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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화. 지옥철도 이용권 (2)

 

 

"로이드 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물어봐."

"어째서 혼자 가시는 겁니까."

"지옥성에?"

"예."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밍이의 등에 올라탄 로이드를 향해 물었다.

"혹시 제가 여기 혼자 남아서 할 일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당연히 있지. 왜 없겠어."

로이드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피어났다.

"넌 여기 지켜야지. 내가 지옥왕한테 보고하러 다녀오는 동안. 세상 일 모르는 거잖아. 지난번 같은 용암 거인이 또 와서 난동을 부릴 수도 있는 거고. 기껏 완공한 철도가 박살 날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

"역시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니, 뭐가?"

"저는 로이드 님이 절 이곳에 버려두시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만."

"헐. 진심이세요?"

"예. 로이드 님은 언제든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날 대체 어떻게 봤길래."

"야비, 쪼잔, 뒤끝."

"...이젠 아주 요약까지 하는구나."

"그게 편하니까요. 어쨌건-"

은발의 기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로선 드물게 싱긋 미소를 그려냈다.

"그럼 저는 명대로 여길 지키고 있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어, 그래. 혹시나 내가 너 버리면 알아서 집에 찾아오고."

"알아서 찾아가라니, 어떻게...."

"저거 있잖아."

로이드가 이죽거리며 하늘을 가리켰다.

지옥 상공.

그곳에 헬게이트가 활짝 열려 있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저거 닫을 일 없거든? 저기서 차가운 바람 나와 주는 게 이 일대의 기온 하락에 유리할 거니까. 용암이 조금은 더 빨리 굳을 거고, 그만큼 철로와 지반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거니까. 그래서 저거 계속 열어둘 거거든."

"그럼 설마."

"응, 그 설마. 내가 널 왜 버리냐. 여차하면 너 그냥 저 헬게이트 넘어가면 돼. 그럼 간단하게 지옥 탈출할 수 있는 거잖아? 물론 건너편은 극지방이니까 좀 춥긴 하겠지만, 설마 그랜드 마스터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죽진 않겠지?"

"...."

"그러니까 저기서부터 헤엄쳐서 프론테라 영지까지 오면 되겠네. 와아, 박수."

"...."

"크흠."

"...."

"미안, 농담이야."

"충분히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어, 들켰나."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게 농담이라는 것도 들키셨습니다."

"쳇. 쓸데없이 눈치 빠른 녀석."

"감사합니다. 그럼 얼른 다녀오시죠."

"오냐."

로이드는 꼬밍이를 이륙시켰다.

그 뒤로도 한동안 말없이 날았다.

그렇게 지옥의 가장자리와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아. 성공했다."

하비엘 놔두고 혼자 지옥성 가기, 성공.

'행여나 호위 때문에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녀석이 그런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과 함께 지옥성에 가는 일이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지옥왕을 만나야 하니까. 그런데 지옥왕, 자꾸 날 김수호라고 대놓고 불러대니까.'

그게 불편하고 불안했다.

하비엘은 눈치가 둔한 녀석이 아니었다.

지옥왕이 거듭 이쪽을 부르는 이상한 호칭에 의문을 느끼게 될 것이 뻔했다.

'가급적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어.'

행여나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다.

그러면 하비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쪽을 어떤 태도로 대하게 될까.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하고 꺼려졌다.

'하지만 어쨌건, 녀석 없이 혼자 지옥왕을 보러 가게 돼서 다행이야.'

그 생각을 하자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때였다.

그의 품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이윽고 안주머니 속에서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 ...야, 이제 근처에 아무도 없지? 그럼 이럴 때만이라도 나 좀 꺼내 주면 안 되나?

그동안 안주머니 속에 숨겨 두었던 녀석.

망나니 프론테라의 망령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 안 돼."

- 어째서!

"귀찮아서."

- 뭐?

"너 꺼내 주면 또 징징거리고 매달릴 거잖아. 안 그래?"

- 야, 그건!

"맞네. 그래서야. 안 꺼내 줄 거야. 시끄럽고 성가실 거니까."

- 하. 이 새끼, 그래서 날 여기 계속 가둬 두시겠다?

"가둬 둔다는 건 어감이 좀 그렇고. 보호라고 하자."

- 그게 그거잖아! 으읏, 이익!

안주머니 속에서 뭔가가 막 투닥투닥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안주머니 단추가 뾱, 하고 열렸다.

프론테라의 망령이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후우! 으으! 답답해서 뒈질 뻔했네, 진짜!

"...."

- 새끼, 정색하면서 쳐다보기는. 안 나갈 거야. 그냥 이렇게 고개만 좀 내밀고 있을 거라고. 이것도 안 되냐? 엉?

"후우."

- 한숨은 내가 쉬고 싶다, 인마. 생각 좀 해 봐라. 나 벌써 한 달째 안주머니에 갇혀 있었다고. 저 뽀동인지 뭔지 하는 것들한테 찌그러져 있었단 말이다.

"따뜻하고 폭신하고 포근해서 좋았겠네."

- 좋기는 지랄.

"...."

- 그래서 한 달 만에 고개 좀 내밀고 바깥 공기 마셔 보겠다는데, 그것도 못 하게 해? 이 새끼야,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어, 사람이야. 넌 망령이고."

- ....

"방금 욕하려고 그랬지?"

- 당연하지!

"그런데 반사적으로 떠올린 게 부모 욕이어서 멈칫했던 거냐, 설마?"

- ...어오. 재수 없게 눈치 빠른 새끼.

"고마워. 재수 없게 여겨줘서."

- ....

망령 프론테라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린 로이드도 만족스러운 고요함을 즐겼다.

그렇게 말없이 얼마나 한참을 날았을까.

망령 프론테라가 먼저 침묵을 깼다.

- 야, 가짜.

"...."

- 어이.

"...."

- 아, 진짜. 대답 좀 하지?

"이름을 불러야 대답을 하지."

- ...이봐, 로이드. 됐냐?

"어. 용건이 뭔데."

- 날 도와주겠다던 일 말이다.

안주머니 입구에 두 팔을 걸친 채 바깥 풍경을 보던 망령 프론테라.

녀석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모처럼 진지한 눈길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로이드는 깨달았다.

지난 한 달 내내 잠잠했던 녀석.

그랬던 녀석이 새삼스럽게 억지를 쓰며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유.

그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구나 싶었다.

'내 철도 공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자길 도와줄 차례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대로 지옥에서 떠날까 봐 불안해하는 건가.'

아마도 둘 다겠지.

그래서 굳이 억지까지 써가며 대화할 타이밍을 잡은 거겠지.

과연 녀석이 미심쩍다는 듯 물어왔다.

- 어떻게 된 거냐? 방법 찾아보겠다더니.

달갑지 않은 질문이다.

아니, 사실은 난처한 질문이다.

로이드는 태연한 척 대꾸했다.

"아직 못 찾았어."

- 뭐? 아직도?

"어."

- 왜 못 찾았어?

망령 프론테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로이드의 콧등도 덩달아 찡그려졌다.

'쯧, 이래서 이 녀석과 이야기하는 거, 찜찜했는데.'

자꾸만 묘하게 부채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버리는 놈.

그래서 징징거리는 걸 뿌리치지도 못하게 하는 놈.

성가셨다.

귀찮았다.

그런데 미안했다.

그래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이드는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그냥. 못 찾았어. 진짜로."

- 못 찾았다고?

"어."

- 진짜로?

"어."

- 안 찾은 게 아니라?

"...."

망령 프론테라의 물음이 점점 송곳처럼 느껴졌다.

녀석의 추궁 같은 물음이 계속 이어졌다.

- 너, 솔직히 말해봐. 날 도와줄 방법, 찾아볼 생각이 딱히 없는 거지?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도...."

- 사실이잖아.

"...."

- 너, 그럴 노력을 해 봤어?

"나도 찾아보려고 고민하고 있거든?"

- 거짓말.

"뭐?"

-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고민은 지랄. 너 고민 안 하잖아. 아니, 지옥왕이 시킨 철도인지 뭔지를 어떻게 만들 건지만 온종일 고민하면서 지냈잖아. 안 그래?

"어이."

- 한 달 동안 네 안주머니에서 난 그냥 놀고만 있는 줄 알았냐? 나도 다 듣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날 도와줄 생각, 조금이라도 해 본 적 있냐고, 이 새끼야.

"...어이, 말이 좀 심하다?"

로이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나라고 너 도와주는 게 쉬운 거 아니잖아. 솔직히 너도 방법을 모르잖아. 그런데 그걸 내가 찾아보겠다는 거잖아. 한데 그게 한 달 만에 뚝딱하고 찾아지겠냐. 안 그래?"

- 하. 말은 잘한다. 변명하고 자빠졌네.

"뭐? 변명?"

- 그래. 변명.

망령 프론테라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 내가 네 본심을 모를 것 같냐?

"내 본심이라니."

- 네 급한 일부터 처리하면서 시간이나 좀 벌고. 그 뒤엔 찾아봐도 방법이 안 보인다며 미안한 척하고. 그렇게 날 팽개치고. 그럴 거잖아.

"...."

- 잘살고 있던 사람 몸 빼앗고, 가족도 빼앗고, 다 빼앗아 가 놓고 이젠 망령을 가지고 놀기까지 하시네. 하, 빌어먹을 새끼. 가증스러운 도둑놈 새끼.

"야."

- 왜. 할 말 있으면 해 보시든가.

"말 그렇게 하지 좀 말자.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 안 달라져. 그래서 이러는 거야.

"뭐?"

망령 프론테라의 이죽거림이 짙어졌다.

- 어차피 나 안 도와줄 거잖아. 다 안다고, 이 새끼야.

"...하, 진짜. 계속 사람 죄인 취급만 하기냐."

- 당연하지. 아니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어?

"진짜 내가 이런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결국, 로이드도 참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어차피 나한테 몸 안 빼앗겼어도 너, 1년 반 뒤엔 죽을 운명이었어. 알고는 있냐?"

- 뭐?

"네가 매일 행패 부리던 단골 주점. 거기 골방에서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면서 죽을 운명이었다고."

- 이 새끼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더 말해 줘?"

- ....

망령 프론테라의 입이 다물렸다.

로이드의 입이 열렸다.

차마 꺼내지 않았던 말들을 꺼냈다.

자신이 철혈의 기사를 읽으며 보았던 프론테라 남작가문의 몰락.

로이드 프론테라와 남작부부, 줄리앙의 비참했던 최후.

그 모든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했다.

그동안 망령 프론테라는 침묵을 지켰다.

그저 묵묵히 로이드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로이드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쓰라린 웃음을 토해 냈다.

- 하. 그래서.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

- 그래, 많이 봐줘서 믿는다고 치자.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이 새끼야. 내 가족들 죽을 운명 바꿔 줘서 고맙다고 절이라도 할까?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거야? 엉?

"칭찬은 개뿔.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 그럼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 너도 알고 있으라고. 당사자니까."

로이드는 칼로 자르듯 말했다.

이 녀석과의 언쟁, 지친다고 생각하며.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 도둑놈 맞아. 쌍욕을 해도 할 말 없어. 지금도 그래. 솔직히 널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감도 안 잡혀. 막막하고 막연해. 그런데 그게 잘못이냐?"

- ....

"그래, 그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널 도와줄 방법을 못 찾으면 너한테 죄인이 되는 거겠지. 그런데 어떡하냐. 못 찾으면 그냥 못 찾는 대로, 죄인인 채로 잘 먹고 잘 살아 버릴 건데. 그럼 그냥 죽을까? 그건 아니잖아. 그거 말고는 나도 방법이 없을 건데."

- ....

"이젠 나도 모르겠다. 나도 나름 노력은 했는데. 네 몸에 들어온 뒤로 이만큼이나 했는데. 그래도 계속 내 탓만 하는 거면 나도 뭘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안 그러냐."

-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었던 거. 몸을 빼앗은 대신 가족이라도 살게 해 줬으니 감사하라는 뭐, 그런 건가?

"야, 그런 뜻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한텐 똑같은 소리지.

"그게 무슨...."

로이드는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반박하려고 녀석에게 눈길을 던지는 순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망령 프론테라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아냐. 네 말대로 1년 반쯤 뒤에 내가 죽었다면, 주점 골방에서 피를 쏟으면서 죽었다면, 그래도 최소한 지옥에 와서 판결은 받을 수 있었겠지?

"...."

- 그래. 네 말대로 내가 죽었다면 차라리 지옥의 벌을 받을 수라도 있었겠지.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환생할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겠지. 그런데 지금 나는? 뭐지? 왜 이런 꼴인 거지? 이승과 저승,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망령인 채로. 어째서 환생도 못하고 영원히 이런 꼴로 떠돌아야 하는 거냔 말이야.

"어이...."

- 됐어. 추하게 징징거려서 미안했다, 새끼야. 네 할 일이나 하고 꺼지시든가.

거기까지였다.

망령 프론테라는 주섬주섬 안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는 고개를 내밀지도 않았고, 꺼내달라고 어거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로이드는 복잡한 기분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말없이 꼬밍이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비행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렇듯 불편한 비행의 끝이 곧 다가왔다.

지옥성에 도착했다.

익숙한 진입로를 지나 지옥왕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지옥의 합당한 지배자를 뵙습니다."

지옥왕 앞에 예를 표했다.

집무실은 여전히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사무용 의자.

그보다 더 커다랗고 심플한 책상.

그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그리고 숨 가쁘게 업무를 처리하다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는 지옥왕의 눈길까지.

"왔나. 용건부터."

저 일 더미에 찌든 태도 또한 여전하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예, 일전에 제게 맡기신 철도 공사를 모두 완료하였습니다."

"그런가?"

"예, 지옥의 지배자시여."

"내가 알기로는 용암 거인도 때려잡았던데."

"예, 그렇습니다."

"고생이 많았겠군."

"예.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허. 겸손을 부리지도 않는군."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가. 어쨌건 잘 알았다. 덕분에 철도 시공의 노하우도 상당 부분 익힐 수 있었고."

"설마, 제 시공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당연하지."

어느새 펜과 서류를 내려놓은 지옥왕.

무테안경 너머로 그의 눈길이 번득였다.

"기본적인 원리 정도는 익혔달까. 덕분에 철로를 유지보수할 방법도 대강은 알 것 같고."

"제가 따로 알려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상세히 알려주면 더 고맙고. 그에 대한 보수도 충분할 테고."

"보수 말입니까?"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지옥왕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그걸 들으며 로이드는 몰래 주먹을 쥐었다.

'역시 지옥왕이야.'

공짜를 싫어하며 기브 앤 테이크를 선호하는 성격이라더니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왕의 말이 이어졌다.

"김수호. 네가 철도를 관리할 노하우를 내게 알려준다면, 나는 너에게 지옥철도를 이용할 1회의 권한을 주도록 하지."

"지옥철도 이용권을 말입니까?"

"그렇다."

지옥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용권을 사용한다면, 미래에 네가 죽었을 때, 행여나 죄를 많이 지어 연옥에 떨어지는 판결을 받더라도 한 번은 무조건 지옥철도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은...."

"지옥철도를 타고서 지옥의 끄트머리, 환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지."

"헐."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옥왕이 주겠다는 지옥철도 1회 이용권.

