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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화. 새로운 경지 (1)

 

 

키아아아아아-!

 

급속충전 옵션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세 갈래 마나써클이 회전했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다.

주위를 휘저었다.

마나의 흐름이 생성되었다.

마치 욕조 가득하던 물이 회전하며 아래의 구멍으로 빨려들듯.

주위의 모든 마나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니,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일대의 공기가 요동쳤다.

공기 속의 작은 먼지들이 말라비틀어졌다.

먼지에 달라붙어 있던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미생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유자적하게 섬모를 흔들던 박테리아도.

그 박테리아에 기생하려 기회를 엿보던 바이러스도.

신체를 구성하던 분자 속 마나를 순식간에 빼앗기고 말라비틀어졌다.

물론 로이드 주위의 훨씬 거대한 먹잇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본드래곤의 머리뼈가 그러했다.

 

꽈드드드드!

 

로이드를 둘러싼 본드래곤의 머리뼈.

그중에서도 그가 들어와 있는 뇌실.

그 공간 전체에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뼈마디가 요동쳤다.

뼛조각들이 뒤틀렸다.

거침없이 마나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콰드드! 드득! 콰득!

 

뇌실 안쪽 벽면이 변색되었다.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혹은 갑작스러운 파멸에 몸부림치듯.

급속충전의 범위에 사로잡힌 공간 전체가 비틀리고, 유린당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주위의 어떠한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을 감고서.

고치 속에 웅크리듯이.

혹은 고요하게 도사리고서,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래서 본드래곤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머리를 한 차례 흔들었다.

- 뭐지, 이건.

흑마법사 타르가가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머리뼈 속에 들어와 자신을 계속 성가시게 만들던 로이드 프론테라.

그놈이 안쪽에서 또 뭔가 일을 꾸미는 게 느껴졌다.

엄청난 기세의 마나 흡수였다.

처음엔 잠깐 뜨악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뭐,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나름 대단하고 흉악한 기세의 마나 흡수이긴 한데.'

그걸 무서워하기엔?

본드래곤의 뼈대가 지닌 마나가 워낙 많았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징그럽고 무식할 정도로 많았다.

그렇기에 타르가는 로이드가 벌이는 급속충전에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았다.

지금 로이드가 시도하는 마나 흡수.

그게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행위라면?

본드래곤이 지닌 마나의 총량은 대도시 크기의 호수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지금 네놈이 발악하는 짓거리도 결국엔 바가지로 호숫물을 퍼내려는 것과 같은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물론 다 퍼낼 수는 있다.

대신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족히 몇 년.

어쩌면 수십 년쯤 걸릴지도 모른다.

지금 로이드가 벌이는 짓이 그와 같았다.

타르가의 입장에서는 그냥 가소로웠다.

'머리, 또 때려볼까.'

그래서 아까처럼 저놈에게 타격을 줄까.

하지만 타르가는 기다렸다.

어쨌건 마나 흡수를 당하는 판국이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머리뼈가 아주 약간은 약해져 있을 테니까.

그런데 괜히 스스로를 때렸다가 행여나 머리뼈에 실금이라도 가면 자신만 잔뜩 손해일 테니까.

'조금 지켜볼까.'

기다리기로 했다.

'어떤 마나 흡수라도 영원히 할 수는 없는 법이니.'

당연한 소리다.

아무리 효율이 뛰어난 기법이라도 그렇다.

흡수를 하는 자가 수용하는 마나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흑마법사였던 타르가는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니 결국엔 이 흡수도 조만간 끝날 것이다.

기다리자.

그러면 된다.

그런 타르가의 예측은 정확했다.

곧, 급속 충전의 한계 시간이 다가왔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의 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키이이이이....

 

본드래곤의 머리뼈 내부.

그곳에 들어앉은 로이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날뛰던 마나써클이 잠잠해졌다.

광포하게 회전하던 기세가 가라앉았다.

포악하고 무차별적이던 마나 흡수가 종료되었다.

마나 흡수를 마친 로이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급속충전을 사용한 직후에만 느껴지는 이 특별한 감각.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 감각을 느끼며 눈길을 들었다.

역시나 눈앞에 잔뜩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재빠르게 읽었다.

 

[마나하트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마나하트]

[단계 : 소드 익스퍼트 중급 Lv 10]

[신체 능력 향상률 : 1,200%]

[보유 중인 스킬 전용 옵션 : ① 충격상쇄 ② 만독불침 ③ 무아지경]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1,700]

 

[당신의 마나하트는 본드래곤의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하며 단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약한 양의 드래곤 마나가 당신의 마나하트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이 당신의 마나하트 스킬에 새로운 전용 옵션을 부여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반인반룡 - 우연한 계기로 당신의 마나하트 일부가 드래곤하트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신과 조우하는 모든 드래곤이 당신에게 적대감 대신 호기심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호기심을 호의로 발전시키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헐.'

메시지를 다 읽은 로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마나하트가 또 성장했다니.

일부나마 무려 드래곤하트의 특성을 지니게 됐다니.

덕분에 드래곤의 호기심을 받게 됐다니.

아니, 그보다....

'마나하트 스킬, 한 단계만 더 올라가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네?'

내심 뜨악했다.

걱정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간 덜컥 소드 익스퍼트 상급으로 올라가 버려서 팔자에도 없던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게 생겼다.

졸지에 중증 불면증 환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드래곤은?'

어떻게 됐을까.

급속충전에 제대로 당했을 텐데.

스킬 옵션 범위가 무려 반경 7미터니까.

머리뼈 안쪽이 제대로 털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서 빠져나가자.'

로이드는 재빨리 일어났다.

아무리 급속충전이라고 해도 본드래곤을 처치하진 못했을 것이다.

대신 제법 큰 타격은 주었으리라는 기대는 들었다.

엄청난 두통?

혹은 갑작스러운 혼절?

어쨌건 이 틈에 빠져나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본드래곤을 잡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니까.'

애초의 목적은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꼬밍이가 하비엘을 찾아낼 수 있도록.

중상을 입었을 녀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그럴 시간을 버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다.

'이쯤이면 됐어.'

더는 바라지 않는다.

이런 괴물과 더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이젠 밖으로 나가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자.

다짐하며 로이드는 시신경 다발 구멍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리고 그때.

파괴적인 충격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콰아아아앙-!

 

"...!"

콘크리트벽으로 내던져지는 음료수 캔.

그 안에 갇힌 딱정벌레의 신세가 이런 걸까.

"어헉!"

콰작, 뇌실 반대편 벽으로 날아갔다.

부딪혔다. 아니, 처박혔다.

전신의 뼈가 어긋나는 느낌.

내장이 밖으로 쏟아지는 착각.

순간적으로 시야가 캄캄해졌다.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

왼쪽과 오른쪽이 어디인지.

아무것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커... 헉! 무슨!'

로이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느리게 복구되는 시야 속에서 간신히 생각을 이어갔다.

'설마 본드래곤, 급속충전에 제대로 당했는데도... 멀쩡한 거야?'

소름이 돋았다.

아닐 거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까와 똑같으니까.

본드래곤이 스스로 머리를 후려치고.

자신은 그 안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러던 아까와 달라진 게 없으니까.

그러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거야, 급속충전.'

눈앞이 캄캄해졌다.

조금 전은 충격으로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면.

지금은 압도적인 암담함에 눈앞이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럴수록 이를 갈았다.

바락바락 기었다.

'그렇다고! 내가 죽을 줄 알고!'

여기서 죽을 순 없다.

이렇게 하비엘 녀석 구할 시간 벌어주려고.

남 좋은 일만 실컷 해주려고 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

그러기엔 너무나 억울하다.

'아직 꿀도 제대로 못 빨았단 말이다.'

평생 고생만 잔뜩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난에 짓눌려 고시원에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볼품없이 살아야 했다.

여기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시작부터 빚더미가 자신을 반겼더랬다.

그거 갚아보겠노라고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다.

수없이 죽을 위기를 넘겨야 했다.

'그렇게 겨우 사람 살 만한 영지로 가꿔놨는데! 이제 그 꿀만 빨면 되는 건데!'

그런데 여기서 예정에도 없던 본드래곤에게 죽는다니.

억울해서 죽어도 못 죽을 것 같았다.

'안 돼. 살 거야. 무조건 산다! 나는!'

한 손엔 삽을 쥐고.

다른 손엔 손톱을 세우고.

바락바락 기를 쓰고 기었다.

뇌실을 비척비척 벗어났다.

시신경 다발 통로를 애벌레처럼 통과했다.

마침내 눈구멍 밖으로 널브러지듯 몸을 빼냈다.

시원한 밤 공기가 가슴속 가득 들어왔다.

"됐다...."

로이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 본드래곤이 또 스스로 머리뼈를 후려쳤다.

 

콰아아앙-!

 

"...!"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 압도적인 충격.

그 충격에 형편없이 날려가는 자신.

아까의 자신이 던져지는 음료수캔 속에 갇힌 딱정벌레였다면?

지금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채 교통사고를 당한, 그래서 차 밖으로 튕겨 날아가는 운전자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 아득한 생각 속에서.

밤하늘로 아스라이 날려가며.

150미터 아래에서 휙휙 지나가는 숲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아꼈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RP도.

CP도.

너무 놀부처럼 아끼고 살았나 싶었다.

'그냥 RP 써 버릴걸. 소드 익스퍼트 상급, 될걸.'

그랬다면 지금의 충격을 아주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완전히 늘어진 상태로 무력하게 추락하는 꼴을 안 겪지 않았을까.

'아님 CP라도 썼어야 했던 건데.'

엔딩 스포일러라도 써볼 걸 싶었다.

그랬다면 이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미리 봤을 텐데.

자신의 최후가 될 오늘을 예측했을 텐데.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을 텐데.

'바보같이. 너무 아꼈어.'

엔딩 스포일러를 쓸 때마다 다음번 필요 CP가 엄청나게 늘어난다고.

그러니까 정말로 쌔한 느낌이 올 때만 쓰리라고.

안 그러면 정작 필요한 때에 CP가 모자랄 거라고.

아끼고 또 아끼자고.

다짐했던 그동안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어.'

반쯤 흐려진 시선을 움직였다.

너무나 세찬 맞바람 속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가까워져 오는 지면이 보였다.

바위가 비죽비죽.

저기 떨어지면.

온몸이 곤죽.

그러니까.

저 자리다.

저곳이 내가 죽는 자리인 거다.

순식간에 온몸을 사로잡는 소름 속에서.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코앞으로 다가온 최후.

그 앞에서 의연해지려 애썼다.

그리고 지면에 내리꽂히기 직전.

누군가에게 허리띠를 붙잡혔다.

 

덜컥!

 

"로이드 프론테라, 정신 차려!"

귓가에 세차게 울리는 국왕 누님의 목소리.

그 외침과 함께 느껴지는 그녀의 엄청난 완력.

로이드는 구원의 손길에 격하게 화답했다.

"...우웩!"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추락의 기세 그대로 허리띠가 아랫배를 콱 조였다.

거의 배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쿠, 커억! 쿨럭! 크어억!"

반쯤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임에도 엄청나게 아팠다.

너무 아파서 기절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주위를 조금은 둘러볼 수 있었다.

"업히도록, 얼른!"

'국왕 누님?'

어느샌가 국왕 알리시아가 자신을 업고 있었다.

업은 채로 대정원을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수풀과 수로를 뛰어넘었다.

진로를 방해하는 조각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통째로 부수고 그대로 돌파했다.

격렬한 질주와 다소 흐트러진 호흡.

그 열기가 국왕의 등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다급한 심정도 함께 느껴졌다.

즉, 그녀는 자신을 업고서 도망치고 있었다.

뒤를 추격해 오는 본드래곤을 피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 하."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절... 구해주시는 것이옵니까."

"어찌하여는 무슨!"

국왕이 거칠게 외쳤다.

"놔두면 죽을 것 같으니까 구했지! 그럼 버리고 도망칠까!"

"제발 그러지는 말아주시옵소서."

진심(?)으로 대답했다.

국왕 전하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느니.

그러니 짐이 된 저를 버리고 도망치셔야 한다느니.

그런 말은 행여나 입밖에 뻥긋도 하지 않았다.

괜히 마음에도 없는 그딴 말을 했다가 국왕이 '그래, 가슴 아프지만 그대의 말이 옳군'이라는 식으로 반응해 버릴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죽기 싫어.'

로이드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질주하는 국왕의 등에 업힌 채로.

시선을 뒤로 돌렸다.

밤하늘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달을 통째로 가리듯 이쪽을 뒤덮어 오는 거대한 형체만 보였다.

이쪽을 추격해 날아오는 본드래곤이었다.

"...."

국왕, 느리다.

이대로면 금방 잡힐 것 같다.

"전하."

"왜!"

"더 힘껏 달리소서."

"이미 그러고 있다만!"

"제 마나도 받으시고 말이옵니다."

"...!"

흠칫하는 국왕 알리시아의 등짝.

그런 국왕의 어깨를 짚었다.

남은 마나를 쥐어짜서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딩동.

 

[당신은 현재 탈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③ : 절전 모드(改)의 적용을 받는 상태입니다. 현재 마나 증폭률은 25%로 고정되어 있으며, 타인에게 전해주는 마나의 총량은 2.5%로 제한됩니다.]

 

키이이....

 

겨우 2.5퍼센트.

그거라도 좋았다.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야 하니까.

그래야 살아날 희망이 약간이라도 생길 테니까.

"지금쯤이면 왕도 주둔군도 반격 준비를 마쳤을 것이옵니다."

"알고 있어!"

"그쪽으로... 주둔군 집결지로 도망치소서."

"그러고 있다니까!"

나름 국왕을 독려했다.

국왕의 질주가 더욱 다급해졌다.

하지만 어째서 현실은 이럴 때만 냉정한 걸까.

도대체 왜 저 본드래곤은 지치지도 않고 날아와 벌써 우릴 따라잡는 걸까.

 

쿠우웅-!

 

"...!"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날아왔다.

국왕 알리시아가 급히 질주를 멈추는 게 느껴졌다.

"...아."

거칠게 정돈하려는 호흡.

그 사이로 그녀가 내뱉는 소리도 들려왔다.

로이드도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절망의 절벽처럼 앞을 막고 있는 본드래곤이 있었다.

이쪽을 굽어보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하, 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젠 진짜로 끝이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머리를 굴려도 아무런 방법이 없는데.

그 사실을 깨닫자 그냥 웃음이 나와 버렸다.

검을 꽉 틀어쥔 국왕의 어깨가 공포로 굳는 것을 느끼며.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는 본드래곤의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로이드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싸늘하게 치미는 소름 속에서.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왕 이렇게 죽게 된 거.

'하비엘. 너라도 무사해라, 인마.'

이렇게나마 벌어준 시간으로 꼭 살아라.

남겨질 뽀동이랑 방울이, 하망이랑 비벙이와 꼬밍이.

착한 백작 부부랑 줄리앙도 부탁한다.

대신 너만 너무 잘 먹고 잘 살면.

내가 좀 억울할 거 같으니까.

살면서 배도 나오고 머리도 벗겨지고 무좀도 걸려서 고생 좀 해라.

'그러니까....'

고개를 들었다.

본드래곤의 벌어진 아가리.

이미 지척까지 쇄도해 오고 있다.

닫혀 왔다.

이쪽을 씹으려.

기둥 같은 송곳니가 번득이고.

그보다 빛나는 검영이 홀연히 나타났다.

송곳니를 가로막았다.

 

...!

 

소리도 없었다.

느낄 틈도 없었다.

뭔가가 번득인다 싶은 순간.

로이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비엘?'

어느샌가.

은발 기사의 뒷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이쪽을 지키듯.

적에게 맞서듯.

오연히 앞을 가로막고서.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가 옆으로 베어낸 롱소드 한 자루.

평범하게 그려낸 궤적이 수천 갈래의 찬란한 오러로 물들었을 때.

로이드는 불현듯 떠올렸다.

소설 철혈의 기사.

그 이야기 속에서 보았던 모습.

하비엘이 마침내 도달했던 경지.

그건 바로....

"그랜드 마스터?"

로이드가 중얼거린 순간.

본드래곤의 전신이 수천 조각으로 잘려나갔다.

225화. 새로운 경지 (2)

 

 

풍덩!

 

10분 전.

온몸을 휘감는 강물 속에서.

하비엘은 죽어가고 있었다.

'....'

간신히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이 흐리다.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다.

살갗에 와 닿는 감촉도 낯설다.

