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원시부족민 다섯 명이 시체산을 내려가 물자를 모아 오기 시작했다.
쿠우웅-!
"후우… 어째 대회 나갈 때보다 더 빡세냐?"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내려놓으며 부족장 장진아가 입을 열었다.
전직 헬스 트레이너이자 보디빌딩 관련 대회 경력자라고 했던 만큼 힘쓰는 것에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나와 강소현은 레벨과 능력치가 6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4다. 그리고 같은 4의 능력치여도 누가 뭘 하느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보이는 것 같다.
옆의 다른 사람들이 돌무더기 몇 개 옮기는 동안 장진아는 거대한 바위나 건물 골조를 통째로 들어 옮겼으니까.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다들 돌아가 주시죠."
대리파밍과 식량의 교환.
거래가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뭐, 라면과 잡다한 음식 몇 가지와 대리파밍의 맞교환이면 충분히 제 값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초인이 된 인간이라 해도 시체산을 오가는 일은 제법 귀찮은 일이니까.
미니맵에 보이는 푸른 점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
본격적인 요새의 이동 준비가 시작되었다.
▶▷▶▷▶▷▶▷ 전력 변환기 건설중
현관의 조종실 옆에 만들어둔 빈 방.
모아온 물자를 사용해 방 중앙에 발전기 박아 넣고 그 옆에 전력 변환기를 설치했다.
내가 직접 조립했던 발전기와는 다르게 재료만 가져다 두니까 알아서 변환기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콰드드드득-!
모아온 재료들이 푸른빛 큐브 안에서 압축된다.
우웅-!
이후에는 큐브들이 만들어내는 형태에 맞춰 압축된 재료들이 내가 정해둔 설치 장소를 향해 자동으로 이동한다.
우우웅-!
기다란 전선들이 집안 곳곳의 바닥 속으로 스며들고.
[전력 변환기 건설 완료]
[500마력 -〉 5000kWh]
쿠구구구궁-!
집 전체에 짧은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리고 완성된 전력 변환기.
"오... 이게 대체 뭐래요?"
그러게 말이다.
1x1x1m인 큐브 형태의 발전기에 꽂힌 기다란 관.
큐브에 연결된 관을 따라가면 직사각형의 박스가 나타나는데, 생긴 건 무슨 보일러처럼 생겼다.
"흠, 바닥의 전선을 보면 이게 전력 변환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직육면체의 보일러같이 생긴 전력 변환기 아래로는 전선들이 바닥으로 이어져 있다.
"근데 천장등이나 이런 것도 지을 수 있어요?"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강소현이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다.
"혹시, 콘센트도 만들 수 있을까요? 핸드폰만 돼도 로라 진료하기 편하게 차트라도 만들 수 있을텐데."
안타깝지만....
"집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전기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레벨도 조금 더 오르고 설계도에서 해금한 설비들이 늘어난다면 또 모르겠다만, 당장은 전기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몇 없다.
▶▷▶▷▶▷▶▷ 저급한 화장실 연구 완료
"대신 화장실은 조금 개선되지 않을까 싶네요."
[조잡한 화장실: 2,000p]
기존에 지어진 '저급한 화장실'의 다음 단계 연구가 끝났고, 곧장 '조잡한' 등급으로 업그레이드를 해봤는데.
쿠구구구궁-!!
"어어…?"
조금 기괴한 형태로 화장실이 변해버렸다.
"이, 이게 무슨...."
양 끝의 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변기.
그리고 변기와 변기 사이에 있는 샤워기.
세면대 따위는 없다.
"변기 하나 고르시죠."
그래도 전용 변기가 생긴 셈이니 강소현에게 먼저 고를 기회를 줬다.
"허, 뭔 변기가 마주보고 있어...."
그래도 푸세식 변기 위에서 샤워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나 싶은데.
"제가 왼쪽 거 쓸게요."
"저는 오른쪽 변기를 쓰겠습니다."
화장실 문을 기준으로 좌, 우에 놓인 전용 변기를 고른 후 그녀를 데리고 조종실로 왔다.
중간에 화장실로 잠깐 새긴 했어도 전력 변환기를 지은 데는 목적이 있으니까.
"이 집이 움직이는 거구나... 아, 안전한 거 맞죠?"
현관이 있던 자리에 솟아오른 '이동식 요새'의 조종 스틱에 손을 얹고 강소현에게 주의를 줬다.
"뭐든 꽉 잡고 계시죠. 집을 운전하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모릅니다."
띠딕-
스틱을 앞으로 밀자.
쿠구구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24. 멸망
끼리릭-끼릭-
스틱을 움직이자 이동식 요새의 다리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쿠우웅-!!!
"꺄아아악!!!"
그리고 집이 앞으로 움직였다.
쿠우웅-!!!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시체 밭을 벗어나는구나!
파스스스스―
집이 움직일 때마다 하부에 쌓인 돌조각과 먼지들이 바닥으로 흩뿌려지고.
와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고블린의 시체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 살살 좀!!!"
쿠우웅-!!!
반쯤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들과 강소현의 비명을 뒤로한 채 나는 집을 골목길 입구로 움직였다.
5m 높이의 담장이 둘러진 나의 집은 좋게 말해도 '집'에 어울리는 외견은 아니다. 거기다가 8개의 거미다리가 10m 높이로 집을 지탱하고 있기까지 하니까.
쿠우웅-!
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스킬의 이름대로 '이동식 요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겠지.
아직, 담장 안의 집은 만들어진 방도 적고 일부는 지붕도 없어서 상당히 조잡하긴 하다만, 적어도 외견만큼은 든든한 요새의 느낌을 주기 시작했으니까.
우우웅-!
고블린 시체더미에 파묻힌 포탈이 토해내는 기이한 소리를 지나쳐 도착한 골목길 입구.
고작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완전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쓰으읍!!!"
막다른 골목이란 곳은 대로에서 바람이 밀려들어오는 장소다.
그렇게 밀려들어온 바람은 서로 맞물려서 하늘 위로 날아가고 그렇게 하늘 위로 날아간 냄새는 내 집을 침범해 우리의 후각을 마비시켰었다.
"하아~!!! 공기가 진짜 달라졌네요."
허나, 골목의 끝자락에 위치했던 나의 집은 이제는 골목길 입구를 틀어막고 있다.
즉, 신선한 공기를 잔뜩 마실 수 있다는 말이다.
칙, 치익-
"쓰으읍."
"아니, 담배 끊은 거 아니였어요?"
시체 썩은 내 때문에 담배가 의미 없어졌던 거지, 딱히 금연을 한 것은 아니다.
"후우...."
뭐, 언젠가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세상이 망한판에 당장 금연하라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빨리 끊어요. 저야 그렇다 치는데 로라한테 안 좋아요. 고양이들은 그루밍하면서 털에 붙은 잔여물들을 다 먹을 수밖에 없는데, 알려진 바로는 구강암 같은 질환에 걸릴 수 있다네요."
당장 끊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마는....
"빨리 끊어 보겠습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란 말이지.
'집사'라는 클래스로 전직을 한 뒤로 생긴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서 그런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내게 이상한 본능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로라가 야생의 본능을 가지고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 이상한 본능 같은 감각이 생겨났다.
집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고, 로라를 돌보는 것 또한 과하게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뭐, 나쁜 것은 아니라 그냥 방치해두고 있긴 한데….
"아... 그래서 담배를 못 끊으시겠다?"
"그렇습니다만."
여기에 담배에 대한 것도 그런 본능이 생긴 느낌이다.
"철저한 컨셉질을 유지하게 만들겠다 뭐 이런 건가요?"
이상한 집사복.
여기에 더해지는 담배.
"이준 씨를 보면, 마치 누군가의 취향이 가미된 게 아닐까 싶네요."
이게 또 골때리는 게, 내 각성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뤄졌다.
내 각성의 시작은 동물보호단체 '노묘에게 안식을'에서 보내준 게임 링크였다.
그 끝은 핸드폰이 로라로 변해 버린 것이고.
"와, 노묘를 끝까지 살다 가게 해준다니…. 되게 좋은 단체긴 한데...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장난 같습니까?"
"아뇨. 그런데 너무 말이 안 돼서요."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말이 되는 걸 찾는 게 더 웃기는 꼴이지 않나 싶다.
"근데 저는 언제 2차 전직 하러 가요? 이준 씨가 계속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직은 지상에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하늘에는 수많은 와이번들이 괴성을 지르며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미니맵 끝자락에서는 거대한 검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고.
그녀 말마따나 사기적인 포탑들이 언제까지고 먹힐 거라는 보장은 없다.
허나, 아직 내 감은 강소현을 보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아, 그놈에 감이 뭐라고... 뭐, 그러라니까 그러긴 한 건데… 어어?"
"무슨 일입니까?"
"그게 백색 마탑에서―"
백색 마탑에서 그녀에게 특약조건이 추가된 가입서를 새로 보내줬다고 한다.
"지금 가입하면 이준 씨한테 영구 신체 강화 시술을 해주겠다네요."
"흐음."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백색 마탑'에서는 강소현을 원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 더 존버하시죠."
80억이나 되는 인류가 얼마나 살아남았을지는 모르겠다만, 그쪽에서 강소현을 높게 사는 것 같으니 당장은 몸값을 더 올리는 게 맞는 판단일 것이다.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 가입서라는 조잡한 이름이지만, 어쨌든 그쪽에서 내게 '영구 신체 강화 시술'이란 걸 해줄 정도로 그녀를 원하는 것은 사실이니.
"아, 알겠어요. 그런데 이준 씨는 포인트 얼마나 있어요?"
나?
'상태창.'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2,354,321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6」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썩어 넘칠 정도로 있습니다만."
"아, 저 상점에 사고 싶은 게 있어서요."
포인트 거래가 가능한가?
"저도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끼리 손을 맞잡고 '거래'라고 외치면 무슨 화면이 떠오른다고 하더라구요."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려주십니까?"
"아, 그게 저도 이준 씨한테 오기 직전에 알았어요. 오고 나서는 뭐 여기는 먹을 것도 많고 그러니까 딱히 상점을 쓸 일이 없어서 까먹었죠."
"...까먹을 게 따로있지. 이 중요한걸."
"근데 점점 세상이 더 이상해지는 꼴을 보니까 상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서요."
하기야.
이름부터가 '튜토리얼 상점'이지 않나.
그놈에 튜토리얼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서 뭐가 사고 싶으신지?"
"아, 이준 씨는 상점이 없댔죠. 그 튜토리얼 상점에는 한정된 개수만 판매하는 이상한 물건들이 있어요."
"뭘 살 건지 말이라도 해 주셔야―"
"가격은 100만 포인트구요."
다짜고짜 가격부터 말하면 내가 뭘―
"이름은 '보호의 룬'이네요. 지정 역역을 보호해준다는데, 이준 씨 집에 쓰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당장 드리겠습니다."
저런 아이템이라면 100만 포인트여도 기꺼이 지급할 의향이 있다.
"아, 이것 말고도 하나 더 사려고 하는데···."
"그건 얼마입니까?"
"이것도 50만 포인트구요. 이름은 '마나 감응 물약'이네요. 뭔가 제가 먹어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도 사시지요."
무능력자가 되었기에 당장 큰 효율을 보지는 못할 테지만, 강소현 그녀가 백색 마탑에 다녀온 뒤로는 상당히 큰 효과를 보지 않을까 싶다.
"손 주세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러니까 약, 14년 만에 잡아보는 여자의 손.
"거래."
