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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ㅍㅇ 재업금지_by K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

글---글개미

1화

난 죽는다.

서늘한 밤바람도, 반만 고개를 내민 달빛도, 암살자로 살아온 감각도 모두 같은 말을 속삭인다.

난 곧 죽는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양털처럼 폭신해 보이는 정원의 수목들 사이로 수많은 샛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나갈 수 있는 생로는 없다. 죽음의 악취가 흐르는 사로뿐이다.

"라온."

심장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리를 빗은 듯한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중년인이 보인다.

이 자다.

데루스 로베르트.

로베르트 가문의 주인인 이 남자 한 명 때문에 이 거대한 정원 전체가 죽음의 늪처럼 진한 사기를 뿜어냈다.

"예."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넌 그림자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실적을 보여주었다. 네가 음지에서 움직여준 덕분에 가문의 성장세가 더욱 빨라졌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기쁜 척도, 기쁘지 않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목각인형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라온."

그가 나지막하게 운을 뗐다.

"넌 그림자에게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데루스가 손을 뻗었다. 바닥에 비치는 그의 그림자가 똑같이 손을 내밀었다.

"그림자는 주인을 따르면 그만이다. 생각도, 감정도, 마음도 필요 없다."

"맞습니다."

"그걸 알면서 왜 네 스스로 움직였지?"

급격하게 차가워진 데루스의 목소리가 심장을 꽉 조였다.

"세뇌는 어떻게 풀었고."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놀란 척을 하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었다.

뭐지?

이전과 다른 언행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세뇌가 풀린 걸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말해라. 세뇌를 언제, 어떻게 풀었지?"

이렇게까지 나오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세뇌.

그건 로베르트 가문이 암살 단체 '그림자'를 운용하는 방법이다.

놈들은 어린아이들을 납치 혹은 구매해와서 감정을 죽이고, 세뇌를 걸어 평생을 암살자로 사용한다.

나도 세뇌에 걸렸었지만, 우연히 얻은 기연 덕분에 그 지독한 족쇄를 풀어낼 수 있었다.

"네가 가문에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데루스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너를 포함한 그림자의 암살자들에겐 두 개의 목줄을 채워놓았다. 첫 번째는 세뇌 그리고 두 번째는…."

"크헉!"

폐와 심장을 톱으로 써는 듯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레이지 웜이다. 네 몸속에 넣어 둔 벌레가 내 명령에 따라 심장을 파먹고 있지."

"레, 레이지 웜…."

레이지 웜은 노예의 감정마저 파악할 수 있는 최악의 주술이다.

데루스는 레이지 웜을 이용하여 내가 가문에서 도망치려던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고, 공명정대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세뇌도 모자라, 레이지 웜까지 먹였던 건가? 이 지독한!"

"지독한 게 아니라, 철저한 거다. 실제로 넌 세뇌를 풀었지 않나."

데루스가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다정한 눈빛으로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말이 있지. 내 가면은 남들보다 조금 두껍고 특별할 뿐이야."

"데루스 로베르트…."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수는 없어.

난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이에 납치되어 로베르트 가문의 음지에서 사냥개이자, 암살자로 사육되었다.

감정도, 마음도 잃은 채로 살아가다가 기연을 얻어 간신히 세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야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건 철창을 벗어날 열쇠가 아니라 죽음의 족쇄였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망할!

말라붙었던 감정의 우물에 붉은 물이 차오른다. 처음으로 느끼는 분노였다.

"그 상태에서 일어선다고?"

데루스의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이 피어났다.

"마지막까지 꼴사납게 죽진 않겠다."

허리춤에 매단 검을 쥐었다.

정원에 들어오며 느낀 죽음의 감각은 변하지 않았다.

난 여기서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면 그냥 가진 않겠다. 최소한 팔 하나 아니, 상처 하나라도 만들고 죽겠다.

"으아아아아!"

단전에 가득 찬 오러를 폭발시키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뻗어나가던 칼날이 반으로 뚝 부러졌다.

딸칵.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계가 회전하며 데루스의 차가운 눈동자가 뒤집히고, 달이 거꾸로 섰다.

아….

이제야 알았다. 내 목이 데루스의 검에 잘려 나갔다는 걸.

하지만 암살자의 검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부러진 검날 뒤에 숨은 섬뜩한 오러가 데루스의 허연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추잡하군."

데루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파리를 쫓는듯한 가벼운 손짓에 마지막 검격이 촛불처럼 꺼졌다.

역시나….

데루스는 대륙 최강이라 칭해지는 무인. 내가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놈은 강하고, 난 약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을 리가 있나!

가슴 밑바닥에서 번져가던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 올랐다.

데루스에게 평생을 농락당한 게 억울했고, 기연으로 얻은 '불의 고리'를 완성 시키지 못하는 게 미치도록 아쉬웠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신도, 악마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루스의 가면을 벗기고 놈의 목을 베겠다는 분노가 전신을 가득 메운 순간 내 세계가 빨갛게 멎었다.

* * *

"음…."

데루스 로베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막았거늘.'

저 쓰레기가 마지막에 내지른 검격을 완벽하게 차단했음에도 손등에 작은 상처가 벌어졌다.

피가 흐르는 상처라니,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어이가 없군.'

놈은 스스로 세뇌를 풀었고, 레이지 웜의 고통을 견뎠으며, 자신에게 상처까지 입혔다.

소모품으로 사육한 사냥개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당혹스러웠다.

'다만.'

라온은 이미 죽었다. 상식을 벗어난 놈이었지만,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치워라."

데루스가 등을 돌리자, 정원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무인들이 튀어나와 라온의 시체로 다가갔다.

우우웅.

뻘건 핏물에 잠긴 라온의 목걸이가 푸른빛을 내뿜었지만,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노>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분노>가 당신의 육체에 강림…그릇이 사망했습니다!]

[오류가 발생….]

* * *

환생.

존재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부분은 믿지 않는 환상의 개념.

라온 역시 환생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평생을 세뇌에 걸려 있었고, 세뇌에서 풀려났을 땐 로베르트 가문을 벗어날 준비로 바빠서 그런 허무맹랑한 것 따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햇살아. 여기 봐봐!"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적안의 미녀가 파란색 딸랑이를 흔든다.

"빨간색도 있어!"

왼손에 들고 있던 빨간색 딸랑이도 앞으로 내밀었다.

딱딱딱!

두 딸랑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금발 여성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후."

라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딸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이쪽으로 와!"

금발 여성은 활짝 웃으며 더 신나게 딸랑이를 휘돌렸다.

지금 시야에 보이는 건 두 개다. 소시지처럼 오동통한 팔과 신나게 딸랑이를 흔드는 여성.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저 팔이 내 팔이고, 저 사람이 내 어머니라니….'

저 여성의 이름은 실비아. 지금도 믿기 힘들지만, 난 암살자였던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저 여성의 아이로 환생해버렸다.

처음엔 당연히 꿈이라고 여겼다.

한숨 자고 나면 다 끝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도 자도 이 요상한 꿈이 깨질 않았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하루하루가 지나 100일이 되었고, 그제야 라온은 자신이 환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햇살아! 이쪽이야!"

"아우!"

딸랑이를 향해 천천히 기어가자, 실비아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 조금만 더!"

라온은 실비아를 따라 아장아장 기어서 딸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부…."

하지만 무거운 머리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헉!"

실비아가 딸랑이를 던져버리고 몸을 던져서 쓰러지려던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빠르네.'

그녀의 몸은 쾌속했다. 오러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적당한 무예는 익혔던 것 같았다.

"놀랐지? 괜찮아요. 괜찮아."

실비아가 라온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우."

라온이 손을 흔들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표현했지만, 그녀의 두드림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햇살이. 엄마랑 꽃님 볼까?"

실비아는 자신을 업은 채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따스한 햇볕이 솜이불처럼 보드랍게 내려왔다.

'아직도 햇살이라고 불리다니….'

실비아가 부르는 햇살이는 당연히 이름이 아니라 태명이다.

가주가 와서 이름을 정해줘야 한다는데 더럽게 바쁜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00일이 지난 지금도 태명인 햇살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후….'

라온은 실비아의 품에 안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었고, 벽엔 고급스러운 바다색 벽지가 발라져 있었으며, 천장에는 마법 등이 달려 밤에도 불이 들어왔다.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자는 아이의 몸인지라, 많은 것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여긴 부잣집이다. 그것도 꽤 명성 있는 가문.

'나쁘지 않아.'

어차피 환생했다면 평범한 가정보다는 돈 혹은 힘이 있는 가문이 낫다.

'복수해야 하니까.'

데루스에게 목이 잘릴 때의 섬뜩함은 아직도 선하다.

암살자로 사육되며 감정이 모두 마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죽기 전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는지 놈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만큼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조급해서는 안 돼.'

라온은 차분히 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까지 이 방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의 위치가 뭔지 아는 게 없다.

일단 상황을 파악한 뒤 복수 준비를 해도 늦진 않는다.

암살자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내였고, 자신은 최고라 불렸던 암살자였다.

감정과 복수심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거기다.'

전생의 기연을 통해 1000년 전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검사의 기예 '불의 고리'를 얻었다.

지금부터 '불의 고리'를 익혀나간다면 암살이 아니라, 정면 승부를 통해서도 데루스 로베르트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서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그건 그렇고 또 졸리기 시작하는데….'

실비아의 품에 안긴 채로 따스한 햇볕을 받으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얼마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졸리다니, 아기의 몸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햇살이 졸려? 그럼 코 자자."

실비아가 방긋 웃으며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더 느리게 한다. 꾸벅거리며 목이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실비아 님!"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실비아의 직속 시녀가 들어왔다.

"가, 가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시녀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

그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 집안의 가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던 모양이다.

"지, 지금이라도 준비를…."

"이미 늦었습니다. 바로 앞까지 당도하셨어요!"

"이런!"

실비아도, 시녀들도 당황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

뚜벅.

반쯤 열린 문밖에서 몸이 움츠러질 정도로 딱딱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가 대체 누구지?'

라온이 살며시 눈을 뜨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금발을 이마 위로 넘긴 적안의 노인이 다가온다. 그 위압적인 걸음에 실비아도, 시녀들도 몸을 떨었다.

'아….'

노인의 눈을 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주변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

"아, 아버지."

"이 아이인가?"

실비아의 앞에서 멈춘 금발 노인은 싸늘함만이 담긴 시선으로 턱짓했다.

"아, 네."

실비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라온을 가주에게 내밀었다.

'아….'

라온의 동그란 눈매가 크게 뜨여졌다. 정면에서 가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발적안. 그리고 얼음장을 두른 듯한 냉막한 인상의 노인…아!'

작은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대륙의 정점이라 불리는 가문의 주인이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작은 입에서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난 대륙 최강의 가문에서 환생한 모양이다.

2화

대륙에는 여섯 개의 빛과 다섯 개의 어둠이 있다.

찬란한 태양이 되어 대륙에 우뚝 선 여섯 세력을 육황이라 칭했고, 음지에 깃들어 패악와 공포를 펼치는 자들을 오마라 불렀다.

그 육황 중 하나이자, 북방에 군림하는 패주가 바로 지그하르트 가문이었다.

"아우우."

라온은 그런 지그하르트의 주인과 눈을 마주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잘된 건가…?'

지그하르트는 전생의 자신을 실컷 이용해 먹다 죽였던 로베르트 가문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 힘을 키운다면 복수할 시기가 훨씬 당겨질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저처럼 이 아이도 금발에 붉은 눈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실비아가 보드랍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글렌은 아찔할 정도의 위압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몸을 들어 올렸다.

'어?'

라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렌에게 안긴 순간 손목을 통해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웅…."

오랜만에 느껴보는 오러에 자신도 모르게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오러가….'

글렌의 오러는 따뜻하기만 한 게 다가 아니었다. 자연의 마나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어마어마한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몸을 녹여주고 있어.'

환생 이후엔 추위를 굉장히 많이 탔다. 처음엔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체질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글렌의 오러를 받자, 혈관으로 태양 빛이 들어온 것처럼 온몸이 따스해졌다.

우우웅.

글렌은 오러를 이용하여 라온의 육체 구석구석을 살핀 뒤 다시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뭐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글렌 정도의 무인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건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손자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저런 표정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비아."

"네."