차갑고, 축축하고, 둔탁하게 부글거리는 느낌.

'강물.'

하비엘은 중얼거렸다.

비로소 정신이 조금은 들었다.

나, 마제나 강에 빠진 건가.

그럼 싸우던 곳에서 수백 미터나 날려 와 버린 건가.

'꼬리가... 움직였어.'

분명 잘라냈던 본드래곤의 꼬리였다.

이젠 놈을 거의 다 잡았다고 여겼다.

놈이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라고.

이때 머리뼈를 박살 내면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방심했어.'

멍청했다.

쥐지도 못한 승리가 손아귀에 들어왔노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잘못이었다.

아니, 설마 잘린 꼬리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게 갑자기 자신을 덮칠 줄도 정말로 몰랐다.

그래서... 아니다.

이것조차도 변명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돌아가야 해.'

다급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

본드래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니, 손가락 하나조차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쿨럭!"

 

부그르륵!

 

힘겹게 내뱉은 기침.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거친 거품 되어 수면으로 올라갔다.

대신 하비엘의 몸은 더욱 가라앉았다.

강물 깊은 곳으로.

더욱 깊은 곳으로.

심연 같은 바닥까지.

'....'

숨을 쉴 수가 없다.

겨우 붙잡은 의식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을 되뇌었다.

'...주군. 로이드 님.'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사람들.

그 어떤 역경이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설령 죽음이 자신을 사로잡는다 하여도.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들을 지키겠노라 남몰래 다짐하였더랬다.

한데 그 다짐,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다짐은 거창했는데 이런 꼴이라니.

결국엔 강바닥에서 비참한 꼴로 익사 당하는 신세라니.

한심했다.

그리고 싫었다.

자신이 이대로 끝나는 것이.

그래서 남겨질 로이드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

그러니까,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주군의 아들이라서?

영지의 후계자라서?

'아니.'

그건 아니다.

전에는 그렇게 여겼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조금은 알겠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로이드가 죽거나 다치는 게 싫었다.

가끔 그가 밝히곤 하던 소원처럼.

그가 유유자적 꿀이나 빨며 늙어가길 바랐다.

그때까지 그의 곁에 남는 기사이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움직여라.

제발.

하비엘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필사적으로 온몸에 힘을 주었다.

부러진 팔과 다리, 전신을 향해 움직이라고.

이제는 여기서 나가야 할 때라고.

다시 싸우러 가야 한다고.

외쳤다.

다그쳤다.

재촉했다.

몰아쳤다.

그리고 잠시 후.

심장이 멎었다.

'안 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의식이 끊어졌다.

전신이 늘어졌다.

차갑고 어두운 마제나 강바닥.

그곳에 가라앉아 눈도 감지 못하고서 강물에 천천히 흘러갔다.

그렇게, 확실한 죽음을 차근차근 맞이했다.

심장이 멎으며 몸속의 혈액 흐름이 멈추었다.

두뇌로 올라가는 경동맥 속 흐름도 멈추었다.

산소 공급이 끊긴 뇌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신체의 모든 세포가 허덕였다.

신경과 근막.

근육과 골수.

모자란 산소를 달라고.

우린 더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노라고.

항거할 수 없을 죽음 앞에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였다.

그것은 구차한 발악이었다.

게걸스러운 구걸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자.

그의 모든 신체가 구차하고도 게걸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구할 길 없는 산소 대신 다른 자원을 마구잡이로 끌어왔다.

마침 적당한 자원이 있었다.

마나였다.

 

...키이잉.

 

죽음의 과정을 밟는 이 와중에도.

그의 심장에는 대량의 마나가 남아 있었다.

소드마스터 단계의 마나하트.

그 주위를 감싼 세 갈래 써클.

강대한 마나를 담고서 순환했던 잔해가 선명한 역사처럼 남아 있었다.

역사는 기억을 되돌리고.

잔해는 순환을 돌이키고.

마나는 신체를 두드렸다.

 

...키이이잉.

 

멈춰 있던 세 갈래 써클이 서서히 움직였다.

남은 마나를 갈구하는 신체의 각 기관.

그 필사적인 요구에 부응했다.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신체 말단으로 마나를 공급했다.

부서진 혈맥을 서서히 채워갔다.

허덕이던 신체를 차근차근 자극했다.

 

키이이이잉!

 

세 갈래 써클의 회전이 빨라졌다.

닥쳐오는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마나하트에 남아 있던 모든 마나를 끌어냈다.

증폭했다.

공급했다.

그동안 마나하트가 비워졌다.

그럼에도 써클은 계속 회전했다.

더욱 뽑아냈다.

바닥까지.

남김없이.

종국에는 마나하트, 그 자체까지.

 

키이이이잉-!

 

한도를 넘도록 맹렬해진 써클의 회전이 마나하트를 녹였다.

하비엘의 마나하트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봄날의 솜사탕.

쏟아 버린 잉크.

휘몰아치는 태풍.

녹아들고.

배어들고.

전신에 휘몰아쳐.

세포마다 새겨졌다.

신체의 모든 세포에 마나하트가 생겼다.

예전의 마나하트가 심장에 자리한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였다면.

이제는 달라졌다.

60조 개의 체세포.

60조 개의 마나하트.

60조에 60조를 곱한 만큼의 공명.

그 모든 과정이 총연장 10만 킬로미터의 신체 혈관을 따라 네트워크를 이루었다.

거침없이.

번지고.

전파되고.

증폭되다가.

마침내 폭발적으로.

 

...!

 

소리도 없었다.

자각할 틈도 없었다.

자신이 언제 눈을 떴는지.

어떻게 강을 벗어났는지.

어느 틈에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

하비엘은 비로소 상황을 자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을 벗어났고, 싸움터로 돌아와 있었다.

어느샌가 자신이 로이드와 국왕을 등 뒤로 두고 있었다.

앞에서는 본드래곤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본드래곤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고스란히 느껴져.'

스쳐 가는 바람.

공기의 밀도 차이.

그 속에 스민 마나의 개울.

미세한 마나의 경계와 경계가 속삭였다.

검이 움직여야 할 경로가 마음에 새겨졌다.

자신의 힘을 쏟아붓고 싶어지는 자리가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검을 들었다.

옆으로 휘둘렀다.

스르륵, 너무나 평범하게.

별다른 특별함도 섞지 않고.

그저 휘둘렀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러고 싶은 곳으로.

모든 마나하트를 개방했다.

전신의 체세포가 그에 반응했다.

체세포 숫자만큼의 마나하트가 타올랐다.

무량대수에 달하는 공명이 일어났다.

공명이 세 갈래 써클로 증폭되었다.

그렇게 세상의 한 자락을 베었다.

 

...!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었다.

눈 깜빡일 틈새에서 검광이 번득였다.

다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각.

 

본드래곤의 전신에 선이 그려졌다.

하나, 둘, 셋, 다섯, 열, 백.

그리고 일천구백육십이.

 

스커거거거거거걱!

 

1,962갈래의 오러가 공간을 갈랐다.

아니, 찬란하게 저며냈다.

본드래곤의 신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 ...!

거대한 뼈다귀가 수천 조각으로 잘렸다.

무력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터터터터터텅!

 

일대가 주사위처럼 매끈하게 잘린 뼛조각의 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하비엘은 이미 그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회수한 검을 평범한 검집에 넣었다.

몸을 돌렸다.

자신이 지켜낸 이들의 안위부터 살폈다.

"국왕 전하, 무사하시옵니까."

"...그, 그래. 보다시피."

국왕 알리시아가 멍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금 자신이 뭘 본 것인지.

무슨 광경을 목격한 건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뭐였지, 방금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금방 이해하기엔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떠올렸다.

"아, 짐보다는 여기."

업고 있던 로이드를 얼른 눕혔다.

한 발짝 물러나 주었다.

하비엘이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로이드 님. 의식이 있으십니까."

"...어."

"괜찮으십니까."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로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배어났다.

전혀 괜찮지 않다.

진짜다.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최소한 몇 군데는 부러진 것 같다.

게다가 뇌진탕도 있는 건지 계속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미치겠다.

아니, 솔직히 당장 기절하지 않고 있는 게 기적이라서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로이드는 웃을 수 있었다.

'이 녀석, 진짜 대단한 놈.'

하비엘의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죽지 않았다.

무사하다.

아니, 완전 멀쩡하다.

게다가 방금 본드래곤을 처리하던 모습이란.

'됐구나. 그랜드 마스터.'

직감할 수 있었다.

공간을 가르던 수천 갈래의 오러.

삽시간에 알찬 깍둑썰기를 당해 버린 본드래곤.

그 모습은 그에게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었으니까.

그걸 읽으며 수없이 감탄했던 모습이었으니까.

덕분에 로이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사실 그동안 하비엘의 성장이 정체된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터였다.

자신이 아스라한 심법의 완성을 도와주어서.

발파까지도 알려준 바람에.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닐까.

그게 독이 되어 하비엘의 성장을 방해하게 된 건 아닐까.

솔직히 내심 계속 마음에 걸렸더랬다.

한데 오늘 모습을 보니 그 염려가 한 큐에 날아갔다.

'위기도 넘기게 됐고 말이지.'

로이드는 한결 편해진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동안 하비엘이 두 손으로 어깨를 짚어주었다.

 

키이이이잉....

 

녀석의 강대한 마나가 어깨를 타고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쪽의 마나써클을 공명시키는 것도.

세심하게 회전시켜주는 것도 느껴졌다.

편안한 느낌의 마나가 전신을 천천히 돌았다.

'느어어.'

고된 노동을 끝낸 저녁,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원샷한 뒤에 사우나를 마치고 최고급 전신 안마 의자에 앉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아저씨 같이 늘어지는 소리를 낼 뻔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응급처치가 끝났다.

"...후아."

로이드는 눈을 반짝 떴다.

한결 가뿐해진 상체를 스르륵 일으켰다.

아프지 않았다.

부러졌거나 금이 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위들.

그곳들이 말끔히 치료된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자신을 치료해준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어이, 너."

"예."

"이런 걸로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물론입니다."

"그래?"

"예. 로이드 님은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요."

"잘 아네. 또 뒤끝 더럽고 쪼잔하고, 뭐, 그런 얘기하려고 했지?"

"잘 아시는군요."

"그래. 잘 알지. 네가 뭘 이룬 건지도."

"...벌써 알아채신 겁니까."

"어떻게 못 알아채냐."

로이드가 핀잔했다.

주위에 수천 조각 주사위처럼 잘려 흩어진 본드래곤 잔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냥 뼈도 아니고 드래곤 뼈를 일검에 저 꼴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눈치를 못 채겠냐."

"...."

"어쨌건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해?"

"예."

"넌 내가 뭘 축하하는지는 알고 감사하는 거냐?"

"그야 물론 제가 그랜드...."

"그랜드 뭐."

"...."

"그랜드인지 뭔지 난 관심 없고. 방금 보니까 전보다 덩어리 매끈하게 잘 썰더라?"

"예?"

"깍둑썰기. 저거."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본드래곤 뼈를 가리켰다.

"크기 일정하고. 표면 매끈하고. 아주 죽인다, 죽여. 이젠 화강암 덩어리만 갖다 주면 보도블록이랑 타일 수천 장쯤 순식간에 싹싹 잘라내서 만들겠다, 그지?"

"...."

"이게 바로 대량생산이라는 거거든. 표준화. 규격화. 거기에 흠잡을 데 없는 품질 보증까지. 그러니까 넌 앞으로 저렇게 썰기만 해. 파는 건 내가 할게. 수익은 9대 1로. 물론 내가 9고 네가 1. 알았지?"

"...."

"너도 이제 부자 되는 거야, 인마."

"...하."

하비엘은 그만 실소를 흘려 버렸다.

이쪽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웃는 로이드.

농담 같지도 않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도련님.

그 눈빛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기뻐하고 있다고.

이쪽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게 되어서.

아니, 그 전에 이쪽이 무사해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로이드 님.'

굳이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입으로는 실없는 소리만 지껄여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로이드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

로이드가 자신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다만 서로가 그것을 느끼는 걸로 되었다.

입으로는 여전히 서로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해도 그랬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도 축하드립니다."

"축하? 뭘?"

"이번에 살아남으셨으니 내년 초에 저한테 마음껏 놀림 받으실 수 있게 되셨지 않습니까."

"하. 겨우 서른 살 되는 거라고 놀리려는 거야? 그게 나한테 씨알이나 먹힐 거 같냐."

"아뇨."

"그럼?

"서른 살 모태...."

"하지 마."

"솔로...."

"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로이드는 실없이 웃었다.

하비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비로소 조금은 실감이 났다.

'살았구나.'

자신을 부축하는 든든한 하비엘.

주위에 수없이 널브러져 있는 본드래곤의 뼛조각.

그걸 보니 오늘의 거짓말 같았던 난리가 진짜였음이 조금씩 체감되었다.

그 엄청난 난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제야 긴장감이 조금은 풀렸다.

한데 그때였다.

로이드의 눈앞에 뜻밖의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딩동.

 

[보유 중인 언데드 지배 스킬이 지배 가능한 새로운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 : 본드래곤]

[상태 : 빈사]

[원래는 강대한 존재인 본드래곤이 뜻밖의 빈사상태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드래곤의 보유 마나가 거의 고갈된 상태입니다. 이에 당신의 초보적인 언데드 지배 스킬로도 지배 가능한 조건이 일시적으로 충족되었습니다. 또한, 한번 지배에 성공한 대상은 당신의 허락이 없는 한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대상으로 포착된 본드래곤을 지배하시겠습니까?]

 

[YES / NO]

 

'....'

웬 횡재냐, 이건.

메시지를 다 읽은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26화. 드래곤의 속사정 (1)

 

 

'헐, 개이득.'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떠오른 난데없는 메시지.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그걸 재차 정독했다.

'본드래곤이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고? 딸피? 그래서 마나가 거의 고갈된 상태로 허덕이고 있고, 덕분에 내 언데드 지배 스킬 사용 조건이 일시적으로 충족된 거라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는 재빨리 스킬창을 열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의 상세 내용을 눈앞에 띄웠다.

 

딩동.

 

[스킬명 : 언데드 지배]

[단계 : 초급 Lv. 1]

[일정 규모의 언데드 병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지배를 받아들인 언데드 병사들은 죽음마저 넘어선 충성심과 대가 없는 성실함을 제공할 것입니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종류 : 좀비, 스켈레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50]

 

[현재 보유 중인 RP : 2,632]

 

'흠, 분명 스킬 내용에는 지배 가능한 언데드의 종류가 좀비와 스켈레톤만 있다고 나와 있어. 그런데 지금은 본드래곤을 지배하는 게 가능하다고? 잠깐, 그렇다는 건....'

아마도 지금 본드래곤이 빈사 상태라서.

말 그대로 딸피 상태로 허덕이고 있어서.

일시적으로나마 좀비나 스켈레톤 수준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언데드 지배 스킬의 지배 조건이 충족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망설이거나 미적거릴 틈이 없다.

'이유야 어쨌건 된다는 거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지.'

눈앞에 떨어져 있는 동전은 일단 줍고 봐야 한다.

마트에 있는 무료 시식 코너도 그냥 지나치면 손해다.

쿠폰은 닥치는 대로 모을수록 좋다.

조금 구차하고 구질구질하지만.

그게 김수호로 지냈던 대한민국에서 그가 살아남은 비결이었다.

로이드는 곧바로 움직였다.

언데드 지배 스킬을 발동시켰다.

수천 조각으로 잘려 있는 본드래곤의 잔해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딩동.

 

[언데드 지배 스킬 시도에 실패했습니다.]

[에러 코드 : 00A1, 정원 초과]

[새로운 언데드 개체를 지배하여 받아들일 여유 공간이 없습니다.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개체 일부를 해고하거나,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정원을 늘려 주세요.]

 

'헐.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구나.

로이드는 얼른 반성했다.

더욱 재빠르게 언데드 지배 스킬창을 열었다.

'눈앞에 놓인 떡고물이 너무 커서 내가 잠깐 냉철함을 잊었어. 이러면 안 돼. 반성하자.'

RP를 투자했다.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스킬 레벨 업!]

 

[스킬명 : 언데드 지배]

[단계 : 초급 Lv. 2]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종류 : 좀비, 스켈레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10]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0]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70]

 

[현재 보유 중인 RP : 2,582]

 

'좋아.'

정원 확보 완료.

로이드의 시선이 쉼 없이 움직였다.

확신과 탐욕을 담고서 본드래곤을 향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을 발동했다.

