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화. 샛별의 이름은 (1)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참고인 조사 이후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제도는 평화로웠고, 그는 법황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자는 공식 석상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성녀는 평소처럼 빈민가를 시찰하며 아픈 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어떤 이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쿵!
"끄윽···!"
여명궁의 연무장.
태자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일어서십시오. 그 정도로 무릎 꿇어선 무엇도 해내실 수 없습니다. 적이 전하의 체력을 배려해주며 공격해올 것 같습니까?"
"끄헉, 우욱···!"
수업 중이다.
언제나처럼 대련이지만, 그 수위는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혹여 숨을 돌리려 한다면. 그대로 몰아쳐 급소를 가격했다.
끅끅 숨을 몰아쉬는 꼴이 사뭇 처량했으나, 봐줄 수는 없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간다.'
내가 아는 미래와는 다르다.
평민 계집을 죽인 일은 후회하지 않으나, 그 일로 말미암은 후폭풍은 지난 생보다 더 빠른 기수들의 폭주로 이어질 것이다.
당장 성자조차 의심스러운 정황이 가득한 상황.
혹여 그를 막아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답은 무력 행사밖에 없다.
그렇지 않나.
전투란 것의 본질이 변수투성이의 게임인 만큼, 태자에겐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하단 말이다.
'최종적으로는···.'
···지난 생보다 빠르게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걸 목표로 둬야겠지.
태자가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건, 옥에서의 명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앞으로 2~3년 정도가 남았다.
그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생각하는 중 태자가 물었다.
"이런 무식한 대련이 의미가 있겠나?"
"있지요. 기사는 한계를 시험하며 성장하는 법입니다."
게다가 단순히 몰아붙이기만 하는 대련이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어떤 묘리를 숨겨두는지를 몸으로 느끼게끔 계산한 대련이다.
그걸 바탕으로 태자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역추적하면 이 수련은 끝.
다른 인간이면 불가능하지만, 태자는 가능하다.
그의 검재는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특출났으니까.
나는 회초리를 곧게 쥐며 말했다.
"설명 다 들었으면 일어나십시오. 다시 갈 거니까."
"···요즘 자네가 날 두들겨 패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착각입니다."
눈치만 더럽게 빨라선.
"갑니다!"
"으헉!"
그리 수업이 이어졌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으아아아!!!"
태자는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던 구도를 벗어나 반격을 노려볼 수준이 됐다.
빠른 성취가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순간이 지난 직후였다.
"저, 소가주님···!"
"엠마? 쉬고 있으라니까 왜 왔냐."
수행인으로 따라온 엠마가 말을 걸어왔다. 분명 거리나 구경하고 있으라고 보내놨을 텐데 어찌 궁으로 돌아온 걸까.
긴박한 엠마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하니, 엠마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몰래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그리하며 속삭였다.
"길에서 마주친 희망 교단 사제분이 이걸 은밀하게 전해달라고···!"
희망 교단.
그 단어에 나와 태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일순의 정적.
그리고 우리는 곧장 엠마를 내보낸 후 방으로 가 편지를 확인했다.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다.
"밀회 신청이군요."
자정이 넘은 이후, 제도 외곽의 비처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적지 않는 건 잘한 일이다.
더불어 직접 통하는 것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를 전한 것 또한 잘한 일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게 맞겠나?"
"예, 누구에게도··· 특히 성자에게 들켜선 안 되는 만남이란 판단이 깔려있겠지요."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나는 히스토리아를 안다.
애초에 성향 자체가 무언가를 의심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녀석이다.
그럼에도 경계와 의심을 띤 채 비밀스러운 접선을 청했다는 것은, 그 녀석이 보기에도 확신이 설 정도로 성자에게서 이상한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편지를 품에 수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단은 해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은 하루를 보내주십시오."
"위화감을 조성하지 말란 말이군. 알겠네."
"조심스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태자는 피식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레베카에게 홀려 있을 당시엔 하루가 멀다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갔네. 궁의 샛길은 빠삭하다네. 밀회만큼 자신 있는 게 또 없을 정도로."
"참 자랑이십니다."
이 새끼야.
아무튼 문제는 없다는 말이겠지.
"그럼 밤에 봅시다."
나는 그대로 궁을 빠져나왔다.
* * *
태자에게 이른 대로 저녁 시간까지는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뒤따라온 아리아에게 고기빵을 먹여보고, 치즈버거보단 못하지만 능히 왕조를 칭할 음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누님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외에 서고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외출까지 했다.
"소가주님··· 술은 저한테 심부름시켜도 되지 않나요?"
"네가 나보다 술 보는 눈이 좋아?"
"아뇹···."
거리의 사람들에게 내가 술을 사는 모습이 목격되어야만 했기에 직접 다녀왔다.
와중 슬펐던 점이라면 내 손에 술병이 들려 있자 다들 기겁하며 멀어졌다는 사실.
여하튼, 방으로 돌아와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곤 엠마에게 말했다.
"오늘은 한잔하고 잘 거야. 이제 내 방 들어오지 마."
"네? 하지만···."
"취한 나, 감당할 수 있어?"
"······."
스르륵 엠마가 사라졌다.
숨을 내쉬었다.
잔에 차 있는 술을 마나로 휘저으며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자정.
나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갔다.
'장소는 제도 북쪽.'
유동 인구가 적은, 또한 빈민가가 밀집해있는 공간이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곤 마탑이 끝인데··· 그 마탑조차 지금은 베아트리스의 사건으로 얌전해져 있는 상태다.
여러모로 밀회에 적합하단 말이다.
태자를 만난 것은 밀회 장소 앞.
섣불리 먼저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기감을 숨긴 채로 날 기다리고 있는 점은 칭찬해줄 만했다.
"꼬리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없네. 천하의 드레노어 경도 내 밀회만큼은 한 번도 알아챈 적이 없었네."
자부심은 좀 접어뒀으면 좋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걸어 나갔다.
밀회의 장소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참고인 조사에 따라왔던 희망 교단의 성기사 중 한 명이 넝마를 입은 채로 우리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평범한 빈민가의 가정집 풍경이,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일행이 있으시군요."
히스토리아가 태자를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선 제가 아는 만큼의 일을 알고 계십니다."
"네, 함께 행동하신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전하를 뵙습니다."
"희망의 성녀를 뵙소."
간단한 인사치레를 끝낸 후 히스토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겨우 며칠 사이 꽤나 수척해진 꼴이다.
지금도 눈빛 가득 근심이 가득했다.
아니, 근심이라는 말로 끝낼 수 있을까.
"···일단 여쭙고 싶어요."
"말씀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아시는 거죠?"
다짜고짜 건네진 말이었으나, 이 상황을 만든 게 나와 태자다.
우리는 잠시 눈빛을 나눈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진실을 밝힐 때였다.
* * *
히스토리아는 전해 들은 이야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악마, 그 아이가요···."
충격적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악마를, 신의 종인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랬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만큼 명확한 답이 없었다.
"···그러네요. 가호를 뚫고 베르의 영혼을 흔들려면 악마가 강림하는 수준은 되어야 하는 거였겠죠."
악마의 힘은 개념을 다시 쓴다.
그것은 사랑, 추억, 성격, 그 외의 모든 것들을 입맛에 맞게 새로이 새겨 영혼을 뒤흔드는 힘이었다.
그러니 베르헤임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
모든 게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탁해진 베르헤임의 눈빛도, 그의 이상한 행동도.
그 외의 모든 것이.
와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악마는, 베르가 소환한 게 아니었군요."
"예, 그 부분에 관해서는 함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원흉인 레베카가 사라졌다 한들, 악마에 대한 공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것들은 공포와 절망을 먹고 산다.
이 사실이 공표되었다간 도리어 그들에게 양식을 주는 일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그건 레베카를 소환한 어떤 집단에게 득이 되는 행동일 뿐이었다.
히스토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다잡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들을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이제,
'도움을 청해야 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베르가 금서를 연구하는 것 같아요."
"······."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악마에 의해 어떤 나쁜 일을 꾸민다면··· 가장 그럴싸한 건 성자께서 관리하는 봉인고에 있을 것이란 추측을 했습니다."
거기까지 간파했던 건가.
히스토리아는 문득 야속한 기분을 느꼈다.
"미리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것을."
"그리하면 성녀님께서 믿지 못하셨겠지요."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아마, 베르를 음해하려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지난 일입니다. 그보다 그리 생각하신 근거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히스토리아는 지난 며칠간 그를 관찰하고 생각했던 내용을 말했다.
"처음엔 의심이었어요. 의심이 있고 나서야 베르에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단 걸 눈치챘죠. 몰래 뒷조사를 했어요. 베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이동 경로만 파악하는 형태로."
그러자 드러난 것이 있었다.
베르헤임은 유독 신전의 북동쪽, 자신의 집무실과는 반대에 있는 봉인고 근처를 자주 다녔다.
그건 그의 이동 경로를 필기로 정리하지 않는 이상 모를 정도로 치밀한 움직임이었다.
그게 수상했고, 그 수상함의 방점을 찍은 것이 있었다.
"베르가 시약을 매입하고 있었어요. 그건···."
"아마도 이종족의 시약이겠군요. 대상은 마녀나 하플링들이겠고."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신전으로 통하는 물류의 조사가 있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의 금서 연구를 지목한다.
그 원인 또한,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이는 듯했다.
히스토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간절함을 담아 유렌과 칼리오스를 보며 말했다.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베르를 구하고 싶어요."
답은 곧장 돌아왔다.
"물론입니다. 도리어 저희 쪽에서 도움을 구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말을 받은 것은 칼리오스였다.
"확증이 필요하오. 우리가 원하는 구도는 그가 금서를 연구하는 현장을 급습하는 것이오. 그리해야 그를 옥죌 수단이 생기는 것이니까."
"전투를 염두에 두시는 건가요."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소. 물론 대외비로 실행할 것이며 이 일은 해결 이후에도 철저히 함구 될 터요. 다가올 위협엔 성자의 가호와 힘이 필요하니. 우리는 처벌이 아닌 그를 쥘 목줄이 필요한 것이오."
히스토리아는 쓰게 웃었다.
흔쾌히 도움을 주는 것은 감사했다.
설령 그것이 어떤 이익을 위한 것이라 하여도.
하나 그저 모든 것을 외부인에게 맡기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전투 전에 제게 설득할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히스토리아는 그런 단서를 덧붙였다.
"악마의 유혹이에요. 베르라면··· 제가 아는 그 아이라면 사실을 말했을 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가능성을 믿고 싶어요."
"···위험할 수도 있소. 더 확실한 방법으로 가는 게 옳지 않겠소?"
"홀로 이야기해보겠다는 건 아니에요. 연구 현장을 급습하고 정말 금서 연구가 맞다면, 그 순간 전투 전에 잠시 이야기할 말미를 얻고 싶어요."
남동생 같은 아이였다.
그리도 위대한 가호를 타고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외로웠던 아이.
누구도 감히 그를 보듬어줄 생각을 하지 않아 홀로 의젓해야만 했던 아이.
그렇기에 안쓰러웠다.
히스토리아는 이 모든 것이 베르헤임을 더 유심히 봐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처럼 여겨졌다.
"부탁드립니다."
짧게 고개를 숙이자 그에 칼리오스가 곤란한 얼굴을 만들었다.
유렌은 그제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런 중이었다.
"그 일, 꼭 필요합니까."
그가 물었다.
필요성을 묻는 말이었고, 히스토리아는 답을 알았다.
"목적에는 필요치 않아요. 하지만···."
"하지만?"
"···제게는 필요해요."
히스토리아가 짓는 미소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남을 납득시키는 말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질문이 건네져 왔다.
"어째서입니까?"
그에, 입을 빌어 나오는 답은 신념에 관한 이야기였다.
"성녀니까요. 저는 희망을 믿는 사람이니까요."
"······."
"다들 그리 말하죠. 희망께선 그 어떤 계시도, 가호도 내리지 않으시는 매정한 분이라고. 하지만 그게 그분의 존재를 의심할 이유여야 할까요? 이렇게 그분의 신성이 제게 깃들어 있는데."
유렌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깊었다.
히스토리아는 그런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저는 생각해요. 희망께서 답이 없는 이유는, 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필요가 없다?"
"답을 주시지 않아도 저희는 알고 있으니까요."
히스토리아는 맑게 웃었다.
"희망은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에요. 괜찮아지고, 선해지고자 하는 믿음이죠. 그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답은 이미 저희 곁에 있는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잊는 때가 있어요. 그렇기에 희망께서 저를 이 땅에 내리신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나아질 것을 믿어주지 못해도 한사람만큼은 그걸 믿어주길 바라셔서. 그게 저이길 바라셔서. 그러니까, 저는 한 번이라도 믿어주고 싶어요. 베르가 스스로 나아질 수 있다는걸."
장황한 이상론이었다.
스스로도 그걸 안다.
그래, 급습 후 바로 제압하는 게 더 수월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무력으로 그를 해한다면, 악마가 씌운 개념을 더 안전하게 풀어헤칠 수 있을 터였다.
이건 순전한 고집이다.
그렇기에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으리라.
히스토리아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뭐, 그럼 그렇게 합시다."
"유렌···?"
"상관없지 않습니까. 혼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급습을 막겠다는 것도 아니고··· 증거고 뭐고 다 밝혀진 상황에 전투 전 몇 마디 정도면."
히스토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렌이 이어 말했다.
"애초에 성자한테 질 정도로 약하지도 않습니다. 2대 1로 그놈 하나 못 잡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말이 히스토리아의 귓가에 새겨졌다.
뒤이어 그의 의견에 침음을 흘리며 수긍하는 칼리오스가 보였다.
히스토리아는 그 모든 일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렌이 이를 허락하리란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성적으로 움직일 줄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일을 위해 태자보다 더 격렬히 이 부탁을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의견을 들어준 것이다.
아직 그를 파악하지 못한 걸까.
생각하는 순간 칼리오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리하지. 무엇보다 성녀께서 돕지 않는 이상 일이 진행될 수 없을 터이니. 성녀, 결행 일은 언제가 좋겠소?"
히스토리아는 그 말에 흠칫하며 답했다.
"아···! 이틀 뒤에요. 베르의 동선이나 일정을 조사해봤어요. 아마 이틀 뒤 밤에는 연구를 위해 봉인고로 들어갈 거예요. 그때가 아니면 한동안은 행사가 있어서···."
주기는 틀림이 없었다.
여기까지 밝히지 않았다면 이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녀의 말에 유렌이 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계획은 그렇게 세워지기 시작했다.
* * *
히스토리아는 밀회를 끝내고 돌아왔다.
계획은 이틀 뒤, 늦은 밤.
봉인고쪽의 경계가 가장 허술해지는 날이었고, 연구가 진행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날이었다.
우선 자신이 한 차례 사전 조사를 끝낸다.
연구를 시작한 게 확실하면 빠르게 통신하여 유렌과 칼리오스를 부른다.
그렇게 현장 급습.
이후에 설득을 해보고, 그게 안 된다면 전투를 통한 제압.
···까지가 세워진 계획이었다.
히스토리아는 그 일을 상기하며 유렌에 관한 것을 떠올렸다.
헤어지기 전 부탁을 들어줘 감사하단 말을 전했고, 그에 유렌이 건넨 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성녀님 의견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패야 말을 듣는다는 쪽이라.
―그럼 어째서···.
―그럼에도 성녀님 말씀대로, 믿어주는 사람 하나쯤은 있는 것도 좋겠구나 싶어서. 그게 끝입니다.
히스토리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전에도 느꼈지만, 역시 소문이랑은 참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정취가 느껴지는 좋은 공기였다.
그에 사뿐사뿐 걷던 중이었다.
"늦었군."
흠칫―
히스토리아의 걸음이 멎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아왔다.
고개를 돌렸고, 직후 눈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어딜 다녀왔나."
"···베르."
신전 기둥 뒤쪽, 그림자 아래서 베르헤임이 걸어 나왔다.
지독하게도 음울한 낯빛을 한 채로.
< 샛별의 이름은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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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별의 이름은 (2) >
#041화. 샛별의 이름은 (2)
숨이 틀어막히는 듯한 긴장감이 히스토리아의 전신을 에워쌌다.
베르헤임은 냉막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잠시 이야기나 하겠나?"
그가 정말 무엇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히스토리아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응."
"따라오지."
그렇게 베르헤임을 뒤따랐다.
* * *
도착한 곳은 예배당이었다.
그곳에 닿기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단상 앞에서 멈춘 베르헤임의 등을 봤다.
차라리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일까.
생각하는 중 그가 말했다.
"어딜 다녀왔나."
"잠시 산책 좀. 생각할 일이 많아서."
"고민이 있나 보군. 전에는 없다고 하더니."
"어떻게 고민 없이 살 수 있겠어. 큰일은 아니야."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서릿발 위를 걷는 듯한 평화였다.
불안감이 히스토리아의 속에 차올랐다.
그런 순간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응?"
"어릴 적의 일 말이다. 내가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았을 적."
"아아···."
