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자신의 고충은 자신만 안다
위군맥이 싸늘한 시선으로 인장풍을 쓱 쳐다보자, 인장풍의 머리 위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인장풍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곧장 남궁묵의 곁으로 뛰어갔다.
이내 위군맥이 옥색 구슬이 놓인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구슬은 용안(龍眼)처럼 크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조금 전 손을 살짝 폈을 땐, 분명 희미한 불빛도 새어 나왔었다. 자세히 보니 구슬 위에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분명 아주 보기 드문 형태의 야광주임이 틀림없었다.
“…….”
인장풍은 뻣뻣하게 경직된 상태에서 남궁묵을 보다가 노인의 정체를 궁리했다. 노인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품을 더듬거리다 꺼낸 물건이 희귀한 야광주고, 그걸 선물까지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때, 남궁묵이 입을 실쭉거리며 손을 뻗었다.
“돌려주십시오.”
남궁묵은 위군맥과 혼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또한 스승님이 준 선물이든 뭐든, 위군맥에게는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이 이렇게 값어치 있는 물건을 가지고 계셨다는 걸 알았다면 무엇 하러 돈을 드렸겠는가?
하지만 남궁묵은 결국 알았다 해도 스승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늘 스승을 피붙이처럼 여기곤 했다. 다만 스승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위군맥에게 야광주를 선물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위군맥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남궁묵이 보는 데서 야광주를 자신의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돌아서 서봉촌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장풍은 남궁묵을 바라보는 위군맥을 보며 남몰래 웃으며 생각했다.
‘군맥, 그리 차갑게 굴면 아직 네 여인도 아닌 남궁묵이 떠나지 않겠는가?’
남궁묵은 당장 눈앞에 멀리 사라져 가는 위군맥을 칼로 찔러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스승님, 당신 제자가 그리 쉽게 돈을 버는 줄 아십니까? 간신히 벌었는데 스승님을 만나자마자 절반이나 날려버린 건 아십니까? 제가 달라고 할 땐 주지도 않으셨으면서!’
“아이고, 남궁 아가씨. 화 좀 가라앉히십시오.”
인장풍은 웃음을 꾹 참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한 남궁묵에게 말했다.
“와, 스승님께서 참으로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십니다.”
그러게 말이었다. 첫 만남에 야광주를 선물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일전에 연왕도 남궁묵에게 옥패를 선물하긴 했지만, 그 옥패에는 귀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뿐, 옥패 자체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당연히 좋은 옥이긴 했다. 하지만 인장풍은 위군맥의 야광주를 팔면 연왕이 선물한 옥패 일고여덟 개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곧 남궁묵이 슬픈 눈으로 말했다.
“제 말이 그렇습니다.”
앞에서 걷고 있던 위군맥이 불현듯 뒤돌아 그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안 갈 건가?”
남궁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저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된 셈이었다. 겉과 속이 판이했다. 단점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위군맥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가 단순히 그의 평판이나 눈 때문만은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체면을 세우고 본때를 보여줄 날이 분명히 올 것이었다.
이내 인장풍이 빙그레 웃곤 쥘부채를 흔들며 따라갔다.
“간다! 남궁 아가씨랑 몇 마디 나눈 것이 다인데. 군맥이 자네, 그런 걸로 신경을 쓰는 건 아니겠지?”
남궁묵은 위군맥이 자신을 따라 서봉촌까지 오는지는 몰라도, 인장풍은 분명 한가하고 무료하니 함께 어울리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 * *
이윽고 남궁묵의 집 앞에 도착한 인장풍이 놀란 듯 말했다.
“남궁 아가씨, 이런 곳에서 거처하는 것입니까?”
남궁묵이 인장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의 과장된 표정과 행동을 보는 남궁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이 집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인장풍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었다면 으레 걱정하는 말이라 생각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묵은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인장풍이 그런 얼굴을 보이니 우습기만 할 따름이었다.
평소에 호의호식하는 인장풍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무 수행 기간에 누가 장소를 따진단 말인가? 평범한 민가는 고사하고 외양간이나 마구간이어도 들어가야 할 상황이면 들어가야 했다.
계속되는 정적에 인장풍은 자신의 행동이 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코를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근데 남궁 아가씨는 남궁가의 큰아가씨가 아니십니까? 초국공께서 거처도 마련해 주지 않을 정도로 인색하신 건 아니시지요?”
남궁묵은 옆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뒤돌면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들여보내 줄진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남궁묵이 악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인장풍은 억울한 얼굴로, 옆에서 집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위군맥을 쳐다봤다.
“그냥 걱정되어 그런 것입니다. 이리 좁은 곳에서 어떻게 주무십니까?”
남궁묵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저랑 한방에서 잘 생각이십니까? 장풍 공자님,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인장풍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자야 한단 말입니까?”
남궁묵이 덤덤하게 답했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두 사람을 초대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 자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불안함에 인장풍이 흥분해서 말했다.
“우리는 손님입니다!”
남궁묵이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초대를 안 했으니 제 발로 오신 손님이겠지요.”
