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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화 미쳤지

치이익.

불판 위에 올라간 고기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딱히 유명한 식당도 아니고 질이 좋은 고기도 아니었지만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구워진 고기를 집어 입에 넣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식사에 열중하던 일행은 어느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후우.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어 본 것 같군."

"코리안 바베큐. 정말 최고야."

"···저 후식 시켜도 되나요?"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번개처럼 메뉴판을 훑어보는 일행의 모습에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몬스터의 등장 이후로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실.

대다수의 시간을 이세계에서 보내거나 지구에 있을 때는 병원에서 생활하거나 마음 착한 이웃들의 도움으로 나름 부족함 없는 일상을 보냈던 유성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간접적으로나마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투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식사가 끝나고 마침내 서창훈의 입이 열렸다.

"별로 도와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돈도 받고 밥까지 얻어먹다니 정말 면목이 없네."

"여러분이 오크들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돈은 약속을 지킨 것 뿐이고 밥이야 뭐 얼마 하지도 않는데 부담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그렇군. 밥 한 번 사는 걸로 부담 느끼기에는 자네가 번 돈이 좀 많아야지! 하하하!"

570억.

약속대로 세 사람에게 1할씩 나눠주고도 무려 399억이라는 거금이 남는다.

물론 세금이나 수수료를 계산한다면 실제로 남는 돈은 그것보다 적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

무심코 스마트폰을 켜 자신의 계좌를 확인한 유성은 가늘게 눈을 떴다.

57억을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일행들의 눈치가 보여 적당히 기쁜 척 연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정말로 솔직히 말해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야 물론 '좋다', '싫다' 중 선택하라면 당연히 '좋다'일 것이다.

그러나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뛸 듯이 기뻐할만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금액이 더 낮았더라면, 조금 더 현실성 있는 금액이라면 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는 않을 듯 싶었다.

액수에 따라 '좋다'의 비중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혹시 안 기쁜가?"

"기쁜데요?"

"그런가? 뭔가 담담해보이는 표정이기에 별로 안 기쁜가 했지."

"기뻐요. 단지 금액이 너무 커서 좀 당황스러운 것 뿐이에요."

"그럴만한 액수기는 하지. 하지만 돈을 쓰면 쓸수록 점점 실감이 날 걸세. 부모님에게 선물이라도 사드리는 건 어떤가?"

"저 양친 모두 돌아가셨는데요."

태연한 한 마디에 서창훈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고 로저스와 이하영은 은근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별로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작 유성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양친이 돌아가신 건 꽤 오래 전의 일, 고의도 아니고 실수로 저지른 일에 화를 낼 정도로 성격이 모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난 부분이라고 한다면 양친의 죽음보다도···.

"여러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죠? 돈도 있겠다 뭘 해도 될 것 같은데."

이 이상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었지만 서창훈은 유성이 배려해주는 것이라 여겼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아니, 우리는 길드를 만들기로 했네."

길드.

공식적으로 정의되거나 대중 사이에 퍼진 단어는 아니었지만 이름만 들어도 대충 그 목적과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참 많은 생각을 했다네. 다행히 우리는 자네가 도와준 덕에 몬스터를 상대하는 요령을 배우고 어울리지 않게 거금도 벌었지만, 자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돼지 괴물에게 잡혀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어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

서창훈은 지금까지 보여주던 어벙한 표정 대신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주고 강력한 몬스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그런 길드를 만들 생각일세."

"창훈 아저씨야 그렇다 치는데 두 사람도? 로저스 너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생활비 버는 게 목적이라며?"

"뉴튜브에서 보니 우리 나라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한국에 머무르면서 좀 지켜볼 생각인데 그동안 가만히 있기도 뭐해 이 아저씨나 좀 도와주려고."

"하영이는? 몬스터랑 싸우는 거 무섭다고 하지 않았어?"

"통장에 57억 꽂히니까 별로 안 무섭더라구요.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죠."

"풉."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유성의 모습에 서창훈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괜찮다면 자네도 함께 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우리들 만으로는 조금 불안해서 말이야. 자네 같은 강자가 있다면···."

"아니요. 별 생각 없습니다."

"흠흠. 내가 말했잖아. 수백억이나 번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고생을 하려 하겠어?"

"아니, 돈 때문은 아니야. 말해줄 수는 없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함께 하지는 못 할 것 같아."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사실에 딱히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불규칙적으로 지구와 이세계를 넘나들어야만 하는 유저의 특성 상 제대로 된 한 사람 분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절한 것이었다.

"가끔 여유가 생길 때 도와드리는 정도가 한계일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오히려 가끔 도와주는 것 만해도 고마워해야지. 나야말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하네."

"미안하면 2차는 아저씨가 쏘시는 거죠?"

"흐하하! 좋아, 내가 쏘지. 먹고 싶은 건 얼마든지 먹으라고!"

* * *

지금까지 묵었던 곳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풍스러운 호텔의 객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마친 유성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열한자리 숫자의 나열.

"······."

몬스터의 존재는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인류는 버티고 있었고 문명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만한 거금이라면 이런 세계 속에서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게임과 영화, 소설 같은 온갖 즐길 거리로 가득한 자신만의 성채를 구축해 즐기면 그만이다. 몬스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해 인류가 멸망하는 것 같은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병으로 죽거나 늙어 죽을 때까지 아마 그 안에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달 전의 자신이었더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라는 인간은, 한유성이라는 인간은 분명 그런 인간이니까.

'지금은···.'

지난 한 달 간 겪었던 일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999번의 죽음을 겪어가며 간신히 괴물을 잡아냈을 때의 성취감, 한 세력을 통째로 미끼로 던진 도박수가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 배신자를 잡아내고 주어진 목표 이상의 성과를 달성했을 때의 희열, 스마트폰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뜻대로 부릴 때의 쾌감.

지금껏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강렬한 감정들은 당황스러웠지만 동시에 흥미롭기 그지 없었다.

'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평생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돈을 벌었고 일신의 안위를 챙길 수 있을만한 힘도 생겼다.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이나 부, 명예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떤 불이익이 있을 지도 모르는 고글 따위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떠한 위험도 없는 밝고 안전한 길. 어떤 위험이 있을 지 모르는 어둡고 위험한 길.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떤 길을 골라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아리스, 해천경, 필립, 레온.

네 명의 몸으로 해냈던 일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해냈던 오크 전사와의 사투.

그저 상기하는 것 만으로 머리 한 구석에 짜릿한 무언가가 느껴졌고, 심장은 거세게 뛰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던 유성은 탁자 위에 놓아뒀던 고글을 집어 들고는, 잠시 그것을 응시하다 이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미쳤지, 미친 거야."

입으로는 끝임 없이 불만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유성은 끝내 빛의 입자로 화해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고글을 벗지 않았다.

사라지기 직전, 자신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유성은 자각하지 못 했다.

* * *

-무신 : 그래서 그 '방구석한량'을 찾는 건 실패했다는 거군.

-슈퍼개미 :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아예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은 걸 보면 퀘스트를 하느라 아예 지구에 없을 수도 있고 어디의 오지에 고립되어 사회와 합류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더 커.

유저는 절대로 그 존재를 숨길 수 없다.

무인이나 마법사, 초능력자 같이 제대로 된 체계와 방향이 잡혀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수많은 세계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스킬만 골라내는 탓에 좋게 말하자면 뭐든지 가능한 만능 능력자, 나쁘게 말하자면 근본이 없는 잡탕 능력자가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이제 막 유저가 된 존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슈퍼개미 : 최대한 빨리 신변을 확보해서 안전하게 보호해야 해. 유저를 잃는 건 엄청난 손해라고.

계약자들 역시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 어떤 수련을 해도 계약을 맺은 대상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없고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 그러나 유저는 다르다.

무한한 세계의 다양한 능력과 가능성을 훔쳐 끝없이 성장을 거듭해 초월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슈퍼개미'와 달리 '무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무신 : 그러든지 말든지.

-슈퍼개미 : 정말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인류의 존망이 걸려있는 문제라고.

-무신 : 설마 자네가 인류의 존망을 논할 줄이야. 웃기지도 않는군.

-슈퍼개미 : ···몰랐으니까.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어?

-무신 : 그러시겠지.

'무신'은 웃었다.

지금은 180도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거의 '슈퍼개미'를 떠올리자면 도저히 비아냥거리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슈퍼개미 : 어떤 말을 해도 되지만 너도 최소한 협조는 해 줘. 한국인이라고 꼭 한국에 살고 있는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근본 없는 능력이나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꼭 확인해 봐.

-무신 : 난 바쁘다.

-슈퍼개미 : 너 진짜···.

-무신 : 아니, 변명이 아니라 진짜 바쁘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제서야 '무신'의 사정을 떠올린 '슈퍼개미'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개인적인 감정을 제쳐두더라도 '무신'은 지금 다른 일을 할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무신 : 물론 여유가 되더라도 딱히 찾고 싶지는 않지만.

-슈퍼개미 : 아, 또 왜?!

-무신 : 본인이 의지가 있다면 딱히 우리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알아서 강해질 테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말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겠지. 우리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않나?

-슈퍼개미 : ······.

-무신 : 세상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 하지만 우리들은 어땠지?

누군가는 진지하게 힘을 갈고 닦았으며 누군가는 그저 돈을 벌려 했으며 누군가는 명성을 얻으려 했다.

그 결과는 유저들끼리의 강함의 격차로 나타났다.

-무신 : 3강, 3중. 3약.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방구석한량'도 어련히 알아서 자기가 잘 할 거다.

-슈퍼개미 : 그걸 못할 것 같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물건들을 팔아서 크게 한탕하고 잠적해버리면···.

-무신 : 이만 끊지.

고글을 벗은 '무신'은 지면을 내려다봤다.

악마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외형의 생명체들.

익숙한 무기와 낯선 무기들을 겨누고 있는 생명체들을 마주하며 '무신'은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은 과연 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이거 게임 아님

039화 실험

그는 절대자였다.

물론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절대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무한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일 뿐.

누군가는 고작해야 재력과 권력 좀 가졌다고 절대자라 불리겠냐고 코웃음을 치겠지만 글쎄, 신화에 나오는 신들보다는 못하겠지만 원하는 것은 뭐든지 살 수 있는 재력과 세상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고 뜻대로 바꿀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절대자 이외의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그 무한한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음습한 욕망을 마음껏 재우고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문제가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렴 자신은 절대자가 아니겠는가?

절대자가 하는 일에 오류가 있을 리 없을 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한낱 인간이 감히 어떻게 절대자의 행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헉! 헉! 헉!"

그렇기에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절대자인 자신이 왜 도망가고 있는 건지, 왜 자신의 다리로 직접 뛰고 있는 건지, 왜 하인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크허어···. 케헥!"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평생 운동 한 번 하지 않은 그의 몸은 고작해야 몇 분의 달리기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로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당장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사무쳤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우후후."

또 저 소리다.

저택 내에 있는 모든 보안 장치를 가동해도, 수많은 호위와 부하들을 보내도, 미친듯이 달리고 달려도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저주 받을 웃음 소리.

"으아아아아아!"

점점 더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성을 잃은 남자는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을 향해 보석으로 장식된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총구 끝에서 섬광이 번쩍일 때마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어둠이 일순 사라지며 텅 빈 복도의 모습이 보였다.

철컥!

떨리는 손으로 재장전을 끝마친 남자는 어둠으로 물든 복도를 향해 모든 정신과 감각을 집중했다. 그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면, 저 어둠 속에서 뭔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긴장이 무색하게도 복도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매캐한 화약 냄새에 긴장이 풀린 것일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남자가 복도를 향해 겨눴던 총구를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순간, 다시는 들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우후후."

'위!'

남자는 즉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권총을 겨눴다.

그러나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천장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팔을 차올리며 총구의 방향을 트는 것이 먼저였다.

파지지직!

전기가 튀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앞에 나타난 보랏빛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도끼.

그리고 그 도끼날을 만들어내고 있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남자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네, 네 년!"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스트레스 해소나 할 겸 별 생각 없이 집어온 길거리의 거지.

자신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 혹은 귀신과 같이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노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장난감에게 이런 꼴을 당했다니.

분노와 치욕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질 지경이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것! 따듯한 숙소를 내주고 배불리 먹여줬건만 감히 주인을 향해···."

콰직!

"···어?"

삿대질을 하기 위해 내밀었던 왼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팔꿈치를 기준으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왼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뒤늦게 올라오는 통증에 자신의 팔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아, 으아아아!"

입으로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남은 손에 들린 권총을 겨누고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분노와 공포로 마비된 머리로도 저 무도한 악적이 온 몸에 구멍이 난 채로 목숨을 잃을 거라는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었는지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치지지직!

발사된 탄환은 도끼날과 부딪힌 순간 작은 섬광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몰랐겠지만 고출력의 플라즈마 응집체는 가벼운 납탄두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증발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열량을 품고 있었다.

서걱!

"끄아아아악!"

두꺼운 합금도 어렵지 않게 잘라낼 수 있는 절삭력은 덤이다.

총을 들고 있던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가 차례대로 잘려나간 남자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지를 잃는 중상을 입었지만 열에 의해 지져진 상처에서는 피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에 의식을 잃는 것조차 없었다.

"제, 제발. 돈, 권력, 명예!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네! 뭐든지! 제발 살려만 주게!"

"······."

잠깐의 침묵.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이 흐르고 태평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든지 줄 수 있냐면 네가 죽인 내 언니도 살려줄 수 있냐···고 전해달라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빌어라! 죽은 사람을 어떻게···."

"그럴 줄 알았대."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보랏빛의 도끼날.

죽음을 앞둔 순간에서야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추레하게 늙은 한 명의···.

콰직!

"됐어. 감사할 시간이 있으면 앞으로 어떻게 할 지나 걱정해. 이 난리를 벌여 놓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어?"

남들이 보면 정신병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을 혼잣말을 지껄인 유성은 구석에 떨어진 오른팔에서 권총을 빼내 쥐고는 잠시 망설이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플라즈마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아리아드네의 실 추적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 * *

낯선 풍경에 잠시 당황하던 유성은 뒤늦게 이 곳이 집 안에 있는 패닉룸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퀘스트를 끝내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라 마련한 장소였지만 아무리 봐도 이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답답한 방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네."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허리춤에 고이 꽂혀있는 도끼자루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권총.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카르마 상점에 들어가 봐도 구걸이나 아픈 척 하기 같은 스킬들만 존재할 뿐, 마지막에 집어 들었던 권총이나 그 외에 이것저것 챙긴 물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카르마를 지불하고 꺼낸 물건은 등급과는 관계없이 몸에서 떨어져도 퀘스트가 끝날 때 지구로 돌아오는 건 거의 확실하고, 문제는 원래부터 이세계의 물건인 경우인데. 퀘스트에서 명시한 보상을 제외하고는 이세계의 물건은 가져올 수 없는 건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유성은 이내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니야. 커뮤니티에서 대화하는 걸 보면 이세계의 물건을 지구로 가져오는 방법이 존재하는 건 확실해. 인벤토리에 집어넣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거 퀘스트를 진행할 때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자동으로 저장되는 방식이지 따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기능은 없는데? 아니면 등급이 올라가면 해금되는 기능 중 하나인가? 스킬은 카르마만 지불하면 바로 가져올 수 있는데 물건은 가져올 수 없는 이유는 뭐지? 현실에 미치는 파급력의 차이인가?"

