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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060

#050화. 금기의 황자 (3)

기분이 더럽다.

단순히 그런 감상을 뛰어넘는 께름칙한 감각이었다.

생전 몰랐던 어떤 지식이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되는 건 그런 불쾌함을 낳는 일이었다.

아직도 손끝이 떨린다.

시야는 흔들려 사물이 두세 개로 나뉘어 보이고, 그런 것을 떠나 머리가 너무 지끈거렸다.

다만, 그런 중 느끼게 되는 건 있었다.

'뭐야 이건.'

마법은 새겨지는 순간 발동이 됐다.

마치 '이건 이런 마법입니다'라고 말해주려는 듯 강제적인 행사였다.

무슨 마법이냐··· 하면 설명하기엔 단순한 힘이었다.

'존재감···?'

그게 보인다.

이제까지 내 눈이 이능의 형상을 판별하고 결을 읽는 데에서 그쳤다면, 이건 그것을 넘어 상대의 존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걸 분석하고 분해하는 힘이었다.

예를 들면 그랬다.

"아직도 저러네. 아! 그럼 복수의 때인가!"

"데아?"

"히히, 기다려봐 프리드. 저 녀석한테 꿀밤이라도 먹여 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거든."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금서고가 폴짝 뛰어 내 앞에 선다.

흐린 시야 속에서 금서고의 몸을 이루는 구조, 그것의 이능적 해석 따위가 보였다.

저것이 신격의 편린을 어떤 형태로 지니고 있는지, 그 편린이 어떻게 작용하고 녹아있는지 따위가 보인단 말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 있었다.

물리적으로 해할 수 없는 상대가 분명함에도 나는 한 가지 강한 확신을 느꼈다.

주먹에 호호 바람을 불어대는 저 얄미운 꼬맹이는.

"호오···!"

주먹으로 쳐서 팰 수 있다고.

정수리 쪽, 유독 붉게 달아올라 있는 신격의 응집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빠아아악―!

"으갹!!!"

그러자 금서고가 펄쩍 뛰다가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러댄다.

"아파! 아파아아!!!"

그 순간, '피잇' 하고 마법이 스러진다.

시야가 돌아온다.

머릿속이 범해지는 감각 또한 옅어졌다.

나는 숨을 헐떡였다.

멍하니 일어난 현상을 봤다.

그 시점에 시조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잘 생각하고 써라.'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건 둘째 일이다.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큰 힘이었다.

한 번 사용함에도 뇌가 짓이겨질 것만 같았다.

정보량을 내 몸이 감당하지 못하니 남발하였다간 영구적인 뇌의 손상이 와버릴 지도 몰랐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그랬다.

그냥, 그런 의문이 들어버렸다.

'왜?'

이건 대체, 무엇을 상대하기 위한 힘인가.

절대 인간이나 이종족을 상대하는 힘이 아니다.

이것으로 인해 보인 것은 어떤 고차원적인 세상의 구조였다.

차마 인간의 뇌로는 모두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그런 구조 말이다.

가슴 속이 차가워졌다.

* * *

금서고는 머리에 혹이 났다.

그 꼬맹이는 현상에 묘한 공포감까지 느끼며 '이게 어떻게 되는 건데!'라며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금서고가 이젠 내게 대들지 않게 되었다는 것.

이후로 진정하는 일을 끝냈으나, 더 얻을 정보는 없었다.

눈과 관련된 무언가도, 신목과 관련된 일도.

그걸 떠나, 엘프 장로가 말한 계승식까지.

-모, 몰라. 걔는 진짜 아무것도 말 안 했으니까.

하여 나는 금서고를 나왔다.

태자를 만나기 위해 정원을 가로지르는 중이다.

이에 관해서는 당장 더 생각지 않으려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추측은 무엇도 확실한 근거가 없었으니까.

다만 이르길, 암흑가를 빨리 정상화해야 할 이유가 늘어나 버렸다.

'정보가 필요하다.'

그곳엔 제국 너머 우호 이종족 사회까지 뻗쳐있는 정보망이 있다.

아니, 그걸 넘어 '외경'의 정보 일부도 요청한다면 가져오는 용병 집단이 널리고 널렸다.

'시조 파로스에 대한 정보는 가문 내에도 거의 없어.'

하지만 어딘가엔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암흑가를 통해 어떤 단서든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태사께선 정말 신비한 분이시네요. 깜짝 놀랐어요. 정령한테 딱밤이 통할 수도 있다는 게."

3황자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흘긋 시선을 돌리자, 병자 같은 얼굴이 보였다.

"···하니까 되덥니다."

"그게 대단한 거죠. 신비를 다루신다는 거잖아요."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3황자께서도 큰 비밀이 있으시지 않았습니까. 추호도 생각 못했습니다. 금서고가 고대 정령이고, 그것과 계약할 정도로 전하께서 재능이 특출나실 줄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건 내가 이번 생에 들어와 새로 깨달은 사실 중 수위를 다툴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커다란 의문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새끼가 왜 자살을 했지?'

내가 아는 3황자는 황위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겁쟁이 황자였다.

하지만 실제로 보인 건 달랐다.

외관상 불쌍해 보이거나 힘없어 보이는 건 그대로.

하지만, 눈의 새로운 능력을 통해 봤던 이 꼬맹이는 끔찍한 수준의 재능이 깃들어있는 놈에 스스로도 그리 비관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한데, 어째서 지난 생은···.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데아가 대단한 거죠. 저는 데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걸요."

"···다른 정령과 계약했다면."

"저는 죽었어요."

눈이 좁아졌다.

3황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몸이 약하거든요. 어릴 적부터 그런 건 아시죠?"

"예."

"제겐 자연을 담아낼 영혼이 있어요. 하지만 그걸 감당할 육신이 없죠. 그래서 쉽게 망가져 버려요. 그때도 그랬죠. 이건 비밀이긴 한데···."

꽤 흥미로운 얘기가 나왔다.

"데아가 황성 밖까지 힘을 쏟아내 저와 계약을 연결한 건요. 제가 그날 죽을 위기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가만 뒀으면 몸이 뻥~ 터졌을거라고 하더라구요."

"···음."

"데아가 제게 오는 자연의 부담을 대신 받아주고 있어요. 제가 금서고에 오래 있는 이유도 그거죠. 데아를 못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 몸에 쌓이는 부담이 커지거든요."

"확실히 공석에는 나서지 않으시지요."

"곤란해요. 조금만 다수의 마나에 접촉되어도 그게 제 몸에 흘러 들어와 버리니까. 특히 건국제 때는 엘프들의 정령이··· 으으···."

그런 관계인 건가.

확실히 마법이 발현된 순간 3황자와 금서고 사이에 아주 강렬한 연결이 있는 걸 봤다.

단순히 계약의 증표인 줄 알았건만, 그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표하는 일인 듯했다.

그걸 떠나서 생각해보면 그랬다.

'괴물인데. 이건.'

태자보단 못하지만, 그 발끝 정도는 따라가는 재능이 확실하다.

전 제국적 손실이다.

만약을 생각해봤다.

이 3황자가 정상적으로 정령술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고, 금서고에 묶이지 않았더라면 전생의 전황은 어땠을까.

그와 더불어,

'자살이 맞나?'

아닌 거 같은데.

어떤 추측이 사실에 가까워진다.

황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계약의 약화나 단절이 있었다면 그 반동으로 이 녀석이 죽었을 수도 있다.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곤 하지만, 내가 들은 건 어디까지나 옥에서의 소문이 끝.

생각해보자.

황제가 된 3황자가 몸이 터져 죽었다면 세간에 그걸 그대로 공표할까?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차라리 암살당했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성마저 적에게 뚫렸다는 것은 아군의 사기를 무너뜨리니 차라리 원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겁쟁이가 자살로 도망쳤다.

그리 이른다면 그건 태자도 믿을 정도로, 3황자가 보여온 행색과 얼추 들어맞았다.

더불어 병사들에게 잘만 포장해 푼다면 독기를 끌어올려 줄 소식으로 가공하는 게 가능했다.

왜, 흔하지 않나.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간들이 위정자를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구하겠단 사명감에 빠져버리는 일 정도는.

내가 몰랐던 거야 뭐, 그 시기의 진상을 알 만한 고위직들은 에릴다와 아리아가 끝이었기 때문이겠지.

그 녀석들과 이런 칙칙한 이야기를 나눌 태자가 두 사람을 피하지 않았던가.

여하튼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추측은 그것.

다만 아직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전하께서 그리 외부의 압력으로 죽어버린다면 금서고께서는 어떻게 됩니까?"

그 꼬맹이 성격이 참 더러워 보였다.

그리고 집착이 아주 강해 보였다.

3황자가 죽는다면 분명 그 꼬맹이가 어떤 식으로든 난리를 쳤을 텐데 왜 전생엔 어떤 사고 소식도 없었던 걸까.

그 답만큼은 확실하게 돌아왔다.

"데아는 아무것도 못 해요. 금서고에 갇혀 있으니까."

"음?"

"잘은 모르지만 그런 조건으로 들어간 거라고 했어요.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나갈 수가 없다나."

씁쓸하게 웃는다.

나는 그쯤 답을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게 이유였고, 그를 제하고서라도 하나.

'제국이 멸망해도 도움이 안 되는 꼬맹이란 거네.'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젠 벌어지지 않을 일에 관한 대화라.

태자가 살아있는 한, 3황자는 저번 생과 같은 길은 걷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비효과였다.

* * *

프리드는 오랜만에 사람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 상대가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까닭이다.

명목상 자신은 남들과 같은 데아의 계약자여야만 했다.

금서고의 지식을 이르지도 못하고, 데아의 존재도 이르지 못하는.

그걸 아는 유렌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니 꽤 생경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닌가.

왜인지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

하지만, 동시에 씁쓸함을 떠오르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데아는 사람이 아니야.'

아마 자신의 감정을 이르자면 사랑일 터였다.

어떨 땐 누나 같고, 어떨 땐 동생 같은 톡톡 튀는 여자아이는 결국 금서고에 갇혀 평생을 지내야 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불행한 미래를 마주해야 하는 아이였다.

스스로 그것을 입에 담아버렸다.

-데아는 아무것도 못 해요. 금서고에 갇혀 있으니까.

자신은 언젠가 죽는다.

인간이기에 그리될 것이고, 그 순간 데아는 그 적막한 금서고에 또 홀로 남겨질 터였다.

그것은 참으로 미안하고 슬픈 일이었다.

프리드가 데아에게 이렇듯 최선을 다하는 이유도 그와 일맥상통했다.

언젠가 꿈꾸길 데아에게 황성의 정원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먹는 음식 따위를 함께 먹고 싶었고, 밤늦은 시간에 몰래 나와 함께 별을 보고 싶었다.

평생 못 할 일을 어렴풋이 꿈꿔봤고, 그것을 재차 부정당하는 과정이 지금이었던 것이다.

입 안이 씁쓸해졌다.

프리드는 그 감정을 빠르게 지워내고 궁으로 돌아갔다.

조금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늘은 늦게까지 데아와 있어 주어야지.

그런 마음으로 방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짜잔!"

덜컥, 프리드의 몸이 멎었다.

숨이 턱 걸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광경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지! 꺄하하!!!"

자신의 방, 침대 위.

데아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일어서 환히 웃고 있었다.

프리드는 환상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무엇보다 먼저 그런 의문이 삐져나왔다.

"···어떻게?"

데아는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답했다.

"말했잖아! 거래 때문에 묶여있던 것뿐이라고!"

무어라 덧붙이는 말이 많았다.

"애초에 소유권이 나한테 있던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내가 금서고에 복속되는 형태였던 거지! 그 기간이 거래가 끝날 때까지였는데, 거래가 오늘 끝났잖아? 소유권이 넘어와서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거야! 아, 그래도 멀리는 못가··· 신명을 쌓으려면 금서고와 연결이 계속 유지되어야 해서. 딱 이 궁까지 정도···."

하지만 프리드의 귓가에 맴돌다 떠나는 말들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를 묻긴 했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걱정마 프리드! 이젠 밖에서도 내가 지켜줄 수 있어! 어··· 딱 궁 안에 있을 때까지!"

프리드는 천천히 의기양양한 데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뺨에 손을 얹었다.

"웅?"

데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와락!

프리드가 데아를 끌어안았다.

데아가 덜컥였다.

"앗! 거기 혹! 혹!"

"하하···."

프리드는 멍하니 웃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는 실감이 나서, 데아를 끌어안고 있으면 연결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심장이 뛰었다.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데아."

"왜 그래? 안 기뻐···?"

"아니, 그게 아니야."

말이 툭툭 끊겼다.

눈치를 보는 데아의 모습에 더욱 그렇게 됐다.

언제나 상상만 해오던 일들이 떠올랐다.

하나, 한 번에 입 밖에 내기엔 쌓아온 말들이 너무 많았다.

당장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기엔 입이 하나밖에 없음이 통탄스러웠다.

하여 프리드는 말했다.

"잘 됐다. 진짜. 너무."

"으응··· 히히···."

"태사께 감사를 드려야겠어. 아, 뭘 드려야 하지?"

"엑, 걔가 뭘 했다고."

"데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익···!"

"데아."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쿵쿵 설렘으로 뛰는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프리드는 그 감각에 한참이나 떨다가 이내 눈을 감고 머리를 비웠다.

꿈은, 예상치도 못한 형태로 너무 갑작스레 이뤄지고 있었다.

* * *

떠나는 날이 되었다.

누님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다.

"다녀오겠습니다."

"예, 언제나 건강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식사는 끼니때마다 챙겨 드시고···."

머쓱하게 웃었다.

어찌 이 말은 입력이라도 되어 있으신 건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러신다.

와중 참 죄송하고 감사한 점은 누님이 내 일이 위험함을 앎에도 막지 않으신다는 것.

언제나 하나만을 묻는다는 것.

"소가주,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맞는 것이지요?"

"저에게, 그리고 파로스에게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의무의 수행이니까요."

"언제나 긍지를 잃어선 아니 됩니다. 저는 소가주를 믿어요."

아주 희미한 미소, 걱정이나 두려움이 베었음에도 누님께선 그런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셨다.

그게 감사하였다.

"전하께서 함께하시니 괜찮을 겁니다."

"······."

이런, 잘못 말했나.

누님의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생각해보니 그 인간과 다니며 유독 걸레짝이 된 일이 많아 인식이 썩 안 좋으실 법도 하다.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더 말해봐야 걱정만 시킬 것 같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아리아 쪽은 누님이 봐주기로 하셨다.

내가 부재중인 동안 돌봐준 일이 꽤 됐는데, 그것 때문이지 아리아가 누님을 꽤 좋아해 잡음은 없었다.

누님도 어릴 적 나를 돌보던 게 생각나 그 일이 즐겁다 이르신 일이 있고.

여하튼 내 좁디 좁은 인간관계의 정리도 끝났으니 간단한 짐과 함께 몰래 제도를 빠져나왔다.

태자는 숲 속 접견지에서 만났다.

"왔군. 잘 지냈는가?"

"어제 봐놓고 뭘. 꼬리는 없습니까?"

"내가 검술 다음으로 자신 있는 게 암행이네."

"자랑이라고 말하나."

치켜세운 엄지를 부러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하튼, 그리 접선은 끝.

···아니, 하나가 더 있군.

이번 여정에 끼일 사람이.

나는 다가오는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로브를 뒤집어 쓴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 아래까지 오는 물빛 곱슬머리, 새파란 눈은 오른쪽이 검은 안대에 가려져 있었다.

그 외에 가장 큰 특징이라 하면 로브 아래 민소매 셔츠로 인해 드러난 오른팔의 의수.

하늘색 금속 위로 마법 회로 따위가 은은하게 빛난다.

나는 그 꼴을 보고 말했다.

"멀쩡해 보이네. 이제."

"······."

베아트리스 폰 길푸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게 만든 폐급 마법사.

이제야 부상을 수습해, 이 여자를 쓸 수 있게 됐다.

< 그림자의 도시 (1) >

#051화. 그림자의 도시 (1)

본래라면 저 여자는 이 일에 끼일 계획이 없었다.

현 마탑주인 로나 우드위치의 말로, 아직 베아트리스의 '조율'이 끝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악마에게 당한 상처다.

부상을 수습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힘을 심는 중이라 하니 차후를 위해 당장의 전력에서 제외.

그런 구상이었으나, 베아트리스 본인이 참석의 의지를 보였다.

마탑주의 말로는 본인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적응과정을 마쳐버렸다던가.

자랑스러워 하던 표정이 얼핏 기억난다.

그래봐야 악마에게 홀린 폐급 아닌가··· 라는 말은 굳이 안 했었다.

여하튼, 그렇게 지금.

"싸울 수 있는 거 맞냐?"

"급한 조율은 끝냈어요. 의수도, 눈도."

"눈?"

"심었거든요."

자세히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전투는 가능하다고 하니 앞으로 볼 일이 있겠지.

고개를 끄덕이니 베아트리스가 날 빤히 바라봤다.

나는 눈을 좁혔다.

"뭐."

"···아뇨. 그냥 잘 지내신 것 같아서."

"이게 잘 지내는 거로 보이냐?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 치는 새끼들 뒷수습하느라 뒤지겠는데."

"······."

움찔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본인 얘기인 건 아는 듯하다.

'그럼 사과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고개를 숙여버리는 건 뭔가.

머리카락은 또 왜 만지작거리는데.

보고 있자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

'마법사는 대체로 사회성이 박살나 있으며 남에게 사과할 정도로 인격적이지 못하다.'

누가 한 말인진 모르겠지만 그 인간의 세기의 현자인 게 분명했다.

혀를 쯧쯧 차니 태자가 말했다.

"투닥거리는 건 나중에 하고 우선 출발하지 않겠나? 반갑소 위자드 베아트리스. 내 소개는 따로 하지 않도록 하지. 잘 부탁드리오."

"···그래서 뭘 하면 되나요?"

베아트리스가 태자를 무시하고 내게 물었다.

태자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 게 보였다.

무시에 약한 건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군.

"이보시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처 듣는 척···."

"가자고 해놓고 왜 전하가 지랄입니까. 됐으니까 움직입시다. 넌 시키는 거나 잘하고."

나는 태자를 말리고 출발을 독촉했다.

