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절세미남, 낭자?
똑, 똑똑.
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약운의 귀에 들려왔다.
그러자 고약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아름다운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두 사람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서, 상대가 고개를 조금만 더 숙이면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았다.
고약운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자사를 세게 밀쳤다.
“뭐 하자는 거야?”
“계집애 넌 양심도 없구나! 내가 널 이리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는데…… 인정머리도 없어.”
자사는 큰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나왔어.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걱정 마. 여기서 내 숨결이 드러나는 걸 막을 수 있는 힘을 느꼈다. 아무도 우릴 발견하지 못할 거야. 근데 넌 정말 겁도 없더구나. 절벽에서 그렇게 뛰어내리다니,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했어?”
“죽음이 두려웠다면 목숨을 걸지도 않았어.”
고약운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벽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그러니 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적어도 떨어져서 죽을 것 같진 않았어. 근데, 여기에 무슨 힘이 있다는 거야?”
자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가득했다.
“천영진은 연기종의 진법이 아니라 동악 대륙의 진법이다. 강자가 제련해서 만든 것이고.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이 안에서 강한 힘을 느꼈어.”
“강한 힘?”
약운의 눈빛이 번뜩였다.
“자사, 나 이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자사는 약간 망설이더니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넌 내가 봉인되어 있길 바라잖아. 방금 전 봉인이 느슨해졌다. 조금 더 있다간 해제될지도 몰라.”
“안심해. 나 혼자서 알아봐도 충분해.”
“그래, 위험하면 나를 바로 찾아. 도와줄 테니까.”
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고약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닥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자사를 불러선 안 되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고약운의 마음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 * *
고약운은 혹시라도 무언가가 나타날까 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동굴 깊숙이 들어갈수록, 자사가 말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턴 숨쉬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 어떤 위험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방은 모두 낯선 기운투성이였다. 도처에 이름 모를 생물들이 널려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고약운을 공격하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고약운의 눈앞에 돌문이 나타났다.
“여기다. 여기서 힘이 나오고 있어.”
고약운은 숨을 깊이 쉬곤 천천히 돌문 위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돌문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스스로 열렸다. 순간 고약운은 숨을 참았다.
돌문을 열고 들어간 동굴 내부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눈부시고도 긴 은색 머리카락이 바닥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입고 있는 붉은 옷은 기괴한 느낌인데다 피 비린내가 나는 듯했으나, 의외로 그와 어울렸다.
남자의 미간 사이에는 불꽃 표시가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활짝 핀 장미처럼 보여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약운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천하제일의 미남인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기만 하는데도 가슴이 저절로 두근거렸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눈을 떠 버렸다.
남자의 눈동자는 붉었다. 그는 천천히 동굴을 살피더니, 고약운을 경계하며 멀찍이 물러났다.
고약운 역시 이 남자가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천지를 파괴하고, 땅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말이다.
곧이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낭자.”
‘낭자?’
고약운은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그의 말 한마디에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사고마저 정지되어 버렸다.
“낭자.”
고약운은 경악하며 눈앞의 절세미남을 바라봤다.
‘눈을 뜨자마자 낭자를 찾는다고?’
고약운은 남자를 쓱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야? 왜 여기 있지?”
그러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몰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려는 듯 애를 썼다. 그러나 정말로 기억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 * *
한편 이 시각,
고약운은 모르나, 대륙 어딘가의 산맥 위에서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수(灵兽)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아주 오랫동안 주위에 울려 퍼졌다. 그 영수들은 단체로 무릎을 꿇은 후 어딘가를 향해 절을 올렸다.
“우리의 왕이 깨어났다! 만물은 무릎을 꿇어라! 왕께서 돌아오신다!”
* * *
다시, 동굴 안.
고약운은 어리둥절해하는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의 신비한 힘이 당신한테서 나오는 거 같아. 힘의 이유를 알았으니 난 가 볼게.”
그러자 남자는 침상에서 내려와 고약운의 뒤를 쫓았다.
은빛 긴 머리카락은 그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름다운 남자는 불쌍한 표정으로 고약운을 바라보았다.
“따라오지 마.”
고약운은 그 한마디를 남긴 후,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 * *
한 달이 지나자, 황궁 정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때. 진법에서 한줄기 빛이 보였다. 한 달 전, 수련하고자 진법에 들어간 수많은 젊은이가 다시 모습을 나타났다.
라음은 계속해서 고약운을 찾았다. 그러나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설마 사고가 난 걸까? 그럴 리 없어.’
“왜 고가의 고약운이 보이지 않습니까?”
혼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모두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했다.
이내 혼비가 속으로 생각했다.