"이 아이의 이름은 라온으로 하겠다."

"라온이요? 아, 아버지. 라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실비아의 눈썹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 뜻 그대로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라는 의미다."

부드럽게 오러를 운용할 때와 달리 글렌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피어났다.

'허….'

이거 뭐 운명인가?

전생과 같은 이름인데다가 그 의미 역시 똑같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글렌이 냉정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픈 손주에게도 관심이 없을 줄은 몰랐다.

"이상이다."

글렌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검붉은 코트를 툭 털고서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아버지! 최소한 다른 이름을…."

실비아가 라온을 안아 든 채 따라갔지만, 글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저택을 나가버렸다.

부녀관계가 아니라, 남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우으!"

라온이 입술을 떨었다. 조용히 있고 싶었지만, 외부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 미안해!"

실비아는 라온을 끌어 안아주면서 그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언가가 있는데. 졸려서 생각할 수가 없어.'

라온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과 실비아의 온기를 동시에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이의 몸은 정말이지 불편하다니까….'

* * *

달이 하늘의 중심에 떠오른 시간.

아기용 침대에 누워있던 라온이 슬며시 눈을 떴다.

'자는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는 바로 옆 침대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탁.

침대를 두드려도 깨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잠든 모양이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00일은 너무도 답답한 시간이었다.

잠은 끝없이 쏟아졌고, 일어났을 때도 실비아와 함께 있어서 마나를 운용할 수도, 연공을 할 수도 없었다.

연공 중에 가볍게 건드리기만 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아무것도 못 했지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아기 침대.'

시녀장 헬렌의 조언으로 오늘부터 온기가 있는 아기 침대에서 따로 자게 되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긴 했지만, 이 시간에 실비아가 일어날 리가 없다. 연공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다.

'시작해볼까.'

라온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불의 고리 연성을.'

대륙의 연공법은 호흡을 통해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여 단전에 오러를 쌓는다.

하지만 전생의 기연을 통해 얻은 연공법 '불의 고리'는 달랐다.

마법사가 서클을 만들 듯이 심장에 둥근 고리를 연성해서 체력과 육체를 성장시키고, 정신력과 마나 감응력을 높여준다.

즉, 오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켜 무인이 되기에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해주는 연공법이 바로 불의 고리였다.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지.'

불의 고리는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연공법. 아무리 높은 경지의 무인이라도 자신이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는 걸 알 수가 없다.

실제로 대륙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데루스 로베르트도 라온이 불의 고리를 익혔다는 건 알지 못했다.

불의 고리를 이용해서 육체와 정신을 성장시키고, 지그하르트 가문의 검술을 익힌다면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복수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다만 라온의 육체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냉기.'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마나가 흐르는 마나 회로가 지독한 냉기로 막혀 있었다.

이걸 처음 안 건 얼마 전이다.

자는 척하면서 잠깐 마나를 운용해봤는데,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뻔했다.

"후웁."

라온은 폐가 말릴 정도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대기 중에 퍼진 마나를 느껴보았다.

'흩어지는군.'

기본적인 마나 감응력이 별로인지, 전생과 달리 마나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 끝에 간신히 마나를 받아들여서 마나 회로에 가라앉혔다.

'음.'

라온은 흡수한 마나로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하려다가 우뚝 멈췄다.

'역시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어깨 부근의 마나 회로 절반 정도가 서늘한 냉기에 막혀 있었다.

'이러니 잠이 오고, 추울 수밖에.'

그동안 20시간 넘게 잠을 자고, 지독한 추위를 느낀 이유가 바로 이 냉기 때문이었다.

'아홉 곳인가?'

마나를 흘려 전신을 훑어보았다. 냉기에 막혀 있는 마나 회로는 전부 아홉 개였다.

'심각한데….'

아기의 마나 회로는 성인과 달리 활짝 열려 있다. 그런 상태에서 냉기가 반 넘게 차올랐으니, 나이가 들면 마나 회로 전체가 냉기로 막힐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는 추위와 고통이 찾아오거나, 심하면 죽게 될 거다.

그전까지 어떻게 해서든 이 냉기들을 지워버려야 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마나 회로의 냉기를 뚫어야겠어.'

불의 고리 연성이 한참 늦어지겠지만, 지금은 사는 게 우선이다.

후욱.

라온이 천천히 숨을 들이켜 마나를 받아들였다. 흡수한 마나를 송곳처럼 얇고 예리하게 저며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를 찔렀다.

티익!

얼어붙은 폭포를 포크로 찌른 것처럼 작디작은 냉기가 떨어져 나갔다.

'잠깐. 이 냉기를 이용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대로 냉기를 내보낼 수도 있지만, 냉기의 순도가 아까웠다.

라온은 떨어져 나간 냉기를 자연의 마나와 함께 불의 고리의 흐름대로 이끌었다.

자연의 마나와 마나 회로를 막고 있던 냉기가 하나로 뭉쳐 전신의 마나 회로를 순환하기 시작했다.

'됐어!'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생보다도 훨씬 느린 속도였지만, 큰 문제 없이 불의 고리의 흐름에 따라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우우웅.

마나와 함께 이끈 냉기가 몸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아이의 몸 덕분이군.'

마나 회로가 활짝 열린 아이의 마나 회로가 아니었다면 냉기 때문에 순환 자체를 할 수 없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음으로… 어? 벌써?'

조금 머리와 힘을 썼다고, 졸리기 시작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꺼풀이 커튼처럼 내려갔다.

'망할….'

라온은 분하다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잠에 빠지고, 하늘에 걸린 달이 손가락 세 마디만큼 움직였을 때 방문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문조차 열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지그하르트의 가주 글렌이었다.

"...."

글렌은 잠이 든 라온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노을처럼 연한 빛이 피어났다.

화아아.

마나 회로의 냉기 때문에 찡그려진 라온의 이마가 벨벳처럼 매끄럽게 펴졌다.

* * *

"아부부."

라온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쉽지 않아.'

깨어 있는 시간이 짧고, 그마저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불의 고리를 만들 시간이 없었다.

다만 한두 시간 밖에 안되는 연공 시간과 냉기로 인해서 진도가 지체되는 것 치고는 신기할 정도로 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꼭 누가 도와주는 것처럼.

"라온. 오늘은 조금만 더 움직여볼까?"

실비아가 허리를 굽히고 딸랑이를 흔들었다. 계속 반응해주었더니, 딸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놀아주기 힘들군.'

솔직히 말하자면 실비아나, 시녀들과 놀아주는 게 냉기를 견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아이의 육체에 성인의 정신이 들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우웅."

라온이 고개를 까딱이고서 실바아를 향해 기어가려고 할 때였다.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누군지 모를 백발의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거적때기 같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눈만큼은 호수처럼 맑았다.

"어? 아저씨!"

실비아는 노인을 알고 있는 듯 환하게 웃으며 문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이구나."

"아, 아니지. 성자님…."

"아웅."

라온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옹알이를 해버렸다. 성자라는 칭호와 거지나 입을 듯한 의복을 보자 저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넝마의 성자!'

넝마의 성자 페드릭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치료사 중 하나다.

신성력, 의술 모두 하늘에 닿았지만, 방랑벽이 있어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자는 무슨. 예전처럼 아저씨라고 부르거라."

페드릭은 클클 웃고서 라온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네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 이 아이냐?"

"아, 네."

"오호! 금발에 적안? 너 이후에 처음 아닌가?"

"맞아요. 예쁘죠?"

실비아가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긋 웃었다.

"그 말 그대로다. 한 살도 안 된 녀석이 예쁘게도 생겼군. 글렌처럼 사나운 놈이랑은 전혀 달라."

페드릭은 낄낄 웃으며 라온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름은 뭐지?"

"라온이에요…."

"라온?"

그는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림자라는 뜻 아니겠지?"

"맞아요…."

"아이의 이름을 그림자로 짓다니, 글렌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페드릭은 지그하르트의 가주인 글렌의 이름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불렀다.

'글렌 지그하르트와 넝마의 성자가 친구라는 소문은 진짜였군.'

라온은 빗자루 같은 페드릭의 머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암살자로 살았기 때문에 세계의 정세에 관해서는 나름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글렌 지그하르트와 넝마의 성자가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정보는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라온. 이 할아버지가 잠깐만 보자꾸나."

페드릭이 자신의 어깨와 팔뚝, 다리와 가슴 부근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으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다가 마지막으로 하얀빛을 펼쳐냈다. 그 빛을 쬐자, 온천에 들어간 듯한 후끈한 기운이 전신에 차올랐다.

"후우."

페드릭이 낮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돌렸다.

"어떤가요? 다른 아이에 비해 성장이 늦고, 추위를 많이 타던데…."

실비아가 양손을 꼭 모은 채로 페드릭에게 다가갔다.

"혹한의 저주다."

페드릭이 눈썹을 찡그렸다.

"저, 저주라뇨? 갑자기 그게 무슨!"

"혹한의 저주는 실제 저주가 아니다. 지독한 냉기가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체질이지."

"아…"

"여자아이에게 드물게 나타나는 체질이거늘. 남자아이가 혹한의 저주를 타고난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그는 묘한 눈빛으로 라온의 몸을 훑어보았다.

"지금은 마나 회로가 열려 있는 시기라 큰 문제가 없겠지만, 네 살 이후 마나 회로가 닫히기 시작하면 심각한 추위와 고통을 느끼게 될 거다"

"그, 그런…."

실비아가 불안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알아서 고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온이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냉기를 지울 수 있다. 딱히 치료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 아이의 마나 회로를 막고 있는 냉기 덩어리는 총 아홉 개. 내가 치료했던 여자아이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숫자다. 거기다 하나하나의 냉기가 강하니, 억지로 뚫었다간 백치가 될 가능성도 있겠어."

"치, 치료할 방법은요!"

실비아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페드릭의 소매를 확 잡아당겼다.

"화속성 영약을 희석해서 하루에 한 번씩 물처럼 마시게 하고, 해가 가장 높게 뜬 정오부터 2시간 동안 햇볕을 쬐게 해주어라."

"그렇게 하면 나을 수 있나요?"

"말했다시피 이건 병이 아니라, 체질이다. 내가 말한 대로 한다면 최소한 어린 나이에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다. 다만…."

페드릭이 말을 끊고 뜸을 들이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냉기가 이 아이의 체질과 체력을 잡아먹어서 치료가 끝나도 검사가 되기는 힘들 거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실비아는 죽지만 않는다면 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 생각하면 다행이구나. 어쨌든 지금부터는 이 아이를…."

똑똑.

페드릭이 추가적인 조언을 해주려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고급스러운 검은 예복을 입은 중년인이 방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께서 성자님을 찾으십니다."

"나중에 간다고 전하거라."

"지금 당장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쯧, 하여튼 때를 못 맞추는 녀석이라니까."

페드릭이 짧게 혀를 차고서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 나중에 다시 들리마."

"아, 네."

페드릭은 라온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년인과 함께 방을 떠났다.

'혹한의 저주라….'

라온이 손가락을 비볐다.

'드디어 알았군.'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냉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졌다. 다만 특별히 달라질 건 없다.

지금까지처럼 불의 고리를 연성하는 동시에 냉기를 지우면 성인이 되기 전에 혹한의 저주를 치료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육체와 마나 감응력을 만들 수 있으니까.

"라온."

문이 닫히자마자, 실비아가 침대에 누워있던 자신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그녀가 불안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엄마가 꼭 구해줄게. 어떻게 해서든."

항상 웃기만 하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뭐지…?'

실비아의 떨림이 전해지자,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꺼끌한 철사로 심장을 긁는 듯한 느낌이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찌르르함을 계속 느끼고 있긴 싫었다. 그래서.

"아부부."

라온은 실비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작은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

"도련님!"

"세, 세상에…."

실비아가 눈을 부릅떴고, 시녀들이 짧은 비명을 터트렸다.

"라온…."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물기 젖은 자신의 손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에게 가봐야겠어."

실비아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 * *

실비아는 라온이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지그하르트의 가주전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성자가 지나갔기에 가는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 실비아 님!"

"지금은 가주님과 성자께서…."

"비켜!"

앞을 막아서는 시종과 시녀들을 억지로 뚫고 알현실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노크 같은 주먹질을 다섯 번 했을 때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페드릭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글렌이 인상을 구겼다.

