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6

맹판관요괴저택 (9)

마자추는 황당해서 외쳤다.

"천기수사. 적원방의 이름은 무시하고 지금 일개 포두의 말은 듣겠다는 거요?"

씩씩대던 마자추는 연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했는지 사과했다.

"널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포두."

"괜찮습니다. 대협. 이해합니다."

제갈우는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마자추를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적원방의 이름을 무시했다는 거냐?"

"방금 그랬잖소! 내 말은 무시해놓고 이 포두의 말은 듣다니...!"

"예전에 당문 근처에서 웬 관리 놈이 한 줌 핏물로 변해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 때 독왕이 당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했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당문 무인들을 조사했다. 내가 독왕을 무시한 거냐?"

"그건... 그건 아니오."

"조사할 때 관리를 따르던 하인 놈들은 내 시중을 들면서 일을 도왔다. 이게 하인의 말은 듣고 독왕을 무시한 거냐?"

"..."

마자추는 본전도 챙기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제갈우는 무림에서 가장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마자추를 쏘아보았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하등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천기수사 님. 연 포두가 천기수사 님의 일을 도울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능히 할 수 있다."

"!"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 깐깐한 천기수사가 일개 포두를 인정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포두의 재주가 뛰어나고 한경에 소문이 자자하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연우혁도 놀랐다.

"??"

말 한 번 안 나눠본 무림의 명숙이 갑자기 찾아와서 높게 평가를 하니,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연우혁 생각에 범인은...

'팽 형이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팽주성이 제갈세가 방문한 상태에서 신나게 떠든 게 분명했다. 그 사람 말고는 의심가는 사람이 없었다.

"말해봐라. 연우혁. 왜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

진검보 무인들을 이끄는 탈명검 단종혁이 입을 열었다.

"천기수사. 그 포두는 지금 막 왔소."

"뭐? 별 문제 없다고 했다면서?"

제갈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하등명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오작들이 별 문제가 없다고 해서..."

"설마 오작하고 포두를 구분하지 못하는 거냐? 눈에 문제가 있느냐?"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실언했습니다."

제갈우는 무림에서 두번째로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하등명을 쏘아보았다. 마자추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어린 소가주의 등을 두드려줬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가 나왔는가 했더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나보구나. 그럼 들어보자. 판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

연우혁은 긴장했다.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연우혁이 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선택은?

'역시 자연사로 몰고 가는 거다.'

괜히 어설프게 자리에 있는 아무나 범인으로 몰았다가는 일이 어떻게 튈지 몰랐다. 천기수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연우혁은 스스로의 이점을 믿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연우혁이 훨씬 더 잘 알지 않는가!

'한경에서 손꼽히는 오작들이 시신을 확인했다. 시신 자체에는 별 증거도 없다. 충분히 몰고 갈 수 있다!'

"저는 판관 어르신께서 곤장을 맞아 쇠약해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좌중에 있던 무림인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상 연우혁이 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몇몇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쯧!"

제갈우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연우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제갈우 정도면 곱게 미친 무림인이었다. 무림에는 제갈우보다 더 미친놈들이 많았다.

"어르신께서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성급하다고 생각한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예전에 당문 근처에서 웬 관리 놈이 한 줌 핏물로 변해서 사라진 적이 있다고 했지. 그 놈은 갓 급제한 겁 없고 건방진 놈이라 당문의 대장간 중 몇 개가 국법에 어긋난다고, 치워버려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며 시비를 걸었었다."

제갈우는 연우혁 대신 마자추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과연 누가 이 관리 놈을 죽였겠느냐?"

마자추는 당황해서 얼떨결에 대답했다.

"당, 당문?"

"봐라. 증거가 하나도 없지만 여기 철두산군도 수상한 걸 안다! 판관의 죽음도 비슷하다. 너무 공교롭지 않느냐? 그렇게 쌩쌩하던 자가 갑자기 급사를? 그것도 성질 괄괄한 무림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리에서? 내게 보낸 서신에는 본인이 아프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무림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기수사의 말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등명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판관 어른은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단 말입니다."

"맞소! 보아하니 아픈 놈이 색은 더럽게 밝혀대는데 화까지 터뜨리니 쓰러지는 것도 당연하지!"

"조용히 해라. 네 녀석들 의견 물은 게 아니니까."

제갈우는 짜증스럽게 손을 내젓더니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애초에 이 포두 의견이 궁금한 거였지 다른 멍청한 놈들 의견이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림인들이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일 뿐입니다. 어르신. 판관 어르신께서는 사실 몸이 편찮으신지 꽤 됐습니다."

"...?!"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천기수사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지병이 있었다고?"

"예. 혹시 판관 어르신께서 왜 곤장을 맞게 되신지 아십니까? 몸이 허해지셔서 요괴를 보게 되신 탓입니다."

연우혁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몸이 허해진 사람을 금의위가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렸으니..."

"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한경의 대소사를 맡아서 처리하시는데 어디 쉽게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셨겠습니까. 몇몇 사람만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개방에 물어보십시오."

"흠!"

제갈우는 예상 밖의 이야기에 생각에 잠겼다. 좌중의 무림인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완전히 귀병 걸린 거 아니요!"

"맞습니다. 천기수사 님! 연 포두가 상관의 명성을 존중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이러셔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조용해라, 조용해!"

제갈우는 아까보다 더 짜증스럽게 무림인들을 닥치게 만들었다.

"좋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원래부터 몸이 좀 안 좋은 놈이라는 건 받아들이지. 하지만 수상한 건 그게 끝이 아니다. 판관 놈이 부릴 수 있는 관졸들이 있고 포쾌들이 있는데 이런 무림인들은 왜 불러 모았을까?"

"말했잖소. 어떤 놈이 협박을..."

"낭인 몇 놈 때문에 이만한 무인들을 모았다고?"

"겁이 많았나보지."

"판관 놈이 겁이 많았으면 진작 낙향했겠지. 넌 조용히 좀 해라!"

마자추는 다시 찌그러졌다. 천기수사는 집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아니었겠느냐? 낭인이 아니라, 여기 있는 놈들과 관련된 무림인 중에 의심 가는 놈이 있어서..."

연우혁은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이건 어르신께서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말해라."

"제 생각에는 판관 어르신께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혈판장을 보낸 낭인이잖습니까?"

하등명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낭인이 아니라 다른..."

털썩!

뒤에서 듣고 있던 저택의 총관이 사색이 되어 넘어졌다.

"그, 그걸 어떻게...!"

"뭐냐? 말해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무림인들은 일제히 으르렁댔다. 그 살기 넘치는 기세에 짓눌린 총관은 벌벌 떨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주인 나리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 포두께 원한은 없었습니다! 그저 낭인 놈한테 은자만..."

"...아니, 이런 미친 잡놈을 봤나!"

마자추는 가장 먼저 깨닫고 경악했다.

지금 설마 판관이란 놈이 자기 부하를 죽이려고 낭인을 고용했단 말인가?

"저... 저는 낭인한테 은자를 갖다 줬을 뿐입니다. 제발!"

"닥쳐라. 우리는 그러면 왜 부른 것이냐!"

"낭인 놈들을 살인멸구해야 한다고..."

"...하! 고작 저잣거리 낭인 놈들을 말끔하게 죽이겠다고 우리가...!"

자리에 있던 무림인들은 허탈함에 빠졌다.

웬 낭인 무리가 협박한다길래 의로운 일을 하는 셈치고 왔더니, 판관 놈이 일을 맡긴 낭인을 살인멸구하는 일이었다니.

"괜찮나, 연 포두?"

"...그저 비통할 뿐입니다. 크흑!"

"이해한다. 이해해! 저런 상관 놈 밑에서 그리 충성을 다했다니. 죽어도 싼 놈이다!"

마자추는 탄식하는 연우혁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저렇게 상관 복이 없단 말인가?

주변이 난장판이 됐는데도 제갈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총관을 심문했다. 낭인을 고용하면서 든 은자까지 세세하게 캐물었다.

'이 돈이면 고작해야 이류 한둘 고용했겠군.'

이런 저잣거리 낭인들은 배신당했다고 저택에 뛰어들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판관의 죽음과 아무 상관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무림인들을 불러 모은 이유도 설명이 됐다."

"천기수사. 슬슬 인정하십시오. 지금 여기 있는 동도들이 결백하다는 걸 말입니다."

"보채지 마라. 확인할 만큼 확인하면 그렇게 할 거다."

제갈우는 안채를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확인하러 가자."

"어, 어르신. 시신은 함부로 건드리면..."

악취를 막기 위해 천으로 코와 입을 막은 오작들은 당황했다.

잘 정돈된 시신을 문외한이 건드렸다가 훼손하면 유족들에게 은자는 커녕 곤장이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비켜라. 내가 네놈들보다 만진 시신의 숫자가 곱절은 될 테니."

제갈우는 더 이상 상대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뒤를 쫓았다.

"몸에 상처나 시반(屍斑, 죽은 뒤 피부에 생기는 멍울)을 보는 법은 아느냐?"

"예."

연우혁은 해결했던 사건들에서 단서 봤던 법을 떠올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시반이 등이나 엉덩이에 나타나면 누워서 죽었고, 가슴팍이나 배에 나타나면 엎드려서 죽은 걸 알 수 있습니다."

옆에 있던 오작들은 경탄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저런 건 오작들 사이에서만 내려오는 일종의 비전이었다. 길거리나 돌아다니는 포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비방을 저렇게 술술 읊다니.

'연 포두의 소문이 과연 거짓이 없구나!'

"이 시체는 가슴팍에 시반이 있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장형을 맞은 상처가 낫지 않아 엎드려서 주무셨을 겁니다."

"입이나 코, 귀에 독이 들어갔는지 검사는 해봤느냐?"

"오작들이 은을 대어가며 확인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도 물러나지 않는 연우혁의 모습에 오작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불안해졌다.

상대방이 무림의 고수인데 언제 분을 터뜨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우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마지막으로 뱃속은 확인해봤느냐?"

"!"

연우혁도, 오작들도 놀랐다.

오작들이 놀란 이유는 창자 속까지는 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겉이 아니라 배를 갈라서 안을 확인하는 건데 유족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연우혁이 놀란 이유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독살 가능성이 높지 않나, 지금?'

살수들이 어떻게 죽였는진 모르겠지만 독살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뱃속에 든 내용물에 독이라도 나오면 일이 다 꼬였다.

오작들도 만약 독이라도 나올까봐 초조해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래도 판관 어르신의 몸을 가르는 건 다른 분들이 허락해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만."

"이걸 쓰도록 해라."

제갈우는 은 송곳을 꺼내 내밀었다. 배를 가르지 않고 구멍 하나만으로 독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푹!

연우혁은 신중하게 은 송곳을 찔러넣었다. 오작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깨끗합니다!"

제갈우는 깨끗한 은 송곳 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확실히 다 확인한 것 같았다.

"타살은 아닌 모양이군."

'살았다.'

연우혁은 현청벽사신공의 구결을 암기하던 걸 멈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허공섭물을 응용해서 은 송곳에 뱃속의 내용물이 묻지 않도록 감쌌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슬아슬한 짓이었다.

"너희들은 나가있어라."

"?"

연우혁은 제갈우가 갑자기 오작들을 내보내자 당황했다.

'설마 들켰나?'

"너는 내가 왜 저 놈들을 내보냈는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부족하군!"

제갈우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연우혁은 자기가 무슨 실수를 했나 되짚어보느라 깊이 골몰했다.

벌컥!

천기수사는 안채의 벽장을 열더니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영약 같아 보이는 것들을 휙휙 꺼내더니 연우혁에게 던졌다.

"빨리 챙겨라."

"..."

연우혁은 오늘 겪은 일 중 가장 경악했다.

살막 실종 사건 (1)

"어, 어르신. 이건... 이건 도둑질 아닙니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연우혁이 뒤늦게 외쳤다.

그러자 제갈우는 무림에서 세번째로 한심한 잡놈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규 녀석이 네 칭찬을 많이 해서 높게 평가했는데, 아직 확실히 어리숙하구나!"

'아니. 제갈규였나?'

연우혁은 자기 칭찬을 누가 했는지 깨닫고 놀랐다.

팽주성한테 입 가볍다고 욕한 게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제갈 형께서 제 칭찬을 하셨습니까?"

"그래. 산채에서 보여준 재주는 제법 괜찮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냉수사를 속일 순 없지. 하지만 말했듯이, 아직 어리숙하다! 무림에서는 잠깐의 빈틈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마라."

"어르신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연우혁은 공손히 말했다.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해서 오히려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판관하고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

설마 판관하고 생전에 '하하! 천기수사 님, 제가 죽으면 제 안채를 샅샅이 뒤져서 다 가져가주십시오 껄껄'같은 약속이라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당당함이 설명되지가 않았다.

제갈우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아둬야 하겠지. 언젠가 무림에서 군사(軍師)로 명성을 날리게 될 테니. 이것도 인연이니 설명해주겠다."

"?"

연우혁은 '전 포두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갈우의 성질머리가 워낙 더러워보여서 감히 반문하지 못했다.

"무림에서 군사로 지혜를 빌려줄 때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단순히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라, 뒷일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림은 단순히 진상을 밝힌다고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다. 만약 살인사건에서 누가 누굴 죽였다고 면전에서 대놓고 말하면, 그 당사자는 검을 들고 칼부림을 벌일 수도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것까지 생각해서 일을 해결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제갈우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건 가장 유의해야 하는 게 아니지."