이 보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덕분이었다.

'이거, 말 그대로 지옥행 1회 면제권이랑 똑같은 거잖아?'

그 어떠한 악인도.

그래서 무조건 지옥의 연옥에 갇혀 고통받아야 할 영혼도.

지옥철도 이용권으로 지옥 끄트머리에 가서 환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무조건 한 번은 형벌을 면제받고 환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쩌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옥 면제권.

이젠 살아서 뿐만이 아니라 죽고 나서도 꿀을 빨 수 있는 수단이 확보되는 건가.

그 생각을 하자 절로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기대 이상의 보상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지옥에 오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멈칫했다.

뭔가가 떠올랐다.

"...."

로이드의 태도가 변했다.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쿵덕거리던 가슴도 차분하게.

가만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보고 있던 지옥왕이 의아함을 느낄 정도의 태도 변화였다.

"김수호, 왜 그러지? 내가 주겠다는 보수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

혹시 지옥철도 이용권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지옥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건 아닙니다. 제게 주신다는 지옥철도 이용권에 불만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뭐가 궁금한 거지?"

"이거, 혹시 말입니다."

로이드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내심 생각을 정리했다.

미련을 버렸다.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물었다.

"제게 주시겠다는 철도 이용권, 이거 쓰면... 갈 곳 없이 떠돌던 망령도 환생할 수 있는 겁니까?"

243화. 떠나는 자와 남은 자 (1)

 

 

"제게 주시겠다는 철도 이용권, 이거 쓰면... 갈 곳 없이 떠돌던 망령도 환생할 수 있는 겁니까?"

"무어라?"

예상치 못한 로이드의 물음.

그 질문 앞에 지옥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지옥의 지배자가 되물었다.

"물론이지. 환생할 수 있다. 애초에 그럴 자격을 주려고 만든 이용권이니 말이다. 한데 그걸 왜 물어보는 것이지?"

"실은... 제가 돕고 싶은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돕고 싶은 녀석이라. 내가 떠올린 바로 그놈인가."

"혹시 짐작하고 계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지옥왕이 피식 웃었다.

"김수호, 너에게 몸을 빼앗겨 지옥을 떠돌던 로이드 프론테라의 망령을 돕겠다는 것 아닌가. 내 추측이 틀렸는가?"

"아뇨, 맞습니다."

로이드는 순순히 시인했다.

어차피 허락을 구해야 할 일이었다.

애초에 딱히 감출 일도 아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짐작이 맞으십니다. 지옥의 지배자께서 하사하실 철도 이용권을 그에게 양보하고 싶습니다."

"어째서지?"

"예?"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내가 내려주는 그 이용권, 그건 결코 가벼운 선물이 아니야. 어떤 경우에라도 한 번은 반드시 지옥의 벌을 면할 수 있는 엄청난 특혜지. 설령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을 극악한 범죄를 수십, 수백 번을 저질렀다 해도 지옥의 형벌을 피하고 환생할 수 있어. 너도 그 가치를 모르진 않을 텐데."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 왜 그런 엄청난 특혜를 그 망령에게 양보하겠다는 건가. 이유가 뭐지?"

"이유는...."

로이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사실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아주 조금은 충동적으로, 그렇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니 고민을 하고 마음을 돌아본다 한들 새삼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로이드는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뭐? 이유를 모르겠다고?"

"예."

대답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냥, 진짜로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런데 이 결정을 내리니 마음이 편해져서.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어서.

그래서 무심결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 물론 아깝기는 합니다. 보세요. 여기, 눈꼬리에 눈물도 맺혔지 않습니까."

"흠, 하긴. 진짜로군."

"예. 진짜 아깝습니다. 제가 왜 이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들지가 않아서 더 이상합니다."

"김수호. 보기보다 멍청한 놈이었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멍청해서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런가."

"예."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엄청난 특혜를 그냥 양보하는 건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후련해졌다.

말로는 아깝니 어쩌니 하는데, 솔직히 별로 아까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쯧. 망나니 프론테라 그놈 때문에 마음 약해져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놈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야. 그놈 징징거리는 게 지겨워서 이러는 거야. 허구한 날 책임져라, 도와달라, 징징거리고, 억지 쓰고, 얼마나 성가신데.'

그러니 이참에 혹(?) 하나 떼어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성가신 혹을 떼는 비용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투자라고.

절대로 호구라서 이러는 거 아니라고.

백작부부 얼굴을 봐서 이러는 거라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야물딱진 마인드 컨트롤을 넣었다.

그런 로이드를 보는 지옥왕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반대로 눈길은 푸근해졌다.

'김수호.'

영악한 놈이다.

그런데 나쁜 놈은 아니다.

그저 워낙 궁핍한 환경에서 악착같이 살아남다 보니 약삭빠른 심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

'탐나는군.'

평소엔 악착같은 놈.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적인 마음까진 잃지 않는 놈.

그러면서도 적당히 자신의 이득은 끝까지 챙기는 놈.

그래서였다.

볼수록 탐이 났다.

'저놈,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빠질 일이 있으면 차라리 옆에 두고 부려먹어야겠어.'

거창하게 자신의 권한을 넘겨준다거나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저 자유롭게 행동할 재량권 정도만 주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의 권한만 부여해도?

'이곳의 헬나이트와 사탄들을 충분히 구워삶겠지. 철도를 건설하면서 보여줬던 모습처럼.'

3만의 사탄을 부려먹던 로이드의 모습.

인상적이었다.

기특한 손주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의 기분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였다.

'넌 나중에 죽으면 반드시 내 곁에 두고 써야겠구나.'

지옥왕은 내심 장래의 스카웃(?) 계획을 다지며 로이드를 굽어보았다.

그가 말했다.

"김수호여. 너는 정말로 환생의 권한인 철도 이용권을 로이드 프론테라의 망령에게 양보할 생각인가?"

"예, 그렇습니다. 지옥의 지배자시여."

"좋다. 너의 뜻을 높이 사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차피 곁에 두고 부려먹을 거라서 환생 권한 따위, 쓰일 일도 없을 텐데.

지옥의 왕은 본심(?)을 숨기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내심 점찍어 둔 미래 지옥의 산업 역군을 향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서명이 새겨진 이용권이다. 이걸 제시한다면 지옥의 어떤 누구도 감히 환생의 문 앞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철도가 운행될 수 있는 것인가?"

"아, 마지막 시험 운행만 해 보면 됩니다."

"시험 운행이라. 서둘러 마치도록. 나도 이젠 67만 년 만의 첫 퇴근을 해보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로이드는 지옥왕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지옥성을 빠져나오자마자 지옥철도 지옥성 정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시험적으로 만들어진 초기형 열차가 있었다.

'후아. 그래도 기대했던 것보단 잘 만들어 놨네.'

철도 공사를 하는 틈틈이 주문해 둔 열차였다.

구조는 매우 원시적이고 간단했다.

기존에 사탄들이 영혼을 나르는 데 쓰던 초대형 수레를 일렬로 연결했다.

수레의 바퀴를 철도 레일에 맞게 개조하고, 화산재와 불똥을 막아줄 뼈대와 천막을 씌웠다.

심지어 동력은 수동이었다.

제일 앞쪽의 열차에서 8명의 사탄이 레버를 열심히 끙차끙차 누르면, 그 힘이 도르래를 통해 바퀴 축으로 전달되어 열차를 움직이게 했다.

그러다가 사탄들이 지치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조의 사탄 8명이 교대를 했다.

그렇게 총 24명의 사탄이 3개 조를 이루어서 교대로 땀 흘리며 추진력을 얻는 8기통, 아니, 8사탄력 생체공학 친환경 추진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지옥 열차의 위용(?)이었다.

즉, 지옥 열차는 정말로 영혼만 와글와글 덜컹덜컹 실어서 지옥의 끝자락으로 옮기기만 하는 역할에 충실한, 그런 개념의 호송 열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승차감 같은 건 기대하지 마라."

- ....

초대형 수레를 개조한 객실.

의자조차 없는 맨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건너편에 앉은 프론테라의 망령을 쳐다보았다.

원래 크기로 돌아온 녀석.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뭐야. 설마 아직도 삐쳐 있는 거야?"

- ....

"뭐. 왜. 뭐. 사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말을 하세요."

- ....

프론테라의 망령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한데 이쪽을 쳐다보는 눈길은 아까와 많이 달랐다.

화가 나서.

억울해서.

막막하고 암담해서.

절박하게 매달리며 화풀이를 하던 예전의 눈길이 아니었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너, 고마운데 아까 나한테 화내면서 쏘아붙인 게 있어서 뻘쭘한 거지?"

- ....

"뜨끔하는 거 보소."

- ...아, 씨. 진짜.

"고마우면 말로 해라. 욕하지 말고."

- 안 고맙거든?

"그래?"

- 당연하지. 뭐가 고맙냐. 사람 놀래키기나 하고.

"하. 놀라기는 했나 보네."

- 그럼 안 놀랬겠냐, 새끼야? 뭐, 이런 생각도 못한 짓을 해 가지고....

"사람 감동하게 하냐고?"

- 감동은 지랄.

"그놈의 성격도 참 지랄."

- 그래서 띠껍냐?

"아니, 후련하다. 이제 볼 일 없어질 거 같아서."

- 그건 나도 동감이다, 이 새끼야.

"그래서 좋아?"

- 당연하지.

프론테라의 망령이 피식 웃었다.

로이드도 똑같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는 사이, 지옥열차가 지옥의 역사에 길이 남을 첫 시범운행을 시작했다.

 

덜컹! 덜커덩! 쿠덕! 덜컹!

 

객차가 엄청나게 흔들렸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과 함께 엉덩이가 욱신거릴 정도로 진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별로 불편해하지 않았다.

낯선 감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 정도면 군대에서 타던 육공트럭이랑 비슷하네.'

온통 골반을 뽀갤 듯이 덜컹대는 딱딱한 감각.

정신없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소음까지.

군대에서 누구나 짐짝 취급을 받으며 종종 타보았을 육공 트럭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승차감이라 할 수 있었다.

로이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프론테라의 망령을 쳐다보았다.

"어이, 혹시 멀미할 거 같으면 말해."

- 왜?

"천막 걷어 줄게. 고개 내밀고 밖에 토하라고."

- ...확 천막 밖으로 걷어차 버릴까.

"그런 식으로 달려들다가 역으로 털렸던 건 벌써 까먹었냐."

- 안 까먹었다, 새끼야.

"그럼 얌전히 환생이나 하러 갑시다. 그나저나 어떠냐, 이 열차의 역사적인 첫 승객이 된 기분은?

- 뭐, 그닥.

프론테라의 망령이 턱을 북북 긁었다.

-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고 싶네.

"술?"

- 어.

"그동안 못 마셨던 거냐."

- 당연하지. 그럼 이 꼴로 어떻게 술을 마실까.

"뭐, 하긴 그러네."

피식,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프론테라의 망령도 피식 웃었다.

- 그럼 나도 하나 묻자.

"뭔데."

- 너, 다른 세상 새끼지?

"어. 알고 있었냐."

- 당연하지. 내 몸 되찾으려고 1년 가까이나 너한테 달라붙어서 지냈는데 그걸 모를 리가.

"뭐, 듣고 보니 그러네."

- 두고 온 세상엔 미련 없고?

"딱히는?"

- 정 없는 새끼네, 이거. 거기 남았을 가족이 그립지도 않냐.

"어. 부모님 다 돌아가셨거든."

- ...원래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동안엔 함께 있는 거랑 똑같다더라. 힘내라, 새끼야.

"뭐라는 거야."

- 됐고. 우리 부모님은? 요즘도 잘 계시냐?

"당연하지. 완전 신수 훤하시다."

- 정말?

"어."

로이드는 프론테라의 망령을 바라보았다.

찬찬히 바라보며, 솔직한 마음으로, 말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좀 늦게 전하는 소식인 건데. 이제 프론테라 가문, 남작 가문 아니야."

- 뭐? 그게 뭔 소리야?

"백작 가문 됐거든."

- 워어.

"놀랍지? 나도 놀라워. 어쨌건, 백작님은 요즘 다시 취미 찾으셨어."

- 나무 조각?

"어. 벌써 서재에 새로 깎은 조각이 한 가득이더라."

- 엄마, 아니, 어머니 꽃밭은?

"거기도 여전하지. 아, 두 배로 넓히셨더라. 덕분에 백작님 허리랑 무릎이 좀 걱정되긴 하고.

- 그 꼰대 양반 허리랑 무릎은 또 왜?

"요즘 꽃밭 일 도와주는 데에도 눈을 뜨셨거든. 익숙하지도 않은데 자꾸 쪼그려 앉아서 일하느라고 쑤신다고 그러시더라.

- 쯧. 여전히 주책없으시네.

"줄리앙 소식은 안 묻냐."

- 됐어. 그놈은 워낙 똘똘하니까 알아서 잘살고 있겠지.

"정답이야. 최근엔 장가갔다."

- ...쿨룩!

"진짜야."

- 진짜?

"어."

- 누구랑 결혼했는데?

"동쪽 술탄국 술탄 딸이랑.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라서 싸움도 무진장 잘해. 부부싸움 터지면 볼만할걸."

- 줄리앙, 맞아 죽겠네.

"아마도?"

- ....

로이드와 프론테라의 망령.

둘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동생네 부부 싸움을 상상하며 잠시 줄리앙에게 애도를 표했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피식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넌 뭘로 환생하고 싶은데?"

- 나?

"어."

- 모르겠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 굳이 예를 들자면....

"들자면?

- 고래.

"고래?"

- 응, 고래.

프론테라의 망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벌써 여기 지옥 구석에서 너무 오래 지내서. 여기, 진짜 지겹도록 더웠거든. 그래서 시원한 물에 좀 첨벙 빠져보고 싶네.

"그럼 굳이 고래 아니라도 정어리도 있고. 멸치도 있잖아?"

- ...그건 금방 잡아먹히잖아, 이 새끼야.

"아, 그런가."

- 당연하지. 어쨌건 그렇게 좀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 좀 싫어. 답답할 거 같아.

"좋아하는 술은 못 마시겠네, 고래로 태어나면."

- 아, 씨. 진짜. 넌 만약에 내가 드래곤으로 환생하면 각오해라.

"그래 봤자 어차피 드래곤 성체로 클 때쯤엔 나 늙어 죽고도 한참이나 지나 있을 텐데?"

- ....

"훗."

- 어휴. 이 새끼, 진짜.

"진짜 뭐."

- 약속대로 도와줘서 고맙다고, 새끼야.

"그 말을 이제서야 하냐."

- 그럼 어쩌라고.

또 웃었다.

심하게 덜컹대는 열차 속에서.

천천히 지나가는 지옥 한 자락의 풍경을 뒤로 두고서.

그렇게 로이드는 프론테라의 망령과 함께 웃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느꼈다.

마음 한쪽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무게추 하나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진짜를 밀어냈다는 원죄.

그걸 계속 숨기며 진짜 행세를 한다는 죄책감.

그렇게 백작부부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죄악감.

그렇듯, 졸지에 뻐꾸기 새끼가 된 것만 같던 기분들까지.

"...그러니까, 두 분은 내가 잘 모실게. 미안."

