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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봄이 오다

* * *

머리가 반 토막 난 아르구르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악마의 죽음은 즉각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아르구르의 하수인과 추종자는 그들의 주인에게 전해 받은 힘을 크게 잃었고, 악마의 군세는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약해진 적군을 아군이 가차 없이 몰아세웠다.

적들은 여전히 많은 숫자가 남았지만, 기세가 넘어간 순간부터 승패가 판가름 난 것과 다름없었다.

마침내 악마의 군세가 이리저리 흩어져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기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살았어! 살았다고!"

"어머니...."

그리고 병사들은 이 승리의 주역이 누군인지를 잘 알았다.

"기사단장 만세!"

"흑기사 데일 경 만세!"

"두 분께 영원토록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사단장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를 띄워주는지."

"겸손이 과한 것 같소."

"겸손이라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르구르를 떨어트린 것도. 녀석의 불꽃을 방어해 틈을 만들어내준 것도. 마검으로 놈의 머리를 벤 것도 자네 아닌가. 난 숟가락밖에 얹지 않았네."

기사단장은 진심이었다.

자기는 거들기밖에 안 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얼마나 공을 세웠든, 악마를 죽였으면 된 거다.

"자. 어서 자네도 손을 흔들어주게. 다들 자네의 이름을 외치고 있지 않나."

기사단장의 조언대로 데일은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더욱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베른바르트가 다가와 껄껄 웃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군! 앞으로는 자네의 시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우리 같은 퇴물은 슬슬 은퇴할 때가 되긴 했지."

기사단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격렬한 전투가 끝이 났다.

밤새 싸운 병사들은 하나같이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바로 쉴 수는 없다.

뒤처리를 해야 한다.

악마와 그 하수인들의 시체에는 사악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냥 놔뒀다가는 대지가 오염되고, 또 다른 괴물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살아남은 사제들은 신성한 불꽃으로 시체들을 불태웠다.

에스델이 한차례 손을 휘저을 때마다 하수인의 시체가 조그마한 입자가 되어 바스라졌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시체 앞에 섰다.

기사단장은 승리의 주역에게 기꺼이 시체를 양보해줬다.

"마음껏 먹게. 빛의 교단에서는 발작하겠지만, 뭐 어떤가."

"고맙소."

"고맙기는."

"근데 그 먹는다는 표현은 좀...."

어쨌거나 보상을 거둘 시간이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기 전. 생각했다.

'아르구르의 피에도 특별한 힘이 있다.'

가니아고스의 피를 마시면 마력이 크게 늘었던 것처럼, 아르구르의 피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

'마시면 근력을 늘려주던가.'

문제는 아르구르의 피가 강산성이라, 피부에 닿으면 녹아버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문제없다.

데일은 투구를 벗은 뒤.

아르구르의 상처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치이이익!

얼굴 가죽이 녹아내리며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상관없다. 회복하면 그만이니.

데일은 아르구르의 피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식도가 녹았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 기괴한 광경에 기사단장과 군단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 그런 식으로 먹을 줄은 몰랐는데."

"괜찮은 거 맞소 저거?"

"...괜찮을 거요. 아마도."

그렇게 데일은 아르구르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몸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변화가 있다.'

전신의 근육이 이전보다 훨씬 탄탄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데일은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방패를 하나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아주 가볍게 그 모서리를 쥐어 보았다.

우드득.

너무나 간단히 우그러지는 방패.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슨 쇠를 종이처럼 구겨버리나. 이 정도 근력은 내 부하들이 마력을 끌어올려도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여전히 시체가 남아 있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시체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적당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흡수한다.'

과욕은 도리어 해가 된다.

특히 아르구르처럼 사악한 악마의 생기와 잔혼을 거두면, 그만큼 데일의 정신에도 영향을 끼친다.

너무 많이 흡수했다가는 선배 흑기사인 케인과도 비슷한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데일은 흡수를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들이 데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아르구르가 도시를 습격해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광경.

일부러 귀족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가족을 직접 죽이게 시킨 일.

사람들을 가지고 놀다 가차 없이 버린 가벼운 장난들.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눈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아르구르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별거 없다.

유희.

즐거우니까 그리 행동했을 뿐.

악마답다면 악마다운 이유였다.

"...."

데일은 흡수를 계속했다.

아르구르의 기억은 대부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기억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기억이 있었다.

'이건?'

기억 속. 아르구르는 누군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상위 악마일까? 아니다. 아르구르보다 훨씬 작은 상대는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로브를 걸친 여성. 아니. 남성일까? 중성적인 외모 탓에 잘 구분되지 않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봐서는 마법사 같은 느낌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사처럼 다부진 근육도. 사제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그의 가슴에는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으니 말이다. 검신 위에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룬 검?'

아르구르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4군단을 공격해 시선을 끌어라. 미끼가 되란 말이다.

아르구르는 굴욕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에게 고개를 조아려 굴종했다.

그것만으로도 둘 간의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대체 누구지?'

데일은 그 얼굴을 살폈다.

낯이 익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낯이 익다.

하지만 누군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데일의 기억 속에 저런 기묘한 인간은 없었다.

아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낯이 익으면서, 기억에는 없는 모순된 경험.

데일은 가슴에 검이 박힌 저 괴인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피려 했다.

하지만 한계가 찾아왔다.

여기서 더 생기를 흡수하면 걷잡을 수 없다. 그만둬야만 한다.

데일은 아쉬웠지만, 생기를 거두는 걸 멈췄다.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도 그렇게 끝이 났다.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방금 본 광경에 대해 생각했다.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라니. 무슨 소리지?'

괴인은 악마조차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그런 자가 아르구르를 미끼로 던지고, 할만한 일은 무엇일까.

데일이 깊은 고심에 잠겨 있자, 에스델과 하켄. 그리고 하티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경?"

"아까 봤습니다. 공중에서 화려하게 하시던데요? 근데 왜 그러고 서 있습니까?"

데일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내저어주었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싸움 후에 멍하니 계시는 횟수가 늘었어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 아니죠?"

"괜찮다."

"그래! 데일 경이 뭐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는 거뜬하지."

"하긴. 데일 경이라면...."

그제야 에스델도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일행은 아르구르의 시체를 소각했다.

하티가 놈의 살점을 한입 뜯어먹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데일이 말렸다.

'이런 걸 먹었다간 지옥견 같은 게 되지 않을까.'

데일이 말리자 하티가 불만스레 울어댔다.

마치 '왜 너만 먹냐'라고 면박을 주는 것 같았다.

데일은 그런 하티의 반응을 모른척하며, 장작을 날랐다.

아르구르의 시체는 너무나 거대해서 에스델의 신성만으로는 전부 불태울 수 없었다.

기름과 장작이 아르구르의 위에 쌓이고. 이내 불꽃이 피어올랐다.

썩은 고기 타는 냄새가 전장에 진동했다.

그때 병사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저 두렵고도 강대한 악마 역시, 죽으면 한낱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병사들은 너도나도 모여들어 아르구르의 시체가 불타는 모습을 구경했다.

몇몇은 눈물을 흘렸다. 먼저 떠나간 전우들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몇몇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전투는 누가 뭐라 해도 아군의 승리였으니, 병사들은 기뻐할 권리가 있었다.

또 몇몇은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아마 마음속으로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베른바르트도 데일의 옆에서서 이 우중충한 캠프파이어를 구경했다.

그가 물었다.

"그때. 자네가 한 말 있잖아. 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거. 그거. 진심이었나?"

"진심이었소."

"그래. 진심이었단 말이지."

조그맣게 중얼거린 베른바르트가 아련한 표정으로 불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먼 과거를 담고 있었다.

"예전에는 많았지. 자네처럼 전쟁을 끝내겠다느니. 몸을 바쳐 평화를 가져오겠다느니. 터무니없는 말을 당당히 외쳐대던 머저리들이."

"...."

"어느샌가 그런 말을 떠드는 놈이 안 보이더군. 다들 무기력했던 거야.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우리는 이미 마음속 깊이 패배했었네."

베른바르트가 고개를 돌려 데일과 눈을 맞추었다.

그 눈동자에는 의지라는 이름의 불꽃이 빛나고 있었다.

"고맙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걸 자네가 깨우쳐 주었어. 그래. 황제가 평화를 바라지 않으면 뭐 어떤가. 아직 도끼를 휘두를 힘이 있고, 나를 따라주는 병사가 있어. 끝까지 해볼 생각이네. 그래야 죽은 전우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겠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로 4군단은 씻지 못할 상처를 얻었다.

전방의 요새는 함락되었고, 이리스 성 역시 크게 피해를 입었다.

복구를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하지만 어떤 희생을 치렀더라도 상관없다.

악마를 죽였다는 것. 그리고 이 늙은 장군과 병사들이 의지를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한참을 타오르던 아르구르의 시체가 마침내 부스러기가 되어 흩날렸다.

불도 꺼지고.

사위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사위가 그림자 속에 잠겨들었다.

"하하. 그나저나 벌써 악마를 둘이나 처치하다니. 대단하군. 이제 자네에게는 악마 살해자란 별명이 붙을 걸세. 어때. 마음에 드나?"

"악마 살해자라...."

데일은 그 단어를 입에서 몇 번 굴려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니 뭐니 불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소."

드물게도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앞으로 데일이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별명이 아닌가.

"자네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그때.

저 지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뒤덮였던 세상이 다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아진 데일은 투구를 썼고, 베른바르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해가 일찍 뜨는군. 아무래도 봄이 오는 모양이야."

봄이 오고 있었다.

* * *

이레네에서 그리 머지않은 마을.

본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주민들의 담소가 활기차게 들려오던 마을은 지금. 불길한 적막에 쌓여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노인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에 다섯. 저 위치에는 열을 배치하라."

노인은 수정구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 수정구에서는 눈동자 하나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수정구 속 눈동자가 시키는 대로 술식을 그리고, 사람들을 옮겼다.

꽁꽁 묶인 사람들의 숫자만 1,000명이 넘었다.

노인 혼자서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노동. 하지만 눈동자는 가차 없었다.

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고, 몸을 혹사해가며 겨우겨우 술식을 완성해냈다.

눈동자가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자. 이제 마력을 불어넣어."

고개를 꾸벅 숙인 노인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술식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산제물들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수정구 속 눈동자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악마의 마법은 불필요하게 가학적이란 말이지."

다음 순간.

산제물들이 털썩 쓰러지고.

술식을 따라 공간이 커튼 걷히듯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가슴에 룬검이 박힌, 데일이 괴인이라고 표현했던 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놀랄만치 위력적이야."

괴인은 한차례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가슴이 들썩였고, 몸에 박힌 룬검도 움직였다.

"쿨럭!"

괴인은 피를 토해냈다. 아무리 사제물을 사용했더라도, 이 정도 마법을 사용하려면 몸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다.

"빌어먹을 아렌."

욕설을 내뱉은 괴인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끔찍한 몰골을 한 군세가 열을 맞춰 걸어 나왔다.

괴인이 말했다.

"자. 가서 이레네로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머저리 황제의 숨통을 끊고, 제국을 불살라라. 그리고 알려라. 내가 돌아왔다고."

명령을 받은 군세가 기괴한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그 거센 파도의 한복판에서 괴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햇빛이 얼굴에 쏟아져내렸다.

"비로소 봄이 오는 모양이구나."

봄이 오다

* * *

전투는 끝났지만, 더욱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배신자들의 처분에 대한 문제였다.

군단장과 기사단장. 그리고 지휘관들은 꼬박 하루 동안 회의를 거쳤고, 결론을 내렸다.

"많든 적든 악마의 힘을 직접적으로 받은 이들은 전부 처형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는 병사들에게는 기회를 주겠다."

반란군이 전부 악마가 좋아서 아군을 배신한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이 끝없는 전쟁에 지친 자들도 있었고, 황제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돌아선 이들도 있었다.

자기 병사들을 사랑하는 군단장답게 꽤나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레네에서 온 지휘관들도 딱히 반발할 수 없었다.

함께 온 빅토르 백작이 악마에게 홀린데다가, 그 때문에 성문이 뚫리고 말았다.

이레네의 지휘관들로서는 면이 안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오히려 기꺼워했다.

"놈이 악마를 섬겼다고? 그 짧은 사이에 배신하다니, 참으로 줏대 없는 사내구나.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놈의 가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참이다. 이번 일을 문제 삼아, 악마와 붙어먹은 가문이라 이름 붙이고 싸그리 몰아내야겠어."

기사단장은 살벌한 말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일이 일이었던 만큼, 빅토르 백작과 친분이 있는 귀족들도 감히 두둔하지 못했다.

전투를 마치고. 병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날.

대대적인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처형 방식은 교수형이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처형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군단장님? 목에 밧줄을 걸어도 안 죽는데요?"

악마의 힘을 받은 추종자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목에 밧줄이 걸려 숨을 못 쉬는 데도 계속 살아남아 버둥거렸다.

결국.

병사 중에서 도끼를 잘 다루는 이들을 선발해, 배신자들의 목을 베게 시킬 수밖에 없었다.

써걱.

도끼날이 목을 자르고. 흉측한 머리통이 데구르르 떨어질 때마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새끼! 아무리 그래도 악마한테 붙어먹냐?"

아무래도 악마의 추종자들은 옛 동료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잔인한 광경에 에스델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고. 하켄은 누구보다 앞에 서서 환호했다.

데일은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적어도 저기에서 목이 잘리는 이들 중에 무고한 사람은 없으니, 별 감흥은 없었다.

그때. 데일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얼굴 한가운데에 깊은 흉터가 난 사내였다.

"아. 데일 경. 여깄었군요."

"...누구?"

"벌써 잊어버리신 건가요?"

그제야 병사의 얼굴을 유심히 본 데일은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아. 내 옆에 서 있던 신병."

"하하! 역시 기억해주셨군요. 정신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정말로 정신을 차렸더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설마 진짜 살아남을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죽을 줄 알았다.

꽤나 격렬한 싸움이었고, 풋내기들이 살아남을 만한 전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신병은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 건가?'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얼굴에 저 커다란 흉터를 보라.

누가 봐도 노련한 병사의 모습이 아닌가?

신병은 한 번의 전투로 전사가 되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라."

"예! 신전에 가서 헌금도 많이 낼게요!"

"아니. 이상한 데 낭비하지 말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 먹어라."

"예?"

"밤의 여신도 그걸 바랄 거다."

"...예!"

멋대로 밤의 여신의 이름을 들먹였지만, 무슨 상관인가.

남들은 데일을 여신의 기사라 부를 텐데.

사제장 에리얼은 왜 아까운 헌금을 마다하냐고 툴툴거리겠지만 말이다.

그런 식으로 처형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참모격 인물들이다. 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악마의 힘을 받았는데, 인간의 모습을 한 이는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흉측한 괴물들.

그중에는 베른바르트의 손자도 있었다.

그래도 한때 군단의 참모 자리에 있었던 만큼, 손자는 독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처형의 마지막 순서에 베른바르트가 직접 목을 자를 거라고 했다.

'그래서는 안 돼.'

손자가 조부를 죽이는 일도. 조부가 손자를 죽이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데일이 군단장에게 말했다.

"내가 처형하겠소."

"...그래 주겠나?"

이번 승리의 주역이 그리 말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

병사들도 그러려니 해줄 터.

군단장은 데일의 마음 씀씀이를 알아채고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고맙네. 못난 손자를 잘 부탁하겠네."

데일은 지하 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 감옥은 황실 기사들의 철통 같은 경계를 받고 있었다.

기사들은 데일이 다가오자 아는체를 해왔다.

"오. 무슨 일이시오."

"밖에는 한참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소?"

데일이 목숨을 걸고 공중에서 아르구르와 격전을 벌이던 걸 똑똑히 본 기사들이다.

상대가 이교도든 뭐든, 데일은 전사로서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기사들의 호의적인 반응에 데일은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아. 군단장이...."

"하긴. 노인에게 혈육을 직접 처형하라는 건 가혹한 얘기지. 알겠소. 들어가시오."

기사들은 별 추궁 없이 데일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만큼 데일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데일은 횃불 하나 없이 어두운 지하 감옥을 내려갔다.

이 습하고 음침한 공간에 다른 죄수는 없었다. 철창 안은 전부 텅 비어 있었다.

데일은 한참을 걸어 지하 감옥의 가장 안쪽에 다다랐다.

강철을 겹겹이 세워 만든 철창 속에서 누군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놈인가?'

그 모습은 워낙 이곳저곳 비틀려서 한 단어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상어 인간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상어 인간은 데일의 기척을 듣고 눈을 떴다.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기이한 빛을 내뿜었다.

데일이 물었다.

"너인가? 배신자의 우두머리가?"

"란돌. 내 이름은 란돌이다. 흑기사 데일."

생각보다 더 침착하고, 듣기 좋은 음성이 들려왔다.

데일이 란돌을 가둔 철창 앞에 털썩 앉았다.

"나를 아나?"

"알다마다. 여러모로 믿기 어려운 소문의 주인공 아닌가. 이성을 유지하는 흑기사라거나, 숱한 업적을 이뤄낸 영웅이라거나.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놀랐어. 아르구르와 싸우는 모습. 제법 훌륭했다."

란돌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설마 이렇게 솔직한 칭찬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데일은 잠시 멈칫했다.

란돌에게서는 결과에 승복하는 깔끔함이 느껴졌다.

그 얼굴에 후련한 감정이 서렸다.

데일이 물었다.

"후련해 보이는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반란을 준비하면서도.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내심 내가 틀렸기를 바랐었던 것 같아. 누군가 나를 막아주기를 원했던 거야."

"...처음부터 반란을 하지 않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

란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지금 이대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 변화가 필요했고, 내가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야."

"후회는 없나?"

"전혀!"

당당히 외치는 란돌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데일은 그 눈동자에서 란돌이 인간이었을 적에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놀라운 점이 하나 있었다.

"악마에게 홀렸는데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군. 보통 괴물이 되어버리는 걸로 아는데."

"인간성을 유지하는 흑기사도 있는데, 세상에 불가능할 게 뭐가 있을까."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마검을 뽑아들었다.

란돌은 란돌 나름의 이유가 있어 배신을 한 것이다. 란돌 개인은 어쩌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란돌은 책임을 져야 한다.

불길한 기운을 흩뿌려대는 마검을 바라보며, 란돌이 물었다.

"할아버지... 아니. 군단장이 보낸 건가?"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걸 말리고 내가 온 거다."

"하긴. 그렇지. 자기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일이 없는 분이니까. 고맙다. 할아버지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해줘서. 이 은혜는... 이제 갚을 길이 없지만. 그래도 너에게 감사하마!"

란돌은 고개를 앞으로 숙여 목을 쭉 내밀었다.

푸르딩딩한 가죽에 둘러싸인 두꺼운 목은 여간한 일격으로는 베어내기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데일이라면 가능하다.

데일은 철창을 열었다.

란돌의 앞에 서서 마검을 양손으로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란돌은 아무 말도 없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내리치면 그걸로 끝.

하지만 데일은 우뚝 멈춰선 채, 다시 검을 거두었다.

아직 물어야 할 게 남았다.

란돌은 의아해하며 그런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가?"

"물어볼 게 있다."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말해주겠다."

"대마법사. 그리고 다른 영웅들. 너희 반란군이랑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란돌의 눈동자가 빠르게 명멸했다.

데일은 경험적으로 이런 상태의 추종자나 하수인은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어 인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분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희망이자, 진정 섬김 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이지! 거짓된 왕관을 쓰고 있는 저 황제 따위보다. 천상에서 방관하는 저 오만한 여신들보다 우리의 주인으로 더 어울리는 분이시란 말이다!!"

사람이 바뀐 것 같다.

침착하고 차분하던 지금까지의 분위기가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란돌의 행동이 순식간에 변했다.

마치 신을 섬기는 광신도와도 같다고 해야 할까.

'잠깐. 근데 왜 그분들이 아니라, 그분이라 부르는 거지?'

