게 고민하던 사제가 말했다.

"나쁘지 않은 얘기군요. 근데, 늪으로 대피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남쪽의 늪에는 별별 포악한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걸로 들었습니다만."

"걱정할 것 없소. 그 포악한 몬스터들을 내가 데려왔거든."

"아. 그렇다면 저 리자드맨들이...!"

"저 리치도 마찬가지요."

놀라워하는 사제에게 데일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늪지로 들어가면 큰 소리로 '라그나'라고 외치시오."

"라그나. 말씀이십니까?"

"늪에 사는 하이엘프 이름이오. 뛰어난 전사지. 내 이름을 말하고 적당히 괜찮은 검 하나 선물해주면, 흔쾌히 도와줄 거요."

"...늪에 왜 하이엘프가?"

"뭐. 어디든 별난 사람이 있는 것 아니겠소."

당신도 그 별난 사람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사제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그는 데일을 손을 붙잡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경께서는 진정으로 명예로우신 분입니다! 평생을 빛을 섬겨온 몸입니다만, 지금만큼은 밤의 여신께 감사할 수밖에 없군요."

"신경 쓰지 마시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그러자 사제는 더욱 감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정작 갚을 길이 없군요. 이거 참...."

"바깥소식을 아는 게 있으면 좀 알려주시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사제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오래도록 이곳에 갇혀 지냈던 터라 바깥의 소식은 모릅니다. 그저 이레네가 무너지고, 황혼의 추종자라는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밖에는...."

데일이 아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지식이었다.

사제는 생각보다 아는 게 적었다.

데일이 낭패감을 느끼던 그때.

사제가 조심히 말했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알고 있습니다."

"오. 말해주시오."

"사실 어디까지나 소문이라, 그 진위는 불분명한지라...."

"그래도 일단 말해주시오. 듣고 내가 판단하겠소."

주저하던 사제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이틀거리에 떡갈나무 숲이라고 있습니다. 그 떡갈나무 숲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특이한 노랫가락이 귓가를 맴돈다고 합니다."

"노랫가락?"

"예. 그 노랫소리를 따라가면 특별한 선술집이 나올 겁니다."

데일이 미간을 좁혔다.

산중에 뜬금없이 선술집이 있다고?

동화 같은 얘기였다.

"물론 믿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단순히 헛소문이라기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던 지라."

"흠."

"그 선술집의 주인은 음유시인이자 작가, 마법사인데, 아주 특별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대륙의 모든 일들을 훤히 꿰고 있다고 하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대륙의 소식을 듣기 위해 그곳을 찾아간다고 하니,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그곳만한 곳이 없을 겁니다."

사제도 이번에 이 마을을 탈출해, 그 선술집으로 향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 이 마을에서 추종자들을 몰아내는 게 목표였다고.

'썩 믿기지 않는 소문인데....'

하지만 사제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단순히 헛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선술집에 가봤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데일이 보기에 이 사제는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판단을 어느 정도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방향도 맞으니까, 헛소문이라도 상관없겠지. 게다가 음유시인 겸 마법사라.'

조금 흥미가 생겼다.

"한번 들러보겠소."

* * *

데일은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며, 주민 중에서 함께 따라올 이들을 모집했다.

"원한다면 따라와도 좋소. 하지만 미리 말하겠소. 우리를 따라오는 것보다 여기 남는 게 더 안전할 것이오. 우리는 가면서 적이 있으면 피하기보다는 싸울 것이고, 전투도 많이 치를 것이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대부분은 이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다만. 개중에는 데일과 함께 하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을 따라가면, 황혼을 따르는 그 개새끼들을 죽일 수 있는 겁니까?"

"그래."

"그럼 받아주십시오. 놈들은 제 부인과 딸을 잔해하게 살해했습니다. 복수하게 해주세요."

"제 가족을 채찍으로 때려 죽였습니다. 어머니의 비명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황혼의 추종자들에게 강한 원한을 지닌 이들 20여 명이 합류 의사를 보였다.

데일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그들을 부하로 받아들였다.

"칸입니다."

"라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다. 데일이다."

그사이.

무르하탈이 데일에게 다가와 말했다.

"놈들의 거처를 털어, 무기와 식량과 금화를 챙겼습니다. 제법 두둑이 챙겨두고 있더군요."

고개를 돌리니, 무르하탈의 언데드 군단의 무장이 이전보다 좋아진 게 눈에 보였다.

원래는 맨손으로 싸우던 스켈레톤들에게도 검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카리악이 이끄는 리자드맨 무리도 각자 단창과 투구를 하나씩 뒤집어쓰고 있었다.

신체 구조 탓에 갑옷은 못 입지만, 새로 얻은 쇳조각에 리자드맨들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데일이 물었다.

"전부 털어버린 건 아니겠지?"

"주인님의 말씀대로, 남은 주민들이 사용할 만큼의 물자는 남겨놓았습니다만... 그냥 전부 챙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런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무르하탈은 몇 번이나 의문을 제기하고는 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해보였다.

데일은 무르하탈을 슬쩍 내려다본 뒤, 툭 물었다.

"무르하탈. 너는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마냥, 무르하탈이 웃었다.

"클클. 이 뼈다귀 몸을 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사람이겠습니까."

"나는 내가 사람이라 생각한다."

웃음을 뚝 그친 무르하탈이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 배려는 해야지."

무르하탈의 안광이 당황 어린 감정으로 넘실거렸다.

처음에 언데드라 불렀을 때 화를 내길래 의아해했건만....

'본인을 사람이라 생각하는 반언데드라. 이 흑기사는 정말로 이상하군.'

하지만 무르하탈은 조금 회의적이었다.

'이건 마음의 빈틈이다. 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마음에 빈틈이 있다면 언젠가 약점을 보이고 말지.'

무르하탈은 인간성이라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세상 착하게 굴던 놈들도, 궁지에 몰리면 결국 제 본색을 드러냈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하는 자는 드물다.

그게 사람이다.

그렇기에 데일의 신념이 너무나 우습게 보였다.

하지만 무르하탈은 굳이 데일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아직 데일에게 마음 깊이 충성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한 가지 기대감도 들었다.

'훗날. 그 빈틈이 언젠가 너의 발목을 잡고, 뒤통수를 찌를 것이다. 그때도 네가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성 따위는 내던지고, 본능에 몸을 맡길 것인가. 그 순간이 실로 기대가 되는구나. 클클클!'

텅!

데일은 사악한 미소를 짓던 무르하탈의 머리를 후려쳤다.

리치의 두개골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

당황한 무르하탈이 물었다.

"저. 갑자기 왜 공격을?"

데일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왠지 속으로 재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

무르하탈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음유시인

* * *

보급을 마치고, 새로 지원병을 추가로 얻은 데일 군단은(무르하탈이 지은 이름이다.) 다시금 진군을 시작했다.

선두에서 걷는 데일을 향해 무르하탈이 손을 비벼대며 보고했다.

"주인님. 이번에 무기를 얻으면서 군의 전력이 크게 늘었습니다. 리자드맨과 인간 병사들이 먹을 일주일 치 식량도 따로 얻었고 말이지요."

"나쁘지 않은 소득이군."

"예. 저희 군단은 안정적으로 보급을 얻을 기반이 없습니다. 결국. 마주치는 적들을 습격해, 이번처럼...."

"약탈을 해야 한다는 건가?"

"클클. 이왕이면 현지 보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주시죠."

무르하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사령술사들은 직업의 특성상 한 곳에 둥지를 틀어 세력을 키워나가는 걸 좋아하고, 병력을 지휘하는 쪽에 빠삭하기도 했다.

무르하탈도 데일의 군단을 키워나가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야 귀찮은 일을 대신해주니. 나쁠 게 없지.'

경험이 풍부한 무르하탈에게 일을 맡기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하게 만들어주면 데일 군단은 저절로 크게 성장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데일처럼 할 수 없다.

언제 무르하탈이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 배신할 줄 누가 알겠는가?

당장 황제도 자기 병사들을 믿지 못해 군단을 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데일은 다르다.

그에게는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이상한 낌새만 보이면 바로 처리하지 뭐.'

설령 무르하탈이 어떤 치명적인 계략을 꾸며 배신을 시도하더라도, 혼자서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당장 이곳에 있는 병력 전부가 데일에게 덤벼도 데일에게 타격이나 제대로 입힐 수 있을까?

무르하탈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딱히 데일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신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물론 기회와 가능성이 생긴다면 그때는 또 다른 문제지만....

어쨌건 지금은 데일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새로 합류한 인간 병사 중에서 쓸만한 이가 몇 있더군요. 대장장이의 아들이 하나. 견습 재봉사하나. 요리사가 하나. 그들에게는 병사 대신 다른 일을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게 좋겠군.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고, 원하는 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라."

"지당하신 선택입니다."

데일과 무르하탈이 긴밀한 대화를 나누자, 위기감을 느낀 리자드맨 카리악이 끼어들었다.

"카르! 카단!"

"이놈! 감히 주인님과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끼어들다니...!"

"됐고. 카리악이 뭐라고 하는 거냐."

무르하탈이 앙상한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이 도마뱀은 자기들이 신병에게 싸우는 법을 교육시키겠다 합니다. 새로 합류한 병사들은 도저히 써먹지 못할 상태인지라."

"리자드맨들이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나?"

"종족은 달라도, 싸우는 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육이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그럼 앞으로 신병들의 교육은 카리악에게 맡기겠다."

"카락! 카룸!"

"...믿고 맡겨달라는군요."

의욕적인 부하들 덕에 골치 아픈 문제점들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세부적인 사항을 정한 데일은 다시금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사제가 말한 떡갈나무 숲이다.

'소문이 사실일까?'

숲속의 특별한 선술집과 마법사 음유시인에 대한 소문.

데일은 소문이 사실일 확률은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다.

'삶이 힘들 때는 희망이 필요한 법이니까.'

그런 식으로 부풀려진 희망이 때로는 엉뚱한 소문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번 역시 그럴지도 모르고.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다.

데일 군단은 자그마한 개울을 따라 이동했다.

햇빛도 없는 야심한 밤에 이동하는 건 평범한 군대에는 위험한 일이지만, 데일 군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언데드들은 도리어 밤에 더 활기찼고, 리자드맨 역시 밝은 밤눈을 지녔으니.

이번에 새로 합류한 신병들만이 곤란해했을 뿐이다.

그렇게 밤에 이동하고 낮에는 적당한 그늘에서 쉬기를 이틀째의 저녁.

사제가 말한 대로 떡갈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는 숲을 맞닥뜨렸다.

무르하탈이 미심쩍은 눈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어딘가에 선술집이 있다는 건가요?"

"사제 말로는 그렇지."

의심 많은 언데드 리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인님. 교단의 사제들은 아무렇지 않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작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애초에 숲 바깥으로 노랫소리가 들린다면, 적들도 끌어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데일은 울창한 숲을 휙휙 둘러보았다.

무르하탈의 말마따나, 이런 곳에 선술집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노랫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데.'

사제는 떡갈나무 숲에 가면 노랫가락이 들려올 거고, 그 가락을 따라 가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노랫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허탕인가.'

데일이 이 숲을 그냥 우회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돌연. 숲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무르하탈이 로브를 여몄다.

"이 무슨. 평범한 바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 이 소리 뭐야?"

"응? 그러게."

그렇게 말한 건 이번에 새로 합류한 신병이었다.

그들은 귀에 손바닥을 대는 시늉을 했다. 무언가 들리는 모양.

데일이 물었다.

"들리다니. 무슨 말이지?"

"아. 경. 이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휘파람?"

"휘! 휘! 하는 휘파람인데... 그치?"

"예. 저도 들리는 것 같은데요. 안 들리시나요?"

무르하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데, 대체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냐! 만약 나와 주인님을 우롱하는 거라면...."

"좀 닥쳐봐."

"넵."

데일은 다시 주위에 흐르는 바람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 역시 이게 평범한 바람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자, 바람이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미약한 소리를 냈다.

휘휘, 하는 휘파람 비슷한 소리.

너무 작은 소리라 집중을 잃으면 금방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지만, 절대 착각은 아니었다.

'노랫가락...인가?'

데일은 고개를 들었다.

무르하탈은 여전히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지, 두개골만 긁적이고 있었다.

반대로 신병들은 뭔가 감미로운 노래라도 듣는 듯. 머리를 까딱이며 박자를 타고 있었다.

'과연.'

아무한테나 들리는 소리는 아니라는 건가?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것 같다. 이 숲에는 뭔가 있다."

"으음. 그렇습니까? 확실히, 지금 보니 이 숲 전체에 무언가 기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들어가 보시죠."

데일은 앞장서서 숲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빽빽한 숲길을 거침없이 나아가, 노래가 들려오는 쪽을 향했다.

그렇게 숲 안을 돌아다니길 한참.

돌연. 나무 위에서 작은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깃털이 새카만 까마귀였다.

"까악! 반갑습니다 신사분."

데일은 얼간이처럼, '까마귀가 말을 하다니?' 따위의 반응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반갑다."

"혹시 신사분께서는 이곳에 손님으로서 온 겁니까, 아니면 침략자로서 오신 겁니까."

잠시 질문의 의도를 고심하던 데일이 답했다.

"손님으로 온 거다."

"그렇다면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와주시길 바랍니다. 뒤편의 용맹한 병사분들도요."

"나 혼자 가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르하탈이 곧장 화를 냈다.

"건방진 것! 자기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으면서, 감히 누구보고 무기를 버리라 마라 명령을 내리느냐!"

"원하시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까마귀는 뻣뻣하게 나왔다.

정말 자신이 있거나,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 혼자 무기를 버리고 들어가지."

"하, 하지만."

"애초에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궁한 건 우리다.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언제든 신호하십시오. 곧바로 군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까악! 따라오시죠."

까마귀가 훌훌 날아 어디론가로 향했다.

데일은 바닥에 마검을 내려놓은 뒤. 까마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 머지않아 까마귀가 멈춰 섰다.

"까악. 도착했습니다."

신비로운 광경이 데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명한 물이 찰랑이는 자그마한 연못. 그 연못 옆에 서 있는 전형적인 선술집 모양의 건물.

선술집에서는 촛불 빛과 흥겨운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화 같은 광경에, 데일은 생각했다.

'좀 뜬금없군.'

이곳을 만든 게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괴짜인 건 확실했다.

"여기로 들어가면 되나?"

"까악! 까악! 까악!"

데일의 질문에 대답 대신 요란하게 운 까마귀가 푸드득 날아가버렸다.

어깨를 으쓱인 데일은 선술집 문을 열었다.

마침 키가 작은 음유시인이 선술집의 한가운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흑기사 데일은 악마 두르핀과 용감히 맞섰으니! 악마조차 그 힘을 당해내지 못하는구나! 간악하고 비열한 두르핀이 동귀어진을 노리니, 명예로운 흑기사는 스스로의 몸을 던져 사람들을 지켜냈노라!"

한껏 격앙된 어조로 노래하던 음유시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휘! 휘!"

그는 발을 구르며 요란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선술집의 취객들이 맥주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린 뒤, 모두 따라서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휘! 휘!!"

"그리하여 흑기사 데일 경은 별이 되어, 저 밤의 여신의 오른편에 앉아 지상을 굽어보시니. 휘! 휘! 이것으로 위대한 흑기사의 모험은 막을 내리노라!"

"와아아아!"

"흑, 너무 슬프고도 감동적인 이야기야."

취객은 환호성을 터트렸고, 몇몇은 눈물까지 훔쳤다.

분위기가 힘껏 달아오른 걸 눈치챈 음유시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것으로 제 신곡 '위대한 흑기사의 사랑과 모험, 그리고 승천'은 끝입니다. 하지만 노래에 미처 담지 못한 그분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습니다. 데일 경의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면, 여기 책이 있으니 구매해주세요! 지금 구매하면 단돈 은화 한 닢! 수익의 일부분은 밤의 신전으로 기부되어, 별이 되어버린 데일 경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당장 사겠소!"

"나도! 나도 사겠습니다! 3권. 아니. 5권 주세요!"

"닥치고 내 돈을 받아가!"

취객들은 홀린 듯이 책을 사서 챙겨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열렬한 분위기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데일은 생각했다.

'이 노랫소리. 그냥 노래가 아니군. 사람을 홀리는 힘이 깃들어 있어.'

마치 선원들을 노래로 홀려 바다로 끌어들이는 세이렌처럼, 이 음유시인의 노래에는 무언가 있다.

'아니. 그것보다.'

사람들이 사가는 저 책.

왜인지 낯이 익다.

데일은 성큼 걸어 근처에 있는 취객의 책을 빼앗아 들었다.

"으잉? 넌 뭐야 이 새끼... 어?"

"잠시만 보겠소."

"아. 예."

데일은 책을 휙휙 둘러봤다.

데일에 관한 묘하게 왜곡된 이야기가 적힌 소설책. 한때 상위구역의 베스트셀러였던가?

'감히 누가 내 이름으로 책을 팔아먹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 범인을 오늘 찾은 것 같다.

데일은 열심히 책을 팔아대는 음유시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음유시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데일과 눈이 마주쳤다.

"...."

"...."

잠깐의 침묵 사이에, 음유시인의 표정이 휙휙 변했다.

당황. 놀라움. 반가움.

그리고 '큰일났다!'하는 감정이 드러난 얼굴.

공연으로 먹고사는 이답게 표정이 참으로 풍부했다.

데일이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아. 음. 하하. 그. 살아계셨네요?"

"내가 살아있어 불만인가 보군."

음유시인은 또르르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휘! 휘!"

""휘! 휘!!""

그러자 취객들이 호응하며 일제히 이곳으로 시선이 몰렸다.

음유시인은 데일에게 양손을 펼치며 외쳤다.

"보십쇼! 여기 있는 이가 누구인지!!"

"누구?"

"어. 살벌한데...."

"검은 갑주의 기사... 설마 흑기사?"

음유시인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맞습니다! 별이 되셨던 경께서 여러분들의 열띤 성원에 직접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팬 미팅을 위해서 말이죠!"

"...뭐?"

"모두 구입하신 책을 들고 와, 싸인을 받으세요! 분명 나중에 비싼 값으로 되팔 수 있을 거예요!"

"와아아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싸인 한 번만 해주십시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취객들이 홀린 듯이 데일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음유시인은 테이블 위로 올라가더니....

공중제비를 돌고서는 맹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음유시인

* * *

갑작스럽게 바람이 선술집안을 휘몰아치더니, 음유시인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공중제비를 돈 음유시인은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어딜!"

데일은 곧장 맥주잔을 집어 들어 음유시인을 향해 투척했다.

쐐액!

위기를 감지한 음유시인은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쾅!

맹렬히 날아간 맥주잔과 나무로 된 문이 부딪혔고, 둘 다 산산이 조각났다.

그 말도 안 되는 위력에 음유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부서지는 건 자기 머리통이 아니었을까?

음유시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사람을 죽일 작정인가요!!"

"그럼 도망치지를 말던가."

음유시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달음박질했다.

데일은 성큼성큼 달렸다.

음유시인이 외쳤다.

"모두 달려드세요! 데일 경이 팬미팅을 한다잖아요!"

"와아아!"

"싸인해주세요!"

눈이 반쯤 풀린 취객들이 데일에게 몸을 돌렸다.

주먹을 휘두르려던 데일은 멈칫했다.

죄 없는 취객들을 불구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다.

고민하는 사이.

취객들이 데일에게 몸을 던져 깔아뭉갰다. 그렇게 취객들이 차곡차곡 쌓여 인간의 산을 이루었다.

음유시인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요! 이제... 어?"

쿵!

데일이 번쩍 일으키며, 자신을 깔아뭉개던 십수 명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입가에 미소를 지운 음유시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슨 사람 힘이."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음유시인은 짧은 다리를 도도도 놀렸다.

마법사답지 않게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이, 이 정도면 따돌렸겠지?'

열심히 달리던 음유시인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흑기사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게 아닌가!

"으아악!! 왜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는 너는 왜 도망가는 거지?"

"저를 잡으면 죽일 거잖아요!"

"스스로도 켕기는 게 있나 보지?"

