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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11화 돌과 마법

"조금 놀란 표정이네?"

"솔직히 놀랐네, 마족일 줄은 몰랐거든."

여인의 혀가 조롱하듯 흔들렸다. 실시간으로 마나의 농도가 짙어졌다. 피부에서 끈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족이었다니. 최악이군.'

평온함을 가장했지만,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마나가 빠르게 돌았다.

다행인 건, 여인이 방심하고 있다는 거였다.

여인은 갈라하드가 마법사인 걸 알고 있었으니,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이 괜히 마법사의 천적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족은 온몸의 피가 마나였다. 그것도 아주 고농축의 마나.

그런 마족에게 일반적인 마법으론 타격을 줄 수 없다. 마족의 피보다 농도가 더 높은 마나를 담아야 했다. 마나 연초를 두 개 정도나 피워야 할 정도로-.

"사실 연합국의 프락치라 예상했다네. 그쪽 놈들도 제법 부지런하니까."

마나가 더욱 빠르게 돌았다. 회전을 이용한 압축이었다. 과도한 압축에 뿌드득- 소리가 났다. 마나 과부하 증상이었다. 묵직한 북부의 마나가 속을 가득 채웠다.

갈라하드는 슬쩍 뒤를 살폈다. 멍청하게 생긴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둘 중 살아나오는 놈을 잡으려고 할 것이다.

톡.

그때 갈라하드의 심장 부근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마나 압축이 한계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빌 거야?"

"빌면 봐줄 텐가?"

"생각해보고."

"그럼 빌어야지."

진짜 빌 줄은 몰랐는지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서 여인의 웃음이 짙어졌다.

"아하하! 멍청한 놈! 진짜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너 귀엽구나?"

여인의 혀가 갈라하드의 얼굴을 쓸었다. 그 표면에 뾰족한 돌기가 갈라하드의 볼을 긁었다.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갈라하드는 웃었다.

거리는 충분히 좁혀졌다. 여인은 멍청하게 웃고 있었고, 마나는 한계까지 압축한 상태였다.

'지금이군.'

갈라하드의 손을 타고 형체 없는 바람이 날아갔다.

"···어?"

찰나의 순간, 여인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여인의 뒤로 선이 길게 그어지고, 안가의 벽에 큼지막한 상처가 새겨졌다.

"이런- 목을 노렸는데."

툭, 여인의 오른팔이 바닥을 뒹굴었다.

회심의 수인데, 고작 팔이라니- 낭패군.

갈라하드는 작게 탄식했다.

그 찰나에 피하다니-. 마족이라 마나에 민감한 듯했다. 갈라하드는 방금 얻은 정보를 머리에 넣었다.

"아아아악!!! 감히 너 따위가·········!"

"자네가 먼저 거짓말하지 않았나. 나도 화가 났다네."

"죽어!"

여인이 하나 남은 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를 타고 응축된 무형의 기운이 쏘아졌다.

'마나 덩어리?'

순수한 마나 덩어리였다.

마나 덩어리라니! 갈라하드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갈라하드는 흥분을 애써 누르며,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 사이로 마나가 타오르며 그 부피를 더했다. 아쉬운 대로 최대한 압축했다.

앞으로 반투명한 방벽이 생겼다.

탕! 제법 농도가 짙은 방벽인데도, 마나 덩어리가 가벼이 부수고 어깨를 강타했다.

갈라하드는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등에서 격통이 올라왔다.

"끄윽-."

갈라하드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마나를 그대로 던지다니-. 이게 마족인가.'

꿀꺽, 입에 가득 고인 침을 삼켰다.

'재밌군.'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발화."

갈라하드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여인의 얼굴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근거리에서 터졌지만, 여인의 고개가 살짝 돌아간 게 전부였다.

'기본적인 마법은 안 통하는군.'

마족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아까처럼 마나를 한계까지 압축해야 했다.

적어도 마나 연초 두 개는 펴야 했는데, 여인이 그를 기다려줄 정도로 인내심이 깊어 보이진 않았다.

"미꾸라지 같은 놈! 죽어라!"

여인이 연달아 손을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묵직한 공격이 갈라하드에게 쏘아졌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이 사고를 가속했다. 압축 없는 마나론 저걸 아주 잠깐 저지하는 게 전부였다.

'크기를 줄여야겠군.'

갈라하드는 손을 비틀었다. 농도를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압축하고, 마법의 크기 자체도 줄였다.

편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효과를 보일 것이다. 대신 범위가 너무 작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를 쓰려면 기사의 검처럼, 정교하고 정확해야 했다.

작게 만든 방벽이 기운을 흘렸다. 갈라하드도 동시에 몸을 뒤틀었다.

부웅-. 압축된 바람에 고막이 터질 뻔했다.

뒤에 있던 벽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 단단한 벽에 큼지막한 흉터가 새겨졌다.

'실수하면 죽는다.'

갈라하드는 필사적으로 냉정을 유지했다. 마법사에게 흥분은 독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는 공격할 수가 없군. 범위가 너무 작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나 억제력이 줄어들기에 공격용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를 경계하는 지, 여인은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인은 거리를 유지하며 무형의 기운을 계속 쏘아댔다.

그걸 빗겨내는 것만으로도 마나가 뒤틀렸다. 짜릿함이 손끝을 타고 퍼졌다.

그때,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머리를 두들기는 돌에 여인이 짜증스레 눈썹을 구겼다.

마법은 가벼이 넘기면서 한낱 돌 따위에 짜증을 내다니-. 갈라하드는 마법이 돌보다 못한 듯하여 어이가 없었다.

'그렇군. 돌보다 못하면 돌이 되면 되지.'

갈라하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안가의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단단했다. 무형의 기운이 연신 두드리는데도 그저 금이 가는 게 전부였다.

덕분에 주먹만 한 돌이 제법 많이 굴러다녔다.

"발화."

갈라하드는 여인의 옆쪽을 겨누고 손가락을 튕겼다. 여인의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멍청한 놈-."

마법이 빗나갔다고 생각했는지, 여인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아래에서 튀긴 돌이 여인의 얼굴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것처럼 여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 새끼가-."

여인의 얼굴에 독기가 차올랐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연속으로 튕겼다. 폭발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원래라면 그녀에게 아무런 상처도 못 입히는 마법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악! 이 멍청한 마법사 놈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돌무더기에 여인의 얼굴에 짜증이 차올랐다.

'재밌군.'

마법의 새로운 활용에 갈라하드는 감탄을 터뜨렸다. 이게 마법의 묘미이자 매력이었다. 그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이크-, 가만히 좀 있게! 영점 조절 중이라네!"

갈라하드는 바닥을 구르며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을 뒹굴며 마법을 쓰다니-. 다른 마법사가 보면 기절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현장직인 갈라하드에게는 일상이었다.

날아간 돌이 이번에는 여인의 코에 적중했다. 순간 여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뚝한 코가 무너지며 코피가 줄줄 흘렀다. 여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구겨졌다. 안 그래도 못생겼던 얼굴이 더욱 흉해졌다.

얼굴에 주름 생긴다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죽일 거야! 죽인다-!"

여인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마구잡이로 뿜어져 나왔다.

그 기세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맙소사-.'

쾅! 쾅! 쾅! 쾅! 무형의 기운이 사방에서 터졌다. 보이지 않는 재해였다.

천장이 흔들리고 바닥이 갈라졌다. 사방에 굵은 선이 그어지고, 모든 게 부서졌다.

살짝이라도 섞이는 순간 끝이었다. 저건 방벽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긴장감에 털이 바짝 섰다.

너무 집중한 탓에 눈의 실핏줄이 잔뜩 터졌다.

여인의 손이 멈췄다. 여인에게도 다소 무리였는지 그 숨소리가 거칠었다.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사랑스러웠던 돌이 전부 가루가 되어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돌을 전부 부숴버리다니-. 정말 무식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제 네가 뭘 할 수 있지?"

평온함을 되찾은 여인이 히죽 웃었다. 그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갈라하드는 절망을 애써 누르며 생각했다.

'이제 내가 뭘 할 수 있지?'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저번 변태 영주 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아드리안나의 짜릿한 손도 떠올랐다.

아드리안나 쪽은 어떻게 재현할지 아직 감도 안 왔다. 그렇다면 변태 영주는-.

'아, 저게 있었군.'

갈라하드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다.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

'내가 마법에 상처를 입다니.'

마족 카른튤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법에 팔을 잃다니, 다른 마족의 귀에 들어간다면 평생 놀림 받을 만한 일이었다.

'죽을 뻔했어.'

순간의 예감이 아니었다면 목이 날아갈 뻔했다.

놈은 마법사치고 굉장히 까다로웠다. 팔을 자른 것도, 괴상한 마법으로 돌을 튀겨 공격하는 것도 전부 예상 밖이었다.

다만, 놈은 마법사고 여인은 마족이었다.

놈이 어떤 발악을 해도,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카른튤라는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자른 놈이었다.

카른튤라는 거리를 유지하며, 놈을 차근차근 밟았다.

이윽고 놈이 휘청였다. 그 꼴이 형편없었다. 먼지와 진흙 범벅에 뚫리거나 긁힌 자국이 곳곳에 가득했다. 쓰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슬슬 질리네."

놈의 방식이 괴상했기에 고전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팔을 잘린 것도 그저 방심의 산물이었다.

가벼이 손을 휘둘렀지만, 놈은 피하지 못했다. 놈이 뒤로 볼썽사납게 엎어졌다.

엎어진 놈이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힘이 부족한지 다시 쓰러졌다.

풍기는 향긋한 피 냄새에 카른튤라의 정신이 핑- 돌았다.

"제법이야. 마법사인데,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대단해."

진심이었다. 괴상한 방식이라고 해도, 마법사로서 카른튤라를 이렇게 귀찮게 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엎어진 사내가 피를 쿨럭였다. 금방이라도 죽을 듯했다.

'끝이네.'

카른튤라는 그제야 천천히 다가갔다.

카른튤라는 꿈틀거리는 사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놈을 어디부터 먹을까. 머리부터? 아니면 다리부터?

"아니야, 이 정도로 죽으면 어떻게 해? 조금만 더 버텨봐. 살아있을 때 먹어야 더 맛있다고."

"미안하지만, 내 명줄이 제법 질겨서."

