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장 외벽의 끝. 새가 간신히 앉을 법한 얇은 담벼락 위에 다섯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불길에 타오르는 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봤어?"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가 물었다.
"천재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저게 정말이라면 그 녀석 이상의 재능이겠어."
"흐름을 넘어 재현이라. 어처구니가 없군."
"...."
네 명의 남녀는 각자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대답했다.
"루난이랑 버렌을 보러 온 건데, 좋은 구경했네."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최근 우리 적운대에 피해가 많았잖아. 그래서 말인데 버렌이나 루난은 너희가 알아서 데려가고, 라온은 내가 찜…."
"죽고 싶나?"
"저 천고의 재능을 날름 삼키겠다고?"
"여기서 피를 보기 싫으면 말을 잘 골라라."
"…!"
네 명의 남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당장에 칼을 뽑을 기세였다.
"노, 농담이야. 농담."
장발의 남자는 핼쑥해진 미소로 손을 저었다.
"어찌 됐든 저 아이로 인해 많은 게 변하겠네."
"...."
네 명의 남녀는 연무장을 나서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으로 동의했다.
지그하르트 무력의 중심인 대(隊) 그들의 눈에도 라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리메르는 교관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글렌을 따라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점점 약해지는 놈이 뭐 하러 직접 나선 거냐."
글렌은 옥좌에 몸을 묻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제가 수석 교관인데 할 일은 해야죠."
"리메르 님."
가주전에서 대기하던 집사 로엔이 차를 건네주었다.
"오랜만이네. 로엔."
"예."
겉보기엔 로엔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리메르가 훨씬 많았기에 말을 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글렌이 금색 팔걸이에 턱을 괴며 물었다.
"라온과 버렌을 왜 붙인 거냐."
"뭐, 어쩌다 보니…."
"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을 텐데, 어쩌다?"
"와, 역시 가주님은 속일 수가 없네요."
리메르는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버렌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편협합니다. 라온은 특별한 무언가를 가졌지만, 밝혀지지 않았죠.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대련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
"가주님도 보셨다시피 라온의 육체는 여전히 냉기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력만큼은 이미 경지를 이룬 무인과도 맞먹을 정도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도 가주님도 몰랐던 게 있습니다."
리메르는 검질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천재성입니다. 사실 제가 보고 싶었던 건 라온의 정신력이었습니다. 뛰어난 무학을 배운 버렌을 상대로 어떤 대응을 보여줄지를 기대했습니다."
리메르의 눈동자가 별을 박아 놓은 듯 반짝였다.
"다만 이번에 라온이 보여준 건 정신력이 아니라, 재능. 그것도 천고의 재능이었습니다. 한번 본 것으로 상대 권법의 흐름을 파악해서 역습을 가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수많은 전장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재능입니다!"
"이전에 돌팔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있다. 혹한의 저주에 걸린 아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돌팔이라면 넝마의 성자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냉기 마법이나 오러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거나, 경국지색의 외모를 얻게 된다고 하더군."
"바로 그겁니다!"
리메르가 쿵하고 발을 굴렀다.
"그 재능이 발휘된 거라구요! 그 녀석은 무학에 절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흐음…."
"버렌이나, 루난 그리고 다른 손자, 손녀들도 특별하지만, 라온은 그 이상입니다. 대륙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기질이에요!"
신이 난 리메르와 달리 글렌의 표정은 덤덤했다.
"저 역시 그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대주분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재능이었죠."
글렌과 함께 대련을 보았던 로엔 역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합니다. 라온에게 동색의 패가 넘어갔지만, 은패 이상의 보상을 내어주시면…."
"그럴 일은 없다."
글렌은 단호함이 깃든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유치한 계략 덕분에 라온에게 선물을 주게 되었지만, 단계까지 올려서 보상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엑! 하지만…."
"너도 그 아이를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다.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도록."
"진짜 정 없다니까…윽!"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에 리메르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라온은 진짜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껴안고 있지만 말고, 제대로 키워줘야 해요. 100년 만의 천재라던 가주님의 둘째 손자나 슬리온 가문의 첫째보다 위일지도 모르니, 잘 생각해주세요."
"말이 많아졌구나."
"진짜를 봤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별은 없다. 그 아이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다면 모를까."
"에이, 그래도 냉기를 지울 수 있는 최상급 영약이나, 연공법…."
리메르는 글렌이 올린 손에 입을 다물었다.
"돌팔이가 말했다. 이 이상 화속성 영약을 사용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하더군."
"이야! 관심 없는 척하시더니, 다 알아보고 계셨군요!"
"헛소리. 그 말 많은 놈이 혼자 주절거렸을 뿐이다."
"오…."
"흐음!"
리메르와 로엔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글렌은 쯧 혀를 차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등 뒤로 금색 불꽃이 타오르며 지그하르트 보고의 철문이 솟구쳤다.
"난 보고를 정리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라."
글렌은 그렇게 말하고서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전에 남은 리메르와 로엔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가 이제와서 보고 정리를 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 * *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 실비아와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가 워낙에 많은 것을 궁금해해서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자정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으니, 6시간 이상 말만 한 것 같았다.
'힘드네.'
라온은 방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마음이 편하지만, 수련 이상으로 힘들었다.
-크흠,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도다. 앞으로 네놈은 매일 이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거라.
리메르는 별관의 음식과 간신이 마음에 들었던지 오랜만에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연무장의 그 개밥 같은 식사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미안하지만, 그거 계속 먹어야 하는데."
이제 정식 수련생이 되었으니, 몇 년 동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맛을 따지는 기생 마왕이라니, 어이가 없는 놈이다.
-그러고 보니 네놈에게 물을 게 있었지.
"물을 거?"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팔에 걸려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 형태로 돌아갔다.
-본왕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보았고, 인간의 육체로 산 세월도 수백 년이 넘는다. 하지만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라스의 불길이 폭발할 듯 타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이상의 불꽃이었다.
-본왕은 느낄 수 있다. 네놈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말하라. 네놈의 정체를….
"야 라스."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내 정체나, 네 이름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무슨…."
"생각보다 기억력이 나쁘네."
라온이 라스를 내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와의 내기는 끝났다. 헛소리 말고 보상부터 가져와."
21화
"설마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라온이 어깨 위에 떠 있는 라스를 툭 쳤다.
-본왕은 마계를 지배하는 분노의 군주다.
라스에게서 푸른 냉기가 뿜어진다. 뼈가 시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었다.
-존재를 갖게 된 이후로 거짓을 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존재를 가지게 된 이후라는 말은 한 번도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본왕과 네놈은 내기라는 계약으로 묶여 있다. 싫다고 해도 넘어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그니까 뜸 그만 들이고 달라고."
-그 전에 하나만 묻겠노라.
"뭘?"
-네놈이 그 뾰족귀의 기세를 뚫은 방법 그리고 그 건방진 놈의 무학을 따라한 방법이 무엇인냐.
라스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질문을 해왔다.
"일단 보상부터 줘. 그게 먼저야."
-음, 알겠다.
라스의 푸른 불꽃이 나비처럼 팔랑이자,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오르면서 솟구치는 육체의 희열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노>가 가진 특성 중 하나가 임의로 생성됩니다.]
[<설화의 감각>이 선택되었습니다.]
[특성 <설화의 감각(1성)>이 생성되었습니다.]
"설화의 감각?"
라온은 특성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하찮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특성이 걸렸군.
"능력이 뭐지?"
-감각의 범위를 늘려주는 능력이다. 1성이니, 대략 1할의 거리가 늘어나겠지.
"1할이라…."
현재 기감으로 10M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범위가 11m가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감각 범위가 늘어날수록, 그 효용이 급상승할 특성이었다.
-본왕의 경우엔 원래 가진 감각의 10배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노라.
"그래?"
그러고 보니, <설화의 감각> 뒤에 1성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그 말은 저 특성도 불의 고리처럼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은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암살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력 이상으로 감각을 중요시해왔다. 감각의 범위가 늘어난다고 하니, 어떤 특성도 부럽지 않았다.
"근데 왜 설화의 감각이지?"
-취향이다. 존중해라.
"허."
얼음꽃 팔찌도 취향, 설화라는 이름도 취향. 센스가 참으로 구렸다.
-본왕과의 내기는 끝이 났으니….
라스가 다가오려 할 때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칭호 <최초의 승리>가 생성되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어?"
-이런!
라스는 상태창을 볼 수 없는 대신 메시지는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이 쥐새끼 같은! 본왕의 능력치를 또 빼가다니!
"내가 한 게 아니라, 네가 만든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고 있는 거잖아. 거기다 네 본체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능력치 1 정도는 눈곱만큼도 안 되는 거 아닌가?"
-무, 물론이다!
"그럼 별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라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됐다. 이제 네 차례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라.
"싫어."
-뭐? 지금 뭐라고….
"싫다고."
라온은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왕을 능멸하는 것이냐! 분명 네 능력을 알려준다고….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일단 보상부터 달라고 했지."
-어….
기억을 되새기던 라스가 입을 쩍 벌렸다.
"맞지? 난 네게 답을 준다고 한 적이 없어."
라온이 옅게 웃었다.
'환생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없지.'
암살자 라온의 격을 끌어온 걸 말하려면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라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환생만큼은 꺼내선 안 된다.
'불의 고리도 마찬가지.'
불의 고리에는 육체와 정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효과 말고도 무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건 자신의 무학만이 아니라, 적의 무학도 포함되기에 대련에서 버렌의 공호권을 따라 할 수 있었던 거다.
물론 상태창의 강화 효과와 버렌의 공호권 성취가 불의 고리보다 낮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라스에게 정보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은 적이니까.'
조금 가까워진 것 같지만, 라스는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노리고 있다. 자그마한 정보라도 넘겨줘선 안 된다.
-본왕을 농락한 것이냐!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꽃을 내뿜었다. 수만 개의 얼음 칼이 피부를 꿰뚫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참을만해.'
수속성 저항력을 얻은 이후에 라스를 만나 다행이었다. 저항력이 없던가, 라스가 화속성을 가졌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거다.
라온은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라스의 냉기를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학습 능력이 낮군.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서 공격해봐야 너만 손해야."
-닥쳐라!
라스의 불꽃이 한층 더 거세졌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오한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화아아!
외부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인지,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까지 살아나 더 죽을 맛이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조금씩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독한 놈!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거냐!
"정신력."
가볍게 대꾸해줬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음에도 견디기 힘들다. 전생에서 지옥 수련을 견딘 경험이 없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바득 깨물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을 때 눈앞에 푸른 창이 올라왔다.
[<분노>의 공격에서 극한의 정신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정신과 육체에 활역이 차올랐다. 마나 회로를 짓누르던 냉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라스가 악을 지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제 살 깎아 먹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본왕의 지켜본 인간의 역사에 너 같은 건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놀리는 말이 아니다.
왜 환생을 했는지, 왜 지그하르트에서 태어난 건지, 왜 라스와 엮인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본왕을 얕보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육체와 영혼을 씹어 삼킬 테니까!
"계속 말했잖아. 할 수 있다면 해보라고."
미소를 짓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오늘도 한 건을 해주었다.
"그런데…."
창밖을 보는 라온의 눈빛이 서리를 덮은 듯 차갑게 일렁였다.
"저건 뭘까."
* * *
카룬 지그하르트가 머무는 중무전.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방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
벌써 네 시간 가까이 차려자세로 서 있는 버렌 지그하르트의 입에서 참고 참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책상에 앉아 있던 카룬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버렌 지그하르트."
"예엑."
긴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버렌의 입에서 탁하고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네게 무엇을 지시했지?"
"수, 수석 수련생 자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지지 말라고 하, 하셨습니다!"
"그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슬리온 가의 계집을 꺾고, 라온을 짓밟은 후 수석에 이름을 올리라고 말했지."
카룬의 눈동자가 뻘겋게 타올랐다.
"그런데 그 계집도 아니고, 직계에서 떨어져 나간 버러지의 자식에게 패해? 그것도 모두의 앞에서?"
방을 울리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심장이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날 어디까지 망신시키고 싶은 거냐. 셋째나 넷째처럼 되고 싶은 건가?"
"아, 아닙니다!"
버렌이 덜덜 떨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젠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두 형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넌 이미 첫 번째 기회를 상실했다."
카룬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 대한 반가움은 없었다. 분노와 짜증만이 가득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버렌은 그 섬뜩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발끝만 보며 입술을 씹었다.
"기초 수련을 끝낸 후 수련생을 졸업할 때 그간의 성적을 매겨 다시 수석을 뽑을 거다. 그 자리를 가져와라."
"예…."
버렌은 마른침을 꾹 삼키고서 피를 토하듯 대답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답게 살고 싶다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카룬이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가, 감사합니다."
버렌은 6개월 만에 만난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왔다.
"젠장!"
중무전을 나온 버렌이 악을 내지르며 벽을 후려쳤다.
"그 망할 놈 때문에…."
이가 바드득 갈린다. 평생 칭찬만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꾸중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라온이라는 버러지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됐다는 게 너무도 화가 났다.
"후욱!"
가슴을 가득 채운 짜증을 한숨으로 뱉어냈지만,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기분을 전환 시키기 위해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여기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5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벽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버렌이 코웃음을 쳤다. 외부 문은 닫혀 있었지만, 실내 단련장이나, 휴게실의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멍청한 교관들."
입을 삐죽이며 휴게실로 향했다. 열린 문을 닫으려고 할 때 라온의 이름이 걸려 있는 사물함이 보였다.
"음."
보기만 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라온의 사물함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밑에 둔 상자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상자를 여기다…어?"
상자를 열어본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이 신발 숫자는!"
상자 안에는 밑창이 다 닿거나, 뜯어진 수련용 단화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켤레가 아니라, 열 켤레 넘게.
'이걸 6개월 만에 썼다고?'
믿을 수 없어서 신발들을 살펴봤지만, 전부 크기와 형태가 똑같았다. 모두 보급받은 라온의 신발이었다.
"허."
버렌이 헛웃음을 흘렸다. 라온과 같은 수련용 단화를 보급받았지만, 교체한 건 고작 2번이다.
'이게 말이 되나?'
자신이 신발을 두 번 바꾸는 동안 라온이 10번 이상 교체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친…."
몇 년은 신은 듯한 신발들을 보자,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가 맑아지자, 억지로 무시했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라온이 그 누구보다 빨리 연무장에 나와서 그 누구보다 늦게 들어갔던 것.
식은땀을 흘리고, 입에서 냉기를 내뿜으면서도 단 한 번도 훈련을 포기한 적이 없던 것.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 단련을 끝낸 뒤 깜깜한 연무장을 홀로 달리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내가 겉멋으로 검을 휘두르고, 숙소에서 쉬는 동안 놈은 매일 한계를 넘은 거야….'
라온의 기세가 임시 수련생 누구보다도 뛰어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거야말로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인데.'
5연무장에서 가장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준 건 라온이었다.
'그리고 난 반대로….'
라온을 비꼬고, 조롱했으며, 시험에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다가 추하게 패배까지 해버렸다.
"끄으으!"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질투에 눈이 멀어 추잡하고 더러운 짓만 해온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버렌은 텅 빈 휴게실에서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는 연무장에 들어올 때와 달리 정광이 어려 있었다.
"다시는…."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고, 지금이라도 추구해야 할 자세였다.
"후우!"
버렌은 깊은숨을 내뱉어 마음속에 쌓인 아집을 비웠다. 연무장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리메르의 그것처럼 가벼웠다.
* * *
별관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지 이틀째. 라온의 일과는 연무장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새벽부터 별관 주변을 달렸고, 아침을 먹은 뒤엔 기구 대신 맨몸운동으로 근력을 단련했다.
어제 실비아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방해할 놈은 딱 하나뿐이었다.
-또 수련인가. 정말이지 지겹도다. 본왕을 위해 다른 재롱이나 부려보아라.
아낌없이 주는 라스를 무시하고 계속 수련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가주전의 수석 집사 로엔이라고 합니다."
머리의 반이 구름색으로 물든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호출하셨습니다."
그는 공손한 예를 다하여 고개를 숙였다.
"호출이라고 하셨습니까? 절 왜…."
