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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는 교수들이 모여서 토론을 거쳐 징벌을 내린다.

대부분은 내부의 규율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생도와 담당 교수만 나와서 죄목을 읆고 처벌을 통보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사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저 망할 놈이 만든 중상자가 86명이오! 그것도 단 하루만에! 심지어 깔끔하게 칼로 찌른 것도 아니고 관절을 부수고 뼈를 조각내고 사지를 부러트려서 회복시키는 것도 어렵답니다! 당장 사흘 후에 있을 서임식에 국왕 전하가 친림할 예정인데 이걸 대체 어떻게 할거요?"

"하여간 전사 놈들 폭력적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사람 죽이는 기술만 죽어라 연마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뭐? 저 놈이 미친 놈인 게 왜 우리 탓이야? 맨날 어두운 방에 처박혀서 실험만 하다보니 머리가 돌아버린 거냐?!"

"쯧쯧, 내 용병 놈이 강사 노릇 한다고 할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 대체 어떤 식으로 가르쳤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모든 교수들이 목에 핏줄을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단 한 생도가 86명의 생도에게 정신적 후유증을 겪을 정도의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며, 동시에 재물을 강탈한 전무후무한 사건.

적당히 큰 사건이었더라면 모두가 쉬쉬하며 덮어버렸겠지만 유래가 없을 정도의 거대한 스케일에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쿵!

마력이 담긴 발구름으로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한 펠릭스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온 생도.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지?"

의지로 사람을 죽인다는 전설 상의 의형살인(意形殺人)의 경지가 이러할까.

머리카락과 옷이 일렁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내는 펠릭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유성은 입을 열었다.

"전 펠릭스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 뿐입니다."

"···내 가르침을 따랐다?"

"아카데미는 네 집이 아니고 나는 부모가 아니다. 아카데미의 생도가 다른 생도들에게 두들겨 맞아 제대로 강의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그건 개인이 처리해야 할 문제에 불과하다. 성인이 됐으면 자기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부 아카데미 교수의 입장으로 하신 말들이지요."

보일듯 말듯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며 펠릭스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분노를 느꼈다.

이거 게임 아님

029화 아카데미

용병으로 활동할 때의 성질 같았으면 당장 안면을 뭉개버렸겠지만 자신은 더 이상 용병이 아닌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안 그래도 천한 태생에 예의도 모르는 용병 출신이라고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도까지 폭행한다?

전후사정이나 시시비비가 어찌 됐든 그 날로 자신에 대한 평가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리라.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생도들도 들었던 이야기를 부정하지는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설마 펠릭스 교수님 씩이나 되시는 분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는 않겠죠?"

"···내가 분명히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너에게 당한 생도들 중에서는 신관들의 빠른 조치가 없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심각한 중상을 입은 이들도 나왔어. 이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카데미의 문제다."

"그 개인과 아카데미를 나누는 기준은 대체 무엇입니까?"

펠릭스와 눈씨름을 하던 유성은 높은 자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교수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사라진 비전을 복원하고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희망을 걸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왕국의 모든 신민에게 공평하게 배움의 기회를 베풀어, 이 못난 놈에게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국왕 전하와 이 왕국에 보은하고자 병사가 되서라도 봉사할 생각이었습니다."

-예? 저,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요?

'넌 좀 닥치고 있어.'

속으로야 어떤 대화를 나누든 겉으로 볼 때 유성은 아무런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필립으로부터 가져온 '연기' 스킬의 힘으로 인해 풍기는 진실의 향기로 인해 묘한 흡입력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뭔가 주제를 벗어난 듯한 유성의 말에 교수들은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묘하게 그 뒤가 궁금해지는 내용에 태클을 넣기보다는 일단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보기로 했다.

"평민보다 못한 처지로 영락한 가문의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밥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에 열중했지요."

-저 그렇게 열심히는 안 했는데요···.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어도 가문과 국왕 전하, 왕국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견뎠습니다. 하지만 펠릭스 교수님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신 것들 때문에 그 꿈은 산산조각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싸우면서 생긴 상처를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헤집자 유성의 눈에 순식간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계신 모든 교수님들은 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시고 계실 겁니다."

사실 레온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교수보다 모르는 교수의 수가 더 많았다.

교수와 생도 모두 합심하거나 묵인해서 레온을 괴롭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사, 기사 학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불과했고 마법사, 연금술, 행정학, 법학 등 다른 학부의 교수들은 레온이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들어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몰랐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눈치 없는 사람으로 찍힐 것만 같은 분위기였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탁상을 내리치고는 목에 핏줄을 세워대며 고함을 질러대는 유성으로 인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집단으로 뭉친 생도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당했습니다! 가문에서 보내준 생활비를 빼앗겼습니다! 자기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제가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 하고 수련을 할 수 없도록 방해했습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조롱과 모독을 가하며 마음의 상처를 입혔습니다! 1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끔직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

"그만 하라고 생도들에게 빌어도, 말려 달라고 교수님들에게 부탁해도 그 누구도 제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신분 때문 입니까? 몰락한 귀족 출신의 생도 하나를 위해 고위 귀족이나 명가 출신의 생도들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었던 겁니까? 돈 때문입니까? 뇌물 하나 주지 못 할 정도로 가난한 생도보다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줄 상인이나 부잣집 출신 생도의 비위를 맞추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겁니까?!"

"···그만."

"가난하고 힘없는 가문 출신의 생도가 겪는 문제는 그저 개인적인 일이고 부유하고 힘 있는 가문 출신의 생도가 겪는 문제는 아카데미의 모든 교수님들이 모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까? 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만하라고 했다!"

펠릭스가 쏘아 보낸 기세에 노출된 유성의 말이 중간에 멈췄다.

양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넘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일개 생도 따위가 왕국의 명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목소리를 높여!"

"저는 그저···."

"네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자리는 너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 본질을 흐리려 해봤자 네가 생도들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펠릭스는 교수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설마 생도 하나가 되는 대로 지껄인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진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크흠."

"뭐, 원칙적으로 펠릭스 교수의 말이 맞기는 하지."

"사정이 안 됐기는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는 법이지. 암."

피를 토하는 듯한 유성의 한탄에 동요한 사람이 적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감정에 휩쓸려 일을 처리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유성이 벌인 사건의 스케일은 커도 너무나도 컸다.

애초에 이 자리는 그저 재판을 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불과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고 하더라도 오늘 다친 생도들의 가문의 힘과 영향력을 생각해본다면 절대로 선처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의 화를 풀고 자신들에게 괜히 불똥이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강력한 처벌을 내리고 더 나아가 그의 가문까지 대가를 치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판결을 내리겠다. 레온 생도는 무고한 생도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 금품을 갈취한 바, 그 죄를 물어 그린델 가문에서 운영하는 광산에 노역하게 한다. 기한은 레온 생도가 해한 생도들의 치료비와 위자료를 모두 배상할 때까지, 부족한 금액은 베르문드 가문에도 청구할 것이며 만약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베르문드 가문의 사람들도 광산에 노역하게 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잘못한 건 저인데 왜 가문의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는 겁니까!"

"억울하면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다 제 탓이란 말입니까? 전부 제가 잘못한 거라구요?"

"그래."

"······."

울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에 펠릭스는 조금은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사흘 후에 국왕 전하가 친림하는 서임식이 있으니 처벌은 그 이후로 미루도록 하겠다."

잠깐 얼굴을 비췄다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테지만 그래도 국왕이 아카데미에 오는데 트집 잡힐 거리는 단 하나도 남겨둘 수는 없었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처벌도 결정됐지만 '공식적'으로 유성이 생도들을 구타하고 그에 대한 처벌이 내려진 건 서임식 이후에 일어난 일로 기록될 것이다.

"저는···."

"꺼져라."

수많은 교수들의 압박에 유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쯧, 요새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포션이든 신관이든 뭐든 좋으니 서임식 전까지 반드시 생도들을 회복 시켜야 합니다."

"아니, 기사 학부에서는 대체 어떤 교육을 하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요? 설마 저런 일이 흔한 거요?"

"크흠. 그냥 저 놈이 부적응자인거니 오해하지 마시오."

시끌벅적 떠들어 대는 교수들 가운데 아카데미의 학장이 펠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이 알려졌다가는 우리 아카데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 최대한 조용히 묻어야 하오.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은 생도들은 내가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생도들은 입을 다물게 할 미끼가 필요한데···."

"···제 강의를 듣는 피해자들에게 최고점을 주고 아카데미를 수료할 때 최대한 좋은 평가와 추천장을 써주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들은 가급적 생도들에게 좋은 평가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생도가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사회로 나가 활동할 때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교수들의 평판까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평가마저 그러할 진데 추천장 같은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특급 용병의 추천장 정도가 아니면 생도들의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정도면 되겠군. 어떻게든 잘 수습하기는 했지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사양일세. 앞으로는 담당 교수로서 생도들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군. 허허."

학장의 눈에서 실망의 감정을 읽어낸 펠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실력도 없는 것들에게 추천장을 줘야 하는 것 만도 치욕인데 저런 노골적인 실망의 시선까지 받아야 한다니.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어느 분야에서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오늘 이 일로 인해 왕국 내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는 몇 단계는 떨어졌을 것이다.

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서 나온 펠릭스는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전부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낮아진 평가가 더 낮아지리라.

'누구든지 눈에 띄기만 해봐라.'

생도든 뭐든 일단 걸리기만 하면 온갖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아서 눈물을 쏙 빼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율상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생도가 있을 턱이 없었다.

'후우, 아무래도 오늘은 좀 취해야겠어.'

아껴뒀던 술을 깔까 생각하던 펠릭스는 기둥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누구냐."

"접니다."

"···하!"

갑작스레 튀어나온 레온의 모습에 펠릭스는 치솟는 살의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숙소로 안 돌아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망한 거 이제 그냥 막 나가겠다는 건가?"

"교수님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금 대화가 하고 싶어서 말이죠."

"대화? 자비라도 구걸하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아까도 말했듯이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네 가문에 대한 처벌 역시 마찬가지. 설령 우리가 그냥 넘어가더라도 이번에 피해를 입은 가문들은 절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대화의 주제는 자비가 아닙니다. 협상이죠."

"협상?"

펠릭스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기본적으로 협상이란 것은 어떤 식으로든 협상의 당사자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일방적으로 한 쪽만 이득을 볼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 레온은 협상을 해서 득이 될 게 있지만 생도들과 교수, 아카데미는 협상을 해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협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레온이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만지작거리는 순간 펠릭스의 생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 펠릭스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른 것 뿐입니다.'

'···내 가르침을 따랐다?'

'아카데미는 네 집이 아니고 나는 부모가 아니다. 아카데미의 생도가 다른 생도들에게 두들겨 맞아 제대로 강의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이야, 아주 깔끔하게 찍혔네요."

방금 전 진행됐던 재판의 모습과 소리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네모난 물건을 든 레온의 얼굴에는 재밌어서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사흘 후에 국왕 전하가 아카데미에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국왕 전하께서 이걸 보게 된다면 꽤나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거 게임 아님

030화 아카데미

유성은 처음부터 이 퀘스트를 평범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구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만약 지역 유지나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에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선생의 묵인 하에 학생 하나를 계획적이고 집단적으로 괴롭히고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부탁? 폭력? 신고?

