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칙, 치익-
"쓰으읍."
고된 노동 후에 피우는 담배 한 대.
집을 집답게 만드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고된 일이었다.
아니, 요새를 요새답게라고 해야 되려나?
"후우-."
그 후에는 로라를 구경하면서 힐링 타임을 갖는다.
『냐아~!!』
우다다다다다―
로라의 뜀박질 소리.
생후 2개월이 넘어간 어린 로라는 요즘 들어 부쩍 '우다다다'- 하는 일이 늘었다.
'우다다'는 고양이가 미친듯이 뛰어 다니는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다.
체력이 넘치는 어린 고양이에게 주로 보이는 현상으로 주로 밤에 많이 발생하지만, 우리 로라는 나와 수면 패턴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대낮에 우다다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우다다다다다―
코옹-!
『키야오오!!!』
이렇게 가끔 벽에 머리를 꽁 하고 박는데.
『미아아오~』
그러면 곧장 내게 머리를 부비며 응석을 부려온다.
"우쭈쭈~"
핥짝, 핥짝.
로라는 츄르를 먹을 때조차 기품이 넘친다.
보통 첫 츄르는 무턱대고 씹어 먹어서 줄줄 새게 된다는데, 우리 로라는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짜주는 족족 품위 있게 핥아 먹기만 하니까.
"끝!"
어떨 때는 평범한 아기 고양이 같으면서도, 또 다른 순간에는 기묘하리만치 이지가 맴도는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 로라.
로라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로라의 집사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또각, 또각.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음에 할 일들을 준비하기 위해 남은 카운트를 확인했다.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372:00」
추출기에서 나온 물자로 집을 요새처럼 강화하고 고정 포탑, 주방 등의 설비를 짓고 나니 하루가 훌쩍 넘게 지나 있었다.
버닝 포인트존도 리셋되었지만, 포인트 수급보다는 먼저 할 일이 따로 있다.
또각, 또각.
대문으로 걸어가니 웅장해진 고정 포탑이 그 위용을 뽐내며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2단으로 높아진 고정 포탑.
1단과 2단에 달린 원통형의 게틀링건.
그리고 1단과 2단 사이의 공간에는 작은 미사일 발사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총구 뒤편으로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달려 있고 사다리 위에는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다.
또각. 또각.
포탑에 올라 확인해보니 포탑을 조종하는 손잡이 부분도 조금 바뀌어 있었다.
원형 핸들은, 둥근 직사각형 형태의 레이싱 자동차 핸들처럼 변했고, 중앙에 클락션처럼 뭔가 누르는 것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이걸 누르면 미사일이 나가지 않을까 싶다.
3m 정도의 높이의 포탑을 올라온 이유가 단순 감상은 아니다.
골목 앞 2차선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집.
2단 포탑 위로 올라가자 건너편에 폐허 속에 숨어 있는 두 남매가 보이고 있다.
칙, 치익-
"후우-"
봉화라도 피우듯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다 보니 건너편에서 쏘아지는 시선이 느껴진다.
"어이~!"
크게 소리치며 손을 흔들자 누나인 이하린이 어깨를 들썩하는 행동을 보이고는 쏜살같이 2차선 도로를 건너왔다.
치지지직-
스파크가 튀는 신발을 뽐내며 대문 아래에 선 이하린.
"와... 집이 진짜 요새 같아졌네요. 그 기관총도 엄청 커졌고. 부럽다. 우리는 먼지 구덩이에서 자는데...."
그녀가 변모한 집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을 연신 내뱉더니 내게 물었다.
"이거 자랑하려고 부른 건 아니죠? 왜 불렀어요?"
"아저씨랑 일 하나 해 볼래?"
서른둘.
아저씨라 불리고 싶진 않다만, 20살짜리 여자애와 10살짜리 남자애 사이에서는 아저씨가 맞지 않나 싶어서 '아저씨'를 주어로 붙였는데....
"씹, 그렇게 입고 아저씨라 하지 말래요? 존나 변태 같거든요."
이해는 하겠다만, 말을 너무 세게 하는 게 아닌가?
"흐음. 그럼 오빠랑 일 하나 해 볼까?"
나름 골려주려고 호칭을 바꿔봤는데,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것도 상상 이상으로.
"...미친."
고장난 듯이 멈춰버린 이하린.
한참을 그렇게 서있더니 나를 바라본다.
"그냥 아저씨라고 해요. 저게 더 소름 돋네요. 아니, '나랑 일할래?'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왜 앞에 이상한 말들을 붙여서...."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할 일은 똑같아. 소각로에 고블린 시체만 채워 넣어. 대신 식량을 좀 나눠 줄게."
저번에 저들에게 나눠준 식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둘이서 아껴 먹으면 안 5일 정도 먹을 것이고 정량대로 먹는다면 이틀이면 다 먹을 양을 줬으니까.
내가 야박해진 건 아니고, 상대적으로 식량의 가치가 높아져서 그렇다.
이제는 마트나 백화점 같은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워졌으니까. 폭발까지 감안한다면, 다 터져서 썩어있거나 하지 않을까싶다.
연이은 지진과 폭발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인간 고기'를 먹느냐 '몬스터 고기'를 먹느냐 하는 선택지를 더욱 강요받게 되었다.
"하아… 할게요. 대신 물도 한 통만 주세요."
물은 공짜기 때문에 넉넉히 줄 생각이다.
그렇게 거래가 수락되고 이하린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준 뒤에 '버닝 포인트존'에서 포인트 수급을 시작했다.
위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이쯤 되면 외적인 것으로 집을 숨기는 것도 어렵고, 남매가 길 건너편에 자리를 잡은 이상 내 힘을 숨기느라 할 일을 못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니까 그냥 드러내기로 했다..
피유우우웅-
쏘는 김에 미사일 성능 테스트도 해봤는데, 미사일이 탄착 지점이 포탈 속이라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방에 포인트가 만 단위로 올라간 걸 보면, 위력이 결코 약하진 않을 것이다.
"아저씨."
한참 집중하던 중에 나를 불러 세우는 이하린.
「추출중... 16%」
아직 한참 남았으니, 업무 종료 보고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나와 내 집 그리고 집 앞의 포탈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려는 것일 텐데.
"왜 계속 여기 있어요? 저 포탈도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한데... 다른 데는 생겼다 금방 사라지는데, 아저씨 집 앞에는 시체도 너무 많고, 포탈도 계속 있잖아요. 진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안전 측면에서 말하자면 거대한 괴물들의 이목을 안 끌고 집을 이동하기 어려워서가 주된 이유다.
포탈은 아직까지 큰 위협이 되고 있지 않다.
허나 하늘을 떠다니는 눈알 괴물이나 기괴한 손이 잔뜩 박힌 공은 내 집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이하린 말로는 운이 좋으면 저 괴물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못 본 척 봐줄 때도 있다고 하는데.
사람을 봐주는 것과 '이동식 요새'가 지나가는 걸 봐주는 건 또 다른 얘기기에 함부로 테스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다음은 '포탈'을 자원으로 따져 봤을 때 얘기다.
버닝 포인트존을 비롯해, 이번에 이하린을 통해 얻게 될 '황금 고블린 추적기'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위협요소라기보다는 '꿀'로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어차피 놈들이 당장 몰려나올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꿀이 있으면 빨아 줘야지 왜 도망가?
마지막으로 나는 강소현의 귀환 문제로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강소현이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탓에 어떻게 돌아오는가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혹여나 내가 요새를 이동시키는 바람에 로라가 주치의와 못 만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 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이걸 다 곧이곧대로 말해줄 생각은 없으니.
"돌아올 사람이 있어서."
심플하게 한마디로 설명을 해 줬다.
"와... 여자?"
허나 그것이 이하린에게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들렸던 모양이다.
"아저씨, 생각보다 되게 로맨티스트네요. 망한 세상에서 뭘 기다린다고.... 우리 엄마아빠는 그냥 우리 버리고 튀어 버리던데."
내 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모가 버리고 갔다는데, 것다 대고 뭐라 말을 하겠어?
"그래. 힘내고 일이나 마저 하자."
포탑의 총성 사이로 내려앉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이어나갔다.
「이준(Lv.6) 32세 / 보유 포인트: 6,779,640p」
그러다 보니 버닝 포인트존이 끝났고.
「추출중... 100%」
추출기의 %도 100을 채웠다.
"가 봐. 고생했어."
"아저씨, 또 시킬 거 있으면 불러요!"
조금 침울해져 있더니 떠날 때만큼은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간 이하린.
이제는 '황금 고블린 추적기'란 걸 사용해 볼 차례다.
#30. 황금 고블린 (1)
"뭐 이딴 게 다 있어."
황금 고블린 추적기는 금색 띠가 둘러진 나침판과 같은 생김새를 한 물건이었다.
N극을 가리키는 바늘에는 N자 표식 대신 황금색 고블린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그림이 가리키는 곳에 황금 고블린이 있다는 뜻 같은데....
신빙성이 너무 떨어진다.
달그락.
달그락.
쉼 없이 돌아가는 나침판의 바늘.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내 집 앞의 2차선 도로다.
도로를 바라보고 좌우로 움직이는 바늘을 보면 분명 저곳 어딘가에 황금 고블린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나 포탈 속에 있는 걸 잘못 가리키는 건 아닐까 싶어서 포탈 안에서도 사용해봤지만, 막상 포탈 속에 들어가면 나침판은 귀신같이 들어온 포탈의 입구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말인즉슨.
황금 고블린이 은신과 같은 스킬을 쓸 수 있거나, 2차선 도로의 땅 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추적기가 완전 불량품인 경우도 있기야 하겠다마는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 경우의 수로 생각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당장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해서, 고정 포탑을 이용해 나침판의 끝점에 맞춰 총알을 난사해봤다.
피유우우웅-
이참에 제대로 된 성능 확인도 할 겸, 포탑에 달린 미사일도 쏴 봤고.
퍼어어엉-!!!
약 5m 정도의 땅이 움푹 페인 걸로 보아, 위력 자체는 충분한 것 같다.
실제 대미지는 뭘 맞혀봐야 알겠지만.
달그락.
달그락.
고정 포탑의 포화와 미사일 폭격에도 변함없이 움직이는 나침판의 바늘.
"이러면 나가린데...."
나침판의 움직이는 범위로 계산해본 대략적인 위치는 아무리 멀리 쳐도 2차선 도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초당 20발의 총알을 쏟아내는 고정 포탑으로 넓은 범위 전체에 포화를 뿌린 거라 놈이 도로 위에 있었다면 무언가 피해를 입었어야 한다.
것도 중간중간에 미사일까지 곁들여서 쐈으니까.
달그락.
이러면 남은 가능성은 땅 밑밖에 남지 않는다.
