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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

23화 유능한 폐급

'대단하군.'

예전 흑마법학회의 보안은 형편없었다. 각 지부의 정보가 서로 공유될 정도였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몇 단계에 걸친 보안이 있을 정도로 철저했다.

마지막 문은 갈라하드에게도 다소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에 들어간 마석이 세 개였다. 그 급이 대충 봐도 최소 중급이었다. 마탑주의 방에도 저런 문은 없었다. 마석장이 있는 북부였기에 가능한 사치였다.

마석을 연결하는 마법진의 설계가 어딘지 익숙했다.

'노인의 것이군.'

은퇴한다고 그렇게 떠벌리더니 제 버릇 남 못 준듯했다.

'노인이 북부에 있는 건가?'

알 수 없었다. 갈라하드 혼자 왔으면 일이 꽤 복잡해질 뻔했다.

노인이 설계한 문이라면 갈라하드도 쉬이 뚫을 수 없었다.

노인의 몸값이 얼마인가, 더불어 중급 마석 세 개라니-. 보안에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감도 안 왔다.

'내가 그렇게 세게 때렸나.'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다만, 놈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보안이 완벽해도 문제는 늘 사람에게서 발생했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졸업에 4년이나 걸린 놈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 일단 자네의 이름은 비밀로 하지."

심지어 이름까지 비밀로 하잖다.

코르튼의 눈에 번들거리는 탐욕을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거절할 필요가 없었기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게."

코르튼이 자신 있게 문을 열었다.

거창한 보안과 달리 안은 의외로 평범했다.

인테리어는 신경 쓰지 않은 듯 회색 일변도였다. 지하 감옥과 다른 점은 쇠창살이 없다는 것밖에 없었다. 마법사 놈들의 미적 감각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곳곳에 있는 서적과 후드를 쓰고 돌아다니는 음침한 놈들까지-. 흑마법사라는 이름과 달리 의외로 평범한 마탑 풍경이었다.

그 사이사이 돌처럼 굴러다니는 마석과 딱 봐도 고가의 마도구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설비가 대단하군."

"말하지 않았나. 북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발굴한 마석장이 몇 개인지 파악도 안 될 지경이야. 심지어 멍청한 북부 놈들은 마석을 재수 없는 돌멩이 취급하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살짝 찌르니 친애하는 동문 코르튼이 바로 설명해줬다. 참 친절한 놈이었다.

'오히려 호황기라-.'

그렇게 열심히 잡았는데, 오히려 북부에서 잘 나가고 있다니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방법을 다르게 해야겠군.'

원래는 적당한 증거를 찾고, 하나씩 회유하여 다른 지부의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쪽이 깔끔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예상과 달랐다.

'보안이 너무 강화됐어.'

지위가 꽤 높은 듯한 코르튼도 다른 지부의 위치를 몰랐다. 여기 놈들의 머리를 전부 까도 별다른 정보가 안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팔호가 정보를 가져오겠지만, 그것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요원은 항상 굴을 두 개 파야 했다.

"마석을 캐려면 마법사가 많이 필요하니까. 우리는 마법사에게 최고 대우를 해주지. 수도에서도 받을 수 없는 금액일 거야."

"마법사가 직접 마석을 캐나?"

"아, 모르는군. 흠흠-."

갈라하드는 마석의 활용이나 용도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지만, 마석을 캐는 방법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갈라하드에게 마석은 그냥 장난감이었다. 혹은 보조 도구거나.

"마석은 마법사가 캐는 게 효율이 높아. 일반인이 캤다가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고-. 마크가 내 손을 못 놓는 이유지."

친절한 설명에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크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거군.'

마석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하니, 코르튼이 미심쩍은 모습을 보여도 마크는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담이 크군.'

마법사 인식이 안 좋은 북부에서 대장이 마법사를 받아들여 같이 사업까지 하다니-. 단순히 담이 큰 수준이 아니었다.

마석장 세 개는 그 정도의 가치였다.

강화된 보안, 5대대 마크와의 관계, 마석장의 운용-. 갈라하드는 그를 하나씩 계산했다.

그냥 없애기에는 부작용이 많았다. 더불어 유지하면 나오는 장점이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다른 지부의 위치도 모를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다.

그 말은 곧 지부끼리 단절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 꿀꺽하고 굴려도 위쪽에서 눈치채기 힘들다는 이야기였고-.

'이쪽 지부를 유지하는 편이 좋겠군.'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지부를 유지하면 다른 지부의 정보를 받을 수 있었고. 5대대 마크와의 관계에서 칼자루를 쥘 수도 있었다.

더불어 마석장 운용으로 제법 큰 금전이 나올 것이다.

데미안의 밥값이 상당한 상황이었다.

'완벽해.'

갈라하드의 눈이 가라앉았다.

원래 나쁜 칼은 없었다.

나쁜 주인이 있을 뿐이지.

'좋은 곳에 쓰면 되지.'

갈라하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르튼님, 어디 가십니까?"

주근깨가 가득한 사내였다. 사내의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사내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 큼지막한 마석이 박혀 있었다.

수도에서 마석 박힌 지팡이는 잘 나가는 마법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슨 등산지팡이 느낌이었다.

"아, 바트. 바쁘니까 비키게."

"오늘 방문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습니다만. 학회는 외부인의 출입을 엄하게 금지합니다. 이 사실이 위에 들어갔다가는 지부 자체에 불이익이 내려올 게 분명합니다."

바트라 불린 주근깨 사내가 갈라하드를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사내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그렇기에 까다로웠다.

갈라하드는 코르튼이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기대했다.

"닥치게! 바트! 자네는 가서 마석 캐기나 해! 어딜 감히! 부지부장인 내게 언성을 높여!"

코른튼은 대뜸 목청을 높였다.

정말 획기적인 돌파구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외부인의 출입은 민감한 사항이지 않습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말단인 자네가 뭘 안다고 나불거려!"

"위쪽과 이야기가 된 겁니까?"

"지부장이 없으니 내가 그 위쪽이다! 그러면 내가 자네한테 보고를 올려야 하나? 자네, 뭐 되나?"

"그게 아니라-."

"자, 그러면 자네가 부지부장 하게! 제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코르튼의 막무가내식 지위 남용에 주근깨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도 사내는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외부인은 위험합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여-."

"이쪽은 지팡이도 없는 상태인데, 혹시 모를 위협이라니?"

갈라하드는 코트를 걷어줬다. 검도, 지팡이도 없었다. 그저 정갈한 셔츠와 바지가 전부였다.

'지팡이가 없어서 쉽게 본 거군.'

갈라하드는 그제야 코르튼이 자신을 만만하게 본 이유를 깨달았다.

확실히 마석 달린 지팡이의 유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큰 차이였다.

마법사들이 괜히 전 재산을 들여 지팡이를 사는 게 아니었다.

갈라하드에게 지팡이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 다른 이들의 눈빛에 서린 의심이 풀렸다. 지팡이 의존도가 수도보다 심한 듯했다.

