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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09

100화 술래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고통의 알이 미친 듯이 뛰었다. 꼭 광소를 터뜨리는 것 같았다. 시야가 계속 흔들렸다. 정신이 위로 쭉 올라갔다.

지배자의 피를 마신 까닭이었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의 피는 전에 마셨던 것들과 달랐다.

그건 단순히 마족의 피가 아니었다.

이건-.

'마나 그 자체다.'

순수한 마나를 마신 기분이었다. 이렇게 순도가 높을 수가 있다니-. 이제껏 다뤘던 마나가 전부 쓰레기로 느껴질 정도였다.

더 가지고 싶었다.

아니-.

'다 마시고 싶다.'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연신 뛰었다. 놈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경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능이 약했다. 네발 마족에게 받은 모종의 힘 덕분에 지배자의 권능을 버틸 수 있었다.

지배자의 권능은 공격이 아닌 지배였다. 즉, 버틸 수 있으면 위력이 급격하게 반감된다. 거기에 지배자의 피까지 마셨다.

그런 상황도 모르고, 앞까지 다가온 지배자에 갈라하드는 승리를 확신했다.

실제로 계획은 제법 깔끔하게 들어갔다. 지배자의 행동을 예상했고 유도했다.

심장에 얼음 창을 꽂으려는 그 순간, 지배자가 괴상한 힘을 발휘했다. 지배자의 몸이 순간 뒤틀렸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권능이 하나 더 있나?'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격이 전부 무위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지배자의 목이 반쯤 뜯겼고, 그 가슴에는 얼음창이 꽂혀 있었다.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태였는데, 지배자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고작 이것이냐?"

"아직 남았네만."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래, 남아야 할 것이다. 배신자의 제자니까. 한 수는 있어야지."

갈라하드는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지배자의 바로 앞에서 얼음송곳이 튀어나왔다. 옆에 있던 마족이 대신 맞았다. 붉은 피가 가득 튀었다.

"건방진 것."

지배자의 앞으로 마족들이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지배자 앞에 마족으로 이루어진 벽이 생겼다.

무표정의 인간들이 뒤엉킨 모습은 상당히 끔찍했다.

그때, 갈라하드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손가락을 튕겼다. 형체 없는 뭔가가 갈라하드의 방벽에 막혔다.

무형의 마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급 마족의 권능이군.'

주변을 살펴보니, 주먹을 휘두르는 마족이 보였다.

'수하의 권능까지 쓰는 건가.'

단순히 움직임을 부리는 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다만, 그 권능이 꽤 투박한 감이 있었다. 평소였다면 가벼이 흘렸을 정도로 엉성했지만, 문제는 그 수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이런.'

사방에서 권능이 쏟아졌다. 갈라하드의 방벽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때, 지배자 주변의 인간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인간들이 마치 부품처럼 서로 마구 엉켰다. 사지가 꺾이는데 작은 비명도 망설임도 없었다.

크기가 순식간에 커졌다. 그 형태가 상당히 꺼림직했다.

'골렘이군.'

인간으로 뭉친 골렘이었다.

지배자의 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갈라하드의 마법을 막을 두꺼운 방패를 세운 것이다.

'현명하군.'

공간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상대의 위치를 알아야 했다. 저렇게 위치를 가려버리면 답이 없었다.

공간 마법은 가벼운 마법이 아니었기에, 위치를 대충 가늠하고 막무가내로 쏠 수 없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권능과 마족들, 제 몸을 숨긴 지배자까지-.

갈라하드는 계산을 다시 했다.

'그게 있군.'

갈라하드는 꽤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렸다.

두근! 고통의 알이 대답하듯 짙은 마나를 거칠게 뿜어댔다. 지배자의 피를 마셨기에, 그 충동과 무게가 극심했다. 정신이 흔들렸다.

'살짝 홀짝인 정도인데, 이 정도라니-.'

다 마셨으면 터졌겠군.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 앞에 얼음송곳이 떠올랐는데, 순도가 얼마나 높은 건지 기포 하나 없이 투명했다. 달려오던 마족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뒤에 있던 놈들까지 꼬챙이가 되어 쓰러졌다.

엄청난 위력이었지만, 그 자리는 금세 메꿔졌다. 마족과 병사로 이루어진 살점의 해일이었다.

'천천히.'

갈라하드는 날뛰는 마나를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방벽이 거칠게 흔들렸다. 살점이 가득 뿌려졌다. 피가 바닥을 적셨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명은 없었다. 고함도 없었다. 그저 살점 써는 소리와 방벽 두드리는 소리,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전부였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확인하며, 계속해서 마법을 뿌렸다. 마나가 떨어지면 수통을 홀짝였다.

지배자와의 전투는 소모전이었다. 지배자는 자신의 수하를 계속해서 밀어 넣었고, 갈라하드는 방어하면서 하나씩 처리했다.

다 잡기에는 지배자의 수하가 너무 많았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의 마나는 한정적이었다.

갈라하드의 패배가 확정된 소모전이었다.

"슬슬 재미가 없구나."

지배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놈 아래에는 인간으로 뭉쳐진 자그마한 골렘이 있었다.

무표정의 사람들이 촘촘히 뭉친 그 골렘은 상당히 끔찍한 모양새였다.

"동감일세."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대답했다. 허세라고 생각했는지 지배자가 끌끌 웃었다.

"배신자 놈의 제자답게 입만 살았구나."

지배자가 이죽거렸다. 갈라하드가 최초의 마법사의 제자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갈라하드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최초의 마법사는 마법의 시초였다. 마법사 모두가 그의 제자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갈라하드는 슬쩍 아래를 확인했다. 축축할 정도로 피가 가득했다.

마물이 아니라 마족이니, 농도가 더 짙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잠깐."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들었다. 쏟아지던 권능이 순간 멈췄다.

"이제 와서 목숨이라도 빌 생각이냐?"

"아니, 잠깐 할 게 있네."

지배자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이놈! 그 귀한 물건을 막대기로 쓰느냐!"

"막대기라니. 지팡이일세."

"이런- 망할 것!"

갈라하드는 지배자의 격렬한 반응을 무시했다.

테두리는 전부 그렸다.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좀 까다로웠지만 완벽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시 살폈다.

'충분하군.'

고개를 끄덕인 갈라하드는 금색 봉으로 바닥을 찍었다.

"이놈!! 감히!!"

지배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반응이 상당히 맛있었다.

갈라하드의 아래에서 빛이 가득 올라왔다. 금색 봉으로 아주 거대하게 그린 마법진이 형태를 드러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지배자가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골렘이 지배자의 앞을 가렸다. 마법진이 공격용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배자는 인간 골렘으로 자신의 위치를 가렸다. 갈라하드의 마법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마법진 위에 있던 피가 방울졌다. 잔뜩 끓인 것처럼 피어올라서 펑- 하고 작게 터졌다. 거기에서 붉은 안개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붉은 안개가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사냥도 쓸모가 있었군.'

대공과의 사냥에서 썼던 붉은 안개였다.

여기서 쓸 줄은 몰랐지만-.

"자, 2차전일세."

갈라하드가 피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질긴 놈.'

지배자는 눈을 가득 구겼다.

놈의 마법은 괴상했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의 피부를 뚫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다만, 그건 지배자가 방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배자가 수하로 주변을 두른 뒤에는 단 한 번의 일격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찮은 마법사가 내 권능을 이겨낼 줄이야.'

지배자의 권능은 그보다 낮은 것들에 군림하는 거였다. 그건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마법사인 놈이 지배자의 권능을 이겨냈다.

'잊힌 존재가 관여했군.'

격을 올려준 게 분명했다. 지배자의 권능을 견딜 수 있도록-.

구렁텅이에 있어야 할 놈이 굳이 힘을 써서 돕다니, 다소 신기한 일이었다.

다만, 그래 봤자였다.

격을 올려서 지배자의 권능을 이겨내도, 버티는 게 전부였다. 놈은 지배자의 영역에 있었다.

그때, 놈 아래에 있던 피가 안개로 변해서 주변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가릴 속셈인가. 끝까지 발버둥치는군.'

지배자는 작게 혀를 찼다. 허튼 수였다. 수하의 눈은 곧 지배자의 눈이었으니까.

다만, 한 번 당한 적 있던 지배자는 방심하지 않고 인간으로 만든 방벽을 더욱 견고히 세웠다. 아예 틈이 없도록 가득 채웠다.

그리고 권능을 펼치려는 순간-.

지배자는 묘한 서늘함에 몸을 비틀었다. 어깨에 얼음송곳이 박혀있었다.

'······어떻게?'

놈의 마법이 공간을 뚫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미 사방을 가린 상태였다.

이쪽의 위치를 알 수 없을 텐데-.

'막무가내로 쏜 것인가? 운이 좋은 놈이군.'

지배자는 눈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이제 끝에 몰리니까 막무가내로 쏘아대는 듯했다.

그때, 허리가 흔들려다. 시선을 내리니, 허리에 얼음송곳이 박혔다.

놈은 지배자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방을 전부 가린 상태였다. 어떻게 지배자의 위치를 안다는 말인가-.

그때, 묘한 냄새가 풍겼다. 그에 주변을 보니 이미 붉은 안개가 가득 차 있었다.

'······설마.'

지배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배자는 일단 움직였다. 허벅지에 얼음송곳이 스쳤다.

변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붉은 안개-.

'피로 만든 안개를 통해서 내 위치를 알아냈다.'

지배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자네가 술래일세."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

"진입해야 합니다."

길버튼의 다급한 목소리에 퍼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호가 없다."

"신호를 못 보낼 정도로 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갈라하드는 그리 허술한 사내가 아니다."

퍼스트의 대답은 여전히 단단했다. 아드리안나의 미간이 가득 구겨졌다.

갈라하드가 들어간 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 그런데 신호가 없다는 이유로 그저 기다려야 한다니-.

아드리안나는 퍼스트가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체 모를 사내였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때, 퍼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병력이 오는군. 지원을 요청했나?"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발소리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에 고개를 돌리자, 다가오는 병력이 보였다. 그 규모가 상당했다. 숫자가 쓰인 깃발이 여덟 개였다.

6대대를 제외한 전 대대가 병력을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대공의 명령이 분명했다.

웬만해서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 대공이 이런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다니-.

'도대체 무슨 보고를 올렸길래?'

아드리안나는 고개를 작게 갸웃거렸다.

2대대 대장 리암이 앞으로 나섰다.

"아드리안나 대장. 먼저 와 있었군."

아드리안나는 고개만 까닥거렸다. 그 뒤로 대장들이 옆으로 섰다. 다들 굳은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했다.

"듣기로 지배자라는 고위 마족이 6대대를 점거하고 있다는데?"

북부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리암이었다. 마족이 대대를 점거한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듯했다.

"그렇다."

"바로 진입하지."

리암이 뒤쪽에 손짓했다. 다른 대장들이 각자 무기를 뽑았다. 뒤의 병사들도 기세를 가득 올렸다.

당장 진입할 기세였다. 병력까지 온 상황이었다.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나를 믿게나.]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아직이다."

"아직?"

아드리안나의 말에 리암이 눈을 구겼다.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숨을 내쉬었다.

"갈라하드 대장이 지배자가 도망갈 가능성이 있으니, 그를 묶고 신호를 준다고 했다. 갈라하드 대장의 신호가 떨어지면 진입하겠다."

아드리안나는 힘을 주며 말했다.

"갈라하드 대장? 특무대의 마법사 말인가. 대공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마법사다. 상대는 고위 마족인데, 그를 믿는 게 말이 되나?"

3대대 대장이 의문을 제기했다. 타당한 의문이었다. 다른 대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하드의 이름에 오히려 반감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순식간에 기세가 기울었다.

"지배자의 도시를 발견한 것도 갈라하드 대장이고, 6대대를 점거하고 있는 걸 찾아낸 것도 갈라하드 대장이다. 그의 판단을 따르지 않으면, 누굴 따른다는 거지?"

아드리안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에 대장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신호가 오면 진입한다."

아드리안나는 굳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평소 다른 대장에게 간섭하지 않는 아드리안나였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명령을 내리니, 대장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만,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그때-.

성 안쪽에서 거센 힘이 느껴졌다. 순간 병사들이 거칠게 휘청였다. 대장들의 고개가 홱-하고 돌아갔다.

병사들 몇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형이 흔들렸다. 그 막대한 힘에 대장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런 괴물을 갈라하드 대장이 맡겠다는 건가?"

2대대 대장 리암의 물음에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신호를 기다린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성문 너머로 붉은 안개가 가득 피어올랐다. 털이 곤두설 정도로 음울한 안개였다.

"신호다."

조용히 있던 퍼스트가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아드리안나는 작게 찌푸렸다.

"지배자가 도망칠 가능성도 있으니, 각 구역을 나누겠다."

아드리안나는 각 대장에게 각자 맡을 부분을 지정해줬다.

아드리안나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는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북부의 영웅이자, 대공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니까.

아드리안나의 명령에 따라서 부대가 빠르게 퍼졌다. 각 성문으로 움직였다.

빠르게 배치를 끝낸 아드리안나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

퍼스트와 펌킨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특무대까지-.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진입한다."

짧은 명령을 내린 아드리안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오러를 끌어올린 아드리안나는 순식간에 성문을 통과했다.

성벽 주변을 마물과 마족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핏빛 안개로 향하는 마족들이 보였다.

순백의 오러를 휘두르자, 정면의 마족이 순식간에 먼지로 화했다.

아드리안나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순백의 오러가 연신 찬란하게 빛났다. 먼지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핏빛 안개 앞에 도착한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렸다.

거기에-.

"늦었군."

퍼스트가 앉아 있었다. 꼭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느긋한 모습이었다. 옆의 펌킨이 고개를 작게 숙였다. 느긋한 퍼스트와 달리 펌킨은 땀이 가득했다.

벌써 도착하여 저리 여유롭게 있다니-.

'실력자다.'

아드리안나는 작게 감탄했다.

"여기서 갈라하드의 냄새가 난다는 말이지."

퍼스트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피로 이루어진 짙은 안개에서 갈라하드의 냄새가 난다니-. 괴상한 소리에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렸다.

"진입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고쳐잡으면서 진입하려고 할 때-.

퍼스트가 아드리안나 앞을 막아섰다. 아드리안나를 막아 선 퍼스트에 펌킨은 묘하게 불안해졌다.

다만, 지금 퍼스트는 임무 중이었다. 장난을 칠 리가 없었다.

"뭡니까?"

아드리안나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퍼스트가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그쪽은 빠지게."

단호하게 말했다.

101화 듀오

"그대는 빠지게."

퍼스트가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펌킨은 작게 경악했다.

지금 퍼스트의 얼굴에는 작은 웃음기도 없었다. 퍼스트는 일할 때는 진지한 사내였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심했다.

"이건 마법이다. 그대는 마나를 불태우니, 갈라하드에게 오히려 방해일세."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구겨졌다.

"그러니 그대는 빠지게나."

퍼스트는 개의치 않고 아드리안나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합당하고 차분한 설명이었다.

문제는-.

"갈라하드에게 필요한 건 나일세."

그를 끝으로 퍼스트가 핏빛 안개로 들어간 것이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작게 흔들렸다.

펌킨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겠습니다. 일단,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를 부탁합니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펌킨은 그녀가 묘하게 분해 보인다고 느꼈다.

펌킨은 퍼스트를 따라서 안개로 들어갔다. 안개는 농도가 짙었다. 숨을 쉴 때마다 끈적임이 붙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이걸 갈라하드가 만들었다고?'

펌킨은 눈을 찡그렸다.

고위 마족이 만들었다는 게 더 신빙성 있었지만, 퍼스트가 한 말이었다. 퍼스트는 갈라하드에 관해서는 전문가였다.

그렇게 조금 걷자 거대한 등이 있었다. 퍼스트였다.

"왜 그러십니까?"

퍼스트는 대답 대신 안쪽을 가리켰다. 붉은 안개가 너무 짙어서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펌킨은 오러를 눈에 집중했다. 시야가 한결 쾌적해졌다.

'고위 마족-.'

저 멀리에 왕관을 쓴 고위 마족이 있었다. 풍기는 존재감이 저릿했기에 보자마자 지배자라는 걸 알아챘다.

지배자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있었고 목은 찢겨 있었다.

분명히 치명적인 상처들인데, 지배자는 형형했다.

"빌어먹을 하찮은 인간 놈이."

지배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펌킨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이 절로 굽혀졌다. 퍼스트가 어깨를 잡았다. 단단한 손에 펌킨의 정신이 돌아왔다.

"오러를 바짝 올려라. 머리로."

"예."

펌킨은 다급하게 오러를 일으켰다. 오러를 머리까지 올리자, 정신이 돌아왔다.

지배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지도 않았다. 그저 영역에 들어왔을 뿐인데, 이런 중압감이라니-.

'······이게 고위 마족?'

펌킨은 거친 숨을 애써 누르며 중얼거렸다.

지배자 앞의 괴물이 거칠게 움직였다. 사람으로 뭉친 끔찍한 괴물이었는데, 작은 비명도 없었다. 살 부딪히는 소리가 전부였다.