태자의 눈에 핏대를 세운 채로 베아트리스를 노려봤다.

베아트리스는 태자를 무시하고 내 곁에 섰다.

"···잘 부탁해요."

"오냐."

"나는 잘 부탁할 수 없을 것 같네만?"

"몰래 나왔으면 목소리 좀 죽이십쇼. 아직 제도 근첩니다."

구도가 아슬아슬한 것이 영 불안한데, 어쩌겠나 싶다.

'···뭐 사이까지 좋을 필요가 있나.'

일만 잘하면 됐지.

그리 생각하며 출발했다.

시선을 북으로 향했다.

'···이그로시아.'

그림자의 도시가 저 끝에 있었다.

* * *

이그로시아를 말하려면 그 전에 제도와 위성도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제도는 인간종의 심장이라는 상징적 입지와 달리 도시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기껏해야 만 오천.

제도 내에 거주하는 게 가능한 인구의 숫자가 그렇다.

천 년 전, 최초 인간의 군집이 만든 국가인 만큼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크게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국의 건국 이후로 계속해서 부응했다.

군집은 더욱 커졌고, 그리하여 제도가 인구 포화로 신음한 것이 건국 이후 200~300년경.

당대의 황제는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묘수를 던졌다.

-위성도시를 짓지.

바로 제도와 말로 사흘거리면 오갈 수 있는 각 방위에 위성도시를 짓는 것이다.

그렇게 인구 밀집을 해소하려 했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제도를 기준으로 8방위에 여덟 개의 위성도시가 세워졌다.

당대 황제는 도시 별로 상업이나 생산 등의 특화 요소를 지정해 그곳에 생산자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일궈냈다.

도시의 영주로는 고위 귀족들을 배치해 자금 유동성을 끌어올렸고, 그리하여 8개 도시가 제도의 인구 난을 완벽히 해결해버린 것이다.

약 3대에 걸친 진행 과정에서 있었던 잡음은 중요한 일이 아닐 터다.

본론으로 돌아가, 지금은 암흑가로 불리는 이그로시아 또한 개중 하나라는 것만 알면 된다.

그렇다면 이그로시아는 어떻게 치외법권의 암흑가가 되었는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역 도시였던 이그로시아의 당대 영주가 사고를 쳤다.

뒤에서 몰래 노예를 사고판 게 아닌가.

제국은 노예를 엄격히 금지한다.

건국 황제부터가 오크의 노예 출신이었던 만큼 그 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 혐오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겠나.

당시 그 일을 행한 이그로시아의 영주 집안, 그리고 지도층과 관리층은 삼대가 숙청을 당했다.

도시는 지도층이 없는 무주공산이 되어 온갖 잡음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양 옆으로 붙어있던 도시들은 이그로시아의 기능, 자원을 다 먹어버렸다.

그 결과 도시가 폐품이 됐다.

관리자를 뒤늦게 투입해보았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범법 지대가 된 그곳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이후에는 범죄자들이 이그로시아로 몰렸다.

영지민들의 인명부조차 없어진 도시는 죄인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까닭으로.

그렇게 그 일이 백 년 이상 이어졌다.

그러고 나니 일어나는 의외의 현상이 있었다.

다른 도시의 범죄율 감소 및 치안 회복.

범법자나, 불법적인 일이 한 곳에 몰려버리니 도리어 다른 도시들이 깨끗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그로시아는 '필요악'이 되었다.

들쑤실 바에 쓰레기들을 모아 놓는 인간 쓰레기통.

하루살이들의 요람.

그곳을 정리하기 위해 투입할 인적, 물적 자원을 생각하면 건드려 봐야 이익이 될 것이 없었다.

또한 그곳의 특이한 문화 덕에 제국으로 흘러들어오는 외국의 물자, 혹은 정보가 이제는 꽤 큰 이익이 되어 더 정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도시 자체는 혼돈 속이었다.

외면받은 도시인 만큼 그 혼돈은 나날이 깊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한 남자가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기르고어.

이그로시아에서 태어난 빈민 소년이자, 현 암흑가의 주인이었다.

그의 평가를 정리하자면 그랬다.

-걸물이지. 오로지 머리 하나로 그 혼돈 속에 질서를 세워버렸으니. 누가 알았겠나? 열 살 남짓한 나이에 빈민 소년이 세운 집단이 그들의 우산이 되어주었을 줄은.

고작 20년, 열 살의 소년이 빈민들을 모아 만든 집단인 '관조자의 비수'는 이그로시아의 통치 집단이 되었다.

그들이 암흑가를 장악한 방법은 '정보'였다.

이그로시아 어디에나 있는 빈민들이 주워들은 정보를 선별, 관리.

그것으로 적대적 세력을 이간질시켜 부수고, 우호적 세력을 영입해 덩치를 불린 것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기르고어가 평범한 상인의 자재로 태어났다면 대륙의 금화를 뒤흔들 거상이 되었을 것이며,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제도 정계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업적이긴 했다.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였다.

'그런 인간도 홀렸단 말이지. 그놈의 악마한테.'

이제부터는 내가 아는 사실이다.

서른의 기르고어는 우연히 제도에 들러 만난 레베카를 사랑하게 된다.

그 여자에게 온갖 보화를 선물했으며, 그 여자 하나 때문에 수도의 정보 집단을 재편하기까지 했다.

그런 정성을 보이다가 어느 날, 사고를 쳤다.

-정계가 혼란스럽습니다. 귀족들의 비리가 마구잡이로 풀려나고 있습니다.

기르고어가 정보 제한을 풀었다.

그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일어난 현상은 너무 분명한 형태로 제도를 무너뜨렸다.

귀족이란 족속들이 청빈하게만 살 확률은 아주 낮다.

대체로 귀족은 범법에 걸친 경우가 많으며, 그것을 쉬쉬하는 게 기존의 기조였다.

내가 태자에게 찍히기 전까지 아무도 내 죄를 짚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나도 해본 적 있던 금지 물품의 거래부터 해서 귀족들이 적대 세력에게 벌였던 수작질. 그와 더불어 불법적인 약물의 유통과 암살 청부 기록까지.

하나하나가 중대한 사건들이 온 백성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귀족가의 혼란이 일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

이번에도 2황자다.

그 인간이 집권 중일 때 하필 그런 일이 일어났다.

-2황자께선 전원 숙청을 명하셨습니다.

-말리는 사람 없덥니까?

-저를 비롯한 드레노어 경과 몇몇 황실 귀족이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2황자는 적당히 하라는 말을 들어 처먹을 정도로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탄원서는 깔끔하게 무시.

딴에는 백성의 민심을 잡아 정의로 군림하고 싶어 했다는 게 태자의 추측이었다.

그때, 누님은 처음으로 '계승'을 고민하시기까지 했다.

파로스의 가주, 그리고 소가주에게만 주어지는 '재고'와 '반려'의 권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결론만 말하면 결국 그러지 못했다.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황실 기사들이 무작위로 귀족들을 베어 죽였고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은 것은 2황자의 발닦개들과 건덕지가 없던 누님 등의 청빈한 귀족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암군 중의 암군이 따로 없지 않나.

그런 감상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그랬다.

마탑의 붕괴, 법황청의 몰살.

그런 사고와 더불어 전쟁까지 겹친 제국이 본격적으로 무너진 계기가 그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 사건 끝에서 기르고어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사라진 이그로시아는 더 큰 혼란 속에서 비명을 내질렀으며, 그곳에 가둬져 있던 법범자들은 이윽고 제도 전체에 퍼져나가 내부의 혼란을 만들었다.

세간에는 기르고어를 죽인 것은 그가 자아낸 혼란에 무너졌던 자들의 가족이라 말한다.

나 또한 비슷한 의견이었다.

여하튼, 뒷이야기를 빼고 정리하자면 그런 얘기다.

"이그로시아가 보이는군."

내가 막아야 할 것이 그 사건이었다.

약 이틀, 마나를 팍팍 써가며 달려 여기까지.

시야 끝에 암울한 흑색의 성벽이 보이고 있었다.

* * *

검은 머리의 소년이 음울한 흑색의 도시를 걸었다.

그는 열 살 남짓한 외형을 하고 있었고, 곁으로는 키 크고 깡마른 노인 하나를 대동하고 있었다.

소년은 심장을 차갑게 식히며 도시를 살폈다.

그리하다 듣기 좋은 미성으로 읊조렸다.

"진하네. 많이."

도시란 향기를 품는다.

높게 쌓인 성벽 안에 갇힌 공기가 그곳의 생활상을 담아내어 가둠으로써 그 삶을 후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소년이 발디딘 이그로시아 또한 그런 향기가 있었다.

···아니, 향기라기엔 어폐가 있겠지.

시취와 오물 냄새가 섞인 악취.

이것이 이그로시아 전반에 걸친 냄새였으니.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사랑한 것이 바로 이 공기였음으로.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일렀듯, 냄새가 너무 진하다는 것.

그것은 이그로시아가 병듦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던가, 시취와 악취가 심해진다는 것은 그 정도로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아니던가.

소년만의 방식이지만 정론에 가까웠다.

미간에 주름을 만든 소년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의 망막에 맺힌 것은 골목 구석에서 시들어가는 소녀였다.

소년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불쌍하게도."

목소리엔 울음기까지 배어 있었다.

소녀의 시선이 소년을 향했다.

달싹이는 입술은 구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소년은 슬피 웃었다.

그리곤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래, 네 뜻대로."

그렇게,

뿌득!

소녀를 아파할 시간도 없도록 빠르게 죽였다.

이곳에서의 구원은 죽음 외엔 존재하지 않음으로.

침묵이 깔렸다.

소년은 소녀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라본."

"예."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야."

웃음기가 얼핏 배어 있으나 그렇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라본이라 불린 노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년은 말했다.

"잘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 아이에게 줬지."

소년의 시선은 이그로시아의 중심에 닿아있었다.

"나의 자리, 나의 이름, 나의 모든 것."

소년의 눈동자에 심연이 내려앉았다.

그는 시리도록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잘못되었어. 어디서부터지?"

"···그 외부인들이 나타난 이후라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외부인을 치우면 될까?"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듯합니다."

"그래, 모자라. 턱없이 모자라."

소년이 짓씹듯 말했다.

"이 모든 걸 계획한 그 아이도, 거기에 동조한 아이들도, 방관한 아이들도. 모두가 잘못되었어. 이그로시아가 썩어버린 거야."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지. 다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뿌리까지 뽑아버려야지. 그렇게 정화해야만 해. 그곳에 새로운 싹을 심을 거야. 나는 다른 방법은 떠올리지 않을 거야."

"주인의 뜻대로."

"응, 내 뜻대로."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핏 광오하게도 들릴 말을 내뱉었다.

"나의 것이었으니, 모든 건 나의 뜻대로 될 거야."

그가 소녀를 안아 든 채 걸었다.

깊은 그림자 속으로, 도시의 가장 어두운 땅으로.

그리하며 노인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곧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적을 놓쳤어?"

"마법사를 대동하고 있는지라."

"훌륭해. 준비성이 좋구나."

소년은 미소지었다.

옅은 감사함을 느끼는 채였다.

애초에 그들의 정보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 이그로시아로 돌아올 이유는 없었으니.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도시를 옳게 정화할 수 없었을 테니.

"라본, 손님맞이를 준비하자."

소년.

일찍이 기르고어라 불리었으며, 그 이름을 버리고 떠난 사내는 노인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

< 그림자의 도시 (2) >

#052화. 그림자의 도시 (2)

이그로시아까지 오는 여정에서 확실히 느낀 게 있었다.

역시 마법사는 유용하다.

인성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이건 인간이라는 종의 품위를 몇 단계는 올려버리는 족속이었다.

그리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내내 있었다.

우선 출발 때부터 그랬다.

-탐지 마법에 생물이 걸렸어요. 마차네요. 열넷, 익스퍼트 하나, 비기너 열하나. 일반인 둘. 귀족가의 마차인 것 같아요. 북동으로 조금만 피해 움직이죠.

베아트리스의 탐지 마법은 근방 몇백 미터 단위의 생물을 탐지하여 들키지 않는 길을 찾아줬다.

제도를 오가는 위성도시의 귀족들이나 상인 무리, 거기에 사냥을 나온 백성들이나 야영 중인 다른 모험가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걸러내니 은밀성으로 인한 기동력 저하가 획기적으로 준 게 아닌가.

이동 자체도 그렇게나 도움이 됐건만 백미는 역시 야영.

-불.

화르륵!

장작이고 뭐고, 나뭇가지를 몇 개 꺾어 들고 오니 곧장 불을 피워버린다.

-집.

우드득!

집을 지으라고 하니 흙으로 움집을 만들어 잘 공간을 마련했다.

그 외에 야영 중의 경계 마법, 그리고 연기 등을 은폐하기 위한 인지 저해 결계까지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게 많았으며, 그로 인하여 여정으로 인한 피로감은 거의 전무한 수준까지 떨어져 내렸다.

양가감정이 있었다.

이렇게 편리하니 좋다는 생각 절반, 이런 편리한 마법사를 죄다 병신으로 만든 이 여자에 대한 아니꼬움 절반.

물론 회귀한 지금에서는 전자가 더 크긴 하다.

그런 내 생각과 달리 태자는 조금 불만이 많았다.

물론, 그냥 환경에 대한 불만만 있던 건 아니다.

-이보게, 이왕이면 베개도··· 말 듣는 척이라도 해주지?

-어이, 마법사. 왜 내 움집만 바닥이 촉촉하지?

-···유렌, 자네 말만 듣는 것 같으니 저 여자에게 전해주겠나? 물 좀! 제발 물 좀 달라고!!!

뭐랄까, 내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베아트리스는 태자를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사실 감정적인 부분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나.

더군다나 예를 따지기엔··· 마탑 자체가 가진 자율권이 있어 그 후계 자리에 있는 베아트리스는 태자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었다.

로나 우드위치가 얻어낸 자율권이다.

악마를 막은 영웅의 공식적 후계자씩이나 되니, 개인적인 허물을 떼어두고 보면 저 둘은 거의 대등한 관계라고 봐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 다 제멋대로 구니 생긴 게 이 상황.

뭐라 말을 해야 할까.

태자 편을 들어줄까.

생각해봤으나 '굳이?'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물."

쪼로록···.

내 말은 잘 듣지 않나.

뭣 하러 나서나.

둘이 사이 나쁜 게 내 일도 아닌데.

'태자야 공식적인 일이면 알아서 감정 죽이고 대처할 테고. 이 여자야 내가 말하면 알아들으니 돌발 행동을 할 걱정은 없고.'

그러니 대강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애들 화해까지 시키는 보육원장은 아니지 않나.

마법진에서 흘러나온 물이 컵에 담겼다.

마법으로 지어낸 물이라 그런가, 마셔 보니 마나가 조금 차올랐다.

목이 시원해지고 속이 충만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베아트리스를 봤다.

또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만 만져라. 머릿결 다 상하겠네."

움찔, 어깨를 떤 베아트리스가 말없이 손을 뗐다.

"···그것도 그러네요."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왜 저러나 모르겠네.

아니, 내가 신경쓸 바는 아닌가.

나는 생각을 지우고 저 먼 곳의 이그로시아를 바라봤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

감상을 말하자면···.

"진짜 더럽네."

"···뭐, 범죄자의 도시이지 않나."

생김새가 더럽다기보단 흘러나오는 기운이 더러웠다.

눈으로 그게 보였다.

변질된 마나, 이종족들의 흔적, 거기에 저주가 그득한 물건이 오가는 곳이라 그런지 도시 전체에 검댕이 같은 마나가 곳곳에 눌어붙어 있었다.

정말 들어가기 싫게 생겼다.

한데도 들어가야 한다는 게 안타까운 일.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인가."

"일단은 잠입해야지요. 도시 내부 상황부터 살펴야 할 것 아닙니까."

수상한 걸 아니까 무턱대고 깽판부터 친다?

생각이 고블린 손가락 길이면 그런 행동을 해도 이해가 될 것이다.

잠입과 조사라는 것의 본질이 뭔가, 정체를 숨긴 채로 일방적으로 상대의 정보를 캐어 오는 데 그 목적성이 있었다.

그러니 우선 변장.

"야."

"네, 할 수 있어요."

철컥―

의수가 벌어지며 내부의 마공 기관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마법진이 조형되며 이내 손바닥 위에서 마법이 형태를 잡는다.

그러니까, 저게 저 여자의 스태프라는 말이었다.

처음 볼 땐 얼마나 놀랐던지.

여하튼, 베아트리스가 의수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자 얼굴이 달라지고 머리칼 색이 갈색으로 빠졌다.

표독스러워 보이는 여자가 안대를 낀 채 날 보고 있었다.

저게 얼굴이 어울리는 것 같은데,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될까요?"

목소리도 바뀌었군.

역시 마법은 편리하다.

"그래, 나랑 전하도."

"네."

먼저 만들어진 태자는 뭐, 한 마디로 못 생겼다.

반 대머리에 곰보 얼굴.

적당히 악당 같다 싶기도 하고···.

"이제 당신 차례네요."

"저렇게 험악하겐 하지마."

"내 얼굴이 어떻길래 그러나?"

"적당히 악당같습니다."

"흠···."

대화 중 베아트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뭘 하려는 건가 하니 내 얼굴에 손을 얹었다.

오른쪽 왼쪽 모두 말이다.

그리곤 이리저리 주물렀다.

신경 써서 만드는 건가.

"대충 해. 너무 튀는 얼굴도 곤란하니까."

"네."

그렇게 얼굴이 만들어졌다.

태자가 그를 평했다.

"흠, 평범하군."

"그게 제일 아닙니까."

"범죄자스럽지 않네만."

"원래 범죄자같이 생긴 사람은 범죄 안 저지릅니다. 멀쩡하게 생긴 애들이 진짜 무서운 거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인가?"

"왜 시비지?"

눈초리를 주니 어깨를 으쓱한다.

갈수록 옛날 성격이 나오는 것 같은데.

"···갑시다. 그냥."

챙길 걸 다 챙겨서 움직였다.

변장까지 끝내고 향하는 곳은 정문.

계획은 그러했다.

'남부에서 도망쳐 온 범죄자로 위장.'

그렇게 이그로시아 내부에 녹아들어 조사할 것이다.

