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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화 호문클루스

본의 아니게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었던 덕분일까.

서창훈에게 부탁해 특별히 공수해온 드론은 그 무엇과도 마주치거나 방해 받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저택 내부를 비행할 수 있었다.

'의외로 단순한데?'

중앙홀과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를 크게 'ㄷ'자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

처음 있던 방 근처에서 몇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 했을 때는 몰랐지만 크기를 제외한다면 저택의 구조는 굉장히 단순하다.

더 이상의 확인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드론을 회수하려던 유성은 부서진 문을 발견하고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에 조심스레 카메라의 방향을 틀었다.

-···설마 이것도 저인가요?

사방에 튀어있는 피와 살점,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시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상황이었지만 회색빛의 머리카락 하나 만으로 시체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방금 그건 설마···."

"뭐, 우리들 중 하나겠지."

"넌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아? 너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죽어있었잖아?! 좀 놀란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별로?"

아리스와 앨리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일지 몰라도 엄연한 타인인 유성에게는 느끼는 감정은 '아리스와 똑같이 생긴 소녀가 죽어있다' 정도가 전부였다.

굳이 추가하자면 이런 상황과 비슷한 게임이나 소설 등을 떠올리며 조금씩 추측을 좁혀가고 있다는 게 전부였다.

"···너 뭔가 이상해."

"그래서 뭐? 같이 가기 싫어?"

"읏!"

어지간히 혼자 남겨지는 게 무서웠던 듯 잠시 머뭇거리던 앨리스는 이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옷자락을 붙잡았다.

끼익!

텅 빈 복도로 나온 유성은 앨리스에게 받은 키로 근처에 있는 방들의 문을 열고 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의 방을 확인했을까.

몬스터의 기척을 느끼고 근처에 있는 방으로 숨어든 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어."

구조에 비해 저택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고 돌아다니는 몬스터와 수색해야 할 방의 숫자는 너무나도 많다.

기적이라도 따라주지 않는 이상 모든 방들을 확인할 때까지 들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고 밀려 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도주하거나 탈출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그냥 밖으로 나가는 건 어때?"

"뭔 소리야? 방식을 바꿔야지."

게임이었더라면 방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면서 샅샅이 뒤져봐야 했겠지만 이건 현실이다.

수많은 객실이나 창고에 과거와 관련된 단서나 저택 내부를 수색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는 곳만 수색하고 닫히거나 숨겨진 문은 파괴해서 열면 그만인 것이다.

드론에 여분의 스마트폰을 매단 유성은 그대로 음악을 재생하고는 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철퍽! 철퍽!

철컹! 철컹!

"끼이이이익!"

드론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리빙 아머, 수많은 생명체들을 기워 만든 키메라, 살점의 괴물 등 저택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수많은 몬스터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는 드론을 쫓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을 저택 내부를 이리저리 비행하며 몬스터들을 자신이 왔었던 반대쪽의 복도로 보내버린 유성은 드론의 신호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자."

"가자니. 어디로?"

"위. 보통 이런 상황에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은 꼭대기 아니면 지하인데 이 저택에는 지하가 없는 것 같으니 위로 가야 하지 않겠어?"

유성은 앨리스와 함께 중앙에 있는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있던 몬스터들 중에서도 음악을 듣고 아래로 내려온 놈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1층과 비교하자면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아, 아아···."

"흑, 흐윽. 으흐흐흐."

물론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아예 몬스터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코너를 돈 순간 나타난, 3m는 될법한 거대한 몬스터를 마주한 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토해내고 말았다.

"힉?!"

짐승의 것으로 추측되는 역관절의 다리, 근육질의 비대한 몸통, 네 개의 팔, 두 개의 머리를 달고 있는 끔찍한 키메라.

두 개의 머리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틀며 유성과 앨리스를 내려봤다.

"훅, 훅. 훅"

"···아, 아아?"

잔뜩 분노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머리와 넋 나간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머리.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숨을 들이키는 여자의 머리를 확인한 순간, 유성은 섬전보를 사용해 키메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소리를 지르기 전에 처리한다!'

기껏 몬스터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는데 소란이 커지면 말짱도루묵이다.

서걱!

여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기 직전, 플라즈마 도끼가 깔끔하게 목을 잘라냈다.

평범한 몬스터였더라면 이것으로 끝났겠지만 상대는 키메라였다.

남아있는 또 하나의 머리가 몸을 움직이며 유성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큭!"

암월 16식의 흘려내기와 버텨내기를 동시에 사용했음에도 기본적인 스펙과 체구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에 유성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마녀! 마녀! 우리를 괴물로 만든 마녀!"

네 개의 팔로 펼치는 공세는 두 개의 팔로 펼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거추장스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팔 두 개 정도는 바로 날려버릴 수 있지만 그 뒤에 남은 팔에 역공을 허용하기 때문에 유성은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못하고 기회를 노릴 수 밖에 없었다.

"몇 번이라도 좋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주마! 죽어서 네가 저지른 죄를 뉘우쳐라! 이 마···"

덜컥!

"···녀?!"

갑작스럽게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키메라.

당연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만큼 유성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콰직!

남자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유성은 정수리에 박아 넣은 도끼를 빼내 다시 한 번 내려쳐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잘했다. 덕분에 살았어."

"으응."

키메라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것은 후방에 있던 앨리스가 가시 덩굴 스킬을 이용해 발목을 묶은 덕분이었다.

그러나 앨리스는 칭찬을 들었음에도 그다지 기뻐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저기, 이 키메라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뭐가?"

"자기를 괴물로 만든 게 우리라고, 죄를 저질렀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신경 쓰여."

"그냥 헛소리지. 너 이런 키메라를 만든 기억이 있어? 없지? 그냥 머리가 이상한 키메라가 헛소리를 한 걸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물론 유성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더불어 이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말했다가는 앨리스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모르기에 별거 아니라는 듯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런데···."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있으면 뒤를 경계해줘.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 지 모르니까."

"아, 응!"

유성은 앨리스와 함께 본격적으로 2층의 탐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익숙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도 있네."

"······."

회색빛 머리칼의 소녀들.

누군가는 급소만을 꿰뚫린 채, 누군가는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라는 차이만 제외한다면 모두들 죽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자."

유성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아리스와 앨리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서재 가공된 약초와 시약, 마법 재료들이 잔뜩 쌓여있는 창고 등 완전히 다른 2층의 모습에 침울했던 아리스와 앨리스가 놀랐기 때문이다.

"세상에. 발락시아의 묘목과 붉은 나비의 고치까지 있어? 여기 있는 것들 중 하나만 가지고 가도 부자가 될 수 있겠어!"

"챙기려면 지금 말고 나중에 갈 때 챙겨. 그건 그렇고 여기도 별 거 없는 것 같은데?"

1층과 비교한다면 그나마 낫지만 단서나 정보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

결국 유성은 더 이상의 수색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3층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뭐 해?"

가볍게 계단에 발을 디딘 유성과 달리 앨리스는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위로 올라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뭔가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그건 아닌데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그래? 그럼 나 혼자 갈 테니까 넌 적당한 곳에 숨어있다가···."

"아, 아니야. 갈 수 있어."

잠시 앨리스를 응시하던 유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다르다.'

3층에 올라오는 순간 1층과 2층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닭살이 절로 돋는 음습한 공기, 곳곳에서 풍기는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독한 냄새,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몬스터.

"어?"

"왜? 뭔가 봤어?"

"아니,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이상한 소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했지만 앨리스가 말한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아래층의 몬스터 소리를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런가?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 내뱉는 말 같았는데."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앨리스는 곧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키메라가 외치는 소리를 잘못 들은 것 같아."

"일단 여기에는 몬스터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경계를 늦추지 마."

"알았으니까 빨리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자. 여기 있으면 왠지 불안해지는 기분이야."

앨리스의 재촉에 유성은 근처에 있는 문에 열쇠를 꽂아 넣고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안에 있는 것들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거대한 유리관들과 그 안에 들어있는 생물체들.

어떤 것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는지 미성숙한 모습을 있었고, 어떤 것은 다양한 생물들의 신체를 이어 붙인 키메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것은 인간도, 괴물도 아닌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런 연구는 듣도 보도 못했어.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탄생시키고 개량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경악한 앨리스와 달리 유성은 담담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과학이 발달한 세계가 아닌 아닌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에서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신기하게 느껴졌지만,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 인간 같은 개념에 대해 널리 퍼져있고 실험까지 하고 있는 21세기 지구의 현대인으로서는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건···."

"······."

-······.

아리스와 완벽하게 동일하게 생긴 소녀가 들어있는 유리관들.

99%의 추측이 100%의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아니, 우리는 만들어진 인간. 호문클루스였던거야."

-···수백 번도 넘게 죽어본 경험 때문인지, 유성 님의 이상한 추측들을 먼저 들어서 그런지 별로 충격적이진 않네요. 이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좋은 거지.'

의외로 스무스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아리스와 달리 앨리스는 자신이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사시나무처럼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잠시 잡담을 나누며 앨리스를 위로해 준 유성은 곧바로 3층의 탐색을 이어갔다.

3층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유리관들과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둘러보지 않았음에도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앨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정도.

그러나 유성은 수색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 구석에 있는 방에서 원하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쓰다 만 듯 펼쳐져 있는 책에 커다란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살고 싶다.」

이거 게임 아님

051화 흔한 이야기

아리스는 고아였다.

평범한 고아였더라면 뒷골목의 일원이 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겠지만, 아리스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기에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다.

무형의 에너지를 꿰뚫어 보고, 이해하며, 자신의 뜻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

아리스는 그 능력을 이용해 마법사 흉내를 내며 간단한 의뢰나 잡일들을 해결하며 번 돈으로 나름 부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생활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신비한 능력을 가진 소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여러 사람과 세력들이 그녀를 확보하고자 모여들었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낀 아리스가 도시를 떠나 이름 없는 숲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거 네 이야기 같은데.'

-전 이런 걸 쓴 기억이 없지만 내용상 제 이야기가 맞는 것 같긴 한 것 같네요.

'네 원본이 쓴 거겠지.'

-원본이라니, 조금만 단어 선택에 신경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은근히 상처 받는다고요.

숲속에서 숨어 살면 포기할 거란 생각과 달리 아리스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았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감각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은 드물게 존재한다.

그러나 단지 보는 것만으로, 단순한 마법도 아닌 마탑의 비전이나 개인의 독창적인 마법마저도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인간은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다.

후계자를 찾는 마법사와 마탑, 악마와 관련됐다고 여기고 추적하는 사제와 교단, 신비한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귀족과 국가, 심지어 이종족들까지 나서 아리스를 추적했고 결국 아리스는 얼마 가지 못해 잡히고 말았다.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은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실험체로만 여겼다. 그들은 내가 가진 능력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온갖 실험과 연구를 거듭했다.

단순히 수십 년, 수백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재능 정도라면 중요한 인재로 여겨져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의 능력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례가 없던 전무후무한 능력이었고, 사람들은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한 명이 아닌, 더 많은 것들을 얻기를 원했다.

능력의 메커니즘을 해석하기 위해, 능력을 재현하기 위해 아리스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갇힌 채로 정체 모를 약을 먹고, 정체 모를 실험을 당하고, 피와 살점을 잘라 가고, 정체 모를 마나 운용법을 익히며 매일 죽음의 고비를 오갔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끔찍한 실험을 당해도 포션 몇 병이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사제들의 신성력이면 말끔하게 회복됐다.

처음에는 그저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십수 년에 다다를 무렵, 아리스의 생각은 달라졌다.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어떤 모습이 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복수할 것이다. 나를 이런 꼴로 만든 이들에게, 도와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게, 내가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종이 너머로도 전해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끝 모를 원망과 생생한 악의.

비록 자신이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그 생생한 심정을 접한 아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여기에 적힌 사람은 네가 아니잖아? 너는 너. 아리스는 아리스. 너와 이 아리스라는 사람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야.'

-저도 아리스인데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풉.

다른 사람을 위로해 본 경험이 없었던 탓일까.

원론적인 수준의 대단치도 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 유성의 모습에 아리스는 기분이 풀렸는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됐으니까 계속 읽어요.

"크흠."

그러던 어느 날, 아리스는 뜬금없이 자유의 몸이 됐다.

아리스를 탐낸 어떤 나라에서 사람들을 보냈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라에서 아리스를 다른 곳으로 이송하는 도중 전투가 벌어져 양측이 공멸했기 때문이다.

자유가 된 아리스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두 나라는 서로가 아리스를 데려갔다고 여겨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아리스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과는 완벽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말이다.

아리스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강자와 이종족의 능력과 비전들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그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괴물로 성장했다.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나를 실험체로 삼았던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아리스를 마왕, 멸망을 부르는 자, 파멸의 마녀 등 다양한 멸칭으로 부르며 토벌대를 보냈지만 그녀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다만 아리스도 그 이상 뭔가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내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오랜 세월의 실험으로 상처 입고 약해진 몸에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더 오래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죽기 싫다. 살고 싶다. 살고 싶었다.

그리고 아리스는 실험체로 지낸 시간에서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국가 규모의 국력과 인력을 수십 년간 투입해 얻어 낸, 자신에 대한 수많은 데이터와 생체 실험의 결과물들.

아리스는 그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육체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인공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처음에는 연거푸 실패했지만 아리스의 눈은 이럴 때도 빛을 발했다.

생명력의 흐름을 보고 조정해 인공적으로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복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마저도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나라 하나라면 모를까 전 세계와 싸우는 건 이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더 강하고 튼튼한 몸이 필요했다.

자기 자신만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던 아리스는 더 이상 없었다.

인간, 이종족, 몬스터들을 잡아온 아리스는 다른 생명체를 하나로 융합하거나 각 종족의 우월한 능력을 추출해 다른 종에 이식하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것에 열중했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 흔한 이야기네.'

-저 아래에 있던 몬스터들은....

'실험의 결과물들이었겠지. 너, 그러니까 호문클루스들은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거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었던 걸 보면 실험체들과 저택의 관리를 맡고 있는 관리인 정도의 역할을 맡았을 테고.'

-관리인이라니, 저는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없는 데요?

'마법으로 조종했든지, 뇌를 만지작거렸든지 어떻게든 했겠지. 일단 계속 읽어 보자.'

그러나 아무리 사기적인 눈을 가지고 있다 한들 아리스는 개인이었고 그녀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아리스는 지금까지의 실험을 바탕으로 모든 종족의 장점을 집대성한 이상적인 육체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영혼을 이식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오늘, 나는 새로 태어날 것이다. 다소 불안한 점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상관없다. 내 눈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기든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몇 장의 페이지를 넘겼지만 그 문구를 끝으로 더 이상의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결국 어떻게 됐을까요?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둘 중 하나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아리스는 이 저택에는 없다는 거야.'

-왜요?

'왜긴 왜야. 저 아래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는 거 보면 몰라? 이 저택에 남아 있으면 그 꼴을 그냥 보고 있겠어?'

-아!

'실험에 성공해서 복수하겠다고 떠나 버린 건지, 실패해서 죽어 버린 건지는 몰라도 어느 쪽이든 우리한테는 다행이지. 이런 괴물이 저택에 있었더라면 탈출은 어림도 없었을 테니.'

나라 하나를 멸망시킨 마녀.

아무리 현대 병기가 있다 한들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대충 사정도 알아냈으니 슬슬 여기서 나가자. 2층에 있는 물건들이 돈 좀 되는 것들이라고 했지? 몇 개 챙겨 가면 내려가서...."

고개를 든 유성은 뒤늦게 방 어디에서도 앨리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얘는 또 혼자 어딜 간 거야?'

