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사탄은 굴려야 제맛 (1)
"뭐? 명창 로이트 프론테라가? 지옥의 중심에 있다고?"
이곳은 지옥성 인근 수도권(?)의 어느 용암탕.
열댓 명의 사탄들이 용암에 몸을 녹이고 있었다.
오늘도 부모님께 근심을 늘려드린 사탄.
부모님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만들어드린 사탄.
온갖 패악질로 부모님 등골 브레이킹에 성공한 사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평소라면 그런 자신의 패륜과 패업을 자랑하듯 떠들곤 하는 사탄들이었다.
한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평소보다 신선한 화젯거리가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잠깐, 소문의 그 저세상 고음불가의 주인공?"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이 그 노래 듣다가 골로 갔다던데?"
"크크크. 왜 아니겠어."
소식을 가져온 외뿔 사탄이 히죽 웃었다.
"다들 며칠 전에 느꼈지 않나. 헬게이트가 열리던 거."
"아, 느꼈지."
"그럼 찬사의 당사자가 지옥에 발길을 들이는 것도 다 느꼈을 텐데."
"당연하지. 그런데 그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옥의 중심에 있다고?"
"그래."
외뿔 사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소식이 느리구만. 오늘 아침 지옥왕께서 곳곳에 포고령을 내리셨는데."
"그게 진짠가?"
"당연하지."
"정말?"
"그럼 내가 없는 지옥왕의 포고령을 거짓으로 만들었을까?"
"하긴. 그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그러니까 믿어야지."
"좋다. 믿는다. 그러니까 명창의 노래를 들어보러 가자! 지옥의 끝자락으로!"
"...난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옥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끝자락으로 가야지."
"왜?"
"네가 나 같으면 너 같은 놈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겠냐?"
"...."
"가자! 끝자락으로!"
용암탕에서 몸을 녹이던 열댓 마리의 사탄이 일어났다.
짐을 챙겨 지옥의 끝자락을 향한 여정에 나섰다.
그곳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지옥성 인근에서도.
어느 이름 모를 화산 옆구리 자락에서도.
매연 가득한 심연의 연옥에서도.
온갖 사탄 마귀들이 로이드 프론테라의 소식을 접했다.
지옥의 끝자락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유는 모두 똑같았다.
'명창이라잖아? 찬사까지 얻으며 두루 칭송을 들었잖아? 그러니까 확인해봐야지. 그놈 노래가 실제로 그렇게 끔찍한지. 그리고 만약에 그 노래가 소문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악담을 퍼트리리라.
작은 것도 꼬투리를 잡아 과장하리라.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물어뜯고 비방하리라.
그렇게 그 명창의 명성에 먹칠을 하리라.
자기보다 잘나가는 놈이니까.
그런데 왜 잘나가는지 모르겠는 놈이니까.
자격 없는 그런 놈은 어떻게든 몰락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야 자신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질 것 같으니까.
이참에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끌어내리리라.
'흐흐흐, 각오해라.'
사탄들은 마음속으로 음흉한 칼을 갈았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세상 고음불가?
세기의 명창?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자기보다 딱히 잘난 구석도 없어 보이는데 명성을 얻고 칭송을 듣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저런 놈보다는 자신이 훨씬 낫다고.
자신도 기회만 생기면 저런 놈보다 훨씬 유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멍청한 빡대가리 같은 세상이 그걸 몰라보는 거라고.
그래서 자신이 안타깝게 묻혀 있는 거라고.
하지만 언젠간 자신도 떠오를 거라고.
진가를 발휘할 것이라고.
그러니 어울리지 않는 명성을 얻고 있는 놈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그래야 이 멍청한 세상이 조금은 바로잡힐 거라고.
그렇게 사탄들은 생각했다.
음습한 질시.
음흉한 경쟁심.
속내에 시기심 한 무더기를 감추고서.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백수 사탄들이 지옥의 끝자락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모습에 하비엘이 기함했다.
"...설마, 지옥왕에게 협조를 요청했던 목적이 이거였던 겁니까."
"어. 당연하지."
"처음부터 이걸 예상했던 겁니까."
"물론 당연하지."
이곳은 지옥의 끝자락.
그곳에 우뚝 솟은 어느 뾰족한 바위 꼭대기에서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바위 아래, 구름처럼 운집한 3만의 사탄 무리를 둘러보았다.
'딱 좋아.'
기대 이상이다.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사탄 무리를 바라보는 로이드의 입꼬리가 수확철을 맞이한 농부의 미소처럼 훈훈하게 올라갔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생각을 해봐라. 여기가 어떤 동네냐."
"지옥이지요."
"그런데 여기 사탄들이 유명하고 칭송받는 사람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냐."
"시기와 질시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어. 정답."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야. 날 끌어내고 헐뜯으려고 모여들 거라고 봤지. 그 결과가 이거고."
로이드가 평원을 스윽 가리켰다.
워우우우우!
그의 손길을 본 3만의 사탄들이 화답했다.
평원을 거친 아우성으로 가득 채웠다.
처음엔 중구난방으로 울부짖던 사탄들이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며 그 외침이 하나로 통일되어 갔다.
"한 곡 뽑아봐라! 당장!"
위협적인 재촉.
사나운 눈길.
운집한 사탄들의 기세가 한층 흉흉해졌다.
사탄들을 굽어보는 로이드의 미소가 한결 의미심장해졌다.
그가 손나발을 만들었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증폭된 마나로 성대를 강화했다.
평소보다 열 배쯤 커진 그의 헛기침 소리가 손나발을 타고 평원에 울렸다.
"커흠! 흠!"
그 소리가 울린 순간부터였다.
거친 아우성으로 가득하던 평원이 잠잠해졌다.
사탄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수만 쌍의 시선이 로이드에게 쏠렸다.
모두가 기다렸다.
로이드의 노래가 시작되기를.
모두가 기대했다.
로이드의 노래에서 꼬투리를 잡을 수 있기를.
그런 모두의 음습한 갈망과 바람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로이드의 미소가 음흉해졌다.
"너희들, 설마 내가 노래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여기 모인 거냐?"
"...!"
모두가 움찔.
로이드의 태연한 말이 이어졌다.
"근데 노래해 주기 싫은데?"
"...."
"내가 왜?"
"...."
"꼭 불러줘야 할 이유라도 있나?"
"...말도 안 된다!"
어느 외뿔 사탄이 발끈해서 외쳤다.
"우리가 여기까지 모였잖나! 네 노래 한번 들어보겠다고!"
"응, 그런데?"
"그런데 노래를 안 하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응, 되는데?"
"...뭐?"
"너희가 많이 모인 거랑 내가 노래해야 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로이드가 능글거리는 미소를 담고서 되물었다.
"그, 그래도!
외뿔 사탄이 당황하며 대꾸했다.
"지옥왕이 포고령을 내렸다! 네가 여기서 노래할 거라고!"
"응. 방금 취소됐어."
"...."
"들어봤자 인생에 개뿔 도움도 안 될 노래 하나 듣겠다고 여기까지 이렇게나 모인 네놈들이 참 한심하다. 안 그러냐? 다들 진짜 할 일 없이 한가한가 봐?"
"...."
"게다가 내가 너희랑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 아니잖아. 그런데 왜 노래해 주는 게 의무인 것처럼 떠들고 있는 건데. 하고 안 하고는 내 마음인데. 안 그래?"
"...."
"그래서 안 한다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억울해?"
"당연하지!"
"그럼 다들 나한테 낚인 걸로 하자."
"...."
"아, 그러면 더 억울하려나?"
"...."
부글부글.
운집한 사탄들의 마음속에서 열기가 끓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인간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 할 수가 없었다.
왜?
저놈의 곁에 붙어 있는 은발 기사 놈이 너무 강하니까.
무려 헬나이트, 지옥의 1군단장을 쓰러뜨린 놈이니까.
어설프게 덤볐다간 자신 같은 보통의 사탄들은 수천이건 수만이건 모조리 도륙당할 테니까.
그렇듯 부들거리는 사탄들을 향해 로이드의 비웃음이 쏟아졌다.
"다들 아직도 볼일 남았나? 아니면 미련 때문인가? 난 이제 여기서 네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나 할 거다. 억울하면 덤비든가. 아니면 왔던 곳으로 꺼져서 부모님께 효도나 하든가."
"...."
분노에 잠겨 침묵하는 사탄들.
로이드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바위 반대편 아래로 내려왔다.
기다리던 하비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녀석답지 않게 이쪽을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저, 로이드 님."
"응, 왜?"
"저들, 기껏 지옥왕에게 협조를 부탁해서 모은 사탄들이지 않습니까."
"어, 그렇지."
"한데 어째서 그런 식으로 저들을 대하신 겁니까."
"응?"
"매정하고 야박한 방식으로 저들을 대해서 얻을 이득이 없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해?"
"예. 저들이 모이면 로이드 님이 그 끔찍한... 노래를 불러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놈들을 일꾼으로 쓰게 될 거라고 본 거야?"
"예. 그래서 걱정입니다."
"뭐가 걱정되는데."
"저들이 이번 일로 앙심을 품고 로이드 님의 일을 훼방 놓으려 들지 않을까요."
"어. 분명 그럴 거야."
"예?"
"분명 그럴 거라고."
"그런데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예."
"내 일을 훼방 놓으라고 그런 거지. 그래야 일이 진행될 거거든."
"예?"
"설명할 시간 별로 없고. 일이나 시작하자. 따라와."
어리둥절해하는 녀석에게 손짓했다.
지옥의 끝자락 근처 미리 눈여겨 봐둔 장소로 데려갔다.
근처가 탁 트여 있는 평탄한 지형이었다.
한쪽으로는 덜 굳어 부글거리는 용암 연못이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 이제부터 삽질 좀 하자."
턱!
배낭에서 접이식 삽을 꺼내 하비엘에게 건넸다.
자신도 삽을 야물딱지게 쥐었다.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을 파내려는 겁니까?"
"응."
"무엇을 위한 삽질인 겁니까."
"사냥."
"예?"
"며칠 뒤부턴 사냥감이 줄줄이 몰려올 거라서."
"사냥감이라니...."
"그런 게 있어. 철도 건설의 핵심 재료를 공급해줄 소중한 사냥감이랄까."
"...."
하비엘은 묘한 눈길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다.
이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는 저 미소도 그렇다.
마치, 뭔가를 미리 다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뭘 그렇게 신기하단 듯이 쳐다보냐."
"...."
"나 예언가 아니거든. 조상님 중에 신기 있는 분도 없었거든? 지금 이거, 엄연히 머리로 계산하고 설계한 상황을 예측하면서 준비하는 과정인 거거든."
"...."
"그러니까 일단 하자는 대로 파자?"
"알겠습니다."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
무엇을 준비하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짐작할 수 있긴 했다.
'분명 지옥에 대해 남들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옥왕을 만나러 가던 때에도.
지옥왕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로이드 님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지옥의 무언가를 혼자만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일단은 믿어보리라.
적어도 로이드 님은 자신의 주위를 해롭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지금껏 영지와 주위 모두를 위해 수없이 헌신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믿어보자.
은발의 기사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로이드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이 시공 가이드라인을 따라 땅을 파내면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츠츠츠츠츠!
어느새 지면에 시공 가이드라인이 디테일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은 로이드와 함께 열심히 땅을 팠다.
파내고, 퍼내고, 또 팠다.
지치지도 않고 팠다.
무려 그랜드 마스터의 삽질이었다.
거기에 뽀동이와 방울이도 가세했다.
덕분에 일행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땅굴 하나를 파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커다란 호리병 형태를 갖춘 땅굴이었다.
입구의 지름은 약 10미터.
입구에서 이어지는 통로의 기울기는 가파른 60도.
그렇게 약 100미터에 달하는 통로 끝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다.
방의 폭과 깊이, 높이는 80, 200, 50미터였다.
로이드는 그 방 중심에 아담한 욕조를 팠다.
그리고 욕조를 가득 채웠다.
그 역할은 하망이가 도맡았다.
"하망! 하마망!"
호로로록!
마침 근처에 펄펄 끓는 온천이 있었다.
하망이는 뜨거운 커피 마시듯 온천수를 호호 불어가며 흡입했다. 담아왔다. 욕조에 뱉었다.
그렇게 욕조가 채워지자 꼬밍이의 차례가 왔다.
"꼬밍아?"
"꼬밍?"
"너, 목욕 좋아해?"
"꼬밍!"
"별로 즐기진 않는다고?"
"꼬미밍!"
"흐음, 그런데 어떡하냐. 요즘 보니까 너, 깃털에 벼룩 좀 보이던데."
"꼬밍?"
"그럼 씻어야겠지?"
"꼬, 꼬밍!"
"그래, 결심해줘서 고마워. 입수."
"...꼬밍!"
풍덩!
꼬밍이가 온천수로 뛰어들었다.
처음엔 별로 내켜 하지 않다가.
막상 뛰어드니 편안한 듯 표정이 늘어졌다.
"꼬, 꼬미미이이잉...."
"좋아?"
"꼬미이이잉...."
"그래, 다행이야. 좋다니까 계속 그렇게 있자. 한 열 시간쯤."
"...꼬밍?"
"그래야 육수가 충분히 배어나거든."
"...."
그때부터였다.
꼬밍이는 팔자에도 없던 온천욕을 장장 10시간이나 이어가야 했다.
심지어 욕조의 물이 잘 식지도 않았다.
워낙 지열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꼬밍이의 두 발이 그냥 아주 제대로 통통 불었다.
그런 희생(?) 덕분이었다.
꼬밍이가 몸을 담근 온천수가 제대로 된 뱁새 육수(?)로 우러났다.
"흠흠, 향기 좋고."
로이드는 온천수를 알뜰살뜰 퍼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조심조심.
땅굴 입구 근처와 통로에 골고루 뿌렸다.
그제야 로이드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배어났다.
"휴, 다 됐다."
유리병 함정 대신에 땅굴.
닭 육수 미끼 대신에 뱁새 육수.
이걸로 준비가 다 갖추어졌다.
지옥의 용암 열기에 녹거나 휘지 않을 현지 맞춤형 건설 자재.
그리하여 지옥 철도의 노반 시공기면을 안정하게 지탱하고 부등침하를 막아줄 자재.
동시에 노반 위에 놓일 철도 레일과 침목으로도 공급될 자재.
그걸 한 큐에 대량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이제, 이쪽에게 빡친 사탄들이 데려올 수많은 용암 지네를 사냥할 때가 왔다.
234화. 사탄은 굴려야 제맛 (2)
츠샤샤아앗! 츠츳츳!
200개의 다리가 물결쳤다.
용암을 휘저었다. 바닥을 박찼다.
기다란 동체를 돌진시켰다.
푸확!
한 마리 거대한 용암 지네가 용암 연못을 벗어났다.
몸길이는 무려 30미터.
몸통의 지름만 1미터.
실로 거대한 지네였다.
성격 또한 지극히 흉포했다.
쉬쉭! 츳츳츠!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사방으로 살기를 뿌려댔다.
뭔가 거슬리는 대상이 발견되면 당장 덤벼들어 커다란 위턱으로 갈기갈기 찢어놓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런 용암 지네의 등에 탄 사탄은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었다.
'크흐흐! 바로 이거지!'
어느 외뿔 사탄의 만면에 사악한 미소가 배어났다.
동시에 야무진 확신도 쑴펑쑴펑 솟구쳤다.
"어떠한 뜨거운 용암에도 녹지 않는 단단한 껍질! 제아무리 철통 같은 갑옷이라도 단숨에 뚫을 위턱! 거기에 바위쯤은 단숨에 으스러뜨리는 괴력까지! 그런 용암 지네를 3만 마리나 모았다! 크핫하!"
"크핫하하!"
"죽어 버려, 로이드 프론테라!"
"끝장내 버려, 명창 따위!"
"저세상 고음불가? 이참에 진짜로 저세상에 보내주자!"
"크하!"
외뿔 사탄의 외침.
그 외침에 따라 3만 마리의 사탄이 외쳤다.
그들 각각이 타고 있는 용암 지네 3만 마리가 쉭쉭거렸다.
3만의 사탄과 3만의 용암 지네.
그들의 진격은 실로 위용이 넘쳤다.
진군하는 것만으로 용암 연못이 까맣게 뒤덮였다.
발길이 지나간 것만으로 일대의 현무암 바위가 으스러지고 평평해졌다.
진격로에 살던 지옥의 모든 생물들이 숨을 죽였다.
그럴 법했다.
사탄도 물론이지만, 용암 지네는 실로 무시무시한 생명체였다.
지옥 생태계의 당당한 상위 포식자였다.
어떤 용암에 집어넣어도 녹지 않는 단단한 껍질.
최소 20, 최대 30미터에 달하는 몸길이.
사나운 성질 덕에 용암 연못에서 당할 생명체가 없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은?
그런 용암 지네가 무려 3만 마리나 모였다.
지옥에 서식하는 거의 모든 개체를 몰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상관없어!'
3만 마리의 용암 지네.
그 무리의 진격을 선두에서 이끄는 외뿔 사탄은 생각했다.
'우리를 모욕했잖나. 감히 인간 주제에 사탄을!'
생각만 해도 주먹이 덜덜 떨렸다.
굴욕이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 인간의 흠집을 잡아보려 했었다.
명창이라는 명성에 금을 내고 싶었다.
그래서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지옥의 끝자락까지 갔었다.
한데 막상 가 보니?
그놈이 자신을 낚았다.
왜 노래를 불러줘야 하는 거냐고.
마치 하찮은 벌레 대하듯이 굴었다.
낚시를 한 게 맞다고 태연하게 시인했다.
심지어 이럴 시간에 집에 가서 효도나 하라는 덕담까지 했다!
'그게 더 굴욕적이었어!'
모욕적이었다.
치욕적이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반드시 갚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끌고 왔다.
함께 굴욕을 겪은 사탄들과 협력해서.
무려 보름의 시간이나 알차게 들여서.
지옥 전체의 용암 지네를 박박 모아서 끌고 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로이드 프론테라의 굴욕!"