다만, 사내는 이번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나가 높을 수 있지 않습니까. 측정해봐야 합니다."

"하, 진짜 귀찮게 하는군. 그러니까 자네가 말단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하, 그래. 두고 보게. 마도구 검사해도 되지? 그 아카데미에서 하던 거랑 똑같은 거야."

갈라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측정 도구의 원리는 갈라하드가 악수할 때 마나를 넣어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높은 농도의 마나를 넣어, 순간 흡수되는 양으로 전체 마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바트, 괜히 귀찮게 한 거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코르튼가 주근깨 사내를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주근깨 사내가 애써 외면하며 갈라하드에게 마나 측정 도구를 내밀었다.

"사용법은···."

"알고 있네."

갈라하드는 그를 받아 팔뚝에 둘렀다.

갈라하드는 아카데미 시절의 마나 양을 떠올렸다.

'그것보다 살짝 줄어드는 게 좋겠지.'

애초에 마나 측정 도구는 신뢰도 높은 마도구가 아니었다.

정보국에서도 마나 측정 도구는 참고 사항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 놈들은 그를 맹신하는 듯했다. 지팡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부터, 마나 측정 도구까지-. 마도구 의존이 생각보다 심한 듯했다.

마석이 넘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1년을 수련해도 마석 하나를 더 드는 것보다 효율이 낮은 게 마법이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지름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옳은 길은 늘 가장 힘든 길이었다.

'마법사가 도구에 의존하는 꼴이라니.'

갈라하드는 차오르는 혐오감을 누르며 마나 농도를 조절했다.

마나 확인은 갈라하드에게는 습관과 다름없었다. 그를 역순으로 조작하여 마나 양을 조절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마나 측정 도구가 검붉은 빛을 뿜었다.

마나 측정 도구는 마나가 적을수록 검은색이고 많을수록 붉어졌다. 흔한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흔한 마법사가 지팡이까지 없으니 놈들에게는 위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코르튼의 얼굴에 비웃음이 차올랐다. 비웃는 실력은 일품이었다.

주근깨 사내는 작게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진짜 충신이었다.

다만, 우리 믿음직한 코르튼은 충신을 볼 수 있는 눈 따위 없었다.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필요한 일이라고! 근데 말단 주제에 감히 나를 의심해?!"

"아니 그게-."

"뭐! 이 새끼야! 가서 마석이나 캐! 너는 오늘 할당량 두 배다!"

코르튼의 외침에 주근깨 사내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주근깨 사내는 도망치듯 뒤로 사라졌다.

충신의 전형적인 말로였다.

'바트라.'

갈라하드는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별것도 아닌 놈이 까불고 있어! 하, 어차피 지부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연구부터 둘러보지. 자네 연구 좋아하지 않았나?"

코르튼이 거들먹거리며 웃었다.

마나 검사까지 통과하니 아예 마음이 놓인 듯했다.

더불어 갈라하드를 꽉 잡으려는 의도도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를 보여주겠다니-.

'유능하군.'

정말 유능한 폐급이었다.

"고맙군."

갈라하드는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동문 좋다는 게 뭔가."

코르튼이 히죽 웃었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동문이었다.

****

"부지부장이 외부인을 데려왔다는군."

"맙소사, 진짜로-?"

셰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부지부장의 능력은 형편없지만, 성과에 대한 욕심은 엄청났다. 아래의 실적을 제 것으로 보고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못난 놈으로 보기에는 또 어려웠다.

상승에 대한 욕심이 어마어마한 코르튼은 종종 말도 안 되는 실적을 올렸다.

5대대 대장과의 거래도 코르튼이 튼 거였다. 그 덕분에 부지부장 자리에 오른 것이고-.

그런데 외부인을 들이는 짓을 저지르다니, 이는 궤를 달리하는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부지부장이라도 생각 없이 외부인을 들였겠어? 몸 사리는 걸로는 일 등이잖아. 보안을 무시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라는 거지."

셰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화두는 부지부장이 데려온 대상으로 옮겨졌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부지부장이 이런 강수를 뒀단 말인가?

"여기 모여서 다들 뭐해!"

뒤에서 익숙한 호통이 들렸다. 어깨가 한껏 올라간 부지부장이었다.

자연스레 그 옆의 인물에게 향했다.

머리를 뒤로 깔끔히 넘긴 잘생긴 사내였다. 청년과 사내 사이의 외모였는데, 푹 들어간 눈가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다리와 팔이 길쭉하고 말랐지만 어딘지 탄탄함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깔끔하게 잘생긴 수도 귀족이었다.

다만, 그 눈이 묘했다. 심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 셰른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셰른, 이 친구에게 연구 성과 좀 보여주게."

"······예? 연구를요?"

터무니없는 명령이었다. 셰른이 맡은 건 마족 연구였다. 그걸 외부인에게 보여주라니-.

"어차피 이제 같이 일할 사이니까."

"······네."

지부장이 외출 중이니, 코르튼을 막을 인물이 없었다. 미적거려봤자 호통만 들을 뿐이었다.

"좀 둘러보고 있게. 나는 보고 올리고 올 테니까."

마족 연구를 구경거리처럼 칭하는 코르튼에 셰른은 작게 경악했다.

셰른은 정체 모를 사내와 둘이 연구실로 향했다.

"조금 더럽죠? 손님이 오실 줄 몰라서요."

"괜찮네. 마법사의 연구실이 거기서 거기지."

사내의 고풍스러운 말투에 셰른은 사내가 귀족이라 확신했다.

"뭐··· 뭐야? 셰른?"

연구실에 있던 파른탈이 눈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뾰족한 시선이 사내에게 꽂혔다.

연구 관련된 거라면 지부장도 들이박는 파른탈이었다. 셰른은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부지부장님이 연구 성과를 보여주래."

"누구한테? 설마-."

"반갑네, 내가 그 누구일세."

사내가 능청맞게 손을 흔들자, 파른탈이 눈썹을 가득 구겼다.

"미친 건가? 연구가 뭔 줄 알고-."

"너는 하던 거 해. 내가 보여드릴게."

셰른의 말에도 파른탈의 구겨진 눈썹은 펴지지 않았다.

셰른이 '어차피 봐도 모를 거야-.'라고 속삭이고 나서야 파른탈이 물러섰다.

어차피 셰른의 연구는 한 번 본다고 알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제가 맡은 건, 마물의 피에 관한 연구예요."

"마물의 피?"

사내의 반문에 셰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물을 연구한다는 걸 들었을 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제국에서 마족의 연구는 절대 금지였다.

마족을 연구한다는 건 반란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당연히 쫄 수밖에-.

'웃어?'

미세하게 올라간 사내의 입꼬리에 셰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히 보니 그대로였다.

잘못 본 게 분명했다.

"5대대에서 공수받나 보군?"

"······아, 예. 그들은 마물의 가죽을 쓰지만, 피는 안 쓰니까요."

"어떻게 연구했지? 마나 측정 도구로는 마족의 피를 파악할 수 없을 텐데."

