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당령은 팔짱을 끼고 대장간 기둥에 기댄 채 연우혁이 하는 짓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지금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 포두가 보여준 신통한 재주 때문에 반쯤이라도 믿는 거지 아니었다면 아까 입을 놀렸을 때 혀를 암기로 꿰뚫어버렸을 것이다.
몇 개월 전에 사라진 노인을 대장간 좀 뒤지는 것만으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신통력이 있어도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개방의 장로도 그런 재주는 없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개방의 거지들이 왜 고생을 하겠는가.
젊은 포두는 대장간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유심히 관찰했다. 어떨 때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당령은 포두가 뭘 보고 흥미로워하는지 궁금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
그냥 먼지 낀 선반이었다.
'뭐야?'
지금 혹시 조롱당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연우혁이 걸어 나오자 당령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알겠나?"
"예."
"...?!!!!!"
당령이 경악해하는 사이 연우혁은 포쾌들에게 물었다.
"인근의 흑도 무리 중에 철갈방(鐵蝎幫)이 있지?"
"예? 예."
한경의 흑도 세력 중 하나로 나름 세력이 있는 놈들이었다.
한경 내에서 크게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한경 내를 거점으로 인근을 오가며 밀수와 약탈을 일삼는 놈들로, 끈질기고 교활한 놈들이었다.
애초에 한경에서 오래 버티는 흑도 문파들은 대체로 끈질기고 교활할 수밖에 없었다.
벼슬아치에게 뇌물을 바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정파 문파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교묘한 처신을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그렇다고 해서 난폭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고관대작이나 명문정파의 고수 앞에서나 조심하는 거지 포쾌들 앞에서는 얼마든지 난폭성을 드러내는 흑도의 무림인이었다.
그걸 아는 만큼 포쾌들도 철갈방이란 이름이 나오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놈들이...?"
"그래. 안내해라."
"예, 옛. 알겠습니다."
포쾌들은 겁이 났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연우혁이 보여준 모습이 있는데 부하들로서 체면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믿음도 있었다.
이 포두라면 분명 무슨 계책이 있을 거라고!
당령은 연우혁을 따라가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어떻게 철갈방 놈들이 강 노인을 납치해간 걸 알았지?"
연우혁은 표정을 관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의 범인까지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먼지 낀 선반을 보셨습니까?"
"그래."
"그것 덕분에 알 수 있었습니다."
"???"
당령은 대체 이게 뭔 소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사천당문의 복잡한 독과 암기도 막힘없이 다룰 줄 아는 자신이 이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다니.
"선반... 선반이라..."
"당 소저. 무공의 고수들은 무공이 남긴 흔적만 보고서도 어떤 무공인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런 겁니다."
"??????"
연우혁은 대충 의미 있게 던졌다 싶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역시 당령은 알아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자기가 나름대로 논리를 맞춰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반... 철갈방의 무공... 포두. 궁금한 게 있는데."
"당 소저. 철갈방에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우혁은 화제를 돌렸다.
당령은 고개를 들었다. 제법 으리으리한 철갈방의 가옥이었다. 안을 보지 못하게 높게 세운 담벼락 안쪽에는 여러 채의 방(房)과 그 지붕 끄트머리가 보였다. 시끄럽게 들리는 소리를 보니 이십 명은 족히 넘어보였다.
'21명이군.'
"다른 무인을 부르시겠습니까?"
사파나 흑도의 문파는 의외로 무공을 익히지 못한 놈들이 많았다. 무공이란 건 생각보다 깊은 끈기와 인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십 명이 넘는 인원수는 꽤나 귀찮은 적이었다. 게다가 이 안쪽은 상대에게 익숙한 지형 아닌가. 잘못 싸우면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 기다려."
당령은 말을 남기고 가볍게 경공을 펼쳐 방(幫)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정문 앞에 서더니 가만히 기다렸다.
"?"
"...?"
포쾌들은 이 당문의 무인이 뭘 하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 순간 정문이 열리더니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는 철갈방 무인이 튀어나왔다.
"커헉... 컥... 독...!"
당령은 즉시 암기를 쏘아서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제야 뒤늦게 당문의 미친 무인이 이 인근에 독을 뿌렸다는 걸 깨달은 포쾌들은 기겁해서 물러났다.
그러나 연우혁은 가만히 있었다. 영안으로 이미 독이 가옥 안쪽에만 퍼졌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안 피해?"
"대(大) 당문의 무인께서 하독하시는데 실수가 있을 리 없지요."
당령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당령은 기특하다는 듯이 포두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럼 하북팽가와 사천당문 중 어느 세가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
객잔의 독 (4)
'아니 이런 개새끼가.'
연우혁은 당령을 속으로 욕했다.
물론 납치된 노인을 찾는 건 연우혁의 일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강 노인은 당령에게 중요한 사람이지 연우혁에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강 노인을 이렇게 한 번에 찾아줬는데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다니.
팽가 남매가 아무리 호인이라지만 나중에 '연 포두가 하북팽가보다 사천당문이 더 대단하다던데'같은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갈세가 말입니까?"
"아니. 하북팽가."
"...하북팽가도 그 협의(俠義)로 무림에 빛나는 명성 높은 세가이자, 그 도법은 무림의 일절로 꼽힙니다만... 역시 당문의 세력을 따라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중에 꼭 팽주성에게 '팽 형님 당령한테 협박받았습니다 그 새끼 아주 나쁜 새끼입니다'라고 해명하기로 다짐하고, 연우혁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당령의 눈빛이 이제까지 봐왔던 눈빛 중에서 가장 부드러워지고 흡족함에 가득 찼다. 영안으로 보지 않아도 아주 만족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우혁은 속으로 욕했다.
"정말 보는 눈이 있는데? 옛말에 구안능지(具眼能知)라고 했지. 아주 훌륭해. 포두."
당령은 튀어나오는 무인 두 명을 암기로 쏴죽이며 칭찬했다. 연우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무례하게 굴었다는 걸 인정하겠어. 포두 네 재주는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어."
"감사합니다."
당령은 기어 나오는 무인 한 명을 암기로 쏴죽이고 텅 빈 수전(袖箭) 통을 소매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비침(飛針)을 쏘아서 그 뒤의 무인을 즉사시켰다.
포쾌들의 눈에는 그저 번쩍이더니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 보였겠지만 연우혁의 영안은 그 안의 내막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연우혁은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효율적이다.'
무림인이 일 대 다수의 싸움을 피하는 이유는 어떤 무인도 싸움을 거듭하면 지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적이라 하더라도 그 적을 베고 찌르면 체력이 소모되고 내공이 소모됐다. 실수로 생채기라도 나면 피로는 빠르게 가중됐다.
그러나 사천당문의 전투법은 그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상대가 머무는 곳에 독을 뿌려서 중독시킨 다음 무방비하게 튀어나오는 놈들을 암기로 쓰러뜨린다.
심지어 기관(機關)의 힘을 사용한 암기라 무림인이 직접 던질 필요도 없었다. 자기보다 약한 하수들을 다수 상대할 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전투법이었다.
쾅!
문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제까지 쓰러진 무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당령은 암기를 발사하려다가 동작을 멈췄다. 상대가 두꺼운 정문 파편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 개... 개자식들이... 쿨럭!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연우혁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사(壯士) 체형의 무림인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으르렁거렸다.
잘 단련된 외공과 그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쌓은 내공. 연우혁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이 철갈방의 방주 노릇을 하고 있는 철갈권(鐵蝎拳) 탁명이었다.
탁명은 대체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도 이것보다는 덜 갑작스러울 것이다.
"내가... 내가 당문하고 원한을 진 게 없는데 대체 왜...?"
"사파 무인이라면 등 뒤에서 칼 맞아도 의아해하면 안 될 텐데."
당령은 차갑게 대꾸하면서 탁명을 주시했다. 꼴에 방주라고 제법 괜찮은 해독약을 갖고 있었는지 다른 놈들에 비해 중독 상태가 훨씬 약했다.
게다가 시체와 정문 파편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서 암기를 급소에 찔러 넣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무시했을 상대의 말에 대답해주는 건 상대를 격분시켜서 빈틈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강 노인을 납치해서 데리고 있겠지?"
"그... 그깟 대장장이 놈 하나 데려와서 가뒀다고...?!"
자백이나 마찬가지인 말에 당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저 포두는 흐트러진 대장간의 모습만 보고 사라진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미... 미친... 아무리 당문이라 하더라도 이런 짓이 허용될 줄 아느냐?!"
"지부(知府)한테 사파 새끼 하나 쓸어버렸다고 하면 감사를 받으면 받았지. 당문이 네 하찮은 방과 똑같은 줄 아나?"
당령은 독살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독이나 암기도 그렇지만 당문의 혀 또한 치명적인 무기라는 걸 깨달았다. 한 마디 들을 때마다 탁명의 정신이 분노로 흐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경을 다스리는 지부 어르신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가 가능한 오대세가 출신의 무림인과, 그 밑의 밑 판관에게도 굽신거리며 뇌물을 바치는 일개 방주는 신분이 달라도 너무나도 달랐다.
아마 탁명 본인도 지금 느끼고 있을 터였다.
당문의 힘과 권세라면 철갈방 무인들을 허가 없이 격살해도 칭송을 들으면 들었지 책임을 묻진 않을 것이라고!
"하긴 그렇게 멍청하니 방을 말아먹었겠구나. 남은 무인이 없으니 방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저건 배워야 한다.'
연우혁은 감탄했다.
저게 진짜 격장지계였다. 탁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포효하며 들고 있던 정문 파편을 던졌다.
당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법을 밟으며 암기를 쏘아냈다. 비침이 탁명의 몸 위에 꽂혔다.
'뭐지?'
예상했던 것보다 얕게 들어간 암기에 당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외공을 익혔는진 몰라도 살가죽이 꽤 질긴 모양이었다.
"당 소저, 조심하십시오! 놈이 혈단을 복용했습니다!"
연우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까부터 영안을 열고 있었기에 철갈권이 뭘 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파편을 던지고 먼지에 몸을 숨겨도 연우혁의 눈을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무슨 단약을 복용한 거지?'
무림에는 흔히들 혈단(血丹)이라고 불리는 단약들이 있었다.
이름에 피가 들어가긴 했지만 그 중 피로 만든 건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수상쩍은 약재와 광물들을 수상쩍은 방식으로 섞어 넣은 것에 가까웠다. 보통 붉은색이라 혈단이라고 불렸다.
이런 수상쩍은 단약을 복용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일시적으로 잠력을 끌어내고 내공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고, 어지간한 사파 무림인도 이런 혈단을 쉽게 먹진 않았다.
어디서 어느 의원이 만든지도 모르는 물건을 목구멍 속으로 던져 넣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후유증만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탁명은 나름 방주라고 괜찮은 혈단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공의 양이 빠르게 증가하고 그 흐름도 매서워졌다. 동시에 피도 끓어올랐다.
'저러다 죽...?! 아, 어차피 죽겠군.'
생각해보니 철갈권 입장에서는 애써 세운 방도 망했겠다, 가만히 있으면 당문 무인한테 팔다리가 썰리는 운명밖에 남지 않았다. 죽더라도 저승길동무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큭!"
당령은 생각보다 매서운 탁명의 공격에 전율했다.
같은 이류의 경지라 하더라도 당령은 일류를 엿보고 있는 이류 말입이었고 탁명은 편법과 속성으로 익힌 이류 중입의 경지.
게다가 독과 암기까지 있으니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상성이 썩 좋지 못했다.
놈이 익힌 특수한 외공 때문에 암기가 제대로 혈도를 찌르지 못하고 있었고 독 또한 방금 먹은 해독약 덕분에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단약까지 먹어서 내공이 급증한 상태.
'침착하게 시간을 끈다.'
당령은 지금 가장 유리한 우군인 시간을 떠올리며 단혼보(斷魂步)를 밟았다. 변화가 심한 보법에 탁명은 순간 당령을 놓치고 잘못된 방향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탁명은 억지로 몸을 꺾고 방향을 전환했다.
쓰레기 같은 사파 무인이 보여주는 예상 외의 독기에, 당령의 눈빛도 공명해서 매섭게 타올랐다.
"좋다. 어디 한 번...!"
저런 놈과 권각을 교환하는 것도 손해라 여겼지만, 저렇게 건방지게 덤비는 걸 보니 한 대 맞고서 숨통을 끊어버려야겠다는 당문 특유의 독심이 올라왔다.
그 순간 탁명의 뒤에서 흰 채찍이 날아들었다. 탁명은 간신히 몸을 옆으로 피했지만 등이 쫙 찢어지며 독이 스며들었다.
"!!"
"...!"
탁명은 한낱 어린 포두 새끼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자랑하던 질긴 외공마저 부수고 상처를 입힐 줄이야.
"포두 새끼...!?"
'당문은 부하 다 죽여도 존대하던 놈이...'
연우혁은 포두를 무시하는 철갈권의 태도에 살짝 발끈했다.
판관이 부리는 개새끼 취급이라지만 다 죽어가는 범죄자 놈이 저런 태도를 보이니 울컥하는 게 사실이었다.
"죽여버리겠다!"
탁명은 살가죽을 찢고 올라오는 독기에 고함을 쳤다. 점점 혼미해지는 정신이 판단력을 잃고 분노에 몸을 맡기게 만들었다.
'아니?!'
연우혁은 상대가 당령을 두고 자신을 노리자 깜짝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당령을 계속 노릴 줄 알았던 것이다.
'놈이 동귀어진을 노리고 있다!'
심지어 같이 죽겠다는 각오로 달려들고 있었다. 연우혁은 바로 백사편법의 초식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푹!
탁명은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받아냈다. 날카로운 채찍이 몸을 뚫었는데도 황소처럼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환장하겠군!'
"포, 포두님!!!"
포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은 침착하게 영안으로 탁명의 동작을 읽어냈다. 그리고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힘까지 불러냈다. 내공과 체력이 샘솟듯 밀려왔다.
지금 놈의 움직임은 날카로운 채찍으로 베거나 뚫는 게 아닌, 오로지 힘으로 쳐야 막을 수 있었다.
퍽!
북 터지는 소리에 포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탁명이었다.
연우혁은 깊게 숨을 내쉬며 쓰러진 철갈권을 내려다보았다. 달려들었을 때부터 부상이 심했던 탓에 이미 숨통이 끊어져있었다.
'운이 좋았다.'
길이 넓지 않고 상대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피할 수가 없었다. 만약 영안이 없었거나 힘이 부족했다면 날아가는 건 연우혁일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였다.
"주, 주먹질 한 번으로... 철갈권을 죽이신 겁니까?!"
"...아니다. 당 소저가 죽인 거지.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연우혁은 양 포쾌의 뺨을 때릴까 잠깐 고민했다. 안 그래도 심기 불편해졌을 당령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령은 먼지를 털고 다가오더니 말했다.
"됐어. 연 포두가 죽인 걸로 하라고."
"예? 하지만 당 소저께서..."
"귀 멀었나? 네가 죽인 걸로 하라니까?"
"아, 예."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당령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방금은... 사과하지. 당문의 무인은 다들 화증(火症)이 좀 심한 편이라."
"아닙니다. 의협심이 강하시면 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래도 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덜한 편이야."
"..."
연우혁은 경악했다.
그리고 앞으로 당문의 '당'만 들려도 무조건 도망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실로 미친 새끼들이다!'
객잔의 독 (5)
"제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백 리 밖에 있어도 알아채지만, 당 소저가 화증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속으로는 욕을 했지만, 겉으로는 깜짝 놀란 척을 하며 연우혁은 말했다.
영안으로 본 당령의 기분은 더욱 더 흡족해졌다.
"너 같은 포두가 사천에 있어야 할 텐데."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만약 사천에서 포두를 해야 한다면 연우혁은 진지하게 관직을 그만두는 걸 고민해볼지도 몰랐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고 있었나?"
"예. 저번에 보셨잖습니까?"
당령과 같이 싸운 건 처음이 아니었다. 저번 산채 토벌전에서 같이 싸운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합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아! 물, 물론 알고 있었지. 그걸 모를 리가 없잖나."
'이 사람, 잊고 있었군.'
하긴 산채 토벌에서 냉수사를 설득한 연우혁의 화술은 기억해도 무공은 기억 못할 수 있었다. 별로 싸울 일이 많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같이 싸웠는데 아예 잊고 있었다니...