그 어느 것도 적합하지 않다.

부탁한다고 들어줄 놈들이었더라면 1년이 넘도록 꾸준히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며,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으면 애초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고, 선생들이 상황을 묵인하고 넘어가는데 신고한다고 변하는 게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D)을 꺼내기 위해 1,000 카르마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증거 모아서 터트리면 그만이지."

지구였더라면 언론에 알려 사건을 공론화 했겠지만 이 곳에는 언론이 없기에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증거를 모을 생각이었지만 사흘 후에 있을 서임식에 국왕이 직접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획을 앞당겼다.

초대형 사고를 쳐 교수들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고 지금까지 레온이 겪었던 일들을 털어 놓으며 중간중간 '국왕', '봉사', '차별', '힘 있는 가문과 약한 가문'같은 단어를 은근슬쩍 끼워 넣는다.

유성의 연설을 듣던 교수들이 위화감을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애초에 유성은 그 자리에 있던 교수들이 아니라 영상을 볼 국왕을 노린 연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어도 가문과 국왕 전하, 왕국에게 보답하겠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견뎠습니다. 하지만 펠릭스 교수님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신 것들 때문에 그 꿈은 산산조각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거 참.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우연하게도 국왕 전하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넘치는 생도가 무능한 교수 때문에 인생을 망친 것처럼 찍혀버렸네요. 물론 저나 교수님은 이게 진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사흘 후에 이걸 보게 되실 어떤 분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

"저는···."

기적이었다.

무엇이 기적이었느냐 하면 바로 펠릭스의 주먹을 피해낸 것이었다.

마치 동영상을 스킵한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있던 펠릭스가 갑자기 코 앞에 나타나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주먹을 휘둘렀고 유성은 수라감각도의 힘을 빌어 간신히 그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파앙!

풍압만으로 골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날린 공격.

상황을 심각성을 깨달은 유성은 다급하게 입을 열려 했지만 펠릭스가 두 번째로 내지른 주먹을 막아내는 보고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할 수 없다!'

불시에 날아온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느라 이미 자세가 흐트러진 상황이다.

두 번째 공격을 피한다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자세마저 완벽히 무너질 테고 이어지는 세 번째 공격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터, 이 공격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내야 했다.

암월 16식. 태산 지르기.

전신의 힘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단 일권에 뿌려내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지르기.

생도 레벨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방금 전 펠릭스가 날린 공격의 여파를 느낀 유성은 이걸로는 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가지 스킬을 더 추가했다.

마력강화.

마력을 이용해 신체 능력을 단기간 끌어올리는 스킬.

순간적으로 가속한 유성의 주먹은 펠릭스의 주먹이 최대한의 위력에 도달할 수 있는 포인트를 먼저 지나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컥!"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인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유성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입안에서는 쇠의 비린 맛이 느껴지고 전신의 뼈가 시큰거렸지만 그렇다고 쉴 틈은 없었다.

'3격? 이 또라이 새끼가! 잠깐 말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할 거 아니야!'

펠릭스의 두 번째 주먹을 막아내기 위해 전신의 힘과 마력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쏟아부었는데 설마 쉬지 않고 세 번째 주먹이 날아올 줄이야.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끝을 내겠다는 듯 피처럼 붉은 빛의 오러를 두른 주먹을 바라보며 유성은 이를 갈았다.

'젠장, 보통 성질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학생을 처 죽일 정도로 막 나가는 놈이었을 줄이야. 재도전권을 사용해서 두 번째 기회를 노리는 건···, 아니야, 벌써 포기하긴 일러.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뭔가···'

느려진 시간 속에서 유성은 다시 한 번 주먹을 내질렀다.

오러를 두른 펠릭스의 주먹과 피로 물든 유성의 주먹.

누가 보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명확해 보였고 마침내 둘의 주먹이 충돌했다.

쩌엉!

"···뭣?"

펠릭스의 입에서 당혹성이 튀어나왔다.

오러를 둘러 철판마저 꿰뚫을 수 있는 위력을 담은 주먹이 오러조차 없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맨주먹에 막히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지금까지 쌓아온 상식이 산산이 무너지는 황당한 사태에 무심코 고개를 든 펠릭스는 희미한 황금빛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생긴 틈, 그리고 유성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저를 죽인다 하더라도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습니다. 설마 제 손에 들린 게 유일한 증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건 대체 뭐냐."

"영상과 소리를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 입니다. 방금 전의 회의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제가 아카데미에서 당한 일들이 전부 기록되어 있죠."

"전부?"

"예. 전부입니다."

"믿을 수 없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믿지 않아도 됩니다. 교수님이 아무리 부정하셔도 있는 게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진실에 거짓을 섞는다.

이미 방금 전의 재판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한 상황, 처음 보는 물건과 자신만만한 유성의 태도에 펠릭스의 기세가 주춤했다.

"지금 제 손에 들려있는 마도구 이외에도 방금 전의 재판과 지금까지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기록한 또 하나의 마도구를 누군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죽거나 실종된다면 그 누군가는 국왕 전하에게 마도구를 건내기로 저와 약속했습니다."

"그런 마도구가 두 개나 있을 리 없고 만약 진짜 있다면 굳이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지.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잔꾀를 낸 것 같지만 그 정도 얄팍한 생각으로 이 몸을 속일 수는 없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죽이시면 됩니다. 사흘 후에 일어날 일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게 조금 아쉽긴 하군요."

"···이 망할 애새끼가!"

욕지거리와 함께 머리를 내질러진 주먹.

그러나 펠릭스의 주먹은 종이 한 장 차이를 두고 코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죽일 거면 빨리 죽이십쇼."

으득!

코 앞까지 죽음이 닥쳐왔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본 펠릭스는 이를 갈며 주먹을 거뒀다. 특급 용병으로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상대하고 관찰하며 쌓인 경험이 말했다.

저건 진짜다.

진실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눈.

'진실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정말 저것과 같은 마도구를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건가?'

망설이는 펠릭스의 모습에 유성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교묘하게 사냥을 시작했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이 마도구를 전하께 바치고 그 동안 저를 괴롭힌 생도들과 무시한 교수님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협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말이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처럼 보였다.

"교수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이 마도구가 공개됐을 때의 여파는 어마어마할 겁니다. 관련자들의 명예는 모두 똥통에 처박힐 거고 전하의 진노를 사게 되겠지요."

"······."

"하지만 그 경우 저는 복수를 했다는 만족감 이외에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을 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배상금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유지할 수 없겠죠."

찰나의 순간, 희미하게 올라가는 펠릭스의 입꼬리를 보며 유성은 씨익 웃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슬슬 눈치챘겠지?'

유성의 짐작대로 펠릭스는 방금 전보다 다소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렇겠지. 이번 일에 얽힌 생도들의 가문에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이번 일을 알게 된 국왕이 관계자들에게 엄벌을 내린다 하더라도 잘해봐야 벌금형에 명예가 떨어지는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국왕이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분노하더라도 관련된 생도들의 숫자와 그들이 속한 가문, 교수들의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영향력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당장은 전하의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전하의 관심이 사라지면 이번 일로 피해를 입은 생도들과 가문들이 너와 네 가문에 보복을 하려 할 거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건 베르문드 권법을 복원하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제 꿈과 부딪히죠."

"참 곤란한 일이군. 정의를 바로 세우자니 피해자가 적절한 배상을 받을 수 없고, 그렇다고 피해자의 배상을 위해서 정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니, 아무래도···."

"협상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시선을 교환하던 둘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씨익 웃었다.

* * *

"난 이만 가보지. 밤공기가 차니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쉬게."

"교수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펠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성은 손바닥 위에 놓인 빨간색의 물병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들던 사람이 건강 챙기라고 포션까지 챙겨줄 줄이야.

세상사 요지경이라지만 그 엄청난 갭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여기서 협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어. 이 영상을 국왕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거든'

국왕이 이 안의 영상을 보게 된다면 당연히 관련자들에게 처벌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

'보게 될 때'다.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절대자인 국왕에게 한낱 아카데미 생도가 사사로이 접근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도구를 들이밀며 그것을 봐 달라고 했을 때, 국왕이 순순하게 그 말에 따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보여주기는커녕 호위들로 인해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펠릭스도 알았을 거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위험을 감수하기는 싫었겠지.'

약한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일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겠지만 유성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를 드러냈고 그것이 펠릭스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진짜로 또 하나의 마도구가 있을 수 있다고, 자신이 죽어도 어떤 식으로든 진실이 알려질 수 있는 계획을 미리 마련해뒀다고, 고작 생도 하나에게 화풀이 하는 대가로 받을 불이익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펠릭스가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다.

'게다가 협상을 안 하면 내가 떠난 이후의 뒷일을 장담할 수 없거든.'

단순히 괴롭힘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라면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터트려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유성이 목표로 삼는 건 SSS랭크 클리어.

이차원 스킬과 아티팩트 사용으로 줄어든 점수를 메우기 위해서는 운명 개변률을 100% 이상으로 높여야 했고 그를 위해서 완벽, 그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야만 했다.

'생도 한 사람마다 금화 100개 정도 받아낸다면 금화 8,600개. 아니지, 다른 가해자들한테도 전부 받아내야 하지? 야, 지금까지 너 괴롭힌 애들이 정확하게 몇 명이야?'

-대, 대충 200명은 되지 않을까요?

'그럼 금화 20,000개 정도 되겠군. 그 정도면 네 가문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겠지?'

-···아마도 그렇겠죠?

'거기에 내일 돌아다니면서 다른 교수들과도 협상하는 김에 겸사겸사 네 성적도 조금 신경 써 달라고 한 마디 하면 평가도 좋아지겠고···.'

-그, 그건 부정 아닙니까?

'왜? 싫어?'

-···싫은 건 아닙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난 1년 간 끊임없이 이어졌던,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문제가 불과 하루만에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꿈까지 이루어지게 생겼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그 고생을 했다니···.

'참 쉽기도 했겠다. 나 없이 너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냐?'

-크흠.

유성은 레온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면서 피식 웃었다.

남은 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 뿐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31화 아카데미

엘랑드 아카데미의 졸업식 날 국왕이 방문하는 것은 일종의 전통이었다.

국왕은 추후 왕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졸업생들은 자신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을 기억하는 중요한 과정이기에, 정말로 여의치 않은 사정이 있지 않은 이상 국왕은 반드시 참가하고 아카데미는 예정대로 졸업식을 진행한다.

평소 말썽 많은 생도들이라도 이 날 만큼은 절대로 사고를 치지 않는다.

"그게 진짜야?"

"진짜야. 내가 직접 들었어."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비어있는 강의실에 모인 생도들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1년 간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 지내던 녀석이 갑자기 뭘 잘못 먹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눈에 띄는 생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다녔단다. 처음에는 헛소문에 불과하다고 웃고 넘기던 이들은 피해자들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

'그륵, 그르륵.'

'죽여줘···. 그냥 죽여줘···.'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몰골로 생사의 경계를 헤매고 있는 친구들.