란돌이 쇠사슬에 묶인 팔을 앞으로 움직여 데일의 다리를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려던 데일은 간신히 팔을 멈췄다.

란돌에게는 여전히 적의가 없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이야. 이것이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는 진리지!"

"...아까는 네 선택이 틀렸길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럴 리가! 내 선택은 옳았어!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어느 누구를 따를 수 있으리!"

틀렸다.

상태가 맛이 갔다.

데일은 내렸던 팔을 다시 들어올렸다. 마검의 검날이 란돌의 안광을 반사해 흉흉하게 빛났다.

하지만 란돌은 여전히 미소 지을 뿐이다.

"이미 끝났어. 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패배하고는 애초에 중요하지도 않았다고. 너희들은 속은 거야! 황제는 기사단장을 이곳에 보냈으면 안 됐어!"

"뭐?"

"이레네로 돌아가 봐.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테니!"

란돌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고문을 한다고 해도 열 거 같지도 않았고.

데일은 마검을 내리쳤다.

썩!

란돌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녹색 피가 튀었다.

그 입가에는 끝까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데일은 그런 란돌을 내려다보았다.

"...."

란돌의 말이 단순히 미치광이의 헛소리는 아니리라.

'이레네로 돌아가라고?'

대체 무슨 소리인가.

속았다는 말은 또 무엇이고.

아르구르의 기억에서도 시선을 끌라느니, 미끼니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언가 불안하다. 데일은 란돌의 시체를 수거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감옥의 입구를 나선 데일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호위가 없어?'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사라졌다.

아무리 데일이 들어갔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게 그들의 임무였을진대.

데일은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배신자들의 처형이 끝이 났는지 더는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은 불길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 데일은 한데 모여 얘기를 나누는 지휘관들을 발견했다.

그곳에 심각한 표정의 기사단장과 군단장도 있었다.

데일은 군단장을 붙잡고 말했다.

"마치고 왔소."

"아... 녀석은 전사답게 깔끔히 죽음을 받아들였나?"

"그렇소. 근데. 한 가지 이상한 말을 들어서 급히 달려왔소. 란돌이 이레네를 언급했소. 우리가 속았다고 말하더군."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베른바르트는 전서구가 전해준 급보를 펼쳐 보였다.

그 자그마한 종이에는 다급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레네가 공격받고 있다!'

봄이 오다

* * *

이레네에서 온 급보에 지휘관들은 웅성거렸다.

공격받고 있다고? 대체 누구에게?

"내부 반란인가? 아니면 악마의 침공?"

"하지만 아직 다른 군단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들은바가 없소."

"다른 군단도 배신을 했다면?"

"그렇다고 해도, 그만한 군세가 이동하면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될 수밖에 없소. 은밀히 이레네까지 당도하는 건 불가능하오. 그 중간에 있는 성과 요새가 몇 개인데!"

"상대는 악마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어요."

말없이 지휘관들이 회의하는 걸 듣던 기사단장이 말했다.

"자! 모두 진정하게!"

"...."

"이레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네. 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네. 바로 이레네로 돌아가는 것이지."

이레네는 그 시초부터 악마와의 싸움을 염두에 두고 건설된 도시다.

도시를 감싼 높고 단단한 3겹의 성벽은 쉬이 뚫릴만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당장 4군단도 생각보다 많은 배신자 탓에 요새를 내주지 않았던가?

그간 이레네에는 여러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고, 외부 사람들의 유입도 많았다.

검문을 엄격하게 하는 상위구역은 괜찮겠지만, 외곽구역과 빈민가에 얼마나 많은 배신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부터 정예만 모아 최대한 빨리 이레네로 돌아간다. 중간에 뒤처지는 자는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쫓아올 자신이 있는 자만 함께하도록."

"예!"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당장 이레네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되었다.

황실기사단원과 몇 명의 마탑의 마법사들. 그리고 실력 있는 병사들만이 이레네로 되돌아갈 채비를 했다.

군단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군마를 모두 내어 드리겠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아니요.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이 또한 악마의 계략일 수 있으니, 요새를 비워두어서는 아니되오."

데일과 하켄. 그리고 에스델도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특히. 에스델은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었다.

"어. 일단 챙겨야 하는 게. 타고 갈 말을... 식량은."

"에스델."

"준비할게...."

"에스델."

데일은 에스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눈가에 희미한 눈물이 맺혀 있고, 가는 몸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진정해라."

"교단에 만약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죠? 그곳에 계신 형제자매님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걸 막으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진정해라."

에스델은 데일을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흑기사의 서늘한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맞아요. 제가 당황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게 없죠.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별거 아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에스델은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준비에 주어진 시각은 반나절이다. 다른 이들이 짐을 싸고, 타고 갈 말을 준비하는 사이.

데일은 신전으로 향했다.

아레짐이 맞아주었다.

"아. 경.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레네가 위험하다고요?"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겠지."

아레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네는 제국의 심장입니다. 인류의 심장이기도 하죠. 괜히 그곳에 교단과 밤의 신전이 자리한 게 아닙니다. 이레네가 무너지면 신앙적 중심지도 잃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두 여신의 힘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부디 이레네를 지켜주십시오."

"노력해보겠다."

짧게 대답한 데일은 아레짐을 지나쳐 기도실로 향했다.

곧장 투구를 벗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왔습니다."

연기가 피어올라 형상을 이루었다.

데일이 고개를 수그렸다.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는 훨씬 희미하고, 위태롭다.

자그마한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군.'

여신이 말했다.

[어■ 오거라 ■들아.]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데일은 한층 더 집중하며 말했다.

"이레네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르구르 그 사악한 것을 물리쳐준 네가 너무 자랑스럽지만, 지금은 그 칭송을 할 때가 아닌 것 같구나. 한시라도 빨리 이곳으로 와야 한단다.]

"많이 급합니까?"

[놈들이 내 눈을 가리고 입을 막았단다. 제대로 준비하고 온 셈이다. 애초에 아르구르는 미끼에 불과했던 거야.]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제물을 바쳤다.

적지 않은 양이 쌓여 있다.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아르구르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라고 데일은 직감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힘이었다.

'그리고 마력도.'

이제 해골마를 타고 쉼 없이 달려 이레네로 가야 한다.

해골마를 유지하려면 마력이 드니, 미리 마력을 올려두는 게 좋았다.

당장 이번 전투에서도 마력 부족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데일은 근력 상승과 영혼 강화를 택했다.

갑옷 강화를 배제한 공격적인 선택.

이번만큼은 여신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느니라.]

새로운 힘이 데일의 심장에서 맴돌았다.

데일은 곧장 자기 상태를 확인했다.

[데일]

등급: 5

직업: 암흑기사

근력: 110

내구: 66

마력: 60

체력: ―

정신력: 50

[보유 기술 목록]

생기 강탈

새벽의 안개

영혼 지배

해골마 소환

[특성]

반인 반언데드

어둠의 감각

밤의 여신의 축복

[칭호]

악마 살해자

놀랄 정도로 성장한 근력 수치가 눈에 띈다.

'놈의 피를 마신 게 큰 도움이 됐군.'

아르구르의 피를 마시고, 그 힘을 취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이제 그 누가 데일을 무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뿌듯해하거나 자랑스러워할 여유는 없다.

데일은 자리에서 곧장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이레네로 가겠습니다."

[그래. 내 아들만 믿고 있겠다.]

데일은 망토를 펄럭이며 기도실을 나갔다.

이레네로 가야 한다. 이레네가 무너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이레네가 인류의 중심이라니, 이레네를 잃은 제국이 그 힘을 크게 잃을 것이라느니 하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짧으면서 긴 시간.

데일은 이레네에서 터를 잡고 활동했다.

맛없는 맥주를 파는 여관 주인이 있고, 왕국을 잃은 왕녀와 그 호위 기사가 있다.

체스 두는 걸 좋아하는 마법사가. 늘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 사제장이. 기계 다루는 걸 수상하리만치 좋아하는 괴짜 드워프도 있다.

그리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데일은 그들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여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 모든 일을 꾸미는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명확히 밝혀진 건 없다.

악마를 발아래에 두던 그 괴인은 누구인가? 영웅들의 행방은?

이번 이레네를 기습한 것도 그 괴인인 걸까?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뭐가 되었든 데일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데일은 마검을 쥐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모두 대열을 지켜 출발한다! 우리의 가족과 친우! 제국을 지키러 가는 거다!"

기사단장의 외침에 기사와 병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랴!"

이윽고 기사단장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나머지 부대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당신의 광휘를 뿌려, 앞길을 비춰주소서!"

기사의 뒤에 탄 사제들이 사방에 빛을 흩뿌렸다.

이미 해가 진 터라 말이 달리다가 자칫 넘어질 수도 있다.

환한 빛은 몬스터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데일은 해골마를 몰고 대열의 가장 후미를 맡았다.

혹여나 몬스터들이 습격할까를 경계하는 것도 있지만, 데일과 해골마가 옆에 서면 말들이 불안해하는 탓도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출발했지만, 낙오자가 속출했다.

"크윽! 마, 말이!"

"아악!"

말이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가혹한 질주에 지쳐서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사제들이 축복을 걸어준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기사단장은 가차 없이 말했다.

"낙오자는 각자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 재정비한 후 이레네로 오도록!"

"예!"

낙오자를 챙겨줄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 카엘름 성에 도착한 기사단장을 백작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시...."

"인사는 됐소.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거라 믿소."

"아 예. 들었소. 이레네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을 내어주시오. 우리가 타고 온 말들은 다 지쳐버렸소."

"아, 알겠소!"

최소한의 휴식만 취한 부대는, 카엘름에서 말을 갈아타 다시 이동했다.

강행군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병사들의 체력이 먼저 바닥날 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말을 갈아탈 경유지도 없다.

기사단장은 속도를 조금 늦출 수밖에 없었다.

"후우. 마음은 급한데, 상황이 따르지 않는구나. 이레네에서 추가로 온 전서구는 없나?"

"예. 저희 쪽에서도 전서구를 보내봤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썩 좋지 않나 보군."

기사단장은 이를 으득 갈았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기사단장은 말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모두 일어나도록."

"예!"

그렇게 부대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이동 간에 2할의 병력이 낙오되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선방했다고 느낄 정도의 가혹한 일정이었다.

그리고 부대는 무려 일주일 만에 이레네의 근방에 다다랐다.

"지금까지 마주했던 마을 3개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흔적은?"

"확실히 악마가 맞습니다. 몬스터는 아니었습니다. 숫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요. 예상으로는... 아마 이레네가 악마의 군세에 포위되어 고립되었을 겁니다."

"곤란하게 되었군."

방어 시설 자체는 건재하니 그 부분은 안심이다.

문제는 식량이다.

이레네는 지금 급격한 인구 증가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안 그래도 식량 문제로 곤란하던 차에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져 버린다?

시간은 아군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계산된 계획이었던 건가? 각지에서 혼란을 일으켜, 피난민들이 이레네로 몰려들게 해 혼란을 일으키는... 아니.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는 걸까.'

이를 으득 간 기사단장은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찌 됐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레네다.

상황이 어떤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단장을 필두로 부대는 앞다투어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이레네가 서 있는 넓은 평원이 불타고 있는걸.

"세상에."

악마의 하수인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다. 빈민가 곳곳에는 불이 붙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외곽구역의 성벽에는 적군이 몰려들고, 하늘에는 악마로 추정되는 존재가 둘 정도 보인다.

이곳에서 보이는 숫자만 둘이다.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까 위태로운 모습. 상황은 생각보다 더 급박했다.

"대체 어디서 이만한 숫자가 몰려들었단 말인가!"

기사 하나가 분을 못 이기며 뛰쳐나가려 했다.

"당장 돌격해야 합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기사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돌격해봤자, 개죽음밖에 안 되네. 안쪽의 병력과 합류해서 조직적으로 저항해야 해."

기사단장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이곳에 있는 게 정예 중의 정예라도 한계는 있다.

그냥 들이받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려면, 결국 저 병력을 뚫어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예?"

"여기서 말을 전부 버린다."

기사단장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우리는 비밀 통로로 들어간다."

불타는 이레네

* * *

기사단장이 이끈 곳은 부대가 있던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이었다.

이름 없는 산의 중턱에는 화전민 마을의 것인지, 허름한 집 몇 채와 부대 시설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언덕 아래.

무성한 나무로 가려져 웬만한 주의력이 없으면 발견하기 힘든 곳이었는데, 이런 장소에 마을이 있다니.

참으로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장은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집으로 들어가 바닥을 들어냈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커다란 궤짝이 드러났다.

궤짝을 여니 식량이나 성수, 기본적인 무기, 간단한 마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이레네 건설 초기에 미리 준비해놓은 곳이네. 다행히 관리가 잘 되고 있었군."

기사단장은 성수와 식량, 무기를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병사들은 마른 건량과 육포를 씹었다.

육포가 질겨서인지, 아니면 마지막 식사라서인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휴식을 취한 뒤.

기사단장은 마을의 구석 자리로 이동했다.

우물이 흙과 돌 따위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기사단장은 시간을 들여 흙을 걷어냈다.

그러자 우물을 덮은 쇠판이 눈에 들어왔다.

두껍고 무거워 혼자서는 들기도 어려운 물건이었는데,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드드득.

기사단장은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는 쇠판을 옆으로 밀어냈다.

봄날의 햇빛이 우물 속에 들이쳤다.

데일은 그 안쪽을 살피며 생각했다.

'깊군.'

깊다. 우물치고는 깊어도 너무 깊다. 자칫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가는 그대로 비명횡사할 깊이였다.

기사단장은 궤짝에서 꺼낸 밧줄 사다리를 우물에 걸며 말했다.

"이레네로 통하는 비밀통로네. 지하수로랑 연결되어 있지."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소."

"자네가 알았다면, 그게 어찌 비밀통로겠나?"

"...."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데일은 가장 앞서서 우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굳이 밧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에 낙하해 쿵! 하고 두 다리를 딛고 땅에 섰다.

기사단장의 말대로 우물의 바닥에는 다른 곳으로 통하는 널찍한 통로가 있었다.

발아래에는 물이 찰랑이는 게 느껴졌다. 지하수가 스며든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지하 속에 으레 숨어 사는 몬스터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다리가 무식하게 많은 벌레 몇이 벽을 기어 다닐 뿐이다.

데일이 위쪽에 말했다.

"문제없소! 내려오시오!"

데일의 외침에 병사와 기사들이 하나둘 내려섰다.

그들도 이렇게 넓은 통로가 이레네까지 쭉 나 있다는 데에 놀라워했다.

'돈지랄을 제대로 했군.'

데일이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이 비밀통로가 적에게 발각되었으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어차피 많은 숫자가 이 통로를 이동하면 위에서 알아차릴 수 있게끔 조치를 해두었네. 그리고 이 통로 끝에 있는 건 외곽구역이야. 상위구역이나 황궁으로 통하는 통로를 이리 숨겨두었을 리는 없지 않나?"

어차피 외곽구역으로 통하는 통로니 들켜도 큰 상관 없다는 걸까.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토론할 때가 아니었다.

기사단장을 필두로 횃불을 든 부대가 천천히 이동했다.

어둡고 폐쇄된 지하 통로를 움직이는 건 언제나 정신력을 깎아먹는 짓이다.

수면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똑.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곤 했다.

바닥에 고인 물기도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부대는 별다른 전투 없이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꽤 오래 이동하자. 마침내 위쪽에서 소란이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도 쉬지 않고 진동했다.

"요란하게 싸우는 모양이군. 구역질 나는 놈들."

이레네의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 이 위는 빈민가일 것이다.

지면이 흔들리는 건, 적군이 발을 구르는 탓일 거고.

'빈민가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데일은 그가 오갈 때마다 달려오던 아이들을. 사람들을 모아 일을 벌이던 장물아비 아이렉을. 그리고 자신을 무슨 신처럼 모시던 암흑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과연 이번 침공에서 무사히 성안으로 대피할 수 있었을까?

은근히 빈민가를 깔보던 성안 사람들이 그 정도 시간을 주었을까.

데일은 부디 그랬기를 바랐다.

만약 성안 사람들이 자기만 살려고 빈민가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성문을 닫았다면.

그랬다면 데일은 또 한번 사람에게 실망했을 테니.

찰박.

마침내 풍경이 변했다. 바닥에 찰랑이던 물은 냄새나고 끈적한 오수가 되었다.

이레네의 지하수로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앞으로 복잡하게 길이 갈렸는데, 데일은 기사단장을 멈춰 세웠다.

"잠시만 멈춰주시오."

"무슨 일인가?"

"지금 기사단장께서는 어디로 향하는 길이시오?"

"일단 황궁으로 가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상황을 전해 들어야겠지."

"지금 당장 외곽구역이 무너져도 안 이상한 상황이오."

기사단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기사일세. 일단 폐하 곁으로 달려가야 해."

"그러면 이만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소."

기사단장에게 그만의 사정이 있다면, 데일에게도 데일의 사정이 있다.

데일의 선언에 아쉬운 표정을 짓던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간 고마웠소."

"하하! 이 친구. 뭘 영영 못 볼 것처럼 얘기하나. 폐하께 보고만 드리고, 나도 곧바로 싸우러 나올 거네."

데일과 기사단장은 악수를 나누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데일은 이 위대한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

헤어짐이 아쉽다.

기사단장이 부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기사들도 있었지만, 데일이나 하켄처럼 용병들도 있었고, 귀족 가문의 자제와 사병들도 있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겠지. 이만 흩어질 시간 같군. 내가 길을 알려주겠네."

기사단장은 복잡한 지하수로의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고 시간을 허비하게 될 수도 있다.

데일도 기사단장의 설명을 유심히 들었지만....

'음. 전혀 모르겠군.'

그냥 포기하고, 평소처럼 하티와 하켄에게 길 안내를 맡기기로 했다.

그렇게 설명을 끝마친 기사단장은 걸음을 옮기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뒤. 데일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검을 다루는 솜씨가 늘었더군. 새로 스승이라도 구한겐가?"

"그런 셈이오."

"잘 됐군."

그 말을 끝으로 기사단장은 사라졌다.

부대도 흩어져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데일과 하켄은 카일라의 여관이 있는 5구역으로.

에스델은 교단이 있는 6구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헤어지기 직전. 데일이 에스델에게 물었다.

"괜찮겠나? 우리랑 함께 가는 게 더 안전할 거다."

에스델이 고개를 저었다.

"한시라도 빨리 교단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요. 별문제가 없다면 저도 여관으로 가서 합류할게요."

데일은 조금 불안한 기분을 느꼈지만, 에스델의 의지를 꺾기는 힘들어 보였다.

"조심해라. 위험한 순간이 오면 괜히 나서지 말고 혼자라도 숨어라. 내가 찾으러 가겠다."

"믿고 있을게요. 그럼 이따 뵈어요! 하켄도 괜히 엄한 짓 하지 말라고요."

"어. 둘이서만 얘기해서 나는 까먹은 줄 알았어. 섭섭할 뻔했네. 근데 엄한 짓이라니. 사제 양반은 나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부러 밝게 웃어보인 에스델도 걸음을 옮겼다.

데일과 하켄도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불쾌하고 어두운 지하수로를 걸었다. 하티는 윤기 나는 털에 오물이 묻어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지면의 진동은 심화되고 있었다.

이따금씩 자지러지는 비명 같은 것도 들려왔다.

지상의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데일은 속도를 올렸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오수가 무릎까지 차올랐다.

그때. 하켄이 외쳤다.

"어어! 조심해요!"

데일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돌연. 오수 속에서 무언가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데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악어?'

꽤나 거대한 악어였다. 순간 당황했지만, 데일은 반사적으로 양팔을 뻗어 악어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힘껏 비틀어버렸다.

찌직.

주둥이가 찢겨나갔다. 바닥의 오수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 황당한 습격에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 악마의 하수인은 아닌 거죠?"

"그래."

"근데 왜 도시 지하수로에 악어가... 아!"

데일과 하켄은 동시에 옛 기억을 떠올렸다.