"동색의 패를 수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그냥 사람을 보내서 패를 줄줄 알았는데, 직접 부를 줄은 몰랐다.
"헙!"
건물 안에 있던 실비아가 창문을 넘어서 뛰어나왔다.
"로, 로엔 님."
"실비아 님."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를 알고 있었기에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버. 아니, 가주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저기 혹시…."
"특별한 일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수여식일 뿐이니까요."
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선하게 웃었다.
"라온…."
"괜찮아. 다녀올게."
라온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서 겉옷을 걸쳤다.
"잠깐만! 옷은 갈아입고 가!"
"이대로도 괜찮아."
글렌은 천생 무인이다. 수련하다가 왔다는 티를 내면 싫어하진 않을 거다.
"그럼 가시죠."
로엔은 빙긋 웃고서 앞장을 섰고, 라온은 실비아에게 눈짓을 보내고서 가주전으로 향했다.
* * *
"...."
라온은 금빛 옥좌에 앉은 글렌을 올려보며 손끝을 떨었다.
수백 명이 들어와도 넉넉한 알현실에서 글렌과 일대일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저놈 조금 강하다고 재는 것이냐. 붉은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도다.
물론 아예 정신이 나간 라스는 예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약속은 지켜야겠지."
글렌은 필요 없는 말을 앞에 걸치고서 로엔에게 손짓했다.
"예."
로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은은하게 빛나는 동색의 패를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로엔의 손에서 전해지는 동색의 패를 받았다. 패의 중앙엔 지그하르트의 문양인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이 그려져 있었다.
"네게 동색의 패를 수여한다. 넌 동패를 반납하며 그에 합당한 물건을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당장 말씀드려도 됩니까."
라온은 패를 움켜쥔 채 글렌을 올려보았다. 이 패를 어떻게 사용할지 이미 생각해놓았다.
"…말해보라."
글렌은 잠시 침묵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지그하르트."
"음?"
"제 어머니를 원래의 직위로 올려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로엔만이 아니라, 글렌도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내려보았다.
"원래의 직위라면 직계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글렌이 입을 다물었다. 진의를 알아보려는 듯 전신을 훑었다. 그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 심장이 우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실적이다."
"실적이라 하시면…."
"나만이 아니라, 가문 모두가 인정할 실적을 쌓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럼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불가능에 가깝다. 다양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힘들 테니."
그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절대 이루지 못하리라 장담을 하는 것 같았다.
-시건방지도다. 본왕이 본체를 찾는다면 수천 합 안에 죽일 수 있는 놈이 감히!
라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글렌을 노려보았다. 다만 수천 합을 겨룬다는 건 라스에게도 버거운 초강자라는 뜻이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라온은 로엔에게 동패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실적 쌓기는 전생에서 숨 쉬는 것처럼 해온 일이다. 어떤 임무를 완수해서라도 실비아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잠깐."
돌아가려 할 때 단상 위에서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 보상을 말하지 않았다."
"예?"
"넌 질문을 했을 뿐이다. 그런 건 패 없이도 들려줄 수 있는 말이다."
뒤를 돌아보니, 글렌이 차가운 눈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변한 것 같았다.
'뭐지?'
글렌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패를 받아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소원을 말하라."
"…."
라온은 아로엔의 손에 들려 있는 동패를 보며 눈을 빛냈다.
'다음 소원이 정해져 있긴 하지.'
실비아의 복귀 질문 이후 무엇이 필요한지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오러 연공법.'
불의 고리는 분명 천고의 연공법이지만, 육체와 영혼을 단련시켜 줄 뿐 오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전생에서 익혔던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했다.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오러 연공법? 그건 기초 수련을 진행하며 교관들이 전수해줄 거다."
그 말은 맞았다. 기초 수련에서 주어지는 연공법도 대륙 전체로 본다면 중상급의 연공법이다.
하지만 그 수준으론 안 된다.
실비아의 지위를 회복하고, 데루스의 목을 베기 위해선 그 이상의 연공법이 필요하다.
"그것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동급의 패에 해당하는 연공법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계속 느끼지만, 그는 암살자인 자신 이상으로 감정 표현이 적었다. 냉혈이라는 별명이 참 잘 어울렸다.
딱!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을 튕기자, 가주전 바닥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쿠구구구!
바닥에서 금색 불꽃이 돋아났다. 나선을 그리며 타오른 불꽃 속에서 원형의 책상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이건…."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책장은 알현실의 높고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고, 칸막이마다 형형색색의 책이 꽂혀 있었다.
"지그하르트의 책장 중 하나다. 중앙에 손을 올린다면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책이 내려올 거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였고 책의 개수는 셀 수도 없었다.
'그림자 연공법보다 좋은 거면 돼.'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나오길 바라면서 책장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책장이 진동한다. 책들이 들썩이며 추위를 타듯 덜덜 떨었다.
책장은 바람을 탄 듯 회전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파앙!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첫 번째 칸의 첫 번째 책이 저절로 빠져나와 펼쳐졌다.
화아악!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금빛 불꽃을 뿜어내면서.
"이 무슨!"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옥좌의 손잡이를 으깨며 벌떡 일어섰다.
22화
"저 책은…."
라온은 불타오르는 책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책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낡았지만, 장대한 금빛 서광을 뿜어내 알현실을 밝혔다.
우우웅!
여름의 끝을 알리는 꽃잎처럼 떨어진 책이 손끝에 닿았다. 불길에 타오르고 있음에도 뜨겁지 않고, 체온처럼 따스했다.
'만화공?'
책 표지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를 넘기려고 할 때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더 큰 불길을 일으켰다.
스스스.
순식간에 끝 페이지에 도달한 책은 수명을 다한 장작처럼 재가 되어 흩어졌다.
"어?"
라온이 사그라지는 책을 움켜쥐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종이는 가루가 되었고, 불꽃은 연기가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화공(萬火功) : 만겁의 불길과 마주했습니다.]
[만화공이 기억됩니다.]
그 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뇌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누군가가 뇌에 거대한 침을 쑤셔 넣는 듯한 느낌이다. 라스의 정신공격보다 더한 통증에 무릎이 휘청였다.
"후욱…."
다행히 고통은 찰나의 순간에 끝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도련님!"
바로 옆에 있던 로엔이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너 방금 뭘 한 거냐.
'나도 몰라. 그런데….'
기억난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만화공의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그마한 떨림이 깃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글렌이 평소와 달리 화등잔만 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무엇을 한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손에서 사라진 연공법의 내용은 기억납니다."
"그 책의 이름은?"
"만화공입니다."
"...."
라온의 대답을 들은 글렌은 눈을 내리감았다. 석상이라도 된 듯 한참 동안 멈춰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이상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내용이 기억난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되었다."
글렌은 평소처럼 냉담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동색 패의 보상은 이루어졌다. 이만 나가보거라."
"음…."
라온이 슬쩍 로엔을 보았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황급하게 평소같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뒷걸음을 걸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글렌과 로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만화공의 내용이 내 기억에 박힌 것도 시스템의 능력인가?'
-시스템이 네 기억력과 사고력을 높여주긴 하지만 강제로 뇌에 집어넣는 능력은 없다.
라스의 목소리에도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음….'
라온은 가주전의 복도를 걸어가며 머리에 박힌 만화공의 정보를 훑어보았다.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그림자 오러 연공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묘하고 정심한 연공법이었다.
'거기다….'
만화공 안에는 오러 연공법만이 아니라, 하나의 검술과 옛 세상의 정보도 담겨 있었다.
머리에 각인된 만화공을 제대로 익힌다면 전생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걸 왜 넘겨줬지?'
만화공은 동패 따위로 얻을 수 있는 오러 연공법이 아니다.
은패. 아니, 금패를 줘도 바꾸지 않을 물건인데, 왜 넘겨준 건지 모르겠다.
-이미 받아놓고, 뭘 그리 걱정이 많은 게냐.
'하긴.'
글렌 정도 되는 사람이 준 물건을 뺏을 리 없다. 이미 날아가서 달라고 해도 줄 수도 없지만.
'돌아가자.'
지금은 기억만 있을 뿐 습득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돌아가서 연공을 하고 싶었다.
라온은 가주전을 나가자마자 별관으로 뛰었다. 전력으로 달리가는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라온이 떠난 알현실은 밤과 같은 침묵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 가주님. 라온 도련님이 가져가신 연공법이 설마…."
"그래. 그분의 것이다."
글렌은 책장 첫 번째 칸의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을 가져가다니….'
지그하르트 역사상 아무도 꺼내지도, 읽지도 못했던 초대 가주의 연공법이 바로 라온에게 넘어간 만화공이었다.
동패가 아닌, 은패 수준의 연공법을 넘겨주기 위해서 최초의 책장을 꺼냈는데, 만화공을 가져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꿀꺽.
로엔은 재가 되어버린 연공서의 조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알려졌다간 라온 님과 실비아 님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만화공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만화공에 대해 전해지는 건 가주가 된 이후다. 가문의 역사를 샅샅이 뒤지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음, 그럼 연공서가 아예 사라져 버린 건 어떻게…."
"그것도 괜찮다. 사람에게 전해졌지 않느냐."
라온의 연공서의 내용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런 현상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전해졌다면 그만이다.
"그래도 만화공은 지그하르트의 가주에게 전해지는 연공법인데…."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연공법이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기서 썩어 문드러졌겠지."
놀란 건 사실이다.
아니, 경악했다는 게 맞다. 다만 판별식에서 금색 불꽃을 만들어낸 라온이기에 오히려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을 얻었으니, 라온 도련님은 그 누구보다 강해지시겠군요."
"아니."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재능도, 무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인간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도, 강한 인간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지."
글렌이 마의 벽은 넘은 이후에도 판별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재능을 발현한 아이들에게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단순한 재능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운 걸 봤더니, 저도 모르게."
로엔이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글렌은 재능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물론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뛰어난 무학과 재능만을 따졌지만.
"앞으로 무언가가 변할 것 같구나."
글렌은 옥좌의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만화공. 가문에서 딱 한 번만 나왔던 금색 불꽃. 모두 라온이 가져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신의 손자이지만, 대놓고 사랑을 줄 수 없는 그 아이 때문에 가문 내외로 많은 변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이지. 글렌은 그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 * *
라온은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몰라서 문까지 잠갔다.
-거창하구나.
'너도 알 텐데. 오러 연공을 하는 중에 방해를 받으면 죽을 수도 있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연공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개인 침대에서 잘 때까지 불의 고리를 연성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너도 방해하지 마."
-흐음!
"너 설마…."
-딱 한 번이다.
푸른 불꽃 사이로 빙글거리는 미소가 피어났다.
"한 번?"
-본왕은 네놈이 그 연공인가 뭔가를 하는 동안 딱 한 번 방해하겠다.
"그러다가 네가 내 몸을 가져가기 전에 폐인이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다.
라스에게서 짐승의 목 울림 같은 비웃음이 들려왔다.
-넌 극복하지 못하겠지만, 본왕은 네놈의 사지가 잘리고, 단전이 터져도 살려낼 수 있다.
사이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함이 등골을 스쳤다.
-네가 폐인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가 본왕에겐 기회가 되겠지.
'이놈은 역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라스는 아군이 아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마계의 악마이자, 분노의 화신이었다.
"한 번이라고 했나?"
-본왕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터. 그 연공법을 습득할 때까지 딱 한 번만 끼어들겠다.
"어쩔 수 없겠네."
라온이 손목을 문질렀다.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라. 본왕이 언제 네놈의 정신을 찌를지 모르니까.
라스의 목소리에 격한 흥분이 담겼다. 처음으로 놀릴 기회가 생겨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왕이라는 놈이 고작 이런 거 가지고.'
매번 본왕이라는 유치한 호칭법을 사용하고, 마계의 군주이니, 분노의 왕이니 하는 놈이 이런 사소한 것에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만 했다.
'그렇지만….'
라스가 한 번의 방해만 한다고 해도 위험한 건 사실이다.
만화공은 자연의 마나를 흡수해서 단전에 오러를 쌓는 연공법.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았다간 마나 회로나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마나 회로에 냉기가 박혀 있는 자신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래도 밀릴 순 없지.'
라스는 약하게 나오면 더 세게 밀고 들어오는 성격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래. 해봐."
라온은 속마음을 감추고 여유롭게 웃었다.
-그 건방진 표정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지.
"그럼 평생 지켜만 봐야 할 텐데."
-…지금 당장 네 정신을 부수고 싶군.
"해봐. 난 가만히 있다가 능력치만 받아먹으면 되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버러지가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이 버러지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두드려라."
-끄으윽!
손을 휘휘 젓고서 침대 아래에 앉았다. 라스가 폭주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시원하게 무시했다.
'놈이 생각이 있다면 지금 건드리진 않겠지.'
찬찬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들이키는 숨결에 자연의 마나를 담았다. 청량함으로 전신을 채우고, 다시 날숨. 마나 회로에 깃든 탁한 기운을 뱉어냈다.
'좀 겹치는데.'
만화공의 흐름과 불의 고리의 흐름은 그 이름처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인 마나를 마나 회로에 가라앉혔다.
우측 손목에서 만화공의 흐름이 시작된다. 그 기운은 불처럼 과격하면서도 물처럼 도도했다.
고오오오!
뜨거운 마나가 전신을 질주한다. 장중한 흐름에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들이 쓸려나갔다.
'이것도 놓칠 순 없지.'
저 순수한 냉기를 버리기엔 아까웠다. 만화공의 기운과 함께 단전까지 이끌었다.
후우웅.
순식간에 단전까지 내달린 만화공의 기운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당연하겠지.'
한 번의 연공으로 만화공을 습득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만화공의 흐름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지면 그 기운이 자연스럽게 단전에 안착할 것이다.
'거기다.'
만화공의 기운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의 냉기도 흡수하고 있으니, 냉기 저항력도 빠르게 성장하게 될 거다.
"후…."
한 번의 순환을 끝낸 라온이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눈을 떴다.
-화속성인가.
"단일 속성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연공법 자체는 굉장히 뛰어나."
-너 치고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뭐?"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놈들이 문제지.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은 만능자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냉기로 하나의 성을 얼려버린 이야기는 역사에도 남았지….
"음."
라온은 자기 자랑을 시작하는 라스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그가 전에 했던 말에 주목했다.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이라.'
그의 말이 맞다.
한 가지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자들은 반푼이 취급을 받지만, 격을 넘어선 사람들은 절대자 취급을 받는다.
한 번의 연공으로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특별하다. 전설로 내려오는 불의 고리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제대로 익혀봐야겠어.'
한동안 만화공에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그 전에."
-이제 처리하려는 거냐?
"그래. 밤마다 찾아오는 걸 보면 우연은 아니니까."
라온의 빨간 눈동자가 사신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오랜만에 복직 좀 해볼까.
* * *
주디엘은 한 달 전 별관에 들어 온 신입 시녀다.
좋은 인상과 밝은 성격, 깔끔한 일 처리 덕분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별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다만 하루 업무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러 간다던 그녀는 정원의 나무 위에 숨어 라온의 방을 엿보고 있었다.
'또 혼잣말인가.'
주디엘은 방에서 중얼거리는 라온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영향일 지도 모르겠다.
허공과 대화하던 라온이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자, 주변 마나의 흐름이 급변했다.
저렇게 명상에 빠진 적은 많았지만, 마나의 파동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역시 가주전에 가서 오러 연공법을 배워왔군.'
라온은 동색의 패를 이용해서 오러 연공법을 얻어 온 것 같았다. 마나의 흐름이 굉장히 격렬했다. 생각보다 강한 연공법이었다.
'보고할 게 늘었어.'
주디엘은 라온이 다시 눈을 뜨고, 방에 불이 꺼지고 나서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정원의 끝에 있는 작은 호수에 가서 땅에 숨겨둔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그 종이에 라온이 별관에 돌아온 이후의 행적과 파악한 내용을 전부 적었다.
신기하게도 종이는 글씨를 적자마자, 바로 사라져서 옆에서 보기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짓도 할 게 못 된다니까."
주디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약점이 될 정보들을 보고하다니, 갑작스럽게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래도 해야지."
씁쓸함은 잠시였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허무한 마음을 채웠다.
툭.