- 됐어, 새끼야.

"그리고 나중에 꼭, 내 입으로 밝혀 드리려고. 너랑 나에 대한 거."

- 알았다고, 새끼야.

"후우, 미안. 갑자기 기분이 좀 이상해져서."

- 새끼가. 미안하면 사람 울리지나 말든가.

로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프론테라는 웃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여전히 열차는 느릿하게 덜컹대며 풍경을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옆 칸 열차에선 프론테라 가문의 기사, 하비엘 아스라한이 두 로이드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244화. 떠나는 자와 남은 자 (2)

 

 

덜컹, 덜컹....

 

한가롭게 덜컹대는 열차.

느릿하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

그 속에서 프론테라 백작가문의 기사, 하비엘은 묵묵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고개 숙인 채 나직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지 않았다.

옆쪽.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

옆 칸 열차가 있는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모두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둘 모두 로이드 프론테라의 목소리였다.

그걸 들으며 은발의 기사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때때로 품어왔지만 언급하지 않았던 의문, 수시로 궁금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호기심, 문득문득 치밀었지만 끝내 눌러 두었던 의혹까지.

그 모든 의문과 호기심, 의혹에 대한 답을 알아 버렸다.

진짜와 가짜.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

방종한 자와 성실한 자.

퇴폐적인 자와 건설적인 자.

경멸스럽던 자와 존경스러운 자.

둘이 하나가 아니었음을.

모두가 그것을 몰랐음을.

하비엘은 비로소 알았다.

'로이드 님.'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문다.

그러고도 방금 자신이 누굴 부른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의 로이드를 마음속으로 부른 것인지, 정말로 모르겠다.

망나니짓으로 원성을 사던 진짜 로이드 프론테라인지.

수많은 기지와 노력으로 가문을 되살린 가짜 로이드 프론테라인지.

자신이 누구를 부른 것인지.

자신이 누구를 섬긴 것인지.

자신이 누구의 곁에 있길 바라는지.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다.

그렇게 하비엘은 번뇌에 사로잡혔다.

"...."

차라리 벨까.

그렇게 가짜를 단죄해야 할까.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그게 맞지 않을까.

하비엘의 눈동자에 잠깐 스산한 기세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살벌한 기세는 피어날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은발의 기사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저 가짜 로이드 프론테라가 마음에 들어서?

그건 아니었다.

하비엘은 이런 일에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섞는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었다.

지금,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을 판단하는 그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였다.

자신이 평생 충성하겠노라 맹세한 대상.

아르코스 프론테라 백작.

그런 자신의 주군에게 누가 될지.

행여나 주군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지.

어떤 결정이 주군에게 충성하는 길이 될 것인지.

하비엘은 오로지 그 기준으로만 지금 상황을 판단하려 노력했다.

그것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냉철한 계산이었다.

냉철한 계산이기에 더욱 쓰라린 판단이었다.

'죄송합니다, 로이드 님.'

그는 망나니 프론테라의 망령을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지금의 가짜 로이드를 남겨 두자고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었다.

두 로이드가 나누는 이야기.

그걸 듣고 있다 보니 정말로 어쩔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진짜 로이드 님은 이미 망령이 되어 버린 듯하니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듯했다.

몸을 되찾으려 노력했어도 소용이 없었던 듯했다.

즉, 진짜 망나니 로이드가 되살아날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한데 만약 자신이 지금 가짜 로이드를 벤다면?

그렇게 가짜 로이드를 단죄해 버린다면?

답이 없어질 터였다.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겠지. 아니, 훨씬 나빠질 거야.'

진실이야 어쨌건.

알맹이야 어떻건.

저 가짜는 지금까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진짜 행세를 하며 지내온 터였다.

아니, 원래의 망나니 로이드보다 훨씬 훌륭하게 행동하며 가문을 몰락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기까지 했다.

하니 그런 이를 베어 봤자.

가문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듯했다.

오히려 커다란 기둥을 잃은 건물이 무너지듯.

지금껏 간신히 지탱되던 가문이 다시금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럴 수밖에 없어.'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지금 국왕 알리시아의 신임을 받는 자가 누구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가주인 프론테라 백작이 아닌, 저 가짜 로이드가 국왕의 신임을 받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웃 영지인 라코나 자작령에게서 수도세를 받는 사람은?

그 상수도를 관리하는 사람은?

역시나 저 가짜 로이드였다.

동부 산맥 건너편의 몬스터들이 영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비벙이도?

역시나 저 가짜 로이드가 수족처럼 움직이는 환상종이었다.

그 밖에도 영지 온돌과 석탄 광산도.

피난민들의 집이 된 아파트의 관리와 보수도.

대하수로의 슬러지 처리를 맡은 드래곤 솔리타스도.

그 많은 사업과 이해관계가 모두, 전부, 모조리, 저 가짜 로이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데 저 가짜 로이드가 당장 없어진다면?

프론테라 영지의 어떤 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이쯤이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 로이드는 가짜가 명백하지만.

이미 진짜보다 나은 가짜다.

아니, 영지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비엘은 거머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고민과 번뇌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에겐 큰 고민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 사실을 주군께 알려야 하는 것일까.'

지금 이곳에서의 자신의 판단은 최종적인 결정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즉결심판을 실행할 것인가를 임시로나마 판단했을 뿐.

이 일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주군인 프론테라 백작이 내려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하비엘은 고민했다.

'주군께 당장 알리는 것이 분명 옳을 텐데.'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방금 안 진실을 숨기는 것이 주군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 될 수 있음에도.

그걸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이 어쩐지 망설여졌다.

스스로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 답은 곧, 옆 열차 칸에서 들려온 두 로이드의 대화를 들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두 분은 내가 잘 모실게. 미안."

- 됐어, 새끼야.

"그리고 나중에 꼭, 내 입으로 밝혀 드리려고. 너랑 나에 대한 거."

"...."

다시 한 번, 하비엘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가짜는 어쩌자고 저런 말을 하는가.

대체 어쩌자고 저런 말로 사람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가.

'일단은... 기회를 주는 게 옳을까.'

방금 들려온 가짜 로이드의 한마디.

그 속에 담긴 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가식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저 말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저 가짜가 백작부부에게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리라고.

언젠가 스스로 진실을 밝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러니 기다려 주는 일이 옳을 것이라고.

"...."

자신이 미친 거 아닐까.

하비엘은 잠시 든 생각을 억눌렀다.

적어도 저 가짜가 진짜 로이드를 외면하지 않았으니까.

망령이 되어 떠돌던 진짜 로이드를 끝까지 도와줬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고, 그 마음으로 책임을 지려 하고 있으니까.

지켜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이런 일은 저 당사자가 스스로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군, 죄송합니다.'

하비엘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판단이 가문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몰려오는 혼란과 당혹스러움을 애써 억눌렀다.

그러는 동안 열차는 잘도 덜컹거리며 굴러갔다.

꾸준히, 천천히, 차근차근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철도의 종착지인 지옥 끄트머리 정거장에 도착했다.

"후아."

로이드는 궁둥짝을 주무르며 열차에서 내렸다.

역시나 육공트럭스러운 승차감은 추억으로 퉁칠 게 못 된다.

확실히 이거, 궁둥짝이 제법 얼얼하게 쑤신다.

심지어 허리도 상큼하게 아프다.

'한마디로 저세상 승차감이구만.'

로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효율적인 영혼 호송을 위해서 만든 열차니까,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승차감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훨씬 중요하고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설마 하비엘, 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니겠지?'

로이드는 정거장에 내려서자마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행여나 하비엘이 근처에 있을까 봐.

그래서 프론테라의 망령을 보게 될까 봐.

어릴 적 엄마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 빼돌리던 두근거림으로 사방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다소 마음을 놓았다.

'없는 거 같네.'

지옥왕에게 완공 보고를 하고자 지옥성으로 갈 때 이 근처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는데.

녀석, 혹시 볼일이라도 보러 간 걸까.

혹은 기다리다 지겨워서 낮잠이라도 자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탁 트인 정거장 주변 어디에도 하비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야.'

미적거리다간 하비엘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녀석이 프론테라의 망령을 목격하면 상황이 심히 곤란해진다.

최악의 경우에는 녀석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공격당할 수도 있다.

그 생각에 로이드는 이마의 진땀을 닦아냈다.

프론테라의 망령을 재촉했다.

"야, 얼른 내려. 빨리빨리."

- 아, 씨. 더럽게 보채네.

"보채는 게 아니라 좀 빠릿하게 움직이잔 거지."

- 그러니까 용건 끝났으면 빨리 환생이나 하라는 거냐, 이 새끼야?

"아놔, 그런 게 아니라."

- 새끼, 겁먹기는. 하비엘한테 들킬까 봐?

"...후아. 정답."

- 알았어. 얼른 가자. 나도 그놈 밥맛 떨어져서 마주치기 싫으니까.

"밥맛 떨어져?"

- 어.

로이드의 물음에 프론테라의 망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 그 새끼, 그렇게 생기면 인간적으로 반칙 아닌가? 재수 없어. 볼 때마다 짜증 나고 이유 없이 억울해져. 아버지가 내 호위로 그 새끼를 옆에 붙여놓고 난 뒤로는 어딜 다녀도 기분이 나질 않았다니깐.

"...야, 너두?"

- 어, 나두.

"젠장."

두 로이드는 잠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세상의 얼굴 천재들을 원망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환생의 문은 플랫폼 끄트머리에 있었다.

호송된 영혼들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플랫폼을 통해 환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든 덕분이었다.

- 후우.

막상 환생의 문을 앞에 두니 떨리는 걸까.

혹은 그동안의 방랑을 마칠 수 있음에 설레는 걸까.

프론테라의 망령이 잠시 숨을 골랐다.

이쪽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 그럼 간다.

"어."

별달리 특별한 인사도, 감동적인 작별의 말도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건 필요가 없었다.

프론테라의 망령도.

그를 보는 로이드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저 손만 흔들었다.

마치 하루를 함께 어슬렁거리며 보내다가 저녁에 헤어지는 사이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건성으로 인사하고는 내일 다시 볼 것처럼.

그렇게 평범한 인사말과 대꾸.

대수로울 것 없는 손짓으로.

서로를 떠나보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정말로 마지막 한 걸음을 환생의 문으로 옮기는 순간.

프론테라의 망령이 잠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 ....

마치 속삭이듯 아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녀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

로이드는 멍하니 환생의 문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마음속이 복잡해져서.

그런 자신의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작은 숨 한 번 내쉬고는 걸음을 돌렸다.

터벅터벅 돌아와 열차에 올라탔다.

온통 덜컹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물끄러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이쪽과 마주앉아 떠들던 녀석이 있던 자리.

이제는 눈치 없는 천막만 불어오는 바람에 너덜거리듯 펄럭대고 있었다.

그렇게 열차가 출발했다.

여전히 태연하게 덜컹덜컹.

느릿하고 꾸준하게 천천히.

지옥의 풍경을 뒤로 밀어내며 움직였다.

그동안 로이드는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지옥은 별로라고.

온통 공기도 매캐하고 화산재투성이라서 매일 눈이 따갑다고.

몇 번인가 소매로 눈가를 비볐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지옥성 정거장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려서니 뜻밖의 반가운 얼굴이 이쪽을 반겨 주었다.

"...어? 하비엘?"

"이제 돌아오셨습니까, 로이드 님."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로이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하비엘을 마주 보았다.

분명 지옥 끄트머리 정거장에 남아 기다리라고 했었는데.

한데 어째서 녀석이 여기 지옥성 정거장에 와 있는 걸까.

이쪽이 의아해하는 사이.

하비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불안해서 왔습니다."

"불안해서?"

"예."

"뭐가 불안해서."

"로이드 님이 혹시나 정말로 저 버리시는 게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여기까지 뛰어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로이드 님께선 열차 운행 점검을 하러 가셨다더군요."

"그래서, 여기서 내가 돌아오길 기다렸던 거냐."

"예."

"...하. 극지방에서 프론테라 영지까지 헤엄쳐서 가는 건 어지간히 싫었나 보네."

"예. 싫긴 했는데, 이렇게 로이드 님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또 생각이 달라집니다."

"달라져? 어떻게?"

"차라리 이 얼굴 안 보고 살걸, 하고 말입니다."

"...."

"농담입니다."

"응, 충분히 진담 같았어."

"들킨 겁니까."

"아마도?"

로이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다행이다.

마침 하비엘이 제멋대로 움직여 주어서.

지옥 끄트머리에 간 프론테라의 망령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어서.

뜻하지 않게 여기까지 자신을 마중 나와 주어서.

이런 시답잖은 농담이나마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덕분에 이렇게나마 애써 웃을 수 있기에.

참, 다행이다.

"그럼 가자. 지옥왕한테 운행 결과 보고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로이드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앞장을 섰다.

하비엘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로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다행이다.

마침 자신이 둘러댄 거짓말을 로이드가 믿어 주어서.

그래서 평소처럼 저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어서.

이런 시답잖은 농담을 여전히 나눌 수 있어서.

덕분에 저 가짜 로이드의 살짝 부어 있는 눈가를 자신이 모른 척해 줄 수가 있었기에.

참, 다행이다.

'로이드 님, 부디 평온하고 행복한 새 삶을 사시길.'

은발의 기사는 진심으로 바랐다.

진짜와 가짜.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

방종한 자와 성실한 자.

한때 섬겼던 자와 지금 섬기는 자.

둘 모두의 앞날이 평온하고 행복하길.

자신의 바람대로 둘 모두에게 남은 모든 나날이 평화롭고 따스하길.

떠나간 자와 남은 자.

모두를 위해 하비엘은 기원했다.

그리고 말없이 로이드의 뒤를 따랐다.

245화. 용왕 후원 멤버십 (1)

 

 

준비 기간 1개월.

시공 4개월에 걸친 노력.

그 끝에 완성된 지옥 최초의 철도.

지옥철도 666의 운행 보고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래, 시험 운행에는 이상이 없었나?"

"예, 지옥의 지배자시여."

무사히 시험 운행을 마친 로이드는 곧바로 지옥성에 입궁했다.

지옥왕 앞에 공손히 무릎 꿇었다.

"전체적인 운행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점검한 결과, 열차가 안정적으로 운행할 때의 평균 속도는 시속 약 35킬로미터 내외인 것으로 파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대의 열차가 이곳 지옥성에서 지옥의 끄트머리까지 영혼을 호송하고 돌아오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약 7시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7시간이라."

"영혼을 태우고 내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까지 포함한 결과입니다."

"좋군. 오늘 시험한 것과 같은 열차를 더 많이 만들면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지옥의 지배자시여. 또한, 용암이 범람하여 철도를 훼손하지 않도록 노반 주위로 용암이 빠져나갈 배수로, 아니, 배용로를 시공하였습니다."

"배용로라."

"앞으로 모든 구간의 일정 거리마다 남는 사탄 인력을 상주시키며 용암이 얼마나 흘러드는지, 배용로가 막히진 않았는지, 철로의 상태가 양호한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보수 공사를 하면 되고?"

"그렇습니다."

"흐음, 하지만 그럼에도 감당이 안 되는 문제가 생기면?"

"...."

"널 불러도 되는가?"

"...."

