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내공이 조금 늘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연우혁은 내공이 늘어난 감각에 의아해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관아 건물들이 보였다. 다행히 제대로 해결이 된 모양이었다.
"이보게."
"엇, 일어나셨습니까?"
뛰어가던 하인이 연우혁을 보고 놀라워했다.
"지금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됐지?"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병사들이 몰려와서 다 뒤지고 있습니다. 웬 잡놈들이 턱밑에서 놀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런."
하인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관병들이 광산을 샅샅이 뒤져서 은이란 은은 다 끌어낸 뒤 관아도 마저 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혈교 놈들이 남긴 흔적이 있나 조사하는 것이리라.
'이번 일에 혈교 놈들이 관련되었을 줄이야.'
연우혁은 앉아서 하인이 가져온 죽을 한 술 떴다.
생각해보니 이번 일은 운이 좋았다. 혈교가 관련되었는데도 별다른 부상 없이 쉽게 끝낸 것 아닌가. 자칫하면 혈교의 무리들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새로 배운 무공들도 제대로 시험해봤고...
'옥면살검 놈이 방심한 건 설마 내가 챙긴 혈옥갑 때문인가?'
그 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놈은 분명 보물이 있던 자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갔다. 애지중지하던 보물을 누가 훔쳐갔는데 당황하지 않을 무인은 없었으니까.
"대협! 감사합니다!"
"!"
연우혁은 죽을 먹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본 꼬마가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낯이 익어서 누군가 했더니 광산 안에서 본 현령의 아들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 분께서 그 간악한 마두 무리들을 쓸어버리셨다고요!"
"저보다 두 분께서 더 애쓰셨는데..."
현령의 아들은 연우혁 앞에 앉더니 어떻게 들어왔는지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적당히 대답해주던 연우혁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현령 나으리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아버님께서는..."
꼬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관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의 책임을 진다고 하셨습니다."
'저런.'
낭인 무리들이야 전부 다 죽었으니 더 잡을 게 없다지만, 현령은 현령대로 책임을 져야 했다.
관직을 맡은 사람이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일을 그르쳤으니 무조건 중형이었다.
'중형이면 어떻게 죽냐의 차이인데.'
현령의 아들을 보니 체념한 표정이었다. 아직 어린데도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관리의 자식으로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약간 안쓰러워진 연우혁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손짓했다.
"...잠깐 이리 와보십시오."
"예?"
"현령 나으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하는 걸 잘 들으십시오."
현령의 자식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가며 포두의 말에 집중했다.
* * *
하 교위와 이 학사는 원래 현령이 앉아야 하는 자리에 앉아 관무를 대신 보고 있었다. 옆에는 병사들이 관아를 뒤져서 갖고 나온 서류들이 차곡차곡 쌓인 채였다.
끌려 나온 현령은 산발이 된 머리로 고개를 푹 숙였다.
"현령은 들으시오. 현령은 무도한 무리가 광산을 점령하고 법도를 어지럽히는데도 막지 못했소. 이것이 첫 번째 죄요. 심지어 사사로운 정 때문에 제대로 된 보고를 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요."
"부끄럽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현령은 포기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중죄를 몇 개나 저질렀으니 이미 죽음은 각오한 뒤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계에 기지를 발휘해 현 상황을 알린 공이 있고, 만약 무리해서 저항했다가는 인근의 다른 백성들이 참화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는 상황을 참작하겠소."
"...???"
현령은 예상과 다른 말에 귀를 의심했다.
금의위가 벌을 물으면 물었지 이런 상황에서 공을 참작하거나 챙겨주진 않았다. 현령이 금의위 쪽 파벌에 뇌물을 바친 사람도 아니었는데...
"파직에 처하니 관인(官印)을 내려놓고 물러나시오. 추가로 조칙이 내려오기 전까지 자택을 떠나지 마시오."
"감, 감사합니다!"
현령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중형에 처해야 했다면 아마 현령 정도는 금의위가 즉석에서 처벌까지 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금의위의 권위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지 않고 파직에서 끝냈다는 건 아마 보고가 올라가도 파직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현령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걸어 나왔다.
"아버님!"
"그, 그래."
관아를 나와 저택으로 돌아간 현령은 달려오는 자식을 보고 황망한 표정으로 반겼다.
하인들은 현령이 무사히 풀려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연신 눈을 깜박였다.
"주, 주인어른.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아주 풀려나신 겁니까?"
"파직에서 끝날 것 같은데...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대협의 말이 맞았습니다!"
"?"
아들의 말에 현령은 당황스러워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협께서 아버님이 세운 공을 교위님께 바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대협이 누구..."
하인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 광산에 같이 온 포두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
"포두?! 난 낭인인 줄 알았..."
"낭인 아닙니다!"
현령의 아들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충격받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현령은 미안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실수했구나. 목숨을 구해준 은인 앞에서 무슨 무례한 소리를. 병사들의 이야기만 듣고 착각한 것 같다."
사실 채찍과 독과 암기로 적을 제압한 건 맞았지만 현령은 자기가 뭔가 착각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광산 안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만큼 병사들이 낭인과 포두를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포두가... 공을 적어주며 바치라고 했다고?"
"네!"
현령은 믿기 힘들었다.
포두가 그런 영리한 꾀를 생각해낸 게 매우 놀라웠다. 아무리 금의위 교위와 같이 일을 했다고 하지만 저런 꾀는 아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금의위의 위세가 얼마나 칼날 같던가. 괜히 잘못 수작을 부렸다가는 자기도 휘말릴 수 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현령을 위해 꾀를 짜내준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대협께서는 아버님이 억울하단 걸 아신 거죠!"
"...!!"
현령은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이런 이유만으로 남을 도와주는 호인이 있단 말인가?
* * *
"현령의 아들에게는 자네가 말해줬겠군."
"죄송합니다."
연우혁은 놀라지 않았다. 영안으로 본 하 교위가 딱히 분노하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할 건 없다. 실제로 거짓말은 없었으니. 궁금한 건 왜 현령의 목숨을 구해줬는지다."
"음. 죽을 정도의 죄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 교위는 멈칫했다.
뇌물이나 먼 친척 같은 현실적인 이유가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저런 이유가 나올 줄이야?
"자네는 정말 금의위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절대 교위는 안 시켜줄 거면서 저런 소리를 하는 하 교위의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참. 장계에 자네 이름을 넣었네."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마 한 줄로 '포두가 협조했다'정도 들어갔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예 빼버리는 판관 놈도 있었는데 이 정도만 해줘도 감지덕지였다.
탁-
하 교위는 연우혁 앞에 무공서 하나를 던졌다. 그걸 본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이게 뭡니까?"
"이번 일에서 세운 공을 내 나름대로 보상하는 거다. 금의위의 무공이지."
"...!!!"
연우혁은 깜짝 놀라서 무공서의 이름을 읽었다.
-위국권법
"..."
정강표국의 사람들 (1)
어이가 없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금의위 교위와 나름 친해졌다지만 대놓고 앞에서 '뭐 이딴 걸 주십니까'할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연우혁은 매우 감사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공서를 읽었다.
사실 읽기보다는 영안으로 한 번에 쭉 흡수했다. 그게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연우혁이 익힌, 포쾌들에게 나눠주는 위국권법은 초식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고 매우 단순했다. 삼절객의 말에 따르면 옛 무공인 금강선공에서 그나마 어려운 부분을 전부 제거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 교위가 내민 무공서의 위국권법은 총 열여덟 초식으로 포쾌들의 권법보다 훨씬 초식이 많았다. 게다가 그 초식 하나하나에 매우 심오하고 깊은 이치가 담겨 있었다. 불문무공의 느낌도 나면서 동시에 유문(儒門)의 향취도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초식을 한 번 그려보니 어느 상황에서도 대응이 가능했다.
'이게 상승무공이구나!'
이제까지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는 무공이나 웬 사파 마두가 만든 무공만 익혔던 연우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초식 이름은 똑같았지만...
"이런 걸 제가 읽어도 되는 겁니까?"
"금의위는 무림의 문파와 달리 무공에 그렇게 폐쇄적이지 않다."
하 교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금의위는 그 조직의 특성상 무림의 문파와 다른 규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무공에 대한 개방성이었다.
당장 금의위에서 익힐 무공을 연구할 때에는 국자감이나 도찰원, 한림원에서도 참여했다. 폐쇄적인 무림의 문파와는 천지차이였다.
"원래 금의위에 소속된 역사들이 공을 세우면 포상으로 무공의 초식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나 또한 이번 경우를 그렇게 해석했다."
"이렇게 무공서를 통째로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까?"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물었지만 하 교위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빨리 외우도록. 규율상 내가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런 경우는 없었군.'
솔직히 감동했다.
이번에 연우혁이 공을 크게 세우긴 했다지만, 이걸 이렇게 보상해주려고 하다니.
당장 한경에만 봐도 부하의 공을 무시하고 자기만 아는 놈들이 얼마나 많던가.
'수틀리면 사람 죽인다고 욕해서 죄송합니다. 교위님.'
"이 권법을 가르쳐주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하나는 네가 진정 백성을 아끼는 청백리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연우혁은 뭔 개소린가 싶었지만 얌전히 경청했다.
"두 번째는 네 무공이 아직 일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보니 초식의 이해는 뛰어나지만 내공이 부족하더군. 초식 사이에 끊김이 있다."
"예. 느끼고 있습니다."
이류의 무인과 일류의 무인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초식을 연달아 펼쳤을 때 드러났다. 이류의 무인은 초식 하나의 힘은 온전히 구현해내더라도 초식을 연결해서 투로를 펼치면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걸 펼칠 수 있는 정순한 내공과 외공이 있어야 온전한 투로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연우혁 같은 경우에는 깨달음은 완연했지만 역시 내공이 부족했다.
"이 권법은 그런 깨달음을 수련하기에 좋은 권법이다."
'음. 이 권법의 깨달음은 필요 없는데.'
다른 게 더 문제인 연우혁은 슬쩍 물었다.
"내공은 어떻게 수련해야 합니까?"
"영약을 사야 한다."
"..."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답에 연우혁은 할 말을 잃었지만, 하 교위는 매우 진지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인들이 왜 강하겠는가?
영약을 복용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금의위의 무인들이 왜 강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영약을 복용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었다.
'하. 진짜 탐관오리 되어야 하나?'
"마지막으로."
"예."
"네가 익힌 무공들은 아무래도 마두로 오해받기 쉽다. 권법이라도 정종무공을 익혀놓는 게 좋을 것 같다."
"..."
* * *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연우혁은 하 교위, 이 학사와 작별하고 먼저 출발했다. 둘은 장계부터 시작해서 처리해야 할 뒷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권법 하나로 감당이 되나?'
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니 과연 권법을 자주 쓸지도 의문이었다. 육박전 벌이다가 장갑이라도 벗겨지면 정말 포두 다음 관직이 마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싸우면서 느낀 거지만...
'기문병기가 확실히 편하다.'
왜 경지 낮은 무림인들이 특이한 무기를 들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상대해 본 경험이 적다보니 어, 어 하다가 그대로 당하는 것이다.
특히 연우혁처럼 영안이 있는 경우에는 이런 기문병기를 사용하기에 더 유리했다. 기문병기의 약점이 상황이나 상성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인 건데, 연우혁은 그걸 먼저 주도할 수 있었다.
권법을 수련하더라도 앞으로 한동안은 이 채찍과 암기를 더 이용할 것 같았다.
"어, 포두님. 가십니까??"
"가는데?"
"어, 그게... 그러니까..."
"???"
관아에 있던 하인은 허둥댔다. 연우혁은 이 하인이 왜 이러나 싶었다.
"난 다른 곳의 포두다. 오래 머무르면 위에서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 알, 알겠습니다. 으, 어르신께서는 뭐하시는 건지..."
'뭐지?'
하인이 왜 이러나 싶은 연우혁은 말의 속도를 올렸다.
마을 입구를 벗어나는데 마침 들어오던 관아의 몸종이 연우혁을 보고 놀라워했다.
"포두님. 돌아가십니까??"
"...가는데?"
"어, 그게... 그러니까..."
"??"
'뭐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연우혁은 속도를 더 올렸다. 괜히 이상한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뒤쫓아 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과민했나?'
하긴 아까 봤을 때 둘의 얼굴은 적대심이라기보다는 당황에 가까웠다.
함정을 준비했어도 당황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 * *
'이틀이면 도착하겠군.'
교위가 말을 하나 준 덕분에 제법 빠르게 길을 달릴 수 있었다. 달려가던 연우혁은 저 멀리 보이는 폐가를 발견하고 눈빛을 빛냈다.
저런 폐가라 하더라도 여행객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굳이 땅바닥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폐가에는 먼저 선객들이 있었다.
"!"
"...!"
선객은 표국의 표사들이었다. 수레 근처에 꽂힌 깃발에는 '정강표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연우혁도, 표사들도 멈칫했다. 이런 외진 곳에서 만나는 행객은 기본적으로 서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우혁이 관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표사들은 심하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표국은 곳곳의 관과 협력해야하는 만큼 관복을 입은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디서 오셨소?"
"한경의 연 포두입니다. 잠시 일이 있어서 기남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쪽은?"
"우린 정강표국에서 왔소. 나는 추 표두요. 한경이라면 가는 길이 같게 됐군."
상대가 정식 관직이 아닌 일개 포두라는 걸 듣자 표사들의 태도는 조금 더 느슨해졌다. 아무래도 포두 앞에서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여기서 머무를 거요?"
"괜찮으시다면."
추 표두는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우혁을 훑어보았다.
관상이 사악하거나 비열해보이지는 않았다. 도적놈들이 위장해서 접근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요패를... 볼 수 있겠소?"
"물론."
연우혁은 요패를 던졌다. 추 표두는 포두의 요패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게 됐소. 요즘 도적놈들이 기승을 부려서 말이오."
"표사로서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선선하게 받아들이는 연우혁의 모습에 추 표두는 솔직히 놀랐다.
포두치고는 꽤 젊었는데, 한경의 포두라고 성질을 내거나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지 않다니. 포두에게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럼 편히 쉬시오. 이봐, 포두께 물을 좀 갖다 드려라."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표주박에 담긴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걸 본 추 표두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경험은 적나보군.'
경험 많은 포두였다면 아무리 아는 표국이라 하더라도 저런 물을 냉큼 받진 않았을 것이다.
'별 거 없군.'
영안으로 물을 확인한 연우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표사들이 함정을 판 녹림 무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하룻밤 쉬기는 편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냥 한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확실하게 범인을 찾아야 한다니까요!"
"그러다가 도적떼라도 만나면 손해가 더 큽니다!"
건량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하해불택신공을 속으로 되뇌던 연우혁은 표사들의 대화가 점점 커지고 격렬해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배려심이 없군.'
연우혁은 다시 눈을 감고 새로 배운 위국권법에 깊이 몰두했다.
하 표위의 걱정과 달리 연우혁은 보자마자 권법의 초식들을 모두 이해한 상태였다. 남은 건 머릿속으로 다른 무공들과 어떻게 섞어서 쓸지 고민하는 정도뿐.
'교위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좁은 공간에서도 검봉을 피해 상대를 오히려 밀어붙이던... 음. 역시 내공이다. 연달아 권격을 펼치면서 보법까지 밟다니. 보법... 보법도 지금 너무 사파스럽나? 지독한 느낌이긴 한데.'
"표두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말 조심해라, 놈! 네놈이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저는 그저 돌아갔을 때 책임을 묻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연우혁은 하 교위와 옥면살검의 싸움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헛기침을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오. 목소리가 너무 컸군."
포두가 다가오자 그제야 표사들은 자기들이 너무 열띠게 떠들었음을 깨닫고 멋쩍어했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그렇지 외부의 인물 앞에서 내부의 사정을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다니.
"아무것도 아닌데 이렇게 떠드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혹시 표물이 사라졌습니까?"
"...맞소. 목소리가 정말 컸나보군."
추 표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었는지 자던 포두가 다 들은 모양이었다.
표물을 옮기는 게 표국의 일인 만큼 표물이 사라지는 건 표국의 신용과도 관련된 큰일이었다. 설령 그게 표물 중 단 하나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출발했을 때 수레에 실은 궤짝의 숫자를 확인했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가 사라져있었던 것이다.
관련된 자들을 모두 불러 확인했는데도 언제 어떻게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라도 알았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그것도 모르니 표두 입장에서는 속이 썩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어떤 문책을 받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사라진 표물 하나를 찾아보자니 지나온 길이 몇 리인가 싶어 막막했다. 쟁자수들 중에는 요괴 짓이 아닌가 이야기가 돌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된 거요.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오."
추 표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마라'는 뜻을 담아 설명을 끝냈다. 이 포두한테 말해준 것도 해결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말해준 거였던 것이다.
"표물이 뭡니까?"
"...그건 말해줄 수 없소."
"비단옷인가보군요."
"?!!"
추 표두는 깜짝 놀라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궤짝이 하나 사라졌을 때 다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당, 당연히 모두의 몸을 뒤졌소."
추 표두는 눈앞의 젊은 포두한테 압도되어서 '어떻게 비단옷인 걸 알았느냐'라고 묻지도 못했다.
"다른 궤짝들은?"
"표물은 함부로 열 수 없소."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른 궤짝들을 열어서 확인해보십시오. 비단옷이 늘어나있을 겁니다."
"...?!!!!"
설명을 끝낸 포두는 덤덤하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추 표두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정강표국의 사람들 (2)
"...열어봐라!"
추 표두는 망설이다가 궤짝을 열도록 명령했다.
표사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궤짝의 문을 열고 안에 든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표, 표두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신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표사들을 보자 추 표두는 묻지 않아도 정답을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사라진 비단옷들이 다른 궤짝에 들어가있었던 것이다!
"몇 개냐? 사라진 비단옷은 없느냐?"
"예, 예! 정말 다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정말 요괴의 짓 아닙니까??"
"허튼소리. 요괴가 왜 이런 짓을 해?"
표사들이 술렁거리면서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떠들어댔다. 그러나 쓸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던 추 표두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포두님."
"?"
눈을 감고 심법을 운기하던 연우혁은 한쪽 눈을 뜨고 힐끗 표두를 쳐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젊은 포두였지만, 방금 보여준 기묘한 재주를 보고 나니 이 모습도 비범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추 표두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
"음."
연우혁은 심법을 운기하던 걸 멈추고 추 표두와 눈을 마주쳤다.
'괜히 참견했나?'
연우혁이 표두에게 사라진 비단옷의 위치를 말해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우혁이 그 위치를 이미 알고 있어서였다.
표국, 궤짝에 든 비단옷들, 사라진 궤짝 하나, 쟁자수 사이에서 도는 요괴의 소문...
이미 정답을 아는 만큼 알려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물론 연우혁도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 정답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나불대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걸. 사실 두 번째 이유가 더 컸다.
둘째는 내버려두면 이들이 서로 칼부림을 벌여서였다.
원래 해결한 사건에서는 난투의 흔적만 남아있어서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실제로 옆에서 보니 아마 표두와 고참 표사가 서로 싸웠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무림의 문파들이 대개 그렇듯이 윗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 아무리 올바른 의견이어도 피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칼부림이 벌어지면 연우혁한테도 불똥이 튀니 해결해줬는데, 역시 사람이 배가 부르면 눕고 싶듯이 물건을 찾아주니 사연을 알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알려드리겠습니다."
"!"
추 표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덕분에 이번 표행의 책임자로서 의문이 풀리게 된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약속해주십시오."
"..."
추 표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포두가 얼마나 뜯어낼지 예상이 갔던 것이다. 재주 없는 포두도 심심하면 돈을 뜯어내는데, 재주 있는 포두라면 얼마나 뜯어내겠는가.
"무엇인지?"
"이번 일로 아무도 처벌하지 말아주십시오."
"...예?"
"이번 일로 아무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신지...?"
연우혁은 설명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거리고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해왔듯이, 신통력 있는 도사인 척 하는 게 백 마디 설명보다 훨씬 나았다.
예상대로 끙끙대며 고민하던 추 표두는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좋소이다! 이 표두의 명성이 보잘것없지만, 나름 정강일창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지는 않겠소이다."
결국 사라진 물건도 없고 잘 마무리 된 만큼 어지간한 일은 눈을 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추 표두는 그보다 어떻게 된 일인지가 훨씬 궁금했다.
"역시. 제가 사람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연우혁은 추 표두만 들을 수 있도록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밤에 짐짝은 누가 관리합니까?"
"표사들은 밖에서 보초를 서니, 쟁자수들이지요."
"그럼 짐짝을 건드릴 기회가 있는 건 누구겠습니까?"
"쟁자수... 아니, 포두님. 그건 불가능하오."
추 표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국도 짐을 옮기는 쟁자수들을 그렇게까지 믿지 않았다. 표사들이야 나름 오랫동안 같이 일하며 대우를 받는다지만 쟁자수는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대우를 받는, 사실상 짐꾼들 아닌가.