잔혹하다고 해봤자 뭉쳐서 저항하지 못하는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전부였던 그들은 그 모습을 보자 마자 곧바로 교수에게 가서 사정을 알렸고 징계위원회로 레온이 끌려가는 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레온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활기차게 아카데미를 활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녀석. 교수님들을 협박하고 있었어."

"협박이라니. 어떻게? 게다가 교수님들이라면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라는 건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고작해야 생도 따위가 어떻게 교수들을?"

"마도구가 있었어. 영상과 소리를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 그 안에 지금까지 아카데미에서 겪은 일을 전부 기록해뒀다고 하더라고."

"그런 마도구가 있다고?"

"내가 직접 확인했어. 레온이랑 펠릭스 교수님이 같이 다른 교수실로 들어가길래 뭔가 이상해서 몰래 엿들었거든. 마도구의 능력을 설명해주는 레온의 목소리와 그 자리에 없었던 다른 교수님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했어.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서임식 때 국왕 전하에게 그 마도구를 공개해버리겠다고 협박하더라고."

"미친!"

생도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라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건 아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국왕에게 찾아간다?

심각한 처벌은 받지 않겠지만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오, 더 나아가 가문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있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데?"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알려도 무시할 게 뻔하니 국왕 전하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대."

"뭐 그런 독한 새끼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어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본다면···."

생도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레온과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던 교수들. 가문에 알리겠다고 노발대발하다 레온과 잠시 면담의 시간을 가지고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문 생도들.

만약 레온에게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국왕에게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면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

"잠깐! 그게 진짜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 자식이 국왕 전하께 그 마도구를 공개해버리면 우리는 어떡해?!"

"에이. 그럴 거면 교수들이나 레온한테 당한 놈들이 괜히 가만히 있겠어? 사고 친 거 묻는 대가로 마도구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식의 협상 같은 걸 했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겠지. 당연한 일이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추측은 한 생도의 반박에 의해 힘을 잃고 말았다.

"협상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록들은 빼고 나머지 사람들에 관한 기록들만 보여주면? 우리가 지금까지 그 놈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그 놈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믿고 아무 것도 안 했다가 만약 마도구를 공개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이라고! 정신 좀 차려!"

"씨발, 그러는 넌 무슨 해결책이라도 있어? 왜 혼자서 분위기를···."

"있어."

"···뭐?"

"우리도 협상하면 돼."

* * *

"그래서 날 불렀다 이 말이지?"

"으, 응."

주변을 둘러본 유성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강의실 안을 메우고 있는 열댓명 정도의 생도들.

가식적인 미소 너머로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굴욕과 분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생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유성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협상이라.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한테 특별한 마도구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교수들과 생도들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 마도구를 사용하느냐의 여부지. 우리는 네가 그걸 공개하지 않고 묻어뒀으면 해."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폭력이라도 휘두를 건가?"

꿀꺽.

'그럴 줄 알았다.'

누군가는 마른 침을 삼켰고 누군가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조금 더 적합한 장소들이 있을텐데 굳이 이런 강의실로 불러서 문까지 막아두고 협상을 하고 싶다라. 내가 보기엔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려는 것 같은데. 아니면 감금인가? 서임식이 끝나고 국왕 전하가 아카데미를 떠나실 때까지 내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차, 착각이야."

"그래? 그럼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길 수 있을까?"

"···그건 안 돼."

"당연히 그러시겠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모습에 주변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모두가 은근슬쩍 무기를 향해 손을 뻗고 마력을 끌어올리며 전투를 각오한 순간, 유성의 입이 열렸다.

"좋아."

"어? 지, 진짜?"

"질 게 뻔한 싸움을 하기도 싫거든."

"그, 그렇지? 하하하!"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무공을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바탕이 되는 것은 레온의 육체.

대련처럼 일대일로 겨루거나 방심하고 있는 놈들에게 기습을 가해 쓰러트리는 것 정도는 가능하더라도 거의 스무 명에 달하는 생도들과 정면으로 싸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플라즈마 도끼 들고 날뛰면 이야기가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누구 하나 죽어나갈 수도 있으니.'

교수들의 영향력과 요 이틀 간 맺은 협상의 내용을 떠올린 유성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고이 접어 머리 한 구석으로 집어넣었다.

"잘 생각했어. 앞으로 누가 귀찮게 굴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아, 장비 새 걸로 바꿔줄까? 이번에 블랙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 하나 생겼는데 나는 원래 쓰던 게 있어서 그냥 보관만 해두고 있었거든? 너 맨날 오크 가죽 장갑 쓰던데 다른 것 좀 써봐. 오우거 가죽 만한 게 없어."

"다 비켜! 레온, 이번 서임식 끝나고 같이 아카데미 바깥으로 놀러 가지 않을래? 내가 아주 죽이는 곳을 알고 있는데."

십년지기 친구라도 된 듯이 친하게 접근해오는 생도들의 모습을 향해 유성은 적당히 웃음을 지어주며 맞장구를 쳐줬다.

모든 것이 잘 풀린 듯한 모습, 그러나 유성의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이 놈들 하는 꼴 보자니 여기서 끝 맺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적당히 맞장구쳐주면서 지내면 앞으로 아카데미 생활은 나쁘지 않을 거야.'

-···유성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 나라면 당연히 끝까지 가지. 나는 내가 싫어하는 놈들이 잘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거든.'

그 한 마디에 레온은 망설임을 접고 결정을 내렸다.

-끝까지 가겠습니다.

'좋아.'

끝까지 가봤자 얻을 건 거의 없다느니,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천년만년 이 몸으로 살 것도 아니고 퀘스트가 끝나면 돌아갈 처지, 레온의 인생인 만큼 마무리 정도는 레온이 결정하는 게 옳았다.

탕!

발을 굴러 모두의 시선을 집중 시킨 유성은 구석에 있던 한 생도를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생도들은 그 생도가 레온이 마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이용해서 교수들과 생도를 협박했으며, 협상을 하자는 의견을 낸 생도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니스, 넌 나가. 뒤지기 싫으면."

"···고맙다."

끼익!

데니스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유성은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혹여 무기라도 꺼내는 것이 아닐까 긴장했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와인?"

붉은 빛의 액체와 뚜껑을 여는 순간 풍기는 시큼한 냄새.

어디를 어떻게 보더라도 와인이다.

술이라도 같이 마시면서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자는 건지, 그 전에 아카데미 내부에 술을 어떻게 반입한 건지 의문을 드러내고 있는 생도들을 향해 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요원을 도와주고 얻은 거야. 53년산 아르미안 와인이라고 했던가? 딱히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내다 팔기에는 우리 세계의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 이상함을 느끼고 추적해올까 보관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네."

촤악!

"읏?"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난데없이 와인을 뿌리는 모습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유성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밑작업이지. 아무리 막 나가는 놈들이라도 맨정신으로 사고를 쳤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조금 떨어지잖아? 술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면 적당한 이유가 되겠지."

"그게 무슨 말···"

촤악!

"큿!"

"이렇게 대놓고 옷에 와인이 묻어있으면 조금 부자연스러운가? 뭐, 교수랑 다른 생도들이 평소 너희들의 행실에 대해 증언을 해줄 테니 어떻게든 되겠지."

촤악!

"···이 새끼가 미쳤나."

와인으로 흠뻑 젖은 생도가 욕지거리를 내뱉고 다른 생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기는 했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가락의 때 만도 못하게 여기던 놈에게 이런 굴욕을 받고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수양이 깊지 않았다.

"야, 둘러싸."

"싸우게? 마도구 공개한다?"

"하! 공개? 여기서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앞으로 버리지 기분 맞춰주며 아카데미 생활할 거 생각하자니 속이 터져나갔는데 잘 됐네. 협상은 무슨, 넌 오늘 뒤지게 맞는 거야. 그게 싫으면 마도구를 내놓고."

"흐음."

콧노래를 부르며 강의실 안을 거닐던 유성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싫다면?"

"···이렇게 되는 거지!"

갑작스럽게 날아온 주먹이 유성의 안면을 후려쳤다.

단 일격에 뒤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본 모두가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탁! 탁! 탁!

안면을 맞은 유성은 그대로 근처에 있던 책상을 밟고 하늘 높이 도약한 다음, 벽을 차고는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작용 반작용의 모습을 완전히 무시하는 움직임에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유성은 눈을 감고 오래 전 군대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유성이 복무한 부대는 부조리나 폭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던 부대였다.

후임이라는 이유로 웃기지도 않는 규칙을 지켜야 했고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폭력을 당했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당연한 듯이 악습이 유지됐다.

동기 중 한 명이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 똑바로 안 하냐?'

뺨을 톡톡 두들기는 정도의 타격.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끔찍했다.

'커헉!'

마치 헤비급 복서의 펀치에 맞은 것 마냥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을 한 동기는 그대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처절하게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과정에 팔에 걸린 TV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 후의 일은 간단했다.

선임과 동기는 곧바로 달려온 행보관에 의해 끌려갔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선임들이 대거 영창을 가거나 휴가가 잘리는 사태와 함께 대부분의 악폐습이 사라졌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콰앙!

"크학!"

고통 끊기와 견뎌내기로도 없앨 수 없는 둔중한 충격.

눈 앞이 흐려지고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타고 올라왔지만 유성은 웃었다.

"···이게 대체 무슨?"

머리 위에는 화려한 관을 쓴 채, 여러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인을 확인한 유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거 게임 아님

032화 아카데미

양지에 있다고 해서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높은 곳에 있다고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저 관여해봤자 득 될 게 없기에, 얽히면 귀찮기에 알고서도 모르는 척 넘기는 것 뿐.

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렴, 한창 때의 피가 끓는 한창 때의 소년소녀들을 한 곳에 모아 놨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는가. 아카데미에서 어느 정도의 괴롭힘이나 차별, 편가르기 같은 일이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이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생도들이 술에 취해 날뛰다 아무 죄 없는 생도를 건물 밖으로 떨어트려? 그것도 졸업식 날? 그럼 평시에는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만취한 생도들이 다른 생도를 창 밖으로 던져버린 초유의 사태를 무려 국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직접 목격해버린 상황. 당연히 그 날의 분위기는 바닥을 쳤고 졸업식과 서임식이 끝나자마자 국왕은 이 사태에 대해 엄밀한 조사를 명했다.

"레온! 그 새끼가 연기한 거에요! 저희는 함정에 빠진 거라구요!"

"그, 그러니까 저희가 평소에 걔를 괴롭힌 것도 맞고 그 날 거기로 부른 것도 맞아요, 맞기는 한데···, 아니, 그 날 있었던 일은 별개라니까요? 저희가 한 게 아니에요!"

가해자들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지난 1년 간 괴롭혔던 생도가 며칠 전부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생도들을 전부 패고다녔다.

그런데 그에 당한 피해자들과 교수들은 그 생도에게 협박을 당해서 조용히 있었다.

자신들은 협상을 하고자 불렀는데 갑자기 술을 뿌려서 홧김에 주먹 한 방을 날렸는데 탁자와 벽을 박차고 원래 있던 위치에서 완전히 반대편에 있던 창 밖으로 전력을 다해 몸을 날려서 떨어졌다.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들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횡설수설 그 자체, 그에 반해 피해자와 다른 생도, 교수들의 증언은 간결하고 명확했다.

