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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뿌드득.

라스는 눈을 감은 라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지?'

아무리 본래의 힘을 쓸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의 빙의를 막아내는 인간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제 10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놈이.

'말이 안 돼….'

지금과 다른 시대였지만, 수많은 인간을 봐왔다. 검으로 나라를 세운 영웅도, 대륙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 악인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인간은 처음이다. 꼭 '그놈'을 보는 듯한 짜증이 일었다.

-기다려라. 본왕의 힘이 돌아오는 날. 네놈의 영혼을 씹어 삼켜버릴 것이다.

라스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럴 일은 없으니, 꿈 깨."

어린 인간은 파리를 쫓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본왕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안 된다니까."

9화

날이 밝았다.

라온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짐을 챙겨서 별관을 나왔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정원 앞에 일렬로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올게."

라온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실비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혼자 가서 다행이야.'

연무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수련생뿐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실비아와 함께 갔다면 오늘 연무장에 도착 못 했을 거다.

"실비아 님. 그런 표정으로 도련님을 보내실 건가요?"

"으음…."

헬렌의 가벼운 꾸중에 실비아의 굳은 얼굴이 슬며시 녹아내렸다.

"라온."

실비아가 모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라온의 앞에 섰다. 여전히 걱정되었지만, 이젠 포기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보았으니까.'

라온은 지난 한 달 동안 마나 회로에서 퍼지는 냉기를 견디면서 단 하루도 단련을 쉬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입김을 내뿜으며 매일같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인내하며 노력한 아이를 시무룩한 얼굴로 보낼 수는 없었다.

"라온. 잘하고 와."

실비아는 걱정으로 울렁이는 감정을 다잡고 미소 지었다.

"응."

라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5 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괜찮겠지?"

"많이 나아지셨잖아요. 잘되면 훈련을 통과해서 돌아오실지도 몰라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가장 좋긴 하죠."

실비아와 헬렌은 멀어지는 라온의 등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훈련 통과 따윈 필요 없으니, 무사히만 돌아와 달라고 기도했다.

* * *

5 연무장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벽이 직사각형 형태로 설치되어 있어서 꼭 길쭉한 상자 같았다.

입구에서 오른쪽에는 곱게 간 흙이 깔린 야외 훈련장이 있었고, 좌측에는 지붕이 있는 실내 단련장이 있었다.

라온은 연무장을 쭉 둘러본 뒤 중앙에 선 아이들을 훑었다.

'듣던 대로 숫자가 많군.'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연무장 곳곳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나 방계만이 아니라, 봉신 가문이나 외부에서 데리고 온 추천생들도 있어서 매번 이 정도 인원이 모인다고 들었다.

'이번엔 더 많다고 했었지.'

헬렌이 올해는 사람이 많아서 6 연무장도 가동한다고 말해줬었다.

바삭.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녹색 머리칼에 얼굴이 동그란 아이가 복부에 달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먹고 있었다.

"드실래요?"

라온이 멍하니 보고 있자, 주머니에서 다른 과자를 꺼내 내밀었다.

"아니, 괜찮아."

"넵."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네모난 빵이 튀어나왔다.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몸을 풀려고 할 때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쟤 맞지? 팔다리 비실비실한 거 봐. 툭 치면 부러지겠네. 훈련할 수는 있나?"

"환자면 대충하는 척하다가 도망가지. 왜 나서서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난 가주님에게 직접 따지는 모습을 보고 눈 감았다. 주제를 몰라. 지가 직계인 줄 아는 거지."

방계의 아이들이 다 들리도록 비난을 해댔다.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지, 라온을 노려보는 아이들이 많았다.

"팔찌는 또 저게 뭐야?"

"꽃무늬 팔찌?"

"나잇값도 못 하네."

방계들은 팔목에 걸린 라스를 보고 킥킥 비웃었다. 이 팔찌는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모양이다.

-저거 설마 본 왕을 말하는 것이냐.

잠이 든 것처럼 조용했던 라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팔찌 모양 바꾸라고 했잖아.'

-고귀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버러지들이로다. 무엇을 하는 게냐. 당장 저놈들의 대가리를 깨부숴라.

라스의 목소리가 끓는 물처럼 지글거렸다.

'뭐하러?

-본 왕만 건드린 게 아니라, 네놈에게도 시비를 걸었는데 참는다는 거냐?

'넌 무슨 일인지도 모르잖아.'

-그딴 건 상관없다! 본왕을 똑바로 보기만 해도 눈알을 뽑아버려야….

'난 너처럼 미치지 않았어.'

이 미친놈에게 몸을 넘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흐음."

라온이 고개를 돌려 방금 주둥이를 놀린 방계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잠시 찔끔했지만, 뭐 어쩔 거냐는 듯 턱을 쭉 내밀었다.

'전생이라면 무시했겠지.'

전생의 자신이라면 못 들은 척하고 몸을 돌렸을 거다. 암살자가 시선을 끌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은 암살자가 아니라,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라온은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입을 놀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직접 올 줄은 몰랐던지 얼굴에 당황이 비친다.

"어?"

"무, 무슨 말을…."

"모기처럼 앵앵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으음."

"그, 그게…."

방계의 아이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역시.'

이 아이들은 그저 부모가 하던 걸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 따윈 없었다.

"앞에서 못 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는 말 안 배웠어?"

"다, 닥쳐!"

"몰락해서 별관에 박혀 사는 주제에 감히!"

"네놈은 직계가 아니라, 방계다!"

"너희도 방계다. 감히라는 말은 상대가 너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 하는 말이지. 너희는 내게 그 단어를 뱉을 자격이 없어."

라온의 목소리는 고조되지도, 가라앉지도 않았다. 사실을 말하는 단순한 어조였다.

"크으으!"

방계 세 놈이 금방이라도 덤빌 것처럼 다리를 벌리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뚜둑.

라온이 손가락을 풀었다.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풀고, 시선을 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네놈을…."

"그만!"

방계 놈들이 달려들려고 할 때 우측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발의 미소년이었다.

-저놈은 뭔데 방해냐. 머리를 부숴라.

'버렌이었던가.'

판별식에서 최고의 재능을 보여주었던 직계였다.

"곧 훈련이 시작될 텐데 뭐 하는 짓이지? 외부의 인원들 앞에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을 할 셈이냐?"

그는 예상과 달리 세 놈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질책했다.

"버, 버렌 님!"

"죄송합니다!"

라온에게 달려들려던 방계들은 버렌의 한 마디에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숙였다.

"네놈은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방계들의 사과를 받은 버렌이 라온에게 다가왔다.

"너 따위는 언제라도 걷어낼 수 있는 먼지에 불과해. 별관에서도 쫓겨나기 싫으면 쥐 죽은 것처럼 조용히 살아라."

버렌은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인상을 구겼다.

'쥐새끼 같은 놈!'

눈앞의 덜떨어진 놈은 한 달 전 가주님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그것도 제 능력이 아니라,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건 능력이 없는 놈이고, 두 번째로 싫어하는 건 주제를 모르고 건방진 놈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그 둘 모두 포함되었다.

훈련도 제대로 못 하고 떨어져 나갈 낙오자 따위가 가주님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만으로 짜증이 일었다.

"훈련에 참여할 생각이 없으면 당장 꺼져라. 아니, 그냥 나가. 네놈이 훈련을 통과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버렌의 비난에 방계의 아이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속 시원한 얼굴로 돌아가려 할 때 라온이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개소리를 해도 참 맛대가리 없게 하네."

라온이 턱을 모로 틀었다. 삐딱한 표정으로 버렌과 눈을 마주쳤다.

"네가 뭐라도 되나?"

"뭐?"

"넌 직계일 뿐 어떠한 지위도 없다. 별관에서 쫓아내? 수련생 신분조차 안 된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 네 아버지에게 가서 이르면 그나마 가능성 있겠네."

"방계 놈이 감히…."

버렌의 주먹에 녹색의 바람이 깃들었다. 그가 살벌한 눈으로 다가올 때 연무장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쾅!

바르르 떨리는 문을 넘어 적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뾰족한 귀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외모를 가졌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경쾌한 기세와 함께했다.

"벌써 싸우냐? 젊다 못해 어려서 그런지 당돌하네."

그는 히죽거리며 연무장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저자가 여기에 있었나?'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남자.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렸던 엘프 검사 리메르였다.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단전에 부상을 입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흐흥!"

리메르는 자신과 버렌을 한 번씩 쳐다본 후 연무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크음…."

버렌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서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이 봐주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표정 같았다.

"반갑다."

단상의 중심에 선 리메르가 씩 웃었다.

"너희들의 수련을 총괄할 수석 교관 리메르라고 한다."

목소리가 가볍다. 경박하기보다 바람처럼 경쾌한 느낌. 리메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훈련 참여자는 160명. 교관은 8명. 너희 모두를 가르치기엔 숫자가 좀 많지? 그래서 줄이는 게 좋겠어. 딱 4분의 1로."

리메르의 여유로웠던 미소에 농축된 장난기가 어렸다.

"주, 줄인다고요?"

"그것도 4분의 1?"

"그게 무슨 소리…."

아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기초 수련에 참여하는 인원을 거른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옥석을 가리자는 거지. 난 소수라도 제대로 된 검사를 키워보고 싶거든."

리메르는 상품을 고르듯 아이들을 보며 손가락을 휘저었다.

"에엑, 저, 저는 오라고 해서 온 건데…."

아까 과자를 내밀었던 녹색 머리 아이가 들고 있던 빵을 떨어뜨렸다.

"전 지그하르트의 방계입니다! 수련생이 되기 전부터 거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맞습니다! 저희 모두는 가문에서 참여하라는 말을 듣고 온 겁니다!"

"아아, 난 무식해서 직계고, 방계고. 그런 거 몰라."

리메르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연무장에선 내가 룰이다. 불만 있으면 내게 권한을 넘겨준 가주님에게 따져."

수석 교관이 아니라, 흡사 뒷골목 양아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지만, 외모가 좋으니 멋스러워 보였다.

'거른다라….'

라온이 턱을 긁적였다. 리메르는 상대의 기질과 잠재력을 느끼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들었다. 그 능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을 고르려는 것 같았다.

-저 건방진 놈은 무엇이냐.

'뭐?'

-감히 본왕을 내려다보다니, 마음에 들지 않도다. 저 엘프 놈의 귀를 뽑아버려라.

'네 눈에 마음에 들 사람이 있을까?'

라스는 그 이름대로 모든 것에 분노했다.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그 누구도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마족들이 경배하는 진정한 군주의… 이, 이놈!

'시끄러.'

라스의 혓바닥이 길어지기 시작해서 팔찌를 툭 쳤다.

"그럼 바로 시험을 시작하지."

리메르는 새끼손가락에 붙은 귀지를 훅 불었다.

"너희는 무학을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재능입니다!"

"튼튼하고 유연한 육체입니다!"

"굳건한 단전!"

"검술과 오러 연공법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들은 이미 시험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들고 각자가 생각한 중요한 요소를 외쳤다.

"재능, 육체, 단전, 검술 다 옳은 말이야. 하지만 그것들은 벽과 지붕이다. 그 아래에 잘 다져놓아야 할 토대가 있지. 바로 체력과 정신력이다."

"아…."

"음…."

아이들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중 무학을 배운 녀석도, 배우지 않은 녀석도 있을 테니,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시험을 치르겠다."

아이들을 가리키던 리메르의 손가락이 스르륵 움직여 야외 연무장을 가리켰다.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연무장을 뛰어라. 전력으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명이 움직였다. 라온과 함께 판별식을 치렀던 직계 버렌과 봉신 가문 슬리온의 루난이었다.

"이익!"

"가, 가자!"

"달려!"

그 둘을 따라 다른 아이들도 연무장을 뛰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말아라. 본왕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

라온은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신선한 공기로 폐를 채웠다. 앞에서 뛰고 있는 아이들을 따라 땅을 박찼다.

'확실히 다르군.'

루난과 버렌은 이미 한참 앞을 달리고 있었다. 가볍게 달리는 것 같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할 속도를 냈다.

오러의 질이 뛰어나고, 특별한 속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부터 육체와 정신을 단련했기 때문이다.

-크흠, 이미 달렸으면 가장 앞으로 가라. 왜 맨 뒤에 있는 거냐.

'네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지고 싶지 않을 뿐이니라.

'이건 경쟁이 아니야.'

라온이 단상 위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부는 리메르를 보았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잠재력과 기질을 본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살피진 않을 거다.

"후욱…."

라온은 차오른 숨을 뱉어내며 두 눈을 빛냈다.

'이건 버티는 자가 이기는 시험이야.'

그건 대륙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일이었다.

* * *

"확실히 버렌 님과 루난 님이 독보적이군."

"속도만 빠른 게 아니야. 안정성도 있어. 지금 속도도 전력이 아니니, 저대로 몇 시간이고 달릴 수 있을 거다. 열두 살에 저 수준이라니, 장래가 무섭다. 무서워."

단상 아래에 선 두 명의 교관은 달리는 아이들을 살피며 잡담을 나누었다.

"올해는 방계 수준도 높네. 제대로 교육해서 보낸 모양이야."

"추천생들도 마찬가지야. 잘 골라왔는지 뛰어난 아이들이 많아."

그들은 버렌과 루난만이 아니라, 뒤에서 달리는 아이들도 하나하나 평가했다.

"음…."

아이들 모두를 살피던 교관들은 후위 집단에서 달리는 라온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따라가지 못하는군."

"환자잖아. 저 정도로 뛰는 것도 대단한 거야."

"음, 벌써 지쳐 보이는데. 금방 떨어지겠어."

교관들은 예상했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다른 아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다만 그들의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던 리메르의 시선은 라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군.'

라메르의 녹색 눈동자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저런 녀석은 처음 봐.'

자신은 다른 일족보다 더 호화로운 자연의 축복을 받아 다른 사람의 상태와 잠재력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재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은 대륙의 최강자들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 생각이 처음으로 변했다.

가장 앞에서 뛰는 루난과 버렌도, 그 뒤에서 이를 악물고 뛰는 방계와 추천생들도 자신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클지, 어떻게 강해질지 모두 보였다.

딱 한 명. 라온 지그하르트만 제외하고.

'왜 보이지 않는 거지?'

먹구름이 낀 듯 그의 미래가, 그의 잠재력이 보이지 않았다.

재능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아니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보는 듯 인지를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재미있군."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지루해진 시대. 정말 오랜만에 흥미로운 인간이 나타났다.

* * *

"저거 봐라."

"건방 떨더니, 꼴찌?"

"꼴찌라는 말도 과해. 금세 떨어져 나갈 테니까."

방계의 아이들은 하위 그룹에서 달리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별관에서 곱게 자란 놈이 제대로 달릴 리가 없지."

"저 당황한 표정 좀 봐라."

"10분도 못 버티겠네."

세 사람 외에 다른 아이들도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다만 라온의 심각한 표정은 힘들거나 지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련인데 그냥 달리기만 한다고?'

전생에서 체력 단련을 할 땐 뒤에 굶주린 짐승을 풀어놓았다.

체력이 다 할 때까지 달리기만 하라니, 그 시절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너무 쉬운데?

10화

아이들이 연무장을 뛰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버렌과 루난은 여전히 가장 앞에서 달렸고, 그 뒤로는 방계와 봉신 가문 그리고 추천생들이 엎치락뒤치락 끼어 있었다.

물론 160명 모두가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이미 한참 전에 포기해서 연무장 구석에 주저앉았고, 지금도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흐아암."

리메르는 단상 위에 드러누워 하품을 했지만, 눈동자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61번째 녀석은 가진 체력보다 빨리 포기했군. 62번째는 체력보다 더 버텼고.'

그는 졸린 눈으로 160명의 아이들을 한눈에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리메르가 보는 건 아이들이 가진 체력이 아니었다.

'체력만 보는 건 의미가 없지.'

아이들은 성장 환경에 따라 체력이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직계 둘과 상위 그룹의 20여 명을 제외한다면 다 거기서 거기다.

비슷한 체력을 가졌으면서도 어떤 아이는 숨이 차오른 즉시 포기하고, 어떤 아이는 가슴을 꼬집으면서 혹은 울면서도 끝까지 달렸다.

'그 차이가 무엇보다 중요해.'

누군가는 쉽게 포기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작아 보이는 저 정신력의 격차가 미래엔 어마어마하게 벌어질 거다.

체력은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재능도 성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끈기를 키우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어려서부터 포기하지 않는 아이는 미래에도 포기하지 않고, 포기가 익숙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쉽게 포기하는 법.

물론 크게 깨닫고 변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듯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부터 정신력과 끈기가 뛰어난 아이를 고르는 게 훨씬 편했다.