이번엔 제대로 반응이 왔다.

 

딩동.

 

[언데드 지배 스킬이 시도됩니다.]

[지목된 개체, 본드래곤의 잔해가 스킬에 반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3조각의 잔해 중에서 1,962조각이 스킬에 포섭되었습니다.]

[1,963조각 중에서 1개의 조각이 스킬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음?'

로이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비엘에게 잘린 1,900조각이 넘는 본드래곤의 뼈 무더기.

그 대부분이 스킬에 성공적으로 포섭되었는데.

딱 한 조각만 반항(?)을 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간 스킬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본드래곤의 마나가 약간이나마 자연적으로 회복될 수도 있다.

좀비나 스켈레톤보다 수준이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스킬 성공 조건이 사라질 거야.'

로이드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무려 본드래곤을 부하로 부려먹을 찬스인데.

그걸 날려 버린다면?

말 그대로, 라면 다 끓이고 냉장고에서 김치도 꺼내고 말아서 먹을 식은밥까지 세팅했는데 막판에 냄비 떨어뜨려서 다 쏟는 격이다.

'그건 안 돼.'

로이드의 눈길이 다급해졌다.

그때 마침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에 반발 중인 한 조각의 상세 내역을 불러오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상세 내역을 불러옵니다.]

 

딩동.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로이드의 눈동자가 전월 카드 내역서를 받아보는 직장인의 시선처럼 재빠르게 샤샤샥 움직였다.

 

[현재 언데드 지배 스킬에 반발 중인 본드래곤의 뼈 한 조각의 부위는 <두정골>로 파악되었습니다.]

[스캔 결과 본드래곤의 <두정골>에 기생하고 있는 영혼이 감지되었습니다.]

[기생 영혼이 언데드 지배 스킬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기생 영혼에 대한 정보를 보시려면 '이곳'을 선택해주십시오.]

 

지체 없이 선택했다.

본드래곤의 두정골에 기생해서 언데드 지배 스킬에 반발하고 있다는 영혼의 신상(?)이 제대로 까발려졌다.

 

딩동.

 

[기생 중인 영혼]

[본명 : 타르가]

[성별 : 남성]

[나이 : 47세]

[직업 : 흑마법사]

[신장 : 173cm]

[체중 : 61kg]

[그 외 특이사항 : 저혈압, 신경성 소화 장애, M자 탈모, 짠 음식 선호, 소스는 부어서 먹는 편, 미혼, 연애 경험 없음, 야심가, 흑마법사 단체의 리더, 각종 국가 전복 프로젝트 추진 중 국왕 알리시아의 손에 의해 사망.]

 

"...."

아하.

그 흑마법사 수장이 요기 있었네.

눈앞에 주르륵 뜨는 영혼의 신상을 보며 로이드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사건, 트로이의 목마 같은 거였구만.'

국왕에게 들었던 흑마법사 잔당 토벌전이 떠올랐다.

흑마법사들이 대응할 틈도 없이 급습했다고 했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토벌했다고 했다.

그 토벌전의 마지막에 국왕이 흑마법사 수장의 목을 베었다고도 했다.

한데 그때 국왕이 하나 놓친 게 있었던 것이리라.

'이 흑마법사 놈, 죽는 순간에 자신의 영혼을 드래곤 뼈에 옮겨 담은 거야.'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아카이아 연합군이 야습을 감행할 정예 병사들을 커다란 목마 속에 숨겨 트로이에 넘겼던 것처럼.

죽음의 위기에 몰린 흑마법사 수장이 자신의 영혼을 드래곤 뼈에 숨겼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놈이 나한테 뒤끝 쩔게 집착했던 거였고.'

아까 본드래곤이 설치던 때도 떠올랐다.

유독 이상하리만치 이쪽을 집요하게 따라오며 공격했던 본드래곤이었다.

그땐 왜 저러나 싶기도 했는데.

놈의 정체를 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마란에서 나한테 태클이 걸린 거라고 여긴 거겠지. 쯧. 하여간 이놈들은 이래서 안 돼요. 지들이 잘못한 걸 꼭 남 탓만 한다니깐.'

로이드는 한결 여유로워진 눈길을 움직였다.

뒤이어 새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어내렸다.

 

딩동.

 

[두정골에 기생 중인 영혼에 대한 파악이 완료되었습니다.]

[파악 완료된 기생 영혼을 당신의 의사에 따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제거하시겠습니까?]

[YES / NO]

 

'역시 당연히 예스지.'

이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로이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본드래곤의 두정골 조각에서 희미한 외침이 다급하게 들려왔다.

- 자, 잠깐만!

'음?'

딱 들어봐도 뭔가 꼬장꼬장하고 얍삽한 느낌의 아저씨 목소리.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의 수장 타르가인 듯했다.

놈의 더욱 다급해진 외침이 계속 들려왔다.

- 잠깐만! 이러지 마! 내 이야기를 좀 들어봐!

'저기요? 뭐라고?'

- 그래, 기회를 줘!

'기회를?'

피식,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다급하게 애원하는 타르가를 한껏 비웃어주었다.

'기회를 왜 나한테서 찾아?'

- ...뭐?

'진로 상담은 염라대왕한테 가서 받으세요?'

- 자, 잠깐만!

 

달칵.

 

서슴없이 'YES'를 선택했다.

뒤이어 변기 물 내려가듯 시원한 콰아아! 굉음과 함께 타르가의 비명이 멀어졌다.

상큼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본드래곤의 <두정골>에 기생하고 있던 <흑마법사 타르가>의 영혼이 소멸되었습니다.]

[본드래곤의 부서진 뼛조각 1,963개 모두가 당신의 언데드 지배 스킬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이 성공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본드래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래, 이거지!'

성공이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본드래곤을 마음대로 부려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아직 남은 과정이 있었다.

복구였다.

다행히 그 과정에선 로이드가 크게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망가진 본드래곤이 '불사'의 속성에 따라 신체 자가 복원을 시도합니다.]

[내부의 마나가 서서히 회복됩니다.]

[잘린 뼛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쿠드득, 쿠득!

 

하비엘의 검에 형편없이 잘려 흩어진 본드래곤의 잔해.

그 뼛조각들이 바닥에서 들썩거렸다.

마치 아스라한 심법처럼.

주위의 마나를 조금씩 흡수했다.

그렇게 스스로 빈사상태에서 벗어났다.

잘린 부위를 스스로 끼워 맞추었다.

조금씩 제 형상을 되찾아갔다.

물론 그 사이에 로이드가 열심히 하비엘을 말려야 했다.

본드래곤의 잔해가 들썩이는 걸 본 하비엘.

녀석이 검을 쥐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스톱! 저거 이제 내 거야."

"...저게, 로이드 님의 소유라는 말입니까?"

"어."

검을 뽑다 말고 본드래곤과 이쪽을 번갈아 쳐다보는 하비엘의 눈빛.

그 시선에 호기심과 곤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로이드는 재빨리 혓바닥을 촵촵 적셨다.

"너한텐 안 들렸을지 몰라도, 방금 저 본드래곤이 내 마음속에 말을 걸어왔거든."

"뭐라고 걸었습니까, 대체?"

"골병대 막내, 그러니까 신입이 되고 싶대."

"...."

"너한테 빈사상태가 되도록 썰렸잖아. 그래서 항복한 거지."

"정말입니까, 그게?"

"그럼. 잘 봐."

로이드가 한 손을 들었다.

엄지로 따봉을 추켜세우며 본드래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재생 중이던 본드래곤의 뼛조각 일부가 반응했다.

뼛조각으로 로이드의 엄지 모양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다.

"봤지?"

"...."

"더 자세한 자초지종은 좀 있다 설명해줄게. 지금은 일단 이 녀석 복구부터. 알았지?"

"...알겠습니다."

하비엘은 할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 날뛰던 본드래곤인데.

아무리 자신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났다지만.

그걸 포섭해서 골병대에 편입시켜 버렸다니.

듣고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보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로이드와 본드래곤을 번갈아 쳐다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전신이 복구되며 잘린 뼈가 붙고, 분리된 뼈마디가 결합되는 본드래곤.

그 본드래곤이 로이드를 향해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결이 뭘까.

알 수 없었다.

로이드를 바라보는 하비엘의 눈빛에 호기심과 경외, 의문이 함께 떠올랐다.

그동안 로이드는 본드래곤의 복구 과정에 집중했다.

'좋아, 복구가 잘 되고 있어.'

행여나 조립이 잘못되진 않았을까.

혹은 빠진 뼛조각이 있지 않을까.

마트에서 큰 맘 먹고 고른 삼겹살을 비장하게 살피듯.

고민 끝에 선택한 감자 덩이를 진지한 눈길로 분석하듯.

행여나 저쪽 빵이 살짝 더 크지 않나 의심하는 심정으로.

로이드의 눈동자가 더없이 날카롭게 빛났다.

 

[본드래곤의 신체가 복구 완료되었습니다.]

[재탄생한 본드래곤의 신체에 새로운 인격이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인격은 백지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제부터 1분간 당신이 건네는 말은 본드래곤의 새로운 인격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그걸 본 순간 로이드는 깨달았다.

이제부터가 본드래곤을 수하로 맞아들이는 과정의 마무리이자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그걸 직감한 로이드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서슴없는 멘트를 대뇌 전두엽에 장전했다.

발사했다.

'나는 로이드 프론테라. 너의 절대적인 주인이며,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다. 또한, 너는 내가 소유한 골병대의 자랑스러운 일원이다. 너는 내 지시에 따라 파라면 파고 까라면 까는 굴착기이고, 크레인이며, 모든 면에서 완벽한 건설 머신이야. 그러니까 노동은 언제나 즐거워. 잔업은 정말로 기뻐. 안전제일. 로이드 님 만만세. 알아들었으면 손가락 하트 발사.'

본드래곤을 쳐다보며 강력한 사념(?)을 보냈다.

그러자 곧 본드래곤이 반응했다.

 

쿠구구구...!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이내 이쪽을 향해 거대한 앞발을 들었다.

지극히 공손하게.

손가락 하트를 발사했다.

동시에 상큼한 메시지가 로이드의 눈앞을 장식했다.

 

딩동.

 

[본드래곤에 대한 언데드 지배 시도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본드래곤은 당신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 당신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수행할 것입니다.]

[언데드 지배 스킬의 지배 명단이 갱신되었습니다.]

[지배 가능한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10]

[현재 지배 중인 언데드 병사의 숫자 : 201 (↑1)]

 

'나이스. 초필살 나이스!'

이제 됐다.

정식으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러니까 저 거대하고 엄청난 본드래곤이 정말로 부하가 됐다.

확인을 마친 로이드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한데 그때였다.

별안간, 뜻밖의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딩동.

 

[마나하트 스킬 옵션 ④ : 반인반룡이 발동됩니다.]

[인근에 있는 드래곤의 영혼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

이건 또 무슨 일일까.

'드래곤의 영혼이 나한테 관심을?'

로이드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다음 순간.

이쪽을 향해 손가락 하트를 발사하고 있는 본드래곤에게서, 오직 로이드에게만 들리는 영혼의 목소리가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 내 이름은... 고룡 엔티쿠스.... 이제는 너의 소유가 된... 이 뼈대의 원래 주인.... 내 부탁을 들어주면... 맹세코 용왕께 네 선행을 알리겠으니... 제발... 날 좀... 도와줘....

227화. 드래곤의 속사정 (2)

 

- 제발... 날 좀... 도와줘....

 

'어?'

로이드는 눈을 끔벅거렸다.

방금 뭔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몇백 미터쯤 밖에서 외치는 듯 아련했다.

그래서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방금 메시지가 떴지, 아마? 옵션이 발동됐다고 했어.'

마나하트 스킬에 새로 장착된 반인반룡 옵션.

본드래곤의 머리뼈 속에서 급속충전을 쓴 후에 얻은 옵션이었다.

옵션의 기능은 심플했다.

드래곤이 이쪽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뭐, 나쁜 옵션은 아니야.'

대부분의 드래곤은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바퀴벌레 발견한 사람이 슬리퍼나 신문지 뭉치부터 집어들고 보듯, 인간만 보면 일단 죽일 생각부터 하는 게 다반사다.

한데 반인반룡 옵션이 있으면?

드래곤에게 묻지 마 척살은 당할 일이 없을 듯했다.

'일단은' 호기심을 가져줄 테니까.

그런데 지금, 그 옵션이 발동되고 있다는 메시지가 떴다.

로이드는 청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조금 전의 목소리가 서서히 또렷하게 들렸다.

 

- 거기... 내 목소리가 들리나...? 나는 고룡 엔티쿠스.... 이 목소리를 듣고 있을 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진짜네.'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다.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 나는 고룡 엔티쿠스....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위대한 일족의 일원.... 내 뼈를 손에 넣었을 이에게 도움을 청한다....

 

확실하다.

로이드는 목소리의 정체를 짐작했다.

'설마 이 본드래곤이 살아 있을 적의 장본인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래서 로이드는 고민했다.

'아 씁. 저런 목소리는 그냥 쌩까고 싶은데.'

무시할까.

못 들은 척 넘겨 버릴까.

그런 유혹이 사골육수처럼 퐁퐁 솟구쳤다.

괜히 들어줘 봤자?

도와달라느니.

자비를 바란다느니.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길 것 같았다.

'뭔진 몰라도 내 일도 아닌데 엮이기 싫어. 그렇잖아도 여기도 수습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로이드의 시선이 주위를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극히 아름답고 웅장했던 이곳, 테르미나 대정원.

지금은 명절날 초딩 조카 30명이 신나게 휩쓸고 간 후의 방구석을 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이거 다시 복구하는 공사 따내면 제법 짭짤할 것 같단 말이지.'

그렇게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프론테라 영지의 창고에 그득하게 쌓이게 될 터다. 그리고 자신의 노후자금으로 알차게 쓰이겠지.

생각만 해도 보람이 쑴펑쑴펑 돋아났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저 목소리를 무시하자고 마음먹었다.

발동되어 있는 반인반룡 옵션을 강제로 끄려고 했다.

한데 그때였다.

 

- 지금 내 목소리를 듣고 있을 이여.... 진심으로 그쪽을 위해서 하는 요청이다.... 지금 내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내 고귀한 뼈대는 3년 안에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이며....

 

"예, 제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까?"

로이드는 빛의 속도로 반응했다.

재빠르게 두 눈 반짝이며 목소리에 응답했다.

곁에 있던 국왕과 하비엘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이쪽을 향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 눈빛들에 개의치 않았다.

'당연하지. 3년 안에 뼈대가 가루가 된다고? 본드래곤이 사라질 거라고?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씀!'

이득도 없는 괜한 요청에 호응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기껏 얻은 본드래곤의 유통기한이 3년이 된다면?

그건 막아야 할 일이다.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어야 할 터이다.

그렇게 로이드는 드래곤의 목소리를 향해 재빠르게 화답했다.

돌아오는 드래곤의 목소리에 기쁨이 배었다.

 

- 허, 친절한... 인간인가. 혹시 그쪽은 내 뼈를 악용한 흑마법사의 무리가 아닌지...?

 

"아닙니다."

 

- 그런가...?

 

"옙. 아무렴요. 오히려 제가 그놈들을 물리쳤습니다. 흑마법사 타르가, 혹시 알고 계십니까?"

 

- 알고... 있다.... 그자가 내 시신을 발굴했지.... 악용하기도 했고....

 

드래곤의 목소리에 난폭한 감정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걸 감지하자마자 로이드가 냉큼 말했다.

"그놈, 제가 없앴습니다."

 

- 그쪽이?

 

"예. 방금 없앴습니다. 혹시 두정골에 그놈이 기생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 ...그걸 아는 걸 보니... 그놈을 없앴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 보군....

 

"예, 바로 그겁니다."

바야흐로 지금은 자기 PR의 시대.

로이드는 드래곤의 목소리를 향해 자신의 치적을 열심히 어필했다.

덕분인지 드래곤의 목소리가 조금 따뜻해졌다.

곧 변화가 눈앞에 드러났다.

 

파아앗...!

 

아까부터 이쪽을 향해 내밀고 있던 본드래곤의 손가락 하트.

그 손끝에서 서서히 빛이 떠올랐다.

떠오른 빛이 허공에 영상을 만들었다.

'설마 영상 편지?'

로이드는 직감했다.

그 직감은 맞았다.

영상 속에서 녹색 비늘의 드래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드래곤의 것과 완벽히 같은 모양의 뿔.

비늘의 상태나 온몸의 무수한 흉터로 보아 제법 늙은 외양.