조금 긴장하고 있었는데, 막상 잡아 보니 별 감흥은 없었다.
파앗-!
오히려 눈앞에 떠오른 거래창이 더 신기할 지경이니.
「거래 품목을 올려주세요」
깜빡이는 창.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도 변하는 게 없었다.
"아, 그거 음성 인식이에요. 올리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거래'라고 외치면 돼요."
"150만 포인트."
「1,500,000p」
"거래."
내 거래창에 나타난 150만 포인트라는 문구.
「상대방」
「 - 」
그리고 강소현의 거래창은 비어 있었다.
"거래."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854,321p」
강소현의 손을 붙잡고 거래라고 말하자, 내 상태창에 있던 포인트가 줄어들었다.
오... 이런 게 되다니.
"흐음...."
뭔가를 고민하던 강소현이 허공에 손을 막 휘젓기 시작한다.
"이게 왜?"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뇨. 사는 것 자체는 끝났는데. 상점이 좀 이상해져 있네요. 돌빵, 녹슨 물 컵 같은 것들 재고가 다 사라져 있어요."
세상이 망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으니 이제 슬슬 식량이 모자란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좀비를 잡아서 물컵과 빵을 얻을 수도 없으니까.
바바리안으로 전직한 강소현의 지인들만 봐도 먹을 게 없어 고블린을 구워 먹었다고 하지 않았나.
"자요!"
강소현이 허공에서 녹색 빛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꺼내 내게 건네준다.
우웅-!
표면에는 빽빽하게 알아먹지 못할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돌멩이에서는 진한 숲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보호의 룬」
「지정 영역을 보호하는 장막을 설치한다」
「사용 시 영구 지속, 설치 시 해제 불가」
「장막 재생시간 24시간」
영역의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일단 한 번 설치하면 끝인 물건임은 알 수 있었다.
밑져야 본전.
집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방공호가 있던 곳에 만들어진 마스터룸의 자리에 보호의 룬을 가져다 대자.
우우우웅-!!
기이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휘몰아치며 돌 주위에 작은 장막이 생겨났다.
휘오오오오오-!!
직후 바람이 몰아치며 그 장막이 점점 커져나가며 나와 강소현의 몸을 뚫고 지나간다.
『냐아!!!』
담장 위에 늘어져 있던 로라까지 통과한 장막은 이내 내 집을 완전히 감쌌다.
"와... 이거 제법 좋아 보이네요."
아직 성능은 알 수 없지만, 육안상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좋아 보이긴 한다.
100만 포인트짜리 물건은 튜토리얼 상점에서 파는 가장 고가의 물품이라고 한다.
강소현의 얘기를 들어보니 속성 무기, 강회된 방어구 등등 더 많은 아이템들이 있다는데 그녀는 가장 비싼 아이템을 구매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뭐든 제일 비싼 게 좋은 법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100만 포인트짜리 돌멩이와 50만 포인트짜리 물약을 샀다는 게 좀 웃기기는 한데, 포인트 따위야 금방 벌 수 있으니 그녀의 소비관에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포인트 수급 좀 하겠습니다."
이제는 무려 이동하면서 포탑을 쏠 수 있지 않나?
* * *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골목길 입구에 세워둔 나의 집.
그리고 그 앞의 2차선 도로에는 좀비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영화 속의 좀비라면 총성을 듣고 쉴 틈 없이 몰려올 법도 하다만, 현실의 좀비에게 소리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쿠우웅-!
소란이란 소란은 다 피우고 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렇다.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는 내 이동식 요새에게 좀비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몰려왔으면 할 정도였으니.
"사, 살살 좀 몰아요!!"
"제가 집 운전은 오늘이 처음이라 이해 좀 해주시죠."
이동하면서 좀비들을 섬멸한 덕분에 이동식 요새의 운전 실력도 많이 능숙해졌다.
아직 동승자의 탑승감까지 고려할 수준은 못 된다만.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그렇게 골목 입구를 오가며 좀비를 섬멸하다 보니 당장 근처에 있는 좀비는 죄다 씨가 말라 버렸다.
"와... 진짜 사기적인 능력이네요. 저도 빨리 능력치 되찾아서 포탑 좀 쏴보고 싶네요. 지금은 포탑 핸들도 못 당기니까요."
원래 게임에서도 양학이 재밌는 법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고.
"여기까지 하죠."
한 1만 마리 정도 잡았나?
집 앞 2차선 도로는 어느새 좀비의 밀도가 상당히 줄어 있었다.
여기서 더 나가서 팍팍 잡아버리고 싶긴 하다마는 저 멀리 보이는 구체의 괴물 때문에 더 이상 어그로를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1,143,982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6」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그래도 백만 포인트는 복구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지.
기기기기긱-!
어느새 2차선 도로 한복판까지 온 나의 집.
큰길가 끄트머리에서 구체 형태의 괴물이 보인다.
눈 같은 건 없어도 거대한 팔이 잔뜩박힌 구체의 괴물이 내쪽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집을 운전해서 골목길로 돌아왔다.
-크르라라락!
-크라라락!!
골목 입구 막기를 푼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좀비 두 마리가 텅 빈 골목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쿠웅-!
푸직-
이동식 요새의 거미다리를 이용해 밟아 죽였는데―
파앗-!
「남아 있는 좀비의 숫자가 80%에 도달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720:00」
「생존을 준비하세요」
라는 메시지도.
"옘별."
'불완전한 선택지'를 마지막으로 고른 새끼 얼굴이 아른아른 거린다.
물론 이 경우에는 내가 같은 짓을 해버렸다는 차이가 있겠지만, 애초에 그놈이 선택지를 고르지만 않았어도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 아닌가?
콰아아아앙-!!!
메시지가 나타나고 얼마 안 가 사방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러오기 시작했다.
어째 '보호조치 완화'의 폭발이 하다만 느낌이다 싶었더니, 미뤄뒀던 것들이 한 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다.
삐이이이이이―
각성 후 이상하리만치 강인해진 몸.
미친 듯한 포탑의 총성에서도 문제없던 고막에서 이명이 들려온다.
"――――"
"안 들립니다!!!"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강소현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니.
"―――!!"
능력치가 봉인되고 나약해진 강소현의 귀에서는 피가 숫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타앗-!
『냐아아아아!!!』
이대로 나도 강소현처럼 귀머거리가 되진 않을까 싶던 찰나에 로라가 내 어깨 위로 올라와 소리치기 시작했다.
『냐아아아아!!!』
"꺄아아악-!! 대체 이게 뭔...."
이로써 확실해졌다.
로라는 고막과 같은 내부 장기마저 회복시킬 수 있는 최강의 고양이라는 사실이.
로라의 울음소리와 함께 푸른빛 구체가 우리의 귀를 둘러싸고 회복시키기 시작했으니까.
투둑-!
그리고 또 한가지 알게 된 점.
'보호의 룬'은 성능이 매우 뛰어나다.
투두두둑-!
중구난방으로 주변 건물과 땅 밑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고, 폭발로 인해 사방으로 잔해들이 흩뿌려져 내 집을 둘러싼 장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반투명한 초록빛 막에 막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건물 잔해들.
말이 잔해지, 실제 모습은 철근이 잔뜩 박힌 톤 단위 무게를 가진 돌덩어리다.
쿵-!
그래 봐야 내 집을 침범하진 못한다만.
쿠구구구구궁-!
30분은 족히 넘는 시간 동안 지속되던 폭발과 땅울림이 서서히 멎어간다.
구구구궁-!
주위를 둘러보니 안 그래도 박살났던 세상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져 버렸다.
잔해가 가루가 된 느낌이랄까?
"허어... 이준 씨, 이거 로라가 한 거죠?"
자신의 귀를 가리키며 내게 질문을 하는 강소현.
"로라가 원래 좀 대단합니다."
강소현에게는 로라의 특별함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느껴져서 간단하게 로라에 대한 설명을 해줬고.
"아니, 제가 로라 주치의인데 어째 그걸 이제야 말해 주셔요!!!"
약간의 잔소리를 들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아, 뭐 이해는 하는데... 의료적인 부분은 숨기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그래도 강소현이 멸망 속에서 자신의 정보를 숨기는 것 정도는 이해해 줄 정도의 사람이라 잔소리 자체는 금방 끝났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파앗-!
「랭킹이 집계됩니다」
랭킹?
저건 또 뭐냐.
"이, 이거 보여요?"
강소현에게도 같은 것이 보이는 듯한데....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76) -대한민국
2등: 존 스미스(2,686) -미국
3등: 풋타엿파쭐라록(2,654) -태국
.
.
.
100등: 김국성(1099) -북한
"보입니다. 갑자기 뭔 랭킹이...."
"이준 씨 1등이신데요?"
「플레이어 킬」
1등: 제인 스미스(132) -미국
2등: 린쒄(112) -중국
3등: 가가와 시게유키(110) -일본
.
.
.
100등: 강두식(36) -대한민국
〈 지구를 지탱하던 신은 사라졌어도 그 힘은 지구에 남겨져 있습니다. 〉
[신이 죽고 망가지기 시작한 세계. 이제부터는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랭킹 집계 알림 이후로 들려오기 시작한 신비로운 초월자의 음성.
〈 몬스터를 몰아내고 인류의 영역을 만드세요. 〉
[동족의 피만이 너를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머릿속에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 가장 많은 몬스터를 헤치운 자. 남겨진 신성의 조각을 얻을 지어니. 〉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이고 올라온 자만이 초월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허나, 그 내용은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25. 장막 너머의 세계
"회,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순신 건설의 전 회장 곽성룡.
무너진 순신 건설 건물의 잔해 속에서 회장(會長) 팻말을 닦던 그에게 다급하게 찾아온 부하가 말을 걸었다.
조폭이 편하던 시절에는 조직의 보스로 기업이 유리해진 시절에는 건설 회사의 회장으로 살아온 곽성룡.
"야이 새끼야, 세상이 망했는데 회장은 무슨 회장. 그냥 큰형님이라 부르랬지!"
미련이라도 남은 듯 회장(會長) 팻말을 닦고 있지만, 망한 세상에 맞춰 가기 위해 그의 호칭만은 다시 조폭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큰형님, 근데 진짜 큰일 났지 말입니다."
"뭔데?"
"처, 철두 행님이 미쳤습니다."
"뭐?"
"그, 행님 육촌 동생 자제분을 자꾸 먹으려 하는데요...."
"하아... 이 개새끼. 안내해!"
순신 그룹 회장에서 다시 '성룡파 큰형님'으로 돌아간 그가 앞장선 부하를 따라 건물 잔해를 헤집고 나아간다.
세상이 망하고 철저한 상명하복만이 남은 조폭의 세계는 아포칼립스라는 상황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무너진 순신 건설의 건물 잔해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치워져 있었고, 그중 평평한 땅에는 직급이 높은 형님들이 머무를 수 있는 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문까지 달린 버젓한 방이었다.
두목 곽성룡의 방에 비한다면야 초라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누가 봐도 부러움을 살법한 그런 공간으로 그들이 들어섰다.
"여, 여기입니다. 형님."
"겁쟁이 새끼. 비켜 임마!"
겁에 질린 부하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간 곽성룡.
그의 눈앞에는 도륙난 사람의 시체와 뼛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야, 이 새끼. 사람 고기를 얼마나 처먹은 거야?"
"오셨습니까, 형님!"
"인사는 됐고, 철두 저놈 왜 저런지―"
저벅, 저벅.
문철두의 옆에 있던 부하를 닦달하던 곽성룡을 향해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다가온다.
