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파렴치한 연기종
혼비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 소저……. 연기종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소. 모두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오. 더군다나 소저 같은 폐물에게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는 방금 전 고약운이 거절을 한 덕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관심 없다니까요.”
고약운은 넋이 나간 혼비의 얼굴을 대충 훑어보았다.
“또한 저는 오라버니의 선택을 믿습니다. 이미 오라버니께선 연기종의 초대를 거절했었지요. 분명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리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제 선택은 오라버니와 같습니다.”
당시 연기종은 꽤 성대하게 고생소를 초청했지만, 그는 수많은 강자들 앞에서 이를 거절했다. 그를 직접 초대한 혼비에게는 당시의 기억이 영원한 고통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상처를 그의 동생인 고약운이 주고 있는데, 어떻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혼비에게서 퍼지는 사악한 기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나무를 쓰러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흉악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고약운. 감히 연기종의 청을 거절하겠다는 거냐? 너처럼 쓸모없는 폐물이 이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만 아니었어도…….”
아가씨의 치유만 아니었어도 그는 폐물 고약운과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
고약운이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몇 번을 물으셔도 똑같습니다. 저 고약운은 연기종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고 장군. 당신의 손녀가 말하는 것을 보셨지요? 가정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키신 겁니까?”
그 말에 고 장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고약운이 했던 말을 듣곤 다소 놀랐으나, 어느 순간 그의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저 계집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다. 연기종과 관계를 맺는 것이 장군부에 얼마나 큰 이득인지를 모르는 것을 아닐 터인데! 굴러들어 온 복을 거절하다니, 장군부에 대한 생각은 쥐뿔도 하지 않는 폐물 계집 같으니!’
고약운의 할아버지 고 장군은 지금까지 고약운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혼비 장로. 자고로 여인이란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 후엔 남편을 따라야 하오. 지금 아버지가 없는 고약운은 당연히 할아버지인 내 말을 들어야 한다오. 그러니 내가 이 일을 결정하겠소. 이제부터 고약운은 연기종의 사람이외다. 그곳에서 저 애가 죽든 살든, 더 이상 우리 가문과는 무관한 일이오.”
말을 마친 뒤 고 장군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고약운의 맑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자 고 장군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몸을 떨기 시작했다.
눈앞의 손녀 고약운은 한낱 폐물일 뿐이고, 그녀의 오라비 고생소는 천재였다. 연기종 같은 대종문이 고 씨 가문과 동맹을 맺는다면, 이는 고 씨 가문에 천재가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만한 가치라면 고약운은 당연히 희생해야 하지.’
이 같은 생각을 하며, 고 장군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렇게 결정하신 겁니까?”
고약운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해서, 그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라음이 고약운의 팔을 꽉 붙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약운이 오늘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고약운의 몸에 빙의된 것만 같았다.
고 장군이 고약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약운, 난 네 할아버지다. 그러니 네 인생을 결정할 권리가 있지.”
“할아버지? 하하하!”
고약운은 참지 못하고 그를 비꼬듯이 크게 웃었다.
“명목상으로 할아버지라고 말씀하지 마시죠. 당신이 할아버지라도 제 인생을 결정할 자격은 없습니다.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할 테니까요. 고가에 머물렀던 건 순전히 제 오라버니 때문입니다. 고가가 바로 오라버니의 집이었기 때문이죠. 그동안 오라버니를 위해서 화를 참았지만, 당신들이 제게 한 짓을 안다면 오라버니는 분명 저더러 고가를 떠나라고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라 장군은 참지 못하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약운아, 네가 라음이와 가까이 지낼 때 나는 걱정이 참 많았다. 둘이 친하지 않길 바라기도 했지. 왜냐면 네가 고가의 사람이라 고 씨 영감이 우리 라음이를 괴롭힐까 봐 그랬고, 또 네가 너무 나약해 보여서 그랬다. 라 씨는 자고로 강인한 사람과 어울리는 법이거든!
그런데 얼마 전 네가 지금까지 나약해 보였던 것은 사실 모두 위장이었다고 하더구나. 난 그 말을 사실 믿지 않았다. 재능의 유무는 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라, 본인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너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래, 뭔가를 마음대로 바꾸긴 어렵겠지, 그러나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는 법! 네가 고가를 떠난다면 우리 라가에서 너를 손님으로 모시며 후하게 대접하마. 환영한다, 고약운!”
고 씨 가문? 연기종? 둘 다 고약운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고약운은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 그녀가 연기종을 두려워하겠는가?
또한 라 장군의 말은 그녀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라 씨 가문은 너무나도 친한 라음의 집안인데,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혼비의 안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라 장군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 장군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냉소를 지으며 라 장군을 쳐다봤다.
