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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지친 이들의 선도자 (1)

"이봐, 자네. 혹시 들었나?"

"들었냐니. 뭘 말이오?"

"이 영지 도련님 말일세."

"도련님? 로이드 님 말이오?"

"그래. 그분. 그분이 글쎄, 엄청난 소환 마법을 쓴다고 하더구만."

"소환 마법을?"

이곳은 프론테라 백작령 동쪽.

동부산맥 기슭의 계단식 농경지 시공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흙을 나르던 피난민 일꾼 사내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거 자네도 봤지?"

그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 뽀동이가 있었다.

10미터의 뽀동통한 덩치로.

압도적으로 빵빵한 궁디를 흔들며.

그 반동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피난민 일꾼 사내가 말했다.

"저 커다란 쥐 말일세. 저게 그 로이드 도련님이 소환한 거라고 하더구만."

"허허, 저걸 말이오?"

"그렇다더군."

"에이. 말이 안 되오."

"어째서 말이 안 된다는 건가?"

피난민 사내가 물었다.

동료 사내가 대꾸했다.

"형님도 좀 생각을 해 보슈. 저 생쥐가 얼마나 크고 힘이 센지를 말이오. 그것만 봐도 엄청나게 대단한 소환수라는 거 아뇨?"

"으음, 그래서?"

"저런 엄청난 소환수를 소환하려면 소환 마법도 그만큼 강력해야 할 거 아뇨. 한데 로이드 도련님? 그분 나이가 아직 서른도 안 된 듯하던데."

"자네 말은 그분이 너무 젊어서 아직 그런 소환마법까진 익히지 못했을 거다?"

"그게 내 생각이오."

"그럼 저 몬스터는?"

"동부산맥에서 어린 몬스터 하나 주워다가 키운 거겠지요."

"그런데 자네 생각이 좀 틀린 것 같은데."

"어째서 말요?"

"세상 어떤 몬스터가 씨앗 하나 먹는다고 크기가 집채만큼 커졌다가 주먹보다 작아졌다가 하나?"

"...형님 술 마셨소?"

동료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피난민 일꾼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봤네. 아까 그 도련님 말일세, 저 생쥐한테 빨간 씨앗을 먹이더라고. 그랬더니 글쎄, 주먹보다 작던 생쥐에서 저렇게 커다란 몬스터로 변신하는 게 아닌가."

"직접 봤단 말요? 형님이?"

"글쎄 그렇다니깐? 같이 본 눈들도 많으니까 확인해 보든가."

"허허. 그게 정말이라면...."

"저 도련님, 엄청난 분이라는 거지."

"그렇겠구려."

엄청난 소환수를 마음대로 부린다.

거기에 이런 대규모의 공사를 설계하고 지휘하기까지 한다.

그런 로이드를 두고 피난민 일꾼들 사이에 갖가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태어나던 때부터 소환 마법의 천재였을 거라고.

눈만 감았다 뜨면 건물 하나 뚝딱 지을 거라고.

혹은 이번 재난을 점지한 하늘이 내려보낸 분이실 거라고.

온갖 추측과 과장, 억측과 상상이 보태어졌다.

피난민들의 귓바퀴를 솔깃하게 간질였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해바라기씨를 먹으면 커지는 뽀동이와 방울이.

엄청난 양의 물을 마시며 부풀어 버리는 하망이.

가끔 산에서 내려와 무거운 물건을 척척 옮겨주는 비벙이.

거기에 새로운 환상종 꼬밍이까지.

저런 생물이 있을 거라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도감에서도, 이야기에서도 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 계단식 농경지 시공 현장에 일꾼으로 참여하면서 환상종의 위용을 제대로 접하게 되었다.

그런 환상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로이드의 모습도 수시로 목격하게 되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탄하는 게 당연했다.

시간이 갈수록 로이드를 바라보는 피난민들의 태도가 더욱 열렬해졌다.

현장에 참여한 피난민 일꾼 아저씨들마저 마치 최고의 아이돌 방탄조끼단을 영접한 소녀팬들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기도 했다.

그래서 로이드는?

그런 피난민 일꾼들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부추겼다.

"그게 바로 이미지의 힘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꼬밍아?"

"꼬밍?"

"더 높이 날아 볼까?"

"꼬밍!"

펄럭! 후우우웅!

꼬밍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3미터 길이의 날개가 양옆에서 힘차게 움직였다.

엄청난 기세의 돌풍.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지면이 훅 멀어졌다.

아니, 자신을 실은 꼬밍이가 순식간에 50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

"후우."

로이드는 꼬밍이의 등 깃털을 꽉 붙잡았다.

안전장치 없는 바이킹을 타면 이런 기분일까.

한편으로는 아찔하면서도 동시에 짜릿한 느낌.

그런 속도감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로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아래쪽에 펼쳐진 현장을 둘러보았다.

"와아아아-!"

현장에서 이쪽을 향해 내쏘아진 우렁찬 환호.

흙을 옮기던 피난민 일꾼들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이드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그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저 사람들은, 그리고 저들의 말을 전해 들을 가족들은 모두 나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겠지.'

사실은 쥐뿔도 없는데.

그저 RP라는 비밀스러운 자원을 활용하고 있을 뿐인 건데. 거기에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은 덕에 몇몇 상황을 조금 미리 예상할 수 있을 뿐인 건데.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저 이쪽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준다.

'그러면 그 믿음을 강화시켜 줘야지.'

그게 이미지의 힘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일상에서도 몇 번은 느꼈을 법한 힘.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누군가는 환호와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또 누군가는 한심하다는 비웃음을 받게 만드는 오묘한 힘.

그게 이미지인 거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지긋지긋하도록 피부로 느낀 덕분이었다.

'항상 쩌리 취급만 당했지.'

가난했다.

집도, 가족도 없었다.

비좁은 고시원에서 지냈다.

옷도 몇 벌 없어서 색이 바랜 맨투맨 티셔츠 두세 벌로 일 년을 버티며 돌려 입고 다녔다.

돈을 아끼느라 제일 값싼 동네 미용실도 서너 달에 한 번만 갔다.

그처럼 꾀죄죄하기 그지없던 겉모습과 인상.

쪼그라든 자신감만큼 더욱 움츠러들던 어깨.

덕분에 어딜 가든 자신을 향한 대접은 최악이기 일쑤였다.

삼각김밥을 사러 편의점을 가도.

볼펜 하나 사려고 문구점을 들러도.

심지어 동네 미용실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알바생이든 직원이든 사장이든 자신을 은연중에 깔보고 무시하는 게 수시로 느껴졌다.

아니, 무시 정도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좀도둑으로 억울하게 의심받은 적도 있었지.'

당시엔 서러워서 눈물까지 났는데.

지금은 그저 쓴웃음만 맺힌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이미지를 신경 써서 만들어 둘 필요가 있어. 그 이미지가 진실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눈에 보이는 걸 더 믿고 신봉하니까. 그런 믿음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위한 힘이 되어 줄 거니까.'

그래서였다.

그는 일부러 꼬밍이를 타고 날았다.

수시로 상공에서 현장을 시찰하고, 점검했다.

그런 행동에는 이미지 관리 외에 실질적인 이득도 있었다.

'후아. 날아다니면서 현장을 둘러보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있구나.'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고 몸길이 2미터로 커진 꼬밍이.

그 등에 몸을 싣고 날아다니니 더없이 쾌적했다.

드넓은 현장을 한눈에 둘러보기가 이처럼 편할 수가 없었다.

'이번 시공은 현장이 굉장히 넓으니까. 마레즈 개간지와 비슷할 정도니까.'

게다가 평평한 저지대 늪지였던 마레즈 시공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비탈진 경사 지대라는 점이었다.

'그런 경사를 온종일 오르내리며 현장을 살펴봐야 했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땀난다, 땀나.'

그렇듯 꼬밍이 덕분에 로이드는 종아리에 알 터지는 경험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현장의 디테일을 살필 때는 그럴 수 없었지만.

"뽀동아?"

"뽀동?"

"여기 오늘 파낸 자리 말이야. 조금 수평이 안 맞는데?"

"뽀도동?"

"조금 더 파야겠다. 그리고 공병대 16조!"

"예!"

"여기부터 저기까지. 뽀동이가 수평 맞추면 너흰 삽으로 다듬고 다지기 들어가. 요령은 알지?"

"예! 물론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비탈과 경사지를 계획대로 시공했다.

뽀동이가 엄청난 힘과 속도로 땅을 파내며 계단 모양의 큰 틀을 잡았다.

그 후엔 공병대가 투입되어 지표면의 수평을 잡았다. 파낸 자리, 절토면의 디테일을 다듬었다. 그동안 피난민 일꾼들은 뽀동이가 파낸 흙을 산기슭 아래로 옮겼다.

그렇게 옮겨지고 모인 대량의 흙은?

비벙이의 손에 맡겨졌다.

"비버벙! 비벙!"

환상종 중에 가장 힘이 센 비벙이였다.

그러나 산비탈 파내기 작업에는 동원되지 못했다.

무려 3천 톤이나 나가는 체중.

그 체중으로 시공 현장의 붕괴를 일으킬 위험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비벙이에겐 땅 파내기 대신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파내어져서 옮겨지고 모인 대량의 흙.

그 흙을 초대형 체로 걸러내는 일이었다.

"비벙! 비버버벙!"

츄와아아악!

가로 10미터, 세로 15미터에 달하는 초거대 체가 비벙이의 손에 잡혔다.

"비버벙! 비벙!"

푸확! 푸확!

비벙이가 초대형 체를 흔들었다.

그 위에 올려진 흙이 체로 걸러졌다.

돌멩이와 자잘한 나무뿌리, 그 밖의 잡다한 입자가 분리되었다.

입경 19밀리미터 이하의 흙만 채 아래로 떨어졌다.

산비탈을 깎아낸 절토면과 그 앞에 세워질 돌망태 옹벽, 그 사이 공간에 뒷채움재로 채워 넣을 흙을 선별하는 작업이었다.

'이거 은근 중요한 작업이지. 뒷채움재를 어떻게 넣느냐에 따라 옹벽 전체의 안정성이나 물 빠짐이 결정될 정도니까.'

로이드는 수시로 뒷채움재 흙을 점검했다.

그리고 꼬밍이도 동원했다.

"자아, 꼬밍아. 알지?"

"꼬밍?"

"오늘은 크고 아름다운 그물을 만들 거야. 자아, 출격."

"꼬밍!"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은 꼬밍이가 날아올랐다.

촘촘한 격자무늬를 그리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동시에 등에 멘 가방에서 거미줄을 뿜어냈다.

촤아아악!

뿜어낸 거미줄이 비행 궤적을 따라 떨어졌다.

내려앉으며 격자무늬 그물을 만들었다.

지면을 빈틈없이 뒤덮었다.

동시에 지면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 로이드가 외쳤다.

"백색창기병, 투입!"

"우오!"

삽을 들고 대기하던 백색창기병대가 움직였다.

일반 병사의 속도를 까마득하게 넘어서는 맹렬한 삽질을 선보였다.

비벙이의 손길을 거쳐 선별된 뒷채움재를 퍼서 뿌렸다.

뿌려진 뒷채움재가 거미줄 위를 도톰하게 덮었다.

그리고 일제히 흙을 다졌다.

다지기가 끝나면 로이드가 또 외쳤다.

"꼬밍아! 한 번 더!"

"꼬미밍!"

추확!

다지기가 완료된 뒷채움재 위로 꼬밍이의 격자무늬 거미줄 그물이 꼼꼼하게 살포되었다. 뒤덮고, 달라붙었다.

그러면 또 백색창기병이 그 위로 뒷채움재를 퍼서 덮었다. 다졌다.

그와 같은 과정에 계속 반복되었다.

꼬밍이가 날아올라 거미줄 그물을 뿌리고.

백색창기병대가 삽질로 뒷채움재를 덮어 다지고.

그러면 또 거미줄 그물을 뿌리고.

덕분에 산비탈을 깎아낸 가파른 절토면에 거미줄 그물과 뒷채움재가 일정한 두께로 열 겹이 넘게 쌓였다.

마치 해물파전 열 장을 도톰하게 쌓아올린 듯한 모습이었다.

'좋아. 제대로 시공되고 있어.'

뒷채움재 흙 사이에 쏙쏙 깔린 거미줄 그물.

그게 뒷채움재 전체를 끈끈하게 붙들게 되었다.

덕분에 막강한 마찰력을 발휘하며 흙이 앞으로 흘러내리거나 아래로 내려앉지 않도록 고정해주었다.

로이드는 그 앞에 돌망태 옹벽을 덮었다.

꼬밍이가 철조망처럼 꼼꼼하게 짜낸 거미줄 틀을 세웠다.

뒷채움재로 쌓아올린 사면 앞쪽을 틀로 덮었다.

그러면 공병대가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큼지막한 자갈과 부서진 돌을 틀 안으로 쏟아 넣었다.

"자아, 둘, 셋! 부어!"

"으랴압!"

와르르르! 콰드칵!

정확히 계산된 양의 돌이 돌망태 안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돌망태와 뒷채움재 전체를 한 번 더 거미줄로 엮어서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옹벽의 첫 구획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좋아. 설계한 그대로 되고 있어.'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현장에 동원된 공병대와 백색창기병, 피난민 일꾼들의 땀방울이 빛났다.

그때부터였다.

똑같은 시공이 산비탈 전체에서 이루어졌다.

파내고, 다듬고, 뿌리고, 쌓고, 다지고, 세웠다.

가파르던 비탈면이 수십 칸의 계단처럼 변해 갔다.

각각의 수평면에 논과 밭으로 꾸려질 공간을 품어 갔다.

그 범위가 점점 넓어졌다.

어떤 날은 진눈깨비가 날렸다.

어떤 날은 모처럼 따스했다.

어느 날엔 함박눈이.

또 어느 날엔 칼바람이 불었다.

그럼에도 시공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남이 아닌 스스로와 모두를 위한 공사였다.

수많은 피난민이 정착을 위해 꾸리는 개간지였다.

그러한 모두의 땀과 노력이 추위를 밀어냈다.

하루가 가고.

열흘이 지나.

한 달, 두 달이 흘러.

마침내 동부산맥 곳곳이 하얀 목련과 노란 개나리로 물들어 갈 무렵.

성큼 다가온 초봄의 첫 자락에서 모두의 함성이 울렸다.

"자, 마지막이다! 힘내!"

"으라라랍!"

"둘! 셋! 부어!"

"으라차!"

자갈과 돌이 부어졌다.

거미줄 돌망태 내부를 알차게 채웠다.

수백, 수천의 구획으로 계획된 광대한 계단식 개간지.

겨우내 치열하게 이어져 왔던 초유의 시공.

그 완성을 매듭짓는 마지막 칸의 옹벽이 마침내, 우뚝 섰다.

그러나 로이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함부로 환호하지도 않았다.

완공된 옹벽에 들뜨지도 않았다.

현장의 일꾼들은 완공에 기뻐하고 들떠도 된다.

사실은 그게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심리이고 기분이다.

하지만 자신만은 그래선 안 된다.

모두가 기쁨에 젖더라도.

들떠서 환호하고 웃더라도.

그 모두를 감독하고 책임지는 자신만은 기분에 휩쓸리기보단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안전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자, 주목! 시공이 끝났을 때 뭐가 제일 중요하다?"

"현장 정리!"

"사고는 주로 어떤 현장에서 발생한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현장!"

"다들 알았겠지? 그럼 이제부터 정리 작업이다. 실시!"

"실시!"

이미 로이드의 스타일을 철저하게 체득하고 있는 공병대였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백색창기병대와 피난민 일꾼들을 이끌었다.

현장을 정리했다. 정돈했다. 다듬었다.

그 정리 작업이 끝났을 때.

비로소 모두는 완공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로이드는 쉽게 환호하지 않았다.

'아직이야. 나한테만은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으니까.'

어느새 완공된 옹벽.

그 수많은 옹벽이 떠받치는 대규모의 계단식 농경지.

그걸 보는 로이드의 눈빛에는 보람과 긴장감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동부산맥 위로 먹구름이 끼었다.

부슬부슬, 그러다 마침내 쏴아아.

세찬 비가 영지와 동부산맥 일대를 적셨다. 때렸다. 퍼부어졌다.

매년 이 시기마다 찾아오는 손님인 봄철 장마였다.

동시에 로이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아, 이제부터 검증 시작이다.'

옹벽의 가장 큰 숙제.

물 빠짐과 침하에 대한 안정성.

그 성능을 실전에서 검증할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

139화. 지친 이들의 선도자 (2)

쏴아아아아아!

폭우가 내렸다.

수없이 쏟아붓는 물방울이 동부산맥 일대를 적셨다.

산비탈과 골짜기에 모였다.

낮은 지대로 흘렀다.

서쪽 사면 아래.

프론테라 백작령을 향해서였다.

그렇게 흘러온 물줄기가 계단식 농경지를 만났다.

콸콸콸!

원래 수천, 수만 년 동안 자연적인 비탈을 타고 내려갔던 물줄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인간의 손에 다듬어진 계단식 지형이 앞을 가로막았다.

논과 밭이 들어설 공간에 고였다.

