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데릴사위
'할 수 있다. 아카데미도 상위 성적으로 졸업했고, 빵빵한 뒷배도 만들었잖아. 할 수 있어.'
제임스는 우중충한 회색 복도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끝까지 꽉 조인 셔츠가 따끔했지만, 제임스는 거기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오늘이 바로 그토록 고대하던 정보국 면접 날이기 때문이었다.
정보국이 어떤 곳인가. 대륙의 천재 중에서도 천재만 모인 곳이었다. 비밀리에 제국을 움직여 그 존재를 아는 이도 극소수였다.
정보국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인재만 골라 받는 아카데미를 상위 성적으로 졸업하거나, 대륙에서 이름을 알릴 정도의 위업을 달성해야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철저한 신분 조사를 통과해야 했고, 실무와 근접한 실기를 통과해야 했다. 면접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리고 제임스는 이 기적을 꼭 잡고 싶었다.
"시발, 진짜."
그때, 투박한 욕설이 들렸다. 고개를 드니 맞은 편에 검은 머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단추를 풀어 헤친 정복과 삐딱한 자세, 짜증이 가득 찬 얼굴까지-. 딱 봐도 불만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제임스에게는 사내의 정복만 보였다.
'······정보국 요원!!'
정보국 요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보국은 베일에 싸인 조직이었다. 실제로 면접까지 오는 과정에서도 사람 한 명 마주친 적 없었다.
제임스 또래인 것 같은데, 벌써 정보국 요원이라니-. 제임스의 눈이 절로 반짝였다.
"뭐 볼 일 있습니까?"
사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멋있어서 그랬습니다!"
제임스는 황급히 차렷 자세를 하며 대답했다. 혹시나 붙으면 제임스의 선임이 될 사람이었다.
"병아리한테 화풀이하기는···. 최악이군."
사내가 눈을 찡그리며 연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나 줍니까? 좋은 건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내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사내의 손가락 위로 붉은 불이 타올랐다.
"······마법사!"
제임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법사로 정보국 요원이라니!
"마법사 처음 봅니까?"
제임스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제임스의 손가락 주변으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후배였군."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사내가 작게 혀를 찼다. 사내의 입가로 회색 연기가 풍겼다. 제임스를 보는 사내의 표정이 미묘했다.
"왜 편한 길을 두고 관리국에?"
사내의 물음은 타당했다.
본래 마법사로 졸업하면, 마탑에 들어가는 게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귀족의 아래로 들어가거나-.
마법사는 전투보다는 연구와 개발에 최적화된 직군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쪽에서 벌 수 있는 돈과 명예가 압도적으로 컸다.
제임스에게도 마탑에서 권유가 많이 들어왔다. 그를 뿌리치고 정보국에 지원한 이유는-.
"영광스러운 제국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고 싶습니다!"
면접 예상 질문에 있던 터라, 제임스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사내가 눈을 찡그렸다. 이게 아닌가?
"······마나가 좀 새는군. 압축 과정이 조금 약해."
"압축 말입니까?"
"이렇게."
사내가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사내의 손가락에 스파크가 튀었다. 언뜻 보면 제임스와 같았지만, 제임스는 그 정교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더 적은 마나로 같은 효율을 낼 수 있군요!"
"그래, 아카데미에서는 안 알려주지. 책만 잡아본 놈들은 마나 효율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실전에서는 효율이 더 중요해. 마나 한번 채우는 데 얼마나 걸리지?"
"삼일 정도 걸립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예?"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기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다.
"마나를 아무 생각 없이 채우지 말고, 저장할 때부터 그 농도를 계산해서 저장해. 그냥 숨을 쉬듯 무지성으로 저장하니까 삼 일이나 걸리지."
'마나 저장하는데 농도를 계산하라고?'
마법을 쓸 때 계산식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마나 농도를 계산하라니-. 그게 말이 되나? 제임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농도를 미리 계산해서 기억해두면, 딱 필요한 마나만 쓸 수 있지. 그럼 이런 것도 가능하고."
사내가 연달아 손가락을 튕겼다. 스파크가 연속으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한 개였던 것이 순식간에 터지더니, 작은 꽃 모양이 됐다.
번개로 이루어진 꽃-. 그 정교함에 제임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게 여자한테 잘 먹히거든. 자네도 써 봐. 껌벅 죽어."
"······아, 그렇습니까."
"여자 친구 있나?"
"헤어지고 왔습니다."
"정보국이라?"
"네."
"멍청이군."
"네?"
사내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풍겼다.
"들어가면 못 사귀거든."
"괜찮습니다! 저는 제국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제국 의견은 들어봤나?"
"······예?"
사내가 기침하듯 웃었다.
"그래, 아무튼 정보국에 들어가면 하나만 기억해."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눈을 감고, 입을 닫아. 시키는 것만 해. 그러면 올라갈 거야."
사내가 눈을 찡그렸다. 언뜻 보면 웃는 것 같았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 않았다.
그때, 옆쪽 문이 열리고 여인이 나왔다. 차가운 인상의 미인에 제임스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갈라하드, 실내에서는 금연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이건 마나 연초라고."
"그래서요?"
"향긋하지."
여인이 피식 웃으며 안쪽으로 고갯짓했다. 혀를 찬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임스는 멍하니 사내를 올려봤다.
"그대는 이혼당하지 말고 잘 버텨보라고."
"······네? 네!"
제임스의 어깨를 두드려준 사내가 문으로 들어갔다.
제임스는 '갈라하드'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은 이름이더라···.
'···아카데미 최연소 졸업자!'
뒤늦게 떠올린 이름에 제임스의 입이 쩍 벌려졌다.
갈라하드는 아카데미의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보통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마법사는 대부분 2위계, 높으면 3위계였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최연소로 졸업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졸업할 때 4위계였다.
졸업 후 갑자기 사라졌다더니-.
'정보국에 들어갔구나.'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런 전설적인 인물을 만났다니-. 제임스는 작게 '야호!'라고 소리쳤다.
역시 정보국이었다. 대륙의 천재 중 천재만이 모여서 제국을 이끌어간다는 정보국-.
그때, 안쪽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시발, 지금 나보고 기둥서방을 하라는 겁니까?"
갈라하드의 목소리에 제임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임스는 다급히 문 위를 쳐다봤다. 큼지막하게 '부국장실'이라 적혀 있었다.
부국장실에서 저렇게 거친 욕설을 하다니-.
'멋있다.'
제임스의 눈이 반짝였다.
'꼭 붙어야겠어!'
제임스는 주먹을 쥐며 기합을 넣었다.
저 멋진 갈라하드의 밑에서 일하고 싶었다.
***
"갈라하드, 대공의 장녀와 결혼하라는 게 어떻게 기둥서방이 되나?"
부국장이 살집 가득한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숨을 깊이 내쉬며 진정했다.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대공의 장녀가 어떤 인물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최연소 소드 마스터 아닌가. 장래에는 북부 대공 자리를 이어받을 거고. 그렇다면 북부 대공의 남편이 되는 것인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가."
부국장이 허허 웃었다. 뻔뻔한 태도에 갈라하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왔다.
제국이 세워질 때만 해도 대공은 정말 대공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이자, 황제 바로 다음 권력자-.
다만, 북부라는 위치가 문제였다. 북부는 마족의 영토와 맞닿아 있었다. 대공은 마족의 공세를 막아내야만 했고, 그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힘을 잃고 있었다.
거기에 무식한 북부 놈들은 마법을 마족의 부산물이라며 마법사를 극도로 혐오했다. 대공의 영토는 유일하게 마탑이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마법사이자 정보국 요원인 갈라하드를 보낸다는 건,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부국장이 가장 밀어준 카드였다. 제 손으로 쳐낼 리가 없었다.
"어디서 내려온 겁니까."
착잡한 얼굴이 된 부국장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부국장은 위에서 꽂아준 인사라며 정보국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부국장이 위를 가리킨다는 건, 정말 위쪽이라는 이야기였다.
"자네 아버지가 추진한 일일세."
"시발! 진짜! 개 같은···."
갈라하드는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갈라하드는 백작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여기 귀족은 권력이 약해지는 걸 막기 위해, 장남에게 모든 걸 승계했다. 그중에는 장남을 제외하고 전부 죽이는 일도 있었다.
귀족의 아들로 환생한 갈라하드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마법을 공부했다.
공부야 전생에서 실컷 했으니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한국에서 명문대에 들어갔던 갈라하드였다. 따분한 수능 공부와 대학 공부에 비해 마법은 공부할 때마다 시각적인 부산물도 있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밌었다.
더불어 기본적인 마법 술식은 전생에서 배웠던 고등 수학 정도였다.
덕분에 최연소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정보국에도 들어왔다. 이 정도면 이제 배 두드리고 살겠지 싶었건만-.
'챙겨주지 않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나를 팔아? 이런 시발.'
아주 정치적인 정략결혼이었다. 갈라하드의 명석한 머리는 피할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결론은 금세 도출했다. 막다른 길이었다.
'좆 같네 진짜.'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부국장 맞은편에 앉아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부국장의 눈썹이 올라갔지만, 이제 선임도 아니었다.
"갈라하드-."
"뭐요?"
"나도 한 대 달라고."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부국장을 노려봤다. 그래, 부국장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 주머니에서 연초 하나를 꺼내 부국장에게 건넸다.
"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간단한 마법도 못 쓰십니까."
"자네도 늙어보게.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불!"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부국장의 연초에 불을 붙여줬다.
"사내가 돼서 레몬 향이 뭔가. 레몬 향이."
"얻어 피우면서 불만은 참 많습니다."
둘은 가만히 연초만 연달아 폈다.
부국장의 얼굴도 그리 좋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부국장이 가장 밀고 있던 카드였으니, 부국장도 빈털터리가 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게, 왜 결혼을 안 했나? 나이도 찼을 텐데."
"제국과 결혼했습니다."
"자네가 제국을 싫어하는 건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만."
"부국장님도 아내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일리가 있군."
둘이 작게 웃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부국장이 피곤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국장의 손발이 다 잘린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국장이 다시 부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됐습니다. 알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으며 연초를 비벼 껐다.
"하긴 자네 여인들한테 인기가 많지. 사실 자밋도 자네를 좋아한다네."
부국장이 옆에 있는 자밋을 가리키며 짓궂게 웃었다. 그러자 자밋이 얼굴을 가득 찡그렸다.
"사실 알고 있었네. 자밋 미안, 사내 연애는 별로라."
"······저도 한 대 주시죠."
자밋까지 셋이 나란히 앉아서 한참이나 뻐끔거렸다. 대화 하나 없이 조용했지만, 각자 머리는 시끄럽게 굴러가고 있었다.
"사탕이나 초콜릿 사가십쇼. 여자는 그런 거 좋아합니다. 북부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자밋이 연기로 도넛 모양을 만들며 말했다.
"사탕이라. 기억하지. 아, 밖에 있는 놈 쓸만할 겁니다."
"밖에 있는 놈?"
"당근처럼 생긴 애송이 말입니다."
"당근?"
"면접자 말하는 거 같은데."
"아, 그렇군. 근데 자밋 왜 반말을···. 해도 되지. 우리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허허. 그래, 괜찮아 보이더냐?"
"예, 제국이랑 결혼하겠다더군요."
"자네가 면접 때 했던 말이군."
갈라하드가 쓰게 웃었다.
그런 말을 했었나?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면접 볼 때는 다들 그러지 않나. 이 회사를 정말 좋아한다고-, 뼈를 묻겠다고-. 그런 맥락이었다.
"뭐 더 궁금한 건 없나?"
부국장이 몸을 뒤로 눕히며 물었다. 처음 갈라하드와 마주했을 때는 정의와 야망으로 반짝이던 눈에 이제는 노쇠함과 피곤이 자리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여자 이쁘답니까?"
이번에는 부국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웃던 부국장이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더군."
2화 가죽 수첩
'고작 가방 하나가 전부라니.'
갈라하드는 손에 든 가죽 가방을 흔들며 작게 혀를 찼다.
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결국 건진 건 이 가죽 가방 하나였다. 정복도 반납하여, 올 때 입고 왔던 허름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살아 나온 건 내가 최초로군.'
정보국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었다. 정보국에서 나가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전설이었다. 실제로 한 번 정보국에 속하면, 다른 부서로 이동할 수 없었다.
정보국은 보안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기 때문이었다. 갈라하드도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면, 망치로 머리를 때려서라도 기억을 지우려 했을 것이다.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때, 마차 한 대가 요란하게 다가왔다. 윤기 넘치는 말의 투레질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몇몇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보는 것처럼 구경했다.
'요즘 시대에 마차라니-.'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도학이 발전하면서 말 대신 마법진과 마나 저장소를 단 마력차가 유행했다. 값은 말과 비슷하거나 저렴한데, 관리도 쉬워서 인기가 많았다. 실제로 수도에서 마차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다.
'대공이 보낸 마차군.'
그 먼 거리를 마차 타고 가야 한다니-.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마차로 향했다. 마차에는 눈이 쭉 찢어진 사내가 앉아 있었다.
두꺼운 쇠갑옷과 허리춤의 기다란 검, 허벅지 안쪽의 단검, 옆에 둔 투구까지-. 전형적인 기사였다.
"갈라하드 앰버르탄님 맞으십니까?"
"그렇다. 대공 전하가 보내신 마차인가?"
"예, 길버튼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사내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외관보다 내부가 더 형편없었다. 천 쪼가리를 두른 의자는 술집 의자보다 불편해 보였고, 벽에는 얼룩까지 있었다.
'쉽지 않겠군.'
이런 허름한 마차와 고작 한 명을 보냈다는 건 그쪽에서도 갈라하드를 반기지 않다는 뜻이었다.
"마족 가죽으로 만든 거라 생각보다 푹신할 겁니다."
길버튼이라 소개한 사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불평해도 바뀔 게 없는 걸 알기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랐다.
쾅, 마차 문이 요란스럽게 닫혔다. 갈라하드가 앉기도 전에 마차가 움직였다.
"푹신하기는-. 누가 엉덩이를 발로 차는 것 같군."
작게 투덜거리자 마차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귀가 밝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안쪽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가죽 수첩을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허름한 수첩이지만, 마나를 흘려 넣으니 자동으로 펼쳐졌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시작하여, 번듯한 글씨체까지 다양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제일 위에 적힌 문장은-.
[나는 소설에 빙의했다.]
삐뚤빼뚤한 한글로 적혀 있었다.
분명 갈라하드가 쓴 문장이었지만,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흐릿했다.
처음에는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로 환생한 줄 알았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때, 갈라하드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마족과 익숙한 이름들을 듣고 나서야 소설에 빙의했다는 걸 깨달았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기억을 되짚어 소설의 내용을 정리했다. 그게 이 가죽 수첩이었다.
빙의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시간이 제법 지난 뒤였다.
소설에 대한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다지 주의 깊게 봤던 소설도 아니었고, 누가 소설 내용을 외우면서 읽나.
그래도 굵직한 줄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세상은 마족의 왕에게 멸망한다.]
소설은 새드 엔딩이었다. 아니, 새드 엔딩이라 표현하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좆좆 엔딩이었다.
[중요 인물 : 금발의 소드 마스터, 무슨 대마법사, 요정의 어머니, 도끼를 쓰는 야만인, 반마족······.]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혀 있었다. 결말은 확실했지만, 그 외의 내용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아래에 제국어로 설명이 붙어 있었다.
[대마법사는 황혼의 마탑주가 가장 유력하다. 소재지는 불명. 금발의 소드 마스터는 북부 대공의 장녀가 유력함, 요정의 어머니는 요정의 숲에 있을 것, 도끼를 쓰는 야만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갈라하드가 정보국에서 일하며 얻어낸 정보들이었다.
갈라하드의 목표는 따스하고 편한 노후였다. 그를 위해서 마족의 왕 엔딩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원래는 정보국에서 마족의 왕을 대비할 생각이었다. 정보국은 대륙을 움직이는 기관이라 불릴 정도로 큰 권력 기관이었으니까.
'그런데 북부 소드 마스터의 기둥서방이라···.'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잘된 수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수는 아니었다.
금발의 소드 마스터는 비중이 가장 컸던 영웅이기도 했고, 마족과의 전선이 있는 지대였으니까.
본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고 하지 않나.
갈라하드는 손때가 묻은 수첩을 계속해서 다시 읽으며 기억을 되짚었다.
***
마차가 멈춘 건 해가 떨어지고 나서였다.
"내리시지요."
길버튼이 뒤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도로 바로 옆이었다.
"노숙하겠다는 건가?"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백작 가문의 자제였다.
하루 간격으로 마을이나 성이 있는데, 왜 굳이 노숙하겠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최대한 제국과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대공 전하의 뜻인가?"
"저는 아드리안나 님을 따릅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가 결혼할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래, 부인 말을 잘 들어야지."
으드득, 길버튼의 입가로 살벌한 소리가 났다.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군.'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갈라하드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마법사에 백작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그런 놈과 대공의 장녀가 결혼하는 상황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 아래에 수많은 알력 다툼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을 것이다. 결과를 보니 대공의 패배였고.
"아직 혼인하신 건 아닙니다."
길버튼이 어금니를 보이며 웃었다. 등을 콕콕 찌르는 살기-.
'이거 위험하겠군.'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쓰게 웃었다.
길버튼은 말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노숙이 익숙한 듯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지켜봤다.
장작들이 모이더니 순식간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냄비를 그 위에 올리고, 고기를 던져 넣었다. 거기에 스튜까지-.
'먹기 싫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여기 놈들의 위생 관념이 쓰레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흙을 파고 장작을 만진 손으로 고기를 뒤집다니-. 최악이었다.
"드시죠. 북부식 요리입니다."
길버튼이 고기 하나를 잡아서 내밀었다. 썰지 않아 큼지막한 고깃덩이였는데, 그 표면만 구운 상태였다. 익지 않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냥 레어도 아닌 슈퍼 레어였다.
이딴 게 요리? 어이가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반찬 투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맙네."
갈라하드는 고기를 입으로 뜯었다. 비린내를 가득 머금은 시큼한 피가 입안을 채웠다. 꼭꼭 씹어 삼켰다.
단순히 엿 먹이려고 그렇게 구운 건 아닌지, 길버튼도 고기를 뜯었다. 심지어 흐르는 피를 음료처럼 마셨다. 그 야만적인 식사를 보고 있으니 북부로 가기 싫은 마음이 한결 커졌다.
식사는 조용하게 이어졌다. 다 먹은 길버튼이 병에 담긴 술을 건넸다.
"나는 술을 하지 않네."
갈라하드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술은 머리를 느리게 하고 손을 무겁게 하기에 마법사에게는 금기였다.
"역시 마법사시군요."