"잘 모르겠습니다."

"군사로서 가장 유의해야 하는 건 바로 일의 보상을 챙기는 거다!"

"..."

연우혁이 경악해하는 사이에도 제갈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무림인 놈들은 태반이 무식한 무부들이라 지혜의 가치를 모르지. 필요할 때는 굽신거리다가도,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삯을 깎으려고 염병이다."

천기수사의 목소리에는 진득한 원한이 묻어나왔다.

무림의 지낭으로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원한이었다.

"절대 먼저 답을 알려주지 마라. 알겠느냐! 반드시 보상을 먼저 손에 넣은 다음 답을 알려줘야 한다. 만약 상대가 약속을 어긴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보복해야 하고! 무림인 놈들은 조금만 빈틈을 주면 고작 머리 좀 굴린 것에 이렇게 비싸게 값을 내야 하냐고 지껄일 테니까!"

제갈우는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거기에 압도된 연우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으면 수색을 도와라. 네 재주를 보겠다."

"어, 어르신. 죄송합니다만 방금 말하신 것과 이게 무슨 연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네가 정말 냉수사를 속인 포두가 맞느냐?"

제갈우는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 한다는 게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연우혁도 어이가 없었다.

'일은 선금을 받아라'와 판관 안채 터는 게 뭔 상관이란 말인가?

"봐라! 내가 여기는 왜 왔느냐?"

"판관 어르신께서 서신을 보내서..."

"맞다. 판관이 부탁했지. 이게 하나다. 그런데 왔는데 판관이 죽었구나! 판관의 죽음에 관한 억울함을 누가 해결했느냐?"

"천기수사 어르신께서..."

"너와 내가 해결했지. 이게 둘이다. 마지막으로 판관 놈은 서신으로 거짓부렁을 지껄였다. 그러니 이게 셋이다."

"뭐가 하나고 둘이고 셋인 겁니까?"

"삯값 말이다, 삯값! 이 미련한 놈 같으니! 나를 불렀으니 한 번 빚을 졌고, 내 재주를 썼으니 두 번 빚을 졌다. 마지막으로 내 체면을 깎았으니 세 번 빚이다!"

"...?"

고민하던 연우혁은 뒤늦게 깨닫고 외쳤다.

"설마 지금 판관 어르신이 드려야 할 보상을 챙기시는 거였습니까!?"

"드디어 머리라는 걸 쓸 줄 알게 됐구나! 그래. 알면 됐다! 빨리 챙겨라!"

제갈우는 미간의 주름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게 본 무림의 후배가 헛소리만 해대서 영 답답했는데, 드디어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초청해서 왔고, 원통한 죽음을 풀어줬고, 체면을 깎아준 것도 참아줬으니 이제 마땅한 값을 받아갈 때였다.

"그... 친족들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보상을 받고 싶으면 남은 친족들한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먼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제갈우는 탄식했다. 이런 수준 낮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는지 잊어버린 거냐?"

"잘, 잘 모르겠습니다."

"무림인 놈들은 필요할 때는 굽신거리다가도,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삯을 깎으려고 염병이라고 했다! 판관의 친족 놈들이라고 다를 거 같으냐? 언제 그랬냐고 귀찮게 굴면서 일단 비싸 보이는 걸 빼돌리려고 하겠지. 한두번 겪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빨리 챙겨라!"

천기수사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반문했다가는 네놈에게 몫을 챙겨주지 않겠다'라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연우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재빨리 같이 뒤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판관 놈 재산 좀 턴다고 해서 나쁠 게 없었다.

그나마 뒷감당이 걱정이긴 한데, 어차피 제갈우가 주도해서 턴 거였으니 문제가 생겨도 제갈세가 책임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어르신.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패물이 아니라 영약만 챙기시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다. 영약은 패물만큼 값지다. 하지만 패물만큼 사람들이 기억하진 않는다. 패물이 사라지면 판관의 친족들이 성가시게 굴겠지만, 영약이 사라지면 눈치도 채지 못할 거다. 하물며 무림인들도 아닌 만큼... 너도 앞으로 보상을 챙길 때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진짜 제갈세가 출신이 맞긴 한가?'

연우혁이 그런 흉흉한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르고 천기수사는 하수오를 들고 감정했다. 오십년 정도는 된, 꽤 묵직한 놈이었다.

"받아라. 이건 네가 가져가라."

"!"

영안으로 하수오의 가치를 파악한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강호를 떠도는 전설에서나 만년하수오 같은 게 나오지, 실제로는 오십년 정도만 된 하수오만 해도 매우 값어치가 뛰어난 영약이었다.

무림인이 아니더라도 잘 달여서 먹으면 근골이 튼튼해지고 양기가 증진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판관의 안채에 있는 것도 그런 목적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 일류의 경지를 노리고 있는 연우혁에게는 금보다도 값진 물건이었다.

"저한테 주셔도 됩니까?"

"일을 했으면 보상이 있어야지. 내게는 별 쓸모없는 물건이다."

제갈우는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경지가 높아지면 내공의 양을 무작정 늘리는 것보다는 이해와 깨달음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

"세가의 다른 무인들이 탐낼 수도 있잖습니까."

"제갈세가 일을 왜 네가 신경 쓰냐? 챙기기나 해라. 그 놈들은 자기가 알아서 벌어먹겠지!"

연우혁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영약을 챙겼다.

안채에는 방금 챙긴 하수오만큼은 아니어도 괜찮은 영약들이 꽤 많았다. 판관이 장생과 보양에 관심이 많았다는 게 느껴졌다.

바싹 말린 뱀부터 시작해서 각종 삼은 물론이고 독버섯까지...

'독버섯은 왜 먹으려고 한 거야?'

아무리 자양강장에 도움이 된다지만 독버섯까지 구비해놓다니.

연우혁은 어이없어하며 영안으로 주변을 훑었다. 사실, 영안은 이런 식으로 도둑질할 때 유용한 능력이었다.

아래에 숨긴 영약까지 빈틈없이 꺼내자 제갈우가 빤히 쳐다보았다.

'아차. 너무 잘했나?'

연우혁은 속으로 움찔했다.

영안으로 찾았다지만 제갈우 입장에서는 이상한 오해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찾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어디 가서 네 몫을 못 주워먹진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

오작들이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고, 저택의 사람들이 장례를 준비하고, 초대 받은 무림인들이 돌아갈 채비를 마치는 사이 연우혁은 안가에서 눈을 감고 고요히 집중했다.

오늘 일류의 벽을 뚫을 생각이었다.

'부족한 내공은 저택에서 챙겨 온 영약으로 뚫는다.'

지금 판관의 장례를 준비하느라 한경은 한창 분주했다. 파직당했다지만 한 때 관직에 있었고 꽤 권세가 있었던 만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혁 같은 포두들은 오히려 이럴 때 한가했다. 괜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포쾌들이 순찰만 잘 돌면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미뤄뒀던 벽을 깰 적기리라.

으적!

입 속에 구겨 넣은 영약들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강한 기운으로 변했다. 연우혁은 쓴맛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의 내공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기경팔맥을 따라 낯선 내공들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내공의 흐름을 정확히 관측했다. 실수하면 내공이 날아가는 건 물론이고 내상까지 입을 수 있었다.

회음혈부터 백회혈까지. 내공이 천천히 그 크기를 키워가며 움직였다. 심법으로 전신 세맥에 축기된 내공부터 새로 영약으로 흡수한 내공까지 모여서 단전으로 엉켜들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익혔던 무공 구결들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위국권법부터 시작해서 백사편법, 탈혼비도, 쌍사보법과 사심불구경공까지.

'할 수 있을 거 같다!'

영안으로 자신이 익힌 무공을 완벽히 이해한 연우혁이었기에 오히려 결함을 더 잘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쳐줄 내공과 외공이 부족하면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연우혁의 경우 특히 초식과 초식 사이에 그 단절이 심했다. 내공이 받쳐주면서 초식을 이어주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연우혁은 자신이 익힌 무공의 초식들을 막힘없이 풀어나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우혁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위국권법을 펼쳤다. 허공에 어지러운 권영(拳影)이 잔상처럼 남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손발이 움직이는 쾌감은 무림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성취감이었다. 연우혁은 무아지경에 빠져 권법을 이어나갔다.

"흠흠."

"!"

연우혁은 고개를 돌렸다.

역용술을 펼친 적조와 부하가 멋쩍은 표정으로 앞에 서있었다.

"이봐. 무공의 깨달음을 얻었나?"

"예."

"축하한다. 꽤 상승의 권법 같은데. 무슨 권법이지?"

"위국권법입니다."

"아니, 그건 금의위의 권법 아닌가?"

연우혁이 되레 놀랐다. 상대가 이름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금의위와 상대해 본 적 있으니 알지. 금의위의 권법을 익힌 게 신기한데."

"인연이 있었습니다."

"정말 잘 보였나보군."

적조는 금의위의 무인들이 외부인에게 무공을 쉽게 전수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하물며 포두 같은 말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걸 감안하고도 전수받았다면 정말 대단한 재능이었다. 흔히 이 포두의 지혜 때문에 잊기 쉬웠지만, 사실 포두의 무공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명문정파 출신도, 무림인도 아닌 사람이 이 정도 경지를 이루는 건 극히 드문 일인 것이다.

'이류 말입이나 이류에서 일류 사이 같은데, 설마 일류의 벽을 깼나?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단순히 재능을 넘어서 내공을 쌓을 시간이 필요했다. 영약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일개 포두가 그런 걸 구하기는 힘들었다.

"들어오십시오. 판관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는데..."

"아. 덕분에. 정말 신통하더군."

"?"

연우혁은 적조의 말에 의아해했다.

"뭐가 말입니까?"

"무림인들의 시선을 끌었잖아? 덕분에 나도, 부하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제가 그랬습니까?"

"??"

이번에는 적조와 적조의 부하가 황당해 할 차례였다. 적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옥벽? 옥벽이었나? 그걸 누가 훔쳐갔고 어떻게 훔쳐갔는지 설명하면서 시선을 끌었지 않나."

"아니, 그게 들어갈 정도로 시선을 끌었습니까??"

"저택에 있던 무림인이란 무림인 놈들은 다 안뜰에 모여서 듣고 있던데?"

"그래도 보초 서는 자들은 있지 않았습니까?"

"보초 서는 놈들도 안뜰로 가서 네 말을 듣고 있던데."

"..."

연우혁은 갑자기 저런 무림인들을 믿고 호위를 맡긴 판관이 아주 조금 불쌍해졌다.

살막 실종 사건 (2)

"...하여간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그보다 천기수사가 왔는데, 별 일 없었나?"

적조는 제갈우의 별호를 읊을 때 적개심과 두려움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별 일 없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포두, 너는 포두라서 천기수사 그 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거야."

적조의 말에 부하는 긴장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살수들이 어느 문파를 두려워하느냐 이야기가 나오면 여러 갑론을박이 나왔지만, 적조가 생각하기에 제일 두려운 문파는 제갈세가였다.

무림에서 가장 두려운 자는 강한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였던 것이다.

그 중 특히 천기수사 제갈우는 살막의 의뢰를 몇 번이고 망쳤는지 몰랐다. 저번에 부자 놈을 하나 죽였는데, 자상(刺傷)의 각도와 깊이만 보고 살수가 고용됐다는 걸 알아차리는 모습에 오금이 굳는 기분이었다.

"무서운 사람이긴 했습니다."

연우혁은 일 끝내자마자 바로 안채부터 털어댔던 천기수사의 모습에 깊이 공감했다. 적조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을 거야. 용케 속여 넘겼다."

"천기수사께서 그렇게 명성이 높으신데, 용케 살막에서 원한을 가지지 않는군요?"

"원한? 원한이야 강호 천지에 다 뻗었지만, 원한 있다고 다 갚을 수는 없는 법이야."

살막이라고 제갈세가나 천기수사에게 원한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복수하겠다고 천기수사를 공격하는 순간 피의 보복이 돌아올 테니 참을 뿐.

살막이 아무리 악명이 높아도 제갈세가나 오대세가의 공격을 받아낼 만큼 강하진 못했다.

무림에서 원한이란 힘이 없다면 잊어버리는 게 차라리 속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두 네가 당문이나 팽가와 친하게 지내는 건 현명한 선택이다. 네게 복수하려는 놈도 한 번은 고민할 테니까."

"!"

살수의 말에 연우혁은 전율했다.

확실히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놓치고 있었다. 연우혁이 사건을 해결할수록 원한도 같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군.'

이번 판관의 일은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운이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상단전을 걱정하면서 수련하다가 등에 칼 맞고 죽으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저는 당문하고는 그리 친하지 않습니다만."

"그래?"

적조는 의아해했다. 당문 무사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좀 염탐해봤는데 포두의 말과는 달랐던 것이다.

독혼수처럼 괴팍한 당문의 고수가 아끼는 외부인은 흔치 않았다. 안 그래도 폐쇄적인 당문 아닌가.

'저 녀석 말이 맞겠지.'

적조는 더 묻지 않고 넘겼다. 어차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 포두. 우린 약속을 지켰다. 포두도 약속을 지켜줬으면 좋겠군."

"그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연우혁의 질문에 적조의 부하는 매섭게 노려보았다.

살수로서 저런 말은 언제나 좋지 못한 징조였다. 원래 약속과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는 암시였으니까.

그러나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을 어기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 말입니다. 저는 두 분을 도우고 싶은 겁니다."

"돕고 싶다?"