옹벽과 절토면 사이의 공간에 대량으로 스몄다.

그리고 돌망태 옹벽 사이로 콸콸콸 흘러나왔다.

'좋아!'

로이드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수시로 현장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측량 스킬의 지하 스캐닝 옵션을 발동했다.

돌망태 옹벽 너머.

안쪽의 뒷채움재가 들어간 공간의 물 빠짐을 실시간으로 관찰했다.

그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물 빠짐? 완전 원활해. 안쪽의 흙이 흘러내리거나 기울거나 내려앉는 현상도 없어. 하아, 내가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면서도 뿌듯해졌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다니던 대학의 교수님이 이걸 본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칭찬이라는 칭찬은 다 듣고 A+ 학점 폭격도 받으면서 대학원으로 끌려가게 되지 않을까.

'....'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함부로 하지 말자.

로이드는 황급히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냈다.

때마침 장마가 찾아온 마당이다.

장마만큼 옹벽의 성능을 극한으로 시험할 기회도 또 없다.

그는 장마 기간 내내 모든 옹벽을 검사하고 진단했다.

물론 그동안 무너지거나 이상을 보인 옹벽은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시공, 그 자체였다.

'자아, 그러면 다음 단계로.'

로이드는 곧바로 계획의 고삐를 조였다.

옹벽을 세우고 개간지만 만든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이제는 그걸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분배할 차례였다.

"그러니까 이걸 전부 결재해 주셔야겠습니다."

"이걸... 전부?"

"예."

터어엉!

로이드가 서류 뭉치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책상다리가 삐그덕, 불안한 신음을 토해 냈다.

프론테라 백작은 움찔, 책상에서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올렸다.

멍하니 생각했다.

이 서류 뭉치 꼭대기, 천장에 닿아 있는 건 아닐까.

"이게 전부 무엇이더냐?"

그가 물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계약서와 현장 출퇴근 확인서입니다."

"계약서? 현장 출퇴... 뭐?"

"조금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계단식 농경지의 옹벽 시공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피난민 일꾼들의 명단과 그들의 출퇴근 작업 기록이랄까요."

"...."

"매일 현장에 출근할 때. 오전 새참을 먹을 때. 점심을 먹을 때와 오후 새참 시간. 거기에 퇴근하는 시간마다 출퇴근 기록부에 지장을 찍도록 했습니다. 현장의 피난민 일꾼 모두에게 말이지요."

"어, 어째서?"

"나름 꼼꼼한 작업 관리랄까요. 대리출석도 예방하고 말입니다."

"대리출석이라니?"

"일하지 않았는데 일한 척할 수도 있습니다. 인원이 많은데 관리가 소홀해서 복잡해진 현장에선 충분히 발생할 법한 일이지요. 특히나 작업 시간의 대가로 농경지 분양을 받을 기회가 있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모두에게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다.

그 과정에서 계약서를 통해 약속했다.

열심히 일하면 그 대가로 개간지를 분양해 줄 거라고.

그러니 체력이 허락하는 한 많은 현장에 오래 참여해 보라고.

'하지만 모두가 고용주의 생각처럼 성실한 건 아니지.'

어딜 가든 그렇다.

꼼수를 쓰는 사람이 꼭 있다.

편하게 이득만 쏙 빼먹으려는 부류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 로이드였다.

"그래서 출퇴근 기록부 관리에 특히나 신경을 썼습니다. 대리출석이 최대한 불가능하도록 말입니다. 덕분에 뭐, 이렇게 서류가 많아졌고요."

"...그럼, 이걸 내가 다?"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

"내용 확인은 저와 아스라한 경과 바이에른 경이 모두 마쳤습니다. 누적 근무 시간이 많은 순서대로 분류도 마쳤고요."

"...."

"덕분에 저흰 사흘 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뭐, 그거에 비하면 이거 서명만 하시면 되는 거니까."

"...."

그 서명, 다 하려다간 손목 부러지겠는데.

하지만 백작은 한숨만 푹 내쉴 뿐, 로이드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겨우내 얼마나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며 일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랬지. 최근엔 식사 때도 얼굴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걱정마저 들었다.

행여나 저러다가 과로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덜컥 감기나 몸살에 걸려서 몸져눕진 않을까.

그러니 뭐라도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싶은데.

고민을 해보아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 아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 아들의 계획에 걸림돌이 생기지 않도록 피난민 캠프를 보살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최선이라 여기며 겨울을 보낸 백작이었다.

그런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네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나.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 서명 하나 도와주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네 얼굴을 보겠니."

"하하. 그렇지요?"

"물론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 저녁까지만 서명을 마쳐 주시면 되겠습니다."

"...어?"

"그럼 부탁드립니다?"

콰앙!

제 할 말만 마친 로이드가 집무실을 닫고 쏙 빠져나갔다.

그렇게 백작은 멍한 얼굴로 혼자 남겨졌다.

삐그덕↗

눈치 없는 책상다리만 애먼 소리로 집무실의 고요를 깨뜨렸다.

그날, 백작 저택의 하인과 하녀들은 밤이 새도록 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프론테라 백작의 꿍얼거림을 귀에 담으며 잠을 청해야 했다.

계획은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다.

손목 관절의 건강을 제물로 바친 프론테라 백작의 노고.

그 노력과 희생을 발판으로 개간지 분배 작업이 쑥쑥 이루어졌다.

"자아, 총 근로 시간이... 오오, 꽤 상위권이시네?"

"아, 예."

"그럼 어디 보자. 근로 시간을 많이 쌓은 덕분에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제법 많아. 일단 여길 좀 보실까?"

촤락!

로이드가 분양 계약 테이블 위로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이번에 시공한 계단식 농경지.

그 전체가 담긴 지도였다.

로이드가 지도의 여러 자리를 딱딱 짚었다.

"여기, 그리고 여기랑 여기. 너무 위쪽이 아니라서 출퇴근하기에 편할 거야. 배수 상태도 아주 양호한 편이고, 무엇보다도 모양이 네모 반듯해서 씨 뿌리고 거름 주고 수확할 때도 관리하기가 두루두루 편할 거고."

"어, 그럼 이 밭으로 하겠습니다."

"여기? 좋아. 여기 계약서. 서명하는 요령은 저번에 해 봐서 알지?"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식이었다.

로이드는 개간지 시공에 참여한 모든 피난민 일꾼의 근무 시간과 디테일을 정리하고 분류했다.

철저하게 그 데이터와 공헌도를 근거로 삼아 개간지를 분양해 주었다.

'이렇게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겐 좋은 자리가.

설렁설렁 참여한 사람에겐 모퉁이나 자투리땅만 주어졌다.

물론 몇몇은 불만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좋지 않은 땅을 받은 사람도 대부분 결과에 수긍했다.

로이드의 관리 아래 작성된 출퇴근 기록부가 워낙 철저하고 꼼꼼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시공이 이어지는 내내 로이드가 피난민 일꾼들을 상대로 쌓아올린 범접불가의 이미지도 한몫을 했다.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분이셔. 그냥 신분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격이 달라.'

어느새 피난민들 사이에 로이드는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 조금 좋지 않은 농경지를 분양받게 되어도?

대부분이 그냥 수긍했다.

저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러니 순순히 따르는 게 이득이다.

아니, 사실 이렇게 집도 절도 없는 처지에 머물 곳과 일굴 농경지를 받는 자체가 이미 엄청난 은혜이고 배려다.

피난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린 생각이었다.

덕분에 며칠에 걸친 계단식 개간지 분양 계약을 마친 직후.

로이드의 눈앞에 기분 좋은 메시지가 빼곡빼곡 알차게 떠올랐다.

딩동!

[프론테라 영지의 계단식 농경지 보급을 완료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본격적인 보강토 옹벽 방식을 실제 시공에 적용한 대륙 최초의 사례를 남겼습니다. 이 시공 사례는 로라시아 대륙의 토목공학사에 길이길이 남아 수많은 후학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입니다.]

[당신은 대륙의 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토목공학자 10인의 끝자락에 들었습니다.]

[후대의 수많은 토목공학도가 늘어난 시험 범위에 한숨을 내쉬며 당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빛나는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8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070]

'좋아!'

메시지를 보며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륙의 역사에 이름이 남겨지고 어쩌고 블라블라.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겐 업적으로 획득한 대량의 RP가 훨씬 짜릿하고 소중했다.

'800이라. 이로써 꼬밍이 뽑느라 프리미엄 랜덤 뽑기로 소모한 RP는 그럭저럭 땜빵했네.'

그전의 3연꽝으로 날린 것까지 메꾼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한데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딩동!

재차 알림음이 울렸다.

동시에 새로운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당신은 수많은 피난민을 도운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립과 정착을 위하여 큰 사업을 성공리에 실행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이에 수만 명의 피난민이 당신을 향해 열렬한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찬사, <지친 이들의 선도자>가 생성되었습니다.]

[지친 이들의 선도자]

[찬사 등급 : 영지 역사]

집을 잃었다.

식량이 떨어졌다.

모닥불조차 없었다.

정처 없이 걸어야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리라.

끝없는 한숨 벗 삼아 울었다.

젖 보채는 아이 달래며 기었다.

죽을 자리 찾아 황망히 헤맸다.

어디에도 낙원은 없을 거라고.

몸 누일 자리조차 없으리라고.

지레 포기하고 절망했다.

그러다 만났다.

비로소 깨달았다.

나조차 포기했던 나.

그런 나를 위해 손 내미는 자.

아직 한 사람쯤 남아 있었음을.

[찬사 효과 : 프론테라 백작령에 정착하게 된 피난민들은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우러릅니다. 그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의 역량으로 땅을 일굴 것입니다. 향후 30년간 동부산맥 계단식 농경지의 풍작 확률이 300% 증가합니다. 수확량이 200% 증가합니다.]

[찬사 지역 : 프론테라 백작령]

[찬사 유지 기간 : 30년]

[찬사의 효력은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 내에서 24시간 적용됩니다. 또한, 추후 당신의 행적에 따라 찬사를 받는 지역과 기간이 확장 및 연장, 축소 및 단축될 수 있습니다.]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3]

[현재 보유 중인 CP : 108]

'와우.'

메시지를 다 읽은 로이드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이게 옵션이지!'

풍작 확률이 세 배나 증가한단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수확량이 두 배로 늘어난단다.

그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풍작이 터지든 아니든 일단 수확량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거잖아? 심지어 30년 동안? 게다가 계단식 농경지의 엄청난 면적을 감안하면...'

이건 진심으로 대박이다.

거의 마레즈 개간지와 맞먹는 면적의 농경지.

그곳의 생산력이 단숨에 두 배로 뛰게 되었다.

게다가 운이 좋아서 풍작이 터지면?

'무려 여섯 배의 수확량.'

이게 바로 잭팟이었다.

비유하자면, 월급 300만 원 받으며 살아가던 월급쟁이의 통장에 30년 동안, 매달, 600만 원이 특별 보너스로 쇽쇽 꽂히게 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커흐흑!'

이제 진짜 시름 하나 덜었다.

이 정도 생산량이면 앞으로 피난민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덕분에 앞으로 해야 할 일거리도 줄었다.

'사실 왕도에서 오는 보급품만으로는 모자라진 않아도 좀 빠듯했는데. 내년부터는 식량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이제 앞으로 개간은 없다. 더는 추가로 개간 공사 안 벌여도 돼!'

원래는 계단식 농경지의 상황을 보며 개간지 범위를 늘리려고 했다.

그래야 왕도에서 오는 보급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비상시에도 영지가 자립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계산하고 있었다.

훗날 또 벌일 개간을 내심 준비하고 있기도 했다.

한데 이번에 얻은 찬사 보상 덕분에?

추가적인 개간이 필요가 없어졌다.

일이 줄었다.

그만큼 꿀벌 라이프도 한 발짝 가까워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흐흐흑! 너무 좋아!'

로이드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기쁨을 만끽하며 팔다리를 방방 휘젓고 내찔렀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 상관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헐떡이는 숨 가라앉히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만끽하던 기쁨도 잠시.

호흡이 가라앉자 잠깐 가출했던 냉정함이 돌아왔다.

그러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중간 점검, 해 볼까.'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추진하고 있는 건지. 이대로 쭉 계획을 실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인지.

이쯤에서 한 번쯤 큰 그림을 점검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요즘 가끔씩 뜬금없이 쌔한 기분이 들곤 했단 말이지.'

사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간혹 쌔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노파심 때문에?

혹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만 보면 지금 상황이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아. 냉정하게 따진다면 은근 위험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야.'

겉으로 보면 모든 게 잘 굴러가는 것만 같다.

피난민들을 수용할 아파트 단지도 무리 없이 지어지고 있었다. 동부 산맥의 계단식 농경지도 너무나 성공적으로 마련되었다.

거기에 찬사의 효과로 엄청난 생산력까지 얻어냈다.

모든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좋기만 했다.

하지만 만약 뭔가가 틀어진다면?

그래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피난민들의 정착이라든가, 개간지의 운용이 틀어질 수도 있어.'

그러면 영지의 발전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영지가 와르르 망할 수도 있다.

'인구가 너무나 급격히 늘어났으니까.'

덕분에 덩치가 커진 영지.

뭔가가 잘못되면?

그만큼 수습하기도 어려울 것이리라.

'그러다가 폭망하면 나만 손해지. 잘못하면 폭망한 영지를 수습하느라 평생 뼈 빠지게 일만 하게 되는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요즘 간혹 느껴지는 쌔한 기분, 이거 마냥 무시만 할 게 아니야.'

보통 이런 식으로 쌔한 기분은 빗나가는 일이 좀처럼 없다.

쌔한 기분이란?

'사람이 n년을 살아오며 몸소 겪어온, 무수히 엿 됐던 상황과 경험이 캄브리아기 지층처럼 두껍게 쌓여 생성한 일종의 인생 빅데이터인 거지. 그거 은근 신빙성 있는 거 같아.'

그래서였다.

잠시 고민하던 로이드는 결정했다.

'오랜만에 써 보자. 엔딩 스포일러.'

마침 CP도 제법 넉넉하게 모여 있었다.

로이드는 스킬창을 열었다.

엔딩 스포일러 스킬을 선택했다.

딩동.

[스킬명 : 엔딩 스포일러]

[스킬 등급 : ???]

[필요 CP : 40 (2회차)]

[일정량의 CP를 소모하여 현재 스토리의 대단원에 펼쳐질 엔딩씬 일부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해피엔딩일 수도, 새드엔딩일 수도 있습니다.]

1회차 때보다 2배로 뛴 필요 CP.

하지만 로이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스킬창 아래쪽의 '실행'을 선택했다.

[스킬 : 엔딩 스포일러를 사용하시겠습니까?]

[현재 보유 중인 CP : 108]

[YES / NO]

'당연히 YES지.'

[스킬 : 엔딩 스포일러가 발동됩니다.]

[40 CP가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CP : 68]

그가 YES를 선택한 직후였다.

츠즈즈즈...!

주위의 시간이 서서히 멈추었다.

차근차근 기울어 가던 오후의 햇볕도.

아까 난리를 치던 통에 피어올라 허공을 떠다니던 먼지도.

모두 시간에 못 박혀 박제되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 앞 공간이 일렁였다.

둥글고 새파란 통로가 열렸다.

그 안으로 우윳빛 영역이 보였다.

예전에도 겪었던 현상이다.

로이드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걸음을 떼었다.

포털 속 우윳빛 공간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찰랑... 파아앗!

섬광으로 물드는 시야.

일순간 느껴지는 현기증.

그 가장자리에서 로이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스토리의 엔딩 장면.

그 비밀의 끝자락이 차츰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무슨....'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140화. 두 번째 엔딩 스포일러 (1)

'무슨....'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크게 떠보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런데 눈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몸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온몸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동시에 뜨겁고 건조한 열기가 온몸에서 느껴졌다.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였다.

'난 누워 있는 건가.'

평소보다 어쩐지 훨씬 흐릿해져 있는 시야.

그런 시야로나마 주위의 상황을 살펴보려 애썼다.

그때였다.

"하비엘.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인 것 같다."

자신의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의 자신이 저렇게 말했다.

잔뜩 쉬어 지친 목소리로.

가쁜 호흡을 내쉬며 간신히.

'이거 뭐야.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대사였다.

게다가 눈에 띄게 가쁜 호흡과 온몸의 열기, 무력한 몸 상태도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눈치와 감각으로 보자니 그런 듯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실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천장으로 봐선 침실인가? 화려하진 않아도 적당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인 것 같고.'

그런 곳에 눕혀져 있다.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힘겨운 듯 떠듬떠듬 말을 꺼내고 있다.

'딱 그거구만. 병으로 골골대다가 유언 남기고 죽는 상황.'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로이드는 안도하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제일 예쁘고 온건한 엔딩이긴 하네. 내가 죽을 모습을 미리 본다는 점은 좀 찜찜하긴 하지만.'

괜히 호들갑 떨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엔딩 스포일러.

이 스킬은 지금 시나리오의 엔딩을 미리 엿보여 주는 스킬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든 인생의 엔딩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

당연히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병사로 죽는 모습이 보인다는 건, 으음, 몇십 년쯤 탱자탱자 꿀 빨면서 잘 살다가 늙은 육신으로 떠난다는 뜻인 거겠지.'

