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솔로 탈출을 위하여 (2)
콰콱!
오러의 절삭력이 발파에 실렸다.
공간을 가열하고 가르며 쇄도했다.
일격에 드래곤의 어깨를 관통했다.
"...커아악!"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어깨를 꿰뚫렸다.
지름 50센티나 되는 구멍이 생겨났다.
물론 그의 압도적인 덩치에 비해서는 작은 구멍이긴 했다. 부위도 어깨인지라 목숨에 지장이 갈 상처도 아니긴 했다.
사람으로 치자면 연필이나 볼펜 하나가 어깨에 꽂힌, 딱 그 정도 상처였다.
하지만 안 죽는 상처라고 안 아픈 건 아닌 법.
아팠다.
진심으로 무진장 아팠다.
자랑스러운 이 땅의 드래곤으로 태어나 이 정도로 다칠 일 자체가 없었던 솔리타스였다.
난생처음 겪는 미지(?)의 아픔에 솔리타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참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크, 그으아아악!"
절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뻔했다.
사무치도록 엄마를 찾고 싶어졌다.
회복 마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으아악! 그으악!"
당황해서 쿵쿵 수십 미터나 물러났다.
전신의 비늘 사이사이로 식은땀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당황스러웠다.
이해가 안 됐다.
솔리타스의 시선이 하비엘을 향했다.
'저거, 인간 맞는 거지?'
분명히 맞다.
다른 드래곤이 폴리모프를 한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순수한 순종 인간이 맞는 건데, 고작 이쑤시개 같은 검 한 자루로 자신의 어깨를 일격에 관통해 버렸다.
'방금 그 공격이 어깨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왔다면....'
예를 들자면 머리나 목, 가슴으로 날아왔다면?
그래서 미간이나 숨구멍에 구멍이 퍽 뚫렸다면?
"...."
그냥 아픈 걸로 끝나진 않았을 터다.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곤경에 빠졌겠지.
'이해가 안 돼.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저놈은 인간인데. 난 드래곤인데. 그런데 인간이 일격에 내 어깨를 뚫었다고?'
행여나 이걸 소설로 쓴다면 당장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비웃음만 잔뜩 받을 터다.
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화가 되었다.
통증과 함께 몰려오는 당황스러움과 당혹감.
이내 스멀스멀 피어나는 또 다른 감정.
점점, 화가 났다.
'감히.'
츠파아아앗!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의 눈빛이 변했다.
동시에 그의 거대한 몸이 새하얀 광채에 휩싸였다.
강력한 치유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어깨의 관통상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그러나 자존심만은 회복되지 못했다.
'내게 이런 굴욕을 선사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절벽만큼 거대한 두 날개를 활짝 펼쳤다.
집채마저 날려 버릴 돌풍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바닥이 뭉개지고, 던전 전체가 들썩였다.
공성추를 수백 배 확대한 듯한 머리가 통째로 휘둘러졌다. 하비엘이 있는 공간을 휩쓸어 갔다.
콰콰콰콰-!
길이를 다 합치면 족히 40미터는 되는 목과 머리였다.
그처럼 압도적인 사이즈와 무게, 그걸 떠받치는 경이로운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바닥이 갈라졌다.
벽면이 뭉개졌다.
천장이 무너졌다.
단 일격에 던전 내부의 광장 일부가 아예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솔리타스는 맹공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뚫어 버린 인간.
그래서 자신의 자존심을 구정물에 처박아 버린 인간.
그 가증스러운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이런 벼룩 같은!"
후우웅!
독수리가 날파리를 추격하듯.
북극곰이 눈송이를 잡으려 날뛰듯.
솔리타스가 날개와 사지를 맹렬히 휘둘러댔다.
머리와 목을 휘젓고, 뒷다리로 땅을 박차고, 발톱으로 허공을 할퀴고, 날개를 휘둘러 폭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파괴의 현장이었다.
던전 내부의 광장이 실시간으로 무너지고, 뭉개졌다.
그러나 하비엘은 끝끝내 잡히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의 흉포한 연속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마치 여름밤 침대 머리맡에 등장한 모기처럼.
겨울철 마스크 필터 사이로 쇽쇽 침투하는 초미세먼지처럼.
솔리타스의 모든 공격을 따돌리고 회피했다.
그것도 매우 여유롭게.
"...."
하비엘은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숨이 차지 않는다.
저 드래곤의 공격이 너무나 잘 파악된다.
솔리타스의 내리치는 앞발을 피해내며, 하비엘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저 드래곤, 약한 건가?'
아니면 자신이 강한 건가.
어느 쪽인지 헷갈렸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저 드래곤을 상대하는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버겁지 않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싸울 만해.'
하비엘은 그만 희미하게 웃어 버렸다.
분노한 드래곤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상황이다.
엄청난 덩치와 무게로 파괴적인 공격을 쏟아부어 오고 있다.
한데도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딱히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드래곤의 공격은 빠르고 파괴적이었지만, 자신은 더 빨랐다.
엄청난 덩치에 어울리는 드래곤의 경이로운 공격 범위가 압박을 가해와도 언제나 피할 틈이 보였다.
그쪽으로 그저 피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드래곤의 허점에 반격을 찔러넣기만 하면 됐다.
타다닷!
땅을 박찼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져 내려오는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아래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박살 나는 바닥과 함께 파편이 날아왔다.
수백 조각의 치명적인 바위 파편.
그 모든 파편의 속도와 궤적을 순식간에 읽어냈다.
감각과 반응.
물 흐르듯이 이어가며.
덮쳐오는 일곱 덩이의 파편을 연달아 밟았다.
허공에서 계단을 오르듯이 박차고, 밟으며, 일곱 번 방향을 바꾸었다. 아니, 허공을 달렸다. 그리고 발파를 쏘았다.
투확!
발파의 반발력이 전신을 밀어냈다.
허공을 내달리던 몸이 순식간에 멈칫.
뚝 떨어졌다.
코앞으로 드래곤의 앞발도 떨어져 스쳐 지나갔다.
후우우웅!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드래곤의 거대한 앞발.
그걸 보며 하비엘은 자연스럽게 검을 내뻗었다.
오러를 일으켰다.
츠샤앗, 카가각!
드래곤의 앞발에 흠집이 새겨졌다.
다섯 장의 비늘이 잘려나갔다.
왈칵, 커다란 주전자가 쏟아지듯이 피가 뿌려졌다.
"아얏!"
삽시간에 새끼손가락을 베인 솔리타스가 앞발을 움츠렸다.
따끔해서 절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나 하비엘에겐 자비가 없었다.
스칵! 스카카칵!
아예 솔리타스의 손목 위로 내려앉았다.
오러가 실린 검을 서슴없이 내리그었다.
솔리타스의 손목에 세 줄기의 혈선이 그려졌다.
"그아, 앗!"
황급히 앞발을 털었다.
다른 쪽 앞발로 손목을 훑었다.
그러나 이미 하비엘은 도약을 마치고 저 멀리 지면에 착지하고 있었다.
'무슨 저런! 크아악!'
솔리타스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여름밤에 잠에서 깨어나 맨손으로 모기를 잡으려고 몽유병 환자처럼 허우적대는 인간들의 고통을 이제는 좀 이해할 것 같다.
아무리 앞발을 휘둘러도.
꼬리로 후려치고 날개를 떨쳐도.
그렇게 주위의 모든 공간을 휩쓸고 파괴해도.