3층에는 몬스터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뜬금없이 몬스터가 튀어나오거나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기에 유성은 조심스럽게 앨리스의 행방을 쫓아 3층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앨리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정중앙에 있는 거대한 하나의 방만이 남았다.

"여기에도 없으면 아래로 내려갔다는 건데."

기껏 몬스터가 없는 곳으로 왔는데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곳으로 내려간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앨리스가 혼자 움직였다는 사실부터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아리스의 태클을 무시하며 유성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끼이익!

기름칠을 하지 않았는지 문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방 안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유성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이 풍경을 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방에 튀어 있는 수많은 살점과 신체 파편, 내장들.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으나 그중에는 뿔이나 비늘, 꼬리같이 명백히 인간의 것이 아닌 것들 또한 있었고 그것들이 썩어 가며 풍기는 지독한 냄새는 후각을 마비시키고 의식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사방에 그려져 있는 수많은 마법진과 촛불들, 용도를 추측할 수 없는 수많은 기구의 모습을 둘러보던 유성은 뒤늦게 이 방에서 일어났던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새로운 몸으로 갈아탔던 건가? 아무래도 성공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인데, 실패했던 건가."

"맞아. 실패했지."

앨리스의 목소리.

그러나 유성은 긴장을 풀지 않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소총을 겨누었다.

철컥!

"어라? 내 집에 그런 게 있었던가? 그건 무슨 물건이니?"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앨리스가 아니었다.

"...아리스인가?"

앨리스의 머리 위에 달라붙어 있는 뇌.

그리고 뇌와 머리를 연결하고 있는 촉수와, 앨리스가 지금껏 보여 주지 않았던 여유 넘치는 표정 등 정체를 추측할 만한 증거는 차고 넘쳤다.

"눈치가 빠르네? 실험에 대해 알고 있던 것도 그렇고 설마 내 일기를 읽은 거니?"

"어, 읽었지. 새로운 육체니 뭐니 장황하게 써 놨더니만 생각처럼 잘 안 됐나 봐?"

"하아, 그러게 말이야. 이상적인 육체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는데 거부반응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어."

아리스는 머리, 정확히는 머리 위에 달라붙어 있는 뇌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간신히 영혼과 영혼의 그릇 만큼은 어떻게든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라서 정말 곤란한 참이었어. 육체는 사라졌지, 현실에 영향을 끼칠 방법은 없지, 마력은 점점 줄어가지, 이대로 끝인 줄로 알았는데 세상에! 설마 호문클루스들이 여기까지 올 줄이야.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서 내린 명령이 통하지 않았으면 정말 죽었을걸."

"...."

유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3층으로 올라가기 싫다고 말했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을 때, 하다못해 책을 읽을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몸을 빼앗기고, 죽은 줄 알았던 최악의 마녀는 되살아나서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상황.

"...제안 하나 해도 될까?"

"제안?"

"나는 싸움을 싫어하는 평화로운 성격이라서 말이지. 너도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괜히 서로 손해 볼 짓은 하지 말고 이대로 헤어지면 어떨까?"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거든? 부활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의식을 진행할 몸 하나, 새롭게 사용할 몸 이렇게 총 두 개가 필요해. 의식을 진행할 몸은 이거면 되는데, 새로운 몸은 아무래도 너 말고는 남은 게 없는 것 같다는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야...."

아리스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너에게도 흥미가 있어. 말투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정도를 넘어 아예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보면 아무리 봐도 내 호문클루스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몸은 호문클루스지만 그 안에 다른 영혼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

"저택에 없던 이상한 물건들을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네 정체가 궁금해졌어.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네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뽑아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걱정하지 마. 아프지는 않을 테니까. 오히려 아주 기분 좋을 거야."

"협상 결렬이군."

"상관없지 않아?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리스를 향해 유성 역시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 결과는 정해져 있지."

유성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거 게임 아님

052화 잡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유성은 승리를 확신했다.

음속을 뛰어넘는 탄환의 위력은 절대적, 제아무리 마녀라 한들 코앞에서 쏘아진 총을 맞고 버텨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고 1초도 지나지 않아 유성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팟!

목표에 명중하기 직전, 총알은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연기가 되어 증발해 버렸다.

찰나의 순간 본능적인 판단으로 뇌가 아닌 신체 각부와 다른 급소들을 노리고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지만 결과는 같았다.

"드워프들이 쓰는 핸드캐논과 비슷하게 생겨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무기였구나. 그런데 그게 전부야?"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마법을 사용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괴물에게는 총이 통하지 않는다.'

비록 육체를 잃었더라도, 뇌만 남아 호문클루스의 육체에 기생한 꼴사납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나라를 단신으로 멸망시킨 마녀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아리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는 순간, 유성은 본능적으로 수라감각도를 발동해 의식을 가속했다.

'온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와 살점들로부터 솟아나는 촉수와 덩굴, 손바닥들.

전 방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단 한 곳뿐이었다.

"어머?"

섬전보를 사용해 아리스 앞에 도달한 유성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머리 위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암월 16식 바위 뚫기.

명중한다면 물렁한 뇌 정도는 가볍게 꿰뚫을 자신이 있었다.

명중한다면 말이다.

"큭?"

"얘 좀 봐. 설마,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네 앞에 나왔을 것 같니?"

거센 반발력과 함께 튕겨 나간 주먹.

연이어 공격을 이어 가려던 유성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직!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거대한 촉수.

공격을 피했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유성은 이를 악물고 공격을 피해 내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까지 닥쳐온 덩굴을 흘려 내기로 피해 내고, 발목을 잡으려던 손을 디딤대로 삼아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박차 지면으로 추락한다.

연거푸 섬전보를 발휘해 방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공격을 피해 내는 유성의 모습에 아리스마저도 감탄성을 토해 낼 지경이었다.

"와! 대단해! 호문클루스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대체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

아리스의 능력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잠깐의 공방만으로 마력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아크로바틱한 동작의 연속으로 신체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템을 쓰는 것.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유성의 장점이다.

근처까지 다가온 촉수를 앞으로 쳐 내 순간적으로 아리스의 시야를 가린 유성은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한 물건을 꺼내 세팅을 끝마치고는 아리스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졌다.

찰나라는 말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행동, 그러나 아리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유성을 포박하는 데 성공했다.

"정신 사납게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는."

고치를 연상시킬 정도로 전신을 꽁꽁 휘감고 있는 수많은 덩굴과 촉수.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아리스는 유성의 머리에 손가락을 올리며 말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단순히 기억만을 옮기는 게 목적이라면 뇌를 바꾸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자신이 진정한 자신으로 남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깨달음, 영적인 재능, 감정을 온전히 계승하기 위해서는 영혼도 같이 옮길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이 육체에서 영혼을 빼내 단순한 그릇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우우우웅!

"컥!"

자신의 육체, 거기에 자신이 만든 창조물인 만큼 영혼을 끄집어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경련하는 육체로부터 영혼을 끄집어내고 진리의 마안을 이용해 영혼의 물질화까지 끝마친 아리스는 손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황금빛의 보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은데...."

뇌만큼은 못하더라도 영혼 역시 어느 정도의 정보를 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 영혼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호문클루스 그 자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행동, 이상한 수준의 전투력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자세한 건 의식을 끝내고 뇌를 뒤적여 보면 알 수 있겠지.'

이 상태로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시라도 빨리 안전한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의식을 진행하려던 아리스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쿨럭, 쿨럭! 케흑!"

"...어떻게?"

뇌와 영혼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다.

아무리 영혼이 남아 있다 한들 뇌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육체는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호문클루스는 영혼을 뽑아냈어도 움직이고 있다.

연거푸 기침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아리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거나 위로 던진 공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충격.

유성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스를 노려보며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거 내놔."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손가락 끝을 움직이는 게 전부.

그리고 발신기의 버튼을 누르는 데는 그 정도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콰과과과광!

위력을 측정하기 위해 한 번 써 본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다시 보아도 [미확인 생물체. 인간에게 매우 적대적인.] 퀘스트의 보상으로 얻은 폭발물의 위력은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지구보다 훨씬 발전한 세계에서 만들어진, 암석 파쇄용 폭발물의 여파는 방 전체를 순식간에 휩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닥을 무너트리며 방을 2층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꺄아아아아악!"

방어 마법을 펼쳐 두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의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던 아리스는 전신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과 열기에 비명을 지르며 미쳐 날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리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툭!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직사각형의 물체.

그리고 곧바로 재밌어 참을 수가 없다는 듯한 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더?"

콰과과과광!

두 번의 폭발과 두 번의 붕괴.

1층의 홀에 떨어진 아리스의 모습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칠공에서는 까맣게 죽은피가 흘러내리고, 양 다리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으며, 전신은 극심한 화상을 입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크르르르.

갑작스러운 이변에 놀란 것도 잠시, 홀에 모여 있던 몬스터들은 마녀를 발견하고는 잔혹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다시 한번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그 밖의 것은 어찌 되든 좋았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 신나게 죽여 왔던 호문클루스가 아닌 진짜 마녀라는 사실을 말이다.

콰직!

아리스의 손바닥으로부터 튀어나온 커다란 가시가 근처에 있던 키메라의 머리를 순식간에 꿰뚫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아리스를 중심으로 자라난 수백, 수천에 달하는 가시 덩굴과 촉수, 기괴한 팔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걸리는 모든 것들을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꺄아아아아아!

자신만만하게 달려들었던 몬스터들은 그제야 상황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도망가려 했지만, 분노한 아리스에게는 도주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붙잡혀 갈기갈기 찢겼고,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는 곳에는 곧바로 가시덩굴과 촉수가 쏘아져 모든 것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2층에서 바라보고 있던 유성은 밀려오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촉수와 덩굴이 방패 역할을 해 줘서 간신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살아남았다 뿐이지, 몸 상태는 아리스와 비교해 전혀 나을 게 없었다.

급히 재생 앰플을 주사해 상처를 회복시키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위험해.'

영혼을 뽑히는 순간 유성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영혼이 뽑혀 나갔음에도 의식은 멀쩡했고 몸도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으니 바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 대신 아리스의 영혼이 뽑혀 나간 건가?'

의뢰인이 확실히 죽은 게 아니라서 실패로 간주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저 마녀가 영혼석을 부숴 버린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퀘스트가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히! 감히! 감히! 도구가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대? 나와! 나오란 말이야!"

쿠구구구궁!

아리스의 난동은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고 건물에서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압사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유성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틀렸어. 마녀. 나는 도구 따위가 아니야."

콰직!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자리를 꿰뚫은 거대한 가시를 슬쩍 바라본 유성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하! 네가 도구가 아니라면 대체 뭐란 거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이던 유성은 입 안에 요상단을 한 알 털어 넣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다."

"데우스 뭐라고?"

콰직!

지면에서 솟구치는 가시들.

그러나 유성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의 신. 모든 운명과 개연성을 무시하며 갑자기 이야기에 등장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사라지는 편리한 존재. 불합리의 극치. 그것이 바로 나다."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혹시 너 머리라도 다친 거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의 신?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겉으로는 평이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리스는 온정신을 집중해 유성의 위치를 쫓고 있었다.

폭발로 인해 오감이 맛이 간 상황이라 정확한 추적은 불가능했지만 사방에 뻗은 촉수를 감각 기관 대신 이용해 조금씩 범위를 좁혀 가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어. 애초에 이해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그래, 거기구나.'

아리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벽에 파고든 촉수를 움직여 유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을 통째로 휘감기 시작했다.

뱀이 먹이를 삼키듯 단번에 집어삼켜 버릴 생각이었다.

"어머, 신기하네. 나도 딱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

"도구에게 이해를 구하는 주인이 어디 있겠니? 주인은 그저 사용할 뿐이고 도구는 사용될 뿐이지."

콰과과광!

건물의 일각을 무너트리며 튀어나온 거대한 촉수와 굵은 덩굴들이 목소리가 들린 공간을 순식간에 둘러쌌다.

"잡았다!"

사냥에 성공한 것을 확신한 순간, 아리스는 긴장의 끈을 놓았다.

포식자가 유일하게 빈틈을 드러내는 찰나의 순간, 유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잡았다.'

녹음기에 정신이 팔린 아리스를 향해 유성의 신형이 쏘아졌다.

이거 게임 아님

053화 괴물

파지지직!

아리스의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공격력을 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곧 플라즈마 도끼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과도 동일했다.

최대한 늦게 전원을 올렸지만 플라즈마 무기 특유의 이질적인 소리는 아리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

"어딜!"

제아무리 당황했다고 한들 마녀는 마녀였다.

기습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쏘아지기 시작한 날카로운 가시와 촉수들을 바라보며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재정비할 틈을 주면 안 된다. 여기서 끝내야 해.'

유성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근처에서 몇 줄기의 가시덩굴들이 솟구치며, 접근하는 촉수와 덩굴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유성이 만들어 낸 가시덩굴은 아리스가 만들어 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도 적고 약했다.

그러나 유성은 아리스는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사영편법.'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놓는 것이야말로 무공의 기본.

아무런 법칙도 없이 무작위로 움직이는 아리스의 것들과 달리 유성의 가시덩굴은 사영편법의 묘리에 따라 촉수와 가시들을 교묘하게 쳐 내거나 견제하면서 길을 막았고, 그 결과 유성은 순식간에 아리스의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감히!"

쳐 낼 수 있는 공격은 쳐 내고 흘려 낼 수 있는 공격은 흘려 내며, 피할 수 없는 공격은 고통 끊기로 통증을 무시하고 몸으로 받아 내며 돌진한다.

바로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온 유성의 모습에 아리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기묘한 물건들을 쓴다 한들 이런 호문클루스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 쉽게 죽여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전하는 건 상대는 자신을 죽일 각오로 덤빌 수 있지만, 자신은 새로운 몸에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위험해.'

결국 아리스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유성, 아리스, 덩굴, 촉수, 무너지던 저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정지했다.

물론 정지한 것처럼 보일 만큼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것뿐이지 진짜 멈춘 것은 아니다.

'바로 영혼을 옮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뇌를 바꾸지 않으면 상당한 기억의 손실을 각오해야 했고 기존의 영혼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영혼이 억지로 그 몸에 들어가려 하면 둘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운이 좋아도 양측 모두 기억의 혼탁이나 정신 오염 같은 부작용이 생기고 운이 나쁘면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모두 극심한 영혼의 상처를 입고 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내 눈이라면 가능해.'

모든 에너지를 보고 조종할 수 있는 진리의 마안.

당연히 그 대상에는 영혼도 포함됐다.

자신의 눈을 믿은 아리스는 그대로 유성의 몸에 자신의 영혼을 겹쳤다.

* * *

영혼 전이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존의 영혼을 육체에서 뽑아내 반발을 아예 없애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다.

제대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고 지친 육체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트라우마를 자극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연거푸 주는 방식으로 영혼의 의지를 꺾고 약화시킨다면 육체를 차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내 눈은 모든 걸 볼 수 있어. 부정적인 기억, 끔찍한 기억들을 찾아서 몇 번 상기시켜 주면 그만이야.'

그러나 유성의 정신과 마주한 순간 아리스는 이성을 잃을 뻔했다.

"우웁!"

유성의 정신세계 중간중간 자리 잡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보들.... 아니, 정보보다는 오염 물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이상한 것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감을 자극하는, 생명체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와 악의로 가득 찬 정체불명의 무언가.

온갖 끔찍한 경험을 한 대마녀 아리스조차도 이것과 마주한 순간 극심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얘는 어떻게 이런 걸 머릿속에 품고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완벽하지 않은 듯 군데군데 비어 있고 이리저리 꼬여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파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위험한 무언가.