그 생각에 더욱 안도감이 피어났다.

이제 그는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으로 상황을 감상했다.

'뭐, 어떤 병으로 죽는지나 좀 지켜볼까. 그럼 병을 예방할 수도 있을 거고. 운이 좋으면 꿀 빠는 여생을 몇 년쯤은 더 늘릴 수도 있겠지?'

이래서 역시 엔딩 스포일러가 좋아.

티브이에서 틀어주는 생×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

그런 것보다 이게 훨씬 쩔어.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볼 수 있으니까.

완벽한 개인 맞춤형 질병 예방을 실현할 수 있으니까.

그렇듯 로이드가 상황에 집중하며 관찰을 이어 가던 때였다.

"아닙니다, 로이드 님. 조금만 힘을 내십시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방향이나 각도로 보아 침대 옆 의자에서 간병을 해주던 이인 듯했다.

'익숙한 목소리. 하비엘이네.'

그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한데 초점이 조금 흐릿했다.

하비엘 특유의 계란형 얼굴과 은발이 블러 처리를 잔뜩 한 모자이크 화면처럼 뿌옇게 보일 뿐.

'헐. 그런데도 잘생긴 거 좀 보게. 저 나이가 되도록 턱선이 안 무너졌어?'

완벽한 계란형 얼굴.

그 모습을 보자 심술이 났다.

그때 하비엘의 탄식 섞인 말이 들려왔다.

"벌써... 이렇게 떠나실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초조함 또한 배어났다.

녀석이 이쪽의 손을 붙드는 게 느껴졌다.

그런 녀석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짜식. 그래도 내가 죽을 때가 되니까 슬퍼해 주는 건가.'

녀석과는 늙을 때까지 아웅다웅하며 지낸 사이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조금만 기운을 내십시오. 제발."

하비엘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리고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손에서 따스하고도 맑은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마나였다.

'응급처치?'

그 생각이 맞는 듯했다.

하비엘이 주입한 마나가 손을 거쳐 팔뚝을 지나 가슴으로 흘러들어 들어왔다.

가슴을 중심으로 조금씩 범위를 늘렸다.

병마에 찌든 탁한 기운을 몰아냈다.

동시에 심장을 반복적으로 눌렀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심장 마사지를 하는 거구나.'

언제라도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상황.

하비엘은 어떻게든 이쪽의 목숨을 연장시켜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다급한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 한쪽이 찡해졌다.

"로이드 님. 조금만 버티십시오.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아니, 아니야. 후우... 난, 너무 늦은 것 같아."

"하지만 로이드 님...."

찡해진 이쪽의 기분과는 별개로 미래의 자신이 하비엘을 다독이고 있었다.

잠시 힘겹게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이드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부터 꺼내는 말이 유언이다.'

하비엘의 심장 마사지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숨을 쉬는 것 자체가 괴로울 정도였다.

급격히 떨어지는 기력이 느껴졌다.

이제 몇 초 안 남았다.

이제부터 유언 몇 마디.

그걸 남긴 후에는 확실히 숨이 끊어진다.

로이드는 긴장했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두자.'

미래의 자신이 달싹거리며 움직이는 입술.

혀의 움직임과 공기로 빚어내는 최후의 유언.

그걸 제대로 듣기 위해 모든 의식을 집중시켰다.

"작년을...."

힘겹게 내뱉는 첫 마디.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뭐?

작년?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개간지를 늘리고... 모든 게 잘되는 줄 알았어. 안일했어. 설마 그런 강추위가.... 전염병에 대비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이것도, 그 대가로 받는 벌이겠지...."

"로이드 님...."

"그 심한 추위를 무사히 넘겼던, 피난민들이, 후우... 나도... 설마 이런 봄날에...."

"흐흑, 로이드 님...."

"미안.... 너라도... 떠나."

스르륵.

손에서 힘이 풀렸다.

맞잡고 있던 하비엘의 손을 놓쳤다.

침대보 위로 손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 호흡이 끊어졌다.

"하아...."

내뱉는 마지막 숨결.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

죽음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서일까.

혹은 죽음 직전의 마지막 배려일까.

일순간, 아주 잠시,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덕분에 임종의 순간을 지켜주는 하비엘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한데 그 얼굴이.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어?'

임종의 순간을 체험하던 로이드는 멈칫했다.

'뭐지?'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거칠게 부비고 싶다.

아니, 그런 걸 하지 않아도 잠시나마 또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쪽을 보며 눈물을 참고 있는 하비엘의 얼굴.

늙지 않았다.

젊다.

그냥 젊은 게 아니라, 요즘 보던 모습과 거의 똑같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깐. 이거 뭐야.'

설마 소드마스터라서 혼자 안 늙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고 그랬어. 그건 소설 속 하비엘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러니 자신이 늙어서 병들어 죽는 상황이라면?

하비엘도 엇비슷한 모습으로 늙어 있어야 한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늙지 않았어. 젊은 모습이야. 그 뜻은....'

지금 엿보고 있는 엔딩의 시점.

미리 체험하던 죽음의 장면.

이 순간이 먼 미래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게 아니라는 소리야?'

그의 시선이 황급히 움직였다.

조금 더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그 다급함 끝에 하비엘이 맞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그 손등.

수척했다.

그런데 주름이 없다.

노인 특유의 검버섯도 찾아볼 수 없다.

수척하지만 젊은 사람의 매끈한 피부를 지닌 손등.

그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손이었다.

확인은 거기까지였다.

파아앗...!

눈앞이 섬광으로 물들었다.

돌연한 눈부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

삐그덕.

어느새 자신은 침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까 엔딩 스포일러를 쓰기 전에 앉아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런 사실에는 신경을 쓰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서.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꿀꺽.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눈동자는 훨씬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맙소사.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쿵! 쿠웅! 쿵!

심장이 거칠고 빠르게 날뛰었다.

입을 가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늙어 죽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먼 미래가 아니었다.

하비엘의 생생하게 젊던 모습.

녀석이 그러쥐고 있던 자신의 매끈하던 손등.

그 어디에서도 노화나 긴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미친. 이런 미친.'

본능적인 공포심.

엔딩을 확인해 보길 잘했다는 안도감.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후우. 일단 진정하자.'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죽는 거 아니니까.

미리 대강의 상황을 봤으니까.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태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려 노력했다.

날뛰던 심장도, 가빠졌던 호흡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후아. 돌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피식 웃어본다.

그렇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절로 방금 엿보았던 엔딩 장면이 차근차근 떠올랐다.

엿보던 과정에서 얻어낸 몇 가지 정보도 냉정하게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정리부터 해 보자. 내가 죽었어. 사인은 병사. 먼 미래가 아니었어.'

몇 년 후일까.

혹은 몇 개월 뒤일까.

차분하게 유언을 돌이켜보았다.

덕분에 죽음의 시점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내년 봄이다. 확실해.'

추측의 근거가 되는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작년에 개간지를 늘리고 난 뒤에 안일했다고 했지. 그리고 강추위를 언급했어. 그러니까 올해 개간지를 늘린 것이 저 시점에서는 작년의 일이 되는 거고. 그 말은 즉, 이번에 찾아올 겨울에 강추위가 몰아닥친다는 뜻이겠구나.'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거기에 마지막 말은 더 확실해. 이런 봄날에 나도, 라고 말했지.'

정리해 보니 윤곽이 대강 그려졌다.

옹벽 시공과 개간지 공사를 마쳤음.

그해 겨울에 유례없는 강추위가 찾아왔음.

그리고 봄날에 병을 얻어서 죽음.

'한데 그 병마가 전염병이라는 게 문제야.'

분명히 유언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전염병에 대비하지 못했다고.

그 대가로 벌을 받는 듯하다고.

'영지에 전염병이 발생하는 거야. 수많은 피난민이 죽고, 그 와중에 나도 병에 걸려 죽는 거지.'

그럼 그 이후에는?

하비엘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거기까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내 무덤을 만들어 주고 영지를 떠나 모험을 시작하게 될 수도 있겠네. 소설 철혈의 기사 극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보면 결국 돌고 돌아 하비엘은 소설과 흡사한 행보를 밟게 되는 셈이다.

로이드는 그 아이러니에 콧등을 찡그렸다.

'뭐, 내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욘 없고.'

그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내년 봄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염병.

그걸 예방하는 게 급선무였다.

'후우. 개간지 늘리기도 대성공으로 끝냈고 이제 좀 숨통 트이나 싶었더니.'

목숨 걸고 전염병을 막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고민을 거듭했다.

엔딩 스포일러를 통해 얻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전염병의 발생 경로를 추측하느라 애를 썼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야.'

어떤 전염병이 발생하게 되는 건지.

그 전염병의 발생 경로는 어떤 건지.

도무지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피난민이 많이 몰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추측이 틀린 거라면? 나름 방역을 한다고 애를 썼는데 엉뚱한 곳에서 다른 원인으로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결국엔 방금 본 엔딩의 모습을 맞이하게 된다.

꿀은 빨아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사.

억울한 꼬락서니가 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건 안 돼. 막연하고 두루뭉술한 대응으론 죽도 밥도 안 될 거야.'

확실하게.

야무지게.

똑부러지게.

그런 디테일한 준비와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자면 예정된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전파 경로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엔딩 스포일러를 또 써 볼까 싶기도 했다.

죽음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고 단서를 얻어 볼까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엔딩 스포일러 3회차 실행 비용이 80 CP. 이거, 뻥튀기 장난 없네.'

2회차는 40이었는데.

아무래도 회차가 늘어날 때마다 비용이 2배로 늘어나는 듯했다.

한데 지금 남아 있는 CP는 60이 고작이었다.

엔딩 스포일러를 쓰려야 쓸 수 없었다.

'후우. 그럼 뭐지 대체. 어째서 그런 전염병이 창궐한 거지.'

로이드는 끙끙대며 고민에 잠겼다.

그렇게 반나절을 방 안에서만 보냈다.

저녁이 깊었다.

하비엘이 찾아왔다.

"시간이 되셔도 안 오시길래 데리러 왔습니다."

"뭐?"

"자장가 서비스 시간 말입니다."

"...."

아 참. 깜빡했다.

매일 이 시간이면 녀석한테 자장가 불러 줘야 하는데.

오늘은 종일 고민에 잠겨 있느라고 정신이 딴 데 팔리고 말았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쯧. 설마 그래서 울었던 거냐? 자장가 못 듣게 될까 봐?"

"...울었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너 말이야. 엔딩에서."

"엔딩이라니요."

"그런 게 있어."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내내 고민에 잠겨 있었더니 뒷골이 뻐근했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져 있었다.

하비엘 녀석을 재우러 가는 김에 산책이나 하며 바람을 좀 쐴까 싶었다.

'그럼 새로운 생각이나 단서가 떠오를 수도 있을 거고.'

하비엘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녀석의 숙소를 향해 말없이 걸었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뒤를 따라오던 하비엘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낮에 보고를 드리려다가 깜빡한 것이 있습니다."

"보고? 뭔데."

"피난민 캠프에서 나오는 분뇨 말입니다."

"어. 그게 왜?"

"지난번에 파 놓은 구덩이가 다 찼습니다."

"벌써?"

"예."

"흐음, 하긴. 머릿수가 워낙 많으니까."

로이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만 명이나 모여 있는 피난민 캠프였다.

엄청나게 먹는 만큼 배출되는 분뇨의 양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걸 아무 데나 못 버리게 지시해 두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만 모으도록 조치했다.

한데 그게 벌써 다 찼다니.

로이드는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전염병 때문에 머리 아픈데. 차라리 식사 배급량을 확 줄여 버려? 그럼 좀 덜 싸려나? 그래도 그건 좀 아닌데. 구덩이를 더 파? 쓰읍. 뭔가 한도 끝도 없는 느낌이라서 그것도 좀.'

수만 명의 분뇨.

상상보다 양이 엄청났다.

따로 모아서 비료로 쓰고도 한참이나, 너무 심하게 많이 남을 정도였다.

'확실히 땅에 묻는 건 한계가 있어. 그럼 그냥 프로나 강에 버릴까? 어차피 하류인 북쪽에는 맞닿아 있는 영지도 없으니까. 그냥 무인지대니까. 어쩌면 그게 제일 청결하고 손쉬운 방법일... 어?'

생각을 이어 가던 도중이었다.

뭔가가 어렴풋이, 번쩍, 떠올랐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머릿속이 급격히 바빠졌다.

단서.

떠오른다.

조각조각.

뚜렷하게.

이어지고, 맞추어지고.

연결되며, 하나의 실루엣으로.

'전염병... 분뇨... 강... 맹추위... 봄철... 그렇게, 전염병.'

아까까지 고민하던 전염병 발생의 원인.

방금 하비엘에게 들은 분뇨 문제.

두 가지 퍼즐이 하나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해답의 실마리를 비추었다.

그렇게 로이드가 떠올리게 된 실마리.

그것은 지구의 역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의 어느 한 페이지였다.

"1830년 겨울. 오스트리아 빈. 유례없는 강추위. 도나우 강 동결 사태. 그리고... 콜레라."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침내, 예정된 전염병의 원인을 찾아냈다.

141화. 두 번째 엔딩 스포일러 (2)

"1830년 겨울. 오스트리아 빈. 강추위. 도나우 강의 동결. 그리고... 콜레라."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침내 맞추어진 퍼즐 조각.

그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치켜든 해답.

'그래. 이거였어.'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옆에서는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콜레라라니요?"

"음?"

"방금 뭔가 혼자 중얼거리셨지 않습니까. 오스트리아 빈. 도나우 강. 콜레라.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 그거."

불현듯 깨달은 해답을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거였는데.

역시나 하비엘의 예민한 청각이 그걸 놓치지 않았나 보다.

로이드는 피식 웃으며 재빨리 얼버무렸다.

"잊혀진 고대 도시와 강의 이름이야."

"고대의 도시 말입니까?"

"어. 전에 왕도에서 줄리앙 보려고 아카데미 방문했을 때. 그때 집어든 책에서 봤어."

"한데 그걸 지금 왜...."

"생각해 보니까 문득, 그곳과 지금 우리 영지의 상황이 흡사한 것 같아서."

"흡사하다니요?"

"사람이 무진장 많이 몰려 있는 상황 말이지."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1830년의 오스트리아 빈.

지금의 프론테라 백작령.

두 장소 사이에는 차원과 공간을 뛰어넘은 공통점이 있었다.

'변변한 분뇨 처리 시설이 없지. 그 상황에서 도시의 인구가 갑작스럽게 폭증했어.'

1830년.

당시의 유럽은 산업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수많은 노동자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예외가 아니었다.

몰려든 노동자의 물결.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분뇨의 처리에 문제가 생겨났다.

'당연하지. 그전에는 분뇨가 나오면 일부는 농사의 비료로 쓰고, 나머지는 대강 길이나 강에 버리는 식이었거든. 그런데 인구가 갑자기 확 늘어나니까? 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분뇨를 처리할 각이 안 나왔던 거야.'

그럼에도 아무런 대책이 세워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겨울을 맞이했다.

하필이면 유례없는 강추위가 몰려왔다.

빈의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이 통째로 얼어 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때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여전히 남는 분뇨를 강가에 내다 버렸다.

'그게 재앙의 시작이었던 거지.'

평소였다면 분뇨가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갔을 터다. 강물 속에서 각종 미생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분해될 분뇨였을 터다.

한데 그해 겨울, 도나우 강이 통째로 얼어붙게 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분뇨가 떠내려가지 않았다.

얼어붙은 강가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상태에서 햇볕에 녹았다가, 밤에 얼었다가를 반복했다.

부패가 진행되었다.

대량의 썩은 분뇨가 땅속 깊숙이 스며 갔다.

일대의 지하수를 오염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그 지하수를 마신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리게 되었다.

도시를 덮친 대규모 전염병 사태의 시작이었다.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거야. 그 결과가 내가 엔딩 스포일러로 본 장면이었던 거고.'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도나우 강의 동결 사태.

그로 인해 일어난 대규모 콜레라.

로이드는 그 사례를 적당히 각색해서 하비엘에게 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을 봤거든."

"고대 도시 빈이라는 곳에서 말입니까?"

"어. 난 그런 사태가 우리 영지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확실히 그렇다.

지금 프론테라 백작령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오스트리아 빈에 산업화의 물결로 노동자가 몰렸다면.

지금 이곳에는 몬스터 도미노의 여파로 피난민이 모여든 상황이다.

"게다가 우리 영지에도 분뇨 처리 시설이 없지. 그런데 만약 올해 겨울이 유난히 추워진다면? 그래서 프로나 강이 얼어 버린다면? 저 고대 도시의 사례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아주 높은 확률로."

로이드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말하다 보니 더욱 또렷한 확신이 들었다.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전염병에 걸려 죽던 자신.

그 미래의 자신은 지금 이 시기에 잘못된 결정을 내렸던 것이리라.

제대로 된 분뇨 처리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일 터다.

그저 프로나 강에 분뇨를 내다 버리는 편한 길을 택했겠지.

이제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한데 이쪽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 님의 말씀을 들으니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데 말입니다. 분뇨 처리 시설이 뭡니까?"