저 자그마한 인간 하나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소드마스터인가? 아니, 엄마가 얘기해 준 소드마스터 인간과는 너무 다른데?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야. 저 인간, 이야기 속 소드마스터들보다 훨씬 센 것 같은데?'
경악 속에서 솔리타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탄전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아니, 마법까지 동원해도 그렇다.
저 은발의 인간에게 자신은 그저 거대한 샌드백일 뿐.
심지어 맷집마저 좋아서 때리는 맛까지 찰진 고깃덩이일 뿐.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도망치자.'
솔리타스는 결심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
이대로 있다간 죽을 판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날뛰어도 저 인간을 잡을 수는 없을 듯했다.
반면에 저 인간은 착실한 데미지를 자신에게 입혀 오고 있다.
그러니 장기전으로 가면 결국 자신이 진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자존심보다 훨씬 중요하니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9천 년은 남은 창창한 자신이었다.
그런데 한때의 자존심으로 뻗대다가 여기서 허무하게 죽기는 싫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현실적으로 사는 게 현명한 거지!'
그러니까 도망치자.
더 낭패를 보기 전에 튀자.
더 은밀한 곳에 새 던전을 만들자.
그래서 힘을 키운 뒤에 복수하자.
'50년쯤 뒤면 충분하겠지. 그땐 저 인간 놈, 늙어서 약해져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그때 저놈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괴롭히며 오늘의 치욕을 갚아주는 거야.'
결심을 했으면 바로 움직여야 하는 법.
솔리타스는 곧바로 도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첫 단추는 브레스였다.
"건방진 인간 놈아! 죽어라! 흐으으으으읍!"
후와아아아악!
짐짓 위협적으로 외쳤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를 가득 채운 숨결에 드래곤하트의 마나를 섞었다.
열화와 같은 기운이 숨결을 물들였다.
그 순간, 힘껏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
지옥과도 같은 열기의 화염 숨결이 쏟아져 나갔다.
얄밉게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은발 인간을 덮쳤다.
하지만 솔리타스는 기뻐하지 않았다.
브레스는 그저 속임수일 뿐이다.
솔리타스는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계획의 다음 단계를 실행했다.
'지금이다!'
파아앗!
재빨리 마나하트를 움직였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마나의 배열을 덮어썼다.
동시에 그의 거대한 육체가 빠르게 변화했다.
샤아아아아....
신비로운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솔리타스는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종족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특별한 마법, 폴리모프였다.
'좋아, 이 틈에 빠져나가는 거다.'
이제 거대하던 드래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훤칠한 키의 붉은 머리칼 청년이 있을 뿐.
그렇듯 폴리모프를 마친 솔리타스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던전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어서, 조금 더 빨리!'
방금 쏘았던 브레스의 여파가 가라앉기 전에.
은발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어서 던전을 빠져나가야 한다.
던전 출구 밖으로 나가자마자 공간 이동 마법으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솔리타스가 세운 도주 계획이었다.
'젠장. 공간 이동 마법, 여기서 바로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출구를 향해 내달리는 동안 솔리타스는 투덜거렸다.
공간 이동 마법.
말 그대로 머나먼 공간을 단숨에 도약할 수 있게 해주는 경이로운 마법.
하지만 이 던전에서는 그걸 쓸 수 없었다.
공간 이동을 방해하는 마법진을 꼼꼼히 설치해 둔 까닭이었다.
'50년 전의 멍청한 나 같으니라고!'
이 던전을 만들 때는 설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누군가를 피해 던전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저 다른 드래곤들이 던전을 만드는 것처럼 했다.
엄마한테 배운 던전 만들기 가이드.
혹은 모범적인 드래곤 대세 던전.
그걸 충실히 참고하며 이곳을 만들었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공간 이동 방해 마법진을 꼼꼼하게 깔아두었다.
'젠장! 젠장!'
방해 마법진 때문에 공간 이동은 쓸 수 없다.
함부로 썼다간 좌표가 모조리 뒤엉키고 꼬이게 된다.
최악의 경우엔 온몸이 분해되어서 따로따로 전송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솔리타스는 더욱 힘껏 내달렸다. 던전 출구를 향하여. 생존의 꿈을 위하여. 자신의 두 다리만 믿고 달렸다.
그리고 악몽 같은 인간과 마주쳤다.
"드래곤?"
"...!"
어느새 앞쪽에 스윽 나타난 은발의 기사.
벌써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져오고 있다.
하지만 이쪽을 보는 눈동자는 이미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다.
네가 아까 그 빨간 드래곤이구나.
그런데 어딜 그리도 바쁘게 뛰어가는 거니?
솔리타스는 엉겁결에 대꾸했다.
"나 드래곤 아닌데?"
"...."
은발 기사의 표정이 굳었다.
솔리타스는 파르르 떨리는 6번 척추를 느끼며 후회했다.
방금 대꾸, 자기가 생각해도 등신 같았다고.
폴리모프, 티 나게 빨간 머리로 하지 말걸 그랬다고.
하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은발의 기사가 검을 들었다.
이쪽을 향해 성큼 다가오며 목을 겨누었다.
솔리타스는 직감했다.
'당했다.'
외통수에 몰렸다.
이제는 본체로 돌아갈 시간이 없다.
그러다간 변신하기도 전에 목이 잘릴 것이다.
마법으로 반항해도 승산이 없다.
마나를 움직이는 즉시 목이 잘릴 것이다.
갑작스러운 육탄전으로 기습을 감행하면?
그것도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일 터였다.
'본체로 싸울 때도 상대가 안 됐는데 지금은 더더욱....'
승산이 없으리라.
'내가 천 살만 더 나이를 먹었어도.'
저런 인간 따위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솔리타스는 개탄하며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다가오는 은발의 기사에게 시도할 마지막 저항을 준비했다.
차라리 자폭이라도 하자.
독한 마음을 먹었다.
드래곤하트를 서서히 움직였다.
내부의 마나 배치를 바꾸었다.
자신이 품은 모든 마나가 충돌하도록.
그 충돌이 파괴적인 폭발로 이어지도록.
이 일대를 모조리 휩쓸어 버리도록 준비하고, 각오했다.
그리고 마침내 은발의 기사가 세 걸음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지금!'
어린 드래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폭을 향한 최후의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을 눈꼬리에 머금었다.
'억울해.'
이제부터 나는 펑, 하고 터지겠지.
저 가증스러운 인간 놈과 나란히 최후를 맞이하겠지.
그렇게 결혼도 못해보고.
여자 한번 사귀어보지 못하고.
앞발 꼬옥 잡고서 데이트하기, 던전에 바래다주고 뽀뽀하기, 텔레파시로 연애편지 주고받기, 입술에 묻은 생크림 브레스로 호오 닦아주기, 무릎 꿇고 청혼하고는 쑥스러워서 산봉우리 뽀개기 등등.
그런 달달구리한 경험 한번 해보지 못하고서.
모태 솔로 총각 드래곤 귀신이 되는 거겠지.
생각하니 억울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왈칵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눈물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이봐요, 거기 드래곤님? 잠깐 내 제안 좀 들어볼래요? 그럼 10년 안에 장가, 확실하게 갈 수 있을 텐데."
불현듯 어디선가,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48화. 솔로 탈출을 위하여 (3)
어디선가 불현듯 들려온 달콤한 유혹.
귓구멍 속 달팽이관에 담는 것만으로도 솔깃솔깃 달달구리해지는 제안.
