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튜토리얼 종료
"포, 포탑 키세요!!!"
아, 맞다.
포탑을 꺼뒀지.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멈춰 있던 포탑을 작동시켰다.
포탑을 작동시키고 나서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강소현이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 차 있다.
새로운 아이템일까?
혹은 스킬?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생각만 한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강소현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끔찍한 세상에서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 하나하나가 내게 귀중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허나, 강소현의 대답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그냥 걸어왔는데요...."
포탑이 토해내는 총성을 뚫고 또렷하게 채 들려오는 강소현의 말.
수만 고블린 대군을 뚫고 온 비결이 고작 '걷기'라니.
너무도 안 믿기지 않는가?
"아니, 누가 그걸 모릅니까? 대체 무슨 방법을 썼냐는 말입―"
24시간 넘게 피와 살점만이 가득한 고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젠틀한 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예민한 투의 말이 나와 버렸고, 강소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단박에 내 말을 끊어버렸다.
"진짜 걸어왔어요. 저 고블린들은 저는 신경도 쓰지 않던데요?"
그러고는 이곳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내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서웠죠. 그런데 제가 코앞에 서 있어도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마치 이준 씨한테 직진으로 돌격하는 거에 미쳐 있는 것 같달까...."
내게 '고블린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라는 페널티라도 주어진 게 아닐까 싶었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를 좀 해봤는데요. 이준 씨는 능력이 강한만큼 이상할 정도로 많은 몬스터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페널티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능력이 강할수록 몬스터가 많이 나온다.
이 경우 '내 몫'의 몬스터들은 죽어라 나만 바라보고 오직 나만을 향해서만 달려든다고 한다.
"저희도 이번에 인당 100마리 정도씩 나왔어요. 특이한 능력으로 각성한 사람들은 더 많이 나왔구요. 힘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도 고블린들이 그 사람만 보고 달려드니까, 주변에서 다 눈치를 채게 되더라고요."
나와는 상관없는 고블린들을 마주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다들 자기한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냅다 거리를 벌리더라고요. 힘을 숨기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힘을 사용하게 됐죠."
그 답은 강소현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동물의 본능과도 같이 인간은 효율을 추구한다.
"와, 진짜 신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많더라고요."
나 말고도 특이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템을 감지하는 택배기사뿐만 아니라, 이태초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특출난 직업을 얻어낸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고 한다.
"제가 확실하게 본 거는 하늘에 둥둥 떠다니면서 구슬을 뿌리는 사람이랑 몸이 불처럼 변하는 사람이었어요. 이준 씨 능력처럼 '저거 완전 사긴데?' 싶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만 해도 꽤나 좋아 보이더라고요."
공중 부양 후 폭발하는 구슬 투척.
피격 시 화염으로 변하는 이능.
아무래도 이 세상은 보다 복잡해지려는 모양이다.
각성, 스킬, 아이템 등등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도무지 기준을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은 2차 전직이라 부르던데, 저도 그런 게 생겼어요. 개나소나 다 생긴 건 아니더라고요. 다 해봐야 열 명은 되려나?"
게다가 특이한 클래스를 얻게 될 예정인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무슨 게임도 아니고 2차 전직은 또 무슨 말인지....
"아직은 뭘 고를 순 없고 무슨 심사 중이라는 메시지만 나오지만요."
강소현에게 더 많은 정보를 듣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만, 지금의 컨디션으로 이 이상 머리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데 지금 시체 쌓인 거 장난 아니던데, 저걸 직접 치우자고 하실 건 아니죠?"
쏟아지는 포화소리를 들으며 강소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도 더 이상은 한계가 왔다.
『냐아....』
강소현이 오기 전까지 골골거리며 내 손을 열심히 핥아주던 로라도 덩달아서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아기 고양이의 평균 수면 시간은 16~20시간이라는데,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강소현이 오기 직전부터 한계가 왔는지 나의 무릎팍에 쓰러져 반쯤 잠들어 있던 로라.
『냐아….』
검은색 털뭉치가 무릎 위에서 꼬물거리면서 고개를 치켜든다. 그러고는 마치 자기는 괜찮다는 듯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들려줬다.
이에 화답하듯이 나도 로라를 안아주고 싶지만, 내 몸도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니―
"제 대신 포탑 좀 부탁합니다."
털썩.
강소현에게 고정 포탑의 핸들을 넘기고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이이익!! 일어나!!! 이 미친놈아!!!"
퍼억-!
로라를 끌어안고 포탑 아래에서 곯아떨어진 나와 로라. 그런 나를 깨우는 것은 잔뜩 악을 쓰는 강소현 비명 소리와 묵직한 발길질이었다.
30시간 넘게 고정 포탑에 앉아 있는 것은 제법 고된 일이었기에, 이렇게 내가 쓰러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단순히 앉아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자동 포탑을 온오프 하면서 포인트 수급에 신경 쓰고, 높아지는 시체 더미에 맞춰 현관을 오가며 집의 높이를 조절하는 데다가―
▷▶▷▶▷▶▷▶ [생활 환경 개선 연구 완료]
추가된 스킬 '설계도'에서 다른 기능들을 해금하는 일까지 관리해야 했으니.
게다가 그사이에 로라까지 돌봤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타-!!
투타타타타타타타타-!!
내심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기를 바랐지마는 아직도 총성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걸 보면 이 이상 더 자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남은 몬스터의 수를 확인했다.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2,681마리」
내 기억으로 나 혼자서 시간당 약 3천 마리를 잡았던 것 같다.
"한, 세 시간 정도 잤어요. 빨리 핸들이나 잡아요!!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초심자인 강소현이 3시간 동안 잡아낸 고블린의 숫자는 대략 7~8천 마리.
강소현 그녀는 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다.
"아우, 진짜 이게 뭔 고생이야!!! 왜 포탑 한 대는 못 쓰게 해놔서!!"
치이이익-
나처럼 포탑을 번갈아가면서 쏘지도 못한 강소현이 대체 어떻게 저만큼의 고블린을 잡았을까?
"끄으윽... 힐-!"
그 해답은 까맣게 타버린 손에 힐을 쓰면서 포탑의 핸들을 당기는 강소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좀비한테 공격받지 않는다 해도 저 많은 좀비와 고블린들은 헤치고 온 강소현도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곤하긴 할 텐데.
것도 그녀 몫의 몬스터 웨이브 3를 마치고서 이곳까지 온 것이니까.
게다가 화상을 입어 가면서 나 대신 내 몫의 고블린들을 해치워준 게 아닌가?
"고맙습니다. 강소현 씨도 몬스터 웨이브 3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털썩-
감사인사를 건네고 포탑에 앉았는데, 강소현 그녀는 여전히 두 번째 고정 포탑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몬스터보다는 거기 있던 사람들 때문에 더 피곤하네요."
"왜―"
'왜 내려가서 쉬지 않습니까?'라고 물어보려 했는데, 내 질문보다는 강소현의 말이 더 빨랐다.
"뭐 해요? 안 쏘고. 얼마나 남았는진 몰라도, 교대로 쏘다 보면 조금 더 할 만할 거예요."
그녀도 고된 시간을 보냈을 게 뻔한데, 이걸 끝까지 같이해주겠다니....
아직 그녀의 손도 다 회복되지 않았건만.
"감사합니다."
그녀의 듬직한 모습에 감동이 밀려온다.
"고맙긴요. 곧 얹혀살게 될 입장인데, 입주 예정자로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요."
이런 걸 두고 의리라고 불러야겠지?
아포칼립스 사이에서 이런 의리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만.
아니, 애초에 의리라는 단어는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라 생각하던 나였으니까.
"조금 쉬시죠. 제가 먼저 쏘겠습니다."
투타타타타타타탓-!
투타타타타타타탓-!
다시금 포탑에 앉았고 쉼 없이 들러오는 총성이 나의 복귀를 반기고 있다.
사람이 둘이 되니 전투 자체는 더욱 쉬워졌다.
"교대!!"
포탑이 가열될 때마다 서로에게 차례를 넘긴다.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512마리」
"1,500!! 교대!"
반복되는 교대 작업과 착실하게 줄어가는 고블린의 숫자.
"1,100!"
그리고 고블린의 수가 줄어들수록 내 마음 한켠에는 불암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700!"
고블린의 10만 대군.
그 끝에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괴물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10만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이렇게 쉽게 끝나는 게 맞는지에 대한 걱정에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교대!!! 정신 차려요 이준 씨!"
밀려오는 걱정과 피곤에 절어 둔해진 내가 잠시 고장나면, 강소현이 곧장 소리쳐서 나를 일깨워 준다.
"이이이익!!!"
"강소현 씨!!! 정신 붙잡고 힘내요! 이제 300마리 남았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
지속적으로 악을 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강소현도 마음속으로는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끝에 거대한 괴물이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걱정과는 별개로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교대!"