"부탁드려요."

실비아는 이를 꽉 깨물며 무릎을 꿇었다.

"라온을 구해주세요!"

뒤에 시종들이 있음에도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

글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실비아가 머리를 숙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도 들었을 텐데? 그 아이의 체질이 낫는다고 해도 무인으로 살기 힘들다는 걸."

이미 전해 들었는지 글렌은 라온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무인으로 키우지 않으면 돼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가 무인이 되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치 없는 아이에게 왜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아버지의 손자니까요."

"네가 인연을 끊는다고 가문을 나간 후에 데리고 온 손자지."

"그건…."

실비아가 떨리는 눈동자를 바닥으로 깔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내려주는 것뿐이다. 바보짓은 한 번이면 족해."

글렌의 얼굴은 얼음장을 씌운 듯 싸늘했다.

"지그하르트는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땅. 나약한 손자 따위는 없는 게 낫다. 거기다 영약 정도는 너도 구할 수 있을 텐데?"

"밖에서 구하는 것보다 가문의 보고에 있는 영약들이 훨씬 효과가 좋으니…."

"그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 자들에게 주기 위한 물건이다. 손자라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이에게 줄 건 없다. 그만 나가거라."

"아버지! 제발!"

실비아는 피가 흐르도록 주먹을 말아쥔 후 다시 머리를 박았다.

'물러나선 안 돼!'

혼자였다면 여기서 돌아갔다. 자존심을 생각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겐 지켜야 할 아이가 있었다. 라온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매달려야 했다.

"끌고 나가라."

글렌의 단호한 지시에 기둥 뒤에서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실비아의 양팔을 잡고 문으로 끌고 갔다.

"제, 제발 라온을!"

실비아가 끝까지 라온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글렌은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후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페드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막내 손자의 상태를 봐달라고 불러놓고, 연기 한 번 잘하는군. 솔직히 대하는 게 그리 어렵나?"

"시끄럽고, 자세한 상태나 말해."

"말했듯이 마나 회로 아홉 개가 냉기로 막혀 있는 상태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위험해지겠지."

페드릭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네가 오러로 냉기를 밀어준 덕분에 한동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글렌과 페드릭은 라온의 몸을 직접 확인했음에도 그가 불의 고리를 연성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불의 고리는 천 년 전의 연공법이었고, 단전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도 불의 고리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혹한의 저주 증상이 있는 여자아이들은 순도 높은 냉기를 이용하여 뛰어난 마법사나 검사 될 수도 있지만, 더운 기운이 많은 남자아이는 달라. 말했듯이 네 막내 손자가 무인이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무인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 살기만 하면 돼."

"실비아에겐 윽박질러놓고 상관없다? 북멸왕도 막내 손주는 예쁜 모양이구먼."

페드릭이 클클 웃었다.

"...."

글렌은 페드릭의 말을 무시하고서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그었다.

우우웅.

공간이 십(十)자로 갈라지며 금빛의 차원이 열린다. 불길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작은 나무 상자 세 개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페드릭에게 넘겨주었다.

"어휴, 이래서 내가 가문 같은 걸 만들지 않는 거야."

페드릭은 한숨을 내쉬고서 나무 상자를 받았다.

"부탁한다."

글렌의 시린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낮게 울렸다.

"다 좋은데, 그 아이의 이름을 왜 라온이라 지은 거냐. 좋은 이름이 쌔고 쌨는데, 하필 그림자라고…."

"라온이라는 이름에는 그림자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하늘 높게 뜬 금빛 태양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에는 그것과 정반대의 뜻도 있었지."

3화

"마님. 가져왔습니다."

시녀장 헬렌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대접을 실비아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실비아는 대접 안에 든 영약을 식히면서 잠이 든 라온을 바라보았다.

"먹이기 힘들겠지?"

"아이들은 쓴 걸 싫어하니까요. 실비아 님도 어렸을 때 쓴 약을 싫어하셨죠."

"나도?"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약 먹기 싫다고 도망가신 적도 있었어요."

"에이, 라온이 듣잖아."

"후후."

두 사람은 고로롱 숨소리를 내는 라온을 보며 옅게 웃었다.

"하긴 약을 좋아하는 아이는 없지. 거기다 라온은 이렇게 어리니, 더 싫어할 테고."

"실비아 님. 그래도…."

"알아. 먹여야지."

실비아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께서 주신 영약인데, 한 방울도 남겨선 안 되지.'

그날 아버지에게 빌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페드릭은 별관에 다시 들려 질 좋은 화속성 영약 세 개를 건네주었다.

영약을 희석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 테니, 그 시간 동안 다른 영약을 구하면 된다. 그분이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라온."

실비아는 라온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으…."

라온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떴다.

"잘 잤니?"

"아우우웅."

"오늘부터 라온이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이걸 전부 먹어줘야 해."

실비아는 작은 나무 수저로 약을 떠서 라온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먹긴 하겠지만, 바로 울겠지.'

아이의 본능 상 약은 먹겠지만, 쓴맛에 짜증을 내고 뱉을 게 분명했다.

"자, 먹자."

실비아는 영약이 흐르지 않도록 긴장한 채 라온의 입에 영약을 넣어주었다.

"으으…."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는 게 보였다. 곧 터질 울음을 기다리며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

살며시 눈을 뜨자, 라온이 고사리 같은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꼭 더 달라고 하는 것처럼.

"헬렌. 이건…."

"도, 도련님이 더 달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그거 맞지?"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영약을 떠서 라온의 입에 흘려 넣었다.

"우우!"

라온의 눈썹이 팔(八)자로 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울지 않았다. 좀 전보다 더 빠르게 손을 까닥였다.

"아…."

실비아가 입을 떡 벌렸다.

"라온이 내 마음을 알아준 건가?"

"분명합니다! 도련님께서 실비아 님의 뜻을 알고 참아주시는 것 같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면 쓴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저렇게 더 달라고 하는 걸 보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참겠다는 게 분명했다.

"라온!"

실비아는 참지 못하고 라온을 꽉 끌어안았다.

* * *

'됐고, 빨리 약이나 더 주세요.'

라온이 실비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을 흔들었다.

'좀 쓴 건 대수도 아니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

그냥 약이라면 모를까. 지금 가장 필요한 화속성 영약이다. 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쓰고, 뜨겁더라도 전부 먹어 치워야 한다.

"라온 좀 봐! 너무 예쁘게 먹지 않아?"

"그럼요!"

라온은 실비아와 헬렌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넘겨주는 영약을 꿀떡꿀떡 삼켰다.

'뭔지는 몰라도 효과가 장난이 아니야.'

영약을 먹자마자, 뱃속에 용광로를 피운 것처럼 뜨끈한 기운이 타올랐다. 더운 열기가 마나회로를 흐르며 추위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약효도, 농도도 적당해.'

연약한 아이의 몸에 강한 영약은 오히려 독일 될 수도 있다.

실비아와 헬렌이 신경을 썼는지 영약의 농도는 받아들이기 딱 좋은 정도였다.

"끅."

라온은 수저에 남은 영약까지 쪽쪽 빨아 먹은 뒤 작게 트림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마님."

"응. 잠시 자도록 놔두자."

실비아와 헬렌은 감격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아우."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라온이 눈을 번쩍 떴다.

'한동안은 안 오겠지.'

오더라도 건드릴 일은 없을 테고.

밥도 먹고 약도 먹었으니, 실비아나 헬렌이 자신을 깨울 일은 없다. 연공을 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라온은 체내에 차오른 뜨끈한 기운을 끌어당겨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했다.

'영약 덕분에 불의 고리를 만들고, 냉기를 녹이는 시간이 더 빨라지겠어.'

그의 입가에는 본인도 모르는 미소가 지어졌다.

* *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라온이 불의 고리 연성을 시작한 지 2년하고도 반이 지나갔다.

그동안의 일과는 참으로 간단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실비아와 헬렌과 놀아주다가 점심과 영약을 먹은 뒤 낮잠을 자는 척하면서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

저녁을 먹고 조금 일찍 자다가 자정쯤 깨어나 모두가 잘 때 두 번째 연공을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대륙 전체의 3살배기 중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거 하나는 자신 할 수 있었다.

'잘하면 오늘 불의 고리가 1성에 오를 수도 있겠는데.'

영약 덕분에 연공 시간이 길지 않음에도 진도가 막힘이 없었다.

적절한 시간과 집중력만 확보되면 오늘 불의 고리를 연성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 관심이 없군.'

글렌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뒤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딸인 실비아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나.'

그쪽에서 관심이 없다면 이쪽도 줄 필요 없다. 전에 생각했듯이 얻을 것만 얻어서 가문을 나가면 그만이다.

'다만 아주 조금….'

이곳에 남아 있을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이 마음에 걸렸다. 3년 동안 함께 있으며 자그마한 감정의 싹이 트인 것 같았다.

"라온. 엄마라고 불러봐!"

미래를 생각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실비아가 헤헤 웃으며 자신을 안아 들었다.

"어마!"

"아우우! 한 번 더!"

"어마!"

"꺄아악!"

억지로 발음을 뭉개며 엄마라고 불러주자, 실비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행복에 푹 잠긴 눈빛이었다.

"라온. 딱 한 번만 더!"

"어마!"

"실비아 님. 약을 가져왔습니다."

조금 지친 얼굴로 실비아와 놀아주고 있으니, 헬렌이 따뜻하게 데운 영약을 가지고 왔다.

"아, 수고했어."

실비아는 헬렌에게 영약이 들어 있는 대접을 넘겨받았다.

"자, 라온."

그녀는 따끈한 영약을 조금 식힌 뒤 내밀었다.

"아웁!"

라온의 작은 입이 약이 든 스푼을 마중 나갔다.

"잘 먹네!"

2년 반이 지났는데도 실비아와 헬렌은 영약을 삼키는 자신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졸려…."

라온은 영약을 다 먹은 뒤 졸린 것처럼 눈을 꿈뻑였다.

"약 다 먹었으니까. 낮잠 잘까?"

"응."

"그래. 코자자."

실비아는 창가 앞에 놓인 침대에 자신을 내려놓고, 배를 두드려주었다.

"우우웅…."

라온이 자는 척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실비아와 헬렌이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는 척하는 이 시간이 저 둘의 휴식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군.'

라온은 눈을 감은 채로 불의 고리 연성 구결을 외우며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웅.

들숨에 빨아들인 자연의 마나를 전신으로 흘려보냈다.

'마나의 흐름이 매끄러워.'

평소와 똑같이 호흡했지만, 마나가 부드럽게 흘러간다. 무언가를 이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침착하자.'

차분히 숨을 내쉬며 마나 회로를 흐르는 마나의 선을 연결했다. 폐가 작아 숨이 달려 손끝이 떨렸지만, 꾹 참았다.

고오오!

영약의 뜨거운 기운과 자연의 마나로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깎은 뒤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뿌득.

영약의 기운과 마나가 뼈와 근육, 피부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칼날을 벼리는 것처럼 점점 날카로워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불의 고리를 연성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불덩이가 심장을 가로지르는 듯한 후끈한 감각이 가슴을 울렸다.

뜨거운 기운이 심장을 후프처럼 휘돌고 있었다. 드디어 불의 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드디어 됐….'

눈을 뜨고 환호를 지르려 할 때 금색의 빛이 번쩍였다.

띵!

[첫 번째 <불의 고리>가 연성되었습니다.]

[최초의 업적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 <불의 고리(1성)>이 생성됩니다.]

'이, 이게 뭐지?'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마법진 같은 빛이 눈앞에 떠 있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육체가 조금 더 굳건해집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근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1성)>의 효과로 체력이 상승합니다.]

[특성 <수속성 저항력(1성)>이 생성됩니다.]

<불의 고리>를 습득했다는 메시지 이후로도 다른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어?'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이 내용들은 뭐….'

메시지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몸이라 엄청난 차이까진 아니지만, 변화 자체는 확실했다.

'거기다 통증도 줄어들었어.'

마나 회로를 막고 있던 냉기의 통증도 감소했다.

'불의 고리에 이런 능력이 있었나?'

불의 고리는 분명 전설이라 불리는 연공법이지만, 고리 3개가 생길 때까지는 큰 효과가 없고, 4개 때부터 제 능력을 발휘한다.