그 뜻밖의 꼬드김에 솔리타스는 멈칫했다.
"...뭐?"
발동하려던 자폭을 급히 중단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다른 인간이 있었다.
아까 처음 브레스를 쏘기 직전에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방금까지 자신과 싸우던 은발의 기사와 한패인 인간.
어두운 머리칼의 사내였다.
"제안? 네가? 내게?"
"예. 제가. 그쪽 분께."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방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드릴 제안을 한번 들어보시죠."
"그래서, 들으면 10년 안에 장가를 갈 수 있게 해 준다고?"
"예."
"그걸 어떻게 믿지?"
솔리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자신의 앞뒤를 둘러싸고 서 있는 하비엘과 로이드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솔깃한 말이기에 이야기를 들어볼까 했는데, 도저히 믿음이 가질 않아. 따지고 보면 네놈들은 내 던전에 제멋대로 들어온 침입자일 뿐인데."
"예? 침입자라니요? 천만의 말씀을."
솔리타스의 눈길이 거칠어졌다.
로이드가 재빨리 입술에 침을 츄릅 발랐다.
"저흰 처음부터 좋은 제안을 드리려고 여길 방문했을 뿐입니다."
"하. 헛소리. 그럼 어째서 마법 함정을 모조리 격파하며 들어온 거냐."
"안 죽으려고요."
"뭐?"
"마법 함정이 어찌나 정교하게 촘촘하게 깔려 있던지 말입니다. 너무 치명적이었달까요.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안 죽으려고 최선을 다했지요. 그러다 보니 함정을 파손하게 된 거고 말입니다. 그 점이 실례가 됐다면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슨...."
솔리타스는 잠시 반박이 궁해졌다.
저 인간이 하는 말.
뭔가 막 던지는 듯한데 은근 말이 되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쪽이 그럴듯한 반박을 꺼내기도 전에 재차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어쨌건 그렇게 나름 열심히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좋은 제안을 드리려고 말입니다."
"좋은 제안이라니...."
"최고의 장인에게 보석 가공 기술, 배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뭣?"
솔리타스는 멈칫했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로이드가 재빨리 말했다.
"둘러 말하지 않겠습니다. 존경하는 드래곤 님, 저는 당신의 고민을 알고 있습니다. 손재주가 좋지 않으시지요? 보석 가공에 어려움을 겪어 왔고, 그래서 보물을 쌓아 두지 못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지 못해서 상심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손재주가 좀 없어도 괜찮습니다. 노력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장인에게 10년쯤 빡쎄게 수업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보석 가공, 충분히 마스터하게 되지 않을까요."
"자, 잠깐. 잠깐만."
솔리타스가 로이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경악감 가득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손재주가 없다는 것, 그리고 결혼 문제로 고민 중이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대체 무슨 수로? 어떻게?"
당황스러웠다.
아니,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드래곤이었다.
어떤 인간과도 교류하지 않았다.
성체가 된 지도 겨우 50년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은커녕 다른 드래곤이나 유사 인종과도 교류한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인간이라니.
족집게도 이런 족집게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 인간이 자신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걸까.
혹시 유령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정체를 감추고서 인간인 척하는 나이 지긋한 드래곤인 게 아닐까.
혹은 인간 중에서도 지고의 경지에 달한 대마법사거나 예언가쯤 되는 걸까.
솔리타스는 짬짜면처럼 반반으로 뒤섞인 경계심과 호기심, 조심스러움과 궁금증을 느꼈다.
로이드의 눈꼬리에 정중한 눈웃음이 내걸렸다.
"그걸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렵지 않았다니?"
"철혈의 기사가 알려줬거든요."
"기사? 철혈의?"
"네."
"그게... 누군데?"
"엄청나게 강력한 기사입니다. 그쪽 분의 감각을 속이며 이곳을 정찰하고 유유히 빠져나갈 정도로 말입니다."
"거짓말."
솔리타스가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너는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인간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다. 내 감각을 속이고 이 던전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고? 그때까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그런 인간이 존재할 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너는?"
"예."
"어떻게?"
"방금 저 친구를 보셨지 않습니까."
로이드가 천연덕스럽게 하비엘을 가리켰다.
"기억하실 텐데요. 방금까지 검 한 자루로 그쪽 분과 호각의 대결을 펼쳤지요."
"그건...."
"게다가 철혈의 기사는 저 친구보다 더 강합니다."
물론 사실이다.
소설에서 '철혈의 기사'라는 칭호를 받던 때의 하비엘. 그 미래 시점의 하비엘은 현재의 하비엘보다 강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였다.
6개의 써클, 즉 헥사 써클의 보유자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갓 성체가 된 드래곤 솔리타스의 감각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로이드가 말했다.
"그 기사가 제게 알려줬습니다. 이곳에 드래곤의 던전이 있는데 쌓여 있는 보석이 영 없더라고 말입니다. 그나마 조금 쌓인 것마저도 가공 수준이 형편없더라고도 말하더군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토대로 내 상황을 추측했다는 건가?"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에 자신감을 실었다.
"그게 아니면 제가 무슨 수로 그쪽 분의 사정과 고민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철혈의 기사는 당연히 가공의 인물이다.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책 속의 하비엘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블러핑, 즉, 뻥카를 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게 뻥카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누구에게도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안 통할 뻥카도 통하는 법.
통할 뻥카는 더 잘 통하는 법.
"크흠."
솔리타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그려졌다.
의심과 고민, 호기심과 관심이 그의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저 인간, 믿을 수 있을까.
저 말, 과연 진짜일까.
자연히 의심이 생겼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곳이 있었다.
'내 고민의 핵심을 너무 정확하게 찌르고 있단 말이지.'
보석을 세공할 손재주가 없어서 보물을 쌓지 못했고, 그래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 고충과 아픔.
그걸 족집게로 콕 짚듯이 언급했다.
그 고민을 해결해 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정말로 누군가가 몰래 던전의 상황을 살펴본 게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정보였다.
한데 그걸 알고 있다.
그 말은 곧, 저 터무니없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확인해보고 싶다.
딱히 손해는 아닐 테니까.
솔리타스는 고민 끝에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내게 좋은 제안을 하러 왔다고?"
"예."
저 드래곤, 넘어왔다.
그걸 확신한 로이드의 입가에 신뢰, 성실, 정직이라고 써 놓은 듯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혓바닥이 입술에 촵촵 침을 발랐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며, 하비엘은 문득 생각했다.
'철혈의 기사라.'
전에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로이드가 지나가듯 언급했던 이다.
'과연 누굴까.'
궁금해졌다.
자신보다 강하다고 했다.
한데 그런 이름, 다른 데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름을 알리지 않고서 조용히 검을 수련하는 자인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해. 어째서 그런 자가 로이드 님께 은밀한 도움을 준 거지?'
자신을 능가하는 엄청난 실력자.
로이드와 몰래 교류하는 듯한 자.
하비엘은 그 두 가지 사실이 잘 매칭이 되지가 않음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상해. 게다가 로이드 님이 누군가를 몰래 만나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혹시 자장가로 자신을 재워 둔 뒤에 만난 걸까.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하지만 로이드가 말하는 저 철혈의 기사가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평소부터 생각하던 로이드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어설픈 정보와 계획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가 생각하는 로이드는 좀생이였다.
쪼잔하고, 깐깐하고, 야비하며,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 아등바등 악착같이 노력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즉, 그만큼 소심하다는 뜻이다.