완전한 외지인보다는 현지인스러운 면모를 보여야 의심이 더 줄 테니.

그렇게 입지를 쌓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바라는 구도는 하나다.

'관조자의 비수와 접견.'

공공연한 사실 하나가 있다.

외부에서 온 집단이 내부에서 위명을 쌓아 올리면, 이그로시아의 지붕인 관조자의 비수가 접선해온다.

그 이후엔 조금 더 은밀하며 이그로시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뢰를 받고, 그로 하여 어떤 이들은 관조자의 비수에 섭외되기까지 한다.

'닿으면 알겠지. 뭔 짓거리를 하는지.'

단순히 기르고어를 패는 것 말고도, 그놈 뒤에서 수작질을 부리는 녀석들까지 끌어올리려면 이정도는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위조 신분은 있다. 남부의 범죄자 명부를 직접 찾아 골랐으니까.'

뒷조사에서 의구심을 느끼게 할 요소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그 위치까지 빠르게 닿을 것인가.

뭐, 뻔하지 않나.

죄인의 도시라면 그 법도를 따라야지.

"정지! 누구냐!"

건달인지 경비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그로시아의 위병이 우리 앞을 막았다.

나는 한 발 나섰다.

그리고,

"반말은 이 새끼야."

꽈아앙!

위병의 머리를 잡아 땅에 처박았다.

아, 오랜만이다. 이거.

"위병 새끼가 말이 짧아."

험악하게 눈을 뜨고 위병을 노려봤다.

그러자 위병이 덜덜 떠는 게 느껴졌다.

"누, 누구십···."

"그걸 말해야 들여보내 주나? 몰라도 들여보내 준대서 남부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근거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그로시아가 실제로 그러했다.

돈을 찔러 안에 들어가거나, 위병을 겁박해 들어가거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다면 그쪽이 수상해진다.

꿀꺽, 위병이 마른침을 삼킨다.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더니, 이내 답했다.

"···들어가십시오."

"그래야지. 새끼가."

짝짝 위병의 뺨을 두드렸다.

그리고 은화 하나를 위병에게 던져줬다.

"옛다. 깽값. 뭐하나? 어서 들어가지."

태자와 베아트리스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어벙하게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음.'

둘 다, 망나니짓은 재능이 없는 듯하다.

* * *

기르고어는 꿈을 꿨다.

그것은 이젠 해묵은 과거의 일이었다.

이그로시아의 밑바닥.

하루도 몇십 몇백이 굶어 죽는 하수도에서 기르고어는 소년을 봤다.

자신과 무척이나 닮은 흑발을 지녔으며 눈빛이 총명했던 소년을.

-먹을 게 있다면 조금만 떼어주세요.

-응? 나도 없는데.

-있으실 거예요.

-호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흥미를 느끼게 하는 소년이었다.

당장 배를 곯고 죽어가는 중에도 차분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그러했고, 그 많은 사람 중 기척을 죽이고 있던 자신을 찾은 것도 그러했고, 동년배로 보일 텐데도 존대를 쓰는 게 그러했다.

-걸음걸이가 달라요. 하수도의 거지들은 그렇게 큰 보폭으로 걷지 않고 고개를 들지도 않아요. 무엇보다 주변을 보지 않죠. 그렇게 여유롭지 않으니.

-존대는 왜 써. 우리 비슷한 나이 같은데.

-아닐 거예요. 아이는 그렇게 웃지 않아요.

꽤 오랜 시간을 방랑한 삶이었다.

소년은 그런 삶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도 특히 빛나는 아이였다.

호기심이 동했다.

그저 저주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왔을 뿐인 곳에서 그런 인재를 만났다는 것이.

그 호기심은 이윽고 어떤 변덕으로 화했다.

-너, 살고 싶구나?

-모두가 그럴 거예요.

-아니, 너만이 다를 거야.

기르고어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난 반 진심 반,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결심.

-너, 내가 배부르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있다면 뭐든지.

-내 뭘 믿고?

-제게 큰 가치를 두지 않으심을 믿고요. 장난감으로 쓰실 테니 저는 그 역할에 충실할 수 있을 거예요.

-진짜 마음에 드네.

기르고어는 그날,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기르고어야. 너는 내 이름을 이고 살면서 이곳의 주인이 될 거고.

-영광은 제게, 주인께선 실리를 얻으시겠네요.

-햐, 걸물이야.

이름을 줬다.

자신을 닮은 아이인 만큼 자신과 같은 이름을.

그리고 지위를 줬다.

자신이 자아낸 왕좌에 소년을 앉혔다.

꼭두각시 소년은 주제를 알았으며, 영민했고, 충심이 깊었다.

굶지 않게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을 모셨다.

그 순간이 즐거웠던 것일 터다.

하여 계획에도 없던 10년의 체류를 했던 것이겠지.

소년은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고, 생에 처음 만들어본 집단은 도시의 주인이 됐다.

기르고어는 그 모든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부관을 둔 채로 남과 부대끼는 삶 또한 즐겨보았다.

하지만, 결국 한 곳에 머무를 수만은 없는 입장이기에 떠났다.

청년이 된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채로 말이다.

-돌아올 때까지 지키고 있어. 난 알아봐야 할 게 있어서 조금 오래 떠나 있을 거거든.

-언제든 주인의 옥좌를 지키겠습니다.

-음, 훌륭해 기르고어.

-···주인.

-이젠 익숙해져. 네가 기르고어야.

분명, 그렇게 만족스러운 이별이었다.

"주인."

기르고어는 부름에 눈을 떴다.

흐릿한 촛불이 겨우 안을 비추는 허름한 안채.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그리고, 방치되어 있음이 보였던 장소.

그곳에서 기르고어는 입을 열었다.

"응, 라본."

"그들을 찾았습니다."

"오래 걸렸네. 제도를 떠난 게 일주일 전이었을 텐데."

"···변장을 하고 있더군요. 워낙 자연스러운데다 행적도 위화감이 없었던 터라."

"그래? 뭘하고 있었는데?"

기르고어는 흥미를 느꼈다.

라본은 자신의 '눈'을 나누어준 가장 오랜 수족인 만큼 그의 인지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을 것일 까닭이다.

한데도 그가 일주일이나 행적을 놓쳤다니.

그리고 그 이유가 행적에 위화감이 없음이라니.

"신기하네. 태자에 태사에 마탑 후계자씩이나 되면 여기 문화는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묻자, 라본이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응? 괜찮으니까 말해봐."

독촉하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구역을 재패하고 있습니다."

우뚝, 기르고어의 몸이 멎었다.

라본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북동부, 하야스의 구역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집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가명은 쿨카란. 데른. 모이라. 남부에서 실종된 실제 범죄자입니다."

직후였다.

"푸하핫!!!"

기르고어가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발을 동동 굴렀고, 그러다 허벅지를 팍팍 때리며 웃음을 그치려 했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기르고어는 참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주도자는 누굴까.

그래,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태사. 유렌 파로스. 그 남자겠지? 명색이 망나니 출신이니."

"예,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는 힘들겠지만, 행동으로 유추하길 쿨카란의 이름을 쓰는 게 유렌 파로스일 겁니다."

"와···."

재밌는 사람이네.

기르고어는 흥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보고 싶네."

"예, 접선을 주도해보겠습니다."

"응, 너무 기다리게는 하지마."

기르고어가 싱긋 웃었다.

유쾌한 소식이 유독 반가웠다.

찝찝한 꿈을 빠르게 털어낼 수 있었음으로.

< 그림자의 도시 (3) >

#053화. 그림자의 도시 (3)

유렌의 이그로시아 진입 열흘 차.

북동부의 정리가 끝났다.

얼마 전까지 '하야스의 손'이라 불리던 구역은 이제 '쿨카란의 몽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파격적인 행보에 온 이그로시아의 시선이 북동부로 몰렸다.

강력한 소수 정예의 포악함이 기존의 터줏대감들에게 경계심을 불어넣은 것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쿨카란의 뒷조사가 있었다.

그것은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이어진 처사였다.

아무렴, 이곳이 어떤 도시던가.

대륙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그림자의 도시가 아니던가.

쿨카란.

남부 페이 자작령 출신의 건달.

가진 검재가 있어 저잣거리의 검보로 41세의 나이에 익스퍼트 중위에 오름.

자작령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일대를 장악했으며, 한 달 전 자작가의 딸을 노리며 날뛰다 돌연 실종.

정보 업체들은 말했다.

"아무래도 기사 집단을 피해 도망 나온 듯합니다."

"암만 익스퍼트 중위라 해도 훈련된 익스퍼트 집단을 이길 수는 없음이지요."

그가 과한 욕심을 부려 남부에서 탈주했고, 이리 이그로시아에 와 새로운 기반을 형성하려 한다고.

물론 사실과는 괴리가 있었다.

이는 세간의 누구도 모를 사실이었다.

누가 알았겠나.

쿨카란은 그날 분노한 자작에게 사로잡혀 영주성 지하실에서 아직도 고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 페이 자작이 에릴다의 수족이라는 사실을.

끝으로 쿨카란의 이름을 뒤집어쓴 것이 유렌이라는 사실을.

암만 정보전에 능한 이그로시아라 한들 한계란 있는 법이었고, 그 틈을 파고든 게 이 작전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완벽했다.

현재 모이라라는 가명을 쓰는 중인 베아트리스는 그 일련의 과정에 꽤 큰 놀라움을 느꼈다.

그런 중에도 할 일은 하고 있으니, 바로 의수 끝을 까딱여 마법을 조절하는 일이었다.

"자네, 좋아 보이는군?"

"아아, 고향에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좋나?"

"그냥 추억팔이 좀 하는 겁니다. 말투가 왜 이렇게 띠껍지?"

"태자한테 띠껍?"

"스승한테 반말?"

"······."

북동부, 전 하야스의 본부.

대회의실에 앉아 있는 것은 유렌과 칼리오스 그리고 두 사람의 곁에 딱 붙어 있는 무희들이었다.

외부인이 있음에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베아트리스의 역량이었다.

4위계 환혹 마법 속삭임의 그림자.

무희들의 인지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업적을 늘어놓는 깡패에 불과할 뿐이었다.

칼리오스는 무희가 입으로 넣어주는 과일을 씹으며 말했다.

"영 불편하군. 여인들을 끼고 노는 것은."

"참으십쇼.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니까. 이 중 분명 외부의 정보책이 있을 겁니다. 저희 행보나 대화는 계속 실어 날라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까 참는 걸세. 하, 이 여인은 제발 내 몸 좀 그만 더듬었으면 하는데."

"그 정도면 진짜 사랑이네. 대머리여도 좋다는 건데."

"···그만하지."

베아트리스는 오가는 대화를 흘려 넘겼다.

다만, 마법을 계속 조율하며 유렌을 흘끔거렸다.

시전자인 베아트리스에겐 변장 너머 원래 유렌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로 심드렁함과 짜증으로 가득 찬 표정.

하지만 줄곧 관찰한 바로 그는 지금 꽤 안락한 상태였다.

'다행.'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반가웠던 것이다.

아무렴, 그날 악마의 유혹에서 자신을 구하 것도 모자라 절망에 빠져 있던 자신을 건져준 것이 그가 아니던가.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진 빚을 갚고, 조금만 더 욕심을 부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관계까지도 되고 싶은 것이다.

머리를 기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어서, 그 말이 왜인지 속에 파고들어서.

베아트리스는 생각 중 또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아직 별다른 감상을 말해주지 않는 건 조금 섭섭했다.

그런 때였다.

"그래서, 북동부가 끝났는데 다음은 어딘가. 동부? 북부?"

이번에도 칼리오스였다.

베아트리스는 딱 그에게 들릴 정도로만 선명하게 중얼거렸다.

"성격 급하시네."

"허?"

"······."

"자네 뭐라고 했나? 분명 시비조···."

"거 둘 다 그만 좀 합시다."

쯧, 유렌이 혀를 차며 중재했다.

베아트리스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괜히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더불어 이미 자신에게 어떤 실망감이 있는 사람이니 더 잘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약혼 관계일 때 더 친해졌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늦은 후회였지만 말이다.

"넌 대체 왜 전하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잘하고 있네! 더 하시게!"

"전하는 입 좀 다무십쇼."

"······!"

칼리오스가 배신감에 절어 유렌을 노려봤다.

유렌은 베아트리스를 짜증난다는 듯 쳐다봤다.

베아트리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해요."

"그만 좀 하자. 그러면."

"···주의할게요."

답했으나 베아트리스는 자신이 없었다.

칼리오스가 싫은 건 아주 복합적인 여러 이유 탓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태자로서 우월함은 베아트리스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생각하면 그는 인간으로서 정말 호감을 품기 힘든 사람이었다.

엮인 모든 사건이 그랬다.

레베카에게 홀려 있을 당시의 그는 레베카를 만나겠다고 기사들을 시켜 자신을 가로막았다.

어떨 때는 마탑으로 공식 행사 공문을 내리는 일이 있었고, 몬스터 토벌 의뢰를 내린 때도 있었다.

자신을 제도에서 떨어트려 놓겠단 목적 하나로 말이다.

강제성이 없다곤 하나, 황실 명령.

이 땅에 편히 발을 붙이려면 그 정도는 상호존중으로 해야만 했었다.

그 순간이 얼마나 화가 났던가.

뿐만 아니었다.

유혹에서 빠져나온 이후는 또 다른 쪽으로 아니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사건 이후 옳다구나 약점을 잡아 탑주인 스승에게 제자의 처우가 어떠니 하며 스크롤과 시약을 대량으로 뜯어가지 않았나.

그러니까, 베아트리스의 눈에 보인 칼리오스는 유렌의 등에 업혀 이익만 갈취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인 것이다.

베아트리스와 칼리오스의 눈이 마주쳤다.

베아트리스는 옅게 인상을 찌푸렸고,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더 대화가 이어지기 힘든 상황.

유렌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본제로 돌아갑시다. 앞으로의 행보는 일단 내부 안정. 잡아먹은 구역을 좀 돌볼 겁니다."

"목적은?"

그에 베아트리스가 입을 열었다.

"닷새 뒤가 이그로시아 대회의에요. 이그로시아의 모든 유력 집단의 수장이 참석하는 의회인데, 거기에 저희가 초청된 거죠."

칼리오스를 향해 이렇게 긴 말을 하는 것은 처음.

이유는 '내가 더 도움이 된다'를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관조자의 비수도 그곳에 나올 거예요. 본인이 나올지 대리인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유렌이 받았다.

"접근한다면 그곳에서 할 겁니다. 우리 구역의 사업을 재편하고 싶은데, 그것으로 중앙의 핵심적인 역할을 원한다. 그런 식으로 물꼬를 틀고자 합니다."

칼리오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도움이 안 돼.'

보고받을 줄만 아는 성정을 보니 적어도 이 일에서만큼은 자신이 월등히 도움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에 저열한 우월감 따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아, 슬슬 저녁 시간이네. 갑시다. 밥은 먹어야지."

유렌이 해산을 명했다.

베아트리스는 유렌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야 함께 일어나 졸졸 그의 뒤를 쫓아 걸었다.

* * *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 와중에도 나름 재밌는 경험.

그리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뒤탈 없이 뭔가를 두들겨 패고 사람을 다루는 일은 먼 옛날을 떠오르게 했다.

사람 근본이란 게 그리 잘 바뀌지 않는 것인지, 내 인지로 치면 20년도 더 과거의 일이건만 이 망나니 행세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쉽게 행해졌다.

하나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생각은 없다.

망나니짓도 적당히 해야지.

제도에 돌아가면 누님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처신을 잘해야 할 것 아닌가.

그보다 먼저, 이 일을 그만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슬슬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애매하단 말이지.'

그간 이그로시아를 꾸준히 둘러봤다.

분명 제도에서 도망간 놈들이 이곳에 왔다면, 혹은 기르고어를 움직이는 놈들이 일을 벌인다면 뭐라도 징조가 있을 터였다.

한데 그걸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그로시아 자체가 병든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사람이 죽어 나가는 동네니 원.'

이런 동네에서 사람 몇 더 죽어 나가는 걸 어찌 특이하게 보고 그 위화감을 느끼겠나.

분명 일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어딘가에 물어 캐묻고 다니자니 그게 더 수상하다.

차라리 내부 조력자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정보의 부재로 머리가 아프지 않았을 텐데.

톡, 톡.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을 이었다.

'수족을 만들까?'

아니, 뭘 믿고?

애초에 범죄자들이다.

무언가 이성적인 도움을 바라기엔 그들의 생리가 배신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외부 지원?'

아니, 까딱했다간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도 계획이 있었다지만 운이 따라줘 겨우 안정적인 자리 잡기에 성공했다.

외부 인사를 함부로 들이는 건 악수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중이었다.

똑똑―

"어, 들어와."

노크 소리에 답하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앞서 몇 번 느낀 적 있던 허탈함을 다시 느끼며 놈을 봤다.

"헤헤, 형님! 평안히 쉬고 계십니까!"

왼쪽 뺨에 칼자국, 걸레짝 같은 떡진 머리칼 거기에 길쭉한 두상과 얍삽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손을 싹싹 비볐다.

"그래, 페토."

"저,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형님!"

"내가 널 어떻게 모르냐."

전생에 다루던 병사 중 한 명인데.

페토.

우리 부대의 수색대장이자 눈치 하나는 죽여주게 빨랐던 간잽이.

끝으로 누구와도 잘 지내던 리암과 유별나게 자주 다퉜던 놈.

나라고 알았겠나.

내가 부하로 데리고 다닌 놈이 이그로시아 출신일 줄은.

'뭐, 도둑질하다가 잡혔단 말은 들었는데···.'

그것도 자세한 얘기는 영 안 했으니 뭘 알겠나.

사실 하나씩 짜 맞춰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이그로시아는 기르고어의 암살 이후로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고, 이곳에 거주하던 범죄자들은 전쟁으로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온갖 도시로 퍼져나갔으니까.

개중 페토가 섞여 있었고, 하필 그 상태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혔다면 앞뒤가 맞지 않나.

능력은 좋은 녀석이었다.

도둑놈 출신답게, 거기에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까지 붙으니 함정이나 길을 찾는 것에는 아주 신물이 나 있는 놈이었고 도움을 받은 일도 꽤 됐다.