달리 방법이 없자, 인장풍은 위군맥에게 도움을 청했다.
위군맥은 고개를 돌려 뒤에 보이는 남궁가의 저택을 본 후, 다시 눈앞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을 보았다. 그리곤 무덤덤하게 말했다.
“옆집에 가서 묵도록 하지, 자네가 가서 물어보게나.”
위군맥의 싸늘한 눈빛에 인장풍은 하는 수 없이 그리로 향했다.
그가 손쉽게 인장풍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궁묵은 어깨를 으쓱이며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위군맥도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절대 귀족 아가씨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위군맥이 황성에서 숱하게 봤던 득세하지 못한 사람들이 쫓겨났던 곳이나, 사랑받지 못하는 서녀가 사는 곳도 이곳보다 열 배 아니, 백 배는 더 좋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며, 조금 전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나쁘지 않은 방 안 광경이 펼쳐졌다. 값나가는 장식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유 모를 편안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안채 벽 쪽엔 수납장이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곳에는 각종 약재가 놓였고, 옆에 있는 책꽂이에는 책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대부분 의서와 지리 관련 서적들이었다.
하지만 남궁묵이 들어오자마자 뒷방으로 떠나서, 위군맥은 하는 수 없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 * *
잠시 후, 남궁묵이 찻주전자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다가 책상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위군맥을 발견하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수한 옷차림의 준수한 공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기대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이 초라한 집을 순식간에 우아하고 범상치 않은 공간으로 보이게까지 했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위군맥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을 우러러보게 하는 존귀한 분위기를 타고난 것 같았다.
곧 위군맥이 발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남궁묵이 든 찻주전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고생하며 살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위군맥은 남궁묵의 의술 실력도 알고 돈을 밝히는 모습까지 보았기에, 지금 그녀가 거처하는 이 집이 매우 의아했다. 거기다 그녀의 스승이란 노인에게 선뜻 돈을 건네는 모습까지 보니, 수중에 돈이 부족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남궁묵은 찻주전자를 책상에 올려놓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생 말입니까? 고생이란 무엇입니까? 위 세자께서도 금릉 황성에서 호의호식하며 수많은 하인의 시중을 받고 사시지만, 과연 삶이 고생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위군맥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과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후에도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맞습니다.”
남궁묵은 덤덤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언제든 호의호식하고 호화로운 환경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지 않아도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왜 그래야 합니까? 혼자 화려한 저택에 살며 하인 수백 명의 시중을 받아도 다 저랑 상관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단으로 몸을 휘감고 하인들을 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위군맥이 찻잔을 들고 옅은 미소를 띤 남궁묵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금릉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남궁묵은 속내를 감추지 않고 여전히 여유롭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금릉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금릉성 안에 좋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곳보다 자유로운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남궁묵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순응하고 잘 살아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평생 혼인하지 않고 살 수는 없었다. 남궁회를 신경 쓰지 않더라도, 언젠가 스승과 사숙이 억지로 혼사를 정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나이가 찼는데도 혼인하지 않으면 서봉촌에서도 계속 지내긴 힘들 것이었다. 살수는 은밀한 직업이지만, 성과 이름을 숨기고 살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남궁가로 돌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건 생각해 봤습니까?”
남궁묵이 반신반의하여 위군맥을 쳐다봤다.
“정말 저랑 혼인할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하겠지요.”
위군맥이 그녀를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폐하의 명이 아닙니까. 폐하께선 농으로 그런 분부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남궁묵은 살기 어린 눈빛을 감추며 화를 애써 억눌렀다.
“그러면 남궁주와 혼인해야 맞는 것 아닙니까?”
위군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남궁가의 적녀와 혼사를 맺어 주셨고, 남궁 부인의 영애는 아가씨뿐이니 그대와 혼인하는 것이 맞습니다.”
남궁묵은 처음으로 남궁주를 위해 사실을 소명해 주고 싶었다.
“남궁주도 적녀입니다.”
남궁주의 어머니, 정 씨가 정실부인을 대신한 첩실이라 해도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남궁가의 정실부인이었다.
“남궁주는 서녀로 태어났지 않습니까.”
계속되는 방어에 남궁묵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남궁주만 당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남궁주가 싫다는 말이지?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잠시 후 위군맥이 다시 물었다.
“생각은 잘 해보셨습니까? 설사 내가 파혼에 동의해도 폐하께서는 그 이유를 추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허나 그렇게 금릉에 돌아간다 해도, 아가씨의 혼사는 피할 수 없는 처지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그대의 혼사를 초국공과 정씨 부인이 결정하게 되어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남궁묵이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위 세자께서는 이 혼사에 아무런 불만이 없으십니까?”
위군맥이 담담히 말했다.
“없습니다. 그저 폐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화를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문 남궁묵을 보자, 위군맥의 얼굴에 냉한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정말로 이 혼사에 만족하고 있었다. 남궁묵은 저와 마주할 때 그 어떤 경멸과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위군맥은 진정으로 황성에 돌아가면 황제의 성은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