길버튼이 '마법사'를 강조했다. 좋은 발음은 아니었다.
"그래, 아주 뛰어난 마법사지."
갈라하드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대답했다. 길버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북부에서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무식한 북부 놈들은 마법사와 마족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고작 이 정도의 협박이라니. 갈라하드는 유치함을 느꼈다.
"설마 대공이 자신의 영토에서 사위 하나 못 지킬까."
이번에는 길버튼이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인내심이 깊은 놈이었다.
"요즘 제국에서 마법사들을 사냥하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마법사의 심장이 아주 비싸다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길버튼이 히죽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최근에는 마법사들이 사냥당하는 기록도 제법 많이 올라왔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이래 봬도 제법 귀한 물품이니까. 황제 폐하와 대공의 이십 년만의 교류 아닌가. 반란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흉흉했는데, 교류의 증거인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갈라하드가 히죽 웃었다. 길버튼은 전과 달리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꽤 중요한 사람이네. 잘 모시게."
그 내막은 갈라하드도 몰랐다. 어쩌면 단순히 줄 끊긴 신세일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 없었다.
"드셨으면 다시 움직이시죠."
길버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 자고 계속 움직일 생각인가?"
"예, 중한 분이시라."
"괜찮겠나?"
"저는 기사라서 며칠은 안 자도 됩니다. 중한 분은 괜찮으십니까? 마차가 많이 흔들릴 텐데."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삐졌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끄덕였다.
실제로 마차의 의자는 딱딱하고 격하게 흔들렸다.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갈라하드를 어떻게든 고생시키려는 치졸한 속셈이 분명했다.
다만, 갈라하드는 마법사였다. 이 시대의 마법사는 전투보다는 보조적인 성격이 강했다.
흔들리는 마차를 아주 푹신하고 조용한 침대로 만드는 건 꽤 쉬운 일이었다.
갈라하드는 오랜만에 코까지 골며 잤다.
***
똑똑.
경보 마법에 갈라하드는 눈을 떴다. 얼마나 푹 잤는지, 몸이 개운했다.
갈라하드는 자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었다.
전보다 수척해진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푹 주무셨나 봅니다?"
"아주 잘 잤지. 자네는 괜찮나?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습니다. 전장에서는 며칠 자지 못하는 거 흔한 일입니다."
"그렇군. 나는 괜찮으니, 계속 수고해주게."
길버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었다.
"가는 길에 성이나 마을에 한 번 들르지."
"···성 말입니까?"
"코트를 좀 사야할 것 같아서 말이지."
갈라하드는 닭살이 오른 팔을 쓸며 말했다.
"마법사가 추위도 탑니까?"
길버튼이 정말 의문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마법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사람인데 당연히 타지."
물론, 마법을 사용하여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마법사의 신체에 영향을 주는 마법은 침대를 깎거나 소리를 차단하는 것보다 배는 더 까다로웠다.
"경로에 가르세튼 성이 있지 않나? 거기 코트가 좋다던데. 들르지."
"가르세튼 말입니까?"
묘하게 찝찝한 반문이었지만, 길버튼은 원래 찝찝한 놈이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길버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굉장히 찝찝한 놈이었다.
***
'춥군.'
갈라하드는 머리를 넘기며 투덜거렸다. 중앙은 매일 따뜻했는데, 여기는 닭살이 올라올 정도로 추웠다.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마나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연초를 입에 물지도 않았는데, 입김이 나왔다.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쭉쭉 빠질 정도였다.
돌이 깔려있지 않아서 구두 아래로 진흙이 잔뜩 묻었다. 진흙이 맞나? 갈라하드는 코를 킁킁거렸다. 꺼림직한 냄새가 풍겼다. 진흙이군. 갈라하드는 황급히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향긋한 레몬 냄새가 다른 냄새를 물리쳤다.
"올라갈수록 더 추워질 겁니다."
눈 밑이 퀭해진 길버튼이 뾰족하게 말했다. 길버튼은 어디서 꺼냈는지 동물 가죽처럼 보이는 털 옷을 입고 있었다.
"전선에서 추위를 맨몸으로 버티고 뭐 그런 거 없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미소였다.
"예, 군인도 따뜻하게 입습니다."
아쉽군. 갈라하드는 작게 투덜거렸다.
그때, 뚱뚱한 사내 하나가 뛰어왔다. 살집이 얼마나 많은지 뛸 때마다 흔들렸다. 사내는 유행이 다 지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이고! 오셨으면 내성으로 오시지 왜 외성에 멈추셨습니까!"
뚱뚱한 사내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슬쩍 길버튼을 쳐다봤다. 길버튼은 마치 자신 일이 아니라는 듯 시선을 피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대공 전하의 손님 아니십니까?"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길버튼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공 측에서 방문한다는 언질이 있었군.'
길버튼은 성에 방문하는 걸 오히려 반대했다. 저 사내가 말하는 방문이 갈라하드의 방문은 아닐 것이다.
"들어가시죠!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푹신한 침대가 있나?"
갈라하드의 물음에 뚱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끄덕였다.
"예, 따뜻한 욕조도 있습죠!"
"잘 익힌 고기도?"
"물론입니다! 저희 요리사는 이 근방에서 제일입니다!"
"좋군."
갈라하드가 끄덕이자, 신난 돼지 사내가 엉덩이를 출렁이며 앞장섰다.
"조심하십쇼. 가르세튼 성 주변에서 사라진 인물이 꽤 많습니다. 그중에는 마법사도 있다더군요. 마법사에게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어느새 옆에 붙은 길버튼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나. 진작 말했어야지."
"안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하긴."
작게 투덜거리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이 작게 웃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자네, 싸움 잘하나?"
뜬금없는 물음에 길버튼의 눈썹이 구겨졌다.
"제법 합니다."
"그러면 잘 지키게나. 나는 중요한 몸이니까."
갈라하드가 입에 문 연초를 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모한 건가, 담대한 건가. 혹은 알고 있나.'
작게 중얼거린 길버튼이 어딘가로 손짓을 보냈다.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3화 덜렁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르세튼 성의 영주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삐쩍 마른 사내였다. 길버튼도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 다니엘은 길버튼보다 한 뼘 더 컸다,
'음침하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다니엘의 손을 맞잡았다.
"갈라하드 앰버르탄이라고 합니다."
"······앰버르탄이면-. 오, 앰버르탄 백작님의 자제분이셨군요."
다니엘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니엘이 입꼬리를 올리자, 뾰족한 누런 송곳니가 보였다.
'앰버르탄 백작을 알고 있군.'
의외였다. 중앙 귀족이라면 앰버르탄 백작을 알만 했지만, 여기는 북부의 초입이었다.
앰버르탄은 꽤 대단한 귀족이었지만, 여기까지 위명을 떨칠 정도는 아니었다.
둘 중 하나였다. 다니엘이라는 이 귀족이 중앙으로 진출하고 싶은 야심이 있는 귀족이거나-.
'앰버르탄 백작을 따로 조사한 적 있거나.'
다니엘의 뒤로 보이는 큼지막한 벽난로에서 따뜻한 열기가 퍼졌다. 다니엘의 얼굴에 음영이 깊어졌다가 얕아졌다.
"앰버르탄 백작님의 자제분이 대공 전하와는 무슨 일로-."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뒷말을 흐렸다.
"초청받았습니다."
"초청 말입니까?"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길버튼을 가리켰다. 길버튼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시건방진 태도였지만, 다니엘은 신경 안 쓰는 듯했다.
"아, 그렇군요. 식사하셨습니까?"
갈라하드가 고개를 젓자, 다니엘이 다시 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같이 드시지요. 지금쯤이면 준비가 됐을 겁니다."
***
'진짜 북부식이었군.'
갈라하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포크로 찍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길버튼이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덜 구워서 주나 의심했는데, 여기 고기도 핏기를 머금고 있었다. 오히려 길버튼의 고기가 더 익힌 상태였다.
"술은 안 드십니까?"
"금주 중이라."
갈라하드가 고개를 젓자, 다니엘이 히죽 웃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미소였다.
그때, 하녀가 갈라하드의 그릇에 구운 채소를 올려줬다. 갈라하드는 자신을 뚫어지라 보는 하녀에 눈을 찡그렸다. 당장 다른 귀족이었으면, 뺨을 올렸을 상황인데도 하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안 먹나?"
"괜찮습니다. 아까 먹어서."
갈라 하드의 물음에 길버튼이 고개를 저었다. 오기 전에 길버튼이 했던 괴상한 소리와 어우러지며 찝찝함이 가중됐다.
"혹시 마법사십니까?"
그때, 다니엘이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순간 식사 자리가 조용해졌다. 움직이던 하녀들이 그대로 멈췄다.
'앰버르탄을 조사한 적 있군.'
갈라하드는 다니엘을 응시했다. 그 번들거리는 눈이 꼭 맛있는 음식을 보는 눈과 흡사했다.
"앰버르탄의 셋째 아들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다니엘이 고기를 나이프로 썰며 말했다. 붉은 피가 살짝 튀었다. 지금 보니 저쪽은 아예 생고기를 먹고 있었다.
물음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문득 길버튼이 했던 '북부에서는 마족과 마법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법사라면?"
갈라하드는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마나를 천천히 움직였다. 언제든 놈의 머리에 구멍을 뚫을 수 있게 준비했다. 마법 혐오 시대에서 마법사의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아! 저희 딸이 마법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카데미 시험도 봤었는데, 떨어졌답니다. 얼마나 낙심하던지-."
다니엘의 얼굴에 온기가 떠올랐다. 다니엘은 전과 달리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입에서 고기 파편이 튀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딸아이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마법사를 만난다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오해한 건가. 갈라하드는 손에 머금은 마나를 유지했다.
"엠마를 불러오거라! 어서!"
다니엘은 갈라하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리쳤다. 다니엘의 명령에 하녀가 뛰어갔다.
잠시 뒤에 나타난 다니엘의 딸 엠마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다니엘과 닮은 건 길쭉한 키뿐이었다. 다니엘과 키가 똑같았지만, 다니엘과 달리 얼굴에 생기가 넘쳤고 눈도 큼지막했다.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아내분이 미인이신가 봅니다."
"예? 아, 그랬었죠. 지금은 아니지만. 인사하거라. 수도에서 오신 마법사, 갈라하드님이다."
엠마가 제 치마의 양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색한 수도식 예법이었다. 갈라하드를 보는 그 눈빛이 상당히 끈덕졌다.
'인기 많은 건 피곤하군.'
엠마는 갈라하드 옆에 딱 붙어 앉았다. 향긋한 향기 사이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정말 아카데미를 최연소 수석으로 졸업하셨어요?"
엠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와아! 진짜였구나! 아카데미에 들어간 제 친구가 알려줬어요! 갈라하드라는 분이 있으시다고!"
"아이가 얼마나 조잘거리던지. 성을 듣자마자 바로 알았습니다. 들어가기도 힘든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졸업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앰버르탄을 조사한 게 아니었군.'
놈들이 조사한 건 앰버르탄이 아닌 갈라하드였다. 장수생의 부모와 비슷한 마음 아닐까.
"열심히 했습니다."
"에이, 아카데미 최연소 수석 졸업은 전에 없을 업적이잖아요. 천재 중의 천재!"
엠마가 어깨를 부딪치며 싱그럽게 웃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으로 목 옆을 긁었다.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던 건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새끼의 몸에 어른 정신으로 존재하는 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다. 갈라하드는 애새끼들이랑 뛰어노느니 차라리 책을 읽는 걸 선택했다.
갈라하드는 세 살 때부터 고시 공부하듯 마법서를 읽었다.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졸업한 건, 최연소로 마법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낮잠 시간도 챙기는 여기 놈들의 공부량과 갈라하드의 공부량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만, 굳이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제 마법 한번 봐주실래요?"
엠마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밥값은 해야지.
엠마가 요란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심지어 팔까지 좌우로 펼쳤다. 누가 보면 대마법이라도 쓰는 줄 알겠군. 갈라하드는 찌푸려지는 눈썹을 필사적으로 폈다.
"보여주소서! 그대의 분노를-!"
'주문은 왜 도치법이야.'
그때, 엠마가 합! 소리를 내며 양손을 뻗었다. 엠마의 손바닥에 미약한 불이 뿜어졌다. 연초에 불을 붙이기에도 부족한 화력이었다.
저 실력으로 아카데미 갈 생각을 했다는 용기를 칭찬해야 하나-.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더 늘었구나! 이 정도면 다음에는 붙겠어!"
갈라하드의 생각과 반대로 다니엘은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엠마가 아카데미에 붙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저건 갈라하드가 세 살 때 펼친 마법보다 하찮았다.
다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손바닥에 힘을 좀 더 빼고 마나를 더 힘껏 넣어봐라."
"손바닥에 힘을 빼라고요? 그런데 마나를 어떻게 더 넣어요?"
"손바닥에 힘을 줘야 마나가 움직이냐?"
"······네?"
빡대가리군. 갈라하드는 짜증을 애써 눌렀다.
"마나는 의지로 움직이는 거다. 근육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근육을 쓰는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마나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둘을 분리해."
갈라하드는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했다. 백번은 넘게 했던 말이기에 술술 나왔다. 마법사 중에도 빡대가리는 많았다. 마법을 술식으로 이해하는 놈도 드문 세상이었다.
"······그래요?"
엠마가 눈을 찡그렸다.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혼자 깨달았겠지. 멍청한 게 죄는 아니니까.
갈라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엠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을 줘보거라."
"네? 아, 네."
수족냉증이라도 있는지 엠마의 손은 차가웠다. 갈라하드는 손을 통해 마나를 집어넣었다.
본래 타인에게 마나를 넣는 건 위험한 짓이었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아니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했던 짓이었다.
'마나가 제법 있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쓰레기 같은 실력에 비해, 가진 마나는 제법 있었다. 다니엘이 좋은 거라도 먹였나.
"내 가르침은 비싸니까 집중하거라."
"네!"
"입 열지 말고 마나에 집중해."
엠마가 입을 꾹 닫고 목만 까닥거렸다. 갈라하드는 엠마의 마나를 건드려 흐름을 인도했다. 멍청한 걸 고려하여 다섯 번 정도 반복해줬다.
"······아아!!"
엠마가 들뜬 탄성을 터뜨렸다. 엠마의 손이 잠시 오므렸다가 펴졌다.
"이제 알겠느냐?"
"네! 근육이 아니라 의지로 움직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아아!"
엠마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엠마의 손바닥에 있는 불은 그대로였다.
이해 못 했군.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엠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열 번 정도 더 반복하고 나서야 엠마의 불이 커졌다. 이제 연초에 불은 붙일 수 있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정말 고마워요! 갈라하드님!"
"괜찮다. 지식 전달은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니까."
쏟아지는 감사 인사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별거 아닌 가르침이기도 했고, 애초에 타인의 마나를 탐방하는 건 갈라하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멍청한 머리에 비해 마나양이 생각보다 많다. 타고난 건가-.'
아니면 영양제라도 먹었나.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주무시고 가시죠. 편안한 밤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맞아요! 주무시고 가세요! 꼭이요!"
묘하게 차분해진 다니엘과 얼굴이 잔뜩 상기된 엠마가 차례로 말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응시했다. 길버튼은 여전히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한 발 물러선 느낌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궁금증이 들었다. 호기심은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었다.
"그럼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갈라하드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북부에서 간통은 사형입니다."
슬쩍 다가온 길버튼이 속삭였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아직 혼인 안 했다고 하지 않았나?"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이 작게 웃었다.
***
방은 북부라는 걸 고려하면 꽤 훌륭했다. 침대부터 간편한 욕조, 벽난로까지 있었다. 물론, 수도의 허름한 여관보다는 작고 더러웠다.
'북부니까.'
갈라하드는 마법으로 몸을 가벼이 씻어내고 침대에 앉았다.
'요즘 시대에 양초라니-.'
양초에 불을 붙이자, 주황색 불빛이 위태로이 흔들리며 방을 밝혔다.
갈라하드는 습관처럼 마나를 돌렸다. 이어서 간단한 알람 마법 세트를 설치했다. 마법사의 기본 소양이었다.
더불어 길버튼의 찝찝한 말까지-.
'북부라.'
갈라하드는 등만 기댄 상태로 눈을 감았다. 마법사인 갈라하드는 선잠으로도 충분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알람 마법이 울렸다. 갈라하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길었던 양초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문은 닫아둔 상태였기에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벽난로의 불빛이 전부였다.
타닥, 미약한 벽난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려 정신을 깨웠다. 숨 한 번 내쉴 동안, 한기에 뭉쳤던 근육이 풀어졌다. 가라앉았던 정신이 바짝 섰다.
끼익-.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눈에 익은 펑퍼짐한 치마가 보였다.
'엠마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야밤에 외간 사내의 방문을 열다니-.
확실히 엠마는 미인이었다. 가슴이 부족했지만, 대신 늘씬한 다리를 가졌다.
다만, 지금 갈라하드는 대공의 장녀와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욕정에 일을 그르칠 정도로 갈라하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마법을 가르쳐 준 거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갈라하드는 최대한 신사적으로 거절했다.
거절이 약했는지 엠마가 성큼 다가왔다. 방이 어두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놈의 인기.'
갈라하드가 한숨을 내쉴 때, 엠마가 침대맡에 섰다. 엠마의 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쪽인가. 더 꺼림직한데-.
그때, 엠마가 펄쩍 뛰었다. 그 때문에 엠마의 치마가 날개처럼 펄럭였다.
이렇게 저돌적이라니-. 갈라하드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시선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
덜렁. 치마 아래 존재해서는 안 될 흉물스러운 게 힘차게 인사했다.
'···덜렁?'
꽤 다양한 것을 겪어 웬만해서 당황하지 않는 갈라하드였는데, 너무 의외의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치마가 내려가며 엠마의 얼굴이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퀭한 눈-.
엠마가 아니라 다니엘이었다.
엠마의 옷을 입은-.
"마법사의 심장이 그렇게 좋다고! 우리 딸의 양분이 되어주시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소!"
송곳니를 길쭉하게 뽑은 다니엘이 갈라하드를 덮쳤다.
덜렁!
"진짜 너무하는 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4화 코트 선물
"딸아이를 위한 거니 양해해주게! 마법사의 기본 뭐! 그것!"
다니엘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로 단검처럼 거대한 송곳니가 보였다. 붉게 충혈된 눈과 실핏줄이 잔뜩 올라온 피부는 대충 봐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기본 소양 말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심장은 하나라서 주는 건 조금 곤란하네."
"그대는 마법사 아닌가!"
침착하게 거절의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작게 혀를 차며 마나를 움직였다. 손끝에서 스파크가 강하게 튀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파크를 연달아 일어났다.
