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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무한 증식 (2)

쿠쿠쿠쿠쿠!

묵직한 마력이 지하 내부를 가득 메웠다.

"젠장…."

엘리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탑에 존재하는 절대자들.

엘리스가 한 종의 정점이라면....

상대는 한 신화의 정점 중 하나이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적이라는 뜻이다.

"놈은 내가 맡을 테니까 그동안 어떻게든 위로 빠져나가."

"응?"

"나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너라도 먼저 도망치라고!"

"뭐야. 내 걱정 해 주는 거였냐?"

크기는 포메라니안만 해가지고.

당당하게 앞을 가로막는 모습이 뭐랄까.

주인을 지키려는 강아지 같다.

"걱정은 무슨! 나는 그냥, 네가 죽으면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니까. 그걸 막으려는 거지!"

엘리스가 발끈하며 외쳤다.

"걱정하지 말고 그냥 지켜봐."

"뭐? 지금 여기서 자존심 부릴 때야?"

"자존심 부리는 게 아니야. 단지, 나를 믿어 달라는 거지."

보여 줄게.

네가 계약한 플레이어가 누구인지.

그리고 마지막에 웃고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도.

***

쿠웅! 쿠웅! 쿠웅!

거대한 굉음과 함께. 3m 크기의 석상이 나타났다.

사막의 자칼을 본떠 만든 외형.

이것이 바로 이 지하의 보스 몬스터인 아누비스다.

"재밌구나. 나에 관한 건 네놈 어깨 위에 있는 진조에게 들은 것이냐?"

아누비스가 '질문'했다.

우우우웅!

공기가 급변했다.

이 느낌, 이 감각.

역시, 발동하려는 건가.

[아누비스가 고유 능력 '아누비스의 심판'을 발동합니다!]

시전자가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대상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한다면.

그로써 조건이 충족된다.

...됐다.

진혁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래, 맞아. 아니면 내가 어떻게 이런 곳을 알겠어?"

"역시 그렇군."

아누비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조 정도의 고위 생명체라면, 지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하이브'를 노리고 온 걸 테고?"

"뭐, 그런 셈이지. 그거 사다가 블랙마켓에 팔아먹으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거든."

무한으로 곤충들을 증식할 수 있는 이이템이라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이걸로 두 번째.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겠다. 도굴꾼이여, 보물에 눈이 머는 것은 미물들의 당연한 습성이다만, 나의 영역에 들어와 놓고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나?"

마지막치곤 꽤나 재미없는 질문이네.

그거야 당연히....

"너 하나 따돌리지 못하면 혀 깨물고 죽어야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우우우웅!

신의 능력이 발현되었다.

[요구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아누비스의 심판이 발동됩니다!]

[모든 스탯이 50%만큼 하락합니다!]

[고유 능력과 스킬의 사용이 1분간 봉인됩니다!]

연거푸 나타나는 상태창들.

동시에 전신에 있던 마력과 힘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예리했던 감각이 무뎌지고 손에 익은 스킬과 고유 능력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 능력의 진정한 무서움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아누비스가 '심판의 대전자(對戰者)'를 선정합니다!]

"소개하마. 이것이 바로 나의 손과발이 되어줄 대전자이다."

낮고 굵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키에에에엑!"

지금까지 상대했던 곤충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솟구쳤다.

쿠쿠쿠쿠쿠!

지하 전체가 떨렸다.

신의 간택을 받아, 그의 명령을 따르는 대전자.

그렇기에, 대전자는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분쇄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묵빛이 감도는 외피와 눈이 시리게 빛나는 앞발톱이 눈에 띄었다.

'이 녀석의 레벨이 71 정도였지?'

회랑에서 만났던 혈족들의 레벨이 50대 후반이니, 그보다 높은 거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아누비스의 심판'으로 인해 스탯과 고유 능력이 봉인된 상태였으니까.

진혁은 검강이 실려 있지 않은 단검을 손에 꽉 쥐었다.

"침 좀 그만 흘려라. 그렇게 내 머리가 뜯어먹고 싶은 거냐?"

"키이이이!"

굳이 마수어를 몰라도, 저건 '그렇다'라는 뜻일 거다.

그러고 보니 고유 능력 중에 마수어를 사용하는 놈도 있었는데.

관련 능력들을 융합하면 어떤 게 튀어 나오려나?

진혁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삭!

자이언트 멘티스가 모래 위로 빠르게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낫처럼 생긴 발톱이 목을 향해 뻗어 왔다.

그러나.

카가가각!

진혁이 단검으로 궤적을 살짝 비틀었다.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케엑?"

휘청하고.

자이언트 멘티스의 몸체가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무게중심이 완전히 흔들린 탓이다.

'완전히 빈틈투성이군.'

겹눈깔로 360도를 볼 수 있으면 뭐 하나?

반응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데.

진혁의 눈에 장난스러운 이채가 맴돌았다.

동시에, 단검이 자이언트 멘티스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푸욱!

살이 헤집어지는 파육음.

초록색 체액이 뿜어졌다.

갑주로 뒤덮인 부분이 아닌, 연결 부위를 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키에에에에!"

처절하게 울려 퍼진 비명이 동굴 전체를 휘감았다.

이제 겨우 다리 하나 가지고 엄살은.

진혁은 검을 뽑고 살짝 거리를 벌렸다.

"고작 인간이라고 방심했지? 그러니까 애꿎은 다리 하나 잃은 거 아니야."

꼭 어중간하게 강한 놈들이 이러더라.

상대를 얕잡아보고 설렁설렁하다가 역으로 한 대씩 처맞는.

"키이이이."

자이언트 멘티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절단된 채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다리를 바라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꿀렁!

잘린 다리가 새로 돋아났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구만."

이건 뭐 피콜로도 아니고. 자를 때마다 쑥쑥 자라났다.

진혁이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온다.

콰앙!

지면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자이언트 멘티스가 재차 도약했다.

호선을 그리는 발톱.

'이건....'

틀림없다.

얼핏 봐선 티가 잘 안 나지만, 발톱에 흰색 강기가 맺혀 있었다.

그대로 맞부딪쳤다간 검이 버티질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부웅!

진혁이 머리를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흉기.

부우웅! 부우우웅!

이어지는 공격들 또한 허공을 갈랐다.

결코 속도가 느린 게 아니다.

전투가 지속됨에 따라 곤충 특유의 탄력을 받기 시작한 데다, 대전자 버프까지 받은 상태.

때문에 현재 자이언트 멘티스의 발톱은 눈으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그 모든 것들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냈다.

마치, 리듬을 타는 듯 독특한 움직임으로.

'역시 노래는 트로트지.'

이미 전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진혁의 머릿속엔 노래 한 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걸쭉한 음색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

이 지하에 있는 곤충들과 싸울 때마다, 이 리듬감에 맞춰 공격 타이밍을 외웠었다.

신기하게도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 올 때마다 이 리듬감에 맞춰 피하면, 서서히 상대의 체력을 낭비시킬 수 있었다.

'이거 어째 예전보다 더 잘되는 것 같은데?'

아니, 진짜로.

예전에는 가끔 한두 번 엇박이 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사소한 실수조차 없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움직임에 진혁은 가빠지는 호흡마저 즐겁게 느껴졌다.

부우웅!

부웅!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공격의 속도가 느려졌다.

발톱의 외형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이쯤에서....'

진혁이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상단에서 오는 공격을 마지막으로 피하고.

부우우웅!

텅 비어 있는 틈을 노린다!

최대한 힘을 준 상태에서 자이언트 멘티스의 뒷다리를 찍었다.

푹! 푹! 푹! 푹!

힘줄을 노린 깔끔한 일격.

순식간에 네 번의 벌침을 먹여준 진혁이 또 다시 여유롭게 거리를 벌렸다.

"케에엑!"

쿠웅!

자이언트 멘티스가 꼴사납게 자리에 널브러졌다.

물론,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다.

어차피 상처야 회복될 테니까.

'하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는 평생 가는 법이지.'

진혁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자이언트 멘티스 앞에 섰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키에에엑!"

분노한 자이언트 멘티스가 다시 일어나면, 쓰러뜨린 뒤.

곧바로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기서 포인트는 절대 힘들어 하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는 거다.

여유로운 분위기와 가볍게 올라간 입 꼬리.

마지막으로 '너는 백년이 지나도 나를 이길 수 없을 거다'라는 표정까지.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괜찮다.

강한 상대를 능욕하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고인물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였으니까.

***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누비스가 분노와 경악으로 얼룩진 괴성을 내질렀다.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한 싸움이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이 상황을 믿기 힘든 건 엘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강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남다른 인간이었다.

그건 인정한다.

혈족 중에서도 뛰어났던 벨루스조차 고전하다 결국엔 패배했으니까.

하지만, 회랑에서는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였고.

너프를 먹고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된 지금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

'감각과 반사 신경만으로 상대를 농락하다니.'

엘리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아누비스가 지정한 대전자 아닌가?

그걸 상대로 저토록 여유를 부리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스의 눈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이언트 멘티스 앞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진혁이 보였다.

'정말, 저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아타락시아 가(家)의 몰락과 그것을 초래한 여섯 가문에 대한 증오.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한 인간이 그 숙원을 풀어 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두근! 두근! 두근!

엘리스의 심장이 고요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고양감이 전신을 따라 퍼져 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깔끔하게 잘린 자이언트 멘티스의 다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

후두둑.

진혁이 단검에 묻은 체액을 바닥에 털어 냈다.

'좋아.'

이로써 자랑하던 양 발톱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키, 키이이...."

자이언트 멘티스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호전성이 극도로 높은 곤충형 마수들에게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왜? 이제 그만 덤비게?

"사냥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여태껏 그리 기세등등하게 날뛰어 놓곤, 벌써 그만두려고?

물론, 이해는 한다.

사냥은 쫓기는 쪽보다 쫓는 쪽이 재밌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사냥꾼이 사냥감이 될 차례다.

"뭐 하는 거냐!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맞서 싸우란 말이다!"

아누비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답답했는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쳤다.

그러나 이미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버린 자이언트 멘티스는 주인의 명령을 듣지 못했다.

"뭐 해? 빨리 뛰어야지."

진혁이 단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입술을 모아 십부터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쉽진 않겠지만.

41화 무한 증식 (3)

"케에에에에!"

날카로운 단말마와 함께.

바람구멍이 난 자이언트 멘티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재생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소용없다.

아무리 질긴 녀석이라도 심장만큼은 복구할 수 없었으니까.

['아누비스의 대전자'가 쓰러졌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펠타로스 공국의 마도서'를 획득하셨습니다.]

[중급 마정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걸로 또 하나의 레벨이 올랐다.

게다가 탑 중층부에 가야 구경할 수 있는 마도서까지 등장했다.

'호오, 이것 봐라?'

진혁의 입에서 작게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대전자를 쓰러뜨렸지만, 이 정도로 좋은 보상을 준 경우는 없었다.

무기류를 떨구거나 간혹 특수 효과가 붙은 액세서리를 주는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이토록 보상 간의 격차가 커지다니.

진혁은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독식에 의한 효과와 행운 스탯까지 적용된 덕분이었군.'

우연이 아닌 필연.

계속해서 쌓아 온 작은 기연들이 지금의 성과를 이룩해낸 것이다.

짜릿하다.

'내가 했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이 맛에 고이고 고여도 게임을 접지 못했나 보다.

진혁이 사체 옆에 놓여 있는 고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

손끝을 찌르는 한기.

...차갑다.

[순수한 냉기로 인해 손끝의 감각이 일부 마비됩니다.]

펠타로스 공국의 마도서는 빙계 마법을 배울 수 있었기에, 비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에게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비록 90% 이상은 얼음 마법은커녕 눈송이 하나 만드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른 계열의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기회 자체만으로도 희소가치는 충분했다.

'역시 마도명가들이 밀집해 있는 공국답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13층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거라, 나중에 천천히 얻으려 했는데.

계획보다 훨씬 빨리 새로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사각.

책의 첫 번째 장을 펼쳐지자.

복잡해 보이는 문자들이 두 눈에 들어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누비스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마도서는 전부 룬어로 적혀 있었기에, 애초에 일반인은 읽을 수조차 없다.

게다가 룬어를 습득한다고 한들,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가장 기초적인 마법을 구사하는 덴 또다시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었다.

노력과 재능.

두 개의 영역이 모두 뒷받침되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리석긴. 그 마도서를 읽는데만 해도 3년은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허억!?"

말하던 아누비스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츠츠츠츠!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투명한 얼음 가루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1분이 지나 고유능력과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Lv1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응?

강아지 짖는 소리 비슷한 게 들린 것 같긴 한데.

"방금 뭐라고 했었나?"

"어, 어떻게...."

어떻게긴.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거든."

물론,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게 쉬울 리는 없다.

초중고 12년을 배운 영어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사람이 넘쳐났으니까.

하지만, 그건 억지로 욱여넣은 주입식 교육일 때 이야기고.

'이건... 내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했던 공부지.'

재밌었으니까.

그리고 이걸 배워야만 강해질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외웠다.

...죽도록 연습했다.

마법 계열을 선택한 플레이어들보다 강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츠츠츠!

어느덧 흩날리던 얼음 가루들이 하나의 형(形)을 갖췄다.

2m가 넘는 얼음 화살 5개.

아름답게 조형된 각각의 화살들이 진혁의 명을 기다렸다.

"확실히 네놈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인정하마. 하지만, 그 얼음 장난감을 믿고 나와 싸우겠다는 것이냐?"

"알아."

"뭐라고?"

"소용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현재 갖고 있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아누비스를 죽일 순 없다.

아니, 피부에 작은 상처 하나조차 입히지 못할 것이다.

엘리스와 마찬가지로 녀석 역시 이 탑의 최상위에 위치한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헛발질하느라 초조한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무엇보다 대전자나 벌레를 통하지 않고선 다른 생명체를 공격할 수 없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일 텐데?"

"...."

이번엔 아누비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방을 협박하기 위해 말을 건 것이었으나, 어떻게 된 건지 녀석은 그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걸려 있는 제약의 종류까지도 모두 꿰뚫어보고 있는 상태.

'보면 볼수록 놀랍군.'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아무리 공격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이유가 뭐지?"

궁금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리고 그 속에 숨겨 둔 꿍꿍이가 무엇인지도.

하지만, 아누비스의 기대와 달리 진혁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너무나 허무했다.

"그냥... 재미?"

"재, 재미라고?"

"아무리 때려도 죽지 않는 샌드백이라니. 이건 포기 못 하지."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우드득하고.

아누비스 석상의 표면에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갔다.

진혁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좋아.

'자존심 높은 놈답게, 도발에 약하군.'

이런 식으로 계속 긁다 보면 머지않아 복사 조건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듯.

쿠쿠쿠쿠쿠!

아누비스가 농구공만 한 벌집을 꺼냈다.

무한 증식이 가능한 특수 아이템 '하이브'였다.

드디어 사용하려는 건가.

대전자가 사라진 이상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는 저것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인간을 갈가리 찢어 삼켜라!"

아누비스가 하이브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부우우웅!

부우웅!

벌집에서 날개를 지닌 비행형 벌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막을 찌르는 소름 끼치는 소리.

동시에 진혁의 머리 위에 있던 얼음 화살들이 사라졌다.

콰콰콰쾅!

굉음과 함께 자욱한 눈보라가 일어났다.

바닥에 꽂힌, 2m짜리 기둥들엔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꿰어 있었다.

모두 적중이다.

'역시, 이 정도 타격으론 어림도 없는 건가.'

벌레의 외피마저 가볍게 뚫어 버리는 얼음 화살이었으나, 하이브를 파괴하는 덴 실패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싸움의 승패는 누구의 인내력이 더 뛰어나냐에 달려 있었으니까.

화르륵!

진혁의 왼손에 한 줌의 불꽃이 일어났다.

츠츠츠!

오른손엔 가느다란 얼음 줄기들이 한기를 뿜어냈다.

바로 그때.

['불의 원소(B)'와 '얼음 조형(A)'이 융합합니다!]

진혁이 양손을 하나로 합쳤다.

얼음과 불이 모이며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불꽃과 눈보라가 얽히고설켰다.

쿠쿠쿠쿠쿠!

공기가 급변했다.

"키이이이...."

"케엑! 케엑!"

이질적인 마력에 벌레들마저 주춤했다.

아누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스킬 '데이 라이트(AA)'을 획득하셨습니다!]

[데이 라이트]

입수 난이도: AA

내용: 마력을 압축해 방출하는 대군(對軍) 스킬입니다. 백색계열 마법은 위력 자체도 뛰어난 편이지만, 시야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전투에 있어 활용도가 매우 높습니다

[융합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얼음 조형에 이어, 융합을 통한 새로운 스킬까지 얻었다.

그것도 무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특화된 대군 스킬로.

'과연, 위력은 어떨까?'

과거에도 이 스킬을 얻었었지만, 지금만큼 완벽하게 성장한 상태는 아니었다. 실수를 했고 실패를 했으며, 낭비된 시간과 노력들이 뒤섞여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에 기대됐다.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이 과연 어디로 이어질지.

진혁이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우우웅!

[Lv1 '데이 라이트'가 발동됩니다!]

거대한 빛이 지하를 집어삼킨 건 바로 그때였다.

마치,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는 것처럼.

눈부신 빛이 벌레들의 눈을 태워 버렸다.

"케에에엑!"

"키이아아아!"

벌레들이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질렀다.

오랫동안 빛이란 걸 본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괴로운 건 알겠는데, 그렇게 고개를 처박고 있으면 이건 어떻게 피하려고?"

데이 라이트의 1차 효과는 빛 속성 피해.

어둠 관련 속성을 지닌 생명체에게 피해를 입히고 눈을 멀게 한다.

허나, 진짜는 2차로 몰려오는 폭풍이다.

진혁이 단검 끝에 모인 빛을 바라봤다.

팔이 가늘게 떨렸다.

강력한 마력을 압축하다 보니 근육에 무리가 갔던 탓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그 순간.

하나의 점으로 모인 빛이 직선으로 쏘아졌다.

