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저물지 않는 노을 (4)
처음엔 보이지 않았다.
마법이 아닌 어떤 술수라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악마가 손을 휘저은 후 갑작스레 마나의 통제가 빼앗기니 당황스럽기만 했다.
확실한 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악마들의 사용하는 고유의 무언가였겠지.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런 중 변화가 있었다.
'회초리.'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회초리에 마나를 불어넣으니, 눈이 저 악마의 '결'을 보여준 게 아닌가.
흐릿했다.
또한 모양새도 다른 결과는 달라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결론만 말해 그 또한 '결'이었다.
[꺄아아아아악!!!]
악마가 뿔이 떨어진 자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주변의 마나가 일렁이며 땅거죽을 뒤집는다.
비명이 영혼을 긁어대는 기분이다.
그에 시선은 절로 손에 쥔 회초리로 갔다.
'대체 뭐하는 물건이야?'
단단한 것 말고는 특징이 없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이건 '눈'에 감응하는 물건이었다.
'초대 파로스?'
그 이름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다시 악마를 봤다.
'당장 저놈부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 넣었으나, 내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일은 요원했다.
그저 한 번이면 망가져 버릴 몸을 조금 더 붙잡아주는 수준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의에 오러까지 썼으니 안 죽은 게 용하지.'
6위계의 마법을 쓰는 놈이다.
상대하기 위해선 오러가 필요했고, 준비되지 않은 육신으로 자아낸 오러는 내 몸까지 함께 갉아 먹었다.
거기에 검의까지 더하니 근육과 관절이 갈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입 안에 핏물이 고였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피를 삼키며 말했다.
"···다시 간다."
[잠깐! 잠깐만!]
쾅!
발을 디뎌 순식간에 악마의 코앞까지 갔다.
악마는 마법을 발했다.
급했던 건가.
전처럼 기이한 결은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마법이라면 더욱 쉽지.
채앵!
피하고, 베고, 반사했다.
그 모든 것을 다시금 악마가 파훼한다.
난전이었다.
꽈과과과광!
정원은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내 호흡도, 시야도 흐려진다.
하나 정신만큼은 붙잡는다.
그것이,
―전장에 나선 기사가 눈을 감는 건 죽을 때뿐이라네.
내가 보고 배운 것인지라.
꽈아아앙―!
꽃봉오리 형태의 장막을 깨부순다.
안력에 힘을 돋운다.
회초리에 마나를 두른다.
―――――!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세상이 느리게만 보였다.
요령은 차츰 익숙해져 간다.
내가 뛰어난 이유가 아니었다.
'닮았어.'
회초리와 눈을 연결하는 기전은, 놀랍게도 '검의'의 사용법과 지극하게 닮아있었다.
그리하여 눈과 무기에 의지를 담는다.
검식에 강제성을 부여한다.
숨을 들이쉬었다.
'죽인다.'
아니, 떼어낸다.
저 악마와 베아트리스를.
그리 의지를 다잡는다.
'···보였다.'
희뿌연 안개가 되어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 노을빛의 색, 개중 유독 붉게 타오르는 결.
'팔, 뿔, 날개.'
악마에 완전히 집어삼켜진 세 부위.
뿔은 날렸다.
날개와 팔이 남았다.
이 자세로는 팔을 벨 수 없다.
너무 가까웠고, 저 팔은 이미 뻗어 나와 내 목을 향하고 있었다.
'회피.'
악마를 뛰어넘었다.
훤히 드러난 등, 날개가 돋아난 접합부를 본다.
그렇게,
쩌억―!
[꺄아아아악―!]
날개를 베어냈다.
팔 하나가 남았다.
* * *
베아트리스는 이를 악물어 신음을 참아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말 한시라도 방심한다면 이대로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다.
아직 멀쩡한 왼쪽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찐득하고 축축한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포기하고 싶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편해질까 싶었다.
하나, 그리할 수 없었다.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므로.
베아트리스는 이 전투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방관자라는 입장은 드러나지 않은 정보까지도,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주었다.
악마가 고통스러워한다.
이 위기감은 분명 유렌의 수가 효용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악마의 눈과 시야를 공유하기에 아는 것이 있었다.
'회초리.'
[신목이 하계에 왜 있는데!!!]
저 회초리는 신목이라 불렸다.
그리고 정신이 동화되어 함께 느끼길, 악마는 저것에 께름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유렌은 분명, 악마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다.
베아트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처음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승리를 점칠 수 없었다.
그저 절망스러웠고, 죄악감이 들었다.
물론 죄악감만은 여전하다.
하지만, 절망만큼은.
'나 하나로 끝낼 수 있어.'
이 목숨 하나를 버리는 것만으로 끝낼 수 있었다.
그 감정이 이윽고 육신의 통제력을 회복시켰다.
절망을 먹고 살아 악마, 그렇기에 희망이 나타날 때면 그 강제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진저.
우우웅―!
악마의 팔이 마법진을 자아냈다.
베아트리스는 돌아온 통제력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
하나, 억눌렸다.
"끄윽···!"
[좀! 너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안 되겠니?!]
악마의 짜증 서린 말이 이어졌다.
베아트리스는 귀를 막고 저항을 이어갔다.
그녀는 변명에 익숙지 않았다.
스스로 행한 일을 변명하기보단, 그저 목숨으로 그 죄를 책임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버티는 이유였다.
'죽어, 같이.'
[하! 난 안 죽거든?]
그래, 외차원으로 돌아갈 뿐이겠지.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닐 터다.
'영체에 타격을 받겠지. 신목이니까···!'
[······!!!]
'네가 말했잖아? 정신이 얽히고 있다고.'
악마의 근본적 위기감은 저 회초리에서 나온다.
저것으로 얻은 상처는 영체에 새겨진다.
물론 악마는 초월체다.
이것만으로는 어떤 심각한 위해도 얻을 수 없으나, 적어도 악마의 영혼엔 작지 않은 상처가 남아 그를 치유할 시간이 필요해질 터다.
[웃기지 마!!!]
꽈아아앙!!!
마나와 악마의 힘이 융합했다.
어떤 규칙도, 배열도 없이.
그저 힘 자체를 폭사시켜 일대를 휩쓸어 버리려는 수였다.
하지만,
턱!
"잡았다. 이 개새끼."
유렌은 그를 몸으로 받아내며 공간에 뚫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그를 쳐내려는 악마의 손목을 잡아챘다.
양발로 베아트리스의 배와 목을 밟았다.
회초리가 겨드랑이 아래에 닿았다.
악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진짜 잠깐. 잠시 얘기 좀···.]
"꺼져."
빠지지직!!!
[아아아아아악!!!]
또다시 마나가 회초리 위를 둘렀고, 유렌이 쿨럭 피를 토했다.
하나 유렌은 멈추지 않았다.
실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 뜬 채로, 흉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오러를 자아냈다.
그 순간 베아트리스는 직감했다.
'···끝.'
유렌이 읊조렸다.
"가라."
뿌드드득―!
오러에 짓이겨진 어깨가, 그대로 유렌의 힘에 뽑혀 나갔다.
버틸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 베아트리스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이런, 미친···.]
베아트리스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그러했다.
쩌저적―!
검은 핏물이 공간을 수놓는다.
그 뒤로, 붉은 하늘에 금이 가며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별.'
깨진 하늘 뒤로는 밤하늘의 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별이 너무나도 눈부신 밤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울먹거리며 달려가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 꿈이구나.'
단번에 알 수 있었고 그 상태로 이어지는 일을 관조했다. 스스로의 의지는 없었다.
악마에게 몸을 빼앗겨 있던 직전처럼,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시점인지는 이윽고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때다.'
3위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최연소 4위계에 도전할 인재라 평가되며 그만큼의 질시를 받았던 때.
그때의 자신은 너무나도 어렸고, 세간의 압박은 무거웠다.
특히 마탑이나 가족들의 기대가 더욱 그랬다.
―증명해야 한다. 그게 마법사란다. 베아트리스, 4위계를 넘어야 해. 범부의 벽을 넘지 못한다면 넌 그저 특이했던 역사의 한편으로 끝나고 말게다.
―베아트리스! 길푸어의 영광이 네 어깨에 달려 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다오!
―대단해! 너는 분명 역작이 될 게다! 다음 시대는 분명 너의 시대일 게야!
모두가 말했다.
4위계를 넘어야만 한다고.
마법사로서 위대해야만 한다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다른 영애들이 교양을 공부할 시간에 마법을 익혔으며, 새로운 옷을 원할 때 새로운 마도서를 빌렸으며, 산보를 나갈 때 마탑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하지 않는 모든 순간, 주변에서 쏘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이 너무 무서웠던 까닭으로.
―결국 어린아이인가.
―아아, 결국 천재의 편린만을 가진 게로구나.
―베아트리스, 제발···.
무엇을 원동력으로 하는지도 몰랐다.
마법은 더 이상 재밌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기계적으로 그것을 수행했다.
하나, 마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곪아가던 마음은 어느 순간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렸다.
그것이 숨통을 틀어막아 도망치고만 싶었다.
한데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집도, 거리도, 마탑도.
모든 곳이 사람들 투성이었으며 그중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리하여 베아트리스는 아무도 없을 장소를 찾아냈다.
그곳이 바로 마탑의 천장.
마탑주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천상 정원이었다.
도망쳐 온 곳은 숨통이 트였으나, 가슴은 여전히 아려왔다.
눈부시게 빛나는 별들 하나하나가 다 누군가의 시선 같아서.
찬란함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역겨워서.
그리하여 엉엉 울어버렸다.
그런 때였다.
―어머, 왜 울고 있나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후후, 가시에라도 찔렸나? 이리 봐요. 이 정원의 장미는 가시를 손질하지 않아 다칠 때가 있거든.
베아트리스는 꿈을 유영하던 중,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뒤틀렸던 기억의 조각이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타, 탑주님···?
―그래, 베아트리스. 우리 작은 보물.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언제나 고깔모자를 쓴 채로 호호 웃는 동화 속 마녀 같은 인자한 할머니.
너무 바빠 탑에는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던, 그런 사람.
―많이 힘들었나 보군요.
이 사람이었다.
주름진 손으로 뺨을 어루만져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이리와요. 괜찮으니까.
그리 자신을 끌어안아 준 사람은.
―무엇이 그리 슬프던가요?
그 물음에 무어라 답했더라.
···그래.
―그, 그러니까. 히끅···.
엉엉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매달렸다.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가 되어 하소연을 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했고, 그에 탑주는 그런 답을 했다.
―괜찮아. 못해도 괜찮아. 제가 옆에 있잖아요. 지금은 울어도 돼요.
그 말이 위로였다.
그리도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을, 시선들을 가려주던 고깔모자는 탑주의 것이었다.
안아준 온기도 그녀의 것이었고,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건 그 손길이었다.
베아트리스는 그것을 이제야 깨달아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이조차도 잊고, 그녀가 일궈온 모든 것을 부숴버리려 했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겨우··· 겨우 현혹 따위에 걸려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에 자괴감이 차올라서.
그녀를 볼 면목이 없어서.
"······."
베아트리스는 눈을 떴다.
밤하늘은 꼭 그날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쪽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한쪽 팔에도 감각이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팔이 뽑힌 자리엔 찢긴 천으로 지혈이 되어 있었다.
"이제 일어났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렌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몸, 그리고 거친 숨.
그럼에도 어딘가 긴장이 풀린 모습.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아, 끝났구나.'
안도, 그리고 회한.
그에 이제야 종지부를 찍을 때임을 실감하며, 베아트리스는 말했다.
"죽여줘요."
차라리 죽음으로 값을 치러야 하리라.
하나, 돌아온 말은 그랬다.
"누구 맘대로 죽니 마니 하고 있어?"
베아트리스가 흠칫했다.
유렌은 짜증스럽게 말을 더했다.
"야, 똥 싸질러 놓고 남한테 치우라는 건 뭔 경우냐?"
비수가 가슴을 푹 찔러 헤집었다.
< 저물지 않는 노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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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베카 (1) >
#031화. 레베카 (1)
베아트리스의 눈빛이 떨렸다.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나, 그 이상의 말은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지어내는 것보다 유렌의 힐난이 빨랐다.
"악마 소환이 금기로 치부되는 건 소환 당사자인 네가 제일 알 테고, 자칫하면 이 소환 하나로 제도가 쑥대밭이 됐을 것도 잘 알 테고. 그거 막았더니 뭐? 죽여달라? 이게 말인가?"
유렌의 콧등 위로 주름이 잡혔다.
"그냥 책임지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 아닌가? 편해지고 싶은 거잖아."
"아니··· 크흡···!"
벌떡 일어나 반박하려던 베아트리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녀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눈빛엔 억울함이 맺혔다.
하나, 유렌은 그런 것에 흔들릴 정도로 정이 많은 성정은 아니었다.
"맞잖냐. 걸리면 사형? 당연하지. 그걸로 끝난다면 그래, 여기서 죽여줄 수 있어. 그런데 마탑은? 네가 싸지른 똥 때문에 건국제 날 이 사달이 난 제국 위신은? 그건 누가 책임지는데. 죽은 네 무덤이라도 파헤쳐? 그걸로 문제가 해결되나?"
하나하나,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베아트리스도 알았다.
금기는 인간만의 금기가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지 않는 모든 종족의 금기였다.
그들이 이 땅에 일으킨 혼란의 역사가 금기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자신은 그것을 소환하려 들었고, 실제 소환해 사고를 칠 뻔했다.
자칫했으면 건국제를 찾아 이곳에 온 이종족 귀빈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을 것이다.
막은 것?
기적이다.
유렌의 기이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설령 소드 마스터인 드레노어 경이 왔어도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었을 터다.
그걸 알기에 어떻게든 목숨으로 책임을 지려 했다.
그게 틀렸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럼 제가 어떡하나요?"
책임은 어찌 지란 말인가.
그것은 얼핏 반발로 보일 법도 한 질문이었으나, 베아트리스의 표정이 그것이 답을 향한 갈망임을 보여줬다.
유렌은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리곤 말했다.
"살아서 갚아야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말이었다.
"살아서 갚아. 네 생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네 손으로 망가뜨리려 했던 것들을 악착같이 지켜. 그렇게 제국을 위한 삶을 살아."
"당신은···."
"뭔 죽느니 어쩌니 하고 있어. 그거야말로 도망치는 거지. 전쟁터에서는 말이야. 자살하는 놈이 도망치는 놈이야. 끝까지 적진 한가운데로 돌격해서, 적군 모가지 하나라도 더 따서 저승길 길동무로 삼는 걸 책임감 있는 놈이라고 하고."
쯧, 유렌이 혀를 찼다.
기이했다.
그저 비유라고 하기에 저 말은 꼭 자신이 겪은 일을 전하는 말 같았다.
하나, 그런 감상보다 우선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이미 죄를 저질렀잖아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유렌은 살아서 갚으라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입장에서 그것은 저지른 일을 외면하기 위한 그럴 듯한 면죄부일 뿐이었다.
행한 일에 대한 죄악감이 좀처럼 지워지질 않는단 말이다.
하여 건넨 질문에 유렌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답했다.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네?"
"머리가 맛이 좀 갔나? 야, 묻자. 악마 소환으로 죽은 사람 있어?"
"···!"
"다친 사람은 있고? 아, 내가 다치긴 했는데, 그건 빼고. 고작해야 밑에 있는 인간들 잠든 게 끝 아닌가? 그 인간들은 네가 악마 소환한 거 알긴 해?"
"그건···."
베아트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유렌이 코웃음을 쳤다.
"모르네. 그럼 이 일 제대로 아는 거, 나밖에 없다는 말이잖냐."
그제야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악마와 융합하며 고통에 절여져 있었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환 직후부터 내내 그런 상태였기에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소환되었고, 버텼고, 유렌이 악마를 쫓아냈다.
그 말인즉슨,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멍하던 베아트리스는 이윽고, 그런 반응을 토해냈다.
"하, 하하···."
차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그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아껴본 적이 없음에도 살아있다는 것에 너무나 큰 감사함이 몰려왔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눈이 타들어 갔음에도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끄흡···!"
하나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이 질끈 감겼다.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것이 손 틈새로 삐져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중얼거림에 가깝게 덜덜 떨며 그런 말을 토해냈다.
"죄송··· 감사···."
너무 많은 것이 미안했다.
더불어 길을 바로잡아준 유렌이 더없이 고마웠다.
자신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도 감사했다.
유렌은 쇳소리 섞인 기침을 흘리며 그동안 침묵을 지켜줬다.
그런 이후였다.
"그래도 잊지 마."
"끄흐···."
"난 다 알고 있어. 네가 저지른 일. 저지를지도 몰랐던 일. 그리고 그 일을 막느라 내가 한 고생까지."
유렌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실질적 피해자는 나야. 그러니까 넌 나한테 빚진 거라고."
시선이 마주쳤다.
베아트리스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앙 물었다.
"···아, 말이 안 나오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 까라면 까고 죽으라면 죽어. 그게 제국을 위한 거고 네가 저지른 일을 사할 방법이야."
그리도 험악한 말을 한 주제에 유렌은 독기가 빠진 얼굴이었기에.
왜인지 원망이 없는 기색이었기에.
"알아들었냐?"
베아트리스는 끝끝내,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내지 못하고 답했다.
"···네."
그의 말대로, 몇천 마디 말과 몇만의 금화로도 다할 수 없는 빚을 져버렸다.
그리하여도 모자란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그런 사실을 알기에 저 말에 저항하지 못하리라.
눈물이 좀처럼 멎지 않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무너진 천상 정원의 출입구를 부수며 나타난 남자가 있었다.
당혹, 그리고 땀으로 절어 있는 금발의 잘생긴 사내.
그를 본 순간 유렌이 혀를 찼다.