히스토리아의 눈빛이 일렁였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일곱 때. 맞아. 그때도 이랬지."
성자와 성녀는 법황청에서 자란다.
그때는 아직 자신이 성녀로 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베르헤임은 이제 막 가호를 내리받았던 때였다.
둘 모두가 서툴렀던 시절.
그 시기의 히스토리아는 모든 게 새롭고 즐거웠다.
하지만 베르헤임은 아니었다.
-흐이잉···.
어린 그는 한순간에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들의 경외 어린 시선이 두려워 울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히스토리아는 늦은 밤 베르헤임을 몰래 이곳으로 데려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일탈은 베르헤임이 배시시 웃으면 끝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히스토리아의 마음을 적셨다.
"모험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너는."
"어릴 적의 일이군."
"외경의 신비를 파헤쳐 영웅이 될 거라고 말한 거. 기억나?"
"기억난다. 여전히 외경에 대한 호기심은 있으니."
"나는 그걸 응원했었어."
"그래, 법황청은 맡기라고 했었다. 운명이 날 도우실 거라고."
"응."
한데 어째서 너는.
그 말이 목 끝에 걸렸다.
이질감은 곧이어 슬픔으로 화했다.
"···많이 바뀌었네. 너도. 나도."
살포시 웃으며 신비로움을 동경하던 아이는 없다.
저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음울한 그림자 뿐이었다.
아니, 뒷모습이라서 차라리 그림자 정도만 보이는 것이겠지.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히스토리아는 가슴이 아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게 이유인가."
베르헤임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자와 붙어먹은 이유가, 그것이냐 물었다."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닮은 말이 고막에 박혔다.
"무어라 하던가. 내가 미쳐있다 하던가? 내가 사특한 일을 벌인다고 하던가? 리아, 너는 그 말을 믿을 텐가?"
저것은 확신이었다.
히스토리아는 새삼 놀라지 않으려 했다.
그렇겠지. 자신이 베르헤임의 뒷조사를 했듯 그 역시 자신의 뒷조사를 했을 터다.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이 일은 쉬이 납득이 가능했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리한다고 한들 베르헤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터다.
법황청은 이미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으니까.
"베르."
히스토리아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거야?"
슬펐다.
그저 슬프고 또 슬펐다.
차오르는 죄악감은 이내 회한이 되었다.
더 잘 지켜봤어야 했건만.
저 아이는 아직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건만.
하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 듯했다.
"답해라. 무슨 이야기를 했나."
히스토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소리의 호소력이 짙어졌다.
"베르, 정신을 차려줘."
히스토리아는 믿고 싶었다.
어릴 적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그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고.
"너는 악마한테 홀린 거야. 레베카는 악마야."
히스토리아가 한 발 내디뎠다.
손을 뻗으려 했다.
일말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안다."
그것은 스러지고 말았다.
히스토리아의 숨이 멎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은 찢어질 듯 크게 뜨이고 있었다.
황망함을 담은 말이 삐져나왔다.
"···뭐?"
"안다고 했다. 그녀가 악마인 것 정도는. 나를 뭘로 보는 거지? 운명의 사도다. 나는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인간이다."
그는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너무나도 소름 끼쳤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베르헤임은 말했다.
"그래서 금서가 필요했다. 이것이면 답이 되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리아, 너는 말했지. 내가 그녀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베르헤임의 음울함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 나를 도와라. 나는 그 아이를 '치유'할 생각이다."
히스토리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런 일도 힘겹게 만들었다.
"종족 변이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 아이가 악마인 게 문제라면. 악마가 아니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할 수 있다. 금서의 결과물과 내 운명의 가호가 합쳐진다면 분명···."
"베르."
"···조금이면 된다. 이제 거의 완성됐어. 조율만 남았다."
"제발···."
눈이 질끈 감겼다.
그 순간 히스토리아는 깨달았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끔찍했다.
악마의 개변은 역시 근본적인 무언가를 뒤틀어 사람을 망가뜨리는 힘이었다.
히스토리아는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베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왜 그걸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악마는 종이 아닌 정신체다.
그것들은 어떤 감염의 현상이 아니니 치유 또한 불가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진대 어찌 그게 가능함을 믿는단 말인가.
그걸 깨달은 순간 히스토리아는 알게 됐다.
"···아, 너는 돌이킬 수 없구나."
슬픔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를 바라봤다.
회한은 다시 한번 히스토리아를 덮쳤다.
"멈추지 않을 생각이구나. 너는."
"돕지 않을 생각인가. 너는."
"도울 수 없어. 그게 옳지 못함을 아니까."
"그럼 막아설 생각인가? 네가 나를?"
"응, 그럴 거야."
그녀는 통신기를 들었다.
베르헤임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나, 히스토리아의 손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삑―
통신기가 마나로 이루어진 파장을 발했고, 그게 순식간에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이곳으로 전하와 파로스 소가주가 올 거야. 너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홀로 해결하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뭐든 밝게 볼 뿐, 사리분별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베르헤임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이 모든 상황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럼 연구 결과만 챙겨서 떠나야겠군. 레베카는 제도에 없는 듯하니 그녀를 찾아야겠지."
"못 가."
"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시간을 벌 것이다.
적어도 유렌과 칼리오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에 베르헤임은 답했다.
"리아, 널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수인을 맺었다.
그에게서 신성이 아닌, 어떤 다른 기운이 발출되기 시작했다.
히스토리아는 무표정하게 그 검보라색 마력을 노려봤다.
"개화하라."
화아악―!
기운이 히스토리아를 덮쳤다.
하지만,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베르헤임의 눈썹이 들렸다.
히스토리아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타 준 차. 그게 함정이라는 건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회한으로 가라앉았다.
"당해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겐 막을 능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네가 그 수만큼은 쓰지 않길 바랐으니까."
차를 마시는 순간 잘못됨을 깨달았다.
몸 안의 신성을 그러모아 그 기운을 몸속에 봉인했다.
그렇기에 저것은 자신에게 닿지 않는 함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스토리아는 미소를 그릴 수 없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베르헤임."
스으으―
금빛 신성이 히스토리아의 몸을 휘감았다.
미약하게 보이지만 절대 스러지지는 않을 희망의 신성이었다.
베르헤임은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손을 쓰게 만드는군."
그가 힘을 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히스토리아에게 겁박이 될 수는 없었다.
히스토리아가 팔을 뻗었다.
피잉―!
성법 7번, 신창(神槍).
금빛 섬광이 곧은 궤적으로 베르헤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이 커졌다.
히스토리아는 말했다.
"왜? 놀랐어? 가호가 지켜주지 않아서? 베르헤임, 대체 언제까지 착각하고 있을 거야."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베르헤임은 그조차 잊고 있었다.
히스토리아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너, 마지막으로 가호를 쓴 게 언제야?"
"···!"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가호를 내리지 않는다.
가호는 애초에 신께 빌리는 힘이었으므로, 언제든 거둬질 수 있는 법이다.
그에 베르헤임이 처음으로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년이."
분노였다.
콰아아앙―!
붉은 신성이 베르헤임의 몸을 휘감았다.
그가 밟은 바닥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힘의 농도는 숨이 틀어 막힐 수준이었다.
"가호가 없다고? 상관없다. 신성은 남아 있다. 이건 운명께서 거둬갈 수 없어."
"알아. 타고난 거니까."
"그러니 리아, 넌 결코 내게 이기지 못한다. 희망은 운명 앞에서 언제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으니."
그 또한 알았다.
운명과 희망의 구도가 지난 천 년간 변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실제 하는 신과, 존재조차 모호한 신.
우열은 분명하지 않던가.
하지만, 베르헤임이 모르는 게 있었다.
그녀는 더 돌이킬 수 없음에 탄식하며 힘을 발했다.
휘광이 점차 불어났다.
그녀의 주변을 넘어, 공간 전체로.
또다시 공간을 넘어, 법황청 전체로.
아득한 크기의 신성에 베르헤임의 표정이 굳었다.
히스토리아는 그런 그를 노려봤다.
"베르헤임, 기억해 둬."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의문에 답을 얻었던 순간부터, 히스토리아에게 희망은 더 이상 신기루가 아니었다.
"희망은, 운명이 가혹한 때에 가장 빛나는 법이야."
그녀의 머리칼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눈동자에서는 동공이 사라졌다.
등 뒤로 신성한 헤일로가 떠올랐다.
권능에 가까운 힘이 공간에 휘몰아쳤다.
그리고,
투콰아앙―!
예배당의 천장을 뚫고, 하늘에서 금빛의 심판이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비산했고, 그것이 걷힌 뒤에 있는 것은 붉은 장막 속의 베르헤임이었다.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성이 끝이 아니군. 생명을 태울 셈인가."
"그걸로 널 막을 수 있다면."
미리 보지 못한 자신의 죄였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막지 못한 건 분명 자신의 죄였다.
그러니 책임도 스스로 져야만 하겠지.
그게 유일한 속죄일 테니.
히스토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같이 죽자. 베르헤임."
다시 한번 신성이 휘몰아쳤다.
* * *
통신 신호가 울린 건 막 잠에 들고자 침대에 몸을 뉜 때였다.
아직은 울려선 안 될 것이 울리자, 가장 먼저 당혹을 느꼈다.
'왜?'
실수는 아닐 터였다.
이건 실수로 발동될 수 없는 물건이니.
그렇다면 이변?
밀회가 들킨 건가?
아니면 히스토리아가 돌발 행동을 한 건가?
고민할 틈조차 없었다.
-비, 빛이다···!
저택의 소란스러움이 귓가에 들려왔고, 직후 커튼의 틈새로 금빛 섬광이 번쩍였다.
곧장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벼락같은 한 줄기 빛이었다.
방향은···.
'···법황청.'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쾅!
더 이상 고민을 이어갈 생각도 못 한 채, 나는 법황청을 향해 내달렸다.
심장이 불안감으로 빠르게 뛰었다.
< 샛별의 이름은 (3) (수정) >
*수정된 회차입니다. 이미 회차를 일독하신 분들은 공지를 참고해주십시오. *#042화. 샛별의 이름은 (3) (수정)
숨이 가쁘게 뛴다.
전신을 휘감은 신성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지극한 고통이었으나, 이는 이미 감내하는 내용이었다.
오로지 희망의 성녀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
히스토리아는 이것을 배운 날 들었던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초대 성녀께서는 운명의 독선, 혹은 변덕을 언제나 염려하셨지요. 그분은 참으로 자유분방하시며 한편으론 어린아이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선이 아니신, 중도적인 유희꾼. 운명은 그런 분이시지 않던가요.
-무서워요···.
-그러니 저희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대 성녀는 지그시 웃으며 말했다.
-운명이 잔혹할 때 빛나야 비로소 희망일 테니.
히스토리아는 표정을 굳혔다.
대가가 있으나, 이 힘의 효능은 확실했다.
생명을 태워 희망을 지어내고, 그것으로 운명의 신성에 저항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히스토리아는 광륜을 펼쳤다.
그것으로부터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과과광―!
그녀의 공세는 폭풍과도 같았다.
광륜의 빛은 파멸적인 기세로 베르헤임을 짓이겼으며, 그 외에도 찰나의 순간 지어진 수십 개의 신창이 그의 급소를 노렸다.
성법술은 마법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마법이 철저한 계산 아래 대기 중에 스며든 마나를 움직여 섭리를 뒤트는 것이라면, 성법은 간절한 기원을 물리적인 형태로 빚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심상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표출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더욱 뚜렷하고 강력한 힘을 품고 현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히스토리아의 성법술은 이 순간에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가슴에 품은 것은 회한.
불사르는 것은 생명.
목숨을 걸어서라도 베르헤임을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재앙과도 같은 힘으로 화했다.
물론, 그리한다고 해서 베르헤임이 곧장 당해줄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낭비가 심하군."
쩌어엉―!
그의 주먹에서부터 돋아난 붉은 기운이 신창을 부쉈다.
그가 발을 구르자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파동이 일었다.
성자 베르헤임.
다른 말로, 성기사단장 베르헤임.
그는 이 시대 최강의 성법술사였다.
동시에 극강의 힘을 가진 기사였다.
운명의 신성이 발하는 '강제성'이 없어도, 가호가 발하는 '확정성'이 없어도.
아무리 그녀 자신이 목숨을 태워 신성을 불러낸다 한들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바로, 경험이었다.
"7번. 신창."
베르헤임이 영창했다.
짧은 영창이지만, 그럼에도 영창이다.
무영창 법술이 가능한 경지에서 영창까지 더한 법술은 그 기전부터가 일반적인 법술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붉은색의 창은 베르헤임의 몸보다 세 배는 커다란 크기였다.
그 속에 깃든 기운은 흉악하기만 했다.
히스토리아는 이를 악 물며 방어막을 펼쳤다.
그 위로 창이 꽂혔다.
쩌어어엉―!
배리어에 금이 갔다.
끝이 아니었다.
"8번, 신뢰. 9번, 검격. 11번, 가속."
붉은 번개가 베르헤임을 휘감았다.
이윽고 그의 손에 지어진 붉은 신성의 검에 번개가 집약됐다.
검이 미친 듯이 울었다.
그가 어깨를 흔들자 참격이 쏘아졌다.
꽈아아아앙―!
베르헤임의 참격이 기어코 히스토리아의 배리어를 부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당하진 않아."
히스토리아라고 한들 생각해둔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험이 뒤떨어진다.
성법간의 상성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
빈민가의 구제만 해온 삶으로선, 일평생 투쟁을 이어온 그와 같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류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짝!
히스토리아가 손바닥을 부딪혔다.
자신은 베르헤임에 비해 무엇이 뛰어난가?
딱 하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화력으로는 지지 않아."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양의 신성이 히스토리아의 전신에 깃들어 있었다.
"40번, 신벌."
짧은 영창으로 자아내는 것은 성법의 극치였다.
구멍 뚫린 예배당의 천장 위로, 구름으로 뒤덮여 있던 하늘이 열렸다.
금색의 법진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수십 수백에 이르는 염원이 배열을 시작하고, 이내 사출.
―――――!!!
눈과 귀가 멀어버릴 듯한 폭격이 베르헤임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히스토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호흡을 틀어막았다.
"쿨럭···!"
입에서 새빨간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신성이 뭉텅이로 빠졌다.
신벌은 멸절의 성법이다.
공간 내의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닌, '소멸' 상태로 이끄는 수.
비술로 신성의 양을 증폭시켰다 한들 반동은 클 수밖에 없었다.
시야는 운무에 가려진 상태.
긴장은 풀지 않았다.
암만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베르헤임.
천년의 역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우수한 재능을 지닌 남자였으니.
그 경계심은 옳았다.
"훌륭했다. 너 치고는."
꽈아아아앙―!
운무를 뚫고 나타난 베르헤임이, 그녀가 펼쳐둔 배리어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베르헤임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신이 다 타들어 가 검게 물들어 있었고, 살갗과 근육은 갈려 나간 수준으로 찢긴 몰골이었다.
얼핏 보이는 표정은 처음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하나, 그것이 그의 패배를 이르는 것은 아니었다.
"33번, 회생."
스으으―
베르헤임이 빠른 속도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불합리한지.
생명을 불사르더라도 겨우 맞상대나 되는 수준으로 재능의 차이가 심각하단 말인가.
'하지만···!'
발악은 최후의 최후까지 해야만 하는 법이었다.
히스토리아는 그 틈을 노렸다.
푹―!
영창하지 않은 신창이 근거리에서 베르헤임의 배에 박혔다.
베르헤임의 표정이 굳었다.
히스토리아는 그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17번, 폭쇄."
베르헤임이 몸을 물리려 했으나, 그것보다 그의 배에 박힌 신창이 우는 게 빨랐다.
꽈아아앙―!
베르헤임의 복부가 터졌다.
* * *
베르헤임은 상정치 못한 상황에 짙은 분노를 느꼈다.
히스토리아는 이렇게까지 애를 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세 수 안에 어떤 식으로든 목을 비틀 수 있는 상대였다.
그 예상이 뒤틀린 것이다.
이것은 곧장 전투로 그녀를 해하고 떠난다는 계획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베르헤임의 칙칙한 금안이 그녀를 살폈다.
진지하게 싸워야 한다.
깨달은 순간 그는 전황을 다시 인지했다.
복부의 폭발.
내부 장기의 손실.
하나, 그에겐 충분히 감당 가능한 희생이었다.
전투를 이어 나가기엔 무리가 없단 말이다.
'문제는···.'
헤일로까지 만들어버리는 히스토리아의 신성.
신성의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숙련도의 차이가 있지 않던가.
암만 많은 양의 신성을 자신에게 때려 박는다 한들, 베르헤임은 그것을 능히 파훼할 만큼 경험과 숙련도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이 구도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였다.
'신성의 성질이 발현되지 않는다.'
운명의 신성은 강제하는 신성이다.
운명의 신성으로 지은 성법은 상대를 맞추겠다는 의지를 담는 것만으로도 필중의 효력이 가해진다.
하나, 지금의 히스토리아를 상대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저런 수를 배워온 걸까.