처음에 작았던 스파크가 손가락을 통하면서 순식간에 크기를 부풀렸다. 커진 스파크를 머금은 손을 다니엘의 복부에 가져다 댔다.
"캬하아아악!"
다니엘이 비명을 터뜨리며 몸을 뒤틀었다. 다니엘의 얼마 없는 머리가 삐쭉 섰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풍겼다.
아주 잠시였다. 놈은 언제 아팠냐는 듯 다시금 달려들었다.
급하게 시전한 마법이라 약했지만, 저리 멀쩡할 정도는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놈의 환부를 살폈다. 설령 기사라도 직접 맞으면 멋진 번개 문신을 새겨졌을 것인데, 놈은 검게 그을린 게 전부였다.
'마족?'
마족에게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건 제법 유명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마법의 뿌리가 마족이기 때문이었다.
"그대도 딸아이를 마음에 들어 했잖소! 사랑을 위해 심장 정도는 내줘야 사내지!"
"내가 언제 마음에 들어 했나. 멍청한데 노력하는 게 가여워 마법을 가르쳐 준 게 전부일세. 그리고 솔직히 엠마는 자네를 닮아서 싫네."
"뭐라?! 누가 멍청하다고?! 속이지 마시오! 훔쳐보는 거 다 봤소!"
다니엘이 기다란 송곳니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엠마는 자네랑 닮아서 못생겼네! 자네랑 헷갈린 이유도 그 때문이고."
"감히 내 딸을 희롱하는 것인가! 참을 수 없군! 사죄의 의미로 심장을 내놓게!"
"엠마가 못생긴 게 왜 내 탓인가. 그대 잘못이지."
침착하게 설명했지만 멍청한 마족은 들어먹질 않았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공중에 뿌렸다. 까드득-. 다니엘의 송곳니가 공중에서 막혔다. 놈의 충혈된 눈동자가 뒤룩 굴렀다. 끔찍하게 흉물스러웠다.
"나 사실 대공의 사위가 될 몸일세.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게나."
"무슨 사위! 대공은 마법사를 끔찍이 싫어하는데! 그리고 어차피 대공한테 가봤자 고통스럽게 죽을 텐데, 얌전히 우리 이쁜 딸의 양분이 되게나! 그편이 더 건설적이니까!"
다니엘이 소리치며 손을 움직였다. 그 사이에 마법의 빈틈을 찾아낸 듯, 손톱이 마법을 찢었다. 기다란 손톱이 갈라하드의 어깨를 노렸다.
막을 수는 있지만, 막으면 오히려 수세에 몰릴 것이다. 계산을 마친 갈라하드는 뒤로 넘어지며 마나를 휘둘렀다.
어깨에서 뾰족한 고통이 느껴졌다. 순간 정신이 흔들렸지만, 마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갈라하드의 손에서 불이 길게 뿜어졌다.
"끄아아아악! 사람한테 불을 쏘다니! 미친 마법사 새끼!!"
"자네가 먼저 손톱을 찌르지 않았나! 나도 아팠네!"
"아아아악! 시발!"
불이 붙은 다니엘이 펄쩍 뛰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순간 시야가 흔들렸지만, 마법은 다니엘에게 똑바로 쏘아졌다.
다니엘의 가슴에 선이 길게 그어졌다. 분홍 드레스가 찢어지며 풍성한 가슴 털이 드러났다.
눈이 뒤집힌 다니엘이 양손을 번쩍 들었다. 거무튀튀한 손톱이 길어졌다.
갈라하드는 빠르게 단단한 껍질을 둘렀다. 다니엘 손톱에 손쉽게 깨졌다. 손톱에 마나가 담겼나. 갈라하드는 호기심을 느끼며 옆으로 굴렀다.
허리춤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니엘의 손톱이 갈라하드의 허리를 긁었다.
갈라하드의 손에서 다시 불이 뿜어졌다. 다니엘이 비명을 길게 질렀다. 뭔가 타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갈라하드는 문득 길버튼을 떠올랐다. 잘 지키라고 했더니 아직도 안 나오다니-.
"길버튼! 미친 영주가 치마를 입고 나를 덮치려고 하네! 자네 주군의 남편 순결이 위험하네!"
"크흐흐··· 기사를 부르는 건가? 그쪽은 이미 늦었을 거야. 아주 독한 포도주를 줬거든."
다니엘이 반쯤 탄 얼굴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제 얼굴을 손톱으로 긁으니, 멀끔한 피부로 돌아왔다.
'싸움 잘한다더니. 벌써 당했나?'
대공의 기사인데 설마 당했을까 싶지만, 기사든 황제든 목에 칼이 박히면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튼, 길버튼의 도움은 요원했다.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여튼 무능한 이를 옆에 두면, 괜히 사서 고생한다니까.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본격적으로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가 손가락을 타고 회전했다. 계수와 술식 전부를 외웠기에, 주문은 필요 없었다.
손짓에 기다란 불의 벽이 세워졌다.
"비겁하게 마법을 쓰다니!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마법사!"
마나 저항력이 높은 놈이었다. 불길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걸로 충분했다.
갈라하드의 검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마나가 움직임과 동시에 술식의 답을 떠올렸다. 마법이 차례로 계산됐다.
"천재적인 마법사 우리 딸 엠마를 위하여!"
불길이 갈라지며 노릇노릇하게 익은 다니엘이 뛰쳐나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엠마는 재능이 없네. 오히려 멍청한 쪽에 가깝지."
갈라하드는 침착하게 설명하며 놈의 허벅지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뾰족한 얼음 화살이 놈의 허벅지에 박혔다. 동시에 압축했던 마나를 터뜨렸다.
놈의 허벅지에 박힌 얼음 화살의 크기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다른 마법사가 보면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연계 마법이었지만, 마나 저항력 때문에 놈의 피부를 찢지는 못했다.
"멍청한 건 너지! 대공한테 가는 마법사니까!"
그를 본 다니엘이 히죽 웃으며 달려들었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멍청하긴.
얼음 화살에 놈의 무게 중심이 흔들렸다. 갈라하드를 노렸던 손톱이 비스듬히 스쳤다. 갈라하드의 앞머리가 잘려 공중에 떴다.
갈라하드의 손바닥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소용없다! 마족의 오물 따위-. 으갸갸갹!"
다니엘이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 시선은 여전히 갈라하드를 향해 있었다. 놈의 말처럼 아주 잠시 멈추는 것에 불과했다.
다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갈라하드는 녀석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멍청한······."
다니엘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다니엘의 충혈된 눈이 큼지막해졌다. 입을 벙끗거렸지만, 그저 형상을 띠지 못한 숨소리가 전부였다.
"마족은 진짜 마나가 혈액이군."
갈라하드는 감탄하며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가 다니엘의 심장에 올린 손을 타고 넘어갔다.
다니엘의 마나가 온전히 느껴졌다. 인간과 달리 마나가 온몸에 퍼져있었다.
인간의 마나보다 좀 더 투박했다. 가공되지 않은 느낌-. 마나의 원류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성질은 비슷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네. 그게 마나의 법칙이야. 마족이 자신보다 약한 마족이나 마법사를 잡아먹는 이유지."
약간의 도박이었다. 만약 다니엘의 마나 농도가 높았다면, 오히려 갈라하드가 위험했을 것이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니엘은 갈라하드의 차분한 설명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다니엘의 피가 갈라하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말 잘 듣는 개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마족의 마나를 움직인다고? 마법사는 마족의 오물이자 하수인이었다. 어찌 감히-.
고개를 든 다니엘은 그대로 굳었다. 자신을 내려보는 갈라하드의 눈이 평온했다.
엠마의 손을 잡고 마나를 인도할 때처럼 아무 감정 없이 관찰하는 눈이었다.
"오호- 이렇게 움직이는군."
다니엘의 피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다니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나? 오, 되긴 하는군. 술식이 너무 뒤죽박죽이 되지만."
다니엘의 팔뚝이 터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피 대신에 스파크가 뿜어졌다. 평온한 감탄이 터졌다.
"잠깐만 참아주게. 몇 번만 더 하면 감을 잡을 것 같거든. 부탁하네."
다니엘의 숨이 뜨거워졌다. 이어서 토하듯 불이 나왔다.
"아픈가? 마나가 혈액처럼 존재하는데, 왜 아프지?"
갈라하드가 다니엘을 보며 물었다. 팔목이 터지고 불을 토해냈는데, 아프냐니? 이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그때, 다니엘의 반대쪽 어깨에서 거친 스파크가 튀었다. 뼈가 아릴 정도로 짜릿한 통증이 다니엘을 강타했다.
"잠깐만. 조금만 버텨주게. 자네는 할 수 있어. 힘을 내보게."
쓰러지고 싶었지만, 다니엘의 어깨를 잡은 갈라하드의 손이 놓아주지 않았다.
"다른 마법사의 심장 같은 걸 엠마에게 먹인 건가? 생으로 먹였나? 아니면 구워서?"
아아-. 다니엘의 왼쪽 다리가 얼었다. 오른쪽 다리에서 괴상한 줄기가 튀어나왔다. 다니엘의 눈에서 자그마한 불이 타올랐다.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죽었군."
갈라하드는 쓰러진 다니엘을 보며 혀를 찼다.
'마족이라. 확실히 흥미롭네.'
너무 흥분하여 조절에 실패했다. 마족이 이 정도로 죽다니-. 소문보다 허접했다.
아쉬움을 달래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구운 고기 냄새를 밀어냈다.
'몇 놈의 심장을 먹인 거지?'
갈라하드는 엠마의 마나를 떠올렸다. 최소 넷에 많으면 다섯 정도 먹였을 듯했다.
'많이도 먹였군.'
하여튼 여기 놈들은 마법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뒤늦게 길버튼을 떠올린 갈라하드는 욕을 중얼거리면서 문으로 향했다.
'죽었으면 상황이 귀찮아지는데.'
길버튼이 죽으면 이제 누가 길 안내를 해주나. 그리 중얼거리며 문으로 향하는데, 문 옆에 익숙한 코트가 떨어져 있었다.
영주가 입고 있던 비싸 보이는 코트였다.
'코트는 안 사도 되겠군.'
갈라하드는 다니엘을 슬쩍 본 뒤에 코트를 입었다. 제법 따뜻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선물 고맙네. 잘 쓰겠네."
갈라하드는 다니엘에 감사를 표하고 문을 열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길버튼이 평온하게 검을 닦고 있었는데, 복도의 풍경이 아까와 달랐다.
여기저기 붉게 물들었고, 곳곳에 조각들이 뿌려져 있었다. 흡사 지옥이라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그때, 길버튼 옆에 있던 것이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엠마였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위험한 곳이라고."
"이 정도로 위험하긴-. 영주가 엠마의 치마를 입고 왔네."
"오, 잘 어울렸습니까?"
"엠마보다 태가 좋더군. 영주는 마족이었네. 진짜 마족은 아닌 거 같았지만."
"아하, 나쁜 놈이었군요."
길버튼이 아리송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표정 관리하는 듯했지만, 제법 잘 보였다.
'확신은 아니었고, 의심 정도였나.'
어쩌면 대공이 눈여겨보던 곳일 수도 있었다.
하필 고른 성이 이런 성이라니-.
'운이 없군. 운이 없어.'
갈라하드는 코트를 여미며 투덜거렸다. 좋은 코트를 얻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부에는 마족이 흔한가 보군. 마족이 영주까지 하는 걸 보니."
"북부뿐만이겠습니까."
갈라하드가 기침하듯 웃었다.
그때, 창문 너머로 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잎 하나 없이 앙상한 나무들과 갈색 일변도의 땅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북부에 괜히 저주받은 땅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 너머로 익숙한 문장이 박힌 마차들이 보였다. 대공의 문장이었다.
"대공께서 직접 마중 나온 건가?"
"그럴 리가요."
마차에서 병사들이 우루루- 내렸다. 그 사이에 귀족처럼 생긴 멋진 사내가 있었다.
멋진 사내가 길버튼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길버튼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내가 대공의 일을 대신 해준 건가?'
점수를 좀 딴 건가.
중얼거리던 갈라하드는 엠마와 눈이 마주쳤다. 엠마는 뭐가 억울한지 눈도 감지 못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그녀의 눈꺼풀을 내려줬다. 엠마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자네, 그거 아나?"
"뭐 말입니까?"
"엠마는 다니엘이랑 안 닮았네."
"······예?"
그때, 내성으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아무것도 아닐세. 가지, 갈 길이 머니까."
갈라하드는 멍청한 표정이 된 길버튼을 보며 낄낄 웃었다.
***
마차를 타고 며칠이나 달렸을까.
갈라하드의 정신은 마족에게 쏠려 있었다.
'몸 전체가 마나였다. 마나가 놈들의 피인 것처럼.'
갈라하드의 마나를 매개체로 이용하니, 마족의 피를 이용하여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다.
'이건 새로운 사실인데.'
마족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고, 찾기도 힘들었다.
한때 제국을 멸망시킬 뻔했던 마족을 연구하는 건 제국법상으로 강력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마법의 원류가 마족이라는 기록을 어떻게든 지우려는 게 현재 마법사들이었다. 마탑 또한 마족을 연구하는 걸 금지했다.
더불어 교단까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마족과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다만, 북부에는 마탑도 제국도 없었다. 교단이 있었지만, 그 위세가 약했다.
그동안 줄곧 궁금했던 마족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며 멈췄다.
'도착했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얀 털로 범벅이 된 뭔가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설인?'
그때, 털이 움직이며 눈송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가라하드 맞소?!!"
사내가 어눌한 제국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가라하드가 아니라, 갈라하드일세."
"그래! 가라하드! 내리쇼!"
사내가 손짓했다. 사내의 털모자가 거칠게 휘날렸다. 가방을 챙겨, 마차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코트 속을 헤집었다.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진짜 칼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은 순백의 세상이었다. 어디를 봐도 하얀색밖에 보이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돌리며 코트를 여몄다.
"좋은 코트군!"
"그렇지? 친구에게 선물 받은 걸세."
"뭐라고?!"
"친구가! 선물! 해준 걸세!"
"좋은 친구군!!"
바람 소리가 얼마나 큰지 평소처럼 말하면, 아예 안 들렸다. 사내의 목소리가 괜히 큰 게 아니었다.
"북부의 벽에 도착한 걸 축하하네!"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에 갈라하드는 의문을 느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도착했다는 건지-.
사내가 크게 웃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뭔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산이라고 생각했던 걸 자세히 보니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 크기가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아서 설산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 거대한 성벽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다.
꼭 세상을 분단하는 것 같았다.
"이게 북부의 벽입니다."
어느새 폭신한 코트로 갈아입은 길버튼이 말했다.
그 애매한 웃음이 조금 거슬려서 슬쩍 농담을 던졌다.
"드디어 내 아내를 볼 수 있겠군."
길버튼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었다.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
갈라하드도 사내라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5화 하녀
'이게 북부의 벽이군.'
갈라하드는 세상을 분단하듯 끝없이 펼쳐진 하얀 벽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 친구가 북부에 가면 꼭 북부의 벽을 보라더니, 진짜 대단하군."
"······북부의 벽을 무슨 명물처럼 이야기하십니까."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지."
"마족에 대항한 인류의 마지막 방어선이니 말입니다."
길버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뻔뻔한 대답에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쇠뇌가 가리키는 방향이 이쪽인데?"
"혹시 모르니까요."
길버튼이 짙게 웃었다.
"그래, 혹시 모르지."
그때, 털보 사내가 거대한 뿔피리를 꺼냈다. 챱챱 소리를 내며 요란스레 입을 닦은 털보 사내가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세상을 깨울 기세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성벽 위로 은색의 것들이 나타났다. 거리가 멀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은색을 보니 병사들인 듯했다. 전부 철을 입혔다니-.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하나둘씩 올라온 병사들이 성벽 위를 가득 채웠다.
뿌우우우우-!
뿔피리가 다시 울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하얀 성벽의 중앙이 갈라졌다.
굵게 쌓인 눈이 떨어져 나가며 거대한 쇠창살 문이 나타났다. 빠드득, 쇠창살이 천천히 올라가며 눈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꼭 설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큼지막한 눈덩이가 떨어졌다.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지켜봤다.
쿵!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창을 위로 동시에 들었다. 칼군무, 아니 창군무였다. 뾰족한 창이 햇빛에 빛났다. 한껏 올라간 창이 땅을 찍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묵직한 소리가 퍼졌다. 눈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까드득-. 쇠창살이 이내 끝에 도달했다. 쿵! 다시금 퍼지는 북소리와 내려찍는 창-.
'잘 만든 뮤지컬 같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한 위용이었지만, 솔직히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안 보였다.
뿌우우우우-! 다시 들리는 뿔피리와 북소리. 그에 맞춰서 내려찍는 창-.
"나를 위해 연습한 건가?"
"······그냥 시간대가 맞은 겁니다."
길버튼의 헛기침을 보니, 맞는 듯했다.
"이것 참 감동이군."
"···원래 하는 겁니다."
쿵!!!
그때, 성문이 완전히 열렸다. 그 안의 풍경은 언뜻 다른 도시와 비슷했지만, 또 전혀 달랐다.
사람들이 두꺼운 털옷을 입어 멀리서 보면 동물과 같은 모양새였는데, 등에 작살이나 쇠뇌 같은 걸 다 하나씩 들고 있었다,
더불어 돌아다니는 물자들도 전부 전쟁에 쓸 거 같은 것들이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군.'
그때, 털보 사내가 뿔피리로 갈라하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제국의 마법사가 도착했다!!"
쏟아지는 날카로운 눈빛과 야유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요란한 소개에 맞춰 손을 흔들었지만, 환호는 없었다. 오히려 야유가 거칠어졌다.
수도에서 마법사라고 하면 받았던 선망의 시선과 정반대인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털보 사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유치한 훼방이었다.
'북부 놈들이 그리 상남자라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털보 놈을 불렀다. 털보 놈이 히죽 웃었다.
"다음부터는 유능한 마법사라고 소개하게. 그냥 마법사로 소개하면 좀 부족하지 않나."
털보 사내의 웃음이 멈췄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눈빛이었다.
"아니면 뛰어난 마법사도 괜찮고. 내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나 제법 실적이 좋다네."
털보 사내가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외치더니 쿵쿵거리며 사라졌다.
"지금 저 사내가 뭐라고 했나?"
"저주받을 마족의 부산물 찌꺼기 놈이 감히 까부는군. 생긴 것도 밥맛 없게 생겼고-. 도발은 왜 합니까?"
"진실을 말한 건데, 도발이라니. 근데 정말 밥맛 없게 생겼다고 했나?"
길버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안 했군. 추잡한 질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드디어 도착했네.'
갈라하드는 저 멀리 보이는 내성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했다.
꽤 로맨틱하지 않나.