하늘 위도 가능성이야 있기야 하겠다만, 저 와이번 떼 사이로 황금 고블린이 날아다닐 것 같지는 않으니까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뭐, 만일 위에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나가리인 상황이겠지만....
'아포칼립스 속 집사' 게임에서처럼 '레이더'라든가 '감시 카메라' 같은 설비가 나온다면 좋겠지만, 이걸 얻으려면 레벨을 올리거나 설계도를 다음 단계까지 해금하는 방법밖에는 길이 없다.
칙, 치익-
고로 내게 당면한 세 가지 과제의 진행상황을 점검해볼까 한다.
"쓰읍."
첫 번째 과제인 집 강화는 충분한 자재를 얻어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후우-."
아직 좀 조잡한 부분이 있긴 한데, 이제 집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으니 '요새'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여기서 요새를 더 강화하려면 몬스터 웨이브와 같은 퀘스트를 통해 레벨을 올리거나, 설계도의 다음 단계가 열린 뒤가 될 것이다.
[방어 설비] ― 고정 포탑 2단 업그레이드 ―
└ 자동 포탑 ― 상향된 자동 포탑 ―
이 뒷줄에도 뭐가 있긴 한데, 회색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다.
설계도의 연구 가능한 것들을 전부 해금한다면 뒷부분이 개방되지 않을까 싶다.
┌ 추출기: 시체 소각로 필요.
[주거지 건설] ― 발전소 ― 에너지 설비 ― 냉난방
└ 생활 환경 개선 ― 주방 설비
└ 조잡한 화장실
▶▷▶▷▶▷▶▷ [71:26 냉난방 설비]
설계도의 마지막 남은 연구 '냉난방 설비'를 진행중이니, 약 71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지 확인할 수 있겠지.
"쓰으읍."
두 번째 과제는 안전 확보.
집 앞에 고블린 왕국이 들어 있는 이상한 포탈도 있지만, 나는 지금의 상황을 나름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안전 확보의 중요도 순위도 마지막으로 밀려 있었고.
"후우-."
허나, 길 건너편에 이하린 남매가 자리 잡은 것 때문에 한 단계 우선순위를 높이게 되었다.
이하린의 말에 따르면, 그들을 쫓아온 괴한들이 동생은 '식용'으로 자신은 '놀잇감'으로 납치하려 했다고 하는데....
"미치겠네."
저 남매 때문에 사람을 처먹는 미친놈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린 동생을 둔 이하린이 등에 큰 상처를 입었던 것만은 사실이니 미리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이이이잉―
뭐, 대비라 해봐야 포탑이 알아서 해주는 거다만.
내가 할 일이라곤 그저 대인전을 대비한 철저한 마음의 준비가 다다.
세상이 망하고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다가오는 적들도 이전처럼 만만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칙, 치익-
"쓰으읍."
마지막 과제는 집 앞의 포탈이다.
내부에 자리한 고블린 왕국을 생각해본다면 하나의 위험요소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본다면 저 포탈은 내게 손해를 입힌 적이 없다.
오히려 큰 이득만 주고 있지.
"후우우-."
뭐, 수천 수만 마리 고블린이 나와서 조금 위기가 오긴 했어도 이제는 100만 마리가 온다 해도 잡아낼 자신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버닝 포인트존으로 백만 단위의 포인트로 꿀까지 빨게 해주고 있으니.
『냐아아-!!』
"그래. 어떻게 하긴 해야지...."
로라는 저걸 내비두면 안 된다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질 않는다.
이동식 요새로 포탈 속을 침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쓰으읍."
차라리 렙업이라도 좀 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데....
"후우우-."
일전에 강소현과 만났던 시체 거인.
그놈들을 잡으면 1레벨과 능력치 스탯 1을 준다.
"아저씨!!! 나 부른 거 맞죠?"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이하린 아닌가?
연신 봉화를 피워 올리다 보니 연기를 알아본 이하린이 집앞에 도착해 있었다.
"네? 시체 거인이라... 그걸 잡았다고요?"
"그래서 본 적 있어?"
본적은 있으나 누군가가 잡는 것을 본 적은 없다는 걸로 보아 아직까지 시체 거인의 '한입충 쌉가능'은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아니, 보통은 그거랑 싸울 생각을 안 하지 않나요?"
"어쩌다 보니."
"아저씨, 그거랑 어쩌다 싸우게 된 건지 알려줘요. 그러면 어디서 봤는지 말해 줄게요."
'내 고양이 로라가 놈을 사냥하자고 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놈과 싸웠다고 하기에는 나는 누가 봐도 매우 신중한 사람이다.
흐음....
"같이 있던 여자가 좀 호전적이라서."
강소현.
언제쯤 돌아올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대신 희생을 좀 해줘야겠다.
"아저씨가 기다린다는 분요? 와... 아저씨만큼 특이한 사람인가 보네요."
강소현에 대한 잘못된 감상을 한 줄 내뱉은 이하린이 곧장 내게 시체 거인의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한강진역 방향에 있다는 거지?"
"으음... 망한 세상에서 뭔 역을 따져요. 대로를 바라보고 왼쪽이라니까요."
집을 기준으로 대로를 바라보고 왼쪽은 한강진역 방향이다. 길 건너편에는 용산구청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녹사평역이 나온다.
"그렇게 말해도 몰라요. 저 약간 길치라... 미니맵 없었으면 벌써 길 잃어서 죽었을 걸요?"
뭐, 이만큼 확인했으니 그녀가 말한 곳이 어딘지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쿠우우웅-!!
오른쪽 라인에는 눈알 괴물이랑 이상한 팔이 달린 공 모양 괴물이 있어서 집을 움직여서 갈 생각은 못했겠지만, 이하린이 말한 시체 거인은 내 집을 기준으로 왼쪽라인에 있다.
"미, 미친… 이 집 걸어다닐 수 있는 거였어요?"
쿠우웅-!
"아저씨이!!!!"
들을 건 다 들었으니 요새를 움직여 시체 거인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이하린이 몸을 들이밀어 요새의 이동 경로를 막아섰다.
"왜?"
"이, 이사 가는 거 아니죠?"
아무래도 포탈 자리도 지키긴 해야겠지.
"잠깐 외출한다. 동생 데리고 집이 있던 자리 좀 지키고 있어 봐. 혹시라도 사람들 오면 절대 포탈 근처로 못 들어가게 하고."
"네???"
쿠우웅-!
"아니, 이 사람아!!! 나 혼자 여길 어떻게 지켜요!!!!"
쿠우웅-!
"아저씨이!!!"
거, 버스 타고 보호받으러 왔으면 시키는 것이나 잘할 것이지 말이 많어.
멀어지는 이하린의 투정을 뒤로한 채 시체 거인이 있는 곳으로 이동식 요새를 운전했다.
세상이 더 망하기 전에 레벨부터 올려 둬야지.
쿠웅-!
쿠웅-!
렙업을 위해 시체 거인 방향으로 이동한 지 3분.
8개의 거미다리로 움직이는 이동식 요새는 약 시속 30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다.
쿠웅-!
쿠웅-!
"와, 씨... 저건 또 뭐냐?"
"집? 아니면 집 모양 괴물인가?"
세상은 폭삭 무너져버렸어도 생각보다 살아남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소미야, 숨어!"
이태원역 근처에서 한강진역 방향으로 가는 길.
적게는 둘 많게는 다섯 명으로 이뤄진 생존자들을 마주쳤다.
건물 내부의 운전석에 있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고, 들리는 소리로 유추해봤다.
"뭔 이상한 괴물이 또...."
본의 아니게 어그로를 좀 끌어버렸다마는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10m, 최대 높이로 요새를 띄워서 이동한 덕분에 큰 길을 잔뜩 메우고 있는 좀비 떼들의 공격을 받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내 요새를 따라다니려면 좀비 떼를 다 잡으면서 와야 한다.
"거점 옮길까? 여기도 이상한 괴물이 나타난 걸 보면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아...."
뭐, 대부분은 집모양 거미 괴물이라 생각을 하는 것 같다만.
거미다리는 그렇다 쳐도 '집' 자체는 요새 느낌으로 그럴싸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끼이이익―
철컥-!
이태원역과 한강진역 사이에 위치한 공영 주차장 한구석에 이동식 요새를 주차했다.
이하린의 말에 따르면, 이 무너진 공영주차장 어딘가에 시체 거인 두 마리가 있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진 주차장의 중앙도로.
사방을 뒤덮고 있는 찌그러진 자동차들.
그리고....
기기기기기긱-!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대한 시체 거인 두 마리가 주차장의 폐허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기긱-
사람 머리통 세 개로 만들어진 눈알.
놈이 그것을 굴려 나의 요새를 바라본다.
전에 만났을 적에는 철봉 하나로도 손쉽게 잡았던 것이 저 시체 거인이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허나 놈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을 대비해 냅다 고정포탑으로 포화를 갈겨버렸다.
피슈우우우웅-!
퍼어어엉-!!!
것도 미사일까지 곁들여서.
와르르르르-
5m짜리 시체 거인 두 마리는 10m 높이에서 내리쏘는 포탑의 위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푸슈우웃-!!
폭격까지 맞아 산산조각 나버린 시체 거인의 잔해 속에서는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고―
쉬이이이익-!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시체 거인의 남아있던 가슴 부분까지 무너져 내렸다.
쿠구구구궁-!
맞으면 사람을 정신 이상자로 만들어 버리는 검은 액체가 완전히 멎은 뒤에는 요새의 높이를 낮춰 시체 거인에게 드랍된 아이템을 확인했다.
「검은 마석 x2」
지금까지 총 네 마리를 잡아서 100% 드랍된 것을 보면 이것이 이 거인의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전과 달리 반쯤 폭사시켜 버렸기 때문에 검은 액체가 사방에 퍼져 있어 당장 '검은 마석'을 회수할 수는 없다.
저기 맞으면 정신 착란 같은 이상한 상태이상에 걸려 버리니까.
그래도 저 액체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게 있을 순 없으니 상태창을 켜 변화한 부분을 확인했다.
파앗-!
「이준(Lv.8) 32세 / 보유 포인트: 6,778,89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8」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시체 거인의 보상은 전과 동일했다.
레벨이 2 올랐고, 능력치도 8로 늘어났다.
"...이게 뭔."
가장 중요한 것은 '스킬에 추가된 것이 있는가?'인데.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요새화]
[요새 축소화: 1,000,000p]
요새 축소가 대체 무슨 말인가?
"별짓을 다 할 수 있겠네."
만일 내가 상상했던 대로 요새의 크기가 줄어드는 기능이라면 고블린 왕국을 요새를 타고 침공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얼만큼 작아지는지가 관건이다만.
쿠구구구궁-!!!
"미친."