"예, 그래서 따로 마물용 마나 측정 도구를 만들어야···."

사내는 마족의 피에 마나가 있고, 그 농도가 짙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족을 연구한 게 분명했다.

"마물용 마나 측정 도구? 마석을 이용할 텐데, 농도가 낮아서 불가능하지 않나? 아, 마나가 빠져나가는 속도를 검사하는 거군. 일회성으로 쓰나?"

사내의 질문에 셰른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사내는 마물용 마나 측정 도구의 원리를 묻고 있었다. 꼭 기밀을 발설한 듯하여 찝찝했다.

"그러면 마석 소모가 너무 많지 않나?"

"하! 뻔한 지적을 하는군. 마석의 소모가 많다니-. 그러면 다른 해결법이라도 제시하던가!"

파른탈이 뾰족하게 말했다. 마석을 너무 많이 쓴다고 매번 지적당하는 터라, 민감한 부분이었다.

다만, 마석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족의 마나 농도가 너무 짙은 탓이었다.

파른탈의 물음에 사내가 눈을 찡그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에 셰른이 한 마디 거들려고 할 때, 사내가 되물었다.

"마시면 되지 않나?"

그 목소리가 차분하여 내용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사내의 말을 되새기던 셰른은 화들짝 놀랐다.

"마족의 피를 마시라고요?!"

"왜 놀라지? 그게 효율적이지 않나? 마석 소비도 줄이고, 본인의 마나에도 좋은 영향을 줄 텐데?"

확실히 사내의 말은 지독하게 이론적이었다.

다만-.

"마족의 피를 마신다니 그게 무슨 야만적인···."

마족의 피를 직접 마시는 건, 너무 무식하고 야만적인 방식이었다.

"음, 마물의 피를 연구하려면 최소 중급 이상의 마석을 쓸 텐데, 그게 한두 푼인가? 그리고 마시는 게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지 않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마물의 피를 마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 마족의 피를 마시라니! 마족의 마나 농도가 얼마나 높은지 모르니까 그리 말할 수 있겠지! 마족의 피를 마셨다가 죽거나 미친 마법사가 몇 명인데!"

파른탈이 뾰족하게 반박했다. 셰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의 피를 마셔서 죽은 이가 몇 명인가.

그때,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오답이라는 것처럼-.

"그들은 마족의 피를 마셔서 죽은 게 아닐세."

사내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족의 피를 마셔서 죽었는데, 마족의 피를 마셔서 죽은 게 아니라니?'

셰른의 눈이 가득 구겨졌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지-.

"그들은 마족의 피를 못 이겨내서 죽은 걸세."

사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셰른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마족의 피를 마셔서 죽은 건, 그 피를 이겨내지 못해서라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죽었다는 궤변이었다.

다만, 사내의 차분한 목소리에 확신이 단단했다.

"마물의 피는 마족의 피보다 농도가 낮아서 마실만 하네. 자, 마셔보게나.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니까. 아-, 해보게."

사내가 마치 술을 권유하듯 마물의 피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사내의 진지한 목소리에 셰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물의 피가 마족의 피보다 농도가 낮다고, 마실만 하다는 건-.

'둘 다 마셔봤다는 거잖아!!'

셰른과 파른탈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코르튼! 이 미친놈! 진짜 흑마법사를 데려온 거야?!'

셰른은 터지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24화 비싼 의뢰

"한 번만 마셔보라니까?"

사내가 유리병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검붉은 피가 찰랑였다.

마족과 마물의 피를 마신 흑마법사라니-.

'미친···. 진짜다. 저건 진짜야.'

차분한 목소리에 셰른은 닭살이 가득 올랐다.

마족의 피에 대한 악명은 흑마법사학회에서 유명했다.

열 명의 흑마법사가 마족의 피를 마셨는데, 그중 여덟이 죽고, 하나는 미쳤으며, 나머지 하나는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마족의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권유하고 있었다.

"왜 안 마시는 거지? 직접 경험하는 것만큼 효율적인 게 또 있나?"

사내는 오히려 둘을 타박하고 있었다.

"저··· 정말 위험한 게 아니라면 한 번 마셔보십쇼!"

파른탈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파른탈의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 사이로 열망이 언뜻 보였다.

'미친 파른탈!'

셰른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양이 많지 않던데, 내가 마셔도 되나?"

사내가 유리병을 흔들며 물었다. 이 귀한 걸 자신이 마셔도 되는지 묻는 듯했다.

서늘한 괴리감에 셰른과 파른탈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좋군. 아, 혹시 사탕 같은 거 있나?"

"···사탕이요?"

"단 거 없나."

단 걸 좋아하는 셰른이 사탕 몇 개를 꺼내서 사내에게 던지듯 건넸다.

"고맙네, 이게 맛이 없거든."

사내가 유리컵에 든 마물의 피를 망설임 없이 털어 넣었다.

"······진짜 마셨어."

진짜 마신 사내에 셰른은 경악에 찬 신음을 흘렸다.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사탕을 입에 넣었다.

마물의 피를 술처럼 털어 넣고, 쓰다고 사탕을 먹다니-.

셰른의 상식이 전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이거 계산식 틀렸네. 마나 농도가 살짝 더 낮아.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보게, 듣고 있나?"

"···네? 네!"

"농도를 좀 더 줄이게. 그리고 애초에 계산식 자체가 엉터리인데? 기준이 없잖나. 기준이."

심지어 바로 계산식 지적을 했다.

'마물의 피가 상한 거 아니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파른탈이 유리병을 집었다.

사내가 마신 것과 같은 마물의 피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저··· 정말 괜찮은 겁니까?"

"조금 아프기는 한데,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되네."

한참을 주저하던 파른탈이 마물의 피를 한 번에 삼켰다.

"음, 한 번에 다 마시면 힘들 텐데, 젊은 친구라 그런지 패기가 있군."

"그런 건 미리 말을······."

파른탈의 입이 멈췄다.

파른탈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눈에 실핏줄이 가득 올라왔다. 눈가를 타고 눈물이 길게 흘렀다. 숨을 못 쉬는 듯 끄윽- 소리만 냈다.

"아, 괜찮네. 혈관 하나하나가 불에 타는 것 같겠지만, 그건 착각이라네. 고작해야 고통일 뿐이야. 집중하게. 마나를 누르는 걸세."

"끄으윽-."

파른탈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사지를 파들파들 떨었다. 얼굴에 핏줄이 가득 올라왔다. 발끝으로 발딱 섰다.

어떤 고통을 겪는지 상상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다.

"괜찮네. 마족의 피도 아니고 마물의 피잖나. 그것도 시간도 제법 지난 건데, 뭘 이리 엄살이 심한가."

'엄···살?'

발끝으로 서서 몸을 바들바들 떠는데, 엄살일 리가 없었다.

"자, 방법은 간단하네. 심장에 자네의 마나가 있다고 생각하게나. 그걸 꾹 누른다고 상상하게. 숨을 끝까지 들이마셨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네. 따라 해보게나. 후- 하- 후- 하-. 제대로 하게나. 자네, 죽고 싶은 건가?"