"헤헤, 큰행님. 오셨습니꺼~!"
"철두야, 정신 차려봐!!"
58살, 문철두.
그는 성룡파에서 '순신 그룹'이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최전방을 맡아주던 행동파 대장이다.
"헤에... 행님, 저 이제 철두 아니라 지혁입니다. 이제 우리 번듯하게 살지 않습니꺼!"
"이 새끼야, 번듯하게 살겠다는 놈이 사람 고기를 이렇게 처먹어?"
"헤에, 이게 그 대식가 협횐지 뭔지 가입하고 나니까 배가 고파서 미치겠더라구요."
"철두야!!! 정신 차려라!!!"
행동파 대장으로 앞에서 가장 많은 칼침을 맞아주던 동생.
번듯한 기업이 되고 나서도 문철두는 항상 곽성룡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행님, 제가 뭐 머리를 쓸 줄 압니까? 그냥 까짓거 빵 한 번 더 다녀오죠.
기업 조사에서도 대신 총대를 메고 감옥을 다녀왔을 정도니.
'철두야... 이게 다 내 부덕이다.'
오른팔이자 피붙이보다 진한 인연을 가진 동생을 바라보던 곽성룡.
그런 성룡을 향해 문철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행님, 이제 나 문.지.혁.이라니까요."
"병신아, 세상이 망했는데 지혁이 이름이 먹히겠냐? 옛날처럼 무식하고 우직한 철두가 더 낫지. 너 임마 사람 고기 얼마나 먹었어? 정신 차리고 말해 봐!!"
조폭.
그들이 어렸던 시절의 대한민국은 와일드했다.
뒷돈 몇 푼이면 봐주는 경찰이 수두룩했으며, '조폭과의 전쟁' 전까지는 말 그대로 그들의 세상이기도 했으니.
다시 맛본 무법의 해방감은 철두의 자제력을 흐트러트렸다.
"애, 애새끼 고기는 더 맛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아, 씨발. 미치겠네. 옆에 너! 이름이 뭐냐?"
"안녕하십니까. 형님! 강. 호. 중. 이라고 합니다."
"그래, 너 철두 옆에 있었지. 이새끼 사람 고기 얼마나 처먹었어?"
"네, 네 명을 먹었습니다...."
"그걸 안 말리고 뭐 했어!!!"
뻐억-!
"끄윽…."
차마 자신이 대신 잡아먹힐까봐 말리지 못했다고는 말은 못하겠고, 입만 뻥끗뻥끗하던 그.
"에휴, 이 병신을 오른팔이랍시고 데려다니던 철두도 철두지."
"죄송합니다!"
"애들 다 모아 와."
세상은 정부의 재건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망했고 더 잔혹해졌다.
길거리에는 좀비들이 가득하며, 사람들 중에서는 사람을 먹어서 강해질 수 있는 사람들마저 생겨났으니.
그런 세계에서 조폭이란 꽤나 쓸만한 직업이 되었다.
철저한 위계질서.
상명하복.
수금을 통한 포인트 확보.
과거의 칼침을 놓던 시절부터 서류작업이 주된 업무가 된 기업형 조폭으로의 진화과정을 거친 '성룡파'.
무너진 건물 잔해를 치우고 만들어둔 거대한 광장에 조직원들이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니임!!!""""
철그럭-
번뜩이는 강철갑옷, 허리춤에는 붉은 빛 예기를 내뿜는 칼을 찬 사내가 광장 단상위의 곽성룡을 향해 다가간다.
"큰형님, 아가씨 지키는 애들 빼고 다 모여서 도합 231명입니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는 조폭들도 검은 정장과 사시미칼 대신 각성한 클래스에 걸맞는 복장을 입게 되었다.
터억-!
"2조 줄 비뚤어졌다. 죽고 싶어?"
곽성룡이 보고를 받는 사이 조직의 간부들은 도열한 조직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10m 선 넘는 놈은 한 식구고 나발이고 바로 처형이다."
조폭들 또한 좀비 웨이브를 피하기 위해 철저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
"여자 구하러 간 놈들은?"
단상 위의 곽성룡이 조직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연락이…."
"씨이팔. 뭔 계집들도 죄다 강해져가지고, 퉤엣! 이런 세상일 수록 계집들 모아두는 게 중요하단 말이다!!!"
그 험난했던 7080의 서울도 그러했으니.
여자와 술, 마약과 폭력은 언제나 험한 세상에서 환영받는 법이다.
"형님, 다섯 명씩 뭉쳐 다니는데 여자 잡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다들 뭐 칼 들고 활 쏘고 초인적인 힘도 쓰고 그러는데, 저희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광장에 도열한 조직원들 중 하나가 주제 모르고 그들의 보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 팔 보이십니까? 여자라고 얕볼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상처 가득한 팔을 보이며 그들의 보스를 향해 하소연을 하는 한 사내.
뚜벅, 뚜벅.
"너 이름이 뭐랬지?"
"김준민입니다."
푸욱-!
"하아, 씨이발. 이래서 어린 새끼들이 안 된다는 거야."
그를 향해 걸어간 곽성룡이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아 그의 배를 쑤셨다.
"크으윽-! 혀, 형님!!"
"형님은 무슨, 한심한 새끼가. 토토 사무실에서 전화나 돌리면서 조폭 흉내 내니까 니들이 뭐라도 된 것 같드냐?"
곽성룡이 도열한 조직원들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이제는 칼밥 먹던 놈들이 다 해 먹을 시대다. 또 저 따위로 약한 소리 할 놈 있어?"
""""없습니다!!!""""
본보기식 처형.
곽성룡 앞에 도열한 조직원들 사이에 싸늘한 한기와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 고기 고른 놈들 많지?"
곽성룡 그 또한 사람 고기를 골랐다.
서걱-
"철두 봤지? 사람 고기는 필요한 만큼만 먹어라. 잘못하면 병신 되기 십상이니."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김준석의 귀를 썰어 먹으며 조직원들을 훑어본다.
으적, 으적.
"능력치가 올랐다."
으적, 으적.
"스킬의 일부를 획득했다."
으드득.
"끄어억~! 뭘 얻었다는 알림이 나오면 무조건 일주일은 사람 고기를 금식해야 한다."
동네 깡패에서 기업형 조폭까지.
그는 이런 식의 활발한 정보 공유로 조직을 항상 살려냈고 강화시켜 나갔다.
"이를 어긴다? 그러면 뇌가 망가지는 거야. 더 강해지는 대신 반쯤 병신이 된다고 생각해라."
200여 명의 조직원.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진짜 깡패 출신인 만큼 그들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변한 세상을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사람 고기'를 먹고 산다.
"두식아."
"예. 행님!"
"그 아 새끼 부모 좀 찾아와라."
"큰형님 육촌 동생 말씀이십니까?"
"그래."
"예, 행님!"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연락 두절이 된 사람을 어찌 찾는단 말인가?
허나 곽성룡의 왼팔이자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던 강두식에게 있어 큰형님의 명령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 * *
『하아악-!!!』
"강소현 씨, 지금 로라가 고블린 보고 하악질하는 거 맞습니까?"
"아, 네. 그런 것 같네요...."
생후 두 달이 된 로라는 부쩍 호기심이 늘었다.
그 대상이 조금 이상해지긴 했다만.
"뭐, 와이번 보고 하악질 안 하는 게 어디예요."
"로라가 와이번을 보고 나서는 어쩔지 모르는 일입니다만."
-끼예에에에엑!!
호랑이도 제 말하면 찾아온 다는 말이 있듯이, 때마침 우리의 머리위로 와이번 한 무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철새의 비행처럼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와이번들.
"하아,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럴까요?"
그걸 바라보던 강소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이 또 한 번 변하면서 정리할 것들이 좀 생겼던 참이라, 강소현과 함께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분명, 이상한 목소리가 말하기로는 몬스터 킬 랭킹 1등에게는 '신성의 조각'이 주어진다고 했다.
「직업 전용 퀘스트 – 10레벨까지 고양이를 지켜라.」
「보상: 신성의 조각이 고양이에게 깃든다.」
그리고 나의 직업 전용 퀘스트에는 10레벨을 찍으면 로라가 '신성의 조각'을 얻게 된다고 써져 있다.
신의 죽고 그 힘이 남겨져 있다는 설명으로 보아하건데, 이 신성의 조각은 지구의 신이 남긴 유산일 가능성이 높다.
"로, 로라가 신이 되는 건가요?"
『냐아~?』
'신'이라는 말에 반응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와 강소현을 바라보는 로라.
타다다다닷-!
검은색의 짧은 털뭉치가 나를 향해 돌진한다.
코옹-!
코옹-!
지금 로라가 하는 행동은 번팅(bunting)이라 부르는 행위로, 집사를 향해 머리를 콩 하고 들이박는 행동을 뜻하는 말이다.
"와, 이준씨는 진짜 축복받았어요. 세상에 저런 고양이가 어디 있어?"
번팅은 친분이 있거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냄새를 묻히는 행위로, '너는 내 것이다' 혹은 '네가 너무 좋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크흠, 원래 로라가 좀 축묘긴 하죠."
축묘도 이런 축묘가 없지.
이런 로라가 신이 된다면,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기만 하다.
"하긴 로라가 신이 되면 재밌긴 하겠네요. 수많은 신도를 거느린 아기 고양이라니, 크큭."
진짜 신이 되는 건진 모르겠고 그저 나와 강소현의 추측뿐이지마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못해도 신 비스끄므리한 것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고블린은 어쩌죠?"
다음 안건은 지상에 무작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포탈이다.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696:00」
어제 그 난리가 나고부터 정확히 24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좀비들 사이 곳곳에 포탈이 열렸고, 그 안에서 고블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충 스무 마리 정도 나오면 사라지네요."
우우웅-!!
내 집 뒤편의 포탈에서도 뭔가 나오는 소리가 나는데, 나오는 족족 포탈 위로 쌓인 시체 더미에 깔려 죽는 것 같다.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79) - 대한민국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83) - 대한민국
가만히 있는데 랭크 보드의 킬 카운트가 올라가는 걸 보면 아마 내 킬로 취급이 되고 있는 것 같고.
"포탑만 해도 사긴데, 이딴 식으로 날로 먹는 게 된다고요?"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원래 사람이란 그런 존재지만, 강소현이 그러니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든다.
10만 대군과의 처절한 사투는 잊어버린 채 시체 더미로 개꿀 빠는 모습만 기억하는 강소현.
"아... 미안해요. 하긴 10만이나 되는 숫자를 잡았는데, 이런 혜택은 있어도 될 만하네요."
"뭐, 괜찮습니다."
빠르게 내 표정을 읽고 곧장 사과를 하는 그녀.
그런 강소현이기에 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다.
또각, 또각.
"그런데 집까지 낮춰 두고, 어디 가시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포탈. 이태초에서는 게이트라고 불렀다죠?"
"아, 네."
"그것 좀 확인하려고 합니다."
왜 내 집 앞에만 저게 계속 있는지.
이 망한 세상과 각성한 인류, 이상한 놈들이 2차 전직까지 시켜주는 상황이다.
즉, 무엇이던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의미다.
"저, 저길 들어가시겠다고요?"
"당장 들어갈 생각은 없고, 테스트를 좀 해볼까 합니다."
뭐, 그 전에 시체들부터 치워야겠지만.
화르르르륵―
강소현의 지인, 바바리안 부족민들이 조금 청소를 해줬다 해도 집 앞 골목길을 메운 것은 10만의 고블린 시체다.