당령도 머쓱했는지 급히 화제를 바꿨다.
"방금 보여준 권법의 위력이 제법 강맹하던데 무슨 권법이지?"
"위국권법입니다."
"..."
당령은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적절한 대답일지 알 수가 없어서 머뭇거렸다. '대단한 이름의 권법이다'라고 말하면 조롱하는 것 같았고, '그딴 권법으로 저런 위력을 내다니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저, 포두님."
언변이 부족한 당문의 무인을 구해준 건 포쾌들이었다. 방금 있었던 싸움에 넋이 나가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포쾌들이 연우혁에게 말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포쾌들이 머뭇거리면서 하는 말에 연우혁은 긴장이 풀려서 피식 웃었다.
방금 철갈권과의 싸움은 연우혁에게도 상당히 긴박한 싸움이었다.
냉수사한테 채찍을 받고 나서 동급의 무인 정도는 우위에 서서 싸울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싸움에는 정해진 결과가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영안이나 술법이 없었다면 크게 다쳤으리라.
괜히 상승무공에 '상승'이란 이름이 붙는 게 아니었다.
고송이 만든 백사편법은 전진과 공격에만 초점이 맞춰줘 있었지만, 정파의 상승무공이었다면 아까 같은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초식이 있었을 것이다.
"포두님?"
"방해하지 마라. 깨달음을 정리하는 게 안 보이나?"
당령은 짜증스럽게 포쾌들을 쳐다보았다.
싸우고 나서 깨달음을 정리하는 게 무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저 돼지 새끼 같은 포쾌들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연우혁은 새삼스럽게 당령이 명문세가의 무림인이라는 걸 느꼈다. 정작 연우혁 본인은 이게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과연. 이게 깨달음인가.'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왜 불렀지?"
"빨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러지? 독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텐데."
"그, 노인분께서 안에 계실 텐데 그 분도 중독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당문의 무인과 친분이 깊은 노인 아닌가. 독에 대처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계실 거다. 그러니까 당 소저께서도 과감하게 하독을 하셨겠지."
"아하!"
모르는 게 없는 연우혁의 말에 포쾌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그들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뛰어 들어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과연 그런 거였습니..."
타타탁-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당령은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예상 밖의 모습에 당황해서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 * *
다행히 강 노인은 멀쩡했다. 철갈방의 무인들이 중독되는 걸 보자마자 당문이 왔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위로 올라가는 독연(毒煙)의 성질을 파악한 강 노인은 낮은 곳으로 몸을 피하고 물에 적신 천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재빨리 독을 전부 처리한 당령은 강 노인이 무사한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콜록. 괜찮습니다. 아기씨. 이렇게 구해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연우혁도 정정한 강 노인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만약 강 노인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당문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예상이 불가능했다.
"이 사파 새끼들을 젓갈로 담가버렸어야 했는데..."
"그러실 거 없습니다. 이 늙은이는 나름 괜찮게 지냈습니다."
강 노인은 당령을 달래며 말했다.
연우혁이 보기에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질 좋은 철과 무기를 몰래 만들어 밀매하던 철갈방 입장에서 강 노인 같은 대장장이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피해가 컸을 테니까.
"역시 그걸 보고 오셨군요. 제가 남긴 암호를 보셨습니까?"
"?"
"쓰지 않아(歇) 먼지가 낀 선반 위에 벌레(虫)를 올려놓았으니 갈(蠍)이지요. 이 근처에 갈을 쓰는 흑도 무리는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철갈방이란 걸 알아보신 줄 알았습니다만..."
"!!"
당령은 강 노인의 말에 포두가 왜 선반을 유심히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짧은 사이에 강 노인이 남긴 뜻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알아보신 게 아니었습니까?"
강 노인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당령이 이렇게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기 뒤의 포두가 찾았습니다."
"포두라면 설마 사 포두...?!"
"그 새끼가 아니라... 그, 새로 온 포두요."
당령은 이 주변에 익숙하지 않아서 설명이 서툴렀지만 강 노인은 금세 이해했다. 매우 놀라워하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설마 당문의 무인이 아니라 포두께서 찾아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연우혁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운으로 이 한경에서 사람 하나를 찾을 수는 없지요... 허허. 고맙습니다."
"포두. 사례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일단 의원부터 만나보도록 하죠."
"정말 괜찮습니다만..."
"그건 의원이 할 소리고!"
당령은 다음에 보자고 말한 뒤 강 노인을 끌고 나갔다. 연우혁과 포쾌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말... 무림인들은 상종하질 못할..."
"쉿. 조용히 하게."
양 포쾌는 기겁해서 동료의 입을 막았다.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저런 무인을 욕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포두님! 포두님의 지혜가 없었다면 저희는 살아서 자리를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포두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포쾌들은 진심 어린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니 새삼 이 젊은 포두에 대한 충성심이 샘솟았다.
새로 온 포두가 한경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거나, 이 주변에 혈연이 없다거나 하는 단점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포두 밑에서라면 정말 충성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니 겸연쩍군."
"아닙니다. 포두님. 포두님께서는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저희가 나머지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솜씨를 한 번 보도록 하지."
영안으로 부하들의 감정을 볼 수 있었던 만큼 연우혁은 이들이 진심으로 나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싸우느라 내공도 꽤 소모했겠다, 연우혁은 옆에 걸터앉아 포쾌들이 싸움 현장을 정리하는 걸 구경하려고 했다.
착착착-
포쾌들은 경쾌한 움직임으로 시체들을 한곳에 늘어놓았다.
'잘하는군.'
섣불리 칼을 휘두르는 무림인치고 시체를 처리할 각오까지 마친 무림인은 드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뒷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있는 법. 포쾌들도 그 중 하나였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진 곳의 시체들은 웃돈을 줘도 무섭다고 꺼리는 경우가 많은 만큼, 포쾌들이 나서서 현장을 정리하고 시체를 치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연 사 포두 밑에서 혹독하게 일했던 포쾌들인 만큼 쉬지 않고 시체들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땀을 훔치고 곧바로 철갈방의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
연우혁은 포쾌들이 왜 가옥 안으로 들어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체는 다 밖에 있지, 가옥 안에 있는 시체는 없었다.
'뭐지?'
얼마나 지났을까. 포쾌들은 기쁘고 뿌듯한 얼굴로 가옥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연우혁 앞에 서더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전낭을 꺼내 바쳤다.
"포두님. 전부 다 찾았습니다!"
"은자 한 조각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받아주십시오!"
"..."
포쾌들의 얼굴은 충만함으로 빛났다. 시체와 가옥을 수색하면서 조금도 빼돌리지 않았다는 점이 그들의 빛나는 충성심을 증명했다.
'은자를 찾고 있던 거였군...'
연우혁은 포쾌들의 일처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체들을 치우면서 그걸 다 하나씩 몸을 뒤져보고 있었다니.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그, 그래. 고맙군. 다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은자 말고도 돈이 될 법한 물건을 챙겨 갖고 나오겠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에서 눈치껏 훔칠 수 있는 게 포쾌들의 특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연우혁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 * *
오충의 조카, 오 포쾌는 자신이 나름 일류 포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포쾌들이 눈치 없이 뇌물을 받다가 쫓겨나고 죄인을 돕다가 쫓겨나고 맡은 일을 실패해서 쫓겨나는 동안에도 흔들림 없이 한경의 포쾌로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류 포쾌에게는 일류 포쾌만의 고충이 있었다. 바로 숙부인 오충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연 포쾌, 아니 이제는 연 포두군. 연 포두가 사 포두를 대신해서 구역을 맡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사 포두 그 놈이 만만한 놈이 아니거든. 포쾌로 강등됐다 하더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더군다나 거기 포쾌들은 다 사 포두 놈의 부하 아니었느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쩝쩝.
-그러니 네가 그쪽으로 가서 연 포두를 도와라.
-예?! 숙부님, 제가 순찰을 하지 않으면 여기 구역은...
-다 알고 하는 소리다. 내가 포쾌 노릇을 안 해봤을 줄 아느냐? 한 명 정도는 괜찮을 테니 가서 연 포두를 도와라. 가서 눈치껏 상황을 보고 내게 전하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연 포두는 그냥 포두 자리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오랫동안 한경의 포두로 일한 오 포두는 나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면에서 연우혁은 아무리 봐도 포두로 계속 머무를 사람이 아니었다.
오 포두의 재주야 포두 노릇이 한계라지만, 아무리 봐도 연우혁은 얼마든지 기회만 찾아오면 그 이상도 될 수 있는 젊은이였다.
꼭 자기 밑에서 공을 세운 부하라서가 아니라 훗날을 생각해서 은혜를 베풀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시끄럽고 빨리 가기나 해라! 네놈의 녹봉을 누가 주는지 알고는 있느냐?
호통을 치는 숙부의 모습에 오 포쾌는 찔끔해서 물러나왔다.
'하긴 확실히 사가놈 밑의 포쾌들이 험악하긴 하다.'
정든 구역을 바꾸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숙부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는 오 포쾌도 이해했다.
아마 찾아가면 그 포쾌들이 꽤나 경계심을 품을 테니, 적당히 술이라도 사가서 경계심을 풀고 사가놈이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 물어봐야...
"저는 대협을 시기해서 목숨을 노렸으나 대협께서는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앞으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오 포쾌는 안가 마당에서 사가놈이 머리를 쿵쿵 땅바닥에 박고 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
대체 무슨 작당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야공 강 노인 (1)
사 포쾌는 이마에 피가 흥건히 고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극적인 모습에 다른 포쾌 몇몇은 '속임수가 아니냐'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 포쾌가 포두였을 시절 뜯긴 원한이 있는 만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연우혁은 사 포쾌가 지금 진심으로 감복하고 있다는 걸 영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말을 했길래 저러나?"
연우혁의 질문에 막 포쾌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그냥 있었던 일을 놀라지 말라고 설명했을 뿐입니다."
객잔에서 끙끙 앓아누워 있던 사 포쾌한테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던 건 바로 막 포쾌였다.
당문의 무인이 동료들을 끌고 나간 사이, 막 포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에 나섰다.
점소이 놈이 당문 무인한테 누명을 씌우려다 죽었고, 당문 무인이 분노해서 너도 죽이려 했는데 새로 온 포두가 막았고...
사 포쾌는 믿기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하긴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에 막 포쾌도 인내심을 가지고 몇 번이고 설명해줬다.
"그게 다입니다."
"그게 다라고?"
"예... 듣고 나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던데..."
엎드려 있던 사 포쾌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저는 천성이 거칠고 손속이 독해서 무관에서도 저를 오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이렇게 믿어주신 분은 처음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그, 그래. 알겠으니 일어나라."
사 포쾌 입장에서야 험하고 거친 삶을 살다가 몰락했을 때 받은 은혜가 뼈에 사무칠 수 있어도 연우혁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웠다.
일단 진심으로 충성하겠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지만...
"사 포쾌는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됐다. 부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나."
"...!"
막 포쾌는 연우혁의 대답에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부끄러워했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거칠게 대했다면 애초에 다른 포쾌들은 저 객잔에서 살아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포두가 상관이었기에 그들도 목숨을 부지했던 것 아닌가.
"...예! 과거의 은원은 잊고 대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포쾌끼리 친하게 지낸다면야 좋겠지만..."
연우혁은 포쾌들이 일치단결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서로 성격도 다르고 원한관계도 있는데 어떻게 사람이 일치단결하겠는가.
그냥 각자 시킨 일이나 잘 해오면 충분했다.
"어, 저거..."
"연, 연 포두님."
정문에서 엿듣다가 발각된 오 포쾌는 머뭇거리면서 인사했다. 연우혁은 반가워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오도록. 무슨 일로 왔나?"
"그, 오 포두님께서 말입니다."
오 포쾌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속삭였다. 아무리 자기 밑에서 일한 포쾌라지만, 포두가 됐는데 눈치 없게 굴었다가는 호되게 당할 수 있었다.
연우혁은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다른 포쾌들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도우라고 절 보내셨..."
"문제?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지?"
"저 포쾌들 말입니다. 닳고 닳은 놈들이라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사 포쾌 같은 놈은 더더욱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오 포쾌는 매우 진지했다.
포쾌들의 충성심이 보이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별 의미없는 흰소리였지만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렇군."
"오 포두님이 한동안 여기서 일하라고 하셨으니, 수상쩍은 포쾌가 있으면 슬쩍 말해주십시오."
"그, 그래. 그러도록 하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연 포두님 계십니까? 전갈을 갖고 왔습니다. 강 노인이라고 하시면 아실 거라고..."
"무슨 일이지?"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지금 가지."
강 노인이 부른다는 말에 연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의 뒤를 쫓았다.
포두가 사라지자 오 포쾌는 매서운 눈길로 다른 놈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마음을 품은 놈이 있다면 분명 여기서 티가 나리라.
"빨리 순찰 돌러 가세."
"그래야겠군."
"저번에 들어온 송사(訟事)는 어떻게 할 건가? 관아에 고발한 주제에 철전 하나 바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냥 처리해야지. 포두님의 체면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은가."
'...???'
오 포쾌는 뇌물 없이 일하겠다는 동료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눈을 끔벅였다.
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신통력으로 출가라도 시킨 건가!?'
* * *
강 노인은 대장간 뒤쪽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작은 집에 의원이 세 명이나 붙어서 강 노인의 상태를 진맥 중이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괜찮으니 돌아가셔도 좋소."
"아닙니다! 좀 더 확인해야 합니다."
"...?"
한경의 의원들이 이렇게 책임감 있었나 의아해하던 연우혁은 의원들이 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식은땀을 흘리게 했을지는 뻔했다.
"잠깐, 이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좀 나가주시오."
"예, 예.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울화나 불편함이 있으면 바로 저희를 부르셔야..."
의원들은 강 노인이 진심으로 걱정됐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연우혁이 보기에 강 노인은 딱히 편찮은 곳이 없었다.
'아프면 죽인다고 협박이라도 한 것 같은데.'
"앉으십시오. 대접해드릴 게 마땅치 않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강 노인은 형형한 눈빛으로 연우혁을 보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 구해주신 게 포두님이라고 말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할 줄 아는 포두는 그리 많지 않지요... 물어보니, 무공을 꽤 진지하게 익힌다고 들었습니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연우혁은 상대가 왜 이런 말을 꺼냈나 싶어 의아해했다. 그런 속마음도 모르고 강 노인은 여상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한 때 무공에 뜻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당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가전무공을 열심히 수련했었지요."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당문의 무인과 친한 만큼 당문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아예 당문의 본가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당문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지간한 신뢰나 공헌이 없다면 당문 같은 가문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걸 허락해줄 리 없었다.
"무림인이셨습니까?"
"허허. 아주 예전에나 그랬을 뿐입니다. 무림은... 철없는 젊은이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강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옷 위를 쓰다듬었다. 연우혁은 영안을 쓰지 않아도 그 밑에 있는 흉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림인으로서 살아가는 걸 포기하고 기관진식(機關陣式)만 건드리니 마음은 편하더군요."
"훌륭하십니다. 무림인보다는 야공(冶工)이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연우혁의 말에 강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철갈방에서 갇혀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은 없지만... 아무래도 물려받은 무공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지 않으면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 무공은 당문의 무공이 아닌 제 가문의 무공입니다. 부디 포두님께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
예상치 못한 말에 연우혁은 아까보다 더 놀랐다.
한 때 당문의 무인이었던 노인이 물려주고 싶어하는 무공이라면 평범한 수준의 무공은 아닐 것이다.
그런 무공을 처음 만난 연우혁에게 주고 싶어 하다니.
기쁜 걸 떠나서 걱정이 됐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문의 무인들이 지랄을 하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강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무공은 당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높게 평가하고 말해주셨는데, 거절한다면 그것 또한 무례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 진전을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우혁은 깊숙이 예를 표했다.
당문이 암기와 독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대세가 기준에서 특별히 뛰어난 거고 다른 무공들도 수준이 낮지는 않았다.
하북팽가가 도법에만 능하지 않듯이 당문의 다른 검법이나 권법, 장법이나 보법 등 다른 무공들도 무림의 기준으로 치자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특히 단순하고 쉽기로 소문난 권법을 쓰는 연우혁에게는 어떤 권법이든 일품의 권법이리라.
안 그래도 철갈권과 싸우면서 균형 잡힌 무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었는데...