도시에 악어를 푼 마법사. 추격. 그리고 하켄의 고향인 늪지 마을에서의 전투.

과거의 기억과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다니.

꽤나 어이없는 심정이었다.

"하하. 그때 경비대장이 못 잡고 놓친 녀석이 있었나보네요."

"수로는 넓으니까. 놓쳐도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일이 이렇게 되니 갑자기 후회가 되네요."

"뭐가."

"...진즉에 말할걸."

죽어서 둥둥 떠다니는 악어를 보니, 자연스럽게 고향인 늪지 마을이 떠오른 모양이다.

죽은 친우와 그의 가족. 그리고 아직 내뱉지 못한 고백.

이레네가 위기에 처하고. 마치 세상이 망할듯한 분위기에 접어들자, 비로소 후회가 드는 것이다.

데일이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늦었다. 이곳에서 일을 해결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면 되는 거야."

"그, 그렇겠죠?"

멋쩍게 곱슬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말했다.

"저도 저지만, 데일 경도 너무 조급한 것 같아요. 겨우 악어 따위가 다가오는데 못 알아채다니요?"

"그건... 그렇군."

뛰어난 시각과 청각을 지닌 데일이 악어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만큼 여유가 없고 조급하다는 증거였다.

하켄치고는 꽤 적절한 지적에 데일도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마침내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과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던 비명과 고함 소리도 보다 선명해졌다.

데일과 하켄은 계단을 단숨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꺄아아악!"

"비, 비켜!"

"살려줘!"

"모두 질서를 지켜주시오!"

아비규환.

도로는 어디론가로 도망치기 위해 급히 이동하는 사람들. 필사적으로 질서를 잡으려는 병사들.

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남의 주머니를 털거나 부정을 저지르려는 도둑들.

칭얼대는 아이.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여인.

'개판이군.'

다들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만큼 당황하는 이유가 있었다.

철퍽!

성벽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흉측하게 생긴 하수인.

수비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하나둘 성벽을 넘어 안으로 침투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 숫자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잖아. 정예병들도 안 보이고. 황제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쨌거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확실하다. 더더욱 빨리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여관에도 도둑이나 하수인 따위가 들이닥쳤을 수도 있다.

데일과 하켄은 혼란한 거리를 헤쳐 빠르게 걸어갔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커다란 게 떨어져 데일 앞에 내려섰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오."

딱정벌레 같은 생김새에 두 다리로 선 거대한 곤충이 데일을 노려보았다.

곤충은 몸에 두른 갑각이나, 손에 든 검 때문에 마치 기사처럼 보였다.

하켄이 중얼거렸다.

"...곤충 기사?"

"반갑소 흑기사. 나는 15위의 악마이자 별을 뒤흔드는 자. 칸타나 님을 섬기는 필돈이오."

데일이 딱딱하게 답했다.

"비켜."

"그럴 수 없소! 당신 같은 강자와 싸우는 것이야말로 나의 기쁨! 당신의 목을 베어 그 영혼과 함께 주인님께 바치겠소! 자! 기사 대 기사로서...."

다음 순간.

데일의 몸이 흐려졌고. 곤충 기사가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

데일의 왼손이 어느새 곤충 기사의 머리를 향해 뻗어오고 있었다.

경악한 곤충 기사가 저항할 새도 없이. 데일은 기사의 머리를 붙잡고 손을 오므리면서 유물 장갑을 발동시켰다.

콰아앙!

곤충 기사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유물 장갑의 폭발 때문은 아니었다.

그전에 이미 데일의 악력이 기사의 머리를 뭉개놓았다.

데일은 머리를 잃은 기사의 몸을 걷어찬 뒤, 말했다.

"비키라고 했어."

지금의 데일은 인내심이 없다.

불타는 이레네

* * *

기사단장은 황제의 알현실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다.

이렇게 허락을 받지 않고 진입하는 것도. 칼을 차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이 제국에서는 기사단장이 유일했다.

그만큼 기사단장은 황제의 신임을 사고 있었다.

"미하일. 어서 오게."

황제는 기사단장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사단장은 권좌에 앉은 황제를 향해 극진한 예를 취했다.

"레딘의 아들이자, 아르투스 가문의 미하일이 대륙의 가장 고귀한 분을 뵙습니다. 제가 부족하여, 이레네가 위험에 처해있는데도 이제야 복귀한 점. 심히 죄송스럽습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저를 벌해주십시오."

"벌하라니! 내가 내려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주었다 들었네. 역시 내가 믿을 건 미하일 자네뿐이야."

미하일은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기사단장은 이번 원정에서 겪은 상황을 간추려 보고했고,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서도 설명받았다.

'악마가 셋이나 몰려왔다고? 그것도 하나는 최소 중위급.'

미하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 난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이만한 군세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아니.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다른 군단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지원 병력을 보내오고 있습니까?"

"모르겠네. 모든 전서구와 전령이 차단당했어. 게다가 내가 그 반란분자들을 어떻게 믿겠나. 필시 이번 일도 그놈들이 연루되었을 터!"

"폐하...."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인데. 좀 더 믿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황제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황제의 말대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럼 이레네의 병력만으로 막아내야 한다는 건가. 가능은... 할지도 모르겠지만.'

피해가 얼마나 커질까.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쉰 기사단장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곧바로 복귀하겠습니다."

"복귀하다니? 어디를?"

"그야 외곽구역이지요. 상황이 위태롭다 들었습니다. 제가 가서 목숨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아. 그런 얘기였군. 그럴 필요 없네."

"...예?"

황제는 한없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외곽구역은 포기할 생각이네."

"...진심이십니까?"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내가 이 자리에서 농담을 던졌던 적이 있나? 애초에 외곽구역과 빈민가는 이 이레네에서 덤에 불과하지 않나."

기사단장이 외쳤다.

"폐하! 저 밖에는 100만이 넘는 폐하의 신민들이 있습니다! 저들을 전부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정말 나의 신민이라면, 기꺼이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많은 인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건, 미하일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오늘따라 이상하군. 악마와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기사단장의 눈이 흔들렸다.

평소였다면 그냥 고개를 수그리고 명에 따랐을 것이다. 그는 황제의 검이니까.

검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참을 수가 없었다.

'...봐선 안 될 건 너무 많이 봐버렸어.'

악마를 토벌했다.

게른하르트와 데일의 분투를. 병사들의 눈물과 환호를 보았다.

희망은 독이다. 평생을 격전 속에 살아온 늙은 기사에게, 희망은 다른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긴 삶에서 처음으로 기사단장은 주군의 명을 거역하기로 마음먹었다.

"봄이 오니 저도 마음이 들떴나 봅니다. 이 나이를 먹고 말이죠."

"너...!"

"폐하. 이 미하일을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이 불충은 악마의 목을 베고. 폐하의 신민들을 지켜내는 것으로 갈음하겠습니다."

"미하일! 네놈마저 나를 배신하려는 것인가!!"

황제의 고함을 들으며, 기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이 이동했다.

험지로 나아가는 그 발걸음은 나는 듯이 가벼웠다.

* * *

"꺄아아악!"

"사, 살려줘!"

점점 더 성벽을 넘어오는 적군의 숫자가 많아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외곽구역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숫자에서 역부족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상위구역에서 기사님들과 마법사님들이 금방 올 거다!"

"아까부터 그 얘기만 몇 번쨉니까! 정말 오는 건 맞긴 합니까?"

"나도 잘...."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 고참병들 마저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성안으로 침투해오는 적군은 더욱 늘어났다.

데일과 하켄. 그리고 하티는 그런 혼란한 거리를 거침없이 뚫고 나갔다.

"저기 여관이 보이네요! 불에 타거나 도둑이 들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행이군."

"일단 잠시라도 앉아서 쉬고 싶네요. 지금은 카일라의 맛없는 맥주도 맛있게 느껴질 것 같아요."

조금 안심하며, 하켄은 여관의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퉁! 소리와 함께 볼트가 날아들었다. 화들짝 놀란 하켄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볼트가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쳐지나갔다.

"...."

이 예리한 기습에 하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을 봤다.

카일라가 쇠뇌를 들고 이쪽을 겨냥하다가, 데일과 하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 뭐예요. 하켄이었어요? 다짜고짜 문을 열길래 강도인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헤헤."

카일라가 귀엽게 배시시 웃어보이자, 하켄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아, 알았으니까 일단 쇠뇌부터 내려놓고 얘기하자고."

"일단 멀쩡한 것 같으니 다행이군."

언제나 그랬듯. 참으로 똑 부러진 여자였다.

데일이 들어서자, 엘레네와 프라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일 경!"

"왔나? 기다리고 있었네!"

엘레나와 프라우가 주인이 돌아온 강아지마냥 쪼르르 달려와 달라붙었다.

데일은 슬쩍 프라우만 밀어냈다.

프라우가 서운한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데일이 물었다.

"별일 없었나."

"별일은 있었는데, 어찌어찌 막아냈어요."

카일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강도들 시체 치우느라 고생 깨나 했어요. 그래도 프라우 씨가 오랜만에 도움이 되었어요."

"하하하! 나한테는 너무 시시한 놈들이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데일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발튼 씨는 숙부를 찾으러 간다고 사라졌어요."

"빈민가 사람들은? 모두 성 안으로 들어왔나?"

"경비대랑 교단의 사제님들이 바깥으로 나가 시간을 벌었대요. 전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경비대장 카달, 그 강직한 드워프와 교단의 전투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해낸 모양이다.

"...."

한차례 설명이 끝나자 침묵이 찾아왔다.

각자 생각할 거리가 있어,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이 고요함은 바깥의 혼란과 대비되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정적 속에서 하켄이 헝겊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카일라. 맥주 한 잔만 부탁해."

"그럴 줄 알고 미리 따라놨어요. 어차피 팔아먹지도 못할 거 같은데. 많이 마셔요.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말고요."

"어차피 취할 정도로 맛있지도 않아."

카일라 서늘하게 노려보자, 하켄은 허겁지겁 맥주를 들이켰다.

카일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하켄 덕분에 분위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그녀가 물었다.

"데일 경. 이제 어떻게 하실 셈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다들 입을 다물고 데일의 의견을 기다렸다. 이곳의 리더는 다름 아닌 데일이었다.

그리고 선택은 리더의 몫이다.

"...."

데일은 바깥을 살폈다.

성벽이 금방이라도 뚫릴 것 같았다.

상위구역에서는 여전히 지원이 없다.

'버렸군.'

황제는 외곽구역과 빈민가를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도.

'상위구역만으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생각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를 포기했다.

황제의 그간 행보를 떠올리면, 그자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건 무용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다.'

승산 없는 싸움이다. 목숨을 걸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다들 짐 챙겨라. 도시를 탈출한다."

"하지만 성벽이 포위되어 있잖아요. 어디로 도망치게요?"

"지하수로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그곳으로 가면 된다."

데일의 결정에 잠시 갈등하던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짐 쌀게요."

"꼭 필요한 것만 챙겨라."

"알겠어요."

카일라는 분주히 움직이며 보따리를 쌌고, 엘레나와 프라우도 배낭을 멨다.

하켄은 그런 셋을 거들었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 들었다.

단 하나. 데일은 카일라가 챙겨든 쇠뇌를 보고 말했다.

"들고 걷기 무겁지 않겠나? 무기라면 더 가벼운 것들도 있는데."

"아버지 유품이에요. 이거라도 챙겨야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여관을 나선 뒤, 한데로 똘똘 뭉쳤다.

혼란 속에서 흩어지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했다.

가게를 떠나기 전. 카일라는 마지막으로 가게를 뒤돌아보았다.

"...."

그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맺혔다.

데일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못난 딸이 결국 아빠 가게를 말아먹었네요."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다."

카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저. 이 일과 적성이 안 맞나봐요. 맥주도 맛없게 만들고...."

"그렇긴 하지."

"...데일 경. 보통 이럴 때는 위로를 하는 거예요."

카일라가 눈을 반개하자, 데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여관을 계속해줬으면 좋겠는데."

"왜요?"

"안 그러면 나를 받아줄 곳이 없으니까. 또 마구간을 전전하는 건 사양이다."

카일라는 피식 미소 지었다. 이 흑기사는 이제 어딜 가서 거절당할 인물은 아니다.

당장 상위구역으로 가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이 허름한 여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카일라는 그게 조금 고마웠고. 기뻤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돌아와서 아예 건물을 새로 지어야겠어요. 일단 땅문서는 챙겨놨으니까요."

역시나 똑 부러진 여인이었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일행은 대로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공주님!"

"아이렉. 무사했군요."

빈민가의 장물아비.

아이렉이 부하들을 이끌고 왔다. 근데, 부하들의 숫자가 좀 많았다.

"오랜만이오."

"아. 데일 경."

"식구가 많이 늘으셨군."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다보니... 어쨌든 공주님이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 경은 지금 어디로 향하는 길인가."

데일은 계획을 짧게 설명했다.

아이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함께해도 되겠나?"

"알겠소."

아이렉의 부하들은 모두 빈민가 태생치고는 제법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군기도 잘 잡혀 있었다.

빈민가의 큰 세력을 담당했던 이다운 역량이었다.

데일은 하켄에게 말했다.

"먼저 지하수로로 향해라."

"데일 경은요?"

"에스델을 찾아오겠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하티. 따라와라."

데일은 하티와 함께 거리를 뛰었다.

그때쯤.

환호와 함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기사단장께서 나타나셨다!"

"폐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거야!"

기사단장이 지닌 상징성은 크다.

기사단장은 황제의 오른팔과 같으니. 그가 참전하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올랐다.

'황제가 정신을 차린 걸까?'

그와 동시에.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4구역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여유 병력은 전부 4구역으로 가!"

"멍청아! 여유 병력 같은 게 어딨는데!"

악마 셋의 펼치는 공세는 몹시도 파괴적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성벽들이 빠르게도 허물어졌다.

'4구역이면 밤의 신전이 있는 곳인데.'

교단으로 향하던 데일은 우뚝 멈춰섰다.

이대로 4구역으로 갈까?

하지만 교단과 밤의 신전은 도시의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한 곳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을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데일은 고민했다. 그리고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우선 교단으로 간다.'

직감.

데일의 감각이 말한다. 지금 당장 교단으로 가야 한다고.

'아까부터 성기사와 사제들이 보이지 않아.'

하얀 법복과 갑옷을 입은 그들은 자연히 눈에 띈다.

하지만 거리 어디에도 성직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교단 앞에 도착하고서 얻을 수 있었다.

본래 교단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병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데일의 후각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이 냄새.

'피.'

무언가 사달이 났다.

불타는 이레네

* * *

아직 성벽이 무너지기 전. 에스델은 교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 드나들던 뒷문으로 들어간 에스델은 황급히 교단 안으로 발을 들였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비명. 칼 휘두르는 소리. 선명한 피 냄새.

에스델은 당황했다.

'저, 적습인가?'

성문을 타고 악마의 하수인들이 넘어오는 상황이다.

그중 하나가 교단에 들어선 걸까?

에스델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형제님들. 자매님들. 그리고 오르단 님. 제발 무사하셨으면...!'

격한 소리가 나는 건 본당 쪽이었다.

예배, 세례, 기타 모든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이자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빠르게 걷던 에스델은 이내 복도에서 다른 사람을 마주쳤다.

아는 얼굴이었다.

"노리스 형제님. 무사하셨군요!"

멀쑥한 사내가 에스델을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에스델 자매님! 여기 계셨군요."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이 싸우는 소리는 뭐고. 다른 형제 자매님들은 대체 어디 계신 건가요?"

에스델은 다급한 마음에 말을 와다다 쏟아냈다.

노리스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찬찬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

에스델이 노리스에게 걸음을 옮기던 그때. 불현듯. 에스델은 노리스의 법복 끝자락이 붉게 물들어있는 걸 깨달았다.

'사람 피?'

이상함을 깨닫고 뒤로 물러서려던 순간. 검을 뽑아든 노리스가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죽어라!"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노리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광경이 선명히 보였다.

그 검 끝은 분명 에스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에스델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도 이제는 풋내기 견습 사제가 아니다.

데일을 따라 여러 전장을 돌았고, 수많은 강적을 상대해봤다.

에스델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카가각!

벼락처럼 내질러진 검끝이 에스델의 옆구리를 훑으며 지나갔다.

찢어진 법복 아래로 사슬 갑옷이 드러났다. 검과 부딪힌 사슬은 깨어져 살갗으로 파고들었다.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치명상에 이르렀어야 할 일격은 피해낼 수 있었다.

항상 갑옷을 입고 다니라고. 지겹도록 말한 데일의 잔소리가 효과를 본 것이다.

"뭣!"

설마 공격이 실패할 줄 몰랐던 노리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다음 일격을 날리려 했다.

에스델은 빠르게 기도문을 읊어, 눈앞에 방벽을 만들어냈다.

단단한 방벽에 튕겨 나간 노리스가 바닥을 굴렀다.

에스델은 방벽으로 노리스를 지그시 짓눌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허억. 말해보세요. 왜. 왜 저를 죽이려고 한 거죠?"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그저 죽여야 하니, 죽일 뿐."

"...예?"

"유감이지만 에스델. 대의를 위해 죽어라!!"

바닥에 짓눌려 있던 노리스가 돌연.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손에는 뾰족한 송곳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새하얀 섬광이 내리치는 게 더 빨랐다.

섬광에 직격당한 노리스는 환한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노리스가 있던 자리에는 재 한 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허억. 허억. 허억."

에스델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신앙의 형제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이다니.

손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멍하니 있던 에스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에스델은 본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윽. 깨진 사슬이 살 속에 파고들었어.'

따끔한 통증에 에스델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상처 자체는 옅다.

문제는 살 속에 파고든 쇳조각이다.

이대로 치유해버린다면, 쇳조각이 살 속에서 곪아 버릴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에스델은 상처를 내버려 두었다.

법복이 점점 붉게 물들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착한 본당.

에스델은 한차례 심호흡한 후, 문을 열었다.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모두 에스델이 아는 얼굴이다. 외부인은 없다. 악마의 하수인도 없다.

모두 항상 보아왔던 형제 자매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신성한 장소에서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검에는 하나같이 피가 묻어 있었다.

"다들... 대체. 이게."

말을 이어가려던 에스델은 입을 다물었다.

저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은 고리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빛을 뿌리며 본당을 환히 비추었다.

그리고 그런 성물의 바로 아래.

본디 주교나 고위 사제가 서서, 예배를 이끄는 자리에 나이 지긋한 사제가 한 명 있었다.

인자한 얼굴. 곧은 허리.

교단 내에서도 큰 어른으로 통하는 인물이자, 에스델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사제.

오르단이었다.

"어서 오렴. 에스델."

"이게. 이게 대체. 다른 사제님들은...."

"진정하렴 에스델. 늘 침착함을 잊지 않고 차분하게 행동할 것. 내가 늘 얘기하지 않았었느냐."

아마도 이 상황을 만들었을 장본인이 그리 말하다니?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오르단의 태도가 오히려 에스델의 피를 차갑게 만들어주었다.

"대체 왜.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이신 겁니까. 대체...."

"우선 방법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주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단다. 동지를 포섭하고, 계획에 방해가 될 성기사나 전투 사제들은 하나씩 배제하거나, 먼 곳으로 발령 보냈지. 그리고 오늘. 악마들이 몰려왔을 때 이렇게 말했단다."

오르단이 목을 가다듬고, 엄숙하게 말했다.

"성 밖 빈민가에도 우리 신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제님들. 위험한 일인 건 압니다. 그들을 구해주시겠습니까?"

오르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단 한 명도.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더구나. 모두 바깥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용감하게 달려나갔단다. 같은 인간으로서 존경스러울 정도지."

"당신...."

"하지만 그들은 생각했어야 해. 자신들이 빠져나가면, 이제 교단은 누가 지킬까. 그때부터는 일이 쉬웠단다. 동지들과 칼을 뽑았고, 형제와 자매를 베었지."

에스델은 노리스를 떠올렸다.