적조는 포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위치만 말해주면 될 텐데? 이봐, 포두. 말했잖아. 장로의 손녀를..."

"예. 압니다. 장로의 손녀를 찾고 계시다고. 그런데 적 대협. 혹시 손녀를 암살하러 가시는 겁니까?"

"뭐?"

뜻밖의 말에 역용술이 풀리더니 머리카락이 붉어졌다. 적조가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방금 그게 무슨 뜻으로 한 소리냐?"

"대답부터 해주십시오."

연우혁은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무공의 경지가 오른 것도 오른 것이었지만, 무림에서 워낙 괴팍한 인물들을 많이 만난 탓에 이제 흔들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아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자. 보십시오. 지금 찾는 손녀 분의 자당께서는 장로님과 사이가 틀어지시고 도망쳐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손녀 분에게 가서 살막에서 나왔다, 모시러 왔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어... 놀라더라도 혈연인데 감격하지 않을까?"

적조의 부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연우혁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답했다.

"놀라긴 할 겁니다. 감격은 저도 모르겠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좋게 나온 분이 아닌데, 여러분께서 너무 대뜸 찾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됩니다. 만약 자당께서 살막의 살수들이 언젠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함정이라도 파놨다면?"

"...!"

연우혁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은 저택에서 십수명이 넘게 죽은 사건이었고, 저택의 사람들과 살수가 충돌해서 피바람이 불었었다.

그럼 최소한 살수들이 찾아갔을 때 환영은 받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저택 사람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렸거나, 오해가 있었거나...

"음!"

적조는 침음성을 흘렸다. 생각도 못했는데 확실히 포두의 말이 아픈 곳을 찔렀다.

"아씨께서 싫어하실 지도 모르겠군."

'그걸 말해줘야 아나?'

연우혁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살수들이 이해했다면 다행이었다.

"그럼 이제 알려드리겠..."

"연 포두.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봐라."

"?"

적조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우혁은 멈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일을 맡긴 장로께서는 사실 내게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이다."

'아하.'

연우혁은 적조 같은 살막의 대주이자 고수가 왜 이런 사람 찾는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긴 자기 스승의 가족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설 수도 있었다.

"장로께서 손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신 겁니까?"

"비슷하다. 찾아달라고 했지만 만나게 해달라고 하진 않았어. 애초에 장로께서는 돌아가셨고."

"저런. 지병이 있으셨습니까?"

"내가 죽였다. 다툼이 좀 있어서."

"..."

연우혁은 경악했지만 두 살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받은 은혜가 있어서 죽은 사람 소원이나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손녀를 찾고 싶다고 말만 했지 또 찾은 뒤의 이야기를 안 했단 말이야."

"그럼 찾은 다음 어떻게 하시려고 했습니까?"

"살막으로 가서 묘지에 술이나 좀 붓고, 장로 재산도 좀 주고 하려고 했지. 그런데 듣고 보니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좀 들어서."

"..."

"어떻게 하면 좋겠나?"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연우혁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두 살수의 무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인내했다.

"저택이 아니라 밖에서 만나시죠. 만난 다음 물어보시면 되잖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우혁이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장로의 손녀와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외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택에서 호화롭게 사는데 그걸 다 버리고 살막의 안가로 떠나고 싶은지 대답해줄 것 아닌가.

"좋은 생각이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음. 연 포두. 부탁 하나만 더 하고 싶은데."

"어떤 부탁인지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이야기하는데 같이 좀 가주..."

연우혁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적조와 부하의 말이 다급해졌다.

"내가 관리 가문의 어린 여식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봤겠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절 보십시오. 제가 명문가의 여식과 어울릴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냥 살수들하고 어울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연우혁으로서 관리 가문의 여식과 접촉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연우혁이 가문이 있고 미래가 창창한 정관이면 모를까, 가문도 없고 재주 뛰어난 포두에 불과했다. 지금 막 명성을 쌓았을 뿐인데 한경의 명문가 여식을 꼬드겼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괘씸죄에 걸릴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출세하려고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있는데 뭘 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살수들도 만만치 않게 끈질겼다. 적조는 계속 간청하다가 결국 마지막 수단을 꺼내들었다.

"나중에, 자네가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죽여주지!"

"...아니. 진짜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정말 진지한 일이라 그렇다. 만약 내 서툰 말 때문에 아씨가 장로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떳떳하지 못할 거야."

적조의 진지한 말에 연우혁의 마음도 좀 누그러졌다.

'아니. 잠깐. 이 사람이 죽였잖아.'

연우혁은 바로 감상적으로 되려는 기분을 다잡았다. 속을 뻔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 번 계획을 짜봅시다."

"포두. 자네는 내 장자방이다!"

'이렇게 무의미한 칭찬도 드물겠군.'

고작 여식 만나서 무슨 이야기할지 정하는데 이런 칭찬이라니. 연우혁은 속으로 질색했다.

***

청군 정씨는 한경의 역사 깊은 명문가 중 하나였다. 때로는 드높은 권세나 풍족한 재물 없이도 그 가문이 쌓은 역사만으로 존중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청군 정씨가 바로 그랬다.

새로 한경에 부임하는 관리부터 시작해서, 자기 가문의 격을 올리고 싶어 하는 야심 찬 가주, 오래되고 넓은 인맥의 힘을 빌리려는 전장주나 상단주...

살문 장로의 딸이 결혼한 사람은 바로 이 가문 출신의 젊은 관료였다. 비록 둘 다 병약해서 일찍 죽었지만, 둘이 낳은 딸 정여혜는 아직 가문에 남아있었다.

'젠장. 생각보다 접촉하기 어려운데.'

연우혁은 이게 판관의 죽음을 조작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강호의 여협도 아닌 규중처녀를 일개 포두가 만날 방법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밖에 나갈 때도 이제 여러 사람들을 다 데리고 나가는데...

"어떻게 안 되겠나?"

"조용히 좀 해보십시오."

연우혁은 깊게 생각에 잠겼다. 다른 포쾌들은 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연우혁이 저렇게 고민하나 두려워했다.

"우혁 아우 있나?"

"!"

안가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팽주성의 모습에 연우혁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적조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포쾌처럼 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팽가로 돌아간 줄 알았던 사람이 나타나자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아. 별 일은 아니고. 언제나 공무로 고생하는 우혁 아우가 걱정되어서 왔네. 가끔씩 쉬어주어야 어려운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팽주성은 최근 한경 주변의 명산지를 둘러본 다음 한경의 젊은이들과 유산회(遊山會)를 조직한 모양이었다.

말이 유산회지 한마디로 산으로 놀러가는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변 호족이나 명문가 출신 젊은이들끼리 같이 놀러가서 시 짓고 경치 구경하는...

원래라면 당연히 연우혁은 낄 생각이 없었다. 저런 자리에 포두가 가봤자 좋을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팽주성이야 자기 의동생이라고 띄워주겠지만 굳이 눈총만 받을 자리를 무엇하러 가겠는가.

"잠깐. 형님. 혹시 정 소저도 있습니까? 청군 정씨의..."

"!"

팽주성은 깜짝 놀랐다.

"우혁 아우. 설마..."

"형님. 오해십니다. 제가 그 소저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정 거사 어르신과 친분을 쌓을 생각인가?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군. 그 어르신께서 우혁 아우를 도와주신다면 한경에서 정말 든든할 테니까!"

"...예. 형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십니까?"

연우혁은 팽주성을 무시한 자신을 반성했다.

"정 소저도 있네. 걱정 말게. 내가 도와주겠네. 정 소저가 아우를 칭찬할 수 있도록."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잠깐 이야기 할 시간만 있으면..."

"사람 참! 나만 믿게."

팽주성의 반응에 연우혁은 살짝 불안해졌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

"자네가 연 포두라고? 생각보다 훨씬 젊군."

"포두 놈이 여기는 왜 와?"

"왜, 질투라도 하는 건가? 아버지한테 들었네. 자네가 아버지의 일을 도와줬다고."

"혼자서 철갈방을 토벌했다는 게 정말인가?"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시비를 거는 자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요즘 소문 덕분인지 연우혁을 보고도 환영했다. 부하 포쾌로 위장한 적조는 초조하게 속삭였다.

"아가씨는 어디 있지?"

"좀 기다려보십시오."

"연 포두, 연 포두! 혹시 이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맞출 수 있겠나?"

"향낭이군요."

"대, 대단하군! 대단해! 다들 이거 봤나?!"

생각보다 잘 녹아드는 연우혁의 모습에 팽주성은 매우 흐뭇해했다.

가문이 없거나 포두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저렇게 재능이 있는 아우라면 당연히 친분을 쌓을 자격이 있었다.

한바탕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연우혁이 팽주성에게 돌아왔다. 생각보다 심각한 표정에 팽주성이 놀리듯이 말했다.

"우혁 아우. 왜 그러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팽 형님. 정 소저가 실종되신 것 같습니다. 저기 저 놈을 붙잡아서 심문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

살막 실종 사건 (3)

팽주성은 당황했다.

물론 우혁 아우가 앉은 자리에서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범인을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산에 놀러 와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이야.

이쯤이면 연우혁이 액운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농담처럼 떠오를 정도였다.

"그게 정말인가?"

"예."

연우혁은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 이 사건 자체는 초반에 잘 해결하면 그리 복잡하게 꼬일 사건이 아니었다. 당장 정 소저를 데리고 간 놈도 사악하고 치밀한 계략으로 데리고 간 게 아니었다.

-정 소저의 하인들을 매수해서 다른 곳으로 헤매게 한 다음, 내가 찾아서 데리고 오면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유치하고 철없는 발상이었지만 문제는 강호의 드넓은 산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자칫 정말로 실종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실종이 되면 여기서부터는 찾기가 매우 복잡해졌다. 그렇게 되면 연우혁도 당장 달려가서 흔적 확인하고 세 갈래길 중 어디로 갔는지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기껏 쉬러 나왔는데 숨도 쉬지 못하고 산을 뛰어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연우혁은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일념 하에 팽주성에게 말했다.

"물론 이유도 있습니다. 형님. 아까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맞혀보라고 했을 때 향낭이..."

팽주성은 듣지도 않고 연우혁이 지목한 사람을 붙잡으러 걸어갔다. 연우혁은 황당하다는 듯이 팽주성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혁리욱은 한경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문장으로 곧 급제할 거라는 기대를 받는 청년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유산회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칭찬의 말을 던졌지만 혁리욱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언제쯤 출발해야 하지?'

유산회에 정여혜가 온다는 말을 듣자 혁리욱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 소저와 가까워질 방법이 전무했다.

최근에 청군 정씨 가문에서 이리저리 혼사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자기 가문으로는 전혀 연락이 오지 않는 걸 보니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끝장이었다.

없는 돈을 긁어모아 정 소저의 하인들을 매수했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잘못 알려준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는 적당히 때를 봐서 '제가 찾아보러 가겠습니다'정도만 하면 됐다.

"이보게. 혁리 아우."

"!"

갑자기 덩치 큰 무림인이 말을 걸자 혁리욱은 긴장했다. 팽가 출신의 무림인, 팽주성이었다.

솔직히 혁리욱은 팽주성이 조금 불편했다. 사람이야 호탕하지만 아무래도 거친 무림인 아닌가. 유산회에 참가한 벗들 중에는 팽가의 권세 때문에 아첨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혁리욱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걷지. 저쪽으로 가게."

"예?"

혁리욱은 당황했다.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걷자는 건데 왜 그러나?"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좀 쉬어야겠..."

팽주성은 웃으면서 혁리욱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림인도 아니고 연약한 혁리욱에게 내공이 실린 지법은 비명이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팽주성은 그럴 줄 알고 아혈을 먼저 짚은 상태였다. 혁리욱이 '미쳤소?'하고 눈빛으로 말하자 팽주성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좋게 말할 때 따라오게. 한 번만 더 반항하면 대낮에 개처럼 두들겨 맞는 수가 있네."

"..."

뒤에서 따라오던 연우혁이 오히려 더 기겁했다. 평소 느긋하던 인상과 전혀 다른 모습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오대세가 출신인데 저 정도 강단도 없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보다는...

'아니, 이 사람 이유도 안 들었는데 이래도 되나?'

아무리 연우혁을 믿는다지만 이러다가 잘못 안 거면 어쩌려고...

"이 정도면 됐겠군. 자. 점혈을 풀 텐데 소리 지르지 말게. 멀리도 왔지만 소리 지르면 자네만 고통스러울 테니까."

혁리욱은 아혈이 풀리자 씨근덕대며 팽주성을 노려보았다. 팽주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하게 말했다.

"정 소저를 어디로 안내한 건가? 빨리 말하게."

"!?"

혁리욱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을 눈앞의 무림인과 포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소..."

팽주성은 다시 점혈한 다음 혁리욱을 한 대 팼다. 뼈나 장기를 다치지 않게 고통만 주는 수법에, 연우혁은 팽주성이 한두번 해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빨리!"

"컥... 커헉. 백, 백련봉 쪽으로... 잘못, 잘못했습니다."

"따라오게. 우혁 아우. 자네도 같이 가지."

"아, 예."

연우혁은 아까보다 매우 공손해진 태도로 대답했다. 혁리욱이 눈물을 콸콸 쏟아내는 걸 보니 거절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난 백련봉 쪽으로 가서 한 번 돌고 오겠네! 괜찮은 경치를 발견하면 돌아올 테니, 먼저 마시고 있게나!"