"...생각보다 입담이 좋으시네요."

어쨌거나 음유시인은 계속 달렸다.

이 숲은 자신의 집과도 다름없다. 지리를 훤히 꿰고 있었다.

얼마든지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데일의 차가운 선언을 듣기 전까지.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안 멈추면 더는 안 봐준다."

음유시인이 우뚝 멈췄다.

데일에게서 피어오르는 진한 살기를 느낀 것이다.

그의 본능이 외쳤다.

안 멈추면 여기서 죽는다고.

"머, 멈췄습니다."

"다행히 눈치는 빠른 편이군."

데일은 음유시인의 목덜미 부위의 옷을 들어올렸다.

데롱데롱 매달린 음유시인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노움이군.'

자색 머리에 똑같은 색깔의 눈동자. 노움이라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깊은 눈빛을 보면 아주 어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음. 안녕하세요?"

노움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데일은 그런 노움을 데롱데롱 들고 다시 선술집을 돌아왔다.

데일에게 던져졌던 취객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어, 음. 여기가 어디지?"

"머리가 아픈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데일은 음유시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치 빠른 음유시인이 재빨리 말했다.

"자! 자! 오늘 영업은 끝입니다! 모두 2층으로 올라가서 숙면을 취해주시길 바랍니다!"

"어우. 좀 자야겠어."

"졸리네...."

취객들이 좀비처럼 비척비척 계단을 올라갔다.

시끌벅적하던 선술집 내부가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노움은 적당히 테이블과 의자를 끌어왔다. 그는 의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자. 앉으세요.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해드릴 게 없어서 민망하네요. 그럼 우리, 통성명부터 할까요?"

"그전에. 숨어 있는 동료나 부르지?"

또르르 눈알을 굴린 음유시인이 머쓱하게 말했다.

"이미 다 들킨 건가요?"

"목소리로 상대를 홀리는 마법은 네가 쓰는 거고. 바람 마법은 다른 마법사가 사용한 것 아닌가?"

"허... 굉장히 예리하시네요.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음유시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했다. 그러고는 선술집 구석을 향해 말했다.

"리마. 얼른 나와."

그러자 의자와 테이블이 켜켜이 쌓인 곳에서 자그마한 노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앞의 음유시인과 외모가 판박이처럼 닮았으나, 머리카락이 좀 더 길었다.

"가족?"

"아, 네. 여동생입니다."

여동생 쪽은 머뭇거리며 다가오다가, 데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음유시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하하... 낯을 좀 가리는지라. 어쨌건 통성명부터 하죠. 저는 아랄의 아들. 소마입니다."

여동생 쪽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리마."

"저희 남매는 둘 다 마법사고, 힘을 합쳐 이곳 선술집을 꾸려나가고 있지요."

"그래. 그럼 우선. 이것부터 해명해 보지?"

데일은 소마가 팔던 소설책을 툭툭 두드렸다.

"내 이야기를 멋대로 각색해서, 그걸 팔아먹어서 돈까지 번다라.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하. 무언가 오해가 있나 보군요. 저희는 절대 사사로운 탐욕 때문에 이 책을 판 게 아닙니다."

"그럼?"

소마가 의자를 밟고 벌떡 일어났다.

목을 한차례 가다듬고는, 마치 노래하듯이 말했다.

"이 기나긴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먼 과거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때는 재작년이었지요. 저희 남매는 마법사로서 마탑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노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어디든 존재했습니다. 아아! 신께서는 참으로 비정하시지. 우리 남매에게 뛰어난 재능은 주셨지만, 어찌하여 노움으로 태어나게 했단 말입니까!!"

"짧게. 그리고 앉아."

"흠흠."

소마가 헛기침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쨌든. 그렇게 모진 대우에 시달리던 중. 저희는 한 소식을 듣고 말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노움 부부를 위해, 빈민가를 뒤집어엎은 어느 흑기사의 이야기지요! 그건. 정말이지 저희에게 구원과도 같았습니다."

소마가 데일의 오른손을 덥석 붙잡았다. 숨어 있던 리마도 데일의 반대편 손을 붙잡았다.

"세상 그 누가 노움을 위해 그리 행동해줄 수 있겠습니까! 모진 차별에 힘든 삶을 살던 저희들도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경께서는 그때부터 이미 저희의 영웅이셨던 겁니다. 그리고 결심하게 되었지요. 음유시인으로서, 데일 경의 업적을 노래와 책으로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려야 한다고!"

"그래서 그 어처구니없는 소설을 썼나? 일부 내용 빼고는 순 거짓말인 엉터리를?"

"참고로 책은 리마가 적었습니다. 노래를 지은 건 저고요. 리마? 경께서 궁금하신 게 있다나 봐."

"...적당한 각색은 이야기를 더 풍요롭게 해줘요."

"이름하여, 소설적 허용이라는 녀석이지요."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느 노움답게 이 음유시인은 말이 참 많았다.

시끄럽게 뱉어낸 말들이 투구 안을 웅웅 울렸다. 음유시인답게 목소리가 미성인 게 오히려 더 짜증 났다.

"그게 남의 이야기를 소설로 팔아 돈을 버는 이유는 안 되는 것 같은데."

"하하... 하. 뭔가 소설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군요."

"...죄송해요. 다음에는 더 잘할게요."

리마가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데일은 속으로 한숨을 머금었다.

저런 표정으로 말하니, 더 화를 내기도 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일은 아이 같은 외양을 한 이 노움들한테 약했다.

"다음에는 사실만 적어라. 이상한 거짓말을 부풀리지 말고."

"아하. 고증을 신경 쓰는 타입이군요. 마스터 안드레이와 비슷한 느낌?"

아는 이름의 등장에 데일이 물었다.

"안드레이를 아나?"

"알다마다요. 도서관의 기록관을 맡으신 분이니, 저희같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찌 연이 없겠습니까."

"안드레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글쎄요. 황제가 이레네를 하늘로 띄워 올릴 때 같이 있었으니, 여전히 저 공중 어딘가에 떠다니지 않을까요?"

"...성이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다고?"

데일이 되묻자, 소마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아하. 여기를 왜 찾아왔는지 알겠군요. 저희가 이곳에서 책을 팔고 있어 찾아온 게 아니라, 정보가 필요해서 온 거죠?"

데일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하지만 이를 어쩌죠? 저희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정보를 팔지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정보료를 주시거나,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주시는 게 원칙...."

"멋대로 내 책을 팔아 번 돈.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원칙이지만. 저희 사이에 그런 걸 따지는 것도 그렇죠. 안 그래요?"

황급히 말을 돌린 음유시인이 방긋방긋 웃었다.

데일도 굳이 더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당장 알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우선 내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좀 듣고 싶은데."

"동료들이라면 함께 모험을 다녔던?"

"하켄. 에스델. 엘레나. 그 밖에 여러 명."

"아하. 혹시 악마와의 싸움 이후에 어딘가에 숨어 지내셨습니까?"

"놈이 자폭하면서 의식이 날아갔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니 1년이 지나 있더군."

데일은 늪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옆에서는 리마가 데일의 말을 분주히 말을 받아적었다.

흥미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소마가 감탄하며 말했다.

"허. 그러니까, 늪지대에서 굴복시킨 리자드맨과 리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겁니까? 그 병력을 이끌고 황혼의 추종자들이 지키는 마을을 쳤고요. 정말이지. 이전에도 느꼈지만, 경의 행보는 참...."

"...좋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나도 동의한다 동생아."

데일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책상을 쿵쿵 두드렸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흐음. 오래도록 잠들어 계셨으니 처음부터 설명해야겠군요. 미리 숨을 힘껏 들이켜세요. 기나긴 노래가 될 테니. 아. 숨을 안 쉬어도 되는 몸이었던가요?"

"기왕이면 짧게 부탁하지."

소마는 자리에서 힘껏 뛰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멋들어지게 착석했다.

리마는 그런 소마를 향해 마도구로 만들어낸 푸른 빛을 쏘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공연을 위한 무대가 되었다.

"악마를 이끌어 난공불락의 이레네를 무너트린 정복자! 단신으로 검성과 맞붙어 싸워 이긴 실력자! 그 이름은 황혼이었노라! 못난이 황제는 성을 들어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대륙의 질서는 무너져 내리니. 이는 곧 혼란의 시작이 되었도다!"

소마는 손가락을 겹쳐서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빛이 손가락을 훑고 지나가자, 벽에 그림자로 된 괴물이 경박하게 움직여 댔다.

"황혼의 추종자는 온 대륙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을 개종시켰으니, 세상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힘없는 백성들은 비탄에 빠졌구나! 휘! 휘! 하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니! 늑대왕 하켄이 용병과 난민들을 이끌고 서쪽을 지키고 있노라!"

"늑대... 뭐?"

"북쪽의 엘드리엄에는 새로운 성녀 에스델이! 동쪽의 카엘름에는 에리얼 사제장이 거뜬히 버텨주니. 여전히 이 대륙에는 희망이 남아 있도다!"

"...?"

소마가 자기만 아는 얘기를 와다다 쏟아내자, 데일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리마를 봤다.

리마는 갑작스러운 시선에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하켄 님은 거대한 늑대와 함께 용병들을 이끌고 있어요. 그래서 늑대왕이라 부르죠."

'거대한 늑대면 하티 말하는 건가.'

"그 뛰어난 실력과 모두를 사로잡는 강철 같은 카리스마에 수많은 용병들이 따르고, 지금은 서부의 수호자로서 활약하고 있어요."

"뭐?"

뛰어난 실력. 강철 같은 카리스마. 수호자.

그 어떤 단어도 하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데일이 물었다.

"혹시 소문이 잘못된 거 아닌가?"

"아뇨. 용병들이 늑대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건 확실해요. 황혼의 추종자들의 공세도 몇 번이나 격퇴했고요."

"...."

데일은 일단 이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했다.

하켄은 서쪽으로 간다고 쪽지를 남겼으니, 어느 정도 행적도 일치하고 말이다.

'에스델은 성녀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나. 뭐. 교단의 성물을 팔에 떡하니 차고 다니는데, 당연한 거지.'

에스델의 실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르단 탓에 고위 인력을 대부분 잃은 교단이다. 에스델 외에 그 누가 교단을 이끌 수 있을까.

'에리얼은 카엘름으로 갔나. 확실히. 카엘름에는 밤의 신도들이 많은 편이니까.'

카엘름은 데일이 직접 가니아고스를 사냥한 곳인지라, 다른 곳보다 밤의 여신에게 우호적인 이들이 많았다.

에리얼이 그곳으로 떠난 것도 이해는 갔다.

'근데 왜 전부 흩어진 거지?'

데일은 비록 자신이 없어도, 동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길 원했다.

그편이 더 안전할 것이고.

하지만 동료들은 왜인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데일은 아직 듣지 못한 이름이 하나 남아 있다는 걸 알아챘다.

"잠깐. 아직 한 명 못 들었는데."

"예?"

"엘레나. 너희들이 소설로 팔아먹었던 바이만의 공주 말이다."

"아아...."

고개를 끄덕인 리마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격노의 마녀를 말하시는 거군요."

"...뭐?"

데일은 그 별명에 멈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마는 설명을 계속했다.

"격노의 마녀는 황혼의 추종자들이 있는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있어요."

데일은 말을 잃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엘레나는 마녀라 불리고 있었다.

음유시인

* * *

사람들은 사악하거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마법사들에게 마녀라는 호칭을 붙이곤 한다.

하지만 데일이 기억하는 엘레나는 선한 아이다. 마녀라는 호칭이 붙을 이유가 없었다.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해라."

"예?"

"어서."

데일의 서슬에 깜짝 놀란 리마가 소마의 등 뒤로 도도도 달아나버렸다.

한창 자기 노래에 취해 있던 소마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격노의 마녀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셔서...."

"아. 바이만의 공주에 대한 얘기 중이었구나."

소마는 책상에서 내려와 의자에 풀썩 앉았다. 맥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관객의 애를 태우는 음유시인 특유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슬슬 데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할 때쯤. 입가를 훔쳐 맥주를 닦아낸 소마가 말했다.

"격노의 마녀와 그 충직한 엘프 기사는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기사라면, 프라우 말하는 건가?"

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둘은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황혼의 추종자나 악마가 자리 잡은 곳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해대고 있습니다. 그 마법이 어찌나 강력하고 끔찍한지, 추종자들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지요."

이건 예상외였다.

'프라우라면 몰라도 엘레나가 그리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데일이 물었다.

"근데 왜 마녀라고 불리는 거지? 적들을 공격하니, 오히려 영웅이라 불려도 안 이상한 것 같은데."

"그게...."

말하기 어려운 듯. 잠시 갈등하던 소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공격하는 건 황혼의 추종자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대륙의 모든 이들이 강압에 의해서 황혼을 따르게 된 건 아닙니다. 그 사상에 매료된 자들도 있고, 당장 삶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황혼 쪽에 합류한 마을과 도시도 있습니다."

이레네가 무너지고 대륙에 혼란이 찾아왔다.

이전처럼 교역이 활발하지도 못하며, 밭이 쑥대밭이 되면서 식량 산출도 크게 줄었다.

몇몇 도시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자립하기 힘들어졌고, 그중에는 당장 살아남기 위해 황혼으로 넘어갈까 고심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리고 그자들을 엘레나가 공격한 거군."

"배신자라 부르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고의 의미로 성벽을 무너트리는 선에서 그쳤다고 합니다. 앞으로 황혼을 따르게 된다면, 성벽만 무너트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을 거라는 말도 남겼고요."

"그래서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거군."

"예. 성벽이 무너졌는데 가뜩이나 어려운 도시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도시민들은 대륙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죠. 그렇게 소문이 퍼지게 된 거죠. 도시를 무너트린 격노의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데일은 말없이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군.'

겨우 1년.

너무 많은 게 변하고 말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자제심은 남아 있어 다행이야. 프라우가 말려주고 있는 건가.'

성벽을 허무는 선에서 그쳤다니 다행이다.

만약 엘레나가 도시의 민간인마저 공격했다면. 그때는 정말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니까.

"지금 엘레나는 어디쯤 있지?"

"글쎄요. 마지막으로 발견된 건 2군단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황혼 쪽에 붙은 군단이었지요."

그 이후로, 소마는 데일이 모르는 대륙 정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황혼 쪽으로 돌아선 1군단과 2군단.

황혼을 거부한 4군단. 황제에 대한 충성을 여전히 유지한 3군단.

여전히 하늘을 떠다니며 지상을 향해 일방적인 폭격을 가하는 이레네와 황제.

마지막으로....

"황제를 쫓던 황혼은 추격을 포기했습니다. 여간한 방법으로는 공중에 떠 있는 이레네를 떨어트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죠."

"그래서?"

"자리를 잡고 거대한 탑과 도시를 건설 중입니다."

"탑?"

소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황혼의 의도는 모르겠습니다. 대체 뭘 위해 탑을 짓는지요. 하늘에서 무언가를 지상으로 떨어트릴 구조물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레네 아니겠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이것으로 소마의 이야기는 끝이었다.

데일은 전체적인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다.

'황혼의 세력이 굉장히 크다. 남아 있는 악마들마저 놈에게 충성하고 있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흩어져서 산발적인 저항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고, 연대하지는 못해.'

연대하지는 못하는 이유는 거리 탓도 있지만, 구심점이 없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제국을 이끌던 황제는 자기 신민들을 버리고 하늘로 도망쳐 버렸다.

그 황제의 자리를 대신해 사람들을 한데로 모을 자가 누가 있을까?

귀족들?

황제가 하늘로 날아오른 대가로 제국 귀족들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다.

종교 지도자?

에스델이나 에리얼이 사람들을 이끌 경우, 반대쪽 신자들은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오랜 시간 제국의 방패가 되어온 군단장 베른바르트가 가능성이 있지만....

그 역시 많은 어려움이 있는 상태.

그렇게 인류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그 느슨한 틈 속에서 황혼은 걷잡을 수 없이 몸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탑이라....'

무슨 의도로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걸까.

데일은 문득. 이전 황혼의 추종자들이 다스리는 마을에서 보았던 그 석상을 떠올렸다.

사람들을 강제로 숭배하게 시켰던 황혼의 석상을.

'석상을 부쉈을 때, 분명 빛무리 같은 게 나왔었지.'

단순한 석상은 아니었다.

뭔가 의도가 있다.

놈이 짓는다던 그 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데일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탑이 완성되게 두어서는 안돼. 그러러면.... 결국은 놈과 싸워야 되겠군.'

여러 증언으로 들었을 때, 기사단장을 죽인 건 황혼이다.

그리고 황혼은 다른 누구와 협동하지 않고, 단신으로 기사단장을 죽였다고 한다.

압도적인 차이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다.

검성이라 불리던 기사단장은 인류 최강에 걸맞은 사내였다.

데일이 알기로 그보다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혼은 그를 너무나 간단히 꺾었다.

'황혼의 강함은 고위 서열 악마보다 강할 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강하겠지.'

지금의 데일이 그 황혼과 싸우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해져야 한다.

잠들어 있던 지난 1년을 메울 만큼,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빠른 성장을 위해서 데일은 더 강력한 적과 맞붙어야 한다.

그래서 데일은 물었다.

"서쪽에 하켄이 지키고 있는 영역이 있을 테지?"

"예? 예, 그렇죠?"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조금 강력하다 싶은 악마나 황혼의 추종자가 있으면 전부 알려줬으면 좋겠군."

소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피해가실려고 그러시는 거구나! 그러면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아니."

데일은 소마의 말을 끊은 뒤.

서늘하게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전부 죽일 거다."

그 과격한 선언에 소마와 리마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 * *

무너진 이레네와 2군단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황야.

지력이 약해 오랫동안 버려진 이 땅에 거대한 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인부들이 돌과 자재를 날랐다.

황혼의 추종자들이 채찍을 휘두르고, 음울한 분위기가 흐르는 마법사들이 연신 주문을 외웠다.

덕분에 탑은 놀랄 만치 빠르게 그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과연 이 탑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문득, 돌을 나르던 한 인부는 멍하니 자신이 만드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아...."

불길하고 기괴한 탑이었다.

미관이나 안전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한 층이라도 더 높게 쌓겠다는 일념으로만 지어진 듯한 건축물.

더러운 외향과 구름을 찌를듯한 키는 그 자체로 신들의 권위를 모독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부는 자기가 이 끔찍한 건물을 짓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에 큰 좌절감을 느꼈다.

하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또다시 채찍이 날아올 것이다.

자신의 가족과 동료를 죽인 채찍이 말이다.

'신들이여.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인부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하나였다.

기도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옥좌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황혼이다.

황혼은 빠르게 올라가는 탑을 마치 아름다운 것을 보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올려다보았다.

그런 황혼에게 나이 든 노인이 보고했다.

"아군에 투항하는 세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지에서 이름있는 영주들이나 군단장들이 저항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들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입니다."

황혼은 권태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는?"

"여전히 동쪽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쪽을 주시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격용 첨탑을 여럿 세웠으니, 함부로 이쪽으로 다가올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게 순조롭구나."

심드렁하게 대답한 황혼은 돌연,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우웁."

"무, 무슨 일이십니까?"

황혼은 아무렇지 않게 입가를 닦았다. 화려한 옷이 피에 젖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별거 아니다. 기사단장이 안쪽에서 발악해, 잠시 몸에 부하가 걸린 것뿐이다."

"...참으로 질긴 자군요."

"그래. 그래서 난 기사가 싫어. 도무지 얘기가 통하지 않고, 중요할 때 꼭 한 번씩 나를 엿먹이거든."

황혼은 자신의 가슴에 박힌 룬검을 쓰다듬었다.

특별한 힘이 서려 있는 룬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혼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알아보라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흑기사 말씀이시라면, 거인산 협곡에 흐르는 강가를 모두 수색해봤지만 그 시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역시, 악마 두르핀의 폭발에 그대로 소멸된 것 같습니다."

시종일관 심드렁하던 황혼이 처음으로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강가 전부를 뒤진 거 맞아? 그 강의 지류에 뭔가 더 있는 거로 아는데? 내가 거기 여러 번 지나다녀봐서 잘 알거든. 거인들과 몇 번 내기도 했었고. 아. 정확히는 내가 아니지만, 어쨌든."

