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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카앙!

캉! 카카카카캉!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 넘는 공방전이 오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천유성은 점점 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장.

게다가 상대는 특기마저 포기한 채 근접전에 어울려 주고 있지 않은가?

모든 상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팽팽한 균형은 도무지 깨지질 않았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단 하나.

'검술을 쓴다고?'

단순히 흉내나 모방 따위가 아니다.

유구한 세월마저 느껴지는 노련함.

게다가 중간 중간 허를 찔러 오는 파격적인 수준의 변칙성은. 솔직히 말해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천유성이 거리를 벌린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짧은 시간 안에 다수의 스킬을 발동하다 보니 무리가 갔던 탓이다.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놀랍군. 모르는 사이에 이 정도 수준의 검술을 익히다니."

"최근에 열심히 배웠어.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정확히는 조금 전에.

그것도 너한테 배운 거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저 녀석 눈이 돌아가겠지.

진혁의 이죽임에, 천유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네놈이 장기를 포기했다고 한들 나 역시 단순히 검술만으로 상대하기엔 무리였어. 너 같은 괴물을 상대로 여유를 부린 내 실수다."

인정해야 한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 공기가 급변했다.

직선으로 뻗은 검.

그곳에서.

[천유성이 Lv6 '추혼검기(追魂劍氣)'를 발동합니다!]

파츠츠...!

검신을 따라 푸른 마력이 맺혔다.

닿는 걸 모조리 베어 버리는 극의(極意), 바로 '검기(劍氣)'였다.

"젠장.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이제 막 검 좀 배운 초보 상대로 검기까지 쓴다고?"

"네놈이 초보라는 전제부터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군."

천유성이 단칼에 일축했다.

콰앙!

그리고 검기를 흩뿌리며, 진혁을 향해 쇄도해 왔다.

진혁이 천유성과 단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걸로 맞섰다간 날이 다 나가겠는데?'

아무리 10강짜리 검이라도 검기는 견딜 수 없다.

괜히 최강이라고 불리는 힘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들면 된다.

검기를 상대할 수 있는.

아니, 검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진혁이 바위 위에 놓인 검은색 단약을 쥐었다.

"'검의 노래'와 '마혼단(魔魂丹)'을 융합하겠다."

우우우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SS)'을 획득하셨습니다!]

['검의 무덤': 도검류에 대한 이해도가 500%만큼 증가합니다. 몸은 최적의 검로를 찾으며, 전신의 감각 또한 최고치에 이릅니다.]

[검마(劍魔)의 칭호를 받기 위한 필수 재능 중 하나입니다.]

[복사된 능력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가능하면....

이 능력은 '얼어붙는 눈물'을 흡수한 뒤에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무리를 한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걸 내보낼 수밖에.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현됩니다.]

검의 끝을 본 이는 검성(劍成)이 되었지만, 끝을 깨어 버린 이는 검마(劍魔)가 되었다.

최강이자 최악의 재능.

그렇기에, 그를 기억하는 이는 없다.

남은 거라곤 이름 없는 묘지 위에 꽂힌 한 자루의 검뿐.

이것은 그 마두(魔頭)에 관한 이야기다.

쿠쿠쿠쿠쿠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대리석 가루들이 공중으로 천천히 솟구쳤다.

바로 그 순간.

[Lv1 '흑월야(黑月夜)'가 발동됩니다!]

진혁의 단검 위로 검은 달이 드리웠다.

결계의 빛마저 물들여 버리는 칠흑 같은 초승달이.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달려오던 천유성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26화 검성(劍成) 천유성 (2)

욱씬! 욱씬! 욱씬!

전신에 느껴지는 묵직한 압력.

과부하가 걸린 혈관들이 비명을 지른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이게 전투계열의 SS랭크 고유 능력을 사용한 여파인가.'

지금까지는 불의 원소를 제외하곤 전투계열의 능력을 사용한 적 없어서 실감이 안 났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알겠다.

마력의 절대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중에 테레사의 고유 능력까지 쓰려면....

마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리라.

얼어붙은 눈물을 완전히 흡수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질질 끌었다간 몸이 버티질 못한다.

진혁은 남아 있는 마력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화르르륵!

검 끝에 검은색 기운이 일렁였다.

검마(劍魔)가 사용하던 검강(劍罡).

구현한 건 본래 위력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하고말고.

***

으득!

천유성의 어금니가 입술 깊숙이 파고들었다.

핏물이 배어나왔지만, 고통은 느끼지 못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을 만큼 노력했다.

게임 속에서도.

게임 밖에서도.

하지만, 아무리 단련하고 노력해도 눈앞에 있는 놈을 이길 순 없었다.

결과는 언제나 흑백 화면.

[You Die]라 쓰인 붉은 글자만이 그동안의 노력이 어땠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렇게 1년, 2년....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읽은 게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잊고 지내던 세월.

바로 그때.

[시련의 탑]이 현실로 도래했다.

바로 이거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결코 녀석에게 밀릴 이유가 없다.

지금의 격차는 단지 먼저 게임을 시작해 좋은 기연들을 독식해 왔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최선이라고 확신하는 준비를 끝마쳤음에도....

대체 어째서!

네놈은 또다시 나에게 절망만을 안겨 주느냔 말이다!

천유성이 거칠게 포효했다.

'추혼검무(追魂劍舞)'.

수십 줄기로 나뉜 검기.

'제1식(第一式)'.

유형화된 푸른 마력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추혼수라검(追魂獸玀劍)'.

절대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고함을 지른 천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수십 개의 검기가 진혁을 집어삼켰다.

콰콰콰콰콰콰!

지면이 종잇장마냥 잘려 나갔다.

압도적인 위력.

단순히 검풍만으로도 터무니없는 물리력이 강제되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자욱한 먼지만이 피어올랐다.

"하아.... 하아. 하아."

천유성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격하게 들썩였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를 구사했다.

이거라면 틀림없이 통했을 거다.

그러나.

"뭔 스킬이 이렇게 먼지가 많이 나냐?"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저벅.

상처 하나 없는 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은 게 아니다.

받아친 것도 아니다.

그저 피했을 뿐.

"거, 검로...를 모조리 읽었다고?"

수십 개가 넘는 걸?

그런, 말도 안 되는!

검을 휘두른 자신조차도 모든 검로를 알진 못했다.

"추혼검이 나쁜 건 아닌데, 이것보다 빠르고 강한 걸 쓰는 놈과 싸워 봤거든."

지금 있는 1층이 아닌, 훨씬 더 위에서.

탑을 지배하는 절대자 중 하나와 맞붙어 봤었지.

"웃기는군. 추혼검 위에 있는 상승무공은 천마가 쓰는 것 외엔 없다."

"어떻게 알았어? 그놈이랑 싸웠는데?"

"끝까지!"

천유성이 검을 횡으로 그었다.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진혁이 단검을 내리꽂았다.

콰앙!

서로 다른 궤적의 검이 하나의 점에서 맞부딪쳤다.

카가가각!