물론, 그 아래에는 추잡한 정치 싸움이 있지만-.
'이제 그 유명한 내 아내를 볼 수 있겠군.'
***
볼 수 없었다.
성문을 통과한 갈라하드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별채였다. 갈라하드는 그중 제일 큰 방에 넣어졌다.
길버튼은 연락이 따로 갈 것이니 그전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한 뒤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문 앞을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어를 쓰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막고 길버튼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슬쩍 나가려고 하자, 날이 시퍼런 도끼까지 들이밀었다.
'갇혔군,'
대륙 반을 달려왔는데, 오자마자 별채에 가둬버린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갈라하드가 생각했던 가능성 중 하나였다. 그중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고.
'말려 죽일 생각인가.'
방은 크고 황량했다. 침대 같은 필요한 것들만 있었다. 그중 특이한 건-.
'샹들리에는 왜 있는 거지? 연회라도 열라는 건가.'
천장에 황량한 방과 전혀 안 어울리는 화려한 샹들리에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참으로 고약한 놈이 인테리어한 게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연락이 올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갈라하드의 가문은 중앙에서 영향력이 있었지만, 북부까지 펼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갈라하드는 장자가 아닌 셋째였다. 북부에서 아주 쓸모없는 신분이었다.
그나마 천재 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있긴 했지만, 마법에 대해 배척하는 북부에서 그건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즉 대공에게 갈라하드는 아무 장점이 없었다.
그에 반해 대공의 장녀 아드리안나는 북부의 영웅이었다. 최연소 소드 마스터로 전장에서 끊임없이 업적을 세우는 중이었다.
대공이 아드리안나를 견제할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었다. 대공의 아드리안나 사랑은 유명했으니까.
갈라하드는 자신이 대공이라 가정하고 상황을 짚었다.
무슨 알력 싸움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대공은 백작의 세 번째 아들과의 혼인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겠지.'
눈 찢어진 놈 하나를 호위 겸 길잡이 겸 마부로 보낸 게 그 증거였다. 달가운 결혼이었으면 고작 한 명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북부는 쇠퇴하는 중이었고, 그 적인 마족은 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과 틀어지면, 불모지인 북부는 끝이었다. 그래서 일단 갈라하드를 성에 들였다.
'그렇다고 진짜 결혼시킬 생각은 없고.'
방에 처박아두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혼인을 미룰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혼인을 무를 방법이 생기면···.
'버리겠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그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애초에 대공의 장녀와 갈라하드를 혼인시켜 제국이 얻을 이득이 없었으니까.
서로 체면치레하는 정도를 원할 것이다.
그러면 손해를 보는 건-.
'나잖아.'
애초에 왜 자신이 뽑혔는지도 미지수였다.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하녀 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미인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올려보고 있었다.
"가······ 갈라하드님의 시중을 들게 된 그웬입니다!"
자신을 그웬이라 소개한 여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외모의 여인이었다.
분명한 미인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음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웬의 잔뜩 주눅 든 태도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시중은 필요 없는데."
"그··· 그게 요강도 비워야 하고 밥도 드려야 하고···."
"아하, 한 걸음도 나가지 말라는 소리였군."
갈라하드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삐꺽거리며 잔뜩 움츠렸다.
그웬 뒤로 무장한 사내들이 보였다. 죄다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군. 손을 흔들어 인사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여기 놈들은 손 인사를 안 하나?'
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웬이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대자로 엎어질 수가 있는 거지? 갈라하드는 신기함을 느끼며 그웬을 일으켜줬다.
"가···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그웬을 잡아주며 마나를 넣어 그녀를 확인했다.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마나가 많군.'
물론, 마법사가 아니어도 대부분 어느 정도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로 넘기기에는 그웬의 마나가 지나치게 많았다.
"마법사인가?"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에게 마법사 하녀를 넣는다는 건 의도가 명백-.
그웬이 순식간에 울상이 됐다. 꼭 부모 욕이라도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아니요오. 마법사 아니에요."
그웬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법사가 아니라는 건가?"
"······저 마법사 같은··· 그런 저주받은 마족의 오물인 마법사 절대 아니에요. 하나도 몰라요! 진짜요! 믿어주세요!"
느닷없이 다리에 매달며 오열하는 그웬에 '저주받은 마족의 오물인 마법사' 갈라하드는 턱을 긁적였다.
북부의 마법사 인식이 안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인가? 이건 거의 예전 마녀 시절 반응 아닌가.
대문에서 마법사라고 신나게 광고한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피곤해지겠군. 어쩌면 혐오 범죄에 당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 마법사가 피곤했다.
아무튼, 저 정도 반응이라면 정말 마법사가 아닐 만했다. 그렇다면 저 마나통이 순전히 재능이라는 소리인데-.
그때, 마나통을 보는 갈라하드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그웬이 옷을 벗으려고 했다. 갈라하드는 황급히 말렸다. 첫날부터 하녀 옷을 벗긴 놈이 될 수 없었다.
"알았네,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군."
그웬은 자신을 믿어줘서 고맙다며 또 눈물을 펑펑 흘렸다. 눈물이 상당히 많은 여인이었다.
'그럼 마나 농도 때문에 저 마나통이 만들어진 건가?'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웬이 아니었다.
'진짜 가둬둘 생각이군.'
심지어 하녀까지 붙여줬다. 아예 나오지도 말라는 소리였다.
흠. 갈라하드는 다시 의자에 앉아 침음성을 흘렸다. 지금 당장 갈라하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며칠간 이 방에 있어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해야 했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방금 느꼈던 마나의 농도였다.
마족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이곳의 마나 농도는 중부보다 훨씬 짙었다.
마나를 천천히 돌렸다. 마나가 무거웠다.
마나의 정확한 수치를 기록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마나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기도 했고, 대기의 마나 농도 또한 매번 바뀌니 정확히 기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낭비를 막고자 대부분 마법진과 마석을 애용했다.
그런 탓에 여기 마법사는 공돌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쪽이 대우가 더 좋은데, 굳이 흙탕물에 뛰어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마법사는 전보다 많지만, 진짜 마법사는 오히려 희귀한 시대였다.
갈라하드가 마나 농도에 관해 생각한 해결책은 간단했다.
한국식 주입식 공부, 닥치고 외워-였다.
고등학교 때는 가장 욕하고 혐오했던 방식이지만, 이것만큼 실용적인 게 없었다.
가장 기초적인 마법, 마나 화살을 셀 수 없이 반복했다. 생각하지 않고 펼칠 정도로 감각을 익혔다.
마법 화살을 기준으로 마나 양을 정의했다. 덕분에 갈라하드는 어디서든 마나 화살 한 번만 펼치면 그를 기준으로 농도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게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두 배 정도.'
갈라하드는 손에 떠오른 마나 화살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부보다 두 배나 높은 마나 농도라니-.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마나의 농도가 짙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본래 마법은 가진 마나로 대기의 마나를 묶어 사용하는 방식인데, 대기 중의 농도가 짙다면 마법을 쓸 때 마나가 오히려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를 위해서 마나 농도를 더 높게 유지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압축이었다. 마나는 또 예민하여 압축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굳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마법 과정이 몇 배나 더 어려워지는 거였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개고생이었다.
대신, 높은 농도 덕분에 위력은 크게 늘겠지만-.
'좋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웃었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효과적인 수련이었다.
이 높은 마나 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본신의 마나 농도를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마나 민감도 또한 크게 오르겠지-.
'오랜만의 수련이군.'
갈라하드는 일부러 마나의 농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했다. 살짝이라도 실수하면, 마나 회로가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덕분에 긴장이 날카롭게 섰다.
갈라하드의 정신이 점차 가라앉았다.
마법을 펼치니, 다른 상념은 전부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진짜 마법사였다.
***
'···이 상황에서 웃는 거야?'
그웬은 번쩍거리는 갈라하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라하드는 감금을 당한 것과 다름 없는 상태였다.
제국이 아닌 타지에서, 제 부인이 될 이를 보지도 못하고 감금당한 처지인데 웃고 있다니-.
갈라하드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에 서린 감정은 일종의 광기에 가까운 희열이었다.
그웬은 처음 보는 밝은 얼굴이었다. 도대체 뭘 하길래 저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지?
그에 시선이 자연스레 갈라하드의 손으로 향했다. 갈라하드의 손 주변으로 불빛이 번쩍였다.
마법이 분명했다. 그 화려함에 그웬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법은 마족의 더럽고 저주받은 오물이다-. 마법사의 핏줄인 그웬이 귀가 따갑도록 들은 소리였다.
더러운 마법사의 자식이라며 멸시를 당한 건 예삿일이었고, 죽음의 위협까지 숱 차례 겪었다.
그웬이 이렇게 하녀라도 할 수 있는 건 아드리안나 덕분이었다.
그런 탓에 누구보다 마법을 혐오하는 게 그웬이었다.
분명 그랬을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아름다워.'
갈라하드의 손에 맺힌 결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시큰거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감히 아드리안나의 아름다움과 비견될 정도였다.
왜 저 사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웬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웬의 손끝에 작은 불빛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아주 형편없었지만, 그웬이 일생 경험해본 적 없는 짜릿함과 해방감이었다.
그웬은 정말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때, 그웬이 들고 있던 빗자루가 쓰러지면서 큰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린 그웬은 지극한 자기혐오를 느꼈다.
평생 자신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던 게 마법이었다. 더러운 핏줄로 그웬을 괴롭혔던 마법을 제 손으로 펼쳤다니-.
그웬은 손톱을 제 팔뚝에 피가 나올 정도로 깊게 박았다. 간신히 돌아온 정신이 다시 마법에 쏠렸다. 그웬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걸레질했다.
쨍그랑-.
당연하게도 그릇이 깨졌다.
***
갈라하드는 방금 자신이 본 게 진짜인지 고민했다.
그냥 본 것만으로 마법을 시전했다고-?
'······진짜 천재군.'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웬이라는 이름이 있었나? 있었던 것 같기도-.
'탐나네.'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갈라하드에 그웬은 눈을 질끈 감았다.
6화 아드리안나
애슐리는 일어나자마자 침대부터 정리했다. 침대라고 해도 짚 더미 위에 해진 천을 깐 게 전부였지만-.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일어났다. 서로 고개만 까닥거린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 아이는 솥 아래에 장작들을 넣었고, 다른 아이는 딱딱하게 얼은 스튜에 마찬가지로 딱딱한 빵을 넣었다.
정확한 분업화였다. 단 한 명만 빼고-.
드르렁-. 중심에 한 여인이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그웬 언니가 피곤했나 봐."
"집안일 엄청 못 하는데, 하녀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피곤하지."
애슐리의 대답에 아이가 꺄르르 웃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웬은 제 밥은 굶어도 동네 고아들은 챙길 정도로 따뜻한 여인이었지만, 일머리는 형편없었다.
청소를 하면 빗자루를 부숴 먹었고, 설거지를 하면 그릇을 깨 먹었다. 그웬이 하녀를 하고 있다는 게 아직도 의문이었다.
"제국에서 온 사내를 담당하게 됐데. 이번에 실수하면 진짜 잘릴 것 같다던데?"
"······기회를 많이 주긴 했지. 근데 제국에서 온 사내라니?"
"그 있잖아. 아드리안나 님의 결혼 상대."
"결혼? 아, 기둥서방."
"쉿! 그런 말을 쓰면 안 돼!"
불결한 단어에 애슐리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북부에서 제국에 대한 반감은 마족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웅 아드리안나가 제국의 마법사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제국과 마족을 합친 괴물과 결혼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에 사람들은 기둥서방이라 지칭했다. 아드리안나까지 모욕하는 언사였지만, 없는 곳에서는 왕도 욕하지 법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아이가 투덜거리면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작게 한숨을 쉰 애슐리는 그웬에게 향했다.
'도대체 어떻게 자면 이렇게 되는 거지?'
치마는 잔뜩 말아져 있고, 배는 훤히 드러나 있는 그웬을 보며 혀를 찼다.
"그웬. 일어나. 출근해야지. 우리 먹여 살려야지."
"으에에··· 좀만······."
"그웬-."
한참이나 흔들고 나서야 그웬이 눈을 떴다. 여전히 눈에 힘이 없었다.
애슐리는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이들이 붙어서 그웬을 앉혔다. 한 아이는 시원한 맛이 나는 나무로 그웬의 입을 헹궜고, 다른 아이는 그웬의 머리를 정리했다. 또 눈꺼풀을 떼주는 아이까지-.
완벽한 분업화였다.
그웬은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했는데 말끔해져 있었다.
"제국 사람을 맡았다며."
"우으."
"씹고 말해도 돼."
입에 빵을 잔뜩 넣은 그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내 담당이야."
대답하는 그웬의 얼굴이 어딘가 어두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웬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에 애슐리는 손을 저어 아이들을 물렀다.
"······그게 나를 원하시는 거 같아."
그웬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애슐리는 그웬을 살폈다. 확실히 이쁜 얼굴이었다.
다만, 가득 찬 슬픔과 우울이 그를 가득 가렸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 막히는 우울한 분위기였다.
심지어 그 상대는 아드리안나의 결혼 상대 아닌가?
그 아드리안나를 두고 그웬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착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웬은 종종 괴상한 망상을 하고는 했으니까.
"아드리안나님의 부군 될 사람이신데··· 아아··· 왜 이런 시련을······."
저런 상태의 그웬은 남 이야기는 절대 안 들었으니,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정 안 되겠으면, 우리 이야기를 해."
"너희 이야기?"
"보살피는 고아들이 엄청 많다고. 짐 덩이 딸린 여자인 걸 알면, 바로 정떨어질걸?"
그웬의 큼지막한 눈이 끔벅였다. 아, 실수했다. 애슐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너희가 무슨 짐덩이야아아! 너희는 다 내 소중한 아이들이야!"
"알았어. 울지마. 알았다니까-."
애슐리와 아이들은 펑펑 우는 그웬에게 붙들려 한참이나 안겨 있어야만 했다.
아이들의 눈총에 애슐리는 작게 사과했다.
"나쁜 짓은 절대 하면 안 되고! 그리고 돈은 내가 어떻게든 벌어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 마법은 절대 안 돼!! 마법은!"
그웬은 마법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를 열 번 정도 더 하고 나서야 풀어줬다.
평소에는 다섯 번이었는데, 두 배로 늘었다.
***
'됐다.'
갈라 하드는 손에 맺힌 결정을 보며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이토록 짙은 농도의 마나는 처음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평소보다 두 배는 큰불이 타올랐다.
완전히 깨달은 건 아니었지만, 그 발전 가능성은 분명했다.
이제 마나가 두 배로 들지만, 대신 두 배의 화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마법은 마나를 두 배로 넣는다고 화력이 두 배가 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으면, 마법사들의 시대였을 것이다.
두 배로 짙은 마나 농도에-.
쨍그랑!
'그웬이군.'
고개를 돌리니 접시를 뒤로 숨긴 그웬이 보였다.
"······식사하세요."
식사는 늘 그렇듯 접시 하나에 전부 올려져 있었다. 분명 들어올 때는 세 개를 들고 왔을 텐데-.
'또 덜 익혔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겨 작은 불을 만들었다. 불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고기를 두드렸다. 향긋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멍하니 보던 그웬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꼭 악마를 마주한 성직자 같은 모양새였다.
'거대한 마나는 북부의 짙은 마나 농도 때문인가.'
마나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법사에게 필요한 건 마나 민감도였다. 마나를 지니고 있다고 모두가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나는 누구나 가졌지만, 마나 민감도까지 지닌 이는 흔치 않았다.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마법사의 길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웬은 아주 허접하고 불안정하지만, 갈라하드의 마법을 한 번에 따라 했다. 그건 갈라하드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찐따가 진짜 천재라고?'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웬을 살폈다. 그웬은 잔뜩 웅크려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챙겨야겠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북부에 있을 시간이 제법 길 것은 분명했다.
애가 소심한 게 조금 걸리지만, 천재는 천재였다. 저건 아카데미에서도 본 적 없는 재능이었다.
'북부라 탄생한 건가?'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반드시 챙겨야만 했다.
문제는 마법에 대한 반감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그웬은 마법을 볼 때마다 제 눈을 가리거나 주저앉았다. 아주 난리였다.
"그웬."
"네에?!!"
이름만 불렀는데, 그웬이 펄쩍 뛰었다.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었나-. 갈라하드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웬이 시선을 피했다. 그 뒤로 깨진 그릇이 보였다. 그웬이 늘 하는 일이었다.
"마법을 배워보겠나? 자네는 하녀 일에 끔찍하게 재능이 없지만, 마법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네."
"마법이요?"
눈을 잠시 끔벅거리던 그웬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끔찍한 모욕이라도 받은 반응이었다.
"······마법은 마족의 오물이라고 그랬어요. 마법사는 마족의 오물을 받아먹는다고···."
그웬이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발음이 좋은 게 신기했다.
"마법사가 마족에서 파생된 건 맞지만, 그래도 오물은 조금 그렇지 않나?"
"그··· 그게 아니라! 갈라하드님을 모욕한 게 아니라! 그런 소문이 있다는!"
"아무리 그래도 똥이라니."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벌을 내려주세요!"
그웬이 냅다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 소리가 상당히 컸다.
일은 개똥같이 못하는 그웬이었지만, 사죄만큼은 일품이었다. 그웬은 바닥에 딱 붙을 정도로 납작 엎드렸다.
'반감이 예상보다 심하군.'
부모가 마법사한테 죽기라도 했나? 귀찮아졌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고.
마법의 이끌림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그건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마법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갈라하드가 할 것은 그녀에게 마법을 계속 노출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 생각을 정리하며 그웬을 쳐다보고 있자, 그웬이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저는 보살피는 아이들이 여덟 명 정도 있어서 안돼요! 다들 귀엽고 이쁜 아이들이죠!"
"고아들을 보살피는 건가? 착하군."
"······네?"
그웬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돈으로 꼬시면 되나.'
갈라하드는 그웬의 큼지막한 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돈이야 퇴직금 덕분에 충분히 많았다.
"그러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군. 돈을 주면 괜찮은 건가?"
"네? 그럼 얼마나······. 아앗! 아니에요! 전 파는 물건이 아니에요!"
"많이 줄 수 있네."
"·········얼마까지 되는데요?"
"얼마까지 알아봤지?"
그웬이 눈을 끔벅이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역시 선제가 최고였다.
잠깐 고민하던 그웬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아니에요. 마법은 절대 안 돼요! 싫어요!"
"그건 두고볼 일이지."
대놓고 끈적이는 시선에 그웬은 바들바들 떨었다.
***
갈라하드는 자그마한 인기척에 눈을 떴다.