아무리 수양을 쌓은 기사라 하더라도 머릿속에 이런 걸 품고 있다가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광인이 되고 말 것이다.

정말로 이 몸을 차지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아리스는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세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황량하지?"

보통 인간의 정신세계는 다양한 색깔로 물들어 있기 마련이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은 다채로운 색깔을 하고 있고 즐거운 인간은 밝은 색깔을, 불행한 인간의 정신은 어두운 색을 띄고 있다.

그러나 유성의 정신세계는 대부분이 무채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찾은 색깔들도 그 빛이 너무나 희미해 자극해 봤자 효과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아리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가늘게 눈을 떴다.

정신세계 가장 깊숙한 곳, 여러 방어 기제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정체불명의 기억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그 기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봤던 색깔 중 가장 선명하게 빛나면서 어두운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이거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아리스는 진리의 마안을 이용해 유성의 영혼을 향해 그 거무튀튀한 기억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반듯하고 거대한 건물들과 스스로 움직이는 수많은 강철 수레, 처음 보는 의복을 걸친 사람들이 빛나는 무언가를 들고 오가는 모습.

모든 것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 낸 아리스는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마침내 이 기억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침울한 얼굴로 거대한 관을 뒤따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한 명의 소년.

저 그림을 들고 있는 소년이야말로 지금 호문클루스의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영혼의 주인이다.

"부모의 장례식인가?"

이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지만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장례식의 일종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는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슬퍼하지 않지?"

부모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음에도 소년에게서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진리의 마안으로 샅샅이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기쁨도, 슬픔도, 평온함도, 괴로움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공허.

그 공허함에 순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색깔이 있었던 걸 보면 분명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낀 건 확실한데?'

그 순간 작은 감정이 느껴졌다.

다만 그것은 아리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분노?'

소년이 분노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부모가 죽고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

문제는 그 분노의 정도였다.

정신적 타격을 입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아주 미약한 수준의 분노.

이 정도로 영혼에 타격을 주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황한 아리스는 급하게 빠져나와 정신세계를 이 잡듯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원하던 기억은 찾을 수 없었다.

'이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제야 아리스는 유성이 정체불명의 끔찍한 무언가를 머릿속에 집어넣고도 멀쩡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무엇과도 공감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이해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즐거운 척, 화난 척, 슬픈 척, 당황한 척 할지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연기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지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어딘가 결여된 불량품.

아리스가 아는 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를 부를 만한 호칭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괴물."

* * *

콰직!

플라즈마 도끼가 앨리스의 머리 위에 달라붙어 있던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완벽한 승리.

그러나 유성은 찜찜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였지?'

음흉하거나 분노에 찬 표정만 짓던 아리스가 마지막 순간 보여 준, 두려움에 찬 표정과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였던 입술을 떠올린 유성은 벅벅 머리를 긁었다.

대체 뭘 봤기에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괜히 신경 쓰였다.

"저주라도 남기려 한 건가?"

고민에 빠진 유성은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퀘스트 '구원을 바라는 소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과정을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운명 개변률 259.9%, 이차원 스킬 사용률 80.4%, 이차원 아티팩트 사용률 94%.]

[최종 평가 S랭크.]

[놀랍습니다! 비록 소녀의 구원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한유성 님은 압도적인 전력의 차를 극복하고, 세계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대마녀를 쓰러트리는 믿을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하셨습니다! 그 공을 높이 사 보상을 지급합니다.]

[클리어 보상 : 10,000,000 카르마, 진리의 마안(A+), 가시덩굴(C).]

[S랭크 클리어 추가 보상 : 5,000,000 카르마.]

[잠시 후 본래 세계로 귀환을 시작합니다.]

스킬과 아이템을 잔뜩 사용해 처참한 랭크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올라간 스킬과 아티팩트 사용률 이상으로 높은 운명 개변률을 달성해 S랭크의 클리어를 받았다.

보상 또한 화려 했다.

아이템은 받지 못했지만 무려 1,500만 카르마와 완벽한 진리의 마안, 더 강력한 가시덩굴 스킬을 얻었다.

만족스러운 결과.

그러나 유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래서 아리스는 어떻게 되는 건데? 영혼이 몸에서 뽑혀 나갔잖아! 내가 가면 아리스는 계속 저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목적이 소녀의 구원인데 구원을 못 했잖아! 설마 이렇게라도 살아남았으니 구원으로 치는 거냐?"

앨리스의 시체를 뒤져 황금빛의 보석을 찾아낸 유성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아리스의 영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몸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마안으로 어떻게 하는 거 같던데 대충 에너지의 흐름을 파악해서 시도해 보면.... 아니야, 지금 이걸 살아 있는 상태라고 간주하는 건지는 몰라도 괜히 잘 알지도 못하는 거 시도했다가 자칫 실패하기라도 하면 뒷일이 귀찮아져. 퀘스트가 끝나고 의뢰인이 죽는 경우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잖아.'

"으아아아아! 돌겠네, 진짜!"

그냥 사탕을 먹는 것처럼 보석을 먹으면 어떨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다다른 순간, 유성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아리아드네의 실 추적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팟!

언제나 그렇듯이 메시지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54화 하지 말라면....

지구로 돌아온 유성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은 나지막한 욕지거리였다.

"아니, 이런 미친! 이렇게 끝나면 어떡해? 그래서 아리스는 어떻게 되는 건데?"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뒤처리를 안 하고 나온 것만 같은 찜찜한 느낌.

그러나 이미 퀘스트는 끝났고 아리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차피 이미 지나가 버린 일,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유성은 발광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글에 떠오른 새로운 메시지를 읽어 내렸다.

[한유성 님의 등급이 '능숙한 해결사'에서 '전문 해결사'로 상승합니다.]

[카르마 상점에 새로운 상품이 추가됩니다.]

[앞으로 카르마 상점에서 이차원의 아티팩트를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퀘스트 종료 시 유저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물건에 한합니다.]

[해당 시스템은 스킬과 달리 이차원에 있는 실제 물건을 유저의 차원으로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사라진 아티팩트가 이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져온 아티팩트가 유저의 차원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부디 충분히 생각한 이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차원의 아티팩트를 구입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긴 것은 대수롭지 않았다.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 커뮤니티를 훑어보면 유저가 이차원의 아티팩트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뒤에 적혀 있는 문구였다.

'스킬과 달리 이차원에 존재하는 실제 물건을 가져오는 방식?'

고글의 기능과 규칙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열중하던 당시 끝내 풀지 못한 몇 가지 난제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상점에서 스킬을 구입한다면 본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스킬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현실적으로 이미 끝나 버린 퀘스트의 세계에 다시 가서 의뢰인의 상태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 어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아티팩트는 이차원에 있는 실제 물건을 가져오는 방식이고 스킬은 그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스킬은 원본을 복제해서 집어넣는 방식인가?"

솔직히 이게 뭐라고 굳이 다른 방식이라고 말해 주고 경고까지 하는지는 조금 애매했다.

굳이 차이점을 꼽자면 스킬은 형태나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 정보로 분류되고, 아티팩트는 실체와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분류된다는 점?

이 차이점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나 고민하던 유성은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카르마 상점으로 들어갔다.

[보유 카르마 : 27,750,000.]

[상품 목록.]

-아리스의 영혼석(C) : 2,000,000

-찢겨진 칠흑 드레스(E) : 5,000

-근력 상승(D) : 10,000

(해당 스킬을 구입할 때마다 근력 포인트가 1 상승합니다)

(해당 스킬로 성장시킬 수 있는 근력은 최대 299 포인트입니다)

-민첩 상승(D) : 10,000

-체력 상승(D) : 10,000

-....

-....

-....

"있다."

동급의 스킬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무심코 아리스의 영혼석을 구입하려던 순간, 유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이걸 구입할 가치가 있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리스의 영혼석은 구입해 봤자 별로 득 될 것이 없었다.

영혼석을 다시 영혼으로 되돌리는 방법도 모르고, 어떻게든 영혼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한들 돌아갈 몸이 없다.

잘 풀려 봐야 대화 상대를 하나 얻는 정도고 잘못되면 포인트 낭비밖에 되지 않는 일.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냥 넘기는 게 맞는 선택이었지만, 유성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움직였다.

[아리스의 영혼석(C)을 구입하셨습니다.]

"...이걸 왜 샀지?"

전혀 득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음에도 왠지 모를 충동에 무심코 움직이고 말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인 것은 유성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금화와 마력석을 팔고 평생 흥청망청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을 얻은 순간부터 쓸데없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더 이상 고글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다시 고글을 사용했다.

무시했어도 상관없을 아리스를 굳이 한 번 더 만나겠다고 여러 퀘스트를 진행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모았고, 전심전력을 다해 추가 퀘스트에 임했다.

"...."

묘한 기분.

그제야 유성은 자신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번째 퀘스트를 수행했을 때부터인가?'

평생 살아 있다는 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그저 살아 있기에 살아간다는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충격적인 경험.

손바닥에 놓인 아리스의 영혼석을 한참 내려다보던 유성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별 상관없나."

낯설지만 굳이 억누를 필요까지는 없다.

오히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온 유성에게 이런 감정은 꽤나 흥미롭기까지 했다.

이런 색다른 경험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손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자, 그럼 문제는 이걸 어떻게 원래 영혼으로 되돌리느냐 인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계산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계산기에 문제를 입력해야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처럼, 완벽한 진리의 마안이 있다 한들 처음 보는 구조의 물건을 풀어내 원래 형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은 두 가지.

다른 유저의 도움을 구하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며 방법을 찾는 것.

당연히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영혼과 관련된 퀘스트가 뭐가 있지? 네크로맨서나 퇴마 같은 키워드로 찾으면 되나?"

우우웅!

주머니에서 전해지는 진동.

스마트폰을 꺼낸 유성은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드디어 받았군!

"깜짝이야!"

고막이 울리는 듯한 서창훈의 목소리에 유성은 기겁하며 스마트폰을 귀에서 떨어트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왜 그렇게 화났어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일세!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던 건가?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이에 지구에서 엄청난 시간이 흐른 건가 생각하며 날짜를 확인한 유성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고작해야 반나절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웃는 얼굴로 헤어진 사람이 고작해야 반나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렇게 급하게 전화를 거는 것일까.

고민에 빠져 있는 유성을 향해 서창훈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도와주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하셔도 곤란합니다. 일단 뭘 도와줘야 하는지 정도는 먼저 말해 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로저스와 하영이가 실종됐어!

"...예?"

* * *

유성이 처음 향한 곳은 체인 길드의 본사였다.

그러나 본사에 도착하기 무섭게 서창훈은 유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근처의 카페라도 가는 줄 알았지만 자동차에 탑승하는 것을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계약자 협회로 가고 있다네."

"...거길 왜 갑니까?"

"으음, 말로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이걸 보게."

서창훈이 내민 서류를 훑어보던 유성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튀어 나왔다.

"이건 뭡니까? 새로 출시하는 게임의 홍보물 같은 겁니까?"

"실제 일어난 일일세. 지금으로부터 대략 6시간 전, 강원북부 지역에 정체불명의 도시가 나타났네."

위성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진에는 판타지 매체에서나 나올 법한,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기이한 양식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만들어지고 오랜 시간이 흐른 듯 전체적으로 허름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 크기와 웅장함만큼은 지구의 어떤 도시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아 보였다.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었네.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세계의 물건들이라고 해 봐야 몬스터가 가지고 있던 것이나 부서진 잔해가 대부분인데, 이런 식으로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나타난 것은 세계 최초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일세."

"그래서 이 도시를 살펴보겠다고 로저스와 하영을 보낸 겁니까?"

"난 말렸지만 자기들끼리 얘기하더니 끝끝내 가겠다고 하더군. 그리고 도시 내부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락이 끊겼네."

"살아 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뭐하지만 생존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무작정 구조대를 보내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더 넘겨 보게."

뒤페이지를 확인한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묶여 있는 채로 어딘가의 건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을 둘러싼 채 도마뱀을 닮은 형태의 몬스터들이 보였다.

"가칭 리자드맨.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인질로 잡아서 가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로저스와 하영이의 모습은 찍지 못했지만 그 둘도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네."

"흠."

유성은 서창훈의 말에 건성으로 호응해 주며 연신 페이지를 넘겼다.

'애매하네.'

세 사람과의 인연도 있고 총기류와 관련해서 서창훈에게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

어떻게 서창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거절할까 고민하던 유성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췄다.

"영혼을 다룬다?"

"리자드맨들 중 영혼을 소환해 동료들에게 버프를 걸거나 적에게 여러 가지 디버프를 거는 놈들이 있다고 하더군."

"흠."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혼석 상태의 아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곧바로 방법을 찾는 것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퀘스트에서 방법을 찾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 유성과 서창훈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최상층에 위치한 회의실에 들어간 유성은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리 퀘스트를 하느라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간간이 뉴스를 보거나 인터넷을 둘러보며 최소한의 정보는 습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 회의실 안에는 수두룩했다.

'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무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화랑 길드의 마스터에, 최소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들로만 이뤄진 아크 메이지 길드, 전직 특수부대 출신으로 이뤄진 천군 길드까지? 화려하네.'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유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지금은 한가롭게 구경할 때가 아니라 이 임무를 하느냐 마느냐 정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민되네.'

안전만 생각한다면 굳이 현실에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퀘스트에서 방법을 찾는 것이 나았지만, 개인은 쉽게 구할 수 없는 화기나 각종 장비들을 간단히 구해 줄 수 있는 서창훈과의 인맥을 포기하기에는 조금 아까웠다.

물론 강창석이라는 다른 루트가 생기기는 했지만 유저에게 공급을 의존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애매한 상황.

그러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유성은 마음을 정했다.

철컥!

"죄송합니다.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유성과 시선을 마주친 강창석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 여기서 뭐하냐? 잠깐, 설마 이번 작전에 참가하려는 건 아니지? 그치? 제발 아니라고 해 줘!

강창석의 진심 어린 걱정,

그리고 유성 역시 진심에 보답하기 위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죠."

"응?"

"실종자 수색. 하겠다고요."

자고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55화 합리적인 판단

자신의 충고를 개무시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강창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연이어 전음을 보내도 입술을 가리키고는 슬며시 고개를 젓는 유성의 모습에 강창석은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연단으로 다가갔다.

"한국 계약자 협회장, 강창석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의례적인 인사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박수.

간단한 소개가 끝난 이후 회의실이 어두워지고 벽 한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에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낯선 도시의 조사를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처음에는 자동차나 트럭을 타고 이동했지만 도시 안으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차량의 시동이 꺼졌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엔진을 정비했다.

그러나 차량들은 시간이 지나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깨끗하던 영상에도 노이즈가 끼거나 화면이 뭉개지기는 등의 문제가 생기자 점점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

잔뜩 뭉개져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

인간과 거의 동일한 크기의 도마뱀, 가칭 리자드맨들이 나타나 무기를 겨누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종료됐다.

"보신 것처럼 도시 안에서는 자동차와 스마트폰, 카메라와 같은 전자 장비들이 오류를 일으키거나 작동을 멈추는 등의 이상 현상이 존재합니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나타난 이후로 일부 지역에서 기존의 상식이나 물리학 법칙을 무시하는 현상들이 관측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약자들의 소식이 끊긴 이후, 정부에서는 군대를 투입해 도시의 제압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금 재생되는 영상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결과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불을 뿜어내는 자주포.