주디엘은 종이를 엄지손톱 크기로 접어 호수 위에 띄웠다. 저 종이는 내일 아침에 카룬 지그하르트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다.
"그럼 돌아가…아!"
몸을 일으키다가 황급히 멈춰 섰다. 뒷목에 닿는 서늘한 날붙이의 감각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입을 열면 죽는다."
어쩔 줄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릴 때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움직여도 죽는다."
죽음을 담은 듯한 목소리에 솜털이 우수수 돋아났다.
"눈을 내려 호수를 봐라."
목소리의 지시에 눈동자를 깔아, 호수를 보았다.
"아…."
밤하늘을 머금은 어둑한 호수 위. 라온 지그하르트의 붉은 눈이 떠 있었다.
23화
꿀꺽.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째서 저 아이가 여기에….'
침대에 누워 자고 있어야 할 라온 지그하르트가 왜 자신의 뒤에. 그것도 칼을 겨눈 채로 나타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으으….'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호수에 비치는 붉은 눈동자를 본 순간 생각은커녕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아이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생명을 베어낸 살인마와 눈을 마주친 기분이다. 심장이 꾹 우그러들었다.
"별관에 돌아온 첫날부터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더군."
"흡…."
첫날이라면 자신의 시선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렸을 때부터 첩자 교육을 받아와서 기척을 죽이고, 존재감을 감추는 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정체가 발각되고, 뒤를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입을 벌려라."
"아아…."
라온 지그하르트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주디엘은 어깨를 덜덜 떨며 입을 벌렸다.
"끄어억…."
벌어진 입을 통해 라온 지그하르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 손가락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넘어갔다.
"캬학!"
송곳으로 식도와 위를 뚫어버리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으흑…."
불을 삼킨 것처럼 뱃속의 열기가 식질 않았다. 복부를 쥐어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차박.
라온 지그하르트는 배를 잡고 버둥거리는 자신을 놔두고, 호수로 들어가서 감색 종이를 가지고 왔다.
스르륵.
종이를 펴는 그의 눈동자는 어둠을 담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범한 종이가 아니로군."
"크흡…."
주디엘은 입을 꽉 다물었다. 통증이 지독했지만, 첩자로서 자존심이 있다. 이대로 굴복할 수는 없었다.
"...."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 흙, 불, 바람."
그는 갑자기 원소를 말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내용을 살필 방법을 찾는 것 같았다. 다만 그걸 왜 입으로 내뱉는지는 모르겠다.
"…햇빛, 달빛."
"…."
답은 달빛이었지만, 주디엘은 반응하지 않았다. 혀를 씹으며 뱃속을 으깨는 듯한 고통을 견뎠다.
"달빛이었군."
"어…?"
순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정답을 말했다.
'뭐, 뭐야! 어떻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참고만 있었을 뿐이다. 종이의 비밀을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는 몸을 돌려서 종이에 한참 동안 달빛을 쏘아낸 뒤 그 내용을 확인했다.
"여러모로 조사 한번 잘했군. 이건 어디로 가는 거지?"
"으…."
라온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젠 고통보다도 무서움이 더했다. 목덜미를 조여오는 듯한 공포감에 허리가 아려왔다.
"아리스 지그하르트."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첫째 딸 이름을 불렀다.
"카룬 지그하르트, 데니어…. 카룬 지그하르트였군."
"허억!"
주디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트렸다.
"다, 당신 뭐야!"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에 턱이 덜덜 떨렸다.
'이, 이 아이는 대체!'
표정 관리와 인내력은 첩자가 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요소다.
저런 어린아이가 훈련받은 자신의 눈빛을 보고 정보를 빼가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
라온 지그하르트는 여전히 말없이 자신을 굽어본다. 서슬 퍼런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표정으로 읽는 게 아니라면?'
그의 눈은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그저 고통받는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배를 찢을 듯한 고통 그리고 생각을 읽는 듯한 라온의 모습에 머릿속으로 저주 하나가 스치고 갔다.
"내, 내게 레이지 웜을 먹인 겁니까?"
"레이지 웜을 알고 있었나?"
라온 지그하르트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너 따위가 그걸 알고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끄어어억!"
구역질이 나왔다.
'레, 레이지 웜이라니!'
레이지 웜은 최악이라 불리는 저주 중 하나다. 술자가 먹인 벌레가 몸에 들어가면 위치만이 아니라,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도 파악된다.
가장 지독한 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술자가 원할 때 지독한 고통을 주면서 죽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밖에 없어. 레이지 웜이야!'
이 지독한 고통, 생각을 읽는 듯한 라온 지그하르트의 모습으로 볼 때 입에 들어간 건 레이지 웜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레이지 웜을…."
이제 13살이 된 아이. 그것도 평생 병을 앓아온 아이가 레이지 웜을 사용했다는 게 의심 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라온 지그하르트가 종이를 흔들며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으…."
그 말이 맞다. 레이지 웜이 몸에 들어간 이상 반항도, 도주도 생각할 수 없으니까.
"카룬 지그하르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는 건 중무전의 첩자라는 뜻이겠지. 계획은 7달 전 판별식 때부터였을 테고."
"...!"
주디엘이 눈을 부릅떴다. 그것도 맞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7달 전 판별식에서부터였다. 다시 한번 레이지 웜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아주 자세히 조사했군. 나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와 헬렌, 다른 시녀들까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달빛에 반짝이는 글씨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어린 살기에 등골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거, 건드려선 안 될 인간을 건드렸어.'
쉬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별관엔 무인도 없고, 사람들은 선하다. 어린 라온과 폐인이 된 실비아의 정보를 모아오는 임무이니, 누워서 떡 먹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별관엔 괴물이, 그것도 지독한 살의를 가진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당장 목을 매달고 싶었다.
"끄으윽…."
팔의 살을 쥐어뜯었다.
라온에게서 전해지는 창백한 살기에 얼굴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았고, 레이지 웜이 있는 장기는 터질 지경이었다.
"내, 내용을 바꾸겠습니다. 사실이 아닌…."
"그럴 필요 없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종이를 아래로 내려 달빛에 비치는 글자를 지웠다. 다시 종이를 접은 뒤 호수 위에 띄워놓았다.
"어, 어째서…."
"지금 정보를 수정해도 내 정보는 결국 카룬에게 전해진다. 그리되면 네가 무능하다는 것만 알리는 꼴이 되겠지."
"흡!"
그가 무릎으로 앉으며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 피처럼 뻘건 붉은 눈. 손발이 바르르 떨렸다.
"보고 주기는?"
"저, 정기보고는 2주일입니다."
"오늘 내가 버렌을 꺾었으니, 정기보고가 더 빨라질 거다. 아마 1주일로 바뀌겠지."
"아, 예…."
주디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라온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지금부터 넌 이중 첩자다. 바로 들킬 정보는 내어주고, 들키지 않을 중요한 정보는 숨겨라. 반대로 그쪽의 중요 정보는 내게 가져와."
"아, 알겠습니다."
지금의 공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돌아왔을 땐 쓸만한 정보가 있길 기대하지."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으윽…."
하지만 아직도 그의 붉은 눈이 자신의 심장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털썩.
주디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 고통이…."
어느새 고통도 사라졌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레이지 웜을 제어한 것 같았다.
'괴물….'
반항할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존재가 별관의 어둠에 몸을 감추고 있었으니까.
"으으!"
주디엘은 입술을 깨물고서 숙소로 달려갔다. 라온이 남긴 공포는 목덜미에 돋아난 닭살처럼 그녀의 심장에 깊게 박혔다.
* * *
-언제 레이지 웜을 소환한 거냐.
"그건 레이지 웜이 아니야."
방으로 돌아온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뭐?
"일시적으로 극한의 통증을 일으키는 독을 먹였을 뿐이다."
전생에 레이지 웜에 당하긴 했지만, 기억도 없을 때라 소환 방법 따윈 모른다. 주디엘에게 먹인 건 고문에 사용하는 독일 뿐이었다.
"레이지 웜 따위는 있어도 안 써."
그런 지독한 저주를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눈앞에 그 벌레가 있었다면 발로 으깨버렸을 거다.
-그럼 그 독은 어디서 났지?
"만들었다."
-아까 주방이랑 창고에 갔던 게 그럼….
"맞아."
독의 조합법 정도는 외우고 있기에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로 변형된 독을 만들었다.
-잠깐. 넌 그놈의 생각을 모두 읽지 않았느냐.
"그랬지."
-레이지 웜도 없이 그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몇 가지는 예측, 몇 가지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상태를 보았다? 놈은 계속 같은 표정이었는데?
라스의 푸른 불꽃이 요동쳤다. 상태를 보고 정보를 알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난 알 수 있어."
전생에서 20년 넘게 암살자로 살아왔다. 고문을 해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주디엘의 생각을 읽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13살짜리가 인간에게 공포를 심는 방법을 알다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본 적 없는 일이다.
맞는 말이다.
전생에서 암살자로 살아온 시간이 없었다면 주디엘이 정보를 모으는 걸 알지도 못했고, 이런 방법을 쓸 수도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전생의 삶이 나름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카룬 지그하르트였단 말이지."
라온이 침대에 앉으며 카룬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가 왜 주디엘을 넣었는지, 대충 예상은 간다. 판별식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이쪽의 정보를 파악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선택을 잘못했다.
자신만을 관찰했다면 모를까 별관에 있는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까지 관찰범위에 끼워 넣다니,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왜 정보를 바꾸지 않았지?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그 여자가 적은 종이엔 네가 냉기를 많이 이겨냈다는 정보와 뛰어난 오러 연공법을 구해왔다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걸 지워야 하지 않나?
"그건 어차피 피라미 정보야. 뒤통수를 치려면 그 정도는 넘겨줘야지."
그는 손가락으로 침대보를 쓱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내 진짜 정보를 중무전에 보내다 보면 정보에 대한 신뢰가 쌓일 거야. 그렇게 쓸모없는 정보를 보내주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거짓 정보를 보내면 카룬 지그하르트를 잡아먹을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야."
-허….
라스가 헛바람을 흘렸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 역시나 이놈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네놈은 역시 13살이 아니다. 뱃속에 백 년 묵은 능구렁이가 가득 차 있어.
"고작 능구렁이?"
라온은 라스를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능구렁이가 아니라, 암살자지.'
그것도 최고의 암살자.
* * *
루난 슬리온은 본가로 돌아왔어도 단련을 쉬지 않았다.
시험 날 라온 지그하르트가 보여준 움직임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 돼."
집에 있는 기구로 단련을 하자, 연무장에 있을 때와 다르게 들 수 있는 무게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기구만이 아니다. 오래달리기나, 다른 체력 단련도 평소보다 잘 되질 않았다.
"음…."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하나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없다. 항상 옆에 붙어 다니던 그가 없기에 평소처럼 힘을 내기 힘들었다.
최근엔 라온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가 더 좋아져서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맡는데, 그 탓도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해.'
루난 슬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단련장을 나왔다.
"루난?"
슬리온 가의 가주 로칸 슬리온은 가문의 연무장을 떠나는 루난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아빠랑 같이 수련하기로 했잖아. 어딜 가는 거니?"
"라온한테."
"라온? 서, 설마 라온 지그하르트?"
"응."
"그, 그 녀석에게 왜 간다는 거니? 그것도 아빠랑 같이 훈련하기로 한 지금?"
로칸 슬리온은 평소의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말을 더듬었다. 간신히 시간을 내서 막내딸과 놀려고 했는데 갑자기 라온에게 간다고 하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냄새도 있고, 수련도 있어."
"어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갈게."
루난은 의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치고서 단련장을 나갔다.
"자, 잠깐만! 수련은 여기서 아빠랑 하면 되잖아!"
"가서 해야 해"
루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계속 간다고만 하다니, 서, 설마 라온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게냐?"
"무슨 짓?"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내려 라온과 함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도와줬지.'
라온이 직접 도움을 주진 않았지만, 그의 옆에 있기만 해도 훈련이 잘되었으니, 도움받은 게 맞았다.
"응. 했어."
"끄으윽! 라온. 네 이놈!"
로칸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내 딸을 협박해?'
루난의 짧은 대답에 로칸의 상상력이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라온에게 협박을 당해서 덜덜 떠는 딸의 불쌍한 모습이 그의 뇌리를 잠식했다.
"아이고! 가주님!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업무는 절대 미뤄서는 안 되는…."
"당장 내 검을 가져오라!"
로칸은 자신을 찾으러 온 집사에게 호통을 쳤다.
"엑? 거, 검이요?"
"루난. 나도 가마! 그놈을 그냥 둘 수는 없겠어!"
로칸이 눈을 부라렸다. 당장에 지그하르트의 별관을 박살 낼 기세였다.
"어? 어?"
집사가 입을 쩍 벌렸다. 저 딸 바보가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하는 게냐! 내 검을 가져오라 하지 않았느냐!"
"자, 잠시만요! 가주님! 저랑 이야기 좀…."
"이야기는 필요 없다! 검과 징벌만이 있을 뿐!"
"어후…."
집사는 루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맹한 눈으로 로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 말수 없는 아가씨로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걸 해결할 사람은 그분밖에 없어.'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서 저택으로 들어가 검 대신 마님을 찾아갔다.
* * *
"그러니까 라온 도련님이 네 수련에 도움을 줬다는 거지? 협박이 아니라."
"응."
어머니인 클라라의 말에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클라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하며 좌측으로 돌아갔다.
"아, 아니, 난 당연히 혀, 협박이라도 당한 줄 알았지. 그냥 간다고만 하니까. 이건 누구라도 오해를 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금방이라도 지그하르트로 돌격할 것 같았던 로칸은 어깨를 반으로 접은 채 구석에 쭈그려 있었다.
"시끄럽고. 가서 일이나 해요."
"아니, 오늘은 우리 루난이랑 놀기로…."
"쓰읍."
"아, 알겠어."
"이따가 가서 확인할 테니까. 일 처리 제대로 안 되어 있으면 각오하세요."
"으, 응. 걱정하지 마."
로칸은 그 큰 덩치를 축 늘어뜨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루난."
"응?"
"라온 도련님께 고맙다고는 했니?"
"과자 받았을 때 했어."
"수련을 도와줬을 때는?"
"안 했어."
"후후."
클라라는 고개를 젓는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만났을 땐 고맙다고 하렴."
"근데 아빠가."
"음?"
"아빠가 남자한테는 먼저 말을 걸지 말라고 했어."
"아하!"
클라라가 빙긋 웃었다. 집사는 그 웃음을 보며 오늘 로칸이 밤새 잔소리를 들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아빠 말은 잊으렴. 남자도, 여자도 상관없어.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게 당연한 예의란다. 알겠니?"
"응."
"그럼 오늘은 아빠 말고, 엄마랑 수련할까?"
"응."
루난은 클라라와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가며 라온의 덤덤한 얼굴을 생각했다.
'고맙다고 해야지.'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을 하자, 아주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24화
라온은 창가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렵군.'
휴가 동안 잠을 아끼며 연공해 봤지만, 오러를 만들지 못했다.
'보통 연공법이 아니야.'
글렌의 표정을 봤을 때도, 뇌리에 박힌 만화공을 살폈을 때도 느꼈지만, 이 연공법은 동색의 패 따위로 얻을 무학이 아니다.
은패. 아니, 금패 수십 개를 바쳐도 아깝지 않았다.
'왜 그냥 줬을까.'
글렌이 자신과 실비아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데, 이런 대단한 오러 연공법을 그대로 넘겨준 이유를 모르겠다.
가장 놀라운 건 책이 가루가 되고, 그 지식은 자신에게만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러 연공법에 문제가 있는 건가?'
완성된 연공법이 아니라, 어딘가 하자가 있는 오러 연공법이라 실험을 위해 그냥 주었을지도 모른다.
"음…."
라온은 머릿속에 저장된 만화공의 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해보았다.
'별문제는 없는데.'
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히 운용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펄떡이며 치솟았다.
-본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간, 네 영혼과 육신은 분노에 삼켜질 것이다.
"그러던가."
라온은 끌끌 웃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도 보지 못한 건방짐이로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콧대를 찍어 눌러주마.
"계속 말하잖아. 할 수 있으면 하라고."
