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무심한 남자
길을 걷는 그들의 입에서는 다시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파냈다면 금방 망가지지 않았겠습니까.”
먼저 위군맥이 무미건조하게 말하자, 남궁묵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상관없습니다, 약수에 넣으면 그만이니까요.”
좋아하는 것이 많은 남궁묵이었지만, 스스로도 이리 자줏빛 눈동자에 강렬히 사로잡히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지금껏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까딱하다 눈을 마주칠 때면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눈앞에 진귀한 장신구를 펼쳐놓고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기분이었다.
“…….”
위군맥이 눈썹을 추켜올리자, 남궁묵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러니 제 말은 저한테 신선도를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는 겁니다. 위 세자께서도 보존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특별히 위 세자께는 50냥에 팔겠습니다. 그런데 뭘 파냈기에 망가진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남궁묵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웃었다.
위군맥은 남궁묵을 무덤덤하게 한 번 바라보곤 다시 돌아서 걸어갔다.
곧이어 남궁묵은 그의 뒤를 따르며 있지도 않은 식은땀을 닦고, 이 위험한 사내와는 빨리 헤어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십니까?”
이윽고 남궁묵이 돌아서 가려 하자, 뒤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묵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성 밖으로 나왔으니 위 세자께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연왕(燕王) 전하의 저택 별채부터 가야 합니다.”
남궁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말입니까?”
위군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
“50만 냥이나 받고 약방문 한 장 휙 던져주면 끝인 줄 알았습니까? 아가씨께서 주신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남궁가 큰아가씨의 의술 윤리입니까?”
“…….”
‘당신이 이토록 말주변이 좋다는 걸 장평 공주님께서도 아십니까?’
그 냉하고 과묵한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대부호인 위군맥은 돈을 받고 액막이를 해줬음에도 남궁묵이 책임지지 않으면 약방문을 물리겠단 말을 전했다. 그에 결국 남궁묵도 그를 따라 연왕 저택의 별채로 갈 수밖에 없었다.
* * *
권세 있고 지체 높은 양반들의 별채는 죄다 행궁 주변에 지어져 있는데, 공교롭게도 남궁가의 집과 연왕의 저택만 대각선에 위치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기별도 없이 온 남궁묵은 위군맥을 따라 저택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마침 연왕(燕王)과 연왕비(燕王妃)는 대청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연왕은 들어오는 위군맥을 보고 근엄한 얼굴로 따스하게 웃었다.
“군맥이 왔느냐. 남궁 아가씨도 왔구나. 이쪽으로 앉아라.”
“외숙부님, 외숙모님.”
“연왕 전하와 연왕비마마를 뵈옵니다.”
서른을 갓 넘긴 연왕비는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친근함이 느껴지는 단정한 얼굴이었다. 연왕비가 곧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가 큰따님 아니신가? 듣던 대로 참 곱군. 그리 예의 차릴 것 없네.”
“황송하옵니다. 연왕비마마.”
연왕비는 연왕의 계비지만 명문가 출신이었다. 현 왕조의 개국공신이자 노장군인 경국공 남전이 바로 그녀의 부친이었다.
원비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황제는 남씨의 적차녀를 연왕의 계비로 들였다. 연왕과 혼인한 후 연왕비는 적자 3명을 낳았고, 장자는 올해 열여덟이 되었다. 연왕비는 현숙하고 너그러우며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선황후가 살아 계실 때 가장 아꼈던 며느리 중 하나였고, 지금은 연왕의 경애를 받고 있었다.
연왕비가 곧 남궁묵을 자신 곁으로 끌어당겨 앉히고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아리따운 아가씨구나. 예전에 남궁 부인을 두 번 뵌 적이 있는데, 참 모란꽃처럼 아름다우셨었지. 그러고 보니 남궁 부인을 많이 닮은 것 같구나. 나도 슬하에 여식이 둘 있지만, 유주(幽州)에서 볼 수가 없다네.”
남궁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연왕비마마.”
남궁묵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는 연왕비는 그녀가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연왕비도 연왕이 외조카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어, 위군맥이 좋은 여인을 배필로 맞이하는 것이 무척 기뻤다.
곧 연왕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군맥이가 복이 많구나.”
“…….”
남궁묵은 난감했다.
“감사합니다. 외숙모님.”
덤덤하게 답한 위군맥이 이번에는 연왕에게 말했다.
“외숙부님, 여기 약방문이 있습니다. 남궁 아가씨가 특별히 보완한 것이니 몇 달 꾸준히 드시면 효과를 보실 것입니다.”
위군맥이 약방문을 꺼내 연왕 앞에 내밀었다.
연왕은 곧 어리둥절해하며 건네받았다.
어안이 벙벙한 건 남궁묵도 마찬가지였다. 위군맥의 말에서는 자신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효과를 볼 것이라는 단정적인 말도 하지 않았으니, 석 달 후 완치되지 않더라도 만회할 여지를 준 셈이었다.
“…….”
‘혹여 내가 당신을 속이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는 것입니까?’
남궁묵의 시선을 느낀 위군맥이 그녀의 호주머니를 쓱 한번 쳐다보았다.
‘감히 나를 기만해 50만 냥이나 뜯어냈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에 남궁묵은 남몰래 조용히 뾰족한 눈초리를 보냈다.
‘저 밉살스런 무표정!’
“남궁 아가씨가 의술에도 능한 것인가?”