'당문의 무인이던 사람이 높게 평가하는 무공이라면 분명 대단한 상승의 무공...'
-탈혼비도(奪魂飛刀)
"...앗. 비도술입니까?"
연우혁은 예상치 못한 무공에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상대의 가전무공이라고 해서 꼭 암기술이나 독공이 아니란 법은 없었다.
"맞습니다. 허허. 암기술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연우혁이 쓰는 암기라고는 기껏해야 저번에 산채 토벌하러 갔다가 주운 암기를 던지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무림에서 좋은 암기는 그만큼 비싼 탓에 연우혁 같은 포두가 쓸 만한 무기가 아니었다. 사파 고수가 기묘한 암기를 쓸 수 있는 건 그만큼 은자를 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암기술이 나쁘지 않긴 하다.'
당황했던 연우혁은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당령이 싸우는 걸 떠올려보면 암기술은 절대 나쁜 무공이 아니었다. 특히 자기보다 한 수 낮은 무인들을 상대할 때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불균형한 형태로 무공을 익힌 상황에서 더 특이한 무공을 추가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분명 있으면 도움은 되리라.
"거궐(巨闕)에서 전중(膻中)으로, 전중에서 기사(氣舍)로, 기사에서 협백(俠白)으로..."
강 노인은 천천히 무공의 구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무공은 동작만으로 설명이 끝났지만 복잡한 무공은 그 안에 담긴 내력의 흐름은 물론이고 전수자의 비유나 깨달음, 쓰면서 느낀 철학과 이치까지도 설명을 해야 제대로 전수가 됐다.
이 탈혼비도는 강 노인의 가전무공에 당문에서 반평생을 일하며 얻은 암기의 깨달음을 섞은 무공.
제대로 무공을 이해하고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 년에서 일 년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강 노인은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이 포두를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어떻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어려운 무공이다.'
확실히 어려운 무공이라는 걸 느낀 연우혁은 영안을 열었다. 그리고 무공서를 쫙 훑은 다음 완전히 이해했다.
야공 강 노인 (2)
사실, 비급 하나로 무공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무림인이 겪을 수 있는 수천 가지도 넘는 상황에 대한 내공과 외공의 상세한 움직임을 어떻게 비급 하나에 다 담아낼 수 있겠는가. 괜히 상승무공에 비유나 철학이나 이치가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무공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이 중요했다.
먼저 그 무공을 익히면서 얻은 깨달음으로 이끌어줘야 제자들이 헤매지 않고 빠르게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연우혁의 영안은 실로 놀라운 능력이었다.
비급의 정보를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별다른 과정 없이 무공에 담긴 깊은 이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연우혁 본인은 그런 점에 새삼스럽게 전율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무인의 초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훔쳐낼 수 있는데 잘 정리된 비급이라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 무공은... 정말이지...'
연우혁은 방금 얻은 정보를 소화시키듯이 깊숙이 생각에 잠겼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와서 소화에도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강 노인이 말한 것처럼 이 무공은 어려운 무공이었고, 대단한 무공이었으며, 그리고...
'...너무 극단적인 것 같은데???'
연우혁이 보기에도 지나치게 극단적인 무공이었던 것이다.
무공에 적힌 모든 운기와 행공의 과정이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집중되어 있었다.
비도를 빠르고 강하게 던지기 위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내공을 쥐어짜내듯이 모아서 천신(天神)을 느끼며, 외공에 사용되는 모든 근육을 하나로 일치시켜 지기(地祇)를 불러오며,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뜻을 한 점에 모아 인귀(人鬼)를 깃들게 한다...
멋지고 현학적인 비유긴 했지만 완전히 이해한 연우혁 입장에서 이 무공은 '모든 내공과 외공을 극한까지 쏟아 부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비도를 던져라'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내공과 외공을 극한까지 쏟아 붓는 것도 평범한 무공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 만큼 대단한 무공은 맞긴 한데...
'너무 위험하지 않나?'
"저,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강 노인은 벌써 질문을 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흐뭇해했다.
과연 제갈세가와 연이 있다는 소문이 돌 만큼 영리한 포두답게 벌써 어느 정도 이해를 한 모양이었다.
"이 무공은 그러니까, 온 힘을 다 짜내서 비도를 쏘아보내는 무공 아닙니까?"
"...맞습니다!! 허허, 이렇게 뛰어나실 줄은 몰랐는데...!"
강 노인은 깜짝 놀라서 동의했다.
후인으로 삼은 만큼 기대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혹시 다른 초식들은 따로 있습니까?"
연우혁은 혹시 탈혼비도의 다른 초식들은 다른 비급에 적혀 있나 싶었다.
아무리 암기술이라 하더라도 극단적인 초식 하나만으로 구성된 무공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당장 연우혁이 소문으로 들은 사천당문의 암기술만 해도 여러 초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암기들의 속도를 서로 다르게 해서 쏘아 보내거나, 암기 뒤에 암기를 겹쳐서 쏘아 보내거나, 처음 몇 개의 암기를 막아내면 다음 암기에는 특별한 살초가 숨어 있다거나...
"없습니다."
그러나 강 노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까?"
"암기술은 초식이 많을수록 약해지고 초식이 적을수록 지독해집니다."
"하지만 무림을 돌아다니다보면 초식 하나로 끝내지 못하는 상황이 닥쳐올 수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초식 하나로 끝낼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드셔야 합니다."
"..."
연우혁은 상대가 산전수전 겪은 무림의 종사(宗師)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외곬인 낙향한 무림인인지 헷갈렸다.
물론 초식 하나로 끝장낼 수 있도록 각오를 다진 채 상황을 만들라는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논리라면 무림의 모든 무공들은 초식 하나로만 구성되어 있으리라.
당장 극단적인 찌르기로 유명한 점창의 사일검법만 해도 여러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던가.
'안정적인 무공을 원했는데...'
연우혁이 기대한 건 같은 암기술이라 하더라도 여러 상황에서 대응 가능한 안정적인 당문의 비도술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냥 언제나 목숨 걸고 싸우는 사파 마두나 쓸 법한 지독한 초식 아닌가.
'...이제와서 새삼스럽지만, 내가 익힌 무공들이 지나치게 좀 사파스럽지 않나?'
편법에 독이 묻은 병장기에 암기술에 권법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종무공을 깊숙이 익힌 무림인보다는 저잣거리 구르는 사파 느낌이 물씬 났다.
"아직 이해를 못하신 것 같은데,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 이해는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할 테니 틀린 부분이 있으면 말해주십시오."
연우혁의 말에 강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 포두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 짧은 사이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단 말인가?
하긴 아까 말한 걸 보면 이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한 것...
"!!!!"
연우혁의 설명이 시작되자 긴가민가했던 강 노인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후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강 노인은 붉어진 눈시울을 닦으며 말했다.
예상 외의 성과였다.
그저 후인을 찾아서 가문의 무공과 평생의 심득을 물려 줄 생각이었는데, 저런 재능을 보니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골랐다는 확신이 들었다.
"노야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무공을 수련해서 반드시 군림천하 하겠습니다."
"...포두로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차.'
연우혁은 생각 없이 너무 대충 말했다는 걸 깨닫고 말을 바꿨다.
"무공을 수련해서 반드시 명성을 날리겠습니다."
"예. 허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실, 철갈방에서 만든 암기들도 좀 드리고 싶은데 다 두고 나와서..."
"...사실 그 암기들을 챙겨 갖고 나왔습니다."
살짝 머쓱하긴 했지만 연우혁은 좋은 기회여서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포쾌들이 돈 되는 물건들을 찾을 때 당연히 안에 있는 쇳덩이들도 끌려 나왔던 것이다.
강 노인은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허허 웃으며 잘됐다고 손뼉을 쳤다.
"드리고 싶은 수전(袖箭)이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
작은 통 안에 용수철 같은 기관들을 채워 넣고 그 힘으로 암기를 쏘아 보내는 수전은 무림의 강력한(그리고 비싼) 암기 중 하나였다.
그 위력은 당령이 쓴 걸 직접 봤었기에 연우혁도 잘 알았다. 준비만 잘 해놓으면 별다른 체력을 소모하지 않고 쉽게 상대를 사살할 수 있는 암기였다.
"수전은 그 안에 들어가는 화살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만들기 어려워집니다."
한 발을 쏘아 보내는 단통수전(單筒袖箭)과 달리 쌍통수전(雙筒袖箭)이나 삼재수전(三才袖箭)만 되어도 만드는 데에 손이 많이 들어갔다.
그리고 강 노인이 철갈방에서 만들던 건 무려 구궁수전(九宮袖箭)이었다.
"이 녀석이 아주 뛰어난 물건이지요. 여기를 돌리면..."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 안에서 튕겨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그 안을 훑어보고 구조에 감동했다. 강 노인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지 알 것 같았다.
가져다가 팔기만 해도 금으로 값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그냥 내주다니.
"아시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암기입니다!"
"허허. 부끄럽습니다. 이 녀석이 연 포두님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기쁘겠습니다."
"이걸 제가 받아도 될지..."
"이제는 나온지 한참 됐지만 저 또한 당문의 무인이었습니다. 당문의 무인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그런가?'
연우혁은 강 노인을 보자 정말 당문의 무인이었나 살짝 의심이 갔다.
당문의 무인이었던 것치고는 사람이 너무 예의바르고 정상이지 않은가.
어쩌면 당문의 핏줄이 아니었기에 그런 걸지도...
쾅!
"강 노인이 여기 있나?"
'감히 어떤 놈이?'
연우혁은 발끈해서 몸을 돌렸다. 이런 노인을 핍박하는 사파 놈들이 있다면 가진 무공과 (당문의 무인들을) 동원해서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들어온 건 놀랍게도 포쾌들이었다. 포쾌들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연우혁을 보고 당황해했다.
"아, 아니... 혹시 먼저 명령을 받으셨습니까?"
"무슨 소리냐? 무슨 일로 온 거지?"
"판관 나리께서 강 노인에게 아주 크게 화가 나셨습니다."
"!"
포두나 포쾌들 입장에서 한경의 판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경의 사법을 맡아 처리하는 만큼 다른 관리들에 비해 위세가 높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직접적인 건 이들에게 포두와 포쾌를 뽑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판관들은 정식으로 직첩(職牒)을 받은 정관(正官)이었고 파리 목숨인 포두나 포쾌하고는 비교하면 하늘과 땅 같은 차이였다.
판관 나리가 도심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라고 화를 내면 그 날로 포두들은 머리를 싸매고 골치를 앓아야 했다.
그런 판관이 강 노인을 잡아오라고 하다니.
"어째서?"
"대금을 받은 주제에 약속한 물건을 반 년이 넘게 주지 않았다고..."
"아니, 납치되셨잖나!"
"판관 나리께서는 그런 걸 모르십니다! 일단 모셔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희 목숨이 위험합니다."
포쾌들은 연우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최근에 사 포두를 베어버리고 그 자리를 뺏었다는 소문 때문에 이렇게 공손하게 구는 거지, 아니었다면 저런 젊은 놈에게 굽신거릴 일도 없었다.
강 노인이 괜찮다는 듯이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제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니 가서 해명하면 이해해주실 겁니다."
"...혹시 모르니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연우혁은 자청해서 나섰다.
원래라면 같이 껴서 좋을 게 없었지만 강 노인에게는 받은 게 너무 많았다.
게다가 사천당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 아닌가. 강 노인이 가서 곤장이라도 맞으면 판관은 물론이고 연우혁한테도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강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허허. 포두님께서는 포두 노릇을 하시기에는 지나치게 의기가 드높으십니다."
"예??"
* * *
맹 판관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관청 형관(刑館)의 가운데에 앉아 강 노인을 잡으러 간 포쾌들을 기다렸다.
돈을 받아간 주제에 계속 물건을 내놓지 않고 사라졌다가 뒤늦게 돌아와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니.
"잡아왔습니다. 어르신!"
"늦지 않느냐! 이 구더기 놈들. 잠깐. 네놈은..."
"연우혁이라고 합니다! 판관 어르신의 일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 이렇게 같이 왔습니다."
괜찮은 아첨에 맹 판관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뇌물도 바치지 않고 지부 나리한테 잘 보여서 포두가 된 놈이라 괘씸했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눈치가 있기도 했다.
앞으로 처신만 잘 한다면...
"어르신! 제가 감히 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
포쾌들은 깜짝 놀랐다. 맹 판관도 넓적한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감히 좋게 봐줬더니 기어오르다니?
"네가 감히..."
"만약 쓸모없는 말이라면 곤장을 치셔도 좋습니다! 한 말씀만 하게 해주십시오!"
"으, 으음."
압박에도 불구하고 젊은 포두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맹 판관은 불쾌한 와중에도 호기심이 생겼다.
"...뭐냐? 말해봐라."
"죄송하오나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 귀를 가까이..."
포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포두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직감한 것이다. 성질 더러운 맹 판관 앞에서 저렇게 까불다니.
아니나다를까 이야기를 들은 맹 판관의 안색이 변했다.
"저 노인을 풀어줘라!!"
"...???"
맹판관요괴저택 (1)
포쾌들은 뜻밖의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맹 판관이 신경질을 부리며 외쳤다.
"이 구더기들아!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이냐! 애초에 내가 언제 잡아오라고 했느냐! 작업을 확인하라고 했지!"
"...?!!!"
'뭐야?'
'귀, 귀신에 홀리신 건가?'
포쾌들 입장에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긴 했다.
그 꼬장꼬장하고 성질 더러운 판관이 자기 체면도 상관하지 않고 말을 뒤집다니.
저 젊은 포두가 귀신을 부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설마 정말로...
허둥대며 움직이는 포쾌들을 보며, 맹 판관은 아직 옆에 서있던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방금 한 말이 정녕 사실이렷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제 목을 걸겠습니다."
"흥. 네 목이 그만한 가치가 있겠나. 하지만 잘했다. 제법 쓸모가 있구나."
맹 판관은 일단 연우혁이 한 말을 믿기로 했다.
-판관 어르신. 저 강 노인이란 분은 젊었을 적 사천당문에서 일하신 것으로 친분이 아주 깊습니다! 당문의 사람들이 한경에 몇 와있는 걸로 아는데, 그 무뢰배들의 체면도 생각해주셔야...
확실히 저 대장장이의 뛰어난 기술을 보면 당문과 관계가 있었다는 말도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한경에 당문 무인들이 여럿 와있었는데, 이들의 건방지고 무례한 행동을 생각해봤을 때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머리가 돌아가는 놈은 확실해. 제법 기특하군.'
다른 포쾌나 포두들이 하라는 것도 제대로 못할 때 그걸 미리 알아차려서 자신한테 고해바치다니.
제법 기특한 놈이었다. 맹 판관은 연우혁이 뇌물을 바치지 않은 걸 이만 잊어주기로 했다.
쾅!
그 순간 형관의 두꺼운 문짝이 날아가더니 비교적 젊은 중년의 무림인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빛과 손톱에서는 섬뜩한 목청(木靑)색 빛이 번뜩였고 오른쪽 팔은 왼쪽 팔에 비해 유난히 길고 굵었다. 연우혁은 상대가 자기보다 훨씬 고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뭐, 뭐, 뭐하는 놈이냐?!"
문 옆에 있던 포쾌가 기겁해서 외쳤다.
여기 형관은 판관이 머무르는 곳이자 근처에는 관청의 다른 관리들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심지어 이 한경을 상징하는 지부 어르신이 공무를 보는 정당(正堂)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마디로 행패를 부렸다가는 목숨 부지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오는 자가 있다니. 포쾌들은 그런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네놈이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포쾌들이 옆에서 뭐라고 지껄이던 간에 중년의 무림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길가의 돌멩이마냥 무시하고는 발을 박차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무림인은 판관 앞에 서있었다. 무림인은 맹 판관을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이 여기서 판관 노릇한다는 맹가 놈이냐?"
"그... 감... 누구시오?"
'감히 누구냐'라고 외치려던 맹 판관은 상대의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껴 말을 바꿨다.
"오해가 있는 것 같..."
철썩!
무림인은 판관의 넓적한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맹 판관은 옆으로 날아갔다.
"어억!"
"야, 이 맹가의 오라질 놈아! 네놈이 뭔데 강 어르신을 끌고 가! 네놈이 이 당등의 체면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사천당문!!'