희망의 신성에 저런 효력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건만 어찌 이해하지 못할 일이 생기고 만 건가.
고민할 틈은 없었다.
"끈질기네. 베르헤임."
"너야말로."
"포기해."
쩌저적!
히스토리아의 헤일로가 갈라졌다.
그 사이로 순수한 신성의 에너지가 결집됐다.
위험.
판단을 내린 순간 이미 베르헤임은 방어막을 펼치고, 신체 가속 성법을 사용했다.
하나 피해는 지울 수 없었다.
―――!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온 에너지체가 베르헤임의 팔을 날렸다.
그의 이가 으득 갈렸다.
눈빛은 더욱 탁하게 물들었다.
와중 분노는 냉정함을 이끌어왔다.
'이길 방법.'
없지 않다.
베르헤임은 저 끔찍한 힘이 무엇을 기반으로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소모전. 그리 가볼까."
무한해 보이나 분명 총량이 정해진 힘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다 털어내는 수밖에.
베르헤임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히스토리아의 등 뒤였다.
꽈아아앙!
발로 배리어를 걷어찼다.
상위 성법을 남발하게 하는 것?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배리어를 치는 것보단 효력이 덜하다.
저것은 유지하는 내내 신성력을 빨아먹는 연비 나쁜 술법이었으니.
쾅!
콰앙!
콰아앙!!!
체술을 필두로한 근접전.
이것은 히스토리아가 가장 파훼하기 힘든 전투법일 터였다.
근거리에서의 대처법이라 해봐야.
"신창···!"
"같은 수에 두 번은 당할 수 없지."
직전에 보였던 정도가 끝.
쿠웅!
발에 신성을 둘러 창을 밟았다.
베르헤임의 눈에 히스토리아가 헐떡이는 게 보였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다.
깨달은 순간 그는 상위 성법을 발현했다.
"36번, 신궤."
빠지지직!
오른팔 위로 붉은 번개가 돋아나 비명을 내질렀다.
히스토리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베르헤임은 무심하게 팔을 뻗었다.
일점돌파의 근거리 성법.
배리어를 한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꿰뚫는 게 가능한 수이며, 콱!
"끅?!"
히스토리아의 목을 죄기엔 충분한 수였다.
베르헤임은 몸을 재생하며 히스토리아의 신성을 억제했다.
피부가 닿은 상대라면··· 또한 이리 힘이 빠진 상태라면 그 정도 일은 능히 가능했다.
"재롱은 잘 봤다. 주제에 노력했군."
깊은숨이 삐져나왔다.
베르헤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줄 알았다면 다른 용도로 썼을 거다. 리아, 나는 아직 널 완전하게 몰랐나 보군."
성법의 응용은 미숙했으나, 순간적인 재치는 번뜩였다.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이해하며, 그를 이용할 전략을 수립할 머리가 있다.
그것을 타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헤벌쭉 할 줄만 아는 여자가 그런 재능이 있었다니.
"칭찬하마. 하나 거기까지다."
꽈악―!
"끅···!"
히스토리아의 목을 졸랐다.
죽여야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래, 레베카를 미소 짓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런 '약속'을 했으니 방해가 된다면 평생 어깨를 나란히 해온 친우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큭···!"
히스토리아가 숨을 끊어 쉬었다.
한데, 그 모양새가 이상했다.
"크흐흑···!"
그녀의 입꼬리가 힘겹게올라가고 있었다.
반항심을 품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에선 모종의 안도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어째서?
무슨 연유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지?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그녀가 힘겹게 말했다.
"어지간히도 다급했나 보구나. 베르헤임."
그에 베르헤임의 표정이 굳었다.
히스토리아의 안도는 베르헤임의 속에 어떤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다.
"···무슨 소리냐."
"잊은 거 없어?"
히스토리아의 시선이 바닥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을 확인한 순간, 베르헤임의 눈빛이 흔들렸다.
'통신기!'
그게 있었다.
히스토리아가 말했다.
"난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게 목적이었어."
그제야 베르헤임은 자신이 무엇을 간과했는지를 깨달았다.
그 폭격에 가까운 공격이, 히스토리아의 끔찍했던 발악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는지를 겨우 알아버린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꽈아아아앙―!
···길어질수록 자신이 불리해지는 전투였다.
베르헤임은 히스토리아를 내던졌다.
황급히 배리어를 둘렀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그 위로 짓쳐드는 것이 있었다.
검은 회초리.
그 뒤로 잿빛 머리칼, 보랏빛 눈동자.
공간을 장악한 것은 흉악한 짐승처럼 일렁이는 기운.
"이 씨발 새끼는 하루를 못 버티고 지랄을 해."
유렌이 그곳에 있었다.
베르헤임은 방어와 동시에 공격을 예비했다.
하나, 무용했다.
꽈드드드득―!
배리어가 회초리에 닿은 부분부터 무너져내렸다.
그에 베르헤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는 순간이었다.
회초리가 베르헤임의 뺨을 후려쳤다.
쩌어억―!
"으극···!"
거기에 하나 더.
"안 끝났네."
태자 칼리오스가 나타났다.
그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대가리부터 박지. 전하가 납시었는데 건방지게 고개를 들고 있나."
꽈앙!
베르헤임의 머리가 바닥에 꽂혔다.
< 샛별의 이름은 (4) (수정) >
*수정된 회차입니다. 이미 회차를 일독하신 분들은 공지를 참고해주십시오. *#043화. 샛별의 이름은 (4) (수정)
우열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유렌과 칼리오스가 나타나고, 부상을 수습하지 못한 베르헤임은 칼리오스에게 제압된 채 목에 검이 겨눠졌다.
히스토리아는 그것들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탈력감이 전신을 에워쌌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어깨를 짓눌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며, 신성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괜찮습니까."
다가온 유렌이 물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죄송해요. 제가 칠칠치 못해서."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유렌이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하는 것에 히스토리아는 죄스러운 마음을 느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나, 역시 그것이 완벽했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떻게든 두 사람이 올 때까지 버텼다는 것.
그 사실에만 집중해 현재의 상황을 따져보면 그랬다.
이제 걱정되는 것은 하나였다.
"베르헤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돌아올 수 있나요?"
그와 맞서면서 의도적으로 더 악독하게 말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부터 더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것이 베르헤임이 죽길 바라여 한 일은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다.
"···현혹을 풀 수 있을까요?"
그가 제정신을 찾길 바랐다.
히스토리아는 아직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신의 목숨이 대가가 되었다 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결과가 밝길 바랐다.
그에 유렌이 이르길.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죽음보다는 희망적인 답이었다.
히스토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안도가 치미는 순간이었다.
꽈아아앙!!!
흠칫, 폭음에 히스토리아의 고개가 들렸다.
유렌이 혀를 차며 낮게 읊조렸다.
"거 잘 좀 잡고 있을 것을."
베르헤임이 다시 일어났다.
칼리오스의 제압을 떨쳐내고서 말이다.
* * *
포기할 수 없었다.
베르헤임은 이렇게 무너질 수 없었다.
"아직··· 아직이다···!"
육신에 남아있던 신성을 자폭하듯 터뜨렸다.
그 결과 칼리오스를 떨쳐내는 데는 성공.
물러선 칼리오스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베르헤임 또한 한 발짝 물러서며 몸을 회복시켰다.
숨만 붙어있다면 어떤 부상이든 회복할 수 있다.
그게 성기사였다.
"아직도 더 하고 싶은가? 결과는 같을 것 같네만."
칼리오스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고 싶다가 아니었다.
'해야만 한다'였다.
그래야만 레베카를 살릴 수 있을 테니.
"그녀를 고쳐야 한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였군."
베르헤임은 혀를 찼다.
저자에게 더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칼리오스는 애초에 레베카에게 잘 보일 궁리나 하는 인간이었다.
그녀의 행복이 아닌, 그녀를 통한 스스로의 행복을 바라던 놈이었다.
그게 자신과 달랐다.
-웃었으면 좋겠다. 다들. 알겠지? 베르가 도와줘야 해! 성자는 신님의 분신이니까!
베르헤임은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만으로 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약속, 약속을···.'
인상이 찌푸려졌다.
기억이 흐릿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건가?
분명···.
'우리가, 웃음을···.'
그런 약속이었을 텐데.
베르헤임은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 생각할 것이 아니다.'
히스토리아의 발악으로 인해 상황이 나빠졌다.
하지만, 최악 중에서도 희소식은 있는 법이니, 이로써 도리어 얻는 것 또한 생겼다.
베르헤임은 으르렁거리듯 칼리오스에게 말했다.
"···그것부터 말해라. 레베카를 어디로 숨겼나."
"왜 나한테 묻나. 그걸."
"네놈이 숨겼음이 확실하니까. 그게 아니라면 사라졌다는 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정복욕, 지배욕, 오만.
칼리오스를 이루는 것들이 그리도 추악함을 베르헤임은 알았다.
세상은 그것을 군주의 자질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개인을 향한다면? 그것은 그저 끔찍한 집착이 될 뿐이지 않던가.
그래서였다.
레베카가 사라지고, 칼리오스가 악마 소환의 날 제도 밖을 빠져나갔다는 인과가 납치라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은.
그 일에 유렌 파로스가 함께했다는 확신을 떠올리고 마는 것은.
히스토리아가 자신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이 둘이 떠오른 것은.
베르헤임의 시선이 삐딱하게 서서 다가오는 유렌을 향했다.
"명목뿐인 가문의 후계야. 권력이 필요했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씨발."
"추악한 것과 추악한 것이 붙었군. 그러니 그 사달을 냈겠지."
쿠구구―
베르헤임은 신성으로 육신을 강화하며 말했다.
"레베카를 내놔라. 그녀의 병은 나밖에 치료할 수 없다."
칼리오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병?"
"병이다. 그녀는 악마라는 병에 걸려있다. 그러니 내가 치유를···."
그 순간이었다.
"···하. 그것이었나."
칼리오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베르헤임의 눈이 좁아졌다.
* * *
칼리오스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꽤 많은 고민을 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또한 악마에 의해 무언가가 뒤틀려 있다면 그게 어떤 부분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알고자 했던 것은 구태여 금서라는 수단을 쓴 목적.
그리고 이제야 그 답이 나왔다.
"악마. 병."
그리고 치유라는 확신.
말해 무엇하겠나.
그들의 술수에 의해 악마라는 개념이 다시 쓰여있다.
그렇다면 베르헤임이 행한 것은 종과 관련된 연구, 혹은 영혼과 관련된 연구겠지.
아마 전자가 더 유력할 것이다.
'봉인고에 봉인된 금서 중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정도는 조사를 해두었으니.'
그렇기에 칼리오스의 눈빛이 침잠했다.
"그 여자 자체가 악마란 얘기를 못 들었나? 성녀라면 분명 설득을 위해 말했을 텐데."
이 시점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히스토리아에 관한 것이었다.
싸움이 있다면 그 과정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 상황에서라면 설득을 외치던 그녀는 분명 그 이야기도 했을 터다.
한데 왜 이 인간은 헛소리나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안다. 그러니까 치료해야지. 그걸 몰아낸다면 레베카는 돌아온다. 운명의 힘과 연구라면 분명 가능하다!"
덜컥, 그의 어깨가 떨렸다.
돌아온 답에 칼리오스가 느낀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진심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순수한 경멸을 느꼈다.
확증편향에 가까운 확신에.
망상에 의한 행동 원리에.
감정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칼리오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 건가? 금서를 연구하면서? 악마를 마주하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칼리오스는 태생이 군주인 사내였기 때문이다.
더 큰 대의와 더 큰 선의.
그것을 위한 하나의 희생이 아무리 뼈 아프다 해도, 칼리오스는 기꺼이 그를 감내할 사람이었다.
실제로 레베카를 포기한 이유가 그것이었지 않던가.
본인이 그런 일이 가능하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버린 것이다.
한데 베르헤임은 달랐다.
칼리오스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그 이유를 판단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칼리오스는 어쩔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탄식이 일었다.
"···그랬던 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감정은 허탈함을 닮아있었다.
손이 턱을 쓸었다.
"자네는 모자란 것이었군. 그저 저능할 뿐이었던 건가."
칼리오스는 의욕을 잃었다.
그를 이성적으로 더 설득할 필요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무엇이라 해야 할까··· 그래.
"몰랐군. 그래도 성자라 하니 다를 줄 알았건만, 초인의 편린은 없는 것이었어."
그것은 실망감이었다.
다를 줄 알았다.
베아트리스 하나만이 이상하고, 남은 이들에겐 어느 정도 이성이 있을 줄 알았다.
성녀의 부탁에 큰 반발을 하지 않은 것도, 구태여 대화를 한 것도, 인도적인 방책을 강구해보려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아직 누구도 모르는··· 오로지 유렌만이 아는 칼리오스의 본성 하나를 일깨웠을 뿐이었다.
"고맙네. 수준을 알게 해주어서. 기대를 접게 해주어서. 그러니 답례로 알려주지."
선민의식.
자신만이 위대하기에 모든 것은 자신의 뜻으로 되어야만 한다는 그 압도적인 확신.
달리 말하여 오만이자, 그리하여 자신감.
드러날 일이 없기에 스스로도 몰랐던 그 성향이 몸을 불림에, 칼리오스는 한숨을 내쉰 후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여자라면 자네 모친 곁으로 보내줬네."
덜컥, 베르헤임이 굳었다.
그러자 칼리오스는 구태여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해가 안 되나? 이승에 없단 말일세."
이제 칼리오스는 베르헤임에게, 또한 남은 둘에게 어떤 기대도 품지 않았다.
* * *
그 순간, 나는 참 우습게도 태자의 욕지거리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문득 그게 생각이 났다.
태자로서의 위엄, 주변인들의 기대, 거기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까지.
그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가 가리고 있었을 뿐 천성이라는 게 있지 않던가.
한꺼풀만 벗기면 드러나는 게 있단 말이다.
-자네는 애미가 없나?
-바람난 네 애미 보면 없는 게 낫다 싶기도 합니다만.
-허허, 씨발놈의 새끼. 대련이나 합세.
태자는 근본부터 성격이 썩 좋은 인간은 아니다.
입버릇은 더욱 험악한 편이고.
정겨워서 좋다.
상황이 조금만 좋았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허튼소리를."
성자의 눈이 충혈됐다.
눈빛이 흔들렸고, 정신은 그것보다 심각하게 흔들린 듯, 기색에서 더 이상의 이성을 찾아볼 수 없다.
성자가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쿵!
붉은 신성력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통제를 잃고 폭주하는 듯했다.
나는 넌지시 말했다.
"살살 좀 긁으시지."
"살아있다고 믿는 편이 더 잔혹하지 않나?"
"그거야 그럽니다만···."
뭐가 문제냐는 태자의 표정을 보니 확실히 내가 아는 그 인간이 맞긴 하다 싶다.
그런 감상에 잠시 빠져 있었으나.
"으아아아―!"
아쉽게도 여유가 그리 많진 않았다.
베르헤임의 육신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현상을 잘 알았다.
'변이?'
타개법으로 고른 게 겨우 저건가.
"괴상망측해지고 있군."
그 말을 흘려들으며 상황을 되짚었다.
'히스토리아는 살렸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설령 어떤 큰 변고를 당했다고 해도 여기서 저 녀석을 죽게 두진 않을 것이다.
조금 과격한 수라도··· 생각나는 방법이 몇 있었으니.
그보다 성자.
저놈이 변이에 손댄 게 문제였다.
자신의 몸에도 오염을 실험한 광기는 그렇다 치자.
중요한 것은 내가 상정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병력 데려왔습니까?"
"예배당 앞을 막아두고, 주변을 통제하게 했네. 일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아서."
변해가는 베르헤임을 봤다.
덩치가 몇 배는 불어나고, 몸 위로 거친 털 같은 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순록의 두개골 같은 것이 투구처럼 자라나 감싸고 있었다.
완성된 것은 마치 거대한 늑대인간이 순록의 뼈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형상이었다.
'연구가 성공했나?'
아니, 그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게 있었다.
'신성력이 아닌데.'
붉은 신성에 거머리처럼 얽혀 있는 것은, 나도 몇 번 보지 못한 외경의 기운이다.
애초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던 외신들이 남기고 간 부산물.
그러니까, 이질적이어서 섞일 수 없단 말이다.
저게 섞이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면 외경의 기운은 뒤틀려서 '오염'이 된다.
그 결과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고.
'오염의 폭사.'
지난 생의 히스토리아가 그랬듯, 자폭으로 이곳을 다 변이시켜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람들 물리는 건 잘하셨습니다. 터지면 곤란하니까."
"대충 베어 죽이면 안 되겠나?"
"저희 다 죽습니다.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한 꼴이 됩니다."
"그럼?"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잘라내야지요. 저 상태 그대로."
신목을 꺼내 들었다.
떠올리는 것은 지난 시간동안 내가 고민했던 것들···.
성자가 법황청 자체를 테러할 최악의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사건이 발생하면 어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다.
과정에서 기대를 건 게 신목이었다.
근거는 베아트리스의 일이었다.