하여 처음 이곳에서 만났을 땐 반가웠다.

과거의 인연이란 생각에 유쾌함까지 들었고.

이왕 아는 놈이니 잘 구슬려 이놈을 정보책으로 쓸까.

그런 생각도 했을 정도였다.

결국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믿을 놈은 못 되지.'

뭐랄까, 패 죽인 후에 시키면 꾸역꾸역하긴 하는데 가만히 두면 다른 생각을 자주 한다고 해야 하나.

탈영하려는 시도만 두 자릿수가 훨 넘는 놈이다.

다른 상황이라면 데리고 썼겠지만 이런 은밀성이 필요한 일에는 영 미심쩍단 말이다.

여하튼, 생각을 지우고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냐."

"그, 제가 수상한 놈을 하나 발견했습죠."

"수상한 놈?"

페도가 고개를 더 숙이며 간사하게 말했다.

"옙! 얼마 전부터 이 근처에서 형님 방을 훔쳐보던 거지 노친네 하나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놈을 딱! 발견하고 이리 왔습죠!"

눈이 초롱초롱하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건가?

일단 흥미가 돋는다.

'거지, 노인.'

그리고 날 훔쳐본다.

그것은 빈민들을 정보책으로 이용하는 '관조자의 비수'와 퍽이나 어울리는 방식이 아닌가.

벌써 주목을 받는다?

더군다나 내게 관심까지 보여온다?

호재일지 악재일지 모르나, 더 깊이 알아볼 필요 정도는 있다.

하여 물었다.

"그래서 그 노친네는 어디 있는데?"

그러자 답이 돌아왔다.

"놔두고 왔는뎁쇼?"

"-"

"아니, 혹시 힘 숨긴 노친네면 어쩌나 싶어서 일단 말씀드리러 왔습죠."

"어디 갔는지 몰라?"

"어, 그러게요."

페토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가만 그 눈을 들여다봤다.

그러고 나니 주먹이 먼저 움직였다.

빠악!

"야이 병신 새끼야."

"오옥···!"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이 병신은 거기 노인을 잡아둔다거나 뒤를 밟을 놈을 뿌려둔다거나 하는 후속 조치도 안 하나?

그럼 보고는 대체 왜 하러 온 거야.

진짜 이러면 잘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빠악!

빠악!

빠악!

"혀, 형님! 제발 그마아···."

"그만은 새끼야. 넌 좀 더 맞아라."

빠악!

"어어억!!!"

그러던 중이었다.

멈칫―

주먹이 멎었다.

다른 게 아니라, '눈'에 잡힌 게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건?'

페토의 척추 꼬리뼈 쪽에서부터 무언가 이능이 얇은 실처럼 연결되어 밖으로 뻗어 있었다.

그 끝으로 다른 인간이 연결되어있는지 페토의 것이 아닌 마나가 실에 얽혀 있었다.

내가 그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덜컥, 페토가 멎었다.

페토의 마나가 순간적으로 다른 것에 잠식됐다.

'섭혼 마법?'

깨닫는 찰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페토가 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일 밤, 달이 기우는 시간에 38번가의 가죽 지붕 집으로 오시오."

그렇게,

풀썩―

페토가 쓰러졌다.

내 미간이 좁아졌다.

* * *

곧장 태자와 베아트리스를 소집했다.

그리고 내게 있었던 일을 말했다.

태자는 그런 의견을 건네왔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군."

타당했다.

소속도 정체도 밝히지 않은 채 섭혼 마법 따위로 말을 전해 온 것은 의도가 참 불순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말 관조자의 비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저희는 자세히 알지 못하니."

만약의 가능성.

아주 작게라도 그들이 관조자의 비수일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그걸 떠나서도, 지금 연기 중인 '쿨카란'은 이런 접근에 겁을 먹어선 안 된다.

앞뒤 안 가리는 폭주 마차.

그게 쿨카란의 행보였으니까.

"자가당착인가?"

"도리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관조자의 비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거래를 청해오는 다른 집단이라면 그곳을 통해 이곳의 깊은 정보를 캐내어도 될 테니."

5위계 마법사 하나, 익스퍼트 기사 둘.

우리의 전력이다.

적들이 어떻게 나오든지 빠져나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터다.

나는 베아트리스에게 말했다.

"섭혼 마법은 추적했냐?"

"네, 마법 끝에 38번가가 있긴 하네요. 그렇게 멀지 않아서 잡을 수 있었어요. 마나 반응은 둘, 시전자랑··· 어린아이? 일반인인 것 같아요."

안대 위로 의수를 얹으며 흘리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전투 준비는 하고 가는 걸로 하지요. 어떻습니까?"

잠시 고민한 태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 달리 방법도 없고, 무엇이 되었든 대회의까지 뭐라도 정보는 필요한 법이니."

그렇게 달이 기우는 시간까지 우리는 같은 방에서 의견을 나눴다.

앞선 때처럼 무희들을 끼고 환혹 마법을 켜둔 채로.

거기에 부하들을 독촉해 술을 계속 방에 들이며.

무희들이 술독에 빠져 기절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하게 달빛이 차올랐다.

태자는 제게 기대있던 무희를 털어내며 말했다.

"출발하지."

"예."

창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인지 저해 결계를 몸에 두른 채였다.

그렇게 38번가.

가죽 지붕 집이라는 묘한 건축물은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반쯤 무너진 건물 지붕을 낡은 가죽으로 꿰매둔 집이었다.

그 앞에 당도한 순간이었다.

끼익―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눈이 예민하게 주변을 훑었다.

혹여 다른 마법적 처리가 우리를 덮칠까, 그런 걱정이 있어서.

하지만,

'없어.'

공간 자체에 결계가 둘려있긴 하나, 이게 우리에게 해를 주는 형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소리나 기척을 지워내는 종류의 마법 같았다.

몇 번 본 일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우릴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반갑소."

노인이었다.

왼쪽 눈은 눈구멍이 텅 비어 있는, 거기에 키가 태자보다 크고 몸은 베아트리스보다 마른 노인.

직후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관조자의 종 라본이라 하오. 제국의 기둥들을 뵙소."

덜컥, 몸이 멎었다.

< 기르고어 (1) >

#054화. 기르고어 (1)

말을 들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관조자의 종.

즉 비수의 일원이 우리 정체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적은 또 누가 알고 있는 거지?

잘못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우리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흑막 놈들은 자리를 빠져나갔을 수도 있고.

바로 떠오르는 선택지는 심문.

살기가 돋는 순간이었다.

"살기를 거둬주시오. 현재 중앙에 있는 이들과 우리는 다르니."

"······."

"가짜 따위와 도매급으로 엮이고 싶진 않소. 이는 참으로 불쾌한 일이오."

스스로를 라본이라 소개한 노인은 진심으로 불쾌함을 내비쳤다.

그리하며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오. 이그로시아의 주인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태자와 눈짓을 나눴다.

직후 나는 내 얼굴 위로 붙어있던 변장 마법을 뜯어냈다.

이어서 베아트리스가 본인과 태자의 변장 마법을 해주했다.

정체를 알고 있는 시점에 구태여 변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고, 지하실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군?"

"하하, 전하는 호쾌하시네."

태자의 말마따나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어린아이.

외모가 너무 중성적이라 겨우 몇 가지 특징을 들어 소년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제국민에게서는 흔히 나오지 않는, 한나와 같은 검은 머리라는 것과 오른쪽 눈이 꿰매어진 상태라는 것.

소년이 말했다.

"반가워. 내가 진짜 기르고어. 이 도시의 주인이야."

생긋 미소 짓는 얼굴은 구김살이 없다.

그러나 내뱉는 말은 지극한 혼란을 담고 있었다.

"진짜 기르고어?"

"음, 태사도 반가워. 일단 앉아줄래? 대접할 게 없는 건 미안. 내가 기반을 다 잃어서."

다리를 꼰 소년이 말했다.

그에 태자가 나서 자리에 앉았다.

"적대적이진 않군. 함정이라면 유감이고."

"그럴 리가. 친해지려고 부른 거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거든."

"어떻게 우리 정체를 알았지?"

"떠나기 전부터 지켜봤으니까."

"원하는 건?"

"지금부터 말하려고."

소년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그것은 내 속에 경계심을 불어넣었다.

경험해 봐서 안다.

저런 태도를 보이는 자들은 둘 중 하나다.

잃을 게 없거나, 자신이 있거나.

직후 깨닫길, 저 소년은 후자였다.

"우선 믿을 만한 근거는 줘야지. 베아트리스 양? 내게 거짓 탐지를 걸어도 좋아."

마법 중에서도 특히 기묘한 마법.

상대의 동의가 있어야만 발동되는 거짓 탐지.

파훼법이 있는 건가?

아니, 적어도 내 눈에는 어떤 술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상한 것은,

'저주?'

저 소년의 온몸에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겹겹이(얽히고설킨)/ 저주가 걸려있다는 것.

베아트리스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해봐.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네."

철컥, 의수가 갈라지며 마공기관이 빛을 발했다.

이윽고 푸른 마나가 소년의 목을 죄었다.

거짓을 말하면 호흡하는 법을 잃는다.

그런 마법인 만큼 발동 기전은 확실히 보였고, 그게 방해받는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흠흠."

소년이 목을 쓰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이럼 대충 대화할 준비는 끝난 건가?"

그런 말에, 태자가 답했다.

"꽤 혼란스럽네. 자네 말도, 태도도, 지금 처한 모든 상황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인정하면 쉬운 얘기야. 지금 기르고어라 불리는 애는 애초에 내 대역이고, 이그로시아의 진짜 주인은 나다. 자, 마법도 내 목을 조르지 않잖아? 이건 진실이야."

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런 음습한 뒷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군."

"믿어주는구나?"

"들을 말이 많아 보여서."

현명한 대처였다.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무작정 겁박하고 달려든다면 들을 수 있는 정보는 더 적어질 테니.

소년··· 진짜 기르고어라고 해야겠지.

녀석은 미소를 짙게 만들었다.

"음. 좋아. 그럼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나는 말했다.

"처음부터 해. 비수의 탄생보다 더 이전."

"오?"

"네 정체부터 밝히는 게 도리가 아닌가? 20년 전에 생긴 비수의 흑막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여서."

그렇지 않나.

저놈을 보고 당장 떠오르는 것은 외경에 있는 밤의 종족.

그들이라면 이런 육체적인 변화에서 자유롭다.

나는 회초리 위로 손을 얹었다.

기르고어는 눈읏음을 지으며 답했다.

"음, 좋아. 이쪽도 패를 까라는 거지? 상호 신뢰는 중요하다고 생각해."

"주인···."

"괜찮아. 못 할 말은 아니야. 애초에 남한테 말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숨겼을 뿐이고."

기르고어가 노인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그리하고선 의자에 등을 파묻은 채, 노래하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습인 건 저주. 나는 당신들 같은 인간이야."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기르고어의 삶은 이미 이백 년 이상 이어지고 있었다.

그 근간으로 돌아가 보자면, 그곳엔 어떤 마을의 비극이 있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 그냥 있을 법한 사고. 암상인이 마을에 들렀고, 그 상인의 물품 중에 저주가 있었던 것뿐이야."

"그건 자네가 건드린 건가?"

"설마. 난 그게 있는지도 몰랐어. 그때 나는 10살짜리였는걸."

그저 암상인의 욕심이었다.

아티팩트에 걸린 저주를 푼다면 더 큰 값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직접 풀기엔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마을 장정들을 이용하자.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저 돈을 쥐여주고 무언가를 시키면 될 터이니.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었지. 누가 알았겠어. 아티팩트의 힘은 저주가 본체라는 걸."

저주를 해주하려는 순간이었다.

아티팩트에 깃들어 있던 힘은 곧장 해주를 시도하던 사람에게 옮겨붙었고, 그 사람의 생명을 다 빨아들인 뒤 옆 사람에게 옮겨졌다.

그런 일이 순식간에 몇 십 번이나 반복됐고, 마지막이 기르고어였다.

"정신을 잃었어. 다시 깨어났을 땐 이 몸에 저주가 붙어있더라. 어이가 없더라고. 사람들은 다 죽었지, 나는 저주에 시달리게 됐지."

"···암상인은?"

"내가 죽였어. 저주는 나랑 궁합이 꽤 잘 맞아서 그 힘을 쓰는 게 힘들지 않았거든."

저주라곤 하나 일종의 이능이었다.

설령 부엌칼 하나라도 그 물건을 쥔 자에 따라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흉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 아니겠나.

기르고어의 몸은 무슨 연유에선지 저주와 궁합이 좋았다.

저주는 자신이 빨아들인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기르고어의 몸에 때려 박아 버렸다.

하여, 불로불사.

기르고어는 저주가 먹어 치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썩 마음에 들진 않았어. 오래 사는 게, 그것도 어린아이의 몸으로 몇백 년이고 사는 게 좋지 않다는 건 5년도 안 되어서 깨달을 수 있었거든."

하여 해주법을 찾아다녔다.

이 아티팩트의 정체가 무엇이고, 또한 저주를 떨쳐내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지.

하나 그 일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거기까지가 내 배경. 그리고 이제부터 비수에 관한 이야기."

그러자 유렌이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기르고어는 그를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뒤, 말을 이었다.

"그 꼬맹이··· 그러니까 지금 이그로시아 중앙에 있는 가짜 기르고어를 처음 만난 건 정보를 찾기 위해 잠시 이곳에 들른 때였어. 자주 왔었거든. 아무래도 어두운 쪽 정보는 여기가 찾기 쉬워서."

영특하고 눈치가 빨랐다.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계산이 빠른 게 기꺼웠다.

그리하여 변덕을 부렸다.

"내가 원래 한곳에 오래 있지는 않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걸 들키는 순간 불사의 비밀이니 어쩌니 욕심을 내는 애들이 많거든. 귀찮잖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재밌어 보여서 그놈을 돌봤지. 이왕 할 거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정보기관을 만들고 녀석을 전면에 세웠어. 그게 관조자의 비수. 이러면 이해가 되나?"

"···그러니까, 지금 전면에 나와 있는 건 처음부터 허수아비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뭐, 부정은 못 하겠네."

칼리오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이 많아 보였고, 이어서 예상한 질문이 나왔다.

"그럼 기반을 잃었다는 말은? 파벌이 갈린 건가? 아니면 배신당한 건가?"

"둘 다 틀렸어."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야겠지.

"내가 지난 10년 동안 자릴 비웠었거든.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해주의 단서를 찾으려고. 이번엔 꽤 믿을 만한 정보다 싶어서 떠났지. 그 사이에···."

"일이 이렇게 됐다?"

"···뭐, 원래라면 이것도 몰랐겠지. 당신들 때문이거든. 내가 이그로시아로 돌아온 거."

"···?"

"악마를 잡았다나 뭐라나. 그 정도 능력이면 뒤 좀 파서 저주랑 연관된 건 없나 보려고 했지."

기르고어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다음 말을 이었다.

"묘한 외지인들이 있어. 꼬맹이 옆에 있는 것들인데, 조금 조사해 보니 그놈들이 오고 나서부터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씩 생겼더라고."

슬쩍 떠보는 말.

그에, 노골적인 경계의 반응이 돌아왔다.

기르고어는 눈썹을 들었다.

'이거네.'

역시, 도움받을 사람은 잘 고른 듯했다.

* * *

거짓 탐사는 한 번도 빛나지 않았다.

진짜 기르고어가 한 말 중 거짓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알겠군.'

이그로시아에 진입하기 전, 도시 전체에 곰팡이처럼 피어 있던 저주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저놈이 뿌려둔 것이다.

정확히는···.

'···권속?'

노인, 라본이라는 저 인간이 기르고어에게 힘을 받아 뿌려둔 것이겠지.

계약의 방식은 명약관화했다.

둘 다 눈 한쪽이 없다.

기르고어가 자신의 눈 하나를 저 노인에게 주어 힘을 나누어준 것일 터다.

그런 사소한 것부터.

'외지인.'

핵심 정보까지.

"인체 실험류로 추측 중이야. 실종자가 늘었고 대체로 빈민. 소문을 수집하면 밤 중에 세력을 습격하는 이종족 비슷한 것도 보인다고 했고···."

확실했다.

행동하는 방식이 꼭 그 새끼들과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의구심은 여전하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 싶어. 당신들, 그 외지인을 쫓는 것처럼 보였거든."

"근거는?"

"정보력을 얕보지 마. 당신들이 뭘 찾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 도망친 사제. 맞지 않아?"

느껴지는 게 있었다.

'숨기고 있군.'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풀지도 않는다.

거짓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목적에 맞게 자신들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그리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 다 잘렸다는 인간이 잘도 정보를 물어와.'

그리고 말이 이어질수록 그렇다.

이 상황에서 해법을 구하려면 기르고어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수밖에 없는 그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끌려다녀서 장기 말로 쓰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하. 잠시 나가계시겠습니까."

내가 이르자 태자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테지.

내게 방법이 떠올랐다는 것도 이해한 것일 테고.

"알겠네. 문 앞에 서 있도록 하지."

"으응?"

기르고어가 눈을 끔뻑인다.

그 사이에 태자가 나갔고, 베아트리스는 남았다.

"뭐야, 넌 안 나가고 뭐해."

"···네."

베아트리스까지 어깨를 늘어뜨리며 나갔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응시하는 기르고어와 마주했다.

긴장을 돋웠다.

소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저건 분명 노괴였다.

원하는 것을 바로 주지는 않을 터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자, 협상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상대의 갈망과 내 갈망을 교환하는 거지.'

서로가 얼마나, 어느 폭으로 그걸 채워줄 수 있느냐가 협상의 우열을 결정한다.

지금의 구도는 일방적이다.

정보를 저쪽에서 쥐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혹시 저놈이 다른 술수를 쓴다면?

우리를 버림패로 쓴다면?

'낭패잖아.'

다행히, 내겐 이 구도를 바꿀 비밀 무기 하나가 있었다.

피잇―!

눈의 마법을 발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더럽게 많네.'

존재감, 그렇게 이르러야 할 저주가 기르고어의 몸에 수십 수백 개나 걸려있었다.

이걸 다 파악하는 일은··· 눈이 강화되기 전이라면 아주 힘든 종류였을 것이다.