"...."

"다 뒤져본 거. 아니지?"

"그건...."

써걱.

주황색 빛무리가 스쳐 지나가더니 노인의 오른팔이 바닥을 뒹굴었다. 노인은 입을 꽉 깨물며 어떻게든 비명이 새어나오는 걸 참아냈다.

황혼은 손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얀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노인의 잘린 팔을 깔끔하게 되돌렸다.

"난 거짓말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죄, 죄송합니다."

"그 강의 지류에 있는 늪지대는 아직 안 조사해본 거지?"

"...남부의 늪은 워낙 방대한지라, 수색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황혼은 코웃음을 쳤다.

"나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걸 숱하게 이뤄보았고, 지금도 그 불가능에 다가가고 있어. 그런 내 앞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변명으로 삼는 건, 너무 구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로 인력을 파견해 수색을 시키겠습니다."

"두 번은 없어."

냉랭한 말에 노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조심히 황혼의 눈치를 살폈다.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평소 여간해서는 먼저 질문을 건네는 적이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지 못했다.

노인은 재빨리 황혼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노한 기색은 없었다.

다시 평소처럼 심드렁한 얼굴이다.

"말해봐."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흑기사는 죽었을 게 확실합니다. 악마 두르핀의 폭발에 휘말리면 어지간한 악마라도 살아나기 힘듭니다."

"아니. 살아있어."

"...그걸 어찌 확신하시는지."

"여전히 이 대륙 어딘가에서 그분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황혼은 가슴에 박힌 룬검을 쓰다듬었다.

"게다가 악마 따위에 쓰러지실 분이 아니야. 다른 누구보다 악마를 많이 상대해봤을 분이니. 두르핀이 궁지에 몰리면 자폭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왜 그리 집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강한 기사일 뿐이지 않습니까."

황혼은 의미심장하게 웃은 뒤, 건설되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보는 눈이 없구나. 이 모든 일을 끝낼 열쇠는 그분에게 있다. 이 대륙에 사는 모든 쓸모없는 인간들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지."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흑기사를 생각하는 황혼의 눈에 깃든 건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이었다.

애정. 그리움. 혹은 분노.

지금껏 황혼은 다른 그 어떤 이에게도 이런 감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런 노인의 혼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며, 황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살아있으면 반드시 이곳으로 온다. 남의 불행을 외면할 사람이 아니니. 그전까지 나. 아니, 우리는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쳐둬야 해."

황혼은 권좌에서 일어났다.

긴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한걸음. 한걸음 탑을 향해 걸었다.

"이 탑이 완성되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와 그분이 하나 되는 순간."

황혼은 흉측한 탑의 겉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러자 탑의 겉면에 새겨진 불길한 문자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황혼의 눈도 빛났다.

"내가 신들을 떨어트릴 거야."

늑대왕 하켄

* * *

대륙의 서부.

유서 깊은 무역 도시 알드군트.

한때 '도시 연맹' 소속 자유도시였으나, 악마의 침공 이후 제국에 복속되었던 이 유서 깊은 도시는 최근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레네의 붕괴로 대륙의 질서가 무너졌다.

제대로 된 무역은 극히 어려워졌으며, 상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자연히 무역 도시였던 알드군트는 재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레네를 무너트린 황혼의 추종자들이 가장 먼저 노린 건 바로 이곳 서부였다.

상대적으로 전쟁의 화마에서 자유로워, 융성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적들이 몰려오지만 군사를 보내줄 이레네는 이제 없다.

서부에 거점을 두고 있던 여러 도시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의 방위를 맡은 인물은....

"하켄 사령관님.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찰대가 파악한 바로는 막대한 보급 물자가 적 진영으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놈들이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하켄은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모가 조심히 물었다.

"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켄은 참모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간단한 것도 내가 일일이 지시해야 하나?"

하켄은 옆에 누워 잠자고 있던 하티를 스윽 쓰다듬었다.

그러자 하티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죄,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 의견은...."

"그것도 좋지만 여기서는 이런 문제가...."

방에 모여 있던 참모들은 서로 토론하며, 필사적으로 지혜를 짜내기 시작했다.

하켄은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켄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걸.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켄은 스스로가 이런 막중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냐를 설명하려면 우선 거인산에서의 전투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때 분위기가 개판이었지.'

데일이 몸을 던져 두르핀과 함께 협곡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 이후에 있던 폭발에 온 천지가 뒤흔들렸다.

악마의 최후다운 끔찍한 폭발이었다.

그 강렬한 위력에 멍하니 있던 동료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력한 폭발. 우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데일 경은?

에스델은 충격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켄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엘레나는 데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협곡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 몸을 프라우가 잡아주었다.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건 하켄이었다.

분명 엄청난 폭발이었고, 거기에 휘말리면 누구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하켄은 데일이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사람이 아니야.'

아무런 근거 없는 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용병은 감에 따라 살고 죽는 족속이다.

하켄은 데일이 살아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인지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당장 다른 악마가 우리를 쫓을 수도 있어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번뜩 고개를 든 건 엘레나였다. 물기 젖은 눈에는 증오와 원망이 담겨있었다.

"우리 탓이에요."

"...어?"

"우리가 좀 더 강했다면. 더 노력했다면 데일 경을 살릴 수 있었어요. 데일 경이 우리를 위해 희생할 필요도 없었고요. 데일 경이 죽은 건 전부 우리 탓이에요."

엘레나는 로브를 여민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프라우가 급하게 따라붙고, 아이렉이 그런 엘레나의 뒤를 잡으려 했다.

엘레나가 냉정하게 말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제부터 저는 바이만의 공주가 아니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엘레나는 조금도 고민 없이 답했다.

"복수."

당황한 하켄은 엘레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도무지 붙잡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금방이라도 마법이 날아올 것 같았다.

하켄은 바닥에 주저앉은 에스델의 어깨를 흔들었다.

"사제 양반. 사제 양반. 어서 저 공주님 좀 말려봐. 뭔가 눈깔이 이상한 게, 여기서 그냥 보내면 안 될 거 같아."

"그녀 말이 맞아요. 전부 저희가 부족해서 데일 경이...."

"아니 사제 양반까지 왜 그래!"

머지않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에리얼은 착잡한 기색으로 동쪽으로.

에스델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북쪽으로.

그간 함께 힘을 합쳐오던 이들은 헤어짐에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하켄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애초에 이 사람들이 함께한 건....'

종교도 다르고 성격도. 출신도 모두 다른 이들이 이렇게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데일 덕이었다.

강력하고. 때로는 엄격하고, 때로는 부드러우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데일이었기에 이들을 한데로 묶어둘 수 있었다.

데일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순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건 필연이었다.

"뭐냐고 진짜...."

자신은 저들을 붙잡을 수 없다.

하켄은 데일 옆에서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려던 용병이고, 저들을 설득할 언변도 없다.

'나는 데일 경이 될 수 없어.'

하켄은 데일이 사라진 이후 처음으로 울적함을 느꼈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구나."

옆에는 아직 하티가 남아 있었다.

만약 하티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켄은 하티의 갈기를 마구 쓸어주었다.

"고맙다 이 녀석아."

하티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울었다.

함부로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얼른 손을 뗀 하켄이 괜스레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여기서 궁상떨고 있어봤자 뭐 해결되는 게 있나. 데일 경이 돌아올 때까지 난 내 일을 해야지. 거인 형씨들도 잘 있으쇼!"

"...너희. 다시 오지 마라!"

"악마. 싫다."

악마와의 싸움에 기진맥진해진 거인들을 뒤로하고. 하켄은 협곡을 넘어, 산에서 내려왔다.

왼쪽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늪이 보였고, 다른 한쪽에는 고향 마을이 보였다.

"데일 경이 물살에 떠밀려 왔다면, 어쩌면 늪에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데일 경 냄새 안 나냐?"

허공에 코를 벌름거리던 하티가 고개를 저었다.

하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 없지."

하켄은 터벅터벅 걸어 고향으로 향했다.

고향 사람들은 하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밥을 배불리 먹고. 하룻밤 푹 잔 하켄은 주민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레네가 무너졌다는 것.

악마의 잔당들이 곳곳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마을도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

온 주민들이 모여 긴 상의를 나누었고, 결국 하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 하켄이 그래도 믿음직... 스럽지는 않지만."

"하켄이 그래도 허튼소리 할... 사람이기는 하지만."

"하켄이 똑똑...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하켄을 믿을 수밖에 없겠네."

하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왠지 기분이 나쁜데. 나 돌려서 욕하는 거 아니지?"

늪지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준비했다.

짐마차를 수리하고, 보따리에 꼭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우울함 속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몇몇 아낙은 눈물을 보였다.

하켄도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젠가 용병질로 큰돈 벌어서. 이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약속했는데.'

그런 약속을 누구랑 했던가?

'...퀼.'

영혼의 단짝이던 친구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전선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아 놓고서는, 이레네로 돌아오는 길에서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은 친우.

하켄은 여전히 친우의 죽음을 그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데일의 조언이 기억났다.

어쩌면 시간이 얼마 없을 수도 있으니, 더는 미루지 말라는 말.

하켄은 그 말을 피부로 느꼈다.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피난 가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악마가 아니라 도적 떼를 만나도 몰살을 당하거나, 사로잡혀 노예가 될 것이다,

어쩌면 속마음을 말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 퀼의 아내이자 하켄의 소꿉친구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우리 그이는 이번에도 일이 생겼나 봐?"

"어. 응. 그게."

고민하던 하켄이 표정을 굳혔다.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려 했다.

"그게 있잖아."

"알아."

"어?"

"안다고."

그렇게 말한 퀼의 아내는 묵직한 자루를 하나 내밀었다.

자루에는 그간 하켄이 퀼의 이름으로 보내왔던 은화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중에 사실대로 말하면 돌려주려고 모아두고 있었어. 상황이 궁핍할 때는 조금 꺼내 쓰긴 했지만...."

하켄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우리가 더 미안하지. 고마워."

"...."

"울지마."

"누가 운다고... 흡! 컥! 칵! 칵! 나 사례 들렸... 컥!"

"하여튼...."

그녀는 하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 * *

마지막으로 테이블 위에 데일을 향한 쪽지를 남긴 하켄은 주민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그리고 머지 않아 한 무리의 용병들과 마주쳤다.

하켄은 긴장했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용병은 도적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일부러 얼굴에 힘을 주고, 강하게 나갔다.

"누구냐."

하켄의 옆에서 하티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용병들은 주춤했다.

그들은 상황을 설명했다.

"저희는 이 근방에서 용병 일을 해먹고 사는 놈들입니다. 이번에 이레네가 큰일 났다 해서 도망치는 중이었죠. 당신은...."

"하켄이다. 나도 용병이었지."

"하켄?"

"하켄... 들어본 적 있는데."

"아. 그 흑기사와 함께하는!"

데일은 용병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용병 업계에 들어서서 수많은 업적을 세운 그는 제2의 용병왕이라고 불리며, 많은 존경과 경외를 받았다.

그리고 그 옆에 항상 붙어 다니던 하켄 역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물론. 용병들이 으레 그렇듯, 소문의 신빙성은 썩 높지 못했다.

"흑기사 데일의 가장 강력한 동료라 들었어."

"듣기로는 흑기사와 사흘 밤낮을 겨루고, 서로의 강함을 인정해 함께하게 되었다지?"

"웬만한 용병은 한 손만으로도 꺾을 수 있다는데."

"음. 그 정도라고? 별로 그렇게 강해보이지는 않는데."

"생각을 해봐. 흑기사 데일이 데리고 다니는 동료는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고. 교단의 성녀 후보도 그렇고. 무시무시한 엘프 기사와 바이만의 공주도 있다는군. 당연히 저 사람도 범상치 않을 거야."

"드, 듣고 보니."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하켄은 분명 괜찮은 실력을 지닌 용병은 맞았다.

경험도 많고. 데일과 함께 하며 힘도 많이 길렀으니까. 용병 중에서는 상위권의 실력일 것이다.

하지만 저 용병들이 저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인가 하면... 절대 아니었다.

"당신이 진짜 그 하켄이 맞소?"

하켄은 멍청히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냥 그렇다고 하는 게 이득 아닌가?'

그러고는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 하켄이 맞다."

"오오!"

"역시!"

그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

* * *

그 이후로 여러 일이 있었다.

마침 그 용병들은 악마들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위험할 판.

용병들은 기꺼이 하켄의 지시를 따르겠노라 했고, 하켄은 엉겁결에 지휘를 맡게 되었다.

'아, 악마 잔당이 쫓아오고 있다고?'

하지만 잔머리와 제 살 길 하나 만큼은 뛰어난 하켄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

하켄은 하티의 후각을 이용해 적들을 요리조리 피했고, 여러 잔재주를 이용해 기어코 추격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악마의 잔당은 그 밖에도 많았고, 그들에게 쫓기는 사람 또한 많았다.

서쪽으로 향하다 보니, 다른 집단과 조우하게 되고, 그 집단이 또 하켄의 명성에 합류하고, 무사히 살아남으니 그렇게 하켄의 명성이 오르고, 그 명성에 끌려 또 집단이 합류하고.

하켄이 이곳 알드군트까지 도달했을 때.

하켄은 이미 수천 명의 용병과 난민을 무사히 이끈 구세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 별명도 찬란한 늑대왕.

언제 도시가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던 알드군트의 시장은 그런 하켄을 눈물을 흘리며 맞았고, 즉각 그에게 도시 사령관이라는 감투를 내려주었다.

이제 하켄은 도시의 수호자로서 모든 도시민을 지킬 의무가 생겨버렸다.

긴 회상에 잠겨 있던 하켄이 고개를 헛웃음을 흘렸다.

'왜지?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데. 사실 아무것도 없는 용병이라는 게 들키면, 난 분명 목이 잘리겠지? 허허. 데일 경. 빨리 돌아와줘요. 나 죽을 것 같아.'

그런 하켄의 헛웃음에, 참모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느, 늑대왕이 웃으신다.'

'우리 의견이 저분께는 너무 하찮았던 거겠지.'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해!'

공포에 질린 참모들은 더욱 열을 올렸다.

저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충성했던 건 아니다.

하켄의 실력에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꽤 있었다.

개중에는 '내가 하켄 저놈 잘 아는데. 그냥 별 볼 일 없는 용병 나부랭인데? 그냥 흑기사 옆에서 졸개처럼 붙어 다닌 거지 뭐. 저 새끼만 죽이면 내가 그 자리를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라는 망발을 내뱉으며 하켄을 밤중에 습격하려던 무도한 무리가 있었으나, 거대한 늑대가 놈들의 목을 물어뜯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특히 이 늑대는 사람 맛을 아는지라, 하티에게 당하면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켄이 늑대를 시켜 반란 분자를 살해하게 시켰다고 믿었고, 사람 시체를 뜯어먹는 늑대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부터 늑대왕의 말에 감히 토를 다는 이들은 사라졌다.

"의, 의견을 취합했습니다. 부디 사령관님의 고견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필사적으로 계획을 짜낸 참모가 하켄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하켄은 보고서를 스윽 훑어보았다.

'응. 전혀 모르겠어. 왜 이렇게 어려운 단어들을 많이 쓰는 거야. 무식한 용병이라고 은근히 꼽주는 건가?'

하켄의 미간이 꿈틀대자, 참모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종이를 빠르게 넘긴 하켄이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쁘지 않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을 거다.

'뭐. 머리 좋은 애들이 열심히 생각한 계획이니까, 어련히 잘 되겠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전략과 장기적 안목이 전무한 하켄은 참모들이 의견을 내면 대충 무게 잡는척하다가 수용하곤 했다.

자기 의견을 굳이 섞지도 않았다.

말을 얹어 봤자 밑천만 드러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리고 이건 예상외의 결과를 낳았다.

유능하고 열정적인 참모진과 그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사령관.

도시의 군대는 적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했으며, 악마의 하수인들조차 늑대왕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떨었다....

"회의 끝났으면 나가보도록."

"예."

참모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그들은 회의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언제봐도 칼날 같은 사람이야."

"침묵으로 사람을 압박할 줄 알아. 웬만큼 노회한 귀족도 저만한 위엄을 갖추기 힘들거늘...."

모두 착각이었다.

하켄은 그냥 밑천 드러나는 게 무서워, 닥치고 있던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참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의가 끝나도 무언가 고심하고 계시던데.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도시 방위를 위한 상상도 못 할 전략을 생각하고 계시겠지."

"아니면 도시를 넘어, 황혼에게 직접 쳐들어가는 위대한 계획을 생각 중일지도."

가장 나이 많은 참모가 말했다.

"어느 쪽이 됐든. 감히 우리는 생각지도 못할 심후한 생각을 품고 계실 거다."

참모들은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하켄은... 창밖을 보며 우수에 찬 눈으로 생각했다.

'아까 그 하녀 이쁘던데. 남자친구 있으려나?'

공략

* * *

소마는 지도를 펼쳐 데일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곳 대륙 서부는 특히 더 혼란스러운 곳이란 말이죠? 지형이 험한 곳이 많다 보니까 도적 떼도 많고, 황혼의 추종자도 많고, 황혼에게 넘어간 영주들도 많고. 하여튼 개판이에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조심해야 할 두 놈이 있죠."

"그게 누구지?"

소마가 지도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나는 여기서 북쪽에 있는 도시 알브헤임을 다스리는 파브리스라는 놈이고. 다른 하나는. 래파킨."

소마는 데일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무려 500명이 넘어가는 도적 떼를 거느린 대도적이에요. 산맥을 끼고 주위를 약탈해대는데, 황혼의 추종자들도 섣불리 건들지 않는 놈들이죠."

"...500명?"

"놀라운 숫자죠?"

그 말대로다.

숫자가 많다는 건 그 자체로 힘이 되지만,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도적이 500명이면 그들이 먹고 자고 입는 데에 드는 모든 것을 다 조달해야만 한다.

단순히 도적질만으로 그 모든 걸 충당하려면 대단한 수완이 필요했다.

또. 숫자가 늘어날수록 내분이나 기타 귀찮은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꼭 규모가 클수록 좋은 건 아니었다.

"그 래파킨이라는 놈. 수완이 좋은가 보군."

"예. 제 정보에 의하면 몰락 귀족 출신 기사라는데. 이때다 싶어서 도적 떼를 조직한 것 같네요."

"그러면 놈부터 손봐줘야겠군. 도시는 공략하는 데 준비가 필요할테니."

데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들었으니,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이만 가보겠다."

"엇. 밤이 깊었는데 같이 이야기나 하다 가시지."

"우리는 보통 밤에 움직인다. 그 편이 더 편하니까."

"아... 언데드."

조용히 있던 리마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심히 말했다.

"...안 그래도 경께서 안 돌아가니까 리치와 리자드맨들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숲을 불태울 거 같아요."

"그러기 전에 돌아가야겠군."

참으로 성질 급한 부하들이었다.

데일이 미련 없이 선술집을 나서려 하자, 소마와 리마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그것만으로도 의견이 통한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데일을 붙잡았다.

"경!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음?"

"경과 함께 다니면 좋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좋은 이야기에는 좋은 음유 시인이 필요하죠!"

"...좋은 작가도요."

둘을 슬쩍 돌아본 데일은 흔쾌히 승낙했다.

"마음대로 해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

이미 리치와 리자드맨까지 휘하에 두고 있는데, 노움 마법사를 구태여 거절할 이유가 무엇 있을까.

그리고 소마와 리마는 정보에 해박하니 큰 도움이 될 거다.

"근데 이 선술집은 어떻게 하고?"

"으음. 한동안 휴업해야죠 뭐. 자, 자! 모두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소마가 노래하듯이 외치자, 2층에서 자고 있던 취객들이 비척비척 걸어 내려왔다.

여전히 비몽사몽 한 그들에게 소마가 말했다.

"저희 선술집을 이용해주신 손님 여러분 모두 감사하고, 다음에 또 인연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리마가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오더니, 취객들의 등을 밀어주었다.