오크 전사를 사냥한 날 이후, 유성은 강남구에 집 한 채를 구입하고 그 안에서 적지 않은 퀘스트를 진행했다.

단 고랭크 클리어나 보상을 노린 플레이는 아니었다.

몬스터들에게 노려져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던 때와 땡전 한 푼 없어서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필요한 퀘스트를 수행했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은 다르다.

이 고글의 기능이 정확히 어디까지 닿는지, 자신이 알지 못한 능력들이 있는지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성은 묵묵히 커뮤니티를 관찰하고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이런 저런 실험을 했고 그 결과 여러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구에서 이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자신과 확실하게 접촉하고 있는 물건에 한한다던가, 똑같은 물건을 꺼내더라도 문명의 수준이나 차이에 따라 카르마나 이차원 스킬, 아티팩트 사용률에 차이가 난다던가, 시간 배율은 무작위지만 지구와 1:2 이상으로 배율의 차이가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던가 하는 사실들이었다.

심지어 그 중에서는 일부러 깽판을 쳐 가장 낮은 클리어 랭크를 받아보는 실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정말 끔찍했어."

FFF랭크 클리어.

명시되었던 기본 보상은 확실히 들어왔지만 보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엄청난 페널티를 먹었다.

[운명 개변률 57.0%, 이차원 스킬 사용률 68.5%, 이차원 아티팩트 사용률 84%]

[최종 평가 FFF랭크]

[끔찍합니다! 한유성님은 목표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의뢰인의 운명을 엉뚱한 방향으로 개변시키고 말았습니다!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아니, 난 그럴 줄 몰랐지. 그보다 애초에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은 누가 하는 건데?"

페널티는 무려 50만이나 되는 카르마 포인트의 압수.

다행히 실험을 하면서 쌓인 카르마가 있어서 문제 없이 벌금을 지불할 수 있었지만 만약 카르마가 마이너스로 떨어졌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이는 기분이었다.

거실에 있는 소파에 몸을 누인 유성은 눈가를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대충 실험은 끝난 건가.'

자신이 상상력이 닿는 범주 내에서의, 현실적으로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실험은 전부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글의 기능은 제한적이지만 등급을 올리면 거대한 물건을 가져갈 수 있거나 이세계의 물건을 지구로 가져올 수 있는 등 여러가지 기능이 해금된다. 결국 당장 필요한 건 퀘스트를 잔뜩 수행해서 등급을 올리는 것. 그리고···."

-구원을 바라는 소녀(146시간)

목록 최상단에 자리 잡은 퀘스트의 이름과 그 옆에서 줄어들고 있는 시간을 바라보며 유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흐, 흐윽. 유성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반드시 도와주러 돌아올 거라 믿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냈던 아리스를 생각하며 유성은 벅벅 머리를 긁었다.

연민이나 동정심 같은 감정에 휩쓸린 것은 아니다.

그저 추가 퀘스트라는 것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겸사겸사 자기 좋을 대로 결정하고 자기 좋을 대로 믿어버리는 멍청한 소녀에게 쓴소리를 해주기 위함일 뿐이다.

"그럼 준비물을 챙겨보실까."

이거 게임 아님

040화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리스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총 두 가지.

하나는 치료제다.

퀘스트가 끝날 당시 아리스의 양팔은 걸레짝이라는 비유가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부상을 입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연계라는 단어로 추측컨데 퀘스트를 끝냈던 순간부터 바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을 터, 아무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퀘스트를 시작했다가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양팔을 가지고 저택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도 있기에 일단 양 팔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가 필수였다.

'몇 가지 치료제들을 구하기는 했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얻어온 최하급 포션, 무협 세계에서 가져온 요상약, 일단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구하기는 했지만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심각했던 상처와 치료제들의 효과를 생각해본다면 이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더 강력한 효과를 가진 치료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두 번째 준비물은 어떤 의미로는 첫 번째 준비물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장비."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스킬들로부터 나오는 힘.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힘이기에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퀘스트를 수행할 때마다 매번 다른 육체로 움직여야 한다는 유저의 특성 상 본래 육체에 있을 때가 아니면 위력이 불안정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마력 같은 능력치의 부재로 아예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두 번째는 장비에서 나오는 힘.

지구에서는 이세계의 물건을 사용하기에는 눈치가 보인다는 단점이 있지만 퀘스트에서 사용한다면 어떤 능력치를 보유한 육체로 사용하든 일정 이상의 위력을 보증하는 안정성과, 클리어 랭크에 영향을 줄 정도로 남용하지 않는다면 마음껏 사용해도 뒷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지구에서는 스킬과 장비 순으로, 퀘스트를 할 때는 반대로 활용하는 게 적합해.'

빈약한 아리스의 능력을 보조 할 수 있는 강력한 장비가 필요하다.

이 지경이 된 세상 속에서도 강력한 통제력과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원하는 장비를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길드장이 된 서창훈이라는 인맥의 힘과 막대한 자본의 투자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건이 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낸다.'

정리를 끝마친 유성은 패닉룸으로 되돌아가 고글을 착용했다.

[다차원 탐색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퀘스트 관측에 성공했습니다]

-구원을 바라는 소녀(146시간)

-총, 균, 아다만티움.

-마계에서 탈출하고 싶은 201명의 결사대.

-제갈세가와 진법으로 겨뤄 이길 수 있는 능력자 어디 없나요?

-네오 타운의 연쇄 살인마 추적.

···

······

·········

"···저 결사대 은근히 신경 쓰이네."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퀘스트 목록 창에 언제나 끼어있는 이름.

확인할 때마다 나날이 줄어드는 생존자의 숫자에 호기심을 느낀 유성은 문득 그것을 클릭했다가 질겁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에서 탈출하고 싶은 201명의 결사대]

-문명 분류 : B-02

-문명 등급 : 2.02

-난이도 : A+

-시도 때도 없이 대륙을 침략하는 마족들. 누적된 피해에 분노한 대륙의 모든 지성 종족들은 마족들의 근거지인 마계를 타격하기 위해 온 대륙의 힘을 모아 결사대를 투입했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결사대는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마족들로부터 쫒기며 마계를 떠도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들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클리어 조건.

1.대륙으로의 무사 귀환 : 생존자 1인 당 카르마 1,000,000, 최상급 마력석x53, 최상급 마족의 심장x87, 마검 벨페고르, 군신의 깃발, 신궁 스톰애로우, 해츨링 급 마도기갑···.

-추가 조건.

1.마족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시 : 카르마 50,000,000, 쓰러트린 마족들의 모든 부속물 및 소지품, 마왕의 핵 조각.

"이런 미친!"

유성은 허겁지겁 페이지를 뒤로 돌렸다.

대충 봐도 희망이라고는 눈곱 만큼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A+급이라는 욕 나오는 난이도, 휘황찬란한 보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소름이 돋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얼른 목록을 넘긴 유성은 마침내 원하던 퀘스트를 찾아냈다.

[미확인 생물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문명 분류 : H-32

-문명 등급 : 1.02

-난이도 : C-

-자원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해저 9000m에 만들어진 기지. 언제나처럼 자원을 캐내 해상으로 보내는 나날을 보내던 가운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은 미확인 생물체의 출현, 불행하게도 그 생물체는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기지 내의 인원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그 생물체로부터 도망쳐 지상으로 탈출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1.지상으로 탈출 : 카르마 200,000, 중증 외상용 긴급 재생 앰플x5, 암석 파쇄용 고화력 폭발물x3, 순수 타이탄 주괴 5kg,

-추가 조건.

1.생존자 구조 : 생존자 1인 당 카르마 100,000. 고농축 헬륨3 연료봉x1.

등급이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퀘스트 보상을 확인한 순간 유성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직감했다.

효과를 짐작하기 애매한 이름을 가진 포션들과 다르게 중증 외상용 긴급 재생 앰플이라는, 효과와 성능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의 치료제.

아리스의 중상을 완벽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

C-급.

그것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같이 등급과 난이도가 비례하지 않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진짜로 순수하게 C-급에 어울리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퀘스트.

숨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던 유성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퀘스트를 시작했다.

['미확인 생물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을 시작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차원 좌표 특정 및 아리아드네의 실 연결 완료]

[영자(靈子) 이동을 실시합니다]

* * *

가장 먼저 든 생각은 'x됐다'였다.

시야가 바뀌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자신의 머리통을 노리고 쏘아지는 괴생물체의 손톱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큭!"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렸지만 볼에서 불타는 듯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동기화가 끝나지 않아서 스킬은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브랜트 공화국 53번 연구소 산 근접 무장 시제품(C+)을 꺼내기 위해 5,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파지지직!

"키에에에엑!"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생성된 플라즈마 도끼날에 순간적으로 괴생물체가 멈칫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찰나의 순간 드러난 빈틈, 그 어떤 스킬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경험을 통해 싸움 그 자체에 익숙해져 있던 유성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 괴물의 머리통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콰직!

정수리가 반으로 쪼개지고도 몸부림치며 푸른 피를 사방팔방에 흩뿌리고 있는 괴생물체.

납작한 머리와 튀어나온 눈동자, 전신을 덮고 있는 초록색의 비늘과 굽은 등, 아가미와 물갈퀴.

물고기와 개구리를 반쯤 섞어 놓은 듯한 외형을 보는 순간 유성은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응?"

이상한 일이었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몬스터를 보아왔고 이것보다 끔찍하고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와도 마주한 경험이 있는데 어째서 이 놈에게서 그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 본능을 억누르고, 더 자세히 괴물의 생김새를 관찰하기 위해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 유성의 머리 속에 문득 한 가지 이름이 떠올랐다.

'이거 분명 딥···.'

['제롬'과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제롬'의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천상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시여. 저희들에게 고난을···.

"이봐, 정신 차려."

-응?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디서 말하시는 겁니까? 그보다 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어, 음···."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제롬이 읆조린 기도문 비슷한 말과 필립이 가지고 있던 유저에 대한 인식을 떠올리고는 태평하게 말했다.

"난 천사야.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네 모습에 감동한 천상의 그 분이 널 도와주기 위해 보낸 존재지."

-아, 아아! 역시 그 분은 존재하고 계셨군요!

'안 그래도 매번 사정 설명하기 귀찮았는데 대충 이렇게 때우면 되겠군.'

속사포처럼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 제롬을 무시한 채 유성은 상태창을 불러냈다.

이름 : 제롬

직업 : 숙련된 중장비 운전사

레벨 : 43

칭호 :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

근력 : 109

민첩 : 92

지혜 : 95

체력 : 105

마력 : 8

보유 스킬 : 타이탄 중장비 운용(C-), 지치지 않는 체력(D), 강화 시술(D), 첨단 장비 정비(D), 능숙한 손재주(D)

"뭐야? 너 왜 이렇게 세?"

중장비 운전사라는 직업을 보고서 일반인과 비슷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구의 자신을 뛰어넘는 근력과 체력, 그리고 살짝 모자란 민첩과 지혜가 등장하자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화 시술을 받았으니까요? 이 정도의 심해에서 광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시술입니다.

"아···."

뒤늦게 스킬 창을 확인한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저 9000m에 세워진 자원 기지라는 단어를 보고서 과학 문명 기반의 세계라는 걸 짐작했는데 아무래도 이 세계는 사람의 능력치를 끌어 올려주는 강화 시술이 대중화될 정도로 발달된 과학력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마력이 낮은 게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운 몸이었다.

"일단 지금 상황을 설명해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지의 상태는 어떤지 그런 것들 말이야."

-예? 천사님은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급하게 오느라 아는 게 없다. 왜? 불만이야? 나 그냥 갈까?"

-아, 아닙니다! 문제가 생긴 건 30분 전 입니다. 평소와 같이 채굴을 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외벽에 구멍이 뚫렸다는 경고와 함께 기지 내 직원들의 신호가 끊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개의 구역이 갑작스레 폐쇄되거나 침수되기 시작해서, 일단 근처에 있는 직원과 합류할 생각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저 괴물이 달려드는 바람에 이 방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잠수함이나 탈출 포드 같은 거 없어?"

-C-5구역에 물자 보급 용 잠수함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곳은 지금 제가 있는 위치에서 완전히 반대에 있습니다. 중간중간 폐쇄된 구역을 돌아가야 하는데 바깥에 저 괴물까지 뚫고서 도달할 가능성은···.

뒷말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침울한 제롬의 목소리에 유성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벌써 포기하지 마. 설마 네 믿음은 그것밖에 안 되는 건가?"

-천사님!

"그래, 그래. 지레짐작하는 건 좋지 않아. 뭐든지 일단 부딪혀보면···."

삑!

방에서 밖으로 나온 유성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 전에 쓰러트린 것과 같은 모습을 한 괴생명체, 딥 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운 채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어림 잡아도 수십은 되어 보이는 숫자의, 인간에게 적대적인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유성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끼이이이이!"

뇌를 헤집는 듯한 괴성의 하모니.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전력의 섬전보를 펼쳐 반대쪽 복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거 게임 아님

041화 요즘 시대에 무슨…

섬전보의 묘리는 간단하다.

전신의 힘을 용천혈에 집중 시킨 후 터트려 폭발적인 속도를 얻어내는 것.

이 말을 다르게 하자면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가속력을 제외한다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촤악!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풍압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놈들이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깨달은 유성은 섬전보를 펼쳐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따라잡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수가 너무 많아!'

두세 마리, 하다못해 네다섯 마리만 됐더라도 스킬과 무기를 이용해 어떻게든 잡아볼 엄두라도 냈겠지만 놈들의 숫자는 수십, 어쩌면 그 이상. 사람 세 명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차는 좁은 통로에서 몇 마리 잡아보겠다고 발을 멈췄다가는 압도적인 물량에 그대로 묻혀버린다.

'왼쪽? 오른쪽?'

-왼쪽!