이동식 요새의 다리와 담장을 합치면 15m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나의 요새.
쿠구구궁-!
요새가 점점 압축되듯이 줄어들더니, 작고 기계적인 모습의 생김새로 변해버렸다.
입처럼 보이는 정면에는 '소각로'가 자리하고 있었고, 쪼그라든 벽 사이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포대와 고정포탑과 자동포탑의 총구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어릴적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움직이는 성의 축소판 같달까?
그래도 멋지긴 멋지다.
내 집이라 그런게 아니고, 순수하게 객관적인 감상이다.
여기서 층수를 더 높인다면, 더 멋진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타다다닷-!
밖에서 축소화를 통해 변화한 요새의 모습을 구경하던 내게 로라가 달려온다.
『냐아~!!』
"뭐?"
로라에게 전해져 오는 의지.
축소화 상태에서는 요새의 공격을 강화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 * *
요새 축소화의 성능을 확인한 뒤에 나머지 변화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관리]
[마력이 듬뿍 담긴 키튼 사료 2,000p]
[조잡한 숨숨집 500p]
[조잡한 화장실 1,500p]
고양이 관련 텝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저급한'이었던 숨숨집과 화장실의 등급이 '조잡한' 등급으로 상승했고, '마력'이 포함되었다는 이름의 키튼 사료가 새롭게 생겨났다.
대체 그놈에 마력이 뭔진 몰라도 비축해둔 사료 대신 저것을 먹여야 하는 것만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무려 마력 아닌가?
강소현의 능력치 스탯이 '마력'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뭔가 대단한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생후 2개월된 고양이가 대단해져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 싶겠지만, 우리 로라에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이미 '힐'도 쓸 줄 아는 고양인데.
"화장실부터 해서 싹 다 새걸로 바꿔줄게."
『냐아~!!』
로라도 새로운 사료와 용품들을 기대하는 것 같다.
"아쉽긴 아쉽네."
추가된 스킬들은 나름 만족스러웠어도 '방어 설비'에 추가된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 [60:13 냉난방 설비]
아무래도 냉난방 설비 연구가 끝나고 나서 설계도의 다음 부분이 해금되어야지만 '방어 설비'의 잠겨 있는 것들이 개방될 것 같다.
한서불침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진화한 인류.
한겨울의 칼바람조차 우리에게 추위를 느끼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냉난방 설비가 있지?' 싶었는데, 적재적소에 쓰이는 집사의 스킬을 경험하고 나니까 불길한 추측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냉난방 설비'가 한서불침으로 진화한 인간들이 추위와 더위를 느낄 정도로 심각한 이상기후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달까?
"옘별, 여기서 더 망해 봐야 뭐 얼마나 더하겠어."
정상적인 물자 수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상을 망가트린 지진과 폭발.
5명을 넘는 인원이 뭉쳐 있으면 몰려드는 좀비 웨이브와 세상 곳곳으로 포탈을 열고 진격하는 고블린들.
거기다가 대로에 자리잡은 거대한 눈알 괴물까지.
푸슈우우우웃-!
망한 세상에 대한 고민을 끝내고 보니, 시체 거인의 검은 액체가 모두 사라졌다.
「검은 마석 x2」
이제 검은 마석만 챙겨서 돌아가면 되니, 마석을 집어서 인벤토리에 넣었는데―
파앗-!
「용산구에 모든 제약이 파괴되었습니다.」
「주시자의 눈이 해방됩니다.」
「더 이상 주시자의 눈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알아먹지 못할 메시지들이 튀어 나왔다.
#31. 황금 고블린 (2)
"씨벌...."
정황상 내가 뭔 짓을 한 건 맞는 듯한데.
'눈' 하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하다.
보기만 해도 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위험한 놈이다만.
시체 거인이 아무래도 '주시자의 눈'이라 불리는 괴물을 제약하던 요소였나 보다.
어째 뭣도 없는데 주는 건 많더라니....
일단 돌아가자.
* * *
쿠구웅-!!
"아, 아저씨이!!!!"
집앞 2차선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이하린이 이동식 요새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비상사태예요!!"
순간 '내가 한 짓이 들킨 건가?' 싶어서 변명거리를 떠올리던 차에 들려온 그녀의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는데요?"
'들'이라 한 걸 보면 강소현이 돌아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딱히 큰 경계심을 보이는 것도 아니니 식인종 무리가 쳐들어 온 것도 아닌 것 같다.
남은 가능성은 일전에 봤던 야만 부족의 방문이다.
집이 있던 골목길로 돌아갔더니, 예상했던 대로 처참한 몰골을 한 강소현의 지인 네 명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좀비 웨이브를 일으키자 할 줄 알았는지, 제법 거리를 벌린 채 나와 대화를 시작했다.
"이준 씨, 안녕하세요."
부족장.
근육질의 바바리안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피부는 더 구릿빛이 되었고 근육은 더욱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반갑습니다."
뜬금없이 왜 나를 찾아왔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로라 주치이의 지인들이기 때문에 나름의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다.
"소현 언니는 어디로 가셨나요? 이준씨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던데...."
부족장이 대표로 나와 내게 물었다.
"...."
그리고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1안. 사실대로 말한다.
이 경우 대답은 '차원의 틈새로 넘어갔습니다만.'이 된다.
여기서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황 설명을 곁들여야 한다.
2안. 경계심을 보이며 강소현의 정보를 숨긴다.
'알아서 뭐하게?' 혹은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있겠지만,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저들의 무기에 '붉은색 피'가 묻어 있는 걸로 보아 강소현의 지인들은 대인전에도 충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3안 4안 줄줄이 쓰레기 같은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지만, 정작 내가 고른 선택지는 가장 처음에 생각했던 '사실대로 말한다.'이다.
"강소현 씨는 차원의 틈새로 넘어갔습니다만."
그리고 순도 100%짜리 내 정직한 답변은 바바리안 부족민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
한참을 멈춰 있던 그들.
뭔가 부연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간략하게 2차 전직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아... 그걸 다짜고짜 차원의 틈새로 넘어갔다 하시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포탑이 무서워서 차마 화는 못내고.
식은땀을 훔치며 말하는 근육질의 바바리안 여자.
"이름이?"
언제까지 근육질 여자라 칭할 수는 없어서 이름을 물어봤는데.
"장진아예요. 여기 쌍둥이는 윤설 윤솔. 여기 남자는 박정수구요."
도합 4개의 이름을 들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전체와 통성명을 해버린 셈이니,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들의 이름과 특징을 기억했다.
그렇게 열심히 이름을 기억 중인 내게 근육질 여자, 아니, 장진아가 물었다.
"근데 그걸 저희가 어떻게 믿어요?"
'2차 전직을 하러 차원의 틈새로 넘어갔다.'라는 말을 어떻게 믿게 만들까?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저들을 납득시킬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저들도 전투를 상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에 대한 불신이 생겨버린 느낌이랄까?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 소현 언니가 사라져 있으니까 괜히 신경이 쓰이네요."
강소현이 나 때문에 사라졌다고 하면, 죽을 지언정 덤벼들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뭐, 나 때문은 아니라 2차 전직 때문이다만.
어차피 포탑 때문에 전투가 일어나도 문제는 없겠지만, 저 야생의 바바리안들은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 때문에 강소현을 보내는 것에 안 좋은 예감이 들었구나 싶다.
"하아, 이 언니들 다들 속고만 살았나. 아저씨, 미리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았잖아요."
다행이라고 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나를 도와주겠답시고 이하린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기야, 이하린의 동생도 2차 전직을 하면 차원의 틈새로 넘어가니 나보다는 그녀가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아저씨가 마음만 먹으면 다들 총알구멍 숭숭이야!! 몰라?"
허나 기대와는 달리 이하린의 화법에는 큰 문제가 있었지만.
"넌 또 뭐니? 네가 뭘 안다고―"
멸망한 세상의 인류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10m라는 거리를 유지해야한다.
멀찍이 떨어져서 말다툼을 시작하는 그들의 꼴이 퍽이나 우스웠다.
"내 동생도 무슨 마법 협회 초대장인지 받아서 잘 알거든요. 남이 그렇다면 그렇구나 할 것이지 말이 많아."
나름의 해명이 된 것 같긴 한데, 어째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아포칼립스가 와서 그런지 다들 말투에 날이 서 있는 느낌이랄까?
"우, 우리는 그렇지 않았어!"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면, 2차 전직은 수많은 세계(世界)에 속한 사람들이 지구를 관측하다가 마음에 드는 인간들에게 제안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마다 경험도 다르고, 전직의 결과도 다 달라서 그런지 뭔가 정립된 정보가 만들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그랬거든요!"
뭐, 정보 자체는 그렇다 치는데, 저들이 이 이상 싸우게 둬서는 안 된다.
"쓰읍! 하린아. 가만히 있자."
이하린 쟤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누가 봐도 야만족에 어울리는 외견의 사람들한테 저렇게 막말을 해대는 걸 보면 그렇다.
낯선 도망자 남매.
그리고 강소현과 친분이 있는 바바리안 부족민들.
귀찮을 법도 하지만, 내게는 이 상황이 퍽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기왕 사람이 많이 모인김에 저들에게 시킬 일이 좀 있으니까.
세 명씩 두 개의 조로 나눌 생각이라 저들의 사이가 더 나빠져서는 안 된다.
"소현 언니 보고 싶은데...."
"나도…."
너네 엄마는 차원의 틈새에 있단다.
엄마마냥 강소현을 찾는 쌍둥이 자매에게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인 뒤에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요 앞 도로에 땅을 좀 팔 겁니다. 제가 가리키는 방향의 땅 밑에서 황금 고블린이란 놈이 나올 건데, 그놈을 좀 잡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네? 뭐요?"
"황금 고블린을 잡아 오라고요."
"뭔, 황금 고블린을... 저번에는 무슨 건설 자재를 모아오라 시키시더니."
내가 보상으로 식량을 줄 것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군말 없이 수긍하는 강소현의 지인들.
"어차피 밥 달라고 오신 것 아닙니까?"
꾀죄죄한 몰골.
등에 꼬질꼬질한 봇짐을 메고 있다만, 저기서 음식이 있을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저들이 이곳을 찾아올 이유가 뭐 있겠는가?
인원이 한 명 줄어 있는 것은 좀 신경 쓰이는데, 어차피 저들이 말하고 싶으면 말해줄 것이니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저씨, 나도 할래요! 근데, 따로 해도 되는 일이에요?"
일 자체에는 불만이 없으나 같이 일하게 될 사람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이하린.
"우리도 너랑 일하기 싫거든. 그냥 조용히 있자."
뭔 놈에 분위기가 이리 삼엄한지.
피슈우우우웅
퍼어어엉-!!!