'어느 정도 결정이 났네.'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이미 반수 이상의 아이들이 포기했고, 나머지도 지쳐서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시험의 끝을 준비하고 있던 리메르의 눈에 하위 그룹에서 달리는 금발의 아이가 들어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오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유일한 아이였다. 리메르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이해할 수 없군.'

라온의 체력은 한참 전에 바닥난 상태였다. 육체를 짓누르는 냉기와 가빠오는 호흡에 서 있지도 못해야 하건만, 녀석은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다.

'끈기 정도가 아니야. 독기인가?'

수많은 전장을 돌며 찬란한 재능들을 봐왔다.

그 중에선 검으로 대륙에 우뚝 설 검사도, 마법으로 세상의 격을 바꿀 마법사 있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라온처럼 버티진 못할 거다.

아예 바닥난 체력으로 계속해서 달린다? 그것도 지독한 체질을 안고 태어난 12살짜리가?

그건 생사가 걸린 전투를 수십 번 넘고서야 가질 수 있는 정신력이다. 곱게 자란 저 아이에게 어떻게 저런 독기가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음….'

리메르의 눈동자에 연무장 전체가 드리웠다.

힘을 아끼고 있음에도 가장 앞서 나가는 루난과 버렌도 대단했지만, 바닥난 체력으로 지금까지 달리는 라온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라온을 무시하던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도 그에겐 지기 싫은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리고 있었다.

"후후."

리메르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가르칠 맛 나네."

* * *

"으음…."

버렌 지그하르트는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한 번씩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왜지? 저놈이 어떻게 남아 있는 거냐고!'

라온 지그하르트. 가주님에게 말대꾸했던 저 건방진 놈은 예상과 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느리지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끝까지 달리고 있었다.

'달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라온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에 냉기를 지녀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성장도 느리다고 들었다.

실제로 본 놈은 듣던 것보다도 한심했다. 키도 작고, 단련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방계도, 봉신 가문의 아이들도, 재능을 인정받은 추천생들도 포기해서 떨어져 나가는데, 곧 죽을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 놈도 그렇고 짜증 나는군.'

유일하게 자신을 따라오는 루난도, 당연히 떨어져 나가야 할 라온도 거슬렸다.

'좋다. 확실한 차이를 보여주지.'

버렌은 루난과 라온 모두의 마음을 무너뜨리기로 마음먹고 거칠게 발을 굴렀다.

후우웅!

오러를 운용하여 허벅지와 종이리의 근육을 증폭시켰다. 시야가 좁게 느껴질 정도의 속도로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놈들이?'

라이벌이라 생각한 루난도, 라온도 반응하지 않았다.

둘은 각자의 속도를 유지한 채 달렸고, 오히려 방계와 봉신 가문의 녀석들만 조급하게 자신을 뒤쫓았다.

"쯧!"

버렌은 혀를 차고서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비슷하게 달리던 루난과 큰 차이가 날 정도로 앞서 나갔고, 라온은 한참 전에 추월했다.

그래도 루난과 라온의 속도는 그대로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 각자의 전력을 유지했다.

'끄윽!'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녀석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디 끝까지 그렇게 나올 수 있나 보자.'

* * *

"후욱!"

라온이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계속 힘이 들어와.'

체력은 한참 전에 바닥을 드러낸 것으로 모자라, 말라붙은 우물처럼 텅 비었다.

기절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3성에 오른 불의 고리가 전해주는 단비 같은 활력 덕분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천국이지.'

전생에서 암살자로 사육될 땐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들개에게 쫓겼다. 터지려는 심장을 움켜쥔 채 산을 내달렸었다.

결국 따라잡혀서 들개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 지옥 같은 삶에 비하면 지금은 놀이나 다를 게 없었다.

"후욱…."

라온이 가쁜 숨을 흘리며 앞을 보았다. 아직도 전력을 유지하는 방계나, 추천받은 아이들도 어디에서 보기 힘든 재능이지만, 루난과 버렌은 특별했다. 둘은 조금도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채 처음부터 끝까지 안정적으로 달렸다.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때 갑자기 버렌이 속도를 올렸다. 그는 루난을 추월하여 선두로 올라섰다.

"어?"

"버, 버렌 님이?"

"달려! 뒤처지면 안 돼!"

그를 본 다른 방계나 추천생들이 무리해서 속도를 올렸다.

"흥!"

버렌은 따라잡아 보라는 듯 루난과 자신을 보며 눈을 흘겼다.

-무엇을 하는 게냐. 도발하는데 그대로 있을 거냐? 따라잡아서 저 눈알을 뭉개놓아라.

라스가 버렌을 노려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지만, 라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경쟁이 아니야.'

오늘의 달리기는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체력, 정신력을 보여주는 시험이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자신 말고 한 명이 더 있었다.

'루난 슬리온.'

두 번째로 달리는 은발의 소녀는 버렌의 독주에 관심도 없다는 듯 본인만의 속도를 유지했다.

'이쪽이 오히려 한발 앞서 있군.'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루난이 버렌보다 정신적으로 조금 더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버렌은 어른스러운 척하고 있지만, 그 나이 그대로 애였다. 저대로 전장에 나갔다간 금방 죽게 될 거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라온은 버렌이 아니라, 루난의 뒷모습을 쫓으며 연무장을 달렸다.

"라, 라온?"

"어떻게…."

"지, 지금까지 달리고 있었다고?"

무리해서 버렌을 쫓던 방계들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비꼬는 말을 하던 녀석들이다.

"허억, 허억! 무, 무슨 짓을 한 거지?"

"끄으, 말도 안 돼…."

숨을 헐떡이는 방계들은 라온에게 추월당하자 걸음을 멈추고 땅에 주저앉았다.

라온은 그들의 경악한 눈동자를 추진력 삼아 앞으로 달렸다.

'한심하군.'

어딜 가나 입만 떠드는 놈들은 실속이 없는 법이다.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계속 달렸다.

"후우…."

라온은 느린 호흡을 통해 불의 고리를 끝없이 회전시켰다.

'고리의 성장이 빨라.'

그리 긴 시간을 달리지 않았음에도 고리의 연성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역시 불의 고리는 전력으로 활동해야 제 능력을 발휘하는 연공법이었다.

'그래도 더럽게 힘들지만.'

불의 고리가 회전한다고 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장과 폐가 찌그러진 듯 조여오고, 옆구리는 단도가 박힌 듯이 아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도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을 때 라스가 혀를 찼다.

-본 왕의 빙의체가 될 놈이 패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몸을 넘겨라. 당장 쫓아가서 저 파란 머리 꼬마를 통째로 얼려주마.

'시끄러워.'

이건 따라잡기 위해서 하는 시험이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본 왕이 눈을 뜨고 있는 한 지는 꼴은 못 본다.

'그럼 눈 감아. 이렇게 달리는 것도 기적이니까.'

거짓이 아니다.

라스의 시스템이 있다고 해도 아직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제거할 수는 없다. 불의 고리라는 기적 덕분에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다.

-그럼 본 왕에게 몸을 넘겨라.

라스가 어제 보았던 푸른 불꽃의 형태로 변했다. 놈의 분노가 감정을 자극하여 속이 울렁거렸다.

'하필 이럴 때….'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친 상태에서 라스의 자극이 전해지니, 어제보다 2배에 가까운 고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여기서 지친 모습을 보였다간 라스에게 약점이 잡힐 수도 있다.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달렸다.

'헛짓하지 말고 다시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운용하며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다리를 굴렀다.

-크으, 대체 왜 네놈에겐 본 왕의 힘이 통하질 않는 거냐!

라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분노의 감정을 자극했다.

"후욱…."

라온은 바닥 친 체력을 억지로 끌어 올려 라스의 정신 공격을 버텼다.

'죽겠군….'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수많은 사선을 넘었던 전생의 경험과 불의 고리가 균형을 맞춘 덕분에 정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 지독한 놈!

'포기하고 꺼져.'

"으합!"

라온이 라스의 기운을 밀어낼 때 단상에 드러누워 있던 리메르가 벌떡 일어섰다.

"자, 그만!"

그의 시원한 외침에 연무장에서 달리던 아이들이 발을 멈췄다.

"허억! 허억!"

"끄으윽!"

"아우욱!"

아이들은 눈이 풀린 채로 주저앉거나, 무릎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후욱…."

라온 역시 곧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괴물 같은 놈.

라스가 이를 갈며 다시 팔찌 속으로 들어갔다.

'말했잖아. 안 된다고.'

이마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시험도 힘들었지만, 라스의 공격을 버티는 게 더 버거웠다. 조금 더 달렸다간 정말 죽을 뻔했다.

'이번 삶도 평범하진…음?'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을 때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띵!

[체력을 넘어선 극한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11화

[근력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허…."

라온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왔다.

'이 내용은 진짜야.'

전완근부터 시작된 근육의 떨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주먹을 움켜쥐자, 이전보다 조금 강해진 악력이 느껴졌다.

탁.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보았다. 작은 쇳덩이가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능력치가 오르면 실제 육체도 변하는 거였나?'

-그럼 본왕이 만든 시스템이 가짜인 줄 알았나?

'미쳤군.'

라온이 혀를 내둘렀다. 한계를 넘어선 단련을 했다고 육체 능력을 올려주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보상이었다.

너무 사기 능력이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두 번째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의 견제를 버텨냈다면서 능력치를 추가로 올려준다는 메시지였다.

-저거 뭐냐?

'....'

라온은 육체에 전해지는 희열에 대답 없이 두 눈을 빛냈다.

-이, 이게 무엇이냐. 본왕의 견제를 이겨내서 추가 능력치는 주다니!

'너도 모르는 건가?'

-당연히! 이 시스템이 남에게 넘어간 적도, 본왕이 인간의 몸을 뺏지 못한 적도 없었으니까!

라스가 푸른 불꽃으로 변해서 눈앞을 붕붕 날아다녔다. 벌과 같은 움직임. 그도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확실히 그렇겠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일 때 단상 위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수고했다."

발을 구른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뼉을 쳤다.

"끄으…."

"으음…."

"망할!"

그의 흥겨운 미소에 포기해서 떨어져 나간 아이들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

"간신히 버텼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반면 끝까지 버틴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쳤지만, 뿌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당장 떨어뜨릴 생각은 없으니까."

"엑?"

"예?"

리메르의 경쾌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난 시험을 치른다고 했을 뿐. 오늘 결정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다만 오늘처럼 훈련하면 너희 중 대부분이 떨어질 거다."

"네?"

"그, 그게 무슨 말…."

아이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오늘 끝까지 달린 아이가 50명 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떨어진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난 분명 전력으로 뛰라고 말했지만, 너희들은 힘을 비축하면서 뛰었지. 160명 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으로 달린 녀석은 딱 한 명뿐이다."

리메르의 시선이 아주 잠시 라온에게 머물렀다.

"그 녀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체력의 안배를 두고 달렸다. 그래놓고 포기한 한심한 녀석들도 있고."

"으…."

"그, 그게…."

그 사실을 들킨 아이들은 창피함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뻘겋게 물들였다.

"추가로 뒤처지지 않으려고 체력 단련에 오러를 사용한 얌생이들은 부끄러운 줄 알도록."

"으음."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버렌과 몇몇 수련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너희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은 없어. 시험을 치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니까."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능글맞음과 진지함이 뒤섞인 기묘한 미소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임시 수련생' 신분이다. 6개월 뒤에 치를 시험에서 합격한다면 앞에 붙은 '임시'를 떼어주지."

"그, 그 시험이 뭔데요?"

아까 과자를 주려고 했던 녹색 머리칼의 아이가 흐려진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걸 알려주면 재미없지. 순위는 정하지 않겠지만, 수석 수련생은 뽑을 테니, 열심히 하도록."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힌트를 주마."

리메르는 뚝뚝 소리가 나도록 목을 풀면서 아이들을 내려보았다. 금방 포기한 아이도, 끝까지 달린 아이들도 눈을 빛냈다.

"6개월 동안 내가 지시하는 훈련을 그대로 완수해라. 너희의 생각을 넣지 말고, 내 말만 따른다면 시험은 무조건 합격할 수 있다."

"오!"

"저, 정말입니까?"

"너무 간단한데요?"

따라만 하면 된다고 하니, 아이들의 표정이 햇볕을 마주한 듯 환해졌다.

"난 거짓말은 안 해. 내 지시만 따라가면 합격할 수 있을 거다. 다만…."

리메르의 입꼬리가 꼬여서 올라갔다.

"그게 쉽진 않을 거야. 난 지시만 내리고 너희가 마음대로 하도록 둘 테니까. 오늘처럼 니들 마음대로 움직였다간 한 명 빼고 전부 탈락이야."

"으음…."

"그런…."

이제 12살에서 13살인 아이들의 얼굴에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다급함이 깃들었다.

반면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 덤덤한 사람도 있었다. 라온과 루난이었다.

두 사람은 리메르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젠장…."

반면 오늘 1등으로 훈련을 끝낸 버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직접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리메르는 자신을 질책했고, 라온을 칭찬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렸음에도 저 떨거지 방계에게 진 기분이었다.

'건방진 놈!'

버렌은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리메르가 아니라, 라온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너희는 앞으로 5 연무장에 붙어 있는 숙소에서 지내게 될 거다. 시설도, 대우도 최고 수준이니, 6개월 동안 잘 즐기도록."

리메르는 연무장 뒤로 보이는 숙소를 가리켰다.

"으음…."

"저기가 숙소…."

최고 수준의 대우라는 말에도 아이들의 얼굴을 밝아지지 않았다. 본인들에게 주어진 혜택이 시한부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첫날이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가서 쉬어도 되고, 이곳에서 각자 하고 싶은 수련을 해도 된다. 좌측이 실내 훈련장도 있으니, 마음대로 쓰도록."

리메르는 그 말을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갔다. 다만 계단의 중간쯤에서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한 가지만 더. 이곳에 신분은 없어. 왕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평등하다. 동기들끼리 친하게 지내라."

그는 이제 정말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을 흔들고서 연무장을 나갔다. 교관의 절반은 그를 따라 떠났고, 나머지는 연무장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저 건방진 뾰족귀놈이….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라온이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전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얼굴이 짜증 난다. 감히 본왕을 내려다보다니. 만 년 동안 얼음에 가둬도 부족하리라.

'....'

이유를 들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라스는 생각대로 성격 파탄자인 것 같았다.

'무시하는 게 좋겠군.'

살짝 고개를 젓고서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지친 육체와 정신을 풀었다.

'훈련장이나 가봐야겠네.'

라온은 라스의 주절거림을 무시하고 리메르가 알려준 실내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으음…."

"라온 지그하르트."

"대체 어떻게 달린 거지?"

방계들과 봉신 가문의 아이들은 실내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라온의 등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정보와 오늘 보았던 라온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꾸준한 수련으로 체력을 단련해온 자신들보다 더 오래 버텼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영약 때문이겠지."

처음 라온에게 시비를 걸었던 방계 크레인 지그하르트가 콧등을 찡그렸다.

"여, 영약?"

"별관에 있는 것들은 직계에서 버림받았잖아."

"맞아. 방계 중에서도 최하위라고. 어떻게 영약을 먹겠어."

"먹었다고 해도 그리 좋은 영약이 아니겠지."

"가문에서 내어 준 게 아니라, 넝마의 성자께서 주고 가셨다더군."

크레인은 의문을 가진 방계들에게 그 사정까지 말해주었다.

"아!"

"성자께서!"

"결국 저놈은 본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영약의 힘으로 달린 거네."

"그래놓고 잘난 척은!"

넝마의 성자가 준 영약을 먹었다는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쯧!"

"운 좋은 놈!"

"방계 주제에 운빨로 영약을 먹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크레인은 방계의 아이들이 피워내는 질시의 눈빛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응?"

"저 건방진 놈 교육 좀 해야 하지 않겠어?"

"하긴 저놈 버렌님 한테도 따져댔잖아."

"적당히 분위기를 잡을 필요는 있겠지

"그럼 오늘 저 녀석이 숙소로 갈 때…."

"그만둬라."

방계 아이들이 라온을 습격할 계획을 짜려 할 때 옆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버, 버렌 님?"

"고귀한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하는 짓거리다."

버렌은 차가운 눈빛으로 방계들을 훑었다.

'한심한 것들.'

라온 지그하르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다수의 폭력으로 압박하는 건 추하디 추한 짓이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로서 그딴 계획을 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차피 금방 떨어져 나갈 버러지일 뿐이다. 무시하고 수련이나 하도록."

그는 한심하다는 듯 눈매를 좁히고 연무장을 나갔다.

"아, 음…."

"하, 하지 말라고 하시네."

"음."

"너희 정말 바보냐?"

크레인이 어깨를 내린 방계들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뭐?"