아무래도 저 본드래곤의 생전의 모습인 듯했다.

"무슨...."

갑자기 떠오르는 드래곤의 영상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국왕 알리시아.

그런 그녀의 감탄을 뒤로하고 로이드는 영상에 집중했다.

영상 속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이것은 나, 고룡 엔티쿠스가 남긴 기록이며, 바다에 던진 유리병 속 조난 편지다. 또한, 날 도울 자에게 건넬 최고의 선물이며 호의다.

영상 속 드래곤, 엔티쿠스가 호박색 눈동자를 굴렸다.

정말로 살아 있는 드래곤처럼 박력 있게 이쪽을 굽어보았다.

- 우선, 내 목소리에 응답한 이의 이름을 알고 싶구나.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행여나 남에게 새치기를 당할까.

로이드는 냉큼 대답했다.

고룡 엔티쿠스가 흡족한 듯 웃었다.

- 좋다.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여. 내 목소리에 응답한 것에 우선 감사한다. 그쪽은 혹시 날 도울 준비가 되었는가?

"으음, 일단 조건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 조건?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느냐는 듯 반문했다.

"무슨 일인지 조건도 안 들어보고서 막무가내로 돕고 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로이드는 생각했다.

'진짜로 그래. 세상에서 제일 난감한 물음이 저런 거라니까. 너, 날 도와줄 수 있어? 라고 도움 요청하면서 뭔지 얘기도 미리 안 해주는 거지. 일단 도울 수 있냐고. 그것부터 대답하라고. 그게 뭐냐, 진짜.'

적어도 도움을 요청하려면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부터 밝히는 것.

그게 당연한 순서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화법에 걸려들어 손해 보고 책임까지 떠맡는 건 끔찍하게 싫었으니까.

'설령 본드래곤의 유통기한이 3년으로 쪼그라든다 해도 그래.'

본드래곤은 진심으로 탐나는 골병대원이었다.

저걸 부려먹는다 생각하니 없던 두 번째 심장까지 생겨나서 서라운드로 콩닥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저걸 유지하기 위해 무리를 해야 한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면?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진짜로 당연하지. 능력도 안 되는데 과도하게 비싼 초고급 외제차 유지하려고 갚지도 못할 정도로 빚지면서 사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니까 저 드래곤이 뭘 원하는지.

어떤 도움을 요청하려는 건지.

그것부터 확실하게 들어야 한다.

로이드는 그런 의사를 확실하게 담은 야물딱진 눈빛으로 고룡 엔티쿠스를 올려다보았다.

영상 속 고룡 엔티쿠스도 그런 눈빛을 읽은 듯했다.

- 허.

드래곤의 입가에 피어나는 헛웃음.

- 그래. 그 말이 맞군. 따지고 보면 난 도움을 구걸하는 입장이니. 좋다.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 내 용건부터 상세히 밝히겠다.

"예, 들어보겠습니다."

- 요점부터 말하자면 내 영혼은 지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지옥이요?"

- 그렇다.

"그럼 지금 이 영상 속 모습은 뭡니까?"

- 이 영상은 내 실체나 영혼이 아니다. 그저 지옥에 빠지기 직전에 다급히 남긴 편지일 뿐이지. 내 뼈를 유리병 삼아,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진 마법의 편지 말이다.

"...."

흠, 그러니까.

저 영상, 따지고 보면 그냥 영상 편지인 건데 적당한 수준의 마법적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어서 다른 지적 존재와 상호작용이나 대화가 되는, 뭐, 그런 건가 보다.

로이드는 그렇게 이해했다.

"뭐, 어쨌건. 지옥에 빠져 있는데 어떤 도움을 원하는 겁니까? 설마 지옥에서 건져달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죠?"

- 맞다.

"...예?"

- 그쪽의 추측이 맞다. 아까 그쪽에게 처단 당한 흑마법사, 그자들이 내 시신을 온갖 사악한 목적을 위해 악용했기 때문이다. 안식에 들어 있던 내 영혼이 저주받았고, 지옥으로 끌려가게 됐지. 그러니 부탁이다. 제발, 지옥에 가서 그곳에 빠진 내 영혼을 구원해다오.

"네, 안녕히 계세요."

엔티쿠스의 말을 듣자마자 로이드는 꾸벅 인사했다.

그대로 본드래곤에게 지시해서 영상을 끄라고 말하려 했다.

만약, 그 순간 엔티쿠스가 다급히 다음 말을 외치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었다.

- 잠깐! 설마 내 요청을 거절하려는 것인가!

"네, 그런데요?"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엔티쿠스를 돌아보았다.

"제가 미쳤다고 지옥에 갑니까?"

- 그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저, 이래 봬도 나름 앞날이 창창한 몸입니다. 아직 지옥에는 발가락 하나 걸칠 일도 없는데, 제가 왜 친분도 면식도 없는 그쪽을 구한답시고 스스로 지옥행 익스프레스를 타느냐는 겁니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지옥에 가서 영혼을 구해달라니.

듣는 순간 진심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아니, 제가 무슨 전설이나 신화 속 영웅도 아니고, 신의 아들도 아니고. 무슨 깡으로 저처럼 평범한 사람을 지옥까지 보내려는 겁니까? 혹시 그쪽 분, 물귀신이세요? 혼자 지옥에서 구르는 거 억울해서 저까지 엮으려는 건 아닙니까?"

- 그건 당연히 아니다!

"죄송한데 그럼 그냥 팔자려니 하고 계속 거기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 진짜 지옥 같은 데는 가기 싫거든요.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 지옥으로 가는 헬게이트는 내가 당장 열어줄 수 있다.

"아니, 제발, 그런 거 필요 없다니까요."

로이드는 기겁했다.

저쪽을 도와주지 않으면 본드래곤이 3년 안에 가루가 될 거라고 해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응답을 했던 건데.

설마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도움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이건 완전 택배 왔다는 외침에 반갑게 문 열어줬다가 낚여서 난데없는 종교인의 포교 방문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옥행이라니.'

택도 없는 소리다.

본드래곤 열 마리를 준다고 해도 거절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본드래곤 그냥 반품해도 돼. 좀 많이 아쉽긴 하지만, 본드래곤 없다고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

적어도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본드래곤을 잃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인생은 안전빵이 최고니까.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그때였다.

고룡의 영상이 한결 다급해진 멘트를 발사했다.

- 잠깐! 내 영혼을 구원해준다면! 그쪽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어마어마한 보답을 줄 것이다!

"네?

상상도 할 수 없을 보답?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귀가 쫑긋거렸다.

'아, 씨. 솔깃하면 안 되는데.'

로이드는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일단 들어나 보자.

잠자코 엔티쿠스를 올려다보았다.

엔티쿠스가 초조한 듯 빠르게 말했다.

- 아까도 내가 말했지 않는가. 이 영상은 날 도울 자에게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자 호의라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보답이 뭡니까?"

- 용왕 베르키스의 공식적인 후원.

"예?"

베르키스?

용왕의 공식적인 후원?

로이드가 생각을 더듬는 사이, 엔티쿠스의 말이 이어졌다.

- 만약 그쪽이 날 도와준다면, 그래서 내 영혼을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하여 안식의 길로 인도하여 준다면, 나 엔티쿠스는 반드시 그쪽의 선행을 용왕에게 알릴 것이다. 그쪽이 보인 선의로 가득한 용기를 상세히 전할 것이다.

"그래서, 용왕 베르키스라는 분이 절 후원하도록 소개팅, 아니, 소개를 시켜주겠다는 겁니까?"

- 그렇다.

"그러면 뭐가 좋아집니까?"

로이드는 물었다.

이제부터가 핵심이다.

후원, 받으면 좋다.

그런데 그게 막연하면 곤란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받는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당연하지. 하다못해 휴대폰 하나 개통할 때도 요금제 혜택부터 따지잖아? 동네 마트 멤버십 카드 만들 때도 포인트 적립률이 몇 프로인지부터 따지는 세상이라고. 그런데 이건 무려 용왕의 후원이니까. 혜택 따져야지. 어떤 이득을 보는지 구체적으로 제대로 짚어봐야지.'

정말로 당연한 소리였다.

그는 깐깐한 고객님의 눈빛으로 엔티쿠스를 쳐다보았다.

엔티쿠스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

- 뭐가 좋아지냐고?

"예."

- 흐음, 일단 평생 재물이 부족해지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용왕이 기거하는 마룡굴에는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합친 만큼의 금은보화가 쌓여 있으니까.

"오오. 좋네요. 그리고요?"

- 목숨이 두 개가 될 것이다.

"어, 설마 그거 부활 혜택?"

- 맞다. 용왕의 마법은 지극히 지고하여, 죽은 자도 한 번은 살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요?"

- 일단 기본적인 혜택은 거기까지다.

"더 없는 겁니까?"

- 모르지. 추가로 주어질 혜택은 용왕이 그쪽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에 달렸을 테니까. 하지만 대신 단 하나, 내가 약속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 내 부탁을 받아들여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곳에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확실한 수단.

"확실한 탈출 수단요?"

- 그래. 딱 한 번. 그쪽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느 장소에서건 이쪽 세계로 이어지는 탈출용 헬게이트를 열 수 있는 1회용 마법을 네 손에 새겨주겠다.

엔티쿠스의 용왕 후원 멤버십(?) 혜택과 지옥 탈출법 안내는 거기까지였다.

로이드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흐음.'

고민이 됐다.

'용왕 후원 혜택, 생각보다 좀 쎈데?'

듣고 보니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그냥 강력한 빽 하나를 얻는 정도가 아니었다.

평생 마르지 않을 재물 혜택.

한 번 죽어도 살려주는 부활 혜택.

거기에 잘하면 프리미엄 플러스 혜택까지.

게다가 부려먹기 딱 좋은 본드래곤의 유통기한도 무기한으로 늘릴 수 있게 된다니.

'아 씨, 큰일이다. 땡기잖아, 이거.'

재물은 그렇다 쳐도.

본드래곤도 그렇다 쳐도.

부활 혜택이 너무 탐났다.

꿀단지만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만도 빡쎄기 그지없는 이 험난한 세상.

그 세상살이에 1회의 부활 찬스가 주어진다는 거.

그만큼 더 안정적으로 꿀 빠는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근데 그걸 따내는 조건이 지옥행이야. 어오.'

좀 찜찜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으니까.

언제든 지옥에서 탈출할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니까.

저 고룡이 제시한 떡고물이 더욱 탐나게 보였다.

'으음, 이 정도 조건이면 불가능하진 않을지도.'

로이드의 눈길이 슬쩍 옆을 향했다.

자신과 드래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하비엘.

녀석이 이쪽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래서 로이드는 말없이 씨익 웃었다.

'그래, 이러려고 네가 그랜드 마스터가 된 셈 치자.'

하비엘을 보니 조금은 희망이 엿보였다.

아무리 지옥행이라도.

험난한 여정이라도.

그랜드 마스터가 있다면 조금은 덜 빡쎄지지 않을까.

어지간한 역경은 좀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로이드는 야물딱진 물귀신적 마인드로 멘탈을 무장했다.

비로소 내심 결정했다.

고개를 들었다.

고룡 엔티쿠스를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거국적으로, 통 큰 마음으로, 엔티쿠스 님을 도와드리도록 하죠. 대신에-"

그의 손이 움직였다.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는 하비엘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말했다.

"저 녀석도 꼭! 함께 데려가게 해주세요."

228화. 쩐과 함께 : 지옥편 (1)

 

 

"저 녀석도 함께 데려가게 해주세요."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로이드의 손끝이 하비엘을 가리켰다.

하비엘의 귓바퀴가 살짝 움찔거렸다.

은발의 기사는 생각했다.

지옥엘?

함께?

가자고?

'혹시나 만약에 로이드 님이 그런 결정을 한다면 기꺼이 따르려고는 했지만.'

아까 돌연 모습을 드러냈던 드래곤의 영상.

영상과 협상을 벌이던 로이드.

그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더랬다.

만일 로이드가 저 드래곤의 영혼을 도와주기로 결심한다면.

그래서 기꺼이 지옥에 가는 결정을 내린다면.

자신도 로이드와 함께하리라고.

지옥의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리라고.

그렇게 내심 다짐하고 각오했더랬다.

한데 지금 보니?

'괘씸해.'

갑작스러운 회의감이 퐁퐁 샘솟았다.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원래 쪼잔하고 야비하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럴 줄이야.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인가.

'후우.'

로이드를 향하는 하비엘의 눈빛이 가자미눈이 되었다.

그러나 로이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하비엘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그 뻔뻔한 웃음이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안 갈 거야? 나만 보낼 거야? 와, 우리 하비엘. 그렇게 안 봤는데.'라고 말이다.

"...."

말을 말자.

하비엘은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반쯤 체념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입가에 함박웃음꽃이 피었다.

"네, 마침 저 녀석도 동의한 듯합니다. 그럼 저와 저 녀석, 둘이 당신을 도우러 지옥으로 가는 걸로. 대신에-"

로이드의 뻔뻔한 말이 이어졌다.

"그쪽 분도 우리의 도움에 따른 보답을 좀 더 확실히 보증하시죠."

- 보증?

"예, 보증."

고룡 엔티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푼돈을 빌려주거나 받을 때에도 보증이 오가는 세상입니다. 하물며 위험을 무릅쓰고 지옥까지 가서 도움을 주는 일인데, 그 보답에 대한 보증이 있어야 믿고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나는 약속을 했다만.

"입으로만 하는 약속은 곤란하지요."

- 계약서라도 쓰자는 말인가, 그럼?

"아뇨, 이 경우는 계약서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구요."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다.

본인도 아닌 영상.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이 남긴 영상 편지와 계약서를 써봤자 그건 효력이 없을 터였다.

실제로 계약서 내용을 어겨봤자 저 드래곤의 영혼은 손해를 볼 일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확실하게, 저 영혼도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뭔가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보증이 된다.

약속을 믿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영혼의 맹세를 거시죠."

- ...뭐?

"기왕 약속하시는 거, 제대로 영혼의 맹세로 보증을 서달라는 뜻입니다."

- 그게 무슨....

고룡 엔티쿠스의 영상이 눈에 띄게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걸 보는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역시.'

영혼의 맹세.

그걸 언급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맹세는 그냥 입으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니까.'

인간들은 모르는.

오직 드래곤들 사이에서만 오가는.

가장 중요한 일에만 평생 딱 한 번, 목숨을 걸고 약속하는 맹세였다.

'그래서 그 맹세를 어기면 저당 잡힌 영혼이 소멸되는 거지. 영원히. 돌이킬 수도 없이.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거야.'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영혼을 건 캐삭빵이랄까.

그런 요구를 들은 까닭이었을 터다.

- 인간, 네가 어떻게 영혼의 맹세를 아는 거지?

되묻는 고룡 엔티쿠스의 눈빛이 심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더욱 뻔뻔하게 철판을 깔았다.

알기야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었으니까 아는 거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 그건....

"맹세, 하실 겁니까, 무를 겁니까? 그것만 대답해주시죠."

- ....

"이 정도의 확실한 보증 없이는 저 못 움직입니다."

로이드가 딱 자르듯 말했다.

그것 또한 솔직한 진심이었다.

본드래곤을 영원히 부리면서 얻을 이득.

평생 마르지 않을 재물과 또 하나의 목숨.

그러한 엄청난 혜택을 자랑하는 용왕 후원 멤버십이 걸려 있다고 해도 그랬다.

무려 지옥에 가는 일이었다.

아무리 안전장치가 있다고 해도.

탈출용 헬게이트가 주어진다 해도.

아예 위험이 없는 건 아닐 터였다.

그러니 위험에 비례하는 확실한 보증이 없다면 절대로 움직이지 말자고, 로이드는 못 박듯 다짐하고 있었다.

고룡 엔티쿠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후우. 정말로 그 맹세를 원하는 건가?

"당연하지요."

- 원 참. 생전에도 하지 않았던 영혼의 맹세를 죽은 뒤에, 그것도 인간과 나누게 될 줄이야....

"싫으면 마세요, 그럼."

- 자, 잠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 당연히 있지. 난 그 맹세, 안 한다고는 안 했는데.

"지금 혹시 제가 너무 급하게 군다고 책망하시는 거?"

- 그것도 당연히 아니지.

"그럼요?"

빤히 쳐다보는 눈빛.

할 거면 하고 아니면 말고.

어차피 이쪽은 잃을 게 없다는 당당 뻔뻔한 태도.

결국, 고룡 엔티쿠스가 백기를 들었다.

