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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능 씨 가문의 위기

9화. 능 씨 가문의 위기

“감히 누가 날 폐물이라 해?”

고약운의 웃음이 점점 차가워졌다. 그녀의 눈 속엔 패기가 흘러넘쳤다.

“이제부터 제대로 기억해둬. 또 누가 날 폐물이라고 하면, 내 실력을 다시 보여 줄 테니까. 난 고약운이야. 고천의 딸이자, 고생소의 여동생이지. 둘 다 세기의 천재인 건 다들 알지? 난 그 두 사람의 얼굴에 절대 먹칠하지 않아.”

고약운은 지난 생에선 명성이나 평판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전생에서 그녀의 아버지 하명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 또한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 고약운으로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녀는 이번 생에서 제 가족들을 보호하고 싶었다.

그녀는 고약운으로서 고천을 위해 꼭 복수를 하고 싶었다. 절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모욕을 받게끔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멀지 않은 곳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가 노란 풀숲에 서 있지만,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영은풍은 멀리서 고약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계속 그녀를 바라봤다.

‘고약운. 정말로 내 주의를 끌려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난 널 영원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영은풍은 원래 천영진에 들어와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으나,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고약운이 자신을 분명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옆에 설 수 있는 건 강자뿐이야.’

고약운이 한 말은, 마치 영은풍 자신이 이전에 고약운에게 했던 말에 대한 대답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영은풍은 제대로 착각을 하고 말았다.

고약운은 영은풍의 등장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한 번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 * *

이때, 잔잔한 호수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바보들아. 폐물 앞에서 뭐하냐?”

능희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더니, 냉소를 지으며 고약운을 바라봤다.

“파동을 느끼면서 영기를 찾고 있었는데, 너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버렸지 뭐야. 너희들 지금 폐물을 무서워하는 거야? 고생소를 모욕하는 게 뭐 어때서? 이런 쓸모없는 동생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수치나 다름없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 고천? 살아서 너 같은 폐물을 본다면 아마 죽고싶어 할 것 같은데? 고약운, 이대로 살아서 뭐하냐? 오라비 망신이나 시키고, 죽은 네 아버지도 널 부끄러워 하실 거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능희는 속이 다 시원했다. 폐물을 이렇게 괴롭힐 때마다 속이 시원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능희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근데…… 이쯤에서 폐물의 눈빛이 흔들려야 하는데…….’

“공자, 조심하세요. 방금 고약운이 호부시랑 댁의 임서(林西)를 내동댕이쳤습니다.”

“네, 맞아요. 임 공자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쳤어요.”

옆에 있던 이들이 능희를 걱정해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뭐?”

능희는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임서는 취기 5급이야. 어떻게 이런 폐물이 임서를 내동댕이쳐? 청룡국 사람들 모두가 못 믿을 걸? 거짓말도 작작해라.”

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능희는 바닥에 쓰러진 임서를 보고 말았다.

‘지금 내가 뭘 본거지? 임서는 왜 여기 누워있어?’

능희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갔다.

능희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곧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구약운.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냐? 아니, 힘이 있는데 왜 나랑 바로 겨루지 않았을까? 근데 너, 날 너무 노려보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겠어? 우리는 다수고, 너는 혼잔데? 아이고, 네가 우리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기회를 주마. 그 검을 이리 내 놔.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니까.”

“입으로 내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알아?”

고약운은 옆에 있던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 이내 솨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 검 한 자루가 나타났다. 녹슨 검 끝은 능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걸 본 능희가 벌컥 화를 냈다.

“누가 녹슨 검을 내놓으래? 그걸 영기라 할 수 있냐? 너 정말 내가 세 살로 보여?”

“그러게. 그냥 낡은 검 한 자루일 뿐이지.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고약운, 좋은 말 할 때 어서 보물을 내놔. 그럼 적어도 고생소한테 네 시체는 보내주마.”

“그래?”

고약운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머리가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난 분명 주려고 했어. 그걸 안 받은 건 너고.”

이때, 영은풍은 침착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멀리서 구약운을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정체 모를 감정이 섞여 있었다.

“구약운. 보아하니 네가 내 눈에 띄려는 게 아니라, 모두가 널 얕보는 것 같구나.”

고약운이 연기종의 영기를 찾아냈다. 이건 그녀의 정신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다.

영은풍은 고약운을 오랫동안 바라본 뒤 숲속으로 사라졌다.

* * *

“고약운. 네가 이렇게 눈치가 없으면 그냥 죽일 수밖에 없어.”

능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널 죽이면 영기도 얻을 테니, 네 천한 목숨도 나름 쓸모가 있겠구나.”

말이 떨어지자마자, 능희와 그의 일행들이 고약운을 기습했다.

‘죽이기만 하면 보물은 내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모두의 눈이 탐욕과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몰려옴에도 고약운의 수려한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기만 했다. 이들이 내는 속도는 느리게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았다.

“너희는 정말 느리구나. 미안하지만, 난 애들 싸움엔 관심 없어.”

그녀가 힘을 쓰자 금세 몇몇이 바닥을 뒹굴었고, 몇몇은 고약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말도 안 돼!”