"저건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하라는 뜻이잖냐."

"어?"

"내 이름에 먹칠하기 싫으니까. 우리보고 처리하라는 말씀이시잖아. 그것도 못 알아들어?"

"아?"

"그, 그거야?"

"당연하지. 빨리 준비해. 라온놈을 확실하게 교육시켜 놓으면 버렌님도 흡족해하실 테니까."

네 명의 수련생들은 둥글게 모여서 오늘 어떻게 라온의 기강을 잡을지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앉았던 루난 슬리온의 눈동자가 한 곳을 향했다.

그건 일등으로 달렸던 버렌도, 방계나 봉신 가문의 아이들도,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렸던 리메르도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중하위권에서 달렸던 라온의 등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서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이상해."

* * *

리메르는 연무장을 떠나 본관 뒤편에 있는 북망산을 올라갔다. 산 중턱에 놓인 호랑이 형태의 바위에 도착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낮잠 바위에 선객이 있네."

바위에 말을 걸자, 그 위에 서 있던 금발의 노인. 글렌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걸 제게 물어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리메르가 바위에 등을 기대며 헛웃음을 흘렸다.

"가주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보는 눈 하나는 좋잖습니까. 근데 라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제대로 파악되질 않아요."

"...."

"분명 바닥이었습니다. 마른걸레를 수없이 짜서 물 한 방울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끝까지 달렸던 건지 이유를 모르겠네요."

웃고 있는 리메르의 눈동자에 궁금증과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버렌과 루난은 최고의 재능을 지녔고, 다른 아이들도 나쁘지 않아요. 훗날 가문의 기둥이 되어 줄 수 있는 녀석들입니다. 다만…."

"라온은 판단이 안 선다는 거겠지?"

글렌의 시선이 리메르를 너머 5 연무장으로 향했다.

"맞습니다. 재능도, 잠재력도, 미래도, 성향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깜깜한 건 가주님을 봤을 때 이후에 처음입니다."

리메르가 킥킥 웃었다.

"단전이 걸레가 된 이후 하루하루가 지루했었는데, 오랜만에 재밌는 냄새가 납니다."

"네 역할은 냄새를 맡는 게 아니라, 아이들을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걸맞은 무인으로 키워내는 거다."

"그야 당연히 알고 있죠. 지그하르트 최고 충신이 바로 저 아닙니까!"

리메르가 양아치처럼 건들건들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환자가 아니고, 전우가 아니었다면 지금 목이 날아갔을 거다."

"이야. 단전을 다친 게 도움이 되는 날도 있군요."

"...."

글렌은 리메르의 단전과 심장 부근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수련생 교관은 네가 원한 일이다. 이상한데 시선 끌리지 말고, 제 역할에 충실하도록."

"물론입니다. 이번 기수에는 제 미래를 맡길 녀석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리메르가 글렌을 따라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렌이나, 루난을 말함이냐?"

"그럴 수도 있고. 추천생 중에 있을 수도 있고, 악만 가진 평민일 수도 있고, 가문에서 버림받은 아이일 수도 있죠."

"우연일 뿐이다. 그 아이는 무인이 되기 힘들다."

글렌은 그렇게 말하고서 북망산을 내려갔다. 리메르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무인의 등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아니란 걸 잘 아시면서."

* * *

라온은 실내 훈련장에서 여러 기구와 장비들을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왔다.

'나쁘지 않군.'

훈련기구나 장비는 리메르의 말대로 최고이자, 최신 기종들이었다. 따라온다면 확실하게 키워주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단련장이었다.

훈련 자체를 오후에 시작했기 때문에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기숙사로 가기 위해서 연무장을 나와 길을 돌아가려 할 때였다.

"어이."

우측 골목에서 울린 낮은 목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오전에 시비를 걸었던 방계 네 명이 살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이 지나기도 전에 영약을 먹었다면서?"

"그래놓고 잘난 척한 거냐."

"내가 그 정도로 영약을 먹었으면 너 정도는 한참 전에 추월하고 버렌 님의 바로 뒤까지 쫓아갔을 거다."

네 명은 있지도 않은 무게를 잡으면서 다가왔다.

-저런 꼬맹이들에게도 우습게 보이는 건가. 혀 깨물고 죽고 싶도다.

'걱정 마.'

라온의 눈동자가 화로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번엔 네가 보고 싶은 장면이 나올 테니까.'

12화

"음…."

라온은 잔잔한 마음과 달리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가볍게 대화나 하자는 거니까."

가장 앞에 있던 장발의 방계가 다가왔다. 저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다. 크레인 지그하르트. 오전에 시비를 걸었고, 판별식에서 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녀석이다.

"어이."

크레인의 턱짓에 그의 옆에 있던 세 명의 아이가 자신의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에 붙었다.

"대화?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세 명이 동시에 길을 막아 빠질 수가 없었다.

"따라오면 알게 될 거야."

"조용히 와."

크레인이 히죽 웃으며 손짓하자, 옆에 붙은 놈들이 어깨로 밀기 시작했다.

나이보다 몸집이 작은 라온과 또래보다 덩치가 큰 방계들이 함께 움직이니, 성인이 아이를 데려가는 모습 같았다.

"자, 잠깐만. 여기서 말하는 게…."

"이젠 늦었어."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라온은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움츠리자, 방계의 아이들은 낄낄 웃으며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웠다.

-보고 싶은 장면을 보여준다고 해놓고, 지금 무엇을 하는 거냐.

'밥도 뜸을 들여야 맛있는 법이야. 좀 기다려.'

라온은 겉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윽!"

라온은 무기력하게 연무장 외곽으로 끌려가서 벽에 던져졌다. 구석지고 어두운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영약빨 새끼."

"뭐?"

"직계에서 버림받은 주제에 운 좋게 먹은 영약으로 건방을 떨어?"

"성자께 받은 영약이 아니었다면 오늘 넌 뛰지도 못했겠지!"

"비겁한 놈!"

방계들의 표정이 먹잇감을 보는 맹수처럼 사나워졌다.

'뭔 저따위 이유로….'

어린애임을 증명하듯 덤비는 이유가 참으로 유치하고 초라했다.

'거기다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모양이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일인가.'

12살인 자신과 달리 방계의 나이는 13살이고, 덩치도 훨씬 컸다. 한참 전부터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티 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

"우리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교관님 말 들었잖아. 동기끼리 대화 좀 하자는 거지"

방계들이 주먹을 돌리며 다가왔다.

"맞는 말이네."

라온이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처맞는 말."

조금 전까지 그의 눈빛에 어려 있던 공포와 당황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오른쪽에 있던 바가지 머리가 주먹을 내질렀다.

어깨를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오른쪽 팔꿈치로 놈의 오른쪽 가슴을 후려쳤다.

"꺼어억!"

바가지 머리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꺽꺽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뭐, 뭐야!"

좌측에 있던 실눈이 앞으로 발을 차올렸다.

퍼어억!

왼손으로 올라오는 발을 쳐냈다.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명치를 찍었다.

"끄으윽…."

실눈의 아이가 명치를 부여잡은 채 자빠져 눈을 까뒤집었다.

빠악!

뒤에 있던 녀석이 주먹을 뭉쳐서 내리쳤다. 손바닥으로 흘려낸 뒤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허어업!"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너, 너희 뭐 하는 거야! 왜 저딴 놈에게 당하는 거냐고!"

홀로 남은 크레인이 뒷걸음질 쳤다. 말을 더듬으며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대화잖아. 네가 말한 동기간의 오붓한 몸의 대화."

라온은 크라인이 물러난 만큼 다가갔다.

"오지 마!"

크레인이 악을 내지르고서 왼 주먹을 뻗어왔다. 바로 오른 주먹이 따라간다. 제대로 단련한 연계 공격이었다.

다만 그걸 받는 사람은 평범한 12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뿌득!

라온의 손이 독사처럼 꼬여 올라갔다. 크레인의 왼팔을 휘감아서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끄아악!"

팔이 꺾인 고통에 크레인이 오른팔을 다 내지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이야."

왼손으로 수도를 세워 크레인의 우측 허리를 내리쳤다.

"컥! 커어억!"

크레인이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훌륭한 비명이다. 다만 아직 대가리를 깨지 않았다. 당장 부수거라.

'그놈의 대가리….'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네 명의 방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라온이 목을 돌리며 방계들에게 다가갔다.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흐윽!"

"으으으!"

"뭐, 무슨…."

방계들은 오한이 걸린 듯 몸을 떨었다. 그들의 표정엔 당황을 넘어선 공포가 어려 있었다.

"으으…."

크레인은 추위를 탄 것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이놈은 대체.'

직계인 버렌도,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직계들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기세였다. 라온에게는 오러 따위가 아닌, 어둑한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어, 어른들을 보는 것 같아….'

그것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 가문의 기둥이 된 어른들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서늘한 감각이었다.

"대화는 깊게 나눌수록 좋은 법이지."

"으어억!"

"제, 제발!"

라온이 웃으며 다가가자, 방계들은 사신을 만난 듯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퍽! 퍼어억!

그의 주먹질에 방계들이 비명도 뱉지 못하고 굼벵이처럼 몸을 구겼다.

-시원하게 잘 패는군. 처음으로 네놈이 마음에 든다.

'그거 고맙네.'

라온은 라스가 감탄할 정도로 방계들을 두들겨 팼다. 그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고통이 가장 심할 곳만 골라서.

"끄흡!"

"으어어억…."

방계들은 이제 라온의 눈도 쳐다보지 못했다. 뭍에 나온 새우처럼 몸을 움츠릴 뿐이다.

"제,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으으윽!"

라온은 방계들이 자신의 발끝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교육한 뒤 일어섰다.

"오늘 우리가 한 건 동기간의 대화다. 맞지?"

"에, 예!"

"그, 그렇습니다!"

"동기간의 대화를 어디 가서 털어놓진 않겠지?"

"다, 당연히!"

"물론입니다!"

그만 맞고 싶었던 크레인과 방계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를 끝내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마, 마무리?"

"그게 무슨 소리인지…."

"너희를 자극해서 내게 보낸 놈은 누구지? 버렌인가?"

"어…."

"예? 그, 그건 아니고요."

방계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버, 버렌 님은 지시를 내린 적이 어, 없으십니다."

"예.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셨죠. 저희가 그냥…."

"그래?"

라온이 픽 웃었다. 다급한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니다. 정말 버렌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아예 썩진 않았군.'

버렌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입이 험한 건 분명하지만, 구제불능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내일도 나랑 대화하기 싫으면 알아서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예!"

"물론입니다!"

"그, 그림자도 밟지 않겠습니다!"

라온은 방계들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골목을 나가려고 할 때 알림음이 울렸다.

띵!

* * *

턱.

라온과 방계들이 떠난 골목 구석으로 리메르가 내려섰다.

"흐음!"

그는 빌빌대며 떠나가는 방계들을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걸 보게 되었군.'

평소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아주 좋은 구경을 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야.'

오늘 본 라온은 글렌과 실비아에게 들었던 불쌍한 환자의 모습과는 달랐다.

'천재인가?'

라온은 무학을 배운 적이 없다.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적도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준 움직임은 그와 달랐다.

첫 번째 주먹을 최소한의 거리로 회피한 뒤 바로 상대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적이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급소를 쳐서 단숨에 끝내버렸다. 투박한 면은 있지만, 처음 싸운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주먹질이었다.

정신력만 대단할 줄 알았는데, 무학에 대한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피는 어디 가지 않는군.'

리메르는 방계들을 후려 팬 뒤 역으로 협박까지 하는 라온의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한때 세상이 좁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최강이라 생각할 때 만난 글렌도 저랬다. 평범해 보였지만 나서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인간을 무시하던 자신이 감명받아 따를 정도였으니,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방계들의 말을 역이용해서 협박하는 라온의 모습은 더더욱 글렌과 닮아 있었다.

"최고의 재능들 사이에 껴 있는 알 수 없는 재능이라…."

리메르가 피아노를 치듯이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심장이 뛰는군."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꼬여 올라갔다.

* * *

라온은 기숙사 앞에서 대기하던 교관이 내어준 열쇠 번호대로 405호실로 들어갔다.

별관에 있던 자신의 방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큼지막한 개인실이었다. 침대는 푹신해 보였고, 연공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럼.'

방 구경은 간단하게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금 전에 보았던 메시지를 불러왔다.

[<분노>가 당신의 행동에 만족했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만족했다는 내용과 함께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런 방식으로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건가?'

라스의 견제를 버틴 것만이 아니라, 만족시켜도 능력치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다만.

[<분노>가 악을 내지릅니다.]

-착각이다! 본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모자라! 놈들의 목이라도 따야 만족한단 말이다!

라스가 난리를 부리는 걸 보니, 본인과 상관없이 전해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전해지는 저 능력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추가로 오르는 능력치가 어디서 왔는지는 라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도 모르는 건가? 네 능력이라면서 아는 게 없네."

-네놈이 본왕의 것을 가져가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어쨌든 모르는 건 맞잖아."

-끄으윽….

라스는 아까 기분 좋았던 것이 모두 사라진 듯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좋다. 알아보고 돌아오마. 기다리고 있어라.

라스는 그 말과 함께 존재감을 감췄다. 팔찌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혼이 어디론가로 날아간 것 같았다. 손을 붕붕 휘둘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랜만에 조용하네."

라온이 손을 내렸다. 라스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씻을 준비를 하고, 4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목욕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보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네.'

손목에 걸린 꽃팔찌를 보며 픽 웃었다. 인정을 받거나, 방해를 견디는 걸로 능력치를 주다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겐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어서 라스에게 질 일도 없다. 여러모로 이득뿐이었다.

'돌아오기 전에 연공이나 할까.'

라온은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운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고오오오!

집중력을 끌어올린 뒤 연공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크으윽!

"벌써 왔나?"

혀를 차며 눈을 뜨자, 손목에 걸린 라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도둑놈!

"도둑?"

-네놈은 본왕이 본체에 남겨둔 힘을 훔치고 있었다!

'본체?'

그러고 보니, 라스는 어딘가의 왕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본왕(本王)이라 칭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았지만.

-마계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였다!

'그러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뿌드득!

라스에게서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답은 무엇이냐. 본왕에게서 힘을 얻어가는 똥파리 주제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란 말이다.

"어차피 네가 원해서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고마워할 필요가 있나?"

-끄으윽….

라스는 할 말이 없는지 신음만 흘렸다.

-건방짐 하나는 정말이지 하늘을 찌르는구나.

"딱히."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라스는 평생을 떠받들어 살아왔기 때문에 조금의 단호함도 견디지 못하는 것뿐이다.

-현재 본왕의 육체는 네놈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상태창의 능력이 네놈에게 전해진 것이지.

'흐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제안?"

-본왕과 내기를 하자. 네가 이긴다면 능력치를 넘겨주마. 다만 진다면 본왕의 분노를 가져가라.

라스의 목소리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분과 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분노>가 당신에게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13화

"내기?"

라온의 눈매가 가늘게 내려갔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갑작스럽게 내기를 하자고 하니, 라스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긴장할 필요 없다. 본왕은 거짓말을 하지도, 널 속이지도 않는다. 직접 보여주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첫 번째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정식 수련생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

성공 시: 모든 능력치 +2, 임의선택 특성.

실패 시: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읽어보니,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내기를 해서 이긴다면 라스의 능력을 넘겨준다는 것 같았다.

"리메르가 말했던 정규수련생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하라는 건가?"

-그렇다. 놈이 수석은 반드시 뽑는다고 했으니, 결과는 확실하게 나오겠지.

"음…."

다만 몇 가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임의선택 특성은 뭐지?"

-본왕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하나가 네게 주어질 거다. 물론 네 하등함에 맞춰 단계가 격하하겠지만.

"특성이라…."

라온은 기름을 부은 듯 푸른 불길로 타오르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매번 스스로를 마계의 왕이라 칭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했다. 임의로 주더라도 쓸모 있는 능력이 나올 가능성은 높았다.

"하나 더. 이게 가장 중요한데 실패 시에 분노의 감정 10포인트가 생긴다는 건 뭐지?

-말 그대로다. 본왕이 가진 분노의 감정이 네게 생성된다.

"그 말은 네가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니다. 본왕이 네게 넘기는 분노의 감정은 티끌에 가깝다. 가랑비 수준이지. 다만….

라스의 목소리에 노골적인 기대감이 녹아내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본왕의 분노를 받아들이다 보면 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언젠가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다.

"그걸 노리는 거였나?"

라온이 차가운 눈으로 라스를 내려보았다. 놈은 자신의 육체를 한 번에 빼앗는 것을 포기하고, 차근차근 강탈하려는 것 같았다.