‘고약운은 연기종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해. 그 계집의 모든 정신력을 아가씨를 치유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단 말이다. 그러니 그 계집에게 어떤 사고도 일어나선 안 돼.’
능 씨 가문의 공자 능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비 장로, 고약운은 천영진에서 영수를 만나 포위 공격을 당했으니, 아마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그 계집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날 현장에 있던 자들을 모두 매수했으니, 이제와 진실을 말할 사람은 없었다.
“뭐라고?”
라음이 화난 표정으로 능희를 노려봤다.
“네가 한 말이 진짜라고 맹세할 수 있어?”
“그래. 고약운은 영수한테 공격받아 죽었다니까?”
“공격당하는 걸 보고도, 어째서 구하러 가지 않았어?”
라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구해? 내가 걔를 왜 구해야 하는데? 그깟 폐물이 죽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폐물을 살리는 건, 폐물이 축낼 식량을 낭비하는 거나 다름없어. 차라리 일찍 죽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뜨게 되었으니,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면서 능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걔는 폐물이 맞아. 할아버지는 그 계집이 취기 4급이라고 하셨어. 4급이 어떻게 5급을 때려눕히겠어. 분명 동굴에서 보물을 얻은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5급을 때려눕히는 게 가능하겠어?’
라음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 능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그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내가 약운이의 복수를 할 거야!”
라음은 눈물을 머금고 능희를 가격했다. 그러자 능희도 라음에게 맞서면서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다.
“저 천박한 자식이!”
라 장군이 발끈하며 군중 속에서 나와 라음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감히 어떤 개자식이 내 딸을 건드리는 게냐?”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자,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라음, 너 꼴이 왜 이래?”
라음은 순간 주먹을 날리려던 것을 멈췄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약운아. 너, 너 안 죽은 거야?”
라음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죽었대? 누가 그래?”
고약운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러자 라음은 앞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능희를 가리켰다.
“얘가 그랬어. 네가 영수한테 죽는 것을 직접 봤다고 하던 걸. 그래서 내가 능희를 때려죽이려 했고. 그런데 네가 이렇게 살아 있다니! 좋은 사람은 장수를 못하고, 화근은 천년을 간다는데…… 약운아, 넌 화근이구나!”
‘맞아. 고약운 저것은 화근덩어리야.’
능희는 고약운 저 계집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쟤는 내가 죽길 바랐을 거야. 하지만 난 안 죽었어.”
고약운의 미소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자, 이렇게 모두의 실력이 증명된 셈입니다.”
고약운이 살아있는 걸 보자, 혼비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약운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선 안 된다. 저 정도의 강한 정신력이라면, 분명 아가씨를 치유할 수 있어.’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헛기침을 두 번 정도 한 후 말을 이었다.
“자, 청룡국 내 인재가 배출될 시간입니다. 청룡국에는 고생소와 태자 전하 같은 천재들이 있고, 그 맥을 이어나갈 천재가 이중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으면 그 어떤 성과도 거둘 수 없지요.”
모두의 시선이 고약운에게로 쏠렸다.
청룡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에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고약운이었다.
이내 고 장군의 얼굴이 흉악하게 변했다. 그는 눈앞의 고약운이 손녀가 아닌 철천지원수로 보였다.
“고 소저.”
혼비가 고약운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의 형제는 천재지만, 안타깝게도 소저는 폐물이군. 그래도 연기종은 소저의 영해가 유난히 넓다는 것을 알아봤소. 하지만 이런 영해를 가졌다한들, 소저가 가진 실력으론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소이다.”
혼비의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고약운은 그저 씩 웃었다.
‘서령 대륙은 확실히 동악 대륙에 비해 확실히 많이 뒤처지는구나. 연기종 강자조차 이런 영해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전생에서의 나도 이런 영해를 가졌다면 내가 맞게 될 결말 또한 달랐을 거야.’
“그러나.”
혼비의 눈빛이 번뜩였다.
“우리 연기종은 소저를 폐물이라 무시하지 않소. 자, 소저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연기종에 충성할 기회를 드리겠소. 어떻소?”
그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고약운, 넌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덕을 베푼 연기종에 감사를 표해야 할 테지.’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 뭐라는 거야? 폐물더러 연기종에게 충성하라고? 혼비 장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모두들 자신의 귀를 믿지 못했다. 연기종이 왜 폐물에게 충성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다음에 이어진 고약운의 말이었다.
“전 연기종에 관심이 없습니다. 송구하네요.”
그녀는 연기종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태자의 스승인 장로 혼비의 청을 과감하게 거절한 것이다. 점차 흉악해지는 혼비의 표정을 보며, 모두들 땀이 나는 손을 꼭 쥘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