연우혁은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있는 걸 보니 당령보다 배분이 높은 사천당문의 무인이 분명했다.
정말 놀랍게도 당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문의 다른 무인들은 당령보다 더욱 성질이 사납고 난폭했던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 잡혀가도 그렇지 대낮에 형관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오다니?
당등은 넘어진 판관을 일으켜 세우더니 뺨을 한 방 더 올려붙였다. 판관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내공을 담아서 때리지는 않았지만 단련하지 않은 판관 입장에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한 형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어? 당장 불러와라! 이 아우의 체면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지 내가 직접 물어보겠다!"
"한, 한 형이라면 설마 지부 어르신을 말씀하시는...?"
아픈 와중에도 판관은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이 미친 당문의 무인은 그냥 일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한 것이었다.
지부 어르신과 호형호제 할 만큼 친하다면 판관의 뺨 정도는 수십 방 올려붙여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 새끼야!"
당등은 이야기하다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이마로 판관의 코를 박아버렸다. 판관은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한 형께서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 불러와라. 불러오란 말이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협!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몰라 뵙고..."
"용서해주십시오. 대협! 오해가 있었습니다!"
"?"
당등은 갑자기 끼어드는 포두를 보고 분노를 터뜨리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혹시 네놈이 연우혁이냐?"
"맞습니다."
"아! 네 이야기를 들었다. 강 어르신을 찾아냈다고?"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령이 다행히 이 미친 무인에게 말을 해준 모양이었다.
"잘했다. 잘했어! 내 살면서 포두 노릇을 하는 놈은 본 적이 없었는데. 너 같은 포두 놈들만 있다면 얼마나..."
"대협. 판관 어르신께서는 바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게 정말이냐?"
당등은 기특한 포두를 만난 김에 분노를 멈출까, 아니면 그냥 분노를 더 터뜨릴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연우혁보다 더 입김이 강한 사람도 있었다.
판관이 몇 대 맞는 건 그냥 지켜봤던 강 노인이었지만 연우혁의 일이 되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맞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대협."
"아니,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
강 노인까지 나서자 당등은 재빨리 판관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맹 판관은 허겁지겁 연우혁 뒤로 기어 도망쳤다.
"그만 때리겠습니다. 저깟 놈, 충분히 교훈을 얻었을 겁니다. 그러니 어르신도 그러지 마십시오. 아저씨께서 제게 해주신 은혜가..."
맹 판관이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저, 저 미친 놈을 아느냐??"
"모릅니다. 강 노인을 구출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보다 조심하십시오! 무림인들의 청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듣지 않습니까."
"그... 그렇구나. 어디 가지 말고 내 앞에 있어라! 꼭 날 지켜줘야 한다. 내, 오늘 이 보답은 반드시 하마."
맹 판관은 어린아이처럼 연우혁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속삭였다. 어지간히 당등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거 미안하게 됐소."
강 노인과 이야기를 끝낸 당등은 대충 사과했다.
그 사과에 맹 판관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사과를 하지 말 것이지 저딴 식으로 하니 더더욱 굴욕적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들어보니 어르신에게 뭘 자꾸 만들라고 부탁했다던데. 맞소?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왜 자꾸 그런 걸 만들라고 한 거요? 뭐 수탈이라도 하려고 그러나?"
"..."
굴욕을 씹어 삼키며 맹 판관은 연우혁 뒤에서 천천히 설명했다.
"...집에 자꾸 요괴가 출몰해서 그렇습니다."
"뭐? 요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보다 못한 강 노인이 나서서 말렸다. 아까 판관이 맞는 건 내버려뒀던 사람이 이러는 걸 보니 정말 불쌍한 모양이었다.
맹 판관의 말은 이랬다.
언제부턴가 한경에 있던 맹 판관의 저택에 한밤이 되면 웬 요괴가 나타나 기괴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탐관오리 맹가 놈아, 네놈이 집어삼킨 재물들을 백성에게 돌려줘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이 어르신이 집어삼켜주마!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요괴의 모습에 기겁한 하인들이 달려가면 이 요괴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온 집에 불을 밝혀두고 버티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다시 요괴가 나타나서 저택에 기괴한 소리를 내뱉고 사라졌다.
비싼 돈을 주고 호위를 고용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호위들이 농락만 당했다.
"쉽군."
듣자마자 당등은 알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물론이고 다른 포쾌들도 깜짝 놀라서 당등을 쳐다보았다.
과연 당문의 경험 많은 무인답게 이게 무슨 요괴의 짓인지 알아차린 것일까?
"집어삼킨 재물을 백성들한테 돌려주면 될 것 아닌가."
"..."
"..."
맹 판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안 그래도 엉망인 얼굴이 더 엉망이 됐다. 연우혁은 판관에게 속삭였다.
"참으셔야 합니다."
"알... 알고 있네."
까득!
맹 판관은 이를 갈며 인내했다.
"요괴 놈의 헛소리를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재물을 몰래 긁어모은 적이 없습니다."
"하!"
당등은 대놓고 비웃었다. 포쾌들 중 몇몇은 그 모습에 통쾌하단 표정을 지었다. 무림인들이 대부분 법도를 신경 쓰지 않는 야인이라지만 가끔은 그래서 좋을 때가 있었다.
저 욕심 많은 판관이 망신을 당할 일이 또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요괴 놈하고 어르신한테 맡긴 일이 무슨 상관이오?"
"요괴는 양기(陽氣)에 약하니 폭죽을 쏘아대는 장치를 만들어서 저택에 배치하려고 했습니다."
'효과적인 방법이 맞나?'
연우혁은 의아해했지만 다른 포쾌나 당등까지도 제법 그럴듯한 방법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 만하겠군."
"판관 어르신. 일이 늦어져서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철갈방의 무리들이 이 늙은이를 납치한 탓에 몸이 둔해지고 약해진 것이니, 제발 선처를..."
"어이쿠,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등이 눈을 부릅뜨자 맹 판관은 다급히 대답했다.
"물건은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해주셔도 됩니다. 그깟 요괴 놈, 사실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우혁은 판관의 상태가 꽤 잠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안으로 보니 온갖 피곤이 가득했던 것이다.
'하긴 몇 개월은 더 난리를 쳤을 테니...'
"아저씨. 혹시 모르니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대충 일이 마무리되자 당등은 강 노인을 모시고 갈 준비를 했다.
연우혁과 맹 판관은 빨리 당문 무인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포두 너도 따라와라."
"..."
연우혁은 당문 무인과 엮이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옆의 맹 판관이 보내는 필사적인 눈빛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하하. 참 영특한 포두로군."
맹판관요괴저택 (2)
관청을 나와 쭉 걸어 내려오면서 당등과 강 노인이 옛날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사이 연우혁은 틈을 노렸다.
"대협.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판관 어르신의 저택에 나타나는 요괴를 좀 조사해보려고 합니다."
"오."
당등은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연우혁은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맹 판관의 양쪽 뺨이 붓고 코뼈가 조금 내려앉긴 했지만 어쨌든 당문과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이다.
이제 이대로 미친 당문의 무인만 보내면...
"나도 좀 구경하고 싶군. 기다려라. 어르신만 데려다드리고 갈 테니까."
"..."
* * *
강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당등은 팔짱을 끼고 젊은 포두의 뒤를 쫓았다.
눈빛에는 평소 넘치던 살기 대신 호기심이 가득했다.
당가의 무인들은 외부인들을 잘 칭찬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가의 무인들은 살가움이나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등이 생각하기에, 그건 당가의 무인들이 이 무림에서 진정한 협(俠)과 의(義)를 아는 유일한 문파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정파들은 시늉이나 내는 정도였고...
하여간 그렇기에 이런 당가의 무인에게 외부인이 칭찬을 받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젊은 포두는 그 대단한 일을 해냈다.
당령이 그리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저 젊은 포두가 없었다면 강 노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했다.
'젊은 포두치고 무공이 뛰어나긴 한데.'
당등은 뒤에서 찬찬히 연우혁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젊은 포두치고 무공이 뛰어난 편이긴 했지만 명문세가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편이었다.
이런 수준으로 동귀어진을 펼치는 철갈방의 마두와 배짱 있게 맞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담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강 노인이 남긴 파자(破字)를 순식간에 알아차릴 정도로 영특한 만큼, 상황을 주도면밀히 계산했으리라.
당등의 머릿속에 부족한 무공을 두뇌로 채우는 다른 세가가 떠올랐다.
"혹시 부친께서 제갈세가 출신인가?"
"...예?!?"
앞에서 걸어가던 연우혁은 기겁해서 주변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제갈세가의 무인 중 하나가 몰래 사생아를 낳았다는 소리 아닌가. 제갈세가 사람들이 듣는다면 뒷목 잡을 소리였다.
당등은 연우혁의 반응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은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비밀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것치고는 너무 머리가 좋은데."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린 탓에 여러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아..."
당등은 안타깝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나이 있는 무인인 만큼 상단전이 열린 사람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감이다."
"괜찮습니다. 다 왔습니다."
연우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당등은 고개를 들고 장소를 확인했다. 한경 외곽의 다 무너져가는 고묘(古廟)와 그 위에 대충 휘갈긴 협(俠)자. 그리고 안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
무림에서 이런 특징을 가진 장소는 많지 않았다.
"개방?"
"예. 한경의 개방 분타입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같은 구파일방이라 하더라도 개방은 그 위치가 조금 특수했다. 관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만약 구파의 무림인이 관청에 방문한다면 대부분 '도사님, 선사님, 오셨습니까'하며 대우를 받았다.
구파 문파가 오대세가처럼 강력한 힘과 명성, 인맥을 갖고 있어서기도 했지만 일단 그걸 제외하더라도 구파의 무림인들은 세간에서도 존경 받을 요소들이 많았던 것이다.
수양이 뛰어난 도사나 승려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관리들도 존경하며 흠모했다.
그에 비해 개방의 무림인이 관청에 방문한다면?
일단 관리들은 삐딱한 자세로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심지어 일결이나 이결 제자가 아니라 분타주가 와도 그랬다.
개방의 힘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개방이 그만큼 관아와 깊이 엮여 있기 때문이었다.
화산파의 무림인이라면 관리한테 모욕을 받으면 뺨을 갈겨버리고 화산으로 돌아가면 됐다.
하지만 개방의 무림인이 관리의 뺨을 갈기면 관리들은 펄펄 뛰며 이 인근 거지들의 구걸을 방해하고, 거지들에게 맡기는 각종 더럽지만 짭짤한 일들을 취소해버리고, 거지들끼리의 법도에 따라 처리한 일도 트집을 잡고...
다른 구파와 달리 개방은 관에게 허락받은 특권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책임져야 할 거지들도 그만큼 많았다.
부역을 지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심지어 국법도 잘 적용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관리들은 '거지들의 귀찮은 일은 거지들끼리 알아서 해라'하며 백성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모욕일 수도 있었지만 특권인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개방과 관은 서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태도를 견지했다.
거지들은 허락된 구역 안에서만 구걸을 하고, 포두나 포쾌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포두나 포쾌들은 거지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먼저 핍박하거나 갈취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우혁이 오 포쾌한테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거지 놈들 만만해보여도 돈 뜯지 마라'였다.
포쾌 입장에서는 엮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긴 왜 온 거지?"
"안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포두 나으리께서 여긴 무슨 일로..."
젊은 거지 하나가 연 포두를 보고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두가 분타까지 찾아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어린 놈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소?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가 따끔하게 가르치겠소. 최소한 다리 하나는 부러뜨릴 테니 이만 돌아가시오."
"그것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분타주를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아니... 분타주 님을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닌..."
당등의 눈빛에서 살기가 짙어지고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거지는 그제야 상대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설, 설마 독혼수 당등 대협이십니까?"
"물을 시간에 분타주나 부르지 그러냐?"
"예, 예!"
'잘 데리고 왔군.'
연우혁은 당등을 데리고 온 보람을 처음으로 느꼈다.
억지로 따라올 때는 질색했지만 역시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는 법이었다. 개방 분타에 들어갈 때는 당문의 무인이 가진 명성이 제법 쓸만했다.
"들어오십시오. 분타주께서 안에 계십니다."
연우혁은 거미줄을 손으로 대충 치운 다음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몇몇 거지들이 깨진 그릇에 죽을 담아 손으로 퍼먹고 있었다. 연우혁과 눈이 마주치자 절대 줄 수 없다는 듯이 그릇을 손으로 가렸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당등은 젊은 포두의 말에 놀랐다.
"...분타주 님을 뵙습니다."
"!"
그릇을 손으로 가리던 거지가 꼬질꼬질한 소매로 입가를 슥 닦은 다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 이 거지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문데. 용케 알아봤군. 역시 소문이 자자한 명포두라 다른 건가?"
"어떻게 알아봤냐?"
당등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당장 당등도 분타주인 걸 알고 유심히 지켜보고 나서야 상대의 무공이 다른 거지들보다 뛰어나단 걸 알 수 있었다.
저 분타주의 무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계열의 무공이 분명했다. 개방에는 거지들이 많아 저런 무공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 포두는 분타주와 안면도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아차렸단 말인가?
"매듭을 봤습니다."
개방의 제자들은 새끼줄에 묶은 매듭의 개수로 신분을 표현했다. 분타주라면 세 개의 매듭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분타주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난 매듭이 없네만?"
분타주는 일부러 매듭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매듭이 없어서 분타주 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 정말 명포두가 맞군 그래! 개수가 아니라 없어서라니. 그래. 그건 생각 못했군."
사실 영안으로 확인한 거였지만 연우혁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등은 감탄한 눈빛으로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명포두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그것도 독혼수 대협과 같이? 필요한 정보라도 있나?"
팔짱을 낀 당등은 아마 포두가 필요한 정보를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무림에서 개방만큼 소문과 정보에 빠삭한 이들이 드물었으니까. 온갖 곳을 돌아다니는 거지들은 주워듣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분타주 님에게만 이야기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다들 나가있어라."
분타주는 의아해하면서도 거지들을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당등과 분타주만 남자 연우혁은 입을 열었다.
"분타주 님. 판관 저택에 요괴인 척 소란을 일으키시는 건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당등은 놀라서 입을 쩍 벌린 채 젊은 포두를 쳐다보았다.
* * *
협걸개(俠乞丐)란 별호를 갖고 있는 정 분타주는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눈앞의 포두가 뛰어나단 소문을 많이 듣긴 했지만, 그 중에는 과장도 어느 정도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원래 무림의 소문이란 건 칠 할이 거짓 아니었던가.
백 보 양보하더라도 단서를 찾고 범인을 집요하게 쫓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지, 앉은 자리에서 백 리를 보는 그런 재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분타주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포두에 관한 소문들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판관 저택에 나타나는 요괴들은 개방의 거지들입니다. 무공을 익혔으니 밤에 담장을 넘고 요괴인 척 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겠지요. 게다가 개방의 귀가 있으니 저택의 방비도 쉽게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개방이 왜 그런 짓을?"
"아마 그... 판관 나리의 탐학질이 좀 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연우혁의 조심스러운 말에 분타주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 자하고는 구원(舊怨)이 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무슨 짓이오? 들키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의협심이 좋다지만 밑의 거지들도 있지 않소."
당등은 어이가 없어서 분타주를 타박했다. 분타주도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연우혁도 어이가 없어서 당등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판관의 뺨을 대낮에 갈긴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장난하나?'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네."
"들켰잖소. 여기 들켰는데 무슨."
분타주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보다 못한 연우혁이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이제라도 그만두시면... 잠깐. 분타주 님."
영안으로 분타주의 감정을 보고 있던 연우혁은 설마 싶었다.
"...이미 며칠 전에 판관 저택의 은자를 털었네. 놈이 끝까지 버텨서 요괴 시늉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 거참!"
당등은 이 겁 없는 거지에게 벌컥 화를 냈다.
알 만한 사람이 이렇게 뒷감당을 생각 안 하고 일을 저지르면 어떡한단 말인가?
맹판관요괴저택 (3)
화를 내던 당등이 고개를 돌려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속으로 당문의 뻔뻔함을 욕하고 있던 연우혁은 움찔했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런데 왜 그런 거냐?"
"!"
"여기 거지들을 도와줄 이유가 포두 네게는 없을 텐데."
'아. 다른 거였군.'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판관한테 말하지 않고 개방의 분타에 와서 도와줬냐니, 그거야 당연히...