"혹은 죽음!"
"끝장내자!"
"크아아!"
외뿔 사탄의 선창에 29,999명의 사탄이 포효했다.
그리고 모두가 확신했다.
'이긴다, 이 싸움은! 반드시!'
무려 3만 마리의 용암 지네였다.
제아무리 강력한 기사가 있다고 해도.
이건 감당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지옥의 군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헬나이트라 해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용암 지네는 천 마리 정도가 한계니까!'
예를 들자면 인간 로이드와 하비엘에게 당했던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가 그랬다.
헬나이트 중에서도 특출하게 강했던 그 지옥의 1군단장은 홀로 약 1,300마리의 용암 지네를 상대한 전적이 있었다.
그게 헬나이트의 한계(?)였다.
한데 지금 모인 3만 마리의 용암 지네라면?
로이드 프론테라가 제아무리 끔찍한 노래를 불러댄다고 해도.
하비엘 아스라한이 아무리 강력한 기사라고 해도.
반드시 짓밟을 수 있을 것이었다.
'크흐흐, 아무리 헬나이트를 쓰러뜨렸다 해도 결국엔 인간이니까. 그사이에 강해져 봤자 얼마나 달라졌겠어? 그러니 자비는 없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반드시 감상해주마!'
투확!
마침내 3만의 사탄과 용암 지네가 지옥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자신들에게 굴욕을 안겨준 로이드 프론테라.
그 가증스러운 인간을 찾으려 눈길을 번득였다.
그런데....
"어디 갔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를 찾아보아도.
하다못해 화산 구덩이를 뒤적거려도.
그 어디에서도 로이드 프론테라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도망친 건가?"
"그럴 리가!"
사탄들이 당황에 휩싸였다.
한데 그때였다.
츳츠츠?
그들을 태운 용암 지네들이 일제히 움찔, 몸을 떨었다.
돌연 머리를 치켜들더니 사방으로 더듬이를 흔들었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외뿔 사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엔 별것 아닌 일로만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점점, 지네가 말을 듣지 않았다.
명령을 전혀 듣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츳츠츠츠츠!
멈추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용암 지네가 내달리고 있었다.
한쪽 방향으로만 더듬이를 바쁘게 놀리며.
마치 그쪽에서 향긋한 먹잇감이라도 찾아낸 듯이.
아예 통제할 수 없는 맹목적인 기세로 돌진했다!
"으, 으으앗! 이거, 왜 이래!"
외뿔 사탄은 당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모든 지네가 똑같았다.
3만 마리의 지네들이 일제히 통제에서 벗어나 한곳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쪽에서 지네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츳츠츠!
용암 지네들의 더듬이가 흥분으로 연신 떨렸다.
지네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냄새.
본능을 자극하는 저 먹음직한 냄새.
마치 닭을 푹 고아낸 듯한 저 육수 향기!
그걸 맡자마자 전신의 껍질이 덜덜 떨렸다.
당장 달려가서 저 향기에 풍덩 빠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달렸다.
점점 짙어지는 향기를 찾아서.
화산재 평원을 지나, 바위를 부수고, 어느 땅굴을 찾아냈다.
츠츠츳츠!
확실하다.
땅굴 속이다.
저 안쪽에서 짙은 육수 향기가 퐁퐁 솟아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자신을 조종하던 사탄의 목소리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야! 멈춰! 멈추라고! 야!"
츳츠츠츠츠츠!
사탄의 외침을 무시하고 땅굴로 뛰어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짙은 육수 향기가 더듬이를 사로잡았다.
미친 듯이 내달렸다.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땅굴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간 순간.
지네는 발견할 수 있었다.
"꼬밍?"
웬 커다란 뱁새가 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던 건지, 온몸의 깃털이 통통하게 불어 있었다.
그 옆에서는 어느 인간이 진하게 고아진 육수, 아니, 온천수를 퍼서 물통에 담다가 이쪽을 보며 웃었다.
"거 봐. 내가 온댔지?"
그 인간의 물음이 향한 곳.
그곳에 은발의 기사가 앉아 있었다.
전혀 당황하지 않은 차분한 눈길로.
마치 정육점에 들어온 새 고깃덩이를 바라보듯이.
이쪽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두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숫돌에 검을 갈았다.
싸아악↗
...츳츠?
뜻밖의 분위기에 지네가 움찔했다.
♣
사냥은 성공적이었다.
3만 마리의 지네가 모조리 처리(?)되었다.
3만 명의 사탄도 모조리 사로잡혔다.
그 과정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츳츠?
가장 먼저 입장한 선두의 용암 지네.
놈이 움찔거리는 순간.
하비엘의 검이 번득였다.
그걸로 지네의 운명이 끝장났다.
투컥!
수십 갈래의 정교한 오러가 지네의 전신을 휘감았다. 잘라냈다. 해체했다.
등껍질, 배껍질, 더듬이, 다리를 똑같은 크기와 길이의 규격으로 분해했다.
껍질 안쪽 알맹이는 옮기기 좋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했다.
거기까지 걸린 과정은 딱 0.2초.
오러의 섬광이 잦아들었을 때.
용암 지네는 모든 부위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포장만 남겨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 위에 타고 있던 외뿔 사탄은?
로이드의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대가리 박아."
"옙."
처척!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외뿔 사탄이 잽싸게 땅굴 구석으로 달려갔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졌다.
마침 이마에 돋은 뿔이 있어서.
그걸 땅속에 콕 꽂으면 되어서.
대가리 박으면서 중심 잡기가 편해서.
나름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눈물 흘렸다.
그 사이에 사냥이 척척 진행되었다.
츳츠츠!
다음 지네가 뱁새 육수의 향기에 이끌려 들어오면?
투커걱!
어김없이 하비엘의 오러가 슥삭 빛났다.
처척!
살아남은 사탄의 대가리 박기도 여지없이 실행되었다.
그 사이 뽀동이도 바빠졌다.
하비엘에게 해체된 지네 껍질과 알맹이 속살을 부지런히 옮겼다.
함정 내부가 그 잔해로 뒤덮이지 않도록.
사냥이 계속 원활히 진행되도록.
미리 입구 반대편에 파둔 출구로 지네 잔해를 옮겼다.
그렇게 사냥이 온종일 이어졌다.
사태를 깨달은 사탄들이 지네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뱁새 육수에 눈이 돌아간 지네들이었다.
안에 함정이 있건 말건 무조건 돌진했다.
차례대로 함정에 들어와 하비엘의 검에 차례차례 잘려나갔다.
그렇게 사냥에만 꼬박 8일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3만 마리의 지네가 차곡차곡 해체되고, 정리되었다.
그 부산물이 모조리 로이드의 임시 자재 창고에 쌓였다.
3만 명의 사탄도 모조리 생포되었다.
드넓은 화산재 평원에 무릎 꿇려졌다.
"후후, 흐흐흐."
"...."
"후후후, 흐흐흐흐."
"...."
평원 위로 흐르는 로이드의 웃음.
그 불길한 소리를 들으며 사탄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야심차게 모았던 3만의 용암 지네.
그게 그토록 허무하게 썰릴 줄은 몰랐다.
로이드가 그런 함정을 파놓았을 줄도 몰랐다.
그를 따르는 은발의 기사가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한참 뛰어넘었다는 사실은 더 몰랐다.
그냥, 이런 꼴이 되어 생포될 줄 정말로 몰랐다.
'하. 사탄 인생. 더 쓰레기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외뿔 사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서 이렇게 끝장날 줄 알았다면 더 나쁘게 살걸.
괜히 어설프게 후회하지 말고 제대로 못된 짓 많이 할걸.
하지만 인생은 짧고 후회는 언제나 한발 늦는 법.
"어이, 너."
처척.
어느새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가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이놈들 전부 선동했다며?"
"...."
외뿔 사탄은 대꾸없이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로이드의 목소리가 살짝 사악해졌다.
"그러니까 벌을 받아야겠지?
"...."
벌 같은 거, 주든가 말든가.
어차피 그냥 죽일 거면서.
무슨 말이 저렇게 많은지.
외뿔 사탄은 다가올 죽음을 의연히 기다렸다.
한데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은 그의 예상을 다소 벗어난 것이었다.
"너, 이제부턴 죽고 싶어도 못 죽을 거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 정도로 굴려주지."
"...예?"
그게 무슨 소리야?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무지막지하게, 굴려먹고 부려먹을 악덕 업주의 미소를.
"예는 무슨. 일하라고. 나한테 잡혔으니까."
"...."
"그러니까 너흰 이제부터 내 노예인 거거든. 이해가 안 되냐?"
"...저기, 그럼."
"어. 질문해봐."
"안 죽이는 겁니까?"
"왜 죽여?"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상큼하게 웃었다.
"죽기 직전까지 공짜로 부려먹을 놈들을 죽이면 손해 아니냐?"
"...."
"그런데 왜 죽여. 귀찮고 번거롭게."
"...."
"죽을 거면 차라리 일하다가 과로사로 죽어라. 그게 이제부터 네가 유일하게 죽을 수 있을 방법일 거다."
"...."
차라리 지금 죽여줘.
외뿔 사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를 향한 로이드의 미소에는 자비가 없었다.
아니, 고용계약서 따위도 없었다.
'사탄들이 상대니까.'
당연히 계약서는 만들지 않을 거다.
근로자를 위한 복지와 정당한 임금도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놈들, 말 그대로 사탄이거든. 그런데 이놈들한테 어설프게 잘 대해주면? 바로 호구 잡혀. 그게 지옥의 섭리니까.'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
순리를 지키면 낭패만 본다.
그게 지옥을 지배하는 규칙이었다.
자고로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그러니 이번만은 힘껏 현지화(?)를 시도하자고 로이드는 다짐했다.
'마침 계획이 제대로 먹혔기도 했고.'
그냥 먹혀들어간 정도가 아니었다.
대성공이었다.
지옥왕을 통한 소문 퍼뜨리기.
그렇게 모인 사탄들에게 모욕 주기.
그러면 이놈들이 반드시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다.
'사탄들의 특성이 그래. 원한이 생기면 꼭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라서. 심지어 그 원한의 대상이 자기보다 잘나가는 놈이다? 그러면 어김없지.'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리라.
그렇게 예상했다.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과연 사탄들은 지옥의 생물 중에서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생물을 몰고 왔다.
그게 용암 지네였다.
'철혈의 기사에서 잠깐 나왔지, 용암 지네.'
이름 그대로 용암 연못에서 서식하는 지네였다.
서식지가 서식지이니만큼 용암에 녹지 않는 껍질을 지녔다.
덩치마저 크고 아름다워서 껍질의 양도 충분하리라 보았다.
이번 철도 시공에 쓰일 핵심 자재로 말이다.
'그게 무려 3만 마리야. 그 정도면 충분해.'
철도가 놓일 지반.
그 지반 위로 조성될 노반.
노반을 따라 설치될 침목과 레일.
그걸 만드는 데에 쓰일 자재 전부를 지네에게서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자신은 지네 사냥(?)의 경험도 나름 풍부했다.
어디에서?
군대에서.
어쩌다가?
행보관의 충실한 SCV가 되어서.
'하. 지금도 생각하니까 빡친다.'
당시의 행보관은 건강식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느 날인가, 행보관이 지네를 술에 담가 먹으면 몸에 좋다는 소리를 듣고 왔더랬다.
덕분에 자신은 약 2주 동안 지네 사냥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했다.
'그때 제대로 경험치 쌓았지. 빈 페트병에 닭 육수 부어놓고 기다리다가 지네가 병에 들어가면 파팍! 어휴, 내가 무슨 심마니나 세수코 직원도 아니고.'
어쨌건 그때의 경험 덕분이었다.
용암 지네를 성공적으로 잡은 것은 물론이고 3만 마리의 사탄 노예 일꾼까지 확보했다.
그 성과를 생각할수록 사악한 미소가 보람차게 쑴펑쑴펑 솟구쳤다.
"참고로 미리 말해두지만, 안전제일? 꺼지라 그래. 당연히 일당도, 추가 수당도 절대로 없다? 뭐, 싫으면 하비엘 감시 뚫고 도망쳐보든가."
"...."
외뿔 사탄도.
나머지 사탄들도.
모두 생각했다.
저 인간, 그 지닌바 악랄함이 은근 자신들 스타일이라고.
'크흡, 반하면 안 되는데... 존경스럽잖아!'
사탄들을 대하며 유례없는 악덕업주로의 변신을 결심한 로이드.
어느덧 3만 명의 사탄들은 그런 로이드의 무자비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235화. 사탄은 굴려야 제맛 (3)
이곳 지옥은 묘하게 서울을 떠올리게 한다.
간혹, 꼬밍이의 등에 몸을 싣고서 하늘을 나는 지금 같은 순간이면 특히 그렇다.
'측량.'
[스캔을 시작합니다.]
로이드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활짝 펼쳐진 꼬밍이의 날개 너머, 지상의 광경이 보였다.
"...."
물론 서울과는 다르다.
곳곳에서 터지고 있는 활화산.
화산 옆구리에서 케첩처럼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용암.
사방에 가득한 열기까지.
한눈에 봐도 서울과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딱 하나, 숨쉬기 빡쎄다는 게 좀 비슷하지.'
어딜 가나 화산재가 날렸다.
서울의 미세먼지를 연상시켰다.
매캐한 유황 냄새는 자동차 배기가스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곳이 서울보다 훨씬, 오조 오억 배쯤 치명적이고 지독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향수병 돋긴 하네.'
고시원 1층 김밥헤븐 아주머니는 잘 지내실까.
종종 눈치 주면서도 그래도 챙길 건 챙겨줬던 고시원 총무는 여전히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을까.
'아,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별로 좋지도 않았던 곳을 잠깐이나마 추억 대하듯 떠올리다니, 자신이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로이드는 정신을 차리고 측량에 집중했다.
'그래도 용암만 빼면 험난한 지형이 의외로 별로 없어. 다행이야.'
그가 지금 측량하고 있는 이곳 지옥의 평원.
의외로 지형이 온화(?)했다.
지나치게 높거나 험준한 산이 딱히 없었다.
깎아지른 절벽이나 분지 같은 지형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제일 흔한 지형이 화산재로 가득한 평원이었다.
'화산 활동이 활발한 탓이겠지.'
산이 높아질 틈이 없다.
화산?
좀 높아진다 싶으면 금방 터지고, 무너진다.
분지나 계곡?
있어봤자 금방 용암이나 화산재로 메꾸어져 버린다.
그런 까닭에 지옥의 전체적인 지형은 평탄, 그 자체.
덕분에 공사가 제법 편해질 듯했다.
'철로를 놓기 위해 산을 파서 터널을 만들거나 계곡을 지나기 위해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평원에 곧은 철로를 쭈욱 놓기만 하면 된다.
군데군데 수백 군데씩 퍼져 있는 용암 연못은?
'요령껏 피해 가면 되는 거고.'
그렇게 로이드는 지옥의 평원을 쭈욱 측량했다.
지하 5미터까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산재가 그나마 덜 쌓인 곳.
용암이 흘러들지 않을 곳.
그런 곳들을 면밀히 파악했다.
하나의 경로로 연결했다.
그 경로가 점점 연장되었다. 길어졌다. 계속 이어졌다. 지옥의 끝자락에서 지옥성이 있는 곳까지. 총 110킬로미터에 걸쳐.
그 후에야 로이드는 지옥의 끝자락으로 돌아왔다.
노예 사탄들을 억류해둔 캠프에 착륙했다.
'후아.'
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꼬밍이의 등에서 내렸다.
자그마치 3일 내내 잠을 걸렀다.
그동안 아스라한 심법으로 버티며, 계속 눈에 힘 빡 주며 측량에 집중해야 했다.
덕분에 철로를 놓을 경로를 모조리 측량하고 데이터를 따낼 수 있었지만, 대신에 눈알이 뻑뻑해지다 못해 시멘트에 담긴 것 같은 피로감을 만끽해야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물 좀."
"여기 있습니다."
하비엘 녀석이 건네주는 식은 온천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이."
"예."
"너 설마, 여기서 하염없이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그런 소름 돋는 말씀을.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내가 지금 돌아올 걸 어떻게 알고 나왔어?"
"그냥 느껴졌습니다."
"느껴져?"
"예. 5분쯤 전부터요."
"설마...."
"그 설마가 맞으실 겁니다. 꼬밍 경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습니다."
"...."
"그래서 로이드 님이 돌아오고 계신 걸 알 수 있었고, 이렇듯 마중을 나오게 된 겁니다."
"...."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지."
"...."
"로이드 님?"
"어."
"뭐하시는 겁니까. 아무 말 없이 절 빤히 쳐다만 보시고."
"아, 내 목소리 못 들었냐?"
"예?"
"입속으로 완전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네 험담."
"...."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그 험담의 핵심에 저를 향한 로이드 님의 부러움이 담겨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헐?"
"키도 제가 더 크고."
"...."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
"검술이야 뭐."
"...."
"심지어 노래도 제가 더 잘하지요."
"잠깐! 너 지금까지 노래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어떻게든, 성대가 사라져도, 설령 발톱으로 노래해도, 로이드 님 노래보단 나을 자신 있습니다."
"...."
"훗."
"...."
이 기분, 뭘까.
비비탄 한 발 딱콩 쐈는데 대포알로 쿠쾅, 하고 돌려받은 듯한 이 억울함은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하는 걸까.
로이드는 사골육수처럼 쑴펑쑴펑 피어나는 자괴감을 쓴웃음으로 털어냈다.
"뭐, 어쨌건. 그동안 사탄들은?"
"비교적 얌전했습니다."
"그래?"
뜻밖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놈들, 탈출하려고 온갖 발악에 꼼수는 다 부렸을 것 같은데."
"물론 로이드 님이 측량을 하러 떠난 첫날은 그랬습니다."
"그랬어?"
"예. 캠프를 몰래 빠져나가려던 사탄도 있었고, 다른 사탄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키려던 자도 있었지요."
"그래서? 전부 진압한 거야?"
"예."
"죽이진 않았지?"
"예. 다만-"
하비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배어났다.