다 치울 것도 아니고 포탈 입구까지만 길을 뚫어 두는 것이기에, 일 자체는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화르르륵―
▶▷▶▷▶▷▶▷ [추출기 연구중 68:23]
본래 추출기를 짓고 나서 하려 했는데, 휙휙 변해가는 세상 때문에 이 이상 포탈 확인을 미룰 수는 없다.
저게 우연히 찾아온 재앙일지, 내게만 나타난 기연일지는 저 안에 들어가야지만 알 수 있으니까.
괜히 방치했다 큰 문제가 생길 바에는 빨리 치워버리는 게 더 낫기도 하고.
"으으... 냄새. 뭐 도울 건 없어요?"
"미쳤습니까? 당장 집으로 들어가시죠."
어딜 무능력자가 집 밖에 나오고 있어.
"하아, 자꾸 그러면 그냥 백색 마탑으로 가 버릴 거예요!!"
"안전제일 모르십니까? 집에서 쉬고 계십쇼. 이제 포탈 내부를 확인해야 하니까요."
또각, 또각.
『냐아-!!』
어깨에 로라를 태워 '집사'의 정체성을 보다 견고하게 한 뒤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우웅우웅우웅-!!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뭔가 홀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푸른빛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거울 같달까?
투욱-!
돌 조각을 던져 봤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제 다음은 기다란 것을 넣다 빼 볼 차례.
철그럭-!
철봉을 들고 포탈을 향해 찔렀는데―
푸욱-!
뭔가 손맛이 느껴졌다.
"...미친."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84) - 대한민국
몬스터 킬의 카운트도 올라갔고.
"옘별."
근데 왜 욕을 하냐고?
푸욱-!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85) - 대한민국
푸욱-!
푸욱-!
푸욱-!
「몬스터 킬」
1등: 이준(109888) - 대한민국
대충 아무렇게나 찔러도 킬 카운트가 올라가고 있으니까.
그말인즉슨.
저 안은 고블린이든 뭐든 몬스터로 꽉 찬 포화 상태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렇게나 찌른 철봉으로 킬 카운트가 올라가는 게 말이 안 된다.
흐음···.
여기서 드는 생각.
포탈에 반쯤 통과시킨 봉으로도 킬이 올라가는데 고정 포탑의 포화를 갈기면 어떨까?
1. 개꿀빨고 끝난다.
2. 저 안의 무언가가 튀어나와 문제를 일으킨다.
3. 원거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정도의 결과가 나올텐데.
"강소현 씨 생각은 어떻습니까?"
"와, 이걸 나한테 선택권을 준다고요?"
나는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서 강소현에게 선택권을 넘겨줬다.
재수 없게 벌집을 쑤신 꼴이 될까봐 조금 불안하기도 했으니.
"하아, 제가 고른 선택지로 인해 잘못된다고 뭐가 바뀌어요?"
"그건 아닌데, 제 마음은 편해지지 않습니까."
"미, 미친. 진짜 이준 씨는 그 뒤틀린 뭔가만 아니면 참 괜찮은 사람이신데...."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걸 그대로 두자니 찝찝하기도 하고, 어차피 궁금해 하시는 눈친데 그냥 질러요."
"믿고 가봅니다."
쿠구구구구구궁-!!
"꺄아악-!! 말 좀 하고 움직여요!!!"
"마음이 급해서. 죄송합니다."
쿠웅-!
이동식 요새를 움직여 포탑의 총구가 포탈을 향하게끔 만들었다.
으지직-!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자리를 잡기위해 고도를 낮춘 요새에 짓눌리고―
푸시이이이익-!
썩은 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씹...."
냄새 때문에 반 강제로 타임어택이 되어 버렸으니, 빠르게 포탈을 향해 포화를 퍼부었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자동 포탑은 움직이는 대상이 없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대의 고정 포탑만을 사용해서 포탈 속에 포화를 퍼부웠는데....
「이상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남은 시간이 줄어듭니다.」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680:00」
남은 시간이 10시간 정도 줄어 버렸다.
#26. 버닝 포인트존
"미, 미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투타타타타타탓-!!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670:00」
"포탑 안 멈춰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투타타타타타타탓-!!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660:00」
"대, 대체 왜 계속 쏘는 거예요?"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1,617,862p」
"아, 아무래도 저 포탈이 버닝 포인트존인 것 같습니다."
버닝 포인트존(Burning Point Zone).
게임식으로 따지자면 무한 포인트 수급이 가능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1,865,845p」
포인트의 정확한 가치는 알 수 없으나, 숫자만 봐도 벌리는 액수가 어마무시하다.
이대로만 가면 강소현에게 줬던 100만 포인트를 금세 다시 복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
투타타타타타타탓-!!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649:24」
"미, 미쳤어! 대체 얼마나 벌리길래 그래요?"
"아, 방금 막 100만 벌었습니다."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2,213,450p」
"배, 백만이요? 그럼 더 쏴야지 왜 멈추고 그래요?"
나의 돈으로 '마력 감응의 물약'을 사먹었던 강소현.
그녀가 자신에게 떨어질 보상이 기대됐는지, 말리기는커녕 나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허나, 버닝 포인트존에서 벌 수 있는 액수는 100만 언저리가 한계인 모양이다.
"아쉽게도 더 이상 포인트가 올라가진 않군요."
또각, 또각.
포탈 바로 앞에 주차해둔 나의 집.
우웅우웅우웅-!
대문을 열고 나가자 곧장 푸른 빛 포탈이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캬아아오!!!』
어깨 위에 선 로라가 포탈을 향해 하악질을 시작했는데, 그 뉘앙스가 '빨리 저길 들어가라!'였다.
"로라야, 진짜 들어가?"
『냐아아!!』
"왜, 왜요? 로라가 저기로 들어가래요?"
집 담장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묻는 강소현.
"하아. 이걸 어찌해야 할지...."
"로라가 하잔대로 해 봐요. 평범한 고양이도 아닌데 손해 보진 않을 것 같은데... 제가 먼저 가볼까요?"
"미친소리 마시고 그냥 집에 계십쇼."
우우웅-!
그렇게 말하고 포탈 앞으로 다가갔는데, 막상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언제까지 서있게요?"
어느새 담장 위에 올라선 강소현이 내게 물었다.
"뭐라 말 할 생각은 없었는데, 30분은 넘게 서 계시니까 보고 있기가 좀 힘드네요."
답답하기야 하겠지.
나도 저 안이 궁금하고 빨리 들어가고 싶긴 한데, 저 정체불명의 포탈로 '내'가 직접 들어가야 하니까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거다.
거기다 로라까지 데리고 가야하니...
슬쩍 고개만 넣어 볼까?
아니지, 그랬다가 얼굴이 댕강 잘리기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물체를 넣었다 빼는 것에 문제는 없었지만, 인체 혹은 생명 활동을 하는 것이 들어갔다 나오는 것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흐음...."
"아, 답답하게!! 그냥 좀 들어가!!"
좀비 시체라도 가져와서 테스트를 해봐야 되나?
좀비를 생명체로 쳐서 실험을 하는 게 맞는 건가?
독촉하는 강소현을 무시한 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차에―
『키야오오!!!』
타앗-!
로라가 포탈로 뛰어 들었다.
"옘별."
또각, 또각.
얘가 이런 적이 없는데, 어찌....
당황한 건 당황한 거고, 당장 로라를 되찾아 와야하기 때문에 급히 포탈로 따라 들어가 버렸다.
우우우우웅-!
기묘한 빛에 휩싸이며 포탈을 넘어가자 ―
쿠구구구구궁-!!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불쾌한 느낌을 잔뜩 주는 이상한 동굴이 나타났다.
타앗-!
『냐아...』
동굴안의 광경을 본 로라가 겁에 질린 채로 내 어깨 위로 돌아왔고 그제서야 나는 포탈 속의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뚜욱-뚝!
이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럴 것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모든 것이 고블린으로 이뤄진 동굴.'
꿀렁- 꿀렁-
포탑의 포화로 반쯤 뭉개진 고블린들이 얽히고설켜 동굴 벽을 메우고 있다.
후두두둑-후두둑-
동굴을 걷는 내내 머리 위에서는 녹색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으며, 바닥에 붙은 고블린의 살덩어리들이 내 다리를 옥죄려 든다.
촤아악-!
철봉을 휘둘러 살덩어리들을 쳐내고는 있다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푸우욱-!
몇 걸음 걷지도 않았건만, 이미 내 무릎 위까지는 동굴 바닥의 살덩이에 집어 삼켜져 버렸다.
상황이 답답하긴 해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덤덤하게 있긴 했다만.
내가 믿는 구석은 몬스터를 멈추게 만들고 집사를 강화시켜주는 기묘한 힘을 보여줬던 로라다.
그리고 로라는 내 믿음에 제대로 된 보답을 해줬다.
『키야오오!!』
바람한 점 없는 눅눅한 동굴,
어깨 위에서부터 산들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어깨를 바라보니, 로라 주위로 금빛 장막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가볍게 불던 산들바람은 이내 점점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휘오오오오-
동굴에 광오한 금빛 물결이 몰아치고.
-기기긱!
어둠과 살덩어리로 가득했던 동굴 벽이 비명을 지르며 나와 멀어진다.
내 몸을 옥죄던 살덩어리들은 사라졌다.
바람의 근원은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로라.
검은색 작은 털뭉치로부터 시작된 금빛 물결은 지저분한 녹색 살덩어리 사이로 하나의 길을 만들어냈다.
"괜찮겠어?"
일전에 보여줬던 로라의 힘.
이번에도 그 힘을 사용한 것 같은데, 역시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냐아.』
조금 기운이 빠지긴 했어도, 기력이 있어보인다.
이대로 로라가 뚫어준 길을 따라 이 정체모를 포탈 속을 묵묵히 걸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숨이 턱 막힌다.
금빛 길을 벗어나 보이는 그 광경이 너무나도 끔찍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뭉개진 살덩어리들이 꿀렁이며 녹색 즙을 줄줄 뿌리고 있다.
고블린들의 비명과 살과 살이 뭉개지는 소리가 섞여 동굴 속에 메아리친다.
꿀꺽.
물리적으로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아도 그 기괴한 분위기에서 오는 압박감에 침을 꿀떡 삼켰다.
또각, 또각.
좁은 동굴 속에는 고블린들의 살점이 얽히고설키는 소리.
그것을 뚫고 들려오는 청명한 나의 구두굽 소리.
대체 이 동굴은 뭘까?
이 벽에서 고블린이 태어나는 것일까?
이 벽의 표면을 가득 채운 고블린들을 다 몰아낸다면 '벽'이 나타나기는 할까?
『냐아-!!』
계속해서 생겨나는 의문을 되새기며 로라의 둥근 고양이 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었다.
걷다 보니 동굴 반대편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라가 만들어 낸 금빛 길과는 다른 빛.
마치 어딘가의 횃불이 만들어 냈을 법한 붉은 빛이 동굴의 반대편 입구에서 보이고 있었다.
『캬아오!!』
그리고 내게 전해지는 로라의 의지.
"넘어가진 말고 구경만 해라?"
『냐!!』
고개를 끄덕이는 로라.
또각, 또각.
그럴 거면 대체 여기까지 왜 들어오게 했나 싶은데, 기왕 온 김에 대체 뭐가 있는지 보기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동굴의 반대편을 향해 걸었다.
붉은 빛을 토해내는 통로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뭘까?
인류의 새로운 터전이 될 수 있는 '별천지 이세계'가 펼쳐지진 않을까?