-너도 상태창의 능력치에 따라, 네 육체가 변한다는 건 깨달았겠지. 이 내기를 받아들인다면 네 복수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다.

라스는 분노의 왕답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로 내기를 받아들이라 말했다. 처음으로 이놈에게 짜증이 일어났다.

'그런데 왜 이런 내기를 하지?'

본체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그 힘을 끌어와서 자신의 정신을 불복시키면 그만일 텐데, 왜 이런 귀찮은 수를 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했듯이 본왕의 본체 능력은 네게 연결되어 있다. 그 힘을 끌어 올 수만 있다면 당장에 네 몸을 가져갔겠지.

라스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꾸했다.

"거짓말한 건 없나?"

-본왕은 마계의 군주다.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 따윈 하지 않는다.

"후…."

라온이 가는 한숨을 뱉어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라스는 분명 미친놈이었지만, 질문에 대해서는 항상 솔직하게 답을 말했다.

"먹을 수밖에 없는 독 사과인가."

모든 능력치가 2나 올라가고 특별한 능력 하나가 생긴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반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물론 쌓이면 위험하겠지만.

"흐음…."

5 연무장엔 뛰어난 아이들이 많았다. 루난과 버렌은 말할 것도 없고, 방계와 추천생들도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아이라면 수석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자신은 환생자다.

시험이 무엇이든, 아이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전생의 삶을 이용한다면 절대 지지 않는다.

"좋다. 받아들이지."

-좋은 선택이다.

[<분노>와의 내기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라온은 떠오르는 메시지 사이로 라스와 눈을 마주쳤다. 놈은 웃고 있었다. 본인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담긴 미소였다.

그래서 똑같이 웃어주었다.

네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 * *

다음날 새벽.

버렌이 연무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뜨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의 머리는 곱게 빗어 올라갔고, 훈련복은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귀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음?"

볼 때마다 과하게 인사를 하던 크레인과 몇 명의 방계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왜 저러는 거지?'

왜 저러나 생각할 때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건드린 건가?'

버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라온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건드리는 건 위대한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거리다.

'한심한 것들.'

멍청이들에게 한마디 해주려고 다가가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라온이 들어왔다.

"음?"

그런데 너무 멀쩡했다. 한대도 얻어맞지 않은 것처럼 멍이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보다 오히려 더 당당해 보였다.

"흡!"

"힉!"

반대로 크레인을 비롯한 방계들은 라온을 보자마자, 꼬리를 만 개처럼 몸을 돌려 구석에 처박혔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버렌이 마른침을 삼켰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봐."

참지 못하고 덜덜 떠는 방계들에게 다가갔다.

"버, 버렌 님!"

크라인을 비롯한 방계들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왜 그렇게 떠는 거냐."

"그, 그게…."

"으음!"

방계들은 자신이 아닌 그 뒤에 서 있는 라온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드리운 건 확연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아니라, 라온을 두려워한다고?'

라온이 무엇을 했기에 이들이 이렇게 겁에 질렸단 말인가.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별일 아닙니다."

"헤헤!"

방계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역으로 얻어맞은 건가?'

그것 말고는 없다.

방계 녀석들은 라온을 교육하겠다고 찾아가 역으로 맞고 온 게 분명했다.

버렌은 등을 돌려 라온을 보았다. 그는 어제와 똑같이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나름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코웃음이 나왔다. 재능도 없는 환자 놈이 힘을 숨겨봐야 티끌일 뿐이니까.

'발악해봐라.'

어차피 밑바닥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

* * *

라온은 목을 풀다가 어제 '대화'를 나눈 방계들과 눈을 마주쳤다.

"윽!"

"끕!"

방계들은 악마라도 마주한 듯 기괴한 신음을 흘리고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

"뭐지?"

어제만 해도 대놓고 욕하던 방계들이 주춤하는 모습에 다른 임시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의문이 비쳤다.

라온은 코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버렌이다. 조롱 혹은 비웃음이 어린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버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훤히 보였다. 재능 없는 놈이 발악해봐야 의미 없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아주 큰 착각이지.'

불의 고리가 있는 자신에게 재능 따위는 의미가 없다. 임시 수련 기간이 끝날쯤에는 버렌 정도는 한참 추월해 있을 거다.

-저 뱀 눈깔이 짜증 나는구나. 뽑아버려라.

'또 시작이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함부로 눈깔을 돌리는 놈들은 모조리….

'좀 조용히 해.'

라온이 팔찌를 툭 쳤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스의 말이 끊겼다.

-이, 이놈이 진짜!

'말 진짜 많네.'

라스의 말을 무시하며 불의 고리를 운용하려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열렸다.

쿠웅!

삐걱거리는 문이 넘어 리메르와 교관들이 들어왔다.

교관들은 정확하게 오와 열을 맞췄지만, 리메르는 잔걸음을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잤나?"

리메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예!"

임시 수련생들은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너희가 평소 체력을 단련했다고 해도 나름 전력으로 달렸으니, 꽤 힘들었을 거다. 그러니까…."

리메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뛰어라. 전력으로!"

"네?"

"오, 오늘도요?"

"인간의 체력은 끝까지 사용하면 할수록 그 한계가 늘어난다. 전력으로 달려라. 내가 그만이라고 말할 때까지."

아이들이 찡그리고 있을 때 어제처럼 두 사람이 먼저 땅을 박찼다. 루난과 버렌이었다.

파아앙!

두 사람은 어제와 달리 체력을 비축하지 않고, 가진 전력을 다해 뛰었다.

"으으!"

"또 달리기라니!"

오늘은 무언가를 배울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짜증을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또 뜀박질인가? 지루하다. 이따위 수련 없이도 강해질 수 있다. 너와 적의 피를 보면….

'난 좋은데.'

라온이 라스의 말을 끊었다. 폐에 새벽 공기를 담아내고서 땅을 박찼다.

-좋다고? 모래를 마시며 끝없이 달리는 게?

'달릴수록 강해질 수 있으니까.'

-멍청한! 네가 본왕에게 몸을 넘긴다면 1년 안에 최강자가 될 수도….

'그게 내가 아니면 아무 소용도 없지.'

라스의 헛소리를 한마디로 끊어내고 발을 놀렸다.

'어제보다 더 빨라졌어.'

민첩성과 체력이 올랐기 때문인지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어제 훈련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던 방계와 몇몇 추천생들의 속도를 처음부터 따라갈 수 있었다.

"어?"

"으음…."

"라, 라온?"

중하위 그룹의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네가 왜 여기에 붙어 있냐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성장이 빨라.'

라온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나란히 달렸다. 불의 고리만이 아니라, 능력치가 있으니, 성장 속도가 가히 마법과도 같았다.

다만 전력으로 뛰고 있음에도 버렌과 루난은 점점 멀어져갔다. 확실히 저 둘의 재능과 수련양은 지금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환경이 나쁘지 않아.'

전력을 사용하도록 만들어주고, 앞에는 따라잡아야 할 아이들이 많았다. 수련하기엔 최고의 환경이었다.

라온은 단상에서 졸고 있는 리메르를 보았다. 한없이 가벼운 듯한 남자지만, 수련 방법은 확실했다.

'당신의 수련. 잘 이용해주지.'

* * *

"그만!"

새벽부터 시작된 달리기는 태양이 뜨고 나서야 멈추었다.

"끄어억!"

"허어억!"

"하악!"

아이들은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연무장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전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어제와 달리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새벽 수련은 이걸로 끝이다."

"새, 새벽…."

"오전도 아니고, 새벽…."

새벽 수련이 끝났다는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새벽은 공기도 맑고, 마나를 더 쉽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너희가 정식 수련생이 된 이후에도 계속 달릴 테니,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리메르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끝없이 달리는 아이들을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그럼 아침 식사를 해라."

"이렇게 달렸는데, 무슨 식사…."

"바, 밥 못 먹어!"

"들어가겠냐고!"

아이들은 드러누운 채로 앓는 소리를 읊었다.

"힘들어도 먹는 게 좋다. 이후에도 수련이 계속되니까. 속이 비면 버티지 못해. 다만 이번에도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리메르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알아서 하라는 듯 사라졌다.

"이렇게 뛰고 바로 밥을 먹이다니…."

"머, 먹긴 먹어야겠어. 나중에 토하더라도."

아이들은 비틀거리면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새벽부터 훈련이 거셌기 때문인지 식사는 기름지지 않고, 가벼웠다.

따뜻한 스프와 부드러운 빵, 담백한 고기와 몇 가지 채소가 전부였다.

"음식 한 번 처참하군."

"그래도 이거면 먹을 수는 있겠어."

방계의 아이들은 식판에 든 음식을 가만히 보고 있는 라온을 보았다.

"저기 봐라."

"안 먹고 있네."

"별관에서 귀하게 크셨는데, 저런 게 들어가겠냐."

"하긴 서열은 최하위면서 환자라 대우만 받았을 테니까."

아이들은 낄낄대며 라온을 비꼬았지만, 라온은 이번에도 그들의 예측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을 줘?'

훈련이 끝났다면 모를까. 훈련 중에 식사를 받은 적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잡초를 뜯어 먹든, 짐승을 사냥하든 직접 해결했기 때문에 밥을 주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여기 정말 최곤데?'

14화

라온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더럽게 맛없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이런 쓰레기 음식이 나왔다면 셰프의 머리통을 뭉개버렸을 것이다.

'어? 맛을 느꼈어?'

-간접적이지만, 본왕은 네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특히 미각에 치중되어 있지.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미식가로 이름이 높아서….

'말 더럽게 많네. 미각이 공유되어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면 되는 걸 가지고.'

-입 다물어라! 본왕은 과묵하기로 이름 높은… 윽!

'소화 안 되니까. 좀 조용히 해.'

라온은 팔찌를 툭 쳐서 라스의 입을 막고, 단상 위를 보았다.

리메르가 낮잠을 자듯 단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동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었다.

-참으로 꼴 보기 싫은 놈이로다. 저 뾰족한 귀를 뽑아버리고 싶다.

라스는 리메르만 보면 화가 솟구치는지 입에서 냉기를 내뿜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무력을 지녔지만, 성격이 가볍다 못해 경박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리메르의 모습을 보니, 그 정보는 무섭도록 정확했다.

'다만 빈틈은 없어.'

저렇게 퍼질러 자고 있어도 그에게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은퇴했다고 해도 한때 마스터였던 무력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모양이다.

-본왕이 네 몸을 먹어 치우는 순간 저 귀부터 뽑겠다.

'그러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으하함!"

리메르는 임시 수련생들이 전부 모이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일어나서 느릿하게 기지개를 폈다.

"밥은 잘 먹었나?"

"예."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대답은 새벽보다 축 늘어졌다.

"그럼 바로 다음 훈련을 시작한다."

리메르는 씩 웃었다. 그의 시선이 연무장 한편에 놓인 목검을 향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검은 됐고, 내가 하는 자세를 따라 해라."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놀리듯이 목검이 아니라,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굽혔다.

"거, 검을 배우는 게 아닙니까?"

방계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외쳤다.

"아닌데?"

"저희는 검을 배울 줄 알고…."

"맞습니다. 광검께선 검으로 이름 높으신데 왜…."

"검? 검 좋지. 근데 너희는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뛸 수 있나?"

리메르의 입꼬리가 꼬여서 올라갔다. 시원하게 웃고 있지만, 오싹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체력도, 정신력도, 자세도 갖춰지지 않은 너희가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힐 수 있을까?"

"아…."

"매번 말하지만, 내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책임도 본인이 지면 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연무장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다른 수련을 하고 싶은 사람은 우측으로 빠지도록."

물론 빠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그 자리에 서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후 허벅지가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무릎을 굽혀라."

"예!"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그 자세를 따라 했다.

"이 자세를 마보라고 한다. 말에 타는 자세라는 뜻이고, 검, 도, 창, 권. 모든 무학의 기본이 되는 자세지. 지금부터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마보를 유지해라."

"예!"

아이들은 우렁차게 외치고서 팔을 올렸다. 기본자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못 따라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저런 품위 없는 자세로 육체를 단련하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군.

'넌 그런 인간의 몸조차 뺏지 못했고.'

-끄윽, 그건 다른 경우….

'나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

라온은 꽃팔찌를 치고, 눈을 감았다.

'중요한 시간이야.'

불의 고리를 이용하면 이런 기본 수련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다른 아이들과 얻는 게 달랐다.

"그럼 난 좀 잘게."

리메르는 다시 드러누워서 졸기 시작했고, 마보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끄으응…."

"으윽!"

"이,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건데!"

아이들은 지진이 난 것처럼 사지를 벌벌 떨었다. 마보가 기본자세라곤 해도 이렇게 오랜 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루난과 버렌을 비롯한 상위 그룹의 아이들 그리고 라온은 정자세를 유지했다.

"저, 저놈 대체 뭐야."

"어떻게 이걸 버틸 수 있냐고!"

"체, 체질이 최악이라며!"

"분명 환자라고 들었는데…."

라온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정확한 자세만큼은 연무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위였다.

"끄아아아!"

"지, 질 수 없어."

"저놈이 저러고 버티는데 어떻게 멈추냐고!"

마보를 풀고 포기하려던 아이들은 하위 그룹의 라온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자세를 유지했다.

다만 이번에도 그들의 생각과 달리 라온은 여유로운 상태였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전생에선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허벅지와 등에 돌을 매고 마보를 섰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훈련 정도야 가뿐했다.

물론 지친 육체 위로 퍼지는 냉기의 고통은 지독했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이건 더 강해질 기회였다.

우우웅.

라온은 마보를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서 퍼져나가는 냉기를 육체로 받아들였다.

많은 고통을 준 만큼 상당한 양의 냉기가 흡수되었고, 불의 고리의 성취가 또 한 번 높아졌다.

이대로라면 라스와의 내기도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놈은 모르겠지만.

고오오오.

라온이 마보의 수련이라는 것을 잊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 단상 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정신을 차려보니, 리메르가 일어서서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들은 주저앉아서 허벅지를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고 있었다.

-본 왕의 말을 언제까지 무시하는 거냐!

'미안. 못 들었어.

-이, 이 하찮은 놈이 정말….

라스는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던지 이제야 반응하는 자신을 보고 욕을 내뱉었다.

"후욱…."

라온은 라스가 뭘 하든 말든 상쾌한 호흡을 하며 허벅지와 허리에 뭉친 근육을 풀었다.

띵!

[자신의 체력을 넘어서는 극한의 수련을 완료하셨습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이번에도 체력이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부들거리는 허벅지에 활력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허리를 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버틴 녀석도, 포기한 녀석도 있다."

리메르는 끝까지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난 지시를 내릴 뿐 너희의 훈련에 직접 관여하진 않는다. 스스로 한계를 넘어라. 할 만큼 했다고 말하는 정신을 후려쳐서라도 버텨야 6개월 후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을 거다."

그는 능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이 말도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포기하든, 끝까지 하든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리메르는 내일 훈련을 위해 허벅지를 풀어주라고 한 뒤 사라졌다.

-자연의 신을 믿는 뾰족귀 주제에 정신론을 외치다니, 어처구니가 없도다. 정신력 따위는 압도적인 힘 앞에 무너지거늘.

'아닌데.'

-뭐가 아니라는 게냐.

'정신력은 중요하다고.'

라온은 다리를 풀어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넌 진정한 힘을 느껴본 적이 없는 하룻강아지라 그렇다. 본왕의 힘을 느낀다면 당장 경배하게 될….

'난 정신력으로 네 공격을 버텼는데?'

-보, 본왕은 아직 본래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

'난 어린아이일 뿐인데?'

-그, 그건….

라스의 목소리가 젖은 수건처럼 축 가라앉았다.

'정신력이 의미 없을 리가 없지.'

정신력과 체력은 근육과도 같다. 한계가 있지만,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위기 상황을 겪었지만,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발휘하여 살아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가볼까.'

라온은 허벅지와 엉덩이의 근육을 풀어준 뒤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갔다.

단련장 안에는 근력과 민첩성을 올릴 수 있는 단련 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또 수련이냐?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오징어를 쥐어짜듯 육체와 정신력을 한계까지 몰아내야 능력치가 오른다.

자신에게 추가 훈련은 지루하거나, 힘든 일이 아니라, 기대감 가득한 순간이었다.

라온은 맨몸운동인 팔굽혀펴기와 플랭크를 비롯한 기본적인 단련부터 시작했다.

-정말이지 답답하도다. 나무에 매달린 애벌레를 보는 듯해.

'나뭇가지를 기는 애벌레도 언젠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법이지.'

-네가 나비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본왕에게 몸을 넘기는 방법뿐이니라.

'그건 나비가 아니라, 독을 가진 나방이지. 꿈 깨.'