1성을 이룬 것으로 이런 변화를 주는 건 전생에 없던 일이다.

'영약이나, 아이의 몸 때문인가?'

여러모로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이 메시지 때문인가….'

라온이 눈앞에 뜬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전생과 지금은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이 메시지 같았다.

"도련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머리 위에서 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공을 하는 동안 다시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헤렌! 이거 바!"

라온이 손가락으로 마법진 같은 메시지를 가리켰다.

"네? 침대요?"

헬렌은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지 침대를 보며 웃어줄 뿐이다.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헬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저 메시지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변화를 확인하시려면 <상태창>을 확인하세요.]

'상태창? 어?'

무슨 말인지 모른 채로 상태창이라는 말을 되뇌자, 메시지와 같은 빛의 창이 눈앞으로 튀어나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아홉 가닥), 저질 체력, 전신 냉증,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 불의 고리(1성), 수속성 저항력(1성)

*추가 능력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뜬 상태창이라는 걸 천천히 살펴보았다.

'혹한의 저주, 저질 체력, 전신 냉증, 운동능력이랑 마나 감응력 저하라….'

상태에 적힌 내용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역시 내 몸은 여러모로 거지 같군.'

혹한의 저주는 그렇다 치고 냉증에 저질 체력까지 있다. 평소에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지.'

라온이 입매를 다물었다. 좋지 않은 체질이 가득했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은 전생에서 최고의 암살자라 불렸고, 불의 고리라는 천고의 연성법을 알고 있다.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의 고리를 완성한다면 저 단점 따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다 여긴 지그하르트니까.'

지그하르트가 가진 검술 비기까지 익힌다면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베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복수만 생각해선 안 된다.

'난 고작 3살이니까.'

데루스는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이다. 지금부터 복수하겠다고 열을 냈다간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어차피 놈은 죽일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느리더라도 안정적으로 힘을 쌓아서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끝을 내야 한다.

라온은 다짐을 하듯 주먹을 움켜쥐고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그건 그렇고 이 메시지는 정말 뭐지?'

갑자기 이 메시지와 상태창이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암살자의 감각으로 내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만 느껴질 뿐.

'아마 환생과 관계가 있겠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한 이유와 이 메시지가 관계가 있다고 어렴풋이 짐작만 갔다.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노리는 것처럼 천천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가자.'

* * *

[두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마나 감응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2성)>의 효과로 기력이 상승합니다.]

메시지창을 확인한 라온이 씩 웃었다.

'드디어 됐어.'

첫 번째 고리가 생성된 후 2년 반 동안 꾸준히 수련한 덕분에 두 번째 불의 고리가 생겨났다.

첫 번째 불의 고리는 가로로, 지금 생겨난 두 번째 불의 고리는 세로로 심장을 휘돌고 있었다.

감응력이 올랐다는 메시지 때문인지 방 안에 떠도는 마나에 대한 감각이 민감해졌다.

역시 저 메시지가 특별한 혜택을 주는 것 같았다.

'5살에 두 개의 불의 고리를 만들다니.'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전설급 연공법 불의 고리를 습득한 건 대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거다. 뿌듯함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그래도 만족해서는 안 돼.'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떤 방해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철저하게 대비해놓아야 한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은 내게 베풀어 주기만 했다.

떠날 사람이라, 도움을 주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호의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휴우."

라온이 다시 연공을 시작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들!"

실비아가 들어왔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안색이 조금 어두웠다.

"엄마?"

5살이 넘었기 때문에 이젠 실비아에게 제대로 엄마라 불러야 했다. 발음이 조금 새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은 엄마랑 갈 곳이 있다고 했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온 검붉은색 예복을 침대에 놓고 자신의 잠옷을 벗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어린 직계와 방계 아이들을 모아다가 무슨 확인을 한다고 했었다.

"걱정하지 마. 금방 끝날 거야."

실비아는 자신이 안심시키려는 듯 방긋 웃었다.

"응."

"우리 아들은 어쩜 이리 착하고 예쁠까."

실비아는 옷을 갈아입히다 말고 자신의 볼에 얼굴을 비볐다.

'으, 제발….'

라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만 떨었다.

옷을 갈아입고서도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던 실비아의 폭주를 멈춘 건 헬렌이었다.

"마님. 지금 그러고 계실 시간이 아닙니다. 곧 '판별식'이 시작된다구요!"

4화

라온은 실비아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별관을 떠나 지그하르트 본관으로 향했다.

'저게 본관인가.'

멀리 본관이 보인다. 높이는 하늘과 눈높이가 맞을 정도였고, 너비는 이 먼 곳에서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집이 아니라, 성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규모.

'북방의 지배자답네.'

지그하르트는 하나의 가문임에도 왕국보다 더한 영토와 무력을 보유했다. 괜히 육황의 한 축이 아니었다.

'다들 저기서 산다는 거지?'

헬렌이 말해주길 실비아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직계들은 전부 본관 가주전 주변에서 산다고 했었다.

실비아만 따로 별관에서 사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알려주지 않았다.

'판별식이라….'

라온은 본관의 중심에 세워진 가주전을 훑어보면서 오늘 열리는 판별식에 대해 생각했다.

'별걸 다한다니까.'

하늘을 향해 열린 아이의 두개골은 4살을 기점으로 닫히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아이가 가진 마나의 재능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두개골이 닫힌 아이들을 모아다가 마나에 대한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행사가 바로 오늘 열리는 판별식이다.

'난 뭐가 됐든 상관없지.'

지금의 재능이 미천하다고 해도 '불의 고리'가 육체와 마나 감응력을 최고의 상태로 올려줄 것이다. 타고난 재능 따위는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라온."

천천히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있을 때 실비아가 자신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옆을 보니, 어느새 본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엄마는 라온이 무엇을 해도 상관없어.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돼."

"응. 알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방긋 웃어주었다.

"역시 우리 아들이 제일 귀엽다니까!"

그녀가 또 자신의 뺨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리되면 5분 동안은 움직이지 못한다.

"으흠, 실비아 님."

"아, 미안!"

헬렌의 헛기침에 실비아가 정신을 차렸다. 함께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들어가자. 조금 늦었겠어."

"네."

그녀는 자신을 안은 채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음.'

라온은 가주전 내부의 사람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수준이 높군.'

본관 그것도 가주전이라서 그런지 건물 내부에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인들만이 아니라, 시종과 시녀들의 눈빛에도 정광이 어려 있었다.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아."

"응."

라온은 실비아와 함께 1층 중앙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는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 판별식이 열리는 알현실의 입구였다.

"실비아 지그하르트, 라온 지그하르트, 헬렌 카빈. 확인했습니다."

알현실을 지키던 무인이 다리를 틀며 문을 열어주었다.

끼이이익!

쇳덩이가 뒤틀리는 듯한 묵중한 소리와 함께 별세계가 열렸다.

천장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금색의 벽에선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장식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 이곳이 바로 지그하르트의 가주 글렌을 만날 수 있는 알현실이었다.

쿠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라온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실비아? 그럼 저 아이가 실비아의?"

"무슨 어린아이의 얼굴이 저리…."

"금발적안."

"체구가 작군. 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패배자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그렇겠지."

"패배자가 아니라, 낙오자라고 해야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라온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물론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어린 몸으로. 아니, 어리기 때문에 라온은 저들이 쏘아내는 비릿한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저런 녀석까지 알현실에 들어오다니."

"낙오자의 자식까지 판별식을 진행할 필요가 있나?"

"그러게요. 수준 떨어지는 짓인데."

뭐가 실패자고, 무슨 낙오인지 모르지만, 저들은 실비아와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음….'

라온이 주먹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에게 작다고 말한 건 아무렇지 않았지만, 실비아의 욕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괜찮아. 라온. 엄마만 보고 있어."

그녀는 패배자, 도망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자신을 향해 웃어주었다.

'역시 이 사람은 강해.'

실비아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렁이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저들이 직계인가.'

여유를 되찾아 알현실 내부를 훑어보던 라온의 눈이 단상 위에서 멈췄다.

붉은빛 의자에 앉아 있는 7명.

그들은 밑에 있는 사람들과 격이 다른 기운을 두른 채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수준이 달라.'

아래 있는 방계들이 여우와 늑대라면 단상 위 직계들은 이미 하늘에 오른 용처럼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들은 방계처럼 입을 열지 않았지만,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과 실비아를 내려보았다.

'다 적들뿐인가.'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할 때 실비아는 단상 위가 아니라, 아래. 그것도 끝자리로 향했다.

'이상해.'

여러모로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가문의 직계와 방계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직계라면 몰라도 방계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건 기이한 일이다.

거기다 실비아는 홀로 떨어져 살고, 단상 위에 올라가지 못했다. 직계임에도 모종의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게 분명했다.

'이유가 뭐지?'

도망자나, 낙오자라고 하면 대련이나, 전투에서 패했던 걸지도 모른다.

쿠웅!

실비아가 차별받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알현실의 문 앞에 서 있던 무인들이 들고 있던 창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북방에 군림하는 지그하르트의 온당한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과 함께 알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활짝 열렸다.

고오오오!

공기가 파르르 떨리는 듯한 위압적인 기파와 함께 글렌 지그하르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만으로 중력이 무거워지고, 심장이 조여든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긴장감이 등골을 스쳤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단상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용들도, 밑에서 이를 드러내던 늑대들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뚜벅.

그 발소리.

5년 전 들었던 그 딱딱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글렌 지그하르트가 입장했다. 알현실 전체를 짓누르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펼치며 단상의 중심에 세워진 금색 옥좌에 앉았다.

"시작하라."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알현실 중앙에 검이 솟구쳤다. 거인이 들기에도 벅차 보이는 거대한 석검이었다.

'저게 판별의 검인가.'

저 검은 1000년 전의 물건으로 손을 올리면 그 사람이 가진 마나의 재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석검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재능을 판단하는 게 오늘 열리는 판별식의 정체였다.

"첫 번째 버렌 지그하르트."

진행자의 말에 단상의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아이가 일어섰다.

"검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그가 단상으로 내려가자, 사회자가 석검을 가리켰다.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석검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버렌의 손끝에서 피어난 녹색 빛이 석검 전체를 뒤덮었고, 검병의 끝 부근에선 진한 바람이 피어났다.

"오오!"

"바람이다! 바람이야!"

"검 전체에서 빛이 나는 걸 보니, 마나의 질도 최상급입니다!"

"역시 카룬 님의 자제다운 재능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단상 아래에 선 방계들은 버렌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인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검사에게 잘 어울리는 좋은 속성이다. 앞으로는 바람을 느끼는 데 집중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버렌은 태양을 마주한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봉신 가문 슬리온의 루난 슬리온."

"네."

단상의 우측 끝에 앉아 있던 은발의 여자아이가 조용히 일어섰다.

'봉신가 슬리온인가.'

왕을 따르는 귀족처럼 봉신 가문은 지그하르트를 따르는 북방의 명가들이었다.

슬리온은 봉신 가문의 대표였기 때문에 직계와 같이 단상 위에 있던 모양이다.

우우웅.

루난이라 불린 여자아이가 덤덤한 눈으로 석검 앞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치이잉!

그녀의 손이 석검에 닿자, 뭉툭한 검날의 끝에서 달을 녹인 듯한 은빛이 치솟았다.

솟구친 빛은 검날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검병까지 올라섰고, 검 전체에 은빛의 서리를 만들어냈다.

"서리? 그것도 검 전체라니!"

"버렌 님과 같은 수준의 재능인가…."

"괜히 슬리온이 아니야."

"슬리온 가에 또 하나의 천재가 나왔군."

다만 버렌 때와 달리 환호와 박수 소리는 크지 않았다. 봉신 가문과 방계 사이에 경쟁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속성을 가졌구나. 칼날처럼 예리하게 다듬는다면 어떤 기운도 뚫을 수 있을 게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루난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감사합니다."

루난은 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2명의 직계와 수많은 방계, 봉신 가문 아이들이 석검에 손을 올렸지만, 버렌과 루난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알겠군.'

라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사람들의 판별식을 보자, 뭐가 좋고 나쁜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마나의 순도는 검날의 빛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마나의 속성은 검병의 끝에서 나타나.'

마나의 질이 뛰어난 경우는 루난이나, 버렌처럼 검 전체가 번쩍이고, 특별한 속성의 마나는 검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가자. 라온."