"참 빨리도 오십니다."
칼리오스였다.
그는 천상 정원의 몰골을 보다, 이내 황망한 표정으로 유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건네는 말.
그에 유렌은 답했다.
"악마 소환의 전조를 봤습니다. 그래서 소환을 막았습니다. 저랑···."
유렌의 손가락이 베아트리스를 가리켰다.
"···이 여자랑."
흠칫, 소환의 당사자이면서도 영웅 취급을 받게 된 베아트리스가 몸을 떨었다.
칼리오스는 그제야 그녀를 발견하고 탄식을 흘렸다.
그러다가, 주먹을 꽉 쥔 채로 떨며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늦었군."
"그건 또 아십니까?"
"미안하네. 하던 일을 미루고 곧장 달려왔건만···."
"예예, 그러다 공사 다 망하십쇼. 드레노어 경이라도 보내주지 원."
"···보냈네. 경은 밑에서 쓰러진 마법사들을 살피고 있네. 그들에게 신경이 팔려 옥상까지 흔적을 못 본 듯해. 시야가 넓은 사람은 아니니."
"망할 아저씨네 진짜."
"···몸은 괜찮나?"
"됐으니까 일으켜 주십쇼. 갈 데 있으니까."
칼리오스가 비통한 표정으로 유렌을 일으켰다.
무언가 정리되어가는 상황.
유렌이 떠나려 한다.
그를 깨달은 순간에야, 베아트리스는 감정에 복받쳐 자신이 전하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자, 잠깐!"
레베카.
그녀에 관한 걸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했다.
하지만,
"레베···."
"알아."
돌아온 답은 베아트리스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이젠 알겠어. 내가 병신이었던 거."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살의.'
말을 내뱉으며 유렌이 뿜어내는 기운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살의에 차 있었다.
* * *
몸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다.
남은 마나를 어떻게든 그러모아 그런 몸을 회복시켰다.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태자의 마나를 빌렸다.
목걸이의 치유력, 거기에 태자가 휴대하고 다니는 포션까지 마시니 과연 몸이 싸울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됐다.
그런 과정에서 떠올린 생각이 있었다.
'역시 말이 안 돼.'
암만 생각해도 그 평민 계집에 관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이 안 됐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그냥 여자 탓에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구나.
그리고 태자와 가까워진 이후엔 생각했다.
그 여자가 사술이라도 쓴 게 아닐까 하고.
회귀 후엔 생각했다.
그 여자에겐 뭐라도 수상한 점이 하나는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모든 게 의심이었다.
정황상의 의심이라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체조차 제대로 모른 채로 그 계집을 건드렸다가 돌아올 후폭풍을 먼저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 내가,
'너무 안일했다.'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회초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직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악마.'
내 눈은 악마를 보지 못한다.
이 회초리에 마나를 불어넣는 순간만, 그것들의 정체가 흐릿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미처 생각지 못한 가능성이, '설마'라 치부했던 가능성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그 계집이 악마의 계약자라면?'
그럼 이 모든 게 제대로 설명된다.
그 여자가 마나로 훑어도 평범해 보이던 이유를.
그럼에도 기이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만 이유를.
이리도 께름칙했던 이유를.
자, 다시 생각해보자.
'악마라면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이 보면 그저 평범할 뿐인 여자가, 딱 제국의 유력자들만 골라잡아서 홀리고 사로잡는 말도 안 되는 일도.
그녀 자신이 엮여있으면 다들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날뛰게 만드는 일도.
황금 기수들의 능력?
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악마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신이 이 땅을 짓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외차원의 초월적 정신체들이다.
그런 것을 떠나서, 무엇보다 계집이 악마라는 가설이 완성되면 지난 생부터 존재했던 모순 한 가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녀는 잘 산다더군. 평범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고 하네.
회귀 전, 어느 날 태자가 옥에서 건넸던 말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충분히 그런 일이 있을 법하다.
유력자들을 홀려놓고 평민과 결혼? 낭만 있네.
그런데 말이다.
'그때는 전쟁기였잖아. 그것도 아리아가 통치하던 멸망기.'
그 말을 들은 건 우리가 옥에서 나오기 1년 전, 전선이 다 밀리고 국고가 말라 다 같이 죽어가는 그런 때였다.
평민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일 따윈 바랄 수 없는, 심지어 평민 하나의 삶을 추적하고 살펴볼 여유조차 없는 시기였다.
한데 태자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내게 말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 여자와 관련된 모든 건 모순덩어리란 말이다.
그걸 파헤쳐야만 했다.
그 여자를 다시 봐서 정체를 확인해야만 했다.
하여 나는 태자에게 물어 그녀의 거처를 찾았다.
그렇게, 내 의심은 방점을 찍었다.
"다 왔네. 여기가 그녀가 사는 곳일세. 한데 유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태자는 미안해하면서도, 내 부탁이 탐탁지 않다는 듯 물어왔다.
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또 봤다.
암만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그에, 나는 차오르는 허망함을 느끼며 태자에게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하."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전하께선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체 무엇이?"
"제도를 오가는 평범한 여자가 이런 성 밖의 동굴 속에 사는 게. 전하께선 이게 정말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태자가 그녀의 집이라며 날 안내한 곳은 성벽 밖의 동굴 입구였다.
이곳은 도저히 아무런 힘 없는 여자가 홀로 살 곳이 아니었다.
한데, 태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뭐가 이상하단 건가?"
그 의심 없는 눈망울에 소름이 끼쳐왔다.
대체 얼마나 끔찍한 저주란 말인가.
지난 거리에서의 조우 때도 얼핏 느낀 것이지만, 계집을 포기한 지금조차 기저에 깔린 인식은 뒤틀린 그대로다.
저것이 말해주지 않던가.
'···악마.'
그건 인간이 아니다.
* * *
칼리오스는 이 상황이 영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악마 소환은 중대 사안이다.
하지만, 그리 설명을 했음에도 어찌 아직도 레베카를 흉수로 짚는 건지.
이리 깊은 밤에, 저리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구태여 아녀자가 홀로 사는 집까지 와 난동을 부리려 하는지.
속상한 일이었다.
세간이 무어라 부르든, 레베카가 마녀가 아니란 사실만큼은 칼리오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유렌을 다시 한번 설득하려고 했지만···.
"멈춰보시게. 응?"
"좀, 그냥 따라오십시오."
유렌은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하다하다 무력 수단도 생각했다.
하나, 그러기엔 유렌의 기세가 너무 살벌해 보통 일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결국 칼리오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중재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혹여 저 살벌한 유렌이 사고를 치기 전에, 가운데 서서 이번에야말로 오해를 확실히 풀어야겠지.
그리 생각하며 칼리오스는 유렌보다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집'의 끝, 공동 속 레베카의 거처에 도달했다.
"전하?"
레베카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자신을 봤다.
그 모습에 칼리오스는 피식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벽에는 옷이 걸려 있었고 그 외에 소녀다운 생활 기재들이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마녀인가.
그저 아기자기한 소녀일 뿐이지 않던가.
칼리오스는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이리 늦은 시간에 찾아서 미안하네. 그게···."
그때 흠칫, 레베카가 유렌을 발견했다.
겁을 집어먹은 듯 몸을 움츠렸다.
칼리오스는 빠르게 유렌을 설득하려 했다.
하나,
"아, 씨발···."
유렌의 욕지거리를 듣는 순간 칼리오스의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레베카를 보는 유렌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 위로 떠올라 있는 기색은, 분명 레베카의 존재 자체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혐오였다.
극단적인 반응에 몸이 굳는 그때였다.
칼리오스의 눈은 이어지는 이변을 똑똑히 봐버렸다.
퉁!
유렌이 전조도 없이 출수했다.
그렇게,
서걱―
레베카의 머리를 썰었다.
핑그르르, 레베카의 머리통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을 돌았다.
칼리오스의 숨이 턱 막혔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빛을 잃어가는 레베카의 녹색 눈동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뇌가 쩌저적 굳었다.
이윽고 잇새가 벌어졌다.
"···레베카?"
그녀의 이름이 허망하게 허공을 노닐었다.
어째서.
그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다른 무엇보다 속이 미어지다 못해 터지는 기분이었다.
들끓는 감정은 이윽고 분노, 살의 따위로 변모하여 유렌을 향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감정의 변화였다.
손이 검 위로 갔다.
하지만,
"너는···!"
"전하,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보십시오."
유렌의 반응에 칼리오스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전하께선 저게 정녕 인간으로 보입니까?"
"···?"
유렌은 여전히 떨어져 나간 레베카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혐오로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니, 혐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역겨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지극히도 이성적으로 보였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꼬집는 그 나날처럼, 정련된 기세였다.
그것이 사고를 일깨웠다.
회초리 끝이 가리키는 방향에 무언가 있다.
그 확신이 들어, 칼리오스는 삐걱삐걱 레베카의 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칼리오스의 눈에 보인 것은 그랬다.
히죽―
[아, 들켰다.]
머리통만 남은 레베카가 안면 근육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 레베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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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베카 (2) >
#032화. 레베카 (2)
계집이 악마라는 가설을 세운다면 이어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었다.
악마의 소환엔 소환자와 계약자가 필요하다.
베아트리스처럼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도 있고, 둘을 따로 설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계집은 후자의 경우다.
계집의 체내 마나 회로엔 어떤 기술적인 변이도 없다.
즉 악마를 소환한 것은 타인이며, 저것들은 집단.
계집은 어떤 단체의 목적을 위해 제국에 스며든 간자란 말이 된다.
다친 몸을 이끌고도 싸우러 올 생각을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소환된 악마의 무력은 기본적으로 육신을 따라가니까.'
그렇게 계집을 무력화시키고 배후를 캐내려 했다.
한데, 그리할 수 없다.
사태는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뭐냐, '너희들'은···."
[들켰다! 들켰어!]
[아아, 이제 어떡하지?]
[전하~ 전하아~! 너무 아파요! 저 좀 살려주세요! 깔깔!]
[아쉬워··· 조금 더 놀고 싶었는데.]
[그런데 저거 그거 아냐?]
[아아, 이게 아직도 하계에 있구나.]
계집이 아니다.
저 몸뚱어리 안에 든 것은, 인간이 아닌 악마의 집단이다.
회초리와 눈이 공명하며 이제야 알게 된 사실에 경악이 차올랐다.
무력화?
심문?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바로 목을 날려버리지 않으면 도리어 당하는 건 이쪽이었을지도 몰랐다.
등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소름이 끼쳤다.
다른 무엇도 아닌,
"대체 어떤 새끼가, 악마를 이렇게나 많이 부른 거냐?"
저 악마들을 소환해 부리기 위해 치렀을 '대가'가, 그 집단의 광기가 너무나도 아득해서.
"···악마."
태자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중, 저 분홍 대가리는 깔깔깔 웃기 바빴다.
구역질이 났다.
뇌리에 때려 박듯 울리는 목소리들이 현기증을 자아냈다.
긴장을 끌어올렸다.
숨을 가다듬었다.
'한치도 방심해선 안 된다.'
지금부터는, 악마와의 문답이다.
"···말해. 뒤에 있는 놈이 누구냐? 누가 너흴 소환해서 여기 꽂아 넣은 거냐?"
저것들에게 대답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악마는 현계의 필멸자와 편을 먹고 노는 것들이 아니라, '계약'의 수행을 위해 소환자와 함께해주는 것뿐이니까.
애초에 악마가 소환과 계약이라는 방법을 거쳐 가면서까지 이 땅에 내려오는 이유는 오로지 '유희'를 위해서다.
악마는 필멸의 몸을 입고 이 땅을 거닐며 즐길 수 있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는 족속들이다.
저들이 금기인 이유가 그것이다.
가장 순수한 악.
세상이 혼란과 절망에 뒤덮이는 일조차 '놀이'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이 저 악마라는 종이라서.
개체 하나하나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것들이라서.
'저 몸에서 간자 역할을 해준 것도···.'
결국 놈들에게는 놀이의 일환일 테니까.
그런만큼 저들의 변덕이 내게 답을 줄 수도 있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맨입으로?]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으음, 그건 안 되겠는데.]
[아이야, 우리도 거래에 대한 신용이란 게 있지 않니.]
[맞아. 계약을 함부로 발설하는 악마를 누가 또 불러줄까?]
인상이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네가 계약을 갱신하면 또 모르지.]
이가 악물렸다.
저들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하핫! 그러면 되겠다! 얘야, 우리와 계약하지 않으련? 많은 걸 바라지 않아!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는 몸. 몸에 안착하기 위한 영혼! 그리고···.]
[위약금! 위약금을 받아야 해!]
[아아, 그렇지. 좋아! 선심 써서 본 계약의 1.5배! 그 정도면 어떨까?]
[나쁘지 않아, 손해는 조금 보겠지만 하계에 더 남아있을 수 있다면···.]
흔들려선 안 된다.
'악마의 흥정이다.'
저것들은 합리적인 척 거래를 제시해, 가장 불합리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나는 침묵했다.
[내키지 않아? 너는 정말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을 텐데?]
[흉수가 궁금하지 않아? 넌 계속 의심했잖니.]
[아아, 축제 거리에선 정말 서늘했지. 아직도 기억나.
"넌 좋겠다. 우연이면 다 돼서!"
]
[얘네들 목적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닌데.]
그 순간, 악마가 속삭였다.
[계약만 해주면··· 우리가 바꾼 기억들도 전부 돌려놔 줄 수 있는데···.]
흠칫 떨었다.
내가 아닌, 태자가.
"···전하."
"······."
"전하."
태자를 바라봤다.
흔들리는 눈빛은 저 말이 충분히 먹혀들었음을 보여줬다.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는 건가?'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이곳에 들어와 계집의 목을 베는 순간까지 태자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그걸 떠나서 한 가지 더.
저 말에 함의된 뜻은 내게까지 곤란함을 불러일으켰다.
'···이것들을 돌려보내도 나머지 셋은 그대로라는 말이잖아.'
그런 말이다.
이곳에서 저것들을 처리해도 성자, 대공자, 암흑가의 주인은 여전히 레베카를 목놓아 부르짖을 것이란 뜻이다.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냐고···.'
뒷골이 확 당겨온다.
악마들은 여전히 흥정해오고 있었다.
[어때, 계약할 마음이 드니?]
[정말 헐값에 하는 계약이 아니니!]
[몸 하나면 돼! 그거면 우리는 만족하고 기꺼이 거래할 수 있어!]
[바보야, 위약금.]
[아? 그건 당연히 몸에 포함되는 거지.]
[비명과 절망은 언제든 수집할 수 있으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도 하나만큼은 알겠다.
이놈들에게서 얻어낼 것이 없다.
그러니,
'···죽인다.'
당장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한들 하계에 저것들을 더 남겨두는 것보단 낫다.
회초리에 마나를 휘감으려는 순간이었다.
턱!
"유렌."
태자의 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머리칼에 가려 태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흥정에 혹하는 건가?
"···전하, 들어선 아니 됩니다. 저건 악마의 흥정입니다."
"아네. 잘 알고 있네."
근데 왜.
"잠시 몇 가지만 묻겠네."
섣불리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누구보다 혼란스러울 게 이놈이란 걸 알아서다.
머릿속에 선택지가 떠오른다.
'내가 다 설명한다. 아니면 직접 상황을 느끼게 한다.'
후자가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이제껏 자신이 상대한 게 악마라는 걸 느끼기엔.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회초리는 여전히 쥔 채였다.
여차하면 나설 것이다.
태자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악마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자네들이었나?"
[응? 처음부터?]
[난 전하가 제일 좋았어. 공주님이 된 기분이었거든.]
[아, 난 슈페···.]
"···그럼 내 추억은 자네들과 함께한 추억이겠군. 난 모든 순간을 놀아난 거였고."
[나 진심이었는데? 전하랑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하하···."
태자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불안했다.
회초리를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내 기억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쳐진 건가?"
[알고 싶으면···.]
"계약을 해라?"
[아핫···!]
태자를 다그쳤다.
"전하."
"조금만 더."
꽈드득···.
바닥이 찌그러졌다.
태자의 마나가 발현되고 있었다.
감정은? 분노? 절망? 회의?
어떤 것도 이 상황에 좋지는 않다.
긴장감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계약의 조건은 뭐지?"
"전하!"
"그들은 자네들에게 뭘 줬나."
마나를 회초리 위로 휘감았다.
출수하려 발을 디뎠다.
그때였다.
[1만의 영혼!]
멈칫했다.
아득한 숫자가 순간 사고를 마비시켰다.
[1만을 받았어! 우리한테도 복잡한 일이었거든.]
[꼭 1만이 아니어도 돼. 하계의 기사 아이들 기준으로 익스퍼트면 삼백. 마스터면 3명 정도면 된단다!]
[그것도 아니라면 절망을 조금 많이 주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현현할 수 있으니!]
아, 어떤 미친 새끼들이지.
야만족이라는 최대의 용의자들조차 용의선상에서 멀어질 숫자다.
양민 1만이라는 숫자?
저 정도 숫자는 어지간한 대도시 하나의 백성을 모두 제물로 가져다 바쳐야 나온다.
'죽여야 해.'
태자가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 나라도 나서야 한다.
마음먹고 한 걸음을 더 내딛는 순간이었다.
"잘 들었네."
푸욱!
태자의 검이 악마의 미간을 꿰뚫었다.
[아···?]
그제야 나는 태자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씁쓸한 미소.
거기에 일말의 분노.
"안 죽는군."
···아니, 지독한 분노였다.
미소 지은 탈 아래 있는 것은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꽈득, 꽈득.
태자가 검을 휘저어 악마의 머릿속을 짓이겼다.
악마는 뭐하냐는 듯한 눈으로 태자를 올려다봤다.