"음?"

"혹시 구덩이를 파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겁니까?"

"어. 당연하지."

로이드의 고개가 끄덕.

그 확신에 찬 모습이 하비엘의 입을 다물리게 했다.

"...."

정말로 묘한 도련님이다.

아니, 신기하기 짝이 없는 자다.

하비엘은 문득, 아까 낮에 겪었던 기묘한 경험을 떠올렸다.

'보고를 드릴 일이 있어서 로이드 님을 찾아왔었지.'

침실 문을 두드렸었다.

안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한데 로이드의 기척은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어차피 꼭 해야 하는 보고였다.

로이드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충격을 받아야 했다.

'로이드 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

보이지 않았다.

없었다.

테이블 앞에도.

침대 아래에도.

커튼 너머에도.

몸을 숨길 곳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로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로이드의 기척은 계속해서 느껴졌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기척은 느껴지는데 침실 곳곳을 뒤져 봐도 사람은 없는 상황.

기이하고도 낯설며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로이드 님이 내 감각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보이지 않았다.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기척은 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물러났다.

침실에서 나와 머리를 식혔다.

밀려 있는 다른 업무부터 처리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찾아왔던 때는?

평소처럼 침실에서 뒹굴거리는 로이드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

자신이 찾아갔던 낮의 침실.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로이드 님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감각을 교란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로이드가 지닌 이해불가의 능력도.

종종 선보이는 불가사의한 지식도.

'의심...해야 하는 걸까.'

혹은 호기심으로만 묻어 두는 것이 나을까.

하비엘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간단했다.

'일단은 지켜만 보도록 하자. 호기심으로만.'

자신이 보기에 로이드는 분명 뭔가 비밀을 지니고 있다.

돌이켜 보면 영지의 주점 주인장에게 온돌방을 지어 주었던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의심을 품기는 싫었다.

비밀을 지녔더라도.

설령 불가사의한 능력을 품었더라도.

로이드는 그 능력을 언제나 영지의 발전에만 쏟아부었으니까.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가문과 수많은 이들을 구해 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호기심만.

딱, 거기까지만.

'그게 내 본분이겠지.'

하비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주군에게 충성하는 기사일 뿐이다.

그러니 로이드가 영지를 위해 헌신하는 한 그를 지켜주는 것이 자신의 최선일 터.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로이드 님의 침실로 돌아가도록 할까요."

"어? 왜?"

"이제부터 새로운 공사를 계획하실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고민과 계획으로 오늘 밤을 지새우시겠지요?"

"아마도?"

"그래서입니다."

"너도 같이 밤새겠다고?"

"예. 지켜 드리겠습니다."

"뭐래. 소름 돋게."

"...."

"어휴. 손발 사라질 뻔했네."

"...."

"그래도 같이 날밤 지새면서 의리를 지키시겠다?"

"예."

"그러고 싶음 그러시든가."

"...."

"그럼 야식이나 좀 챙겨 가자."

로이드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할 일이 많아진 밤이다.

그렇게, 새로운 계획을 위한 야근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다음 날, 로이드는 프론테라 백작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뭐, 대하수로?"

"예."

"그게 무엇이더냐?"

"영지에서 발생할 분뇨를 처리할 땅속 터널입니다."

아침 식사 도중이었다.

고소한 치즈와 새콤한 샐러드.

든든한 달걀과 기름진 소시지.

따끈한 우유로 풍성한 식탁이었다.

로이드는 식탁을 힐끗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으음, 만일 식사 중에 이런 이야기가 싫으시다면 나중에 말씀드릴까요?"

"아니다. 괜찮다."

향긋한 식사 중에 분뇨 이야기.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눈살을 찌푸릴 법도 했다.

하지만 프론테라 백작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영지의 일이고 여기서 사는 사람들에 관련된 일이잖니. 네가 그렇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걸로 보아선 이런 아침 식사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기도 할 테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분뇨를 처리할 방식이라니. 분명 뭔가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거겠지?"

"물론이죠."

"좀 들어볼 수 있겠니?"

"예."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전날 하비엘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백작에게 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백작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

"그런 식으로도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더냐?"

"예.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기록으로도 남아 있는 사실이니까요."

"하면, 그런 일이 우리 영지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거라고?"

"아무래도요."

"그래서 대하수로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예."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신이 내린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영지에서 먼 곳에 분뇨를 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장소가 은근히 없었다.

동쪽에는 산맥이 있다.

거기에 분뇨를 버렸다간 지하수와 상수원 모두가 오염될 가능성이 컸다.

남쪽의 라코나 자작령에 버려도 문제가 될 터다.

'거기에 전염병이 생겨나면 우리 영지까지 번지는 것도 금방일 테니까.'

그렇다고 왕의 영토인 서쪽에 버릴 수도 없다.

그럼 남는 곳은 북쪽인데, 막상 그 빈 땅에 대량의 분뇨를 버릴 생각을 하자 숨이 턱 막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옮기기엔 분뇨의 양이 너무 많으니까.'

사실 단순한 산수 차원의 문제였다.

한 사람이 하루에 배출하는 분뇨의 평균적인 양을 200그램 정도로 잡고 계산하면?

'피난민의 숫자를 곱하면 답이 나오지. 하루에만 약 9톤에서 10톤 가까운 분뇨가 배출될 거야. 한 달이면? 약 300톤이야.'

한 달 만에 300톤의 똥 덩어리.

1년이면 3,600톤.

10년이면 무려....

'쯧. 더는 계산하지 말자.'

상상하자니 속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어쨌건, 수레를 이용하건 사람이 양동이로 나르건.

단순하게 옮기기엔 감당이 안 되는 규모의 분뇨였다.

게다가 오랜 기간 대도시로서의 체계와 인프라가 풍부하게 갖추어진 크레모 시, 왕도 등과 달리 이곳 프론테라 영지는 피난민이 몰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영지민의 숫자가 몇천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듯 열악한 인프라.

한꺼번에 확 불어난 인구.

거기서 나오는 분뇨 문제를 해결하자면 비슷한 케이스를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야. 오스트리아 빈. 거길 참고해야 해. 그곳에서 실제로 선택했던 대처법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는 오스트리아 빈의 사례를 롤모델로 삼기로 했다.

앞으로 영지에서 발생하게 될 전염병을 방지할 방법.

실제 역사에서 오스트리아 빈이 선택한 대처법을 보면 답이 보였다.

'1830년부터 1835년까지. 빈 강의 양옆에 폭 1.5미터, 높이 2미터의 하수관을 만들었지. 그걸 '콜레라 카날'이라고 불렀던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 1890년부터 1910년까지는 훨씬 큰 규모의 하수로를 추가로 만들었어. 무려 폭 15미터에 높이는 8미터로. 그렇게 전에 만들었던 콜레라 카날과 새로 만든 대하수로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지.'

그렇게 열심히 땅을 팠다.

꼼꼼한 하수 시스템을 만들었다.

덕분에 마침내 콜레라의 창궐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걸 배워야 해.'

생각을 정리한 로이드가 말했다.

"사실 개념 자체는 간단합니다. 영지민들의 생활을 통해 발생하는 각종 오물과 분뇨를 따로 지하로 흐르게 하는 겁니다. 기존의 강물이나 지하수와 완전히 분리시켜서 말이지요."

"하면, 강물과 지하수의 오염을 예방하는 것이로구나?"

"예.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래서입니다."

일단 대하수로 시공을 위한 밑밥은 넉넉히 뿌렸다.

백작이 시공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했다.

일은 이럴 때 추진해야 한다.

할 때는 단숨에.

쇠뿔을 뽑듯이.

딴생각할 틈도 주지 말고.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니 공문을 하나 써 주셨으면 합니다."

"공문이라니?"

"인력 모집 공문입니다."

궁금함을 드러내는 백작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큰 규모의 공사가 될 겁니다. 영지 전체를 시공하는 공사이기도 할 겁니다. 이곳 저택은 물론이고 기존의 촌락들, 거기에 피난민 캠프와 아파트 단지까지. 거의 모든 거주 구역을 아울러 땅을 파고 하수관을 설치해야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라면?"

"다 모인 하수를 북쪽 무인지대까지 원활하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거기까지도 물론 땅을 파야 할 테지요."

"엄청난 규모의 공사가 되겠구나."

"예. 그래서입니다. 그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사실이었다.

기존의 공병대?

그들만으로는 턱도 없을 터다.

게다가 공병대는 우선순위인 아파트 시공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엘프 철근공과 오크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쉬고 있는 백색창기병대 정도는 동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일손이 턱없이 모자랍니다. 하니 영지민들과 피난민들의 조력이 필요합니다."

"흐음, 그래서 자원자를 받겠다는 것이로구나."

"예."

사실은 그들을 강제로 동원해 볼까도 싶었다.

이미 프론테라 영지는 백작령이 되었다.

그만큼 엄청난 권한을 지니게도 되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영지민과 피난민을 강제로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대한민국에서 종종 겪었던 설움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실컷 일했는데 일당 못 받고 계속 밀리고 하는 거... 너무 끔찍했어.'

먹고 살아 보겠다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겠다고.

그토록 바둥거리며 일했던 나날이었다.

한데 세상은 종종 그런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

무시? 비웃음?

그런 건 차라리 양반이었다.

가장 아프고 서러운 폭력은 바로 일당이 밀리는 일이었다.

'일당. 그거 하나 보고 뼈 빠지게 코피 쏟아 가며 일한 건데.'

미안하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서로 좋은 게 좋은 아니겠냐고.

그러니까 며칠만 기다리면 몰아서 주겠다고.

사람 좋은 얼굴로 타이르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엔?

'일당 지급 미루면서 얼버무리듯 꺼내는 그런 식의 약속, 나중에 지키는 꼴을 한 번도 못 봤어.'

한 번 밀린 일당은 계속해서 밀린다.

이상하게도 항상 그랬다.

덕분에 고시원비를 내지 못할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해야 했던지.

고시원 총무만 보면 슬금슬금 눈치를 보느라.

쌀밥도 제대로 못 퍼 오는 날마저 있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빡치네.'

그리고 서러웠다.

당시의 울분이 지금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강제로, 공짜로 사람 굴리는 건 안 돼.'

자신이 겪으며 욕했던 그런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남에게 하긴 싫었다. 아무리 치사하게 살아도 그런 짓까지는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게다가 실리적인 측면을 보아도, 강제 동원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닐 터였다.

'주민들과 피난민들의 불만이 쌓이게 될 거야.'

물론 불만 따위는 그냥 뭉개면 된다.

하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기 어려워질 것이다.

'민심을 잃는 거야. 그때부터는 내가 무슨 공사를 벌여도 주민들이 자원하는 일이 없어질 거야. 그런 거 해 봤자 손해다. 아무 대가도 없고 몸만 상한다... 라는 인식이 박히는 거니까.'

그러면 곤란했다.

당장 눈앞의 이득을 위해 오래도록 단물을 빨 수 있을 신뢰 자산을 깎아 먹는 짓.

그런 근시안적인 선택은 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공문이 필요한 겁니다. 합법적으로 고용 계약을 작성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뭐, 이번에 자원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요."

"그렇겠지. 이제 농사철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랬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존의 영지민들도.

계단식 농경지를 분양받은 피난민들도.

하나같이 농사 준비에 바빠질 시기였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일단 1차적으로 지원자를 받고, 모자라는 숫자는 크레모 시에서 전문 인력을 고용 계약으로 끌어와야겠지요. 돈이 좀 들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야겠지. 알겠구나. 내 그럼 공문을 작성해 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백작이 공문을 작성했다.

영지 곳곳에 공문을 두루두루 돌렸다.

사실 그러면서도 로이드는 큰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다.

계단식 농경지를 만들 때와는 여건이 여러모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땐 공사에 참여하는 만큼 개간지를 분양해 준다는 조건이 있었으니까 다들 열광적이었지. 하지만 이번엔 달라. 그냥 약간의 일당밖에 줄 것이 없어. 다들 자기 땅 일구느라 바쁠 시기에 딱히 큰 메리트는 없는 보상인 셈이지.'

그러니까 추가적인 인력은 돈을 들여서 크레모에서 고용하고 끌어오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로이드는 침대로 몸을 던졌다.

"후우."

전날 밤을 지새워서 그런 걸까.

종일 바삐 움직여서 이런 걸까.

내내 잊고 있던 노곤함이 몰려왔다.

'일단 좀 자자.'

지금은 푹 자고.

내일의 고민은 내일 하자.

로이드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딩동.

[지금까지 당신이 쌓아온 수많은 업적과 찬사가 종합적인 효력을 발휘합니다.]

[프론테라 백작의 공문을 접한 영지민과 피난민 대다수가 당신을 도움으로써 은혜를 갚고 싶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로이드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메시지가 잠든 그의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142화. 뜻밖의 연계 효과 (1)

"비벙-!"

프론테라 백작령의 아침이 밝았다.

드높은 동부산맥 중턱에서 우렁차게 날아오는 비벙이의 포효와 함께 수많은 사람과 가축, 종달새, 개구리, 꿀벌이 잠에서 깨어났다.

물론 로이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뭐냐 이건.'

로이드는 한 차례 눈두덩을 꾹 눌러 비볐다.

평소처럼 단잠을 자고 깨어난 아침이었다.

특히 평소보다 훨씬 피로했던 전날이었던 탓에 신발조차 벗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잠들었던 그였다.

'그래서인가. 내가 너무 푹 잤나. 잠이 안 깨고 눈앞에 헛것이 보이네.'

조금은 덜 깬 멍한 기분으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헛것'을 다시 읽어 내렸다.

[기존의 영지민들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당신을 돕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습니다.]

"...."

뭔 어린이 동화책 모서리로 정수리 찍히는 헛소리야.

세상에 자발적인 도움이 어딨다고.

게다가 한두 명도 아니고 영지민 대다수가?

난 그런 거 안 믿거든?

'최소한 두루마리 휴지 30개들이 증정품 한 덩이쯤 공짜로 품에 떨어지거나, 하다못해 알짜배기 쿠폰북 하나쯤 쥐여 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꿀맛 같은 수당 하나쯤은 보장 돼야지.'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겨우 움직인다.

그게 사람이다.

보상 없는 노동은 없다.

대가 없는 선의도 없다.

그러니까 세상에 공짜란 없다.

아무런 이유 없는 호의 또한 절대로 없다.

그게 로이드의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오랜 각박한 생활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품게 했다.

그래서 남에게 좀처럼 공짜를 허용하지 않았다.

남에게서 공짜로 뭔가를 얻으려는 기대도 크게 갖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슨 자발적으로 소매를 걷어붙인다는 건지, 나 참.'

자신은 그저 프론테라 백작을 통해 공문 몇 장을 영지 곳곳에 붙인 게 다다.

적절한 금전을 지급하겠다고.

그러니 대하수로 공사에 참여할 인부를 구한다고.

그렇게 인부 모집 공문을 붙였지만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보상이 그저 그랬으니까.'

한창 농사 준비로 바쁠 봄철이다.

굳이 몇 푼의 돈 때문에 인부가 되어 줄 사람이 많을까.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잘해야 백 명 정도? 그쯤이면 평타는 치는 결과겠지.'

그러니까 나머지 인력은 크레모에서 고용해 온다.

그 계획을 점검하며 그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달아나지 않는 졸음을 억지로 쫓아냈다.

그리고 잠시 후 보았다.

헛것이라고만 여겼던 메시지가 여전히 눈앞에 남아 있는 모습을.

그 메시지 아래로 이어져 있는 추가적인 알림을.

[지금까지 당신이 쌓아온 업적과 찬사가 연계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

뭐?

로이드의 눈동자가 멈칫.

천천히 움직였다.

메시지를 선택했다.

그러자 상세한 내용이 활짝 펼쳐졌다.

딩동.

[당신은 일찍이 영지의 배신자를 처단하고 기강을 확립함으로써 지위에 어울리는 위엄을 보였습니다. 프론테라 백작령의 주민들은 그날 당신을 향해 느꼈던 놀라움과 감탄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찬사, '일벌백계의 집행자'가 당신을 향한 기존 영지민들의 기본적인 신뢰감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몰락하던 영지를 재건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경이로운 끈기와 계획성으로 가문의 빚을 청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도맡기도 하였습니다. 프론테라 백작령의 주민들은 그러한 당신의 노력과 헌신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찬사, '몰락한 영지의 건설자'와 '프론테라의 장남'이 영지민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영지민도 당신의 건설 계획에 의문이나 의심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넉넉하지 않은 상황을 무릅쓰며 피난민들에게 인도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은 당신이 베푼 도움과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찬사, '지친 이들의 선도자'가 피난민들의 당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거대한 재난 앞에 물러서지 않고 맞서며 기꺼이 방패가 되어 영지민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러한 행적은 한 차례가 아닙니다. 당신은 야수 개미의 침입 앞에 일꾼들을 살리고자 지하로 뛰어들었습니다. 흑마법사에게 잡혀간 병사들을 구하고자 서슴없이 던전에 돌입했습니다. 수십만 마리 메뚜기 떼를 유인하고자 일부러 미끼가 되었습니다. 영지민들은 당신의 이 모든 용기와 희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찬사, '종소리의 구원자'가 기존 영지민들의 입을 타고 피난민 캠프에 퍼져 가고 있습니다. 당신을 은인으로 여기던 피난민들은 이 놀라운 찬사를 전해 들으며 감탄과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찬사의 연계 효력으로 특수한 효과가 생성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모든 영지민과 피난민이 한마음으로 당신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향후 일정 기간 동안 프론테라 백작령에 몸담은 모든 이들이 당신의 계획과 행동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며 따릅니다.]