친근하게 다가와 칼을 휘두르던 형제를.

이들은 익숙함과 친분이라는 칼날을 휘둘러 형제자매를 죽였다.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던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에스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르단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네가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건 방법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을 벌였는가겠지."

"대체... 악마. 악마에게 홀린 것이군요?"

"그래 보이느냐?"

오르단이 양손을 마주 대자, 경건한 빛이 흘러나왔다.

빛의 신성.

악마의 추종자가 아니라는 증거.

에스델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

"신께서는 믿음에 대한 대가로 힘을 내려주신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지. 하지만 저 신이라는 작자는 그저 대가를 바치면 힘을 내려줄 뿐이란다. 그 힘을 어떻게 쓸지는 개개인의 선택일 뿐. 어떻게 보면 악마랑도 다를 게 없어. 대가를 지불하고, 힘을 받는 계약 관계라는 점에서 말이지."

"신성 모독입니다! 신께서 이런 일을 용서하실 것 같습니까? 신벌이...!"

오르단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사제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 그 끝에 맺힌 피가 똑, 하고 바닥에 부딪혔다.

오르단은 비웃는 듯.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신벌을 내리실 거면, 우리가 칼을 뽑아 형제자매들을 모두 참살하기 전에 내리셨겠지? 내가 일을 벌이기 전에는 알아채지도 못한 자다. 혹은. 알았어도 말할 방법과 의지가 없었거나. 어디 시험해볼까?"

오르단은 공중에 떠 있는 성물을 향해 활짝 팔을 벌리며 외쳤다.

"자! 듣고 있으시면 제게 신벌을 내려주십쇼!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양이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벼락을 내려 저와 제 동지들을 벌해, 당신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하지만 벼락은 없었다. 당연히 천벌도 없었다.

성물은 그저 은은히 빛날 뿐이었다.

오르단은 팔을 내리고, 표정을 굳혔다.

그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무감정했다.

"그래. 늘 이런 식이었지. 나의 가장 소중한 아이가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도. 항상 방관할 뿐이었어."

하늘은 응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두 다리로 홀로 서야 할 때가 온 거란다. 의지하지 않고, 누군가의 추종자로서가 아닌, 오롯이 인간으로서."

"지금 악마가 저 바깥에 있어요. 전부 죽게 생겼다고요! 근데 두 다리로 서겠다고요?"

"적어도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겠지.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단다. 그분은 악마 같은 건 진작 굴종시켰으니."

"대체 그분이라는 게...."

오르단이 에스델의 말을 끊었다.

"그만. 대화는 이걸로 끝이다. 이제 선택할 시간이란다. 나는 에스델 너를 높게 평가한다. 그 품성과 의지. 타고난 재능은 때로는 눈부실 정도지. 정말로 신이 선택한 아이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단다."

에스델은 오르단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저를 회유하려는 게,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닐 것 같은데요."

"물론. 실리적인 이유도 있다. 너는 성녀의 대체자라 불릴 정도로 교단에서 많은 기대를 사고 있지. 그런 네가 우리 쪽으로 돌아선다면... 앞으로 할 설득들이 더 쉬워지지 않겠느냐."

오르단의 말이 끝나자, 그 옆에 선 사제들이 하나둘 천천히 다가왔다.

눈동자에는 진한 살기가 번뜩였다.

만약 여기서 에스델이 전향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에스델을 죽일 생각이다.

에스델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이내 벽에 등이 가로막혔다.

더 뒷걸음칠 공간은 없다.

'에스델. 받아들이렴. 설령 거짓말이라 해도. 알겠다고 해.'

오르단은 에스델의 올곧은 성품을 안다. 여기서 만약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면.

설령 그게 거짓말이라 해도, 더는 이전의 에스델은 없을 것이다.

'그거면 돼. 그거면.'

사제들이 점점 다가간다. 그들이 든 검끝도 점점 가까워진다.

에스델은 고개를 수그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됐다.'

오르단은 성공을 직감했다. 그녀가 알던 에스델이라면,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없다.

에스델이 고개를 들었다. 결정을 끝마친 얼굴.

에스델이 청명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오르단 사제님. 아니. 오르단."

"그래. 드디어 결정을 내렸구나."

하지만 이어서 나온 말은 오르단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당신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뭐?"

"저는 여신을 믿습니다. 설령 저희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으신 분이라도... 그분이 지금껏 저희를 위해 해오신 일들이 헛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너."

그렇게 말하던 에스델은.

정말이지. 그녀답지 않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오르단. 당신처럼 신께서 도와주길 기다리고 있다가, 멋대로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직접 그분의 뜻을 지상에 펼칠 겁니다."

에스델이 자세를 잡으며 양손을 펼쳤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결투재판입니다! 무력으로 저를 꺾어보십시오! 신께서 더 옳은 쪽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에스델... 너. 변했구나."

거절할 가능성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호전적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 흑기사랑 다니더니. 변했어. 기껏해야 설전이나 벌일 줄 알았는데."

"데일 경과 함께하라고 한 건 오르단. 당신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후회되십니까?"

"그래. 진심으로 후회되는구나. 그자는 그저 네 신앙을 흔들기 위한 도구였건만. 오히려 네 의지를 굳건히 하다니."

탄식을 내뱉은 오르단이 싸늘하게 말했다.

"죽여라."

검을 든 사제들이 달려나갔다.

에스델은 재빨리 기적을 준비했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두렵다.

왜 아니 두렵겠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애초에 호기롭게 덤비라고 외친 것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렵더라도, 목숨의 위협 앞에 꺾이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데일 경이라면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가 믿고 따르는 기사는 분명, 오르단이랑 지루한 설전을 벌이며 설득하려는 대신.

마검을 붕붕 휘둘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것이다.

에스델도 그리했다.

그녀의 버팀목인 오르단이 사라진 지금. 그녀가 믿고 존경하는 이는 데일뿐이었으니까.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꺾이지는 않는다.

에스델이 기적을 준비하고, 오르단 역시 기도문을 읊으며, 사제들이 검을 휘두르려는 그때.

챙캉!

벽면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산산이 조각나며 흑기사가 날아들었다.

* * *

온 도시에 적군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명과 고함이 끊이질 않는다.

늘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대던 에리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꼬리를 굳게 내리고 있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말이죠."

에리얼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언제나 한산하던 밤의 신전에는 지금. 밤의 신도들이 모두 모여 벌벌 떨고 있었다.

대부분은 암흑가의 주민들이다.

굶주리고. 힘없고. 삶에 남은 거라고는 신앙뿐인 이들.

이들이 위협을 피해 마지막으로 몸을 위탁한 곳은, 당연하게도 밤의 신전이다.

그리고 이들을 받아주는 건 에리얼의 의무다.

아직 이들은 밤의 여신의 서늘한 품에 안기기에는 너무 이르다.

더 이어가야 할 삶이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서로의 양면이니. 죽음을 상징하는 밤의 여신은 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다.

'삶이 아름다울수록, 죽음 역시 가치 있는 법.'

어쨌거나 이곳에 처박혀서 우아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별로 교리에 맞는 행동은 아니다.

에리얼은 몇 안 되는 사제를 모아놓고 말했다.

"도시를 탈출해야겠어요. 우리의 폐하께서는 시민들을 전부 버리신 모양이니까요.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하, 하지만 도시를 어떻게 탈출하죠?"

"일단 밖으로 나가죠. 성벽이 무너지고 적들이 안으로 밀려들면. 반대로 틈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과 합류할 수도 있고요. 뭐든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백만스물하나. 백만스물둘."

"저기 마스터 루드비히도 잘 챙기시고요."

사제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신도들은 전투 능력이 없다. 그런 이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누구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에리얼도 내심 그 어려움을 알기에 일부러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지도자가 흔들리면 그 아래까지 흔들리기 마련이다.

'이럴 때 데일 경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원정을 나갔던 부대 중 일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데일 경은 어딨는 거지. 설마.'

에리얼이 고개를 휙 들었다.

'여기 말고 딴 데부터 들른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데일이 자신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해도(에리얼은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른다).

데일은 밤의 여신의 기사이자, 교의 얼굴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다른 곳을 먼저 들렀을 리는 없다.

'분명.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 거겠지.'

에리얼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신전을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때.

위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피 냄새가 자욱한 무리가 신전 안으로 밀고 내려왔다.

악마의 하수인들. 그 숫자가 못해도 30은 넘는다.

머리가 세 개에, 여섯 개의 팔을 단 하수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신도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에리얼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녀는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그 더러운 발을 들이는 걸까요."

"밤을 따르는 갈보야. 내 직접 네 목을 베어, 그 피로 이 불길한 공간을 가득 메울 것이다."

머리 세 개 달린 하수인이 쿵쿵 걸어왔다.

에리얼이 한숨을 내신 뒤, 뒤쪽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모두 눈을 감아주세요."

"사, 사, 사제장님. 하지만."

"어서요. 혹시라도 실눈을 뜨거나 그러시면 안 돼요?"

끔찍한 괴물들을 앞두고 눈을 감으라고?

모두 두려움에 덜덜 떨었지만, 그래도 사제장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다시 고개를 돌린 에리얼은 눈을 가린 안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름은... 뭐. 그런 건 알 필요 없겠죠."

에리얼은 안대를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잠깐의 정적.

에리얼은 다시 뒤를 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제 눈뜨셔도 좋아요."

"예, 예?"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수인들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연기가 바람 속에 흩어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신도 하나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어. 그. 방금 그 괴물은 어디 갔나요?"

"괴물이라니요? 다들 꿈이라도 꾸셨나요?"

"...."

에리얼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리얼은 평소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요. 제가 이 자리를 카드놀이로 따냈다고 생각했나요?"

불타는 이레네

* * *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산산이 조각나며 허공에 비산했다.

본당을 가득 채운 빛을 색유리가 반사하며 아름다운 색으로 공간을 수놓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온 불청객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데일은 마검을 들고 에스델의 앞에 섰다.

"데일 경!"

"조금 늦었다."

"아뇨. 딱 맞춰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흑기사의 등장에 사제들은 주춤했다.

오르단도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입꼬리를 누그러트렸다.

"아. 데일 경. 오랜만이군요. 근데 4구역 쪽 성벽이 무너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밤의 신전을 내버려두고, 이곳으로 와도 되는 건가요?"

"...."

너무나 옳은 지적에 데일은 가슴이 쿡 찔린 기분이었다.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 가장 아픈 법.

"에리얼이... 알아서 잘할 거다."

"사제장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시군요. 그럴만해요. 에리얼 사제장은 이쪽에서도 요주의 인물이니."

사실 딱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데일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오르단이 말을 이어갔다.

"저 개인적으로는 경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감사?"

"경이 교단의 시선을 끌어준 덕에 일을 수월히 꾸밀 수 있었고, 경을 이용해서 귀찮은 작자들을 제거할 수도 있었죠."

데일은 오르단이 무얼 말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보물고에서 우리를 습격한 성기사. 역시 네 짓이었군."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제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분명 궁금하시겠죠."

"아니."

"궁금하시다면 그 이유를... 예?"

"전혀 궁금하지 않다."

데일은 단호히 말했다.

시간도 촉박한데, 늙은 배신자의 설교를 들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무슨 의미시죠?"

"남에게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려는 건, 본인 스스로도 자기 행동이 켕긴다는 증거니까. 자기 자신조차 믿지 않는 설교 같은 건 들을 필요가 없다."

이번엔 오르단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진실이 가장 아픈 법. 늘 침착하던 오르단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여신의 종 주제에...."

"시작하자."

데일이 마검을 쥐고 앞으로 걸어나가자, 사제들이 황급히 그 앞에 마주 섰다.

오르단도 눈을 형형히 빛내며 양손을 앞으로 향했다.

손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데일이 봐 왔던 어떤 사제의 신성보다 더 짙은 힘이었다.

오르단이 비웃듯이 말했다.

"빛은 어둠의 상극. 수천 년간 교단은 어둠을 사냥하기 위해 발전해왔어요. 당신이 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뭐. 한번 붙어봐야... 알겠지!"

데일은 말하는 와중에 아주 자연스럽게 도끼를 던졌다.

웬만큼 경험 많은 전사가 아니고서야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기습.

도끼가 팽그르르 돌아가며 날아오자, 오르단이 급히 기적을 외웠다.

"방벽이여 나와라."

신에 대한 감사도, 경탄도 없다.

그건 이미 기도문이 아닌 마법사의 주문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기적은 발동되었다.

빛의 방벽이 도끼와 부딪혔다.

꽝!

방벽이 깨지고, 도끼가 힘없이 떨어졌다. 이런 일을 성사해낸 인물답게 오르단의 기량은 대단히 뛰어났다.

오르단이 분노하며 외쳤다.

"명예로운 기사라 들었는데 이런 비겁한 기습을!"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법이지."

데일은 짐승처럼 내달렸다.

사제들이 검을 뽑으며 급히 제지하려 했다. 데일은 그 움직임을 보며 비웃었다.

'형편없군.'

익숙함을 무기로 형제를 찌른 자들이다. 그 실력은 대단할 게 못 되었다.

마검이 한번 번뜩였다.

가장 앞에 있던 사제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이, 이런. 빛이여!"

당황한 다른 사제들이 곧바로 섬광을 터트렸다.

신벌 기적이 데일을 향해 쇄도했다. 데일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리고. 곧장 어둠을 흩뿌렸다.

사아아악!

새벽 안개가 데일을 감쌌다.

여러 방향에서 쏟아져온 섬광이 안개를 두드리고, 금방이라도 어둠을 찢어발길 것 같았지만....

놀랍게도 새벽 안개가 도리어 빛을 밀어내었다.

빛을 먹어치우는 어둠.

경악하는 사제들에게 데일이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를 필요조차 없었다.

단 일격을 버텨내는 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데일이 사제들을 전부 뭉개놓을 상황.

오르단이 재빨리 가세했다.

"빛이여 저 자를 녹여라!"

펼쳐진 양 손바닥에서 두 쌍의 섬광이 뿜어졌다.

에스델이 곧바로 방벽을 전개해 섬광을 막아냈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지킬 벽을!"

"건방지구나! 네가 날 상대할 성싶으냐!"

빛과 빛이 맞섰고, 꺾였고, 산란했다. 무지개색 프리즘이 온 사방을 메웠다.

하지만 아직 에스델은 오르단의 적수가 아니었다.

방벽이 으스러지며, 남은 섬광이 데일을 덮쳤다.

섬광은 그대로 데일의 오른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데일은 고통을 느꼈다. 영혼의 고통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팔 아래가 허전했다.

'그래. 상극이 맞긴 하군.'

오르단도 눈썹을 찌푸렸다.

"평범한 흑기사였다면 방금 그걸로 팔이 날아가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타들어 갔어야 하는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이상할 정도로 빛에 내성이 있군. 아주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오르단이 지껄이든 말든. 데일은 죽은 사제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어 생기를 흡수했다.

사라진 팔은 금방 재생되었다.

'그래도 교훈을 하나 얻었군.'

저 섬광에는 절대 닿으면 안 된다.

데일은 마검을 휘둘러 아직 살아있는 사제들도 모조리 베었다. 이제 남은 건 오르단 하나뿐.

그러나 오르단은 여전히 침착하다.

데일을 죽이기 위해 또 다른 기적을 완성한 상태.

'보고 피하면 늦어. 마법 반사 망토는... 아직 사용하기 못 하는 데.'

빛보다 빠를 수는 없다. 오르단이 기적을 쏘아 보내기 전. 미리 몸을 던져야 했다.

데일은 오르단의 눈을 읽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 그리고 그 손끝이 향하는 방향.

데일이 몸을 던졌다. 다음 순간. 그가 서 있던 빈자리에 섬광이 직격했다.

콰과과과!

단단한 판석이 순식간에 소멸할 정도로 강력한 기적.

가까스로 피해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오르단이 손을 움직이자, 계속해 뿜어져 나온 섬광이 데일을 따라왔다.

"이런."

섬광에 집어삼켜질 판.

데일은 마검을 빠르게 휘둘러 몸 앞에 검으로 된 장벽을 만들어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검이 휘둘러지고. 마검에 잘려나간 빛자락이 화려하게 흩어졌다.

빛을 잘라내는 검사.

"검술이 제법이군요. 하지만!"

콰아아!

빛무리가 더욱 진해졌다.

데일은 여전히 빛을 잘라냈지만, 미처 잘라내지 못한 빛무리가 데일을 덮쳤다.

그 단단하던 갑옷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이대로면 끝장이다 싶은 그때.

에스델이 오르단을 향해 천벌 기적을 날렸다.

아무리 오르단이라도 방어해내야 한다.

데일을 향하던 빛무리가 다시 에스델에게 향했다.

에스델이 벌어준 천금 같은 기회.

데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보다 기량이 더 뛰어나. 일단은 접근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아.'

오르단은 강하다.

마치 신성을 마르지 않는 샘처럼 펑펑 써댄다.

데일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기량이다.

게다가 둘 간의 상성 차이도 문제였다. 데일의 단단한 갑옷도 오르단 앞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대로 피해 다니기만 해서는 승산이 없어.'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잠깐이라도 실수했다가는 그대로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접근해야 한다. 거리를 좁혀 공격해야만 한다.

하지만 저 무한한 신성력을 뚫고 어떻게 접근한다 말인가.

차라리 여기서는 전략적인 후퇴를....

'아니. 꼭 접근할 필요는 없지.'

본당을 둘러보던 데일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어쩌면 승리로 이를 수 있는 열쇠를.

그때.

에스델이 소리쳤다.

"데, 데일 경! 더는 못 버텨요!"

에스델이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에스델이 먼저 소멸될 판.

고민의 시간은 없다.

데일은 한걸음 크게 내딛고. 허리를 힘껏 돌렸다. 양손에서 뻗어나간 마검이 허공을 날았다.

휘릭!

"하찮은 수작을!"

오르단이 즉각 반응했다.

에스델을 압도하던 빛 무리로 곧바로 장벽을 만들어내려 했다.

하지만 마검이 그리는 궤적이....

무언가 이상하다!

"뭐?"

빠르게 날아간 마검이 이내 목표물에 적중했다.

본당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성물.

거대하고 신성하며, 따뜻한 빛을 발산하는 은 고리.

예배일에는 모든 신도들이 와서 저 성물을 향해 기도를 했고, 여신의 따스함을 피부로 느꼈다.

그런 성물에 참으로 불경스럽게도, 마검이 부딪혔다.

신심을 모두 버린. 아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오르단도 잠깐이지만 굳어버렸다.

쿵!

다음 순간.

마검에 적중당한 은 고리가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그리고 그 낙하지점에 있는 이는 바로 오르단.

오랜 숙원을 성공한 만족감을 더 키우기 위해, 예배를 주관하는 자리에 서 있던 게 문제였다.

당황한 오르단은 곧장 섬광을 쏟아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성물은 조금 늦춰질지언정, 계속해서 오르단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당연했다.

신성이 가득 깃든 성물을 같은 신성으로 밀어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오르단은 이날을 위해 오래도록 수련해온 사제다.

'끝까지...!'

오르단은 모든 힘을 끌어내 신성을 끌어냈다. 지나친 혹사로 눈과 입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의미 없는 발버둥은 아니었다.

오르단이 펼쳐낸 기적은 성물이 떨어지는 걸 막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

바로 마검이다.

성물과 부딪혀 추진력을 잃은 마검이 뒤늦게 떨어져내렸다.

그 검날을 아래로 향한 채로.

그리고 검끝과 신성이 부딪힌 순간. 오르단이 펼쳐낸 장벽에 금이 갔다.

오르단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쿠웅!

가로막혀 있던 성물이 아래로 떨어져내려 오르단을 덮쳤다.

자욱한 먼지가 한 차례 피어오르고. 다시 걷혔을 때.

오르단은 은 고리 아래 깔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가슴에는 마검이 수직으로 박혀 있었다.

"...음. 이 정도로 잘 될 줄은 몰랐는데."

데일은 투구를 긁적였다.