"유렌, 이것들은 어찌 죽여야 하나."
"···의식으로 태워야 합니다."
"이곳에서 가능한가?"
"제가 비슷한 걸 할 줄 알기는 합니다."
"부탁하지."
촤악, 검이 뽑히자 검은 핏물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응? 역소환하게?]
[아아, 저거면 되긴 하겠다.]
위기감이 없는 태도다.
와중 깨닫게 되는 건.
"···너희 이게 뭔지 알지?"
이놈들, 역시 회초리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답을 얻긴 영 글러 보였다.
[알려줄까?]
[그럼 계약할래?]
계약 없이는 무엇도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초리를 태자가 쑤신 미간에 박아넣어도 그랬다.
"너희 친구는 아파하던데."
[아모리오? 걔야 뭐··· 고고하시니까. 아픈 것도 싫겠지.]
[좀 아프고 말면 되는 걸 왜 그러나 몰라. 어차피 얜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거슬리는 말이 하나 더 나왔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흔들려선 안 된다.
'흥정이다. 이것도 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흥정이 없음을 이놈들은 잘 알 뿐이다.
회초리에 대해 알아낼 방법은 분명 다른 곳에도 있을 터다.
"···그래, 그럼 가라."
마나가 풀려나오자 결이 보였다.
태자가 잘 찔렀다.
회초리가 박혀있는 딱 그 부분에, 저것들의 결이 모여있었다.
악마는 끝까지 웃었다.
[또 봐.]
"다신 보지 말자."
꽈지지지지직―!
마나가 번갯불로 화해 악마의 머리통을 불살랐다.
* * *
칼리오스는 동굴을 나왔다.
하늘을 보니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푸른빛도, 새벽의 맑은 공기도 칼리오스를 달래줄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기억이 조작되어 있고, 자신이 믿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걸 마주한 찰나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혼란스러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하지만 무엇보다 큰 감정은 분노였다.
"전하."
뒤따라 나온 유렌이 말을 걸었으나 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악마에게 홀려 행했던 일들이 후회됐고, 고작 악마 따위에 흔들렸단 그 사실 자체가 치욕스러웠다.
그런 감정에, 칼리오스는 말했다.
"···병신같군."
칼리오스는 어울리지 않는 욕지거리를 했다.
담아본 일 없는 천박한 말이 목에서 걸렸으나, 겨우 그걸 토해냈다.
"위대한 건국 황제의 후신. 스스로 그리 말하고 다녔음에도 고작 악마 따위에게 홀렸네.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고, 여전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네."
"······."
"이런 병신 같은 게 태자라네. 유렌 파로스. 자네가 가르치려던 사람이네."
칼리오스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가 뜨거워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만 모든 것을 놓아버리면 어떨까.
무엇이 바뀌어있는지 모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면 해결될 일이 아닌지에 관한 생각이 연신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자격이 없네. 내가 누구보다 자격이 없었네."
자괴감이 분노와 얽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순간이었다.
"압니다. 전하 병신인 거."
움찔, 칼리오스의 손끝이 떨렸다.
고개를 돌렸다.
유렌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큰둥하고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을 한 채로.
"제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전하는 병신이 맞습니다."
유렌이 다가오며 말했다.
"남들이야 잘났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눈치는 더럽게 없고 사고방식은 자기중심적이고 하는 짓거리는 나사가 빠져 있습니다. 솔직히, 남들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불경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이런 순간인 만큼 칼리오스는 저 말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는 어떤 답조차 낼 수 없는 인간을 대체 어찌 우월하다 하겠는가.
칼리오스의 입술이 꽉 물렸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나,
"그래도 하나 아는 게 있습니다."
유렌의 말은 그런 칼리오스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제가 아는 전하는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달아나지도 않았고, 멈춰 서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눈치가 없기에 두려움을 모릅니다. 독선적이기에 패배를 모릅니다. 나사가 빠져있으니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기어코 해내고 맙니다."
칼리오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렌은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이 나라의 다음 제위에 오르는 이는 전하여야 합니다. 물러남을 모르고 이기기 위해 나아가는 당신이. 악마가 나타나 제국을 노리려 드는 난세의 황제여야 합니다."
어찌 그리할 수 있는 건가.
유렌은 스스로의 말에 의심을 모르는 듯했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진대, 유렌은 그런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것이 왜인지 속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겠나."
"기억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셨습니까? 모르고 살면 뭐 어떱니까. 저도 술에 취해 한 일은 잘 기억 못합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르니 어떤 선택을 할지 겁이 나십니까?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그 순간, 유렌의 회초리가 칼리오스의 미간에 닿았다.
"그래서 제가 있습니다. 이 회초리가 있습니다."
유렌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대체로 사람이든 짐승이든 패면 말 듣덥니다. 영 좆같은 짓거리나 하려 한다 싶으면 이걸로 뒤통수부터 후려갈겨 드리겠습니다."
단단하다.
회초리는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고, 그 너머의 눈빛은 그보다 더 단단했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자의 눈빛이라 해야 할 터였다.
칼리오스는 무심코 깨달았다.
자신이 그를 태사로 임명한 이유가 저 눈빛이었음을.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면, 저리도 확신에 찬 인간이어야 했음을.
"하···."
칼리오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불확실함 속에서 하나 확실한 것을 깨달았다.
유렌 파로스를 고른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이것만큼은 어떤 외압도 흔들림도 없었다.
그를 확신하자 이번엔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겨우 하나를 찾아, 그게 가능해졌다.
"불경하군! 참으로 불경해!"
"쪼개지 마십쇼. 정드니까."
"정들면 어떤가!"
"기분이 너무 좆같을 것 같습니다."
"섭섭하네!"
"벌써 좆같습니다. 한 대 쳐도 됩니까?"
"안 되네!"
끅끅대는 웃음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배가 아팠다.
흔들렸던 것도, 그 와중에 답을 찾은 것도,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우스워서 그랬다.
뒤늦게야 웃음을 멈춘 칼리오스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맞네. 자네 말이 맞아."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는 독선적이다.
스스로 생각하길, 이 땅의 누구보다 뛰어나며 감히 세상 전체가 자신의 맞은편 저울에 올라도 본인이 더 중요함을 피력할 사람이다.
그 선민의식이 곧 그의 정체성이다.
태평성대를 이룰 제왕의 그릇이 자신이니 황위를 내어주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으며,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부수고 나아갈 뿐이다.
그러니 이 고민은 너무 우스웠다.
벽은 깨부수면 된다.
혹여 길을 잃더라도, 스스로 정한 최고의 길잡이가 옆에 있었다.
칼리오스는 그걸 겨우 깨달았다.
"자네는 또 내게 가르침을 주는군."
"기분은 풀렸습니까?"
"완전히.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칼리오스는 퍽이나 시원스럽게 웃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고민한다면 정체성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그래, 그러니 이야기해보지."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 것.
"알아낸 사실. 그리고 이제부터 해야 할 것들을."
동굴에서의 기억을 되짚어, 알고 있던 사실과 알아낸 사실을 조합했다.
"제국을 노리는 건 집단이다. 그들은 내부에서부터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악마는 당분간은 나올 수 없겠지."
이는 악마가 스스로 떠벌린 말 중 답이 있었다.
유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집에 들어간 제물이 1만입니다. 적군도 백성과 병사가 무한하지 않은 이상, 그것과 같은 흉물을 또 만드는 일엔 수고가 필요할 테지요."
"그렇다면 유예가 생겼군. 적의 가장 큰 위협은 넘겼네."
"물론 다른 방법으로 쳐들어오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대비를 할 수 있지."
칼리오스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는 이런 일에 있어선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사실 꼭 그렇지 않아도, 이런 문제라면 누구든 답은 빠르게 낼 수 있을 터였다.
"급한 건 전력 보강이겠군."
"마침 전력 보강에 수고를 들일 일이 생겼습니다."
유렌의 말에 칼리오스는 싱긋 웃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 그 세 놈. 레베카가 사라져 날뛸 것들부터 처리해야지."
제국의 가장 큰 전력이 될 황금 시대의 기수.
그들은 아직 미몽에서 깨지 못했다.
< 레베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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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탑주 (1) >
#033화. 마탑주 (1)
방침을 정하는 것은 빠르게 이뤄졌다.
워낙에 타산이 빠른 인간이다.
태자가 사건을 제대로 인지한 것만으로도 일의 진척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이 된 것이다.
"일단 레베카의 죽음은··· 최대한 은폐하지."
"예, 계집이 죽었다는 걸 알면 그 셋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차라리 실종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당분간은 잠잠할 수 있네. 레베카를 찾느라 다른 생각은 못 할 테니."
레베카의 죽음은 극비다.
그것을 아는 건 나와 태자, 그리고 베아트리스까지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또한 일이 이리되니 베아트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악마 소환의 주체가 누구인지 말했고, 태자는 납득했다.
"차라리 다행일세. 고삐를 채울 수단이 생긴 것이니."
죄질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는 이 시점에 이미 외적을 막기 위한 장기 말로 기능하게 됐으니까.
이어서 다음 안건.
"제국을 노려 악마를 소환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네. 당분간은 비밀일세. 무엇하나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어."
"예, 내부가 혼란스러워진다면 도리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지게 됩니다."
"전쟁이 당장일지, 10년 뒤일지 모르네. 당장 군대를 조직한다 한들, 시기를 모르니 무한정 대기 상태에 들어갈 수가 있네. 그리되면 생산성이 떨어져. 이런 치밀한 수를 세운 적이라면 우리를 말려 죽이는 방법도 있음을 모르지 않을 걸세."
"무엇보다 숨김으로써 얻는 것이 있지요."
"저들을 끌어내야지."
우리의 반응이 거세질수록 적들은 더 은밀해진다.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끌어낼 수 있도록 유인하는 것이 옳다.
물론 저들도 악마 소환이 들켰다는 것은 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평소와 같이 침묵한다면?
어떻게든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기웃거릴 것 아닌가.
정보전은 전쟁의 최우선 요건이다.
"물밑에서 움직일 걸세.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할 테니."
"드레노어 경은···."
"안 되네. 경은 입이 너무 싸."
그럼 그렇지.
태자는 거기까지 논한 후, 길게 숨을 내쉬며 물어왔다.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모릅니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군은 회귀 전 제국을 침공했던 야만족.
하지만, 그놈들은 개개인의 힘이 끔찍하게 강했을 뿐 절대 집단의 크기가 1만이라는 숫자를 우습게 여길 정도로 많지 않았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놈들의 문화가 그랬다.
동족애라고 해야 할까, 야만족들의 분위기는 집단 내의 끈끈함을 가장 중시하는 형태였다.
물론, 내가 다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후보군으로서의 신빙성은 여러 요소로 인해 부정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후보군은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하면 인간과는 아직도 교류를 하지 않는 외경(外境)의 이종족들이 떠오른다.
악마와 관련된 쪽으로 생각하면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애초에 밤의 종족이라 불리던 것들이야.'
사악하다.
또한 사술에 능하다.
악마를 통한 혼란을 일으킨 경력이 있고,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영역에 거점이 있다.
하나, 이 또한 무어라 속시원히 판단하긴 힘들었다.
그러니 무엇보다 필요한 건 조사였다.
"첩보를 파견해야 합니다. 가까운 왕국부터 우호 이종족의 땅, 외경이나 금지까지 가능한 모든 곳에."
"1만이 증발한 사례를 찾아야한다는 말이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최근 몇십 년간 발생한 실종이나 몰살 사건 등도 조사해 보아야지요. 재해로 보고된 건도 다시 봐야겠고. 기사급의 실종도 봐야합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는 게 없다면 발로 뛰는 것밖에 방법이 더 있겠나.
대충 당장 필요한 것들은 파악을 끝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내부에 첩자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지."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이 내부의 적이다.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쟁을 겪지 않으면 그를 실감하기 어렵다.
하여 어떻게 색출한 것인가.
그에 대한 답으로, 태자가 내게 말했다.
"건국제에 참여해주게."
"갑자기?"
"무도회가 있지 않나. 자네는 악마를 구별할 수 있고."
아, 그 말이었나.
아직 익숙지 않은 능력이라 잊어버렸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악마를 통한 술수를 쓰는 것들이 있다면 연합체의 수장들이 모이는 그 자리에 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둘째 날이네. 그전까지는 몸을 회복해주게. 필요한 게 있나?"
"어, 마나포션 좀 주면 좋습니다."
"보내두도록 하지. 그럼 이렇게 끝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성벽 근처까지 왔다.
태자는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했다.
"···이번 악마 소환 건 자체는 숨기지 않을 걸세. 하늘이 깨지는 순간을 본 사람이 너무 많네."
"예, 그렇지요. 아무래도."
"자네가 토벌에 공이 있음을 말할 걸세."
태자의 의도를 대충 알겠다.
숨길 수 없다면 최대한 이용해야지.
"제가 귀빈들과 대화하란 말, 맞습니까?"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봐야 하네. 자네에게 접근할 수도 있어."
"뭐, 일단 알겠습니다."
쉬고 싶지만 어쩌겠나.
상황이 이리 혼란스러운 것을.
성벽 앞, 경비병들이 태자를 알아보곤 바짝 굳어 경례를 한다.
태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긴 밤이었군. 고생했네."
얼굴의 그늘이 다 지워지진 않았다.
태자로서도 혼란스러운 일이었을 터다.
다행히 말을 잘 알아먹고 정신을 차린 듯하지만, 당분간은 더 지켜볼 필요가 있겠지.
"전하께서도 편히 쉬십시오."
"쉴 틈이 어딨나. 당장 오늘부터 건국젠데."
"끝나면 쉬십시오."
"너무하는군. 여하튼 가보겠네."
그렇게 태자와 찢어졌다.
터덜터덜 거리를 걸었다.
건국제가 시작되며 온 제도가 들썩이고 있었다.
소란을 피해 외곽으로,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소가주. 꼴이···."
홀을 서성이던 누님이셨다.
아, 그래. 어쩌다 보니 외박을 해버렸구나.
옷도 찢어지고 몸은 더러워져 있었다.
이 꼴을 뭐라 해명해야 할까···.
"···술을 너무 마셔서. 그만 굴러버렸습니다."
"아아, 다행입니다."
미봉책이었으나, 다행히 누님은 납득해 주셨다.
묘하게 슬펐다.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듯한데,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잠을 자지 못하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예, 누님도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씻고 잠들었다.
오래는 자지 못했다.
점심쯤 전해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아씨께서 쓰러지셨어요···."
아무래도 내가 악마와 싸운 일이 벌써 소문이 퍼진 듯했다.
* * *
위험한 일은 최대한 지양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 면목이 없어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고, 그에 나는 내 멀쩡함을 피력하느라 꽤 큰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태자의 마나로 목걸이를 발동시킨 게 유효했는지, 누님의 눈에도 내가 크게 다치진 않은 것처럼 보였던 듯하다.
사고를 빠르게 수습한 후엔 태자가 보낸 마나포션으로 몸 상태를 더 개선했다.
효율은 여전히 쓰레기지만, 어떻게든 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는 만들었다.
이제부턴 개인적인 고민의 시간이었다.
계집의 정체나, 그간 있었던 일들에 관한 것 말이다.
악마가 개입했다.
그리고 적이 집단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확실시된 시점에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었다.
'역시 그 오크는 그놈들 짓이라고 봐야겠지.'
토벌전에서 기이할 정도로 계획적으로 움직이던 오크들.
그건 계집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간 태자를 노린 암수라고 보는 게 옳을 터다.
즉, 유기적인 대처가 가능한 적들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계집은 시나리오 1정도.'
그놈들이 계집으로 인해 내부를 흔드는 것에 실패했다 한들 멈출까?
물론 조사가 시작된 이 시점에, 새로이 만 단위의 인명을 소모해 악마 무리를 또 소환하진 않겠지. 그만한 대인원을 제물로 바치고 수습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우리가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유예다.
내부를 방비할 수 있을, 딱 그 정도의 유예.
'내정은 태자한테 맡기면 된다.'
나보다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일을 잘 처리할 터다.
그러니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할 터다.
'회초리. 이건 대체 뭐지?'
검고 단단한 회초리.
딱 그 정도의 감상만 품었던 물건이었으나, 악마를 상대하며 이 물건의 가능성을 새로이 깨달았다.
그게 경악스럽다.
파로스의 시조가 남긴 물건은 악마를 대비하는 물건이라는 뜻이 아니던가.
이쯤 되면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다.
'회귀 전의 파로스를 노린 잡것들이···.'
···그 집단과 같을 수가 있다.
아니, 악마를 다룬다는 시점에서 거의 확실시된 사안이라고 보는 게 옳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감정이 크게 일렁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걸 수습했다.
'이젠 이게 나한테 있다.'
노려도 날 노릴 거다.
그리고 그건 내게 아주 반가운 일일 터다.
혹여 이 물건을 목표로 내게 손을 뻗어온다면···.
'···쉽게는 안 죽일 거야.'
탁!
회초리로 반죽을 내리쳤다.
그 순간 아리아가 말했다.
"어서! 어서 만들 거라! 아이참! 오늘은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느냐!"
흠, 맥이 빠지게 하는 목소리다.
기고만장해져 내 등을 챱! 챱! 때려대는 꼴에 꿀밤이 마려우나, 참아줬다.
"아리아는 치즈버거 왕국의 위기를 막아낸 칭찬을 받아야 하는 공주님이란다! 파로스는 어서 치즈버거를 진상해야 한단다!"
이유 있는 요청이라 더욱 기고만장한 거겠지.
그래, 인정한다.
전날 저녁, 다행히 아리아가 내 말을 안 잊고 태자에게 전해준 덕에 악마의 뒷수습이 되었고, 곧장 계집을 베러 갈 수도 있었지 않던가.