교대로 포탑을 쏜다.
"이준 씨, 집중!!"
피와 살점만이 낭자한 이 지옥에서 무너지는 정신을 서로가 붙잡아 준다.
"강소현 씨, 졸면 안 됩니다!!"
사람이 둘이면 효율이 배가 아닌 곱절이 된다.
혼자서도 어찌저찌 해내기야 했겠지만, 강소현 수의사가 더해지니 모든 것들이 훨씬 수월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화상 없이 고정 포탑을 쏘고 로라의 도움 없이도 잠과 피로로부터 나를 깨워줄 사람이 있으니.
『고로로로롱~』
덕분에 로라도 더 이상 무리하는 일 없이 무릎 위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159마리」
클리어를 눈앞에 두고 있건만 여전히 이변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고블린 챔피언과 고블린만 나오다 끝이 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50마리」
"50마리!!"
손에서 땀이 비오듯이 쏟아진다.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10마리!"
부디 이대로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하며.
「몬스터 웨이브 3. 남은 고블린 0마리」
"다, 다 잡았습니다!"
"이게 끝이에요?"
30시간 넘게 지속된 10만 고블린 대군과의 전투.
'그 끝에는 강대한 적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우리의 추측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이가 없네."
파앗-!
"그래도 무사히 끝난 게 어디예요."
"하아, 이거 시작은 10만 마리였습니다."
"와... 내심 만 단위라고 생각은 했는데, 10만이나 나왔을 줄은 몰랐네요."
10만 고블린 대군을 해치운 감상이라도 내뱉고 싶었건만.
"이, 이거 보여요?"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곧장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인데.
파앗-!
「몬스터 웨이브 3 종료」
「인벤토리에 보상이 지급됩니다」
「인류의 보호조치가 일부 해제됩니다」
'보입니다.'라며 대답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해 버렸다.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누던 강소현도 무릎 위에서 골골거리며 자고 있던 로라까지 모든 것들이 무채색으로 변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완벽한 질서의 신이 자리잡은 지구. 〉
〈 진짜 세상은 혼돈과 무법, 우연과 기연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
〈 그 속에서 나는 완벽한 질서와 법칙을 추구했습니다. 〉
그리고 자칭 '신'으로 추측되는 자의 개소리가 시작되었다.
〈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하는 법. 〉
〈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발생한 몬스터들에게 생명체들이 죽어나서는 안 된다. 〉
〈 괴물들은 차원을 갉아 먹는 악의 덩어리다. 〉
〈 나는 무작위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정해진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 그렇게 이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
지구, 아니 우주까지 더해서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며 언젠가는 100% 규명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시뮬레이션이론이니 뭐니 하는 말까지 나돌 정도이니 대부분은 다 이해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말이다.
이런 것들을 전부 신이 만들었다는 것은 별개의 얘기지만.
〈 허나, 본래 진짜 세상에는 법칙도 질서도 안정도 평화도 없는 법. 〉
〈 만들어진 세상의 인간들이어도 지구를 사랑했습니다. 〉
〈 최소한의 보호. 최대한의 진화. 인류는 이를 이겨낼 힘을 얻었습니다. 〉
〈 더 이상의 간섭은 불가합니다. 〉
〈 열심히 살아남아 이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를 세워주십시오. 나의 아이들이여. 〉
〈 질서와 법칙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그대들의 여정에 빛이 있기를. 〉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던 자칭 신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
[세상에 정해진 법칙이란 없다.]
[신조차도 허상에 불과하니.]
[그러니 인간, 불완전한 선택지를 골라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칭 신처럼 무언가 초월적인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는데, 이번 것은 느낌 자체가 자칭 신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놈이 요구하는 것은 '불완전한 선택'이라는 이름의 선택지를 고를 것.
파앗-!
「몬스터 고기」
도축된 고블린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눈앞에 떠오른다.
파앗-!
「인간 고기」
도축된 사람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눈앞에 떠오른다.
「몬스터 고기」
「몬스터를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몬스터를 활용하는 법을 알게 된다」
「숨겨진 페널티: 1」
그리고 카드 아래에 설명창이 나타났다.
「인간 고기」
「인간을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다」
「먹은 인간의 힘을 일부 획득할 수 있다」
「숨겨진 페널티: 1」
몬스터를 먹고 몬스터를 활용하는 방법을 얻게 된다는 1번 선택지 '몬스터 고기'.
사람을 먹고 사람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2번 선택지 '인간 고기'.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다.
#20. 이상현상
콰르르르르―
"흐읍!"
멈춰 있던 세계가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억! 허억.... 이, 이준 씨? 대체 이게 뭔...."
그녀도 나랑 같은 현상을 겪은 모양이다.
주춤-
"강소현 씨는 뭘 고르셨는지."
"버, 벌써 골랐어요? 아니죠?"
뒷걸음질 치며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강소현.
가끔씩 강소현 수의사는 나를 무슨 미친놈 보듯이 보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또각, 또각.
"오, 오지 마요!!"
참교육각이 섰으니 조금 겁을 줘 볼까 한다.
철퍼덕.
"아, 아니죠?"
조금 심하게 겁에 질려 보이는 강소현을 보니 그녀를 놀릴 생각도 금세 사라져버렸지만.
"하아... 제가 대체 뭘로 보입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고른 것은 1번 선택지인 '몬스터 고기'다.
"휴우… 왜 사람 겁주고 그래요!!!"
"사람을 식인종으로 단정 짓고 보시는 분이, 어째 겁주는 걸로 뭐라 하십니까?"
"아, 아니. 이준 씨는 좀… 효율을 중요시하는 성격 같아서…."
"제가 효율충이다 이 말이십니까?"
"아, 아뇨. 충이 아니라. 효율적인 사람이라고요."
그렇다.
나는 효율적인 사람이다.
허나 아무리 득이 크다고 해도 사람 고기를 먹을 정도의 병신은 아니다만.
"아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 선택지에 답은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녀의 눈에는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아, 그, 그렇죠.... 미안해요.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고 막 뭘 고르라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강소현 씨도 몬스터 고기를 고르셨나요?"
"그 숨겨진 페널티 때문에 아직 고르진 않았는데...."
"뻔한 걸 뭘 고민하셔요. 딱 봐도 악마 같은 놈이 수작질 부리는 건데."
"아... 이제 골랐어요. 근데 이제 비축식량이 다 떨어지면 우리는 저 고블린 같은 걸 먹고 살아야 할까요?"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댄 강소현이 내게 묻는다.
'몬스터 고기'를 먹고 사는 것이 '사람 고기'를 먹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싶은데.
"고블린 고기를 먹으라니.... 이준 씨는 저것들을 먹을 자신 있어요?"
"그럴 리가요."
때마침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생겼으니, 최소 내 집안에서만은 '사람을 먹냐 몬스터를 먹냐'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2,354,321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6」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 [주방 설비]
몬스터 웨이브 중간에 연구를 진행했던 주방 설비의 '설계도'. 그리고 타이밍 좋게 레벨업의 보상으로 추가된 스킬.
[주거지 건설]
[수경 재배 설비: 1,000,000p] New!
비축식량이 떨어지고 나서부터 우리의 식량은 수경 재배 설비를 이용해 만들어진 신선한 야채가 될 것이다.
100만 포인트나 하는 만큼 제법 기대되는 설비랄까?
물론, 그 전에 집부터 완성시켜야 하겠지만.
"아니, 진짜 능력 이름이 뭐예요?"
"집사입니다만."
"움직이는 집, 포탑에 식량 재배까지. 뭐 이런 사기적인 게 다 있나 싶네요."
"본래 집사란 그런 존재입니다."
이제부터는 할 일이 매우 많다.
강소현 그녀도 내 집에 빌붙어 살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고.
"우선, 전력 설비를 지으려면 전선을 모아야 합니다. 저는 지붕을 지을 벽돌이나 철근 잔해들을 모아올테니, 강소현 씨는 전선을 모아 오시죠."
"여, 여기를 내려가라고요?"
담장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강소현의 의문.
"이거 높이는 못 낮춰요?"
"고블린 시체에 깔려 죽고 싶으시다면야...."
산처럼 쌓인 고블린 10만 대군의 시체.
'이동식 요새'를 작동해 집의 높이를 높여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있었으면 그대로 시체 더미에 깔려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아, 그렇네요. 가, 같이 갈 거죠?"
당연한 말을.
또각, 또각.
"조심해서 따라 오시죠."
소각로고 나발이고 이 10만 구의 고블린 사체를 태워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둘이서 직접 한다치면 못해도 수십 일 이상은 걸리지 않을까 싶고.
"갑자기 전력설비는 왜 지으시게요?"
10만 구의 사체는 5m 높이의 담장조차 냄새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게 되었다.