"응."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가 상큼하게 웃고서 자신을 들어 올렸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거 봤지? 똑같이 하면 돼."

실비아는 석검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뒤 시범을 보여주듯 손을 뻗었다,

"응."

짧게 대답한 뒤 석검을 바라보았다.

'잘 나오진 않겠지.'

불의 고리가 2성이 되었지만, 마나 회로의 냉기는 질겁할 정도로 많이 남았다.

현재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난 빛을 펼치진 못할 거다.

"후우."

천천히 숨을 뱉고 석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웅.

손이 석검에 닿자, 조약돌이 떨어진 연못처럼 심장에 파동이 일어났다. 작았던 고동이 가슴을 넘어 전신을 울렸다.

'뭐지?'

그 기이한 감각에 손을 빼려고 할 때 눈앞에 환하게 번쩍였다.

은빛 갑옷을 두른 금발의 사내가 보인다.

그의 앞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괴물들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뭐야 이건….

환상이 분명한데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감각이 생생했다.

호흡도 제대로 못 하고 손을 떨고 있을 때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날 위로 황금색 불길이 타올랐다.

그가 불꽃에 휩싸인 검을 벼락처럼 내리그었다.

그 순간.

대지 위로 치솟은 금빛의 불길이 세상을 덮었다.

시야 전체에 차오른 금색 화염을 피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세상이 바뀌고 눈앞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불의 고리(2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성취가 모자랍니다.]

뭔지 모를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석검에서 빛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세차게 올라가던 빛이 힘을 잃고, 검신의 중앙 부분에서 멈춰 섰다.

다른 사람처럼 특별한 능력도, 높은 순도도 없었다. 직계는커녕 방계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재능이었다.

"벌써 끝?"

"중간도 못 간다고?"

"크하하하! 저렇게 적은 건 처음 보는데?"

"마나의 질도 나쁜데다가 아무 능력도 없는 백색이군."

"외모 빼고는 볼 게 없네."

"역시 도망자의 자식은 무신께서도 보살피지 않으시나 봐."

판별식을 지켜본 직계들은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방계들은 대놓고 비웃음 터트렸다.

"...."

직계와 방계들에게 짧은 조언을 해주던 글렌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아. 라온. 잘했어."

실비아는 항상 보여주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안았고, 어느새 다가온 헬렌이 입술을 깨물며 귀를 막아주었다.

"후…."

라온이 낮은 숨을 뱉어냈다.

무시는 익숙했다. 인간이 아니라, 개로 사육되고 세뇌까지 받았으니, 감정 따윈 버린 지 오래다. 비난과 모욕 따윈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얻을 것만 얻어서 떠날 몸.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자신을 진짜 가족으로 대해줬지만,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실비아와 헬렌까지 비웃는 놈들을 보자, 감전된 듯 가슴이 찌릿했다.

'좋다.'

라온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으로서 대해준 사람들이다.

그들을 비웃는 직계와 방계들에게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건지 알려주기로 다짐했다.

"판별식은 매번 참여했지만, 저 수준은 처음 보네."

"진짜 지그하르트 맞아?"

"실비아가 가졌던 재능도 전부 날아갔네요. 가주님과 같은 금발적안 빼고는 볼 게 없어요."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떠든 놈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

"그만."

글렌의 서늘한 한 마디에 알현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판별식은 끝났다. 전부 나가도록."

"가주님?"

"다시 말해야 하나?"

"모두 해산하라."

글렌의 둘째 아들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슬쩍 눈치를 보며 알현실을 나갔다. 물론 들리지 않게 라온과 실비아의 욕을 중얼거리면서.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알현실에 남은 사람은 방의 주인인 글렌 지그하르트와 그의 수석 집사 로엔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글렌은 중앙에 세워진 판별의 검을 보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로엔이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파직!

판별의 검 아랫부분에서 치솟은 빛이 검날을 넘어 검병의 끝까지 차올랐다.

화아아아!

그 빛은 태양처럼 진한 황금색이었고, 검병의 끝에선 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올랐다.

"금색 불꽃?"

글렌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5화

딱!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알현실 내부의 마나가 들썩였다.

쿠구구구!

잔잔한 호수 같았던 마나의 흐름이 급속도로 출렁이며 바닥에서 거대한 철문이 치솟았다.

화아아아!

천장에 닿을 정도로 웅장한 철문은 금빛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가, 가주님?"

로엔이 눈을 부릅떴다. 저 문은 가주만이 소환할 수 있는 지그하르트의 보고다. 글렌이 저 문을 소환하는 건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잠시 다녀오마."

글렌이 손을 올리자, 금빛 철문이 기름을 칠한 듯 부드럽게 열렸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 석검 위로 타오른 금색 불길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고의 내부엔 셀 수 없이 많은 보물이 쌓여 있었다.

최상급 영약과 무기들, 성을 살 수 있는 보석과 여러 종류의 서적까지. 하나만 나와도 대륙에 피바람이 일으킬 보물들이었다.

글렌은 자신을 열렬히 드러내는 무기나 보석, 정갈하게 쌓인 영약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보고를 일직선으로 걸어가 가장 깊은 곳에 세워진 거대한 책장으로 향했다.

원통형 책장은 세계수라도 된 듯 보고의 끝까지 솟구쳐 있었고, 칸마다 가지각색의 책이 꽂혀 있었다.

탁.

글렌이 땅을 가볍게 차자, 그의 몸이 중력을 무시하고 떠 올랐다. 허공을 밟아 책장의 첫 번째 칸으로 향했다.

첫 번째 칸엔 다른 곳과 달리 딱 두 권의 책만 놓여 있었다.

그는 앞에 꽂힌 누렇고 낡은 책을 잡아서 빼내려 했다. 하지만 책은 바위에 깔린 듯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움직이지 않는군."

글렌은 혀를 쯧 차고서 바로 옆에 있는 붉은빛 책을 꺼냈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과 달리 부드럽게 빠졌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보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타다닥.

빠르게 책의 내용을 훑어보던 글렌의 손이 중간에서 뚝 멈췄다.

"음…."

그는 책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초대 지그하르트 가주의 오러는 태양 같은 금빛이었으며, 마계의 불꽃마저 녹여버리는 초월적인 화력을 보여주었다…."

글렌은 눈을 내리감고, 라온이 만들어낸 금색 불길을 떠올렸다.

"금색 마나, 금색 불길."

노란색 오러는 자주 나왔지만, 진한 금빛의 마나는 지그하르트 역사상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은 색이었다.

"라온. 넌 대체…."

* * *

"엄마가 미안해."

실비아는 별관에 돌아오자마자 라온을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더 꽉 잡혀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괜찮아."

라온은 실비아의 등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전생에선 감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죽이라면 죽였고, 납치하라면 납치했고, 훔치라면 훔쳤다. 사육사와 개. 명령과 복종의 관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에게 주기만 했다.

받기만 한 삶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지금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나는 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웃지는 못하더라도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날 비웃었다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가주전에 있던 자들은 실비아를 비웃었다.

단상 아래의 방계들은 대놓고 낄낄거렸고, 단상 위의 직계들은 벌레를 보듯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려줘야겠지.'

실비아를 비웃은 그들 모두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오늘 그들이 보여준 추잡한 행동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 * *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정원 잔디 위에 남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짙은 금발이 잔잔한 바람에 휘날리는 아이의 이목구비는 어려 보임에도 이미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몸이 좋지 않은 것처럼 얼굴이 창백한 것이 약간의 흠이었다.

"후우…."

두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불의 고리가 세 개가 되기 직전이군.'

아이가 아니라, 소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성장한 라온이 옅게 웃었다.

'벌써 7년이 지났나.'

첫 번째 판별식 이후로 7년이 지나, 어느새 열두 살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꾸준히 연공을 한 덕분에 두 개의 불의 고리가 세 개로 늘어나기 직전이었다.

'조금 아쉽네.'

전신에 퍼진 냉기만 없었다면 진즉에 3성에 올랐겠지만, 아쉽게도 냉기와 함께 연공을 하느라 진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얻은 게 없지는 않았다.

'상태창.'

속으로 이젠 익숙해진 단어를 외쳤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아홉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 불의 고리(2성), 수속성 저항력(2성)

*추가 능력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2성으로 올랐고, 상태에서 전신 냉증이 사라진 덕분에 전처럼 손발이 굳는 증상은 사라졌다.

물론 다른 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건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건 불의 고리 성취가 올라가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흐음."

라온이 상태창을 끄고, 잔디밭에서 일어섰다.

'이제 육체 수련도 시작해야 하는데….'

추위를 덜 타게 된 덕분에 실비아와 시녀들의 걱정은 줄어들었지만, 몸을 움직이려고만 하면 쫓아와서 말린다.

불의 고리 성취를 빠르게 높이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수련도 필요했기 때문에 대놓고 훈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당하게 수련할 방법 없나?'

억지로 수련을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실비아의 말은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명령이 아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별관에서 헬렌이 달려 나왔다.

"판별식에 참여해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하여튼 마님이랑 똑같다니까."

"아, 그랬지."

판별식은 외부에 나가 있거나, 임무 수행 중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도 가야만 했다.

"그 짜증 나는 것들 또 보겠네."

몇 년 전 2번째 판별식에 참여했을 때도 노골적인 조롱을 받았다. 이번에도 비겁자니, 도망자니 알아듣지도 못할 소릴 짓거릴 것이다.

"도, 도련님. 그런 말씀은 작게…."

헬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가문 내부의 눈과 귀는 항상 열려 있어요."

"걱정도 팔자지만, 알겠어."

라온은 짧게 혀를 차고서 별관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예복 차려입은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면 방에서 쉴래? 엄마 혼자 가도 돼."

눈가에 주름이 조금 늘어난 실비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우릴 비웃은 놈들이 어떻게 변했나 확인해야 하니까.'

암살자에게 표적의 변화는 최우선으로 확인해야 하는 과제였다.

라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판별식에 참여하기로 했다.

* * *

라온은 실비아, 헬렌과 함께 판별식이 열리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키가 작군."

"비짝 말랐네. 금발적안만 빼면 다른 가문의 아이라고 해도 믿겠어."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어울리는 건 저 잘난 외모뿐이지."

"창백해서 얼굴도 별로 같은데?"

예상대로였다.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는 직계들과 속삭이듯 비꼬는 방계들은 여전했다.

'다행이야.'

저들은 여전히 자신과 실비아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달라지지 않아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조애나, 헨리, 데니어….'

라온은 단상 위부터 아래를 둘러보며 직계와 방계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었다.

단상 아래 맨 뒷자리에 앉아, 30분 정도 대기하니 가주 글렌 지그하르트가 입장했다.

그는 여전히. 아니, 7년 전보다 더한 위엄을 두른 채 단상 위로 올라가 판별식을 진행했다.

직계는 한 명도 없었고,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만 판별식을 진행했기 때문에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식이 종료되었다.

방계 아이들의 마나 순도가 높았기 때문에 중간중간 자신과 비교하는 놀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오늘 판별식은 종료되었습니다. 모두 수고…."

"잠깐."

글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판별식이 끝났다는 사회자의 말을 끊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옥좌에 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절대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라온을 향했다.

순간 정적이 일어나며 이 공간에 있는 모두의 관심 역시 그에게 집중되었다.

'나?'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가, 가주님?"

"으음…."

실비아가 당황하여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옆에 있던 헬렌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기초 수련에 참여하라는 명령서가 떨어졌을 텐데, 왜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답을 보내오지 않았지?"

'기초 수련 참여?'

그런 건 받은 적도 없다. 옆을 보니,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 가주님. 라온은 다른 아이들과 다릅니다. 아직 몸속의 냉기가 남아 있어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에겐 예외도, 거부도 없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는 아이입니다. 훈련을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실비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훈련을 받아라. 그게 지그하르트다."

글렌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눈을 내리감았다.

"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니, 최소한 조금의 시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또 집을 나갈 건가? 그 핏덩이를 데리고?"

"그, 그건…."

오른손을 잡은 실비아의 손이 축축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이 땅에선 지그하르트로서 살 수밖에 없다. 싫다면 나가거라."

글렌의 목소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말하듯 냉담했다.

"저러다 또 도망치는 거 아니야?"