사내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놈과 눈이 마주친 카른튤라는 괴리감을 느꼈다.

'저 눈-.'

분명 수세에 몰렸는데도 놈의 눈은 여전히 차분했다.

놈이 손을 들었다. 그 아래로 큼지막한 돌이 보였다. 언제 갈았는지 칼처럼 날카로운 돌이었다.

'이런 수를 숨겨뒀다니-.'

귀엽네.

카른튤라는 피식 웃으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멍청한 놈-. 똑같은 수를 몇 번이나 쓰는 거야?"

콰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뜨거운 열기가 카른튤라의 몸을 간질였다.

그래 봤자 고작 돌이었다. 카른튤라의 팔을 뚫지 못할 것이다.

머리만 날아가지 않으면 카른튤라의 승리였다.

한참 비웃던 카른튤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열기만 느껴질 뿐 어떤 통증도 없었다.

어쩌면 그 눈에 괜히 지레 겁먹은 걸 지도 모른다. 작게 혀를 차며 손을 내렸다.

그런데 사내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래쪽에 있었는데, 그 몸으로 도망이라도 친 건가-. 도망칠 수 있을 줄 알고?

그때,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카른튤라는 제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카른튤라가 있던 자리에 사내가 있었다.

'저 몸으로 어떻게 저리 빨리 움직였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사내의 등에 깊게 새겨진 화상자국이 답이었다.

'······폭발을 제 등에 터뜨리고 그 반발력으로?'

카른튤라에게 돌을 날릴 때 쓰던 방법을 자기한테 사용한 거였다.

미친-. 끔찍한 지독함에 카른튤라는 욕을 중얼거렸다.

사내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아까 잘린 카른튤라의 팔이었다.

"이런 취미는 없네만-."

놈이 잘린 팔을 높이 들더니, 그를 쭉쭉 짰다.

잘린 단면에서 흐른 붉은 피가 놈을 흠뻑 적셨다.

마족의 피를 마시는 마법사라니-.

기괴한 모습에 카른튤라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피범벅이 된 사내가 카른튤라를 응시했다.

줄곧 차분하던 사내의 눈에 감정이 떠올랐다.

그건-.

꾹꾹 눌러 담은 희열이었다.

선명한 욕망에 카른튤라는 한 걸음 물러섰다.

뒤늦게 자신이 물러섰다는 걸 눈치챈 카른튤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족인 자신이 마법사에게 겁을 먹다니-.

그때, 사내가 손을 휘둘렀다. 손에 묻은 피가 길게 뿌려졌다.

순간 세상이 높아졌다.

'······어?'

아니, 카른튤라의 눈높이가 낮아졌다.

뒤늦게 통증이 올라왔다. 시선을 내려보니 발목 아래로 싹둑 잘려있었다. 깔끔하게-.

"······이게 무슨."

카른튤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카른튤라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고개를 들었다.

"아, 역시 되는군. 저번에 썼던 방식인데, 자네의 피가 농도가 높으니 오히려 더 쉽군."

여태껏 평온했던 사내의 목소리가 위아래로 삐쭉거렸다. 그 목소리에 사무친 기쁨이 가득했다.

사내가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그 걸음마다 혼자 중얼거리며 감탄을 터뜨리는 게 기괴했다.

카른튤라는 다급하게 손을 휘둘렀다.

사내가 피에 젖은 손가락을 튕겼다.

왼팔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오, 농도가 같은 마법과 마나가 만나면, 마법이 우세하군. 놀라워."

어느새 사내가 바로 앞에 서서 내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아까와 달리 차분하지 않았다.

"저번 놈처럼 금방 포기하지 말고 부디 힘껏 버텨주게. 자네는 진짜 마족 아닌가."

그렇지?

사내의 목소리는 아주 정중했다.

진심으로 부탁하는 것처럼-.

"이게 무슨······."

카른튤라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사내의 손이 그 입을 막았다.

"쉿, 집중해야 하니. 입 좀 닫아주게.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

'마족의 피를 마시면 마나 농도가 순간적으로 올라가고. 뒤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이 오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이거 최근에 좋은 일만 가득하군.'

갈라하드는 방금 알아낸 내용을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아까 그놈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 검에 선명한 오라가 깃들어 있었다. 어설프다고 해도 놈도 정보국 요원이었다.

놈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갈라하드가 이길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럴 만했다. 마법사와 마족이었으니까.

그 마법사가 갈라하드였을 뿐.

해가 어스름히 떠오르고 있었다. 등이 시원했다. 아니, 차가웠다. 상쾌하군.

"할 건가?"

사내의 표정에 고민이 깃들었다. 그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이내 놈이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뭐, 제 잘못인데요."

좋은 놈이군. 오래 못 살겠어. 갈라하드는 텁텁하게 중얼거렸다.

"로즈는 안가를 습격한 마족에게 죽은 거네."

갈라하드는 챙겨뒀던 마족의 머리를 던졌다.

툭! 데구르르르-. 사내가 떫은 얼굴로 제 앞에 굴러온 마족의 머리를 챙겼다.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네. 그를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그 입에서 피가 가득 튀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피를 너무 흘렸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놈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은혜라-. 멍청한 놈이군. 이건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저는 핸섬입니다."

"요원 이름인가?"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래 보였네. 나는 갈라하드라네."

핸섬이 눈을 찡그렸다. 원래 요원 이름을 밝히면, 마주 요원 이름을 말하는 게 예의였다. 회사원이 명함을 교환하는 것과 비슷했다. 갈라하드는 애써 그 눈을 외면했다.

"시간이 너무 흘렀군. 가보겠네, 회식 중에 잠깐 나온 거라서."

핸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천천히 걸었다.

갈라하드는 핸섬이 안 보이고 나서야 손에 모아뒀던 마나를 흐트러뜨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술집에 도착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은 모양이었다.

앞에 익숙한 형체가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입을 벌리고 눈을 받아먹고 있었다.

갈라하드는 비틀거리며 데미안 옆에 앉았다. 온몸이 고통투성이였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벽에 기댔을 때는 작게 비명이 터질 정도였다.

"제가 죽는다고 말했잖아요."

데미안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갈라하드는 기침하듯 웃었다.

"고작 이 정도로 안 죽네. 마음껏 먹었나?"

"네."

"다행이군. 계산은 누가 했나?"

"눈 찢어진 아저씨요."

"길버튼? 하, 또 투덜거리겠군."

"개새끼, 두고 보자고 하던데요."

갈라하드가 기침하듯 웃었다. 그 입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갈라하드의 신음이 적막을 깼다.

"죽여드릴까요?"

데미안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갈라하드는 그게 데미안의 친절이라는 걸 알았다.

"됐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래요. 그럼."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문이 거칠게 열렸다.

"끄아아아아악! 뭐야!"

후크 선장이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나. 자네는 부자 되기 글렀군. 따뜻한 스튜 하나 부탁하네."

"저는 고기요."

후크 선장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옵쇼!"

후크 선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폈다.

소년은 검이 아닌 손을 내밀었다.

갈라하드는 기침하듯 웃으며 그를 잡았다.

"조금만 먹게. 바로 북부로 가야 하니까."

소년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슬픔이었다.

12화 번개

"······도대체 뭐 하다가 오신 겁니까?"

갈라하드의 처참한 몰골에 길버튼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네."

"이런저런 일이라니-. 치료는 했습니까?"

"괜찮네. 마법사는 튼튼하거든. 이 정도면 툭툭 털면 낫네. ···비유였네, 비유. 손 치우게."

"도와주려고 했습니다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게."

길버튼은 입맛을 다시며 맞은편에 앉았다. 갈라하드가 다 식은 스튜를 밀었다.

"여기가 스튜를 아주 잘하네. 먹어보게나."

"저는 아침을 안 먹습니다."

"그러면 데미안한테 주게."

데미안이 냉큼 그릇을 가져갔다. 길버튼은 작게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헤르문한테 습격이라도 당했습니까?"

"헤르문이 누군가?"

"덩치 크고 쇠도끼 들고 다니는 무식한 놈 있습니다."

"그럼 아닐세."

마족 피를 마신 덕분에 몸 상태가 최악은 아니었다.

마족 피는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았지만, 출혈은 막았다. 상처에 알보칠을 바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문제는 마나가 들끓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족의 피로 얻은 짙은 농도의 마나가 자꾸만 안에서 날뛰었다.

목줄 푼 맹견이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집중을 잠시라도 잃으면 마나가 터질 것만 같았다.

갈라하드는 어떻게든 마나의 목줄을 채우려 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쉽지 않았다. 그저 누르는 게 전부였다.

"그건 뭡니까?"

"몸에 좋은 걸세."

갈라하드는 수통을 품에 넣었다. 그러자 길버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하는 듯했다.

그때, 술집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왜 아침부터 술집에서 만나자···. 뭐야! 꼴이 왜 그래요!"

그웬이 냅다 달려와 갈라하드를 붙잡았다. 그 거리감이 살짝 당혹스러웠다.

"왜··· 왜 이래요? 누구한테 맞았어요?! 누구야!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사람을 이렇게 때리다니!"

"내가 이겼으니 진정하게. 그리고 재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내라고 숨길 필요 없어요! 누구나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저도 다른 하녀들이 청소 못 하는 짐 덩어리라고 괴롭힌다고요!"

"그건 괴롭힘이 아니라, 사실 아닌가?"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이런 끔찍한 짓을 하다니!"

"자네, 지금 재수 없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상처를 살피던 그웬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흐윽- 잠깐만 기다려요. 닦을 수건 가져올 테니까."

전혀 믿지 않는 듯했다. 그웬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갈라하드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맞고 다닌다니-. 그렇게 보이나?

"내가 맞고 다닐 관상인가?"

"허약하게 생기긴 했습니다."

"자네들이 괴상할 정도로 두꺼운 거라네. 중부에서는 나도 한 덩치 했다네."

"아, 그렇습니까."

뒤이어 그웬이 흠뻑 젖은 천을 들고나왔다. 됐다니까 기어코 붙어서 갈라하드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네만."

"봉급이 열 배니까. 열 배 열심히 일해야죠."

"그것도 그렇군. 더 열심히 닦게나."

"근데 이 아이는 누구예요?"

그웬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물었다.

"아, 자네 후임 데미안일세."