손을 휘휘 젓고서, 방을 나갔다. 라스에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명경지수. 한밤의 호수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라온."
"라온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을 비롯한 시녀들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얘기도 별로 못 했는데, 밥도 별로 안 먹었고…."
실비아가 아쉬운 점을 쏟아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주말마다 올 수 있잖아."
임시 수련생일 때와 달리 정식 수련생이 된 덕분에 주말에는 별관에 올 수 있었다.
"그래도…."
실비아의 우울한 감정이 시녀들에게도 옮았는지, 로비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 다녀올게."
이런 민망한 감정과 상황은 쥐약이다. 재빠르게 손을 흔들고서 별관의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여는 중에 시녀들의 끝자리에 서 있던 주디엘과 눈을 마주쳤다.
"흡!"
주디엘이 비명을 지르려다가 입을 막았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렸다. 공포라는 괴물에 잡아 먹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공포로 인간을 지배하는 건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녀가 카룬 지그하르트가 있는 중무전의 중요 정보를 빼 온다면 제대로 거두어 줘야겠다.
-괴물 같은 놈.
주디엘의 표정을 본 라스가 탄식 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괴물에게 듣는 괴물 칭찬도 나쁘진 않군.'
라온은 옅게 웃으며 일주일간 떠나 있던 5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집합 시간보다 10분 정도 빨리 연무장에 도착했다.
아이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160명 중 남은 아이는 42명밖에 되지 않아서 연무장이 텅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4분의 1만 남기다니, 리메르는 평소 보여주는 가벼움과 달리 결과에 대해서는 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으음!"
"또 무언가 달라진 거 같은데…."
아이들이 라온을 보는 눈빛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6개월 전 그들의 눈빛에 조롱과 비웃음, 약간의 동정이 담겨 있었다면 지금은 질시와 놀라움, 동경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만화공에 대해서만 생각하면서 몸을 풀고 있을 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냄새를 맡는 듯한 흥흥거리는 콧소리까지 이어졌다.
'이 걸음 소리는….'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눈을 맹하게 뜬 루난이 있었다.
-저 계집 이젠 냄새를 맡으며 따라온다.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나?
'글쎄. 강아지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해서.'
라온은 어색한 표정으로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 걸음 더 다가와서 멈춰 섰다.
"고마워."
"어?"
뭐지?
갑자기 왜 고맙다는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
루난은 고맙다고 말하고선 밥 주기를 기다리는 고양이 눈이 되었다. 평소와 달리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 응."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루난은 고개를 작게 꾸벅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제 평소와 같은 거리였다.
"음!"
그러고선 해냈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맙다는 말은 왜 한 거지?"
"고마우니까."
"아…."
오히려 루난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저 모양새를 보니, 더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뭐, 뭐야? 저 계집 뭘 하고 싶은 거냐!
'나도 모르겠어.'
전생과 현생을 모두 뒤져도 루난 같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저 맹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모닥불을 보고 있을 때처럼 정신이 탁 풀린다.
다만 방해하는 것도,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감정을 모르기 때문인가?'
상대의 감정을 잘 몰라서 루난이 고맙다고 말한 이유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스도 함께 당황했지만, 저 녀석은 성격 파탄자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당황이라는 감정을 알게 되는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도리안이 녹색 머리칼을 날개처럼 펄럭이며 달려왔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관이라도 만난 것처럼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왔다.
"자,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임시 수련생일 때도 죽을 것 같았는데, 정식 수, 수련생이 된 지금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안 가서 쉬는 동안 계속 악몽만 꿨습니다. 으으…."
도리안은 대답도 듣지 않고, 지 할 말만 주절거렸다. 정식 수련생이 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겁을 내다니 이 녀석도 참 별종이었다.
"그래도 라온 도련님이 수석이라 다행입니다. 만약 버렌 도련님이 수석이셨다면 저, 정말 숨도 못 쉬었을 겁니다. 차라리 시험에 떨어지는 게 나을…"
도리안이 그 말을 할 때 버렌과 방계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히익!"
버렌의 서늘한 눈빛에 도리안이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딸꾹! 딸꾹!"
도리안은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겁에 질린 도리안을 신경도 쓰지 않고 라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일주일 전 네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패했음을 인정한다. 미안하다."
버렌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
"헉!"
"버, 버렌 님!"
그 옆에 있던 수련생들이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리는 버렌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포기한 건 아니다. 그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다시 네 앞에 서겠다. 난 물러서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물론 네게도 질 생각 없다."
버렌은 라온만이 아니라, 루난에게도 손가락을 겨눈 뒤 좌측으로 걸어갔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도리안은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덜덜 떨며 일어섰다.
"저, 저는 어떻게 하죠? 찾아가서 빌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눈동자가 처음보다 2배는 빨리 흔들렸다. 저 상태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버렌의 시선에 박힌 건 자신과 루난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을 거다.
-얻어터지고도 주제를 모르는 놈이로다. 당장 쫓아가서 눈깔을 뽑아버려라.
'저 정도면 대단한 거야.'
이제 13살이 되는 아이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재도전을 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명가 지그하르트의 직계다운 모습이었다.
-대단하고 말고는 상관없다. 본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니, 죽여라.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가 입을 다무니, 다른 놈이 떠든다. 조용할 틈이 없었다.
후우웅!
라스를 분노를 한 귀로 흘리면서 발목을 돌리고 있자, 담장 위로 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살짝 늦었지? 어제 술을 좀 마셔서 늦잠을 좀 잤다. 미안."
상쾌한 녹풍과 함께 리메르가 나타났다. 새가 집을 지은 듯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허허 웃었다.
뿌득!
뒤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렌이었다.
-감히 본왕을 기다리게 하다니, 저 건방진 뾰족귀가 아예 정신이 나갔다! 당장 귀를 찢어버려라!
라스는 참지 못하고 분노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버렌과 라스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리메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잘 쉬었지?"
그가 손을 흔들었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았는지 비실비실한 모양새였다.
"예!"
아이들은 그와 반대로 연무장이 떠나가도록 우렁찬 소리를 질렀다.
"먼저 정식 수련생이 된 걸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뭐, 다 알고 있겠지만 떨어진 녀석들은 본인 의사에 따라 6연무장의 수련에 참여하기로 했다. 친구가 떨어졌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리메르는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오늘부터 정식 훈련을 시작한다. 큰 틀은 변하지 않아. 너희는 정신이든, 체력이든, 무학이든 매번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하게 될 거다. 그게 가장 빨리 그리고 높게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는 기본 단련엔 끝이 없다고 말을 이었다.
다만 하품을 쩍쩍하는 게으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몇 가지 수련이 추가된다. 첫 번째는 오러 연공법. 내일부터 새벽과 저녁 시간에 오러 연공을 하게 될 거다."
오러 연공을 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 새벽과 일몰 시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그렇게 바라던 검술과 권법 수련도 시작한다."
"오오!"
"드디어!"
검술과 권법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리메르가 다음 말을 하려고 할 때 연무장의 문이 쾅 열렸다.
후우욱!
모래 먼지가 피어나는 문 앞엔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왼쪽 어깨로 내렸고, 흑백이 뚜렷한 동공은 진주처럼 반짝였다. 피부는 그와 반대로 눈송이처럼 새하얬다.
"오?"
"어…."
루난과는 색이 다른 단아한 미모에 연무장의 소년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아, 씨벌. 문이 왜 이렇게 안 열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에 소년들의 입이 다른 의미로 또 벌어졌다.
"마침 왔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다가오는 소녀를 가리켰다.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전 기수에서 떨어진 낙제생이다. 앞으로 함께 수련해야 하니까. 인사는 해둬."
"마르타다."
마르타라는 이름을 밝힌 소녀는 턱을 치켜들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외모는 단아했지만, 말과 행동은 뒷골목 양아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래 보여도 착한 아이라니까. 잘 지내주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뭐, 그렇대."
리메르는 히히 웃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 수련생들의 입은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오늘은 간단하게 몸을 풀고, 정규 수련은 내일부터 진행한다. 그럼."
그는 아이들을 한 번씩 훑어보고서 씩 웃었다.
"달려라. 전력으로."
"역시나."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을 박차려고 할 때 앞으로 그림자 세 개가 튀어 나갔다.
루난과 버렌 그리고 낙제했다는 마르타였다.
"도, 도련님."
그들의 뒤를 쫓아서 달리려고 할 때 도리안이 다가왔다.
"저 사람이 여기에 오다니, 어, 어떻게 하죠?"
"저 여자를 알아?"
"모, 모르십니까? 저분도 직계잖아요."
"직계라고? 판별식에서 본 적이 없는데."
"아, 일반적인 직계는 아니죠. 입양되셨으니까요. 오직 재능만 보고."
도리안은 마르타가 글렌의 셋째 아들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딸로 입양되었다고 말했다. 그것도 오직 재능 때문에.
"재능이라."
라온은 버렌이나, 루난보다도 앞서나가는 마르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1살이 더 많긴 하지만, 대충 보아도 그녀의 재능은 보통이 아니었다.
"제가 알기론 마르타님도 라온 도련님처럼 전 기수에서 수석 수련생이었어요."
"그런데 왜 낙제한 거지?"
"패, 팼대요."
"응?"
도리안이 모은 양팔을 덜덜 떨며 말을 이었다.
"수련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수, 수련생 다섯을 반 죽여놨다고 해요. 그중에 직계도 2명이 껴 있었죠."
"직계 둘이라…."
"성격이 더럽다고 하니, 조, 조심하세요."
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땅을 박찼다.
'조심해야지.'
그녀가 나를.
힘을 숨길 생각 따윈 없었다. 덤빈다면 그 누구라도 밟아버릴 것이다.
* * *
"후욱…."
라온은 저녁까지 진행된 체력 단련을 마치고 거친 숨을 뱉어냈다.
"으억…."
"주, 죽겠다."
"일주일 쉬었다고 이런…."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가는 신음을 흘렸다.
"너무 무리하면 내일 훈련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리메르와 교관들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다시 쓰러졌다.
"말했듯이 내일부터는 오러 연공도 함께 실시한다. 지금부터 연공서를 나누어 줄 테니, 오러를 익히지 않은 수련생은 앞으로 나오도록."
리메르의 손짓에 단상 위로 새끼손톱 두께의 책이 올라왔다.
"기본으로 내어주는 연공서라고 실망할 필요 없다. 린덴 오러 연공법은 대륙 어디에서도 통하는 연공법이니까."
대부분은 가만히 있었고, 소수의 평민 출신 수련생들이 앞으로 나가서 연공서를 받았다.
"음?"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그는 아직 오러가 없었으면서도, 앞으로 나오질 않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너도 오러가 없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 얻은 오러 연공법을 익히려고 합니다."
"흐음!"
동급의 패를 이용해서 가주님에게 연공서를 받은 것 같았다.
'은패 이상의 연공법을 주셨겠지?'
글렌은 겉과 달리 라온을 아낀다. 분명 린덴 이상의 연공법을 주었을 것이다.
"오러 연공법을 이미 익히고 있는 수련생은 각자의 방에서 새벽 연공을 하고, 오늘 연공서를 받은 수련생과 라온 지그하르트는 내일 새벽 이곳으로 나오도록."
"저도입니까?"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오러를 익힌 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
"잠깐. 할 말 있어요."
체력 단련을 끝내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마르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수석이 누구지?"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모두를 훑어보았다.
"나다."
라온은 마르타의 새까만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오러도 없는 녀석한테 밀리다니, 직계도, 봉신 가문도 다 죽었나 보네."
그녀는 버렌과 루난을 비웃으며 라온의 앞에 섰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이 위에 있는 걸 못 봐."
마르타의 서늘한 기세가 전신을 휘감았다.
"한판 뜨자."
25화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서 턱을 들었다. 거만한 눈빛.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여기 터가 안 좋은 건가?'
라온이 연무장 바닥을 툭툭 찼다. 도리안이 경고를 해줬지만, 바로 시비를 걸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정말이지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뾰족귀보다, 파란 눈깔보다 건방진 놈이 나올 줄은 몰랐도다. 네 몸을 내놓아라. 본왕이 저 계집을 통째로 얼려버리겠다!
'이럴 줄 알았어.'
마르타의 도발에 라스의 발작도 시작됐다. 느껴지는 분노의 폭을 보니, 평소보다 훨씬 격했다.
"흠."
"마르타 지그하르트."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 옆에서 아이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품위 없게 지금 무얼 하는 거냐."
버렌 지그하르트였다. 서늘한 눈빛으로 마르타를 노려보았다.
"앙?"
마르타가 입매를 구겼다. 명문가의 아이가 보여줄 만한 얼굴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에 발을 담근 인간들이 할 법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누님에게 한 말이야?"
그녀가 웃으며 버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둥이 함부로 놀렸다간 그대로 뒈지는 수가 있어. 다음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교관님과 가주님 앞에서 수석의 자리를 인정받았다. 넌 그걸 부정하겠다는 건가?"
버렌은 본인의 일처럼 나서서 마르타를 막아주었다.
"내가 알기론 너도 시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난리를 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르타의 입꼬리가 빙글 올라갔다. 선이 굵은 비웃음. 수석을 모른다고 한 것과 달리 시험 과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다."
버렌의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내가 보였던 추함을 또 보고 싶지 않아서 지금 네 앞을 막고 있는 거다."
"어엉?"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마르타 지그하르트."
라온이 버렌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버렌의 눈빛은 맑았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상황이 어지러지지 않게 막기만 하려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던 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척!
마르타를 막으려는 사람은 버렌만이 아니었다. 루난이 라온을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왔다.
"너도 같은 생각이야?"
마르타가 루난과 버렌을 훑어보며 히죽 웃었다.
"가."
루난은 뚱한 눈빛으로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물러나라. 마르타."
"내가 말했잖아."
마르타의 눈이 번득였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는다고!"
그녀의 주먹이 대기를 뚫어버리며 버렌에게 쏘아졌다.
후우웅!
오러까지 담긴 주먹이 버렌의 얼굴에 닿기 직전 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퍼엉!
단상 위에 있던 리메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냈다.
"너희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아무리 만만해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 섭섭해."
그는 빙긋 웃으며 마르타의 주먹을 밀어냈다.
"마르타. 넌 그 성질머리 때문에 낙제했다면서 아직도 그대로구나."
"그건…."
"버렌이나, 루난은 몰라도 라온은 네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았어. 그래도 싸우고 싶어?"
"저도 오러를 쓸 생각 없어요."
"그래도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나중에 기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참아."
"칫…."
마르타는 입을 삐죽이면서 한발 물러섰다. 다만 떠나지 않고 버렌을 노려보았다.
"버렌 지그하르트."
"뭐지?"
"너희 형 나한테 얻어터져서 한 달 동안 누워만 있던 거 알고 있지? 건방을 떨려면 실력부터 키워."
"난 형과 다르다."
"그야 보면 알겠지."
마르타는 가늘게 웃고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루난과 버렌도 긴장을 풀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마르타가 뒤를 도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난 건방진 놈들보다 남들 뒤에 숨는 겁쟁이가 더 싫어!"
순식간에 뛰어들어 라온에게 주먹을 내질러왔다.
"헉!"
"아!"
버렌과 루난은 반응하지 못했고, 리메르는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역시.'
라온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면서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놓았을 때 달려들 거라 예상했다.
타악!
가슴을 노리고 내달려온 마르타의 주먹을 손등으로 쳐냈다.
"어?"
"맞을 각오는 됐지?"
꽉 쥔 주먹을 내질렀다. 공호권의 회전이 담긴 주먹이 텅 빈 마르타의 복부를 향해 질주했다.
"헉!"
마르타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이를 악문 그녀의 왼손에 갈색 기운이 어렸다.
터엉!
맨주먹과 오러가 담긴 팔뚝이 맞부딪치며 라온과 마르타가 동시에 밀려났다.
"오러는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라온은 빨갛게 달아오른 주먹을 툭툭 털어냈다.
"너, 너 뭐야!"
흑백이 뚜렷한 마르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당당함만을 드러내던 그녀가 말까지 더듬었다.
"이야!"
"그, 그걸 막았다고?"
리메르가 낄낄 웃었고, 버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익!"