로이드는 살짝 억울해진 기분으로 지옥왕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A/S 때문에 지옥까지 다시 오라는 지옥왕.

할 수만 있다면 '이 진상아!'라고 외치며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훨씬 건설적인 반응을 선택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이득을 보겠다는 심보로.

만면에 서비스 정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물론 공짜로는 안 됩니다."

"야박하군."

"어차피 공사 발주 계약서를 작성할 때도 사후 무상 관리에 대한 항목은 설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지옥의 왕께서도 매사에 공짜를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긴 하다만."

"충분한 대가가 주어진다면 저는 언제든 부름에 응답할 것입니다."

"충분한 대가라."

"예."

"설마 그 대가라는 것, 네가 상황에 따라 저울질을 하겠다는 건가."

"...."

"맞군."

"아무래도 세상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시국과 시세라는 것이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로이드는 지옥 지배자의 지적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뻔뻔하게 웃어 버렸다.

그냥 뻔뻔하게 요청을 뭉갤 작정으로?

아니었다.

사실 이것은 불합리한 진상질과 호출을 방지하기 위한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당연하지! 미리 A/S 보수를 합의해 버리면, 어? 지옥왕 저 양반이 자기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날 여기까지 부를 거잖아?'

보지 않아도 뻔할 터였다.

철로 상태가 조금 안 좋아졌다고.

요즘 열차가 전보다 덜컹대는 것 같다고.

이번에 용암이 좀 넘쳐서 노반이 불안정해졌다고.

스스로 연구하고 사탄 좀 빡쎄게 굴리면 될 일까지 전부 이쪽을 불러서 떠넘기려 들 것이 뻔해 보였다.

'그게 편하니까!'

그렇게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성심껏 사후 서비스를 해 주게 되면?

계속되는 호의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공식 호구로 전락하고 만다.

부를 때마다 당연하게 오는 놈.

그런 식으로 인식이 박히는 것이다.

로이드는 그런 취급을 받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도 당연하지. 이제부터 꿀만 빨고 살기에도 바쁠 텐데, 왜 내가 수시로 지옥까지 출장을 와야 하는 거냐고.'

기껏 국왕 누님의 일꾼인 SCV 신세를 면했는데.

자칫 삐끗하면 지옥 SCV로 전락할 수도 있다.

로이드는 그러한 위기감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필사적인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언제든 부담 없이 올 수는 없습니다. 제게도 제 일이 있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바쁜 와중에 부르려면 그만한 보수를 제시해야 할 거란 뜻이로군?"

"예."

"그 보수에 움직일지 말지는 네가 결정하는 것일 테고. 맞나?"

"역시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흐음."

지옥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로이드는 내심 뜨끔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저거저거, 지옥왕 저 양반, 빈정 상했다고 나중에 사심 섞어서 지옥 무기징역! 이딴 판결 내리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닐 터다.

지옥왕은 지옥에서 제일 공정한 형(?)이니까.

오로지 개인감정 없이 합리적인 판단만 내리는 존재니까.

로이드는 그 사실을 믿고서 지옥왕 앞에서도 뻔뻔하게 굴 수 있었다.

곧, 그런 그의 배팅이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좋다. 한편으로는 괘씸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일에 있어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김수호, 네놈인 듯하군."

"...그렇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노림수가 잘 먹혔다.

덕분에 지옥왕에게 A/S라는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불려 오는 일은 면할 수 있게 됐다.

그때그때 취향껏 요청을 튕겨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로이드는 철도 시공 대금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자, 그럼 시공에 대한 값을 치를 차례로군. 계약서를 통해 협의하고 약속한 내용은, 어디 보자. 지옥에 억류된 드래곤 엔티쿠스의 영혼을 해방해 주는 것이었군."

"예, 그렇습니다."

"좋다. 당장 값을 치러주도록 하지."

스슥, 스스슥, 지옥왕이 펜대를 굴렸다.

뭔가 서류 하나를 순식간에 작성해서 사탄에게 건네주었다.

서류를 건네받은 사탄이 어딘가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잠시 후 돌아온 사탄의 손에는 주먹 크기의 반투명한 구슬이 하나 들려 있었다.

지옥왕이 사탄에게서 받은 구슬을 이쪽으로 건넸다.

"자, 받아라."

"설마, 이 구슬이 엔티쿠스의 영혼입니까?"

"정확하게 알려주자면 그 드래곤의 영혼을 임시로 담은 그릇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반투명한 구슬 안쪽에서 뭔가 조금씩 움직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엔티쿠스의 영혼인 듯했다.

지옥왕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구슬에 마나를 집어넣는 즉시 영혼을 바깥으로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진짜로 해방되는 셈이지. 하지만 여기선 그걸 할 생각은 말도록. 그랬다간 그 영혼, 다시 지옥에 억류될 테니까."

"이를테면, 집에 가서 뚜껑을 열어 보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러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고룡의 영혼이 담긴 구슬을 조심스럽게 휴대용 배낭에 챙겼다.

그러다가 문득, 지옥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하지만 내심 마음 한쪽에 품고 있었기에 궁금했던 의문을 떠올렸다.

"음, 저기.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가."

"지옥의 왕께선 혹시 제가 로이드 프론테라의 몸에 들어온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동안,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알고 싶었다.

궁금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지옥의 왕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나도 모른다."

"그렇습니까...."

"다만, 아주 희귀하게, 몇백 년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줄 수 있겠군."

"제 영혼이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일이 말입니까?"

"그래. 차원은 완벽히 독립적이진 않으니까. 따로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차원을 둘러싼 거대한 헤일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곤 하니까."

"...아, 예."

"아마도 차원의 헤일로 사이에서 발생한 중력파의 간섭이 마나적 요동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싶군. 마치 디랙의 바다에서 에너지를 얻은 물질이 쌍생성 작용을 일으키듯이 말이다."

"...아, 예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이해하고 있겠지?"

"...죄송합니다."

"쩝."

어째서 괜히 송구해지는 걸까.

지옥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데 김수호, 넌 다른 사람이었다면 마땅히 궁금해했을 부분을 물어보진 않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원래 세계에 남았을 네 육체 말이다."

"...."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궁금한데, 별로 알고 싶진 않습니다."

"어째서?"

"그걸 알아봤자 여기의 제겐 아무 영향이 없을 테니까요."

로이드의 미소도 씁쓸해졌다.

사실이었다.

물론 궁금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그걸 안다고 지금 자신이 달라질 건덕지가 없다.

그저 호기심 해소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니, 사실은 꺼려졌다.

'지긋지긋해, 그때 그 시절.'

추억으로 포장하려 해도 그 포장지가 너무 고생 범벅의 색깔이라서.

그래서 가끔씩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지옥의 왕도 그런 이쪽의 심정을 눈치챈 것일까.

무테안경 너머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가. 알았다."

"감사합니다. 그저 살아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잘 살아 있다. 됐나?"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이쪽으로 건너왔기에 비워졌을 육체.

그게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상태인지, 굳이 자세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잘 살아 있다는 한마디.

그거면 충분했다.

"하면 이제는 떠날 시간이겠군. 특별히 네가 지옥에 올 때 출발했던 곳으로 헬게이트를 열어주도록 하지."

"왕도 마젠타의 테르미나 대정원 말입니까?"

"그렇다."

 

츠팟!

 

지옥왕의 간단한 손짓.

그 한 번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헬게이트 너머로 어둑한 밤 풍경이 엿보였다.

여전히 쑥대밭인 모습의 테르미나 대정원이었다.

"이곳과 인간계는 시간의 축이 다르지. 네가 지옥에서 보낸 5개월 사이에 인간계에서는 겨우 5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도록."

"감사합니다."

로이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지난번에 용암 거인을 때려잡느라 극지방으로 연결했던 헬게이트.

거기로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지옥왕의 서비스(?)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북극 탐험은 면했구나 싶었다.

"그럼 준비를 갖추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행여나 지옥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한다.

꾸벅 인사한 로이드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지옥성 바깥에 대기시킨 하비엘과 환상종들, 본드래곤을 모두 데려왔다.

다 함께 헬게이트를 통과했다.

환상종들을 품속에 넣고서 제일 먼저.

그다음으로 하비엘이 걸어서.

마지막으로 본드래곤이 온몸의 뼈마디를 잘게 나누어서.

그렇게 통과하고 나니 인간계의 밤바람이 훅 불어와 일행을 반겼다.

"...후아."

추웠다.

한겨울의 바람도 아닌데.

그동안 지옥의 열기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그냥 평범한 바람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이드는 오랜만에 맞이한 맑은 공기도, 모처럼 밟아보는 땅바닥의 잔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헬게이트가 닫히자마자 쇽쇽 주위부터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한밤중이라서 그런지 보는 눈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용용아?"

 

삐그덕!

 

아직 분해된 뼈다귀 상태인 본드래곤, 용용이가 뼛소리로 반응했다.

로이드가 녀석에게 말했다.

"넌 지금 여기 사람들 눈에 띄면 난리 나니까 좀 숨어 있어라. 일단 저쪽. 저기가 동쪽이야."

 

삐덕!

 

"저 동쪽으로 계속 날아가다 보면 완전 큰 산맥이 하나 나올 거거든? 그게 동부산맥이라는 건데. 당분간 거기서 좀 놀고 있어. 행여나 오크들 만나면 친하게 지내고."

 

삐걱?

 

"우리 용용이 착하지. 말 잘 들으면 나중에 골병대 형아들 소개해 줄게. 자, 실시."

 

삐덕!

 

용용이가 힘차게 대답하고는 즉시 동쪽 밤하늘로 날아갔다.

그러고 나서야 로이드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후아."

비로소 느껴지는 인간계의 신선한 바람.

자신이 지옥에서 지냈던 기간이 거의 5개월이나 됐는데.

그동안 인간계에선 5일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니.

그 뜻밖의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이제 해가 바뀌면 서른이니까. 크흡.'

하지만 그게 살짝 미뤄졌다.

지옥과 인간계의 시간 축이 다른 덕분이었다.

체감상 삼십 대가 되는 참사(?)를 조금은 미루게 되었다.

게다가 어쨌건 지옥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니 이젠 그 값을 받아내야지.'

괜히 지옥에 갔던 게 아니다.

얻어낼 것이 있으니까.

분명한 이득이 있으니까.

오직 그걸 바라고 갔던 거다.

그러니 이제는 지옥행의 보람을 알뜰하고 야물딱지게 챙길 때였다.

'본드래곤 난동 때문에 망한 대정원 쇼케이스라든가. 그거 때문에 망친 국왕 누님 체면 살려주는 일이라든가. 뭐, 여러 가지 수습할 일이 많지만 일단 그건 내 일 아니니까 제끼고.'

그건 오지랖을 부릴 일이 아니다.

이쪽의 여력이 될 때 도와주면 될 일이다.

그전엔 국왕과 왕실이 알아서 수습할 일이다.

그러니 우선 자신부터 챙기자고 로이드는 다짐했다.

"자, 일단 가자."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만끽하던 하비엘.

녀석도 지옥에서 돌아왔음이 기쁜 걸까.

모처럼 밝아진 표정의 녀석에게 대꾸했다.

"으슥하고 음침한 곳으로."

"...."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 고룡 영혼 풀어줘야지."

그래야 용왕 후원 멤버십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절대로 미룰 일이 아니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머리가 두 쪽이 나지 않는 한.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여전히 엉망진창인 테르미나 대정원을 빠르고 은밀하게 빠져나갔다.

한밤의 시가지와 로이하비 현수교를 지나쳤다.

왕도의 성벽을 슥삭 넘어갔다.

인적 없는 교외의 숲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근처에 아무도 없지?"

"예. 토끼 열두 마리, 그중의 하나를 노리는 여우 한 마리, 부엉이 두 마리, 그 외의 작은 동물들 빼고는 느껴지는 기척이 없습니다."

"좋아."

그랜드 마스터인 하비엘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안전을 확인한 로이드는 품에서 구슬을 꺼냈다.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증폭시킨 마나를 구슬로 밀어 넣었다.

 

파아아앗...!

 

반투명하던 구슬이 광채를 머금었다.

이내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존재가 눈을 떴다.

구슬을 박차고 솟구쳐 나왔다.

무어라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밤하늘로 쏘아지는 유성처럼 상승했다.

말 그대로 은하수 속의 별이 되어 반짝, 사라졌다.

 

휘이이잉.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그 속에서 로이드는 잠깐 기다렸다.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고룡의 영혼이 올라간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가.

손바닥에 남은 텅 빈 구슬을 쓰윽 쳐다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설마.'

방금 고룡.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약속했던 보상도 없이.

그냥 튄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무려 영혼의 맹세를 건 사이다.

말 그대로 영혼의 캐삭빵 맹세를 한 고룡이었다.

그런데 해방시켜주자마자 그 약속을 깨고 튀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좀 불안하단 말이지?'

뭔가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다.

좀 거창하면서도 뻔한 이벤트도 하나 없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번쩍, 하고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그냥 시원한 밤바람만 휑하니 불어오고 있었다.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중고거래 사기를 당하면 이런 쌔한 기분이 아닐까.

로이드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로이드 님."

하비엘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왔다.

"아무래도, 생각지 못한 손님이 온 것 같습니다."

손님?

그게 무슨 소리일까.

조금 전까진 이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했었는데.

그런데 손님이라는 작자는 대체 언제 왔다는 걸까.

로이드는 무심결에 하비엘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정말로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그건 바로....

'용왕?'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46화. 용왕 후원 멤버십 (2)

 

 

'용왕?'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조금 전까진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하비엘이 직접 확인까지 했는데.

한데 누군가가 와 있었다.

아니, 동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자였다.

코끼리보다 큰 덩치.

살짝 보이는 발톱마저 어마어마해 보이는 앞발.

제왕의 품격에 어울릴 법한 엄청난 갈기.

거기에 박쥐를 닮은 날개와 전갈 꼬리가 달려 있었다.

한데 뱃살은 또 똥똥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말랑말랑하고 폭신할 듯해서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저 외모를 종합해서 그 정체를 유추하자면....

'만티코어?'

로이드가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만티코어의 입이 열렸다.

"코롱?"

"...."

"코로롱, 코롱!"

"...."

뭐라고 하는 걸까.

설마 저거, 으르렁거리는 건가.

아니면 뭔가 이쪽에게 말을 거는 걸까.

하지만 로이드는 만티코어의 포효, 혹은 인사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위협을 느끼며 움찔거리거나 물러나지도 않았다.

당황하거나 황당해하는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사실 당혹스럽기는 했다.

그럼에도 힘껏 참았다.

어떠한 동요의 기색도 내비치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으로 안면 근육에 빡 힘을 주며 표정 관리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 일 모르는 거야. 진짜로 만약에 저 만티코어가 용왕이면 어쩔 건데?'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드래곤은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존재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종족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 인간이 아닌 몬스터로 변신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감히 섣부른 리액션을 보일 수가 없게 됐다.

'당연하지! 진짜로 만약에 용왕이 변태 같은 취향이라서 저딴 모습으로 등장한 거면, 어? 그랬는데 내가 괜히 당황하거나 소리치거나 이상한 리액션 보이면, 그냥 첫인상 점수부터 나가리 되는 거잖아?'