"······내 후임! 진짜요? 후임 가지는 게 꿈이었는데!"

데미안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웬의 눈이 반짝였다. 선물이라도 받은 기색이었다.

"너도 혹시 고아니?"

"아니요. 어머니 계시는데요. 창부세요."

"어머, 다행이구나."

뒤이어 톰도 도착했다.

"이쪽도 내 후임이에요?"

"일병! 톰! 입니다!"

"우와아아! 후임이 둘! 드디어 나도 후임이 생겼다!"

양쪽에 톰과 데미안을 앉힌 그웬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갈라하드는 옆에서 들리는 어지러운 대화를 애써 흘리며, 마나에 집중했다. 여전히 마나는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한 번 쓰는 게 낫겠군.'

들끓는 마나를 한 번 털어내는 게 나을 듯했다. 다만, 힘 조절이 안 되니 성을 벗어나서 써야 했다.

슬슬 움직여야 했다.

시간은 갈라하드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슬슬 부인을 보러 가야겠군."

다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내성 문 앞에 병사들이 제법 모여있었다.

아무래도 특무대가 궁금한 듯했다. 특무대를 마주한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저거 하녀 아니야? 전선에 하녀를 끌고 가는 건가? 미쳤군."

"소대를 잡아먹는 데미안이야. 저놈이 먹은 소대만 열 개라던데-."

"저게 그 마법사라는 대장인가? 어디서 이미 맞고 왔나 보군."

주변에서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

갈라하드는 슬쩍 머리를 매만졌다. 손가락에 스파크가 튀었다. 주체 되지 않는 마나에 짜증이 절로 났다. 그를 애써 누르며 대원을 살폈다.

괜히 이런 걸로 시작부터 의기소침한 건 좋지 않은데-.

"저 하녀래요! 하녀! 역시 군인으로는 안 보이나 봐요! 왜냐면 하녀니까!"

하녀라고 좋아하는 그웬과 아무 생각 없는 데미안-.

'전혀 타격이 없군.'

톰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지만, 그건 딱히 상관없었다.

"이목이 모였으니, 멋진 마법을 보여줘야겠군."

"여기는 중부가 아닙니다. 마법에 대한 인식은 마족의 오물 정도입니다."

"의식이 좋지 않으면 그를 개선해야지."

길버튼의 만류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마나를 털어내고 싶은데-.

"감히 어떤 버러지가 아드리안나님을 탐하는 거냐!!"

그때, 앞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얼마나 좋은지 귀에 쏙쏙 박혔다.

놀란 병사들이 황급히 갈라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추위를 안 느끼는지 중요 부위만 털 옷으로 겨우 가린 상태였다.

온전히 드러난 거대한 근육질의 몸에 흉터가 가득했다. 웬만한 사람만 한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자루까지 철이었다.

갈라하드를 향하는 놈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내가 맞혀보겠네. 자네가 말한 헤르문이지?"

길버튼이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예, 헤르문입니다. 1대대의 인물인데, 아드리안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과합니다. 한 번은 아드리안나님을 희롱했던 놈의 혀를 뽑은 적도 있습니다."

혀를 뽑다니 끔찍하군.

"근데 저 사내가 왜 나를 노려보지?"

"몰라서 묻습니까?"

"아, 내가 결혼할 사이라서? 추악한 질투군."

"너무 크게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노오오오옴!"

헤르문이란 놈이 도끼로 땅을 내려쳤다. 쿠웅! 꼭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굉음이 들렸다.

"힘이 대단하군."

"지금 감탄할 때입니까?"

"먼저 남을 인정할 줄 알아야 자신도 인정받는 걸세."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여유를 꾸미고 있었지만,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헤르문은 1대대에서 인정 받은 실력자입니다."

콰아앙! 헤르문의 도끼가 다시금 바닥을 내리쳤다. 병사들 몇 명이 중심을 못 잡고 쓰러졌다. 말도 안 되는 괴력이었다. 저놈은 마족의 힘줄을 먹었나?

"길버튼! 비켜라! 제국 놈을 지키는 것이냐!"

"대공 저하의 명령이다."

"상관없다! 내가 책임질 테니 비켜라!"

길버튼이 갈라하드를 돌아봤다. 길버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자네, 지금 고민하는 건가?"

"음, 아닙니다."

"됐네, 마침 잘됐군. 마렵던 참이었네."

"위험합니다."

길버튼의 진지한 만류에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위험하다니-. 내가? 저 맨몸의 원시인을 상대로?

갈라하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전부터 의문이었는데, 여기 놈들은 왜 마법사를 무시하는 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마족이 마법사를 무시하는 건 당연했다. 그 상성이 천적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근데 여기는 술집의 건달들까지 마법사를 무시했다. 마법사를 혐오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무시하는 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중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야, 마법사는 전투에 약하지 않습니까."

"자네들은 도대체 어떤 마법사를 본 거지? 하긴 북부까지 기어들어 올 마법사라면 그 수준이 보이는군."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크흠."

"나는 기어들어 온 게 아니라 끌려온 걸세."

"예,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영주를 상대로도 고전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마족이니까. 마족은 마법과 상성이 좋지 않네."

쾅!쾅!쾅! 힘을 과시하려는 건지 헤르문이란 놈이 연신 도끼로 바닥을 두들겼다. 그에 맞춰서 병사들이 야유와 함성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내가 마법사 인식 개선에 앞장서야겠군. 저 무지몽매한 놈들에게 마법사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겠네."

"괜찮겠습니까?"

"나 대장일세. 원래 대장이 가장 강한 거 모르나?"

"···몸 상태가 엉망이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출혈 같은 것들은 멈췄지만, 흘린 피가 많아 머리가 어지럽고, 마나는 날뛰고 있었다. 다만-.

"손가락 하나만 있어도 쇠도끼를 든 헐벗은 원시인 정도는 이길 수 있네."

앞으로 나선 갈라하드는 원시인을 천천히 살폈다.

오러를 두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죽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깡인지 모르겠군.'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작게 튕겼다. 스파크가 거칠게 튀었다.

마나가 조절이 되지 않았다. 마족 피를 마신 까닭에 자꾸만 날뛰었다.

'이거 힘 조절이 안 되겠는데-.'

갈라하드는 제 가슴을 두드리는 원시인을 응시하며 끄덕였다.

한 번 시원하게 털어낼 생각이었다.

'눈이 그쳤군.'

갈라하드는 하늘을 올려봤다.

눈이 그쳤는데, 하늘은 기다란 먹구름 가득했다.

잔뜩 쏠린 시선들과 조금 움츠러든 대원들-.

'아주 화려한 걸로 해야겠어.'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탁탁 튕겼다.

친절하게 기다려주는 원시인 덕분에, 오랜만에 주문까지 읊었다.

***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몸 상태 안 좋으신데!"

"헤르문이라면 그분 아니십니까-. 마족이랑 힘 대결에서 이겼다는······."

뒤에서 쏟아지는 걱정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맞는 말이었다. 헤르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1대대라는 것만으로도 북부에서는 능력의 증거였다.

그에 반해 갈라하드는 반쪽짜리 마물인 영주하고도 고전했었다.

더불어 갈라하드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밤중에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곳곳에 상처가 있었고 등에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리는 게 맞았지만, 갈라하드가 나선다니 어쩌겠나.

"크하하하! 제국 놈이 겁을 상실했구나!"

헤르문의 입에서 거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장 목을 칠 생각에 신난 듯했다.

""망나니! 망나니!""

주변에서 연호가 연신 쏟아졌다. 모두가 헤르문이 갈라하드의 목을 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좋지 않군.'

안 그래도 시작부터 웃음거리가 된 특무대였다. 여기서 대장이 패배하는 모습까지 보이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전선에서는 평판이 상당히 중요했다. 갈라하드가 패배한다면, 특무대는 시작부터 망가질 수도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 쏟아지는 야유와 우려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얼굴이 평소와 달리 조금 구겨져 있었다. 예의 여유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짜증이 작게 서려 있었다.

"나 1대대 헤르문! 감히 아드리안나님의 짝이라 까분는 제국 놈에게 결투를 청한다!"

'결투라니 머리를 썼군-.'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왜 갈라하드와 길버튼의 대화를 얌전히 기다렸나 싶었더니, 저걸 노린 듯했다.

북부에서 결투는 신성한 것이었다. 누구든 신청할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불이익도 줄 수 없었다.

"결투-! 결투!"

사방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어서 저주받은 더러운 마법사의 목을 뽑으라며 종용했다. 사방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졌다.

그때, 갈라하드가 오른손을 들었다. 시끄럽던 야유가 점점 잠잠해졌다.

갈라하드에게는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질문 좀 해도 되겠나?"

"······곧 죽을 놈이 무슨 질문! 얌전히 목이나 내밀 거라!"

"해도 된다는 거군. 자, 묻겠네. 자네는 마족인가?"

길버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북부에서 마족이냐고 묻다니-. 이는 부모나 아내를 모욕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욕이었다.

그 상상도 못 한 질문에 작게 야유하던 병사들까지 조용해졌다.

"어떻게 저리 끔찍한 말을-!"

걱정하던 그웬조차 놀라서 더듬거렸다.

빠드득, 빠드득-. 헤르문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끔찍한 소리를 자아냈다. 이거 일 났군, 길버튼은 칼자루를 잡았다.

정 안되면 난입해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겠지만, 아드리안나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반응을 보니 아닌가 보군. 마족도 아니야, 가죽도 안 둘렀어, 오러도 없어-. 도대체 무슨 깡으로 덤비는 거지?"

"······노오오옴!!"

헤르문이 자세를 낮췄다. 놈의 굵은 다리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뿌드득 소리를 냈다. 땅이 작게 파였다.

그 짙은 살기가 주변까지 퍼졌다. 병사들의 안색이 질릴 정도였다.

헤르문이 땅을 박찼다. 쾅! 굉음과 함께 헤르문이 밟고 있던 땅이 움푹 파이고, 헤르문의 신형이 쏘아졌다.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힘 조절이 안 되네. 잘 버텨 보게."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주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한 줄기였던 스파크가 손가락 사이로 튕기더니, 크기를 급격하게 부풀렸다.

그건 정교하지 않았다. 갈라하드도 다루기 힘든 듯 눈을 찡그렸다. 점점 퍼지던 스파크가 더욱 크기를 부풀리더니 이내 갈라하드의 팔 전체에 감돌았다.