달리 말해 지금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물어옴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신목을 꺼내 허공을 한 번 그었다.

그러자,

투둑―

저주가 스러졌다.

저 수백 개 중, 딱 하나만.

"···!"

기르고어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표정의 흐름을 살핀다.

당황, 혼란, 그리고 경악으로 넘어갔다가 희망.

이 변화를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겠지.

앞서 일렀듯, 협상이랑 갈망하는 것의 교환이다.

그에 저놈은 스스로 약점을 말했다.

백단위의 해가 지나는 동안, 이 저주를 해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그런 말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봤는데 되네."

방금 우리의, 나의 가치는 소모품에서 '유일무이'가 되었다.

"그럼 다시 얘기해 볼까."

"무슨···!"

기르고어가 삐걱삐걱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소파에 등을 묻고 다릴 꼬았다.

신목으로 손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는 거 다 읊어봐. 그 저주, 대답이 마음에 드는 만큼 걷어 줄 테니까."

아직 백 개가 넘게 남았다.

저놈은 부지런히 대답해야 할 터다.

< 기르고어 (2) >

#055화. 기르고어 (2)

현실감을 느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기르고어는 일어난 변화가 일시적인지, 그도 아니면 영구적인지.

저자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자신의 저주는 어떤 식으로 해주 된 것인지까지 아주 많은 일들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리한다 한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지난 수백 년.

누구도 풀지 못했던 저주는 유렌의 손짓 한 번으로 해주 되는 저주라는 것.

'어떻게?'

저 회초리로 허공을 그었다.

그렇다면 회초리의 공능인가?

'···아니.'

기르고어는 이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이능에 관한 정보를 모아왔다.

그런 공능의 기물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하여 이르길, 가능성이 있다면 눈.

그것은 오랜 지식을 인용한 결론이었다.

'가장 위대한 이능은 눈에 담긴다.'

지극한 이능은 눈에 깃들어 그 존재의 세계를 다시 쓴다.

그렇기에 초인의 세계는 범인의 것과 다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라본에게 반을 떼어준 기르고어의 눈 또한 그런 종류였었다.

"하핫···!"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에 희열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에 절망감이 치솟았다.

"웃음이 나오나? 나는 그다지 안 웃긴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유렌의 모습에 기르고어는 모든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 이그로시아의 재통치.

그런 것은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렌은?

저 눈은? 해주는?

'···안 돼.'

사라져선 안 된다. 위험해져서도 안 된다.

애타게 찾아온 해답이다.

포기할 수 없었다.

하여 기르고어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완전한 을이 되는 경험은.

"···미안해."

사과를 하는 경험은.

"사과할게. 당신들을 이용하려고 했어."

이렇게 조바심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경험은.

"맹세할게. 심장에 걸고. 나를 이루는 이 모든 저주에 걸고."

기르고어는 애타는 눈으로 유렌을 마주했다.

"다시 이야기해보자. 온 힘을 다해서 당신들을 도울게."

계산은 의미가 없다.

저 눈이 유렌에게 있는 이상, 기르고어는 평생 목줄에 메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러고 나니 가장 먼저 차오른 감정은 괘씸함이었다.

'이만큼이나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하나하나가 그랬다.

-정보를 찾은 방법은 내 눈 때문이야. 눈에 걸린 저주는 '천통', 타인의 시야를 공유하고 의지를 조작하는 능력이야. 그걸 내 시종··· 라본에게 나눠줬지. 라본이 이그로시아를 돌아다니면서 천통으로 곳곳의 일을 파악하면 그 정보가 나에게도 들어오거든.

-당신들을 이용하려 했어. 다행히 당신들 계획이 우리한테 쓰기 좋았거든. 지역을 재패하고 중앙 회의에 참석, 비수에 접근. 그 일에 끼어서 내부로 잠입하려고 했어. 꼬맹이를 만나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든 수를 쓸 수 있으니까.

-···그래, 전투 상황은 당신들에게 몰아넣으려고 했어. 비수는 거대한 집단이야. 이그로시아 그 자체지. 심부로 들어가려면 이그로시아의 모든 죄수와 싸워야 해. 그건··· 나와 라본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정보의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진짜 목적도 밝히지 않았다.

끝으로 사지로 우리들을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런 것들을 다 고해하고 나서야 기르고어는 말했다.

-계획을 다시 짤게. 완수에 차질이 없도록. 무엇보다 당신의 심기를 거스를 일이 없도록.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줘.

그리 말하는 꼴을 보고 있자면 꽤 속 시원했다.

내내 여유나 부리던 낯짝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도,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그 외의 여러 가지가 모두.

무엇보다도.

-난 당신이 간절해. 지금 보여준 게 거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사죄의 뜻을 충분히 보일 거야.

보상이랄 걸 얻어냈다.

-내 비밀 창고가 있어. 꼬맹이도 모르는 비밀이야. 거기에서 물건을 빼줄게. 분명 마음에 들 거야.

-위치가 어딘데?

-중앙의 심부. 비밀 통로가 있어. 진입하면 그쪽으로 안내해 줄게.

온갖 기물이 흘러넘치는 이그로시아에서, 저 노괴가 특히 특별하게 여겨 빼돌린 물건이란다.

무장의 든든함은 중요하다.

누군가는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등의 개소리를 지껄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나.

도구가 좋을수록 장인의 능력이 특출나진다.

특히 나 같은 기사로 치면 그 중요함이 더했다.

'오러를 견디는 무기가 몇 개 없으니까.'

몸은 꾸준히 완성되고 있다.

오러를 쓸 일은 갈수록 늘 터다.

한데 봐라.

신목이 아니었다면 이때까지 전투에서 무기를 얼마나 해 먹었겠나.

고민할 필요 없다.

오러를 한 번 발할 때마다 명검 하나씩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회초리로만 싸울 수도 없고.'

그러니 무기를 얻음은 호재.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아, 받는 건 당신 하나야. 사죄의 뜻이라지만··· 나로서도 꽤 힘들게 모은 것들이거든.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고.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 그곳의 물건 하나에 내가 원하는 저주 세 개를 풀어줘.

-바라는 게 많네.

-그럴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했어. 당신도 이 거래에 만족할 거야.

자신만만하니 일단은 두고 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무 쪼아도 안 좋지.'

완벽한 갑의 우위를 얻었다곤 하나, 그것으로 겁박만 하는 것은 삼류들의 대처다.

이것을 가장 잘 이용할 방법은, 상대에게 이 상황이 '거래'라는 인식을 심는 것.

그리해야 협조성이 커진다.

어떻게든 내게서 보상을 얻어내기 위해 상대가 먼저 나서게 되는 법이고.

여하튼, 그런 이유로 얻어낸 게 하나 더 있었다.

"헤헤, 형님. 이 페토를 점찍어주셔서 영광입니다요!"

연락책으로 반가운 놈 하나를 얻었다.

전생의 수색대장이자 현 이그로시아의 깡패 페토.

기르고어와 나의 연락책이다.

"그래, 잘하자."

"물론입지요!"

똘망똘망한 눈을 보며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음, 마법이라기보단 저주야. 말했잖아. 천통은 상대의 의사를 조정한다고. 암시를 심어서 꼭두각시로 부리는 것도 가능해. 물론 상대의 정신력이 강하면 도리어 역풍을 맞지만.

이놈은 의지가 약해서 세뇌에 당했다는 말이 된다.

확실히 일리가 있긴 하지.

도리어 감사할 지경이다.

'수색 능력 하나는 끝내줬으니까.'

앞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요긴하게 쓸 예정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였다.

아지트로 돌아오니 태자가 물어왔다.

"대체 뭔가? 그 의뭉스럽던 꼬맹이를 구워삶은 비결."

"어찌저찌 했습니다."

"말은 안 해줄 심산이군?"

"가문 비전이라 말 못 해줍니다. 이건."

"흐음···."

틀린 말은 안 했다.

알아내기로, 통궤안이고 신목이고 가문 내에서 나온 건 맞지 않나?

태자는 금방 납득했다.

"···뭐, 결국은 잘 풀린 셈이니."

그리하고선 검을 뽑았다.

아지트 지하실, 베아트리스의 마법으로 외부와 단절시킨 공간.

달리 말해 급조한 연무장.

얼추 계획이 잡힌 시기다.

더불어 기존의 계획대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목적은 가짜 기르고어를 잡는 것 외에, 근본적으로 한 가지가 더 있지 않던가.

-외부인들에 관한 것만큼은··· 미안, 천통으로도 알 수가 없었어.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니 연결이 불가능했고, 설령 연결이 가능했어도 다가가지 않았을 거야. 꼬맹이까지 섭혼한 녀석들이라면 섣불리 건드리긴 위험하다는 말이니까.

외부인.

즉, 레베카의 사건과 엮여 있는 놈들.

용의주도한 놈들이다.

그놈들을 쫓아야 하는 실정에 심부까지 전투를 하지 않는다거나 끝까지 전투를 하지 않는 상황의 발생을 바라는 건 너무 낙관적이지 않던가.

하여 태자를 조금 더 빨리, 여러 상황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련은 오랜만인 듯하군."

"예, 여기 와선 수업한 일이 없긴 합니다."

"없긴 왜 없나. 매번 수련 명목으로 싸움터에 던지지 않았나."

"쫄따구 몇십 정도도 한 번에 상대 못할 거면 검은 놓아야지요."

뭘 꿍해 있는 건지 원.

다 대 일 전투에 적응시키려는 큰 뜻이 있건만.

나는 회초리를 들었다.

태자가 기수식을 취했다.

"자, 그래서 이번엔 무슨 명목인가."

"명목은 아니고. 혹시 모를 상황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강자일 경우··· 같은 것은 너무 많이 수련시켰다.

두들겨 팰 때마다 성장하는 인간이라 그 방면에서는 이미 두들겨 패며 경험을 만들어 뒀다.

다만,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은 하나.

"비수의 전투법은 아십니까."

"아티팩트나 저주를 둘둘 두르고 싸우지. 목숨을 걸고 상대를 죽이려는 놈들 아니던가."

"예, 거기까지 알면 됐습니다."

마법과 저주를 상대하는 법.

태자는 이 방면의 지식이나 경험이 영 모자라다.

이걸 미리 가르칠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배우고 싶어 하던 검의. 하나만 가르쳐드릴 겁니다."

"검의라면?"

"주술 베기.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태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윽고 태자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야 가르쳐주는군?"

좋아하기는.

기대를 접어줬다.

"완벽하게는 못하실 겁니다. 경지를 떠나서 제가 아니면 완성이 불가한 기술입니다."

"내게 불가능은 없네."

"그럼 오늘 알게 되시겠네."

태자의 육신은 익스퍼트 최상위, 마나량은 이미 소드마스터에 육박했다.

단 한 가지.

경험이라고도 불리고 깨달음이라고도 불리는 그것 하나가 모자랐다.

물론 그걸 당장 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흉내는 낼 수 있지. 몸이 좀 망가지겠지만.'

이제 겨우 익스퍼트 중위급에 올라온 내 몸으로도 검의를 흉내내는 게 가능하다.

태자 역시 원리만 안다면 한 두 번 정도.

치명적인 저주는 베어낼 수 있을 터다.

그럼 어떻게 그걸 가르치느냐.

답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태자가 내게 그랬듯, 나 또한 같은 방법을 쓸 수밖에.

"좀 맞아봅시다. 몸으로 익히는 것만큼 빠른 게 없으니."

주술 베기도 결국 검술이다.

특히 태자에겐 더 그렇다.

미래의 저 인간은 주술의 결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주제에 계산과 감으로 주술 베기를 재현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저 인간에겐 같은 검식을 반복, 숙달하는 것만큼 빠른 배움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야, 쏴."

"네."

꽈아아앙―!

베아트리스가 태자를 향해 마법을 발출했다.

태자가 그것을 피하려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허."

빠악!

"으극!"

다가가 신목으로 종아리를 후려갈겼다.

태자가 핏발선 눈으로 날 노려봤다.

뭐, 어쩌라고.

"피하지 말고 베셔야지요."

태자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이마에 핏대가 솟아 있었다.

* * *

베아트리스는 여태껏 그런 생각을 했었다.

유렌이 칼리오스의 태사로 자리하는 것은 어떤 외부적인 위협을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한 동맹이라고.

저들이 실제 사제관계를 맺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것은 비단 베아트리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칼리오스를 알고 제도의 정계를 아는 이들 대부분은 아직도 그런 추측을 했다.

칼리오스는 정통성을 위해 파로스를 곁에 두었을 뿐이다.

···라고 말이다.

한데, 지금 그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뀌고 있었다.

빠아아악!!!

"으극···!"

"팔 위치 다시."

오늘로 사흘 차.

베아트리스는 3~4위계 사이의 마법을 연신 칼리오스에게 쏘아댔다.

아티팩트가 품는 대부분의 마법에 속하는 출력이었다.

칼리오스는 그것을 마나로 튕겨내거나, 몸을 돌려 피하는 등의 본능적인 행동을 하려 했다.

그때마다 유렌은 칼리오스의 몸을 후려쳐 그 일을 막았다.

"베십시오. 막는 것도, 튕기는 것도 아닌 벤다. 그게 핵심입니다."

"어떻···!"

"베는 일을 상상하면 됩니다. 전하께선 가능하십니다."

"이 미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불가능은 없니 어쩌니··· 이래서 입만 산 새끼들이 제일 문제···."

"···마법사. 다시 마법을 날리게."

뭐랄까, 표현하길 유렌이 칼리오스의 속을 박박 긁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명백히 깨닫길, 유렌은 검술적 지식이 칼리오스보다 월등하며 그의 모든 움직임을 간파할 능력이 있었다.

그랬다.

실제로 유렌은 칼리오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던 것이다.

그에 관한 놀라움이 있었다.

그 외의 것을 따지자면 그랬다.

'도발, 약하네.'

칼리오스는 유렌이 말할 때마다 핏대를 빡빡 세워대며 실패한 일에 재도전했다.

암만 봐도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오기였다.

그 태자의 진짜 성격이 저럴 줄은 몰랐지.

여하튼 베아트리스는 기꺼이 마법을 날렸다.

칼리오스를 괴롭히는 일이 조금은 즐거운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그 감정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빠악!

"억!"

"또 마나로 튕구려고 하네. 베라니까."

"나도 모르게···."

"짐승 새끼랑 뭐가 다릅니까? 본능대로 행동하는 게."

"주둥이가 아주···."

"스승한테 주둥이?"

"···어."

빠악!

"끄헉!"

"말버릇 조심합시다. 좀."

유렌이 회초리로 칼리오스의 배를 갈겼다.

칼리오스는 끅끅 숨을 내쉬며 침을 흘려댔다.

그에 베아트리스 또한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악마와 융합했을 적, 저 회초리에 두들겨 맞고 팔이 뽑혀 나가던 순간이.

오소소―!

등골이 소름이 돋아왔다.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베아트리스는 그를 참아내려 했다.

'···날 구해주기 위해서 때린 거였어.'

그러니 아픈 기억 정도는 기꺼이 지워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순간 유렌이 말했다.

"야, 마법 다시 날려봐."

"···네."

화르륵―!

3위계의 불꽃 마법이 베아트리스의 의수 위로 맺혔다.

베아트리스는 이번 역시 조금의 자비도 품지 않은 채 그를 쏘아냈다.

그때였다.

"이 빌어먹을···!"

쿵!

칼리오스가 발을 굴렀다.

그의 얼굴 위로 악기가 서렸다.

직후 그가 검을 양손으로 쥐고, 몸쪽으로 당겼다.

베아트리스는 숨을 멈췄다.

저 동작이, 너무 익숙했기에.

그 기수식에서 유렌이 겹쳐 보일 만큼 그와 닮아있었기에.

"죽어라!!!"

꽈아아아앙―!

칼리오스가 검기를 날렸다.

그것이 마법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며, 베아트리스의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광경에 멍해진 베아트리스는 몸이 굳었다.

그렇게 당하기 직전,

퉁!

어느새 그녀의 앞에 나타난 유렌이 검기를 허공으로 튕겨냈다.

베아트리스는 놀란 눈으로 유렌을 봤다.

유렌은 칼리오스를 응시한 채 말했다.

"보십쇼. 하면 되잖습니까."

칼리오스는 눈을 끔뻑였다.

직후 멍하니 자신의 손을 봤다.

"엥?"

"두들겨 맞다 보면 다 몸에 익습니다. 감 잡은 김에 조금 더 해봅시다. 아, 몸은 어떻게든 회복시켜줄 테니까 엄살피울 생각 말고."

"어어···."

천천히, 유렌이 다시금 칼리오스의 등 뒤로 향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에게 말했다.

"야, 마법 다시 쏴봐."

하나 베아트리스는 곧장 그리할 수 없었다.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다름 아닌, '맞다 보면 몸에 익는다'라는 유렌의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일어난 이 현상을 믿을 수가 없어서.

'말도 안 되잖아.'

마법은 벨 수 없다.

완성된 마법의 집합체는 그것이 가진 고유의 유기성이 있는 터라 그것을 벤다는 것은 곧 '술식' 자체를 벤다는 말과 같았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개념을 벤단 말인가.

유렌이 그게 가능한 건, 악마가 이른 대로 '통궤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칼리오스는?

눈도 없는 주제에 이 일을 행한 저 인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이! 다시 해보시게! 뭔가 될 것 같네!"

베아트리스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어벙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며 또 칼을 드는 남자의 모습이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르륵―!

부정을 위해 던진 화염구는 이번 역시 같은 결말을 맞았다.

쩌어어억―!

전보다 완숙하게 마법이 잘렸다.

터지지 아니하고 베였다.

칼리오스의 얼굴 위로 희열 따위가 맺혔다.

베아트리스의 시선이 유렌을 향했다.

유렌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심할 뿐이었다.

'대체 뭘 만드는 거예요?'

그 질문이 차마 입을 빌어 나오지 않았다.

차오르는 감정은 공포.

베아트리스는 생애 처음, 개인이 가진 재능의 총량이란 것에 공포심을 느꼈다.

회의까지 하루가 남은 날의 일이었다.

< 기르고어 (2) > 끝

056화. 관조자의 비수 (1)

회의 날이 됐다.

어떻게든 배우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으리라.