그래서 쟁자수들이 짐짝 근처에서 보초를 설 때에도 엄정한 규칙이 있었다. 한 시진마다 보초 인원이 바뀌고, 날이 밝고 나면 모든 쟁자수들이 모여서 표물을 확인했다. 만약 조금의 문제라도 있으면 다 같이 처벌을 받았다.
"차라리 표사라면 무공이 있으니 표물을 훔쳐서 도망칠 수 있소이다. 하지만 쟁자수는..."
연우혁은 그런 지적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표물을 훔치는 거면 어렵겠지요. 하지만 표물을 다른 궤짝에 숨겨넣는 것 정도는 쟁자수도 할 수 있습니다."
"!!!"
표두는 눈을 깜박였다. 확실히 그랬다.
"하, 하지만 다음 쟁자수는? 다음 쟁자수뿐만이 아니라 날이 밝았을 때 모두의 눈을 속여야 하는데?"
"모든 쟁자수들이 손을 잡은 거지요."
"...!!!!!!"
추 표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연우혁은 고승처럼 차분하게 설명했다.
쟁자수들은 기본적으로 표사보다 더 가혹한 상황에 처한 만큼 서로 아끼는 마음이 강했다.
새로 들어온 쟁자수 중 한 명이 실수로 궤짝을 부수자, 그 쟁자수는 물론이고 다른 쟁자수들도 받을 처벌을 두려워했다.
-차라리 이 일을 숨기자!
-하, 하지만 이 부서진 궤짝을 어떻게 숨긴단 말이오?
-표물이 사라지면 모를까, 다른 궤짝에 들어있다면? 도착하고 나서 이상하게는 여겨도 더 이상 조사하진 않을 것이다!
-!
괜히 다 같이 처벌을 받느니, 쟁자수들은 손을 잡고 부순 궤짝을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도착하고 나서 궤짝 하나가 사라진 걸 깨달아도 표물이 멀쩡히 들어있으면 그리 깊게 파고들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문제는 도중에 눈썰미 좋은 추 표두가 궤짝이 하나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쟁자수들 사이에서 요괴 소문이 먼저 돈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빨리 도착하게 하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거겠지요."
"이, 이 놈들이...!"
추 표두는 얼굴이 벌게졌다. 서투르고 뻔뻔한 쟁자수 놈들 때문에 외부인 앞에서 표국의 치부를 보이게 되다니.
"약속하셨잖습니까?"
"아, 그. 그랬지..."
눈앞의 포두가 말하자 그제야 추 표두는 정신이 돌아왔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대신 다른 감정이 샘솟았다.
대체 왜?
"...여보시오. 포두님."
"아직도 물어보실 게 있으십니까?"
"그, 미안합니다. 귀찮게 해서... 왜 은자나 그런 게 아닌, 쟁자수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하신 거요?"
'은자 달라고 했으면 안 줬을 놈이 뭐라는 거야?'
연우혁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추 표두나 표사들은 호구가 아니었다. 만약 '은자를 내놓아라'라고 했다면 '에이 궁금하지만 표물은 찾았으니까 포기하자'라고 반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는 일개 포두지만 관인입니다. 관인이 해야 할 일이 뭐겠습니까. 백성들이 가혹한 벌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
추 표두는 오늘 가장 놀랐다. 사라진 표물이 다른 궤짝에서 발견되었을 때도, 쟁자수들이 저지른 짓이란 걸 알았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었다.
'이런 포두가 있다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청백리, 청백리 하지만 보통 고서나 야담에서나 나올 존재 아닌가. 실제로 추 표두는 살면서 한 번도 청백리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졌다.
사실 쟁자수들의 불만을 관리해야 하는 건 표두인 본인이었다. 가혹하게 처벌만 할 줄 알지 쟁자수들이 가진 불만은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이번 표행이 비교적 안전한 표행이고 쟁자수들의 심성이 악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조금만 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표행이 어떻게 틀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추 모, 오늘 연 포두님을 만나 크게 배웠습니다. 쟁자수 또한 표국의 사람이고, 마땅히 덕을 베풀어야 하는 일인데!"
"?"
갑자기 추 표두가 포권하면서 소리치자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핑계에 대한 반응치고는 지나치게 격렬했던 것이다.
"음. 이해해주시니 기쁩니다."
"한경에 도착하면 연 포두님을 크게 대접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감사해한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밑의 포쾌들이나 데리고 배에 기름칠을 해주게 할 생각이었다.
'호들갑이 좀 심한 사람이군.'
* * *
방가전장에서 일하는 공 총관은 팔짱을 끼고 하인에게 지시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표국의 물건이 들어올 것이다. 확인할 준비를 하도록 전하거라."
"예!"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어린 하인이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백 리 밖에서 오는 표물의 위치를 아시는 겁니까?"
"위치를 아는 게 아니다. 마땅히 와야 하는 시간이니 준비하는 것뿐이다. 정강표국이 이런 표물을 늦을 리 없지 않느냐?"
"만약 늦으면요?"
"한경에 짐 옮기는 표국이 어디 정강표국 하나뿐이더냐."
총관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어린 하인은 깜짝 놀랐다.
정강표국 사람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면서도 저렇게 언제든지 관계를 접을 준비를 하다니.
"놀랐느냐? 하지만 상인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정강표국도 알고 있다. 아무리 친밀해도 정강표국이 공짜로 일을 해주진 않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예, 옛!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연 포두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더냐?"
"예."
"으음."
공 총관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걱정했다.
소문에 들으면 한경 밖의 관리 놈이 일을 시키겠다고 데려갔다는데, 원래 포두나 포쾌 같은 이들이 그리 대우 받는 위치는 아니었다. 괜히 싸움에 휩쓸려서 비명횡사라도 했을까 걱정이 됐다.
"그, 그래도 지부 어르신께서 그 포두의 재주를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자기가 체면이 섰다고..."
"지부 어르신의 체면이 목숨을 구해주진 않지. 기껏 무공서를 구해놨는데 보답을 할 기회가 사라질까봐 걱정될 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표물이 도착했답니다!"
"역시. 잘 됐군. 들어오라고 해라!"
공 총관은 자기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정문으로 향했다. 수레와 함께 표사들이 들어오고, 말 위에는 낯익은 포두가...
"???"
"앗. 총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니, 자네...? 표국에 들어갔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돌아오는 길에 만나 동행했습니다."
"다행이군. 일이 잘 마무리된 모양이야!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별 일 아니었습니다."
연우혁은 자세히 말하는 걸 피했다. 아무래도 금의위가 주도한 일인데다가 혈교까지 엮인 만큼 떠벌리고 다니는 게 걱정됐던 것이다.
괜히 다른 금의위 교위가 와서 '이놈! 어디서 허풍을!'하고 칼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정말 별 일 아니었나보군.'
젊은 포두의 반응에 공 총관도 무심코 넘어가버렸다. 관리가, 그것도 젊은 관리가 자신의 공에 대해 떠벌리면 떠벌렸지 그냥 넘어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니, 두 분. 아는 사이셨습니까?"
뒤늦게 들어온 추 표두는 연우혁과 총관의 대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오랜만에 한경에 와서 잘 모르겠군. 이 포두가 어떤 포두인지 아나? 바로 한경제일포두일세."
"아, 아니... 그 정도는..."
연우혁은 좀 민망했다.
다른 포두들이 딱히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저런 별호를 달고 다녀도 되나 싶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뭐라? 혹시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추 표두는 오면서 있었던 일에 살을 붙여서 총관에게 설명했다. 공 총관은 감탄해서 무릎을 쳤다.
"저게 젊은 관리의 의기 아니겠는가!"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가도 되나?'
연우혁은 영양가 없는 대화에 멀뚱멀뚱 서있다가 슬쩍 정문을 쳐다보았다.
표국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 이제 슬슬 관아로 돌아가서 포쾌들을...
"잠깐. 연 포두! 기다리게. 자네가 무공을 찾았었잖나!"
"!"
돌아가려던 연우혁은 공 총관의 말에 놀랐다.
"설마 괜찮은 무공서를 찾으셨습니까?"
"그럼 이 사람이 괜찮지 않은 무공서로 허풍을 떨까? 이리 오게."
공 총관은 연우혁을 방 안으로 불렀다. 연우혁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탁!
-흑사보(黑蛇步)
"..."
연우혁은 첫 이름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아찔해졌다.
'아니. 이름은 그래도 괜찮은 무공일지도...'
"이게 누구의 무공인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백면신투의 무공이라는군!"
"..."
정강표국의 사람들 (3)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연우혁은 더욱 아찔해졌다.
백면신투가 익힌 무공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아니, 이쯤되자 어디서 구했는지가 더 신기했다.
"총관 어르신. 그, 백면신투의 무공을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백면신투가 살아있는 무림인도 아니고 소속된 문파가 있는 무림인도 아니었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담벼락을 넘으려다가 죽은 무림인 아닌가.
대체 백면신투의 무공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 총관의 입가가 쭉 올라갔다. 연우혁의 질문을 꽤 기다렸다는 게 느껴졌다.
"잘 물어봤네. 바로 흑시(黑市)에서 구했네!"
"!"
흑시, 귀시(鬼市)라고도 불리는 이 장소는 쉽게 말하자면 바로 암시장이었다.
보통 사파나 하오문 같은 이들이 주도해서 열리는 이 수상쩍은 시장에는 온갖 수상쩍은 물건들이 흘러나오고 빠져나갔다. 장물에 위품에 허섭스레기들로 가득찬 만큼 어지간한 이들은 들어가서 뭔가 사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 수상한데...?'
무림인도 아닌 공 총관이 진짜 무공인지 가짜 무공인지 구분할 수 있나 걱정이 됐다.
그런 연우혁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공 총관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가 직접 보고 구했을까 걱정하는 건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를 만큼 멍청해 보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우혁은 뜨끔해서 반성했다.
무림인들의 안 좋은 습관이 어느새 연우혁에게도 옮아버린 것이다. 무공 좀 익혔다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을 얕보다니.
공 총관은 무공은 모르지만 오랫동안 전장에서 일하면서 사람과 물건을 보는 눈이 탁월했다. 이런 사람이 멍청하게 가짜를 살 리 없었다.
"예전에 하오문 무인에게 은혜를 하나 베푼 적이 있었네. 제법 큰 은혜였지. 그 은혜를 빌미로 부탁한 거니, 암시에서 가장 괜찮은 무공이 나왔다고 봐도 좋을 걸세."
"...어르신...!"
연우혁은 감동했다.
세상에는 은혜를 받고도 갚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경의 맹 판관이 그랬고, 기남의 현령이 그랬으며, 하여간 대충 관리들은 다 그렇다고 봐도 좋았다.
오히려 장사를 하는 이들이 신의를 지킬 줄 알았다.
"이 연 모는 어르신밖에 없습니다!"
"허허. 사람 참 부끄럽게. 어서 받게나."
연우혁은 감사히 받아서 영안을 열고 훑었다. 지금 연우혁이 익힌 보법이 전진에 치중한 백사보법과 그냥 별로인 위국보법밖에 없는 만큼 뛰어난 보법이 필수적이었다.
"...?"
흑사보를 이해한 연우혁의 표정이 알쏭달쏭하게 바뀌었다.
이 보법은...?
'무리(武理)가 괴팍한 건 그렇다 치고, 구결이 이상한데?'
보통 일반적이지 않고 괴팍한 무리일수록 사파 무공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은 이제 괴팍한 무공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익힌 무공들이 대부분 다 그랬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이 놀란 건 이 무공서에 무언가 숨겨진 뜻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영안을 좀 더 깊게 사용한다.'
심호흡을 한 뒤 연우혁은 영기를 사용해 영안에 더욱 더 집중했다. 오랜만에 두통과 함께 머릿속으로 정보가 밀려왔다.
'이건 두 개의 무공이다!'
흑사보와 사심불구경공(蛇心佛口輕功)!
놀랍게도 흑사보는 뒤의 경공을 익히기 위한 입문 보법이었다. 연우혁은 두통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흥분했다.
입문 보법이 따로 있다는 건 그만큼 그 경공이 대단하단 의미 아니겠는가. 둘의 구결을 분리해서 읽어내자 서로의 위력이 정확히 느껴졌다.
흑사보는 적을 대면한 상황에서도 몸을 돌리지 않고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수 있는 기묘한 보법.
그리고 그 흑사보를 익힌 뒤 배우는 사심불구경공은 신법과 보법에도 그 이치가 맞닿아서 적용이 되는, 몸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신공절학...
'...'
둘 다 정말 도둑놈용 무공이었다. 연우혁은 갑자기 두통이 거세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백면신투 놈의 무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진짜로 두통이 심해지는 거였다.
"으윽."
"연 포두! 연 포두! 이, 이봐! 의원을 불러와라!"
* * *
잠에서 깨어나자 연우혁은 자신이 왜 기절했는지 깨달았다.
하단전과 중단전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강한 신통력을 사용한 게 문제였다.
'이게 그 소리였군...'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고 나자 왜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절명한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몇 번 더 쓰러지고 나면 언젠가는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통제 가능한 영안이라 다행인가?'
만약 다른 통제 불가능한 신통력이었다면 실시간으로 몸이 박살나는 걸 지켜봐야 했었으리라.
연우혁은 눈을 감고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무공을 정리했다. 영안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의 무공이었던 만큼 확실히 뛰어난 무공이긴 했다.
지나치게 도둑놈용 무공이어서 그렇지. 게다가 겉모습도 영 소름끼쳤다. 강시처럼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날아가는 무림인이라니.
'...뭐... 도망칠 일이 있긴 하겠지.'
연우혁은 흑사보 무공서를 보며 새삼스럽게 백면신투에 대해 생각했다.
보아하니 백면신투는 아마 이 무공을 대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전반부에만 손때가 가득하고 후반부에는 거의 펼쳐진 흔적이 없었다. 아마 두 가지 무공이 섞여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전반부만 익힌 모양이었다.
'흑사보만 익힌 모양이군. 하긴 흑사보만 해도 나쁘진 않다만...'
연우혁은 백사보법과 흑사보를 섞기로 마음먹었다.
냉수사나 백면신투가 봤다면 기겁했을 광경이었지만 이미 두 보법을 대성에 가깝게 이해한 만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할 때는 백사보법으로, 나머지 상황에서는 흑사보로. 누가 물어보면 쌍사보법이라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아닌가? 이름이라도 좀 더 정파스럽게 바꿔야 하나?'
사심불구경공은 마찬가지로 괴팍한 경공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뱀의 마음에 부처의 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속으로는 도망칠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주지 않는다는 절묘함이 있었다.
뛰어난 경공은 신법이나 보법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 경공이 바로 그랬다. '몸을 가볍게 하는 공부'의 이치가 깊어지면 '몸을 움직이는 공부'나 '발을 움직이는 공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공을 정리한 연우혁은 마침내 체념했다.
'무림에서 싸울 일 생기면 그냥 마두 취급 받자. 관직 오르면 무마되겠지.'
"연 포두. 괜찮나?!"
연우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공 총관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과로 때문에..."
"상단전이 열린 탓에 단명한단 이야기는 들었네."
"...그, 예."
보는 사람마다 곧 죽을 사람 보듯이 대하는 게 당황스럽긴 했지만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 총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렇게 재주 좋은 사람이...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지만 정말 너무하는군."
"아직 괜찮습니다."
일 년 안에 죽을 것처럼 말하자 연우혁은 부정했지만, 공 총관은 무시하고 자기 할 소리를 했다.
"실은 흑시에서 한 가지 더 구했네."
"무엇입니까?"
"소림 소환단일세."
"...?!!"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에 연우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영약이 아니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영약은 그 의미가 달랐다. 누가 들고 있는 걸 들킨다면 목이 날아갈 수 있었다.
"들킨다면 위험합니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
공 총관은 소림이든 대림이든 알 게 뭐냐는 듯이 대꾸했다.
무림인들이나 소림을 공경하지 공 총관은 불자(佛者)도 아니었다.
"들키면 하오문 놈들이 목이 날아가지 내 목이 날아가진 않을 걸세."
"저도 그럴까요?"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빨리 먹게. 내가 보는 앞에서 처리해주면 고맙겠군."
"...어르신...!"
연우혁은 다시 한 번 감격해서 아부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공 총관이 짜증을 냈다.
"빨리!"
"아. 예."
먹기 전에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영안을 열었다. 방금 혹사한 탓에 조금 조심스러웠다.
놀랍게도 멀쩡한 소환단이었다.
'반 갑자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통 일류의 경지를 엿보려면 반 갑자의 내공이 필요하단 게 무림의 정설이었다. 현재 연우혁이 쌓고 쌓은 내공과 소환단의 내공을 합치면 반 갑자 정도가 나왔다.
꿀꺽!
저번 하북팽가의 취옥단처럼 입에 넣고 삼키는 순간 녹아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 기운은 느낌이 달랐다. 훨씬 더 단단하고 정엄한 기운이 단전과 세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공을 흡수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나 반 갑자의 내공을 갖추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연우혁은 초식을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펼쳐봤자 초식과 초식 사이에 아주 작은 끊김이 있을 거라는 걸.
'...아쉬워하지 말자. 이 정도면 곧이다.'
연우혁처럼 늦게 시작해서 스승도 없이 이류 말입에 이렇게 빨리 도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걸로 저번 빚은 갚은 걸세."
"오히려 제가 빚을 졌지요."
"그런가? 안 그래도 부탁할 게 있었는데 잘 됐네."
"..."
당했다는 걸 알았지만 연우혁은 불평하지 않았다. 사실 방금 삼킨 소환단이 단전에 묵직하게 자리 잡아서 불만도 생기지 않았다.
"뭐든지 말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연우혁은 한경의 고관대작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전장과의 이권다툼까지 어떤 일이든 해낼 각오로 말했다.
"음. 그게 말일세..."
막상 연우혁이 흔쾌히 수락하자 공 총관은 괜히 꺼내기 저어됐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어렵겠다 싶으면 하지 않아도 되네. 사실 자네가 해결해주기보다는, 자네의 식견을 듣고 싶은 거라서."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의아해하는 연우혁을 앞에 두고 공 총관은 설명을 시작했다.
방가전장쯤 되면 그래도 한경에서 나름 이름 있는 전장이라, 관리들과 친분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있었다.
총관은 은자를 바치고 관리는 친절을 베풀어주는 아름다운 상생이 한경 같은 대도시에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개방의 거지들이 전장의 근처를 돌아다닐 때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게 굴었다. 소리를 높이는 건 물론이고 구걸을 할 때도 시간을 지키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게 비일비재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 설명이 적었군. 그러니까 보통 개방의 거지들이 저러는 건 관리 중 누군가가 사주한 걸세."
"!"
만약 전장의 누군가가 개방의 명예를 더럽혔다면 거지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굴었을 것이다.
저렇게 은근하게, 선을 지켜서 행동한다는 건 아마 거지들 본인은 별다른 원한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한경에서 개방의 거지를 사주할 수 있는 건 보통 관리들밖에 없었다.
"대충 이런 식이네. 한경의 관리가 나한테 필요한 게 있다 하더라도 그냥 대뜸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 사람도 체면이 있고 나 또한 체면이 있는데 말일세."
'체면이 저런 곳에 쓰는 단어인가?'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연우혁의 윗사람들일 테니 욕해서 좋을 게 없었다.
"예. 그렇죠."
"그러니까 거지들이 먼저 좀 시끄럽게 굴면, 그 다음에는 사주한 관리가 나를 초청하는 걸세. 연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겠지. '요즘 거지들이 시끄럽게 굴어서 전장 내에 불평이 많다고 들었네, 공 총관. 괜찮다면 내가 도와주겠네.'같은 식으로 말이야."
'사파 새끼들 수법이잖아?!'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지가 먼저 거지 풀어서 괴롭힌 다음에 불러서 '도와줄까?'라니. 사파 새끼들도 저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 총관은 이 방법 자체에는 전혀 불만이 없어보였다. 워낙 유구한 전통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것 자체는 별 불만이 없네. 이렇게 관리의 청탁을 들어주면 그게 또 빚이니 말일세. 문제는 어느 관리가 어떤 청탁을 하고 싶어하는지일세. 미리 알아야 대비하기 쉽거든."
관리의 청탁을 들어주는 건 환영이지만, 미리 내용을 알고 있어야 영리하게 대비가 가능했다.
내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술자리에서 대뜸 들으면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도 없는 만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줘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관리들이 그걸 노리기에 이런 방법을 썼다.
"어느 관리가 어떤 청탁을 하려는지 미리 안다면 거절할 핑계도 준비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지."
"개방에 직접 물어보면 어떻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공 총관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 자들도 관리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일인데 그걸 대답해주겠나?"