괴물이 어딘가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힘에 핏빛 안개가 크게 흔들렸다. 안쪽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곳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곳곳에 흉터가 있었고, 늘 깔끔하던 옷과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세가 곧았다.

'눈을 감고 있어?'

갈라하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괴물의 거대한 주먹이 갈라하드의 붉은 방벽을 내려쳤다.

쿵!! 바닥이 작게 흔들렸다. 주먹이 부숴지며 피와 살점이 가득 뿌려졌다.

핏빛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시야가 가려졌다.

"힘이 더 강해지는군. 뒤로 물러나 있어.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게.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까."

퍼스트가 검을 털며 말했다.

명령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펌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퍼스트는 이미 짙은 핏빛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

'흥미롭군.'

갈라하드는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붉은 안개는 대공과 사냥할 때 사용했던 마법이었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렀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는 마치 자석처럼 붉은 안개를 끌어당겼다. 갈라하드는 그를 따라 붉은 안개를 판단했다. 마나 흐름의 속도와 방향을 가늠하여 지배자의 위치를 계산했다.

이런 무식한 계산이 가능한 건, 공간 마법을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공간 마법을 연구하면서 공간에 관한 이해가 압도적으로 늘었다. 그 덕분에 계산이 빨라졌다.

"얼음송곳."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의 일렁이며 얼음송곳이 사라졌고-.

마족들이 크게 움찔거렸다. 적중했다는 신호였다.

'재밌군.'

붉은 안개의 흐름을 계산하여, 공간 마법을 사용한다-. 계산의 수준을 벗어난 묘기였다.

이론적으로 생각했던 게, 정확히 작동할 때의 그 짜릿함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때, 어깨의 중압감이 더욱 무거워졌다.

'점점 더 강해지는군.'

지배자의 권능이 강해지고 있었다.

'권능을 집중한 건가.'

마법사가 마나를 압축하는 것처럼, 지배자는 권능의 영역을 줄여서 힘을 강화한 듯했다.

고위 마족이라 그런지, 권능을 생각 없이 휘두르던 마족들과 달랐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지배자의 피를 마셔서 나온 마나를 압축해야 했다. 그래야 유효타를 먹일 수 있었다.

문제는-.

'두 모금 남았군.'

지배자의 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인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마족의 피로 만든 붉은 안개는 갈라하드의 영역이었다. 잡은 마족만 벌써 두 자릿수였다. 주변에 쏠린 마족도 전보다 훨씬 적었다.

흐름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놈의 권능은 정신 간섭이 아니다.'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지배자의 권능은 정신 간섭이 아니었다. 육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권능이었다. 인간으로 만든 골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꽤 험한 꼴을 봤는데도, 지배자는 계속해서 소모전을 유도하고 있었다.

'아직 남은 수가 있군.'

지배자가 숨기고 있는 게 있었다.

'시체를 다시 세우나?'

시체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갈라하드가 가장 경계하는 건, 여우 가면의 열었냐는 물음이었다.

그때, 핏빛 안개 사이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퍼스트였다.

'왔군.'

퍼스트는 안개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굳이 계획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끄덕였다.

퍼스트의 기척이 서서히 사라졌다.

'두 모금 정도인가.'

갈라하드는 남은 수통을 흔들었다.

한 모금에 마법 한 번이었으니-.

'충분하군.'

갈라하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제법이구나.'

지배자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놈이 있었다. 놈은 마족의 피로 된 방벽을 두르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마족의 피를 이용하다니-. 박쥐 놈들 같지 않은가. 그에 지배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배신자의 제자라는 건 거짓이었군.'

배신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박쥐였다. 배신자의 제자가 박쥐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놈에게서 왜 배신자의 냄새가 나는 건가.'

박쥐처럼 싸우면서, 배신자의 냄새가 나는 놈이라니-.

"도대체 넌 뭐냐?"

지배자가 눈썹을 구기며 말했다. 진심으로 놈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자 얼음송곳이 지배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배자의 신형이 작게 흔들렸다.

놈은 핏빛 안개로 위치를 확인했다. 놈의 얼음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 인정하겠다."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얼음이 부서져서 흩날렸다.

지배자는 아래를 살폈다. 살점과 뼈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 셀 수도 없었다.

놈이 쓰러뜨린 수가 얼마인가. 실로 대단한 업적이었다.

놈에게는 자신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만, 지배자의 권능은 지배였다.

"허하지 않았도다."

지배자는 가만히 명령했다.

쌓인 시체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각난 뼈와 살점이 뒤엉켰다. 뿌드득뿌드득. 살점과 뼈가 뒤엉키는 경쾌한 소리가 퍼졌다.

심장 주변으로 살점이 뭉쳤다. 살점이 가득 뭉치자, 그를 철보다 단단한 마족의 뼈가 덮었다. 꼭 갑주와 같은 모양새였다.

짙은 색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눈도, 입도 없었다. 숨을 쉴 구멍도 필요 없었다.

그저 왕의 적에게 달려들기 위한 두 발과 목을 틀어 쥘 두 손이 전부였다.

"일어나라. 내 병사들아."

지배자의 병사였다. 순식간에 공간이 가득 찼다. 숨도 쉬지 않는 지배자의 병사가 일제히 놈을 향했다.

전의 수하와 그 기세가 달랐다.

지배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놈을 응시했다.

얼마나 달콤한 절망일까-.

다만, 놈의 반응이 지배자의 예상과 달랐다.

놈은-.

"오, 신기하군. 부숴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건가? 뼈를 갑주처럼 쓰는 건 탁월한 선택이군. 다만, 갑주로 두는 것보다 창 같을 걸 주는 게 더 낫지 않나?"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말 흥미가 가득한 목소리로-.

놈은 절망은커녕 오히려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족이었군."

"미안하지만, 인간일세. 그저 학구열이 뛰어날 뿐이지. 이런 멋진 볼거리를 선사해주다니, 진심으로 고맙네."

감사를 표하는 놈에 지배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머리와 목만 놔두거라."

지배자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배자는 권능을 강화했다. 병사들이 놈을 덮쳤다.

놈은 병사들이 가득 달려드는 순간에도 지배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진득한 시선에 지배자는 눈을 찡그렸다.

놈이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날카로운 바람이 병사를 긁었다. 병사가 전과 달리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그 강도가 달랐다.

"오, 확실히 효과적이군."

놈의 감탄에 지배자는 혀를 찼다.

완벽한 공세였지만, 지배자는 방심하지 않았다.

평범한 놈이 아니었기에-.

그때, 서늘한 느낌이 스쳤다. 지배자는 재빨리 어깨를 뒤틀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지배자의 어깨를 긁었다. 놈의 마법이었다.

그에 지배자는 놈을 확인했다. 놈은 병사들에 가득 둘러싸여 모습도 안 보였다.

저 상황에서도 지배자를 공격하다니-.

'지독한 놈이군.'

지배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만, 전과 달리 공격이 날카롭지 않았다.

'슬슬 힘이 빠지나 보군.'

마경이 아니라도 지배자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대단한 일이었다.

지배자는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황급히 권능을 살폈다.

'이런-.'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밖에 펼쳐둔 권능이 끊겨 있었다. 붉은 안개 때문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단순히 내 위치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어디까지 본 것이지?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런 수싸움을 벌이다니-.

지배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포위됐을 가능성이 컸다.

'혼자 들어온 건, 나를 묶기 위함이었군.'

지배자는 조소를 머금었다. 정말 자신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오만하다.'

지배자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바닥에 자그마한 문이 있었다.

'경계의 구멍을 연다.'

지배자가 괜히 이곳을 택한 게 아니었다. 상황이 뒤틀리면, 경계의 구멍을 열 생각이었다.

여우 가면이 경계했지만, 지배자가 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경계의 구멍이 열리면-.

'마경이 더는 마경이 아닐 것이다.'

지배자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서늘한 바람이 지배자의 허벅지를 긁었다. 놈의 마법이었다.

병사들에 둘러싸였는데도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만들어서 지배자를 공격했다.

'실로 독한 놈이구나.'

하지만 그 위력이 약했다. 흠집조차 안 날 정도였기에, 지배자는 피하지도 않았다.

"헛된 발악이다."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다. 지배자는 몸을 황급히 틀었다. 얼음창이 지배자를 스쳤다. 피하지 않았다면 심장이 뚫렸을 것이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허수를 뿌렸다는 건가?'

병사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수를 계산했다는 건가-?

"대단하군."

지배자는 인정했다.

지배자가 경계하지 않았다면, 당할 정도로 예리한 수였다.

다만-.

"고작 마법으로 날 죽일 수 있겠느냐?"

마나에 민감한 고위 마족인 지배자였다. 놈이 아무리 예리한 공격을 해도, 급소는 피할 수 있었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뚫리는 것만 아니면, 놈은 지배자를 죽일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일세."

거대한 덩치의 기사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래서 공격을 퍼부었구나.'

계속 마법을 퍼부은 이유가 지배자의 신경을 끌기 위함인 듯했다.

저 기사가 공격할 틈을 만들려고 한 듯했다.

'그러면 방금의 공격도-.'

회심의 일격을 피했다고 안심하게 유도했다는 건가.

실로 첨예한 수였다.

'지독한 놈이다.'

지배자는 작게 경악했다.

'위험하다.'

마법은 몰라도 오러는 위험했다.

확실히 까다로운 수였지만-.

'나는 지배자다.'

지배자는 순간적으로 권능을 가득 끌어왔다.

그리고-.

"꿇어라."

기사에게 명령했다.

지배자가 권능을 가득 쏟자, 기사의 검이 순간 느려졌다.

놈은 잊힌 존재의 가호를 받았지만, 기사는 아니었다.

지배자의 권능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아니-.'

다만, 기사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기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검을 밀어 넣었다.

온몸의 근육이 거부해도, 기사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그 지독함에 지배자는 눈을 부릅떴다.

결국, 기사의 검은 지배자에게 닿았다.

지배자의 오른팔이 잘려서 바닥을 뒹굴었다.

허전한 오른팔에 지배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다.'

자신을 이렇게 몰아 세우다니-.

다만, 고작 팔 한쪽이었다.

"지금일세."

기사가 이죽거렸다.

목 바로 옆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지배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기사의 검은 지배자의 움직임을 강제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놈의 세 번째 수였다.

'참으로 지독하다.'

소리 없는 날카로운 바람이 지배자의 목을 갈랐다.

지배자의 머리가 떠올랐다. 지배자의 시선이 빙글- 돌았다.

공중에서-.

'열어라.'

지배자는 낮게 명령했다.

*

"이 정도의 압박감이라니. 이게 고위 마족인가."

퍼스트는 저린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퍼스트는 마족을 높게 칭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마주했던 마족은 전부 쓰레기처럼 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북부의 고위 마족은 그 존재감이 전혀 달랐다.

'무릎을 꿇을 뻔했다.'

퍼스트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이런 걸 혼자 상대했다니-.'

입에 연초를 물고 쩔뚝거리면서 다가오는 갈라하드에 퍼스트는 감탄했다.

차이를 줄였나 했더니, 또 아득히 멀리 가 있었다. 절망적인 차이였지만-.

'더 올라갈 수 있겠군.'

퍼스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갈라하드가 갈 수 있다면, 퍼스트도 갈 수 있었다.

그때, 갈라하드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에 퍼스트가 잡으려고 하자, 갈라하드가 미간을 구겼다.

갈라하드는 손을 내민 게 아니었다.

그가 내민 건-.

"다 흐르지 않나. 빨리 담게."

빈 수통이었다.

****

'······방해다. 방해가 된다.'

아드리안나는 붉은 안개를 보며 텁텁한 혼잣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때, 대장들이 병력을 끌고 차례로 도착했다. 포박된 6대대의 병사들이 상당했다. 제거가 아니라 제압하느라 늦은 듯했다.

이내 핏빛 안개 주변으로 병력이 가득 모였다.

진입하려는 그들을 펌킨이 막아섰다.

"지배자는 자신보다 낮은 이를 지배하는 권능을 지녔습니다. 함부로 진입하면 오히려 지배자를 돕는 겁니다."

펌킨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펌킨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대장들은 그를 가벼이 무시하고 안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나섰다.

"지배자는 위험한 고위 마족이다. 지금 병력을 넣는 건 오히려 불더미에 장작을 넣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 아드리안나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기에.

아드리안나의 명령에도 대장들이 반발했다.

그때, 2대대 대장 리암이 나섰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마경과 흡사한 효과를 보일 수도 있으니 주변을 포위하고 기다리는 게 맞다."

리암에 이어서 5대대 대장과 7대대 대장까지 합세했다. 그에 대장들이 한발 물러섰다. 대장들은 각자 부대를 이끌고 구역을 맡았다.

"고위 마족을 제국 놈에게 맡겨야 한다니-."

"제국 놈이 상대할 수 있는 고위 마족을 우리가 못 상대할 거라고?"

대장 몇몇이 작게 투덜거렸다. 호전적인 북부의 대장으로서 대기하는 게 탐탁치 않은 듯했다.

그때, 안쪽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퍼졌다. 병사들이 절로 무릎을 숙였다. 중대장들도 버티는 게 전부였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대장들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칼자루를 쥔 손이 저렸다.

잠시 뒤에 핏빛 안개가 천천히 옅어졌다.

대장들이 각자 수신호를 보냈다. 부대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대장들이 앞으로 나서며 무기를 뽑았다.

"상대는 고위 마족이다. 다들 긴장하도록."

부대의 움직임은 조용하고 빨랐다.

옅어지는 핏빛 안개-. 무거운 적막함이 자리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감이 올라왔다. 병사들 몇은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바람이 불면서 핏빛 안개가 밀려났다.

"저런-."

그 안의 모습은 상당히 끔찍했다. 살점과 뼈가 가득 쌓였고, 병사 형태의 괴물이 멈춰 있었다.

전선을 넘나든 대장들도 질릴 정도로 끔찍한 풍경이었다.

그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했다.

문제는-.

"제대로 잡게! 고위 마족의 피일세! 얼마나 귀한 건 줄 아나?"

갈라하드가 지배자의 피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잔뜩 신난 얼굴로, 잔소리까지 하면서-.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상황에-.

대장들의 얼굴이 묘해졌다.

"자네 말대로 잡았지 않나!"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잡으라고."

아드리안나는 도끼눈이 됐다.

102화 미안

북부에서 고위 마족은 흔치 않았다. 등급이 높은 마족은 마경을 나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족이 마경에서 강하다는 건, 다시 말해 마경 밖에서는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등급이 높은 마족은 마경 밖인 북부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 고위 마족이 나타나면 필연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이번에는 고위 마족이 아래에 도시까지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공이 괜히 전 대장을 소집한 게 아니었다.

'불쾌하군.'

붉은 안개에 5대대 대장 마크는 찡그리며 창을 잡았다.

다른 대장들도 무기를 쥐고 붉은 안개를 빙 둘러서 있었다.

선두에는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고위 마족은······.'

마크는 텁텁한 중얼거림을 삼켰다.

갈라하드의 유능함이야 마크도 잘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고위 마족이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고위 마족은 무리였다.

다만-.

'갈라하드인데···.'

마크의 미간이 좁혀졌다. 고위 마족은 대장 급은 되어야 잡을 수 있었다.

마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대장이 전부 모였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도 상당했다.

이런 대병력과 모든 대장들 앞에서 고위 마족을 잡는다면-.

'판도가 또 바뀌겠군.'

갈라하드는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건 명예였다.

고위 마족을 잡는 건 실력의 증명이었다.

대공의 인정을 받은 갈라하드가 무력까지 증명해버린다면-.

'아래로 들어갈 걸 그랬나.'

마크는 괜히 농담을 중얼거렸다.

붉은 안개가 전부 사라졌다. 드러난 모습은 상당히 끔찍했다.

곳곳에 쌓인 시체들과 시체들로 만들어진 듯한 괴물들까지-. 험한 꼴을 많이 본 북부의 병사들이 토악질할 정도로 끔찍했다.

참상의 중심에 갈라하드가 있었다. 갈라하드의 손에 들린 건 분명 고위 마족이었다.

'정말 고위 마족을 잡았다고-.'

마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라운 업적이었다. 문제는-.

"좀 더 잘 눌러보게."

그 고위 마족의 피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공의 전설이 떠올랐다. 전선의 대공은 마물의 살점으로 배를 채우고, 피로 목을 축였다는 이야기-.

그건 마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는-.

'······웃고 있어?'

지금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드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수통에 피를 담고 있었다.

그 표정에 분노는 없었다.

저렇게 웃으며 피를 담는 게, 마족의 살을 뜯는 대공보다 오히려 더-.

'음...'

대장들의 표정이 오묘했다.

'증명······한 건가?'

고위 마족을 잡은 건 확실했다.

확실한 증명이었다.

다만-.

"이미 두 통이나 채우지 않았나. 이제 더 나오지도 않아!"

"마른 육포도 짜면 물이 나오네."

'이건 너무 증명했는데...'

그때, 아드리안나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

"이건 계획과 다르지 않습니까."

'화났군.'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에 갈라하드는 혀를 찼다.