굉음이나 폭발음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지면이 박살나거나 벽에 구멍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상력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충실했을 뿐.

치이이이익!

백린(白燐).

물에 들어가도 계속해서 타들어 가는 악마의 불꽃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벌레들을 태워 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 와중에도 하이브에선 계속해서 새로운 벌레들을 탄생시켰지만....

진혁은 쉴 틈 없이 마력을 쏟아 부으며 수가 쌓이는 걸 막았다.

'군집체 벌레들이 무서운 건 바로 개체 수 때문이지.'

협동력도 뛰어나고 집단 사냥도 능숙해 수가 늘어날수록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단순히 1+1=2가 아닌 3이나 4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수만 모이지 않게 한다면, 각개 격파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퍼엉!

콰아앙!

불꽃이 하나 터지면,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또 다른 불꽃을 폭발시켰다.

얼음 화살 또한 대형 벌레들의 외피를 뚫으며, 착실하게 그 역할을 다했다.

벌레가 태어나 나오는 속도보다 죽어 나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크으윽…!"

결국, 보다 못한 아누비스가 하이브의 두 번째 능력을 발동했다.

['하이브'가 대상을 선별합니다.]

***

잠시 뒤, 벌집에서 나온 건 1m도 채 안 되는 말벌 한 마리였다.

독침이 제법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보유한 마력도 낮을뿐더러, 단일 개체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케에에엑!"

길게 포효한 말벌이 침을 세운 채 날아올랐다.

그리고 약 20m 높이의 상공에서 그대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꽤나 빠른 속도.

진혁의 단검을 꺼냈다.

콰득!

두 개의 흉기가 교차했다.

단검 끝에서 걸쭉한 체액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머리를 잃어버린 말벌은 날아오던 궤적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콰아아앙!

하이브의 선택을 받은 것치곤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키이이...."

말벌은 죽지 않았다.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머리가 새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재생이냐?"

"후후. 겨우 그런 걸로 보이나?"

아누비스가 낮게 웃었다.

"키이이이!"

"케에엑!"

두 번째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몸통에서 새롭게 자라난 머리뿐 아니라 이번엔 잘려 나갔던 머리에서도 새로운 몸통이 자라났다.

재생이 아닌 분열.

완전히 실사판 호러 영화다.

"베어 봤자 소용없다는 건가."

"그렇다. 이젠, 아무리 날뛰어 봐야 더 많은 벌레들과 싸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브의 두 번째 능력이다. 무한히 분열되는 벌레들을 체력과 마력이 다할 때까지 상대해야 하는.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도 그 한계는 존재할 터.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걸렸다.'

진혁은 웃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조차 모두 자신이 계획한 것이었기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포석이 되어 원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42화 무한 증식 (4)

"케에에엑!"

"키에에에!"

두 마리의 말벌들이 길게 포효했다.

[하이브의 능력으로 인해 '공포 내성' 효과가 발동됩니다!]

진혁이 보유하고 있는 '간극' 스탯은 대상과의 본질적인 격차를 극복하거나 벌린다면.

'공포 내성'은 감각의 일부를 마비시켜, 죽을 때까지 적을 물어뜯는 효과를 지녔다.

꽤나 성가신 능력이다.

특히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분열하는 놈이라면 더욱더.

부우우웅!

말벌들이 각각 좌우에서 비행을 시작했다.

조금 전과 같이 상공에서 하강할 기회를 엿봤다.

'지금이다.'

진혁이 일전에 '코인 거래소'에서 구입해 둔 아이템을 꺼냈다.

[거대화 알약(C)]

대상의 크기를 최대 10배까지 늘려 주는 효과를 지닌 특수 아이템.

바로 이때를 위해 준비해 둔 비장의 카드였다.

"멍청하긴! 덩치를 키운다고 독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누비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이브로 인해 강화된 말벌의 독은 독에 내성이 있는 거인들조차 죽일 수 있을 터.

고작 거대화 알약 따위, 백 개를 먹어 봤자 소용없었다.

하지만. 진혁은 그걸 먹지 않았다.

"누가 그래? 내가 먹는다고?"

오히려 날아오는 말벌의 입을 향해 던졌다.

직선으로 뻗은 궤적.

꿀꺽!

말벌의 목구멍을 타고 알약이 넘어갔다.

"케엑?"

"무, 무슨... 짓을...!"

아누비스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지만, 진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렸다.

'알약이 완전히 흡수되기 전에 끝내야 된다.'

약 1분.

거대화가 진행되기 전까진 그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진혁은 알약을 먹은 말벌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말벌이 반사적으로 꼬리를 움직였다.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벌침이 진혁의 목을 노렸다.

'역시나 경동맥을 노리는군.'

급소를 노리는 건 녀석들의 본능이다.

진혁은 목을 살짝 움직여 독침을 피했다. 동시에 팔을 뻗어 말벌의 등 위에 올라탔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케에에에에!"

말벌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워! 워!"

날뛰지 좀 마라.

멀미나려 하니까.

진혁이 등 위에서 말벌의 날갯죽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엄지로 신경계가 있는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키이이이...."

말벌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중추신경계를 자극했으니 그럴 수밖에.

이걸로 방향과 속도는 물론, 공격성까지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 곤충들로 비행 레이스를 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네.'

이래서 경험은 아무리 괴팍한 거라도 쓸모 있을 때가 있다는 거다.

물론, 당시에는 날아가다 추락했던 기억이 더욱 많긴 했지만.

부우우웅!

진혁이 말벌을 타고 하이브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뭐 하는 거냐! 죽여라! 당장 저놈을 죽이란 말이다!"

아누비스가 나머지 말벌에게 명령을 내렸다.

"키에에엑!"

명령을 받은 말벌이 진혁의 뒤꽁무니를 바짝 추격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0초.

더 빨리...!

조금만 더 빨리!

풍압에 눈을 뜨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진혁은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20초, 19초... 그리고 마침내 남은 시간이 10초가 된 순간.

[알 수 없는 정육면체(D)를 사용하셨습니다.]

진혁이 코인 거래소에서 얻은 또 다른 아이템을 사용했다.

우우우웅!

약 2m 크기의 반투명한 정육면체가 하이브 전체를 감쌌다.

물론, 정육면체의 한쪽 면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진혁은 이미 그곳에서 탈출한 상태였다.

조종하던 말벌과 뒤쫓던 말벌을 남겨 둔 채.

'이제 마무리다.'

[4개의 아이템을 합성해 '알 수 없는 정육면체'를 강화합니다!]

[능력 촉진제(D)]

[끈끈이 풀(F)×4]

[칼투리스 숲의 거미줄(F)]

[트윈헤드 오우거의 콧물 100mg(F)]

나머지 아이템들까지 전부 사용하자, 반투명한 막에 거미줄 모양의 문양이 새겨졌다.

"케에에엑!"

"케엑!"

콰앙!

쾅! 쾅! 쾅!

말벌들이 온몸으로 벽을 부딪쳤지만, 벽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보유하고 있는 코인의 한도 내에서 급조한 것치곤 꽤나 훌륭한 성능을 자랑했다.

좋아.

이걸로 마지막 무대는 갖춰졌다.

"개막식은 역시 불꽃놀이로 시작해야겠지?"

시간이 없는 관계로 개회사는 생략하겠다.

진혁이 검지와 엄지를 맞부딪쳤다.

[Lv4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거대화가 막 진행되려는 찰나.

정육면체 안, 말벌들과 함께 남겨 뒀던 불꽃이 반응했다.

퍼퍼퍼펑!

거대한 화염이 일어났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폭발이라 위력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완전히 숯덩이로 변해 버린 말벌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꿈틀거렸다.

증식과 재생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키이이...."

"케엑!"

"케에엑!"

조각난 파편의 수에 맞춰 수백 마리의 말벌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엄청난 숫자다.

엄청난 숫자긴 한데.

문제는.

지금 정육면체 안에 정해져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그극!

우드득!

감당할 수 없는 숫자에 말벌들의 외피가 짓눌렸다.

그러다 결국, 압력을 감당하지 못해 외골격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거대화 알약(C)이 드랍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압사당한 시체에서 완전히 흡수되지 못한 '거대화 알약'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예상했던 대로군.'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1분이라는 시간을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건 바로 이걸 위해서였다.

무한이 증식하는 놈들에게 거대화 알약을 먹인 뒤,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죽인다면....

알약 또한 무한이 증식되어 드랍될 거라고.

물론, 다른 아이템 또한 같은 방식으로 대량 확보할 수 있었지만, 굳이 거대화 알약을 고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랭크가 높거나 부피가 큰 아이템은 아예 먹일 수도 없고 또 4층을 공략하려면 최대한 많은 알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벌써 2레벨이나 오른 건가.'

몰이사냥에 버금가는 대량 학살을 하는 덕에 경험치 또한 미친 듯이 올라갔다.

뭐랄까.

한여름 밤 살얼음 낀 맥주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갓 튀긴 치킨까지 곁들여 먹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너무나 달달한 조합으로 구성된 일거양득의 보상에 취할 것만 같았다.

'이 맛에 지하 1층을 포기할 수 없다니까.'

눅눅하고 축축한 구덩이에 기어 들어와 징그러운 벌레들과 싸우는 건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일정이다.

그럼에도 웃으면서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고생 끝에 오는 보상 덕분이었다.

"케에엑!"

"키익!"

말벌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뫼비우스 띠.

해야 할 건, 그저 팔짱을 낀 채 구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아이템과 경험치가 들어왔으니까.

[거대화 알약(C)이 드랍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대화 알약(C)이 드랍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거대화....]

[레벨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상태창들을 보며, 진혁은 생각했다.

지금쯤... 이걸 바라보는 아누비스의 속은 썩다 못해 문드러지고 있을 거라고.

***

"이, 이게 대체...!"

아누비스의 두 눈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분명, 필살을 자랑하는 계획이었다.

무한 증식하는 벌레를 상대로는 내로라하는 강자들조차 치를 떨며 도망쳤으니까.

그런데.

저런 식으로 하이브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나를 도발했던 거였나?'

합성을 위한 아이템들도 미리 구해 둔 걸 보면, 틀림없다.

모든 게 함정이었다.

뿌드득!

아누비스의 어금니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었다는 생각에, 분노로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지만....

지금 당장은 화를 낼 시간조차 없었다.

미친 듯이 레벨업을 하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은 강해진다.

결정해야 한다.

1초라도 빨리.

"빌어먹을."

이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은....

아누비스가 손바닥을 쫙 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주먹을 쥐었다.

[아누비스가 '하이브'를 파괴합니다!]

콰아아아앙!

정육면체 안에 있던 하이브가 폭발했다.

***

"역시 이렇게 나오는 건가."

한창 레벨업을 즐기고 있던 진혁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달콤한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네놈!"

아누비스가 이빨을 드러냈다.

건치네.

하얗고 튼튼해 보이는 게, 물렸다간 뼈와 살이 말끔하게 분리될 것 같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이브가 파괴된 이상 이 싸움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화가 나는 건 알겠는데, 인상 좀 풀어. 지고 나서 질척거리는 게 제일 추하다는 거 알고 있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응."

무사하고말고.

그렇게 협박해 봤자 삼시 세 끼 꼭꼭 잘 챙겨먹고 만수무강하다가 100세쯤 돌아가실 예정이다.

단명(短命)이랑 급사(急死)는 내 사전에 없는 말이거든.

"크아아아아!"

능청스러운 진혁의 태도에, 아누비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콰앙! 쾅! 콰아앙!

바닥에 금이 쩍하고 갈라졌다.

미친 듯이 화가 나고 눈앞에 있는 놈을 죽이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짜증났던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살아서 위로 올라와라. 인간! 그때는 이 손으로 직접 척추와 함께 모가지를 뽑아 주겠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야. 아! 물론, 내 목은 원래 있는 위치에 둘 거고. 합체 로봇도 아니고 뽑았다 붙였다하면 미관상 영 좋지 못할 것 같거든."

"...."

아누비스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만 더 쌓였다.

여기 서 있는 1분 1초가 수치심과 분노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결국.

"얼굴. 똑똑히 기억해 놨다."

짧은 경고와 함께. 아누비스는 스스로의 혼을 담은 석상을 파괴해 버렸다.

쿠쿠쿠쿠!

[아누비스의 그릇이 파괴됩니다!]

무너져 내리는 파편들.

동시에.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아누비스의 심판]

입수 난이도: 오버랭크

내용: 대상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대상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로써 조건은 충족됩니다, 대상의 능력치를 50%만큼 감소시키고 1분간 스킬과 고유 능력의 발동을 제한합니다.]

[단, 이 능력은 동일한 대상에게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으며, 남용할 경우 이집트 신격들의 분노를 사게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능력 또한 손에 넣었다.

무려, 신의 힘이 깃든 오버랭크로 분류된 능력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너무 일찍 받아 버렸는데, 이거.'

문답만으로 대상의 능력치를 대폭 줄여 버리다니.

이거 완전히 사기잖아.

제한 조건이 걸려 있긴 해도 시기적절하게 사용한다면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집트 신화에 소속된 신들이 당신의 존재에 관심을 갖습니다.]

[몇몇 이들이 강한 적대심을 표출합니다!]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아누비스 녀석이 그새를 못 참고 지네 편한테 쪼르르 달려가 한풀이를 했나 보다.

'하여간 신이란 놈이 입은 가벼워가지곤.'

쯧쯧.

진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탑의 상층부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스탯 포인트부터 분배해 둬야겠어.'

우선순위는 나중에나 얼굴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이집트 녀석들이 아니었다.

현재의 성장과 당장 앞에 있을 3층 보스에 관한 일이지.

이곳에 와서 올린 레벨만 무려 18.

스탯 역시 54포인트나 쌓여 있는 상태였다.

미친 성장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대형 길드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랭커가 독점 던전에서 한 달 내내 사냥을 해야 간신히 찍을 수 있는 게 바로 20레벨이었으니까.

그걸 혼자서,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달성했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스탯을 어디에 투자할지 행복한 고민을 좀 해야겠군.'

진혁이 막 스탯창을 띄우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우우웅!

통화 요청을 원하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 녀석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면에 표시되어 있는 이름은....

꽤나 뜻밖의 인물이었다.

43화 검성의 제안 (1)

[천유성님이 화상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진혁이 화면에 있는 통화 표시를 드래그 했다.

"이야. 살아 있었네?"

마인들이 꽤나 만만치 않았을 텐데....

역시 검성이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네놈 때문에 내가 밤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그 찰거머리 같은 놈들을 처리하느라 잠도 한 숨 못 잤단 말이다!"

천유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알지. 근데 그거 다 널 위해서 했던 거야. 넌 다른 건 다 좋은데 대인전 실전 경험이 부족하더라고."

"그, 그걸 말이라고!"

"게다가 역지사지라는 단어 좀 알려주고 싶어서. 찰거머리한테 쫓기는 심정이 어떤지 이번에 제대로 배웠을 거라고 믿을게."

"진심으로…. 네놈은 죽은 다음 반드시 지옥으로 갈 거다."

"으음. 그건 부정하기 힘들 것 같네."

선과 악으로 양분한다면 아마, 나는 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천국과 지옥 둘 중에 고르라면 지옥이 좀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나한테 욕이나 하려고 연락한 것 같지는 않고. 원하는 게 뭐야?"

정말로 마인들에 관한 일로 보복을 하려고 했으면, 이렇게 대화나 나누지 않았을 거다.

직접 찾아와서 칼부터 휘둘렀겠지.

몇 년 동안 100번도 넘게 싸워 봤기에, 진혁은 천유성이란 인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사실 너에게 제안할 게 한 가지 있다."

"마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 하도록 밑밥을 깐 거였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알겠어. 일단 이야기나 들어볼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유성이 입을 열었다.

"1시간 뒤, 각성자 협회에서 행사가 열릴 거다. 나를 포함해 AA급 이상 판정을 받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무도회(武道會)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지."

이것 참....

무도회라니.

"세월도 좋네. 보스 공략도 계속 실패하고 있는 중인데, 협회에서 무도회를 연다고?"

"그래서 개최하는 거다."

"뭐?"

"연이은 실패로 인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협회와 길드의 공신력은 떨어지려 하고 있지. 때문에 이번 무도회를 통해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강하고 믿을 수 있는지 보여 주려는 생각인 거다."

"흐음. 일리는 있네."

화려하고 다양한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의 대련.

몬스터를 사냥하는 레이드야 뷰튜브를 통해 자주 나왔지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간의 전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확실히 팽창해 있는 긴장을 풀어 주기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들이 콜로세움을 통해 대중들을 만족시켜 준 것처럼.

그래, 뭐.

의도야 알겠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난 AA급 이상 판정을 받지 못 했는데?"

"무도회의 우승자에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성유물의 레플리카 중 하나를 고르거나...."

천유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뭔가 느낌이 쎄하다.

"혹은 무도회에 참여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상대로 대련을 신청할 수 있는 지목권을 얻거나."

젠장.

불길한 느낌은 왜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걸까?

진혁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나랑 싸우겠다고 하려고?"

"널 쓰러뜨리는 것만이 내가 탑을 오르는 유일한 이유다. 그것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와. 누가 전투광 아니랄까 봐.

소원 한번 골 때린다.

어쩌면 진정한 중2병은 저 녀석이 갖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거절해 버리면 그만 아니냐? 그 지목권인지 뭔지 하는 거?"

"물론, 그래도 된다. 거절을 하면 겁쟁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긴 하지만,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야 상관없겠지."

"그럼, 나도 거절하면 되겠네. 낙인보다 귀찮은 게 더 싫거든."

다행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뒷구멍이 있어서.

진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니, 넌 거절하지 못할 거다."

천유성이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티켓 한 장을 꺼냈다.

황금색 글자와 홀로그램이 박혀 있는,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티켓이었다.

"뭐냐 그건?"

"블랙마켓에서 온 초대장이다. 이게 있으면 내일 자정,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여할 수 있지."

"...!?"

천유성의 말에, 진혁이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야 그럴 수밖에.