"으음. 그래도 제가 한 번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제가 나름 친분이 있습니다."
"아니..."
공 총관은 연우혁이 저렇게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젊은 포두가 개방 거지와 가질 친분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쪽박 안 부수는 정도가 다일 것이다.
"가서 물어보되 억지로 물어보지 말게. 알겠나? 괜히 두들겨 맞을 수도 있네. 거지 놈들은 겁이 없어."
"예. 알겠습니다."
정확히 두 시진 후 젊은 포두가 돌아왔다.
"알아왔습니다. 총관 어르신."
"...?!!!!!!"
정강표국의 사람들 (4)
공 총관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뭘 알아왔다는 건가?"
"예?"
젊은 포두는 갑자기 왜 이러시냐는 듯이 총관을 쳐다보았다.
"개방의 거지들이 어느 관리한테 사주를 받았는지 궁금하셨던 거 아닙니까?"
"그, 그랬지... 그랬는데. 개방 놈들이 대답을 해줬나?"
"예."
"...?????"
공 총관은 혹시 연우혁이 갖고 있는 신통력 중에 섭혼술이라도 있나 싶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그 꼬장꼬장한 거지 놈들을 설득했단 말인가.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앉게. 어느 관리가 사주를 한 건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사실 연우혁도 반신반의하면서 찾아간 거였지만, 한경의 정 분타주는 놀랄 만큼 연우혁을 환영했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네. 정말 다행일세. 걱정을 많이 했거든. 독혼수 대협도 걱정 많이 했네.
-하하. 농도 참 잘하십니다! 하하하!
-농, 농담이 아니었네만... 하여간 무슨 일로 왔나?
-그, 다름이 아니라. 좀 죄송스러운 부탁일수도 있습니다.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최근에 방가전장에서...
-야! 방가전장과 관련된 일 다 찾아서 갖고 들어와라!
-...!
분타주는 바로 찾아서 알려줬다.
개방의 거지들한테 사주한 관리는 바로 한경의 금 통판(通判)이었다.
통판은 판관과 비슷한 품계를 갖고 있는 한경의 정관(正官). 판관보다 실권은 떨어져도 품계는 살짝 더 높은 만큼, 나름 신경 써야 할 관리였다.
"아니, 금 통판이?"
"왜 그러십니까?"
"놀랐네. 이런 식으로 사주할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거든."
모든 관리들이 다 청탁할 게 있다고 개방 거지를 시키지는 않았다. 부탁의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사실 그 이유도 들어왔습니다."
"...아니, 개방이 그것도 말해줬나?"
"예."
공 총관은 진짜 섭혼술을 썼나 고민하며 경청할 준비를 했다.
금 통판이 원하는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경의 방가전장이 본인이 원하는 표국, 그러니까 창천표국에게 일을 맡겨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일하던 정강표국을 밀어내고 말이다.
"허, 금 통판이 창천표국과 무슨 사이길래?!"
"그것도 물어봤습니다."
"..."
"창천표국의 총표두가 금 통판의 친족이라는군요."
"이런."
공 총관은 바로 이해가 가서 혀를 찼다.
이런 청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예외가 있는 법. 자기 친족의 부탁이라면 체면 때문에라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원래 표국끼리 이런 식으로 경쟁해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네. 표사들이 거친 무림인들이라 해도 마땅한 도리는 있는 법이니. 하지만 정강표국과 창천표국 사이는 조금 예외일세. 왜냐하면..."
"아. 둘 사이에 해묵은 원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개방이 말해줬나?"
"예."
공 총관은 앞으로 개방 거지들이 입 무겁다는 말은 조금 회의적으로 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강표국의 국주와 창천표국의 국주는 원래 같은 문파에서 수학한 무림인이었는데, 그 때부터 둘은 치열하게 절차탁마했더랬다.
그 다툼은 강호에 출도한 뒤로도 끝나지 않아 계속해서 원한이 사이에 누적되었고...
...심지어 서로 표국을 차린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이미 몇 번 충돌이 있었던 만큼 저 두 표국 사이의 다툼은 도리고 법도고 말할 게 없었던 것이다.
"저렇게 싸우면 이제 누가 옳고 그른지는 의미가 없어지네. 다른 문파들도 나처럼 생각할 테니. 하여간 연 포두. 정말 고맙네. 이렇게까지 잘 해줄 줄은 몰랐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함세."
"아닙니다. 일이 잘 풀려서 저도 기쁩니다."
"...혹시 개방 거지들을 무력으로 협박한 건 아니겠지?"
"어르신!"
"농, 농담일세."
하지만 영안으로 보니 공 총관은 매우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 * *
"포두님께서 돌아오셨다!!"
"?"
구역의 안가에 도착한 연우혁은 사 포쾌가 고함을 지르자 의아해했다.
그러자 포쾌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더니 부복했다.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 걸 경축드립니다!!"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처벌하겠다."
"?!"
포쾌들은 연우혁이 왜 저러나 싶어 어리둥절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지나가던 한경 사람들은 이미 포쾌들의 외침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잘 됐습니다. 연 포두님!"
"포두님께서 안 보이시길래, 설마 다른 곳에 가신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포두님께서 오래 계셔야...!"
"하하. 하하하."
안가로 들어가 재빨리 정문을 닫은 연우혁은 포쾌들을 보며 심법을 운기했다. 그러자 수치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대체 방금 소동은 뭐냐?"
"그, 그게 말입니다."
사 포쾌는 자기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금의위가 포두님의 활약에 엄청나게 만족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닙니까?"
"그걸 어디서 들었지?"
연우혁은 포쾌들의 말에 더 놀랐다.
개방이나 하오문도 아니고 일개 포쾌들이 저 멀리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지부 어르신께서 서한을 받고 크게 만족하셨다고, 관아에 소문이 돌아서..."
"저희가 뭔가 잘못 안 겁니까?"
'아니.'
연우혁은 하 교위의 빠른 일처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한경의 지부 어르신한테 서신까지 보내다니.
하긴 부탁을 하고 포두를 데리고 간 것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알려줘야 지부 어르신의 체면도 섰다.
확실히 생각보다 포쾌들도 소문을 잘 주워들었다. 개방이나 하오문보다 그 넓이는 좁아도 몇몇 소문들은 더 빨리 듣는 것 같기도 했다.
"잘못 안 건 아니다. 운이 좋아서 공을 세웠다."
"경축드..."
"저희가 은조각을 좀 모았습니다! 대접해드리고 싶..."
"그냥 제 객잔으로 오십시오!"
연우혁은 손을 뻗어 지저귀는 포쾌들의 말을 막았다.
"축하는 고맙다. 하지만 놓치고 있는 게 있군."
"그게 무엇입니까?"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 으스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관리로서 사는 건 참으로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다. 그리고 포두로서 사는 건 더더욱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공을 세우고 그걸 드러내야 했지만, 동시에 공을 세우고 드러내서는 안 됐다. 다른 관리들의 시기와 질시를 받아서 짓밟힐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부 어르신이 좋게 봐준 건 의외의 소득이었지만, 괜히 다른 관리들이 견제하기 시작하면 본전도 못 찾았다. 지부 어르신이라는 확실한 줄을 잡는 게 아니라면 으스대서는 안 됐다.
게다가 하 교위는 얼마 전에 판관 한 명을 곤장 치고 가지 않았던가. 그 원한이 불똥처럼 연우혁에게 튈 수도 있었다.
"과, 과연..."
"탄복했습니다. 포두님."
"축하는 고맙다. 이렇게 받으니 기쁘군.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뭐가 있었지?"
연우혁은 밀린 일들이 있으면 빠르게 처리할 요량으로 물었다.
밖에서 일하고 왔다 하더라도 안의 일이 처리 안 되어있으면 꼬투리를 잡힐 수 있는 게 냉혹한 한경 관리 사회였다.
그 질문에 오 포쾌는 자신이 갖고 온 명주(銘酒)를 슬쩍 다시 행낭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축하로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좀도둑 놈 하나를 잡았습니다. 생각보다 멍청한 놈이라 금세 따라잡히더군요."
"잘했다."
"연 포두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게 무슨 상ㄱ... 아니다. 다른 건?"
"부역(賦役)을 맡은 놈들이 나오지 않아서 확인해봤는데 몇 년은 된 폐가더군요. 보고했더니 저희 잘못이 아닌데 책임을 물으셔서..."
한경에서는 치수나 성곽 보수 같은 일에 백성들을 불러서 부역을 시키곤 했다.
물론 이런 부역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떤 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버려서 부를 수 없었지만 어떤 자는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척 하고 부역을 회피하곤 했다.
이런 이들을 찾아서 데리고 오는 것도 포쾌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애초에 한경을 떠나버린 건지 그냥 장부를 속이고 다른 곳에 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곤란했겠군. 어느 곳이지?"
"한경 남쪽으로 십오 리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하왕촌인데 웬 폐가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번 더 찾아가서 촌장의 집을 뒤져라. 숨겨놓은 호패가 나올 거다. 촌장이 마을 사람들을 부려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다."
"...????"
포쾌들은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사건들을 확인했다.
몇 개 안 되게 남아있던 사건들이 순식간에 앉은 자리에서 해결되었다.
주루에서 사라진 장신구는 바깥의 여물통에서 발견되었고(양 포쾌는 기절할 뻔했다), 갑자기 밤에 으스스하게 나타나는 인화(燐火)는 썩은 나무를 치우자 벌레가 붙을 곳이 없어서 사라졌다(막 포쾌는 섣불리 부적을 산 자신을 욕했다).
이 정도면 관리들이 와서 시비를 걸어도 책잡힐 건 없겠다 싶자 손님이 방문했다.
놀랍게도 제갈세가의 무인이었다.
"아니, 대협!"
제갈규를 알아본 연우혁이 반갑게 인사했다. 제갈규는 생각보다 연우혁이 반갑게 인사해서 당황했는지 멋쩍어하다가 인사했다.
"으... 으음. 반갑네."
"이렇게 뵙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그... 그렇군. 그, 팽 형한테 들었는데, 나도 편하게 호형호제해도 좋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 그래. 연 아우."
제갈규는 확실히 넉살이 좋지 못했다. 연우혁을 나름 인정하는 만큼 편하게 대하려고 해도, 그리 친하지 않아서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그걸 본 오 포쾌가 재빨리 술을 꺼내려고 하자 연우혁은 손짓했다. 오 포쾌는 재빨리 술을 집어넣고 물러났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음. 별 건 아닌데..."
'별 거겠군.'
이제까지 '별 거 아니다'라고 말한 무림인들 중 정말로 별 거 아니었던 사람은 드물었다. 연우혁은 무림인의 체면을 배려해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사실, 내가 부탁을 받았네."
"무슨 부탁이십니까?"
"...비무에 참가해달라고."
"아하."
보통 무림에서 비무는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지만, 제갈세가의 무인한테 참가해달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당연히 제갈세가 무인한테 '비무에 나와라, 네 세가 이름을 걸고 내 명성을 높여보겠다!'식으로 시비를 거는 무인은 없을 테고...
아마 비무에 참가한 쪽 중 하나가 자기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제갈세가의 젊은 고수를 초대한 것이리라.
이런 일은 무림에서 종종 일어났다. 서로 다툼이 일어났다고 대뜸 생사결을 벌이면 그건 사파지 정파가 아닌 것이다.
정파라면 나름 서로의 체면을 존중해가며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 중 많이 쓰이는 방식이 바로 이런 비무였다.
패자가 승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체면과 실리의 적절한 조화.
물론 이것도 이겨야 유리했다. 괜히 저쪽에서 젊은 고수를 불러온 게 아니었다.
"혹시 상대가 형님보다 강합니까?"
"그건... 그건 아니야. 하지만 자네의 지혜가 필요하네. 도와주겠나?"
"혹시 제가 비무에 참가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이지.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제갈규의 단호한 대답에 연우혁은 안심했다.
비무에 참가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원한을 쌓는 거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조언 몇 마디 하고 빚을 지워놓는 건 수지 맞는 장사였다.
"제가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의 지혜야말로 무림 제일..."
"내 지혜는 연 아우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네."
"!?"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히 '야 연 포두가 제갈세가보다 머리 좋다더라' 소문이라도 나면 말 그대로 머리가 잘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 왜 이래?'
영안으로 보니 매우 심란해보였다. 하긴 자존심 센 오대세가의 무인이 자기 머리가 부족하다고 인정할 정도면 보통 정신 상태는 아닐 터였다.
"형님. 솔직하게 털어놔주십시오. 저희 둘이 머리를 맞대면 어느 문제든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연우혁은 자신이 해결했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날로 먹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제갈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초청한 자들은 상대를 이기고 싶어서 초청한 걸세. 대신 나가달라고 말일세."
"예. 그렇겠지요?"
"그 상대들도 제법 뛰어난 고수를 초청했네."
"하지만 아까, 상대가 형님보다 강하진 않으시다고..."
"그랬지."
제갈규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대는 당문의 당령 소저일세."
"..."
연우혁은 지부 어르신이 불렀다고 해야 좋을지, 금의위 교위가 불렀다고 해야 좋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강표국의 사람들 (5)
하지만 연우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갈규가 말을 끝내버렸다.
"연 아우. 나는 대(大) 제갈세가의 핏줄로, 강호의 많은 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내게 물어보곤 했네. 하지만 사실 난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네. 신기묘산, 신기묘산이라고들 하지만 아직 어설프단 말일세."
자존심 강한 제갈규로서, 세가의 사람도 아닌 무림인한테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겠지만 눈앞의 이 포두라면 왠지 입이 열렸다. 어쩌면 제갈규가 인정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난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연 아우는 알겠나?"
"..."
물론 연우혁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누가 죽었거나 뭐가 사라졌거나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런 건 눈 감고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치정 문제 아닌가.
제갈규가 당 소저를 좋아하는데 체면에 상처를 주지 않고 좋게 이길 방법 같은 게 있을 리가...
"형님. 당 소저를 왜 좋아하시는 겁니까?"
"...어, 어떻게 알았지!?"
'큰일났군. 이 사람.'
자기가 방금 태도로 드러내놓고 진심으로 놀라하는 제갈규의 모습에 연우혁은 경악했다.
제갈규가 무림에서 친우는 좀 부족해도 머리가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제 머리까지 부족해지고 있었다.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두고 고민하시는 이유가 뭐 그리 많겠습니까."
"그... 그렇군. 하긴..."
사실 연우혁은 예전부터 태도를 보고 알았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제갈규가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 소저를 좋아하시는 건 사실이지요?"
"...맞네. 호감이 있네."
"이유가 뭡니까?"
연우혁은 이유를 들으면 해결방법이 생길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가문이나 무림의 정세와 관련된 이유라면 그걸 핑계로 비무를 파할수도...
"예쁘잖나."
"...그렇군요."
'틀렸군.'
예상 밖의 이유에 연우혁은 실패를 직감했다.
어쩌면 무림에 온 후 처음으로 실패하는 사건이 될지도 몰랐다.
* * *
사 포쾌는 팔짱을 끼고 구역 안가의 정문 앞에 섰다.
원래 이런 정문 문지기 노릇은 귀찮고 보람 없는 일이라 포쾌들 중에서는 대충 하거나 꾀를 부리는 자들이 많았다. 한경 안에서 이런 포쾌들 안가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사 포쾌의 자세는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사 포쾌를 아는 다른 포쾌들이 보고 놀라워 할 정도였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사 포쾌도 자신의 평판이 어떤지 잘 알았다. 원래는 부하였던 다른 포쾌들도 사 포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 포두의 조카 놈은 노골적으로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 포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법.
사 포쾌는 악랄한 무림인들 앞에서 아무 상관없는 자신을 구해준 젊은 포두에게 꼭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연 포두 안에 있나?"
"...?"
옷을 보니 꽤 괜찮은 집안의 여식으로 보이는 사람이 정문 앞에 서서 말을 걸자 사 포쾌는 멈칫했다.
원래라면 뇌물을 요구하거나 귀찮게 굴지 말고 가라고 했겠지만, 달라진 사 포쾌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씀드릴 수 없소."
"...뭐?"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하시오. 마땅한 관무라면 맡아서 처리하겠소!"
눈앞의 소저는 옅게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말했다.
"한 번만 넘어가주지. 비켜라. 안에 있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하시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소."
'미쳤나?'
당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포쾌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화도 나지 않았다.
무슨 황제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포두 하나 만나는데 이렇게 격식을 철저히 따지는 포쾌 새끼가 어디 있단 말인가.
"분명 한 번만 넘어가준다고 했..."
"아이고!!!"
"사 포쾌! 이리 오게! 포두님!! 당 소저 오셨습니다!!"
뒤늦게 다른 포쾌들이 달려들어서 사 포쾌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사 포쾌는 당황해서 물었다.
"뭐하는 거냐?! 외부인을 멋대로 들여보내다니!"
"입 닥치시오! 당문의 사람입니다!"
"뭐, 뭐!?"
사 포쾌는 기겁했다. 어쩐지 잘 사는 집 같다 했는데 당문이었다니.
"당, 당문의 사람이 여긴 왜...?"
"저번에 포두님께서 일을 해결해주셨잖습니까. 물어볼 게 있나봅니다. 아니, 객잔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왜 모릅니까!"
"이봐. 사 포쾌는 그 때 누워있었잖나."
"아. 그랬지."
저승을 구경하고 온 포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동안, 당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왔다. 뒤늦게 소란을 알아차린 연우혁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당 소저. 포쾌들이 규율을 중시해서 말입니다."
"보기 좋군."
당령은 알아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안에서 심법을 운기하며 제갈규의 비무를 고민하던 연우혁은 당령을 보자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당 소저. 비무 때문에 오신 겁니까?"
"!!"
평소 허둥대지 않던 당령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는지 의자 귀퉁이를 부숴버렸다.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의자 비싼 의자인데.'
"어... 떻게 알았지?"
"한경의 포두로 일하면 이런저런 소문들이 들어옵니다. 포쾌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개방의 거지들 못지 않지요."
"그런 거였나. 몰랐는데 놀라워."
졸지에 당령 안의 포쾌들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연우혁은 상대가 비무 때문에 왔다고 듣자 혹시나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비무 상대가 제갈 형이라 고민되시는 겁니까?"
당령은 이번에는 아까만큼 놀라지 않았다. 이번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 포두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네. 그래. 상대가 제갈규라서 지금 고민 중이야."
'설마?'
연우혁은 당령도 제갈규에게 호감이 있나 싶었다.
영안으로 그런 감정은 본 적 없었지만 사람 마음이란 건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을 지 모르는 법.
"혹시 제갈 형을 좋..."
"어떻게 하면 제갈규를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까?"
다행히 당령은 연우혁의 망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갈 형을 말입니까?"
"그래. 알다시피 비무에서는 독과 암기가 제한되잖아."
연습 비무에서 사천당문은 아무래도 좀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치명적인 암기도, 지나치게 치명적인 독도 쓸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적당한 암기나 독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문제는 그 정도 암기나 독은 제갈규도 안다는 점이었다.
같이 협행을 하면서 무공을 봤는데 제갈세가의 무인이 모를 리 없었다.
"네 꾀라면 분명 그 놈을 이길 방법을 알 것 같아서."
"아니... 당 소저. 친분이 있는 무인의 약점을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말하고 나서 연우혁은 아차 싶었다. 영안으로 본 당령의 몸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당령은 놀랍게도 인내했다. 손등 위로 힘줄이 튀어 오르는 정도로 분노를 가라앉힌 당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지. 당연히 알고서 한 질문이야. 농담에 가까웠지."
'절대 농담이 아니었는데.'
진심으로 내놓으라고 했다가 뒤늦게 깨닫고 농담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영안을 가진 연우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우혁은 살짝 감동했다.
'사건을 해결해 준 보람이 있군.'
강 노인을 찾아주기 전이었다면 '니가 제갈세가한테 뒤지든 말든 알 게 뭐냐 뱉어라'했을 텐데...
"음."
"?"
"으음."
"??"
"뭐, 몰래 말해줘도 괜찮고. 당문의 이름을 걸고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몰래..."
* * *
'액이 낀 날인가?'
어찌어찌 당령도 돌려보내고, 연우혁은 생각에 잠겼다. 이쯤 되니 비무가 진심으로 두려워질 정도였다.
'가더라도 절대 제갈규 옆에 있지는 말아야겠군...'
"연 포두 있는가!"
'젠장.'
제비처럼 안가에 날아드는 당등을 본 연우혁은 경공을 미리 펼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소문은 들었다. 공을 세웠다고? 대단하구나. 금의위 놈들이 얼마나 까다롭고 지랄맞은데 말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분타주는 네가 끌려간 줄 알고 관아를 습격하려고 했지."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살짝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관아 습격은 뒷감당이 너무 힘든 일이지 않은가.
"용케 그런 생각을..."