마르타가 갈색 오러를 전신으로 끌어 올렸다.
"거기까지."
그대로 돌진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이상은 허가할 수 없어."
웃고 있지만, 뿜어지는 기세가 날카롭다. 조금 전 장난을 칠 때와는 또 달랐다.
"하지만 전!"
"지금 오러 없이 싸워봐야 불완전 연소일 뿐이잖아. 나중에 라온이 오러를 익혔을 때 제대로 붙어봐. 그땐 허락해 줄 테니까."
"후…."
마르타는 이를 갈며 라온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갔다.
"라온."
리메르가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마르타의 공격을 어떻게 막았지. 꼭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무게중심입니다."
라온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정답을 툭 던졌다.
"무게중심?"
반문은 버렌이었다. 루난 역시 궁금한 듯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여자 등을 돌려놓고서 무게중심은 앞이 아니라, 뒤에 맞췄습니다. 그 방향은 버렌도, 루난도 아니라 중앙인 저였죠. 무조건 달려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작 그걸로…."
버렌은 답을 듣고 나서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고, 루난은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탁 풀렸다.
"흐음!"
리메르가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역시 관찰력과 육체 능력은 대단하네.'
무게중심으로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즉시 반격하다니, 역시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
버렌은 라온과 마르타가 맞부딪친 바닥을 쭉 살펴본 뒤 입술을 깨물고, 연무장을 떠났다.
"단단히 말해뒀으니, 한동안 귀찮게 하진 않을 거다. 대신 나중에 오러를 익히게 되면 마르타와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공호권의 회전은 아예 네 걸로 만들었네."
라온이 마르타에게 날린 주먹엔 회전이 담겨 있었다. 반격 이상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뒤를 돌았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이냐. 본왕에게 주먹을 날린 계집을 그냥 보내다니! 사지를 찢고 만년빙하에 가두어야….
'한 방 날렸잖아.'
-모자르다. 아예 머리통을 부숴놔야지!
'이득이 없어.'
지금 이곳에서 주먹다짐을 해봐야 얻을 게 없다.
나중에 그녀에게서 얻을 게 있을 때 수석 자리를 걸고 내기를 하는 게 훨씬 도움 된다.
-크으으, 통째로 얼린 뒤 부숴버려야 하건만….
'기다려. 더 시원한 모습을 보게 해줄 테니까.'
라온은 웃으며 연무장을 떠났다.
* * *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연무장으로 나왔다. 혼자서 연공을 하고 싶었지만, 지시가 내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
수련생 대부분이 오러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연무장에 나온 사람은 8명이었고, 전부 평민 출신 수련생이었다.
"도, 도련님."
도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오, 오러를 익히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요? 거기다 단전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는 말도 있고…."
그 말이 아예 잘못된 건 아니다. 실제로 좋지 않은 연공법을 익히다가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지그하르트에서 제공하는 연공법은 안정적이고, 주변에 뛰어난 교관도 있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괜찮을 거다."
도리안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을 읊어주었다.
"그, 그렇겠죠? 도련님이 말씀하시니까 좀 안정이 되네요."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 정말 괜찮겠죠? 아무리 안정적이라고 해도 위험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저라면 다 끝장나잖아요! 어, 어떻게 하지? 죽으면…."
"...."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말해도 도리안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딱히 녀석을 신경 쓸 이유도 없었고.
"오늘은 안 늦었지? 딱 좋은 시간이네."
리메르가 평소처럼 담을 넘어 들어왔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곧 해가 뜰 테니, 바로 시작하자."
"예!"
오러를 익힌다는 기대감에 아이들이 평소보다 훨씬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다른 아이들이 먼저 오러를 익히고 있다고, 뒤처졌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 오러는 평생을 익혀야 하는 무학. 다른 아이들이 딱 한발 먼저 갔다고 생각해라."
"예!"
"그럼 옆에 있는 교관과 함께 개인 연공실에 들어가라. 너희가 안정적인 연공에 들어갈 때까진 교관들이 도와줄 테니, 궁금한 거 힘든 거 다 말해."
리메르가 손뼉을 치자, 뒤에 물러서 있던 교관들이 아이들을 개인 연공실로 데리고 갔다.
"음."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었다.
"넌 혼자 개인 연공실로 들어가라."
"그럼 절 왜 부르신 겁니까?"
"연공서로 연공법을 익히다 보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거든. 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마음 놓고 연공해."
"...."
못 믿겠는데.
지금까지 봐온 리메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연공실에서 죽어가도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다.
"그 눈은 뭐냐? 나 못 믿어?"
"아닙니다."
고개를 젓고서 연공실로 들어갔다. 도움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적당히 호법 정도만 서주면 충분하다.
"후욱."
라온이 눈을 감고, 만화공의 운용을 시작하자, 그의 어깨 위로 새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시작해볼까.'
* * *
리메르는 라온이 연공실에 들어가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기감을 풀었다.
'뭘 얻었나 볼까.'
펼쳐낸 기감으로 라온의 연공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파동을 읽어보았다.
'화속성이군.'
뜨겁고 역동적인 마나가 라온의 주변에서 휘몰아쳤다.
'보통 연공법이 아닌데?'
라온의 마나 회로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정상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 막 터진 용암처럼 폭발적인 기운. 오러 연공법을 습득 중인 상태에서 저 정도 마나가 움직이다니, 평범한 연공법이 아니었다.
'저건 동색의 패가 아니라, 금패를 줘도 얻지 못할 수준인데?'
린덴 연공법을 익히는 아이들에게 상위 연공법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라온의 것은 달랐다.
직계들이 배우는 연공법 그 이상.
저 연공법을 제대로 습득하게 된다면 라온의 단전에서 대체 어떤 오러가 생겨날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오러의 흐름이 굉장히 난해하다. 습득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음?'
리메르가 가는 눈썹을 내렸다. 뜨거운 기운이 내달리는 라온의 마나 회로. 그 안에서 서늘한 한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
라온이 움직이는 기운을 느끼고 나자, 자연스레 입이 떡 벌어졌다.
'마나 회로의 냉기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기운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어!'
라온은 열기로 지워지는 냉기를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단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마나를 처음 다루는 놈이라고?'
연공법을 배운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녀석이 마나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오러 연공법이 특징이 아니라, 저 녀석의 재능이야.'
뛰어난 연공법 이상으로 라온의 마나 제어 능력이 놀라웠다. 뱃속부터 마나를 통제해 왔어도 저 정도는 아닐 거다.
'육체와 무학의 흐름만이 아니라, 마나에도 재능이 있었다니….'
라온은 판별식에서 마나에 최하위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버렌이나, 루난보다도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저 녀석이 저 연공법을 제대로 익힌다면….'
리메르는 기대감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라온 지그하르트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연공실 밖으로 나왔다.
"라온."
리메르는 단상에서 내려와 라온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수련해라."
"예? 어제는 앞으로 매일 나오라고…."
"됐으니까. 숙소에서 수련해."
숙소의 벽은 마법 처리가 되어서 오러 연공을 해도 외부에서 느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라온의 오러 연공법을 느꼈다간 심한 견제가 들어 올 가능성도 있다. 마법 처리가 된 숙소에서 연공하는 게 나았다.
"내가 한 번씩 가서 봐줄 테니까."
"교관님이요? 음…."
"나라고 항상 게으르진 않거든?"
"알겠습니다."
라온은 평소처럼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바로 알려드려야겠지.'
리메르는 라온의 몸에서 퍼지는 뜨거운 마나의 잔향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 * *
리메르는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알현실을 찾아갔다.
"요즘 자주 찾아오는군."
석상이라도 된 듯 옥좌에서 움직이지 않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중앙의 붉은 카펫을 걸어왔다.
"마르타가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듣던 것보다 성격이 더 뜨겁더군요."
"그 아이는 또래의 누군가에게 패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을 거다."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라온과 살짝 부딪침이 있었습니다."
리메르는 어제 일어났던 라온과 마르타 그리고 버렌과 루난의 대립을 말해주었다.
"그런가? 그 아이들이 벌써…."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 속에 자그마한 기쁨이 떠도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라온에게 대체 무얼 주신 겁니까?"
리메르는 라온에게 보여준 모습과 달리 놀란 티를 내며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정돈된 흐름을 가진 연공법은 처음입니다. 거기다 그게 화속성이라니…."
"만화공이라는 연공법이다."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만화공?"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지."
"아,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구나. 그러니 그런 수준의… 어? 어어?"
리메르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초, 초대 가주요?"
"그래."
"허, 금패나 은패급의 연공법을 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초대의 연공법을 넘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주님이 라온을 아끼긴 아끼시는군요."
"만화공이 라온을 선택했을 뿐이다. 난 그 아이에게 그걸 넘겨줄 생각이 없었어."
"음…."
글렌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마도 그 안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던 모양이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냐."
"그게 아니라, 라온에 대한 이야깁니다. 그 녀석의 재능은 역시 정상이 아니에요. 무학만이 아니라, 마나에 대한 재능도 무시무시합니다!"
리메르는 오늘 본 라온의 마나 흐름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판별의 검은 평범 이하로 나왔다면서요. 그거 어디 망가진 거 아닙니까?"
"...."
글렌 지그하르트는 팔걸이를 쥐던 손을 떼서 턱을 쓸었다.
'마나에 대한 재능도 있다라….'
모두가 나간 후 판별의 검에 금색 불길이 빛났던 건 역시 라온의 능력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 아이의 몸 상태는 괜찮나?"
"여전히 땀이 차갑고, 입에서는 냉기를 뱉어냅니다. 몸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훈련 후에는 오히려 더 편안해 보입니다."
"음…."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릭이 말해준 대로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라온은 육체와 마나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관찰력과 통찰력에 침착함까지 있죠. 또 하나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재능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라온에게 그런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녀석은 너무 어려."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죠. 사실 전 예전부터 아드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리메르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글렌을 올려 보았다.
"전 당신이라는 불꽃을 보고 지그하르트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 중엔 제가 따르고 싶은 왕이 없습니다."
"너 설마 그래서 교관으로…."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리메르다.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교관이 된 이유가 스스로 왕을 찾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라온도 자격이 주어진다면 후계자에 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잘되었군요."
리메르가 진녹색 안광을 발하며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만 더. 라온에겐 재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뭐, 그건 저보다 가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알현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 말을 흘리고 문을 닫았다.
"그래. 잘 알고 있다."
글렌은 텅 빈 알현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도."
26화
라온이 만화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벽과 저녁에 이어 밤에도 연공을 지속했지만, 오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특별한 연공법은 무엇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만큼 습득 난이도도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함께 운용하기에 성취가 더딘 것도 있었지만.
'천천히 하자.'
연무장 중앙에 선 라온이 덤덤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불의 고리가 있으니까.'
불의 고리가 있는 이상 육체와 마나적인 재능은 언젠가 끝까지 차오른다. 지금은 조급하게 발을 내디딜 때가 아니라 더 단단하게 토대를 다질 때다.
터엉!
정규 훈련 시간이 되자마자, 연무장 문이 시원하게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로 지각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오전 시간에는 무학을 배운다."
"오오!"
"우와아아아!"
"드디어!"
"검술이다! 검술!"
아이들은 손을 들어 올리며 왁왁 소리를 질렀다.
수련생들은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한 달 동안 체력 단련만 해왔다. 저런 환호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대륙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떨친 건 검술이지만, 권법도 그에 못지 않다. 지금부터 기본 권법의 형태를 보여주겠다."
리메르는 보여주겠다고 말해놓고 단상에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그가 하품하며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 권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칠형권이군.'
일곱 가지 형태를 갖춘 권법이자, 모든 권법의 기본이 되는 주먹질이었다.
형을 알고는 있지만, 익힌 적은 없었다. 전생에서 내뻗은 손은 항상 적을 단숨에 죽이기 위한 칼날이었으니까.
"아, 칠형권…."
"저건 이미 아는데."
"에휴, 지겹겠네."
칠형권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익혔던 권법이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루한 표정들이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희 중에 칠형권을 미리 배워온 녀석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익혔다는 걸 확인하면 바로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게 해주마."
"다음 진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겁은 많은 주제에 궁금한 게 많은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는 같은 수련생 신분이지만, 같은 수준은 아니다. 즉, 똑같은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내가 정한 선을 넘기만 한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보내주마."
리메르는 지난 수련 방식은 너무 고루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좋네. 마음에 들어."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방긋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또 지루한 칠형을 배울 줄 알았는데, 이게 맞지. 뛰어난 인간이 뒤떨어지는 인간에게 맞춰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어쨌든 지금부터 각자의 자리에서 방금 보았던 칠형권을 재현해라. 말했듯이 내 마음에 들면 바로 다음 수련을 시작하게 해주마."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칠형권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기초가 잘 잡혀있군.'
라온은 주변에서 칠형권을 펼치는 아이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괜히 명가가 아니야.'
기본이라 어설프게 배우고 넘어갔을 줄 알았지만, 아이들은 정확한 방향과 힘을 가지고 주먹을 뻗어내고 있었다.
"흠, 역시."
리메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버렌 지그하르트, 루난 슬리온,…."
그가 제대로 된 칠형권을 선보인 수련생의 이름을 부르자, 중앙에 남은 인원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라온 지그하르트도 있었다.
* * *
"흠."
리메르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펼치는 칠형권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그의 주먹질은 제대로 된 형이 잡혀있진 않은 날것이었다. 실비아에게 들었던 대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라온은 버렌이 사용한 공호권의 흐름을 따라 한 적이 있으니, 며칠 안에 완벽하게 숙달할 수 있을 거다.
'다른 아이들도 좀 볼까….'
라온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글렌에게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도 제대로 살폈다.
'나쁘지 않군.'
추천을 받아서 들어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눈과 육체가 뛰어났다. 저 아이들도 금세 칠형권을 익혀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경쟁이 좋다니까.'
이건 오래달리기나 마찬가지다.
앞서 나아가는 아이들은 후위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뒤의 아이들은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훈련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리메르는 칠형권을 통과한 마르타와 버렌, 루난을 비롯한 수련생들을 살폈다.
마르타는 2단계에서 배워야 할 권법까지 완벽하게 익혔기에 3단계 벽력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
마르타가 중간에 낙제하긴 했지만, 그건 실력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다. 저 아이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다른 수련을 준비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거친 성격을 조금 유하게 만들 방법도 같이 생각해 보고.
'저쪽도 잘하고 있네.'
버렌과 루난도 2단계에서 배우는 진승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저 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3단계 벽력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리메르는 드러누운 채로 노트에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적었다.
'자, 그럼 다시…어?'
연무장의 아이들을 모두 훑어본 뒤 다시 라온에게 향한 리메르의 동공이 출렁였다.
'뭐야….'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이 짧은 순간에 라온 지그하르트의 권로에 칠형권의 형태가 새겨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리메르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라온은 마르타, 루난, 버렌과 다르다. 분명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건만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칠형권이 아무리 기본 권법이고, 따라 하기 쉽다고 해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성장을 하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뭐 이런 괴물이….'
마나 운용 능력에 놀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무학 습득 능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후."
라온이라고 특별취급을 할 생각은 없었다.
권법의 기본을 확실하게 다진 뒤 다음 단계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빠르게 다가올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일지도….'
* * *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경쾌하게 주먹을 내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교관들은 마음에 드네.'
지금까지 뒤떨어지는 놈들을 기다려왔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재능 없는 사람은 그 발판이 되는 게 옳은 방식이었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칠형권을 배우는 아이들이 보인다.
자신이 저걸 익힌 건 2년 전. 이제야 저 권법을 배우는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건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저들이 칠형권을 익힌 뒤 2단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은 벽력권을 끝내버리고 검술을 시작하고 있을 테니까.
'저 녀석도 있군.'
마르타는 중앙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스스로 훈련에 참여한 후 결국 수석을 따낸 별종.
한 달 전 자신의 기습을 막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감각도 움직임도 뛰어났었다. 재능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13살이 되어서야 오러를 익히고, 권법을 시작한다는 건 출발 신호가 울리고 한참 뒤에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녀석이 날 따라잡을 일은 없겠군.'
자신의 오러는 이미 3성의 경지에 올랐고, 권법만이 아니라 검술들도 섭렵한 상태다.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시작한 버렌이나, 루난이면 모를까. 라온은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발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낮은 발판에 불과했다.