'맹 판관이 보답 안 할 놈이니까 그렇지...'
연우혁이 보기에 맹 판관은 인색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게다가 포두 알기를 길가의 돌멩이마냥 하찮게 알았다.
그런 놈이 자신의 부끄러운 문제를 해결했다고 제대로 보답해줄 리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고 되레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공식적으로 올라온 사건이라면 판관 말고도 다른 관리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차라리 나았지만 이런 일이라면...
차라리 개방의 거지들한테 말해줘서 피해 없이 원만하게 끝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나았다. 개방의 거지들이 난폭하고 국법을 무시하며 사는 놈들이라지만 보답은 확실히 했으니까.
물론 '판관한테 말해봤자 돈 안 돼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판관께서 하신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 녹을 먹는 관리로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
"...!!"
당등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당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곧 죽을 놈이라 그런가? 대단하군!'
상단전이 열려서 단명할 놈이라 그런지 관리 특유의 탐욕이 없고 백성을 위한 사명감만이 번뜩였다. 저런 놈이 제대로 된 관리를 해야 하는데 고작 포두 자리에 있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정 분타주도 깜짝 놀랐다. 분타주는 당등보다 더 놀랐다.
"설... 설마, 자네, 판관 놈이 한 일들도 아는 건가?"
"그야 알겠지! 개방 거지 놈들이 요괴 시늉하는 것도 알았는데 판관 놈이 한 일도 모를까. 이 포두가 아주 신통하오."
'어. 모르는데.'
연우혁이 아는 건 판관이 워낙 탐관오리라 개방의 거지들이 요괴 시늉으로 현혹시키고 은자를 뺏어간 사건이지, 정확히 판관이 탐관오리로서 무슨 일들을 했는지까지는 몰랐다.
다행히 분타주는 알아서 설명을 해줬다.
"한경에서 판관 놈이 한 일을 아는 건 우리 개방의 동도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본적으로 탐관오리들은 거지들도 가리지 않고 탐학질을 해댔다.
찬물을 끼얹고 쪽박을 박살내는 것 정도는 예삿일이고, 거지들한테 시킨 더러운 일들의 삯을 깎아서 주거나 분타에 상납할 은 쪼가리를 강탈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포두 같은 관리는 할 수 없는, 판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개방이 그런 걸로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한경의 길거리를 쏘다니는 거지가 몇 명인데 그런 걸로 하나하나 원한을 품었다가는 끝이 없었다.
"에이..."
당등은 픽 웃었다.
"누가 들으면 개방이 도사들 모임인 줄 알겠소. 저번 사천에서는 개방의 거지 하나가 닭 뺏겼다고 양민을 때려죽였는데."
"..."
연우혁은 나중에 꼭 분타주한테 '저는 당문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해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분타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개방의 거지가 십만인데 그들 중에 성정이 악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긴 그 말도 맞군."
이번에 한경의 개방 분타주를 분개하게 만든 일은 바로 판관의 친척이 저지른 일이었다.
한경의 가옥을 빠삭히 꿰뚫고, 집을 사고 팔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간꾼 노릇을 하는 이른바 가쾌(家儈)는 매우 이문이 남는 직업이었다.
한경처럼 큰 도시에서 집은 언제나 사고 팔렸고, 또 국법에 따라 집을 사고 팔 때는 가쾌의 수결도 반드시 들어가야 하니 이렇게 돈이 벌리는 직업도 찾기 힘들었다.
당연히 이런 일은 이상할 만큼 관리의 친족들이 자주 맡곤 했다.
거기까지는 분타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연우혁 기준에서는 저것도 좀 이상한 일이었지만, 무림 기준으로는 관리 친족한테 요직 맡기는 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가쾌 놈이 쳐죽일 놈이야!"
분타주는 이야기하다보니 새삼 분통이 터진다는 듯이 으르렁댔다.
"가쾌란 놈이 있지도 않은 가짜 가옥을 양민들한테 팔아넘기다니!"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더 악행의 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가쾌는 관의 허락을 받고 거간꾼 노릇을 하는 만큼 거래가 이뤄지면 자기 수결도 관아에 바치는 문서에 적어 넣어야 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가옥을 팔아넘긴 건 적당히 무마할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들통난다면 당연히 가쾌의 목도 같이 날아갔다.
가만히 있어도 꽤 버는 놈이 저렇게 욕심을 부리다니.
당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의아해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지?"
"판관 놈이 뒤를 봐주고 있습니다. 속은 걸 깨달은 자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관아에 고발하려고 하자 판관이 누명을 뒤집어씌워서 입을 막아버린 거지요."
분타주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몇 명은 옥사했고 다른 몇 명은 겁을 먹고 한경에서 야반도주했다. 다른 이들은 이제 속은 걸 알아도 감히 꺼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개방의 거지들이 아니었다면 분타주도 이 일의 내막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쳐죽일 놈입니다. 분타주 님."
"알아줘서 고맙네. 자네 같은 포두가 있다니, 아직 세상의 도리가 다하지 않은 모양이야."
"둘이 의기투합하는 건 좋은데 이번에는 내가 할 이야기가 있소."
당등은 독을 먹은 것마냥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지금 한경에 금의위 교위가 하나 와 있단 말이지."
"..."
"..."
연우혁과 분타주의 안색이 급변했다.
금의위.
명색은 황제의 친위대였지만 실상은 개방이나 하오문을 능가하는 첩보 조직이었다.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을 찾아내야 하는 만큼 사방을 돌아다니며 풍문에 귀를 기울였고 그만큼 악명도 높았다.
금의위는 동창과 함께 무림의 겁 없는 이들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집단이었다.
"금의위 교위가 한경에는 대체 무슨 일로...?"
"난들 알겠냐? 뇌물을 받으러 왔는지, 한경에 먼 친척이 있는지, 아니면 관료 놈이 역모를 꾸몄던지, 금의위 놈들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얼마나 비밀스러운 놈들인데. 한경에 교위가 있다는 것도 내가 지부 형님과 친해서 주워들었던 거다."
꿀꺽 침을 삼킨 분타주가 침착을 되찾기 위해 호흡하며 말했다.
"아직 그리 걱정할 건 없습니다. 일개 교위 아닙니까."
'좀 위험한데.'
연우혁은 생각이 달랐다.
교위는 군관으로 따지면 그리 급이 높지 않은 신참이 맡는 직위였지만(물론 이 정도만 해도 비정규직인 포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신분이 높았다), 그 앞에 금의위가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대체로 관리의 힘은 그 지위가 높을수록 강해졌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바로 황제와 독대하는 관리였다.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관리는 그 품계가 아무리 낮아도 고관대작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어떤 말이 나와서 자신의 목을 날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금의위는 바로 그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일개 교위라 하더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대국 전역의 뛰어나고 야심찬 인재들이 우글거릴 텐데...
'내가 경험했던 사건들에서도 능력이 없진 않았다.'
실제로 연우혁이 실패할 경우에 금의위들이 자주 나오지 않았던가.
-...해결에 실패하자 금의위 역사들이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가서 처형했다...
-...해결이 늦어지자 금의위 역사들이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가서 처형했다...
-...해결이 미흡하자 금의위 역사들이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가서 처형했다...
'음. 아니다. 능력이 없는 걸지도.'
생각해보니 다 데려다가 처형하는 건 개나 소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사실 아직 걱정할 건 없긴 하오. 금의위 교위가 일개 판관 놈 저택 은자 사라진 것까지 관심 가질 가능성은 적으니. 그런데..."
당등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이번에 판관 놈 저택에 요괴가 자꾸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크게 퍼졌잖나."
"그게 왜 크게 퍼졌습니까?"
분타주는 당등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개방이 판관의 저택에 과감하게 침입할 수 있었던 건 판관이 나름 체면을 신경 쓰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판관은 요괴가 나온다고 대놓고 알리는 대신 자기 집안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만큼 판관도 소문을 내고 싶지 않아했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오."
"..."
연우혁은 당등을 경악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 당문의 무인은 자신이 판관의 뺨을 냅다 올려붙여서 관아에 소문이 퍼진 걸 슬쩍 넘어가고 있었다. 대낮에 보는 눈 많은 자리에서 판관에게 실토하게 했으니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이 퍼지면 교위 놈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놈이 관심을 가지면 요괴는 물론이고 은자 빼온 것도 꼬리를 밟힐 수 있지 않소. 하필 왜 은자는 지금 훔쳐가지고."
"끄응."
분타주는 당등의 지적에 괴로운 소리를 냈다. 일이 복잡하게 꼬인 것이다.
"아직 들키진 않았으니 벌써 겁을 먹을 건 없소. 금의위 교위 놈이 한가하진 않을 테니 어지간하면 안 건드리겠지.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 때 생각합시다. 이렇게 엮인 것도 인연이니 우리가 도와드리리다."
"고맙습니다. 대협."
당등의 말에 멍하니 듣던 연우혁이 멈칫했다.
'...왜 우리?'
그 때 밖에서 거지 한 명이 기침 소리를 내고는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분타주 님. 대화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웬 포쾌 놈 하나가 포두 나으리를 계속해서 찾는데, 어떻게 할까요?"
"?"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고묘 밖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연우혁을 찾고 있던 건 사 포두, 아니 사 포쾌였다.
"무슨 일이지?"
사 포쾌는 많이 뛰어다녀서 행색이 엉망인 것과는 별개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포두님. 당장 한경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뭐?"
"금, 금의위가 포두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는 하인 놈한테 먼저 들어서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아마 내일이면 부름이 올 겁니다. 오늘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
연우혁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곧 침착을 되찾고 다시 물어보았다.
"금의위가 날 죄인으로 붙잡는다고 하던가?"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그러면 추궁하려고 부르는 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어..."
사 포쾌는 뒤늦게 부름이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연 포두는 딱히 뒷돈이나 뇌물을 받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알려줘서 고맙군."
맹판관요괴저택 (4)
사실 사 포쾌와 연우혁은 좀 입장이 달랐다.
사 포쾌야 원한 쌓은 것도 많고 저지른 짓도 많으니 금의위가 부르면 바로 도망치는 게 옳은 판단이었지만, 연우혁은...
'난 비리 저지를 시간도 없었다.'
아마 최근 해결한 소문을 듣고 불렀을 가능성이 컸다. 그 정확한 이유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연우혁은 이게 안 좋은 이유는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다녀오도록 하지."
"...예! 포두님을 믿겠습니다!"
* * *
맹 판관은 몸을 바닥에 바싹 붙였다. 거의 엎드리기 직전의 자세였다.
원래라면 한경에서 맹 판관이 이렇게 비굴하게 굴 상대는 없었다. 설령 지부 어르신 앞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눈앞의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금의위의 교위였으니까.
"편하게 앉으십시오. 판관 어르신."
"아, 아닙니다."
자기보다 낮은 관직임에도 불구하고 판관은 자세를 낮추고 눈치만 봤다. 눈앞의 교위 놈이 보는 서책이 무슨 내용인지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원래 판관은 관아에 고발하는 사건을 맡아 형사를 처리하는 만큼 다른 동급의 관리에 비해 그 권한과 책임이 컸다.
때문에 자신이 처리한 일들을 잘 정리해놨다가 조정에서 순안어사(巡按御史) 같은 감사가 나오면 그 앞에 쪼르르 달려가 자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잘 처리했는지를 해명해야 했다.
금의위 앞에서 하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일이란 건 얼마든지 트집을 잡으려면 잡을 수 있고, 또 판관의 일이란 건 완전히 깨끗하기는 힘든 일 아닌가. 뇌물을 보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혼자 청백리처럼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지금 금의위 교위 놈이 보는 서책이 자신이 잘못 처리한 사건의 내용이라면...
'젠장. 젠장! 왜 하필이면 내가. 다른 놈이 맡아도 됐을 텐데!'
맹 판관은 한경의 다른 판관들을 저주했다. 하필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이 안 장주가 죽은 사건은 실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예?"
질문에 교위의 눈빛이 찌푸려졌다. 판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해결했냐 물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맹 판관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안 장주는 견사(繭絲) 장사로 크게 번 사람이었는데, 뒤로는 또 염왕채로 돈을 벌어 번만큼이나 원한도 많이 산 사람이었다. 맹 판관도 뇌물을 몇 번 받았었다.
그런 장주가 장원 외곽의 누각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장주의 발걸음을 제외하고서는 어떤 발걸음도 보이지 않았던 사건 아닌가.
맹 판관은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죽을 거면 다른 곳에 가서 죽지 왜 하필 내가 맡은 건에서 이렇게 골치 아프게 죽는단 말이냐!
분명 포두 놈들이 적당히 일하는 시늉을 한 뒤 아무나 붙잡아올 테니, 눈치껏 적당히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두 놈들은 진짜로 문제를 해결했다. 새로 들어온 그 젊은 놈이 무슨 신통력을 부렸는지 범인 놈이 칼을 들고 날뛰었다가 잡혔던 것이다.
'아차.'
여기까지 떠올린 맹 판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판관은 이런 커다란 일을 마무리하면 조정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아뢰는 보고를 작성해서 바쳤다.
그 때 맹 판관은 분명,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위해 포두들의 활약은 한 줄로 퉁치고 나머지는 자화자찬으로 채워 넣었...
-밑의 포두들이 제법 재주가 좋아 증언을 확인해왔습니다. 그 증언을 훑어보니 위화감이 있어 총관을 심문했는데, 버티지 못한 총관이 칼을 들고 날뛰어 자리에서 베었습니다...
'제, 제기랄.'
교위가 물어보는 것도 당연했다. 꽤나 특이한 사건에서 증언만 듣고 위화감을 느꼈으니 왜 느꼈는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맹 판관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 범인을 찾은 건 자신이 아니라 포두 놈이었으니까.
"포두... 포두 녀석이 좀 수상하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상했다? 어째서?"
"그건... 그냥 믿었습니다."
"...그냥 믿었다 이 말입니까?"
교위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판관은 이를 악물며 변명했다.
"워낙 영특한 놈이고, 또 아랫사람을 믿지 않으면 누가 충성하겠습니까!"
"흠."
교위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 팔강채 토벌은 어떻게 무림인들을 동원하신 겁니까? 험하고 거친 자들이라 설득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 그건..."
이것도 또 맹 판관이 직접 한 일이 아니었다. 맹 판관은 무림인들을 저주하고, 연우혁을 저주하고, 금의위 교위를 저주했다. 과거에 슬쩍 자기 공으로 적어놓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저주했다.
"무림인들을 불러서..."
판관이 주절댔지만 이미 교위는 듣고 있지 않았다.
교위는 보고에 적힌 '포두를 시켜 불렀다'라는 글귀를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판관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흠뻑 젖은 맹 판관이 돌아가고 나서 교위는 하인을 불렀다.
"여기 관아의 연 포두란 사람이 있다는데. 그 자를 불러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 * *
연우혁이 부름을 받고 도착한 곳은 평소라면 절대 방문할 일 없는 한경 한복판의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군관을 무시하는 명문가들도 금의위 교위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 저택에 모시고 싶어하니, 이런 곳에 머무르는 것도 당연했다.
대문을 통과한 뒤 복도를 다섯 개 정도 걷고 정원 세 개를 돈 다음 슬슬 하인의 다리가 아파오지 않을까 생각할 무렵 금의위 교위가 머무르는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
연우혁은 눈을 감고 하해불택신공과 탈혼비도를 생각했다. 남는 시간 틈틈이 무공을 익히는 게 작은 즐거움이었다.
"연 포두, 맞나?"
"예. 맞습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연우혁은 영안을 열었다.
딱딱하고 무기질적인 목소리. 딱히 욕심이나 분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탐관오리는 아니군.'
판관 같은 탐관오리가 아니라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만약 적이라면 무능한 게 차라리 더 다루기 쉬웠으니까.
"안 장주가 죽은 사건은 어떻게 해결했나?"
"...발자국의 깊이가 지나치게 깊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누군가 수작을 부렸구나 생각했습니다."
"왜 총관을 의심했지?"
"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고, 또 거동이 수상했습니다."
"능력이 비상하군. 지나치게 직감에 의존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아주 비상해. 팔강채를 토벌할 때 무림인들을 어떻게 동원했나?"
"...사라진 비급들이 팔강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뿐입니다."
"그 소문을 퍼뜨렸나?"
"아닙니다."
"퍼뜨렸다 하더라도 부정할 수밖에 없겠지."