할 수 있는 건 그저 제롬의 안내에 따라 도망치는 것 뿐, 곳곳에 나뒹구는 잡동사니를 피해 무아지경으로 질주하던 유성은 다급한 외침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뛰어! 더 빨리 뛰라고!"

"저 괴물들 안 보여? 바로 문을 닫아야 해! 놈들이 들어올 거라고!"

"넌 좀 닥쳐!"

절박한 표정을 지은 채 손짓하고 있는 사람들.

젖 먹던 힘까지 전부 짜내 섬전보를 펼친 유성의 신형이 포탄 같은 속도로 쏘아져 통로를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천장에서 내려온 두꺼운 게이트가 내려와 입구를 봉쇄해버렸다.

"하아, 하아."

"위에 있을 때 달리기 선수였나? 무슨 국가 대표가 뛰는 걸 보는 것 같더군."

"···뒤늦게 적성을 찾았군요. 여기서 살아나가면 이 짓거리 관두고 전업하는 걸 고민해보죠."

실없는 농담을 건내는 중년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유성은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한 컨테이너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창고, 그리고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대박이라는 생각에 헤벌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죄송합니다. 저 말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걸 보니 기뻐서."

"그럴 만도 하지. 기지운용팀의 카르멘이네."

"타이탄 운전기사 제롬입니다. 그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지상에서는 지금 상황을 알고 있습니까? 구조대는 출발했습니까? 저 괴물들은 대체 뭡니까?"

괴물에게 쫓기다 간신히 구출된 사람이 너무나 태평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기에 적당히 연기를 했다. 다행히 주제가 주제였던 지라 사람들은 금새 유성에 대한 관심을 꺼트리고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실험체라니까! 오리진 사에서 비밀 실험을 하다 탈출한 놈들이 분명해!"

"심해 9,000m에서 무슨 실험을 해?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인데 그 사람들 전부 속이고 뭔가를 했으면 많아봐야 몇 명이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숫자가 나오는데?!"

"그럼 대체 저게 뭔데?!"

"···외계인 아닐까?"

"외계인이 우주도 아니고 심해에서 나올 리가 있겠냐?"

자기 나름대로의 추론을 늘어놓으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괴물들의 정체에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딥 원.'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종족.

딥 원(deep ones)이라는 명칭대로 심해에 살며 물고기와 개구리, 인간을 적당히 섞어 놓은 듯한 외형을 지닌 존재.

평상시 다양한 서브 컬처에 관심을 가졌던 유성은 괴생명체의 생김새가 크툴루 신화에서 묘사되는 그것과 완벽하게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들을 딥 원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절망했다.

'젠장, 판타지 세계와 무협 세계가 실존하는 마당에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크툴루도 진짜 있는 거였어? 아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땐 데 크툴루야? 게임이나 만화에나 나오면 충분한 놈들이 왜 이런 데서 나오는 거냐고? 미친 거 아니야? 내 이성 수치가 위험해!'

지구에 닥친 위기 따위는 아이들 장난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우주적인 스케일을 가진 존재들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 만으로도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근원적인 수준의 공포와 절망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신이 꺾이기 직전, 누군가의 외침이 유성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모두 주목!"

단 한 마디로 사람들을 진정 시킨 카르멘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저 괴물의 정체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에서 탈출하느냐다."

"신호도 보냈으니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구조대가 도착하려면 최소 48시간이 걸린다. 저 괴물들에게 여기까지 몰리는 데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지. 앞으로 47시간 동안 여기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저 괴물들을 상대하는 건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자네는 여기 남게. 미끼 역할을 해준다면 나야 좋지."

"뭐?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깡!

근처의 컨테이너를 두들겨 모두의 관심을 끈 유성은 카르멘을 응시하며 말했다.

"현재 기지의 상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케이시!"

구석에 있던 금발의 여인이 키보드를 두들기자 벽 한 쪽에 걸려있는 거대한 모니터에 기지의 청사진으로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이 떠올랐다.

사분지 일 정도 되는 구역이 위험을 알리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실시간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모습.

"22···실례, 23%의 구역이 침수됐어요. 아직은 데미지 컨트롤 기능이 작동하고 있어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침수 구역이 60% 이상을 넘어간다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기지가 전체적으로 붕괴될 거에요. 지금 페이스로 침수가 진행된다면 대충 1시간 이내면 도달하겠군요."

"현재 위치에서 C-5구역까지 갈 수 있는 루트를 띄울 수 있습니까?"

"잠시만요···. 됐어요."

청사진 위에 여러 개의 초록색 선들과 도착 소요 시간으로 보이는 숫자들이 떠올랐다.

"C-5구역에는 물자 보급 용 잠수함이 있습니다. 그걸 타고 지상으로 탈출하죠."

"누가 그걸 몰라? C구역은 여기에서 맞은편에 있어! 바로 옆구역에 가는 길에도 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데 기지를 완전히 거슬러가겠다고?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모릅니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히 알죠."

"그게 뭔데?"

"여기서 버티고 있다가는 괴물들의 먹이가 되든 수압에 짓눌려 고깃덩이가 되든 확실히 죽을 거란 사실이죠. 아주 희박해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선택지와 아예 가능성이 없는 선택지. 자살희망자나 위험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겁쟁이가 아니라면 어느 쪽을 골라야 하는지 너무 뻔한 거 아닙니까?"

삑!

날카로운 비프음과 함께 모니터 위에 떠오른 선 중 하나가 사라지며 시간이 늘어났다.

"당신과 말싸움하면서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남을 거면 남으십쇼. 저는 혼자서라도 탈출할 테니까."

"이, 이 자식이···."

'네가 어떻게 되든지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유성의 진심을 느낀 것일까.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는 이를 갈며 외쳤다.

"···누가 안 간대? 최소한 그 괴물들에게 대항할 도구는 챙겨가야 할 것 아니야!"

"3분 드리겠습니다. 준비하십쇼."

"젠장! 기다리고 있어!"

근처의 컨테이너를 열고 내용물들을 뒤지고 있는 남자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유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십니까? 여러분은 안 갈 겁니까?"

순식간에 창고 안은 무기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르멘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협상에도 일가견이 있는 친구였구만. 도저히 블러핑처럼 느껴지지 않았어."

"진심이었으니까요."

여유만 있었더라면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랬겠지만 지금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다.

추가 보상에 정신이 팔려 한 사람이라도 더 데려가려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퀘스트에 실패해 노리고 있던 기본 보상마저 얻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시간 낭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3분 후, 총 35명의 생존자들이 집결했다.

단순하 쇠파이프부터 시작해서 작업용 공구로 보이는 것들까지, 각양각색의 무기들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유성은 구석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하든 우리는 안 가. 여기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거야."

"좋을 대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대신한 유성은 무기에 따라 각자의 포지션을 정했다. 전방에 배정된 사람들로부터 격렬한 항의가 들어왔지만 유성은 단 한 마디로 그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제가 선봉을 맡겠습니다."

안전한 곳에서 명령만 내리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가장 위험한 곳에 나서 솔선수범하는 사람에게 항의를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자신이 들어온 곳과 정반대쪽에 있는 게이트 앞에 선 유성은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었다.

"케이시."

철컹!

굳게 닫힌 게이트가 올라가고 엉망진창이 된 통로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 깜빡이는 조명과 어딘 가에서 물이 새어 들어오는 지 발등까지 올라오는 바닷물.

그러나 딥 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안전한 것 같은데?"

"끼에에에엑!"

"히익?!

말하기가 무섭게 게이트 바로 위의 천장에 붙어있던 딥 원이 떨어지며 괴성을 내질렀다.

정신을 헤집는 힘이 담긴 괴성과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외형에 모두가 비명을 내지르며 패닉에 빠지려는 순간, 가장 앞에 있던 유성이 플라즈마 도끼를 작동시켜 딥 원의 목을 날려버렸다.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절명해버린 딥 원과 정체불명의 무기를 들고 있는 유성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 합니까? 안 갈 거에요?"

태연하기 그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앞서 나가는 유성의 모습에 사람들은 헛웃음을 짓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무기는 뭔가?"

"저도 모릅니다. 그냥 괴물들과 싸우다 죽은 사람이 떨어트렸는데 쓸만해 보여서 주운 겁니다."

"플라즈마를 이용한 무기 같은데 그런 무기가 이런 기지에 있다니 이상한 일이로군. 정말로 회사가 이 곳에서 뭔가의 실험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졸지에 사악한 기업이 되어버린 회사를 향해 유성은 마음 속으로 조의를 표했다.

물론 진짜 생체실험을 한 것은 아니니 유야무야 되기는 하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탈출하고 나면 여기저기서 구설수에 오르는 건 피하지 못할 듯 싶었다.

"놈들이 어디에서 올 지 모르니 모두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케이시는 기지의 상태에 주의하면서 안내해주십시오. 괴물들을 쓰러트린다고 한들 통로가 침수돼서 길이 막히거나 수몰된다면 그대로 죽은 목숨입니다. 조금 늦어져도 좋으니 안전한 루트로 가야합니다."

"···알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가죠."

'크툴루? 우주적 공포?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얼마든지 와라. 오늘 할리우드 액션 영화 한 편 찍고 만다.'

이거 게임 아님

042화 모두 뛰어

기지의 구조는 해저 9,000m에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문명이 지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엉망진창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통로의 높이와 폭, 형태, 조명의 색깔과 광량 등 모든 것이 제각각으로 변하기에 조금만 걷다 보면 멀미가 올라와 머리가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사람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취향 고약한 사람이 만들기라도 한 거야? 상태가 왜 이래?'

-컨소시엄을 이룬 여러 기업들이 제각각 생산한 구조물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이라 조금 난잡하긴 하죠.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당장 파이프에서 괴물이 튀어나와서 덮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철퍽!

자연적으로는 절대 날 수 없는, 축축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모두의 시선이 천장으로 집중된 순간 유성은 순식간에 근처의 벽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라 도끼로 파이프를 베어냈다.

"끼이이이이!"

고통에 찬 비명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잘려나간 파이프 사이에서 상반신만 남은 딥 원이 푸른 피와 내장들을 쏟아져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괴물이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향해 유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파이프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 같군요. 어디에서 튀어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놈들이니 모두 주의하십시오."

"······."

"설마 겁먹은 겁니까?"

미묘하게 비꼬는 듯한 유성의 질문에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 미래 세계라 하더라도 광부들의 삶은 위험하고 힘들기 그지 없다.

당연히 그만큼 성격도 거칠고 호탕해지기 마련이었고, 실제로 그렇지 않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최소한 겉으로는 강한 척 연기를 했다.

그런 광부들인 만큼 당연히 이런 노골적인 도발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이깟 개구리랑 물고기를 섞어 놓은 놈에게 무슨 겁을 먹겠는가?"

"그, 그럼! 너무 순식간에 죽어서 당황한 것 뿐이야."

"흠흠, 고작해야 이깟 놈들이 뭐라고."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딥 원의 시체를 발로 툭 치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시체를 이리저리 툭툭 건드리거나 침을 뱉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강화 시술을 받은 사람들이야. 스펙만 보자면 정면으로 딥 원 한두마리 정도는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미지의 존재와 맞선다는 두려움에 잡아먹히면 허무하게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유성은 다소 시간을 낭비하게 될지언정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딥 원을 별 것 아닌,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젠장! 뭘 기다리고 있어? 얼른 가자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광부를 바라보며 유성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릴 필요가 없는데 왜 절 기다리고 있습니까? 먼저 가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흠흠."

"농담입니다. 가죠."

유성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광부의 어깨를 두들기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타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진짜 용기가 아니라 나는 겁먹지 않았다는, 실제로는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허세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 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가장 위험한 최전방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삐빅!

게이트가 열리고 반대쪽 통로가 드러난 순간 누군가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 벽, 천장 등 통로에 빼곡하게 달라붙은 채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일단의 무리. 그리고 서로 상황 파악이 끝난 순간 양측의 대장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캬아아아아!"

"발사!"

딥 원의 무리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막무가내로 돌진하기 시작했고, 유성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뒤에 있던 사람들은 챙겨왔던 제각각의 무기들을 겨눈 채 통로 반대쪽을 향해 마구잡이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무기라고 해봤자 그다지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자원 채취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지인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물건들도 있었지만 벽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강화시술이고 나발이고 수압에 짓눌려 죽을 상황이기에 일정 이하의 위력을 가진 물건들을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켁!"

"꾸르륵!"

물론 그런 무기들이라도 타격을 입히는 데는 충분했다.

약간의 개조를 거친 화염방사기에서 쏘아진 불꽃이 통로를 가득 메우고, 네일건에서 발사 된 수십여개의 못들이 살점을 꿰뚫고 푸른 피를 흩뿌린다.

평범한 인간의 무리였더라면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거센 공격.

그러나 상대는 인간이 아닌 외신(外神)의 추종자들이었다.

두두두두두!

화염과 못의 세례에도 위축되지 않고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딥 원들의 모습에 공포가 퍼지려는 순간 유성이 외쳤다.

"사격 중지! 전원 전투 준비!"

단단히 도끼를 움켜쥔 유성은 심호흡을 하고 가늘게 눈을 떴다.

'틈이 생겼어.'

놈들을 상대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밀집도였다.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공간 자체를 메우며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로는 체술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섬전보를 발휘해 순식간에 딥 원의 무리 속으로 파고든 유성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

암월 16식. 장작 패기.

전신의 힘을 실어 단번에 내려 찍는, 어떤 의미로는 섬전보와 꼭 닮은 초식.

장작 패기를 펼쳐 제일 앞에 있던 놈을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쪼개버리고는 그 기세를 몰아 사선으로 올려 쳐 옆에 있던 놈의 팔을 잘라낸다.

'마무리는 짓지 않는다.'

확실하게 끝내려고 시간을 끄는 순간 그대로 휩쓸린다.

적당히 부상만 입히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적당히 마무리를 지을 터, 지금은 기세를 타고 끝없이 전진해나가야 할 때였다.

콰직!

수라감각도를 발동한 유성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 적들의 몸에 닿지 않게 실시간으로 각도를 수정하며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냉병기로 이런 짓거리를 했다가는 한 마리도 베어내지 못하고 기세를 잃어 그대로 멈춰 버렸겠지만, 지금 유성이 들고 있는 무기는 일반적인 냉병기가 아니었다.

플라즈마의 응집체의 절삭력 앞에서 뼈와 살의 반발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유성의 회전 역시 멈추지 않은 채 수많은 딥 원들의 몸을 토막 낼 수 있었다.

"케에에엑!"

절반 정도 쓰러트렸을까, 놈들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유성이 그것을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가시덩굴.'