[피난민을 포함한 모든 주민이 당신을 위한 무상 노동에 자발적으로 나서리라 다짐했습니다.]

[찬사 연계 효과 대상 : 프론테라 백작령의 모든 구성원]

[찬사 연계 효과 기간 : 3년]

"...헐."

이거 실화냐.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정독했다.

역시나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건 명백한 실화다.

"대박."

너무 엄청난 설명이 줄줄이 이어지니 오히려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금은 멍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원한 아침 공기라도 마시면 들뜬 마음이 좀 가라앉을까.

커튼을 걷어내고 침실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굳어 버리고 말았다.

"와아아아-!"

창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환호성과 함성이 날아왔다.

아침 공기를 마셔보기도 전에 고막과 온몸을 사정없이 두드려 왔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운집한 사람들.

저택 안뜰 너머.

정문 담장 바로 바깥에서부터 저 멀리 진입로 아래까지.

대강 세어도 천 명은 족히 넘을 인파가 이른 아침부터 저택 앞에 모여 있었다. 침실 창가로 모습을 드러낸 자신을 향해 환호성과 함성을 보내고 있었다.

'어. 이거 잠깐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실감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진짜네. 방금 그 메시지.'

그는 차분함을 찾으려 노력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지금까지 세운 업적과 찬사.

그것들이 연계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자신이 영지 셀럽(?) 1순위가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대하수로 공사에 참여하고자 아침부터 저택을 찾아오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다.

'후아.'

이러다가 나중엔 왕으로 추대되는 거 아닐까.

그러면 평생 편하게 꿀도 못 빠는 건데.

안 그러려면 좀 긴장해야 할지도.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매만졌다. 침실을 나섰다. 잔뜩 상기된 백작 부부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혹시 창밖을 보았느냐? 아까부터 다들 저렇게 모여서 난리도 아니구나. 다들 일을 시켜 달라고, 금전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저렇게들 자원을 하고 있단다. 고작 어제 몇 장 붙였던 공문 덕분에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워낙 명문이시니까요. 공문에 쓰신 글귀에 다들 깊은 감동을 받은 덕분일 겁니다."

"그, 그런 것이더냐?"

"예, 아마도."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난데없는 필력 칭찬에 고무된 프론테라 백작을 향해 말했다.

"무척 반가운 상황입니다. 따로 수고롭게 크레모에서 일꾼을 고용하지 않아도 될 듯하니까요.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저들 앞에 나서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물론이란다. 널 위해 일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겠느냐."

"감사합니다."

이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백작.

그를 향해 미소를 남기고는 저택을 나섰다.

저택 앞에 모인 수많은 영지민과 피난민들 앞에 섰다.

굳이 거창하고 오글거리는 연설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테이블 하나를 냉큼 차렸다.

계약 테이블이었다.

"자아! 다들 줄 섭시다, 줄!"

노라는 것은 물이 들어왔을 때 저어야 한다.

커다란 돛도 순풍이 불어올 때 펼쳐야 한다.

빨래도 햇볕 쨍쨍한 낮에 너는 게 국룰이다.

근로 계약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의욕이 올라왔을 때.

뭔가 해 보겠다며 활활 타오를 때.

그럴 때 재빨리 계약 테이블에 앉히는 게 최고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로이드는 얼굴 가득 티타늄 철판을 깔고서 계약 테이블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자아, 이름과 주소 쓰시고. 나이와 성별, 키, 체중 쓰시고."

"예? 나이를 말입니까요? 성별과 키는 왜...."

"사람마다 힘과 체력이 다를 거니까. 나이에 따라 회복력도 다를 거고.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막 굴려 주면 좋을 거 같아? 정말로?"

"아, 그건 물론 아닙니다요."

"그렇지? 막 피곤해 죽겠는데 일 나오라고 재촉하고. 안 나오면 일당 깎인다고 압박하고. 좀 쉬고 싶은 날인데 제멋대로 잔업 지시하고. 그러면 끔찍할 거 같지 않아?"

"예, 예...."

"그러니까 일당은 지급될 거야. 공짜는 없어."

"예?"

"못 들었어? 일하는 만큼 일당 지급될 거라고."

"저기, 하지만 로이드 도련님. 저희는 딱히 대가는 필요가...."

"쯧. 나중에 구설수 듣기 싫어서 이러는 거야. 주는 대로 받아."

"아, 예. 알겠습니다."

"그래, 좋아. 공사 시작하면 작업 일정 공문으로 돌릴 거니까 그동안은 농사 준비에 집중하고 있어. 마레즈 개간지는 잘 꾸려져? 요즘은 좀 어때?"

"아, 제가 마레즈 개간지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십니까요?"

"왜 몰라. 나랑 개간지 분양 계약했잖아."

"그랬... 읍죠."

"애들은 잘 커? 돈 모이면 크레모로 공부시키러 보낼 거라며."

"어떻게 그것까지 기억을...."

"그럼 잊어 주랴?"

"아닙니다요. 아닙니다요. 그저 저 같은 놈을 다 기억해주시니 너무 놀라워서...."

"뭘 그런 걸 가지고 놀라나. 암튼 그럼 잘 들어가. 농사 준비 잘하고. 작업 일정 공문 받으면 꼭 읽어 보고."

"알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로이드 도련님."

"오케이. 다음 사람."

...이라는 식이었다.

즉, 그는 자원자들과 계약서를 일일이 작성했다.

자원자들로 하여금 성별과 나이, 키, 체중 등의 조건도 기재하도록 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자원자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인원보다 숫자가 많을 듯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신체 상황에 따라 작업 로테이션을 충분히 돌릴 여건이 되었다.

'로테이션, 돌려야지. 안 그러면 농사는 누가 짓고 소는 누가 키워.'

아무리 공사가 시급해도 농사 또한 중요하다.

그러니 사람들의 농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세심하게 작업 로테이션을 돌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일당. 무조건 줘야 해.'

그는 일당도 빠뜨리지 않았다.

자원자라고 해서 공짜로 굴리기 싫었다.

돈이 펑펑 남아나서?

뒤늦은 복지 정신에 눈을 떠서?

모두 아니었다.

훗날을 위해서였다.

'공짜로 사람 굴리면 나중에 꼭 구설수가 나오니까.'

지금은 다들 열렬하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

지금의 환호가 나중엔 비난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니 평소부터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며 일을 시켜야 인식이 제대로 박혀. 아, 저분이랑 일을 하면 일당 떼일 일은 없구나. 제대로 값을 받는구나. 안심하고 일할 수 있어. 그런 인식 말이지.'

그런 인식이 생겨야 계속 일을 시키기 편해진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일손을 구하기도 쉬워진다.

말 그대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로이드는 종일 수천 명의 자원자와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동안 내내 싱글벙글.

자원자들도 뿌듯한 미소가 한가득.

누가 보더라도 훈훈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로이드 곁의 한 사람, 하비엘만 빼고서 말이다.

'후우. 역시 사람들은 로이드 님의 실체를 모르는군.'

옆에서 계약서 서류를 나르는 하비엘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종종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도 순진한 건지.

대체 로이드의 어떤 면을 보고 이렇듯 환호하는 건지.

항상 곁에서 지켜보는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쪼잔하고 야비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

가능하다면 외치고 싶었다.

이 인간 사기꾼이라고.

다들 도망치라고.

물론 냉철하고 침착한 그는 자신만의 외침을 가슴속에 갈무리하는 데에 성공했고, 자원자들의 근로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직 남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남은 정도가 아니지. 아주 산더미야, 산더미.'

계약을 마친 로이드는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인력 수급 문제를 해결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인력 다음은 자원.'

사람만 있다고 일이 되진 않는다.

건설물에는 엄연히 재료가 들어간다.

이번에 만들 대하수로에는 특히 대량의 석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야. 저녁 먹으러 가자."

"예?"

자원자들의 근로 계약서 서류 정리를 마무리하던 하비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녁을 먹자면서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아닌 게 아니라 로이드는 외출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외투를 걸치며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따라와 보면 알아."

"...."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로이드 님은.

게다가 저녁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하비엘은 의문을 느끼며 그를 따라 저택을 나섰다.

말에 몸을 실었다.

나란히 말을 달렸다.

어느새 깔리기 시작한 노을 아래.

로이드의 말머리가 남쪽을 향했다.

'설마 라코나 자작령으로?'

그건 즉, 저녁을 라코나 자작의 저택에서 먹겠다는 뜻인 걸까.

아니, 저녁만 먹으려는 것이 아닐 터다.

또 뭔가를 뜯어내려는 것일 터다.

'로이드 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한 번 밉보인 대상은 계속해서 밟아주는 인간.

아주 끝장을 볼 때까지 쭉쭉 빨아먹는 인간.

그런 인간이 로이드가 아니던가.

과연 그 짐작이 맞았다.

곧 말발굽이 라코나 자작령의 경계를 넘었다.

몇 개의 촌락과 논밭을 지나 호화로운 저택 앞에 당도했다.

라코나 자작의 저택이었다.

한데 그 저택의 앞뜰에서는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싸움?'

두 사내가 주먹다짐을 벌이는 게 보였다.

옷차림으로 미루어 자작가 저택의 하인인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호화로운 차림의 청년 하나가 둘의 싸움을 즐기듯 구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주먹 제대로 뻗어, 이 자식들아! 엉? 지는 놈은 오늘 밤 창고에서 자는 거야. 당연히 저녁도 없을 거다. 알았어들?"

제법 커다란 덩치.

야비하게 번들거리는 눈초리.

그 모습을 보며 하비엘은 청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라코나 자작의 아들이로군.'

이름이 디에고였던가.

줄리앙 도련님처럼 왕도의 아카데미에 유학을 갔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언제 고향으로 돌아온 걸까.

하비엘이 그런 생각을 떠올릴 무렵이었다.

"어이."

로이드가 디에고의 뒤편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린 디에고의 어깨에 한쪽 팔을 턱, 하고 걸쳤다.

"엇? 누구?"

깜짝 놀란 디에고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로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로이드의 눈가에 사탄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눈웃음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누구긴. 나지. 내가 오늘 볼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너한테 또 묻는 건데, 느그 아부지 지금 뭐하시냐?"

라코나 자작의 아들, 디에고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입이 아닌 목젖으로.

딸꾹.

143화. 뜻밖의 연계 효과 (2)

디에고 라코나.

라코나 자작의 아들.

그는 한때 나름 기대받던 젊은이였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명석한 정도는 되었다.

커다란 체격 덕분에 힘도 뛰어난 편이었다.

검술에 대한 재능도 제법 있었다.

영지의 기사 쿠르노 경에게 여러 번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렇듯 어릴 적부터 주위의 기대를 받으며 컸다.

커서는 왕도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때까지는 나름 좋았다.

자신이 제법 잘 나간다고 여겼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 악마 같은 놈과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그런데... 이놈이 왜 여기서 나와?'

딸꾹.

크게 출렁이는 목젖.

저도 모르게 돋아나는 소름.

그렇듯 음차원의 영역으로 힘차게 추락하는 행복지수 그래프를 느끼며, 디에고는 눈을 부릅떴다.

"어? 어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생각처럼 입술이 움직여 주질 않는다.

허파가 밀어 올린 호흡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데.

혀가 굳어 버린 듯 갈피를 찾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는 당황해 버렸다.

"뭘 그렇게 놀라?"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디에고의 어깨에 걸친 팔에 힘을 주었다.

놈의 머리를 이쪽으로 슬쩍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인 거지? 그래서 잘 못 들었구나? 그러니까, 느그 아부지 지금 뭐 하시냐고."

"그, 그게...."

"응. 차근차근 말해 봐."

"그...."

"내가 무섭냐?"

"...."

디에고는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인정하기는 싫은데 무서웠다.

로이드 프론테라.

저놈을 보면 화가 나야 할 텐데.

머리 뚜껑이 열릴 정도로 열불이 뻗쳐야 할 텐데.

지난번에 저놈에게 무참히 얻어맞고 짓밟혔던 기억을 떠올리자면, 저놈이 국왕에게 아카데미의 비리를 고자질하는 바람에 자신이 퇴교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자면, 게다가 그 일 때문에 3개월이나 감옥 신세를 졌던 걸 되새기자면....

'화가 났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기대받으며 자랐던 자신이었다.

아카데미의 당당한 일원으로 촉망받기도 했다.

한데 이젠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퇴교당한 것도 모자라 왕명으로 감옥 신세를 지기까지 했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공적인 귀족 세계에서의 영원한 퇴출.

왕실의 주요 관직을 평생 받을 수 없음.

그렇게 쫓겨나듯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던 요즘이었다.

수시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럴 때마다 술을 마셨다.

하인과 하녀들을 괴롭혔다.

그렇게 화풀이라도 해야 속이 좀 가라앉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인 둘을 불러 세웠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싸워 보라고, 주먹다짐을 벌이라고 했다.

처음엔 하인들이 주저했다.

어떻게 그러느냐고.

싸우기 싫다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그래서 채찍을 가져왔다.

이제부터 자신의 명령을 안 듣는 놈은 이 채찍으로 다스리겠노라고.

그렇게 억지로 싸움을 붙였다.

하인들의 코피가 터지고, 눈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고 더욱 독촉했다.

싸움에서 지는 놈은 저녁 식사가 없을 거라고.

거기에 추가로 오늘 밤을 창고에 처박혀서 보내야 할 거라고.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워 보라며 다그쳤다.

하인들이 뭔가 잘못을 해서?

아니었다.

하인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물론 그가 느끼는 죄책감 또한 없었다.

'그래도 돼. 저것들은 하인이니까. 내 소유니까. 내 물건인데 화풀이 못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화풀이.

그걸로 즐거워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울분을 아랫사람들에게 풀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이드와 딱 마주쳐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화가... 나질 않아.'

찬물을 흠뻑 뒤집어쓴 것 같았다.

만나면 찢어 죽여 버리겠다고 수백 번은 벼르고 있었는데.

막상 로이드와 덜컥 마주치고 나니 화가 나질 않았다.

대신 본능적인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두쿵! 두쿵!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그 소리가 고막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바닥이 차가워지며 땀이 배어났다.

그리고...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이보세요? 어이? 아저씨?"

"...."

이쪽을 쳐다보는 로이드의 눈빛.

설렁설렁 내밀어 오는 목소리.

어깨를 휘감고 있는 놈의 팔뚝.

그 모든 감각이 과거의 순간을 불러왔다.

놈에게 얻어맞고 짓밟혔던 고통을 되살렸다.

뼈에 새겨진 통증과 두려움.

그 모든 기억과 감각이 본능적인 공포로 변했다.

즉, 그는 천적을 만난 쥐새끼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어 버렸다.

'쯧. 이놈도 지 아빠랑 똑같네.'

로이드는 실소를 머금었다.

라코나 자작이나 그 아들이나.

둘 모두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표본 같은 인간들이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사자가 되었다가,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즉시 쥐새끼가 되어 버리는 얄팍한 본능이랄까.

그는 얼어 버린 디에고의 등을 툭 밀었다.

"말로 대답 못하겠으면 몸으로 안내해. 너네 아부지한테 볼일 있어서 왔으니까."

"어, 그, 그...."

"자아, 가자?"

"...."

디에고가 쭈뼛거리며 앞장을 섰다.

저택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었다.

그동안 로이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침내 디에고의 발길이 자작의 집무실 앞에서 멈추었다. 놈이 희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집무실 문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 했다.

"어이."

그제야 처음으로 로이드의 입이 열렸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던 디에고가 화살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어깨를 크게 움찔, 떨었다.

로이드의 입술 끝이 휘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아까 하인들 괴롭히고 있었지?"

"...."

"그렇게 힘없고 반항 못 하는 사람 괴롭히면 기분이 어때?"

"...."

"대답."

"그, 그게...."

"쯧. 됐고. 이 저택의 하인들, 넓게 보면 우리 백작령의 주민인 건 알고 있겠지?"

"...."

"너희 자작령의 영지민인 동시에 우리 백작령의 주민이기도 한 거야. 거기서 더 넓게 보면 국왕 전하의 백성이기도 하다? 와, 그런데 이놈 이거, 전하의 백성이자 백작령의 주민을 그렇게 막 괴롭히는 거였구나? 너, 혹시 막 나가는 인생이야? 응? 아주 위아래도 없고 개념도 없지?"

"어, 그, 저...."

"옹알이는 따로 독학으로 떼시고."

"...."

"한 번만 더 그러다가 눈에 띄면 그땐 진짜로 죽는다."

"...."

"알아들었으면 꺼져."

딱히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뇌피질 영역 이전의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동물 같은 놈이다.

그저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보면 일단 물어뜯는 게 뼈에 새겨진 놈이다.

저런 놈에겐 세련된 화법도 아깝다.

"쯧."