그때쯤 파른탈의 고개가 훽- 올라갔다. 뼈가 뒤틀리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뼈가 뽑히는 것처럼 살가죽이 올라왔다.

"음, 안 되겠군. 이번만 도와주는 걸세."

사내가 파른탈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사내의 손에 핏줄이 가득 올라왔다. 파른탈의 호흡이 빠르게 안정됐다.

파른탈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셰른은 황급히 파른탈을 부축했다.

"파른탈! 괜찮아? 정신이 들어?"

파른탈이 정신을 차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사내는 파른탈의 연구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맞아, 계수가 높았어. 오차 범위 선정이 틀렸던 거야."

정신을 차린 파른탈이 곧장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파른탈의 재촉에 셰른은 보고서를 점검했다.

'계수를 바꾸면-. 맞네.'

그동안 골머리를 앓게 했던 게 단번에 풀렸다.

사내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거."

그때, 사내가 파른탈의 연구 보고서를 가리켰다.

파른탈이 필사적으로 일어나서 사내에게 다가갔다.

"중간에 인간의 마나 계수표가 비어있군?"

"아, 인간과 관련된 연구는 아직 준비 중입니다. 모종의 단체에 습격당해 소실된 부분이라···."

"그렇군. 펜 좀 주겠나?"

"예!"

사내가 파른탈에게 받은 펜으로 보고서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제 연구를 남이 손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파른탈인데, 지금은 가만히 지켜봤다. 오히려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사내가 연구 보고서를 내밀었다.

"오차가 약간 있지만, 허용 범위일 걸세."

비어있던 표가 전부 채워져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서 뒷장에 추가적인 자료를 적어줬다.

전부 모종의 단체에 습격당하면서 소실된 자료였다. 연구에 필요하지만, 구할 방도가 없어서 애를 먹던 것들인데-.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모종의 단체거나, 흑마법학회의 고위층인 본회거나-.

모종의 단체가 여기서 보고서를 고쳐주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본회에서 나오신 분이십니까?"

부지부장이 절차를 무시하고 들인 것과 마족과 마물의 피에 해박한 것, 마물의 피를 마시고 아무렇지 않는 것, 소실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것까지-.

모든 게 사내가 본회에서 나온 인물임을 가리켰다.

"비밀일세."

긍정과 다름없는 대답에 셰른과 파른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본회라니-.

전설로만 내려오는 이야기를 실제 마주하니 입술이 바짝 말랐다.

"본회 분이 어째서 여기까지···."

"왜겠나?"

사내는 오히려 되물었다. 꼭 시험하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썩어빠진 놈들을 전부 청소하기 위해서입니다!"

파른탈이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사내가 계속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학회는 지금 마석에 매몰되었습니다! 연구는 뒷전이며, 마석 지팡이가 자랑으로 생각하는 썩어빠진 놈들투성이입니다! 심지어 연구 담당인 저희에게도 마석 할당량을 강제합니다!"

파른탈이 입에서 피를 토하는 것처럼 쏟아냈다. 평소 불만이 많았던 파른탈이었기에, 목소리에 절절함이 가득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쇄신을 준비하고 있네."

쇄신-. 셰른은 그 달콤하면서도 짜릿한 단어를 작게 중얼거렸다.

"마석 좋지. 부르는 게 값인 돌 아닌가? 다만, 그래봤자 돌일세. 돌덩어리가 진리를 열어줄 것 같나?"

사내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셰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쓸만한 건 자네들이 유일하네. 다른 놈들은 전부 마도구나 핥는 가짜 마법사지."

사내의 인정에 파른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응이 너무 격하지 않나? 셰른은 작게 찡그렸다.

"나는 새살이 돋을 자리를 위해 썩은 살을 도려낼 것이네. 파른탈, 자네는 합격일세."

사내의 지명에 파른탈이 격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 눈에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승을 숭상하기 위해 들어온 흑마법학회였다. 그런데 연구는 뒷전이고 마석장에서 곡괭이질 하는 날이 점점 늘었다. 분노하던 파른탈에게 너무 달콤한 말이었다.

"파른탈, 손을 주게."

"감사합니다!"

사내가 파른탈의 손목을 잡았다. 사내의 손에서 거친 스파크가 연속으로 튀었다. 정말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마법이었다.

저런 정교한 마법을 주문식도 없이 하다니-.

'역시 본회!'

"됐네, 이것이 인장일세."

파른탈의 손목 안쪽에 번개 모양의 멋들어진 흉터가 있었다. 파른탈이 그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저··· 저는요?!"

셰른은 다급히 물었다.

"조건은 하나일세."

사내가 마물의 피가 담긴 유리병을 밀었다.

"자네의 진심을 보이게."

꿀꺽-. 셰른은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 무식하지만, 그렇기에 속일 수 없는 시험이었다.

"마셔라! 셰른!"

셰른에게 늘 친절했던 파른탈이 뒤집힌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압박에 셰른은 마물의 피를 꿀꺽 삼켰다.

꼭 불을 삼킨 듯했다. 그냥 불이 아니었다. 잔뜩 가시가 돋친 불이었다.

몸 내부가 전부 찢어지고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셰른의 정신이 순간 아득해졌다.

그때,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사내를 마주한 순간 파른탈의 광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다스리는 사내에 경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다.

"자네도 합격일세."

셰른과 파른탈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수모가 녹아 흘렀다.

"자, 그대들은 이제 내 직속일세. 축하하네."

둘은 한결 엄숙해진 얼굴로 끄덕였다.

"일단 여기 남아서 평소처럼 지내면서, 지부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두게. 특히 코르튼."

셰른과 파른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종이 좀 주겠나? 고맙네."

"아닙니다!"

사내가 빈 종이에 뭔가를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기준은 마나 화살일세. 이걸 이용해서 마족의 피를 연구하게. 마물의 피를 활용할 수 있으니,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셰른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마족의 피에 대한 상세한 자료였다. 사내는 그저 휘갈겼지만, 그들에게 꼭 필요한 자료였다.

"아, 인간 연구는 금지일세. 모종의 단체가 접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혹시나 그런 연구를 하는 놈이 있다면 따로 적어두게나. 항상 쇄신을 기억하게."

사내의 진지한 목소리에 둘은 엄숙한 얼굴로 끄덕였다.

"다음에 또 오겠네."

사내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며 코르튼 부지부장이 등장했다.

사내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었다.

****

"연구는 어땠나?"

"나쁘지 않았네."

연구만 하던 마법사들을 꼬드기는 건, 요원인 갈라하드에게 손을 뒤집는 것보다 쉬웠다.

심지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회유는 갈라하드의 전문이었다.

'연구소 하나 차렸군.'

당장 놈들의 연구는 형편없었다. 가진 마석과 고가의 마도구가 많아 기대했건만 별로였다.

그래도 쓸만한 놈들이었다.

방향을 잡아주고 마족의 피에 대한 정보까지 줬으니, 다음에 왔을 때는 성과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코르튼을 감시하는 역할까지 맡겼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굴을 두 개 파야지.'