"지배자를 잡지 않았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계획과 달리 혼자 상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원래 계획은 저희가 합류할 때까지 지배자를 붙잡아두시는 거였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성큼 다가오며 질책했다.

"계획은 늘 바뀌기 마련일세. 중요한 건 결과지."

"과정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과정이 쌓여 만들어지는 겁니다. 갈라하드 대장이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내리자 넝마가 된 코트가 보였다. 그 사이로 피가 굳어 있었다.

'상태가 엉망이군.'

곳곳이 찢어지고 뚫린 곳도 있었다. 중상이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위 마족의 피를 마신 뒤부터 안쪽이 계속 타는 것처럼 뜨거웠기에, 고통을 느낄 틈이 없었다.

다만-.

"그래도 안 죽었네만."

갈라하드는 두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이 더욱 강렬해졌다. 오답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마경이 아니라고 한들, 고위 마족은 고위 마족입니다. 그걸 혼자 상대하겠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갈라하드가 지배자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갈라하드가 크게 다쳤지만, 그건 갈라하드의 몫이었다.

결론이 좋았으니, 보통은 대충 넘어갔을 것이다. 자신이 다친 게 아니었으니까.

이제껏 갈라하드가 경험했던 이들 대부분 그랬다.

다만,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더 분노했다.

"믿어 달라고 하셨습니까? 믿음은 서로의 행동이 쌓인 결실입니다. 제가 어찌 믿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드리안나의 말은 정론이었다.

상황이야 어찌 됐건 갈라하드가 계획과 다르게 행동한 건 사실이었다.

"미안하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셔도······ 예?"

"미안하다고 했네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순간 풀렸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미안하다는 이야기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오, 그런가. 사실 거짓일세. 안 미안하네."

다시 도끼눈이 됐다.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원래 묶어둘 생각이었는데, 지배자란 놈이 생각보다 약해 보이더군. 더불어 다른 꿍꿍이도 있는 것 같고.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예, 알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아드리안나의 얼굴은 진지했다.

"갈라하드 대장은 현명하기에 그 판단이 대부분 옳겠지만, 갈라하드 대장도 사람입니다.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치명적으로 작용할 겁니다."

아드리안나의 진지한 충고에 갈라하드는 끄덕였다.

"명심하겠네."

"예, 나머지 처리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물러섰다.

'이게 끝인가.'

보통 뒷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아드리안나는 바로 물러섰다. 확실히 호방했다. 대공의 피가 조금 들어가긴 한 듯했다.

'···연다고 했던 건?'

여우 가면이 경계하던 게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지배자를 한 번에 처리한 것도 그 이유였다. 놈이 개수작 부릴 수 없도록 설계했다.

확실히 지배자는 까다로운 놈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방심을 놓지 않았다.

다만, 끈기는 갈라하드의 장기였다.

어느새 옆에 여우 가면이 있었다. 가면을 벗은 여우 가면은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그쪽 뭐예요? 허무의 마법을 그렇게 쓰는 건 들은 적 없는데요. 정말 내 권능을 보고 베꼈다고? 인간에 맞춰서 개정까지 하고? 그 짧은 시간에?"

쏘아붙이는 여우의 목소리에 경악이 가득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여우 가면은 갈라하드가 네발 마족 안에서 구른 시간을 모르니, 세기의 천재로 보일 것이다.

"허무의 위력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까. 이중 마법으로 쓰다니-. 허무 마법이랑 다른 마법을 동시에 쓴다고? 머리에 뭐가 든 거죠? 열어봐도 돼요? 잠깐만 열어볼게요."

"잠깐. 자네, 왜 여기 있지?"

"제가 있고 싶으니까요."

여우 가면의 대답은 당당했다.

"지배자가 연다고 했던 건? 막았나?"

"아하, 그거요? 열렸죠,"

담담한 대답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아까 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여우 가면의 손가락이 갈라하드를 가리켰다. 그에 갈라하드의 눈이 구겨졌다.

"뭐가 열렸다는 거지?"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래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마법사잖아요?"

"마음에 든다?"

갈라하드의 물음에 여우 가면이 코를 찡그렸다.

"해가 뜨고 지는 건 막을 수 없답니다. 눈이 녹는 것도. 어머, 너무 많이 말했네? 그쪽이 사랑스러워서."

여우 가면의 화려한 눈이 호선을 그렸다.

황급히 손가락을 튕겼지만, 여우 가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해가 뜨고 지는 건 막을 수 없다-.'

해와 관련된 것 중에 가장 유력한 건 '여명'이었다.

그 뒤에 붙은 말이 미묘했다.

'눈이 녹는다?'

묘한 단어였다. 단순한 의미가 아닐 것이다.

찝찝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가 열렸다는 거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 농도가 짙어진다.'

이내 마나 농도가 짙어지는 곳을 찾아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거세게 뛰었다. 그 뜀박질 소리가 전보다 컸다. 고위 마족의 피를 마신 까닭이었다.

거기는 다른 곳과 달리 시체가 괴상할 정도로 많이 겹친 곳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휴, 여기저기 너무 긁힌 거 아닙니까?"

길버튼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 뒤로 특무대가 있었는데, 다들 몰골이 엉망이었다.

다만, 묘하게 안심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뒤의 다른 병사들과 대장들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전투가 끝난 뒤에 승리를 만끽하는 느낌이었다.

"길버튼 경, 마침 잘됐네. 여기 좀 치워보게."

"예? 예."

길버튼이 군말 없이 시체들을 밀었다. 손에 피와 살점이 묻어도 길버튼은 투덜거리지 않았다.

"이거! 해드려요?"

"그래. 그웬, 고맙네."

그웬이 다급하게 붙어서 마나를 건네줬다.

갈라하드의 신경은 길버튼이 치우는 곳에 가득 쏠려 있었다.

'마나 농도가 짙다-.'

시체를 치우자, 허름한 나무 문이 보였다. 평범한 지하실 문이었다.

"이거 그냥 지하실 문 아닙니까?"

"본래 보물은 평범한 곳에 숨기는 법이지. 아, 그웬. 이제 됐네."

"아직 덜 했는데-."

그웬의 손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섰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지하실 문이었다. 그 손잡이도 낡아서 건드리기 꺼림직한 그런 형태였다.

다만-.

'여기서 마나가 계속 뿌려지는군.'

농도가 짙어진다. 구멍, 열었다. 갈라하드는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했다.

가장 큰 가능성은-.

'마족의 영역과 이은 건가.'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갈라하드는 주머니의 가죽 수첩을 꺼내서 살폈다.

[북부의 벽은 무너진다.]

갈라하드가 봤던 북부의 벽은 견고하고 단단했다. 그 경계 또한 엄격했다. 그런 두꺼운 벽은 밖에서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 파야지,'

그래서 마족의 도시가 필요했나?

"무슨 일이지?"

퍼스트가 다가왔다. 지배자의 권능을 억지로 떨쳐내고 검을 쓴 터라, 그 상태가 상당히 엉망이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문을 가리켰다.

"뭔가 있다."

"······뭐가 있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가 검을 털며 물었다. 검에서 먼지가 가득 일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전과 달리 시선이 불순하지 않았다. 몇몇은 시선을 피하는 듯했지만-.

"일단 확인부터 해야겠네."

갈라하드가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자, 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아래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존재했다.

그 공간의 너비가 좁았다. 잘해봐야 사람 둘 정도 지나다닐 정도였다.

"가지."

퍼스트가 검을 빙글 돌리며 다가왔다. 그 얼굴이 여전히 진지했다.

"몸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이번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 눈이 단호했다. 그러자 퍼스트가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갈라하드와 합이 맞는 건 나다. 고위 마족을 처리한 것 못 봤나? 그대는 오히려 방해일세."

퍼스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내려갔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물러섰다.

요원 출신인 퍼스트는 손발이 잘 맞았다. 굳이 말이 필요 없었기에, 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필요한 건 잘 맞는 손발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 가지."

"예? 예."

갈라하드는 피던 연초를 안쪽에 던졌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둘이 갈 걸세."

그를 끝으로 갈라하드는 안으로 뛰었다.

"위험합니다!"

화들짝 놀란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따라 뛰었다.

둘이 바로 사라지자,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펌킨은 괜히 그 구멍을 내려봤다.

"펌킨."

"······왜 또 그러십니까."

퍼스트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또 뭔가 지랄할 것 같은 분위기에 펌킨은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방금 아드리안나가 입꼬리 올린 거 봤나?"

"······아드리안나가 왜 입꼬리를 올립니까. 무표정이던데."

"아니, 분명히 방금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조롱이었다. 분명히-."

"착각입니다. 착각."

펌킨은 구시렁거리는 퍼스트를 단호하게 일축했다.

"분명히 봤는데-."

*

'꽤 깊군.'

갈라하드는 옷깃을 고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쿵.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이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건 위험합니다."

"나는 마법사라서 괜찮네."

"다음부터는 제가 먼저 뛰겠습니다."

"밑에서 받아주기라도 할 건가?"

"예."

"자네, 상당히 응큼하군."

"······예?"

갈라하드는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그마한 불이 주변을 밝혔다. 인위적인 동굴이었다. 특이한 점은 벽이 붉었다.

동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마족의 피군."

그를 맛본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왜 벽에 마족의 피를 칠했지?"

"······예전에 2대대가 맡았던 성문이 습격당한 적 있었습니다."

눈썹이 가득 내려간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습격은 밖이 아닌 안쪽에서 일어났습니다. 확인해보니 성벽의 한쪽이 작게 뚫려 있었더군요."

"거기에 마족의 피가 듬뿍 묻어 있었나?"

"······예? 예."

아드리안나가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면서 정면을 살폈다.

마족의 피로 덧씌워진 끝없이 이어진 굴-.

대충 윤곽이 잡혔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네."

"예, 알고 있습니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드리안나를 쳐다봤다.

"······몇 번 듣지 않았습니까. 저 길버튼 아닙니다."

"그렇군. 다만, 역치가 있기에 농도가 높은 곳은 계속 높고, 낮은 곳은 계속 낮지. 가령 마족의 영역을 봐도 알 수 있네. 성벽 하나를 두고 그 농도가 완전히 다르지 않나?"

"······음."

잠시 뒤에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그래, 마족은 마나 농도가 짙은 곳에서 강해지고, 옅은 곳에서는 약해지네."

"예, 이해했습니다."

끄덕이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털었다.

"자, 그러면 마족이 북부를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농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대기 중 마나의 흐름을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마탑주 정도 되어야 시도해볼 수 있으니, 마족이 행할 일은 아니지."

아드리안나가 둥근 눈으로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대신 놈들에게는 농도 짙은 피가 있지."

갈라하드는 연초로 벽을 가리켰다.

붉은색 일변도의 동굴은 통로였다. 마족의 피로 마나의 흐름을 유도한 통로.

"무식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방법이지."

마족의 피를 칠해서 마나 통로를 만들었을 줄이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흥미롭군."

갈라하드는 벽을 손으로 쓸었다. 마족의 피가 끈적였다.

마족의 피가 인간의 피에 비해 굳는 속도가 느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처리를 한 듯했다.

"······북부가 마족의 영역이 된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구겨졌다. 무표정이 깨지고 심란함이 올라왔다.

"정답일세."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기며 시원하게 웃었다.

"흥미롭지 않나? 피로써 마나 통로를 만들 다니. 마법사는 절대 할 수 없는 생각이지. 확실히 합리적이야."

들뜬 목소리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굳었다.

갈라하드가 마법에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북부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흥미를 느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북부인이 아니라서?'

아드리안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북부의 문제를 가장 앞장서서 해결한 갈라하드였다.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렇게 들뜬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족의 영역이 늘어난다는 건 큰일입니다."

"맞네, 아주 큰일이지. 마족이 더 강대해지고, 출몰이 더 잦아질 걸세. 북부는 마족의 마당이 되겠지. 이런 대공한테 했던 농담이 이렇게 돌아오는군."

끌끌 웃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런데 어찌 웃으십니까? 북부가 무너질 상황인데-."

"북부가 왜 무너지나?"

"······예?"

갈라하드의 반문에 아드리안나의 말문이 막혔다.

방금까지 하던 이야기가 그거 아닌가?

"통로는 우리가 막을 걸세."

갈라하드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자신감이 가득했다.

'······우리?'

아드리안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정 방법이 없으면 자네를 세워두면 되니 걱정하지 말게. 그러면 마나가 흐르지 못하니까. 음, 자네 손 좀 뻗어보겠나?"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기침했다.

무슨 저런 괴상한 농담을-.

"빨리 안 뻗고 뭐 하나? 양쪽으로 쭉 뻗어보게. 닿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뻗게."

아드리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쭉 뻗었다.

갈라하드가 거칠게 기침하며 웃었다. 그에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손을 내렸다.

"자네가 너무 굳은 것 같아서 말일세."

짓궂은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꾹- 씹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드리안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든든하군."

상쾌한 레몬 향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밀어냈다.

103화 만져줘

동굴은 더러운 습기가 가득했다. 마족 특유의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가득 간질였다.

지옥으로 향하는 동굴 같은 모습이었다.

'최하급 마족이군.'

마족의 피를 제법 마셔본 갈라하드였다. 맛만 봐도 급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여기에 뿌려진 피는 분명 최하급 마족의 피였다.

"옵니다."

아드리안나의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순백의 오러가 격하게 일어났다. 주변 마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나 지우개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올라왔다. 마법사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닿는 순간 끝이었으니까-.

'더 강해졌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리며 오히려 한 발 내디뎠다. 거부감이 격하게 올라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전보다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새 적응한 건가.'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상대의 힘에 영향을 받았다.

마경의 지배자를 마주하고 힘이 폭주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 저리 자유롭게 다루다니-.

'역시 천재군.'

두근! 두근! 두근! 아드리안나의 뒤통수에 고통의 알이 격렬하게 뛰었다.

고위 마족의 피를 먹은 탓인지, 고통의 알이 기세등등했다. 방심하는 아드리안나의 뒤통수에 일격을 꽂자고 종용했다. 갈라하드는 가볍게 무시했다.

정면의 굉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족과 마물이 서로 짓이기며 미친 듯이 뛰어왔다.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아드리안나의 검에 순백의 오러가 가득 일어났다.

오러는 신념이었다. 그렇기에 오러는 속이거나 꾸밀 수 없었다.

그런데 오러가 저런 순백이라니-.

'고귀하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휘둘렀다. 순백의 오러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깔끔한 흰 선이었다.

오싹-. 갈라하드의 본능이 비명을 질렀다. 닿는 순간 끝이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달려오던 마족과 마물들이 닿는 순간 놈들의 먼지로 변했다. 비명도 없었다. 그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순백의 오러가 사라지자, 보이는 건 가득 쌓인 먼지가 전부였다.

아무리 하급 마족이라도, 칼질 한 번에 먼지로 만들어 버리다니-.

'음.'

갈라하드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두근······. 고통의 알이 조용해졌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뒤를 보며 물었다. 그 얼굴에 옅은 피로도 없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자네, 누구보다 아름답다고 내가 말했었나?"

"예, 하셨습니다."

가벼이 끄덕인 아드리안나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움직이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뒷모습이 참으로 든든했다.

조금 더 걸었다. 마족들이 뜸해지자,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에 일하던 곳은 어땠습니까. 아, 대답하기 어려우신 질문이면 괜찮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조심성 가득한 모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악덕 기업이었네. 쉬는 날도 적고, 명예가 없으니 보람도 없었지. 연봉은 제법 많았지만."

"나쁜 곳이었군요."

"맞네, 아주 못된 곳이었지."

갈라하드는 가만히 끄덕였다. 확실히 정보국은 그리 좋은 직장이 아니었다.

제국과 결혼하겠다는 미친놈 정도 되어야 그럭저럭 버틸 만한 곳이었다.

"왜 그런 곳에서 일하셨습니까?"

"그게 최선이었네."

텁텁한 목소리에 아드리안나는 뒤를 돌아봤다. 갈라하드가 늘 그렇듯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었다.

"최선이라면-."

"아카데미를 졸업한 마법사의 장래는 찬란할 정도로 유망하지만, 동시에 처참하다네. 대부분 마탑에 들어가서 마도구나 만지작거리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었다.

마탑에 들어가는 선택지도 있었다. 다만, 지금의 마탑은 공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주력은 마도구였다.

"음침한 방에 앉아서 기다란 봉이나 만지작거리는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네. 더불어 내게 마탑은 부족했지."

"부족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마족의 왕을 막아야 하니까."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그 푸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아, 그에 관해 조사를 좀 했습니다. 제 이야기라면 뭐든 끄덕이는 부대원들이 정색하고 고개를 젓더군요. 개념에 관여하는 존재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마족의 왕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니-. 갈라하드는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 격한 거부가 반증일세. 누군가 개념을 억제한 게 아니라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흠칫 놀랐다.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권능이라니-. 그렇다면 저쪽 남부의 끝에 있는 섬의 주민들은? 이건 상당히 궁금하군."

갈라하드의 말이 빠르게 쏟아졌다. 이제까지 품었던 의문들이 터졌다. 아드리안나는 흥분한 갈라하드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아무래도 신혼여행은 남부로 가야겠네."