지붕을 짓는다 해도 10만이 넘는 고블린들이 뿜어내는 악취를 막아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나중에 환기설비 같은 게 열리면 또 모르겠지만.
"이 시체 치울 자신 있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이 시체들이 썩기 시작하면 냄새를 감당할 자신은 있으세요?"
"미쳤어요?"
"그렇죠. 그래서 집을 이동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지붕도 짓고, 전선도 깔아둬야 할 것 같네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다.
절이 이 골목길이고 중이 내 집이라면, 나는 기꺼이 떠날 생각이다.
"와… 이 거미다리 같은 게 왜있나 했는데, 집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게 좀 충격적이네요."
"그렇죠. 그보다 강소현 씨 2차 전직 얘기 좀 해주시죠."
아까부터 뜸을 들이며 말을 하지 않던 강소현의 2차 전직. 내심 궁금한 것도 사실이라 분위기를 탄 김에 그녀에게 물었다.
"아… 그…."
"뜸들이지 말고 말해 보시죠."
"...."
대체 무슨 대단한 직업을 얻었길래 이렇게까지 뜸을 들인단 말인가?
"아직 심사 중이라는데...."
폭삭 무너진 문명 속에서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클래스 전직에 대한 '심사'를 한단 말인가?
"하다못해 누가 심사를 하는지, 아니면 대체 뭘 심사하는지라도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지, 진짜 알려드리고 싶은데.... 심사 중이라는 메시지 아래에 상세 내용 발설 시 사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좀 어려울 것 같아요."
흐음.
궁금해 미치겠는데....
아직까지 이 상태창이니 시스템이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테스트 삼아 아주 사알짝 말하는 것 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싶은데...."
"미, 미쳤어요? 애초에 '사망'이라는 전제가 달린 메시지는 처음 나왔는데, 뭔 놈에 테스트예요!!!"
하긴.
내 궁금증을 풀자고 강소현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네.
"미안합니다. 호기심이 조금 지나쳤나 봅니다."
"...뭔가 변하면 알아서 말해줄테니까 더 이상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각성한 인간을 '심사'하는 미지의 존재.
무채색으로 변한 세상에서 들려온 이상한 목소리들.
"으음...."
뭔가 감이 오는 게 있어 보이는 강소현.
"근데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또각, 또각.
산처럼 쌓인 고블린 시체.
그것을 밟고 내려온 지상 역시도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준 씨."
"네?"
"저는 이 주변에서 전선만 모으면 되는 거죠?"
"저 시체들을 헤집고 꺼낼 자신이 있으시다면야."
나의 집이 있던 자리.
내 옆 빌라가 무너진 자리.
내 옆옆옆 빌라가 무너진 자리까지 전부 시체들이 뒤덮고 있다.
"아, 저 구석 쪽은 그래도 잔해가 보이긴 하네요. 저쪽부터 찾아볼게요!"
라고 말하며 건너편 빌라 잔해로 뛰쳐나가는 강소현.
골목 입구 쪽이나 대로변으로 조금만 나가도 전선은 쉽게 구할 수 있을텐데, 굳이 저 시체를 헤집고자 한다니....
또각, 또각.
멍청한 선택으로 고생을 하는 것 또한 그녀의 복이다.
『냐아아~!』
[고양이 관리]
[저급한 숨숨집: 100p]
[저급한 화장실: 300p]
어깨 위에 탄 로라.
몸도 거이 다 회복되었고 몸도 조금자라서 지금은 손바닥 두 개에 가득 찰 정도로 커졌다.
이제 슬슬 숨숨집이나 제대로 된 화장실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저급한'이라는 이름 때문에 스킬에서 파는 것들을 사고 싶지는 않다.
나온김에 병원 근처에서 숨숨집이나 화장실이라도 찾아볼까 싶다.
모래부터 시작해서 고양이 용품들은 왜 이렇게 사이즈들이 다 큰지 모르겠네.
-크라라라락!!
강소현은 골목길에서 재료를 파밍할 예정이기에 '죽음이 깃든 가방'은 내가 소지하고 있다.
고작 두 번째 외출.
내가 이렇게까지 좀비들 틈새를 돌아다니는 것에 적응될 줄은 몰랐다.
『냐아~!』
툭!
로라도 마찬가지.
근데 로라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내 어깨 위에서 앞발로 좀비에 냥냥펀치를 갈기고 있었으니까.
투둑! 툭!
"떽!"
적적한 좀비 사이를 로라와 걷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직업 전용 퀘스트 – 10레벨까지 고양이를 지켜라」
「보상: 신성의 조각이 고양이에게 깃든다」
강소현에게 확인해본 바로는 이 직업 전용 퀘스트는 나에게만 적용되어 있다. 그간 '신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방치하고 있었는데, 레벨도 6으로 오르고 로라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고 나니까 대략적인 감이 왔다.
로라는 '신'의 힘을 쓸 수 있는 고양이인 것 같다.
금빛을 내뿜으며 하울링을 하면 몬스터를 멈추게 만들거나 나를 엄청 강력하게 만드는 식의 변화를 만들었다.
게다가 좀비에게 나온 돌빵과 물컵을 어딘가로 사라지게 만드는 이변을 만들기도 했으니까.
생후 한 달 반으로 추정되는 로라.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힘을 쓰면 고열에 시달리며 아픈 상태가 되어버리지만, 10렙을 찍고 신성의 조각이란 것을 얻게 된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내 고양이가 신이 된다라...."
20cm의 검은 털뭉치를 바라보며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냐아!』
팍! 파바바박!
로라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야깽이들이 호기심 많고 기운이 넘친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쓰읍! 혼난다!"
『냐아....』
별 타격도 없는 아기 고양이의 솜방망이질.
-크르르르르.
그럼에도 좀비가 살짝 반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죽음이 깃든 가방'을 소지한 채 좀비를 공격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최대한 자제하게 할 생각이다.
-크르르르르륵.
-크르르르르르.
동물병원으로 가는 길 전체가 좀비 투성이었으니.
재수 없게 선공 시 아이템 효과가 해제되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개죽음 당할 판이다.
[지붕 건설: 2,000p]
새로이 추가된 지붕을 짓기 위해서는 넓고 평평한 재료가 필요하다.
당장 집 주변의 잔해조각을 모아서 지을 수도 있겠지만, 조각 따위로는 재료를 수급하는 데만 한세월이다.
이태 24시 동물병원.
로라의 숨숨집과 화장실을 확보하면서도 지붕에 쓸 재료를 얻을 수도 있는 꿀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휴우."
'넓은 길'에만 상주하는 좀비들이 멀어지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공격받지 않는다 해도 저 좀비들 틈새를 걸어다는 것은 제법 정신력 소모가 큰일이니까.
콰앙-!
넓고 평평한 벽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콰과광-!!
그 뒤에는 강소현이 말했던 고양이 용품 코너 쪽의 잔해를 치운다.
부서진 숨숨집.
부서진 화장실.
건물의 잔해가 제법 무거웠는지 멀쩡한 것들을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비교적 덜 부서진 숨숨집.
덜 부서진 화장실.
그래도 계속 발굴 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니, 고양이 화장실의 졸업템으로 여겨지는 둥근 형태의 커다란 바구니를 발견하긴 했는데....
"로라야, 어때?"
『캬아오!!』
로라는 이걸 쓸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이거는?"
화장실은 싫다고 했으니, 인조털로 만들어진 동굴 형태의 숨숨집을 보여줬다.
『냐아…』
썩 마음에 들진 않아도 쓸 의향은 있어 보인다.
"그러면 이것만 챙긴다?"
딸랑-!
딸랑-!
"떽!"
반쯤 부서진 방울 달린 낚싯대.
그것이 로라의 흥미를 끌어버린 모양이다.
"집에 가서 놀아줄게."
전에 멀쩡한 장난감들을 제법 챙겨 왔으니, 저런 쓰레기를 탐 낼 필요는 없다.
『냐아!!!』
아직까지 놀아준 적이 없어서 쓰진 않았던 고양이 장난감들.
슬슬, 이것들을 써야할 때가 왔나 보다.
시체와 좀비, 무너진 건물들로 가득 차 있는 망한 세상에서도 고양이는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
"갈까?"
로라 목걸이의 텔레포트 쿨타임은 24시간.
집에서 나오는 길이 문제지, 돌아가는 것에는 전혀 문제 될 거리가 없다.
파앗-!
바닥에서 생겨난 마법진에 휩싸이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집 앞마당이었다.
"어어?"
그리고 하필 전선을 들고 들어온 강소현과 맞닥뜨려 버렸고....
"미친...."
거대한 건물 잔해들과 함께 텔레포트로 나타난 나와 로라.
그 모습을 본 강소현이 '미친'이라는 한마디를 내뱉더니 고장난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당장 잔해를 옮겨 지붕부터 짓기 시작했다.
"로라, 여기서 쉬고 있어!"