'악마와 합일한 인간을 분리해냈다.'
그 순간 보인 묘한 결은, 잠식된 부위를 복구시켜주진 못했을지언정 악마를 베아트리스의 몸에서 떨어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다른 것도 아닌 악마다.
한데도 이것은 세계수의 가지라는 이름답게 그 기적에 가까운 일을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이라고 그게 안 될까?
악마와 붙은 인간도 떼어낼 수 있는데, 인간에게서 오염을 떼어내는 게 불가능할까?
아니다.
오염도 결국 외경의 이능이다.
더군다나 섞이지도 못한채 저리 신성력에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베어내는 걸 넘어 떼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며, 그 말은 법황청 테러가 일어나더라도 사제라는 전력을 보존할 수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노력하기엔 충분한 근거가 생기지 않았나.
하여 태자를 상대로 내내 실험했던 게 있었다.
-아니! 자네는 왜 내 마나만 그렇게 쏙쏙 베는 건가! 어? 잠깐! 마나만 골라서 베는 게 가능한가? 그 기술! 내게도 알려주··· 으억!
인간에게서 이능을 떼어내는 실험을 했다.
귀속되어 있는 마나를 잘라내, 그 힘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연습이었다.
처음엔 미치도록 힘들었다.
마나처럼 유동적인 것의 결을 보고, 그것만 쏙 잘라내 분리시키는 것은 주술 베기를 처음 고안할 때만큼 많은 심력을 소모케 했다.
하지만, 결과만 말하자면 그 일은 성공이었다.
-···마나가 다 사라졌네만.
-충전하십시오.
-아니, 잘 되지가 않네. 명상이 좀 필요한···.
인간과 마나는 분리가 가능하다.
인간과 신성도 분리가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검증하길.
[그어어어어!!!]
괴물이 된 성자가 검붉은 창을 자아내 쏘아냈다.
그걸 향해 회초리를 휘둘러봤다.
채애애앵―!
쏘아진 창을 베어내자 그것이 신성과 오염으로 나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결론이 나왔다.
'신성과 오염도 분리가 가능하다.'
이 정도면 됐다.
자세를 다잡았다.
태자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지시해주게."
나는 말했다.
"도망 못 가게 잡아만 두십쇼."
한 겹씩 벗겨보게.
그 순간이었다.
꽈아아앙!
성자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 샛별의 이름은 (5) >
#044화. 샛별의 이름은 (5)
베르헤임이 파고들던 변이는 기본적으로 무언가의 '상태 변화'에 초점을 둔 연구였다.
무언가를 '광화(狂化)'시키는 작용이 아닌, '변이'시키는 작용인 것이다.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일이 바로 유렌이 지난 생에서 겪었던 테러였다.
법황청 내에 있던 모든 사제는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이했으며, 그럼에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울부짖었다.
그 부분이 핵심이었다.
개중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은 다름 아닌, '변이 후에도 이성은 유지된다'라는 명제였다.
까가가각―!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였으나, 변한 베르헤임은 여전히 능숙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는 외경의 이능이 섞인 신성력으로 전보다 포악한 성법술을 휘둘렀으며, 특유의 물불 가리지 않는 '성기사의 전투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렌과 칼리오스에게 성기사를 상대할 때의 압박감을 그대로··· 아니, 변이로 인한 능력치의 상승까지 고려하자면 그 이상으로 부여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길, 성기사는 전쟁 기계다.
그리 불리는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징글징글하게도 재생하는군!"
칼리오스가 짜증 서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대로 베르헤임은 혹여 몸이 베이더라도 즉각적으로 재생했다.
내부가 파열되더라도 아랑곳 않고 달려들었다.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변이했기 때문도 아니다.
성기사가 원래 그렇게 싸우기 때문이다.
누군가 멸칭으로 비유하길 바퀴벌레.
신성력만 남아있다면 전신이 다 으깨져도 부활하는 게 고위 성기사란 직종이었다.
그리하여, 전투의 양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렌의 역할이었다.
채애애앵―!
유렌의 눈은 지금도 베르헤임에게 얽혀 있는 외경의 이능을 읽고 있었다.
단순히 읽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른둘!"
쩌어억―!
결의 파악, 그리고 공격.
유렌의 신목은 그와 감응하며 베르헤임의 섞이지 않는 두 성질을 부지런히 떼어놓고 있었다.
입으로 숫자를 세는 행위는 남은 결을 어림짐작하여 필요한 공격 횟수를 칼리오스에게 전달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여러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유렌에겐 집중력을, 칼리오스에겐 체력 안배를, 베르헤임에게는 조바심을 심은 것이다.
베르헤임은 숫자가 줄수록 부담감을 느꼈다.
다만 카운트 다운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몸에 걸리는 부하가 시시각각 심해지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한 채 원거리 성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죽어라!]
7번 신창, 8번 신뢰, 11번 가속.
그가 가장 애용하는 세 개의 법술이 조합됐다.
붉은 뇌전의 창은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유렌을 향해 치달았다.
물론,
"발악은!"
쩌어어엉―!
유렌은 모든 이능 행위에 대한 상성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법술이 통할 리가 없었다.
[레베카를···!]
베르헤임은 으르렁거리며 또 다른 법술을 예비했다.
19번, 창염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레베카를 내놔라―!]
그때였다.
칼리오스가 베르헤임을 막아섰다.
"그 여자는 없다니까. 모가지를 비틀어 들개에게 던졌네."
꽈아아앙―!
검이 불꽃을 두른 육신과 부딪혔다.
양쪽의 기세는 팽팽했다.
누구 하나 밀리지도, 밀어내지도 못했다.
완벽한 균형.
그것을 힘의 우열이 없는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었다.
아마, 칼리오스라는 사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분명 그러했으리라.
"잡았군."
칼리오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베르헤임은 섬찟함을 느꼈다.
몸을 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균형이 맞은 것이 아닌, 칼리오스의 마나가 대치 상태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을.
"잘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유렌의 속삭임, 발이 닿는 감촉.
그리고,
"스물하나."
숫자.
쩌어어억!!!
신목이 등 쪽으로 얽혀있던 베르헤임의 오염을 베어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오염은 곧이어 유렌이 휘두른 신목에 의해 말끔히 지워졌다.
[끄윽···!]
압도적 열세.
그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우나, 그보다 지금의 베르헤임을 괴롭히는 것은 칼리오스의 말이었다.
[레베카···!]
"곁으로 보내줄 테니 닥쳐보시게."
그는 베르헤임의 심령을 흔드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다만 도발이라고 치부하고 싶음에도 그럴 수 없는 것은, 칼리오스의 태도가 너무 확고했기에.
또한 베르헤임에겐 레베카가 없는 '만약의 세상'조차도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일곱!"
쩌어어엉―!
그 일을 생각할수록 마음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레베카가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는 공포는 점점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셋!"
꽈앙―!
스스로 부정하고 있지만, 그리할수록 답은 가까워지기만 했다.
'레베카가 죽었다.'
그 단어가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하ㄴ···!"
[으아아아!!!]
콰과광!
신성력이 폭주했다.
그에 맞춰 외경의 이능이 점점 큰 폭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충격파에 유렌이 밀려났다.
그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베르헤임의 감정은 길을 잃고 날뛰었다.
원망, 자책, 분노, 회한, 그리하여 허무.
공허함으로 치달은 감정에 자아가 멀어져갔다.
짐승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약속이야!
추억에 울부짖었다.
이제는 영영 지킬 수 없는, 그런 순간의 기억에 절망했다.
[아아···!]
그것이 방아쇠가 되었다.
우두둑―!
그의 몸이 울긋불긋 일렁이기 시작했다.
갑옷처럼 입었던 순록의 뼈가, 그 속으로 자리했던 늑대의 몸이 뒤틀렸다.
하나로 합쳐지고, 또 다른 것으로 분화하며 나뉘었다.
그의 몸에서 검보랏빛 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 * *
나는 헛숨을 삼켰다.
저 현상을 이미 안다.
'자폭···!'
그 전조다.
저 께름칙한 이능의 유동은, 그리고 배열은 분명 히스토리아가 자폭한 자리에 남아있었던 그것이다.
등골이 섬찟해진다.
위기감이 경종을 울린다.
'오판···!'
성자가 스스로에게 변이를 심어두진 않았으리란 판단이.
그가 전투를 통한 승리를 노리리란 판단이.
그가 해온 발악에서 느껴졌던 생존 욕구가 눈을 가렸다.
목표를 앞둔 순간의 집중력이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자살 기도.
최악의 상황.
'도주?'
베르헤임을 죽게 두고 도주한다.
그렇다면 나와 태자는 살 수 있다.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그 망설임이 발을 묶었다.
와중에도 성자의 폭주는 가속했다.
결을 파악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레베카···!]
놈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꼴로 그 이름을 부르짖는 순간이었다.
"1번."
나지막이 그런 목소리가 울렸다.
숨이 멎었다.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 끝에 걸린 것이 있었다.
"봉쇄."
저 구석진 곳에서, 히스토리아가 곧 죽어가는 꼴로 성법을 구사했다.
순간 나와 히스토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힘없이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차오른다.
그것의 정체를 어찌 밝히기도 전이었다.
화아아악―!
금색의 광휘가 공간을 휩쓸었다.
* * *
히스토리아는 꿈속을 유영했다.
흐린 시야, 스러져가는 숨은 정신을 점점 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돌고 돌아 먼 과거에 닿아있었다.
-히스토리아.
-성녀님!
-후후, 이젠 당신이 성녀님인 걸요?
막 성녀로 발탁된 때의 일이었다.
선대 성녀의 얼굴은 어찌나 아직도 이리 선명한지, 그 자글자글한 주름이나 따스한 미소가 아직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시절은 모든 게 낯설었으나 즐거웠다.
히스토리아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교육자였던 그녀의 이야기들이었다.
희망의 신성이 무엇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혹은 선대 성녀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의 이야기들.
의무감보단 즐거움이 먼저였다.
그렇기에 히스토리아는 좀처럼 진지해지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바꾼 사건은 다름이 아니었다.
-오늘은 의무에 대해 배울 거예요.
-의무요?
-네, 되도록 수행할 날이 오지 않으면 좋은 의무지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게 기억났다.
그녀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담아, 그렇게 자신에게 '비술'을 가르쳤다.
-초대 성녀께서는 운명의 독선, 혹은 변덕을 언제나 염려하셨지요. 그분은 참으로 자유분방하시며 한편으론 어린아이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선이 아니신, 중도적인 유희꾼. 운명은 그런 분이시지 않던가요.
운명의 여신.
그 이면에 관한 내용은 어린 히스토리아에게 너무 무서웠다.
선대 성녀가 예를 든 내용은 더욱 그러했다.
-수만의 생명을 불구덩이에 넣으실 수 있답니다. 바닷속에서 끄집어내 살릴 수도 있으시지요.
-대단하네요!
-그걸 재미로 할 수도 있는 분이랍니다.
재미로 수만을 살리고 죽인다니.
그런 제멋대로인 신이 또 어디에 있나.
혹여 운명의 여신이 무언가 나쁜 장난을 친다면?
그런 생각에 오금이 다 저리는 순간, 선대 성녀는 말했었다.
-그러니 저희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희망의 비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이유에 관한 이야기였다.
-운명이 잔혹할 때 빛나야 비로소 희망일 테니.
바로 오늘 같은 날, 운명이 이리도 잔혹한 날을 위해서였다.
쿠구궁!
히스토리아는 눈을 떴다.
여전히 시야는 흐렸다.
하나, 무엇도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베르헤임이 무너지려 했다.
그 기운의 포악함이, 유렌과 칼리오스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행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히스토리아가 바라지 않던 결말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도 죽지 않길 바랐다.
유렌도, 칼리오스도, 베르헤임까지도.
'베르···.'
연민이 떠올랐다.
히스토리아는 이런 식으로 무너지게 되는 그가 참으로 가여웠다.
그것은 비단 그가 이용당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를 남들보다 잘 알아서.
누구보다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외경엔 신비로운 것들이 많대!
모험을 동경하는 아이였다.
저 자리의 무게를 짊어지기엔 너무 어린, 그런 아이였다.
어찌 운명께선 저 아이를 저리 가혹하게 내모시는가.
가장 가까운 종을 어찌 보살피지 아니한 것인가.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히스토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쿨럭···!"
운명이 가혹한 오늘이라면, 자신이 희망이어야 했으니.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그녀는 쇳소리 섞인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봤다.
눈을 좁히며 시야를 잡으려 노력했다.
그리하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남은 힘이 없다.
더 태울 생명력도 없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게 하나는 남아 있었다.
두웅―
오염의 전이를 막기 위해 몸속에 걸어두었던 봉인.
그 신성력만큼은,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
모든 신성을 다 쓰면 숨이 다할 테니 오염으로 인해 변할 일은 없다.
시신 그대로 오염과 함께 스러지리라.
'괜찮아.'
가만히 둔다면 모두 죽는다.
그걸 모를 정도로 우둔하지 않으니, 적어도 자신의 목숨으로 셋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게 맞았다.
'괜찮아.'
모든 게 괜찮았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말해줘야 하는데.'
괜찮으리라고.
정신을 차린 베르헤임에게 넌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용당한 너도 괴로웠으리라고.
이젠 다 괜찮다고.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유렌에겐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었다.
자신이 모르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에 이 호기심을 조금 더 풀고 싶었다.
그 고기빵이란 것이나 먹으며, 저 남자와 더 많이 대화해보고 싶었다.
'아, 아쉬워라.'
생각하며 히스토리아는 힘겹게 손을 뻗었다.
"···1번."
화악!
히스토리아의 전신이 빛났다.
남은 생명이, 기운을 봉하던 신성이, 그리고 염원이 모두 하나의 법술에 담기기 시작했다.
범상한 술식이 아니었다.
그 광휘야말로 최후의 불꽃이라는 단어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다.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감내할 수 있었다.
와중 유렌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히스토리아는 미안한 마음을 눈빛으로 전했다.
그리하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부탁해요.'
그렇게,
"봉쇄."
화아아악―!
법술을 발현했다.
빛이 베르헤임을 휘감았다.
* * *
베르헤임은 광휘에 뒤덮이던 중, 온기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샛별이 되어 어두운 밤을 밝힐지라. 그대의 길을 비추는 나를 일컬으니, 나는 희망이라!
소녀가 활기차게 외쳤다.
누구인가.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그날의 대화만이 기억났다.
-어때? 잘하지?
-으응.
-그럼 박수쳐야지!
-응···!
소녀는 무어라 외친 후 박수를 치라 강요했다.
자신은 왜인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박수를 쳤다.
그러자 소녀는 말했다.
-베르도 잘 보고 배워!
-왜 배워야 하는데?
-그게 분신이 할 일이니까!
소녀는 논리가 없었다.
다만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활기찼다.
그것이, 참 보기 좋았었던 것 같았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사람들이 웃어.
-웃겨야 해···?
-당연하지! 웃어야 복이 오는 걸! 웃는 사람이 많아야 희망을 믿는 사람도 많아지는걸!
소녀는 억척스러웠으나 맑았다.
베르헤임이 아는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멋있었다.
자신을 이끌고 어디든 달려가 주는 모습을 동경했다.
어두운 밤이면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고마웠다.
소녀는 베르헤임의 세상이었다.
-웃었으면 좋겠다. 다들. 알겠지? 베르가 도와줘야 해! 성자는 신님의 분신이니까!
그리하여 그랬던 것 같다.
-···응, 약속.
-좋아! 우리 약속한 거야!
약속이 있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이건 베르헤임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추억이었다.
그리고 잊어서도 안 되는 추억이었다.
그 추억에, 베르헤임은 스스로 붙였던 가짜 이름을 지워냈다.
'···아니다.'
레베카가 아니었다.
이 온기는, 그 활기는, 그리고 웃음소리는.
그것은 파스텔톤이 아닌 눈부신 순백을 휘날렸다.
녹음이 아닌, 태양의 금색을 눈 속에 박아넣었었다.
어찌 그걸 잊었는지조차 어처구니가 없어서.
하여 베르헤임은 눈을 떴다.
꽈드드드득―!
광휘의 사슬이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베르헤임의 눈에선 피눈물을 덮는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멀리, 쓰러져가는 히스토리아가 보였기에.
스스로 무너뜨린 진짜 추억이 있었기에.
[리아···.]
갈라진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 오염은 안정되었다.
그렇기에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있었다.
베르헤임은 스스로 한 일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여 손이 절로 뻗어나갔다.
그 순간 시야 위로 다른 것이 덮였다.
"이 개새끼가."
험악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찍어눌렀다.
뻗어낸 손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다만,
빠드득!
맹수 같은 사내가 휘두른 회초리에 우그러졌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그의 몸에서 짐승의 가죽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신목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진다.
과도하게 마나를 소모한 육신이 비명을 지른다.
숨이 헐떡여진다.
그 상태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성자를 봤다.
최후의 봉인이 마지막 오염의 결을 끊을 말미를 벌어줬다.
변이한 몸이 인간의 것으로 완전히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승리.