"아니, 팽 형! 팽 형께서 가시면 우린 누구와 마십니까!"

"혁리욱 자네는 왜 같이 가나?"

"혁리 아우도 같이 가고 싶다는군. 하하!"

팽주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끝낸 뒤 연우혁과 혁리욱을 데리고 말을 몰았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이렇게 손속을 쓰셔도 되는 겁니까?"

"하하. 자기가 한 일이 있는데 입 닥치고 있지 않겠나?"

"만약 틀리기라도 했다면?"

"우혁 아우가 한 일이 틀릴 리가 있나. 이봐. 빨리 안내하게."

"이, 이쪽입니다..."

혁리욱은 고통과 수치, 굴욕으로 떨다가 일각 정도 지나자 정신이 돌아왔는지 변명을 꺼냈다.

"제가 악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네. 정 소저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 그런데 왜 이렇게 가혹하게...!"

"그건..."

연우혁은 자신이 대신 설명하려고 했다.

혁리욱이 괜히 팽주성한테 원한이라도 품으면 자기가 미안해졌던 것이다.

"지금 정 소저한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자네만 있는 줄 아나? 자네 때문에 여기 우혁 아우는 바쁜 공무도 내버려두고 왔는데 기회만 날리게 생겼어. 자네는 자네밖에 모르나?"

"아, 아니. 형님. 그게 아닙니다."

"아닌가?"

팽주성은 의아해했다.

그거 말고 화낼 이유가 딱히 없었던 것이다.

"여기 산이 비교적 낮고 야트막해보여도 그래도 산입니다. 단촐하게 나왔다가는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아니...!"

혁리욱은 포두의 말에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란 말인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목소리 낮추게. 내가 자네 동생인가?"

팽주성이 엄하게 노려보자 혁리욱은 자신도 모르게 포두 뒤로 숨었다. 연우혁은 팽주성을 말렸다.

"죄송합니다. 팽 형. 여기 혁리욱 소협도 나쁜 뜻은 없었을 겁니다."

"그, 그렇습니다. 여기서 길을 잃을 리가..."

"정 소저 데리고 간 것도 들켰으면서 자신은 어떻게 하나?"

"그... 그건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앞으로 우혁 아우 앞에서 쓸데없는 짓을 저지를 때는 한 번 더 고민하고 하게."

팽주성의 말에 혁리욱은 경악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경황이 없어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포두가 알아맞힌 것이다.

최근 한경에 명성을 떨칠 때만 해도 '포두가 무슨, 운 좋게 쉬운 사건 몇 개 잡았을 것이다'라고 비웃었었는데...!

"대체 어떻게?!"

연우혁은 대답해주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영안으로 본 저 멀리에서 가마를 잠깐 내려놓은 흔적이 보였던 것이다.

'젠장.'

정 소저가 여기 있었으면 쉽게 끝났지만 없는 순간부터 이제 가짜 흔적 진짜 흔적을 찾아가며 쫓아가야 했다. 연우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혁리욱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없, 없을 리가 없는데... 아직 안 온 거 아닙니까?"

"저기 잠깐 가마 내려놓은 흔적 있습니다. 북쪽으로 간 모양이군요."

현실을 부정하던 혁리욱은 연우혁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말도 안..."

타타탁!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연우혁과 팽주성은 고개를 돌렸다. 숨을 헐떡이며 땀에 젖은, 새로 들어 온 포쾌 적조였다.

적조는 연우혁을 노려보려다가 팽주성이 있는 걸 알아차리고 말했다.

"포... 포두님이 사라지셔서... 찾아왔습니다."

"저렇게 충성스러울 줄이야!"

팽주성은 감탄했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더니, 역시 연우혁 밑의 포쾌들은 충성심과 끈기도 범상치 않았다.

이렇게 쫓아올 줄이야!

"대... 대체 무슨 일로..."

"미안하다. 다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다급한 일이시길래..."

적조는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혹시라도 보는 눈이 있을까봐 내공을 쓰지 않고 뛰었기에 더 피곤했다.

"이 혁리 소협 때문에 정 소저가 이상한 곳으로 가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적조는 눈을 뒤집고 혁리욱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연우혁은 서둘러 말렸다. 일개 포쾌한테 목숨 위협을 받는다는 충격에 혁리욱은 더더욱 혼이 나갔다.

"우혁 동생. 저 포쾌는..."

'아차.'

"의분(義憤)이 뭔지 아는군그래. 그래! 마치 우혁 아우가 포쾌였을 때를 보는 것 같네."

"...감사합니다. 빨리 찾으러 가시죠."

"정, 정 소저를 찾아주십시오."

혁리욱도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애원했다.

"자네는 조용히 하고 있게. 자. 여기서 흔적이..."

사실 팽주성과 적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사라진 걸 몰랐거나 크게 늦었으면 모를까, 이렇게 흔적을 잡은 이상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팽주성은 세가에서 강호를 돌아다닐 때를 대비해서 추적술을 배웠고, 적조는 살수인 만큼 추적술에 뛰어났던 것이다.

"여기 흔적이 있군."

"여기 찾았습니다!"

"?"

"?"

팽주성과 적조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기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수풀이 치워져있지 않나. 사람이 움직여야 이쪽으로 갈 수 있네."

"여기 발자국이 있고 떨어진 철전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 건드린 흔적입니다."

혁리욱은 둘의 대립에 당황했다. 당당하게 나서놓고 왜 이런단 말인가?

"둘 중 뭐가 맞는 겁니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자네는 조용히 하라니까. 보게. 여기 나뭇가지가 그냥 부러질 리가..."

"나뭇가지는 짐승도 부술 수 있습니다. 발자국을 보셔야지요."

"그 발자국은 숫자가 너무 적지 않나? 다른 사람 아닌가?"

그 때 저 멀리서 연우혁이 말했다.

"흔적 찾았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

"..."

***

가끔 모든 우연과 불운이 일을 꼬이게 할 때가 있었다. 바로 정 소저가 사라진 일이 그랬다.

하인들이 길을 잘못 알고 들어간 것부터 시작해서 우왕좌왕하며 한 행동들이 모두 다 추적을 힘들게 만든 것이다.

'직접 몸으로 뛰니 더 짜증나는군.'

방금 흔적은 단단한 길 위로 나있는데다가 흙먼지가 날아들어서 겉으로 보면 찾기 쉽지 않았다. 머리로 알고 있었는데도 영안으로 간신히 잡아낼 정도였으니 얼마나 희미한 흔적인지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그 나뭇가지는 짐승이 건드린 겁니다."

"하, 하지만 치운 흔적이 있었는데?"

"짐승을 쫓던 사냥꾼입니다. 참고로 저쪽 발자국은 사냥꾼이 낸 겁니다."

"..."

"..."

두 무림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혁리욱은 슬슬 여기서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는지 감이 온 것 같았다.

"이보게, 연 포두. 제발 정 소저를 찾아주게! 뭐든지 해줄 테니..."

뻑!

팽주성은 혁리욱을 한 대 쳤다. 혁리욱이 축 늘어지자 팽주성은 멈칫했다.

"음. 혼절시킬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적조는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은 우혁 아우를 섬기는 포쾌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우혁 아우 밑에 여러 포쾌들이 있다지만,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포쾌로군!'

"이번에야말로 발자국을 찾았네!"

"여기 가마를 내려놓은 흔적이...!"

"둘 다 아닙니다. 발자국은 하인이 물을 뜨러 간 거고, 가마를 내려놓은 건 축이 부러진 겁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팽주성과 적조는 한없이 멍청해진 기분을 느끼며 연우혁의 뒤를 쫓았다. 둘은 서로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친해진 기분이었다.

살막 실종 사건 (4)

반 시진 정도 뛰어다니면서 연우혁은 가짜 흔적 열여덟 개를 잡아냈다. 그 사람 좋던 팽주성도 화를 낼 정도였다.

"이 하인들은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았으면 가만히 있기라도 할 것이지, 대체 왜 이렇게 돌아다닌단 말인가!"

물론 몇 번이고 잘못된 길로 빠지다 보니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연우혁이 보기에는 방금 한 말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우혁 아우! 이건 정말 확실하네. 정 소저의 발자국이야!

-물을 마시려고 잠깐 그쪽으로 갔다가 벌레에 놀란 겁니다.

-...

사람이 민망함을 감출 때에도 화를 내기 마련. 연우혁은 팽주성의 마음을 이해했다.

"원래 산을 돌아다녀 본 경험이 없는 자들은 길을 잃을 때 더 우왕좌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나 원 참!"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흔적이 점점 가까이 나있는 걸 보니..."

연우혁은 말하다가 흔적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젠장. 여기까지 오기 전에 찾았어야 했는데.'

지금 앞에 나있는 세 개의 흔적, 발자국과 찢어진 천과 흩어진 신발은 연우혁의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 흔적이었다. 이제 이 다음은 무조건 사라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흔적이 악랄하기 그지없는 단서라는 점이었다.

무려 매번 해결할 때마다 진짜 정답이 바뀌는 단서!

제대로 된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각 단서에 남아있는 아주 미세한 흔적을 찾고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겠군!'

"형님. 형님께서는 왼쪽으로 가주십시오. 적 포쾌. 적 포쾌는 오른쪽으로! 저는 가운데로 가겠습니다."

"알겠네!"

연우혁을 따라온 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움직였다. 이유야 모르겠지만 연우혁이 저렇게 나눠져서 찾으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땅을 박차고 경공을 펼치며, 연우혁은 몸을 반 바퀴 돌려서 뒤를 쳐다보았다. 기괴한 움직임의 경공이었지만 이렇게 움직여야 더 빠른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영안이 있어서 뒤를 보지 못하는 문제점은 별 방해가 되지 않았다. 연우혁은 쭉쭉 거리를 벌려가며 영안의 영역을 넓혀갔다.

'찾았다!'

저 멀리서 명문가의 여식으로 보이는 사람이 넘어져 있었다. 앞에 있는 건 놀랍게도 호랑이였다. 언제라도 덤벼들 것처럼 사납게 으르렁대는 호랑이의 모습에 연우혁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래서 싫었는데!'

연우혁이 이번 추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던 것도 이래서였다.

늦어지면 맹수의 습격까지 일어나는 만큼 다른 사건과 달리 조금의 한숨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려가던 연우혁의 손끝에 비도가 잡혔다. 탈혼비도가 다시 한 번 날아갈 준비를 끝내고 빛을 발했다.

그 순간 정 소저의 소매 속에서 자모환(子母丸)이 튀어나오더니 호랑이의 미간을 정확하게 맞췄다. 방심하고 있다가 급소를 맞은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

놀라워하면서도 연우혁의 손끝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고작 일류 초입이었지만 이류였을 때와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반 갑자를 넘긴 내공이 온몸을 격렬하게 타고 돌며 한 가지 목적만을 향해 움직였다.

오직 극쾌(極快)만을 위한 일초식의 무공!

'푹'소리와 함께 멈춰 있던 호랑이가 쓰러졌다. 정여혜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연우혁은 아차 싶었다.

'방금 초식은 설마 살막의 무공인가?'

생각해보니 정여혜의 어머니는 살막 장로의 딸이었으니, 무공을 전수받았어도 놀라울 게 없었다.

경지를 보니 삼류에 불과했지만 살수의 무공이란 건 원래 강함보다 허를 찌르기에 무서운 법. 연우혁은 경계심을 올렸다.

"저는 적..."

"혹시 연 포두십니까?"

'이런.'

연우혁은 명성이란 게 생각보다 귀찮다는 걸 깨달았다.

적조의 이름을 대며 넘어가려 했는데, 상대가 복장만 보고 바로 연우혁인 걸 깨달은 것이다.

"맞습니다. 정 소저십니까?"

"네. 도, 도와주십시오. 하인들이 갑자기 도망쳐서..."

정여혜는 겁먹은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그러나 연우혁은 방금 초식을 본 만큼 절대 방심하지 않고 영안을 열었다. 살문의 암기를 물려받은 사람이 호랑이 때문에 저럴 리 없었다.

'...아니. 젠장.'

놀랍게도 정여혜는 연우혁을 공격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연우혁은 괜히 팽주성이나 적조가 오기 전에 사고가 터지는 것보다는 미리 선수를 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정 소저. 저를 공격하셔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자당께서 떠나온 곳의 무림인들이 정 소저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

정여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정여혜는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하더니 말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연 포두. 어머니께서 떠나온 곳이라니요."

"여기서 이름을 말해도 되겠습니까? 사람은 없지만 혹시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정여혜의 표정이 돌변했다. 사람 하나 정도는 쉽게 죽일 법한 싸늘한 모습에 연우혁은 살문 장로의 핏줄이 끊기지는 않았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뭘 원하는 거지, 포두?"

"정 소저.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도 그저 협박받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의 말에 정여혜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서 포두까지 협박꾼이라면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그쪽에서 뭘 원하지? 어머니의 무공?"

"아닙니다. 그쪽은 그저 정 소저를 도와드리고 싶어합니다."

"뭐라고?"

연우혁은 정여혜의 외조부가 죽었고, 살수들이 유언을 지키려고 한경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짧게 설명했다. 그걸 들은 정여혜는 기막혀했다.

"다른 목적 없이 살수들이 그냥 유언을 지키려고 찾아왔다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확실히 이상하게 들리긴 한다.'

직접 살수들한테 들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정여혜 입장에서 살막의 살수들이 찾아와 대뜸 도와주겠다고 하면 '이 살수들이 뭔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수들이 갑자기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게 훨씬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지.'