더 이상 싸우지 말란 의미에서 도로가로 미사일을 날렸는데, 그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
"아, 아저씨 안 싸우고 열심히 할게요!"
도합 다섯의 입을 닥치게 만들었으니.
콰아아앙-!
침묵이 내려앉은 골목길.
미사일로 내려앉은 2차선 도로.
나침판의 움직임을 보면 대략 500m 정도의 땅이 황금 고블린이 움직이는 범위다.
쿠구구궁-
쏘는 족족 무너지는 땅.
그 아래로 거대한 빈 공간이 드러났다.
뭔 놈에 땅 밑이 이리 텅텅 비어 있는지.
저러니 싱크홀이 자꾸 생기지....
세상이 망하기 전 발생하던 싱크홀의 근원을 마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시키는 대로 잘 해보십쇼."
A조 이하린, 장진아, 이미진.
B조 윤설, 윤솔, 박정수.
달그락.
달그락.
황금 고블린 추적기가 움직이는 범위의 양 끝에서 출발한 A조와 B조.
중앙지점에서 서로 마주칠 때까지 땅 밑에서 범위를 넓혀가며 고블린을 찾아야 한다.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하게요?"
출발하기 전 이하린이 가진 의문.
"나는 집 지켜야지."
내가 요새를 비울 수는 없으니까.
저들을 집 안에 들여서 요새를 지키게 하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집을 지킨다고 했지만, 고블린 놈이 지상으로 튀어나오면 포탑으로 잡을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쿠구구구구궁-!
"화이팅!"
편한 관람을 위해 요새를 최대 높이로 상승시킨 뒤 저들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주었다.
2차선 도로의 무너진 땅.
양 끝에서 출발한 A조와 B조가 서너 번은 마주쳤고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던 중 변화가 일어났다.
타앗-!
-고르르르륵!!!
"잡아!!!"
대검을 휘두르며 소리치는 장진아.
"B조!!!!"
스릉-
건너편에 있던 B조도 그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땅 위로 올라왔다.
-고르르르!!
그리고 그들보다 한발 빨리 땅위로 올라온 것은 황금 고블린이었다.
말 그대로 황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고블린.
등 뒤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보따리를 메고 있었는데, 물리법칙을 무시한 것 마냥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씨발!! 웰케 빨라!!"
A조와 B조의 포위망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황금 고블린.
위이이이잉―
투타탓-!
허나, 놈이 아무리 빨라봐야 총알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아… 하아…."
원래부터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그들은 짧은 추격전을 거치고서 더 처참한 모습으로 변했다.
물이라도 좀 넉넉히 줘야겠네.
"아저씨... 아저씨가 잡았어도 주기로 한 건 줄 거죠?"
대표로 내게 황금 고블린의 사체를 가지고 온 이하린이 물었다.
"내가 준 의뢰는 저걸 잡아 오라는 거였다만."
"그, 그래도 우리가 몰아 세워서 아저씨가 잡은 거잖아요!!"
대문앞에 놓인 황금 고블린의 시체를 집으로 가져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고민좀 해 보고."
황금 고블린이 뭘 주느냐에 따라 저들이 얻게 될 것도 달라질 것이다.
* * *
포탈을 열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 악독한 놈들이 '고블린'인데, 놈들에게도 예외란 것이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끊어 쏜 고정 포탑에 맞아 넝마조각처럼 되어 버린 황금 고블린.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황금색 피부를 가진 놈은 등짝에 거대한 보따리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따리 속에는 망한 세상 속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공간확장 수통x20」
「평범한 강화권 x20」
「마석 통신기 x20」
「모닥불 x20」
「횃불 x200」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보다 보니까....
뭐랄까?
꼭 세력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모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탐사를 위한 물품도 있어 보이고.
20이라는 숫자를 보아하니, 지금의 5인 인원 제한이 언젠가는 완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세력이라...."
10m 내에 사람 다섯 명밖에 있지 못하는데, 세력이 필요하긴 한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람 고기를 처먹는 미친놈들이 즐비한 세상이 되어 버렸는데, 세력을 일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뭐, 이하린 이하준 남매가 내게 똥을 넘겼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해도, 내가 타깃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어차피 겪어야 할 풍파라면 빨리 대비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역시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주시자의 눈'이라 불리는 눈알 괴물까지. 모든 것은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가 존재하고 있다.
'시체 거인'으로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으나, 한 구역의 시체 거인들을 다 죽이면 '주시자의 눈'이 해방된다.
'고블린'들이 인간을 납치하고 공격하지만, '황금 고블린'은 인간들에게 유용한 물품들을 제공한다.
'시스템'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줬지만, 그와 덩달아 여러가지 재난들을 가지고 왔다.
'인간 고기'와 '몬스터 고기'의 선택지도 마찬가지일 테지.
뭐, 마지막 건 정보가 너무 없긴 하다만.
어쨌든 지금 내 주변에는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즉, 황금 고블린의 보따리 속에 든 물품들을 곧바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저들을 요새에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다만.
당분간은 유용한 거래상대로는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무전기 역할을 할 것 같은 이름의 '마석 통신기'.
장비를 '평범한' 등급으로 강화시켜주는 '강화권'.
탐사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수통'.
모닥불이나 횃불은 뭔지 모르겠다만, 단순한 모닥불은 아닐테니 이것 또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보상을 기대하고 있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었는데, 뭐든 쓰기 나름이라고 당장 저걸 유용하게 쓸 방안을 떠올려 냈다.
제법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내가 요새를 비우고 어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내가 세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저들의 인력이 꼭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고로 내 집 근처에 자리잡은 일곱 명의 사람을 불러 모았다.
#32. 황금 고블린 (3)
포탈을 열고 사람들을 납치해가는 악독한 놈들이 '고블린'인데, 놈들에게도 예외란 것이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끊어 쏜 고정 포탑에 맞아 넝마조각처럼 되어 버린 황금 고블린.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황금색 피부를 가진 놈은 등짝에 거대한 보따리 집을 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보따리 속에는 망한 세상 속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공간확장 수통x20」
「평범한 강화권 x20」
「마석 통신기 x20」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보다 보니까....
뭐랄까?
꼭 세력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모여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탐사를 위한 물품도 있어 보이고.
20이라는 숫자를 보아하니, 지금의 5인 인원 제한이 언젠가는 완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세력이라...."
10m 내에 사람 다섯 명밖에 있지 못하는데, 세력이 필요하긴 한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람 고기를 처먹는 미친놈들이 즐비한 세상이 되어 버렸는데, 세력을 일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뭐, 이하린 이하준 남매가 내게 똥을 넘겼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해도, 내가 타깃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어차피 겪어야 할 풍파라면 빨리 대비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역시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주시자의 눈'이라 불리는 눈알 괴물까지. 모든 것은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가 존재하고 있다.
'시체 거인'으로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으나, 한 구역의 시체 거인들을 다 죽이면 '주시자의 눈'이 해방된다.
'고블린'들이 인간을 납치하고 공격하지만, '황금 고블린'은 인간들에게 유용한 물품들을 제공한다.
'시스템'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줬지만, 그와 덩달아 여러가지 재난들을 가지고 왔다.
'인간 고기'와 '몬스터 고기'의 선택지도 마찬가지일 테지.
뭐, 마지막 건 정보가 너무 없긴 하다만.
어쨌든 지금 내 주변에는 일곱 명의 사람들이 있다.
즉, 황금 고블린의 보따리 속에 든 물품들을 곧바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저들을 요새에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다만.
당분간은 유용한 거래상대로는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무전기 역할을 할 것 같은 이름의 '마석 통신기'.
장비를 '평범한' 등급으로 강화시켜주는 '강화권'.
탐사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수통'.
처음에는 개인적인 보상을 기대하고 있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었는데, 뭐든 쓰기 나름이라고 당장 저걸 유용하게 쓸 방안을 떠올려 냈다.
제법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내가 요새를 비우고 어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내가 세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저들의 인력이 꼭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고로 내 집 근처에 자리잡은 일곱 명의 사람을 불러 모았다.
좀비 웨이브를 경계해서 그런지 10m 간격으로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요새 아래쪽에 모인 사람들.
5m의 담장이 보호하고 있는 웅장한 나의 요새.
대문 옆과 위에는 포탑들 위엄을 뽐내고 있다.
처억-
그 사이에 서서 저들을 내려다보니 마치 내가 성주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쿠구구구구궁-!!
"전체 도열!!!"
한껏 뽕에 취해 요새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소리쳐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저 아저씨 또 이상한 짓 하네."
이하린부터.
"자기가 무슨 성주야 뭐야."
"이상한 능력으로 각성했다고 유세 부리는 것도 아니고."
강소현의 지인들까지.
말로는 투덜거리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만, 자세히 지켜보니 저들의 행동만은 정직했다.
보상을 탐내는 눈빛.
말은 저래도 몸은 정직하게 오와 열을 맞춰서 곧은 자세로 서 있었으니까.
하기야, 아포칼립스에서는 무력과 비축된 식량만이 갑을 관계를 결정짓는 요소일테니.
사기적인 강함을 보이는 '이동식 요새'와 편의점의 반을 통째로 옮겨 온 비축식량이 있는 한 저들은 내 든든한 우방이 되어줄 것이다.
위이이이잉―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고정포탑을 작동시키고 저들을 하나씩 불러서 보상을 먼저 지급해주기 시작했다.
보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고 본론을 꺼낸다면, 반은 이미 먹고 들어가는 것일 테니.
첫 타자는 이하린과 이하준 남매다.
"이하린, 이하준."
대문을 활짝 열고 논공행상을 진행하는 왕이 된 기분으로 거만하게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예~! 폐하."
그리고 이하린 그녀는 흥을 아는 사람이었다.
"누, 누나?"
"너도 따라 해!"
"예, 예. 폐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위로 올린 이하린. 그리고 그것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동생 이하준.
"그대들의 공이 크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상황극.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는 망해버린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희가 아닐까 싶다.
"상으로 마법 부여가 된 수통과 통신기, 아이템 강화권을 지급하노라."
덤이라는 느낌으로 편의점 특제 비축 식량들까지 제공해 줬고.
달달달달.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이하린이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서, 서, 성은이 망극해요."
동생은 그의 누나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는지 얼굴이 빨개진 채 도망치듯이 저 뒤로 가버렸다.
"아저씨, 무슨 성주 놀이해요? 그런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진짜 이상해."
그리고 남겨진 이하린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거, 같이 잘 놀아 놓고는 너무한 거 아닌가?
"크흠, 망한 세상에서 이런 거라도 하고 놀아야 하지 않겠어?"
"민망하죠? 내가 맞춰 줬으니까 이 정도로 그친 거예요. 뭐, 그래도 나쁘진 않았어요. 몇 달 만에 재밌었으니까요."