사람은 소심할수록 신중한 법이다.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움직이는 분이지, 로이드 님은. 어설픈 정보와 계획? 그런 걸로 절대 함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야. 그랬다간 자칫 큰 손해를 볼 거라고 생각하겠지. 즉, 로이드 님은 이곳에 드래곤의 던전이 있다는 사실과 이곳의 속사정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신뢰할 만한 자에게 정보를 얻었고, 그걸 토대로 계획을 짜서, 움직인 것이겠지.'
그 결과가 지금의 순간이리라.
'그렇다는 뜻은 로이드 님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철혈의 기사, 그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뜻인데.'
대체 누굴까.
추측을 해 볼수록 궁금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드래곤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려는 로이드의 모습이 조금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정보를 근거로 삼아서 이 상황, 모든 판을 설계한 거야.'
자신을 데려와서 드래곤과 싸우게 했다.
자신이 드래곤을 제압하게 됐다.
그렇게 이쪽의 우세함을 드래곤에게 각인시켰다.
드래곤 특유의 끝없는 오만함을 한풀 꺾어놓았다.
그렇듯 기선을 제압한 유리한 상태에서 드래곤이 혹할 달콤한 제안을 내밀고 있다.
특유의 현란한 혀놀림을 선보이며 말이다.
'저 혀놀림은 그 자체로 무기야.'
한데 저 혀놀림.
그냥 무작정 혀를 놀리고 입을 터는 게 아니다.
혀놀림이 100퍼센트 먹혀들어갈 환경과 상황을 미리 만들어둔 거다.
그렇게 완벽하게 깔린 판 위에서만 혀를 놀리는 거다.
그래서 매번 위력적이고 효율적인 결과를 만드는 거겠지.
'하여간 무시무시한 인간 같으니.'
그리고 저런 인간에게 걸려든 가련한 드래곤 같으니.
하비엘은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드래곤 솔리타스를 바라보았다.
솔리타스는 로이드의 혀놀림에 이미 반쯤 넘어오고 있었다.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최고의 장인에게 보석 세공 기술을 배우시는 겁니다. 도제가 되어서 말이지요."
"도제? 장인의?"
"예. 마침 제 영지에 그런 분이 계십니다."
"누구지, 그게?"
"왕실의 드워프 장인인 웰스 코기두스 어르신입니다."
"드워프? 코기두스?"
솔리타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장인인데 심지어 드워프라니.
그러면 실력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최고 중의 최고가 확실할 터다.
"그러면... 나보고 그 드워프의 도제가 되어 보석 세공 기술을 배우라는 건가?"
"예. 혹시 자존심이 상하시거나 하는 건 아니죠?"
"...으음."
솔직히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을 듣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깟 자존심 살짝만 굽히면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겁니다. 부자가 되고, 결혼도 하고, 알콩달콩 신혼 생활에, 2세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지요."
"그런가? 신혼여행도 가는 거고?"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
솔리타스의 숨소리가 조금 커졌다.
하지만 그는 드래곤답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흐음, 좋은 제안이기는 한데, 그래서 여전히 의심이 되는군."
"의심이라. 어떤 점이요?"
"나한테 일방적으로 퍼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군. 당연히 네가 내게서 원하는 것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제 슬슬 말씀드리려던 참인데."
"말해 보도록."
"예.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겠습니다. 제 영지 인근에서 한 달에 딱 한 발만, 브레스를 사용해 주십시오."
"...브레스를?"
"예."
솔리타스는 의아해졌다.
저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제 영지에 대하수로가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지하의 하수로를 통해 각종 오수와 분뇨를 따로 분리하고, 모아서, 처리하는 시설이지요."
"그래서?"
"그 처리의 결과로 슬러지라는 침전물이 대량으로 생겨날 겁니다."
"설마...."
"예. 역시 드래곤이십니다. 벌써 짐작하셨군요. 그 짐작이 맞습니다."
"슬러지라는 걸 브레스로 태워달라는 말인가?"
"예."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손으로 처리하고 태우기에는 너무 많은 양입니다. 어렵고 위험하지요. 하지만 드래곤인 그쪽 분의 브레스라면 딱 10초면 됩니다. 충분히 재로 만들어주실 수 있겠지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사람의 힘으로 슬러지를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마법사를 동원한다고 해도 그럴 터였다.
'최고의 왕실 마법사가 사용하는 지옥불꽃 마법? 그걸로도 어려워.'
지옥불꽃 마법은 물론 뜨겁긴 할 터다.
하지만 그 뜨거움은 몇 초도 지속되지 않는다. 범위 또한 생각보다 좁아서 대량의 슬러지를 한꺼번에 처리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쓸데없는 폭발력으로 펑펑, 지저분한 슬러지 파편을 사방에 튀겨댈지도 모른다.
반면에 드래곤 브레스는?
'온도 자체가 엄청나지.'
게다가 범위와 고열의 지속 시간까지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말 그대로 한 달에 한 번만 훅.
브레스를 불어 주면 쌓여 있는 슬러지를 단숨에 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 재로 비료를 만드는 거지.'
그것이 로이드의 계획이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설득의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혹시 슬러지를 처리하는 일이 더럽다고 느껴지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제 제안을 거절하시고 이 어두컴컴한 던전에서 평생 모태솔로로 살 계획이 아니시라면 말입니다."
"...."
모태솔로.
그 한마디가 솔리타스의 심장을 콱 옥죄었다.
'제, 젠장.'
레드 드래곤은 맹렬히 고민했다.
저 인간이 하는 제안.
듣고 보니 자존심을 두 번이나 접어야 하는 일이었다.
드워프 장인의 도제가 되어야 한다.
분뇨가 침전된 슬러지를 처리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자존심만 살짝 굽히고 접어 두면?
'평생 꽃길을 걸을 수도 있어.'
성공적인 연애와 결혼.
지금껏 간절히 소망해 왔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한 번... 해 볼까.'
솔리타스의 마음이 움직였다.
물론 그는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이 시점의 자신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엘프의 숲을 둘러싼 갈등에 의해 하비엘과 대결하게 됐다는 사실도. 그 대결의 끝에 뿔이 잘리고 치명상을 입어 도망치게 되었다는 것도. 그 쓰라린 상처에 500년이나 시름시름 앓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됐다는 사실 또한 전혀 몰랐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로이드 덕분에 솔리타스의 앞에는 새로운 선택의 꽃길이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솔리타스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심을 굳혔다.
"좋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팔랑!
로이드가 환하게 웃으며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 순간을 위해 알뜰살뜰 준비해 둔 자본주의적 증표.
인간은 물론이고 오크와 엘프도, 심지어 드래곤마저도 피해 갈 수 없는, 어지간한 마법의 맹약보다 더욱 현실적으로 지독한 노예 계약의 필수 구비 서류.
외주 근로 계약서였다.
149화. 시공 가이드라인 (1)
하루가 지났다.
화염굴에서 프론테라 백작령까지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래곤인 솔리타스가 사용하는 공간이동 마법 덕분이었다.
다 함께 던전을 걸어 나왔다.
공간 이동 방해 마법진의 영향 범위를 벗어났다.
그렇게 솔리타스의 공간이동 마법에 몸을 실었다.
파팟, 츠팟, 빛이 번득이고 잠깐 현기증이 이는가 싶더니 익숙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프론테라 백작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럼 자아, 이쪽으로."