기(氣)와 강(罡)의 격돌.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균형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완전히 발현된 검은 달이 천유성의 강기를 순식간에 갉아먹었다.

"크으으읍!"

천유성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폭주에 가까울 정도로 마력을 쏟아 부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마력의 문제가 아니다. 스킬이나 고유 능력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둘 사이에는 얼마나 이 세계를 즐기고 좋아했는지에 대한 차이가 존재할 뿐.

결국.

쿠웅!

천유성이 한쪽 무릎을 꿇었고.

"커억!"

콰아앙!

이어지는 일격에 잡고 있던 철기검을 놓쳤다.

공중에서 빙그르 회전한 검이 지면에 꽂혔다.

마침내 승부가 가려진 것이다.

"이번에도 내가 이긴 것 같네. 정확히 몇 승인지는 모르겠지만."

횟수는 오래 전에 까먹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두 자릿수는 넘은 것 같긴 한데.

"13…8이다."

138이라.

벌써 그렇게 됐나?

"다음엔 139겠군. 물론, 만약에 또 승산이 있다고 착각한다면 말이야."

진혁의 말에, 천유성이 눈을 치켜떴다.

"다음이라고?

"그래, 다음에. 아! 기왕이면 지금보다는 더 강해져서 와 줬으면 좋겠어."

복사 능력을 동일 대상에게 사용하려면 90일이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진혁이 아는 천유성이라면 다음에 만났을 때 지금보다 더욱 쓸 만한 능력을 가지고 올 것이다.

'사실상 출장뷔페가 찾아오게 만들 수 있는 셈이지.'

뭐 하러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고생스럽게 복사를 하나?

눈앞에 강해지기 위해서 안달이 난 놈이 있는데?

이런 녀석은 서서히 키워서 잡아먹는 게 제 맛이다.

'나중에 15층에선 [그 스킬]까지 구해 놓을 테니까.'

수련광만이 얻을 수 있는 기연을 복사할 생각을 하자, 자연스럽게 진혁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물론.

"죽여라.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

천유성의 입장에선 이 말을 값싼 동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것 참.

살려 준다고 해도 싫어하는 놈은 아마 세상에 이놈밖에 없을 거다.

하는 수 없지.

작게 한숨을 쉰 진혁이 단검을 회수했다.

"너도 알다시피 시련의 탑은 만만치 않은 곳이야. 랭커들도 방심하는 순간 죽어나가는 게 여기잖아?"

탑의 난이도에 대해선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특히나 '사람'이라는 변수가 추가된 지금은 과거보다도 훨씬 난이도가 올라갔을 터.

"때문에 강한 플레이어는 최대한 많이 필요해. 특히나 너같이 특별히 강한 플레이어라면 더욱더."

"특별히 강...한 플레이어?"

천유성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묘한 눈빛이다.

평생을 무시 받던 백작가의 망나니 아들이 마침내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그런 느낌이랄까?

이건 넘어왔다.

...지금이다.

진혁이 천유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또 하나의 스킬을 발동했다.

[Lv2 '교감'이 발동됩니다.]

[당신에 대한 대상의 적개심이 누그러집니다.]

[호감도가 미미하게 상승했습니다.]

진혁의 손을 잡고 일어난 천유성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명심해라. 다음번에는 지금과는 아예 결과가 다를 거라는 걸."

아무렴. 어련하시겠어.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결계를 해제하려던 천유성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네놈의 이름을 모르는군."

"자주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통성명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야. 너. 거기. 이봐 등등.

인칭대명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잖아?

"그래. 알겠다. 그렇다면 원래 부르던 대로 부르도록 하지."

응?

뭔가 느낌이 쎄한데?

설마....

"잠깐! 그걸로 부르지 마."

진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름 알려 줄 테니까. 제발.

멈추라고 이 새끼야!

"티모 대령."

아. 부르지 말라니까....

진혁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동시에 재미삼아 지은 닉네임이 얼마나 큰 파급 효과를 몰고 올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뼈저리게.

***

진혁이 천유성과의 전투를 끝내고 한창 아이템을 습득하고 있을 때.

유적에선 또 하나의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차례 전투를 끝내고 쉬고 있는 공격대.

"천화 형. 저 앞쪽에 있던 몬스터들 다 정리한 거 아니었어?"

탐지 마법을 사용하던 마법계열 플레이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1시간 전에 광일이가 애들 데리고 가서 다 쓸어버렸지."

"그래? 흠...."

"왜?"

"아니, 그게 탐지 마법에 마력 반응이 잡히고 있거든. 한 마리 아니면 두 마리 같긴 한데...."

"그럴 리가. 스펙터들이라 확실히 처리했는지 3번이나 확인한 걸로 아는데. 어디 봐 봐."

송천화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정말이다.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반투명한 스크린에 붉은색 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아. 광일이 이 자식. 귀찮아서 일처리 대충 했나 보네."

송천화가 머리를 긁적였다.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스펙터 같이 시야에 놓치기 쉬운 유령 몬스터들을 한두 마리 빠뜨리는 경우가.

그런데 바로 그때.

"어? 자, 잠깐만. 이놈 움직이기 시작했어."

"움직이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이 녀석들, 어그로 끌리지 않으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놈들인데?"

"진짜라고! 게다가 빨라. 곧장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 순간.

쿠―웅. 쿠―웅!

지척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유령계열에겐 존재할 수 없는 발소리가.

송천화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에....

스펙터를 놓친 게 아니라 기존에 없던 존재가 새로이 나타난 거라면?

그리고 외각 경계를 뚫고 지척까지 접근할 때까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거라면?

오싹하고.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당장... 쉬고 있는 놈들 다 깨워!"

"저, 전부?"

"그래, 전부!"

송천화가 고함을 질렀다.

***

잠시 뒤, 공격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3m에 이르는 거대한 골렘이었다.

암석으로 만든 육중한 몸.

하지만, 골렘보다 더욱 신경이 쓰이는 건 녀석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는 백발의 남자였다.

"흐음. 안녕하십니까? 인간 여러분."

고막을 따라 맴도는 감미로운 음성.

남자는 송천화를 향해 생긋 미소를 지었다.

"마, 말을 하잖아?"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성체 몬스터라니."

"저 골렘도 그냥 골렘이 아니라 아이언 골렘이야. 날붙이 따위로는 흠집도 안 간다고."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지능형 몬스터.

그중에서도 인간과 유사한 개체는 플레이어들이 가장 기피하는 종류에 속했다.

"네놈이 이 유적의 보스 몬스터인 거냐?"

송천화가 거대한 방패로 몸을 가린 채 물었다.

"하하, 제 이름은 벨루스. 이 유적의 주인을 모시는 혈족 중 하나일 뿐입니다."

"혈족? 혈족이라면...."

말을 곱씹던 송천화의 동공이 크게 팽창했다.

"서, 설마."

아름다운 인간의 외견을 한 몬스터 중에 저 표현을 쓰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뱀파이어...."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 남자가 모시고 있는 이 유적의 주인은....