그러나 그렇게 쏘아진 수십여 발의 포탄들은 갑자기 나타난 반투명한 막을 뚫지 못하고 허공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방어막입니다. 일정 이상의 속도나 위력을 가진 공격에 자동으로 반응해 도시를 방어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도시를 수색하기 위해서는 계약자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죠. 물론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저 안에 얼마나 되는 리자드맨들이 있고 또 어떤 몬스터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잠시 말을 끊고 유성을 응시하던 강창석은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잡혀 간 사람들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몬스터들의 도시를 그냥 놓아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계약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부대를 파견해 생존자 구출 및 도시의 수색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설마, 강제 징집입니까?"

"그럴 리가요. 정부에서는 보상금과 세금 감면, 협회에서는 희귀 몬스터나 신소재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어 주는 식으로 위험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오."

"보상금은 보나마나겠지만 세금 감면과 무기는 좀 끌리는데?"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는지 곳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상기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들을 바라보던 강창석은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협회의 일과 관련된 중요한 전화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나와.]

이중으로 들려오는 강창석의 목소리에 유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회의장 밖으로 나와 문을 닫는 순간,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며 강창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지인이 사람 좀 찾아 달라고 해서 온 건데? 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즉답에 강창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보 좀 알려 달라니까 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없다느니 유저의 자격을 뺏어갈지도 모른다느니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철벽을 치고, 간신히 만났나 싶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정도로 자기 안전을 병적으로 챙기는 놈이 지인이 부탁한다고 이런 위험한 임무에 나선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믿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 막기라도 할 거냐?"

"진짜 성질 같아서는 그냥...."

"얼마 전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고 거창하게 말한 사람이 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기억이 안 나네."

능글맞은 유성의 말투에 강창석의 눈가가 씰룩였다.

"퀘스트야 실패해도 지구로 되돌아오거나 페널티나 받고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네 성장이 빠르고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 봤자 아직은 계약자 수준에 불과해. 지금은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차근차근 힘을 쌓는 데 집중해야 할 때야."

"꼭 퀘스트를 해야만 강해지는 건 아니지. 현실에서도 경험을 쌓고 깨달음을 얻어서 강해질 수 있잖아?"

"효율이 다르잖아. 효율이."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유성이 결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강창석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 만들어 내는 걸 부숴 봐. 그러면 바로 허락해 주지."

"하기 싫다면?"

"그럼 말이 아니라 힘으로 말려야지."

끝임 없이 회전하며 완벽한 태극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원형의 방어막.

무공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유성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힘으로 이 방어막을 깨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격이 다르다.'

암월 16식이나 발경은 어림도 없고 플라즈마 도끼를 꺼내도 저 방어막에 흠집 하나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유성은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격이 다른 스킬은 나도 하나 가지고 있지.'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완벽한 진리의 마안.

그 전까지의 불완전한 진리의 마안이 밤하늘의 별을 눈으로 관측하는 수준이었더라면, 완전한 진리의 마안은 우주망원경을 가져와서 관측하는 수준이었다.

베르문드 운용법으로 마력을 끌어 올린 유성은 그대로 방어막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펀치에 강창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유성은 진지했다.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에너지가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며 외부의 충격을 분산하고 있다. 단순히 강한 공격만으로는 깨지 못해. 하지만 균형을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진리의 마안으로 방어막의 구조와 원리를 낱낱이 파악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주먹이 목표와 부딪힌 순간,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강창석이 만들어 낸 방어막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어?"

"이제 됐지?"

"잠깐! 너 이거 어떻게 한 거야? 태극미리벽을 어떻게?"

"태극미리벽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중요한 건 부쉈다는 거지. 설마, 추하게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 아니겠지?"

겉으로는 여유 만만해 보였지만 내심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게 주장한다 한들 강창석이 끝내 안 된다고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유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는 상황.

유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다행히 강창석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좋아. 네 맘대로 해라."

"의외로 순순히 포기하네?"

"약속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약속이 아니라 유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첫 만남 당시 자신의 포박을 무효화한 것은 특별한 아티팩트의 효과로 생각하고 넘겼지만, 태극미리벽을 맨주먹으로 부순 것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순수한 실력이다.

잘해야 계약자 상위권 정도의 실력 정도라고 여겼는데, 이 정도면 계약자 중 최상위, 어쩌면 계약자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했다.

"좋아, 그럼 슬슬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지 않을래?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너무 오래 걸리면 좀 그렇잖아."

딱!

"먼저 간다."

유성이 회의실 안으로 사라지자 강창석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유성은 괴물이다.

삼약의 경지 정도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다를 수 있고 시간을 조금 준다면 삼중, 끝내 삼강까지도 갈 수 있는 괴물.

하지만 그렇기에 더 걱정됐다.

'하지만 완전히 성장한 게 아니야. 보호가 필요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성은 유저와 얽히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아는 유저들 중에서도 결코 얽혀서 좋을 게 없는, 미친놈이라는 표현이 전혀 부족하지 않은 유저가 2명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나서는 건 좀 그렇고....'

비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은 전투에 나설 수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초월자들과 사람들을 이어 주는 주선자.

자신이 죽어 버린다면 그 즉시 전 세계의 계약자들은 일반인으로 돌아가 버린다.

한참을 고민하던 강창석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설마,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블루 블러드나 니르바나 정도로 위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 둘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강창석은 인류의 미래라는 숭고한 대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 * *

회의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유성은 강원도로 향했다.

몬스터가 등장한 이후, 서울 바깥으로 나온 것이 처음이었던 유성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무너지고 불 탄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 부서진 도로와 버려진 자동차,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도시와 마을들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방어를 펼친 나라라는 수식어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한국이 이 정도면 대체 다른 나라의 상황은 얼마나 심각한 거지?'

유성은 그제야 자신이 세상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태 초기에는 살아남는 것 이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이후에는 고글의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 집 안에 틀어박혀 여러 가지 퀘스트를 수행하며 이것저것 실험하는 데 정신이 팔렸던 탓이다.

그나마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해 봐야 간간이 인터넷이 끊긴다는 것과 물가가 엄청 올랐다는 정도?

'지구에서도 활동을 좀 해야 하나?'

유저들이 커뮤니티에서 당장이라도 지구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식의 대화를 나눌 때는 그냥 웃고 넘겼지만 아무래도 단순한 과장은 아닌 듯싶었다.

유저로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에 빠져 있던 유성은 서창훈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도착한 것 같군. 내리지."

버스에서 내린 유성은 작은 감탄을 토해 냈다.

임시로 마련된 캠프임에도 불구하고 군대와 계약자,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어지간한 시장을 방불케 하는 번잡함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들 안내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을 반납하고 군인들이 나눠 주는 보급품을 받고 있자니 어째 재입대나 훈련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군인들이 나눠 주는 것은 군복이나 전투화 같은 물건들이 아니었다.

고열량 에너지바와 생수, 마력석을 이용한 반도체를 사용해 도시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특수 GPS 등 이번 작전의 수행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

모든 물건을 수령하고 몸을 풀고 있던 유성을 유심히 바라보던 서창훈은 결국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야. 그냥 걱정돼서 해 본 소리일세. 도시 안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자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여럿이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는가?"

미지의 장소에서 단독으로 활동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번 수색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임시로 파티를 맺는 판국에 단독으로 활동하겠다는 유성의 선택을 서창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비합리적인 판단.

그러나 거듭된 권유에도 유성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매번 혼자서만 활동하다 보니 협동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다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될 수도 있으니 저 혼자 행동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만약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게."

"그거야 당연하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창훈을 배웅한 유성은 그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여럿이 움직이면 만약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나 혼자 도망치기 힘들잖아.'

서창훈이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성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이거 게임 아님

056화 고맙다

적지 않은 저항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시로의 진입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웠다.

도시로 접근할 때는 물론, 안으로 진입할 때까지 저항은커녕 리자드맨의 모습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세계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도시, 정체불명의 능력을 사용하는 리자드맨, 현대 병기를 가볍게 막아 내는 방어막 등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잔뜩 긴장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지경.

마지막까지 긴장을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도 인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쓸쓸한 도시의 모습에 무심코 긴장을 풀고 구경에 정신이 팔릴 정도였다.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이건 뭐 감탄밖에 안 나오네."

"이런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나? 대체 건물을 뭐로 만든 거야?"

"이건 드래곤을 조각한 건가?"

성냥갑 구조의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로 빼곡한 지구의 도시와 달리, 유려한 곡선과 기하학적인 형태의 예술품을 보는 듯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반짝이는 금속들로 만들어진 건물들과, 크고 웅장한 동상들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유성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순순히 감탄할 수 없었다.

'대체 저건 뭐야?'

도시 안으로 들어온 순간, 느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진리의 마안을 발동시킨 유성은 도시 정중앙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에너지의 기둥을 목격하고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보아 왔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계속해서 발산하는 무언가.

'궁금하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보호하는 방어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막대한 에너지원.

대체 그 정체가 뭔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단독으로 활동하고 싶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눈에 띄는 행동은 금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유성은 무언가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모두 정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유성만이 아니었다.

임시로 지휘를 맡고 있던 대형 길드의 소속의 전사가 손을 들며 정지 명령을 내렸다.

쿵! 쿵! 쿵!

묵직한 울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던 아련한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이내 바로 근처에서 들려오나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두의 긴장감이 극에 다다른 바로 순간 누군가가 근처의 건물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그곳에 있는 것은 리자드맨.

아니, 고풍스러워 보이는 사제복과 지팡이를 들고 있는 리자드맨 사제였다.

"샤아아아아악!"

"...뭐라는 거야?"

"위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울림 소리 같기도,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소리.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저히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다.

단 한 사람, 유성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태초의 언어, 바벨은 차원과 종족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는 스킬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외신(外神)의 언어마저 해독에 성공해낸 바벨에게 리자드맨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 정도야 누워서 떡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리자드맨의 말을 이해한 유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와 협정?'

저 리자드맨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일부 몬스터에게 지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화를 시도하며 협정을 거론할 정도로 똑똑한 몬스터를 만나 본 적이 없었던 유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싯!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

"...."

"시싯!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들어라! 이 몸은 신성한 땅, 드래고니아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 받은 대사제 노르드라고 한다! 우리는 그대들과 싸우고 싶지 않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위대하신 용신께 맹세코 그대들을 안전하게 보내 주겠다고 맹세하겠다! 하지만 만약 계속 들어올 생각이라면...."

리자드맨 사제가 말끝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수십에 달하는 리자드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땅을 더럽힌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분명한 지성이 느껴지는 유창한 언변에 유성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현재 지구에 나타나고 있는 이차원의 존재들.

사람들은 그저 괴물을 뜻하는 몬스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었고 유성 역시 은연중에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유저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새로운 안식처를 찾기 위해 표류하던 부서진 차원들의 파편이나 패배자들.'

즉 이들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다.

이차원에서 살아가던 지성 종족이었던 것이다.

'좋아. 그건 알겠어.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서서 리자드맨의 언어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될 것이다.

다른 유저들에게 정체가 알려지는 건 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면서도 나설 수 없는 상황.

무기를 겨눈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노르드가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지하다고 용서 받을 수는 없는 법. 침입자들이여, 신성한 땅을 더럽힌 대가를 치르도록."

탕!

꼬리로 지면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리자드맨들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선조시여! 미욱한 후손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저거다!'

리자드맨들의 외침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영혼체들.

유성은 진리의 마안을 통해 영혼들이 나타나는 과정과 그것들이 리자드맨들의 정수리에 깃드는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데 성공했다.

우득! 우득!

영혼을 받아들인 리자드맨들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비스듬하게 굽어 있던 등은 똑바로 펴지고 비늘 위에는 정체불명의 문자가 떠오르며, 왜소했던 체격은 근육질의 두꺼운 몸으로 바뀌었다.

리자드맨보다는 용인(龍人)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모습.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을 향한 리자드맨들의 적의 정도는 충분히 읽어 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분위기 역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전원 전투 준비!"

"쳐라."

사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마리의 리자드맨들이 달려들기 시작했고, 계약자들 역시 진형을 갖추며 요격에 나섰다.

콰과과광!

집단끼리 맞붙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선제압.

각양각색의 강력한 마법과 특별한 소재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리자드맨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공격에 벌써 승리를 확신했는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폭격 사이로 리자드맨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사람들의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쩌엉!

"...어?"

두꺼운 대검이 일격에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거구의 청년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비현실적인 장면.

그 전사가 나름 알아주는 강력한 계약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 리자드맨이 이렇게 강할 리가...."

"마법사! 구경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 봐!"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무슨 마법을 쓰라고? 지원이든 뭐든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미, 미안!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저 새끼 튄다! 잡아!"

누군가는 용감히 리자드맨들과 맞서 싸우고, 누군가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며, 누군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아비규환 그 자체.

그리고 유성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냉정하게 모든 상황을 관측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고 있다?'

얼마든지 그럴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아닌 옆면으로 가볍게 후려치거나 급소를 가격해 기절시키는 식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는 리자드맨들의 모습에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화를 원한다는 리자드맨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놈들은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적대시하는 몬스터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감히 전장에서 한눈을 팔다니!"

생각에 잠겨 있는 유성을 발견한 리자드맨이 경멸의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허공에 흩날리는 핏줄기.

물론 그 피의 주인은 유성이 아닌 리자드맨이었다.

"커헉!"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가볍게 내지른 팔꿈치.

단순한 팔꿈치 치기였지만 발경을 통해 흘려 넣은 마력은 단단한 리자드맨의 비늘과 근육을 뚫고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싯! 저 인간을 잡아라!"

단 일수에 동료를 쓰러트린 유성을 향해 리자드맨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유성은 자신이 타깃이 됐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싸우면 위험하다.'

리자드맨들의 강함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다.

적수공권을 고집하면 간신히 네다섯 마리, 도끼를 꺼내 들면 잘해야 열 마리?

더 큰 문제는 리자드맨 전사들이 아닌 노르드라는 리자드맨 사제였다.

직감인지, 기형적으로 상승한 지혜나 정신 스텟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도망치게 놔둘 성싶으냐! 싯! 거룡강림의 술!"

그그그그긍!

리자드맨 사제가 주문을 외우는 것과 동시에 근처에 있던 드래곤의 동상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다.

덩치와 무게에서 나오는 파괴력만 계산하더라도 저 동상을 정면에서 당해 낼 수 있는 계약자는 한국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저것과 맞서 싸우는 것은 용기도 뭣도 아니다.

단순한 만용.

그나마 전의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마저도 동상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성은 오히려 동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바로 피 떡이 되겠지.'

새롭게 개방된 능력치 상승권을 이용해 모든 능력치를 299 포인트로 올렸다 한들, 추정 무게가 최소 수십 톤이나 되는 거대한 동상과 힘겨루기를 할 정도는 아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스킬과 아이템을 동원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덩치를 생각하면 플라즈마 도끼는 기껏해야 생채기를 입히는 정도에 불과하고, 방어력을 어느 정도 무시하는 발경도 저만한 거체를 일거에 제압할 만한 위력은 없었다.

하지만 유성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성질이 다른 두 에너지의 조화와 균형으로 외부의 충격을 막아 낸다. 하지만 꼭 성질이 다를 필요는 없어. 서로 성질이 같으면 두 에너지가 하나로 뭉쳐 버리기 때문에 상극의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뿐, 두 에너지가 섞이지 않게 컨트롤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하는 불가해(不可解)의 눈.

평생 실험체로 살아온 소녀를 겨우 수 년 만에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로 만들어 준,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괴이한 능력.

강창석은 아무 생각 없이 보여 줬겠지만 진리의 마안은 고작해야 단 한 번 보는 것만으로 태극미리벽의 원리부터 발동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우우우웅!

양손바닥에 모인 마력.