연우혁은 정여혜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정 소저. 저는 그저 협박받아서 연락만 전할 뿐입니다. 정 소저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포두가 별다른 설득이나 회유 없이 담담하게 물러서려고 하자 정여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살수들이 아무 의도 없이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아니. 만나보긴 하겠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기는 해야지. 저택에라도 찾아오면 문제가 커질 테니까."

"살수들도 혹여나 폐가 될까봐 저택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우혁은 내친 김에 적조를 좀 더 칭찬해줬다. 정여혜는 그 말에 조금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 정도 생각을 할 머리는 있는 모양이네. 애초에 조부님께서는 살수들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고수를 식객으로 거두셨어. 별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는 죽었을 거야."

'그런 거였군.'

연우혁은 원래 살수들이 찾아갔을 때 왜 난리가 났는지를 깨달았다.

정여혜의 할아버지는 살막과의 인연을 알고 있는 만큼 철저히 대비한 것이다.

"연 포두! 여기 하인 놈들을 붙잡았네."

"저는 말을 붙잡아왔습니다."

다른 쪽으로 갔던 팽주성과 적조가 돌아왔다. 그 사이 부쩍 친해진 둘은 서로를 칭찬했다.

"적 포쾌의 재주는 참 뛰어나군."

"팽 대협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둘이 저렇게 친해도 되나?'

연우혁이 의아해하는 사이 정여혜가 시선을 보냈다. 기회를 만들란 소리였다.

"여기 정 소저께서 마차 없이 뛰다가 다치신 모양입니다. 혹시 말을 탈 수 있으십니까?"

"느리게라면..."

"적 포쾌. 자네가 말을 이끌게."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반색하며 감사해했다. 팽주성은 엄한 눈으로 붙잡아 온 하인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때문에 정 소저는 오늘 죽을 뻔했네. 여기 우혁 아우가 서둘러 쫓아오지 않았다면 말로 하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지.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만 살려고 도망치다니..."

"저, 팽 대협. 저는 괜찮습니다. 이 일은 넘어가주셨으면 합니다."

정여혜는 가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팽주성은 당혹스러워하며 하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이 자들은..."

"부탁드립니다. 저 때문에 이들이 벌 받는 걸 본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아씨!"

하인들은 정여혜의 말에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감격했다. 심지어 팽주성까지 감격했다.

'아니. 저건...'

연우혁은 왜 이렇게 저 행동들이 낯익나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건 연우혁이 하는 짓과 비슷한 짓이었다.

적조는 연우혁 옆에서 속삭였다.

"장로는 저승에서도 만족할 거다. 손녀가 저렇게 선량하다니."

"그 생각은 아직 하지 마시고, 조금 나중에 대화하고 마저 판단하시죠."

"?"

* * *

"정, 정말 아무런 뜻도 없다."

"살막의 살수들이 그냥 아무 뜻도 없이 왔다는 걸 믿으라고?"

팽주성을 먼저 보내고 대화할 틈을 만든 정여혜는 싸늘하게 캐물었다. 적조는 어리둥절해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연 포두. 이건..."

"저 보지 마십시오. 제 일 아닙니다."

"아, 아니. 정말 도와주려고 온 건데..."

"그냥 도와줄 거 없으면 돌아가겠다고 하시죠?"

"어떻게 그러나?"

"상대가 싫다는데 어떡합니까?"

매정한 연우혁의 말에 적조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둘을 지켜보던 정여혜는 연우혁에게 말했다.

"연 포두는 살수들한테 협박 받은 것치고는 그렇게 겁을 먹은 것 같지 않은데, 이유가 뭐지?"

"두 분의 일을 돕고 정 거사와 안면을 튼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한경에 소문이 자자할 만하네."

정여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포두들과 달리 저 젊은 포두는 능력부터 시작해서 야심까지 남달랐다.

다른 포두들이라면 시키는 일도 허덕이면서 하고 있을 텐데, 혼자서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윗사람들한테 눈도장을 찍고 있지 않은가.

"좋아. 부탁할 게 있긴 해."

"!"

적조는 반색했다.

"뭐지? 뭘 부탁하고 싶은 거냐?"

"혼약을 맺고 싶은 상대가 있어."

"..."

생각도 못한 부탁에 적조는 경악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그거 말고는 부탁할 게 없는데 어떡하란 거야? 도와줄 수 없으면 돌아가던가."

"아, 아니. 그건..."

상대 살수가 맹세에 집착하는 걸 알아차린 정여혜는 기세가 등등했다.

연우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하품을 하며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예뻐하시지. 하지만 다른 친척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야."

정 거사는 엄격하고 고집 센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대소사를 마치 독불장군처럼 처리했다.

그런 정 거사에게 명문가가 아닌 살문 같은 정체불명의 무림 조직 출신 며느리를 데리고 온 아들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여혜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둘은 계속 눈치를 받아왔었다. 특히 정여혜의 숙부들이 보내는 견제가 심했다.

정여혜는 이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반드시 힘을 얻어서 보복할 생각이었다.

"나는 내 재주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렸지만, 쐐기를 박으려면 화룡점정할 무언가가 필요해."

"대체 누구길래?"

"바로 제갈세가지."

"...!"

적조는 경악했다.

하필이면 골라도 제갈세가란 말인가?

"제갈세가의 직계인 제갈규가 이 근처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혼약을 맺을 수 있게 도와줘."

"무리다. 무리! 차라리 네 숙부를 죽이겠다."

"숙부들이 갑자기 급사하면 누가 의심을 받겠어? 할아버지가 무슨 백치로 보여?"

"자연스럽게 죽이겠다."

"자연스럽게 죽이든 부자연스럽게 죽이든 그냥 죽는 것 자체로 의심을 살 거라고. 자꾸 그딴 방법을 지껄일 거면 돕는다는 말은 하지도 마."

"내가 무슨 재주로 제갈세가와 혼약을 맺게 해준단 말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갈세가는 살막과 가장 앙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살막이 일방적으로 앙숙이라고 여기는 것에 가까웠다.

평범한 놈이라면 납치나 할 수 있지 제갈규 같은 제갈세가의 무림인은 그런 짓도 할 수 없었다. 적조는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혼약이라고 말은 했지만 당연히 그것까지 바라진 않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만들어달란 거야."

"그건... 그래도 무리다."

"할 수 있는 게 대체 뭐야? 그럼 꺼지던가!"

"내가 오대세가의 무림인으로 보이냐? 난 살막의 대주다!"

울컥해서 항변한 적조는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연 포두. 대신 좀 말해주게. 제갈세가의 젊은 놈을 데리고 와달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음. 사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만."

"..."

살막 실종 사건 (5)

"...어떻게?"

"제갈세가와 친분이 있어서요?"

"아, 아니. 넌 대체 포두가 왜 이렇게 무림세가와 친분이 깊은 거냐?"

연우혁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소리였다.

지나가던 무림인 놈들이 선량한 포두를 괴롭혔으면 괴롭혔지 연우혁이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으니까.

"무림인 놈들이 자꾸 제 멱살 잡으면서 일 해결하라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나도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일 해결해달라고 하는 놈들이 많았지만 그 놈들과 다 친하진 않지... 혹시 천기수사도 친분 때문에 넘어간 거냐?"

"무슨 소리를. 제가 얼마나 공들여서 대답을 했는데..."

억울해하며 반론하던 연우혁은 순간 천기수사가 제갈규와의 친분으로 챙겨준 걸 보고 멈칫했다.

"음. 친분이 조금 있긴 했습니다만."

"역시!"

적조가 명포두가 아닌 인맥포두를 보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연우혁은 분노했다.

"아니, 친분으로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그래. 알겠다. 하여간 지금 제갈세가의 젊은 놈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거지?"

"지금 그걸 그냥 넘어가시면..."

둘이서만 속닥거리자 정여혜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건데?"

"지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제게 남는 게 하나도 없잖습니까."

"할아버지한테 소개시켜줄게. 이번에 목숨 구해줬다고 해주면 되잖아."

"나도 두 명 죽여주겠다. 어떠냐?"

"뭔..."

무슨 제갈규 만나는 걸 어시장 물고기 장사하듯 이야기하는 모습에 연우혁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손익을 따져보면 손해는 아니었다. 정여혜가 자기 이름을 걸고 소개해준다는데 제갈규 정도는 팔아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팔아넘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게만 해주는 건데...

"그보다 정 소저. 제갈 형은 연모하는 소저가 있습니다만."

"원래 연모하는 사람은 시간 지나면 바뀌기 마련이지."

패기 넘치는 정여혜의 말에 적조는 부정적인 기색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 연모한 정인을 그리 쉽게..."

"하긴 제갈 형은 쉽게 바뀔 거 같기도 합니다."

"?!"

적조는 제갈규란 놈이 대체 뭐하는 놈인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 * *

제갈규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몰았다.

팽주성의 초대를 귀찮다고 거절했다가 장로한테 한 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장로님. 그 회에 참가하는 놈들이라고는 온통 머저리...

-머저리 같은 소리 하고 있구나. 머저리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보기엔 네가 머저리다. 혼자 해결 못해서 남 지혜는 빌리는 놈이 무슨 거들먹이냐?

-...다녀오겠습니다.

제갈규가 보기에 한경에서 팽주성과 어울리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다 시서화가 뭔지도 모르는 얼간이였다.

밖에 나와서 술 취해서 머저리 같은 시만 읊어대는데 그걸 참아주는 게 얼마나 고통이겠는가.

하긴 재주가 뛰어난 놈들은 다 급제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갈 형님! 여깁니다, 여기!"

"어... 자네도 여기 참가했었나?"

낯익은 포두를 발견한 제갈규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 팽 형님께서 초대해주셨습니다."

"사실 나도 그랬네. 그보다 주변이 어수선한데 무슨 일이 있었나?"

"말도 마십시오."

연우혁은 손사래를 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혁리욱과의 관계를 위해서 혁리욱이 했던 일들을 빼고, 실수로 하인들이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맹수 나오는 곳까지 들어가서 완전히 아수라장이...

"팽 형님께서 없으셨다면 큰일났을 겁니다."

"팽 형께서 없으셨다면 정말 위험했겠군. 하여간 백면서생들은 이럴 때 쓸모가 없단 말이야."

제갈규는 연우혁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주성을 존중하는 만큼 이번에 팽주성이 활약했다는 사실에 기꺼워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소저가 팽 형한테 반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규중의 규수가 그러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일이 커질 텐데 말이야. 하하."

'농담도 잘 못하시는군.'

연우혁은 제갈규가 참 농담을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말했다.

"제갈 형님.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음? 자네 부탁이라면... 무슨 부탁이지? 혹시 은자가 필요한가?"

"아니. 그런 부탁을 왜 합니까?"

"보통 그런 부탁들을 자주 하던데."

제갈규는 머쓱한 표정으로 꺼내려던 전낭을 집어넣었다. 연우혁은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정 소저께서 크게 놀라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지어준 시가 별 효과가 없는 모양입니다. 제갈 형님께서 한 번 지어주십시오."

"...그, 연 아우.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가 술법 같은 게 아닌데."

제갈규는 당황했다.

맹수 보고 놀란 사람이 한시 듣는다고 마음이 평화로워질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은 끈질기게 제갈규를 붙잡고 부탁했다.

"평소 제갈 형님의 이름을 듣고 존경해왔다고 하셨습니다. 시와 상관없이 얼마나 감동하겠습니까."

"그, 그래? 하지만 시라는 게 놀랐을 때 억지로 들으면 괜히..."

제갈규는 머릿속으로 압운(押韻)을 떠올리며 걸어갔다. 연우혁이 기대하는 만큼 뭔가 보여주고 싶었지만, 원래 시라는 건 초조해하면 더 잘 안 나오기 마련.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적조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어정쩡하게 다가가는 제갈규를 보니 영 못 미더웠던 것이다.

'괜찮은 거 맞나, 이거?'

멀리서 떠듬떠듬 읊는 제갈규의 모습에 적조는 갑자기 정여혜가 마음을 바꿔 '이게 아니야!'라고 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러나 시가 끝나자 정여혜는 깊이 감동한 표정으로 제갈규를 쳐다보았다. 마침 그 때 얼굴을 가린 면사가 떨어지더니 정여혜의 얼굴을 드러냈다.

'아니. 너무 개수작이잖나!'

적조는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저런 식으로 미인계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제갈규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멈춰섰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한 남자처럼 보였다.

"..."

"보기 좋지 않소, 적 포쾌? 규 아우와 참 잘 어울리는군!"

"그, 그러게 말입니다."

유쾌하게 웃는 팽주성의 모습에, 적조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 * *

아침이 되자 연우혁은 숙소에서 눈을 떴다.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제법 괜찮았다.

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숙소는 포두나 포쾌들이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하는 곳이었지만 사실 포두가 머무르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 포두는 자기 집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연우혁은 집은 없었지만 포두로서 구역에 배정받은 안가가 있었다. 안가에서 잠을 청해도 됐지만 굳이 이 숙소에서 자는 이유는 이부자리를 새로 옮기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여기 숙소의 위치가 편해서였다.

"연 포두님 나오셨습니까!"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을 법한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한경의 길거리를 오고가고 있었다. 빨리 도착해야 하는 하급 관리부터 시작해서 남들보다 더 신선한 재료를 사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번루의 하인들, 오늘 아침 장사를 준비하려고 자리를 잡고 있는 좌판 상인들...