"흥."
마르타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라온에게 관심을 끄고, 벽력권의 수련에 정신을 집중했다.
해가 질 때까지 벽력권의 성취를 올리고 있던 마르타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가씨. 직계 수련을 할 시간입니다."
그녀의 집사인 카멜이었다.
"알겠어."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수준 낮은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한심해."
"라온 지그하르트."
그들을 비웃으면서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격이다. 다음으로 가도록."
바람을 탄 듯한 가벼운 음성에 뒤를 돌았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하루. 아니, 고작 반나절 만에 칠형권을 완성 시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4일이 걸렸는데.'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지그하르트에 입양된 자신조차 4일이 걸려서야 칠형권을 익혔다.
저 발판 놈이 고작 반나절 만에 그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다음 권법을 알려주시죠."
"이미 해가 졌잖냐. 귀찮으니까. 내일 하자."
"귀찮다니 교관이 할 말이 아니…."
"잠깐."
마르타가 대화 중인 라온과 리메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교관님. 지금 저 녀석이 합격했다는 건가요? 오늘 배운 칠형권을?"
"그래."
리메르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고 너무 대충 통과시키는 거 아닌가요?"
"대충?"
"칠형이 아무리 기본 권형을 담고 있다고 해도 각을 잡으려면 꽤 시간이 걸려요. 저 녀석이 그 각을 반나절 만에 완성했을 리 없을 텐데요."
"당연히 완성은 아니지. 다만 진승권으로 넘어갈 수준은 돼."
"하, 그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겁니다."
"흐음…."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다가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라온. 한 번 보여줘."
"싫습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교관님의 통과 선언을 들었는데, 뭐하러 다시 해야 하죠?"
"너…."
"그럼 내일 알려주려고 한 진승권을 지금 알려주지."
마르타가 나서기 전에 리메르가 먼저 입을 뗐다.
"후, 알겠습니다."
라온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렸다. 호흡을 멈추고 주먹을 뻗어낸다. 묵직한 정권이 저녁 공기를 뚫었다.
발을 앞으로 내밀며 좌측 주먹을 내지른다. 꺾여 오는 방향이 흡사 부메랑과 같았다.
우측으로 회전하며 허리춤에 놓았던 오른 주먹을 후려친다. 경쾌한 바람에 마르타의 앞머리가 나풀거렸다.
그 뒤로 이어진 라온의 자세는 표홀하면서도 박력 넘쳤다. 그는 칠형권의 일곱 가지 형태와 기세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꿀꺽.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가 대충 넘긴 게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정말 반나절 만에 칠형권의 형과 의를 익혀냈다.
"너 미리 알고 있었지!"
"아니."
라온은 뭔 헛소리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끄…."
할 말이 없었다. 아까 보았을 때 라온의 주먹질은 분명 초보자 수준이었으니까.
"어때 마르타. 이 정도면 인정할만하지?"
리메르가 자신을 놀리듯이 끌끌 웃었다.
"저걸 반나절 만에?"
"내가 뭘 본 거지?"
"와…."
"진짜 미쳤네."
교관들과 아이들도 놀라웠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 정도는 나도 했어."
마르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서 등을 돌렸다.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괜찮아.'
고작 칠형권이다. 검술도 아닌, 권법의 기초 중 기초. 저걸 조금 빨리 익혔다고 해도 자신을 따라잡는 건 무리다.
그래.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마르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직계 훈련장으로 향했지만, 머릿속엔 라온이 휘두른 주먹의 궤적이 깊게 남았다.
* * *
"어쩌라는 건지."
라온은 손을 털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서 그러는 거다."
리메르는 연무장을 떠나는 마르타를 보며 픽 웃었다.
"사실 나도 놀랐어. 너 정도로 빠르게 습득하는 녀석은 처음 봤거든."
"칭찬은 감사하지만, 다음 권법부터 알려주세요."
"하, 그래야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허리와 손목을 풀고서 하늘을 보았다.
"근데 라온."
"네?"
리메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내일 보자!"
그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시야를 가린 뒤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재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 막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본왕이 전에 말했잖느냐. 저 뾰족귀는 뒤통수칠 관상이라고. 전장에서 네놈을 버리고, 홀로 도망칠 놈이니라.
언제부터 점쟁이가 되었는지, 라스는 리메르의 미래에 대해서도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라온은 입맛을 쩝 다셨다. 리메르의 반응을 보았을 때부터 저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난 지금부터 직계만 받을 수 있는 훈련을 받으러 간다."
알고 있었다. 저녁 이후 수련생들이 개인 단련을 하는 동안 직계들은 추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불합리하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꺾을 거다."
그는 잠시 라온을 노려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저 건방진 눈깔은 여전하군. 언젠가 꼭….
'아니, 달라졌어.'
라온이 버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 달 전부터 버렌의 눈빛이 맑아졌다.
경쟁심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추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박.
뒤에서 들린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넌 안 가?"
"안 가."
"가는 게 좋지 않나?"
"안 가."
"강한 검술도 배우고…."
"안 가."
루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쯥."
라온이 입맛을 다시고서 단련실로 향했다. 뒤에서 루난이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사박사박하게 들려왔다.
27화
"후욱!"
버렌 지그하르트는 벽력권의 형을 차례로 펼쳐낸 뒤 거친 숨을 뱉어냈다.
'쉽지 않네.'
2단계인 진승권은 본관에 있을 때 배워놓아서 어렵지 않게 통과했지만, 3단계 벽력권의 습득은 쉽지 않았다.
기본 권법안에 고급 묘리가 어우러져 있어서 익히기 난해한 권법이었다.
'그래도 다음 주 정도면 끝낼 수 있겠어.'
본관에 있을 때 권법 기초를 확실히 익혀둔 덕분에 점점 자세가 잡혀갔다. 벽력권을 익힌 지도 2주가 넘었기 때문에 다음 주 안에 통과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다시.'
버렌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다시 벽력권의 수련을 시작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수련복이 젖어서 몸에 달라붙을 때까지 권법을 반복하던 그가 자세를 바로 했다.
후웅!
천천히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우측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긴 흑발의 미소녀가 세차게 수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는 한참 전에 권법을 끝내고 가장 먼저 검술에 진입했다.
완벽한 자세와 정립된 형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수준의 검술이다. 성격은 지랄맞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르타의 진도는 수련장 누구보다 빠르고, 실력 역시 가장 뛰어나다. 교관 모두가 깜짝 놀랐을 정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뒤에서 굶주린 맹수가 쫓아오는 것처럼 짜증과 긴장이 가득 찬 표정으로 검술을 펼쳐냈다.
'하긴 저럴 수밖에 없지.'
버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하루 만에 칠형권의 형태를 잡고, 진승권의 습득을 10일 만에 끝낸 괴물이 뒤에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거다.
어이가 없지만, 지금 라온은 자신과 똑같이 벽력권을 수련하고 있었다.
후웅!
라온이 내지르는 주먹에 공기가 휘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고, 땅을 구르는 발에 연무장의 바닥이 들썩인다.
그의 손짓과 발짓엔 벽력권의 묘리가 확실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괴물 같은 놈.'
주변에서 천재이니, 괴물이니 소리를 듣고 자라왔지만, 그걸 남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수련생이 되기 전 진승권을 한 달 동안 익혔는데도, 3일의 추가 수련을 끝내고 나서야 벽력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도 빠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달 동안 익혀도 대단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라온은 고작 10일 만에 그 경지를 따라 잡아버렸다. 그것도 단순히 형만 익힌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묘리까지 권법에 담아냈다.
'저대로라면.'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검술로 넘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
버렌이 가는 한숨을 뱉었다. 사실 라온을 살피며 놀란 건 그의 재능만이 아니다.
'노력과 정신력.'
라온은 훈련 시간에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입에선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오면서 전신은 땀에 젖는다.
제삼자가 보아도 정상을 벗어난 몸 상태건만 녀석은 그 어떤 훈련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나, 끝까지 하겠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걸 실제로 이루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놈은 하지.'
라온은 매번 가진 모든 걸 소모해가며 훈련에 최선을 다한다.
리메르가 말했던 자신의 한계를 넘어 실력이 가장 빨리 느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볼 때마다 놀라게 만들어.'
라온을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감탄이 나온다. 녀석은 이 수련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버렌. 손이 멈췄다. 쉬려면 휴식장에 가라!"
"아닙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교관의 외침에 버렌이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뱉으며 머리에 가득 찬 상념을 흘려보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라온에게는 절대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녀석의 정신력을 본받아서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파앙!
버렌은 정신을 집중하며 꽉 말아쥔 주먹을 내뻗었다.
* * *
후웅!
눈앞에 적이 있는 것처럼 광기를 담아 검을 내리치던 마르타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꾹 말아 쥐었다.
'짜증 나.'
이 연무장에서 유일하게 검을 잡고 있음에도 참기 힘든 짜증이 밀려왔다.
'이건 모두….'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눈길을 돌렸다. 허연 입김을 뱉으며 주먹을 날리는 놈이 보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놈을 보자,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벌써 벽력권에 들어갔다니.'
자신이 검에 진입하는 동안 라온은 두 가지의 권법을 모두 습득하고, 벽력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버렌이나, 루난처럼 권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처음 익혀서 저런 발전 속도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망할….'
뒤에서 쫓아오는 전율적인 재능. 언제 선두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저 자리는 내 거였는데.'
지그하르트에 입양된 이후 추격자는 항상 자신이었다.
천재라고 우쭐대고 잘난 척하는 직계와 방계들을 추월하여 놈들이 절망하는 모습을 비웃어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 역할이 반대가 되자, 쫓긴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후웅!
마르타는 점점 더 거대해지는 라온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서 검을 내리쳤다.
짜증이 가득 담긴 수련검의 칼날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그녀는 중천에 뜬 태양이 서산에 걸릴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후욱…."
마르타가 긴 숨을 뱉으며 검을 내렸다. 종일 검을 휘두르고 나니,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측을 보자마자 다시 인상을 쓰게 된다. 라온의 권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었으니까.
'저 망할 놈은 지치지도 않나?'
극한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하루종일 수련하다니, 악바리도 저런 악바리가 없었다. 뒷골목에서 살 때 본 적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쯧."
마르타는 해가 떨어진 걸 확인한 후 몸을 돌려 연무장을 나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 카멜이 고개를 숙여왔다. 대답할 힘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가씨."
카밀이 걸음을 빠르게 맞추며 마르타를 불렀다.
"그리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최근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주어서 모두 잊고 있지만, 라온 도련님은 큰 약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카멜은 기합 소리가 들려오는 연무장을 힐끔 보고서 빙긋 웃었다.
"병 말하는 거야? 그놈은 독종이라 통증 따윈 신경 쓰지 않아."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라온 도련님은 오러에 대한 재능이 최하 수준입니다."
"뭐?"
"아가씨께서 입양되기 전이니 모르시겠지만, 판별식에서 라온 도련님의 마나 감응력은 최저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카멜은 단전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현재 5 연무장에서 오러를 익히지 못하신 분은 라온 도련님 한 명 아닙니까?"
"맞아."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달 전에 리덴 연공법을 배운 수련생들은 모두 단전에 오러를 안착시켰다.
카멜의 말대로 수련생 중에서 오러를 익히지 못한 사람은 라온뿐이다.
"동패로 얻을 수 있는 연공법이라고 해봐야 중급에서 중상급. 린덴보다 조금 뛰어난 연공법이죠. 그런데도 아직 연공법을 습득하지 못한 걸 보면 그분의 마나 재능은 판별식에서 나온 대로 최저 수준일 겁니다."
"아!"
"아무리 검술과 권법에 재능이 있어도 오러에 대한 재능이 미약하다면 제대로 된 무인이 될 수 없습니다."
카멜은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랬군."
마르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턱을 끄덕였다.
'오러에 대한 재능이 없는 거였어.'
라온이 가진 무학적 재능이 너무도 뛰어나서 잊고 있었지만, 놈은 지금까지도 오러를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오러 재능이 약한 무인은 반쪽짜리라는 말이 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무학에만 재능을 몰아받은 반쪽짜리 무인이었다.
"후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난 시간 동안 잠까지 설쳤던 불안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괜한 걱정이었네. 신경 쓸 필요 없는 놈에게 관심을 줬어."
마르타는 쇳덩이를 뺀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직계 수련장으로 향했고, 카멜은 그 뒤를 따르며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은 잠시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벽력권의 묘리와 흐름을 몸과 정신에 때려 박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을 흘러내리고, 입에선 눈처럼 하얀 김을 뿜어졌다. 누가 봐도 지친 기색. 하지만 그의 얼굴은 태양을 마주한 듯 밝았다.
"후."
라온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옅게 웃었다.
'점점 즐거워지는군.'
교관이 보여준 움직임은 1mm의 오차도 없이 머리에 새겨지고, 그 흐름과 형태가 육체를 통해 재현된다.
무학을 익히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전혀 몰랐다.
'당연한 건가.'
전생에선 무학이 아니라, 생존법과 살인법만을 배웠다. 성장하는 건 오직 사람을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오러를 늘리고, 살인검을 수련하는 건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내 한 몸이 으스러지고, 찌그러져도 적을 죽일 방법만을 몸과 정신에 새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칠형권도, 진승권도, 벽력권도 기초적인 권법이지만, 그걸 배우고 익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위한 발전이니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수련을 하게 되니, 힘들어도 웃음만 나왔다.
'고통도 견딜 만해.'
통증만 따지자면 마나 회로의 냉기 때문에 지금이 전생보다 더 고통스럽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고양감에 몸을 멈출 수 없었다.
불의 고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육체를 강화한다.
권법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까지 성장하는 게 느껴지니, 훈련이 즐겁기만 했다.
-그런 기초적인 몸부림을 익혀서 어디다 쓰려는 것이냐. 본왕에게 몸만 넘긴다면 당장 대륙의 정점에 서게 해주마.
'거기에 내 의지가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어.'
아무 의미도 없이 남의 명령을 따르는 건 전생의 삶으로 충분하다. 몸을 넘겨서 얻게 된 최강 따위는 필요 없다.
-멍청하군. 너처럼 허약한 놈은 평생을 노력해도 그 위치에….
'흐흠.'
기분이 상쾌하니, 라스의 개소리에도 웃음이 나왔다.
파앙!
라온은 라스의 말을 리듬 삼아 벽력권의 자세를 순서대로 펼쳤다. 수련을 통해서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배워나가는 것 같았다.
후우웅! 후웅!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내지르고, 잠시 호흡을 조절할 때 수련생 중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 저기 수석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뭐지?"
"그 진승권의 마지막 자세가 잘 안 되는데…."
"우측 발을 조금 더 벌려.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라온은 수련생의 자세를 보자마자, 문제를 파악했다.
"아! 감사합니다!"
수련생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단번에 이해했는지 지적한 부분을 고쳐 제대로 된 자세를 잡았다.
"와, 한 번에 고쳐졌어!"
"권법의 천재라니까!"
"교관보다 더 잘 보는 거 같아."
수련생들은 서로의 자세를 확인한 뒤 라온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라온은 수련생들이 놀라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권법 수련을 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 오러 연공을 준비했다.
날이 갈수록 성취가 폭발하는 권법과 달리 만화공의 습득은 지지부진했지만, 라온의 표정은 덤덤했다.
'처음부터 오래 걸릴 줄 알았으니까.'
머릿속에 든 만화공의 내용을 모두 훑어보고 깨달았다.
만화공은 불의 고리처럼 전설급의 연공법이다.
제대로 익힌다면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오러를 사용할 수 있으니, 습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거기다 냉기도 함께 흡수하고 있으니까.'
라온은 만화공의 열기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도 함께 운용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기운을 동시에 순환시키는데, 그 기운이 쉽게 단전에 안착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당장의 성취가 느린 건 맞다.
하지만 만화공을 습득하고, 냉기를 모두 흡수했을 때의 보상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불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첫 번째 꽃을 피워낼 때가 기대되네.'
라온은 만화공의 화염에서 피어날 꽃 한 송이를 그리며 눈을 감고, 연공에 빠져들었다.