황급히 자리를 피해 달아나는 디에고의 뒷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혀를 찼다.

그리고 자작 집무실의 문을 상큼하게 두드렸다.

똑똑똑.

"밖에 누구인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자작의 물음.

"벌써 저녁 준비가 끝났나? 식사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내 휴식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 충분히 일러두었을 텐데?"

이내 자작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로이드의 입가에 빙글거리는 미소가 맺혔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그만...."

"모르긴 뭘 몰라. 모르면 다인가? 내 잠은 벌써 깨 버렸는데? 응?"

"맹세합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이렇게 자작님의 심기를 상하게 할 줄도 진짜로 몰랐고 말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굳게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안쪽에서 빽 하고 날아오는 라코나 자작의 호통.

로이드의 입가에 더욱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고,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허어, 그래도 한사코 몰랐다고만 하나? 네놈, 누구냐? 분명 하인 놈일 텐데 감히 내게 이렇듯 꼬박꼬박 말대답을 해? 당장 문을 열고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에."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어허, 그래도 말로만?"

"하지만 제 사정도 좀 헤아려 주십시오, 자작님. 제가 이 저택에 자주 드나들지를 않아 봐서 그만, 자작님이 언제 혼자만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가지시는지 아는 게 도통 없습니다."

"뭐? 지금 감히 나와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냐?"

"물론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진짜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문을 두드린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중요한 일?"

"예."

"고작해야 하인 따위인 네놈이 뭐가 중요해서 감히 내 쉬는 시간을 방해해!"

콰앙! 와장창!

안쪽에서 문을 향해 뭔가를 집어 던진 걸까.

자작의 버럭 외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한 차례 요동쳤다.

뭔가가 문에 부딪혀서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로이드의 입가에 더더욱 즐거운 웃음이 피어났다.

"정말입니다. 진심으로 맹세합니다. 이거, 진짜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면 문을 열고 바닥에 이마를 조아리고서 보고하면 될 것이 아닌가. 겨우 하인 따위인 네놈을 위해 내가 손수 몸을 일으켜 문까지 열어 줘야 하나? 엉?"

"예. 열어 주셔야 합니다."

"...뭐어?"

"아니, 벌떡 일어나 열어 주시게 될 겁니다. 제가 가져온 소식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지금, 무슨 헛소리에 개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헛소리도, 개소리도 아닙니다, 자작님."

"흐... 허허허. 허허허허?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더욱 험악해진 자작의 목소리.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자작의 혈압이 힘찬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그래. 좋다. 내가 문을 열어 주마. 그리고 네놈에게 용건을 들어 주마. 그래서 만약 네놈이 밝힐 용건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면 내 직접 네놈을 엄벌에 처할 것이다."

"예, 부디 그래 주십시오."

"그래도 이놈이 끝까지...."

"어서 문을 열어 주시지요."

"...좋다. 내 오늘 밤 직접 네놈을 매달아 채찍질하고 산 채로 가죽을 벗겨 감히 주인을 희롱한 죄가 무엇인지, 이 저택의 모두에게 똑똑히 보이도록 하마."

부스럭, 쿵! 쿵!

옷깃 부스럭대는 소리.

뒤이어 문을 향해 다가오는 거친 걸음 소리.

문고리가 요동쳤다.

마침내 문이 확 열렸다.

벌컥!

로이드는 만면에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자작님."

"...."

"진짜로 중요한 용건이거든요. 바야흐로 국왕 전하의 지엄하신 재건의 뜻을 받들어 자작님네 영지 남쪽 지대에 본격적인 채석장을 조성해 볼 계획이라서."

"...."

"어? 혹시 안 중요하게 느껴지는 겁니까? 그럼 이제부터 설마, 절 채찍질하고 매달아서 산 채로 가죽을 벗기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

"그러면 큰일 나는데."

"...꼬르륵."

쿠웅.

이쪽을 망연자실 쳐다보던 라코나 자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협상(?)은 무난하게 타결되었다.

혼절했던 라코나 자작은 10분쯤 후에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쪽을 향해 수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하다고.

요즘 귀가 어두워져서,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서, 너무 큰 실수를 했다고.

제발 이번만 좀 너그럽게 봐주시라고.

행여나 프론테라 백작님께도 고자질하지 말아 주시라고.

이쪽의 두 손 살포시 부여잡으며 어찌나 열렬하고도 간곡한 사과를 끝도 없이 애국가 4절까지 부르듯 하시는지.

덕분에 협상은 너무나 수월했다.

"좋습니다. 제가 특별히 자작님의 폭언, 거기에 세트 메뉴로 저지르신 무례를 모두 눈감아 드리도록 하지요. 제가 드리는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이제부터 라코나 자작령의 남쪽에 채석장을 조성할 것이라고. 아울러 채석장 조성과 관리, 산출물에 대한 권한을 모두 프론테라 백작령이 가져갈 것이라고.

"아. 그리고 행여나 오해하실까 봐 미리 드리는 말씀인데 이거, 강탈 아닙니다? 물론 착취도 아니고 말입니다. 국왕 전하께서 프론테라 백작령을 동부 재건의 중심지로 지목하신 사실은 자작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예."

"그러니까 교양과 상식에 정통하신 자작님께서는 재건 작업에 많은 자원이 들어갈 것이란 사실도 충분히 이해하시겠지요?"

"...예에."

"좋습니다. 바로 그게 핵심입니다. 이거, 그 자원을 제공하게 되는 일인 겁니다. 채석장에서 산출될 석재 말입니다."

"...."

"생각해 보십시오. 채석장에서 캐낸 돌이 다듬어져서 각종 공사에 쓰일 겁니다. 프론테라 영지에 세워질 수많은 시설물의 기초가 되고, 기둥과 벽이 되며, 지붕이 될 겁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

너만 좋겠지, 너만.

자작이 망연자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로이드의 너스레는 계속 뻔뻔하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거, 자작님께도 굉장히 좋은 일인 겁니다. 국왕 전하의 뜻을 받들어 재건의 중심지로 우뚝 서는 프론테라 영지! 한데 그 재건의 재료가 될 석재를 자작님네 영지에서 제공한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예에에. 영광스럽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제 입가의 근질거림을 가라앉히고 싶으시다면 여기, 서명을 부탁드립니다."

"...크흡."

결국, 라코나 자작은 눈물 젖은 서명 한 자락을 남겼다. 동시에 자작령에 또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빨대가 투확 꽂혔다.

그렇게, 대하수로 시공을 위한 로이드의 큰 그림이 착착 실체를 드러냈다.

144화. 농담 같은 진담 (1)

채석장.

말 그대로 돌을 캐내는 곳이다.

각종 건설물, 조각품, 그 밖의 다양한 용도로 쓰일 양질의 석재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시설이다.

또한, 지금의 로이드에게 가장 필요한 시설이기도 했다.

'당연하지. 제대로 대하수로를 만들려면 대량의 석재는 필수니까.'

프론테라 백작령의 모든 범위를 커버하게 될 하수로였다.

기존의 중심 촌락은 물론이고 마레즈 개간지와 동부 산맥 개간지, 북쪽의 아파트 단지까지.

실로 광범위한 영역을 모두 아우르게 될 공사였다.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석재가 필요했다.

'물론 철근과 시멘트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 방울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현재 방울이가 만드는 철근과 시멘트.

그 대부분은 아파트 단지 공사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대하수로에까지 동원할 분량이 모자랄 듯했다.

방울이를 아무리 독려한다 해도 그럴 터였다.

'환상종은 기계가 아니니까.'

엄연한 동물이다.

당연히 한계가 있다.

그 한계 이상으로 혹사시킬 수 없다.

'그러면 안 돼. 방울이 똥꼬 다 헐고 까질 거야.'

그러잖아도 매일 철근 끙까를 푸화확.

화산폭발로 시멘트를 쿠콰앙.

매일 쉴 틈이 없는 방울이의 똥꼬였다.

지금도 똥꼬가 헐지 않도록 좋은 흙만 골라서 먹이며 관리를 해 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방울이는 한계야. 지금 이상으로 일을 시킬 수는 없어. 그러니 대하수로는 시멘트보다는 석재로 만드는 게 바람직할 거야. 오랜 시간 관리하기에도 그게 더 유리할 거고.'

시멘트는 마법의 재료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능의 재료는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갈라지고 부스러진다.

그럴 때마다 꼼꼼히 점검과 보수를 해 줘야 한다.

갈라진 자리는 메꿔 주고, 부스러진 자리는 때워 줘야 한다.

그래야 시멘트 구조물이 오래간다.

'안 그러면 의외로 금방 낡아서 허물어지지. 시골 가면 은근 많잖아. 버려져서 관리 안 되는 폐건물들.'

로이드는 이번 대하수로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여 건설할 대하수로였다.

그러니 가급적 오래도록, 튼튼하게 유지되길 바랐다.

'그래서 이번 공사에서는 석재를 쓰는 게 유리할 거고.'

대하수로는 관리하기에 어려운 구조물이 될 것이다.

습기 때문에 노후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한데 범위가 넓고, 어두우며, 악취마저 심해서 점검하고 관리하기가 엄청나게 빡쎌 것이다.

그래서다.

최대한 사람의 손을 덜 타야 한다.

점검과 보수를 좀 띄엄띄엄 해도 잘 버텨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석재. 그중에서도 화강암일 거야.'

화강암.

우리네 말로 일명 '쑥돌'이라고 불리는 석재.

그러한 화강암은 암석의 내부 구조가 지극히 균질하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내부에 결이 없다.

결이 없기에 어느 한 쪽으로 비틀리거나, 쪼개지거나, 갈라지는 일이 없다.

'즉,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형이 없지. 그래서 초정밀성을 요구하는 반도체 장비나 측정 장비의 주춧돌로 화강암이 널리 쓰이기도 하고. 컬링 경기에서 쓰는 돌이 화강암이기도 하고.'

엄청난 하중도 손쉽게 버텨낸다.

심지어 내부로 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외부로부터의 오염도 완벽히 방어한다.

그래서 바닷가의 거친 환경에 세워지는 등대의 건축에도 종종 쓰인다.

한번 세워 놓고 오랜 시간 방치해도 변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듯 튼튼하고 변형이 없는 특성.

영구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수명.

로이드는 그러한 화강암이야말로 이번 대하수로 공사에 가장 적합한 자재일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였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우리는 오늘 채석장을 만들 겁니다. 그러니까 뭘 한다? 비탈면의 흙이란 흙은 모조리 파내는 거죠. 자아, 시작합시다. 힘찬 구호와 함께. 실시!"

라코나 자작령의 남쪽 산기슭 경계.

그 일대를 로이드의 손길이 가리켰다.

공병대와 백색창기병대, 오크 전사들이 모조리 삽을 쥐었다.

10미터로 커진 뽀동이가 야물딱지게 눈을 빛냈다.

비벙이도 첨탑 사이즈의 앞발을 털며 몸을 풀었다.

거기에 바이에른 경이 거두어 키우던 아기 마스토돈 다섯 마리도 가세했다.

"뿌이애애앵-!"

어느새 생후 7~8개월 무렵에 접어들며 황소 2배 사이즈로 커진 아기(?) 마스토돈 5남매였다.

녀석들은 바이에른 경의 쓰담쓰담을 받으며 열심히 대형 쟁기를 끌었다.

'좋아. 역시 큰 공사에는 장비빨이 필수야.'

작업 현장을 둘러보는 로이드의 눈동자에 흐뭇함이 떠올랐다.

일찌감치 측량 스킬의 '지하 스캐닝' 옵션으로 이곳 일대를 조사한 바 있는 그였다.

덕분에 비탈면의 지표 아래 3미터 지점부터 두터운 화강암 암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처음부터 이곳을 채석장 부지로 찍어 두었다.

그렇게 계획을 다 잡아놓고 라코나 자작을 방문했다.

반강제로 자작의 동의를 얻어냈다.

채석장 조성 계획을 밀어붙였다.

기왕 하는 거라면 신속하고 깔끔하게.

그러한 모토에 입각하여 동원 가능한 인력과 환상종을 모조리 데려왔다.

"나무고 뭐고 다 밀고 걷어냅시다! 암반이 드러날 때까지!"

"우오오!"

"꾸익!"

"뽀동!"

"비벙!"

"뿌으이애앵!"

로이드도 앞장서서 삽을 잡았다.

아스라한 심법까지 동원하며 삽질의 정석을 선보였다.

그동안 나름 삽질과 공사로 잔뼈가 굵었노라 자부하던 공병대원들이 감탄과 흠모의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던 백색창기병대원들이 경쟁심에 타오르며 더욱 바삐 삽을 놀렸다.

오늘의 삽질도 운동으로 여기고 있던 오크 전사들이 호승심을 드러내며 대흉근을 불끈거렸다.

모두의 작업 속도에 한층 탄력이 붙었다.

그렇게 엿새가 지났다.

라코나 자작령의 남쪽 산기슭.

그곳의 비탈면이 완벽하게 채석장으로 탈바꿈되었다.

무성하던 나무는 온데간데없었다.

촉촉하게 쌓여 있던 흙도 몽땅 옮겨졌다.

그 자리에 화강암 암반이 통째로 드러났다.

'자아, 다음은 채석장에서 캐낼 석재를 옮겨 올 수송로 차례.'

돌을 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캐낸 돌을 현장으로 원활히 옮겨 와야 한다.

한데 돌이라는 것은 근본부터가 크고 무거운 재료다.

그러니 그걸 옮겨 오기 편하도록 길을 닦아 두어야 할 터.

로이드는 바이에른 경을 불렀다.

"포장 도로 공사. 전에 해 봐서 알지?"

"예, 물론입니다."

"만드는 요령은 전과 똑같아. 땅을 파내는 너비와 깊이, 그 안에 채워 넣는 재료의 규격과 순서. 모두 기억하고 있어?"

"예, 기억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도면에 상세히 첨부해 줄게. 당시에 공사했던 때처럼 뽀동이도 매일 붙여 줄 거고. 공병대 인력은 150명 정도 배정해 주면 충분하겠지?"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아. 경로는 채석장에서부터 마레즈 개간지를 통해 북상해서 영지의 이 지점까지. 시공 계획서와 도면의 지시 사항만 충실히 지키면 될 거야. 그리고 또 하나. 모든 길은 가급적 최대한 직선화할 것. 이걸 명심해야 해."

"예,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믿어 볼게."

"예, 맡겨 주십시오."

로이드는 바이에른 경에게 '영지 남부 가도 공사'를 맡겼다.

벌써 햇수로만 3년째 공병대를 지휘하며 각종 시공을 도맡아 감독해 온 자. 무뚝뚝한 만큼이나 일을 맡기기에 믿음직한 사내였다.

물론 그럼에도 로이드에게 남은 일은 여전히 산더미였다.

'자아, 그럼 다음은 아파트 단지 공사.'

바야흐로 찾아온 봄철.

이제는 동결융해 현상 때문에 멈춰 두었던 아파트 시공도 재개해야 할 때였다.

특히나 다음 겨울이 오기 전까지 입주를 마치려면 하루라도 손쉽게 흘려보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대하수로 공사에 집중하는 동안 아파트 시공을 맡아 줄 인재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옆의 엘프 궁수를 돌아보았다.

"그렇지요, 뮤이라 님?"

"무엇이 그렇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일감이 생겨서 기쁘군요."

로이드의 물음에 엘프 부족장, 뮤이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막 기초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꿀벌 아파트 103동 현장을 돌아보았다.

"사실은 겨우내 심심하고 지루했습니다. 하루빨리 봄철이 돌아오기를 기원했어요."

"기원했다니요?"

"고층 아파트 현장을 누비고 싶었거든요."

엘프 뮤이라의 눈길이 완공되어 우뚝 서 있는 102동 건물을 향했다.

"저는 아직도 지난 초겨울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저 102동 8층 현장을 바람처럼 뛰어다니던 때를 말이지요. 솔직히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몽롱해졌다.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지상으로부터 까마득히 높은 건축물 꼭대기.

그곳의 비죽비죽 솟은 철근 사이를 넘나드는 기분.

아파트 외벽과 추락방지망을 밟으며 바람결을 가르던 그 상쾌함.

그건 거의 쾌감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렇듯 봄을 기다린 건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다들 103동 건물도 어서 올리자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어요."

그래야 하루빨리 건물 외벽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런 아파트 수십 채가 늘어서게 된다면?

드높은 옥상과 옥상을 다람쥐처럼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짜릿했다.

"좋습니다. 대신 건물 빨리 올리려고 날림 공사는 하지 마시구요. 물론 저만큼이나 꼼꼼한 분들이시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네, 걱정은 접어 두셔도 된답니다. 이미 당신이 건네준 설계도면은 모두 완벽하게 외워 두었으니까요."

그만큼 엘프들은 꼼꼼하고, 철저했다.

지난겨울 102동 8층 시공을 도맡으며 나름 경험을 쌓기도 했다.

당분간은 충분히 아파트 현장을 맡겨봄직하다.

엘프들은 말 그대로 타고난 철근공이니까.

이들에게 철근 조립과 거푸집을 맡기면 된다.

거기에 경험 많고 노련한 공병대 일부를 지원해 주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종종 현장을 둘러보며 감독만 하면 되는 거지.'