"그렇지? 내가 말렸다."
"감사합니다. 역시 독혼수 대협밖에 없으십니다."
"정 분타주가 좀 성질이 급하니까 이해해라. 그보다 네 꾀주머니를 빌리고 싶은데..."
"혹시 비무 때문에 오셨습니까?"
당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이, 이 녀석! 대체 그건 어떻게!?"
"사실 당 소저가 오셔서 물었습니다."
"아... 난 또."
당등은 김이 샜다는 듯이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보여준 재주들이 하도 신통하다보니, 당연한 걸 맞춰도 괜히 더 비범하게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여간 잘 됐다. 들어봐라."
당등은 멋대로 털썩 앉더니 제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경에서 활동하는 표국 중에 정강표국과 창천표국이란 두 표국이 있는데, 이 두 표국이 보통 앙숙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또 뭔 시비가 붙어서 서로 비무까지 가게 됐는데...
"이 둘이 하도 붙어대는 바람에 불평이 많다. 표국 놈들이 표물 옮기는 것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움만 벌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내가 중재를 맡게 됐는데."
"??"
연우혁은 비무가 사실 두 표국이 결판을 내려고 벌이는 거였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그 중재를 당등이 맡게 됐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어떤 인연으로 중재를 맡게 되신 겁니까?"
"아. 두 국주가 무당의 속가제자다. 청허진인께서 내게 부탁하셨지."
"!"
무당파의 이름에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두 국주가 같은 문파 출신이란 건 알았지만 무당의 속가제자였다니.
'무당의 무공을 배웠는데 저렇게 저열하게 싸워도 되나?'
"무당 무공 헛배운 놈들이지."
"...사람의 욕심이 어찌 그리 쉽게 다뤄지겠습니까?"
"그건 네가 무당의 도사들을 못 봐서 그런 거 아닌가 싶은데. 그 도사들이 제일 잘 하는 게 그거다. 하여간, 네 그 기막힌 꾀주머니에서 꾀 하나 꺼내 보거라. 맨입으로 부탁하지 않으마."
"엇. 혹시 영약 갖고 오셨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당등은 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영약이 필요했나?"
"꼭 필요한 건 아니고, 아무래도 혼자 무공을 독학하다보니 한계를 느껴서..."
당등은 설마 눈앞의 포두가 일류 직전의 경지까지 혼자서 독학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영약... 으음. 당문의 영약은 외부인한테 쉬이 줄 수가 없군."
"그건 오대세가라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독기 때문이다."
'아.'
연우혁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당문의 무인들이 익히는 심법은 독공이라고 해서 아예 다른 방식으로 특화된 무공이었다.
그런 무공에 어울리는 영약은 당연히 독일 터.
"영약이 아니라면 암기를 갖고 오셨습니까?"
"잠깐, 포두가 암기 써도 되나? 마두 소리 들을 것 같은데."
"..."
연우혁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등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청허진인을 만나게 해주마."
"?"
당등은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연우혁은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파일방도 오대세가도 아닌 만큼 저게 뭔 소린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청허진인을 만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단 말이냐!?"
"모릅니다만..."
"아. 그렇겠군."
당등은 그제야 눈앞의 포두가 오대세가 출신이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네가 상단전이 열린 채로 태어나 목숨이 위험하단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 여러 통 서신을 보냈다. 아무래도 술법에 능한 쪽이 이런 걸 잘 알지 않겠나 싶어서 말이다."
"...대협!"
연우혁이 감사를 표하려고 하자 당등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청허진인은 무당파 내에서도 이런 술법에 능한 분이시다.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장문인도 만나기 힘든데, 운 좋게 이번 일을 해결해주면 만나보겠다고 하시더군. 사실 너한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한테? 어째서 말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
이번에는 연우혁이 머쓱해졌다. 하긴 그렇게 소문이 퍼지도록 해결을 했는데 관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대협. 이건 어디까지나 두 표국을 중재해야 만나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무슨 재주로 둘을 설득합니까?"
"들어나 봐라. 그만 징징대고. 원래 둘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둘이 처음으로 강호에 출도해서 협객 노릇을 할 때 꽤 커다란 산채를 하나 토벌하고 금덩어리들을 주웠다지 뭐냐."
"옆에 혹시 철로 만든 궤(櫃)도 있었답니까?"
"...?!!!"
당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정강표국의 사람들 (6)
"드, 드디어 네 녀석이 귀신을 부려서 옛일을 알아내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냐?"
"...산채에 금덩어리가 있다면 당연히 그걸 보관해놓는 철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도적놈들이 득시글거리는 산채에 그냥 금덩어리를 보관할 리 없잖습니까."
"아. 그렇겠군."
사실 연우혁은 자신이 아는 사건인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었지만 당등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금덩어리가 있으면 옆에 철궤도 있을 법했다. 아까도 느낀 것이었지만 이 포두의 말은 지나치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방금 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는데 이 녀석이 내뱉자 괜히 꿰뚫어 본 기분이 들고...
"다른 놈팽이였다면 그냥 금덩어리를 챙겼을 거다. 사실, 그냥 챙겼다면 이렇게 사이가 꼬이지도 않았겠지. 나였다면 그냥 챙겼을 텐데... 여하튼 이 둘은 금덩어리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외쳤단다."
-이 금덩어리는 산적 놈들이 주변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해서 만든 것이니, 우리가 갖지 않고 관에 돌려주겠소. 벼슬아치 놈들이 이 금덩어리를 양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지 감시하겠소!
'와. 정말 아깝군.'
연우혁은 속으로 자신의 일처럼 괴로워했다.
아무리 협행이라고 하지만 그런 금덩어리를 그냥 양보하다니. 역시 협객은 보통 정신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이제 그 뒤에 터졌지. 원래 발견된 금덩이는 총 여섯 개였다. 정강표국 국주 놈이 세 개. 창천표국 국주 놈이 세 개. 이렇게 찾은 거지. 그런데 이걸 찾았을 때 아직 산채 곳곳에서 싸움이 한창이던 때라 둘은 금덩어리를 철궤에 넣고 잠근 다음에 다시 싸우러 갔다고 하더군."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등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당등은 이 젊은 포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계속해서 설명했다.
산채가 꽤 넓었던 데다가 두 국주가 있던 창고는 이미 산적 놈들을 다 죽인 곳이라, 둘은 안심하고 금덩어리를 철궤에 넣고 싸우러 갔다.
그리고 토벌이 완전히 끝난 뒤 돕기 위해 병사들을 끌고 온 군관 앞에서 철궤를 내밀며 선언했다.
-여기 도적놈들이 훔친 재물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겠다! 이 금덩어리를 함부로 훔치거나 멋대로 쓰는 사람이 있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호기로운 선언에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함성을 질렀다. 협객으로서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금덩어리 다섯 개를 환전해서 백성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대협!
-뭐? 다섯 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금덩어리는 여섯 개일 텐데?
-다, 다섯 개였습니다. 어디 앞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한단 말입니까?
"둘 다 각자 세 개씩 넣고 궤를 잠갔는데, 관에 가서 보니까 다섯 개가 된 거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느냐."
서로 세 개씩을 넣었을 텐데 총 다섯 개가 되자, 두 국주는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강표국의 국주는 뒤늦게 넣은 창천표국의 국주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했고, 창천표국의 국주는 정강표국의 국주가 수작을 부린 뒤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의심은 점점 쌓이고 원한으로 변했다. 결국 이렇게 두 표국이 다툼을 하게 됐으니, 따지고 보면 금덩어리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보기에는 누가 수상한 것 같으냐? 난 아무래도 창천표국 국주가 수상하다. 뒤늦게 넣지 않았느냐?"
"의외로 관리들은 의심하지 않으시는군요?"
"그야 관리들은 털 만큼 털었거든."
당등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일이 터지고 나서 가장 많은 의심을 받은 건 역시 금덩어리를 맡은 관리들이었다.
군관부터 시작해서 관리들은 온갖 협박을 받고 탈탈 털렸지만, 놀랍게도 금덩어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간덩어리가 커도 그렇지, 이런 일에 낀 금덩어리를 날름 도둑질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맞, 맞습니다. 혹시 몰라서 철궤를 열 때도 다 같이 참석해서 열었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관리 놈들 중 한 놈이 훔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창천표국 국주겠지. 자. 네 생각은 어떠냐?"
"아닙니다."
"아니야!? 잠깐, 그럼 넌 누가 범인인 줄 짐작이 간다는 거냐?"
"예."
"...!"
당등은 감탄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아직 정답을 듣지 않았지만 이 포두의 추측이 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지금 들은 것만으로 누가 범인인 줄 알아맞히다니.
"창천표국 국주가 훔쳤다면 그렇게 노골적이고 뻔뻔하게 훔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두 개만 찾았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 그렇군. 확실히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면 대체 어느 놈이 훔친 거냐?"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관리도 아니고 국주도 아니라면 그 날 산채에 있던 무림인들 중 하나겠지요."
"..."
당등은 연우혁의 추리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영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물론 그 자리에 다른 무림인들도 있었지만 가져가는 건 무리다. 그 의심은 이 이야기를 아는 다른 놈들도 해본 의심이란 말이다."
당등은 왜 산채의 다른 무림인들이 가져갈 수 없었는지를 설명했다.
창고에서 금덩어리와 철궤를 발견한 둘은 혹시라도 살아남은 산적놈들이 몰래 금덩어리를 훔쳐서 도망가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고민 끝에 둘은 무림인다운 방식으로 해결했다.
창고의 빗장을 치고 정문을 단단히 막아버린 것이다.
"마지막에 남은 창천표국 국주는 문에는 빗장을 치고 다락에 난 구멍으로 나왔다고 하더군. 나중에 확인해보니 빗장도 건드린 놈이 없고, 다락의 먼지도 그대로였다고 했으니, 다른 무림인 놈들은 건드릴 수가 없지."
"문을 잠근다고 못 훔치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선문답 같은 소리를... 네가 청허진인이냐?"
당등은 들고 있던 찻잔으로 탁자 위에 있던 철전을 탁 덮어버렸다.
"이렇게 있는 걸 어떻게 훔친다는 거냐?"
"저는 여기 찻잔에 손을 안 대고 철전을 훔칠 수 있습니다만."
"!!"
당등은 깜짝 놀랐다.
믿기진 않았지만 이 포두의 신통력이라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한 번 해봐라."
"이미 했습니다."
"뭐? 정말?"
당등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철전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무슨..."
그제야 연우혁이 철전을 집어서 자기 전낭에 집어넣었다.
"찻잔에는 손 안 댔습니다."
"..."
당등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자 연우혁은 그만 말을 돌리고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로 대답하면 조금 어색할 것 같아 선문답을 던지며 분위기를 잡았는데, 아무래도 당문 사람들 상대로는 역효과인 것 같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문을 잠가도 얼마든지 빈틈은 있다는 겁니다. 대협. 예를 들어, 처음에 금덩어리를 철궤에 넣을 때 창고에 다른 무림인들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래. 주변을 호위하고 보초를 서던 놈들이 몇 명 더 있었다고 들었다."
"그럼 얼마든지 훔칠 수 있었을 겁니다."
당등은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마지막에 창천표국 국주가 여섯 개를 확인하고 철궤를 잠갔다. 훔치는 건 무리야."
"대협. 제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혹시 정강표국 국주가 먼저 세 개를 넣을 때 그걸 대신 받아서 넣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
당등은 눈을 크게 떴다.
놀랍게도 포두가 지적하는 상황에 맞는 놈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있었지. 곽선이란 놈이 철궤 안의 먼지를 치우고 금 덩어리를 넣었다고 했다."
"그 사람이 금 덩어리를 하나 훔친 겁니다. 견물생심 아닙니까."
"마지막에 창천표국 국주가 여섯 개를 확인하고 철궤를 잠갔다니까?"
연우혁은 대답 대신 철전 하나를 반으로 쪼갰다.
그걸 본 당등은 벼락이 머리에 내려치는 듯한 깨달음을 받았다.
"그, 그렇구나!"
"복잡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혼란스러운 자리에서 무슨 복잡한 계략을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곽선이란 사람은 금덩어리가 워낙 울퉁불퉁하고 모양도 제각각이니, 하나를 반으로 쪼개 넣어도 눈치를 못 챌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를 소매에 넣고 남은 하나를 쪼개서 세 개를 맞췄겠지요. 창천표국 국주야 자기가 찾은 금덩이도 아니니 그냥 세 개인가보다, 하고 잠갔을 거고요."
"이... 이런 쳐 죽일 놈... 잠깐, 그러면 관아의 벼슬아치 놈들은 왜 이걸 다섯 개라고 한 거냐?"
"아마 대장장이가 반으로 쪼개진 금덩이를 붙이지 않았겠습니까? 붙이면 딱 들어맞으니, 움직이는 도중에 쪼개졌겠거니 생각했을 겁니다."
"이 놈들은 그걸 왜 말하지 않은 거냐!"
"아마 무림인들이 찾아와서 윽박지르는 탓에 겁을 먹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들 실수로 쪼갰다는 말을 하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를까 싶었던 거겠죠."
"이런 빌어먹을..."
당등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두 국주가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모든 게 웬 잡놈 하나의 별 생각 없는 도둑질 때문이었다니.
연우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워낙 시일이 지나서 해결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곽선이란 자가 시치미를 떼면 어떡합니까?"
연우혁이 원래 사건을 해결할 때는 정답만 알아내면 끝이었지만, 실제 무림의 사건은 그걸 알아내도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사건 같은 경우는 상대가 잡아떼면 답이 없는 것이다.
"응?"
"그러니까 곽선이란 자가 증거가 없다고 하면..."
연우혁의 말에 당등은 폭소를 터뜨렸다.
"너는 천 리 밖에서 일어난 일은 해결할 줄 알면서도 십 리 안에서 일어날 일은 모르는구나. 따라와라!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려주마."
***
젊었을 적 강소일권이라는 거창한 별호로 불렸던 곽선은 무관을 차리고 나름 주변에서 존경 받는 유지로 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은 무림인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반쯤 금분세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가 관아와도 엮여 있는 만큼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당등은 그런 곽선을 설득하기 위해 혈도 열한 군데에 침을 꽂고 여섯 가지의 독을 몸구멍에 툭툭 집어넣었다.
"네놈이 금덩어리를 훔친 걸 알고 있다. 인정하겠느냐, 죽겠느냐?"
"그르르륵. 끄으윽. 끄으으윽."
"인정하겠느냐, 죽겠느냐?"
"저, 당 대협. 죄송하지만 저 분께서는 지금 말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걱정 마라. 저렇게 보여도 말은 할 수 있으니."
곽선은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누가 봐도 '인정하겠다'라는 뜻이 느껴졌다. 당등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봐라! 말하지 않느냐."
"..."
연우혁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정말 당문 사람들과는 그만 엮여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 때 갑자기 주변이 추워지더니 곽선의 방에 있던 등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말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방 안으로 퍼져나갔다.
"왜 그 자를 괴롭히고 있는가?"
"청허진인 님 오셨습니까?"
당등은 곽선을 바닥에 던지고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여기 오는 길에 내가 하인을 보냈다. 금 도둑놈을 찾았다고."
연우혁은 자신이 틀렸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당등에게 감동해야 할지, 기막혀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금 도둑놈이라니?"
"그러니까 들어보십시오. 이 놈이..."
당등은 연우혁이 설명해 준 내막을 일일이 털어놓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곽선은 눈만 데룩데룩 굴리며 기겁했다.
'대체 어떻게...!?'
아무도 알 수 없는 내밀한 사정을 저렇게 정확히 맞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과연. 그런 거였나."
"이 놈 때문에 두 국주가 그렇게 싸운 겁니다."
"그럴 수도. 하지만 그 뒤로 둘이 계속해서 싸운 건 둘의 마음속에 분노와 질시가 있어서일세. 그런 게 없었다면 설령 금덩어리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해했을 거야."
"그런 게 없는 놈이 강호 천지에 어디 있답니까? 하여간 두 국주 놈을 화해시켜드렸으니, 이 젊은 놈을 좀 살려주십시오. 재주가 기막힌 놈입니다."
당등은 대뜸 연우혁의 양 어깨를 붙잡더니 앞으로 떠밀었다.
"이번 일도 사실상 이 녀석이 알아낸 겁니다. 귀신을 부리는 것처럼 신통한 녀석입니다."
"귀신을 부리는 건 자네 생각처럼 편리한 일이 아닐세.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게 귀신이고, 음과 양이 굽히고 피는 것이 귀신일세.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사라지는데 귀신이라고 오래 전 일을 어떻게..."
"...영안도 있습니다."
"영안이라는 것도 자네 생각처럼 편리한 신통력이 아닐세. 사물을 좀 더 자세히 보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이 젊은 포두가 내막을 맞힐 수 있는 건 자세히 본 걸 기반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서일세. 신통력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이라고 봐야 하겠지."
"그냥 좀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당등이 짜증을 내자 연우혁은 이 얼굴도 모르는 도사에게 호감이 갔다. 어쩌면 강호에서 사천당문을 제압할 수 있는 건 무당일지도 몰랐다.
포두 연우혁 (3)
자신보다 아래 배분인 당등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청허진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신선이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살릴 수 있겠나? 술법이라는 것은 자네 생각처럼 편리한 일이 아닐세."
"으윽."
당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가의 진전을 이은 문파는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무당의 도사들은 가장 그 색이 뚜렷한 이들이었다.
이 도사들은 늙으면 늙을수록 말을 더 복잡하고 알쏭달쏭하게 해대는 습관이 있어 듣는 사람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었다.
당등이 생각하기에 혈교나 마교의 무인들이 무당의 도사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 이런 점 때문인 것 같았다.
검을 섞기 전에 복장이 터지는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청허진인 님... 약속하셨잖습니까.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독하게 손을 썼습니다."
'와. 진짜 뻔뻔하시군.'
연우혁은 자기편인데도 순간 감탄할 뻔했다.
누가 봐도 즐기면서 손을 썼는데!
"진정하십시오. 당 대협. 전 괜찮습니다."
연우혁은 일단 당등을 달랬다. 상대가 당등보다 강한데다가 배분까지 높은 이상, 저렇게 나오면 이쪽에서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괜히 힘을 쓰기보다는 공손한 모습이라도 갖추는 게 맞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무당의 도사가 하는 말은 해가 동쪽에서 뜬다 하더라도 믿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자네가 믿음직한 도사들을 잃는 것뿐이지. 내게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런 개..."
연우혁은 황급히 당등의 소매를 당겼다.
청허진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는 삼시충(三尸蟲)에 대해 아는가?"
"진인께서 틈만 나면 떠드시는데 모르겠습니까?"
"알지만 진정 아는 건 다른 의미일세. 삼시충이란..."
도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설명을 시작하자 당등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귀를 막았다.
삼시충이란 도교에서 나오는 벌레로, 각자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에 머무르며 사람의 욕망을 관장하고 상제에게 죄악을 고해바치는 벌레였다.
그러므로 당등 또한 화를 가라앉히고 악업을 줄이며 선업을 쌓아야 진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아니, 선업을 쌓아야 무공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게 대체 무슨 허튼 소리입니까? 그러면 마교의 고수는 어떻게 나오고 혈교의 고수는 어떻게 나온답니까?"
"그래서 지금 마교가 천하를 지배하는가? 혈교가 천하를 지배하는가?"
참다못한 당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청허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내가 자네에게 약속한 건 저 젊은 포두를 만나보겠다는 거였네. 그리고 사실, 자네가 이 일을 해결해주지 않았어도 만나봤을 걸세. 인연이 닿은 적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면 왜 저한테 이런 중재를 맡기신 겁니까?"
"선업을 쌓으면 좋지 않나."
당등의 입 속에서 빠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나왔다.
"잘 해결했네. 이제 이야기할 수 있게 잠깐 나가주겠나?"
"예. 예. 앞으로 저한테 어떤 부탁도 하지 마십시오!"
당등이 쓰러진 곽선을 데리고 나가자 갑자기 안이 조용해졌다. 청허진인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남아있었다.
"인연이 닿은 적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겠군."
"아. 예."
"담풍호를 말하는 걸세. 그는 한 때 무당의 제자였지."
"!"
삼절객의 이름이 나오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하긴 생각해보니 삼절객은 술법을 쓸 줄도 모르면서 술법이나 영기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보통 출신은 아니라는 게 짐작이 갔다.
"처음 들었습니다. 그게 왜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자네는 천 리 밖의 일은 해결할 줄 알면서 당연한 걸 묻는군그래. 본인이 알리고 싶지 않아하고, 무당도 알리고 싶지 않아하니 그렇겠지?"
'음. 당등 대협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
연우혁은 빠르게 당등이 그리워졌다. 그냥 이야기하기 싫다고 하면 되지 뭘 저렇게 짜증나게 말한단 말인가.