방공호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나의 집은 아직 상당히 조잡한 부분이 많다.
1m 아래로 꺼져 있는 방공호와 그 옆에 이어진 땅과는 단차가 맞지 않는다. 원래 집에서 부엌이었지만, 집이 폭삭 무너져서 내 집에는 방공호의 틀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저곳을 메인룸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현관이 있던 자리에는 '이동식 요새'의 조종대가 박혀 있어서 지금에 와서는 현관보다는 일종의 '조종실'처럼 개조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쿠구구구궁-!!
대략적인 집의 구상을 하며 방공호와 연결된 메인룸에 지붕을 짓고 나니.
"아니, 어쩜 사람이 그래요? 설명 좀 해 주시죠!"
정신을 차린 강소현이 내 텔포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평범한 텔레포트 능력입니다만."
"...평범한 건 전혀 모르겠네요. 그래도 엄청 유용한 건 알겠어요. 대체 학교에서 어떻게 돌아왔나 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군요."
혼자 멋대로 감탄을 시작한 강소현.
"와, 근데 물자까지 들고 오는 건 너무 사기 아니에요? 페널티 같은 건 없어요?"
"24시간이라는 쿨타임이 존재합니다."
딱히 숨길 건 아니고, 이걸 알아두는 편이 앞으로 함께하게 될 강소현에게도 좋을 것이기에 순순히 알려줬다.
"와, 24시간이라는 시간제한을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능력이네요. 다른 사람들 여러 명이 가지고 있을 걸 이준 씨는 혼자 다 가지고 있는 느낌이니까요."
그리고 강소현은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답례로 저도 재밌는 걸 알려줄게요."
이 경우에는 내가 받은 게 더 크다고 봐야 되려나?
"그, 전직 심사가 끝났대요. 결과만 놓고 보면 합격인데...."
"그래서 대체 클래스가 뭘로 바뀐 겁니까?"
말을 흐리며 답답하게 구는 강소현.
그런 그녀를 독촉하자, 상상치도 못했던 엄청난 정보들이 튀어 나왔다.
"제가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라는데요?"
#21. 의문
백색 마탑의 마법사도 아니고.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도 아니고.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갑작스럽게 아포칼립스가 찾아온 세상.
각성자로 진화한 인류.
좀비로 변한 사람, 포탈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뜬금없이 나타난 신과 악마 같은 놈들까지.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데 여기다 '백색 마탑'이라는 이상한 놈들까지 추가됐다.
"대체 백색 마탑은 뭡니까?"
"그, 그게...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는데요?"
"더 자세한 건 없습니까?"
"차라리 제가 백색 마탑 수습 마법사 후보 가입서를 읽어드릴게요."
이름부터 더럽게 긴 '백색 마탑 수습 마법사 후보 가입서'로 보아 그 내용이 얼마나 지루할지가 벌써부터 예상이 갔다.
허나, 지루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걸 듣지 않을 수는 없으니 강소현이 읽어주는 내용들을 묵묵하게 들었다.
"노부는 백색마탑을 총괄하는 대마도사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루옴브 리사체다."
첫 문장부터가 병신같다.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루옴브 리사체'라는 이상하고 긴 이름.
"루베른을 지탱하는 자랑스러운 일곱 기둥의 수장이자 마도의 끝을 목도하여 세계로부터 '대마도사'의 칭호를 인정받은 위대한 업적을 세운 마도사로서―"
'루베른', '일곱 기둥', '세계의 인정'.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다 빼고 저런 핵심 단어의 부연 설명이나 좀 해줄 것이지....
"차원 너머에 숨어 있던 새로운 가능성에 싹을 틔우고자 대규모 관측 마법을 사용했다."
지루하디 지루한 연설문.
저게 무슨 '가입서'야, 보험 약관보다 지루하기만 한데.
"―까지가 가입서 내용이에요."
내 해석을 덧붙여서 요약한 내용은 이렇다.
1. 다른 차원 '루베른'을 지탱하는 일곱 개의 마탑 중 '백색 마탑'의 수장 뮈시기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대규모 관측 마법을 썼다.
2. '질서와 법칙'을 만들어 낸 지구의 신이 사라지면서 지구가 관측 가능한 차원이 되었고, 그것이 '백색 마탑'의 눈에 들어왔다.
3. 그렇게 좆돼가는 지구를 구경하다가 힐러로 전직한 강소현을 발견했는데, '힐러' 클래스의 강소현이 메이스로 몬스터를 때려잡는 모습에 반해 가입 신청서를 보냈다.
"어떻게 제가 잘 이해한 것 맞습니까?"
"...네. 뭐, 그런 것 같아요. 어째 이준 씨가 해석해준 게 저도 이해가 더 잘 가네요."
그치?
저 가입서가 내 눈에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구나.
"그래서 저기에 서명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이건 시스템 알림으로 나온 말인데 제가 무슨 차원의 틈새로 넘어간다는데요."
"네?"
"그렇다네요...."
말끝을 흐리며 멍해진 강소현.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차원만 해도 머리가 따라가질 못하겠는데, 차원의 틈새는 또 뭐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칙, 치익!
"쓰으읍."
머리가 안 돌아갈 때는 니코틴을 주입해주면 된다.
"후우...."
"아이 씨. 연기를 꼭 제 쪽으로 뱉어야겠어요?"
흡연충은 언제나 서럽다.
멸망하기 전에도 흡연 구역을 찾아다니면서 담배를 펴야 했는데, 세상이 망하고 나니 불편한 동거인의 눈치를 보게 생겼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그녀의 얼굴 쪽으로 연기를 뱉은 것도 사실이니.
아니, 어째 연기가 저쪽으로 찾아간 느낌이었는데, 이걸 뭐 해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죄송합니다."
또각, 또각.
정중한 사과와 함께 조금 멀어지는 방식을 택했다.
마침 혼자 생각할 거리도 많이 생겼으니까.
"쓰으읍."
내 감에 의존하자면, 지금 당장 강소현이 차원의 뭐시기로로 떠나는 것은 안 될 것 같다.
"후우...."
느낌적인 느낌이라 그녀가 순순히 납득해 줄지는 모르겠다마는.
"와, 진짜 컨셉충의 극한. 냄새만 안 풍기면 진짜 이준 씨 담배 피는 모습은 매일 봐도 안 질릴 것 같네요."
그런 내 생각을 끊는 강소현의 말.
칭찬일까?
욕일까?
답은 정해져 있다.
'충'이 붙은 것을 보면, 당연히 욕이다.
그녀의 말을 직역하자면, '우스꽝스러운 집사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꼴이 웃기다.'일 테지.
탁, 타악!
이 이상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사절이다.
"왜 꺼요? 진짜 좋은 의미로 한 말인데...."
또각, 또각.
담배를 끄고 강소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퍽이나."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강소현 씨 방은 강소현 씨가 직접 치우십시오."
거, 기껏 방도 만들고 치워주기까지 했더니 담배 하나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와… 진짜 쪼잔해. 진짜 욕 아니라니까요!"
"저도 쪼잔하게 군 거 아닙니다. 다 큰 성인이 자기 방은 직접 치워야지요. 것도 제가 여성의 방을 함부로 치울 수도 없지 않습니까?"
쪼잔한 게 아니다.
여성의 방을 함부로 볼 순 없는 노릇이니, 내 나름의 배려를 하는 것일 뿐.
"...."
찾아온 정적.
이대로 멀뚱멀뚱 서있기도 뭐해서 곧장 그녀에 전직에 대한 조언을 시작했다.
"크흠, 강소현 씨, 그 전직이란 거 지금 꼭 해야 합니까?"
"아, 아뇨. 딱히 시간제한 같은 건 없는데요?"
"그럼 조금 나중에 가시죠."
"아…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
당황한 듯 말을 잊지 못하는 강소현.
"사실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보시죠."
"하아. 듣고 쫓아낼 생각은 말아요. 저도 나름 많은 것들을 버리고 온 거예요."
또각, 또각.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로라 주치의로 제가 초빙한 건데, 제가 그런 쪼잔한 짓이나 하겠습니까?"
"으음. 뭐 그렇다 치죠. 사실은 지금 제 스킬이 다 사라져 있어요."
"스킬이 사라졌다고요?"
"그, 2차 전직 심사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그렇게 됐네요...."
"2차 전직을 한다는 데 오히려 스킬 개수가 늘어나거나 더 강해지는 게 정상이 아닌지요?"
"그렇긴 한데, 아니, 다른 사람들은 그랬는데…. 저만 좀 이상한 것 같네요."
당장 중요한 사실은 강소현 그녀가 무능력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능력치는 어떻게 되셨는지…?"
침울해진 강소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자.
"이것도... 사라진 건 아닌데, 아까 가입서를 받고 나서부터 조금 이상하게 바뀌었어요."