- 하겠다.

"정말이십니까?"

- 이미 하겠다고 말했으니 맹세는 실행되었다.

"좋습니다."

로이드는 만족했다.

역시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으며 봤던 그대로다.

저 영혼의 맹세는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바로 실행되는 점이 특징이었다.

요상한 주문을 외운다든가.

빛과 마법진이 번쩍인다든가.

누구나 생각할 법한 그런 거창한 과정이 없었다.

맹세는 말 그대로 맹세.

약속은 문자 그대로 약속.

한다고 하는 순간 하는 거니까.

그게 다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하겠다, 라고 뱉은 말 한마디.

그 약속을 어기는 순간 영혼이 삭제되는 까닭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고룡 엔티쿠스가 내뱉은 저 맹세를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한 엔티쿠스의 눈빛에 온기가 떠올랐다.

- 고맙다. 날 도와주어서.

"별말씀을. 약속이나 잘 지키시죠."

- 당연히. 네 도움으로 내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나는 반드시 맹세를 지켜 용왕 베르키스를 너의 후원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자, 지옥으로의 길을 열어주마.

 

파츠츠츠크!

 

엔티쿠스의 말이 끝난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마치 포털처럼.

지름 2미터의 파직거리는 원이 허공에 생겨났다.

그 원 안쪽으로 화산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살벌한 광경이 얼핏 엿보였다.

뜨겁고 매캐한 바람이 훅 불어와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 자, 헬게이트를 열었다. 저 건너편이 지옥이지.

"...."

- 저쪽은 제법 더우니까 조심하도록 하고. 지옥 곳곳을 누비는 사탄들도 조심하도록. 놈들은 언제나 선량한 영혼을 속이고 타락시키는 일에서 희열을 얻는 족속들이니 말이다.

"그럼, 당신의 영혼은 지옥 어디에 빠진 겁니까?"

- 모른다.

"...."

- 하지만 아마도 지옥왕이 내 영혼을 잡아두고 있겠지.

"후아."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로이드는 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이거, 진짜 실화인가.

팔자에도 없던 지옥왕과 대면이라.

막상 눈앞에 열린 헬게이트를 보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이다.

엔티쿠스의 맹세도 받아냈다.

그러니 이번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용왕 베르키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어.'

본드래곤이라는 하수인.

평생 마르지 않을 재물.

그리고 또 하나의 목숨.

거기에 추가로....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결국 이렇게, 기어코, 짐의 그림자를 벗어나려 함인가."

국왕 알리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곁에서 엔티쿠스와 이쪽의 대화를 모두 보고 들었을 국왕.

그렇기에 엔티쿠스의 부탁을 수락한 이쪽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국왕.

그녀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내보였다.

로이드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하면?"

"제가 아무리 용왕이라는 존재의 후원을 받게 된다 하여도, 전하의 그늘에서 뛰쳐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끝까지 짐의 신하로 남겠다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짐이 맡기는 일은 좀처럼 하려 들지 않겠지."

"그것은...."

"이미 짐은 알고 있노라."

국왕 알리시아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오늘의 일을 모두 함께 겪고, 목격한 짐이니라. 한데 어찌 그대는 짐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가."

"...."

"그대의 가문을 섬기는 아스라한 경은 마침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완전히 벗어났지. 아까 아스라한 경이 내보인 그 모습이 상상의 경지라는 그랜드 마스터의 단계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적어도 짐이 보유한 그 어떠한 군대로도 쉽사리 막을 수 없으리란 건 확실할 터."

"전하."

"거기에 그대는 방금 본드래곤을 수하로 부리게 되었지, 아마?"

"그러하옵니다."

"소드마스터를 벗어난 기사. 복종하는 본드래곤. 이 둘만으로도 이미 그대 가문의 힘은 짐의 왕가를 능히 넘어섰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송구하옵니다."

"이제 그만 송구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옵니다, 전하. 앞으로도 계속 송구하고 싶사옵니다."

로이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예전에도 전하께 아뢴 적이 있사오나, 저는 그저 제 영지에서 평범하고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인 자이옵니다."

"알고 있노라."

"예, 그래서이옵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정복도, 출세도 관심이 없사옵니다. 그저 이 한 몸 편히 쉬며 느긋하게 살고만 싶사옵니다. 그렇기에 저에겐 여전히 전하의 그늘이 필요하옵니다."

정말이었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된 하비엘.

이쪽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본드래곤.

그 두 존재만으로도 마젠타노 왕가를 뒤엎을 힘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정말로 작정하면 이 대륙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도 정복 전쟁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내가 그런 걸 왜 해?'

그런 거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자신을 떠받드는 여유로운 영지에서 하하호호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다음 달 월세나 고시원비에 시달린다거나.

간당간당한 교통비를 걱정한다거나.

못 받은 일당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거나.

그런 고통스러운 삶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정복 전쟁? 왕? 그런 걸 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고 싶지도 않다.

괜히 그런 짓을 벌였다간?

셀프로 일 폭탄을 떠안게 될 것이 확실했다.

여유롭게 탱자탱자 뒹굴거리는 건물주적 라이프와도 이별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안 돼.'

그러니 일을 크게 벌이면 안 된다.

이쪽에게 호의적인 국왕 알리시아의 신하로 남아야 한다.

그녀의 든든한 우산 아래에서 꿀만 빨아야 한다.

그래서였다.

'그러자면 국왕 누님의 협조가 필요해.'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로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냉철한 계산과 솔직한 진심.

둘 모두를 담아 국왕에게 고하였다.

"하오니 전하, 저는 아스라한 경의 새로운 경지와 본드래곤의 정체를 외부에 알리지 않겠사옵니다. 다만 그 대신에 전하께서 저를 게으른 신하로 대해주기만을 오직 바라옵니다."

"게으른 신하로?"

"그렇사옵니다."

"명목상 짐의 신하로는 남되, 짐이 맡기는 일을 전부 거절하겠다는 뜻이로군."

"그것은 아니옵니다, 전하."

"하면?"

"지금껏 제가 전하에게 받은 호의와 후원이 있지 않사옵니까. 저는 원한을 잊지 않는 만큼 누군가의 은혜도 저버리지는 않는 사람이옵니다."

"정말로?"

"예."

"진짜로?"

"예."

"흐음. 과연?"

"...."

"어쨌건, 짐이 부탁하는 일을 상황에 따라서 호의로 받아들일 여지는 남겨두겠다는 뜻이로군. 그대의 호의를 담아서. 짐이 이해한 바가 맞는가?"

"바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쯧. 그대라는 자는 정말이지, 똑똑하고 건방진데 얄밉지가 않아서 큰일이야."

국왕 알리시아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로이드의 뜻이 제대로 느껴졌다.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됐지만 그저 여유롭게만 살고 싶은 한량.

그 장래희망(?)을 위해 왕실의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하긴. 차라리 이래 주는 것이 다행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로이드가, 프론테라 가문이.

작정하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자신과 왕실은 그걸 억누를 수 있을까.

'아니.'

그녀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하다.

본드래곤 하나만으로도 이미 왕실의 모든 군대가 동원되어야 할 터다.

한데 소드마스터를 벗어난 아스라한 경까지 가세한다면?

지휘부의 몰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로 지휘체계가 무너질 것이다.

남은 군대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엔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왕국군이 무너지고 왕실이 몰락하게 되리라.

'....'

잠깐이었지만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였다.

국왕 알리시아는 웃었다.

눈앞에서 예를 표하는 로이드 프론테라.

그가 자신의 신하로 남아주겠다는 제안이 오히려 고마웠다.

"좋다.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넙죽 엎드렸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노동 면제권, 드디어 얻어냈어.'

감격의 떨림으로 어깨를 부르르.

보는 눈이 없다면 어디 가서 환호성을 내지르며 훌라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역시 국왕 누님이야. 믿고 있었어.'

그릇이 크고 대범한 군주.

공명정대한 사자 같은 존재.

그런 국왕의 면모를 믿었던 그였다.

그 믿음으로 요청을 건넸던 그이기도 했다.

그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다행이야. 조금만 쪼잔한 군주였다면 이런 요청, 씨알도 안 먹혔을 거니까.'

일개 신하의 가문이 왕실을 아득히 넘어서는 전력을 갖추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군주는 불안감에 발 뻗고 잠들지도 못할 터다.

앞에서는 괜찮다고 허허허 웃어도.

뒤로는 이쪽을 암살하거나 무너뜨릴 궁리만 하게 될 터다.

한데 국왕 알리시아는?

'그러지 않아. 오히려 이걸 기회로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 들겠지.'

물론 한편으로는 이쪽의 독주를 견제할 장치를 마련하려 고심하겠지만.

서로 충돌만 하지 않으면 된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 된다.

그렇게 공존을 선택하면 된다.

그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국왕의 눈앞에서 용왕 후원 멤버십 가입(?) 의사를 드러냈다.

국왕보다 더한 존재를 등에 업게 될 것임을 공언했다.

그 상태에서 국왕에게 제안했다.

날뛰지 않겠다고.

국왕을 존중하겠다고.

얌전히 평화롭게 살겠다고.

그러니 이쪽을 건드리지 말아 주시라고.

방금 로이드가 건넨 제안의 정체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국왕 알리시아는 그 제안의 본질을 단숨에 이해하고 이쪽의 동반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국왕과 만족스러운 거래(?)를 마친 로이드는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열린 헬게이트를 쳐다보았다.

"후아."

헬게이트 안쪽, 자욱한 매연 사이로 얼핏 엿보이는 화산재와 용암 대지.

그 광경을 보자 비로소 조금은 실감이 났다.

용왕 후원 멤버십 회원이 되기 위해.

끝없이 쑴펑쑴펑 솟아날 재물.

본드래곤 이용권 무제한 서비스.

그걸 더욱 알차게 누리게 해줄 또 하나의 목숨까지.

그 모든 혜택을 얻기 위해.

이제는, 지옥으로 갈 때였다.

그리고 같은 순간.

지옥의 모든 마귀가 헬게이트를 바라보는 로이드의 시선을 감지했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쿵덕거리는 2심방 2심실을 부여잡았다. 똑같은 찬사를 띠롱 떠올렸다.

'뭐? 악마적 음정의 소유자, 명창 프론테라 님이 여기로 친히 오신다고?'

229화. 쩐과 함께 : 지옥편 (2)

 

 

콰아아아아-!

 

이곳은 지옥의 이름 모를 어딘가.

허공에서 헬게이트가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성난 짐승처럼.

울컥거리며 불길을 뿜었다.

그러더니 다른 물체(?)도 뱉어냈다.

로이드와 하비엘이었다.

"...어이쿠!"

로이드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엉덩방아 찧는 신세를 모면하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 직후 저도 모르게 한쪽 발을 움츠렸다.

"앗뜨!"

 

치이익!

 

반쯤 녹아 흐물거리는 암석.

그곳을 디뎠던 오른쪽 신발 바닥이 어느새 살짝 그을려 있었다.

'헐.'

여기, 진짜 불지옥이네.

로이드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니 문득, 헬게이트를 통해 지옥으로 넘어오기 직전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하면, 로이드 프론테라여. 그대는 곧바로 지옥에 가려는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매정하군. 이곳의 뒷수습에 손을 보태어주고 가도 좋으련만."

"비벙이를 남겨두겠사옵니다, 전하."

"그런가."

"예, 전하."

공손히 고개 팍팍 숙였다.

국왕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약간은 서운해하는 듯한 미소.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무려 드래곤의 부탁을 받았으니 그 일부터 처리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지사. 다행히 사태의 규모에 비해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많지는 않은 듯하니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본드래곤이 설친 직후였다.

다만 그런 것치고는 피해가 심하지는 않았다.

처음 본드래곤에게 희생당한 궁중 수석마법사.

그리고 몇몇 근위대원을 제외하면 사상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게 모두 그대의 덕이겠지."

"그건...."

"아니. 굳이 부인할 필요가 없음이야. 그대가 커다란 비버를 꺼내 초청객들이 도망치도록 유도한 덕분이 아닌가."

"...."

"그런 그대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초청객들이 사태에 휘말려 희생되었을 터. 짐은 그대의 용기와 솔선수범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쯧. 그놈의 마음에도 없는 성은."

"...."

"이럴 때마다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어서, 다른 방법으로 지옥에 보내주고 싶어지기도 하고."

"...."

저기, 국왕 누님.

칼자루는 좀 놓고 말씀해주시죠.

로이드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사실 그도 자신을 아끼는 국왕의 마음을 잘 알았다.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신하.

눈치도 빠르고 야망이 없는 신하.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신하를 얻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아니, 그런 인재를 발견하는 일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그런 자를 놓치기 싫을 테니까.

그러니 아쉬운 것일 터다.

이쪽의 강성한 전력 때문에.

이제는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없게 되었음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일 터다.

그래서 저런 뼈 있는 농담까지 굳이 하는 것일 터다.

'뭐, 내가 셀프로 날 그런 인재로 평가하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애초에 자신은 평범한, 이쪽 세상에 없는 지식을 약간 갖춘 사람일 뿐이다.

눈치와 센스?

그것도 대부분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으며 이곳의 설정과 미래를 조금 더 알고 있기에 발휘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로이드는 결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몸을 사리자고 마음먹었다.

'조금 잘나간다고 막 붕 떠서 나대면 안 돼. 그러다가 인생 나가리 된 케이스가 역사에 얼마나 많은데.'

그건 본드래곤과 그랜드 마스터인 하비엘을 거느리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강성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운 나쁘고도 어처구니없는 암살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게 세상살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는 국왕과 절대로 척을 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그래도 제가 선택한 방법으로 지옥에 가야 다시 전하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런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그대라면 목이 뎅겅 잘려도 지옥의 마귀들을 꼬드겨 다시 살아 돌아올 것 같단 말이지."

"지나친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그래?"

"예, 전하."

"자꾸 그렇게 능청스럽게 구니까 더 시험해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

"걱정 말도록. 농담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진심으로 성은을 생각한다면 짐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오도록."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돌아오고 싶다.

그것만은 진심이다.

지옥 같은 곳에 오래 머무르는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로이드는 약간의 뒷수습을 거들었다.

3천 톤 궁둥짝 바디프레스의 여파로 절뚝이는 비벙이를 데려왔다.

녀석을 잘 어르고 달랜 뒤에 국왕에게 맡겼다.

그리고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 꼬밍이를 모두 안주머니에 챙겼다.

본드래곤에게는 대기 명령을 내렸다.

"넌 근처에 좀 짱박혀 있어라."

 

삐그덕?

 

본드래곤이 거대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순딩하고 덩치 큰 강아지가 주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아직 여기 사람들은 네 모습을 보면 격하게 반응할 거거든. 무서워할 거야. 그건 너도 싫지?"

 

삐그덕! 삐그덕!

 

본드래곤이 거대한 머리를 격하게 끄덕끄덕.

로이드가 말했다.

"그래서야. 내가 지옥 다녀올 때까지 왕도 인근에 숨어 있어. 눈에 안 띄게. 가능하다면 인적이 없는 바다에 몸 담그고 있는 게 좋겠네."

 

삐그덕!

 

"괜찮아. 그래도 안 죽어. 너 숨도 안 쉬잖아?"

 

삐그덕!

 

"기가티탄 같은 애들이 덤벼도 딱밤만 때리면 돼. 네가 더 쎄."

 

삐그덕!

 

"알았어. 빨리 돌아올게. 약속."

...어째, 언데드 지배 스킬에 종속되면서 생겨난 본드래곤의 새로운 인격이 덩치 큰 강아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드래곤은 이쪽의 약속을 듣고서야 안심한 듯 날아올랐다.

왕도 북쪽의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

대강의 뒷수습을 했다.

나머지는 국왕에게 맡겼다.

"그럼, 다녀오겠사옵니다."

그렇게 헬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하비엘과 나란히 지옥으로 건너왔다.

"...후아."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에도 코가 얼얼했다.

'완전 계란 썩은 냄새가 사방에서 나네.'

썩은 듯하면서도 코 점막을 쿡쿡 찌르는 듯한 알싸한 향.

유황 냄새가 가득했다.

풍경도 그에 못지않았다.

눈길 닿는 거의 모든 곳이 화산이었다.

크고 작은 산줄기들이 옆구리 터진 우유팩처럼 용암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풀? 초목? 싱그러운 나무?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늘도 온통 매연으로 시커멓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크흠흠, 쿨룩, 콜록."

곁에 있던 하비엘이 짐짓 헛기침을 해댔다.