하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유렌? 자네 괜찮나···?"
나는 태자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뒤돌았다.
쓰러진 히스토리아를 향했다.
머리가 뜨거웠다.
속이 쿵쿵 뛰었다.
시체처럼 잠든 모습이 망막을 어지럽혔다.
설마, 이번에도 그렇게 죽는 건가.
멋대로 희생하고 떠나려는 건가.
그 생각이 영 멎질 않아서, 그렇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야."
턱, 숨이 길게 삐져나왔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진짜 제멋대로냐. 어떻게."
"하하···."
히스토리아가 힘없이 웃었다.
곧 죽어가는 숨을 한 채로.
하지만, 다행인 일이었다.
'아직 살아있다.'
그러니 아직은, 돌이킬 수 있었다.
< 샛별의 이름은 (6)
[무료 마지막 회차입니다.]
>
#045화. 샛별의 이름은 (6)
전투가 끝난 자리는 황폐했다.
칼리오스는 전신이 다 부서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렇게까지 격렬한 전투를 해본 일이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없었다.
그 오크 챔피언과의 전투 마저도 이만큼 급박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그저 이겼다고 기뻐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희생이 있었군.'
칼리오스의 표정이 침잠했다.
쓰러져 숨을 몰아쉬는 히스토리아와 그녀를 부축하는 유렌이 보였으므로.
최후의 순간은 분명 그녀의 도움 덕택에 살았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혹여 도주로 목숨을 보전했더라도 베르헤임이 시체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엉망이군.'
무엇 하나 계획대로 된 것이 없음에 탄식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을 수습한 칼리오스는 만신창이가 된 베르헤임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곤 유렌에게 말했다.
"···이 자를 데리고 가 봉인고를 조사해 오겠네. 증거를 모아야 하니."
변명이었다.
그저 자리를 비켜주기 위함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렌이 히스토리아에게 어떤 짙은 부채감 따위를 품은 게 은연중에 보여왔던 까닭이다.
하여 그녀의 최후를 홀로 지킬 말미를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지."
그렇게 칼리오스가 자리를 떠났다.
* * *
히스토리아는 유렌의 얼굴을 보려 했다.
물론 힘겨운 일이었다.
사물의 구분이 흐려져 이목구비도 채 분간하는 게 힘들었다.
희뿌연 사람의 형상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수준.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화나셨네.'
구태여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분위기와 호흡, 그리고 자신을 붙든 힘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그런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안타까움이 일었다.
실망시킨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도 얼핏 치밀었다.
미안했다.
하나, 그것보다 우선하여 남은 생명으로 전하길.
"고마워요."
그 말만은 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히스토리아가 생긋 웃었다.
유렌은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문득 그런 말을 했다.
"···너 진짜 이기적인 거 아냐?"
"······."
"뭐 하나 터지면 항상 이런 식이야. 옆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본인 마음이 편한 대로만 하지."
분노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한데, 미안하게도 그걸 듣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죽음이 가까워지며 자연히 따르는 현상이었다.
분명 격정적임에도 유렌의 말은 자장가 같았다.
낮은 목소리나 튀지 않는 어조가 그 느낌을 짙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 우스웠던 것은 그가 자신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것.
그가 왜인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
이상하게도 그에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상대의 태도가 익숙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그에게 친밀감을 느껴서일까.
"좀, 그냥···."
유렌이 말을 잇지 못했다.
히스토리아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말했다.
"···가요. 저, 위험."
오염을 가둔 신성을 거뒀다.
죽어가는 몸이었으나, 분명 오염이 피부까지 스밀 것이다.
저리 붙들고 있다가 해를 입으면 어쩌겠나.
그런 생각에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뭐가 위험해. 다 죽어가는 주제에."
그가 도리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나기만 해봐라. 넌 좀 맞아야돼.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어찌 그걸 바라지 않을까.
내일을 그리는 일을 어찌 갈망하지 않을까.
히스토리아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렌이 신경질을 내고, 자신이 '그래도 잘 풀렸으니 된 거 아닌가요!'라고 반박하는 장면은 꽤 즐거울 것 같았다.
물론, 헛된 망상이었다.
"하, 하하···."
"웃기는, 새끼야."
"가, 이제."
"안 가. 나는."
"죽는, 위허···."
그 순간이었다.
"안 죽어. 힘 빠지는 소리 그만 좀 해라. 네가 그러지 않았나?"
그의 손에서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그것이 히스토리아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누구 하나는 믿어주는 게 희망이라고. 그런데 네가 안 믿으면 어쩌잔 건데."
눈빛이 떨렸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의 말은 분명, 자신이 그에게 전했던 어떤 말이었기 때문이다.
와중 손에서부터 따스함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래. 뭐 어쩌겠냐. 죽기 직전인데 그럴 수도 있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그러니까 내가 믿어줄게. 딱 오늘만. 지금만."
그가 자신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네 희망, 되어주겠다고."
그 순간이었다.
두웅―!
오염이 박동했다.
* * *
이 여자를 다시 만난 날부터 그냥···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싸울 일이 참 많을 것이고, 그 일에 이 여자가 안 끼일 확률은 적다고.
어쩌면, 살아있는 이상 희생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맞닥뜨릴 것이고 그때면 이 여자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리라고.
이미 이 여자를 너무 잘 안다.
전장에서 함께한 시간도, 다시 만나 나눈 대화들도 모두 그 확신을 부추기기만 했다.
하여 생각한 것이 있었다.
또 그딴 짓거리를 벌이려 하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막지 못한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막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 여자가 마음대로 죽게 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성적 판단도, 이해관계도 없이 그냥 싫었다.
하여 그 답으로 여러 가지를 떠올려봤다.
실제로 가능한 것들이 몇 있었다.
다행히 이번 일 또한 그런 범주 안에 있었다.
우두둑―!
히스토리아가 오염을 품었다.
그것은 죽음의 순간까지 히스토리아의 속에 남아 이렇게 맥동하고 있었다.
물론, 숨이 끊기면 이 오염의 박동도 끝을 맺는다.
하지만 숨이 끊기지 않았다면?
'변이'를 위한 최소한의 생명력이 그녀에게 남아있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변이하겠지. 오염이 목숨을 붙잡아 줄 테고.'
그걸 위한 재료가 마침 내게 있었다.
'목걸이.'
마나를 생명력으로 치환해주는 목걸이다.
고대의 물품인 만큼 그 기전은 밝힐 수 없으나, 현상만큼은 분명하니 사용해 봤다.
내 생각대로 목걸이가 불어넣어 준 생명력은 오염의 토양이 됐다.
오염이 변이를 일으켜 히스토리아를 회복시키도록, 동력 자원이 되어준 것이다.
우두둑―!
오염이 마나와 얽힌다.
마나를 증폭한다.
증폭된 마나가 치유력으로 화한다.
히스토리아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화아악―!
그러다 히스토리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보라색의 운무가 그녀를 에워쌌다.
하지만, 원하는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며 이 세계를 이루는 진리 한 가지를 되새겼다.
'모든 이능은···.'
생명을 통해 발화한다.
발화한 이능은 소모되어도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 차오른다.
마나도, 정령력도, 그리고 '신성력'조차 말이다.
이윽고 기다리던 반응이 왔다.
화아아악―!
오염에 의해서라고 하나 그 또한 생명력이다.
생명력을 먹이로 하여 신성력이 차올랐다.
황금의 광채가 검보라색과 뒤얽힌다.
그렇게, 히스토리아가 형상을 바꿔갔다.
나는 이윽고 완성된 형태에 헛웃음을 흘렸다.
"천사."
실존 여부야 둘째치고서라도 꽤나 어울리지 않나.
저, 자기 마음 편할 줄만 아는 여자에겐 딱 어울리는 꼴이다.
목각 인형처럼 관절이 나뉜 백색의 몸뚱어리는 팔의 관절이 유독 많았다.
황금색 밀랍을 녹여 만든 듯한 금색의 머리칼과 날개는 끈적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리, 오른쪽 다리가 두 개다. 왼쪽에 붙은 하나의 다리까지 총 세 개의 다리가 있었다.
나는 이 형상을 안다.
아마, 지난 생의 히스토리아가 오염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뒤틀림 이상의 무언가로 나아갔다면 이런 모습으로 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감상으로 두는 게 좋겠지.
"사람은 사람 모습으로 살아야지."
이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생명력도, 신성력도, 그렇다면 저 오염은 모든 역할을 다 했으니 치워버려야 하지 않겠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목을 그러쥐었다.
히스토리아가 흰자위만 남은 눈으로 날 봤다.
이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정신을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변이만 일으킨 탓이겠지.
그러니 결과.
[아아···.]
본성만 남는다.
생존 본능.
외부 자극에 의한 반응, 반격을 위한 기제만이 남을 터다.
우우웅!
히스토리아를 중심으로 신성과 오염이 그러모아진다.
그것들은 아득히 파괴적인 힘을 담은 채 날 노렸다.
몸 상태를 점검했다.
'싸울 수 있어.'
목걸이는 없다.
하지만 몸은 움직일 수 있다.
마나? 쥐어짜야 겨우 나올 수준이지.
하지만 말이다.
'전쟁 땐 이게 일상이었어.'
징징거릴 생각은 없다.
꽈드득―!
몸 주위로 마나를 해방한다.
신목 위로도 덧씌워, 그것을 조형한다.
키이이잉―!
괴성과 함께 지어지는 것은 오러.
공간 자체가 내 권역으로 화한다.
기수식을 취했다.
입 안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내장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다.
이를 악 물어 정신을 집중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까지 할까.
스스로 그런 질문을 건넨다면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이걸로 퉁 치자."
이 여자가 멋대로 날 구해주고 죽어버린 것에, 그 부채감이 아직 남아서.
"이제 목숨 빚은 없는 거다."
내 마음 좀 편해지자고 무리 좀 하는 거다.
꽈아앙―!
히스토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빗발치는 공세를 걷어냈고, 녀석의 심장을 향해 신목을 뻗었다.
오러의 파쇄가 결을 베어내고, 찌르고, 찢어발겼다.
방해되는 모가지를 뒤틀고, 날개를 뽑고, 팔다리를 분질렀다.
그래도 신성력이 있으니 히스토리아는 꾸준히 재생했다.
그러니 더욱 격렬하게, 조각조각 내겠다는 기세로 덤벼들었다.
쾅―!
그렇게 누구 하나가 죽지 않고선 끝나지 않을 것처럼 싸워.
전보다 힘겹게 하나씩 결을 벗겨내.
쩌적―!
이 여자에게서 천사의 가죽을 뜯어냈다.
* * *
칼리오스는 봉인고로 향하며 생각에 빠졌다.
이 모든 일이 레베카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줄곧 의심해 오던 일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모든 일이 악마에 의한 계략이었다곤 하나,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의아한 일이 많았다.
가장 먼저 오크 챔피언.
그것들은 어째서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을 향했는가.
투쟁이 아닌 전략을 사용했는가.
둘째로 베아트리스.
그녀는 그 많은 방법 중 어찌 악마 소환을 시도했는가. 그걸 떠나서, '어떻게' 악마 소환의 방법을 알아냈는가.
셋째로 베르헤임.
이 연구를 혼자서 할 수 있나?
학자도 아닌 성직자가, 그것도 금서의 지식을 읽는 것만으로?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금서가 그렇게 만만했다면 세상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해석을 위해 요구되는 마법 지식이 6위계 이상이었다.
상기한 사실 중 실제로 검증한 것은 베아트리스 하나.
하지만 베아트리스도, 자신이 어떻게 악마 소환의 술을 알게 된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부분이 악마에게 다시 쓰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모든 정황으로, 또한 알고 있는 사실로 미뤄봤을 때 칼리오스가 떠올릴 수 있는 추측이 있었다.
'집단.'
레베카를 만들고, 황금 세대 기수들의 심령을 뒤흔든 집단.
그들이 다른 방면으로도 움직이고 있었다면.
자신들의 의도를 위해 그저 상황을 관측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 가정은 참으로 기분이 나쁜 종류였다.
아무렴, '내 것'인 제국에 쥐새끼가 활보하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던가.
그 일을 그냥 넘어갈 정도로 칼리오스는 이해심과 아량이 깊지 않았다.
더불어, 그 일을 남에게 조사하게 둘 정도로 칼리오스는 남을 믿지 않았다.
모든 걸 떠나 베르헤임과의 전투에서 칼리오스는 확신해버렸다.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자신이 직접 나서야만 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치기엔, 황금 세대의 기수란 것들은 너무 무능했다.
여하튼 본제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언제 어디서, 또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가.
또한 저들은 자신들의 행보를 어디까지 경계하고 있는 것인가.
그 답을, 칼리오스는 봉인고에 들어와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으음."
칼리오스의 입가에, 아주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이미 다녀간 듯하군. 한발 늦어버렸어."
봉인고는 누군가 헤집은 흔적이 역력했다.
그에, 칼리오스는 이고 있던 베르헤임을 향해 읊조렸다.
"자네에게 물을 게 아주 많네."
봉인고는 베르헤임의 허가를 받은 인물만 들어올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가 과연 누구와 연구를 공유했으며 누구에게 봉인고의 출입을 허락했을지, 그 정도 답은 곧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주게. 내 인내심이 다 하기 전에."
미소 짓는 칼리오스의 눈빛에 깃든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 정리 (1) >
#046화. 정리 (1)
간밤에 일어난 사건은 다음 날 아침 제도 전역으로 퍼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탑에서의 사건 때와 다르게 이번 사건은 목격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법황청 상공에 떠오른 빛기둥과 신벌의 법진.
그 빛만으로 잠들었던 제도의 백성들이 다 깨어났으며, 근거리에 있던 사제나 성기사들은 그것이 전투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했다.
물론 빠르게 진압에 나선 칼리오스 덕에 실제 전투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모든 걸 가릴 수는 없음이었다.
우선 예배당이 무너졌다.
칼리오스가 걸레짝이 된 베르헤임을 어깨에 이고 그곳을 나서는 모습을 본 사람이 가득했으며, 유렌이 피를 흘리며 히스토리아를 안아 들고 나서는 모습 또한 수많은 사제가 목격했다.
그리하여 이런 소문이 퍼졌다.
-성자와 성녀가 죄를 지어 구금됐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본디 소문이라는 것은 맥락 없이 자극적인 내용만이 퍼지는 법이었다.
하나, 사실관계에 관한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교정되었다.
그 일에 칼리오스가 개입했음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봐, 그 얘기 들었어? 소문이 틀렸어! 성녀님이 아니야! 성자가 금서를 연구했대."
"나도 들었지. 다행히 초기에 성녀님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전하께 도움을···."
"이번에도 파로스가 함께 했다고 하더군! 망나니라곤 해도 능력은 출중한 모양이야."
"두 번째인가? 저번 마탑 사건도 그렇고 이번 대의 태사는···."
"세 번이지! 오크 챔피언의 토벌도 있었으니까!"
가장 완벽한 거짓말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거짓말이다.
그는 여러 근거를 통해 신빙성을 끌어올렸다.
"그래서 무슨 금서였는데?"
"신의 힘을 탐냈다나 봐."
"허어··· 이미 가호도 있던 사람이."
"그 죄로 가호를 박탈당했다더군. 성자 직도 내려오게 된 모양이야."
"그럼 법황청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그걸 막은 사람이 누구였어?"
"태자 전하랑 파로스 소가주. 그리고··· 아!!!"
"그래, 성녀님! 이번 대의 교단은 희망이 이끌어 간다더군!"
세간에 퍼진 소문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베르헤임이 신의 힘을 탐내 금서를 연구했다.
그 낌새를 눈치챈 히스토리아가 황실에 긴밀히 도움을 요청해, 두 사람과 함께 그 사건을 진압했다.
일이 이리되자 교단의 주교급 인물들은 발언권을 잃었다.
성녀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게 했다는 점에서 희망 교단은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운명 교단 쪽은 특히 심했다.
성자의 방만을 어찌 모르고 있었냐는 지탄을 받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법황청은 유일하게 민심을 사로잡은 성녀를 구심점으로 내부가 다시 짜이기 시작했다.
그 일로 외부 행사가 다 취소될 정도로 내정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럼 성자는 어떻게 된 건데?"
"그게 말이지···."
어떤 처벌에 관해서도.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처형했다는 말이 있네."
"으응?"
"누구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간밤에 처형했다더군."
그는 세간에서 망자가 되어 있었다.
히스토리아가 눈을 뜬 것은 딱 그런 소문이 정착한 때였다.
"이제야 일어나네."
눈을 뜬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파로스 소가주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유렌이었다.
* * *
꿈속을 유영하는 시간이 길었다.
히스토리아는 멍한 상태로 흐릿한 세계를 걸어나갔다.
하여 '이미 사후 세계로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상념도 떠올렸으나, 결국 눈을 뜬 곳은 현실.
히스토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살아있네요."
죽을 각오를 했고, 실제로 자살이나 다름 없는 일을 했다.
한데 그런 것치곤 몸 상태가 너무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이유 모를 활력이 도는 기분이었다.