"레온이요? 비록 성취는 대단치 않지만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성실함을 가진 생도지요.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부족한 형편에도 싫은 내색 한 번도 안 하고 항상 단련에 힘쓰는데 그만한 생도가 없습니다."

"그 놈들 아주 못 된 놈들이에요. 뭉쳐 다니면서 다른 애들한테 시비 걸고 다니지, 틈만 나면 바깥으로 놀러 나가서 저럴 바에는 뭐 하러 아카데미에 들어왔나 소문이 자자했어요. 언젠가 사고 한 번 칠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설마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이야."

교수들과 생도들은 입을 모아 레온이 국왕과 국가에 깊은 충성심을 가졌으며 학업에 힘쓰는 모범적인 생도라 칭찬했고,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을 향해서는 평소에도 행실이 좋지 않으며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문제아들이라고 비난했다.

거기에 그들에게 당한 증거라며 적지 않은 수의 생도들이 부상을 보여줬으니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하 17명의 생도는 다른 생도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며 학업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고, 만취한 상황에서 무고한 생도를 힘으로 겁박해 창 밖으로 던지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벌인 바, 그 죄를 물어 피해자인 레온 생도에게 금화 1,000개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이며 아카데미의 퇴학과 징역 3년 형을 명한다."

"아, 안 돼요! 그러면 저 아버지한테 맞아 죽는단 말이에요!"

"판사님, 한 번만 봐주세요!"

"판사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판사님!"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

본래 이렇게까지 가혹한 판결이 내려지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우연히도 가해자들의 가문의 세력과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일치단결해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고 국왕이 이번 재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가 겹쳐져 극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형이 내려진 날 저녁, 빈 강의실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전부 약속을 지켰다. 이제는 네가 약속을 지킬 때다."

"약속이라."

유성은 주변을 둘러싼 교수들과 생도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당당한 척 필사적으로 연기하고 있지만 그 너머로 감춰진 두려움과 치욕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번 정도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애간장을 태우고 싶었지만 펠릭스에게 허무하게 죽을 뻔했던 경험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 펠릭스 교수님의 가르침을···.'

콰직!

건내기가 무섭게 부서진 스마트폰.

그걸로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는지 한 노교수가 손짓을 하는 순간 스마트폰은 불길에 휩싸여 한 줌 재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속으로 할부도 끝나지 않았던 스마트폰의 명복을 빌어준 유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역시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이것과 같은 또 하나의 마도구가 있습니다. 만약 협상이 지켜지지 않거나 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망, 혹은 행방불명 될 시, 누군가가 국왕 전하에게 다른 마도구를 전달할 겁니다."

"우리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 이왕 하나 없앤 거 나머지도 그냥 깔끔하게 다 없애버리는 것이···."

"못 믿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교수님들이 저 같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크흐흠!"

상대방에게 목줄이 쥐어진 상황.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한 발자국 물러나며 최후의 선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대신 그것을 이용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우리 역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와 네 가문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 너야말로 약속을 지키거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로군요."

"···칫."

눈싸움을 벌이던 펠릭스가 혀를 차고 몸을 돌리자 교수들과 생도들 역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 강의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나가고 홀로 남은 유성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폈다.

"으음! 이걸로 대충 끝난 건가? 네가 보기에는 어때? 만족스러워?"

-······.

레온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생도들을 두들겨 패길래 아카데미 생활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신비한 마도구를 이용해 교수들과 생도들을 협박해 상황을 뒤집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생도들을 골라내 보라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이름을 불렀더니만 그 놈들마저 아카데미에서 내보내버렸다.

그 와중에 두둑한 배상금과 교수들의 평가 보장,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에 절대로 딴지를 걸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은 덤이다.

-···만족스럽습니다. 정말로, 만족스럽습니다.

지난 1년 간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유성이 일을 벌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느꼈고 말했던 것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슴이 벅차 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그렇기에 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클리어 과정을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운명 개변률 169.9%, 이차원 스킬 사용률 22.4%, 이차원 아티팩트 사용률 19%]

[최종 평가 SSS랭크]

[놀랍습니다! 한유성님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본 클리어 보상 : 100,000 카르마, 제국 공용 금화x30, 하급 마력석x3, 베르문드 비전 마나 연공법 전반부]

[추가 조건 클리어 보상 : 제국 공용 금화x20, 하급 마력석x2, 베르문드 비전 마나 연공법 후반부]

[SSS랭크 클리어 추가 보상 : 2,000,000 카르마]

[잠시 후 본래 세계로 귀환을 시작합니다]

"이제 가봐야겠네."

-정말로 가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이대로 계속 네 몸을 차지하고 살았으면 좋겠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는 합니다.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저보다 유성님이···.

"그럼 다시 퀘스트를 걸던가."

-하하, 그러고 싶지만 저도 어떻게 도움을 정할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다. 대신 다시 한 번 절박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그 퀘스트란 걸 요청할 수 있을 지 모르죠. 그 때가 된다면 유성님이 또 도와주러 오길거라 믿겠습니다.

"남이 먼저 채가지 않으면 얼마든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프로그램 기동]

[아리아드네의 실 추적 완료]

[영자 이동을 실시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 * *

"정당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건데 괜히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만드네."

유성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콧잔등을 긁었다.

그 동안 몇 개의 퀘스트들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의뢰인들과 감정적으로 교감을 나눴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장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괴물로부터 살아남는 것 만으로도 벅차 티격태격대기만 했던 아리스, 대화를 나눌 시간은 많았지만 정작 나눈 대화는 얼마 되지 않는 해천경,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헤어진 필립과 달리 레온은 그가 처한 상황에 꽤나 진지하게 몰입했고 심심할 때마다 대화를 나눴던 탓에 어렴풋한 친분이 생겼다.

살짝 아쉬움이 남는 느낌이랄까?

"후우, 일단 좀 쉬고 보상 확인은 내일 하는 걸로···."

침대로 몸을 던지기 위해 몸을 돌린 유성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얕은 이불 한 장을 뒤집어 쓴 나신의 남성과 여성이 서로 뒤엉킨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주머니를 뒤적이던 유성은 자신의 스마트폰이 이세계에서 잿더미로 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무심결에 질문을 던졌다.

"저 혹시 오늘이 몇월 며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식을 벗어난 상황에서 상식 밖의 질문을 받은 탓일까.

남자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머리 맡에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는 날짜를 말했다.

"···3월 28일이요."

"6일? 비율로 따지면 거의 1:1 인가? 대체 시간 비율이 어떻게 책정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난이도나 세계관에 의해서 결정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행히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만약 시간 비율이 극단적으로 차이 나게 된다면···."

"저기···."

"아, 죄송합니다. 하던 거 계속하세요."

유성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꺄아아아악!"

뒤에서 흉흉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만큼 유성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모텔 밖으로 나온 유성은 주머니를 뒤적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나 땡전 한 푼 없었지?"

레온의 몸으로 지내다 보니 지구의 자신이 빈털털이 신세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퀘스트로 수많은 금화를 얻기는 했지만 지구에서 금화를 내밀며 계산을 요구했다가는 대번에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테고 현금화를 하는 것도 금은방의 위치를 찾고 금화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교차검증하는 등의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당장 어딘가에 묵을 만한 돈도 없고 정보를 조사할 수 있는 스마트폰조차 없었다.

"어이, 거기 가는 아저씨."

"크, 크흐흠."

"지금 헛기침한 아저씨. 그래 지금 돌아본 아저씨. 혹시 돈 좀 있어?"

"···뭐, 번외 퀘스트라 생각할까."

행인들을 상대로 시비를 걸고 있는 불량배들을 발견한 유성은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유성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호텔에서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이거 게임 아님

033화 졸속행정

현대에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사냥하는 헌터가 등장하는, 이른바 헌터물들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개념들이 있다.

헌터들의 강함을 측정해 등급으로 나누는 랭크 제도, 민간인들의 생활권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몬스터들의 서식지, 현대 군사력을 능가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제에 순응하는 능력자들, 흉악한 살상 병기를 아무렇지도 들고 다닐 수 있는 분위기 같은 것들 말이다.

소설로 볼 때는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굳이 물고 넘어지지 않았다. 아무렴 주인공이 몬스터들 때려잡고 강해지는 걸 봐도 바쁜 판국에 그런 걸 볼만한 여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디테일을 챙긴답시고 그런 아무래도 좋은 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묘사했다가는 오히려 좋지 않은 평가를 들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유성은 소설에서는 묘사되지 않던, 그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직접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띵동!

"351번부터 360번까지 들어오세요!"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우르르 일어나 강당 한 쪽에 마련된 능력 측정소로 이동했다.

능력 측정소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적당히 라인을 쳐서 분리한 장소에 역기나 악력기 같은 것을 놓아둔 허접한 장소에 불과했고 그 외에 능력 분류소나 세부 측정소 같은 것들도 전부 비슷한 처지였다.

"뭔가 상상과 다르네."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내뱉은 한 마디가 현재 유성의 심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최소한 손을 얹으면 상태창처럼 능력치를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기계라던가, 정말로 체계적이고 정확한 테스트를 통해 능력을 측정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눈 앞에 펼쳐진 건···.

'병무청에서 신검 받는 기분이랄까? 아니, 그냥 기분이 아니라 그게 맞는 것 같은데?'

대기자들 중 여자들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신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움직임을 보이는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띵동!

"다음 361번부터 370번까지 들어오세요!"

주머니에서 362번이라고 적혀있는 쪽지를 꺼낸 유성은 능력 측정소라는 팻말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362번, 한유성 씨 본인 맞으시죠."

"예."

"본인 확인되셨구요. 앞에 있는 바벨을 들어 올리시면 됩니다."

동네 체육관이 아닌 올림픽에서나 볼 수 있는 바벨에 유성은 무심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무게가 얼마나 되나요?"

"300kg 정도 될 걸요?"

"세계 신기록이 200kg 중후반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300kg을 들라구요?"

"그냥 계약자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는 과정이니까 일단 시도해보고 안 될 것 같으면 안 되겠다고 말해요. 이거 실패해도 2차, 3차 측정이 있으니까 그 쪽으로 가시면 되요."

"자세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제한 같은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마력을 사용하면 안 되고 순수하게 힘만을 이용해서 들어야 한다거나."

"애초에 평범한 인간은 절대 들 수 없는 건데 순수하게 힘으로 들든 특이한 능력을 사용해서 들든 무슨 상관이에요."

귀찮음이 물씬 느껴지는 표정과 목소리.

그야말로 모범적인 공무원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앞으로 나가 양손으로 바벨을 단단히 잡았다.

"흡!"

양팔에 힘을 주자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 바벨은 이내 완벽하게 머리 위로 올라갔다.

세계신기록을 크게 갱신하는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아쉽게도 테스트를 받겠다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과 공무원들에게는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네, 확인되셨구요. 2차, 3차 측정은 패스하시고 바로 능력 분류소로 가시면 됩니다."

"저, 이게 끝인가요?"