강소현의 능력치는 '마력?'이라는 글자로 바뀌었고, 대각선으로 붉은색 빗금이 그어져 있다고 한다.
누가봐도 '사용불가' 판정인데, 저걸 '조금 이상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크흠, 그 말은 앞으로 강소현 씨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일반인과 다름없게 되었다는 뜻이군요."
이 세상에 일반인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또각, 또각.
"-히익! 왜, 왜 그래요. 무섭게."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젠지 알려주고자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서 말했다.
"당분간 집에 틀어박혀 계시죠. 무능력자가 되었다 해도 당장 저 가입서에 서명하는 건 안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녀가 무능력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당장의 내 감이 그녀를 절대 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 알겠어요. 저 이제 전선도 못 옮겨요. 진짜 완전 약해져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전력설비 짓고, 마당 잔해 정리하고, 구역 좀 넓히고 하는 것들이니 편하게 로라랑 쉬고 계시면 됩니다."
『냐아아~!』
방공호에 들어가서 자고 있던 로라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재빠르게 뛰쳐나왔다.
"알겠어요…. 진짜 버리면 안 돼요!"
또각, 또각.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건지.
대답하는 대신 나는 등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 * *
"으읏차!!"
귀찮지만 지금 하는 일은 럭셔리하게 변할 예정인 내 집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대지면적 100평의 땅.
약 60평 정도의 주거구역과 40평의 마당으로 구역을 나눴다.
100평은 약, 330㎡로 가로세로 길이만 따져 본다면, 약 18.18x18.18m가 된다. 물론 집이 정사각형은 아니라서 20.36x16m지만.
뭐, 쉽게 말하면 폭삭 무너진 집을 새로 짓기가 더럽게 빡세다 이 말이다.
지금의 집은 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느낌이니까.
2평짜리 방공호 주변에 벽을 두르고 지붕을 얹어둔 게 끝이니.
"와, 이제 마당도 거의 다 치우셨네요. 뭐 도울 거 없을까요?"
방에서 쉬던 강소현.
마냥 쉬고 있기엔 지루했는지 내 옆에 다가와서 뭐 도울 거리가 있냐며 묻는다.
"없습니다."
무능력자인 그녀가 톤 단위의 건물 잔해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수의사인 그녀가 건축 설계에 대한 조언을 줄 수 있을 리도 없으니 다른 것을 요청했다.
"그냥, 옆에서 말벗이나 해주시죠."
"그래요!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준 씨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큰 집을 얻으셨어요?"
말벗을 해달라 했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라 한 적은 없다만.
"아니, 여기 평당 3~4천만 원 정도 하지 않나요? 역 근처인걸 감안하면 5천까지 할지도…?"
세상이 멸망한 와중에 그녀는 내 집의 가격이 궁금한 걸까?
아니지.
어떻게 노가다, 택배 상하차, 야갼 편돌이나 하던 내가 이런 거대한 집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거다.
1972년에 지어진 낡은 주택이어도 대지 면적이 넓고 입지가 좋아서 매매가로 따지자면 50억 정도는 할테니까.
뭐, 망한 세상에서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내 나이는 서른둘이다.
대한민국에서 서른두 살에 수도권, 것도 이태원 한복판에 100평짜리 단독주택을 얻기 위한 방법은 몇 없다.
당연히―
"상속받았습니다만."
할머니께 물려받았다.
"...저 지금 충격받았어요."
"왜죠?"
"이준 씨는 뭔가 '악착같이 모아서 샀습니다만'이라고 대답할 것 같았거든요."
쿠우웅-!
등에 짊어진 콘크리트 더미를 내려놓으며 강소현을 바라봤다.
더 눌러앉기 전에 꼭 확인해 볼 것이 있었으니.
"혹시 과거의 저를 진짜 모릅니까?"
"네? 편의점 야간일 보셨잖아요....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그러죠?"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으니 당장은 넘어가야지.
아직까지 알아보는 사람은 없지만, 언젠가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
대화재.
그곳에 있었던 억울한 누명.
할머니의 희생.
더 생각해봐야 마음만 아프지.
"크흠. 혹시나 해서 물어 봤습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미리 언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에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수배된 범죄자였다거나 그런 쪽은 아니시죠?"
"당연한 말을."
기분도 조금 꿀꿀해졌고, 더 이상 딱히 할 말도 없어서 묵묵히 작업을 이어 나갔다.
콰직-!
마당 한켠에 잔해를 쌓아 모아두고, 집의 전반적인 윤곽을 잡는다.
'능력치'라는 초인적인 힘을 얻은 덕분에 일 자체는 쉬웠다.
대충 아무 돌덩이나 부숴서 구상한 집의 형태에 맞게 깔아두면 되니까.
일종의 밑그림이랄까?
건축이니 뭐니 하는 전문지식이 전무한 내게 있어서는 이런 작업뿐이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
"아, 이준 씨, 혹시 문은 안 만드실 거예요?"
"로라 전용 통로가 있는 문이 아니면 안 달 생각입니다. 그래도 강소현 씨 방에는 달아 드리죠."
중간중간 강소현의 요구사항을 맞춰주는 것은 덤이다.
"근데 층고가 왜 이렇게 높아요?"
내 집에서 완전한 방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방공호 위의 마스터룸이다.
그리고 좀 전에 확장한 집의 층고는 5m다.
일반적인 아파트 층고인 2.5m 정도를 기준으로 잡아서 2층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나의 고양이 로라를 생각한다면 층고는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캣타워, 캣 월을 설치할 예정입니다."
그래야 로라의 수직공간을 충분하게 확보해줄 수 있을 테니까.
"너, 너무 높지 않나요?"
아포칼립스 속 집사를 플레이할 때, 고양이의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높이가 4.5m다.
뭐, 로라의 주치의인 강소현의 주장도 일리가 있겠지만, 이 망한 세상과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게임 속의 지식을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처음에는 캣타워든 캣월이든 낮게 시작해서 차근차근 높혀나갈 생각입니다."
"집주인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불만은 없어요. 5m짜리 캣타워나 캣월을 짓겠다니까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쿠웅-!
다시금 정적이 이어지고 내가 작업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다.
"휴우."
직사각형 형태의 땅.
중앙에 집을 배치하고 최소 5m 간격으로 집 주변에 마당을 두른다.
현관이 있던 자리를 조금 넓혀서 '이동식 요새'의 조종실을 만들고, 대문과 조종실 사이에는 포탑으로 이동하기 위한 길을 깐다.
조종실 뒤편에는 거실과 주방을 설치.
그 뒤편에는 나와 로라가 머무를 마스터룸이 자리하고 있고 마스터룸과 거실 사이에 복도를 둔다.
복도에는 마스터룸, 화장실, 강소현의 방 순서로 입구를 만든다.
"와... 그러니까 저 돌무더기가 지금 말한 대로 밑그림을 까신 거라는 거죠?"
건축지식이 전무한 나이기에 돌을 깔아서 각 구역의 선을 표시해뒀다.
물리적인 도면작업이랄까?
"대체 뭘 하나 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까 좀 이해가 갈 것도 같네요."
어차피 재료만 가져다두고 스킬 한 번 눌러주면 알아서 지어질 테니 건축법이니 측량이니 하는 것들은 필요 없다.
밑그림으로 깔아둔 돌조각들도 스킬을 쓰면 재료에 흡수되어 사라지니까.
"그, 일반적인 집 구조랑 많이 다른 건 아시죠? 애초에 현관을 없애버린 것도 그렇고."
"알죠. 그런데 달리 선택지가 없습니다. 현관 자리에 저 조종대가 튀어나와 버린 거라."
처음에야 나도 현관에 집착해서 좀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효율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저곳이 조종실을 위한 완벽한 자리다.
CCTV나 레이더를 해금하고서 모니터 설치까지 마쳤을 때 얘기지만.
"와… 나중에 뭐가 나올지도 다 아셔요?"
"대략은요."
물리적인 도면작업을 마치고 '집사'의 스킬 자랑을 시작하려던 타이밍에 문제가 생겨났다.
파앗-!
「모든 인류가 선택을 마쳤습니다」
「인류의 보호 조치가 완화됩니다」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이, 이게 무슨?"
콰아아아앙-!!
콰르르르르르르―
그리고 사방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한 굉음들.
일전의 세상이 흔들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마치 진짜 지진이 난 것 같달까?
"꺄아아아!!!"
거미다리 같은 것들이 지탱하고 있는 고도 10m에 있는 나의 집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모든 인류가 선택을 마쳤다.'
맥락으로만 보면, 불완전한 선택지에서 주어지는 카드를 모든 인류가 골랐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어떤 새끼인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고른 놈 면상 좀 보고 싶네.
#22. 망상
쿠구구구구궁―
정신없이 흔들리는 땅.
거미다리로 지탱되던 나의 집은 지상 10m 높이에 떠 있던 만큼 그 흔들림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다.