그리고 연우혁이 언제나 신세를 지는 건 이 중에서도 아침을 파는 노점상들이었다.

연우혁의 얼굴을 알아본 상인이 싱글벙글하며 손짓했다.

"평소 드시던 걸로 내오겠습니다."

"고맙소."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한경초반이라고 불리는, 달걀을 넣은 볶음밥과 만두, 미선(米線, 닭고기 국물 국수)이 나왔다. 생각보다 푸짐한 식사에 연우혁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건 너무 후하지 않나?"

"연 포두님께 이 정도도 못 해드리면 어디 한경 시전의 상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염려 말고 드십시오. 포두님 오시기 전에 적잖게 팔았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말하게."

연우혁은 평소보다 철전을 더 남기며 감사를 표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식사도 식사였지만 아마 평소 골칫거리였던 게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연우혁을 죽이려 하던 판관은 죽었고, 한경의 유력자 중 하나인 정 거사와 안면을 틀 기회를 잡았다.

귀찮게 굴던 살수들도 원하는 목적을 이루고 떠났으니 한경에 남은 골칫거리가 전부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틈틈이 사건을 해결하며 느긋하게 무공을 수련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눈치껏 한경의 관리들에게 인사도 좀 하고...

"연 포두님 나오셨습니까."

"...?!"

안가에 일찍 출근한 연우혁은 적조와 적조의 부하 둘을 보고 경악했다.

"아니, 왜 아직도 한경에 있습니까?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연우혁은 어이가 없었다.

정여혜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당연히 살수들이 떠났을 줄 알았던 것이다.

"실은 거기엔 사정이 있다."

"사정이 있으니 남았겠지요.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적조는 뺨을 긁적거리며 민망해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려니 영 머쓱한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나눠보니, 숙부란 놈들이 생각보다 견제를 하는 거 같더군."

"숙부 말입니까? 그거야 어느 가문이든..."

연우혁은 정여혜가 말한 숙부들을 떠올렸다.

어느 가문에서든 가주의 애정을 받는 존재는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여혜의 부모는 그 명문가 안에서도 튀는 존재 아닌가.

당연히 정여혜도 질시와 견제를 받았겠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였다. 만약 숙부들이 더 과격하게 행동했다면 정여혜의 말도 달라졌으리라.

연우혁이 보기에 거기 가문의 숙부들은 뒤에서 험담은 해도 그 이상 나설 배짱은 없는 이들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정말 위험했다면 다르게 말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 소저가 두 분을 조금 속인 것 같습니다만."

정여혜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연우혁은 상대방이 야심이 있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살막의 고수 두 명을 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약한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알지. 알아. 나도 그런 건 눈치챘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살수를 자기 보표처럼 쓸 수 있는데 누가 혹하지 않겠냐. 그런데... 핏줄이란 건 어쩔 수가 없더군."

"...적 대협께서 진짜 아버지십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 거냐!"

당황한 적조의 얼굴이 붉어졌다.

"장로, 그러니까 내 스승의 핏줄이란 걸 말하는 거지! 이런 미친 포두 놈아!"

"아. 죄송합니다."

적조는 씩씩대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방금 쉬던 한숨이 그냥 날아간 기분이었다.

"...내 스승, 장로라고 하겠다. 장로는 내 손으로 죽였다. 둘이 충돌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살막에는 여러 파벌이 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지만, 나도 물러설 순 없었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들은 적 있는 이야기였다.

적조는 고민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술 없나?"

"..."

"공짜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맨정신으로는 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그렇다."

"...저기 포쾌들이 숨겨놓은 술이 있습니다."

"제가 갖고 오겠습니다."

적조의 부하는 연우혁의 지시대로 걸어가 찬장을 뒤졌다. 놀랍게도 숨겨놓은 술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찾은 거지?'

탁주를 호리병째로 들이킨 적조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망설였다. 연우혁은 속으로 의심했다.

'뭐 얼마나 비겁한 짓을 했길래 이러는 거지?'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거의 동귀어진 하기 직전까지 갔다. 나는 출수한 초식을 거두지 않았지."

"어설프게 물러서면 더 크게 다치니까요."

"그래. 살수의 무공은 그게 더 심하고. 나는 죽일 기세로 초식을 뻗었다. 그런데 그 때..."

적조는 망망대해를 쳐다보는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장로가 초식을 거두더군. 다른 놈들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지만, 나는 장로가 남긴 유언을 들은 것 같았다. 살수의 유언은 평소 하던 말이 그 유언이지."

적조는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막의 대주로서 한창 활약할 때에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멍청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무림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장로의 손녀가 날 속인다고 어쩌겠나? 애초에 초식을 멈추지 못한 내 잘못이지."

연우혁은 대답 대신 일어서더니 창고로 걸어가 무언가 뒤적거렸다.

"뭐하나?"

포두는 오 포쾌가 숨겨놓은 값비싼 백주를 한 병 들고 왔다. 그리고는 적조의 빈 잔에 따라줬다.

"저는 멍청하다고 생각 안 합니다. 적 대협. 그저 당황했을 뿐입니다. 어느 누가 비웃겠습니까?"

"...비웃지 않아줘서 고맙군."

적조는 씩 웃더니 잔을 들이켰다. 아까보다 향과 맛이 깊은 건 꼭 술이 좋아져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자네 밑에서 포쾌로 일하는 게 자네한테는 조금 부담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진심이야."

"?"

연우혁은 멈칫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어, 계속 포쾌로 일하실 겁니까?"

"괜히 수상하게 하인으로 들어가서 접근하는 것보단 백 배 나으니까...? 음, 녹봉은 안 줘도 되네. 그리고 손녀 일이 끝나면 정말 돌아가겠네."

"..."

망설이던 연우혁은 에라 모르겠다 싶었다. 이미 잘했다고 술까지 따라줬는데 매몰차게 꺼지라고 하기는 또 뭐했던 것이다.

"포쾌 많아서 나쁠 포두가 어딨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자!"

적조와 적조의 부하, 그리고 연우혁은 술잔을 들이켰다. 살막의 살수가 사라지고 새 포쾌가 태어나는 주연(酒宴)이었다.

청강은 흐른다 (1)

그 후로 보름 정도는 별 일 없었다. 오 포쾌가 자신의 술을 어떤 잡놈이 훔쳐갔는지 찾아달라고 하소연한 것 말고는 대부분 사소한 일들이었다.

굳이 하나를 뽑자면 취옥산장에서 일어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밀실에서 벌어진 도난 사건이 조금 커다란 일이긴 했지만 연우혁은 가지도 않고 바로 범인을 찾았다. 산장에서 오 년 넘게 머무르고 있는 앉은뱅이 고수가 바로 범인이었다.

그렇게 보름쯤 지나고 나자 연우혁에게 관졸 한 명이 찾아왔다.

"연 포두님. 지부 어르신께서 포두님을 부르셨습니다."

"!"

연우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경의 관리들 중 지부 어른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지부, 그것도 한경의 지부쯤 되면 이 드넓은 도시의 수많은 대소사를 관리하고 관료들을 감독하며 멋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막말로 위의 조정에서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나 마찬가지인 위치.

당연히 관직에 관심이 많은 연우혁에게는 절대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상대였다. 지부 어른이 어떻게 장계를 올리느냐에 따라 연우혁이 제대로 된 관직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됐다.

'이렇게 빨리?'

연우혁도 언젠가 지부 어른이 연우혁을 한 번쯤 부르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었다.

물론 일개 포두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미친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연우혁이 세운 공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당장 지부 어른도 연우혁이 해결한 걸 듣고 흡족해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었다.

"왜 그러십니까?"

"지부 어르신께서 날 불렀다."

"이, 이런!"

연우혁이 왜 당황하나 궁금해하던 오 포쾌는 기겁해서 안색을 바꾸었다. 옆에 있던 적 포쾌가 물었다.

"지부 어르신이 부르시는 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혹시 벌을 주려고 부르시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거였으면 이렇게 부르지도 않았겠지. 지부 어르신께서 아랫사람을 부를 때 아랫사람으로서는 마땅한 도리를 다해야 한다."

오 포쾌의 말에 적 포쾌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포쾌의 일이란 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살수로서의 경력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게 뭡니까?"

"은자 말이다. 은자."

"..."

적조는 어이가 없어서 오 포쾌를 한 대 칠까 싶었다. 그러나 오 포쾌는 진지했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제대로 된 성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지부 어르신께서 화를 내실지도 모르는데..."

오 포쾌는 매우 진지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떤 놈인지 한 번 얼굴을 보고 싶어서도 물론 있겠지만, 그 아랫사람이 바치는 성의로 어떤 놈인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위아래도 없는 무례한 놈인지 아니면 기본적인 성질머리가 되는 놈인지?

"아니, 지부 어른이 재산만 놓고 보면 여기 연 포두님보다 훨씬 많을 텐데요? 근데도 은자를 내놓으라고 한단 말입니까?"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 재산을 어떻게 모았겠나? 한 놈 빼주고 두 놈 빼줬으면 지부 어른은 나보다도 거지였을 거다!"

"다들 진정해라."

오 포쾌가 펄펄 뛰자 연우혁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이제 와서 없는 은자를 만들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긁어모을 수 있는 건 전부 다 무공이나 영약에 쏟아 붓고 평소 축재도 하지 않았으니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지부 어르신께서도 아마 내가 포두로 일한지 그리 길지 않고 공사에 바빴다는 걸 이해해주실 거다."

"아니... 포두님. 모든 관리들이 다 포두님 같지는 않습니다."

오 포쾌는 걱정되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적 포쾌도 슬슬 분위기를 느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도우러 가겠습니다."

"...?"

밑도 끝도 없이 광오한 말에, 오 포쾌는 적 포쾌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새로 들어온 포쾌가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관아가 네놈 안방이냐? 뭔 목숨을 걸고 들어가?'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 아니다. 그보다 순찰은 저기 사 포쾌하고 같이 도는 게 어떠냐?"

"오 포쾌님께서 같이 도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갑자기 배가 아파서! 어이쿠. 저기 사 포쾌 온다!"

***

"이쪽으로!"

한경의 치소(治所)는 지부 어르신과 여러 정관들이 공사를 처리하는 관아(官衙)이자 동시에 그 위엄과 권세를 드러내는 곳이었다.

특히 지부 어르신이 머무는 정당(正堂)은 특히 더했는데, 한경의 여러 부유한 유력자들이 새로 부임한 지부를 위해 은과 금을 아낌없이 바친 덕분에 어지간한 번루보다 훨씬 위엄 있고 화려했다.

여기까지 올 일은 별로 없었던 연우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놈의 건물이...? 주루 차려도 되겠군.'

하오문한테 주면 기녀들 데려다가 한경의 은자를 싹 긁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문으로 들어가 다음 대문, 다다음 대문, 다다다음 대문을 지난 뒤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간 뒤 다시 한 번 작은 문들을 여럿 돌파하고 그 다음에...

"생각보다 빨리 왔군."

"지부 어르신을 뵙습니다!!"

연우혁은 커다란 외방 안의 상석에 자리 잡고 있는, 덩치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벼슬아치를 목격하자마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느긋하게 반쯤 누운 것마냥 의자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한경에 이렇게 비범한 풍채를 가진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들어오자마자 지부 어르신인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 하하! 과연! 요즘 한경 제일의 명포두라고 불리는 게 헛소문은 아니었어! 이렇게 영특하다니!"

연우혁의 아첨에 자리에 있던 다른 관리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기껏해야 거리를 뛰어다닐 줄만 아는 거친 포두 놈이 이렇게 한 번에 지부 어른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첨을 하다니.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아는가?"

"가르침을 주십시오!"

"최근 한경에 불행한 일들이 많았네. 금의위에서 나온 교위는 사소한 오해로 맹 판관을 가혹하게 처벌했지. 아! 물론 금의위 교위가 잘못했다는 건 아닐세. 다만 좀 억울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맹 판관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울화병으로 죽었겠는가?"

"지부 어르신. 감히 한 말씀을 올리자면, 맹 판관이 재물을 속이려고 요괴가 나타났다고 한경의 풍문을 어지럽힌 건 백 번 죽어도 모자랄 죄입니다."

"알아. 알아. 물론 그랬겠지. 하지만 정말로 요괴를 봤을 수도 있지 않나."

"맹 판관은 냉철하고 이치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요괴를 봤겠습니까?"

"나 원 참. 이 사람들, 무슨 말을 못하겠군."

지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짧은 대화에서 연우혁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단 한경의 관리들은 서로를 별로 안 좋아했다.

물론 맹 판관이 여러모로 적을 만드는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 관리들이 일제히 물어뜯는 건 좀 더 실용적인 목적에서였다.

지부라는 일인자 앞에서 남을 짓밟아야 자신이 올라가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실은 지부의 성격이었다. 무골호인이란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당문의 모 무인이 말했었다) 궁금했었는데 확실히 성격이 부드럽고 원만한 편이었다.

"죄송합니다. 지부 어르신."

"됐네. 됐어. 그래도 맹 판관은 죽어도 덜 억울했을 걸세. 여기 이렇게 충성스러운 부하가 한경의 일을 처리했으니. 맹 판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기 연 포두는 대성통곡을 했다는군. 이런 부하가 또 어딨겠나?"

방금까지 맹 판관 욕을 하던 관리들이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서로 경쟁하는 관리라면 모를까, 부려먹기 쉬운 포두가 저렇게 충성스러운 건 매우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연우혁은 자신이 관리들에게 점수를 땄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맞습니다. 어르신. 여기 연 포두는 맹 판관의 죽음을 듣자마자 저택으로 달려갔답니다. 한경의 다른 포두 놈들은 좀 본받아야 합니다."