'아니 이 새끼가.'
연우혁은 속으로 얼굴도 안 보이는 교위를 욕했다.
다른 무림인들 들으면 연우혁 멱살 잡을 소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산채 토벌은 무림인들이 알아서 토벌하자고 기어간 것에 가까웠다.
그걸 무슨 무림인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부린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상단전이 열렸다고 들었는데."
"예."
"과연 그 재주가 설명이 되는군."
'그냥 판관을 털려고 이러는 건가?'
연우혁은 이 교위가 왜 이러나 의아했다. 그나마 떠오르는 목적은 판관을 탈탈 털기 위해서 정도였다.
당연히 판관은 위에 보고할 때 연우혁의 공은 최대한 줄이고 자기 공은 최대한 올렸을 것이다. 연우혁도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읽어보니 판관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변명만 주절주절 해대면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으리라.
'그런 거라면 좋겠군.'
맹 판관이 쫓겨나면 연우혁도 여러모로 편해졌다. 위에 있는 탐욕스러운 상관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지금 엮여 있는 여러 이들도 한숨 돌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가 판관 자리에 도전할 만큼 공을 세우지는 못한 것 같은데...'
"연 포두. 난 지금 사건 하나를 조사하고 있다. 원래 이 주변 판관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믿음직스럽지 않더군. 차라리 포두 자네처럼 재주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은데."
"...!"
연우혁은 극도로 긴장했다.
금의위 교위의 제안은 칼날 위를 걷는 것만큼 위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금의위의 권세가 강하고 그 힘이 강한 만큼 도움을 주면 어떤 보답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금의위나 동창은 비밀에 집착하는 조직이었다. 만약 연우혁이 일을 기껏 해결했는데 비밀을 지키겠다고 토사구팽을 해버리면...
"과분한 제안이라 제가 해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연우혁은 말을 하면서 목소리에 담긴 상대의 감정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가 교활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른 교위들도 자네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으니. 마음 같아서는 금의위 교위에 추천하고 싶군."
"!"
연우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금의위가 조금, 아니 많이 폐쇄적인 조직이긴 했지만 교위로 들어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전히 위험천만하긴 해도 교위라면 그냥 토사구팽 당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문이 없으니 무리겠군. 역사(力士)라면 모를까."
"...지부 어르신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포두의 자리를 내주셨는데, 그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금의위의 일개 관졸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고되기만 하지 포두보다 더 위험하고 출세 힘든 자리였다.
"자네가 판관보다 더 충신이군."
"아닙니다."
연우혁은 상대가 별다른 흑심이 없고, 자신의 능력을 꽤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거라면 한 번 해볼 만할지도 몰랐다.
"자네가 망설이는 이유는 알고 있다."
"?!"
연우혁은 금의위 교위가 무슨 술법이라도 부린 줄 알고 긴장했다.
"아마 판관이 맡긴 일 때문이겠지. 저택에서 요괴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아, 예. 그것도 있습니다."
'벌써 소문이 들어갔나.'
이미 퍼진 소문을 부정할 순 없었다. 연우혁은 일단 수긍했다.
"자네가 할 필요 없는 일을 하게 된 만큼 나도 도움을 줘야 한경의 백성들에게 부끄럽지 않겠지.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
연우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도 모르겠나? 자네의 재주는 뛰어나지만, 충성심이 눈을 가리고 있군. 명심하게. 뛰어난 관리란 무릇 그 누구도 의심하는 버릇을 들여야 해."
교위는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고서 범인이 누군지 말했다.
"범인은 판관이다. 그 자의 자작극이지."
"..."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일지도 모르겠군.'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맹판관요괴저택 (5)
한 박자 늦게, 연우혁은 깜짝 놀란 것처럼 반응했다.
"헉! 그, 그럴 수가...!"
"말했지. 충성심이 눈을 가리고 있다고."
교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한경 한복판에 요괴가 그리 쉽게 나타나지 못한다. 조정에서 일하는 학사를 불러서 물어봤는데, 딱히 요괴의 흔적이 없다고 하더군."
도사나 승려처럼 조정에서 일하는 학사 중에는 술법에 능한 이들이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런 자를 데리고 와 확인까지 했다는 교위의 말에 연우혁은 전율했다.
'방심하지 말자. 만만치 않다!'
교위가 헛다리를 짚었다 하더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연우혁의 능력이 사기적인 것이지 교위가 무능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봐라. 판관의 능력으로 계속 범인을 잡지 못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개방의 무인들이 뛰어나서 그렇지...'
연우혁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판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대비를 해도 정보가 새서 매번 농락당했으니.
"가장 가능성 높은 답은 하나밖에 없다. 판관의 자작극이지. 자. 그러면 판관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간을 보며 대답했다. 교위는 이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설명해줬다.
"판관은 한경뿐만 아니라 조정의 고관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고 있다. 그 액수가 상당하더군. 자. 자네가 뛰어난 포두라면 예상해보도록. 판관이 다음에는 어떤 자작극을 펼칠 것 같나?"
연우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 교위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 궁리에 들어갔다.
'설마?'
"...혹시 은자를 도둑맞았다고...?"
"잘 맞췄다! 그것밖에 없지. 요괴의 소행을 핑계로 상납을 미루려는 거다. 비루한 수작질이지. 분명 곧 요괴에게 은자를 도둑맞았다고 소문을 낼 거다."
"정, 정말 놀랐습니다.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많은 배움이 되었겠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만약 정말 강력한 요괴가 벌인 짓이면 어떡합니까?"
연우혁은 너무 수긍하는 척만 하면 의심을 받을까봐 일부러 멍청한 질문을 던졌다.
교위는 화를 내는 대신 흔쾌히 설명해줬다.
"그렇다 하더라도 판관의 죄다."
"예?"
"백성의 형사와 민사를 다루는 자가 얼마나 탐학스러우면 요괴가 나타났겠나? 또 얼마나 무능하면 그 나타난 요괴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쩔쩔맸겠나? 둘 중 무엇이든 판관의 죄다."
'세상 천지에 미친 새끼밖에 없구나!'
연우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죄가 있으면 죄가 있어서 유죄고 죄가 없으면 그걸 밝히지 못해서 유죄라니. 하북팽가의 남매가 차라리 그리워질 정도였다.
* * *
당등은 팔짱을 끼고 앉아 분타주와 골똘히 대책에 몰두했다.
아직 상황은 괜찮다지만 낌새가 영 수상했던 것이다.
영리한 포두 녀석은 금의위 교위한테 불려가고, 판관 놈은 또 갑자기 안 보이고...
"은자를 파낼 때는 토룡공을 썼겠지?"
"그렇습니다. 땅을 판 다음에는 흙을 그대로 채워 넣어서 알아차리기 힘들 겁니다."
"글쎄. 강호에 절대란 건 없다. 땅을 파고 들어갔어도 알아차리는 놈은 나오기 마련이지. 거기에 가짜 흔적을 몇 개 만들어놓자고. 숨겨놓은 은자는?"
"아직 꺼내지 않았습니다만..."
"차라리 빼서 친족들에게 나눠줘라. 야밤에 멀리 도망가게 하면 잡기도 힘들겠지."
"함정을 파고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확인하겠다. 내 이목을 속이고 매복하기는 힘들 거다."
"...대협!"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눈깔을 뽑아버리기 전에."
당등은 분타주가 감동하자 질색했다. 협객행에서 가장 싫은 순간이 이런 눈빛을 받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 포두 녀석이 걱정인데..."
"...놀, 놀랐습니다."
"왜 놀랐지? 내가 걱정했다는 게 그리 이상한가?"
분타주는 아차 싶었다. 당등의 괴팍한 성격을 잘못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당등은 더 성질을 내는 대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주가 워낙 대단한 놈이라 그냥 버려두기 아까울 뿐이다. 길가에 원석이 굴러다니면 어느 누구든 줍지 않겠나. 음... 좀 더 알아봐라. 녀석이 갇혔다면 그냥 힘으로 데리고 나와야겠다."
"그, 그건...!"
분타주는 당황했다.
무림인이 힘으로 갇힌 관리를 빼돌리면 그 순간 그 관리의 앞길은 꼬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해줘도 욕을 먹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등은 심드렁했다.
"갇힌 순간 목숨이 위험한 거다. 어느 누가 포두 놈 목숨을 신경써주겠나. 차라리 구해서 사천에 던져놓는 게 낫지. 얼굴 좀 바꾸고 새 호패 던져주면 아무도 모를 거다."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그것도 그렇군. 좀 조용히 살라고 하면 되겠지."
"분, 분타주 님!"
거지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서 문을 열었다. 당등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맹, 맹 판관 놈이...! 곤장을 맞았다고 합니다!"
"뭐? 왜? 무슨 이유로?"
"요괴가 나타났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소요시킨 죄로...!"
"...???"
당등과 분타주는 거지를 앉혀놓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듣고 보니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금의위 교위가 지부 어른한테 '판관이 지금 자기 돈을 아끼려고 한경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고해바치자 지부 어른이 분노해서 판관을 부른 뒤 곤장을 친 것이다.
정식으로 위에 보고하고 처벌을 가한 것은 아니라 파직되진 않았지만, 맹 판관은 한동안 판관 일을 관두고 근신하게 되었다.
그 거만하던 놈이 한경의 다른 관료들 앞에서 피가 나도록 장을 맞았으니 보통 망신이 아니었으리라.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난 알 것 같다."
어리둥절해하는 분타주를 보며 당등은 알겠다는 듯이 탁자 위를 쳤다.
"그 포두 놈이 귀신 같은 계략을 부렸구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대협?"
"멀쩡하던 금의위 놈이 왜 판관을 의심했겠나? 그 포두 놈이 혓바닥으로 구워삶은 게 분명하다. 이런 귀신도 부릴 놈 같으니!"
당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모사(謀士)나 책사들이 차도살인의 계책이라고 말은 많이 해도, 이 포두가 보여준 차도살인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어떻게 금의위 교위를 휘둘러서 돈 뺏긴 놈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단 말인가?
실로 소름이 돋는 재주였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 뒤집어 씌우는 게 가능한 일인지..."
"나야 모르지. 애초에 네놈이 도둑질한 걸 찾아낸 것도 그 포두 놈 아니었나? 훔친 걸 잡아냈으니 훔친 걸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했을 거다. 여봐라! 관아에 슬쩍 가서 포두 놈이 뭘 하고 있는지 찾아봐라. 만약 갇혀 있지 않다면 내 추측이 맞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고 허겁지겁 달려간 거지는 반 시진 쯤 지나서야 돌아왔다.
"연, 연 포두가 금의위 교위와 같이 한경을 떠났다고 합니다."
"역시! 놈을 구워삶은 게 맞다."
"...!!"
분타주는 눈을 끔뻑이며 전율했다.
재주가 뛰어난 포두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판관에게 목이 날아가는 건 저 젊은 포두였으리라.
'협객이다!'
분타주는 젊은 포두가 떠난 방향으로 길게 읍했다. 당등은 무슨 헛짓이냐고 타박하려다가 관두고 고개를 저었다.
* * *
"기남(沂南)에 대해서 아나?"
"한경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번영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교위를 따라가며 연우혁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금의위 교위는 거창한 행렬과 호위를 데리고 가는 대신 연우혁과 함께 평복으로 위장했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는지 감쪽같았다.
"그렇다. 서쪽에 은 광산이 하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현령이 사고가 거듭 일어난다고 장계를 올리더군."
이 당시 광산에 들어가서 광물을 캐내는 건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맨몸으로 곡괭이 하나 들고 기어들어가 땅바닥과 천장이 무너지지 않게 감각만으로 캐내야 했으니, 사고가 빈번한 것도 당연했다.
"광산의 일이란 게 워낙 험하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러 간 역사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교위는 진지하게 말했다.
보낸 첩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광산이 별 이상 없이 인부들이 들어갔다 나온다고 보고했지만, 그 안까지 들어간 역사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 보고를 받은 금의위는 현령이 무언가 숨기고서 면피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 중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음. 저는..."
연우혁이 대답하려던 찰나 멀리서 다른 사람 한 명이 걸어왔다. 교위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일세!"
"누구십니까?"
"이 학사라고 부르도록. 우리 일을 도와줄 거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상대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무림인들에게는 보기 힘든 영기(靈氣)가 학사 주변에서는 일렁거렸던 것이다.
술법을 다루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이었다.
'판관의 저택을 확인한 학사가 이 사람이었군.'
"늦었군."
"미안하네. 여기는 연 포두일세. 이번 일을 도와줄 사람이지."
"흐음. 이 자가 바로 그..."
학사는 연우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백악신(白嶽神)이 깃든 청동 거울을 꺼내 비췄다.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산신의 힘을 빌려 상대의 심성을 파악하는 술법이었다.
그러나 청동 거울은 심성을 파악하는 대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백악신이 나오는 걸 거부한 것이다. 학사는 그 이유를 알고 깜짝 놀랐다.
"영기(靈氣)를 얼마나 쌓은 건가, 자네?!"
"어렸을 때부터 상단전이 열려서..."
연우혁은 길게 변명하는 대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학사는 더더욱 놀랐다.
"상단전이 열려도 그렇지, 이 정도라면 피를 토하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그 정도로 심한가?"
"원래 도사들 중에 뛰어난 자들은 단명하잖나. 다들 상단전이 조금씩 열려 있는 자들이라 그런 걸세. 그런데 이 포두는 아주 활짝 열렸어. 덕분에 영기가 신선마냥 쌓였군."
사람이 신선마냥 영기를 쌓고 있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었다. 교위와 학사는 연우혁을 곧 죽을 사람 보듯이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연우혁은 아직 멀쩡하긴 했지만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더욱 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던 불쌍해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광산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저번에 말한 이후로는 딱히 보고가 없었네. 여기 포두한테는 방금 말해줬고. 혹시 짐작가는 구석이 있나?"
"제 생각에는 흑도 무리가 현령을 협박해서 광산의 은을 밀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은광산 실종 사건 (1)
자리에 있던 학사와 교위 모두 말문이 막혀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저런 대답을 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교위가 친우에게 물었다.
"신통력이라는 게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
"아, 아니... 당연히 아니네. 자네도 알지 않나."
조정에서 일하는 학사나 금의위에서 일하는 교위는 신통력에 대해 접할 일이 많은 만큼 터무니없는 환상이나 착각을 하지 않았다.
신통력은 어디까지나 술법이나 무공처럼 제한된 능력이었고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하더라도 아직 마을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어느 누가 은을 빼돌려서 밀수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이유를 들어보겠다. 설명해봐라."
교위는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만약 이 포두가 한경에서 해낸 일들을 알지 않았다면 어디서 허튼 소리냐면서 호되게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먼저 겉으로 봤을 때 인부들이 문제없이 오고 간다는 건 광산 자체는 멀쩡히 굴러가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간 역사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건..."
"누군가 광산 안에서 외부인을 확인하고 제거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 그 정도는 나나 이 학사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령이 협박받았다? 이런 곳의 일은 보통 현령이 주도한다."
교위의 말에 학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대환국은 땅덩이가 넓어 구석진 곳의 현령은 왕처럼 행세해도 들키기가 쉽지 않았다. 핑계를 대고 자신의 뒷주머니를 차는 건 제법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예. 옳게 보셨습니다."
연우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한두번 해본 게 아닌 만큼 이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에도 관록이 붙은 기분이었다.
이 사건은 사파 무림인들이 광산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현령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협박해 거짓 장계를 보내게 만들었다는 것 정도.
원래는 그 장계에 적힌 내용의 허점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이상한 걸 확인해야 했지만, 이렇게 현장에 온 이상 별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핑계를 대는 대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현령이 한 일이라면 사고가 거듭 일어난다고 장계를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사고가 일어난다고 하면 외부에서 확인하러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저라면 다른 핑계를 댔을 겁니다."
"과, 과연 그렇군!"
학사는 놓쳤던 부분을 듣고 감탄했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랬다. 괜히 수상쩍은 핑계를 대서 의심을 살 이유가 없었다. 교위도 생각지 못한 지적에 만족스러워했다.
"과연. 이해했다. 이 특이한 장계는 현령이 보내는 암어(暗語)라는 건가. 잠깐, 현령이 협박당하고 있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흑도 무리가 범인이라는 건 어떻게 짐작했나?"