쿠구구궁!
허나, 우리는 이미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살아남은 각성한 인류다.
그렇다 보니 이 흔들림에도 금세 익숙해져 버렸고, 머릿속으로만 온갖 뇌내망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
말을 하기에는 너무 심한 흔들림이었으니까.
콰아아아앙-!!!
굉음도 너무 크고.
어쨌든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마지막으로 카드를 고른 새끼 얼굴 좀 보자.'였다.
집의 재건을 위해 기껏 배치해둔 '물리적 설계도면'이 다 흩어진 것이 첫 번째 이유요.
이 망할 지진과 폭발을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이 그놈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놈이 그것을 고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재앙은 안 일어났을 테니.
어쩌면, 우리는 이대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쿠구구구구―
세상이 무너지고 괴물들이 튀어나오던 이전까지만 해도 '폭발'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콰아앙-!!
지금은 미뤄두기라도 했던 것들이 한 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폭발이랑 폭발은 다 일어나고 있지만.
쿠웅-!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흔들리던 집도 멈추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굉음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 이준 씨, 저거 보여요?"
아까 말했던 '평화'라는 단어에 의문이 들었는데, 저 하늘을 보아하니 고블린이랑 좀비만 잡으면서 사는 삶은 나름대로 평화롭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졌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검은색 연기.
-끼예에에에에엑!!!
그 연기에 신이 나서 미쳐 날뛰는 와이번들.
"아, 좆같다."
대지진, 몬스터, 좀비, 커다란 시체 거인, 공중을 떠다니는 눈알로도 부족했는지, 세상 곳곳이 터져나가기까지 했다.
저 꼴을 보고나니까 '좆같다' 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을 정도니까.
"...그렇네요."
강소현도 같은 마음인가 보다.
"이준 씨, 정신 차려요!"
허나, 우리는 폭발과 시꺼먼 연기 정도로 굴하기에는 이미 아포칼립스에 적응해버린 사람들이다.
"대, 대책부터 마련하죠!"
강소현 그녀가 당돌하게 내게 대책 논의를 요구한다.
"뭔 대책이요?"
주변 건물들이 터지고 곳곳에서 화염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한단 말인가?
"뭐라도 얘기해야죠. 그냥 넋 놓고 있게요?"
것도 맞는 말인데, 나는 도무지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
그런 내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지 강소현이 먼저 자신의 뇌내망상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보호 조치가 완화된다고 했잖아요."
완화란, 긴장된 상태 혹은 경직된 것을 느슨하게 만들어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보호 조치'가 완화된다는 말은 보호 조치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는 의미기도 한데.
"이제까지 보호받은 거라고요?"
라는 의문이 든다.
"그, 신님이라는 사람이 지켜줘서 이 정도에 그친 걸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 치면, 그 악마 같은 놈은 뭘까요?"
'신'이 인류를 지켜준 게 지금의 이 상황이라면, 대체 그 '악마' 같은 놈은 뭘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저야 모르죠."
"저도 모릅니다."
답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냥 둘 다 똑같은 놈들일 수도 있고.
그래도 계속해서 서로의 뇌내망상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추측이 몇 개 생겨났다.
1. 지구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건 뭐 누구나 알 법한 사실이고.
2. 몬스터와 좀비가 순차적으로 나타난 것은 '신'의 보호 덕분인 것 같다.
10만 대군을 만난 내 생각은 좀 다른데, 강소현이 겪은 이태초 생존자 캠프를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로 보호조치가 완화되고 나서부터 도로에만 가득하던 검은 점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이준 씨 집은 안전하네요."
우리집 골목으로 오는 좀비들도 있었는데, 수많은 고블린의 시체가 길을 막아준 덕분에 시체의 산 너머로 올라오는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변화가 있을 수도 있어 시체 산 아래로 다가오는 좀비들 몇 마리를 잡아봤는데, 좀비 시체에서는 더 이상 빵과 물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면 식량난이 더 빨리 찾아올지도 모르겠네.
"뭐, 아껴 먹으면 반년도 먹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는 편의점의 반을 옮겨 온 비축식량이 있으니 상관 없는 얘기다만.
"벽도 안 무너졌고, 집을 공중에 띄운 다리도 거미다리같이 얇은데 엄청 튼튼하네요."
게다가 '집사'의 스킬로 지어진 내 집 자체도 매우 튼튼하기 까지 하니, 금상첨화랄까?
내 집은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는다는 확신.
방금 일어난 엄청난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3. 악마 같은 놈이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신으로 추정되는 자의 힘은 아직도 남아서 지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뭐, 계속해서 이 상태창이니 시스템 메시지니 하는 것들이 보이는 걸 보면 당연한 말이고.
지금 일어난 지진과 폭발만 해도 뭔가 하다 만 느낌이었으니까.
"점점 재앙 스케일이 커지지 않을까 싶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내심 보호조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한다.
완화가 이 정도인데, '인류의 보호 조치가 해제되었습니다.' 같은 일이 일어났다가는 세상이 얼마나 더 망가질지 감조차 오지 않으니까.
"크흠, 아무래도 이번 재앙은 이 정도로 끝나는 듯하네요.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할지...."
"그래도 긍정적인 게 좋으니까, 우리는 다행인 걸로 생각하기로 해요!"
그치.
긍정적인 것 참 좋은 말이지.
-끼예에에에에엑-!!
근데 저 대열을 맞춰 날아다니는 와이번들을 보면 자꾸 긍정 마인드가 무너진단 말이야.
"그,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내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던 강소현이 내게 말했다.
또각, 또각.
"그러죠, 뭐."
그래.
어차피 망한 세상인데.
부정적인 것들을 떠올리는 것보단 긍정적인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뭐, 뭐하시게요?"
"다시 물리적 도면을 설치할까 합니다."
지진 때문에 다 흩어져버린 집의 초안.
당장 할 일도 없는데, 이거나 다시 깔아둬야지.
* * *
『키야아오!!!』
대충 하루쯤 지났나?
강소현의 핸드폰 전원도 나갔고 내게 시간을 확인할 수단은 없으니, 해가 뜨고 지는 것만이 우리가 시간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캬아아오!!!』
그리고 로라의 이상행동이 시작되었다.
"강소현 씨, 대체 로라가 왜 이러는 겁니까?"
"얘, 하루에 얼마나 놀아주셔요?"
고양이에 관심이 많고 고양이 관련 동물단체에 정기적인 후원까지 해온 나다.
구글링과 유튜브로 습득한 지식이어도, 웬만큼 전문가 수준은 된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니―
"15분씩 3회에 맞춰서 놀아주고 있습니다만."
인터넷에서 얻은 정석대로 로라의 놀이 시간을 관리해주고 있었다.
"하아... 이게 고양이마다 활동량에 편차가 존재하는 건 아시죠?"
알다마다.
"코숏, 코리안 숏헤어 애들은 기본적으로 야생성이 더 높고 활동량이 많아요."
그것도 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까지 아파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던 로라인데, 무턱대고 시간 단위로 놀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뭔지는 잘 몰라도, 얘는 진짜 특별해요.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회복 속도도 엄청 빠르니까요."
"크흠, 제 딸래미가 좀 천재이긴 합니다."
"아니, 칭찬하는 게 아니구요. 이준 씨가 상당히 잘못하고 있는 점들을 지적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어지는 강소현 주치의의 말은 나를 벙찌게 만들었다.
"리얼함! 얘는 머리가 좋잖아요. 그렇게 대충 낚싯대에 물고기 매달아서 휘둘러준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동물병원에서 파밍해온 수많은 고양이 장난감들 중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 '낚싯대'를 먼저 사용했는데, 내 방식에 상당이 큰 문제가 있던 모양이다.
"리얼하게, 진짜 사냥감인 것처럼 해야 애들이 만족감을 느껴요. 그냥 휙휙 휘둘러서 활동량만 충족시켜준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화면과 현실은 다르다는 말이 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로라의 보호자로서 저런 쓴 소리는 머릿속에 새겨들어야 한다.
'고양이와 놀아줄 때는 리얼함을 추구해라.'
"그다음 문제가 또 있습니다. 사냥에는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
'고양이와 사냥 놀이를 끝낼 때는 간식으로 보상을 해 줘라.'
허나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습식사료와 건식 사료는 제법 챙겨놨지만, 츄르는 멀쩡한 것들이 얼마 없어서 100여 개 정도밖에 챙기지 못했다.
"츄르는 제한적입니다. 이게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나의 합리적인 의문은 강소현의 더 매서운 훈계질에 박살나 버렸다.
"고양이의 사회화와 훈련,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 가장 중요한 때가 새끼 때예요. 고작 츄르 몇개 아까워서 그 기회를 버리시겠다고요?"
"아, 알겠습니다."
"고작 1년이에요, 1년."