“라홍천(罗洪天), 이건 고가의 일일세. 자네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란 말이네! 그저 남에 불과한 자네에겐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자격이 없다네. 이 계집의 부모는 어릴 적에 모두 죽었어. 그러니 할아버지인 내가 이 아이의 부모나 다름없다, 이 말일세! 혼비 장로. 이제부터 고약운은 연기종의 사람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혼비는 이 말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 씨 가문의 사람들은 비교적 눈치라는 게 있어 보였다.
이때, 라홍천이 고약운을 위해 무언가 더 말을 꺼내려 하자, 고약운이 웃으며 그를 제지했다.
“라 장군, 호의는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제 앞엔 고가뿐만 아니라 연기종도 있습니다. 저는 저로 인해서 라가에 피해가 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만 오늘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자신이 강자일 때 누군가가 아부를 하며 치켜세워준다면, 그건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폐물이거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때, 강적 앞에서 자신을 위해 입을 열어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진심으로 그렇게 한 것일 터였다.
라홍천이 베푼 은혜는 고약운의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몇 번을 말해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저는 연기종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고약운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 장군에게 향했던 웃음을 천천히 지우며,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혼비의 어두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흥.”
혼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눈치가 없는 것이니. 나를 탓하진 마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고약운 앞에 다다랐다. 그 속도가 하도 빨라, 마치 빛이 번쩍하고 움직인 것만 같았다.
그의 손에 힘이 몰리며, 그가 고약운을 향해 손을 내려치려던 순간, 온 땅이 굉음을 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혼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 파동은 진법에서 전해진 것 같은데……. 진법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연기종 종주의 딸 시운은 파동이 전해진 후 진법의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진법이 폭발하더니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악마처럼 보이는 은발 남자가 훌쩍 뛰어올랐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을 남자에게도 쓸 수 있을까? 그를 본 모두가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다고 말이다.
아니, 경국지색이라는 말로도 그를 표현하기는 부족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마치 천계에 피는 만주사화가 만개한 것 같았다.
사람의 형상을 한 만주사화가 풀숲에 발을 딛는 순간, 붉은 옷자락이 휘날리더니 은색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땅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색채에 모두가 넋을 잃고 그 남자를 바라봤다.
특히 그의 미간에 보이는 불꽃은 매혹적이면서도 기괴하여, 모두의 뇌리에 박혔다.
남자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 불쌍한 표정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날 버리지 마.”
다들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돌연 황당해졌다.
‘뭐지? 바보인가? 신체는 성숙하나,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한 사람인가? 그렇다면 외모가 너무 아까운데…….’
사람들은 이와 같은 생각에 안타까운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모두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다들 그의 외모에 놀라 그가 진법을 폭발시켰다는 것을 잊고 말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고약운은 그를 보자 골치가 아플 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떨어지지 않는 작은 꼬리 하나를 달게 된 셈이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널 따르고 싶어. 낭자라고 부르는 게 싫다면,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 날 버리지 말아 줄래?”
남자의 눈빛은 너무나도 가련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버려질 강아지 같았고, 고약운은 그를 내버리려는 독한 주인 같았다.
한편 고반반은 이렇게 잘생긴 남자와 고약운이 함께 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고약운,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어떻게 너 같은 거랑 어울릴까 싶었는데,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바보일 뿐이네? 그래, 바보 정도는 돼야 너 같은 폐물하고 어울릴 수 있겠지. 안 그러니?”
고반반은 질투에 못 이겨 악랄한 눈빛으로 고약운을 바라봤다.
반면 남자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못했는데, 바라보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몹시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모두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시운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저 사람이…….’
저 남자는 오래전부터 시운의 꿈에 나타났던 사람이었다.
시운은 자신의 꿈이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매번 꿈속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자신의 앞에 드디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고 오로지 고약운만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고약운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질투가 시운의 심장을 세게 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바로 저 남자의 운명적인 상대라고 말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하지만 시운은 종문의 아가씨로, 체면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평소와 같은 표정을 되찾았다.
“저 남자는 내가 꼭 가져야겠어.”
어릴 적부터 꿈에 그가 나왔다는 건, 자신에게 운명이 정해준 상대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그러니 저 남자는 시운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들 두 사람의 관계에 들러리여야 했다. 단지 두 사람의 감정을 더욱 격하게 할 용도일 뿐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마친 시운은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고약운을 노려보았다.
“고약운, 저자는 누구냐?”
고 장군은 안색이 변하여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서 얼마나 난잡하게 다녔으면, 저런 남자를 사귄 게냐? 고가는 이따위로 아무나 사귀는 계집을 결코 허락할 수 없다. 만약 네가 그자와 관계를 끊지 않는다면, 내 너를 고가에서 쫓아낼 것이다.”
고약운은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사용해 말했다.
“쫓아내실 필요 없습니다. 방금 고가를 떠나기로 결정했거든요. 그러니 전 이제 고가의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