근처에 있던 시체를 뚫고 튀어나온 가시덩굴이 뱀처럼 쏘아져 나가 놈들의 다리를 옭아맨다. 균형을 잃고 무너진 것은 고작해야 세 마리에 불과하지만 도미노를 무너트리는데 큰 힘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놈들을 무너트리는 데는 이 정도의 틈만으로 충분했다.

콰직!

다시 한 번 펼쳐진 죽음의 회전.

회전이 멈추고 남은 것은 죽거나 죽음을 기다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딥 원들, 그리고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과 전신에 푸른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유성 뿐이었다.

'···조금 과했나?'

-···많이 과한 것 같은데요.

여기는 무협이나 판타지 세계가 아니다.

아무리 무기의 이점이 있고 강화 시술을 받았다고 한들 도끼 하나 들고 수십이나 되는 괴생명체들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어서 무쌍을 찍는 존재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우와아아아!"

"으하하하! 이 괴물 자식! 여기서 살아 나가면 내가 거하게 한 잔 산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이런 괴물을 모르고 있었지?"

"저 자식 혼자 일 다하는 거 보고만 있을 거냐? 아직 살아있는 놈들 처리라도 하자고!"

"응? 이 가시덩굴은 뭐야?"

"신경 꺼. 거 괴물 몸에서 가시덩굴 자라날 수도 있지."

"그런가?"

'···잠깐이라도 걱정한 게 바보 같네.'

너무나 태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다소 김이 빠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 일전으로 사기를 대폭 끌어올렸다.

확인 사살을 끝마치고 정비를 마친 일행은 다소 밝아진 분위기로 이동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무리들 역시 어렵지 않게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젠장! 생긴 것만 이상하지 별 것도 아닌 놈들이었잖아!"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겠는데?"

"에이, 괜히 겁 먹었네."

완벽하게 풀어진 분위기.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거나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에 긴장을 붙잡고 있던 유성마저 다소 느슨한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돌아가서 창고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남은 사람들이 20명 정도 됐으니까 200만 포인트를 벌 수 있는 기회인데 지금이라도 되돌아갈까?'

모든 것이 수월하다.

너무 수월해서 갑자기 불안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뭔가 이상해. C-라는 등급과 그 악명 높은 크툴루 신화와 관련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맥 빠질 정도로 쉬운 난이도야. 객관적으로 보자면 아리스 때보다도 쉬울 지경이라고.'

스킬과 장비의 덕을 톡톡히 보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냥 제롬의 몸만으로도 충분히 깰 수 있을 난이도다.

처음의 딥 원만 어떻게든 쓰러트리고 나면 그 후에는 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합류해서 무장을 갖추고 잠수함이 있는 C-5구역까지 이동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경우에는 지금처럼 돌파전술로 순식간에 놈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고 싸울 때마다 사상자가 발생해 사기가 떨어져 속도가 늦춰지겠지만, 그런 것들을 전부 감안하더라도 기지가 붕괴하기 전까지 목적지에 충분히 도달하고도 남았다.

뭔가 잘못됐다.

그리고 그런 예상은 훌륭하게 적중했다.

삐빅!

"멈추세요!"

다음 구역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려던 유성은 케이시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이 너머의 구역에서 침수가 시작됐어요."

케이시가 내민 기계를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에 열려했던 구역이 침수를 뜻하는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럼 돌아가야지. 대체 루트는 있겠지?"

"K-15구역으로 돌아가면 돼요. 3분 정도 늦어지겠지만···."

삐빅!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소리와 새롭게 추가된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구역.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묻기도 전에 수많은 비프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저희 주변에 있는 구역들이 차례대로 침수되고 있어요."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지독한 침묵.

그러나 이들에게는 절망할 시간조차 없었다.

텅! 텅! 텅!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그 소리가 지금 자신들이 있는 기지의 바깥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성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모두 뛰어."

이거 게임 아님

043화 이게 게임이냐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퀘스트가 C-급이라는 등급을 받은 이유가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존재인 딥 원과 얽혔기 때문이 아닌, 해저라는 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철퍽! 철퍽!

밑창을 간신히 적실 정도의 물은 어느새 발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기지의 데미지 컨트롤 기능이 작동하고 있기에 물이 차오르는 속도는 느렸지만 사람들의 안색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비록 느릴지언정 침수는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철컹!

다음 구역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여는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지며 발목에서 찰랑이던 수위가 순식간에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이 구역이 침수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곳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인근 구역들에서 전방위적으로 침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지에 구멍을 뚫어? 미확인 생물이 나타났다는 것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설마 지능까지 있는 놈들일 줄이야. 인류 외 지성체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그 지성체에게 목숨을 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해야 하는 건지 당황스럽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던진 카르멘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카르멘이 도움을 바라는 시선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성 역시 반응해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위험해. 지금 속도라면 절반도 가지 못해서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 거야.'

놈들은 막무가내로 기지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예측하고 정확히 그 구역들만 노려서 부수고 있다.

속도를 높여서 기지가 침수되는 것보다 빠르게 이동하고 싶어도 간간이 튀어나오는 무리들이 발목을 붙잡으면 답이 없다.

'아예 멀리 돌아갈까? 아니, 그러면 시간이 너무 빠듯하다. 죽고 재도전을 해야 하나? 아니야, C-5구역까지 가려하는 이상 몇 번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 문제와 마주할 수밖에 없어. 계속 재도전해서 딥 원과 마주치지 않고 갈 수 있는 안전 루트를 찾아볼까? 아리스 때처럼 수백번을 도전한다면···, 이것도 아니야. 그 때는 특전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고 지금 그딴 짓을 했다가는 포인트가 버티지 못 해.'

죽어도 다시 도전하면 된다던가, 정말로 답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냥 퀘스트를 포기해버리고 지구로 도망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재도전의 기회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그저 강해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자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유희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걸려있는 현실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유성은 수라감각도로 사고 속도까지 끌어올려 필사적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잠깐."

통로를 질주하던 유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자그마한 창문.

창문 너머의 광경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물고기떼처럼 무리를 지어 심해를 유영하는 무수한 딥 원들과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기지의 모습에 모두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단 한 사람, 유성만큼은 그 너머의 풍경을 보며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간, 거리, 수압, 기지의 구조···."

"이보게. 괜찮은가?"

"지도!"

"뭐?"

"시간 없으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지도!"

다급한 유성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케이시가 허겁지겁 달려와 기계를 내밀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입을 수 있을 정도의 잠수복과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는 가장 가까운 구역이 어딥니까?"

"설마 잠수복을 입고 이동할 생각인가?"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계세요! 케이시!"

"예, 옛!"

새롭게 설정된 목적지의 위치를 확인한 유성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따라오세요!"

갑작스럽게 바뀐 목적지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자신만만한 유성의 모습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그 뒤를 따라갔다.

'지능이 있다는 것이 꼭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 만은 아니야,'

이 쪽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이동하려는 구역들로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던 놈들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말과도 동일하다.

덕분에 일행은 단 한 마리의 딥 원과도 마주치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잠수복을 입고 수중을 가로질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수중에서 저 놈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 전부 물고기밥이 될걸요?"

"그럼 대체 뭘 어쩌자는 건가?"

도크(dock)에 있는 것이라고는 바깥에 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잠수복과 이리저리 흩어진 공구들 뿐, 아무리 둘러봐도 해결책이 될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잠수복으로 환복해주십시오."

"그 다음은?"

"수중을 가로질러 가야죠."

"지금 장난하는 건가!"

화를 내던 사람들은 어딘 가를 가리키고 있는 유성의 모습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창문,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존재를 발견한 순간 사람들 사이에 황당함이라는 감정이 퍼져나갔다.

* * *

이 기지는 심해의 생태나 환경 같은 것을 연구하기 위해 세워진 소규모 기지가 아니라 자원을 캐기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기지였다.

당연히 수천 미터에 달하는 수압이라는 극한의 환경을 버티면서 채굴을 할 수 있는 중장비 또한 숱하게 널려있었다.

-저기요! 저건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타이탄(titan) 역시 그런 중장비들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형태의 중장비로는 처리하기 곤란한 장애물이나 험지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탑승형 이족 보행 중장비.

대부분의 타이탄은 딥 원들에게 당해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지만 유성은 제롬의 안내에 따라 그 중에서 나름 상태가 괜찮은 것을 찾아 탑승할 수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일단 머리 위에 있는 레버를 내리시고···.

"알고 있어."

다양한 색깔로 빛나는 수십 개에 달하는 버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레버.

초보자는 메뉴얼을 보더라도 감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였지만, 동기화를 통해 제롬의 타이탄 중장비 운용 스킬을 공유하게 된 유성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레버를 당기고 차례대로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지금은 작업 시간이 아닙니다. 정식 스케줄 이외의 기기 운용 도중 발생한 모든 직간접적인 손해 및 법적 책임은 운전자에게···]

유성은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를 무시한 채 발판을 밟으며 그대로 레버를 잡아당겼다.

우우웅!

유성이 타고 있던 타이탄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타이탄들 역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딥 원들은 기지를 부수는데 정신이 팔려 이 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 있는 상황.

"그 쪽 상황은 어떻습니까?"

[구획 분리도 완료했고 잠수복 착용 및 점검도 끝마쳤네. 그런데 정말로 이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 방법 이외에 모두를 제 시간에 탈출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

"없으면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이 모여있는 구역의 양 끝으로 이동한 타이탄들은 유성의 기합에 맞춰 외벽을 붙잡고는 그대로 위로 들어 올리려 했다.

심해의 압력에 버틸 수 있도록 제작된 기지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타이탄 역시 극한 상황에서 광물을 캐고 장애물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기체, 굳건히 버틸 것만 같던 기지는 육중한 울림과 함께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지, 진짜 들린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더 무거운데?]

"이 작전은 속도가 생명입니다! 두 명 더 붙으세요!"

타이탄 운전기사는 여섯 명.

본래는 두 명이 운송을 맡고 네 명이 딥 원들을 막아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탱커만 여섯 명인데 그 중 네 명이 화물에 붙어있다니 이게 게임이냐."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런 게 있어. 자! 모두들 시원하게 화물 한 번 밀어봅시다!"

[오우!]

쿵! 쿵! 쿵! 쿵!

여섯 기의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육중한 소리.

기지를 부수는데 정신이 팔렸던 딥 원들이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 몰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유성은 한 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외신을 추종하는 종족.

심해의 압력을 버티며 살아가는 질긴 놈들이라지만 그래봤자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강화 시술을 받은 인간의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놈들에게 중장비를 들이대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퍼엉!

육중한 작업용 공구가 휘둘러진 순간 궤적에 걸린 여러 마리의 딥 원들이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변해 푸른 피를 흩뿌리며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뭉쳐서 접근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딥 원들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며 일제히 돌격해왔지만 그 사이에 유성 역시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타이탄 용 수중 용접기.

인간이 사용하는 수중 용접기보다 조금 더 크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특별한 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수중 용접기의 끝부분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콰아아아아!

막대한 열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딥 원들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몇몇 놈들이 열기가 닿지 않는 틈을 찾아내 파고들려 했지만 호위를 맡고 있는 것은 유성 하나만이 아니었다.

[만들다 만 것처럼 생긴 놈들이 어딜!]

"오! 아저씨 꽤 하는데?"

[흥! 내가 이래뵈도 위에 있었을 때는···]

"잡담은 나중에 잠수함에서 실컷 하시고 지금은 집중합시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는 투덜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유성은 온 정신을 집중해 신들린 듯한 컨트롤로 타이탄을 움직여 딥 원들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복잡한 조종과 상황 판단을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는 수라감각도, 타이탄을 통해 펼치는 암월 16식, 뒷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발휘되는 한계 이상의 출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이뤄낸 쾌거였다.

[점점 많아지는데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폭파 낚시라는 것이 있다.

수중에서 폭탄을 터트려 생긴 충격파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으로 위험성 때문에 금지됐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하다.

그럼 이런 수중에서 거대한 암석을 부수기 위한 폭탄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동시에 폭발 시킨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거 확실히 버틸 수 있지?"

-심해 작업 용으로 만들어진 놈입니다. 이 정도 충격은 충분히 버티고도 남습니다.

확인을 끝마친 유성은 그 즉시 설정을 끝마친 파쇄용 폭탄을 전력으로 집어던졌다.

위험을 알리기 위해 밝은 빛으로 점멸하고 있는 모습에 관심이 끌린 놈들이 폭탄으로 몰려들었고, 입력된 시간이 다한 순간 폭탄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콰아아앙!

효과는 확실했다.

폭발에 휩쓸린 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범위 바깥에 있던 놈들 역시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 마냥 축 늘어져 해류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증기선도 못 이기고 머리가 터진 놈을 신이라고 섬기는 놈들이 어딜 감히···."

도저히 들려주지 않고서는 베길 수 없었던 한 마디였다.

이거 게임 아님

044화 왜 남아있지?

[젠장! 이 놈들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끝이 안 보여!]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버티세요!]

타이탄과 각종 도구들의 힘은 딥 원들을 압도했지만, 딥 원들에게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 숫자가 있었다.

기체의 상태를 알리는 스크린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고 무장 또한 거의 다 떨어진 상황,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모두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목표로 했던 C-5구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모두 내리세요! 그리고 카르멘 씨, 혹시 기지 내부에 자폭 장치 같은 것 없습니까?]

"자폭 장치? 자원 기지에 그런 게 왜 있겠나?"

[이런 망할. 그럼 어뢰 같은 무기는요?]

"아니, 그러니까 여기는 군 기지가 아니라 자원 기지라니까! 그런 건 왜 찾는 건가!"

[잠수함에 탑승한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놈들이 추격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제서야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카르멘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해보면 기지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놈들이 잠수함이라고 구멍을 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평범하게 탈출했다가는 죽을 장소가 기지에서 잠수함으로 바뀐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잠시 후, 카르멘을 한층 더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이 날아왔다.

[잠수함을 움직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탑승만 완료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네. 그건 왜 묻는가?"

[그럼 5분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5분? 지금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란 말일세!"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해볼 테니 5분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잠수함 수색도 꼭 해주시구요!]

"그건 또 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가 숨어있던 놈들한테 뒤통수 맞는 건 크리처물의 클리세거든요]

"이, 이보게!"

되물어보려 했지만 이미 통신은 끊겨버린 상황.

기지로 들어가 잠수함에 탑승해 시동을 거는 순간까지도 고민을 이어가던 카르멘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잠시 대기!"

"대기라니? 그게 뭔 개소리야? 당장 가도 모자랄 판에 대기는 무슨 놈의 대기야?!"

"제롬이 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려야 해."