그런 판단에 가르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역시 이런 결과는 마주할 때마다 놀라운 법이다.

"흠, 이 정도면 얼추 되지 않았나?"

태자가 검을 갈무리했다.

지하 연무장은 온 사방이 무너져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3할.'

태자의 주술 베기가 성공하는 확률이었다.

고작 배운지 사흘 만에 올린 성과라는 걸 생각하면 경이적이지 않던가.

'곧 죽어도 재능이란 말이지.'

아무렴, 옥에서 명상만으로 그랜드 마스터에 도달한 인간이니 오죽할까 싶다.

새삼스레 이 인간에게 질투심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내게 중요한 일은 이 재능을 활용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빠악!

"억!"

"뭘 흐뭇해하고 있습니까. 열 개중 일곱 개는 두드려맞는 주제에."

"끄윽…!"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교육하는 것.

뭐, 그 외에도 팰 수 있을 때 한 대라도 더 패자는 마음이 있지만 그건 구태여 설명할 이유도,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부들부들 떠는 태자를 보니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맞아 죽을 일은 없겠군요."

"자네는 꼭 두고 보시게. 내가 소드 마스터에 도달하기만 하면…!"

빠악!

"끄헉…!"

"그때도 제가 이 경지겠습니까. 우쭐대기는."

그랜드 마스터는 몰라도 소드 마스터 정도는 내가 더 빨리 갈 수 있다.

애초에 육체가 완성되지 않은 것뿐, 이미 소드 마스터에 필요한 모든 것 갖춰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몇 년은 더 내가 팰 수 있단 말이다.

꿈틀거리는 태자를 뒤로한 채 지하 연무장을 나왔다.

그러자 페토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내게 수건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오냐."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기에 어깨를 두들겨주고 지나쳤다.

그 순간이었다.

"파로스."

"…아, 깜짝아."

고개를 돌리니 페토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저 못생긴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잔망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걸려 있었다.

"기르고어?"

"오늘이잖아. 회의."

"어, 계획은?"

"얼추 완성했어. 속전속결로 바로 진행할 거야. 그래서 말인데...."

"음."

"회의에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을까?"

내 고개가 기울었다.

기르고어는 꽤나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쪽이 제일 그럴싸한 방법이더라고."

어딘가 음흉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 * *

이그로시아 대회의, 혹은 정례 회의로 불리는 회담은 도시의 중앙에서 이뤄진다.

과거 영주성이었고, 이곳이 부랑자의 손에 떨어진 이후로는 최고 집단의 요람으로 기능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마부는 페토.

안에 있는 것은 나와 태자, 더불어 베아트리스와....

"하하, 긴장되네. 내 집인데도 이렇게 몰래 들어가는 게."

…기르고어까지.

나는 인지 저해 마법, 거기에 베아트리스의 변신 마법까지 두른 뒤 여자아이의 복장을 한 녀석을 가만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네가 내 몸… 시종 역으로 들어가면 같이 갈 수 있을 거다?"

"응."

"그게 맞냐? 진짜 맞아?"

묻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씨발 도시 유행이 어린 남자애한테 밤시중을 들게 한다는 게… 진짜 맞는 얘기냐?"

이그로시아에서 창녀보다 고급으로 치는 게 미동이란다.

하여 이런 자리에서 각 집단의 수장들은 과시욕을 위해 미동을 데리고 와 선보인다고 한다나.

'대체 무슨 끔찍한 도시야?'

나는 이 도시의 존속 이유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고, 그는 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시 채로 불태우고 싶네만."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다른 문화라고 생각해줘.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는 아니야."

기르고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잖아?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뭐야. 희소성이지. 여자? 어리건 늙었건 이쁘건 못생겼건… 도시에 널린 게 여자잖아. 뭐, 자랑은 아니지만 여기 치안이 얼마나 열악해. 빵 한 조각이면 하룻밤을 내어주는 여자는 많거든. 희소성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어린 남자. 그것도 어리고 이쁜 남자는 달라. 조금만 성장해도 가치가 죽어버리지. 남성성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폐품이 되는데, 그렇다고 무한정 수급하기엔 어린 상태에서 예쁜 남자라는 건 좀처럼 찾을 수 없거든."

"그래서 미동을 데리고 다니는 게 일종의 과시 문화로 자리 잡은 거지. 돈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걸 부린다. 귀족들의 사치 문화랑 똑같잖아?"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후달리는 새끼일수록 혓바닥이 길어진다던가.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말이라는 생각에 귀를 닫아버렸다.

하나, 현지인의 말은 대체로 진실인 법이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정지. 누구냐."

"쿨카란의 몽둥이다."

"마차를 열어라."

영주성을 경비하던 비수가 말했다.

마차의 문이 열렸고, 나는 아티팩트를 두른 경비병을 마주할 수 있었다.

경비병의 시선이 나와 태자, 베아트리스를 차례로 훑은 뒤, 기르고어에게 닿았다.

시선이 오랫동안 기르고어에게 머물렀다.

그래도 이놈이 직접 만든 집단.

인지 저해를 뚫고 놈을 알아볼까 하는 걱정이 있었으나....

"미동이군. 과연 기대주 쿨카란이라 할 만하다. 이그로시아를 이렇게 적응해버린 건가."

…씨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지?"

"들어가라. 회의는 저녁이니 그때까지 준비된 방에서 대기하도록. 뭐, 지루할 틈은 없겠군."

경비병이 큭큭 웃으며 나와 기르고어를 번갈아봤다.

살심이 치솟았고, 기르고어가 내 옆구리를 찔러 그를 막았다.

쿠구궁!

마차의 문이 닫혔고 영주성의 문이 열렸다.

이후 베아트리스가 스산하게 말했다.

"죽일까요?"

"조금만 참아. 아직 아니니까."

아직.

이었다.

* * *

영주성의 심부.

검은 머리의 사내는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떴다.

"기르고어."

아직도 낯선 이름이었다.

이것은 본디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으니.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전신을 로브로 감싼 괴한이었다.

그의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또 자고 있나 싶어서 불어봤지. 깨 있었네?"

"무슨 일이냐 물었다."

"아이구, 왜 이렇게 예민하실까. 우리 기르고어 나리."

"장난은 그만두지."

"그럼 이렇게 불러야 하나?"

괴한이 웃었다.

"레베카."

사내는 눈을 좁혔다.

그래, 정체성을 찾는다면 차라리 그쪽이었으니.

그녀는 자신에게 기르고어라는 이름을 주고, 자신의 이름을 가져간 여인이었으니.

"히야, 순애보도 이런 순애보가 없지."

괴한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짐짓 여유롭고 익살스러운 기색이었다.

사내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조력자라곤 하나, 아직까지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상대를 신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동료만 아니었다면… 절대 이곳에서 머물게 하지는 않았으리라.

"나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랑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건 알겠는데, 나 너무 차갑게 대하지는 말아주라."

퉁, 퉁.

괴한이 두드리는 것은 유리관이었다.

안쪽으로는 녹색의 액체가, 그리고.

"이 머리. 내가 가져와 줬잖아."

…불에 타고 난도질당한 여인의 머리가 있었다.

분홍빛 머리칼이 수조관 안에서 흩날렸다.

사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죄악감이 차올랐다.

그녀가 돌아온 지 겨우 1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아직 받아온 어떤 은혜도 돌려주지 못했건만 지키지도 못한 채 겨우 머리 하나만 수습해온 꼴이라니.

그것도 직접 하지도 못한 채 뒤늦게야 그녀의 죽음을 깨닫다니.

주먹이 꽉 쥐어졌다.

눈동자는 복수심으로 타올랐다.

이 일을 벌인 자가 칼리오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찢어 죽여 마땅한 놈이다.'

아니, 단순히 죽음으로 도망가게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런 편안한 최후를 바라고 또 바랄 만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어때, 지금이라도 전쟁하자니까? 도와줄게!"

괴한이 킥킥 웃으며 속삭여왔다.

하지만, 사내는 신중했다.

"섣부르게 움직이진 않는다."

무언가를 꾀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임을, 우열의 판단과 그를 기반으로 한 전략임을 그녀에게 배운 까닭으로.

배운 대로 행해야 했다.

아직 모든 면에서 모자라기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을 살리는 게 먼저다."

사내는 단순한 화풀이로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수조관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하며 괴한에게 물었다.

"확실하겠지. 금기로 주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으음~ 할 수야 있긴 한데. 아직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

"차근차근하고 있지 않던가."

"더 많이 필요하지. 실험도 아직 절반밖에 못 왔잖아."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이그로시아는 그림자 아래의 성채이니."

"으음...."

괴한의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불만이 가득한 모양새였다.

"그냥 다 죽이면 안 되나...."

저리 성급하고 생각 없는 이가 주인의 동료라니.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괴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천천히 하지 뭐. 그보다 나리, 이제 회의 아냐?"

"그래, 변동이 있었지."

쿨카란의 몽둥이라고 하던가.

하야스를 밀어낸 신흥 강자였다.

그에 관해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익스퍼트급 기사. 마법사. 좋은 조합이다."

"기반도 없지. 아직 완전히 내부를 흡수한 것도 아니고."

"죽어도 신경 쓰는 놈은 없겠지. 성급하게 먹다 체했다고 생각할 테고."

"와, 실험!"

괴한이 빠르게 기색을 회복하곤 손뼉을 쳤다.

"쿨카란은 내가 직접 해도 되지? 궁금하더라고. 검술이 그렇게 끝장난다던데."

"숨만 붙여서 데려와라."

"아암, 얼마든지."

괴한이 신난 기색으로 돌아섰다.

"그럼 회의 끝나자마자 실행해볼게. 수고해!"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지를 다지겠다는 듯 수조관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 * *

회의는 총 사흘 간 이어진다.

그간 이그로시아의 유력자들은 배정된 방에서 지내며, 본 회의가 있는 저녁 외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까지가 골자.

우리가 밖을 나돌아다닐 이유는 없다.

애초에 여기서 기반을 다져 깡패가 될 것도 아니지 않던가.

도시의 유력자들이니 뭐니, 엮여봐야 의심받을 구석만 늘어난단 말이다.

하여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길 잠시.

기르고어가 말했다.

"결행은 오늘 저녁이야. 회의를 끝내고 돌아온 밤에 움직일 거야. 건물 내부 구조 자체는 다 외우고 있으니까 경로는 만들어졌고...."

"노리는 건 가짜, 그리고 외부인."

"…응, 맞아. 연구실로 쓸 만한 공간은 여기랑 여기. 그리고 여기."

다들 지하에 있었다.

뭔 놈의 영주성이 지상보다 지하가 넓은 건가 싶기도 하면서, 이그로시아라고 생각하니 그게 또 납득은 되기도 한다.

여하튼, 작전이 시작되면 따로 움직일 것이다.

전투 상황은 피하는 게 좋겠으나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결국은 싸워야 하는 만큼 지금 중요한 건 컨디션 관리였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럼 유렌, 슬슬 가볼래?"

"어? 뭐를."

"약속한 거 있었잖아. 보물."

아, 그게 있었지.

당장 회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잊었다.

태자가 물었다.

"보물? 무슨 얘긴가?"

"있습니다. 받기로 한 게."

"내 건?"

"맡겨놨습니까?"

태자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본인 몫이 배정되어 있으리라 믿는 표정.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지금은 참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비밀 통로라고 하니까 뭐."

"여기서 멀지도 않아. 금방 다녀올 수 있어. 방 배정을 잘 받았지 뭐야."

그렇게 방을 나섰다.

복도 경비가 물었다.

"어딜 가는 거냐."

"뭐. 내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하나?"

험악하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기르고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경비가 나지막히 탄성을 흘리며 씨익 웃었다.

"좋은 시간 돼라."

좆같은 도시.

이 일만 끝나면 어떻게든 불태우고 말 테다.

"괜한 싸움은 하지 마. 피하는 게 상책이야."

"인륜적으로 싸우는 게 상책이라고 보는데."

"참아달라니까. 내가 다시 집권하면 도시 문화도 바꿔 볼게. 저주 한 두 개면 될 것 같아."

틈틈이 저주를 걷어내려 발악이군.

여하튼 기르고어의 말대로 비밀 통로의 입구는 멀지 않았다.

복도 어딘가의 방.

그 안의 작은 찬장.

"열려라."

기르고어가 이능을 담아 읊자, 작은 소리와 함께 찬장이 밀려나며 통로가 드러났다.

계단이 보였다.

"별걸 다 만들어뒀네."

"보관은 신중히 하는 게 맞으니까."

계단을 걸었다.

이번 역시 오랜 시간은 쓰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가져갈 보물에 관한 생각을 했다.

'역시 무기지.'

신목 자체가 뭉툭한 회초리 모양이다 보니, 마나를 벼릴 때 수고로움이 더 드는 편이다.

적당히 날카롭고 튼튼한 검 하나만 있다면 그걸 꺼내오고 싶었다.

암흑가의 주인이나 되는 놈이 꽁꽁 숨긴 보물이 아닌가.

적어도 유물이나 아티팩트급은 될 테니 오러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

기르고어가 철문을 열자 내부가 드러났다.

"나도 하나 챙겨 나와야겠다. 맨몸은 영 불안하네. 자, 하나 골라봐."

기르고어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뒤따라 내부를 살폈다.

그 순간이었다.

"…!"

일순 내 숨이 멎었다.

걸음 또한 멎었다.

그것을 넘어 몸 전체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벽 어딘가에 걸린 붉은 톱날 검.

그를 보며 인 반응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애의 방패, 피를 먹는 철퇴, 바람 늑대의 가죽 망토.'

저것들 모두, 내가 아는 무구들이었다.

"음? 왜? 저 검이 마음에 들어? 어렵게 구했지. 한 100년 전인가...."

목소리가 혼란을 부추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은....'

회귀 전의 전쟁기, 야만족의 대전사들이 사용하던 무구들이니까.

057화. 관조자의 비수 (2)

눈앞의 물건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꿈에도 나와 나를 괴롭혔을 정도로, 저것들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방패에서 뻗어 나온 빛이 얼마나 많은 제국 병사를 죽였던가.

철퇴를 든 대전사는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나며 기사들을 짓이겼던가.

망토는? 저것을 두른 주술사는 늑대의 혼령을 불러내 기동전으로 제국 보급로를 끊어댔었지.

무엇보다 톱날 검, 저것을 들던 대전사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에길 보르타만.'

야만족의 대전사장이자 태자의 숙적이었던 이자크 라 보데타의 부관.

검을 먹는 야수라 불리었던… 최종전까지도 나와 가장 많이 싸웠던 놈의 검.

―눈깔 괴물! 오늘로 끝을 보자!!!

―…미친 새끼.

놈의 톱날 검은 이능을 깎아냈었다.

저것은 정면으로 부딪치면 도리어 내 힘이 깎여나가는 끔찍한 무기였다.

그렇기에 내가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검에 깃든 이능을 보고 그것을 파훼하며 맞싸울 인간이 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 정도로 잘 아는 물건들이니, 놀라움 이상의 무언가가 내게 깃들었다.

나는 기르고어를 바라봤다.

'이 물건의 출처가 이놈이다.'

즉, 이놈은 야만인 측에 붙어 그들의 전력을 강화시킨 놈이다.

그 사실이 내게 드리워졌다.

이제야 무심코 넘겨버렸던 일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회귀 전의 가짜는 암살당했다.'

그 유력 후보는 이놈이다.

그렇다면 가짜를 암살한 이후의 이놈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답이 뻔히 보이지 않나.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순진하게 웃으며 벽에 걸려있던 스태프를 꺼내 드는 모습이 도리어 내 위기감을 치솟게 한다.

그래, 제국이 그 꼴이었으니 방랑자인 이놈으로선 어디든 거취를 옮길 만하겠지.

하지만 왜 하필 야만족이었을까.

속이 답답한 기분에 나는 물었다.

"야."

"응?"

"판테일 두르. 이게 뭔지 아냐?"

야만족의 본거지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신의 성지다.

직후 기르고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길 알아? 신기하네. 북동부 야만족들에 관해선 제국 학자들도 잘 모를 텐데."

"…아는 거냐?"

"모를 수야 없지. 지난 10년 동안 가 있던 곳이 거긴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야만족에 관한 단서를 이렇게 얻게 될 줄이야.

조바심이 치밀어 관련된 것을 더 물으려 했으나....

"그보다 어서 골라줄래? 여기서 시간을 더 쓰긴 힘들어서. 일단은 몰래 움직이는 거니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쩔 수 없나.'

진정하자.

이놈은 도망가지 않을 터다.

저주를 해주 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 이상 내게 충실해야 할 터이니.

"딱 하나만 골라야 해. 진짜 귀한 것들이라서."

라고 말함에, 나는 다시금 끔찍했던 대전사들의 무구를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두 개로 하자."

"…아니, 하나만."

"저주 일곱 개. 그걸로 두 개 가져가겠다고."

"...."

기르고어의 눈빛이 떨렸다.

입술이 뻐끔거렸다.

고민이 깊은 모양새.

그에, 나는 협상을 해봤다.

"여덟 개."

"선불이야."

쉬익!

신목을 휘둘러 딱 여덟 줄기를 걷어냈다.

그러자 기르고어가 왜인지 행복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가져갈 건데?"

"딱 필요한 게 두 개 있네. 이거랑 이거."

그에, 기르고어가 답했다.

"…비싼 것만 골라 가져가네."

슬픈 눈이었다.

* * *

칼리오스는 돌아온 유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빈손인가?"

"예?"

"아니, 뭘 받았다길래 궁금해서."

"아, 여기 있습니다."

유렌이 허리춤의 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아공간 배낭인가.

칼리오스가 입맛을 다셨다.

"뭘 받았나? 쓸만한 게 있던가?"

"안 줄 겁니다. 안 가르쳐줄 거고. 나중에 되면 알 걸 뭘 보챕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자네도 참 성격 한번 옹졸맞군."

"개뿔이, 눈에서 욕심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데."

칼리오스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실제로 쓸만한 게 있으면 '이것 하나 정도는 나한테 양보하는 것 어떤가?'라고 말할 생각이었기에.

'어쩔 수 없지.'

2안으로 가야겠군.

이곳의 사건을 끝낸 후에 기르고어에게 이그로시아의 자산을 뜯어내는 것으로 하자.