어째서···에 관한 의문은 없었다.
히스토리아의 시선은 유렌을 향했다.
그가 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암만 죽어가는 상태라 하나, 그 순간의 대화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러지 않았나? 누구 하나는 믿어주는 게 희망이라고. 그런데 네가 안 믿으면 어쩌잔 건데.
-그러니까 내가 믿어줄게. 딱 오늘만. 지금만.
-네 희망, 되어주겠다고.
유렌은 삐뚜름하게 앉아 턱을 괴며 시선을 돌렸다.
히스토리아는 그 모습에 괜히 이불을 꼭 그러쥐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건 히스토리아에게 너무 낯선 일이었던 까닭이다.
히스토리아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구하는 입장이었다.
고결한 정신과 품행으로 타인의 우러름을 받던 이였다.
한데 그 반대 입장이 된다니, 누군가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다.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울컥하고 차오르는 감정 따위가 있었다.
그런 끝, 히스토리아는 드디어 한 가지를 이해했다.
"···고마워요."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자신이 구했던 병자들이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어떤 말도 더 꺼내지 못하고 '감사하다'라며 울먹였던 이유를.
그렇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말 다른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걸 표현할 다른 유려한 말을 떠올리기엔, 벅차오름이 너무 강했다.
헤헤 웃으면서도 히스토리아의 눈꼬리엔 투명한 눈물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리도 장렬히 죽음을 결심했으나, 막상 그 속내를 끄집어내 보면 자신은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 일이 일어남을 믿지 못해 포기했을 뿐이라는 것을.
유렌은 스스로의 말을 지켰다.
자신도 믿지 못하는 희망이 되어, 이리 자신을 구했다.
그 사실만이 속에 가득했다.
충만함이나 떨림 따위로 화하여 심상을 뒤흔들었다.
그런 때였다.
"저는 제가 뱉은 말은 지킵니다."
"네, 네···."
"그러니까, 이것도 지킬 겁니다."
유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듯 구부정한 자세였으나, 그는 거침없이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으에?"
히스토리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전신이 빳빳하게 굳으며 머릿속이 엉키는 기분이었다.
하나, 직후 일어난 일은 히스토리아가 생각한 무엇과도 달랐다.
빠악!
"으갹?!"
순식간에 휘둘러진 주먹이 히스토리아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저릿한 고통에 히스토리아가 펄떡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윽고 찾아온 알싸한 통증의 잔재에 히스토리아는 신음을 흘렸다.
"끄흣···!"
"말했습니다. 성녀님은 좀 맞아야 정신 차린다고."
다른 의미로 눈꼬리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히스토리아는 유렌을 올려다봤다.
유렌은 왜인지 서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 소가주님···?"
"저는 성녀께서 멋대로 희생하신다고 좋아라 하지 않습니다."
히스토리아가 멈칫했다.
그녀의 고개가 떨어졌다.
유렌은 말을 이었다.
"남의 목숨을 잡아먹고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만큼 비겁하기도 싫습니다. 성녀께서 자기만족으로 살린다고 해도, 전 비참할 뿐이라는 걸 좀 알아주십시오."
면목이 없었다.
괜히 뺨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 의미가 있을까.
입은 다물리고 말았고, 유렌은 그런 히스토리아에게 말했다.
어딘가, 아이를 훈계하는 어른처럼 말이다.
"감사 말고 다른 걸 하십시오."
멈칫하던 히스토리아는 이윽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일을 한참이나 하다가, 부끄러움에 차 답했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합니까."
"멋대로 죽으려 해서···."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유렌의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히스토리아는 멋쩍어져 입술을 우물거렸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에다, 정수리는 아리고 또 아렸다.
그와중에 우스운 것은 그래도 칭찬받았다는 게 묘하게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런 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쳤다.
"···아! 베르는!"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정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을 묻지 못했다는 생각에 유렌을 바라보자, 유렌은 말했다.
"처형됐습니다."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히스토리아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렌이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분명 그리됐을 것이다.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은."
그가 히죽, 비열하게 웃었다.
히스토리아는 황망하게 눈을 끔뻑였다.
* * *
제도는 넓다.
그 속에 지내는 사람의 수와 별개로 천년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만큼 역사적인 건물이 많았고, 이젠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신비한 건물도 많았다.
베르헤임이 구금되어 있는 건물 또한 그랬다.
제국 북단의 어떤 첨탑.
천년이라는 시간 동안, 번화가에서 슬럼가로 변해버린 구시대의 흔적이 남은 구획.
빈민가인 만큼 남들의 눈에 그리 띄지 않는다.
첨탑인 만큼 다가올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었다.
구금된 방엔 겨우 주먹 크기만 한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베르헤임은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 구멍을 통해 밖을 봤다.
탈출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도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했던 일을 돌이키고 후회하길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무엇이 뒤틀렸었기에 자신은 그런 선택을 하고 만 것일까.
생각할수록 차오르는 것은 회한이오, 절망감이었다.
무엇보다 히스토리아를 제 손으로 죽이려 했다는 그 사실이 끔찍하리만큼 괴로웠다.
그런 때였다.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군."
베르헤임은 입구 쪽을 확인하곤 고개를 숙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이제야 고개가 유연해졌군. 보기 좋네."
어찌 아직도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을까.
행한 일이 있을진대.
그와의 대담은 사흘째였다.
처음 눈을 뜨고 날뛰던 자신을 제압한 것도 칼리오스였고, 이후 상황을 전해준 것도 칼리오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일러준 것도 칼리오스였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조사하며, 베르헤임이 뒤틀린 인지 속에서 짚지 못했던 점을 짚어주었다.
개중 가장 큰 것은 그랬다.
"자네가 말한 인물들은 조사해 봤네."
"밀리, 페른, 고르딘. 맞습니까."
"그래, 자네의 연구에 수족이 되어주었던 사제들."
베르헤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호명된 이름들을 들을 때마다 새삼스러운 위화감이 샘솟았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분명 저와는 접점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한데 어느 날부터 제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었지요. 과정이 불분명합니다. 안개에 갇힌 듯 희뿌옇게···."
"그 기분 아네. 나도 레베카와 동굴에서 밀회를 즐기게 된 계기는 아직도 생각이 나지 않거든."
"······."
헛웃음이 나올 일이었다.
저 부분 또한 베르헤임이 공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악마를, 위중한 병에 걸린 인간으로 치부하며 구하기 위해 애썼다니.
하물며 그 이유가, 히스토리아와 함께 했던 추억을 레베카와의 추억으로 덧씌워졌기에 그런 것이라니.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던가.
무엇 하나 맥락에 맞지 않는단 말이다.
한데도 이미 일은 그리 되어버렸다.
그것은 베르헤임으로 하여금 끔찍한 수준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지독하고 또 지독한 일이다.
베르헤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 후회한다고 바뀜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잡았습니까."
베르헤임도 궁금했다.
사적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꽤 많았으므로.
금서에 관한 지식과 연구 방향성을 잡아준 것은, 개중 리더를 자처하던 밀리였으므로.
"제가 연구에 사용했던 시료는··· 외경의 생물입니다. 그걸 구할 유통로를 뚫고 관리한 게 페른, 정제한 것이 고르딕, 밀리는 제 곁에서 총괄을 겸하며 연구의 피드백을 담당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유통 경로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들은 걸 되새기면 하나,
-외경에 친구가 있습니다!
모험가라 얼핏 넘겨들은 그 친구가, 이 모든 일의 원흉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답을 알고 싶었다.
하나, 돌아온 답은 베르헤임에겐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법황청 전체의 인명부를 요청해 뒤져보았네. 하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이들은 없더군."
베르헤임의 표정이 굳었다.
< 정리 (2) >
#047화. 정리 (2)
칼리오스는 이번 일에 들어서며, 아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행동했다.
봉인고의 이변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모든 행동은 '내부의 적'을 찾기 위해 이루어졌다.
베르헤임이 죽었다는 소문을 만들었다.
히스토리아가 병상에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만들었다.
칼리오스 자신은 영웅적 성취를 이룩한 것에 취해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며, 만나는 귀족마다 성자의 악독함을 짚으며 분개했다.
그러니까, 봉인고와 관련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방심시키기 위한 최선을 다했단 말이다.
그 과정에서 적의 꼬리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럼에도 적은 보란 듯이 종적을 감췄다.
인명부에 이름이 없었다는 말은 애초에 사제가 아니었다는 뜻.
이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은, 고작 적이 내부에도 있다는 확신뿐이었다.
지독하게도 짜증이 나는 일이었지만 그럴 수 있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쉽게 꼬리가 잡힐 적이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 칼리오스는 지난 일에 대해 분개하며 주저앉기보단, 생산적인 일을 선택했다.
하여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전투에 돌입하는 그 시기에 그들이 꽁무니를 뺐다고 생각하네. 인상착의를 받아내 제도 내에 순찰을 돌려봤지만··· 나오는 게 없었거든."
"···그렇습니까."
"봉인고에서 사라진 건 연구 기록 하날세. 다른 금서야 뭐, 자네만 풀 수 있는 저주가 걸려 있으니 못 가져간 것도 이해되고."
"···예."
"나는 조금 간절하네. 그러니 그자들에 대한 단서를 자네가 아는 선에서 모두 말해주게. 왜곡된 것 정도는 내가 교차 검증으로 알아낼 수 있음이니."
베르헤임은 충격을 받은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가 말했다.
"우선···."
칼리오스는 길게 이어진 말들을 모두 머릿속에 새겼다.
중간중간 질문을 섞으며 의아한 부분을 검증했다.
왜곡된 정보인 만큼 모든 걸 믿진 않았다.
다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평하길.
'···다행이군.'
쓸만한 정보가 아주 없진 않았다.
칼리오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렸다.
눈을 감고, 호흡을 안정시켰다.
머릿속에 방침이라 할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하여 칼리오스는 말했다.
"···자네를 어떻게 써야할지 꽤 고민했네. 이제야 답을 낼 수 있겠군."
베르헤임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오스는 그의 칙칙한 금안을 곧게 응시했다.
그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대외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거기에, 그를 영웅적인 인물로 만들어 얻는 이득보다 손해가 크기 때문.
마음 같아선 목을 치고 싶었다.
칼리오스에겐 딱히 흥미롭지도, 든든하지도 않은 인물이 베르헤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일이 이렇게 된다면 말은 달라진다.
"자네는···."
칼리오스는 그에게 선고를 내렸다.
대외적으로 내려진 처형이 아닌, 다른 선고를.
* * *
히스토리아가 병상에서 일어나기까진 일주일이 걸렸다.
이젠 신성력도 온전히 회복된 상태.
아니, 회복 이상의 무언가가 생겼다.
'···전보다 그릇이 커진 것 같기도.'
비술의 사용이 원인인지 유렌이 조치한 어떤 방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둘 다가 문제였는지 히스토리아의 신성력은 전보다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다만 양이 불어난 것과 달랐다. 그녀는 신성력을 발했다.
팟칭―!
광채가 요란하지 않게, 도리어 은밀하고 빠르게 형상을 자아냈다.
구현까지의 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었으며, 그 형상의 변주는 그동안 히스토리아가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영역까지 뻗어 있었다.
원한다면 이 신성으로 법술을 새로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확실한 힘의 증가.
한가지, 이 변화에 단점을 짚자면 그랬다.
"날개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지 말아 주세요."
히스토리아는 유렌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뺨이 조금 타올랐다.
외관이 문제였다.
신성력을 강하게 발할수록, 히스토리아의 등 뒤로 빛으로 지어진 헤일로와 날개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야 신성하다지만 그렇지 않나.
남들이 느끼기에 '와! 성녀님은 신성력을 쓸 때마다 날개까지 다시는구나! 혹시 스스로를 천사라고 생각하시는 걸까?'라며 자아도취에 빠진 인간으로 취급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히스토리아는 절대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여 숨길 방법을 고안했으나 그건 역시 불가.
지켜보던 유렌은 말했다.
"그래도 다리 하나 더 안 돋아나는 게 어딥니까. 날개 정도면 양반이라고 봅니다."
"···그만해주세요."
"와, 천사."
"제발···."
히스토리아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원망 서린 눈으로 유렌을 봤지만, 유렌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히스토리아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진짜···."
"뭐."
"···됐어요."
한숨이 삐죽 튀어나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유렌은 한 번 관계에서 우위를 잡았다고 판단한 순간부터 줄곧 자신을 부하처럼 여기는 게 눈에 보였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얄밉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전처럼 예를 차려주지··· 생각하다가도 그렇게 하면 조금 섭섭할 것 같았다.
그녀는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혼란스러웠다.
그런 때였다.
"자리 털고 일어났으면 갑시다."
유렌이 말했다.
덜컥, 히스토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이윽고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슬픔이 옅게 차올랐다.
"···네. 이제야 보겠네요."
지금부터, 이 사고의 원흉인 베르헤임을 만나러 가야 했다.
* * *
히스토리아는 제도 북부로 향하는 내내 생각했다.
그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 사고를 친 것에 원망이 먼저일까.
살아 정신을 차린 것에 안도하는 것이 먼저일까.
그 모든 고민을 아울러, 과연 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까.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 끝에 히스토리아는 생각을 포기했다.
결국 답은 직접 만나 얻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정답이었다.
"···베르."
북부 어딘가의 오래된 첨탑.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장소.
베르헤임은 그곳에 철창 너머로 몸이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그의 꼴은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언제나 깔끔하던 모습과 다르게 전신이 지저분했다.
붉은 머리칼은 엉켜 있었으며, 금색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 꼴에 안도가 차올랐다.
자신을 발견하곤 놀란 듯 치켜뜨는 눈에, 무엇보다 선명한 이지가 맺혀 있었으므로.
히스토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골랐다.
그러다가 결국 그런 말을 했다.
"몸은 괜찮아?"
참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아이건만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생각에.
팔은 결국 안으로 굽는다는 것인지, 히스토리아는 그에게 원망을 토할 수 없었다.
"다행이다. 정신을 차려서."
그녀는 슬픔과 안도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베르헤임은 그 모습에 속 어딘가가 무너져내린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를 꽉 깨물었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리아."
그의 숨은 젖어 들어 있었다.
* * *
베르헤임은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히스토리아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마다 수치심과 죄악감이 치솟았다.
그것은 그녀의 생존과 안정을 확인하면 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감정이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경멸을 담는다면 마음 편히 죄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베르헤임은 그녀가 어떤 여인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뿐이었다.
"많이 힘들었지. 이젠 괜찮아."
히스토리아는 그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자신을 달랬다.
어리고 미숙했던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녀가 언제나 그래왔듯, 만인에게 그랬듯.
죄를 꼬집는 것이 아닌 속죄를 치하했다.
자신을 나쁘지 않다고만 말했다.
허탈한 웃음이 삐져나왔다.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어찌 저리 용서하려고만 드는지.
저 마음의 온도는 왜 항상 따스하기만 한 건지.
베르헤임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 순간에서야 여실히 깨닫게 되는 게 있었다.
'나는···.'
이제, 아마 평생 저 미소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으리라고.
누이이자 어머니였던 그녀에게 평생 죄스러우리라고.
하나,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히스토리아를 아는 만큼 그녀가 기뻐할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기에.
베르헤임은 어떻게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리아. 살아 있어 줘서."
그렇게 그녀의 미소를 지켰다.
분위기는 잔잔해졌다.
히스토리아는 짧은 침묵 후, 웃으며 답했다.
"나도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이후는 그랬다.
베르헤임은 히스토리아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신변에 관한 것이나, 바깥 상황에 관한 것.
그리고 상처에 관한 것까지.
그런 이야기 중 베르헤임은 히스토리아의 변화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녀가 신성력을 발하자 등에 헤일로와 함께 빛의 날개가 차올랐다.
부끄러운 듯 히스토리아가 고개를 숙이지만, 베르헤임은 그것만으로도 대강의 기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미르의 영향일 거다. 내가 연구했던 식물."
"아미르···?"
"외경의 식물이다. 도플갱어의 땅에서 나는데··· 이게 종족의 특질을 흐리게 만들어, 변화가 용이한 상태로 만드는 효능이 있다."
말을 내뱉을수록 베르헤임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면, 이조차도 밀리에게 들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베르헤임은 감정을 빠르게 지워낸 후 말했다.
"네가 섭취했던 시약은 진화와 관련된 연구의 부산물이었다. 내가 먹은 것과 같은."
"진화라면···."
"신성력의 극대화에 가장 알맞은 형태를 찾아 종을 변이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개인마다 다르지. 성향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니."
베르헤임은 그 일을 생각하다 보면 쓴웃음이 나왔다.
히스토리아는 천사가 되었고, 자신은 짐승이 되었다.
어쩌면 자신은, 신의 분신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나쁜 건 아니다. 종의 변이는 어찌 해결된 듯하고, 과정에서 신성력은 생존을 위해 상위의 형태를 취한 것일 뿐이니. 전화위복이라고 봐도 되겠지. 너는 더 강해졌다."
"그, 그런 거구나···."