잠수함에 탑승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제롬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고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자신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준 사람,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 겁먹지 않고 가장 앞에 나서서 싸운 사람, 모두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한 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동료이자 은인을 주저 없이 버리고 갈 만큼 그들은 후안무치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체 그 망할 자식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네. 그리고 잠수함 내부 수색도 꼭 해달라고 하더군."

"젠장, 젠장!"

그그그긍!

"더, 더 기다려야 돼?"

기지가 무너지며 생기는 거대한 울림, 잠수함 내부로 전해질 정도의 충격.

사람들 사이에 점점 공포와 두려움이 퍼져나갔고 카르멘마저도 더 기다려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순간, 마침내 무전기에서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

[탑승 완료! 출발하세요!]

"간다!"

선체를 고정하고 있던 암(arm)들이 해제되고 프로펠러가 회전하며 잠수함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잠수함과 주변의 상황을 알리는 디스플레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카르멘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잠수함 수색은 하셨죠?"

"물론! 그보다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건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보험 좀 들어 놨습니다."

"보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카르멘을 지나친 유성 벽 한 쪽에 위치한 거대한 디스플레이로 시선을 돌렸다.

수천에 달하는 무수한 딥 원들이 기지를 둘러싼 채 유영하고 있는 상황, 아직은 들키지 않았지만 격납고에서 나가는 즉시 이 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잠수함 속도가 놈들을 따돌릴 만큼 빠릅니까?"

"놈들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기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생명체인 이상 긴급 부상의 속도는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긴급 부상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따라잡힐 것 같다는 사실이지."

"그렇군요."

기울어진 기지와 복잡한 해저 지형으로 인해 잠수함이 부상을 하기 위해서는 격납고에서 빠져나오고도 벽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해야만 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기도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한 명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보험을 들길 잘했어.'

"안 가시고 뭐합니까?"

"방금 전에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이대로 가면 저 놈들한테 따라잡힌 다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가세요."

일말의 의혹도 느껴지지 않는 확신에 찬 어조에 카르멘은 뭔가에 홀린 듯 조종간을 잡았다.

그리고 미약한 떨림과 함께 잠수함이 앞으로 나아간 순간 유성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연결되어 있던 마력의 실을 통해 신호를 보냈다.

"어, 어어어?"

"무슨 일이지? 기관에 문제라도 생겼나?"

"저거! 저거 보세요!"

누군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린 사람들은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게 왜 움직이는 건데? 설마 못 들어온 사람 있어?"

"몇 번이나 체크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원격 조종하고 있는 거 아니야?"

"저거 원격 조종 불가능한 모델이거든?"

"그럼 대체 뭐야?!"

여섯 기의 타이탄들이 딥 원들과 싸우고 있는,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

당연히 범인은 유성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마력이 버텨줘서 다행이야.'

유성이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이유는 타이탄들의 조종석에 들어가 원격 조종을 위한 가시덩굴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세심한 조작이 필요한 장비였더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타이탄은 레버와 버튼으로 조작하는 단순한 작업용 기기, 일부 중요한 레버와 버튼에 가시덩굴을 걸어두고 신호를 보내는 것 만으로 충분히 조종할 수 있었다.

비록 양팔을 허우적거리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등 처참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주의를 끈다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았다.

"긴급 부상!"

뒤늦게 존재를 알아차린 놈들이 다가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잠수함은 그들을 능가하는 속도로 부상하고 있었다.

"···하아아."

점점 멀어지는 딥 원들과 잠수함의 거리에 긴장의 끈이 풀린 유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그런 퀘스트가 어디에 있겠냐만 이번 퀘스트는 유독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한 느낌이었다.

[퀘스트 '미확인 생물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클리어 과정을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운명 개변률 168.9%, 이차원 스킬 사용률 40.4%, 이차원 아티팩트 사용률 28%]

[최종 평가 SSS랭크]

[놀랍습니다! 한유성님은 의뢰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구해내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본 클리어 보상 : 200,000 카르마, 중증 외상용 긴급 재생 앰플x5, 암석 파쇄용 고화력 폭발물x3, 순수 타이탄 주괴 5kg]

[추가 조건 클리어 보상 : 3,500,000 카르마, 고농축 헬륨3 연료봉x1]

[SSS랭크 클리어 추가 보상 : 4,000,000 카르마]

[잠시 후 본래 세계로 귀환을 시작합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네."

"고생한 보람?"

"아, 그러니까 모두가 무사히 탈출한 걸 보니 보람차다는 말입니다."

"하하하! 그럴만하지!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쯤 저 괴물들의 먹잇감이 됐을 거야. 위에 올라가면 내가 크게 쏠 테니 기대하고 있게."

"그거 참···."

지구로 돌아갈 때까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려던 유성은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디스플레이 너머에 거대한 무언가가 비치고 있었다.

무성의한 표현이었지만 정말로 거대한 무언가라는 표현 이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마치 악몽에서 나올법한 존재를 모조리 뭉뚱그린 듯한 괴상한 외형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마치 연기가 일렁이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변하는 모습 때문에 제대로 된 외형을 묘사할 수 없던 이유도 있었다.

"······."

디스플레이 너머로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 존재의 입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열렸다.

────.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울림.

소리, 파동, 공포, 악의 그 모든 것이 뭉친 무언가의 거대한 울림이 사람들을 직격했다.

"커헉!"

"으, 으아아아아!"

그 울림이 뭐였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악의만은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채 덜덜 떨거나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그들은 그 울림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잠깐의 공포와 절망을 맛보는데 그쳤기 때문이었다.

"···아."

하지만 유성은 달랐다.

태초의 언어, 바벨 스킬에 의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이해하고 알 수 있었던 유성은 그 울림에 담겨있는 의미를 깨닫고 말았다.

무한한 우주의 신비와 진리, 우주 너머에 존재하는 미지의 존재들,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악의로 첨철된 내용.

한낱 인간의 머리로는 받아들이기는 커녕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지만 유성은 스킬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보호할 수 있는 스킬도, 장비도, 능력도 없던 유성은 금단의 지식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우웨에에에엑!"

눈, 코, 입 등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 나온다.

무언가가 머리에 구멍을 내고 뇌를 헤집는 듯한 끔찍한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유성을 구해줄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아리아드네의 실 추적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 * *

지구로 돌아온 순간 유성이 느낀 것은 머리가 터지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의 두통과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었다.

"케흑! 켁!"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하던 유성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밖으로 나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놓아버릴 정도의 극도의 정신적 피로감과 두 눈이 절로 떠지는 두통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베르문드 연공법을 돌려 심신을 가라앉힌 유성은 퀭한 눈을 한 채 천장을 바라봤다.

'···동기화가 끝나면 스킬과 관련된 지식과 경험이 전부 사라진다는 게 이렇게 다행일 줄이야.'

스킬로 분류될만한 지식이나 노하우, 정보들은 퀘스트가 끝나고 카르마 상점에서 따로 구매하지 않는 한 지구로 귀환하면 전부 사라져버리고 만다.

추측이지만 아마 그 거대한 존재의 울림에 담겨 있는 지식과 깨달음은 스킬로 분류될만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위험한 지식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 다행히 그것을 완벽히 이해하기 전에 지구로 귀환해서 살아남았지만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떠한 정신병에 걸리거나 뇌사 상태에 빠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이씨, 이거 기억 어떻게 못 지우나?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네."

한탄을 내뱉던 유성은 순간 어떠한 사실을 깨닫고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퀘스트가 끝나면 스킬들로 분류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사라진다.

그런데 왜···.

'···왜 이 기억들이 남아있지?'

눈을 감으면 또렷이 떠오르는 신비와 비밀들.

뇌를 바늘로 찔러대는 것만 같은 두통과 함께 유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거 게임 아님

045화 뜬금포

유성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삼일 밤낮이 지난 이후였다.

중간중간 깨어나기는 했지만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두통이 올라왔기에 필수적인 생리 현상을 해결하자마자 쓰러지듯 잠드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

몇 번 소리를 내보고 나서야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신한 유성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 조금 보태 광대까지 내려앉은 다크 서클과 빛을 잃은 눈동자.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잠을 청하려던 유성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고글을 착용했다.

-구원을 바라는 소녀(16시간)

"위험했어."

만약 여기서 한 번만 더 눈을 감았더라면 분명 퀘스트를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지만 애초에 아리스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던 만큼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카르마 상점에 들어가서 스킬부터 구입하고···.'

타이탄 중장비 운용, 첨단 장비 정비 같은 것은 지구에서는 필요 없는 스킬들이었지만 남아도는 것이 카르마 포인트였고 언제 어떻게 쓸 수 있을지 모르기에 전부 구입했다.

그리고 바뀐 능력치를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연 유성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 * *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길드 역시 그 변화 가운데 탄생한 산물 중 하나였다.

몬스터 사냥, 치안 유지, 호위 등 각각의 목적을 위해 모인 계약자들의 집단.

세상이 세상인 만큼 하루에도 수많은 길드가 탄생했으며 그 형태와 규모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소수의 사람들끼리 모여 도움을 주고 받는 느슨한 형태의 길드가 있는가 하면, 각종 투자를 받아 수백 명에 달하는 계약자를 확보해 거대한 기업의 형태로 활동하는 길드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성은 네비게이션과 눈 앞의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도대로라면 여기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굉장히 크고 세련된 건물.

예상했던 것과 다른 상황에 머뭇거리던 유성은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홀을 둘러보던 유성은 카운터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요."

"목적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냥? 경호? 인재 파견? 부속물 처리?"

"굳이 분류하자면 물품 수령인 것 같은데요. 물건 몇 개 좀 구해 달라고 했는데 준비됐다는 말만하고 답장이 안 와서 직접 가지러 왔습니다."

"그 분의 성함이 되십니까?"

"서창훈이라고 합니다."

순간 홀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창훈이라는 분이 본 길드, 체인의 마스터인 서창훈님을 말하시는 게 맞습니까?"

"동명의 길드와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아마 그 사람이 맞을 겁니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초췌하고 퀭한 얼굴.

어떻게 보더라도 체인 길드의 길드장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안내원은 성급히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세상이 요지경이 된 이후로 계약자에 의한 사건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던가.

체인 길드의 건물 안에서 난동을 부려봤자 순식간에 제압 당하겠지만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안전까지는 보장할 수 없다.

'제발 잡상인 좀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지.'

좋은 말로 타일러서 보내야 할지, 나중에 깨지는 걸 감수하더라도 일단 연락을 넣어봐야 할지 고민하던 안내원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안내원은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마주쳤다.

"설마 한유성 씨?"

"···죄송한데 혹시 저랑 아시는 분 인가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당연히 알죠! 포레스트 마스터 한유성! 세상에, 그 유명인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바로 연락할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한유성? 그게 누군데?"

"너도 봤잖아. 뉴튜브에 나온 그 사람. 오크 전사 잡고 인생 역전한···."

"아, 그 사람!"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유성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게 이렇게 유명해질 만한 일이었나? 거의 한 달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인생 역전은 또 뭐야?'

"저스티스 길드의 김한수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한유성 씨! 진짜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잠깐만 얘기 좀 들어주세요!"

심지어는 뜬금없이 대화를 걸어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유성을 구해준 것은 안내원의 한 마디였다.

"확인 완료됐습니다! 따라오세요!"

"자, 잠깐! 몇 분이라도 되니 잠시만 시간을!"

"한유성 씨는 저희 길드장님과 선약이 있습니다! 용무가 있으신 분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모두 진정하세요! 자꾸 이러시면 능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유성은 뒤에서 일어나는 소란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안내원을 따라갔다.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던 안내원이 헛기침을 할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

그 분위기는 회의실이라 적혀있는 방 안에 들어가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에 보는군! 포레스트 마스터!"

"······"

"···미안하네. 웃자고 한 소리니 표정 좀 풀게. 그보다 얼굴은 왜 그런가?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했잖습니까?"

"아는데 시간도 꽤 지났고 자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제는 익숙해졌을 줄 알았지. 미안하네."

"제 상황이요? 제 상황이 어떤데요?"

'내가 뭔가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오크 전사를 잡은 이후로는 지구에서는 아무런 활동을 한 기억이 없었던 유성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서창훈을 응시했다.

"응? 자네 아무 것도 모르나?"

"흠흠,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통신이 닿지 않는 구역까지 들어갔다가 얼마 전에 돌아와서 아는 게 없습니다."

퀘스트를 수행하고 정보를 모으는 것 만으로도 바빴던 나날.

한국이나 다른 나라, 계약자나 몬스터들에 대해 검색할 시간도 없었는데 자신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 지 알 턱이 없었다.

"자네가 그 때 사람들을 구한 게 인터넷 방송으로 송출된 건 알고 있지?"

"그것 때문에 웃기지도 않는 별명도 생겼는데 모를리가요."

"그 영상 이외에도 자네가 경매장에서 마력석과 금화를 팔던 상황까지 영상으로 찍혀서 세상에 퍼졌네."

"그게 왜요?"

"정말로 모르는 것 같군. 지금 마력석 시세가 얼마인지 한 번 검색해보게."

인터넷에서 하급 마력석의 가격을 확인한 유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천 만원?"

"그나마도 계속 떨어지는 상황이지."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몬스터의 부산물과 이세계의 물건들이 세상을 진보 시킬만한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각 나라는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고 몬스터를 사냥하러 나서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에 시중에 나도는 몬스터와 관련된 물품은 극히 적었다.

수요는 끝없이 상승하는데 공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대는 무성한데 제대로 된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에서 유성이 화려하게 오크 전사를 사냥하는 모습과 570억이라는 거금에 전리품을 파는 영상이 퍼지자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수많은 계약자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모여들었고 정부에서는 급히 무장이나 몬스터 사냥, 부속물 판매와 관련된 법안들을 제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거품이었던 거야."

아예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력석은 기존의 에너지원을 뛰어넘는 효율을 낼 수 있고 가공을 끝마친 몬스터의 뼈나 가죽같은 부산물들은 기존의 소재들보다 우수한 강도와 특성을 보여줬다.

문제는 기존의 물건이나 산업을 완전히 밀어낼 정도의 파급력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몬스터의 사체나 부산물들에 대한 가격은 순식간에 수직으로 하락했다.

"물론 특별한 효과를 가진 몬스터의 사체나 강력한 물건들은 비싸게 팔리기는 하지만 그 이하의 물건들은 뭐, 그렇게 됐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유성은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 만원 짜리 물건을 천 배의 값어치로 팔아넘긴 희대의 행운아.

이 정도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뜬금없이 사업 얘기 좀 하자거나 좋은 아이템이 있다고 하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군요."

"나도 엄청 시달렸네. 평생 얼굴 한 번 못 본 친척부터 밥 한 번 같이 먹은 사람들까지, 무슨 놈의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노이로제가 생기는 줄 알았네."