"예. 끝입니다. 다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이동해주세요."

"······."

뭔가 배신 당한 기분.

계약자들을 사칭하는 이들을 빠르게 구별해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이어지는 테스트 역시 기대를 배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권법에 덩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요? 음, 권법은 무공으로 분류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덩굴을 만들어 내는 건 마법인지 이능인지 모르겠네. 그냥 복합계로 분류할 건데 괜찮으시죠?"

"네, 혈압, 심폐 기능, 시력 전부 이상 없으시구요.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뭔가 능력을 통제하기 힘들거나 이상한 충동이 느껴진 적 없나요? 없으시면 이동해주세요."

혹여 유저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유저인 자신을 구분해낼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 허무해질 만큼 테스트는 무성의, 무관심으로 첨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첫 테스트를 시작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유성은 모든 테스트를 끝마치고 자신의 얼굴이 박혀있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예. 계약자 면허증 발급 완료 되셨구요.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뭔가 되게 성의 없다고 해야 하나, 엄청 허술하네요."

통제를 맡고 있던 청년은 유성이 무심코 토해낸 말을 듣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실제로 초기에는 높으신 분들도 와서 이게 뭐냐고 한 두마디 해서 뭔가 좀 있어 보이는 과정이 추가되기도 했는데 계속 항의가 들어와서 결국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항의가 들어왔다구요? 왜요?"

"현장을 모른다 이거죠. 검사를 받겠다고 하루에 찾아오는 사람들 숫자가 몇 명인데 그 사람들 하나하나 세심하게 테스트하고 측정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어요?"

계약자 확인소에는 계약자들만 검사를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계약자인지 아닌 확인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계약은 맺지 않았지만 뭔가 초인적인 능력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기에 최대한 순환률을 높여야만 했다.

"계약자들의 힘이나 능력을 측정하는데 적합한 기준점이 없다는 것도 문제죠."

힘이 센 능력자는 속도가 빠른 능력자보다 강한가?

총을 다루는 능력자는 냉병기를 다루는 능력자보다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파괴에 특화된 능력과 회복에 특화된 능력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가?

같은 계통의 능력끼리 나눠 고저를 가리려 해도 어느 정도 표본이 있어야 하는데 정확한 표본을 측정할 시설이나 기구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더 골치 아픈 건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게 한국 하나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나라만 하더라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수많은 나라들이 전부 자신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내세우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골치 아픈 상황.

결국 각국의 지도자들은 화상회의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거쳤고, 일단 계약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시험과 능력의 분류만 확인하는 간단한 약식 테스트를 세계 공통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건 그나마 양반이에요. 더 심각한 거 알려드릴까요?"

"그게 뭔데요?"

"계약자들이나 몬스터들을 부르는 호칭이요. 근접 계열 계약자를 누구는 무인이라 부르는데 누구는 기사라 불러야 한다던가, 똑같은 몬스터를 두고 누구는 자이언트 터틀이라 하는데 누구는 현무라 한다던가, 심지어 계약자를 부르는 호칭도 능력자, 각성자, 신인류 등···."

"아, 대충 알겠습니다."

청년의 말을 끊고 강당 바깥으로 나온 유성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네."

몬스터들이 어떤 미지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 지 모르니 방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던가, 몬스터들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분노한 신이 내린 징벌이며 계약자들은 악마의 주구들이라는 등 큼직큼직한 이슈들 말고도 이런 세세한 부분들에 있어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퀘스트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이세계에서 보냈던 유성은 느끼지 못했지만 몬스터들의 등장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 보내야 했던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큰 혼란을 겪어야 할 처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성의 결론은 간단했다.

'적당히 혼란이 수습될 때까지 퀘스트나 하면서 시간 때우면 되겠지.'

그야말로 모범적인 유저의 자세.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고글을 착용하고 이세계로 떠나고 싶었지만 유성은 그런 충동을 억누르고 지나가는 택시에 탑승했다.

'일단 안전한 거주지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지구와 이세계의 시간 비율은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어제처럼 낯선 남녀의 행복한 시간에 난데없이 끼어드는 불청객이 되고 싶지 않다면 새로운 집을 마련해야만 했다.

'일단 돈을 버는 건 어렵지 않다. 이번 퀘스트를 통해 얻은 금화를 팔면 되니까.'

함유된 금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얼마 되지 않겠지만 이건 지구가 아닌 이세계의 금화다.

일부의 몬스터들이 떨어트리는 이세계의 동전이나 병장기 같은 것들이 수집가나 사학자들에게 엄청난 값어치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냥 내다 팔면 거금을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과정이다.

갑작스럽게 금화 주머니를 내놓으며 팔려고 한다면 엄청난 관심이 쏟아질 게 분명하다.

그래서 유성은 최소한의 보험을 마련하고 싶었다.

관심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마른 하늘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닌, 그럴듯한 중간 과정을 만들 생각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군인들과 그 근처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

택시에서 내린 유성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바리케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정지! 여기는 출입 통제 구역입니다. 물러나십시오!"

한국은 여러가지 조건이 겹쳐 전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적은 피해로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아냈지만 그렇다고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산이나 험지, 인구 밀도가 적은 마을이나 소도시 등 적지 않은 영토를 몬스터에게 빼앗겼고 시가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숨어든 몬스터들 때문에 서울에서도 아직 완벽하게 탈환하지 못한 곳이 존재했다.

지금 유성이 찾아온 곳이 바로 그런 구역 중 한 곳이었다.

"계약자는 출입할 수 있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아, 계약자십니까?"

현대병기는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 만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었다.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몬스터들부터 도심에서 고화력 병기를 사용 시에 따라올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정부에서는 계약자들이 금지 구역에 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마침 몬스터들의 시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잡동사니들이 엄청난 값어치에 거래되고 있기도 했으니, 계약자들에 대한 데이터도 얻고 몬스터들도 처리하면서 경제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일석삼조의 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진짜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렇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그들을 사냥하는 헌터들이 등장해도 대한민국은 도검 및 총포 관련법의 제한으로 무기의 소지가 허락되지 않는 나라였다.

자랑스러운 k-방어의 현주소였다.

이거 게임 아님

034화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물론 무기 관련 법안에 대해 아예 손을 대지 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꽉 막혔다고 한들 당장 몬스터가 나타나 인명을 살상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데 무작정 무기 소지를 금지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무기와 관련된 법안이 개정되지 않은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기 소지와 사용을 허가하겠다니, 그러다가 도심 한 가운데서 칼과 총으로 무장한 미치광이가 날뛰면 어떻게 할 겁니까!"

"범죄 이력과 정신 감정을 통과한 계약자들에게만 무기 소지 및 사용 허가증을 발급하고 평상시에는 인근 경찰서에 맡겨두다 필요할 때만 대여해주면 됩니다. 기존에 있던 법안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지금 장난해요? 당장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는데 어느 세월에 한 사람 한 사람 검사하고 허가증을 발급합니까? 그리고 계약자만 무기를 소지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또 뭡니까? 그러면 일반인은요?!"

"식칼도 아니고 검이나 도, 창 같은 무기를 어떻게 조달할지, 일단 생산 관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탁상행정과 관료제의 시너지가 만들어낸 기적적인 콜라보!

물론 이건 높으신 분들의 사정이었고 현장의 사람들은 멀리 있는 법보다 당장 코 앞에 있는 몬스터들이 무서웠기에 자구행위니, 생존권이니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어떻게든 무기를 구해서 들고 다니기는 했다.

문제는 그 무기란 것들의 상태였다.

"저기 있는 사람들처럼 뭐라도 들고 오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바리케이트 근처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손에는 빠짐없이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다만 그 무기들이 식칼, 쇠파이프, 망치 같이 일상에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무기로서의 기능은 있지만 진짜 무기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지는 그런 애매한 물건들.

소총으로도 쓰러트리기 힘든 몬스터들을 조잡한 무기를 잡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쉰 군인이었지만 맨손에 비한다면 충분히 선녀라고 할 수 있었다

"맨손으로 충분해요. 전 무기가 필요 없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나간 사람들 중 돌아온 사람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괜찮으니까 그냥 열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걱정해주는 군인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유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잠깐!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그런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동행해도 되겠나?"

당구채를 들고 있는 근육질의 중년인과 자신과 동갑으로 보이는 목검을 든 금발의 서양인, 그리고 여고생으로 이루어진 세 명의 일행.

"그거야 당연히···."

단번에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던 유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키메라, 비밀 요원, 아카데미의 생도들과 싸우며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자신의 육체가 아닌 타인의 육체로 경험한 것이지 지구에서의 실전 경험은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때 오크들과 싸운 것이 전부다.

금화와 마력석을 팔 생각만 하느라 잊고 있었지만 지금 자신은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 곳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 지도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과연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옳은 행동일까?

'정신 차려. 이건 퀘스트가 아니야. 이세계가 아니라 지구라고.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짝!

양 뺨을 가볍게 두들겨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은 유성은 남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3명이나 있잖아요. 왜 굳이 저를 따라오시려는 거죠?"

"그야 뭐, 불안해서 그렇다네."

바리케이트 인근에 모인 사람들처럼 몬스터의 사체나 소지품들이 비싼 값에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한 탕 하려는 생각으로 온 사람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 조잡한 무기를 들고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적었고 무사히 귀환한 사람들은 더 적었다.

"혼자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사람을 좀 모아봤는데 그런다고 없던 용기가 생기지는 않더군. 들어가자니 무섭고 돌아가자니 아쉬워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혼자서도 망설임 없이 들어가려는 자네를 보고 이 때를 놓치면 기회가 없을 것 같더군. 괜찮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지 않겠나?"

"도움이라."

'이들이 사실 강도이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나를 유인해서 죽이려 들 가능성은···.'

유성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을 머리 속 한 구석에 집어넣었다.

본래 뭔가를 의심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퀘스트를 하면서 온갖 극한 상황을 겪다 보니 편집증을 의심할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망상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의심을 가라앉힌 유성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협상에 임했다.

"어떤 종류의 도움을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목숨을 구해 달라는 부탁이면 사람을 잘못 찾으셨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네. 우리들은 몬스터들과 싸워보기는커녕 애초에 몬스터를 현실에서 본 경험도 없네. 실력보다도 자신감이 부족한 상황이지. 그저 몬스터라는 것과 그것과 싸우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게 격려해주거나 싸움을 약간 도와주는 것으로 충분하네."

"전리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여러분이 일방적으로 저를 따라오는데 전리품을 동등하게 나누기는 뭣 하지 않습니까?"

"4:6. 자네가 4할, 우리는 세 명이니 한 사람 당 2할 씩 가져가는 게 되겠군."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만족스러운 조건이었겠지만 지금 유성은 퀘스트로 얻은 보상을 사냥을 통해 얻은 전리품으로 위장하기 위해 온 상황. 수수료라 생각하고 넘어가려 해도 절반 이상을 넘겨주는 건 너무 아까웠다.

"7:3. 제가 7입니다."

"혼자서 7이라니.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 아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가시면 됩니다. 아쉬운 건 제가 아니라 그 쪽이니까요."