아마 이런 매연 가득한 공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반면 로이드는?

완벽히 말짱했다.

'뭐, 대강 서울 공기랑 비슷하네.'

정확히 말하자면 초미세먼지가 맥시멈 수치로 치솟은 날의 서울 홍대 거리와 비슷한 정도로 매캐했다.

'어차피 그 시절에도 돈 없어서 마스크 없이 다녔는데, 뭐.'

몸에 안 좋은 미세먼지였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현장에서 운 좋게 방진 마스크를 주워오는 날엔 좀 괜찮았는데.

그마저도 구할 수 없던 때엔 그냥 기관지 튼튼한 거 하나 믿고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덕분에 수없이 단련되었던 그의 가슴 속 허파꽈리가 이곳, 지옥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쯧. 겨우 이걸로 콜록거리냐?"

"...크흠흠! 그건, 아닙, 콜록!"

"어휴. 그랜드 마스터라며."

"...."

"근데 이걸 못 견뎌?"

"...콜록!"

"쯧. 평생 청정 공기만 맡아 온 나약한 화초 같은 녀석."

"...."

로이드는 히죽거렸다.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도 대기 오염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 이런 식으로 자신의 하비엘보다 우월한 점을 발견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반가운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딩동!

 

난데없이 알림음이 울렸다.

예상치 못했던 메시지가 눈앞에 주르륵 떠올랐다.

 

[보유 중인 찬사,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 물>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당신은 현재 연평균 기온 섭씨 40℃ 이상인 지역에 들어왔습니다. 이에 '서쪽 나라 도련님의 고인 물' 찬사가 발동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탈수 증상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올.'

메시지를 읽는 로이드의 눈동자에 흐뭇함이 떠올랐다.

'어쩐지 아까부터 별로 덥지 않더라니.'

조금 전, 처음 지옥에 왔던 때부터였다.

화산과 용암이 곳곳에 널린 곳에 온 것치고는 크게 덥다고 느끼지 못했다.

땀이 줄줄 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게 찬사 덕분이었던 듯했다.

'사막에서 술탄한테 카나트 만들어주길 잘했네. 이야. 그때 얻은 찬사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설마 지옥에 오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연평균 기온 40도 이상인 미친 동네에 올 거란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냥 찬사 하나 얻었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사막에서 덜 위험하겠구나 싶기만 했었다.

한데 막상 지옥에 와보니?

이런 꿀옵션이 따로 없었다.

"어이, 덥냐?"

"괜찮습니다, 콜록, 크흠!"

"땀이 줄줄 나는데?"

"견딜 정도는 됩니다."

"쯧. 나약한 녀석."

"...."

"하여간 요즘 기사들은 정신력이 없어요, 정신력이."

"...."

로이드는 안주머니 속을 들여다보았다.

"다들 괜찮아?"

"뽀! 방! 하! 꼬!"

안주머니 속의 뽀동이, 방울이, 하망이, 꼬밍이가 고개를 뽀잇 끄덕였다.

"덥진 않고?"

"뽀! 방! 하! 꼬!"

"괜찮아? 그래도 뽀동이랑 꼬밍이는 좀 더워 보이는데?"

"뽀! 꼬!"

역시.

온몸이 매끈한 방울이나 하망이와는 달리, 털이 복실복실한 뽀동이와 꼬밍이는 조금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차라리 밖으로 나와서 있자. 꼬밍아?"

"꼬밍!"

"넌 이거 먹고."

"꼬미밍!"

꼬밍이에게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였다.

거대해진 녀석의 등에 하비엘과 함께 올라탔다.

더위에 헥헥대는 뽀동이는 어깨에 태웠다.

"그럼 일단 상승!"

"꼬밍!"

지옥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높은 곳에 올라와 사방을 둘러보니 시야가 한결 트였다.

덕분에 목적지로 삼을 만한 곳이 보였다.

'저기인가.'

어느 지평선 너머.

그곳에 특이한 모양의 화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일반적인 산과 많이 달랐다.

굳이 비유하자면 뒤틀린 황천의 꽈배기를 세워둔 모양 같달까.

그런 꽈배기 산이 수줍은 혼돈의 계란찜 같은 용암을 부글부글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 보자 문득,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지옥의 광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지옥의 왕이 거하는 지옥성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지. 지옥왕은 그 꼭대기에 군림하고서 지옥에 떨어진 모든 영혼을 다스린다고 했던가.'

한데 저 멀리 보이는 꽈배기 산이 딱 그런 모양 같았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저기네.'

저곳에 지옥의 왕이 있으리라.

아울러 고룡 엔티쿠스의 영혼도 저곳에 붙들려 있을 것이다.

"꼬밍아? 저쪽으로 날아갈까?"

"꼬미밍! 밍!"

방향을 알았다면 그냥 날아가면 된다.

쓸데없이 모험이니 어쩌니 하면서 걸어갈 필요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꼬밍이의 날갯짓을 독려했다.

낯선 지옥의 광경이 발아래로 휙휙 지나갔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

그리고 아홉 시간.

'...이나 날았는데 왜 하나도 안 가까워지는 거지?'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비행한 끝에 로이드는 뒷골을 잡았다.

지옥왕이 있을 법한 꽈배기(?) 산.

그곳이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

꼬밍이가 아무리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저쪽으로 날아가고 있는데.

지면이 아래로 휙휙 지나가는데.

이상하게도 꽈배기 산과는 전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환장하겠네.'

뭔가 있다.

저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데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 속 내용을 돌이켜봐도 그랬다.

이런 현상에 대한 언급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조금 막막했다.

한데 그때였다.

'음?'

난감한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던 로이드의 시야에 뭔가가 포착됐다.

그는 뒷자리의 하비엘을 불렀다.

"어이, 하비엘. 너 나보다 시력 좋지?"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저기 저거, 보여?"

로이드의 손이 지상의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하비엘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그쪽을 주시했다.

"보입니다. 사람 같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피부색이 조금 이상한 것도 맞아?"

"예. 정확히 보셨습니다. 피처럼 붉은 피부를 지녔군요. 머리에는... 뿔도 있는 듯하고 말입니다."

"뿔?"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못 봤는데.

하비엘이 대꾸했다.

"확실합니다. 뿔이 돋아나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지옥에서 사는 마귀, 사탄이겠지요."

"바로 그거지. 빙고. 마침 길 좀 물어볼 필요를 절감하던 참인데."

"설마, 사탄에게 접근하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여기 그랜드 마스터가 있는데 저런 사탄이 뭐가 무서울까."

로이드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리고 곧장 꼬밍이를 하강시켰다.

저 멀리 보이는 사탄을 향해서.

마치 초행길에 낯선 사거리를 뱅뱅 돌다가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운전자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탄 근처에 꼬밍이를 착륙시켰다.

"어이!"

갑작스러운 이쪽의 착륙과 부름에 움찔 놀라는 사탄.

그 지옥 주민을 향해 로이드가 선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부모님한테 효도해야 된다?"

"...!"

초면에 다짜고짜 덕담을 들은 사탄의 눈동자가 분노에 휩싸였다.

230화. 쩐과 함께 : 지옥편 (3)

 

 

이곳은 지옥성 정문.

매연으로 온통 시커먼 하늘.

그 아래로 사나운 불기둥 두 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불기둥 사이로 이어지는 기다란 통로.

그 끝에 거대한 해골이 놓여 있었다.

가히 산 하나 크기에 달하는 해골.

지옥왕의 거처이자 지옥의 중심, 지옥성이었다.

그 지옥성을 가리키며 지옥의 주민, 사탄 파겐티가 사악하게 웃었다.

"저기는 지옥성이 아닙니다."

"그래? 아주 거짓말이 기본이구만? 이런 썩을 놈 같으니라고."

"흐흣,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감사할 줄 알았습니까?"

"감사 따위야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크크크, 그렇습니까."

사탄 파겐티는 연신 싹수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로이드를 향해 연신 공손하게 굽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 로이드와 처음 만났을 때.

골수까지 새겨지는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탄 파겐티는 전날의 그 사건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진짜 아팠어, 제기랄!'

자신은 그냥 길을 가던 중이었다.

거처로 삼던 용암탕에서 뒹굴거리다가 배가 출출해서.

근처에 길 잃은 영혼을 만나면 좀 괴롭히다가 잡아먹을까 싶어서.

그래서 간만에 마실이나 나왔던 참이었다.

한데 그러던 도중에 갑자기 커다란 뱁새 한 마리가 옆에 착륙했던가. 그리고 뱁새에 타고 있던 인간이 다짜고짜 덕담을 날려왔던가.

그건 무려....

'너,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부모님한테 효도해야 된다?'

...라는 어마어마한, 사탄의 인격을 뿌리부터 모독하는, 지옥의 어떤 이라도 듣자마자 개탄하고 통탄할 법한 천인공노할 덕담이었다.

'부모님한테 효도라니!'

대체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면 그런 끔찍한 말을 뱉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길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감히 그런 경우 없는 덕담을 초면부터 날려온단 말인가.

사탄 파겐티는 진심으로 분노했었다.

지옥의 주민답게 즉각 송곳니를 드러냈다.

저 경우 없는 인간을 처단하리라고.

산 채로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리라고.

다짐하며 달려들었더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를 광대뼈로 감상해야 했다.

 

쩌컹!

 

순식간에 날아온 강철삽.

삽머리 평평한 면에 얻어맞아 홱 돌아가던 자신의 고개.

그게 끝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게 변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가.

눈을 떠보니 저 인간, 로이드가 자신을 향해 방긋 웃었더랬다.

'안녕?'

'나,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 물음을 입에 담기도 전에 또 삽질(?)이 날아왔더랬다.

 

쩌컹!

 

또 한 번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또다시 캄캄해지는 눈앞.

그때부터였던가.

자신이 깨어나고.

로이드가 방긋 웃고.

뭐라 말을 붙여보기도 전에.

다짜고짜 삽질이 날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정확히 열 번쯤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열한 번째 깨어나던 순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눈을 뜨자마자 즉시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열심히 빌었다.

그랬더니 저 인간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한 대만 더 맞자?'

'...!'

악독해도 저런 악독한 놈이 없었다.

진심으로 빌었는데도 또 날아오던 삽질.

거기에 맞아 다시금 홱 돌아가는 자신의 머리.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사탄 파겐티는 절감했다.

이렇게 악독한 놈은 오랜만에 본다고.

정말 존경스럽다고.

기절하면서 어쩐지 눈물이 배어났다.

진심으로 존경할 만한 위인을 만난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이미 로이드를 향해 충성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실로 성심껏 로이드를 모시고, 안내했다.

예를 들자면....

 

'크크크, 그래서 저 꽈배기 산으로 날아가려고 하셨던 겁니까?'

'어.'

'어이쿠, 현명하십니다. 예, 맞습죠. 저기가 바로 지옥성입죠.'

'그래? 저기가 지옥성이 아니면 상으로 너 용암에 튀겨줄까?'

'살려주시죠.'

'그럼?'

'사실은 저 꽈배기 산... 후우, 신기루입니다.'

'쯧, 대강 짐작은 했는데 역시나. 그럼 진짜 지옥성이 따로 있는 거야?'

'예.'

'어딘데, 그게.'

'....'

'뒤질래?'

'사실 지옥성의 진짜 위치는... 용암 개울 넘고... 어쩌고저쩌고... 서쪽 화산재 무더기 지나서... 재잘재잘... 해골 분지 너머에... 블라블라... 입죠.'

'와, 그걸 시치미를 싹 떼고 거짓말을 했던 거였냐?'

'예.'

'보람찼냐?'

'네.'

'그럼 진실을 말한 지금은?'

'...괴롭습니다.'

'쯧, 바른말 하느라 고생이 많네.'

'크흑.'

'괜찮아. 힘내, 짜샤. 길 안내 끝나면 상으로 욕해줄게.'

'저,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사탄 파겐티는 로이드를 진짜 지옥성까지 무사히 안내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 어제부터 거짓말 참느라 진짜 힘들었다.'

물론 틈만 나면 거짓말을 조금씩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바른말을 훨씬 많이 했다.

덕분에 내내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참았다.

자신이 안내하는 자가 로이드니까.

그 유명한 '저세상 고음불가'의 소유자니까.

무려 지옥의 1군단장,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의 고막을 잘근잘근 짓밟은 장본인이니까.

저렇게 악독한 자를 안내하는 건 사탄 가문 3대의 영광이 될 일일 테니까.

사탄 파겐티는 보람을 느끼며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저기, 그럼, 안내가 끝났으니까...."

"욕해달라고?"

"예!"

사탄 파겐티의 눈이 반짝거렸다.

명창 로이드에게 직접 듣는 욕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고막에 새겨놓고 싶었다.

혹은 액자라도 만들어서 걸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파겐티의 기대를 한 큐에 부숴 버렸다.

"싫은데?"

"...예?"

"설마 넌 내가 약속 같은 걸 지켜주길 바랐냐?"

"허, 그, 그 말씀은...."

"너 같은 놈이랑 했던 약속 따윈 나한텐 씹다 뱉은 껌보다도 못한 거거든?"

"아, 아아!"

"...느꼈냐?"

"...예."

"그럼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감사합니다!"

사탄 파겐티가 대만족한 표정으로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사탄 놈들이란.'

욕만 해주면 어찌 저리도 좋아하는지.

게다가 거짓말까지 해주면 흥분하며 자지러지기까지 하는지.

'대한민국 인터넷 사이트에 쟤들 풀어놓으면 적응 완전 잘하겠네.'

온갖 패드립과 모욕의 향연.

수시로 물어보는 부모님 안부.

서슴없이 내미는 인격 모독적 발언.

욕이 안 들어가면 문장이 안 만들어지는 경우까지.

사이트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를 모욕하고 비하하는 일이 너무나 일상처럼 벌어지는 곳이 대한민국의 인터넷과 SNS 세상이었다.

한데 이곳 지옥의 사탄들을 보니?

그곳에 풀어놓으면 정말 적응 잘하겠구나 싶었다.

'뭐, 어쨌건.'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옥성 정문을 바라보았다.

사탄 한 놈 잘 굴린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제는....

"설마 이대로 지옥왕을 만나실 작정이신 겁니까."

지금껏 묵묵히 뒤를 지켜주던 하비엘이 물어왔다.

로이드는 녀석을 돌아보았다.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어."

싱긋 웃고 말았다.

하비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안일한 계획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위험하고 안일해? 왜?"

"상대가 지옥왕이지 않습니까."

지옥성 정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이쪽을 따라오며 하비엘이 말했다.

"지옥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어떤 힘을 지녔을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로이드 님의 안전을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설령, 제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상태라 해도 말입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어도 불안하다는 거지?"

"예."

"지옥왕이 어떤 자인지 모르니까?"

"예."

"그럼 괜찮아."

"예?"

하비엘이 멈칫.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지옥왕이 이 지옥에서 제일 안전한 형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 것 없어. 다 생각과 계획이 있으니까 안심하고 따라와."

로이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어차피 진짜로 위험해지면 탈출용 헬게이트를 열어 버리면 되니까.

휙 하고 로라시아 대륙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미련 없이 이번 미션(?)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별다른 부담이 없었다.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치 프론테라 저택 정원을 산책하듯.

지옥성 본궁을 향해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러자니 문득,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지옥왕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있었지.'

지옥왕.

지옥의 지배자.

모든 헬나이트를 다스리는 군주.

거기까지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괴신적인 면모를 떠올릴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사실을 떠올리며 로이드는 계속 걸었다.

지옥성 본궁에 입장했다.

영혼의 상태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

그래서 지옥에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존재.

그런 이쪽의 등장에 놀란 사탄들의 수군거림을 귓가로 흘리며.

저 인간이 명창 로이드 프론테라인 거냐는 지옥성 경비대의 쑥덕거림을 들으며.

본궁 중심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지옥왕의 권좌 앞에 섰다.

예를 표했다.

그곳에 지옥왕이 있었다.

사무용 의자처럼 생긴 심플한 권좌.

아무런 장식 없이 넓기만 한 책상.

책상 위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서류.

그 서류 더미에 깔려 질식할 것만 같은 표정.

만성피로에 시달린 표본처럼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있었다.

예를 올리는 이쪽을 보며 진심으로 성가시다는 듯.

무테안경을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후, 바빠 죽겠는데 이건 또 뭐야...."

지옥왕.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자.

업화의 지배자이자 열아홉 연옥의 감시자.

지옥의 왕 헬카로스였다.