바람은 이 숲을 벗어날 때까지 저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손님을 모두 내보내고.

단촐하게 짐을 싼 노움 남매가 데일의 뒤로 따라붙었다.

리마는 수려한 글씨체로, '무기한 휴업'이라 적힌 팻말을 선술집 입구에 걸어붙인 뒤, 도도도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선술집에서 더는 휘파람 소리도. 노랫가락도 들려오지 않았다.

숲은 고요에 잠겼다.

* * *

무르하탈이 데일을 맞아주었다.

"아.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노움들은?"

"마법사 겸 음유시인. 아는 게 많고 이 근방 일에 해박하니, 계획을 세울 때 같이 상의해라."

"호오. 그렇군요."

무르하탈의 새파란 안광이 흥미로 불타올랐다.

리마는 겁을 집어먹고 소마의 뒤에 숨었다.

그리고 소마는 무르하탈을 보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우왓. 진짜 리치잖아. 생긴 건 그냥 스켈레톤이랑 큰 차이 없네."

"...말하는 게 건방지구나. 예의를 갖춰라."

"흐음. 조금 권위적인 성격에, 자존심이 강하고, 쪼잔한 구석이 있군. 뼈다귀라서 그런가?"

"리치 무르하탈. 쪼잔함... 메모."

리마가 소마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소설에 쓸 참고 자료였다.

순식간에 쪼잔한 뼈다귀가 되어버린 무르하탈이 분노를 터트리려던 그때.

데일이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이좋게 지내."

"알겠...습니다."

무르하탈은 뼈를 파르르 떨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데일은 무르하탈이 좋아할 만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제부터 도적 떼를 칠 거다. 네가 좋아하는 언데드도 많이 만들 수 있겠지."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소마가 안내할 거다.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빠르게 이동하면 당장 오늘 해가 뜨기 전에 놈들이 자리 잡은 산 초입에 닿을 수 있어요."

"생각보다 가깝군."

"그렇죠. 가끔 래파킨의 부하가 저희 선술집에 와서 정보를 사가기도 했으니까요. 겸사겸사 책도 좀 팔았고요."

데일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는 핀잔을 주었다.

"사람은 좀 가려가면서 장사해라."

"제 아름다운 노래를 못 듣게 하다니? 아무리 극악한 인간이라도, 그건 너무한 처사잖아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 건 알겠군."

노움 남매가 새롭게 합류한 데일 군단은 빠르게 전진했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이동하는 게 좋았다.

소마는 숲길을 마치 제 집 앞마당처럼 꿰고 있었다.

노움 남매를 노려보던 무르하탈도 그 재주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천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떡갈나무 숲이 끝나고. 저 멀리 도적 떼가 자리 잡은 산이 보였다.

데일은 하늘을 살핀 뒤 명령을 내렸다.

"일단 이곳에 대기해라."

넓적한 떡갈나무 잎이 햇빛을 가려주고 있다.

언데드들이 대기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소마가 물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건가요? 밤에만 움직이는 군대라. 뭔가 멋있네요. 데일 군단 같은 멋대가리 없는 이름 말고, 아예 밤의 군대라고 하죠? 마침 데일 경이 밤의 여신의 기사이기도 하고요."

네이밍 센스를 지적당한 무르하탈이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소마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우선 정찰부터 해볼 생각이다. 싸우는 건 좋지만, 적어도 지형 정도는 살펴둬야 하니."

"그런 거라면 이 소마가 함께 하겠습니다! 길을 안내해드립죠."

"카리악. 발이 날랜 리자드맨 10 정도를 끌고 따라와라."

"카룸!"

씩씩하게 대답한 리자드맨 병사가 데일의 뒤에 기립했다.

"무르하탈. 알아서 잘하고 있어라. 주위 경계 철저히 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믿고 다녀오십시오."

"동생아. 너도 뼈다귀 마법사님이랑 잘 있어!"

데일과 노움. 그리고 리자드맨 무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리마가 슬쩍 옆을 보았다. 마침 언데드 리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뭘 보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님이 없을 때는 내가 이곳의 왕이다. 그러니 알아서 깎듯이 행동해. 안 그러면 콱 잡아먹어 버릴 테니! 클클클!"

무르하탈은 사악하게 웃으며, 제 나름의 농담을 건넸다.

농담이라기에는 진담이 많이 섞여 있었지만....

리마는 몸을 움츠리고는 슬쩍 종이를 꺼내 글귀를 적었다.

[리치 무르하탈. 성격 더러움. 기분 나쁨. 그리고 냄새남.]

무르하탈은 모를 것이다.

오늘의 이 작은 사건이 무르하탈의 이름이 먼 훗날까지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걸.

'냄새나는 뼈다귀 무르하탈'로.

* * *

숲을 나선 데일과 리자드맨들은 언덕을 올랐다.

우선 주위에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다.

언덕을 오르자 주위 풍경이 대강 눈에 들어왔다.

당장 눈에 띄는 건, 산 초입에 서성이는 사내들이다.

소마가 설명했다.

"도적단의 보초일 겁니다. 주위에 적이 오나 안 오나 살피는 역할이죠."

"도적단 주제에 나름 할 건 다 하는군."

"적이 많은 놈들이니까요. 아. 뭔가 내려온다."

그때.

산에서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더 내려왔다.

다섯 명은 칼을 차고 있었고, 나머지는 손에 밧줄이 묶여 질질 끌려갔다.

소마가 표정을 찡그렸다.

"으음. 래판킨은 마을을 습격해서 그 주민들을 사로잡는 걸로 유명하죠."

"노예로 삼는 건가?"

"그렇죠? 허드렛일을 시키거나, 농사를 짓게 하거나. 노예를 판매한다는 말도 있긴 한데, 요즘 같은 시대에 노예를 살만한 곳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카룸! 카락!"

뒤에서 카리악이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어서 공격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그런 카리악을 진정시켰다.

"기다려라. 북쪽에서 뭔가 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뭔가 오다니요?"

소마는 데일이 바라보는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보인다는 거예요."

"검이랑 창으로 무장한 무리가 열. 걸음걸이만 봐도 도적 나부랭이가 아닌데."

소마는 그런 데일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고 혼자 중얼중얼거리다니.

'역시 미친 거 맞지? 하긴 언데드의 본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조금 뒤.

소마는 저 멀리에 점이 꿈틀대는 걸 발견했다. 점은 이쪽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커졌고, 이내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데일의 말대로였다. 삼엄히 무장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소마는 경악했다.

'무, 무슨. 진짜였다고? 그럼 저 멀리에 있던 사람들을 여기서 전부 들여다본 거야?'

소마는 흑기사가 지닌 초인적인 시각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유심히 살폈다.

"이건 내 직감이다만. 저놈들. 황혼의 추종자 같지 않나?"

소마는 미간을 좁히며 신중히 살폈다.

"어, 음. 확실히, 분위기는 비슷할지도... 아니. 잠깐. 맞는 것 같은데요? 저 사람들이 북쪽에서 왔는데, 북쪽에는 아까 말했듯, 놈들이 점거하고 있는 알브헤임이라는 도시가 하나 있거든요."

황혼의 추종자들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던 도적들도 그런 추종자들을 발견하고, 상대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밧줄에 묶인 사람들은 그 뒤로 끌려갔다.

소마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래파킨이 어떻게 저 큰 도적단을 유지하나 했더니. 추종자들이랑 붙어먹고 있었던 거예요. 노예를 팔아서 필요한 재원을 모았던 거죠."

"어쩌면 그 래파킨이라는 놈도 추종자일 수도 있고."

"그것도 가능성이 있죠. 황혼은 자기한테 고개 숙인 귀족들이나 권력자들한테는 후하게 대하는 편이니까요."

래파킨의 도적단은 황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걸로 보인다.

원래 데일의 계획은 저 도적단을 급습해서 성장도 이루고, 물자나 자원을 약탈하는 것이다.

그 뒤.

병력의 양과 질을 충분히 키워 도시를 향해 공격을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놈들을 공격했다가는 바로 도시 쪽에도 소식이 가겠군.'

그렇다면 도시의 추종자들도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비를 할 것이다.

지금 데일의 주력 병력은 언데드.

언데드는 분명, 가치가 있고 유용한 병사들이지만, 단점 또한 명확하다.

상대측에서 미리 언데드에 대한 방호만 제대로 해놔도 상황은 훨씬 까다로워진다.

데일 또한 절반은 언데드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공격할 거면 한 번에 들이쳐야 해. 소식이 퍼지기 전에.'

도적단을 소탕한 뒤. 곧바로 도시 쪽으로도 진격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데일의 계획에 소마는 난색을 표했다.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십니다. 성벽이 있고, 방호 시설이 있다고요. 공성 병기로 두들기거나 마법사들이 없으면, 엄청난 병력으로 들이쳐야 하는데. 지금 저희 군의 전력으로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확실히.

성벽을 끼고 수비하면 어마어마한 이점이 생긴다.

당장 인류도 악마의 군세를 상대로 높은 성벽을 끼고 수십 년을 방어해내지 않았던가.

데일이 거느리는 군대는 성벽에 접근하기도 전에 화살 세례에 박살이 날 것이다.

소마가 데일을 달래려 했다.

"도시는 일단 무시하시고. 다른 잡다한 놈들이나 토벌하면 될 일이이죠. 애초에 서쪽의 늑대왕과 만나는 게 목적이니까, 꼭 전부 처리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런 소마의 설명을 말없이 들으며, 데일은 노예를 거래하는 도적단과 추종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노예로 거래되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다.

하지만 노인이나, 여성, 어린아이도 몇 명 정도 섞여 있었다.

데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마을을 하나 들렸다. 추종자들 아래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더군. 놈들에게 가족을 살해당한 이도 많았고, 모진 혹사에 불구가 되어버린 이도 많았다. 인간보다는 가축같이 살아가고 있었지."

"으음. 요즘은... 드문 일은 아니죠."

데일은 소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알브헤임이라는 도시도 사정은 다르지 않을 거다. 그렇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런 사람들을 못 본채하고 지나갈 수는 없어."

"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가요?"

"더 이유가 필요한가?"

무심하게 되묻는 데일은 분명 진심이었다. 가식은 없다.

소마는 데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음유시인으로서 수많은 이야기와 영웅담을 접했다.

용을 사냥한 명예로운 전사.

사악한 마법사에게서 공주를 구출해낸 왕자.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약자들을 돕는 방랑 기사.

하나같이 꿈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소마는 안다.

꿈은 현실에 없기에 꿈이라고.

어려운 시대다.

기사도는 이제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명예와 헌신은 아둔하다고 욕을 들어먹는 시대.

그렇기에 소마는 더욱 열정적으로 노래했을지 모른다.

현실에 없는 꿈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지금. 그토록 바라오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제가.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분명.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지?"

"예. 노래로 동물이든 사람이든 홀릴 수 있어요. 어. 잠시 동안이요."

"마침 괜찮은 생각이 났다."

데일은 노예 거래 현장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성벽이라는 게 밖에서 공격하는 건 어려워도... 의외로 안쪽에서는 쉽게 무너져 내리거든."

공략

* * *

래파킨.

가난한 몰락 귀족의 아들. 그것도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떠한 재산도 물려받지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졌다.

가문에서 배운 거라고는 칼질밖에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갓 20살이 되었을 무렵. 그는 용병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래파킨의 실력은 웬만한 기사 정도는 되었기에, 용병으로서 실적을 쌓아가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한때는 자신이 혹시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 정도면. 용병의 최정점에 설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사내가 포부를 품었으면 정상을 노려야지."

그렇다면 상위구역에 들어갈 권리도 주어지고. 운 좋으면 귀족 미망인과 눈이 맞아 신세를 펼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괴물에 의해 갈가리 찢겼다.

어느날 그가 의뢰를 마치고 길드 건물을 나설 때였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다른 용병과 부딪힌 일이 있었다.

상대는 그냥 지나가려 했지만, 꼴에 귀족의 피가 흐른다고, 오만했던 당시의 래파킨은 시비 거는 걸 참지 못했다.

"어이.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지."

"...부딪힌 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하하! 이 자식 신입이냐? 감히 이 래파킨 님에게 그렇게 뻣뻣하게 굴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래파킨은 천성이 포악한 자다.

그는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도시 안이니 죽이지는 않을 거지만, 얼굴에 흉터 정도는 새겨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려던 다음 순간. 래파킨의 칼이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흐트러졌다.

래파킨은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샌가 뽑아든 검을 다시 집어넣는 상대를 보고 나서야, 상대가 무언가를 했다는 걸 짐작했을 뿐.

그는 당황하며 외쳤다.

"너, 너 대체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흠. 글쎄."

상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래 용병왕이라 불렸었지."

"용병왕... 무슨 그딴 별명이.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뭐. 그렇겠지. 근데 이제 곧 듣게 될 거야. 내가 악마를 모두 무릎 꿇리고, 세계를 구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용병왕이라는 사내는 사납게 웃었다.

래파킨은 그 모습에서 그릇의 차이를 느꼈다. 또한 피부로 실감했다.

자신은 천재 같은 게 아니라고.

저 사내가 있는 한, 절대 용병의 정점 같은 데에는 못 선다고.

그 뒤. 깊은 좌절을 느낀 래파킨은 곧장 업종을 변경했다.

바로 도적이다.

래파킨은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며 도적질을 했다.

그리고 래파킨은 도적질에도 그럭저럭 재능이 있었다.

여러 마을을 약탈했고. 도적단도 크게 키워나갔다.

때로는 추적대가 쫓아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래파킨은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 영리하게 적들을 따돌렸다.

도적단의 규모도 순식간에 백을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대륙에 명성을 펼치는 도적이 되지 않을까?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래파킨은 그렇게 자신했다.

그들과 마주치기 전까지.

"보자. 이게 전부인가? 역시 싱겁네. 전부 바싹 타버려서 누가 두목인지도 모르겠잖아요. 적당히 좀 하시지. 마법사님."

"미안해요."

"아니. 사과받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단둘이었다.

단둘이서 부하들을 10분 만에 불태워버렸다.

아는 얼굴이었다.

검을 든 쪽은 이전에 마주쳤던 용병왕.

로브로 얼굴을 가린 여자 쪽은....

'대마법사!'

한창 악마를 사냥하고. 황제와 반목하고 있던 영웅들.

그들은 너무나 간단히 래파킨이 일궈온 모든 걸 부숴버렸다.

다행히 래파킨은 운 좋게 나무 뒤에 숨어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때 래파킨은 느꼈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야. 우리랑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본능적인 공포.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둘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시체를 내버려 둔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두목도 죽었겠죠?"

"뭐. 아마 그렇겠죠."

"하긴. 그 화염 폭풍 속에 휘말리면 저라도 살기 힘드니까요...."

사라지기 마지막 순간. 대마법사는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래파킨은 마법사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마주쳤다!'

하지만 어째선지, 대마법사는 고개를 돌리고는 사뿐히 걸어가버렸다.

그날 이후로 래파킨은 지독한 공포에 시달렸다.

밤이면 대마법사와 용병왕이 나와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 꾸었다.

나약한 래파킨은 절대 그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싸울 수도.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래파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단련에 힘썼다.

스스로의 힘이 강해지면, 그 두려움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 둘의 수준에는 결코 닿을 수 없었다.

그사이. 세상은 변했다.

이레네는 무너지고, 혼란이 도래했다. 그와 같은 도적이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

신나게 날뛰던 그는 어느 날 황혼의 추종자들이랑 마주했다.

그들이 숭배하는 석상을 보았다.

석상의 눈과 마주했고, 대마법사와 눈을 맞췄던 그 날을 떠올렸다.

래파킨은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아."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래파킨은 황혼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를 괴롭혀오던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성을 다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이번 노예들은 제대로 전달했겠지?"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예. 15명. 모두 무사히 전달했습니다. 다만."

"다만?"

"다음 달 할당치를 맞추기는 조금 힘들 것...."

래파킨은 손에 든 잔을 집어던지며 성을 냈다.

"힘들 것 같으면 근처에 있는 마을을 덮쳐서 노예로 삼으면 되잖아!"

"그, 그치만 이 근방의 마을은 이미 전부 사라진 지 오랩니다.

"그럼 더 멀리서라도 구해와! 애새끼든 노인네든 싹 다 갖다 바치라고!"

래파킨의 서슬에 부하는 몸을 움츠렸다.

저런 상태의 래파킨에게 잘못 말했다가, 목이 달아난 선배들이 얼마나 많던가.

래파킨은 눈에 불을 켜며 말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다. 곧 있으면 나도 황혼께 인정받아,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간부가 되는 거라고. 그때까지는 할당치를 모두 지켜야 해. 만약 그러지 못하면, 너는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알겠어?"

"예, 예. 알겠습니다."

래파킨은 잔인한 두목이다.

그리고 한다면 하는 사내이기도 했다.

사내는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저기. 그리고. 알브헤임 쪽에서 소식을 하나 전해 왔습니다."

"뭔데."

"떡갈나무 숲에서 남쪽으로 가면 마을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소식이 끊겼답니다."

"흐음?"

"자세한 건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무언가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답니다."

래파킨은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근처에는 뭐 없지 않아? 대부분 우리 쪽 세력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남쪽에는 늪밖에 없고."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쓸데없는 걱정이군. 거기에도 우리 동지들이 있었으니, 겨우 몬스터 나부랭이에게 당했을 리는 없고. 갑자기 땅에서 군대라도 솟아오르지 않는 한, 공격당했을 리도 없어."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래파킨은 포악한 자였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멍청했다면 수백이 넘는 도적 떼를 거느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상황을 읽는 눈이 있었다.

래파킨의 상식으로, 황혼의 추종자들이 지키고 있는 마을에 문제가 생길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말은 됐고. 어서 술이나 더 가져와. 그리고 이번에 사로잡은 노예 중에 괜찮은 여자 두세 명 정도 들여보내고. 남편이 있는 여자로."

"아, 알겠습니다."

래파킨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빼앗는 걸 즐기는 사내였다.

그런 취향을 아는 부하는 고개를 조아린 뒤, 황급히 방을 나섰다.

그 모습에 래파킨은 혀를 끌끌 찼다.

"저놈도 마음에 안 들어. 갈아치워야겠어."

피처럼 빨간 포도주를 홀짝이며 기다리길 한참.

취기가 알딸딸하게 오른 래파킨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멍청한 새끼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부하가 왜 이리 늦는단 말인가.

또 바깥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슬슬 이상함을 느끼던 래파킨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두목. 명령대로 데려왔습니다."

왜인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던 래파킨은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쯧. 들어와!"

문이 열렸다.

래파킨은 곧장 불만을 쏟아내려 했다.

"여자 몇 명 데려오는 게 그렇게 어려운 명령이...."

래파킨은 문을 열고 들어온 무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자기 볼을 꼬집었다.

'꿈인가?'

그런 반응을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부하가 데려온 건 아름다운 여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지옥에서 온 것 같은 흑색 갑주의 기사.

키가 작고 눈이 부리부리한 노움.

그리고 혀를 날름거리는 리자드맨까지.

하나하나가 개성적인 이들이 함께 모여 있자,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에 가까워 보였다.

'이, 이놈이 포도주에 약을 탔나?'

환각인가? 환각이겠지?

하지만 흑기사에게서 풍겨오는 차갑고 음산한 기운에 닭살이 오소소 돋고, 뒤통수가 시린 걸 보니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노옴!"

래파킨의 반응은 재빨랐다.

그는 옆에 내려놓고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화하고 곧장 땅을 박찼다.

검 끝이 데일에게 향했다.

공포를 이기기 위해 수십 년을 갈고 닦은 기술.

황혼을 섬기며 받은 힘과 마력으로 강화한 신체가 만나, 날카로운 일격으로 변모했다.

검 끝이 향한 곳은 데일의 투구에 난 눈구멍.

검은 긴 선을 그리며 그대로 데일의 머리를 꿰뚫을 기세였다.

하지만....

텅!

데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예기를 뿜어내던 검이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래파킨은 멍하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무슨....'

모든 힘과 기술을 쏟아부어낸 필사의 일격이다.