꿀꺽!

송천화의 목을 따라 마른침이 넘어갔다.

진조(真祖).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

이곳은 바로 그 녀석의 영토다.

'승산이 없어.'

설마, 1층에 그 정도로 강력한 괴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테레사도 있고 또 준비해 둔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한들, 진조에게만은 예외다.

'최소한 레벨이 500대가 넘을 테니까.'

현 시점에서 그 어떤 고유 능력과 성유물로도 녀석을 사냥할 순 없었다.

송천화가 힘겹게 입을 뗐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냐? 아무 이유 없이 이곳에 오진 않았을 텐데?"

"호오. 제법 눈치가 있으신 분이로군요. 맞습니다. 제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벨루스가 골렘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렸다.

툭.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벼운 착지다.

"제안이라면 무슨?"

"선택권을 드리죠. 두 개 중에서 한 개를 고르시면 됩니다. 먼저 첫 번째.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얌전히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벨루스의 손바닥에 붉은빛의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본보기로 절반 정도 죽은 다음에 가축처럼 끌려가시겠습니까?"

27화 타락한 회랑의 주인 (1)

"웃기는군. 진조가 직접 이곳에 왔다면 몰라도. 휘하의 혈족 한 놈이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송천화가 벨루스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피해가 제법 크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레이드를 포기하고 가디언을 뚫으면 된다.

굳이 진조와 싸울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멍청하게 적의 본진으로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송천화의 입장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흐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라고?"

"당연하지. 기껏해야 50레벨짜리 몬스터 정도는, 이미 몇 번이나 사냥해 봤다."

진조의 통상 레벨은 500 이상.

하지만, 녀석을 따르는 혈족들은 그보다 훨씬 레벨이 낮았다.

50에서, 높아야 60대 정도랄까?

강한 건 맞지만, 포지션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공격대라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 시련의 탑 운영진 게시판에서 공식으로 푼 정보이니 이건 틀림없어.'

송천화가 자신만만하게 자세를 잡았다.

"하하. 역시나! 인간들은 왜 이렇게 레벨이란 틀에 얽매여 있는지 모르겠네요."

벨루스가 유쾌한 듯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파츠츠츠!

붉은색 스파크가 일어났다.

공기가 급변했다.

동시에 벨루스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주제도 모르는 열등한 인간들 따위가 감히...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벨루스가 Lv11 '블러드 바인드'를 발동합니다!]

혈액이 비산한 건 바로 그때였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수천 개의 핏방울이 순식간에 탱커들을 집어삼켰다.

"컥?"

"어어어? 이거 뭐야?"

"디스펠, 디스펠 좀 빨리!"

당황한 탱커들이 고함을 질렀다.

마법 저항력을 올려 주는 아이템을 착용했음에도,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하지만, 디스펠이 사용되기 바로 직전.

벨루스가 펴고 있던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퍼퍼퍼퍼퍽!

콰득!

콰드득!

"끄아아악!"

"으아악!"

엄청난 압력이 갑주를 우그러뜨렸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 속.

"이런 병신들아! 멀뚱히 서서 뒈질 때까지 기다릴 거야? 당장 움직여!"

송천화가 공격을 명령했다.

"젠장! 달려들어!"

"다음 마법이 발동되기 전에 죽여야 돼!"

근접 딜러들이 자리를 박찼다.

포위망을 구축한 채 일제히 사각에서 덮쳤다.

대부분은 혈액으로 만든 방패에 막혔지만....

푹! 푸욱!

극소수의 검과 창은 벨루스의 몸을 꿰뚫는 데 성공했다.

칼날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벨루스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실망이네요. 적어도 무기에 신성력 정도는 두르고 공격을 했어야죠."

그걸로 끝.

퍼버버벅!

벨루스를 둘러싸고 있던 딜러들의 몸이 한 줌의 핏물로 화해 버렸다.

으깨진 육편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공격이 통하질 않는다.

반면, 상대의 공격은 위력적이다 못해 공격대 전체를 압도했다.

"어, 어떻게 혈족이 이렇게 강할 수가...."

송천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고작 혈족 하나가 지닌 힘이 이 정도면.

이를 이끄는 진조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상상조차 가질 않았다.

3층의 보스를 공략하고 있는 최상위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이끌고 와도.

감히 레이드에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

송천화가 방패를 늘어뜨렸다.

당장은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이 소식을 밖에 전해 줄 수 있었으니까.

"항복하시는 겁니까?"

"그전에 한 가지만 묻겠다."

"질문이라... 좋습니다. 어디, 말씀해 보시죠."

"왜 우리를 끌고 가려는 거지?"

벨루스에게 있어, 공격대를 전멸시키는 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1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당신들을 미끼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미끼라고?"

"저희 주인께서 흥미를 느낀 인간이 있는데, 하필 한 명이 신성력을 다룰 줄 아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간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건.... 테레사에 관한 이야기다.

노리는 건 역시 그녀였나.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송천화의 머릿속은 빠르게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성기사인 테레사가 합류해 준다면....'

아주 어쩌면 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닌,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게 만들어 줄 빈틈을.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다. 따라가지."

송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엄지손톱으로 스스로의 손바닥을 찔렀다.

[긴급 호출 스크롤이 발동되었습니다.]

[지정 대상은 '테레사 드 로렌시아'입니다.]

푸른색 상태창이 점멸했다.

이제 믿을 건 이것뿐이다.

송천화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이 모든 상황이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

진조(真祖),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그녀는 시련의 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다.

아니, 강자였다.

일족의 금기를 어겼기에, 타락했고.

그 결과 탑의 가장 아래층에 유배되었으니까.

그래서 붙은 유적의 이름이 '타락한 자들의 회랑'이다.

엘리스와 그녀를 따르는 소수의 혈족이 거주하는, 심연에 위치한 왕궁이라는 뜻에서.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

진혁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러자 눈앞에 상태창 하나가 보였다.

조금 전, 개인 퀘스트의 형식으로 온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회랑의 주인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는 플레이어들과 짐꾼들을 살리고 싶으면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오십시오.]

[난이도: 없음

보상: 회랑의 주인과의 만남

내용: 퀘스트를 수락할 경우 마지막 방까지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과 함정들이 멈춥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테레사가 힐끗 진혁을 바라봤다.

자신이야 계약에 묶여 있으니 당연히 도우러 가야 하지만.

비전투계열인 짐꾼으로 온 진혁은 아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기다리다가.

며칠 뒤, 구조대가 가디언을 뚫고 올 때 밖으로 나가면 그만이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네?"

"저야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진 않지만, 그쪽이 간절히 부탁한다면 함께 가 줄 수도 있죠."

"부탁이라면... 어떤?"

"그거야 뭐. 적당히 성의 표시만 해 주시면 됩니다. 보아하니 구독자 층이 꽤 탄탄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진혁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다 알면서.

선수끼리 왜 이래?

돈 말고 코인으로다가.