손을 휘휘 젓고서 다시 팔을 굽혔다. 단순히 많은 횟수가 아니라, 근육에 자극이 되도록 팔을 느리게 굽혔다가 폈다.

가슴 근육이 끊어질 듯 아렸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반가웠다. 지금의 통증이 훗날의 능력치와 체력이 되어줄 테니까.

팔굽혀펴기 이후에 복부 단련을 하고 있을 때 단련장으로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을 힐끔 쳐다보고서 각자 떨어져 단련을 시작했다.

루난과 버렌도 들어와서 기구들을 둘러보았다.

루난은 홀로 떨어져서 기구를 잡았고, 버렌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목검이 놓인 곳으로 가서 목검을 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우웅!

평소 버렌을 따르는 방계들은 그를 따라 목검을 잡고 각자 배웠던 검술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저놈은 검을 잡았다.

'그러네.'

-넌 잡지 않는 건가?

'지금은 필요 없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 기본적인 체력과 근력, 민첩성이다.

거기다 버렌을 포함한 아이들의 검술 실력은 걸음마 수준도 되지 않았다. 어설픈 실력으로 지도자 없이 검술을 수련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라온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지루하면서도, 힘든 단련을 계속했다. 내일은 더 많은 발전을 이루길 바라면서.

* * *

루난 슬리온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본인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너무도 큰 실망을 하게 된 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시선을 끄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건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렸던 엘프 리메르도, 남들이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버렌 지그하르트도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직계에서 쫓겨나, 방계가 된 실비아의 아들인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왜 눈이 가는 거지?'

처음이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가는 것도, 그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도.

'냉기 때문인가.'

라온의 마나 회로에는 지독한 냉기가 맴돌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능력인 서리가 그의 냉기에 친숙함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네.'

이유를 안 루난은 이제 그에게 관심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성장이 빨라.'

라온의 성장 속도는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났다.

한 달 전 알현실에서 봤을 땐 근육 하나 없이 바짝 말랐지만, 지금은 약간이나마 근육이 붙은 상태였다.

'거기다.'

어제 최하위권이었던 그는 오늘 중하위권 그룹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하늘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자신도 저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건 무리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다.

"흡!"

루난은 60kg짜리 기구를 가뿐하게 들어 올리면서 힐끔힐끔 라온을 살폈다.

"정말 이상해."

15화

라온은 정규 훈련을 끝낸 뒤 바로 실내 수련장으로 향했다.

다른 아이들은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었지만, 그는 가볍게 숨을 뱉어내고 바로 가슴 근육을 단련하는 기구에 앉았다.

'괜히 전설로 내려오는 연공법이 아니야.'

몸은 지친 상태였지만, 불의 고리가 심장을 휘돌며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시켜주었다.

체력을 끝까지 쥐어짜서 훈련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전력으로 움직이게 만들다니, 대륙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후욱…."

라온은 어제보다 무게를 5kg 높게 맞추고 기구를 들어 올렸다. 대흉근이 제대로 자극받을 수 있도록 천천히 움직이고, 가동범위는 최대한으로 늘렸다.

탁.

여섯 세트를 끝내고 일어났을 때 옆 기구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평소 주변에 오는 사람은 배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니는 요상한 녹색 머리뿐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난?'

옆 기구에 앉은 사람은 긴 은발을 쓸어내리는 루난 슬리온이었다.

루난은 라온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를 설정하고서 기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그녀가 기구를 들어 올리는 자세는 라온과 거의 흡사했다. 횟수나, 무게가 아니라, 근육의 자극에 신경을 썼다.

-저건 무엇이냐.

'나도 몰라'

라온은 루난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근육에 세밀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 다른 운동 기구에 앉았다.

"흐읍!"

무게를 조절한 뒤 기구를 들어 올렸다. 최대한의 무게 이상을 치면서 불의 고리를 돌렸다.

"후욱!"

원래라면 현재 무게에서 10kg을 빼야 하지만, 불의 고리 덕분에 지금의 무게를 들어 올리면서 더 많은 횟수를 시행할 수 있었다.

팔과 가슴이 떨릴 정도로 운동한 후 기구를 내려놓았을 때 또 옆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루난이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설정한 뒤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얘가 왜 이래?'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수련생은커녕 리메르에게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루난이 왜 자신을 따라 같은 자세로 기구를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착각인가?'

생각해보면 큰 근육 다음에 작은 근육을 단련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저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하면서 일어났다.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어깨 단련용 기구로 향했다.

끼이익!

무게를 맞추고 어깨의 자극을 느끼며 기구를 들어 올렸다. 가볍게 한 세트를 끝냈을 때 앞으로 루난이 걸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다가 옆자리에 앉아서 무게를 조절했다. 이번에도 더 무거운 무게였다.

"흐읍!"

그리고선 앞만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저런 도발을 받고서도 가만히 있다니!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꼬리를 말 셈이냐.

'도발이라….'

라온이 고개를 돌려 루난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듯 앞만 보면서 기구를 사용했다.

'무슨 생각이지?'

처음과 두 번째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 운동까지 쫓아오는 걸 보면 따라오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데, 그 빛은 맹해서 의도를 모르겠다.

-모른다고? 너보다 내가 낫다고 시비를 걸고 있지 않느냐. 당장 면상에 주먹을 날려라!

라스에겐 애고, 어른이고, 여자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이름답게 모든 것에 분노했다.

'좀 가만히 좀 있어.'

라온은 라스의 분노를 무시하고 일어서서 스쿼트를 시작했다. 역시나 루난은 옆에 따라와서 더 무거운 무게로 허벅지를 굽혔다.

"뭐, 뭐지?"

"왜 저 둘이 붙어 있는 거야?"

"루난 님이 왜 저 떨거지를 신경 쓰는 거냐?"

단련장에서 훈련하던 아이들은 라온의 옆에 붙어서 훈련하는 루난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뿌득.

검술 수련을 끝낸 뒤 방계들과 함께 단련장으로 들어온 버렌은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으음!"

"루난이 왜 저기에…."

방계들은 라온의 옆에서 단련하는 루난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흐음."

라온은 옆에서 모두의 관심을 받는 루난을 보았다.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과 새하얀 피부. 이목구비는 얇으면서도 뚜렷하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을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빛은 나사가 빠진 듯 맹하게 보인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루난이 한 세트를 끝냈을 때 다가가서 물었다.

"...."

그 말을 들은 루난은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이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게를 더 늘려서.

'나도 모르겠다.'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기구에서 일어섰다. 곧 질릴 테니, 그냥 놔두고 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루틴이 변해서 무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루난이 보라색 눈동자로 자신의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

루난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과 눈만 마주쳤다. 낮잠 한숨 때린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하."

라온은 낮게 숨을 뱉고서 다른 운동 기구를 향해 다가갔다. 루난은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라가서 똑같은 기구를 사용했다.

* * *

루난 슬리온이 라온 지그하르트를 관찰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음."

그녀는 실내 단련장에 들어오자마자 라온을 찾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가장 빠르게 단련실에 들어가서 기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제보다 무게가 더 올라갔어.'

라온이 들어 올리는 기구의 무게는 어제보다 5kg이 늘어났다. 사실 그 정도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면 무게를 늘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무게가 하루마다 늘어난다면? 그건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대부분은 모르겠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는 지난 일주일 동안 10kg가 넘는 무게를 올렸다. 아이의 성장이 빠르다고 해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수치다.

'환자라고 했는데….'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약했다. 하지만 버티고 견디는 건 이 연무장의 그 누구보다 끈질겼다.

'자세 때문일까?'

라온이 기구를 들어 올리는 자세는 다른 사람과 조금 달랐다. 특이한 자세 때문에 저런 성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정한 루난은 가슴 운동을 하는 라온의 옆 기구에 앉았다. 그리고서 라온이 보여주었던 자세대로 기구를 들어 올렸다.

'음.'

딱히 별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근육이 조금 더 자극되는 정도일까.

'별거 없네.'

딱히 큰 의미 없다는 생각에 원래 자세대로 무게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어?'

라온에게서 풍겨오는 뭔지 모를 시원한 향기를 들이마시자, 들고 있던 기구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뭐지?'

근력과 민첩성이 단숨에 늘어난 듯한 기분. 원래라면 힘겹게 들어야 할 무게가 가뿐해졌다.

다만 잠시간 자신을 바라보던 라온이 떠나가자 그 특이한 감각이 바로 사라졌다.

"아…."

루난은 아쉬운 얼굴로 다음 기구로 향한 라온의 등을 바라보았다.

'혹시.'

루난은 라온을 따라 바로 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평소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설정한 뒤 들어 올렸다.

"으윽…."

무리였던지 기구를 들어 올리기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라온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기운에 다시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진짜였어.'

평소에 들 수 있는 무게보다 10kg은 무거운 기구를 들다니, 기분만이 아니다. 정말 능력이 강화된 것 같았다.

"흐읍!"

능력 이상의 무게를 치고 있지만, 어깨와 팔에 조금의 부담도 없었다.

기분 좋게 운동을 끝내고 나니 앞에 라온이 서 있었다.

"할 말 있어?"

금발적안. 지그하르트의 증거를 그대로 담은 소년이 물었다.

"아니."

루난은 고개를 저었다. 라온은 잠깐 자신을 쳐다보다가 다음 기구로 향했다.

'계속 붙어 다녀봐야겠어.'

루난은 고양이처럼 긴 눈을 빛내며 라온의 뒤를 쫓았다.

더 무거운 기구로 단련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가 더 끌렸다.

* * *

리메르는 지그하르트의 본관을 뒤에 솟구친 산을 올랐다.

"쯧."

산 중턱에 놓인 평평한 바위로 올라가려던 그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제 낮잠 바위에 매일같이 오시다니, 손주가 어지간히 걱정되시는 모양이네요."

그의 말에 바위 위에서 한 자루 검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 글렌 지그하르트가 내려왔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흥."

리메르는 콧방귀를 끼고서 바위에 등을 기댔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에휴. 그냥 물어보면 되지. 꼭 그렇게 무게를 잡으셔야 합니까?"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고 글렌이 앉아 있는 바위로 뛰어올랐다.

"아이들은 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로 빡세게 단련하고 있죠."

"의외?"

"훈련을 아이들의 자율에 맡겼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사실 12살에서 13살인 아이들의 의지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주일만 지나도 대부분 설렁설렁 수련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처음 이 훈련을 결정했을 때 160명 중 20명만 뽑을 생각으로 결정했으니까.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가주님의 손자 덕분에요."

"손자? 버렌말이냐?"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좀 하지 마세요. 라온 말입니다."

"난 연무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네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 진짜."

리메르가 붉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손주가 걱정되어서 기다리던 노인네가 아무것도 모른 척하는 게 답답했다.

"그 녀석. 가주님이나, 실비아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글렌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는 확연하게 변했다.

"육체도, 정신도 약하니, 다치지 않도록 빠르게 떨어지기를 바라셨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다. 차별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지."

"어쨌든 저도 라온을 최대한 빨리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리메르의 푸른 눈동자에 삭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 아이 괴물이었어요. 정신력이 일반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수십 혹은 수백 번의 전장을 다녀온 무인보다 뛰어난 수준입니다."

라온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봐온 수많은 재능 중에서도 특별했다. 매일 아침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야 할 정도로.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라온은 160명 중 최하위권이었지만, 3주가 지난 지금 중위권에 안착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 라온이 사실 환자 아니라,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상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아이의 몸엔 지금도 지독한 냉기가 흐르고 있으니까."

요즘은 훈련 중에 라온에게만 시선이 간다. 그 아이는 정말 수련의 한순간, 한순간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요즘엔 라온만 따로 불러서 개인 훈련을 시켜볼까 고민이 될 정도입니다."

열심히 준비한 수련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서 임해주니, 라온에게 조금 더 정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인가?"

"녀석은 겨울나무처럼 몸에 서리가 올라와도 멈추질 않아요. 다른 녀석들도 그 모습에 자극받아서 더 열정적으로 수련하고 있죠. 5연무장의 자극제랄까요."

"흐음…."

글렌이 무표정으로 턱을 긁적였지만, 입꼬리가 옅게 올라서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제 예상과 다르게도 합격할 아이들의 숫자가 상당할 것 같습니다."

그는 귀찮게 되었다고 중얼거렸지만, 눈매는 웃고 있었다.

"라온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은 건가?"

글렌은 침묵하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음…."

리메르는 들리지 않게 침을 삼켰다.

'예상 이상이군.'

글렌이 라온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따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막내딸에게 주지 못한 애정이 라온에게 옮겨 간 것 같았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무리하고 있는 건 확실한데, 신기할 정도로 금방 회복되더군요."

"너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니까요. 제 눈을 피하는 건 대륙십천 빼고, 처음입니다."

리메르가 대답을 하며 턱을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의 잠재력이나, 상태를 누구보다 잘 봐왔지만, 라온은 예외다.

솔직히 말해서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오른 글렌보다 라온이 더 신기했다.

"리메르."

"예?"

"넌 라온의 담당 교관이 아니라,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이다. 라온만 생각하지 말고, 가문에 힘이 되어줄 아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가져라."

글렌은 위엄 가득한 말을 내뱉고서 산 아래로 내려갔다.

"하."

리메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흘렸다.

"라온 이야기만 듣고 가면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래?"

16화

거대한 검을 갈아 세운 듯한 예기를 뿜어내는 지그하르트의 가주전.

그 웅장한 저택의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는 옥좌에 앉아 눈매를 좁혔다.

'그러고 보니….'

넝마의 성자라는 이름을 얻은 돌팔이가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있었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경우가 있다고 했었지.'

페드릭은 혹한의 저주라는 체질을 가진 아이 중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있다고 했었다.

'그 재능이 발현된 건가.'

그게 아니고선 바로 탈락하리라 생각했던 라온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을 리가 없었다.

"흐음…."

글렌이 탁한 숨을 뱉어냈다. 북방의 무신으로 떠받들어지는 그가 남 앞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실수였다. 너무도 큰.'

과거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을 때 사막의 모래처럼 감정이 메마른 적이 있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실비아에겐 다른 아이들과 달리 혈육의 정을 주지 않았다. 아비가 아니라, 사육사처럼 할 일만 정해줬을 뿐이다.

아비의 정도, 어미의 사랑도, 형제간의 우애도 얻지 못한 막내는 실 달린 인형처럼 삐걱이며 살아가다가 외부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가문을 떠났다.

'그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지.'

실비아가 떠난 이유에 형제간의 이간질과 부하들의 하극상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실비아가 어찌 되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더 강해져야겠다고, 가문을 더 크게 키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

마의 벽을 넘어 다시 인간의 감정을 되찾고 나서야 깨달았다. 되돌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호위들을 보내 실비아와 뱃속의 라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사위와 손녀딸은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핏물이 되었다.

'한심하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그하르트의 가주, 북패왕, 검의 제왕. 그 어떤 이름으로도 과거를 돌릴 수는 없었다.

실비아와의 감정의 골은 깊고도 깊었고, 그걸 회복하는 건 무리였다.

'라온.'

그렇기에 막내 손자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실비아와 라온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하여도.

똑똑.

또 한 번 다짐할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글렌은 지쳐 보였던 안색을 지우고, 차가운 위압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 * *

라온은 들뜬 숨을 가라앉히며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몸이 풀린 기분이네.'

2주 동안 꾸준히 단련한 덕분에 대부분의 훈련에서 중간그룹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섰다.

지금 속도로 성장한다면 시험 전에 버렌이나 루나와 같은 수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도 시작해볼까.'

어깨 단련용 기구를 들자마자, 왼쪽 자리로 루난이 다가왔다.

"읍!"

그녀는 침이라도 질질 흘릴 것 같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기구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벙한 얼굴의 계집이 또 왔군.

'놔둬.'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무시하고 단련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번엔 오른쪽에 누군가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나요?"

배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니는 동그란 얼굴의 수련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유일하게 말을 거는 녀석이다.

'도리안이라고 했었지.'

매번 리메르의 지시에 빌빌대면서 겁을 집어먹지만, 끈기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녀석이다.

"드실래요?"

도리안은 이번에도 배 주머니에서 동그란 과자를 꺼내 내밀었다.

"어…."

얼떨결에 과자를 받았다. 다시 돌려주려고 할 때 옆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루난의 보라색 눈동자가 설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맹한 계집이 저런 눈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과자를 좋아했던가.'

그녀의 시선은 과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먹을래?"

"...."

라온은 손에 든 과자를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야생고양이처럼 손을 까딱이며 고민하다가 과자를 훌쩍 받아 갔다.

"…고마워."

그녀는 라온과 도리안에게 차례로 고맙고 한 뒤 토끼가 풀잎을 뜯듯이 과자를 베어 물었다.