"조금 데리고 놀았습니다."
"데리고 놀아?"
"예. 마침 지옥 세계에서 유행하는 주류 검술이 어떨지 궁금하던 참이었거든요."
"...."
"많이 궁금했는데, 이젠 안 궁금해졌습니다."
"...."
무시무시하고 지독한 놈.
로이드는 마음속으로 하비엘의 대련 상대가 되었을, 그래서 무한으로 굴림을 당했을 사탄들을 위한 소소한 애도 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하비엘에게 진심으로 당부했다.
"잘했어. 그럼 더 굴려."
"진심이십니까?"
"당연하지. 이참에 제대로 군기 잡는 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내가 설계 마치고 공사 시작할 때까지."
"알겠습니다."
그날부터였다.
로이드는 설계에, 하비엘은 사탄 굴리기에 매진했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로이드의 설계 스킬 페이지가 철도 도면으로 꽉꽉 채워졌다.
매일매일이 지나며 하비엘의 구령과 함께 사탄들이 힘겹게 굴렀다.
덕분에 사탄들은 성심껏 기도했다.
'후우, 후우욱! 허억! 그 설계인지 뭔지, 제발 좀 빨리 끝내줘!'
하비엘의 구령에 따라 앞구르기.
하비엘의 구령에 따라 뒤구르기.
그러다가 틀리면 불려 나가서 그랜드 마스터와 보람찬(?) 검술 대련.
그렇듯 사탄들이 팔자에도 없던 유격훈련을 받으며 땀을 한 바가지씩 쏟는 동안, 로이드의 설계도 마침내 완성을 향해 달려갔다.
개략적인 선로의 종, 평면도를 작성했다.
도상계획에 따른 현지답사를 시행했다.
1/50,000 스케일의 선로 종, 평면도를 작성하고, 선로를 50미터 간격으로 잘라 선로횡단면도를 작성했다.
마지막으로는 최종 확정측량을 실시했다.
그리고 1/1,000 스케일의 선로 종, 평면도를 작성했다.
거기까지가 대략적인 설계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중간에 열차가 정차할 역이 없는 덕분에 비교적 간단한 설계라 할 수 있었다.
'다 됐다.'
20미터 간격으로 작성하고 출력한 선로횡단면도를 착착 정리하며 로이드는 흐뭇하게 웃었다.
마침내 설계가 끝났다.
하지만 그걸 축하할 틈은 없었다.
설계가 끝났으니 이젠 미적거리지 말고 시공에 돌입할 차례.
쉴 틈도 없이 본격적인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로이드의 악덕 업주 본능이 빛(?)을 발했다.
"거기! 11조 작업반! 삽 보인다! 13조! 오늘 안에 용암길 새로 파내라고 했지! 14조! 내가 허락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휴식을 취해?"
지옥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노반 조성 공사.
노반은 철도가 놓이도록 구축되는 일종의 전용 통로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대다수의 철도가 그냥 평범한 땅이 아닌, 땅에 살짝 쌓은 둔덕 위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을 말이다.
쉽게 말하면 그게 바로 노반이었다.
'노반은 중요하지. 모든 철도의 기초가 되는 구조물이니까. 노반을 잘 만들어야 철로가 침수되거나 푹 꺼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법이거든.'
대부분의 노반은 흙쌓기 방식을 선택했다.
곳곳에 용암이 가득한 지옥의 환경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연하지. 언제 용암이 제멋대로 흘러넘칠지 모르거든.'
물론 철로의 자재로 쓰일 지네 껍질이 용암에 녹지 않긴 했다.
하지만 그 아래의 지반은?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여긴 일종의 늪지와 비슷한 거야. 그냥 물이 아니라 훨씬 끈적거리는 용암이 흐른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렇듯 줄줄 흘러오는 용암이 철로를 덮치면?
용암이 흐르며 가하는 횡압력에 철로의 레일이나 침목이 유실될 수 있다.
운이 좋아 그렇지 않더라도 철로를 뒤덮은 용암이 굳어 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라도 열차가 정상적으로 운행하지 못하는 참사가 발생하는 셈이었다.
'그래서야. 무조건 노반을 넉넉하게 높여놔야 해.'
어지간한 용암이 흘러와도 철로가 영향을 받지 않도록.
로이드는 노반을 최대한 높였다.
다행히 노반에 쓰일 재료는 넘치도록 많았다.
근처에 지천으로 쌓이고 깔린 화산재였다.
"야! 다들 삽 보인다! 내가 삽으로 화산재 다질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어!"
"온천수 뿌리고 끈적하게 만든 후에 팡팡!"
시공 현장의 사탄들이 한목소리가 되어 우렁차게 답했다.
"삽이 안 보이게 팡팡 치라고 했습니다악!"
"그렇지! 팡팡 치랬지!"
"예!"
"그런데 왜 삽이 보이는 거냐고!"
"...."
"삽이 안 보이게 팡팡! 눈썹에 코털까지 휘날리게 팡팡! 어깨가 떨어져 나가도록 열심히 치고 다지란 말이다!"
"알겠습니다악!"
사탄들이 악을 쓰며 대답했다.
다들 힘들어서 죽을 노릇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사탄들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탄들이 피로에 지쳐 허덕일수록 더더욱 그들을 독촉하고 재촉했다.
당연히 퇴근도 없었다.
"헉, 허억! 사, 살려줘...."
"으으... 목이 마르다... 딸기맛 용암 주스 한 잔만 마시고 싶다...."
"우리, 작업 시작한 게 언제였지?"
"열흘쯤 된 것 같은데...."
"그럼 그동안 우리 한 번도 못 쉰 거, 실화냐?"
"실화... 맞는 듯...."
"크흡, 차라리 죽여줬으면."
"크흐흡, 너만 죽었으면...."
"뭐, 인마?"
사탄들은 때론 신세 한탄을 하며.
때로는 서로에게 스트레스 풀이성 비방을 가하며.
로이드의 지시에 따라 고분고분 일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후우, 그래도 로이드 프론테라 저 인간, 겪어볼수록 악랄해서 은근 좀 끌리지 않냐."
"뭐? 너 미쳤냐?"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저 인간이 이렇게 심하게 우릴 굴려먹을 줄 누가 알았겠냐."
"뭐,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서 너도 도망치는 거 시도도 안 해보는 거잖냐."
"야! 난 처음에 튀다가 잡혀서 죽을 뻔했거든?"
"그래서, 한 번 죽을 뻔했다고 시도를 안 할 놈이냐, 네가?"
"...."
"거 봐. 너도 저 인간한테 눈독 들이고 있는 거였구만."
"눈독을 들이다니, 내가? 저 인간한테?"
"그래."
"무슨 눈독?"
"저 인간의 악랄함과 얍삽함을 배우고 싶어 하고 있잖냐, 나처럼."
"...."
"쓰읍, 후우. 솔직히 나도 이러기 싫다. 빌어먹을, 그래도 나도 명색이 사탄인데. 인간 따위의 악랄함, 쪼잔함에 감탄하면서 저런 거 배워야지, 이런 마음먹기 싫다고. 그런데-"
삽질을 하던 외뿔 사탄이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배워야지. 자고로 제대로 된 사탄이라면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 거 아니겠냐."
"후우, 변명치고는 혓바닥이 길구만?"
"혓바닥 길어도 좋다, 나는. 그래서 더 부끄럽지 않게 불효하는 사탄이 될 수 있다면."
"...."
"이런 얘기 해서 뭐하겠냐. 삽질이나 하자. 어휴, 씨."
"어후, 씨!"
...그렇듯, 대부분의 사탄들이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로이드가 자신들보다 쪼잔하고, 얍삽하고, 악랄하고, 집요하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모두가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배우자고.
공사를 하면서 로이드 곁에 오래 머물자고.
로이드의 행동을 보고, 연구하고, 곱씹으며 따라 해보자고.
그렇게 더욱 악랄한 사탄으로 거듭나겠노라고.
모처럼의 자기계발(?) 욕구를 불태웠다.
그리고 삽질에 매진했다.
"야! 떠들 힘 있으면 삽질이나 더 팍팍 하란 말이야!"
로이드의 닦달을 활력소 삼아.
하비엘의 감시에 어깨 움츠리며.
노반을 쌓고, 다지고, 또 쌓았다.
그렇게 3개월가량이 지났다.
지옥의 끝자락에서부터 110킬로미터의 구간에 걸쳐 탄탄한 노반이 조성되었다.
최대한 곡선 구간이 없도록.
노선의 기울기를 최소한으로 잡으며.
한 개의 열차가 3개 이상의 기울기에 걸치지 않도록.
동일 기울기의 길이가 3킬로미터 이하로 조성되도록.
로이드가 미리 신중하고도 세심하게 잡아둔 경로를 따라서였다.
'좋아.'
어느덧 전체적인 실루엣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110킬로미터 길이의 노반.
그걸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보다 공사가 훨씬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무려 3만에 달하는 사탄.
그들이 거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혹독하고 악랄하게 굴려줄수록 이쪽에게 더욱 협조적으로 변해갔으니까.
'변태 같은 놈들.'
쓴웃음과 함께 꼬밍이를 착륙시킨 로이드.
그는 오늘 시공된 노반의 상태를 본격적으로 점검했다.
그럴수록 그의 웃음이 흐뭇해졌다.
'흠 잡을 곳이 없어.'
나름 완벽에 가까웠다.
정확한 규격과 강도를 충족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하면 돼. 노반 공사를 마무리한 뒤엔 궤도를 깔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이번 공사도 거의 마무리다.
그 뒤에는?
지옥왕에게 철도 운영과 유지 보수 요령을 알려주고 대가를 받아내면 된다.
고룡의 영혼을 돌려받아 해방시킬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용왕 베르키스의 후원을 받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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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알차고 야물딱지게 꿀을 빨 인생 세팅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더 신경 써서 공사 마무리까지 달리자.'
자꾸만 콩닥콩닥 뛰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로이드는 노반 점검을 마무리해 갔다.
그렇기에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지옥 역사 최초의 철도가 놓이고 있는 이곳 평원.
바로 이 근처에 황량한 얼굴을 한 길 잃은 망령이 하나 있음을.
그 망령이 이쪽을 보며 경악하고 있음을.
'뭐야. 저건... 나잖아?'
길 잃은 망령.
한때 프론테라 남작령의 망나니였던 청년.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몸을 빼앗긴 남자.
그렇게 한순간에 지옥의 거주민이 되어 버린 망자.
로이드 프론테라의 망령이 로이드의 모습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236화. 애원하는 망나니 (1)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
그는 엉망이었다.
성격도, 언행도, 생각도.
어느 구석 하나 성실한 곳이 없었다.
언제나 방만하고 제멋대로 굴며 주변과 스스로를 망가뜨리곤 했다.
그리고 항상 생각했다.
프론테라 영지.
지루하고 볼품없는 시골.
그런 곳에서 태어나 썩어가야 할 자신이 불쌍하다고.
그래서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좀 더 잘나질 못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서.
분했고, 억울했고, 성질이 났다.
치솟는 화를 주변에 풀었다.
하녀에게 폭언을 퍼붓고, 하인을 때렸다.
부모를 비롯한 가족에게도 제멋대로 굴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취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유일하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술을 마셔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주점에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다.
마시다 보니 또 울분이 치솟고 성질이 났다.
그 뒤의 기억은 또렷하진 않았다.
그저 때려 부쉈던가.
주점의 테이블과 의자, 그 밖의 집기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넘어뜨리고, 던지고, 내리찍고, 밟았던가.
그 와중에 주점 주인장이 울먹였던 것 같다.
제발 이러지 마시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던 주점 주인장을 뿌리친 것 같다.
한 번 위협적으로 노려보며 주먹을 치켜드니까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리던 그 모습이란.
볼품없는 버러지 같아서 재미있다고 느꼈더랬다.
저택으로 돌아오며 그게 또 생각나서 낄낄댔다.
그렇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육신을 지닌 상태에서의 마지막 기억.
'그 뒤로는... 저놈이....'
망나니 로이드의 망령이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공허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자신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 아침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어찌 잊을까.
졸지에, 이렇듯 망령이 되어 버렸던 순간을.
자신의 육신을 빼앗은 다른 놈이 침대에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꼴을 보던 때의 기억을.
'....'
그날 아침, 하비엘과 잘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섞던 저놈.
자신의 육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자신인 척하며 지내던 저놈.
그 꼴을 보니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무서웠다.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자신이 왜 갑자기 육신을 빼앗긴 건지.
어째서 자신이 유령 같은 꼴이 된 건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
무력했다, 자신은.
그저 육신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24시간 놈에게 붙어 다녔다.
놈이 잘 때, 먹을 때, 그 외에도 온종일.
몸을 되찾으려고 갖은 시도를 다 해보았다.
자기 행세를 하는 가짜 놈을 몰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몸을 돌려받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언제까지?
저 가짜 놈이 크레모에서 기가티탄을 물리치고 의식불명이 되었다가 깨어난 후에 자신의 부모님과 재회하던 때까지.
'....'
그래도 의식불명이 되었으니까.
식물인간 같은 상태가 되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성공하리라 확신했더랬다.
한데 그것도 실패했다.
실패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모님이 달려와 울먹이며 저놈을 끌어안는 모습까지 보아야 했다.
진심으로 저놈을 걱정하던 부모님의 표정.
떨리는 손끝으로 저놈의 안위를 살피던 눈빛.
그걸 보자 맥이 탁 풀렸던가.
'....'
당혹감.
박탈감.
패배감.
그리고... 자신이 왜 엉망으로 살았나 싶은 후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빼앗고 자신의 행세를 하는 저놈.
저 가짜 놈에게 달라붙어 지냈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놈이 얼마나 열심히 지내는지.
저놈이 얼마나 바락바락 애를 쓰는지.
저놈이 얼마나 많은 궁리를 하며 사는지.
그 누구보다도 똑똑히, 자세하게,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변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난 그저... 우리 가문이 형편없다는 탓만 하며 살았는데.'
저놈은 달랐다.
자신의 몸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인데.
형편없는 가문에 빚까지 덤으로 잔뜩 짊어졌는데.
그것쯤은 오히려 천국 같은 조건이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댔다.
사람이 저렇게 지낼 수 있나 싶도록 노력했다.
때로는 몸소 위험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망나니짓을 하며 시궁창에 처박아 놓았던 주위의 시선을 모조리 바꾸었다.
자신이었다면 감히 꿈도 못 꾸었을 일이었다.
그걸 모두 똑똑히 보았으니 변명할 수가 없었다.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몸을 빼앗겨서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저 가짜를 끌어안고 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떠나왔다.
망자들의 틈에 섞여 저승으로 왔다.
지옥에 빠졌고, 지옥성을 찾아갔다.
한데 그곳에서 판결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니까.'
육신을 빼앗겼지만, 그 육신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신을 지닌 상태도 아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 또한 아니다.
즉, 자신은 일종의 영적인 난민이었다.
무국적자였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부유령.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망령.
그것이 자신이 처한 신세였다.
그래서였다.
그때부터 이곳, 지옥 구석에서 숨어 지냈다.
그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사탄들은 무서웠다.
놈들에게 걸리면 영혼 자체가 소멸되니까.
행여나 사탄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하며 숨어 살아야 했다.
얼마나 그렇게 지내온 걸까.
알 수도 없었다.
이곳 지옥엔 계절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매일을 숨어서 지내야 했다.
그렇듯 매 순간을 똑같이 지옥처럼 버텨와야 했다.
그래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방만하게 살았던 자신.
그런 자신에게 어울리는 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은?
망나니 로이드는 지옥으로 올라온 자신의 결정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지금 저곳, 자신이 보는 곳에, 떡하니 있는 가짜 로이드의 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기껏 몸 되찾기를 포기해줬더니, 저 망할 놈이 벌써 뒈져서 여길 올라왔어?'
여긴 지옥인데.
그런데 저놈이 벌써 여기 와 있는 꼴이 보였다!
'저 등신 같은 새끼가 진짜!'
망나니 로이드의 망령은 울컥했다.
몸 되찾기를 괜히 포기했다는 후회가 급류처럼 밀려왔다.
이윽고 인내심의 둑이 무너졌다.
- 야!
거칠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로이드에게 사납게 돌진했다.
- 벌써 뒈졌으면 이젠 내 손에 뒈져, 이 새끼야!
망나니 로이드가 로이드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서 로이드는?
황당함을 느꼈다.
"...뭐야, 이건."
한창 노반 공사가 마무리된 곳을 점검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툭 튀어나와 주먹을 휘둘러 오는 망령이라니.
진심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사탄들도 나한테 설설 기는데 고작 망령 따위가?'
스윽.
로이드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평소 싸움을 피하는 편이라서 그렇지, 실은 그도 소드 익스퍼트 상급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그런 만큼 한낱 망령의 주먹질 정도는 너무나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반격 또한 손쉬웠다.
터턱!
주먹을 피한 로이드가 손을 뻗었다.
짝! 짜작!
망령의 뺨을 때렸다.
찰진 소리와 함께 망령의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로이드의 반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터턱!
비틀거리는 망령의 허리를 어깨로 밀며 무릎 뒤를 껴안아 당겼다.
그대로 체중을 앞으로 실었다.
- 어, 어억?
망령이 뒤로 쿠당탕 넘어졌다.
로이드는 재빨리 오른쪽 무릎으로 망령의 명치를 짓눌렀다.
왼쪽 다리와 오른손으로 망령의 양팔을 눌렀다.
왼손으로 망령의 목줄기를 틀어잡았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후아. 이건 또 뭐야, 진짜.'
망령을 손쉽게 제압한 로이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혹시 무분별한 철도 개발에 반대하는 지옥 주민, 뭐 그런 건가.
그럼 또 내가 악덕 개발업자 역할을 해줘야 하는 건가.
로이드는 잠깐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망령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어?"
저절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로이드, 프론테라?"
- ...이제 알아봤냐, 이 새끼야?
"...."
진짜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안 믿어지긴 하는데.
아래에 깔려서 버둥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이 망령, 분명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다.