고양이가 성묘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내 아기 고양이 로라의 어린 시절임을 생각한다면 매우 귀중한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저도 많이 놀아줄 테니까, 이준 씨도 '제대로' 놀아주셔야 합니다."
1일 최소 2시간의 놀이 시간 보장.
로라의 주치의 강소현이 내린 처방이다.
즉, 이제부터 최소 한 시간 이상은 로라의 놀이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뭐, 솔직한 심정으로는 10시간도 쓸 의향이 있다만.
『냐아아~!!』
아름다운 미성.
변해가는 눈동자의 색.
어?
벌써 눈동자 색이 변하나?
한 3~4개월은 돼야 눈 색이 정확해진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강소현 씨, 혹시 로라 눈 색이 조금 변한 거 느껴지십니까?"
"아, 네. 그렇네요.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생후 한 달쯤부터 서서히 눈 색이 변하기 시작해요. 노리끼리한 걸 보면 노란색이나 주황색 쪽으로 가지 않을까 싶네요."
"황금안이라니...."
내 로라가 금안 흑묘가 된다고 한다.
푸른 눈의 아기 야깽이 모습도 아름답지만, 성묘가 되어 늠름하게 변한 로라의 모습도 제법 기대가 된다.
* * *
미니맵의 검은 점들이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탓에 우리는 반 강제로 집에 칩거하게 되었다.
딸랑-!
딸랑-!
낚싯대 끝에 달린 물고기가 쥐새끼라도 되는 것마냥 리얼함을 추구하며 로라와 놀아주던 중 미니맵에 푸른색 점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습관성 미니맵 관찰 증후군에 걸려버린 나이기에 곧장 이변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대낮이다.
강소현과 교대로 수면을 취하는 중이기에 지금은 내가 경계를 서면서 로라와 놀아주고 있었다.
"소, 소현 언니!!!"
고정 포탑에 앉아 귀를 기울이자 시체 더미 아래에서 강소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들이 강소현과 무슨 관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비는 해두는 것이 좋겠지.
"시체가... 언니가 진짜 여기로 온 거 맞아?"
"킁킁, 언니 냄새가 이쪽에서 나는데?"
대화의 맥락으로 보아 저들은 강소현의 냄새를 따라서 이곳까지 온 것 같은데, 아직 의문이 하나 더 남았다.
이 망한 세상에서 사방 곳곳으로 흩어진 좀비를 뚫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소현 언니이이!!!!!"
허나 그 해답은 강소현의 이름을 부르짖는 저들이 스스로 알려주게 될 것이기에 고정 포탑에 앉아 손님과 대화할 준비를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더 이상 다가오면 발포하겠습니다!"
"초, 총? 저, 저희는 소현 언니 지인들인데요. 킁킁, 언니 여기 있지 않나요? 냄새가 분명 이 집 방향인데...."
처음 나타난 사람은 이상한 몽둥이를 들고 킁킁거리고 다니는 여자다. 표범무늬가 새겨진 허름한 가죽옷을 걸쳐 입고 어깨 위에는 거대한 몽둥이를 걸치고 있다.
냄새로 사람을 찾는 이상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옷차림새도 그렇고 약간 원시부족민 같아 보인달까?
"아, 이제 내려!"
냄새를 맡던 야만인을 뒤따라 올라온 것은 등 뒤에 커다란 바구니를 매고 있는 근육질의 여자다.
쿠웅-!
그녀가 바구니를 내려놓자 바구니 안에서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내렸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원시부족민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저들을 상태창의 직업으로 표현하자면 '야만인' 혹은 '원시부족'이 되지 않을까 싶은 외형이다.
"무장 해제 안 하십니까?"
저들이 순수한 대화를 원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꾀죄죄한 몰골의 사람들이 저렇게 무기를 빼 들고 서있는 꼴을 보아하니 마치 약탈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무장 해제를 지시했는데.
"아...."
"위협적으로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저들의 리더, 아마도 부족장으로 추정되는 근육질의 여자가 곧장 사과를 하며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머지도 이를 따라 무장을 해제했고.
쿠웅-!
통짜 철로 만들어졌고 투박한 생김새의 칼과 방패.
마찬가지로 어딘가 조잡해보이는 대검.
나뭇가지를 이어 만든 것 같은 화살 두 개.
대충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몽둥이까지.
야만족의 옷차림과 썩 어울리는 느낌의 투박함을 가진 무기들이 담장 너머 시체산 위에 놓였다.
"전직을 뭘로 하셨길래, 냄새로 강소현 씨를 찾아온 겁니까?"
대화할 준비가 되어 보이기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고, 저들은 순순히 내 의문에 대답해줬다.
"바, 바바리안 추적꾼으로 각성했는데, 저는 냄새로 사람을 추적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시부족 혹은 야만인과 어울리는 외견이라 생각은 했다만, 실제 직업이 저럴 줄은 몰랐다.
바바리안이라니....
바바리안은 야만족을 뜻하는 말 아닌가?
야만족으로 2차 전직을 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23. 낯선 손님
"다짜고짜 무례하게 찾아온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무기를 내려놓은 근육질의 전사가 시체산을 짓밟고는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다.
무기는 내려 놨어도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조금 더 간을 보려고 했는데.
저벅, 저벅.
"저희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저들이 먼저 자신들의 무해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미친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말고 다들 나 따라해."
부족장으로 추정되는 근육질의 전사가 말하자 일행들이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진짜 소현 언니를 찾아 왔어요."
터억-!
"안 믿기시면 그냥 죽이세요."
포탑 앞에 일렬로 늘어서서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려는 원시부족민들.
그들의 행동에는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모를 터프함이 묻어 있었다.
아니, 꼬우면 그냥 죽이라고 하는 것을 터프하다고 표현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소현의 지인이라 그런지 저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로라야, 강소현 씨 좀 깨워 봐. 핥는 걸로 안 일어나면 그냥 발가락을 콱 물어버려."
일단, 저들은 전투를 상정하지 않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기에 강소현을 불러 왔다.
『캬아오!』
"로, 로라야!! 또 발가락 물면 어떡해!!!"
콰당탕-!
"이준 씨!!! 또 발가락 물라고 시켰죠! 아니, 푹 잠들어서 사람이 못 일어날 수도 있는 거지 어째 매번 이런 방식으로 깨우려 들―"
강소현 수의사가 화를 내며 뛰쳐나왔음에도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나. 그리고 고정 포탑에 앉아서 뚫어져라 밖을 쳐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본 강소현.
"어? ...문앞에 뭐 있어요?"
그녀가 뭔가 이상 상황이 벌어졌음을 깨닫고는 내게 물었다.
"강소현 씨, 원시부족이랑 친분을 맺은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입고 있는 허름한 가죽옷과 돌을 깎아 만들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투박함을 지닌 무기들.
노빠꾸로 포탑 앞에 일렬로 서서는 자신들을 못 믿겠으면 그냥 죽여 버리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아무리 아포칼립스가 왔다고 해도, 저 정도로 맛이 가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저들이 본래 저런 원시부족 생활을 하던 이세계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물어봤는데.
"아... 원시부족이 아니라 2차 전직을 그런 쪽으로 해서 그래요. 그, 조, 조금 특이하긴 한데, 나쁜 애들은 아니에요."
라는 대답이 나왔다.
"흐음."
강소현이 나왔음에도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얌전히 나와 강소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면, 저 바바리안 부족민들을 무해한 것이 맞다는 판단이 든다.
"이준 씨, 쟤들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죠?"
이제 슬슬 용건을 물어봐도 되겠다 싶었는데, 강소현이 갑작스럽게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희 이태초에 있을 때 정말 힘들게 지냈어요. 주류그룹 눈치보랴 범죄자 새끼들 눈치 보랴.... 쟤들은 저보다 더 힘들었을 거구요."
흐음.
아포칼립스의 클리셰와도 같은 비극 적인 이야기를 자꾸 강조해서 말하는 강소현.
물론 현실에서는 물리적으로 각성한 여성들이 연대해서 복수 비슷한 것들을 했지만, 복수건 뭐건 저들이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저 소리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죽이시면 안 돼요...."
이유는 몰라도 내가 저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어서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년인가?' 싶다.
"강소현 씨, 어디 아픕니까? 제가 저 사람들을 왜 죽여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타인의 눈으로 보면 내가 포탑을 이용해 저들을 겁박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보이는 상황만으로 나를 오해했다기에는 이미 강소현과 나는 꽤나 가까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소현의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 말고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
"혹시 머리에―"
"그쵸? 혹시나 해서 좀 오바해봤어요. 뭐든 확실한 게 좋잖아요."
내 말을 끊고 튀어나온 말.
역시, 강소현은 미쳤다.
"...…."
칙, 치익-
"쓰으읍."
할 말을 잃었다.
"후우우...."
진짜 제정신인가?
아니지.
세상이 이 따위가 됐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지.