'초월적인 무언가'를 만나 이 상황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가간 그곳에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씹."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욕이었다.
동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거대한 고블린들의 부락이었다.
아니, 왕국이라고 해야 되나?
두둥-둥 두둥-!
까마득하게 넓은 돔 형태의 동굴.
그리고 그곳의 중앙에는 '조잡한 성'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성 위에는 커다란 고블린 한 쌍이 서 있고, 그 아래로 수없이 많은 고블린들이 도열해 있었다.
두둥-둥 두둥-!
성 앞 광장에 모여 북을 치며 춤을 추는 고블린들.
분위기로 보아 '축제'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중앙 광장에 무언가 기둥에 매달린 것들이 보인다.
"개, 씹… 옘별...."
안력을 강화해 성 앞을 바라보자 축제의 제물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축제의 쓰이는 것은 끔찍한 몰골로 기둥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우선, 내 집앞의 포탈에서 끌려간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좀비라면 몰라도 고블린들에게 누군가가 끌려간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서 끌려온 걸까?
-고오오오오!!!!!!
그 해답은 성 앞의 광장에서 이상한 주술을 벌이는 고블린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푸우욱-!
주술사 같은 고블린이 구불구불한 칼을 꺼내 기둥에 묶은 사람들의 목을 가른다.
뚜욱, 뚝.
기둥을 타고 흘러간 붉은 피가 바닥에 스며들고 그들의 발밑으로 이상한 마법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마법진이 빛나고 바닥에서 대한 녹색 손이 솟아 올랐고, 그것이 사람들을 붙잡고 마법진 속으로 데려갔다.
-고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고블린들의 환호성이 시작되었고―
우웅-!
소리와 함께 고블린들의 성 앞 광장에 포탈들이 생겨났다.
-고를…
-고르륵…
그리고 광장에 생겨난 포탈 안에서 부상당한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고르륵-!!
그들을 향해 붉은 빛 전신갑옷을 입은 고블린이 뭐라 소리치자, 부상당한 고블린들이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고르륵!!
그리고 부상병들이 나왔던 포탈로 갑옷으로 무장한 멀쩡한 고블린들이 다시 들어갔다.
일어난 상황으로만 보자면 현지 인간 조달을 위한 부상자 교대 행위가 아닐까 싶다.
잘박, 잘박.
그렇게 포탈에서 나온 부상당한 고블린들의 수가 수백.
"미, 미친."
수백의 부상병 고블린들이 내가 있는 동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km단위로 저 고블린들은 멀리 있었고.
오는 내내 왕성을 중심으로 퍼져있던 부락에서 그 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다 보니 그 수가 심상치 않게 불어나 있었다.
천, 아니 만 단위일지도?
나를 향해 다가오는 녹색 물결.
말도 안 되게 큰 동굴이기에 거리는 충분히 멀지만, 이대로 더 있다가는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고 있다.
"로라야, 가도 되지?"
『냐아!』
로라도 그렇다 하니.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재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 포탈 입구로 향했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쉴 새 없이 걸어 와서 뭘 어떻게 지나쳐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이는 것은 내 집의 담장.
"이준 씨, 벌써 왔어요?"
고정 포탑에 앉아있던 강소현이 나를 보고 묻는다.
"계속 거기 계셨습니까"
"후우.... 둘 다 글루 가버렸는데, 걱정 되서 뭘 할 수가 없네요. 능력치가 봉인되니까 더 불안하기도 하고요."
『냐아...』
털썩-
대답할 기운도 없어 대문 안 마당에 그냥 대자로 엎어져 있는 나와 로라.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나의 집사복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쯤.
스윽-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준 씨, 정신 좀 차려봐요."
갑자기 해가 가려져서 눈을 떴더니.
강소현, 그녀가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
"아, 감사합니다."
물까지 떠다 주고.
"로라가 왜 이렇게 열이 나죠?"
로라의 상비약으로 구비해 둔 '긴급 회복약', 강소현이 그것을 로라에게 먹이며 물었다.
"후우."
"이제 말 좀 해봐요. 로라는 왜 이렇고, 이준 씨는 무슨 일이 있었길레 그렇게 땀을 막 흘렸어요?"
그녀가 뜸들이던 나를 독촉하고, 나는 포탈 속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좆…"
"좆이요?"
"아뇨, 좆같은 게 있었다고요."
그녀에게 포탈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줬다.
"흐음, 던전이라는 호칭이 어울리긴 하네요."
"던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크고 뭐가 많았습니다만. 뭐, 딱히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네요."
세상 곳곳에 흩뿌려진 고블린들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만....
그 기괴한 모습 때문에 이름을 붙이기도 너무 어렵다.
"그래도 버닝 포인트존이 열리는 방식은 알 것도 같습니다만."
생각보다 알아낸 것이 얼마 없다.
체면치레라도 하기 위해 버닝 포인트 존에 대한 내 추측을 얘기해줬다.
부상당한 고블린들은 저 동굴의 벽이 된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면 동굴에서 빠져나와 집앞 골목길에 있는 포탈 밖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포탈 내부에 포화를 쏟아 부으면, 동굴의 벽이 된 채 덩어리 져서 순환하던 고블린들이 죽게 되고 그것이 내 포인트가 되는 구조다.
"확실히 이준 씨 말이 일리가 있네요."
추측일 뿐이지만, 감에 의존하자만 아마 내 말이 맞을 것이다.
그말인즉슨.
이 망한 세상에서 집 앞에 포탈이 있는 나 혼자만이 무한 포인트 복사 버그를 쓸 수 있다는 것.
언제 다시 포인트 복사가 가능해질지는 몰라도, 뭐 시간 날때마다 포탈에 총알을 들이부어 보면 알지 않겠어?
『냐아~!』
열이 내리고 활력을 되찾은 로라가 내 어깨에 올라오며 소리친다.
마치 '거, 내말 맞지?'처럼 느껴지기에.
"로라야, 네게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순순히 인정하고 칭찬하며 쓰다듬어 주었다.
당장 포인트를 쓸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만, 의미 없이 이런 포인트 수급 장소가 생겼을 리는 없으니.
기회가 될 때마다 모아두면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강소현을 통해 '보호의 룬'을 얻었던 것처럼.
* * *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473:24」
"아, 이준 씨, 지금쯤 포인트존이 리셋되지 않나요?"
부글부글.
편의점에서 파밍해 왔던 된장찌개를 끓이던 강소현이 내게 묻는다.
본래 식사는 각자의 몫이었으나, 강소현이 무능력자가 된 뒤로는 그녀가 도맡아 해주고 있다.
"흠, 한 두어 시간 뒤면 그럴 것 같네요."
식사를 하며 지난 며칠간 포탈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1. 포탈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들어갔다 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포탑으로 내부를 포탑으로 박살내고 들어간 거라 문제가 있어도 없어져 버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2. 포인트존 리셋에는 약 20~30시간이 걸린다.
부상당한 고블린들은 고블린 왕국에서 포탈로 이어지는 동굴 아래에 있는 거대한 지방 덩어리로 들어간다.
그곳에 흡수된 고블린들은 서서히 재생하며 포탈 방향의 입구까지 벽을 타고 밀려오는데, 그 시간이 대략 20시간 정도 걸린다.
3. 고블린으로 이루어진 동굴을 공격하면,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포인트를 얻는다.
시스템 알림이 '이상현상'이라고 표현했던 만큼, 이상하리만치 많은 양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뭐, 대신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의 시간이 조금 줄어들긴 한다만....
어차피 보호조치가 사라지는 건데, 좀 줄어들어도 꿀은 빨아 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잘 먹었습니다. 매번 느끼는데 강소현 씨는 요리에 재능이 있습니다."
그렇게 정보 공유를 포함한 식사 시간을 마치고, 다시 고정 포탑에 앉으려던 내게 강소현의 의미심장한 말을 내 뱉었다.
"아무래도 빨리 백색 마탑에 가봐야겠어요. 이준 씨 강해지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이대로 시간만 죽치고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요."
아직도 내 감은 그녀가 떠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준 씨 감은 믿죠. 근데 그래도 그냥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도 이준 씨 조언대로 미룬 덕분에 방금 새로운 특약이 추가됐어요."
특약?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에게 더 좋은 조건이 붙어 봤자지 않나? 싶었는데.
그런 내 생각은 강소현의 충격적인 답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준 씨께 신체 강화 시술 대신에 불사자 각인이라는 걸 시켜주겠다네요."
불사(不死)라니…
아무리 세상이 망하고 인간이 각성했다 해도 죽음을 거스르는 건 좀 너무 간 거 아닌가?
#27. 불청객 (1)
불사(不死).
말 그대로 죽지 않는다는 뜻인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참을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불사라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아, 설명을 읽어 보면... 뭔 말이 이렇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강소현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으나, 병신같이 구구절절한 설명문 때문에 설명에 난항을 겪는 모양이다.
"그냥 읽어 주시죠. 제가 해석할 테니."
불사자 각인 설명에 앞선 '백색 마탑'의 소개문.
대마법사니, 초월적인 발견이니 하는 잡설이 많았는데, 그냥 단순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마탑은 마탑마다 개별적인 컨셉이 존재한다는데, 그중 백색마탑은 마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와 회복, 버프를 주는 마법이 특징이라고 한다.
뭐, 몸 자체에 마력을 때려 박아서 강화하고 손에 든 무기도 같이 강화해서 적을 부숴버린다는데....
다치면 자힐해서 회복하고.
"사실상 무식한 전사랑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일전에 만났던 야만 부족들이 떠오르는 전투법이다.
"그, 그래도 마법인데 바바리안이랑은 다르지 않을까요?"
뭐,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까 넘어가고.
"무튼, 그래서 불사자 각인이 진짜 불사(不死)가 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인 것 같네요."
"그래도 뭐 노력할 것도 없이 폭발적인 회복력을 얻는다는 점은 좋게 느껴집니다만."
대략적인 각인의 효과는 이렇다.
신체 재생력이 중상급으로 상승한다.
'중상급'의 기준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이 껴 있는 것을 보면 나쁘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신체의 마력 수용 효율이 증가한다.
나한테는 능력치다만, '마력 수용'이란 말이 몸이 힘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라면 확실히 메리트가 있다.
나는 이미 능력치의 뽕맛을 알아버렸으니까.
그 밖에도 피부가 단단해지고 기온 변화에 덜 민감해지는 등의 효과가 있다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하아, 이 이상 붙잡는 것도 좀 그렇겠네요. 다녀오시죠."
"너무 갑자기 가는 것 같아도, 내심 고민 많이 한 거 아시죠?"
옆자리 고정 포탑에 앉아 당겨지지 않는 핸들을 만지작거리던 강소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도 이 망한 세상에서 힘을 잃고 무능력자가 됐던 것이 계속 신경 쓰이긴 했을 거다.
내 집에서 보호받고 있다 해도, 내심 부담이 되긴 했을 거고.
엄연히 우리는 남이다.
남의 호의를 받고만 있는 것도 어떤 면에서 보자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질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십쇼."
내 감은 절대 보내지 말라는데, 괜한 부담을 주기는 싫어서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강소현 그녀가 허공에 싸인하듯이 손을 움직이자―
파앗-!!!!
거대한 백색 섬광이 그녀를 감싸고 강소현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 * *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408:00」
강소현이 떠나고 며칠인가 지났고, 보호조치 해제까지는 약 17일의 시간이 남았다.