보는 순간 로이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망령이라서 얼굴 모습이 다소 흐릿하지만.
심지어 반투명해서 이목구비도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뭐지. 이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당황스러웠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와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당황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꼭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듯한 기분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몸을 빼앗은 대상.
그렇게 자신 때문에 인생을 빼앗긴 피해자.
그래서 내내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한 존재.
그런 상대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마주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금방 정신을 다잡았다.
당황하지 말자고.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표정을 바로잡았다.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 그건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 이 새끼야?
역시나 고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 넌 왜 벌써 뒈져서 지옥에 올라온 건데?
"내가? 죽었냐고?"
- 그래.
"죽긴 뭘 죽어, 내가."
아무래도 저놈, 이쪽이 죽었다고 여겼나 보다.
로이드는 그 오해를 풀고자 대꾸했다.
"나 안 죽었는데."
- 뭐?
"안 죽었다고."
- 뭔 개소리야. 안 뒈진 놈이 왜 지옥에 있는 건데!
"어떤 드래곤한테 부탁을 받아서 지옥왕이랑 맺은 건설 계약 때문에. 일하느라고."
- ...어?
"잠깐 출장 온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 ....
이게 무슨.
망나니 로이드는 황당함을 느꼈다.
드래곤한테 부탁을 받아서 지옥왕과 건설 계약을 맺었다니.
절로 얼빠진 질문이 흘러나왔다.
- 너, 내 몸으로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냐?
"그냥 뭐, 열심히 살았는데?"
- ....
"그럼 넌 왜 여기 있는 건데."
- 왜긴! 너 때문이지!
망나니 로이드가 발끈했다.
- 난 그냥 멀쩡하게 잘살고 있었다고! 그런데 너 때문에 내가! 어!
그때부터였다.
망나니 로이드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처음 육신을 빼앗겼던 날부터 겪은 이야기를 꺼냈다.
따지고, 항의하고, 외쳤다.
분개하고, 푸념하고, 한탄했다.
호소하고, 애원하고, 매달렸다.
- ...그러니까, 제발 날 좀 도와줘. 응? 나 여기 있기 싫어. 오도 가도 못하는 망령 꼴로 지내는 것도 이젠 지겨워. 응? 차라리 환생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좀!
"...."
- 너 때문이잖아. 내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망령이 된 게, 전부 너한테 몸을 빼앗겨서 생긴 일이라고. 그런데 왜 너만 잘살고 있는 거냐? 응? 내가 뭘 잘못했길래!
"...."
- 책임져! 책임져! 날 좀 어떻게 해줘!
"...후아."
로이드는 한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제압당한 채 이쪽을 향해 바락바락 매달리는 망나니 로이드.
녀석이 겪은 지난 일들을 들어보니 좀 불쌍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망령이 됐다니.'
그래서 이승에도, 저승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니.
설마 녀석이 그런 상태로 지냈을 줄은 몰랐다.
'완전 무국적자 신세가 된 거네.'
정리해보니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래서 난감했다.
불쌍하긴 한데.
안타깝긴 한데.
"대체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냐? 방법이 있어?"
- 방법은 도움을 줄 네가 찾아봐야지!
"...."
- 우리 집 하인 하녀들은 그랬단 말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그게 당연한 거 아냐?
"어, 안 당연해."
또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아주 많이 미안하고 안타깝긴 한데.
이 망나니 로이드 프론테라 녀석.
이놈은 망령이 되어서도 갑질 근성을 못 버렸구나 싶었다.
"일단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로이드는 망나니 로이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나. 넌 나한테 부탁을 하는 입장이야. 소리 지르지도 말고 떼쓰지도 마. 어린애 아니잖아."
- ....
"둘. 우리 일단 호칭 정리부터 좀 하자."
- 뭐?
"호칭 정리. 몰라?"
- 당연히 아는데, 근데 그걸 왜 해야 하지? 내가 로이드잖아. 넌 가짜고.
"나도 로이드인데."
- 무슨 개소리야? 가짜 주제에.
"그럼 날 계속 가짜라고 부를 거냐?"
- 당연하지.
"그럼 난 너 안 도와줄 건데."
- 뭐?
"빈정 상하잖아."
- ....
망나니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맞아. 이 가짜 놈, 엄청 쪼잔하고 뒤끝 더러운 놈이었지.'
처음 몸을 빼앗긴 후 1년 가까이 가짜 놈 곁에 머무르며 관찰할 때 종종 느꼈던 점이었다.
한데 지금 직접 놈과 말을 섞어보니?
옆에서 보면서 느낀 이상의 쪼잔함이 피부에 확 와 닿았다.
망나니 로이드는 당혹감을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 그,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깔끔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이기는 쪽이 로이드. 지는 쪽이 프론테라. 어때?"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위...."
- 야, 제정신이냐?
"안 내면 지는 거다. 바위...."
- 아, 진짜!
"보."
처척!
두 로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로이드는 가위.
망나니 로이드는 보.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 내가 이겼으니까 로이드할게."
- 하아, 미친. 몸을 빼앗다 못해 이젠 이름까지 뺏는 거냐?
"최소한 성으로는 불러주잖냐, 프론테라야."
- ...빌어먹을. 그럼 이젠 날 좀 풀어주든가.
프론테라가 투덜거렸다.
그를 보는 로이드의 눈빛이 알게 모르게 씁쓸해졌다.
'후우. 좀 많이 미안하긴 하네.'
자신이 몸을 빼앗은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그럴 의사도, 의지도 없었다.
그건 그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일 뿐이었다.
한데 그 사건이 자신과 저 망나니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놓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난 승승장구하고. 저놈은 망령이 되어 버리고. 쯧.'
고의로 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안했다.
물론 무작정 미안한 건 아니었다.
자신도 떳떳한 구석이 있었다.
'어차피 내가 몸을 빼앗지 않았더라도... 1년 5개월쯤 뒤엔 주점 골방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테니까.'
그게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로이드 프론테라가 맞이했던 운명이었다.
자신이 몸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심지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던 것은 로이드 프론테라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백작이 된 남작부부, 그리고 줄리앙까지.'
가족 모두가 자살하고 살해당하는 참담한 최후를 예정에 두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리되었을 터다.
그렇게 따지면?
최소한 자신이 로이드 프론테라의 가족에겐 은인이기도 한 셈이었다.
'후우. 그 은혜로 몸을 빼앗은 일을 퉁치고 싶기는 한데.'
사실은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놈을 꼭 도와야 하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성가시기도 했다.
한데 마음이 콕콕 쑤셨다.
양심 한구석이 찜찜했다.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잘 대해주셨던 백작부부를 떠올리자면 더욱 그랬다.
'난 이미 그분들의 아들 행세를 해왔으니까. 그런데 그분들의 진짜 아들이 곤경에 처한 걸 무시하면? 그걸 못 본 체하면? 후우, 그건 진짜 그분들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이, 프론테라. 잘 들어. 네 처지가 어떤지, 네가 뭘 원하는지 다 알겠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한테 도움을 주기가 어려운 상황이야."
- 뭐? 이 새끼가 진짜....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라. 나 지금 바쁘거든? 지옥왕한테서 따낸 공사가 한창인 상황이거든? 그러니까 일단 내가 하던 일부터 좀 마무리할게. 어차피 지금 당장은 널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방법을 모르잖냐."
-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서야. 벌여놓은 공사 마무리하는 동안에 널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 알았어? 그러니까 당분간 내 안주머니에 좀 들어와서 조용히 지내라."
- 네놈 안주머니에?
"어."
프론테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너 망령이니까 작아질 수 있지?"
- 네놈이 날 놔주면 가능해지지.
"그러니까 작아져서 내 안주머니에 좀 틀어박혀 있으라고."
-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건데?
"공사 끝날 때까지 안전해질 기회를 주는 거야. 아니면 혹시 사탄들한테 붙잡혀서 소멸되고 싶고, 뭐 그런 거냐?"
- ....
"이쯤이면 내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겠지?"
- 후우, 빌어먹을. 알았으니까 일단 놔주기나 해.
프론테라가 짓씹듯 투덜거렸다.
로이드는 그를 풀어주었다.
간신히 풀려난 프론테라가 몸 크기를 줄였다.
로이드는 그를 안주머니 속 친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뽀동아? 방울아? 하망아? 꼬밍아? 여기 이 친구는 프론테라라고 해. 때리거나 괴롭히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뽀? 방? 하? 꼬?"
안주머니 속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던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와 꼬밍이.
네 환상종이 프론테라의 모습을 보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이드와 똑같은데 조금 이질적인 망령의 모습.
그 모습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반면 프론테라는?
기겁했다.
- ...와아악! 뭐야, 이 털 뭉치들은!
"뭐긴. 당분간 너랑 같이 부대낄 애들이지. 나한테 1년 정도 붙어서 지냈다며. 그럼 최소한 꼬밍이 빼고는 다 봤을 텐데."
- 야! 본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왜 이딴 것들이랑 지내야 하는 건데!
"싫어? 그럼 사탄들한테 던져줘?"
- ....
"그게 더 싫지?"
- ....
"얌전히 지내라. 괜히 얘들한테 미운털 박히지 말고."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운털, 이미 박힌 듯했다.
조금 전 프론테라가 내뱉은 '이딴 것들'이라는 발언.
그 발언 때문에 이미 가자미눈을 뜨고 있는 네 환상종의 모습을 보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자, 그럼 입장."
- 잠깐, 잠깐만!
"단추 잠급니다아."
- ...야! 부흡!
프론테라를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안주머니 단추도 야물딱지게 잠가 버렸다.
잠시 후 안주머니 속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네 환상종이 프론테라를 열심히 토닥여(?)주는 모양이었다.
'후아. 일단 이렇게 시간은 벌었네.'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저 프론테라, 망나니의 망령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뭐, 그래도 도와준다는 호언장담은 하진 않았으니까. 그저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만 했으니까.'
최소한 빠져나갈 구석은 만들어두었다.
혹시나 도움을 못 주게 될 경우엔 '노력했는데도 도울 방법을 못 찾았다'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당분간은 이렇게 안주머니에 숨겨두는 게 나을 거고. 그래야 하비엘한테 이놈 존재를 안 들킬 테니까.'
자신을 로이드라고 믿고 있는 하비엘.
그런 녀석이 진짜 로이드 프론테라의 망령을 목격한다면?
그렇게 진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솔직히 예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당분간은 프론테라 녀석을 숨겨두는 게 최선일 것이리라.
그렇게 로이드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로이드 님?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계신 겁니까?"
정말로 아무런 전조도, 기척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갑작스럽게 철렁.
바로 뒤에서 하비엘의 물음이 날아왔다.
237화. 애원하는 망나니 (2)
"로이드 님?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계신 겁니까?"
정말 너무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바로 뒤에서 들려온 하비엘의 물음.
"...!"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건가.
로이드는 흠칫했다.
아니, 흠칫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깐 숨을 콱 참으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둘러댈 말을 생각하느라 머리도 데구르르.
하비엘이 뒤쪽으로 다가온 까닭에, 녀석에게 자신의 표정을 보이지 않은 게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피식 웃었다.
"지금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냐?"
짐짓 노반 시공 현장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저기, 보여? 저쪽 노반. 내가 미치겠다,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어, 있어. 상부 노반 위쪽의 시공기면. 거기가 아주 엉망이야. 저렇게 노반 다져놓으면 안 된다고 내가 신신당부했는데 진짜. 사탄 이놈들, 진짜 말 안 들어."
"흠, 제가 보기엔 크게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네가 보기엔 이상이 없어도 내가 보기엔 이상이 많은데 말입니다? 저 상태에서 침목이며 레일 설치하면 나중에 다 뒤틀릴 거거든."
"그렇습니까."
"어. 이따 사탄 놈들 불러서 다시 좀 다져야겠다. 후우, 이거 믿고 일을 못 맡길 지경이네."
"바이에른 경이 그리우시겠군요."
"어, 그렇지. 공병대랑 골병대도."
로이드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그저 둘러대기 위해 꺼낸 화제였는데.
프론테라 영지에 있을 바이에른 경과 공병대, 골병대가 그리운 건 진심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공사를 함께 치르며 손발을 척척 맞춘 이들이니까.
그만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베테랑들이니까.
"그런데 여긴 왜 왔냐?"
"식사하실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발 오늘 저녁 메뉴도 용암 지네 뱃살 구이라는 말은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오늘 저녁 메뉴도 용암 지네 뱃살 구이입니다."
"정녕 그게 최선이야?"
"최선이겠지요. 이곳에서 조달하고 조리할 수 있는 유일한 메뉴니까요."
"구이 말고 찜이나 튀김도 있잖아?"
"찜을 만들기엔 물이 귀하고, 튀김을 만들기엔 튀김옷 삼을 밀가루가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생으로 먹으면 안 되나?"
"생으로 말입니까?"
"어. 간장게장처럼... 아니, 암튼 그냥 생으로."
"정녕 그러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로이드는 짐짓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노반 공사에 매달린 지 약 3개월.
그동안 정말 지긋지긋하도록 지네 고기만 먹어야 했다.
사실상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식량이기도 했다.
처음엔 제법 맛있었지만, 이젠 지네 고기 냄새만 맡아도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다.
"뭐, 그래도 어쩌겠냐. 가자, 가."
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떼었다.
하비엘보다 한 발짝 앞서 갔다.
하비엘 모르게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한편으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어렵사리 화제 돌리기에 성공했다.
분위기로 보아 하비엘이 뭔가를 딱히 눈치채진 못한 듯했다.
'녀석한테 들켰으면 굉장히 곤란해질 뻔했어.'
로이드는 자신의 겉옷 가슴께를 매만졌다.
살짝 불룩한 안주머니.
그곳에 숨겨둔 망나니 프론테라의 망령.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녀석과 아웅다웅 설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래서 행여나 하비엘이 그걸 들은 게 아닐까 가슴 철렁했는데.
화제를 돌리면서 은근슬쩍 눈치로 살펴보니?
다행히 하비엘은 덤덤한 기색이었다.
딱히 뭔가를 감지하진 못한 듯했다.
비로소 로이드는 쿵쿵거리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만큼 하비엘의 눈길은 무거워졌다.
'....'
아무래도 로이드 님이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로이드 님은 음식 투정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적어도 자신이 아는 로이드 프론테라는 그랬다.
최소한 망나니짓을 그만둔 뒤부터는 진짜로 그랬다.
어지간히 평범하거나 조악한 음식을 내밀어도 거절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맛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구석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잘 질려하지도 않았다.
같은 음식을 열흘, 한 달을 먹어도 불평 없이 잘만 먹었다.
마음속으론 불평을 느낄지언정,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흡사 몇 년은 궁핍하게 지내본 사람 같았다.
그래서 음식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아는 이 같았다.
한데 방금은?
'지네 고기가 지겹다고 노골적으로 말했어.'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저녁에 갑자기 넌더리가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까 그 혼잣말, 확실히 이상했어.'
앞서 걸어가는 로이드의 뒷모습.
그걸 보는 하비엘의 눈길이 의미심장해졌다.
사실 아까 로이드에게 말을 걸기 직전, 로이드의 말소리를 들었던 그였다.
'마치 혼자서 중얼중얼 떠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아니, 마치 두 명의 로이드 님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고 해야 하나.'
믿기지 않았지만.
진짜로 그런 느낌이었다.
근처 화산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로이드의 혼잣말 내용까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말투나 분위기 정도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더랬다.
'로이드 님이 로이드 님과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두 가지 말투가 번갈아 들렸다는 거야.'
마치 같은 목소리를 지닌 두 개의 인격이 대화하듯.
혹은 똑같은 목소리의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는 듯.
딱 그런 느낌의 혼잣말이었다.
'게다가 대화를 나누던 두 인격 중의 하나는 마치... 예전의 로이드 님이 쓰던 말투 같았고.'
정말로 딱 그랬다.
예전, 로이드가 정신을 차리고 성실해지기 전.
온갖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던 바로 그 시절.
그때의 말투를 고스란히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우연히 들은 로이드의 혼잣말은 망나니 시절의 로이드와 현재의 로이드가 아웅다웅 말다툼을 하는 느낌이었다.
'....'
설마 로이드 님, 이중인격인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하고.'
하비엘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로이드에게서는 이중인격자의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비엘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지난번엔 지옥왕이 로이드 님을 이상한 호칭으로 불렀지. 김수호. 그건 대체 무슨 뜻을 지닌 호칭인 걸까.'
비록 당시의 로이드는 자신도 그 호칭이 뭔지 모르겠다며 대꾸했지만.
자신이 보기엔 달랐다.
'로이드 님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
한데 그걸 굳이 밝히지 않고 있는 듯했다.
보면 볼수록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상했던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긴 했지. 예전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몇 년 전, 로이드가 갑자기 온돌 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던 날부터였던가.
확실히 그날부터 로이드가 변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다.
당시에는 그걸 기이하다 여기면서도 내심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엉망진창 망나니였던 사람이 한순간에 성실해졌던 거니까.
오히려 자신을 포함한 주위 모두가 그 변화를 반겼더랬다.
한데 지금은?
조금 불안해졌다.
저러다가 로이드가 갑자기 예전의 망나니로 돌아갈까 두려워졌다.
한 번 확 바뀌었던 사람이니까.
다시 바뀌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로이드 님, 저는 지금 로이드 님의 그 성실한 모습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쪼잔하고 야비하다고 수시로 꼬집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금의 로이드가 망나니였던 시절보다 훨씬 낫다고 여겼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했다.
'만일 로이드 님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찌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불행에 빠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내심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제가 어떤 보탬이 될진 모르겠지만, 로이드 님의 지금 모습을 지켜드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앞서 걸어가는 로이드.
그의 뒷모습을 향한 하비엘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
철도 시공이 계속 이어졌다.
망나니 프론테라의 망령을 도울 방법은 당장엔 찾을 길이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일단 벌이고 있던 공사에 집중했다.
지옥의 끝자락에서부터 지옥 중심의 지옥성까지.