그런 막장 사태만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용왕 후원 멤버십 자격을 얻기 위해 지옥까지 다녀왔는데.

열대야 뺨치는 지옥 열기에 몇 달을 시달리며 공사까지 하고 왔는데.

그래서 드디어 용왕을 영접하게 됐는데.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첫인상 점수를 깎이기 싫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용왕은 나한테 최고의 호구가 되어줘야 하니까.'

+1의 목숨.

무한의 재물.

거기에 미지의 추가적인 포상까지.

꿀 빠는 인생 세팅의 화려한 마무리를 장식해줄 존재가 용왕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용왕에게 나쁜 인상을 주기 싫었다.

그래서였다.

"흠, 흠! 하비엘, 공손히 기다려."

일단 하비엘을 제지했다.

행여나 녀석이 눈치 없이 검을 뽑을까 봐.

은발의 기사를 말린 뒤에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모았다.

깍듯한 태도로 서서 반짝반짝 말똥말똥한 눈으로 만티코어를 올려다보았다.

한데 그런 예의 차리기 전략(?)이 통한 걸까.

이쪽을 보는 만티코어의 표정이 푸근해졌다.

뒷다리로 섰다.

통통한 몸을 일으켰다.

앞발로 손짓 발짓을 하기 시작했다.

"코로롱? 코롱! 코로롱!"

"...."

"코롱! 코로롱!"

"...아하하, 아, 예."

"코로롱? 코롱! 코롱?"

"으음, 그런가요. 아하하하."

로이드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꽃이 빠지직 피어났다.

하비엘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귓속말로 물어왔다.

'로이드 님.'

'아, 왜.'

'저 만티코어가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

'일단 닥치고 있어봐. 나도 미치겠으니까.'

로이드는 쑴펑쑴펑 솟구치는 진땀을 닦아냈다.

저 만티코어, 뽀동이나 다른 환상종들과는 달랐다.

진심으로 저 뚱땡이 거대 사자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 건지, 뭐라고 손짓하는 건지, 이쪽한테 바라는 게 뭔지 진짜 1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휴, 늙어가지고 배에 탈모까지 온 주제에!'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만티코어의 탈모가 와서 뽕뽕하게 드러난 핑크색 뱃살을 콱 꼬집어라도 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로이드는 떠올렸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존재들이 있었다.

용왕 베르키스.

그리고 용왕을 모시는 다섯 마수에 관한 이야기였던가.

'맞아. 용왕에게 그런 측근들이 있다고 했어.'

다섯 마수의 모든 면면이 다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섯 마수 중에 8미터짜리 만티코어가 리더라던 이야기는 떠올랐다.

'그럼 이놈이?'

로이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만티코어를 올려다보았다.

혹시나 하고 드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확인이 우선이다.

"저기."

로이드가 조심스럽게 만티코어를 향해 물었다.

"혹시, 그쪽 분, 용왕 베르키스 님이 보내서 온 겁니까?"

"코롱!"

만티코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더욱 활발하게 손짓했다.

"코로롱! 코롱? 코롱!"

"아, 저기, 좀만 손짓 천천히...."

"코롱? 코로롱! 코롱!"

"그러니까, 용왕 베르키스 님의 심부름을 나왔다는 거죠?"

"코로롱! 코롱!"

"아, 그래서 절 데리러 오셨다는 거?"

"코롱!"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는 만티코어.

이내 이쪽을 향해 뚠뚠한 궁딩이를 내밀며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이쪽을 힐끔 돌아보며 자신의 등을 턱짓했다.

"코로롱!"

"...등에 타라구요?"

"코롱!"

"...."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로이드는 하비엘과 눈짓을 나누었다.

하비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만티코어는 엄연한 최상급 마수.

성난 만티코어는 단독으로 인간의 정예 군단 하나를 몰살할 수 있다.

뽀동이와 비슷한 덩치를 지녔지만, 전투력은 뽀동이를 아득히 초월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나이를 먹은 만티코어라면 수많은 경험을 지닌 백전노장일 터.

만약 곁에 하비엘이 없었다면?

졸지에 간식거리가 되지 않기를 빌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야.'

새삼 든든해졌다.

덕분에 믿고(?) 녀석과 함께 만티코어의 등에 올라탈 수 있었다.

"어, 으음, 잘 부탁합니다."

"코롱!"

만티코어가 맡기라는 듯 콧김을 푸룽 뿜어냈다.

그리고 상상 밖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투콰학-!

 

"...므븟!"

너무나 순간적인 가속.

순식간에 멀어지는 지면.

아니, 압도적인 속도로 쑥쑥 밀려나는 주위의 풍경.

반사적으로 갈기털을 꽉 움켜쥔 덕분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로이드는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슨 질주가 이렇게 빨라?'

만티코어의 질주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뽀동이를 타고 달리는 데에 익숙했지만.

꼬밍이를 타고 비행하는 것도 익숙했지만.

만티코어의 질주는 두 환상종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어느 정도냐면, 맞바람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으와아아!'

 

콰아아아아아-!

 

맞바람이 너무나 맹렬하게 불어왔다.

안면 근육과 피부가 모조리 맞바람에 짓눌리고 찌그러졌다.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침략군처럼 느껴졌다.

풍압에 콧구멍이 강제로 세 배쯤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로이드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서야 간신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면서 기대했다.

'하비엘은?'

이때가 기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굴 피부와 근육마저 짓누르고 찌그러뜨리는 엄청난 맞바람이 몰아닥치고 있으니까.

아무리 하비엘이라도 이럴 때는 대굴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로이드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 스맛폰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굴욕짤을 찍어서 두고두고 평생 보관하는 건데.

짬짜면처럼 뒤섞이는 아쉬움과 기대감을 품고서 로이드는 하비엘을 향해 시선을 퐁당 던졌다.

그리고 이쪽을 태연하게 돌아보는 하비엘의 멀쩡한(?) 얼굴을 발견해야 했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어?"

"뭔가 평소보다 훨씬 눈빛이 초롱초롱하신 것 같습니다."

"...."

로이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하비엘의 얼굴은 완벽하게 멀쩡했다!

이렇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맞바람 속에서도 얼굴이 전혀 찌그러지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속눈썹 한 올조차 나풀거리지 않았다.

'이건 사기야!'

믿기지가 않아서 속으로 빼액 외쳤다.

한데 하비엘 녀석, 이런 이쪽의 심정을 알아챈 걸까.

이쪽을 향해 피식 웃었다.

"지금 어째서 제 얼굴만 멀쩡한 건지 궁금해하고 계시는 듯합니다만."

"...."

"그랜드 마스터니까요."

"...."

"마나를 돌리고 있습니다. 마침 요즘 신체 외부의 저항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기법을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제 계산상으로는 피부의 강도와 탄력, 질김의 정도를 강철과 비슷한 수준으로까진 끌어올릴 수 있는 듯합니다. 지금처럼요."

"말도 안 돼."

"말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요."

 

츠스스스스...!

 

하비엘이 한 손을 들었다.

검지를 세워 허공을 살며시 휘저었다.

녀석의 검지 끝에서 빛나는 오러 한 줄기가 흘러나왔다.

그 손짓을 따라 허공에 그림을 새겨 나갔다.

한데 그림의 정체가 이상했다.

사람의 얼굴이었다.

형편없이 못생겼다.

그냥 아주 스타킹을 얼굴에 덮어씌우고 100미터쯤 쭉 잡아당긴 모습 같았다.

로이드는 미간을 콱 찡그렸다.

"뭐냐, 이 생기다가 만 쭈글탱이 얼굴은."

"로이드 님의 지금 모습입니다."

"...."

"정말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아니, 전위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소엔 그다지 볼 것도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바람에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뭉개지고 나풀거려서 한 번만 스치듯 구경해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강렬한 인상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

"이건 뭐랄까요. 인간의 얼굴이라는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듯한 모습입니다. 너무나 강렬하고 역동적인데, 그게 또 비대칭적인 독특함과 특수성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그런 묘한 부조화가 천편일률을 벗어난 면과 입체감을 만들어내고 있고 말입니다. 인상적이군요. 강렬한 비대칭의 새로운 기준을 본 기분입니다."

"...."

저기, 남 얼굴 가지고 현대미술 묘사하듯이 감탄하는 건 그만둬 주지 않을래?

로이드는 침음을 삼켰다.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만티코어가 질주 방향을 살짝 바꾸어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확 정면으로 때려 와서.

그 서슬에 입술이 푸를르헙럴러러 나풀거려서.

반박하고 싶은 말을 장전해도 발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만 속으로 피눈물만 삼켰다.

언젠가 이 굴욕을 갚아 주리라.

내심 다짐만 새겨 놓았다.

옆에선 하비엘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쨌건, 진짜로 말이 안 되는 건 만티코어의 이 엄청난 질주겠지요."

"...으으, 으읍, 어,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맞바람 속에서 고개를 팍 숙이고 대답했다.

하비엘의 대꾸가 들려왔다.

"아마 용왕이라는 존재가 이 만티코어에게 특별한 마법을 걸어 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예."

역시 그럴 것이다.

아무리 최상급 마수인 만티코어라도 이런 질주 속도는 말이 안 되니까.

이건 그냥 생물학적 한계를 말끔히 뛰어넘은 속도니까.

'용왕이라는 게 참 대단하긴 하네.'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 기분은 어떤 걸까.

대체 어떤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삼생의 공덕을 쌓아야 그런 강력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걸까.

'전생에 나라 백 번쯤 구하면 되는 건가.'

새삼 부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주위 풍경이 휙휙 변해 갔다.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넜다.

들판과 황야를 가로질렀다.

몇 개의 촌락과 도시를 지나쳤다.

호수를 뛰어넘고 계곡을 통과했다.

마침내 거대한 산자락을 올라갔다.

그곳에 커다란 굴이 있었다.

'마룡굴인가.'

중립적인 독립 도시인 가펠.

그곳에 있다는 마룡산이 떠올랐다.

용왕 베르키스가 조용히 기거하는 장소.

아무래도 눈앞의 굴이 바로 그 마룡산의 마룡굴인 듯했다.

"코롱!"

만티코어의 질주가 굴속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이내 잘 닦인 복잡한 통로를 거침없이 통과했다.

통로를 살펴보는 로이드의 눈길이 진지해졌다.

'역시.'

마룡굴이 맞다.

게다가 여기, 워낙 휙휙 지나치고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엄청난 건축물이다.

'산 내부를 통째로 깎고 파서 만들었어. 산을 이루는 기반암 전체를 던전의 외피로 삼아 버린 거야.'

이런 공사를 진행하려면.

이런 시공을 감행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자본과 인력이 필요할까.

그걸 생각하니 절로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아무리 측량과 설계 스킬이 있어도.

환상종들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거대한 산의 기반암 자체를 재료로 삼아 버리는 이런 초월적인 규모의 공사를 진행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10년으로도 각이 안 나올 거야. 진짜 장난이 아니네.'

새삼 이곳 던전 내부를 보자 용왕이라는 존재의 사기성이 피부에 확 와 닿았다.

갓 성체가 되었던 드래곤인 솔리타스의 던전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만큼 이곳은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런 존재가 내 후원자가 되어 주는 거야.'

자고로 인생에 있어 현실적으로 소중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포근하고 따뜻한 가족.

넉넉하게 먹고 살 자산.

그리고 언제든 기댈 수 있을 든든한 학연, 지연, 혈연 등등의 빽.

한데 지금 자신은?

그중의 마지막 요소인 빽을 끝판왕 급으로 확보하게 됐다.

포근하고 따뜻한 프론테라 가문의 사람들.

넉넉하게 마련된 영지의 자산.

거기에 용왕의 후원까지.

이제 진짜로 꿀만 빨 수 있을 인생 세팅이 완성되기 직전이다.

'루룰루루루, 후흐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러한 콧노래는 만티코어의 질주가 마침내 끝났을 때도, 만티코어의 등에서 내릴 때까지도 멈추어지질 않았다.

아예 땅에 내려서면서는 살짝 기쁨의 스텝을 밟기까지 했다.

그는 마룡굴 가장 깊숙한 곳으로 안내받았다.

"코로롱! 코롱!"

마지막 통로 모퉁이.

그곳을 돌아들어 가니 광활한 공동이 이쪽을 반겼다.

길이와 너비만 각각 어림잡아 수 킬로미터는 될 법했다.

천장마저도 아득할 정도로 넓었다.

몸길이 200미터쯤 되는 드래곤 몇 마리가 팀을 짜고 풀코트 농구 한 게임쯤 뛰고도 남을 법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 온갖 금은보화가 잔뜩 깔려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러한 광활한 공간에도, 그 공간을 가득 채운 압도적인 양의 금은보화에도 눈길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던전 공동의 중심부.

그곳에 아무렇게나 놓인 소파.

그 소파 위에 널브러진 존재가 그의 시선을 너무나 강렬하게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용왕다운 카리스마로?

혹은 압도적인 위엄으로?

아니었다.

'방구석 집돌이가... 왜 여기서 나와?'

마치, 주말 오후에 야구 경기 틀어놓고 누워 계시다가 '아빠 안 잔다'라고 하시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말 그대로 물아일체.

소파와 한몸이 되어 널브러진 존재.

이것은 소파인가 용왕인가.

지금까지 이런 용왕은 없었다고 잠꼬대하는 듯한 존재.

그것이 용왕 베르키스를 보며 로이드가 느낀 첫인상이었다.

247화. 귀차니스트의 속사정 (1)

 

 

귀차니스트.

이 세상에는 다양한 유형의 귀차니즘 소유자들이 있다.

그냥 귀찮아서 배달 음식만 시켜먹는 영진이 형.

뼈 발라 먹기 싫다며 순살 치킨만 먹어대는 성진이.

집게질이 귀찮다는 이유 하나로 불판 위의 고기도 안 뒤집고 그냥 날름 먹는 다호.

저녁에 선크림 지우기 귀찮다고 종일 집에서 안 나간 사린이.

지하주차장 몇 발짝 내려가기 싫다고 굳이 밖에만 주차하는 박 부장까지.

그렇듯 로이드는 대한민국에 있던 때부터 다양한 유형의 귀차니스트를 겪었노라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그 자부심(?)이 박살 나고 있었다.

드디어 마룡굴의 중심에서 마주하게 된 용왕 베르키스.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 방구석 폐인은?'

보자마자 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수준의 귀차니스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왕은 소파와 한몸이 된 듯 널브러져 있었다.

자신의 본거지에 모처럼의 인간이 찾아왔는데도.

그 인간이 자신의 후원을 받을 자격을 얻은 존재인데도.

그럼에도 용왕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스윽.

 

그저 나른한 눈동자만 딱 2밀리미터쯤 움직였다.

그렇게 이쪽의 모습을 1초쯤 쳐다보는가 싶더니.

 

스륵.

 

'왜 잠드는 건데!'

로이드는 속으로 빽 외쳤다.

당황스러웠다.

설마하니 용왕이 이런 식의 귀차니스트인 줄은 몰랐는데.

이쪽을 보면서도 인사 한 번도 없이 잠드는 놈인 줄도 몰랐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용왕이니까.

세상 모든 드래곤을 다스리는 자니까.

최소한 지배자다운 모습 비슷한 건 보일 줄 알았는데.