라는 말을 남긴 채 동생 옆으로 가버린 이하린.
"이준 씨, 저희도 저거 해야 될까요?"
그리고 이하린과 교대하듯이 내게 다가온 근육질의 부족장 장진아가 내게 물었다.
"아니요."
여기서 더 하면 진짜 미친놈이지 않을까?
이미 흥도 짜게 식어버렸기에 나머지들에게는 일사천리로 물건만 대충 전해주고 끝냈다.
"왜 우리는 강화권 안 줘요?"
이하린과 이하준은 내 나름대로 요새 주민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지만, 바바리안 부족민들은 아니다.
"아, 뭐. 이해는 할게요. 저흰 네 명이니까요."
그리고 이유는 달라도 그들도 나름 납득을 해준 것 같고.
-치지직.
-아저씨, 들려?
"들린다."
-아, 아아, 아저씨 목소리다!
한쪽 귀에만 낄 수 있게 만들어진 이어폰과 그 밑으로 마이크가 연결되어 있는 마석 통신기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통신기의 서버 역할을 할 것으로 추정되는 직육면체 형태의 박스를 조작하자 박스 위로 숫자가 표기되기 시작했고, 통신기를 조작해서 모두 같은 숫자로 주파수를 맞추었다.
-이준 씨, 저 장진아에요.
-윤설이에요.
-운솔이에요.
-툭, 투툭.
실제 주파수로 돌아가는 원리는 아니겠으나, 대체할 말이 딱히 없어서 그냥 주파수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했다.
"다들 장비 업글부터 하고 두 시간 뒤에 요새 앞에서 보는 걸로 합시다."
통신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도 확인했으니 이제는 개인 정비의 시간을 가질 차례다.
「평범한 강화권」
「평범한 등급으로 장비를 강화한다. 조잡한 이상의 등급의 아이템에만 사용 가능.」
저급한 -> 조잡한 -> 평범한 -> ???
다음 단계가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아포칼립스 속에서 아이템과 같은 것들의 등급은 위와 같은 순서로 나타나는 듯하다.
'평범한 강화권'을 집사복에 가져다 댔더니.
지직- 지지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강렬한 빛을 내뿜는 전격 같은 빛이 휩쓸고 지나갔다.
『키아오오!!』
화들짝 놀란 로라가 어깨에서 뛰어 내려갔고, 나는 강제로 몸이 고정된 것 마냥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벗고 쓸 것을....
지지직- 지직-
푸른색 스파크를 튀기는 집사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후우...."
약 10분간 이동불가 상태가 되어 버렸으니.
"뒤질 뻔했네."
요새 안이었기에 망정이지, 무턱대고 밖에서 장비를 입은 채 강화권을 사용했다가는 '나 좀 죽여주소' 하는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
또각, 또각.
'평범한' 등급이 되고 나서도 구두굽 소리는 변함없이 청아한 소리를 자아내고 있다.
또각, 또각.
화장실로 들어가 변화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봤는데, 이전과는 또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색 나비넥타이에는 흰색으로 고양이 그림의 자수가 새겨져 있고, 은색 고양이 그림이 있는 단추들은 모두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로라의 전용 좌석이 달린 오른쪽 어깨 부분에도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우선, 로라의 안장이 조금 더 안정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폭도 넓어졌고, 재질도 더 푹신해졌다.
『고로롱~ 고로로롱~ 고로롱~』
벌써부터 내 어깨에 올라와 몸을 둥글게 만 걸 보면, 로라가 느끼기에도 변화한 안장이 제법 편한 것 같다.
뭐, 그 밖에도 허리춤에 벨트에 디테일이 추가되었다거나 흰색 구두에 박힌 아이보리 색의 고양이 자수가 더 디테일해지는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딱히 별 감흥은 없다만.
뭔, 죄다 고양이를 박아 놨는지....
* * *
「인류의 보호조치 해제까지 302:00」
무슨 보호조치를 해제한다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제 약 13일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
최초에 주어진 시간은 720시간.
버닝 포인트존으로 줄어든 시간을 감안해도 족히 열흘은 넘게 시간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포탈과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집 앞에서 대기중인 저들은 밖을 누비며 돌아다녔을 것이니.
"아저씨~! 사람 불러다 놓고 뭐 해요?"
저들을 모은 이유는 간단하다.
또각, 또각.
"정보 교류를 좀 할까 싶은데. 다들 어떠신지요?"
대문을 열고 문 앞에 서 있던 일곱 명의 사람을 훑어보면서 말했고.
"그런 거라면, 저희도 좋아요."
다들 정보에 메말라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흔쾌히 정보 교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왜 그 용산구청으로 가면 정부랑 연락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시작은 바바리안의 부족장, 장진아 부터였다.
"그걸 아직도 믿습니까?"
시작부터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말이 나와 버렸다만.
강소현도 같은 말을 했다가 내게 한소리 들었었는데, 저들도 강소현과 같이 아직도 꿈과 희망이 넘쳐나나 보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 정부는 무슨 정부.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죠."
허나, 이어진 말을 듣고서는 오히려 나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자책하게 되었다.
"저희 은신처 근처에 대학생 무리가 있었어요. 그중 한 명이 천리안 같은 스킬을 썼고요."
강소현의 지인들 근처에는 명상을 하면 멀리 있는 장소의 풍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특수 스킬의 소유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걔가 용산구청에 진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그랬어요. 건물도 반 정도는 멀쩡하대요. 그리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리고 그 특수 스킬의 사용자가 천리안을 통해 바라본 용산구청의 풍경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어 버렸다.
"아, 그때 그 사람 말로는 진짜 제대로 정부가 기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대요. 경찰복을 입은 통제 인원도 있고 그렇다네요."
기껏해야 사람들 좀 모여 있을 줄 알았는데.
'전기'가 통하고 인원을 관리할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그 천리안을 쓴다는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저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당사자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겠다 싶어서 '천리안' 스킬 소유자의 행방을 물어 봤는데....
"잡아먹혔어요."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답변이 들려왔다.
죽은 것도 아니고, 실종도 아니고, 잡아먹히다니….
이러면 주어가 굉장히 중요해지는데.
"...누구한테?"
누가 저 사람을 잡아먹었는가.
고블린이나 좀비한테 잡아먹혔다면 차라리 낫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100% 사람일 것만 같다.
"누구긴 누구예요, 사람이지. 이준 씨는 밖에 별로 안 돌아다녔죠?"
"그렇습니다만."
"밖은 지옥이에요. 그 순신 건설인지 뭔지 그놈들 때문에 경리단길 근방은 전부 깡패들 영역이 되었어요."
장진아가 알려준 바깥세상은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 넘는 마경이 되어 있었다.
"저희도 나름 조사를 해 봤죠. 그러다가 동료도 하나 잃어 버렸구요."
전과 달리 한 명이 줄어 있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냄새로 사람을 추적하는 '바바리안 추적꾼'은 식인종들에게 사냥당해 먹혀버렸다.
그리고....
"미, 미친. 나 쫓아온 사람이 잡아먹은 것 같은데요? 그 변태 새끼들 중 한 놈이 킁킁거리면서 돌아다녔어요."
바바리안 추적꾼을 잡아먹은 식인종들은 '야생의 추적자' 스킬을 흡수했고 이를 이용해서 이하린과 이하준 남매를 사냥하러 왔다고 한다.
"아무리 도망쳐도 따라온다 싶었는데."
"그래서 사람을 처먹으면 좋은 점만 있는 겁니까?"
스킬, 능력치 등을 흡수한다는 식인종.
일전에 이하린의 말에 따르면 식인종은 바보가 된다고 했다.
허나, 이하린을 따라온 자들은 내 요새를 관찰만하고는 도망쳤었다. 바보가 됐다면, 정찰과 도주 같은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았겠지.
즉, 식인에 대한 페널티가 생각 이상으로 미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사람을 일정 간격으로 조금씩 섭취하면 그런 페널티가 좀 완화되는 것 같더라고요. 물론 중독을 이겨내야 하지만요."
'인간 고기'를 선택한 자가 사람을 먹으면 엄청난 쾌락을 느끼고 먹은 사람의 능력을 흡수하게 된다.
많이 먹으면 바보가 되도, 그 정도를 조절할 수 있으니 사실상 페널티라고 부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아, 그렇다고 무한정으로 힘을 흡수하는 건 아니에요. 뭔가 제한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식인종들과 직접 싸워가면서 그녀들이 알아낸 정보들은 하나같이 귀중한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능력치가 강해지는 건 잘 모르겠는데, 스킬은 한 번에 한 명의 것만 흡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내심 '식인종 = 무한 스킬'인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 망한 세상의 벨런스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놈들은 스킬을 하나씩 더 쓸 수 있다는 말이니, 주의할 필요는 있을 거다.
"그래서 용산구청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이준 씨 요새도 있고, 저희가 같이 움직인다면 나름 가볼만할 것 같은데요?"
"강소현 씨를 기다려야 해서."
안타깝지만, 강소현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올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이곳을 비울 수는 없다.
대신 다른 걸 제안할 생각은 있다만.
논공행상을 통해 식량과 보조 장비를 얻은 사람들.
그리고 정보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 대화의 물고도 트였다.
이제는 슬슬 나도 본론을 말해도 되겠다 싶은 상황.
"저랑 같이 주시자의 눈을 잡으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들에게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
그 위를 빙빙 돌고 있는 와이번들.
아마도 놈이 주시자의 눈이 아닐까 싶다.
"미, 미친. 그걸 잡자고요?"
8까지 오른 레벨.
순전히 감이다만, 10레벨은 찍고 로라한테 '신성의 조각'이란 걸 먹여 놔야지 앞으로의 삶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레벨과 능력치라는 보상을 주던 시체 거인을 잡으면서 해방된 것이 '주시자의 눈'이다.
아마도 시체 거인보다 더 나은 보상을 주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놈을 잡아야 용산구청에도 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들에게 용산구청이 이 망한 세상 속에 유일한 희망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을 이해는 해줄 수 있다.
나도 궁금하긴 하거든.
이 망한 세상에서 전기도 통하고 통제할 경찰까지 있는 멀쩡한 구청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거기다 사람이 수백씩이나 몰려 있기까지 하다니.
궁금하긴 해도, 주시자의 눈의 공략을 짜면서 강소현의 귀환을 기다리는 게 우선이다.
처음에는 무슨 미친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바바리안 부족민들과 이하린 남매.
허나 내 요새를 보더니 어딘지 모를 가능성을 느낀 것 같다.
"공략 좋죠. 그걸 잡아야 용산구청에 가는 것도 이해하겠어요. 근데 그 강소현이라는 분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요?"
그런 이하린의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려는 듯.
지지지직-!
지지직-!
갑작스럽게 하늘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하늘에 금이 간다.