5자리 숫자 딱 채워서 주면 다 죽어 가던 의욕도 솟아오를 거다.

"악취미로군. 어차피 너도 보스한테 볼 일이 있던 것 아니었나?"

지켜보던 천유성이 혀를 찼다.

"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강매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테레사 씨한테 의견을 물어본 것뿐이잖아? 게다가 넌 유적 밖으로 나갈 거 아니야?"

"그래.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이미 실패했으니까."

"그럼, 조용히 갈 길 가라. 괜히 훈훈한 거래에 고춧가루 뿌리지 말고."

진혁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천유성이 더욱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너처럼 악랄하게 굴어야 강해질 수 있는 건지 하는."

이 자식이?

"후우. 됐다. 말을 말자."

말해 봤자 나만 손해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니었고.

한숨을 내쉰 진혁이 테레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코인을 드리면... 저와 함께 공격대를 구출해 주실 건가요?"

"많은 걸 약속할 순 없지만, 적어도 1만 코인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1만 코인.

누가 들으면 욕부터 하고 볼 정도로 터무니없는 요구다.

현 시점에서 1만 코인을 모은 사람은 손에 꼽았을 테니까.

하지만 공격대 전부를 구해 낼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액수였다.

다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진혁 씨는 두렵지 않으세요?"

일반적인 레이드도 아니고 한 종(種)의 정점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

죽으면 코인도.

성유물도 모두 소용없다.

그럼에도.

"글쎄요. 두려워해야 하나요?"

진혁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태연한.

마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다.

"...."

테레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감이라기 보단 오만에 가까운 발언.

그런데도 왜일까.

두근! 두근! 두근!

묘한 기대감으로 인해 테레사의 심장이 희미하게 뛰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확률론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직감을 믿어야 할지.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가디언을 돌파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아서 말이지."

천유성이 철기 검을 뽑아든 채 몸을 돌렸다.

"아. 한 가지."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잠시 자리에 멈췄다.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참고삼아 들어라."

다소 불쾌하고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힐끗 진혁을 노려봤다.

"나는 저 녀석이 진조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방관하는 제3자였기에,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없이 검을 나눴던 당사자였기에.

그리고 누구보다 상대를 잘 알고 있기에.

한 가지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이 넘어서지 못한다면, 현존하는 그 어떤 플레이어도 진조를 쓰러뜨릴 순 없다."

과거의 검성이자.

미래의 검성이 될 플레이어가 인정했다.

현재 시련의 탑에 있는 플레이어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1만 코인으로 그 플레이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건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시답잖은 혼잣말이었다. 물론,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지만."

중얼거린 천유성이 멈춰 섰던 발걸음을 재차 옮겼다.

"...조언, 고마워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진혁을 향해 살짝 무릎을 숙였다.

"계약을 맺겠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 싸워 주세요."

***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2/2인)]

[몬스터들이 숙면에 들어갑니다.]

[함정이 가동을 멈춥니다.]

쿠쿠쿠쿠쿵!

유적 전체를 철통같이 보호하던 각종 함정과 몬스터들이 침묵했다.

덕분에 가는 길은 꽤나 순조로웠다.

최소한 몇 주는 걸려야 할 여정을 몇 시간 단위로 압축해 줬으니까.

[마력이 +12만큼 상승합니다.]

진혁은 테레사가 해동해 준 '얼어붙은 눈물'을 조금씩 흡수했다.

[얼어붙은 눈물]

입수 난이도: SS

흡수 가능한 마력: 100

내용: 시련의 탑 7층 '세상의 끝'에서 얻을 수 있는 정수입니다. 흡수 시 마력을 대폭 증가시켜 주지만, 특정한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사용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진짜 쏠쏠하긴 하네.'

무려 12스탯.

레벨로 치면 4레벨을 올린 셈이다.

진혁은 확연하게 달라진 마력을 온몸으로 느꼈다.

'검의 무덤'을 활성화했을 땐 혈관 전체가 찢겨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통증이 한결 덜해졌다.

이래서 다들 마나통, 마나통 하는 건가 보다.

'총량이 100이니 이걸 전부 흡수할 수만 있다면....'

천유성의 '검의 무덤'이나 테레사의 '별의 가호'는 물론, 다른 랭커들의 고유 능력과 스킬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거다.

'테레사가 해 주는 해동으로는 12스탯이 한계니 당분간은 이걸로 만족해야겠군.'

12, 18, 30, 40.

이렇게 총 4단계.

냉기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스킬에 따라 흡수할 수 있는 양도 달라진다.

다음 단계로 가려면 상위 스킬을 갖고 있는 인물이나 특수한 아이템이 필요 하다는 뜻이다.

'뭐, 이건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당장은 코앞에 닥친 일에 집중해야 한다.

진혁은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을 답습했다.

수없이 많은 도전과 실패.

그리고 그 끝에서 찾아낸 유일한 활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결코 쉽지 않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어떻게든 뚫어 낼 수밖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통로가 점점 더 넓어지기 시작했다.

28화 타락한 회랑의 주인 (2)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두 사람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장식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그깟 외관이 아니다.

'이건....'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릿! 저릿!

엄청난 마력이다.

마력을 차단해 주는 문이 있음에도 이 정도 압박감이라니.

힐끗 옆을 보자, 테레사는 아예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런 괴물을 저희 둘이서 상대해야 한다고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피부를 찌르는 마력엔. 싸울 의지 자체를 짓밟아 버리는 격이 느껴졌으니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강하다는 건 어차피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게다가 전투라는 게 반드시 강한 쪽이 이기는 건 아니에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략과 전술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마력의 크기로 모든 승부가 결정됐다면....

'나 또한 결코 탑의 마지막 층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뭔가 계획이 있는 거예요?"

"딱 한 가지. 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저를 믿어 주세요."

짧게 내뱉은 진혁이 단검을 꺼냈다.

"네? 그게... 무슨?"

테레사가 물었지만,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끼이이익....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

눈부신 빛과 함께 장관이 펼쳐졌다.

황금으로 만든 바닥과 기둥.

붉은 휘장이 길게 내리깔린 곳엔 고고한 왕좌가 자리해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느라 지쳤느니라."

턱을 괴고 있던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몇 번을 봐도 놀라운 모습이군.'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과 붉은 눈동자.

고혹적이다 못해 퇴폐미까지 느껴지는 몸.

과연, 불로불사의 축복을 받은 뱀파이어다운 외모다.

저 녀석 혼자만으로도 끔찍한데....

진조의 옆으로 도열해 있는 혈족도 열둘이나 됐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놈들이다.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엘리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Lv?? 차원 단절이 해체됩니다.]

베일이 벗겨지며,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으으읍!"

"읍! 읍! 으으으읍!"

재갈과 눈가리개로 감각이 차단된 채 묶여 있는 모습.

송천화를 비롯한 공격대부터.

김 반장과 짐꾼들까지.

대부분 무사해 보였다.

...다행이다.

[Lv2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진실의 눈'을 사용한 채 사람들을 훑었다.