블랙마켓에서 주최하는 경매의 초대장은 구하고 싶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소문만 있을 뿐.

정확한 입수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구하다니.

'미끼치고는 너무 먹음직스러운 걸 가져왔잖아?'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코인 거래소'와는 달리 현금이 주요 화폐인 터라, 현금이 많은 이들에겐 꽤나 매력적인 기회였다.

경매품으로 나오는 것들도 하나같이 쓸 만하겠지.

3일 뒤, 4층을 공략하려면 필요한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경매장이라면 훨씬 더 좋은 것들로 구할 수 있으리라.

"대신, 네가 우승을 하지 못하면 티켓은 공짜로 넘기는 거다?"

"걱정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천유성이 티켓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와라. 피곤해서 졌다는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화상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마지막까지 녀석다운 말을 남긴 채.

***

지하 1층에서 나와 각성자 협회에 가는 길.

진혁은 지하에서 못 했던 일을 마무리했다.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9

힘 8 민첩 8 체력 8 마력 41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54

보유한 코인: 274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스킬: Lv4 '불의 원소', Lv3 '진실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3 '독식', Lv3 '얕은 호흡', Lv1 '얼음조형', Lv1 '데이라이트'

——————————————————

'54포인트라....'

이걸 보니 확실히 실감 난다.

하루 동안 얼마나 미친 듯이 사냥했었는지.

게다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고유 능력과 스킬들에, 진혁의 입꼬리가 연신 위로 향했다.

특히 지하에서 새로 얻은 '얼음조형'과 '데이라이트' 그리고 '아누비스의 심판'은 앞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데가 무궁무진 할 터.

미쳤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장 속도에 미쳤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진혁의 시선이 다시 스탯으로 향했다.

'스탯은 지금까지 투자하지 않았던 것 위주로 골고루 올려야겠군.'

특화형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환경에서 대처하려면 다른 스탯도 최소한의 기준치는 넘기는 편이 좋았다.

탑의 위로 갈수록 워낙 변칙적인 기후와 몬스터들이 등장했으니까.

[힘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민첩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체력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3개의 스탯에 모두 8포인트씩 투자했다.

그럼 어디....

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우드득.

두 쪽으로 갈라진 돌멩이.

확실히 악력이 달라졌다. 민첩을 올린 덕에 전신의 감각 또한 더욱 예리하게 갈무리된 느낌이었다.

'체력은 전투가 장기화됐을 때 체감할 수 있을 테니 좀 더 지켜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이 올린 영상이 'HOT issue' 동영상으로 선정되셨습니다.]

눈앞에 황금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오.

벌써, 입소문을 탄 건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퍼진 모양이다.

진혁이 재빨리 동영상을 클릭했다.

가면을 쓴 자신과 패트릭, 테레사를 비롯해 대형 길드의 랭커들이 보였다.

물론, 마인에 관해서 적당히 편집해 둔 상태였다.

이 영상의 목적은 길드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아도 이미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니까.

-헬린이 울어요: 무보수로, 그것도 혼자서 보스한테 가겠다니. 이거, 실화임?

-소리벗고 팬티질러: 와. 실력만 개쩌는 줄 알았는데, 인성까지 지리네.

-오른이 되세요: 개멋있다. 순수하게 사람들을 생각해서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거잖아.

-kd1004: 랭커들 다 보고 있냐? 보고 좀 배워라. 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지.

-야스오는 과학: 근데 솔플로 보스 공략이 가능하긴 한 거임?

-허언증 판독기: 다른 놈이 저렇게 말했으면 쌍욕부터 박았을 텐데, 저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보여준 업적을 보면 진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듦.

-송가인2주 압수: ㅇ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감.

-Dimian Peter: 형. 얼굴 한 번만 공개해 주라. 진심 앞으론 형 영상 조회수만 올려줄게.

-헐크가헐크: 222222

-람쥐썬더: 33333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베일에 싸여 모두가 궁금해 하던 화제 속 플레이어.

그런 실력자가 당당하게 보스 공략을 선언했으니 분위기가 달아오를 수밖에.

그 말을 뒷받침하듯, 이미 조회수도 지붕을 뚫고 하늘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조회수: 50,536,988]

탑 외 거주자들이 하루에 한 번만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5천만 조회수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수치였다.

1만 조회수당 100코인을 주니 5천만이면 50만 코인.

거기에 수수료 명목으로 90%를 떼 갔으니 5만 코인을 정산 받을 수 있었다.

'수수료를 90%나 떼어 가는 미친 조항만 아니었어도 50만 코인을 버는 건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5만 코인이면 눈이 돌아갈 만한 양이긴 하지.'

한국에서야 비교할 대상이 없을 테고.

해외에 인기 많은 랭커들도 5만은커녕 1만 코인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 같이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헤비 유저들조차 영상 하나당 백에서 천 단위의 조회수를 올리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코인은 일단 잘 모아두도록 하고.'

수수료를 제외한 정산금을 받은 진혁이 이내 걸음을 멈췄다.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

각성자 협회 정문.

검은색 양복을 빼 입은 천유성이 보였다.

저 녀석은 오늘 대련한다는 놈이 복장이 저게 뭐냐?

설마, 싸우는 무도회랑 춤추는 무도회랑 착각한건 아닐 테고.

진혁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천유성도 진혁을 발견했다.

"늦었군."

천유성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꽤나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늦긴. 아직 약속 시간까지 1분 남았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눈으로 천유성의 위아래를 훑었다.

'유적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네.'

날카롭게 갈무리된 기운.

신체 또한 탄탄해졌다.

과연, 재도전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이해간다.

눈부신 성장을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천유성의 바람과 달리, 격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벌어졌지.

'이거, 안쓰러워서 어떡하나.'

똑같이 시간을 보내도.... 그리고 똑같이 죽어라 노력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둘 사이 갖고 있는 정보의 질이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뭐야. 천유성인지 뭔지 하는 떨거지가 너였냐? 생각보다 너무 비쩍 곯았는데?"

양복이 불쌍하다 느낄 정도로 터질 듯한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의 목에 있는 문신.

알고 있는 문신이다.

'호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꽤나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길 거 같다.

44화 검성의 제안 (2)

흑운(黑雲) 길드.

이미 자리를 굳힌 한국의 1위 '단군'과 2위 '싸울아비'에 이어 3위 자리를 노리는 대형급 길드 중 하나다.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지.'

흑운 길드는 매우 호전적인 영업력을 바탕으로 최근 급격히 성장했으며, 특히나 길드장인 홍덕표는 꽤나 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질이 나쁜 놈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목에 흑운길드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구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는 친구냐?"

진혁이 천유성에게 물었다.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저쪽 길드의 스카우터가 가입 제안을 했었거든."

아....

방금 그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이해됐다.

목에 힘깨나 주고 있는 길드에서 천유성에게 흥미를 보였고.

당연히 독고다이인 이 녀석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겠지.

하여간,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 검성 나으리다.

남자가 재차 물어왔다.

"어이. 묻잖아. 네놈이 천유성인지 뭔지 하는 놈이냐고?"

"그래, 내가 천유성이다."

"역시.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에 검은 머리를 찾으라더니 그 말이 맞았군. 나는 흑운 길드의 정도현이라고 한다."

정도현이 자신을 소개했다.

"길드의 가입 제안이라면, 이미 그쪽 스카우터한테 말해 뒀다."

"알아. 대충 전해 들었어."

"그럼, 더 이상 이야기는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한데, 우리 길드의 제안을 고작 AA등급 받은 신입이 거절하는 게 거슬려서 말이지. 이번에는 강제로라도 예스를 받아낼 생각이다."

"네가... 날 말이냐?"

천유성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호오. 생긴 거랑 다르게 깡따구는 좀 있나 보군."

정도현도 이빨을 드러냈다.

순간, 둘 사이에 옅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파츠츠!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지면에 먼지가 흩날렸다.

손이 움직인다.

서로의 허리춤에 있는 무기를 향해서.

바로 그때.

"오버하지 말고 칼 집어넣어. 설마, 협회 앞에서 싸울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지?"

진혁이 끼어들었다.

"먼저 시비 건 건 이놈이다!"

천유성이 항변했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여기서 싸웠다간 뒷감당이 골치 아파지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컹!

"큭!"

결국, 혀를 찬 천유성이 반쯤 뽑은 검을 집어넣었다.

반면, 정도현은 진혁을 위아래로 흘겼다.

마치, 물건에 가치를 따지는 것처럼.

"넌 또 뭐냐?"

뭐긴.

"오늘 무도회인지 뭔지 있다기에 이 녀석 응원하러 온 놈이시다."

"응원? 무도회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응원이라고?"

"초대장을 못 받았거든."

"하.... 초대장도 못 받을 정도라면 등급도 형편없다는 뜻일 텐데?"

"F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알파벳이지."

진혁이 태연스럽게 말하자, 정도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내뱉었다.

우두둑!

관절을 풀자 터질 듯 팽창한 근육들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응원하러 왔으면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 손뼉이나 칠 것이지. 감히, F등급 따위가 내 앞을 막아?"

만약, 이곳이 협회 앞이 아닌 탑의 내부였다면 그 즉시 척추를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해 가볍게 팔다리 한두 군데 부러뜨리는 걸로 봐주자.

그것이 정도현이 생각한 타협점이었다.

하지만, 마력을 실은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 녀석은 내 먹잇감이다!"

지켜보던 천유성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스릉!

검이 뽑히며, 눈부신 검광이 쏟아졌다.

[천유성이 Lv6 '추혼검기(追魂劍氣)'를 발동합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정도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천유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주먹에서 푸른빛 기운이 일렁였다.

바위조차 일격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강화형 스킬이었다.

"한 방에 그 젓가락 같은 검까지 박살내 주마!"

그리고 그것이.

정도현이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었다.

***

쿠우웅!

2m에 이르는 거대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단검 손잡이 부분이 관자놀이를 파고들었으니 당연히 의식이 날아갈 수밖에.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진혁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단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유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곧,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끌어올렸던 마력을 흩어 버렸다.

검에 맺혀 있던 검기가 사라졌다.

'방금 그 움직임....'

아무리 상대가 방심했다곤 하나 그 짧은 시간에 급소를 가격하다니.

워낙 빠른 속도였던 터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음에도 그만 기척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당한 정도현은 자신이 뭐에 당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천유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유적에서 헤어진 후. 1분 1초도 쉬지 않고 강해지는 것에만 몰두했다.

하루를 한 달로 늘려 주는 미궁에 들어가 미친 듯이 수련했고.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계속해서 한계를 극복해 나갔었다.

그런데도.

대체 어째서.

'녀석과의 격차는 조금도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복기하고 또 복기해도....

방금 기습에 대응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뭘 멍하니 있어?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야지? 가뜩이나 시간도 없다며?"

"...그래."

천유성은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

각성자 협회 13층 수련장.

층 전체가 마력을 흡수하는 마정석과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플레이어들이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장소다.

캉! 카앙!

카카카카캉!

날붙이가 교차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 24명이서 펼치는 배틀 로얄 방식. 때문에 경기장은 온갖 종류의 고유 능력과 스킬들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하하, 박 형. 어째 각성하기 전보다 몸이 더 둔해진 것 같은데? 능력에 너무 의존하는 거 아니야?"

"아직 몸 푸는 중이다 자식아. 이제부터 제대로 할 거니까 긴장 놓지 마라. 5층에 있는 힐러 아줌마 만나기 싫으면."

높은 등급을 받은 플레이어들만 모아 둔 탓일까?

대부분 서로 간에 일면식이 있었다.

끼리끼리 몰려다닌다고.

강한 자들끼린 인맥을 갖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살초를 배제했을 뿐. 자존심과 명예가 걸려 있기에 모두가 매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같은 시각.

관중석에서도 각 길드의 랭커들과 방송국 관계자들이 흥미롭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기가 꽤나 수준이 높군요."

"예. 이 정도면 대중들도 만족할 듯싶습니다."

"하지만, 임시방편이고 어서 3층을 돌파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여러 목소리가 오갔다.

대부분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인류의 미래고 나발이고 간에, 당장 길드의 세력만 부풀리는 게 최우선 과제인 이들도 있었으니까.

관중석 정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매의 눈으로 유망주들을 훑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일한 S급이자 흑운 길드의 마스터인 홍덕표.

그리고 그를 따르는 흑운 길드의 스카우터들이었다.

"저기 2인조도 꽤나 쓸 만해 보입니다."

스카우터 한 명이 불꽃을 다루는 노인과 소환수를 부리는 젊은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가 소환수를 이용해 방어를 담당하고 틈이 보이는 즉시 노인의 불꽃이 상대를 압박하는 모습.

오랫동안 합을 맞춘 듯 완벽한 연계다.

허나, 홍덕표는 스카우터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 넘겼다.

이미 한 명의 플레이어에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바로 천유성에게.

'...훌륭해.'

슬림하지만 탄탄한 체격.

차갑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갈무리된 기운은 멀리서 보는 이들에게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각성 테스트에도 허점이 많나 보군.'

저게 고작 AA등급일 리가 없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A'라는 카테고리에 넣으면 안 된다.

종횡무진 시합장을 누비며 휘두르는 검엔 홍덕표 스스로도 벌써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었으니까.

"네놈이 포섭에 실패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아, 형님. 거 말씀 한번 심하십니다. 원래 제가 제압할 수 있던 건데, 웬 버러지 한 마리가 뒤통수를 쳤다니까요?"

정도현이 발끈했다.

"또 그놈의 F급인지 뭔지 하는 놈 타령이냐?"

"서,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고작 그런 방해꾼 때문에 실패했다는 걸 어떻게 믿어?"

"하아. 답답합니다, 진짜. 차라리 저기에 절 좀 출전시켜 줬으면, 버러지들 싹 다 정리하고 천유성까지 무릎 꿇려 놨을 텐데...!"

"씁! 니가 지금 시합 타령할 때야? 조금 뒤에 있을 인터뷰나 신경 써."

정도현을 무도회에 출전시키지 않고 아껴 둔 건 무도회가 끝난 뒤에 있을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각성한 이들 중 50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AAA등급.

과거, 시련의 탑의 성장 속도를 고려해 본다면 정도현은 앞으로 3년 이내에 충분히 S급의 반열에 오를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유망주를 영입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길드의 위상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

"이번 일 준비하느라고 돈 많이 썼다. 알고 있지?"

"걱정 마십쇼. 제가 화면발만큼은 죽이게 받습니다."

정도현이 꿈에 부푼 얼굴로 씨익 웃었다.

***

흑운 길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경기를 구경하던 진혁이 작게 하품을 했다.

이건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리 목숨을 걸지 않는 친선 경기라지만 수준이 너무 낮다.

그나마,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만났던 민정우와 이유리를 만난 게 유일하게 신선한 점이랄까?

'간만에 보니 반갑긴 하네.'

두 사람은 그때 자극을 꽤 받았는지 제법 실력이 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는 시련의 탑이 나타나고 나서 뭘 했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마냥 욕하기엔 주위의 반응이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다.

겨우 이 정도 수준으로 미래가 밝니 어쩌느니 말하다니.

아주 가관이다.

이 정도 레벨의 개그면 뚱한 표정의 엘리스라도 하루 종일 웃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하려나?

'젠장, 이렇게 되면 천유성의 우승은 확정이겠어.'

진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날뛰고 있는 천유성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쉽게 초대장을 날름 먹으려 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시합장 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공격한다고 해도. 천유성의 피부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천유성은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다.

"컥!"

"크으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플레이어들이 기절하거나 항복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다.

대부분 검의 궤적을 읽을 엄두도 못 냈고.

만약, 읽는다 해도 채 3합을 받아내지 못 했다.

결국, 경기가 시작된 지 15분 만에 천유성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쓰러졌다.

"우, 우승자가 나왔습니다."

협회 직원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짝! 짝! 짝! 짝!

곧바로 천둥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관중석에 있던 길드의 관계자들도 진심으로 이 대결을 감명 깊게 봤다는 방증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천유성 플레이어님. 그럼, 두 가지 보상 중에 하나인 레플리카와...."

"레플리카 따윈 필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상대를 지목하는 거다."

천유성이 직원의 말을 끊었다.

다시 한번 관중석이 소란스러워졌다.

'과연. 아이템보다는 강한 자와의 대결을 원한다라....'

'멋지군. 우리 길드에서 꼭 데려왔으면 좋겠는데.'

'대체 저 검귀가 그토록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지?'

'길드의 마스터 중 하나겠어.'

모두들 생각했다.

저토록 강한 괴물이 대결하고 싶은 상대라면 한국의 최상위 랭커일 거라고.

이곳엔 오지 않는 단군이나 싸울아비 길드의 마스터인가?

아니면 오래 전부터 한국 무술계의 정점으로 알려져 있는 유 씨 가문의 유천영 어르신?

혹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용병들 쪽에서?

그렇게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을 바로 그때.

"나와라."

천유성의 검 끝이 관중석에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45화 검성의 제안 (3)

"그래! 바라던 바다! 당연히 승부를 내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 정도현이었다.

협회 앞에서 있던 일로 인해 자신을 지목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멍청하긴. 네놈을 지목한 게 아니다."

옆에 있던 홍덕표가 정도현의 손목을 잡고 끌어 앉혔다.

"예? 형님?"

정도현이 반문했지만, 홍덕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들뜬 얼굴로 천유성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래, 그 정도 실력을 갖고 있으면 강한 녀석과 싸워 보고 싶겠지.'

이해는 한다.

자신 역시 강자와의 전투는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었으니까.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처음에 천유성의 등급을 들었을 땐 갖고 싶은 장기말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정도현이 실패한 뒤 수련장에서 보여 준 무용을 봤을 땐 원하는 조건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지금 천유성이 보여 주는 행동을 보자 비로소 확신했다.

저 녀석을 얻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만약, 살아서 손에 넣지 못 한다면 죽여서라도 갖고 말겠다는 것 또한.

"간만에 몸 한번 제대로 풀겠어."

홍덕표가 양복을 벗었다.

하얀 와이셔츠 사이로 단련된 근육이 드러났다.