로이드는 곧바로 솔리타스를 안내했다.
드워프 장인 코기두스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 청탁을 시도했다.
"저기, 코기두스 님?"
"무슨 일이냐. 나 바쁜데."
"바쁘신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일 때문에 말입니다."
"전에 말했던 일?"
땅땅땅, 한창 쇠망치를 두드리던 코기두스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로이드와 그 뒤에 서 있는 솔리타스를 보고는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뒤에 있는 건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혹시...."
"예, 맞습니다. 전에 수락하셨었지요? 도제를 하나 거두어 달라고 드렸던 부탁 말입니다."
사실이었다.
드래곤 솔리타스를 포섭하기 위해 영지를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로이드는 그때 미리 코기두스를 설득해 두었다.
값비싼 와인과 맛있는 안주를 동원했다.
술잔을 나누며 열심히 아양을 떨었다.
코기두스가 지닌 장인 특유의 자존심을 한껏 살려 주었다.
그렇게 적당히 오른 취기만큼 코기두스의 기분이 좋아졌을 때 은근슬쩍 부탁을 했다.
구제불능의 똥손을 지닌 청년이 하나 있다고.
그 청년의 손재주를 조금만 나아지게 해 주시면 좋겠다고.
당연히 처음엔 거절했던 코기두스였다.
도제를 거두라니.
그런 일은 질색이었다.
이득도 없고 귀찮기만 했다.
한데 그런 거절에 대한 로이드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진중한 얼굴로, 진솔하게 말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그 청년, 드래곤이라고.
영지의 개발을 위해 그 드래곤의 조력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한데 조력을 받아내려면 그 드래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그 보상이 바로 어르신의 가르침이라고.
그렇듯 드물게도 솔직한 부탁을 했다.
그 솔직함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자신에게 항상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온 로이드의 기특한 태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코기두스는 그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아니, 계시는 분이 네가 말했던 그분이로구만?"
인간이 아니다.
드래곤이다.
먼 과거에는 수많은 드워프 장인을 노예로 부렸던 천적 같은 종족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솔리타스를 향한 드워프 장인의 눈동자에 짓궂은 기색이 배어났다.
"그러니까, 저 도련님 표현대로 말하자면 엄청난 똥손이시라고?"
"...."
끄덕.
끄덕이는 솔리타스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졌다.
방금 코기두스에게 당했던 팩트 폭력 때문인지. 혹은 드워프의 도제가 된다는 일말의 굴욕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드래곤 던전 외의 장소에 처음 와보는 머쓱함 때문인지.
본인, 아니, 본룡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건 솔리타스는 뜻밖에도 드워프 장인 앞에서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이미 각오는 하고 왔소. 자존심도 접어 두었소. 부디 가르침을 주시면 좋겠소."
"비루한 손재주를 구제하는 건 장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많이 혼나며 배우게 될 거요."
"그 점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소. 아니, 각오하고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
행복한 용생을 위한 결정이며 각오다.
드워프의 제자가 되는 것쯤,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게다가 저 드워프는 이제부터 자신을 똥손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줄 존재가 아닌가.
충분히 스승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솔리타스는 생각했다.
"좋구만."
코기두스의 수염 사이로 너털웃음이 번졌다.
그날부로 솔리타스는 드워프 장인의 도제가 되었다.
아예 코기두스의 숙소에서 함께 지내며 보석 세공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온갖 혼쭐은 다 났다.
매일 잔소리를 듣는 것은 기본.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솔리타스는 한 번도 드워프 장인에게 대들지 않았다.
이게 다 모태솔로 탈출을 위한 노력이라고.
이걸 견뎌 내면 자신도 연애,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더욱 묵묵히 노력했다.
덕분에 로이드와 하비엘, 코기두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솔리타스의 정체를 몰랐다. 그저 영지의 모두가 솔리타스를 최근 드워프 대장간에서 매일 혼나며 일을 배우는 빨간 머리 청년, 이라고만 여겼다.
어쨌건 그렇게 성공적으로 솔리타스를 영입(?)한 로이드는 비로소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이젠 됐다. 대하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인력, 석재, 거기에 슬러지 처리반까지. 필요한 요소가 다 갖춰졌어.'
겨울이 오기 전까지 대하수로를 지어야 한다.
그래야 내년 봄에 창궐할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
로이드는 그 일념으로 본격적인 설계 작업에 돌입했다.
물론 그 전에 설계 스킬을 성장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시공은 범위가 넓으니까. 아니, 넓다 못해 그냥 아예 영지 전체니까.'
지금까지 굴려왔던 중급 설계로는 부족했다.
한 번에 설계할 수 있는 범위를 늘려야 할 필요가 느껴졌다.
'측량 스킬이야 범위가 좀 좁아도 연달아 사용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지형 데이터를 얻을 수 있지. 하지만 설계는 좀 달라. 그냥 자동으로 데이터를 따내는 게 아니라, 일일이 내가 설계를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설계 범위가 좁으면?
열심히 설계를 잘하다가 도중에 흐름이 끊긴다.
'쉽게 비유하자면 자동차의 자동 기어와 수동 기어의 차이 같은 느낌이랄까. 측량은 스킬만 연달아 써 주면 알아서 데이터가 따지는데, 설계는 내가 일일이 데이터를 조작해야 하니까. 마치 수동 기어를 변속할 때 일일이 클러치를 밟아 줘야 하듯이.'
사실 그것보다 더 번거로웠다.
게다가 설계 스킬을 자주 사용할수록 설계의 오차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대하수로는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면 안 돼. 하수로에서 똥물 새면 끝이야, 끝.'
똥물이 새면 지하로 스며들고.
지하수를 듬뿍 오염시키고.
그러면 전염병이 창궐하리라.
엔딩 스포일러로 봤던 병사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안 돼. 그러니까 이번엔 오랜만에 스킬 레벨을 올려야겠어.'
편리함도 추구하고.
혹시나 모를 오차도 줄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목록 중에서 설계 스킬을 선택했다.
딩동.
설계 스킬의 상세한 정보가 떠올랐다.
[중급 설계 : Lv 6]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729,000㎥]
[스킬 전용 옵션 : ① 도면 출력, ② 평면도 표시(3D), ③ 시뮬레이션 모드]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200]
'벌써 중급 6레벨이네.'
그동안 따로 RP를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대형 시공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사이에 스킬 레벨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자, 그럼 간만에 RP 폭격 좀 해 볼까.'
금보다 귀하고 피처럼 소중한 RP를 대량으로 투자하는 일이다.
로이드는 심호흡을 하며 '스킬 레벨업' 메뉴를 선택했다.
[설계 스킬을 <중급 Lv 7>로 레벨업합니다.]
[레벨업에 필요한 RP : 200]
[현재 보유 중인 RP : 4,070]
[스킬 레벨업을 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딩동!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레벨 업!]
[중급 설계 : Lv 7]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1,000,000㎥]
[스킬 전용 옵션 : ① 도면 출력, ② 평면도 표시(3D), ③ 시뮬레이션 모드]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220]
무난하게 레벨이 오르고 설계 가능 범위가 늘어났다.
하지만 로이드는 이 정도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지. 기왕이면 제대로. 아예 등급이 오를 때까지.'
투자를 하는 거면 등급을 올리는 게 낫다.
등급이 오르면 새로운 스킬 옵션이 생길 테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이드는 계속해서 RP를 쏟아부었다.
중급 7레벨에서 8레벨로.