연우혁과 미리 친분을 다져둔 금 통판이 눈짓하며 말했다. 연우혁은 속으로 이런 인맥을 만들어 준 당등에게 깊이 감사했다.

'당 대협. 감사합니다!'

"칭찬만 할 순 없지. 포두는 인색하면 안 돼. 인색한 사람이 포두를 하면 포쾌들이 여럿 도망치지. 자네는 이런 자리에 오면서 선물도 하나 갖고 오지 않았나?"

"!"

각오했던 화살이 날아오자 연우혁은 긴장했다. 바로 영안을 열고 상대부터 확인했다.

적대심이나 증오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은자에 대한 탐욕과 받지 못한 못마땅함 정도.

그리고 상대의 신분은...

"궁 판관. 왜 그러나. 연 포두가 포두 자리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은자를 모았겠나? 연 포두. 신경 쓰지 말게. 사실 오늘 이렇게 부른 것도 요즘 소문이 자자한 포두의 얼굴도 보고 궁 판관도 소개해 주려고 부른 거야. 아무래도 맹 판관이 없는 만큼 한동안 궁 판관이 서쪽도 담당하게 될 테니까."

한경처럼 넓은 곳은 판관 한 명이 모든 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맹 판관은 한경의 서쪽을, 궁 판관은 동쪽을 주로 맡아서 담당해왔었지만 맹 판관이 파직되고 죽은 이상 새 판관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궁 판관이 다 맡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마땅한 성의와 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르신."

"아. 왜 그러나. 자네도 분명 연 포두가 뛰어나다고, 탐이 난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포두지요. 하지만 성의와 도리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땅히 이런 자리에 오면서 바칠 건 바쳐야 한다, 이 말입니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서 법도를 안 지켜서야 되겠습니까?"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연우혁은 궁 판관의 집요한 탐욕에 경악했다. 심지어 다른 관료들도 질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경의 관료들 중 청백리는 없다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은자에 미친 사람이 있었다. 그게 바로 궁 판관이었다.

보다 못한 금 통판이 도와주려고 나섰다.

"여기 연 포두도 정신이 없었겠지. 곧 기회가 되면 바칠 걸세."

"맞습니다. 판관 어른. 제가 아직 서툴러 재물을 모을 줄 모릅니다."

"하. 그 재주를 갖고 대체 어디에 쓰는 건가? 앉아보게."

궁 판관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젊은 포두를 노려보며 탁탁 의자를 쳤다.

이렇게 많은 사건들을 문제 없이 해결했으면서도 재산 하나 모으지 못했다니. 우도할계(牛刀割鷄)도 정도가 있었다.

"그만, 그만! 오늘 그런 이야기 하려고 부른 게 아닐세."

"죄송합니다. 어르신."

궁 판관은 사과하면서도 연우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눈은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배워라, 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맹 판관이 좀 더 나았을지도...'

맹 판관은 그냥 죽이면 됐는데 이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인지 아찔할 지경이었다.

***

"아버지, 절 받으십시오!"

"아들아. 고맙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참도록 해라."

잠깐 안뜰로 나온 사이 금 통판과 마주한 연우혁은 절부터 하려고 했다. 금 통판은 볼살을 푸르르 떨어대며 웃었다.

"지부 어르신께서 널 아주 좋게 본 모양이다."

"궁 판관께서는...?"

"그 놈은 미친놈이다! 나도 청백리는 아니지만 그 놈은 대체 왜 안 잡혀가는지 모르겠다. 그 놈이 판관이 아니었으면 바로 파직당했을 거다."

금 통판도 궁 판관의 집요함에는 질린 모양이었다.

지부 어른이 말리려고 해도 계속 돈, 돈 거리는 배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 놈이 은자가 필요할 때는 꽤 요긴한 놈이긴 하다만..."

"..."

연우혁은 궁 판관이 왜 파직당하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금 통판은 자기가 한 말이 객쩍었는지 변명했다.

"많이 빌리진 않았다."

"많이 빌리셨더라도 아버지께서 필요하신 거라면 어느 누가 모욕하겠습니까?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제가 이 주먹으로 때려죽이겠습니다!"

"우하하하! 그래, 그래!"

둘이 신나게 떠드는 사이 하인이 달려와서 말했다.

"지부 어르신께서 누각선으로 출발하신답니다."

"아. 그래. 그래. 따라가마."

"배 말입니까? 지부 어르신께서 어디 가시기라도..."

"아니다. 아니야. 그냥 여흥이지."

언제나 누각이나 주루에서 술을 마시다보면 색다른 위치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지기 마련.

그런 배에 기름 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저런 누각선이었다. 커다란 배 위에서 자리를 잡고 마시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는 것이다.

저 멀리서 강을 따라오는 거대한 누각선을 본 연우혁은 멈칫했다.

"저거 군선... 아닙니까?"

"군선을 지부 어르신께서 빌려서 개조하신 거지. 참 풍류가 있으시다니까."

"그래도 됩니까?"

"안 되지만 알 게 뭐냐? 지부 어르신께서 하시겠다는데."

"..."

연우혁은 이 사람들한테 아첨하다가 나중에 찾아온 금의위 교위한테 다 같이 죽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청강은 흐른다 (2)

"자, 타러 가세!"

"지부 대인께서는 참으로 풍류를 아신다니까."

"암. 한경에서 제일가는 풍류가시지!"

그러나 연우혁의 고민과 별개로 관인들은 신이 나서 누각선 위에 올라갔다.

어떠한 의문이나 고민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나?"

금 통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연 포두가 아까부터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런 멋진 배에 올라가서 술을 마실 수 있다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우하하하! 그래, 그래! 사실 네가 일만 할 줄 아는 꽉 막힌 청백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풍류도 즐길 줄 아는구나!"

'풍류가 아니라 횡령이잖아...'

연우혁은 이를 꽉 물지 않기 위해 애써야했다.

***

솔직히 누각선은 멋지긴 했다. 연우혁은 목선 위에 오층으로 된 화려한 누각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기술적인 난이도를 떠나서 발상 자체가 정말 노는 데에 미친놈이 아니라면 하기 쉬운 생각이 아니었다.

낮은 층에서는 비교적 지위가 낮은 관리들이, 높은 층에서는 지부 어르신과 그의 심복 정관들이.

원래 연우혁은 낮은 층은커녕 노잡이도 하기 힘든 위치였지만 이번에는 운 좋게 가장 높은 층에서 지부 어르신과 같이 대작할 수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무림인 놈들이 한경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꼴을 절대 볼 수 없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판관 어르신."

그리고 하필이면 연우혁 옆에 앉은 건 궁 판관이었다. 궁 판관의 으르렁거리는 말에 연우혁은 일단 맞장구부터 쳤다.

"무림인 놈들은 칼이 있으면 칼을 믿고 가문이 있으면 가문을 믿어 돈을 바치지 않는다. 한 어르신께서는 훌륭한 분이지만 이런 놈들에게 너무 관대하지. 나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알겠나?"

"...예... 판관 어르신."

배가 흔들려서 그러는지 눈앞의 미친 판관 때문인지 이상하게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궁 판관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경의 법도는 지켜야 하는 법이야!"

"판관께서 대쪽 같은 건 누구나 알지. 하하. 저번에 당문의 무인이 결국 찾아와서 은자를 바친 건 우리 한경 관리들의 자랑이었네."

"...?!"

그냥 대충 듣던 연우혁은 멈칫했다. 이건 정말로 신기했던 것이다.

'아니. 대체 어떻게?'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연우혁이었지만 이건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장 도사께서 오십니다!"

"?"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신분을 듣자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궁 판관을 포함한 몇몇 관리들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누구십니까?"

"지부 대인께서 총애하는 도사지."

한 마디로 물었는데 관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 도사를 헐뜯으며 욕하기 시작했다.

강호에서 고명한 도사나 승려는 언제나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존재였다.

수많은 부잣집 주인과 명문가의 안주인들이 고명한 도사와 승려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지만, 그 정도 되는 도사와 승려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무당이나 소림에 찾아가 '내가 시주하겠으니 장문인께서 내 미래를 점쳐주시오'나 '내가 시주하겠으니 방장께서 덕담 좀 해주시오'하고 건방지게 지껄였다가는 무당산이나 숭산 어딘가에 묻힐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건 고관대작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어른들도 때가 되면 찾아와서 공손하게 진언을 듣고 가는 곳에 자기 권세 믿고 행패를 부렸다가는 구족이 같이 사이좋게 죽을 수도 있었으니...

그런 부족한 수요를 노리고 열심히 활동하는 게 바로 강호의 떠돌이 도사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주 드물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도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이비거나 좌도방문의 술법만을 조금 할 줄 아는 정도였다.

장 도사도 그런 부류에 들어갔다.

어느 날 홀연히 한경에 나타나서 지부 어르신의 저택을 기웃거리더니, 은근슬쩍 총애를 사고 있는 도사 놈.

다른 관리들이 싫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느 누가 상관이 이상한 도사 놈한테 홀리는 걸 좋아하겠는가.

"이해가 갑니다. 지부 어르신께서 이상한 도술에 홀리기라도 하면..."

"뭐?"

궁 판관은 연우혁의 말에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도사 놈이 건방지니까! 목에 아주 힘을 꼿꼿하게 주고 다니지. 우릴 아랫사람처럼 보면서 말이야."

"혹시 윗사람에게 마땅한 예의도 바치지 않았답니까?"

연우혁은 설마 싶었다. 그러나 관리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분개했다.

"역시 연 포두군. 바로 그런 놈일세."

"..."

어이가 없었지만, 연우혁은 아까보다는 덜 충격 받았다. 하긴 아까보다는 좀 더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무림인들도 다른 세가 구역에서 활동하면 양해를 구하고 대가를 치르는데, 장 도사란 사람은 지부 어르신의 총애만 믿고 관리들한테 일절 친절을 베풀지 않는 모양이었다.

'겁이 없군. 나였으면 절반 정도는 돌려줬다.'

객실의 문이 열리더니 장 도사가 들어왔다. 표정에는 현기(玄機)가 엿보이고 복색은 예스럽기 그지없었다. 몇몇 하인들은 이미 장 도사에게 깊이 빠져있는지 깊숙이 인사했다.

"도우께서는 강녕하셨습니까?"

"예, 예! 도사님!"

"도우께서는..."

장 도사는 관리들은 내버려두고 하인들을 하나씩 붙잡고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도우께서 얼굴이 붉으신 건 화기(火氣)가 얼굴로 올라오셔서 그런 겁니다. 수승화강(水昇火降)! 이 부적이 찬 기운을 도와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도사는 잘 몰라도 진짜 사이비 같군.'

연우혁은 경악했다.

연우혁이 아는 도사가 기껏해봤자 청허진인 정도였지만 눈앞의 도사가 진짜 도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부적에 별 영기가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영 수상쩍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점잖은 척 해도 영안으로 본 마음 속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수상쩍은 요소들과 달리, 눈앞의 도사에게는 영기와 내공이 느껴졌다. 심법으로 내공을 쌓아 술법을 부리는 도사의 특징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이 속인 게 아니었군!'

도사가 탐욕스러웠지만 능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니.

하긴 모든 도사들이 다 청허진인처럼 득도한 것 같은 인물들은 아니었다. 괜히 무림에서 '요술'이라고 따로 부르며 술사라고 하겠는가. 도술의 특성상 까딱하면 타락하기 좋았다.

"지부 대인을 뵙습니다."

"장 도사! 어서 오게, 어서 와!"

지부 어르신이 도사를 환영하며 떠들기 시작하자 관리들은 도사를 죽여버리거나 자기 귀를 막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가 흉흉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장 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첨을 끝내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훌륭한 주연(酒宴)에 초대받은 만큼, 저도 지부 대인께 무언가를 보여드려야겠지요."

장 도사가 손짓하자 도사의 시동 둘이 들어왔다. 각자 붉은 색, 푸른 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시동들은 자리를 돌아다니며 관리들에게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신통력이지."

궁 판관은 이를 갈며 말했다.

저 장 도사란 놈은 꼭 이런 연회 자리에 초대받으면 자기 신통력을 보여주겠다고 온갖 잡귀를 불러댔는데, 그게 지부 대인한테는 매우 잘 통했다.

'신통력은 아닌데?'

영안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연우혁은 다시 물었다.

"판관 어르신."

"왜 자꾸 부르냐?"

"만약 제가 이 신통력을 막고 저 도사를 망신 준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너는 내 아들이다!"

"..."

오른팔이나 심복, 혹은 믿음직한 부하 정도를 예상했지만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이 나왔다. 연우혁은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장 도사님!"

"?"

도사는 처음 보는 놈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며 일어나자 '저 놈은 뭐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진정 감탄했습니다!"

"도우께서 무엇을 말하시는지...?"

"도사님의 신통력 말입니다! 자. 보십시오!"

연우혁은 관리한테 나눠준 부적을 하나 뺏고 허공에 흔들었다. 백린을 발라놓은 부적이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흔들면 타오르는 부적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연우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사의 시동을 붙잡았다. 푸른 옷을 입은 시동의 소매 속에는 산 채로 꿈틀대는 새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

"사방에서 불이 피어오르면 여기서 이렇게 새가 날아오르는 겁니다!"

"그, 그런 거였구나!"