스쳐지나가는 수십 개의 상태창들.

마력 소모가 극심했지만, 진혁은 무리해 가며 모두의 이름과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찾아야 한다.

이중에서....

'그 녀석'을.

바로 그때.

"인질들이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기다리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건 말만 묻는다는 거지, 무조건 답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다.

거절하면 이 왕궁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물어보세요. 사실 저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판을 벌인 이유가 궁금하긴 합니다."

"내가 그대를 이곳까지 초대한 건 바로 그대에게서 나오는 냄새 때문이었다."

"냄새라고요?"

땀 냄새는 아니겠고.

뱀파이어를 자극할 수 있는 냄새라면... 설마?

"그렇다. 네 몸에서 흘러나오는 혈향(血香)! 보통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미로운 향이 나를 자극하였다."

젠장.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B형 남잔데, 갑자기 웬 감미로운 피 타령이야.

진혁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많이 심란한 모양이구나."

"그럼 피를 쪽쪽 빨아서 미라로 만들어 버린다는데, 심란해 하지 않을 사람도 있습니까?"

"나는 맛있는 걸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60년은 생을 허락할 터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안심이 안 되는데.

저거, 한 마디로 '평생 옆에 두면서 배고플 때마다 목에 빨대를 꽂겠다'는 말이잖아?

"호의는 감사하지만, 뱀파이어의 고급 도시락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가학적인 취미는 다른 곳에서 알아봐라.

개중에는 좋아하는 놈도 있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선택하라고 말한 게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맨입으로 그러자는 건 아니고... 피 대신 다른 걸 드리도록 하죠."

"호오."

맹랑한 제안이 흥미를 끈 걸까?

엘리스의 입에 걸려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우리에게 맛있는 피보다 귀중한 건 없다. 설령 무엇을 제안하든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자유'라도 해도 말입니까?"

"...!?"

진혁의 말에 엘리스의 얼굴빛이 변했다.

동시에.

"감히!"

"여기서 그 단어를 꺼내다니!"

"찢어 죽여 버리겠다. 인간!"

엘리스의 좌우에 도열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말에서 살기가 배어 나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들에게 있어 자유란 단순한 단어 그 이상을 의미했다.

끝없는 어둠 속에 유배되어 보낸 세월.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도.

바람의 부드러운 촉감과 풀의 싱그러움도.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네놈... 지금 뱉은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거다."

"책임질 수 없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진혁이 품에서 가면을 꺼냈다.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가면이었다.

미궁에서도 사용했었지만, 그때와는 형태가 살짝 달랐다.

오른쪽 뺨에 마력으로 새겨 놓은 룬 문자가 눈에 띄었다.

"그건...."

엘리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알아보는군.

이 가면이 갖고 있는 의미를.

진혁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떡밥은 충분히 던져 놨으니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다.

"제 이름은 강진혁."

세뇌하자.

"탑에 있는 마인(魔人)들을 대표하여."

현재 내가 연기해야 할 인물을.

그리고.

"지금부터 당신을 이곳에서 꺼내 드리겠습니다."

그 인물이 갖고 있는 성격과 목표까지도.

***

마인(魔人).

돈이나 복수 혹은 개인의 신념 때문에, 인류를 등진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인들은 플레이어들이 탑을 오르는 걸 방해했고.

심지어 미궁이나 유적에 있는 몬스터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시련의 탑이 현실로 도래한 이후. [코인농장]을 비롯한 수많은 악행은 각종 메스컴에서도 뜨겁게 다뤄지고 있기에, 마인들의 인지도는 여느 대형 길드에 못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선 나도 들어본 적 있다. 헌데, 그대가 그들 중 하나라고?"

엘리스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가면만으로는 확신을 주기에 부족하겠지.

그렇다면.

좀 더 알려주면 된다.

마인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탑 27층에 있는 [신전]과도 이미 연락이 닿은 상태입니다. 이곳에 엘리스 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유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봉인을 속일 수 있는 방법도 모두 그곳에서 알려줬죠."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말.

거기에 태연한 표정까지 곁들여진 건 덤이다.

"과연.... 신전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거라면, 단순히 허언은 아니겠구나."

"그럼,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엘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또 오랜 세월동안 불가능하다 여긴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하고 있지."

아름다운 장미엔 가시 있는 법.

"무엇보다 말만 번지르르한 놈은 쉽게 믿을 수 없어."

거절.

단순한 부탁이나 제안이었으면 서로 손 털고 나가면 그만이었겠지만.

여기서 거절은 곧 죽음이다.

엘리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도열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몸을 달싹였다.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 진혁은 생포하고 테레사는 죽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다, 이거지?

"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면, 그땐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흐음?"

엘리스가 들어 올리던 손을 멈췄다.

"단순히 심증만으로 신전과 저희의 제안을 걷어차기엔, 부담이 되실 텐데요?"

"...."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요."

"좋다. 그대가 정말로 마인이라면...."

엘리스의 시선이 진혁을 지나 그 뒤로 향했다.

"인간들을 죽이는 것 따위엔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테지."

말과 함께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돌발 퀘스트]

내용: 함께했던 동료를 죽이십시오.

보상: 엘리스의 신뢰

실패 시: 그 어떤 말로도 엘리스를 설득할 수 없게 됩니다.

죽이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뿐인 선택지.

그리고 진혁은....

"알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단검을 움켜쥐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

***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예요!"

테레사가 배신감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했던 남자였다.

짐꾼이었지만, 보여 준 압도적인 무용.

신비롭고 어딘지 모르게 따뜻했던 인상.

그렇기에 믿으라고 했던 말을 되새기며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동료를 죽이라는 말에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상대의 정체가 정말로 마인 중 하나였다고.

"처음부터... 저를 이용할 생각이었던 건가요?"

"그런 질문은 이제 와서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진혁이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테레사가 방패로 몸을 감쌌다.

방어 위주로 버티겠다는 건가.

"테레사 씨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암스테르담의 아웃브레이크를 막아낸 전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고.

"인간을 대상으로 싸워 본 적... 있으세요?"

탓!

진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

뒤!

테레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카칵!

방패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단검이 철을 긁고 사라졌다.

'빨라!'

게다가 이 움직임.

변칙적이다 못해 괴랄하다.

카캉! 카카카캉!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테레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방어에만 집중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대로라면 5분? 아니, 3분도....

입술을 질끈 깨문 바로 그 순간.

"아...."

테레사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를 잘못 읽었고.

그로 인해 대처가 어긋났다.

물론, 그 틈을 놓칠 진혁이 아니었다.

푸욱!

관절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 비워 둔 틈.

단검이 갑주로 보호받지 못한 곳을 파고들었다.

테레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동맥이 잘린 터라, 상처에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치명상이다.

"아...으으...."

신음하던 테레사가 결국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하나로는 부족하겠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진혁이 몸을 돌렸다.

벌벌 떨고 있는 공격대.

진혁은 그중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 앞에 섰다.

'진실의 눈'을 통해 확인해 뒀으니 틀림없다.