이제 코르튼만 꿰어내면, 양쪽에 심복을 심어두고 서로 감시하게 할 수 있었다.

그때, 밖을 확인한 코르튼이 문을 잠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코르튼이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드리안나를 죽이게."

너무 단도직입적인 부탁에 갈라하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뜸 아드리안나를 죽이라니-.

"후······, 아주 높은 분들이 아드리안나의 죽음을 원하네. 아드리안나를 처리하면 막대한 보상을 내려줄 것이야."

여명이 분명했다.

"높은 분이 많이 높은가?"

코르튼이 히죽 웃었다.

"우리가 괜히 마족을 연구하겠는가?"

갈라하드는 코르튼이 왜 연구를 보여줬는지 깨달았다.

제국은 마족의 연구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마족과 관련된 연구는 뿌리까지 뽑는 제국이었다.

그런 마족을 연구한다는 건-.

'세력이 제국에 굴하지 않을 정도라는 걸 보여준 거군.'

여명이 생각보다 더 큰 듯했다.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명이 아드리안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그 보상이 상당히 크겠지. 아드리안나는 놈들에게 가장 큰 복병이니까.'

우리 욕심 많은 코르튼은 지부장에게 말하지 않고 진행할 생각인 듯했다.

'혼자 다 먹겠다는 거군.'

즉 비밀이 보장된다는 뜻이었다.

'아드리안나를 죽여 달라는 부탁이라-.'

레몬 향이 깊게 풍겼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니, 아드리안나를 죽여달라는 부탁은-.

'나쁘지 않네.'

꽤 좋은 제안이었다.

물론, 아드리안나를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다만, 여명에게 접근할 기회였다.

바로 넘어가는 건 좋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얻을 이득은 뭐지?"

"······이득? 아, 그래. 당연히 있지!"

더듬는 걸 보니, 갈라하드에게 줄 보상은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진짜 답이 없는 놈이었다.

"아주 높으신 분의 부탁이야. 만약 성공한다면 상상도 못 할 보상이 따를 걸세. 굴러다니는 마석과 고가의 마도구들, 자네도 봤잖는가? 그것보다 더한 보상이 있을 걸세!"

구체적이지 않은 보상은 늘 끝이 좋지 않았다.

물론, 이번에는 그 보상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보상이라-. 참 좋군. 하지만 말일세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허울뿐이라네. 틈이라도 노리려면 아드리안나에게 가까이 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손도 잡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잡았다가 죽을 뻔했네. 북부 놈들 성격 모르나?"

갈라하드의 대답에 코르튼이 히죽 웃었다.

"지원은 걱정하지 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게나."

코르튼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갈라하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자네, 정말 듬직하군!"

"하하! 나 부지부장일세. 지부장도 없으니 내 세상이라는 거지. 오면서 마석과 마도구들 못 봤나?"

갈라하드가 필요한 것들을 말하자, 코르튼의 웃음이 서서히 멈췄다.

잠시 뒤 코르튼이 은화가 아닌 끔찍하게 생긴 손가락만 한 알을 내밀었다.

"고통의 알일세."

"고통의 알?"

"고위 마족에게서 얻은 물건이지. 이걸 먹고 한 맹세를 어기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절명하지."

코르튼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코르튼이 순순히 믿나 싶었는데, 나름대로 방책을 준비한 듯했다.

확실히 고위 마족의 물건이라면 자신할 만했다.

다만-.

"맹세를 어기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절명한다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가. 혹 이 자그마한 것에 판단할 두뇌가 있나? 아니면 개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건가? 혹여 마법의 종류인가?"

쏟아지는 갈라하드의 질문에 코르튼은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이 끔찍하게 생긴 걸 보고 갈라하드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빛냈다.

아주 귀중한 걸 발견한 것처럼-.

"아, 미안하네. 음, 고위 마족의 것이라고-."

고통의 알은 어느새 갈라하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저 끔찍한 물건을 보석 살피듯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갈라하드에 코르튼은 몸을 작게 떨었다.

"그래, 먹고 맹세하라고-. 알겠네."

갈라하드는 아무렇지 않게 삼켰다.

꿀꺽-.

그 거침없는 행동에 코르튼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 갈라하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코르튼을 보며 맹세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아드리안나를 죽이겠네."

묘한 조건이 붙은 듯했지만, 내용은 일치했기에 코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이런 원리군. 고위 마족이라. 이 정도의 마나 농도라니. 이거 정말 대단하군."

갈라하드는 자기 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하나 더 구할 수 있나?"

"자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나 더 먹으면 알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하나 더 있나?"

입맛을 다시는 갈라하드에 코르튼은 도망치듯 일어났다.

****

"길버튼 경, 큰일 났습니다."

톰의 진지한 목소리에 길버튼은 눈을 찡그렸다.

"왜 대장이 사고 쳤나?"

"예? 아닙니다."

"그러면 그웬이 또 막사를 태웠나?"

"아, 밖에 나가서 하고 있습니다."

"데미안이 배고프다고 했나?"

"예? 아닙니다. 이것 좀 보십쇼."

톰이 뭔가를 내밀었다. 뭐가 잔뜩 적힌 누런 양피지였다.

길버튼은 양피지에 적힌 걸 천천히 읽었다.

"특무대 회계장부? 이런 것도 있었나?"

"아, 시간이 남아서 정리해봤습니다. 아무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시간이 남아서 회계장부를 작성했다니.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길버튼은 회계장부를 천천히 살폈다. 숫자가 적힌 문장을 두 줄 읽으니 어지러움이 올라왔다.

"뭐가 문제라는 거지?"

길버튼이 장부를 톰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곧 예산이 바닥납니다."

"예산이 바닥나다니? 마차를 받을 때, 부대 운용비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예, 부대 예산은 성과에 맞춰서 나오지 않습니까?"

"음. 그렇지."

길버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예산을 받을 때, 저희는 성과를 올린 게 없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그래서 편성된 예산 자체가 적었습니다."

"그렇군."

그제야 이해한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올린 성과에 대한 반영은 다음 분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지."

"우리 부대는 예산이 지나치게 많이 듭니다. 1대대 출신인 길버튼 경의 몸값은 이해하지만, 데미안과 그웬의 몸값이 이상할 정도로 높습니다."

계속된 돈 이야기에 길버튼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거기에 데미안의 식비와 이번에 길버튼 경의 갑옷 수리비까지-. 이대로는 파산입니다."

'파산'이라는 두 글자가 정확히 들렸다. 길버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산한다는 거군."

"예? 아, 예. 맞습니다."

"본론부터 꺼내지 왜 길게 말하나?"

"아하하···. 아무튼, 방법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방법?"

"예, 가령 길버튼 경의 갑옷 수리는 4대대 임무를 도와주다가 벌어진 일이니 4대대 쪽에 비용 처리를 보내는 게 맞고, 데미안의 식비 같은 경우에는·········."

괴상한 이야기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길버튼은 대충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튼 경도 동의하시는군요."