그런데.

천유성은 여전히 검을 세운 채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홍덕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자세히 보니 검 끝이 향한 방향이 약간 달랐다.

정도현도 자신도 아닌, 조금 더 오른쪽.

그곳엔 귀찮다는 표정을 만면에 가득 띄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후우."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천유성이 검을 내렸다.

모두의 앞에서 인정한 것이다.

원하는 대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뭐, 뭐야?"

"홍 대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고?"

"누구지?"

"모르는 얼굴인데...."

"당장 데이터베이스 돌려 봐!"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길드 관계자들이 다급히 대상의 정보를 찾으려 했다.

적어도 협회 빌딩 안에 들어올 정도면, 최소한 각성 테스트는 봤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연히 그에 대한 정보 또한 있을 것이다.

[플레이어 강진혁, F랭크]

잠시 뒤, 남자에 대한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F급?"

"서, 설마... F급을 지명한다는 거야 지금?"

"그렇게 안 봤는데, 저 친구. 약한 사람 괴롭히는 취미라도 있던 거였나?"

소란이 더욱 커졌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바로 그때, 정도현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혀, 형님. 저놈입니다! 제 뒤통수 친 놈이 바로 저놈이라고요!"

"뭐?"

"아까 전에 천유성이랑 같이 있던 놈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응원한다고 찾아왔다던 그 자식이 틀림없습니다."

"저 녀석이...?"

홍덕표가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도 슬쩍 홍덕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천유성이 무슨 이유로 널 지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제 파악을 한다면 거절해라. 네놈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한 마디.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홍덕표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대련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지. 1초도 안 돼서 끝날 거라고."

"무사히 끝나기만 하면 다행이게? 검에 힘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F급은 두 토막이 날걸?"

"하긴, 아무리 시합이라도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운이 좋아도 큰 부상을 입을 테고.

조금만 재수가 없어도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여기 있는 모두가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시합장 아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우."

귀찮다는 표정을 잔뜩 지은 채.

***

경기장엔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진혁은 바닥에 놓여 있는 장검 한 자루를 집었다.

무게도 가볍고 균형도 나쁘지 않았다.

보급형치곤 말이다.

"제발 부탁인데, 이번에도 지면 그만 좀 덤벼라."

아니, 진심으로.

슬슬 포기라는 걸 해 줬으면 정말 고맙겠는데.

"꼭 내가 진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방금 싸움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음. 확실히 실력이 늘긴 한 것 같네. 열심히 수련했나 봐?"

근육도 제법 탄탄하게 붙었다.

삼대는 몇 치는지. 보충제는 뭘 먹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설마, 스테로이드를 꽂은 건 아니겠지?

"감상은 그것뿐이냐?"

"아. 초대장 한 장 받는 게 이렇게나 귀찮은 거구나 하는 생각도 좀 들었어."

"...."

천유성의 얼굴이 구겨졌다.

동시에 검에 실린 마력의 농도가 변했다.

파츠츠츠!

[천유성이 Lv6 '추혼검기(追魂劍氣)'를 발동합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운무.

유형화된 기와 계속해서 억제해 온 살기가 하나로 합쳐졌다.

저릿! 저릿!

진혁의 피부에도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합에서 보여 줬던 건 힘을 아꼈던 거였나.'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참아 왔던 걸 한 번에 분출하는 느낌이다.

"다 좋은데, 이거 친선 시합... 맞지?"

분위기가 꼭 콜로세움에 온 것 같은데?

룰은 생사결로, 둘 중에 한 명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고.

"초대장을 얻고 싶으면, 제대로 싸워야 할 거다."

천유성이 검을 앞으로 뻗은 채 자세를 잡았다.

오른발을 움직이며, 무게중심을 낮췄다.

단숨에 거리를 좁힐 생각이다.

쿠쿠쿠쿠!

마정석으로 만든 지면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 세상에나...."

"진심으로 할 생각이야 저거!"

"젠장. 가드들 불러! 진짜로 죽이겠어!"

지켜보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설마 손속에 사정을 둘 줄 알았던 천유성이 무지막지한 살기를 뿜어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바로 그때.

우우우웅!

새로운 마력이 시합장 전체를 휘감았다.

천유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력.

불길하다 못해 흉흉하기까지 한 검은색 기운이 발현되었다.

[고유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

장검을 완전히 뒤덮고도 모자라 1m 넘게 솟구친 검강에 대기가 흔들렸다.

"허억?"

"거, 검강이다!"

"미친. 무슨 F급짜리가 검강을 써?"

"그것도 억지로 끌어올린 게 아닌 완성된 수준이야. 전 세계에서도 이 정도 검강을 쓸 수 있는 플레이어는 한 손에 꼽는다고."

경악에 가까운 반응이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홍덕표조차 두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이건 대체...."

말리려던 가드들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만."

구경하던 길드의 관계자들도.

모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어쩌면.

이 승부를 보게 된 것이 자신들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 속, 진혁이 물었다.

"검기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유적에서의 일을 잊진 않았을 텐데?"

능력의 상하관계를 극복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검에 관해서라면 더욱더.

"분명, 내 검기로는 네 검강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거라면 만들 수 있지."

순간,

파츠츠츠...!

검기 위로 또 다른 검기가 덧씌워졌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일곱 번.

마치, 여러 겹의 갑옷을 입은 것처럼 겹겹이 쌓인 검기가 하나의 형을 갖췄다.

'호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저런 식으로 응용한다면 검강을 상대로라도 잠시는 버틸 순 있다.

마력과 체력 소모가 엄청나긴 하겠지만.

'싸움을 질질 끌기 보다는 단기전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군.'

아마도 3분, 그 이상은 아무리 천유성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피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진혁의 시선이 손에 쥔 장검으로 향했다.

벌써부터 금이 가기 시작하는 칼날이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경기장에 널려 있는 일반 검으로는 검강을 견딜 수 없다.

단검으로만 싸우면, 언노운이라는걸 알아보는 이가 있을 수 있기에 일부러 이걸 고르긴 했지만....

덕분에 시간이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됐다.

"간다!"

먼저 움직인 건 천유성이었다.

콰앙!

지면을 박차고 최단 거리로 좁혀오는 신속.

발도 자세에서 폭사된 검이 진혁의 목을 노렸다.

진혁이 정면으로 검을 받아냈다.

콰아아앙!

그저 두 개의 흉기가 맞부딪쳤을 뿐.

하지만, 검압이 빚어낸 돌풍으로 인해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빠르다.

그리고 매섭다.

쾅! 콰앙! 콰앙!

연이어 펼쳐지는 공방전.

천유성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초식을 펼쳤고.

진혁은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모조리 받아쳤다.

섬광이 번쩍이며 허공에 수많은 불꽃이 흐드러졌다.

쿠쿠쿠쿠!

마력이 폭주한다.

마정석으로 만든 경기장이 버티지 못할 정도다.

"휘유. 거. 더럽게 매섭네. 하마터면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뻔 했어. 그럼, 이제 끝난 거냐?"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천유성의 검신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추혼검무(追魂劍舞)'.

겹겹이 쌓여 있던 검기가 각기 가른 방향으로 나눠졌고.

제2식(第二式)'.

타오르는 겁화는 이내 경기장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격하게 타올랐다.

추혼염제(追魂炎帝)!

이것이 바로 추혼검의 두 번째 검.

눈앞에 마주하는 적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힘.

'추혼염제'다.

화끈하고.

진혁의 안면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 자식도 진짜 재능충은 재능충이네.'

벌써 추혼검의 제2식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물론, 완벽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난해하기 짝이 없는 추혼검의 편린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재능이었다.

화르륵!

7개의 붉은 꽃잎이 개화했다.

이건 위험하다.

진혁은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이 공격을 절대 정면으로 받아선 안 된다고.

그렇다면....

진혁이 '검의 무덤'을 해체했다.

그러면서 검강에 사용했던 마력을 새로운 스킬을 발동하는 데 쏟아 부었다.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무수히 많은 얼음 가루들이 직사각형 형태의 방패를 만들었다.

천유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빙계 스킬에 당황한 듯싶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놀라지 않는다. 이번에는 절대로!'

평정심을 되찾은 천유성이 완전히 만개한 꽃잎을 크게 휘둘렀다.

퍼어어엉!

얼음과 불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완전한 상극.

그러나, 스킬의 완성도는 단연 천유성 쪽이 우위였다.

'됐다!'

천유성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막대한 양의 수증기가 솟구친 터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얼음 방패가 박살나는 묵직한 손맛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

승리를 확신한 순간.

['데이라이트'가 발동됩니다!]

수증기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점멸했다.

빙계열 속성의 스킬이 아니다.

또 다른 속성의 스킬이 발동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커헉!"

천유성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어지는 광경에 천유성은 또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천유성이 Lv6 '검막(劍幕)'을 펼칩니다!]

반사적으로 펼친 방어 스킬.

동시에.

콰콰콰콰콰콰!

직선으로 가로지른 빛이 마정석을 관통하고 경기장 외벽까지 꿰뚫어 버렸다.

***

치이이익!

"크...으윽."

천유성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전신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위력을 조절했기에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리 검막을 펼치더라도 대군(對軍)스킬을 받아낸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넌... 대체 스킬을 몇 개나 갖고 있는... 거냐."

가까스로 내뱉은 말.

그와 함께.

쿵!

천유성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46화 기자회견 (1)

경기장 전체가 적막에 잠겼다.

예상을 뒤엎어 버린 결과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

"...."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도합 두 번 놀라야만 했다.

첫 번째는 동 랭크의 플레이어들을 압살해 버린 천유성의 실력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런 천유성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

전율로 인해 일어난 솜털이 아직까지 곤두서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영원 같았던 침묵을 깬 건 누군가의 한 마디였다.

정확히는 욕설에 가까운 탄성이었지만.

"이런 미친...!"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상식을 완전히 깨 버린 상황이었기에.

그만, 속에 있는 진심을 내뱉어 버리고만 것이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봐, 봤어? 검강만으로도 눈이 튀어나올 뻔했는데, 마법 계열의 스킬들까지 사용한 거?"

"그것도 보조로 익힌 수준이 아니야. 방금 그 하얀빛, 마정석으로 만든 보호벽을 박살내고 외벽까지 뚫어 버렸잖아!"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어디 상층에 있던 보스 몬스터가 뛰쳐나온 게 더 그럴듯하잖아?"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젠장.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수선한 분위기 속.

진혁은 경기장 바로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렇군. 자네와는 박물관에서 본 이후 처음이니까."

"아으...."

민정우와 이유리가 몸을 움찔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철저하게 밟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탓이었다.

"사실, 첫 스타트가 조금 살벌하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흠. 나 또한 자네와 척을 지고 싶진 않네. 솔직히 말해 적으로 만났다간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거든."

"나,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좋아지자는 의미에서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기왕이면 소환사이신 이유리 씨가 힘써 주셨으면 좋겠네요."

"뭐? 부탁?"

"예. 들어보시고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야...."

"물론."

진혁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앞으로의 관계 따위, 변기통에 집어넣은 뒤 내려 버릴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돼요."

"...!"

이유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말이 좋아 선택권이 있는 부탁이지.

거절했다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할 수 있는 거라면... 아니,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들어줄게."

"감사합니다."

진혁이 이유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했다.

보스 공략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 동시에 소환사인 이유리라면 훨씬 더 쉽게 준비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는데?"

"내일 모레. 그때까지 여기 주소로 전부 보내 주세요."

"이, 이렇게 많은 걸 이틀 만에 하라고?"

"왜. 못 하시겠어요?"

"아니, 아니야. 하면 되잖아, 하면."

이유리가 울상을 지으며 진혁이 건네준 쪽지를 챙겼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볍게 인사한 진혁이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이건...?'

진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위쪽이다!

쿠우웅!

관중석에 있던 남자가 뛰어내렸다.

거대한 덩치와 근육질의 몸.

협회 앞에서도 만났던 정도현이었다.

"이건 정말 의외로군. 치어리더인 줄 알았던 놈이 이 정도 힘을 갖고 있을 줄이야."

"시비를 거는 거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는데, 몸이 완전히 풀려서 힘 조절을 못 해 줄 것 같으니까."

진혁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동시에 '진실의 눈'을 통해 상대방의 상태창을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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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도현

성별: 남

나이: 33세

레벨: 21

힘 40 민첩 17 체력 18 마력 8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8,535

직업: 차력사(借力士)

고유 능력: 거인의 힘

스킬: Lv5 '거인의 손아귀', Lv5 '거인의 방패', Lv5 '고통 둔화', Lv5 '깊은 호흡', Lv4 '약자 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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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현재 대상은 당신에게 무언가 꿍꿍이를 갖고 접근했습니다. 그 의도가 뭔지 파악한다면, 대상이 갖고 있는 스킬 중 '거인의 손아귀'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꿍꿍이라고?

단순히 시비를 걸기 위한 게 아니라는 뜻인가?

아니, 그것보다 시스템은 정도현의 의도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복사 조건에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시련의 탑에 관한 비밀을 푸는 건 이후의 일일 뿐.

지금 당장은 고민해 봐야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신경 쓸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워워.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싸우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정도현은 살기를 뿜어내는 진혁을 향해 양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마치, 싸울 의사 자체가 없다는 것처럼.

"그럼, 뭣 때문에 사람 귀찮게 하는 건데?"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아서...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되도 않는 너스레를 떨던 정도현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진혁은 손을 마주잡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잘 부탁한다고?

그럴 리가 없지.

남을 깔보기만 할 줄 아는 놈에게 그런 신사적인 태세전환이 가능할 리 없다.

시스템 말대로 다른 이유가 있을 터.

진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유성과 비교하면 떨어지긴 했지만.

정도현도 동 랭크 대비 꽤나 강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녀석이 왜 무도회에 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른 대형 길드와는 다르게 왜 길드 마스터인 홍덕표는 이곳에 직접 온 것일까?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까지는 몰랐지만,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진혁이 정도현을 바라봤다.

평온함을 가장한 얼굴 뒤에, 열등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은 결코 친해지려고 내려온 게 아니다.

오히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과시하기 위함에서 온 것이리라.

악수라는 행위. 정도현이 갖고 있는 '거인의 힘'이라는 고유 능력. 무도회에 내보내지 않고 아껴 둔 플레이어. 길드의 성장을 위해 안달이 나 있는 길드 마스터.

단서와 단서가 취합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혁의 머리에 무언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기자들이 와 있는 거군.'

난데없이 나타난 루키가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갈 걸 우려해 정도현을 보낸 것이다.

전투라면 몰라도. 단순히 힘을 이용한 악력만큼은 정도현이 훨씬 우위에 있을 테니까.

모두의 주목을 받던 대형 신인이 완력에 밀려 괴로워한다?

이쪽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거다.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상대가 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진혁의 가설이 옳다는 걸 증명하듯.

복사 조건의 달성을 알리는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거인의 손아귀(B)'를 획득하셨습니다!]

[거인의 손아귀]

입수 난이도: B

내용: 대형 몬스터인 거인이 갖고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악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하며, 본인 체중의 10배에 달하는 아이템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그런 꿍꿍이가 있는 거였구나.'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진혁이 만면에 웃음을 띠운 채, 이번엔 지하에서 얻은 고유 능력을 사용했다.

[고유 능력 '아누비스의 심판'이 발동됩니다!]

우우우웅!

미세하게 떨리는 공기.

사용자가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대상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면 그로서 조건은 충족된다.

"이 악수는 흑운 길드 전체를 대표해서 하는 거냐?"

진혁이 첫 번째 '질문'을 했다.

"물론이다. 덕표 형님도 너에게 관심이 있거든. 보아하니 길드가 없는 것 같은데, 우리와 함께하면 특별대우를 해 주지."

특별대우라....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를 잘도 지껄이네.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니,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조차 역겹게 들렸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직 문답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사실 급전이 필요한데, 거기 가입하면 계약금도 두둑이 당겨 주나? 왜. 스포츠 스타들도 이적 시즌 되면 선불로 얼마씩 주고 하잖아?"

"푸하하! 뭐,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액수만 말하면 얼마든지 맞춰 주지."

이걸로 두 번째.

아누비스의 심판이 이래서 사기다.

별 시답잖은 질문으로도 조건이 충족됐으니까.

무엇보다 감각이 극히 예민한 놈이 아니라면, 상대는 이 스킬이 발동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집트 녀석들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텀을 주고 써주기만 하면 된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진혁이 정도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두 손이 마주했다.

***

'걸렸다!'

정도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상대가 미끼를 덥석 문 것이다.

'아무리 검술과 마법에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힘만큼은 약할 수밖에.'

이걸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 기자회견을 갖는다면, 최상의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때마침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걸 본 기자들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든 채.

두 사람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누구지?"

"문양을 보면 흑운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 같은데?"

"오오! 다른 길드들보다 먼저 저 플레이어를 영입하려는 생각인가 보군. 이거 완전히 특종 각 제대로 잡을 수 있겠어."

"대형 길드와 유망주와의 만남이라…. 이건 톱 기사는 따놓은 당상이구만."

'완벽한 타이밍이다!'

[정도현이 Lv5 '거인의 손아귀'를 발동합니다!]

정도현의 팔뚝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강철조차 우그러뜨릴 수 있는 거인의 힘이 인간의 손을 통해 재현되었다.

그런데.

"...어?"

고통으로 일그러져야 할 상대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했다.

부르르 하고.

마주잡은 손이 격렬하게 떨렸다.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이럴 수가....

'설마, 근력조차 나와 대등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모든 분야에 완벽한 만능형 플레이어 따위는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힘을 쥐어짜내도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사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

"마지막으로 묻지."

진혁이 천천히 입술을 땠다.

"크읍! 씨벌. 묻긴 뭘 물어?"

얼굴이 시뻘게진 정도현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단순히 힘이라면, 네가 우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였냐?"

"그거야 당연하지! 너 따위 비실비실한 놈이랑 나랑... 커억?"

정도현이 질문에 대답한 순간.

갑자기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상대가 강해진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약해진 건....

'오히려 나였나?'