당연히 막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막아내도 이렇게 가볍게 튕겨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내 공격이 조금의 위협도 되지 못했구나.'

그 옛날.

용병왕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아득함.

그리고 공포.

멍하니 질려 있던 래파킨은 곧장 땅에 엎드렸다.

그는 상황 판단이 빠른 사내였다.

"귀인을 몰라뵈었습니다. 감히 건방지게 공격한 것, 용서해주십시오."

깔끔할 정도의 태세 변환에 데일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귀인이라는 거지?"

"그만한 실력을 지니셨으면, 누군들 귀인이 아니겠습니까."

리자드맨이 데일을 보며 물었다.

"카락? 카리악?"

대충 '죽일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래파킨. 이 도적단의 우두머리 래파킨. 맞나?"

"예, 예. 제가 래파킨입니다."

"황혼의 추종자인가?"

순간 래파킨은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뭐라고 답해야 할까?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래파킨은 솔직하게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황혼을 섬기고 있는 몸입니다."

"그래? 북쪽 도시에 노예를 보내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군?"

'이미 거기까지 들켰단 말인가.'

다른 세력에게 괜한 위기감을 주지 않기 위해 나름 숨겨오던 사실이 간파당했다.

래파킨은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예. 노예를 성실히 보낸다면, 간부의 위치를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황혼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제법 위치가 있다는 뜻이겠군?"

"그렇습니다."

래파킨은 자기 쓸모를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활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내 도움을 원한다. 어쩌면. 살 수 있어!'

래파킨이 저자세를 유지하며 물었다.

"무언가.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데일은 순순히 자기 계획을 말했다.

"알브헤임에는 추종자의 간부가 있을 테지? 이름이.... 파브리스였나? 난 놈을 암살하고 도시를 해방할 생각이다. 네가 기회를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아.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제 얼굴을 보면, 성문이든 뭐든 열어줄 겁니다."

"좋군. 협조하겠나?"

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당연하지요!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래파킨은 음흉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

'크흐흐. 암살이라고? 도시에는 황혼의 정예 병력들이 있다. 네가 아무리 강해봤자라고. 거기까지만 가면... 내 승리다.'

데일은 래파킨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순순히 협조해줘서 고맙군. 그나저나 오면서 느낀 건데 도적단이 인상적이더군."

"하. 하하. 그렇습니까?"

그제야 래파킨은 의문이 들었다.

'부하들이 족히 500명은 넘는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히 온 거지?'

그런 래파킨의 의문과 별개로. 데일은 덤덤히 말했다.

"규모도 놀랍고, 농사나 대장장이들까지,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는 것도 놀랐어. 정말 수완이 대단하던데."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내 아래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우리 군대에는 너 같은 인물이 필요한데."

"물론이죠. 기회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당연히 빈말이다.

래파킨의 머릿속에는 데일의 뒤통수를 때릴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푹!

데일의 건틀릿이 래파킨의 가슴을 꿰뚫고 들어갔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라 래파킨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쿨럭. 어... 어째서?"

"온 산채에 피비린내가 가득하더군. 노예들을 보니 한쪽 발을 잘라놨던데,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른 거겠지?"

"살려준다는 약속... 비겁한."

데일은 한없이 무기질적인 눈동자로 죽어가는 래판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한 번도 살려준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다."

"이 개, 같은."

"다만. 기회를 주겠다. 죄를 씻을 기회를. 무르하탈."

그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문밖에서 언데드 리치가 사뿐히 걸어왔다.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이 자를 언데드로 되살려라. 기왕이면 사람 모습 그대로. 아직 쓸데가 있다."

"갓 죽은 신선한 시체인지라, 피부가 썩어서 흘러내릴 때까지는 사람과 구별이 안 될 겁니다."

데일은 심장이 터져, 빠르게 죽어가는 래파킨과 시선을 맞췄다.

"내 심장도 멈췄는데, 너 같은 놈의 심장이 뛰는 건 참을 수 없지."

"끄. 으."

"래파킨. 살아서 지은 죄를 죽어서 갚아라."

데일은 래파킨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영원히."

공략

* * *

래파킨의 도적단은 나름 제대로 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험한 산 중턱에 산채를 지었고, 단단한 목책과 높은 망루로 수비해놓은 상태.

목책의 안쪽에는 여느 다른 마을처럼 농사지을 밭과 주민들이 거주할 저택이 어설프게 늘어서 있었고, 조잡하지만 대장간도 있었다.

처음. 소마는 도적단의 산채를 보고 감탄을 흘렸다.

"허어.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요. 정말 저희만으로 공격해도 되나요?"

그러나 데일은 심드렁했다.

"나 혼자서도 놈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시간만 있다면 말이지. 중간에 도망가는 게 문제지."

실로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말이지만, 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흑기사가 딱히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 진실을 담담히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소마. 네 도움을 좀 받겠다."

"좋습니다. 뒤에서 구경만 하는 것도 좋은 음유시인의 태도는 아니니까요."

"카리악. 너는 리자드맨 하나를 보내서 무르하탈과 본대를 불러오게 시켜라."

"카룸."

소마가 짧은 다리를 움직여 목책을 향해 접근했다.

워낙 키가 작은지라 수풀 속에 몸이 가려, 보초를 선 도적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하아암."

보초는 나른하게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설마 누군가 주위에서 이름을 떨치는 이 도적단을, 그것도 해가 중천에 뜬 대낮에 공격해올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소마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 휘―

어딘가 새소리처럼 들리는 휘파람이 보초의 귀를 간지럽혔다.

늘어지게 하품하던 보초가 동료에게 물었다.

"뭐지?"

"왜."

"뭐 새소리 같은 거 안 들려?"

"산이니까 새소리가 들리지 등신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 보초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그는 어기적 움직이며 망루를 내려섰고,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어어. 얌마. 왜...."

휘― 휘―

말리려던 동료의 눈동자도 탁 풀렸다.

출입문이 열리자 데일이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재주가 좋군."

"뭘요. 다만, 이 상태가 길게 유지되진 못해요. 5분이면 제정신을 차릴 겁니다. 그 전에 래파킨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데, 제가 정보를 불게 만들게요.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한데."

"그럴 필요 없다."

"예?"

푹!

데일은 도적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산채로 생기와 잔혼을 뜯어내 흡수했다.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정보지만, 이 산채의 구조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가장 중앙에 있는 건물에 놈이 있다."

"어, 음. 가차 없으시네요."

"자비를 베풀어줄 이유가 없는 놈들이니까."

소마는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분명 방금까지는 영웅으로 보였던 이가, 지금은 두려운 언데드 기사로 보였다.

'어, 음. 그렇지. 쓰레기들한테 무슨 자비야.'

소마는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사이, 데일은 리자드맨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리악. 경로에 있는 도적들을 조용히 제거해라. 할 수 있겠지? 암살은 너희 특기니까."

"카룸."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카리악과 리자드맨 병사들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신발을 신지 않은 그들은 어떤 소음도 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다.

늪지의 은밀한 사냥꾼답게, 리자드맨은 몰래 도적들에게 접근해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커읍!"

카리악이 운 나쁜 도적의 하나를 잡아챘다.

한 놈은 도적의 입을 틀어막았고. 다른 녀석들은 몸통을 난도질했다.

도적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대낮에 이뤄지는 완벽한 암살이었다.

데일은 죽은 산적들에게 영혼 지배를 가해, 죽음에서 되살렸다.

멍하니 일어난 망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이 앞장서서 네 동료들의 시선을 끌어라."

"그어."

망자들이 비척비척 앞으로 걸어나갔다.

주위를 순찰하던 도적들은 그런 망자와 마주치면 크게 당황했다.

"어어. 뭐야. 너희 그 상처는 뭐... 컥!"

망자에게 시선이 쏠리면, 리자드맨이 처리한다.

데일은 죽은 도적을 또다시 망자로 되살려 다시 앞세웠다.

그렇게 일행은 적진의 한 가운데를 너무나 당당하게 걸었다.

위험을 알리는 종소리도. '적이야!' 고함을 지르는 도적도 없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가끔 도적들에게 사로잡힌 노예들을 마주칠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한쪽 발목이 잘려있었는데, 그들은 데일과 마주치면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데일은 도적들한테와는 달리, 자상하게(적어도 소마는 그리 느꼈다) 얘기했다.

"잠시만 조용히 해주시오. 금방 풀어주겠소."

저 서늘한 음성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노예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데일은 웬 사내가 여자 두 명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조용히 따라와. 그러면 다칠 일 없어!"

"제발요. 제발 봐주세요. 저는 남편이랑 자식이 있다고요."

"...그래서 끌려가는 거라고 멍청한 년들아."

도적들에게서 흡수한 기억으로, 데일은 저자가 래파킨의 시종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카리악이 데일을 돌아보았다.

명령만 내리면 죽이겠다는 눈빛.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자기가 직접 땅을 박차 사내의 옆에 내려섰다.

"뭣...."

"쉿. 조용히 하도록."

데일은 사내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내는 뭐라고 외치려 했지만,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이빨 몇 개를 부러트려 주자, 금방 얌전해졌다.

영혼 지배로 여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걸 막은 데일이 말했다.

"다시 돌아가시오.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여인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데일은 사내에게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겠지? 살고 싶다면 네 두목에게 안내해."

사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래파킨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이름을 날리던 도적단이 순식간에 접수당한 경위였다.

* * *

소식을 들은 무르하탈은 곧바로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미 목책이 뚫린 순간, 나머지 도적들을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 숫자를 믿고 용감하게 덤벼든 도적들은 이내 압도적인 격차에 하나둘 무기를 놓고 항복했다.

도적단 측 사망자가 100.

아군은 하급 언데드 외에는 피해가 전무했다.

무르하탈이 순조롭게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데일은 죽은 래파킨에게서 기억을 엿보았다.

'그냥 도적 나부랭이인 줄 알았는데... 흥미로운 기억들이 있군.'

용병왕.

그리고 대마법사와의 만남.

래파킨의 기억 속 그들의 모습은 데일의 기억과도 일치했다.

'그리고 래파킨은 어째서인지 황혼의 석상을 보고 그들을 떠올렸다.'

단순히 눈빛이 비슷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쩌면 내가 황혼에게서 기시감을 느끼는 것과 관계되어 있을지도.'

마침 무르하탈이 래파킨을 언데드로 되살렸다.

이제 래파킨은 절대 데일을 거역할 수 없다.

데일이 래파킨에게 물었다.

"용병왕과 대마법사를 만났더군."

래파킨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태도로 공손하게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너는 왜 황혼의 석상을 보고 그들을 떠올렸지?"

"직감이었습니다."

"직감?"

"황혼께서 그 둘과 관계가 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다른 근거는 없고?"

"예. 죄송합니다."

"흠. 더 정보를 얻으려면 간부들을 털어야 하나."

그때.

무르하탈이 되돌아왔다.

"주인님.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두 항복했나?"

"예. 죽인 동료를 언데드로 되살리니까, 곧장 무기를 버리더군요. 클클클."

"혹시라도 도망친 인원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한 명도 놓치지 않은데다, 도마뱀 녀석들을 시켜 밖에 돌아다니는 보초들도 추적해 죽이라 명령했습니다."

깔끔한 일처리에 데일은 만족했다.

"훌륭하군. 수고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알브헤임 쪽도 공격해야 해."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르하탈조차도 우려를 표했다.

성벽을 끼고 있는 상대를 공략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았다.

데일은 래파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걸 위해서 이놈을 되살린 거다."

"으음. 그래도 여전히 너무 위험한 계획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무리 주인님께서 실력에 자신이 있으시다 해도, 적들에게 둘러싸이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럼 달리 괜찮은 방법이 있나? 놈들의 성벽에 그냥 들이박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무르하탈은 주저했다.

그는 여전히 도시를 공략한다는 생각 자체에 회의적이었다.

1천조차 되지 못하는 병력이 아니던가.

하지만 데일은 단호했다.

"됐고. 사람을 모아 놨겠지? 그곳으로 안내하도록."

"...알겠습니다."

무르하탈은 래파킨과 데일을 데리고 공터로 향했다.

무장해제 된 도적들과 노예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도적들은 래파킨을 발견하고 뭐라 말하려다, 뻥 뚫려버린 심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했을 거라 본다. 너희들은 졌고, 이제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

"...."

"그간 너희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

도적 떼에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억지로 붙잡혀, 도적이 되어버린 자도 분명 존재할 거다.

노예들에게도 최소한의 인간성과 예우를 갖춘 이들도 소수나마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지금 곧바로 북쪽의 알브헤임을 치러간다. 너희들도 거기에 동참할 거다."

"!"

"도, 도시?"

"황혼의 추종자들이 다스리는 곳을 말하는 거야? 이 정도 병력으로? 그냥 죽으러 가라는 거잖아."

경악하는 도적들에게 데일이 말했다.

"내키지 않는 자. 그리고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지금 말해라."

슬쩍 눈치만 보던 도적들 중, 몇몇 용감한 자가 일어났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그래?"

"저희는 래파킨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름이?"

"벤자민입니다."

데일은 노예들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여기 벤자민의 말이 사실인가? 그에게 아무런 죄도 없나?"

그러자 잠자코 있던 노예들이 울분을 담아 외쳤다.

"아닙니다! 저 새끼가 제 남편의 발목을 잘랐습니다!"

"제 딸을... 흑흑."

"씹어죽일 놈입니다!"

벤자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것들이. 평소에는 쥐 죽은 듯이 있다가 기회가 생겼다고...!"

"썩 결백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닙니다. 저들이 모함을...."

"무르하탈. 새 언데드 병사다."

"예."

무르하탈은 벤자민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벤자민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썩어들어가더니, 그대로 스켈레톤이 되어버렸다.

데일은 무심하게 말했다.

"달리 억울한 사람 있으면 손을 들도록. 기회를 주겠다."

"...."

도적들은 두려움 몸을 떨 듯, 감히 손을 들지 못했다.

* * *

리치와 언데드. 리자드맨. 그리고 도적 무리까지.

데일이 이끄는 군대의 구성이 한층 더 다채로워졌다.

소마는 미묘한 얼굴로 군대를 훑어보았다.

'누가 봐도 이쪽이 나쁜 놈인 것 같은데.'

쓰레기와 괴물들을 이끌고 다니는 흑기사라니.

이런 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주인공 앞을 가로막는 악당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무심하게 무르하탈의 보고를 들었다.

"새로 충원된 도적 떼가 423명. 하급 언데드가 112기입니다. 게다가 놈들이 제법 많은 재물을 숨기고 있더군요."

"지금은 놔둬라. 도시 쪽에서 눈치채기 전에 놈들을 쳐야 하니."

"알겠습니다 주인님."

고개를 조아리는 무르하탈을 향해 데일이 말했다.

"무르하탈. 앞으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력을 불릴 것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을 받아들여서, 내 병사로 써먹을 거다."

"자칫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도중에 도망가는 놈들도 많을 거고요."

"도망가는 놈들은 리자드맨을 시켜 사살하도록. 반란은... 일어나도 상관없지만, 애초에 그럴 일 없게 네가 잘해라."

"맡겨만 주십시오."

공손히 대답한 무르하탈이 데일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하도록."

"주인님께서는 저들에게 벌을 주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짐작하는 게 맞습니까?"

"그래.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지."

"하면, 달리 좋은 방법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령...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만든 뒤, 죽여서 언데드로 되살린다거나 말이죠. 그편이 그들의 죄에 대한 징벌로 더 알맞지 않겠습니까?"

무르하탈의 의문에 데일은 잠시 고민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괜히 훗날의 불안으로 남기느니, 죽여서 언데드로나 부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래봤자 도적 나부랭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놈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는 줘야지."

"기회. 말씀시이십니까?"

"누구나 실수를 하니. 속죄할 기회를 받아야 한다. 도적으로서 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우리와 함께 싸우며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고, 죄를 뉘우친다면 나중에 용서할 수도 있겠지. 물론, 용서하는 건 내가 아니라 노예처럼 부려 먹히던 사람들이겠지만."

무르하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지금까지 주인님의 사상에는 동의하지 못하나,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주인님께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들이 뉘우칠 거라고?"

"아니."

데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면. 딱히 저들이 갱생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미안한척하는 자들은, 결코 뉘우치지 않거든."

데일의 눈동자는 먼 과거를 담고 있었다.

조부를 죽인 자가 통쾌하게 웃던 그 얼굴을.

사람이 뉘우칠 수 있을까?

갱생할 수 있을까?

글쎄. 데일은 회의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기를 죽인 사람까지도 용서하란 분이 있었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여전히 데일의 지향점이자, 마음의 버팀목이다.

그가 아는 가장 고결한 사람.

평생을 걸쳐 노력해도 닿을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별 같은 존재지만, 데일은 그 별을 향해 손 뻗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흉내라도 내볼 생각이었다.

"자, 슬슬 가자. 도시로. 최소한의 병력은 이곳을 지키고, 나머지는 전부 따라와라."

데일은 언데드 래파킨을 앞세우며 중얼거렸다.

"도시를 무너트리면, 내 군대가 2배 정도는 커지겠군."

조용히 듣던 무르하탈이 안광을 호전적으로 불태우며 말했다.

"2배라니요."

"?"

"알브헤임만 무너트리면, 못해도 4배로 커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군단이라는 이름이 우습지 않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흑기사가 지옥에서 되돌아왔노라고.

공략

* * *

데일은 래파킨의 도적들과 황혼의 추종자들이 노예를 거래할 당시, 이미 리자드맨 하나를 놈들의 뒤에 붙여놓았다.

추종자들이 어느 경로로 이동해 어떻게 도시로 들어가는지 미리 파악해둔 것이다.

그 경로를 그대로 밟아 빠르게 목적지에 다다른 데일과 군단은 도시를 살폈다.

"과연 삼엄하군요. 게다가 잘 방비 되어 있어요."

"알브헤임 남작령이라고 했던가?"

"이제는 뒤에 남작령이라는 단어는 떼야하지만 말이죠."

이들이 공략하려는 알브헤임의 성벽은 높고 단단했다.

황혼의 추종자로 보이는 병사들이 쇠뇌를 들고 삼엄하게 경계를 섰고, 간혹 마법사나 기사도 보였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아득하긴 하군.'

지금껏 성벽을 수비하는 입장이었지, 공격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막상 이렇게 적으로서 마주하니 저 성벽이라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수십 년간 최전선을 뚫어내지 못한 악마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무르하탈은 도시를 살피며 주요 사항을 읖었다.

"성벽 높이는 못해도 10미터는 되겠군요. 건축 양식을 보면 드워프 제 성벽이 확실하니, 여간한 공성 병기로는 두들겨봤자 흠집도 안 날 겁니다."

"그래 보이는군."

"성벽 주위에 파인 해자 또한 깊고 넓습니다. 도시 동쪽은 호수가 가로막고 있고, 서쪽은 제법 높은 경사가 져 있어, 공략을 한다면 북쪽과 남쪽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놈들도 그걸 알고 있고 말이지?"

무르하탈은 침중한 어조로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북쪽과 남쪽에는 이미 과할 정도의 대비가 되어 있겠죠."

옆에서 같이 듣던 소마도 말을 얹었다.

"경.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면 어떨까요? 도적들이 합류했다 해도 1000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저길 치는 건 너무 무모해요. 저긴 호들갑 조금 보태면 요새나 다름 없다고요."

이번만큼은 무르하탈도 소마의 말에 동의하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데일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방비가 삼엄한 만큼, 안쪽에서 공격당 했을 때의 혼란도 클 거다. 그 점을 노리면 돼. 그리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난 저 도시를 공략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두신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3가지 작전이 있다. 그 3가지를 전부 사용할 생각이다."

데일은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대비해, 소마와 무르하탈. 그리고 카리악에게만 계획을 전달했다.

긴 시간을 들여 데일의 계획을 곱씹은 소마가 중얼거렸다.

"만약 제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정말로 성공할 수도 있겠는데요."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승산이 없지는 않군요."

"카룸."

그들은 여전히 이 성을 공략하는 게 어렵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만약 성공만 한다면...."