"그것도 볼만하겠지만, 이제 깰 단전이나 마나 회로도 없잖아."

"저런 사람이 가문의 직계였다니. 쯧쯧"

"...."

라온은 실비아와 글렌 그리고 이 방에 있는 모두를 보며 서늘한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제야 알겠군.'

실비아가 직계이면서도 이런 처참한 대우를 받는 이유를. 직계만이 아니라 방계에게도 무시 받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문을 나갔던 거야.'

그녀에겐 무예를 익힌 흔적이 있지만 오러가 없다. 단전을 폐하거나, 오러를 익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예상대로 전자였다.

실비아는 단전과 마나 회로를 망가뜨린 뒤 가문을 나가 아버지와 결혼을 했던 게 분명했다.

'날 임신한 뒤 아버지가 죽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겠지.'

이해는 간다.

지그하르트의 직계 자리를 스스로 걷어찼다가 돌아왔으니, 방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이유는 합당했다.

'다만.'

그건 외부의 시선이고, 그들의 사정이다. 실비아의 아들인 라온의 입장에선 그녀가 받는 대우를 참을 수 없었다.

탁.

라온이 실비아와 헬렌의 손을 놓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도, 도련님!"

"라온.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괜찮아."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저어 준 뒤 글렌의 정면에 섰다.

"가주님. 말씀하신 대로 다음 달부터 훈련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손자가 아닌, 벌레를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넌 훈련이 있던 것도 모르지 않았나?"

글렌의 셋째 아들이자, 삼촌인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직계 중 유일하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던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기초 훈련이라고 해도 환자인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괜찮습니다."

라온이 데니어가 아니라, 글렌을 바라보았다.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겠죠. 훈련에 참여하겠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에 일순간 변화가 일었다.

작은 돌멩이 정도로 인식하는 듯한 눈빛이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자신은 밑바닥 사냥개에서 최고의 암살자로 올라선 전력이 있고, 대륙 전설에 나오는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다.

그 모든 능력을 살린다면 이 가문에서 우뚝 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복수가 늦어진다? 아니다. 오히려 이게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

꾸욱.

라온이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너희가 깔본 돌멩이가 얼마나 단단해질지 보여주마.'

6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넌 그게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고 있느냐?"

글렌 지그하르트의 눈동자에 자그마한 기세가 담겼다.

"크윽!"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짓눌리는 것 같아.'

글렌은 거대한 바다에서 바닷물 한 바가지를 퍼 올렸을 정도로 작은 기세를 뿜어냈을 뿐이지만,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서 흐른 식은땀 때문에 옷이 등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불의 고리를 연성하지 않았다면 방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북멸왕이라 불리는 무인인가….'

눈빛만으로 질릴 정도라니, 데루스 로베르트 이상의 무력이다.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넌 지금 한 말을 책임질 수 있느냐?"

"가, 가주님. 라온은 아직 어립니다. 무얼 알고 한 말이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라온 님은 별관에만 계셔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실비아와 헬렌이 옆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뿐입니다. 기세를 거두어 주십시오."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일어서며 기세를 막아주었다.

"데니어 님!"

"저런 건방진 녀석조차 챙기시다니, 역시 데니어 님이라니까."

"무력보다도 마음이 넓으신 분이잖아."

데니어의 언행에 방계들이 찬사를 보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다."

"윽!"

"끄윽…."

글렌의 패도적인 음성에 데니어와 실비아가 동시에 물러섰다. 그들이 움직인 게 아니라, 글렌이 목소리만으로 두 사람을 밀어낸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데니어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달랐다.

"아, 아버지…."

오러조차 없는 몸으로 글렌의 기세를 견디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라온은 아직 훈련을 받을 상태가…."

실비아의 눈동자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모르겠어.'

이 울컥하는 감정이 그녀에 대한 동정인지, 걱정인지 혹은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난 암살자였지.'

암살자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삶이 아닌, 죽음과 친숙하게 지내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더 이상 암살자로 살지 않겠다.

암살자 라온이 아닌,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실비아를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

캬앙!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목에 매달린 쇠사슬 한 가닥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지 못합니다."

라온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글렌의 위압적인 눈동자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당장에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전 이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서 자랐습니다. 지그하르트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잘난 곳인지 모릅니다."

"라, 라온!"

실비아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훈련에 참여하여 지그하르트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라온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숨을 멈추고 글렌을 바라보았다.

"...."

글렌의 한쪽 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 말은 기초 수련으로 지그하르트의 수준을 판단하겠다는 거냐?"

"그게 지금의 제가 지그하르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교관에게 단단히 준비하라 지시해야겠구나. 널 실망시키지 않도록."

글렌의 붉은 눈동자에서 피어오른 불길에 알현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크으…."

라온은 참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신은 겨우 열두 살이다. 아직은 글렌의 천분의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아이였다.

다만 굴복한 건 아니다.

불의 고리를 꾸준히 연성하고, 뛰어난 된 오러 연공법을 익힌다면 언젠가 그 앞에서도 당당히 설 수 있다.

라온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는.'

* * *

모두가 떠난 후 침묵이 내려앉은 알현실엔 글렌과 그의 집사 로엔만이 남아 있었다.

"봤나?"

"예. 확실하게 봤습니다.

글렌의 질문에 로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녀석은 물건이다."

글렌의 입매는 조금 전과 달리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내 압박을 견디면서 당당히 말하는 열두 살이라니, 지금까지 그런 녀석은 없었어."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로엔이 흘러내린 머리를 정돈하며 씩 웃었다.

"외모만이 아니라, 기세도 어렸을 적 가주님을 쏙 빼닮았습니다."

"이상한 소리 말거라."

글렌은 헛소리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의 입가는 바람을 탄 풀잎처럼 조금 더 올라갔다.

"기초 수련의 난이도를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들은 귀가 많으니, 그래야겠지."

"라온 님이 수련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기초 수련에 참여조차 힘들 거다."

글렌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영약 덕분에 몸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체격도, 체력도 좋지 않아. 좀 더 회복되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다."

"그럼 왜…."

"말했잖느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에게 차별은 없다고."

"음."

로엔이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수십 년을 함께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글렌이 대놓고 라온을 부른 건 그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 역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아마 라온이 훈련에서 떨어지면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것처럼 영약을 내려주실 거다.

물론 라온이 직접 나섰던 건 글렌조차 몰랐을 테지만.

"전 라온 님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만, 걱정스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직계와 방계 아이들 때문이겠지."

"네. 크게 반응하진 않겠지만, 이전과 달리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가주님의 기세를 견뎠으니까요. 미리 조치를…."

"아니, 지켜보기만 해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어."

"알겠습니다."

로엔은 본인의 생각이 있음에도 글렌의 지시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 글렌은 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주님.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혹시라도 라온 님이 기초 수련을 통과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통과?"

글렌이 턱을 괴며 7년 전 판별식을 떠올렸다.

'금색 불꽃.'

우연인지 혹은 이상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지만, 라온은 초대 가주만이 사용했다는 금색 불꽃을 피워냈었다.

"그럴 일은 없다. 다만 만분의 일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피식 웃으며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려야겠지."

* * *

라온은 별관에 돌아가자마자, 실비아의 방으로 끌려갔다.

"라온."

실비아가 라온의 양쪽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음…."

"지그하르트의 훈련은 아이라고 봐주지 않아. 지금의 네 체력으론 버틸 수 없어. 다치기만 할 거라고."

실비아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어."

"뭐?"

"나도 내가 어떤 감정으로 움직였는지는 정확히 몰라."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정말이다. 실비아, 헬렌과 12년을 살았지만, 아직 자신의 감정은 파스텔톤 하늘처럼 연하다.

"하지만 본관에 가서 엄마가 무시당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그래서 한마디 하고 싶었어."

실비아와 헬렌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솔직한 마음을 뱉어냈다.

"아…."

"라온 도련님."

실비아의 입이 벌어지고, 헬렌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후우."

실비아는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라온. 네가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넌 아직 어려. 한참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에 벌써 엄마를 생각해줄 필요 없어."

"하지만."

"넌 모르겠지만, 엄마 꽤 강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실비아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서 혀를 씹었다.

'이런 아이를….'

라온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가문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았고, 몸이 아파도 홀로 참아냈다.

그렇게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기에 스스로 힘든 곳으로 걸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다녀올게. 훈련을 딱 1년만 미뤄달라고 부탁하면 그분이라도…."

"해볼게. 아니, 할 수 있어."

라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실비아를 위해 나선 것도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기초 훈련은 실비아와 헬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놓고 육체 수련을 할 기회였다. 알아서 찾아와준 행운을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정말이야. 할 수 있으니, 믿어줘."

"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야."

"음…."

라온이 흔들리는 실비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 소리였군.'

서로의 시선이 달랐어.

자신은 훈련에 버틸 수 있다를 말했고, 실비아는 몸 상태를 걱정했다.

암살자로서 실적만을 따지던 그 시간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몸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포기할게."

실비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새로운 대답을 말했다.

"넌 아파도 말하지 않는데, 널 어떻게 믿어!"

"약속할게"

"하아…."

실비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 님. 라온 도련님을 한 번 믿어보는 건 어때요?"

"헬렌도 라온이 어떤 앤지 알면서…."

"훈련 강도가 높은 건 맞지만, 이번 수석 교관님은 지그하르트에서 보는 눈이 가장 좋은 분이에요. 도련님의 상태를 알고 있을 테니, 심해지기 전에 중지시키실 거예요."

"하아…."

헬렌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라온. 정말 약속할 수 있니?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 알겠지?"

"응."

라온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만 믿어볼게."

"고마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네?"

"5 연무장에 다녀올게. 말이라도 해놔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온 도련님."

실비아가 나가자마자 헬렌이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쳤다.

"절대.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힘드시면 바로 포기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알겠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몇 번이 아니라, 몇십 번을 말해도 부족해요. 도련님은 다른 아이들보다 약하다는 걸 기억하고, 오기를 버려야 해요."

"그래."

헬렌 역시 실비아 정도로 걱정이 많았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포기할 일은 없어.'

폐가 터져서 죽더라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힘들면 힘들수록 불의 고리의 경지가 올라, 육체와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 *

라온은 별관 뒤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본관에 갔다 오니, 텅 빈 느낌이네."

본관에는 넓은 연무장과 세련된 정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 있지만, 별관에는 작은 정원과 호수가 전부였다.

너무 작아 실비아의 눈을 피해 수련할 수 없었지만,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라온은 정원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훈련은 꽤 힘들겠지.'

실비아나, 헬렌의 걱정대로 자신의 몸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마나 통로에 냉기도 남아 있고, 성장도 늦으며, 체력도 부족하다.

지그하르트의 훈련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니, 아이들의 기초 훈련이라고 해도 버거울 거다.

다만 자신에겐 그 이상의 지옥을 걸어온 전생의 경험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이 있다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태어난 이후 불의 고리를 익힌 게 토대였다면 다음 달부터 진행될 훈련은 집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였다.

그 공사를 잘 다져놓아야 훗날 높은 건물을 쌓을 수 있다.

"보여줘야지."

그 어떠한 직계보다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줘서, 우리를 조롱하던 놈들의 입을 전부 닥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놈. 데루스 로베르트.'

이곳의 일로 복수가 조금 늦어지겠지만, 자신의 진짜 목표는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다.

데루스의 가면을 벗기고, 목을 베는 그날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후…."

라온이 서산 아래로 잠겨가는 금빛의 태양을 보며 눈을 감고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의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가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7화

지그하르트는 북방의 지배자란 명성답게 막강한 무력 단체들을 보유했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인 단체들이었지만, 가장 용맹한 무력 단체를 묻는다면 열 명 중 다섯은 전마대를 꼽았다

그 전마대의 대주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인 카룬 지그하르트는 인상을 구기며 혀를 찼다.

"환자. 그것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라고 하지 않았나?"

"넝마의 성자와 가주님의 대화를 들었던 시녀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분명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다. 이전에 봤을 때도, 오늘도 그 아이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카룬 지그하르트가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그때마다 책상이 아니라, 그의 집무실 전체가 울렁였다.

"놈은 아버지의 기세를 견뎠다."

글렌이 뿜어낸 기세는 그가 본래 가진 힘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처럼 작았다.