물론 그렇다고 쉴 생각은 없었다.

아니, 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또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하수로 건설을 위한 측량이었다.

'후아. 이렇게 쉴 틈 없는 거, 실화냐.'

다음 날부터 그는 영지 전체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끊임없이 사용하며.

그렇게 충분한 마나를 보충하며.

쉴 틈 없이 측량 스킬을 펑펑 써댔다.

며칠에 걸쳐 영지 전체의 지형과 특성, 지표면 아래 5미터까지의 구조를 바늘 하나의 빈틈도 없이 모조리 스캔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대하수로의 모델을 구상했다.

'아무래도 콘크리트로 만들어서 매립하는 관보다는 훨씬 큰 구조물로. 관이 아니라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은 지하 통로 형식으로.'

그래야 하수도를 관리하기가 편해진다.

하수도가 막히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예 크게. 근대 유럽의 도시가 배경인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하수로처럼.'

하수로의 중앙에 오물과 하수가 흘러갈 통로를.

그 양옆으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보행로를.

나란히 배치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거기에 하수가 흘러갈 단면의 아래쪽을 역달걀형으로 만드는 게 좋겠지. 그래야 하수가 흘러가는 유속이 빨라지고 잡동사니가 바닥에 덜 쌓일 테니까.'

머릿속에서 계획이 알차게 세워졌다.

하지만 로이드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대하수로의 윤곽을 잡아갈수록 고민이 더욱 커졌다.

아무리 측량을 하고 설계안을 잡아도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역시나 슬러지 처리가 제일 문제네.'

슬러지(Sludge).

일명 오니(汚泥)라고도 불리는 이 물질은 하수 처리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생기는 침전물이었다.

하수구를 통해 모이는 하수.

이걸 한 장소에 오래 두면 수분과 찌꺼기가 분리된다.

자연히 수분만 위로 뜨고, 무거운 찌꺼기가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가라앉아 쌓인 오물 엑기스가 슬러지다.

그러면 이렇게 가라앉은 슬러지를 모으고, 농축하고, 미생물을 이용해 분해하고, 남은 찌꺼기에서 수분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매립을 해서 파묻든, 바다에 버리든, 혹은 불에 태우든지 하는 거지. 그게 현대 세계에서 슬러지를 처리하는 방법인데.'

지금 이곳에서 그런 처리 방식을 어떻게 구현할지 조금 막막했다.

'슬러지를 모으는 것까진 할 수 있어. 대하수로의 종착지에 슬러지 농축조를 만들면 되니까. 그곳으로 모든 하수를 모이게 하고, 슬러지가 가라앉도록 해 두면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모은 슬러지를 어떻게 처리하지?'

공병대를 투입해야 할까.

슬러지를 퍼내서 땅에 묻어야 할까.

로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일단 슬러지의 양이 엄청날 것이다.

게다가 냄새는 둘째치고 유독가스마저 장난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분뇨가 농축되고 압축되고 유기물에 분해되어 썩은 물질이 슬러지였다.

당연히 메탄을 비롯한 엄청난 가스가 실시간으로 생성될 텐데, 그런 장소에 사람을 투입했다간 모조리 질식해서 죽어나가는 참사가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건 공병대는 물론이고 오크 전사나 엘프도 예외가 아니야.'

그렇다고 환상종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어찌어찌 슬러지를 무사히 퍼낸다 해도 문제가 더 있었다.

그걸 매립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 영지 내에는 그럴 자리가 없어. 그렇다고 그걸 멀리까지 가져가서 버리면? 그것도 문제가 될 거야. 남의 땅이니까. 아니, 설령 빈 땅이 있다고 해도? 애초에 그 많은 양의 슬러지를 거기까지 옮기는 데에 드는 인건비 등의 비용부터가 에러인 거고. 쓰읍. 그럼 어떡하지.'

로이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제일 좋은 건 압도적인 열기로 한 방에 태워 버리는 건데.'

가스고 미생물이고 분뇨 농축 성분이고 뭐고 그냥 한 방에 확.

태워서 재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이틀 밤낮을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는 날.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하비엘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소풍 가자."

"...예?"

하비엘의 눈썹이 꿈틀.

의혹 가득한 물음을 던졌다.

"난데없이 소풍이라니, 어디로, 무얼 위해서 말입니까."

"드래곤 레어. 드래곤 만나러."

"...."

마치 식당에 밥 먹으러 간다고 대꾸하는 것처럼.

혹은 카페에 커피 사러 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꺼낸 로이드의 대답이었다.

따라서 하비엘은 그 말을 실없는 농담으로만 여겼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145화. 농담 같은 진담 (2)

세상의 수많은 동굴에는 대부분 주인이 있다.

호랑이굴에는 호랑이가 살고.

뱀굴에는 독사가 똬리를 틀며.

아늑한 곰굴에서는 불곰이 겨울잠을 청하는 법.

여기 이곳, 동부 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화염굴도 예외가 아니었다.

"솔로... 이젠 솔로 신세에서 벗어나고 싶다."

화염굴 깊숙한 안쪽.

그곳을 회한 가득한 한숨이 가득 채웠다.

이윽고 거대한 덩치가 몸을 뒤척였다.

크그극, 쿠우웅!

단지 돌아눕는 동작만으로 언덕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170미터의 덩치. 일상적인 옆구리 착지만으로 던전을 쩌렁쩌렁 흔들리게 만드는 6,000톤의 체중.

화염굴의 주인,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가 중얼거렸다.

"나도 이젠... 외로워."

한숨 가득 담아 내뱉은 독백.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광활한 던전 중심부의 아득한 벽면만이 헛된 메아리를 되돌려줄 뿐.

그 사실이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를 더욱 울적하게 했다.

'젠장. 보물이라도 좀 쌓아 뒀으면 메아리라도 덜 울렸을 텐데.'

레드 드래곤의 적색 눈동자가 짜증스레 던전 중심부를 훑었다.

던전 중심부는 휑했다.

드래곤의 던전이라면 으레 쌓여 있을 법한 왕관도, 보물 상자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진귀한 무구나 보석은 물론이고, 비교적 흔한 금화 더미조차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빈털터리 드래곤이었다.

'쳇. 이러니까 짝이 없지.'

솔리타스의 눈길에 짜증과 울적함이 배가되었다.

괜한 한숨만 또 흘러나왔다.

'차라리 드래곤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만일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듯 결혼을 위해 보물과 금은보화를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인간들이야 뭐, 대강 농사만 짓고도 짝 만나서 아이들 낳고 잘 살다가 죽는 것 같던데.'

만약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수많은 취준생, 예비 신랑신부, 청년, 동년배들이 들었다면 당장 잃어버린 어처구니를 찾으려 두리번거렸을 법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솔리타스는 한숨 섞인 넋두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아아. 결혼하고 싶다. 장가가고 싶어.'

하지만 결혼을 하려니 돈이 없다.

던전에 쌓아 둔 금은보화가 없다.

결혼한들 해츨링에게 먹일 금화나 보석이 모자랄 것이다.

금화와 보석.

그건 해츨링의 식량이니까.

한데 그걸 쌓아두지 못한 자신이니까.

그러니 어떤 드래곤도 자신과 결혼하려 들지를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옛 시대였다면 인간의 도시를 급습하거나 협박하면 간단한 일이었을 텐데.'

솔리타스의 거대한 입에서 또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츨링 시절에 엄마에게 들었던가.

예전, 그러니까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드래곤이 보물을 모으는 일이 지금처럼 어렵진 않았다고 했다.

편한 방법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급습해서 적당히 왕을 위협하는 거지. 혹은 드워프 장인 수백 명을 데려다가 강제노역을 시키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욕심 많은 인간 귀족이 착복으로 긁어모아 만든 보물 창고를 통째로 뽑아서 가져와 버리든가.'

옛 시대의 드래곤들은 그런 방법을 통해 손쉽게 부를 축적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축적한 부로 어렵지 않게 결혼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수백 년 전, 용왕 베르키스라는 드래곤을 중심으로 구세대 드래곤들이 합심하여 세계에 선포한 '드래곤의 율법' 때문이었다.

'젠장할 드래곤의 율법 따위!'

율법의 효력은 강력했다.

인간의 도시에 대한 약탈이 금지되었다.

협박이 금지된 것 또한 물론이었다.

드워프 장인들을 감금할 수도, 노예로 부려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즉, 어떠한 드래곤도 명확한 근거 없이 다른 종족에게 부당한 위해를 가할 수 없도록 행동을 제한하는 범 종족적 평화 선언.

그것이 '드래곤의 율법'의 취지였다.

'취지는 개뿔! 자기네 세대 드래곤들은 실컷 인간들 굴려 먹거나 협박해서 보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선, 이제 와서 착한 척을 하자는 건가? 위선자 꼰대들 같으니!'

아무리 용왕 베르키스라는 자가 인간 소녀와 혼인했다지만.

한때 세계를 초토화했던 마룡을 물리쳤다지만.

훌륭한 취지의 율법을 고안하고 실천했다지만.

덕분에 세상의 모든 종족이 평화와 번영을 찾았다지만.

갓 성체가 된 1,050살 어린 솔리타스의 입장에선 그런 율법 따위, 조금도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드래곤의 율법에서 권장하는 '새로운 방식의 보물 쌓기 가이드라인'이 특히 그러했다.

'타 종족에 대한 약탈이나 협박 금지. 그러니까 직접 광맥을 찾을 것. 드래곤의 우월한 힘과 체력을 바탕으로 인간이나 드워프가 도달할 수 없을 깊이의 맨틀 속 막대한 광물질을 직접 캐낼 것. 그리하여 각자의 기량과 마법으로 광물질을 가공하여 보물로 창조할 것... 젠장.'

그게 문제였다.

솔리타스도 처음에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랐다.

어미에게서 독립을 하자마자 곧바로 광맥 탐색을 시도했다.

지하 수십 킬로미터 아래 맨틀 속.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광맥을 찾아냈다.

우월한 힘과 체력으로 다이아몬드 원석을 무더기로 캐서 가지고 나왔다.

한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제대로 가공을 할 수 없었어.'

나름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말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결과물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도?

다이아몬드의 모양이 삐뚤빼뚤.

균형이 안 맞는 것은 물론이었다.

잘못 가공해서 흠집이 새겨지기 일쑤였다.

다이아몬드 원석 100개를 가공하는데 성공작이 1개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빌어먹을 이 똥손!'

솔리타스는 자신의 투박하고 조악한 손재주를 원망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도 절대로 나아지지 않는 저주받은 손재주의 소유자.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리 광물을 채굴해도.

제대로 보석 가공을 하질 못했다.

보석 가공에 연일 실패만 하니.

금은보화를 쌓을 수가 없었다.

가공에 실패한 보석은 귀중품으로서의 가치가 급락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난 실패자인 거지. 독립하고 여태껏 보물을 제대로 쌓질 못했으니까.'

생각하니 또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보물을 쌓아 둬야 하는데. 그래야 결혼 후에 태어날 해츨링에게 보물을 맛있게 배불리 먹일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 보물이 하나도 없어. 해츨링이 태어나도 금방 굶어 죽을 거야. 세상에 어떤 멍청한 드래곤이 나 같은 놈과 결혼하고 육아를 하려고 들겠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도 자신은 답이 없었다.

즉, 결혼 시장에서의 경쟁력 제로.

그게 바로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휴우... 모르겠다. 그냥 결혼, 포기할까.'

성체가 된 지 어언 50년.

이제는 슬슬 그런 생각마저 드는 솔리타스였다.

그렇게 젊은 레드 드래곤이 한숨과 자포자기로 던전 바닥을 북북 긁어 대던 어느 무렵이었다.

"...음?"

또 한숨을 내쉬려던 솔리타스가 멈칫했다.

거대한 머리를 들어 한쪽을 쳐다보았다.

던전 중심부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통로.

그쪽 너머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침입자?"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한참 외곽, 던전 출입구 근처였다.

그곳에 설치해둔 마법 함정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반응했던 함정이 실시간으로 파괴되고 해체되는 것 또한 느껴졌다.

즉, 누군가가 던전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함정 지대를 돌파하며 중심부를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솔리타스는 곧바로 드래곤 특유의 초월적인 감각을 동원했다. 자신의 던전에 발을 들인 이들의 면면을 대략이나마 단숨에 파악해냈다.

'인간. 두 명. 감히.'

쿠웅!

솔리타스가 거대한 몸체를 일으켰다.

기둥 같은 네 다리로 땅을 디뎠다.

한쪽의 길이만 200미터에 달하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런 젊은 레드 드래곤의 눈동자에는 짙은 살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렇잖아도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참인데 잘됐군.'

이참에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 주마.

쿠구구구구!

분노한 레드 드래곤의 발길이 던전 외곽의 침입자들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투확!

산성 용액이 뿜어졌다.

석판에서부터 분출되었다.

커다란 통로 전체를 뒤덮으며 쇄도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잠시에 불과했다.

쉬릭, 스칵!

롱소드가 번득였다.

아래에서 위로.

섬전처럼 솟구쳤다.

일검에 공간을 갈랐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산성 용액도 갈랐다.

뒤이어 검풍이 휘몰아쳤다.

콰하학-!

압도적인 기세의 검풍에 산성 용액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밀려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시적인 진공의 공간.

그 속을 은발 사내가 질주했다.

타다탓!

단 세 번의 발구름.

하비엘은 그 간단한 스텝만으로 단숨에 30미터를 질주했다.

검풍을 일으키며 치켜들었던 검을 착지와 동시에 내리그었다.

그곳에 정교한 마법진이 있었다.

카그각! 쿠웅!

마법진 새겨진 석판이 통째로 잘렸다.

비로소 산성 용액의 분출이 멈추어졌다.

"후우."

하비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은 아주 잠깐 위험했다.

설마 석판에서 그토록 지독한 산성 용액이 뿜어져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의 눈길이 뒤쪽을 향했다.

"괜찮으십니까."

"어. 대강은?"

통로를 따라 흘러오는 능청스러운 대답.

이내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하비엘은 남몰래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가 저 인간과 여기까지 와서는....'

드래곤의 던전을 침범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자행하고 있단 말인가.

'설마 그때 했던 로이드 님의 말이 진담이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러니까 열흘 전이었던가.

난데없이 소풍을 가자는 로이드의 말에 자신이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소풍이라니. 어디로, 무얼 위해서 가는 거냐고.

미간 찡그리며 물었더랬다.

그랬더니 로이드가 이렇게 대꾸했던가.

"드래곤 레어. 드래곤 만나러."

당시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로이드가 두둑한 식량과 야영 장비 알차게 담긴 배낭을 내밀어 올 때도, 이미 준비한 말에 몸을 실을 때도 그랬다.

또 뭔가 일을 벌이는 것이겠거니.

그러니 로이드를 잘 호위하면 되겠거니.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다.

열흘 동안의 여정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우리가 가고 있는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잖아? 드래곤 레어라고.'라는 대답만 들려줄 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농담으로 여겼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진짜 목적지를 숨기려는 의도일 거라고. 그래서 뻔하고도 고약한 농담을 주절거리는 것이리라고.

그런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니까, 설마 진짜로, 이렇게, 드래곤 레어를 친절하게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후우."

자신이 모시는 도련님이 이 정도로까지 미친 인간일 줄은 몰랐는데.

하비엘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래서입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여기서라도 걸음을 돌려 돌아갈 생각은 없는 겁니까."

그는 진심으로 물었다.

로이드가 눈썹만 으쓱 치켜올렸다.

"없는데?"

"...."

"뭐. 왜. 뭐."

"...."

"다 생각이 있고 대책이 있어서 온 거야. 그러니까 넌 나만 믿고 계속 함정만 돌파하면 된다니까?"

"후우. 물론 함정이야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습니다만-"

하비엘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함정을 돌파해야 하는 겁니까. 설마 이대로 드래곤과 마주치게 되는 순간까지 전진해야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어. 정답."

"...."

"드래곤 만날 때까지 전진하는 거 맞는데?"

"...."

"내가 계속 말했잖아. 드래곤 레어. 드래곤 만나려는 거라고."

"하지만...."

"괜찮아. 다 생각해둔 게 있고 준비한 대책이 있으니까."

"...."

정말로 대책, 있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이었다.

'또 믿어 봐야 하는 건가.'

하비엘은 마음을 다잡았다.

저런 모습을 보일 때의 로이드 님은 믿을 수 있다.

이쪽이 상상하지 못한 대책을 반드시 선보이곤 했으니까.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일단은 믿어 보자.

'그리고 만약, 로이드 님의 대책이 먹히지 않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는 거야.'

하비엘은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예기치 못한 위험이 닥치면 로이드를 최우선으로 지키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부터였다.

쉬리릭, 철컥! 콰콰콰-!

수많은 함정이 은발 기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산성 용액은 기본이었다.

쏘아지는 번개와 화염.

독 발린 화살과 증기 폭발.

떨어지는 바위와 악몽 같은 환영.

공기마저 얼릴 냉기와 눈을 멀게 하는 섬광.

인간의 모든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함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

그의 검이 번득일 때마다 함정이 잘리고, 깨지고, 뒤틀리고, 쪼개졌다. 그 어떤 교묘한 속임수도 그의 감각을 속이지 못했고, 그 어떤 함정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얼마나 많은 복도와 모퉁이를 지났을까.