연왕비는 은근히 놀란 눈치였다. 연왕의 상처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고, 명의를 수소문해 봐도 이제껏 뚜렷한 효험을 본 적은 없었었다.
“조금 아는 것뿐이옵니다.”
금세 연왕비의 눈빛이 실망감으로 어두워졌다.
“외숙부님, 외숙모님. 저희는 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외숙부님, 약을 꼭 드셔야 합니다.”
연왕이 고개를 끄덕인 후 남궁묵에게 말했다.
“남궁 아가씨도 언제 시간 있으면 별채에 한번 놀러 오거라.”
“예. 연왕 전하, 연왕비마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연왕비가 몸을 일으키더니 친히 하인에게 위군맥과 남궁묵을 배웅하라 일러주었다. 또한 남궁묵에게 자주 들르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묵은 그저 미소로만 답하며 물러날 뿐이었다.
* * *
남궁묵이 당당하게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위군맥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위군맥이 아무리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라 해도 그는 정강군왕부의 세자이자 장평 공주의 아들이었고, 연왕의 외조카이며 황제의 친외손자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안의 몇몇 문지기들에게 감히 위군맥을 막아설 배짱은 없었다.
그렇게 남궁묵, 위군맥은 대수롭지 않게 성을 나갔다. 하지만 남궁묵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데 이 사내가 따라와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거기다 도중에 만난 인장풍까지 따라오는 바람에, 결국 세 사람이 나란히 집에 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봉촌까지는 아직 2리나 남아 있을 무렵, 나이는 들었지만 민첩해 보이는 사람이 순간 달려들었다.
“묵아, 묵아…….”
하지만 남궁묵이 민첩하게 옆으로 피해서 노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곧바로 수포가 되어 버렸다. 위군맥과 인장풍은 노인을 쓱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노인은 무공의 기본기는 갖추고 있긴 하였으나, 보잘것없는 솜씨라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아서였다.
노인이 반갑게 말했다.
“묵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 스승이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절 걱정하셨단 말입니까?”
남궁묵이 예쁜 눈썹을 살짝 까딱이며 손에 든 것을 들어보였다.
“이것이 아니고요?”
노인은 콧방울을 움직이곤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장원루 오리구이군! 역시 우리 묵아가 스승을 섬길 줄 아는구나. 하하!”
남궁묵은 무덤덤하게 비아냥거렸다.
“사흘 전엔 스승에 대한 예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헴,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이 스승에겐 우리 묵아가 최고다. 스승에 대한 섬김을 모른다니! 내가 꾸짖은 건 네 사형(師兄)이었다.”
남궁묵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형이 돌아오면 그 말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에 노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것이 스승을 놀리고 있구나!”
그때 인장풍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풉……. 남궁 아가씨, 저 노……, 아니 저분이 스승님이십니까?”
‘이 노인이 농 던지는 것 말고 남궁묵에게 뭘 더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거지? 남궁묵은 분명 위군맥처럼 진지하고 점잖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노인은 그제야 남궁묵 뒤에 누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에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두 사람을 한참 훑어보다가 물었다.
“묵아, 둘 중 누가 네 낭군인 것이냐?”
“…….”
남궁묵은 멍하니 손에 들린 짐을 쳐다보았다.
‘그냥 이 오리구이로 당장 스승님 입막음을 해버릴까? 화근이 될 말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니, 예의 없다고 벼락을 맞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인장풍이 바로 두 발자국을 물러나 옆에 있는 위군맥을 가리켰다.
“오호?”
노인은 위군맥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점점 굳어져 가는 그의 얼굴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탄식하듯 말했다.
“묵아, 네 아버지가 좋은 이는 아닌가 보구나. 이 사내,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 내 보기엔……, 그냥 네 사형과 만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스승님이라는데 인사도 안 하다니! 어찌 이토록 눈치가 없을 수 있는가?’
참다못한 남궁묵이 이마를 짚고 손에 든 짐을 스승의 품에 떠넘기며 말했다.
“스승님, 얼른 가시지 않으면 오리구이가 식어 맛이 없어질 겁니다. 그리고 술값은 제가 다 갚았으니, 이제 성에 들어가셔서 즐겁게 노시면 됩니다.”
그러더니 지폐 한 장을 꺼내 스승의 손에 쥐여 주었다. 노인은 밤낮으로 상상하던 맛있는 요리를 손에 넣자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내 제자야, 이 스승은 널 믿는다. 널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이 스승에게 말하거라. 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선 품속을 더듬거리다 구슬 하나를 꺼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위군맥의 손에 가만히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제자의 낭군을 처음 보는 것인데 선물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겠느냐? 오늘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받거라. 그럼 이 늙은이는 젊은 사람들 일에 그만 참견하고 이만 가보겠다.”
노인은 세 사람의 표정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짐과 지폐가 생긴 것에 너무도 기뻐하며 떠나갔다. 그 후, 한참을 멀어졌음에도 그의 박자도 안 맞는 괴상망측한 노랫소리가 꾸준히 세 사람의 귓가를 괴롭혀 왔다.
인장풍은 노인이 멀어지자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다.
‘저 노인장 정말 웃기는 사람이구나!’
“하하하!”
인장풍은 하도 웃어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하하. 군맥아, 저 노인장께서 네게 무슨 선물을 주었나?”
지금껏 위군맥을 말 못 하는 이라 착각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놓고 다른 사내를 만나란 인물도 처음이었다. 왜, 위군맥이 그렇게 별거 아닌 사람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