믿기 힘들었지만, 고유 능력은 물론 스킬까지 모조리 봉인당한 상태였다.

우드득!

손에 전해지는 압박감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부러진다.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손가락이 모조리 아작 날 터였다.

"놔... 놔라. 이거 놓으라고!"

"응? 왜? 아파?"

진혁이 피식 웃었다.

"끄아아악!"

"엄살 부리지 말고. 보니까 힘에 꽤 자신이 있는 것 같던데, 덩치는 산만 해서 질질 짜고 그러면 안 되지."

"그만, 그마아아안!"

결국, 정도현이 온몸을 마구 비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처음 상대를 갖고 놀아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머릿속엔 온통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퍼억!

정도현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반격이라기 보단 살아남기 위한 발악에 가까웠다.

물론.

그런 어설픈 공격 따위가 통할 리 없다.

진혁이 복부에 꽂힌 정도현의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그걸로 끝.

콰앙!

번개처럼 내지른 주먹이 정도현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꾸웨에엑!"

완전히 기역자로 꺾인 몸.

피와 함께 토사물이 쏟아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홍덕표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짓밟아 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파츠츠...!

낯선 마력이 끼어들었다.

47화 기자회견 (2)

'뒤쪽...!'

원거리 공격이다!

진혁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붉은 섬광이 번쩍이다 싶더니.

콰아아앙!

1초 전까지 진혁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생겼다.

"감히… 도현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 이날을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고함을 지른 건 관중석에 있던 홍덕표였다.

애지중지하던 동생이,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히든카드가 망가졌으니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하얗게 변해 버린 홍덕표가 어금니를 갈았다.

동시에 홍덕표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쿠쿠쿠쿠쿠!

층 전체를 뒤흔드는 마력.

호오.

역시, S급은 S급이라 이건가?

그래도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마력 운용이 제법이다. 쓸데없는 낭비가 확실히 적긴 하네.

아직 센스가 부족하긴 하지만, 3년 정도 갈고 닦으면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 듯 보였다.

진혁이 다시 한번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

이름: 홍덕표

성별: 남

나이: 41세

레벨: 34

힘 38 민첩 33 체력 20 마력 15

보유한 스탯 포인트: 1

보유한 코인: 25,850

직업: 버서커

고유 능력: 혈마기(血魔氣)

스킬: Lv5 '광폭화(狂暴化)', Lv5 '혈액 응고', Lv4 '전신 강화', Lv4 '피아 식별', Lv4 '참수(斬首)'

——————————————————

[복사 조건: 홍덕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으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대상의 고유 능력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복사 조건을 읽은 진혁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래, 이 맛에 융합을 손에 넣었다.

다른 사람이 온갖 애를 써서 얻은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거라....'

그거야 뻔하지.

이미 정답은 알고 있었다.

진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화가 나는 건 이해하는데, 싸우는 건 좀 참아 주면 안 될까?"

"왜.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는 거냐?"

"아니, 길드 마스터나 되는 놈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박살나면 쪽팔릴까 봐 그렇지."

"이,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아주 뼈째로 씹어 버리겠다!"

홍덕표가 관중석을 박찼다.

콰앙!

의자가 모조리 박살나며, 단숨에 진혁과의 거리를 좁혔다.

2m에 이르는 대검에 붉은빛 기운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검강과는 다르다.

혈마기(血魔氣)라 부르는.

피를 이용한 이질적인 힘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진혁 또한 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츠츠!

검은색 강기가 솟구쳤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두 개의 기운이 격돌했다.

검붉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콰콰콰콰콰콰콰!

폭주하는 마력에 지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오오!"

"역시. 홍 대표야. 이 마력. 멀리서 보기만 해도 오싹오싹하구만."

"검에 맺힌 기운 좀 봐. 동영상에서만 보던 건데. 그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기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전투가 지속될수록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변을 깨달은 건 한 여성 기자였다.

"홍 대표님이 혈마기까지 사용한 걸 보면 절대 봐주는 게 아닌데.... 저 남자는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죠?"

짧은 물음에. 나머지 기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다.

홍덕표가 트레이드 마크인 스킬까지 사용했음에도 대등하게 싸우다니.

"그, 그러게?"

"정신이 팔려서 깜빡했는데, 진짜잖아?"

"세상에나.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S급하고도 대등하다고?"

그들의 눈엔 진혁이 홍덕표와 엇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걸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현실은 대등한 정도가 아니었다.

적어도 검을 나눈 당사자끼린 지금 이 한 번의 공방전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린 상태였다.

"크윽!"

홍덕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공방전에서 밀린 탓이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설마.... 나보다도 강하단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의 탑 2층 몬스터 '거신병'의 숨통을 끊었던 레이드.

그곳에서 당당하게 제1진의 우익을 담당했던 자신이 고작 F급 판정을 받은 떨거지 하나에게 밀린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큰하게 느껴지는 어깨와 손목의 통증은 누가 더 강하고 약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벌써 힘든 건 아니지? 정 힘들면 파스라도 좀 붙이고 해도 되는데?"

진혁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웃...기지마라. 아직 본 실력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어째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지 않아?"

"...."

홍덕표가 입술을 꾹 닫았다.

아무리 센 척을 해 봐도 이 싸움을 지속했다간 결국에 어떤 결과를 맞을지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여기서 꼬리를 말았다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

바로 그때.

끼이익!

경기장과 외부를 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

[한상진이 Lv4 '중재(仲裁)'를 발동합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힘.

한국 각성자 협회장, 한상진이 보유한 스킬이었다.

"협회장이다!"

"뭐? 그 양반 어지간해선 외부 행사 참관 안 하는 걸로 아는데?"

"진짜야! 저기 봐!"

입구에서 중년의 남성과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나타났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자가 한국에 있는 각성자들을 이끄는 사람인가.'

날카로운 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

이번엔 마인들이 만든 가짜가 아니다.

책임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부터 완전히 달랐으니까.

"한상진 협회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자가 저희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를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놨단 말입니다! AAA등급을 받은 유망주를요!"

홍덕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한상진은 홍덕표의 불만에 너털웃음으로 화답했다.

"하하. 뭐, 시합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홍 대표님이 이해해 주세요."

"예?"

"동네 초등학생 대회도 아니고. 부상이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 그보다 제가 좀 바빠서 잠시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잠시만...!"

홍덕표가 뭐라 외쳤지만, 한상진은 무시한 채 곧장 진혁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한국 각성자 협회를 맡고 있는 한상진이라고 합니다."

"절 알고 계신 겁니까?"

"사실, 20분 전까진 강진혁 플레이어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무도회를 담당하고 있던 박 부장으로부터 급하게 연락을 받았죠. 제가 직접 와 봐야 한다고요."

하긴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한상진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예상에 없던 이변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그래서 저희 측에서 조사를 해 봤더니... 과거, 강진혁 플레이어님의 등급에 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 조금 특별한 점이 있더군요."

한상진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기자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F등급인 진혁이 이토록 강했던 이유가 밝혀지려는 것이다.

"한국의 16번째 S급 판정을 받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저희 실수로 인해 잘못된 등급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사과드리고 싶군요."

결코 길지 않은 담화.

하지만, 거기에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허억!?"

"S! ...S급?"

"저 사람 등급이 S급이었어?"

"세상에나… 여기서 새로운 S급을 보게 될 줄이야."

"A급 플레이어들이 찍 소리도 못 한 게 당연한 거였구나. 이러니 아예 상대가 안 됐지."

순간, 기자들은 들고 있는 카메라를 떨어뜨리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한국에서 각성 테스트를 본 사람의 수는 700만이 넘는다. 각성자 협회 본부는 물론, 전국에 흩어져 있는 32곳의 지부를 풀가동한 결과였다.

그중에 S급은 고작 15명뿐.

게다가 테스트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 20~40대의 젊은 층인 걸 생각한다면, 사실상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대형급 신인은 거의 다 나온 셈이었다.

촤촤촤촤촤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빨리 찍어!"

"강진혁. 그래, 강진혁 맞아. 지금 협회장 입에서 직접 들었다고!"

"기사부터 빨리 내보내. 자세한 건 뒤에라도 알려줄 테니까. 당장 기사부터 띄워!"

"위층에 기자회견실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불러와. 뭐? 흑운 길드의 신인 인터뷰? 야 이 새끼야! 지금 그딴 게 중요해? S급 떴다니까! 갈아입던 빤스도 내던지고 당장 튀어와!"

모든 관심이 일제히 진혁을 향해 쏟아졌다.

환호성과 박수갈채 속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S급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썩은 표정의 홍덕표와.

"쿨럭... 커억! 꺽! 케엑!"

아직까지 속에 있는 걸 게워내는 정도현을 제외하곤.

'빌어먹을.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된다.'

홍덕표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쳤다.

펄펄 끓는 쇳물을 목구멍에 쏟아 붓는 것 같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자, 잠깐만요! 기자님들! 사실 이번에 저희 흑운 길드에서 탑 공략을 위해 준비한 게 있는데, 특별히 맛보기로 미리 알려드릴 수...!"

"아.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인터뷰하러 올게요. 그때 듣도록 하죠."

"언제나 응원합니다, 홍 대표님. 그리고 그 뭐냐. 유망주? 아무튼 뭐시기 플레이어님. AAA등급 좋죠. 암요."

"그... 하하. 다음에는 토사물은 좀 닦고 하는 걸로 하죠. 제가 비위가 좀 약해서."

얼마 남지 않은 기자들마저 서둘러 진혁 쪽으로 달려갔다.

***

3시간이 흘렀을 땐 꽤나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한국의 16번째 S급 등장]

[초대형 신인, 협회장이 직접 와서 결과 통보]

[대형 길드에서 러브콜 쏟아져. 과연 강진혁 플레이어의 다음 행보는?]

안 좋은 소식이 연이어 터지고 있는 와중에 모처럼 훈풍이 분 덕분이랄까?

매스컴도 온통 진혁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된 상태였다.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무엇보다 정확히 원하던 타이밍에 S급 발표가 난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또 누가 올린 거냐?'

진혁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올린 영상을 보다 피식 웃었다.

[S급에게 까불던 듣보 유망주 참교육 현장]

정도현이 까불거리다가 제대로 박살났던 바로 그 영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상의 조회수가 S급이 발표된 영상과 거의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루미네이션: 근데 ㄹㅇ로 딱 한 대 맞고 토한 건 좀 그렇지 않냐? 직업도 차력사라더만.

-pplmost124: ㅇㅇㅇ. 솔직히 대한민국 군필자면 주먹으로 배 한 대 맞는 것 정도는 걍 견딤. 저거 오바임.

-와사비맛 치약: ㄴㄴ. 저거 보고 나도 여동생보고 배 때려 보라 시켰는데, 일어나 보니까 다음날임.

-야스오 캐리갑니다 부캐임: 여동생이 S급 랭커일 수도 있는 거잖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북선 좌현 조타수: ㅇㅈ. 오늘 당장 각성 테스트 보게 해라.

반응이 뜨겁다.

흑운 길드는 이번 일로 인해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니 내 알 바는 아니지.'

두 사람의 고유 능력과 스킬을 복사한 이상 길드가 박살나든 뭐하든 관심 따윈 없었다.

푸욱...!

진혁이 푹신한 의자에 등을 묻었다.

부드럽게 전신을 감싸 앉는 촉감에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역시.

퍼스트 클래스가 좋긴 좋다.

'이래서 다들 높은 랭크를 받으려고 한 거구나.'

한상진 협회장이 특별히 신경 써 준 덕분에, 진혁은 미국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는 비행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편도로만 천만 원이 넘는 1등석으로.

천유성에게도 블랙마켓 초대장도 얻어 뒀고,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은 이태민과 유연화가 해 주기로 했으니.

이제 마음 놓고 미국에서의 일에 집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 앞쪽에 남자... 조심해.]

반지 안에서 잠자코 있던 엘리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48화 블랙마켓 (1)

"조심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진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 녀석. 냄새가 이상해. 불쾌하고 찝찝하다고 해야 하나? 너랑 다르게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고 싶지 않은 향이야.]

뭔가 했더니.

피 냄새 이야기였냐?

이 녀석은 대체 사람을 뭐로 생각하는 걸까?

걸어 다니는 도시락?

아니면 심심할 때 먹는 간식?

어느 쪽이든 정상은 아니다.

[표정 보니까 대충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장난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충고해 주는 거야. 저 남자, 절대 일반인이 아니야.]

꽤나 진지한 목소리다.

"흠...."

진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단순히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니리라.

힐끗 앞쪽을 보자 금발에 흰색 정장을 입은 백인 남자가 보였다.

20대 정도로 돼 보이는 젊은 나이. 하지만,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여유는 어딘지 모르게 연륜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아니, 진짜로요!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뭐가 즐거운지 남자와 스튜어디스가 연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젊은 CEO나 재벌가의 2세 같은데....'

과연, 엘리스의 말대로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는 걸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진혁이 상대가 눈치 채치 못 하도록 조심스럽게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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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렉스 주드로

성별: 남

나이: 24세

레벨: 27

힘 15 민첩 13 체력 15 마력 61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0

직업: 네크로맨서

고유 능력: 잊혀진 고분

스킬: Lv5 '사자부활(死者復活)', Lv5 '망자의 계약', Lv5 '마력 용해로', Lv4 '죽은 자의 손길', Lv4 '이종교배(異種交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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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대상과의 친밀도에 따라 고유 능력과 스킬들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단, 최고조의 친밀도를 달성하기 위해선 '마인 협회'에 가입해야만 합니다.]

이건 설마...!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설마, 저 남자가 마인 중에 하나였을 줄이야.

능글맞은 얼굴도 다 거짓말이었단 건가?

[거 봐. 내 말 맞지? 이래봬도 내 코가 시련의 탑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명품....]

엘리스가 자기 잘났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반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덕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녀석은 유용하긴 한데, 말이 많은 게 유일한 단점이다.

자기가 아직까지 여왕인 줄 아는 것도 문제고.

그때였다.

"여행은 편안하게 즐기고 계신가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승무원이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때마침 잘됐다.

알렉스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를 물어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예. 덕분에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아! 그리고 간식거리도 좀 가져왔는데, 드시겠어요?"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감사합니다."

진혁이 소고기 스테이크를 넣은 샌드위치와 블랑 캔 맥주를 건네 받았다.

그러면서 넌지시 알렉스에 관한 운을 땠다.

"보니까 1등석에 저 말고 다른 분도 타 계신 것 같은데. 혹시 각성자인가요?"

"아, 알렉스 씨 말씀이시군요!"

알렉스에 관해 묻자, 승무원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어지간히 환심을 사 둔 모양이다.

"프랑스 유명 화장품 기업의 임원이에요. 한국에 업무 차 왔다가 오늘 막 미국으로 가신다고 하더라구요."

저 녀석이 화장품 기업의 임원이라고?

시체를 다루는 네크로맨서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재밌네.

'아마, 저 녀석이 나와 함께 1등석에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거다.'

계획적으로 탑승했을 확률이 높겠지.

그리고 그 이유는 단 하나.

저번에 2인조가 실패했던 섭외를 다시 한번 하기 위함이리라.

'그나저나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나올지 궁금하군.'

천유성의 암살 의뢰가 실패했기에, 녀석들도 대놓고 접근하진 못할 것이다.

그때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들고 오든가 천천히 호감을 쌓아 포섭하려 할 터.

진혁이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상대의 목적을 미리 알아챈 이상, 이 연극의 결말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해야 할 건 순진한 얼굴로 녀석의 노림수에 넘어가 주는 척 연기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정확히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어? 설마...."

진혁을 본 알렉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현실에서 유명 인사를 만난 것처럼.

"실례합니다. 혹시, 오늘 한국에서 S급 판정을 받으신 강진혁 플레이어님 아니십니까?"

살짝 들뜬 얼굴.

떨리는 목소리.

이야. 연기력 봐라.

이 정도면 기업의 임원이 아니라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지만 연기력 하면 이쪽도 지지 않는다.

"예. 조금 전에 S등급으로 재판정을 받았습니다."

"역시! 오늘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영상 저도 몇 번이고 다시 봤습니다. 진짜 신기하네요. 영상 속에서 본 분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한참 신나서 떠들던 알렉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양복 안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거 실례를... 저는 알렉스 주드로라고 합니다."

건네받은 명함엔 '드 페오나 코퍼레이션의 해외 영업이사'라고 적힌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진혁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바에 가서 한잔하는 게 어떻습니까? 긴 여행 길 술이라도 있어야 시간이 빨리 가죠."

우연을 가장한 친목 다지기라.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특히나 젠틀한 마스크와 화려한 언변을 갖고 있다면 더욱더.

하지만 글쎄.

과연, 이 담화에서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누가 되려나?

"뭐, 시간 때우기 좋겠네요. 저도 맥주만 마시려니 살짝 아쉬웠던 참이었거든요."

***

도착한 곳은 퍼스트와 비즈니스 승객들을 위한 바였다.

"제가 즐겨 마시는 술이 있는데, 그걸로 해도 괜찮을까요?"

"도수만 있는 거라면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이 13세.

살롱에선 병당 1500만 원에 판매되는 최고급 코냑이다.

알렉스는 그걸 자판기에서 콜라 뽑듯이 태연하게 시켰다.

한 잔, 두 잔.

독한 양주가 비워질수록 둘 사이의 경계심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적어도 알렉스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병 전체가 비워졌을 때.

"사실, 제가 한국에 온 건 화장품 관련 때문이 아닙니다. 각성자 관련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였죠."

알렉스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달그락.

어린이 주먹만 한 얼음이 유리잔 안에서 움직였다.

진혁이 모른 척 되물었다.

"각성자 관련 사업이요?"

"예. 일단 시작은 가볍게 해 보려고 했습니다만. 작은 문제가 생겨서요."

"문제라면 어떤...?"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최근 가면을 쓰고 다니는 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지.

그 가면 지금도 캐리어 안에 들어있으니까.

당장 꺼내서 쓰면 이 녀석 표정이 꽤나 볼 만해질 같지만....