그래서 찾아온 아리아에게 치즈버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말이다.
-치즈도 종류가 많잖아요. 여긴 전쟁터라서 구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구상만 한 것들이 있어요.
언젠가, 한나가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모짜렐라를 쓰는 거죠! 버거를 한 입 물때마다 치즈가 쭈우욱!!! 늘어지게!!!
-허어어···!
-패티 안에 모짜렐라를 숨기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아니, 거기다가 더블로 가야지! 체다치즈를 패티 위에 얹으면···!
-유렌! 어서 치즈를 찾으러 가세나!
-진정하십쇼. 병신 새끼야. 지금 전쟁 중이잖아요.
그날 모짜렐라를 구하러 가겠다는 태자를 말리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그런 이유로 불쾌하게 남은 기억이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꽤 해볼 만한 시도였다.
치즈 자체는 구하기 쉬웠다.
지금 제도의 시장은 그때와 달리 활발하게 돌아갔고, 식도락에 대한 귀족들의 수요도 아주 큰 편이었으니 심부름만 시켜도 어지간한 건 다 구해졌다.
레시피도 이미 들었다.
하여 그대로 따라하는 중이다.
다진 고기 안에 치즈를 넣고 잘 감싼 후 패티를 굽는다.
그리고 야채를···.
"토, 토마토는 빼줘야 한단다···! 아리아는 빨간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단다···!"
···오늘만 토마토를 뺐다.
위아래로 빵을 덮어 건네주니, 모짜렐라 더블 치즈버거.
비주얼이 꽤나 폭력적이다.
뿌듯했다.
'보고 있냐. 한나.'
유독 한나가 그리운 날이다.
지금쯤 뜀박질은 하고 있을까?
아리아랑 비슷한 나이대이니 어쩌면 사고뭉치로 자라 마을을 들쑤시고 있을 수도 있겠군.
'찾으려면 앞으로 10년.'
행방을 알기 위해선 녀석이 제도에서 노상 점포를 하다가 잡혀가길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이리도 슬플 때가 없다. 세상에 한나라는 이름에, 비슷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에 빠져있던 와중 아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뻗었다.
"대, 대단하구나! 치즈가 두 개나 들어간 게 확실하느냐?!?!"
"예, 일단 드셔보십시오."
그리움을 접어두고 아리아에게 치즈버거를 건넸다.
아리아는 꿀꺽꿀꺽 침을 삼키다,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크게 버거를 물었다.
직후 입에 문 버거를 당기자,
쭈우우욱―!
패티 속 모짜렐라가 길게 늘어졌다.
눈을 뜬 아리아는 격양에 차올라 "웁! 웁!" 환호성을 내질렀다.
직후 흐르는 치즈를 전부 빨아 먹곤 그런 감상을 건네왔다.
"대, 대단하다···! 이건 마법이구나!!!"
"맛있습니까?"
"치즈 위자드란다! 아니! 이건 대마법사 치즈버거란다!!!"
그 정돈가.
여하튼 맛있게 먹어주니 뿌듯하다.
그리고 볼일도 끝났으니 이제 보낼 때가 됐다.
"자 빨리 먹고 가십시오."
"우웅?"
"저도 오늘 일정이 있어서."
"거, 거짓말! 오빠버니 전하가 오늘 파로스는 백수라고 했는데!"
그 인간은 애한테 뭘 가르치는 거지?
"가볼 데가 있습니다."
"어딜 가느냐! 아리아도 같이 갈 것이다!"
아리아가 강경하게 말했으나, 오늘은 안 된다.
"아픈 사람 많은 곳으로 갑니다. 전하, 자칫하면 전하께서도 치료사에게 진찰받아야 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아리아 또한 치료사라는 말에 기겁을 했다.
왜인지는 모른다.
치료사의 대외적 이미지가 아픈 사람을 고문하는 쪽이라 그런 걸까.
'기껏해야 살이나 파고 꿰매는 게 끝인 애들인데.'
···아니, 그래서 그런 걸수도.
어느덧 아리아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내 시선을 피한다.
"아, 아리아는 바쁜 일이 생각났단다. 오늘은 공부를 할 것이란다···!"
슬금슬금 아리아가 멀어졌다.
치즈버거를 우물거리면서.
"다, 다음에 보자꾸나!"
거머리 퇴치, 완료.
* * *
느지막한 오후였다.
건국제의 소란에 더불어, 전날 악마 소환을 시도한 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분위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하나 사건이란 것은 어찌 발표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지는 법이다.
"어딜 제도에서 악마 소환을!"
"흉수는 잡았대?"
"아니, 하지만 소환도 실패했으니 금방 잡히겠지! 만약 뭔가 수를 쓴다고 해도 금방 들켜서 군에 압송되겠지!"
대대적으로 알려진 사실로 소환은 실패했고 그걸 막은 건 나와 베아트리스다.
각색이 들어간 내용이나, 이는 확실하게 백성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희석시켜 주고 있었다.
필요한 일이니 그러려니 했다.
무엇보다 그 여자를 굴릴 방향성을 생각하면 저 정도 평판이야 필요하지.
괜한 소란을 피하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쓴 채 움직였고, 그렇게 도착한 것은 외곽의 치유소였다.
건물 전체를 대관하여 베아트리스 하나를 집중 치료하는 곳이다.
내 얼굴을 확인한 경비대들이 비켜섰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 그 여자를 찾아갔다.
전날은 경황이 없어 미처 나누지 못한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치료실 복도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아, 손님이 오셨네요."
멈칫했다.
의외의 사람을 만나버렸기에.
"파로스 소가주, 맞지요?"
노파가 과일 바구니를 든 채로 복도 앞에 서 있었다.
싱긋 웃을 때 그려지는 주름은 어딜 가나 있는 인자한 할머니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커다란 고깔모자나 로브, 거기에 인자한 이미지를 단번에 지워버릴 정도의 위압감이 긴장감을 자아냈다.
결정적으로 눈에 비치는 마나의 배열.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마탑주님을 뵙습니다."
로나 우드위치.
베아트리스의 스승.
그리고,
'···마녀.'
레베카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배기 마녀.
그녀는 제국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이종족 출신 마탑주였다.
< 마탑주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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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탑주 (2) >
#034화. 마탑주 (2)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서도 꽤 유명한 편이다.
애초에 이종족이 인간 제국의 마탑주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이야깃거리 자체가 꽤 흥미를 끄는 편이었고, 그걸 떠나서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영웅.'
로나 우드위치는 제국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300년 전 악마를 막아낸 영웅 말이다.
그녀는 여느 마녀들이 그렇듯 출신지를 자기 성씨로 삼은 마녀였다.
정확한 나이는 불명.
다만 알기로, 그녀의 나이가 적어도 300은 넘는다는 것뿐이다.
그녀가 인간 세계에 처음 나타난 건 파로스가 마지막 태사를 배출한, 그리고 악마가 이 땅에 나타났던 때였다.
당시 인간 세계에 견학을 왔던 그녀는 당대의 황제, 파로스와 함께 악마를 막아섰다.
그렇게 이제는 영웅담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환란 속에서 마침내 승리.
결국 악마 추방하는 데 성공하고, 그녀는 공로를 인정받아 제국의 시민권을 얻은 최초의 이종족이 되었다.
이후로는 마탑의 고문이 되었다가, 마땅한 후계가 없는 시기엔 직접 마탑을 운영하며 제국에 체류하고 있다.
물론 마녀라는 종 자체가 출신지에 영속되는 특징이 있어, 주기적으로 숲으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제국을 놓지 않았다.
그에 관한 여러 추측으로는 마녀가 당대 황제를 사랑했다던가, 당대의 파로스와 약속을 나눴다던가 등등 말이 많지만, 개중 확실한 건 없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런 전설적인 인물이란 말이고, 나는 그 영웅을 우연하게 이리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
"자, 드세요."
치료소의 테라스.
마탑주가 과일차를 내어 왔다.
직후 인자한 할머니의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을 했다.
"파로스를 직접 보는 건 100년만이네요. 제가 대외 행사는 나가지 않아서···."
내 선조의 친구라 생각하니 어색함이 치솟는다.
하여 말을 고르고 있자 마탑주가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흠, 역시 많이 다르네요. 회색 머리나 보라색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모를 정도로."
"선조님은 어땠습니까?"
"벨프는 우락부락했죠. 수염도 덥수룩하고 얼굴도 삭아서 얼핏 보면 아저씨 같은 때가 참 많았어요. 겨우 22살에요! 그에 비해 당신은 참 젊게 생겼구요."
호호 웃는 모습은 사뭇 유쾌했다.
추억을 노니는 듯 마탑주의 미소는 아련함을 띠었다.
그런 부드러운 분위기 속, 어느 순간 마탑주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문득 마탑주가 말했다.
"그건 죽었나요?"
흠칫했다.
마탑주가 말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맥락상 눈치챌 수 있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베이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어디까지 아는 걸까.
악마와 관련이 있나?
일단 그녀도 이종족이다.
게다가 마녀라는 종 자체가 폐쇄성이 짙다 보니 더 의심됐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런 내 생각을 부정했다.
"레베카. 그 악마 말이에요."
"···!"
"후후, 저는 진짜 악마와 맞선 적도 있는 걸요? 일이 이렇게까지 되면 모를 수가 없죠. 그래도 다행히 악마는 퇴치가 되었나 보네요."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떠오른 것이 있었다.
지난 생에서 베아트리스가 소환한 악마를 역소환한 것이, 그리하여 목숨을 날린 것이 이 여자였다는 것.
내 굳은 표정에 그런 답이 돌아왔다.
마탑주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드려야겠네요. 뭐가 됐든 악마를 소환한 건 그 아이니까요."
마탑주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재능있는 아이라 아끼고 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금방 부서질 것만 같아서 불안한 아이기도 했죠. 더 잘 돌보려고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나 봐요."
마탑주의 시선은 치료소 안을 향했다.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들었죠. 기뻐하는 모습에 그저 흐뭇해하기나 했어요. 직접 확인해 볼 생각도 못 하고 마침 잘 됐거니 싶어 숲에 잠시 돌아갔죠. 그곳의 마나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몸인지라."
"······."
"결국은 오판이네요. 제가 없는 사이에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요.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리도 오래 살았거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찌 이리 서툴기만 한 건지···."
찻잔을 쥔 마탑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막아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모든 게 제 부덕의 소치에요."
무어라 답해야 할까.
적당한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있었다.
"용서는 아닙니다. 저 여자에게 쓸모를 느껴서 살려둔 거지."
"어떤 이유든 살린 거죠. 죄인을 감싸고 도는 모습이 좋게는 안 보이시겠지요. 예, 어떤 이유로든 악마 소환을 시도한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금기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제게는 친딸 같은 아이랍니다. 감사하고 죄송할 수밖에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후후, 역시 벨프와는 다르군요."
마탑주가 차를 호록 마셨다.
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하튼, 맨입으로 감사할 생각은 없답니다. 제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책임도 함께 져야겠죠."
그 순간, 허공에서 웬 나무패 하나가 튀어나와 내 앞에 놓였다.
"제 마녀로서의 인장이랍니다. 이걸 반으로 쪼개면 딱 한 번, 저는 약속된 법칙을 따라 당신 앞에 나타날 거예요. 어떤 부탁이든, 설령 그것이 비도덕의 끝에 있는 일이라도 저는 당신을 돕게 되겠죠."
내 눈이 크게 뜨였다.
이 물건이 무엇인 줄 안다.
300년 전의 황제가 약속의 증표로 그녀에게 받았다는 물건이었다.
귀물이다.
적어도 7위계 이상이 확실한 이의 도움을 약속받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여벌의 목숨이 생긴 것이라 봐도 좋았다.
조심스레 패를 수습했다.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패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걸 쓸 만큼 위험한 순간이 없길 바랄 뿐이에요."
"모르죠."
대화는 그리 끝을 향해 달려갔다.
"용건이 있어 오신 거지요? 들어가 봐요.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음, 너무 몰아붙이진 말아 줄 수 있나요? 제가 잘 타이를 테니."
"노력해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나는 내 회초리로 향하는 마탑주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과거의 인물이라면 혹여 알지 않을까.
"이 회초리. 무슨 물건인지 아시는 것 같군요."
"벨프가 사용하던 물건이니 알지요. 파로스의 가보가 아닌가요?"
"···맞습니다."
"엘라이오를 훈계할 때마다 저걸로 바닥을 치며 분통을 터뜨린 기억이 있어요. 흠, 지금 봐도 참 특이하네요. 어떻게 저리 변형되지 않고 유지되는 건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회초리를 보는 게 이에 관해 깊이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역시 외부인이라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마탑주가 손을 흔들었다.
그에 나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의외의 만남이긴 하나 딱 거기까지.
얻은 것은 여벌의 목숨.
썩 나쁘지 않은 성과라 치부하며 치유소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은 곧장 보였다.
구태여 노크는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게 있었다.
"스승··· 아, 소가주."
베아트리스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한쪽 팔과 눈이 사라진 채로.
또한 그 부위의 피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간 채로.
단발이었던 머리는 치렁치렁하게 길어져 있었다.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죄송하네요. 못 볼 꼴을 보여준 것 같아서."
악마에게 당한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 거겠지.
구태여 그에 대해 더 이야기하진 않았다.
안색은 안 좋았으나, 그 미치광이처럼 보이던 기세는 확실히 누그러뜨려져 있었다.
태자처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걸까.
'뭐, 얘도 그 계집 정체는 아는 것 같았으니까.'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다.
와중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악마 탓에 위계가 올랐어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만큼 수습할 기간이 필요해요."
공짜 전력 상승이 되었단다.
악마가 이 여자의 몸을 쓰며 억지로 경지를 뚫어버린 것이다.
수습할 시간은 당연히 줄 수 있었다.
그리 말했고, 이어서는 레베카가 어찌 되었는지와 차후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말했다.
끝으로 이 여자의 역할을 전해 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과정에서 느낀 게 있었다.
이 여자는 내내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자아가 죽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시선이 부쩍 길어진 물빛 머리카락을 향했다.
악마와 융합되는 과정에서 저리된 것이었다.
머리칼을 빤히 쳐다 보자 베아트리스가 시선을 느꼈는지 하나 남은 손으로 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지저분해졌죠."
"별생각 없는데."
"자를 생각이에요. 병실만 나서면."
"굳이?"
"네?"
베아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하나 남은 눈이 의문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 어울리네."
일단 화딱지 나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가려줘서 좋다.
거기까지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손을 휘적휘적 젓고 치유소를 나섰다.
뒷수습은 이만하면 된 듯하다.
* * *
로나는 유렌이 떠난 병실로 들어왔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 베아트리스가 있었다.
로나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그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얼핏 배어 있었다.
누구보다 악마의 위험함을 알고 있을진대, 또한 금기를 어긴 제자는 파문이 마땅할진대 어찌 저 아이에겐 이리 관대해지고 마는 것인지.
이것이 꼭 자신의 탓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죄송하다며 우는 모습에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만다.
사라진 눈과 팔이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더 같이 있어 줬더라면 현혹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가 속에 가득했다.
늙어버린 이유일 터다.
암만 마녀라고 해도 수명은 있는 법.
로나의 수명은 이제 십 년도 채 남지 않았다.
평화에 찌든 건지, 그도 아니면 죽음이 다가오며 시야가 좁아진 건지.
어쩌면 이 아이에 대한 측은함 따위가 눈을 가린 것일지도 몰랐다.
자세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기뻐하는 베아트리스를 보며 함께 웃은 게 그리도 후회되기만 하는 것이다.
하여 로나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죄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물론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 가냘픈 아이는 자신의 감정으로 인해 다시 한번 상처를 받을 터이니.
"···베이."
"아, 스승님."
베아트리스는 움츠러들어 있었다.
로나는 미소를 더 환하게 만들었다.
"잘 보내드렸나요?"
"네···."
"몸은 좀 어때요?"
로나는 가져온 과일을 깎아 베이의 입에 넣었다.
베이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우물거리다, 이내 삼켜낸 후 말했다.
"···괜찮아요. 더 아프진 않아요."
마나를 사용하지만 않으면.
···이겠지.
악마의 상처가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건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자신조차 300년 전 그 상처를 회복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던가.
베아트리스의 경우는 더했다.
악마를 직접 몸으로 받아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행인 점이라면 악마의 흔적을 억제하고 치유하는 방법을 이미 안다는 것.
경험이 있다는 것.
로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회복시키고, 다시는 현혹에 빠지지 않게 만들 작정이었다.
자신의 남은 수명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일 테니까.
고된 훈련이 되리라.
그런 만큼 당장은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시킬 것이었다.
생각하며 베아트리스를 돌보던 로나는 그녀가 연신 머리칼을 매만지는 걸 발견했다.
로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잘라줄까요? 단발머리를 좋아하잖아요."
베아트리스는 본디부터 깔끔한 걸 좋아하는 성격 탓에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아마 저것이 거슬리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에 건넨 질문이었고,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니요."
"응?"
베아트리스는 검지로 머리끝을 돌돌 말며 말했다.
"조금만, 길러 볼까 싶어서···."
고개를 푹 숙여 알 수는 없으나, 목소리에서 확실히 느껴지는 건 있었다.
직전보다 생기가 차올라 있었다.
그에, 로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전투 후 제대로 된 휴식 없이 돌아다녔다 보니 피로가 꽤 쌓였던 걸까.
눈을 뜨니 이미 점심이었다.
자려면 더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나 하며 멍하니 천장을 보는 중이었다.
"소가주님, 식사 안 하세요?"
"어, 저녁에 먹으면 안 되나."
"아씨께서 기다리시는데."
"···지금 내려갈게."
엠마의 말에 곧장 식당으로 내려갔다.