장장 110킬로미터에 걸친 노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로이드는 3만 명의 사탄을 더욱 효율적으로 갈구고 부려먹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최대한 악덕업주 코스프레를 하면 됐다.
"다들 알지? 오늘도 철야다!"
철야에 따른 특별수당?
당연히 없었다.
열악한 근로 환경에 대한 복지 혜택?
그런 것도 당연히 없었다.
그저 악독하게 굴리고 또 굴렸다.
퇴근을 시켜주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작업 능률이 떨어진다 싶으면?
불러다가 온갖 갈굼을 시전하며 닦달을 해댔다.
"자, 복창해라. 네가 힘들고 미적미적거리는 건 열정과 끈기가 모자라서 그런 거야!"
"열정! 끈기!"
"목소리가 작잖아!"
"열쩌엉! 끈기이!"
"좋아, 그 기운으로 더 일하란 말이야!"
"...크흡! 그래도 너무 아프고 힘듭니다!"
"닥쳐! 아프고 힘들어야 사탄이지!"
...라는 식이었다.
물론 그건 로이드의 평소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그가 절대로 하지 않던 짓이었다.
힘든 일을 시킨다면 그에 어울리는 임금을.
위험한 일이 있다면 안전대책과 위험수당을.
그러한 모든 일에 반드시 노동계약서 작성을.
그것이 평소 로이드의 지론이었다.
자신이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구르며 숱하게 겪은 서러움과 모멸감. 거기에 일당을 떼이던 비참함까지.
그런 더러운 일들이 자신의 현장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달랐다.
'여긴 지옥이니까!'
지옥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었다.
다른 곳에서 이렇듯 인부들을 막 대했다간?
이미 현장이 발칵 뒤집히고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한데 여기 지옥은 완전 달랐다.
혹독하게 현장을 굴릴수록 사탄들이 좋아했다!
지독하게 일을 시켜댈수록 사탄들이 환호했다!
복지고 뭐고 무시할수록 사탄들이 자지러졌다!
'...완전 미친 변태 싸이코들 아닌가, 이 정도면?'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즉, 이곳의 사탄들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합리적으로 대해줄수록 사람을 호구로 봤다. 만만하게 보면서 기어오르고 말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내 현장 방침이랑은 너무 안 맞지만 어쩔 수가 없어. 이건 현지화다. 현지의 관습에 적합한 방식으로 현장을 운용하는 거야.'
로이드는 양심의 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며 사탄들을 마구 굴려댔다.
덕분에 노반 시공이 더없이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철도의 기초 토대가 되어줄 노반.
그걸 다 만든 후 곧바로 궤도 시공에 착수했다.
'거창하고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도 돼. 영혼을 호송하는 열차가 상행선과 하행선, 양쪽을 적당한 속도로 원활하게 다닐 수만 있으면 되니까.'
현대 한국에서 짓는 KTX 고속열차처럼 복잡하고 호화롭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기본만 충실하게 지키자고 로이드는 다짐했다.
'일단은 노반 위에서 궤도를 떠받칠 도상부터.'
그는 궤도의 바탕을 '유도상 궤도(有道床 軌道)' 형식으로 잡았다.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상 전체에 자갈이 깔린 형태였다.
'바닥에 깔아둔 자갈 자체가 마찰력을 발휘하면서 충격과 진동을 어느 정도는 흡수하지. 시공이 간편하고 구조가 간단해.'
반면, 열차가 운행할 때 먼지가 다소 발생하고, 유지 관리에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옥이니까 미세먼지는 아무 문제가 안 되고, 유지보수 작업에 투입할 사탄이야 어차피 넘쳐나게 많을 거니까!'
지금도 무려 80만이나 되는 사탄이 일일이 수레로 영혼 호송을 하는 판국이다.
한데 나중에 철도가 본격적으로 운용되면?
엄청난 숫자의 사탄이 실업자(?)로 내몰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발생하는 잉여 사탄들을 궤도 유지 보수에 투입하면 일이 간단해지는 것이다.
'후우, 그러니까 일하자, 일!'
자갈을 까는 일은 쉬웠다.
기본적으로 지옥에는 돌멩이가 넘쳐났다.
화산쇄설물이 식으면서 생성된 갖가지 암석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샅샅이 긁어모았다.
총연장 110킬로미터의 노반 위에 평평하게 깔았다.
그 위에 침목과 레일을 깔았다.
그 형식도 굳이 너무 최신식을 따르지 않았다.
현대의 대한민국이나 독일, 미국, 스위스 등지에서 널리 쓰이는 ALT-시스템(Alternative System) 같은, 최신의 고기능 궤도 방진 체결장치 등을 만드는 것도 물론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지.'
물론 최신 공법이 좋기는 하다.
열차가 달릴 때 진동이나 소음이 훨씬 적고 쾌적해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칫 그런 공법을 선택했다간 쓸데없이 시공만 복잡해지고 시공 기간만 잔뜩 늘어나게 될 터였다.
'게다가 사탄이랑 호송되는 미생물 영혼만 잔뜩 태울 열차인데 승차감 따위!'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그는 궤도의 형식도 비교적 오래되고 단순한 'STEDEF' 방식으로 정했다.
'내가 공부한 것 중엔 나름 제일 오래되고 단순한 방식이니까.'
STEDEF 궤도는 1964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개발된 방식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초창기 열차에 제법 널리 쓰였던 방식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국철과 서울시 지하철 1~4호선을 들 수 있을 터였다.
"침목 깔고! 레일 놓고! 체결구 제대로 채우고! 시공 가이드라인 제대로 지키고!"
도상에 가로로 놓여 레일을 고정하고 하중을 분산시키는 침목.
그건 용암 지네를 해체하며 무수히 얻은 지네 다리로 만들었다.
튼튼한 지네 다리 네 개를 엮었다.
그걸로 튼튼한 침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도상에 박아 넣은 지네 다리 침목을 바탕으로 레일을 깔았다.
열차 바퀴가 실제로 접촉하면서 달리게 될 레일.
그 레일은 지네 껍질로 만들었다.
누가?
하비엘이.
어떻게?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며 얻은 눈부신 위력의 오러로.
스카가각!
한 번 검을 휘두르면 오러 수십 줄기가 푸확.
지네 시체를 덮쳤다.
두껍고 단단한 지네 껍질이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실로 소름 끼치도록 일정한 규격대로 쑹컹쑹컹 잘리고 가공되었다.
그렇게 무수히 얻어낸 지네 껍질 레일을 침목 위에 깔았다.
지네 더듬이를 체결구로 삼았다.
케이블타이로 묶어 버리듯.
레일 아래에 만든 구멍과 도상을 한데 엮었다.
그리고 침목과 레일 전체를 도상에 때려 박듯 추가로 고정했다.
"뽀동아! 밟아!"
"뽀동!"
모처럼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고 거대해진 뽀동이가 흥겹게 뛰었다.
통실하고 뚠뚠한 뱃살과 궁디를 출렁였다.
체중을 잔뜩 실어 침목과 레일을 밟았다.
쾅쾅, 쿵쿵, 콩콩, 쾅쿵쿵, 요란하고 묵직한 소음이 종일 잔뜩 발생했다.
물론 로이드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그런 소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이 지옥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사람도 안 사는 지옥인데 소음 같은 걸 왜 신경 써?'
소음, 분진 등의 주위에 끼칠 피해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시공은 더없이 신속하게 쭉쭉 진행됐다.
물론 그렇기에 로이드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지옥이라서.
사람이 없어서.
신경도 쓰지 않은 시공 현장 소음.
그것 때문에 시공 현장이 시나브로 위험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 ...구르르륵! 시끄러워!
철도 시공 현장 인근의 어느 용암 호수 밑바닥.
그곳에서 곤히 숙면하던 존재가 있었다.
한데 지금은?
분노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시공 현장 소음 때문에.
마치 일요일 아침에 시끄럽고 무개념한 윗집 층간소음에 시달려서 몸부림치듯.
- 구르륵! 다... 죽여 버릴까.
지옥의 야생에서 가장 위험하고 난폭한 존재.
용암 거인이 파멸적 분노를 느끼며 눈을 뜨고 있었다.
238화. 소음공해 컴플레인 (1)
- 구르르륵! 부그르륵!
지옥철도 건설 현장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
그곳에 드넓은 용암 호수가 있었다.
원래는 평화롭게(?) 끈적이는, 흔해빠진 지옥의 호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쩐지 평소보다 격렬하게 끓고 있었다.
전에 없이 사납게 부글거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 구르륵! 시끄러워....
용암 호수 바닥에서 잠들어 있던 용암 거인이 몸을 뒤척였다.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두 귀를 막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더 자고 싶었다.
지금까지 2만 년 정도 잠깐 잤으니까.
앞으로 최소한 10만 년은 더 자고 싶었다.
그래야 끝도 없는 노곤함이 조금은 풀릴 듯했다.
아, 오늘은 그나마 푹 잤구나 하는 만족감이 들 듯했다.
그런데 현실은?
잔인했다.
쿠웅! 쿠우웅!
얼마 전부터 근처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저 소음, 거슬리는 진동.
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는 소음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귀찮아서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일어나서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놔두면 잠깐 저러다가 말겠지.
이것도 그냥 지나가는 소란이겠지.
그러니까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하는 게 최선이겠지.
용암 거인은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이제 보니?
아무래도 그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쿠웅! 쿠우우웅!
저 거인 미치게 하는 진동이 하루 24시간 온종일 매 순간 끝도 없이 달려왔다.
용암 호수를 두드리고, 그 바닥에 잠든 용암 거인의 고막을 쿡쿡 쑤셔댔다.
- 구르르륵!
용암 거인의 눈꺼풀이 신경질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귀를 막은 거대한 두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진동이 울릴 때마다.
쿠우웅, 거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쿠웅, 소음이 신경을 긁을 때마다.
쿠우웅, 거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용암 거인은 절감했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고.
- 구르르르륵! 구르륵!
인내심의 끈이 툭 끊어지는 순간.
용암 거인이 눈을 떴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용암 호수에 변화가 일어났다.
부글거리며 고여 있던 호수의 용암이 거인에게 흡수되었다. 거인의 몸 일부가 되었다. 원래부터 거대하던 거인의 덩치를 더욱 부풀렸다.
그리고 마침내.
- 구그르르르르! 구오오!
몸을 일으켰다.
호수의 용암을 모조리 흡수하고서.
마침내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육신으로.
화산재 가득한 평원에 우뚝 서서 분노의 눈길을 빛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소음과 진동이 날아오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 구르륵!
3킬로미터 떨어진 곳.
그 사이에 산이나 언덕이 없어서.
거인의 신장이 200미터나 되어서.
아무런 방해물 없이 똑똑히 보였다.
그것은 직선으로 기다랗게 쌓인 화산재 둔덕이었다.
둔덕 주위로 수천 마리쯤 되는 사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뭔가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이 용암 거인을 자극했다.
- 구륵!
저놈들이다.
저 기다란 둔덕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곳의 사탄 놈들이 저 둔덕을 쌓고 만드느라 그동안 소란을 피운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하다.
- 다 죽인다, 구륵!
그러면 된다.
저 사탄들을 모조리 죽이면 된다.
죽은 사탄들은 소란을 피우지 못할 테니까.
다시 주위가 조용해질 테고, 자신은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 터다.
결심한 용암 거인이 걸음을 옮겼다.
쿠콰아앙-!
32미터에 달하는 화염의 발바닥이 지축을 울리게 했다.
처음엔 오랜만에 걷는 탓에 천천히, 차근차근.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며 차츰 위협적으로.
종국엔 노골적인 분노를 담아 거침없이.
쿠콰콰콰콰콰!
뛰었다.
달렸다.
돌진했다.
태풍처럼.
지진을 몰고 가듯.
3킬로미터의 거리를 엄청난 보폭으로 주파했다.
파괴적인 진동과 굉음을 몰고서 철도 건설 현장을 덮쳤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어떠한 타협도 없이.
모든 체중을 실어서.
뛰어올랐다.
건설 중이던 철로를 짓밟았다.
투콰학-!
공들여 만든 레일과 침목이 짓이겨졌다.
열심히 쌓은 노반 자체가 짓뭉개졌다.
단 한 번의 도약과 짓밟기.
그 일격으로 무려 80미터 가량의 노반 구간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사탄들도 마찬가지였다.
"무, 뭐야!"
"끄하아아악!"
"엎드려!"
탄환처럼 사방으로 날아드는 파편에 수십 명의 사탄들이 얻어맞았다. 파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깨지고 터진 상처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차라리 나은 형편이었다.
기습적인 짓밟기에 직격으로 밟혀 가루가 되어 버린 스무 명가량의 사탄에 비한다면 말이다.
"요, 용암 거인이다악!"
사태를 제일 먼저 깨달은 어느 사탄이 외쳤다.
갑작스러운 파괴와 폭발적인 흙먼지.
그 속에서 허둥거리던 사탄들이 일제히 동작을 딱 멈추었다.
모든 사탄들의 안색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용암 거인?'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만큼 용암 거인은 지옥에서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자신들이 부리던 용암 지네?
그런 건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실제로 용암 거인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지옥왕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용암 거인이 왜 여기서 나와?'
어릴 적 부모님한테 들은 옛날이야기대로라면 용암 거인은 거의 수십만 년에 한 번 깨어난다고 했는데.
놈이 마지막으로 난동을 부린 것이 불과 2만 년 전이라고 했는데.
그렇기에 아직 놈이 날뛰기엔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을 터인데.
"누, 누가 가서! 지옥왕께 이걸 좀 알려!"
"크아악! 나도 그러고 싶다!"
"나도! 그런데 지옥성! 너무 멀잖냐!"
"그럼 숨기나 해! 도망쳐!"
전의를 잃은 사탄들이 연장을 버렸다.
제각기 살 길을 찾아 숨거나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200미터 높이에 있는 용암 거인의 두 눈.
그 자비 없는 눈길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윽고 천벌 같은 폭력이 쏟아졌다.
콰앙-!
용암 거인이 가볍게 땅을 밟았다.
숨기를 선택한 사탄 열 마리가 숨죽이고 있던 바위틈.
순식간에 뭉개졌다.
그곳의 사탄들 또한 가루가 되었다.
도망치기를 선택한 사탄들도 그리 무사하지는 못했다.
후우웅, 콰콰콰콰콰-!
거인의 거대한 발이 이번에는 가로로 움직였다.
마치 빗자루질을 하듯.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슥슥 쓸고 문질러 버렸다.
한데 그 평범한 동작의 범위가 수십 미터 단위였다.
그 서슬에 휘말린 사탄 수십 마리가 개미떼처럼 몰살당했다.
"제발! 크, 사탄! 살려!"
사탄들이 살고자 날뛰었다.
사방으로 도망치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용암 거인에겐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사탄들이 소란을 피웠고 그 소음에 시달리다가 깨어났으니까.
이곳의 사탄들을 모조리 죽여야 자신이 조용히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충실히 실천으로 옮겼다.
짓밟고,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쓸고, 수천 도의 입김을 불었다.
사탄들이 살충제 맞은 날파리 떼처럼 무더기로 목숨을 잃어 갔다.
난폭한 굉음과 다급한 비명.
파괴적 포효와 애처로운 외침이 뒤섞였다.
안타깝게도 사탄들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했다.
애초부터 사방이 트여 있는 평원을 위주로 철도 공사 현장이 지정된 까닭이었다.
딱히 숨을 곳도,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 구르르르륵! 구륵!
용암 거인의 기세가 더욱 흉포해졌다.
이제는 아예 즐기듯 살육의 몸짓을 이어갔다.
만약, 때마침 앞을 가로막은 은발의 기사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의 사탄 수천 명이 몰살될 때까지 용암 거인의 살육은 중단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 구르륵?
한창 살육을 즐기던 도중이었다.
용암 거인은 저도 모르게 내리치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신기한 생물체가 보였다.
- ...구르르륵?
갑자기 어느 순간 앞에 나타난 개미 같은 실루엣.
쬐끄마한 사탄보다도 조금 작은 듯했다.
그런데 그 외모가 신기했다.
피부가 시뻘겋지 않았다.
머리엔 뿔 대신 은색 털이 풍성했다.
새파란 눈길로 이쪽을 감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용암 거인은 생각했다.
- 구르륵!
신기하게 생긴 이상한 사탄이다.
저걸 손바닥으로 내리쳐서 죽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용암 거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후우웅-!
거대한 손바닥으로 은발의 기사, 하비엘을 내리쳤다.
그 순간, 하비엘의 검이 번득였다.
스슷!
별다른 굉음도, 화려한 섬광도 없었다.
그저 아주 짧게 장검이 번득였을 뿐이었다.
그저 너무나 평범하게 공간을 휘저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용암 거인은 자신의 손바닥이 수십 조각으로 잘리는 참상을 목격해야 했다.
투퍼퍽!
- ...구륵!
하비엘이 휘두른 검로를 따라 수십 줄기의 오러가 피어났다.
마치 빛나는 그물처럼 공간 자체를 저며냈다.
용암 거인의 손바닥을 수십 조각으로 잘라냈다.
팔뚝도, 어깨도, 상반신 전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 구, 구르륵!
투퍼퍼퍼퍽!
용암 거인의 상체가 수백 조각으로 잘렸다.
선혈과도 같은 용암이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다시 뭉쳤다.
- 구르르르르륵!
콰아아-!
수백 조각으로 잘렸던 용암 거인의 신체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 몸을 일으켰다.
태연한 눈길로 하비엘을 굽어보았다.
하비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투퍼퍼퍽!
용암 거인의 전신을 갈랐다.
저며내고, 베고, 잘랐다.
그러나 용암 거인은 그때마다 계속 잘렸다가 다시 뭉쳤다.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 포효했다.
- 구르르르워억!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로이드의 목울대도 꿈틀거렸다.
'와나. 뭐야, 저건.'
상공 300미터를 가로지르는 꼬밍이의 등 위에서 로이드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문득,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여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구간의 현장 정리를 하고 있던 자신과 하비엘이었다.
오늘 작업이 모처럼 쾌적하게 진행되어서.