28화
마르타의 수련검이 초여름의 선선한 공기를 가른다.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연계. 지그하르트의 기본 검술 중 하나인 연성검이었다.
후우웅!
그녀는 전장의 한복판에 선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 강렬한 기세에 연무장에서 피어오른 모래조차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후우웅!
그런 마르타의 우측에서 비슷한 검풍 소리가 들려왔다. 금발적안의 소년.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그의 뭉툭한 수련검은 마르타와 똑같이 연성검의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한참 뒤떨어졌던 라온이 결국 마르타를 따라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본 마르타의 얼굴엔 예전 같은 초조함과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라온에게 박수를 보냈다.
"잘하네."
마르타가 수련검을 내려놓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학을 배우는 속도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야. 그런데…."
그녀는 말을 살짝 끌며 손가락을 돌렸다.
"마나 감응력이 그따위라면 돼지 목에 진주나 다를 바가 없지. 그런 반쪽짜리 재능은 별로 부럽지가 않네."
마르타의 목소리는 컸다. 수련생 모두가 그 말을 들었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오러와 무학에 대한 재능이 반씩 있는 게 낫지. 네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건 검술 교관 정도일까?"
라온에게 도움을 받은 수련생도, 버렌도, 옆에 서 지켜보던 리메르와 교관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마르타가 더욱더 진한 비웃음을 흘렸다.
'저 멍청이가 4달 동안 오러를 익히지 못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니까.'
오러 수련이 정규 훈련에 들어간 지 4달이 넘었지만, 라온은 오러를 익히지 못했고, 그의 단전은 빈털터리였다.
'처음엔 식겁했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라온을 보며 진심으로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재능이 쫓아오는 공포에 잠조차 설칠 정도.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해도 그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카멜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정말 반쪽짜리였어.'
라온이 판별식에서 최악의 마나 감응력을 보여주었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연공을 시작하고 4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단전에 오러를 만들지 못했다.
검술이나 권법을 아무리 잘 배우고, 익히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 주먹과 검에 담겨야 할 힘이 없는데.
"후후."
마르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검을 휘두르는 라온을 비웃으며 턱을 틀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었어.'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라온은 버렌이나, 루난은커녕 겁쟁이 도리안 수준도 되지 않았다.
다만 라온에게 반격을 당했던 건 아직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다.
'이제 잊어도 되겠네. 오러를 쓰는 대결에선 상대조차 안 될 테니까.'
마르타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응?"
루난 슬리온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
"할 말은 그것뿐?"
"가."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거야. 수준 높은 수련을 할 시간이거든."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주고, 연무장을 떠났다.
후웅!
마르타가 한껏 조롱하고 떠났지만, 라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며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빨간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직 검뿐이었다.
* * *
라온은 야간 수련까지 끝낸 뒤 실내 단련장을 쭉 둘러보았다.
'다 돌아갔나.'
내일부터 이틀간 휴일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후…."
라온은 들뜬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검술에만 집중했더니, 밤이 된 줄도 몰랐다.
암살하기 직전의 집중력과 같은 수준. 수련할 때 발휘하기 어려운 극한의 집중력이었다.
'검술이 꽤 늘었는데.'
검에만 집중한 덕분에 연성검의 성취가 꽤 올라갔다. 조금만 더 익히면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냐!
오늘 수련에 만족하고 있을 때 분노로 가득 찬 라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도발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니. 한심한 놈!
'도발?'
-그 검은 머리 계집이 계속 주절거렸지 않느냐!
'아, 그랬어?'
라온이 픽 웃었다. 수련에 집중하느라, 마르타가 떠드는 것도 몰랐다.
-본왕에게 그따위 말을 주절거렸다면 전신을 얼린 뒤 갈기갈기 깨부숴버렸을 거다!
'전에도 말했잖아. 지금은 싸워봐야 이득이 없다고.'
지금 도발에 넘어가서 싸워봐야 마르타에게 뽑아 먹을 게 없다.
수석 자리를 걸고, 그녀에게 내기를 걸어 영약이나, 무학서 하나라도 챙기는 게 훨씬 낫다.
'어차피 뭘 해도 이길 수 있으니까.'
만화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르타 같은 애송이를 이기는 건 간단하다. 그녀에게 괜찮은 보물이 들어왔을 때가 싸움을 걸 때다.
'일단 돌아갈까.'
라온이 정리를 끝내고 단련장의 마법 등을 끄려고 할 때 문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
작고 가벼운 발소리. 매일 들어서 알 수밖에 없는 루난의 걸음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루난이 서 있었다. 평소처럼 맹한 눈이 아니었다.
"자."
그녀가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벽돌보다 조금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뭔데?"
루난은 대답하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과 함께 솟구친 새하얀 냉기 아래 엄지손가락만 한 구슬이 하나 있었다.
"어…."
라온은 상자에 든 구슬과 루난의 보랏빛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가져가라고?"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상자에 담긴 구슬을 손에 올려주었다. 손바닥 위로 기분 좋은 시원함이 올라왔다.
"먹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뭐지?'
이게 뭔지 모르겠다. 다만 저렇게 냉기가 모여 있는 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걸 보면 귀한 게 분명했다.
"음…."
암살자의 삶에서 배운 대로라면 먹지 않아야 하지만, 루난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감에 손이 움직였다.
"후…."
이 녀석이 이상한 걸 주진 않겠지.
눈 딱 감고 구슬을 입에 넣자, 혀끝에서 바로 녹아내렸다. 초콜릿을 얼린 듯한 시원한 단맛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하고 달콤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런 맛이 있다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단맛이다! 아니, 시원함 때문에 단맛이 올라간 건가? 더, 더 가져와라! 더 먹어보고 싶다!
감각을 연결했었는지 라스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펄쩍펄쩍 뛰었다.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라스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어때?"
"마, 맛있네."
"구슬 아이스크림이야."
루난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선 그대로 단련장을 나갔다.
"어? 야!"
손짓하며 불렀지만, 루난은 돌아보지 않았다.
-…별종이로다. 근데 하나만 더 줬으면 좋았을 것을.
'걱정해준 건가.'
루난은 오늘 마르타가 대놓고 조롱한 것을 걱정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준 것 같았다.
별관에서 가끔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긴 했지만, 이런 형태와 맛은 처음이었다.
상자의 크기를 보았을 때 끽해야 아이스크림 4개가 들어가 있었을 텐데, 그중 마지막 하나를 건네준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걸 주다니.'
루난은 아이답게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에 집착을 가질 만도 한데, 망설임 없이 건네다니 보통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아껴둔 간식을 들고, 우물쭈물하는 루난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 참."
라온이 픽 웃었다. 저런 아이까지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근데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이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누구보다도 높고, 험난한 길. 그리고 만화공은 그 길을 더 쉽게 걸어가게 해줄 길잡이다.
그런 뛰어난 길잡이가 쉽게 힘을 빌려줄 리가 있겠는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나중에 보답 좀 해야겠네.'
라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훈련장을 나왔다. 지쳐있던 발걸음이 풀잎처럼 가벼워졌다.
* * *
"세상에! 라온 도련님!"
라온이 별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던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웬일이세요?"
"라온이 왔다고?"
헬렌의 목소리를 들은 실비아가 방문을 걷어차고 달려와 라온을 부둥켜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몇 달째 찾아오지도 않고!"
"지난주에 봤잖아."
라온이 볼을 비비는 실비아를 밀어냈다. 수련생이 된 이후엔 주말 면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실비아는 일주일마다 숙소로 찾아왔었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
실비아는 허공을 내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금방 준비할게. 헬렌!"
"도련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실비아는 시녀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울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비프스튜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할까.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별관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생에 없던 진짜 집이 이러할까.
"빨리 만들어! 라온이 배고플 거라고!"
"알겠어요! 근데 재료가…."
"일단 있는 거 다 때려 부어!"
라온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 * *
다음날 새벽.
주디엘은 라온의 방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온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손에 쥔 종이를 툭툭 쳤다. 이전에 호수에서 찾아냈던 달빛 종이와 같은 물건이다.
"고개를 들어라."
엄숙한 목소리에 주디엘이 몸을 떨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중무전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따, 딱히 없습니다. 이전에 도련님이 권법과 검술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서 더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오러를 익히지 못한 지금은 관심이 멀어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라온이 빙긋 웃었다. 오러는 모든 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그 재능이 뒤떨어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떨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한 건?"
"실비아 님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철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철수하면 좋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이용할 구석이 사라지지.'
주디엘을 이중 첩자로 만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건 좋은 흐름이 아니었다.
"저, 저기 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오러를 익히지 않으신 건지…."
주디엘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뗐다.
"글쎄."
라온은 답을 해주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것만으로 주디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도 그날의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이다.
"수고했다. 나가보도록."
"예, 예!"
주디엘은 눈동자를 떨며 일어섰다. 공포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며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누가 들으면 일부러 익히지 않은 줄 알겠군.
'분위기와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라온이 손목에 매달린 라스를 툭 쳤다. 주디엘은 알아서 착각하고 자신의 존재감과 공포를 더욱 키울 거다.
-오러를 익히는데 그렇게 힘들어하다니 한심하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한 번 배운 마법과 무학은 눈을 감고도 행할 수 있었지.
'그러게 참 한심하네.'
라온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마음이 여유롭기에 라스의 놀림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음?"
새벽 단련을 위해서 정원으로 가려 할 때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붉은색 머리칼에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다니는 엘프. 리메르였다.
"교관님?"
"잘 잤어?"
리메르는 새집이 지어진 머리를 한 채로 손을 흔들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예전에 약속한 거 못 지켰잖아. 그게 미안해서 조금 도움을 주려고."
"약속이요?"
"권법 수련 첫날 진승권을 알려준다고 하고 도망갔잖아."
"아!"
"그건 이미 늦었으니, 다른 교육을 해줄게."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진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네게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마."
29화
"지금 속성을 알려준다고 하신 겁니까?"
라온이 흐트러진 리메르의 머리와 옷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사기꾼을 보는 눈빛이네."
리메르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낄낄 웃었다.
"내가 좀 게으르긴 해도 교육은 확실하잖아."
"...."
그건 맞다. 그의 방식은 많은 아이를 데려가진 못해도, 소수의 성장은 확실하게 책임졌으니까.
"의심 그만하고 나와."
"여기서 하는 게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대충 준비해서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라온은 방에 들어가서 겉옷을 꺼냈다.
-새벽부터 뾰족귀와 마주치다니, 오늘 재수가 없겠군.
'매번 만났는데 뭘.'
겉옷을 걸친 뒤 별관을 나갔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북망산."
리메르가 별관 뒤편에 솟구친 산을 가리켰다. 지그하르트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산으로 별관만이 아니라, 본관과도 닿아 있었다.
"가자."
"알겠습니다."
라온은 리메르를 따라 산을 올랐다.
"이쯤이면 되겠네."
리메르는 20분 정도 산을 오른 뒤 멈춰 섰다. 평평하면서도 나무가 자라지 않아 공터 같은 공간이었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라온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속에선 리메르가 어떻게 움직여도 반응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그저 느끼게 해주고 싶을 뿐이니까."
"느낀다?"
"그래."
리메르의 웃음과 함께 진녹색 바람이 불어왔다.
"날 믿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
"믿으라고 해도…음?"
겨울을 지우는 봄 내음처럼 살랑거리며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었다.
그 뒤로 여름 숲에서나 느낄 법한 시원한 바람이 산을 오르며 달궈진 육체를 가라앉혔다.
세 번째는 겨울이다. 혹한의 폭풍처럼 뼈를 아리게 만드는 서늘한 바람이 피부를 짓눌렀다.
바람은 또 한 번 변했다.
사계를 담아냈던 진녹색 바람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라온의 주변을 휘감았다.
"난 바람으로 내 주군을 지킬 칼날을 만들길 원했지."
녹색 바람의 해일 속에서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아!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칼날 폭풍이 몰아쳤지만, 라온은 물러나지도,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이게 내가 선택한 바람이다."
라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녹색의 폭풍을 느꼈다.
후우욱!
거친 바람의 기세가 꺼지고, 리메르의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가 피어났다.
"무섭지 않았어?"
"교관님이 공격할 의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역시 넌 아무리 봐도 13살이 아니야."
리메르가 픽 웃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에 존재하던 바람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속성이 담긴 연공법은 다른 연공법에 비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익히기 쉽지 않아."
그의 잔잔한 목소리에 바람이 춤을 추듯 울렁였다.
"엘프인 나야 태어났을 때부터 바람을 느꼈지만, 인간인 넌 다르지. 마나 회로가 냉기로 가득 차 있으니, 더 힘들 테고."
"맞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이 난해한 것도 있지만,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냉기와 반대되는 기운을 운용해야 하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바람에도 종류가 있다.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날카롭거나. 난 모든 것을 뚫어낼 바람의 검을 바랐고, 그걸 이뤄냈었다."
이뤄냈었다라고 과거형을 말할 때 리메르의 표정은 서글프다기보다 당당했다.
"너도 그걸 찾아야 해. 네가 가질 불의 이미지를 잘 생각해봐라."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선 그 속성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지."
"하지만 여긴 북방입니다. 산에 불이라도 지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불꽃을 보기는 힘들어요."
"그랬다간 너랑 나랑 사이좋게 목이 잘릴걸."
리메르는 킥킥 웃고서 손을 저었다. 그의 발끝에 녹색 바람이 일어났다.
"따라와라."
"또 어딜 가는 겁니까?"
"바람은 느꼈으니, 불을 보러 가야지."
* * *
라온은 리메르를 뒤를 따라 산을 달렸다. 대략 20분쯤 뛰었을 때 리메르의 걸음이 느려졌다.
후욱!
열풍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차디찬 숲에서 두꺼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온에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저긴가.'
붉은 벽돌로 지은 집과 회색 가마가 붙어있었다. 열기는 가마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덥군.'
여긴 북방이다. 대륙에서 가장 추운 곳임에도 더울 정도이니, 저곳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 수 있었다.
"어이, 영감. 나 왔어!"
리메르는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갔다.
가마에 다가갈수록 열기가 강해진다. 새어 나온 땀으로 옷이 젖을 정도.
"으음…."
익숙하지 않은 열기에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가 요동을 친다. 심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엔 딱 하나의 기구만 존재했다.
아궁이. 집 전체를 일그러져 보이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내는 가마의 아궁이가 있었다.
아궁이 앞엔 머리를 허옇게 물들인 주름 가득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는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면서도 아궁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게 내가 알던 불꽃이 맞나?'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전생의 삶을 통해 많은 불길을 봐왔다. 직접 피운 모닥불부터 마법사의 손에서 뿜어지는 상위 화염 마법까지.
하지만 그 무엇도 아궁이에서 치솟은 불꽃의 열기를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고오오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비명을 지르고, 아직 습득하지도 않은 만화공의 흐름을 따라 주변의 마나가 움직였다.
불길이 일어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열기의 출렁임에 심장이 박동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궁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감. 집중력은 여전하네."
리메르는 녹풍으로 열기를 가라앉히며 손을 털었다.
"네놈 때문에 열기가 죽지 않느냐."
"꼴을 보니, 어차피 오늘도 실패잖아."
"끄응…."
노인은 리메르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아궁이에 뭔지 모를 회색 덩어리를 집어넣었다.
후욱.
대지조차 녹여버릴 것 같았던 열기가 가라앉고, 불길은 따스할 정도로 낮아졌다.
"아…."
라온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길이 꺼지자마자, 마나 회로를 질주하던 만화공의 흐름이 흩어졌다. 아쉬움에 손끝이 떨렸다.
"이번에는 또 뭘 데리고 온 거지? 저건 뭐야."
노인은 라온을 보고 눈매를 찡그렸다. 아래로 내려간 입매와 한껏 솟은 눈썹을 보니, 고집이 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허! 저거라니! 가주님의 손자께 무슨 막말이야!"
리메르는 본인도 반말하고 막대하면서 예의를 차리라 말하고 있었다.
"흥, 난 이미 은퇴한 노인네일 뿐이다. 가주께서 직접 오시지 않는 이상…음?"
그는 라온의 눈과 머리카락을 보고 일어서다가 멈춰 섰다.