서로 맞닿은 두 개의 물방울이 한쪽에 합쳐지는 것처럼, 서로 성질이 같은 두 개의 마력은 금방이라도 하나로 합쳐질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지만 끝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금단의 지식을 얻고 대폭 상승한 지혜 스텟으로 인해 발달한 마력에 대한 감각과 통제력이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진리의 마안, 금단의 지식, 지혜 스텟이 하나로 어우러져 만들어 낸 기적.

그리고 유성은 그 기적을 자신을 향해 닥쳐오는 동상의 팔을 향해 가져다 댔다.

텅!

북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

놀랍게도 수십 톤이나 되는 동상의 체중을 실은 공격은 유성의 손바닥 사이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갔다.

"뭣?"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리자드맨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안했다. 그리고 고맙다. 강창석.'

비록 본인에게는 전해지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으로나마 지금까지 까칠하게 대한 것에 대한 사과와, 새로운 기술을 알려 준 감사의 인사를 보낸 유성은 리자드맨들을 뒤로한 채 도심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거 게임 아님

057화 평화로운 공존은 무슨....

물론 도망치는 사람을 그냥 보내 줄 정도로 리자드맨들은 자비롭지 않았다.

'다른 놈들도 많은데 왜 하필 저놈이야?'

많은 전사들을 놔두고 직접 자신을 쫓아오는 노르드의 모습에 유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싯! 잡아라! 반드시 잡아!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원귀강림의 술!"

"끼에에에엑!"

수십의 원귀들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기괴망측한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높은 정신 스텟을 가진 유성은 원귀의 비명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주먹을 내지를 뿐이었다.

추격을 뿌리치며 도주를 이어 가던 유성은 마침내 주변에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만."

폐 안의 공기를 모조리 내뱉는다는 느낌의 발성법.

단순히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것과 그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같은 인간끼리도 언어를 구사할 때 발음의 차이가 생기는 마당에 아예 발성기관이 다른 종족의 언어는 최대한 비슷하게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리자드맨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 우리들의 말을 한 것인가? 내 말을 이해했으면 다시 한번 말해 봐라."

"그렇다. 나는 너희들의 말을 할 줄 안다."

"알아듣기 힘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우리들의 말이 맞군. 설마, 다른 세계에서 우리들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이야.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거기, 대사제 노르드라 했던가?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대화를 원한다면 우선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나?"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다소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은 한유성. 신분은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게 전부인가? 하다못해 뭔가 다른 직위는 없는 건가?"

"그게 전부야."

"본래라면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과 말을 섞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이번은 예외적인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지. 그대, 한유성이여. 묻고 싶은 게 무엇인가?"

"하위 계층.... 아니, 됐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려던 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노르드가 말한 계층의 뜻이 재산의 많고 적음을 말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까 물러난다면 무사히 보내 준다고 하거나 전투에 돌입해서도 가급적이면 죽이지 않고 생포를 하려 하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의도지?"

"우리들은 그저 의무에 따라 신성한 땅을 더럽힌 무도한 침입자를 막으려 한 것뿐이다. 쓸데없이 피를 보는 것은 우리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무도한 침입자? 이봐,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먼저 침입한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거든? 지금 이 도시가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해?"

"그 부분은 사과하지. 그러나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우리들의 의지가 아닌 어디까지나 사고에 불과하다."

예상대로 이들은 무조건으로 인간을 적대시하는 몬스터들과 달리 지성과 이성을 갖추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종족이었다.

"사고?"

"거기에는 긴 사정이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간단히 설명할 만한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세계가 멸망하는 대재앙 속에서 이 도시만이 간신히 탈출했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군."

'잘하면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일어난 해프닝.

약간의 피해는 있었지만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정도는 아니다.

'그래, 우리와 다르게 생겼다고 무작정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건 좋지 않아. 문명인이면 대화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야지.'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사소한 오해로 인해 무익한 싸움을 벌이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진실을 깨닫고 후회하는 뻔하디 뻔한 클리셰.

이런 이야기를 숱하게 읽어 온 유성은 리자드맨들과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인간들이 대화를 원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이다. 우리들은 오랜 세월 공간의 틈새를 떠도느라 많은 피해를 입고 많은 자원을 소모했다. 무익한 싸움은 우리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대화로 푸는 것이 제일이겠지.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왜 안 될 거라 생각해? 내가 인간들의 지배층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지."

"그대가? 하지만 그대는 하위 계층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가 아는 상위 계층이 한 명 있어. 그 녀석을 통한다면 인간들의 지배층들에게 너희들의 뜻을 전할 수 있겠지."

강창석.

그 역시 유저인 만큼 리자드맨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고 한국 계약자 협회장이라는 거창한 감투를 쓰고 있으니 정치인들과도 충분히 연락이 닿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

그 뒤의 일은 소위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다.

"그게 사실인가?"

"속고만 살았어? 당연히 사실이지."

시종일관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노르드는 유성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약 그대의 생각대로 싸우지 않고 대화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공에 합당한 보상을 내리겠다."

"보상 좋지. 뭔데?"

"드래고니아의 임시통치자이자 용신교의 대사제로서 그대에게 드래고니아의 1급 시민권과 원하는 나라의 총독 직위를 맡길 것을 약속하마."

"...총독?"

실실 웃던 유성은 노르드의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뭔가 되게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너무 상식 밖의 범주에 있는 말이었던 터라 뇌가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욕심도 크군. 좋아, 이 행성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자네가 원하는 나라 하나를 더 주도록 하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도록."

"대화가 잘 풀려서 이 세계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 받게 된다면 그다음에는 뭘 할 생각이지?"

"당연히 드래고니아를 부활시켜야지."

"그 부활이 정확하게 어떻게 이뤄지는 거지?"

"이 행성의 생태를 용족에게 적합하게 바꾸고 용족의 문명을 퍼트리며 능력과 쓰임에 맞게 원주민들의 등급을 나눠서 관리해야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노르드의 말을 경청하던 유성은 마침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미친 제국주의자들이었잖아! 평화로운 공존은 개뿔! 어쩐지 생긴 것부터 이상하게 생겼다 싶었어. 도마뱀? 딱 봐도 음흉하게 생겼잖아!'

사람이든 이종족이든 역시 생긴 대로 노는 법이었다.

"왜 물러나는가?"

"여기서는 바깥에 연락할 수단이 없잖아? 일단 여기서 나가야 바깥에 너희들의 뜻을 전달할 수 있지 않겠어?"

"그건 곤란하다. 그대는 우리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만약 그대가 바깥에 나갔다가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리들과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협상은 불가능해진다. 그대는 여기에 남고 이번에 붙잡은 사람들을 한 명씩 내보낼 테니 그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전하도록 하라."

"아아, 그 방법이 있었구나! 내가 그걸 생각 못 했네."

"...."

"...."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잠시 후 노르드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도망갈 생각이군. 그렇지?"

탕!

꼬리로 땅을 후려치는 것과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하는 땅.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머뭇거린 사이,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지팡이를 피한 유성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노르드를 응시했다.

'사제가 무기를 들고 덤빈다고?'

당황은 잠시, 침착하게 공격을 걷어 내고 역공에 나서려던 유성은 몇 합의 공방을 나누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르드는 자신의 공격에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완벽하게 받아 내고 역으로 압박해 오고 있었다.

"무슨 놈의 사제가 이렇게 잘 싸워?"

"사제라고 해서 근접전에 약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지. 드래고니아의 수호자로서 이 정도의 무술은 기본 소양이라네. 그러는 자네야말로 전사인 것 같은데 사제에게 격투로 밀려서야 되겠는가?"

"큭!"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가진 스킬 중 직접적인 체술과 연관된 스킬은 단 두 가지.

오버 테크놀러지 세계관 요원들의 암살기인 암월 16식과 아카데미 생도의 격투술뿐이다.

그동안은 딥 원이나 양아치, 오크 전사같이 이 두 가지 스킬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거나, 외신이나 미친 마녀처럼 아예 규격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적만을 상대했기에 새로운 스킬을 습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유성은 그런 과거의 선택을 진심으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푹!

급소에 틀어박히는 지팡이.

고통 끊기로 통증을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찰나의 경직은 피할 수 없었고, 그사이 노르드가 다가와 유성의 목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찌릿!

"읏?"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

노르드가 충격을 받고 경직된 사이 섬전보를 펼쳐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지금 실력으로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도망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분노한 노르드가 괴성을 내지르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뒤를 쫓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는 재주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 상황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유성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대신 그 둘을 능가하는, 문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재주는 있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유성은 품 속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고글을 꺼내 착용했다.

[다차원 탐색 시스템에 접속합니다.]

[퀘스트 관측에 성공했습니다.]

-선인들에게 일족이 몰살당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복수하고 싶습니다.

-마계에서 탈출하고 싶은 195명의 결사대.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들이 나타났는데 이거 실화냐?

-이단심문관이 동생을 잡아갔습니다.

-....

-....

-....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유성이 임무를 흔쾌하게 수락한 이유.

그것은 단지 강창석의 말을 따르기 싫어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완벽한 탈출을 보장하는 유저의 능력 덕분이었다.

'어떤 퀘스트를 고르지?'

당장 노르드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인 만큼, 적당한 등급 내의 아무런 퀘스트나 고르면 그만이었지만 유성은 섣불리 퀘스트를 고를 수가 없었다.

단순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이왕 퀘스트를 하는 김에 겸사겸사 부족한 점도 채울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근접전과 관련된 스킬이라면 무림 세계관이 낫겠지. 하지만 스킬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히 등급만 봐서는 안 돼. 의뢰인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탕!

익숙한 소리.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것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지면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공중에 체공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거리가 상당히 줄어들고 말았다.

결국 유성은 적당히 눈에 띄는 퀘스트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를 시작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차원 좌표 특정 및 아리아드네의 실 연결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이게 무슨?"

코너 하나를 돌았을 뿐이다.

아주 잠깐 시야에서 놓쳤을 뿐인데, 다 잡은 사냥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황당한 상황.

당황한 노르드는 부하들을 재촉해 인근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끝내 유성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거 게임 아님

058화 시작부터 클라이막스

유저로 활동하다 보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단련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빠른 상황 파악과 판단 능력.

상당수의 퀘스트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절박한 상황이나 그에 준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은 유저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코를 찌르는 지독한 술 냄새와 전신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느낌.

슬며시 눈을 뜬 유성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윽!"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은 강렬한 통증.

머리맡에 놓인 냉수를 들이켜며 호흡을 가다듬기를 잠시,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위진무'와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위진무'의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으으음.

제정신을 찾지 못한 듯한 반응.

유성은 의뢰인과 대화하는 것보다 퀘스트를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

-문명 분류 : B-23

-문명 등급 : 0.59

-난이도 : C-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 위진무. 그는 진천무가의 운명이 걸린 비무전의 일원으로 선택되어 심각한 부담감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위진무를 도와 비무를 승리로 이끌고 진천무가를 봉문의 위기에서 구해 내십시오.

-클리어 조건

1.결투에서 한 번 이상 승리 : 300,000 카르마, 청목단×3, 최상급 금창약×3, 최상급 벽곡단×30.

-추가 조건

1.더 많은 결투에서 승리 : 승리 횟수가 1회 추가될 때마다 2,000,000 카르마. C급 스킬 무료 선택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행했었던 무림 세계관의 퀘스트와 비교하자면 매우 양호한 조건이다.

산맥과 세력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거나 수만에 다다르는 사람들을 미끼로 소모시킬 필요 없이, 단순히 결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유성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한 번만 이겨도 클리어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고?'

C-급 퀘스트치고는 지나치게 후한 조건이었다.

"어이."

-으음, 술이 덜 깼나. 무슨 환청이....

"위진무,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

-헉? 뭐, 뭐야? 사술인가? 요괴? 왜 몸이 멋대로....

"술이 덜 깬 것도 아니고 사술도 아니고 요괴에 홀린 것도 아니다. 나는 네 간절한 바람을 느끼고 너를 도와주기 위해 온 사람이다."

-저를 도와주러 오셨다고요?

"대충 신선 같은 초월적인 존재 비스무리한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퀘스트를 시작할 때마다 겪는 가장 큰 난관은 의뢰인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유성 역시 의뢰인에게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온갖 언변을 발휘하며 설득에 힘썼지만 이게 은근히 정신력을 잡아먹는 작업이었던 터라 나중에는 대충 한두 마디로 설명하고 끝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뢰인이 상황을 이해하고 협력한다면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동기화 덕분에 퀘스트 수행에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조금 귀찮아질 뿐.

다행히 위진무는 전자에 속하는 경우였다.

-신선! 서, 설마 저에게 신공절학을 가르치거나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오신 겁니까?

"미안한데 무공에 대한 거라면 나보다 네가 아는 게 더 많을걸? 신선 비스무리한 존재라고 했지 신선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잠깐만 기다려봐. 상태 창."

이름 : 위진무

직업 :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

레벨 : 215

칭호 : 일류무사

근력 : 261

민첩 : 387

지혜 : 362

체력 : 327

내공 : 431

보유 스킬 : 굉뢰권(B-), 진공각(C+), 만월심법(C+), 찰나의 시간(C+), 유성보(C), 권기(C), 침투경(C), 격투술(C), 발경(C), 전음입밀(D)....

통천신마 해천경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의뢰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능력치와 스킬들.

구경에 여념이 없던 유성은 뒤늦게 이번 퀘스트의 등급을 떠올리고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결투 상대가 엄청나게 강한 건가?'

끼익!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위진무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하얀색의 무복을 걸친 중년인이 들어왔다.

"...."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누구나 눈치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방 안에서 진동하는 술 냄새와 중천에 떠오른 해, 막내 제자라는 신분과 무복을 걸치고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

곧이어 날아들 호통을 각오하고 고개를 숙인 유성의 귀에 예상과는 전혀 다른, 걱정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오지 않나 했더니 술을 마셨느냐? 네가 지금 이럴 만한 상황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중년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물이 담겨 있는 대야와 하얀색의 무복을 앞에 내려놓았다.

"하아, 됐다. 최대한 빨리 단장을 끝마치고 나오도록 해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논리적인 추측 끝에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을 찾아냈다.

'너 혹시 내놓은 자식이냐? 평소에 사고 엄청 치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이 그냥 포기해 버린 그런 거 아니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데?'

-그건 아닙니다. 최근 들어 규율을 어기기는 했지만 스승님도, 사형들도 모두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저래?'

-그것이....

위진무의 설명은 이러했다.

얼마 전 진천무가의 영역 내에 새로운 문파들이 개문을 선언하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그 중소 문파들이 진천무가의 밑에 들어오지 않고 진천무가의 영역과 이권을 빼앗으며 새로운 패자가 될 야심을 내보였던 것이다.

무인의 수준으로 따지자면 진천무가가 위.

하지만 무인의 숫자는 중소 문파 연합이 훨씬 더 많았고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해 낼 수 없다는 말처럼 거듭된 전투 끝에 피해가 누적된 진천무가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스승님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이 땅의 이권과 영향력을 걸고 비무를 벌이자는 것이었지요.

'무인의 수준은 진천무가가 더 높다면서. 그런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한 거야? 아니, 설명을 보니까 받아 주긴 했네?'

-맞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스승님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혹여 저들이 말을 바꾸지는 않을까 걱정한 진천무가의 가주는 다급히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공증인을 불렀다.

그리고 만인이 주목하는 상황에서 열린 비무의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졌지?'

-...예.

여덟 명을 뽑아 실력을 겨루되 한 번 이긴 자가 계속해서 비무에 나설 수 있는 연승전.

결과는 처참했다.