지금 당장은 참아야 한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진혁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영상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1층에 있는 '타락한 자들의 회랑'을 공략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플레이어죠. 얼마 전 대형 길드끼리 열린 회담에서도 4층 공략을 선언했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알렉스 씨 회사와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일종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희 쪽에서도 보스를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분께서 워낙 강하게 막으셨습니다. 아마도 모든 공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거겠죠."

이놈 봐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을 막 지어내네?

마인과의 연관성이 있는 부분을 편집한 뒤 영상을 올렸더니....

제3자는 절대 진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구라를 쳐도 어떻게 당사자한테 구라를 치냐?'

이건 뭐, 속아 주고 싶어도 속아 줄 수가 없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어디까지 개소리를 하는지 들어보는 것도 꽤나 재밌을 듯싶다.

"굉장히 욕심이 많은 친구군요. 그 가면을 썼다는 사람."

"맞습니다! 너무하죠! 그래서 말입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 혹시 저희와 함께 가주신다면.... 저희로선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요?"

"예! S급부터는 단독 행동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강진혁님을 터치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S급이 갖고 있는 특권을 이용해 4층 공략에 한 숟가락 얹으시겠다?

뭐라고 해야 하나?

진짜 낯짝 한번 두껍다고 해야 하나?

볼펜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겠네. 이거.

"알렉스 씨가 싫은 건 아니지만, 부탁치곤 조금 과하군요."

"물론, 무리한 요구만큼 그에 걸맞은 대가를 드릴 생각입니다."

알렉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우우웅!

찬란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투명한 크리스털에 담긴 푸른빛 액체, 엘릭서였다.

죽을병에 걸려도.

혹은 심장이 박살난 상황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전설의 물약.

'진짜 이놈들은 대체 뭔 짓을 하길래 저런 비싼 걸 잔뜩 갖고 있는 걸까?'

아니, 진심으로.

가능하면 언제 한번 날 잡고 마인들의 하루를 다룬 브이로그라도 찍어 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얼마나 악독하게 살아야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수 있는지. 좀 보고 배우게.

진혁이 엘릭서가 든 병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탐나긴 하네요."

그러자, 알렉스가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엘릭서는 강진혁 플레이어님의 것입니다."

[알렉스가 Lv5 '망자의 계약'을 발동합니다!]

희미한, 그렇지만 불길한 기운이 솟구쳤다.

계약한 상대로부터 구속력을 갖는, 네크로맨서들의 고유 스킬이었다.

'역시, 이걸 사용하는 건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계약서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무서운 거다.

모르고 당하기 너무 쉬웠으니까.

'절대 판정이기 때문에, 한 번 걸리면 반드시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수행해야 하지.'

불이행은 곧 죽음뿐. 따라서 여기에 낚여선 안 된다.

하지만, 사인을 안 하자니 엘릭서가 너무 아까웠다.

"아!"

무언가 생각났는지 진혁이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결정하셨습니까?"

"예. 죄송하지만, 사인은 하지 않겠습니다. 요새 워낙 사기가 많아서 함부로 펜을 놀리지 말자는 주의거든요."

"그것…참 실망스러운 말씀이네요. 그렇다면 엘릭서 역시 없던 일로 하는 수밖에요."

알렉스가 진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계약이 틀어졌으니, 엘릭서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건 제가 갖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또 한 번 입에 넣은 사탕은 다 먹을 때까지 뱉지 않는다는 주의이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은근슬쩍 마력을 끌어 모았다.

쿠쿠쿠쿠쿠!

비행기가 격하게 흔들렸다.

"스, 승객 여러분. 난기류로 인해 비행기가 잠시 휘청거리니 다들 안전벨트를... 꺄아아악!"

"모두 이동하시는 걸 잠시 멈춰 주시길 바랍니다."

승무원들이 허겁지겁 움직였다.

다들 이 현상이 난기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는 이만 안전을 위해서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알렉스 씨도 승무원의 지시에 따르세요."

진혁이 어금니를 꽉 깨문 알렉스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줬다.

왜?

억울하면 힘으로 해 보든가?

그런데 괜찮겠어?

네크로맨서가... 시체 하나 없는 곳에서 뭐 어쩔 건데?

설마,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기라도 하려고?

'글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 정도 일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렉스가 마인 협회 내에서 갖고 있는 권한은 크지 않을 테니까.

49화. 블랙마켓 (2)

으득.

알렉스는 어금니를 부러져라 꽉 깨물었지만,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네크로맨서는 근접전을 위한 포지션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은 회유 뿐. 전투에 관한 건 위쪽의 허가가 필요했다.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겁니까? 제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말입니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 그래도 2인조 때보단 좋았어.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노력이 티가 나더라."

그땐 거창한 외부 설계만 신경 쓰느라 정작 세세한 디테일을 놓쳤었다.

덕분에 함정이란 걸 바로 눈치 챘지만.

"저번에도 그렇고.... 계약금만 쏙 빼먹는 데 아주 도가 트셨군요."

"그거야 뭐, 너희들이 호구처럼 당해 주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하게 되더라고."

강제로 입속에 케이크를 쑤셔 넣어주는데.

사람인 이상 맛있는 음식을 씹을 수밖에.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야."

진혁이 생긋 웃었다.

반면, 알렉스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너무 저희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당장에야 골치 아픈 적이 나타나서 그 녀석이 우선이지만, 이후엔 당신에게도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테니까요."

"골치 아픈 놈이라면 가면 쓴 놈 이야기냐?"

"그렇습니다."

"글쎄. 너희 수준으론 그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없을 텐데?"

"하! 조금 전까진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구시더니. 이제 와서 그런 말씀하셔 봤자...."

알렉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진혁의 말이 이어진 순간.

알렉스는 이번 계획의 근간이 된 모든 가정들을 뒤엎어야만 했다.

"룬어가 새겨진 가면을 쓰고 얼마 전 대형 길드와도 접촉했었지. 물론, 거기엔 너희도 있었고."

"...!"

알렉스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식은땀이 나고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설마.

'정말로 가면을 쓴 녀석과 알고 있던 사이라는 건가?'

업로드된 영상엔 마인들에 관한 부분이 편집되어 있기에 제3자는 절대 알 수 없을 터.

'다시 말해, 저 말은 진짜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이 한 가지 존재하긴 한다.

바로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능성이 말이다.

허나, 알렉스는 가면을 쓴 남자와 진혁이 동일 인물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1층에 있는 타락한 자들의 회랑을 공략하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1레벨을 유지해야만 했다.

당연히 가면을 쓴 남자의 레벨도 1이었겠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진혁은 몇 시간 전 무도회를 통해 추정 레벨 20이라는 결과를 받은 상태다.

둘 사이의 레벨 격차는 무려 19.

'고작 며칠 만에 그 격차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해.'

그렇기에 둘은 타인이다.

적어도 알렉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이 또한.

진혁이 설계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어설프게 알고 있는 놈들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확신하는 법이지.'

진혁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마인 놈들이라면 회랑을 공략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워낙 정보의 범위도 넓고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도 화려했으니. 어설프게나마 정보의 편린 정도는 찾았으리라.

하지만.

시련의 탑, 지하 1층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다.'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동시에 영원히 따라잡힐 리 없는 정보의 격차.

오랜 시간, 고통을 즐긴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결국, 알렉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강진혁 플레이어님의 장난은 어느 정도 참아야 한다, 뭐 이런 뜻이겠군요."

"그런 뜻이지. 그리고 혹시 알아? 어찌 됐든 나랑 그 녀석도 경쟁 관계니 나중에 너희들한테 쓸 만한 정보 좀 풀어 줄지?"

"알...겠습니다. 현재로선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네요."

알렉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놈들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게 정립한 것 같다.

"아!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진혁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예?"

"고작 천유성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가면 쓴 놈한테도 쩔쩔맬 정도라면 나한테 덤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암살이니 고문이니 하면서 강압적으로 정보를 빼낼 생각이라면 다시 생각해라.

적어도.

"내가 그놈들보단 훨씬 까다로울 테니까."

***

일련의 이벤트 후 비행기는 다시 순조롭게 상공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도착한 건 저녁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알렉스는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녀석에 대한 신경을 껐다.

지금 당장은 녀석에 관해 신경 쓰는 것보다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매 시작 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4시간.

'일단은 자본금부터 모아야겠군.'

달러가 필요하다.

그것도 가능하면 많이.

'최소한 지금 갖고 있는 돈의 200배 정도는 불러야 할 텐데....'

한상진에게 돈을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자금의 출처니 뭐니 하면서 캐묻는다면 나중에 일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정부부처가 세무청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갖고 있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뿐이다.

지갑에 있는 원화를 환전해 봤자 4천 달러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이걸론 턱도 없다.

경매장의 최소 입찰 단위가 5만 달러부터였으니까.

그렇다면.

"세계의 기억을 불러오겠다."

진혁이 저장해둔 스킬들을 불러왔다.

필요한 건 '진실의 눈'과 융합할 능력이었다.

'나중에 정령계열 쪽 능력이랑 융합하려고 했었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

정령계열은 능력을 남용해도 부작용을 완화시킬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반면, 암속성 계열은 효율성이 좋은 대신 부작용을 갖고 있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안전성과 효율성.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의 여건상 진혁은 후자를 선택했다.

['진실의 눈(SS)'과 '혈마기(S)'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스킬 '탐식의 눈(SSS)'을 획득하셨습니다!]

우우우웅!

밝은 빛과 함께 두 스킬이 하나로 합쳐졌다.

[탐식의 눈]

입수 난이도: SSS

내용: '진실의 눈'의 상위 버전 스킬로, 모든 종류의 결계에 면역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의 상태창을 엿볼 수 있는 건 물론, '시야 공유'와 '마인드 리딩'을 통해 내면적인 부분까지 간섭할 수 있습니다. 단, 혈마기의 특성상 자주 사용할 경우 시전자의 인격을 오염시킬 위험 또한 존재하며, '시야 공유'와 '마인드 리딩'은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대상을 상대로 단 한 번(효과는 발동 후 1시간 동안 지속됩니다.)만 발동할 수 있습니다.

탐식의 눈.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인간미를 잃어버릴 수 있는 부작용이 존재하긴 했지만.

효율성 측면에선 가히 비교 불가능할 정도의 압도적인 능력 자랑하는 스킬이었다.

'나쁘지 않네.'

진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준비는 다 했으니.

이제 돈을 긁어모으러 갈 시간이다.

낮보다 밤이 화려한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

라스베이거스 '룩소 호텔' 카지노.

이곳의 보안실장인 데이비드는 연이어 터지는 소식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 실장님. 벌써 100만 달러 넘게 잃고 있습니다."

"4번째 딜러 교체입니다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보안 카메라상으로도 문제가 없어요. 카지노 전체에 고유 능력과 스킬을 차단하는 결계도 제대로 작동중이고요."

보안실의 직원들이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냐 지금! 다 아니라면 대체 이건 무슨 수로 설명할 건데?"

콰앙!

데이비드가 CCTV 모니터를 내려쳤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양인 손님 한 명.

바로 이 사람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고작 4천 달러 가지고 와서 1시간 만에 10만 달러를 넘게 딴다고?'

단순히 운에 맡기는 슬롯머신이나 룰렛을 돌린 거면 말도 안 한다.

종목은 오롯이 포커.

실력이 반영되는 도박인 만큼 호구가 오래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결국엔 카지노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양인 남자는 거기서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다 뿐이랴?

아예 폭주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딜러들을 농락하면서.

'승률이 높은 게 아니야.'

승률은 고작 10%를 조금 넘기는 수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이길 때마다 큰 판을 모조리 쓸어가 버린다는 점이다.

마치 테이블 위에 있는 패를 모조리 엿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

고유 능력도 아니야.

스킬도 아니야.

그렇다면 녀석과 손잡은 내부자가 이 안에 있을 수밖에.

그게 데이비드가 내린 결론이었다.

"딜러, 다시 바꿀 준비해. 이번엔 내가 직접 지명하겠다."

같은 시각.

진혁은 포커 테이블에서 한창 돈 따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젠장. 이번에도 지면 안 돼.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고.]

'마인드 리딩'을 통해 딜러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J 원 페어]

공유한 시야로 딜러의 패 또한 훤히 보였다.

나머지는 상황을 봐 가며 여유롭게 배팅만 하면 된다.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군.'

아무리 카지노 내에 결계가 펼쳐져 있더라도 면역 판정을 지닌 '탐식의 눈'을 막을 순 없다.

마치 도박을 위해 최적화된 스킬이라고 해야 할까?

시간만 충분하다면 전 세계 카지노에 있는 돈이란 돈은 모조리 쓸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다음부턴 블랙리스트에 오를 테니 현실적으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급한 돈이 필요한 건 이번뿐이었으니까.

"콜. 저는 10 투 페어입니다."

진혁이 쌓여 있던 칩을 밀어 넣었다.

딜러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마지못해 패를 펼쳤다.

"...10 투 페어 윈. 축하드립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썼던 블러핑마저도 간파당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패배를 시인하는 것뿐이었다.

"세상에나...."

"대체 딜러들이 몇이나 박살난 거야?"

"벌써 네 명째야. 젠장. 내가 카지노 10년 차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처음 봐."

"어지간히 많이 긁었군. 적어도 100만 달러는 넘겠는데?"

"미친. 완전히 복권 당첨된 수준이잖아. 근데 슬슬 일어날 때도 된 거 아니야? 꼭 끝까지 버티다가 입고 있던 옷까지 날려먹더만."

"그건 멍청한 놈들 이야기고. 저 남자는 완벽하게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다고. 이대로 가면 카지노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걸?"

"푸하하! 그건 볼 만하겠네."

지켜보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진혁의 화려한 솜씨에 어느새 매료되어 버린 탓이었다.

촤르륵!

진혁은 칩들을 모아 다시 색깔별로 높게 쌓았다.

이걸로 20만 달러 추가다.

하지만.

'부족해.'

경계심 많은 딜러들이 쉽게 미끼를 물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은 흐르는데, 배팅 액수는 좀처럼 커지질 않았다.

남은 시간은 이제 30분.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딜러, 한 번 더 교체하도록 하겠습니다."

창백한 피부의 비쩍 마른 남자가 나타났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얼굴에 뼈에 가죽만 들러붙은 모습.

허나, 기형적인 외모보다 인상적인 건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다.

호오.

이것 봐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각성자를 딜러로 쓰겠다?'

아마도 자신들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결계 쪽에도 뭔가 장난질을 해둔 게 틀림없었다.

잃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 카지노에서 수작을 부릴 거라곤 생각했지만....

귀엽네.

'탐식의 눈' 앞에서 재롱을 부리겠다니.

진혁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셔플하겠습니다."

딜러가 새로운 카드뭉치를 쥐었다.

우우웅!

손가락 끝에 마력이 맺히는 게 보였다.

[마이클 패드로가 Lv3 '교묘한 눈속임'을 발동합니다!]

촤촤촤촤!

카드가 빠른 속도로 뒤섞였다.

하나, 둘.

위아래로 포개지며 클로버와 하트가 어지럽게 날뛰었다.

그에 맞춰 진혁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여섯....

그리고 마침내.

셔플이 끝난 카드가 딜러와 진혁 앞에 놓였다.

그러나 진혁은 카드를 뒤집지 않았다.

따닥! 따닥!

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딜러의 신경을 긁었다.

"카드... 확인 안 하십니까?"

결국, 딜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인?"

"예. 확인을 하셔야 배팅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총 일곱 번. 내가 본 것만 세 개의 스킬로 장난질을 했는데. 굳이 카드를 봐야 할까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딜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친구가 카드로 장난질을 하는 건 제법인데, 연기 교육은 제대로 안 받았네.

정곡을 찔렸다고 표정에 다 나타나서야 쓰나?

"됐고. 호텔 지배인이나 보안팀 쪽 매니저 나오라고 하세요. 지금 당장."

진혁이 명령조로 내뱉었다.

그러자 바로 그때.

"지저분한 동양인 나부랭이가 감히 누구보고 나오라 마라야? 그리고 뭐? 스킬? 사기? 이게 진짜 미쳤나. 넌 오늘 엠뷸런스에 실려 나가게 될 줄 알아. 알겠어?"

데이비드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50화. 블랙마켓 (3)

근육만 풍선처럼 부풀린 덩치들이 잔뜩 나타났다.

"어이, 노란 원숭이. 다시 한번 말해 봐. 지금 우리 카지노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거냐?"

데이비드가 두 눈을 부라렸다.

가뜩이나 심기가 좋지 않은데, 제대로 걸렸다는 얼굴이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이쯤 되면 낯짝이 두꺼운 건 지구촌 관습인 듯싶었다.

물론, 내로남불이야 웃어넘길 수 있지만.

딱 하나, 저 주둥아리만큼은 넘어갈 수가 없다.

"노란... 원숭이?"

"그래, 너희 동양인들은 피부색이 다 그렇잖아. 게다가 사내새끼 얼굴이 그게 뭐냐?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겨선."

방금 이걸로 결정했다.

"일단, 넌 얼굴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맞자."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완전히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놈이군. 손님들 즐기시는 데 방해되지 않게 안으로 데려가라."

데이비드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손마디를 우두둑 꺾으며 진혁에게 다가갔다.

"예, 실장님."

"이거 뭐, 살짝만 주물러도 뼈가 다 부러지겠는데?"

"대체 뭔 배짱으로 까부는 건지 모르겠네."

"조금 뒤에 질질 짜는 모습이 기대되는구만."

압도적인 서양인의 신체.

그리고 여기 있는 경호원들은 그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엘리트들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손이 진혁의 어깨에 닿는 순간.

우드득!

뼈가 박살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팔이! 내 팔이!"

비명이 나온 건 그로부터 1초 남짓이 흐른 뒤였다.

180도 가량 뒤틀린 오른팔.

근육질 남성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뭐, 뭐야?"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허나 상황을 파악할 틈도, 거기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한 명을 처리한 진혁이 다음 사냥감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으니까.

콰앙!

"컥!"

콰득!

"으아악!"

가벼운 몸놀림이다.