바로 어제 누님을 실신시켜버린 입장에 더 걱정시킬 수가 있겠나.
도착하니 간단한 요깃거리를 앞에 두고 누님이 앉아 계셨다.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 소가주. 푹 주무셨는지요."
"집이 최곤 거 같습니다. 하루 종일도 잘 수 있을 것 같네요."
누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안 되지요. 저녁은 연회에 참석해야 하니."
영 귀찮은 일정을 주지시켜주시니 의욕이 떨어졌다.
가기야 갈 테지만 글쎄, 목적만 달성한다면 바로 나올 생각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연회에 있어 봐야 뭣하겠나.
그것도 막 날뛰어도 되는 연회가 아니라 다른 왕국이나 이종족들도 참여하는 연회다.
적당히 있어 주다가 빠져 쉬는 게 차라리 이롭단 말이다.
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가지요. 소가주께도 보여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어서."
"예?"
누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약혼이 무산됐으니 혼약할 사람을 찾아야 할 것 아닌지요. 제가 목록을 추려보았습니다."
눈을 끔뻑였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 마탑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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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제 (1) >
#035화. 건국제 (1)
결혼이란 무엇인가.
그 의문에 대한 내 답은 하나다.
'가문 후계 준비.'
필요한 일이고, 그렇기에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걸 떠나서도 그랬다.
회귀 전부터 옥에 갇혀 있던 내게, 누님이 누누이 하던 말이 있지 않던가.
파로스에 어울리는 참한 여인을 만나 혼인하고, 영특한 후계를 생산해 가문을 안정시키자고.
누님의 바람이 그러하고 실제로도 필요한 일인데 내가 못 들어줄 이유가 있겠나.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다.
당장 언제 어디서 사고를 터뜨릴지 모르는 폭탄이 세 개나 있다.
거시적인 위협을 둘째치고서라도 여자나 만나 히히덕 거릴 시간은 없단 말이다.
준비를 끝내고 황성으로 향하는 길.
나는 은근슬쩍 당장은 구미가 당기지 않음을 피력해봤다.
"아무래도 너무 서두르시는 건 아닙니까? 파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혼약자를 구하는 모습이 영 보기는 좋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당장 혼약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견문을 넓히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많은 여인과 대화해 보아야 여인을 잘 알게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여자랑은 지긋지긋하게 놀아봤단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전직 개망나니 유렌 파로스에게 여자 경험이 없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 그리 믿는 게 확실해 보였다.
사실을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해 보았으나, 이내 그 일을 포기하게 된다.
'···오늘까지 실신하시면 곤란하니까.'
세상엔 묻어둬야만 하는 비밀이 있는 법이고, 그게 이런 쪽이라 믿는다.
달리 화제를 돌리려 했다.
이르길 역공이다.
"한데 누님께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으신지요. 저보다는 누님이 급···."
"없습니다. 제겐 가문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혼약자 정도는 찾는 것 정도는···."
"어찌 그리할 수 있을까요. 제 행복은 가문에 있음이니, 이곳이 안정되어야 저도 안정을 찾는 게지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반격을 해온다.
뜻을 파헤치면 '네가 결혼하면 나도 할게' 정도겠지.
표정의 변화는 없으나 기색에서 완고함이 느껴진다.
이러면 내가 이길 수 없다.
누님이 어떤 사람이던가.
온 세상이 포기한 나의 석방을 죽는 그 순간까지 믿으며 밀고 나간, 황소고집 중의 황소고집이다.
꼼짝없이 영애들이나 봐야 할 상황.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방법을 생각해야 하건만 야속한 마차는 어느새 황성에 도착해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소가주!"
저 멀리서 에릴다가 우릴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표정은 꽤 신경질적이었다.
또 무슨···.
"언제 오나 한참 기다렸네요. 잠시 따라와 주실 수 있어요? 태자 전하께서 찾으셔서. 아, 파로스 영애. 잠시 소가주를 빌려 가도 될까요?"
"아···."
누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반가운 탄식이었다.
"···예, 전하께서 찾으신다면 당연히 가야 할 일이지요."
누님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에릴다는 그런 누님께 예를 취하곤 내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여명궁에 도착.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예?"
"진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왜 그래요?"
에릴다가 징그럽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하나 그 모습조차 반갑다.
덕분에 위기를 피했다.
* * *
머리가 식으니 그제야 궁금해졌다.
한창 바쁠 인간이 왜 나를 부른 걸까.
이미 건국제에서의 방침은 다 정해졌건만, 따로 전할 특이사항이라도 생긴 걸까.
답은 이윽고 얻을 수 있었다.
연회를 대비해 의장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태자가 거울 너머로 시선을 던져 날 반겼다.
"오느라 수고 많았네. 잠은 푹 잤는가?"
"예, 뭐어.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변동이 생겼네."
"변동이라 함은?"
"엘프의 엘더가 왔네."
그 말에 흠칫했다.
엘더··· 그러니까 엘프의 장로다.
이건 다만 직위가 높은 엘프가 왔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천년 정도를 사는 게 엘프다.
그리고 엘더 정도 되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온 족속들이다.
역사적으로 가보면 뜻이 이해되지 않나.
"화석들 말입니까?"
종족 전쟁의 생존자.
오르테어의 건국기 때 건국 황제와 직접 싸웠던, 살아있는 역사.
그들이 왔다는 것이 사뭇 놀라움을 자아냈다.
애초에 그들은 어떤 행사에도 전면에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진 시대적 상징성을 너무 잘 알기에, 또한 그들은 현시대의 엘프보다 더욱 고리타분하여 숲을 벗어나려 들질 않기에 그렇다.
이번 건국제 역시 마찬가지.
엘더는 이 행사에 참여할 계획이 없었다.
한데 갑작스레 엘프의 무리에 엘더가 끼어버렸단다.
어떤 이유인가.
고민이 떠오르는 순간 태자가 말했다.
"사건이 좀 많지 않았나. 오크 챔피언의 등장부터···."
"···악마? 그건 고작 이틀 전 일이 아닙니까."
"그들에게 시간이 중요하기나 하겠나. 특히 엘더라면."
공간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이겠군.
엘더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중요한 점은 그게 엘더의 등장과 어떤 식으로 엮였을까 하는 것.
답을 낸 건 에릴다였다.
"사건 자체에 주목하기보단 해결한 인간이 보고 싶은 거겠죠. 왜, 하필 처리한 게 전하랑 당신이잖아요."
"아?"
"정통성 문제에요. 고리타분한 것들이 이제까지 전면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뭐였는지는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유명한 말이잖습니까."
몇백 년 전 일이었다.
제국의 역대 황제 중 엘프의 엘더에게 초청을 보냈던 이가 있었다.
더 나은 우호 관계를 위해 식사 자리라도 갖자는 나름의 호의 표시였고, 그에 엘더가 건넨 답이 그것이다.
-대화할 가치가 없다.
엘더들의 고리타분함을 제대로 짚은 말이었고, 보이기에 따라 모멸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 다른 반격을 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우호의 시대이기 때문.
그리고 엘프와 인간의 관계란 결국 '약속'에 의해 묶인 관계이기 때문.
본제로 돌아와, 나는 태자가 이 일을 내게 이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아봐달라는 겁니까. 엘프의 약속이 뭔지."
"아무래도 어떤 이유로 우호를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면 찜찜하지 않나. 또한 엘더가 직접 나섰다는 건 우리가 자격을 갖췄을 가능성도 되고."
타당한 말이다.
정황상 엘더의 구미를 당기게 할 만한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 약속이 뭔지를 안다면···.
"···이용해 동맹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 악마와 거리가 먼 것이 엘프네. 그들의 신이 악마를 증오하니까."
"확실히 용의선상에서 멀긴 합니다. 동맹군을 만들 수 있다면 이득이지요."
태자가 빙긋 웃었다.
"이래저래 부탁만 늘어서 미안하군. 폐하께서 회의에 참석하신 터라, 나는 연회 총괄에 집중해야만 하네."
"아닙니다.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으니···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겠습니다."
물론 저들끼리 숙덕거리기나 바쁜 귀쟁이들이 나와 대화해줄지는 또 의문이긴 하지만, 시도해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태자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이번에는 행동거지를 특히 조심해주게. 영웅이지 않나."
"제가 뭐 날뛰기라도 하겠습니까."
"지난 연회에선 날뛰어준 터라."
아리아만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았다.
더불어 이번엔 나 역시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제도 전체를 넘어 손님들에게까지 내가 악마 소환을 막았다는 소문이 퍼진 차다.
이미 날 더러 숙덕거리는 인간들이 넘칠 텐데 뭣하러 공연한 소문을 더 만들겠나.
"가보겠습니다."
"음, 잘 부탁하네."
나는 그렇게 여명궁을 나섰다.
연회장에 도착했고, 내가 나타나자마자 숙덕거리는 인간들을 피해 누님의 곁으로 갔다.
"용무는 잘 마치고 오셨는지요."
"예, 한데 누님···."
"음, 부탁받으신 일이 있으신 게지요. 아쉽지만 약혼자에 관한 것은 미루어 보겠습니다."
됐다.
괜히 주먹을 꽉 쥐는 중이었다.
누님이 아주 옅게 웃음기가 베인 목소리로 말했다.
"소가주, 감사합니다."
"예?"
"이리 훌륭히 자라주셔서. 그것이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누님의 시선은 연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소가주에 대한 걱정이 참 많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야 믿음이 있었으나, 세간에 비치는 소가주의 모습은 참···."
"···부끄러운 얘기였습니까."
"···이젠 추억으로 불러도 될 이야기지요. 오늘 오는 길에, 그리고 이리 소가주를 기다리던 중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들 소가주를 영웅이라 합니다. 파로스라고 합니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중 누님께선 말을 이으셨다.
"자랑스럽습니다. 파로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자라준 것이."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이 정도로는 당신이 행했던 희생에 걸맞은 보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게 누구보다 파로스다웠던 건 언제나 누님이었기에.
따라가려면 한참은 멀었다.
나는 이제 겨우 내 힘을 휘두를 자리를 알게 된 천치일 뿐이다.
하여 겨우내 말하길,
"···나아져 보겠습니다. 꾸준히."
앞으로를 기약할 말이 끝이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누님의 웃음소리가 작게 틈새를 노닐었다.
다행히 어색함이 차오를 새는 없었다.
빠바밤!
건국제 연회가 시작됐다.
* * *
제국의 건국제는 비단 제국 내에서나 중요한 행사가 아니었다.
이르길 제국을 필두로 한 대륙 각지 종족들의 연합 회담이라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왜 건국제가 그런 역할을 하는가.
왜 제국이 중심이 되었는가.
그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를 봐야 했다.
최초로 세워진 인간의 국가가 오르테어다.
그렇다면 향후 세워진 인간의 국가는 오르테어에서 분화된 왕국일 수밖에 없으니 우열관계가 분명하다.
이종족들로 봐도 그랬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목에 칼을 쑤셔 박은 것은 건국 황제다.
노예의 해방을 완수하고 저들과 최초로 동등한 관계에 오른 것이 그이며 이후 반목하던 종족들을 모아 협상을 해낸 것도 그이니 무력적으로나, 명분적으로나 이 연합의 주인은 제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천년은 길다.
연합에서 제외된 오크 같은 종족이 있었고, 새로이 연합에 들어온 하피 같은 종족도 있었다.
연합 내의 우열 관계는 유동적으로 바뀌어 왔으며, 제국의 힘이 약화 된 때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변해가던 과거의 한 줄기일 뿐이다.
이번 대의 제국에서만큼은 제국이 맹주를 자처하는 것에 그 어떤 이견도 나오지 않았다.
"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태자가 장내에 입장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건국 황제의 후신이라 불리며 이미 유명하던 찰나에, 성인식으로 오크 챔피언의 수급을 가져온 만큼 지금 태자의 위세는 하늘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아마 큰 헛짓거리만 안 하면 이 구도는 절대 바뀌지 않을 테고, 그렇게 만드는 게 내 역할이니 태자가 엇나갈 일은 없다.
나는 걸어 중심으로 가는 태자를 살폈다.
문득, 지난 일은 생각하니 저게 또 어색해 보였다.
'노숙자 꼴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꼬질꼬질한 상태로 피를 흥건하게 뒤집어쓰며 칼질하던, 그러면서 웃던 꼴만 보다가 저리 멀끔한 모습을 보니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사실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혈질에 제멋대로인 건 똑같을진대 사람 겉모습이 이리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게 새삼스럽다.
그런 감상에 취해있길 잠시.
"오늘 이 자리에 모여준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오."
태자가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회초리를 매만졌다.
'슬슬 시작해야겠지.'
필요한 만큼 사람은 다 모였다.
내 첫 번째 역할.
'악마의 흔적은···.'
또 다른 악마를 찾아야 했다.
마나가 은밀하게 회초리와 감응한다.
눈이 맑아지며 세상이 회백색으로 탈색한다.
평시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기적, 마나, 그리고 자연.
정령계의 미물들이나 신의 휘광, 그리고 정련된 마나는 각기 다른 색과 모양을 띤다.
그에 더불어 이 순간 이능을 이용한 속닥임을 주고받는 게 있다면, 그 흐름까지도 보였다.
-이번 대는 강건하겠군. 끔찍한 재능이다.
누군가 태자를 그리 평하고 있었다.
그걸 흘려넘기고 계속해서 연회장 내를 훑었다.
그렇게, 결론.
'없는데.'
적어도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즉 황성 연회장 내에는 악마와 연관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도 확인했으나 보이지 않았던 걸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 안쪽에는 악마가 없다고 보는 게 좋은 듯하다.
물론 몇 차례의 검증이 더 필요하겠지만 당장은 안심.
그리 마나를 수습하려던 순간이었다.
저릿―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 마나에 걸릴 정도로 강한 시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인 게 있었다.
'···엘더?'
자연의 마나와 정령을 두르고 있던 늙은 엘프 남자.
모두가 태자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만이 이쪽을 대놓고 응시하고 있었다.
그 역시 악마와 관련된 무엇도 보이지 않았기에 흘려 넘겼었다.
어찌하여 날 보는 건가.
혹여 내가 흘린 마나가 저 자의 기감에 잡힌 건가?
천년을 넘게 산 괴물이다.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은 이내 뒤집혔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어느 쪽을 향하는 지를 뒤늦게 깨달아서.
'회초리?'
엘더가 보던 것은 내 허리춤에 걸린 회초리였다.
< 건국제 (1)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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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제 (2) >
#036화. 건국제 (2)
회초리, 그에 관심을 가지는 엘더.
두 가지 요소를 조합하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저 노괴는 천 년 전 종족 전쟁의 생존자다.
당연히 나의 시조와 건국 황제를 마주하고 이 연합의 주춧돌이 되었던 자들 중 하나다.
그렇다면 말이다.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수상하기만 한 회초리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결론에 닿았다.
이윽고 내 속엔 비약에 가까운 어떤 추측이 떠올랐다.
'···파로스를 노렸던 건 엘프?'
회귀 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로 파로스를 깡그리 태웠던 사건의 수괴는 엘프들이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나조차도 이 회초리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른다.
이건 숫제 신물이라 불러 마땅한 물건일진대 어찌 탐욕이 없을까.
가설을 세워보자.
엘더는 회초리의 제대로 된 효용을 안다.
하여 이리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 관심엔 탐욕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회귀 전 파로스의 습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떠오른 의심은 내 적개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런 때 엘더의 고개가 들렸다.
나와 엘더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 봤다.
시간이 멎는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눈동자 너머로 자리한 아득한 마나의 깊이가, 천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여실히 실감케 해줘서 그랬다.
하지만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대치 상태에서 나와 엘더는 꽤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봤다.
그런 중 태자의 연설이 끝났다.
곡조가 바뀌며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먼저 시선을 뗀 것은 엘더였다.
그는 자신을 보좌하는 젊은 엘프에게 무어라 속닥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걸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을 전해 들은 엘프가 내 앞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그들의 전통 복식을 차려입은 젊은 여자 엘프는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넨 후,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장로께서 따로 접견을 원하십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시간을···."
눈썹이 들렸다.
'적개심은 안 보이는데.'
잠시 고민했으나 답은 뻔했다.
굳이 회초리나 가문에 대한 일이 아니더라도, 엘더와의 대화는 내게 필요했던 일이니.
"···안내 부탁드립니다. 누님,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예, 다녀오시지요."
누님께 양해를 구하고 엘프를 따라갔다.
긴장감은 여전했다.
* * *
도착한 접견실.
엘더는 소파에 앉아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날 바라봤다.
얼굴 위로 그려진 주름은 깐깐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희게 새어버린 머리칼이나, 깊은 눈동자는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허허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긴장을 풀 수 없는 상대다.
아무렴, 하고자 한다면 이 황성 한가운데서 재앙을 자아낼 수도 있는 게 바로 저 노괴가 아니던가.
눈은 이 순간도 활성화된 채로 이변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 상태로 고개를 짧게 숙였다.
"세계수의 첫 번째 기둥을 뵙습니다."
"반갑소. 파로스의 후예여."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내 회초리에 가 있었다.
미간이 좁아지는 순간이었다.
"경계할 필요는 없소.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
"······?"
"신목 말이오. 당신이 지닌 회초리."
고개가 들렸다.
신목, 이게 그런 이름이라는 것조차 지금 알았다.
엘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놀란 내게 말했다.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소. 그것은 애초에 우리에게 허락된 물건이 아니니."
"···허락, 말입니까."
"신목은 본디 스스로 주인을 고르오. 그 신목이 귀하의 선조를 골랐소.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는 게지."
"이게 무엇인지 잘 아시는 듯합니다."
넌지시 떠봤다.
그리고, 나는 충격적이라 할 만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어머니 세계수의 가지를 일컫는 말인 것을."