진천무가에서 일곱 명이 패배하는 동안, 중소 문파 연합의 패배는 고작해야 세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제야 유성은 위진무가 왜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아까 그 사람이 이해심 깊은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의 운명이 어깨에 걸렸는데 당연히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

일단 운기를 통해 취기를 몰아낸 유성은 세안과 환복을 끝마친 이후, 방 안에서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동기화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미묘한 이질감을 좁히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다르군."

지구의 자신과 위진무의 무학적인 수준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격차가 있었다.

이 무공과 경험 들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노르드와도 충분히 자웅을 겨뤄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번은 이겨야겠지만.'

난이도를 생각하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은 자신이 있었다.

요는 이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끼익!

"사제! 내가 최대한 빨리 나오라고 하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고 어서 따라오게!"

겉으로는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유성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이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우선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거나 사전 공작을 통해 컨디션을 떨어트린다면....'

둥! 둥! 둥!

중년인을 따라 이동하던 유성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북소리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 사람 누구야?'

-진일 대사형입니다.

'외우기 쉬워서 좋네. 혹시 진이 사형도 있냐?'

-아시는군요. 진일, 진이, 진삼 삼형제는 저희 진천무가의 자랑입니다.

'....'

웃어야 하나 놀라야 하나 고민하던 유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대사형, 저 북소리가 무엇입니까?"

"응? 이상한 걸 묻는구나. 당연히 비무가 시작되기 전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북소리가 아니겠느냐?"

"비무요?"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오늘이 바로 네 비무 날이지 않느냐?"

"...."

아무래도 시작부터 단단히 꼬인 것 같았다.

* * *

"얼마 있지 않으면 비무가 시작하는데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진천무가의 제자는 이 비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군."

"너무 그러지 말게. 어차피 질 싸움, 미적거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아니, 어쩌면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엄연한 무인인데 그렇게 추한 꼴을 보여 줄 리 있겠는가?"

"그거야 모르지.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는 애초에 이 가문의 혈족도 아니지 않은가?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도망쳐도 이상할 게 없지."

"흐흐흐, 그러면 정말 볼만하겠군."

으드득!

진천무가의 가주 진기우는 이를 갈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무(武)에 살고 무에 죽는 무인인 만큼 비무에 따른 결과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자와 가문의 명예를 욕보이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무례한 놈들을 향해 가문의 절학을 펼치고 싶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이들이 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진기우는 필사적으로 참을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진천무가의 위진무의 입장이오!"

순간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던 비무장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랜 시간 이 지역의 패자로 군림해 왔던 진천무가의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다.

진천무가의 사람이든, 중소문파의 사람이든, 구경꾼들이든 이 순간만큼은 조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바로...."

느릿한 걸음으로 비무대를 향해 다가오는 청년.

눈 밑은 시커멓고 양 볼은 홀쭉하게 내려앉은 위진무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물론 위진무가 앞으로 남은 여섯 번의 비무에서 전부 승리해 진천무가를 구해 낼 가능성은 아예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천무가의 최후에 걸맞게 조금은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진천무가의 역사가 오늘 여기서 막을 내리겠구나!'

깊은 탄식을 토해 낸 진기우는 초췌해 보이는 위진무를 바라보면서 진지한 고민에 잠겼다.

'기권할까?'

그 누구보다 승리를 바라는 진기우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위진무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어차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질 싸움에 억지로 내보내서 심한 꼴을 당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체라도 온전히 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애제자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아니다.'

그러나 진기우는 고개를 저었다.

가문의 운명을 짊어진 위진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그는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만약 위진무가 도망쳤더라도 진기우는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진무는 주변의 기대와 압박감에 무너지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왔다.

"...."

"...."

비무대에 오르기 직전, 진기우와 위진무의 시선이 마주쳤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아도 남자 대 남자로서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이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내린 선택. 존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슬프게도 유성의 진심은 진시우에게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59화 사술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유성은 자신이 있었다.

비무에서 질 자신이 말이다.

-도와주러 왔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쉽게 포기하셔도 되는 겁니까?

'시끄러! 상황이 이런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더라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런 자리가 아니었더라면 스킬과 아티팩트를 사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승률을 높일 수 있었겠지.

"하아."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퀘스트라는 것들 자체가 기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깔고 들어가기 마련, 고작해야 이런 상황에 절망을 느낄 정도면 지금까지 해 온 퀘스트들이 뭐가 되겠는가?

실패의 메시지가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유성은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해 볼 생각이었다.

'특별한 무기를 사용해도 될까? 플라즈마.... 대충 검기 같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기인데 말이야.'

-만약 그런 신병이기를 이 자리에서 사용한다면 비무에서 이기더라도 무기를 노리고 몰려든 무림인들에 의해 진천무가가 쑥대밭이 될 겁니다.

'비무에서 이기기는 했는데 너무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 다음 비무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되지? 부상이 회복될 때까지 비무를 뒤로 미루는 건가?'

-그런 경우에는 그냥 패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애초에 비무라는 것이 피하거나 미룰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위진무의 단호한 대답에 유성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지금 이건 뭔데? 술에 취해 있던 네 상태도 그렇고 지금 시간도 그렇고 최소한 한 번 이상 비무가 연기됐었던 것 같은데?'

-이건 전날의 비무가 밤늦게까지 이루어진 터라 부득이하게 하루 뒤로 미룬 것에 불과합니다.

'진짜 없어? 뭐라도 좋으니까 좀 떠올려 봐!'

잠시 머뭇거리던 위진무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세력이 공격을 해 오거나, 상대가 독이나 사술 같은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시험을 보기 싫으니 학교에 미사일이 떨어졌으면 하는 정도의 현실성 없는 망상.

그러나 유성은 화를 내기는커녕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진천무가의 위진무! 열산권가의 하운! 올라오도록!"

자신, 아니 위진무보다 살짝 큰 청년.

유성과 하운이 비무대 위로 올라오자 중앙에 있던 거대한 체구의 중년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림맹의 감찰단주 황보성이 이번 비무를 감독하고 결과를 보증하겠소! 비무는 정정당당하게 이뤄질 것이며 진천무가와 오대문파 중 패배한 측은 약속에 따라 이번 전쟁에 소모된 배상금을 지불하고 봉문에 들어갈 것이오! 만약 이를 어기는 이가 있다면...."

우웅!

"무림맹과 황보세가를 능멸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무시무시한 기파를 뿜어내던 황보성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이 냄새는 설마.... 하! 설마 이런 중요한 비무를 앞두고 술을 마실 줄이야. 진천무가의 수준도 알만하군."

위진무였더라면 수치심으로 인해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위진무가 아닌 유성이었고 자연스레 반응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 마셨어. 별 상관없을 것 같아서."

"하하하! 맞는 말이로군! 술을 마시든 말든 어차피...."

"술 마셔도 너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가벼운 도발.

그러나 그 효과는 확실했다.

"미쳤나 보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있지. 내가 미친놈으로 보인다면 그건 아마 네가...."

으득!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 이를 가는 하운의 모습에 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왜 이래? 분노조절장애라도 있어? 왜 이렇게 쉽게 화내는 건데?'

-너 정도야 술 마시고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무인은 당연히 화를 내겠지요!

아무래도 무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며 기수식을 취한 유성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얘 실력이 어느 정도지?'

-열산권가의 하운은 전대 고수인 열화신권에게 직접 가르침을 사사받은....

'너랑 비교해서 말해 봐.'

-저보다 두 수 위입니다.

두 수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황보성이 외침이 들려왔다.

"시작하라!"

희미한 파공성.

소리를 인지한 순간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날린 유성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얼굴이 있던 공간을 꿰뚫은 주먹을 발견하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끝낼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군. 아니, 운이 나쁜 건가? 그만큼 더 고통스럽게 지게 될 테니 말이야!"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었지만 유성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위진무가 말한 두 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일격에 승부가 갈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차이.

방금 전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서로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지 조금만 가까웠더라면 지금쯤 자신은 안면이 뭉개진 채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스킬을 발동했다.

우우웅!

두 눈이 희미하게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유성은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호오, 이것도 피해?"

잔혹한 미소를 지은 하운이 연이어 주먹을 날려 오기 시작했다.

열산권가의 열풍권(熱風拳)은 양강지기를 이용한 아지랑이로 눈을 속이는 권법.

계속해서 일렁이는 모습 때문에 언제 주먹이 움직이는지, 정확히 어디로 날아오는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하운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유효타를 허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열 합이 지나고 스무 합이 지날 때까지 자신의 주먹이 스치지도 못하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어어?"

"열산권가의 하운이 진천무가의 막내 제자보다 몇 수는 위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게 뭔가?"

"뭐 하고 있는 거냐! 장난치지 말고 빨리 끝내 버려!"

순식간에 끝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비무가 길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퍼져 나갔다.

"이게 무슨? 설마, 진무가 지난밤에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이냐?"

"그, 글쎄요?"

진천무가의 사람들 역시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위진무의 실력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위진무가 보여 주는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보인다!'

내공 역시 에너지의 일종인 만큼 진리의 마안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혈도를 따라 가열 차게 회전하고 있는 내공을 진리의 마안으로 꿰뚫어 본 유성은 하운의 공격이 시작되기 한 발 앞서 파악하고 회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

허벅지와 발바닥에 내공이 집중돼 붉게 물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뒤로 몸을 날리자 하운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낼 수 있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예상 외로 유성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위진무 역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성은 위진무의 말에 대답해 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운의 공격은 어느 것 하나 닿지 않았지만 자신의 공격 역시 하운에게 닿지 않고 있다.

유성과 하윤, 양측 모두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유효타를 내지 못한 것이다.

'기본적인 능력치의 차이가 너무 심해.'

자신이 내공의 흐름을 통해 움직임을 예측하고 피한다면 하운은 자신의 공격을 순수하게 눈으로 보고 피해 내고 있다.

내공으로 속도를 끌어 올려도 하운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하윤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더 많은 내공을 사용해야 했기에 내공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수라감각도도 쓸모가 없고.'

수라감각도는 어디까지나 사고를 가속해 체감 시간을 늘리는 기술.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하는 상황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애초에 상대방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다지 유용한 기술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뭔가 이상해. 이 자식, 내 움직임을 미리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자신의 공격을 보고 대응하는 정도를 넘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미리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교묘한 움직임.

-그, 그건....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지 위진무가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하운이 먼저 움직였다.

"쥐새끼 같은 놈이 피하는 재주만 익혔나 보구나! 어디 한번 이것도 피해 보거라!"

하운의 몸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하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가 딱 봐도 강력한 기술을 사용하려 하는데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바보짓이다.

-안 됩니다!

"걸렸구나!"

위진무와 하운의 외침이 교차했다.

어지간히 실전 경험이 없지 않은 이상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초식을 쓸 무인은 없었고, 하운은 당연히 그런 경험 없는 무인이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미끼.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하운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하운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유저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

자신의 예측보다 반 박자 더 빠르게 접근해 팔을 뻗는 위진무의 모습에 하운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속에서도 하운은 훈련 받은 대로 움직여 굉뢰권이 날아올 위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것이 하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암월 16식. 폭풍 메치기.

강화 시술 스킬로 빨라진 스피드,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체술인 암월 16식이 시너지를 이루어 하운을 그대로 돌바닥에 거꾸로 내리꽂아 버렸다.

마지막 순간 반사적으로 목을 틀었기에 즉사는 면했지만 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이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

친선 비무라면 모를까 이건 한 지역의 패권을 놓고 펼쳐지는 생사투였다.

이미 앞선 비무에서도 몇 명의 사망자가 나온 터, 이 정도는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이번 비무의 승자는 진천무가의 위진무다!"

"우와아아아아!"

"젠장, 사제! 난 사제를 믿고 있었다구!"

진천무가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고작해야 한 번의 승리.

그러나 진천무가의 무인이 꼴사납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위진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 비무의 결과와 진천무가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기권하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진무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진천무가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장식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한 번이라도 좋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승리를 거둬 진천무가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다.

이제 위진무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다음."

"삭월검문의 서도형!"

황보성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막한 인상의 검수가 비무대로 올라왔다.

"대단하군. 설마 하운을 쓰러트릴 줄이야. 하지만 이 몸, 월광검협 서도형 앞에서는...."

"알아서 패배 플래그를 꽂아 주다니 다행이야."

"패배.... 뭐? 그게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어도 패배라는 말이 들어간 이상 절대로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덤벼. 단숨에 끝내 주지."

서도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뽑았다.

희미하게 떨리는 검극과 전신을 찌르는 살기.

방금 전 쓰러트린 하운에 뒤지지 않는 기세에 유성은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시작하라!"

핏!

수라감각도로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명치를 날아오고 있는 검.

'피하려면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묘한 미소를 지은 유성은 공격을 완전히 피하는 대신 슬쩍 몸을 틀었다.

푹!

쇠붙이가 육신에 파고드는 소리.

그러나 공격이 명중했음에도 서도형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피하지 않고 일부러 옆구리에 공격을 허용했다.

예상 밖의 상황에 굳어 버린 순간, 서도형의 귀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

고통 끊기를 사용해 검상의 통증을 무시한 유성은 그대로 서도형의 팔목을 붙잡고 암월 16식의 기술을 연거푸 펼치기 시작했다.

안개치기로 다리를 꺾는 것을 시작으로 바위 뚫기로 갈비뼈를 부숴 내고 천둥 찌르기로 손가락을 짓뭉갠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끝난 이후에는 한때 서도형이었던 것만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다음."

"...."

"...."

장 내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살을 주고 상대의 뼈를 깎는다는 격언은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괘, 괜찮으십니까?

'지금 진짜 뒤지게 아픈 거 필사적으로 참고 있거든? 좀 조용히 해 주지 않을래?'

옆구리에서 불을 가져다 댄 것 같은 화끈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유성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지금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진천무가의 위진무. 잠시 내려와서 부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비무를 중지하거나 미룰 수는 없지만 상처 부위에 붕대를 두르거나 금창약을 뿌리는 정도는 충분히 허용되는 일이다.

그러나 황보성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유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냥 바로 다음 비무를 속행해 주십시오."

"정말로 괜찮은가?"

"피륙이 살짝 긁힌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성의 당당한 모습에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황보성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젊은 것들 답지 않게 독기가 있군. 좋아, 녹의무가의 사태령! 올라오도록!"

녹색 무복을 걸친 중년인이 비무대로 올라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젊은 청년 무사의 혈기는 대단했지만 앞선 두 명이 명망 있는 후기지수라면 사태령은 실시간으로 이름을 날리는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이제는 기권하셔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위진무도 기권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태령을 훑어본 유성은 오히려 환한 웃음을 지었다.

좁은 눈매와 비열한 인상, 가느다란 염소수염이 어우러져 어딘지 모르게 비호감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모습.

바로 이것이야말로 유성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상대였다.

안 그래도 내공의 소진과 출혈로 인해 빠르게 컨디션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

빠르게 승부를 봐야겠다고 결심한 유성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사태령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

"오만한 놈 같으니!"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기 시작하는 손바닥의 잔상들.

진리의 마안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유성은 일부러 살짝만 몸을 틀어 방금 전 생긴 검상 부위를 노출시켰다.

그리고 사태령의 공격이 스치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바닥을 나뒹굴며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너무나 격렬한 반응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 공격을 날린 사태령마저 당황하기를 잠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유성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사, 사술! 사술을 쓰다니!"

"뭣? 사술이라니! 이 개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어?"

순간 사태령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 자신의 공격이 스친 부위.

그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덩굴 줄기가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리며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이거 게임 아님

060화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이능에 상당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외부의 개입에 의한 인위적인 변화를 막아 내고, 올바른 형태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저주처럼 기원부터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집채만 한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사라 하더라도 생명체 내부에는 자그마한 불꽃조차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한 거지.'