꼭 갈라하드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다. 갈라하드의 피부에 검은 줄이 마구잡이로 새겨졌다.

갈라하드의 입이 열렸다. 그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천벌."

갈라하드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귀에 똑똑히 들렸다. 갈라하드를 감싸던 스파크가 위쪽으로 튕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쿵!

어느새,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헤르문의 도끼가 높이 올라갔다. 그 도끼를 든 팔에 근육이 굵직하게 올라왔다. 헤르문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네놈의 목을 뽑아 그 피로 몸을 적시겠다!"

헤르문이 갈라하드를 향해 도끼를 내려쳤다. 갈라하드가 반으로 쪼개질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 같았다.

그때, 하늘이 작게 진동했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먹구름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스파크가 튀었다.

번개였다. 하늘을 찢어발긴 번개가 그 영역을 빠르게 넓혔다.

번개가 땅에 도달하는 건 찰나였다.

순간적으로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다. 도끼를 휘두르며 웃는 헤르문, 그 앞에서 짜증스러운 표정의 갈라하드, 경악한 병사들까지-.

번개가 헤르문의 도끼를 타고 흘렀다. 헤르문의 모습이 하얀 빛무리에 가려졌다.

정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콰르르르릉!

소리는 뒤늦게 들렸다.

번개는 순간이지만, 지독하도록 길게 느껴졌다.

이내 선명하던 세상이 다시 느려지고 어두워졌다.

툭.

도끼가 바닥에 뒹굴었다.

헤르문은 선 채로 까맣게 타 있었다.

머리는 바짝 타서 삐쭉 서 있었고, 눈은 흰자위로 가득했으며, 그 피부에 검은 자국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온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회색 연기가 가득 올라왔다.

"아-."

작게 소리를 낸 헤르문이 그대로 엎어졌다.

어떤 야유나 환호도 없었다.

그저 무거운 정적만이 자리했다.

그 헤르문이 닿지조차 못하고 쓰러졌다니-.

"후- 시원하군. 헤르문이라고 했나? 고맙네. 덕분에 좀 홀가분해졌다네."

예의 여유로움을 되찾은 갈라하드가 미소를 지으며 헤르문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일어나라는 듯-.

그 묘한 괴리감에 병사들이 흠칫 놀라 한 걸음씩 물러섰다.

"······마법사가 원래 저렇게 강합니까?"

톰의 물음에 길버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괜히 길버튼이 마법사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마법사가 강한 게 아니었다. 갈라하드가 괴물인 거였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길버튼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잔뜩 신났네.'

정보국 요원 자밋은 자꾸 들썩이는 신입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정보국에 들어온 게 그렇게 좋아요?"

"···네? 네! 엄청 좋습니다!"

우렁찬 대답에 자밋은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저럴 때가 있었지. 그와 마주쳤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나를 다시 마주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나.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처음에는 웬 꼬맹이가 까부나 싶었는데, 그 나름대로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정보국에서 그가 맡은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기도 했고.

"저는 갈라하드님 같은 요원이 될 겁니다!"

그때, 신입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밋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감히 갈라하드를?'

[자밋, 성질 좀 죽이게나.]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농담에 자밋은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병아리가 뭘 알겠는가. 그와 같은 요원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감도 안 올 것이다.

"···그 이름은 웬만해서 입에 안 담는 게 좋을 거예요."

"예?"

찔끔 놀란 신입의 얼굴에 자밋은 쓰게 웃었다.

너무 겁을 줬나.

"······그냥 제 우상이라서-. 죄송합니다."

우상이라, 그가 들으면 웃겠군. 자밋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신입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밋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차가 뜨거워서. 나도 모르게. 자, 이제 요원 이름을 만들어 줄게요. 제임스라 그랬나. 제임스의 요원 이름은-."

신입이 침을 꿀꺽 삼켰다. 꼭 뼈다귀를 앞에 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자밋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갈라하드예요."

정말이지, 신입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니까

13화 전선

'정보국에 마족이 들어왔다-.'

갈라하드는 그 쌉싸름한 문장을 입에서 굴렸다.

단순하게 보면 북부의 안가 하나에 마족이 들어온 거였지만-.

'그리 쉽게 풀릴 리가.'

항상 최악을 상정하며 움직여라-. 갈라하드의 선임 중 하나가 해준 명언이었다. 정작 그 선임은 그 말을 지키지 않아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북부의 정보가 언제부터 섞인 거지?'

대공과 제국의 마찰에 마족이 뭔가를 했을 수도 있었다.

제국이 받는 정보는 정보국에서 생산하는 것들이니까.

그를 추적하려면-.

'정보국의 북부 정보와 실제를 비교해서 추적해야 겠군.'

장난질을 쳤다면 꼬리가 남을 수밖에 없었다.

톡톡, 갈라하드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두들겼다.

"근데 굳이 왜 마부석에 있습니까. 좁습니다."

"안에서는 연초를 못 피우지 않나."

"왜 못 피웁니까? 올 때는 잘만 피셨잖습니까."

"지금은 데미안이 있잖나."

"술집에서는 잘만 피우지 않았습니까?"

"술집과 밀폐된 마차가 같나?"

길버튼이 눈썹을 구겼다.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끗거리다 닫았다.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연초를 털었다.

때마침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존나게 춥군."

이 정도면 칼바람을 넘어선 도끼 바람이었다. 출발 전에 코트를 구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체온 유지에 마나를 다 쓸뻔했다.

"북부잖습니까."

길버튼이 고삐를 튕겼다. 네 필의 말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말발굽 아래로 소복하게 쌓인 눈이 거칠게 튀었다.

주변은 온통 흰색과 검은색 투성이였다. 흰색은 눈이었고, 검은색은 그 아래에 깔린 땅이었다.

"땅이 검군?"

"마족의 피가 닿으면 검게 물듭니다."

"음, 마족의 피에 담긴 마나와 관련이 있나?"

"뭐라는 겁니까. 제국어로 말씀하십쇼."

"자네는 참 무식하군. 좋은 기사야."

길버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갈라하드는 다시금 제 생각에 빠져들었다.

마족과 마나, 아드리안나의 마나를 태우는 성질-.

둘 다 미치도록 매력적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길버튼의 물음에 상념이 깨졌다.

"어떻게라니?"

"전선에 가면 반발이 더 심할 겁니다."

"천재에게 반발은 숙명일세."

길버튼이 눈을 가득 구겼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었다.

일단, 전선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아드리안나를 연구해야지.'

아드리안나의 중요성에 비하면, 마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드리안나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생각지 못한 풍경이 갈라하드를 반겼다.

"전선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예, 저기가 전선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령부지만."

"저게 어딜 봐서 전선인가. 도시 아닌가?"

셀 수 없이 많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탑 같은 것들도 즐비했다.

오히려 대공의 성보다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았다. 저게 어디를 봐서 전선이라는 말인가.

"전선에 대부분의 병력이 있으니, 그를 따라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것처럼-."

길버튼이 고삐를 틀었다. 말이 다시금 투레질했다.

"발전했습니다."

짜잔, 저렇게 발전했습니다-로 끝내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전선 주변이면 위험하지 않나?"

"어차피 저기 밀리면, 북부의 어디에 있건 위험합니다."

음,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래도 실제로 그게 되나?

그때, 병사 무리가 보였다. 제일 앞에 있는 놈의 복장이 특이했다. 걸친 코트의 가죽이 두꺼웠는데, 늑대의 것도 곰의 것도 아니었다.

"마물 가죽으로 만든 코트입니다."

"마물?"

"예, 마물은 마족 중 하나입니다. 맹수의 형태에 지성이 없는 마족인데, 그 가죽이 두꺼워 마족의 공격도 막을 수 있어서 전선에서는 코트나 방어구로 이용합니다."

마물의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라니-. 마법사인 갈라하드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길버튼을 본 병사가 큰 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그 얼굴에 존경심이 깃들었다.

"이쪽 분은···."

병사가 갈라하드로 시선을 돌렸다.

"갈라하드라고 하네. 아드리안나의 남편 될 사람이지."

병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꼭 제 부모의 욕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병사가 뒤로 달려가서 뭐라 소리쳤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손가락을 왜 푸십니까?"

"경험해보니 백 마디 말보다 번개 한 번의 효과가 더 좋더군."

"······절대 안 됩니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할 때쯤 마차가 통과됐다.

성에 들어선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술집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 앞에서 주먹 다툼하는 놈들도 보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동전을 던지며 내기했다. 한쪽에서는 소매치기라며 소리 지르며 쫓아갔다.

법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법을 죽였거나.

그때, 말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말에서 튄 침이 길가에 있는 사내에게 묻었다.

"어떤 개새끼가-!"

길버튼은 냅다 달려드는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발로 걷어찼다.

사내가 반쯤 녹은 눈에 데굴데굴 굴렀다. 잠시 뒤에 일어난 사내가 옷을 털고 제 갈 길을 갔다.

"북부 전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길버튼이 피가 묻은 부츠를 털며 웃었다.

***

갈라하드와 길버튼은 그웬과 데미안, 톰을 길버튼의 집에 넣어두고, 사령부로 향했다.

사령부에 평소와 달리 병사와 마차가 많았다. 각 대대의 마차들까지 보였다.

각 대대의 대장들이 모였다는 증거였다.

"대회의 중인가 봅니다."

"대회의?"

"대장급이 모이는 회의입니다. 정기회의 기간은 아닐 텐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봅니다."

"지각이었군."

갈라하드의 농담에 길버튼은 피식 웃었다.

갈라하드는 입구에서 바로 막혔다.

"허가받지 않은 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털이 복슬복슬한 병사가 갈라하드를 눈짓하며 말했다. 갈라하드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이유였다.

사령부에서 아직 보고를 못 받았을 리 없었다. 뻔한 훼방이었다. 유치하게 나오는군-.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나름대로 효과적인 훼방이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갈라하드였다는 것이다.

예상대로 갈라하드는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갈라하드가 나서면 일이 커질 게 분명다. 그에 길버튼은 먼저 나섰다.

"이분은 특무대의 대장 갈라하드님이시다. 이대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면 네가 책임질 건가?"