9, 10레벨을 지나쳤다.
거기서 280 RP를 추가로 투자했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지가 눈앞을 수놓았다.
딩동.
[스킬 등급 업!]
[설계 스킬의 등급이 <고급>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새로운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고급 설계 : Lv 1]
[한 번에 설계 가능한 구조물의 면적 : 3,375,000㎥]
[스킬 전용 옵션 : ① 도면 출력, ② 평면도 표시(3D), ③ 시뮬레이션 모드 ④ 시공 가이드라인]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RP : 500]
[현재 보유 중인 RP : 2,870]
'좋아.'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려 1,200이나 되는 RP를 쏟아부었다.
덕분에 설계 면적이 중급 6레벨이던 때보다 4배 이상 늘어났다.
거기에 새로운 옵션 개방도 덤이었다.
'옵션이 중요하지.'
시공 가이드라인이라.
로이드는 새로운 옵션의 상세 내용을 열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시공 가이드라인 - 설계한 결과물의 설계도가 간략한 가이드라인의 형태로 실제 지형에 표시됩니다. 이 가이드라인은 설계자 본인뿐만 아니라 현장의 작업자들에게도 명확히 보이게 될 것이며, 실제 시공이 설계 사항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지를 작업자에게 실시간으로 알려줄 것입니다. (시공 가이드라인은 옵션 ② <평면도 표시(3D)>와 연동됩니다.)]
'뭐?'
로이드는 설명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자 새로운 옵션이 품은 핵심 기능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기존에 지니고 있던 평면도 표시가 작업자들에게도 보이게 되는 거네. 동시에 시공이 설계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작업자에게 곧바로 알려 주기도 하는 거고.'
이거 은근 장난이 아닌데?
만약 저 설명이 사실이라면 작업 능률이 훌쩍 좋아지리라.
로이드는 그러한 예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밖으로 나섰다.
'확인 좀 해 볼까.'
저택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마침 땡볕 아래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던 하비엘이 보였다.
녀석을 불렀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너 보려고 왔지."
"...."
"뭐. 왜. 뭐. 대체 뭐가 불만이라서 또 가자미눈 뜨고 쳐다보는 건데."
"영 믿음이 가질 않아서 말입니다."
"믿음이?"
"예.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로 저를 찾아오셨나 싶어서."
"아. 그러니까 우리가 딱히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서로를 찾을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은 거야?"
"당연하신 말씀을."
하비엘이 땀 닦아낸 수건을 반듯하게 접었다.
"용건을 밝혀 주시지요."
"어. 그럼 삽질 좀 해 줘."
"...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하비엘이 멈칫.
고개를 갸웃거렸다.
"삽질을 말입니까?"
"어. 자, 일단 받고."
녀석이 얼결에 삽을 받아들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말했다.
"여기 좀 파 줄래?"
연무장 중앙을 가리켰다.
하비엘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대뜸 삽을 건네시며 연무장 중간을 파내라니. 이유를 알려 주실 순 없겠습니까."
"응. 없겠는데요."
"...."
"파 보면 알 거야. 일단 나 믿고 파자?"
"후우."
하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처럼 개인 훈련에 집중하고 있던 참인데.
얼마 전 레드 드래곤과 겨루며 느낀 점들을 되새기고 있었는데.
저 좀생이 도련님의 엉뚱한 지시 때문에 그 흐름이 다 끊길 판국이다.
'서둘러 끝내자.'
기왕 하는 거, 후딱 끝내자고 마음을 먹었다.
굳게 삽을 쥐고서 자세를 잡았다.
아예 아스라한 심법까지 동원했다.
콰삭!
무려 소드마스터의 삽질이었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삽이 머리끝까지 땅속으로 푹 파고 들어갔다.
하비엘은 마치 숟가락으로 밥그릇 속 불고기덮밥 퍼내듯 너무나 수월하게 땅을 푹푹 파고, 퍼냈다.
그렇게 얼마나 연무장 바닥을 파냈을까.
땅속에서 뭔가 이질적인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파란색 직선이었다.
땅속에 가로로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선,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었다. 실을 팽팽하게 당겨 놓은 것도 아니었다.
'빛이잖아, 이건.'
밝은 파란 색깔의 빛이었다.
어디서 쏘아냈는지도 모를 푸른빛의 직선이 땅속에 그려져 있었다.
빛이기에 삽으로 건드려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하비엘은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한데 로이드는 계속하라는 눈짓만 보냈다.
"뭔가 표시가 보이지? 그거 따라서 계속 파 볼래?"
"...."
확인, 해 볼까.
하비엘은 호기심을 느끼며 삽을 놀렸다.
땅속에서 드러난 푸른 선을 따라 계속해서 땅을 팠다.
그러자 차츰 푸른 선이 그리는 면이 드러났다.
면을 따라 땅을 파냈다.
선과 면이 그리는 전체적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땅속에 그려진 커다란 정육면체였다.
가로와 세로, 높이가 각각 2미터.
푸른빛의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총 8㎥의 정육면체가 땅속에 그려져 있었다.
덕분에 자신은 그 빛의 표시에 따라 정확하고도 반듯한 정육면체 모양의 수직 땅굴을 파낸 셈이 되었다.
"이건 대체 뭡니까."
절로 물음이 튀어나왔다.
수직 땅굴 위쪽에서 로이드의 대답이 들려왔다.
"시공 가이드라인."
"예?"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
그때부터였다.
"그러니까 그건 말이지...."
뻔뻔한 거짓말과 뻥카로 무장한 로이드가 혓바닥에 힘찬 기어를 넣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향해 피식 웃으며 입을 여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비엘은 문득, 생각했다.
이런 순간이면 로이드 님은 언제나 한결같다고.
하얀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고.
150화. 시공 가이드라인 (2)
"예전에 오크 부락에 석빙고 지어주던 때 말이야. 그때 우리 둘이서 처단했던 흑마법사 기억나?"
로이드의 물음이 날아왔다.
하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억합니다."
"그때 흑마법사가 모아뒀던 마법 재료들 싸그리 가져온 것도 기억하지?"
"예, 물론."
"거기서 얻은 물건 중에 신기한 게 있더라고. 이거. 마나를 주입하니까 허공에 환영을 만들 수 있더라?"
땅굴 위의 로이드가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잡힌 둥근 메달이 보였다.
"그럼 땅속에 그려진 이 빛의 정육면체, 그 메달을 이용해서 그린 겁니까?"
"어. 앞으로 공사를 할 때 설계도를 이런 식으로 땅속에 그려주면 어떨까 싶어서. 작업자들 편하게 일하라고."
"신기한 기능이군요."
"그렇지? 나도 신기해. 더 신기한 기능도 있고. 삽으로 아무 데나 한번 찍어서 파내 볼래? 딱 한 삽만."
"아무 데나 말입니까?"
"어. 아무 데나."
"...."
하비엘은 로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메달을 힐끗 쳐다보았다.
알 수 있었다.
저 메달, 마법 물품인 것은 맞다.
하지만 땅속에 새겨진 빛의 파란 선과 면.
이걸 저 메달로 그렸다는 건 로이드 님의 거짓말이다.
"...."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하비엘은 삽을 들었다.
로이드의 말에 따라 정육면체 땅굴 내부의 벽면 한 곳을 쿡, 찍어서 파냈다.
빛의 선과 면을 따라 반듯하게 만들어져 있던 정육면체 한쪽 면에 커다란 흠집이 새겨졌다.