8:2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너무 극단적인 경우에는 판이 깨질지 몰랐고, 만일의 경우 자신이 정당한 과정을 거쳐 금화와 마력석을 얻었다는 증인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조금 더 쳐줬다.

"흠, 6:4는 어떤가?"

"7:3."

"6.5:3.5은···."

"7:3."

"하아, 좋네. 7:3로 하지."

7:3.

그나마도 세 명이서 나눠야 하니 유성과 다른 사람들의 전리품은 7배의 차이를 가진다. 거부감을 느낄 만도 했지만 일단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라 여긴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가시죠."

"그 전에 통성명부터 하지. 나는 서창훈이라고 하네. 형이든 아저씨든 편하게 부르게."

서창훈의 소개가 끝나자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도 입을 열었다.

"칼 로저스. 로저스라고 불러."

"이하영이라고 해요."

"한유성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에 창훈 아저씨와 얘기한 것처럼 제가 여러분들을 안전하게 보호해드릴 수 있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노력해볼 테니 귀환할 때까지는 제 명령에 따라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유성이 걸음을 내딛자 망설이던 일행은 곧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깨진 창문들과 부서진 보도블록, 갈라진 아스팔트, 곳곳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와 물건들.

전기가 끊긴 것은 아니었기에 불이 들어온 건물이나 아련하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상가가 적막함을 달래줬지만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체 모를 공포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실감넘치는 아포칼립스 영화라도 보는 기분이군."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로저스의 목소리에 유성은 말을 받아줬다.

"어느 나라 사람이야?"

"미국."

"미국인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관광하러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이 전부 끊기는 바람에 갇혀버렸어. 돈은 없고 물가는 나날이 하늘로 치솟는데 굶어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나. 괴물이라도 잡아서 돈 벌어야지."

관광객에서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로 전직해버린 로저스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유성은 고개를 돌려 이하영을 바라봤다.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저만 살아남았어요. 갈 곳도 없고, 사 먹을 돈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어서 생활비 벌러 왔어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교복 입고 있는지, 여고생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잖아요."

틱틱대는 이하영의 태도에 유성은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였다.

괜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느니, 힘들었겠다느니 어설프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척을 하는 것보다 그냥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게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무기가 있는데 너는 무기 없어?"

"오빠도 무기 없잖아요."

"나는 무기 없이 싸울 수 있거든. 너도 무기 없이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딱!

이하영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희미한 바람이 일행을 감싸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오케이. 이해했어. 어느 정도로 다룰 수 있지?"

"어느 정도요?"

"단순히 바람을 부르는 게 전부는 아닐 거 아니야. 정확히 어디까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냐고."

"···실험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몬스터가 나오면 한 번 시도해 봐.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날린다던지, 얼굴 근처의 공기를 조작해서 호흡을 막는다던지,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은 내가 알려줄 테니까."

그런 식으로 능력을 쓸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던 이하영의 안색이 살짝 하얗게 변했다.

"···예."

"큐대와 목검이라, 창훈 아저씨와 로저스는 창과 검이 무기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네. 원래는 좀 폼나는 무기를 구하고 싶었는데 이것 말고는 구할 수 있는 게 없더군."

"남은 돈 다 털어서 샀지. 이 놈의 나라는 왜 이렇게 빡빡해? 총이야 그렇다 쳐도 검도 안 팔아? 그나마 구한 게 겨우 목검이라니."

'전위 2명에 후위 1명이라. 나쁘지 않네.'

자신은 전위로도, 후위로도 나설 수 있으니 적당히 상황에 맞춰 포지션을 바꾸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구만."

"뭐가 다른데요?"

"바리케이트를 넘어가면 바로 괴물들을 볼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한참을 걸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군. 이러다가 허탕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럴 리는 없으니까 걱정 마시죠."

만약 오늘 몬스터를 만나지 못한다면 가시덩굴 스킬을 이용해 자작극을 벌여서라도 전리품 세탁 과정을 거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거리도 생각보다 깨끗한 걸 보면···."

쐐액!

'머리. 가슴.'

선두에 있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작은 도끼.

수라감각도를 통해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해낸 유성은 무너진 상가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크들을 발견하고 양주먹을 들어 올렸다.

"일단 가볍게 몸부터 풀어보죠"

거세게 뛰는 심장과 박동에 따라 전신을 순환하는 마력.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이거 게임 아님

035화 오크 전사

계약자.

사전적인 정의는 이름 그대로 계약을 맺은 사람을 부르는 단어다.

몬스터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각성자나 능력자가 아닌 계약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계약자들은 전부 어떠한 존재들과 계약을 맺었고 그들의 힘과 능력을 빌려온다.

누구와 계약을 맺었느냐에 따라 무인(武人)이 되고 마법사가 되기도 하며 인간이 아닌 존재와 계약을 맺어 이질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이능력자들도 존재한다.

창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여러가지 물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창훈이 굳이 당구대를 들고 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사일창객이 더 나은 무기를 구할 수 없었냐며 타박합니다]

그가 계약을 맺은 존재는 창을 사용하는 무인이었다.

점창파의 절학인 사일검법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문창법인 사일창법(射日槍法)을 창안하고 무림에 이름을 알렸다고 하는데,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사일창법을 펼치는데 가늘고 가벼운 창이 필요하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쉿!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쏘아진 당구대.

눈을 꿰뚫을 생각으로 날린 공격이었지만 현실은 눈가에 약간의 상처를 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취익!"

서창훈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오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계약을 맺어 무공과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됐을 때만 하더라도 모든 게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즐겨 읽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고 손쉽게 몬스터들을 쓰러트리고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몬스터와 마주한 순간, 그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덜덜.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다리.

설령 그것이 인간이 아닌 존재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생명을 노린다는 게, 자신의 생명이 노려진다는 게 이렇게 두려운 일인 줄 몰랐다.

계약을 통해 내공과 창법, 보법, 심법을 얻었지만 그것이 전부다.

창법을 얻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경험은 얻지 못했고, 보법은 얻었으되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을 앞에 두고 물러서지 않을 담력은 얻지 못했으며, 심법은 얻었으되 내공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내공의 힘과 사일창법의 묘리로 어떻게든 공격을 걷어내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초보자용 몬스터 주제에 어딜 감히!"

성기사와 계약을 맺은 로저스는 은은하게 빛나는 검을 휘두르며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무기의 차이 때문에 결정타를 넣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줄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해 서창훈이 무심코 시선을 돌린 순간 오크가 눈을 붉게 물들이며 달려들었다.

"끼이이익!"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도끼를 보며 죽음을 직감한 서창훈은 무심코 질끈 눈을 감았다.

촤악!

"움직여요!"

처음에는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 줄 모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서창훈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 뜨고 움직이라구요!"

종이 한 장 차이로 정수리 앞에 멈춰있는 도끼.

뒤늦게 오크의 팔뚝을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는 덩굴을 발견한 서창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는 그대로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일수초현(日輸初現).

움직이지 않는 목표에 공격을 명중 시키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피거품을 게워내고 있는 오크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창훈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도와준 유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자신의 상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 *

서창훈의 앞에 있던 오크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유성은 연이어 덩굴을 휘둘러 로저스와 싸우고 있는 오크의 발목을 낚아 채 그대로 넘어트렸다.

"인간! 감히!"

다른 곳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로워 보이는 분노한 것일까, 아니면 여럿이 동시에 덤비고 있음에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한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오크들이 더 거세게 달려드는 것 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거센 공세 앞에서도 유성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느리다.'

99의 능력치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오크 정도는 여유롭게 상대하고도 남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민첩이 27일 때도 속도에서 밀린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는데 거기서 4배나 뛰었었는데 맞는 게 이상하지.'

민첩 수치가 4배로 올랐다고 4배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력, 반응 속도, 사고 속도 등 속도에 관련된 모든 능력들이 유의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갔다.

굳이 수라감각도를 사용하지 않아도 오크 정도의 공격은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을 정도.

'민첩은 대충 감 잡았고.'

콰직!

"뀌익!"

섬전보를 사용해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 들어가 바위 뚫기를 내지른다.

망치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움푹 파여 뒤로 날아가는 동료의 모습에 잠시 정신이 팔린 오크를 향해 유성은 연이어 살수를 펼쳤다.

가볍게 내지른 안개차기가 다리뼈를 부러트리고 바위뚫기가 연약한 살점을 뚫고 목젖을 꿰뚫는다. 그러나 순식간에 2마리나 되는 오크를 제압한 유성의 안색은 미묘하게 굳어있었다.

"잘 안 죽네."

죽음에 가까운 중상을 입기는 하더라도 바로 죽지는 않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지간히 상식 밖의 힘이 아닌 이상, 단순한 타격으로 무언가를 단숨에 때려 죽인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살상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주먹이나 발차기보다 무기를 드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조건이었다.

우득!

안으로 들어가 고목 비틀기로 순식간에 목을 꺾어버린다.

암월 16식은 격투기나 무술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보위대의 살인기술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다면 생명을 거두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후, 다친 데 없지?"

"예, 예!"

틱틱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차렷 자세로 대답하는 이하영을 바라보며 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달려드는 오크들로부터 지켜줬더니만 왜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몬스터를 처음으로 봐서 충격을 받았나?'

대충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멍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창훈을 향해 말했다.

"왜 그렇게 봐요?"

"자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서 놀라고 있었네."

"너튜브에 나온 사람들에 비하면 택도 없는데 괜히 띄워주시긴. 그리고 절 보고 감탄할 시간이 있으면 반성을 하세요. 코 앞에 적이 있는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어떻게 합니까?"

"미안하네. 실전은 처음이라 당황했어. 앞으로는 주의하겠네."

고개까지 숙이며 사과하는 사람을 타박하기 뭣했던 유성은 로저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싸움에서 유일하게 1인분 역할을 한 것을 칭찬해줄 생각이었지만 죽은 오크를 내려다보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지 모르게 불길함이 느껴졌다.

"음, 가능."

"······."

대체 뭐가 가능하다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던 유성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로저스를 무시했다.

"저,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몸 어딘가에 마력석이라는 게 있다는 글을 봤는데 해부를 해야 하나요?"

"그거 오크한테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이건 그냥 시체를 갖다 팔아야 해."

"그, 그럼 저희가 들고 가야 하나요?"

"으음, 이럴 줄 알았으면 트럭이라도 들고 오는 건데."

"그냥 버리죠."

"기껏 잡은 걸 그냥 버리자고?"

황당한 시선을 보내오는 두 사람을 똑바로 응시하며 유성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알아봤는데 평범한 오크는 마력석도 없고 사체도 특별히 활용할 구석이 없어서 잘 팔리지도 않고 가격도 싸더라구요."

"그래도 팔 수 있는 거 아닌가?"

"고작해야 오크 한 마리 잡고 돌아가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저, 저는 이제 돌아가고 싶은데요···."

약한 소리를 하는 이하영의 모습에 유성은 필사적으로 설득을 이어갔다.