"미안한 말이지만 담풍호가 해결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상단전이 열린 걸 해결해 줄 방법은 없네."
"으음."
연우혁은 침음성을 흘렸다.
각오는 했지만 역시 들어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청허진인 정도 되는 도사가 저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무공의 경지를 올려서 조화를 맞추는 걸세. 자네는 초절정의 경지가 어떤 경지인지 아는가?"
"아직 일류라고 칭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경지를 알겠습니까?"
"초절정의 경지는 상단전을 여는 경지일세."
"!"
일류의 경지까지는 하단전에 내공을 쌓아 무공을 익히고, 절정의 경지부터는 중단전에 내공을 쌓아 육체를 뜻에 걸맞게 바꿔나가며, 마지막으로는 상단전을 두드려 초절정의 경지에 도전한다.
"혹시 술법 중에 이기어검과 비슷한 술법을 본 적이 있나?"
"아. 있습니다."
연우혁은 학사가 쏘아 보내던 검을 떠올렸다. 청허진인은 잘 됐다는 듯이 설명했다.
"이해가 쉽겠군.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 술법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어검을 쓸 줄 아는 건 상단전을 열었기 때문일세. 즉, 바꿔 말하자면 하단전과 중단전이 그 정도로 받쳐줘야..."
"...상단전을 열고도 몸이 버틸 수 있다는 거군요. 제가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글쎄. 쉽지는 않겠지. 작금 무림에 그런 고수는 다섯도 되지 않을 테니."
"..."
"그런 알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는 건 그만두세나.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한 건 담풍호와 인연이 있어서 뿐만이 아니니. 자네는 상단전이 열린 사람이 왜 금세 죽는지 아는가?"
"음,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에는 선천진기까지 낭비해서 기력이 쇠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맞네. 정확히 보았군."
나름 신통력을 계속 써왔던 만큼 연우혁도 어느 정도 체감하고 있었다.
신통력을 잘못 쓰면 순식간에 생기가 빨려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자네가 아직 생생한 것은 자네가 신통력을 매우 잘 통제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기가 충만하기 때문일세.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벌써 피골이 상접했을 걸세."
영안은 신통력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기운의 소모가 적은 능력이었다.
그리고 연우혁은 영기가 매우 충만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무림의 신맥이나 지체와 같은 극히 드문 자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덕분에 연우혁은 상단전이 열린 사람치고는 매우 무사히 버티고 있었던 거였다.
"놀, 놀랐습니다. 저는 제게 쌓인 영기 때문에 상단전이 열리고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우혁은 놀랐다. 솔직히 영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왜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쌓아놨나'하고 후회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세. 영기가 충만할수록 온갖 신통력이 생기고, 이런 신통력은 통제가 어려워지니 말일세. 다른 신통력들이 모두 영안처럼 온순하게 주인의 말을 듣는 건 아니네."
"..."
상단전이 열렸는데 영기가 적으면 순식간에 고갈되어서 죽는다.
상단전이 열렸는데 영기가 많으면 버티다가 죽는다.
기본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이상 빠르냐 늦냐의 차이지 험난한 삶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시간을 벌고 싶다면 이런 신통력들이 멋대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네. 그리고 그걸 가르쳐주고 싶어서 이렇게 부른 거기도 하고."
"...!"
청허진인의 말에 연우혁은 놀랐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로 가르쳐줄 줄이야.
"하지만 지금 가르쳐주시려고 하는 건 무당의 비전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제가 배워도 되는 겁니까? 훗날 무당의 다른 분들께서 알면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이런 걸 익히는 사람이 자네 말고 또 있겠나. 상관없네."
'상관있는 것 같은데...'
연우혁은 뭘 배우든 간에 무당 도사 앞에서는 최대한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자네는 가장 어려운 첫 단계를 해냈다고 볼 수 있네."
"예? 어떤 걸 말씀하시는..."
"선업을 쌓아 영기를 정순하게 만드는 것!"
청허진인이 지금 가르쳐주는 현청벽사신공(玄靑辟邪神功)은 사실 신공이란 이름이 붙은 것치고는 그리 인기 있는 심법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 심법은 내공을 쌓는 심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단전이 열린 사람에게 신통력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였다. 신기가 있는 사람이 강제로 귀신을 보듯, 상단전이 열린 사람은 강제로 신통력을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강한 의지와 선한 영기를 갖고 있다면 스스로 신통력을 밀어내며 술법으로 승화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게 바로 현청벽사신공이었다. 온몸의 기운을 외부의 삿된 침입이 없도록 굳건하게 갖추는 심법. 그리고 이 심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선업으로 쌓은 영기가 필요했다.
"자네는 포두로 일하면서도 한 점 악업도 쌓지 않았네. 언제나 백성들을 아끼며 그들의 고충을 해결해줬지. 그 행동이 이런 결과로 나타난 걸세."
"감,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자신이 했던 온갖 사파스러운 짓들은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문제를 해결해서 얻은 영기들이라 저런 평가를 받는 모양이었다.
"무당의 도사들도 자네처럼 선업을 쌓지 못하네. 분명 어렸을 때부터 진심 어린 선업을 쌓아왔겠지..."
청허진인의 목소리에서는 존중이 느껴졌다. 연우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범인들은 세상의 도(道)가 무슨 의미냐고 말하지만 어떤가? 자네가 선업을 쌓지 않았다면 이 심법을 어떻게 익힐 수 있었겠는가?"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흥에 겨운 청허진인은 선업과 악업, 내단과 수행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무림에서 존중 받을 의인을 만난 게 기뻤던 것이다.
연우혁이 현청벽사신공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건 한 시진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
그로부터 삼일 후.
당등은 곽선의 저택에서 청허진인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다.
"가셨나?"
"예."
"잘 꺼졌군. 빌어먹을 늙은이. 뭘 배우긴 했나?"
"완전히 해결은 하지 못하더라도 목숨을 늘릴 방법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말에 당등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풀렸다.
"흥. 다행이군. 자꾸 요설만 내뱉었으면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
'면전에서는 딱히 별 짓 못하시지 않았나?'
"호풍환우하는 건 배웠느냐?"
"사실 술법으로 바람과 비를 불러오는 건..."
당등은 연우혁 앞에 암기를 던졌다. 연우혁은 재빨리 본론만 대답했다.
"심법과 함께 술법도 배웠습니다."
무림의 무공이 내공을 익히면서 외공도 같이 익히듯, 영기를 다스리는 것도 단순히 심법으로 끝나지 않고 술법도 필요한 법이었다. 힘을 다스릴 줄 아는 자만이 힘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나중에 한 번 보마. 따라와라. 갈 곳이 있으니까."
연우혁은 눈치를 보며 당등의 뒤를 쫓았다.
사실 삼일 동안 청허진인과 함께 무공을 수련한 만큼 바깥 일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포쾌들이 찾아오지 않은 걸 보니 별 일 없긴 했겠지만 그래도 포두 자리란 게 중간관리직인 만큼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무당의 심법은 난해하기로 이름이 높다. 이번에 한 번 배운 것으로 될 것 같으냐?"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하! 패기가 좋구나. 나중에 무릎 꿇고 무당의 도사를 소개해달라고 하지나 말거라."
당등의 말에 연우혁은 살짝 머쓱해졌다.
현청벽사신공은 첫날에 이미 다 깨우치고 그 다음 날부터는 술법 연습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분위기가 좀 그랬던 것이다.
"아마 난해하다고 소문이 난 건 무당의 심법이란 게 도가의 향기가 짙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연우혁이 다른 무당의 무공을 보진 못했지만, 무당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당등 같은 마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짐작 가능했다.
자기 자신의 삿된 기운을 털어내고 자신 안의 우주(宇宙)와 하나 되겠다는 도사들의 사고방식은 평범한 범인이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연우혁도 운 좋게 쌓은 영기가 선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으면 입문부터 십 년은 걸릴 뻔했다.
"악취가 짙겠지 무슨. 문 열어라!"
목적지에 도착한 당등이 정문 앞에서 고함을 지르자, 문지기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연우혁이 본 한경의 저택들 중 손꼽힐 만큼 화려하고 부유한 저택이 있었다. 깜짝 놀란 연우혁이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네 상관 집도 모르느냐? 금 통판 놈 집이다."
연우혁은 금세 누군지 떠올렸다. 이번에 창천표국의 사주를 맡았던 한경의 관리 중 하나였다.
'아. 그 개방한테 부탁했던...'
죄인을 가두고 처벌하는 판관보다 세수를 걷는 통판이 더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저택을 보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그냥 기본적으로 한경의 고관들은 매우 부유했다.
'이 자식들은 대체 얼마나 챙기는 거지?'
연우혁이 경악해하는 사이 당등은 익숙한 듯 걸어서 금 통판이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는 연우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금 통판. 저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오. 통판의 체면을 위해 국주를 도와준 놈이지."
"...??"
그랬었나?
포두 연우혁 (4)
"그런 거였습니까?"
"무림의 일이란 건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 달라지기 마련이지."
당등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얼마 전까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청허진인의 가르침을 받다 온 연우혁에게는 헛소리로 들렸다.
"통판 어른을 소개해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렇게 급하게 소개해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연우혁도 물론 한경의 정관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통판이나 판관, 더 올라가서는 한경의 우두머리인 지부 어른하고도 안면을 익혀놔야 정관 자리를 노릴 수 있지 않겠는가.
기본적으로 포두는 비정규직에 가까웠고 특별한 공이 없으면 제대로 된 관직을 얻기 힘들었다.
그리고 특별한 공을 세우려면 윗선에 잘 보여야 했다. 아무리 공을 세워도 한경의 관리들이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으면 올라가질 않았다.
그런 만큼 친해지고 싶긴 했지만...
'이거 괜히 역효과 나는 거 아닌가?'
금 통판의 성격도 모르는데다가 당등의 행동이 너무 급하고 거칠었다. 만약 금 통판이 조금만 영리하다면 이번에 연우혁이 나선 게 창천표국의 국주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한경 포쾌 놈들은 그냥 도둑놈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포두가 있었구나! 복이다, 복이야! 실로 한경의 복이야! 우하하하!"
"..."
그러나 걱정도 무색하게 금 통판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좋아했다. 어찌나 웃었는지 볼살이 푸르르 떨렸다.
"이리 와라. 이리 와! 연 포두,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 이리 재주 좋은 녀석이 여기 한경에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 절 받으십시오!"
당등은 연우혁이 찰나도 고민하지 않고 외치는 모습에 질색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연 포두 덕분에 내 체면이 살았다. 내 체면이 살았어! 사실, 맹 판관 같은 놈들만 포두를 부려대는 꼴이 영 못마땅했거든."
금 통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통판의 말에서 느껴지는 질투심과 적개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경의 관리들이 전부 친하진 않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판관 같은 경우는 형사를 다루는 만큼 품계는 낮아도 권세는 높았고, 통판 같은 경우는 품계는 높았지만 권세는 좀 낮았으니...
"난 그래서 한경의 포두들은 다 맹 판관의 부하인 줄 알았지."
금 통판은 말하면서 슬쩍 떠보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허술하고 멍청해보여도 통판 또한 한경에서 오래 머문 관리였다. 권력의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았다.
그러나 금 통판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었다. 금 통판이 권력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면 연우혁은 그냥 영안으로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
'자기 밑에 붙으라 이거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연우혁은 금 통판이 원하는 대답을 정확하게 해줬다.
금 통판은 연우혁이 지금 맹 판관 밑에 설 거냐, 아니면 자기 밑에 설 거냐고 묻고 있었다. 여기서 대답이 늦었거나 맹 판관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대번에 의심을 사서 쫓겨났을 것이다.
과연 금 통판의 얼굴이 헤벌쭉 펴졌다. 반응이 빨리 나오는 걸 보니 그만큼 진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셔라, 마셔! 오늘 재주 좋은 새 아들이 생겼는데 이 기쁨을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쏘냐!"
연우혁은 금 통판이 따라주는 술을 벌컥벌컥 마셔야 했다.
취기가 거나하게 오른 금 통판이 옆의 첩과 노는 사이, 연우혁은 당등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소개해주신 겁니까?"
"급하게 친해진 건 네놈이지. 뭐? 아버지? 이런 미친 놈."
"당 대협께서도 원하신다면 그렇게 불러드릴 수 있습니다."
"너는 정말 황궁에 던져놔도 목 하나 간수는 할 놈이다. 그래. 왜 이렇게 급히 통판을 소개시켜줬는지 궁금하겠지. 이유는 내가 친 놈이 네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다."
"...?"
연우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곽선 말입니까?"
아주 옛날에 금덩어리 하나 훔쳤다가 온몸의 구멍이랑 구멍에 전부 극독이 들어간 불쌍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연우혁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수도 있었다.
"뭐? 아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 놈이 왜 나와?"
"그럼 누굽니까? 아. 알겠습니다. 개방의 거지입니까?"
"미친놈아, 내가 언제 개방의 거지를 팼느냐? 판관 놈이다, 맹 판관 놈!"
"아."
연우혁은 살짝 머쓱해졌다. 당등이 친(그리고 쳤을 것 같은) 놈들이 워낙 많아서 헷갈린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판관 어른이 왜 저한테 원한을?"
"이유야 많지. 일단 금의위 교위 때문에 놈은 물러난 상태다. 그 교위와 가까이 지낸 게 누구지? 네 녀석이다. 이간질을 했다고 의심을 받을 법하지. 그리고 실제로 한 게 맞잖냐."
"제가 아니라 교위가 한 짓입니다!"
정말이었다.
맹 판관이 자작극을 벌였다고 의심한 건 교위 본인이었으니까.
물론 연우혁이 옆에서 말리지 않긴 했지만...
"그래. 그래. 알겠다. 그런 걸로 하자고."
'진짜 패고 싶네.'
"그리고 지금 한경에서 네 소문은 생각보다 많이 퍼졌다. 당장 어제 객잔만 가도 보기 드문 명포두가 나왔다고 떠들더군."
"그렇습니까? 이거 참... 그런데 그건 뭔 상관입니까?"
"맹 판관 놈 성격을 아직도 모르느냐? 딱 봐도 샘이 엄청난 놈이다. 자기는 탐관오리라고 욕을 먹는데, 자기 밑의 부하가 칭송받는 걸 탐탁해할까?"
"...!"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당등의 말이 맞았다.
'속이 더럽게 좁아 보이긴 했다.'
당장 저번에만 봐도 맹 판관이 포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놈은 내게 원한을 품고 있다."
"그렇죠."
"하지만 내게는 원한을 풀 수 없지. 목숨이 걱정된다면야. 그러나 너라면?"
"...?"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다.
당등한테 품은 원한이 왜 연우혁한테 온단 말인가?
게다가 따지고 보면 연우혁이 당등한테서 목숨을 구해줬는데.
"당 대협한테 품은 원한이 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친우 아니냐. 날 못 노리니 나하고 친분이 깊은 너라도 노리는 거지."
"..."
그제야 모든 진상을 깨달은 연우혁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그러니까 당등하고 친하다는 오해 때문에 맹 판관의 목표가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앞의 두 가지 이유보다 이게 더 결정적인 것 같았다.
"...아니, 당 대협!"
"그래서 이렇게 금 통판을 소개해 준 거다. 잘 해봐라. 네 재주라면 분명 그깟 놈 하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
연우혁은 당등이 무당의 무공은 절대 익히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저렇게 악업을 쌓고 다니는데 어떻게 익히겠는가!
***
'최악은 아니긴 하다.'
연우혁은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숙소로 향했다.
금 통판의 호감을 사고 손을 잡은 건 결과적으로 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위를 노리는 상황에서 친해질 관리가 필요했으니까.
연우혁이 노리는 정관 자리는 판관인 만큼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점도 좋았다. 이례적으로 공을 세워서 특별히 관직을 받는 포두들은 보통 판관 자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보통 수준으로는 안 된다는 점인데.'
말이 특별한 공이지, 상관들이 깎아갈 것까지 생각하면 거의 역모 정도는 막아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질보다 양이다. 쌓아나가면 언젠가는 터지겠지.'
관리들과 친분을 쌓고 꾸준히 일을 해결해서 위에 올리는 장계가 언젠가 터지길 기다린다. 연우혁이 보기에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맹 판관이 날 노린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맹 판관이 연우혁을 다른 포두 보듯 하찮게 여겨서 벌레 대하듯 대해주는 게 편했다. 상대가 방심한 사이 이것저것 준비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당등이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한경에 소문까지 돌았으면 그냥 대충 넘어갈 가능성은 낮았다.
"!"
어두컴컴한 앞에서 두 명의 사람이 걸어오자 연우혁은 눈을 크게 떴다.
드넓은 한경에서 야간의 통금을 어기고 몰래 다니는 사람이야 여럿이지만, 저 둘은...?
"잠깐. 멈춰라!"
***
철갑창(鐵甲槍) 목기, 혈파두(血爬頭) 송단은 둘 다 이류 경지의 무림인이었다.
이들은 때로는 낭인으로 은자를 받고 문파의 편에 서서 싸웠고, 때로는 살수로서 은자를 받고 의뢰인이 죽여 달라는 자를 죽여줬다. 사파 무림에서는 이류의 경지만 되어도 불러주는 곳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들이 맡은 일은 살수였다.
최근에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 놈 하나를 죽여 달라는 것이었는데, 한경 토박이가 아닌 둘은 포두가 어떻게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포두란 건 으레 잔돈푼을 갈취하고 관리들 앞에서는 굽신거리는 소인배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멀리서 인상착의를 들은 포두가 걸어올 때만 해도 둘은 일의 실패를 의심하지 않았다.
무공을 익혔다지만 아마 삼류일 터. 정말 잘 쳐봐야 이류 초입 정도였다. 산전수전 겪은 무인 둘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잠깐. 멈춰라!"
운 좋게 포두는 자기가 먼저 외쳤다. 접근하기 좋은 핑계라고 생각한 둘은 시선을 교환한 뒤 외쳤다.
"어이쿠, 포두님! 한 번만 봐주시오!"
"못 본 걸로 해주시면... 헤헤!"
송단은 자세를 낮추며 접근했다. 그러자 포두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야, 이 멍청한 놈들아! 뒤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눈치라고는 없는 놈들!"
"?"
둘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암기가 발사되는 소리였다.
"컥!"
목기가 옆으로 나뒹굴었다. 낯빛이 파래진 걸 보니 제대로 맞은 게 분명했다. 송단은 웬 젊은 포두 놈한테 역으로 당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눈치를!?'
"...놈!"
놀라면서도 몸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붉은 파두(爬頭, 쇠스랑)가 튀어나오더니 살벌하게 날뛰었다. 검보다 긴 거리를 갖고 있는 기문병기는 처음 만나면 대응하기 쉽지 않았고 아하는 순간에 바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파두를 휘두르는 순간 포두는 뒤로 쭉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송단은 기묘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한 그 움직임에 소름이 돋았다.
'뭔...?!'
푹!
아까의 소리가 났다. 송단은 이를 악물고 가슴팍으로 암기를 받아냈다. 암기가 철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철판을 챙겨 넣은 보람이 있었다.
'암기를 전문으로 익힌 놈이라면 접근해야 한다!'
송단은 혹시라도 모를 암기를 대비해 앞으로 돌진했다. 복잡하고 섬세한 맛은 없어도 우직하고 기세 좋은 보법이었다.
그 순간 포두 놈의 손에서 채찍이 튀어나왔다. 허공 위에 복잡한 선을 그리는 채찍에 송단의 움직임이 멈췄다.
푹!
넓적다리에서 격통이 올라왔다. 암기가 정확히 빈틈을 찌른 것이다. 송단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싸움 도중에 이런 느낌을 받기 쉽지 않았다.
자기보다 한 수 위의 고수가 자신을 꼭두각시 놀음하듯이 조종하고 있을 때.
바로 그럴 때 드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놈의 경지는 그 정도가 아니다!'
방금 채찍이 얽혔을 때 느꼈지만 상대도 일류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이 든단 말인가?
'시간을 끌면 진다...!'
"크아악!"
송단은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포두 놈은 아까의 기묘한 보법으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퉁!
아까처럼 옷 안에 넣은 철판에 암기가 부딪쳤다. 송단은 암기 하나 정도는 더 맞을 각오로 보법을 뻗었다. 보아하니 독은 없었다.
채찍이 날아들었다. 송단은 자기가 가진 강한 초식을 펼쳤다.
"흡!"
노발충관(怒髮衝冠)이 펼쳐지자 쇠스랑이 힘있게 터져 나오며 채찍을 휘감았다. 송단은 쇠스랑을 순간 놓아버렸다.
"죽어라!!"
송단은 암기에 채찍을 쓰는 걸 보니 가까이 붙으면 권법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붉은 기운이 번쩍 올라왔다.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강한 충격에, 송단은 이 움직임 또한 유도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런 곳에서... 포두로 변장한... 마두를... 만날 줄이야..."