"그러고 보니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길드를 세운다길래 세 사람이 활동할만한 파티 느낌의 자그마한 길드나 하나 세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별 거 아닐세. 자네가 그랬던 것처럼 미숙한 계약자들 좀 도와주고 몬스터를 상대하는 노하우 같은 것들을 공유했더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더군. 덩치만 크지 실속은 없네."

절대로 그런 말로 넘길 수준은 아니었지만 유성은 굳이 입 밖으로 그런 생각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길드도 아니었을 뿐더러 애초에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찾아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가 부탁한 물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으음."

유성의 질문을 들은 순간 서창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물건들을 어디에 쓸 건지 알려줄 수 있겠는가?"

"몬스터를 사냥하는데 써 볼 생각입니다."

"자네 실력이라면 이런 게 없어도 충분히 몬스터를 잡을 수 있고, 자네가 잡지 못하는 몬스터는 이런 물건으로 당해내지 못할 걸세. 진짜 이유를 알려주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호신용입니다."

유성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서창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벽 한 쪽에 세워져 있던 물건을 들고 왔다.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철제 케이스.

케이스를 열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확인한 유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는데 용케 다 구하셨군요."

"별로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네. 시간도 널널했고 관련 법안도 통과돼서 비교적 쉽게 허락이 떨어지더군."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죠."

"벌써 갈 생각인가? 조금 있으면 로저스와 하영이가 올텐데 인사는 하고 가지? 아니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게나."

"선약이 있어서요. 나중에 마시죠."

퀘스트 제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상황.

다소 매정해 보일지 몰라도 한가롭게 차를 마실만한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조심히 가게."

"예.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끼익!

"엇?"

"아, 죄송합니다."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앞에 서 있던 남자와 부딪힐뻔한 유성은 사과를 건냈다.

"······."

"···저기요?"

자신,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케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님?"

"회장?"

"아, 자네는 모르겠군. 이 분은···."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말하죠. 한국 계약자 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고 있는 강창석이라고 합니다."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유성입니다. 따로 소속된 곳은 없습니다."

의례적인 인사.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격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진심으로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기쁨보다 황당함이 먼저 드네요."

"죄송하지만 전 사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사업이요?"

밑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목적을 가졌다고 생각한 유성은 적당히 인사를 건내며 자리를 떠나가려 했다.

고막을 타고 전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야, 방구석한량. 너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인한 찰나의 경직.

"예? 뭐라구요? 방구석 뭐?"

본능적으로 연기 스킬을 이용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속여 넘기려 했지만 이어지는 강창석의 말에 상황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죄송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이만 가봐야겠군요."

"예? 그래도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시지."

"나중에 마시죠. 한유성 씨? 이왕 가는 거 저랑 같이···."

서창훈에게 인사를 건내고 뒤를 돌아본 강창석은 그 사이에 텅 비어버린 복도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보소?"

이거 게임 아님

046화 버그

'뭐지? 대체 어떻게?'

물건을 받으러 왔다가 정체를 들켜버린 어이없는 상황.

그럴듯한 개연성이나 어떠한 조짐도 없이 뜬금없이 터진 대형 사고에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도주를 택했다.

들어올 때 기억해둔 테라스를 통해 옆에 있던 건물의 옥상으로 몸을 날린 유성은 채 몇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흑과 백으로 물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도시.

"이건···."

"그림자 세계. 들어오는 건 어렵지만 나가는 건 더 어려운 곳. 대화를 나누기에 이보다 적절한 곳은 없지. 만나서 반갑다, 방구석한량. 아, 내 닉네임은 슈퍼 개미야.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뒤를 돌아보니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는 강창석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성은 일단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강창석 님이라고 하셨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모르는 척 하시겠다? 미안한데 이미 꼬리 잡혔거든? 너 그 등에 매고 있는 거. 그거 뭐야? 대한민국에서 그런 것들을 구해서 들고 다닐 사람이 유저 말고 더 있어? 게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간 거 보면 방구석한량 맞구만, 어딜 오리발을!"

"이건 그냥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 구한 것들이고 도망친 게 아니라 급한 일이 있어서 가보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저? 방구석한량? 게임 얘기를 하시는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내보내주십시오."

당황함과 불안함이 적절하게 섞인, 누가 보더라도 억울한 일에 휘말린듯한 유성의 모습에 강창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몬스터가 나타나기 전의 세상이었더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변명이었지만 현재의 세상에서는 저런 물건들을 들고 다닌다고 의심은 할 수 있을지언정 무작정 유저로 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말로 유저가 아닐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진짜 방구석한량이 뭔지 모르겠다고?"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진짜 모르겠습니다."

"잠깐만. 만약 진짜 사람을 착각한 거라면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고 적절한 배상도 하지."

뒤로 물러난 강창석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검색 영역 대한민국 서울 한정. 갑 신원 미상, 을 한유성. 이상의 조건으로 검색 시작."

잠시 후 허공으로부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색 완료. 해당하는 인물은 없습니다.

"······."

"······."

잠깐의 침묵.

서부극의 총잡이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교환하던 둘 가운데 먼저 움직인 것은 강창석이었다.

"천라(天羅)!"

강창석의 손 끝에서 발사된 무형의 그물.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에 유성은 차마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그물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스륵.

"···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허무하게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 그물.

얼빠진 강창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성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일격이다.'

폭발적인 속도를 자랑하는 섬전보로 적과의 거리를 좁히고 마력 강화로 끌어올린 근력을 이용해 암월 16식의 바위 뚫기를 펼치며 주먹이 닿는 순간 진리의 마안으로 마력의 흐름을 동조시켜 발경을 펼친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

퉁!

복부에 정확히 일격이 들어가면서 강창석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지만 유성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마치 풍선을 때린 듯한 반발력.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곧바로 후속타를 날리기 위해 접근한 순간 강창석의 몸에서 강력한 역장이 발생하며 유성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젠장."

방금 전의 일격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유성은 허리춤에 달려있던 도끼 자루를 움켜쥐며 곧이어 날아올 역공에 대비했다.

그러나 강창석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너 지혜 수치 몇이야?"

"적에게 내 정보를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아, 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더만 무슨 편집증 있어? 같은 유저한테 왜 그렇게 쓸데없이 적대적으로 나오는 건데?"

"갑자기 그림자 세계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납치하고는 공격을 가하는데 그럼 적대적으로 안 나오게 생겼냐?"

"그건 네가 자꾸 유저가 아닌 척 시치미 떼고 도망가려 하니까···. 하, 됐다."

딱!

강창석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흑백으로 이루어졌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물들며 사라졌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면 믿을 수 있겠냐? 난 너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야. 다른 놈들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나는 너를 해할 생각이 없어."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거지?"

"그건···."

뭔가를 말하려다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자신을 뻔히 응시하는 강창석의 모습에 유성은 마른 침을 삼켰다.

당장 별다른 적의는 없어 보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목숨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강자를 앞에 두고 있는 만큼 당연히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지금 지혜가 몇이야?"

"말해주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말해줄 건데? 돈이라도 줄까?"

"나 돈 많거든?"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강창석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만나면 잔소리도 좀 하고 선물도 좀 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무신 말대로 알아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도와주려 하다 오히려 악영향만 끼칠 것 같아. 대신 한 가지만 묻자. 그 물건들, 퀘스트 클리어 하는데 쓸 거지?"

"······."

유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강창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지구나 이세계의 물건들을 쓰면 퀘스트 클리어는 쉬워지겠지만 적당히 수위를 지켜라. 이차원의 스킬이나 아티팩트 사용률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클리어 랭크가 떨어지는 건 알고 있지? 그게 심해지면 여러가지 페널티가 따라온다."

"그건 알고 있어."

"끽해봐야 카르마 회수 정도나 알고 있겠지. 그거 이외에도 강제 퀘스트 부여, 스킬이나 아티팩트 삭제, 유저 자격 박탈, 퀘스트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닌 네 소유의 카르마 원천 징수 등 뭐 이것저것 있으니까 조심해."

"······."

"그리고 쉽지는 않겠지만 가급적 퀘스트에서 제시하는 목표 이상을 달성해서 고랭크 클리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 편리함에 중독돼서 클리어 랭크 신경 안 쓰고 퀘스트 날로 먹다가는 나중에 개고생 한다. 가급적이면 이차원의 스킬이나 아티팩트는 쓰지 말 것, 쓸거면 그만큼 성과를 거둘 것. 알겠어?"

'계속 고랭크로 클리어하고 있는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억누른 유성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얼마든지."

"지구의 문명 등급은 몇이지?"

뜬금없는 유성의 질문을 들은 강창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거기까지 파악했다 이거지?"

"파악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퀘스트 좀 하다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걸."

"···그래. 바로 알아야지."

씁쓸한 표정을 짓던 강창석은 벅벅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지구의 문명 등급은 0.76이다."

"생각보다 더 낮군."

"문명 등급이 높다고 무작정 아티팩트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같은 세계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냉병기와 미사일이 동등한 건 아니니까. 이 정도면 대충 감 잡았지? 다른 질문은 없나?"

"없어."

"그럼 이거 가지고 가라."

"···명함?"

"구하기 힘든 물건이 있거나, 귀찮은 일이 생기면 그 번호로 연락해. 어지간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해주지."

"······."

명함과 강창석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성은 순식간에 빌딩에서 몸을 던지고는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퀘스트 좀 하다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라."

허공에서 술병을 꺼낸 강창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그 바로 알 수 있는 것을 한참 동안 몰랐던 멍청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세계의 능력과 물건을 가져올 수 있는 유저의 능력.

그러나 그 거창한 능력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힘을 키운 유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퀘스트의 보상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극한의 상황을 헤쳐나가며 끔찍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거나 목숨을 잃는 경험을 겪어야 한다.

21세기의 지구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중 그런 고통과 경험을 감수하면서도 끝없이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삼강(三强)처럼 정말로 강해져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

삼중(三中)처럼 뭔가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당연히 힘 보다는 돈 될만한 능력이나 물건들을 중점적으로, 그것도 아주 가끔씩 퀘스트를 수행하며 가져오려 할 것이다.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신이 포함된 삼약(三弱)으로 취급되는 유저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유성이 들고 있던 케이스의 내용물을 꿰뚫어본 투시안이 도박에서 활용하기 위해 가져온 스킬이었던 것처럼 그의 스킬들과 장비들은 싸움보다는 여러가지 잡기에 특화되어 있었다.

현재의 강함으로 보자면 자신과 유성은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잠재력과 성장 가능성, 유저로서의 퀘스트 수행 능력만 놓고 본다면 유성이 태양이고 자신이 반딧불이 된다.

유저가 된 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돼지 않은 주제에 비록 전투에 특화되지는 않았다지만 훨씬 먼저 유저가 된 이와 순간적으로나마 대등하게 겨루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 성장 속도는 좀, 아니 많이 이상하지 않나?"

유성을 향해 던졌던 그물, 천라(天羅)를 소환한 강창석은 정보를 확인했다.

혹시 자신이 장비의 옵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몇 번을 봐도 옵션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했다.

"사용자보다 지혜 수치가 낮은 대상을 구속하는 거 맞는데?"

고민하던 강창석은 유성이 구속 효과를 무효화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유저가 된 시간이 있는데 유성의 지혜 수치가 자신을 넘긴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지혜가 몇인데."

강창석의 지혜 수치는 715였다.

* * *

한참 도심을 헤매면서 추적을 경계하던 유성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 쉽게 보내주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건가?'

자신이 다른 유저의 입장이었더라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지를 염두에 두고 다른 유저를 대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과한 경계를 한 듯 싶었다.

"만약 내가 선구자고 나와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후발 주자가 나타났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버리거나 족쇄를 채워두려 했을텐데."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강창석이 압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굳이 아득히 뒤쳐진 자신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강함이라."

이름 : 한유성

직업 : 유저

레벨 : 45

칭호 :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자

근력 : 149

민첩 : 149

지혜 : 757

정신 : 766

체력 : 149

마력 : 103

보유 스킬 : 금단의 지식(??), 진리의 마안(C+), 수라감각도(C), 월광 16식(C), 사영편법(C), 섬전보(D), 고통 끊기(D)······.

근력과 민첩, 체력은 기존의 99에서 제롬의 강화 시술 스킬을 가져오면서 50 포인트가 성장했고 마력은 베르문드 연공법을 수련하면서 4 포인트가 상승했다.

문제는 새롭게 추가된 정신이라는 스탯과 하루아침에 껑충 뛴 지혜였다.

"···버그 사용 같은 걸로 취급돼서 페널티 받는 건 아니겠지?"

지구로 귀환하기 직전 들었던 거대한 존재의 울림에 담겼던 우주의 신비와 진리에 관한 정보들은 카르마 상점에서 구입하지 않았음에도 금단의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스킬창에 남아 자신의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금단의 지식은 정상적인 스킬이 아니었다.

등급은 물음표로 표시되고 설명을 띄우면 태초의 언어, 바벨로도 해석할 수 없는 깨진 글자만 끝없이 이어진다.

유성은 이것이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당한 카르마를 지불하고 얻지 않은 스킬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에 의해 지워지는 게 정상이지만···, 프로그램으로도 완전히 상쇄하지 못할 만큼 그 울림에 담긴 것들의 충격이 강력했던 거야."

뇌와 영혼을 헤집고 강제로 정보를 쑤셔 넣는 듯한 끔찍했던 충격.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은 최대한 노력했지만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남은 불완전한 정보들이 금단의 지식이라는 이름의 스킬로 변해 남았다.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금단의 지식이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었더라면 울음을 들었을 때처럼 그 안에 담겨있는 악의와 내용을 버텨내지 못하고 죽거나 미쳐버렸을 테니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 얻은 스킬이 아닌 탓에 내용이 중간중간 비어있거나 이리저리 꼬여있어 제대로 활용할 방법은 없었지만, 그 구멍투성이의 불완전한 스킬만으로도 정신이라는 새로운 스탯이 생겼고 지혜 수치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비록 근력이나 민첩, 마력같이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스탯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낫지 않겠는가?

'모든 준비는 끝났다.'

상태창의 확인을 끝마친 유성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고글을 착용했다.

반드시 깰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시작해볼까."

이거 게임 아님

047화 나 말고 누가 있겠냐

[구원을 바라는 소녀] 퀘스트는 지금까지 수행했던 퀘스트와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퀘스트가 아닌 연계 퀘스트라는 점, 앞선 퀘스트 수행으로 인해 의뢰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어떤 것이 필요한 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퀘스트의 등급과 목표 자체가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구원을 바라는 소녀]

-문명 분류 : M-5

-문명 등급 : 0.82

-난이도 : ??