나야 만능 정신안정제 로라가 있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건 없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래.
얼마 전까지 평화롭게 자기 할 일 하고 살던 사람들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갑자기 좀비가 되고, 그 좀비를 때려죽이기까지 해야 했으니까.
현대인의 반은 정신 질환을 달고 산다 하지 않나?
아포칼립스가 왔으니 아마 90%로 그 비율이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흠... 아는 정신과 의사 있으십니까?"
그래도 로라 주치의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건 좀 그렇다.
중성화 수술하다 사고라도 치면 어떡해.
"하아. 좀 오바한 건 맞는데,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쟤들 진짜 착한 애들 맞아요."
오바?
아무리 봐도 정신적인 문제 같은데....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진짜 아니니까. 만나서 얘기만 좀 하고 올게요."
"그래도 대면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로라 중성화 수술을 마칠 때까지는 강소현 씨는 사지 멀쩡한 채로 살아 계셔야 합니다."
"아... 뭐, 뭔 말을 그렇게…. 네. 그건 저도 이해할게요."
저벅, 저벅.
강소현이 대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얘들아! 왜 찾아온 거니?"
"...."
내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는 근육질의 여자.
저들을 쫓아내도 상관은 없겠다마는 나도 대체 무슨 연유로 저 원시부족민들이 수많은 좀비들을 뚫고 강소현을 찾아왔는지가 궁금했기에―
스윽-
턱짓으로 말하라는 눈치를 줬다.
"내가 대표로 말할게. 언니, 이태초 캠프가 무너지고 상황이 많이 변했어.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봐 우리가 알려주러 온 거야."
대표로 입을 연 바바리안의 부족장.
"언니, 물자가 운동장에 있던 체육실에 다 들어 있었잖아. 그게 다 불타버렸어."
불완전한 선택지를 마지막에 고른 놈, 그 망할 놈 때문에 생긴 일인 듯한데....
폭발이 일어나 수천명이 비축해둔 물자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물자 징발해서 체육실에 모아둔 게 한정식 의원을 주축으로 한 주류 그룹이잖아.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좀비들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책임을 운운하더라고."
"그래서?"
"한정식 의원을 그냥 처형해버리더라."
"미, 미친. 죽였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덤탱이 쓰고 처형당한 이태 초등학교 그룹의 리더.
"그 선택지 있잖아. 아무리 범죄자여도 설마 인간고기를 고르겠어? 했는데, 진짜 고른 놈들이 있더라고. 걔들이 시체를 챙겨가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아포칼립스가 찾아오고 광기에 젖어버린 사람들.
제법 흥미로운 얘기라서 무심코 대화에 껴 버렸다.
"아, 듣고 계셨네요.... 무튼, 이어서 말하면, 처형하고 시체까지 챙겨가는 데 한 5분쯤 걸렸나? 다들 벙쪄 있다가 뒤늦게 범죄자놈들 제압이라도 하자고 막 그랬는데, 그때부터 좀비들이 진짜 미친 듯이 몰려오더라구요."
내가 대화에 끼자 그녀가 대문 뒤에 있는 강소현 대신 나를 바라보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도망치다 보니까 좀비들한테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바바리안 부족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좀비들은 5명을 초과하는 인원이 10m 내의 공간에 있으면 몰려간다.
2. 이동 중에 5m 안쪽에서 마주치는 좀비는 5인 이하의 인원이여도 공격을 한다.
어째 담장에서부터 10m가 조금 넘는 거리를 칼같이 유지하고 있다 싶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야만스러운 겉모습과는 달리 제법 배려심도 있고 생각도 있어 보인달까?
"혹시 시체를 가져갔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어디로 갔는지까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그 범죄자 집단 대장격으로 있던 놈들이 20명 정도 돼요. 총 인원수는 200명 정도구요."
저들 전부가 식인종이 됐을 건 아닐테고.
"대략 몇명이나 식인종이 됐습니까?"
"아, 그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시체 가져가던 인원이 열댓 명은 됐으니까 20명은 넘지 않을까 싶네요."
"그들이 혹시 무리를 주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아, 네. 그런 것 같은데...."
그렇게 식인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씨발."
욕이 튀어나와 버렸다.
"네?"
범죄자 집단 200여 명.
그중 대장격인 식인종이 20명.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린 사람들.
식인종 입장에서 보자면, 무한 뷔페가 열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아... 그래도 설마 사람을 막 잡아먹고 다니겠어요?"
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것 같은데?
당장 행복빌라 사람들만 봐도 다짜고짜 나를 죽이고 내 집을 털려고 하지 않았나.
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능력까지 흡수한다고 했으니 그들이 살인 순회를 돌 가능성은 아마 100%에 수렴할 것이다.
"그 사람들도 최대 5인으로밖에 못 움직이니까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세상이 망하기 직전까지 창궐하던 코로나 바이러스.
5인 이상 집합금지가 풀린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이런 상황에 처해졌는지 모르겠는데, 그것들은 식인종이건 뭐건 상관없이 인간을 제약하고 있다.
5인이 6인 이상 집합금지로 바뀌고, 바이러스 대신 다른 것들이 인간을 제약하게 됐다는 차이가 있지만.
"고, 고마워. 이걸 다 알려주려고...."
정보를 공급받은 뒤 강소현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음에도, 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당연히 저들이 단순 정보 공유를 위해 이곳에 왔을 리는 없을 것임을 안다.
사람이 어째 호의만 베풀고 가겠어?
"뭐,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부족장 근육질의 전사를 바라보며 물었고.
"아, 혹시 식량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저들이 찾아온 본래의 목적을 들을 수 있었다.
식량은 많고 마침 내게는 저들에게 시킬 일들이 있다.
[에너지 설비-전력 변환기]
필요자원: 전선 -200m, 철 -2t, 석재 -5t
발전소에서 나오는 마력 500을 전기로 변환하기 위한 에너지 설비의 전력 변환기.
철이랑 전선, 돌쪼가리들로 어떻게 마력을 전기로 바꾼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아니, 애초에 내 스킬에 이해가 가는 게 있기나 했나.
어쨌든 슬슬 이 시체산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니까.
"그, 제발 먹을 것 좀 나눠 주세요.... 고블린 고기는 진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야만족들이 내게 감정적인 호소를 시작했지만, 그 내용은 매우 비정상적이었다.
"그걸 먹었습니까?"
야만적인 외견과는 달리 지적인 대화가 가능해서 뇌까지 퇴행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 고블린을 먹었다는 것을 보니 마냥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그, 그게 도저히 먹을 걸 구할 수가 없어서...."
근처 마트, 편의점, 조금 먼 거리에 있는 것들까지 싹 다 털렸고 잔해 속에 묻힌 것들은 폭발과 지진 때문에 죄다 쓰레기가 되었다고 한다.
"먹을 만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포션 먹어 보셨죠? 불로 구웠어도 식감은 이상하리만치 끈적거리고, 맛은 처음 먹어보는 끔찍한 맛이랍니다."
뭐, 일단 식량 문제는 그렇다 치고.
"다섯 명이 어떻게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대화의 물고가 트인김에 궁금한 것도 하나 더 물었다.
강소현이 백색 마탑의 초대를 받았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 걸로 추정은 되는데, 어째서 5명이 똑같이 야만족으로 전직을 했는지 궁금했으니까.
"아, 부족 생활을 하는 '바바리안 협회'에서 저희 다섯 명의 팀웍을 보고 2차 전직을 제안해 줬어요."
바바리안 협회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 세부 클레스는 다 달라요."
「클래스: 바바리안(전사) / 능력치?: 4」
저들의 상태창에는 이런 식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고 한다.
강소현의 능력치가 '사용 불가 판정의 마력'으로 변한 것처럼 능력치 뒤에 '?'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이준 씨, 우리 식량 조금만 나눠주면 안 될까요? 그 뭐 재배하는 설비 같은 것도 지을 수 있다면서요."
내 궁금증이 해소되어 보이자 강소현이 저들에게 호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 편의점의 반 이상을 털어왔기 때문에 아직 식량은 차고 넘친다.
"전선 200m, 철 2t, 석재 5t을 모아 오시면 음식을 내드리겠습니다."
무능력자 일반인이 된 강소현은 지금은 포탑의 핸들조차 당기지 못한다. 망한 세상에서 나약해진 강소현을 혼자 두고서 집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사' 능력 때문에 로라를 두고 갈 수도 없고.
"뭐, 뭐를 가져오라고요?"
기왕 온 손님인데 유용하게 써야하지 않겠어?
마침 대리 파밍해줄 사람들이 찾아와준 셈이니, 어떤 면에서 보면 참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전선은, 전신주에서 뽑아 오시고 석재는 건물 잔해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철은 대충 철이 들어갔다 싶은 것들로 주워 오시면 되고요. 차문, 철근 등등 많지 않습니까?"
"...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