그러자 변화가 생겨났다.
삐빗!
뾰족한 소리와 함께 그쪽 면의 색깔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로이드의 빙글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봤지? 설계와 실제 시공이 달라지면 그렇게 작업자에게 곧바로 알려 주는 거야."
"그럼...."
"작업자들이 시공에 오차가 생겼다는 걸 현장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거지."
"설렁설렁 일하는 건 이제 끝이라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대신 복지는 빵빵하게 해 주잖아?"
로이드가 악덕업주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설계 스킬 등급을 올리면서 얻은 가이드라인 옵션.
실제로는 어떻게 적용이 되나 싶었다.
한데 실전에서 테스트를 해 보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이건 아예 설계한 평면도 3D 버전이 땅속에 고스란히 표시가 되는 거네. 실시간으로 시공 오차까지 알려 주는 버전으로.'
설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꼼꼼하게 해도.
막상 현장의 작업자들이 개판을 치면 그 시공은 나가리가 된다.
설계 사항을 어물쩍 어기거나, 약간씩 오차가 나도 귀찮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시공을 진행하거나 하는 일은 현장에서 은근 발생하는 일이었다.
현장의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게 방지되는 거지. 시공에 오차가 생긴 게 색깔로 딱 보이니까.'
게다가 가이드라인이 붉은색으로 변하는 기준점, 오차율을 임의로 지정할 수도 있었다.
즉, 이 옵션이 있으면 정밀한 시공은 걱정할 일이 없다.
특히 이번의 대하수로처럼 정밀성이 요구되는 시공은 더욱 그러할 터다.
'게다가 마법 물품이니 어쩌니 하는 거짓말도 대강은 통한 것 같고.'
다행히 하비엘의 의심도 피해낸 듯하다.
그러니까 이젠 됐다.
이제는, 본격적인 대하수로 시공을 시작할 때였다.
♣
시공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자, 이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첫 굴착지로 선정된 영지 중심 촌락 인근.
그곳의 현장에서 바이에른 경의 엄숙한 연설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로이드 프론테라 님의 지도 아래 다양한 공사를 치러냈다. 수많은 온돌방을 만들었고, 마레즈 습지를 비옥한 농토로 만들었으며, 저 드높은 동부산맥의 호수에서 영지까지 이어지는 상수도를 매설하기도 했다."
지금껏 그와 공병대가 참여했던 공사들.
그 업적을 언급하는 바이에른 경의 얼굴에 훈훈한 자부심이 배어났다.
"그뿐이겠는가? 지금은 로이드 님의 설계에 따라 아파트라는 대형 집단 주거 시설을 세우고 있으며, 겨우내 동부산맥의 비탈을 파내고 정비하여 수많은 옹벽을 쌓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모든 공사를 능가할 새로운 업적을 세우기 위해 삽을 들었다."
연설을 듣는 공병대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각자의 작업복 가슴에 새겨진 자잘한 자수. 그 각각의 자수는 대원들이 치러낸 공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공병대원 각자의 훈장이자 노련한 경력을 증명하는 표식인 셈이었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건설할 것이다. 로이드 프론테라 님의 설계에 따라, 영지의 미래를 위하여, 각자의 명예를 걸고서, 오늘도 우리는 외친다. 안전제일!"
"안전제일! 우오!"
힘찬 구호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
공병대 병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수많은 피난민, 영지민들이 로이드를 위해 자원했다.
경험 많은 소수의 공병대가 현장을 이끌고, 다수의 피난민과 영지민이 일손이 되었다.
거기에 로이드가 새로 얻은 설계 옵션, 시공 가이드라인이 편리하고 정밀한 시공을 가능케 했다.
"뽀도동! 뽀동-!"
호바바바밧!
뽀동이가 거대한 궁디를 씰룩거릴 때마다 땅이 퍽퍽 파였다.
그렇게 가로와 세로 4미터.
깊이 5미터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모습을 보던 공병대와 작업자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어났다.
"저기, 땅속에 저건 대체 뭔가? 시퍼런 빛이 보이는 것 같은데."
어느 피난민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 옆의 공병대 병사가 씨익 웃었다.
"아, 저거요? 로이드 님이 땅속에 새겨 주신 가이드라인입니다."
"가이드... 라인?"
"예."
"그게 뭔가?"
"저 선이 땅속의 파야 할 곳과 파지 말아야 할 곳을 정확히 알려 준다고 하더군요."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뭐, 가능하니까 저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거겠지요. 저도 원리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건, 저 표식을 정확히 지키면서 땅을 파고 시공을 하면 될 거라고 하더군요."
"허허, 이거 참. 신기하기 짝이 없구만."
작업을 앞두고 가이드라인에 대해 브리핑을 받은 공병대 병사들.
병사들에게 설명을 듣고서 신기해하는 작업자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시공 가이드라인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데 그 모습이 모두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단순히 땅속에 선과 면이 대강 그려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땅을 파낼 범위만 간략하게 표시된 정도가 아니었다.
땅을 파낼 범위를 그려 주는 선.
그 안쪽에 쌓을 벽돌의 위치와 범위.
그 아래 놓일 기초의 배치와 깊이, 두께까지.
아예 3D 설계도 자체를 푸른 선과 면으로 따서 땅속에 입체 홀로그램으로 선명하게 박아 넣은 듯한 광경이었다.
"저거, 생각보다 엄청 디테일하잖아?"
상상 이상의 디테일과 마주한 작업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모두가 작업에 투입되었다.
뽀동이가 파낸 수직갱을 반듯하게 다듬었다.
영지의 중심 촌락.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배출할 각종 오물과 분뇨.
그걸 가져와서 버리게 될 대형 하수정이었다.
'뭐, 현대식 하수 시스템처럼 각 가정에서 다이렉트로 하수나 오물을 버릴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기엔 기술력이 너무 부족하다.
돈도, 시간도, 인력도 모자란다.
진행되는 공사를 지켜보던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솔직히 기왕이면 만드는 하수 시스템, 가능하다면 대한민국의 것처럼 현대식으로 만들고 싶었다.
집에서 사용한 물이 그대로 하수구로 들어가고, 변기에서 내린 물이 그대로 깔끔하게 내려가고. 그렇게 모든 사람이 별다른 수고나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하수를 처리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선 그게 불가능해.'
현대식 하수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모든 주거 시설에 하수관을 연결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당장 겨울 강추위가 몰려오면 프로나 강이 얼어붙게 될 것이다. 얼어붙는 강물과 쌓이는 분뇨에 의해 대규모의 전염병이 창궐하게 될 예정이다.
그 전에 대하수로 공사를 완료해야 한다.
그러자니 각 가정에까지 일일이 하수관을 만들고 연결할 시간이 없었다. 그만큼 촘촘한 시스템을 건설하려면 최소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였다.
'그냥 각 촌락, 지역마다 대형 하수정을 만드는 거지.'
각 가정에서 나오는 오물과 분뇨.
그것들을 가지고 나와 하수정에 버리게 하면 된다.
그렇게 버려진 하수가 하수정에 연결된 하수관을 통해 흘러가게 하면 된다.
그것이 로이드가 시공하려는 대하수로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그게 수고와 시간이 덜 들기도 하고.'
일단 지금은 최대한 가성비를 따지며.
그러한 모토를 가슴에 새기며 로이드는 시공을 이끌고, 감독했다.