찌지지직-
아니, 찢어지고 있다.
무슨 종이라도 찢는 것처럼 텅 빈 하늘에 구멍이 뚫렸고.
"-이이이이익!!! 이 미친 영감탱이드으을―!!!"
그 안에서 강소현이 몸을 비집고 나타났다.
"-이이이익!!!!"
쿠우웅-!
다행이라 해야 될지는 모르겠으나, 강소현의 낙하지점은 내 집 앞마당이었다.
#33. 귀환
"-이이이익!!! 개같은 영감탱이들 다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버닝 포인트존을 쓰느라 줄어버린 시간 탓에 정확히 얼마 만에 강소현이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며칠 만에 본 강소현이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사실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우웅-!
"늙은이들아!!!! 이러니까 좋냐!!!!"
부우웅-!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된 강소현.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가시가 잔뜩 박힌 모닝스타를 휘두르며 악을 쓰고 있었다.
철그럭-
철봉을 집어 들고 광증을 앓고 있어 보이는 강소현에게 물었다.
"강소현 씨, 제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이이이익!!!"
"강소현 씨?"
"하아... 어?… 이, 이준 씨?"
뇌진탕, 정신 착란 등에 휩싸인 사람은 기본적인 인지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로, 강소현에게 간단한 질문을 몇 가지 해보았다.
"제, 제 이름요? 강소현이요."
"제 딸래미 이름이 뭡니까?"
"로라요."
"문 앞에 서 있는 네 사람 이름 기억하십니까?"
"윤설, 윤솔, 장진아, 저번에 왔던 남자 하나. 저 문제없으니까 그만하셔도―"
"그 옆에 서 있는 남매는요?"
"...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기억 안 나십니까?"
쿵-!
자신의 머리에 꿀빰을 때리는 강소현.
"지, 진짜 모르겠는데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강소현이 이내 이하린 이하준 남매를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당연히 모르는 게 맞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일 테니."
혹시라도 강소현이 기억 못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우길 때를 대비해 물어본 건데….
"...."
건강 상태 확인을 위한 내 질문이 그녀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다.
"...."
빠직-!
"미쳤어요? 어쩜 사람이 오랜만에 보는데도 한결같이 이럴까...."
"크흠,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나 확인을 했을 뿐입니다. 그냥, 모른다고 하시면 되는 걸 왜 머리까지 때리셔서...."
"하아... 아무튼, 저는 멀쩡하니까 그 봉 좀 치워요."
철그럭-
강소현이 온전한 상태임을 확인했으니 꺼내두었던 철봉을 치웠다.
또각, 또각.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리고 재회 기념 악수를 청했다.
며칠 만에 봤는지는 몰라도 매일같이 붙어 있던 사람과의 재회이니 반가운 것도 사실이니까.
척-
강소현도 내 손을 잡고는 거세게 손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윽.... 사, 살살 좀 하시죠."
"아, 미안해요. 아직 힘 조절이 능숙하지 못해서."
분명 강소현은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로서 차원의 틈새란 곳으로 떠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준이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어도 '마탑'이라 함은 보통은 '마법'을 배우는 곳이 아닌가?
"강소현 씨, 고작 며칠 사이에 많이 변하셨군요."
허나, 강소현의 몰골을 보면 무슨 산적굴에서 수행을 하고 온 것 같다.
원래도 제법 마른 근육이 붙어 있던 강소현의 몸은 허벅지부터 팔까지 전반적으로 더 탄탄한 근육들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저기 있는 흉터들까지.
과장 조금 보태서 산적으로 영업을 뛰다 온 느낌이랄까?
"아... 제 꼴이 좀 그렇죠?"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녀가 반쯤 나체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찢어지 흰색 수련복.
마탑에 갔지만, 지팡이 대신 거대 모닝스타를 들고 왔다.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무기까지.
이상하게 변한 강소현의 모습을 보고 나니 마탑이라는 곳에 대한 내 인식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
"하아… 미친 영감탱이들."
백색 마탑의 '스승'을 자처하던 다섯 명의 늙은이들에 대한 얘기로 강소현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대마도사니 일곱 기둥이니 하면서 거드름이나 피우던 노친내들...."
일전의 가입서부터 보이던 쓸데없이 긴 미사여구.
꼬장꼬장한 말투에서 느껴지던 것처럼 그녀에게 가르침을 준 자들은 늙을 대로 늙어 빠진 놈들이었다.
"다짜고짜 옷을 벗기더라고요."
것도 단단히 미쳐버린.
"시간이 없다면서 할망구 둘에 영감 셋이서 저를 붙잡고는 막!! 뭔 수술을 하는데.... 마력 회로를 만든다나 뭐라나."
요약하자면, 강소현은 차원의 틈새라는 흰색 공간으로 납치당했고 강제 탈의를 당한 후에 인체 개조를 당했다는 말이다.
"진짜 아파 죽을 뻔했어요.... 거의 기절만 스무 번은 한 것 같은데. 기절하는 족족 깨우더라고요."
"뭐 저런 미친놈들이...."
강소현이 겪었을 고생을 떠올리며 나름의 공감을 해주던 차에 그녀가 내게 알아먹지 못할 개소리를 내뱉었다.
"아, 근데 그거 이준 씨도 해야 돼요."
나도 '납치 + 강제 탈의 + 인체 개조'를 당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내가 대체 뭘 해야 된다는 건지....
"그때 제가 가는 조건으로 계약한 게 있잖아요."
"그? 뭘 말하시는 건지...?"
내게도 뭘 준다는 얘기가 있긴 했다.
'불사자 각인'이란 것을 나도 받게 해준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 나도 해야 한다는 걸 보면 '불사자 각인'을 말하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네. 제가 받은 게 그거예요. 단순히 몸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넓고 안정된 마력 회로까지 이식하는 시술이니까요."
"시술?"
"아, 시술이라기엔 조금 복잡한 게 많아서... 수술이라고 해야겠네요."
"옘별... 뭔진 몰라도 그거 안 받으면 안 됩니까?"
"아, 그 미친 늙은이들이 마법 스크롤로 만들어 줘서 제가 뭘 할 건 없어요. 금방 끝나니까 일로 오시죠."
자박, 자박.
반쯤 맛이 간 눈동자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강소현.
또각, 또각.
"뒤, 뒤로 물러나시죠, 강소현 씨."
그에 맞춰 뒷걸음질 치는 나의 발걸음.
"이준 씨? 왜 도망가요. 이게 받고 나면 진짜 세상이 달라진다니까요."
사방으로 흰자가 보이는 맛 간 눈깔을 하고서는 저걸 믿으라는 건가?
안타깝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순진한 사람은 못 된다.
"블링크."
텁-!
"젠장."
'블링크'라니....
갑작스럽게 내 뒤에서 나타난 강소현.
꽈아악-!
거, 내가 집산데 힘으로 뭘 어쩌겠다고....
"소용없어요."
허나 나는 나를 옥죄는 그녀의 손아귀 힘을 뿌리쳐 낼 수 없었다.
"어이! 아줌마!!!"
그때 나를 구원해주는 이하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 아줌마?"
구원이라기에는 첫 워딩부터가 좀 문제가 있다만.
나한테 아저씨라 하는 건 그렇다 치는데, 강소현에게 아줌마라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것도 저런 기괴한 모닝스타까지 들고 있는데?
"이준 씨, 제가 없는 사이에 재밌는 사람을 데려왔네요."
꽈아악-!!
"쿨럭, 사, 살살 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사람이 이 정도로 과격해질 수가 있는 거지?
"우리 앞에 서 있는 거 안 보여? 반가운 건 알겠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 좀 해줍시다."
그리고 이하린은 눈치 없이 계속해서 강소현을 자극하고 있다.
저 망할 것....
"이준 씨, 오랜만에 보는 애들이랑 인사도 해야 하고, 저 아가씨랑도 인사 좀 하고 올게요."
우우웅-!
"그, 그거 저리 치우시죠!!"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강소현이 맛이 간 눈깔로 내게 이상한 종이 쪼가리를 들이민다.
차악-!
"끄아아아아악!!!!"
낡고 더러운 종이가 내 몸에 닿자마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나는 기억을 잃고 쓰러졌다.
* * *
"...끄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언니이~!!"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강소현의 심기를 거스르던 이하린이 강소현을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언니'로 바뀌었고.
"이것 좀 드셔 볼래요? 아저씨가 준 건데."
아양을 떨다 못해 거의 수발을 드는 지경으로 그 행동거지도 바뀌어 있었다.
둘만 있을 때는 몰랐던 강소현의 모습이랄까?
알파메일.
아니, 알파 피메일이라 해야 되나?
강소현은 무리를 이끄는 데 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아니지, 무리라기보다는 조직이 맞는 표현이겠다.
투박하고 섬뜩하게 생긴 모닝스타를 보면 산적이나 깡패가 더 어울려 보이니까.
-치지직.
-언니, 그 눈알 괴물 진짜 없어졌는데요?
바바리안 부족, 강소현의 지인들이 없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정찰을 나가 있었다.
-띠딕.
"그치, 이준 씨 추측대로 주시자의 눈이 그 눈알 괴물이 맞나 보네. 아마 이준 씨가 뭘 해서 저게 돌아다니게 된 것 같은데, 조금 더 알아봐줘. 위험하면 스크롤 찢고."
그들의 보고를 들은 강소현이 마석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며 다음 지령을 내린다.
-치직.
-알았어. 다른 생존자들한테도 한번 물어볼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누군가가 강소현에게 '주시자의 눈'을 사냥한다는 내 계획을 말해줬고, 강소현이 기절한 나대신 일을 진행시키고 있던 것 같다.
"...."
"아, 이준 씨. 일어나셨네요."
멍하게 대문앞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한 강소현이 웃으며 다가온다.
"몸 좀 어때요?"
다짜고짜 기절시키고는 어떠냐고 묻는 건 무슨 악취미인가 싶은데....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느껴지는 바로는 이 이상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다.
힘은 넘치는데 몸 자체는 날아갈 듯이 가볍달까?
"이준 씨는 그래도 기절했으니 다행이지, 저는 기절도 못했어요. 무슨 정신력을 키운다나 뭐라나.... 기절하는 족족 다시 깨우더라고요."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저 꼴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준 씨는 얼마나 편해요? 잠깐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것저것 다 처리돼 있고, 몸도 강해졌고."
그녀 말대로 잠깐 기절해 있다 일어났을 뿐인데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해결되고 있었다.
「추출중...100%」
이건 또 언제 100%를 채워 놨는지.
어째 집 앞에 시체가 좀 줄은 것 같더라.
"그 뭐냐 추출기? 그것 좀 확인하고 계세요. 밖에서 몸 좀 풀고 올게요."
부우웅-!
부웅-!