아드리안나는 검을 털었다.

"개념을 지운 게 마족의 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누군가 마족의 왕이라는 개념을 봉인하고 있다는 건가?"

"예. 오러는 신념의 힘입니다. 오러와 비슷한 형태로 마족의 왕이 개념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마족의 왕이 개념에서 힘을 얻기에, 그에 관한 개념 자체를 봉인했다-.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고려해볼 만한 의견이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마족의 왕은 언젠가 나타날 것이고, 끔찍한 최후를 가져올 테니까.

"아무튼, 우리는 마족의 왕을 대비해야 하네."

"예, 어떻게 말입니까?"

"북부를 강하게 만들어야지. 벽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고, 마족을 몰아내는 걸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다른 건 다 부차적인 이야기였다.

마족의 왕을 상대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건-.

"자네일세."

갈라하드는 가만히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굳었다.

"자네는 상대가 강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지. 설령 그 상대가 마족의 왕일지라도-."

아드리안나는 자신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응시했다. 길쭉한 손가락에 굳은살이 가득했다.

"자네는 타오를 걸세. 활활."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에 갈라하드는 단어 선택이 좋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비유일세. 아무튼, 마족의 왕을 잡기 위한 곳으로 마탑은 별로였네. 그래서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연락이 오더군."

아드리안나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송곳니가 긴 뱀 형태의 마물이 먼지로 흩어졌다.

[아직 모르나 보군?]

퍼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나를 주변으로 뿌렸다.

여기까지 감찰실이 닿을 리는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확실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정보국의 요원일세."

아드리안나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먼지가 크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떠오른 건-.

"······정보국이 뭡니까?"

조금의 민망함이었다.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정보국이 비밀의 조직이지만, 그 존재는 암암리에 유명했다.

'하긴 여기는 북부니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국은 황실 직속 비밀 기관일세. 주된 목적은 정보의 수집이지만, 제국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지."

"······아하."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 관한 북부의 반감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작은 반감이라도 내비칠 것이라 예상했는데, 아드리안나는 순순히 끄덕였다.

"도둑이 아니셨군요. 다행입니다."

아드리안나는 오히려 작게 안도까지 했다.

"도둑? 도둑이 왜 나오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드리안나가 정색하며 정면을 쳐다봤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가 말한 가능성을 고민했다. 마족의 왕에 대한 개념을 다른 누군가가 봉인했다-.

"혹시, 이번 혼인도 임무입니까?"

아드리안나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뜬금없는 물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임무서는 없었다. 그저 북부 대공의 딸과 혼인하라는 부국장의 구두 명령이 전부였다.

갈라하드는 부국장의 가장 쓸만한 패였다. 그런 부국장이 명령을 내렸다는 건, 이미 모든 수를 써봤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명령은 맞았다.

다만, 구두 명령으로 내려진 임무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러니 부정해도 상관없겠지만-.

"맞네."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언젠가 그 값을 치르는 걸 알기에.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거칠게 일어났다. 동굴이 흰색으로 보였다.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북부에서 죽는 역할이었네. 제국이 북부로 진출할 구실로서. 북부가 가장 싫어하는 조합 아닌가. 제국의 귀족인데다 마법사였으니까."

아드리안나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도끼눈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구실로 이용한다니 옳지 않습니다."

지극한 정론이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나는 본래 임무를 즐기지 않네. 즐기는 자는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감정을 배제하는 게 내 원칙일세."

한바탕 잡은 뒤라 마족이 없었지만, 아드리안나는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만약 제가 혼인 안 하면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혼인에 실패한다-. 북부에서도 쫓겨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정보국에서 뒤처리를 보낼 것이다. 갈라하드가 죽어야 쓸모가 있으니까.

갈라하드가 뛰어나도, 정보국 전체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높은 확률로 죽겠지. 설령 살아남아도 마족의 왕을 막지 못할 것이다.

파혼은 죽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드리안나와의 결혼이 쉬워질 것이다.

그녀의 성품은 올곧았으니까.

다만, 그런 구질구질함은 갈라하드의 취향이 아니었다.

"요원으로 돌아가겠지."

거짓은 아니었다. 은퇴할 때까지는 요원이었으니까.

"아, 다행이군요."

아드리안나가 깊게 안도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다만,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내 임무 성공률은 백에 수렴하니까. 자네는 나와 결혼할 걸세."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때, 정면에서 마물이 쏟아졌다. 찰박찰박- 꺼림칙한 발소리가 가득 퍼졌다. 자그마한 동굴로 끔찍한 괴물들이 쏟아졌다.

"뒤쪽으로-."

아드리안나가 짧게 말하며 정면으로 나섰다.

"알았네."

거부하지 않고 바로 뒤에 숨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리 당당하게 숨다니-.

"자네는 뒷모습도 아름답군."

뻔뻔하게 속삭이는 갈라하드에 아드리안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

'지우개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법 마족을 많이 잡았는데도, 순백의 오러는 옅어지기는커녕 더 찬란하게 타올랐다. 그녀에게 마족은 연료였으니까.

마족이 쌓일수록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마족이 끊임없이 쏟아지는데도, 그녀의 걸음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도 결국 인간이었다.

사방이 피로 뒤덮인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괴물들과 싸우는 건 정신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드리안나는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전진했다.

'용사군.'

전설에나 나올법한 용사의 자태였다. 과연 마족의 왕을 찌를 검이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건-."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가득 내려갔다.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가 가득 떨렸다.

갈라하드는 몇 가지 의문이 있었다.

마족의 피로 통로를 만들어도, 북부 전체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더불어 아드리안나로 통로의 피를 지우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고작 이 정도에 지배자를 썼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여명이 어떤 단체인지 알 수 없지만, 고위 마족인 지배자가 흔한 카드는 아닐 것이다. 교환비가 맞지 않았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통로의 끝에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군.'

끝에서 그들이 마주한 건, 수많은 갈림길이었다.

'굴이 하나가 아니었군.'

갈라하드는 가까운 굴을 살폈다. 겨우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굴이었다. 거기에도 피가 가득했다.

'마물이겠군. 덩치가 작은 마물을 쓴 건가?'

교환비가 이상하더니만, 이런 술수를 부렸을 줄이야.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하루 이틀로 가능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아드리안나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심한 얼굴이 조금 깨져 있었다.

"침착하게. 흥분은 머리를 느리게 하는 독일세."

"······예."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주변을 살폈다.

"개미굴이라니. 정말 정성이군."

마족의 피를 칠해 둔 통로를 없애려면 아드리안나가 손수 지워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그때, 아드리안나가 검을 굳게 잡았다.

"굴을 물리적으로 무너뜨려도 마족의 피는 남으니, 마나 길은 이어질 걸세. 북부의 농도는 필연적으로 높아지겠지. 이래서 막을 수 없다고 한 거군."

갈라하드의 차분한 설명에 아드리안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북부의 농도가 높아지면, 마족이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북부는 지금도 간신히 전선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마족이 더 강해지면 균형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아드리안나는 절로 조급해졌다.

"맞네, 이 정도면 마족의 영역 정도겠군."

아드리안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북부 전체가 마족의 영역이 된다니-.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왜 저리 여유롭게 하는지 의문이었다.

"북부가 마족의 영역이 되면, 버틸 수 없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북부는 그대로 마족의 영역이 되겠지. 아마 제국을 향해 세워둔 성벽까지 물러서겠고-. 성 두 개 정도는 남겠군."

갈라하드의 말에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가득 씹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일단-."

"이건 자네가 해결할 영역이 아닐세."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늘 답을 내놓았던 갈라하드였다. 무슨 수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자,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네는 이해하지 못했네. 해답을 바로 못 떠올리지 않나."

갈라하드의 지적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구겨졌다.

지금 마나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는 게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

"이런 자네, 길버튼이었군."

"어찌 그렇게 심한 말을-."

"자, 다시 설명하겠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네. 그러면 마나가 흐르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갈라하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정말 흥미로운 문제를 냈다는 것처럼-.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답은 간단하네. 더 짙은 농도의 영역을 만들면 되는 것이지."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가벼운 대답을 잠시 되새겼다.

'맞다. 마나는 농도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니까. 그걸 막으려면 마나 농도가 더 높은 곳을 만들면 된다-.'

작게 감탄하던 아드리안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곳이 마족의 영역만큼 진하다고 하지 않았나? 마족의 영역보다 높으려면······.'

"······마경을 만드신다는 겁니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에 갈라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마족의 영역을 피하려고 마경을 만들 리 없지 않은가.

"누구 좋으라고 마경을 만들겠나."

갈라하드는 수통을 흔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문제는 마족의 피로 이루어진 통로였다.

마족의 피가 마나를 흐르게 하고, 북부의 마나 농도를 높일 것이다.

다만, 마족의 피는 갈라하드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이 되는 도구였다.

'이거 대공이랑 사냥 안 갔으면 큰일 날 뻔했군.'

갈라하드는 농담을 중얼거리며 수통을 살폈다.

고위 마족의 피가 세 통이나 있었다. 양은 충분했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몇 개 있었다.

첫 번째는 갈라하드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고위 마족의 피는 아주 지독하다는 것이었고. 둘이 섞이면 제법 큰 문제가 됐다.

'여섯 모금 마신 것으로도 이렇게 됐으니.'

고통의 알이 연신 거칠게 뛰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에 울렸다.

여기서 고위 마족의 피를 두 병 더 마셨다가는 고통의 알이 날뛸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해법이 필요했다.

다행히 해법은 바로 앞에 있었다.

"아드리안나."

갈라하드의 목소리에 평소와 달리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드리안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당장 북부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갈라하드라도 이 상황을 가볍게 해결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부탁 하나 하겠네."

"예, 뭐든."

진지한 갈라하드의 얼굴에 아드리안나는 굳게 끄덕였다.

그에 갈라하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혹시 내가 이상 행동을 하거든."

이상 행동이라니. 갈라하드가 뭔가 하려는 게 분명했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으며 갈라하드의 말을 기다렸다.

"이곳 좀 만져주게."

갈라하드가 가리킨 곳은 왼쪽 가슴이었다.

"맨손으로."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104화 만져

아드리안나는 대개 무표정이었다. 그냥 무표정이 아니라,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썰미가 뛰어난 갈라하드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드리안나는 감정을 눈썹으로 표현했다. 기분이 나쁠 때는 눈썹이 내려가고 좋을 때는 올라갔다.

그건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는 도끼눈이 됐다. 도끼눈이라도 눈 안쪽에 힘을 주는 게 끝이었지만, 꽤 놀라운 변화였다.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의 표현이 그게 전부라 생각했다.

그런데-.

"······네에?!"

'정말 놀랐을 때는 토끼 눈이 되는군.'

아드리안나의 앞머리가 올라가며 안 그래도 컸던 눈이 더 커졌다. 사람 눈이 저렇게 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디를 만져달라는 겁니까!"

"왼쪽 가슴일세."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만-."

"그저 맨손으로 왼쪽 가슴을 만져달라는 걸세. 자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건가.""······!"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붉어진 얼굴에 토끼 눈까지-.

'이거 어려울 수도 있겠군.'

아드리안나가 접촉에 어색해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손만 잡아도 그대로 굳어버리는 아드리안나였으니까.

다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고위 마족의 알이 가슴에 있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진지한 얼굴로-.

"안 만지면 내가 죽네."

단호하게 말했다.

"······가슴을 안 만지면 죽는다는 겁니까? 아니, 그게 무슨-."

"진심일세."

다시금 단호하게 말하자,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지만, 갈라하드는 그를 지나쳤다.

지금도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이를 막아야 했다.

'슬슬 다시 나오는군.'

저 멀리에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전에 나오던 놈들보다 그 소리가 컸다.

성벽 근처에 있던 최하급 마족이 먼저 나왔고, 등급이 높은 놈들이 차례로 이어서 오는 듯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마족의 피로 이루어진 동굴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물리적으로 무너뜨려도, 마족의 피는 남았기에 마나는 흐를 것이다.

이건 마법에 관해 쥐뿔도 모르는 북부 놈들이 막을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갈라하드가 있었다.

'이렇게 많은 피라니-. 내 생일인가?'

동굴의 끝, 무수한 갈림길이 나뉘는 그곳에 거대한 피 웅덩이가 있었다. 웅덩이라 부르기에 상당히 큰 규모였다.

마족 피 특유의 썩은 내가 가득 올라왔지만, 갈라하드는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찰박! 피가 가득 튀었다. 서늘함이 허리까지 적셨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냄새가 얼마나 독한지 상쾌한 레몬 향도 밀어내지 못했다. 혀를 차며 금색 봉을 빙글- 돌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통의 알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쿵. 옆에 아드리안나가 착지했다. 피 웅덩이가 반사되어 그런지 얼굴이 가득 붉었다.

잠시 머뭇거린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보며 끄덕였다.

"만지겠습니다."

그 얼굴에 결연한 빛이 가득했다. 아드리안나가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이 가득 떨렸다. 꼭 폭탄 제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만지라는 게 아니라, 내가 이상 행동을 하면 만지라는 걸세."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손을 뒤로 숨겼다.

"아,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이게 그 정도의 일인가?'

"그래, 부탁하겠네."

"예, 꼭 해내겠습니다."

결연하게 끄덕인 아드리안나가 뒤쪽으로 향했다. 마물과 마족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갈라하드는 다시 상황에 집중했다.

피 웅덩이를 이용하여 붉은 안개를 만들 생각이었다. 이어진 마족의 피가 자연적으로 흡수될 수 있도록-.

다만, 단순히 농도 짙은 붉은 안개로는 부족했다.

붉은 안개를 펼치면 마나가 북부 전체로 퍼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대신 이곳에 농도 짙은 마족의 영역이 생기겠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농도가 짙지만, 마족에게는 좋지 않아야 했다. 다소 역설적인 이야기였다. 농도가 짙으면 마족에게도 좋은 건 당연했으니까.

농도가 짙지만, 동시에 마족에게 좋지 않을 방법이라-.

음.

갈라하드의 고민은 짧았다.

'이곳을 불바다로 만들면 되겠군.'

마족조차 못 버틸 정도로 아주 뜨거운 불바다로.

'보일러처럼.'

북부가 너무 춥긴 했다.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끝이 뾰족한 금색 봉은 마법진을 그리기에 상당히 좋았다.

'끝내주는 아랫목이겠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

'완벽하군.'

마법진을 끝낸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붉은 안개를 시전할 계획이었다.

붉은 안개를 시전하면, 마족의 피가 자연스럽게 따라서 모일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족도 태울 불이 필요했다. 다만, 한 번 반짝 타오르는 불로는 부족했다.

그것에 관한 답도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마족의 피를 연료처럼 사용했다. 마족의 피를 먹고 크기를 더욱 키웠다.

아드리안나를 연구했던 갈라하드는 방법을 떠올렸다.

고농도의 마법을 일으켜서 들어오는 마나를 연소시킨다-.

'지옥불을 변형한다.'

거기에 필요한 건 압도적인 격차를 낼 수 있는 짙은 마나였다.

'마침 있군.'

갈라하드는 지배자의 피가 담긴 수통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맑은소리가 들렸다.

마족의 피는 그 등급이 올라갈수록 맛이 끔찍해졌다.

그런 탓에 고위 마족인 지배자의 피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역겨웠다. 역겨움의 진액이었다.

다만, 끔찍한 맛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피에 담긴 파괴력이었다.

여섯 모금 마셨을 때도 몸이 넝마가 됐다. 계획을 행하려면 최소 두 통은 마셔야 했다.

후유증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할 게 분명했다.

그건 존재를 흔드는 종류였다. 갈라하드의 정신력이 뛰어나도 버티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아니, 버틸 필요가 없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아래를 내려봤다.

두근! 박동이 커졌다. 그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시끄럽네.'

두근! 고통의 알이 짙게 웃었다. 놈의 음험한 웃음이 갈라하드의 정신을 흔들었다.

고위 마족의 피를 마신 고통의 알이 잔뜩 까불었다. 역시 단순한 놈이었다.

그렇기에 예상하기 쉬웠다.

'절대 건방지게 올라오지 말게.'

두근! 고통의 알이 비웃듯 더욱 크게 뛰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내렸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대책도 마련했다.

'아드리안나-.'

계산을 끝낸 갈라하드는 수통의 뚜껑을 따고 입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을 타고 흘렀다. 정신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놓게.'

고통의 알이 격하게 마나를 뿌렸다. 전과 달리 버리는 느낌이 강했다. 이건 너 가지라고-.

갈라하드는 금색 봉을 고쳐 잡았다.

마법진은 완성했다. 필요한 건 시동을 걸 농도 짙은 마나였다.

'난리를 치는군.'

강렬한 충동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 근본은 지옥불이었다. 지옥불을 용도에 맞춰 개선했다.

애초에 지옥불은 갈라하드가 만든 것과 다름없는 마법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좀 더 약하지만, 오래 타오를 수 있도록. 그 범위는 마나를 따라서-.'

지옥불을 기반으로 둔 마법이었지만, 또 완전히 다른 마법이었다.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가령-.