-정체불명의 괴물을 물리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소녀. 하지만 저택 안에는 훨씬 더 위험하고 흉악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소녀를 당신만의 방법으로 구원해주십시오.

-클리어 조건.

1.소녀의 구원 : ??

난이도와 보상이 전부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난이도야 999번의 죽음을 겪는 동안 저택 내의 몬스터과 마주했던 경험이 있으니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어 큰 문제는 아니지만 재도전의 여부가 불확실해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일반적인 퀘스트는 재도전권이 없는 상태에서 실패하면 지구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퀘스트는 등급이 없어.'

등급불명의 퀘스트에 등급과 사용처가 정해진 재도전권을 사용 할 수 있는 건지, 만약 사용할 수 없다면 이 퀘스트는 단 한 번만 도전할 수 있는 건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다른 유저에게 물어보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가급적 다른 유저와 엮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을 막았다.

그 생각은 다른 유저를 만나고도 변하지 않았다.

강창석과의 만남은 비교적 부드럽게 이뤄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자신은 변변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무력화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변덕에 목숨을 맡길 수는 없어. 최소한 내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얻기 전까지 다른 유저와의 교류는 피한다.'

마음을 굳힌 유성은 준비물을 전부 챙기고는 목록 최상단에 있는 퀘스트를 선택했다.

['구원을 바라는 소녀'를 시작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차원 좌표 특정 및 아리아드네의 실 연결 완료]

[영자(靈子) 이동을 실시합니다]

* * *

"하아, 하아!"

비틀거리는 다리와 땀으로 흠뻑 젖은 몸, 금방이라도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 양팔을 타고 올라오는 격통.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이대로 주저 앉아 편히 쉬고 싶다.

그러나 아리스는 그럴 수 없었다.

꽈악!

"읏!"

너덜너덜해진 양팔을 가시덩굴로 단단히 동여맨 아리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성님이 도와주러 오실 거야.'

유성은 999번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괴물을 쓰러트렸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지켜본 아리스는 유성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워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살려준 목숨을 고작해야 이 정도의 고통 때문에 포기하겠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달릴 수 없다면 걸어서라도, 걸을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성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철컥! 철컥!

하지만 아리스는 이 도주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

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고풍스러운 형태의 리빙 아머(living armor)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공포로 인해 힘이 풀린 아리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흑, 흐윽!"

아무리 굳은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냉혹하다.

공포로 움직이지 않는 몸, 어느새 코 앞까지 다가와 칼을 치켜든 리빙 아머를 보는 순간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유성 님.'

이만하면 할만큼 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생을 하면서 살려놨더니만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섭하지.

순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리스의 육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 다리를 풍차처럼 휘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공격을 피한 아리스는 그대로 양팔을 들어 올려 자연스레 기수식을 취했다.

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양팔을 늘어트렸다.

"파, 팔이···."

-위험해요!

아리스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유성은 뒤로 몸을 날려 가슴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젠장,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웠나? 그리고 상황은 또 왜 이렇게 급박한 건데?'

999번의 죽음을 겪으며 독기가 바짝 올라왔을 때는 몰랐지만 다시 아리스의 몸에 들어온 순간,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피부가 찢겨나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의 심각한 부상.

근성을 발휘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팔로 제대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구를 쥐는 것도 힘들어. 그렇다면 다리를 이용해야 하는데···.'

철컥! 철컥!

미꾸라지처럼 공격을 피하는 모습에 화가 난 것일까.

리빙 아머의 검이 만들어내는 궤적이 한층 더 촘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리스의 능력치로는 반응하는 것조차 힘든 공격이었지만 칼날이 몸에 닿기 직전, 아리스의 몸은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공격을 피해냈다.

'된다!'

육체와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50포인트 끌어올리는 강화 시술 스킬.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았던 아리스의 능력치가 어지간한 스포츠 선수 뺨치는 수준까지 올라가자 리빙 아머의 공격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피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데미지를 가할 방법.

다소 신체 능력이 올라갔다 한들 통짜 쇠로 만들어진 갑옷에 암월 16식을 때려 넣어봤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굴리던 유성은 순간 눈을 빛냈다.

'그 스킬이라면···.'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이론 상으로는 가능하다.

콰직!

수직으로 휘둘러지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낸 유성은 지면에 박힌 검과 팔을 타고 위로 뛰어올라 리빙 아머의 가슴에 살포시 발을 올려놓았다.

터무니없이 큰 동작, 리빙 아머가 승리를 확신하며 발목을 잡아 채려는 순간 북을 두드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퉁!

"이게 되네."

축 늘어진 리빙 아머.

본래 발경은 주먹이나 손바닥을 통해서 펼치는 것이 상식이다.

기를 동조하고 방출하기 가장 적합한 부위가 바로 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성은 에너지의 흐름을 볼 수 있고 동조할 수 있는 진리의 마안이 있다면 꼭 손이 아니더라도 다른 부위로도 발경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웠고, 그 가설은 훌륭하게 적중했다.

'발로도 사용할 수 있다면 어깨, 무릎, 더 나가서 아예 전신으로도···.'

"으으."

양팔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현실로 되돌아온 유성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상처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유성 님! 유성 님 맞죠?!

"너 도와주러 올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냐."

-···유성 님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자리 좀 옮기자."

잠시 복도를 거닐며 주변을 둘러보던 유성은 최대한 허름해 보이는 문을 향해 다가갔다.

'본래 아리스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마력 강화로 최대한 근력을 끌어올리고 고통 끊기를 사용해 순간적으로 감각을 차단하며 팔을 휘두른다.

암월 16식. 바람 베기.

콰직!

나무로 이루어진 손잡이를 단숨에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유성은 대충 문을 닫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객실로 사용된 듯 가구 몇 개만 존재하는 작은 방.

구석에 있는 침대에 몸을 누인 유성은 인벤토리를 열어 준비해왔던 물건들을 꺼냈다.

[중증 외상용 긴급 재생 앰플(D+)을 꺼내기 위해 5,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최하급 회복 포션(E)을 꺼내기 위해 1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최하급 요상단(E)을 꺼내기 위해 1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주사기 총에 재생 앰플을 장전한 유성은 총구를 팔뚝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핏!

"큭!"

재생 앰플이 몸 안으로 들어간 순간 양팔로부터 불타는 듯한 고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고통 끊기를 사용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

그러나 그 효과만큼은 확실해서 찢겨나간 피부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재생하고 뒤틀렸던 팔과 손가락이 제모습을 찾아갔다.

또 하나의 재생 앰플을 주입하고 회복 포션과 요상단을 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가볍게 암월 16식을 펼쳐 확인을 끝마친 유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님!

"깜짝이야! 목소리 좀 낮춰."

-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유성 님! 방금 그건 뭐에요?

"치료제. 내가 그렇게 만들기도 했고 그 부상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게 생겼는데 당연히 치료해야지."

-그,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유성 님은···.

"잠깐, 그 전에 일단 이건 확실하게 하고 가자. 더 도와 달라는 부탁을 수락한 건 그저 사고였지 내 본의가 아니었어. 내가 다시 온 건 어디까지나 정보를 얻기 위해 온 거야. 알겠어?"

어쩐지 츤데레가 된 듯한 기분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이 말을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네!

"···내 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당연히 전부 이해했어요!

사정이나 목적이 어떻든 간에 결국 유성은 자신을 도와주러 왔다.

아리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실 하나 뿐이었다.

"뭐, 좋아. 내가 사라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얼마 안 지났어요. 5분 정도?

"5분이라."

아리스의 차원과 지구 사이의 시간 배율은 거의 1:1.

그런데 지구에서 거의 2달의 시간이 흐를 동안 이 세계에서는 고작해야 5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극도로 치우친 배율이야. 추가 퀘스트를 수락한 순간 시간 배율이 임의로 조정된 건가?'

하긴 원래대로 1:1의 시간 배율이 유지됐더라면 양팔이 걸레짝이 된 아리스가 이 저택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확인을 끝마친 유성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 봤을 때와 변한 것이 없는 가느다란 소녀의 몸, 그리고 괴물의 피로 얼룩진 드레스.

잠시 주먹을 펴고 쥐기를 반복하던 유성은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 좀 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그 괴물을 잡고 나에게 더 도와 달라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혼자 남는 게 무서워서 유성님이 남아서 계속 도와줬으면 했어요.

"도와줬으면 했다라."

괴물을 죽여달라던가, 저택에서 탈출시켜달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순수하게 도와줬으면 한다.

그제서야 유성은 왜 이 퀘스트의 등급이 물음표로 표기됐는지 깨달았다.

'이런 걸 해달라, 저런 걸 해달라는 정확한 목적을 정하지 않고 막연하게 도움만을 바래서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거야. 그 말은 구원이라는 범주 내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진다는 건가?'

구원.

사전적인 의미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는 뜻.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듯 구원 역시 관점에 따라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괴물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지 않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쉽고 빠르다. 그리고 그만큼 처참한 클리어 랭크를 받겠지.'

당연히 그런 선택지를 고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최소한 그동안 들인 노력과 준비가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성과는 거둘 생각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48화 군필 여고생

다만 그 전에 한 가지 거쳐야 할 과정이 있었다.

"아리스. 넌 어떻게 하면 좋겠어?"

-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냐고. 그냥 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안전한 곳까지 가고 싶은 건지, 그런 것들 말이야. 네 문제니까 최소한 네가 원하는 방향성 정도는 정해야지 무작정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는 없잖아."

고민에 빠진 듯 침묵하던 아리스는 잠시 후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유성 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솔직히 저는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건지, 왜 낯선 저택에서 괴물들에게 목숨을 노려지게 된 건지, 심지어 이 저택에 오기 전의 일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요.

"······."

-그런 저보다는 유성 님이 내린 판단이 더 합리적이고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요.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저는 유성 님의 결정에 따를 거에요. 그러니 유성 님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가장 무난한 방법은 탈출이다.

방한 도구와 식량을 챙겨왔으니 절벽이 아닌 쪽을 통해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성은 지금까지 퀘스트를 수행하며 쌓은 경험과 유저의 직감을 통해, 이 방법은 랭크가 그다지 높게 나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 저택을 탐사했으면 해."

단순히 도망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리스가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이 저택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고랭크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아리스의 반응은 간단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네 목숨이 걸려있는데?"

-유성 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실패하면 뭐 어때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거 말인데···. 이제 죽으면 다시 재도전 할 수 없을지도 몰라."

-···예? 그게 무슨 말이죠?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럴수도 있다는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잠깐만요!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죠! 죽으면 끝이라니! 지금까지 했던 말 전부 철회! 그냥 나가요!

유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고한 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고랭크 클리어를 노린다는 사실에 희미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본인이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흔쾌하게 허락을 내려준 이상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흔쾌히 허락한 적 없거든요?!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아리스의 투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유성은 문틈으로 복도를 훑어봤다.

'일단은 아무도 없군.'

이 저택 안에는 첫 퀘스트 때 쓰러트린 괴물보다 더 위험한 괴물들이 수두룩했다.

아무런 생각이나 준비 없이 무작정 나갔다가는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브랜트 공화국 53번 연구소 산 근접 무장 시제품(C+)을 꺼내기 위해 50,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꽤 소모되는군."

[미확인 생물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퀘스트에서 소모된 포인트의 정확히 열 배.

같은 물건이라도 문명 등급에 따라 필요한 카르마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필요한 경우는 처음 봤다.

'판타지 세계에 SF 세계의 병기를 가져와서 더 많은 카르마가 들어간 건가? 아니, 마녀와 올드한 스타일의 저택이 있다고 이 세계가 판타지 세계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그냥 플라즈마 무기가 그만큼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져서 많은 포인트가 필요한 걸 수도 있어.'

새롭게 떠오른 의문점을 머리 한 구석에 밀어 넣은 유성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첫 퀘스트를 수행할 당시 수백 번이 넘게 저택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 때는 모든 문이 잠겨있었고, 몬스터들 때문에 갇혀있던 방으로부터 멀리 이동하지 못해서 이 저택에 대해서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파지지직!

-이건 또 뭐에요?

"만능 열쇠."

플라즈마 도끼를 휘둘러 손잡이 부분을 부숴버린다.

단순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해서 유성은 어렵지 않게 닫혀있던 방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객실, 창고, 빈 방. 별로 대단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여긴 좀 달라 보이는군."

다른 문들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장식이 달려있는 문.

가볍게 손잡이를 안으로 들어간 유성은 주변을 둘러보고 맥 빠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식당인가?"

수십 명이 앉아도 될 정도로 길다란 식탁과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식기들.

뚜껑을 열어봤지만 내용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여 뭔가 건질 것이 있나 식당 안을 둘러보던 유성은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그림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회색빛의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리스와 똑 닮은 여인의 그림.

"그러고 보니 분명 지난 번에도 복도에서 이런 그림을 봤었지."

그 때는 수수께끼에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넘겨버렸지만 지금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네 가족 아닐까?"

-그 때도 말씀드렸지만 전 가족이 없다니까요?

"네가 모르는 것 뿐이지 낳아준 어머니가 없는 건 아니잖아. 혹시 어릴 적 널 잃어버린 부모님이 나중에 널 발견하고는 같이 살려고 데려온 게 아닐까?"

-같이 살려고 데려온 자식을 괴물이 가득한 저택 한 가운데 던져 놓는 부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좀 더 그럴 듯한 추측은 없어요?

아리스의 물음에 유성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있긴 있지. 그런데 네가 듣기에 영 좋은 추측들은 아니라···."

-괜찮으니까 들려주세요.

"첫 번째 추측은 이 저택은 일종의 실험장이라는 거야. 뭔가의 실험을 하기 위해 너와 몬스터를 이 저택에 던져 놓고 범인들은 안전한 곳에서 우리들이 발버둥치는 걸 관찰하고 있는 그런 상황? 낡은 저택에서 호러나 크리쳐물 분위기 물씬 풍기며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면 최첨단 연구소와 연구원들이 나오는 게 요새 트렌드거든.

-···저, 무슨 소리를 하시는 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아리스가 의문을 표했지만 유성은 지금 상황과 유사한 각종 클리셰들과 이야기들을 줄줄이 읆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이 그림에 있는 여자가 실험을 하다 뭔가 잘못된 상황이랄까? 즉 네가 이 그림 속의 여자라는 거지. 얼떨결에 휘말린 무고한 피해자인 줄 알았던 주인공이 알고 보니 기억을 잃어버렸던 악당이란 전개는 꽤 흔하거든."

-그만! 죄송하지만 유성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크흠, 그냥 그런 게 있어."