칼리오스는 양심의 찔림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제국의 차기 황제로서 황실의 국고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의무임을 믿는 까닭이다.

여하튼, 정리는 얼추 된 듯하니 이제 일을 도모해야겠지.

"곧이군."

"예, 이제 회의입니다. 움직이죠."

결행이 코앞이었다.

* * *

이그로시아의 회의는 일반적인 회의와 달랐다.

그러니까, 엄숙하고 정제된 분위기에서 의견을 나누는 회의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편이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깡패들의 말싸움과 닮아 있었다.

기르고어는 그런 분위기를 속으로 웃으며 지켜봤다.

"물장사나 하는 새끼들이 혀가 길군. 수입권은 우리한테 있다는 걸 잊었나?"

"그러는 그 물이나 처먹는 새끼들 주제에 뭘 얼마나 더 떼가려고? 우리 제조 기술이 없으면 이그로시아 주조업은 다 망한다는 걸 잊었나?!"

회의에 들어온 지 10분, 그리고 회의 시작까지 15분이 남았다.

회의를 주관할 가짜 기르고어는 아직 오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회의석에선 말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쟤들은 아직도 싸우네.'

10년 전에도 같은 것으로 싸운 걸 기억하건만, 베일과 말콤의 주조업 독점권 다툼은 아직도 이어지는 듯했다.

그 외의 것으로 따지자면 그랬다.

모든 것이 기르고어에게 익숙했다.

'차드, 여전히 성격이 차분하구나. 티베리온, 눈치 보면서 낄 타이밍을 재는 게 보여. 히스탈, 빨리 집에 가고 싶구나.'

이그로시아의 권력 구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유렌이 하야스를 몰아낸 걸 제외하면, 그나마 한 자리가 바뀌었을 뿐 기존 구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묘한 착각이 일었다.

사실 이그로시아에는 어떤 변화도 없고, 어떤 변고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말이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이곳이 변해버렸음은 기르고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죽고 있다.

비수가 만들어진 이례 구하려고 했던 것들이 스러져 갔다.

그날 만들고자 했던, 혼돈 속의 질서는 이제 없다.

자멸을 향해 달려가는 도시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의장께서 입장하시오."

그때 늙은 비수의 말이 울려퍼졌다.

쿠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직후 그가 들어왔다.

"다들 앉지."

기르고어의 속은 조금 젖어 들어갔다.

'…변했구나. 아니면 늙은 건가.'

검은 머리칼은 바뀔 리 없으니 그대로, 그 아래로 햇볕을 받지 못해 창백한 피부도 그대로.

다만 총명함을 띄워냈던 눈빛은 이제와 어두운 그늘만이 가득하다.

얼굴 위엔 세월의 흔적이 얼핏 새겨져 있었다.

기르고어는 오랜 세월을 살아와 알았다.

서른, 저 나이쯤부터 얼굴에 새겨지는 것들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는 법이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불편함이 그의 얼굴 위로 가득했다.

고민해봤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이라면 따로 존재하긴 했다.

유렌과 칼리오스에게 듣길 악마의 소행.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이라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인간이 개미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것과 같다.

그저 휘발성이 강한 흥미만으로도 악마는 움직이는 법이었다.

'차라리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후회가 잠시 일었으나, 지나간 일을 붙잡을 수는 없음이라.

기르고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회의를 흘려들었다.

그 사이에 자비나 연민 따위의 감정은 곧이어 종적을 감췄다.

속에 강한 징벌의 의지가 차올랐다.

대체로 헤프게 구는 그였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철칙이란 게 있었다.

이그로시아의, 비수의 법도는 그런 그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했다.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늘 아래의 것을 희생시켜선 안 된다.

비수가 이그로시아를 향하는 순간, 그 죗값은 목숨으로 받아낼 것이니.

와중 회의가 끝났다.

"…그럼 1차 회의를 마치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문으로 먼저 나아갔고, 그 순간 기르고어는 마주했다.

전신을 로브로 감싼 괴한.

'너구나.'

소년을 저리 망가뜨린 외지인을.

문이 닫히는 짧은 순간, 외지인이 기르고어를 빤히 바라봤다.

* * *

1차 회의니 뭐니, 관심 없는 내용만 늘어놓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무장을 점검했다.

달이 기운다.

밤이 깊어져 세상이 어두워졌다.

암행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물었다.

"동선은?"

"내가 알려줄게."

기르고어가 보물고에서 들고 나온 스태프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내 눈앞에 이능이 서렸다.

푸른 마나가 영주성의 지도로, 초록색 선이 동선으로, 끝으로 붉은 점이 적들의 위치로 화했다.

나는 기르고어를 봤다.

'흑마법사였군.'

저주 탓에 본래 능력을 보는 일이 힘들어 그냥 두었건만, 섭혼 마법도 그렇고 이런 인지 변동 마법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저 스태프가 저주와 얽히며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확신하게 됐다.

흑마법사다.

대륙 전체에서도 몇 볼 수 없는, 지난 이종족 전쟁 때 멸종한 족속들.

'오래 살아서 그런가.'

보물고의 것들도 그렇고, 묘한 능력을 파고들 배경은 충분해 보이긴 했다.

예전이야 척살 대상이었다지만 뭐, 지금은 굳이?

그것은 태자도 마찬가지였다.

"흠, 흑마법은 이런 식이군."

그나마 베아트리스가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크지 않았다.

기르고어는 그런 반응을 흘려넘긴 채 말했다.

"지하층까진 조용히 가자. 아무래도 이그로시아 전역의 유력자들이 여기 모여있는 때니까."

"지상에서 들키면 싸움이 커진다?"

"그게 걱정된다기보단 걔들을 살리고 싶은 거지. 싸우면 죽일 거잖아. 너희."

부정은 못 하겠다.

하나하나 무력화시키겠다고 시간을 쓰는 중에 그 외지인들이 도망치면 낭패니까.

기르고어는 생긋 웃었다.

"일이 끝나면 도시를 재건해야 해. 그런데 걔들이 없으면 그게 귀찮아져."

"유념하지."

다 살릴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방을 나섰다.

복도가 비어있는 구간을 따라 조심스럽게, 메인 홀을 빗겨 움직여 지하 통로 앞으로.

"여기야."

"…하수도?"

"내가 여기 있던 당시에 만들어둔 구멍. 아는 건 나랑 꼬맹이… 라본 같은 내 직속들 뿐이야. 이젠 더 늘었겠지만… 꼬맹이 성격상 이런 뒷구멍을 만천하에 밝히진 않았을 거야."

망막 위에 떠오른 지도를 봤다.

확실히, 다른 곳보다는 덜하지만 경비가 배치되어 있긴 하다.

눈을 발동시켰다.

'이능적인 함정은 없다.'

하지만 물리적인 함정은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겠나.

비밀 병기를 쓰는 수밖에.

"페토."

부르자 놈이 와들와들 떨며 답했다.

"예, 옙…?"

"함정 찾아."

눈길을 돌렸다.

하수도의 입구.

대열의 가장 뒤쪽, 베아트리스의 등 뒤에 숨어있던 놈의 눈빛이 떨렸다.

* * *

이그로시아의 전 하야스 파.

현 쿨카란 파의 재간둥이 페토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 파벌이 물갈이된 이 시기에 간부진으로 승급하기 위해서 아양을 좀 떨었다.

특히 대장인 쿨카란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해서(아마 노인을 발견한 일 때문일 터다) 바로 핵심 간부진에 진입.

하지만, 그것은 분명 독이 든 성배였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고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다.

하루 중 뭘 했는지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는 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했지만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일수록 페토의 속에 의아함이 짙어졌었다.

그 일에 끙끙대던 어느 날, 페토는 진실을 알아버렸다.

정확히는 이들이 알려준 것이었다.

페토는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태, 태자. 태사. 차기 마탑주에....'

이그로시아의 진짜 주인까지.

자신의 주변에 있던 게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 줄 모른다.

고래 싸움에 끼여 등이 터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도망치려 했지만, 그것도 불가.

―너 섭혼 마법 걸려서 못 도망가.

도주는 곧장 실패했고 도움 요청도 불가했다.

영락없이 이 인간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페토는 이제야 돌아가신 아버지의 충고를 되새겼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

아아, 아버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괜히 권력 욕심을 부렸다가 낭패를 맞았습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지만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었다.

"함정이나 알람 같은 거 깔려 있는지 확인해 봐. 대충 하면 죽여버린다."

쿨카란인 척했던 태사, 유렌 파로스가 겁박했다.

페토는 다리를 오들오들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저 괴물들의 싸움에 끼여서 죽어버리게 되는 건가?

그런 공포심이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

'…아니! 아니야!'

페토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던가.

처세술의 달인, 이그로시아 말로 후빨의 장인.

이왕 날고 기는 인물들 사이에 끼인 참이다.

달리 긍정적으로 생각할 방도가 있지 않던가!

'이, 이건 기회야…!'

형님들에게 잘 보일 기회!

페토는 마음을 다잡았다.

뒷골목의 재간둥이 페토는 이제 없다.

'앞으로는 황실의 그림자 기사 페토…!'

오늘 밤, 신분 상승을 향해 나선다.

딸깍!

"형님들! 함정 하나 잡았습니다!"

페토가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더 이상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은 보이지 않았다.

058화. 관조자의 비수 (3)

녀석을 작전에 사용하기까지 여러 고민이 있었으나, 역시 이게 맞다.

"어이쿠, 여기 알람 함정이 있습죠! 바로 해체하겠습니다!"

'좀도둑' 페토.

회귀 전엔 그런 멸칭으로 불렸지만, 사실 부대원 모두가 알았다.

―저놈 눈깔 수상하지 않습니까?

―부관님 눈처럼 뭔가 특별한 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뽑아보죠?

―없어. 그만해 병신들아.

저놈의 관찰력은 이능 수준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내 눈으론 다른 벽돌과 똑같이 생긴 함정 벽돌일진대, 그걸 눈대중으로 찾아내곤 노련하게 해체한다.

그저 해체할 뿐만 아니라, 함정의 방식에서 다른 함정들이 어떻게 구성될지를 추론하고 예측해 연쇄적으로 길 자체를 해부해 버린다.

그 얼마나 출중한 능력인가.

심지어 안으로 갈수록 보이는, 몇 가지 이능이 섞인 함정 또한 그랬다.

"이건 접합부 마나를 살짝만 꼬아주면…!"

페토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회로를 건드렸다.

그러자,

철컥! 철컥! 철컥!

…일대의 이능 함정이 모두 무력화됐다.

태자가 탄성을 흘렸다.

"대단하군. 저 정도면 황실 비고도 뚫을 수 있겠어."

나는 그에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답했다.

'실제로 뚫었습니다.'

물론, 페토의 자의는 아니고 회귀 전의 태자가 시킨 일이었다.

뭐였더라, 대전사장과 싸움에서 검이 부러진 후에 명검을 가져와야겠다며 난리를 치더니 그 사달을 낸 게 아닌가.

그렇게 태자는 금고에서 검을 가져오는데 성공했고, 그게 태자가 마지막까지 들고있던 '성천검'이었다.

'그것도 들고 와야 하는데.'

태자의 '지배' 성질에 가장 어울리는 검이 그것이다.

하지만 황실 비고에 있는 검을 꺼내려면 태자 직위만으로는 안 된다.

그만큼의 위업, 그리고 제국 3대 귀족가의 직인이 필요하다.

'이건 방법을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

여하튼, 지금으로 돌아와 보자.

입구의 함정은 다 파훼 됐다.

페토가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명령, 완수했습니다!"

"어, 수고했어."

"충!"

이 새끼는 왜 갑자기 기사 흉내지.

입신양명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기르고어는 그런 페토를 잘 살피더니 내게 속삭였다.

"저거 데려갈 거야?"

"어, 안 줘. 데려갈 거야."

"쩝, 아쉽네."

이놈도 페토를 탐내는 것이겠지.

안타깝지만 내 회귀 전의 부하들은 찾는 대로 싸그리 다 내 밑에 둘 것이다.

이용방식을 잘 아는 것도 그렇고, 후반까지 살아남은 놈들은 하나하나가 전력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놈들이니까.

그런 중 태자가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공동인가?"

"응, 여기서부터는 공간이 커져. 아마 숨기 힘들어질 거야."

기르고어의 말대로였다.

망막에 떠오른 지도에는 이제까지의 좁은 통로나 복도와는 다른, 커다란 공간이 큐브처럼 얽혀 있었다.

대체 이 구조는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걸까.

생각을 해봤으나 몇백 년 전 일이니 내가 답을 알 도리는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것.

긴장을 돋우는 중이었다.

"전투 상황은 최대한 늦춰보자. 여긴 내가 나서볼게."

그렇게 기르고어가 한 발 앞으로, 문 앞에 섰다.

스태프가 탁, 바닥을 쳤다.

그러자 검은 마나가 운무가 되어 바닥에 깔렸고, 문 틈새로 스며들었다.

하나, 둘, 셋.

딱 거기까지 속으로 센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드리워진 광경에 태자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재웠군?"

"정신 간섭이 흑마법의 핵심이니까. 재우는 것 정도야. 어서 가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르고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웬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

안에 있던 수십의 인간들이 모두 식탁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 있었다.

확실히 유용하다.

그리 생각하면서 안으로 따라 걸었다.

페토는 어느새 내 뒤에 딱 붙어 조심조심 걷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어으, 왜 이렇게 서늘하지...."

페토가 팔을 비볐다.

그게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

"그, 태사님께서는 안 서늘하십니까? 닭살이 막 돋는데."

쭈굴쭈굴하게 말하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저놈이 겁을 먹었다'라는 게 내 오랜 경험적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다.

탈영 중독자, 도주의 달인.

이놈은 그렇게 불리는 놈이었고, 이놈이 상기한 사고를 칠 때마다 공통점이 있었다.

―봐! 도망치는 게 맞다니까! 부관 개새끼야! 이거 어쩔 거야아악!!!

적들에게 포위당하는 등의 위험 상황이 펼쳐졌다는 것.

우뚝 몸이 멎었다.

노파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식당을 돌아봤다.

"왜 그래?"

"잠시."

그렇게, 눈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전투 준비!!!"

"무스… 어?"

뿌드득―

태자의 멍한 목소리 뒤로, 잠든 비수들의 몸이 뒤틀렸다.

근육이 뒤집어지고 몸 밖으로 뼈가 튀어나온다.

그러다가 몸이 변형되었고, 끝으로 괴이가 만들어졌다.

꼭, 종족 변이의 술에 피폭당한 고깃덩어리 같은 그런 괴이가.

"이게 무슨...."

"상태 이상이 트리거다. 외부의 마나가 상태를 변이시키면 몸속에서 저게 발현하는 형태야."

눈으로 정보를 분석했다.

변이체들의 몸엔 웬 씨앗 같은 것이 심어져 그 뿌리가 전신으로 퍼져 있었다.

저들이 내뿜는 파동이 있었다.

그게 마침내 공간에 다 채워지자,

왜애애애애애앵―!!!

듣기 싫은 소음이 공간을 진동시켰다.

눈살을 찌푸렸다.

기르고어가 스산하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함정을 박아놨다고? 아이들 몸에?"

인정하기 싫다는 듯한 어조였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바뀌진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변장을 뜯었다.

"들켰어. 빠르게 뚫고 간다."

이렇게 된 거, 도망친 놈들이라도 확실히 잡아야 했다.

그리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이었다.

"제가 할게요."

베아트리스가 나섰다.

* * *

이그로시아 영주성의 심부.

법황청에서 도망쳐 나왔던 밀리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도주를 함께했던 페른과 고르딕도 마찬가지였다.

"아아, 짜증 나네."

로브로 전신을 감싼 꼴.

입매는 비틀어져 있었고 겨우 보이는 턱은 주름이 가득 잡혀있었다.

남자가 투덜거렸다.

"뭐 생각대로 풀리는 게 하나가 없냐. 하다하다 여기까지 치고 들어와."

적… 그러니까 태자와 태사가 이곳에 와버렸다.

변이체로 화한 비수들의 눈을 통해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기껏 익스퍼트가 나와서 기뻤는데 그게 저놈들일 줄은 몰랐지. 나한테 왜 이러냐고...."

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하나, 그가 풍기는 기세만큼은 도저히 아이라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빌어 처먹을 파로스. 그 새끼 때문이야. 애초에 그 새끼가 레베카만 안 죽였어도 이렇겐 안 됐는데."

"...."

"아, 그냥 전쟁하면 되잖아. 범죄자 새끼들이랑 제도랑 붙여놓으면 다 죽고 얼마나 좋아? 레베카만 살아있었어도 그걸 유도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 새끼가 하필…!"

꽈직!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졌다.

밀리 또한 그 의견에는 공감했다.

계획이 본격적으로 어그러진 것은 레베카의 죽음이었다.

칼리오스와 베아트리스가 현혹에 저항하는 시기.

대처하기 위해 남은 셋의 인지를 개변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악마에게 먹일 제물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한데 이게 웬걸, 레베카가 돌연 죽어버린 게 아닌가.

정확히는 역소환 된 게 아닌가.

이미 심어놓은 인지를 바꿀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악마를 소환하는 방법도 강구했으나, 그건 불가했다.

'…제물의 수가 모자랐다.'

첫 레베카의 생성에는 여러 호재가 있었다.

상황이 좋았고, 소환자가 좋았다.

하지만 두 번째는?

같은 요행을 바랄 수가 없었다.

한 번의 실패가 생겼으니 다음 제물은 10배를 구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전쟁에서나 뽑아낼 수 있는 비명과 절망을 수집해야 했다.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개변된 인지 내에서 뒤흔드는 것.

남자는 기르고어에게 복수심을 심어 전쟁을 유도하려 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하곤 실험이나 하고 있었다.

레베카를 '진짜 기르고어'라고 인식한 지금의 기르고어가 그의 방식대로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발이 묶인 상태였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 이 사건이 터졌다.

꼬리가 밟혔다.

그에 남자가 분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거기서 자살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여기까지 일이 커지지는 않았을 텐데."

궤변이다.

자신들이 오지 않았더라도, 베르헤임을 조사한 시점에서 꼬리는 밟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베르헤임을 죽이던가. 그랬으면 잘 포장해서 시간을 벌었을 거 아니냐."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가호를 잃었다곤 하나 성자다.