하지만 그걸 12살짜리가, 그것도 환자인 아이가 견뎠다. 눈앞에서 봤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버렌이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

카룬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그래. 견디지 못했을 거다."

자신의 아들인 버렌은 일곱 살부터 수련을 시작했고, 수시로 질 좋은 영약들을 먹었다.

그렇게 키운 버렌도 아버지의 기세를 견딜 수 없을 텐데, 라온이 이겨낸 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비아도 재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었지."

지금은 단전과 마나 회로가 깨져 폐인에 불과하지만, 실비아의 재능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별관에 사람을 넣을 수 있나?"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가능합니다."

문 앞에 대기하던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넣어라."

카룬은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며 몸을 돌렸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조리 보고하도록."

* * *

라온은 아침이 밝아오기도 전에 방을 나갔다. 정원 앞에서 가볍게 몸을 푼 뒤 별관 주변을 뛰기 시작했다.

훈련을 대비하기 위해서 나름 단련한다고 했으니,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후욱…."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전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약한 육체였다.

"하아아."

가빠오는 숨을 참았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는 단순한 행동에 집중하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들어가고 나오는 그 모든 숨결에 자연의 마나가 담긴다.

꽃가루처럼 팔랑이는 마나의 알갱이들이 마나 회로를 누비며 육체에 활력을 주고, 피어나는 냉기를 가라앉혔다.

'좋은 흐름이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고리는 육체 활동과 함께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운용하는 마나의 양과 순도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후우…."

땀으로 옷이 축축하게 젖고,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불의 고리가 만들어 주는 활력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라온!"

전신을 자극하는 단련의 희열을 느끼며 더 집중하려 할 때 창문이 벌컥 열리고, 실비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첫날부터 무리하면 어떻게 해!"

"허억, 허억…."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땀도 그렇게 많이 흘리고, 너무 과했어!"

"어, 어쩌다 보니까."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방해가 아니야. 잘 멈춰줬어.'

이번엔 실비아의 말이 맞았다. 현재 자신의 육체는 환자에 가깝다. 불의 고리가 활력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이 이상 달렸으면 탈이 났을 거다.

'아직 시간은 많아.'

기초 수련이 시작될 때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2성의 끝에 오른 불의 고리를 3성으로 올릴 수 있는 시간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방에서 쉴게."

"몸은 괜찮아? 이상한 곳은 없어?"

실비아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자신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주었다.

"없어. 오늘은 그만하고 쉬어야 할 거 같아."

"너 내일도 이렇게 무리하면 훈련 못 하게 할 거야."

"걱정마."

라온은 옅게 웃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세로 고리를 연공하면 되겠군.'

가로로 도는 불의 고리는 육체를, 세로로 도는 불의 고리는 정신을 성장시킨다.

지금까지 가로로 도는 불의 고리를 운용했으니, 지금은 세로로 도는 고리를 연성할 차례였다.

라온은 바닥에 앉아 눈을 내리감았다. 뛸 때보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자연의 마나를 받아들였다.

지이이잉!

심장을 휘도는 두 개의 불의 고리 옆으로 옅은 그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글렌 지그하르트는 가주전을 벗어나 홀로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관들이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누런 대지를 다지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글렌은 인사를 해오는 교관들에게 손을 들어주고서 연무장에 외곽에 세워진 수석 교관실에 들어갔다.

너저분해 보이는 방의 중앙에 흔들의자 하나가 까딱이고 있었고, 그 위에는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자는 척 그만하고 일어나라."

"어욱…."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가 탁한 숨을 뱉으며 모자를 걷어냈다. 20살이나 되었을까. 붉은 머리칼을 아래로 내린 미남자가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는 평범한 인간과 달리 풀잎처럼 올라가 있었고, 외모 역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움을 뿜어냈다.

뾰족한 귀와 인간을 벗어난 아름다운 외모.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종족이라는 엘프였다.

"제 수면공이 통하지 않는 건 역시 가주님뿐이네요."

"교관들을 땀을 흘리며 땅을 다지는데 수석이라는 놈이…."

"걔네는 제가 내린 지시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전 머리로 일하는 거고, 그 친구들은 몸으로 일하고 있으니 공평하죠."

"리메르. 넌 50년이 지나도 철이 들질 않는군."

"사람이 변하면 죽는 법입니다. 아, 난 엘프구나."

리메르라 불린 엘프가 낄낄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왕림하셨습니까? 설마 막내 손주 때문인가요?"

"...."

글렌은 말을 하지 않고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함께 전장을 달리던 사이라 그런지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실비아가 와서 사정사정하던데, 가주님도 오실 줄은 몰랐네요."

"실비아가?"

"라온이 다치지 않게 잘 봐 달라고 하더군요. 가주님도 그런 부탁을 하러 오셨다면 괜히 오신 겁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 연무장만큼은 가주님께서도 터치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죠. 아무리 막내 손주라고 해도 예외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도록."

"예?"

글렌의 주억거림에 리메르가 입을 벌렸다.

"훈련 강도를 낮추지 말고 네 마음대로 올려라. 어중이떠중이는 걸러지도록."

"강도를 내리는 게 아니라, 올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럼 손자도 떨어질 텐데… 아!"

리메르가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막내 손자를 더 사랑하시나 봅니다. 실비아에게 제대로 못 전한 사랑을 그 아이에게…."

"네가 전우가 아니었다면 방금 목이 날아갔을 거다."

"으흐흐!"

그는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목을 매만졌다.

"확실하게 옥석을 가려라. 제대로 된 인원만 네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수련생 선발 시험이라도 치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알겠습니다!"

"가겠다."

"옙!"

글렌은 리메르의 경례를 받으며 문을 나섰다. 나오는 길에도 교관들은 땅을 다지고 있었다.

"...."

글렌은 별관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가주전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무거워 보였다.

* * *

라온은 눈을 감은 채로 방에 앉아 있었다. 세 시간 넘도록 움직이지 않던 그의 어깨 위로 금빛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세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3성이 되었습니다.]

[<불의 고리(3성)>의 효과로 육체와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3성)>의 효과로 근력과 체력,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3성)>의 효과로 마나 감응력과 정신력, 기력이 상승합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3성에 올랐습니다.]

[혹한의 저주 한 가닥이 사라집니다.]

"됐군."

라온은 눈앞에 뜬 반투명한 메시지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여덟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추가 능력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3성은 확실히 다르네.'

시원한 마나가 전신을 훑고 지나간 것처럼 육체는 민감해졌고, 정신은 맑아졌다.

마나 회로의 너비가 벌어지며 냉기의 고통도 줄어들고, 팔다리에 근육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입문을 벗어나니 확실히 효과가 좋아.'

3성부터가 불의 고리 초급단계다. 이제 막 초급에 올랐을 뿐인데도 육체와 정신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상태창의 효과도 있겠지.'

이 마법 같은 메시지와 상태창 덕분에 불의 고리가 전생보다 훨씬 뛰어난 효과를 내고 있을 거다.

'혹한의 저주도 한 가닥 사라졌고.'

일어서서 가볍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지금 상태라면 지그하르트의 기초 훈련이 아무리 험난하다고 해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야.'

훈련을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천재라고 불리는 지그하르트의 아이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음?"

들뜬 기분에 취해 있을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저녁도 굶었다.

'밥이라도 먹을까.'

방을 나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옅은 불이 켜져 있었고, 실비아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왜 이 시간에…."

"아들이랑 밥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실비아는 방긋 웃으면서 옆에 있는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늦었는데."

세 번째 불의 고리를 연성하느라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상태였지만, 실비아는 웃으며 의자를 꺼내놓았다.

"괜찮아. 빨리 앉아."

라온은 어색한 표정으로 실비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헬렌."

"네!"

주방에서 헬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시녀들이 음식들을 내왔는데,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라온."

실비아가 음식들을 밀어주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엄마가 라온에게 할 말이 있어."

"할 말?"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라온은 똑똑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왜 우리가 따로 살고, 왜 다른 사람이 욕을 하는 건지."

"음…."

라온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실비아는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과거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죄인이야. 짊어져야 할 책임에서 도망친 주제에 살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으니까."

실비아의 말은 생각보다 무겁게 시작되었다.

임무 중 우연히 만난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고, 평범한 기사였던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마나 회로와 단전을 폐하고 가문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사실 네 누나도 있었어. 너랑은 2살 차이가 났고, 시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

"그럼 누나도…."

"그래."

그녀의 목소리가 음울 그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하 밑바닥에서 흐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내 얼굴을 알고 있던 '에덴'의 간부가 습격을 해왔어. 그리 강하지 않았던 네 아빠와 널 임신하고 있던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에덴은 지그하르트가 속한 육황과 대립하는 오마의 한 축이다. 따스해 보이는 이름과 달리 왕국 이상으로 많은 강자를 보유한 괴물 같은 집단이었다.

"그럼 엄마는 어떻게 여기로 돌아온 건데?"

"아버지가 나 몰래 호위를 붙여놓으셨어. 우리와 조금 떨어져 있던 그들은 네 아빠와 누나가 당한 이후에서야 도착했지만."

"할아버지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듯한 냉정한 글렌이 호위를 붙여주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엄마는 이 가문에서 죄인이야. 네 할아버지에겐 정말 드릴 말씀이 없지."

실비아가 고개를 푹 숙였고, 헬렌과 시녀들은 아무 말 없이 모은 손을 꽉 쥐었다.

"...."

라온은 머리 숙인 실비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기적이군.'

실비아는 이기적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문의 책임에서 벗어났다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으니까.

가문의 직계와 방계가 그녀를 왜 그렇게 험하게 대하는지도 이해가 갔다.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애정을 준 사람이다.

남들이 모두 이기적이라 칭해도 자신에게만큼은 2번의 삶을 살며 만난 유일한 어머니였다.

"엄마."

라온의 부름에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후회해?"

"후회?"

"가문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건 아니야. 후회는 하지 않아."

실비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가문에서 투명 인간처럼 지내다가 아버지와 누나를 만나 처음으로 사람답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네겐 미안할 뿐이야. 못난 엄마라…."

"행복했어?"

"그래. 그때도 행복했고, 너와 함께 있는 지금도 행복해."

"그럼 됐어."

"라, 라온?"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라온은 방긋 웃고서 다시 포크를 쥐었다.

'이기적이어도 좋아.'

남들에게 이기적인 인간이라 불려도 좋다. 도망자니, 비겁자니, 욕을 먹어도 좋다.

'대신 되찾겠어.'

그녀가 잃었던 지그하르트 직계의 위치. 먼저 그 자리를 되찾아 준 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복수의 업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흐윽."

"라온 도련님…."

실비아의 큰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옆에 서 있던 헬렌과 시녀들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달그락.

별관의 식당에선 식기가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와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묘한 합을 이루었다.

* * *

라온은 눈이 탱탱 부운 실비아와 시녀들을 돌려보낸 뒤 방으로 돌아갔다.

'점검은 해보고 자는 게 좋겠어.'

3성에 오른 불의 고리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다지고 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우웅.

심장을 감싼 고리들이 살아 있는 생명처럼 펄떡이며 회전한다.

확실히 3성에 오르니, 고리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고 육체과 정신을 성장시키는 효과도 올라간 것 같았다.

'좋군.'

초급 단계의 시작인 3성이 이 정도인데, 나중에 불의 고리가 중급 이상의 단계에 오르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 기대되었다.

라온은 불의 고리를 다섯 번 휘돌린 후 잠을 자기 위해서 침대로 올라갔다. 불을 끄고 눈을 감으려고 할 때 처음 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특성 <???>이 개방 됩니다.]

[특성 <분노>가 생성되었습니다.]

[<분노>가 깨어납니다.]

8화

'분노?'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있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혼자만이 있던 방안에 어떠한 존재감이 드리웠다. 메시지에 나타난 <분노>라는 놈 같았다.

화아아아.

긴장의 끈을 꽉 말아쥐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 눈앞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주먹만 한 불꽃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치솟았다. 화산이 폭발하는 장관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푸른 불꽃 속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광기가 어려 있는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전생의 삶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말하는 불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네가 끌어올린 분노는 본왕에게 닿았다. 마계의 두 번째 군주 라스(Wrath)의 이름으로 네 복수를 이루어주마. 영혼과 육체를 바쳐…음?

스스로를 마계의 군주 라스라고 소개한 푸른 불꽃이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입을 떡 벌렸다.