금 통판이 무릎을 쳤다.

매번 갑자기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면 살아있는 동물들이 하나씩 튀어나와서 변신하던데, 알고 보니 시동 놈한테 숨겨놓은 거였다.

갑자기 웬 미친 놈이 시작도 하기 전에 속임수를 다 까발려버리자 장 도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기 새도! 쥐도! 정말 대단합니다! 감탄했습니다!"

"도, 도우께서 지금..."

"이거 보십시오. 이 비단을 흔들면 이렇게 색이 바뀝니다."

영안으로 무장한 연우혁에게 장 도사가 준비한 가짜 신통력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핫핫핫핫핫핫!"

"진짜 신통력은 바로 연 포두일세그려!"

"더 해보게, 더!"

심지어 지부 어르신도 연우혁이 하나하나 다 까발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뭔가, 장 도사! 이게 무슨 신통력인가! 어린애 속임수 아닌가! 심지어 연 포두한테 다 들켰구만!"

"죄, 죄송합니다. 지부 대인. 이건 사실 진짜 신통력이 아니라 일종의 여흥..."

"됐네. 됐어! 이 사람아. 들켰다고 그렇게 변명하다니. 신통력은 여기 이 연 포두가 진짜로군. 그만 떠들고 앉게!"

망신을 당한 장 도사는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연우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사.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

장 도사의 패인은 타협 불가능하게 챙겨먹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유연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든지 연우혁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

술자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연우혁은 취기가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난간에 섰다. 찬 저녁 바람이 정신을 일깨웠다.

장 도사가 비참하게 구석에 앉아 있는 동안 관리들은 연우혁에게 술을 부어주며 이제까지 장 도사가 보여줬던 신통력들을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었다. 연우혁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해치워댔다.

"이보시오!"

"?"

연우혁은 고개를 돌렸다. 망신당한 도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

"도사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오?"

'별 거 없어 보이는데?'

지부 어르신 말고는 없는 사람인데, 방금 그 지부 어르신도 장 도사에게 좀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연우혁을 해코지하려고 해도 하기 힘들 것이다.

"누가 있으십니까?"

"흥. 말해봤자 뭐하겠소. 직접 보여드리는 게 낫겠지. 여기입니다. 대인!"

장 도사가 외치자 갑자기 배 선두에서 한 사람이 날듯이 올라왔다.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그쪽은 동창을 건드린 거요. 대인! 이 연 포두란 놈이 자기 재주만 믿고 제 일을 망쳤습니다!"

"일을 망쳤다고?"

"예!"

동창.

금의위와 같이 언급되는, 품계와 상관없이 관리들에게 두려움을 사는 조직의 이름이었다.

환관들로 이뤄진 이들은 강호를 암약하며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황제에게 바쳤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이들에게 잘못 보이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그 권세는 가히 날아가는 새를 손가락만으로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동창의 무인은 그 악명과는 달리 평범했다. 허름한 평복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 하나였다.

"일을 망칠 수가 있나? 그 속임수를 쓰면서 실수라도 했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그런 실수를 하겠습니까! 저 포두란 놈이 다 까발렸단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까발리지? 알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 그건 저 놈이 이상한 재주가 있나 봅니다. 다른 관리들이 그러더라고요."

동창 무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네가 한경의 연 포두냐? 금의위를 도와 기남의 일을 해결한?"

"...맞습니다."

"!"

동창 무인은 가면 너머로도 놀라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렇게 재주 있는 놈이 여기 탈 줄 알았으면 네게 부탁할 거 그랬구나."

"대인. 저 놈이 제 일을 망쳤다니까요? 일개 포두 놈이..."

"닥쳐라."

동창 무인은 장 도사를 날려버렸다. 장 도사는 목선 밖으로 날아가 강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생사에는 별 관심도 없는지 동창 무인은 연우혁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알겠군. 알겠어. 왜 일개 포두가 총애 받는 도사한테 시비를 걸었을까 했는데, 내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나? 동창은 아니라도 누군가 뒤에서 도사를 조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도발한 거로군! 그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재주가 뛰어나. 정말로 뛰어나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연우혁은 겸손의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청강은 흐른다 (3)

"그런데 저 하찮은 도사 놈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지?"

동창에서 나온 무인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저 장 도사는 원래 동창의 번자가 아니라, 한경의 지부를 현혹하던 놈을 동창 무인이 발견하고 협박해서 포섭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어지간해서는 저 도사 놈 뒤에 누군가 있다는 짐작을 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한경의 관리들은 장 도사 뒤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연우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은 이미 적당한 핑계를 찾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동창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조심해야 했다. 금의위보다 더 악랄하고 집요한 자들 아닌가.

동창 무인이 칭찬을 해줬으면 '맞습니다'라고 해야지 '사실 아닙니다'라고 했다가는 방금 강 속으로 가라앉은 장 도사 꼴이 나는 것이다.

"누각선에 찾아온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누각선에?"

"예. 오늘은 한경의 관리들이 주연을 벌이는 날입니다. 장 도사가 지부 어르신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그 또한 눈치가 있고 교활한 자. 누각선까지 찾아와서 신통력을 보여주면 한경의 관리들이 원한을 깊게 품을 겁니다. 그런 위험을 굳이 무릅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

가면을 쓴 동창 무인은 젊은 포두의 식견에 감탄했다.

금의위 놈들이 외부인, 그것도 한낱 포두를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하길래 대체 어느 정도인가 했는데 소문이 헛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동창의 당두들 중에서도 저렇게 지혜로운 자는 없었다.

"훌륭하구나!"

"부족한 재주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가 장 도사를 왜 부리고 있었는지는 짐작가나?"

"...이 누각선 때문입니까?"

연우혁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군선을 개조한 뒤 청강 위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으니, 연우혁의 상식으로 이건 거열형 감이었다.

그러나 동창 무인은 연우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각선이라니?"

"군선을 멋대로 개조했으니..."

"아아! 그 소리였구나."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동창 무인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은으로 된 쟁반 위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런 사소한 죄 때문에 이러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농이 제법이군."

'사소한가?'

연우혁은 동창 무인의 사고방식에 살짝 당황했다.

군선을 몰래 갖고 와서 연회에 쓸 누각선으로 개조하는 게 사소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한경의 관리들 중 누군가 탐학질이 과해서 조정에 보고가 올라갔습니까?"

"그만. 아무리 좋은 농이라 하더라도 한 번이면 족하구나."

동창 무인은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동창이 관심을 가지려면 역모나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는 되어야 했다. 혹은 환관들이 아주 크게 이득을 볼 수 있거나.

한경의 관리들이 군선을 훔쳐서 누각선으로 만들던 팔아서 은자로 바꾸던, 조정에 바쳐야 할 세수를 몰래 빼돌리던 그건 동창이 알 바 아닌...

"아니. 마지막은 좀 심했군. 마지막은 잊도록 하거라."

"..."

"여하튼 요지는 이해했겠지. 포두?"

"예."

동창 무인은 연우혁이 떨떠름해하는 걸 느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충성스럽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구나. 마음 같아서는 저기 들어가서 지부부터 나졸까지 모조리 붙잡아 국문하고 싶겠지?"

"예? 아닙니다."

연우혁은 황당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동창 놈들 날로 먹는구나'정도의 평범한 감상이었는데...

"하지만 여기 지부를 붙잡아서 처형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 다음에 앉을 놈도 시간이 지나면 똑같이 군선을 개조해서 주연을 벌일 텐데. 다음 놈도, 그 다음 놈도."

"이해했습니다."

"그래. 이 누각선에서 사직을 신경 쓰는 사람은 우리 둘 밖에 없다. 포두. 하지만 그게 어디겠느냐? 둘이라도 있는 게 사직의 홍복이지."

"?"

연우혁은 순간 '왜 둘이지?'하고 멈칫했다가 뒤늦게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아닌데.'

"여하튼 포두. 도사 놈이 사라졌으니 내 일을 도와줘야겠구나."

"강호에 소문이 자자한 동창을 돕게 되다니, 대대손손 영광일 겁니다."

"아첨까지? 포두. 난 아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연우혁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원래 진짜 아첨꾼은 한 번 들켜도 당당하게 초식을 출수하는 법이었다.

"아첨이라니, 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동창 무인은 깔깔 웃었다.

"알겠다. 그러면 그런 걸로 하자꾸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혈교 때문이다. 혈교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혈교 무리들도 널 알고 있을 테니."

"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혈교 무리가 절 알고 있다는 게 뭡니까?!"

연우혁은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 그 광산에서 혈옥갑(血玉鉀)을 훔친 게 들킨 것일까?

"저번에 광산에서 교위를 도왔지 않나. 장계가 올라갔으니 포두 네 이름도 알고 있겠지."

"교위면 모를까 한낱 포두인 저를 말입니까?"

"장계 내용을 못 봤나보구나?"

장계 내용이 어땠는지 묻고 싶었지만 동창 무인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최근 한경 관리들 중에 혈교도가 있다는 신빙성 높은 첩보를 받았다."

"장 도사..."

"그 놈은 그냥 요술을 조금 부릴 줄 아는 사이비 도사지 혈교도는 아니다. 꽤 지위가 높은 관리일 텐데, 어느 놈인지 확인하려고 이렇게 배에 올라온 거다."

"!"

한경의 정관 중 혈교도가 있다는 말은 확실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당장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게 혈교도였으니까.

차라리 이해타산에 맞춰 움직이는 탐관오리들이 나았지 혈교도는 예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떻게 관리 중에 혈교도가?"

"지부도 도사를 좋아하는데 관리라고 혈교도를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하긴 맞는 말이군.'

아까 본 장 도사의 모습은 판관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도사로 전직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들 정도였다. 가짜인 게 들키면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점만 빼면 도사가 어지간한 관리보다 권세가 더 높을 것 같았다.

비슷한 과정으로 혈교가 관리를 꼬드겼다면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혈교도를 찾는 겁니까?"

연우혁은 의아해졌다.

혈교도만큼 자기 신분을 숨기는데 철저한 이들도 없었다. 장 도사는 기껏해야 요술 한두개 쓸 줄 아는 삼류 도사였는데 어떻게 혈교도를 찾는단 말인가.

"도사에게 산약(散藥, 가루로 된 약)을 줬다. 관리들이 신통력으로 정신이 빠진 사이에 술에 탈 수 있도록."

"놀랍습니다! 동창에서 만든 겁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약을 먹는 것만으로도 혈교도를 잡아낼 수 있다니. 연우혁은 내공에 반응하는 고(蠱) 같은 건가 싶었다.

"동창에서? 동창에서 만들었다고 할 수는 있겠구나.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약은 아닌데."

동창 무인은 종이로 싸인 산약을 꺼냈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그 약을 확인했다.

약은 놀랍게도 독약이었다.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시면 쓰러지거나 앓을 정도는 됐다.

"...이, 이거 독 아닙니까?"

"약재에도 능한가보구나! 맞아. 독이다."

"???"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독을 술에 타는 게 어떻게 혈교도를 찾아낼 수 있는 겁니까?"

"혈교도가 마시면 자신이 들켰다고 생각해서 다른 반응을 보이겠지."

"그럼 다른 관리들은 어떻게 독을 처리합니까?"

"앓은 다음에 의원을 찾아가면 되겠지."

'미친놈이었군.'

동창의 계획을 이해한 연우혁은 경악했다.

그러니까 관리들한테 모두 독을 먹여서 반응하는 놈은 혈교도고 아닌 놈은 어쩔 수 없다니.

이게 말인지 아닌지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걸 타기에는 힘들어졌지. 고민이 되는구나."

"꼭 독을 먹이지 않으셔도 반응이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혈교도가 놀랄 법한 소란만 일으켜주십시오."

"소란으로?"

동창 무인은 그게 되나 싶었다.

수많은 관리들이 취해서 지껄이는 와중에 소란 하나로 반응을 잡아낼 수 있단 말인가?

독으로도 안 될 가능성이 있는데...

"예. 절 믿어주십시오."

"그래, 한 번 재주를 보자꾸나! 혈교도가 놀랄 법한 습격이면 될까?"

"충분합니다. 동창 무인이 왔다거나..."

"좋다. 좋아."

동창 무인은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연우혁은 문득 상대의 경지가 궁금해서 영안을 열어 집중했다.

만약 혈교도가 무공을 익혔거나 무공을 익힌 동료를 데리고 있을 경우, 연우혁 혼자서 다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여기 이렇게 혼자 왔으니 분명 무공의 고수일 터. 어느 정도의 수준일...

"?"

놀랍게도 안개라도 두른 것처럼 속마음이나 무공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연우혁은 그 안개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깨달았다.

'저 구슬은...?'

쌍룡신주(雙龍神珠). 동창 무인이 품속에 갖고 있는 보물이었다. 같은 보물 주제에 어떤 보물인지 곧바로 실토한 혈옥갑과 달리, 쌍룡신주는 이름을 제외한 어떤 사실도 연우혁에게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주인을 신통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보물이라니.

'아무리 동창이 부유하다 하더라도 일개 환관이 갖고 있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위가 높거나 뒷배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우혁은 조금 더 허리를 깊게 굽히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대인의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두(檔頭)다. 하지만 주 공공이라고 부르도록."

'당두였구나!'

"예. 주 공공!"

생각보다 높은 지위에 연우혁은 방금 했던 생각대로 허리를 깊게 굽혔다. 주 공공은 뛰어난 포두에게 받는 인사가 썩 괜찮았는지 흡족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