이쪽을 향한 지옥왕 헬카로스의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후우. 아직 밀린 업무가 끝도 없는 판국에 제멋대로 찾아오면 어쩌자는 건지. 내가 지금 벌써 67만 년째 퇴근 못하고 있는 게 안 보이는 건가."

"죄송합니다, 지옥의 지배자시여. 지상 세계의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옥왕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를 올리기는 무슨. 김수호. 우리, 구면일 텐데?"

지옥왕이 일침을 놓듯 물어왔다.

김수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로이드는 움찔했다.

곁에서 나란히 예를 표하는 하비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하비엘은 '김수호'라는 이름의 진짜 뜻을 아직 모르는 듯했다.

로이드는 표정 관리에 신경 쓰며 지옥왕을 올려다보았다.

"예, 구면이지요. 제 꿈속에 나타나신 적이 있으시니까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불의 거인.

그렇듯 위압적인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냥 좀 생생한 개꿈을 꾼 걸로 치부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평범한 꿈이 아니었던 듯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도 이렇듯 지옥의 수많은 판결을 내리시느라 바쁘신 가운데 찾아뵙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하면 곧바로 제 용건을 밝혀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빨리빨리."

지옥왕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와중에도 어느새 지옥왕의 시선은 이쪽이 아닌, 책상 위의 서류로 돌아가 있었다.

심지어 한 손은 펜을 쥐고서 서류에 서명을.

나머지 한 손은 서류를 넘기며 도장까지 찍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그렇다.

저것이 지옥왕의 진짜 모습이자 본질이었다.

'워커홀릭이지. 수백, 수천억, 수조, 수십조 망자와 죽은 모든 생물의 판결을 실시간으로 내리는 자. 일 더미에 치여 사는 존재. 그래서 오직 서류와 판결로만 타인을 처벌하는 지배자랄까.'

문득,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지옥왕의 본질이 떠올랐다.

절대로 직접 싸우지 않는 자라고 했다.

어떤 존재도 살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서류와 판결.

그 두 가지의 무기로만 다른 존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했다.

즉, 지옥의 모든 무력을 헬나이트와 지옥 군단에게 맡긴 채.

영원히 서류 가득한 책상에 붙들려 판결을 내리는 존재.

그런 존재가 지옥왕이라고 했다.

즉, 정식으로 지옥 판결에 회부되지만 않는다면.

이 지옥에서 자신을 해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존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틀린다고 이쪽을 죽이려 들거나 해코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말 그대로 지옥에서 제일 안전한 형.

그것이 로이드가 지옥왕과의 대면을 앞두고도 불안해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사실 지옥왕보다는 헬나이트가 훨씬 무섭지.'

하지만 헬나이트는 하비엘이 막아줄 수 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됐으니까.

행여나 헬나이트 대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는 한 하비엘이 수세에 몰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다 정말로 하비엘이 당할 것 같으면?

더는 방법이 없다 싶은 순간이 오면?

탈출용 헬게이트를 열면 된다.

그대로 지상으로 도망치면 된다.

그러니 지옥에 오더라도 안전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

그 계산과 확신이 있기에 고룡 엔티쿠스의 부탁을 수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마침내 지옥왕을 만났으니까.

후딱 용건만 해치우고 돌아갈 테다.

돌아가서 용왕 베르키스를 알현하고.

용왕 후원 멤버십 혜택을 알뜰살뜰 챙길 테다.

그 찰진 다짐을 되새기며.

로이드는 촵촵 혓바닥을 적셨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둔 알찬 멘트를 야물딱지게 발사했다.

231화. 지옥철도 666 (1)

 

 

"혹시 퇴근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뚝.

 

로이드의 말이 나오는 순간.

수천 장의 결재서류 위에서 종횡무진 빛의 속도로 움직이던 지옥왕의 펜대가 풀브레이크 급정거를 시전했다.

"뭐?"

지옥왕의 시니컬한 눈초리가 이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얼음을 벼려낸 눈빛이 있다면 저런 게 아닐까.

하지만 로이드는 위축되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반응, 예상했으니까.

'당연하지. 67만 년째 야근 중이잖아. 그런데 퇴근하고 싶냐는 질문받으면, 뭐.'

돌아올 대꾸야 뻔하다.

"그야 당연히 퇴근하고 싶지. 한데 그런 당연한 걸 왜 묻지?"

지옥왕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거냐는 듯한 표정.

좋은 반응이었다.

적어도 이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류에만 고개를 파묻고 있던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소한 요구와 협상이라는 걸 해볼 만한 건덕지가 생겼다고 해야 할 터다.

로이드가 대답했다.

"제가 그걸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날 도와? 네가?"

"예."

"어떻게?"

"지옥왕께서 억류하고 계신 드래곤 엔티쿠스의 영혼을 풀어주겠노라 약속하시면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로이드는 입을 싹 닫아 버렸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옥왕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지옥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러기를 잠시.

"하."

지옥왕의 입가에 헛웃음이 피어났다.

"지금 내게 협상을 시도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감히 무슨 생각으로?"

"지옥왕께서 매사에 극도의 효율성과 공평한 대가를 추구하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정말로 지옥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디에서?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였다.

'거기서 나왔던 언급이 있었지. 지옥왕은 법으로 망자를 조지, 아니, 벌하는 존재라고 했어. 한데 그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격이 됐다고 했지. 그래서야.'

모든 일에 공평한 대가를 요구한다고도 했다.

지옥왕의 사전에 절대로 공짜는 없다고.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려면?

반드시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다.

'딱 좋아.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야. 그렇잖아? 원래 인생이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어?'

공짜도 없음.

퍼주기도 없음.

그런 면에선 묘하게 자신과 비슷한 지옥의 왕이었다.

그래서였다.

지옥왕을 만나러 오는 내내.

로이드는 지옥왕의 입장에 자신을 대입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지옥왕이라면 드래곤 영혼을 석방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역지사지.

자신의 입장을 대입해보기.

덕분에 답이 금방 나왔다.

'나라면 드래곤 영혼 풀어주는 일이 공짜냐고 코웃음 치며 핀잔 놨을 거야. 그럼 부탁을 하는 쪽은? 지옥의 왕이시여, 드래곤 영혼을 풀어주시는 대가로 제가 뭘 해드릴까요, 라면서 아쉽게 매달리는 쪽이 돼 버리는 거거든. 그러면 안 되지. 시작부터 주도권을 몽땅 내주게 되는 꼴이니까.'

가능하다면 모든 협상은 상대를 매달리게 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그게 협상이라는 전쟁을 유리하게 시작하는 비결이다.

바로 그것이 주도권 싸움이다.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덕분이었다.

맞춤형 전략을 짤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격무에 시달려 왔을 지옥왕.

그런 지옥왕이 듣자마자 혹할 퇴근이라는 미끼.

그걸 눈앞에서 흔들며 지옥왕의 흥미를 끌어냈다.

그 타이밍에 은근슬쩍 자신의 요구를 끼워 넣었다.

드래곤 영혼을 풀어주면 퇴근 비결 알려드릴게, 라고.

"어떻습니까. 약속만 하시면 그 비결, 정말로 알려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만."

"...."

로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지옥왕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저 로이드 프론테라, 아니, 김수호라는 인간.

지난번 헬나이트 지오렉시우스 경을 해치우던 걸 보면서도 잠깐 느꼈던 거지만, 정말 징그럽도록 간사하고 치사한 놈이구나 싶었다.

동시에 볼수록 탐이 났다.

'확 저놈을 내 자리에 앉혀 버려?'

처음엔 그냥 지옥 방송 스피커 대용으로 노래나 시켜볼까 생각했었는데.

저놈의 끔찍한 노래를 활용하면 연옥의 망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저놈의 꿈에까지 현신하여 뜻을 알리기도 했었는데.

지금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업무를 모조리 떠넘기고 싶어졌다.

앉혀만 놓으면 일을 기막히게 해낼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은 천년만년 쉴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이내 지옥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꿈(?)을 이루려면 저놈에게 지옥왕 자리를 넘겨야 한다.

혹은 자신을 대리할 정도의 권능을 부여해야 한다.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뭐, 어차피 드래곤의 영혼이야 귀한 관상용 금붕어 정도의 가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풀어줘도 조금 아쉽기만 할 뿐.

실질적인 큰 손해는 없을 터였다.

대신 그 대가로 퇴근할 수 있게 된다면?

퇴근 후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꿀꺽.

 

지옥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산더미 같은 서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갑갑한 넥타이를 벗어 던질 수도 있다.

뜨끈한 용암 온천에 몸을 담그고서 극산성 쥬스를 여유롭게 마실 수 있다.

개운하게 몸을 푼 후에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67만 년 동안 밀리고 쌓인 갖가지 소설과 신화, 각종 전승을 보고 읽으며 즐길 수 있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답이 정해졌다.

저 김수호라는 인간.

저놈이 이쪽의 니즈를 아주 절묘하게 파고든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아주 조금 신경에 거슬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렇게, 지옥왕은 결정(?)을 내렸다.

"좋다. 약속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드래곤 엔티쿠스의 영혼을 풀어주겠노라 약속하겠다. 그러니 밝히도록. 내가 이토록 많은 업무에서 벗어나 퇴근할 수 있을 비결을."

"제게 공사 하나를 맡겨주시면 됩니다."

"공사를?"

"예."

지옥왕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됐다.'

그는 지옥왕 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예상대로 지옥왕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건 통할 줄 알았지. 어차피 지옥왕이나 나나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제안이니까.'

지옥왕은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퇴근 후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자신은?

드래곤 엔티쿠스의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용왕 베르키스의 후원을 받으며 무한의 재물과 여벌의 목숨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공사 하나만 제대로 치러내면 그 모든 게 실현되는 거야.'

로이드는 입맛을 촵촵 다셨다.

프론테라 영지에 차곡차곡 쌓은 꿀단지.

그게 무한의 재물로 절대 깨지지 않게 된다.

심지어 그걸 두 개의 목숨으로 더욱 알차게 누릴 수 있으리라.

평생 절대적으로 유지될 탱자탱자 백수, 갓수, 건물주의 꿈이 실화가 되는 것이다.

그 야물딱진 꿈을 안고서 그가 말했다.

"우선 지옥왕께 하나 여쭙겠습니다. 지옥의 판결 업무는 오로지 지옥왕께서만 내릴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만."

"하면 지옥의 왕께서는 판결 업무가 너무 많아서 퇴근을 못 하고 계신 겁니까?"

"그건 아니다."

지옥왕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옥의 왕이자 망자들을 심판하는 자. 당연히 내 지닌바 능력이 영혼을 판결하는 일이니, 그 일에 치여 퇴근을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설령 하루에 판결해야 하는 영혼의 숫자가 수십, 수백, 수천조에 달한다 해도 말이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지옥왕이 매일 판결하는 영혼의 숫자는 실로 아득할 정도였다.

매일 죽는 인간의 영혼?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동물과 미물도 나름의 영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옥왕의 판결을 거치는 단세포 생물, 박테리아의 영혼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를 자랑했다.

실제로 매일마다, 행성의 바다에 서식하는 박테리아 전체의 40%가량이 파지 바이러스에 의해 사멸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들을 판결하는 일은 쉬워. 너무나 단순한 영혼들이라 인과의 과오를 지니지 않은 존재들이거든. 그러니 복잡한 인간의 영혼과 달리 천국으로 보내느냐, 지옥에 선별해서 가두느냐 고민할 필요가 없어. 그냥 하루에 들어오는 억겁에 달하는 숫자를 모조리 뭉뚱그려 지옥의 끝자락에 있는 환생의 문으로 밀어 넣으면 되지. 그러기 위해선? 판결 한 번이면 충분해. 다만-"

펜대를 들어 보이던 지옥왕.

그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이 지옥성에서부터 환생의 문이 있는 지옥의 끝자락, 그곳까지 영혼을 호송하는 일이 문제야. 혹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문제를 들은 건가?"

"예, 솔직히 밝히자면 그렇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다.

지옥성을 찾기 위해 두들겨 패서 포섭(?)했던 사탄 파겐티.

놈에게 전해 들은 정보 덕분이었다.

"호송해야 하는 영혼의 숫자는 어마어마한데,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서 문제라고 하더군요. 곳곳에 들끓는 용암 때문에 도로를 제대로 닦을 수도 없노라 들었고 말입니다."

"그래, 정확하다. 그게 바로 내가 일에 얽매여 있는 이유지."

"매일 바뀌는 도로 사정 때문에 호송로를 설정하느라 바쁘신 것이겠군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그 업무를 총괄하기 때문이지."

지옥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일 용암에 녹아내리는 길.

그 서슬에 매일 바뀌는 영혼 호송로.

그걸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점검해야 했다.

매일, 매시간 새 호송로를 배정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수하로 부리는 사탄들에게 일을 맡겨놓아도 마찬가지였다.

"영혼 수레를 끄는 현장의 사탄들에게서 거의 분 단위로 보고가 올라오지. 호송로가 막혔다고. 용암에 녹았다고. 수레가 지나갈 수 없다고. 새 길을 정해달라고. 그걸 정해주면? 또 몇 분 뒤에 비슷한 내용의 보고가 올라와. 그럼 또 새 호송로를 정해줘야 하지. 한데 그렇게 영혼 수레를 옮기는 사탄의 숫자가 얼마인지 아나? 무려 팔십만이야."

"...."

"아주 골치 아픈 일이지. 팔십만의 사탄이 각각 분 단위로 내게 보고와 요청을 하느라 아우성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 많은 사탄을 실시간으로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지옥의 왕인 나밖에 없어. 한데 그 일들을 처리하는 게 조금이라도 밀려서 호송이 늦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분명 대참사가 일어날 테지."

"대참사라 하심은?"

"박테리아들의 영혼을 지옥의 끝자락 환생의 문에 넣지 못하면 행성의 생태계 전체를 떠받치는 박테리아 대다수가 환생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거지. 세포 분열이 중단되고, 죽어서 비는 숫자를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이야. 미생물 먹이사슬이 뿌리부터 무너지는 셈이지.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겠나?"

"뭐, 대멸종 사태가 발생할 것 같은데요. 행성 전체에."

"바로 그거다. 그걸 막고자 내가 67만 년 동안 업무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고."

"으음, 그럼 67만 년보다 이전에는 어땠던 겁니까?"

"어땠긴. 지금과 똑같았어."

"똑같았다니요?"

"전임자가 나와 똑같이 일하고 있었다고."

"전대 지옥왕이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래. 전대 지옥왕. 끝내 자살했지. 거의 38억 년 동안 퇴근을 못한 나머지 우울증에 걸려서."

"...."

로이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옥왕의 미소가 더욱 씁쓸해졌다.

"한데 네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래, 어떤 공사지? 대체 어떤 공사를 치르면 저 빌어먹을 호송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냐."

어쩐지 씁쓸하다 못해 한이 서린 듯한 지옥왕의 물음.

그 물음 앞에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털어냈다.

'후아. 파겐티, 그 사탄 놈한테 들어서 영혼 호송 문제가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건 좀....'

막상 들춰보니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부담이 큰 문제였다.

무려 행성 생태계의 운명(?)을 짊어진 택배에 연관된 문제였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제를 예상하던 순간부터 해법 또한 고민했으니까.

지옥성까지 오는 동안 나름 그 해법을 떠올렸고, 가다듬었으니까.

"감히 그 답을 지옥의 왕께 말씀드리자면-"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지옥왕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이참에 철도 하나 까시지요."

"철도?"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왕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철도라. 김수호의 세상에만 있을 물건이겠군."

"...아, 예."

로이드는 어깨를 움찔했다.

지옥왕이 자꾸 김수호라는 이름을 언급하니 옆에 있는 하비엘의 눈치가 보였다.

혹시나 하비엘이 미심쩍게 여기지 않을까.

괜히 켕기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무려 지옥의 왕을 상대로 공사를 따내려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그 협상이 바야흐로 결정적인 국면에 도달한 순간이다.

'집중, 집중하자.'

로이드는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철도를 깔아서 활용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지.

그 장점이 어떤 식으로 지옥의 영혼 호송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

지옥왕에게 제대로, 효과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아니, 아주 세뇌를 시켜야 한다.

'후우, 그러니까 이건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래. 교수님 앞에서 하는 발표야.'

모든 발표의 시작은 관심을 끄는 것부터.

관심을 끌기 위해 강렬하고 상큼한 이미지의 네이밍을 하는 것부터.

그렇게 승부의 포인트(?)를 잡은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감을 장착한 눈빛으로.

지옥왕을 당당히 마주 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지옥철도 666' 프로젝트를 소개하겠습니다."