"···!"
"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혹여 신목에 탐욕을 부린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뜻에 반하는 행동이 되고 마오."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회초리가 세계수의 일부라는 말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나뭇가지라고?'
질감은 한없이 철에 가깝건만 어찌 그리되는 것인지.
더군다나 '가지'라는 말은 더 이상했다.
'세계수에는 가지가 없을 텐데.'
세계수는 그저 거대한 나무 기둥에 불과했다.
실제 관찰 기록이 그랬고,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사실도 그랬다.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뿌리도 가지도 이파리도 없이 대수림 한가운데 그 육중한 몸뚱이를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아함을 제외하면 공고해지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엘프는 용의선상에서 제외인가.'
어머니 세계수를 들먹인 말이다.
이게 거짓일 수는 없다.
인간의 기준으론 신앙이 이유가 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저들의 생리가 그렇다.
세계수는 여러 신 중에서도 특이하게 나무의 형상으로 직접 강림한 신이다.
엘프는 그의 비호 아래서 정령 친화력이라는 가호를 몸소 내려받고 있는 종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신앙은 생존이나 탐욕보다 위에 있는 절대적 명제나 다름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세계수에 대한 충성이 영혼에 각인된단 말이다.
어머니의 선택, 소유권의 주장 불가.
감히 세계수를 입에 담은 순간부터, 저들은 파로스의 흉수가 아님을 몸소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진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엘더는 말을 이었다.
"귀하의 선조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한들 마찬가지요. 귀하께서도 그 신목을 다루고 있지 않소?"
다룬다는 것은 아마 악마의 결을 본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엘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도 선택받은 것이오. 그러니 더더욱 우리는 욕심낼 수 없지."
일순 깔리는 것은 침묵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질문을 엮었다.
"혹시 이 회초리··· 신목에 대해 아는 걸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문 내엔 어떤 기록도 없었던지라."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기회라면 잡아채는 게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내 말에 대답을 잘 해주고 있기도 하니 생각지도 못한 호재가 아닌가.
하나,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엘더는 고개를 저었다.
"말해줄 수 없소."
"···예?"
"그런 '약속'이었소."
덜컥, 몸이 멎었다.
내 눈이 커졌다.
우호의 약속, 그게 회초리와 관련되어 있단 뜻으로 들려서.
"그 약속은 뭡니까?"
"그 또한 말해줄 수 없소. 약속은 이행되는 순간까지 언어가 되어선 안 되오."
엘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듯한 모습에 조급함이 차올랐다.
"잠···."
"이곳에 온 것은 자격을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검증은 끝났소. 이번 대의 용혈은 우수하오. 길잡이는 자격을 갖췄소. 그러니 말씀드리지."
엘더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용혈과 길잡이는 마땅한 증거로 자격을 증명했음에, 귀하께서 모든 권위를 계승하는 날 대수림으로 와 나 레길리온을 찾으시오. 우리의 언약은 그 순간 이행이 될 테니."
용혈은 태자, 길잡이는 나를 일컫는 말이리라.
권위의 계승이란 건, 내가 성인이 되어 가문을 온전히 물려받는 일을 말하겠지.
더불어 '계승식'을 끝내란 말일 터다.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강제성?'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 해주기 싫다는 말과는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건국황제와 선조가 했던 약속이란 건 일종의 강제성을 띠는 듯했다.
하여 나는 질문을 바꿨다.
"그때는 약속이 뭔지. 이 회초리가 뭔지 알려주십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오. 그 또한 약속이었으니."
강하게 노려봤다.
엘더는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짧게 목례하며 말했다.
"신목의 주인을 다시 뵙길 빌지. 기다림이 더 이어지길 바라진 않으니."
엘더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난 뒤로도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들은 내용을 정리해야만 했다.
* * *
엘프의 대장로, 레길리온은 유유히 황성의 정원을 걸었다.
그를 수행하는 가디언들은 묵묵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런 중이었다.
"장로님."
"음, 니히아."
"저들에게 정말 자격이 있겠습니까?"
레길리온의 시선이 가디언들의 지휘관 니히아에게 닿았다.
반항적인 눈빛이 가득한 한창때의 여아는 이제 겨우 300세다.
즉, 엘프의 기준에선 아직 미숙한 나이이며 한창 격정에 시달릴 나이다.
그럼에도 능력이 출중하여 가디언의 지휘관이 되었으니, 저런 혈기왕성함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레길리온은 시선을 거두며 답했다.
"있다. 분명 지난 천 년 중 가장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연회에서 마주친 태자를 상기했다.
그의 혼은 레길리온이 알던 그와 같이 황금으로 불타고 있었다.
스스로 후신임을 자처하는 이답게, 기억 속의 불쾌한 경험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드는 기세였다.
하나, 그보다 더 레길리온을 감탄케 한 것은 유렌이었다.
'벌써 감응하고 있었다.'
놀라운 감응도였다.
레길리온이 아는 한 '계승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신목과 감응하는 것은 어려울진대, 어찌 벌써부터 첫 번째 감응을 해낸 것인가.
처음 악마를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의심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하필 태사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는 점이··· 그러니까 그가 신목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이, 레길리온으로 하여금 더더욱 그걸 단순한 의심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의심을 떨치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행차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는 감응하는 게 맞았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피가 스스로 발현됐다.'
레길리온의 눈빛이 침잠했다.
세대를 이리 뛰어넘었음에도 아직 그 피를 발현하는 자가 있다는 것에 묘한 감회가 들어서.
혹은 약속을 이행할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에 괜한 노파심이 들어서.
속이 괜히 답답해지는 와중이었다.
"···하지만 장로님."
"음."
"고작 20년도 채 살지 않은 인간들입니다. 그들이 어찌 어머니의···."
"니히아. 언행을 조심하라."
"···죄송합니다."
니히아의 입술이 앙 다물렸다.
하지만 표정은 영 납득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레길리온은 그 반항적인 행색을 조금은 이해했다.
딱 천 년 전, 니히아와 비슷한 연배였던 자신이 저러했기에.
레길리온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건넸다.
"인간을 얕보지 말거라. 그들은 짧은 만큼 화려하게 타오르는 이들이니."
"···예."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모양새였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음이 분명했다.
레길리온은 그 모습에 괜히 턱을 매만졌다.
'닥쳐봐야 아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시기의 자신이 떠올랐다.
―흐, 흐이익!!!
―잡았다! 이 귀쟁이 새끼!
―괴롭혔으니까 벌 받아야죠?
턱을 쓸던 레길리온의 손끝이 움찔했다.
벌써 천 년 전의 기억일진대, 어찌 그날 맞은 턱의 고통은 아직도 이리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용혈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왜 흐려지지 않는 건지.
그날 신목이 그리던 궤적은 눈에 보이듯 선한 건지.
"흠···."
레길리온은 불편한 마음으로 제도의 하늘을 바라봤다.
확실히, 대수림과 다르게 하늘을 가리는 이파리가 없어 별이 잘 보였다.
* * *
건국제는 그 이후로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다.
내내 회초리를 든 채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손님 중에는 악마와 연관된 자가 없었다.
그렇게 되니 내 유일한 고민은 엘더와의 접견 때 들었던 말들이 끝.
관련해서 태자와 이야기를 나누어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그랬다.
―흠, 당장은 알기 힘든 일에 강제성까지 부여된 듯하군. 그래도 내 듣기론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한데. 그의 말대로 자네의 계승이 끝나면 함께 대수림으로 가 정황을 파악하면 될 일이 아닌가?
정론이었다.
당장 고민해 봐야 풀리지도 않을 문제에, 엘프와의 언약이라는 것이 닥치기 전까지 다른 사고를 동반하는 일도 아니다.
태자의 입장에선 거기서 끝나는 일.
내가 괜히 신경 쓰게 되는 이유는 엘더가 파로스의 계승식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계가 아니면 전해지지도 않을 내용을 어떻게 아는 건지 원.'
···뭐, 그것도 결국에는 알게 될 일이지.
태자의 말마따나 당장 고민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면 묻어두는 게 맞다.
무엇보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수확이 있었다.
'신목, 신목. 단어를 중심으로 찾아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쓰는 물건의 용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던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조사를 할 생각이다.
여하튼, 그렇게 건국제의 정리는 끝.
큰 행사가 지나자 태자와의 수업도 재개됐다.
그렇게 다가온 첫 수업 날.
빠악!
"어억···!"
여느 수업 때처럼 태자를 두들겨 팬 후였다.
궁으로 돌아온 태자가 얼음으로 눈 위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속 시원하게 바라보던 중, 태자가 말했다.
"아, 이걸 말하는 걸 잊었군."
"뭡니까?"
"이제 슬슬 시작해 보려 하네."
무엇을?
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당장 나와 태자가 함께 의논해 처리할 일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레베카의 낙인을 지울 첫 번째 대상을 선정했네."
"누구입니까?"
"법황청. 그곳의 성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참고인 조사 요청이 들어왔지요."
베아트리스의 악마 소환.
그 면밀한 조사를 위해 법황청이 움직였고, 그 중요 참고인으로 나와 태자가 지목됐다.
애초에 내막을 아는 우리 둘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조사가 지지부진했고, 그런 이유로 상대 쪽에서 뭐라도 알고 있을 우리에게 접근하게 된 것이다.
좋은 현상이었다.
우리의 행보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성자를 살필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니.
태자가 멍이 든 얼굴로 빙긋 웃었다.
"자, 그 음흉한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아보세나. 거기에 하나 더."
말이 덧붙여졌다.
그 순간, 나는 속이 꽤 불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성녀 쪽을 조사해야 하네. 성자의 이변을 가장 잘 눈치챌 자리에 있는 여인이니."
손끝이 움찔 떨렸다.
< 건국제 (2)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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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토리아 (1) >
#037화. 히스토리아 (1)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지성체는 신을 믿는다.
다만 종교로서 정치적 기능을 위해 믿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이 존재하며 그들이 가호를 내리기에 믿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 이종족의 노예로 존재할 때부터, 그 이전부터 인류에게 가호를 내리는 신이 있었다.
바로 운명과 희망.
신계의 만신전에 몸을 뉜 채 현계의 흐름을 주관하는 쌍둥이 여신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신들이다.
실제로 그들의 위계는 신들 사이에서도 아주 높은 편에 속한다.
이쯤 되면 드는 의문은, 그런 신들이 있음에도 인간은 왜 이종족의 노예였느냐 정도일 터.
정답은 나도 모른다.
아니, 세상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어찌 필멸의 운명을 진 피조물이 지고한 신의 뜻을 알겠나.
애초에 그런 거창한 이야기는 학자들이나 논할 내용이다.
그러니 현실적인 부분을 말해보자.
인간이 해방을 이룩하고 국가를 건설한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행정 체계를 잡을 관료와 신을 모실 사제를 뽑은 것이었다.
개중 사제들은 인간의 땅에 신전을 만들었고, 그 신전이 점차 발전되며 완성된 것이 바로 현재의 법황청이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법황청은 두 명의 신을 모신다.
당연히 그 내부에서도 두 개의 분파가 존재한다.
운명 교단, 그리고 희망 교단.
운명과 희망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신앙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리되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나.
"서열 싸움이 있지."
태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법황청 내에는 운명 교단과 희망 교단의 알력 다툼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저들의 우월함을 설파할 대표와 같은 존재들이 필요했고, 그리하여 생긴 것이 '운명의 성자'와 '희망의 성녀'.
당대에 분파 내에서 가장 특출난 잠재력을 가진 존재들을 그리 칭하는 것이었다.
거기까지가 배경.
여기서 조금 더 깊은 얘기로 가보면 그렇다.
"희망은 한 번도 운명을 이긴 적이 없었지요."
법황청을 움직이는 건 언제나 운명이었다.
희망은 명목상의 이유로 법황청 내에 대립 구도로 남아있는 것일 뿐이다.
이유는 하나다.
"음, 희망께선 은총을 베푸시지 않으시니."
희망의 신은 인간의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가호나 계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법황청에서 가호를 두른 건 오로지 운명의 신도들 뿐이다.
그리하여 희망은 그녀의 신성력을 품고 태어난 이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다.
제국민조차 법황청을 떠올릴 때면 운명의 신을 부르짖는다는 데서 그 격차를 알 수 있지 않나.
물론 이리되고서야 하는 얘기지만 운명이니 희망이니 다 거기서 거기지 싶다.
'악마 하나도 못 막아서 대장이 휘청거리는데 뭔.'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신과 악마는 방향성만 다를 뿐, 그 자체는 동격의 위계를 가지지 않았나.
성자는 신 자체가 아닌 축복 좀 받은 피조물일 뿐이다.
즉, 평민 계집의 사례를 통해 교단의 가호가 소환된 악마를 역소환 할 수는 있어도 악마에 의해 쓰인 어떤 개념을 인지하는 건 불가하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여하튼, 본제로 돌아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방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태자는 그들의 권력 구도를 이용하려 했다.
"희망 교단의 입장에선 기회지. 혹여 성자가 베아트리스처럼 무언가 좋지 않은 사고를 벌인다면, 혹은 그 징후를 발견한다면 당대의 운명은 힘이 약화될 걸세.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희망은 법황청의 중심에 설 기회를 얻는 게지. 그들로선 손꼽아 기다리던 기회이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파벌이 다르네. 즉, 운명 교단 전체가 어떤 술수에 걸려 있다 해도 희망 교단만큼은 그것을 의심할 수 있네."
"그 또한 맞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관계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네. 희망 교단이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손 하나 까딱 않고 성자의 이상징후를 찾아낼 수도 있겠지. 그러니 자네가 성녀를 움직여 주게. 아마 자네의 참고 조사는 그녀가 갈 테니."
정치 싸움으로 본다면 그게 맞다.
분명 그럴싸한 계획이다.
본디 억눌려 있던 이들일수록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강해지는 법이니.
다만, 태자가 하나의 변수를 놓친 게 문제였다.
"할 수 있겠나?"
나는 답했다.
"어렵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할 수 있··· 응?"
"어렵습니다. 성녀를 움직이는 건."
"어째서?!"
태자의 미소가 삐걱거렸다.
"이보게, 유렌. 어찌하여 해보지도 않고 어려움을 말하나? 자네답지 않아! 응?"
내가 지레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 절절매는 걸 보니 그냥 귀찮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틀렸다.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태자에게 전했다.
"성녀는 성직자입니다."
"그렇지. 성직자니까 성녀를 하고 있겠지!"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응?"
그런 속 편한 이야기면 좀 좋았을까.
한숨이 삐져나왔다.
나는 내 가슴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여기가 성직자입니다. 그래서 정치 싸움으로는 몰고 갈 수 없습니다."
말하면서도 기억 속 그 말이 떠올랐다.
―선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믿어주는 거예요. 그게 제 의무니까요.
기분 나쁠 정도로 시원스러운 미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을 무겁게 만들었다.
* * *
언제였더라.
법황청의 몰락은, 시간을 잊고 지내던 옥에서의 어느 날에 들었던 소식이었다.
정확한 시간적 지표를 따질 수 없음은 당시 내가 날짜를 세길 진즉에 포기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면회를 온 누님이 그런 말을 했었다.
―법황청이 무너졌습니다. 운명의 성자께서 금기를 범하셨다고 하더군요.
악마 소환 얘기는 아니었다.
이미 베아트리스의 사건으로 인해 한 번 제도는 홍역을 겪었고, 그에 따른 감시가 지극했기 때문이다.
특히 법황청은 사건의 수습을 하지 못한 것으로 지탄받아, 내부적으로 악마에 대한 경계와 단속이 아주 삼엄했다.
그러니까, 성자가 범한 금기는 다른 쪽이었단 말이다.
―금서를 연구하셨다고 하더군요. 언제부터 진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자께서 진행하시던 연구가 법황청 내부를 오염시켰다고 합니다. 신성을 가진 이들은 모두 죽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심부에 없었던 이들은 살았으나···.
성자가 벌인 일은 끔찍했다.
―···더 이상 인간이라 말할 수 없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가 연구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먼 과거 인간이 노예였던 시절, 밤의 종족들이 연구하던 '종족 변이 실험'.
괴상망측한 흑마술 중에서도 끔찍함으로는 따라올 것이 없는 실험이었다.
오죽하면 그 흑마술을 고안하고 창시한 종족이 전 대륙의 공분을 사 동시다발적인 공격에 멸종했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그 정도였다.
종의 변이란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역천의 금기였다.
성자가 어찌하여 그런 연구를 했는지는 끝까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유를 아는 당사자조차 사고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발견 당시 성자께선 끔찍하게 뒤틀린 살덩이 모습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숨통을 끊은 것은 기사단장인 드레노어 경이셨지요. 경께선 성자의 꼴을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흉물'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놈은 스스로 자처한 실험의 폭풍에 휘말려 기괴한 살덩이가 되었다.
그렇게 드레노어 경에게 베여 사망.
그가 금서를 연구하고, 실험을 강행한 동기는 그렇게 영원한 미궁 속에 빠졌다.
이후의 일은 그랬다.
―법황청은 금서의 불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으로 지탄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혼란스러운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리하다 보니 판결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된 듯합니다.
제국이 발견하거나 획득한 금서는 그 종류에 따라 황성의 금서고로 가거나, 법황청의 봉인고로 간다.
개중 종족 변이 실험과 관련된 서적은 봉인고에 있었다.
그것이 종과 신의 관계를 해치는 신앙적 관점에서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걸 관리해야 할 법황청의 비행(非行)이 죄목이었다.
더불어 사건 당사자가 죽은 시점에서 책임소재는 붕 뜨게 되었다.
와중 사고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뭐가 됐든 황실은 그 뒷감당을 해야 했었다.
여기서 안타까운 사실 하나.
당대의 황제는 2황자였다.