그의 눈이 열망으로 반짝거렸다.

"경은 단 500의 군사로 성을 무너트린 기사로 역사에 남을 거예요."

* * *

계획의 첫 단계는 래파킨을 이용해 도시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무르하탈은 심장이 뻥 뚫려버린 래파킨의 상처를 처리하고, 그에게 새 옷을 입혀놓았다.

죽어서 얼마 안 된 신선한(?) 언데드라 그런지, 겉보기에는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래파킨. 계획을 이해하고 있나?"

"무, 물론입니다."

"그러면 알브헤임의 성주에 대해서 설명해봐라."

래파킨은 고개를 조아린 뒤, 지극히 공손하게 설명했다.

"파브리스 남작은 대대로 이 도시를 다스려오던 가문의 사람입니다.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 탓에 귀족 사회에서는 소외 받던 인물이지요. 그는 황혼이 이레네를 무너트리자마자 즉시 자신의 신앙과 남작위를 버리고, 황혼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기회주의자다 이거군?"

"예. 하지만 뛰어난 기사이기도 한 데다가, 황혼께 큰 힘을 받아 이 근방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의 강자입니다."

황혼의 기사라.

데일이 생각하는 황혼이 신들이나 악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추종자를 거느린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적일 것이다.

'성기사 같은 개념으로 봐야겠지만, 나는 황혼에 대한 정보가 없어. 놈들은 게임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정보가 없는 적과의 싸움.

하지만 바라던 바다.

최근 너무 싱거운 적들만 상대하던 터라, 내면의 언데드가 굶주리고 있었다.

데일은 강한 적과 싸워 더 큰 성장을 이루길 원했다.

"그자는 원래도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덕분에 힘든 생활에 도망친 백성들이 도적이 된 경우도 많았고요. 제가 이 근방에 터를 잡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군."

"다만. 다른 악덕 영주와 달리, 여자들을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꽤 의외였다.

으레 악덕 영주란 것들은 하나같이 여자를 밝히는데....

"그래도 일말의 기사도가 있나 보군."

"아닙니다. 그는 남색가입니다."

"...."

어쨌든 계획의 첫 단계는 도시로 잠입해 그 파브리스를 암살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중간에 들어가다 들키기라도 하면, 데일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로 혼자 뚫고 살아 돌아와야 한다.

"중요한 건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것인데. 솔직히 걱정이 되는군요. 파브리스가 이 얼간이를 직접 만나주겠습니까?"

무르하탈은 래파킨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모욕적인 행동이었지만 래파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데드는 위계질서가 강한 법이니.

래파킨은 그저 공손히 말했다.

"제가 그간 노예를 공급해, 간부 진급이 머지않은 상태였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독대를 청하면, 파브리스도 내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그렇게 말한 건 소마였다.

"그. 잠입하는 건 좋아요. 좋은데... 이 모습으로 잠입이 가능할까요?"

소마는 데일을 가리켰다.

"아."

모두 무심코 수긍하고 말았다.

흉험한 외양과 싸늘한 기세만으로도 데일은 평범한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분명 십중팔구 눈에 띄고 말 터.

"일단 갑옷을 벗어야 하지 않을까요?"

"갑옷은 내가 벗고 싶다고 벗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러면 하다못해 투구만이라도 벗죠. 예?"

데일은 마지못해 투구를 벗었다.

잿빛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그 얼굴을 본 소마와 리마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

"왜 그러지?"

"그냥 앞으로 투구 벗고 다니면 안 돼요? 그편이 그림이 더 사는데."

"안 쓰면 오히려 불편하다."

데일은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검과 유물 망토도 풀어서 옆으로 치웠다.

이 특별한 무구들은 과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대신 무르하탈은 평범한 검 하나와 허름하고 조잡한 망토를 주었다.

망토로 갑옷을 가리자,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체격 좋고, 잘생긴 젊은 기사처럼 보인다 해야 할까?

"경한테서 뿜어지는 싸늘한 기세나 넘실거리는 그림자는 어떻게 안 되나요?"

"최대한 자제해보겠다."

"아예 망토뿐만 아니라 로브나 후드도 겹겹이 입죠."

그렇게 옷을 여러 벌 껴입으니 그럭저럭 태가 살았다.

여전히 수상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라 해야 할까.

"자. 그럼 어서 가시죠!"

씩씩하게 말하는 소마를 향해 데일이 물었다.

"정말 너도 같이 갈 거냐? 위험할 텐데."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하느니, 그냥 죽는 게 나아요."

"으음. 그렇다면야."

데일과 언데드 래파킨. 그리고 소마는 숲을 나서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르하탈과 나머지 인원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무사하시길."

데일은 지시를 내렸다.

"신호할 테니, 제시간에 계획이 실행되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미리 횃불을 준비해놓고."

"횃불. 알겠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곧바로 도망쳐라. 믿고 있겠다. 무르하탈."

"맡겨 주십시오."

셋은 성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여유를 가장했다.

데일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여름, 한낮의 따가운 태양.

'가장 환한 시간.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사람들이 가장 나른해지는 시간.'

지역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이 정도 더위라면 지금쯤 사람들은 낮잠을 자거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다.

마음이 풀리고, 만사가 다 귀찮은 시간대라는 뜻이다.

래파킨이 성벽을 향해 다가가자 지키고 선 병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아 죽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평범한 여행자는 없다. 귀찮다고 대충 검사했다가는 경을 치는 법.

병사는 이쪽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창을 부여잡고 다가왔다.

"어이. 멈춰. 신원을 밝혀라."

데일은 래파킨의 등을 쿡 찔렀다.

래파킨이 입을 열었다.

"나는 래파킨이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래파킨? 음... 아! 정말 래파킨 님이십니까?"

"정말 병신 같은 질문이군. 그럼 내가 래파킨이지 뭐야."

도적답게 사나운 말투에 병사는 바짝 얼어붙었다.

그는 래파킨의 얼굴을 슬쩍 살피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기억 속 래파킨과 맞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는 무슨 일로? 그것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부하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직접...."

타당한 의견에 래파킨은 미리 준비해놓은 답변을 내뱉었다. 아니, 내뱉도록 명령받았다.

"일이 생겼다. 당장 파브리스 님에게 직접 전해야 하는 시급한 사안이다."

"시급한 사안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지...."

병사는 섣불리 보내줄 기미가 아니었다.

이대로 억지를 부려봤자 의심만 살 뿐.

여기서는 적절한 거짓말이 필요하다.

"떡갈나무숲 남쪽에 있는 마을을 알고 있나? 우리 동지들이 관리하는 곳인데. 최근 그곳에서 연락이 끊겼지."

"아. 저도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조사대를 보낸 참이었는데... 설마?"

데일은 래파킨의 영혼을 조종해, 더 입을 열지 않고 머리만 끄덕이게 했다.

병사는 침묵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급히 파브리스를 만나야 할 이유를 알아서 상상해낼 것이다.

"그런 일이라면 확실히...."

"서둘러야 한다. 생각보다 급한 사안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어서 문제가 생긴다면, 네 놈도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병사의 얼굴이 하얘졌다.

"아, 알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책임지는 것이다.

병사는 서둘러 래파킨을 도시로 안내했다.

뒤에 따라오는 데일과 소마에게는 신경도 안 썼다.

그저 래파킨의 부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무시해버렸다.

병사는 셋을 이끌고 도시 한가운데에 난 대로를 쭉 가로질렀다.

도시는 래파킨의 도적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한 경계를 자랑했는데, 대로에는 10분 간격으로 순찰조가 지나다녔고, 파브리스가 사는 영주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관문을 거쳐야 했다.

'주민이나 노예는 보이지 않는군. 다른 구역에서 일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구역을 나눠 놨을지도.

곳곳에 황혼의 석상이 서 있어, 마치 주위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 또한 도시의 꺼림칙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어쨌든. 데일은 도시의 구조를 머릿속에 담으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되도록 시선은 위로 들지 않으려 했다.

확률은 낮지만 데일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쳐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두어 개의 관문을 넘었다.

각 관문에 도달할 때마다 관문의 책임자는 앞선 병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직접 다음 관문으로 안내해주었다.

'더럽게 삼엄하군. 파브리스라는 놈. 어지간히도 신중하고 겁이 많은 놈이야.'

아마 귀족 시절부터 생긴 버릇이었을 것이다.

인망도 없고. 귀족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그는 암살이나 배신 같은 문제에 언제나 시달려왔을 테니.

하지만 그런 삼엄한 경계도 래파킨과 함께라면 별문제 없었다.

데일은 새삼 래파킨이 황혼의 추종자들에게 제법 신뢰를 사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그저 도적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간부 자리가 예정되어 있다는 건, 허풍이 아니었나.'

그렇게 모든 관문을 지나고.

도시 중심에 자리한 영주관 앞까지 다다랐다.

거의 작은 성이나 다름없는 영주관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가 마지막으로 셋을 막아섰다.

"오랜만이다. 래파킨."

"오랜만입니다."

"성주님을 찾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래파킨은 지금껏 써먹은 핑계를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 사이. 데일은 힐끔 기사를 살폈다.

'예사롭지 않은 놈인데.'

황혼을 섬기는 기사일까?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단정할 수 없지만, 황실 기사단원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

'저런 게 한두 명이 아니라면, 꽤 위험하긴 하겠군. 장소도 나쁘고.'

데일은 주위를 슬쩍 살폈다.

이곳, 영주관은 위기 시에 농성할 수 있도록, 쇠뇌나 발리스타 따위의 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마법사와 병사들 또한 눈을 형형히 빛내며 주위를 경계했다.

만약 여기서 싸우게 된다면 저 기사뿐만 아니라 영주관에서의 집중 공격도 감내해야 한다.

데일이 싸우기에는 최악의 전장인 셈이다.

'일단 어떻게든 영주관 안으로 들어가야 해.'

데일이 생각을 정리하는 그사이.

래파킨의 설명을 모두 들은 기사는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쪽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 그 원흉을 자네가 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성주님께 곧바로 말해드려야 하는 문제라, 들여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누군지 나한테 말 못 할 정도인가?"

"그게. 예. 괜히 정보가 새나가면 혼란이 일 수도 있어...."

"흐음."

기사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래파킨을 쳐다보았다. 먹이를 살피는 뱀의 눈.

기사가 대뜸 물었다.

"래파킨. 자네. 요즘 건강이 안 좋나?"

"무슨 말씀이신지."

"전에는 내가 이렇게 쳐다보면 심장이 벌컥벌컥 뛰었지 않나. 겁을 집어먹어서 말이야. 그 사이 건강이 좀 안 좋아져 심장이 약해진 건가, 아니면 자네가 용감해진 건가?"

그야 심장이 꿰뚫렸으니, 박동이 안 들릴 수밖에.

돌발 상황에 일행 모두 굳어버렸다.

언데드 래파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만 또르르 굴렸다.

"...."

"...."

잠깐의 침묵 속에서 기사의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더욱 진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다른 병사들도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틀린 건가?'

데일은 검을 향해 슬쩍 손을 가져갔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려 했다.

파브리스를 암살하는 건커녕, 여기서 살아 돌아가는 것부터 걱정해야 한다.

데일은 기사와의 거리를 재며 언제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검을 뽑는 순간부터는 멈출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데일은 기사를 보며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수십 번을 갈등하고, 타이밍을 가늠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

한참을 쳐다보던 기사는 돌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래. 이제 간부가 될 텐데, 매번 겁을 집어먹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황혼을 섬기는 같은 동지끼리 말이야."

"...그렇습니다."

"들어가게. 성주께는 집사가 안내해줄 거야."

"감사합니다."

소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데일은 검에서 손을 뗐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잠깐."

기사가 앞서가던 래파킨을 잡아세웠다. 그리고 데일과 소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성주님과 만나는 건 어디까지나 래파킨 자네 혼자다. 나머지는 여기 두고 가."

일행은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공략

* * *

"성주님과 만나는 건 어디까지나 래파킨 자네 혼자다. 나머지는 여기 두고 가."

기사가 그리 말했다.

래파킨이 우뚝 멈춰섰다.

데일은 검에 다시 손을 가져가 댔다.

'들킨 건가?'

어떻게든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억누르려 했지만, 저 기사에게 이쪽이 수상쩍다는 걸 들키고 만 것일까.

'싸울 수밖에 없나.'

여기서 래파킨을 혼자 들여보내 봤자다. 저 언데드는 혼자 파브리스를 암살할 수 없다.

아니. 그 전에 언데드라는 사실이 들키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일행이 굳어버리자 기사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못 들었나? 둘은 여기 놔두고, 들어가도록."

래파킨이 데일과 소마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

하급 언데드가 되어 지능이 떨어져버린 래파킨에게 적절한 대응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일단 뭐라도 말해야 해. 침묵이 길어지면서 저놈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데일은 일단 래파킨의 영혼을 지배해, 궁색한 말이라도 내뱉게 했다.

"죄송하지만, 이 둘은 반드시 파브리스 님에게 만나게 해야 합니다."

"호오. 반드시라.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래, 래파킨. 말해보게. 저 땅딸막한 노움과 곱상한 남자는 누구이고, 왜 파브리스 님께 보여드려야 한다는 거지? 만약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면, 얘기를 좀 나눠봐야겠는데."

기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틀렸다. 이제 기사는 이쪽을 완전히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사가 신호하자 영주관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도 이쪽을 경계했다.

발리스타나 쇠뇌 따위를 이쪽에 겨누었다.

'좀 편하게 들어가나 싶었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데일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언제라도 뛰어들 준비를 했다.

첫 일격에 기사의 목을 베면 아직 상황이 나쁘지 않다.

문제는 저 기사의 실력이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과연 데일의 바람대로 일격에 죽일 수 있을까?

그렇게 데일이 갈등에 빠져 있던 그때. 소마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경. 이번에는 제가 해결해보겠습니다."

"...마법을 이용해서 정신을 홀릴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어중이떠중이면 몰라도, 기사들은 마력의 흐름에 민감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제 직업이 뭡니까?"

"음유시인?"

"그래요. 음유시인은 있었던 일 없었던 일 다 그러모아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직업이죠. 즉. 거짓말쟁이라는 겁니다."

"...?"

"지켜보시죠."

그리 말한 소마가 총총 앞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게 노움이 다가오자, 병사들이 재빨리 쇠뇌를 겨눴다.

하지만 기사는 손을 휘저었다.

"됐어. 기껏해야 노움인데. 이 땅딸보가 검을 휘두르면 내 목까지도 안 온다고."

기사의 농담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정작 모욕을 당한 소마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기사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흐음?"

"신사분들. 다 웃으셨다면, 이제 제 소개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원하는 대로 해봐."

소마가 배꼽에 양손을 그러모으더니, 눈을 감고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럼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전 대륙을 돌아다니는 방랑자. 이 세상 모든 이야기를 모으는 수집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가수이자, 사라져버린 낭만을 노래하는 예술가. 그리고 떡갈나무 숲의 선술집 주인. 저를 설명하는 호칭은 많으나 그 이름은 하나일지니. 휘! 휘! 소마! 아랄의 아들, 소마가 제 이름 되겠습니다!"

길고 요란한 설명에 기사가 벙찐 얼굴을 했다.

"어, 음. 뭐라고?"

"떡갈나무 숲의 정보상. 이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 편하려나요?"

그제야 기사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아. 떡갈나무 숲의 마법사... 설마 노움일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이렇게 젊은."

"하하. 저희 노움들은 전부 동안이죠. 이래 봬도 제가 기사님보다 나이가 많을 겁니다."

기사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음. 그렇군. 그래서? 네가 왜 여기 있지?"

"아아. 그 이야기를 설명하려면 참으로 구구절절하고, 가슴 아프고, 길고 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하룻밤을 다 써도 모자랄 지경이지요."

"그러면 짧게 설명...."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한 기세를 풍기는 기사님이라면, 제 목을 혹사할 가치가 있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기사가 말릴 틈도 없이. 소마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 이 이야기의 처음은, 제 부끄러운 과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아직 위대하신 황혼을 의심하고, 숲에 틀어박혔던 시절이었죠!"

소마는 능숙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며, 격앙에 차 소리를 질렀다.

조명도. 술도. 심지어 마법도 없었지만, 소마는 이곳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병사들은 어느새 홀린 듯이 소마의 노래를 들었다. 기사도 길고 긴 노래를 끊지 못해 마지못해 팔짱을 꼈다.

이게 소마의 특기였다.

노래를 쓸데없이 잘하는 데다가 이야기가 흥미로우니, 중간에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길고 긴 노래는 계속해 이어졌다.

그의 말마따나 구구절절한 이야기였지만, 한 줄로 요약하면 이랬다.

'처음에는 황혼을 안 믿었는데, 이제는 황혼을 따르고 싶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는군.'

"휘휘! 그렇게 제 보잘것없는 이야기는 끝이 난 것입니다!"

노래를 끝마친 소마가 고개를 푹 숙이자, 병사들이 하나둘 손뼉을 치다, 이내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냈다.

짝짝짝!!

"멋진 이야기잖아...."

"흑. 조금 울었어."

"대단한 공연이었어."

그야말로 열렬한 반응.

자기도 모르게 얼결에 손뼉을 치던 기사도 멋쩍게 헛기침했다.

"험험. 그래. 알겠다. 제법 재주가 있으니, 황혼께 도움이 되겠지."

"이 이야기를 파브리스 님에게 직접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황혼 님을 섬기는 기사들 중, 으뜸은 파브리스 님 아닙니까."

"그래. 뭐. 알겠다."

기사는 소마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이 쪼그마한 노움이 파브리스에게 위험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데일에 대한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뒷놈은. 저놈도 뭔가 있나?"

"제 하인입니다. 원래는 알버트 경이라 불리었죠. 카엘름에서 태어난 비운의 기사! 이 자의 이야기를 하려면 먼 과거로 돌아가야...."

"그만! 노래는 됐어.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만 설명해. 고작 래파킨의 호위로 온 건 아닐 거 아닌가."

기사는 거짓말을 줄줄 읊으려던 소마를 가로막았지만, 소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 알버트는 제가 파브리스 님께 바치는, 일종의 선물이라고 해두죠."

"뭐? 똑바로 말해."

"정말 이 자리에서 말해도 될까요? 그. 듣는 귀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소마가 손을 비벼대며 뜸을 들이자, 기사는 짜증을 냈다.

"헛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말하도록."

"그렇다면... 파브리스 님께서 요즘 밤에 적적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이상 설명 안 해도 되겠죠?"

"아."

그제야 기사는 파브리스의 공공연한 비밀을 떠올렸다.

파브리스는 남색가다.

그리고 눈앞의 데일은 상당한 미남이었다.

'쯧. 재수 없게 얼굴만 잘생겼군. 어딘가 시체같이 차갑고 음침한 놈이긴 한데... 파브리스의 취향에 꼭 맞는 놈이잖아.'

이 건방진 노움이 파브리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인을 데려온 거라면, 그야말로 탁월한 안목이었다.

아마 파브리스는 이 선물에 크게 흡족해하며 소마에게 포상을 내릴지도 몰랐다.

"흐음."

기사는 데일을 유심히 살폈다.

여전히 무언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여기서 만약 막아섰다가, 파브리스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가는 일이 골치 아파진다.

'괜히 나한테 지랄할 것 같군.'

파브리스의 취향인 남자 하인을 바친다는 데, 그걸 저지했다가는 뒷감당이 힘들다.

결국. 기사는 진입을 허락했다.

"좋아. 대신 무기는 내려놓고 가도록."

멍청히 구경만 하던 래파킨이 얼른 몸을 털었고, 데일도 무르하탈에게 받은 검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소마는 무기랄 것도 없었고.

"들어가. 성주님은 성격이... 다소 다혈질이니. 예의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병사들이 쇠뇌를 거두고 길을 비켜주었다.

그제야 일행은 저택이라기보다는 작은 성에 가까운 영주관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데일은 조용히 소마의 공을 치하했다.

"잘했다. 재주가 대단하군. 그냥 마법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밖에 못 하는 줄 알았더니."

"하하. 제 본업은 음유시인이라고요. 마법은 어디까지나 곁가지고요."