-어린애? 왜 어린애가….

"넌 뭐지?"

-네놈이야말로 누구냐. 본왕에게 전해진 분노는 너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라스의 음성은 낮게 가라앉았지만, 숨 막힐 정도로 격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분노?"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생이라면 모를까 이번 생을 살면서 크게 분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깐 전생?'

생각해보면 자신은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했고, 상태창이라는 기이한 능력을 얻었다. 전부 죽고 난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준 게 바로 이 라스라는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네가 내게 상태창을 준 건가?"

-상태창? 네가 그걸 사용할 수 있다고?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음?

라스를 휘감은 푸른 불꽃이 요동쳤다.

-여, 연결이 끊겼어! 어째서….

"네 정체는 뭐고,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본왕을 부른 건 네놈이다.

"내가 불렀다고?"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느냐. 본왕은 네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이곳에 강림했노라.

"아…."

죽기 전에 어떻게서든 데루스 로베르트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게 생각났다. 말을 들어보니, 이 불꽃은 그때의 분노를 따라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근데 너무 늦었잖아.'

전생과 현생의 시간 차이는 2년이었고 태어난 이후 12년이 지났다. 14년이 지난 다음 나타나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 복수를 이루어준다고?"

-그렇다.

"그 대가는?"

라온은 눈동자에서 진한 열기가 타올랐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아까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내 영혼과 육체를 가져가는 건가?"

-그토록 간절한 복수를 이루어준다면 네 하찮은 영육 따위는 바치는 게 옳은 일이다.

"...."

라스를 지그시 내려보았다. 푸른 불길 안에 갇힌 무언가가 보인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사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죽고 환생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가?'

예측해보면 전생에서 놈이 자신의 육체를 차지하기 전에 죽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다.

"복수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다."

데루스에게 평생을 농락당하다 죽은 뒤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는데, 다른 자의 손을 통해 복수한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내 손으로 복수를 해야 해.'

라온은 복수를 남에게 떠맡길 생각이 없었다. 많은 고난이 있다고 해도 데루스의 목은 직접 딸 것이다.

-아니군. 네놈이 맞아.

라스가 푸른 불꽃 속에 감춰둔 두 눈동자를 통해 자신을 노려보았다.

-가슴 밑바닥에 깊고도 짙은 분노를 숨겨두고 있구나.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본왕은 이미 선택을 마쳤으니, 네놈은 몸을 바치면 그만이니라.

라스의 음성에서 분노가 타오름과 동시에 푸른 불꽃이 라온의 덮쳤다.

"끄윽!"

라온이 허리를 굽히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차갑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마저 얼어붙는 감각. 라스라는 놈의 속성은 불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놈을 생각하며 분노를 끌어올려라. 설사 신이라고 해도 본왕이 죽여주마.

라스의 오싹한 목소리에 가슴이 울렁였다. 얼어붙은 고드름에 심장이 꿰뚫린 것 같았다.

[수속성 저항력(3성)이 발동됩니다.]

'수속성 저항력!'

냉기를 흡수한 덕분에 얻은 수속성 저항력이 라스가 뿜어내는 냉기의 통증을 감소시키고 있었다.

다만 라스의 공격은 냉기만이 아니었다.

"크으으…."

라온이 진한 신음을 뱉어냈다. 데루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신을 벌레처럼 내려보던 놈의 비웃음에 숨이 막혀온다.

-본왕에게 몸을 맡겨라. 놈의 머리를 깨부수고, 살을 씹어 삼켜주겠노라.

"후욱….'

감정을 자극하는 라스의 목소리에 데루스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키고 싶었다.

'절대 안 돼….'

라온이 어금니를 바드득 깨물었다. 라스라는 놈에게 몸을 넘겨줬다간 다른 방에 있는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설사 이곳에서 죽더라도 몸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견뎌.'

피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자신은 암살자였다. 그것도 최고의 암살자.

암살자가 가져야 할 덕목인 인내와 감정의 차단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생각보다 잘 견디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본왕의 냉기는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다.

라스는 자신을 비웃듯 몸과 정신을 얼리는 냉기를 펼쳐냈다.

"후욱…."

다행이었다. 감정을 더 자극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텐데, 놈이 선택한 건 냉기의 강화였다. 호흡을 고르며 뼛속까지 침투해오는 냉기를 견뎠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끝까지!

라스의 이글거리는 목소리에 짜증과 분노가 어렸다.

-본왕이 사용할 육체라 손상을 줄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군. 그대로 집어삼켜 주마.

허세가 아니었다. 놈의 불꽃이 커짐과 동시에 육체와 정신을 자극하는 냉기의 강도가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끄으읍!"

라온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피부가 뜯어지고, 장기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분노를 일으키고, 본왕을 받아들여라. 그대로 죽을 셈이냐.

"네놈 따위에게 몸을 넘기느니, 죽는 게 나아."

혀를 씹어서 정신을 차렸다. 몸을 넘기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다짐할 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잠깐만 수속성 저항력이 이놈의 냉기를 막을 수 있다면….'

불의 고리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전부 낮출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라고 해도 지금은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화아아!

라온이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심장에 걸쳐 있던 세 개의 고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불의 고리(3성)>가 육체와 정신의 충격을 대폭 감소시킵니다.]

예상이 맞았다.

불의 고리는 육체와 정신 모두를 성장시키고 보호하는 연공법. 외부에서 파고든 자극을 견딜 때도 효과가 있었다.

불의 고리가 빠르게 휘돌며 정신과 육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금방이라도 터지려던 감정의 불씨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전생에서 키운 정신력과 불의 고리, 수속성 저항력이 조화를 이루니, 라스가 주던 고통과 자극이 훨씬 가벼워졌다.

-네, 네놈은 대체….

라스의 목소리에 경악이 담겼다.

후우욱.

놈이 피워내는 냉기의 불길이 점점 약해진다. 분노를 일으키지 않으면 자신에게 들러붙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린 인간 따위가 어떻게!

"인간은 맞지만, 어리진 않아."

라온은 잦아드는 냉기를 밀어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안 된다고!

라스가 격한 비명을 토하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놈의 눈동자가 겁먹은 망아지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다고 해도 본왕이 인간 따위에게 밀리다니!

"후…."

라온은 가볍게 숨을 뱉어내고 라스를 노려보았다. 놈의 불꽃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출렁였다.

"내 복수는 내가 한다. 잡귀 따위에게 몸을 맡기진 않아."

-잡귀? 마계의 군주에게 잡귀라니!

"나 하나 어쩌지 못하는 놈이 마계의 군주? 군주가 다 죽었냐?"

-네놈이 정녕….

라스가 다시 불꽃을 확대했지만, 크기만 클 뿐이다. 냉기의 화력은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방금 깨어났다고 했었지.'

잠에서 깨어났거나, 봉인이 풀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아아악!

라온이 거칠게 손을 뿌리치자, 라스의 불길이 종이처럼 팔랑이며 떨어져 나갔다.

빠드득!

푸른 불꽃 속에서 이를 가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정을 어떻게 통제하는 것이냐!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지. 그만 사라져라."

-네놈이 본왕의 권능을 가져가 놓고, 어딜 가라는 거냐!

라스가 분노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거기다 본왕은 이미 선택을 마쳤다. 네가 죽기 전까지는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다! 헉!

라온은 주절거리는 라스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불길이 흩어졌지만 타격감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친 느낌이다.

"그러면…."

마나를 끌어와 손끝에 모았다. 정제된 오러보다 질이 많이 떨어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후우웅!

마나가 담긴 손날로 라스를 갈랐지만, 놈은 바람을 견딘 촛불처럼 되살아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쯧, 이것도 안 되나."

라스는 영혼처럼 물질적인 부분이 없었다. 저런 상태면 오러를 사용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라스가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음에도 별관 주변을 지키는 검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놈은 자신에게만 보이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사라지는 거지?"

-네 몸을 본왕에게 넘겨라. 그리하면….

"미친 소리로군."

라온이 코웃음을 치고 있을 때 하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띵!

[추가 능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추가 능력?"

라온은 바로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여덟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특성의 첫 자리를 차지했던 물음표가 분노로 바뀌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상태창 아래에 새로운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근력 : 13

민첩성 : 13

체력 : 12

기력 : 12

감각 : 40

근력이나 민첩성 같은 능력들이 수치화되어 나타나 있었다.

-저, 정말 상태창이 넘어갔다니!

라스의 입에서 차가운 서리가 퍼져 나왔다. 그는 상태창의 내용은 알 수 없는지, 실루엣 같은 형태만 보인다고 중얼거렸다.

"이 상태창과 메시지는 뭐지?"

-…본왕이 만든 시스템이다.

"시스템? 무얼 위한?"

-말해줄 이유는 없다.

"성장의 가속인가?"

-그, 그걸 어떻게….

"역시."

자동반사도 아니고, 떠본 걸로 바로 반응이 온다. 라스는 분노라는 이름 그대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예상대로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보다 불의 고리 효과가 뛰어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 시스템 덕분이었다.

-내놓아라. 네 몸이든, 본왕의 권능이든 내놓으란 말이다!

라스는 이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거대한 왕좌 위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줄 방법도 모르지만, 넘길 생각도 없어."

빠르게 그리고 더 높이 갈 수 있는 능력을 얻었는데, 그걸 몸을 뺏으려던 미친놈에게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네 것도 아니지 않나!

"너도 네 것이 아닌 내 몸을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보, 본왕은 네 소원을 듣고….

"복수를 원한 건 맞지만 그건 내 손으로 해야 할 일이다. 무언지도 모를 네게 몸을 넘겨서 이뤄봐야 의미가 없어."

-끄으윽….

할 말이 없었던지 라스는 이를 갈기만 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 가라."

라온은 대화를 끝내고서 몸을 돌렸다.

-못 간다. 본왕의 권능을 돌려주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라스가 악을 내지르고서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얼마든지 견뎌준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을 때 놈의 몸이 푸르게 빛났다.

화아아아.

푸른 불꽃이 물처럼 흘러 손목을 휘감았다. 고통을 대비했지만,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우우웅.

손목을 감은 푸른 불꽃이 사그라들며 팔찌가 생겨났다. 얼음으로 조각한 듯한 꽃팔찌였다.

-네놈의 숨구멍이 막히는 그 날까지 붙어 있어 주마!

라스가 이죽거리며 팔찌에 매달린 꽃을 흔들었다.

-지금은 봉인이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본왕의 힘은 돌아온다. 그때는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으리라.

"퍽이나."

라온은 팔찌를 떼려고 했지만 아까 불꽃을 만질 때처럼 손에 잡히질 않고, 흩어졌다.

-음….

다만 아예 충격이 없는 건 아닌지 건드릴 때마다 팔찌가 부르르 떨리고, 라스의 말이 끊겼다.

-크읍, 소용없다. 본왕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팔찌를 긁고, 잡아 뽑고, 벽에 비비고, 짓밟았지만, 라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놈도 지독한 독종이었다.

"쯧."

혀를 찼다. 놈의 말대로 꽃팔찌는 무슨 짓을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떼어내고 싶긴 한데.'

놔두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떼어냈다가 시스템이 사라질 수도 있고, 이 라스라는 악마 놈이 실비아나 헬렌에게 옮겨붙을 가능성도 있다.

친구는 가까이에 그리고 적은 더 가까이에라는 말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술수를 부리게 하느니 옆에 두는 게 낫겠어.

끝없이 성장할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을 믿고, 라스를 직접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떨어지지 않겠다면 다른 모습으로라도 변해라. 꽃이 달린 팔찌라니 어울리지 않아."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해골이라면 이해라도 하지, 이런 꽃팔찌를 차고 다니긴 싫었다.

-취향이다. 존중해라.

"허…."

멧돼지처럼 폭급한 놈의 취향이 꽃팔찌라니, 어이가 없었다.

-본왕은 한 번 노린 먹잇감을 놓친 적이 없다. 네놈의 영육은 결국 본왕의 것이다.

"신경 끄는 게 좋겠군."

-끅! 애송이 놈이!

라온은 청각을 차단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라스가 칭얼거렸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시스템의 주인인 라스도 내가 환생한 걸 모르면, 날 환생시킨 건 누구지?'

라온은 새롭게 생겨난 의문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