분명 해볼만 한 시도라 생각했고,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성공할 줄이야.

도리어 데일이 당황할 정도였다.

'운이 좋았나? 아니. 분명 마검이 허공에서 부자연스럽게 움직인 것 같았는데.'

마치 어떤 의지가 개입한 것처럼, 마검이 저 스스로 움직인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그냥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걸까?

어쨌거나 성물에 깔리고, 마검이 꿰뚫린 오르단은... 마치 신의 천벌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째서. 왜 이제서. 왜 이제...."

오르단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움직임을 멈췄다.

초점 없는 그 눈동자는 공허하다.

배교자는 마지막에 눈에 담은 풍경은 무엇일까.

데일은 오르단에게 다가가 마검을 뽑았다. 함께 걸어온 에스델은 착잡한 얼굴을 했다.

형제 자매들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처럼 따르던 자의 배신.

한 개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에스델에게 그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도시가 무너지려는 지금. 형제자매들의 장례마저 치러줄 수 없었다.

"가자. 도시를 탈출해야 한다."

"...예."

데일은 일부러 에스델을 재촉했다. 이런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게 제일이었다.

본당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데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전의 아름답고 경건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쑥대밭이 된 폐허만이 그곳에 있었다.

문득. 데일은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데일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여사제의 시신을 교단으로 운송해온 다음 날.

여러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중에는 이교도 기사가 교단을 쑥대밭을 내기 위해 침입했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예언이 되었다.

소문은 실현되었다.

'얄궂군.'

그때.

에스델과 데일이 완전히 건물을 나서려던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은 고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데일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빛에는 공격성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빛 무리가 에스델을 한차례 휘돌더니 그녀의 손목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빛은 팔찌가 되었다.

"이건... 성물?"

"선택받았나 보군."

"...."

성물의 선택을 받다니.

빛의 신자에게는 대단한 영광이다. 하지만 에스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쁘지 않나?"

"기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네요."

씁쓸하게 미소 지은 에스델은 텅 빈 본당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몸짓인지 데일은 알 수 없었다.

성물을 내려준 신에 대한 감사인지.

죽어버린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한때 어머니였던 배신자에 대한 작별인지.

데일은 묻지 않았다.

성물이 생겼다. 그리고 에스델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가자."

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

불타는 이레네

* * *

"사, 살려줘!"

"으아악!!"

거미처럼 생긴 거대한 악마가 성벽에 기어올라 마구 날뛰었다.

그 흉측한 여덟 개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병사들은 몸이 바싹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악마의 뾰족 튀어나온 위턱이 병사들을 꿰뚫었다.

병사의 몸에서 순식간에 체액이 빨려나갔다.

퉤. 하고 쭈그러든 병사를 뱉어낸 악마가 외쳤다.

"시시한 것들아! 도망치지 말고 기개와 근성을 보이란 말이다!"

호전적으로 외친 악마는 여덟 다리를 굴렀다. 단단한 성벽의 일부가 허물어졌다.

무너진 돌 틈으로 악마의 군세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인간들은 겁에 질려 무력하게 쓸려나갈 뿐이었다.

'너무 쉽군.'

쉽다. 저항이 생각보다 약하다.

악마는 고개를 들어 내성을 살폈다. 인간들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곳.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지?'

의아했다. 외곽구역이 전부 날아가면 상위구역이라고 안전할 수는 없다.

그 두꺼운 성벽으로 어찌어찌 공성은 해낼 수 있지만... 포위된 상태에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말려죽인다면 어떻게 버텨내겠는가.

그렇기에 악마들은 황제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아라단테스.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악마가 멍하니 있자, 머릿속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악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게."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죽고 싶지 않다면.]

"죄송합니다."

악마는 황급히 움직였다.

가슴 속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굴욕!

살면서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온 우주를 여행하며 수많은 별을 잡아 먹어온 이 아라단테스가, 저런 하찮은 것에게 고개 숙여야 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목소리의 주인을 물어뜯고 싶었다.

독을 주입하고. 줄로 칭칭 감아 산 채로 그 체액을 빨아먹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아라단테스가 어찌 해보기에는 너무 강하다.

자신보다 더 강한 아르구르마저 굴복하지 않았던가.

'기회를 보겠다. 만약 틈이 생긴다면... 반드시 죽여버리겠어.'

분노를 불태우며 아라단테스가 움직이려던 그때. 돌연. 악마는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본능이 울리는 경종이었다.

곧바로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오른쪽 다리 두 개가 잘려 나갔다.

다리를 잘라낸 장본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전장에서 한눈을 팔면 쓰나! 눈도 많은 친구가!"

그 얼굴을 알아본 아라단테스가 외쳤다.

"기사단장!"

"알아봐주니... 고맙군!"

써억!

어느새 악마의 오른편에 당도한 기사단장이 이번에는 왼쪽 다리 하나를 잘라냈다.

균형을 잃은 아라단테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명망 높은 기사단장이 아닌, 암살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솜씨.

하지만 다리를 잃었다고 아라단테스가 기동성마저 잃은 건 아니다.

아라단테스는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분사했다. 쑥 튀어나온 거미줄은 저 멀리 있는 성벽에 닿았다.

다음 순간. 아라단테스는 거미줄을 되감아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나!"

기사단장은 악마의 몸에 올라타, 그 단단한 갑각을 휙휙 잘라버렸다.

아라단테스는 급소가 될 부분은 필사적으로 가리려 했다.

더듬이가 잘려 나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며. 눈알이 꿰뚫렸지만.

끝끝내 목숨만은 사수해냈다.

그렇게 기사단장과 함께 날아가던 아라단테스는 돌연. 땅을 크게 박차 성벽 밖으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악마를 썰어대던 기사단장이 물었다.

"허. 이 친구야. 자네는 이미 끝장이지 않나. 곱게 죽으면 안 되겠나?"

"크, 크하하! 멍청한 놈! 너희 인간들만 함께 싸우는 줄 아느냐!"

"뭐?"

그때.

바닥에 널브러진 악마를 향해 또 다른 악마 둘이 접근해왔다.

딱딱한 등껍질로 둘러싸여 몸을 둥글게 말고 굴러다니는 덩치가 하나. 크기는 작으나, 온몸에 눈알이 박혀 있는 악마가 또 하나.

그들은 기사단장을 비웃듯이 말했다.

"기사단장.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성 싶으냐?"

"네 그 잘난 기사들은 어디갔지? 나이가 들고, 부하들에게도 버림 받은 것이냐?"

그러나 기사단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평온하게 말했다.

"뭔가 했더니. 떨거지 놈들이군 그래. 전략을 아주 잘 세웠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 뭉치기로 한 건가?"

"네놈...."

기사단장의 도발에 악마들이 분노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아라단테스는 더 싸울 상태가 못 되지만, 나머지 둘이서 합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그만."

파도처럼 밀려오던 악마의 군세가 거짓말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그렇게 생겨난 길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상대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다.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모두 예를 지켜라."

악마들은 황급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예를 표했다.

팔다리가 모두 잘려 나간 아라단테스도 어떻게든 땅에 이마를 댔다.

하수인들은 감히 그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기사단장은 미간을 좁혔다.

'대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고 붉은 로브를 입은 자가 옷자락을 바닥에 끌며 천천히 다가왔다.

기사단장이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대체 누구지?'

기묘하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를 중성적인 외향이지만, 도리어 그 중성적인 분위기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법사 특유의 총기 가득한 눈과 전사의 다부진 몸. 그리고 사제의 경건한 분위기를 동시에 지닌 괴인이 그곳에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가슴에 박혀 있는 길쭉한 검이다.

괴인은 심장에 검이 박혔지만, 꿰뚫린 부위에서는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의아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 검만큼은 알아보았다.

검신에 룬이 새겨진 저 고풍스러운 검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룬검? 얼굴 없는 기사가 쓰던 그 검이 왜?'

괴인은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사단장. 오랜만이다."

"...뭐?"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뭐. 그럴 수 있지. 예전의 내 모습은 이제 조금 밖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

기사단장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검을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

악마 앞에서도 의연하게 검을 휘두르던 기사단장이다. 그는 지금, 저 괴인을 앞에 두고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녀석은 위험하다.'

기사단장이 상대해왔던 그 어떤 적수보다도 위험한 냄새가 풍겨왔다.

동시에 기사단장은 강하게 결의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누군지는 모른다.

그 정체를 짐작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눈앞의 괴인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끝장이야.'

기사단장은 몸 안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모든 힘을 쏟아 신체를 강화했다.

이렇게 마력을 소진하면 후에 있을 싸움이 힘들어질 터.

하지만 기사단장은 뒤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미지근한 의지로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니라고. 그의 노회한 직감이 말했다.

기사단장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괴인은 여전히 차분했다.

마치 오랜 친우를 만나 담소라도 나누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다른 기사들은 어딨지? 정예병들은? 설마 황제가 너 하나만 내보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겁이 많고 어리석긴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 작자이니."

"...함부로 그분을 모욕하지 마라."

"그래그래. 네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주지. 그 머저리랑 다르게, 온 평생을 사람들을 위해 살아온 네 헌신은 인정하니까. 그 헌신이 결국 보답받지 못했다는 게 안타깝지만 말이야."

"노옴!"

기사단장이 바닥을 박찼다. 분노를 가장한 기습이다.

가장 강력한 기사의 검격이 괴인을 향해 쇄도했다.

'죽여야 한다. 아니. 하다못해 상처라도 입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레네는 끝장이 날 것이다.

제국과 인류도 그걸로 끝.

적어도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간절한 염원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일격에 머리를 꿰뚫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가슴에 칼이 박혀도 죽지 않는 괴물인 듯하니.

하지만 다음 순간.

괴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검을 뽑아든 괴인이 기사단장의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무슨.'

단순히 신체 능력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기사단장의 호흡을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그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으로 정확히 파고들어 왔다.

기사단장의 공격이 읽힌 것이다!

황급히 검을 되돌린 기사단장은 곧장 상대의 공격을 방어해냈다.

카각!

검이 마주대며 불티가 흩날렸다. 기사단장은 곧장 반격에 나서려 했지만, 상대가 한 발짝 더 빨랐다.

공격. 공격. 그리고 또 공격.

쉼 없이 퍼부어지는 검격은 언뜻 마구잡이로 보이나, 하나하나 계산된 검로를 그렸다.

기사단장은 수비에만 급급했다.

'대체 이게 무슨.'

실로 오랜만이다.

자신을 검술만으로 이렇게 압도하는 상대를 만나는 건.

기사단장의 라이벌이었던 루드비히가 종적을 감춘 이후. 기사단장은 이런 실력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다... 용병왕!'

그리고 기분 탓일까? 상대의 검에서는 그 용병왕의 색채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그렇게 짧은 사이에 수십 차례나 이어진 공방 중에 돌연. 괴인이 중얼거렸다.

"흠. 이 정돈가. 나쁘지는 않지만... 질리는군."

순간. 괴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기사단장은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곧바로 물러서려는 그때.

괴인의 주위로 번개 다발이 쏟아져내렸다.

꽈르릉!

그야말로 번개의 폭풍.

기사단장의 몸을 강한 전류가 관통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찼다.

'마법이라고?'

이런 괴물 같은 검사가, 마법까지 사용하다니?

하지만 놀랄 틈은 없다. 이미 승패는 판가름 났다.

기사단장은 졌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다.

아직 검을 휘두를 수 있고 여력이 있는 지금.

조금이라도 공격해서 상처를 입혀야 한다.

"제국을 위해!!!"

강한 의지와 함께 휘둘러진, 삶의 마지막 일격.

최후에 걸맞는 가장 치명적인 한 수.

먹혔다.

평생을 쌓아 이뤄온 경험이 그리 말했다. 이 일격은 먹혔다고.

하지만 다음 순간.

기사단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텅!

공격이 허무하게 막혔다.

하지만 막힌 것 자체에 대한 놀라움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괴인의 앞에 펼쳐진 눈부시게 하얀 방벽이다.

신성.

"대체. 이게 무슨...."

빛의 여신의 기적을 다루다니? 아니. 마력을 다루던 몸으로 신성까지 사용하다니?

그런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 괴인은 미소 지었다.

"기사단장.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보았어.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아무리 검을 잘 휘두르고. 강력한 마법을 다루고. 막대한 신성력을 사용해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어. 사람은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그 증거가 지금 눈앞에 죽어가는 검성이다.

"하지만 사람은 모이면 모일수록 어리석어져. 당장 저 앞에 악마가 다가오는데 자기들끼리 칼을 들고 서로를 겨냥한다고. 그게 사람이라는 그릇이 가진 한계야. 지금껏 악마들에게 속절없이 밀린 것도 그래서였고."

"너...."

"그러면 방법은 간단해. 사람을 벗어나는 거야. 강력한 힘들을 한 몸에 모아서,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정도로 강해지면 그만인 거지."

"네놈... 설마!"

그제야 기사단장은 상대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하지만 늦었다.

푸욱!

부릅뜬 눈으로 발버둥을 치려던 기사단장의 가슴에 괴인의 팔이 파고들었다.

"크흡."

"그간 수고했어. 네 힘도 잘 써주도록 하지. 그래도 적수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제국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최후를 끝까지 보게 해줄게."

괴인은 기사단장의 머리를 돌려, 성안을 보게 했다.

이미 외곽구역으로 잔뜩 밀려들어간 하수인들은 이내 상위 구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외벽을 공략할 때와 달리 거센 저항이 날아들었다.

당연하다. 기사와 마법사 등. 정예 병력이 모두 모여 있으니.

하지만 만약 여기 있는 악마들과. 이 괴인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단장도 없는데 버텨낼 수 있을까?

"네 이놈! 이런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검성도 나한테는 상대가 안 되는데, 그 누가 나를 막을 수 있겠어?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아. 그러고 보니 이걸 묻는 걸 깜빡했군."

정말 중요한 일을 잊어먹은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괴인이 물었다.

"흑기사. 지금 어딨어. 이곳에서는 데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텐데."

"...데일?"

그 순간. 절망하고 있던 기사단장의 눈에 실낱같은 희망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분명 기사단장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뛰어넘을 인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애지중지 키운 제자가 그러했고.

단시간에 성장하며 놀랄만한 업적들을 세운 흑기사가 그러했다.

'그들이 희망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괴인의 상대가 못 된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금 괴인과 마주치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희망이 여기서 꺾여서는 안 된다. 기사단장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4군단에 대기하라고 명했지. 지금쯤 도움을 청하러 다른 군단으로 향하고 있지 않겠나?"

"흐음. 뻔한 거짓말을 하네. 아니.너무 뻔해서 오히려 더 헷갈리는군."

눈을 게슴츠레 뜨며 고민에 빠졌던 괴인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직접 찾아뵐 테니. 이레네가 무너지면 그때부터는 나의 세상이야. 가증스러운 여신들의 힘도 크게 줄어들겠지. 지금은 저 성벽이 무너지고,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황제가 최후를 맞이하는 걸 지켜보자고."

지금도 성벽에는 악마의 군세가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쉼 없이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숫자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악마들이 공세에 합류했다.

거미와 닮은 악마, 아라단테스는 기사단장에 의해 전투 불능이 되었지만, 다른 두 악마는 건재했다.

이제 몰락이 코앞이다.

그렇게 보였다.

"...."

그때. 기사단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괴인은 그게 기사단장이 자포자기한 증거로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폐하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옳다. 폐하는 미친 사람이다. 가장 가까이서 보필해온 나이기에,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괴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너희 같은 괴물을 상대하려면, 어쩌면 미쳐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소리를...."

쿠구구구궁.

괴인은 말을 멈췄다. 갑작스럽게 지면이 흔들린다. 지진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다.

갑자기 딛고 선 땅이 흔들리자 악마도. 악마의 하수인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진동의 원인을 이내 깨달았다.

공략하려던 성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아니. 성벽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날아오른다고?"

상위구역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성은 지상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하수인들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은 그 광경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제도를 잃으신 경험이 있지. 무려 1000년을 이어온 제국의 수도를 말이야. 그분께서는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네. 그래서 이레네의 건립 초기부터 긴 시간을 들여 준비에 들어가셨지. 언제라도 옮길 수 있는 도시를."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늘로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저 성이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괴인이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날아오른 이레네

* * *

쿠구구궁!

상위구역이 하늘로 떠오른다.

지하수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데일도.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에스델도.

주위를 경계하던 하티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로 날아오른 성이 태양을 가려 긴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웠다.

데일은 중얼거렸다.

"여러 의미로 대단하군."

자기 보신적인 황제.

유난히 깊었던 해자.

부유 마법에 대한 집착.

바깥과 비교해 전혀 별개의 세계처럼 느껴졌던 상위구역.

에스델도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저게 가능한지... 대체 무슨. 이게 동화도 아니고...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이미 일어난 일이다. 부정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상황은 예상을 뛰어넘는 식으로 흘러가지만, 지금 해야 할 건 명확하다.

황제가 시민들을 버리고 성이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악마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렸다.

그런 놈들이 다음으로 노릴 곳은 뻔하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안대로 눈을 가린 엘프 사제장.

에리얼이 데일을 보고 총총 달려왔다.

"데일 경! 여기 계셨군요!"

"무사했나?"

"예. 근데 도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신도들이 다들 데일 경만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아. 잠시 교단에서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교단을 찾아가느라 신전 쪽에는 오지도 않으셨단 말인가요?"

"...."

바람맞은 아내 같은 표정을 짓는 에리얼에게, 데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배신감에 젖어 있기에는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

하늘에 떠오르는 성을 슬쩍 살핀 에리얼은 다시 뒤쪽을 바라보았다.

밤의 신도들과 살아남은 병사들. 그리고 시민들이 에리얼을 따라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도시를 탈출할 생각이라 사람들을 모았어요."

"살아남은 이들은 이게 전부인가?"

"...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하지만 번성했던 이레네의 인구를 생각하면, 결코 많은 수라 할 수는 없었다.

"경도 도시를 탈출할 생각이셨죠? 저희도 같이 데려가주실 수 있나요?"

데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지하수로를 통해 도시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지하수로요?"

데일은 이 밑에 지하수로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사단장이 알려준 길이다. 애초에 그 길로 도시 안으로 들어온 거기도 하고."

"아. 기사단장이... 그런 길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그나저나 기사단장이 성 밖으로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가 어딨는지는 아나? 저렇게 성을 띄워버리며 기사단장은...."

기사단장을 신뢰하는 황제가 도주를 택했다?

불길한 예감이 데일의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기사단장이 악마를 쫓아 전장에 파고든 뒤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기사단이 같이 동행하지도 않았고요. 아마도...."

에리얼은 뒷말을 흐렸지만, 그 의도는 명확히 전달되었다.

하지만 데일은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기사단장은 강하다. 하위 서열 악마 정도는 혼자서 베어낼 수 있어. 고위 서열 악마가 나와도 도주할 정도의 실력자다. 근데 죽었다고?"

"경.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로 입씨름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 말대로다.

벌써부터 악마의 군세가 날뛰고 있었다. 놈들이 피난민들의 후열에 따라붙었다.

속으로 혀를 찬 데일이 말했다.

"사람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라."

"경은요?"

"나는 뒤를 맡겠다."

에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도와주기에는 에리얼이 다루는 힘은 주위까지 말려들게 해버릴 가능성이 컸다.

에리얼이 에스델에게 말했다.

"그쪽이 에스델이죠?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 예. 바, 반갑습니다."

에스델이 당황하며 인사했다.

에리얼은 에스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안대로 가려져 감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에리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에스델. 사람들을 이끄는 걸 도와주세요."

"예?"

"아무래도 사람들 중에는 빛의 신자가 더 많으니까요. 저 혼자서 이끄는 것보다는 에스델이 도와주는 게 사람들을 인솔하기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예!"

에스델과 에리얼은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하수로로 걸음을 향했다.

이미 하수인들에게 쫓겨 마음이 다급해진 사람들은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데일만이 혼자서 그 인파의 흐름에 거슬렀다.