소마는 가슴을 펴고 우쭐거리다,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는 좁고 길었으며, 그 흔한 예술품이나 그림 한 점 없었다.

게다가 복도가 꺾이는 모통이에는 어김없이 병사가 쇠뇌와 검으로 무장한 채 서 있었다.

'오로지 방어를 위해 지어진 건물 같군.'

살풍경하지만, 방어에는 지극히 효율적이기도 하다.

저택 주인의 취향이 듬뿍 담겨 있다.

일행은 그렇게 영주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파브리스가 있는 집무실에 당도했다.

일행을 안내해온 집사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래파킨 님께서 주인님을 뵈러 왔습니다."

"래파킨? 그 도둑놈이 여길 왔다고?"

목소리에는 의아함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지만, 파브리스는 순순히 입장을 허락했다.

래파킨 따위가 일을 꾸며봤자 자기한테 손끝도 못 댈 거라 생각한 눈치였다.

문이 열리고.

집무실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파브리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상과 달리 파브리스는 깔끔한 사내였다.

근육도 멋들어지게 붙어 있고 외모도 신사다웠다.

하지만 눈동자에 깃든 잔인함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래파킨.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올 정도니, 뭔가 이유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던 래파킨이 말을 멈췄다.

그 시선이 데일에게서 멈췄다.

"너는...?"

소마가 얼른 답했다.

"헤헤. 존경스러운 파브리스 님에게 바치기 위한 선물입죠."

"이 땅딸보는 또 뭐야. 아니, 그보다 선물이라고?"

파브리스는 자리를 박차 그대로 데일에게 다가와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마음에 드는군. 이름은?"

"데일."

"데일. 이름도 마음에 드네. 우리, 그럼 일단 차라도 한잔하며 대화나 나눠볼까?"

생각보다 신사적으로 나오는 파브리스에게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지."

"그럼 하녀를 시켜서...."

다음 순간.

데일이 파브리스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어떤 준비 동작도 없었기에, 파브리스는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스릉.

순식간에 파브리스의 검이 뽑혀 나와 데일의 손에 붙들렸다.

"이 새끼가...!"

파브리스는 곧장 고함을 질러 도움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데일이 한발 빨랐다.

사아아아!

데일의 몸에서 어둠이 흘러내리더니, 그대로 파브리스와 데일을 감쌌다.

새벽 안개.

소리도. 빛도 모두 차단된 어둠 속 파브리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짜증 나는 공간이군.'

싸한 냉기와 이따금 귓가를 울리는 비명이나 고함 같은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공간.

오래 있으면 필시 정신이 붕괴되어 버릴 것 같은 곳이다.

'이건 분명... 밤의 신도들이나 사용할 기술인데. 그러면 이놈은 흑기사인가? 멍청한 새끼들이 흑기사를 이곳으로 들여보내고 있어.'

아둔한 부하들을 욕하며 파브리스는 자세를 잡았다.

시야는 안 보이지만, 다른 감각으로 보완하면 될 뿐이다.

데일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파브리스는 기다리지 않고 곧장 뛰어들었다.

"검이 없으면 이길 줄 알았나!"

파브리스의 양손에 주황색 기운이 응축되었다. 파괴적인 빛을 뿜어내는 기운이 주위 어둠을 걷어내자 데일의 모습이 보였다.

데일은 파브리스를 향해 곧장 검을 찔러넣었다. 단칼에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파브리스는 양손을 검을 향해 뻗었다.

원래라면 그대로 손을 베어야 할 일격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챙캉!

동강 나는 건 손이 아니라 검이었다.

주황색 빛무리에 닿자, 쇠가 그대로 깨져나간 것이다.

'저건 처음 보는 기술인데.'

데일은 빠르게 상대를 살폈다.

파브리스의 전신에서 흉험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다.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강화하는 건 기사의 그것과 비슷하나, 저 주황색 빛무리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기본은 마력을 이용하는 게 맞아. 하지만 기사처럼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것에 더불어, 마력을 직접적인 공격에 사용하고 있어. 마치 마법사처럼.'

저게 바로 황혼의 힘일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데일을 향해 파브리스가 달려들었다.

"이제 서로 맨몸이구나!"

데일은 혀를 쯧, 찼다.

좀 더 상대에 대해 분석하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데일은 상대의 주먹을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쩡!

양 주먹이 부딪히자, 파브리스의 손에 휘감긴 주황색 빛무리가 크게 일렁였다.

파브리스가 반동으로 뒤로 밀려나고. 뒷걸음질 친 데일도 자기 주먹을 살폈다.

건틀릿 끝부분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까다롭군.'

갑옷의 방어력도 저 빛무리에는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데일의 장점 중 하나가 사라지는 셈.

기가 산 파브리스가 이죽거렸다.

"어찌어찌 기습해보면 날 이길 줄 알았던 건가? 그렇다면 실망인데. 이 파브리스가 그렇게 얕보였을 줄이야."

"그 주황색. 황혼이 내려준 힘인가?"

"흐흐. 그래. 구경만 하는 여신들과 다르게, 황혼께서는 정직하게 힘을 내려주시거든. 너무 걱정마. 네 목숨은 살려줄게. 그냥 죽이기에는 얼굴이 아까우니까. 하지만... 팔다리 한두 개정도는 뽑혀줘야겠지!"

파브리스가 뛰어들었다.

눈동자에는 그 특유의 가학성이 넘실거렸다.

힘껏 앞으로 양손을 뻗은 파브리스는 그대로 데일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대로 팔을 꺾어서 뽑아버릴 속셈이었다.

하지만 팔을 잡힌 데일은 덤덤했다.

"나도 널 죽일 생각은 없다. 황혼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은 것 같으니까."

"뭐?"

파브리스는 순간 멍하니 데일을 쳐다보았다. 팔을 뽑으려는데 왜이리 태연하단 말인가.

이는 파브리스가 흑기사와 싸워보지 않았다는 증거다.

데일은 남은 왼손으로 파브리스의 옆구리를 쥐었다.

뿌드득.

날카로운 건틀릿이 피부를 파고 들어갔다. 아무리 단련된 신체라도, 데일의 악력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한번 상처가 나자, 건틀릿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생기와 잔혼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무, 무슨!"

"혹시나 죽지 않게 잘 발버둥쳐봐라."

산채로 적의 생기와 영혼을 뜯어내기 시작하자, 파브리스도 저항했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의 대결.

하지만 데일은 악마들과도 영혼의 싸움을 해본 사내다.

그런 데일이 보기에 파브리스의 정신력은....

기대 이하였다.

"크아아악!"

끔찍한 고통에 파브리스가 무너져내렸다.

데일은 파브리스가 바닥에 주저 앉자, 곧장 생기 흡수를 그만두었다.

파브리스의 머리를 후려친 뒤, 그대로 팔을 꺾어주었다.

우드득.

"끄읍!"

데일은 파브리스의 입을 막았다. 새벽 안개가 해제되려 하고 있었다.

소음이 바깥으로 퍼지면 곤란했다.

어둠이 흩어지고.

다시 데일의 모습이 드러나자, 소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음. 벌써 끝난 건가요? 이렇게 단기간에?"

그야 파브리스도 빨랐고, 데일도 빨랐으니. 결착도 빨리 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소마의 의문에 친절히 답해줄 수 없었다.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

"왜,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영혼을 거둔다는 건 곧 그 사람의 일부를 속에 받아들인다는 것. 기억을 보는 능력도 그런 현상의 일환이다.

시체에서 찌꺼기나 다름없는 잔혼을 거두는 것도 데일의 정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

악마 같은 흉악한 존재의 시체를 흡수할 때는 언제나 자제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잔혼도 그런데, 하물며 직접 상대의 영혼을 뜯어내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는가?

뜯겨나온 파브리스의 영혼 일부가 데일의 머릿속에서 울부짖는 느낌에, 데일은 잠시 정신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꼈다.

'역시. 자주 할 짓은 못 되는군.'

상대의 영혼을 직접 뜯어내는 이 기술은 분명 강력하다.

선배였던 케인이 선보인 이후로 요긴하게 써먹곤 했지만 남발했다가는 분명 좋지 않은 결과에 이를 것이다.

케인처럼.

다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 파브리스를 빠르게 제압한 데에 만족해야 한다.

데일은 생기가 빨려 홀쭉해진 파브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경고의 의미로 차갑게 내뱉었다.

"섣불리 소리를 안 지르는 게 좋을 거다. 소리 지를 여력도 없겠지만."

"하."

파브리스는 웃었다.

데일에게 패배했지만, 표정에는 패배자의 좌절이 없었다.

"그래. 내가 졌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순간 이미 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내가 죽었다는 걸 알면, 내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와 너를 죽일테니. 너 혼자서 그들 전부를 죽이고 알브헤임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라. 네 병사들은 내 언데드들이 쓸어버릴 테니까."

"푸흡. 이 환한 대낮에? 그것도 이 성벽을 넘어? 멍청한 소리!"

데일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의 한낮은 눈부시게 화창하다.

어둠의 자식들이 활동할만한 시간은 아니다.

"그래. 날이 좀 밝긴 하군."

데일은 목에 건 목걸이를 꺼냈다.

초승달 모양 목걸이는 한낮의 태양 빛 아래에서도 자기 존재감을 은은하게 뿜어냈다.

파브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그 역시 저 목걸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뭐, 뭐야 그건."

데일은 짧게 답했다.

"밤."

그러고는 목걸이를 가볍게 쥐었다. 목걸이에서 한순간 빛이 발했다가, 이내 빛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빛이 사라져버린 건 목걸이뿐만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그 눈부신 원이 차츰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무, 무슨."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기 시작한다.

뜨거운 햇빛에 달궈지던 지상에도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섰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칠흑 같은 밤.

미리 촛불이나 횃불을 켜두지도 않았기에 세상은 더욱 어둡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건, 푸른색으로 타오르는 흑기사의 안광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파브리스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벌일 생각이냐!"

우우우우웅!

파브리스의 질문에 대답하듯.

영혼 깊은 곳까지 섬뜩하게 만드는 뿔피리 소리가 온 도시를 울렸다.

저 멀리서 무르하탈이 진격을 알리는 신호다.

"시작되었군."

도시를 무너트릴 시간이다.

공략

* * *

우우우우웅!

뼛속까지 소름 끼치게 만드는 뿔피리 소리가 도시를 울렸다.

뜨거운 여름 한낮. 늘어지게 낮잠과 휴식을 즐기던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왔다.

"뭐, 뭐야."

그들은 당황했다.

어둡다.

방금 전까지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그림자 뒤로 자취를 감췄다.

내가 너무 오래 자버린 걸까?

꿈을 꾸는 중인가?

아니면 돌아버린 건가?

그들이 믿고 있던 신들의 황혼이 벌써 찾아왔단 말인가!

그런 병사들의 귀에 다시 한번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경고를 알리는 요란한 종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도.

"적이다! 적이야! 적이 오고 있다고!"

"모두 성벽으로 올라가! 정해진 자리에 서라!"

갑작스럽게 적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대체 이 알브헤임을 공격할만한 적이 어딨다고.

땡땡땡!

멍하니 있던 병사들은 계속해 울리는 종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위가 어두워 발이 엉키고, 넘어진 병사들이 바닥을 구르며, 촛불과 횃불을 찾기 위해 요란을 떨어댔다.

그야말로 대혼란.

단지 태양이 그 모습을 잠시 감춘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태양과 빛은 그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다.

"여기 횃불! 횃불 찾았어!"

"자, 잘했어! 나도 불 좀 나눠줘!"

병사 하나가 기어코 횃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환한 빛이 어둠을 살랐다.

병사들은 앞다투어 달려와 빛을 나눠 받았다.

횃불이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고. 어둠이 사라져간다.

다시 안정을 되찾은 병사들은 서둘러 성벽으로 향했다.

"어디서 공격이 오는 건데?"

"몰라. 북쪽이나 남쪽이나 둘 중 하나겠지. 둘로 나뉘어서 가자!"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병사들은 북쪽과 남쪽 성벽으로 올라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사위에서 그들은 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다! 역시 남쪽으로 오고 있었어!"

남쪽 평원에 횃불이 수천 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쪽을 유심히 살폈다.

대체 어떤 간 큰 놈이 도시를 공격해온단 말인가?

하지만 사위가 어둡고 거리가 먼데다가, 적들의 횃불이 그리 밝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난히 밤눈이 밝은 병사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횃불 숫자에 비해 사람 숫자가 조금 적은... 아니. 조금 적은 게 아닌데?"

병사는 당황해 외쳤다.

"횃불만 수천 개고, 정작 움직이는 사람은 몇백 명 안 돼!"

"뭐? 뭔소리야 그게. 왜 그 짓을 하는 건데."

"어 글쎄."

조용히 듣고 있던 지휘관은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 끌기! 진짜 본대는 북쪽에서 오고 있을 거다! 당장 북쪽에 소식을 알려라!"

하지만 황급히 북쪽 성벽으로 향했던 병사는 되돌아와 고개를 저었다.

"아니랍니다. 북쪽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답니다."

"뭐야. 그럼 어디라는 거야."

모두가 의문에 빠진 그때.

한 병사가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큰일! 큰일입니다!"

"뭐냐! 무슨 일이냐!"

"동쪽 성벽이 점령당했답니다!"

"뭔 개소리야! 거기는 호수를 끼고 있잖아! 호수에 군함을 띄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쪽으로 공격을 온다는 건데!"

"그게 공격을 온 게... 언데드와 리자드맨이랍니다."

"아."

그 시각 동쪽 성벽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날뛰는 언데드 군세가 성벽 위를 점거했고, 저항하던 병사들은 또다시 언데드가 되어 아군이 되었다.

무르하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자에 가려진 태양.

'아름답구나.'

무르하탈도 밤의 신자다.

언데드인 그는 늘 태양을 가증스럽게 여겼고, 한낮에 태양을 추방해버린 이 광경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이 일을 해낸 데일에게도.

'실로 대단한 분이로다.'

우선 성물로 태양을 가려 밤을 불러온다.

그다음. 래파킨의 도적들을 남쪽에 횃불을 들고 있게 시켜 상대의 주의를 그쪽에 쏠리게 한다.

그러면 자연히 성 동쪽에는 방비가 약해진다.

당연한 일이다.

태양이 그림자에 삼켜지고, 남쪽에는 적군으로 추정되는 병사가 나타났는데, 누가 호수를 낀 동쪽에 신경을 쓰겠는가.

게다가 시야가 어둡고, 횃불도 제대로 준비되지 못해 도시 반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확인하기 힘들다.

데일이 찌른 건 그 심리적 빈틈이다.

언데드는 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호수가 깊어도, 호수 바닥을 걸어서 건너면 그만이다.

리자드맨?

늪에서 살아온 그들은 수영의 달인이다.

그렇게 호수를 건넌 병력들은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고, 방비도 약한 동쪽 성벽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무르하탈은 명령을 내렸다.

"일부 병력은 도시로 흩어져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마주치는 모든 살아있는 병사를 뜯어먹어라. 노예로 보이는 놈들은 밧줄을 끊어주고, 최대한 도시에 혼란을 흩뿌려 놈들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명령을 받은 언데드가 즉시 흩어졌다.

저들은 대부분 각개격파 당해 소멸당할 터지만, 주저하는 놈은 없었다.

그게 언데드의 무서움이다.

뿌우우우!

옆에서 무르하탈이 건네준 뿔피리를 부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리마가 물었다.

"...저, 저희는요?"

"이대로 있다가는 병력들이 성문을 되찾으러 오겠지. 우리는 영주관으로 간다."

데일이 영주관에서 파브리스를 제압하면 성물을 이용해 태양을 가리고, 즉각 도시로 침입한 무르하탈이 영주관을 향해 진격해 데일과 합류.

그 후.

영주관을 점거하고 그 방어 시설을 역으로 이용해 싸움에 임하는 게 계획의 골자다.

처음 이 계획을 들었을 때, 무르하탈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성주 파브리스를 제압한 뒤 오히려 영주관을 사용하겠다고? 빈집털이? 제정신인가?

하지만 데일은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사위에 내려앉은 어둠이 그 증거다.

'게다가 아직 정예병력이 안 보여. 주인님께서 잡아두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무르하탈이 해야 할 일은 하나.

계획대로 마주하는 적을 모두 분쇄하며 영주관으로 가는 것.

"시체들아. 나를 따라라."

호수를 건너오느라 축축하게 젖은 언데드들이, 찰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영주관을 향했다.

* * *

영주관을 지키던 정예 병력들은 파브리스에게 벌어진 일을 알아챘다.

아니. 알아챘다기보다는, 데일이 직접 알려주었다.

쿵!

아래층 창가로 뛰어내린 데일은 쇠뇌를 들고 있는 병사의 머리를 후려친 뒤.

아래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곳을 봐라!!"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혼란스러워하던 기사와 정예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그들은 발견했다.

창가에 서 있는 흑기사와 그 흑기사의 팔에 붙들린 그들의 주군을.

파브리스는 생기가 빨려 반쯤 죽어 가고 있었다.

"네놈의 주인을 되찾고 싶다면, 어디 한번 해봐라!"

데일의 도발에 병사들이 이를 갈았다.

마법사들은 데일을 녹여버리기 위해 일제히 주문 구결을 외웠다.

그걸 말린 건 이곳의 총책임자인 기사였다.

"그만! 마법을 거둬!"

"하, 하지만."

"파브리스 경까지 함께 죽여버릴 일 있어?"

"아...."

기사는 이를 으득 갈았다. 속았다는 생각에 속에서 불길이 끓어올랐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놈은 교활한 놈이다.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파브리스 경을 인질로 잡고 있다. 마법이 아니라, 직접 들어가서 제압해야 해."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영주관은 과할 정도로 방어에 치중한 건물이다.

수비할 때는 참으로 든든했지만, 이제는 도리어 공격해야 하는 상황.

병사들이 머뭇거리고 기사도 신음을 흘리던 그때였다.

쐐액!

"억!"

빠르게 날아온 볼트 하나가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이어서 들려오는 환호성.

"야호! 명중이다! 나 좀 재능이 있는데? 음유시인 말고 용병이나 할 걸 그랬나?"

키 작은 노움이 창가에 서서 이쪽에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이야. 여기서 보니 전부 쬐끄마하네... 이제 누가 땅딸보지?"

"너!"

기사가 분노를 터트리자, 곧장 볼트가 하나 더 날아왔다.

캉!

칼을 휘둘러 볼트를 쳐낸 기사가 외쳤다.

"안으로 진입해! 몇 명이 희생하든 안으로 뚫고 들어간다!"

"예!"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영주관 안으로 진입했다.

길고 좁은 복도.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이내 함성을 지르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막 모퉁이를 돈 순간.

데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

쿵!

데일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투구와 건틀릿이 부딪히며, 묵직한 소음을 냈다.

투구는 제 역할을 다했다. 어떻게든 일격에 버텨냈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무사하지 못했다.

병사는 코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뒤이어 달려온 병사들은 그 광경을 보았다.

"으, 으아아아!"

"죽어!"

겁에 질린 병사 둘이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데일은 양팔을 뻗어 두 병사의 머리를 동시에 붙잡은 뒤, 그대로 팔을 오므렸다.

콰직! 하고 머리끼리 부딪힌 병사들은 사이좋게 의식을 잃었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기사는 눈을 부릅떴다.

'강하다!'

황혼의 힘을 일부 내려받은 정예병들을 마치 허수아비처럼 두들기고 있다.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마법사! 길을 열어라!"

"네!"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주문을 외어 얼음 결정을 만들어냈다.

냉기의 폭풍이 복도를 타고 휘몰아쳤다. 데일은 재빨리 모퉁이 뒤로 후퇴했다.

"좋아. 길이 열렸다. 바로 다음 들어간다."

"...."

"빨리!"

"예!"

병사들은 저 앞에 기다리고 있는 도살자가 무서웠지만, 뒤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기사가 더 무서웠다.

병사들은 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복도를 달렸고,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를 도니 다음 복도의 건너편에 데일이 서 있었다.

거대한 쇠뇌를 들고.