고작 첩보부인 자신들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단 말이다.

남자는 연신 징징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리는 눈을 꾹 감았다.

'…끝인가.'

남자의 성향을 잘 알았다.

저 제멋대로인 성정을 지독하게도 잘 알았다.

"야, 책임은 져라."

건들건들한 말투.

아이 같은 생떼.

그것을 걷어내면, 남자의 진짜 이름이 보인다.

"여기서 깔끔하게 죽어."

제7사도 히스터. 그는 교단의 심장 중 하나였다.

푸확!

세 사람의 머리가 터졌다.

히스터는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로브에 튄 피를 털어냈다.

"아아, 이제 어쩐다."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입구는 저놈들이 막고 있고, 다른 길로 가자니 나리가 계시고...."

까딱까딱 고개를 흔들던 히스터는 이내 그런 결론을 냈다.

"…싸워서 죽이는 수밖에 없겠네."

뒷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언젠가는 죽여야 할 놈들이었으니까.

아니, 이제라도 이그로시아에서 태자와 태사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고 비명과 절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히스터는 스스로 생각해낸 답에 흡족해하며 빙긋 웃었다.

* * *

베아트리스는 눈앞의 변이체들을 살폈다.

그리고 등 뒤로, 또 다른 방 너머로 움트기 시작하는 불쾌함을 느꼈다.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적은 이렇게나 많다.

하나하나 칼로 썰어 나아가기엔 너무나도 급박한 상황.

콰앙!

칼리오스와 기르고어가 달려드는 변이체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그간 준비한 것들을 보여 줄 수 있을 터라고.

도움이 될 수 있을 터라고.

"길 뚫을게요."

베아트리스의 물빛 머리칼이 되돌아왔고, 본래의 이목구비가 되돌아왔다.

그녀가 휘익, 로브를 걷어냈다.

민소매 복장이라 의수가 더 훤히 드러났다.

직후 안대를 풀었다.

그러자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없는, 다만 과녁처럼 보이는 표식 3개가 겹쳐있는 오른쪽 눈이 드러났다.

"할 수 있냐?"

유렌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아트리스는 내부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심부를 향해 의수를 뻗었다.

철컥! 철컥!

의수가 벌어지며 다시 조립됐다.

마공 기관이 겉으로 드러났으며, 손이 있던 자리는 웬 탄환의 사출구로 변했다.

팔 전체가 길쭉한 원통의 모양새가 되었고, 그 순간 베아트리스가 영창했다.

"충전."

키이이잉―!

마공 기관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그 순간 베아트리스의 어깨에서 노을색의 빛이 일었다.

베아트리스는 의안으로 마나와 노을빛의 비율을 맞췄다.

이 마법을 연마할 적, 로나에게 들었던 말들을 되새겼다.

―악마에게 침식당한 부위는 마나가 순환하지 않아요. 악마의 마력이 마나의 흐름을 막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걸 다르게 이용할 방법이 하나 있지요.

이것은 세상에서 자신만이 가능한 마법이자, 장애를 무기로 쓰는 마법이었다.

―악마의 마력을 대기 중의 마나와 충돌시키면 이는 현상이 무엇인 줄 아나요? 바로 에너지의 발생이랍니다. 그걸 이용하는 거예요. 의수로 외부에서부터 마나를 끌어와 악마의 마력에 접촉시키고… 그 에너지를 잠시 붙잡은 후 일제히 사출시키는 거죠.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죠. 당신은 마나 감응도가 유달리 뛰어난 편이니. 다만 위계 밖의 마법인 만큼 화력은 당신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악마의 마력이 마나와 충돌했다.

그것이 마공 기관의 마력을 한계까지 충전했다.

베아트리스는 에너지를 바로 쏘아내지 않았다.

몇 차례 공정을 더 거쳤다.

타격 부의 충격을 강화시키는 '관통'.

적을 탐색해 요격하는 '추적'.

빗맞아도 무력화 시킬 수 있도록 '폭발'.

그 외의 여러 마법적 처리를 이어갈수록 마공 기관은 더욱 빠르게 돌았다.

단 한 발에 몇십 가지의 마법을 엮어 터뜨리는 광역 분쇄 기술.

그것이,

"매직 미사일."

―――――!

공간을 일자로 가로질렀다.

빛이 눈을 멀게 했다.

강한 마력의 파장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억압해 짓눌렀다.

팔이 덜덜 떨렸다.

마공 기관이 과부하 상태에 도달했다.

철컥―!

마공핵이 튕겨져 나왔다.

베아트리스는 그 자리에 새로운 마공 기관을 삽입했다.

그쯤 빛이 잠들었다.

유렌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

드리워진 시야, 마법을 사출한 방향에 있던 벽들이 모두 허물어져 공간의 끝까지 길이 뚫렸다.

하나, 궤도 밖에 있던 생명체들은 아직 건재했다.

베아트리스는 재차 마법을 장전하며 말했다.

"가봐요. 남은 것들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

키이이잉―!

마공 기관이 다시금 빛났다.

059화. 밤은 요람이 되어 (1)

한순간에 길이 뻥 뚫려버린 상황.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었고, 달리는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이 깃드는 일이었다.

'역시 천재는 천재라는 건가.'

태자야 이제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황금 세대의 기수다.

하나하나가 전력으로서 가진 가치는 이다지도 특출난 면이 있었다.

이 정도 능력의 마법사라면 앞으로의 전투에서 얼마나 더 활약하게 될까.

그런 감상이 떠올랐으나, 이내 털어냈다.

상상력이나 발휘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부탁한다."

"네."

키이이잉―!

베아트리스의 의수가 빛났다.

찌이이잉―!

이번엔 전과 다르게 빛줄기가 사방으로 나뉘며 개체 하나하나를 요격했다.

나는 그걸 뒤로한 채 태자와 기르고어에게 말했다.

"달립시다."

"알겠네."

쿵!

뻥 뚫린 길로 내달렸다.

사이사이 살아있는 변이체들이 우리를 공격해왔지만, 하나둘 정도도 못 걷어낼 정도로 우리가 약하지 않았다.

푸확!

빠르게 쳐내며 층의 끝까지.

그리고 구멍 아래 다음 층으로.

속에 조바심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사고를 쳐버렸다면 상대 측도 이젠 대비를 할 터.

그럴 시간을 주지 말아야 했다.

태자도 같은 생각이었다.

"좀 실례하지."

"엇."

태자가 기르고어를 들쳐 멨다.

기동력이 확보되자 우리는 더 빠르게 나아갔다.

그렇게 아래로 내내 향하던 중이었다.

우리의 걸음이 멈췄다.

"갈림길이네."

"예."

최심부, 길은 양옆으로 퍼져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함께 움직인다?

아니, 낭비다.

"제가 혼자 가겠습니다. 전하께선 그놈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까.

정답은 눈이 알려주었다.

'…뭐야 이건.'

길의 왼쪽.

이질적인 이능 하나가 거대하게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이는 절대 저주나 흑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도망을 포기했다?'

그리고 전투를 결심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나는 헛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제가 왼쪽입니다."

"무언가 보이는 게 있나?"

"예, 대충."

그리 답하자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그럼 나중에 봅세."

"예."

꽈아아앙―!

태자가 오른쪽 벽을 부쉈다.

그 속으로 보이는 것은 변이체와는 다른, 비수의 간부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태자가 검을 뽑아들었다.

기르고어가 스태프를 꼬나쥐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나도 전투를 준비해야겠지.

주머니가 열렸다.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 있었다.

붉은 검신의 톱날 검과 갈기가 돋아있는 바람 늑대의 망토.

고민 끝에 선택한,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대전사의 무구들이었다.

* * *

칼리오스는 마나를 풀어헤치며 눈앞의 적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리하며 물었다.

"죽여도 되나?"

"...."

"대답이 없군. 그런 것으로 알겠네."

기르고어를 흘긋 바라보자 얼굴 위로 표정이 사라져있었다.

음울함이 눈동자를 먹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직접 키운 집단이 비행을 저지른다라.

칼리오스는 위정자로서 그 일이 비통함을 이해했다.

다만, 그 감정이 깊지 못한 것은 칼리오스의 오만이 있는 까닭이었다.

"너무 속상해 말게. 내가 바로 잡아 옳은 지도를 해줄 터이니."

칼리오스가 본 기르고어는 꽤 뛰어난 인재였다.

괜한 것에 홀려 천지분간 못 하던 베아트리스나 베르헤임을 보니, 상대적으로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아는 그가 나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랫것들을 다루는 일에서 본다면 글쎄.

정치력은 영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리오스가 그였다면 절대 비수를 개인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나아질 거란 기대나, 뛰어난 하나에 의해 발전할 것이란 기대를 아예 않았을 것이다.

'여러 집단을 경쟁시켜야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했다면 지금보단 나았을 걸세.'

누가 지도해도 자신만 못할 것을 안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의 뜻을 동경하는 자들을 여럿 만들어 그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해 돌아오는 날까지 현상을 유지하게 하였을 것이다.

기르고어는 그러지 않았다.

아랫것을 향한 믿음이 과했고, 그게 이 일방적인 비행.

그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쳐라!!!"

비수가 짓쳐 들었다.

그에 칼리오스가 발을 굴렀다.

쿠우웅―!

마나가 공간을 짓눌렀다.

그 속에서, 칼리오스가 출수했다.

푸른 마나가 공간을 일자로 그었다.

푸확―!

핏물이 튀겼다.

독기를 품고 있던 비수들의 눈동자에서 생명이 스러졌다.

그나마 막은 것은 익스퍼트급에 도달한 적들.

하나, 그들도 위압감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뭘 놀라고 있나. 자네들이 저열할 뿐인 일이네."

칼리오스가 검을 역수로 쥐었다.

제국 검술 폭풍식, 검의는 깨우치지 못했다지만 다수의 적을 빠르게 몰아칠 때는 이만한 것이 또 없었다.

"자, 빨리 끝내지. 잡졸하고 놀아주기엔 내 갈 길이 바쁜 터라."

그렇게,

쿠과과광!!!

마나의 폭풍이 공간을 휩쓸었다.

* * *

기르고어는 꽤 이상한, 그리고 익숙한 냉정함 속에 있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비정함이라 해야 할 감정이었다.

눈앞에서 직접 키운 비수들이 죽어나감에도 기르고어는 비통함을 느끼지 않았다.

저들 하나하나가 이름과 얼굴을 아는 자들임에도 그저 지나가는 낯선 자들처럼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아마도, 저들이 기대를 배신했기 때문일 터다.

너무 오랜 세월 자신을 위해 살아온 기르고어는 직접 일군 것에 애정이 아닌 소유욕을 느꼈으며, 그것이 배신당한 순간 저들에 대한 감정까지 접어버린 것이다.

그런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서야 기르고어는 인정했다.

'아.'

직접 일궜던 약자들의 울타리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은 비수의 탈을 뒤집어쓴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기르고어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을 동정했다.

다만 죄의 경중을 나누곤 살려서 저들을 다시 쓸 생각을 했던 본인이 안타까웠다.

쿠구궁!

칼리오스의 출수에 비수들이 또 쓸려나갔다.

그 순간 기르고어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제 됐어."

기르고어의 말에 칼리오스가 멈췄다.

비수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림자 속에 있었으나, 지금 살아남은 이들은 비수의 핵심 간부들.

자신을 알아보곤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제정신이구나."

그렇다면 저들의 죄는 소년보다 깊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구나. 누구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

이유가 뭐였을까.

생존욕? 개인의 영달? 타고난 사악함?

무엇이든 상관없다.

저들은 비수가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잃었다.

"나는 너희가 약자였기에 그 자리에 세워준 거야. 그런데 이게 뭐야."

누구보다 비참할 줄 알기에, 가장 쓰라린 배고픔을 알기에.

그렇기에 모르는 이들보다 밑바닥을 잘 보리란 생각에 저들을 그 자리에 세워준 것이었다.

한데 어찌 인간은 이리도 이중적인가.

더는 배고프지 않은 이들은 배고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젠 비참하지 않은 이들은 타인의 비참함을 외면하려 들고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고장 났다.

기르고어는 비수라는 부품에 대해 그런 판결을 내렸다.

기르고어의 눈이 감겼다.

"물건이 고장 났다면 제작자가 책임져야지."

"호오."

기르고어가 쓰게 웃자 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마나를 거뒀다.

직후였다.

탁―

스태프가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기르고어의 몸에 얽힌 저주가 스태프와 감응했다.

우우웅―

옅게 진동이 일었다.

그런 직후였다.

"끄헉…!"

그림자가 땅 위로 솟아 살아남은 비수들의 목을 죄었다.

기르고어는 말했다.

"업의 족쇄야. 너희가 해친 것의 무게만큼 강하게 목이 조여올 거고...."

탁―

한 번 더 스태프로 바닥을 찍자 이번엔 검은 운무가 그들의 몸을 삼켰다.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수들의 살점이 운무에 갉아 먹혔다.

"끄아아아악!!!"

"이건 내 실망감. 이왕이면 고통스럽게 죽어. 하나만 더하자."

세 번째로 스태프를 찍자 비수들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이건 착란이야. 너희는 배고픈 순간으로 돌아가 죽게 될 거야."

"아아아악!!!"

단 세 번.

흑마법을 발휘한 횟수는 겨우 그 정도였고, 그것만으로 비수들은 확정된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기르고어는 말했다.

"가자. 저 끝에 그 아이가 있을 테니."

비명이 노랫소리처럼 어우러졌다.

그 한가운데서 기르고어는 모든 것에 무관심한 채로 칼리오스를 바라봤다.

이는 칼리오스의 흥미를 얼핏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으음."

칼리오스가 말했다.

"자네는 꽤 쓸만하군. 결단력이 보기 좋네."

그것은 기르고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 * *

나는 빠르게 달렸다.

그리하며 기르고어에게 얻어낸 무구와의 '동기화'를 시작했다.

'이게 불편하단 말이지.'

고위 아티팩트는 무구 자체에 얽혀 있는 마나의 결이란 게 있었다.

그 결은 무구의 등급이 높을수록 더욱 촘촘하게 발현되는 편이며, 그런 이유로 상위 무구는 꽤 오랜 시간을 써서 사용자와 마나를 동기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톱날 검은 그나마 쉬웠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싸웠던 놈의 무기인 만큼 무구에 대한 파악이 이미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람 늑대의 망토였다.

'이런 구조였군.'

망토는 그 자체가 방어막이 되는 일반 망토 아티팩트와 다르게 무언가의 매개체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효과는 알았다.

망토와 동기화한 사람의 마나가 늑대의 형상으로 화해 의지를 가진 채 적에게 달려드는 형태였다.

회귀 전에는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영 의아함이 있었는데, 그 의문이 이제는 밝혀지고 있었다.

'정령이 깃들어 있었나.'

망토에 정령이 깃들어 있었다.

속성이 없는, 그런 이유로 사용자의 속성을 빌리는 기이한 정령이었다.

동기화는 꽤 귀찮았다.

그걸 어떻게든 해낸 직후였다.

시험 삼아 늑대를 하나 뽑아봤다.

휘이이―

바람으로 이뤄진 늑대가 나와 함께 뛰었다.

대전사가 부릴 때와는 조금 형태가 달랐다.

조금 더 삐죽삐죽했고, 발톱이나 이빨이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이걸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민은 하지 않았다.

"물어."

말한 순간이었다.

꽈아아아앙―!

벽을 뚫고 나타난 놈이 있었다.

하지만 늑대에겐 내 명령이 선입력되어 있었다.

[커흥!]

늑대가 놈의 검을 물어 공격을 막았다.

나는 놈을 바라봤다.

"아핫! 들켰네?!"

전신을 로브로 감싼 행색.

아주 반갑다.

"이제야 잡았네. 개 같은 새끼."

"숨바꼭질은 재밌었어?"

"재밌긴 새끼야."

잘도 숨어다녀서 찾느라 진이 다 빠졌다.

놈이 늑대를 쳐냈다.

나는 신목을 들어 놈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놈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내 눈이 좁아졌다.

'역시.'

처음 복도에서 저놈의 이능을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의아함이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도대체 왜 제국을 노리는 놈들이 저 이능을 수여 받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놓고 생각하면 답은 뻔히 보였다.

"신이 인간을 버렸다. 그게 맞는 건가?"

"아아, 파로스. 역시 거치적거리네. 이래서 들키기 싫었는데."

꽈아아앙!

검과 맞닿은 상태로 마나를 터뜨렸다.

로브가 휘날리며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갈색의 머리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깐죽거리는 표정, 그리고....

'…금안.'

깊은 신성력의 상징이 놈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 눈은 그 너머를 봤다.

놈이 검에 힘을 더한다.

그리하며 무언가 이능을 발한다.

나는, 저게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가호가 거기에 가 있었구나."

"운명께서 함께 하시니."

운명의 신성, 그리고 베르헤임이 잃었던 가호. 그걸 이놈이 들고 있었다.

휘릭―!

미증유의 힘에 내 검로가 뒤틀린다.

가호에 의한 강제성이었다.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놈이 그곳을 찔러 들어오려 한다.

생각은 이어진다.

왜 운명의 신이 흑막 놈에게 가호를 주었는가.

그렇다면 법황청의 교단은 대체 뭔가.

또한 파로스를 아는 이유는, 이 눈을 아는 이유는 또 뭔가.

수십 가지 생각이 몰아쳤지만 당장은 지워냈다.

"패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이길 수는 있고?"

"당연한걸."

신목만 있었다면 조금 귀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그 외에도 쓸 만한 무기가 많았다.

신의 가호, 상위 차원에서 직접 수여하는 권능.

하지만 말이다.

"결국 이능 없으면 좆도 아니잖아. 너."

키이잉―!

눈의 마법이 발동됐다.

안구가 타들어 가고 뇌가 짓이겨지는 느낌.

하지만 그 대가는 확실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놈에게 서린 압도적인 존재감, 그 어딘가의 타점이 보였다.

신적인 존재라 하여도 결은 존재하는 법이니.

톱날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그걸 휘두르자,

까가각―!

"끅…?!"

톱날검이 가호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060화. 밤은 요람이 되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