"그건 제 직감입니다. 세상 천지에 이런 무도한 짓들을 저지르는 건 대체로 무림인 놈들 아닙니까?"
연우혁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가서 확인하면 알게 될 텐데 이 정도는 그냥 우겨도 됐다.
"..."
교위는 이 무림인을 혐오하는 포두의 직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민이 됐다.
* * *
옥면살검(玉面殺劍)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동자홍은 부하들을 차갑게 노려보며 재촉했다.
"캐내는 은이 늘어나야지, 줄어들다니. 네놈들은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
동자홍 휘하의 부하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엎드렸다. 이 때 괜한 변명을 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낭인 놈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동 대인! 지금 은자가 줄어든 건 인부 놈들이 꾀를 부려서입니다. 놈들이 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겁을 더 확실하게 주면..."
푹!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면살검은 검을 뽑아 낭인의 목을 찔러버렸다. 낭인은 컥컥대며 쓰러졌다.
"알면 줄어들기 전에 했어야지, 네놈은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생색이나 낼 줄 아는구나."
자리에 싸늘한 공포가 내려앉았다. 무림인들은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다.
이 주변에 광산을 점령한 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목표한 만큼의 은을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야 여럿 있었다.
얕은 곳의 광맥은 다 캤고, 협박을 받은 인부들이 서두르다가 사고를 치고, 새로 인부를 데리고 오면 괜히 사실이 새어나갈 수 있으니 있는 인원만을 데리고 쥐어짜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목표로 한 은이 너무 많아서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되지 않나?'
'이미 모은 것만 해도 충분하다. 나누기만 하면 평생 먹고 살 텐데.'
원래 사파나 흑도의 무리라 하더라도 이렇게 멋대로 부하를 찔러 죽이고 베어 죽이면 그 조직이 제대로 유지되기 힘들었다.
당장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는데 도망이라도 쳐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옥면살검이 사파 무림에서 악명이 높은 무림인이라 하더라도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 모인 무림인들이 도망치지 않는 건 탐욕 때문이었다.
옥면살검 밑에서 오랫동안 버티며 광산의 은이란 은은 다 긁어모으지 않았던가.
이걸 배분받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귀신이 될지 몰랐다. 이 은이 여기 무림인들을 버티게 해주는 이유였다.
옥면살검은 부하들의 눈빛에서 불만스러운 기색을 읽어냈다.
"불만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말해 보거라. 자!"
"아, 아닙니다."
"어서! 말하지 않으면 네놈의 밑부터 위까지 크게 구멍을 뚫어주겠다!"
겁에 질린 낭인은 눈치를 보며 내뱉었다.
"캐, 캐낸 은자가 많으니 이만 사라져도 좋지 않겠습니까. 현령은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 외부에 말하지 못할 겁니다... 너무 오래 머물렀다가 일이 틀어질까봐 겁이 납니다."
"....."
옥면살검은 부하의 말에 입술을 씰룩거렸다.
여기 있는 낭인 놈들은 옥면살검의 진짜 목적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다 하나 같이 강도질이나 낭인질을 하다 옥면살검 밑에 모여든 놈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옥면살검이 섬기는 교(敎)의 장로께서는 이만한 은자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았다. 제대로 포상을 받기 위해서는 은을 더 긁어 짜내야 했다.
'죽일까?'
옥면살검의 눈빛에 살기가 일렁거렸다. 그걸 느낀 낭인이 발버둥쳤다.
낭인에게는 다행히, 옥면살검은 검을 다시 뽑지 않았다. 하루에 두 명이나 죽였다가는 부하 놈들의 사기가 괜히 무너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부하들의 불만이 쌓인 만큼 지금은 자제를 해둬야 했다.
쾅!
낭인을 옆으로 집어던진 옥면살검은 다른 부하들을 보며 외쳤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흑도라고 자처한단 말이더냐? 고작 그만해야 하는 이유가 들킬까봐라고? 그런 거라면 검을 내려놓고 돌아가서 농사나 짓지 그러냐!"
내공을 담은 외침에 무공의 경지가 낮은 무림인 몇몇은 벌벌 떨었다.
"난 네놈들처럼 겁 많은 구더기들은 처음 본다! 지금 캐낸 걸 가지고 사라지자고? 사라질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걸로 뭘 할 거냐. 밭뙈기 조금 사면 끝날 거다!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백 칸이 넘는 가옥을 지어서 떵떵거릴 생각을 해야지! 네놈. 꺼지고 싶으면 지금 꺼져라! 지금 꺼지면 살려주겠다."
"아, 아닙니다! 이 구더기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대인,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옥면살검은 탐욕이 부하들에게 제대로 불을 질렀다는 걸 확신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의욕이 없던 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빨리 떠나고 싶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은을 긁어내라. 알겠느냐? 들키고 싶지 않다면 감시를 철저히 해라. 안 그래도 수상쩍은 놈들이 광산을 기웃대고 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인."
옥면살검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는 귀 총관이 싱긋 웃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교 출신인 총관은 그나마 옥면살검의 신뢰를 받는 책사였다.
"자꾸 수상쩍은 놈들이 기웃대길래, 광산에 확실히 대책을 마련해놨습니다."
"그나마 네 녀석이 내 심화를 달래주는구나. 말해봐라."
총관은 자신 있는 태도로 광산 주변의 지도를 펼쳤다.
원래 여기의 은 광산은 입구가 여럿인데다가 그 거리도 상당한 만큼 다른 지역에서 들어오는 잠채꾼들도 가끔씩 나타날 정도였다.
자꾸 허락 받지 않은 수상쩍은 놈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광산의 특성 때문이 컸다.
"일, 이, 삼, 여기 입구들은 막아버렸습니다. 어차피 이쪽으로는 들어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을 겁니다. 사, 오. 여기 입구들은 합쳐버렸습니다. 무인들이 철저하게 감시하고 들어갈 때마다 신원을 확인하고 있으니, 몰래 들어올 방법은 없습니다. 육 입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옆이니 같이 확인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여기 칠(七)은? 반대쪽이고 광산 아래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잖나."
"역시 대인께서는 총명하십니다. 저도 이 입구의 중요성은 잘 압니다. 워낙 넓어서 막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인근에 진법을 펼쳐놨습니다."
총관은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낭인들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굉겁혈망진(轟劫血網陳)입니다."
"...!"
옥면살검은 이제까지 짜증을 터뜨린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만족스러워했다.
굉겁혈망진이라면 교에서도 제대로 성의를 보여준 셈이었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닌 옥면살검의 가치를 인정하고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정말이냐?"
"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훌륭하다. 훌륭해. 그래! 그 진법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옥면살검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외부에서 귀찮은 놈들이 오더라도 한동안은 꼬리를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 * *
"일단 마을에 들어가야 한다고 보네. 그리 수상하지 않을 걸세. 기남에 행상인과 보부상이 얼마나 많이 들리겠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위험하네. 역사가 몇 명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적들이 괜히 경계하고 있다면?"
교위와 학사는 팽팽하게 의견이 갈렸다.
교위는 평소 하던대로 기남에 들어가 주변의 풍문을 확인하고 인부 중 하나의 신분을 얻은 뒤 위장해서 광산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현령이 협박을 받고 있든 아니든 광산 안에 증거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들어가서 확인한 다음 결정을 내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학사는 좀 더 조심스러웠다. 어차피 들어갈 거면 기남에 들어가는 대신 바로 광산으로 직행해야 한다고 봤다. 괜히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적이 드물고 바로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는 여기 입구가 제격이었다.
"지금 이 인근은 진법이 펼쳐졌다는 보고를 받았네. 굳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
"내가 뚫어보겠네."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러나?"
교위는 진법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겼다. 잘 준비된 진법은 공격 측에게 극도로 불리했던 것이다.
우회하면 그만인데 무엇하러 목숨을 건단 말인가?
"?"
이야기를 하던 교위는 문득 포두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진법!?'
깜짝 놀라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저 앞에서 포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법 해제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은광산 실종 사건 (2)
백악신이 깃든 청동 거울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던 학사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
"진법을 해제했다고?!"
"예!"
금의위 교위는 그 말을 듣고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학사에게 명을 내렸다.
"확인해보게."
"알, 알았네."
이 학사는 침착하게 술법을 사용해 주변의 기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진법을 펼쳤다면 인위적인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 자연의 기운과는 전혀 다른 위화감이 느껴져야 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와 달리 정말로 아무런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진법이 사라진 것이다.
"사, 사라졌다!"
"...!"
두 사람이 놀라워하는 사이 연우혁이 수풀을 헤치고 돌아왔다. 손에는 붉은색 혈철(血鐵)로 된 푯말이 들려 있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에 이 학사는 깜짝 놀랐다. 저런 기물을 사용한 진법이라면 그 위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만약 억지를 부려서 밀고 들어갔었다가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고, 고맙네. 자네 덕분에 실수를 하지 않았군. 그런데 이 진법은 대체 어떻게 해제한 건가?"
"저는 상단전이 열린 덕분에 영안이 트였습니다."
"아아..."
금의위 교위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학사는 바로 이해했다.
고서에 나오는 신통력 중에는 영안이 있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형태 없는 것들을 보는 이 능력은 매우 드문 능력이라 학사도 고서에서만 봤었는데...
이 포두가 가진 영기를 생각해보면 저런 보기 드문 능력을 갖고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이런 술법 쪽에 재능이 탁월한 게 분명했다.
너무 탁월해서 단명할 운명을 타고났긴 했지만...
"그런 거였군. 그래서 남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들도 해결할 수 있었던 거였나."
"하지만 그걸로 사건의 내막을 알 수는 없지 않나."
"성인은 불출호지천하(不出戶知天下)에 불규유견천도(不闚牖見天道)지. 이 포두한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걸세."
성인은 방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알 수 있었다. 이 포두가 그런 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건 확실했다.
정말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다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단서 몇 개만으로도 진상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교위는 이 학사의 말을 듣고서도 믿기 어려워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런 단서만으로 모든 진상을 알아맞힌단 말인가.
"원래 범인의 견식은 성인을 따라갈 수가 없네."
"음. 정말 믿기 힘들군. 어떻게 저런 재주를."
'듣기 민망하군.'
연우혁 입장에서는 상당히 민망한 대화였다.
사건의 비밀을 알고서 먼저 지르는 만큼 '어떻게 그걸!'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허세가 필수적이었다.
만약 연우혁이 이런 식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면 교위나 학사는 그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등이나 개방의 분타주, 하북팽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무림에서 위험한 걸 알면서도 그대로 사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른 무림인들과 달리 연우혁은 뒷배도 없고 무공도 아직은 부족하지 않은가.
최소한 자기 자신이 상황을 최대한 안전하게 주도할 수는 있어야 했다.
'교위는 일류 말입. 학사는 그보다 조금 못한 수준. 이 둘이면 충분히 안에 있는 놈들을 처리할 수 있다.'
밥만 먹고 무공만 연공하는 명문정파의 무림인들도 일류의 벽을 쉬이 뚫지 못하는데, 아무리 조정의 뛰어난 군관들 중에서 가려 뽑았다 하더라도 일개 교위가 일류 말입이라는 건 대단히 뛰어나단 증거였다.
아마 이 하 교위는 금의위 내에서도 꽤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자신감 있게 혼자 오지 못했다.
이 학사도 정확한 관직은 몰랐지만 쌓은 내공의 수준이 상당했다. 술법에 뛰어나고 이기(利器)까지 갖고 있는 만큼 든든한 전력이었다.
'분명 옥면살검이었지? 부하 숫자가 어떨 때는 이십 명이었고 어떨 때는 열댓명이었고...'
옥면살검 정도가 일류고 나머지는 삼류가 대부분. 싸움이 붙어도 우두머리만 교위가 상대하고 나머지는 연우혁과 학사가 처리하면 됐다.
"들어가시죠."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해서 부끄럽군. 자네가 나보다 낫다."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파른 길이 쭉 나타났다. 이 광산의 아래쪽으로 빠르게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 입구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길을 걸어가면서 이 학사는 연우혁에게 호감이 생겼는지 질문을 던졌다.
"술법은 배웠나?"
"연이 닿아서 하나 배운 게 있습니다.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힘을 빌리는..."
"남두성군! 도술이로군."
이 학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침음성을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수학하고 조정에 입신한 학사들에게 도사들이란 쓸데없이 난잡한 술법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도술은 변덕스럽고 그 힘을 예측하기 힘드네. 언제는 힘을 빌려주다가도 언제는 주인의 목을 조르지. 괜히 도사들 중에 타락해서 사이한 요술에 빠져드는 이들이 나오는 게 아닐세."
'...아니 어쩌라고...'
연우혁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학사들이야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술법을 배운다지만 연우혁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도사들의 술법을 배운 것만으로도 솔직히 감지덕지였다.
"그에 비해 학사들은 조정의 명으로 귀신과 산신을 부리지."
속으로 욕한 것과 별개로 연우혁은 관심 있게 들었다.
상대가 자기보다 뛰어난 술법 능력을 가진 만큼 얼마든지 배울 점이 있었던 것이다.
도사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선과 귀신의 힘을 빌린다지만 학사들은 조정의 이름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서 각종 신선과 귀신을 굴복시켰다.
부릴 수 있는 이들은 제한되고 그 능력의 가짓수도 적어지지만 그 힘은 훨씬 안정적이고 단단했다.
당장 조정의 보물을 갖고 나온 이 학사가 도사들의 술법을 난잡하다고 비웃는 것도 이래서였다.
술법에는 마땅한 절차와 의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 하나 없이 대뜸 우악스럽게 술법을 펼치니 얼마나 난잡해 보이겠는가.
"더 강한 술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합니까?"
"그건 자네도 이미 알고 있네. 내공을 쌓게나."
학사는 하단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같은 학사들은 특수한 심법을 익혀서 이 내공에 영성(靈性)이 깃드네. 승려들이 익히는 불문무공에는 불성(佛性)이 깃들듯이 말일세."
"어... 상단전의 영기로 사용하는 게 아닙니까?"
연우혁은 살짝 의아해하며 물었다.
연우혁 같은 경우에는 술법과 신통력은 넘쳐흐르는 상단전의 영기로, 무공은 쌓고 있는 하단전의 내공으로 펼치고 있었다.
이 두 과정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마냥 자연스러웠기에 연우혁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었다.
포두의 질문에 이 학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상단전을 열고 거기에 축기를 하겠나? 당연히 하단전에 쌓을 수밖에 없으니 그러는 거지. 자네처럼 상단전의 영기를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 왜냐하면..."
"단명하니까."
"...자네는 왜 끼어드나. 좀 좋게 돌려서 말하려고 했는데."
이 학사의 타박에 금의위 교위는 당황했다.
"미, 미안하다. 별 생각 없이 말했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자네가 이해해주게. 이 사람이 원래 목석 같은 사람이라..."
"예. 그런데 왼쪽에 숨겨진 길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숨겨진 거처가 나올 것 같습니다."
"허! 이 친구는 정말 포두가 아니라 조정으로 데려가서 관직을 시켜야 한다니까! 내가 꼭 위에 말을 올려야겠네."
"아닙니다. 저는 제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사 어르신의 일에 감히 제가 어떻게 말을 얹겠습니까? 부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 * *
광산 안쪽의 숨겨진 거처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먼저 인근 현령의 가족들이 여기 있었다.
혹시라도 현령이 낭인이나 무림인을 고용해 구출 작전을 펼칠까봐 옥면살검은 가장 깊숙한 거처에 가족들을 가둬놓은 것이다.
그리고 훔친 은도 여기 있었다.
꼭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꺼낸 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은이 여기 모여 있는 상태였다. 낭인들은 한시라도 빼서 나누고 싶어 했지만, 옥면살검은 교의 무인들이 와서 가져갈 때까지 은을 쌓아놓을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에서 내려준 보물이 있었다.
반쪽짜리 보물이었지만 옥면살검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보물이었다. 완성만 되면 자신의 무공 경지를 한 단계 높여줄 보물이었던 것이다.
옥면살검은 이 일을 마치고 산더미 같은 은을 바침으로서 나머지 보물의 반쪽을 얻을 계획이었다.
집요하고 교활한 사파 무림인답게 옥면살검은 광산 깊숙한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놨음에도 불구하고 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은신처 안을 복잡하게 꼬아놓고 기관진식을 설치하는 것도 모자라 배신을 대비해 어느 누구도 은신처 안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신투라 하더라도 무언가를 잘못 건드려 옥면살검한테 들킬 수밖에 없었다.