마침내 확 트인 공간이 두 사람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붉은 비늘의 거대한 생물이 둘을 굽어보았다.

"네놈들이 내 거처를 침입한 인간들이로군."

콰아아-!

레드 드래곤이 이쪽을 향해 질문을 던져 왔다.

그저 평범한 물음일 뿐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일대의 공간 전체에 폭풍 같은 메아리가 몰아쳤다.

단순한 메아리가 아니었다.

"...!"

온몸이 요동친다.

전신의 모든 세포가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압력이다.

그 기파의 폭풍을 느낀 순간, 하비엘은 재빨리 움직였다.

로이드의 앞에 섰다.

검을 앞세웠다.

오러를 일으켰다.

츠즈즈즈-!

찬란한 광휘가 검신을 줄기줄기 휘감았다.

하비엘은 그대로 오러를 공명시켜 공간을 잠식했다.

우우웅-!

오러에서 흘러나온 기파가 공기를 흔들었다.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가 발산한 기파와 같은 빠르기로 흔들렸다. 공명했다. 상쇄했다.

투확!

그의 전면에서 두 음파가 충돌했다.

서로를 잠식하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렇게 드래곤의 첫 공격 겸 인사를 방어한 직후, 하비엘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로이드 님, 어서 대책을 알려 주십시오."

이제는 대응해야 한다.

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정면에 도사리고 있는 드래곤.

방금 겪은 단 한 번의 충돌로 실감했다.

저 모습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진짜 드래곤이다.

즉, 여기서 어설프게 대응하면 죽는다.

그 증거로 첫 인사를 보냈던 레드 드래곤이 힘껏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브레스.'

그는 직감했다.

드래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치명적인 권능.

브레스를 발사하기 위해 들이마시는 숨이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 대응할 시간이 얼마 없다.

그는 다시금 로이드를 재촉했다.

"로이드 님."

"어. 이미 대책은 실행되고 있는데?"

"...예?"

대책이 실행되고 있다니.

그게 무슨?

하비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로이드가 묘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너."

"예?"

"너라고."

"...."

설마.

"뭐 해. 안 싸우고."

"...."

진짜? 진심으로?

"너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니깐?"

"...."

하비엘은 믿기지 않는 눈초리로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정말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한데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로이드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혹은 정말로 자신이 있는 것처럼.

한사코 평온한 얼굴과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연한 턱짓으로 드래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순간, 레드 드래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끔찍한 열기가 악몽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가 발사한 브레스.

그 열기의 폭풍이 지옥 화염처럼 이쪽을 덮쳐 왔다.

146화. 솔로 탈출을 위하여 (1)

드래곤 브레스.

일명, 용의 숨결.

콰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의 거대한 입이 벌어졌다.

목구멍 속에서 끔찍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거침없이.

성난 노도처럼.

공간을 태우고, 멸하며, 쇄도해 왔다.

"...!"

하비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저건 위험하다.

당장 피해야 한다.

생각 이전의 본능.

본능 이전의 감각.

그걸 감지하는 순간 하비엘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쉬릭!

오른손을 뻗었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대신 로이드의 어깨를 붙잡았다.

허리를 낮추었다. 왼손을 내밀었다. 로이드의 사타구니 허벅지 안쪽으로 쑥 밀어 넣었다. 몸을 일으켰다. 자연히 그의 어깨가 로이드의 상체를 떠받치게 되었다.

그렇게 쌀가마니 들어 올리듯 훌쩍 짊어졌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가르치는 부상자 도수 운반법과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크엇?"

귓가에 울리는 로이드의 헛숨 소리.

뭐라고 대답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땅을 박찼다.

투콱-!

몸을 날렸다.

로이드를 짊어진 채로.

그 직후,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을 브레스가 휩쓸었다.

쿠콰콰콰콰-!

스치듯 지나가며 공간을 휩쓸어 버리는 브레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절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동시에 하비엘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뜨겁지가 않아.'

브레스가 바로 근처를 휩쓸며 지나가는 와중이었다.

그래서 재빨리 검을 뽑으려고 준비하던 중이기도 했다.

오러로 검막을 쳐야 할 거라고.

그래야 끔찍한 열기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으리라고.

위기감 속에서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던 참인데.

'왜 안 뜨겁지?'

말 그대로 뜨거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브레스의 줄기가 불과 3미터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데.

그저 '약간 따뜻하다'라는 정도의 온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어째서?'

확실히 이상했다.

작은 모닥불을 앞에 두고 앉아도 이보단 뜨거움이 느껴질 텐데.

하다못해 고기를 굽는 불판을 앞에 두어도 때론 얼굴이 화끈해지는 법인데.

그러나 의문만 머금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타닷! 팟!

착지와 동시에 또 땅을 박찼다.

쏟아지고 있는 브레스와 더욱 거리를 벌렸다.

문득, 두 시간쯤 전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아까 로이드 님이 준 크림 덕분인 건가.'

이곳 화염굴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던가.

설마 진짜로 드래곤의 던전을 찾아올 줄은 몰랐던 자신이었다.

눈앞에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 던전의 정체를 깨닫곤 얼마나 경악했던지.

한데 그때, 로이드가 커다란 병 하나를 내밀었더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던가.

'전신에 발라. 타죽기 싫으면 최대한 꼼꼼하게.'

뭔가 싶었다.

코르크 마개를 열어보니 향기가 솟아났다.

엘프의 숲에서 가져온 엘렌시아 수액이었다.

'콩기름 섞은 거 아니다? 완전 원액이다?'

선심이라도 쓰듯 말하던 로이드.

옷을 벗고 온몸에 듬뿍 바르라고 했다.

걸친 의복에도, 갑옷 표면에도, 심지어는 검에까지 빈틈없이 바르라고 했다.

'아끼지 마. 귀하다곤 해도 목숨보단 싸니까. 그러니까 더 팍팍! 열기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관계까지 차단될 기세로 발라야 돼.'

그래서 발랐다.

머리칼 하나조차 빠짐없이.

손톱 각질 하나의 빈틈도 없이.

'그게... 이 순간을 위한 거였군.'

하비엘은 깨달았다.

이젠 알겠다.

엘렌시아 수액이라는 거, 자신의 막연하던 예상이나 생각보다 단열 효과가 훨씬 어마어마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토록 자신 있는 모습이었던 건가.'

대체 뭘 믿고 드래곤의 던전으로 들어오나 싶었는데.

대관절 무슨 배짱으로 드래곤과 마주치고도 태연한가 했는데.

"설마 엘렌시아 수액을 바르면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아도 안전할 거라고 계산하셨던 겁니까."

"뭐, 그렇긴 한데."

착지와 동시에 하비엘이 로이드를 내려놓았다.

힘껏 밀어내며 바위틈으로 함께 몸을 숨겼다.

졸지에 짐짝 취급(?)을 받은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엘렌시아 수액을 믿었느냐는 말.

사실이었다.

"내가 들었거든."

"들었다니요?"

"철혈의 기사가 이 방법을 썼다더라고."

"철혈의... 기사 말입니까?"

"어."

그 또한 사실이다.

소설 철혈의 기사 속 하비엘이 이 방법을 썼다.

엘렌시아 수액을 온몸에 바르고, 수액을 굳혀 만든 갑옷을 입었다.

그 상태에서 바로 저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와 맞섰다.

그랬더니?

브레스에 직빵으로 맞아도 끄떡없어졌다.

그렇게 3일 밤낮을 싸웠다.

마침내 솔리타스의 뿔을 잘라냈다.

패배를 직감한 레드 드래곤을 줄행랑치게 만들었다.

즉, 이렇게 엘렌시아 원액을 바르는 방법은 소설을 통해 검증된 레드 드래곤 대응법인 셈이었다.

"한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쪽을 보는 하비엘이 눈을 빛냈다.

"전에도 언급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대체 철혈의 기사가 누굽니까."

"철혈의 기사가 누구냐고?"

"예."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지.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너보다 훨씬 잘생기고, 강력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

"...정말입니까?"

"와. 바로 의심하는 거 보게."

"그런 기사가 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무모합니다."

"무모하다니, 어떤 점이?"

"드래곤에게 맞서는 일 말입니다."

하비엘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이제 분출이 끝나가는 드래곤의 브레스.

그쪽의 상황을 슬쩍 살피며 재빨리 말했다.

"대체 무얼 노리고 무려 드래곤을 만나러 오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드래곤은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아니, 목숨을 걸어도 모자란 상대입니다. 로이드 님은 이런 위험성을 전혀 생각지 않으신 겁니까."

"어. 생각은 해봤는데."

"그럼 대체 왜...."

"네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계산했거든."

"예?"

눈썹을 찡그리는 하비엘.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녀석의 눈초리.

이제 거의 끝난 브레스의 분출을 돌아보며 다급해지는 표정.

그런 녀석을 향해 말해주었다.

"드래곤이 처음이라서 부담스러운 건 나도 똑같아서 알겠는데, 그래도 쫄지 마."

"그게 무슨...."

"나가서 싸우라고."

"엇?"

투욱.

녀석을 살포시 밀었다.

그 예상 밖의 기습에 녀석이 기우뚱.

몸을 숨기고 있던 암벽 틈새에서 밀려 나갔다.

"로이드 님?"

하비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녀석을 향해 주먹을 불끈.

힘찬 덕담을 돌려주었다.

"화이팅."

"...!"

저 미친 도련님이 진짜!

그러나 하비엘은 로이드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후우우웅-!

문답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마치 집에 들어온 파리를 손으로 쳐내듯.

드래곤의 꼬리가 거대한 채찍처럼 날아왔다.

"흡!"

하비엘은 검을 뽑았다.

그러나 검으로 저 거대한 꼬리에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선 로이드 님이 안전해지도록.'

파앗!

땅을 박찼다.

로이드가 숨어 있는 장소.

암벽 틈새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다행히 드래곤의 꼬리가 이쪽을 따라왔다.

위에서부터 산이 떨어지듯 공간을 뒤덮어 왔다.

콰아아아앙-!

지축이 흔들렸다.

던전 내부가 통째로 쩌렁쩌렁 울렸다.

흩날리는 파편과 압도적인 충격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하비엘이 질주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하비엘은 긴장했다.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방금 꼬리로 자신을 후려친 드래곤의 일격.

그 공격 타이밍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반 박자쯤 빨랐다.

'조금만 반응하는 게 늦었으면 놈의 공격을 유도하려다가 오히려 당했을지도.'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런 공격에 당하면 끝이다.

소드마스터고 뭐고 없다.

그때부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더 빠르게.'

키이이잉-!

세 갈래 마나 써클을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그의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타다닷!

바닥을 박찼다.

바람처럼 질주하며 몸을 날렸다.

중력을 거스르며 벽면을 밟고서 달렸다.

그런 그를 향해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의 공격이 쏟아졌다.

콰드드드득!

꼬리고 후려치고.

앞발로 내리찍고.

날개를 펼쳐 돌풍을 일으켰다.

네 발로 펄쩍 뛰며 마법을 난사했다.

불꽃이 얼고, 얼음이 폭발하며, 돌풍이 공간을 찢었다.

그러나 하비엘은 그 모든 파상공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동시에 솔리타스를 로이드에게서 먼 지점까지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며 로이드는 확신했다.

'역시.'

하비엘은 강하다.

이미 소설 속 같은 시기의 본인보다 더욱 강해졌다.

심지어 소설에서 솔리타스와 대결하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도 그렇다.

그렇기에 오늘, 저 레드 드래곤에게 하비엘이 패배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널 데려왔지. 게다가 저 드래곤, 은근 만만할 거라서.'

이곳 화염굴의 주인.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

강력한 드래곤임과 동시에, 그리 강하지 않은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니까 기본적으로 강하지. 어떤 생명체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드래곤 중에서는 약해. 거의 최하급이야. 이유는 간단해. 어리거든. 이제 갓 미자를 벗어난 놈이니까.'

소설 철혈의 기사.

그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하비엘이 엘프의 숲을 모험하던 에피소드였던가.

그 에피소드의 끝에서 하비엘은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와 대결하게 되었더랬다.

그 과정에서 솔리타스에 대한 정보가 나왔더랬다.

'어리지. 나이는 약 1,050살. 해츨링에서 벗어난 지 5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어. 사람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시기쯤이랄까.'

드래곤의 강함은 나이와 정비례한다.

즉,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진다.

'사람의 경제력과 비슷한 거랄까. 정년퇴직하는 경우를 빼고, 취업에 성공해서 꾸준히 생업에 종사한다는 가정하에 보통은 나이를 먹을수록 경력이 쌓이고 경제력이 증가하니까. 그러니까 저 드래곤의 전투력을 사람의 경제력으로 환산하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쯤 지난 사람의 경제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게 레드 드래곤 솔리타스의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하비엘. 이길 수 있어. 쫄지 말고 밟아. 그렇게 기를 죽이면서 힘의 우위를 보여야 해.'

힘의 차이를 보이는 것.

격이 다름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오늘, 하비엘이 해주어야 할 일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생각하는 다음 단계의 계획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나 드래곤이나 자기보다 쎈 놈 앞에서 분노 조절도 잘 되고 겸손해지는 건 똑같거든. 그래서야. 기를 죽여야 해. 그래야 저 레드 드래곤이 내 제안을 들어볼 자세가 될 테니까. 거기서부터 협상을 시작하는 거지.'

지금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대하수로.

대하수로에서 배출될 슬러지.

그걸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면 저 레드 드래곤의 조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조력을 얻자면 협상과 설득을 해야 할 터.

'하비엘, 피하지만 말고 때려!'

로이드는 응원봉을 휘두르는 기분으로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성원이 날아드는 곳.

그곳에서 하비엘이 공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있었다.

쉴 틈 없이 날아드는 솔리타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의 눈동자에 결단의 빛이 떠올랐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 로이드 님이 위험해질 거야. 맹공을 퍼붓는다. 일격이탈. 강력한 공세를 통해 빈틈을 만들고 퇴각한다.'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는 없다.

물론 드래곤과 정면으로 싸우는 건 무모한 행위다.

그렇다고 수세에 몰려 질질 시간을 끄는 건 더욱 멍청한 짓일 터.

그러니 한순간에, 최대의 역량을 쏟아붓는다.

전력을 기울인 공격으로 드래곤의 공세를 끊는다.

드래곤이 주춤하는 순간, 로이드를 데리고 안전한 곳까지 도망친다.

'할 수 있어.'

정면대결보다는 퇴각.

전법을 결정한 하비엘의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실행은 서슴없이.

공세는 거침없이.

꽈드득!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반격이 개시되었다.

키이이이잉-!

세 갈래 마나 써클이 회전했다.

주위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증폭시켰다.

마나 하트로 밀어 넣었다.

쿠우웅! 쿠웅!

마나하트가 심장과 함께 뛰었다. 날뛰었다.

세 갈래 써클에서 증폭된 마나를 받아들였다.

심장의 수축과 함께.

거대한 압력으로.

짓눌렀다. 압축했다. 높아지는 마나의 밀도. 순도. 군더더기 없이. 압착했다. 다시 한 번 쿠웅, 밀어냈다.

키아아아악-!

소드마스터의 마나하트를 통해 극도로 압축된 고순도의 마나가 다시금 마나 써클에 걸려들었다.

압축된 상태에서 다시금 증폭되었다.

세 갈래 써클을 거치며.

세 번에 걸쳐 폭증했다.

미치듯이 날뛰었다.

날뛰듯이 달려갔다.

혈맥을 따라 질주했다.

근육의 줄기줄기, 세포의 사이사이.

골격의 경계와 신경절의 마디마디.

모든 감각을 일깨우고, 사나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츠샤아아아앗!

하비엘의 검에 두 줄기의 상반된 오러가 피어났다.

날카롭고 선명하며 서릿발 같고 경쾌한 오러.

부드럽고 모호하며 열화와 같고 묵직한 오러.

상반된 성질의 두 오러가 얽혔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다.

섞이고, 당기고, 밀어내며, 반발했다.

하지만 그러한 반발도 잠시.

두 오러가 마침내 충돌했다.

투콰학-!

검신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하비엘의 심장 둘레에서도 비슷한 폭발이 생겨났다.

발파였다.

콰아앙-!

두 갈래의 마나 써클이 심장을 감싸고서 충돌했다.

거대한 마나의 반발력이 노도처럼 혈맥을 내달렸다.

내달림의 끝자락에서 손을 지나, 검신을 휩쓸었다.

그리고 두 갈래 오러의 충돌과 마주했다.

오러의 충돌.

폭발적인 발파.

두 가지 노도와도 같은 힘이 섞였다.

서로의 기세를 증폭시켰다. 시너지를 일으켰다. 모든 것을 휩쓰는 격류가 되었다. 검 끝을 향해 쏟아졌다. 내쏘아졌다. 뻗어 나갔다. 레드 드래곤의 어깨를 향해. 사납게. 거침없이.

드콰각!

하비엘의 오러가 담긴 발파.

그 비장의 한 수가 드래곤의 어깨를 일격에 관통했다.

147화. 솔로 탈출을 위하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