"뭐를 말인가?"

"······봉급 삭감 말입니다."

"내 봉급을 깎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톰의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그······ 아닙니다."

"예컨대 돈이 부족하다는 거 아닌가."

"예, 맞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이리 길게 말하다니-.

길버튼은 혀를 찼다.

"대장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장님이라도 여기는 북부 아닙니까. 돈을 구할 방법이······."

그때, 막사의 문이 걷혔다.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아. 오셨습니까."

톰이 일어나서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길버튼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이 조금 늦어졌네. 데미안이랑 그웬은?"

갈라하드가 큼지막한 가죽 보따리를 톰에게 건네며 물었다.

"훈련 중입니다."

"열심이군. 왜 이런 후줄근한 막사에 있지?"

"타 부대인데, 이 정도면 좋은 대우입니다."

"이런 눅눅한 냄새가 나는 막사가 좋은 대우라니-. 어디서 끔찍한 냄새가······. 길버튼 경, 자네 발 제대로 씻었나?"

"발을 왜 씻습니까?"

"끔찍하군. 그러니까 인기가 없는 걸세."

그때, 톰이 비명을 질렀다.

톰의 손에서 떨어진 보따리가 거칠게 펼쳐졌다.

그 사이로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 쏟아졌다.

금화, 은화, 은은한 빛이 감도는 돌까지-.

생전 처음 보는 금액에 길버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뭐··· 뭡니까? 어딜 갔나 했더니 5대대를 턴 겁니까?! 젠장!"

길버튼은 검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털기는 뭐를 턴다고-. 의뢰를 하나 받았네."

"...도대체 무슨 의뢰길래, 저런 거액을 줍니까?"

길버튼의 미심쩍은 물음에 갈라하드가 작게 기침했다.

"비밀일세."

웃음기 섞인 대답에 길버튼은 굉장히 불안해졌다.

25화 그냥 길버튼

'고통의 알이라.'

갈라하드는 심장 주변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코르튼이 선물해준, 고통의 알은 이제껏 접한 적 없는 물건이었다.

마나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마도구는 아니었다.

'농도가 높아서 그런가? 아니면 봉인?'

유일한 단서는 맹세할 때 스친 아주 작은 기시감이었다.

그건 전에 마족과 싸울 때 느꼈던 순수한 마나 덩어리와 비슷했다.

고통의 알은 심장 주변에 자리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맹세를 어기면 심장을 먹을 거라고-.

마치 머릿속에 귀신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보통 인간이면 이미 미쳤겠군.'

쓰레기 같은 물건이었다. 대상이 미치면 맹세를 지키지 못하니, 오히려 목적을 방해하는 물건이었다.

갈라하드의 입꼬리는 가득 올라갔다.

'이런 신비로운 물건이라니-.'

여명이 제마전쟁의 잔재를 나눠준다는 팔호의 보고가 떠올랐다. 이것도 그 잔재 중 하나인 듯했다.

코르튼을 찔러봤지만, 5대대와의 거래를 튼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고위 마족의 것이라도, 아드리안나가 심장 주변을 만지면 해결될 것이다.

아드리안나의 성질은 상대의 농도가 진할수록 더 강해지니까.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귀한 걸 아깝게 왜-.'

없앤다고 해도 원리를 알아낸 뒤에 없앨 생각이었다.

애초에 알아내면 없앨 필요도 없겠지만-.

'어떻게 작용하는 거지? 기한을 안 정했는데, 그냥 안 지켜도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자, 심장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순간 누가 심장을 한 입 깨문 것처럼 격통이 느껴졌다.

고통에 제법 익숙한 갈라하드도 신음을 흘릴 정도의 격통이었다.

'······생각을 읽는 건가? 자아가 있는 건가?'

슬쩍 심장 부근을 두드리며 물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놈은 그저 재촉했다. 맹세를 지키라고-.

'한 십 년뒤쯤 죽일까.'

실험 삼아 슬쩍 물어보니 다시금 격통이 터졌다.

전보다 격통이 심했다. 마치 까불지 말라는 것처럼-. 갈라하드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자아가 있군. 그리고 그건 마나였어. 아주 고농축의 마나-.'

갈라하드는 방금 느낀 걸 되새겼다.

순간이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자아가 있는 물건이라니. 보물이군.'

한 번 더 해보고 싶었지만, 놈이 화난 것 같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솔직히 말해주십쇼. 무슨 의뢰입니까?"

길버튼이 진지하게 물었다. 길버튼의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감이 제법 좋았다.

"자네는 모르는 게 나을 걸세."

갈라하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주는 것도 재밌을 듯했지만, 괜히 알려줬다가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그때, 톰이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 얼굴에 시름이 가득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거 제가 관리하기에 너무 많습니다."

"톰, 사내가 그리 앓는 소리를 하면 되겠나. 더 내놓으라고 해야지."

"이건 너무 많습니다."

코르튼에게 받은 적당한 계약금이었다. 고작 이 정도가 많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자네가 안 맡으면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하겠군. 음,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 그웬?"

"아··· 안 됩니다! 다 적선할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웬은 돈을 들고 다니기에 너무 여려. 그러면 데미안?"

"맛있는 걸 잔뜩 사 먹을 겁니다."

"성장기의 소년은 무섭지. 자, 그러면 그냥 길버튼 경?"

"그냥 제가 맡겠습니다."

톰이 결심한 얼굴로 끄덕였다.

"잘 생각했네, 자네는 잘할 걸세. 나는 사람을 잘 보거든."

"감사합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냥 길버튼은 뭡니까?"

길버튼이 뒤늦게 의문을 제기했다. 톰이 슬쩍 보따리를 확인했다. 이미 셌던 걸 다시 셌다.

"데미안을 보러 가봐야겠군."

갈라하드는 슬쩍 일어났다.

"아니, 그냥 길버튼이 무슨 뜻입니까?"

데미안은 막사의 뒤쪽에 있었다.

녹슨 검을 든 데미안이 제자리에서 뛰고, 앞으로 굴렀다. 그 주변으로 눈발이 거칠게 튀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검을 휘둘렀다. 검이 그린 선이 엉망이었다.

"줄곧 저러고 있습니다."

따라 나온 길버튼이 묘한 눈으로 데미안을 보며 말했다.

"저건 검술 훈련이 아닙니다. 체력 단련도 아니고 그냥 노는 거 아닙니까. 한참 하다가 들어와서 먹고 잔 다음에 다시 또 저럽니다. 저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검술을 안 배우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길버튼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길버튼은 데미안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싶은 듯했다.

기사가 제 검술을 가르쳐주려고 하다니-. 갈라하드는 작게 놀랐다.

원래는 몇 년을 심부름꾼 하면서 돈까지 바쳐야 검술을 전수해주는 게 기사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길버튼은 좋은 기사였다.

"예전에 데미안과 비슷한 동료가 있었네. 같이 일을 한 적 있는데, 술을 퍼 마시고 밤새 여자를 안는 것 아닌가. 그것도 둘씩."