모두가 살기 위해 도망칠 때.

데일은 적들에게로 향했다.

지나치는 시민들중에서는 아는 얼굴도 많았다.

암흑가의 주민. 자주 물건을 샀던 대장장이. 도시를 순찰하던 경비대원. 길거리에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

데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새 이렇게 아는 사람이 많아진 거지.'

고작 1년. 겨우 1년.

이레네에서 길고도 짧았던 시간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묘한 감상을 느끼며 걸어가던 데일은 우뚝 멈췄다.

도망치는 인파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이가 하나 있었다.

밤의 신도에게 업혀 허공을 향해 목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그와 데일의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일까? 왠지 데일은 이 스켈레톤이 데일을 알아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연. 우직하게 검을 내리치던 스켈레톤이 자세를 바로 하고. 목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부웅!

깔끔한 횡베기.

스켈레톤은 데일을 향해 말했다.

"이백만."

스켈레톤을 업은 신도는 쌩하고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데일이 중얼거렸다.

"숙제. 잊지 말라는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데일은 다시 앞으로 걸음을 향했다.

데일과 비슷한 이유로 뒤편에 남은 병사나 신도들이 악마의 군세와 맞서고 있었다.

그들은 데일의 얼굴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데, 데일 경이다!"

"악마 살해자...."

"사, 살았어."

데일은 대답 없이 마검을 곧추세웠다.

흑기사의 발아래에 일렁이는 유난히 짙은 그림자가 적들을 위협했다.

'사람들이 수로를 다 빠져나갈 때까지는... 시간을 꽤나 많이 끌어야겠군.'

상위구역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그 빈자리에 군세가 속속 모여들었다.

아직 악마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악마들도 이쪽에 몰려올 것이다.

만약 기사단장이 죽었다면.

그 기사단장을 죽인 원흉도.

'쉽지 않겠군.'

어려운 싸움이 될 것 같았다.

데일은 이제 강하다. 어쩌면 악마조차도 홀로 상대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만한 숫자에 끝없는 공격을 받으면 아무리 데일이라도 버텨낼 수 없다.

'빌어먹을 황제놈. 그놈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줘야 했는데.'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작자였다.

그렇게 생각한 데일이 짜증 어린 감정을 담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성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함을 눈치챘다.

'뭐지?'

일정 이상 날아오른 성이 더 올라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었다.

마치 성이 너무 무거워서 그 힘을 못 이겨 다시 떨어지려는 모양새였다.

데일은 문제점을 알아챘다.

'왜 성벽과 함께 날아오른 거지?'

상위구역은 성벽 통째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두껍고 높은 벽에는 여전히 악마 하수인 몇이 달라붙어 있었다.

문제는 왜 굳이 성벽까지 들어올렸느냐다.

성벽이란 결국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다.

저렇게 하늘로 떠오른 순간 그 효용은 크게 줄어든다.

오히려 무게만 늘리는 셈이니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꼴이 되는 셈.

지금도 하늘로 날아오른 성은 어찌어찌 움직이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자 악마의 군세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쩌면 저 성이 다시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도망치던 황제와 귀족들을 찢어발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성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

구조적인 문제일까.

미처 이런 부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애초에 성을 하늘로 띄운다는 건 터무니 없는 망상일 뿐이었던 걸까.

'아니.'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직접 마주해본 적은 없지만 그가 아는 황제는 교활했다.

그리 멍청했으면, 이 살얼음판 위에서 수십 년간 제국을 유지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데일의 생각은 적중했다.

황제는 멍청하지 않았다.

악마의 군세가 성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몰려들던 그때.

돌연.

성벽에 쩌적, 하고 금이 갔다.

"!"

자그마하던 금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성벽 전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벽이 무너졌다.

꽈르르릉!

그건. 비유를 하자면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성벽을 이루던 단단하고 무거운 돌덩이가 땅을 향해 낙하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건... 잔뜩 몰려든 악마의 군세다.

꽈광!

이전보다 훨씬 큰 진동이 지면을 울렸다.

무자비한 질량 폭격에 땅이 쩍쩍 갈라졌다.

원시적이지만, 그 어떤 마법과 폭약보다도 강력한 공격.

저런 무식한 공격 앞에서 무사할 존재는 없다.

설령 악마라도 운석처럼 떨어져내리는 바위들에 직격당한다면 목숨을 건사하기 힘들다.

이 어이없는 광경에, 데일은 중얼거렸다.

"...무슨 메테오도 아니고."

아니. 이렇게 한가하게 쳐다볼 때가 아니다.

성벽이 무너지며 점점 더 많은 돌이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쪽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다.

돌과 돌이 서로 부딪히면서 궤도가 튕겨나가고.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도시 전체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꽝! 꽈광!

데일이 서 있던 바로 근처에도 몇 개가 떨어졌다.

굉음과 함께 바닥에 깊은 구멍이 생겨났다.

이런 거에 얻어맞았다가는 데일이라도 무사하지 못하다.

남은 건 하나.

'지하수로로 달려간다.'

데일이 결론을 내린 그때.

문득. 병사들과 전투를 벌이던 하수인들이 움직임을 우뚝 멈춘 걸 깨달았다.

그들 역시 당황한 눈으로 지상을 향해 낙하하는 죽음의 비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내렸고. 이내 지하수로 쪽 구멍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과 하수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

"...."

잠깐의 침묵.

이윽고 병사고 하수인이고 할 거 없이, 미친 듯이 수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무, 무기 버려!"

"비켜!"

"케르르륵!!"

인간과 하수인들이 사이좋게 달린다.

이따금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당장 도망치는 것에 급해 옆에서 달리는 적은 신경 쓰지도 못했다.

꽈르르르!

그 순간. 돌무더기가 본격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데일도 땅을 박찼다. 이 기묘한 달리기 경주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주자들처럼 정직하게 달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뻥!

"케엑!"

데일이 내지른 주먹에 얻어맞은 하수인이 저 뒤로 날아갔고. 이내 떨어져내린 돌무더기에 납작하게 뭉개졌다.

"!!"

다른 하수인들은 데일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다급한 얼굴을 했다.

마치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러다 둘 다 죽어! 라고.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피 묻은 주먹을 닦아내며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다.

"일단 한 놈."

그러고는 곧바로 다음 하수인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사마귀처럼 생긴 하수인이 그 주먹을 막아내기 위해, 커다란 낫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데일의 주먹은 하수인의 머리를 뭉개놓고 있었다.

"둘."

이번엔 양옆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합공이다.

아가리가 유난히 큰 하수인은 산성 액체를 토해냈고. 촉수가 여럿 달린 놈은 데일을 칭칭 휘감으려 했다.

산성액은 맞아주었다.

오른손으로는 촉수를 붙잡아, 힘껏 잡아당겼다.

하수인이 맥없이 끌려왔다. 저항하려 해도 힘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데일은 그대로 촉수 하수인을 아가리가 큰 하수인에게 집어 던졌다.

요란하게 부딪힌 두 하수인은 바닥에 넘어졌다. 지금 달리는 걸 멈춘다면 맞이하는 결과는 하나다.

죽음.

꽈릉!

하수인은 흘러내린 돌무더기에 깔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다른 하수인들은 깨달았다.

지금 눈앞의 흑기사는 괴물이며, 절대 데일을 맞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하수인들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필사적으로 내달려도, 데일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데일은 성큼성큼 달리며 한 마리씩 착실히 줄여나갔다.

이제 남은 하수인은 하나.

마지막 하수인은 지하수로의 입구에 거의 다다랐다.

결승선이 코앞이다.

하수인의 얼굴에 희망이 보인다.

복잡한 지하수로라면 분명 숨어들 구석이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하수인은 땅을 힘껏 박찼다. 하수인의 몸이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다 우뚝. 허공에서 하수인의 몸이 멈췄다.

데일이 허공에 날아오른 하수인의 발을 잡고 있었다.

"잡았다."

데일은 곧바로 팔을 뒤로 휘둘렀다.

날아오른 하수인은 그대로 지하수로 밖으로 튕겨나갔다.

"끼에에엑!"

끔찍한 비명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리고 꽈릉!

돌무더기가 지하수의 입구를 완전히 메워버렸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천장이 웅웅 울려댔다.

돌무더기가 쉼 없이 도시를 뭉개놓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지하수로는 튼튼하게 지어졌는지, 천장이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안도한 데일은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같이 달렸었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중 하나가 물었다.

"...혹시 이곳에 들어오려던 하수인들. 데일 경이 다 죽이신 겁니까?"

"그렇다만?"

데일이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

"...."

병사들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날아오른 이레네

* * *

입구가 돌무더기로 단단히 봉쇄되었다.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수로는 지극히 어두웠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에스델이 손에 빛을 밝히며 다가왔다. 옆에는 에리얼도 함께였다.

"경."

"후우.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성벽을 무너트려서 지상을 초토화시킨다니. 둘의 당황스러운 감정이 전해졌다.

"황제는 대체...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걸로 악마의 군세에도 큰 타격을 주었겠죠?"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무자비한 질량 폭격이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떼로 몰려들었던 악마의 군세는 그야말로 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악마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못해도 군세의 절반은 죽었을 거고요. 혹시 성이 어느 쪽으로 날아갔는지는 확인하셨나요?"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성은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쪽이라...."

일단 성을 하늘로 띄웠지만, 영원히 날아다닐 수는 없다.

상위구역만으로 자급자족할 수 없으니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서야 할 터.

"동쪽으로 향했다면 역시 다른 군단들과 접선하려는 걸까요?"

"모르겠다. 동쪽으로 가는척하면서 진로를 틀 수도 있겠지."

"으음. 역시 어렵네요."

하늘로 날아오른 이레네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대한 문제다.

셋은 향후 피난민들을 이끌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황제가 동쪽으로 간다면 저희는 그 반대편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악마의 시선이 쏠릴 테니까요."

"이번에 이레네가 무너지면서 대륙의 중앙은 완전히 무법지대가 될 거예요. 위험해도 동쪽으로 함께 이동해서 아직 세력이 건재한 군단에 몸을 위탁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선뜻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기도 했다.

이들은 지금 수천 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

그 목숨의 무게 탓에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데일이 말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여기서 꾸물거려봤자 좋을 게 없으니."

크나큰 피해를 입었을 테지만, 악마의 군세가 전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꾸물거린다면 금방 표적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에스델과 에리얼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의 의견이 옳았다.

"일단 계속 움직이죠."

지하수로를 따라 수천의 시민들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선두에는 하켄이 길을 안내하고 있을 터였다.

데일은 하티와 함께 성큼성큼 걸어 줄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을 앞질렀다.

급하게 도망쳐 나와, 짐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우울한 기색이었다.

아이들은 칭얼거렸고, 아기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럴 때마다 부모들은 쩔쩔매며 아이를 달랬다.

"으아앙!"

"자꾸 그렇게 울면. 악마가 잡아간다?"

"으아앙!!"

아이는 악마라는 단어에 도리어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부모가 곤란해하던 차.

데일이 그 옆을 지나가다 우뚝 멈춰섰다.

데일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울지마라."

사람이었을 적의 버릇 탓인지 우는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그러자 아이는 뚝 울음을 그쳤다.

왜인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데일은 일단 울음을 그쳤다는 데에 만족했다.

부모들은 미묘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오. 다음에도 말하시오. 애 달래는 데에는 자신 있으니."

"...."

부모들은 더더욱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데일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예상대로.

선두에 선 하켄은 지하 통로의 끝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하켄은 데일을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데일 경. 마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것 같은데요?"

하켄은 위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깊은 우물 저 높이 푸른 하늘이 보였다.

"이 위로 올라가면 되나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이 아래로 내려올 때 사용한 밧줄 사다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데일은 사다리를 타지 못하는 하티를 옆구리에 낀 채. 우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바닥에 폴짝 튀어내린 하티가 작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돋아나기 시작한 새싹과 따스한 햇빛. 봄이다.

심각한 상황과는 별개로, 세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데일은 우물 아래쪽을 향해 말했다.

"한 명씩 올려보내라."

"예!"

수천 명이 우물에서 나오려면, 못해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그전에 데일은 상황을 봐두고 싶었다.

하티와 함께 이레네를 향해 걸어간 데일은 곧 도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죄다 박살 났군.'

줄지어 늘어서 있던 빈민가는 악마들에 의해 불타버린 지 오래.

하늘 높이 서 있던 성벽도 모두 허물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었던 곳은 돌무더기에 깔려 그 흔적만을 간신히 남겼을 뿐이다.

마치 오래된 폐허 같다.

어제까지 사람들이 숨 쉬고 삶을 이어가던 장소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성은... 여전히 동쪽으로 가고 있군.'

하늘로 날아오른 성은 저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제법 속도가 빠른지. 어느새 검은 점이 되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악마의 군세.'

악마의 군세가 취한 행동은 제각각이다. 우선 꽤 많은 무리가 날아가는 성을 따라가고 있다.

또 다른 무리는 폐허가 된 도시를 뒤지며 먹이를 찾고 있었고, 그 외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무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한데. 그 무리가 심상치 않다.

"악마... 인가?"

제일 앞에서 몸을 말아 데굴데굴 굴러가는 거대한 괴물이 보인다.

괴물이 구를 때마다 다른 하수인들이 짓뭉개져 비명을 질렀지만, 녀석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데일은 저 악마의 이름을 안다.

'두르핀. 하필이면'

아르구르보다는 급이 떨어져도, 만만치 않게 호전적인 악마다. 게다가 성질도 더럽다.

여러 악마들 중에서 데일이 특히 싫어하는 놈이었는데, 그런 악마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냄새라도 맡은 건가? 아니. 아니야.'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아마 저 악마는 이 주위를 약탈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리라.

참으로 재수없게도. 그 방향에 데일과 피난민들이 있었을 뿐이고.

'피해야 해.'

저 악마와 홀로 싸운다면.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데일은 혼자가 아니며 악마도 혼자가 아니다.

시민들을 모두 지키며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야단났군.'

정말이지. 쉴 틈을 주지를 않는다.

데일은 황급히 우물로 복귀했다.

이미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의 밖으로 나온 상태.

그중에는 엘레나와 프라우.

그리고 아이렉이 있었다.

가장 먼저 데일을 알아차린 프라우가 반갑게 맞았다.

"아. 데일 경. 어디 갔다 왔나?"

"잠시 이레네를 둘러보고 왔다.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더군."

아이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럴 만하지. 하늘에서 성벽을 무너트렸으니."

"악마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리 물은 건 엘레나였다.

데일은 상황을 숨길까 잠시 고민했다. 악마가 다가온다고 하면 시민들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기로 결정했다.

"악마가 오고 있다. 정확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 아니지만, 늦든 빠르든 우리 흔적을 찾아낼 거다."

"그, 그럼 큰일 난 거 아닌가요?"

데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은 일행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아이렉이 물었다.

"내가 얼추 추려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는 병사는 잘 쳐줘도 500이네. 당연히 내 부하들도 포함이고. 이 정도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행히 놈들의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소. 성벽을 공략할 때도 많이 죽었고, 돌덩이에 얻어맞고 크게 준 것 같으니. 하지만."

"그래도 악마가 우세하다는 말인가?"

데일은 수긍했다.

"게다가 이쪽은 시민들을 지키면서 싸워야 하오. 더더욱 불리하지."

"...."

아이렉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고는 의지를 다진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버리세."

"...?"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전부 버리자고 말했네."

곧바로 반응한 건 프라우였다.

프라우는 아이렉의 멱살을 쥐고 성을 냈다.

"아이렉 이 개자식! 그러고도 네가 바이만의 귀족인가! 명예는 대체 어디다 팔아먹었단 말인가!"

"냉정히 생각하게. 나는 바이만의 귀족이네. 경은 바이만의 기사고. 우리는 오로지 바이만을 위해 살아야 하네. 그럼. 지금 바이만은 무엇인가."

"...."

"지금은 공주님이 바로 바이만일세. 공주님이 살아 계시다면 바이만은 여전히 건재한 거지만, 공주님께서 변을 당하시면 정말로 바이만은 끝이란 말이네."

아이렉은 화를 내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지극히 서늘한 목소리로 주장을 이어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담담한 기백에 프라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령 저 아래에 있는 수천이 죽더라도, 나는 공주님만 무사하면 되네. 오히려 저들이 미끼가 되어줄 테니 우리는 살아날 확률이 높겠지."

"아이렉. 네놈...."

"아니면 다른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가? 냉정히 생각하게. 무엇이 옳은...."

"그만하세요."

말을 끊은 건 엘레나였다.

엘레나는 노한 얼굴로 말했다.

"더 이상의 발언은 허락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공주님...."

"그만하라고 했어요."

무어라 더 말하려던 아이렉이었지만, 그러면 엘레나가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았다.

아이렉은 마지막으로 데일에게 물었다.

"경은 알지 않나. 여기 있는 수천을 모두 데리고 갈 수는 없네. 이건 모두가 몰살당하느냐, 아니면 일부라도 확실히 살 것이냐의 문제네. 나도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일세."

모두의 목숨을 걸고 희박한 확률에 도박을 걸 것인가 아니면 일부라도 확실히 살아남을 것인가.

아이렉이 특별히 나쁜 인간이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다.

이게 내심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단지 주위의 시선이 걱정되어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뿐.

아이렉은 그저 남들보다 책임 있는 자일 뿐이다.

그는 부하들을 수십이나 거느리고 있다. 그는 책임지고, 선택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다.

자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아이렉은 악역을 자처했다.

'그래. 아이렉의 말이 맞을지도.'

데일은 문득.

이전에 이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알아챘다.

예전. 하켄과 마젤과 함께 미치광이 마법사를 쫓을 때.

그때에도 하켄은 눈물을 흘리며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자고 말했고.

마젤은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게, 원칙을 지키자고 했었다.

그때 데일은 선택했다.

위험을 감수하자고.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하켄에 대한 친분이나 데일의 오지랖 등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었다지만, 결국 큰 이유는 하나다.

그게 데일이 생각하는. 조부가 가르쳐준 사람다움이다.

우둔하고 멍청한 선택이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것.

어리석은 인간.

예나 지금이나 그게 데일이 추구하는 길이다.

지금이라고 그 길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아이렉이 어떻게든 데일을 설득하려 했다. 이곳에서 제일 발언권이 큰 건 누가 뭐라 해도 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데일은 아이렉의 말을 끊었다.

"어리석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고. 여기 있는 엘레나를 위해 결투를 선언한 것도. 목숨을 걸고 싸워나간 것도 전부 그 때문이오."

데일은 여전히 크리스틴을 기억한다. 그 대단했던 적수를.

그 점을 언급하자 아이렉도 더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이렉 역시 그 일로 데일에게 크게 빚을 졌다.

반박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는 건 아니오."

"...무슨 수가 있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전력면으로 좀 불리하지만, 아주 밀리지는 않는단 말 아니오."

"그렇네. 기사나 마법사 같은 고급 병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해볼 만 할 테지만. 황제도 우릴 버린 마당에 지원병 같은 게 있겠나?"

아이렉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있소. 어쩌면 기사들보다 강한 지원군이."

방금. 하켄과의 과거를 되새길 때 덩달아 떠올랐다.

몬스터도 아니면서, 개개인이 기사 정도는 너끈히 뭉개버릴 괴물들을.

"혹시 거인산이라고 들어보셨소?"

두르핀

* * *

"거인산이라면... 설마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하는 건가?"

거인산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했다.

거인 일가족이 살고 있어, 함부로 지나가다가는 잡아먹힌다는 곳.

특히 거인은 여러모로 두려움을 사는 이들이었는데, 섣불리 토벌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동족의 복수를 잊지 않는 거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왕국이 몰락해버린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 거인들을 이용하자는 말인가?"

"그렇소."

"그들이 우리랑 함께 싸워주긴 하겠나? 아니. 그보다 말이 통하기는 하나?"

"안면이 있소."

거인들과는 즐겁게(?) 대결에 임했던 사이다.

일단 말이 통하긴 할 것이다.