"그게 좋겠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삐뚤어졌다.

*

아드리안나는 검을 좋아했다. 검을 휘두를 때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그녀의 도피처이자, 가장 익숙한 서늘함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검으로 마족을 썰어도 잡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갈라하드의 괴상한 요청이 아드리안나의 머릿속을 가득 헤집었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닿는 이의 마나를 태웠다. 마법사가 아닌 이도 아드리안나에게 닿으면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

그 지독한 성질에 접촉할 일이 없었다.

손잡을 때의 온기도 어색한 아드리안나에게 갈라하드의 부탁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아드리안나에게는 마경을 혼자 헤매는 게 더 쉬운 선택지였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을 터.'

평소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는 갈라하드였지만, 그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북부의 존망이 걸린 상황이었다. 진심일 것이다.

다만-.

'······가슴을? 어떻게?'

자세한 방침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드리안나는 좌절했다.

그냥 만져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육을 풀어주는 것처럼-.

아드리안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마족들이 점점 강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장 외곽에 있는 마족들부터 나올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안쪽에 있는 마족들도 나올 것이다.

북부가 마족의 영역이 된다면, 북부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명백한 위기였다.

이를 타개할 방책은 갈라하드였다.

아드리안나가 할 일은-.

"······윽."

속이 울렁거렸다. 괜히 머리도 아픈 것 같았다.

아드리안나는 뒤쪽을 슬쩍 살폈다.

갈라하드는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 중심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고고하고 당당했다.

그 얼굴이 좋지 않았다. 잔뜩 구겨져 있었다. 꼭 고통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몸을 연신 떨었다. 핏줄이 가득 올라와 있었다.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갈라하드였다. 무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가열."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내려쳤다.

쿵.

'피가 움직인다.'

갈라하드 주변의 거대한 웅덩이가 끓기 시작했다. 마치 거센 열을 가하는 것처럼 연신 보글거렸다.

마족의 피가 피어올랐다. 붉은 연기가 점차 퍼졌다. 처음에는 옅었던 연기가 순식간에 짙어졌다.

"순환."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다시 힘껏 내려쳤다.

쿵! 그러자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퍼졌다. 그건 거센 눈보라 같았다. 바닥의 피가 더 격렬하게 끓었다.

갈라하드가 수통을 열었다. 그 손이 덜덜 떨렸다. 무리하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말려야 했지만, 아드리안나는 그럴 수 없었다.

단순히 갈라하드에게 북부의 존망이 걸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드리안나가 말리지 못한 건, 갈라하드가 정말 활짝 웃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니-.

아드리안나는 작게 놀랐다.

그때, 갈라하드가 수통을 입에 물었다. 목이 연신 꿀렁거렸다. 그를 따라서 핏줄이 가득 일어났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오싹-. 아드리안나는 지배자를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한 서늘함을 느꼈다.

검을 쥔 아드리안나의 손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갈라하드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 입가를 타고 붉은 피가 흘렀다.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씹었다.

말려야 한다. 아니-.

'막아야 한다.'

아드리안나는 본능적인 경고를 필사적으로 눌러야 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금색 봉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지옥."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금색 봉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그건 이제껏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은 불씨였다.

바람에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정도로 옅은 불씨-.

'위험해.'

아드리안나는 뚜렷함 위험을 느꼈다.

그때, 작은 불씨가 금색 봉을 떠났다. 불씨는 하늘거리는 홀씨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그 순간 붉은 안개와 불씨가 닿았다.

동굴을 가득 채운 붉은 안개와 손가락 마디 하나도 되지 않는 작은 불씨-. 둘 중 무엇이 우열일지 분명했다.

다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불씨에게 붉은 안개는 먹이였다. 기름이었고. 숙주였다.

불씨가 붉은 안개를 뜯어 먹으며 순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동굴 중심에 거대한 불이 피어올랐다. 그 세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순간 거대한 동굴이 후끈해질 정도였다.

그에 걸린 시간은 눈 깜박 정도로 찰나였다.

동굴 중심에 가득 피어오른 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든 걸 잡아먹고 태울 생각인 듯,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동굴 주변에 있던 수많은 작은 동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모든 곳을 탐했다.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붙는 순간 전부를 태울 때까지 꺼지지 않는 지독한 불이었다.

지독한 불이 아드리안나에게도 짓쳐 들었다. 화끈한 열기가 아드리안나에게 쏟아졌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오러가 마족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강렬하게 일어났다.

순백의 오러가 아드리안나를 둘렀다. 마를 불태우는 성질을 지닌 오러였다.

이건 분명 마법이었으니, 태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밀린다.'

아드리안나의 오러가 밀렸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성질을 이기는 마법이라니-.

아드리안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황급히 오러를 더 크게 일으키자, 그제야 불이 밀렸다.

화끈한 열기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아드리안나의 뒤에 있던 마족과 마물이 불에 그대로 먹혔다. 마족이 연료인 것처럼 열기가 더욱 거세졌다.

마족과 마물을 먹은 불이 뒤의 구멍까지 가득 채웠다.

사방이 지독한 불로 가득했다. 분노에 찬 마족과 마물의 울음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건-.

'지옥이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마족의 영역을 피하려고-.

'······지옥을 만들었다고?'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의 부탁을 떠올렸다.

이 정도의 불이라면 갈라하드도 위험했다. 아드리안나는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향해 뛰었다.

걱정과 달리 갈라하드는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문제는-.

'······백발?'

갈라하드의 모습이 전과 달랐다.

머리가 찰랑이는 백발이었다. 눈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가득 붉었다.

단순히 외형만 변한 게 아니었다. 그 기세가 달랐다.

본래 갈라하드는 깔끔한 귀족이었다. 여유와 기품이 넘치고 늘 자세가 곧았다.

그런데 지금은 음험한 기색이 가득했다. 늘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가 잔뜩 헝클어졌고, 입꼬리는 사나웠다. 눈에는 맹수처럼 포악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때, 갈라하드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나의 시대가 도래했도다. 모두 내 발아래에 엎드려라. 하찮은 것들아. 무한한 힘을 느끼도록."

갈라하드가 할 법한 말이 아닌 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더불어 그 기세가 미묘했다.

그건 꼭-.

'중급 마족?'

아니, 마족이라기에 다소 미묘했다. 인간이지만 마족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어이, 암컷."

그때, 갈라하드의 형태를 한 놈이 아드리안나를 가리켰다.

갈라하드의 모습으로 감히 저런 단어를 쓰다니-. 아드리안나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그때-.

"무한한 힘을-. 음?"

놈이 아래를 내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이내 답답하다는 듯 코트를 찢었다. 상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마른 근육이 가득한 단단한 몸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 흉터가 빼곡했다. 전선에서 평생을 산 북부의 전사들보다 더 험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놈의 배가 거칠게 꿀렁거렸다. 뿌드득, 뿌드득 기괴한 소리가 연신 퍼졌다. 그에 놈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로 작은 숨이 새어 나왔다.

이내-.

"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이익! 아아악!"

놈이 지독한 비명을 터뜨리며,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놈은 비명조차 뱉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갈라하드가 말한 이상 행동이 분명했다.

'이상 행동. 가슴. 맨손.'

아드리안나는 굳게 끄덕였다. 천천히 건틀릿을 벗었다. 손수건을 꺼내서 손을 박박 닦았다.

그리고 갈라하드의 옆에 조심히 앉았다.

훤히 드러난 거친 상체에 아드리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드리안나의 손은 저주였다. 닿는 이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 아주 지독한 손이었다.

분명 그럴 것인데-.

'내 손이 도움이 된다니.'

아드리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평생을 이 저주 받은 성질에 고통 받은 아드리안나였으니까.

그래도 갈라하드가 필요하다고 말했으니-.

'믿겠습니다.'

이내 아드리안나는 굳은 결심을 내렸다.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열기 때문에 얼굴이 뜨거웠다. 터질 것 같았다.

'이건 부탁이다.'

아드리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탄탄한 굴곡이 느껴졌다.

그 너머로 박동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인의 박동이었다.

그때-.

"주무르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니, 피곤한 얼굴의 갈라하드가 있었다.

"자네, 참 음흉하군."

아드리안나는 입술을 벙끗거리다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105화 이랴

'얼얼하군.'

갈라하드는 눈을 가득 찡그렸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건, 알을 직접 먹는 것과 달랐다.

알을 먹는 건 살아있는 걸 잡아먹으라고 주는 느낌이었다. 잡아 먹힐 가능성도 있었기에 위험했다.

그에 반해 마족의 피를 마시는 건, 먹이를 주는 것과 같았다.

대공의 인정을 받을 때, 최상급 마족의 피를 마신 적도 있었다. 그에 고위 마족의 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명백한 오산이었다.

고위 마족은 최상급 마족과 아예 다른 존재였다.

단순히 한 등급의 차이가 아니었다. 종이 달랐다.

고위 마족의 피는 현재 갈라하드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0kg를 드는 사람에게 1000kg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근육이 찢어지는 걸 넘어서 짓이겨질 것이다.

대신 회복하면 급진적으로 늘겠지만, 그건 버텼을 때의 이야기였다.

마법진의 점화 용도였기에,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고위 마족의 피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마나 회로가 넝마가 될 것이다. 끔찍한 부작용이 올라올 게 분명했다.

부작용을 지우기 위해서는 사용한 뒤에 깨끗하게 지울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다만, 넝마가 된 마나 회로에 남은 고농도의 마나를 태우는 건, 아주 지독하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건 단순히 정신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때마침, 고위 마족의 피를 먹어 기세등등한 고통의 알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고통의 알에게 일부러 주도권을 건네줬다. 예상대로 고통의 알은 신나서 나왔고, 갈라하드가 겪어야 했을 후유증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드리안나까지-.

깔끔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지금-.

'꾹꾹이라도 하는 건가.'

갈라하드는 가슴을 꾹꾹 누르는 아드리안나에 혀를 찼다.

"······어떻게 만지라고 지침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근육을 푸는 느낌으로 한 겁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아드리안나가 빠르게 말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를 봐도 불이 가득했다. 그 열기가 마족을 태울 정도로 강렬했지만, 그렇다고 지옥불까지는 아니었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적당한 업화였다.

'성공이군.'

갈라하드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갈라하드의 얼굴을 응시했다.

괜찮냐니-. 고위 마족의 피를 두 통이나 먹은 상황이었다. 더불어 그 찌꺼기를 가득 태웠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갈라하드도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다만, 계획은 성공했고 죽지도 않았다.

그러니-.

"괜찮네."

갈라하드는 몸에 힘을 줬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다 못해 절규했다. 그저 제자리에 일어선 것 뿐인데도 몸이 휘청였다.

'지랄맞군.'

다만, 움직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때-.

"······자네, 뭐 하는 건가."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앞에 쭈그려 앉았다. 무릎까지 꿇은 모습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업히십쇼."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혼자 걸을 수 있네."

"무리입니다. 업히십쇼."

아드리안나가 고개만 돌려,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올곧은 푸른 눈이 단호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자네가 그리 부탁하니, 어쩔 수 없지."

"예."

농담도 통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아드리안나의 등에 업혔다.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갑주의 서늘함이 갈라하드를 간질였다. 아드리안나가 제 코트를 덮어줬다.

"가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검을 내밀었다. 오러가 검을 타고 주변으로 뿌려졌다. 불이 좌우로 갈라졌다.

순백의 오러에 갈라지는 지옥-. 꽤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아드리안나가 땅을 박찼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신형이 길게 미끄러졌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속도였다. 역시 소드 마스터였다.

아드리안나의 등에 업힌 갈라하드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드리안나는 늘 선두에 섰다. 그 뒷모습은 크고 믿음직했다. 영웅이라는 칭호가 부족함 없는 이였다.

그런데 막상 업혀보니, 생각보다 왜소했다.

"자네, 생각보다 작군."

"예? 못 들었습니다."

"아닐세."

사방이 불로 가득했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작은 영향도 없었다. 조금의 따스함과 서늘함이 전부였다.

"불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겁니까?"

"마나가 전부 사라지면 꺼질 걸세. 고위 마족의 짙은 마나를 사용한 터라, 당분간 마나를 계속 빨아들이······."

갈라하드는 거칠게 기침했다. 그 입으로 피가 길게 흘렀다.

"괜찮으십니까?!"

"먼지가 많아서 그런 걸세.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영역을 계속 확장하면서 계속 마나를 당길 걸세. 들어간 마족이 많으니까."

아드리안나가 땅을 박찼다. 전보다 더 부드러웠다. 걸음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주변에 있는 마족의 영역이 전부 타고 나서야 멈추겠지."

"오히려 마족의 영역이 줄어들 거라는 겁니까?"

"맞네. 놈들의 수를 역으로 쓴 거니까."

"적의 술수를 오히려 이용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감탄이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이제 알았나? 나는 원래 대단하다네."

"흐흠!"

"자네, 지금 비웃은 건가?"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인간이 이 속도로 달릴 수 있다니-.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건 인간보다는-.

"자네, 말로도 손색이 없군."

"······예?!"

아드리안나가 뾰족하게 되물었다.

"이랴!"

"······."

"농담일세."

"······."

"자네, 삐졌나?"

대답 대신 땅을 박차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삐졌군.

****

6대대의 소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중이었다. 지배자가 처리되며, 6대대 병사들이 정신을 차린 게 컸다.

북부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눈물 대신 분노했다.

병사들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마족과 마물의 사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대장들은 지배자의 사체 앞에 모였다. 그 분위기가 상당히 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마족의 부산물이라 무시했던 마법사가 고위 마족을 잡았으니까.

갈라하드가 대공의 인정을 받은 건, 마법사라서 마족의 피를 마셔도 괜찮은 것이다- 라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고위 마족을 잡은 건, 명백한 실력의 증명이었다.

문제는 단순히 고위 마족을 잡은 게 아니라는 거였다.

미소를 지으며 고위 마족의 피를 챙기는 갈라하드는 왠지 모르게 대공 전하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 오히려 대공 전하보다 더-.'

5대대 대장 마크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공 전하가 대장 전부를 움직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대장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하고 최대한 빠르게 응했다.

그런데 대장들이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지배자는 갈라하드가 잡았고, 지배자가 다스리던 마족과 마물은 갈라하드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한 건 6대대의 생존자를 제압한 거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착하니,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를 데리고 지하로 사라졌다.

결국, 대장들은 가만히 대기나 하고 있었다.

결심하고 움직인 대장들이었다. 그에 반해 묘하게 싱거운 느낌이 상당히 미묘했다.

"병사들의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부상자는 많지만, 전사자는 적습니다. 대부분 다리에 부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병사의 보고에 대장들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고위 마족을 상대하면서, 병사들을 봐주기까지 했다는 건가? 그게 말이 되나?"

8대대 대장이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고위 마족을 상대하면서 병사 사정까지 봐줬다는 건, 마크도 믿기 힘들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더욱 깊어졌다. 대장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드리안나의 목숨은 귀하다."

3대대 대장이 주제를 돌렸다.

갈라하드가 오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대장이었다. 갈라하드의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에 마크는 앞으로 나섰다.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나."

마크가 나서자 대장들이 눈을 구겼다.

"살날도 긴 젊은것들이 기다림은 부족하군."

7대대 대장 벨로그라임도 옆에 섰다.

그때, 뒤가 후끈해졌다.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대장들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그에 고개를 돌린 마크는-.

'······?'

입을 쩍 벌렸다.

지하에서 불길이 토하듯 뿜어졌다.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대장들이 순간 뒷걸음칠 정도로 열기가 강한 불이었다.

아드리안나와 갈라하드가 들어간 곳이었다. 거기서 저런 불이 타오르다니-.

"물! 떠와라! 빨리!"

마크는 다급하게 명령했다. 그에 얼 타던 병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이건 그냥 불이 아니다."

갈라하드와 같이 있던 퍼스트라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냥 불이 아니다?"

"마나가 가득한 불이지. 단순한 마법이 아니야. 이건-."

퍼스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불에 닿자 건틀릿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퍼스트의 눈이 커졌다. 재빨리 손을 뺐다.

"아주 지독한 불이지."

퍼스트가 손을 뒤로 숨기며 말했다.

괴상한 설명이었지만, 평범한 불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퍼지는 열기가 저릿할 정도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때, 병사들이 물을 가져와서 부었는데, 불은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크기를 더 키웠다. 마치 화를 내는 것처럼-.

강렬한 열기에 모두가 입을 벙끗거렸다.

"고위 마족이 더 있었나."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대장들이 각자 무기를 고쳐 잡았다. 오러를 가득 일으켰다. 불이라도 베고 들어갈 기세였다.

그때-.

"옅어졌다!"

거세게 일렁이던 불이 약해졌다. 서서히 약해지던 불이 이내 사라졌다.

그에 대장들이 뛰어들려는 순간-.

아드리안나가 구멍을 부수며 거칠게 나왔다.

아드리안나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백색 갑주에는 검은 재가 얼룩덜룩했다. 그 등에 누군가 업혀있었다.