뒤늦게 자신만 아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놨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성은 헛기침을 했다.

"이 그림을 빼면 식당 안에서는 별로 도움이 될만한 게 없는 것 같네. 일단 다른 곳으로···."

철퍽!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을 막은 채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검붉은 살점 덩어리들.

그리고 그 살점들이 벌어지며 생겨난 수십 개의 눈동자들과 눈을 마주친 순간, 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씹···"

풍선 마냥 덩치를 불린 살점 덩어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 쪽을 향해 돌진해왔다.

덩치와 외형으로 그다지 빠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었던 유성은 볼에 자그마한 상처를 내고서야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회피했다.

철퍽! 철퍽!

-꺄아아아아악!

살점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촉수들이 사방에서 닥쳐오는, 악몽에서나 나올법한 끔찍한 광경에 아리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숫자는 많지만 단순하고 느려. 수라감각도로 체감 시간을 끌어올리고···.'

한 가닥, 한 가닥.

차근차근 촉수를 베어내며 조금씩 앞으로 이동하던 유성은 이내 섬전보를 발휘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본체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그러나 살점 덩어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에 분노한 듯 한층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저택 안에 있는 괴물들이 다 모이겠어!'

살점 덩어리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 덩치 탓에 주변의 집기와 그릇들을 전부 휩쓸며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장 괴물을 쓰러트리고 장소를 옮겨야 하는 상황.

순간 황금색으로 변한 유성의 눈이 살점 덩어리를 샅샅이 분석하기 시작했다.

'저기가 핵이다.'

살점 덩어리가 요동칠 때마다 밝게 빛나며 전신에 마력을 공급해주는 핵이 있었다.

문제는 그 핵의 위치가 몸 깊은 곳에 있다는 것과 계속해서 위치를 바꾼다는 점이었다.

'도끼로는 무리야. 아무리 용을 써도 저 안까지 닿을 리가 없고 발경을 쓰자니 계속해서 핵의 위치가 바뀌어서 제대로 들어갈 가능성이 낮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난데···. 문제는 그걸 쓰면 심각한 어그로를 끌게 될 거란 거지'

콰직!

쨍그랑!

엉망진창으로 날뛰는 괴물의 모습에 유성은 결심을 굳혔다.

어그로를 끌리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이 놈을 제압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망설이다가 다른 괴물들이 이 싸움에 합류하기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최악의 사태가 없다.

-더 물러날 곳이 없어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아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유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러날 필요가 없지."

[K2 소총(D)을 꺼내기 위해 5,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탕!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살점 덩어리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갑작스러운 충격과 날카로운 소리에 놀랐는지 놈이 경직한 순간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진리의 마안으로 핵의 위치를 파악하고 사격술 스킬을 이용해 정확하게 총알을 박아 넣는다.

처음에 발사한 총알들은 두꺼운 살점을 뚫지 못하고 중간에 멈췄지만 쉬지 않고 계속해서 총알을 박아 넣자 이내 핵까지 관통 당한 살점의 괴물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그건 대체?

재생 앰플이나 플라즈마 도끼는 회복 포션과 마법 무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번개 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적을 쓰러트리는 물건은 아리스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그 어느 것도 일치하지 않았다.

"아아, 이것은 총이라고 한다. 우리 세계의 평범한 무기지."

-총?

"그런 게 있어. 일단 튀자."

총성을 들은 괴물들이 실시간으로 이 쪽으로 오고 있을 터, 지금은 장소를 옮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한 발 늦은 감이 있었다.

"아, 젠장."

-···아까 더 이상 재도전 못할 수도 있다고 한 거 제발 농담이었다고 말해주세요.

괴물들은 이미 소란을 알아차리고 이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복도 양측에서 다가오고 있는 괴물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성은 짧게 혀를 차고는 새로운 물건을 꺼내 들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선을 넘으면 그 다음 선을 넘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

[K413 수류탄(D+)을 꺼내기 위해 10,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안전핀을 뽑고 가볍게 반대쪽 복도를 향해 던진다.

잠시 후, 번개가 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곤죽이 되거나 부상을 입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괴물들을 향해 소총을 겨눈 유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군필여고생이라고 들어봤을 지 모르겠네."

이거 게임 아님

049화 또 다른 소녀

현대 병기는 몬스터들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자들이 냉병기를 사용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계약자들이 힘을 빌려오는 존재들이 전사나 무인, 기사같이 냉병기를 다루는 존재들이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던가, 총성이 몬스터들의 과도한 관심을 끈다던가 등등의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화기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의 존재였다.

탕!

정확히 미간을 꿰뚫었음에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와 달려드는 악령.

마력을 실은 주먹으로 후려치자 바로 나가 떨어졌지만 유성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벌써 마력을 절반이나 썼어.'

평범한 몬스터를 상대로 화기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 문제였다.

아리스의 마력은 마녀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매우 적은 수준.

스킬들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는 마력만이 아니야.'

[5.56mm 탄창(D-)을 꺼내기 위해 1,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총을 쏘기 위해서는 총알이 필요하고, 총알을 꺼내기 위해서는 추가로 카르마 포인트가 들어간다.

문제는 카르마 포인트도 총알도 무한한 자원이 아니라는 것.

바로 직전의 퀘스트로 인해 카르마 포인트에는 꽤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총알은 이런 식의 무식한 전투를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철컥!

얼마 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바닥을 드러낸 탄창에 혀를 찬 유성은 총을 돌려 매고는 반대쪽을 향해 질주했다.

-잠깐! 혹시 저택 중앙에 뭐가 있는 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몬스터들이 모여있잖아?'

-아는데 그리로 가시는 거에요?

수십 번이나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결국 창 밖으로 뛰어내린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몬스터의 무리.

그러나 유성은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틀기는커녕 오히려 중앙홀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던졌다.

'기회는 단 한 번.'

수라감각도로 발휘되는 극한의 집중력 속, 유성의 손 끝에서 뻗어나간 가시 덩굴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를 휘감았고 아리스의 가벼운 몸은 그대로 홀 반대쪽에 착지하는데 성공했다.

"수백 번 떨어진 보람이 있네."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안전한 곳으로 가주세요. 벌써 쫓아오고 있잖아요!

아리스의 재촉에 유성은 복도를 내달렸다.

손잡이를 부수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건 간단하지만 몬스터들은 바보가 아니다.

모든 손잡이가 멀쩡한 가운데 하나의 손잡이만 부숴져 있다면 당연히 그 방 안에 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대충 근처에 있는 모든 문을 부수고 적당한 곳에 들어가서···."

끼익!

"뭐, 뭐야?!"

갑작스레 열린 문과 그 사이로 뻗어 나온 팔.

몬스터의 공격인 줄 알고 기겁한 유성의 귀에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들어와!"

'사람?'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듣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을 위장하고 있는 몬스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에 유성은 결국 방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쿵!

점점 가까워지던 발자국 소리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들리지 않게 됐다.

그러나 몬스터들로부터 안전하게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유성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

"······."

어깨에 닿는 회색빛의 머리카락과 투명한 피부.

순해보이는 눈매와 150cm를 간신히 넘을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황금빛 눈동자의 미소녀.

아리스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를 묘사하는 말이었다.

이 쪽을 향해 손을 뻗는 소녀의 모습에 무심코 손을 마주대려던 유성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넌 뭐야?"

"그, 그러는 넌 뭐야? 왜 나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건데? 서, 설마 도플갱어?"

"만약 둘 중 하나가 도플갱어라면 그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난 인간이야! 도플갱어는 너겠지!"

악을 쓰는 소녀의 모습에 유성은 아리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쌍둥이냐?'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알아, 안다고. 하지만 이건 그냥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잖아.'

한 쪽이 군필 여고생 같은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둘은 외모는 물론 입고 있는 옷까지도 완벽하게 동일했다.

-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소설이나 게임으로 단련된 경험 상 보통 이런 전개로 가면 뒤가 좋지 않아. 서로 협력하고 힘을 합쳐서 위기를 벗어나는 전개도 없는 건 아닌데 발목을 잡히거나 뒤통수를 맞는 전개가 더 많거든. 내 생각에는 쓱싹하는 게 제일 무난할 것 같은데.'

-쓱싹? 설마 죽인다는 말인가요? 저랑 똑같이 생긴 사람을?

'음. 좀 그런가?'

만약 이게 평범한 게임이고 선택지가 존재했더라면 쓸데없는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 상 유성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눈 앞의 소녀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게임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선택을 재도전으로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

자신의 입장에서는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위험의 싹을 잘라내는 행위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그저 무차별 살인마의 살인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퀘스트의 기준은 엄격하다.'

만약 어떤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찾는 퀘스트를 수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기상천외한 이차원의 스킬이나 도구를 있는 대로 동원하거나,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찔러서 범인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당연히 클리어 랭크는 바닥을 찍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고 재도전을 해 모든 것이 시작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범인의 정체를 지목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킬이나 아티팩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높은 클리어 랭크를 받을까?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스킬과 아티팩트 사용률은 올라가지 않아도 운명 개변률이 바닥을 찍는다.

결과적으로는 옳다고 할지라도 그런 선택을 내리기에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한 최소한의 중간 과정, 즉 그럴 듯한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풀이 과정 없이 답만 적어내면 감점을 당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지금 상황도 그것과 같다.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난데없이 소녀의 목숨을 거뒀다가는 운명 개변률에 어떤 영향이 갈 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목적이 단순한 생존이 아닌 이 저택과 아리스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라는 목적을 떠올린 유성은 결국 유성은 도끼를 거뒀다.

"말해."

"뭐, 뭘?"

"네가 인간인지, 인간 흉내를 내는 몬스터인지 구분하려면 뭐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야? 이름은 뭐야?"

"아, 아리스! 내 이름은 아리스야!"

-예? 쟤 지금 자기 이름을 아리스라고 한 건가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에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은 없고 이름만?"

"어? 으응."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아니 마법은 뭐가 있어?"

"마녀의 마법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해줄 수 없는데···."

머뭇거리던 아리스는 유성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 제어, 가시덩굴, 부패의 저주."

"진리의 마안은 왜 빼?"

"그, 그건 어떻게 알았어? 누구한테도 알려준 적 없는 사실인데?"

"됐고, 여기 오기 전의 일은 기억나?"

"그, 글쎄. 기억이 흐릿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숲 속에서 혼자 살았던 것 같아. 눈을 떠보니 여기였어."

"······."

"진짜니까 믿어줘! 솔직히 지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여기는 어디인지 감도 안 잡히지, 밖에는 이상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무서워서 이 안에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들어오라고 한 것 뿐이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그, 그러게요?

잠시 망설이던 유성은 진리의 마안으로 소녀를 꿰뚫어보고는 도끼를 거뒀다.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환각 마법이나 도플갱어 같은 것이 아닌, 틀림없는 진짜였다.

"아리스."

"왜?"

-예?

"아니, 넌 잠깐 있어봐. 아니, 그러니까 네가 아니라 다른 애를 말하는 건데···."

두 명의 아리스 사이에서 횡설수설하던 유성은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헛기침을 했다.

"이제부터 널 2호라고 부르겠어."

"방금 전에 이름 들었잖아? 왜 멀쩡한 이름을 내버려 두고 2호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건데?"

"아리스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또 있거든. 이름이 겹치면 헷갈리잖아?"

"잠깐, 설마 네 이름도 아리스야?"

"뭐 그런 셈이지. 근데 아리스라고 부르지 말고 유성이라고 불러."

"아리스라는 이름을 안 쓸 거면 내가 써도 되잖아."

졸지에 이름을 뺏긴 소녀는 잔뜩 볼을 부풀렸지만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흔들더니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소한 사람 이름으로 불러줘."

"그럼 앨리스는 어때?"

"···좀 낫네. 근데 넌 이 상황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여기가 어딘지, 왜 몬스터들이 저택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그리고 너와 내가 왜 같은 이름을 쓰고 똑같이 생겼는지 그런 것들 말이야."

"나도 몰라. 그래서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하는 중이었지."

외형도, 성격도, 기억도 똑같은 두 명의 소녀.

정확히 말하자면 짚이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실험장, 가상 시뮬레이션, 마법이나 기타 방법으로 만들어진 복제 인간 등 당장 눈만 감아도 그럴듯한 클리셰가 십수개는 떠올랐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상에 불과하기에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저택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왜? 그냥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내가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탈출할 때 데리러 올 테니까."

잠시 침묵하던 앨리스는 조심스레 다가와 유성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나도 데려가 줘."

"으음, 그냥 여기에 남아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문 너머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 알고 있잖아?"

"알아! 나도 안다구! 그런데 혼자 있는 건 너무 무섭단 말이야!"

눈물을 글썽거리는 앨리스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이 저택에서는 현대 병기로 무장한 자신의 몸 하나도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앨리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물체를 내미는 순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열쇠? 그건 어디서 났어?"

"주머니에 들어있었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열쇠로 근처에 있는 문은 전부 열 수 있었는데, 나를 데려가주면 이걸 빌려줄게. 어때?"

저택 안에 있는 모든 문의 손잡이를 부수려면 굉장한 시간과 체력이 소비될 것이다.

앨리스를 데려감으로써 생길지도 모르는 위험과 데려가지 않음으로써 생길 위험 사이에서 한참을 저울질하던 유성은 결국 결심을 굳혔다.

"따라와도 좋아. 대신 내 말에 철저하게 따라야 해. 할 수 있겠어?"

"물론이지! 근데 정말 이 저택을 조사할 생각이야? 우리 둘 만으로는 위험하지 않을까···."

"둘만 있었더라면 그랬겠지."

"둘?"

유성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클리어 랭크도 있고 강창석에게 들은 말도 있었기에 가급적이면 이세계의 물건은 최소한도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이 저택의 난이도가 너무나도 극악한 수준이었다.

순수한 아리스의 능력 만으로는 조사는커녕 탐사조차 불가능한 상황.

제대로 된 조사를 위해서는 이차원의 스킬과 물건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고 탈출해봤자 지금까지 쓴 포인트는 포인트대로 날아가고 랭크는 랭크대로 떨어지겠지. 혹시 몰라서 준비만 했지 실제로 쓸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어째 전형적인 매몰 비용의 함정에 빠진 느낌.

클리어 랭크를 떠올릴 때마다 멈칫거리는 손을 바라보던 유성은 결국 결심을 굳히고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뭐야? 처음 보는 건데 이상하게 생겼다."

-저도 궁금해요. 이건 뭔가요?

"음, 그러니까 사역마 같은 거야. 이 녀석이 보는 건 나도 볼 수 있지."

21세기 지구에서 만들어진 드론이 어딘지 모를 이세계의 저주받은 저택을 비행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50화 호문클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