"..."
"이름이... 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송단은 그 또한 받아들였다. 숨은 마두 놈이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보통 놈은 아닐 터. 패자에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곧... 한경에도... 피바람이... 불겠군... 이런 마두가 있다니..."
"..."
포두 연우혁 (5)
두 낭인이 완전히 쓰러지고 나서야 연우혁은 깊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두로 오해받은 게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지금 그걸 느끼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내가 판관을 얕봤군...!'
지금 연우혁에게 살수를 보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살수를 보내다니. 컴컴한 밤이라 하더라도 한경 한복판인데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아무리 탐욕스럽고 연달은 실수를 저지른다 하더라도 한경의 관리로 오래 일한 만큼 그 집요함은 얕봐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
서로 이류의 경지인 만큼 이 대 일로 싸웠다면 연우혁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도 꽤 노련한 낭인들이었으니.
속임수로 한 명을 꺾고, 다른 한 명을 연우혁이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영안으로 놈을 꿰뚫어본 덕분에 암기와 채찍에 정신이 팔리게 만들 수 있었다.
만약 놈이 연우혁을 얕보지 않고 성급히 파고들지 않았다면 싸움이 훨씬 길어졌을 것이다. 연우혁의 무공은 기다리거나 물러나면서 싸우는 것에는 유리했지만 자기가 직접 달려드는 것에는 불리했다.
싸움 방식이 좀 마두 같긴 했지만...
'이기는 게 중요하지. 무슨.'
연우혁이 소모된 내공을 점검하고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앞에서 잘 정제된 살기가 느껴졌다.
아까 두 낭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수의 살기였다.
"!"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이를 악물었다. 새로 걸어오고 있는 살수는 연우혁보다 훨씬 위의 경지였던 것이다.
일류 말입을 넘은 절정 직전의 경지. 이 정도 무공 차이는 아무리 영안과 속임수가 있어도 메우기 힘들었다.
"...고인께서는 누구십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두 낭인을 둘러보더니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붉고 눈빛이 이글거리는 모습에서 살수가 극양(極陽)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포두가 이 둘을 죽일 줄은 몰랐는데?"
무시하는 모습에서 연우혁은 대화로 해결하는 걸 포기했다. 상대는 무조건 연우혁을 죽일 생각이었다.
'남은 내공은 칠 할 정도. 잔수작은... 오히려 위험하다.'
구궁수전(九宮袖箭)은 편리한 암기였지만 결국 기관의 힘 이상은 내지 못했다. 저런 고수 상대로 썼다가는 대번에 빈틈을 잡혀서 역으로 당할 수 있었다.
백사격각편도 마찬가지였다. 채찍은 병기 중에서 가장 저지력이 부족한 편에 속했다. 자기보다 한 단계 이상의 고수한테 잘못 썼다가는 그대로 격살당했다.
위국권법이 상승의 권법이지만 한 단계 이상의 고수를 이기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고...
'경공이다. 전력을 다해 도망친다.'
연우혁은 백면신투를 믿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백면신투가 남궁세가에서 뒤진 게 생각나긴 했지만 그건 경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아니겠는가.
"...!"
영안을 펼치던 연우혁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아찔해졌다. 눈앞의 살수만큼의 고수는 아니었지만, 한 명이 더 있었던 것이다. 연우혁의 발을 한 번 묶기에는 충분했다. 고수 상대로 발을 한 번 묶이는 건 치명적이었다.
'미친 판관 놈. 살수 네 명을 날 죽이려고 고용했다고!?'
믿기지가 않는 낭비였다. 살수는 연우혁의 생각을 모르는지 오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소문도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재주가 몇 개는 더 있었나본데. 이 둘이면 충분할 줄 알았더니..."
"죄송합니다. 대주님."
뒤에 있는 자의 말에 연우혁은 상대가 꽤 규모 있는 조직이라는 걸 느꼈다. 강호에 대주가 따로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살수 조직이 많지 않은 것이다.
"젊은 포두 놈아. 네놈의 재주는 인정해주마. 하지만 나도 판관 놈하고 친해져야 하는 만큼, 둘 죽였다고 물러날 수가 없구나. 나 참. 괜히 아쉬운 놈 두 명만 죽였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수가 가볍게 출수했다. 손가락 끝에서 핏빛 기운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연우혁은 이미 그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쌍사보를 극성으로 펼치며 뒤로 움직이자 지법은 허공을 갈랐다.
"!"
붉은 머리의 살수는 놀란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물론 삼성(三成) 정도의 공력으로 지법을 펼쳤다지만 이렇게 쉽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러나는 움직임만 놓고 보면 자신의 보법보다 더 복잡하고 묘한 상승의 무리(武理)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두 놈이 이런 보법을 어떻게 이 정도까지 익혔지?'
무림에서 자기보다 높은 경지의 무인을 만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자기보다 낮은 경지의 무인이 더 어려운 무공을 익힌 모습을 보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명문정파에서 애지중지하는 천재 후기지수한테나 볼 수 있는 무재를 저잣거리 포두에게서 보게 될 줄이야?
"그거 참... 기괴한 보법인데. 정파 놈 같진 않고. 어떤 마두 놈 보법이지? 처음 본다."
"우연히 얻은 비급을 익혔을 뿐입니다."
"...!"
스승도 사문도 없이 비급으로 익히다니.
말도 안 되는 재능에 살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채찍이나 암기를 쓸 줄 아는 것 같던데. 써봐라."
연우혁은 넘어가지 않았다. 눈앞의 살수는 재주를 자랑한다고 해서 봐줄 놈이 아니었다. 힘을 비축하고 내공을 회복해야 했다.
"대주님. 사람이..."
"알아, 알아."
살수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채찍이나 암기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 만난 걸 불운으로 여겨. 강호는 불운한 자에게는 자비가 없다."
십성의 공력이 담긴 지법이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유형화 된 기운이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그 순간 살수는 연우혁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갑자기 증가하는 걸 느꼈다. 일반적인 무공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술법?!'
술법에 놀라워하는 순간 살수는 자신 앞까지 비도가 날아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놀랍게도 포두 놈이 빈틈을 정확하게 꿰뚫고 비도를 던진 것이다!
고수가 된다 하더라도 무공의 약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무공은 완전하더라도 익히는 사람은 불완전했기에 초식과 초식, 호흡과 호흡, 운기와 운기 그 사이에 틈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수가 되어갈수록 그 틈은 바늘구멍처럼 좁아지고 자신보다 고수의 빈틈은 쉽게 간파하기 어려운 법.
'운인가!? 아니, 아니다! 어느 놈이 운에 목숨을!'
이 모든 생각과 함께 살수는 몸을 움직였다. 비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만, 하필이면 상대를 잘못 만났다.
살수의 보법 또한 피하는 것에는 무림에서 일절로 꼽히는 보법이었던 것이다.
살수의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꺾이고 발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순간적으로 비도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비도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꿨다.
처음부터 휘게 던진 게 아니었다. 분명히 살수가 움직이는 걸 보고 바뀐 것이었다. 이 어느 암기술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에 살수는 고서에서 본 술법을 떠올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손을 대지 않고도 물체를 움직이는 도사들의 술법.
그러나 저잣거리 포두가 익힐 만큼 흔한 술법은 아니었다. 애초에 살수 또한 허공섭물을 본 게 처음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난 포두 놈이 천재적인 무공의 자질을 갖고 있고, 또 무림에 극히 희귀한 술법까지 쓸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푹!
비도가 살수의 가슴팍에 박혔다. 살수는 덤덤하게 물었다.
"왜 달려오지 않지? 날 죽이고 앞으로 도망치려고 한 것 아니었나?"
"...보의(寶衣)를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얕았군."
연우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공이 고갈되고 진탕된 탓에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남두성군에, 현청벽사신공까지 사용해서 탈혼비도를 펼치고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의에 막힌 탓에 공격이 얕았다는 게 이미 느껴졌다.
보의를 입고 있단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단단한 줄이야.
"맞아.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네 승리였을 거다."
살수는 점혈로 가슴팍의 피를 막으며 비도를 뽑았다. 무림의 보물 중 하나인 적보의(赤寶衣)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치솟진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포두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네 이름을 기억해주마. 연우혁. 나는 살막(殺幕)의 대주, 혈지혈살(血指血殺) 적조다. 네게는 원한이 없다. 원래라면 아까 낭인 두 놈 뒤졌을 때 끝났어야 할 일이지. 하지만 고분고분한 판관 놈이 필요한 만큼..."
"판관이 왜 필요한 겁니까?"
"사람을 하나 찾아야 하는데, 꼭두각시로 부릴 만한 관리 놈이 흔치 않지."
뒤에 있는 부하가 그만 떠들라고 눈빛으로 간청했지만 적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돼지 같은 관리 놈 때문에 이런 상대를 죽이는 것도 꺼림칙한데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혹시 장로의 손녀입니까?"
"...?!"
적조도, 적조의 부하도 놀라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포두는 기력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적조를 보며 말했다.
"맞는 모양입니다."
"어, 어떻게...? 잠깐, 설마 어디 있는지도 아느냐?!"
"예."
"어디, 어디 있지!? 말해라!"
연우혁은 쓰러지고 싶은 와중에도 영안으로 두 살수를 확인한 다음 당당하게 말했다.
"한경의 포두는 살수의 협박에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소!"
"..."
"..."
* * *
적조의 부하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대주에게 물었다.
"대주님. 대체 왜 저 포두 놈을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아까 포두가 갑자기 '한경의 포두는 살수의 협박에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소!'라고 외쳤을 때만 해도 부하는 포두가 그냥 미친 줄 알았다.
그러나 적조는 부하보다 훨씬 영리했다. 포두가 저렇게 외치자마자 매우 공손하게 자세를 갖추고 다시 읍을 했다.
-살수라니, 이 적 모는 평생 의롭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살수라고 불릴 만큼 악하진 않습니다. 분명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 포두님.
-그렇소?
-예. 보십시오. 저나 제 부하가 포두님께 손끝 하나 댄 게 있습니까?
-이 낭인들은?
-처음 보는 무뢰배들입니다. 치워라! 감히 포두님을 습격한 놈들이다!
-일단 쉬고 싶군.
-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지금 설마 내가 도망칠까 의심하는 건가?
-아닙니다! 어찌 그런 오해를... 그저 누군가 포두님을 해하려 할까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저희는 여기 가만히 서있겠습니다.
-음. 아니다. 믿도록 하지.
그렇게 연우혁은 당당하게 두 살수의 호위를 받아가며 포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오늘 일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침에 들어가서 잠에 빠져들었다.
그걸 또 적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밖에서 서서 기다리다니. 적조의 부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포두를 왜 죽여야 하지?"
"예? 판관 놈을 협박하기로 하셨잖습니까? 포두가 살아있으면 판관 놈이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판관 놈을 왜 협박해야 하지?"
"그래야 사람을 찾지 않겠습니까? 장로님의 따님께서는 분명 관리 놈과 도망치셨고..."
"그런데 저 포두가 안다잖아?"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장로의 손녀를 찾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그 위치를 안다는 건 왜 못 믿지?"
적조의 말에 부하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그건 그랬다.
"아니, 그런데... 살수의 말에는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살수가 아니라 손님으로 찾아왔잖아."
"!"
부하는 그제야 적조가 왜 저러는지 깨달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그런 뜻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가 뒤지기 직전인 상황에서 오히려 허세를 부리다니.
"미친 놈 아닙니까!?"
"재주 있는 자는 원래 광오한 법이야.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지. 위치만 안다면."
적조는 기대가 된다는 듯이 말했다. 포두가 자는 사이 주변 사람들에게 몇 번 물어봤는데, 정말로 재주가 신통했다.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적조로서도 판관 놈보다는 저런 포두 놈과 어울리는 게 훨씬 덜 찜찜했다. 적조는 가슴팍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꽤나 깊은 상처였다.
"포두 놈이 남긴 겁니까?"
"그래."
"대체 어떻게..."
"쾌(快)의 묘리에 모든 걸 쏟아 부은 비도술이더군. 무학의 천재라면 가능하지."
"그 보법이 말입니까?"
적조의 부하는 뜨악해했다. 같은 마두라 하더라도 마공을 수준 있게 익힌 마두가 있고 저잣거리에서 온갖 삼류 무공을 잡다하게 익힌 마두가 있다면, 포두는 전형적인 후자였다. 채찍에 암기에 그런 보법이라니.
그러나 적조는 씩 웃었다.
"네놈이 직접 상대하지 못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뒤로 피하는 걸 보니 보통 상승의 무공이 아니었지. 네가 없었다면 놓쳤을 수도 있다."
"무슨... 아닙니다! 대주님께서 그러실 리가..."
방 안에서 연우혁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날이 밝고 포두가 일어난 것이다.
"연 포두님. 기침하셨습니까?"
"그렇소."
연우혁은 세안하더니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적조의 부하는 당황해서 외쳤다.
"포두... 님, 어디 가십니까?"
"포두가 일하러 가지 어디 가겠소?"
적조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손님으로 부탁하러 왔는데 허드렛일이라도 부탁합니다."
"안 그래도 시킬 생각이었소."
'저 미친 포두 새끼가...?!'
적조의 부하는 전율했다. 살막의 무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 단체로 주화입마에 빠져들지도 몰랐다.
포두 연우혁 (6)
부하의 충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조는 역용술을 펼쳤다. 붉은 머리칼의 색이 변하고 얼굴의 골격이 줄어들었다. 번쩍이는 눈빛과 힘 있는 목소리도 변했다. 어느 누구도 무공의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겉모습이었다.
"그럼 따라오시오."
"예."
연우혁은 살막의 두 고수를 거느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구역의 안가로 향했다.
물론 머릿속은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오가고 있었다.
'다행히 아는 사건이다. 그러나...'
어젯밤은 여러 불운이 겹치던 와중에 하나의 행운이 목숨을 구한 꼴이었다.
하필이면 연우혁을 죽일 정도의 고수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일단 목을 베려고 들 줄이야. 원래대로였다면 살막에서 고용한 낭인 둘이 죽었을 때 끝났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에게 천운이 따라줬다. 살막의 고수 둘이 찾는 장로의 손녀가, 다행히 연우혁이 아는 사건의 당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 알려줘도 되는 게 맞나?'
연우혁의 기억이 맞다면 이 사건은 웬 저택에서 십수명이 넘게 죽은 사건이었다.
단서를 찾고 상황을 추측해가다보면 예전에 살막 장로의 딸이 관리와 사랑에 빠져 도망쳤는데, 살막 장로가 무슨 심정의 변경이 있었는지 부하를 보내 자기 손녀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나왔다.
살수들은 강제로 데리고 가려고 하고 저택의 사람들은 막으려고 했으니 피바람이 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처 안가에 숨은 살수를 찾아서 붙잡는 걸로 이 사건은 끝났었다.
'하긴 그보다는 다른 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살막의 고수들이 찾던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또 이들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사실 앞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이보시오. 적 대협.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하늘에 맹세코 조용히 사라져 포두님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저 대답에 번민하고 고민했겠지만 연우혁은 달랐다. 영안으로 본 연우혁은 저 대답이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저렇게 신의를 지키지 않을 무림인이었다면 어제 다르게 행동했을 터.
앞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이들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해야 했다.
"포두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어제 사용하신 술법은 무당의 술법이었습니까?"
노련한 살막의 고수인 만큼 적조는 연우혁이 사용한 허공섭물을 보고 무당의 향취를 느낀 모양이었다.
어차피 부정해봤자 별 의미 없었기에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무당의 진인께 사사받았소."
영기를 통제하고 온몸의 기운을 외부의 삿된 침입 없이 굳건하게 갖추는 심법인 현청벽사신공은 내공을 빠르게 쌓는 심법은 아니었지만 그 효능은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그 효능 중 하나가 바로 심법에 따라 내공을 운기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술법인 허공섭물을 펼치는 것이었다.
청허진인은 현청벽사신공이 도사의 기운을 엄하게 통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의 기운까지 통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더욱 정순한 내공을 쌓는다면 이기어검과 같은 경지를 펼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연우혁은 그런 터무니없는 경지까지는 바라보지도 않았다. 어느 세월에 그런 걸 하겠는가. 중요한 건 당장 자신의 무공에 어떻게 녹여내는가였다.
어제처럼 암기술에 한 번 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허공섭물이 그리 강한 힘은 아니더라도 암기술과 결합한다면 처음 보는 상대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절초였다.
"과연. 포두님께서 무당의 속가제자 출신일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얼마나 배우셨습니까?"
"속가제자 출신이 아니오. 며칠 배우지도 않았고."
연우혁의 솔직한 말에 적조가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런 걸로 하지요."
"..."
솔직하게 말해줬는데도 오해를 받자 연우혁은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한경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난다오. 그리고 포두는 포쾌들을 부려서 그 일들을 맡아서 해결해야 하지. 둘이 잠깐 포쾌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적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허드렛일도 할 생각이었는데 포쾌 일이라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적조의 부하는 똥이라도 밟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쾌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게 믿기 힘들 만큼 괴로운 모양이었다.
"잘 됐군. 오 포쾌!"
연우혁의 부름에 오 포쾌가 후다닥 달려왔다. 처음 보는 두 명의 모습에 오 포쾌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들은 누구입니까?"
"새로 포쾌 일을 할 자들이다. 오늘 하루 같이 일하도록."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참아라. 포두도 우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부하의 항의에 적조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서로 믿는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무공의 경지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믿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상대방이 배신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상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줘야 했다. 저 포두가 포쾌 일을 억지로 시키는 건 살수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믿을 수 없는 자라면 이런 모욕에 바로 분노를 터뜨리며 사라질 테니까.
-저는 놈이 그냥 저희를 골려주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단순한 자들의 생각이다. 저런 지혜를 가진 자가 단순히 골려주려고 이러겠나?
적조의 부하는 불만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포두가 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적조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포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포쾌가 은밀하게 말했다.
"뭐지?"
"새 포쾌들을 고용하는 건 신중하셔야 합니다."
"신원 때문인가? 걱정하지 마라. 누군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게 아닙니다! 신원이 무슨 상관입니까. 저 자들이 도적이든 살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포쾌의 녹봉을 나눠주는 건 포두님 아닙니까! 일손이 적다고 포쾌를 늘리는 건 최악의 결정입니다. 숙부님 밑에서 배웠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오 포쾌는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중요한 이야기가 맞긴 했다. 은자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는가.
때로 몇몇 서투른 포두가 일을 확실히 해결하겠다는 욕심 하에 포쾌를 많이 고용했다가 끔찍한 결말을 맞곤 했다. 바로 거덜나는 것이었다.
"...그렇군. 하지만 오 포쾌. 저 둘은 사실 녹봉을 받지 않는다."
"예!?"
"그냥 포쾌로서 일할 수만 있어도 영광이라는군."
"미친놈들인가...?!"
오 포쾌는 경악했다.
아무리 포쾌가 부수입이 두둑한 관직이라지만 녹봉을 받지 않고 일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놈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설명해주겠습니다."
"그래. 오 포쾌만 믿네.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뭐가 있지?"
양 포쾌가 재빨리 보고했다.
"석회를 섞어서 팔던 소금장수 금가 놈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아침에 잡으러 갔는데, 이미 도망치고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쉽지."
적조는 무심코 대답했다.
누군가를 쫓는 건 강호에서 포쾌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살수 또한 직업적으로 누군가를 쫓는 일이 잦았다.
"어제까지 있었다면 아마 통금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한경에서 가장 먼저 열리는 문은 남문이지. 남문 근처의 구사(廏舍, 마구간)에 가보자고."
"...!"
"이, 이봐. 눈치가 없나? 어디 신참이 입을 먼저 열어?"
다른 포쾌들이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자 오 포쾌가 다급히 둘에게 말했다.
"내가 따끔히 훈계할 테니 자네들이 이해해주게!"
"으음. 오 형이 그렇게 말한다면..."
한경에서 잔뼈가 굵은 오 포두를 숙부로 둔 오 포쾌는 다른 포쾌들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워낙 발이 넓은 사람 아니던가.
적조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포쾌로 일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의견은 맞지 않습니까?"
"으음. 확실히..."
포쾌들은 적조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치를 따져봤을 때 틀린 구석 하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서쪽으로 가라. 오 포쾌. 여기 두 새 포쾌를 데리고 운하로 가도록. 거기 가면 평소 소금장수와 친하게 지내던 어부들이 있을 텐데, 그 어부들을 붙잡고 소금장수를 어디에 숨겼냐고 물어봐라. 그리 버티진 못할 거다."
"예!"
"???"
오 포쾌는 바로 달려 나갔다. 적조와 그 부하는 남아서 더 묻고 싶었지만 오 포쾌가 나간 탓에 그러지 못했다.
'대체 어째서 서쪽으로 가란 거지?'