그제야 히스토리아는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베르헤임은 평소처럼 구는 모습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차오르는 감정이 하나 더 있었다.
'한동안은 끝이겠군.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들었다.
그리고, 그걸 히스토리아에게도 전해야 했다.
"리아."
"응?"
"고마웠다."
이런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해서.
그런 일에 목숨까지 걸어주려 해서.
그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러니,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라도 베르헤임은 의무를 수행해야만 할 터였다.
베르헤임은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제도를 떠나려 한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혹은 평생."
그 말에 히스토리아가 벙쪘다.
* * *
히스토리아와의 만남에 앞서, 베르헤임은 칼리오스에게 선고를 받았다.
―난 자네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네. 더 살려둘 필요성을 못 느꼈고, 그리하여 볼 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지. 왜, 자네의 생존은 적들로서 더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겠나.
―예, 이해합니다.
―이제와서 새삼 자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네. 그걸 아는 사람은 나와 유렌, 거기에 내 누이와 성녀까지 넷이 끝일 걸세.
―···예, 그럼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베르헤임은 죽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고, 또한 하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외경으로 떠나주게. 이 일을 벌인 여러 용의자를 떠올려 봤는데··· 암만 생각해도 그렇지 않나. 몇만을 희생해 악마를 소환했네. 한데 조사 결과 그 정도 실종 사건은 단 하나도 포착되지 않았어. 그럼 유력한 곳이 어디겠나.
―···외경이지요. 인간을 포함한 우호 이종족들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외지.
―그러하네.
제도를 떠나 외경으로 향해야 했다.
이 일의 원흉이 되는 집단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베르헤임으로서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실험의 재료를 그곳에서 구했으니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군. 듣다 보니 이상하지 않던가. 어찌 자네를 도운 이들은 외경을 그리 잘 안단 말인가.
-예, 같은 의견입니다.
외경은 신비다.
그곳의 가혹한 환경은 인간을 포함한 이 땅의 피조물들이 살기에 적합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족을 빼고 이야기 해보면, 그곳에서 '사육'되는 인간이나 이종족들이라면 제물로서 퍽이나 적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의 수족으로서 살았던 이들이, 그 셋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떠나주어야겠네. 거부권은 없네.
칼리오스는 생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것은 베르헤임에겐 그나마 죄악감을 지워주는 인도적인 처사라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어떤 향수를 치밀게 하는 처사라 할 수 있었다.
"이제 가는 거구나."
떠나는 날이 됐다.
늦은 밤, 제도 북문 너머 숲길.
배웅을 나온 것은 로브를 뒤집어 쓴 히스토리아와 유렌 뿐이었다.
베르헤임은 슬피 웃는 히스토리아를 향해 말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응."
"그리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형태지만 우린 약속을 지키게 된 거잖나."
히스토리아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조금은 억지스럽게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너는 외경을 탐험하고, 나는 법황청을 지키고."
"차라리 다행인 일이다."
"응···."
이별의 순간은 길어봐야 슬플 뿐이다.
또한 베르헤임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믿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그리 말한 후엔 유렌을 바라봤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빨리 이 신파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헤임은 그 모습에 생각했다.
'···다행인 건가.'
강하다.
그리고 생각보다는 정이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저자가 히스토리아의 곁에 있다면 자신보다는 잘 지켜주겠지.
그거면 됐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산다면 족한 일이었다.
베르헤임은 유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렌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됐으면 가라. 나 늦으면 누님한테 혼나."
영문 모를 말, 아마 히스토리아가 있기에 험악하지 않게 자신을 독촉하는 것일 터다.
베르헤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히스토리아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렇게 떠났다.
그렇게 뒤돌아선 후에야 베르헤임은 심장 어림을 손으로 문질렀다.
어쩔 수 없이 칼리오스의 얼굴을 생각했고, 그리하니 조금은 닭살이 돋았다.
―아, 물론 그냥 보내주진 않네. 어찌 죄수를 세상에 막 풀어놓겠나. 나도 조치는 취해놓아야지.
상큼하게 웃으면서도 그는 꽤 잔인한 일을 저질렀다.
베르헤임의 심장엔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
칼리오스가 원한다면 대륙 반대편에 있어도 순식간에 베르헤임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저주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님은 안다.
자신이라 하여도 같은 입장에선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르헤임은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소름 끼치는 인간.'
거듭 다행이었다.
히스토리아와 더 가까운 게, 칼리오스가 아닌 유렌인 것은.
밤의 그림자는 어두웠다.
베르헤임은 그것에 친밀함을 느끼며 나아갔다.
갈 길이 바빴고, 알아낼 것이 많았다.
다른 것들도 하나같이 의문에, 스스로도 어디까지 뒤틀려 있는지 모르는 미지 투성이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베르헤임은 이 여정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풀어내야만 할 개인적인 의문이 있었다.
'가호는 언제부터 없었던 건가.'
괜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게 계속 걸렸다.
레베카로 인한 처사라면 적어도 년 단위는 가호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걸 모른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건 남아 있었다.
'여신께서 대담을 명하지 않으신 건 어느 때부터?'
신은 언젠가부터 응답하지 않았다.
왜곡이 있다기에, 그녀의 의지가 아무런 전조 없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은 너무 의아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억측이다.
하지만 베르헤임은 그것이 영 께름칙했다.
고개를 들었다.
답은 아직 안개 너머에 있었다.
< 금기의 황자 (1) >
#048. 금기의 황자 (1)
법황청의 모든 사건이 해결됐다.
성자가 죽음을 위장해 떠났고, 히스토리아는 법황청 내부 정리를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본 날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사건의 전말을 공유하자 히스토리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의 표정은, 참 낯설게도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용서할 수 없어요. 지금 벌인 일들도, 베르헤임에게 한 짓들도. 악이 있다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잔뜩 화가 난 모습에 일단은 진정시켰다.
애초에 싫다고 해도 억지로 돕게 할 생각이었다.
당연했다.
신성력과 성기사란 족속은 전쟁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더 수요가 높아지는 족속이지 않던가.
여하튼 거기까지.
자잘한 일이 더 있었지만 당장의 급한 불은 껐다.
물론, 이게 이제부터 쉴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예상은 했는데···.'
집단에 내부적으로 파고들어 있다라.
이것은 악재기도 했고, 희소식이기도 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방침이 더욱 명확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태자와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일단 추격조를 편성했네. 하지만 성과는 없을 걸세.
―잡힐 거면 벌써 잡혔습니다. 용의주도한 놈들이지요.
―하지만···.
―예, 시간상으로 여기서 얼마나 더 도망갔던 아직 제국 안입니다. 적에게 텔레포트가 가능한 고위 마법사가 있으면 또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리 쉽게 내뺄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더군.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파고드는 놈들이다.
어떻게든 다음 수를 쓰려고 들겠지.
그 추측을 강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다.
'금서의 연구 일지를 훔쳐 갔다.'
내용이야 성자가 떠나기 전 그를 통해 얼추 복사했으니 안다.
다만, 목적성을 따져보자.
왜 그걸 굳이 훔쳐 갔을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들의 심리를 역추적해 봤다.
'안 훔쳐 갔으면 들키는 게 늦었겠지.'
하지만 성자를 조사하는 이상, 결국은 그들의 존재가 발각되는 건 필연.
어떻게 하던 들킬 거라면 뭐라도 챙겨가겠다는 심보?
거기서 끝날까?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겠지. 들키는 게 조금 더 빨라진다고 하여도.
―그럼 어디에 이용할 생각이겠습니까.
―뻔하지 않나.
물밑의 싸움이란 결국 정보전이오, 심리전이다.
추측 가능한 목적이란 분명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남은 인간들이 있네.
―대공자, 암흑가.
―그들을 흔들 방도에 더 유동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
―북부는 멉니다. 그리고 통제가 잘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그 인간들이 향했을 곳은 뻔하군요.
―암흑가. 제국 안에 있으면서도 별개의 땅으로 격리된 곳이지.
―숨기가 좋고, 신분이 없어도 되는 곳이니.
암흑가다.
수를 쓴다면 그곳이 가장 빠를 터였다.
무엇보다 사특한 실험에 적합한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암시장과 신분 없는 체류자.
즉 재료와 실험체.
그것만 안다면 놈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
아니, 꼬리뿐일까?
―베아트리스의 곁에도 있었네. 베르헤임의 곁에도 있었지.
―암흑가의 주인 옆에도 끄나풀이 있을 겁니다.
―접선을 한다면 그쪽이 맞겠군.
―대어를 낚을 수도 있겠지요.
무더기로 잡아낼 수 있다.
이제야 그놈의 실마리가 보인단 말이다.
심문한다면 적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잡아낼 수 있음이 분명하다.
하여, 우리가 결정한 일이 있었다.
―잠행, 그게 필요하네. 암흑가는 직접 가야하네.
―그것 말곤 방법도 없습니다. 누굴 시키기엔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갈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보지. 암흑가로 갈 걸세. 뒷정리 탓에 벌써 시간이 지체되고 있네.
이틀 뒤, 잠행을 떠난다.
당장 달려가야 마땅하나 잠행이란 것의 목적이 뭔가.
은밀성에 있다.
하지만 나나 태자나 원치 않게도 공적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편이다.
매번 자리에 있던 놈이, 더불어 최근 주목받는 놈이 없어진다면 곧장 소문이 돌지 않겠나.
하루빨리 그쪽으로 가겠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럴 바엔 일정을 며칠 늦추더라도 은밀성을 확보하는 것이 좋을 건 뻔하지 않나.
우리의 행보는 최대한 가려져야 했다.
그를 위한 준비로 태자는 대역이 필요했다.
에릴다의 도움을 받아 직접 교육을 시키는 중이며, 대역에게는 금언의 저주를 걸어뒀다.
태자는 큰 행사를 다 쳐내고 있었다.
영웅적인 업적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얼하냐.
뭐, 크게 없긴 하다.
기껏해야 몸 상태를 다잡는 것 정도에 누님께 내 행보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내가 저택에 칩거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 정도.
그 외에.
"파로스야! 이케! 이케 하면 되는 것이냐!"
내가 없어지면 곧장 난리가 날 꼬맹이 하나를 관리하는 것.
"예, 잘하고 계십니다."
"아리아가 용사가 될 수 있겠느냐!"
"암요. 검술이 아주 기가 막히십니다."
파로스의 정원.
아리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속이 빈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실,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검에게 휘둘리는 수준으로 휘청거리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휘적거리는 건 맞으니까 수련으로 치자.
왜 목검을 휘두르고 있느냐.
이유는 조금 많이 단순했다.
"아리아도 용사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니 공주는 하는 게 없어서 별로다!"
태자의 행보가 문제였다.
법황청의 사건 이후 성녀와 함께 가장 주목을 받은 게, 베르헤임을 직접 두들겨 팬 것으로 알려진 태자였다.
연막을 위해서였다지만, 본인부터가 성자를 무력으로 이겼다는 걸 떠벌리고 다녔고 그걸로 온 궁에서 찬사를 들으니 그게 아리아의 귀에도 들어간 게 아니겠나.
이 꼬맹이가 그렇다.
남들 칭찬이 고파서 얌전한 척하고, 조숙하게 굴고, 그러다가 자기 세계를 만들어버린다.
그런 녀석이 치즈버거 한입충 주제에 영웅이라 칭송받는 태자를 보며, 얼마나 배알이 꼴렸겠나.
대뜸 찾아오더니 그런 말을 했었다.
―아, 아리아도 수련을 시켜다오―!
안 놀아주면 밤새 매달릴 것 같기에, 목검의 속을 파내 가볍게 만들고 대충 휘적거리게 만든 뒤 봐주는 중이다.
아리아가 이마에 땀을 닦았다.
빵싯빵싯 붉어진 뺨이 끌어올려질 정도로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만족감이 얼핏 보인다.
"검술은 힘들구나. 하지만 아리아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다!"
"예에, 힘내십시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리아가 전설의 영웅 치즈버거가 되어서 파로스를 응원해주마!"
"응원입니까?"
"웅! 응원 영웅이다!"
흠, 직접 싸울 생각은 없는 듯하군.
그럼 검술은 대체 왜 배우는 거지?
의아함이 들었으나 저 기대감에 찬 똘망똘망한 눈을 보니 아무렴 어떤가 싶다.
"건강하게만 자라주시면 됩니다. 애들은 그게 제일 큰 응원이지."
"웅! 아리아는 하루 세 끼 잘 먹어서 잘 클 거다! 어서 커서 유렌을 영차영차 응원해 줄 것이란다!"
"편식은 그만하고."
"에에···."
아리아가 곧장 질색했다.
아무래도 잘 크긴 그른 듯하다.
그렇게 턱이나 괴고 있는 순간이었다.
"아참! 그거 아느냐?"
아리아가 목검을 홱 던지곤 내 곁으로 와 앉았다.
놀이가 질린 걸까.
생각하는 순간 꽤 재밌는 이야기가 나왔다.
"봉잉고? 에 있는 책이 황성에 온다는구나!"
금서에 관한 내용이었다.
황실의 낮말 듣는 새 아리아.
쓸데없는 이야기가 주류지만 이렇듯 황성에서 몰래 주워들은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해올 때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대강은 아는 내용이지만 결말이 그리된 건 처음 들었다.
다른 건 아니고, 태자가 이번 사건을 걸고 넘어지며 봉인고의 금서를 전부 황실에 들고 오고 싶어 해 히스토리아와 협상을 했었다.
히스토리아 입장에선 용인이 되는 일이었으나, 입지가 위험해진 운명 교단의 주교들이 문제였다.
어떻게든 권한 하나라도 붙잡고 있겠다고 꽤 발악을 했었지.
'잘 풀었나 보네.'
요즘 따라 점점 전생과 닮아가는 터라 방법이 과격했으리란 추측도 얼핏 들었다.
여하튼,
"금서고가 풍성해지겠군요."
나랑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와중 아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막만 한 손을 쫙 펼치곤 그것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손 틈새로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어둠에 심취하지 말거라!"
눈매가 사뭇 날카롭다.
뭘 흉내 내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떠냐! 막내 오빠버니 같느냐!"
참 우스꽝스러운 꼴.
하지만,
"에잇."
딱콩!
"으갹!"
딱밤을 때렸다.
아리아가 삐익 비명을 지르더니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마, 막내 오빠버니가 진짜 이랬단 말이다!"
"그 사람은 진짜 아픈 거고."
"하, 하지만!"
"다시는 그러면 안 됩니다."
"···웅."
아리아가 금방 수긍하고 시무룩해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기분을 풀어줬다.
그러며 생각하길,
'애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네.'
입맛을 다셨다.
애들이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대로 배워버리니 의도에 악의는 없는 걸 안다.
하지만 3황자를 그렇게 표현하는 걸 남에게 보여주는 건 막는 게 맞다.
'어디서 또 음해하는 말이 나올 줄 알고.'
그도 그럴 게, 3황자와 관련해서는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나이가 14살이라 어둠에 심취해 있다거나, 그래서 품위 탓에 그런 모습을 숨겨야 한다거나 하는··· 안타깝게도 그런 부끄럽고 우스운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뺨을 긁적였다.
'누가 알았겠냐. 황자가 금서고에 선택받을 줄.'
3황자 프리드 오르테어.
내 기준 황좌에 오른 지 반년 만에 목을 매달아 저승으로 도망간, 머리 좋은 겁쟁이.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를 평하자면 그랬다.
'계약자.'
황실 금서고에게 선택받아 강제로 계약하게 된, 언제나 목에 사신의 낫이 걸린 저주받은 황자.
현재 제국의 금서고는 그 꼬맹이가 관리하고 있었다.
* * *
오르테어 제국의 역사가 천 년이다.
인간의 독립과 동시에 지어진 제국이며, 역사가 그리 깊은 만큼 그 제국의 수도인 제도, 그 중심인 황성에는 꽤 많은 신비가 아직 보존되고 있었다.
금서고 또한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어떤 식으로 건축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으나, 밝혀진 사실만 따져보자면 그랬다.
그것은 공간 자체가 신비로 점철되어 일종의 '자아'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본인이 허락하지 않은 자의 출입을 통제하며, 또한 외부와 내부의 공간 자체를 격리해 기운의 출입을 통제한다.
하여 제국의 건국 황제는 그 공간을 '금서고'로 지정했다.
그러니까, 위험 물품을 보관할 목적으로 그곳을 활용한 것이다.
금서고의 탄생 배경은 거기까지.
이후 황실은 직접 교육, 관리한 인력을 금서고에게 소개시켰다.
금서고는 자격이 있는 인물이 나타나면 그 인간을 집어 계약했다.
분명 사건 사고가 터질 수 있는 구조.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금서고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반자의 저주.'
금서고 고유의 능력이며, 저주에 걸린 사람이 배신행위를 하려들 경우, 그의 생명을 가둬가는 저주였다.
또한 금서고에서 얻은 지식을 외부로 발설하려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명을 거둬가는 저주였다.
그게 있어서 금서고는 천 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다.
또한, 그런 이유로 이번 대 역시도 황실은 금서의 관리를 위해 인력을 양성했다.