제국 역대 최악.
···아니, 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한 이래 최악으로 꼽히는 희대의 암군, 2황자 말이다.
그 인간은 스스로 사건을 수습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쉽고 비겁한 방법을 선택했다.
―성녀님께서 재판대에 오르셨습니다.
성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감시할 수 있으며, 견제가 가능한 위치에 있던 성녀가 죄인이자 책임자로 지목됐다.
2황자는 온갖 억지에 가까운 수로 그녀의 죄를 물었다.
그녀 또한 실험의 여파에서 무사하지 못해 몸 대부분이··· 뒤틀려 있는 상태였음에도 말이다.
―실제로 보진 못했으나··· 역시 인간의 꼴이라곤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녀께선 그런 몸으로 재판장에 올라 법황청의 모든 죄를 이고 투옥되셨습니다.
누님은 그날 드물게 안타까운 기색을 드러내셨다.
―사고가 있던 순간, 끝까지 자리에 남아 오염의 확산을 막으신 분께 그런 처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럽군요.
완곡하게 표현했으나, 누님은 2황자의 결정에 지극한 분노를 느끼셨었다.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옥에 갇혀 검이나 휘두르는 처지에 외부의 누가 어찌 되었든 관심이 생길 리가 있겠나.
그저 이르길, 당시 성녀에 대해서는 그런 평을 내렸다.
―병신 같은 인간이군요. 저 같았으면 그 자리에서 황궁까지 달려가 황제의 모가지를 땄을 겁니다.
···조금 많이 비틀려 있던 시기의 평이었다.
여하튼 내가 법황청의 사고에 대해 아는 것은 거기까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녀와 가까워진 것은 훗날의 일이었다.
말했듯 그녀는 몸이 뒤틀린 채로 옥에 갇혔다.
또한 그 상태로 제국 전쟁의 끄트머리까지 살아남았다.
그게 무슨 말이겠나.
―성녀? 이 흉측한 게?
―씨발 놈의 전하야, 주둥이 좀 바르게 놀리면 어디 덧나나?
―음? 내가 왜 그래야 하나?
―나도 네 좆같은 노숙자 상판떼기 가만 봐주고 있잖습니까. 존중 좀 합시다.
―후후, 괜찮아요. 지휘관 말씀대로 전 이제 성녀가 아닌걸요. 저를 그리 추대하던 법황청이 없으니까요. 그냥 히스토리아라고 불러주세요.
그 여자도 죄수 병사로서 전쟁에 나왔었다.
성녀 히스토리아는 내 직속 휘하 부대의 의무병이었다.
* * *
상념에 빠져있길 한참.
엠마가 말을 전해왔다.
"소가주님! 법황청에서 오고 계셔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 방이 보였고, 저 멀리 창 너머로 파로스의 정원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로질러 오는 하얀 마차가 있었다.
주변엔 새하얀 풀 플레이트를 입은 성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내려갈게."
"아, 네. 아씨께서는···."
"집에 없을 거야. 괜히 흉흉한 분위기에 두기도 그렇잖아."
마침 누님께서도 외부 일정이 있다 하셨던 터라, 조금만 일찍 나가달라 부탁했다.
내가 저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 괜한 오해를 하면 그게 또 곤란하기도 했고.
와중 엠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괘, 괜히 꼬투리 잡히는 거 아니겠죠? 법황청 이단 심문관들이 그렇게 무섭다던데···."
"내가 파로스다. 임마. 쟤들도 나 건드리려면 미친 척하고 목숨 걸어야 해."
그걸 시도한 게 태자였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탄식이 일었다.
생각을 털어내고 방을 나서 계단을 내려갔다.
저택의 홀을 지나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하니 마차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차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렇게, 성기사들과 마차가 멈췄다.
일순간의 정적.
절도 있는 자세로 멈춰선 성기사들 중 하나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내리는 여자를, 나는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첫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그만큼이나 하얀 피부,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로 비치는 금색의 눈동자.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고요하고 눈부셨다.
그게 너무나도 어색했다.
'이런 얼굴이었나.'
내가 아는 히스토리아는 안면 근육이 일그러져 광대에 눈이 돋아있었다.
팔은 관절이 네 개였고, 허리는 곱추처럼 굽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리는 세 개에 등 뒤엔 깃털이 뽑힌 날개가 꽂혀 있었다.
무엇보다 피부가 검보라색이었다.
그런 여자가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단다.
문득, 언젠가 부대원들이 모였던 술자리에서 리암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리 성녀님 왕년엔 진짜 눈알 빠지게 예뻤던 거 아십니까? 제가 딱 한 번 뵌 적이 있었거든요! 멀찍이서···.
―전 지금도 제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엑.
―엑? 그 반응 뭐예요?
―어··· 부관님?
―병신 새끼, 말을 꺼내질 말던가.
―부관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얼굴 치워라. 밥맛 떨어지니까.
―푸핫! 너무해!
히스토리아는 제국 제일의 미녀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희망의 여신이 가호 대신 그녀의 외모를 이 땅에 내렸다고.
'이후에 어쨌더라···.'
그래, 얘기를 듣던 태자가 꼭 한 마디를 더 얹어서 히스토리아를 화나게 했다.
히스토리아는 한나에게 가서 태자의 치즈버거를 전부 몰수해버렸고, 태자는 무릎을 꿇고 히스토리아에게 빌었었지.
그날은 끔찍했던 전쟁의 나날 중에서도 몇 없는 우스웠던 날이었다.
그 시간의 일부는 이렇듯 내게 추억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쓴웃음이 배어 나오고 만다.
"파로스의 가주를 뵙습니다."
추억은 나만의 것이라는 게, 이리도 잘 실감 되지 않던가.
그렇겠지.
그것을 인정해야겠지.
나는 이 녀석과 남이 되었다.
조금도 알지 못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무엇도 아닌 참고인이 되었다.
시간은 내게서 슬펐던 순간만을 골라 앗아가 줄 정도로 자비롭지 않음이니.
그걸 겨우내 받아들이고서야, 나는 마주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희망의 성녀를 뵙습니다."
속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관님,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져 있을 거예요.
이 녀석은 나를 살리다 비참하게 죽어버린 녀석이었으니까.
< 히스토리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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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토리아 (2) >
#038화. 히스토리아 (2)
야전에서 의무병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 하면 입이 아픈 수준일 것이다.
특히 법황청이고 마탑이고 죄다 망해버린 제국 병력에게 의무병은 천금을 줘서 데려와야 마땅한 존재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죄수 부대는 운이 좋았다.
무언가를 부수거나 해칠 줄 알던 놈들이 대부분인 죄수들 사이에, 하필 제국에서 가장 특출난 의무병이 있었으니 말이다.
―히스토리아. 그냥 그렇게 불러주세요.
―예, 성녀님.
―하하! 재밌는 분이시네!
히스토리아는 그 시절에도 성녀였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서 추앙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신성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 중 가장 짙었음을 의미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몰골로 전락했음에도 마찬가지.
그녀는 희망이 가장 총애하는 존재였다.
아무렴, 팔다리가 날아가도 조각만 잘 찾아오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치료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 정도 능력이 있으니 중앙에 배치될 법도 했다.
그녀는 애초에 스스로 누명을 덮어써 옥에 들어간 여자였으니, 군 기강에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죄수 부대에 배치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성녀는 시한폭탄이에요. 중앙에 둘 순 없어요.
성녀의 몸에 배어 있던 오염이 문제였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뒤틀린 몸에 곪아있던 오염이 온 사방으로 퍼져버리게 된다.
전쟁이 아닌, 내부에서의 사고로 군대가 자멸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찰나에 태자가 그녀를 낚아채 왔다.
어떤 의무병도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게 우리 부대다.
우리로선 시한폭탄일지라도 치유 능력만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런 이유 탓에 성녀는 죄수 부대의 의무병이었다.
여하튼, 내 휘하에 배치된 그 여자에 대한 것을 말해보자면··· 그래.
―앗, 들꽃이네요!
머릿속이 꽃밭이었다.
그녀는 전쟁에 휩쓸려 죄다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혐오를 담고 있었음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그런 점까지 아울러 과연 성직자라는 건지, 그 녀석은 언제나 희망을 설파했다.
처음엔 히스토리아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에 몇십, 몇백은 자다가도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지도 않으면서 웃는 꼴이 영 배알 꼴렸다던가. 그냥 생긴 게 혐오스러워서 가까이 가기가 싫었다던가.
그런 인식이 바뀌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히스토리아에게 잘해주자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 행동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그냥, 히스토리아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모두가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매 순간 진심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내일은 한나가 새로운 요리를 보여주겠대요!
모두가 어제 잃은 것과 오늘 잃을 것은 이야기할 때, 그 여자만이 내일 얻을 것을 이야기했다.
―혹시 고민 같은 게 있나요? 아, 혹시 짝사랑···!
죽어가는 것 외에도 수많은 것에 가치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꽃, 화분으로 만들면 혼날까요?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 짓게 만들었다.
그래, 세상 누구보다 가장 흉측한 얼굴을 했던 히스토리아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우리가 그 녀석을 아꼈던 이유였다.
거기에 또 하나를 굳이 더하자면 그랬다.
―오늘도 고해성사에요?
그녀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동아줄이었다.
무엇보다 고해성사가 주는 심적인 안도감이 너무 컸었다.
특히 내게 그랬다.
―부관님이 제일 많이 오는 거 알죠?
―입 다물고 듣기나 해.
―고해성사하러 온 거 맞나?
―저는···.
―와, 듣지도 않네.
응어리졌던 죄가 너무 깊었다.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지극했다.
그렇기에 말해야만 했다.
스스로 그것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히스토리아에게 내 많은 후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마다 히스토리아는 "죄를 사하노라!"라고 하며 웃었다.
언젠가는 그런 말을 했었다.
―잘 될 수 있어요. 다 잘 될 거예요.
―장담하지 마.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니요. 쉽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파로스를 재건할 것이라고 말하며 든 근거가, 그게 아직도 기억난다.
―망나니 소가주께서 이렇게 군의 귀감이 되고 계시잖아요. 수많은 병사들을 살리고 있잖아요. 이미 변하셨어요. 그리고 더 변하실 거예요.
―이러다 내가 배신하고 적군에 귀의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않을 걸 믿어요. 저는 부관님을 아니까.
부하, 동료, 그런 것을 넘어.
그날의 그 녀석은 참으로 고귀하게 보였다.
―선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믿어주는 거예요. 그게 제 의무니까요.
이 녀석이 성녀인 이유를, 그날에야 실감하고 말았다.
그런 녀석이었기에 최후의 순간도 그 녀석다운 형태였다.
―하하, 고립됐네요.
제도 방어전이 있기 3개월 전, 전선은 허물어지듯 밀리기만 했다.
우리는 매일 퇴각을 위한 전투를 했고 하필 양동작전에 본진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지원을 위해 달렸다.
그게 실수였다.
―씨발, 나 노리는 거였네.
―적들이 무서워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죠!
양동이 아니라 삼중이었다.
야만족의 왕이 태자를 붙드는 사이, 지원을 위해 움직일 나를 노려 매복 병사들을 심어뒀다.
어떻게든 이기긴 했지만, 내 상처도 깊어져 퇴각은 불가.
마나를 죄다 써버린 데다가 근육과 관절이 짓이겨지는 수준의 부상이었다.
숲이라 몸을 숨길 곳은 있었지만 오래 살아 버티긴 그른 환경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본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히스토리아는 내 곁에 남았었다.
자신이 있으면 다른 녀석들의 이동이 느려질 거라는 명목이었는데···.
뭐, 변명이지.
―죽는 건가···.
―아뇨, 부관님은 살아 나갈 수 있어요.
그 녀석은 내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미친 짓거리였다.
이미 2차, 3차 추격조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이 정도 부상이면 히스토리아의 신성력으로도 하루를 족히 필요로 하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추격조는 반나절이면 우릴 찾아낼 정도로 끔찍한 놈들이었다.
가라고 했지만 영 말을 들어 처먹질 않았다.
온갖 험한 말도, 심지어 이를 악물고 뺨을 갈겨도 녀석은 꼿꼿했다.
도리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취약해진 내게 수면 마법을 걸어버렸다.
―부관님,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져 있을 거예요.
이후의 일은 그저 정황으로밖에 알 수 없었다.
―···히스토리아.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끔찍한 형태로 뒤틀려 있었다.
추격조들은 돌연변이화 되어 꿈틀거렸다.
나무들은 의지라도 얻은 듯 허리를 뒤틀고 있었다.
오로지 내 몸만이 신성에 보호된 채 멀쩡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너무 뻔하지 않나.
언제나 신성력으로 몸 안에 가두고 있던 오염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것으로 추격조들을 죽였고, 와중 나를 살린 것이다.
자폭했다.
나를 살리겠다고.
그 사실만이 명징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묻어주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오염에 다시 손을 대었다가 일어날 일을 알아서.
돌아가 본대의 전투에 합류해야 했기에.
그게 그 녀석이 살려준 목숨값을 다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듯, 내일을 위해 살고자 했다.
그 일도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멸망으로 끝난 걸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긴 하다.
끝으로 회상하길, 녀석은 치즈버거보다 고기빵을 좋아했다.
황폐함 속에 핀 들꽃을 사랑했으며 내일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그런 녀석이었다.
"이곳은 정원이 참 이쁘네요."
그런 녀석이 내겐 익숙지 않은 얼굴로 녀석이 웃는다.
익숙하게 꽃을 칭찬한다.
조용하게, 그러나 활기를 담아 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게 참 마음을 심란하게 하여서, 무어라도 미안함을 덜어내고 싶어서.
나는 그리 말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아직이긴 한데···."
"그럼 밥 먹으면서 합시다. 참고인 조사."
히스토리아는 눈을 끔뻑이다,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성기사들도 함께 먹을 수 있을까요?"
"서, 성녀님···!"
"하하, 다들 아침부터 못 먹어서···."
성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듯하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렌이 히스토리아를 맞이하고 있는 그 시각, 칼리오스 또한 여명궁의 접견실에서 성자 베르헤임을 마주했다.
붉은 머리와 금색의 눈동자.
신의 은총을 받은 대리인치고는 너무나도 무감정해 보이는 차분하고 차가운 인상.
그를 마주한 칼리오스는 생긋 웃었다.
"오느라 고생 많았네. 단둘이라니 긴장이 되는군."
독대였다.
암만 악마 소환에 대한 참고인 조사라 한들, 태자 칼리오스 반 오르테어를 앞에 두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며 추궁할 수 있는 건 성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걸 떠나서도 그랬다.
'자네가 이 구도를 원했겠지.'
칼리오스는 모든 것을 예상했다.
애초에 베르헤임이 악마를 역소환한 장본인인 유렌이 아닌, 자신을 찾아올 것도 계산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자네는 악마엔 관심이 없지 않나.'
그에게 악마는 중요한 게 아니다.
건국제 날부터 레베카가 사라졌다.
고작 일주일이겠지만, 그에게 지난 일주일은 체감상 영원과도 같았을 터였다.
당장 레베카의 행방을 물을 곳은 그나마 그녀의 곁을 맴돌았던 자신과 베아트리스, 대공자, 그리고 암흑가에 있을 그.
개중 베아트리스는 악마에게 당해 몸져누워 있다.
대공자는 북부로 돌아가 있으며, 암흑가의 그와 베르헤임은 상성이 최악이었다.
그럼 자신 밖에 없지 않던가.
사건 조사에 있어 더 중요한 인물인 유렌에게 굳이 성녀를 보내는 것도, 이리 독대를 청해온 것도.
그런 사고의 흐름을 읽을 수만 있다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행동 양식을 안다면 반격은 더욱 쉬워진다.
칼리오스는 여유롭게 물었다.
"그럼 바로 진술을 시작하지. 무엇을 묻고 싶은가?"
"···우선 직접 본 것들부터 일러 주십시오."
"미리 말해준 게 끝이네. 유렌이 내게 마탑으로 와줄 것을 청했고, 그리 도착해 보니 악마를 쓰러트린 유렌이 있었네. 부끄럽게도 제때 나타나지 못했고··· 이후는 그의 상처를 돌보기 위해 동분서주한 게 끝이군."
베르헤임은 침묵했다.
칼리오스는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임은 분명했다.
그게 기꺼웠다.
"더 미심쩍은 게 있나? 손이 닿는 곳까진 도움을 주도록 하지."
애초에 이 참고인 조사에서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은 칼리오스가 아니었다.
이미 베아트리스의 사례가 있는 이상, 또한 자신이 유렌에게 행하려 했던 일이 있는 이상.
칼리오스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었다.
'자, 무슨 생각이든 들었을 것 아닌가. 그 악마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지 않나? 자네는 뭘 준비했나.'
분명, 실행 중이거나 실행할 생각이 있는 대형 사고가 있을 터다.
칼리오스가 알아내야 할 건 그것이었다.
이런 귀찮은 방법을 통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다.
악마가 마음에 새긴 이름을 벗겨내기 위해선 확신으로 향할 의혹이 필요하다.
의혹을 심기 위해선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할 만한 우위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던가.
상대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 확실히 상대를 구속할 만한 억지력이 없다면, 레베카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도리어 일을 더 크게 만드는 일밖에 되지 않는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뭔가 꾸미는 것 같으니 심문 좀 받자'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는 법황청의 두 기둥 중 하나, 여기서 삐끗하다간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확증.
하여 틈을 보기 위해 먼저 틈을 보여줬고.
"이상하군요. 역소환 이후 전하께서 파로스의 소가주와 함께 성을 나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데 상처를 돌보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라···."
베르헤임은 그에 걸렸다.
"···어떤 상처를 입었기에 제도의 치유사들을 다 제치고 외부로 향했습니까?"