어두운 방에 빛나는 여인이 있었다. 찰랑이는 머릿결,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그린 듯한 이목구비까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도 만들 수 없을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가만히 갈라하드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건 일종의 강압이며, 지배였다.
본능적으로 돌린 마나가 아니었다면, 갈라하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왜 내 방에 여신이?'
명료해진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하늘에서 떨어진 여신이었다. 다만, 갈라하드는 무신론자였다.
그렇다면···.
"아드리안나?"
여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대륙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군.'
아니,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머리를 정리했다.
"아버님이 만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예의라 생각하여 방문했습니다. 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지만, 무례하게 방문하여 죄송합니다."
외모와 달리 그 목소리가 단단했다. 단어 하나를 허투루 쓰는 게 없었다.
말을 한 번 나눴을 뿐인데 그 성정이 느껴졌다.
'정의로운 영웅이군.'
갈라하드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거절하러 온 거군.'
어딘지 미안한 기색이 만연한 얼굴을 보니,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누추하지만, 앉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웬이 퇴근한 후에도 연구를 이어간 터라, 식탁이 상당히 어지러웠다.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하며 그 위의 것들을 대충 정리했다.
정작 아드리안나는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아름답군.'
가만히 앉아있는 아드리안나를 보니 순수한 감탄이 나왔다.
아름답다는 단어로 표현하기에 부족한 외모였다. 왜 변방에 있는 여인이 대륙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사태에 끌어들여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풍성한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머리숱까지 많았다. 다 가졌군-.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드리안나가 흔들림 없는 또렷한 눈으로 선언했다.
처음 마주한 약혼자에게 듣기에는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갈라하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거절하는 게 당연했다. 북부의 영웅이자, 최연소 소드 마스터, 차기 대공이 될 그녀에 비해 갈라하드는 상당히 부족했다.
정보국에서 꽤 많은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외부에서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정보국이었다. 한 마디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그대에 비하면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요. 다만-."
"부족하다니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어찌 부족한 게 있습니까."
아드리안나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쳐다봤다. 그 아름다운 외모로 저리 인상을 쓰니, 이유 모를 죄책감이 올라왔다.
꼭 혼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쩌자는 거지. 갈라하드는 작게 헛기침했다.
"저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저 미소를 어디서 봤더라···. 갈라하드는 정보국에서 떠나기 전에 봤던 '제국과 결혼할 예정인 병아리'를 떠올렸다.
"북부와 결혼했다- 뭐 이런 겁니까?"
"···저는 전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결혼할 여유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갈라하드는 정수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바빠서 결혼 못 한다는 거군.'
이유는 예상과 달랐지만, 결론은 예상과 같았다.
갈라하드도 결혼할 생각이 없고, 아드리안나도 결혼 생각이 없었다. 당사자 둘이 같은 생각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이 시대에는 당사자의 생각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대공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아드리안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제국 측의 압박 때문에 당장 파혼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된다면, 저와 파혼해주시겠습니까?"
'참으로 달콤한 파혼 요청이군.'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관계만 유지할 뿐입니다. 그사이 다른 여자를 안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허울뿐인 관계니까요."
고백도 하지 않았는데 차였다니-.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표면적인 결혼이라도 하는 게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갈라하드의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결혼은 한 번뿐인 중대사입니다."
마족을 찢는 북부의 영웅 입에서 나오기에는 다소 동화적인 이야기였다.
'다시 혼나는 분위기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언젠가 평화가 찾아오면,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진지했다.
'희망이군.'
갈라하드는 저런 눈으로 말한 말은 비집을 틈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괜히 볼을 긁적였다. 말하기 조금 이상했지만, 갈라하드는 잘생긴 편이었다.
"아, 제 취향이 아니십니다."
아드리안나의 답변은 단호했다.
두 번 거절 당한 갈라하드는 피식 웃었다.
"어떤 취향이십니까? 저는 인기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아드리안나가 웃었는데, 그 미소가 어딘지 서글펐다.
아드리안나가 은색 건틀릿을 벗었다. 길고 하얀 손에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었다. 그녀가 기다란 검지를 갈라하드의 손등 위에 아주 살짝 올렸다.
파지직-. 전기를 씹은 것처럼 짜릿한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퍼져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아드리안나의 검지로 모였다.
그리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에 타는 것보다 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갈라하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어 꺼억- 소리를 냈다.
아드리안나가 검지를 댄 건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갈라하드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저는 마나를 불태웁니다."
그리 말하는 아드리안나의 눈에 슬픔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갈라하드는 잔뜩 찬 숨을 토하듯 뱉어내며, 땀에 절은 앞머리를 넘겼다.
'마나를 불태운다고?'
갈라하드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법에 대해서라면 웬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갈라하드도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었다.
'마족에게도 통하는 건가? 마나가 마족에 근간을 둬서? 근데 그걸 왜 말로 안 하고······.'
갈라하드의 머리가 엉클어졌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는 손이 따뜻한 이였으면 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갈라하드를 보며, 아드리안나는 쓰게 웃었다.
"잠깐."
숨이 가득 찬 목소리가 아드리안나를 잡았다.
이 사내도 고집을 부리는 건가. 간혹 고통을 겪고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고통을 버틸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기회를 줘도 결과는 같았다.
고통을 버티지 못한 이들은 오히려 아드리안나가 신의 저주를 받은 더러운 마녀라 욕하며 책임을 돌렸다.
아드리안나는 그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게 사실이라 생각했기에.
갈라하드는 조금 다르다고 느꼈는데-.
'결국 아집이군.'
그리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내렸는데, 갈라하드의 눈이 뭔가 이상했다.
원래 아드리안나를 붙잡던 사내들의 눈에는 오기와 만용이 가득했다.
그런데 갈라하드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그거 어떻게 작용하는 거지? 손으로만 전달되는 건가? 마나를 태운다면 마족에게도 작용하겠지? 검을 통해서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질문과 광기 어린 눈에 아드리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아니,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네."
그때, 갈라하드의 손이 아드리안나의 손을 감쌌다.
아드리안나의 몸이 굳었다. 사내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깍지까지 꼈다.
"음, 정말 마나가 타는구우우우으아아아악! 이렇게 작동하느으으으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사내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뒤늦게 아드리안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 사내는 이미 기절한 뒤였다.
아드리안나는 손에 남은 어색한 온기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7화 제국놈
'또 이상한 지랄하지 않겠지.'
길버튼은 아드리안나가 들어간 별채를 보며 문득 걱정이 들었다.
"으음, 목을 자를까, 심장을 파낼까."
그때,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자그마한 여인이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까닥거렸다. 아드리안나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마르디안이었다.
"아니, 내가 머리를 부술 것이다."
덩치가 곰처럼 거대한 사내 헤르문이 낮게 읊조렸다. 그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꺼져, 내가 그 내장을 파서 빵에 발라 먹을 거니까."
"너야말로 꺼져라. 아드리안나를 모욕한 놈을 처리하는 건, 내 일이니까."
의미 없는 싸움에 길버튼은 작게 혀를 찼다.
"갈라하드, 그는 어떤 인물이지?"
루나베른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선이 길버튼에게 쏠렸다.
"그래! 길버튼! 내가 분명 데려오는 길에 죽이라고 했잖아! 대충 산적이나 늑대가 뜯어 먹었다고 하라고!"
마르디안이 뾰족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아드리안나에 대한 마르디안의 집착은 유명했다. 괜히 '미친' 마르디안이 아니었다.
"어떤 놈이냐고."
갈라하드가 어떤 인물이냐면-.
"사기꾼."
갈라하드는 실없는 농담을 하고, 자신이 뛰어난 마법사라 떠벌렸다.
그런데 고작 마족 피가 조금 섞인 영주에게 고전한 걸 보면, 허세 넘치는 사기꾼이 분명했다.
"죽여야겠어! 순진한 아드리안나님을 사악한 혀로 속일 게 분명해! 뽑아야겠어!"
"사기꾼이라.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다시금 살벌한 대화가 쏟아졌다.
'뭔가 있는 것 같았지만.'
볼 때마다 목에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꺼림직한 사내였다. 길버튼은 뒷말을 삼켰다.
별채의 문이 열리고 아드리안나가 나왔다. 마르디안이 꼭 똥 마려운 개처럼 움찔거렸다.
"놈이 뭔 짓을 했어요? 당장 목을 잘라 올게요. 아니면 팔이라도-."
아드리안나가 한쪽 손을 슬쩍 뒤로 숨겼다. 그 미묘한 반응에 마드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손을 잡더군."
아드리안나가 아주 잠깐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지만, 아드리안나는 신경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애초에 아드리안나는 전선이 아닌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근데 마법사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더 고통스러울 텐데-."
루나베른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가 마나를 불태우는 건,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이도 아드리안나와 살짝이라도 닿는 순간 끔찍한 고통에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고통은 마나가 클수록 더 심해졌다. 그런데 마법사가 손을 잡았다니-.
"아주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질렀겠네! 아하하! 멍청이! 그러니까 왜 감히 아드리안나님을 건드려!"
"똥오줌을 지렸겠지! 멍청한 놈! 그 꼴을 못 본 게 아쉽군."
다들 목청을 높여 멍청한 마법사를 비웃었다.
그 고통을 알고 있기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점차 부풀려져 마법사가 고통에 놈이 혀를 빼물고 죽었다는 말이 나올 때,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깍지를 끼더군. 원리가 궁금하다면서-."
아드리안나의 덤덤한 목소리에 방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미친 마르디안조차 아주 살짝 잡고 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마법사가 깍지를 끼다니-.
모두의 얼굴에 제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분노, 짜증, 불신-. 그 표정은 다르지만, 근간은 경악이었다.
마드리안조차 입만 벙끗거렸다.
'진짜 미친 놈이군.'
영주를 죽일 때도 괴상한 분위기가 되더니만, 이번에는 원리가 궁금하다며 깍지를 꼈다니-.
길버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이 길버튼에게 향했다.
"길버튼, 자네는 여기 남아 그를 보호하도록."
의외의 명령이었다.
아드리안나는 항상 전선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녀 본인조차도 전선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주요 병력인 길버튼을 호위로 배치하다니-. 그녀답지 않은 배치였다.
"······예, 알겠습니다."
의문이 들었지만, 길버튼은 묻지 않고 끄덕였다.
"나머지는 바로 복귀하지."
"대공님은 안 뵙고 가십니까?"
"마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바로 복귀한다."
루나베른의 물음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나님의 기운이 약해지신 거 아니에요? 그 고통을 견딜 리가 없잖아!"
그때, 마르디안이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소리쳤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저었지만, 눈이 돌아간 마르디안에게는 소용없었다. 마르디안의 손은 이미 아드리안나의 손등에 올려진 뒤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사람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겠나. 그것도 마법사가-. 아드리안나가 약해졌다는 게 신빙성 있었다.
"그런 놈보다 제 사랑이 더 크다는 걸 보여주겠······."
꺄악! 마드리안이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침까지 흘렸다.
루나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마드리안을 챙겼다.
'놈은 얼마나 미친놈인거지.'
길버튼은 작게 혀를 내둘렀다.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때, 헤르문이 누가 봐도 뭔 짓을 저지를 법한 살벌한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마족처럼 튼튼한 헤르문인데, 회복이 덜 되었다니-. 분명한 핑계였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늘 그렇듯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헤르문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알겠다. 완전히 회복하고 돌아오도록. 몸이 최우선이니까."
'귀찮아지겠군.'
길버튼은 도끼를 고쳐 잡는 헤르문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갈라하드가 한 대 맞는 걸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음, 괜찮을 것 같았다.
***
'···마나가 불에 탄다.'
갈라하드는 저릿한 손을 보며 탄식했다.
마나가 불타는 건 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혈관 하나하나를 토치로 정성껏 굽는 느낌이었다.
'닿는 것만으로 마나를 태운다니. 이게 말이 되나?'
묘사가 아니라, 진짜로 마나가 탔다.
아카데미에 이어서 정보국까지 다녔던 갈라하드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수도의 마법사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면 지팡이로 두들겨 맞을 게 분명했다.
마법학에서 마나는 불변의 것이었다. 마법은 인간이 술식이나 주문을 통해서 그 성질을 더하는 것일 뿐, 마나 자체를 변환시키는 게 아니었다.
순수한 마나는 고결하고 고귀하며 불변이었기에.
하지만 아드리안나는 말 그대로 순수한 마나를 태웠다.
이건 역사적인 발견이었다. 마법사인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는데.'
떨리는 손으로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나가 없군. 조금만 더 잡고 있었으면 죽었을 수도 있겠네.'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거기 누구 있나?"
"뭐 필요하십니까?"
대답은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자, 길버튼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경보 마법이 작동하지 않았는데-. 아, 마나가 없지.
"자네는 노크할 줄 모르나?"
"했습니다만."
마법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못 들은 듯했다.
갈라하드의 고질병이었다. 마법만 연관되면 좀처럼 주체가 되지 않았다. 약점이자 동시에 갈라하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불 좀 있나?"
"손가락에서 불 나오지 않습니까?"
"마나가 다 탔거든."
작게 혀를 찬 길버튼이 뭔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부싯돌이었다.
"무식하기는-. 라이터나 성냥은 없나?"
"여기는 북부입니다."
무식하군. 길버튼의 대답에 작게 혀를 찼다. 길버튼이 갈라하드의 앞에 대고 부싯돌을 부딪쳤다.
탁탁, 살짝 위험했지만, 불은 훌륭히 붙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가득 퍼졌다.
"연초가 많으십니다."
"마나 연초라서."
이해 못 한 눈치였지만, 갈라하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사가 아닌 이한테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 길버튼도 더 묻지 않았다.
"어떠셨습니까?"
"무엇을 말하는 건가."
"아드리안나님 말입니다."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의 사고가 다시 아드리안나로 향했다. 마나를 불태우는 성질-. 아아···. 사고가 다시금 가속했다.
"어떠셨냐고 물었습니다."
길버튼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연초의 불이 중간에 끊어져 있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길버튼이 다시 부싯돌을 들이밀었다. 갈라하드는 고개를 젓고 손가락을 튕겼다. 미약한 불이 손가락 끝에 타올랐다.
"마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마나 연초를 폈잖나."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셨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재촉하는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존나게 이쁘더군."
"대륙 제일이라고 했잖습니까."
"그래, 황녀보다 이쁘던데."
"······황녀를 만나봤습니까?"
"어쩌다 보니. 자네는 황녀를 만나게 되면 무조건 피하게 미친 여자야."
"허세는-."
길버튼이 작게 혀를 찼다. 안 믿는 눈치였다. 갈라하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끝입니까?"
원하는 대답이 있는지 길버튼이 다시금 물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아드리안나는 대륙 제일이 확실한 외모였지만, 갈라하드가 관심 있는 건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
마나를 태우는 성질이었다.
"그녀를 또 만지고 싶군. 이번엔 좀 더 오래-."
"······."
길버튼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길버튼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에 갈라하드는 자기 말이 조금 이상했음을 깨달았다.
다만, 길버튼의 반응이 재밌어 수정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연초 연기를 천천히 내쉬었다. 어지러웠던 정신이 점차 가라앉았다.
'마나를 불태운다-.'
갈라하드는 가죽 수첩을 꺼내서 그 내용을 확인했다. 길버튼이 고개를 삐쭉 내밀었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무슨 언어입니까?"
"고향에서 쓰던 언어네."
"고향이 수도 아니었습니까?"
"수도지."
"······?"
대충 대답하고 수첩을 확인했다.
[마족의 왕이 불에 타오르며 크게 휘청였다.]
'이게 아드리안나였군.'
마족의 왕이 겪은 세 번의 위기 중 가장 강조됐던 거였다. 아마도-. 정확하지는 않았다.
마족의 왕이 불에 약하다고 생각하여 불 계열 마법에 전념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갈라하드의 주력은 불 계열이었다.
'북부에 잘 왔군.'
정보국에서 그렇게 구르면서도 건진 게 없었는데, 북부에 오자마자 이런 큰 단서를 얻다니-. 오랫동안 앓던 이가 빠진 듯하여 히죽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핵심이었다. 어떻게든 아드리안나의 옆에 붙어 있어야 그를 연구할 텐데-.
'문제 될 게 있나? 약혼자잖아.'
갈라하드는 작게 박수치며 웃었다.
"약혼자를 만지고 싶은데, 안내해주겠나?"
"···?"
"아, 보고 싶다고 말하려는 거였네. 말이 헛나왔군."
길버튼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감에 갈라하드는 말을 바꿨다.
"······아드리안나님은 전선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벌써 돌아갔다고? 이게 밀당이라는 건가.
갈라하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군! 그러면 전선으로 가지. 전선이 궁금하던 참이었네."
"전선이 무슨 뒷동산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 지금 대공님의 명으로 감금된 상태 아닙니까."
"감금이었나?"
"몰랐던 척하지 마십쇼."
"흠, 그러면 외출 금지를 풀기 위해, 대공부터 만나야겠군. 대공한테 안내하게."
"······대공님은 바쁘십니다. 지금 약속 잡으면 한 일 년 뒤쯤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길버튼이 '이 새끼 병신인가?' 싶은 눈으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농담은 아닌 듯했다. 일 년은 너무 긴데-.
'엎어야 하나.'
옆의 벽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면서 이미 경로는 다 봐뒀다. 엎을 방법이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엎는 건 갈라하드의 전공이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정중한 걸 보니 그웬은 아니었다. 길버튼이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인물은 염소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사내였다.
"제국놈! 대공님께서 부른다!"
염소수염 사내가 투박한 제국어로 말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아, 사실 내가 일 년 전에 예약을 해뒀네."
길버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었다.
"아, 그런데 나는 제국놈이 아니라, 갈라하드라네."
"제국놈! 따라와라!"
이번에는 길버튼이 낄낄 웃었다.
***
'대공이 나를 왜 불렀지?'
갈라하드는 거울을 보며 용모를 정리했다. 잠을 자지 못해 눈 밑이 퀭했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연초를 물자, 염소 사내가 황급히 뜯어말렸다.
"담배라니! 제국놈! 정신이 나간 겁니까?!"
번역체에 가까운 제국어였다.
"담배가 아니라 마나 연초다. 아주 향기로운 레몬 향이라 대공님도 좋아할 겁니다. 레몬 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안 됩니다! 그건! 참으십쇼!"
완강한 거부에 갈라하드는 남은 연초를 한 번에 빨고 불을 껐다.
대공의 부름은 예상 밖이었다. 여태 줄곧 가둬두다가 갑자기 부르다니-. 유력한 이유는 역시 아드리안나의 방문이었다.
'몰래 방문했다더니, 다 알고 있군.'
그 완벽하고 차가운 외모와 달리 머리는 조금 모자란 건가.
"제국놈! 머리! 넘기십쇼!"
"제국놈이 아니라. 갈라하드-."