'어떡하지? 깨워야 하나? 인사를 건네 볼까? 그럼 그 소리에 깨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히 깨우는 건 섣부른 행동일 것 같아.'

어쩐지 그런 직감이 들었다.

인사를 건넨다고.

그렇게 깨운다고.

저 용왕이 정말로 일어나서 인사를 나눌까?

비로소 용왕다운 위엄을 드러내며 이쪽을 후원하겠다느니 약속된 혜택을 주겠다느니 하는 식의 멘트를 살갑고 알뜰살뜰하게 건네줄까?

'그건 아닐 거 같아.'

로이드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저 용왕이란 작자, 정상의 범주에 들어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깨운다고 일어나서 인사를 나누고 할 존재였다면?

애초에 모처럼의 방문객을 보고도 저렇게 잠들진 않았을 테니까.

'쩝. 그럼 어떡하지.'

로이드는 입맛을 다셨다.

난감했다.

지옥까지 가서 모든 일을 끝냈고, 마지막 혜택만 받으면 되는 건데.

그걸 받아내려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정작 최후의 보상을 주어야 할 용왕이 그냥 무책임하게 잠들어 버리다니.

"하비엘."

"예, 로이드 님."

"일단 좀 기다려야겠다."

로이드는 결정을 내렸다.

저거, 섣불리 깨우면 안 된다.

괜히 보상에 눈이 멀어서 성급하게 행동하다간?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다 끓인 라면을 냄비째로 쏟는 꼴을 겪을 수도 있다.

그는 하비엘을 향해 최대한 조용히 속닥였다.

"그러니까 넌 저쪽으로 좀 멀리 가 있어라."

"로이드 님은 어쩌실 작정입니까?"

"나야 뭐. 기분 좀 맞춰 드려야지."

"기분이라시면?"

"그런 게 있으니까 일단 조용히 있어."

손사래 치며 하비엘을 멀찍이 보냈다.

발꿈치를 들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은밀하게.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서 용왕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용왕 베르키스를 관찰했다.

새삼스러운 확신과 함께 부러움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진짜 방구석 백수 맞네. 평생 뒹굴거리면서 사는 딱 그런 거. 근데 세상에서 제일 부자야. 하 씨. 부럽다.'

건물주, 아니, 갓물주.

소유하고 있는 재산만으로도 먹고살 걱정이 없는 존재.

아니, 그냥 방구석에서 발바닥만 긁으며 뒹굴대고 있어도 통장의 돈이 무럭무럭 퐁퐁 늘어나는 존재. 그래서 삶의 거창한 목표나 열정 없이도 그냥저냥 편안하게 살아가는 존재.

어쩌면 자신의 이상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그런 갓물주적 백수의 삶.

로이드는 그런 자신의 롤모델(?)이 눈앞에 나타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럽다.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용왕 베르키스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거렸다.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 뛰면서 아랫배가 살살 아팠다.

질투? 시기심?

아니었다.

'아이구, 내가 평생 모시고 싶었던 우리 형님이 여기 계셨네.'

자고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막 돈으로 허세 부리고, 자랑이나 일삼고, 흥청망청 밥이나 사고, 그러면서 또 돈 자랑 하고.

그러는 사람을 소중히 하고 가까이 두며 절대로 잃지 않도록 살갑게 대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부는 이럴 때 하는 거다.

아첨도 이럴 때 쓰라고 존재하는 거다.

빛나는 서비스 정신과 넘치는 배려, 존중이라는 소중하고도 따스하고 포근한 범인류적 가치는 이런 순간을 위해 우주에 탄생한 거다.

로이드는 그렇게 정신무장을 다졌다.

옆에 굴러다니던 최고급 실크 담요를 살포시 집었다.

사르륵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잠든 용왕 베르키스의 몸을 담요로 덮어 주었다.

'어이쿠, 우리 형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덮고 주무실까.'

마치 잠들어 있는 금덩이.

혹은 복덩어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로이드가 벌쭉 웃었다.

그의 정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새벽 2시의 싱크대 위를 거니는 바퀴벌레보다도 은밀하게,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였다.

주위를 샅샅이 스캔했다.

적당한 물건을 찾아냈다.

황금으로 만든 잔을 발굴했다.

대형공동 주위로 졸졸졸 흐르는 샘물을 떠 왔다.

그러는 김에 공작 깃털로 만든 커다란 부채도 하나 찾아냈다.

용왕에게 정성 가득한 부채질을 살포시 시전했다.

살랑살랑 산들바람이 불어 용왕 베르키스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그런 덕분일까.

용왕의 잠든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딱 좋아. 원래 소파에서 잘 때 이불 덮은 채로 선풍기 제일 약하게 틀어놓으면 그거 느낌 은근 끝내주거든.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그런 건 똑같네, 똑같아.'

로이드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예전,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집이 어려워지기 전.

그땐 나름 평범한 아파트에서 살았더랬다.

거실엔 3인용 가죽 소파도 있었더랬다.

그 소파는 폭신하고 편했다.

거기 누워서 티비를 보는 게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가죽 소파라서 오래 누워 있으면 땀 차고 더워졌어.'

아무리 방석을 깔아 놓아도 그랬다.

누워 있다 보면 소파와 몸이 닿은 자리에 열이 차서 더워졌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선풍기를 소환했다.

얇은 이불 하나 덮고서 선풍기 약하게 틀어 놓으면?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그건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비슷할 거고.'

마침 용왕이 지금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소파가 가죽 소파였다.

덕분에 그걸 보는 순간 한국에서의 기억이 잠깐 떠올랐고, 당시에 종종 쓰던 자신만의 비기(?)를 용왕에게 서비스로 제공했다.

결과는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쿠우우울."

한결 편안해진 걸까.

용왕 베르키스가 본격적으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기에 그는 몰랐다.

편안하게 코를 골고 있는 용왕 베르키스.

그가 지금 조금은 뜻밖이라는 감정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거, 뭐지.'

용왕, 베르키스는 생각했다.

반쯤 잠든 의식 사이에서.

편안하게 코를 고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귀찮다고 여기면서도.

자신에게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는 인간을 힐끔 실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놈은 또 처음인데.'

용왕의 후원 자격을 얻은 인간이었다.

다만 그 자격을 얻은 인간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지난 몇백 년간, 자격을 얻은 인간들이 몇 번인가 여기까지 찾아왔었다.

그리고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갔다.

아무런 후원도 얻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귀찮았으니까.'

인간을 상대하는 건 귀찮았다.

고작 인간 따위를 맞이하려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러자면 허리와 몸통의 관절과 근육을 움직여야 했다.

팔로 소파를 짚고, 어깨에도 힘을 주어야 했다.

심지어 고개를 들고 눈을 떠야 했다.

눈꺼풀을 열어 눈동자 초점도 맞춰 줘야 했다.

게다가 말까지 섞어야 했다.

그러자면 번거롭게 입까지 움직여야 했다.

그게 너무나 싫었다.

귀찮았다.

그렇게 쓸데없이 움직이는 데 소모하는 인생, 아니, 용생의 몇 초가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계속 잠을 잤다면 자신의 모든 근육과 적혈구는 그만큼 편안한 몇 초를 만끽했을 텐데.

그런 식으로 용생을 아깝게 흘려보내는 게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였다.

어떤 방문자가 와도 무시했다.

그냥 눈도 뜨지 않고 계속 잠만 잤다.

한데 신기하게도 그렇게만 하면 귀찮은 일이 해결되었다.

'다들 처음엔 당황하다가, 나중엔 애걸복걸하고, 분통을 삭이다가, 결국엔 돌아갔거든.'

이곳을 찾아온 용왕 후원 후보들.

그 몇몇의 인간들이 전부 그랬다.

처음엔 이쪽의 무반응에 당황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깨우려는 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무시했다.

그러면 보통의 인간들은 매달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용왕이시여, 제발 눈을 뜨소서.

저를 외면하지 말아 주소서.

눈을 뜨세요 용사여.

기타 등등.

그럼에도 자신은?

그냥 계속 잤다.

꾸준하게, 일관성 있게 무시했다.

그러면 다음으로 나오는 반응은 분통 삭이기였다.

'자신이 무시받는다는 걸 깨닫고는 분개했지. 왜냐. 대부분 자존심이 특출하게 강한 인간들이었거든.'

보통 용왕의 후원 자격을 얻으려면 엄청난 공훈을 세워야 했다.

그것도 그냥 인간계의 공훈 정도가 아니었다.

감히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의 용생을 구원하는 정도의 공훈을 세워야 했다.

애초에 보통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공훈이나 업적이 아닌 셈이었다.

당연히 그런 짓(?)을 해낸 인간들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나같이 절세의 영웅들이었다.

극한의 수준에 다다른 검사.

지고의 경지를 이룬 마법사.

세상의 성자라 불리던 성직자.

혹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복자까지.

그냥 말 그대로 위인전기 시리즈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 하나같이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용왕 후원의 자격을 얻어서 이곳까지 왔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후원을 얻어낼 수 없었다.

'다들 자존심이 너무 강했으니까.'

베르키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영웅들.

그들의 자아는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한데 삶을 통틀어 경험해 본 적 없는, 밑도 끝도 없는 무시를 일관적으로 받아 버렸다.

그것도, 크나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온 이곳 마룡굴에서 말이다.

그런 상황이 그들을 무너뜨렸다.

'다들 못 참더라고.'

처음엔 애걸복걸하다가.

나중엔 아무리 용왕이라도 이럴 수 있느냐고.

어떻게 자신을 이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느냐고.

이거 약속을 위반하는 것 아니냐고.

대놓고 따지거나 분개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 몇 달, 심지어 몇 년.

이쪽이 계속 잠만 자면서 무시를 하니까 생겨난 일들이었다.

물론 그러고 나서는 아내에게 혼이 났다.

이번에도 또 이러면 어떡하시느냐고.

먼 길 온 손님들을 그리도 박하게 대하면 아니 되신다고.

모처럼 어머님과 애기씨께서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용왕 후원 제도를 어찌하여 실천하지 아니하시느냐고.

자꾸 그렇게 뒹굴거리기만 하시는 건 실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혼인할 적에는 부지런해지겠노라 약조하시어 놓고선.

그 약조, 이제 보니 실로 작심삼일이었노라고.

몇 달이고 바가지를 긁혀야 했다.

'뭐, 그래도 좋아.'

베르키스는 내심 히죽 웃었다.

아내에게 긁히는 바가지는 즐겁다. 행복하다. 온종일 쫑알대는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예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방문자는 무시하는 게 좋다.

귀찮음을 감수하며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쫓아내고 나면 아내에게 바가지도 퐁퐁 긁히고.

자신의 입장에선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베르키스는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또 헤벌레해서는 마룡굴을 찾아온 녀석.

후원을 받을 거라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온 로이드.

녀석을 처음 볼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껏 겪은 인간 영웅 놈들과 별다를 것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똑같이 취급하고 대응하면 될 거라고.

그렇게 나름 확신을 했더랬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이놈, 뭐지.'

베르키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오히려 날 더 재우고 있어?'

그랬다.

오늘 마룡굴에 들어온 저 인간.

감히 자신을 보채거나 애걸복걸하지 않았다.

한껏 정중하게 예의 차리는 멘트 따위로 자신을 깨우려 들지도 않았다.

보채거나 애걸복걸하는 대신에 담요를 덮어 주고.

자신을 깨우는 멘트 대신에 부채질을 해 주었다.

게다가 심지어....

'잔에 물도 떠다 놨네? 설마 나 중간에 깨면 목이나 축이라고?'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베르키스의 로이드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

'하, 이놈 이거. 마음에 드는데.'

후원을 받으러 온 인간 중에 이런 놈은 처음이다.

일단 자신을 귀찮게 만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이쪽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 주어서.

베르키스는 로이드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더욱 편하게 잠들었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이건 상이야. 그러니까 넌 고의적으로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무시해 주지.'

아주 진심으로 잠들어 주마.

이거 아무한테나 해 주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도록 하여라.

베르키스는 대만족의 심정을 느끼며 아예 실눈마저 감아 버렸다.

정말로 몇 년쯤 족히 늘어질 기세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드르렁. 퓌유으으."

온몸이 완전히 이완되었다.

행복한 꿈나라로 퐁당 빠져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번에 깨어났을 때엔?

지금 부채질을 하는 저 마음에 드는 인간.

어느샌가 포기하고 사라져 있겠지.

그럼 하품 한 번 늘어지게 하고 아내한테 바가지 긁힌 다음에 뽀뽀나 해 줘야지.

그렇게 베르키스는 이번의 수면 계획(?)을 야물딱지게 세웠다.

물론 깊은 잠에 빠지면서도 그는 조금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계속되는 무시에 뚜껑 열린 인간이 잠든 자신을 공격할 사태도 염려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공격도 자신을 다치게 하지 못한다.

설령 코앞에서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코끝이 살짝 까지고 그슬리는 정도로 따끔할 뿐일 거니까.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없을 테니까.

베르키스는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

덕분에 그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늘어지게 잠든 사이.

깍듯하게 자신을 맞춤형 서비스(?)로 모시는 로이드가 어떤 미친 짓거리를 벌일 것인지를.

248화. 귀차니스트의 속사정 (2)

 

 

"...드르렁! 퓌유으."

이곳은 마룡굴.

용왕의 보금자리이자 세상 모든 드래곤이 경배하는 신령한 장소.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 열 마리가 팀 먹고 풀코트 농구 한 게임을 뛰어도 전혀 비좁지 않을 광활한 던전의 공동.

그곳에 용왕 베르키스의 코 고는 소리가 찰지게 울렸다.

소파와 한몸이 된 지금 자세가 너무나 편안해서.

마침 어느 인간이 덮어 준 담요가 참으로 포근해서.

한데 그 인간의 부채질 산들바람이 실로 청량해서.

이렇게 안락할 수가 없었다.

저절로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저도 모르게 꿈나라로의 힘찬 정주행을 시작했다.

즉, 베르키스는 완벽한 숙면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로이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후후, 됐다.'

방구석 폐인 잠재우기 성공.

로이드는 보람찬 미소를 피워 냈다.

완벽하게 곯아떨어진 용왕 베르키스를 슬며시 살펴보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진짜로 잠들었나 확인도 해 보았다.

알뜰살뜰 펼친 손바닥을 용왕 얼굴 앞에 휙휙 저어도 보았다.

역시나 용왕의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퓌유으으! 흠냐, 쩝."

숨소리가 더욱 편안해졌다.

이건 진짜다.

제대로 잠들었다.

확신한 로이드는 발꿈치를 들고서 살금살금 용왕에게서 물러났다.

아까부터 이쪽을 보고 있던 하비엘이 물어왔다.

"로이드 님, 뭘 하신 겁니까?"

"뭘 하긴."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용왕님 재워 드렸지."

"그건 저도 봐서 알고 있습니다만-"

하비엘의 미심쩍은 표정이 짙어졌다.

"저렇게 용왕을 재워서 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

"두 가지야."

"두 가지요?"

"어."

로이드의 대꾸가 이어졌다.

"하나는 용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거. 아까 처음 봤을 때 딱 감이 오더라고. 너도 봤잖냐. 우릴 봐 놓고도 인사도 없이 바로 잠들던 거."