"왜 서쪽으로 가란 걸까요?"
"글쎄. 전혀 모르겠다."
"혹시 놈이 우릴 골려주려고..."
"그건 아니라고 말했잖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짐작가는 게 없습니다. 아니, 어부들이 소금장수를 숨기고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소문을 들었을지도..."
"어제 밤에 도망친 놈이잖습니까. 그리고 저 포두는 어제 저희와 드잡이질을 했는데 소문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적조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에는 부하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대체 왜 서쪽으로 가라고 한 걸까?
"이보시오. 오 포쾌님. 혹시 오 포쾌님께서는 왜 서쪽으로 가라고 하신지 아시오?"
"물론이지."
"!"
적조와 부하는 놀랐다.
"포두님께서는 앉아서 천 리 밖을 보시기 때문이다. 빨리 따라와라. 이 둔한 녀석들아. 연 포두님께서 포쾌로 일하실 때 한 번도 너희처럼 미적거린 적이 없었다."
"..."
"..."
무슨 마교도나 혈교도마냥 광신해서 떠드는 포쾌의 모습에 적조와 부하는 혀를 내둘렀다.
"뭘 어떻게 해결했길래 저러나?"
"제 생각에는 억지로 범인을 만드려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제 와서 잡기에는 늦었으니 아무나 붙잡고 책임을..."
"찾았다!!!"
오 포쾌는 벌벌 떨며 작은 뱃전에서 기어 나오는 소금장수의 멱살을 붙잡고 외쳤다.
그 믿을 수 없는 모습에 둘은 눈동자를 크게 부릅떴다.
* * *
포쾌들이 밀린 일을 하는 동안 연우혁은 내상을 다스리고 내공을 회복했다.
하해불택신공으로 내공을 쌓고 현청벽사신공으로 몸을 지키는 단단한 껍질을 만든다.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일류의 벽을 깨겠다!'
살수들을 내보낸 건 결정을 내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도 있었지만 무공의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어제 그 복잡했던 싸움이 많은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포두님. 붙잡아왔습니다!"
"잘했다. 둘은 이리 오도록."
연우혁은 둘을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존대하며 말했다.
"적 대협. 대협을 믿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면 사람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좋은 결정이다. 하지만..."
"!?"
바로 수락할 줄 알았던 적조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까 그 소금장수는 대체 왜 서쪽으로 잡으러 간 거지? 혹시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던 건가?"
"..."
연우혁은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적조는 매우 진지했다.
"이봐. 연 포두. 이것만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따로 소문을 들은 게 아닙니다. 그 소금장수는 남문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 한경에서 빨리 도망쳐야 하는 사람들은 남문 근처로 모이는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
적조와 부하는 놀랐다.
"그럼 서쪽은?"
"소금장수가 소금에 섞은 석회는 조개껍질을 갈아서 만든 것이니, 한경 서쪽 강을 타고 올라오는 어부들이 구해다줬을 겁니다. 소금장수가 붙잡히면 그들도 책임을 물을 테니 배에 숨겨줬을 테지요. 좀 잠잠해지고 추적이 실패하면 쉽게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적조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본능적으로 확신이 들었다.
지금 자신이 찾으려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인재는 바로 여기 이 포두밖에 없다고!
"부탁을 말해라. 무엇이지?"
"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죽여주십시오!"
연우혁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판관은 확실하게 제거하고 가야했다.
내버려뒀다가는 쌓은 재산과 인맥으로 무슨 개짓거리를 할 지 몰랐다.
"그래. 그럴 것 같았다. 이봐!"
"예!"
적조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해라."
"존명!"
부하가 나가자 적조는 연우혁에게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놈은 누군가 자기를 죽일 거라고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니까. 저 녀석이 확인하고 돌아오는 대로 놈을 죽이러 가마. 조용하게 말이다."
반 시진 정도 지나고 나서 부하가 다급히 돌아왔다. 적조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벌써 다 확인했어? 그렇게 허술하더냐?"
"놈, 놈이 저택에 무림인을 잔뜩 고용했습니다!"
"..."
아직 의뢰가 실패한 것도 모르는 판관 놈이 무림인을 고용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적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판관은 지금 의뢰를 성공한 살수도 끝장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탐욕스러운 관리들 중에서도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배신하는 놈은 흔치 않았다.
"하, 하하...! 하하하! 이런 미친 놈 같으니. 겁이 없어도 얼마나...!"
"..."
웃던 적조는 연우혁이 별 말 없이 쳐다보자 조금 민망해졌는지 대답했다.
"...바로 죽이지는 못하겠군."
'그냥 아까 당문 무인들 부를 거 그랬나?'
맹판관요괴저택 (6)
아쉬워하던 연우혁은 입맛을 다시며 정신을 차렸다.
원래 무림에는 각자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 법이었다. 누군가를 찾거나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때에는 개방에게, 술법이나 도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무당파에, 지랄염병을 떨 때에는 당문에게...
그리고 누군가를 죽일 때에는 살수한테 부탁하는 게 맞았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하더라도 정파 무인들과 판관을 죽이는 걸 공모할 수는 없었으니까.
"저런 관리 놈이 흔치는 않은데 말이야."
"맹 판관이 탐욕스럽고 집요한 자긴 하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닐 텐데, 살막의 살수 상대로 저런 짓을 해도 됩니까?"
무림의 의뢰인들이 살수들 상대로 사기를 치지 않는 것은 그 뒤에 돌아올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설령 운 좋게 눈앞의 살수는 잡아서 죽인다 하더라도 그 살수의 동료와 동료들이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것이다.
"음. 사실 판관은 우리가 살막 출신인 걸 모르고 있어."
"...?"
"잘 생각해봐라. 포두 하나 죽이려고 살막에 의뢰를 넣진 않지."
한경의 고관으로서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뢰를 넣는 건 생각보다 부담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무림에서도 악명이 있는 살수 조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면 모를까, 자신을 협박하거나 보복할 수 있는 무림의 조직에게 관리가 쉽게 의뢰를 넣진 않았다.
"이번 일은 원래 주변에 적당한 낭인을 찾아서 해치우려던 일이었어. 판관 놈 생각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적조는 적당한 낭인을 준비한 뒤 판관한테서 흘러나온 의뢰를 받게 했다. 의뢰가 끝난 뒤 판관에게 찾아가 살막의 이름으로 협박하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살막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연우혁과 적조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역효과가 날 겁니다."
"연 포두 말이 맞아. 지금도 저러는 놈인데 겁먹으면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하기 힘들지. 사실, 이럴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시간인데..."
지금이야 살수를 깔끔하게 죽이려고 무림인들을 불렀다지만, 일이년 정도 지나면 판관도 슬슬 경계심이 사라지고 식객으로 불러놓은 무림인들이 성가실 것이다.
"시간 주면 저한테 살수가 몇 명은 더 올 겁니다."
불러놓은 무림인들도 있겠다, 판관 성격에 연우혁이 멀쩡하면 확실하게 처리하겠다고 살수 두셋 정도는 더 고용할 수도 있었다.
살수에게 일을 시킨 다음 저택에 불러서 무림인들로 잡아버리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는가.
"맞는 말이다. 자다가 칼을 맞을 수도 있고."
"대주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건방진 관리 놈에게 살막의 두려움을 알려주겠습니다. 무림인들이 있다고 해봤자 놈의 살갗이 제 검을 막진 못할 겁니다."
부하가 비장하게 말하자 연우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적 대협. 이 분 대체 왜 이러십니까?"
"내가 사과하지."
"?!"
적조의 부하는 당황했다. 적조가 안쓰럽다는 듯이 부하를 보며 설명했다.
"이봐. 생각해봐. 대낮에 한경 한복판에서 관리가 칼을 맞고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절대 들키지 않게..."
"그래. 우리야 들키지 않게 도망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 연 포두는 판관과 원한이 있단 말이야.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다고. 무력으로 돌파해서 난자할 게 아니라 조용히, 들키지 않게 죽여야지."
"죄, 죄송합니다."
적조는 고민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야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돌파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일이 너무 커졌다. 어느 정도의 고수를 불렀는지는 몰라도 판관 정도면 발이 넓을 테니 꽤 괜찮은 문파의 고수도 불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돌파한다 하더라도 살막의 무공인 걸 들키는 순간 살막에도 보복이 돌아오리라. 나중에 포두도 곤란해질 수 있고...
'어렵다.'
흔히들 무림에서 살막의 살수라고 하면 황제의 목도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갖고 올 수 있을 거라고 두려워했지만, 그건 살막에서 퍼뜨린 소문에 불과했다.
살수라고 해서 다른 고수를 뛰어넘는 특별한 재주가 있지는 않는 것이다. 살수는 그저 남들보다 좀 더 은밀한 암살에 특화된 무공을 익힌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뛰어난 살수는 무공보다는 다른 자질이 더 뛰어났다. 인내심이나 끈기, 집요함이나 독기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자질이었다. 뒷간에서 반 년 동안 버티면서 상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어야 뛰어난 살수인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막힌 상황이라면 살수도 힘을 쓰기 어려웠다. 무림인들이 잔뜩 대비하고 있는 저택에 들어가 조용한 방법으로 판관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니.
적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음. 미안하군. 연 포두. 방법이 당장 안 떠오르는걸. 하다못해 놈이 나오기라도 하면 모를까, 파직당해서 저택 안에 있지? 접근할 방법이 마땅치가 않아. 혹시 좋은 계책이 없을까?"
"..."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 죽일 계책을 살수들이 짜내야지 그걸 자신한테 묻는다고 해서 뭐가 나온단 말인가?
적조의 부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포두가 명포두여도 그렇지 저택 안에 있는 판관을 죽일 계책을...
"포두님!"
밖에서 사 포쾌가 연우혁을 불렀다. 연우혁은 잠깐 대화를 멈추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말입니다."
사 포쾌는 우물쭈물하는 표정이었다. 연우혁은 괜찮다는 듯이 말했다.
"편히 말해라. 어떤 일이든 들어야 계책을 세우지 않겠느냐."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 하필이면 그게 맹 판관 저택이랍니다."
사 포쾌가 우물쭈물 한 것도 당연했다.
원래 맹 판관의 성질이 더러운 만큼, 판관의 저택에 방문하는 포쾌들은 호된 꼴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일 때문에 찾아가도 그런데 저택에 문제 생겨서 찾아왔다고 하면 더 분노를 사리라.
게다가 연우혁의 경우는 더 위험했다. 최근 한경에서 칭송이 자자하지 않은가. 맹 판관이 그런 부하 포두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저택에 방문했다가 하인들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제가 다른 구역의 포두에게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이건 연 포두님께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무슨 일이 터진 거지?"
"그, 거기 모인 무림인들끼리 서로 싸웠답니다. 뭔... 옥벽(玉璧)이 사라졌다고..."
"그렇군. 내가 가겠다."
"예!? 위험합니다! 맹 판관 그 잡놈의 성질머리가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사 포쾌가 기겁하자 연우혁은 대충 둘러댔다.
지금 들은 사건이 무슨 사건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절대로 넘길 수 없었다.
"녹을 받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
"...!"
"걱정해줘서 고맙다. 사 포쾌. 자네밖에 없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부하가 적조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 계책이 어디 쉽게 나오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죽이는 수단까지 고집을 부리시면 안 됩니다. 무림인들도 많으니 놈들이 대충 뒤집어 쓸 겁니다..."
"계책이 떠올랐습니다."
"!?"
부하는 기겁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적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봐라. 이 포두의 지혜라면 뭔가 나올 줄 알았지."
"아, 아니. 살수도 아닌데 어떻게...?!"
***
어지간해서는 자신 있게 계책이라고 말하지 않는 연우혁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조금 남달랐다.
잘만 풀리면 저택 안에서 소란스러운 난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옥벽 사건이면 분명...'
기서 하씨세가, 진검보(眞劍堡), 적원방(赤猿幫).
이 세 세력에서 나온 무인들이 서로 맞붙은 사건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이 무슨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유가 있어서 매일 다투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술 마시고 어깨 부딪쳐서 칼 휘두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 옥벽 사건도 그런 부류에 들어갔다.
하씨세가의 직계 무인 중 하나가 가문의 보물인 옥벽을 꺼내 자랑하다가 그만 옥벽이 사라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때 옥벽을 돌려서 구경하던 이들은 진검보와 적원방의 무인들이었고, 하씨세가의 무인들은 당연히 옥벽을 찾기 위해 이들을 수색하고 싶어했다.
물론 진검보와 적원방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체면과 자존심이 있는 만큼 그런 수색을 거절했다. 그들은 자기가 아닌 상대방을 수색하라고 강요했다.
말싸움은 점점 더 커지고, 서로 몸싸움으로 번지더니,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기까지...
'조금만 내버려두면 바로 난동이 일어난다.'
무림인들의 성질이 워낙 난폭하고 거친 만큼 옥벽을 찾지 않고 조금만 내버려둬도 소란이 벌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분명 저택 안에서 무림인들끼리 크게 싸움이 벌어질 텐데, 그 때를 틈타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적조는 당혹스러워했다.
물론 이 포두의 계책을 듣겠다고 한 게 본인이긴 했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었던 것이다.
무림인들끼리 크게 싸움이 일어난다니.
이건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 싸움을 붙이려는 건가? 모인 놈들이 바보가 아닐 텐데 말 몇 마디에 놀아날 수가 있나?'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적조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혁은 당당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살수는 포두를 믿고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금 저택에 들어오시면..."
"연 포두다. 저택에 문제가 생겨서 왔다."
"?!"
저택의 하인은 연우혁의 이름을 듣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포, 포두님.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어째서지?"
"아시지 않습니까? 주인어른께서 불같이 노하실 겁니다. 그냥 빨리 돌아가십시오."
주인어른의 더러운 성질을 알고 있는 하인은 연우혁 같은 명포두가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당장 저번에 할머니의 불상을 찾아준 게 누구던가. 판관은 거들떠도 안 보는 일을 해결해 준 건 바로 연 포두였다.
"돌아가셔야 합니다!"
"관의 일을 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할까? 비켜라."
"아, 안 되는데..."
연우혁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드넓은 저택이었지만 초대 받은 무림인들이 곳곳에 있어 소란스럽고 좁은 느낌이 났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어디 계시지?"
"어르신께서는 장을 맞은 게 아직 낫지 않으셔서 쉬고 계십니다."
"저런."
물론 판관 같은 사람에게 곤장이 꽤나 아프긴 했겠지만, 연우혁은 그게 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 수상쩍은 일을 맡기고 다닐 때에는 아픈 척을 하고 있어야 나중에 변명하기 좋은 것이다. 역시 보통 노련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잘 됐나?'
괜히 판관의 얼굴을 보고 욕을 듣는 것보다는 무림인들을 빠르게 싸우게 만드는 게 나았다. 연우혁은 무림인들을 둘러보았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란 거요? 당신네 물건이 사라져도 그럴 수 있겠소?"
"우린 애초에 그런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게 왜 그렇게 행동했나?"
"감히!"
"언성 높이지 마라. 문객으로 초대받았으면 예의가 있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묻지 않아도 어디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화를 내는 쪽이 하씨세가의 무인들이었고, 일을 그냥 끝내려고 하는 쪽이 진검보와 적원방 무인들이었다.
원래 다른 저택에 초대받은 이상 어느 정도는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특히 무림인이 문객으로 초대받는다는 건 무력을 빌려준다는 의미라, 그냥 공짜로 초대받지 않았다. 대가를 받는 만큼 더더욱 행동에 조심해야 했다.
진검보나 적원방의 무인들도 그걸 알았기에 판관의 심기를 너무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고 그건 하씨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게 너무 귀한 물건이라서 그렇지.
저런 게 사라진 이상 그냥 넘어갔다가는 하씨세가 무인들이 가문에 돌아가서 물리적으로 목이 잘릴 수 있었다.
"절대 넘어갈 수 없소. 당신들을 뒤져봐야겠소."
"뭐?"
"제대로 들었잖소. 조용히 끝내고 싶다면 뒤져보게 해주시오."
"그럼 우리 말고 적원방 놈들부터 뒤지시오. 나온다면 거기서 나올 테니."
"헛소리 작작 하는 게 좋을 거다. 진검보 놈들부터 뒤져라. 거기서 나올 테니까!"
"잠깐. 저기 포두가 왔군."
무인 하나가 연우혁을 알아보고 손짓했다. 한창 다투던 세 문파의 무인들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마침 포두 놈이 왔으니 포두 놈한테 물어보면 되겠군."
"포두 놈이 뭘 안다고?"
"이 분은...!"
하인이 소리치려고 하자 연우혁이 괜찮다는 듯이 손짓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고수분들을 뵙게 되니 황송할 뿐입니다."
"포두! 지금 저 두 놈들 중 한 놈들이 보물을 훔쳤소. 빨리 뒤져보시오!"
"눈이 달려 있다면 저기 적원방부터 뒤지겠지. 적원방을 빨리 뒤져보시오."
"우릴 먼저 뒤지면 네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수도 있다. 포두."
인사 한 마디에 세 문파의 무인들이 으르렁거렸다. 연우혁은 흐뭇해했다.
'일각만 기다려도 서로 싸우겠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긴 무슨."
적원방의 무인이 연우혁을 비웃었다.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포두 놈이 시간을 끄는 게 보였던 것이다.
"저 놈이 이 문제를 해결하면 내 할아비겠다."
"살, 살려주십시오. 포두 님! 제가 귀신에 홀렸나봅니다!!"
털썩!
하씨세가에서 데리고 온 마부가 새파랗게 질려서 연우혁 앞에 넙죽 엎드렸다. 손에는 훔친 옥벽이 들려있었다.
세 문파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연우혁까지 황당한 표정으로 마부를 쳐다보았다.
맹판관요괴저택 (7)
"네, 네 놈이...?"
기서 하씨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온 하등명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마부를 쳐다보았다.
평소 그렇게 충성스럽던 놈이 옥벽을 훔친 범인이었다니.
그보다 더 믿기 힘든 건 갑자기 포두만 보고서 죄를 자백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문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마부 놈을 보며 물었다.
"어이, 마부 놈아. 네놈이 훔치고 우리한테 뒤집어씌운 건 나중에 추궁한다 치고. 왜 갑자기 옥벽을 꺼낸 거냐? 겁을 먹었으면 진작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걸 누가 모른다더냐? 왜 갑자기 불었는지 말하라니까."
"말해라."
하등명은 검을 뽑아서 마부 앞에 찍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무인들 중 가장 분노하고 있는 건 믿던 자에게 배신당한 하등명이었다.
충성스럽고 행동거지가 싹싹해서 입의 혀처럼 생각했더니 감히 도둑질을 하다니.
마부는 엎드린 채 벌벌벌 떨면서 입을 열었다.
"그, 그것이, 그러니 말입니다, 저, 저 포두님을 보는 순간 다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쳤나봅니다. 이 물건만 있으면 팔자를 고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마부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적원방에서 나온 우두머리, 철두산군(鐵頭山君) 마자추는 분노보다는 호기심이 들어 계속 캐물었다.
"포두 놈이 왜?"
"저, 저 포두님께서는 눈길만 던져도 죄 지은 사람을 찾아냅니다. 백 리 밖에 있는 범인도 말만 들어도 맞히는 분이십니다."
"...?"
"???"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의아해했다.
세 문파 모두 한경 밖에서 온 만큼 최근 소문이 자자한 포두에 대한 이야기에는 어두웠다. 게다가 문파에서 나름 대접 받는 무인들인 만큼 포두에 대한 이야기에 더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런 소문들은 하인이나 짐꾼, 마부들한테 가장 빨리 퍼지기 마련인 것이다.
"포두가 그럴 수가 있나?"
"사실입니다. 이 연 포두님께서는 한경의 으뜸가는 명포두십니다! 제 조모께서 잃어버리신 불상도..."
연우혁을 안내해주던 하인이 발끈해서 외쳤다. 여기 저택의 하인까지 저렇게 나오자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더더욱 신기해했다.
적원방의 마자추는 연우혁을 보며 물었다.
"이봐. 포두. 저 마부 놈이 옥벽을 훔친 걸 알고 있었나?"
"예."
연우혁은 입맛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이제 여기서 모른다고 해봤자 이득을 볼 게 없었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허세일 겁니다. 우리도 못 찾았잖습니까."
"조용히 해라. 어떻게?"
마자추의 질문에 연우혁은 역으로 물었다.
"대협께서는 왜 옥벽을 못 찾으셨습니까?"
"그야... 진검보 놈들이 급하게 돌려봤는지, 한 놈은 누구한테 줬다는데 막상 그 놈한테 물어보니 다른 놈한테 줬다고 하고... 그러니까 저 놈들이 잃어버려놓고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했지."
"적원방의 무인들은 옥벽을 주고 받은 순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그렇지."