중간 중간 내가 버닝 포인트존을 이용하느라 10시간 씩 줄어버려서 정확한 날짜 계산이 어려워졌지만, 대충 계산하면 그렇다.
『고로로롱 고로롱』
고정 포탑에 앉아 있는 나.
그리고 그 무릎위에서 골골쏭을 불러주는 로라.
이렇게 힐링 타임을 누리며, 곰곰이 생각을 좀 해보고 있다.
과연 강소현을 보낸 게 맞는 판단인가?
이제와 생각났는데, 성장 저하에 대한 강소현의 걱정은 전혀 쓸모없는 걱정이다.
당장, 몬스터를 잡아도 레벨은 오르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능력치 스탯도 올라가지 않는다.
포인트야 나한테 썩어 넘치고.
허나, 배움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가 백색 마탑에서 뭔가를 배워올 기회를 내가 막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칙, 치익-!
"쓰으읍."
답이 나오지 않는 걸 고민해봤자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자.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4,486,430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6」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400만이라는 거금이 있으나, 마땅히 쓸 곳이 없다.
집을 마저 짓기에는 재료가 부족하고, 뭘 사기에는 나한테는 '튜토리얼 상점'이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내가 선택한 일은 '설비 증축'.
그동안 설게도에서 해금한 것들을 지어 집을 더욱 집답게 만들 생각이다.
[추출기 -1000000p]
[소각로에서 재료를 추출한다.]
딱히 필요한 재료도 없고, 소각로 옆에 짓기만 하면 되는 설비다.
대신 더럽게 비싸지만, 내게 썩어 넘치는 게 포인트라 딱히 부담은 느껴지지 않는다.
[상향된 자동 포탑]
고정 포탑 2단 업그레이드와 뭘 먼저 할지 고민을 좀 했는데, 당장 손이 하나인 만큼 자동 포탑의 효율을 늘리기로 했다.
▶▷▶▷▶▷▶▷ [고정 포탑 2단 43:27]
다음 설계도 업글은 고정 포탑 2단계로 해뒀고.
여차하면 남은 '즉시 완료권'을 쓸 수도 있으니.
또각, 또각.
대문 앞, 집 밖을 향하게 지어둔 소각로 주변을 바라보자 파란색 빛으로 '추출기'의 설치 가능 장소가 표시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대문 밖을 바라보게 지어진 소각로.
그 뒤편, 집의 담장 안쪽으로 추출기를 지었다.
우우웅-!
소각로 벽 너머의 자리에 푸른빛 반투명한 큐브들이 생겨나고 이내 바닥에서부터 거대한 화로 같은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
쿠구구구궁-!
벽을 사이에 두고 소각로와 연결된 추출기.
생긴 것만 보자면, 벽난로가 떠오르는 외형이다.
물론, 더 각지고 메카닉한 생김새다만.
조금 살펴봤더니 벽난로의 불을 떼는 곳과 비슷하게 생긴 장소에서 뭔가가 추출되어 나오는 구조로 추측된다.
당장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마는 나머지 설비를 다 짓는 것이 우선이다.
[향상된 자동 포탑: 20000p 0/4]
[850RPM, 초당 14발, 7mm 강화 마탄 사용 / 초당 20p 사용 ]
다음에 지을 것은 향상된 자동 포탑.
'향상된'이라는 말이 붙은 만큼 가성비가 더 좋아졌다. 초당 포인트 소모량도 줄고, RPM과 초당 쏠 수 있는 총알의 수도 늘었다.
사용되는 총알도 '강화 마탄'으로 바뀌었으니.
[자동 포탑: 사용불가 -업그레이드 5000p 2/2]
향상된 자동포탑의 연구가 끝나자 기존에 있던 자동 포탑 두 대가 사용불가로 바뀌었고, 대신 업그레이드라는 기능이 나타났다.
우우우웅-!
시스템 창에 손을 가져다 대자 대문 위에 설치해둔 자동 포탑이 빛 무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위이잉- 철컥.
위이잉- 철컥.
반원형의 하부 지지대부터 보다 견고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견고한 정사각형 형태로 변한 하부 지지대.
쿠구구궁-
그 위로 포탑의 총구를 회전시켜주는 얇은 원기둥이 있는데 이것 또한 더 굵고 단단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철컥-! 철그럭-!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고 게틀링건같이 생긴 발사 부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위이이이이잉―
원통을 회전시켜 총알을 발사하는 형태는 비슷한데, 그 크기가 상당히 커져 있었다.
총구만 아니면 웬 미사일 포대로만 보일 정도니.
『냐아~!!』
로라는 변화한 자동포탑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타앗-!
대문 위로 올라가 뽈뽈거리며 포탑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면 그렇다.
또각, 또각.
신난 로라를 내버려둔 채 나는 나머지 포탑 두 대를 설치하기 위해 집 뒤편으로 움직였다.
이동식 요새로 돌아다니며 깨달은 건데, 막다른 곳을 벗어나면 360도 전체를 커버해줄 필요가 있다.
저능한 좀비들을 잡는 데 문제는 없었다만, 나중에 고블린 왕국이 쳐들어오면 또 모르는 일이니까.
놈들에게는 '공성탑'으로 추측되는 이상한 것들도 있었으니.
게다가 사람의 습격도 고려해야 한다.
초인이 된 인간은 집을 지탱하는 거미다리쯤은 손쉽게 타고 올라올 테니까.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렇게 나머지 자동 포탑 두대를 집 뒤편 코너에 설치해 뒀다.
[향상된 자동 포탑 4/4]
대문 위의 두 대가 집의 전면부를 커버하고, 뒤편 코너마다 설치해둔 나머지 두 대가 혹시 모를 후방 공격을 방어한다.
집의 안전을 확보하니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 디자인 적으로 접근해본다면 조금 처참하지 않나 싶다.
물자가 부족해 창문도 없는 통짜 콘크리트로 지어져 '집'이라기에는 애매한 외형.
그렇다고 '이동식 요새'에 걸맞은 모습이냐?
그것도 아니다.
요새라기에는 어딘가 조잡한 장난감 같아 보이니까.
집을 비우고 물자를 챙겨 오자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처참하다. 최초의 지진이 건물과 함께 상당히 많은 문명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의 폭발은 건물 잔해를 더욱 잘게 으스러트렸고, 내부에 파묻힌 것들까지 더 이상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와 강소현은 '돌 침대'에서 잔다.
푹신한 매트릭스나 담요라도 구해보고자 잔해를 헤집어 봤지만 멀쩡한 것은 단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슬슬 사람 고기든, 몬스터 고기든 이런 것들을 먹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세상은 철저하게 무너졌고, 집 앞의 포탈은 위험요소가 되었다. 허나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기에는 여기보다 안전한 곳이 있을까싶고.
뚜렷한 목표를 잡긴 어려운 상황.
그래도 사람은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시작은 작게 끝은 크게.
물자 파밍을 떠나기는 시기상조고, 당장 내게 주어진 것들을 명확하게 해석하고 응용하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화르르르륵―
가장 먼저 할 것은 '추출기'의 성능 테스트.
화르르르륵―
시체들이 죽은 지 제법 되어서 썩은 내가 장난이 아닌데, 하도 맡아서 그런지 이젠 별 감흥이 없다.
감흥이 없단 말이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고, 전처럼 큰 타격이 없다는 말이다.
「추출중... 2%」
추출기에서 뭐가 나올지는 몰라도 고블린 시체 수백을 소각로에 넣었음에도 고작 2%밖에 차지 않는 걸 보면, 답도 없는 설비가 아닐까 싶은데.
「추출중... 7%」
집앞에 쌓인 게 죄다 시체뿐인데다, 내 집에 지어진 설비의 기능을 모른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에 묵묵히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추출중... 16%」
시체가 십만단위로 있는데 하다 보면 되겠지.
「추출중... 21%」
담장 위에서 자고 있는 로라를 구경하며 소각로에 온갖 것들을 집어넣던 와중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미니맵상에 푸른색 점 두 개가 나타난 건데.
"응?"
바로 그 뒤로 푸른색 점 다섯 개가 더 나타났다.
점의 움직임으로만 보자면 뒤의 다섯 명이 앞의 두 명을 쫓고 있는 모양새다.
이대로 몇 분이면 내 집 앞을 지나가지 않을까 싶은데―
쿠우웅-!
쿠우웅-!
낯선 이들과의 대화를 위해 집을 운전해서 골목 입구까지 이동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대문 위에 달린 향상된 자동 포탑 두 대.
위이이이잉―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위한 고정 포탑 한 대.
옆의 빈자리가 신경 쓰였지만, 그것 보다는 당장 찾아온 불청객들을 맞이하는 게 우선이다.
"누, 누나!!! 저기 이, 이상한 집이다!!"
"살려주세요오오!!!!!"
번개?
푸른빛 스파크가 튀는 이상한 신발을 신은 여고생 그리고 여고생의 팔에 안겨 있는 이상한 잼민이 하나.
도합 두 명의 미성년자가 나의 집을 찾아왔다.
내심 강소현의 지인들이면 어떡하나 했는데, 생판 모르는 남이 나타났다.
아, 여고생인 건 어떻게 아냐고?
교복을 입고 있거든.
새벽 두 시에 일어난 재앙에서 교복을 챙겨 입었을 리는 없고, '그때까지 교복을 왜 입고 있었지?'라는 의문이 든다마는....
"더 다가오면 쏘겠습니다."
내 집에 불청객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린아이여도 마찬가지.
"아, 아저씨! 살려 주세요...."
훌렁-
손을 들고 대문 근처로 다가온 여고생이 대뜸 뒤돌아서 옷을 벗어 버렸다.
'미친년인가…?'싶던 차에 등 뒤로 들어난 커다란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드, 등에 상처 보이시죠?"
"저, 저희 진짜 아무 잘못도 없어요...."
"누나… 우에엥!"
주르르륵-
다짜고짜 상처를 보이면서 울어 재끼는 미성년자 두 명.
"옷부터 입어라."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싶은데.
그래도 저들을 쫓아오던 자들과 거리가 제법 되기 때문에 상황 파악을 먼저 시작했다.
"흐윽… 아, 아저씨 도와주세요...."
"우에에에엥-!!!"
과장된 제스처.
자지러지게 울어 재끼는 잼민이.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투타타타탓-!
"꺄앗-!! 미, 미쳤어요?"
일단 잼민이는 몰라도 저 여자는 절대 여고생일 수가 없다.
나만해도 전용 방어구 '집사복'을 몸에서 안 떼 놓는데, 나보다 적응력이 빠른 애들이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
"누, 누나 들켰는데?"
"아이 씨. 어떻게 알았어요? 하준아, 내가 너무 오바해서 울지 말랬지!!"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이상한 남자아이와 순식간에 태세전환을 해버리는 정신나간 여자.
진짜 미친년인가?
"...클래스가 '고등학생'으로 전직을 한 건가?"
'고등학생'으로 각성한 미친년, 혹은 외형을 속이는 형태의 특이 직업일지도 모른다.
"와, 눈치가 엄청 빠르네요. 아저씨가 입은 이상한 옷도 각성 직업이랑 관련있는 거 맞죠?"
흠, 긍정하는 걸 보면 일단 '고등학생'으로 전직한 건 아닌 것 같고.
"흠, 나는 이게 취향이다만."
"미친... 그 총도 진짜 총이면서… 아저씨 진짜 장난치지 말고, 우리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요?"
점의 이동 속도로 보아 저들을 쫓는 다섯 명이 내 집앞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분 내외.
쿠우웅-!!!