데일의 담담한 수긍에 세 명다 놀라워했다.

"허어. 거인들과도 친분이 있다니."

"자네는 역시 대단한 기사일세. 역시 내 호적수다워."

"역시 경이에요!"

친분이라기보다는 악연에 가깝지 않을까?

하지만 그 점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뭐.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지.'

설득 방법 정도야 이미 다 생각해두었다.

일단 희망적인 방안을 제시하자, 아이렉도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결정이 내려졌으니 그저 따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앞으로의 계획에 상의를 하는 사이.

마침내 피난민들이 우물을 모두 빠져나왔다.

수천명의 사람들은 바깥의 따뜻한 공기를 만끽하며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어딘가로 사라졌던 하티가 돌아와 낮게 으르렁거렸다.

"놈들이 근처까지 온 건가?"

하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는 뜻이었다.

쩡! 쩡! 쩡!

데일이 건틀릿으로 손뼉을 쳤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지금부터 말할 게 있소."

데일은 그리 크게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으로 악마와 그 무리가 오고 있소."

데일은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악마가 오고 있다는 것.

자신은 일단 남쪽으로 향한다는 것.

악마의 군세에게 쫓기는 건 상당히 위험할 거라는 것.

일부러 거인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거인은 악마만큼이나 악명이 자자했으니.

좋지 않은 상황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우리를 따라오고 싶다면 따라와도 좋고 여기서 흩어지고 싶다면 그래도 좋소. 어쩌면 그편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니. 다만 결정은 빨리하시오. 이미 놈들이 근처까지 와 있소."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금방 결정을 내렸다.

"난 고향으로 가봐야겠어. 어머니가 살아계신지 확인해야 해."

"엘드리엄에 친척이 있어서...."

"뭉쳐다니면 먹잇감이 될 뿐이다. 흩어지는 게 백번 나아."

전체 피난민의 삼 할에 달하는 숫자가 흩어지는 걸 택했다.

에스델과 에리얼은 그들에게 챙겨온 식량의 일부를 나눠주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군. 절반은 도망칠 거라 생각했는데.'

남은 이들은 간절한 눈으로 데일에게 몰려들었다.

"저희, 살 수 있겠죠?"

"데일 경. 부탁드립니다."

"신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길."

이들이 잔류를 택한 건 데일에 대한 기대 탓도 있는 것일까?

이들의 간절함이 조금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발걸음마저 무거워질 수는 없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겠소."

데일은 사람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 * *

워낙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자연히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적들에게 발각당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대로는 안돼. 거인산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어.'

도망치기만 해서는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데일은 사람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3조로 나눠야겠소. 그리고 지금부터는 가급적 숲을 통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소."

비라도 내려 흔적을 지워주고, 냄새를 가려주면 좋으련만.

봄을 맞이한 하늘은 얄미우리만치 청명하다.

데일의 지시에 엘레나가 물었다.

"경. 그건 악마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죠?"

"시간벌기다. 이대로는 거인산에 다다르기 전에 놈들한테 따라잡힐 거다. 그러면...."

승산이 낮다. 설령 이기더라도 피해가 극심할 것이다.

데일의 설명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국 따라잡히는 건 마찬가지예요. 더 효과적으로 적들을 방해할 필요가 있어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최고의 방어는 공격. 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소수의 인원을 돌려서 적들을 공격하게 해야 해요."

도리어 상대측에 역공을 가해 무시 못 할 피해를 준다면.

그렇다면 적들도 발걸음을 늦추고 주위를 살피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단시간에 적들에게 타격을 입힌 뒤, 곧바로 후퇴해야 한다. 그게 되는 사람은 기껏해야 나나 소수밖에 없을 텐데...."

"큼큼. 큼."

갑자기 엘레나가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자기를 알아봐달라는 듯이.

"...너?"

"흠흠. 맞아요. 바로 이럴 때를 위해서 마법을 갈고닦은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도 보물고를 다녀온 뒤, 실력이 늘어서 시험해보고 싶던 참이에요. 마침 잘됐네요."

아이렉과 프라우가 곧장 난색을 표했다.

"공주님.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전도 별로 안 치러보시지 않았습니까."

데일도 동의했다.

"나도 둘이랑 의견이 같다. 물론 네 마법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잘 안다만 너는 아직 어리다. 굳이 벌써부터 싸울 필요는 없어."

"...경은 항상 저를 애 취급하시는군요."

"아닌가?"

"아니에요!"

"원래 애는 자기가 애가 아니라고 하는 법이다."

"그런 말은 비겁해요."

평소에는 말 잘 듣던 엘레나가 좀처럼 물러서지를 않았다.

데일은 엘레나와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잠시간의 눈싸움.

결국.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멀리서 한번 해보자."

"...고마워요!"

"위험하면 바로 후퇴할 거다."

"실망시키지 않을 게요."

아이렉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나? 상대가 악마인데."

"여차하더라도 안고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소."

"자네만 믿겠네. 프라우, 자네도 함께 가주게나."

"물론이지."

데일은 엘레나를 업었다.

4군단에서 병사와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방식을 써먹어 볼 생각이었다.

일행을 먼저 떠나보낸 데일은 악마가 올법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 머지않아 데일은 악마의 군세를 발견했다.

이쪽의 흔적을 제대로 추격하기 위해, 군세 역시 여러 개로 흩어져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마침 적당한 상대다.

일행은 수풀 속에 조용히 몸을 숨겼다.

"마법을 준비하면, 마력 흐름 때문에라도 놈들이 알아차릴 거다. 우리가 시간을 벌어주겠다."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

"어차피 얼마 안 걸리거든요."

"뭐?"

순간. 주위에 마력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데일은 움찔했다. 그 양이 심상치 않다.

여태 그가 봐왔던 그 어느 마법사도 이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다루지는 않았다.

엘레나는 주문의 구결을 영창하지도 않았다. 그저 상대를 향해 오른손을 뻗을 뿐.

악마의 하수인들도 갑작스러운 마력의 흐름에 이쪽에 무언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마법이 완성된 후였다.

'이렇게 빠르게?'

다음 순간.

허공에 물방울이 모여들더니, 이내 파도가 되어 하수인들을 덮쳤다.

"케르륵?"

"키이익."

갑작스러운 물살에 휩쓸린 하수인들이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몸이 홀딱 젖었지만,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엘레나가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그 눈동자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나오고. 머리카락은 하늘로 붕 떠오르며, 주위에는 미세한 전류가 타닥였다.

이윽고 마법이 완성되었다.

온 세상이 순간.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콰지지직!

그게 손에서 뿜어낸 번개가 낸 빛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물에 젖어 흠뻑 젖었던 하수인들이 있던 자리에는, 타버린 시체들밖에 없었다.

비명조차 내지를 시간이 없었던 막강한 마법.

프라우와 데일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

"...."

데일이 프라우를 흘끔 봤다.

엘레나가 이 정도 실력이었던 걸 프라우도 알고 있었을까?

프라우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엘레나만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떤가요? 경의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잔뜩 칭찬을 원하는 표정.

이렇게 보면 또 그냥 애 같긴 한데....

"훌륭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군."

"헤헤. 처음이라 긴장했어요.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왜 저한테서 멀찍이 떨어지시는 거예요 두 분 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적들을 확실히 죽여버리기 위해 우선 물을 퍼부은 뒤. 그 위에 번개를 흩뿌린다니.

마법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그 철저함이나 지극히 효율적인 방식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애 교육을 잘못시켰나.'

무언가 데일과 어울리면서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엘레나의 실력은 완벽히 증명되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상대를 깎아나가면,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터.

하지만 데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체로 다가간 데일은 마력을 일으켰다.

'영혼 지배.'

죽은 하수인들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데일에게 명령을 구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어어."

"왔던 곳으로 흩어져 되돌아가라."

"그어."

되살아난 하수인들은 비척비척 되돌아갔다.

저 시체들이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흔적을 교란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적들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되살린 거군요."

"동족이 시체로 움직이는 걸 본다면, 좀 더 경계하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겠지."

"역시 데일 경이에요."

가능성을 보았으니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다.

셋은 이 주위를 옮겨다니며 악마의 군세를 찾아다녔다.

소규모로 돌아다니던 군세는 엘레나의 마법 한 방이면 쉽게도 쓸려나갔다.

설령 몇몇이 살아남는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기민한 데일과 프라우는 절대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군세의 세 개 조를 전멸시켰을 때쯤.

드디어 저쪽도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신들에게 향하는 위협을 깨닫고 무리를 한데로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슬슬 우리도 발을 빼야겠는데.'

하수인이면 모를까, 악마와 마주치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로 물러서지 않은 건 이번 기습으로 꽤나 쏠쏠히 재미를 보았다는 것. 그리고 아직 피난민들과 악마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데일이 물었다.

"여력은 좀 남아있나?"

"마법을 두 번. 많으면 세 번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흠."

잠시 고민하는 사이. 데일의 민감한 청각에 나무가 풀썩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악마 두르핀이 몸을 굴리면서, 나무들을 깔아뭉개는 소리일 것이다.

데일이 엘레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큰놈으로 한방. 가능하겠나?"

"...예! 믿어주세요!"

"믿고 있겠다."

엘레나는 마치 부모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인 아이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데일은 그런 엘레나와 함께 적당한 나무를 타고 올랐다.

쿠구구구.

머지 않아 땅이 진동했다. 거대한 괴물이 빠르게 굴러오고 있었다.

악마의 모습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엘레나가 물었다.

"큰 거라고 하셨죠?"

"가능한 가장 강하게."

"...알겠어요."

엘레나는 조용히 의지를 다잡았다.

'데일 경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제대로 성공해서....'

칭찬받고 싶다.

엘레나는 빠르게 마력을 움직였다. 이미 적들이 마력에 민감하다는 건 앞서서 배웠다.

필요한 건 속도. 그리고 화력.

허공에 불덩이가 생겨나고. 불덩이는 거대한 창의 형태로 변환했으며. 그 창 주위에 뇌전이 타닥였다.

불벼락.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와도 같았다.

오죽했으면 악마와 그 하수인들은 마력의 흐름보다, 불덩이의 열기에 이변을 알아차렸을 정도.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악마 두르핀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염 창을 발견했다. 놈은 곧바로 무언가를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번개를 머금은 화염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화염창이 악마와 부딪혔다.

성대한 폭발.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 하늘로 솟구치는 불기둥.

잠시간 온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꽈르르릉! 온 숲을 뒤흔드는 폭음이 뒤이어 터져나왔다.

"...."

두 눈으로 봐도 믿기 어려운 화력에 데일은 생각했다.

'내가 뭘 키운 거지?'

딱히 데일이 키운 것은 아니었다.

두르핀

* * *

데일은 마법의 결과를 살폈다.

'초토화군.'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던 숲의 한가운데에, 검은색 공터가 생겼다.

마법의 여파로 인한 뜨거운 열기로 숲에는 불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악마와 그 군세는 당연하게도 무사치 못했다.

약한 하수인들은 열기만으로 녹아내렸고.

악마 두르핀의 단단한 등껍질에도 마법이 훑고 지나간 여파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반응한 건가.'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았을 것이다. 그 상태의 두르핀은 무지막지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방금 같은 마법을 얻어맞고도 버텨낼 정도로 말이다.

두르핀은 통증을 삼키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으윽. 마탑의 마스터인가? 황제와 함께 사라졌어야 할 마스터가 왜 여기 있지?"

마법의 위력을 보고 엘레나가 마스터급 마법사라 착각한 것일까?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는 없다.

상대가 이쪽을 과평가할수록, 더 조심스러워질 테니.

'어쩌면 추격을 포기할 수도 있고.'

데일은 대답 대신 지쳐서 기진맥진해진 엘레나를 들쳐업었다.

"프라우. 후퇴다."

"알겠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뭣. 이 노옴! 도망치지 마라!!"

당황한 두르핀이 다시 몸을 공처럼 말아 이쪽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두르핀의 장점은 그 단단함과 기동성이다.

만약 평지였다면 금방 따라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다.

나무줄기를 계속해서 깔아뭉개고 이동하는 탓에 그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엘프답게 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리는 프라우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본대랑 일부러 반대편으로 이동해서 놈을 끌어들인 뒤 다시 본대랑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가 방향을 잡아라. 나는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적의 주의를 끌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본대랑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된다.

언제 저 악마가 데일 대신 본대를 향해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데일은 빠르게 달렸다.

엘레나는 지쳐서 업혀있는 상태에서 데일에게 은근하게 물었다.

"어땠어요 경."

"뭐가."

"방금 마법이요.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마법이에요. 어땠어요?"

"...대단하더군."

"그쵸?"

데일의 담담한 칭찬에 엘레나가 배시시 웃었다.

"하루만 지나면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또 악마를 기습하죠."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놈도 바보는 아니야. 똑같은 걸 계속 당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두르핀의 방어력이 엘레나의 화력을 능가한다는 게 증명되었다.

똑같이 기습을 시도해봤자, 위험에 비해 얻는 게 적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벌었을 것 같은데.'

하수인들을 습격해 그 숫자를 크게 줄이고, 이제는 두르핀의 주의까지 이쪽으로 돌려놓고 있다.

두르핀이 다시 본대를 추적하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흔적을 찾아야 하고. 데일이 시체를 되살려 만들어낸 가짜 흔적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기는 이르다.

피난민들의 체력을 생각하면 이동이 예상보다 느려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노오오옴! 부끄러움이 있다면 당장 멈춰라!"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최대한 두르핀의 시선을 끌어두어야 했다.

* * *

본대를 셋으로 나눠 이끄는 건 에스델과 에리얼. 아이렉이다.

그들은 데일이 두르핀의 시선을 성공적으로 끄는 데에 성공했다는 걸 알아챘다.

'역시 데일 경이야.'

'엘레나 공주님과 함께 잘 해낸 모양이군.'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나도 데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에스델은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악마한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지.'

그간 데일과 함께 하며 쌓아온 믿음은 두텁다. 에스델이 가장 신뢰하는 이가 바로 데일이었다.

에스델은 불안해하는 대신.

사람들을 독려했다.

"저기 연기 보이시죠? 아무래도 숲에 불이 난 모양이에요. 거리가 좀 있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움직이죠."

"예에!"

피난민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에스델이 이끄는 조는 빛의 여신을 따르는 자들이 속해 있었다. 에스델의 말이라면 불만 없이 따라주었다.

며칠간의 이동 끝에, 피난민들은 순차적으로 거인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하켄은 착잡한 얼굴로 거인산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설마 이곳을 두 번이나 방문할 줄은 몰랐는데."

에스델이 물었다.

"거인을 만나보았나요?"

"데일 경과 같이 만났었지."

"아. 그러면 하켄도 데일 경처럼 거인과 친분이 있나요?"

"...친분?"

데일이 거인과 친분이 있었던가?

'서로 귀싸대기를 주고받는 게 친분은 아닌 것 같은데.'

하켄이 의아해하는 사이.

몇몇 남쪽 출신 피난민들은 거인 산을 알아보았다.

"자, 잠깐. 여기는 거인산이잖아."

"거인산? 거인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곳?"

"기껏 악마랑 도망쳐서 온 게 거인산이라니...."

거인의 악명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몇몇은 도저히 산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때. 데일이 시기적절하게 돌아왔다. 거인산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데일이 물었다.

"무슨 문제 있소? 왜 안 들어가고 있소."

어느 한 용기 있는 사내가 따지려 했다.

"아니. 남쪽으로 간다 했지, 거인산으로 간다는 말은... 말은...."

"말은?"

사내는 데일을 올려다보았다.

투구의 양옆으로 뿔 같은 장식품이 돋아난 데일은 이제 악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두려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 데일에게 직접 따지고 드는 건.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내에게는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 어서 올라가시오. 악마가 오고 있으니."

"예...."

눈에 안 보이는 거인보다는. 당장 뒤에 있는 데일이. 그리고 악마가 더 무서운 법.

피난민들은 말없이 산을 올랐다.

그렇게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거인들이 살고, 지세가 험해 악마를 상대하기 좋은 중턱에는 다다르지도 못했다.

'어쩔 수 없나. 오늘은 일단 여기서 야영해야겠는데. 아직 거리는 있으니까.'

피난민들 중에는 노인도 있고, 어린아이들도 있다.

밤중에 무리하게 걷게 시킬 수는 없다.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났다.

구태여 불을 숨기지는 않았다.

어차피 사람이 워낙 많아, 조심한다 해도 들키는 건 금방이다.

차라리 따뜻하게 몸을 쬐고 배불리 먹어 체력을 온존하는 게 나았다.

데일과 하켄. 엘레나와 프라우. 마지막으로 에스델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다.

밀가루를 넣어 만든 죽이 솥 안에서 보글보글 끓었다.

"자! 다 됐다! 빨리 먹어! 앗뜨. 앗뜨뜨."

급하게 먹으려다 체하는 하켄을 엘레나가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프라우는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식사했다.

데일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게 죽을 떠먹었다.

먹을 필요는 없지만, 데일이 사람임을 잊지 않기 위해 거르지 않는 의식이다.

말 그대로 영혼을 위한 수프였다.

유일하게 가만히 있는 건 에스델이었다.

에스델은 어딘가 아련한 눈으로, 그저 조용히 모닥불만을 쳐다보았다.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나? 입맛이 없나?"

멍하니 있다가 흠칫한 에스델이 고개를 저었다.

"데일 경이랑 하켄이랑 함께 모험을 다닐 때. 항상 이렇게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식사했잖아요. 그때가 생각나서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는데, 엄청 아련하게 느껴져요. 그립기도 하고요."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일들이다.

하지만 에스델에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추억이었다.

그때는 이렇게 이레네가 무너질거라고. 오르단에게 배신당하고 형제자매들을 잃을거라고. 그리고 악마에게 쫓기며 떠돌아다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마음이 복잡한가보군."

에스델은 순순히 인정했다.

"예... 특히 오르단에 대해서는 너무 큰 충격이라.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에스델은 속에 있던 말들을 꺼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일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엄청 밉기도 하고. 증오스럽고. 한편으로는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오르단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여전히 믿고 싶고. 사람이라는 것 자체에 환멸도 느끼고...."

에스델은 침울한 얼굴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대강의 사정을 전해들은 다른 이들도 숙연해졌다.

프라우만이 에스델이 내려놓은 죽 그릇에 손을 가져가려다 엘레나에게 제지당했을 뿐이다.

"저도 데일 경처럼 강했으면 좋을 텐데요.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경은 강한 사람이잖아요."

"...."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거리던 데일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마음속의 버팀목이던 사람을 잃는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지. 그게 스승이든."

데일은 에스델을 봤다.

"오래도록 봐온 친구든."

이번에는 하켄을 봤다.

"아니면 부모든."

마지막으로 다시 모닥불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조부 아래서 자랐다. 어렸을 적부터 나를 돌봐주셨지. 내게는 부모와 다름없는 분이셨다."

주변인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데일이 자기 과거 얘기를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데일은 담담히 말했다.

"조부께서는 어느 날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셨다. 억울한 죽음이었지. 그때의 기분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니 에스델. 나는 네 마음을 이해한다."

"아...."

배신이든 죽음이든. 그 형태가 달라도, 버팀목을 잃은 건 동일하다.

데일은 에스델이 느끼고 있을 아픔을 공감한다. 그녀가 억지로 참아내고 있다는 걸 안다.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토해낼 때가 아니니까.

"버팀목을 잃으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스스로 우뚝 서거나. 아니면 넘어지거나."

에스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일 경은 어떻게 우뚝 설 수 있었나요?"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넘어졌다."

"예?"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니까."

에스델과 데일이 눈이 마주쳤다. 에스델은 저 무기질적인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다.

후회와 슬픔. 혹은 분노.

딱 잘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었다.

에스델은 처음으로 이 흑기사에게서 약한 부분을 보았다.

"그만하고 자라.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하니."

데일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하티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날이 샐 때까지 이 주위를 경계할 생각이다.

오늘만큼은 꿈을 꿀 생각은 없었다.