금화와 마력석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몬스터를 찾아야 하는 유성은 고작해야 이것으로 사냥을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몬스터와 싸우는 것에도 익숙해져야죠. 이번에는 다행히 제가 있어서 도와드렸지만 다음에는 제가 도와줄 수 없잖아요. 앞으로 여러분끼리, 혹은 혼자서도 몬스터들과 싸우려면 더 많은 실전을 경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창훈과 이하영은 계속해서 사냥을 이어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강력한 존재에게 보호 받으면서 안전하게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의 자신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것 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일단 무기부터 바꿔볼까요?"

* * *

전투 횟수가 늘어날수록 일행은 첫 전투에서 보여준 어리숙한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빠른 속도로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이들은 초인(超人)이었다.

내공과 신성력, 마력같이 초월적인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과 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던만큼 전투 경험이 쌓이고 공포와 망설임이 줄어들자 오크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쾅! 쾅!

로저스가 전신에 신성력을 두르고 오크들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 시간을 버는 사이 서창훈이 차근차근 창을 내질러 한 마리씩 쓰러트린다.

가끔 어그로가 풀린 몇몇 오크가 로저스를 무시하고 서창훈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이하영이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신체를 자르거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균형이 흐트러질 정도의 강풍이나 눈 주위에 이물질을 날려 보내는 것 만으로 충분한 위력을 발휘하고도 남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 마리의 오크는 바닥에 몸을 뉘이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이 정도는 거뜬한 것 같군요."

"모두 자네가 도와준 덕이지. 정말 고맙네."

단순히 빈말이 아니라 유성은 실제로 세 사람이 싸움에 익숙해질 수 있게 끔 헌신적으로 도와줬다. 다친 오크와 1:1의 상황을 만들어 안전하게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줬고 일행에 어울리는 진형을 제시했으며 능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당연히 세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크흐흠."

물론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이들이 전투에 공포를 느끼고 도망가지 않기 위함이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케어를 해준 유성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갈 건가? 꽤 깊이 들어온 것 같은데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거의 다 왔습니다."

"거의 다 와?"

"아, 조금만 더 돌아보자는 말이었습니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을 둘러댄 유성은 주변을 둘러보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 인간들은 강하다! 우리로는 이겨낼 수 없다! 전사님을 불러와라!'

죽어가던 오크가 내뱉은 한 마디.

평범한 사람들에게 오크의 소리는 단순히 돼지 멱따는 소리로만 들리겠지만 '태초의 언어, 바벨' 스킬을 가지고 있는 유성은 오크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었고 그들의 대화를 토대로 이 근처에 전사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사정도나 되는 놈이라면 금화나 마력석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겠지?'

오크들이 내뱉는 말을 통해 위치를 바꾸기를 여러 차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유성은 계획했던 대로 오크 전사를 발견했다. 이제 놈을 쓰러트리고 은근슬쩍 금화와 마력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발견한 것처럼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고지까지 단 한 걸음만 남은 상황.

"···쟤 좀 많이 세 보이지 않나요?"

"······."

다른 오크보다 반 배는 더 커 보이는 덩치와 주변에 열 마리가 넘는 무리를 대동하고 있는 오크 전사.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내딛어야 할 걸음이 조금 어려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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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화 즐거움

이대로 한 판 벌일 지, 다른 목표를 찾아야 할 지 망설이던 유성을 향해 이하영이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잡혀있어요!"

"사람? 어디?"

"저기요! 저기 식당 안 이요!"

양팔과 양다리가 묶인 채 떨고 있는 사람들.

구석에 놓여있는 조잡한 무기더미로 미루어보아 아마 몬스터를 잡겠다고 나왔다가 잡힌 계약자들로 보였다.

서창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저히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도 성격이었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이 인외의 존재들에게 목숨을 위협 당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다.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좀 위험하다고 보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에 상대한 오크들의 숫자는 여섯 마리야. 그것도 여기 있는 친구가 도와줘서 가능한 거였고. 그런데 단번에 그 두 배를, 그것도 딱 봐도 보스처럼 보이는 놈까지 끼어 있는 무리를 상대하겠다고?"

"그렇다면 그냥 버리잔 말인가?"

"아니, 일단 돌아가서 군인들에게 알려주면 되잖아. 그럼 강력한 계약자든 장갑차든 뭐든 끌고 와서 구해주겠지."

"그 때까지 사람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성을 향해 세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구하든, 도망가든 결국 중요한 것은 유성의 결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제각각의 감정을 담은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면서 유성은 담담하게 읆조렸다.

"구하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서창훈의 주장에 공감한 것은 아니다.

그저 객관적으로 계산한 결과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확신한 것 뿐.

"제가 잠시 오크들의 움직임을 붙들어 놓겠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분은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해서 그들과 함께 오크들을 상대해주세요."

아무리 전투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숫자만 오크들의 두 배가 넘는다.

뭉치기만 하더라도 오크들을 상대할 수 있을 테고 만약 도망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아무렴 도망가는 인간을 쫓아가거나 관심이 끌리는 오크 한 두 마리가 없겠는가?

요는 싸워서 이기든, 발목을 잡고 늘어지든 오크들을 붙잡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저 거대한 놈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가능하겠는가? 자네가 강한 건 알지만 저 놈도 만만찮아 보이는데."

"글쎄요. 대보면 알겠죠?"

오크 전사를 바라보는 유성의 눈동자는 언제부터인가 희미한 황금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전기, 플라즈마, 마력, 내공 등 종류를 불문하고 에너지(energy)를 시각으로 이해하고 볼 수 있는 진리의 마안이 오크 전사의 몸에 있는 마력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살짝 낮은 정도다.'

탓!

"자, 잠깐! 일단 좀 더···."

등 뒤에서 서창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성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네.'

원래의 자신이라면 승산이 있든 없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모험은 피하고 당초 목적대로 적당한 몬스터를 찾아서 전리품을 발견한 척 연기하고 돌아갔을 터, 그러나 오크들과 싸움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정체 모를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이성과는 상관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을 발견한 오크 전사의 눈을 마주한 순간 유성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재밌어!'

콰직!

오른발을 중심으로 시작된 균열이 순식간에 전방으로 번져나갔다.

발바닥을 통해 만들어 낸 가시덩굴이 지면을 타고 뻗어나가며 단단한 아스팔트와 벽돌들에 균열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오크 전사가 부하들을 물리려 했지만 99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펼친 가시덩굴의 성장 속도는 무시무시했고, 순식간에 오크들의 발 밑까지 뻗어나가 발목을 타고 올라가 다리를 휘감는데 성공했다.

"지금!"

한 박자 늦게 튀어나온 일행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오크 무리를 지나쳐 사람들이 갇혀 있는 식당 안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그러나 일행이 사람들을 풀어주기 시작한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크허허허헝!"

워 크라이!

마력을 담은 포효에 인간들은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고 당황하던 오크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무기로 덩굴을 잘라내 구속에서 벗어났다.

"감히 노예들을!"

"미안한데 네 상대는 이 쪽이야."

"헙?"

정당하게 얻은 노예들을 훔쳐가려는 비겁한 인간들을 향해 본 때를 보여주려던 오크 전사는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에 당황하며 손을 내밀었다.

"크윽!"

팔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찌릿한 느낌.

다급하게 반대쪽 손에 들린 글레이브를 휘둘러 추가 공격을 막아낸 오크 전사는 자신을 향해 공격을 날린 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 감히 마법사가 전사에게 덤비는가!"

자신들을 모두 붙잡아둘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전사에게 정면으로 덤빈다니!

얕잡아 보였다는 생각에 분노한 오크 전사는 거센 기합을 내지르며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평범한 인간은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반토막이 나버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위력이 담긴 공격, 그러나 유성은 당황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앞으로 반보를 내딛으며 글레이브의 옆면을 짧게 후려쳤다.

쩡!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진 글레이브와 훤히 드러난 전신.

반사적으로 날린 안개차기가 작렬했지만 오크 전사의 다리는 살짝 흔들렸을 뿐 멀쩡히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단단히 나무에 발차기를 날린 것 마냥 자신의 발이 시큰거리는 상황에 유성은 짧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 공격으로는 어림없다 이거지?'

"후우."

길게 호흡을 들이쉬고 짧게 내뱉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퀘스트를 끝내고 얻은 베르문드 마나 연공법은 마력을 모으고 축적하는 속도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마력의 회복 속도와 통제력 만큼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연공법을 운용하는 것과 동시에 가시덩굴을 만들어내느라 바닥났던 유성의 마력은 빠른 속도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극한의 효율성은 얼마 안 되는 적은 마력으로도 오크 전사와 대등한 겨룰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퍼버버벅!

마력 강화를 사용해 끌어올린 근력으로 펼친 암월 16식의 초식들이 연이어 오크 전사의 전신에 작렬했다. 주먹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타격감과 가죽북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 얼핏 보기에도 절대로 가볍지 않은 타격이었지만 오크 전사는 쓰러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거세게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고작해야 이 정도로 푸른 바위 일족의 전사인 이 몸이 쓰러질 것 같은가! 얼마든지 때려봐라! 이 몸은 아무렇지도 않다!"

"마력 강화를 쓸 수 있나 보지?"

"전사라면 이 정도는 기본···응? 네 놈, 우리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텐데?"

시간이 지나도 쇠하기는커녕 점점 더 빨라지는 글레이브의 모습에 유성은 짧게 혀를 찼다. 두꺼운 나무 같은 질긴 피부를 뚫고 타격을 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

속도 면에서는 자신의 위지만 오크 전사는 그를 만회할만한 경험과 노련함이 있었다.

유성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치명적인 부위는 철저하게 막아내고 맷집으로 견딜 수 있을 만한 부위에 대한 방어는 포기함으로써 부족한 스피드로도 자신보다 빠른 적을 상대로 대등하게 겨루고 있었다.

'지구전이 되면 내가 불리하다. 레온에게서 가져온 E+급의 격투술은 이 놈의 방어를 무너트릴만한 깊이가 없고, 암월 16식의 공격력은 맷집을 뚫고 일격에 쓰러트릴 수준이 아니야. 관절기는 통할 듯 하지만 너무 위험하고···.'

맨손을 쓰는 격투가는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팔과 다리가 닿는 가까운 거리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일격에 쓰러트리는데 실패했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굳이 글레이브를 쑤셔 박지 않더라도 근력과 맷집에서 우위인 오크는 난타전을 벌이기만 하더라도 손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즈마 도끼를 쓸까?'

플라즈마 도끼의 절삭력이라면 이 따위 글레이브는 단숨에 잘라버리고 놈을 반토막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뒤에서 오크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볼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이 재밌는 싸움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성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불길한 느낌을 받은 오크 전사는 글레이브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 인간이 아무리 강해도 맨주먹으로 이 몸을 쓰러트릴 수는 없으리라!'

오크 전사는 자신의 육체와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유성 역시 자신의 스킬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암월 16식. 흘려내기.

이름 그대로 힘을 흘려내는 기술.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내는 것이 극히 어렵지만 수라감각도를 사용한다면 흘려내기를 펼칠 수 있는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낼 수 있다.

텅!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가는 글레이브.

훤히 드러난 오크 전사의 심장을 향해 전신의 힘을 담은 바위뚫기가 작렬했다.

"자, 잡았다!"