멀쩡한 생명체의 몸 내부에 멋대로 가시덩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더라면, 가시덩굴은 C급이 아니라 SSS등급이 책정돼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성은 앞선 비무에서 서도형의 공격을 일부러 허용했고 사태령과의 비무가 시작되는 순간, 옷 안에서 몰래 가시덩굴을 만들어 내 그대로 상처 부위 안에 쑤셔 넣었다.

"비겁하게 사술을 쓰다니.... 크흑!"

"놈! 이상한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그만!"

황보성의 분노에 찬 외침이 사방을 휩쓸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수라의 현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모습에 사태령은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손을 흔들었다.

"오, 오해입니다! 이건 전부 이놈이...."

쿵!

비무장 위로 떨어진 황보성은 사태령을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더냐?"

사태령은 입을 다물었다.

황당함과 억울함으로 인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한 번만 더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황보성의 주먹이 자신의 안면을 단박에 뭉개 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으냐?"

"버, 버틸 만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잔뜩 일그러진 얼굴과 전신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땀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음."

웃옷을 걷고 상처를 확인한 황보성의 입에서 자그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상처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는 덩굴들.

지네나 뱀 같은 것들이 그러고 있더라도 경악했을 텐데 한낱 식물에 불과한 덩굴이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다니, 산전수전 다 겪은 황보성도 처음 보는 기사였다.

"조금만 참거라."

황보성은 망설이지 않고 덩굴을 붙잡은 뒤 곧바로 팔에 힘을 주었다.

덩굴이 팔을 휘감고 조여 오기 시작했지만 한낱 가시 따위가 외공으로 단련된 황보성의 피부를 뚫을 수는 없었고, 이내 덩굴은 간단하게 뽑혀 나왔다.

"헉?"

"저, 저게 대체 뭐야?"

"사술이다! 사술이야!"

거의 어린아이 팔뚝만 한 길이의 덩굴이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왔다

충격의 정도로만 따진다면 멀쩡한 사람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외계인을 본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

화륵!

삼매진화를 일으켜 순식간에 덩굴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황보성은 관중을 바라보며 외쳤다.

"진천무가와 오대문파의 비무는 여기서 중지하겠소!"

"아,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진천무가의 운명이 제 어깨에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단 말입니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일어나려다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젊은 무인의 모습에 진천무가나 관중은 물론, 오대문파에서도 감탄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토록 끔찍한 사술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문을 위해서 끝까지 싸우겠다니.

마치 숙련된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충직한 무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흐뭇한 미소를 지은 황보성은 진천무가와 오대문파의 수뇌부들이 모여 있는 상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으시오! 모두가 본 것처럼 정정당당해야 할 비무에 비겁한 사술이 사용된 것이 확인된 바, 무림맹 감찰단주의 권한으로 비무를 일시 중지시키고 진천무가의 위진무가 회복될 때까지 미루도록 하겠소!"

"으음, 그건...."

"설마, 본인의 판단에 불만이라도 있는 거요?"

오대문파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황보성의 강함도 강함이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에는 명분이 더 문제였다.

어지간한 문제라면 모를까 무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것들 중 하나인 사술이 엮인 문제다.

가끔씩 일어나는, 수준 낮은 하수가 고수의 고절한 수법을 알아보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사술이라고 외치는 오해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사술이 사용된 상황.

괜히 나섰다가 이상한 누명을 뒤집어쓸지도 몰랐다.

"진천무가의 위진무는 속히 부상을 치료할 수 있도록! 그리고 녹의무가의 사태령은 신성한 비무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겁한 사술을 사용한 바...."

"누명입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사태령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졸지에 말이 끊긴 황보성의 살벌한 안광과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적대감 섞인 시선에 사태령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 갔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상대는 한낱 후기지수입니다! 이길게 뻔한 싸움에서 제가 뭐하러 사술을 쓰겠습니까? 설령 쓴다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가급적 눈에 안 띄는 사술을 쓰지 그렇게 눈에 띄는 끔찍한 사술을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창졸지간에 튀어나온 것치고는 꽤나 설득력이 있는 주장.

처음에는 움직이는 덩굴에 놀라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던 사람들도 사태령의 말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살기 넘치던 황보성도 잠시 이마를 찌푸릴 정도, 당연히 유성은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길 게 뻔한 싸움이라고 하셨습니까? 선배님은 이 후배가 싸우지 않고서도 승리를 확신하실 수 있으실 만큼 우습게 보였습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예. 그렇겠지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으로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저 같은 핏덩어리가 눈에 찰 리가 없겠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자, 잠깐! 자네 말투가 뭔가 좀...."

"하지만 결국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겁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대녹의무가의 선배님이 보시기에 늙고 저물어 가는 진천무가의 후배가 우스워 보일지는 몰라도 저 역시 엄연한 무인입니다! 무인이란 말입니다!"

유성은 사태형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철저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단순히 말실수를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파 대 문파의 문제로 확대했고, 처음부터 사태형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처럼 몰아가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 가시덩굴에 관한 것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면 사태형의 주장이 옳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말싸움을 할 때는 상대방의 주장 중 옳은 것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틀린 주장만을 붙잡고 늘어져야 상대방의 신뢰성 자체에 타격을 줄 수 있고, 더 나아가 옳은 주장도 믿을 수 없게끔 만들 수 있다.

"뭐, 뭐야. 왜 다들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내뱉는 말 하나하나마다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약관의 무사.

비열한 외모를 가지고 입을 열 때마다 변명과 상대방에 대한 비난만을 내뱉는 중년의 무사.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믿음직스럽게 보이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관중, 심지어 녹의무가의 사람들마저도 자신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당황하던 사태형은 곧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쓰러진 위진무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놈이 어디서 요설로 사람들을...."

콰직!

황보성의 주먹에 맞은 사태형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비무대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다.

"녹의무가의 사태령은 신성한 비무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특한 사술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바, 신변을 구속하고 심문을 진행하도록 하겠소. 더불어 녹의무가에도 조사가 이뤄질 예정이니 누명을 벗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길 바라오."

황보성의 서슬 퍼런 통보에 녹의무가의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

"스승님도 직접 확인하셨고 의원도 큰 부상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큰 부상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그 요물이 네 몸에서 뽑혀 나오는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진기우는 곧 묘한 표정을 입을 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말이다. 네가 어렸을 때는 자주 잡담을 나눴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말수가 적어지더니 무공 이외의 일로는 말을 나누지 않게 됐지."

진기우의 그윽한 시선을 받은 유성은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화를 받아 넘겼다.

"그래서 지금 제자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럴 리가. 오히려 기쁘구나. 네가 비무에서 이겨 진천무가의 위신을 세운 것보다도, 진천무가가 며칠 더 연명하게 된 것보다도 너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이 더 기뻐서 웃음이 나온다."

"...."

"회복에 방해가 될 듯싶으니 이만 물러가겠다.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엄명을 내릴 테니 푹 쉬도록 해라."

진기우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을 확인한 유성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침상에 몸을 뉘였다.

'너 대체 그동안 어떤 식으로 살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야?'

-무공 수련에 정신이 팔려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길러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기대에 부응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 노력했는데, 오늘 스승님의 말을 들어 보니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은혜? 기대?'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진천무가의 사람이 아닌 외인에 불과합니다. 스승님께서 한낱 외인에 불과한 저를 어여쁘게 여겨 직전 제자로 거두시고 진천무가의 비전들도 아낌없이 베푸셨지요.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고수가 되어 진천무가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라 생각해....

'오케이 거기까지. 대충 무슨 이야기인 줄 알겠네.'

뻔하디 뻔한 클리셰.

이런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 봤자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유성의 관심은 위진무의 과거나 스승과의 관계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아까 비무에서 말이야. 상대들이 네 무공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던데."

기본적인 실력의 차이도 있기는 했지만 하운은 그것을 뛰어넘어 움직임 자체를 미리 예측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하운뿐만이 아니다.

그다음에 나온 서도형의 검법도 그랬고, 마지막으로 나왔던 사태형의 장법도 그랬다.

자신.... 아니, 위진무가 어디로 움직이고 피할지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모습.

굉뢰권, 파천각, 유성보 등 위진무가 가지고 있던 무공들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암월 16식을 사용하자 예상치 못한 허점을 찔린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꿰뚫어 보셨군요. 맞습니다. 오대문파는 저희 진천무가의 무공의 파해법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무인의 수준에서 앞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무에서 칠 대 이라는 처참한 결과가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오대문파는 진천무가의 무인들이 어떤 무공을 사용할지, 그 무공을 어떻게 파훼해야 할지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등급이 그랬군.'

의뢰인이 강하면 뭐하나?

상대는 더 강하고 심지어 이쪽의 공략법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상황.

당연히 이 정도의 난이도가 나올 법했다.

"무공의 파훼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건가?"

-매우 드물지만 가끔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저희 진천무가의 무공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터라 파훼법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위진무뿐만 아니라 진천무가의 모든 사람들이 은연중에 진천무가의 무공은 파훼됐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글쎄. 과연 그럴까?"

-예?

단순히 무공의 파훼법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유성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를 진행하면서 유성은 상대들이 단순히 무공의 파훼법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다고 느꼈다.

"그놈들은 단순히 네 무공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 자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어."

비밀 요원인 필립의 격투술과 아카데미 생도의 격투술이 단순히 등급의 차이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자세부터 스타일, 리듬, 버릇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스킬이라도 세세하게 파고들면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이번 비무의 첫 상대였던 하운은 위진무의 C급의 격투술은 매우 능숙하게 대응했지만 아카데미의 생도였던 레온의 E+급의 격투술 앞에서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굉뢰권에는 여유롭게 받아 냈지만 암월 16식을 꺼내는 순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는, 제3자의 입장이면서 동시에 스타일을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유저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미묘한 이질감.

-잠깐! 지금 그 말은....

"아무래도 진천무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거 게임 아님

061화 미쳤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단호한 대답에 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

-진천무가는 문파가 아닌 세가이기 때문입니다. 혈족을 중심으로 뭉친 세가에서 배신자가 나올 리 없습니다.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여기 있네. 당장 너부터 혈족이 아닌 외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흠흠, 저는 극히 드문 예외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천무가에 있는 외인들은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하인들이 전부입니다.

유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위진무는 곧바로 설명을 이어 갔다.

-유성 님의 말대로라면 이번 비무에 나선 모든 이들의 실력과 버릇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배신자가 있다는 건데, 당장 저만 하더라도 몇 년 전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거의 끊고 홀로 수련에 매진한 사람입니다.

"그게 왜?"

-그런 저의 허실마저도 훤히 알고 있을 정도면 방계나 직계를 넘어서 진천무가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 총관이나 사형들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배신을 했다는 건데.... 당연히 그분들이 배신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도저히 웃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21세기의 지구에서 살아가며 수많은 사건이나 사고 들을 보고 들어온 유성은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지인이나 가족을 등쳐 먹는 사람도 있는데 가문을 배신하지 못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만하십시오. 이 이상 진천무가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명예? 당장 진천무가가 망하고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명예에 신경 쓸 여유가 있다 이 말이지?"

-....

"네가 싫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나는 앞으로 남은 두 번의 비무를 이기는 것만 신경 쓸 테니, 그 뒤의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단 이번과 같은 위기가 또 생겨도 더 이상 내가 도와주러 오는 일은 없을 테니 그건 알아 두고."

기껏 도와줬더니만 나중에 가서 욕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노르드의 추적에서 벗어난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모아 놓은 카르마 포인트도 적지 않은 상황.

굳이 운명 개변률에 집착할 필요 없이 적당한 클리어 랭크를 받고 퀘스트를 종료해도 유성은 손해 볼 게 없었다.

자신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유성의 태도에 잠시 침묵하던 위진무는 곧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정말로 배신자가 있다면 어떻게 찾아낼 생각이십니까?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 배신자 없다면서?"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

"말장난하지 말고 배신자 색출할지 말지 똑바로 말해."

단호한 질문.

당연히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해 주십시오.

"어째 엎드려 절 받기 같은데. 뭐, 마음씨 좋은 내가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배신자를 색출해 낼 생각입니까?

"그건 말이 아니라 앞으로 행동으로 보여 주지."

-예? 어째서 말입니까?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방법에 대해서 듣게 된다면 위진무가 반대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중에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그때가 되면 말리기에는 늦은 상황이리라.

"그 얘기는 이쯤하고 이번에는 내 쪽에서 너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요? 저에게 말입니까?

위진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은 오로지 생각과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자신에게 대체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

"새로운 무공을 만드는 데 도움을 받고 싶은데 말이지."

-예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성은 무협 세계에서 만들어진 무공은 다른 세계의 격투기나 무술 같은 것들보다 무조건 더 강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협 세계는 무공, 판타지 세계는 마법, SF세계는 과학이 다른 세계들보다 발전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딱히 유성만의 선입견도 뭣도 아닌, 누구라도 할 만한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진무와 동기화하고 무공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게 된 유성은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공이 무술보다 우월한 게 아니었어. 물론 그 반대도 아니고. 둘은 아예 개념부터 다른 거였어.'

똑같이 무(武)를 다루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몸만 있으면 펼칠 수 있는 무술(武術)과 달리 무공(武功)은 내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있다.

물론 내공이 없다고 무공을 펼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무술에 내공을 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지금부터 내가 펼치는 초식을 잘 봐 봐."

옆구리가 시큰거리기는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침상에서 내려온 유성은 양팔을 들어 올려 기수식을 취하고는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굉뢰권 1식 뇌성이군요.

모습은 보이지 않고 번개 소리만 들린다 하여 붙은 이름.

자신이 펼쳤다고 해도 믿을 만큼 훌륭한 완성도에 위진무가 감탄하는 사이, 유성은 다시 한번 양팔을 들어 올렸다.

"다음은 이거."

다시 한번 뻗어지는 주먹.

내공을 담아 휘두르기는 했지만 방금 전과는 다르게 번개 소리도 나지 않았고 팔이 움직이는 궤적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느렸다.

"암월 16식의 천둥 찌르기라는 기술이야. 어때?"

-음, 빠르고 정확하기는 하지만 뇌성과 비교하기는 좀....

위진무의 감상은 정확했다.

단순히 위력만 놓고 봤을 때 천둥 찌르기는 뇌성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성이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다.

"맞아. 하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두 기술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대한 거였어."

-본질적인 차이점요?

"뇌성은 확실히 빠르고 강력하지만 주먹을 쥐는 형태부터 어깨의 위치, 자세,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에 맞춰서 펼쳐야만 해."

-그거야 당연한 겁니다. 은하심법으로 끌어 올린 내공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초식이니까요.

"맞아. 하지만 천둥 찌르기는 어떻지? 내공을 사용할 수 없거나 극도로 적은 상황이라면 뇌성과 천둥 찌르기 중 뭐가 더 유용할까?"

위진무는 그제야 유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내공의 유무나 형태에 구애 받지 않는 개념의 무공을 원하시는 겁니까?

"맞아.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강한 무공이 아니거든."

자신은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여러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들의 몸을 움직여야 하는 유저였다.

강력한 무공?

당연히 있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무공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내공이나 마력 같은 에너지를 가지고 다룰 수 있는 이들뿐, 그런 에너지가 적거나 아예 없는 존재라면 아무리 강한 무공이라도 보기 좋은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내공이 없어도 펼칠 수 있는 암월 16식이 더 쓸모 있겠지.

"자유로운 무공. 내공이 없어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고 내공이 있다면 더 강해지는 그런 무공을 좀 만들고 싶은데."

-미쳤습니까?