과자가 맛난지 굳은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가져갈 땐 고양이, 먹을 때는 토끼, 평소에는 맹한 강아지 같다. 여러모로 특이한 녀석이다.

"저기 라온 님?"

도리안이 나머지 과자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렸다.

"저도 옆에서 수련해도 되나요?"

그는 자세를 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상관없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빠른 성장은 불의 고리와 전생의 경험 덕분이다. 옆에서 자세를 따라 하는 정도는 상관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없고."

도리안의 인사에 손을 저어주고, 다시 단련에 집중했다.

끼익!

최대로 집중하여 근육을 자극하고 있을 때 도리안에게서 같은 속도와 범위로 기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난이 있는 왼쪽도 마찬가지였다.

'별난 놈들이군.'

-본왕은 저 녹색 너구리 같은 놈이 마음에 든다.

'왜?'

-본왕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더냐. 깨어난 이후 처음 받아보는 경배이니라.

'....'

라온은 그거 너한테 한 거 아니라고 하려다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애가 셋이야.'

* * *

5주 차.

라온은 새벽 달리기에서 중위 그룹을 추월하여 중상위 그룹에 합류했다.

그날 저녁 자율 훈련을 할 때 그의 옆에는 루난과 도리안 말고도 한 명이 더 늘어났다.

10주 차.

라온은 중상위 그룹의 가장 앞에서 달렸고, 그날 저녁 또 한 명의 수련생이 그 옆에 붙었다.

15주 차.

라온이 최상위 그룹에 들어갔다. 그의 옆에 붙은 6명의 성적도 수직으로 상승했다.

* * *

제5연무장의 임시 훈련이 시작된 지 4달이 지났다.

리메르가 지시하는 훈련은 점차 다양해졌고, 그 난이도 역시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새벽부터 시작된 훈련은 저녁까지 이어져서 체력이 출중했던 상위 그룹의 아이들의 얼굴에도 지친 기색을 드러났다.

물론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리메르가 지시를 내리는 새벽부터 오후까지의 훈련도, 저녁부터 행해지는 개인 단련도 전부 자율이었다.

훈련 중에 힘들다고 포기해도, 자율 훈련을 하지 않아도 리메르와 교관들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자세나, 지도를 부탁하면 정확하게 알려주지만 그뿐이다. 더 열심히 하라던가, 꾸준히 하라는 말도 없었다. 교관이 아니라, 관찰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자율로 맡기는 훈련 방식이라니, 혁신적이라면 혁신적이었다.

실제로 실력에 자신 있는 방계들이나, 추천생들은 훈련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자율 훈련은 아예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런 수준 낮은 훈련 따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정식 수련생이 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아이들의 행동이 바뀌는 계기가 하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좋지 않은 의미로 유명한 그가 5 연무장에 좋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 훈련이 시작되었을 때 라온의 체력은 하위권이었다.

첫 번째 달리기에서 끝까지 달렸을 뿐 중위권에는 닿지 못했고, 곧 죽을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었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체력 좋은 아이들도 떨어져 나가는 훈련을 끝까지 이겨냈고, 자율 훈련 역시 가장 먼저 시작해서, 가장 늦게까지 해냈다.

라온은 헐떡거리는 걸로 모자라, 하얀 김을 뿜어내면서도 끝까지 육체를 단련했고, 다음 날 바로 단련의 결과를 바로 보여주었다.

체력도, 근력도, 민첩성도 눈에 띄게 성장해서 하위권이었던 그의 순위는 이제 160명 중 10위에 이르렀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직접 봐온 아이들은 경악했다.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 추천생들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훈련했고, 자율 훈련도 무조건 참여했다.

그저 놀림감으로만 생각했던 라온을 라이벌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직계 버렌과 그를 따르는 방계의 아이들은 극한의 체력 단련 따윈 필요 없다고 무시하면서, 가문에서 배워온 검과 권을 수련했다.

그렇게 각자가 최선을 다한 시간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 * *

"후욱!"

라온은 새벽 뜀박질을 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간이 지나며 체력과 민첩성이 많이 늘어났지만, 항상 전력으로 뛰고 있으니 지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달라진 건 있지.'

첫 달리기에서 앞을 막고 있던 수많은 아이의 등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상승한 능력치와 불의 고리 덕분에 자신의 앞에 있는 수련생은 이제 10명도 남지 않았다.

-한심하구나. 한 달이 지났는데도, 네 앞에 저리 많은 버러지들이 있다니.

'이렇게 빨리 발전한 게 대단한 거다.'

라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불평불만만 많아서 매일같이 몸을 넘기라고 아우성이다.

'금방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저 둘은 다르군,'

라온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서 달리는 루난과 버렌을 향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아이들과 수준이 달랐다.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정신력도 단단했으며, 가문의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구석이 있지만, 이제 12살인 아이들이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늘은 조금 더 뛰어볼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최대한으로 운용하며 땅을 박찼다.

폐가 종잇장처럼 찢어져서 흩어질 것 같았지만, 불의 고리를 버팀목 삼아 계속 달렸다.

"뭐, 뭐야!"

"라온 지그하르트!"

"이런!"

순식간에 추월당한 최상위 그룹의 아이들이 눈을 부릅떴다.

후우웅!

뒤에서 들려온 바람 소리에 버렌과 루난도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

"...."

버렌은 나무껍질처럼 인상을 찡그렸고, 루난은 보석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동자를 반짝였다.

두 사람은 얼마든지 따라오라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 다르지만.'

라온이 두 사람의 등을 보며 가늘게 입매를 올렸다.

'남은 시간이면 충분하겠어.'

지금 성장 속도로 볼 때 시험을 볼 시기가 되면 저 둘의 체력과 근력, 민첩성 모두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저쪽에서 오러를 사용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일이지만.

'오러라….'

루난과 버렌을 비롯한 직계와 방계, 봉신 가문의 아이들은 이미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불의 고리라는 천고의 단련법을 익히고 있지만, 오러는 한 톨도 없었다.

'익히긴 해야 하는데….'

오러를 익혀야 할 때가 되어가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전 것도 나쁘진 않아.'

전생에서 익혔던 그림자 오러 연공법도 꽤 좋은 연공법이다.

속성으로 익힐 수 있고, 은밀하며, 날카로워 암살과 대인 전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림자 오러 연공법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암살자가 아닌 무인으로 살기로 정한 이상 그 이상의 오러 연공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려면 공을 세워야겠지.'

지금까지 봐온 글렌 그리고 정보로 들었던 글렌은 똑같았다. 가문만을 생각하는 냉혈한. 그렇기에 상과 벌은 확실한 사람이다.

기초 훈련을 수석으로 졸업한다면 분명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것이다.

'다시 목표가 확실해졌군.'

실비아를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좋은 연공법을 익히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무엇을 하는 게냐. 버러지들을 넘어선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저 둘을 잡아라. 본왕보다 앞에서 달리다니, 참을 수가 없도다.

라스의 분노가 요동치면서 가슴이 울컥거린다. 꾹 참고 달리니, 한참 뒤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자극을 견뎌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으음, 또!

라온은 짜증을 터트리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도 잘 이용하면서 말이야.'

* * *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자율 훈련할 녀석은 하고, 말 녀석은 말도록."

리메르는 오후 단련을 끝낸 뒤 거침없이 연무장을 떠났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러 간다고 중얼거렸다.

"후욱…."

버렌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짜증 어린 숨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리메르가 광검이라 불렸던 건 알고 있지만, 최근 그의 모습은 한량이나 다름없었다.

정규 수련 시간에도 드러누워서 대충 구경이나 했고, 자율 훈련에도 관심 없었다.

그런 주제에 정규수련생이 되는 시험을 치르겠다니, 엘프가 아니라, 날뛰기만 하는 메뚜기를 보는 것 같았다.

"버렌 님. 오늘 자율 수련은 안 하십니까?"

리메르의 뒤통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크레인과 방계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상당히 친해진 녀석들이었다.

"해야지."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목검을 잡았다.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딱딱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시작하자."

"예!"

버렌과 방계의 아이들은 각자 떨어져서 이곳에 오기 전에 배웠던 검술을 수련했다.

버렌은 검술 수련에 빠져 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검을 내려놓았다.

'역시 검술 수련할 때가 가장 마음에 편해.'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주신 검술로 단련을 하자, 짜증 났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예!"

"수고하셨습니다."

버렌의 지시에 아이들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중 가장 어렸지만, 직계라는 위치와 절대적인 재능 덕분에 자연스럽게 리더의 위치에 올랐다.

"추가 수련을 할 사람은 따라오도록."

버렌은 목검을 내려놓고, 실내 단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

라온은 기구로 근력 단련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루난과 몇몇 수련생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후우…."

버렌이 열기가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를 정말 화나게 만드는 건 리메르나, 교관들이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가문 서열 최하위 놈이 점점 더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저놈 옆에 붙는 거지?'

루난. 직계인 자신과 맞먹는 재능에, 봉신 가문 중 최강이라 불리는 슬리온의 딸이 라온에게 붙은 이유를 모르겠다.

'젠장.'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던 루난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라온만 따라다니는 모습에 속이 끓어 올랐다.

요즘에는 나름 괜찮게 본 추천생들도 라온의 옆에 모여 있어 더 짜증이 일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모자란 것들끼리 붙어 있을 뿐이니까요."

"최고라고 해도 봉신 가문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저렇게 모여서 뭘 하겠다고."

방계들이 라온과 루난을 보며 코웃음을 쳤지만, 버렌은 웃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뒤에 있는 방계들보다 루난이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확실하니까.

"쯧."

버렌은 혀를 차고서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하체를 단련하는 라온과 루난의 옆자리로 가서 두 사람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어 올렸다.

"오오!"

"역시 버렌 님!"

"어떻게 저런 무게를…."

방계만이 아니라, 수련장에 있는 모두가 탄성을 터트리고, 박수를 보냈다.

감탄과 경악이 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버렌의 표정은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저놈들이!'

라온과 루난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단련만 계속했기 때문이다.

쿠우웅!

버렌이 기구를 거칠게 내려놓고 일어섰지만, 두 사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서로를 라이벌로 삼았는지 기구를 들어 올리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크으…."

버렌의 얼굴이 사과처럼 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열고, 연무장을 나갔다.

'내가 압도적으로 수석을 차지해도 그딴 얼굴을 할 수 있는지 보자!'

17화

라온은 세면을 마치고, 물기에 젖은 눈으로 햇살이 내려서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오늘인가."

6개월이 지나 5연무장의 수련생을 선발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원래라면 연무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달리고 있을 시간이지만, 시험 당일인 덕분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라스가 말을 걸어왔다.

"왜?"

-본왕과의 내기를 기억하고 있느냐.

"물론."

라온이 훈련복을 입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호구가 되어주겠다는데 그걸 잊을 리가 있겠는가.

-네 성장이 인간치고 빠름은 인정하지만, 그 둘을 따라잡지는 못했지. 본왕의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느냐.

라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3달 동안 뛰었음에도 루난과 버렌을 추월하진 못했으니까.

하지만 시험은 다르다. 그들과 대련을 하든, 지금까지 단련한 체력을 보여주든 상관없다.

자신에겐 전생의 경험과 불의 고리가 있다면 시험이 무엇이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그렇게 허세를 부려도 소용없다. 본왕이 네놈의 영육을 차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도다.

'그니까 그렇게 되면 말하라고.'

-그 자신감이 언제 꺼질지 기대하고 있으마.

'그럴 일은 없어.'

라온은 손을 휘휘 저었다.

'적과의 동거도 쉽진 않네.'

요즘엔 라스가 훈련 중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보다, 말이 많은 게 더 귀찮았다.

마계의 군주라는 놈이 왜 저렇게 말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물론 장점도 있지만.'

라스의 방해를 이겨낸 덕분에 꽤 많은 능력치를 얻었다. 고통이 좀 있긴 하지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여덟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근력 : 25

민첩성 : 24

체력 : 23

기력 : 15

감각 : 44

상태창의 수치만 오른 게 아니다. 실제 육체 능력도 크게 성장해서 예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끄음, 본왕의 상태창….

신음을 흘리는 라스와 달리,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로비로 나갔다.

-곧 죽을 얼굴들이로군.

'그러게.'

라스의 말대로 로비에 있는 아이들은 전장에 끌려가는 병사들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 시험 때문이겠지.'

리메르는 어떤 시험을 낼지, 시험의 난이도가 어떻게 될지, 얼마나 통과할지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하면 통과할 수 있다고만 했으니, 아이들이 저렇게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도 환생자가 아니었거나, 불의 고리가 없었다면 저들과 같은 표정으로 침울하게 앉아 있었을 거다.

-전장에 서기 전부터 패배한 닭의 얼굴을 하다니, 한심하도다.

'쟤들은 어리잖아.'

라온은 음울한 분위기의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네놈도 어리지 않느냐.

'나는 달라.'

-흥. 인간들은 항상 본인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법이지.

'....'

라스의 도발에 답하지 않았다. 환생자라는 비밀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스르륵.

숙소 옆에 붙어 있는 5 연무장으로 걸어갈 때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질리지도 않고 오는군.

"흠…."

라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뒤를 돌았다. 은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보랏빛 눈동자의 여자아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루난."

루난 슬리온이었다. 그녀는 자율 훈련에 따라붙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숙소에서도 쫓아오고 있었다.

"할 말 있어?"

"없어."

루난이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뒷짐을 진 채로 어색하게 눈동자를 돌렸다.

"후."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완전히 돌렸다. 루난은 여전했다. 말없이 따라붙은 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훈련을 똑같이 따라 했다.

'왜 날 따라다니는지 원.'

실제로 보여주는 능력은 자신보다 버렌이 더 위다. 화려한 검술, 뛰어난 육체 능력에 나름 리더십도 있다.

하지만 루난은 그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자신만 쫓아다녔다. 먹이를 주고 난 뒤 따라붙는 골목의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근데 난 먹이도 주지 않았잖아.'

과자를 주긴 했지만, 그 주인은 도리안이다. 해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어미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따라오는 건지 모르겠다.

'특이한 녀석이야.'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녹색 머리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도, 도련님…."

루난 다음으로 자신의 옆에 붙은 도리안이었다. 그는 오한이 든 것처럼 손발을 바들바들 떨었다.

"넌 또 왜 그래. 어디 아파?"

"그, 그게 아닙니다. 오늘이 시험이지 않습니까. 걱정돼서 진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으으."

도리안의 눈 밑은 숯덩이를 바른 것처럼 새까맣게 물들었다. 피곤이라는 단어 자체가 눈 아래에 박혀 있었다.

"너 정도면 충분할 텐데?"

라온이 도리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항상 덜덜 떨면서 겁을 먹지만, 재능과 끈기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제 능력을 발휘하면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시험이 뭔지도 모르겠고, 전 무지하게 약해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엑!"

도리안은 손톱을 씹으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헛구역질까지 한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버리지 중에 상 버러지다. 당장 저놈의 대가리를 부수거라.

'언제는 마음에 든다며.'

-본왕에게 겁쟁이는 필요 없도다.

"괜찮을 거다."

라온은 격려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서 도리안을 지나갔다. 그는 소심한 성격과 달리 토하면서도 훈련을 완수해왔다. 무슨 시험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다.

"리, 리메르 님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에요. 옥석을 고른다고 하셨으니, 저 같은 돌멩이는 바로 떨어질 겁니다."

"그럼 떨어지던가."

"엑! 라온 님!"

라온은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타인이다. 필요 이상의 조언을 해줄 필요는 없었고, 녀석과 말을 하다 보니 그 우울함이 옮을 것 같았다.

"음."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옆에서 다가오는 버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과 루난, 도리안을 보고 눈에 불꽃을 피워냈다.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아."

라온이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어.'

전생에도 미친 놈이 많았는데, 이번 생도 별 차이 없는 것 같았다.

-저놈의 눈깔을 뽑아라.

'이놈까지 포함해서….'

* * *

"라온!"

"라온 도련님!"

라온이 연무장에 돌아가서 몸을 풀고 있을 때 우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헬렌?"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별관의 시녀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라온!"

실비아는 달려오자마자, 새가 알을 품듯이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세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되었잖아! 괜찮니? 아픈 곳은 없어?"

그녀의 가는 눈동자에 둥그런 눈물이 고였다. 다만 그녀의 말과 다르게 근육과 살이 쪘으면 쪘지, 마르진 않았다.

"아니, 엄마 난…."

"힘들었지! 정말 고생 많았어. 흡!"

6개월이 지났음에도 실비아는 여전했다. 자신의 말은 듣지 않고, 몸만을 걱정했다.

-어미 앞에서는 네놈도 애 같기는 하군.

'시끄러.'

라스는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며 클클 웃었다.

"도련님. 고생 많으셨어요."