"너희의 자세한 신상정보, 직업 등등 내가 몰라도 될 것까지 다 설명해."
여자애는 몰라도 남자는 확실히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세상이 망했다 해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어린애를 모른척 할 생각은 없다.
허나, 망한 세상에서는 어린 아이를 돕는 다는 좋은 일을 할 예정이여도 위압감을 주는 것이 중요한 법.
쿠구구궁-!
"시, 시체?"
집의 높이를 올려 골목에 쌓인 시체 더미를 보이며 그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구해주면 대가로 뭘 내놓을 수 있는지를 말해봐."
미성년자고 나발이고, 뭐든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것이 좋으니까.
#28. 불청객 (2)
이하린, 이하준.
나이 차가 10살이나 되는 친남매.
누나인 이하린은 20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고 개차반 같은 부모 밑에서 힘들게 살아 왔다고 한다.
세상이 망한 뒤로는 부모와 떨어졌고, 교복 코스프레로 다른 생존자들에게 식량을 나눔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하는데....
"저, 저희 진짜 어렵게 살았어요... 평생 고생만 하다가 세상이 망한 것도 억울한데."
뭐, 워낙에 신파적인 얘기라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거 알아요? 세상이 망하자마자 제가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구구절절한 가정사부터 멸망 후 생존기까지 들은 내 표정이 심드렁하자, 그녀가 곧장 다른 화제를 꺼내 보려 했지만.
"그런 건 됐고, 능력 얘기를 좀 해 봐."
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 네."
이하린의 클래스는 '암살자'다.
최초 전직으로 전사를 골랐고, 이래저래 싸움을 겪으면서 2차 전직으로 '암살자 협회'의 초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암살자 방어구는 '카멜레온 슈트'인데, 외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어요."
뭔 놈에 협회가 이리 많은지.
조만간 정보 수집도 제대로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 한켠에 담아 뒀다.
"잼민이는?"
"재, 재, 재, 재잼 잼민이 아, 아, 아닌데요!"
"쓰읍! 하준아,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만 해."
"끄응...."
동생인 이하준은 10살이다.
어린애가 이런 아포칼립스 속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안타깝게는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어린애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뭔가 본능적으로 꺼려진달까?
"그, 그그, 근데...."
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얘도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저, 저저, 저 아저씨...."
그런 내 시선을 느껴설까?
누나인 이하린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동생이 선천적으로 좀 아파요. 서번트 증후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그저 누나의 영향으로 동생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했을 뿐이지, 장애나 이런 쪽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변명하는 것도 웃긴 꼴이라 마저 말하라는 의미에서 턱을 까딱했다.
"하준아, 천천히 말해보자. 누나랑 연습할 때처럼."
"으, 응."
"저 아저씨 두 살 때 뉴스에서 봤어!"
뭐?
두 살?
"아, 하준이가 한 번 본 건 다 기억하더라구요. 하준아, 뉴스에서 아저씨를 봤다는 게 무슨 말이야?"
조금 자랑스러운 듯한 얼굴로 말하는 누나 이하린.
두 살 때 뉴스에서 뭘 봤다고 그러는지....
"대, 대화재의 아, 악마는 뭘 하고 지내는가!!"
동생 이하준의 답변은 말 그대로 나를 고장나게 만들어 버렸다.
저걸 기억한다고?
"어? 그, 그러면 저 아저씨가... 강순례 할머니 손자?"
강순례.
우리 할머니의 이름이다.
참고로 할머니는 엄청난 부자였다.
여자 혼자서 중견 기업을 일궈낸 희대의 사업가라며 주변에서 치켜세우는 이들도 많았을 정도니.
유명 티브이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책도 몇 권이나 낸 진짜배기 자수성가 부자였다.
어릴 적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집안에서는 사실상 후계자로 통용되고 있었다.
어릴 때는 내가 좀 살가운 성격이었거든.
아무튼 고 2 때 대외 활동으로 스펙도 한 줄 쌓을 겸 친척들과 함께 할머니 공장으로 현장 실습을 갔었는데....
14년 전, 하필 내가 견학을 갔던 그때 할머니의 공장에서 큰 불이 났다.
안전 설비가 잘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장 지하에 설치된 대피실에 모여 들었고.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을 동반한 화재가 퍼져나가서 대피소에는 부상자들도 제법 많이 있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까지 해서 반쯤 포화상태가 된 대피소.
-너, 너는 계약직이잖아!!
재난의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처음에는 하나둘 연고가 없는 자들부터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점점 대피소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주, 준아, 미안하다!
이상하리만치 나를 구석으로 몰아내던 몇몇 어른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였다.
나를 지켜주던 할머니는 없었고, 결국 끝까지 버티던 몇몇 계약직 직원들과 함께 각기 다른 출구를 통해서 대피소 밖으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쫓겨난 것은 나였다.
나를 쫓아낸 것은 큰집 내외와 사촌들이었다.
-문은 닫고 가!! 그쪽으로도 불이 몰아칠 수도 있으니.
끼이익- 쿠우웅-!
거대한 대피소의 폐쇄구를 닫고 나는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건설 결함인지 뭔지는 몰라도 대피소는 결국 화염 속에 휩싸여 무너져 버렸고 다른 출구로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끔찍한 불길을 뚫으며 겨우겨우 살아남은 나의 등에는 아직도 그때의 흔적이 커다랗게 남아있다.
허나, 선명하게 남은 CCTV 영상은 나를 생존자자가 아닌 불구덩이에 다른 사람들을 생매장시킨 악마로 묘사했으며, 할머니는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게 이상하기만 했는데, 결국 살아남은 것은 나 혼자뿐이었기에 확인할 방법은 따로 없었다.
"아, 아니죠?"
짧은 회상에 잠긴 나를 불러 세우는 이하린의 목소리.
잊혀졌다 싶을 때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씩 나타나네.
지긋지긋하게.
"맞으면 뭐? 틀리면 어떻고."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설명을 할 생각이 없을 정도로 나는 무뎌져 버렸다.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 아니...."
막말로 지들이 뭐 어쩔 건데.
대부분은 내 얼굴뿐만 아니라 그 사건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이제는 사회적 평판 따위는 필요 없는 아포칼립스의 세상이다.
"...그렇네요. 저는 그때 어려서 무슨 일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그 법적으로도 무죄인 걸로 알아요."
초등학생 하나.
막 20대에 접어든 여자 하나.
"아저씨... 괜한 소리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저희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내 집에 들일 생각은 없으나, 어린 남매가 멸망한 세상 속에서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건 사실이다.
"누, 누나. 무서."
말을 한번에 이어서 하지 못하는 어눌한 어린아이.
서번트 증후군은 고기능 자폐나 이런 종류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고작 두 살 때 봤던 뉴스를 기억하는 거겠지.
뭐 어쨌든, 그건 그거고.
"그래서 동생은 클래스가 뭐야?"
알아야 할 건 알아야지.
* * *
서걱-
"하아, 겨우 다 잡았네. 개같은 년. 좀비를 이렇게 처 넘기고 가?"
이하린과 이하준을 쫓던 성룡파의 조직원들.
그들은 이하린이 떠넘긴 좀비 무리와 전투를 벌였다.
"킁, 킁."
"형님, 냄새가 이쪽인뎁쇼."
"거리는?"
"1키로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하, 고년 참 재빠르네."
성룡파의 조직원들은 식량으로 쓸 인간과 여자를 조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근데 형님이 애새끼는 왜 잡아오라 하는 거야? 우리 애들은 안 먹는 거 아니었어?"
"그게, 철두 행님이 식자재 감지라는 스킬로 알아봤다는데, 꼬마애가 뭐 엄청난 능력을 가졌다는 것 같습니다. 꼭 먹어둬야 한다는뎁쇼."
"2차 전직이 대체 뭐길래 다들 그런 해괴한 스킬들을 얻었는지."
"행님도 곧 2차 전직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왜 머리 좀 쓰는 애들이 모여서 나름 연구란 걸 하고 있으니까요."
"씨이팔. 이러다 2차 전직 못한 놈들이 더 적어지는 거 아니야?"
"너무 걱정 마십쇼. 킁, 킁."
조직원 정강훈이 사람을 먹고 흡수한 야생의 추격자 스킬을 발동한다.
냄새를 통해 지정 대상을 추격할 수 있는 스킬로 소수로 떨어진 사람들을 노리기에 매우 적합한 스킬이다.
"이년 지쳤나 본데요? 냄새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기야, 등을 그리 크게 베였는데 튀는 데도 한계가 있겠지. 근데 형님들이 여자애는 어떡하랬지?"
"목숨만 붙여 놓으면 저희 마음대로 해도 된답니다."
씨익.
"나 먼저다."
"당연히 형님 먼저죠."
음흉한 미소를 짓는 다섯 명의 조직원들.
그들이 이준의 집이 있는 2차선 도로에 들어섰다.
"정지! 정호, 먼저 확인해 봐."
이준의 집까지 남은 거리는 500m 내외.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성룡파 팀장 김만식이 조직원을 통해 정찰을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한 조직원 한정호.
그 역시도 사람을 먹고 흡수한 '천리안'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조심하는 것 아닙니까?"
"저년 무턱대고 따라가다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투명해지는 스킬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해봐라. 그러니 시간은 좀 걸려도, 확실하게 정찰부터 하고 간다."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명상을 하던 한정호가 눈을 떴다.
"뭐 좀 보여?"
"이게 남한테 흡수한 스킬이라 효율이 좀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래도 볼 건 다 봤습니다. 웬 이상한 정장 입은 놈이 애들을 숨겨주는 것 같은데...."
"뭔데?"
한참을 뜸을 들이다 입을 연 한정호.
"그게, 그 담장까지 둘러진 집이 막 공중에 떠있지 말입니다. 사방이 시체 천지고요."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진 와중에 멀쩡한 형체를 유지한 채 공중에 떠 있는 이준의 집.
"그... 또…."
너무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한정호는 할 말을 잃었다.
퍼억-!
"아, 새끼 더럽게 뜸들이네. 그냥 빨리 말해."
"끄윽… 죄송합니다. 그 집이 무슨 요새 같은데요? 기관총 같은 게 달려 있습니다. 그 위에 이상한 정장을 입은 놈이 앉아 있습니다. 아마 집주인이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선에서 괜히 무리 말고 형님한테 보고부터 하자."
아포칼립스가 온 세계의 악인들은 보다 신중해졌고 철저해졌다.
무식하게 힘으로 밀고 가자기에는 너도나도 각성자가 되어 초인적인 능력을 얻어 버렸으니.
* * *
"아저씨, 진짜 여기 있으라고요?"
"자동 포탑은 움직이는 건 다 쏘고 보니까, 밖으로 나가지만 마."
공중에 2m 정도 띄워둔 '이동식 요새'.
그 아래의 공간에 이하린과 이하준이 숨겨 줬다.
위이이이잉―
5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춘 파란색 점 다섯 개.
제법 신중한 놈들인지 폐허 더미 뒤에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있는 중이다.
"너희 쫓아왔다는 놈들. 혹시 탐지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나?"
"모, 몰라요. 은신처에서 나오자마자 쫓겨 온 거라...."
등에 난 커다란 상처.
고등학생이라는 말부터 울어재끼는 것까지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지만, 저 상처만은 진짜다.
조금 이상한 성격이여도 어린애 둘이서 고생하고 있다는 건 사실인 것 같고.
게다가 동생 쪽은 꽤나 쓸만한 직업을 가진 것 같으니.