염소수염의 호통에 혀를 차며 기름을 발라 머리를 뒤로 넘겼다. 잘생긴 얼굴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거울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뒤에 있던 길버튼이 작게 웩- 소리를 냈다. 못난 질투였다.
염소수염을 따라 대공에게 향했다.
대공의 저택은 걸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북부의 왕이라는 별명이 이해될 정도였다.
저택의 내부는 병사와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가 저택인지, 군사 훈련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어디를 가도 따가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욕을 퍼붓는 놈들도 있었다.
"길버튼, 저놈들이 지금 내 욕을 했네. 가서 혼 좀 내주게."
"개새끼."
"나한테 말고 저쪽한테."
"입만 산 새끼."
"음, 됐네. 자네의 무자비한 욕에 저들도 반성하는 것 같군."
"느끼한 새끼."
정보국에서 받았던 정보보다 그 전력이 높았다. 심지어 여긴 전선이 아닌 대공의 저택이었다. 전선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이 있을 게 분명했다.
정보국에도 구멍이 있군.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이내 거대한 문에 도달했다. 그 앞으로 무장한 기사가 둘이나 있었다.
"잠깐."
눈이 매처럼 부리부리한 사내가 막았다. 수염이 흰데 덩치와 기세가 흉흉했다. 노장이었다.
염소 사내가 설명했지만, 백발의 기사는 듣지 않고 갈라하드에게 손짓했다.
"무기 있나?"
그 물음에 갈라하드는 피식 웃었다. 마법사에게 무기가 있냐고 묻다니-. 확실히 북부 놈들은 마법사에 대해 모르는군.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무안할 것 같아서, 품에 있던 꽁초를 내밀었다. 기사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기사가 두꺼운 수갑을 내밀었다. 그 수갑이 익숙했다. 마나 억제 수갑이었다.
'이게 있다고?'
마나 억제 수갑은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성질을 지닌 물건이었다. 고위 마족의 성질을 응용하여 만든 거인데, 정보국 신입 시절에나 보던 것이었다.
여기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제국놈! 마법사놈! 차시오! 수갑!"
염소수염의 투박한 번역에 갈라하드는 수갑을 찼다.
'오랜만이군.'
정보국 신입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다지 그리운 기억은 아니었다. 탁탁, 손가락이 수갑을 두드렸다.
"여기부터! 혼자! 가시오! 제국놈!"
"그··· 제국 놈이 아니라 갈라하드라니까. 이미 닫았군."
거칠게 닫힌 문에 작게 혀를 찼다.
방은 크고 화려했다. 그 화려함은 보석 같은 사치품으로 인한 게 아니었다.
곳곳에 검과 창이 있었고 벽에는 끔찍한 괴물의 사체가 전시되어 있었다. 마족 박제 박물관이 있다면 여기 아닐까-.
'마족은 이렇게 생겼군.'
아무래도 제국에는 마족이 적은 터라, 마족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정보국 상대는 주로 인간이었다.
아주 가끔 마족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마족의 처리는 다른 부서에서 담당했다. 갈라하드의 부서는-.
인기척에 상념이 깨졌다. 정면의 끝에 사내 하나가 거대한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상 대공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다소 이상하지 않나.
마족의 가죽으로 만든 코트인지, 그 양쪽 어깨에 뾰족한 어금니를 드러낸 큼지막한 머리가 하나씩 있었다. 상당히 따뜻해보였다.
귀족이 아니라 아주 유명한 마족 사냥꾼 같았다. 굵직한 코트를 입었는데도 아래의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더불어 꼭 호랑이 같은 굵직한 이목구비와 형형한 눈빛까지-.
북부의 지배자, 대공이었다.
'바빠 보이진 않는데?'
갈라하드는 속마음을 숨기고 예를 갖췄다.
"제국의 영원한 방패를 뵙습니다."
대공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쇳소리가 섞인 무거운 발소리가 꼭 사형 집행인처럼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목을 긁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대공이 갈라하드의 목을 날릴 이유는 없었다.
갈라하드의 목이 무겁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너무 가볍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나와 약혼할 정도로 얽힌 정치적 문제에 비하여 갈라하드의 목은 한없이 가벼웠다.
대공이 그 정도도 모를 무능한 인물이었다면, 북쪽의 전선은 진작에 무너졌을 것이다. 제국에 먹히거나, 마족에게 침략당했거나-.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퍼런 눈이 갈라하드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꼭 눈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아버지를 전혀 안 닮았군.'
저 험상궂은 얼굴이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그 외모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갈라하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대공의 어깨가 움직였다. 그를 본 순간 머릿속에 있던 계산은 사라지고 훈련된 본능이 갈라하드를 움직였다.
갈라하드의 손목이 부드럽게 돌았다. 서로의 손이 교차하듯 스쳤다.
대공의 거대한 손이 갈라하드의 머리 옆에서 멈췄다. 따가운 서늘함이 관자놀이를 간질였다.
"이리 같은 놈이군."
대공이 제 목에 겨눠진 갈라하드의 손을 보며 끌끌 웃었다. 그 손에는 어느새 응축된 얼음 칼이 들려 있었다.
"직업병이라."
갈라하드는 긴장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퉁, 마나 억제 수갑이 바닥을 뒹굴었다.
"웬만한 마법사는 병신이 된다더니. 쓰레기였군."
대공이 부서진 수갑을 보며 혀를 찼다.
"제가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라서."
갈라하드의 대답에 대공의 웃음이 짙어졌다.
"건방지군."
최대한 겸손하게 말한 건데-.
갈라하드는 애써 뒷말을 삼켰다.
8화 특무대
'대공 베카르탄-.'
갈라하드의 머릿속으로 정보들이 떠올랐다.
다섯 살 때 늑대를 맨손으로 잡았고, 열 살 때 자신을 습격한 용병 다섯을 죽였다. 열두 살 때 기사를 검술로 이겼으며, 열세 살 때 제 아비와 형제를 전부 손으로 패서 죽였다.
망나니의 교본과 다름없는 사내였다.
더불어 취미는 마족을 죽여 그 피로 목을 축이고 가죽을 전시하는 거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부풀리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손가락을 움직였다. 철갑옷도 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저항을 느끼며 파사삭- 튀었다.
'철보다 두꺼운 피부라고?'
갈라하드의 눈이 커졌다.
마나가 담긴 마족의 피와 고기를 먹으면서 강해진 건가? 그러면 마나가 신체적으로도 작용한다는 건가?
'피부에 마나가 머금어져 있나?'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흘려 넣자, 마나가 튕겨 나왔다. 갈라하드의 눈이 커졌다.
농도를 높여서 다시 넣었도 또 튕겼다. 오, 마나가 튕기다니! 갈라하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가라앉은 대공의 눈에 갈라하드는 손을 뗐다.
'딸은 마나를 태우고 아비는 마나를 튕겨내다니-. 이렇게 매력적인 부녀가 있을 수 있나.'
갈라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반대로 대공의 눈에 깃든 감정은 아주 작은 흥미가 전부였다.
"전에는 황태자가 오더니, 이번에는 마법쟁이로군."
마법쟁이-. 그 투박한 단어에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갈라하드의 머리가 바쁘게 굴렀다. 황태자를 보냈었다. 갈라하드가 보내진 걸 보면, 그 끝이 좋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큰일날 뻔하셨습니다. 황태자는 여자에 미친놈으로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발정 난 개새끼겠습니까."
입이 텁텁했지만, 원래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을 욕하는 법이었다.
"하하하! 발정 난 개새끼라니! 정확한 표현이군!"
대공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공간이 가득 흔들렸다.
'북부에 황태자가 왔었다-.'
갈라하드도 모르는 비사였다.
황태자는 여자 편력이 대단한 발정 난 놈이었다. 놈이라면 아드리안나의 소문을 듣고 이 먼 곳까지 올 만했다.
"보자마자 사랑한다더군."
그 난봉꾼 황태자가 먼저 사랑을 말한다니-.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나 태우는 성질 앞에 어떤 마법사가 사랑에 빠지지 않겠나.
"손등에 입을 맞추겠다더군. 다들 말렸는데도 절대 듣지 않고-."
대공이 클클 웃었다. 그 웃음이 나지막하고 거칠어 꼭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감탄했다. 손등에 키스라니-. 그런 영특한 방법이 있었군.
황태자는 마법에 제법 재능이 있었다. 갈라하드가 갈아치우기 전까지는 최연소 아카데미 졸업자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가 아드리안나의 손을 잡았다면-. 갈라하드는 저릿한 손을 작게 털었다.
"울며불며 자지러지더군. 오줌까지 지리면서 바들바들 떠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심지어 저주받은 마녀라 욕했다네."
대공이 소리 내어 웃었지만, 갈라하드는 짙은 짜증을 느꼈다.
마법사가 고작 고통 때문에 포기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 황실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도 여전히 쓰레기지-.
그중 반만 갈라하드에게 왔어도, 벌써 마법의 역사를 바꿨을 것이다.
"황태자가 말을 잘 타더군."
대공의 웃음기 섞인 말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 황태자가 마차나 마법차가 아닌 말을 탈 리가 없었다. 그런 황태자가 말을 타고 갔다는 건-.
'황태자 빼고 다 죽였군.'
진정한 망나니였다.
제국에 대한 명백한 반항이었지만, 오히려 황태자는 반겼을 것이다. 제 추잡한 모습을 본 놈들을 대신 다 죽여줬으니까.
황태자는 그런 놈이었다.
"그다음이 자네고."
'황태자가 한 짓이군.'
황태자는 갈라하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가장 큰 자랑이었던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얽힌 이해관계가 더 있겠지만, 왠지 황태자의 비중이 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댕-댕-댕-. 어디선가 시끄러운 종소리가 들렸다. 대공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옆모습이 꼭 사자와 같았다. 늙고 병들었지만, 이빨은 남아있는 사자.
이빨이 부서지지 무는 걸 주저하지 않는 그런 맹수였다.
그런 대공에게 장녀와 결혼시키라고 갈라하드를 내밀다니-.
대공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고, 제국도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런 수를 둔 이유는 명백했다.
'이제 슬슬 북부가 탐나는 건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제국은 마족을 밀어냈지만, 그 피해가 극심했다. 그를 회복하는 것으로도 제국이 흔들릴 정도였다.
제국은 북쪽으로 도망친 마족을 정리할 생각조차 못 했다.
영리한 황제는 대마족의 머리를 자른 영웅에게 대공의 직위를 내려 북부를 맡겼다.
어차피 북부는 황폐했기에, 황제는 대공에게 세금조차 받지 않았다. 황제에게 북부는 그저 마족 방파제일 뿐이었다.
현재 북부는 이름만 제국에 올렸지, 공국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제국도 북부에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마법이 발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마족과의 전선이 있는 북부의 가치가 제법 올라갔다. 실제로 북부에서 발견된 마석장이 제법 많았다.
물론, 아직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땅이었지만, 북부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갈라하드는 북부를 먹기 위한 핑계였다.
대공이 그를 모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자네는 어땠나?"
대공이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눈에 담긴 흥미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저 작은 흥미가 꺼지면 자신도 끝이라는 걸 눈치챘다.
"손을 잡았습니다. 아주 따뜻하더군요. 깍지도 꼈습니다."
불씨가 조금 커졌다. 대공이 눈을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불씨를 더 키워야 했다.
"따님을 제게 주십쇼."
대공이 크게 웃었다.
머리가 울려 어지러움이 올라왔다. 순간 마나가 뒤틀렸다. 저게 사람이 맞나?
갈라하드는 찡그린 눈으로 대공을 응시했다. 저건 사람보다는 마족에 가까웠다.
그 변태 영주보다도 더-.
마법사인 갈라하드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미친놈이군."
거친 욕이었지만, 대공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도 그 머저리보다는 낫군."
당연한 소리였다.
"놈이 무슨 짓을 해도 제 발끝도 못 따라옵니다."
갈라하드의 말에 대공이 더 크게 웃었다.
"역시 건방지단 말이지."
"겸손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만."
대공의 올라간 눈썹에 갈라하드는 입을 닫았다.
"흠."
대공이 시퍼런 눈으로 갈라하드를 살폈다. 꼭 맹수가 침을 바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하감옥에서 식량을 축내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눈에는 여전히 작은 흥미가 전부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공이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나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네."
순간 조용해졌다. 방이 대공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그전에 다 죽였거든."
상남자다운 해결 방식에 갈라하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
대공은 두 가지의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의 짝이 될 정도의 위치였고, 두 번째는 아드리안나의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아니, 마법사라 오히려 없는 것보다도 못한 상태에서 아드리안나의 짝이 될 정도의 위치까지 올라가라니-.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였지만, 그건 갈라하드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오히려 후자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대공이 갈라하드의 머리를 뽑을 것이란 것에 갈라하드는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이를 허락한 것도 대공에게는 작은 유희 같았다. 어찌 돼도 아무런 상관없는 그런 유희-.
결국, 갈라하드의 결혼에 인류의 존망이 달린 상황이었다.
'진짜 세상을 구하는 기둥서방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무게가 심하게 더 실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 살아남으셨군요."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길버튼이 정말 놀랍다는 듯 감탄했다. 하여튼 띠꺼운 놈이었다.
"설마 상견례에 죽겠나."
"음, 무슨 이야기 나누셨습니까?"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장인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결혼에 관한 이야기지. 혼수를 너무 적게 해주시더군."
"······혼수? 정말 대공 각하가 혼인을 허락해주셨습니까?"
"그거야 시간 문제지."
갈라하드는 대충 대답하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무게가 꽤 실렸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자네, 소속이 어디지? 마부? 경비?"
"······마부는 무슨. 북부에서도 가장 정예로만 구성된 1대대 소속입니다."
길버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사실 알고 있었네, 1대대의 길버튼. 검의 달인이라고?"
길버튼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딘지 불안한 얼굴이었다. 눈치가 빠르군. 갈라하드는 히죽 웃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아, 자네 방금 특무대에 특채로 뽑혔네. 감사 인사는 됐네.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특무대? 그런 게 있었습니까?"
"방금 내가 신설했네. 근사하지 않나? 특수임무부대, 줄여서 특무대."
"무슨 특수임무를······."
"쉿, 비밀일세. 아무튼, 자네는 오늘부터 특무대 소속일세."
"싫습니다. 제가 왜 특무대로 갑니까."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옮겨졌다니까. 아직 이해 못 했군. 대공이 손수 옮겨주셨네. 혼수라고 볼 수 있지. 여기 어디에 있었는데······."
갈라하드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 꺼냈다. 대공의 문장이 찍힌 문서였다. 그 위에 큼지막하게 차출 임명서라고 적혀 있었다. 대상은 길버튼이었다.
길버튼이 다급하게 그를 가져가 여기저기 살폈다. 흠집을 찾아내려는 듯했지만, 애석하게도 저건 진짜였다.
가득 구겨진 길버튼의 얼굴에 갈라하드는 히죽 웃었다.
"······진짜네?"
길버튼의 말이 처음으로 짧았다. 그 얼굴에 복잡함이 가득 떠올랐다.
"나는 항상 진실만을 말하네."
"아니, 대공 각하께서 저를 왜······."
"혼수라고 생각하게나. 그간의 정이 있으니, 자네를 특별히 부대장으로 임명해주겠네. 우리 사이에 감사는 필요 없네."
길버튼의 눈이 잠시 방황했다. 문서와 갈라하드를 번갈아 본 길버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꿈이 아닐세."
"젠장. 근데 부대장이라니. 대원이 있긴 있습니까?"
"그건 지금부터 구해야지."
"빌어먹을."
"자네 욕이 참 정직하군."
갈라하드가 연초를 다 피울 때쯤 길버튼이 차분함을 되찾았다. 생각보다 침착한 놈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둔 인물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일단, 하나는 확실하고 나머지 셋은 자네가 알아볼 걸세."
"고작 하나 있다는 소리입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하나나 있다는 거지."
갈라하드의 대답에 길버튼이 눈썹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히죽 웃었다.
"다섯 정도 데려갈 생각인데, 자네가 나머지 셋의 목록을 만들어보게. 능력 위주로. 인성은 필요 없네. 나는 성악설을 믿거든."
뭐라 입을 벙끗거린 길버튼이 다시 손에 들린 문서를 확인했다. 길버튼의 손에 핏줄이 올라왔다.
"위대하신 대공 각하의 문장이 박힌 문서일세. 그거 찢으면 사형이야."
길버튼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 병력 중에서 뽑으라더군."
"······그런 조건이 왜 붙었습니까? 혹시 아드리안나님이라도 달라고 했습니까?"
"그건 안된다더군."
길버튼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튼 잘 부탁하네. 부대장."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리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쓸만한 이들을 떠올리던 길버튼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북부에 도착한 뒤로 줄곧 감금됐던 갈라하드였다.
그런 갈라하드가 봐둔 인물이 있다니-.
도대체 누구지?
***
"자, 그웬. 자네는 오늘부터 특무대일세. 출세했군! 축하하네!"
"······네?"
청소하고 있던 그웬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 손에 들린 빗자루가 방황하듯 흔들렸다.
이해가 느리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자네는 특무대 소속 군인이야. 전선으로 갈 거니까 빨리 짐을 챙기게. 마족이 우리를 부르고 있네!"
친절하게 설명해줬지만, 그웬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르르- 굴렸다.
갈라하드는 그웬이 타준 떫은 차를 마시며, 그를 잠시 기다렸다. 두 번 정도 홀짝였을 때, 그웬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가 왜 군인이에요! 저는 하녀예요! 청소랑 빨래를 하는 하녀!"
"자네, 청소랑 빨래도 더럽게 못 하지 않나. 걸레질해도 먼지가 그대로-. 접시는 매일 세 개씩 깨 먹는데, 어떻게 안 잘렸는지 궁금할 정도야. 든든한 뒷배라도 있나?"
"······어제는 두 개밖에 안 깼거든요!"
"장족의 발전이군. 축하하네. 아무튼, 자네는 이제 군인일세. 서둘러 짐을 챙기게."
"싫어요! 저는 하녀라고요! 하녀! 군인이 아니라!"
그웬의 격렬한 거부에 갈라하드는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특무대 봉급은 자네 봉급의 열 배일세. 이건 기본급이고 성과를 내면 더 오르지. 자네, 고아들을 돌보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열 배!!"
그웬이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면서 침을 뚝뚝 흘렸다.
"······그러면 덴트도 데려올 수 있고, 비앙카도 시집 보낼 수 있어! 아이들이랑 다 같이 침대에서 잘 수 있고! 할래요!"
"그래, 잘 생각했네. 어서 짐을 싸게나."
열기를 뿜어내던 그웬이 양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법은 배우지 않을 거예요! 제 영혼은 팔 수 없어요!"