궤도 시공의 체계도 정말 잘 돌아가고 있어서.
몹시 기분이 좋던 터였다.
한데 그러던 도중에 불길한 굉음을 들었더랬다.
마치 화산이 터지는 듯하던 굉음과 진동.
그쪽을 돌아보는 순간, 눈을 의심하고 싶어졌던가.
'저 거인이 날뛰고 있었지.'
대부분이 평지인 철도 시공 현장이었다.
덕분에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날뛰는 용암 거인의 모습이 훤하게 보였다.
그걸 목격한 순간부터였다.
꼬밍이 꽁지깃이 빠질 기세로 날아왔다.
하비엘이 먼저 지상으로 뛰어내려 용암 거인의 앞을 막아서는 모습을, 용암 거인이 오러의 폭풍에 휩쓸리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거인이 태연하게 회복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건 좀, 답이 없는 것 같은데.'
로이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래를 보았다.
용암 거인과 하비엘이 피, 아니, 용암을 튀기며 격돌하고 있었다.
스카각! 스칵!
하비엘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오러 수십 줄기가 번득였다.
그때마다 용암 거인의 몸이 수백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완전 칼로 물 베기구만.'
아니, 물이 아니라 저건 펄펄 끓는 수프나 카레 같은 모습이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랬다.
정말로 용암 거인의 몸은 수프나 카레 같았다.
그렇기에 하비엘이 아무리 강력하고 완벽한 오러로 몸을 잘라낸다 해도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십 수백 번을 잘라도 금방 다시 물컹거리며 붙었으니까.
마치 뜨거운 수프나 카레를 칼로 벤 것처럼.
아무런 타격을 가할 수 없었으니까.
'이건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로이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하비엘은 강해. 그랜드 마스터가 됐으니까. 지금도 용암 거인이 하비엘의 몸에는 손끝도 대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얻어맞고 있지. 그런데도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상성의 문제야.'
아무리 잘라도 자를 수 없는 카레.
그걸 자르려고 열심히 휘두르는 식칼.
이 싸움은 그런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애초에 하비엘이 이길 방법이 없는 싸움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로이드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상황을 분석하고.
이후를 예측하고.
최선의 이득을 계산했다.
'일단 이렇게는 안 돼. 답이 없어. 하비엘이 절대로 못 이겨. 나도 마찬가지야. 발파고 급속충전이고 통할 각이 안 보이잖아. 저 용암투성이 거인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놈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대로 계속 난동을 피운다면 철도 공사고 뭐고 전부 나가리가 될 거야.'
그는 인정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니, 너무나 비관적인 결과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만약 철도 시공 현장을 옮기면? 지금까지 만들고 있던 이곳은 아깝지만... 포기하고 다른 경로로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면?'
일단 공사를 재개할 수는 있을 듯했다.
지금까지 공들이고 있던 이곳 현장은 아깝지만.
그동안 측량이며 설계며 시공에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떠올리면 진짜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을 포기하면 새 시작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암담한 가운데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살포시 피어났다.
한데 그때였다.
하비엘에게 끝없이 얻어터지던 용암 거인이 우렁차게 외쳤다.
- 구르르르뤄어억! 다 죽인다! 네놈들이 낸 소음 때문에 못 이룬 잠의 원한을 담아서! 다 죽일 거다! 저 괴상하게 만든 둔덕!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다 부술 거다!
"...."
망했다.
거인의 포효를 듣는 순간.
로이드는 절감했다.
'저놈, 설마 공사 현장 소음 때문에 빡쳐서 저러는 거였어? 그래서 뭐? 괴상하게 만든 둔덕? 끝까지 쫓아와서 다 부술 거라고?'
다리에 힘이 쑥 빠지는 기분이었다.
저 외침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이쪽이 벌이는 공사 때문에 시끄러워서 화가 났으니, 이쪽의 공사를 지옥 끝까지 쫓아오면서라도 방해하고 다 부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 인생 진짜.'
저도 모르게 문득, 눈물이 핑 돌았다.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절감했다.
한데 그걸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짜 답이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용암 거인을 저지할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자신과 하비엘이 연합?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환상종들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답이 없는 문제다.
그런데 답이 없는 문제를 계속 붙들고 있는 건?
그건 변명할 방법도 없는 노답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빠른 손절이 그나마 피해를 줄일 방법이란 거네.'
후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만은 쿨하게 실패를 인정하자고.
그렇게 로이드는 스스로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걸었다.
그리고 꼬밍이를 하강시켰다.
하비엘에게 외쳤다.
"야! 인마! 튀자!"
녀석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번 공사는 명백한 실패다.
이곳 현장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 철도를 건설하려 해도 결국엔 저 용암 거인이 쫓아와서 난리를 부릴 거다.
시공 자체를 진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한데 그걸 어떻게 해보겠다고 붙들고 있다간?
소득도 없이 허송세월만 하게 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래서였다.
빠른 손절을 결심한 로이드가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처음 지옥에 오기 직전.
고룡 엔티쿠스가 안전 대책을 설명하며 자신의 왼손에 새겨준 마법을 떠올렸다.
'탈출용 헬게이트는 이렇게 여는 거라고 했지, 아마?'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왼손으로 마나를 집중했다.
그러자 왼손에서 간질간질한 반응이 왔다.
마치 투명한 타투처럼 왼손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그리고 마나의 줄기를 허공에 쏘아냈다.
키이이이이이! 콰츠카칵!
마나의 줄기가 허공에 원을 만들었다.
파직거리는 원이 약 5미터 지름까지 커졌다.
처음 지옥에 오면서 고룡 엔티쿠스에게 제공받았던 탈출용 헬게이트.
이곳 지옥과 로라시아 대륙이 있는 인간계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
그 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동시에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때 그 고룡, 헬게이트가 연결되는 지점은 무작위로 설정된다고 했지? 그럼 제발 프론테라 영지에서 좀 가까운 데로 출구가 연결되면 좋겠다.'
이젠 지쳤다.
기껏 지옥에서 벌이던 공사가 실패로 돌아갈 마당이었다.
지옥왕과의 계약에도 실패할 것이고.
고룡의 영혼을 해방하지도 못할 것이며.
용왕 후원 멤버십을 얻는 것도 물거품이 될 터였다.
힘이 쭉 빠졌다.
허망했다.
이젠 그저 쉬고 싶어졌다.
'그래, 내 팔자에 무슨 용왕 후원 멤버십에 목숨 두 개냐. 그냥 하나 있는 목숨이나 잘 간수하면서 꿀이나 빨고 살자.'
이쯤에서 만족하자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멈추고 편히 쉬자고 다짐했다.
그러니 기왕 지옥에서 탈출해서 돌아가는 거, 집에서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
그래야 집에 일찍 가서 더 일찍 쉴 수 있을 테니까.
평온하고 무탈하며 꿀이 넘치는 여생을 조금이라도 일찍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로이드는 소소하고도 소박한 염원을 품고서 헬게이트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헬게이트가 완성되었다.
파츠크칙!
한 차례 스파크가 튀나 싶었다.
완성된 헬게이트 건너편에서 인간계의 바람이 불어왔다.
체감온도 영하 80도의 냉기를 품고서였다.
후아아아앙-!
'...으와악?'
너무나 갑작스럽게 불어온 혹한의 바람.
그 서슬에 로이드는 기겁하며 옷깃을 여몄다.
'으윽, 뭐야?'
그는 황당한 심정을 느끼며 헬게이트 건너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헬게이트와 연결된 도착 지점의 풍경이 보였다.
'저건....'
바다가 보였다.
한데 그건 평범한 바다가 아니었다.
온통 슬러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 사이로 둥둥 떠 있는 거대한 빙산도 보였다.
그러니까 저곳은....
'극지방?'
포기하는 심정으로, 오로지 탈출을 위해 열어젖힌 헬게이트의 도착 지점.
그곳 풍경의 정체를 로이드가 깨닫는 순간.
- ...그, 구륵! 에, 엣취이!
거침없이 날뛰던 용암 거인이 처음으로, 온몸을 오들오들 떨어대며 애처로운 재채기를 터뜨렸다.
239화. 소음공해 컴플레인 (2)
- ...그, 구륵! 엣취이!
용암 거인이 온몸을 크게 떨었다.
허리를 꺾으며 격렬한 재채기를 터뜨렸다.
용암 콧물이 사방으로 튀며 땅을 지졌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생각했다.
'헐? 저거... 매너 없이 마스크도 안 쓰고 재채기를... 아니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마 저 거인, 차가운 바람에 약한 건가?'
로이드는 머릿속에 띵동 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직 탈출을 위해 열었던 헬게이트.
한데 하필이면 인간계의 극지방으로 연결된 헬게이트.
덕분에 헬게이트를 통해 맹렬히 불어오기 시작한 혹한의 칼바람.
그 앞에서 용암 거인이 애처롭게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청순, 아니, 가련하게 두 팔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연신 재채기를 터뜨리며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 구륵! 엣취! 쿠르륵! 잇츄! 구륵! 와췻!
그 모습을 보자 혹시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의혹으로 변했다.
의혹에서 가능성을 엿보았다.
가능성이 막연한 희망으로 빛났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일단은 확인부터!'
로이드는 꼬밍이의 안장에 매달아둔 삽을 들었다.
가볍게 두 개의 써클을 돌렸다.
충돌시켰다.
동시에 삽을 뻗었다.
투확!
삽으로 쏘아낸 발파가 수십 미터 거리를 날아갔다.
오들오들 떠는 용암 거인의 한쪽 어깨를 때렸다.
투컥!
- 그룩!
따끔한 듯 이쪽을 홱 째려보는 용암 거인.
뜨끔한 로이드는 곧바로 꼬밍이의 기수를 올렸다.
행여나 용암 거인의 반격을 받을까 재빨리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관찰했다.
방금 자신이 발파를 쏘아 맞힌 용암 거인의 어깨를.
'제발. 내 추측아, 맞아라.'
로이드의 눈동자에 열망과 소망이 피어났다.
만약 추측이 맞는다면?
어쩌면 저 용암 거인을 잡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철도 공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서 들인 노력을 물거품으로 버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제발!'
그의 알찬 소망을 담은 눈길이 용암 거인의 어깨를 콕콕 쑤셨다.
그동안 용암 거인의 어깨가 서서히 복구되었다.
꾸르륵!
펄펄 끓는 카레처럼.
부글거리는 용암으로 만들어진 어깨였다.
로이드의 발파에 맞아 생긴 지름 50센티, 깊이 3미터 정도의 구멍이 손쉽게 복구되었다.
그런데 그 복구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로이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확실하다.
복구 속도가 느려졌다.
비록 작은 구멍에 불과했지만.
아까 하비엘의 공세를 받으면서 입던 손상보다 훨씬 작긴 하지만.
그럼에도 용암 거인의 복구 능력이 아까보다 다소 느려진 게 확연히 보였다.
로이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놈, 갑자기 극지방 바람을 한껏 쐬는 바람에 몸이 살짝 식은 거야.'
그게 이유였다.
사실 간단한 원리였다.
펄펄 끓는 카레를 떠올리면 쉬웠다.
끓는 카레를 칼로 베거나 송곳으로 구멍 낼 수는 없다.
아무리 베고 찔러도 보글보글 끓으며 금방 구멍이 메꿔진다.
'그런데 만약에 그 카레가 식으면?'
점점 걸쭉해진다.
굳어간다.
넉넉히 끓인 카레를 타파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보관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은 카레는 칼로 자르거나 구멍을 뚫을 수 있어!'
용암도 마찬가지일 듯했다.
식고 굳어서 암석화가 진행되면?
지금처럼 잘리고 뚫리는 걸 순식간에 회복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건 땡잡은 거야.'
지옥 상공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극지방 칼바람 속을 비행하며.
로이드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헬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어휴, 저 복덩이!'
지금 이 순간만은 헬게이트가 이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진짜로 그저 탈출하려고 열었던 헬게이트였는데.
그게 이렇듯 극지방으로 연결되어 승리의 희망을 안겨줄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러니 이제 제대로 해보자. 꼬밍아!"
"꼬밍!"
"일단 아래로!"
"꼬미밍!"
바람을 가르며 고도를 낮추었다.
목소리를 전달하기 적당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싶은 순간 외쳤다.
"하비엘!"
하비엘이 이쪽의 외침에 반응했다.
약 200미터 거리에서 녀석이 이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기! 위쪽! 상공에 열린 헬게이트 보이냐!"
끄덕.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녀석.
로이드는 성대에 더욱 힘껏 마나를 실어 외쳤다.
"저기서! 지금! 나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저 거인! 식어가고 있거든! 어쩌면! 저거 잡을 수 있을 거 같다!"
끄덕.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던 터였다.
'로이드 님이 열어젖힌 저 헬게이트 덕분이야.'
차가운 바람에 오들오들 떠는 용암 거인이 보였다.
방금 로이드의 외침대로 차가운 바람에 떠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거인, 이제는 아까처럼 손상을 빠르게 회복하진 못하리라.
'내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해.'
로이드 님은 이쪽을 믿고서 지옥에 왔다.
그러니 이쪽도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
위험이 나타났을 때는 제대로 처리해주어야 한다.
그게 로이드와 함께 지옥에 온 자신의 역할이라고 하비엘은 생각했다.
꽈악!
검을 쥔 그의 손등에 혈관이 돋아났다.
그때부터였다.
하비엘의 공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스카가각!
일말의 자비나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확신만을 담고서.
베고, 또 베었다.
저며내고, 또 저며냈다.
세상의 한 자락을 자르고, 또 잘랐다.
그 검격이 용암 거인의 전신을 골고루 다지듯이 베고, 저미고, 잘랐다.
- 그르륵! 엣취! 그르륵! 구륵!
그렇잖아도 갑작스러운 맹추위에 기겁하던 용암 거인이었다.
하비엘의 공세까지 더욱 노골적으로 매서워지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전신이 오러에 베이고, 썰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회복은 되었다.
한데 그 회복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차가운 바람에 용암이 식어가는 까닭이었다.
용암 거인은 직감했다.
이대로면 여기서 운 나쁘게 죽을 것 같다고.
몸이 다 식어 버리고 굳은 채로 저 은발의 검격을 맞으면 그땐 정말로 몸이 성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 다음에 보자! 엣취! 구르륵!
스커컥, 수십 발의 오러를 맞으며 용암 거인이 몸을 돌렸다.
대놓고 하비엘에게 등을 보였다.
그리고 절뚝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엇? 저놈, 설마?"
상공에서 그 모습을 보던 로이드가 중얼거렸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10년을 우려낸 사골육수처럼 찐하게 쑴펑쑴펑 피어났다.
곧, 그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쿵쿵쿵쿵쿵!
"...저놈! 도망간다!"
로이드가 빼액 외쳤다.
정말이었다.
저 용암 거인, 상황이 불리해진다 싶으니까 대놓고 도주를 선택하고 있었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어!'
로이드는 하마터면 뒷골을 부여잡을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불쑥 나타나서 시공 현장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발칵 뒤집어 놓은 주제에.
그걸 막으려는 이쪽마저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상황이 조금 불리해지니까 곧바로 도주라니?
"저놈 잡아!"
로이드의 외침이 다급해졌다.
단순히 용암 거인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빡쳐서?
아니었다.
'여기서 저놈 놓치면... 공사고 뭐고 끝이야, 끝!'
로이드는 내심 확신했다.
만약 여기서 저 용암 거인을 놓친다면?
그래서 저놈을 완벽하게 끝장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다시는 저놈을 잡을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해. 진짜야. 저거, 여기서 못 잡으면 앞으로 영영 이런 기회는 안 올 거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열어젖힌 헬게이트.
거기서 흘러나오는 극지방의 칼바람.
그 바람의 영향이 멀리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극지방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 봤자 고작 지름 몇 미터짜리 헬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양밖에 안 되잖아. 그에 비하면 지옥이 얼마나 넓은데!'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이건 300평짜리 대저택 거실에 5평 용량의 에어컨을 설치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럼 에어컨 바로 앞쪽만 시원하지. 에어컨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금방 더워져.'
문득, 대한민국에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혹독한 여름 더위를 이겨내던 시기를 떠올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이 지내던 고시원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제일 값싸고 오래된 고시원에서 그런 걸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래서 정말 너무 심하게 더운 날엔.
이러다 진짜로 쪄 죽겠다 싶은 날엔.
근처 은행이나 동사무소에 가곤 했다.
공짜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기라고 만만한 곳은 아니었어. 거기 사람들, 전기세 아끼느라고 에어컨 엄청 약하게 틀어놨었거든. 쪼잔하게스리!'
은행은 엄청 넓은데.
에어컨 출력은 은근 약했다.
그래서 에어컨 바로 앞에 딱 붙어 있어야 제대로 시원했다.
그때의 값진(?) 경험 덕분이었다.
로이드는 지금 도망치는 용암 거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저놈 저거, 이 근방에서 벗어나면 차가운 바람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어!'
일단 여기서만 도망치면 된다.
그렇게 헬게이트에서 멀어지면 된다.
그러면 차가운 바람이 미지근해질 것이다.
잠깐 식었던 몸이 다시금 뜨거워질 것이다.
어떤 공격을 받아도 금방 회복하는 무적의 육체를 되찾을 것이다.
'...라는 게 저놈 계산이겠지. 근데 상황이 저놈 계산대로 되면? 저거, 절대 못 잡게 될 거야. 막지도 못하게 될 거야. 철도 시공 현장은 여기뿐만이 아니니까. 무려 110킬로미터 길이에 걸쳐 있으니까!'
즉, 저놈이 여기서 탈출한다면?
그리고 계속 이쪽의 공사를 방해하고자 한다면?
헬게이트의 바람이 미치지 않는 곳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날뛰게 되리란 뜻이었다.
자신과 하비엘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놈을 막아내려 노력해도.
막지 못하게 되리란 뜻이기도 했다.
'헬게이트는 딱 이거 하나만 열 수 있었던 거니까. 다른 곳엔 못 열어. 이곳의 헬게이트를 계속 유지할 수는 있지만, 추가로 여는 건 안 돼.'