"하준이라 했나?"
"네, 네에...."
소통에 조금 문제가 있긴 하다만.
"저한테 얘기하세요. 저랑은 대화가 잘되니까요."
"그래, 동생도 마탑이나 그 학회라는 곳에서 초대 같은 걸 받지 않았어?"
이하준의 직업은 '스크롤 제작자'.
누나인 이하린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 물품 제작에 특화된 '랑그라시안 학파'에서 2차 전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근데, 왜 안 보내?"
"그, 어떤지도 잘 모르는데... 함부로 동생을 어떻게 보내요."
강소현의 스킬과 스탯이 봉인되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하준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알 필요 없고. 이제 안전해졌으니까 갈 길 가라."
결국 푸른 점은 그 자리에 머물다가 사라져버렸다.
쫄보거나 지나치게 신중한 놈들인 것 같은데, 아무튼 위협이 사라졌으니 이하린 남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끄응... 아저씨 집에 들여보내주면 안 돼요?"
"안 된다."
세상이 망하고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멸망에 충분히 적응한 위험요소라고 봐도 무방할테니.
어리고 불쌍한 남매라고 함부로 내 집에 들일 수는 없다.
* * *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398:00」
"미친년인가...."
첫 만남부터 옷을 벗어 재끼고 상처를 들이밀며 동정심을 유발하던 이하린 이하준 남매.
그런 그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은 내집 바로 건너편인 2차선 도로에 있는 폐허였다.
"아저씨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저 멀리서 내게 손을 흔들어 대고 있는데, 뭐 저리 염치없는 사람이 있나 싶다.
어째 순순히 간다 싶었더니….
"먹을 것 좀 주시면 안 돼요?"
어느샌가 집 앞에 다가온 이하린.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것들이 좀 있는데, 마침 시킬 일도 있겠다 싶어 거래를 제안했다.
"쪼잔해!"
화르르르륵―
「추출중... 23%」
저 남매의 등장으로 멈춰 두었던 추출기 활용이 재개되었다. 홀로 집을 지키며 로라를 돌보는 내가 시체 운반까지 하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절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다.
시체 소각로에 고블린을 집어넣으면 추출기의 %가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대체 저기서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다.
"휴우, 아저씨 거기 앉아만 있으면 안 심심해요?"
예상 외로 성실하게 일해 주던 이하린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도 마침 고정 포탑에 앉아 경계를 서느라 지루했던 참이라,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냥 잡담은 아니고, 나름 건실한 정보 교환이었다.
세상이 망하고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쓰레기가 되었다.
즉, 우리는 정보에 메말라 있다는 뜻이다.
대화의 물고가 트이자마자 서로에게 부족했던 정보들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걸 무슨 전용 무기라고 주는지...."
암살자의 무기는 엄청 작은 단도다.
이하린이 꺼내서 보여줬는데 칼의 크기가 과도보다 작은 사이즈였다.
"이럴 거면 그냥 전직 거절할 걸 그랬어요."
그다음 화제는 다른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류 보호조치 해제 카운트가 나타날 때 있던 폭발로 대부분의 물자들이 소실되었고,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블린을 먹을 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는데.
"아, 저도 조금 먹어 봤는데 진짜 역겨운 맛이에요...."
"고블린을?"
강소현의 지인들도 저걸 먹었었다.
아포칼립스를 맞고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야생의 바바리안들 뿐만이 아니었다.
"아, 네. '숨겨진 페널티1'이라고 써져 있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맛'이 아닐까 싶어요. 진짜 끔찍하게 맛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사람 고기'의 페널티는 무엇일까?
"그 이태초 근처에서 자경단 활동 같은 걸 하는 언니들한테 들었는데, 사람 고기를 먹으면 바보가 된다는 것 같아요. 대신 엄청 세진대요."
강해지는 대신 바보가 된다니....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면, 사람 고기를 골랐더라도 함부로 먹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란 존재가 생각 이상으로 멍청한 짓을 많이 한다는 거지만.
"근데, 아저씨 집 뒤에 포탈은 뭐예요?"
물론 나만 정보를 얻은 건 아니다.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니까.
"고블린들의 근원이 저곳이다."
'암살자'라면 은신 계열의 뭔가 있지 않겠어?
당장 내가 집을 비우고 포탈을 들어가는 것에는 좀 문제가 많으니, 기왕 근처에 자리 잡은 이하린이 대신 포탈 속을 정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닝 포인트존이자 고블린의 왕국이 자리잡은 포탈.
느낌상 뭔가 엄청난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와아... 그걸 저 보고 다녀오라고요?"
「추출중... 100%」
"당장 지금은 가라는 건 아니야. 우선 동생이랑 가서 밥이나 먹고 다음에 얘기하자고."
이하린에게 식량을 좀 건네주고 축객령을 내렸다.
조금 급하게 쫓아낸 감이 있다마는....
100%를 채운 추출기.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대체 '고블린 시체에서 무엇이 추출되었는가?'이니까.
#29. 추출기
집앞 포탈 속에 있는 고블린 왕국.
그곳에서 고블린 놈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 세상 곳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을 열고 있다.
소통이란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라 집앞 포탈 속에 자리 잡은 고블린들이 어디까지 영향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놈들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무턱대고 인간을 공격하며, 납치하고 이상한 주술의 제물로 삼는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니까.
그들이 쓰는 주술이나 '몬스터 웨이브'에서 보이는 공격성을 고려한다면, 고블린들의 주목적은 '사람'을 수급해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류에 대한 악의로 똘똘뭉친 고블린들의 시체를 태워 100%를 채운 추출기.
그런 놈들에게서 대체 무엇을 추출하고, 그렇게 추출되어 나온 것은 무엇일까?
뭐가 됐건, 나의 사기적인 클래스 '집사'를 생각해보면 쓸만한 것임은 분명할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낡은 주전자가 끓는 듯한 소리를 뿜어내는 추출기.
사람의 입 모양을 닮은 추출기의 입구에서는 불길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끼이익-
집 안쪽 담장에 설치해둔 추출기의 문을 열자.
쉬이이이익-!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뿌연 안개가 흩어져 나오고 풍선 같은 붉은 막에 싸인 거대한 덩어리와 함께 아이템 이름이 써진 홀로그램 화면이 나타났다.
「고블린의 진득한 악의」
「하급마석 x 2000」
이름부터가 당장 써먹을 데도 없어 보이는 것들 같아서 잔뜩 실망감이 밀려오던 차에.
파앗-!
눈앞에 푸른색의 반투명한 화면이 떠올랐다.
「대체할 아이템을 골라주세요.」
그치, 내가 무려 집사씩이나 되는데 쓸모없는 걸 줄 리가 없지.
「건설자재 꾸러미」
「황금 고블린 추적기」
「대체 없이 추출된 아이템 획득」
나타난 선택지는 총 세 가지.
진득한 악의니 하급 마석이니 하는 것들은 뭔지도 모르겠고, 쓰는 방법도 모르겠으니, 3번 선택지는 우선 거르고.
당장 당면한 목표인 '집 강화'를 위해서는 1번 선택지 '건설 자재 꾸러미'를 고르는 게 맞다.
연이은 지진과 폭발로 건물 잔해들도 워낙 많이 부서져서 쓸만한 재료를 건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
그렇지만 집 앞 포탈 속의 고블린 왕국을 떠올려본다면 '황금 고블린 추적기'라는 아이템을 골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멸망한 세계는 게임과 같이 판타지 요소가 강해졌다.
그리고 '황금 고블린'은 엄청난 보상을 전제로 나타타는 희귀한 존재로 그려진다.
게임에서나 보던 몬스터들이 실제 세상에 나타난 데다, '황금 고블린' 같은 말까지 보이는 걸 보면 의외로 게임 속 괴물들은 현실고증이 제법 잘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성적으로는 '건절 자재 꾸러미'를 골라야겠지만, 가슴은 '황금 고블린 추적기'를 고르라고 한다.
그야, 황금 고블린 아닌가?
말 그대로 득템 혹은 엄청난 기연과 같은 것을 보장해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그래도 로라와 나의 안전을 고려한다면 집을 강화하는 게 맞는 판단이겠지.
"하아...."
둘 다 너무 괜찮은 선택지라 머리로 선택지를 정했으면서도 도무지 선택지 창으로 손이 안 가는 상황.
『냐아~!』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 내게 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라, 왜 그래? 거기 뭐 있어?"
담장 위에 있던 로라의 시선을 따라가자 건너편에 자리 잡은 이하린 이하진 남매의 은신처가 보인다.
"...아!"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장은 집 강화를 위해 '건설 자재 꾸러미'를 고르고 이하린을 불러서 추출기를 다시 100%로 채우면 되겠구나.
왜 이 쉬운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고양이가 영물 소리를 듣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20살짜리 어린애를 데려다 시체 소각로에 고블린 시체를 채워 넣게 시키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겠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내게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오히려 저 남매가 한 짓거리를 생각해보면 고블린 시체 운반 정도는 너무 가볍지 않나 싶을 정도니까.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괴한들에게 쫓기던 걸 구해줬더니, 곧장 내 집 바로 건너편에 자리 잡는 후안무치한 짓으로 보답을 해준 꼴이니.
저들을 쫓던 자들이 다시 온다면 내게도 피해가 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뭐, 대신 죽도록 굴려야지."
「건설자재 꾸러미」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자 추출기 안에 들어 있던 붉은 막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 든 마석과 검은색 진액들이 붉은 막과 뒤섞이고 순식간에 작아진다.
우우웅-!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덩어리로 변하고는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복주머니'와 비슷한 생김새의 작은 파우치였다.
「건설자재 꾸러미」
파우치를 바라보자 위에 아이템 이름이 떠오른다.
건설 자재가 들었다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주머니.
허나, 마법이나 스킬과 같은 이상한 현상들을 직접 겪어온 나이기에 큰 우려는 들지 않았다.
인벤토리의 아공간과 같이 내부에 확장된 공간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
스윽-
아니나 다를까 건설자재 꾸러미에 손을 가져다 대자 머릿속에 내부에 들어있는 자재의 목록들이 흘러들어 왔다.
[석재 x 200]
[철재 x 200]
[목재 x 200]
스킬에서 '벽 걸설'을 사용해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자재는 종류에 상관없이 개당 5x1m 크기의 벽을 지을 수 있는 용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만 하면 집을 집답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할 것 같으니, 다음에 할 것은 설계도의 연구가 끝난 고정 포탑의 2단계 업그레이드다.
[고정 포탑 2단계 업그레이드: 500,000p, 0/2]
[1200RPM, 초당 20발, 7mm 강화 마탄 사용]
[5,000p 지급 시 소형 미사일 발사]
[능력치 소진 시 초당 10p 차감]
내 옆에 왜 고블린 왕국이 있는가 했더니, 그 이유가 스킬에 들어 있었다.
설비가 해금될수록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물론 그 금액에 납득이 갈 정도의 성능을 지니고 있겠지만.
총알도 더 빨리 쏘고 5,000p로 소형 미사일까지 발사할 수 있는데다가 능력치 소진 시 차감되는 포인트의 양도 동일하다.
우우우웅-!
고정 포탑의 업그레이드 버튼을 누르자 대문 좌우에 자리한 고정 포탑이 푸른 빛 장막에 둘러싸였다.
「고정 포탑 2단계 업그레이드 01:00」
전처럼 지어지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한 빛을 뿜어내는 장막.
포탑이 지어지는 동안 할 일도 많으니, 이제부터는 열심히 몸을 움직일 차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