우드득!

진혁이 그 중에서 가장 앞쪽에 있는 남자의 재갈을 부수고 안대를 벗겨 냈다.

그러자 자유가 구속되어 있던 남자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구, 구조대...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 어라?"

감격에 겨워 있던 남자가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곧바로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반면.

진혁은 생긋 웃었다.

"안녕?"

오랜만에 보네.

이 빌어먹을 놈아.

29화 타락한 회랑의 주인 (3)

검은 까마귀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

박하진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박하진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렸다.

"여기서 만나다니 이것 참 인연이네. 그래서 이 먼 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

생긋 웃은 진혁이 번개같이 박하진의 목을 움켜쥐었다.

"켁! 케엑! 그…거야 당연히...!"

"유적을 공략하러 왔다고?"

"그, 그래."

"개소리하고 있네."

진혁이 손에 힘을 더욱 줬다.

"끄으윽. 이것 좀 놓고 말하자, 제발. 수, 숨이...."

"짧게 말할 테니까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보초를 죽이고 가디언을 깨운 놈들. 너네 맞지?"

"그, 그게 무슨...."

우드득!

"끄아아아악!"

박하진이 몸을 마구 뒤틀었다.

엄지로 쇄골을 압박하자,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던 것이다.

"맞아! 맞다고!"

역시.

보초들의 목 뒤에 난 상처를 봤을 때 확신했었다.

이 상처는 암살계열의 능력자가 한 짓이라고.

그리고 이번 유적 공략에 필요 없는 암살계열이 왔다는 건.

박하진.

그래, 네놈밖에 없지.

"이곳에 온 목적은 보나마나 날 죽이려는 것일 테고."

"그, 그건!"

박하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아니라고 했다간 상대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맞다고 했다간 죽는다.

"대답이 느리네?"

진혁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동시에 마력을 실은 손가락이 박하진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우득! 우드득!

쇄골이 박살나는 섬뜩한 소리.

"으아아악! 그만, 그만! 말할게. 그러니까 그만해!"

박하진의 몸이 아까보다 더욱 격하게 뒤틀렸다.

"기다려 봐, 잠깐만. 나는... 그래! 그 우리 길드장 놈이 시켜서 그런 거야. 안 된다고 했는데 그놈이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어!"

검은 까마귀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신건수인가 하는 그놈?"

TV에서 본 적 있다.

'떠오르는 신흥 길드 특집'이었나 뭐였나 하는 프로그램이었지.

고급 양복에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끼고 꺼드럭거리는 모습은 쉽게 잊으려야 잊기 힘들었다.

"맞아! 신건수! 그 개잡놈이 시킨 거야. 제발 믿어 줘."

"…좋아. 믿어 줄게."

진혁이 손에서 힘을 뺐다.

"후우."

박하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지 마. 살려 줄 생각은 없으니까."

푸욱!

단검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커...억?"

박하진이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원래 내 목숨을 노리는 놈들은 편하게 보내지 않는데, 네놈 덕분에 판을 짜기가 수월해졌으니 특별히 인심 써 준 거야. 고마워하라고."

차갑게 말을 내뱉은 진혁이 박하진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빼 냈다.

[브라함의 반지]

입수 난이도: A

마법 저항력: +10

이동 속도: +5%

고유 능력 억제: +20

죽은 사람이 갖고 있기엔, 지나치게 아까운 아이템이다.

진혁이 반지를 검지에 꼈다.

서걱!

그리고 가차 없이 나머지 검은 까마귀 길드의 암살자들을 베어버렸다.

[냉혹한 심장]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진혁의 손속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 녀석들을 상대로 인간미를 발휘할 만큼 멍청한 짓 또한 없었고.

피가 낭자한 현장 속.

진혁이 고개를 돌려, 엘리스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제가 마인이라는 게 증명됐다고 생각합니다만?"

뱀파이어들이 가장 상대하기 꺼리는 테레사와, 붙잡아 둔 인질들까지 죽였다.

뒷일을 생각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교감'을 통해 상대의 경계심을 완화시킨 것도 엘리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했다.

"좋다. 만약 내가 그대를 믿는다 치고."

엘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은발이 어깨를 따라 흘러내렸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거지?"

...좋아.

진혁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침착하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천천히 낚시 줄을 당길 시간이다.

"7성급 주문을 준비해 뒀습니다. 아이템 안에 엘리스 님의 혼을 봉인한다면 유적의 결계를 잠시 속일 수 있습니다."

"혼을 봉인한다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구나."

그렇겠지.

이 방법은 탑의 40층에서나 나오는 거니까.

"솔직히 말해 꽤 운이 따라 준 덕분이었죠. 기본 골자가 될 수식에... 각 회로에 공급해야 하는 정확한 마력의 양을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진혁이 손가락에 마력을 끌어 모았다.

우우웅!

손끝에 푸른빛이 맺혔다.

글자를 쓰듯 손가락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하나의 단어.

[signácŭlum]

그리고 또 하나.

[immortálĭtas] [sanctuárĭum]

....

여섯 개의 단어로 된 육망성을 그렸다.

각각의 단어에 각기 다른 양의 마력을 주입하자, 푸른빛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육망성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호오."

엘리스가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저런 식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니."

지켜보던 혈족들도 입을 벌렸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압도당한 듯, 입술이 달싹였다.

그사이 진혁은 육망성 한가운데 '브라함의 반지'를 갖다 댔다.

[시전자 '강진혁'의 레벨 조건(1레벨)이 인정되었습니다.]

[7성급 '영혼이전(靈魂移轉)'의 영창이 발동됩니다!]

[대상의 승인을 얻을 경우 주문이 완성됩니다.]

[한 번에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영혼은 한 개입니다.]

[영창의 쿨타임은 365일입니다.]

유적에서 나갈 수 있는 건 한 명뿐.

다음 차례는 일 년 뒤에나 가능했다.

불사의 축복을 받은 뱀파이어에게 있어 시간은 문제될 건 없었지만....

'처음 보는 주문을 덥석 승낙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군.'

엘리스의 고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구겨졌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영창의 허점을 발견한 것이다.

'영창의 근간이 되는 육망성을 부수면 술식 자체를 파훼할 수 있다.'

만에 하나,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더라도....

벨루스를 비롯한 혈족들이 있는 한, 언제든지 인간을 죽이고 봉인을 깨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써 안전장치가 마련됐다.

찜찜한 느낌은 여전히 있었지만.

'단순히 석연찮다는 것만으로 이 기회를 차 버릴 순 없어.'

너무나 오랫동안 갇혀 있던 삶이었다.

그렇기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영원히 이 지하 왕궁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다. 받아들이마."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순간.

[브라함의 반지가 진조 '엘리스'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눈부신 빛이 엘리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

"하하."

진혁이 육망성에 있던 반지를 회수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 쳤다.

...성공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

단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엘리스를 이 안에 봉인시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수십 번도 넘게 실패한 적이 있기도 했고.