하지만, 결과까지 가벼운 건 아니었다.

"으으으...."

"사, 살려 줘. 제발...."

꺾여 버린 팔과 다리.

인대가 완전히 파열됐으니 앞으로 평생 자기 손으로 포크 하나 들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팔을 다친 사람들은 다행이었지. 몇몇은 휠체어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보였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잔혹함이 잔뜩 배어 있는 손속이었다.

"저게 말이 돼? 방금 혼자서 몇 명을 때려눕힌 거야?"

"프, 플레이어다! 저 사람, 전투계열 플레이어라고!"

"하긴 그게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긴 하지."

잔혹하면서도 화려한 손속에,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탄성을 내뱉었다.

이제 남은 건 한 명뿐.

"우아아악!"

가장 덩치가 큰 백인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나름대로 훈련은 받았는지,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노린 공격이다.

물론, 진혁은 고개를 슬쩍 움직이는 걸로 주먹을 피했다.

동시에 번개처럼 오른손을 움직였다.

"커억?"

순간, 백인 남자의 호흡이 멈췄다.

강철처럼 단단한 손이 목을 틀어막았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그극!

180cm에 살짝 못 미치는 키.

몸무게도 70kg에 불과한 동양인이,

신장 2m에 100kg이 가볍게 넘는 덩치의 목을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마침내 데이비드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돼. 켁! 케엑! 안 돼애애!"

진혁의 손에 조금씩 힘이 실리자, 남자가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돼."

우득!

쇄골이 박살나며.

마지막 남은 경호원까지 처참한 말로에 합류했다.

이걸로 끝이다.

거추장스러운 놈들은 다 정리했으니 입에 걸레를 문 친구를 손봐 줄 시간이다.

"아무래도 질질 짜야 할 건 너희 쪽인 것 같은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후, 후회할 거다. 우리 카지노는 스캐빈저 길드와 계약이 되어 있다고."

"스캐빈저?"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네놈이 아무리 각성한 플레이어라도 길드한테는 안 될 테니까."

스캐빈저. 스캐빈저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길드 같은데....

"거기, 마일로인가 뭔가 하는 놈이 있는 곳 아니냐?"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긴.

예전에 [시련의 탑]을 했을 때 만나 본 적 있었으니까 알고 있지.

어중간한 실력을 갖고 있는 주제에 하는 짓은 쓰레기라서 초보존에서 뉴비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때마침, 그곳에 볼일이 있던 나에게까지 시비를 걸어서 아주 제대로 털어 버렸던 기억도 나고.

'갯벌에 산 채로 머리만 빼고 묻어 버린 다음에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지구과학 실험을 한 적도 있었고. 숟가락으로만 때려서 죽인적도 있었지.'

생각해 보니 철이 없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한 30번 정도 따라다니면서 죽이니까 그 뒤론 아예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이 완전히 짓뭉개져 버린 탓이리라.

그런데 믿는 구석이 겨우 그 녀석들이었다고?

"별거 아니네."

진혁이 피식 웃었다.

***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데이비드는 진혁의 여유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각성한 플레이어라도 길드 앞에선 한낱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혼자서 날뛰어 봤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스캐빈저 같은 A급 규모의 길드라면, 이름을 듣는 순간 꼬리부터 마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때였다.

지지직!

데이비드의 귀에 낀 이어폰에서 잡음이 들렸다.

보안실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시, 실장님. 아까 부탁하신 거 지금 찾았습니다!"

"부탁이라면. 아! 그래. 프로필. 어떻게 됐어?"

"그, 그게 말입니다...."

"빌어먹을! 뜸 들이지 말고 빨리빨리 말해!"

"강진혁이라고 어제 한국에서 S급 받은 랭커입니다. 무도회 영상이라고 있어서 확인했는데 완전히 괴물이에요. 절대, 절대 싸우면 안 됩니다. 그 사람하곤."

"S, S급? S급이라고!?"

데이비드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혀를 깨물 뻔했다.

휘청하고.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렸다.

덜덜덜.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 그렇게 등급이 높을 줄이야.'

미국에서조차 S급은 스무 명도 채 되질 않는다.

국가 차원에서 전력으로 지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를 건들이다니.

중견에 불과한 스캐빈저로는. 길드 전체가 달라붙어도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벌집을 건드렸구나.'

아무리 탑에 관해 무지한 데이비드라도 알고 있었다.

높은 등급의 랭커들이 현 시대에 갖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그리고 만약, 상대가 작정하고 날뛴다면....

꿀꺽.

식은땀이 흘렀다.

카지노의 평판이고 나발이고 간에.

머릿속엔 온통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내뱉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되고 간절한 목소리로.

그러나.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지?"

진혁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예? 그게. 방금 보안실에서 강진혁 플레이어님에 관해 들었습니다."

왜 태도가 180도 바뀌었나 했더니.

"등급을 듣고 나니 잘못 건드렸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였어? 그래서 사과한 거고?"

만약 F급이거나 혹은 일반인이었으면 계속해서 무시했겠네?

"제,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데이비드가 다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퍼억!

"우어억!"

복부 깊숙이 파고든 주먹으로 인해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과만 하면 끝이 아니잖아? 죄송할 짓이면 아예 시작부터 하질 말았어야지."

사람 죽여 놓고 '죄송합니다.' 하면 끝인가?

뒤늦게 후회하며 눈물이라도 찔끔 흘리면 모든 게 끝이냔 말이다.

"마, 맞습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다시 또 그러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이미 한 짓에 대해서만 맞자."

약속했다.

얼굴이 노랗게 될 때까지 패 주겠다고.

그리고 진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잠...까아아으아악!"

쾅!

콰앙!

진혁이 주먹으로 데이비드의 안면을 가격했다.

한 방. 한 방.

이곳에 와서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풀 듯, 무게를 실어 내려쳤다.

그렇게 서른 대쯤 맞자 데이비드가 죽는 소리를 냈다.

"살려... 살려 주십쇼.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

여기저기 피멍이 든 건 물론, 코뼈까지 주저앉았다.

진혁이 파운딩을 멈췄다.

"뭐든지?"

"예! 예! 뭐, 뭐든지!"

"그럼, 저기 손거울 앞에 가서 이길 때까지 가위바위보 하고 있어. 도중에 멈췄다간 다시 맞을 거니까 명심하고."

"예? 가, 가위바위보요?"

"모르겠으면 됐어. 그냥 계속 맞자. 나도 그게 더 속 편할 것 같거든."

"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데이비드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손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 승부를 펼치는 것처럼 사력을 다해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그 앞엔 벙 찐 표정의 딜러가 서 있었다.

"자, 그럼. 우리는 이어서 해야죠?"

"예? 이어서... 하신다는 말씀이 어떤 의민지."

"아까 했던 게임. 승부가 나지 않았으니 계속 하자는 말입니다."

"지, 진심으로 말입니까?"

"알아요. 당신이 장난질 친 거.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진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난질?

스킬?

얼마든지 해 봐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여기서 또 스킬을 썼다간 나도 실장님과 같은 꼴이 될 거야. 그건 안 돼. 여기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

'탐식의 눈'을 통해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앞으로 무조건 올인만 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아시리라 믿어요."

진혁이 쌓여 있던 칩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게임이 재개되었다.

***

약 5분 뒤.

스캐빈저 길드가 카지노에 도착했다.

"데이비드 실장님?"

스캐빈저 길드의 A급 플레이어 존 스미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바닥에는 팔다리가 꺾인 채 신음하는 경호원들.

게다가 자신들을 이곳에 부른 데이비드는 길드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가위바위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실장님! 정신 차리십쇼!"

스미스가 한 번 더 고함을 치고 나서야. 데이비드가 거울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실장님과 경호원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죠?"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이 난장판을 보고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믿으란 소리냐.

바로 그때 스미스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했다.

정확히는 터무니없이 쌓여 있는 칩들과 함께 있는 진혁을 향해서.

"저놈이 그런 거군요."

굳이 설명 따윈 필요 없다.

이 상황에서 느긋하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잠시만. 젠장, 잠시만요! 절대, 절대로 저 사람을 건드리지 마십쇼!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그냥 가 주세요. 제발."

데이비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걸했다.

"실...장님?"

스미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자아내는 사이.

"어이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바쁜데 이거 어느 세월에 다 환전하려나?"

진혁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데이비드의 손에 10달러짜리 칩 하나를 꼭 쥐여 줬다.

"아! 실장님. 오늘 잘 놀다 갑니다. 돈 꼻느라 몸도 마음도 추우실 텐데 이걸로 가는 길에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드세요."

역시 헛헛할 땐 뜨끈한 국밥이 최고다.

51화. 블랙마켓 (4)

해가 완전히 진 밤.

진혁은 인적 드문 골목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밤에는 꽤 춥네.'

혹시라도 블랙마켓에서 지정한 시각에 늦을까 봐 좀 일찍 나왔더니, 밤이슬이 제법 차가웠다.

그래도.

원하는 조건을 달성했기에, 상대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겁게 느껴졌다.

'계좌가 든든하면 없던 자신감도 생긴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였어.'

3000만 달러.

한화로 무려 350억이 넘는 금액이다.

진혁은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대부분을 벌었다.

도박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였다.

'이 정도면... 원하는 레플리카 유물을 낙찰 받는 데 충분해.'

총 100여 개의 경매품이 출품된다고 했으니 경쟁 또한 심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내가 원하는 건 겉으로 보기엔 전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진흙 속에 묻혀 있는 진주.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지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지갑을 열기 꺼려지는 그런 아이템이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부우웅!

자동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검은색 벤츠 마이바흐가 진혁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며,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이자가 블랙마켓에서 보낸 직원인 건가.

"117번 손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진혁이 초대장에 적힌 숫자를 보여 줬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가 열리는 곳까진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보안을 위해 안대를 착용해야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차 뒷좌석에 있는 안대.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시각을 차단하는 마법까지 걸려 있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안대 쓰고도 초 단위로 세면서 머릿속으로 목적지를 그리던데.

실제로는 어떠려나?

시험해 보는 것도 재밌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30분 거리,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대저택.]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겠군. 그런데 뭐 하는 거야? 어서 타지 않고.]

그런 것 따위 하지 않아도 '탐식의 눈'을 통해 어지간한 정보는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 플레이어들한테도 써 봐야겠어.'

과거에는 이 눈을 얻었을 때쯤 플레이어들이 모두 시련의 탑을 떠났었다.

실험해 보고 싶어도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이 전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이젠 그럴 걱정은 없지.'

인류가 멸망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모두들 기를 쓰고 탑을 올라야 할 터.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도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그리고 통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에까지 통용이 될지.

그걸 알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진혁은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었다.

***

정확히 30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직원의 말과 함께. 자동차가 멈췄다.

드디어 안대를 벗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우.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진혁이 차에서 내리자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호오."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탐식의 눈'을 통해서 인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저택이다.

게다가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과 오아시스까지 어우러져, 저택의 외관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초대장은 저한테 맡겨 주시면 됩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직원이 초대장의 진위를 검사한 뒤, 허리를 깊이 숙였다.

혼자가 된 진혁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정원에 딸린 연못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약속, 잊은 건 아니지?]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이 녀석이 있었지.

비행기에서 마인을 찾아 준 게 기특해서, 원하는 걸 한 가지 말하라고 했다.

엘리스는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었고.

"상관없는데, 여기로 괜찮겠어?"

기왕 밖에 나올 걸면 라스베이거스가 볼 건 훨씬 더 많을 텐데?

불꽃놀이에 모터사이클 공연에, 구경할 거야 넘쳐날 정도로 많다.

그런데 굳이 갑부들이 돈 자랑하는 경매장을 보겠다고?

[밤의 귀족이자, 고귀한 피가 흐르는 이 몸에게 어울리려면 적어도 이 정도 품격은 갖춰져 있어야지. 나쁘지 않은 저택이야. 인간들이 만든 것치곤 말이야. 나는 여길 선택할래.]

얼씨구.

"0.001평짜리 반지 안에 갇혀 살면서 너랑 어울리긴 뭐가 어울려? 그리고 밤의 귀족이 뭐냐? 밤의 귀족이."

방구석 밤의 귀족이란 소린가?

[뭐야!? 빈민촌 고시원에 갇혀 있는 박쥐 나부랭이라고?]

엘리스가 발끈하며 고함을 질렀다.

반지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이쯤 되면 한심한 걸 넘어 측은한 마음까지 든다.

그래.

과거에 잘 나갔었으니 이해해 줘야겠지.

고개를 가로젓던 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워낙 넓은 저택답게 인기척도 드물었다.

카메라나 특별한 마력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고.

'초대장을 확인한 이상 내부 보안은 확실하다 이런 뜻이겠군.'

무엇보다 경매에 참가하는 손님들의 특성상, 반드시 프라이버시를 지켜 줘야만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쪽으로선 잘됐다.

손님들 중에 한 명 정도 추가되는 것쯤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테니까.

우우웅!

진혁이 브라함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반지에서 사람 형상을 한 엘리스가 나타났다.

이번엔 강아지만 한 크기가 아닌, 150cm에 가까운 신장을 지녔다.

원래 170cm가 훌쩍 넘던 걸 생각하면 여전히 작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의심은 피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으으음! 역시 바깥 공기가 좋구나."

엘리스가 기지개를 켰다.

긴 은발에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최대한 마력을 쏟아 붓긴 했는데, 그 사이즈 이상은 무리다."

"괜찮아. 그래도 예전에 30cm도 안 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허면, 이제 그 경매라는 것을 하러 가는 건가?"

엘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원하는 물건이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부하들이 전부 구해 오는 위치였기에. 엘리스에게 경제관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경매 같은 볼거리는 그녀의 입장에서 꽤나 흥미로운 행위였다.

"그래. 슬슬 들어가 봐야지. 거의 시간 다 됐어."

진혁이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그 뒤엔 돈과 돈이 부딪치는 전쟁이 시작된다.

***

저택 중심에 위치한 원형 극장.

본래 오페라 공연을 위해 설계된 이곳은 현재 전 세계 뒷거래를 원하는 갑부들을 위한 경매장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어느새 175회차라.... 매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지만, 경매 시작 전은 항상 흥분된단 말이야."

"소문으로 듣자하니 이번 경매에 '어룡의 심장'도 나온다던데."

"진짜로? 그게 나온다고?"

"아무래도 시련의 탑이 나타난 덕분이겠지. 마력 파장인지 뭔지 때문에 고대에 사라진 별의별 보물들이 죄다 재현되고 있잖아."

"크으. 기대되는구먼. 낙찰 받진 못하더라도 구경은 꼭 좀 해 봐야겠어."

"그리고 이번엔 워낙 굵직한 것들이 많이 나와서 달러 외에 귀금속이나 채권 따위도 받는다고 하더라고. 물론, 그럴 경우 10%의 수수료를 더 내야 하지만."

"그렇다면 경쟁이 더 치열해지겠네. 나도 잔고 확인 좀 다시 해야겠군."

웅성거리는 소리.

이미 절반 이상이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진혁과 엘리스도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허허. 처음 뵙겠습니다."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노인이 다가왔다.

이 남자는...?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얼마 전, 대형 길드의 간부급들한테 3층 보스 공략을 제시했던, 마인 협회의 노인.

바로 그 녀석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이거 또 거물이 등장했군.'

그때 보여 준 능력을 생각한다면. 노인은 마인 협회의 간부급이거나 최소한으로 따져도 중간 관리자급은 될 것이다.

"...."

그리고 그 옆에는 비행기에서 만났던 알렉스도 있었다.

'이 녀석도 어지간히 두들겨 맞았나 보네.'

잘생긴 얼굴이 완전히 곤죽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엘릭서를 빼앗긴 탓이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정심 따위는 조금도 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건 상대가 인간일 때만 느껴야 하는 감정이었으니까.

"저는 율리우스 캐드릭이라고 합니다. 대충 눈치 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보다시피 이 멍청한 제자 놈의 스승이죠."

율리우스 캐드릭이라....

그런 이름이었군.

상대의 소개를 들은 진혁이 조용히 '탐식의 눈'을 발동했다.

——————————————————

이름: 율리우스 캐드릭

성별: 남

나이: 58세

레벨: 30

힘 11 민첩 9 체력 10 마력 49 악행 25

보유한 스탯 포인트: 1

보유한 코인: 130,855

직업: 네크로맨서

고유 능력: 저주받은 무덤의 묘지기

스킬: Lv6 '통곡의 벽', Lv6 '군단장의 명령', Lv5 '시체들의 밤', Lv5 '3번의 재생', Lv4 '광역 약화', Lv4 '전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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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무능한 부하들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심리적으로 굉장히 화가 많이 난 상태입니다. 그가 주관하는 흑마술 수업을 이수한 뒤, A+등급을 받는다면 고유 능력이나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훌륭한 능력치다.

네크로맨서와 좋은 시너지를 내는 고유 능력까지 갖고 있을 줄이야.

'저주받은 무덤의 묘지기'는 최소한의 마력으로 다수의 소환수를 부릴 수 있기 때문에, 네크로맨서는 물론, 다양한 소환사 계열들이 기를 쓰며 얻고자 했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복사 조건을 읽은 진혁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움켜잡아야 했다.

'시스템이 점점 미쳐 가는구나.'

이건 뭐, 열혈 교수와 재능 만렙 제자를 찍으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조건이 이 따위냐?

어차피 네크로맨서들의 능력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째 복사 조건들이 갈수록 괴랄해 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안 좋은 쪽의 의미로.

'능력이야 그렇다 치고….'

일단은, 쓰린 속을 좀 긁어 볼까?

표정을 갈무리한 진혁이 입을 열었다.

"제자분 덕분에 귀한 것도 얻고 덕분에 즐거운 비행이었습니다."

"허허. 그러셨다니 정말 다행이로군요. 그래서 말인데, 알고 계시다는 정보에 대해 다시 한번 여쭤보고 싶어서 말이죠. 이번엔 제가 직접 왔습니다."

"가면을 쓴 플레이어에 대한 것 말입니까?"