"예, 저도 봤습니다."

"그치?"

"예. 마치 예전의 로이드 님 같더군요."

"어?"

"술에 잔뜩 취한 다음 날 아침에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던 그 시절의 로이드 님 말입니다."

"...."

"기억하실진 모르겠지만 당시의 로이드 님이 딱 저랬습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지요. 깨우려 들수록 오히려 화를 버럭 내며 욕설과 함께 물건이나 집어 던졌고 말입니다."

"...."

"그 시절을 생각하니 로이드 님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더 자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깨우는 것만큼 심기를 거스르는 방법이 없겠지요."

"...."

이건 칭찬을 들은 걸까.

아니면 서슴없이 날아온 돌직구에 옥수수가 털린 걸까.

로이드는 쑴펑쑴펑 피어오르는 비애감을 느꼈다.

조금 억울했다.

'아, 씨. 그 시절의 로이드는 내가 아니었다고, 인마.'

하지만 하비엘도, 이 세상의 누구도 그걸 모를 터다.

그 사실은 자신만 아는, 자신만의 비밀이다.

그러니 이건 자신이 안고 가야 하는 원죄다.

그렇게 생각하자.

로이드는 애써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콧김을 풍 뿜어냈다.

"쯧. 하여간 사람 말로 패는 데는 일관성 있게 일가견 있다니깐. 어쨌건 네 말대로 그렇게 용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내 첫 번째 의도 맞아."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노는 거."

"...예?"

"못 들었어? 놀 거라고."

"설마 여기서 말입니까?"

"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로이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연 뻔뻔한 말이 이어졌다.

"생각해 봐. 용왕이 우릴 부른 거잖아? 만티코어까지 보내줬잖아? 게다가 우리가 들어온 걸 보고도 아무 소리 안 했지? 그럼 이게 뭐냐. 우리 여기 정식으로 초청된 거거든. 안 그래?"

"그건 맞습니다만...."

"초청됐으니까 즐겨야지. 어차피 용왕은 곯아떨어졌는데. 그거 억지로 깨우기도 좀 그런데. 게다가 설마 저 용왕이 몇 년씩 자고 그러겠냐. 그러니까 기다리는 김에 좀 놀아야지."

"대체 뭘 하면서 놀겠다는 겁니까."

"뒹굴뒹굴."

로이드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할 일 없이 뒹굴뒹굴.

그저 백수처럼 널브러지기.

그동안 제일 해 보고 싶던 일이었다.

마침 저렇게 늘어진 용왕의 모습을 보니, 그 욕망이 더욱 자극을 받기도 했다.

내심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좀 쉬고 싶어. 생각 좀 해 봐라. 내가 지금 얼마 동안 계속 일만 했지?"

"음, 지옥에서 거의 5개월, 그리고...."

"지옥 가기 직전엔 국왕 누님 때문에 테르미나 대정원 공사 반년쯤 했지?"

"예."

"그렇지. 그러니까 나 지금 거의 1년 가까이 쉬지도 못하고 뼈 빠지게 일만 한 사람이거든?"

"부지런하셨군요."

"그런 칭찬 반갑지 않아."

"나태하지 못하셨군요."

"그래, 그거지. 어쨌건 그래서야."

로이드가 마룡굴의 광활한 공동 안쪽을 가리켰다.

"이건 모처럼의 휴가인 거지. 마룡굴에 있는 동안 누가 날 건드릴 건데. 안 그래?"

사실이었다.

이곳은 어떤 의미에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였다.

무려 용왕이 기거하는 마룡굴이었다.

한데 누가 감히 여길 찾아오겠는가.

누가 자신을 부르러 오겠는가.

말 그대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완벽한 자유와 휴식이 보장된 공간이 이곳인 셈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마룡굴에서 대놓고 휴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휴가, 혹은 호캉스였다.

이곳에는 5성급 호텔 부럽지 않을 쉼터마저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건 바로 왕성이었다.

심지어 그런 왕성이 두 개였다.

"...아무래도 이거, 어디서 '뽑아 온' 것 같은데?"

마룡굴 공동 한쪽 구석탱이에 나란히 놓인 왕성 두 개.

공동을 탐험하다가 그걸 발견한 로이드는 뜨악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왼쪽에서 보고 오른쪽에서 봐도.

눈앞의 웅장한 건축물은 왕성이 맞았다.

한데 왕성 아래쪽이 좀 많이 이상했다.

'어디서 뜯어 온 것 같은, 아니, 뽑아 온 것 같은 흔적이야.'

확실했다.

왕성 전체의 지지 구조, 그 아래의 지반까지 일부가 통째로 뜯겨진 채로 이곳에 옮겨져 있었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문득, 예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철혈의 기사에서도 언급된 내용이 있었지. 왕도 마젠타가 과거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나. 그때 한 드래곤에게 두 번이나 왕성을 뽑힌 멍청한 왕이 있었다고 했지. 왕도에 처음 갔던 때에도 칙사와 그 얘기를 나눴고.'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분명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데 지금 이곳 마룡굴에 와서 보니....

'그 왕성을 뽑은 드래곤이란 게 용왕이었구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 용왕, 멀쩡한 왕성을 정말로 밭에서 무 뽑듯이 끙차 뽑아 버린 거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여기까지 가져온 거다.

'그러곤 아예 인테리어 소품으로 갖다 놓은 거지.'

뭔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곧 정신을 차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왕성 안쪽도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거, 왕성 안쪽, 생각보다 관리가 엄청 잘됐는데?'

뜻밖이었다.

사방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마치 오늘 아침까지도 열심히 청소와 정돈을 해 놓은 것 같았다.

드넓은 왕성 내부 어느 곳에도 먼지 쌓인 곳이 없었다.

심지어 침실마다 침대가 뽀송뽀송하기까지 했다!

'허허허. 대박.'

로이드는 아예 결심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자신이 언제 왕의 침대에서 자 보겠는가.

그는 대놓고 왕의 침실에 자리를 잡았다.

본격적인 호캉스를 즐겼다.

마침 마룡굴엔 먹을 것도 모자라지 않았다.

중앙의 거대한 공동.

그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는 통로.

그중에 어느 통로를 가건 바닥의 흙 속에 고구마가 잔뜩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크기가 농구공만큼 커다란 초대형 고구마였다.

"야, 굽자."

"...."

"뭐해? 얼른 불 안 피우고."

"...."

엄청난 크기의 고구마를 무려 다섯 덩어리나 끙끙대며 안고 온 로이드.

하비엘은 그런 로이드의 모습을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물었다.

"그거, 마룡굴의 귀한 작물인 것 같은데 막 구워서 먹어도 되는 겁니까?"

"어, 될걸."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만티코어한테 물어봤거든."

로이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정말이었다.

혹시나 고구마를 캐는 행동 때문에 용왕 베르키스의 진노를 사는 것은 아닐까.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그는 만티코어를 찾아갔다.

대놓고 물어보았다.

여기 통로마다 가득한 고구마를 좀 먹어도 되겠느냐고.

돌아온 만티코어의 대답은 쿨내 가득한 'YES'였다.

"코롱! 하고 대답하더라."

"...그 대답이 긍정이었다는 확신이 있는 겁니까?"

"어. 고개 끄덕이면서 코롱 했거든."

"나름 허락을 받은 겁니까."

"그렇지. 그래서 고마운 김에 뽀동이도 소개해 줬고."

"뽀동 경을 말입니까?"

"어. 처음엔 그 만티코어, 고개 갸웃거리더라. 그러다가 뽀동이가 빨간 해바라기씨 먹고 커지니까 완전 반가워하더라."

"그랬겠군요. 아무래도 덩치가 엇비슷하니까."

"그랬던 거 같아. 다행히 뽀동이도 만티코어랑 금방 친해지더라고."

"지금은 둘이서 놀고 있는 겁니까?"

"어. 술래잡기하고 있을걸. 그나저나, 불은 안 피우냐?"

"...."

"얼른 좀 하자. 배고프다."

"...."

졸지에, 소설 속 세상에선 세계를 구한 철혈의 기사가 이곳에선 얼굴에 검댕을 묻혀 가며 고구마를 굽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듯 로이드는 몇 날 며칠을 탱자탱자 뒹굴거렸다.

그동안의 혹사와 과로를 뒤로하고 그저 놀고 쉬었다.

편안했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그러는 동안 하비엘은 때때로 묘한 시선으로 로이드를 관찰했다.

"...."

마룡굴에 온 지도 벌써 열흘째.

그동안 지켜보니 이제, 비로소 조금은 실감이 난다.

역시나 눈앞의 로이드 님은 진짜가 아니다.

정말로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던 거다.

'그래서였어.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보였던 것도.'

몇 년 전의 어느 아침이 떠올랐다.

그 전날만 해도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던 로이드 프론테라.

그랬던 그가 아침이 오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더랬다.

이상했다.

하지만 넘어갔다.

나름 반가운 변화였기 때문이었다.

'이젠 알겠어. 지옥왕이 저 사람을 부르던 김수호라는 호칭의 의미도.'

김수호.

아마도 저 가짜 로이드가 원래 세상에서 지니고 있었을 이름이리라.

그렇다면 그동안 저 사람이 선보였던 뜻밖의 모습들도.

종종 드러내던 신기한 건설 지식들도.

모두 그 세상에서 익힌 것들이었으리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궁금해지는 점도 있었다.

'저 가짜 로이드 님은... 내가 진실을 안다는 걸 눈치채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언제나처럼 뻔뻔하게 굴까.

혹은 이쪽을 겁내게 될까.

그런 날이 오면 자신은 어떻게 저 가짜를 대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당신이 지금의 모습을 잃지만 않는다면, 저도 당신의 곁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로이드를 보는 하비엘의 눈빛에 희미한 온기가 배어났다.

그 눈빛에 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 너 무슨 생각하냐?"

"예?"

"방금 나 보는 눈길이 뭔가 느끼했는데?"

"...."

"솔직히 말해라. 너, 고구마 말고 더 맛있는 거 발견해 놓고 숨기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아닙니다."

"진짜로?"

"예."

솔직히 말하자면 숨기는 건 있습니다.

그런데 당분간은 계속 숨기고 있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은 피식 웃었다.

로이드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번졌다.

"그럼 고구마나 마저 빨리 굽자. 배고파."

"알겠습니다."

고구마를 굽는 하비엘의 손길이 부지런해졌다.

모처럼의 호캉스를 즐기는 두 사람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마룡굴 한쪽 구석에서는.

곤히 잠들어 있던 용왕이 난데없는 위기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헉?"

용왕 베르키스는 눈을 떴다.

모처럼 잠들어 있던 자세가 불편해서?

혹은 살랑거리던 부채질 산들바람이 사라져서?

모두 아니었다.

잠자리는 편안했다.

산들바람은 없어도 상관없었다.

한데 그가 이렇듯 갑자기 위기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난 이유.

그건 간단했다.

'난리 났다. 제일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어.'

까먹고 있던 약속 하나가 뒤늦게 떠올랐다.

그것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했던 약속이었다.

'...매일 연락하기로 했는데!'

까먹고 말았다.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부터?

'모르겠어. 내가 얼마나 비몽사몽으로 지낸 거지?'

베르키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나마 자신이 비몽사몽 상태가 되기 전.

그날 아내가 마룡굴 밖 세상으로 나갔더랬다.

시어머니인 염화룡과의 효도 여행을 위해서였다.

'한 1년쯤 여행 다녀올 거라고. 그동안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는데.'

이를테면 그것은 숙제였다.

한데 그걸 왕창 까먹고 말았다.

베르키스는 2심방 2심실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즉시 두 손을 들었다.

허공에 마법진을 형성했다.

아내가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상관없이, 좌표를 모르더라도 즉시 연락을 취할 수 있을 고급 통신 마법이었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아내의 좌표를 추적했다. 접속을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파칫!

 

통신 마법진이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서 사라졌다.

통신에 실패한 것이었다.

베르키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신을 거부했어."

아내가 삐쳤다.

이건, 진짜로 난리가 났다.

'어떡하지?'

베르키스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너무나 착하고 고와서 결코 삐치는 일이 없는 아내인데.

이렇게 연락마저 거절하는 걸로 봐선 이번엔 단단히 뿔이 난 게 아닐까.

그럼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걸까.

'당장 달려가서 싹싹 빌어야 하나? 아냐. 그건 너무 귀찮아.'

먼 길을 달려가는 일은 귀찮았다.

그러자면 수많은 근육을 움직여야 할 터였다.

막대한 마나까지 동원하며 공간이동도 감행해야 할 터였다.

한데 그건 너무 귀찮았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과연 어떻게 해야 수고를 제일 적게 들이면서 밀린 숙제를 만회하고 아내를 달랠 수 있을까.

"으으. 생각해라. 생각해."

용왕 베르키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맹렬한 고민에 돌입했다.

한데 그때였다.

그가 고민에 사로잡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가 뒤에서부터 스르륵 다가왔다.

그리고 태연 뻔뻔하게 물어왔다.

"아이고, 용왕님? 혹시 뭔가 고민이 생기셨습니까아?"

용왕이 깨어났다는 걸 깨닫자마자 콧구멍 털이 휘날리도록 달려온 남자.

그 와중에도 첫인상 점수 관리를 위해 두 손바닥을 알차게 비비는 남자.

침 바른 혓바닥에 온갖 아첨성 멘트를 뻔뻔하게 장착한 남자.

어느샌가 나타난 로이드가 베르키스를 향해 보험사기단스러운 상콤한 미소를 발사하고 있었다.

249화. 용왕님의 알람이 되었습니다 (1)

 

 

"아이고오, 용왕님? 혹시 뭔가 고민이 생기셨습니까아? 아니면 무슨 문제라도?"

"...."

난데없이 귓가를 숑숑 간질여 오는 목소리.

용왕 베르키스는 고개를 돌렸다.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인간이 있었다.

두 손바닥을 알차게 비비며.

츄릅거리는 혓바닥 감추고서.

상콤하고 친근하게 웃는 놈이었다.

베르키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뭐냐, 너님은."

"예?"

"너님은 누군데 지금 내 앞에서...."

"아이고,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어찌하다 보니 용왕님의 후원 자격을 얻는 바람에 만티코어를 타고 여기까지 왔지 않겠습니까? 혹시 기억 안 나십니까? 며칠 전에 제가 담요도 덮어 드리고 부채도 살랑살랑 부쳐 드렸는데. 아, 그리고 이거."

"...."

"혹시나 일어나시면 목마르실까 봐 제가 떠놨습니다. 우선 한 잔 시워언하게 들이켜 보시지요."

"...."

이놈, 뭘까.

베르키스는 묘한 시선으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좀 떠오르긴 했다.

'그래. 며칠 전에 저런 놈이 던전에 기어들어왔지.'

모처럼 용왕 후원 자격을 얻은 인간.

놈이 만티코어를 타고 왔던 게 기억났다.

외부인은 거의 150년 만이었던가.

상대하기 귀찮았다.

말을 섞는 것도 귀찮았다.

쳐다보기 위해 안구를 굴리는 데 드는 힘조차 아까웠다.

그래서 그냥 잤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았던 몇몇 영웅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냥 자면서 무시하면 알아서 떠날 거라고.