갈라하드는 데미안을 처음 봤을 때 떠올랐던 사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원 이름이 레이디였나-.'

레이디는 이제 막 이족 보행을 배운 것처럼 짐승의 냄새가 가득한 사내였다.

"나는 일을 할 때면 술은커녕 먹는 것도 관리하네. 그런 내게 사내는 미친 것처럼 보였지. 제법 중요한 일이었거든."

길버튼이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래서 한마디 했네. 그 당시의 나는 한 성질 했거든. 그랬더니 놈이 뭐라 대답했는지 아는가?"

"뭐라고 했습니까?"

"맹수가 훈련하는 걸 본 적 있냐고 묻더군."

오래된 기억에 갈라하드는 끌끌 웃었다.

"나도 자네처럼 개소리라 생각했네. 그래서 혼자 일할 생각으로 갔는데-."

그때, 데미안이 앞으로 연속 두 번 굴렀다. 언뜻 보면 우스운 동작이었지만, 검이 그린 선은 정확했다.

"정말 맹수더군."

선명한 붉은 기억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차며 끄덕였다.

"그게 뭡니까."

"아무튼,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세. 굳이 끼워 맞추면 오히려 고장 날 거야. 맹수에겐 맹수의 방법이 있는 걸세. 그냥 잘 먹이면 되는 거야."

길버튼이 눈을 찡그렸다. 불만이 여전히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길버튼은 땀으로 쌓아 올린 정직한 기사였으니까. 데미안은 태어나길 맹수였고-.

둘의 간격은 좁힐 수 없었다.

"정 그러면 둘이 대련 한 번 해보겠나? 데미안!"

앞으로 구르고 있던 데미안이 펄쩍 뛰었다. 검을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얼굴과 옷에 눈이 가득 묻어서 엉망이었다. 볼은 언 것처럼 붉었고 코에서는 콧물이 길게 흘렀다. 눈 와서 뛰어다닌 동네 아이였다. 근육이 상당히 많은-.

"좋습니다."

길버튼이 검을 고쳐 잡으며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던 듯했다.

"데미안, 길버튼 경과 한 번 겨뤄보게."

"죽여요?"

"아니, 죽이면 안 되네. 이래 봬도 부대장이거든."

"아하, 알았어요."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저 1대대 출신입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봉급이 비싸지 않나."

"삭감 안 할 겁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

길버튼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얼굴을 보니 길버튼도 데미안이 궁금한 듯했다. 천생 기사였다.

길버튼이 데미안을 마주 보며 자세를 잡았다. 검을 살짝 비틀어 내미는 정석적인 자세였다.

그에 비해 데미안은 그저 검을 늘어뜨렸다.

"상처 하나라도 내면 네 승리로 쳐주마."

"알았어요."

데미안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앞으로 뛰었다. 탁탁, 그 자세가 낮아서 꼭 네 발로 기는 듯한 기이한 동작이었다.

당황할 법도 한데, 길버튼은 아무렇지 않게 왼발을 뒤로 빼며 자세를 약간 낮췄다.

데미안이 던지듯 검을 휘둘렀다. 검술보다는 맹수의 앞발 같은 동작이었다. 거침없고 거칠었다.

길버튼의 검이 그를 막았다. 그때, 데미안의 검이 비틀렸다. 데미안의 검이 길버튼의 검을 타듯이 미끄러졌다. 검이 아니라 살아있는 뱀 같았다.

"음."

길버튼이 침음성을 흘리며 가드를 밀었다. 순간 데미안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그를 기회로 길버튼이 검을 밀었다. 데미안이 뒤로 넘어졌다.

얼마나 세게 넘어졌는지, 쌓였던 눈이 거칠게 휘날렸다. 그 하얀 눈보라 사이로 검이 쏘아졌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맹수처럼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지만, 길버튼의 검은 단단했다. 틈이 없었다.

'즐기고 있군.'

길버튼이 데미안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길버튼은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데미안에게 유리한 좁은 거리에서 검을 나눴다.

그런데도 격차가 압도적이었다.

"더 빠르게!"

길버튼은 오히려 점점 더 아슬아슬하게 격차를 줄였다. 데미안을 더 끌어올리려는 듯했다.

데미안의 검을 받으며 웃는 길버튼에 갈라하드는 작게 혀를 찼다.

'검 휘두르는 게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경합은 데미안이 픽- 쓰러지며 끝났다.

체력이 다한 데미안이 그대로 엎어졌다. 마치, 배터리가 다한 기계처럼 픽- 쓰러졌다.

그에 반해 길버튼은 숨조차 고요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길버튼이 검을 챙기며 말했다.

갈라하드는 길버튼의 손을 가리켰다. 건틀릿을 끼지 않은 그 손과 손목 사이에 아주 작은 붉은 선이 있었다.

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상처였다.

"자네, 아까 상처 하나라도 내면 패배라고 하지 않았나?"

길버튼의 얼굴이 가득 구겨졌다.

"데미안의 검이 아니라 땅에 긁힌 겁니다."

"추하군."

"진짜입니다. 데미안의 검에 베였다면, 이런 자국이 아니라 좀 더 폭이 넓어야-."

"그래, 역시 자네는 길버튼일세."

"······길버튼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길버튼이라는 뜻이지."

길버튼은 이게 왜 데미안의 검에 당한 게 아닌 지에 대해 한참이나 떠들었다.

알았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소용없었다.

"식사하십쇼!"

톰이 식사 이야기를 꺼내자, 데미안이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길버튼이 데미안에게 갔다.

"식사하래요!"

뒤에서 잔뜩 숨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새까맣게 칠해진 그웬이 있었다.

"자네, 태닝을 너무 강하게 한 거 아닌가?"

"······예? 아! 마법을 연습하다가! 거리 조절이 안 돼서요!"

"그렇군, 잘하고 있네."

"식사 안 하세요?"

"아, 먼저 먹게. 아직 할 일이 남았네."

"할 일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오, 그러지 말아 주게."

"빨리 오셔야 해요! 식으면 맛 없으니까!"

히죽 웃은 그웬이 막사로 달려갔다.

그에 갈라하드는 손을 흔들어주고 뒤로 돌았다.

아직 얻어야 할 게 하나 더 남았다.

음습한 흑마법학회와 공모한 나쁜 5대대 대장과의 거래였다.

'흑마법학회. 마석장, 5대대, 마족-.'

갈라하드는 손에 든 패를 다시금 되새겼다.

마크란 인물은 지극히 계산적이었다.

선택지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제시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제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다른 선택지를 전부 지우면 되지.'

갈라하드는 연초를 입에 물고 걸음을 옮겼다.

****

5대대 대장 마크는 머리가 복잡했다.

최근 마족의 습격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들었다. 병사들의 갑옷부터 검, 그리고 먹는 것까지.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마석장이 아니라면-.'

똑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고 특무대 대장 갈라하드가 들어왔다.

코르튼은 쓰레기 같은 사내였지만, 쥐 새끼처럼 음흉했다. 그런 코르튼과 나갔던 갈라하드가 돌아왔다는 건-.