그녀가 잘 요새 밖으로 나가 절도 있는 자세로 거대한 모닝 스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저걸 보고 나니, 점점 백색 마탑이 뭐하는 곳인지에 대한 의문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마법사한테 둔기술을 배워 왔다는 말 아닌가?
그녀의 움직임은 정돈되었으며 정돈된 와중에도 어딘지 모르게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저 둔기술이야말로 '백색 마탑 마법사'들만의 비전이겠지.
마탑은 이름만 마법사스러운 거고 사실 마초적인 놈들이 모인 곳일지도 모른다.
끼이이익-!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추출기 문을 열었는데, 기존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추출되어 있었다.
"...뭐지?"
기존의 고블린 추출물이 '진득한 악의'와 '하급 마석 2,000개'가 기본으로 나오고 이를 대체할 품목을 고르는 것이었다면,
「마력을 머금은 황금 덩어리」
이번에 나온 것은 그 종류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황금 고블린의 시체를 집어넣어서 그런 것 같은데....
"강소현 씨, 대체 뭘 집어넣습니까?"
황금 고블린 하나에서 나왔다기에는 덩어리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 이준 씨가 기절한 탓에 얼마나 넣어야 될지 감이 안 와서 다 같이 고생 좀 했어요."
그리고 덧붙여진 말.
"대충 4~5천 마리 정도 세고는 그만뒀어요."
사람이 많으니 고블린 수천 마리를 집어넣은 건 그렇다 치는데, 대체 조건이 뭘까?
황금 고블린 + 일반 고블린 4~5천 마리 = 마력을 머금은 황금 덩어리
이런 공식일 것 같진 않은데....
"하린이가 뭔 김이 날 때까지 넣어야 된다길래 무턱대고 집어넣어서 저한테 물어보셔도 알 수 없어요."
언제 엿봤는지는 몰라도 이하린이 추출기가 열리는 것을 목격했고, 내가 기절한 사이 저들이 소각로에 고블린을 태워서 추출기를 100%로 채웠다.
뭐, 결과물이 좋으니 엿본 것 정도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디다 쓰일지는 몰라도 나온게 무려 '황금' 아닌가?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금본위제 따위를 바랄 수는 없겠지마는 적어도 '황금'이라는 것은 인류가 화폐를 사용한 이례 최대 가치를 가져왔던 물품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것도 '마력을 머금은'이 붙어있는데, 이 망한 세상에서는 순수 황금보다는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준 씨, 어떻게 할지 정했어요? 애들한테 대충 설명은 들었어요. 이준 씨가 사고 친 덕에 '주시자의 눈'이 움직이게 됐고, 집 앞에 포탈 속에는 고블린 왕국이 들어 있다면서요."
조금 오해가 있긴 한데....
"아, 사고 쳤다는 건 순전히 제 추측이에요. 추측이라기엔 100% 사실이겠지만요."
"크흠, 그래서 제가 얼마나 기절했습니까?"
일의 진행 속도를 보아하건데 한두 시간 정도 기절했을 것 같진 않고.
"막 30시간 정도 지났네요. 상태창 한 번 보세요. 각인이 잘 됐는지는 모르겠어서."
파앗-!
「이준(Lv.8) 32세 / 보유 포인트: 6,778,89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8」
「각인: 불사자 각인(Lv.1)」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설계도]」
응?
능력치 스탯 뒤에 '?'가 생겨났다.
거기다 각인이라는 이상한 탭도 나타났고.
터억-
터억-
멍하게 상태창을 바라보던 나를 향해 강소현이 손에 모닝스타를 튀기면서 내게 다가온다.
위이이이잉―
그 위협적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포탑을 작동시켜 버렸다.
"하! 쏴 봐요."
강소현이 포탑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도발적인 말을 했고.
투타타타타탓-!
나는 무심코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티딩-! 팅- 티티팅-!
"봤죠?"
"어...?"
강소현 주변에 투명한 막이라도 생긴 것처럼 튕겨져 나간 총알들.
"내, 내가 왜…?"
그와 별개로 내가 왜 그녀를 공격했는지 의문이 들었고, 그 이유는 이어지는 강소현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게 '도발'이라는 마법인데요, 강제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다네요."
사람의 의지를 강제하는 마법이라니....
"뭐, 연달아 쓸 수는 없는데, 나름 효과가 제법 괜찮지 않나요?"
철컹-!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스크롤을 꺼내 들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준 씨도 마법 배워 보실래요? 백색 마탑 비전 마법은 못 알려주는데, 공용 마법들 중에 괜찮은 걸로 제가 몇 개 배워 왔어요. 제가 나름 백색 마탑의 유일한 계승자라 기초 마법 정도는 전수해줘도 된다네요."
그 짧은 시간에 '백색 마탑의 수습 마법사 후보'에서 '유일한 계승자'라는 지위까지 올라간 강소현.
저벅, 저벅.
그녀가 반쯤 맛이 간 눈빛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것도 기억 재생 스크롤을 통해 배우는 거라, 딱히 어려울 건 없을 거예요."
왼손에 든 낡고 삭아버린 거대한 스크롤.
오른손에는 보기만 해도 흉악하게 생긴 모닝스타.
강소현의 몸 여기저기에 난 상처들.
대체 어딜 봐서 마법을 가르치겠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로 와 봐요. 제가 안 아프게 알려줄게요."
흉악해진 강소현에게 떠밀리며 내 기억은 또다시 끊어졌다.
대체 마법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서 배우라는 건지 모르겠네.
#34. 마법
"노부는 백색 마탑의 수장, 대마도사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옴브 리사체다."
강소현이 빛을 잔뜩 머금은 주먹으로 나를 내리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웬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 강소현이에요."
그리고 내 몸에서 강소현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크흠, 빨리 올 것이지 어지간히 비싸게 굴더구나."
저벅, 저벅.
"이 아이에게 재능이 보인다고?"
바닥에 누워 있던 내 주위로 처음의 노인보다 더 꼬장꼬장한 모습을 한 할망구 두 명이 다가오며 말했다.
"흐음, 뻐튕긴 게 괴씸하니 당장 불사자 각인부터 시작합세."
"-이이이익!!! 저, 저리 가!!!"
분명 시점은 내 눈으로 보고 있는데, 목소리와 움직임만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내가 강소현 시점으로 빙의를 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이이이이익!!!"
"껄껄, 싹수가 보여, 싹수가."
대체 내게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나는 1인칭 시점으로 강소현의 기억 속에 빙의한 것 같다.
"팔팔한 걸 보아하니 위대한 우리 백색 마탑의 진전을 이을 가능성은 차고 넘치는 것 같네만."
이걸 보다 보니 뭐랄까?
실제 촉감이나 하는 것들은 느껴지지 않다만, 뭔지 모를 불쾌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눈에 보이는 광경이지만, 그 주체가 내가 아닌 것에서 오는 그런 괴리감.
"-이이이익!! 이 변태들!!!!"
아무튼 그런 불쾌한 감각 속에서 이어지는 장면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늙은이들 다섯 명이 강소현을 둘러싸더니 빛이 맴도는 손으로 강소현을 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아파도 참아라!!!"
꼬장꼬장한 노인네들의 쭈글쭈글한 손에 백색 빛이 감돈다.
그 손이 강소현에게 닿고.
"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속에서 빛은 강소현에게 스며들었고.
"허어, 무슨 마력지체라도 되는 겐가? 어찌 이리 잘 받아들일 수 있지?"
노인들은 그 모습에 침을 튀겨가며 감탄했다.
그와 달리 강소현은 거세게 소리치며 저항했지만.
"-이이익!!! 내 몸에서 손! 떼라고오오―!!!!"
털썩.
아무런 성과도 없이 기절해 버렸다.
"벌써 기절하다니...."
따악!
그렇게 강소현이 기절하면, 노인들은 손가락을 스냅을 튕기고는 알아먹지 못할 마법을 써서 그녀를 다시 깨웠다.
"...허억... 허억. 그, 그만...."
"어허! 강한 정신에 강한 마력이 깃든다! 참아야 하느니라. 네가 동의하지 않았더냐?"
아무튼 1인칭 시점으로 저걸 보다보니, 그녀가 끌려갔던 백색 마탑이 무식하고 마초적인 변태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상 강압적인 범죄자 집단의 행동인데, 너무나도 늙어 빠진 외모 때문에 조금 완화되어 보이는 것 같다.
강소현이 당한 걸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방에서 늙은이들에게 둘러싸여 고문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아, 저 노인네들이 얼마나 꼬장꼬장하게 늙었는지를 설명하자면, 흠....
어떻게 죽어도 자연사로만 보일 정도로 늙었달까?
천 살은 먹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주름도 많고 풍기는 분위기도 꼬장꼬장하다.
실족사, 교통사고 등 어떤 사유로 죽더라도 자연사로 쳐도 무방할 정도의 세월이 저 늙은이들에게는 깃들어 있었다.
자박, 자박.
기본적인 걸음걸이 자세부터가 뒷짐을 지고 있었으며.
"에잉, 쯔읏! 요즘 것들은 약해 빠져 가지고는.... 나 때는 생살을 가르고 마력 회로를 심어도 참았었는데 말이야."
내뱉는 워딩 하나하나에 그들의 얼굴을 가득 메운 주름만큼의 꼰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이이이익!!!"
아무튼 그렇게 서너번 더 기절한 강소현이 깨어나자, 백색 마탑의 수장이라 자신을 소개하던 늙은이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노부의 이름은 대마도사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옴브 리사체다."
"...가, 가, 강소현입니다."
다짜고짜 기절할 정도의 고통을 받아서 그런지 고분고분해진 강소현이 대답했고.
"노부의 이름이 뭐라고?"
꼬장꼬장한 늙은이답게 그녀가 쓸데없이 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지를 확인해왔다.
"... 그, 그게... 리, 리사체 님이요."
빠악-!
"요즘 것들은 기억력이 참 안 좋아. 몇 번 맞다 보면 금세 좋아질게다. 마도의 길을 걷는 자에게 있어 '이름'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 네년이 우리의 제자가 되겠다면, 스승의 이름부터 기억하는 것이 시작이니라."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옴브 리사체.
레아트리 우브 데 아 로베르트 .
미르샤인 페르시아무르고스아바테인.
제니아 로페즈 비앙트라체.
루스차일드 데 체사로드바인.
다섯 명의 늙은이들의 이름이다.
머리통을 맞아가며 이름을 외우는 강소현을 1인칭 빙의 시점으로 보는 탓에, 덩달아 나도 외워 버렸다.
뭐 이런 좆같은 이름들이 다 있는지....
"이제부터 우리 다섯은 너의 스승이다."
이름을 다 외운 강소현에게 다짜고짜 스승 선언을 하는 늙은이들.