"나도 자존심이 있네. 마법은 자네가 무릎 꿇고 알려달라고 부탁해야 알려줄 거야. 내 가르침이 얼마나 비싼 줄 아나?"
"······비싸요?"
그웬의 동그란 눈이 뒤룩- 굴렀다. 비싸다는 것에 꽂힌 듯했다. 어찌 사람이 저리 속물적인지-.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튼! 마법은 절대 싫어요!"
"그래그래, 자네의 보직은 내 비서일세.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면 되네."
"······진짜로요?"
"당연하지, 속고만 살았나?"
"왜 저를요? 저 일 더럽게 못하잖아요? 맨날 구박하는데!"
"알고 있었군."
"당연하죠! 하녀장님도 포기하셨는데요!"
실로 당당한 고백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싫으면 말게. 다른 사람을 구하지 뭐.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도 자네보다 일을 잘할 테니까."
"아··· 아니요! 시켜만 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그웬이 냅다 무릎 꿇고 갈라하드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그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한두 번 매달린 솜씨가 아니었다.
다리에 매달려서 눈을 끔벅이는 게 꼭 간식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 같았다.
'넘어왔군.'
그웬을 데려가서 마법의 멋짐을 잔뜩 보여줄 생각이었다. 마법의 위대함에 차츰 스며들어, 종장에는 제발 마법을 알려달라고 애원하겠지. 갈라하드는 확신했다.
그에 필요한 건 그웬을 데리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래, 서둘러 짐을 챙기게."
"그··· 갈라하드님은요?"
갈라하드는 들고 왔던 가방을 흔들었다. 짐은 하나도 풀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직업병이었다.
그를 본 그웬이 알았다며 열심히 뛰어다녔다. 갈라하드는 다시 차를 홀짝였다.
'차도 더럽게 못 타는군.'
잎을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건데, 맛없게 만드는 것도 재주였다.
차를 다 마실 때쯤, 그웬이 소리쳤다.
"짐 다 챙겼어요!"
그웬을 본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웬은 한 손에는 걸레, 다른 손에는 빗자루를 무기처럼 들고 있었다.
마족과의 전선에 가는데, 빗자루와 걸레라니-. 작게 혀를 찬 갈라하드가 손을 휘저었다.
"자네는 키가 작으니 빗자루를 좀 더 높게 들게나. 그래야 마족의 목을 찌르지."
"·········네에?!"
길게 비명을 지른 그웬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빗자루를 더 높이 들었다.
"하나! 둘! 하나!"
"하나아! 두울!"
목록을 작성하고 돌아온 길버튼은 하녀와 빗자루를 휘두르는 갈라하드에 문을 다시 닫았다.
"망할."
길버튼의 나지막한 욕설이 칼바람에 흩날렸다.
9화 좋은 칼
아카데미도, 정보국도 수도에 존재한 탓에 갈라하드는 주로 수도에서 머물렀다.
수도는 굉장히 청결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돌이 깔려 있었고, 하수도가 설치되어 오물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들 까마귀 같은 양복을 입고 돌아다녔으며, 향수 냄새가 코를 가득 찌르는 곳이었다.
놈들이 잘 씻는 것보다는 황실에서 고용한 마법사들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북부는 끔찍했다. 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와보니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가축의 오물과 섞여 반쯤 녹은 눈이 질척였고, 사람들은 씻지 않아 검고 삐쩍 말라 있었다.
북부에만 따로 흑사병이라도 돌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저기에 대기자들이 있다는 건가?"
길버튼이 데려다준 대기자들 모여 사는 곳은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높았다,
무너진 집이 대부분이었고 그 사이에는 나무로 어설프게 지은 집들도 있었다.
쩔뚝이는 이가 바닥을 기었고 한 손이 없는 놈이 그를 보며 낄낄 웃었다.
"예, 쓸만한 이는 전부 전선에 있으니까요."
"전선에 못 나가는 쭉정이들만 대기한다는 거군."
"비슷합니다."
"짬처리였군."
'대공이 대기 중인 놈이라는 조건을 건 이유가 있었군.'
즉 분리수거장에서 알아서 잘 찾아봐라- 라는 뜻이었다.
멀끔한 코트 차림의 갈라하드와 무장한 기사 길버튼이 같이 걸으니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저주받은 기둥서방이라며 욕한 놈들이 길버튼의 시선에 황급히 숨었다.
"내가 꽤 유명하군. 이거 사인이라도 연습해야겠어."
"기둥서방 소리를 듣고도 좋습니까?"
"좋지. 능력 있고 이쁜 여자를 만나서 편하게 사는 건 모든 사내의 꿈 아닌가."
"저는 아닙니다만."
"자네 꿈은 뭔가?"
"저는······."
무의식적으로 말하려던 길버튼은 입을 꾹 닫았다.
"왜 말을 하다가 말지. 사람을 화나게 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그게 뭔 줄 아나?"
"뭡니까."
"멍청한 마법사와 똑똑한 기사네."
"멍청한 마법사는 됐고, 똑똑한 기사는 왜 화나게 합니까?"
"기사는 똑똑하면, 검이 느려지거든. 자네 검은 아주 빠르겠군."
"······?"
길버튼이 한쪽을 가리켰다. 움막 같은 게 뭉쳐져 있었다. 움막이라니-.
'오크랑 다를 바가 없군.'
이렇게 추운 곳에서 움막으로 어떻게 버티는지 궁금했다.
길버튼은 움막 중에서도 가장 허름하고 허접한 움막 앞에서 멈췄다.
네다섯 개 정도 엮은 지푸라기 아래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해진 옷을 입고 있는 게 영락없는 거지였지만, 그 외모가 제법이었다.
얼굴에 낀 땟국물조차 소년의 귀티를 가리지 못했다.
귀족처럼 생긴 소년이었는데, 그 눈이 참으로 맑았다.
길버튼이 그 소년을 가리켰다.
"데미안, 괴상한 검 솜씨를 지니고 있습니다."
"괴상한 검 솜씨?"
"검술은 아닌데, 또 마족은 기가 막히게 잘 잡는답니다."
"털도 안 났을 것 같은데?"
"그게 중요합니까?"
"농담일세. 젊고 잘 싸우는데, 왜 성에 있지?"
"데미안이 있었던 소대들이 마족에게 전멸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마족에게 전멸한 소대의 생존자면 더 잘 챙겨줘야지. 근데 뭐 소대······ 들?"
"그런 일이 네 번 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소대에서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잠깐 대기 중입니다. 아마 곧 척후병으로 배치될 겁니다."
길버튼이 뒷말을 흐렸다. 네 번이나 전멸한 소대에서 유일한 생존자라니-.
"소년의 짓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철저한 조사를 끝낸 상태입니다."
음-.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전선이기에 더 빡빡하게 조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소년의 짓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실력은 쓸만하다는 거군."
"예, 확실합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며 소년에게 향했다. 소년의 곳곳에 멍과 흉터가 가득했다. 아물지 않은 것도 있었다.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있나. 나약한 놈은 필요 없는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소년은 하늘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눈을 먹고 있는 건가?"
"목이 말라서요."
"그렇군. 마실만 한가?"
"오늘은 레몬 맛이 나네요."
갈라하드는 연초를 뒤로 숨겼다. 소년은 여전히 눈을 먹고 있었다.
멍청한 작태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길버튼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소년 옆에 앉았다. 그제야 소년이 갈라하드를 쳐다봤다.
그 눈에 감정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익숙한 눈이었다.
정보국에서 봤던 놈과 비슷했다. 형제인가? 아니, 놈은 흑인이었다.
다른 거라면, 살의에 범벅된 놈과 달리 소년의 눈은 아직 깨끗했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게 생기셨네요."
뜬금없는 평가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데미안, 자네도 신기하게 생겼네.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군. 부모님이 귀족이셨나?"
"아니요, 저희 어머니는 창부예요."
뜬금없는 부모 소개에 갈라하드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대단하시군. 창부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세. 돈을 낼 정도로 매력이 있다는 거니까. 그래, 아버님은 뭐 하시나."
"음, 넷 중 하나에요."
"슈뢰딩거의 아버지군."
"슈뢰딩거요?"
"신비롭다는 뜻이네."
데미안은 '슈뢰딩거'를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 단어 뜻이 마음에 든 듯했다.
"자네를 데리러 왔네."
"저를요?"
"그래, 자네가 그렇게 칼질을 잘한다더군."
"아하, 좀 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오늘 특무대를 개업했는데, 자네도 들어오게."
"그건 싫은데요."
깔끔한 거절에 갈라하드는 길버튼을 쳐다봤다. 길버튼이 어깨를 들썩였다. 참 얄밉게 생겼군.
"왜지?"
"제가 들어가면 다 죽어요. 아저씨는 좋은 사람 같아서 죽으면 아쉬울 거 같아요."
그 목소리가 상당히 똑 부러졌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먼저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일세. 저기 있는 길버튼이 아저씨지. 자, 형이라고 불러보게."
"형,"
자신을 가리키며 '아저씨!'라 말하는 갈라하드에 길버튼의 얼굴이 구겨졌다.
"두 번째,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 않더군. 그리고 세 번째, 소대원들을 자네가 죽였나?"
"마족이 죽였어요."
"나쁜 마족이군."
"나쁜 마족이죠."
내용과 달리 데미안의 목소리는 참으로 덤덤했다.
"그걸 자네 잘못으로 돌리면, 공을 뺏긴 마족이 섭섭하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네요."
"말이 잘 통하는군."
"그래도 제가 들어가면 다 죽을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나는 명줄이 꽤 길거든."
데미안이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살폈다.
"허약해 보이는데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닐세."
잠시 고민하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딱히 할 것도 없었어요."
"데미안, 그대는 지금부터 특무대 소속이네. 이는 대공 저하의 명령이고-. 자, 소년이여, 일어나게."
"네, 형."
데미안이 건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이 바닥에 끌렸다.
길버튼은 괴상한 대화를 나누고 합심해서 일어나는 둘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둘은 길버튼의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
데미안이 너무 굶은 듯하여, 갈라하드는 데미안을 데리고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면 나머지는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사고 치지 말고 계십쇼. 용병 나부랭이가 섞여, 대공 저하도 포기한 곳입니다. 여기서 죽으면 시체도 못 찾습니다."
길버튼은 몇 번이나 경고하고 사라졌다.
'시체도 못 찾는다-.'
갈라하드는 문장을 입에서 굴렸다.
"평소에 사고 많이 치시나요?"
"천재의 비범한 행동을 범인들은 사고라 생각하지."
"아하."
끄덕이는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술집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침을 퉤- 뱉었다. 사내는 한쪽 팔에 녹이 슨 쇠로 된 몽둥이를 차고 있었다. 북부식 후크 선장인 듯했다.
"썩 꺼져라!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재수 없는 꼬맹이!"
"자네, 평판이 안 좋군."
"그러게요."
"자네 나이 때는 인사만 잘해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네. 자, 해보게나."
"안녕하세요."
"좀 더 고개를 숙여야지."
"안녕···."
"시발, 이 병신새끼는 또 뭐야?"
거친 욕설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술집 사내가 오른쪽 철 몽둥이를 흔들었다. 위협하는 건가?
"나는 갈라하드라고 하네. 반갑군, 멋진 외팔 친구."
"누가 네 친구야! 시발-."
갈라하드는 슬쩍 사내의 몽둥이에 손을 올렸다. 사내가 뭐라 욕하려고 할 때, 그 입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벙끗거리던 사내가 비틀거리며 옆에 기댔다.
"들어가도 된다는군. 자, 들어가지."
"죽였어요?"
"아니, 잠깐 잠든 걸세. 아주 좋은 꿈을 꿀 거야."
갈라하드는 사내의 불퉁한 배를 꾹 밟아 넘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미적지근한 열기, 더러운 땀 냄새가 가장 먼저 그들을 반겼다.
"좋군."
눈이 하나 없거나 뭔가 하나 부족한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주름 가득한 여인들이 뾰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바닥은 치우지 않은 뼈와 깨진 잔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어딘가에서 괴상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들어서자 시끄럽던 소음이 뚝- 하고 끊겼다. 시선이 집중됐다.
눈이 벌건 놈들이 퀭- 하고 코를 풀었다. 어떤 놈은 제 허리춤에 묶인 검을 만지작거렸다.
"자네도 나 못지않게 미움을 받는 거 같은데?"
"제 잘못이니까요."
"아니, 자네 잘못은 없네. 내 장담하지."
갈라하드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다들 반갑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네! 사지 멀쩡하고 실력에 자신 있으면 지원하게나! 인성은 보지 않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졌다.
"여기는 매너가 꽝이군. 인사를 받아주는 놈이 없어."
갈라하드의 투덜거림에 데미안이 뒤늦게 손을 흔들었다.
갈라하드는 피식 웃으며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기저기 칼자국이 새겨진 멋진 테이블이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시키게."
"정말로요?"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네."
데미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지간히 못 먹었나 보군.
갈라하드는 주문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주문받으러 온 건 직원이 아니라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사내였다.
테이블에 주먹을 쾅! 내려쳤다. 아프겠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사내가 갈라하드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발, 어디서 좆 구린 마족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마법사 새끼가 있었네?"
수염이 지긋한 사내가 데미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저놈이 그랬군.'
그 주먹 크기가 데미안의 갈비뼈 부근에 있는 멍이랑 비슷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일단, 마법과 마족은 엄연히 다르네. 수도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무식한 새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조심하게."
"······뭐 무식한 새끼?"
"그런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걸세. 자네 혹시 무식한가?"
사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걸세."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내의 빈 눈두덩이에서 노란 진액이 흘렀다.
여유로운 갈라하드의 태도에 뭔가 있다고 여겼는지, 슬쩍 데미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놈들은 왜 마법사를 무시하지?'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때,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데미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 볼일이 저쪽인 듯했다.
"술집에 올 돈 있으면, 나한테 가져다줘야지. 이 빌어먹을 놈아."
"돈이 없어요."
"돈이 없는데 술집을 와? 지랄하네-. 너 돈 숨기고 있을 것 같았어! 시발 새끼."
"데미안이 빚을 졌나?"
갈라하드가 오른손을 들고 묻자. 사내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쪽 일 아닐 텐데?"
"이제 내 대원이라서 말이지. 내 일이기도 하네."
"그러면 그쪽이 갚아줄 건가?"
"아직 그 정도로 가깝지는 않네만."
"시발! 그럼 닥치고 있어! 그 상판 갈아버리기 전에!"
"워-. 진정하게. 혹시 아나. 내가 갚아줄지?"
"그래서 네놈이 갚아줄 건가?"
"음, 일단 들어보겠네."
사내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 황달기 있는 눈이 잠시 방황했다. 그때, 뒤에 있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내의 어깨가 다시금 올라갔다. 단순한 놈이었다.
"이 새끼가 죽인 소대원이 내 친구였거든. 아주 친한-."
"아하, 그렇군. 그래서 돈을 빌려줬나?"
"저런 소대원 잡아먹는 새끼한테 돈을 왜 빌려줘?"
"그러면 돈을 왜 가져오라고 하지?"
"저 새끼가 소대원을 죽였으니까!"
"자네, 소대원을 죽였나?"
"아니요. 저는 남의 공을 뺏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 도둑질은 나쁘다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시발 새끼가-."
"잠시만 기다려주게."
갈라하드는 안쪽 주머니에 있던 은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뒀다. 사내의 입이 닫혔다. 사내들이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술집이 숨소리도 안 날 정도로 조용해졌다. 탁,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놈 소굴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죽었다는 소대원이 그대의 가족인가?"
"가족과 다름없는 동료였다."
사내가 옆에 눈짓을 보내며 대답했다. 옆에서 뭔가를 꺼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가족은 아니라는 거군. 그런데 자네가 왜 돈을 받지?"
"그야 아주 친한 동료였으니까-."
"음, 제국법이 아무리 이상해도, 동료에게 유산이 넘어가는 법은 없네."
"법은 무슨 시발-."
거친 욕설이 한바탕 쏟아졌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심지어 중년 여인도 식칼을 들고 서 있었다.
'참 교양 없는 곳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니, 소대원이 죽은 것에 자네의 잘못도 있네."
"아니라면서요."
"자네가 나약해서 소대원이 죽은 걸세. 자네가 강했다면 소대원이 죽었겠나?"
"그것도 그렇네요."
갈라하드는 데미안을 응시했다. 데미안의 초점이 또렷해졌다.
그때,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칼 뽑는 소리, 들뜬 숨소리-. 주제 모르는 이들의 노래였다.
"누구나 실수를 하네. 중요한 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지."
"그렇군요."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 내가 위험에 빠졌네. 구해주게. 데미안."
갈라하드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기이한 행동에 검을 뽑고 있던 사내들이 어정쩡하게 멈췄다.
"네! 형!"
데미안이 활기찬 대답을 하며 검을 뽑았다.
데미안의 검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녹이 슬었고, 닦지 않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파상풍에 걸릴 것 같은 구린 검이었다.
허공에 은색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이 굉장히 깔끔했다.
팔이 떨어진 사내가 비명을 질러대며 엎어졌다. 뿜어진 붉은 피가 데미안을 적셨다. 데미안이 입을 쩍 벌렸다. 눈을 먹을 때처럼-.
"아아!"
데미안이 들뜬 탄식을 터뜨렸다.
'백정이군.'
데미안이 앞으로 굴렀다.
검을 잡는 방식이 굉장히 특이했다. 역수로 잡은 게 꼭 생전 검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 동작도 검사보다 시정잡배에 가까웠다.
투박하고 질서가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갈라하드가 봤던 그 어느 기사보다 예리했다.
소년의 재능은 검술이 아니라 살인이었다.
"죽여-! 죽이라고! 재수 없는 새끼!"
"뒤져!"
술집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공격 사이를 데미안이 부드러이 움직였다.
검술보다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검 솜씨가 괴상하긴 하군.'
연초가 반쯤 남았을 때-.
술집에 서 있는 건 데미안이 유일했다. 갈라하드는 앉아 있었다.
"특무대에 들어온 걸 환영하네."
갈라하드의 축하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의 얼굴에 떠올랐던 흥분이 금세 식었다.
'타고난 살인자인가.'
좋은 칼을 얻었군.
갈라하드는 다 핀 연초를 바닥에 튕겼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예의 후크 선장이 욕설을 하며 들어왔다.
"이런 비열한 마법사 새끼! 시발! 감히 방심한 틈을-?!"
호기롭게 욕을 뱉던 후크 선장이 붉게 변한 술집에 말끝을 흐렸다. 그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후크 선장이 눈치를 보며, 슬쩍 다시 나가려고 할 때-.
"주문 좀 받게."
갈라하드가 오른손을 들었다.