"...발리스타?"

발리스타.

거대한 쇠뇌로, 투석기처럼 그 무게나 반동 때문에 지상에 단단히 고정해서 사용하는 대형 병기였다.

한데. 그런 물건을 왜 저 자가 들고 서 있단 말인가?

'저걸 어디서. 아니. 그것보다 직접 들고 사용한다고? 제정신인가?'

그런 병사의 의문을 안다는 듯. 데일은 친절히 말해주었다.

"옥상에 있는 걸 떼왔다."

"그게 무슨 개...."

투웅!

거대한 쇠볼트가 발사되었다. 병사들은 기겁했지만 일직선 복도에서는 피할 곳조차 없다.

푸우욱!

나란히 서 있던 병사들이 사이좋게 꿰뚫려 꼬치 신세가 되어버렸다.

무시무시한 위력에 데일은 크게 만족했다.

"나쁘지 않은데. 부무장으로 쓸만할지도."

발리스타를 등에 메고 다니면, 멀리서 깔짝이는 적들을 잡는 데 좋지 않을까?

반동이 강하긴 하지만 데일에게는 두세 걸음 뒤로 밀려나는 정도고 말이다.

데일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의 상관을 보았다.

도무지 저 앞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다. 가봤자 개죽음이다!

그리고 죽고 싶어 하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진입을 명해봤자, 따를 것 같지가 않았다.

'야단났군.'

아까부터 바깥에서 이상한 소음이 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저놈 혼자서 대책 없이 공격하지는 않았을 터. 성벽이 함락당할 일은 없지만, 빨리 상황을 살피러 가야 하는데.'

방어에 탁월한 영주관의 장점이 도리어 해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이를 악문 기사는 두꺼운 방패를 꺼냈다. 나무를 덧댄 게 아니라, 통짜 쇠로 만든 방패였다.

"내가 길을 뚫겠다. 전부 따라와."

"괘,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지형이 불리해도, 이쪽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황혼을 섬기는 몸이다. 고작 저런 놈한테 겁먹어서야, 황혼님을 뵐 낯이 없다."

"...경!"

"간다. 우리는 영주관을 되찾고, 파브리스 경을 구출한다. 나를 따르라!! 인류를 위하여! 황혼을 위하여!"

"우와아아!"

기사가 든 방패에 주황색 빛무리가 둘러싸였다. 기사는 용맹이 복도를 내달렸고, 그 뒤를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뒤따랐다.

좁은 복도라 한 번에 두 사람 이상 못 지나갔지만 뭐 어떻단 말인가.

지형이 어떻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이들은 인류를 신들에게서 해방한 황혼을 섬기는 추종자들이자, 가장 용맹한 병사들!

제힘만 믿고 날뛰는 흑기사 따위, 다 같이 힘을 합쳐 난도질해주리라!

황혼을 섬기는 기사가 하나. 그 기사를 따르는 종자가 둘.

황혼의 힘을 일부 받은 정예병이 서른.

수십의 인원이 데일을 향해 용감히 달려들었다.

"우리는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

"와아아!"

* * *

무르하탈은 군세를 이끌고 곧장 영주관으로 향했다.

도시 중간중간 관문이 있었고, 지나다니는 병사도 많았지만 별 어려움은 없었다.

상대는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통제를 잃은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법이니.

빠른 속도로 진격. 적의 시체를 일으켜 아군을 늘린 무르하탈은 머지않아 영주관에 당도했다.

'여긴가. 확실히. 요새나 다름없는 저택이군.'

방어 시설이 잘 구비된 영주관은 웬만한 공격에도 너끈히 버텨낼 것만 같았다.

무르하탈은 고요한 영주관의 모습에 잠시 주춤했다.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혹시 주인님이 실패한 게 아닐까?'

척 봐도 공략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영주관에 홀로 들어갔다면, 도리어 당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후퇴하는 게 목숨을 부지할 방법 아닐까?

갈등하는 무르하탈의 옆구리를 리자드맨 카리악이 툭툭 건드렸다.

"뭐야 도마뱀. 이 몸은 지금 고민 중이다. 건드리지 마."

"카룸. 카칵!"

"뭐? 피 냄새가 진하게 난다고?"

"카룸."

"흐음. 좋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무르하탈은 성큼 걸어가 영주관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긴 복도를 걷자, 그들은 머지않아 피비린내 광경을 마주했다.

켜켜이 쌓인 말라비틀어진 시체 수십 구.

그리고 그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흑기사.

한창 생기를 흡수하던 데일이 고개를 들었다.

"아. 일찍 왔군. 잘했다 무르하탈."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주인님께서는... 많은 일이 있던 것 같군요."

무르하탈은 기사의 시체로 눈길을 주었다.

시체에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주위 벽면에도 군데군데 검격이나 부서진 흔적이 있었다.

대체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데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딱히. 별거 없었다. 오히려 조금 실망스러웠지."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놈들이 황혼의 힘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는 대충 알게 되었지."

미지의 적과 싸우는 것과 잘 아는 상대와 싸우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황혼의 추종자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제대로 알게 된 건, 실로 만족스러운 수확이었다.

"뭐.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무르하탈. 선물이다."

데일은 목이 잘린 기사의 시체를 무르하탈을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듀라한으로 되살려라."

이들은 래파킨과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공략

* * *

무르하탈은 죽은 기사와 병사들을 언데드로 되살렸다.

그중에서 기사는 특별히 더 공을 들여 상위 언데드인 듀라한으로 일으켰다.

듀라한으로 되살아난 기사는 잘린 머리를 왼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령...을... 내려... 주십...."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말을 제대로 못 하잖아."

데일의 핀잔에 무르하탈이 설명했다.

"목이 잘렸는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구울 같은 것보다는 몇 배는 더 강하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런 듀라한을 몇이나 만들 수 있지?"

"시체만 있다면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배권을 잃지 않는 건 다른 문제이죠."

"아. 그랬지."

데일은 게임 할 때의 지식을 떠올렸다.

네크로맨서는 마력과 시체가 있다면 원하는 대로 언데드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언데드를 제어하고 지배하는 건 다른 문제다.

네크로맨서가 조종할 수 있는 언데드의 숫자는 정해져 있으며, 그 숫자가 곧 네크로맨서의 역량을 가른다.

자기 역량 이상의 언데드를 만들어내면 언데드가 지배에서 풀려 '야생 언데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언데드에 물려 죽는 네크로맨서의 사례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지배할 수 있는 언데드 숫자는 정신력 능력치에 비례하던가?'

"제가 부릴 수 있는 듀라한은 다섯. 하급 스켈레톤은 1,000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무르하탈이 얼마나 대단한 역량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혼자서 군대를 부리는 셈이니.

"하지만 주인님이 있으니 또 얘기가 다릅니다. 주인님은 흑기사. 밤의 여신의 힘을 내려받은 주인님은 능히 언데드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영혼을 다루는 기술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영혼 지배.

상대의 영혼을 지배해 잠깐이나마 명령을 따르게 만들며, 갓 죽은 시체에 사용하면 언데드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그걸 이용하면 제게서 언데드들의 지배권을 위임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분명 저보다 강한 정신과 영혼을 지니고 계실 터. 막대한 언데드를 다룰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언데드 제작은 무르하탈이 한 뒤, 그 지배권을 정신력이 강한 데일이 이어받는다.

훌륭한 분업이 아닌가.

데일은 새삼, 늪지대에서 이 언데드 리치를 죽이지 않은 걸 잘했다고 생각했다.

"좋아. 이 병사들을 전부 언데드로 되살리고, 영주관을 요새화한다."

"알겠습니다."

성물을 이용해 잠시 밤을 불러왔지만, 언제까지고 태양을 가릴 수는 없다.

슬슬 낮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태양 빛 아래에서 언데드의 힘은 감소하니, 영주관 안에서 농성하는 게 좋았다.

무르하탈은 언데드들을 부려 발리스타, 쇠뇌, 활 따위를 들게 한 뒤, 영주관 곳곳에 배치했다.

본디, 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영주관은 순식간에 아군의 본거지가 되고 말았다.

곳곳에 배치한 언데드를 밖에서 보이지 않게 숨기는 것으로 마무리.

성물의 힘이 다해 다시 햇빛이 지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당황케 하던 혼란도 슬슬 잦아들 터.

모든 준비를 마친 데일은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창백한 얼굴의 파브리스가 바닥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너, 너...."

"영주관에 별별 방어시설을 다 해놨더군. 내가 잘 쓰도록 하마."

"내 병사들이 너를...!"

"마침 오는군."

데일은 영주관 창문으로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오는 걸 확인했다.

그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태양이 그림자 뒤에 숨었을 때 워낙 혼란이 크게 일어나 부상자들이 많았고, 또. 성벽 남쪽에는 여전히 도적들 수백이 서성이고 있다.

적들은 이쪽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 힘들다. 언제 어디서 추가 병력이 올지 모른다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일정 인원이 성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주관이 함락당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동쪽 성벽을 점령한 무르하탈의 언데드 군세의 행적이 영주관으로 향했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언데드 군세가 파브리스와 다른 기사들의 방어를 뚫고 영주관을 점거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영주관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성주님! 남쪽 성문 수비대장 게티스입니다! 지금 도시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죽어가던 파브리스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려 했다.

"게티스... 읍읍."

하지만 데일은 파브리스의 입을 막아버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파브리스는 데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안에 계신 거 맞습니까? 언데드 무리가 이쪽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영주관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비대장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는 깊게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의지를 다지고, 진입을 명했다.

"들어간다."

자신의 주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다못해 확인이라도 해야 한다.

그런 일념으로 병사들이 영주관을 향해 접근했다.

데일은 거리를 조용히 가늠했다.

모든 싸움이 그렇지만. 대규모 전투도 초반 기세가 많은 부분을 좌우한다.

데일은 첫 번째 부대가 영주관 안으로 진입하려 하고.

두 번째 부대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놈들이 충분히 깊숙이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명령을 내렸다.

"쏴라."

그 순간 숨어 있던 언데드 병사 수십이 일어나 장전된 쇠뇌를 겨눴다.

수비대장 게티스는 당황했다.

아군 진영의 심장부에서 매복을 당하다니?

하지만 후회할 새는 없었다.

투투퉁!

"억!"

"크악!"

쏟아지는 볼트 세례에 병사들이 바닥을 굴렀다.

황혼의 힘을 받아 강화된 병사들이라 하나, 볼트가 몸을 꿰뚫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언데드 병사들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볼트를 장전. 다음 사격을 가했다.

게티스가 외쳤다.

"엄폐물 뒤에 숨어!"

"어, 엄폐물이 없습니다!"

당연하다.

방어에 치중한 영주관이다.

화살을 피할 나무나 바위 같은 엄폐물은 진작 치워놓았다.

결국. 궁한 대로 계책을 내놓았다.

"시체를 들어 방패로 사용해라!"

게티스는 앞선 볼트를 맞고 죽은. 혹은 죽어가는 동료들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투투퉁!

연이어 쏟아진 사격에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갔다.

하지만 당황한 건 바깥의 병사들뿐만은 아니었다.

영주관으로 진입해 들어가던 병사들도 바깥의 참상에 당황해 후퇴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영주관 곳곳에 숨어 있던 언데드 병사들이 우르르 밀려왔다.

"어, 언데드다!"

"당황하지 마! 제대로 대열을 갖추고 백병전을 펼쳐!"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사들이 다급히 진열을 정비했다.

좁은 복도이니 대열만 갖추면 능히 막아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게 있으니.

"저, 저게 뭐야."

"듀라한?"

한쪽 겨드랑이에 자기 머리를 끼운 듀라한이 쿵쿵 달려왔다.

병사들은 그 끔찍한 모습에 한 번 당황하고, 그게 아는 얼굴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당황했다.

이윽고 접근한 듀라한은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자기 머리를 들어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겨, 경! 저희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제발 그만두십시오!"

속절없이 쓸려나가는 병사들.

이미 기습당한 순간부터 승산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볼트 세례에서 살아남은 일부 병사들은 뒤로 후퇴하려 했다.

가만두고 볼 리자드맨이 아니다.

한 명이라도 대열에서 벗어난 병사가 보이면 리자드맨들은 은밀하게 달려들어, 곧바로 숨통을 끊어놓았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파브리스는 두 눈을 부릅떴고, 데일도 머리를 긁적였다.

'음. 생각보다 알아서 잘 싸우는데.'

무르하탈의 병력 지휘는 탁월했고, 카리악도 적절한 순간에 잘 나서주었다.

딱히 데일이 세세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알아서 잘하면 나야 편하고 좋지 뭐.'

적당히 알아서 하라고 방임한 게 꽤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파브리스가 느끼는 건 달랐다. 그는 전율했다.

파브리스는 저렇게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군대를 본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움직임이 데일의 지휘력 덕이라고 보았다.

'본신의 힘만 강했던 게 아닌가. 오히려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더 뛰어날지도... 이 자는 분명 황혼께서 이루실 대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포악한 인간이지만, 황혼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파브리스는는 황혼이 이루려는 대업이 반드시 성공하길 원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힘이 없다.

결국. 파브리스가 마지막 여력을 쥐어짜 선택한 건... 설득이다.

"이봐. 대화를 좀 하지."

"음? 또 뭔 수작이지?"

"수작이 아니다. 이미 나는 패배했다. 성벽에 있는 병사들을 전부 데려와봤자, 이곳을 뚫어내기는 힘들겠지."

그의 말대로였다.

이미 영주관을 점거한 순간부터 승기는 기울었다.

여전히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지만, 바깥에는 도적들이. 안쪽에는 데일과 언데드 군세가 있어 앞뒤로 포위당한 꼴이다.

영주관을 되찾지 않는 한, 머지않아 병사들이 무너져내릴 건 불 보듯 훤했다.

남은 방법은 데일을 회유하는 것뿐.

하지만 파브리스는 뛰어난 언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의 설득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했다.

그런 그가 폭력 없이 상대를 설득할 방법은 하나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어차피 마지막이다. 패배자의 추한 몸부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데일은 파브리스의 어조에 실린 진중함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라."

"우리가 왜 황혼을 섬기는지. 황혼께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겠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질문하려 했다.

척 봐도 지위가 높아보이는 파브리스라면 황혼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우선 황혼이 누구인지부터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악마들을 부려 이레네를 무너트린 걸 보면 역시 악마가 맞나?"

"아니. 그분은 악마 같은 게 아니다."

파브리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악마를 힘으로써 굴복시킨 건 나도 안다. 그 점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많지만, 어쨌든 황혼께서는 인간이다."

말을 뱉은 파브리스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지, 다시 정정했다.

"적어도 악마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건 보증할 수 있어."

"딱히 증거는 없고?"

"끄응."

파브리스는 골치 아픈 듯.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데일이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아래에 악마를 부리며,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존재라니.

심지어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힘까지 내려준단다.

'그냥 악마 맞는 거 아닌가.'

하지만 파브리스는 그 점만은 극구 부인했다.

정말로 악마가 아닌 건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일단 이 얘기는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황혼의 목적이 뭔데?"

"두 여신에게서 인류를 해방하는 것!"

"그건 이미 들었지만... 굳이 해방할 필요가 있나?"

신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세상에서 온 데일에게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존하는 신이 있고, 그 신들이 힘을 내려준다면. 굳이 배척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오랜 시간 귀족과 왕족. 그리고 지배층은 신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마법사와 기사들이 그 단적인 예고."

신에게 공물을 바쳐 힘을 얻는 다른 직업과 달리, 기사와 마법사는 마력이라는 힘을 다뤄 강함을 얻는다.

"우리는 교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단 말이다! 왜 그랬을 것 같나!"

"흔한 정치싸움 아니었나?"

"그런 부분도 있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워서다. 몰락한 드워프 왕국의 이야기를 들어봤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에게 거역했다가, 저주를 받고 멸망해버린 드워프 왕국.

유명한 이야기다.

그 드워프 왕이 마지막으로 만들었다는 게 바로 데일의 마검이 아닌가.

"드워프 왕국에 벌어진 일이 언제 다시 벌어지지 말란 법이 있나? 우리는 왜 머리 위에 우리를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잔혹한 존재를 이고 살아야 하는 거지?"

파브리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부분의 생기를 빨려버린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데일은 저 힘이 뭔지 안다.

신념이다.

"악마가 지상에 내려온 지 수십 년이다. 대체 몇 명이나 죽었을까. 몇 개의 왕국이 무너지고, 얼마나 많은 비극이 만들어졌는가. 그때 신들은 뭘 했지? 저 하늘 위에서 훈수를 두는 것 외에 뭘 했냔 말이다."

"글쎄. 제약에 묶여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제약! 그래, 신들이 지상에 개입하려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지. 반대로 말하면 희생만 감수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러지 않은 건 하나. 자기가 손해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지! 두려웠기에 그 많은 사람을 죽게 놔뒀을 뿐이다. 가증스럽지 않나?"

파브리스가 데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황혼은 다르다. 황혼께서는 악마를 굴복시키고, 멍청한 황제마저 무너트렸다. 이제 힘을 모으고 탑을 완성시켜 하늘의 신들을 떨어트릴 거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되찾게 되는 거다. 하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로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이다. 흑기사! 불쌍한 밤의 노예야! 너에게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남아있다면 우리와 함께해라! 황혼을 섬겨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자!"

파브리스는 진심이다. 자신의 신념을 믿으며 그 신념을 데일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데일은 그런 파브리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황혼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황혼을 따르는 자들이 흔한 악마 숭배자들이랑 다르다는 건 알았다.

이들은 여타 악마 숭배자들처럼 힘만을 추구하는 괴물이 아니었다.

신념이 있고 사상이 있다.

파브리스의 주장을 곰곰이 곱씹은 데일이 지적했다.

"그런 것치고 황혼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 같은데? 숭배를 받고, 자기를 숭배하는 놈들한테 힘을 내려주고."

"그건 어디까지나 힘을 모으기 위해서다. 신들을 떨어트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는 건? 너희들이 말하는 자유라는 게, 아랫사람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 건가?"

"...그것 역시 대업을 이루기 위한 잠깐의 희생이다. 모든 대업이 이루어지는 그 날. 그들 역시 해방될 것이다. 약속하지."

"흐음. 약속이라."

심드렁하게 대꾸한 데일은 창밖을 보았다.

늦오후. 태양이 천천히 성벽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파브리스의 주장은 역시 데일의 마음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마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지구인 데일과 이 대륙 태생의 사람들 사이의 가치관에는 멀고 먼 차이가 있을 테니.

데일은 이 세계의 이방인이고, 이방인이 원주민의 가치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못 할 짓이라 생각했다.

다만 다시금 마음먹은 건 있다.

'놈이 짓고 있다는 탑으로 가야겠군.'

데일의 힘은 여신에게서 전해받은 힘.

황혼이라는 자가 정말로 여신을 떨어트린다면, 데일은 모든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꼭 그게 아니라도 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려면 황혼과 결판을 지어야 한다.

데일이 직접 말이다.

언젠가 먼 옛날.

여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계속 정진하거라. 그리하면 여정의 끝에 네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란다.

데일이 원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인간이 되는 것.

데일의 직감이 말했다.

이 여정의 끝에는 황혼이 있다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황혼이 탑을 완성하고, 모든 걸 끝장내기 전에.

'그러기 전에 우선 하켄이랑 먼저 만나야 하지만. 거창한 별명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던데, 또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하지만 데일은 하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옆에 하티도 있는 모양이고. 또, 눈치 하나는 빠른 사내라 알아서 자기 살길을 잘 찾을 거라 생각했다.

* * *

같은 시각. 서쪽. 알드군트.

"하켄 사령관! 어마어마한 대군이 성벽 앞에 진영을 구축했습니다!"

"악마! 악마 라만티스가 사령관께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아무리 악마라도 늑대왕께 결투라고? 제 명을 제가 재촉하는 구나!"

"사령관님! 가서 묵사발을 내주십쇼!"

"하켄! 하켄! 하켄!"

"하켄! 하켄! 하켄! 하켄!"

"와아아아아!!"

'그만해 이 새끼들아!!!!'

하켄은 전대미문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