능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강해질 수 있지? 이런 실력을 몇 년 동안이나 숨겼다고?’

쿵!

능희는 세차게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고약운. 너 일부러 괴롭힘 당한 거야? 어떻게든 나를 뭉개고 괴롭히려고? 도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원한을 산 건데?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나를 모욕하려는 이유가 뭐야? 그럴 가치가 있는 거냐?”

능희는 생각이 많아져 결국 여기까지 도달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고약운이 자신을 심하게 모욕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고약운은 설명하기 귀찮았지만, 능희는 고약운의 침묵을 묵인으로 받아들였다.

“으아악! 고약운! 죽여 버릴 거야!”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능희의 손에는 금빛 부적이 들려 있었다. 이내 부적이 옅은 빛을 발하자, 그의 흉악한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능가의 유일한 부적이다. 할아버지께서 꽤나 큰돈을 써서 고수에게 구매했지.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부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를 부를 수 있어. 고약운, 넌 이제 죽었어!”

능희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부적을 찢었다. 그러자 한줄기 빛이 발하더니, 능의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능희는 한숨을 돌린 후 급히 능의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 손자를 구해주세요! 할아버지께서 주신 부적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 평생 할아버지를 못 보게 됐을 거예요!”

“아니…….”

능의는 이제야 사태를 파악하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이렇게 대담하단 말이냐. 감히 내 손자를 다치게 하다니?”

그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구약운에게 쏠렸다. 그 시선을 따라간 능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 씨 가문의 계집?’

“희야. 저 3급짜리 계집 말이냐?”

“아닙니다, 할아버지. 저 계집은 지금껏 실력을 숨겨왔습니다. 한 번에 우리 모두를 내동댕이쳤어요! 거의 6급…… 아니 7급은 될 겁니다!”

능희는 말을 멈추고 차갑게 웃었다.

“저것이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제게 원한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저를 죽이고 우리 능가의 맥을 끊으려는 속셈일 게 뻔합니다! 저렇게 음험하고 악랄한 것은 절대로 살려둬선 안 됩니다!”

능의 역시 속에서 맹렬한 분노가 샘솟았다. 그는 차갑게 고약운을 쳐다봤다.

“어린 나이에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을 해칠 뿐이다. 무고한 사람을 해지지 말거라.”

능의의 분노는 점점 어두운 기운을 불러들였다. 이윽고 공기가 희박해지더니,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고약운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현재 자신의 실력으로는 능의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고약운은 크게 웃고는 능의를 조롱하며 도망쳤다.

“하하하. 이것이 바로 당당한 능가의 모습인가요? 저처럼 작은 아이가 어르신을 어찌 이깁니까? 소녀, 견문을 더 넓히고 오겠습니다! 오늘의 빚은 제가 기억하지요. 언제가 능가를 멸하는 것으로 이 빚을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여위고 허약한 얼굴에선 패기가 흘러넘쳤다. 이는 황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왕의 기세였다.

능의는 그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십여 년 전, 세기의 천재라 불렸던 고천. 고약운은 대륙의 가장 젊은 무황(武皇)이었던 고천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순간 능의의 눈빛이 번뜩였다.

‘절대로…… 절대로 저 계집을 살려둬선 안 된다!’

“고약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능가를 위협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능의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졌다.

“이제 여기서 죽어라!”

그 말에 고약운이 차갑게 웃었다.

“죽이지 못해서 후회나 하지 마시죠.”

고약운은 말을 마치곤, 능 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내달렸다.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능의는 눈을 가늘게 뜬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약운을 쫓아갔다.

고약운은 능의와 거리가 좁혀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절대 잡혀선 안 돼. 동악 대륙으로 가서 가족들의 복수를 할 때까지 결코 죽을 수 없어!’

여기까지 생각하니 무슨 일인지 힘이 샘솟아, 갑자기 그녀의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고약운의 단정한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마치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고약운은 점차 뛰는 게 힘에 부쳤으며,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안 돼…… 여기서 죽으면 안 돼…….’

- 내가 해결해주마.

이내 자사가 눈살을 찌푸리자, 음산한 기운이 번쩍였다.

“안 돼!”

고약운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는 연기종의 진법 안이야. 네가 나타났다간, 저들의 주의를 끌 수 있어. 지금은 그 세력과 연루되고 싶지 않아.”

이게 바로 그녀가 걱정하고 있던 점이었다.

자사는 고약운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수이자, 복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사가 나타나는 건 막고 싶었다.

* * *

고약운은 능의가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곧이어 눈앞에 절벽이 나타나자, 고약운은 급히 멈춰섰다. 그 모습을 본 능의가 크게 소리쳤다.

“어디로 도망을 가겠다는 것이냐. 기껏해야 취기 4급 주제에! 넌 영원히 청룡국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죽어라!”

‘잠깐, 이 계집이 취기 4급의 실력으로 내 손자를 이겼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능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약운은 웃고 있었다.

“여기서 죽으라고? 당신은 날 죽일 능력이 없어.”

그녀는 이 말을 남긴 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그걸 본 능의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고약운은 그의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절벽을 내려다보던 능의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면 시신도 다 갈기갈기 찢기겠구나. 그래도 시신을 찾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지. 고약운, 살아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