"초대 목록에 갈라하드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이름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병사의 대답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길버튼은 슬쩍 칼자루를 잡았다. 갈라하드가 그를 막았다.

"됐네, 자네는 훌륭한 기사야. 검만 쓰게, 머리는 내가 쓰겠네."

갈라하드가 앞으로 나섰다.

"나를 모른다고? 자네, 내 이름을 들었을 때, 미간을 찡그리지 않았나?"

병사가 입을 꾹 닫고 시선을 피했다.

"음, 위에서 명령이라도 받았나? 갈라하드라는 인물을 통과시켜 주지 말라고."

"그런 적 없습니다."

"자네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군."

갈라하드가 연초를 톡톡 털었다. 떨어진 재가 소복하게 쌓인 눈을 살짝 녹였다.

"이리 오너라-!"

갈라하드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뭔가를 내밀었다. 대공의 문장이 박힌 문서였다. 갈라하드의 손가락이 '차출 임명서' 부분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었다.

큰 소리에 놀란 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얼굴이 사색이었다.

"중요한 회의 중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자, 여기 대공 저하의 문서일세. 다들 무릎 꿇고 듣게나."

갈라하드가 문서를 당당히 내밀었다. 대공의 문장에 병사의 얼굴이 씰룩해졌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위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선임으로 보이는 병사가 나섰다. 그 표정을 보니 보고를 올리는 시늉만 할 게 뻔했다.

"혹시 대공 저하보다 높은 분이 안에 계신가?"

"······예?"

"대공 저하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나를 막는 걸 보니, 안에 더 높은 분이 계시는 게 분명하군! 황제 폐하라도 계시는 건가? 이럴 때가 아니었군!"

황제 소리에 찔끔 놀란 병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안 계십니다."

"그렇군, 그러면 도대체 무슨 깡으로 대공 저하의 명을 받은 나를 막는 거지?"

갈라하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갈라하드의 목소리는 늘 여유롭고 평온했지만, 그 목소리에 묘한 힘이 있었다.

병사들이 바쁘게 시선을 교환했다. 갈라하드가 한 발 나서자. 병사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갈라하드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사이를 당당히 걸었다.

"그거 특무대 차출 임명서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이야기했네. 저들이 알아서 비켰을 뿐이지."

"아, 그렇군요."

뻔뻔한 변명이었지만,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회의 장소가 어디인지 아나?"

"저기입니다."

길을 안내하던 길버튼은 문득 자기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길버튼은 황급히 입꼬리를 내렸다.

***

"최근 마물 다수가 성벽 근처까지 내려왔습니다. 4대대가 맡은 망루 네 개가 점거되었습니다. 본래 금방 자기 영역으로 돌아가는 마물이 이번에는 망루 주변을 점거하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갈라하드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5대대 대장 마크는 루미안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대장들도 보고받고 있었다. 정작 그 당사자인 아드리안나만 조용했다.

그녀의 수하가 막았을 것이다. 아드리안나에 대한 1대대 놈들의 과한 충성심은 유명했으니까.

애초에 아드리안나가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안 두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관심을 두는 건, 마족밖에 없었다.

"근데 왜 회의장에 오지 않는 거지?"

"병사들이 막았답니다."

"막아? 그게 무슨-."

그때, 비웃음을 머금은 6대대 대장이 보였다.

'저 멍청한 놈이 또-.'

머저리 같은 짓에 혐오감이 올라왔다. 그 상대는 황실에서 보낸 이였다. 그를 막다니 정신이 나간 건가?

마크는 신경질적으로 볼을 긁었다. 마크가 슬쩍 일어나려고 하자, 보좌관 루미안이 잡았다.

"어디 가시려고 합니까."

"그를 데려와야지. 황실에서 보낸 사람이다. 아드리안나의 부군이 될 인물이고."

"안 그래도 다른 대장들과 관계가 안 좋은데, 아예 척질 생각이십니까?"

루미안의 타박에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면 황실에서 보낸 인물을 문전 박대하는 걸 그냥 보라는 말이냐?"

마크는 루미안의 솔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마크는 피식 웃고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회의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렇게 세게 안 열었는데?'

그때, 문 건너편에 선 이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를 번듯하게 넘긴 시원한 인상의 젊은이였다. 그 눈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깊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청년으로도, 중년으로도 보였다.

사내의 뒤로 사색이 된 병사들이 보였다.

그 북부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움에 마크는 사내가 갈라하드라는 걸 알아챘다.

"문을 열어줘서 고맙네. 잠시 비켜주겠나?"

사내의 정중한 부탁에 마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비켜섰다.

"반갑네. 나는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늦어서 미안하네. 오는데 길이 막혀서 말이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당당하게 인사했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대장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대회의 중이오."

6대대 대장이 살이 잔뜩 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네, 늦어서 미안하다 하지 않았나. 너무 타박하지 말게."

갈라하드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하대가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앉으세요."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려고 할 때, 아드리안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부인."

갈라하드는 자연스럽게 아드리안나 옆에 앉았다. 아드리안나는 슬쩍 고개만 까닥거렸다.

"······우려와 달리 마물들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망루 두 개는 부서져 사용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다소 이상한 현상이라, 이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4대대 대장이 보고를 이어갔다.

갈라하드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그에 다시 시선이 쏠렸다.

"늦게 와서 못 들었는데, 다시 설명해주겠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평소보다 많은 마물이 성벽을 넘어왔어요. 영역으로 바로 돌아가지도 않았고요."

아드리안나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아드리안나의 뒤에 있던 이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 손이 칼자루에 올라가 있었다.

"머물다가 돌아간 게 이상하군. 망루 주변에 뭔가를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마물은 이지가 없어서 그럴 가능성은 적어요. 그래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네요."

꽤 그럴듯한 의견이었기에, 다른 대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4대대는 지금 망루 복원에 병력 여분이 없습니다. 그 확인을 위해서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4대대 대장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물은 맹수나 짐승과 비슷한 취급이었다. 그래서 굳이 그를 조사할 여유가 없다고 돌려 대답하는 거였다.

"다른 대대는 여력이 없지 않나?"

6대대 대장이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이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지금 전선에 온 이에게 마물 조사를 하라니-. 명백한 시비였다. 다른 대장들이 작게 혀를 찼다.

그 속셈을 모르는지 갈라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러면 특무대가 맡겠소. 다만, 아직 업무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누군가 지원해줬으면 좋겠는데-."

갈라하드의 말에 마크가 손을 들려는 순간-.

"제가 같이 갈게요. 거기라면 복귀하는 길에 있으니까."

아드리안나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끄럽던 회의장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

번쩍!

'아··· 안 돼···.'

또다시 떠오른 번개에 그웬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가 그대로 쓰러지면서, 물 담은 양동이를 밀었다.

물이 엎어지며 바닥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지만, 그웬은 그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웬의 정신은 한 가지에 쏠려 있었다.

[천벌.]

갈라하드가 보여준 그 마법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눈을 감아도 보였고, 잠을 자도 자꾸만 떠올랐다.

오는 동안 후임, 데미안과 톰에게 격려의 말과 재밌는 농담도 못 했을 정도였다.

'안 돼, 마법은 저주받은 거야. 내 인생을 이렇게 몰아넣은 저주라고-.'

일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마법이었다. 그웬이 마법을 쓰면, 자신이 아끼는 아이들까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절대 쓸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의지하는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위함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자꾸만 눈에 보이는 거냐고!'

심지어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터질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더 떠올랐다.

이럴 거면 차라리-.

'쓰고 치울까?'

달콤한 혼잣말을 한 그웬은 고개를 저었다.

참아야만 했다.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참을 수 있었다.

***

그웬을 부르러 위층에 올라온 톰은 그대로 멈췄다.

톰은 사실 그웬을 반쯤 장난으로 선임이라 불렀다. 갈라하드도 농담하듯 선임이라고 하기도 했고, 애초에 군인이 아니라 일반 하녀 아닌가.

다만, 그 심성이 미련할 정도로 곱고, 후임이라며 잘 챙겨주기에 불만없이 따르는 중이었다.

그런 그웬이 번개를 몸에 두르고 빗자루질하고 있었다.

갈라하드가 썼던 마법이 분명했다.

저걸 몸에 두르고 청소한다고-? 왜? 마법사였어?

의문과는 별개로 톰의 자세가 저절로 고쳐졌다.

"아, 톰 후임, 위층 청소는 내가 할게! 내려가서 쉬고 있어!"

"······넵! 명 받들겠습니다!"

톰은 재빨리 부복했다.

톰은 계단을 내려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녀라며······.'

살인귀 꼬마, 마법사 하녀, 기사 길버튼, 제일 의문스러운 대장까지-.

톰은 정말 자기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애석하게도 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14화 약손

"죄다 한 인상 하는군."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대장들을 살폈다.

대장이라는 칭호에 맞게 만만한 놈이 없었다. 다들 한가락씩 하는 듯했다.

직업 특성상 갈라하드는 누군가를 마주하면, 그 수준이 대충 느껴졌다. 물론, 정확한 실력은 알 수 없지만, 그 미묘한 감이 있었다.

여기 있는 대장들은 다들 실력이 있었다.

특히-.

"저놈 이름은 뭐지?"

"2대대 대장 리암입니다. 그 성품이 훌륭하여, 아드리안나님 다음으로 따르는 이가 많습니다."

길버튼이 아주 자그맣게 대답했다. 리암이라-. 갈라하드는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성품이 좋아 보이진 않네만."

"뭐가 보입니까?"

"그냥 느낌이 그렇네."

"······."

"못 믿는 눈치군. 느낌은 무의식이 보내는 일종의 정보라네."

갈라하드는 대장들의 얼굴과 특징, 그 무기 같은 것들을 기억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중 갈라하드를 노려보는 놈이 하나 있었다.

"저 돼지 같은 사내는 뭐지?"

"······6대대 대장 차르티엔입니다. 대장을 가장 늦게 단 사내입니다."

그때, 2대대 대장 리암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바쁘신데, 회의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6대대 대장이라는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돼지 같은 놈이 다가오는군. 내 사탕 냄새를 맡은 것 같네. 이거 큰일일세."

길버튼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돼지 사내가 삐딱한 시선으로 갈라하드를 내려봤다.

"반갑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일세."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놈이 콧방귀를 끼며 무시했다.