무심코 험한 말을 내뱉은 위진무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제가 무슨 대종사의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건 무림의 명숙이나 소문난 기재를 데려와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성 님이 원하는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차라리 무공 수련에 전념해 초식의 경지에 구애받지 않는 무초식의 경지에 오르는 게 더 빠를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미안한데 그건 불가능해."

무공에 쏟을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퀘스트를 수행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어떻게든 이 퀘스트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 가겠다는 유성의 의지는 단호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위진무의 의지 또한 단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짜로? 진짜 불가능해?"

-몇 번을 물어보셔도 답은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장황스럽게 말을 꺼낸 것치고는 의외로 쉽게 포기하는 모습.

그러나 이어지는 유성의 말에 위진무는 자신이 지금 상황을 너무 쉽게 보고 있다는 것 깨달았다.

"망해가는 가문 한번 살려 보겠다고 열과 성을 다해서 도와줬더니만 이런 사소한 도움도 주지 못하겠다니, 충격이 심해서 당분간 아무것도 못하고 쉬어야 할 것 같아."

-예? 그럼 배신자는 어떻게 하고요?

"방금 전에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충격이 심해서 당분간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니까?"

-....

"기분 탓인지 왠지 비무에서도 이길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무공의 창안과 진천무가의 파멸.

둘 중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암월 16식이라는 것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보십쇼.

"오케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성은 암월 16식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찌르기, 치기, 차기, 던지기, 비틀기, 찍기 등으로 구성된, 단순하지만 더 없이 효율적인 기술들의 연속.

-....

대충 협력하는 척하다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는 안 될 것 같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던 위진무였지만, 유성이 펼치는 암월 16식을 직접 보고 나자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굉장히 특이한 무공이군요. 아예 내공의 사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무공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무공보다는 무술이기는 한데, 대충 그런 셈이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거대한 건물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완성된 건물에 손을 대 새로운 형태의 건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뼈대만 세워진 건물에 외벽을 세우고 장식을 붙이는 것 정도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요?

* * *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지하.

악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감옥 안에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로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하지 않았소! 정말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오!"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호소.

그러나 아쉽게도 남자의 호소는 그 앞에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말을 해라. 그날 네가 사술을 쓰는 것을 본 사람만 무려 천여 명에 달한다. 그 사람들이 전부 헛것을 봤단 말이냐?"

"사술이 펼쳐진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위진무 그 망할 자식이 썼다는 말이오!"

"대체 그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사술을 사용했겠느냐? 설령 사술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사술로 너를 공격했을 것이지 자해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거야 비무에서 패배하는 게 무서우니 나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으로...."

"어허, 이놈이 그래도!"

짜악!

"크아아아아악!"

인정사정없이 휘둘리는 가죽 채찍 앞에서 사태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비명을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여라! 죽이라고 이 새끼들아!"

사태령은 떳떳했다.

사술을 쓰지도 않았고 한평생 사술과 얽히거나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위진무 그 망할 놈이 세치 혀와 연기로 사람들을 잠깐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무림맹에서 면밀한 조사가 이뤄진다면 금방 진상이 드러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 갇히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무자비한 고문과 쉴 틈 없이 가해지는 협박과 회유.

감찰단은 이미 자신을 사술 사용자로 간주하고 확답을 얻어 낼 생각밖에 없었다.

"흐흐흐흐...."

"미친 척 연기해도 소용없다. 아니, 미치면 미친 대로 좋지. 그런 놈을 상대하는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나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오."

"정말로 끈질긴 놈이군."

감찰단원은 사태령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반드시 진상을 밝혀내라는 황보성의 엄명에 며칠째 잠도 재우지 않고 온갖 고문을 가하고 있었지만, 이 지독한 놈은 도저히 제 죄를 인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황보성의 실망을 사는 것은 물론이오 감찰대원으로서의 평가가 떨어질 위험도 있다.

'그냥 죽여 버릴까?'

애매모호한 경우라면 모를까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증인과 상황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그냥 죽여 버린 다음에 사술을 사용했다고 인정하는 서류에 수결을 찍어도 문제 될 게 없다.

여러 뒷말이 나오기에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방법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독한 놈이 상대라면 어쩔 수 없다.

감찰대원의 눈에서 살기를 느낀 사태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죽기는 싫었던 탓이다.

감찰단원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어리고 사태령의 입술이 달싹이려는 순간, 두 사람의 관심을 돌릴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이쪽을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철창 너머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반쯤 의식을 잃고 있던 사태령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튀어 나왔다.

"위진무! 이 비겁한 놈!"

퍽!

단 한 번의 몽둥이질로 사태령의 입을 다물게 만든 감찰대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형제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사태령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태령을 내려다보는 유성의 얼굴에는 뜻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 게임 아님

062화 낚시

"불가능하네."

감찰대원은 단번에 거절했다.

사술 사용자와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니, 만약 위진무가 사술에 당한 피해자가 아니었더라면 필시 사술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붙잡아서 심문을 진행했을 것이다.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인 대 무인으로서 사태령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 것뿐입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어허, 잠깐이든 뭐든 안 된다니까?"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해 주신다면 그에 걸맞은 보답을 해 드리겠습니다."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감히 자신을 재물 따위로 어떻게 해 보려는 얄팍한 수작에 분노를 터트리려던 감찰대원은 이어지는 말에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황보 어르신께 대협의 이름을 넌지시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훌륭하고 공명정대한 감찰대원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게 정말인가?"

한낱 후기지수 따위가 무림맹의 감찰단주를 만나 사람을 천거하다니.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번 비무에서 황보성이 위진무를 향해 두 번이나 미소를 지어 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 줬던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감찰대원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흠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감찰대원은 감옥 바깥을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차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따뜻한 차나 한잔 마시고 와야겠군. 시간은 대충...."

"일 각(15분) 정도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

고개를 끄덕이던 감찰대원은 사태령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 험하게 다루지는 말게."

뭔가 오해를 한 듯싶었지만 굳이 풀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찰대원을 배웅했다.

-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들키지 않으면 거짓말이 아니지. 저 사람이 어떻게 진실을 확인할 건데? 황보성한테 찾아가서 내가 이런 일을 눈감아 주고 칭찬을 받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기라도 할 거야?'

-그럼 맹세는 뭡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마. 그건 내가 한 맹세니까 너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몇 마디로 위진무를 침묵시킨 유성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쯤 자신은 수천 번도 더 넘게 죽었을 것이다.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아 사태령과 시선을 맞춘 유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군."

"으아아아! 위진무! 위진무우우우!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더러운 사술로 신성한 비무를 더럽히고 승리하니 좋더냐? 당장 진실을 밝혀라! 진실을 밝히란 말이다!"

피를 토하는 듯한 처절한 절규.

그러나 유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더러운 놈? 그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무슨 헛소리냐!"

"진천무가의 무공들의 파훼법, 비무에 나선 사람들에 대한 정보. 어디서 얻었지?"

순간 사태령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배신자가 있지? 진천무가 내부에 말이야. 그 배신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말이야."

"...무공의 파훼법은 우리 오대문파의 고수들이 연구해서 알아낸 것이다. 비무에 나선 사람들의 정보? 그건 무슨 소리지?"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 연기할 필요 없어. 배신자 이름. 그것만 말해 주면 돼."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군."

'역시 순순히 말해 줄 리 없나.'

사술을 사용한 것과, 배신자를 통해 타문파의 무공의 파훼법과 무인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은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는 어떻게든 개인의 일탈 정도로 묻어 버리고 끝낼 수 있지만 후자는 녹의무가, 더 나아가 함께 연합한 다른 문파들까지 통째로 날려 버릴 만한 초대형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말하지 않겠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지."

"고문이라도 가하려는 것이냐? 오냐, 해 보거라! 얼마든지 해 보란 말이다!"

"고문이라니. 그런 무식한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지. 여기를 좀 보겠나?"

유성이 내민 손바닥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분명 아무것도 없던 손바닥에서 갑자기 가시덩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건...."

"설마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유성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가시덩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물론 지성이나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는 가시덩굴이 손짓에 반응을 할 리 없었지만, 세밀한 컨트롤을 통해 생생한 반응을 연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태령의 눈에는 이 식물이 살아 있으며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요물(妖物)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꿀꺽!

수많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사태령이었지만 옛날이야기나 악몽 속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요물을 눈앞에 두고서는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나는 사술을 익혔다. 그리고 이건 사술로 만들어 낸 특별한 생명체지."

"그, 그런 걸로 고문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

"고문 안 한다니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사태령에게 다가간 유성은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지금부터 이걸 네 머릿속에 집어넣을 거다. 이놈이 머릿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나?"

"...."

"너는 네 의지를 잃고 내 명령에만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는 거다. 내 명령 하나면 가족이나 형제도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는 살인귀가 될 수도 있고, 사술을 사용했다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칙칙한 남자에게 이 귀한 것을 쓰는 것은 아깝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믿든지 말든지."

스륵!

귓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다.

평생 느껴 본 적이 없던 끔찍한 이물감과 덩굴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몸을 떨던 사태령은 고막에 덩굴이 닿는 순간 비명을 내질렀다.

"마, 말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할 테니 멈춰라!"

"멈춰라?"

"멈춰 주십시오!"

잠깐 사이에 180도 달라진 사태령의 모습에 유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에서 나오는 공포지.'

어떤 차원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도 다른 차원에서는 이제껏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배신자가 누구지?"

"모, 모릅니다."

"음, 아무래도 내가 우습게 보인 것 같은데...."

"속이려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른단 말입니다!"

사태령은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 갔다.

"진천무가에서 내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자의 정체에 대해 아는 건 오대 문파의 수뇌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대충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없습니다. 그 배신자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누구인지 제가 대체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짜입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

"아, 안 돼! 그만! 제발 자비를! 컥?"

귓구멍에서 꿈틀거리는 가시덩굴을 빼내기 위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던 사태령은 끝내 극심한 공포를 이기지 못했는지 두 눈을 뒤집고 기절하고 말았다.

"진짜 모르나 보네."

사태령의 귀에서 가시 덩굴을 빼낸 유성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오대문파의 수뇌부를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오대문파와 은밀히 접촉할 방법은 있고? 설령 어떻게 자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들이 순순히 배신자의 정체를 알려 줄 리가 없는데 찾아갈 이유가 없지.'

-가시덩굴을 이용하면 사람을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 잘하면....

'뭐? 이런 가시덩굴에 그런 엄청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분위기 타서 아무 소리나 해 본 건데, 설마 그걸 진짜로 믿은 거야?'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위진무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사태령도 모르고 오대문파의 사람과도 접촉할 수 없다면 이제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사라진 것 아닙니까?

'아니, 아직 한 가지 남았어.'

유성이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사태령을 통해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두 번째는 사태령이 배신자의 정체에 대해 모를 때 그 뒤에 시행할 작전을 위해 밑밥을 깔기 위함이었다.

다만 이 작전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오오! 대체 그 방법이 뭡니까?

'말해 줄 수는 있는데 대신 듣고 나서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예? 제가 왜 화를 냅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약속할 수 있어?'

-하라면 하겠습니다만....

위진무의 대답을 들은 유성은 한 단어를 내뱉었다.

'낚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조금 자세히 풀어서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크흠, 그러니까 그게....'

낚시 계획의 설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리고 유성의 말이 끝났을 때 위진무는 약속을 어기고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이래서 설명하기 싫었단 말이야."

위진무의 호통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유성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 * *

현재 진천무가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가문의 운명이 걸린 비무가 다시 재개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과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상대는 벌건 대낮에 수많은 사람이 보는 비무에 사술을 쓸 정도로 막 나가는 집단, 모자란 것보다는 차라리 과한 것이 나았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 바깥의 경계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내부의 경계는 비교적 소홀해진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홀해진 감시의 틈을 뚫고 한 사람의 불청객이 진천무가 깊숙한 곳에 있는 전각을 향해 접근했다.

끼익.

문을 열자 풍겨 오는 짙은 약냄새에 이마를 찌푸린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막내야!"

"여기입니다. 사형!"

"어허! 가만히 있거라. 괜히 움직이다 상처가 덧나면 어쩌려고."

"하하, 걱정은 감사하지만 상처는 거의 다 회복됐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원래 그다지 깊은 상처도 아니었고 솜씨 좋은 의원들과 귀중한 약재들을 아낌없이 쓴 터라 옆구리의 부상은 거의 다 회복된 상황이었다.

과장된 자세로 붕대에 쌓인 상처를 두들기던 유성은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진이가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오신 게 맞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누구에게도 들키거나 알리지 않고 몰래 왔다. 대체 이런 해괴한 부탁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

의문과 의심이 섞인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진이의 모습에 유성은 고개를 숙이고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것이...."

이런 건 바로 말해서는 안 된다.

잠시 말을 끊은 유성은 긴장감이 최대로 고조됐다고 느낀 순간,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대문파와 내통한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진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라 뇌가 이해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쉿!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누가 들을지도 모릅니다!"

장난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나 진지한 눈빛에 진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그 배신자가 진천무가 무공부터 비무에 나선 사람들에 대한 파훼법들을 모아 오대문파의 사람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믿을 수 없다. 그런 일은 한낱 제자나 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소 가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급이 아닌 이상...."

"그 제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힘이 들어간 눈동자, 하얗게 질린 안색, 떨리는 입술.

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온정신을 집중하며 유성은 조심스레 내력을 끌어 올렸다.

이거 게임 아님

063화 개판이네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냐?"

"저는 지금 진지합니다. 제 눈을 보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은 건지는 모르지만 한 번만 더 이런 말을 꺼낸다면 너에게 진천무가의 명예를 더럽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누가 사형사제 아니랄까 봐 판에 박은 듯 위진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진이를 향해 유성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 증인과 증거가 있습니다. 사태령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놈의 이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느냐?"

"신성한 비무에서 사술을 쓴 이유가 너무 궁금해 지난 밤 제가 그놈을 직접 만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사형들 중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잠시 눈치를 살피던 유성은 진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과 적당한 재물을 준다는 약속을 한다면 배신자의 정체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말을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큰일이어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스승님은 큰 충격을 받으실까 염려되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고, 다른 사형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진이 사형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말씀드린 겁니다."

"...."

짧은 침묵 이후 진이는 몇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날이 밝는 대로 그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하겠다."

"제 말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믿어 줘서 고맙구나. 푹 쉬거라."

진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유성은 그제야 긴장의 끈을 놓고 침상에 몸을 뉘였다.

"쟤도 아니었나 보네. 이제 남은 건 한 명인가?"

낚시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작전이었다.

이름 그대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배신자라면 도저히 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그럴듯한 미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한 작전.

다만 이 작전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야, 말 좀 해 봐. 나만 말하니까 심심하다.'

-....

그것은 끝내 배신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위진무의 평판과 신뢰도가 바로 땅바닥에 처박힌다는 점이었다.

진천무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불러서 배신자의 존재와 그것을 증명할 증인과 증거가 있다느니, 당신만은 믿을 수 있다느니 거창하게 입을 턴 다음 날 '사실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배신자를 골라내기 위한 낚시였습니다. 헤헷.'이라는 말을 하면 과연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에 대한 답은 바로 지금 위진무가 말해 주고 있었다.

-사형들을 거짓으로 속이고 능멸했으니 최소 중징계.... 아니, 가문에 분열을 일으키고 내전을 획책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 주요 근맥을 끊고 무공을 폐해서 쫓겨날 수도 있겠군요. 진천무가와 운명을 같이하니, 기뻐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하하하!

'야, 정신 차려. 배신자가 안 나오면 깔끔하게 죽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니까?'

-지금 저 보고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라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