'테레사라는 변수 덕분에 일이 훨씬 더 수월하게 풀렸어.'

[흐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답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늑해.]

손바닥에 놓인 반지에서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부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앞으로 살 집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그때였다.

"으으...."

바닥에 쓰러져 있던 테레사로부터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 저 여자가 어떻게!"

"죽은 것 아니었나?"

혈족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호흡이 멈춘 걸 확인했다.

혹시나 해서 마력 반응까지 살펴봤었지만, 느껴지는 건 없었다.

틀림없는 죽음.

그런데.

대체 어째서?

"아... 깜빡했네요. 저 친구, 죽어도 한 번 부활하거든요."

'별의 가호'라고.

즉사하지만 않으면 다시 살아난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테레사를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캬. 진짜.

보면 볼수록 좋은 능력이다.

성퀴벌레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네놈! 감히 나를 능멸한 것이냐!]

엘리스가 고함을 질렀다.

속은 걸 깨달았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반면, 정신을 차린 테레사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이런... 계획이었군요."

별의 가호가 있었기에, 심장이 멎은 와중에도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능글맞은 화술로 진조를 구워삶고.

결국 봉인시켜 버린 것까지. 전부.

이래서 무조건 믿으라고 한 거였구나….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지금은 참아야겠죠?"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니까요."

그래.

담소를 나누는 건 나중의 일이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테레사가 Lv4 '성호(聖號)'를 발동합니다.]

테레사의 검이 좌우로 움직였다.

툭!

투욱!

사람들을 구속하던 재갈과 안대가 벗겨졌다.

"헉...."

"허억!"

감각이 차단됐던 사람들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 살았다. 살았다고!"

"우와아아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자유를 맛보게 된 것이다.

"와 줬군요."

송천화가 테레사를 향해 짧게 목례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테레사가 송천화를 일으켜 세웠다.

"구조대는 몇 명이나 온 겁니까?"

대형 길드의 메인 공격대가 셋 이상은 투입되어야 한다.

최소한으로 따졌어도 그 정도 전력은 필요했다.

하지만.

"저를 빼면 한 명뿐이에요."

테레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송천화의 기대를 완전히 짓뭉개 버렸다.

***

"차라리 마인 행세를 했으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것을."

"멍청한 인간 같으니...."

혈족들이 어금니를 드러냈다.

수작을 부리면, 인간들을 모두 제거하란 명령을 받아 둔 상황.

더 이상 봐줄 필요는 없었다.

쏴아아아아!

혈액으로 구성된 각종 마법들이 주위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고.

만들어진 파도는 왕궁 전체를 집어삼킬 듯 높이를 더해 나갔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다.

"트, 틀렸어."

"간신히 살았나 했는데...."

"난... 난 죽기 싫어!"

이미 한 번, 저 스킬에 박살이 났었다.

대형종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탱커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각종 딜러들의 마법은 상위 마법에 의해 지워졌다.

악몽과 같았던 기억이다.

문제는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송천화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까지인가."

테레사가 왔다 한들 소용없다.

혈족은 그때보다 11명이나 더 많았으니까.

전력 차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Lv13 '블러드 웨이브'가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

선혈의 파도가 밀려왔다.

막을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

송천화가 눈을 감았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떨구거나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

파도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 또한 없었다.

송천화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그곳엔.

기묘한 가면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화르르륵!

거대한 불의 장벽이 파도를 막아 냈다.

아니, 단순히 비등하게 막아 내는 수준이 아니다.

수분이 증발하며, 핏방울이 점차 사라져 갔다.

어느 쪽이 더 밀도 높은 마력을 구사하는지 말해 주는 것처럼.

누구지?

'가면에... 단검을 사용하는 랭커는 들어본 적 없어.'

처음 보는 인물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

이토록 강력한 화염 마법을 사용하는 플레이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송천화의 질문에, 테레사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걸렸다.

"반드시 믿어야 하는 사람이요."

30화 타락한 회랑의 주인 (4)

"어떻게 인간 따위가...."

벨루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공격은 인간들을 일격에 쓸어 버리기 위해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저놈은 이토록 쉽게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희들이 쓰는 스킬과 화염 속성은 상극이거든."

거기에 간극 스탯과 적응형 능력치로 인해 오히려 레벨 차이가 역전된 상태다.

이 정도 상황이 갖춰졌으면....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엘리스가 봉인된 순간, 너희들이 이길 확률은 사라진 거야."

"확실히, 마법으로는 이기기 힘들 것 같군."

벨루스가 끌어 모았던 마력을 흩어 버렸다.

"하지만 네놈 말대로 상극이 존재한다면.... 마법으로 근접계열의 공격을 받아내는 건 힘들 테지?"

어느새 오른손에 나타난, 묵빛이 도는 검.

뱀파이어들이 즐겨 쓰는 레이피어였다.

게다가.

[벨루스가 Lv9 '암흑투기(暗黑鬪氣)'를 발동합니다!]

검신을 타고 검은색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검기다.

그것도 꽤나 순도 높은.

"멀리서 날파리처럼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는 놈들을 상대하는 덴 이것만 한 게 없지."

틀린 말은 아니다.

마법계열 능력자는 거리가 좁혀진 순간, 리스크가 극도로 증가하니까.

게다가 열둘이나 되는 수로 동시에 덤빈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한 수였다.

그래.

그게 정석이다.

정석이긴 한데....

누가 그래?

내가 마법에만 강하다고?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고요한 적막 속.

한 시대를 풍미했던 검마의 재능이 진혁의 몸에 스며들었다.

바뀐다.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부터.

마력이 흐르는 과정까지.

가면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과연...검마라는 칭호를 거져 얻은 건 아닌가보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

'...뭐지?'

벨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뭔가 달라졌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파르르.

희미하게 떨리는 손.

설마.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이 내가?

벨루스가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깨물었다.

"웃기지... 마라."

인간 하나에게 겁을 먹다니.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그분을 구속하고 있는 육망성을 깨뜨려야 한다.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

벨루스가 검을 움켜잡았다.

"네놈이 아무리 발악해 봐야 검기를 받아낼 순 없을 것이다."

든든하게 타오르는 검은 기운.

극한의 절삭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검기였다.

"한꺼번에 덮친다."

"명심해. 절대 놓쳐선 안 돼."

"팔다리 하나 정도는 잘라야겠어. 그래야 분이 풀리지."

혈족들이 진혁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했다.

전후좌우.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도 없다.

그러나 진혁은 자리에 멈춘 채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적들을 훑을 뿐.

"검기라. 믿는 게 고작 그거였냐?"

"허세부리지 마라.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여기서 빠져나갈 순 없다."

하긴, 말만 하면 허세로 보이겠지.

어느 쪽이 유리하고 불리한지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보여 주면 된다.

말이 아닌 실력으로.

진혁이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콰콰콰콰콰!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일렁였다.

"이, 이럴 수가...."

벨루스의 두 눈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기껏해야 검의 표면을 덮고 있는 검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검을 완전히 감싸고 그 위로 1m 가까이 솟구친 푸른 기운.