그러니까 저 용암 거인, 무조건 여기서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저놈의 도주를 막아야 한다.
로이드가 애타는 심정으로 외쳤다.
"잡아! 저놈 다리부터 공격해!"
직접 삽을 들었다.
꼬밍이를 독려하며 날았다.
그때부터였다.
하늘에서는 로이드가.
지상에서는 하비엘이.
각자의 방식으로 용암 거인에게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로이드는 서슴없이 삼중발파를 터뜨렸다.
용암 거인의 무릎과 정강이를 두드렸다.
하비엘의 오러도 용암 거인의 하반신을 수없이 베고, 잘랐다.
그럴 때마다 용암 거인의 두 다리에서 선혈 같은 용암이 뚝뚝 흐르고 터져 나왔다.
식어서 아까보다 느려진 재생 속도 때문에 더욱 절뚝거렸다.
하지만....
- 그루루룩! 그루룩!
용암 거인의 도주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심하게 절뚝거리면서도.
발끝을 노골적으로 질질 끌면서도.
끝끝내 용암 거인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덩치답게 엄청난 보폭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헬게이트에서 착실하게 멀어져 갔다.
동시에 로이드의 표정도 어두워져 갔다.
'젠장!'
저지할 수가 없다.
붙잡아둘 수가 없다.
아무리 극지의 차가운 바람이라고 해도.
저렇게 커다란 몸체와 그만한 양의 용암 덩어리를 단숨에 내부까지 식힐 수는 없는 법이라서, 아직은 겉만 조금씩 식어가는 단계라서.
제아무리 때리고 뚫고 베어도 소용이 없었다.
비록 조금 느려졌을지언정 아직은 재생이 멈추질 않았다.
그걸 깨달은 로이드의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저놈 덩치가 너무 커. 그러니까 이런 순간엔 비슷한 덩치가 힘 좀 쓰면서 막아줘야 하는데. 그러면 딱인데. 아, 이럴 때 비벙이만 있었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슴 쓰라린 후회가 들었다.
'비벙이는 덩치가 100미터쯤 되니까. 게다가 뚱뚱해서 무겁기까지 하니까.'
용암 거인의 키가 200미터나 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절뚝이는 놈이라면?
붙잡고 매달려서라도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었을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 마당에선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비벙이를 국왕 누님한테 공짜로 빌려주는 게 아니었어. 이 멍청한 놈!'
할 수만 있다면 4개월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당시의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서 외치고 싶어졌다.
비벙이를 빌려주질 말든가.
빌려줄 거면 대여비라도 거하게 받든가 하라고.
절대로 공짜는 안 된다고.
부모형제 사이에도 공짜는 없는 거라고.
귓구멍에 대고 맥시멈 볼륨 샤우팅으로 외쳐주고 싶었다.
'젠장! 젠장!'
안일하게 비벙이를 빌려준 자신.
그때의 멍청하고 생각 없었던 선택.
그 때문에 이번 철도 공사가 망하게 생겼다.
눈앞에 나타난 희망의 끈을 놓치게 되어 버렸다.
3개월 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판국이다.
아울러 고룡의 영혼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용왕 후원 멤버십도 한때의 꿈으로 날려먹을 상황까지 와 버렸다.
'그러게 왜 공짜로 걔를 빌려줘가지고!'
너무 억울하고 아까워서.
눈물이 핑그르르 맺혔다.
그러는 사이에도 용암 거인은 열심히 절뚝거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하비엘이 더욱 맹렬히 오러를 날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용암 거인의 도주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하아."
헬게이트가 열렸을 때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을 때는.
잠깐이나마 희망을 엿보았는데.
이젠 정말로 방법이 없다.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네 마트에 마지막 남은 1+1 라면 두 봉지를 눈앞에서 다른 아주머니가 낚아채가는 모습을 보는 심정으로, 용암 거인의 도망치는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아직 자신에게 희망의 히든카드가 남아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열어젖힌 헬게이트.
그래서 극지방으로 연결된 헬게이트.
그 헬게이트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극의 바닷속.
그곳에 골병대의 막내, 본드래곤이 있었다.
예전, '북쪽 바다에 몸을 숨기고 있으라'던 로이드의 명령 때문에 이곳까지 와서.
차가운 북극해에 얌전히 잠수하고 있다가.
방금, 마침내 로이드의 존재감을 감지했다.
삐그덕!
...로이드다!
이건 주인 로이드의 냄새다!
푸확!
마치 오랜만에 주인 냄새를 맡은 강아지처럼.
본드래곤이 반가움을 느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머리 위쪽, 상공에 열린 헬게이트를 발견했다.
240화. 소음공해 컴플레인 (3)
이곳은 북해.
온통 얼음과 칼바람 섞인 파도만 몰아치는 혹독한 극지방.
본드래곤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3일 전의 일이었다.
오로지 주인인 로이드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넌 당분간 왕도 북쪽 바다에 몸이나 숨기고 있어라.'
...라고 했던가.
그 명령은 본드래곤에게 절대적인 지상과제가 되었다.
언데드 지배 스킬.
그 스킬에 복종하며 섬기게 된 첫 주인이 로이드였다.
본드래곤은 주인인 로이드가 좋았다.
그래서 로이드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칭찬을 듬뿍 받으려면?
시킨 대로 잘해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열심히 왕도 북쪽으로 날아갔다.
얼마간 날았더니 바다가 나왔다.
처음엔 잠깐 만족할 뻔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본드래곤은 금방 깨달았다.
더 북쪽에도 '계속'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삐그덕!
북쪽. 오로지 북쪽. 제일 북쪽. 완전 북쪽까지.
로이드는 북쪽 바다에 숨어 있으랬으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북쪽 바다로 가면?
칭찬을 아주 많이 들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신이 났다.
날갯짓에 힘을 주었다.
더욱 북쪽으로.
계속 북쪽으로.
하염없이 북쪽으로.
하루 온종일 미친 듯이 날았다.
마침내 행성에서 제일 최북단에 있는 극지방의 바다에 도착했다.
삐그덕!
본드래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두개골을 흔들었다.
뿔에 미량으로 섞여 있는 자철석 성분으로 행성의 자기장을 탐지했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족할 수 있었다.
여기가 제일 북쪽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얌전히 숨어 있으면 로이드에게 칭찬을 듬뿍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확신하고 만족한 본드래곤은 그대로 바다로 다이빙을 감행했다.
수 미터의 빙산을 깨고 얼음물 냉탕 찜질을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동네(?)의 텃세가 생각보다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르르워억!
제일 먼저 텃세를 부린 이곳 바다의 주민은 기가티탄이었다.
몸길이 90미터.
체중 2,500톤.
거기에 엄청난 충격을 흡수하고 막아내는 껍질까지.
나름 무지막지한 신체 스펙을 자랑하는 바닷속 괴수가 기가티탄이었다.
하지만 본드래곤 앞에서는?
한낱 귀찮은 갯가재에 불과했다.
삐그덕, 또캉!
본드래곤의 딱밤이 작렬했다.
단 한 방의 타격.
그걸로 죽음의 위기를 직감한 기가티탄이 부리나케 도주했다.
동시에 본드래곤은 주인인 로이드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느꼈다.
방금의 장엄한 전투를 통해 또 한 번, 주인의 위대함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기가티탄 같은 애들이 덤벼도 딱밤만 때리면 돼. 네가 더 쎄.'
...라고 당부하던 로이드.
그 주인님의 말씀이 정말로 맞았다.
덕분에 기가티탄은 더욱 신이 났다.
자신을 향해 영역 침범을 따지며 덤벼드는 북극해 괴수들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펼쳤다.
기가티탄만큼 크면서 속도는 더 빠른 황제고래도.
가지런한 치열이 매력적인 초대형 상어 테랄로돈도.
심해의 절대적인 강자라 불리는 크라켄도.
모두 딱밤으로 물리쳤다.
그러자 바닷속 생태계 서열의 끝판 대장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인어 군단이었다.
"사악한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바다를 더럽히는 걸 방치할 수 없습니다! 자매들이여!"
"스트림라인은 유연하고 강력하게!"
"돌핀킥은 거침없이 대범하게!"
"자매들이여, 돌격!"
인어들은 실로 강력했다.
그들은 강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지구의 수영 선수들을 보면 그럴 터였다.
올림픽 8관왕에 빛나는 수영의 최강자 마이클 펠프스.
그의 혹독하다고 알려진 훈련량은 하루에 6시간이었다.
그렇게 6시간의 지옥 훈련을 매주 6일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반면 인어들은?
24시간 수영을 했다!
일주일 동안 일주일을 수영했다!
그냥 아주 그들에겐 수영이 생활이었고, 인생 그 자체였다.
덕분에 인어들의 육체는 그 자체로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건장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정도는?
어린애로 보이게 할 피지컬은 기본이었다.
광활한 태평양처럼 드넓은 어깨 근육.
쇄도하는 운석마저 튕겨낼 가슴 근육.
통돌이 세탁기마저 울릴 빨래판 복근.
온몸에 가득한 지렁이 같은 힘줄까지.
말 그대로 평생 수영으로 단련된 수중 세계 최강의 하드코어 익스트림 스위머들이었다.
한데 그런 인어들의 숫자가 무려 1천에 달했다.
어지간한 기가티탄 정도쯤은 30초 안에 머리-가슴-배로 친절하게 인수분해 시켜줄 수 있을 전력이었다.
한데 그런 인어 군단의 돌격은 받은 본드래곤은?
아주 신이 났다.
삐그덕! 삐덕!
인어들은 너무 빨라서 좀처럼 딱밤에 맞질 않았다.
어쩌다가 한 대 맞춰도 엄청난 근육의 맷집으로 조금 아파하며 버텨낼 뿐, 금방 충격을 회복하고 달려들었다.
인어들이 가하는 타격도 제법 묵직했다.
덕분에 온종일 북쪽으로 날아오며 뻐근했던 뼈마디가 모처럼 시원해졌다.
심지어 인어들은 지구력도 뛰어났다.
워낙 초월적인 폐활량을 지닌 이들이다 보니, 장장 3일 가까이 돌격을 감행하면서도 기세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덕분이었다.
본드래곤은 북극해에 도착하고 3일 내내 심심할 틈이 없었다.
즐거웠다.
보람찼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주인님인 로이드도 이런 즐거움을 함께 하면 참 좋을 텐데, 라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일 터였다.
로이드는 지옥에 갔으니까.
본드래곤은 그게 참 아쉬웠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조금 전, 갑자기 로이드의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본드래곤이 뛸 듯한 기쁨을 느낀 것은.
삐그덕!
처음엔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로이드의 마나가 확실했다.
로이드가 지옥으로 가면서 언데드 지배 스킬의 상호위치추적 기능이 끊어졌었는데, 그게 조금 전부터 작동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님인 로이드가 근처에 있음을!
삐그덕! 삐덕! 푸확!
본드래곤은 즉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로이드의 마나가 느껴지는 바다 위 상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덕분에 인근 상공 100미터 지점에 뻥 하고 열려 있는 지름 5미터의 헬게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지옥 특유의 뜨거운 기운.
이곳 일대의 시간축이 지옥의 것과 맞추어지고 있음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느끼는 순간, 본드래곤은 깨달았다.
로이드가 저 헬게이트 너머에 있다.
투확!
너무나 반가웠다.
즉시 날아올랐다.
골반도 야물딱지게 흔들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인어들을 푸드덕 털어냈다.
그리고 헬게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헬게이트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덜컹!
고작(?) 지름 5미터에 불과한 헬게이트를 통과하기엔 본드래곤의 덩치가 너무나 컸다.
하지만 본드래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헬게이트를 통과할 방법이야 간단했다.
삐그더더덕!
전신의 모든 관절을 해체시켰다.
부피가 큰 두개골도, 골반도 최대한 자잘하게 나누었다.
그렇게 조각조각 뼛조각으로 전신을 나누고서 허공에 일렬로 줄을 세웠다.
칙칙폭폭 열차처럼 차례차례 순식간에 헬게이트를 통과시켰다.
거침없이 지옥 상공에 입장했다.
그곳에서 전신을 재조립했다.
삐그더더더덕! 삐덕! 더덕!
조립을 마치자마자 주위부터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있던 극지방과 너무나 다른 지옥의 광경.
그 속에서 순식간에 로이드를 찾아냈다.
삐그덕!
뱁새를 타고서 저공비행을 하는 로이드가 보였다.
즉각 날개로 허공을 휘저었다.
폭발적인 속도로 로이드를 향해 날아갔다.
근처에 착륙했다.
쿠와앙, 굉음과 함께 착륙하자마자 꼬리를 맹렬히 흔들었다.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서 배를 드러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열렬히 로이드의 칭찬을 기다렸다.
그러자 로이드가 빼액 외쳤다.
"야! 급해 죽겠구만 이 시국에 무슨 인사야! 왔으면 밥값부터 해! 저놈 붙잡아!"
삐그덕?
본드래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반갑게 인사했는데.
로이드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아니, 급해 죽겠다는 듯이 타박부터 했다.
왜 저러나 싶었다.
궁금했다.
로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비로소 쿵쿵쿵 도망치는 용암 거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본드래곤의 눈길이 분노로 물들었다.
삐그덕!
저 거인 때문이다.
저 거인이 로이드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로이드한테 반가운 인사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놈을 박살 내야 한다!
삐그더덕!
분노한 본드래곤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도망치던 용암 거인 앞에 내려섰다.
놈을 붙잡았다.
콰아앙-!
본드래곤과 용암 거인.
엇비슷한 체격의 두 거대 괴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용암 거인의 무지막지하던 도주가 처음으로 중단되었다.
- 구르르륵? 구륵?
용암 거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본드래곤이 갑자기 자신을 붙잡다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뿌리치고 싶었다.
한데 불가능했다.
- 구르르워억! 구그륵!
용암 서린 입김을 본드래곤의 머리를 향해 내쏘았다.
펄펄 끓는 용암 손아귀로 본드래곤의 갈빗대를 붙잡았다.
그러면 저 뼈다귀 드래곤이 뜨거움에 기겁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용암 거인의 기대는 빗나갔다.
본드래곤은 전혀 뜨거워하지 않았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드래곤의 뼈는 말 그대로 용가리 통뼈였기 때문이었다.
즉, 본드래곤은 용암이 지닌 고열을 그저 할아버지 돌침대 찜질 모드 정도로만 여겼다.
삐그더더덕!
본드래곤이 더욱 괴력을 발휘했다.
용암 거인이 당황하며 뒤로 서서히 밀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로이드가 외쳤다.
"좋아! 계속 밀어붙여!"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나타나 용암 거인의 도주를 저지한 본드래곤.
그 덩치 큰 골병대 막내를 보는 로이드의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어휴, 저 이쁜 놈!'
사실 본드래곤이 나타나 주리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4개월 전.
왕도를 떠나 지옥으로 건너오기 직전.
그저 '왕도 북쪽의 바다에 숨어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그였다.
설마하니 본드래곤이 그 명령을 너무나 충실하게 지킨 나머지 북극해까지 와서 숨어 있으리란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야 녀석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지.'
본드래곤을 포섭한 언데드 지배 스킬.
그 스킬이 제공하는 상호위치추적 기능.
그걸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본드래곤이 근처에 있음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뛸 듯이 기뻤다.
그러니 이제는?
시공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 용암 거인을 끝장낼 때였다.
"하비엘! 가자!"
총공격이다.
본드래곤이 저놈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그래서 헬게이트에서 멀어지지 못하여 몸이 식어가는 동안에.
저 용암 덩어리 거인을 끝장내야 한다.
그것만 성공하면 철도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
그동안의 노력에 어울리는 엄청난 이득도 챙길 수 있다.
로이드는 그러한 일념으로 삽자루를 움켜쥐었다.
꼬밍이의 비행을 독려했다.
지상의 하비엘과 연계했다.
그때부터였다.
용암 거인에게 돌격했다. 맹공을 퍼부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투확!
발파와 삼중발파는 기본이었다.
용암 거인의 무릎과 발목, 허리 등의 관절을 노렸다.
조금 치사하지만, 그곳(?)을 향해서도 발파를 내쏘았다.
용암 거인이 크게 놀라며 움찔거렸다.
물론 그렇게 입힌 손상은 금방 복구되었다.
아직 용암이 다 식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때려서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때리면 돼!'
어차피 용암이 다 식을 때까지 여기 붙잡아두면 된다.
그러니 안 통하는 것 같아도 계속 열심히 때려야 한다.
놈을 자르고, 후벼 파고, 최대한 손상시켜야 한다.
그래야 헬게이트를 통해 불어오는 극지방의 바람이 용암 거인을 더 빠르게 식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너무 뜨거운 국밥 먹을 때도 그냥 멀뚱히 보면서 식길 기다리진 않잖아?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주면서 입김을 불어주면 더 빨리 식으니까!'
똑같은 원리였다.
발파로 구멍을 송송.
하비엘의 오러로 더욱 송송.
찌르고, 뚫고, 잘라주면 된다.
그렇게 용암 거인의 전신이 손상되면서 자연스럽게 내부의 식지 않은 용암이 차가운 바람에 노출된다.
열기가 한층 빠르게 식는 것이다.
로이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용암 거인의 열을 식히기 위해 말 그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하망이도 그 방법 중의 하나였다.
"하망아! 너 여기서 매일 더웠지?"
"하망?"
"얼음물 마시고 싶지 않아?"
"하망!"
"그럼 가서 여기로 뿌려!"
하망이를 헬게이트 너머로 던졌다.
지옥에서 북극해 상공으로.
순식간에 건너간 하망이가 북극해에 퐁당 빠졌다.
그리고 짭짤한 얼음물을 신나게 들이켰다.
"하망! 하마마망! 호롤로로!"
부와아아악!
하망이의 몸이 순식간에 70미터 크기까지 부풀었다.
다음 순간, 하망이가 아래쪽을 향해 물을 내뿜었다.
"흐므믕!"
뽀와악!
맹렬하게 뿜어낸 물줄기가 하망이의 몸을 로켓처럼 100미터 상공까지 띄워 올렸다.