분명. 나쁜 꿈을 꿀 테니까.

* * *

아침 일찍 일어난 피난민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대로라면 금방 거인산의 중턱에 다다를 터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적들이 예상보다 빨리 추격해오는군.'

연이은 방해로 두르핀이 잔뜩 열이 오른 듯하다.

적들이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여유가 없다.

"모두 조금만 더 힘내세요!"

"마지막이에요! 이 앞만 넘으면 돼요!"

에리얼과 에스델이 사람들을 독려했다. 사람들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숨 가쁘게 움직이길 한참.

마침내 우거진 나무의 숲이 끝이 나고. 바위가 훤히 드러난 산 중턱이 눈에 들어왔다.

저 위에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아래로는 깎아지르는 듯한 아찔한 협곡.

그 바로 옆에 나 있는 크지 않은 길목.

거인 가족들은 이전에 보았던 그 장소에 앉아 있었다.

왜인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아아."

"인간. 먹고 싶다. 하늘에서 인간. 안 떨어지나?"

"기다려라. 입 벌리고 있어라. 운 좋으면 인간. 떨어질 수도 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거인 중 하나가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났다. 입에 침이 고여 잠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린 거인의 눈에 이쪽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 사레가 들린 거인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허억! 컥! 컥!"

"왜 그러냐?"

"만찬! 만찬이다!"

"허어억! 진짜다!"

"입 벌리고 있었더니! 진짜 인간이 생겼다!"

거인들은 이 꿈같은 기적에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들의 선두에서, 언젠가 본 적이 있는 흑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껍질 인간이다."

"껍질 인간? 나 껍질 인간 싫다."

그들은 데일과의 대결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놀라운 괴력과. 무시무시한 지혜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데일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껍질 인간. 기억하고 있다!"

콧김을 흥! 내뿜은 아빠 거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엔 너랑 내기 안 할 거다! 그냥 너희. 잡아먹을 거다!"

"맞다! 그냥 잡아먹을 거다!"

이기지 못할 내기는 하지도 않는다는 걸까?

이 거인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비겁한 구석이 있다.

"이번에는 내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저 협곡을 지나가려고 온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악마가 오고 있다.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악마?

거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악마라는 이름은 방랑자 거인한테 들은 적이 있다. 아주아주 강한 적으로, 많은 거인 동지들을 죽였으며, 기회가 되면 꼭 복수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거인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아, 악마라니. 무슨 말이냐! 제대로 말해라!"

"말 그대로다. 악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너희들은 싸우기 싫더라도 우리와 함께 싸워야 할 거다. 악마가 너희를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처음부터 데일은 설득이나 거래할 생각이 없었다.

악마를 이곳으로 끌고 오면, 좋든 싫든 함께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게임식으로 말하면 '몹 몰이'. 혹은 트레인이라 해야 할까.

거인도 상황을 파악했다. 데일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거인들은 데일에게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때.

저 너머 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무가 풀썩풀썩 넘어가는 소리.

이윽고. 몸을 둥글게 만 거대한 악마가 이쪽을 향해 매섭게 굴러오기 시작했다.

"이 비겁한 놈들! 도망도 여기서 끝이다! 이 달을 뭉개는 자, 두르핀이 직접 너희를 짓이겨주마!"

데일은 그 살벌한 돌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너희들이 상대해야 한다."

멍하니 눈을 깜빡인 거인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요?"

이럴 때만 또박또박 말하는 거인들이었다.

두르핀

* * *

두르핀이 빠르게 굴러오자 거인들이 다급해졌다. 자기들끼리 도망쳐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이 거인 가족이 대체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데일은 당황한 거인들에게 말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와 친구가 되어서 저 악마와 싸우는 것. 다른 하나는 다 같이 죽는 것."

"치, 친구? 너! 친구 아니다! 친구! 이런 거 아니다!"

그야 악마를 꼬리에 물고 다가온 놈을 친구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데일이 굳이 친구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다.

"공통된 적과 같이 맞서서 싸우면 그게 친구다. 그리고 친구는 전투가 끝난 후에도 친구지."

"으으."

"약조해라. 싸움이 끝난 뒤에도 우리들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기껏 악마와 싸워 이겼는데, 또다시 거인과 싸우는 건 사양이다.

데일의 제안에 거인들은 갈등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데일이 맞았다.

하지만.

'마, 맛있겠다.'

'인간 고기. 먹고 싶다.'

눈앞에 차려진 만찬을 포기하라니!

거인들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데일은 냉정히 말했다.

"그래. 그러면 우리는 가겠다."

"무, 무슨 소리냐."

"너희랑 달리. 우리는 저 협곡을 건너가면 되니까. 너희들이 악마랑 싸우는 사이 우리는 지나가겠다."

협곡을 이어주는 다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건너 협곡 저편으로 지나갈 수 있다.

거인은 그러지 못한다.

결국. 참지 못한 거인이 외쳤다.

"알았다! 싸우겠다! 그러니 우리. 버리지 마라!"

"잘 생각했다. 다만."

데일은 마검을 뽑고. 살벌한 기세를 흘리며 말했다.

"저번처럼 약속해놓고 딴소리를 하면, 그때는 가만 있지 않을 거다."

"아, 알았다. 우리. 약속 지킨다."

그 흉흉한 기세에 거인들은 주춤했다. 눈앞의 흑기사는 일전에 봤던 때랑은 전혀 달랐다.

'가, 강해졌다. 껍질 인간.'

'건들지 않는 게 좋다.'

대체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거인과 인간의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거인 가족 넷은 어디선가 뽑아온 나무줄기를 들고 쿵쿵 앞으로 나섰다.

비전투 인원들은 뒤로 빠지고.

병사들과 거인이 함께 섰다.

"...."

"...이거 괜찮은 거 맞냐."

인간과 거인이 함께 싸운다니.

서로가 뻘쭘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가한 감상을 가질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르핀이 빠르게 굴러 지척에 다다른 것이다.

저 파멸적인 돌진 앞에서 방패 진형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뭉개질 뿐.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거인들이 주춤하던 그때.

데일이 땅을 박찼다.

맹렬히 굴러오는 두르핀을 향해 몸을 던졌다.

사람들이 당황했다.

"!!"

"데, 데일 경!"

저런 것에 몸을 던지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

하지만 다음 순간. 사람들이 본 것은 놀라운 광경이다.

쿵!

데일과 두르핀이 부딪혔다.

굉음과 함께 데일은 튕겨나갔다. 맞부딪힌 견갑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두르핀도 옆으로 밀려나며, 돌진하는 방향이 크게 꺾여버렸다.

결국.

두르핀은 회전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악마는 데일을 노려보았다.

"너. 먹음직스러운 영혼을 가지 흑기사. 네놈이 운 좋게 내 동지들을 죽인 걸 안다. 하지만 이 두르핀은 다를 것이다."

"글쎄. 죽은 네 동료들보다 네가 더 강할 것 같지는 않은데."

두르핀은 성질이 더럽고 호전적인 악마다.

데일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하찮은 게 입을 놀리는구나!"

두르핀이 고함을 내지르자, 놈들의 부하가 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 주인과 비슷하게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하수인들은 병사들의 창칼을 무시하며 호전적으로 싸웠다.

두르핀도 다시 몸을 말아 땅을 구르려 했다.

그냥 지켜볼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두르핀에게 달려들어 그 몸을 둥글게 말지 못하게,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렇게 해서 구르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

"하! 네까짓 게 감히 날 막으려... 윽."

비웃으려던 두르핀은 당황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 몸을 부여잡고 있는 흑기사의 힘이 범상치 않았다.

'무슨 이런 터무니없는.'

등급이 오르고.

아르구르의 피까지 마셔 더욱 강해진 데일이다.

그 용력은 악마라 해도 쉬이 뿌리칠 수 없었다.

데일은 상대를 단단히 고정한 채 외쳤다.

"거인들!!"

그러자 하수인들을 신나게 으깨고 있던 거인 가족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드니 데일이 악마를 붙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악마다. 악마만 없으면 훨씬 편한 싸움이 될 터.

그 정도는 거인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죽여!"

"죽이자!"

거인들이 쿵쿵 달려와, 나무줄기로 두르핀을 후두려 패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두르핀의 등껍질은 단단하다. 하지만 묵직한 충격을 전부 흘려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쉼 없는 몽둥이질에 두르핀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심지어 그냥 평범한 몽둥이질이 아니다.

거인들의 활약을 본 에스델은 생각했다.

'거인에게도 축복을 걸어줄 수 있지 않을까?'

데일에게는 빛의 축복이 도리어 독이 되지만, 거인은 다르다.

문제는 신성력이 많이 든다는 점인데....

'이 성물이 있다면.'

에스델은 왼팔에 차고 있는 팔찌로 눈길을 주었다.

이번에 얻은 성물.

이 성물을 착용하고 있으면, 신성력이 샘처럼 솟아났다.

에스델은 양손을 뻗고.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당신의 가엾은 양들에게... 양은 아니지만. 어쨌든 힘을 내려주소서."

거인의 커다란 몸에 하얀빛이 서렸다.

거인은 이 변화에 놀라워했다.

"오오! 갑자기 몸이 가볍다! 기분이 좋다!"

"하얀 인간이 뭔가 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

빛의 여신의 자비를 처음 몸으로 느껴본 거인은 크게 감동해, 더욱 신나게 악마를 두들겨팼다.

"으윽! 그만! 그만하란 말이다!"

결국. 참다못한 두르핀이 외쳤다.

"버러지들아! 나를 지켜라!!"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병사와 싸우던 하수인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싸우던 병사를 무시하고 두르핀에게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안간힘을 쓰며 두르핀을 붙잡고 있던 데일은 외쳤다.

"엘레나! 막아!"

"맡겨주세요!"

프라우의 호위를 받던 엘레나가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파도는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려던 하수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친 물결에 하수인들이 주춤했다. 엘레나는 계속해 마력을 퍼부었다. 파도를 움직여 점점 하수인들을 한데 모았고, 종국에는 파도를 넓게 둘러 하수인들을 가두는 데에 성공했다.

파도 감옥.

당황하던 하수인들은 이내 이게 평범한 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대로 파도를 뚫고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쩡!

파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물속을 헤쳐지나가려던 하수인들은 산 채로 얼어버렸다.

따뜻한 봄날에 어울리지 않게 한기가 풀풀 날렸다.

"허억. 허억."

과다한 마력의 사용으로 엘레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엘레나를 프라우가 들쳐업었다.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허억. 가두기만 했을 뿐이에요. 금방 빠져나가겠죠. 마무리 해야 해요."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여기는 이제 저희한테 맡겨주시죠."

"하지만."

"기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꼬마 마법사님."

서늘한 목소리에 둘의 시선이 돌아갔다.

사제장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들을 가두어둔 것만으로도 꼬마 마법사님은 할 일을 다 한 거예요.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기세요."

엘레나는 불만스레 쏘아붙였다.

"꼬마 아니에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사제장이 프라우에게 말했다.

"프라우 경이었던가요? 저를 저 얼음 벽 위로 올려주시겠어요?"

"수상쩍은 주문쟁이를 업고 싶지는 않은데."

"주문쟁이가 아니라 사제랍니다."

"그거나 그거나."

"죽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알았다."

프라우가 에리얼을 업고 얼음벽 위로 훌쩍 올라갔다.

벽에 갇힌 하수인은 얼음을 향해 몸을 던지며, 벽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얼음 벽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금방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수고했어요.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세요."

"눈을 감으라고? 하! 적을 앞에 두고 전사에게 눈을 감으라니. 그럴 수는 없다."

사실은 옆에 있는 사제장이 껄끄러워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거지만 말이다.

에리얼은 어깨를 으쓱였다.

"경을 배려한 건데. 싫으면 말고요."

사제장은 안대를 벗었다.

프라우는 사제장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왜 안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단 말인가. 장님일까? 아니면 화상 자국이 있나?

호기심을 가지고 고개를 돌린 프라우는 굳어버렸다.

에리얼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눈 감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이윽고 에리얼에게서 어둠이 흘러내려 얼음 벽 안에 갇힌 하수인들을 덮었다.

밤의 사제의 최상위 기술.

꿈 안개.

안개가 하수인들을 덮자, 사위에 정적이 흘렀다.

안개에 갇힌 하수인들이 비명이나 고함을 지를 법도 한데 그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개는 머지않아 걷혔다.

그리고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에리얼은 다시 안대를 썼다.

그리고 프라우에게 말했다.

"다시 내려주세요. 아직 하수인들은 많이 남았잖아요?"

"아, 알겠소."

그제야 굳어 있던 프라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정중하게 말한 프라우가 다시 에리얼을 업었다.

얼음 벽을 훌쩍 뛰어내린 프라우는 생각했다.

'...봐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군.'

안대를 벗은 에리얼 사제장의 얼굴에는....

프라우는 에리얼이 권고할 때 순순히 눈을 감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 * *

아무리 단단한 악마라도, 강력한 축복을 받은 거인 넷이 쉴새 없이 몰매를 때리면 무사하기 힘들다.

두르핀은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지금은 그 뛰어난 기동성도 소용이 없었다.

놈에 대해서 잘 아는 데일이 두르핀이 제 특기를 발휘하는 걸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콱!

계속된 타격 끝에 마침내 상처가 생겼다.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기회다.

데일은 그 안으로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두르핀은 겉은 단단하지만, 정신은 다른 악마에 비해 약하다.'

덩치만 큰 어린애라고 할까.

데일은 건틀릿을 박아넣어 산 채로 생기와 혼을 거두기 시작했다.

두르핀이 저항했다.

정신과 정신의 대결. 악마의 탁한 영혼에 데일의 정신이 오염된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만하다.

두르핀은 영혼이 산채로 뜯겨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괴성을 내질렀다.

껍질이 단단하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일수록 갑작스러운 고통에 더 크게 놀라는 법이다.

데일은 그 점을 잘 이해했다.

"그어억!"

끔찍한 고통에 어떻게든 방어자세를 취하던 두르핀이 몸부림쳤다.

겉껍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한 배가 드러났다.

거인들은 이때다 싶어 그 부위를 신나게 두들겨 댔다.

'좋아. 이대로 착실히 깎아나간다. 하지만 너무 몰아세워서도 안 돼. 이놈의 발광은....'

그때. 두르핀이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두르핀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데일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이런!'

게임을 하던 시절. 데일은 여러 악마를 상대해보았다.

악마는 능력과 힘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악마는 상대하기 수월하나, 또 어떤 악마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두르핀의 경우에는 데일을 가장 많이 죽인 악마 중 하나였다.

두르핀이 강력하냐? 하면 아니었다.

두르핀의 전투 능력은 아르구르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싸움의 승패가 힘의 고저로만 판가름나는 건 아니다.

두르핀의 진짜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악의. 그리고 독기.

두르핀의 그 더러운 성미만큼은 다른 악마를 압도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아르구르가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타입이라면 두르핀은 정반대다.

자기가 죽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함께 죽이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한다.

자폭.

두르핀은 걸어다니는 폭탄이었다.

악마가 가진 힘이 한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등껍질 사이사이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머지않아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이 주위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폭발을.

'실수했다.'

데일은 적당한 시점까지 두르핀을 몰아세운 뒤. 거리를 벌려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데일의 예상보다 아군이 훨씬 잘 싸워주었다.

에스델의 축복을 받은 거인들.

혼자서 하수인을 모두 가둔 엘레나.

그 하수인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에리얼까지.

덕분에 싸움이 예상 이상으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게 두르핀을 자극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런 와중에 데일이 산 채로 생기를 흡수해 고통까지 주었으니,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인내심이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는 위험해.'

두르핀 주위에 있으면 전부 죽는다.

지금이라도 거리를 벌려야 했다.

하지만 두르핀은 한 번 더 그 악의를 발휘했다.

"날 고통스럽게 한 만큼, 네놈들에게도 고통을 주겠다!!"

그렇게 외친 두르핀이 짤막한 두 다리로 일어서 쿵쿵 걷기 시작했다. 데일이 몸을 둥글게 마는 걸 방해하니, 그냥 서서 이동하기로 택한 것이다.

데일이 땅에 발을 디뎌 막아보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두르핀은 누가 공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다리를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두르핀이 향하는 곳에 있는 것은... 피난민들.

에리얼. 엘레나. 프라우. 에스델. 하켄. 하티. 데일과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

두르핀은 제 한 몸을 불살라, 그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해. 어딘가로 날려보낼 수 있다면... 아.'

데일의 눈에 까마득한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깎아지르듯 서 있는 절벽과 그 아래에 흐르는 거친 물살.

"모두 밀쳐!!"

데일이 외쳤다.

짧은 두 마디.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우아아아!"

거인들이 힘껏 달려들어, 나무줄기를 마치 야구 배트처럼 휘둘렀다.

쿵!

강한 충격에 두르핀의 몸이 협곡 쪽으로 밀려났다.

크게 물러난 두르핀은 그러나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뒤뚱뒤뚱 걸었다.

악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는 악의가 두르핀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에스델이 만들어낸 장벽이 다시 한번 두르핀을 튕겨냈다.

두르핀은 다시 달린다.

사람들이 필사적일수록 두르핀은 더욱 힘차게 달렸다. 입가에는 조소가 어린다.

그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엘레나가 한 올 남은 마력을 쥐어짜 전격의 창을 날렸다.

에리얼도 남은 여력을 쏟아 어떻게든 제지하려 했다.

힘이 남은 병사들은 달라붙어 두르핀을 날붙이로 찔러댔다.

전부 소용없다.

악마는 달린다.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두르핀이 점점 더 피난민들과 가까워졌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도 거세지고 있다. 한계에 다다랐다. 곧 두르핀은 폭발할 것이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된다.

기껏 여기까지 왔다.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데일 혼자서 도망치면.

그렇다면 데일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 있는 이들을 모두 잃고 말겠지.

그런 건 싫다.

단순히 인간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는 조부의 당부 때문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 흉내도 아니다.

데일은 이들이 진심으로 살아남길 바랐다.

지금 당장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데일은 달렸다. 온몸의 마력과 간절함을 담아 기술을 사용했다.

'영혼 지배.'

순식간에 빠져나간 마력이 두르핀을 향한다.

원래라면 악마에게는 어림도 없는 공격이다.

하지만 두르핀의 정신력은 다른 악마와 비교해 몹시 약하다.

데일과 두르핀의 정신이 다시 한번 대결을 펼친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리겠다는 두르핀의 악의가 데일을 짓누르려 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살리겠다는 데일의 간절함이 맞섰다.

그리고. 인간의 간절함은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단 한순간. 한순간이나마 두르핀의 전진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영혼 지배가 먹힌 것이다.

머지않아 두르핀은 지배에서 풀려나, 다시 죽음의 전진을 재개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데일은 이 잠깐의 정지만으로도 충분했다.

데일은 멍하니 있는 두르핀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몸을 힘껏 붙잡았고. 가속된 속도 그대로 맞부딪혔다.

기우뚱, 넘어간 두르핀의 몸이 협곡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노오옴!"

지배에서 벗어난 두르핀이 분노하며 데일을 떨쳐내려 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두르핀을 잡은 손에서 결코 힘을 빼지 않았다.

두르핀이 소리쳤다.

"이 멍청한 것! 죽고 싶은 것이냐!!"

확실히 위험하다. 두르핀의 폭발을 바로 앞에서 얻어맞는 것은.

어쩌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일은 오히려 차분했다.

늘 그렇듯. 두려움은 없다.

그 얼굴에서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데일은 두르핀에게 대꾸했다.

"함께 지옥으로 가자."

"이노오옴!!!"

두르핀이 고함을 지른다.

절벽 위에서는 데일의 이름을 외치는 동료들의 비명이 들린다.

저 아래 거친 물살이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

사나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가는 소음.

온갖 소리가 데일의 투구 안에서 웅웅 울렸다.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데일은 그저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귓가를 어지럽히던 소음이 사라지고. 성대한 폭발이 온 협곡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