헬렌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에 있던 시녀들도 대단하다고 말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시험에 합격한 것도 아닌데 무슨."

라온이 얼굴을 긁적였다. 별것도 아닌 일을 칭찬하니, 민망해서 볼이 간지러웠다.

"6개월이나 버티신 거죠."

"그게 대단한 거예요!"

"맞아요. 대단한 일을 해내셨어요."

헬렌과 시녀들은 멈추지 않고 칭찬을 해왔다. 바로 탈락해서 돌아올 줄 알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라온은 얼굴을 비비는 실비아를 밀어내며 헬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시험은 보호자도 참관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습니다. 저희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오셨죠."

헬렌의 손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연무장 곳곳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이 회포를 풀고 있었다.

"근데 이 아이는…."

실비아는 라온의 뒤에 서 있는 루난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난은 실비아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얘도 참 대단하네.'

루난은 실비아와 헬렌 앞에서도 뒤를 따라다니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재능보다 저 성격이 더 놀랍다.

"루난!"

루난과 실비아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좌측에서 두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워 보이는 은발을 뒤로 넘긴 중년인이었다.

'로칸 슬리온.'

봉신 가문 슬리온의 가주이자, 루난의 아버지인 로칸 슬리온이었다.

-저 맹한 꼬마의 표정은 끝까지 변하질 않는구나.

라스의 말대로 루난의 눈빛은 아버지인 로칸을 6개월 만에 보고도 맹했다.

"아빠?"

"여기서 뭘 하는 게냐. 가자!"

로칸 슬리온은 자신과 실비아를 노려보고서 루난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많은 인간을 봐왔지만, 저건 참 특이하다.

'그러게.'

끌려가면서도 자신을 보고 있는 루난의 모습에 헛웃음이 터졌다.

"루난이면 슬리온가의 막내지? 너랑 판별식 같이한."

"맞아."

"친구가 됐나 보네?"

실비아가 방긋 웃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려달라며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친구는 아니야."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가 아니라고? 그럼 무슨 사인데?"

"글쎄…."

솔직히 루난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친구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

"아들. 다가오는 사람들하고는 친하게 지내. 억지로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실비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적 없어."

다가오든, 밀든 그저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지 말고 나중에 별관에 한 번 데리고 와.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어우, 정말 죽겠… 어? 라온 도련님의 어머니십니까?"

적당히 넘어가려고 할 때 헛구역질을 하던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맞아. 넌 누구니?"

"도, 도리안이라고 합니다! 도련님께 많은 신세 지고 있습니다! 인사 박겠습니다!"

도리안은 정말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였다.

"어머!"

"오,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이 헤벌쭉 웃는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가 있다는 게 기쁜 것 같았다.

"라온 도련님이 왜 이렇게 잘 생겼나 했더니 어머님을 닮으셨군요. 정말 미인이십니다!"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꽃을 꺼내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겁먹었을 때는 한마디도 못 하더니, 이럴 때는 말도, 행동도 청산유수다.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다.

"호호, 고마워."

실비아가 꽃을 받으며 웃었다. 눈이 반달이 된 걸 보니, 정말 좋아하고 있었다.

"그만 가라."

"왜 그래."

라온이 도리안을 툭툭 쳐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도리안. 라온이 어떻게 지내는지 좀 말해줄 수 있니?"

"무, 물론입니다. 라온 도련님은 최하위 그룹에서 최상위 그룹으로 올라가 5 연무장의 역사를 새로 쓰신 분입니다. 보는 사람이 감동하게…."

"후우!"

시험의 긴장을 수다로 풀 생각인지 도리안의 말이 끊기질 않았다. 시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해졌다.

-말이 더럽게 많은 인간이로다.

너만큼은 아니야.

"…그렇게 저와 하위 그룹의 추천생들은 라온 도련님이 자세를 알려주신 덕분에 중상위 그룹으로 올라올 수 있었죠. 다, 다른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급해서!"

도리안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세상에나…."

"라온 도련님!"

헬렌과 시녀들은 감격한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조금만 더 들었으면 눈물을 흘렸을 기세였다.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것도 좋지만, 넌 괜찮아? 아직 추위를 많이 타잖아. 숙소는 따뜻해? 아픈 곳은 없어?"

하지만 실비아의 눈동자에는 감동보다 걱정이 더 드러났다. 정말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건강해."

라온이 씩 웃으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도 실비아의 걱정 어린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힘들면 언제라도 그만둬도 돼.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을 따라야 해. 알겠지?"

"응."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의 얼굴에 드러나던 걱정이 조금 가셨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들의 몸만 걱정하는 어머니였다.

"근데 헬렌."

살짝 고개를 튼 실비아의 눈매에 작은 장난기가 돋아났다.

"네. 실비아님."

"라온 말이야. 못 본 사이에 더 귀여워진 것 같지 않아?"

"물론입니다. 누구 아들인데요."

"그렇지! 라온! 엄마가 한 번만 더 안아…."

"윽! 자, 잠깐만!"

라온이 다가오는 실비아에게서 뒷걸음질을 치려고 할 때였다. 연무장 입구 쪽에서 막대한 기파가 일어났다.

'이 기운….'

라온이 이를 악물고 연무장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문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쿠웅!

연무장의 문이 활짝 열리고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남자가 나타났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글렌이었다. 지그하트르의 주인을 마주한 사람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길.'

"아버지?"

"으음!"

실비아와 헬렌 역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느껴지던 기운이 저 인간이었나. 이 시대에도 저런 놈이 있었다니….

라스가 깨어난 이후 처음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그에게도 글렌이라는 남자의 무력은 놀라운 모양이다.

-이미 격을 달리하는 무력이다. 극과 탈을 넘어섰군.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시간? 그게 무슨 말이지'

-....

라스는 대답하지 않고, 글렌을 바라만 보았다.

"음."

라온이 다시 눈동자를 돌려 글렌을 보았다. 그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찬찬히 둘러본 후 단상 위로 올라가 리메르가 앉던 의자에 앉았다.

"엑?"

연무장 담벼락을 넘어오던 리메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가주님이 여길 왜…."

글렌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가문의 미래를 선발하는 행사다. 내가 오지 못할 곳에 왔나?"

"그건 아니죠. 아주 잘 오셨습니다."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글렌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종종걸음으로 단상 위에 올라갔다.

"느긋하게 시작하고 싶었는데, 가주님께서 오셨으니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겠네요. 바로 수련생 선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뒤로 물러나라 말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잘하라고 말한 뒤 멀찍이 물러섰다.

"라온."

실비아의 부름에 라온이 뒤를 돌았다.

"다치면 안 돼."

"도련님. 무리하지 마세요."

실비아와 헬렌은 여전히 잘해라가 아니라, 몸을 조심하라는 걱정을 남기고 물러났다.

-나약하기 그지없다. 너랑은 어울리지 않는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걸 원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만을 걱정해주었다.

'여전히 적응이 안 돼.'

실적만이 중요하던 전생의 사육사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아직도 적응되지 않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자신을 보면서 씩 웃고 있었다.

"그럼 남녀노소. 지그하르트 모두가 궁금해하던 수련생 선발 시험의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리메르가 단상 위에 선 채로 손을 털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모습이었지만, 그에서 피어나던 작은 기세가 광활한 날개를 펼쳤다.

쿠구구구!

글렌 지그하르트만큼은 아니지만, 연무자 전체를 휘감은 막강한 기세에 부모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아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터억!

리메르는 경쾌하면서도, 웅장한 걸음으로 연무장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내 기세를 뚫어라."

그는 바로 앞에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안광을 빛냈다.

"그게 나의 시험이다."

18화

"기세?"

라온이 입매를 찡그렸다.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리메르가 지시했던 훈련을 생각해보면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야 하건만, 그의 선택은 기세였다.

"기세라고?"

"저 아이들에게 기세를 시험한다니…."

"저자는 여전히 정도를 모르는군."

아이들의 부모들도 시험의 내용이 의외였던지 목소리를 높였다.

"교관은 저니까 전부 조용히 해주시죠."

리메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무인들의 삶에서 기세라는 건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는 요소. 그 중요한 능력을 시험하겠다는데, 왜들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틀린 말은 아니다. 기세란 무인이 가진 기질과 격의 조화. 강력한 기세를 가진 무인이 싸우기도 전에 적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흔했다.

"아이들은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기세의 시험이라니, 이치에 맞지 않아."

"오러 자체를 익히지 않은 아이도 있지."

"시험이 너무 불공평합니다!"

"역시 잘 모르시네요. 기세라는 건 단순한 오러의 발현이 아닙니다."

리메르가 긴 손가락을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진정한 기세란 무인이 이뤄낸 업적(業績)이 쌓여 만들어진 격(格). 오러 없이도 발현할 수 있는 무인의 증명이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녹풍이 연무장 전체를 휘감았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방금 리메르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기세를 펼쳐냈다. 스스로 뱉은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래도 불만이면 가주님께 여쭈어보시죠."

리메르가 획 몸을 돌렸다. 언제 진지했냐는 듯 히죽 웃으며 글렌 앞에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가주님. 무인의 기세라는 건 오러로 만들어지는 겁니까?"

'허.'

라온이 헛바람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가주를 끌어들이다니, 리메르라는 인간. 아니, 엘프는 움직임이 예측되질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러를 익히지 않은 자도 살아온 방식에 따라 각자만의 기세를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이야, 역시 가주님!"

리메르는 뒤를 돌면서 손뼉을 쳤다.

"으음…."

"이런."

"가주님께서 저리 말씀하신다면…."

글렌이 직접 말했기 때문에 직계든, 방계든 더 이상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저 뾰족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는 하는구나. 마나, 마기, 오러 따위로 만드는 기세는 가짜다. 영혼에 업적을 쌓은 기세만이 진짜이니라.

라스는 옳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제대로 되지 않은 마족들이 설치기 시작했을 때 본왕은 막대한 기세를 끌어 올려 그 가짜들을 굴복… 윽!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팔찌를 쳤다.

"지난 6개월간 아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한계를 끝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제 디테일한 훈련 덕분에…."

"거짓말하지 마라."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리메르에게 노려보며 일어섰다.

"정규 수련 시간에 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는 걸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제대로 훈련을 시키긴 했나?"

"저도 들었습니다. 훈련 시간에 나타나기만 할 뿐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매일 잠만 자고, 훈련은 알아서 하게 놔둔다고 했습니다!"

"오, 잘 아시네요."

리메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력이 대단하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것 역시 제 훈련의 일환입니다."

"그게 훈련이었다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와 타인의 지시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자다."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아이들에게 바란 게 바로 그 정신력이었습니다. 체력도, 기술도 키워줄 수 있지만, 의지를 높이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전 정신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해서 육성하고 싶었습니다."

리메르는 평소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엔 현기가 담겨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극복한 아이들은 작게나마 나름의 격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아이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겠죠."

그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말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아이들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기대감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다들 이해하신 듯하니, 시험을 시작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카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매에 내려앉았던 불신은 여전했다.

"수련생들이 전부 같은 수련을 했다고 해도 각자가 가진 격의 수준은 다르다. 그걸 어떻게 시험한다는 거지?"

"초기에 아이들이 가진 기질에서 얼마나 성장했냐를 볼 겁니다. 그중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임시 수련생이 수석입니다."

"초기라면 6개월 전 아이들을 말함인가? 160명이 넘는 아이들의 기질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도 못 하면 교관 때려치워야죠."

리메르가 씩 웃었고 카룬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 방해꾼. 아니, 부모님들도 다 인정하셨으니, 바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루난은 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서도록."

루난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앞에 섰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뒤로 빠졌다.

"루난 슬리온. 내가 내보낼 기세는 네가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해왔다면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이다."

리메르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말을 이었다.

"내 기세를 뚫고 내 몸을 닿는다면 합격이다."

"네."

루난이 작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마."

리메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빛에 어린 녹광이 번쩍이며 강대한 기세가 일어났다.

쿠구구구!

갑작스럽게 불어온 위압적인 기파에 루난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으윽!"

루난이 입술을 깨물며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오러를 사용하면 실격이다. 네가 지금까지 수련하며 버텨온 정신력을 일깨워라."

"흐읍!"

그녀는 운용하려던 오러를 가라앉히고, 발을 내디뎠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끝까지 참고 잔걸음을 걸어 앞으로 향했다.

타악.

루난은 느리지만 정확하게 손을 내뻗어 리메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여유로운 합격이다. 그간 최선을 다해선 수련한 성과가 보인다."

리메르는 씩 웃고서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루난은 거친 숨을 흘리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다음 도리안."

"아, 저요? 벌써요? 정말 저예요?"

라온의 뒤에 숨어있던 도리안이 바들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불안한지 배에 찬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 이거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건…."

"내 맘이다. 빨리 나와."

"으흐윽!"

도리안은 찔끔 눈물을 흘리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엑!"

다시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루난이 하는 걸 봤겠지. 네가 단련을 하며 쌓아온 정신력으로 내가 펼치는 기세의 벽을 뚫어라."

"그, 그게 될까요? 전 정신력이 없기로 유명한데…."

"안 되면 떨어지는 거지."

리메르가 두 번째 기세를 뿜어냈다. 루난 때보다는 확연히 약해진 기세. 아이들마다 다른 수준의 기세를 보낸다는 게 진짜였다.

"우헤헥!"

도리안은 너구리 같은 소리를 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 이상으로 물러나면 바로 실격이다."

"어우욱…."

"마지막 조언을 해주지. 넌 겁이 많지만, 수련엔 진심으로 임했다. 너를 믿고 들어와라."

"아, 알겠습니다."

리메르의 안정된 목소리에 도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이가 걸음마를 하듯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가 손을 내뻗었다.

타악.

도리안의 손이 리메르의 허리춤에 닿았다.

"합격이다. 넌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너무 없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꾸에엑!"

아쉽게도 도리안은 토하느라 바빠서 리메르의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흠. 계속하지."

리메르는 곧바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 *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 있던 태양이 서쪽으로 처지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 통과한 아이들의 숫자는 꽤 되었지만,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울음을 터트렸다.

신기하게도 라온에게 자극을 받아 그의 근처에서 체력 단련을 했던 소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합격했다.

하지만 버렌을 따라 체력이 아니라, 검술이나, 권법을 다듬은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떨어졌다.

시험이 진행될수록 버렌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고, 마지막 순서인 라온을 남기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라."

"예."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리메르의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당연하겠지.'

라온이 픽 웃었다. 버렌의 예상과 달리 그와 함께했던 수련생들이 많이 떨어져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자."

리메르가 웃음기를 유지한 채 기세를 펼쳐냈다. 루난과 같은 급의 막강한 기세가 녹색의 바람이 되어 버렌에게 밀어닥쳤다.

쿠구구구!

몰아치는 기세의 폭풍에 버렌을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걸 견디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옆에서 보는 기세와 앞에서 직접 느끼는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루난. 자신과의 경쟁을 포기한 겁쟁이가 이 정도 기세를 뚫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끄으윽!"

입술을 깨물어도 발이 나아가질 않았다. 너무도 힘겨웠다.

'설마 나에게만 더 강하게 하는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 아버지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시험에 잘못된 부분이 없다는 소리였다.

"너의 재능은 특별해. 160명의 인재 중에서 널 따라갈 사람은 손에 꼽는다. 다만."

리메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와 널 따르던 아이들은 시간을 낭비했어. 진의를 알지도 못하는 형태뿐인 검술을 수련할 시간에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했어야 했다."

"끄으으윽!"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전의 오러가 절로 일어나고 있었다.

"넌 어려울 때마다 오러를 사용했지. 이번에도 오러를 사용하면 바로 실격이다."

"사, 사용하지 않습니다."

솟구치는 오러를 억지로 잠재우며 발을 굴렀다. 한 발을 걸을 때마다 용암 위를 걷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등 뒤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그것이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버려진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림받은 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버렌은 직계로서 보여선 안 될 추한 목소리와 표정을 드러내며 기다시피 걸어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리메르의 옷을 움켜쥐었다.

"합격이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기세를 꺼뜨렸다.

"후억억!"

버렌은 그대로 자빠져서 거친 숨을 마구 내뱉었다. 항상 여유롭던 그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넌 아직 12살이다.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고, 그 나이에 맞는 단련을 해. 위만 보고 걷다간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야."

리메르는 버렌에게도 조언을 해주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네."

그의 부름에 라온이 앞으로 나아갔다.

"준비는 됐나?"

"물론입니다."

"그럼 시작하지."

리메르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루난, 버렌에게 뿜어낸 그 이상의 기세가 폭풍이 되어 라온을 휩쓸었다.

"라온!"

"라온 도련님!"

뒤에서 실비아와 헬렌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거 제 시험 맞습니까?"