갈라하드는 손을 슬쩍 길버튼에게 돌렸다. 길버튼이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맞잡았다.

"제국에서는 고작 다섯 명인 부대를 맡아도 대장이라고 하나 보군."

"그렇다네. 북부에서는 몇 명부터 대장이라고 부르나?"

그에 갈라하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돼지 사내의 뒤쪽이었다.

"멍청한······."

"부대를 맡았으면, 대장이 맞습니다."

대답은 돼지의 뒤에서 나왔다. 아드리안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줄 선 건가?'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드리안나 뒤에 사내 하나가 더 있었다.

아드리안나를 발견한 돼지 사내가 '끅끽껙?'이라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대화 끝나셨습니까?"

"에예! 끝났습니다!"

돼지 사내가 화들짝 놀라서 옆으로 비켰다.

감사를 표한 아드리안나가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

'어렵군.'

갈라하드는 무표정의 아드리안나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완벽한 외모와 무표정이 어우러지니 그 속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왔다.

"왜 전선으로 오셨습니까. 혹여 대공 저하 때문이라면, 제가 따로 연락을 넣어두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건조했다.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대 때문일세."

뭐라 말하려던 아드리안나의 입술이 뚝- 멈췄다.

"그때, 그대 이야기만 들었지, 내 의견은 말 못 하지 않았나."

"아, 그렇군요."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나는 등을 곧게 펴고 갈라하드를 응시했다.

"···그대의 말처럼, 그대 때문에 내가 북부까지 끌려온 건 사실이네."

"예, 정말 죄송합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숙였다. 풍성한 정수리가 잠시 시선을 끌었다.

아드리안나는 갈라하드가 작게 헛기침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대도 어쩔 수 없음은 이해하네. 관계를 유지해달라는 그대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아닐세."

"예, 감사합니다."

갈라하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드리안나는 정자세로 가만히 기다렸다.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준 것처럼, 그대도 내 부탁을 들어 줬으면 하네."

아드리안나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납득이 빨랐다.

"합당한 요구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이 금방 나왔다.

갈라하드는 잠시 아드리안나를 응시했다. 아름답군. 갈라하드는 황급히 감탄을 눌렀다. 여러모로 위험한 여자였다.

갈라하드에게 필요한 건 하나였다.

"내가 원할 때 손 좀 주겠나?"

"······네?"

줄곧 무표정이던 아드리안나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당황이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게 전부였지만,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아드리안나에게는 상당히 큰 표현이었다.

"내가 원할 때, 손을 빌려주게."

갈라하드는 속내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전과 달리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던 아드리안나가 입을 열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알고 있네, 참을 수 있어."

대답에 진심이 절로 담겼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살짝 더 올라갔다.

안 그래도 큼지막했던 눈이 더 커졌다. 사람의 눈이 저리 클 수도 있군. 작게 감탄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손잡는다고 죽기야 하겠냐-라고 하기에는 지난번 고통이 너무 강렬했다.

다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네."

갈라하드의 진지한 대답에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다시 내려왔다.

푸른 하늘 같은 파란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였다.

방금 들은 게 진짜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진심일세."

사실이었기에, 굳이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진심이 알아서 가득 담겼다.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민하는 듯했다.

'눈썹으로 감정을 표현하는군.'

갈라하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뒤에 아드리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지금 필요하네."

갈라하드는 냉큼 손을 내밀었다. 진작에 내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성질을 연구하고 싶었다.

바로 내밀 줄은 몰랐는지, 아드리안나의 눈썹이 다시금 올라갔다.

"약속하지 않았나."

단호하게 말하자, 아드리안나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아드리안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오히려 갈라하드보다 아드리안나가 더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갈라하드는 냉큼 그 손을 맞잡았다. 아주 작은 따뜻함이 느껴지고, 이어서 끔찍한 고통이 손끝부터 올라왔다.

혈관 하나하나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 실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정보국의 고문 훈련도 가벼이 통과했던 갈라하드인데, 고통에 찬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드리안나가 손을 빼려고 했다.

"가만히!"

"······아."

갈라하드의 호통에 아드리안나의 눈이 커졌다. 갈라하드는 신경 쓰지 않고 감각에 집중했다.

마나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가. 마나가 불타서 사라지는 건가? 그렇다면 어떤 원리로-.

중얼거리던 갈라하드의 고개가 픽- 꺾였다.

아드리안나는 기절한 갈라하드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 또 몸은 고통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정말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길버튼에 아드리안나는 너무 세게 잡혀 얼얼한 손을 황급히 뒤로 숨겼다.

"이 인간이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아니다."

"근데 왜 얼굴이-."

"아무 일 없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찔끔 놀란 길버튼은 갈라하드를 챙겼다.

***

"무거운 눈꺼풀을 뜨니 못생긴 얼굴이 보였다. 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밖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농담일세. 자네도 썩 나쁜 외모는 아니네."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입에서 신음이 절로 터졌다.

'마나가 타는 고통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정보국 고문 훈련도 만점으로 통과했지만, 마나가 타는 고통은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한 번 겪은 터라 비명을 안 지르는 게 전부였다.

'손 한 번 잡을 때마다 기절이라-. 남이 들으면 웃겠군.'

갈라하드는 저린 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감이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안 잡혔다.

아무래도 마나를 태운다는 개념 자체가 너무 생소했다. 거기에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터라 온전히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열 번은 더 잡아봐야 감이 오겠는데."

"그러다가 죽습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네. 그 죽음이 가치가 있냐 없냐의 문제지."

"그게 가치 있는 겁니까?"

"이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어딨나?"

"······."

길버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래도 저번보다 좋은데?'

저번에는 마나가 다 타서 손가락 까닥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약하지만 마나가 살짝 존재했다.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위로 불이 타올랐는데, 평소와 같은 크기였다.

그때, 갈라하드는 아주 작은 괴리감을 느꼈다.

정말 미세하여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평소 예민할 정도로 마나를 관리하는 갈라하드였기에 알 수 있었다.

'압축 속도가 살짝 올라갔다.'

마나가 호스라고 한다면, 그를 누르는 손가락이 마나 장악력이었다.

압축이 강할수록 마나의 농도가 올라갔고, 그 결과물인 마법의 위력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미세하지만, 호스를 잡은 손가락의 힘이 강해졌다.

'비우고 채워서 그런가?'

마족을 상대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게 마나 농도의 필요성이었다.

마나 장악력이 올라갔다는 건, 그 압축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인은 아드리안나가 분명했다.

손 한 번 잡을 때마다 마나 장악력을 올려주고, 마나의 새로운 성질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여인이라니-.

'팔방미인이군.'

이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이 또 있을까. 갈라하드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이게 사랑인가.

"크흠-."

그때, 어색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까 회의장에서 아드리안나 뒤에 있던 사내였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피곤이 짙게 깔려, 신경질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5대대 대장 마크라고 합니다."

"반갑네.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라고 하네."

"이번 조사가 끝나고 시간이 되시면, 5대대에 한 번 들러주십쇼."

마크라는 사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낭비가 없는 성격인 듯했다.

이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마법에 관심이 있습니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그가 북부 전선의 대장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겠습니다."

그를 끝으로 마크는 일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인사만 하러 온 듯했다. 참 실속 있는 사내였다.

"마크라, 어떤 인물이지?"

"5대대 대장으로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걸로 유명합니다. 마물을 길들이려다가 징계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여러모로 말이 많이 나오는 사내입니다."

길버튼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길버튼은 마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하긴 길버튼은 실속과 거리가 멀었다.

"식사하십쇼."

문을 열고 톰이 말했다. 톰의 얼굴이 어딘가 수척했다.

"그웬이 만든 요리는 먹고 싶지 않네만."

"나이가 몇인데 요리 투정합니까."

"자네, 그웬이 만든 요리 먹어본 적 있나? 없겠지. 그러니 그런 무모한 발언을 하지."

갈라하드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차려둔 걸 안 먹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려가니 다들 식탁에 앉아 있었다. 데미안은 그릇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였고, 그웬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갈라하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톰이 스튜를 떠줬다. 마음의 결심을 내리고 크게 한술 떴다.

이어질 고통에 대비할 때-.

"······맛있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맛에 갈라하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입에 맞으십니까? 다행입니다."

"톰, 자네가 한 건가?"

"예, 그웬 선임의 상태가 안 좋아서-."

"다행이군."

고개를 돌린 갈라하드는 그웬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웬의 머리카락이 잔뜩 뻗쳐 있었다.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혼자 시달리다가 참지 못하고 한 번 썼으리라. 어쩌면 본인은 자각조차 못 했을 수도 있었다.

'천벌을 보고 따라 했나?'

갈라하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벌은 수식이 다른 마법에 비해 배는 어려웠다. 원형을 던져서 주변 마나를 긁어모으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뻗침 정도를 보니 천벌은 아니고, 그 기초적인 개념을 쓴 듯했다.

'천재군.'

한 번 본 것만으로··· 심지어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마법을 쓰다니-.

당장 저 앙증맞은 머리에 마법을 쑤셔 넣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낚싯대를 섣불리 당기면, 물고기가 도망가는 법이었다.

바늘이 입을 완전히 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집이 깨끗하군. 원래 짐승 우리 같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아, 제가 그웬 선임이랑 같이 치워뒀습니다. 그웬 선임이 많이 알려주셔서···."

"헤헤-."

명백한 아부였지만, 그웬이 금세 함박웃음을 지었다. 꼭 풀 뜯어 먹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데미안, 더 드시겠습니까?"

"응."

톰이 데미안의 그릇에 스튜를 채워줬다. 제법 자연스러웠다.

"먹으면서 듣게, 내일 첫 임무에 나갈 것이네."

그웬이 거칠게 기침을 시작했다. 톰이 그 등을 두드려줬다. 갈라하드는 그웬의 기침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4대대를 습격했던 마물들의 이상 행적을 조사하는 임무네. 딱히 위험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 여기는 전선이니까."

그웬의 기침이 더욱 커졌다. 데미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데미안, 말하게나."

"안 가면 안 돼요?"

데미안이 스튜를 한 그릇만 먹으라고 했을 때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웬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갈라하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걷지 않으면 눈에 파묻히는 법이라네."

데미안이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웬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집에 있으면 안 파묻히지 않을까요?"