용왕 후원이고 뭐고 결국엔 포기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여기며 푹 잠들어 버렸다.

한데 지금 보니?

이놈, 전혀 포기한 기색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껏 보았던 다른 영웅들처럼 매달리는 기색도 아니었다.

용왕 후원의 혜택을 달라고.

용왕답게 약속을 지켜 달라고.

그렇게 대놓고 요구해 오지도 않았다.

매달리거나 애걸복걸하긴커녕?

딴에 오히려 이쪽을 도와주겠다며 입술에 침을 촵촵 바르고 있는 게 아닌가.

베르키스는 내심 실소를 삼켰다.

로이드가 내미는 물잔을 받았다. 들이켰다. 그리고 물었다.

"너님이? 나님을? 돕겠다고?"

"예, 용왕님."

"어떻게? 내 고민을 들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어이쿠, 제가 들어드리는 걸로 도움이 된다면 백 번이라도 해야지요."

"정말?"

"예."

로이드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기회다.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용왕이 언제쯤 잠에서 깨어날까 사실은 살짝 초조해지던 참이었는데, 다행히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어.'

지난 며칠 동안 마룡굴에서 호캉스를 즐겼던 로이드.

하지만 그는 마냥 마음 편히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24시간 용왕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왕의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도.

마룡굴 함정 지대 익사이팅 투어를 하면서도.

그러다가 배가 고파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도.

언제나, 한시도 놓치지 않고, 용왕의 동향을 놓치지 않으려 신경 썼다.

그러는 한편으로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용왕의 잠이 길어질 것 같았으니까.'

처음엔 아무리 그래도 며칠씩이나 잘까 싶었다.

한데 점점 보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최소 몇 개월은 이대로 잘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하던 참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한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용왕이 이렇게 깨어나 줬단 말씀이지. 아이고, 고마워라.'

심지어 용왕이 그냥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뭔가 엄청난 고민에 휩싸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였다.

어쩌면 두 번 잡기 어려울 찬스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가 혓바닥에 힘찬 전진 기어를 넣었다.

"용왕님의 어떠한 고민이든 저는 들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수고로움요?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수고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돕고 사는 세상! 서로를 향한 따뜻한 선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함께 일구어 나가야 할 아름다운 미래가 아닐까요."

"...."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만."

"아니, 됐고. 그럼 내 고민 들어볼 수 있다는 거지?"

"예."

"그럼 너님, 결혼은 했냐?"

"예?"

"결혼, 했냐고."

"안 했습니다."

"그럼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예."

"살면서 뭐 했냐."

"...."

아니, 용왕님.

왜 갑자기 말로 사람 뼈를 부러뜨리십니까.

로이드는 눈꼬리에 송골송골 맺히려는 눈물방울을 서둘러 털어냈다.

하지만 용왕 베르키스는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결혼도 안 했고, 여자친구도 없었고. 그럼 내 고민을 못 들어줄 거 같은데? 너님이 유부남의 고충을 알기나 해?"

"아, 조금은 압니다!"

"어떻게?"

"제가 항상 아버지 고민상담 해 드렸거든요. 어머니가 삐치실 때마다 말입니다."

"정말?"

"예."

"흐음, 그럼 우리 꼬맹이가 삐쳐 버린 이 무시무시한 비상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쬐끔은 힘을 보탤 수도 있겠구나?"

"꼬맹이가 누굽니까?"

"내 마나님."

"마나... 아, 용왕비님?"

"어."

"말씀만 주십시오. 성심껏 들어드리겠습니다."

로이드는 촥 무릎을 꿇고 앉았다.

베르키스를 향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뒤통수 근육을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귓바퀴도 살짝 움찔움찔 움직여 보였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당신의 고민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라는 정성 가득한 어필.

그 태도에 베르키스의 마음도 움직였다.

"...쯧. 설명하자면 간단해. 우리 꼬맹이가 삐쳤어."

"용왕비님께서요?"

"응."

"대체 어쩌시다가...."

"이번에 여행을 떠났거든. 우리 엄마 모시고. 딸도 같이."

"용왕님의... 어머님이랑 따님 말씀이십니까?"

"어."

베르키스의 말이 이어졌다.

"너님은 모르겠지만 우리 꼬맹이가 엄청 부지런하단 말이야. 상상을 초월해. 지난 수백 년 동안 여기서 단 하루도 요리며 청소를 거른 적이 없었을 정도니까."

"아, 그럼 혹시... 그 부지런함 때문에 용왕님의 어머님께서 용왕비님께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하신 거 아닙니까?"

"오. 정답. 너님 똘똘하네?"

"그냥 눈치껏 느꼈습니다."

"어쨌건 맞아. 너무 그렇게 집안일만 하면 안 된다고, 너무 성실하게만 사는 것도 안타깝다고, 그러니까 모처럼 바깥 공기나 좀 쐬자고. 1년만 놀다 오겠다며 훌쩍 데려가 버리더라."

"어머님께서, 용왕비님을요?"

"응."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나만 여기 남았지. 이거 완전 기회잖아."

"그렇죠. 일생일대의 흔치 않은 찬스죠. 혼자 남아서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뒹굴거리고."

"바로 그거지. 너님이 뭘 좀 아네."

"아하하."

"어쨌건, 덕분에 원 없이 각 잡고 자려고 했다? 근데 우리 꼬맹이도 그런 내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선지 숙제를 하나 내주더라?"

"숙제... 라니요?"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연락하래."

"...."

"정확하게 그대로 전하자면, '낭군님? 소녀, 처음으로 낭군님 곁을 떠나 세상을 둘러보고 오게 되었답니다. 하여 소녀, 그간 홀로 남아 계실 낭군님이 참으로 염려가 되어요. 하오니 낭군님께서는 매일 아침마다 꼭 기침하시어 소녀에게 기별을 전해주시어요.'라고 말이지."

"...아하하, 꿀이 떨어지네요."

"근데 살벌하지 않냐."

"예. 그렇습니다."

로이드는 서슴없이 맞장구를 쳤다.

생각해보니 저 나긋나긋하고 알콩달콩하기 짝이 없는 당부에 제법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었다.

'원래 저렇게 나긋나긋한 당부가 무서운 거거든.'

예전, 대한민국에서 살던 시절.

가끔 엄마한테 들볶이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용왕 베르키스도 당시의 아버지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님은 정말 이해가 안 돼. 매일 아침 일어나서 연락을 달라니. 세상에 대체 어떤 인생, 아니, 용생을 살아야 아침마다 스스로 알아서 꼬박꼬박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거냐? 그게 진짜로 가능하긴 한 거야?"

"아,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긴 하지요."

"그렇지? 나만 이상한 게 아니지?"

"아무렴요."

로이드는 너스레를 떨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리고 용왕 베르키스가 맞닥뜨린 고민의 핵심을 짚어냈다.

"그럼, 설마 그동안 용왕비님께 연락을 안 하셨던 겁니까?"

"어."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그럼 오늘은 시도해 보셨는지?"

"당연히 했지. 통신 마법으로. 근데 실패했어."

"설마."

"눈치 빠르네."

"수신 거부, 맞습니까?"

"응. 도와줘. 어떻게 하면 이 비상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

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도와주면 뭘 뽑아먹을 수 있을까.

상황을 분석했다.

하나하나 계산했다.

이득과 손해를 따졌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저기, 한 가지 여쭙고 싶은데... 혹시 용왕비님을 찾아가는 방법은 고려를 안 하고 계신 거지요?"

"당연하지. 지금 당장 만나서 무슨 잔소리를 들으려고."

"하긴."

진짜 당연한 소리다.

삐쳐 있는 와이프에게 눈치 없이 쭐레쭐레 접근하는 건?

그냥 저 죽여 주세요, 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는 자살행위다.

그러니 일단 화부터 풀어주고 접근해야 한다.

용왕이 고민하는 포인트도 바로 그것일 터였다.

어떻게 화를 풀어줄 것인가.

다행히 로이드는 그 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제 영지로 오시죠."

"뭐?"

베르키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님더러? 너님 영지로 가자고?"

"예."

"귀찮은데. 왜?"

"제가 모닝콜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모닝콜?"

"예."

이제부터가 중요한 대목이다.

로이드는 입술에 침을 촵촵 발랐다.

더욱 사근사근하고 상콤한 미소를 입꼬리에 장착했다.

그리고 신뢰감 쑴펑쑴펑 돋아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왕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까도 말씀하셨지요? 대체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 용생이어야 매일 아침에 스스로 반짝반짝 눈을 뜨며 일어나느냐고 말입니다."

"어, 그랬지."

"제 생각도 같습니다. 매일 아침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눈을 뜨는 것만큼 어렵고 괴로운 일이 없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게 스스로가 아니라 남이 깨워 주는 거면 어떻겠습니까?"

"남이? 그러니까 너님이 날 깨워 주겠다고?"

"예."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 사기단스러운 정직과 신뢰, 신용을 혓바닥 가득 장착하고서 말했다.

"제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아침마다 깨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왕님께서 용왕비님께 연락을 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흠, 근데 꼬맹이가 연락을 계속 안 받으면?"

"그래도 계속 연락하셔야지요."

"그럼 될까?"

"됩니다."

로이드는 확언했다.

"아침마다 연락을 주시라는 약속을 어겨서 용왕비님이 진노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그 잘못을 지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모든 일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법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성실하게 연락을 하시면 됩니다."

"정말로?"

"예. 물론 처음엔 용왕비님께서 몇 번 연락을 무시하시겠지요. 그래도 계속 꾸준하게 연락을 하시면요? 그럼 결국엔 마음이 풀어지실 겁니다. 왜냐. 반성하며 성실해진 모습을 보이신 거니까 말입니다. 비록 연락이 통하지는 않았더라도요."

"오오. 그럴싸한데?"

"예. 제가 그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너님이 날 깨워 주겠다고?"

"예. 용왕님께선 그저 온종일 뒹굴... 아니, 주무시다가 제가 깨워 드릴 때만 반짝 눈 뜨고서 용왕비님께 연락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 뒤엔 또 온종일 잘 수 있다는 거지? 다음 날 아침에 너님이 나 깨울 때까지?"

"바로 그거지요. 게다가-"

로이드의 확신 가득한 열변이 이어졌다.

"모처럼 이 마룡굴을 벗어나 멀리까지 나가 계시는 모습. 그걸 보이는 것만으로도 또 용왕비님께 추가 점수를 얻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굳이 너님 영지까지 가자는 거로구만?"

"옙, 바로 그겁니다."

로이드의 입가에 신뢰감 가득한 미소가 맺혔다.

베르키스의 입가에 만족감 가득한 웃음이 피어났다.

'좋아.'

베르키스와 로이드.

용왕과 영악한 인간.

둘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놈 이거, 쓸 만한데?'

로이드를 보는 베르키스의 눈빛에 희망이 피어났다.

저 인간이 방금 꺼낸 제안, 다시 생각해 봐도 괜찮았다.

일단 자신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잠만 자면 될 터였다.

그러다가 저놈이 깨워 줄 때 눈 뜨고 꼬맹이에게 연락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이곳 마룡굴에 혼자 남겨진 동안 제일 아쉬웠던 일이 해결되는 셈이었다.

'만티코어 녀석은 날 깨우는 걸 부담스러워했지. 여전히 날 무서워하는 구석이 남아 있으니까.'

한데 그 가려운 부분이 일거에 해결될 각이 보였다.

심지어 자신이 손해 볼 건덕지라곤 보이지도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였다.

베르키스의 눈빛이 별안간, 샐쭉해졌다.

"그래서 너님, 나한테 바라는 게 많겠네."

"옙."

"겸양 안 떨어?"

"이미 눈치채고 계신데 겸양 같은 거 떨어서 뭣하겠습니까. 그래 봤자 괜히 용왕님께서 저 추궁하시느라 몇 마디 말을 추가로 꺼내셔야 하고, 그만큼 귀찮음을 느끼실 텐데요."

"오오. 마음에 들어."

"감사합니다."

"그래, 줄게."

"예?"

로이드가 멈칫했다.

그 순간이었다.

용왕 베르키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됐어. 추가 목숨 한 개. 그리고 마룡굴 출입 권한. 모두 줬다."

"...예?"

"그게 용왕 후원의 혜택이었잖아. 줬다고. 그거 전부."

"전부요?"

로이드는 얼떨떨함을 느꼈다.

그냥 용왕이 손가락 한 번만 튕긴 건데.

어느새 그 혜택들이 전부 주어졌다고 말하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베르키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번쩍번쩍하고, 어? 샤방샤방하게 빛나고, 어? 그런 걸 기대했던 거냐? 귀찮게 그런 반짝이 효과 따위를 왜 넣어, 내가."

"그, 그런 겁니까."

"당연하지. 이제부터는 이 마룡굴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 거다. 어떤 함정에도 걸리지 않을 거야. 그러니 여기 있는 잡동사니 마음대로 가져가서 써도 돼. 그리고 추가로 주어진 목숨은...."

"예."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고. 음, 한번 죽어 보면 확인이 될 건데. 지금 해 볼래?"

"...아닙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게다가 너님, 날 영지에 모시고 있으면서 누릴 이득도 계산한 거겠지?"

"옙."

"들켰으면 멋쩍은 척이라도 해라."

"아하하."

로이드는 멋쩍게 웃었다.

용왕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최소 앞으로 1년.

용왕 베르키스를 영지로 데려가서 모시게 될 기간이었다.

그동안 매일 아침 베르키스를 깨우면서 좀 더 아첨을 떨 수 있을 것이다. 기분을 맞춰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다.

로이드는 그렇게 맺을 인맥이 두고두고 평생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용왕이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백수니까!'

다시금 강조하는 거지만, 저런 분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기회가 생기면 어떤 아첨을 해서라도 건설적이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서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윤택해진다.

'게다가 이렇게 용왕을 도와주면서 들일 수고도 별로 대단한 게 아닐 거고.'

그저 아침마다 한 번.

자고 있을 용왕을 깨워주기만 하면 된다.

말 그대로 강아지 산책시키는 일보다도 들이는 수고가 적은 셈이다.

'겨우 그 정도의 수고로 용왕과의 인맥을 얻는 거야. 이건 무조건 질러야 해.'

1그램의 노력으로 얻어낼 천만 톤의 이득.

눈앞에 놓인 그런 이득을 놓칠 로이드가 아니었다.

"저기, 그럼 이제부터 제가 용왕님을 모셔드려도 되겠습니까?"

"날 업겠다고?"

"그래야 용왕님의 다리가 수고를 하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너님 참, 내 스타일이구나? 그래도 그건 좀 징그러우니까 됐고. 그냥 순간이동이나 하자."

"옙, 알겠습니다."

로이드가 냉큼 맞장구를 쳤다.

베르키스가 순간이동 마법을 준비했다.

영악한 인간과 게으른 용왕.

둘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발의 기사, 하비엘은 가만히 생각했다.

'저 사기꾼.'

김수호라는 저 인간.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사실 사기꾼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 인간을 나는 지켜 주겠답시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쩐지 쑴펑쑴펑 피어나는 회의감 속에서 하비엘은 영지 복귀를 위한 여장을 꾸렸다.

그렇게, 두 인간과 용왕의 프론테라 영지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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