아드리안나의 코트를 두른 갈라하드였다. 그 얼굴이 좋지 않았다. 핏줄이 가득 올라왔고, 입술은 보라색이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도 옅은 미소는 여전했다.

"그웬!"

갈라하드가 소리쳤다. 그러자 하녀복을 입은 여인이 뛰쳐나왔다.

"네! 바로 할게요!"

그웬이 코트를 내렸다. 그러자 갈라하드의 맨몸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 모습이 예상과 달랐다.

갈라하드는 깔끔하게 잘생긴 귀족이었다. 거칠고 굶주린 북부와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갈라하드가 북부에서 배척 받는 것에 그 영향도 있었다.

그런데 드러난 상체에 흉터가 가득했다. 북부에서 흉터는 긍지였다. 살아남았다는 증거였기에-.

다만, 그들도 저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저게 무슨-.'

그웬이 갈라하드의 등에 손을 올리려 했는데, 키가 작아서 닿지 않았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무릎을 굽혀줬다.

"감사합니다! 하앗!"

감사를 표한 그웬이 열심히 갈라하드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갈라하드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좋아졌다.

그때, 구멍에서 불길이 다시 솟구쳤다. 불길이 전보다 더 크고 격렬했다. 어두웠던 밤이 밝아질 정도였다.

"아직 고위 마족이 남았군."

대장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병사들이 무기를 고쳐 잡았다. 분노할 대상을 찾은 것이다.

그때, 갈라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 저건 고위 마족이 아니라, 마법일세."

차분한 갈라하드의 설명에 대장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거대한 불줄기가 고위 마족이 아니라 마법이라니-. 그게 무슨······.

"내 마법이지. 어때 멋지지 않나? 오래오래 타오를 걸세."

갈라하드가 묘하게 뿌듯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에 대장들의 눈이 번갈아 움직였다. 뒤로 솟구치는 거대한 불줄기를 봤다가, 갈라하드를 봤다.

그러니까 저 6대대를 녹일 것처럼 거대한 불줄기가-.

"······그쪽이 한 짓이라는 건가?"

리암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가득 올렸다.

"그렇다네. 단순한 마법이 아닐세. 마족의 영역과 이어진 통로를 따라서 마나를 가져와서 태우기에,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마법이지. 대략 몇 년은 유지될 걸세."

갈라하드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보였다. 꼭 지배자의 피를 수통에 담을 때처럼-.

"자, 따뜻하지 않나? 전문 용어로 아랫목일세."

갈라하드가 거센 불줄기를 가리키며 웃었다.

아까는 고위 마족의 피를 챙기더니, 이번에는 6대대 지하에 저런 불을 피우고 따뜻하지 않냐고-?

'대장들이 다른 의미로 피하겠는데.'

마크는 떨떠름하게 대장들을 살폈다.

대장들은 애써 무표정이었지만, 그 시선이 전부 갈라하드를 피하고 있었다.

마치 갈라하드와 시선이 마주치면 안 되는 것처럼-.

"이제 괜찮네. 내려주게."

"안 됩니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아니-."

"가만히 있으세요."

강경한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

여우 가면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즘 기분이 매우 좋았다. 흥미로운 일이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갈라하드-.'

업화를 쓰는 것으로 모자라서, 여우 가면의 권능까지 베낀 놈-.

고작 10일이었다. 놈은 10일 만에 허무의 마법을 제 입맛에 맞게 개정했다.

'최초의 마법사보다 더 천재려나.'

여우 가면은 흥얼거렸다.

'황혼의 꼬맹이한테 빠져 있는데, 이걸 알려주면 어떻게 될까.'

행복한 상상이 이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건조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무표정의 사내였다.

"지배자를 잃고도 말이야."

"어머, 책망하는 거예요? 저는 맡은 건 끝냈다고요. 설마 실패할까 불안한 건가."

명백한 도발이었지만, 사내의 반응은 무심했다.

"내 계획은 실패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분이 너를 붙여준 거지. 네가 사고를 쳐도 내 계획은 완벽하니까."

사내의 대답은 진부하고 따분했다. 매번 같은 말만 했다.

다만, 사실이었다. 사내의 계획은 완벽했으니까.

여우 가면이 마음대로 행동한 것도, 사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계획은 이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괜히 완벽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다만-.

"방심 안 하는 게 좋을걸요."

갈라하드가 엮인 일이었다.

"내 계획은 완벽하다. 지배자가 멋대로 문을 연 것도 내 아래에 있다."

사내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것처럼.

'흐응, 재미없어.'

이래서 이놈이랑 같이하기 싫었는데-.

"하찮은 북부 놈들은 막을 수 없다."

"상대는 북부 놈이 아닌데."

"상관없다. 황혼의 꼬맹이가 와도."

몇 번을 찔러도 사내의 대답은 여전히 무심했다.

여우 가면은 길게 하품했다. 갈라하드가 일을 벌이기 원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사내의 계획은 완벽했으니까.

'앞으로는 모르지만.'

여우 가면은 입꼬리를 올렸다.

업화를 다루고, 허무도 배운 갈라하드였다.

나머지 두 개도 배울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혹시라도-.

'네 개를 전부 완성한다면?'

그 갈라하드를 최초의 마법사에게 보여준다면-.

치명적인 짜릿함에 여우 가면은 작게 떨었다.

앞에 놓인 구슬이 빛났다. 상황을 알리는 구슬이었다.

성공이면 초록이고, 실패하면 붉은색이었다.

결과가 뻔했기에, 여우 가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갈라하드를 입에 담았지만, 딱히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 건은 완벽한 사내가 오랜 기간 준비한 계획이었기에, 실패할 리가 없었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우 가면은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입 주변이 갈라져 있었다. 무표정이던 사내가 처음 보인 균열이었다.

'왜?'

구슬이 붉었다.

붉음은 실패였다.

사내의 계획이 처음으로 실패한 순간이었다.

"감히 누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번도 흥분하지 않던 사내가 처음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서 구슬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건-.

"갈라하드."

사내가 몇 번이나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갈라하드는 북부에서 뜨거운 이름이었다. 여명에 진작 올라왔어야 할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돌다니-. 누군가 막고 있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를 막으려면 여명의 최상층이 관여해야 했다. 그런 존재가 신경 쓰기에 갈라하드는 아직 작았다.

아무튼, 여명에 처음으로 갈라하드의 이름이 올라온 순간이었다.

"갈라하드."

사내가 계속해서 이름을 되새겼다.

자신의 완벽을 깨뜨린 갈라하드를 용서할 수 없겠지-.

"내 계획은 완벽하다-."

여우 가면은 사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키득거렸다.

106화 입원

최근 6대대에서 지배자가 발견되며 상황이 심각해졌다. 대공이 대장 전부를 소집했을 정도였다.

그에 참모진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무엇보다-.

'갈라하드가 지배자에게 향했다니.'

마석장 사업은 북부의 재정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갈라하드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 갈라하드가 6대대로 직접 향했다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대장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오죽하면 대장들에게 화까지 났다.

"대장들이 갈라하드의 반만이라도 했으면 벌써 제국을 이겼을 텐데!"

참모 중 하나가 소리쳤다. 다른 참모들이 끄덕였다.

그때, 창문 너머로 매가 들어왔다. 2대대 대장의 매였다.

본래 보고는 대공에게 직접 올라가지 않았다. 먼저 참모진에게 왔다. 참모진이 그를 정리하여 대공에게 올리는 게 순서였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매에게 향했다. 매의 다리에 기다란 종이가 묶여 있었다.

'하필 2대대 대장이군.'

2대대 대장 리암은 그 보고가 늘 너무 짧았다.

보고는 한 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꽤 합당한 말이었지만, 너무 압축하는 게 문제였다.

테오도르는 황급히 편지를 열었다.

2대대 대장 리암의 편지는 예상대로 짧았다.

문제는-.

[갈라하드가 지배자를 잡았다. 지배자의 피를 짰다. 지하에 추가 문제가 있었다. 갈라하드가 맨몸으로 아드리안나를 탔다. 6대대의 병사는 대부분 건졌지만, 6대대는 불바다가 되어 더 이상 쓸 수 없음. 갈라하드의 공이다. 성공했다.]

테오도르는 보고를 다시금 읽었다. 짧은 내용이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처음부터 천천히 정리했다.

일단, 갈라하드가 지배자를 잡은 듯했다. 피를 짠다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아무튼···.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배자를 잡았는데 6대대가 왜 불바다······?'

심지어 그 불바다가 갈라하드의 공이란다.

"어떻게 됐답니까? 아니, 무사하답니까?!"

그때, 다른 참모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테오도르는 잠시 고민했다.

6대대가 불바다가 되었지만, 지배자는 잡았다. 고위 마족인 지배자를 못 막았으면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었으니, 잘 막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갈라하드 대장이 지배자를 잡았다는군."

"와아! 역시 갈라하드다!"

"갈라하드 대장!"

참모진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들렸다. 어느새 대공이 자리해 있었다.

참모진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이 테오도르에게 손짓했다. 테오도르는 조심히 편지를 올렸다.

대공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어떤 공을 내리실까.'

고위 마족인 지배자, 그것도 6대대를 점거하고 있던 지배자를 잡았다-. 과연 어떤 공을 내리실지. 괜히 기대됐다.

그때,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고개를 드니, 얼굴이 잔뜩 구겨진 대공이 보였다.

명백한 분노였다,

'······왜?'

테오도르는 보고의 내용을 천천히 되새겼다.

[갈라하드가 맨몸으로 아드리안나를 탔다.]

아뿔싸!

테오도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갈라하드는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마나 회로가 과부하로 찢긴 상태였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마나 회로가 엉망이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마나가 움직이는 가상의 통로가 마나 회로인데, 그 마나 회로가 전부 찢겼다.

그웬 덕분에 어떻게든 붙일 수 있었지만, 여전히 엉망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지독하군.'

갈라하드는 얼얼한 통증에 눈을 찡그렸다.

지배자의 피를 두 통이나 마신 건, 지배자의 계획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동시에 마나 회로를 더 강화하기 위함도 있었다.

마나 회로가 찢어진 건 상당히 위험했지만, 대신 회복하면 그 효과가 확실했다.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마나 회로가 굵고 단단해질 것이다.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자살한다고 경악할 일이었지만, 갈라하드에게는 아드리안나와 그웬이 있었다.

결국, 계획대로 마나 회로를 청소하여 붙였다. 회복하면 마나 회로는 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더 단단해질 것이다.

거기에 지배자도 막았으니,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또 여기지?'

갈라하드는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북부로 왔을 때, 갈라하드가 감금되었던 그 방이었다.

전과 달리 방에 이것저것 잔뜩 쌓여 있지만, 같은 방이라는 건 변치 않았다.

달라진 건-.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중무장한 아드리안나가 안쪽에서 문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밖의 침입을 막는 게 아니라, 갈라하드가 나가는 걸 막는 모양새였다.

'감금이군.'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갈라하드의 책임도 있었다.

오는 마차에서 연초를 입에 문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마법을 썼다.

마나 회로가 다 찢긴 상태에서 마나를 움직이는 건 상당히 끔찍했다. 아니, 아주 끔찍했다. 갈라하드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다만, 찢긴 마나 회로에 마나가 움직인다는 게 갈라하드의 흥미를 건드렸다.

그 감각을 음미하며 몇 번 움직이자, 입에서 피가 거칠게 튀었다.

그에 아드리안나가 기겁했고-.

'갇혔지.'

지금이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마법을 쓰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 회복에 전념할 때였다.

아드리안나가 지켜주는 건, 상당한 호사였다.

다만,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연초 필요하십니까?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거였다.

아드리안나는 매번 선봉에 서며, 그걸 당연히 자기 일이라 여기는 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배자를 잡은 것도, 그 계획을 막은 것도 갈라하드였다.

안 그래도 갈라하드를 북부로 끌어온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아드리안나였다. 이번 일이 더 크게 작용한 듯했다.

두 번째는-.

"···내가 꺼내겠네."

"아!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의 간호가 상당히 어설프다는 점이었다.

대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북부의 영웅인 아드리안나였다. 그런 아드리안나가 누군가를 보살필 일이 있었겠나.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문제는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점점 내려간다는 거였다.

"괜찮네. 자네가 나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거기서 불타서 죽었을 걸세."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려간 눈썹은 올라올 기미가 없었다.

'텄군.'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입에 물었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부싯돌을 튕겼다. 앞에서 튕기는 부싯돌에 갈라하드는 눈을 구겼다.

"······제가 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부탁 좀 하겠네. 톰."

보다 못한 톰이 나섰다. 톰이 불을 지피는 지팡이를 작게 휘두르자, 연초에 불이 붙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조금 더 내려갔다.

'조용해졌군.'

갈라하드는 슬쩍 아래를 봤다. 고통의 알은 기척도 안 느껴졌다. 아드리안나에게 당해서 의식을 잃은 듯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잡는다.'

그동안 고통의 알을 놔둔 건 딱히 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번에 고통의 알이 올라올 수도 있다는 걸 확인했다.

갈라하드가 넘겨줘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작은 가능성도 확실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목줄을 거부한다면-.

'없애야지.'

갈라하드는 가만히 연초를 털었다.

그 방법은 이번에 알아냈다. 아드리안나에게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건 퍼스트와 펌킨이었다. 누워있는 갈라하드에 퍼스트가 눈썹을 구겼다.

"고작 그 정도 마법 좀 썼다고 이렇게 엎어져 있다니-. 자네, 허약해졌군."

"아니, 왜 갑자기 지랄이십니까. 죄송합니다!"

펌킨이 대신 사과하고, 퍼스트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기 말일세."

퍼스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표정이 진지해졌다.

"자네, 마경 훈련소에서 마탑으로 마법사들을 꼬드겼더군."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갈라하드는 나서려는 아드리안나에게 손짓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퍼스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영특한 생각을 하다니. 역시 내 경쟁자일세. 하하하!"

퍼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승부에 쓸데없이 깔끔하게 승복하는 놈이었다.

"자, 이건 내기의 상품일세."

퍼스트가 포션을 꺼내서 던졌다.

교단의 포션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미친! 내 건 왜 줍니까!"

"우리는 한 몸이니까."

"그게 무슨 좆 같은······."

펌킨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퍼스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 눈에 부담스러운 열기가 가득했다.

"갈라하드, 긴장해라. 다음 내기는 내가 이길 것이니까."

"다음 내기?"

"네가 마탑을 세웠으니, 나는 마검탑을 세울 것이다. 둘 중 누구의 탑이 높은지-."

"아! 좀! 죄송합니다."

펌킨이 퍼스트를 질질 끌고 나갔다.

"아니, 그러면 결혼하던가."

"그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둘은 나가는 순간까지 시끄러웠다.

닫힌 문이 금방 다시 열렸다.

"회복 시간입니다! 자!"

그웬이 당당하게 등장했다.

원래 그웬은 울상이었다. 툭하면 울었고, 늘 쭈그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조금 덜했지만, 여전히 소심하고 의기소침했다.

그랬던 그웬이 지금은 당당했다.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자자! 마나 회복 시간이에요! 마나 회복! 그웬이 왔어요!"

장기를 찾은 까닭이었다. 갈라하드를 회복시킨 뒤로 그웬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제는 당당히 갈라하드의 시선까지 볼 정도였다.

"······회복 시간이요."

그래봤자 2초 정도였지만. 눈만 마주치면 피하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부탁 좀 하겠네."

"네! 저만 믿어요! 오늘 많이 먹고 왔어요!"

힘차게 기합을 넣은 그웬이 갈라하드 옆에 섰다.

아드리안나가 한 발짝 더 물러섰다. 그 눈썹이 더 내려갔다.

"해보니까. 주문을 외우면서 하면 더 잘 돼요!"

"주문?"

"건강해져라-. 건강해져라-."

"그건 주문이 아닐세."

"······정말요?"

"아니, 생각해보니 효과가 있겠군. 부탁하네, 그웬."

"그렇죠?! 건강해져라-. 건강해져라-."

갈라하드는 지적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어느새 아드리안나는 문 옆까지 가 있었다.

아드리안나의 가득 내려간 눈썹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건!강!건!강! 거언! 가앙!"

****

톰은 특무대의 핵심이 갈라하드라고 확신했다. 갈라하드가 아니면, 특무대는 바로 해체될 것이다.

갈라하드는 마족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이였다. 그 당당함에 톰은 무의식적으로 갈라하드가 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갈라하드가 제 몸도 못 가누고, 입에서 피까지 토하는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길버튼이 입을 꾹 다물고 밖에서 경비만 설 정도였다.

톰은 위에 특무대 추가 예산을 요청하여, 회복에 좋은 것들을 잔뜩 구했다. 그걸로 스튜를 끓였다.

거기에 그웬이 청소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돌렸고, 갈라하드의 금색 봉을 노리는 데미안을 막았다. 종종 길버튼에게 따뜻한 술도 챙겨줬다.

특무대를 챙기는 것쯤은 이제 톰에게 일상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갈라하드를 찾아온 인물들이었다.

5대대 대장, 7대대 대장, 심지어 2대대까지-. 대장들이 계속해서 갈라하드를 찾아왔다.