대답하는 그웬의 얼굴이 꼭 뼈를 물어온 강아지처럼 자신감 넘쳤다.

"그러면 집이 눈에 파묻힐 거라네."

갈라하드의 대답에 그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북부라도 눈이 그 정도로 많이 오지는 않을걸요?"

그웬의 되물음에 갈라하드는 작게 기침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군. 자네를 고려하지 못했어. 미안하네."

"어······, 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북부에 오신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웬이 씩씩하게 사과를 받았다.

"아무튼 다들 일찍 자게나. 내일 바로 4대대 쪽으로 출발이니까. 아드리안나 쪽과 동행이니 늦으면 안 될걸세."

***

"정말 우리끼리 진행하는 게 맞아? 위에서 지원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옆에서 들린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칼은 눈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중요한 시기라 신경이 날카로운데, 불길한 소리를 자꾸 해대니 짜증이 솟구쳤다.

"닥쳐, 베른. 이미 주인님한테 땅강아지를 지원받았는데, 여기서 또 달라고 하라고? 차라리 목을 뽑아달라고 하지?"

"하지만······."

"도대체 뭐가 불안한데? 이거를 위해서 우리가 쏟은 노력이 얼마인지 까먹었어?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랄을 했다고! 개지랄!"

칼은 참지 않고 욕을 퍼부었다. 베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도대체 왜 약한 소리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방심시키기 위해서, 놈들이 가장 얕보는 땅강아지만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마법사인 둘이 마법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마물의 괴상 현상이라고 보이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목적했던 땅굴을 파고 굳이 후퇴까지 했다. 아마 놈들은 지금쯤 까먹었을 것이다.

뭔가 수상해도 그 넓은 대지를 수색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들의 마법으로 숨겨두기도 했고-.

열보 전진을 위한 한 보 후퇴였음을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잊었어?"

칼은 슬쩍 뒤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이 유독 더 어두웠다. 스산한 느낌에 칼은 몸을 작게 떨었다.

"보내봤자 수색대 정도겠지. 대장급이 굳이 땅강아지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올 것 같아? 그리고 와봤자, 실력 있는 마법사가 없으면 우리를 발견할 수도 없을 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이 좆같은 북부에 마법사가 있겠어?"

칼의 삐딱한 물음에 베른이 입을 꾹 닫았다.

"대장급이 마법사랑 손잡고 오지 않는 이상 실패할 리 없어. 일이나 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칼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베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마법사도 귀한 북부였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왜 북부에 있겠나.

저기 중부에서 귀족 심부름이나 하지.

'괜한 걱정이었군.'

베른은 히죽 웃으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이번 일만 끝내면, 그동안 모아둔 마석을 가지고 마탑으로 돌아가서 떵떵거리며 살자고!"

둘은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해맑게 웃었다.

15화 방귀

"4대대 대장이 자꾸 나를 노려보는데, 기분 탓인가?"

"노려보는 거 맞습니다."

"나의 잘생김을 질투하는 게 분명하군."

"······4대대 대장은 괜히 일을 벌인 놈으로 생각할 겁니다. 이번 마물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대대적인 조사를 나갈 정도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길버튼의 대답에 갈라하드는 볼을 긁적였다.

"특무대가 움직이는 건 신경 안 쓰겠지만, 문제는 아드리안나님이 같이 간다는 겁니다."

길버튼이 슬쩍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하얀색 마차가 있었다.

"아드리안나님은 같은 대장도 예외로 두지 않습니다. 그런 아드리안나님이 방문한다니 4대대 대장도 신경이 곤두설 겁니다."

"그러니까 장군을 끌고 부대 방문을 한다는 소리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것도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실적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쌓아야지."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갈라하드는 그 어깨를 두드려줬다.

"실적은 만드는 것이라네."

그때, 마차를 가지러 갔던 톰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건 짐마차 아닙니까. 이걸 타고 거기까지 어떻게 가라는 건지-."

톰의 투덜거림에 갈라하드는 마차를 살폈다. 확실히 이전에 탔던 마차보다 크기가 작고 창문도 없었다.

다만-.

"그래봤자 마차 아닌가?"

갈라하드에게는 다 똑같은 마차였다. 어차피 바퀴 달리고 말이 끄는 무식한 이동 수단 아닌가?

"애초에 신설되어 실적도 뿌리도 없는 부대니, 이건 당연한 처사다. 억울하면 실적을 쌓아야지. 그러면 마차도 더 큰 걸로 바꿔줄 거니까."

길버튼이 4대대 마차를 가리켰다. 확실히 이쪽 마차와 비교하면 그 크기가 크고 바퀴도 굵었다. 더불어 겉에 각종 다양한 장식도 붙어 있었다.

4대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이쪽을 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저걸 타고 가겠다는 건가? 죽어나겠군."

"가죽도 안 씌운 걸 보니, 얼어 죽겠는데?"

갈라하드의 의문은 그대로였다.

4대대 마차든, 1대대 마차든, 이 마차든 결국-.

"그래봤자 마차 아닌가?"

크든 작든 갈라하드에게는 그저 마차였다.

나무배를 크게 만들고 색을 칠했다고 꺼드럭거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예, 그건 그렇죠."

"맞습니다. 마차가 저희를 나타내는 건 아닙니다."

어딘지 감동한 표정의 톰과 떨떠름한 길버튼-. 말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마법을 모르는 멍청한 놈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마차로 향했다.

'열기와 푹신함 정도면 되겠지.'

기본적인 마법을 깔아둘 생각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마나였는데-.

"왜······ 왜요?!"

"그냥 본 걸세."

"눈빛이 이상했는데요! 끈적하고!"

그웬이 제 몸을 가렸다. 눈치가 제법 빨랐다.

그웬의 마나통이 제법 큰데, 어차피 그웬은 마법을 안 쓰니 그를 이용하면 될 듯했다. 그 과정에서 마나에 노출하는 효과도 있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손을 흔들었다. 마도구를 만드는 원리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마도구는 본래 마석을 이용했다. 주문식을 새기고 그 중심에 농도 있는 마석을 박아서, 대기의 마나를 끌어와서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는 그웬이 마석이었다. 물론, 사람을 마석처럼 쓰는 건 다소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그 시전자가 갈라하드였다.

손가락 끝에 아주 가늘고 얇은 공기층이 생겼다. 바람 칼날을 압축한 마법이었다. 그를 움직여 곳곳에 마법진을 새겼다.

"그웬, 자네는 여기 앉게."

"네! 이거 기분이 좀 이상한데요! 간지럽고!"

"참게. 아, 방귀는 절대 뀌면 안 되네."

"······저는 원래 방귀 안 뀌는데요!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뀌고 싶잖아요!"

그웬을 앉히니 마법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냉기 가득했던 내부가 금세 따뜻해졌다.

"와아··· 이게 마법이군요. 꼭 벽난로 앞에 앉은 것 같습니다."

"좋아요."

"기분이 이상한데···. 으으···."

데미안이 그대로 의자에 녹듯이 누웠다.

"······톰, 고삐 잡을 줄 아나?"

평소 고삐를 절대 넘기지 않는 길버튼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가 따뜻하니 들어오고 싶은 듯했다.

"자네는 좁아서 못 타네. 그 갑옷이 너무 크잖나."

대놓고 실망하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나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면, 마부석에도 설치해주겠네."

"아아, 존경스러운 우리 갈라하드 대장님-."

"좋군."

마부석에도 마법진을 그려주니, 길버튼이 보기 드물게 웃었다.

"북부의 기사도 추위를 타긴 하는군."

"저도 사람입니다만. 이거 참 좋군요. 엉덩이가 따뜻한 것이-."

"전문용어로 엉뜨라고 하네."

***

'엉뜨-.'

길버튼은 뜨끈한 엉덩이에 히죽 웃었다. 고작 엉덩이 하나 따뜻해진 거지만, 이런 추위 속에서는 아주 큰 차이였다.

그 위에 마물 가죽까지 덮어두니 세상 따뜻했다.

옆에서 한 녀석이 다가왔다. 갈색 말에 흰 안장을 올린 여인, 1대대 동기였던 하트나였다.

"오, 제법 잘 어울리는군."

하트나가 비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부터 유난히 길버튼을 질투하던 하트나였다. 길버튼이 특무대로 갔다는 소리에 신나서 놀리러 온 듯했다.

원래였다면 짜증이 좀 났겠지만, 갈라하드랑 다닌 탓에 이 정도로는 별 생각도 안 들었다.

"잘 어울리나? 다행이군."

놈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이런 기분이군. 길버튼은 작게 감탄했다.

"1대대에서 특공대로 떨어진 기분이 어때? 1대대에 들어갔다고 깝치더니 한 방에 떨어졌네?"

"특공대가 아니라 특무대다. 세 글자도 제대로 못 외우다니. 여전하네."

"뭐?!"

하트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길버튼은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이래서 갈라하드가 말마다 깐족거렸구나.

"하, 특공대로 떨어지더니 사람이 까칠해졌네? 충격이 너무 컸나 보군?"

"특무대라니까."

"그래! 특무대! 어차피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 가지고 더럽게 까불거리는군!"

확실히 특무대는 뭔가 입에 잘 안 붙기는 했다.

"네 멍청한 판단 때문에 그런 허름한 마차에서 마부나 하는 거야."

'허름한 마차라-. 확실히 그렇게 보이겠군.'

아드리안나의 마차를 몰던 때보다 지금 마차가 더 안락했다. 겨우 엉덩이 따뜻한 것의 차이였지만, 그게 생각보다 컸다. 이만큼 편한 마차를 몰아본 적 없었다.

"됐고, 신분패를 받아오라는 아드리안나님의 명령이다."

길버튼은 앞에 가는 흰색 마차를 응시했다.

조금 섭섭한 감정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아드리안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아드리안나는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은 선을 두는 여인이었다.

덜컹!

그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런! 길버튼 경! 그웬이 방귀를 뀌었네!"

"안 뀌었다니까요! 나 아니라고오오!"

"사실 제가 뀌었습니다."

뒤쪽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길버튼은 피식 웃었다.

"자, 가져가라."

길버튼은 손때 묻은 1대대 신분패를 던졌다.

"분명 후회할걸."

하트나의 이죽거림에 길버튼은 소리 내어 웃었다.

후회야, 늘 하고 있었다.