232화. 지옥철도 666 (2)

 

 

철도의 역사는 길다.

의외로 제법 많이 길다.

끝도 없이 줄줄이 이어지는 기차처럼.

철도의 역사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

'진짜야. 가장 원시적인 철도의 기원을 따라가면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600년경까지 올라가니까.'

BC 600년 무렵, 그리스 코린트 지방 해협에 어느 마차길이 있었다.

한데 이 마차길은 보통의 길과 남다른 점이 있었다.

길을 따라 바닥에 홈이 두 줄로 기다랗게 패여 있었다.

한데 이 홈의 간격이 수레의 바퀴 간격과 일치했다.

즉, 수레바퀴가 홈을 따라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지극히 초창기적인 철도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일까. 비슷한 사례는 더 있지.'

AD 400년 무렵, 동로마 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심지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 반대편의 고대 중국에도 흡사한 원리의 홈이 파인 수레길이 있었다.

'전국시대였지. 날마다 투닥거리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대량의 물자를 옮기는 데에 그 수레길을 사용했어. 게다가 나라마다 수레길 바퀴 홈의 규격이 달랐다지. 적국이 자기 나라의 영토를 차지했을 때, 자기네 수레길을 사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그렇듯 인류는 역사의 초기 시대부터 원시적인 철도의 원리를 깨우쳤다.

그리고 그 철도의 원리가 산업화의 물결과 만났을 때.

비로소 현대적인 철도가 인류의 생활을 영원히 바꾸었다.

'산업화의 첨병. 대규모 제조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 발전의 원동력. 국가 총력전의 밑바탕. 그 모든 개념에 철도가 필수요소로 들어가 있어.'

사실이었다.

인류가 지닌 수많은 운송 수단.

자동차, 선박, 비행기 등등.

그걸 모두 통틀어도 철도만큼 효율적인 운송 수단은 단연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동차?

당장 서울 시내에서 답이 나온다.

먼 거리의 시내를 이동할 때.

혹은 서울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갈 때.

시내버스로만 다닐래, 전철 타고 갈래? 하고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이 전철을 선택할 것이다.

게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한 번만 타보면?

더욱 온몸으로 기차의 편리함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박은?

'한 번에 대량의 물자를 나를 수 있지. 분명히 좋아. 하지만 제한적이야. 물이 없으면 띄울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국가 영토 내에서의 운송에서 선박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커질 수가 없을 터였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지.'

일단 비싸다.

너무 비싸다.

이착륙 때문에 무게에 민감한 항공기의 특성상 한꺼번에 많은 물자를 나르기가 어렵다.

게다가 태풍이나 각종 악천후에도 취약하다.

그렇듯, 각각의 운송수단은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철도는?

'효율성만 따지면 거의 완전체에 가까워.'

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박처럼 한 번에 많은 물자를 척척 나를 수 있다.

자동차와 같은 교통체증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비행기처럼 악천후에 운행이 중단되는 일도 없다.

저렴하고 정확한 대량 운송.

철도에는 그런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단, 철도를 건설하는 초기 비용, 그에 관련된 인프라를 구축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지금까지 네가 설명한 그 철도라는 것을 건설하는 데에 드는 비용 말인가."

"그렇습니다."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 서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옥성이 그 정도 비용에 허덕일 일은 없겠지요."

"뭐, 그렇긴 하다만."

지옥의 왕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철도. 효율적인 운송. 다 알겠는데. 그걸 여기서 어떻게 깔겠다는 거지?"

"혹시 곳곳에 흐르는 용암을 우려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지옥왕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쪽의 말대로라면 그 철도라는 것, 강철을 제련해서 까는 것이라고 했지 않나. 그런데 곳곳에 용암이 가득한 지옥의 땅에 철로를 깔아봤자 금방 녹을 텐데."

"예, 확실히 그럴 겁니다."

"그럼 대안이 있다는 소리로군?"

"물론이지요."

"알려줄 수 있나?"

"영업비밀입니다."

"자신이 없어서 숨기는 것은 아니고?"

"믿어 주실 자신이 없으면 일을 안 맡기시면 됩니다."

"...."

지옥의 왕, 헬카로스는 로이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을까.

'김수호.'

지옥왕은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로이드의 정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로이드, 아니, 김수호가 이곳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종의 이유로 차원을 넘어 이곳 세상에 끼어든 영혼이라는 것을.

그래서 가소로웠고, 기가 찼고, 흥미로웠다.

끼어든 영혼인 주제에 설치는 꼴이 가소로웠다.

감히 자신 앞에서 대담하게 협상을 벌이는 꼴이 기가 찼다.

그런데 저렇게 설명하는 철도라는 개념은 또 흥미로웠다.

아니, 구미가 당겼다.

'만약 저 설명대로라면... 흐음, 충분히 이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옥왕은 생각했다.

방금 들은 철도의 원리.

철도가 지니는 장점과 단점.

그중에서도 장점이 어떤 식으로 지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가능하겠어. 저자의 말대로라면 말이지.'

수백 대의 수레를 개조해서 일렬로 이으면 된다.

그게 기차가 될 것이다.

기차가 움직일 동력은?

바퀴에 도르래와 레버를 연결하면 될 것이다.

사탄 수십 마리를 태워서 교대로 레버를 밀고 당기게 하면 된다.

마치 레버로 노를 젓는 것처럼.

사탄의 힘으로 열차가 움직이리라.

'그렇게 하면 영혼 호송에 훨씬 적은 숫자의 사탄만 투입해도 되겠지. 팔천 마리쯤? 그 정도만으로도 80만 마리의 사탄들이 각각의 수레로 영혼을 옮기는 지금과 비슷한 양의 영혼을 호송할 수 있을 것이야.'

지옥왕의 계산이 팽팽 돌아갔다.

훨씬 적은 인력으로 많은 영혼을 호송한다.

그렇게 남게 된 잉여 사탄은?

철로의 관리에 투입하면 된다.

아니, 그래도 잉여 사탄이 제법 남을 것이다.

'그놈들은 내 업무를 보조하도록 하면 되고.'

지옥성에는 잡다한 업무가 많았다.

지옥왕의 판결 보조.

영혼들의 업적과 악행 기록 정리.

판결을 받으려 대기하는 영혼의 순번 배정.

판결 후의 지옥행, 천국행, 환생행 영혼들을 나누는 일까지.

'그런 잡무들을 모두 떠맡기는 거지. 게다가 내 일도 한결 줄어들 거야. 안정적인 철도 덕분에 멍청한 사탄들에게 매번 새 운송로를 지정해주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어지니까.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모든 잡무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냥 영혼들을 판결하기만 하면 된다.

가장 기본적인 일거리만 남는 것이다.

그 말은 즉....

'퇴근.'

 

두근!

 

지옥왕의 가슴이 콩당콩당 수줍은 32비트 휘모리장단으로 뛰었다.

퇴근할 수 있다.

무려 67만 년 만에.

지긋지긋한 야근에서 벗어나.

여지껏 보호필름도 떼어보지 못한 집 현관문 잠금장치를 작동할 수 있다.

그렇게 현관을 열고 들어가서.

마침내 구두를 벗고.

따뜻한 용암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마력의 영혼구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저녁 내내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헬튜브, 헬플릭스, 헬챠, 거기에 헬이버 시리즈까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는데.'

 

꿀꺽.

 

상상만 해도 두근거렸다.

생각만 해도 상큼하고 아찔했다.

한편으로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8억 년의 혹사 끝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전임자.

그런 전임자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는 깊은 불안감.

하지만 끝내 그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암담함.

지금까지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온 지옥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는 오랜 시간 품어왔던 먹구름 같은 불안감과 암담함이 가슴속에서 조금씩 걷히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옥의 왕이 이전과 달라진 눈길로 로이드를 굽어본 것은.

전에 없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대답한 것은.

"좋군."

"예, 그 말씀은...."

"김수호, 너를 믿고 철도 공사를 맡기겠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고개를 넙죽 숙였다.

고객님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니 다음 차례는....

"공사 발주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

"아이쿠,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로이드는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역시 지옥왕이다.

공평한 판결과 거래의 아이콘이라더니.

이쪽이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먼저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한다.

'이런 고객이 제일 편해.'

로이드는 만족하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당부드릴 일이 있습니다."

"당부? 내게?"

"예. 이번 공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어떤 일이지?"

"간단합니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옥의 끝자락에서 노래를 부른다, 라는 소식을 지옥 전체에 알려주시면 됩니다."

"흐음,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예. 시공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협조가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해줘야겠지. 좋다. 지옥 전체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로이드는 평소대로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쪽은 지옥왕이 요구하는 자리에 철도를 깔아주는 것.

지옥왕은 철도 건설이 끝난 후 고룡 엔티쿠스의 영혼을 석방해주는 것.

그것이 계약서에 기재된 조건이었다.

조건이 심플한 만큼 따로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내용 확인을 마치고, 서명을 하고, 각각의 계약서를 나누어 가지는 걸로 계약이 맺어졌다.

지옥왕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군. 계약이라는 성과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그쪽에게 철도에 관한 설명을 듣고 계약을 하느라 20분 정도를 허비했는데 말이지."

"20분을 허비했다고 하시면...."

"그 시간만큼 영혼 호송이 밀렸지. 그만큼 세계의 미생물 분열 증식이 지체되고 있고."

"...."

"미생물 생태계 붕괴로 인한 대멸종 발생 가능성이 1퍼센트 정도 늘어났다고나 할까."

"헉."

"뭘 그렇게 놀라나. 이제 계약을 맺었으니 당장 시공지로 보내주도록 하겠다."

"시공지로 말입니까?"

"그래. 직접 이동하면 그만큼 시일이 낭비될 테니 당장 보내주도록 하지."

지옥의 왕이 손짓했다.

그 손짓을 따라 붉은 파장이 생겨났다. 번졌다. 스미듯이. 이쪽과 하비엘의 전신을 휘감았다.

"지옥의 끝자락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철도를 건설하며 이곳까지 오면 되겠지? 그럼, 철도가 완공되는 날 재회하도록 하지."

지옥왕의 그 말과 함께였다.

 

파아앗!

 

"...!"

전신을 휘감은 붉은 파동이 빛났다.

폭발하듯이 번득였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전신이 허공에 붕 뜨는 느낌.

잠깐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더니.

낯선 땅에 두 발을 딛게 되었다.

 

터턱!

 

"헐."

로이드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잠깐 파팟, 부웅, 턱, 했더니 주위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옥성?

그런 건 이제 없었다.

눈앞에 있던 지옥왕도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가 지옥왕이 말한 지옥의 끝자락인 것 같군요."

"어, 동감이야."

옆에서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로이드는 조금은 안심되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순간이동 비슷한 걸로 우릴 여기까지 보낸 거겠지. 지옥은 지옥왕의 영토니까.'

그는 앞쪽을 둘러보았다.

화산재 가득한 평원에선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사이사이로 유황 냄새 가득한 연기가 풀풀 올라왔다.

드문드문 덜 굳은 용암 연못도 보였다.

황량하고 황폐한.

전형적인 지옥 풍경이었다.

반면 뒤쪽은 조금 달랐다.

"여기가 지옥의 끝인가 보네."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로이드는 지옥 끝자락의 광경을 보았다.

지옥 끝자락은 난간도 없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낭떠러지였다.

그 건너편은 절대적 공허를 자랑하는 어둠 그 자체.

'저기 빠지면 어떤 꼴이 될지 상상도 안 되는구만.'

행여나 저기로는 절대 빠지지 말자.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지옥의 끝자락 낭떠러지에서 알뜰하게 서른 발짝 물러났다.

한데 그때였다.

하비엘이 물음을 던져왔다.

"로이드 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궁금한 거?"

"예."

"뭔데."

"김수호가 누굽니까?"

"...쿨럭! 콜록, 켁!"

"괜찮으십니까?"

"아, 어,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여기 공기 진짜 안 좋네."

"...."

로이드는 너스레를 떨었다.

하비엘은 웃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이상합니다. 아까 지옥왕 말입니다. 자꾸 로이드 님을 김수호라는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던데 말입니다."

"아, 그거?"

"예."

"그러게. 내가 봐도 좀 이상해. 그렇지?"

"그렇습니다. 로이드 님에게는 엄연히 로이드 프론테라라는 이름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로이드 님도 김수호라는 호칭이 뭔지 모르는 겁니까?"

"당연하지. 나라고 그게 뭔지 알겠냐. 뭐, 지옥에서 쓰는 호칭 중에 하나인 거겠지, 아마도."

"그렇습니까."

"어. 그렇지."

"그렇군요."

"아마도?"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행여나 입꼬리가 어색하게 떨리지 않도록.

행여나 쿵덕거리는 심장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나름 표정관리에 애쓰며 시치미를 떼었다.

한편으로는 지옥왕을 향한 비방도 잊지 않았다.

'와나. 식겁했네. 지옥왕 그 양반 진짜 악질 아냐? 왜 거기서 자꾸 사람 본명을 막 부르고 난리야.'

다음에 지옥왕을 만날 때는 하비엘은 좀 따로 떼어놔야겠다.

그렇게 로이드는 내심 다짐했다.

다행히 하비엘은 이미 다른 화제를 입에 담고 있었다.

"한데 말입니다.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뭔데."

"대체 여기에 철도를 어떻게 건설할 생각인 겁니까."

하비엘의 손이 지옥의 드넓은 대지를 가리켰다.

온통 화산재가 쌓인 땅.

곳곳에 용암이 고인 땅.

그래서 엄청난 온도로 이글거리는 대지.

"아까 로이드 님이 지옥왕에게 설명한 철도라는 거,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 철도, 열차 바퀴의 규격에 맞춘 기다란 철로를 까는 것이 핵심이라고 하셨지요."

"어, 맞아."

"한데 이곳을 보니 철로가 멀쩡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말입니다."

"어, 그것도 맞아. 적절한 의문이야. 계속해 봐."

"예. 쇳덩이로 만든 철로를 이곳에 깐다면, 제가 생각하기엔 이곳의 열기 때문에 철로가 녹을 것 같습니다. 녹아서 흐물거리고, 변형되고, 그러면 열차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 맞아. 게다가 여기, 철로를 놓을 지반도 제법 불안정할 거야. 온통 용암이 깔려서."

"그럼 대체 어떻게 공사를 치르실 생각인 겁니까."

"다 생각이 있어."

"그 말씀은 설마, 지옥왕을 상대로 사기를 치신 겁니까?"

"워어. 지옥왕한테 사기?"

"예."

"넌 날 어떤 막장으로 봤길래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로이드가 빙글거리며 물었다.

하비엘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야비하고 치사한 사람입니다. 쪼잔하고 경우를 모르는 인간입니다. 때론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잔머리만 굴려대는 한심한 모리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

"제 말이 틀렸습니까."

"...차라리 뼈를 부러뜨리지 그러셨어요."

"그럴 순 없습니다. 로이드 님의 뼈를 부러뜨리는 건 엄연한 하극상이며 폭력이니까요."

"세상엔 언어폭력이란 것도 있는 거거든?"

"그건 로이드 님이 잘하시는 분야인 것 같습니다만."

"어허. 나처럼 순수하고 프레시한 영혼의 소유자한테 무슨 그런 망발을."

"순수하거나 프레시한 줄은 모르겠고, 여자복이 터진 분이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여자복이 터져? 내가?"

"예."

"그게 무슨...."

"다 터져서 없으니까 말입니다."

"...."

"어쨌거나, 철도를 건설할 방법을 생각해두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사람 실컷 패놓고 말 돌리지 말지?"

"돌리고 싶습니다."

"헐."

"돌리면 안 됩니까?"

"그래, 돌리자, 돌려. 후아."

로이드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녀석, 분명 즐기고 있다.

이젠 아주 이쪽을 모시는 일이 익숙해지다 못해 즐기는 경지(?)에 다다른 게 틀림이 없다.

'어오, 그렇다고 이걸 쳐낼 수도 없고 진짜.'

언젠가 이 상처(?)는 수백 배로 돌려주리라.

로이드는 내심 야물딱지게 다짐했다.

그리고 눈앞의 문제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철도를 건설할 방법이 궁금하시다?"

"예. 그렇습니다."

"뭐, 간단해."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내심 그려둔 지옥철도 666 건설 프로젝트.

그걸 실행할 첫 번째 방법을 말했다.

"일단 지옥 곳곳에 있을 방구석 백수 사탄들부터 수만 명쯤 모으면 돼."

233화. 사탄은 굴려야 제맛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