그런 와중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금서고가 스스로 계약자를 선택했지.'
당대의 계약을 위해 양성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금서고는 그들 모두를 거부하며, 궁에 있던 3황자에게 다짜고짜 계약을 걸어버렸다.
당연히 황성은 난리가 났다.
아니, 제국 전체가 그 일에 들썩였다.
그것은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선례가 없던 돌발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필 고른 게 다섯 살배기 황자.
가장 고귀한 핏줄이기에 더욱 그랬다.
어떻게든 계약과 저주를 풀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금서고가 행한 일은 돌이킬 수 없던 것이다.
어쩌겠나.
3황자에게 금서고의 관리를 맡길 수밖에.
모두가 불안해 했다.
어린아이가 혹여 말실수로 금서고의 지식을 내뱉어 죽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있었다.
다행인 점은 3황자가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는 것.
또한, 그가 자신이 금서고의 주인이 된 것에 그리 개의치 않아 했다는 것.
결과에 순응하여 제국에 이바지하려 한 마음이 제국민들의 마음을 녹였다.
그런 말이다.
아리아가 만인의 거리낌으로 서 있던 황족이라면, 3황자 프리드는 만인의 동정을 받던 황족이었다.
그렇기에 3황자를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그게 정치적인 불리함을 불러일으킴으로.
여하튼 그런 인간이 올해로 14살이 된 3황자였다.
그리고,
"가능할까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다.
어깨에 닿는 금발 머리.
몸 전체가 마른 데다가 얼굴의 선도 얇은 유약한 인상, 유리알 같은 푸른 눈.
그리고 병자 같은 미소.
3황자 프리드 오르테어.
갑작스럽게 내가 왜 이 꼬맹이를 만나고 있는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선 오늘의 일을 되새겨야 했다.
'···내일 떠나야 하니 태자를 만나러 왔고.'
그런 중에 3황자가 갑자기 나타나 대화를 청했다.
이번 봉인고 금서의 이전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더니, 그게 아닌 나도 놀랄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금서고에 와달라는 말입니까?"
"네."
나보고 금서고에 따라와 달란다.
이렇게 대뜸 요청하는 내용이 헛소리에 가까우니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제가 갈 수 있습니까? 거긴 3황자 전하밖에 못 갈 텐데."
금서고는 허락받지 않은 자는 아예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데 어찌 이런 요청을 해오는가.
의아하여 물으니, 3황자가 묘한 이야기를 했다.
"그럼요. 데아가 먼저 요청한 일인걸요."
그것은,
"이번 법황청 사건 때문에 소가주님 이야기를 전해줬더니 그러더라구요. 예전에 파로스와 '약속'한 게 있다고. 소가주께서 자격이 된다면, 지금 지키면 될 것 같다고."
내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요청이었다.
< 금기의 황자 (2) >
#049화. 금기의 황자 (2)
파로스, 그리고 약속.
두 단어의 조합은 내게 조금도 낯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다른 일을 겪어오는 중 점점 그 의아함을 키워온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일을 해결하며 이놈의 신목이 얼마나 큰 지분을 차지해왔던가.
그 정체가 신의 가지라는 말까지 들었으며, 관련된 일은 계승식을 끝내면 알려준다니 가문과 약속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이 내게 얼마나 컸겠나.
그럼에도 당장 깊게 파고들지 않은 것은 지금 이걸 알아내려 끙끙댄다고 무언가 새로운 사실이 나오진 않을 것 같아서.
엘프 장로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알게 될 일이라는 생각에.
한데 이런 기회가 생겼다.
함정? 그럴 가능성도 분명히 있겠으나 그 가능성은 지극히도 낮다.
파로스와 약속에 관한 걸 아는 건 현재까지 엘프 장로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금서고 또한 천 년 전에도 존재했던 신비이지 않던가.
공통분모가 있단 말이다.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의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내가 태자를 만나러 왔다는 걸 아는 이상 시간 벌이만 된다면 누군가는 나를 구하러 올 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가봅시다. 금서고."
"네에. 그럼 따라오시겠어요?"
3황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금서고는 황성 북쪽의 별채에 자리해 있었다.
지하에 매립된 공간이며, 그 위로는 고서고를 건축해 위치 자체는 꽤 익숙했다.
"이쪽이에요."
나는 사서들의 예를 받으며 3황자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고서고 어딘가,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드디어 금서고 앞에 도달했다.
거대한 문에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것을 잘 헤아려보면 천사나 악마를 형상화한 것이 있었고,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 꽤 호기심이 차올랐다.
'내가 최초인가.'
아니, 약속을 했던 가문의 시조도 있을 테니 최초까진 아니겠군.
여하튼 흥미는 조금 생겼다.
세간에 퍼진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서고의 의지는 오래전 죽은 사서의 망령이다.
혹은 금서에 스스로를 봉인한 미치광이 마법사다.
또 다르게 이르면 역대 계약자의 혼이 뭉친 군집이다.
온갖 소문이 도는데, 막상 그 답을 알려줄 계약자들은 동반자의 저주에 걸려 있는 까닭으로 답은 언제나 미지 속에 있었던 게 아닌가.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란 말이다.
쿠구구궁!
금서고의 문이 열렸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쉰 후, 앞을 바라봤다.
겉보기엔 특별한 것 없는 서고.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존재는 이곳이 금서고임을 곧 알려주었다.
"프리드!"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녀가 3황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검은 원피스 차림의 소녀.
소녀는 까칠한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3황자를 보며 뺨을 붉히는 순간엔 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을 만들었다.
이윽고 와락, 소녀가 3황자에게 안겼다.
3황자는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받쳐 들었다.
"데아, 손님이 있잖아."
"알게 뭐야. 벌써 하루나 널 기다렸는데!"
소녀가 3황자의 품에 머리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배시시 웃었다.
3황자가 머쓱하다는 듯 내 눈치를 봤다.
"그··· 네. 죄송해요. 데아가 조금 제멋대로라."
뭐라고 해야 할까.
대강의 관계가 그려졌다.
'연인?'
시선이 다시금 소녀를 향한다.
저 소녀를 '데아'라고 하였으니 저게 금서고라는 말일 테다.
금서고는 연신 3황자에게 달라붙어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뭐랄까, 사람 형상을 취한 고양이 같았다.
중압감 없는 모습에 허탈함이 차오르다가도, 그 감정은 빠르게 지워졌다.
다름이 아닌, '눈'에 의해 드러난 것 때문이다.
'···정령.'
정령이다.
저것은 망령도, 의지도, 군집도 아닌 단 하나의 정신체가 형상을 취한 것이었다.
단순한 정령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나엔 아득한 세월의 무게가 녹아있었다.
그 위로 덧칠된 것은 온갖 형이상학적인 이능.
즉, 개체가 속성이나 종의 구분을 넘은 경지까지 와 있었다.
나는 저런 것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았다.
'···에이션트.'
달리 표현해 고대 정령.
어떤 계약도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살아가는, 또한 수련을 쌓는다면 언젠가 신계로 승천하게 되는 예비 신.
가진 힘이 강력한 게 아니다.
저들의 존재가 품는 '격'이 높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존재가 황성에 숨어 있었다는 것에 헛웃음이 일고 만다.
그 감정은 이내 더욱 증폭되기 시작했다.
"야, 훔쳐보지 마."
나는 흠칫했다.
훔쳐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이해됐기에.
'눈을···.'
···간파했다.
멍하니 입을 벌렸다.
금서고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날 흘기고 있었다.
직전의 하찮은 꼴에 차올랐던 허탈함은 이제 종적을 감췄다.
이어진 말은, 결론부터 말하여 이곳에 온 선택에 확신을 주는 말이었다.
"기분 나빠. 파로스라는 족속은."
"······."
"대체 저 눈깔은 왜 이어지는 거야? 그냥 확 없어져 버리지."
내 눈에 관한 이야기.
그게 생각을 깊어지게 만들었음으로.
'신목이 끝이 아니었나?'
안배가 있는 건 알고 있다.
가문의 시조라는 인간이 생각보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음은 갈수록 밝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눈에 관한 것은 달랐다.
'타고난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이것이 무언가의 안배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얻을 정보가 아주 많아 보인다.
그것은 꽤나 고무적인 감상을 자아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편 후, 고개를 숙였다.
"금서고를 뵙습니다."
"내 이름은 데아야. 멍청아."
"······."
싸가지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태도에 순간 그런 생각이 치밀고 말았다.
'패도 되나?'
간파랑 별개로, 결은 여전히 보이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질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정령 자체가 이능체다.
눈이 있는 이상 상성적으로 내가 지는 게 힘들단 말이다.
빤히 금서고를 노려보며 그 결을 살피는 중이었다.
"뭐, 뭐야! 너 왜 그렇게 쳐다봐! 프리드! 쟤 좀 막아!"
"으, 응?"
"싫어! 파로스는 이래서 싫어!"
금서고가 발작하며 3황자의 뒤로 숨었다.
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봤나?'
이건 맞아봐야 나올 수 있는 반응인데.
* *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3황자는 생각보다 어른스럽고 침착한 인물이었다.
금서고 한가운데 소파.
3황자가 차를 내어 왔고, 나는 거기에 앉아 3황자의 무릎 위에 앉아 날 노려보는 금서고와 눈씨름을 했다.
제멋대로인 성정에 고대 정령이라는 지위.
더불어 정보를 쥔 쪽인 만큼 대화의 어려움을 예상했으나, 금서고는 생각보다 얌전한 태도로··· 아니, 긴장한 태도로 날 마주하고 있었다.
아마 눈과 신목 때문인 듯하다.
특히 신목을 보며 일그러지는 표정은 '맞아본 놈이다'라는 확신을 짙게 만들었다.
께름칙해 하면서도 시선이 그리로 향할 땐 태도가 공손해진단 말이다.
선조는 대체 얼마나 성격이 더러웠던 걸까.
얼마나 강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고, 그런 걸 떠나서 생각해보면 나한텐 좋은 일이긴 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금서고가 고대 정령이니, 저 두 꼬맹이가 애정행각을 벌이니 하는 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시조가 대체 뭘 원했기에 이런 일을 예비해뒀느냐는 것이다.
"놀랐습니다. 가문에 대해 아는 것도, 가보에 대해 아는 것도. 그보다 시조님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친분 아니야."
"그럼 뭡니까?"
"······."
금서고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가 말했다.
"···그냥, 거래를 했어."
"무슨 거래인지는 제가 못 듣습니까?"
"알 필요 없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미간을 좁히자 금서고가 곧장 반응했다.
"지, 진짜 거래 내용은 너랑 상관없어! 넌 받을 거만 받아서 사라지면 돼!"
"받을 거라?"
"진짜··· 약속만 아니면 안 들여보내 주는 건데. 여긴 프리드랑 내 보금자리란 말이야···!"
금서고가 힝힝거리며 3황자의 팔을 끌어안았다.
3황자가 끌어안아 주니 그새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건 내가 가고나서 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는 순간 입술을 삐죽인 금서고가 말했다.
본론이었다.
"···아무튼 파로스가 말했어. 언젠가 통궤안이랑 신목을 품는 애가 나타날 거라고."
"통궤안?"
"네 눈. 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냥 걔가 그렇게 부르면 된댔어."
눈의 이름을 들었다.
그에 집중력이 끌어올려졌다.
"선조가 뭘 생각한 건지 아십니까? 이런 일을 예비한 이유나··· 신목과 눈에 관한 것도. 알고 계신 걸 듣고 싶습니다."
조금은 조급해졌다.
하나,
"몰라. 난 걔랑 얘기 별로 못 해봤어. 애초에 만난 적도 한 번 밖에 없는 걸."
돌아온 답은 꽤 김이 새게 만드는 형태였다.
"내가 아는 건 하나야. 말한 애가 나타나면 걔한테 책 하나 전해주래."
"···?"
"···진짜 끝이야."
금서고가 팔을 휘두르자 서고에 박혀있던 책 하나가 날아왔다.
눈을 좁혔다.
'그리모어?'
마법이 새겨진 책이다.
금서고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리모어를 끌어안았다.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리모어가 빛났고, 이내 금서고가 말했다.
"아무튼 난 약속 지켰어.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야."
영문 모를 말.
그에 한 마디를 덧붙이니.
"아, 파로스가 이 말도 전해주라고 했는데."
금서고가 벌떡 일어나 팔짱을 꼈다.
"큼! 크흠!"
헛기침 후에 조금, 많이 얄미운 표정으로 웃었다. 꼭 누군가를 따라 하는 기색이었다.
"여기까지 온 선물! 잘 생각하고 써야 해요?"
뭘까, 저 느글거리는 말투는.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콱!!!
그리모어가 인지할 수도 없는 속도로 날아와 내 머리에 박혔다.
무언가 이변을 느껴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보다 빨리 그리모어가 내게 스며들었고,
쿵!
"끄헉···!"
눈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졌다.
시야가 번쩍번쩍 점멸하며 인지 능력을 잃어갔다.
이가 꽉 깨물렸다.
그 과정에서 머릿속에 강제로 무언가가 주입됐다.
그것은,
'···마법?'
어떤 마법의 지식이었다.
* * *
금서고의 정령 프리데아두스.
데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소녀는 고통에 일그러진 유렌의 표정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자 프리드가 말했다.
"데아, 괜찮은 거 맞아?"
"으응, 괜찮을 거야. 아마."
"···아마?"
"뭐, 괜찮으니까 주라고 했겠지."
무책임한 언행으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데아 역시 저 그리모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또한 어떤 기전을 통해 발현되는지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접근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파로스는 온갖 금제를 그리모어에 걸어둬 이곳의 주인인 데아조차도 그를 열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만 확실히 아는 건 저걸 예비한 초대 파로스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했다는 것.
더불어 저 그리모어가 통궤안과 관련된 무언가라는 것.
사실, 뭐가 됐든 데아에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히히···."
데아는 통쾌했다.
떠오른 날마다 악몽을 꾸게 했던 파로스의 후손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앓던 이가 빠지는 것만 같았다.
아, 얼마나 길고 길었던 고통과 모멸의 시간이었나.
데아는 지극한 만족감에 이제야 웃으며 지난 시간을 회상할 수 있었다.
-살 곳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그럼 제가 마련해드릴게요.
-평범한 곳으로는 안 돼! 금기가 가득한 공간이어야···!
-참, 그런 데가 있다니까.
아직도 기억난다.
파로스가 신명을 쌓기 위해 떠돌던 자신을 찾아온 일도.
금서고를 소개해주고, 거래를 약속한 일도.
그리고···.
-우하핫! 넌 이제 필요 없으니까 죽어!
-아이구, 이럴 줄 알았지.
-응? 어, 어째서···?
-나쁜 아이는 혼이 나야겠죠?
-자, 잠까··· 꺄아아악!!!
···해가 뜰 때부터 저물 때까지 빌고 빌어도 멈추지 않던, 그 끔찍한 체벌의 순간까지도.
머리고 어깨고 팔이고 손바닥이고 엉덩이에 허벅지에 종아리와 발바닥까지.
데아는 맹세코 살면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어본 일이 없었다.
모든 게 선명했고, 지극히도 아팠다.
하지만 이제야 그것을 완전한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나!
-이 책을 건네주면 돼요. 해주는 그 아이 앞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이고.
-그, 그럼···.
-금서고의 권한을 줬잖아요. 소유권 이전은 그날에 끝날 거예요.
거래 대로 책을 주는 조건으로 금서고의 권한이 완전히 넘어왔다.
사실, 이 시점에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데아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에겐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 그럼 오늘은 나랑 있어 주는 거지?"
"으응, 태사께서 돌아가시면 저녁까지는."
"헤헤···."
데아는 보물을 얻었다.
프리드는 데아가 신의 위계를 얻기 위해 황성에서 지낸 천년보다 귀중한 존재였다.
아이가 태어난 날 깨닫길, 위대한 정령사의 그릇.
밖으로 나갔다면 능히 세상을 뒤흔들 재능이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데아가 신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건이었다.
정령이 신이 되기 위해선 위대한 영혼과 교감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것이, 어찌 신의 편린을 얻은 존재를 담을 그릇이 쉬이 보이겠는가.
신명을 채우고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만 찾을 수 있는 존재로 알았건만 그걸 과정 중 찾아 이렇게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은 매 시간이 짜릿했다.
다만 이익이 되는 까닭은 아니었다.
"히히, 평생 같이 있고 싶다."
"어리광은 안 돼."
"싫은데? 부릴 건데?"
가슴이 따스해지는 경험이나, 닿기만 해도 영혼이 차오르는 감정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데아에게도 처음이었다.
프리드가 원한다면 신의 위계도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집착할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 집착의 대상이 신의 이름이 된다는 것을.
데아는 프리드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프리드는 곤란하다는 듯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런데 데아, 태사께선 정말 괜찮으신 거 맞지? 형님과 식사 약속이 있으신 분인데."
"괜찮아. 괜찮아. 쟨 좀 아파도 돼."
유렌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약 10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 금기의 황자 (3) >
#050화. 금기의 황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