"금발적안? 거기다 저 얼굴은…."
"가주님이랑 비슷하지? 라온이 훨씬 더 잘생기긴 했지만."
"음."
노인은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발칸이다. 예의를 차리길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도록."
'발칸!'
라온은 다 타버린 숯을 보는 듯 흐릿한 노인의 눈을 보며 입매를 다잡았다.
'이 사람이 여기 있었다니.'
장인. 그것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대륙 장인의 칭호를 가진 남자로 글렌 지그하르트의 진천검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남자였다.
다만 그의 마지막 활동은 30년 전이었고, 진천검 이후에는 딱히 명검이라 불릴 만한 검을 만들지 못했다.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은 발칸의 반말에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한 길의 끝에 도달한 거인에게 보내는 예의였다.
"음…."
정중함을 차린 인사에 발칸의 구겨진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네가 나에 대해 알려준 건…."
"전혀."
리메르는 고개를 슥슥 젓고서 뒤를 돌았다.
"이 영감은 지그하르트의 장인이다."
"은퇴한."
"그래. 은퇴한 장인. 어쨌든 이 영감이 여기서 불씨를 태우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거든."
리메르가 꺼져버린 아궁이를 가리키며 몸을 돌렸다.
"여기가 북방에서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 *
"화속성 연공법이라…."
발칸은 리메르의 설명을 듣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여기에 데리고 온 거냐?"
"영감은 1년 내내 여기서 불씨만 키우잖아. 여기 말고 제대로 된 불을 느끼게 할 곳이 어디에 있겠어."
"야장들의 공방이 있잖느냐."
"거긴 너무 눈에 띄어. 저 연공법을 습득할 때까진 보여선 좋지 않을 것 같거든."
"좋지 않다?"
"라온이 실비아의 아이라서."
실비아의 아이라는 말에 발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라온을 훑어내렸다.
"후…."
그는 고민하는 건지 몸을 돌려 타오르는 주홍색 불씨를 보았다.
"방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불을 느낄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라온은 발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
발칸이 불씨를 태울 때 심장이 뛰고, 마나 회로가 크게 출렁였다. 그 불꽃의 호흡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난 숯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숯이라면?"
"백탄이나, 흑탄보다 훨씬 강력한 열기를 만들 수 있는 금탄. 금탄을 만드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무얼 하든 상관없다."
"감사합니다."
"흠…."
라온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전보다 더한 예의에 발칸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허락했으니까 됐네. 라온. 넌 새벽 연공 시간에 여기에 와서 만화공을 수련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이 영감은 연공법 따윈 모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의 말대로 발칸에게선 약간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감은 잠깐 나 좀 보지."
리메르는 잘 되었다고 손뼉을 치고서 발칸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영감은 여전히 착해빠졌네."
리메르가 발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씩 웃었다.
"라온을 잘 챙겨주면 나중에 좋은 술 가지고 찾아올게. 과일주 좋아하지?"
"너 때문이 아니다."
"응?"
"저 아이가 왔을 때 아궁이의 불씨가 더 크게 타올랐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숯이 망가질 정도로."
발칸이 노랗게 타버린 숯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런 색이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야."
"역시 영감도 느꼈군."
"난 장인이다. 평생을 보아온 불꽃이 출렁였는데 모를 수가 있나."
재가 되어버린 듯했던 발칸의 회색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저 아이의 호흡엔 불길을 움직이는 힘이 어려있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발칸의 숯가마로 달려갔다. 어둑한 산속에서 피어나는 붉은 열기에 숯가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후우욱!
발칸은 발소리를 들었음에도 라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마의 아궁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아궁이에서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은 그가 괜히 대륙 장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 열기….'
라온은 열기가 가장 진하게 타오르는 자리로 가서 섰다.
격한 열풍에 옷이 말려 올라가고, 피부가 따갑게 달아올랐다. 냉기가 발악하듯 마나 회로를 찔러댔다.
"흡…."
이가 악물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입에서 회색 입김이 흘러나온다.
당장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심장은 불꽃을 느낀 흥분으로 두방망이질 쳤다.
마음에 희열이 깃든다. 고통 속에서 전해지는 불꽃의 호흡을 따라 만화공의 구결을 외웠다.
들이마시는 마나에 뜨거운 숨결이 담기고, 내쉬는 공기에 탁한 기운이 빠져나갔다.
라온이 눈을 감았다.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고오오오.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르자, 고통은 사라지고 열기에서 전해오는 희열만이 가슴을 채웠다.
"...."
발칸이 뒤를 돌았다. 눈을 감은 채로 호흡하는 라온의 모습을 보던 그의 손짓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타닥.
두 사람이 있는 아궁이 앞에선 장작이 타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렸다.
* * *
라온이 발칸의 숯가마로 오러 연공을 다니기 시작한 지 세 달이 지났다.
이젠 산길이 익숙해져서 10분 만에 숯가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우욱!
숯가마는 처음에 본 것보다 더 강렬해진 화력을 뿜어내며 공간을 짓눌렀다. 가마 주변이 손가락만 한 아지랑이로 가득했다.
'여전하시군.'
발칸은 자신이 온 걸 알고 있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도 열지 않았다. 집중해서 아궁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라온은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가마로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등 뒤가 땀으로 젖었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맹수의 아가리처럼 으르렁거렸다.
"후욱…."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지만, 라온은 웃었다. 이제 불길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불이라….'
이제야 좀 알겠어.
리메르의 말대로 불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을 가장 무섭고 강력한 속성이라 말하지만, 제대로 다룬다면 그 어떤 속성보다도 안정적이었다.
살갗을 태울 듯한 열기를 느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후우욱!
아직 습득하지 못한 만화공의 기운이 저절로 깨어나, 대지를 달구는 열기를 끌어당겼다.
그 마나에 반응하듯이 아궁이의 불씨가 악마의 혓바닥처럼 새빨갛게 치솟았다.
"후…."
라온은 폐에 남았던 숨을 내뱉고, 잔뜩 익은 마나를 받아들였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마나를 마나 회로로 이끌었다. 열기에 도망치던 냉기가 만화공의 흐름에 따라 단전으로 끌려갔다.
'이미지.'
연공이 궤도에 올랐을 때 라온은 리메르의 조언을 생각했다. 그는 원하는 이미지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었다.
'내게 필요한 불은….'
목표를 생각했다.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고,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따겠다는 목표. 그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걷는 것처럼 힘들 거다.
때로는 길을 밝힐 횃불이 되어주고, 때로는 맹수를 무찌를 검이 되어줄 불이 필요했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 절대 꺼지지 않는 불. 그게 내가 선택한 불꽃이었다.
화아아악!
명확한 불의 이미지가 잡히자, 뇌리에 벼락이 내리치고 심장이 약동했다.
마나 회로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얼어붙은 냉기를 자극한다.
빙하를 녹이는 용암처럼 뻗어나간 열기가 마나 회로를 관통하여 끝내 단전에 도달했다.
고오오오!
만화공의 기운이 응집되어 오러의 구슬을 만들려는 순간 섬뜩한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이제 본왕의 차례로군.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라온의 등 뒤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30화
뿌득!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라스!'
무아지경에 도달하여 오러를 만들기 직전에 방해를 받자, 뭉치려던 오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크읍!'
정신을 집중해서 사그라지려던 만화공의 오러를 응집시켰다. 억지로라도 오러를 안착시키려 할 때 서늘한 한기가 몰려들었다.
-말했잖느냐.
라스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본왕은 네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노릴 거라고.
'크으….'
그 말이 맞았다.
라스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공격을 들어올 거라 경고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순간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놈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라스가 막대한 냉기를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식은땀조차 얼려버릴 서늘함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당장 눈을 뜨고 싶었지만 지금 움직였다간 마나가 역류하여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놈….'
한동안 조용해서 잊고 있었지만, 라스는 같은 편이 아니다. 악마. 그것도 마계의 왕이다. 육체를 망가뜨려서 영혼을 먹어 치우려는 것 같았다.
후우우욱!
라스의 냉기가 점점 더 독해지자, 숨죽인 듯 가라앉았던 마나 회로의 냉기까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으윽….'
비명이 입을 뚫고 흘러나왔다. 뼈와 피부가 쪼개지는 느낌이다. 차디찬 냉기와 분노의 감정이 정신까지 좀먹기 시작했다.
-끝났다.
라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아닌, 희열이 차올랐다.
-이제 네놈의 육체와 영혼은 본왕의 것이다.
놈의 말대로 전신에 시리고 시린 냉기가 차오른다. 통증을 넘어 감각이 사라져간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크으!'
라온이 혀를 깨물었다. 통증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시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라. 생각!'
라스의 냉기가 이미 전신을 뒤덮었다. 이대로라면 놈에게 몸이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화공을 멈출 수도 없어.'
지금 와서 불의 고리를 운용해도 늦었다. 고리가 회전하기 전에 라스의 냉기가 몸과 정신을 집어삼킬 테니까.
'살아날 구멍을 찾아야 해.'
끊임없이 만화공을 휘돌리며 버텼다. 그야말로 동아줄 하나로 절벽에 매달린 상황이었다.
-포기해라. 네놈의 육체는 이미 본왕에게 넘어갔으니까.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불필요한 노력이다. 매일 숯가마를 태우는 저 노인네처럼.
'숯가마…. 숯가마!'
있었다. 살아날 방법이.
꾸욱!
라온이 주먹을 바드득 말아쥐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마나를 끌어당겼다.
고오오오!
숯가마의 열기에 데워진 자연의 마나가 아니라, 숯가마 내부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네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발악!'
그래. 이건 발악이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건 전생으로 충분하다. 이번 생은 절대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쿠구구구!
단단한 진흙으로 굳힌 숯가마의 천장에서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멈춰라!
'끄윽!'
라스가 뿜어내는 냉기가 강해졌다. 피부를 넘어 뼛속까지 얼려버릴 위력. 이제 팔과 다리에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으로 버티며 마지막 숨을 들이마셨다.
퍼어억!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열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숯가마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었다.
후우욱!
라온은 단숨에 그 열기를 빨아들였다. 태어나서 처음 호흡했던 그때처럼.
코와 입만이 아니라, 전신의 모공으로 받아들인 열기가 몸 전체를 잠식한 냉기를 밀어낸다. 압도적인 화력. 용암이 혈관을 질주하는 듯했다.
화아아아!
노도와 같은 열기에 라스의 냉기들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게 무슨!
'꺼져라. 라스!'
라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마나 회로에서 녹아내린 막대한 냉기까지 끌어당겨 단전으로 이끌었다.
고오오오!
꺼져 가는 아궁이의 불씨 같았던 만화공의 기운이 숯가마의 열기를 받아 뚜렷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우우웅!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완벽하게 형성된 만화공의 오러 바로 옆에 새하얀 기운이 유리구슬처럼 응집되었다. 마나 회로를 채웠던 혹한의 냉기였다.
-이, 이런 젠장!
'후욱….'
라온은 라스의 분통 어린 비명을 흘려들으며 대기에 퍼진 열기와 육체 내부의 냉기를 모조리 갈무리했다.
극한의 집중력. 그는 라스의 방해를 이겨내고 두 번째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후!"
발칸이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탁한 숨을 뱉어냈다.
치이이익!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진한 불길을 일으키는 아궁이를 보자, 옛 기억이 떠오른다.
'벌써 30년이 됐나.'
30년 전에 만든 마지막 걸작 진천검. 인생 최고의 명검인 진천검을 글렌 지그하르트에게 바치고서 자신의 삶은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바쳐도 다 쓰지 못할 재물도 있으니, 남은 삶을 즐기겠다고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불 앞에 앉아 있었다.
일찍 일어날 필요도, 용광로에 불을 지필 필요도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공방으로 향했다.
멈췄지. 아주 단단히.
자신의 시간은 아직도 진천검을 만들었던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끊어내질 못하겠군.'
많은 검을 만들었고, 지그하르트에 큰 공헌도 했으며, 가주이자,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글렌은 자신의 검을 사용한다.
이대로 은퇴해도 역사에 이름이 남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망치를 놓지도, 불에서 멀어지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유는 하나.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글렌에게 바친 진천검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어설프게 불을 지피고, 망치를 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허무함 뿐이었다.
'그래서 이 가마를 만들었지.'
십여 년 전부터는 이 숯가마를 만들어서 숯을 생산했다. 흑탄과 백탄을 넘어서는 금탄을 만들기 위해서.
그 특별하다는 숯이 있으면 더 좋은 검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전설과 소문을 종합해서 수많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금탄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유일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을 때 그 아이가 찾아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녀석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아궁이의 불씨와 호흡했다. 십수 년간 멈춰 있던 불꽃이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타올랐다.
처음이었다.
화염이 반응한 것도, 화력이 올라간 것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언가가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라온에게 곁을 허락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긴 불지옥이니까.'
이 가마가 내뿜는 열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장인들도 피할 만큼 지독했다. 처음에 돕겠다며 찾아온 장인들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입술을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일매일 찾아와 가마 앞에 주저앉았다.
처음엔 바닥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연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열기에 덜덜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흘, 나흘,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세 달.
라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숯가마에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라온의 들숨과 날숨에 호응하듯 아궁이 속 불씨가 거세게 타오르고, 가마의 열기가 곱절 수준으로 강해졌다.
후우욱!
그는 불의 화신이 된 듯 이 공간의 불길을 지배했다.
'이건!'
발칸은 이 순간이 자신에게 찾아온 중요한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숯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장인으로서 살 기회.
"후우욱!"
온 정신을 집중하여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화력을 유지 시켰다. 불고, 부치고 불꽃을 키울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반복했다.
불씨가 살아 숨 쉰다.
중앙에 자리 잡은 투명한 불꽃이 탁하고 흐릿한 불길을 지워내며 더 짙은 화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숯가마에서 퍼지는 열기에 땀을 흘려야 할 라온의 전신 위로 서리가 내려선 것이다.
'뭐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냉기가 퍼진 곳은 오직 라온의 육체뿐이었다.
그 냉기는 점점 그의 전체에 퍼졌고, 결국에는 금빛 머리카락마저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라온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때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대로 놔두었다간 죽을 것 같았다.
"이, 이봐! 너…."
"안 돼."
발칸이 라온을 깨우기 위해서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리메르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리메르! 뭐 하는 거냐! 저놈 저러다 죽겠어!"
"지금은 방법이 없어."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더욱 심하게 떠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줘도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거야."
"저게 전에 말한 그 냉기인가?"
"그래. 저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저런 냉기를 몸에 가지고 있었어."
"그런…."
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저 어린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아궁이의 열기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안쓰러웠고,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나?"
"없어. 무엇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위험해."
리메르의 표정도 평소와 달리 심각했다. 주먹을 말아 쥔 채로 라온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점점 라온의 몸을 덮어가는 냉기를 지켜보았다.
"이, 이대론 정말 죽겠어! 뭐라도!"
"잠깐! 라온이 움직였다!"
리메르의 표정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그게 무슨…어?"
발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숯가마를 태우는 아궁이의 불길이 갑자기 격해졌다.
쿠구구구!
불길은 아궁이 밖으로 뿜어져 나와 숯가마 전체를 휘감았다. 진흙으로 밀폐시켜놓은 숯가마가 터지며 무시무시할 정도의 열기가 허공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
막대한 열기에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흐읍!"
대륙 장인으로서도 겪어 본 적 없는 열기에 몸을 숙였지만, 그 뜨거움은 순식간에 가셨다.
고오오오!
열기가 나선으로 회전하며 라온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응집되며 그의 전신을 덮은 냉기가 녹아내렸다.
화아아!
라온의 육체 위로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아니, 빨간색 불꽃이 아니다.
금빛.
동쪽의 산을 넘어 떠오른 금색 여명에 물든 황금색 불길이 피어났다.
라온은 금색 불꽃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이 주변만이 아니라, 북망산 전체의 열기를 모조리 받아들였다.
우우웅!
태양이 그 웅장한 서광을 완전히 드러내고, 쏟아지던 빛이 아스라이 옅어질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그 눈을 마주한 발칸이 마른침을 삼켰다. 발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뇌리를 꿰뚫었다.
진한 금광.
여명의 빛을 담아낸 황금의 불길의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3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