그 순간, 하망이가 물 분사(?) 방향을 바꾸었다.
헬게이트 너머로 보이는 용암 거인을 향해 쏘았다.
쏴아아아아아!
마치 작정하고 호스로 조준해서 쏘아낸 차가운 수돗물처럼.
헬게이트 건너편에서 쏘아진 북극해 얼음물이 직선으로 날아왔다.
그렇잖아도 본드래곤에게 붙잡혀 차가운 바람을 쐬고 있던 용암 거인에게 강제 냉수 샤워 체험을 선사했다.
- 구루루루루워억! 엣취!
용암 거인의 재채기가 더욱 심해졌다.
엄청나게 피어나는 수증기 속에서 놈의 몸이 더욱 급속도로 식어갔다.
"멈추지 마! 계속!"
로이드의 독려가 더욱 열렬해졌다.
하비엘의 공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하망이가 반복해서 물을 발사했다.
본드래곤도 더욱 용을 쓰며 용암 거인을 붙잡았다.
용암 거인의 몸이 실시간으로 급속히 식어갔다.
부글거리며 모든 손상을 회복하던 그 회복력 또한 식어갔다. 느려졌다. 움직임 또한 점점 둔해졌다.
마치 자비 없는 혹한의 추위에 얼어붙어 가듯.
시뻘겋게 부글거리던 겉면이 시커멓게 굳어갔다.
쩍쩍 갈라진 틈새로 보이는 내부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거인의 몸이 충분히 식었다는 판단이 든 순간.
"지금!"
로이드가 외쳤다.
본드래곤이 용암 거인을 밀었다.
떠밀린 거인이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본드래곤과 용암 거인의 간격이 처음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로 하비엘이 파고들었다.
처척!
화산재 대지를 두 발로 딛고서.
아스라이 피어나는 열기를 가르며.
서늘한 눈길로 용암 거인을 일별했다.
...!
소리도 없이.
섬광을 느낄 틈도 없이.
수백 줄기의 오러가 용암 거인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로이드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알차게 숑숑 떠오르기 시작했다.
딩동!
[당신은 번득이는 기지와 뜻밖의 행운, 믿음직한 아군의 힘을 적절히 활용하였습니다. 덕분에 지옥의 살아 있는 자연재해, <용암 거인 둔클레오스>를 격멸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기적적인 전투 결과가 당신에게 전설적인 찬사를 부여합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찬사,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 생성되었습니다.]
241화. 지옥철도 이용권 (1)
[새로운 찬사,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 생성되었습니다.]
'오옷?'
눈앞에 찰지게 떠오르는 메시지.
그걸 보며 로이드는 군침을 삼켰다.
눈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방향.
그곳에 수백 조각으로 잘려 쓰러지는 용암 거인이 있었다.
- ...구르륵!
거인의 단말마가 거칠게 울렸다. 희미해졌다. 다시는 울리지 않았다.
대신 조각조각으로 잘린 돌덩이가 대지를 때리고 울렸다.
쿠웅! 콰쾅! 쿠쿵!
대부분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반쯤 굳어가는 돌덩이들.
이제 다시는 부글거리며 융합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러기엔 너무 식었으니까.'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엔 진짜다.
용암 거인의 몸이 충분히 식은 상태에서 하비엘의 검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덕분에 저 거인이 진짜로 끝장났다.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그 증거였다.
'어디 보자.'
로이드는 숨을 고르며 메시지를 읽었다.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
[찬사 등급 : 지옥 괴담]
용암 거인은 무서워.
용암 거인은 뜨거워.
용암 거인은 난폭해.
그러니까 쉿, 저 거인을 화나게 하면 안 돼.
우린 그렇게만 알고 살았지.
지옥왕 님께선 바쁘셔서.
헬나이트들은 험한 일 싫어하는 말년이라서.
감히 부를 생각도 못하고 우린 그냥 얻어터지면서 살았거든.
그냥 그렇게 숨죽이고 사는 게 답인 줄로만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더라.
다 방법이 있더라.
로이드 프론테라, 그 인간 말이지.
난 설마 그 인간이 그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지 뭐냐.
그게 뭐냐고?
듣고 싶으면 일단 거기 문부터 좀 닫자.
저기서 찬바람 들어온... 에, 엣취!
[찬사 효과 : 당신은 지옥의 가장 위험하고 난폭한 존재, 용암 거인을 격멸하는 데에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습니다. 당시 수천에 달하는 사탄이 당신의 활약을 똑똑히 목격했으며, 이 영웅담이 지옥 구석구석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덕분에 당신은 지옥의 사탄들에게 헬나이트에 버금가는 두려움과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어떠한 혹한에서도 저체온증에 시달리지 않으며, 동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찬사 지역 : 지옥의 모든 구역, 연평균 기온 섭씨 0℃ 이하의 모든 지역]
[찬사 유지 기간 : 120년(인간계) / 10만 년(지옥)]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6]
[현재 보유 중인 CP : 1,142]
'와우.'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 찬사, 또 꿀옵션이네.'
그는 새로 얻은 찬사의 위력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우선 지옥의 사탄들에게 헬나이트만큼의 두려움과 존경을 받는다는 대목. 이거 앞으로 남은 공사에 상당한 도움이 되겠어.'
철도 공사는 결코 쉽지 않았다.
지옥이라는 특수한 환경.
사탄이라는 특이한 인부.
그 속에서 정상적인 시공을 진행하는 일은 말 그대로 헬 난이도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연하지. 수시로 용암 때문에 지반은 불안정해져, 사탄 놈들은 말 더럽게 안 들어, 어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카락 빠지겠네.'
그게 지난 3개월 동안 시공을 진행하며 자신이 겪어온, 남모를 고충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사탄들을 통제하는 일이 정말로 만만치가 않았다.
말 그대로 더럽게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비엘의 전방위적인 감시가 아니었으면 벌써 3만 명 중에 2만 명은 도망쳤겠지.'
사탄들은 애초에 갱생이 안 되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을 굴리자니 강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게 이쪽에게도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곧바로 현장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테니까.'
그러면 시공 현장은 금방 개판이 된다.
심하면 공사 자체가 나가리판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아주 가끔, 그렇게 파토 나는 현장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로이드였다.
'한데 이젠 그럴 걱정이 많이 사라지겠어.'
이곳 지옥에서 지옥왕 다음의 서열인 헬나이트.
새로 얻은 찬사 덕분에 그들만큼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앞으로 사탄들을 통제하는 일이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 기대되었다.
'게다가 저체온증과 동사 면역. 이것도 꿀옵션이야.'
이렇게 열기가 펄펄 끓는 지옥에서는 쓰일 일이 없는 옵션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혹한이 몰아치는 지역에 가게 된다면?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리라.
'그건 이번에 지옥에 오면서도 이미 피부로 느낀 거고.'
로이드는 예전, 술탄국에서 카나트 수로를 건설하며 얻었던 찬사인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 물' 찬사를 떠올렸다.
그 찬사의 옵션이 이번 것과 비슷했다.
'모든 사막 지역과 연평균 기온 섭씨 40도 이상의 모든 지역에서 탈수 증상을 겪지 않는다는 옵션이었지.'
그 옵션 덕분에 지금껏 지옥에서 버틸 수 있었다.
하비엘조차 더워서 땀 뻘뻘 흘리는 이곳에서 태연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은 그만한 꿀옵션이 없을 지경이었다.
한데 이번에 얻은 찬사의 옵션은?
'살다 보면 또 언제 추운 지방에 갈지 모르는 거거든.'
그러니까 이런 찬사나 옵션은 많을수록 좋다.
마치 예방접종을 맞고 얻는 항체처럼.
지니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무조건 도움이 된다.
그렇듯 로이드는 흐뭇한 심정으로 새로운 찬사를 갈무리했다.
흐뭇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시공, 계속할 수 있게 됐어.'
힘들여 3개월이나 진행했던 공사였다.
이제야 노반 시공을 마치고 궤도 부설에 힘을 쏟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두 달 정도만 더 노력하면 결실을 볼 수 있을 공사였다.
한데 그게 엎어지는 걸 면했다.
무사히 공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쿵덕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안심한 로이드는 제일 먼저 하비엘에게 달려갔다.
"어이, 무사하냐?"
"예, 다행히."
용암 거인의 잔해가 곳곳에 떨어진 파괴의 현장.
하비엘은 그곳에서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온몸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럴 법도 했다.
'비록 헬게이트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지만... 온통 용암과 화염이 가득한 데다 공기마저 매캐한 이곳에서 그토록 뛰고 구르며 싸웠으니. 그래도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로이드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하비엘을 살폈다.
하지만 입은 그런 심정과 반대로 움직였다.
"덥냐?"
"예, 조금."
"쯧, 나약한 녀석 같으니."
"...."
"그랜드 마스터니 오러 팍팍 날리니 하면 뭐하냐. 이 정도 더위도 못 이겨서 땀이 사골육수처럼 퐁퐁 솟아나는데. 안 그러냐."
로이드는 히죽 웃으며 악담을 날렸다.
하비엘이 땀에 절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칼을 떼어내며 대꾸했다.
"땀이 제법 나긴 합니다만, 생각해보니 그래도 제가 로이드 님보단 나은 처지인 것 같습니다."
"뭐? 네 처지가? 나보다 낫다고?"
"예."
"어떻게?"
"이렇듯 땀에 절고 화산재 범벅이 된 제가 뽀송뽀송한 로이드 님보다 잘생겼으니까 말입니다."
"...."
"역시 새삼 깨달을 때마다 짜릿합니다. 늘 새롭죠. 잘생긴 게 최고입니다."
"...."
더러운 존잘러들, 확 다 치질이나 걸려 버렸으면.
낄낄대며 새총 한 발 따콩 날렸다가 정수리에 14톤짜리 GBU-57 MOP 벙커버스터를 맞은 기분이 이런 걸까.
로이드는 비애감에 솟구치는 눈물을 삼켰다.
"야, 지금이 이렇게 잡담이나 나눌 때냐?"
"...."
"현장 난리 난 거 안 보여? 빨리 수습해야지. 그렇게 앉아서 숨만 몰아쉴 때냐고, 지금이."
"...."
"자자, 빨리 움직이자, 좀. 빨리."
"...."
앉아서 숨 고르던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매몰차게 등을 떠밀며 현장 수습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로이드의 입꼬리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뜻밖에 닥쳐왔던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하비엘 녀석도 다행히 무사하다.
그거면 됐다.
그러니 이제는, 현장을 수습할 때였다.
♣
현장은 금방 수습되었다.
비록 사탄이 천 명 넘게 죽었지만.
그 사실에 남몰래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하긴 했지만.
용암 거인에게 밟힌 약 300미터 가량의 구간 노반이 무너지고 유실되었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사탄이 많았다.
노반의 복구도 금방 이루어졌다.
거기에 전에 없던 대형 크레인, 아니, 일꾼도 추가되었다.
바로 본드래곤이었다.
삐그덕! 삐덕!
일행에 뒤늦게 합류한 본드래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언데드 특유의 무임금, 무휴식을 원칙으로 삼았다.
로이드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온종일 움직였다.
"어이?"
삐그덕!
"저기 고인 용암 좀 퍼내 줄래?"
삐그덕!
"좋아, 잘했어. 그럼 용암 퍼낸 구덩이도 화산재로 좀 메꾸자. 꼼꼼하게 밟아서 다지는 것도 잊지 말고."
삐거덕! 삐덕!
"어이쿠, 참 잘한다. 상으로 이름 붙여줄까? 용용이 어때?"
삐그덕! 삐덕!
상으로 이름을 하사받은(?) 용용이의 노동 의욕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
덕분에 다른 환상종들의 의욕도 덩달아 올라갔다.
"뽀, 방, 하, 꼬!"
불과 몇 개월 전에 본드래곤과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을 겪었던 환상종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본드래곤이 용용이로 불리며 현장의 빅 아이돌로 거듭나고 있었다.
환상종들의 입장에선 경쟁심이 절로 타오를 상황이었다.
이대로 저 신입에게 자리를 빼앗길 순 없다고.
자신들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노라고.
의욕을 활활 불태우며 일했다.
"뽀동! 뽀도동!"
뽀동이는 노반 조성이 끝난 지대의 잔토 처리에 더욱 열심히 매달렸다.
뜨거운 화산재를 호오호오 불어가며 볼주머니에 담았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며 날랐다.
방울이도 철근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방울! 빠방울!"
아무리 뜨거운 이곳이라 해도 철근이 쓰이는 곳이 있었다.
주로 지네 껍질로 만든 레일과 레일 사이, 접합부를 접착할 때 철근이 쓰였다.
마치 현장에서 실리콘 총을 쏘듯이.
열로 녹인 실리콘으로 자재를 붙이듯이.
이곳에서는 철근이 그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하망이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흐믕! 흐므믕!"
부와악!
하망이는 지옥 곳곳의 온천수를 한껏 들이켰다.
순식간에 70미터짜리 거대 롤러가 되었다.
그 상태로 현장을 굴러다니며 탄탄하게 다질 곳을 확실하게 다졌다.
꼬밍이도 매일 열심히 땀 흘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자, 꼬밍아? 가즈아!"
"꼬밍!"
꼬밍이는 매일 로이드를 태우고 날갯죽지에 땀띠가 나도록 현장을 날아다녔다.
거기에 사탄들도 더욱 의욕적으로 현장에서 굴렀다.
헬나이트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게 된 로이드.
그의 명령이라면 어떤 잔업도 마다치 않게 되었다.
덕분에 파괴된 현장의 복구가 순식간에 끝났다.
궤도 시공 또한 더욱 거침없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갈 도상을 탄탄하게 다졌다.
궤간을 유지하고 열차 하중을 분산시킬 침목을 횡침목 방식으로 놓았다.
지네 껍질을 가공하여 25미터 규격의 정척 레일로 바닥에 끼웠다. 녹인 철근으로 용접하듯 접합 처리하였다.
마지막은 정거장 시공이었다.
그것도 딱히 어렵거나 복잡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거장을 만들 곳이 지옥성과 지옥의 끝자락, 두 군데밖에 없으니까.'
출발지와 도착지.
양쪽 끄트머리에만 정거장을 만들면 되었다.
로이드는 시공의 신속성과 유지 보수의 편리함을 위해 정거장의 구조 또한 가장 단순한 형태로 잡았다.
'복잡할 필요가 없지. 양쪽에 철로를 놓고, 그 중간에 콘크리트를 굳혀 만든 플랫폼을 두는 게 제일 나아. 어차피 까다로운 승객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대량의 영혼을 열차에 싣고 내릴 때 편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최대한 플랫폼의 공간을 넓게 확보하는 일에 주력했다.
수많은 영혼.
그걸 싣고 내릴 수많은 사탄 하역꾼들.
그들이 일하고 움직이면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공간을 무식하리만치 넓게 잡았다.
막대한 양의 철근과 화산재 콘크리트가 투입되었다.
사탄들의 퇴근 없는 피, 땀, 눈물이 쏟아졌다.
플랫폼 시공에만 한 달을 매달렸다.
덕분에 지옥성과 지옥의 끝자락, 양쪽의 정거장에 길이 300미터, 너비 100미터의 초대형 플랫폼이 완성되었다.
5개월 전, 로이드가 지옥왕에게 제안했던 프로젝트 지옥철도 666.
장장 110킬로미터에 걸친 지옥 최초의 철도가 완공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완공이다!"
"와아아!"
"이제 해방이다!"
"집에 갈 수 있어!"
"다시 뒹굴거리면서 부모님 속 썩일 수 있다!"
"만세!"
마침내 철도가 완공되는 날.
가장 큰 기쁨을 느낀 이들은 다름 아닌 현장의 사탄들이었다.
지옥의 역사에 남을 공사를 끝낸 감격과 소감?
그들에겐 그딴 건 없었다.
그저 마침내 노예 일꾼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고.
다시금 잉여로운 백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름 야물딱지게 외뿔 사탄을 대표로 뽑았다.
로이드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로이드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그동안 저희가 열심히 뼈 빠지게 일했지 않습니까!"
"어, 그랬나."
"예! 그래서 임금을 요구합니다! 그동안 쌓인 일당 좀 주시지요!"
"싫어. 꺼져."
"감사합니다!"
...그렇게 협상이 결렬되었다.
외뿔 사탄을 통해 로이드의 뜻을 전달받은 사탄들은 다들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자신이 다른 사탄을 부려먹게 되면 로이드를 본받으리라고, 자신도 꼭 저런 훌륭한 악덕업주가 되겠노라는 알찬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각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야 로이드는 혼자만의 추가 시공을 벌였다.
타앙! 카앙! 타앙!
모든 사탄 일꾼이 해산된 직후.
휑하게 한산해진 지옥 끄트머리의 플랫폼 구석.
그곳에서 로이드는 홀로 망치와 정을 들었다.
어디선가 가져온 화산암을 망치로 때리고 정으로 깎았다.
모양은 단순하고 투박했다.
섬세한 솜씨를 발휘하지도 않았다.
그저 숨겨놓은 진심을 담아 때리고, 깎고, 글귀를 새겼다.
<지옥철도 건설을 위해 희생한 모든 사탄을 위해 이 추모비를 세웁니다.>
그것은 일종의 비석이었다.
시공에 매달리다가 때아닌 용암 거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탄들을 기리는 추모비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로이드는 숙연해진 얼굴로 완성된 추모비를 바라보았다.
행여나 사탄들의 지탄을 받을까 봐, 이렇게 착한 분인 줄은 미처 몰랐다며 실망의 눈총을 받을까 봐 몰래 세운 추모비였다.
'그래도 이래야 마음이 편해.'
아무리 사탄이라도.
어쨌거나 자신을 위해 일하다가 비명횡사를 겪은 이들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나마 그들을 추모해 주고 싶었다.
설령 그게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행위일지라도.
이렇게라도 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추모비까지 몰래 세운 로이드는 지옥성으로 향했다.
이제는, 지옥왕에게 공사 대금을 받아낼 때였다.
242화. 지옥철도 이용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