10화 평범한 톰
"먹는 건 중요하네. 특히 자네처럼 성장기일 때는 더더욱-. 최대한 많이 먹고 무럭무럭 크게."
갈라하드는 곧 자기 말을 후회했다.
데미안은 앉은 자리에서 테이블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웠다. 오죽하면 쭈뼛대던 후크 선장이 방긋 웃으며 갈라하드를 대할 정도였다.
"자네는 태어나서 밥을 처음 먹나?"
"오랜만에 먹어요."
"그래, 마음껏 먹게. 아니, 마음의 반만 먹게."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술집을 살폈다. 술집이 북적거렸다.
"거기 들어. 아! 똑바로 안 드냐? 개새끼야!"
"머리가 더 무겁다니까! 자리 바꿔 시발-."
후크 선장이 부른 사내들이 기절하거나 죽은 이들을 짐 치우듯 치웠다. 들어보니 골칫거리였던 놈들이었다. 시체 청소 값으로 은화 한 개를 내야 했다.
그때, 술집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길버튼이 어깨에 묻은 눈을 털며 들어왔다.
붉게 물든 술집에 길버튼의 눈썹이 구겨졌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 차올랐다.
느닷없이 등장한 기사에 시체를 옮기던 이들이 바짝 긴장했다. 아무리 개판이라도 기사 눈치는 보는 듯했다.
그때, 술집 주인 후크 선장이 길버튼에게 달려갔다.
"기사님! 저놈들이 이랬습니다! 사람들을 막 썰고 음식을 무단으로 취식하고! 아주 몹쓸 놈들입니다!"
"아니, 값은 지불하지 않았나."
"닥쳐라! 더러운 마법사 놈아!"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음식값에 시체 치우는 값까지 받은 후크 선장이 길버튼에게 일러바쳤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겁니까."
길버튼이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사고를 치다니.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저놈들이 칼을 들이대는 것 아니겠나. 정말이지 죽을 뻔했다네. 데미안이 구해줘서 다행이지! 그렇지? 데미안?"
"에! 아쁘노드!"
"입에 있는 건 씹고 말하게. 다 튀지 않나."
데미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사님?"
후크 선장이 눈을 끔벅거렸다. 길버튼이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래, 내가 돈을 안 냈다고?"
"······네? 네?!"
"그러면 자네 주머니에 있는 은화는 내게 훔친 거겠군! 길버튼 경! 저놈을 잡게!"
"히이익! 잘못했습니다! 나으리! 잘못했습니다!"
후크 선장이 냉큼 바닥에 엎드렸다. 그 아래에 미처 닦지 못한 붉은 피가 찰박 튀겼다.
"길버튼 경, 저놈의 주머니를 뒤지게. 저놈이 내 은화를 훔쳐 갔네! 저놈의 팔을 하나 더 잘라서 균형을 맞춰주게!"
길버튼이 한숨에 지레 놀란 후크 선장이 은화를 꺼내 내밀었다. 길버튼이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화를 받았다.
"그래서 데려온다던 나머지 하나는 어딨나?"
"감기에 걸려서 죽었답니다."
"음- 아쉽군. 하나를 더 구해야 하는데 말이지. 후크 선장! 여기 주변에 쓸만한 놈 없나?"
"있긴 했습니다만-."
"왜 과거형인가. 그쪽도 감기로 죽었나?"
후크 선장이 대답 대신 눈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애꾸눈 시체를 끌고 가던 사내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방금 죽었군.
"쟤는 별로였네. 눈이 하나 없지 않나. 눈은 마음의 창이라 아주 중요하지. 후크 선장! 마족 잡아본 적 있나?"
"없습니다요!!"
화들짝 놀란 후크 선장이 안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때,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제일 구석에서 사내 하나가 꼭 콩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고 있었다.
주의 깊은 갈라하드가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양쪽 팔 다 달려 있고, 다리 있고, 얼굴도 멀쩡하고-.'
합격.
갈라하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톰은 그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지극히 평범한 북부 사내였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 몇 번을 봐도 기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했다.
별명도 '평범한' 톰이었다.
최근 톰 소대에 말썽이 생기며 소대를 옮겨야 했다. 그 때문에 톰은 성에서 대기 중이었다.
톰은 술집에 앉아서, 내일 나온다는 발령 명령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디로 발령이 날지, 거기 사람들은 괜찮을지-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귀족인 사내 하나와 그보다 살짝 작은 소년이 술집에 들어오며 문제가 생겼다.
시비가 붙었고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사내의 목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톰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술집은 건더기가 가득 찬 붉은 스튜가 되어 있었다.
톰은 몸을 돌돌 말아 최대한 작게 만들고 있었다. 톰의 장기였다. 전쟁터에서도 이 비법으로 몇 번 살아남은 적도 있었-.
"반갑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고 하네."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톰은 다급히 손을 맞잡았다. 사내의 손은 꼭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찔끔 놀랄 정도였다.
"일병! 톰!"
"왜 여기서 대기 중이지? 어디 다쳤나?"
사내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뭔가 듣고 있으면 괜히 간질거리면서 편해졌다.
"아닙니다! 소대가 바뀌면서 잠깐 대기 중이었습니다. 내일 발령이 날 겁니다!"
"오, 대기 중이군. 자네, 싸움 좀 하나?"
"못합니다!"
"그렇군, 축하하네! 자네는 오늘부터 특무대일세."
"······네?"
톰은 눈을 여러 번 끔벅였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대화의 흐름이 너무 이상해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짐을 챙기게. 마족이 우리를 부르고 있네."
"아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일병입니다."
"알고 있네. 마나도 지극히 평범하더군."
"네? 그게 무슨···. 그런데 왜···."
"뽑아놓고 보니 다들 개성이 너무 뚜렷해. 나처럼 평범한 이가 하나 더 필요해서 말이지."
자신을 평범하다고 말하는 사내에 톰은 눈을 끔벅였다.
톰은 피에 범벅이 되어 고기를 먹는 소년보다 오히려 이 사내가 더 꺼림직했다. 뭔가 좁히지 못할 듯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머릿수가 하나 부족하기도 하고."
왠지 뒤의 말이 진짜 이유인 느낌이 들었다.
"환영하네, 톰."
다만, 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일병! 톰! 감사합니다!"
톰은 눈물을 찔끔 삼켰다.
"자, 대원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게나."
끌리듯 테이블에 앉은 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선의 영웅, 길버튼 경과 같은 테이블에 앉다니-. 옆에는 피 칠갑으로 생고기를 뜯는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요즘 성에서 가장 유명한 대공의 사위가 앉아있었다.
평범한 톰과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쪽은 톰일세. 톰, 자네가 제일 마지막에 들어왔으니 막내일세."
"일반 병사를 왜 뽑습니까? 금방 죽을 텐데."
"······저 죽습니까?"
"톰, 인간은 언젠가 죽네. 그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렇지 않나?"
"···제가 죽는다고요?!"
"걱정하지 말게. 특무대에 들어온 이상 자네의 죽음은 아주 멋지고 값질 테니까."
톰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죽는다니! 톰은 오래 살고 싶었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습니다. 저는 진짜 평범한 일병입니다. 특무대에 어울리는 재목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말래도, 우리 특무대에는 하녀 출신도 있네."
"···하녀 말입니까?"
"청소랑 설거지를 더럽게 못 하는 하녀지. 자네의 선임일세."
톰의 말문이 막혔다. 이 사내랑은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는데, 또 묘하게 설득됐다. 하녀도 있으면 괜찮지 않나?
"그래서 특무대가 맡은 임무가 뭡니까?"
"자네들이니 특별히 알려주는 걸세. 자네들만 알고 있게나."
갑자기 진지해진 갈라하드에 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공 저하가 직접 신설했다니-.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부대였다. 심지어 이름부터 특수임무부대였다.
과연 어떤 엄청난 임무를···.
"우리의 임무는 대륙의 멸망을 막는 걸세."
'···너무 엄청나잖아!'
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갈라하드의 담담한 말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기를 먹던 데미안마저 멈췄다.
"또 장난입니까."
뒤늦게 길버튼이 짜증을 냈다.
다만, 톰은 웃지 못했다.
그리 말하는 갈라하드의 눈이 처음으로 진지했기에-.
"아, 화장실 좀 다녀오겠네. 길버튼, 자네는 왜 일어나는가? 나는 결혼할 여자가 있는 몸일세. 앉아있게."
갈라하드를 따라서 일어나려던 길버튼이 얼굴을 가득 구기며 다시 앉았다.
"자, 마음껏 시키게나! 돈은 넉넉하니까!"
갈라하드가 호기롭게 말하며 술집을 나갔다.
"더 시켜라. 저놈 돈 좀 털어먹게."
길버튼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에 데미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시 상이 채워졌다.
'이걸 또 먹는다고?'
데미안은 정말 미친 듯이 먹었다. 저 작은 몸에 어떻게 음식이 들어가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길버튼은 문을 보며 포도주를 홀짝였고, 그 사이에 낀 톰은 이도 저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테이블에는 데미안의 고기 뜯는 소리만 들렸다. 그에 눈치를 보던 톰이 이런저런 농담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톰도 입을 닫자 테이블에는 적막만 흘렀다.
갈라하드 하나 빠졌다고 이렇게 되다니-.
톰은 갈라하드를 애타게 기다렸다.
문제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갈라하드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계산을·········."
쭈뼛쭈뼛 다가온 술집 사장이 잔뜩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이-."
길버튼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톰은 필사적으로 몸을 말아서 작게 만들었다.
***
'여기쯤인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제국의 정보국은 대륙 어디에나 뻗쳐 있었다. 대륙을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갈라하드는 대륙 곳곳에 있는 정보국 안가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빼낸 정보였다.
정보국은 안가의 위치를 웬만해서 바꾸지 않았다. 자기들의 상대가 없다는 자신감과 녹이 잔뜩 슬은 나태함 때문이었다.
'여기군.'
갈라하드는 마나 연초를 깊게 마셨다.
안가는 성의 외곽에서도 외곽이었다. 바로 옆에 구멍이라도 뚫려있는지 유난히 바람이 강한 곳이었다.
주변에 집의 흔적들이 있었지만, 다 무너져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듯했다.
그사이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양쪽의 집이 무너져 꼭 덮쳐진 모습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절묘한 위치였다.
문 앞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갈라하드는 문을 살폈다.
문은 흔들면 떨어질 것처럼 허름한 외관이었다. 중앙에 자그마한 홈이 있었다. 그냥 패인 흔적 같지만, 실상은 높은 등급의 보안 장치였다.
정보국의 안가는 각 문에 맞는 마도구를 가져다 대야 열렸다.
농도 차이에 따른 마나의 속도 차이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문을 강제로 열면 내부에 알람이 울리며, 전부 소각된다.
해당 마도구에 맞는 마나를 계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현재 가장 뛰어난 보안 방식이다.
'아직도 그대로네.'
갈라하드가 정보국 입사 시험 때 제안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기본적인 이론만 제시했고, 정보국에서 그를 가져가서 발전시켰다. 물론, 공로에 갈라하드의 이름은 없었다.
'악덕 교수 같은 놈들.'
작게 험담하며 손을 풀었다.
이 보안 방식에는 아주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마법사가 마도구의 마나 농도를 알고 그를 맞출 수 있다면, 손쉽게 뚫린다는 거였다.
하지만 마나 농도는 극비였고, 애초에 외우고 다닐 수도 없었으며, 더불어 알고 있다고 해도 마나 농도를 마도구 없이 맞출 수 있는 마법사는 더 흔치 않았다.
물론, 갈라하드는 아주 흔치 않은 마법사였다.
'여기 마나가······.'
갈라하드는 홈에 손을 올리고 잠시 집중했다. 마나가 손을 타고 흘렀다.
갈라하드의 기억이 틀렸거나, 제국이 안가의 마도구를 바꿨다면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정보국은 감찰실 놈들을 보낼 것이다. 아주 끔찍한 놈들이었다. 상황이 상당히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다만, 갈라하드의 기억이 틀릴 일도, 제국이 안가를 바꿀 정도로 부지런해졌을 리도 없었다.
'역시.'
딸깍.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누······ 누구십니까?"
멍청하게 생긴 사내가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갈라하드는 안가 점검 나갔을 때처럼 표정을 굳혔다.
"누구십니까-?"
"······예?"
"자네, 지금 나한테 누구냐고 물은 건가?"
"그···,"
거칠게 묻자, 사내가 말끝을 흐렸다. 헷갈릴 것이다. 방문 예정이 없는데, 갈라하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까.
"설마 보고를 안 받았나? 분명 새벽에 보고가 갔을 텐데?"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내를 타박했다.
갈라하드는 사내에게 한 가지 가정을 제시했다. 네가 일을 안 해서 보고를 안 받은 거 아니야?
사내는 긴가민가할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굳게 믿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아··· 아닙니다! 이런 깜박하고 있었군! 요즘 업무가 많아서! 아니! 로즈님이 받으셨을 겁니다. 최근 일이 많아서!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기다리고 있으실 겁니다."
"로즈?"
"아, 제 상관이십니다. 저도 여기 발령 난 지 얼마 안 돼서 말입니다. 최근 정리할 게 쌓여서 그걸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하-."
사내가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슬쩍 둘러본 뒤에 그를 따라갔다.
똑똑.
"로즈님, 본부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느새 갈라하드는 손님이 되어 있었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방에 책과 문서가 잔뜩 꽂힌 서재 같은 곳, 그 중앙에 여인이 앉아있었다.
검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로즈라-. 재밌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손님?"
여인이 갈라하드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갈라하드는 찬찬히 여인을 살폈다. 길게 뻗은 손에 굳은살이 없었다. 눈 밑에 거뭇함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윤기가 흘렀다.
관리가 아주 잘 됐군. 마치, 수도의 귀족처럼.
"당신이 그 갈라하드-?"
여인이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맞네, 내가 그 갈라하드라네. 그런데 로즈라니- 본명인가? 얼굴만큼 이쁜 이름이군."
갈라하드는 여자 맞은편에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 고맙지만, 요원 이름이에요."
여인이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꼬며,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갈라하드는 작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아, 연초 좀 펴도 되나?"
"네, 얼마든지요."
"그래? 고맙군."
갈라하드는 텁텁한 침을 삼키며 마나 연초를 입에 물었다. 탁, 손가락에 불이 타올랐다. 그 불 너머로 입꼬리를 가득 올린 여인이 보였다.
갈라하드는 여인을 보며 마나를 조절했다. 손가락에 피어올랐던 불이 커지다가 작아졌다. 원래의 크기로 맞춰졌다. 연초에 불이 붙었다.
'적당하군.'
이어서 연초를 깊게 마셨다. 폐가 가득 부풀었다. 마나가 호응하듯 회전했다. 머리가 맑아졌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마나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이는 기사가 갑옷을 입는 것처럼 경건했다.
"이것 좀 버려주겠나?"
"네? 네!"
탁탁, 갈라하드는 다 핀 연초를 사내에게 주고, 새 마나 연초를 입에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갈라하드는 연기를 깊게 뱉었다.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됐지?"
"이제 한 일 년 정도 됐나-?"
"얼마 안 됐군. 힘들겠어, 수도에 있다가 이렇게 춥고 미개한 곳에서 생활한다니 말이야."
"다 제국을 위한 일이니까."
"그래? 자네도 제국이랑 결혼했나?"
"결혼은 체질에 안 맞아서."
"그렇군. 최근에 나도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 있네."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가린 그 모습이 간질이는 것처럼 요망스러웠다. 이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여인은 기분 좋은지 작게 콧노래를 불렀고, 사내는 받은 꽁초를 주머니에 넣는 중이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톡톡 털었다. 불쾌한 냄새를 레몬 향이 밀어냈다.
"그래-."
계산이 끝난 갈라하드는 차분히 말했다.
여인과 사내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진짜 로즈는 어딨지?"
갈라하드의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이건 비밀이지만, 요원 명은 요원과 제일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지어진다네. 기억하기 어렵게 하기 위함이지."
갈라하드가 여인의 붉은 머리와 눈을 가리켰다. 여인의 입꼬리가 굳었다.
탁, 불이 다시금 타올랐다. 온기가 마나를 당겼다.
"두 번째, 북부의 안가는 웬만해서 첫 지역으로 발령 나지 않는 다네. 다른 지역을 거쳤다가 오지. 그런데 자네는 수도에서 바로 왔다니, 무척 이상하군.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여인이 뭐라 대답하려 입을 벙끗거렸다. 갈라하드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조금만 더 들어주겠나? 고맙네. 자, 세 번째, 자네는 내가 정보국 소속인 걸 알고 있었네. 만약 아드리안나의 남편이 될 갈라하드로만 알았다면, 민간인에게 안가가 노출된 거니, 이렇게 태평하게 반응하지 않았겠지."
후-. 갈라하드의 입에서 연기가 작게 퍼졌다. 여인의 눈썹이 구겨졌다.
"정보국의 나를 알고 있다니. 상부에서 절대 알려줄 리가 없는데 말이지. 이래 봬도 꽤 쓸모 있는 요원이라. 특별 취급을 받는 다네."
"자신감이 대단하시네?"
"자신감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일세. 부탁인데, 그 입 좀 닫아주겠나. 중요한 부분이거든. 그래, 요즘 정보국이 머저리처럼 굴러가니까 내가 누군지 알 수도 있네. 문제는 그다음일세."
여인이 더 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마나 농도가 한결 짙어졌다. 갈라하드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나를 아는데, 안가에서 나를 마주하고도 웃는다-. 이게 가장 말이 안 되네.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아니면 먼저 공격하거나-. 그런데 자네는?"
갈라하드가 작게 기침했다. 연기가 끊어지듯 뱉어졌다.
"재밌네."
여인의 입꼬리가 다시 깊게 올라갔다.
"나는 재미없네. 수당 없는 야근이거든. 자, 다시 묻겠네. 자네는 누군가?"
담담한 물음에 여인이 피식 웃었다. 순간 그 가면이 깨지듯 얼굴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날카로운 가시가 쏘아졌다.
'최악이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겹쳤다.
타앙! 허공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똥이 튀었다. 파드득! 반으로 갈라진 여인의 흉측한 얼굴이 주황빛에 번쩍였다.
수직으로 갈라진 입술 사이로 뱀처럼 기다란 혀가 날름거렸다.
"마족이었군."
"어머, 들켰네?"
여인이 웃음기가 섞인 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똑똑하셔라-. 머리가 아주 맛있겠는걸."
두 가닥으로 나뉜 여인의 혀가 희롱하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마나의 농도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피부에 끈적한 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살짝이라도 움직이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당신! 로즈가 아니었어?!"
사내가 멍청하게 소리쳤다.
미치겠군.
갈라하드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야근이었다.
11화 돌과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