***

어두운 밤이었다. 날카로운 바람 부는 소리가 마차를 계속 두드리는 그런 밤-.

'음···.'

묘한 느낌에 갈라하드는 눈을 찡그렸다.

그웬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저 아니에요! 진짜 안 뀌었다고요!"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뜻 스친 감각이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갈라하드는 자신이 느낀 걸 믿지 않을 정도로 우둔하지 않았다. 다급히 마차 문을 걷어찼다. 쾅! 마차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밖의 풍경이 보였다.

주변은 흰색으로 가득 찬 숲이었다. 기다랗고 마른 나무가 빠르게 지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그웬이 또 방귀를 뀌었습니까?!"

"······안 뀌었어요! 진짜로!"

갈라하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 문을 잡고 다른 손을 비틀며 내밀었다.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손이 얼 것만 같았다.

나무가 빼곡하여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숲이었다. 꼭 괴물이라도 숨어있을 것 같은-.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가벼이 튕겼다. 사이로 작은 불이 연달아 튀며 큼지막한 불을 만들어냈다. 거대해진 불이 어둠을 밀어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마물이군."

붉은 눈의 늑대들이었다.

갈라하드는 주저 없이 화염구를 던졌다. 날아간 화염구가 늑대에게 직격하기 직전, 늑대가 화염구를 잡았다.

'잡다니?'

갈라하드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늑대가 두 발로 걷는군.'

원래 늑대가 두 발로 걷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습격이다!!"

길게 함성이 터졌다.

"뭐··· 뭐예요!"

"자네, 방귀 냄새가 늑대를 끌어모았네. 그러니까 뀌지 말라고 했잖나."

"···네에?! 죄송해요! 뀌지 말라니까 더······!"

갈라하드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시금 불이 서렸다. 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 강해졌다.

"두발늑대입니다! 불에 약합니다! 사람의 머리를 씹어먹는 놈들이니 머리를 조심하십쇼!"

어느새 방패를 꺼내든 톰이 소리쳤다. 톰 옆으로 데미안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산책 나가기 직전의 강아지 같았다.

"나쁜 마물들이 기다리네! 가보겠나?"

"좋아요."

갈라하드는 데미안의 등을 잡아 밖으로 던졌다. 그웬이 길게 비명을 터뜨렸다. 날아간 데미안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톡-! 데미안을 향해 주둥이를 벌리던 늑대가 그대로 찢어졌다. 그 사이로 데미안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볼 때마다 신기한 솜씨군! 길버튼 경!"

"예! 무사합니다!"

길버튼은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찬란한 오러에 늑대들이 손쉽게 갈라졌다.

"아니! 가죽 좀 주워두게나!"

"예?!"

"가죽 좀 챙기라고! 코트를 만들어야겠어! 이보게! 톰! 코트 만들 줄 아나?"

"예?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만들 수 있습니다!"

"좋군! 그웬 자네는 의자에서 엉덩이 떼지 말게! 거기에 방벽 마법도 있으니까!"

"네에에에엑!"

그웬이 천장에 손을 대고 바닥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갈라하드는 웃으며 마차의 천장을 잡았다. 그를 잡고 바닥을 박차니, 순간 세상이 거꾸로 돌았다.

탁! 한 번에 천장 위에 선 갈라하드는 코트 단추를 풀고 손을 털었다.

"대단한 묘기십니다?"

"자네, 뒤에 하나 있네."

"알고 있습니다."

가벼이 대답한 길버튼이 검을 삐뚤게 휘둘렀다. 그 푸른 직선에 달려들던 늑대가 갈라졌다.

사방에서 늑대가 달려들고 있었는데, 기사나 병사의 반응이 제법이었다.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그때 뒤쪽에서 창연한 빛이 터졌다.

늑대의 사체들이 공중으로 가득 떠올랐다. 그 어디에도 피가 없었다. 마치, 바짝 말린 시체 같았다.

그 중앙에 아드리안나가 있었다.

창연한 빛을 온몸에 머금은 아드리안나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신 같았다.

아드리안나가 가만히 검을 그었다.

길쭉한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순간 공간을 가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검으로 마나를 태웠군-.'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갈라하드는 보고도 믿지 못했다.

마물은 아드리안나를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아니, 그 앞에 서 있지도 못했다.

단 한 번의 검이었다. 그로 그어진 선에 늑대들이 바스러졌다.

'말도 안 되는 무력이군.'

마족의 왕 가장 큰 대적자가 그녀인지 보여주는 한 수였다.

심지어 그 얼굴에 작은 힘듦조차 없었다. 그냥 가벼이 검을 휘두른 느낌이었다.

원래는 북부가 마물을 어떻게 막아냈는지가 궁금했는데, 이제는 바뀌었다.

'마물이 아드리안나를 어떻게 막아내고 있던 거지?'

그 정도의 무위였다.

'전혀 감이 안 오는군.'

습관적으로 아드리안나를 어떻게 죽일지 상상하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어떤 방법을 써도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마나를 지닌 모든 것의 천적이었다.

그 무심한 눈은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단 두 번의 검에 늑대의 습격이 끝났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정리 중이었다.

'험한 곳이군.'

갈라하드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작게 혀를 찼다.

"두발 늑대, 심심할 때면 등장하는 놈들입니다. 그 털이 제법 따뜻해서 코트로 가장 인기 있는 가죽입니다."

길버튼이 피 묻은 검을 털며 설명했다. 깔끔한 길버튼의 상태와 반대로 데미안은 피에 뒹군 것처럼 붉었다.

'미묘한 느낌을 받자마자 마물의 습격이라-.'

갈라하드는 손가락을 튕겨 마나 화살을 만들었다. 농도 측정 용도로 쓰는 마법이었다.

그를 들고 아까 찝찝했던 쪽으로 향했다. 마나 화살이 살짝 흔들리더니, 그 크기가 작아졌다.

'다른 곳보다 마나 농도가 짙어.'

물론, 마나 농도야 차이가 있겠지만, 같은 장소에서 이렇게까지 눈에 띌 정도로 차이 날 리가 없었다.

'여기에 뭐가 있군.'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쪽으로 가야겠네."

"길은 저쪽입니다만."

"나는 개척하는 사람이라네. 따라오게나."

"반발이 강할 겁니다."

길버튼이 뒤쪽을 가리켰다. 1대대와 4대대 사람들이 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갈라하드가 가리킨 쪽으로 가려면 마차를 버리고 움직여야 했다. 순순히 따라올 리가 없었다.

"상관없지 않나? 우리 상사는 대공 전하라네."

길버튼이 피식 웃었다. 농담인 줄 아는 듯했다.

갈라하드는 떨리는 손을 뒤로 숨기며 아드리안나에게 다가갔다. 아드리안나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전투 복기하는 건가? 방금 그 완벽한 전투를? 갈라하드는 혀를 내둘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드리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쪽에 뭐가 있네."

"저쪽 말입니까?"

"마나 농도가 짙네. 마나 농도가 짙다는 건 저기서 인공적인 뭔가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잠깐 지도 좀 빌려주겠나? 고맙군."

갈라하드는 아드리안나 옆에 있던 기사의 지도를 빌려 펼쳤다.

"우리가 지금 대충 여기쯤 왔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머릿속에 지도가 있다네."

아드리안나 옆에 있던 기사가 피식 웃었다. 농담인 줄 아는 듯했다.

"마물이 습격했던 망루가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랑 여기네. 그런데 그 중앙에 있는 저 망루는 멀쩡하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군요."

"또 어차피 무너진 망루에 가봤자, 그들이 이미 수복 중이라서 얻을 게 없을 거야. 이쪽으로 가는 게 뭐가 더 있을 것이 분명하네."

"그쪽은 길이 없어 마차로 못 가니, 반나절은 걸어야 할 겁니다."

아드리안나 옆에 있던 기사가 또 끼어들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눈이 마주친 여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리 있는 의견입니다."

아드리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방향은 마물이 습격한 곳과 반대요. 저기에 갔다가는 시간 낭비만 하는 걸세. 애초에 계획과 다르지 않소?"

그때, 4대대 대장이 다가왔다. 그 몸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갈라하드는 그 흔적으로 놈을 분석했다. 찌르는 걸 좋아하는 군-.

아드리안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무대 대장의 의견은 제법 그럴듯한 추리지만, 계획을 바꿀 정도의 근거는 아닙니다. 마법사의 추론이었기에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 죄송합니다. 다만, 대대의 병력 운용권은 각 대장에게 있으니, 그대가 가겠다면 말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계획대로 무너진 망루를 조사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그쪽으로 합류하겠습니다."

아드리안나의 판단은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갈라하드는 애초에 따로 움직이는 걸 원했다. 아드리안나와 같이 다니면, 모든 공은 저 찬란한 여인에게 돌아갈 테니-.

그런데도 굳이 아드리안나한테 말한 건, 뒤에 말한 지원 때문이었다. 뭔가 찜찜한 게 있으면, 아드리안나는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혹시나 엄청난 적을 만나면, 아드리안나를 기다릴 계획이었다.

요원은 항상 굴을 두 개 파는 법이었다.

"흥-. 특무대라니-. 멍청한 대장을 둔 탓에 고생 좀 하겠군."

그런 사정을 모르는 4대대 대장이 콧방귀뀌며 웃었다. 아드리안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그저 판단을 내렸을 뿐이었다.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그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갈라하드는 가만히 대원을 둘러봤다.

혀를 내밀어 입술 주변의 피를 핥는 데미안, 잔뜩 긴장한 얼굴의 톰, 여유로운 표정의 길버튼, 걸레랑 빗자루를 들고 진지한 그웬까지-.

이처럼 엉망일 수가 있을까.

"다들 움직이지."

갈라하드는 작게 웃었다.

"······죄송해요! 살짝 뀐 건데!! 늑대가 올 줄은 몰랐어요!"

그웬이 황급히 사과했다.

***

"어이, 칼! 누가 오는데!"

"이런 곳에 오기는 누가 온다고 그래! 빨리 일이나 해! 이제 다 끝나가잖아!"

"아니, 진짜 오는데?! 5명이야!"

"5명?! 일도 다 끝나가는데 괜히 책잡혀서 좋을 게 없어."

"그럼 어떻게 해?"

"죽여! 이 새끼야!"

16화 땅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