하수정이 될 수직갱을 파내고.
수직갱 바닥의 기초를 다지고.
오수와 분뇨가 지하로 스미지 않도록 화강암 벽돌과 시멘트로 마감했다.
거기에 하수가 빠져나갈 하수관을 연결했다.
5미터 깊이의 일정한 경로로 땅을 기다랗게 팠다.
밑바닥에 모래와 쇄석을 두껍게 깔았다.
그 위로 평평하게 가공한 화강암 판을 깔았다.
오염된 하수의 침출을 막기 위함이었다.
화강암 판 위로 시멘트를 바르고 화강암 벽돌을 맞물리게 놓았다.
하수관의 밑바닥 단면은 역계란형으로 만들었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역계란형 단면이 하수의 흘러가는 속도를 빠르게 하여 흐름을 원활하게 도와주게 될 것이었다.
그러한 하수관의 너비와 높이는 정확히 2미터.
그 한쪽 옆으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을 60센티 너비의 보행로를 따로 두었다.
그렇게 하수관이 다 만들어진 구역은 화강암 벽돌로 마감하고 방수 처리를 한 뒤에 흙으로 덮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맨홀을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수관이 막히거나 오수 침출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보수를 위해 사람이 안전하게 내려갈 나선 계단 통로였다.
마치 오스트리아 빈의 하수로인 '콜레라 카날'을 닮은 모습이었다.
그렇듯 영지 중심 촌락의 하수정.
하수정에서 이어지는 하수로.
그 첫 구간을 만드는 데에 꼬박 20일이 걸렸다.
공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이건 시작일 뿐이야. 겨우 촌락 하나의 분뇨 수집 시설을 만든 거니까. 이제부터 만들 메인 하수로가 진짜지.'
각각의 촌락과 아파트 단지.
그곳들의 하수정과 하수로를 통해 모일 오물과 분뇨.
그걸 한꺼번에 영지 밖까지 흘려보낼 메인 하수로 공사도 시작되었다.
앞서 만든 하수로인 콜레라 카날의 '엑스트라 라지(XL) 버전'이었다.
이 공사를 위해 특별히 비벙이까지 동원했다.
"비버벙! 비벙-!"
쿵쿵!
모처럼 산에서 내려온 비벙이는 신이 났다.
먼발치 로이드의 어깨 위에 있는 방울이를 힐끔 훔쳐보았다.
그렇듯 설레는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어느덧 빨갛게 물든 볼따구 두근거림으로.
3천 톤 순정의 파워를 담아 앞발을 힘껏 움직였다.
"비벙!"
콰아앙-! 콰쾅!
초대형 굴착기가 움직이듯 순식간에 땅이 푹푹 파였다.
깊이와 폭 20미터에 달하는 구덩이가 기다랗게 생겨났다.
앞서 하수관을 만들 때처럼 공병대와 작업자들이 투입되었다.
폭 10미터, 보행로 3미터, 높이 8미터의 초대형 메인 하수로가 준설되었다.
그러한 메인 하수로는 북쪽을 향했다.
매일 조금씩 차근차근.
봄비가 그치고.
새싹이 돋아나고.
개구리가 힘차게 울고.
장미가 첫 꽃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렇듯 3개월의 시간이 지난 뒤, 마침내 메인 하수로가 영지의 북쪽 영역을 넘어갔다.
"자, 여기서부턴 조심해야 해. 다들 기억할 거야. 지난번 몬스터 도미노 사건 때 우리 영지를 습격했던 마스토돈 무리가 어느 쪽으로 쓸려갔더라?"
"북쪽입니다!"
로이드의 물음에 공병대 병사들이 답했다.
당시 마스토돈 무리를 강물로 쓸어서 북쪽으로 쫓아낸 일은 아직도 모두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기억한다니 다행이네. 다들 알고 있다시피 마스토돈은 강인한 동물이야. 강물에 쓸려간 정도로는 죽지도 않지. 당연히 이곳 인근까지 쓸려와서도 거의 모두가 살아남았을 거고, 이 일대를 새로운 서식지로 삼았을 거야. 즉, 이제 우리는 마스토돈의 영역에 들어와서 공사를 벌이게 됐단 말씀이지."
모두를 향한 로이드의 당부가 이어졌다.
"그러니 다들 조심해야 해. 물론 여긴 비벙이가 있으니까 마스토돈이 쉽게 접근할 생각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다들 휴식을 취하더라도 절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말고, 행여나 피치 못하게 멀리 움직일 일이 있다면 반드시 열 명 이상이 조를 짜서 움직이도록 하고. 알겠지들?"
"예, 알겠습니다!"
주의사항을 전달한 뒤에 곧바로 작업을 재개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듯 알뜰살뜰하게 주의를 준 것이 무색하게도, 북쪽 경계를 넘어 시공을 이어 간 지 열흘이 지나도록 마스토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머쓱해라. 연설 괜히 했나.'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마스토돈 녀석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멀리까지 도망쳐서 자리를 잡은 건지도 모른다.
혹은 비벙이의 존재감 때문에 겁먹어서 접근 자체를 안 하는 건지도.
'만일 그런 거라면 뭐, 우리야 좋지.'
위험한 몬스터와는 엮이지 않을수록 좋다.
특히 시끌벅적한 공사를 벌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한데 로이드가 그렇게 안심할 무렵이었다.
"비버벙? 비벙!"
현장에서 땅을 파던 비벙이가 크게 외쳤다.
한데 그 외침의 의미가 조금 이상했다.
녀석이 '여기! 뭔가가 나왔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음? 뭔가가 나와?'
뭘까.
상념에서 빠져나온 로이드는 현장으로 갔다.
비벙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창 파내어지고 있던 땅.
그곳 흙더미 아래.
얼핏 드러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마스토돈?"
시체였다.
죽은 마스토돈이 7미터 정도 깊이의 땅속에 묻혀 있었다.
한데 그 시체가 심하게 썩지 않았다.
죽은 지 오래되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뭐야. 그런데 7미터 깊이에 묻혀 있다고?'
설마 산사태라도 일어나서 매몰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여긴 평지잖아.'
그럼 다른 마스토돈이 죽은 동료를 알뜰하게 묻어 준 걸까.
'아니, 그것도 아니야.'
마스토돈은 단순한 몬스터다.
매장 풍습을 지닐 정도의 지능 따위는 없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비벙? 비버벙?"
고개를 갸웃거리던 비벙이가 앞발을 움직였다.
발견된 마스토돈의 사체 옆쪽을 조심스럽게 파냈다.
그러자 또 다른 마스토돈의 시체가 드러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슨...."
비벙이가 파내는 곳마다 마스토돈의 시체가 있었다. 열 마리? 스무 마리? 아니, 백 마리도 넘어 보였다.
"비벙! 비버벙?"
"어, 으음, 나도 보고 있어. 마치 누군가가 정성껏 묻어 준 것처럼 반듯하게 줄 지어서 묻혀 있는 것도 똑똑하게 보이고. 이건 대체...."
뭘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설 철혈의 기사의 내용을 더듬어도 보았다.
하지만 그 소설에도 이렇듯 반듯하게 매장된 마스토돈 사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이것과 그나마 비슷한 예시는 하비엘이 발파를 터득했던 나마란의 장벽 에피소드에서....
그때였다.
푸취이익!
땅속에서 드러난 마스토돈의 수많은 시체.
그 시쳇더미 사이에서 돌연, 기괴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