칼리오스는 웃음을 참았다.
그의 눈빛에 차오르는 감정, 저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를 능히 느낄 수 있었기에.
"악마가 소환되어 있음을 본 상태였네.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쳤을지 몰라, 사람을 피할 필요성을 느꼈지."
"그럼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 질문이 중요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꼭 추궁이라도 하는 모양새군?"
톡, 칼리오스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난 참고인으로서 앉아있는 것일진대."
"···전하께서 제도를 나설 일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원하던 말이 나왔다.
칼리오스는 그 순간 표정을 바꿨다.
분노와 의심, 경계를 섞은 표정은 꽤 조바심과 닮은 형태였다.
"···내가 레베카를 찾아갔다?"
"······."
"도리어 내가 묻고 싶군."
마나가 어슴푸레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칼리오스는 정제되지 않은 살기를 주변으로 흘려내며 베르헤임에게 질문했다.
"그래, 난 레베카를 찾았네. 악마가 나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가장 먼저 그녀가 걱정되어서. 한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네. 흔적조차 없었단 말이네."
쿠구구궁―
접견실의 가구가 요동쳤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레베카는 없었던 것이지? 고민 중 그런 생각이 들더군."
칼리오스의 얼굴 위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체 악마가 그 난장판을 벌이고 잡힐 때까지. 법황청은 무엇을 했나?"
베르헤임의 눈빛이 침잠했다.
칼리오스는 그를 마주하며 살기를 짙게 만들었다.
속으로는 웃으며 말이다.
'자, 의심받는 기분은 어떤가?'
의심은 곧 경계심을 만든다.
경계심은 은밀함을 낳는다.
하나, 과한 은밀함은 도리어 위화감을 조성한다.
무언가 준비하는 게 있다면, 또한 성자의 성격이라면 그 위화감은 분명 드러날 터였다.
그것을 느껴야 할 상대가 있었다.
'부탁하네. 유렌.'
조사가 있기 전 작전 회의에서 유렌은 말했었다.
―권력을 위한 정치 싸움으로는 몰고 갈 수 없습니다. 성녀는 그리 움직일 수 없는 인물이니.
―그럼 어떻게 하나?
―다른 방면으로 대립하게 만들어야지요. 예를 들면 도의적인 의심을 심는다던가.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전하, 의심이란 건 본디 정황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유렌은 아마 성녀와 이미 만났을 터.
판은 깔아줬으니, 남은 건 그의 몫이었다.
< 히스토리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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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토리아 (3) >
#039화. 히스토리아 (3)
히스토리아와 성기사들은 유렌의 안내를 받아 저택에 들어왔다.
그녀는 걸으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입가엔 생긋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와중 유렌은 말했다.
"앉아 계시면 금방 내어 오겠습니다. 마침 준비 중이던 것이 있어서."
"아, 네! 호의에 감사드려요."
방긋 웃으며 답하자 유렌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히스토리아는 곧장 성기사들에게 속삭였다.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사용인 분들이 밝아 보이시네요. 저택 분위기도 온화하구요. 말했죠? 소가주께서는 소문처럼 나쁜 분이 아닐 수도 있다고."
성기사들은 그녀의 말에 뜨끔 하는 기색이 되었다.
왜 아니겠는가, 유렌이 그녀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완전 무장으로 와버린 것을.
히스토리아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극구 부인했음에도 강행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머쓱함은 더했다.
"···예, 참으로 그러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렌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히스토리아에게 동경 같은 감정을 보이진 않았으나, 귀족으로서의 예우는 확실히 보였다.
더불어 먼저 식사 자리를 청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식사를 약속하기까지 했다.
히스토리아는 그런 점을 조목조목 짚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예요. 한때 소가주께서 과거에 방황하셨다곤 하지만 지금은 태사의 자리에 계신 분이잖아요? 그리고 업적도 많이 세우셨고. 성숙해지신 거죠!"
굵직한 것만 따져도 벌써 오크 챔피언 사냥, 악마 소환 저지였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이가 이루었다기엔 믿기가 힘든 수준의 업적.
물론, 히스토리아가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가 어떤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느냐 따위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해 나설 수 있었던 용기.
그것을 가장 높이 사는 것이었다.
본래 히스토리아의 성격이 그랬다.
밝고 좋은 것을 사랑하며, 암만 악한 사람이라도 사소한 계기만 있다면 선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에 유렌이 예외가 될 이유는 없었기에 이곳에 오기 전부터 그의 편을 들었고, 실제로 자신이 옳았음을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다음부터는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예, 성녀님···."
히스토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어느 순간 유렌이 나타났다.
직접 요리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서 말이다.
"오래 기다리진 않으셨습니까."
"아, 네! 한데 그건···."
그녀는 눈을 끔뻑였다.
유렌이 가져온 음식이 참 특이했기 때문이다.
접시 위에 놓인 것은 하얀색의 동그랗고 투명한 빵, 그 속으로 무언가 다른 것이 차 있는 게 흐리게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가 말했다.
"고기빵입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펴고, 그 속에 고기와 야채를 다져 넣은 후에 둥글게 말아서 찐 음식이지요."
"아아···! 되게 신기하네요! 전통식인가요?"
"그건 아니고, 옛 친구가 전수해준 레시피입니다. 간단하게 요깃거리로 하기 좋지요."
메뉴는 오직 그것 하나였다.
식사 예절에 따르면 박대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히스토리아는 그런 것을 구태여 따지는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은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다과 정도로 생각하면 새로운 음식은 꽤 재밌는 즐길 거리이지 않던가.
유렌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성기사 여러분들도 드십시오. 열량이 높아 충분히 허기를 지워줄 겁니다."
그 순간 문득, 히스토리아는 이 음식을 어찌 먹는 것인지 몰라 의아함을 느꼈다.
슬쩍 유렌을 흘겼고, 그가 맨손으로 이 '고기빵'을 집어먹는 걸 보고서야 얼추 먹는 방식을 이해했다.
직후 히스토리아는 고기빵을 조심스레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다···!'
첫입에 바로 그런 감상이 떠올랐다.
겉을 감싼 피(皮)가 맛있는 게 아니라, 안에 채워진 다진 고기와 갖은 야채의 맛. 그 식감의 조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는 그녀는 고기와 야채의 향이 밴 육즙이 풍미의 비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입가를 손으로 가린 히스토리아는 공연히 신나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정말 맛있네요! 근래에 먹어본 것 중 제일이요!"
"그렇겠지요."
"네?"
"···아,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요리를 좋아해서."
"직접 만드신 거였나요?!"
히스토리아는 깜짝 놀랐다.
장차 위대한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이 요리를 직접 한다는 것이 아주 신기했던 까닭으로.
또한, 그것은 히스토리아로 하여금 그에 관한 호의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녀는 격식보단 진솔함과 솔선수범을 우선하는 사람을 애호했다.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대단하시네요! 정말···!"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식사부터 하시지요. 조사는 어떻게, 식사를 끝내고 하시겠습니까?"
"앗."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 온 이유는 참고인 조사 때문이었던 것을.
히스토리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그녀는 이윽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머, 먹고 하죠···!"
크흠, 헛기침을 하자 유렌에게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스토리아의 귀가 빨개졌다.
* * *
이 시점에 히스토리아가 뭘 좋아하는지, 또 어떤 성격인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전쟁터에서 함께한 세월만 3년 하고도 반년 이상이다.
그동안 하루 이상 떨어져 지낸 일 없이 거의 매일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으니 구워삶는 건 쉬웠다.
뭐, 그런 걸 떠나서라도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에 굳이 '고기빵'을 만들어줬다.
비록 한나가 만들던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히스토리아의 취향을 맞추는 정도는 쉬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녀를 움직이는 건 쉬웠다.
조사 시간이 됐다.
히스토리아가 웃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먼저 경위를 듣고 싶은데요."
"미리 조서로 드린 것에서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악마의 전조를 발견했고, 황성에 도움을 요청한 후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위자드 베아트리스께서 홀로 악마 소환을 저지 중이셨습니다. 저는 그 일을 도왔고··· 상처를 입어 치료를 위해 떠났지요."
알리바이는 이쯤.
물론, 완벽이 아닌 허술함을 부각하는 알리바이였다.
히스토리아는 금방 미끼를 물었다.
"네, 그래서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전조는 어떻게 알아채신 건가요? 그리고 왜 법황청이 아닌 황성에 도움을 요청하셨나요? 끝으로, 회복을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당일 밤에 성문 밖을 향하셨다는 정보가 있어서요."
그녀는 사뭇 진중했다.
그래도 대충 조사할 생각은 없는 거겠지.
하지만 큰 걱정은 안 든다.
그녀는 나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그 속에 있길 바랄 것이다.
그게 설령 어처구니없는 이유더라도 믿어주는 쪽을 우선 생각하겠지.
그런 여자라서, 이 방법이 가능하다.
"그 일들을 설명하려면, 저는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네···?"
"먼저 전조는 어떻게 알아챘느냐. 이건 가문 내의 일을 말씀드려야겠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접견실 벽 쪽 서재를 향하며 말했다.
"파로스는 대대로 삿되고 사특한 것에 관한 교육을 받습니다. 건국기부터 황실을 지켜보는 역할을 맡은 만큼, 후계자에게 가장 큰 위험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을 기르는 것이지요."
"아하?"
"개중 악마에 대해서라면 특히 정보가 방대합니다. 어쩌면 법황청보다."
히스토리아가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 이건 급조한 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300년 전, 제국에 나타났던 악마를 역소환한 이들 중 저희 선조가 계셨습니다."
벨프 파로스.
300년 전의 태사이자, 내가 있기 전까지 마지막 태사였던 남자는 자신이 밝혀낸 악마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파로스의 서고에 봉해두었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주와 후계뿐.
노을을 보고 바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도움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 말이 히스토리아를 납득시켰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그럼 본론, 왜 죄송해야 하느냐. 그 이유는 제가 법황청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청할 대상으로."
"···!"
"짧은 판단이었으나 후회는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악마를 역소환할 때까지 법황청은 마탑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들이 나타난 건 내가 제도를 빠져나간 이후.
그러니까, 노을빛 하늘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는 기현상 이후였다.
"누가 악마를 소환했는지 알 수 없다. 그 상황에서 저는 믿을 근거가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고, 그것이 저 스스로 선택한 태자 전하십니다. 법황청은··· 예, 솔직히 말하면 생각도 안 났고 이후엔 안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건 저희가 미흡했음을 인정해요! 하지만 그 시간에 저희는···."
"예, 건국제를 기념하는 중요한 미사가 있었지요. 두 시간 동안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셨을 터. 아마 악마 소환자가 그 시간을 의도적으로 노린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맞다.
당사자인 베아트리스의 입으로 직접 들은 내용이었으니.
히스토리아는 그에 표정을 굳혔다.
하나,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뒤늦게, 악마를 역 소환한 후 끝내 법황청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 의심이 갔지요. 이대로 법황청이 뒤늦게 나타난다면? 조사를 위해 나를 붙든다면? 그중에 소환자가 있다면? 위기지요. 그런 생각이 드니, 무엇보다 부상 입은 상태로 끌려가는 최악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오해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실례가 됨을 알고 있음에도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네에."
"성자께선 미사회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한데 왜 성자께서도 악마 소환을 모르신 겁니까? 더군다나 그분께선 '가호'를 받으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 부분은 음해였다.
악마 소환에 성자가 연관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심기 위한 음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몰아간다면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
'성자의 행동을 의심하게 되겠지. 아무리 성격 좋은 너라고 해도.'
나와 태자의 목적은 히스토리아에게 '도의적인 의심'을 심는 것.
성자가 이상한 행동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싹을 틔우는 것.
의심만 있으면 된다.
그리하면 분명 균열이 생기고, 그것은 성자에게 틈을 만들어 줄 터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분명 '금서 연구'에 닿을 것이다.
아무렴, 남의 눈을 피해 하루에 몇 시간씩 잠적하는 그 모습은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겠나.
'금서의 연구는 하루 이틀에 되는 게 아니야. 확실히 이 시점에도 무언가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내 생각은 그렇다.
미사가 있던 그 시각에도 성자는 금서를 연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법황청 내에서 움직이는 눈들을 피하기엔 너무 좋은 시각이 아닌가.
하지만 심증만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다.
혹여 단번에 비밀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꽤 큰 문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걸 떠나 우리가 물리적으로 들이닥치는 게 성자를 자극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내부에서 그를 흔들어줘야 하고, 그 수단이 히스토리아였다.
결론부터 말해, 작전은 통한 듯했다.
"그건···."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 * *
법황청.
성자 베르헤임의 개인 집무실.
히스토리아는 그곳에 앉아 베르헤임과 대면하고 있었다.
참고인 조사의 보고였다.
하나, 그녀는 심란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리아?"
흠칫, 베르헤임의 부름에 히스토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애써 밝은 표정을 만들며 답했다.
"아, 응."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 아무것도. 아, 조사한 건 말인데···."
히스토리아는 대략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유렌의 말은 그녀가 감히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을 짚었다.
악마 소환의 용의자에서 법황청조차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의 선택을 받은 베르헤임조차 벗어날 수 없다.
확실히 유렌의 말을 따르면 무언가 이상했다.
'여신님께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린다고···.'
계시를 따라 대담을 청하고 올 것이라 했다.
가호를 받은 성자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떤 계시도 가호도 없는 희망의 여신과 다르게, 운명은 언제나 현계에 가르침을 내려왔으니.
하지만 말이다.
'그때여야 했을까? 아니, 여신님과 대담 중이라면···.'
···어째서 여신조차 악마 소환의 징후를 모르셨던 걸까.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여신의 종일 뿐인 베르헤임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악마와 동격인 여신이 어째서 제도에 일어난 이변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구멍투성이다.
도리어 이제까지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왜? 왜 아무도 그 생각은 못 했을까?'
자문하지만 답은 뻔했다.
그가 성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특별함과 신성함을 믿기 때문이다.
히스토리아 역시 그랬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때부터 베르헤임을 봐왔다.
베르헤임은 언제나 특별했다.
차분하고 이지적이었으며 눈부신 휘광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만큼은 온전한 신과 인간의 편이리라는 전제가 깔릴 수밖에.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치 않았다.
신이 인간에게 기적을 내린다면 그것은 꼭 베르헤임과 같은 형태일 테니까.
애초에 그가 용의자라는 걸 믿고 싶지도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그렇게 의심이 많은 성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음, 태자의 진술과 일치한다. 다른 점은 탈출의 동기군."
"응?"
"태자는 레베카를 찾기 위해 나섰다고 했다. 한데 유렌 파로스는 법황청을 경계한 행위였다라··· 혹시 다른 말은 없었나?"
"다른 말이라면···?"
"밤새 뭘 했는지. 혹여 레베카를 찾아간 건 맞는지. 레베카를 봤는지. 이 부분이 수상해서."
히스토리아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녀의 얼굴 위론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베르."
"···아, 미안하다."
"아니, 아니야. 너에겐 그 문제도 있었겠지."
평생 타인을 자신과 같은 선상에 두고 보지 못하던 베르헤임이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웃음기 많은 평민 여자아이.
히스토리아는 진심으로 그 관계를 응원했다.
그녀로 하여금 베르헤임이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일에 익숙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와 자주 만날수록 베르헤임은 어딘가 이상해져만 갔다.
이따금씩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이 아이가 낯설게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것이 유독 도드라지는 것이 최근 일주일.
레베카의 실종 이후였다.
'···조급해 보여.'
아니,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지 않나.
실종되었다면 원인을 찾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흔적을 찾고 그 길을 따라 레베카를 먼저 수색해야 한다.
한데, 베르헤임은···.
'···범인을 만들고 있어.'
태자를 의심한다.
정황상 억측에 가까운 의심만 있을 진대도.
그 공범으로 유렌을 짚는다.
자신이 본 유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이 범인이라 지목될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범인으로 만들 수 있을 요소를 찾는데 바빴다.
생각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렀다.
히스토리아는 그런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애원에 가까운 마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건넨 것은.
"···베르, 그런데 말이야."
"왜 그러나."
"악마가 나왔던 날. 여신님과 대담을 했다고 했잖아."
"···그랬지."
"여신님께서, 악마에 대한 경고를 해주시진 않은 거야?"
히스토리아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자신과 같은 금안.
짙은 신성의 상징이었다.
언제나 저 눈은 올곧고 맑았다.
한데, 지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 고민.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나?"
너무나도 탁했다.
히스토리아의 손은 책상 밑으로 치마를 꼭 쥐었다.
얼굴 위론 미소를 지었다.
"아니, 없어."
손끝이 잘게 떨렸다.
베르헤임은 그런 히스토리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향했다.
차를 달였다.
그는 저런 취미가 있었다.
신성의 불꽃이 물을 끓이고, 찻잎을 우리고, 차가 만들어진다.
베르헤임이 히스토리아에게 차를 건넸다.
"신경이 예민해진 듯하군. 마셔라.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효능이 있다."
"베르, 내 질문은?"
"들은 게 없다. 계시는 양방향의 소통이 아닌, 내가 한 가지를 물어 천상에 청하면 대담 때 그 답을 듣는 형태니까."
그럼 말 하나 전하는 게 두 시간이나 걸릴 일이야?
무슨 이야기를 청했는데?
질문은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이상은 추궁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구나."
히스토리아는 찻잔을 잡았다.
그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맡는 향이네."
"이번 건국제에서 구한 거다. 모험가들이 외경을 탐사해 구해왔다고 하더군."
"응···."
히스토리아는 차를 마셨다.
그런 중 느꼈다.
베르헤임이 고개 숙인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그 표정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히스토리아 (3) > 끝
ⓒ pap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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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별의 이름은 (1) >
#040화. 샛별의 이름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