대장은 말단 병사였던 톰이 쳐다도 보기 힘든 존재였다.

그런 대장들이 계속 방문한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한편으로 괜히 뿌듯했다.

그중 제일은-.

줄곧 조용히 문을 지키는 아드리안나였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를 도우려 노력했지만, 그 실력이 엉망이었다.

그웬처럼 선천적으로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남을 돌보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북부에서 제일 고귀한 아드리안나였으니까.

아드리안나는 점점 밀려났고, 이내 문 옆에 바짝 붙어서 조용히 있었다.

그 뒤로 아드리안나는 톰을 관찰했다. 톰이 스튜를 끓이면 옆에 와서 진지하게 쳐다봤다.

북부의 영웅 아드리안나의 관찰은 평범한 톰에게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다만, 상대는 아드리안나였다. 그 아드리안나에게 감히 뭔가 알려주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드리안나의 시선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톰은-.

"스튜를 저을 때는 일정한 방향으로 천천히 저어야, 눌어붙지 않지!"

어색한 혼잣말을 시작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억하겠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빗자루질할 때는 약간 기울여서 해야 먼지가 더 잘 모여. 그리고 청소가 끝난 후에는 밖에서 털어야지."

왜 북부의 영웅인 아드리안나에게 빗자루질을 알려줘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어떻게 하겠나.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경청하는 걸-.

톰의 등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톰은 애써 긴장을 숨기며 괴상한 혼잣말을 이어갔다.

나름대로 순항중이었다.

그때, 길버튼이 들어왔다.

"아직도 누워계십니까?"

"보면 모르나. 길버튼 경답군."

"아니, 대장을 찾는 놈들 같길래 데려왔습니다. 들어와!"

길버튼이 밖에 소리쳤다. 음침하게 생긴 남녀가 들어왔다.

"음침하고 삐쩍 마른 게, 딱 봐도 대장을 찾을 것 같았습니다."

"근거가 다소 이상하지만, 정답일세. 길버튼 경, 제법이군."

음침한 두 남녀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흑마법학회?'

톰은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자리 좀 비켜주겠나? 아, 길버튼 경은 남게."

갈라하드의 정중한 요청에 나머지 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톰은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길버튼에게 밀렸다니-.'

그건 치명상이었다.

아드리안나의 입술이 작게 구겨졌다.

그를 본 톰은 경각심이 가득 들었다. 어떻게든 아드리안나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했다.

그때, 허리춤의 지팡이가 보였다. 요리하거나, 불을 피울 때 쓰는 마도구였다.

지금 갈라하드는 마법을 쓰지 못하니, 연초의 불을 붙이는 식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아드리안나님인데, 연초 불붙이라는 건-.'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입을 열었다.

"혹시 이것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갈라하드 대장이 불을 못 피우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연초의 불을 붙이라니-. 톰은 뒤늦게 후회했다.

"고맙다."

아드리안나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졌다.

지팡이를 소중히 챙기는 아드리안나에 톰은 작게 안도했다.

그러다 문득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연초에 불붙이는 걸 다른 이가 볼까 봐 걱정됐지만-.

'대공 전하 앞에서만 하지 않으면 되겠지.'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갈라하드는 손에 들린 종이를 읽었다. 흑마법학회 5대대 지부에 연구를 넣어둔 놈들이 가져다준 보고서였다.

거기에는 마족의 피와 인간의 피에 관한 연구가 적혀 있었다.

그 뭉치가 두꺼웠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마법사의 피에도 마나가 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피를 연구해야 했다.

"인간을 연구한 건가?"

놈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초췌하고 퀭해졌지만, 눈은 더 또렷했다. 광기가 넘실거렸다.

마법사다운 눈이었다.

"직접 했습니다."

"직접?"

"예, 그때 말씀하셨잖습니까. 자기 몸에 직접 하는 게 더 빠르다고."

놈의 팔뚝에 큼지막한 흉터가 있었다. 제 피를 뽑아서 연구했다는 뜻이었다.

"훌륭하군. 마법사의 피에 마나가 담겼다는 건가?"

"예, 마족의 피랑 비교하여 알아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마법사의 피에도 마나가 담겼다. 그 양이 소량이라 알아채기 힘들었을 뿐-.

그 결과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즉-.

"마법사와 마족의 차이는 혈중의 마나 농도뿐이군."

"예, 맞습니다. 마나 농도가 높아질수록 맛과 냄새가 끔찍해집니다. 마치 썩는 것처럼요."

결코 가벼운 대화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마족과 차이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만, 갈라하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여우 가면은 마법사에서 마족이 된 존재였다. 놈이 펼친 건 마법이 아니었다. 명백히 권능이었다.

마법은 권능의 개정판이었다.

권능의 개정판이 마법이라면, 마법사는···.

'마족의 개정판이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확신은 아니었다. 그저 가능성이었다.

다만, 묘하게 입맛이 텁텁했다.

그때-.

문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열린 게 아니었다. 부서졌다. 문이 가루로 변했다. 서늘한 경각심이 마구 떠올랐다.

부서진 문 너머에 고위 마물이 있었다.

고위 마물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에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냉큼 소리쳤다.

107화 갈,라하드

"놈."

고위 마물··· 아니, 대공이 나지막하게 갈라하드를 불렀다.

대공은 그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갈라하드도 키가 큰 편인데, 대공은 갈라하드의 두 배였다.

그 팔은 웬만한 성인 사내의 허리보다 두꺼웠고, 여인의 머리통만 한 근육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지나가는 이에게 대공이 마물과 사람 중 무엇 같으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마물이라고 답할 게 분명했다.

그런 대공이 가라앉은 눈으로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대공의 굵은 손가락이 까닥거릴 때마다, 목만 남은 차르티엔이 아른거렸다.

대공의 눈썹이 내려가 있었다. 대공은 분노하고 있었다.

'왜?'

갈라하드는 지배자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6대대를 불바다로 만드는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잡은 건 잡은 거였다.

대공이 분노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드리안나!"

갈라하드는 냉큼 아드리안나를 불렀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아드리안나가 들어왔다.

아드리안나는 대공과 갈라하드 사이에 섰다.

"오셨습니까."

듬직한 아드리안나에 대공의 시선이 가려졌다. 갈라하드는 작게 안도했다.

"너는 나가 있거라."

대공이 나지막한 명령을 내렸다.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간 뿌드득- 소리가 났다. 대공의 힘줄이 기지개 키는 소리였다.

"명령이다."

아드리안나가 크게 움찔거렸다. 갈라하드를 돌아보는 아드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 명령을 쓰다니. 비겁하군.'

그렇게 나온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마나를 움직였다.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격통이 올라왔다. 몸이 저절로 떨렸다.

"크흠."

갈라하드의 입에서 피가 거칠게 뿌려졌다.

"괜찮으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갈라하드에게 붙었다. 갈라하드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톰, 톰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뜬금없이 톰을 찾는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자네가 필요하네."

"예? 하지만 저는······."

"자네여야만 하네."

갈라하드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쭉 올라갔다. 대공의 눈썹이 내려갔다.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드리안나."

대공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팽배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갈라하드 대장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혹시 모르니 옆에 있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물과 전투할 때도 웃던 대공이 작게 흔들렸다.

'아드리안나가 반발한 게 처음인가 보군.'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에게 향했다. 단지 시선을 받았을 뿐인데, 꼭 어깨를 누르는 듯했다.

'시선으로만 이런 압박감이라니-.'

갈라하드는 슬쩍 기침했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히 갈라하드를 살폈다. 갈라하드를 누르던 기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작 피 좀 토하는 걸로 난리군."

대공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명백한 이죽거림이었지만-.

"갈라하드 대장이 아니었다면, 북부 전체가 위험할 뻔했습니다. 북부를 위해서 싸우다 다친 이를 치하 못 할망정, 고작이라니 너무 하십니다."

정론의 아드리안나는 참지 않았다. 오히려 대공을 책망했다.

검에 찔려도 움직이지 않을 대공의 눈썹이 거칠게 흔들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안 괜찮습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대공의 눈썹이 다시 굳었다. 갈라하드는 슬쩍 목을 매만졌다.

"6대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대공이 이야기를 돌렸다.

'······책망인가?'

하긴 6대대를 불바다로 만든 건 사실이었다.

다만-.

"어쩌겠습니까. 굴까지 팔 정도로 오래 지냈던 놈들인데, 쉽게 나가겠습니까? 불이라도 질러야지."

"그래서 6대대를 아예 태워버렸다?"

"예, 놔뒀으면 6대대가 아니라, 북부 전체가 마족 소굴 될 테니까-. 제 고향과 다름없는 북부가 그렇게 되는 걸, 제가 어떻게 두고 보겠습니까?"

대공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뼈 부서지는 소리였는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 가는 소리였다.

무슨 이 가는 소리가 저리 살벌한지-. 갈라하드는 헛기침하며 슬쩍 아드리안나의 등을 밀었다.

"아! 갈라하드의 대장 말이 맞습니다. 그대로 뒀다면, 북부의 마나 농도가 짙어져서 마족이 더 강해졌을 겁니다. 북부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대공의 시선이 갈라하드를 향했다.

"놈과 할 이야기가 있다."

대공이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봤자, 여전히 마물의 울음소리 같았지만.

"안 됩니다."

아드리안나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괜찮네."

"아, 알겠습니다."

그제야 아드리안나가 자리를 비켜줬다. 아드리안나는 나가기 전에 '갈라하드 대장은 휴식이 필요합니다.'라고 대공에게 강조했다.

그게 갈라하드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걸 모르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거대한 방에서 대공과 마주 봤다.

공기가 심하게 무거웠다. 사형대에 올라갔을 때처럼, 목이 괜히 까슬거렸다. 자꾸만 차르티엔이 아른거렸다.

대공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맨몸으로 아드리안나를 탔다는군."

대공의 두꺼운 입술 사이로 거대한 송곳니가 보였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뜬금없는 소리에 갈라하드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맨몸으로 아드리안나를 탔다고? 그게 무슨······.'

사실이었지만, 너무 단축된 사실이었다. 누가 저딴 보고를 올렸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공이 분노하고 있었군.'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제가 마법을 무리해서 쓰면서, 옷이 전부 타버렸습니다. 아드리안나 대장이 저를 구해준 겁니다."

대공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공기가 좀 편해진 느낌이었다.

'아드리안나가 대공의 약점이군.'

갈라하드는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대공은 마물의 살점으로 배를 채우고 그 피로 목을 축였다. 갈라하드가 괜히 고위 마물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북부에 자리를 잡으려면 대공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다만, 대공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였다. 그런 대공의 마음에 드는 건, 아드리안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 점수를 딸지 고민이었는데-.

'답은 아드리안나였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드리안나는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륙 최고의 미인이며-. 아, 이건 사실입니다. 제가 대륙을 제법 돌아다녔는데, 아드리안나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없었습니다."

갈라하드는 잠깐 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거기에 또 대공 전하를 닮아서 최연소 소드 마스터 아닙니까? 아름다운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실력까지 최고라니-."

대공의 눈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정답이군.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성품은 또 어떻습니까. 항상 선두에 서는 걸 마다하지 않는 그 고귀함은 말할 것도 없지요. 외모, 성품, 실력. 그중에 최고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니-."

갈라하드는 짧게 박수도 쳤다. 대공의 눈썹이 올라갔다.

"황제도 마음대로 못 하는 게 자식인데, 대공 전하는 든든하시겠습니다."

대공이 입꼬리를 사납게 올렸다. 잠시 헷갈렸지만, 대공 식의 부드러운 미소인 듯했다.

무거운 정적이 잠시 이어졌다. 이내 대공이 입을 열었다.

"잘해야 할 것이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명령이었다.

갈라하드는 냉큼 끄덕였다.

"잘하는 건 제 전문입니다."

"건방지군."

"보통 기개라고 합니다."

대공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시선을 마주한 것뿐인데,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사나운 눈이었다.

눈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지만, 갈라하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대공의 입가가 사납게 비틀렸다. 그 틈으로 단검처럼 거대한 송곳니가 보였다.

대공이 뭔가를 던졌다. 검은색 액체가 담긴 투명한 병이었다.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가득 풍겼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아주 끔찍한 냄새였다.

이건-.

'고위 마족의 피다.'

지배자의 피를 마셨던 갈라하드였기에 알 수 있었다.

지배자의 피도 이 정도로 독한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마족의 피는 마나 농도가 짙을수록 더 독해졌다.

지배자보다 더 강한 놈이 분명했다.

"제일 맛있던 놈이지."

대공이 입꼬리를 사납게 올리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진득한 분노가 묻어 나왔다.

'제일 맛있는 놈이라-.'

대공이 맛있다고 할 정도면, 거물일 게 분명했다.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갈라하드에게 더없이 귀한 보상이었다.

'애초에 상을 주려고 온 거였군.'

상을 주려고 왔으면 상부터 주지, 왜 쓸데없이 겁박을-.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다만, 대공이 준 지고한 고위 마족의 피는 갈라하드에 걸맞은 보상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더없이 만족스러운 보상이었다. 갈라하드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과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이게 전부입니까?"

계산은 정확해야 했다.

6대대를 불태웠지만, 그래도 지배자를 잡고 북부를 구했다.

이건 갈라하드의 취향에 따른 보상일 뿐이었다. 객관적으로는 다소 부족했다.

대공의 입꼬리가 굳었다. 대공의 근육이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에 뿌드득- 거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근육이 어떻게 저리 인격이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지 신기했다.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갈라하드는 괜히 서늘함에 목을 매만졌다.

"원하는 게 있나?"

대공의 목소리가 상당히 나지막했다.

수틀리면 갈,라하드가 될 것 같았다.

그에 갈라하드는-.

"사냥 한 번 같이 가시죠."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대공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거대한 송곳니 사이로 미약한 숨이 터졌다.

꼭 맹수의 목을 틀어 쥔 듯한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간담이 절로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웃음소리였다.

대공은 웃을 때, 마물의 울음소리를 냈다.

"좋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서 아주 티끌만 한 온기가 느껴졌다.

알아채기도 힘들 정도로 미세했지만, 대공이 처음 보인 호의였다.

'연달아 정답이군.'

답은 아드리안나와 사냥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들어와라."

대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조금 붉은 아드리안나가 들어왔다.

아드리안나가 다급하게 갈라하드를 살폈다. 이내 작게 안도한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 옆에 섰다.

대공의 호의를 얻었고, 만족할만한 보상도 얻었다.

위기를 넘겼다고 볼 수 있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연초를 입에 물었다.

그러자-.

탁.

"여기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지팡이로 연초에 불을 붙여줬다.

"고맙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예의 무표정이었지만, 눈썹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묘하게 뿌듯함이 느껴졌다.

'왜 불을 붙여주고 뿌듯함을-?'

연초를 깊게 빨던 갈라하드는 지독한 서늘함을 느꼈다.

분명한 죽음이었다.

그에 고개를 들자-.

얼굴이 가득 구겨진 대공이 보였다.

"감히-."

차,르티엔이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어서 오라는 듯-.

상큼한 연초 연기가 깊게 퍼졌다.

****

"콜록! 콜록!"

정보국의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그 맞은 편에는 제임스가 거칠게 콜록거렸다. 연초 때문이었다. 연신 기침하면서도 제임스는 연초를 놓지 않았다.

"연초를 따라 핀다고 갈라하드가 되는 게 아닌데."

"...그래도 조금은 닮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임스가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귀여운 맛이 점점 사라지네-.'

자밋은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예?"

"하나 달라고."

"아. 예."

제임스가 연초를 내밀었다. 그에 자밋은 눈을 가득 구겼다.

"네가 피던 거 말고."

"아하, 여기 있습니다."

자밋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마나 연초의 매캐한 연기가 안을 채웠다.

"그냥 삼키지 말고 마나를 돌리면서 마셔."

"예? 아, 예."

제임스가 진지하게 연초를 응시했다. 자밋은 작게 혀를 찼다.

그때, 문이 열리고 부국장이 들어왔다. 제임스가 벌떡 일어나서 경례를 올렸다. 그러다 이마에 연초가 닿았는지 펄쩍 뛰었다.

혼자 지랄하는 제임스에 부국장이 얼굴을 가득 구겼다.

"이 새끼는 뭐야?"

"갈··· 아니, 제임스입니다."

"갈제임스?"

"······예."

갈제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국장은 잠시 혀를 차다가 상석에 가서 앉았다. 그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왜 그래요?"

"국장 새끼가-."

말하던 부국장이 제임스를 쳐다봤다. 이마가 벌겋게 된 제임스는 여전히 경례 중이었다. 부국장은 가벼이 무시했다.

"갈라하드가 약혼식을 한다는군. 공문이 내려왔어."

자밋의 연초가 떨어졌다. 부국장은 그를 슬쩍 보고 말을 이었다.

"국장의 발에 불똥이 떨어진 거지. 갈라하드가 살아남은 걸로도 부족해서 대공의 인정을 받고, 이제는 약혼식까지 하겠다니까."

부국장이 끌끌거리며 건조하게 웃었다. 자밋은 떨어진 연초를 주웠다.