"저, 저기···."
빠악-!
"어허! 어딜 스승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입을 여느냐?"
강소현은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얻어맞으면서 스승을 자처하는 늙은이들의 강연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마력이 뭐라고?"
"세상 모든 것에 깃든 힘입니다. 마법은 마력을 이용해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뜻합니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마법이란 마법진으로 시작해서 말로 끝맺음 짓는 것으로 '언어'의 정직함이 마법사의 덕목입니다!"
빠악-!
"맞지만, 노부가 질문은 '마력이 무엇이냐?' 단 하나였다. 쓸데없는 사족을 곁들이라 한 적은 없다만."
아무튼 그렇게 얻어맞는 강소현을 바라보면서 나도 덩달아 마법 수업을 듣게 되었다.
빠악-!
"다시!"
얘가 왜 이렇게 맛이 갔나 했더니, 저렇게 처맞는데 사람이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나 싶다.
빠악-!
"어허, 어찌 이걸 못할꼬."
직접 대미지는 없어도 1인칭 시점으로 강소현이 얻어맞는 것을 보는 것도 제법 고역이었으니까.
시간 개념을 잃어버릴 정도로 강소현이 얻어맞는 걸 본 뒤에야 나는 비로소 '마법'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구축할 때부터 의지를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법이란 것은 세계가 자신의 의지를 대변해주는 행위이니."
남의 몸에 빙의해서 얻어맞으면서 배웠더니 이해는 빨랐다.
아프진 않아도 내 몸이 아니되 내 시점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통해 학습하는 것은 생각보다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마법진으로 시작해 말로 끝맺음 짓는 마법.
마법진이라 해도 일부 초보자가 쓰는 수준에서는 별다른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제부터 배울 마법은 백색 마탑의 비전 마법이다. 지금 이순간 이후로 너는 말의 힘을 더욱 느끼면서 살아가야 할지어다."
'마법 개꿀이네.'라고 생각하던 차에 이어지는 노인의 말.
"말을 배신하는 행위는 수명을 깎아먹게 될 게다."
마법은 편리한 만큼 생각 이상으로 큰 제약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내뱉는 말은 말 자체에 힘이 담겨 있다.
자신이 직접 내뱉은 말을 배신하는 행위는 마법사를 약하게 만든다.
그말인즉슨.
마법사는 거짓말, 기만, 사기 등의 행위가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여자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다행히도 곁가지로 배운 수준인 나에게는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만. 어쩌면 아직 이 의식 세계에 있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흐음....
그렇다면 백색 마탑 비전 마법을 배웠다던 강소현은 이미 '거짓말'을 못하는 존재가 됐다는 건가?
생각에 잠겨 있던 내게 대마도사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옴브 리사체가 다가온다.
"네놈은 이제 가 봐라!"
빠악-!
이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내 의식은 다시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 * *
"끄으윽...."
『냐아~!!』
핥짝, 핥짝.
"로, 로라?"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요새 안의 마스터룸에 있었다.
핥짝.
분명 의식세계에서 얻어맞았건만 현실의 내 이마가 터질 듯이 땡땡 부어 있었다.
우우웅-!
그리고 누워 있던 나의 머리 위에서 로라가 그곳을 핥아서 상처를 치유해준다.
"끄윽...."
하인리워즈 루테인 베르사옴브 리사체.
이 개새끼.
분명 마지막 말은 나한테 한 것 같은데 말이야.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는 정신세계에서 어떻게 내게 물리적인 피해를 줬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상처 자체는 금세 치유되었지만 아직도 머릿속을 울리는 듯한 두통이 남아 있다.
또각, 또각.
로라의 힐을 받은 후 복도로 나서자, 로라가 신이 나서는 화장실로 뛰어 들었다.
둥근 형태의 화장실에는 벤토나이트 모래가 깔려 있고.
취이이이익-
로라가 그 위에 올라가 나를 바라보면서 볼일을 보면서 나를 올려다본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바사사사사사삭―
그러고는 그 흔적을 모래로 덮었다.
그렇게 오줌은 모래와 섞여 감자가 되고.
똥은 모레가 붙어 맛동산이 된다.
냄새, 흔적을 지우기 위한 행동이라는데, 내 눈에는 배변 행위마저 귀여워 보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키아오오~!!』
마스터룸 너머 복도 한구석에 설치된 로라의 화장실.
계속 기절해 있던 내가 깨어나서 기분이 좋아진 로라.
그래서 그런지 화장실에 자랑스럽게 세레모니를 시작했다.
바사사사삭―
촤라라락―!
경쾌한 발길질에 흩뿌려지는 벤토나이트 모래.
툭-!
투두둑-!
그리고 그 사이로 떨어지는 거대한 감자 덩어리들.
오줌 냄새가 조금 난다만, 집사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키야오오-!!』
굴러가는 감자 덩어리가 로라의 놀이 스위치를 켜버렸고.
툭-!
투두둑-!
기분이 좋은데다가 놀이 스위치까지 켜졌기 때문에 로라가 자신의 오줌 감자에 달려들어 축구를 시작했다.
투두둑-
데구르르르르-!
고양이의 앞발에 맞은 감자가 벽면을 향해 굴러간다.
저것이 마치 축구공이라도 되는 양, 신나게 굴려댄다.
보다 보면 한없이 귀엽다.
허나, 저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또각, 또각.
"떽!"
이럴 때는 고양이의 잘못된 행동을 곧바로 지적해서 알려줘야 한다.
『냐아?』
보통의 고양이라면 이렇게 혼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원래 동물이 그렇다는데....
『냐아...』
허나 우리 로라는 일반적인 고양이가 아니다.
천재 중의 천재이자, 마력이 깃든 키튼사료를 먹고 자라나는 슈퍼 고양이지.
축 처진 꼬리.
뒤로 납작하게 누운 귀.
『냐아~!』
내 다리 사이를 S자로 오라며 검은색 윤기나는 털을 문질러대는 것을 보면, 누가 봐도 잘못했다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느낄 것이다.
또각, 또각.
"로라, 가자."
타앗-!
로라가 오줌 감자로 축구하는 것을 보고 나니 씻은 듯이 두통이 사라져 있었다.
이 피로회복 능력도 단순 기분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야.
왜 그런지는 로라도 잘 모르겠다고 하니.
일단은 방에서 나가자고.
또각, 또각.
대문을 열고 나갔는데.
"끄아악!!"
정찰을 나갔던 바바리안 부족이 피칠갑이 된 채 돌아와 있었다.
투욱.
한쪽 팔이 바닥에 있는 걸로 보아 제법 험한 일을 겪은 것 같은데....
"아파도 참아!"
"끼야아아아악-!!"
강소현이 뜯어진 팔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대충 맞추더니.
"-힐!"
'힐'이라는 말과 함께 손에 깃든 빛무리를 뒤흔들며 절단 부위를 문질렀다.
우우우웅-!!
절단 부위에 흰색 투명한 구체가 생겨나고는 순식간에 팔이 붙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미안, 백색 마탑 회복이 최고긴 한데, 회복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고통을 동반할 수 있어. 너무 아프면 기절시켜 줄까?"
어딘지 모를 흉악한 소리를 내뱉는 강소현.
"끄아아악-!! 기, 기절시켜 줘요!!"
강소현이 마법을 배우긴 했어도, 뭔가 이상하게 배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백색 마탑의 기대주 강소현.
그녀가 쓴 '최고의 힐'은 야만족 바바리안을 굴복시켜 버렸다.
퍼억-!
털썩.
것도 손날로 목을 쳐서.
"허...."
강소현한테 기절당하면서 힐을 받을 바에는 맛대가리 없는 포션을 먹고 말 테다.
또각, 또각.
"강소현 씨."
조금 흉악한 힐 장면을 보긴 했어도, 깨어난 이상 할 말은 해줘야겠지.
"아, 이준 씨. 일어나셨네요."
"고생 많았습니다."
고작 '고생했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기억 속에서 본 그녀가 워낙 험한 꼴을 당했다만.
그래도 고생한 건 사실이니.
주르르륵―
"저 진짜 힘들었어요."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흘리는 강소현.
허나, 그 목소리만은 덤덤하고 안정적이었다.
"저한테 인수인계하시고 들어가서 쉬시죠."
강소현의 귀환은 내게 퍽이나 반가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2교대로 경계근무를 서면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으며, 강소현의 지인을 포함한 도합 6명의 사람을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이 하나 더 늘어났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실제로 강소현이 나대신 많은 일을 해준 것 같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그녀에게 전해들은 정보들에는 꽤나 실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이준 씨 기절해 있는 동안 얘들이 정찰 다녀왔잖아요."
'주시자의 눈'은 용산구청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근방을 순회하고 있다고 한다.
"그냥 사거리 내에 사람이 보이면 빔 같은 걸 쏜대요."
방패를 가르고 팔을 잘라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닌 레이저 빔을 쏘며.
"근데 백탑 노인네들 말 대로면 안전지대라는 게 생겼을 수도 있다는데...."
다른 세계에는 몬스터들이 비교적 덜 접근하는 '안전지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변한 지구에서는 용산구청이 그 안전지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일단 대로를 넘어서 용산구청으로 가는 것은 나도 동의하는 바다.
내 집과 같은 라인 위쪽에는 '식인종 집단'이 있으니까.
최소 백 단위 인력이 모여 있으며, 사냥조를 만들어 사람을 납치해간다니....
보이는 족족 죽여 마땅한 놈들이 아닌가 싶다.
바바리안들의 정보와 조합해본 결과 이하린 이하준 남매는 놈들이 납치하려 한 것이 맞다.
그리고 고작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를 '식용'으로 납치하려 드는 미친놈들이 그놈들이고.
"아마 놈들이 그때 이곳 근처로 왔었으니, 제 존재를 알고 있긴 할 겁니다."
포탑을 끌고 가서 놈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것도 안전을 확보하는 하나의 방법이겠다마는.
"그래서 뭐 먼저 하실래요?"
"본래 계획대로 주시자의 눈이란 놈을 먼저 사냥하시죠."
차라리 주시자의 눈을 잡고서 안전지대로 추정되는 용산구청으로 향하는 것이 더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식인종 무리 수백이라 해봐야 10m 간격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고, 찾아다니는 것부터가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할 테니까.
"강소현 씨 지인들은 전투에서는 제외하죠."
팔이 잘리고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을 보면 바바리안 부족은 이번 전투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따로 시킬 일도 있으니까.
"그냥 보내게요?"
"그래도 안전지대에 데려다주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제가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물론 공짜는 아니다.
저들을 통해 안전지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흐음...."
자신의 흉악한 메이스와 2단으로 진화한 내 고정 포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강소현.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아직 제가 뭘 배웠는지 모르시죠?"
그녀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35. 레이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