'모종의 거래를 했군.'

갈라하드가 왜 다시 찾아왔을까.

'협박?'

마법사와 거래하는 건 북부에서 지탄받는 일이었다.

다만, 그 마법사가 마족을 연구한다면 상황을 다르게 만들 수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엄하게 금지한 게 마족 연구였다. 그런 마족을 연구한다는 건 반 제국 단체라는 뜻이었다.

더불어 흑마법학회를 통한 마석장 수입이 짭짤했다.

마크는 두 개를 근거로 다른 대장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마크가 흑마법학회를 받은 이유였다.

"차 같은 거 없나? 오늘 말을 많이 해서 목이 좀 마르군."

그때, 어느새 앉은 갈라하드가 루미안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마크가 끄덕이자, 루미안이 입술을 씹으며 밖으로 나갔다.

"일은 잘되셨습니까?"

마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동문이라 오랜만에 이야기를 길게 나눴지. 자네가 손잡은 마법사들의 명칭은 흑마법학회였네."

"그렇군요."

"자네, 알고 있었군?"

"그럴 리가요."

물론 알고 있었다. 마크는 정체를 모르는 놈들을 성으로 들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득과 실을 계산했을 때, 득이 실을 덮을 정도로 컸을 뿐이었다.

"아, 내가 오면서 상급 마족에 준하는 중급 마족과 땅강아지 열여섯 마리, 그리고 마법사 둘을 잡았다고 말했나?"

뜬금없는 자랑에 마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

"실은 마법사가 셋이었다네."

그때, 문이 열리고 루미안이 들어왔다. 루미안이 갈라하드의 앞에 철로 된 잔을 뒀다. 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갈라하드는 차를 고풍스럽게 마셨다.

'마법사 둘이 아니라 셋이다-.'

흑마법학회 뒤에 그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분명했다.

'흑마법학회의 짓이었나.'

마크의 입이 바짝 말랐다.

흑마법학회가 마족과 결탁한 건, 예상에 없던 수였다.

이건-.

'최악이군.'

마크는 눈을 가득 찡그렸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성에 있는 흑마법학회 놈들을 당장 잡아 죽여야 했다.

다만, 그러면 마석장을 운용할 수 없었다.

마족의 습격이 잦아지는 상황에서 마석장을 포기하는 건, 느리게 죽겠다는 이야기였다.

최악과 차악이 아닌, 빠른 최악과 느린 최악이었다.

'이걸 나한테 말하는 목적이 뭐지?'

갈라하드는 특무대를 이끌고 있지만, 병력이 현저하게 적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 없었다.

갈라하드가 마크에게 원할 만한 건-.

'기반이나 병력이겠군.'

칼자루가 저쪽으로 넘어갔지만, 갈라하드와 마크는 체급이 달랐다.

칼자루도 어느 정도 체급이 맞아야 통하는 이야기였다.

'제국 놈의 개소리라고 우긴다면-.'

마크는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갈라하드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 고풍스러운 모습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정갈하게 정리된 복장-.

북부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마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5대대에 특무대 본부를 두고 싶네."

예상한 요구였다.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급소를 비워드리겠습니다."

"보급소는 너무 작던데."

고작 다섯 명인 부대인데, 보급소 건물이 작다니-.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 건물을 드리겠습니다."

"중대라니-. 길버튼 경의 발 냄새가 날 것 같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십쇼."

마크의 물음에 갈라하드가 아래를 가리켰다.

마크는 갈라하드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바닥이었다.

잠시 눈을 찡그리던 마크가 이내 깨달았다.

"지금 대대 본부를 달라는 겁니까?"

"여기가 제일 크더군. 따뜻하고."

농담인가-? 마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 어떤 놈이 대대 본부를 달라고 한다는 말인가. 농담이 분명했다.

마크는 갈라하드의 눈빛에 깨달았다.

농담이 아니었다. 이 미친 사내는 진심으로 대대 본부를 원하고 있었다.

"다섯 명인 부대에 대대 본부가 왜 필요합니까?"

"본부는 부대의 얼굴 아닌가. 나는 크고 깔끔한 얼굴을 좋아하네. 싫은가?"

건물은 그저 건물일 뿐이었다.

예상 밖이었기에, 당황했을 뿐 딱히 상관없었다.

흑마법학회와 대대 본부의 교환. 마크가 해결법을 찾을 동안만이라고 가정하면···.

"좋습니다."

"좋군."

갈라하드는 마크가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가 전부 쓰겠다는 건 아니네. 비울 날이 더 많으니 그건 낭비 아닌가. 나는 낭비를 아주 싫어한다네. 이 건물이 몇 층이지?"

"······3층입니다."

"그러면 자네가 1층과 2층을 쓰게. 우리가 3층을 쓰겠네."

마치 선심 쓰듯 말하는 갈라하드에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저건 경비를 유지하라는 뜻이었다. 건물 관리까지 맡기는 셈이었고-.

"좋습니다."

"아, 하나 더 있네."

욕심이 많군.

마크는 눈을 찡그렸다.

"대장 사이에 파벌이 있다고 들었네. 아드리안나와 2대대 대장 그리고 3대대로 나뉜다더군."

5대대 산하로 들어오고 싶다는 이야기겠군.

'건물을 달라는 건, 그를 위한 기싸움이었나.'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파벌이 있습니다."

"5대대도 있나?"

"없습니다만."

"좋군."

갈라하드가 연초를 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연초에 불이 붙었다.

레몬 향이 가득 풍겼다.

"마석장 사업이 유지된다면, 부대 운영비를 지원해줄 수 있습니다. 대신 임무 몇 개를 수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령 마석 금액에 대한 정확한 정보 같은 것들······."

"자네, 뭔가 오해하고 있군. 특무대가 5대대 밑으로 들어간다는 소리가 아닐세."

이어진 말에 마크는 작게 혀를 찼다.

'동맹을 원하는 건가.'

과욕이었다. 허무맹랑한 자존심이었고.

애초에 특무대와 5대대는 그 규모부터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무대는 고작 다섯 명이었다. 그에 반해 5대대는 중대만 열 개였다. 그 아래의 소대는 더 많았고.

특무대는 소대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런데 동등한 관계를 원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마크는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내 마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동맹이라니-. 어이가 없군. 맞춰주니 내가 우습게 보이나? 대장이라고 정말 같은 대장이라고 생각했나? 그래, 보고를 올리고 싶으면 올려. 그렇다고-."

"아, 내가 오해하게 말했군."

고개를 젓는 갈라하드에 마크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말을 잘못한 거군.'

그래, 규모의 차이가 얼마인데, 동맹을 논하겠는가.

아무리 담이 커도 그런 허무맹랑한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내가 말한 건 동맹 관계가 아니라-."

마크는 뒤에 나올 말을 짐작하고, 대처 방법을 구상했다.

갈라하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그때, 갈라하드가 입을 열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걸세."

마크는 대처하지 못했다.

26화 초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