늑골이 부서졌음에도 오크 전사는 유성을 잡았다는 사실에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끌어안아서 힘으로 조이기만 하더라도 자신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승리의 기쁨에 취한 오크 전사는 유성 역시 자신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시작은 기의 동조.'

접촉한 신체를 통해 적과 자신의 기를 하나로 동조시킨다.

진리의 마안을 통해 상대방 내부의 마력 흐름을 볼 수 있고 베르문드 연공법으로 세밀한 마력의 운용이 가능한 유성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조시킨 기를 단숨에 해방시키면!'

발경(發輕).

퉁!

레온이 익히고 있던 격투가의 비기가 시공간을 넘어 유성의 몸에서 재현됐다.

가죽북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오크 전사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겉으로는 볼 때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지만 내부는 그야말로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황.

"아, 아직···."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오크 전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전신의 힘을 짜내 유성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그리고 유성 역시 그 투지에 나름의 방법으로 보답했다.

발경.

"······."

두 번째 발경.

완전히 바닥난 자신의 마력을 대신해 진리의 마안을 이용해 끌어온 오크 전사의 마력으로 펼친 발경.

첫 번째의 그것보다 허술하고 조잡했지만 빈사 상태의 오크 전사를 쓰러트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공격이었다.

쿵!

"췩! 저, 전사님이 당했다!"

"전사님이!"

"지금입니다! 모두 공격하세요!"

"우와아아아아!"

사기가 꺾인 오크들이 인간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들은 전부 차가운 땅에 몸을 뉘였고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을 껴안거나 유성 일행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등 제각각의 방법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기뻐했다.

"이것 봐봐! 이 놈 엄청난 부자였는데?!"

물론 유성은 그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알지도 못 하고 앞으로 알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 쏟을 관심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싸움도 끝났겠다 이미 유성은 본래 목적대로 퀘스트 보상품을 전리품으로 세탁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렇기에 유성은 알 수 없었다.

"···형님들 이거 보고 계시죠?"

오크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거 게임 아님

037화 일확천금

몬스터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위험종이라는 생각.

갑작스레 몬스터들의 침공이 이제 겨우 한 달, 그동안 인류가 입은 인명, 경제적 피해는 차마 수치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방어를 이뤄냈다고 평가 받는 대한민국마저도 공식적으로 수십 만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실종자까지 더 하면 그 숫자는 수백 만까지 뛰어올랐다.

타국가들의 식량과 에너지의 수출의 중단 및 몬스터의 등장으로 꼬여버린 무역 일정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맛이 가버린 실물 경제와 주식시장은 덤.

당연히 이들에게 있어서 몬스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멸절시켜야 할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다른 쪽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몬스터의 존재야말로 인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 시켜 줄 계기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몬스터들은 지구의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유전적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규소 생명체나 에너지 생명체처럼 상상으로만 여겨졌던 존재들 또한 수두룩했다.

당연히 그런 몬스터들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합금을 우습게 만드는 신비한 금속, 상식을 벗어난 재생력이나 해독력을 가지고 있는 피와 살,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마력석.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은 몬스터를 사냥하려 나섰고 자본가들은 몬스터와 관련된 분야에 투자했으며 기업들은 몬스터와 관련된 소재를 모으고 연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21세기 판 골드 러시라는 새로운 단어까지 나올 지경.

그러나 그런 관심이 무색하게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성과나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값어치가 있을 만한 몬스터는 현대 병기가 통하지 않거나 상당한 화력을 퍼부어야 잡을 수 있었기에 온전히 시체가 남지 않았고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계약자들은 강력한 몬스터를 잡을 만한 능력이나 경험이 없었다.

공급은 없는데 수요만 넘치는 상황.

당연히 유성 역시 지금 몬스터와 관련된 물건들에 대한 값어치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알고는 있었는데···.'

단지 알기만 했을 뿐, 눈 앞의 광경을 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5천! 전부가 아니라 개당 5천!"

"5천 3백!"

"어딜! 5천 5백!"

"저 놈들 말 듣지 마! 나한테 깔끔하게 6천에 넘겨!"

몬스터와 관련된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모인 허름한 강당 안.

수백 명,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숫자를 외치는 모습에 서창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해야 금화 하나를 왜 저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려는 거지?"

"뭐, 몬스터에게서 나온 물건이니까요."

금 함유량만 따지자면 금화의 값어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세계에서 온 몬스터가 가지고 있던 다른 문명의 물건' 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도 수천, 수만 달러에 팔리는 시대다.

저 금화에 포함된 금이 지구의 금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혹여 지구에 없는 어떤 미지의 금속을 함유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같은 가능성 하나 때문에 금화의 가격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화 하나가 골드바 하나보다 더 비싸게 팔릴 지경이라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경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억 단위에 다다르자 돌파하자 점점 구매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내 구매자가 결정됐다.

"1억 4천!"

개당 1억 4천.

퀘스트···아니, 오크 전사가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 들어있는 금화의 갯수는 50개니 총 70억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좋습니다.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몇 개월까지 가능한가요?"

"설마 지금 할부 얘기하는 건 아니겠죠?"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기업이 파산하고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흉흉한 시기에 할부로 물건을 넘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70억을 일시불로 달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가능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것 같은데요."

"나! 내가 현금으로 살 수 있어! 5개! 5개만 팔아줘!"

"닥치고 내 돈을 받아!"

목소리를 높이며 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가 금화를 사려는 건 연구나 조사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투자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 금화에 미지의 금속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까, 어떠한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 같은 가능성은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세계의 화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 화폐의 값어치는 지금 이상으로 크게 뛸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희소성을 위해서는 모든 물량을 자신이 확보해야 했다.

"바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컥!"

"······"

"으음."

액정에 곧바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서창훈은 사례가 들린 듯 헛기침을 했고 이하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유성마저도 살짝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창 몬스터라는 존재에 적응하는 과도기인 만큼 어느 정도 비싸게 팔릴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 가격에 팔릴 줄이야.'

시간이 흘러 몬스터와 신소재에 대한 분석과 정보가 축적될수록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할 것이다. 다른 때가 아닌 지금이기에,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듯 이제 막 몬스터에 대해 알아가는 시기이기에 나올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

다만 로저스만큼은 유일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저렴하네."

"70억이 저렴하단 말인가?"

"그럼, 미국에서 팔았으면 개당 100만 달러, 어쩌면 그 이상에 팔렸을 수도 있을걸?"

"아니, 아직 제대로 검사도 하지 않은 물건을 왜 그렇게 비싼 값을 주고 산다는 말인가?"

"이세계의 물건이잖아? 앞으로 저런 금화가 또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최초로 발견된, 그것도 무려 포레스트 마스터의 첫 번째 전리품···."

"응? 내가 알기로는 녹림권성···."

"크흐흐흠!"

유성의 헛기침에 로저스와 서창훈은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영웅님의 첫 번째 전리품이라는 상징성도 있으니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을 주고서라도 살 사람은 있을 거란 이야기야. 마음 같아서는 안 팔고 묵혀두고 싶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지."

"으음. 그렇군.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는가?"

"뭔데?"

"왜 반말을 하는가?"

"아, 미안. 내가 한국말이 아직 서툴러서."

"분명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는 존댓말을 한 걸로 기억하는데?"

웃기지도 않는 만담을 나누는 둘을 바라보며 유성은 눈을 감고 눈가를 매만졌다.

'설마 그 장면이 스트리밍 되고 있었을 줄이야.'

설마 오크들에게 잡혀서 방송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 영상에 자신과 오크 전사의 전투가 찍혀서 뉴튜브에 올라갔을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하거나 오크 전사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몬스터를 쓰러트린 사람들의 영상도 많았기에 별다른 관심을 사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것도 잠시, 방송의 내용이 내용이었던지라 상당한 사람들이 방송을 보고 있었고 그 결과 유성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처지가 됐다.

물론 영상 덕분에 전리품의 획득처나 진짜 이세계의 물건인지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지고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실에서 포레스트 마스터니 녹림권성이니 이상한 호칭을 붙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일본의 군신(軍神)이나 영국의 아크 나이트(ark knight)같이 이명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 당사자가 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른 물건도 일시불로 파실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하아,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만족해야겠군요. 제 명함입니다. 만약 또 이 세계의 물건들을 구하신다면 저에게 연락해주십시오. 사정이 되는 한 최대한 비싼 값에 구입해드리겠습니다."

진한수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명함을 내민 남자는 악수를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진한수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경호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안전을 확보하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는 전채였고 이제 메인 요리인데···."

유성이 작게 속삭인 순간, 광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금화는 일종의 긁지 않은 복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첨된다면 비싸게 팔릴 수도 있지만 아니면 헐값에 팔릴 수도 있는 물건, 그러나 다른 물건은 이미 당첨이 확정된 물건이다.

꿀꺽.

주머니 안에서 푸른 색으로 빛나는 돌멩이가 나온 순간 사람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몬스터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한참 진행 중이었지만 그 중 확실하게 유용하다고 판단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력석이었다.

몬스터의 몸 어딘가에, 혹은 몬스터가 활동하는 지역 근처에서 발견되는 빛나는 돌, 통칭 마력석은 어마어마한 미지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고 그 가능성을 짐작한 국가와 기업들은 눈에 불을 켜고 매물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10···."

"100억. 총 500억. 바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장 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500억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돈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진심입니까?"

"그 전에 잠시 확인을 해도 되겠습니까?"

"예."

방사능 측정기처럼 보이는 기계를 마력석에 가져다 댄 남자는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좌 불러주시죠."

띠링!

액정 위에 떠오른 숫자들의 나열을 확인한 유성의 눈가가 씰룩였다.

'마력석이 비싸게 팔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성질이 알려진 초기에는 온갖 투기 세력이 끼어들면 끝없이 올라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적지 않은 거품이 꺼졌다.

게다가 방금 전 기계를 가져다 댄 모습으로 추측컨데 마력석의 등급을 측정하는 기술 또한 이미 개발한 것 같은데 고작해야 하급 마력석을 이만한 거금을 주고 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싸게 사겠다는 상대에게 물건을 팔지 않는 것도 웃긴 일이었기에 유성은 마력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넘겼고 남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를 007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혹시 여러분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소속?"

"그러니까 어떤 회사에 다니고 있다거나, 후원을 받기로 했다거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만약 그런 게 없으시다면 저희 일성 그룹과 함께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최대한 원하시는 조건에 맞춰 줄 테니 일성 그룹의 광고에 나오시거나 일성 그룹의 로고가 그려진 옷을 입고···."

"관심 없습니다."

'일성 그룹이라. 커뮤니티에서 봤던 것 같은데. 마력석을 이용한 신개념 반도체를 만든다고 했던가?'

일성 연구단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원을 보내 달라는 '슈퍼개미'와 'made in usa'의 대화를 떠올린 유성은 일성 그룹이 마력석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이유를 납득했다. 남자는 더 권유하는 대신 진한수가 그랬던 것처럼 명함 한 장 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떠났다.

남은 것은 허탈한 표정과 함께 흩어지는 사람들과 멍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의 액정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 뿐.

유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돈도 벌었는데 고기라도 먹을까요?"

눈 깜짝할 사이에 570억을 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평한 한 마디였다.

이거 게임 아님

038화 미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