"기관 다 해제했습니다. 들어가는 길은 이쪽이고, 제 생각에 현령의 가족들을 가둬놨을 곳은 이쯤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있네. 연 어사!"
"포두입니다!"
이 학사는 어찌나 감탄했는지 관직까지 높여줬다. 포두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백악신장. 여기 이 가족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학사가 청동 거울에 대고 말하자 그 안에서 연기와 함께 커다란 장수가 튀어나왔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긴 수염을 늘어뜨린 산신은 겁에 떤 현령의 가족들을 확인하더니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은은 어떻게 합니까?"
연우혁은 산더미 같은 은을 보며 물었다. 이 은을 환단으로 바꾸면 얼마나 나올지 생각하니 목소리가 괜히 떨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바로 옮길 수 없다. 현령의 가족만 빼돌린 다음 바로 군령을 내려서 토벌한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싸움 하나 없이 커다란 사건을 날로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연우혁은 흐뭇해졌다. 역시 능력 있는 금의위 교위와 일을 하니 매우 편했다.
'더 챙길 거 없나?'
연우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현령의 가족은 확인해서 꺼냈고, 은도 쌓여 있는 걸 확인했고...
원래 사건에서 기억나는 건 다 확인한 것 같았다. 연우혁은 낭인 놈들 잔돈푼이나 있으면 챙길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영안을 여는 순간 강한 사념을 담은 정보가 연우혁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혈옥갑(血玉鉀), 혈교의 신병이기, 지금은 기운이 다해서 잠들어있지만 다시금 인신공양과 핏값을 치르면 깨어날 수 있고...
'혈교!?'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옥면살검이 은에 욕심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혈교의 수하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해결해서 나오기도 전에 끝나버렸던 건가? 아니, 혈교의 보물이 여기 있었나? 옥면살검 놈이 둔 건가?'
그러나 방금 놀란 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일이 일어났다.
혈옥갑이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연우혁이 반응할 수도 없이 양손에 착 달라붙어버린 것이다.
붉고 얇은 장갑은 연우혁의 영기를 쫙 빨아들이더니 투명한 색으로 변해 한 번 울고 그대로 손으로 파고들어버렸다.
"무슨 일 있나? 연 어사?"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광산 실종 사건 (3)
'내가 잘못 본 건가?'
연우혁은 방금 있었던 일이 환상이었나 싶었다.
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혈옥갑이 파고든 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멀쩡했다.
그러나 영안을 열어서 보자 방금 있었던 일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났다.
혈옥갑(血玉鉀), 혈교의 신병이기, 영기를 흡수해서 깨어났고, 장갑을 낀 손은 단단하고 날카로워져 혈옥수(血玉手)라는 수공으로 오해를 받고...
"!!"
연우혁은 상단전의 영기를 확인해보았다. 꽤 많은 영기를 흡수한 줄 알았는데 별 차이 없이 여전히 넉넉했다.
'생각보다 영기를 덜 흡수한 건가?'
영기를 확인한 연우혁은 어떻게든 혈옥갑을 해제해보려고 애썼다. 힘을 받아 깨어난 신병이기인 만큼 주인의 뜻에 따라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짓을 해도 장갑은 해제되지 않았다. 강한 의념을 보내 봐도 마찬가지였다.
연우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손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손이 피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깜짝 놀란 연우혁은 손을 휘둘렀다. 실수로 부딪친 바위가 쇳소리와 함께 깎여나갔다. 실로 놀라운 강도와 예리함이었다.
급히 내공을 거두자 손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보물이었다. 놀라운 보물이었는데...
'젠장. 보물을 원하긴 했지만 이런 찜찜한 보물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무림에서 신병이기 같은 보물들은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가지는 것만으로도 무인이 자기보다 한 경지는 높은 무인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겉에서 봤을 때 누가 봐도 사악한 느낌이 드는 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금 이 혈옥갑 같은 보물이 바로 그랬다.
쓰는 순간 손이 요사스러운 핏빛색으로 달아오르는데,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겠는가. 어지간한 명성이나 뒷배가 없는 무림인이 이런 걸 썼다가는 바로 마두 취급 받았다.
사천당문이라면 '독을 연구하다가 손이 붉게 되었다 불만 있나'가 가능하겠지만 연우혁 같은 일개 포두라면...
'장갑부터 껴야겠군.'
연우혁은 대충 낡은 천 장갑을 껴서 손을 가렸다. 어차피 권법이나 수공을 잘 쓰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쓰게 될 때를 대비해서였다.
"다 확인했다. 이만 나가도록 하지."
"예."
벌컥!
그 순간 반대쪽 문이 열리더니 옥면살검 동자홍이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
순간 서로 당황해서 정적이 흘렀다.
잘생기고 반드르르한 얼굴을 한 옥면살검의 눈꼬리가 양옆으로 죽 찢어지더니 살기가 폭발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침입자다!!! 침입자다, 이 구더기 새끼들아!!! 빨리 뛰어오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
"운이 없군."
하 교위는 쯧하고 혀를 차더니 검을 뽑았다. 그 담담한 태도에서는 상대에게 겁을 먹은 기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연 포두.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는데, 다른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겠나?"
"예. 맡겨주십시오."
연우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옥면살검만 하 교위가 상대해준다면 나머지는 연우혁이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들어와라, 들어와! 둘러싸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
사납게 외치는 옥면살검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방에서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급히 들어온 낭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다.
다급하게 들어오느라 서로 어깨를 부딪치는 낭인들과 달리 연우혁은 느긋했다.
"교위님. 이쪽이 유리할 것 같습니다."
"음."
이미 영안으로 이 은신처 안의 복잡한 구조를 꿰뚫고 있었던 만큼 어디에서 다수를 상대하기 유리한지 파악한 상태였던 것이다.
앞쪽은 교위한테 맡기고 뒤쪽의 좁은 길을 잡고 버티고 서자 낭인들은 주춤했다. 넓은 곳이어야 일제히 달려들기 좋은데 통로가 좁았다.
"쳐라! 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은원보(銀元寶)를 하사하겠다!"
옥면살검의 외침에 주춤하던 낭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연우혁은 한 손에 포쾌의 묵곤을 들고 기다리다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재빨리 묵곤을 내려놓고 백사격각편을 뽑아들었다.
상대가 설마 편법을 익힌 무림인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가장 앞의 낭인은 기습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빠르게 날아드는 흰 채찍이 낭인을 강타했다.
"컥!"
충격도 충격이지만 낭인은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기(逆氣)에 경악했다.
"독... 독이다. 커헉."
"!!"
"저... 저 놈, 낭인 놈이다! 속지 마라. 포쾌가 아니라 낭인 놈이다!"
낭인들은 연우혁의 정체를 깨닫고 술렁였다. 포쾌의 몽둥이를 들고 있어서 포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포쾌인 척 하는 사파의 무인이 분명했다.
분명 조정의 첩자에게 돈을 받고 호위로 따라온 것이리라.
"..."
연우혁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곤법을 익힌 척 하긴 했지만, 채찍 한 번 휘둘렀다고 사파 낭인 취급이라니.
"내가 앞에 서겠다!"
초자곤(哨子棍, 도리깨와 유사한 무기)을 든 낭인 하나가 앞에 뛰어들었다. 무기의 특성상 채찍을 상대하기 유리했다.
서로 무기가 얽히는 순간 다른 낭인들이 달려든다면...
푹!
연우혁은 망설이지 않고 강 노인에게 받은 암기, 구궁수전(九宮袖箭)을 발사했다.
영안으로 낭인들의 움직임은 이미 꿰고 있었다. 초자곤을 든 낭인이 외치는 순간 이미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한 뒤였다.
그러나 낭인들 입장에서는 연우혁이 대단한 암기의 고수처럼 느껴졌다.
암기술이란 것은 원래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꿰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위력이 반감되기 마련이었다.
처음 보는 낭인들의 전력을 이렇게 쉽게 파악하다니. 게다가 처음 들어온 낯선 장소에서?
"보통 마두가 아니다. 조심해라!"
"어느 문파 출신이냐, 놈!"
"..."
연우혁은 대답하지 않고 한 손에는 채찍, 다른 손에는 암기를 겨눴다.
어차피 시간은 연우혁 쪽에 유리했다. 왜냐하면...
쿵!
현령의 가족들을 빼돌리는 걸 확인하고 뒤늦게 돌아온 이 학사가 외쳤다.
"위소(衛所)에 연락을 보냈네! 곧 병사들이 올 거야!"
"!"
그 말을 들은 낭인들의 낯빛이 변했다. 연우혁은 이 학사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습니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빈틈!"
연우혁은 당황하느라 빈틈을 드러낸 낭인 앞에 접근한 뒤 바로 암기를 쏘아버렸다. 낭인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이 개하고 흘레붙을 놈이!"
분노해서 덤벼들려던 다른 낭인이 채찍에 맞아 쓰러졌다. 남은 낭인들은 그 지독함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관에서 나온 첩자 놈들이 정말 비싼 마두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 * *
옥면살검과 하 교위는 빠르게 수십 합을 나누었다.
옥면살검의 기세가 악랄하고 패도적이었다면 하 교위의 기세는 단단하고 안정적이었다. 옥면살검은 상대가 누군지 떠올리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금의위!! 금의위 놈이었구나!!"
불가(佛家) 무공하고도, 도가(道家) 무공하고도 다른 유가(儒家) 냄새가 나는 무공을 사용하는 무림인들은 강호에 드물었다. 그 몇 안 되는 이들이 바로 금의위였다.
하필이면 금의위가 관심을 갖고 있었다니. 이 불운에 옥면살검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놈을 죽여 버리기만 하면...'
하 교위는 진충보국(盡忠報國) 초식을 펼쳤다. 연우혁이 익힌 권법의 초식과 같은 이름이었지만 그 위력과 심오함은 천지차이였다.
다급하게 덤벼들었다가 한 대 얻어맞은 옥면살검은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삼켜야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장 뒤늦게 달려온 귀 총관은 난장판이 벌어진 은신처 상황에 경악했다.
낭인들은 절반 넘게 쓰러져있고 옥면살검은 웬 무림인과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총관, 어떻게 된 일이냐! 네놈이 자신한 입구로 침입자가 들어왔단 말이다!"
옥면살검은 검을 섞으면서 외쳤다. 총관은 믿을 수가 없어서 부정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쉽게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 교위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우릴 도와준 놈이 없었다면."
"뭐...? 감히!"
옥면살검은 배신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살기를 폭발시켰다. 총관은 다급하게 외쳤다.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간계일지도 모릅니다!"
"닥쳐라!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해라!"
"알, 알겠습니다."
총관은 다급히 술법을 준비했다. 종을 흔들자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핏빛 기운이 끓어올랐다.
"혈귀(血鬼)여, 나와서 부복해라!"
"강시!"
이 학사는 놀라서 외쳤다. 상대 술사가 제법 귀한 보물을 갖고 있었는지 혈강시를 불러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왜 왔겠나?"
이 학사는 보따리를 풀더니 검을 꺼내서 허공에 던졌다. 동시에 단전의 내공을 심법에 따라 발산했다.
그러자 검이 빠르게 날아가더니 활활 타오르며 혈강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귀 총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혈귀여, 검을 짓밟고 놈을 부숴버려라!"
"삿된 것을 베어버려라!"
두 사람은 치열하게 대결했다. 혈강시는 날아다니는 검을 부러뜨리고 앞으로 돌진하고 싶어했고, 검은 혈강시를 꿰뚫어서 벽에 박아버리고 싶어했다.
연우혁은 남은 낭인을 마지막으로 쓰러뜨린 다음 거세게 숨을 내쉬며 영안을 열었다.
"기해혈!! 기해혈 찌르십시오!!"
"고맙네!"
이 학사는 쾌재를 부르며 검으로 혈강시의 급소를 찔러버렸다. 귀 총관의 눈이 그 황망한 광경에 부릅떠졌다.
저 혈귀가 어떻게 만든 놈인데 저렇게 쉽게 쓰러진단 말인가?
"저... 저...?"
"이 금의위 잡놈이...!"
옥면살검은 옆의 상황도 모르고 투덜댔다.
금의위 놈들은 고리타분한 검법이나 익히는 온순한 개새끼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제법 강했다.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걸 핑계 삼아서 총관 놈에게 요구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놈이 제법이다! 차라리 지금 보물을 내놓..."
옥면살검은 옆을 힐끗 보았다. 원래 혈옥갑을 숨겨놓은 비고가 열려서 텅 비어있었다.
"...?!!!!"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옥면살검의 눈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뭐지?'
교위는 상대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어 자세를 곧게 잡고 방어에 들어갔다.
옥면살검은 하 교위의 예상보다 반 수는 위였다. 원래 사파 무인들은 뒷심이 약해 쉽게 무너지는데 이 자는 그리 맹공을 펼치면서도 호흡이 그리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저 모습도 함정일 수 있었다.
"어... 어떤 새끼가 감...?"
푹!
그 순간 옥면살검의 가슴팍에 유성처럼 비도가 날아들어서 박혔다. 연우혁은 자신이 던지고서도 탈혼비도가 먹혀들어갔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이게 통하다니!'
영안으로 확인하긴 했지만, 저 정도나 되는 상대가 이렇게 크게 방심할 줄은 몰랐다.
대체 어째서?
은광산 실종 사건 (4)
"윽."
연우혁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영안을 켜놓은 덕분에 연우혁은 자신의 육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탈혼비도는 강 노인의 장담대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단전과 경맥을 쥐어짜는 무공이었고, 그 탓에 온몸의 내공이 순간적으로 텅 비어버렸다.
털썩!
"괜찮나?!"
이 학사는 뒤늦게 놀라서 연우혁을 부축했다.
일개 포두가 옥면살검 같은 일류 고수를 일격에 죽인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순리(順理)가 아닌 역리(逆理)에 가까운 무공을 쓴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상대가 방심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저렇게 일격에 숨통을 끊을 수 있겠는가.
"내공이..."
"쉬고 있게! 어차피 다 끝났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 교위가 총관에게 달려들었다.
혈귀도 잃어버리고 옥면살검까지 죽어버리자 총관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보ㅁ... 컥!"
금의위는 증인을 만들겠다고 생포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상대를 내버려봤자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만큼 하 교위는 가차 없이 숨통을 끊어버렸다.
"죽었나?!"
"죽었네."
하 교위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환약을 하나 꺼내서 입에 던져 넣었다. 옥면살검과의 격전이 생각보다 격렬한 만큼 내상이 조금 있었다.
"연 포두는?"
"쓰러졌네. 탈진한 것 같아. 그런 위력의 초식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지."
"정말 놀라운 재능이군."
하 교위는 쓰러진 포두를 보며 말했다.
아직 일류도 되지 않는 무인이 저런 능력을 발휘하다니.
물론 일반적인 무공은 아니었다. 저렇게 한 번 쓰는 것만으로도 탈진하는 초식은 일반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그 초식으로 옥면살검을 죽인 건 타고난 무재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무공을 사사받지도 못했을 텐데 이 정도 무공이라면...
"무공을 정식으로 배우지도 못했을 텐데."
"이 포두야 독견지명(獨見之明) 아닌가. 그 총명함이라면 이해가 가지. 그런데 좀 사파스럽게 싸우긴 하더군."
하 교위는 친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전이 열린, 비범한 지혜를 가진 이 포두는 금의위 교위인 본인도 쉬이 예상하기 힘든 능력을 갖고 있었다.
좀 사파스럽게 싸우긴 했지만.
"이 정도 공이라면 장계에 연 포두의 이름을 써서 올려야겠군."
"장계에?"
이 학사는 뜻밖이라는 듯이 하 교위를 쳐다보았다.
금의위도 조직인 만큼 체면이 있었다. 교위가 해결하면 해결했지 그 옆 이름에 포두 따위가 들어간 걸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용에 한 줄 언급이나 해주면 잘 대접해준 것이었다.
"위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건 내가 알 바 아닐세."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하 교위의 모습에 학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자네답군. 나도 같이 장계를 써주겠네. 나까지 이름을 넣으면 쉽게 무시하진 못하겠지."
"고맙군."
하 교위는 환약을 꺼내서 이 학사에게 내밀었다.
"난 괜찮네만?"
"연 포두를 먹이란 소리였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