라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의 격은 루난이나 버렌은커녕 중하위권 아이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기세는 너무 강대했다.

"글쎄?"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본 네 재능은 루난이나 버렌 이상이거든. 한 번 견뎌봐."

"그렇습니까?"

녹색 바람에 잠긴 라온의 눈동자에서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럼 그 기대를 배신해선 안 되겠군요."

19화

저벅.

라온이 한발을 내디뎠다. 리메르에게 다가갈수록 그에게서 뿜어지는 기세가 급격하게 강대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물론이고 루난이나, 버렌 조차 뚫기 힘든 기세였지만, 웃음이 나왔다.

'알아서 판을 깔아주는군.'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살기로 마음먹은 이후엔 가진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재능을, 능력을 보여줄 판이 열렸으니, 자신은 그 안에 들어가서 놀기만 하면 되었다.

"어때? 버티기 힘들면 말을…."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미소 짓고, 발을 굴렀다.

'지금의 격만으로는 무리야.'

격이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그릇에 담기는 법. 자신에겐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쌓아온 격만이 아니라, 최고의 암살자 라온으로서 살아온 격도 함께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라온 지그하르트의 작지만 단단한 기세 위로 한 번의 실패도 없었던 암살자 라온의 격이 내려섰다.

저벅.

연무장의 모래를 밟는 발걸음 소리가 달라진다. 어깨 위로 업은 라온의 격이 진중한 의지를 발했다.

찌지지직!

칼날처럼 벼려진 기세가 리메르가 펼쳐낸 녹풍의 기세를 반으로 찢었다.

"너 무슨…."

리메르가 눈을 부릅떴다. 여유로웠던 그의 눈동자에 당황이라는 두 글자가 담겼다.

우우우웅!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나아갔다. 거친 바람을 갈라내고 다섯 걸음을 걸어 리메르의 앞에 섰다.

툭.

가볍게 손을 뻗어 리메르의 어깨를 쳤다.

"시험은 끝났습니까."

"어? 어…."

당당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에 리메르는 고개만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손을 내리며 불러온 암살자의 격을 흩뜨렸다. 무리했는지 정신이 멍했다.

"...."

리메르는 그때까지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라스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깃들었다. 항시 분노만을 간직한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흠."

라온은 리메르의 반응을 기다리며 조용한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야유를 보내던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도, 함께 수련한 정으로 응원해주던 아이들도, 그들의 부모들까지 모조리 입을 다물었다.

웅장하기까지 했던 연무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뭐, 뭐야. 저걸 뚫었다고? 저 녀석이?"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오러조차 익히지 않은 환자가 어찌!"

수련생의 부모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숨을 내쉬었다.

"라온? 너 몸은!"

"도련님. 무리하신 거 아닌가요?"

실비아와 헬렌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동한 표정이지만, 입으로는 또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만 글렌 지그하르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얼음장을 씌워놓은 듯한 서늘함은 그대로였다.

'저 사람은 진짜로군.'

라온은 글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너 정체가 대체 뭐야."

리메르는 차분한 라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6개월 동안 지켜보시지 않았습니까. 라온입니다."

"그걸 뛰어넘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난 네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의 기세를 내보냈다. 일부러 장난을 친 건데, 그걸 뚫어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어."

라온이 숨기고 있는 능력을 보기 위해서 그가 버티기 힘들 정도로 강한 기세를 뿜어냈다.

아무리 많은 힘을 감춰뒀다고 해도 뚫어내지 못하리라 확신했는데, 라온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기세를 갈라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음…."

리메르가 라온의 뒤에 있는 직계와 방계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건 마음에 드는군.'

시끄럽던 그들의 입은 자신처럼 꽉 닫혀 있었다. 연무장 전체가 라온이 보여준 놀라운 모습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크흠, 수석 교관으로서 잠시 한눈을 팔았네요."

리메르가 꺼져가는 녹색 바람에 몸을 맡겨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마지막으로 정식 수련생을 뽑는 시험은 종료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중요한 행사가 하나 남았습니다."

중요한 행사라는 말에 모두의 시선이 리메르의 입에 꽂혔다.

"수련생 중에서 대표이자, 수석을 정해야겠죠."

수석 수련생은 훗날 가문의 주역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이들과 부모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망이 어렸다.

'정해진 그대로지만 상황은 많이 변했군.'

사실 수석은 처음부터 라온 지그하르트로 결정되어 있었다. 임시 수련생 기간 중 가장 많은 발전을 이뤄냈으니, 시험의 취지에도 걸맞았다. 물론 이렇게 압도적으로 합격할 줄은 몰랐지만.

'덕분에 준비해둔 돌발 이벤트는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군.'

픽 웃으며 수련생을 훑어내리던 리메르의 시선이 루난과 버렌을 지나 라온에게서 멈췄다. 그리고.

"라온 지그하르트. 오늘부터 네가 5연무장의 수석 수련생이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오오! 라온 님!"

"...."

도리안이 박수를 보냈고, 루난은 묘한 표정으로 박수를 딱 세 번 쳤다.

"라, 라온 도련님이 수석이래요!"

"어우…."

"실비아 님!"

헬렌은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실비아를 부둥켜안았다.

"어?"

"지, 진짜?"

"저 아이가 정말 수석이라고? 믿을 수가…."

"가장 강한 기세를 넘은 건 라온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실비아의 자식이라고! 도망자 실비아!"

"그것과 아이의 실력은 상관없지."

"리메르랑 짜고 사기 치는 거 아니야? 그럴만한 놈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논쟁을 벌였다.

"거, 거짓말!"

버렌이 입술을 떨며 일어섰다.

"이건 아닙니다!"

"뭐가 거짓말이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리메르가 뚱한 얼굴로 버렌을 돌아보았다.

"라온은 저보다 체력도, 근력도, 재능도 떨어집니다. 그런 놈이 수석이라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도 봤지 않나. 라온은 네가 간신히 통과한 것보다 훨씬 강한 기세를 가볍게 돌파했다. 수석의 이름을 받기에 충분해."

"술수를 부렸던 게 분명합니다!"

"버렌 지그하르트. 지금 내 판단을 의심하는 건가?"

리메르의 입에 걸린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선선했던 바람에 각이 선 느낌이다.

"그,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이 사기를 쳤다는 겁니다! 어제 수련에서도 절 따라오지 못한 라온이 저런 강대한 기세를 뚫었다는 게 말이 되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교관님도 제대로 믿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버렌과 함께 다니는 방계의 아이들이 일어서서 버렌의 옆에 붙었다.

"흐음…."

리메르가 턱을 긁적였다. 확실히 라온이 자신의 기세를 그렇게 쉽게 뚫고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투정도 이해는 갔다.

"맞는 말이야."

"혹한의 저주를 앓으면서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오러조차 없잖아."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에서 보았음에도 시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봐. 나도 깜짝 놀라긴 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작은 기대감을 가진 버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저희는 지그하르트 무인들의 가문입니다. 이런 시험보다는 제대로 맞붙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라온이랑 대련이라도 해서 수석 자리를 가지고 가고 싶다는 말인가?"

"제,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눈에 욕심이 가득한데 거짓말할 필요 없어."

리메르가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버렌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시험은 끝났거든. 가주님. 이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버렌 지그하르트."

글렌은 라온과 버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예!"

"이미 결정 난 사항을 바꾸려면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하다. 넌 그 대가를 치를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버렌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즉답했다. 무슨 대결을 하든 라온을 이길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번엔 글렌이 라온의 이름을 불렀다.

"예."

라온이 차려자세를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넌 버렌과 대결할 생각이 있느냐."

"없습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헉!"

"어?"

"어어…."

"저, 저놈이 미쳤나!

바로 거절을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시험은 끝났고, 결과는 나왔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대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

"직계가 어쩌구 저쩌구, 명예가 이렇고 저렇고 하더니, 결과에 승복도 못 할 줄은 몰랐다."

"끄으윽!"

라온의 비아냥에 버렌의 얼굴이 더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글렌의 쇳덩이를 얹은 듯한 음성에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수석의 자리를 걸고 대련을 해라. 네가 이긴다면 동(銅)급의 패를 내어주마."

'동급의 패!'

지그하르트는 무인이 이룬 실적에 따라 금, 은, 동의 패를 수여한다. 동급이라고 해도 가주가 직접 내어주는 패이니, 괜찮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복이 절로 굴러들어왔군.'

수석 수련생이 되어 라스와의 내기도 이겼는데, 동급의 패까지 준다고 하니, 얻을 보상이 2배가 되었다.

글렌은 직계인 버렌이 수석이 되었으면 하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라, 라온!"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실비아가 다가왔다. 걱정하는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버렌은 감격한 표정으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되었으니, 시작해라."

"예!"

버렌이 벌떡 일어서서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 직접 맞붙게 되다니, 네놈의 운도 여기서 끝이로군."

그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직계와 버림받은 버러지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지."

"승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이 혓바닥은 왜 이리 길어."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손목을 돌렸다.

"이 자식…."

"싸움은 대련에서 해라."

리메르가 둘 사이를 막고, 고개를 저었다.

"대련은 단판. 무기와 오러를 사용하면 실격이다. 본인의 육체만을 사용하도록."

"알겠습니다!"

"네."

"좋아. 그럼…."

리메르가 라온과 버렌의 시야를 막고 있던 손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시작!"

"흐아압!"

시작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가기 전에 버렌이 뛰어들었다. 명치를 향해 매서운 주먹을 내질렀다.

타악!

라온이 손등을 돌려 버렌의 주먹을 쳐냈다. 놈의 주먹에 어린 회전력에 손목이 지끈거렸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내 주먹을 막을 수 없다!"

버렌이 차갑게 웃으며 자신의 복부를 향해 두 번째 주먹을 찔러넣었다.

터엉!

손아귀로 주먹을 막아냈지만, 통증이 팔뚝까지 전해져왔다.

"아버지께서 직접 전수해주신 공호권이다. 권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으니, 반칙은 아니지."

"공호권…."

공호권은 주먹에 회전을 넣어 상대를 방어를 뚫어내는 지그하르트의 권법이었다.

'어떻게 할까….'

위력은 있지만, 어설프다.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냥 이기기엔 좀 아까운데.'

쉽게 끝내기엔 이렇게 만들어진 판이 너무도 아쉽다. 모두에게 능력을 증명하며 이기고 싶었다.

"어딜 보는 거냐!"

버렌이 주먹을 뻗어왔다. 상체를 젖혀 주먹을 피해낸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능의 차이를 보여주마!"

놈은 보법까지 밟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도, 발걸음도 어설프지만, 가진 신체 능력이 뛰어나니, 나름 위협적이었다.

'재능이라.'

라온이 옆으로 물러나며 두 눈을 빛냈다. 타고난 재능만 따지는 지그하르트의 머저리들의 머리통을 후려칠 방안이 생각났다.

무학.

저들은 무가의 일원답게 무학에 관한 재능을 최고로 친다. 저들에게 그 재능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좋은 게 있으니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전력으로 운용했다. 세 개의 고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순간 버렌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그가 펼치는 권법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포기한 거냐!"

버렌이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살벌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그럴 리가."

라온의 손이 반달을 그렸다. 그 회전에 맞닿은 버렌의 주먹이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그가 펼쳤던 공호권과 같은 회전이었지만, 그 방향이 반대였다.

"이익!"

밀려나간 버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려들었다.

타악!

주먹을 쳐내고, 어깨로 밀어쳤다. 뻐억 소리와 함께 버렌이 뒷걸음질을 쳤다.

터엉!

라온이 땅을 박차고 당황한 버렌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이놈!"

버렌은 당황한 상태에서도 왼 주먹으로 턱을 노려왔다. 하지만 이미 그의 권은 모두 파악된 상태였다.

파앙.

역회전으로 버렌의 주먹을 밀어낸 뒤 녀석의 복부를 후려쳤다.

"커헉!"

버렌이 거품 무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네, 네가 어떻게 공호권을 쓰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턱으로 침을 질질 흘렸다.

"바, 방금 어떻게 된 거지?"

"저 아이가 어떻게 공호권을…."

"실비아나 리메르가 알려줬을 리도 없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대련을 지켜본 사람들 역시 경악한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네가 보여줬잖아."

라온이 차가운 눈으로 버렌을 내려다보며 손을 털었다.

"난 네 권법을 따라 했을 뿐이다."

20화

"허…."

리메르가 본인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벌어진 입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라온과 버렌의 대결은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대로였다.

라온을 수석으로 임명하는 순간 버렌이 이의를 제기해서 두 사람이 대련까지 갈 거라 예상했다.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버렌의 버릇을 고치고, 라온의 특별함을 모두에게 선보이는 정도로 끝나는 상황. 그게 자신이 원한 전개였다.

하지만 라온이 그 모든 계획을 바꿔버렸다.

아니, 스토리 라인은 그대로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라온은 단순한 힘과 민첩성, 기술이 아니라, 공호권의 묘리를 역이용해서 버렌을 날려버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아무리 오러가 실리지 않다고 해도 버렌의 뛰어난 재능은 공호권의 묘리를 적절하게 살렸다.

하지만 라온은 버렌이 만들어낸 권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회전을 역으로 펼쳐냈다.

아무런 무학도 익히지 않은 아이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뒷골목 술집에서 말해도 뺨을 얻어맞을 정도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음…."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가주님까지?'

동상이라도 된 듯 무표정만 고집하던 글렌조차 놀라움에 눈매를 좁히고 있었다.

"라온."

리메르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에게 다가갔다.

"예. 교관님."

"너 방금 뭘 했지?"

이 단순한 질문에 담긴 건 많았다. 정말 공호권을 본 것만으로 따라한 건지 혹은 누군가에게 배운 건지, 아예 다른 권인지를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버렌의 주먹에서 회전이 보였습니다. 회오리처럼 나선으로 돌아가고 있더군요."

맞는 말이다. 공호권의 특성 자체가 나선의 회전이니까.

"제 주먹이나, 방어하는 손등조차 밀려날 정도로 빠른 회전이라, 그냥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기대감에 대련을 시켰으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도망치면서 싸울까도 했지만, 버렌의 주먹을 보다 보니,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느껴졌다?"

"네. 그의 주먹에서 이루어지는 흐름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왠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역으로 회전을 걸어서 버렌의 회전을 지워버렸습니다."

"아!"

리메르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진짜야!'

북채로 가슴을 내려친 듯 심장이 울렸다. 상대의 무학을 보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천재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지만 라온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상대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다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고의 재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엔 진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버렌의 경지가 낮다고 해도 한눈에 공호권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났는데요?"

리메르가 라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버렌의 훈련을 훔쳐봐서 미리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혹은 누가 알려줬던가!"

카룬의 살벌한 눈동자가 실비아와 라온에게 돌아갔다.

"일단 난 게을러서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니고, 별관에서 사는 라온이 과연 누구에게 공호권에 대해 배웠을까요? 말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버렌이 공호권을 훔쳐 배우는 걸 그냥 놔둘 아이도 아니죠."

"으음…."

그는 바득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글렌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라온에게 도전하고 싶은 사람 있니?"

리메르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앞에서 본 게 있으니, 그 누구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루난?"

"...."

루난은 고개를 저으며 라온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보여주었던 역회전의 공호권을 따라 했다.

"훗."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예상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결과 자체는 훨씬 좋아졌다.

"라온. 네 승리다."

"감사합니다."

리메르가 방긋 웃었고,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네가 알아서 한 거지. 동급의 패는 가주님께서 잘 챙겨주실 거다."

"네."

리메르는 대답하는 라온을 잠시 훑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그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 오러 같은 건 없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돌렸다.

"가주님. 끝났습니다."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간 라온, 버렌, 루난을 비롯한 아이들을 살피고서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조언 한마디만 해주고 가시지."

리메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서 아이들을 불렀다.

"합격자는 일주일 동안 휴식을 한 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불합격자도 너무 실망하지마라. 곧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 그럼 해산! 모두 가족이랑 좋은 시간 보내라."

리메르는 손뼉을 짝 치고서는 연무장의 담벼락을 넘어갔다.

"라온!"

"라온 도련님!"

그가 떠나자마자 실비아와 헬렌이 달려와 라온을 껴안았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련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두 사람은 여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했냐가 아니라, 지겨울 정도로 몸이 괜찮은지를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라온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제 집에 가자. 오랜만에 스튜가 먹고 싶어."

"스튜? 아, 알겠어! 가자!"

"전 먼저 가서 준비해놓겠습니다!"

헬렌은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고, 라온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쫓았다.

"허어…."

"대체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라온 지그하르트…."

"저런 재능이 존재했다니…."

연무장에 남은 사람들은 벙찐 표정으로 라온과 실비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끄읍…."

그리고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땅만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