"예. 저희로선 꽤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조금 과장해서 생사가 달려있다… 랄까요?"

이것 봐라…?

은근 슬쩍 협박을 하네?

진혁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 이야기라면, 나중에 기회 봐서 알려드리겠다고 했을 텐데요."

"안 됐지만, 저희에게 나중은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해야 하거든요."

"그거야 제가 알 바 아니고요."

너희가 급하든 똥줄이 타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 급하면 설날에 한우 세트 보내듯이 엘릭서라도 12개 세트로 예쁘게 포장해서 가져오든가.

그러나 진혁의 이죽임에도 불구하고 캐드릭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흐음. 단언하기 전에 잘 생각해 보십시오. 보아하니 이곳에 오셨으면 무언가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저희가 마음만 먹는다면...."

캐드릭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목소리 또한 싸늘하게 식었다.

"오늘 출품되는 아이템을 전부 구입해 버리는 수도 있다는 겁니다."

52화. 아타락시아의 가주(家主) (1)

마인 협회의 자본력이라면, 이번 회 차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협박.

아니, 단순히 협박이 아니다.

놈들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진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날 압박하려는 생각인가.'

일이 골치 아프게 됐다.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아무리 라스베이거스에서 따 둔 3000만 달러로도 안심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거 없어 보이는 놈들인데, 이 녀석들이 왜 너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엘리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하지만, 그 말에 캐드릭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진혁이야 이유가 있으니 참고 있다지만....

처음 보는 소녀는 거기서 예외였다.

"별거 없어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인데. 대해(大海)에 있는 사금 한 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 따위가 왜 내 계약자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느냐는 뜻이다."

...세다.

역시나 엘리스의 사전에 앞뒤 잰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앞뒤 재지 않는 건 캐드릭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이거 어이가 없군. 강진혁 플레이어님. 대체 어디서 이런 버릇없는 꼬맹이를 데려온 건지 모르겠지만, 입단속 좀 잘 시키시죠."

역시, 뇌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던진 말.

하지만, 그 파장은 막대했다.

"꼬...맹이?"

엘리스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 순간. 엘리스의 동공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꼬맹이!?"

조금 전까지는 귀찮은 날벌레를 상대하는 것 정도였다면, 지금부터는 짓밟아 죽여야 할 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함부로 끼어들지 말거라. 치기 어린 짓거리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 자식, 죽여 버리...."

엘리스가 손톱을 세우려던 바로 그때.

"레이디스 앤 젠틀맨! 오랜 시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지금부터 블랙마켓 제175회차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증폭시킨 목소리가 원형 극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오오!"

"드디어 시작이군!"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들 기대에 찬 얼굴로 첫 번째 경매품을 기다렸다.

덕분에 엘리스와 캐드릭의 기 싸움도 거기서 멈췄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그럼, 조금 뒤에 다시 뵙죠. 물론, 그때는 저에게 아이템을 넘겨 달라고 애걸해야 하실 테지만요."

캐드릭이 짧게 목례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경매가 이어졌다.

"물품을 소개해 드리기 앞서, 초대장과 함께 나눠 드렸던 경매 리스트 외에도 추가적으로 5개의 물품이 더 준비되어 있으니, 모쪼록 잔고를 적절히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5개의 미공개 서프라이즈 출품!

나비넥타이를 멘 진행자가 경매의 흥을 돋웠다.

"그럼, 첫 번째 물품은 바로 미국 애리조나 주에 떨어졌던 운석입니다.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날 뿐더러 시련의 탑으로부터 나온 마력으로 인해 무기나 방어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격은 100만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경매품부터 마력이 주입된 게 튀어나왔다.

무기나 방어구. 요즘 가장 먹히는 키워드 아닌가.

"150만!"

"200만!"

"250만!"

"이건 내 거다. 500만!"

순식간에 치솟는 값.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멍청한 놈들이로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마력이 주입된 운석이라고 해 봐야 제련 기술이 없으면 말짱 꽝인데. 그걸 500만 달러나 주고 사다니.

쓰레기를 모으는 취미라도 있는 거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헛돈만 쓰는 거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운철을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그 말도 안 되는 돈지랄에 살포시 한 숟가락 얹었다.

"600만."

단숨에 최고 기록을 경신해 버린 가격.

"저걸 사려고?"

엘리스가 즉각 물었다.

한 눈에 봐도 별로인 물건을 구입하려하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있어 봐. 사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거에 돈을 쓰면 틀림없이....

"650만."

캐드릭이 더욱더 금액을 올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르니, 이쪽이 배팅하는 것마다 무조건 지르는 방법밖엔 없겠지.'

놈들의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계는 있을 터.

이런 식으로 밀당을 하면서 야금야금 소진시킨다면 '그 아이템'이 나왔을 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700만."

"750만!"

진혁이 한 번 더 가격을 올린 뒤, 캐드릭이 또다시 추격하자 두 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포기하겠다는 의사였다.

"750만 달러로 낙찰되었습니다!"

"...."

캐드릭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진혁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은 탓이다.

허나, 늦었다.

이미 750만 달러를 날린 뒤였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노리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계속해서 따라가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부디, 준비된 잔고가 두둑하길 빌어 주지.'

진혁이 똥 씹은 얼굴을 한 캐드릭을 향해 생긋 웃어 줬다.

"다음 물건도 또 굉장한데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았을 때 작성했던 항해 일지입니다!"

블랙마켓에서 주관한 경매답게 각종 희귀한 보물들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대 미상의 수상한 그릇, 마력으로 오염된 라플레시아, 중세 마녀사냥 때 사용됐던 고문 기구 등등.

진혁은 그들 가운데서 마력이 주입되거나 특별해 보이는 유물들 위주로 미끼를 뿌렸다.

아주 먹임직한 미끼를 말이다.

게다가 포기할 듯 말 듯, 능수능란한 심리전을 펼쳐 경매의 최고 금액을 계속해서 경신해 나갔다.

신사적인 경매에 있어 최악이라 해도 좋을 악마적 재능.

그 결과, 캐드릭은 전혀 쓸모도 없는 엉뚱한 아이템에 70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해야만 했다.

***

뿌드득!

캐드릭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갈았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엔 진혁을 잘게 찢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돈 때문이 아니다.

7000만 달러가 적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마인 협회에서 허락해 준 잔고는 그걸 아득히 뛰어넘었다.

단지.

상대의 저 치졸하고 비열한 작전에 미치도록 약이 오를 뿐.

"스승님. 차라리, 저희가 한 번 정도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아하니 저 녀석이 갖고 있는 자본금 자체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아예 파산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낙찰을 받으면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뒤늦게 잘못 입찰을 했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멍청하긴! 그렇다가 놈이 원하는 걸 순순히 얻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

"그, 그건...."

"네놈이 애초에 포섭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거니, 닥치고 있거라. 돈에 손해는 조금 있겠지만, 어차피 최종 승자는 이 몸이 될 테니까."

그래.

7000만 달러든 몇 억 달러든.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경매란, 최후엔 많은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다음은 마니아분들을 위한 아이템이로군요. 소개드립니다. '최초의 체스판'을!"

진행자가 새로운 물건을 소개했다.

낡고 투박해 보이는 체스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별로 당기지는 않는군."

"그나마 체스 말도 하나도 없네. 나도 취미 삼아 종종 두긴 하지만, 저래서야...."

"누가 아니래?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조각한 거라면 또 몰라?"

"어차피 좀 있으면 '어룡의 심장'이 나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총알이나 아껴 두자고."

"맞는 말이야. 이번 경매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그거니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여태껏 나왔던 보물들에 비해서 너무나 식상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진행자조차 마니아를 위한다는 말로 애써 포장했을까?

물론, 몇몇 콜렉터들에겐 꽤나 구미가 당기는 물건임에 틀림없었지만. 대부분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시작은 5만 달러부터입니다. 원하시는 분께선 입찰 시작해 주십시오."

"100 달러. 우리 집 화장실 슬리퍼를 올려 두는 용도로 쓰지."

"푸하하! 난 150 달러로 하지. 마침 우리 귀염둥이 고양이. 알렉산더의 발톱 가는 용도로 쓸 나무판자가 필요했거든."

"200 달러 여기 있다."

"완전히 호구로군. 200 달러 이상은 없겠어."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딱 한 명.

진혁만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드디어 나왔다.'

3층 보스 공략을 위한 핵심 재료.

이번 경매에 참여한 이유가!

진혁은 힐끗 뒤쪽을 향해 곁눈질했다.

캐드릭과 알렉스 역시 별달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동안 뿌려 둔 밑밥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결실을 맺는지 알아볼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5만."

진혁이 입찰을 시작했다.

"뭐?"

"저기에 5만을?"

"제정신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어떤 멍청이가 저딴 거에 5만 달러나 쓴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비웃음은 단번에 사라졌다.

"10만."

캐드릭이 입찰 전쟁에 뛰어들었다.

"15만."

"50만."

진혁이 즉각 가격을 올렸지만, 캐드릭 역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따라붙었다.

젠장. 캐드릭의 저 표정.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100만."

진혁이 또 다시 올리자.

"1000만."

이번엔 단위 자체가 달라졌다.

이건 떠보는 수다.

이렇게까지 가격을 점핑시켰는데도 따라올 것이냐고 묻는.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확신을 주게 될 것이다.

이쪽이 노리고 있는 게 바로 이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미친. 무슨 체스판 따위에 1000만 달러를 써?"

"우리가 모르는 뭐라도 있는 건가?"

"미치겠네. 저 가격에 따라 붙을 수도 없고."

술렁이는 분위기.

아까와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어느새 원형 극장에 모인 손님들이 이번 경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500만."

진혁이 무겁게 입을 뗐다.

벌써, 갖고 있는 액수의 절반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캐드릭은 입찰 가격을 계속해서 터무니없이 올려 버렸다.

"3000만."

그렇게 말했을 때.

진혁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앞은 보유한 잔고의 최대치를 넘어섰기에.

"훗. 그 액수가 한계였군."

캐드릭이 여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몇 초 늦게 정신을 차린 진행자가 황급히 마이크를 붙잡았다.

"3000만! 3000만 이상은 없으신 겁니까?"

수수료로 10%를 떼는 터라, 무려 300만 달러의 수익이 블랙마켓에 돌아갔다.

처음 이 물건을 출품했을 때, 수수료로 5천 달러만 받아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300만 달러는 무려 600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어차피 이 이상의 입찰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56번째 경매품 '최초의 체스판'은 3000만 달러에 낙찰되었...."

그런데 진행자가 종료를 외치려던 바로 그때.

"1억."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매에 참여한 적 없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도 바로 진혁의 옆에서.

"엘리스?"

진혁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53화. 아타락시아의 가주(家主) (2)

"1억... 1억?"

"제정신인 건가. 저기에 1억을 쓴다고?"

"말도 안 돼."

흥미로워 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미쳐 버린 액수에 경악하고 있었다.

이번 경매의 메인인 '어룡의 심장'이나 다른 미공개 보물들이라면 몰라도.

고작 체스판 따위에 쓰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금액이다.

"크윽!"

캐드릭이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캐드릭은 진혁의 잔고를 파악했을 때만 해도 승리를 확신했었다.

남은 건 저 잡동사니를 갖고 진혁이 갖고 있는 정보와 교환하는 것뿐.

그래. 그렇게 흘러가야 됐다.

그런데 생각에도 없던 꼬맹이가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단 말인가?'

평범할 리는 없다.

100만이나 1000만이 아닌, 단숨에 1억으로 가격을 올려 버린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이미 7000만 달러나 쏟아 부어 쓰레기를 잔뜩 구입했는데, 이제 와서 멈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돈지랄이 될 뿐이었으니까.

절대.

절대로... 그렇게 되게 할 수는 없다.

"1억 1000!"

"1억 5000."

"컥?"

이런 미친.

한 번에 4000만 달러를 올린다고?

무슨 경매를 저딴 식으로 하는 거냐.

아예 압살해 버리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지는 가격 점핑이다.

캐드릭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콧대가 짓뭉개진 탓이리라.

"1, 1억 6000…."

"2억."

고심해서 따라 붙으면, 단숨에 거리를 벌린다.

그것도 따라기 버거울 만큼 말이다.

"스, 스승님! 더 이상은...."

"닥쳐라. 고작 저딴 놈한테 진다면, 우리 꼴이 뭐가 된단 말이냐?"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임무 실패는 물론, 협회의 이름에 똥칠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냐. 좋다! 2억 1000!"

"3억."

"3억 1천!"

"5억."

"5, 5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개소리도 정도껏 해라! 게임 머니도 아니고 너에게 5억이란 돈이 있다는 걸 믿으란 것이냐!"

결국, 참다못한 캐드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이 연신 들썩였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건 완전히 팝콘 각이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사실 엘리스가 나서지 않아도 경매에서 원하는 걸 따낼 자신이 있었다.

'아깝긴 하지만, 회랑에서 얻은 멀린의 지팡이 파편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았지.'

무려, 성유물 중 하나.

멀린의 지팡이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팬티를 전부 벗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돈 싸움은 내 돈 말고 남의 돈으로 하는 게 제 맛이다.

이걸 위해 엘리스를 마인 놈들과 접촉하도록 내버려 뒀다.

엘리스라면 상대가 마인이고 나발이고 간에 할 말을 다 할 테고.

캐드릭 역시 상대의 도발에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둘 사이에 불꽃이 튄다면 자연스럽게 지금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마인 협회가 능력도 있고 돈도 많은 건 알고 있지만....

글쎄.

과연 시련의 탑의 상층을 지배하던 밤의 귀족 중 하나이자 아타락시아 가문의 가주보다 많을까?

진혁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바로 그때 진행자가 끼어들었다.

"크흠! 큼! 노신사분의 말처럼, 혹시 잔고 증명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결코 숙녀분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경매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부탁드립니다."

말이 5억 달러지, 이름이 알려진 기업의 임원들조차 평생을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액수였다.

헌데 기껏해야 중학생밖에 안 돼 보이는 외모의 소녀가 당당하게 내뱉어 대니 믿기 힘들 수밖에.

"증명?"

"예."

"좋아.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엘리스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우우웅!

갑자기 엘리스의 어깨 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붉은빛으로 요동치는 운무(雲霧).

"아공간... 인벤토리?"

그렇다. 바로 만능 저장고라 불리는 아공간 인벤토리다.

"저 소녀. 플레이어였나?"

"이 정도 크기면 꽤나 상위급 같은데?"

"이거, 희귀한 걸 또 보는구만."

손님들도 뜻밖의 광경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잠시 뒤, 엘리스가 공간 저 너머로부터 무언가를 꺼냈다.

수많은 보석들로 치장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왕관이었다.

"이번 경매에선 달러인지 뭔지 뿐 아니라 귀금속도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진행자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왕관을 뜯어봤다.

아무래도 진품 여부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일단, 저희 쪽에서 감정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런 일을 대비해 감정 능력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를 섭외해 두긴 했다.

감정사의 손끝이 희미하게 빛났다.

스킬을 발동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왕관을 살피던 감정사의 동공이 갑자기 급속도로 팽창했다.

"이, 이럴 수가...."

격하게 흔들리는 목소리.

심지어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손도 떨렸다.

"왜? 역시, 가품인가?"

진행자가 다급히 물었다.

"아뇨. 진...품 맞습니다."

"다행이군. 그래서 자네 평가로는 이 왕관은 어느 정도지? 정말로 5억 달러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게. 답변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감정사가 곤란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답변하기 힘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 왕관에 사용된 세공 기술은 현대 기술로 흉내 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

현대 기술로 흉내 낼 수 없다고?

그 말은 설마?

"이게 탑 안에 있는…?"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왕관에 박혀 있는 이, 일곱 개의 날개를 지닌 독수리. 바로 펠슈타인 왕국을 상징하는 영물입니다."

긍정의 뜻이 담긴 한 마디.

그리고 그 한 마디가 일으킨 파장은 원형 극장 전체에 미쳤다.

"탑에 있던 거라고?"

"저게?"

"아니, 그것보다 펠슈타인 왕국이라면 시련의 탑에서도 손꼽히는 미공개 유적 아니야?"

탑에 관한 정보들이 돈이 된다는 게 알려진 뒤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관련 정보를 빠삭하게 긁어모은 상태였다.

적어도 그들의 권력과 돈을 이용할 수 있는 한에 한에선 모조리 말이다.

"왕가를 상징하는 보물이 있어야만 진입할 수 있다는 유적. 들어본 적 있어. 예전에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던 고고학자들이 관련 문서들을 찾았었지."

잊혀진 왕국, 펠슈타인.

신의 저주로 인해 왕국 전체가 모래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와 함께 수많은 보물 또한 매장된 곳이다.

탑의 저층에 있는데다 로또라 불리는 유적이었기에, 수많은 유저들이 기를 쓰고 찾으려 했던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왕국에 대한 단서가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가, 가치는? 그렇다면 가치는 어느 정도란 말이야?"

진행자가 반쯤 이성을 잃은 얼굴로 다그쳤다.

여유 있고 느긋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손님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반말까지 사용했다.

"감히 추정해보자면, 30억 달러는 너끈히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헉?"

"30, 30억 달러?"

"이런 미친. 왕국으로 향하는 지도도 없이 왕관만으로도 그 액수라고?"

"세상에나...."

현실 감각을 아득히 초월한 감평 결과.

이걸로 체스판의 주인은 정해졌다.

"이이익!"

캐드릭의 얼굴은 아예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대체 저 꼬맹이가 누구기에 이토록 무지막지한 보물을 갖고 있단 말이냐.

만약 감평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마인 협회라고 하더라도 금전적으로 상대가 되질 않았다.

이곳에 가지고 온 돈이라고 해 봐야 7억 달러에 불과했으니까.

'완전히 생각을 잘못했다.'

치명적인 오판.

상대를 낮잡아 보던 버릇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저 소녀보다 위험한 건 저 소녀조차 부하처럼 다루고 있는 강진혁이란 인물이다.'

캐드릭이 대견스럽다는 듯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진혁을 바라봤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가면을 쓴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성가신 적이 나타난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