"아닐 겁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마자추는 놀랐다.
적원방의 무인들도, 진검보의 무인들도 옥벽을 주고 받은 순서를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대협께서 철전 하나 빌려주십시오."
"여기 있다."
연우혁은 마자추에게 철전을 받은 다음 하등명한테 걸어갔다. 그리고는 공손히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바쳤다.
"이러면 철전이 어디 갔습니까?"
"하등명한테 갔겠지."
"아닙니다. 제 손에 있습니다."
연우혁은 방금 받은 철전을 흔들었다. 하등명한테 준 건 그냥 아무것도 안 든 쌈지였다.
"다른 걸 준 거냐?"
"예."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내 철전이나 돌려줘라."
"실은 이게 마부가 꾸민 속임수입니다."
"!"
세 문파의 무인들은 홀린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옥벽을 주고받은 사람들만 기억하다보니 옮긴 사람은 의심하기 쉽지 않지요. 보십시오. 여기 마부가 하 대협에게 옥벽을 받아서 마 대협에게 가져다주겠다고 합니다. 하 대협은 옥벽이 마 대협한테 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마부는 그저 마 대협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며 아무 물건이나 바쳤을 겁니다."
연우혁은 철전을 마자추한테 주는 척을 하며 숨겼다.
"여기서 바로 숨기면 쉽게 들통납니다. 마부는 옥벽을 마 대협이 아니라 단 대협한테 바칩니다. 단 대협이 보고 나면 마 대협한테 바치겠다고 들고 나갑니다. 그러면 이제 단 대협은 하 대협한테서 자신한테, 자신한테서 마 대협한테 옥벽이 갔다고 기억하게 됩니다."
마자추는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골똘히 몰두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마부는 마 대협에게 하 대협이 갖다 줬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 대협이 다 보면 단 대협한테 갖다주겠다고 말하며 들고 나갔겠지요. 그러면 이제 마 대협은 하 대협한테서 자신한테, 자신한테서 단 대협한테 옥벽이 갔다고 기억하게 됩니다."
"설마 그 옥벽은 단종혁이 아니라 다른 무인한테 주나?!"
"그렇습니다. 또 이제 다른 무인한테 주면서 다 보고 나면 마 대협에게 전해야 한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몇 번 거듭하게 되면 서로의 기억은 다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저택에 초청받은 지 오래 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서로가 머무르는 방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으니 더 쉬웠겠지요."
"기막힌 수법이다, 기막힌 수법이야!"
마자추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아까 분노한 것도 잊어버릴 만큼 마부의 수법이 대담하고 교묘했던 것이다.
무인들이 뒤에서 옥벽을 전해주는지 지켜보는데 그걸 대담하게 주는 시늉만 하고 거짓말을 하다니.
"하씨세가의 이름으로 사과드리겠소."
"당연히 사과해야지!"
적원방의 마자추도, 진검보의 단종혁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하씨세가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자기 사람 하나 관리하지 못하고 이 소란을 만들었으니 좋게 반응해줄 수가 없었다.
하등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됐다. 고개 들어라."
"!?"
마자추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분명 성질이 괄괄하고 난폭한 마자추가 가장 앞서서 보상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왜, 누구의 목이라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냐? 착각이다. 여기 문객으로 온 것도 있고, 하씨세가의 이름이 있는데 괜히 핍박해서 좋을 것도 없지. 앞으로 계속 강호에서 맞닥뜨리게 될 텐데 말이야."
"마, 마 대협..."
"그리고 포두의 재주를 보니까 끓던 화도 풀리는군. 마부 놈이 이런 짓을 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 무림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일은 처음 본다. 앞으로 십 년은 술자리에서 이야기가 부족하진 않겠군그래."
마자추의 말에 부하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본 단종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씨세가와의 관계도 있는 만큼 그리 크게 충돌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 대협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 또한 오늘 일을 잊도록 하겠소."
"하등명, 오늘 우리한테 빚 하나씩 진 거다."
"그렇게 따지면 저 포두한테 가장 크게 졌겠군."
"하하! 그 말도 맞다."
팽팽하게 살기를 드러내던 무림인들은 기세를 죽이고 서로 화해했다.
결국 이 문제를 좋게 해결해준 건 포두의 재주라는 걸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재주 하나로 세 문파의 다툼을 해결했으니, 실로 명포두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뭘 하기에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오!"
맹 판관이 절뚝거리며 나왔다. 곤장을 맞은 게 다 낫지 않았음에도 나올 만큼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판관 어르신.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다 해결되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시... 아니, 저 놈이 왜!"
"판관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연우혁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젠장. 최악이군.'
소란은 못 만들고 판관과는 마주치고. 오늘 운수가 매우 사나웠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판관 어르신. 녹을 받는 사람으로서 일이 생겼는데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어르신. 연 포두 덕분에 좋게 해결됐습니다."
하등명은 둘의 관계를 모르는 만큼 연우혁을 변호해줬다.
물론 안 그래도 연우혁을 질시하는 맹 판관 성격에는 불에 기름을 붓는 일이었다.
"감히 포두 새끼가 허락도 없이 내 저택에 발을 디뎌? 목숨이 무섭지 않은 것이냐? 내 말 한 마디면 네놈은 포두 자리에서 쫓겨나갈 수 있다!"
'파직된 놈이 뭐라는 거야.'
연우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애절하게 외쳤다.
"판관 어르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닥쳐라! 지금 당장..."
"아니, 이보시오!"
마자추가 분노한 얼굴로 으르렁댔다. 그 기세에 맹 판관이 겁에 질려서 한 걸음 물러났다. 당문의 미친 무인이 기억에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리 판관 어른의 집이라지만 우리 적원방의 체면을 무시하는 거요? 지금 분명 이 포두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줬다고 했잖소. 이리 핍박하는 건 무슨 뜻이오?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면 안 되는 거였다는 거요?"
"...!"
연우혁을 들볶던 판관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놀랍게도 적원방은 물론이고 진검보의 무인들까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판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포두 새끼는 귀신이라도 부리는지 죽지도 않고 잡놈들을 홀리고 있구나!'
대체 그 짧은 사이에 문객으로 부른 무림인 놈들을 어떻게 홀린 건지 믿기지가 않았다. 맹 판관은 이를 악물었다.
판관의 권세와 이름으로 초대한 놈들이긴 했지만, 저 정도 되는 문파들은 하인처럼 부릴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는 체면을 세워주고 존중을 해줘야 했다.
게다가 아직 못 잡아 죽인 살수 놈들도 있지 않은가.
"...미안하게 됐소. 저 포두 놈이 주제를 모르고 건방진 놈이라 화를 냈군. 썩 꺼져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판관은 마지막으로 연우혁에게 화를 내더니 휘적휘적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무림인들은 일제히 불만을 터뜨렸다.
"저런 무례한 자 같으니. 하여간 관리란 놈들은 모두 다 똑같습니다."
"대체 뭘 했길래 저러나?"
연우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저택의 하인이 종달새처럼 지저귀었다.
"어르신께서는 포두님의 명성을 질투하십니다! 정말 너무한 분이십니다. 포두님께서는 충성을 다해 어르신을 섬기시는데!"
하인은 연우혁이 목숨을 걸고 당문의 미친 무인한테서 판관을 구한 일부터 시작해서 충성을 바친 일들을 재잘댔다.
"아..."
"알겠군."
그러자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일제히 연우혁을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미친 당문 무인한테서 상관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더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무능한 상관과 충성스럽고 유능한 부하의 일이 꼭 관에만 있지는 않는 것이다.
"뭐라 해줄 말이 없네그려."
"아닙니다. 자네는 왜 판관 어르신을 헐뜯나? 입조심하게!"
연우혁은 가식을 떨었다. 그 모습에 무림인들은 더더욱 안타까워했다.
저런 청년이 웬 돼지 새끼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니.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협들을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 연 포두. 자네의 무운을 빌지."
저택을 떠나는 포두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마자추는 아까 빌려준 철전을 못 돌려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헉...!"
"왜 그러냐?"
"아, 아까 저 포두가 문제를 해결하면 할아비라고 부르겠다고 했었는데..."
부하의 말에 마자추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네 할아버지는 앞으로 저 포두다."
"대... 대주님! 살려주십시오!"
* * *
'젠장.'
칭송을 받으면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
오늘 목표로 한 건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판관하고 마주치기까지 했다. 연우혁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니 뭔 짓을 할지 몰랐다.
"...???"
연우혁은 적조와 부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둘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기에 연우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숙소에 돌아갔다.
'들어갔나? 아니, 소란이 없었으니 들어갈 수는 없었을 테고. 도망쳤나? 도망칠 이유가 없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고민하던 연우혁에게 정답은 다음 날 아침에 찾아왔다.
"포두님!! 포두님!!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아니, 큰일이 아니라 경사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달려온 사 포쾌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눈빛과 목소리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판관 어르신께서 어젯밤에 급사(急死)하셨답니다!!!"
"...?!"
'언제 들어간 거지!?'
맹판관요괴저택 (8)
연우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살막의 살수들이 사라졌길래 '설마 잠입했나?'하고 생각했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못했었다.
약속한 소란을 만들지 못한 만큼 아무리 살수들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판관이 죽었다니?
'아차.'
연우혁은 바로 해야 할 반응부터 내보였다.
"...으흑흑!"
"!?"
갑자기 포두가 애통한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리자 사 포쾌는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포두님? 맹 판관입니다. 맹 판관이 포두님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시잖습니까."
"조용히 해라! 판관 어르신이 비록 입은 험하고 말은 거칠게 하셨지만, 그건 한경을 떠받치는 거목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그러셨던 거다. 판관 어르신께서 나를 믿고 포두 일을 맡겨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어떻게 일들을 해결할 수 있었겠느냐?"
사실 연우혁에게 포두 일을 맡긴 건 맹 판관의 뜻이 아니라 주변의 눈치를 봐서가 더 가까웠고, 그 뒤로는 계속 연우혁을 쫓아내려고 눈엣가시처럼 여겼지만, 사실 지금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연우혁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부하인지를 주변에 보여줘야 할 때였다.
"포, 포두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 모습에 사 포쾌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생각해보니 이 젊은 포두는 사 포쾌가 시비를 걸었을 때에도 그걸 마음에 두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했었다.
어느 누가 당문의 미친 무인 앞에서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지킬 수 있겠는가?
오직 진정한 충의지심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했다.
"포두님의 생각도 모르고 멍청하게... 이런 입은 쓸모가 없습니다! 에잇! 에잇!"
가짜로 눈물을 짜내던 연우혁은 사 포쾌가 스스로의 입을 때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나야 연기를 해야 한다지만 너는 왜 그러냐?'
"포두님, 포두님! 판관 놈이 뒤졌... 헉."
"야, 이 눈치 없는 놈아! 포두님께서 지금!"
사 포쾌는 다른 포쾌들에게 벌컥 화를 냈다. 귀찮아진 연우혁은 대충 눈물을 닦고 말했다.
"됐다. 내가 슬픈 것과 별개로 공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판관 어르신께서 대체 왜 급사하셨단 말이냐? 그렇게 정정하셨던 분이?"
"매를 맞아서 생긴 장독(杖毒)이 덧나신 거 아닐까요? 아까 오작(仵作) 놈들이 신나서 갔는데, 슬쩍 물어봤더니 별 거 없답니다."
오작은 장의사이자 검시관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포쾌들이 체포부터 시작해서 잡일과 수사, 가끔 노역까지 하는 것처럼 원래 말단 관직이란 건 기본적으로 여러 일들을 같이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오작은 포쾌보다 더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둘 다 무시 받는다지만 아무래도 백성 잡고 잔돈푼 뜯어내는 놈이 시체 만져서 냄새 나는 놈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오작의 입김이 좀 세졌다. 어느 유족이든 간에 죽은 사람을 정성껏 염해서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 했으니까.
특히 이번처럼 판관 같은 한경에서 권세 있었던 사람의 죽음이라면 오작들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걸진 미소가 걸려 있기 마련이었다. 정성껏 염해주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데 그게 다 돈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쇠약해져서 돌아가신 것 같다는데요."
'살수 놈들 대단하긴 하군.'
연우혁은 솔직히 놀랐다.
판관이 죽었으니 한경에서 가장 노련한 오작들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오작들이 아무런 위화감도 눈치 채지 못하다니.
"가자. 어르신을 뵈러 가야겠다."
"예?"
포쾌들은 질색했다.
물론 그 짜증나는 판관 놈은 죽었다지만, 원래 사람이 죽은 곳은 불길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온갖 사기(邪氣)가 그득할 텐데 뭐가 좋다고 거기에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특히 지금처럼 오작 놈들이 시체를 들쑤시고 염할 때에는 더더욱 악취와 기운이 심할 것이다.
"장례를 치를 때 가시죠?"
"이 놈들! 포두님 마음도 모르는 놈들이!"
사 포쾌는 벌컥 화를 냈다.
"너희들은 오지 마라. 나 혼자서라도 따라가겠다! 포두님. 가시죠!"
"아니... 안 간다는 게 아니고..."
"사 포쾌, 사람 참 그러지 말게. 우리가 뭐가 되나? 가시죠. 포두님. 따라가겠습니다!"
포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연우혁의 뒤를 따라갔다.
'의심 받을 가능성은 적지만 조심해야 한다.'
연우혁은 앞장서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 저택에 방문하지 않아도 됐다. 다른 포두들은 아마 질색하며 핑계를 대고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람이 죽은, 악취와 사기가 가득한 곳에 방문하고 싶지는 않아했다.
하지만 연우혁은 자신이 이렇게 충성스럽다는 걸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다.
혹시라도 판관의 죽음에 부정이 있다면 반드시 해결하겠다!
"아, 아니. 포두님!"
저택의 하인이 연우혁의 얼굴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모욕을 받고 쫓겨났는데 이렇게 오다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혹시라도 부정이 있었다면..."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오지 않으셔도 됐었는데. 그냥 장형을 맞은 게 덧나신 거 같습니다."
'뭘 얼마나 세게 친 거야?'
연우혁은 보는 사람마다 장형 이야기를 하자 좀 궁금해졌다. 나중에 교위를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보통 곤장을 칠 때 그걸 휘두르는 놈한테 세기를 조절하게 했다. 판관 같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조절을 해줬을 텐데도 저렇다니.
교위가 보통 세게 때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연 할아버지!"
어제 만난 적원방의 무인, 철두산군 마자추가 연우혁을 알아보고 반겼다.
연우혁은 뭔 소린가 싶어서 되물었다.
"마 대협. 할아버지라는 게 무슨 소리십니까?"
"내 부하 놈 중 하나가 자네를 할아버지로 모시겠다던데? 하여간 여긴 왜 왔나?"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마자추가 짐짓 사나운 얼굴을 하고 으르렁거렸다.
"설마 우리들 중 누군가를 의심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녹봉을 먹는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화내는 게 머쓱해지는군. 하긴, 어제 사람을 풀어서 네 소문을 들어봤다! 재주가 대단하더구나. 그렇게 자기를 모욕한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달려오다니. 범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 마음껏 찾아봐라."
마자추는 판관이 죽었음에도 여유로웠다.
물론 맹 판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만큼 여기 있는 무림인들에게 별 책임이 없다는 걸 확신하고 있어서기도 했다.
어제 저 포두가 옥벽을 찾아준 다음에 무림인들은 각자 머무는 전각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정해진 대로 보초를 서고 안채에는 접근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판관과 딱히 원한 있는 사람도 없었고, 지금 들어간 오작 놈들도 별 문제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냥 늙어서 뒤진 게 분명했다.
"엇. 연 포두님 맞으십니까?"
안채에서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송곳과 망치를 든 오작들이 걸어 나왔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뒤에 있던 포쾌들은 살짝 긴장했다.
오작들과 포쾌들의 사이는 그리 썩 좋지 못했던 것이다. 오작들은 높은 부수입을 올리고 한경의 양민들의 존경을 받는 포쾌들을 질시했고, 포쾌들은 냄새나고 불결한 오작들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만약 판관의 시신만 믿고 별 문제도 없는데 왔다고 시비를 건다면 포쾌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희 행수님께서 저번 무덤을 도굴한 놈을 잡아주셔서 감사하고 계십니다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
평소 까칠하던 오작들이었지만 연우혁에게는 태도가 부드러웠다. 연우혁은 저번에 밀린 사건들을 해결할 때 미루지 않고 바로 끝낸 스스로를 속으로 칭찬했다.
"혹시 수상쩍은 흔적이라도..."
"아이. 없습니다. 없어요. 그냥 장독이 덧나신 것 같습니다. 참 무상한 일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저택을 두고, 첩도 여럿 있으신 분이 장 몇 대에 그냥 가시다니..."
"여기가 맹 판관 저택이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문에서 터져 나왔다.
머무르고 있던 무림인들은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약한 무공으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니! 제갈 대협 아니십니까!"
하씨세가의 하등명이 황급히 예의를 갖추며 달려 나왔다.
제갈세가의 장로, 천기수사 제갈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제갈우는 꼿꼿한 자세로 머리만 돌려 하등명을 쳐다보았다.
"너는 누구냐?"
"하씨세가의..."
"기서 하씨세가?"
"예."
"그러면 너는 하등명이로겠구나."
"맞, 맞습니다!"
하등명이 감탄하자 옆에 있던 다른 무인들도 감탄했다. '역시 천기수사다'라고 감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그 정도인가?'
지금 여기 있는 무림인들 중에 자기가 가장 먼저 나오면 우두머리거나 직계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등명은 젊은 놈이니 직계일 것이고, 그럼 하씨세가의 젊은 직계가 몇이나 된다고...
"천기수사. 내가 누군지도 맞춰보시오!"
"이마가 툭 튀어나왔고 외공이 유독 발달한 걸 보니 너는 적원방의 철두산군이다."
"맞소, 맞소!"
평소 유명하던 무림의 명사를 보게 되자 좌중의 무림인들은 신이 나서 지껄여댔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제갈우를 그냥 내버려두기 부담스러웠는지 하등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천기수사 님께서는 여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판관한테 초대를 받았다. 웬 낭인 놈들이 혈판장을 보내서 협박했다던데."
무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판관이 생전에 이미 말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들었습니다. 웬 겁 없는 낭인 놈들이 예전에 벌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협박을 했다지 뭡니까."
'그런 식으로 떠들었었군.'
연우혁은 판관이 무슨 핑계로 불렀는지 알고서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자기가 고용해놓고 살인멸구하려 한 주제에 낯짝의 두께가 유독 두꺼운 사람이었다.
"천기수사 어른까지 부르다니. 우도할계(牛刀割鷄)도 정도껏 해야지."
"그런데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천기수사 님. 판관께서 어제 병이 덧나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도 들었다."
제갈우의 대답에는 꼬장꼬장함이 담겨있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거슬림을 느낀 마자추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쩌시겠소? 우린 이제 슬슬 나갈까 생각중인데."
"너희는 아무데도 못 간다."
"뭐요? 문객 많아봤자 장례 준비에 방해나 되지..."
"너희 중 판관을 죽인 놈이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느냐?"
"!"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이 일제히 눈빛을 바꿨다. 제갈우가 무슨 목적으로 저러는지 깨달은 것이다.
"지금 저희를 의심하는 겁니까?"
"아해야. 진검보와 적원방이 네 세가 휘하라도 되더냐? 무슨 자신감으로 둘이 아무 잘못 없다고 보장하는 거냐?"
"그, 그건..."
하등명은 한 걸음 물러섰다. 제갈우의 말은 쉽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진검보나 적원방은 다른 문파지 하등명의 문파가 아니었으니까.
"하등명, 어제 빚 져놓고 그것도 말 못 하나? 당연히 아무 잘못이 없지! 우리가 무엇이 아쉬워 저런 놈을 죽인단 말이오?"
마자추가 으르렁댔지만 제갈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했다.
"무인이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는 아주 사소한 이유면 충분하지. 그렇게 입을 맞추니 더 의심스럽군."
"말 조심하쇼. 천기수사. 제갈세가의 이름이 아무리 드높아도, 적원방의 동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니!"
"지금 날 겁박하는 건가? 왜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마자추는 분통이 터져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자추 같은 성격에는 제갈우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천기수사 님. 여기 연 포두께서도 별 문제 없다고 해주셨습니다."
"하등명, 그걸..."
하등명의 말에 마자추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제갈우 같이 꼬장꼬장한 놈이 고작 한경 포두 이름 듣는다고 '아, 그러냐?'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되레 비웃음이나 살 게 분명했다.
"연 포두? 혹시 네가 연우혁이냐?"
"...예. 맞습니다."
"좋다. 네가 앉아서 자세히 말해봐라."
"!?"
제갈우가 연우혁에게 하는 말을 들은 무림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성질 괴팍한 제갈세가의 장로가 설마 일개 포두의 말을 경청하려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맹판관요괴저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