"아무튼, 그 약혼식이 지나치게 화려할 것 같더군."

화려하다? 묘한 단어에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앰버르탄 백작이 참석을 희망했어."

의외였다. 갈라하드는 앰버르탄 가문에서 버려진 존재였다. 차라리 외부인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런 앰버르탄 백작이 직접 움직인다니-.

"황녀와 같이 간다는군."

이어진 부국장의 말에 자밋은 눈을 찡그렸다.

황녀가 뭔가 한 게 분명했다. 그 꽉 막힌 앰버르탄 백작을 움직이다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궁금했다.

"3 황자도 간다는군. 황녀와 대공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거기에 왕국 연합이랑 마탑들까지-."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인데 황녀, 3 황자, 왕국 연합과 마탑까지 모인다니-. 전부 알게 모르게 갈라하드와 얽힌 이들이었다.

황녀를 제외하면 다들 갈라하드가 아드리안나의 약혼자인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화려하네요."

"그래, 그에 똥줄 탄 국장이 갈라하드의 은퇴를 위한 팀을 꾸렸어."

부국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은퇴를 위한 팀이라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밋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누구를 은퇴시킨다고요?"

이번에는 부국장이 웃었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한참 웃은 자밋은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재밌는 약혼식이 되겠네요. 저 휴가 좀 다녀올게요."

"그래, 선물 전해주고."

부국장이 슬쩍 가방을 두드렸다. 자밋이 입꼬리를 올렸다.

선물이라기에 상당히 위험했지만, 갈라하드는 좋아할 것이다.

"아, 얘도 데리고 갈게요."

자밋이 제임스를 가리켰다.

"갈제임스? 영 쓸모없어 보이는데."

"짐은 들 수 있겠죠."

여전히 경례 중이던 갈제임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짐이 많습니까?"

자밋은 혼자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

매일 암투가 벌어지는 황실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능력이 필요했다.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눈,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않는 기개, 가족의 뒤통수에도 검을 꽂을 수 있는 비정함 같은 것들이 필요했다.

앰버르탄 백작은 궁정백이지만, 그 근본은 기사였다.

기사였기에, 위의 것들을 대부분 충족했다.

머리가 희게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게 곧 증거였다.

앰버르탄 백작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두려움을 잊은 철인이었다.

앰버르탄 백작은 제 눈앞에서 아들의 머리가 뽑혀도, 웃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필요하다면 먼저 목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런 앰버르탄 백작이 지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온 것도, 누가 자식을 두고 겁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버님."

아름다운 황녀가 환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누가 네 아버님이냐-.'

앰버르탄 백작은 몸을 벌벌 떨었다.

108화 압수수색

'분명 제법 잘 풀렸는데.'

대공의 약점은 '아드리안나'와 '사냥'이었다. 갈라하드는 두 개를 차례로 공략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제법 좋았다. 대공이 소리 내어 웃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갈라하드가 연초를 입에 물자, 아드리안나가 불을 붙여줬다.

애석하게도 대공에게 보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도끼가 그렇게 빠르다니.'

대공의 도끼가 갈라하드의 앞을 갈랐는데, 공간 마법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빨랐다.

도끼는 정확히 갈라하드의 입에 물려있던 연초만 가루로 만들었다. 경각심이 뒤늦게 올라왔다.

아드리안나가 책망하자, 대공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를 아드리안나가 따라가면서 상황이 끝났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별일 없었네."

길버튼의 물음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불이 작게 피어올랐다.

'대충 회복됐군.'

여전히 통증이 남아있었지만, 이제 슬슬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웬 덕분이었다. 마나통이 큰 그웬이 내내 무식하게 마나를 퍼부었고, 그 덕분에 회복이 상당히 빨랐다.

벌써 마나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후후, 대장에 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내 소문 말인가?"

"예, 대장이 고위 마족을 잡았다는 이야기에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길버튼이 눈썹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신난 기색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

"······반응이 미지근하십니다?"

길버튼이 씰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갈라하드는 연초를 깊게 마셨다.

"나는 주머니의 송곳일세. 그런 당연한 일에 기뻐할 정도로 낙천적이지 않다네. 더불어 송곳이 드러나면, 상당히 귀찮아지는 것도 알고."

길버튼이 안 그래도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떴다. 못생긴 사막여우 같은 얼굴이었다.

"뭐라는 겁니까?"

"내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세."

갈라하드는 앞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넘기며 대답했다.

"와- 재수 없다."

"길버튼 경, 밖으로 말했네."

"이런···. 실수를."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보고서를 떠올렸다.

'마법사의 피에도 마나가 있다.'

갈라하드가 푹 빠진 주제였다.

마나는 심장 주변에 저장됐다. 실제로 마법을 쓸 때도 심장 주변에서 마나를 압축하거나 움직였다.

그런데 마법사는 그 피에 마나가 있었다. 마법사의 피에도 마나가 있다면-.

'마족과 마법사의 차이는?'

단순히 피에 담긴 마나 농도의 차이뿐인가? 만약 그렇다면-.

'내 피는 무슨 맛일까.'

고통의 알을 품고, 마족의 피를 쉴 새 없이 마신 갈라하드였다. 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칼 좀 주겠나?"

"······예? 농담이었습니다."

"빨리."

길버튼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갈라하드의 재촉에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검을 받아 빙글- 돌렸다.

"좋은 검이군."

"살살 다루십쇼. 살살."

"자네, 애인이라서? 이런. 이 친구는 내가 더 좋다는데-."

"데미안, 망할 꼬맹이."

갈라하드는 끌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갈라하드의 팔뚝에 긴 상처가 깔끔하게 자리했다.

"뭐 하십니까!"

"확인할 게 있네. 자, 여기 애인 받게나."

농담에도 길버튼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갈라하드는 팔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진지하게 맛을 봤다.

그 맛은-.

'별로군.'

갈라하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들의 보고보다 농도가 짙었지만,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다.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축적되는 거라면, 더 짙어야 했다.

'고통의 알인가.'

갈라하드가 쓰는 마나는 대부분 고통의 알에서 나왔다. 고통의 알이 원인일 가능성이 컸다.

'마나를 피에 담는다.'

마나는 무형의 것이었다. 무형의 것을 유형인 피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마석이 괜히 비싼 게 아니었다. 마나를 품은 물질이라 부르는 게 값인 거였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마족의 피와 인간의 피의 차이를 알아야 했다.

단서는 이미 갈라하드에게 있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진.'

갈라하드는 팔목을 내려봤다. 큼지막하게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최초의 마법사가 남겼던 마법진을 고쳐 새긴 거였다. 이 마법진은 생명력을 사용하여 마나를 압축했다.

그 덕분에 고통의 알이 마족의 피에서 꽁쳤던 게 생명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딱히 상관없었다. 갈라하드한테 필요했던 건 고농도의 마나였지, 생명력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다르지. 놈이 생명력을 노린 거라면 그 이유가 있겠지.'

가령-.

'생명력이 고농도의 마나를 피에 담게 해준 거라면?'

제법 그럴듯한 가정이었다.

이제 연구할 건, 마족의 피에 담긴 생명력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여기에 있지.'

갈라하드는 아래를 내려봤다. 고통의 알은 여전히 조용했다.

아드리안나에게 호되게 당하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상태였다.

'딱 적당하군.'

갈라하드는 손목을 털었다. 고통의 알에서 생명력을 가져오도록 개량한 마법진이었다. 고통의 알이 정신을 잃은 지금이 기회였다.

'약간 무리지만.'

갈라하드의 상태가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지만, 마나를 움직이는 것쯤은 가능했다.

"혹시 이상을 보이면, 그웬 좀 불러주게."

"···예? 기절했다가 방금 일어나셨잖습니까. 또 뭔가 하시는 겁니까?"

"마법사는 눈을 뜨면 마법을 쓰는 법일세."

"아니-."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의문을 무시하고 마나를 움직였다.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견딜 만했다.

손목의 마법진이 격렬한 빛을 뿜어댔다. 마법진이 강제로 고통의 알을 두드렸다.

평소였으면 저항했겠지만, 지금 고통의 알은 의식이 없었다.

고통의 알이 열리며, 생명력이 가득 뿜어졌다. 마법진이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당겼다.

'오, 이건 또 마나와 다른 느낌이군.'

생명력은 꼭 살아있는 것처럼 날뛰었다. 갈라하드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왜 또 혼자-. 그웬!"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집중을 유지했다.

'피에 마나를 담는다.'

마나 압축에 집중했다. 무게에 심장이 뿌드득-거렸다. 개의치 않고 마나를 더 세게 눌렀다. 가진 마나를 최대한 압축했다. 마나를 천천히 밀었다.

여기부터는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마나를 밀어 넣고, 반응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실험에 가까웠다.

생명력과 마나가 심장 어림에서 만났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고통의 알이 아니었다. 갈라하드의 온전한 심장이었다.

압축한 마나와 뒤섞인 생명력이-.

'피에 섞였다.'

정답이었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진짜 생명력일 줄이야.'

생명력이 피의 용해도를 올린 느낌이었다. 농도 짙은 마나가 생명력을 매개체로 피에 섞였다.

심장이 가득 뻐근해졌지만-.

'고통의 알이 깨면 귀찮겠군.'

고통의 알이 기절한 지금이 기회였다. 갈라하드는 망설임 없이 마법진에 마나를 더 넣었다.

마법진이 격렬하게 빛났다. 마법진이 고통의 알을 누르고, 생명력을 거칠게 꺼냈다.

안쪽 아주 깊숙한 곳에 가득 있었다.

'많이도 꽁쳐뒀군.'

압수수색이었다.

****

대공은 아드리안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드리안나를 보는 건 대공에게 힘든 일이었다. 아드리안나가 그녀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적응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대공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대공은 내려간 아드리안나의 눈썹을 보지 못했다.

"약혼은 할 것이냐."

대공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드리안나가 작게 움찔거렸다.

"네 선택이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놈이 싫다면, 거절해라."

"그러면 제국은-."

"내가 제국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대공의 웃음기 섞인 물음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흔들렸다.

"내가 제국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대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국이 나를 두려워하는 거다."

대공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끄덕였다.

"다만, 제국과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북부는 마족으로도 벅차니까요."

아드리안나의 대답에 대공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렇게 무너질 북부라면, 내가 머리를 뽑겠다."

"안 됩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런 소리를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잔소리가 늘었군. 제 어미를 닮은 게 분명했다. 대공은 작게 혀를 찼다.

"그래서 하겠다는 거냐?"

"아무래도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약혼식까지는 하는 게······."

아드리안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대공이 눈썹을 구겼다.

"너답지 않게 핑계를 대는구나."

"······!"

아드리안나가 움찔거렸다. 대공은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장인어른-.]

뺀질거리는 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고, 까불거리는 게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지.'

아드리안나의 상대였으니, 누구도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굳이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그나마 놈이 낫다."

대공은 텁텁하게 말했다. 검이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까슬까슬했다.

아드리안나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대공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여자관계가 좀 복잡한 게 문제지만-.

'그건 치우면 된다.'

대공의 눈이 살벌하게 일렁였다.

아드리안나의 입이 천천히 열리려고 할 때-.

"아드리안나님!!"

멀리서 길버튼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나가 황급히 달려갔다. 대공은 그 빠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공은 혀를 차며 아드리안나를 따라갔다.

갈라하드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몸이 가득 떨렸고, 입에서 피가 연신 꿀렁였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족의 습격이라도 있었나?"

"아니, 대장이 눈을 뜨더니만, 해볼 게 있다고-."

"혼자 저랬다는 건가?"

떨떠름하게 끄덕이는 길버튼에 아드리안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침상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놈이었다. 그런 몸으로 눈 뜨자마자 저러고 있다니-.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대공은 허허 웃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대공도 도끼에 푹 빠졌을 때, 어깨가 빠져도 도끼를 휘둘렀으니까.

무릇 길은 가시밭길에 있는 법이었다.

'사내라면 저래야지.'

대공의 눈이 깊어졌다.

"어떻게 좀-."

"가만히 두거라."

대공의 명령에 다들 조용해졌다. 자신을 보는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에 대공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놈이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눈에서 빛이 일렁였다. 대공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쥐었다.

놈에게서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났기에-.

놈이 심장 주변에 뭔가 두고 있다는 것쯤은 대공도 이미 알고 있었다.

대공은 사람을 외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놈의 행동이 북부를 위하였기에, 그를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마족과 흡사했지만-.

'마족은 아니군.'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놈이 활짝 웃었다.

곧바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기절하는 순간까지 환하게 웃는 놈에-.

'경쟁 상대가 여인이 아니었군.'

대공은 혀를 찼다.

마법은 머리를 뽑을 수도 없거늘-.

****

'됐군.'

갈라하드는 손을 내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피의 마나 농도가 짙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힘이 넘쳤다.

'답은 생명력이었군.'

"왜 웃으십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도끼눈이었다.

'왜 도끼눈이지?'

갈라하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딱히 실수한 건 없었다.

"몸 상태가 안 좋으신데, 무리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책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이내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의 부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무리는 아니었네. 조금 위험한 정도였지. 그것도 그웬이 있으니까 충분하고."

"네! 제가 있어요!"

"그웬, 침 튀니까 조용히 말하게."

그웬이 황급히 입을 꾹 닫았다. 최근 며칠간 갈라하드를 치료하며 잔뜩 올라간 턱이 내려갔다.

아드리안나는 여전히 도끼눈이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닐세."

"입에서 피 토하시면서, 기절하셨습니다."

아드리안나의 정직한 지적에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너무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조급하다니-. 갈라하드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조급한 게 아닐세. 그웬?"

"건-강-. 네?!"

"마족의 왕을 어떻게 생각하나?"

어색하게 웃던 그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내 무표정이 된 그웬이 입을 무심하게 움직였다.

"그런 건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꼭 누군가 그웬의 입에서 빌려서 말한 것처럼.

"조급한 게 아닐세. 서두를 뿐."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드리안나의 도끼눈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회복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혼자 마법 훈련하시다가 피를 토하며 기절하는 건, 무리가 맞습니다."

또다시 정론이었다.

고통의 알이 기절해서 정신이 없을 때, 진행해야 확실하게 생명력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무리해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리는 맞군.'

갈라하드는 순순히 끄덕였다.

"알았네. 앞으로 주의하지."

"예."

아드리안나가 한발 물러섰다. 금세 도끼눈이 풀렸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웬 덕분에."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건- 강-."

그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등을 두드렸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봤다. 마나 농도가 짙어졌다.

마법사의 피에는 마나가 담겨 있다. 마족의 피에도 마나가 담겨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마나 농도와 생명력이었다.

그런데 만약 갈라하드의 마나 농도가 마족과 흡사할 정도로 짙어진다면-.

'나는 마족인가. 인간인가.'

애초에 마족이란 무엇인가. 또 인간은 무엇이고-.

잠시 고민하던 갈라하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건 해봐야 알겠군.'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때, 가만히 서 있는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예의 무표정이었지만, 묘하게 달싹거렸다.

"화장실은 저쪽일세."

"······예?"

"농담일세.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예."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썹이 굳었다.

'긴장했군.'

아드리안나의 숨소리가 조금 불규칙해졌다. 그 어깨가 평소보다 굳었다. 자세가 살짝 위축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아드리안나를 기다렸다.

잠시 숨을 크게 내쉰 아드리안나가 입술을 열었다.

"약혼식 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썹이 잔뜩 굳은 것을 보니, 상당히 진지한 듯했다.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초대장까지 다 보낸 것 같은데, 안 할 생각이었나?"

"······예?"

아드리안나가 토끼눈이 됐다.

"농담일세. 잘 생각했네. 아주 끝내주는 약혼식이 될 걸세. 꽃은 백합이 좋다고 했나?"

입을 벙끗거린 아드리안나가 크게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괜히 눈을 찡그렸다. 습관적으로 연초를 찾아 입에 물었다.

손가락을 튕기려는데, 움찔거리는 아드리안나가 보였다. 왜 또-.

아드리안나의 손에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음···.'

갈라하드는 대공이 갔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것 좀 도와주겠나?"

"예. 제가 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연초에 불붙이는 걸 좋아하는 건지-.

'특이 취향이군.'

뿌듯한 얼굴의 아드리안나에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연초를 깊게 빨았다.

그때, 고통의 알이 천천히 뛰었다. 그 박동이 전보다 미약했다. 두근? 고통의 알이 꿀렁거렸다. 뭔가 찾는 것처럼 연신 움직였다.

"응? 뭐라고? 없다고? 없다는대요!"

갈라하드가 턴 생명력을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아주 꼭꼭 숨겨놨더군. 잘 썼다고 전해주게."

"잘 쓰셨대!"

그웬이 갸웃거렸다. 이내 그웬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얘 우는 거 같은데요?"

그웬이 갈라하드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운다니? 뭐라고?"

그웬이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끄에에에에엥-."

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집 무너진 비버가 낼 법한 소리군.'

고통의 알이 연신 심장을 꾹꾹 눌렀다. 장난 그만 치고 내놓으라는 듯했다.

'이미 다 썼네만.'

끄에에에엥-.

109화 약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