틀림없다.

이건.

"오, 오러 블레이드라고?"

"검(劍)에 기(氣)를 불어넣는다는 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진혁이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공기마저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예리함.

압도적인 무력이 혈족들을 향했다.

탓!

신형이 사라진 건 바로 그때였다.

"어, 없어졌다?"

"어디야! 어디냐고?"

"젠장. 눈으로 쫓지 말고 마력을 탐지해라!"

벨루스가 외쳤지만, 너무 늦었다.

"크아아악!"

가장 측면에 있는 뱀파이어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팔이 송두리째 잘렸으니,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난 뱀파이어라고 한들 시간이 걸릴 거다.

'일단 한 놈.'

진혁의 눈동자가 다음 타겟을 쫓았다.

철저하게 약한 순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강한 놈까지.

아무리 승리를 확신하더라도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서걱!

단검이 원을 그렸다.

"커억!"

허벅지에 바람 구멍이 나자, 뱀파이어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또 한 놈.

[당장 멈추지...!]

엘리스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 대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진 않는다.

이미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브라함의 반지를 안주머니 깊숙이 쑤셔 놨기 때문이다.

"따로 놀지 말고 진형을 유지해라! 멍청하게 상대의 노림수에 당해 주지 말란 말이다!"

벨루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큭!"

"쳇!"

그제야 뱀파이어들이 엉거주춤 자세를 갖췄다.

부상당한 이들의 공백을 메우며, 측면을 보강했다.

"쳐라!"

열 개의 레이피어가 진혁을 향해 폭사됐다.

검과 검이 격돌한 순간.

콰콰쾅!

레이피어가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산산이 부서져 버린 칼날.

역시나 검기로는 검강을 당해 낼 수 없다.

'상관없다. 절반을 잃더라도 한 번만 공격을 성공시키면 돼.'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건 누구보다도 벨루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부웅!

부우웅!

하지만, 레이피어는 모두 허공을 가를 뿐.

진혁의 그림자 조차 쫓지 못 했다.

30초... 1분.

시간이 지날수록 벨루스의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덤벼도 상대조차 되질 않는단 말인가.'

그 와중에도, 이쪽의 숫자는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언제나 당했는지.

어떻게 당했는지조차도 모른다.

마치 귀신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퍽!

또 하나가 쓰러졌다.

더 이상 옆에 서 있는 혈족은 없다.

"젠장."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벨루스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싸움은 끝났다.

너무나 허무하게.

아니, 허무하다는 말은 당사자인 진혁에게만 해당되는 말일 뿐.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이들은 전신을 휘감은 전율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테레사 씨...."

송천화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체 지금 무얼 본 걸까?

이게 현실이긴 한 걸까?

공격대마저 손도 대지 못했던 진조의 혈족을 혼자서 쓸어버리다니.

그 어떤 랭커라도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꿀꺽!

송천화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 남자. 누구인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

테레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힐끗 진혁을 바라봤다.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건.

사람들 앞에서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중간에 우연히 만나 함께 오게 된 사이예요. 저에게도 그저 믿으라고 했을 뿐, 그 외의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송천화가 탄성을 뱉어 냈다.

가면을 쓴 진혁이 무언가 하려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송천화가 단숨에 진혁에게 달려갔다.

"왜 그러시죠?"

성유물 앞에 서 있던 진혁이 뒤를 돌아봤다.

"그.... 저는 이 공격대를 이끌고 있는 공대장, 송천화라고 합니다."

"대충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실패한 레이드의 책임자.

적군보다 무섭다는 무능한 지휘관.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구석에 찌그러져 있을 텐데.

무슨 낯으로 말을 거는 걸까?

...됐다.

이런 놈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부상자를 데리고 유적을 떠나세요.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수분과 간단한 영양 보급이 필요할 겁니다."

진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데.

송천화가 곤란한 듯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그전에 성유물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설마.

여기서 성유물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와.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놈일세.

"알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이번 레이드에서 구한 모든 아이템의 소유권은 저희 발해 길드에...."

진혁이 송천화의 말을 도중에 끊어 버렸다.

"목숨을 구해 줬는데 성유물까지 달라?"

개소리도 참 신박하게 한다.

너무 참신해서 다음엔 어떤 말을 할지 기대가 될 정도랄까?

송천화도 찔렸는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대신 저희가 다른 보상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돈이든 코인이든 결코 섭섭하지 않게 챙겨 드리죠."

"보상이라...."

이거 안 되겠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본인이 그토록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자요."

진혁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저,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대신 후회만 하지 마세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예?"

"그냥 한 말입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송천화는 찜찜하단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었다.

성유물을 양보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넓적한 바위 위에 놓여 있는 나무 파편.

바로 '멀린의 지팡이'다.

부서진 7개의 조각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 해서 그 가치가 깎여 나가는 건 아니었다.

'마법 재료로 쓰면 활용 가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해.'

송천화의 두 눈이 탐욕으로 얼룩졌다.

이걸 가져간다면, 공격대가 포로로 잡혔던 오점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손으로 파편을 잡은 그 순간.

화끈하고.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송천화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허나, 붉게 달아오른 피부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건.

손바닥에 표시된 역십자 모양의 문양이었다.

"뭐, 뭐지 이건?"

뭐긴....

"저주죠."

본래 엘리스를 소멸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성유물이다.

그런데 엘리스가 죽지 않고 봉인되어 있는 상황에서, 성유물을 건드렸으니 당연히 저주에 걸릴 수밖에.

"저, 저주라니! 설마, 죽... 죽는 겁니까? 제가?"

"생명에 지장 있는 건 아니고요. 단지...."

"단지?"

무모증(無毛症)이라고.

"전신에 있는 털이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쉽게 말해서 평생 매끈매끈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그럴 수가."

송천화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어우야.

한 움큼씩 빠지는 걸 보니 몇 시간 남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말했잖아.

후회할 거라고.

뭐, 이제 와선 아무래도 소용없는 말이지만.

"안 돼… 안 돼애애애애!"

송천화가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달려갔다.아마 거울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모양인데, 안 보는 게 정신건강상 이로울 거다.

***

"...짓궂으시네요."

테레사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남의 떡에 손을 대려고 했으니 자업자득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진혁 씨도 성유물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

'나는 저주를 피한 채 성유물을 만질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별의 가호'.

신성력을 익힐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저주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테레사 씨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저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제 덕분에 살았다는 거, 인정하십니까?"

"...."

테레사가 진혁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만약 진혁이 없었다면....

공격대 중 누구도 살아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예.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SS)'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별의 가호]

입수 난이도: SS

내용: 성기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을 다룰 수 있으며, 즉사가 아닌 한 2번째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쿨타임 240시간)

이걸로....

유적에서 해야 할 마지막 목적까지 모두 달성했다.

31화 고인물이 절대자를 조련하는 법

진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새로 얻은 능력을 확인했다.

'별의 가호'.

별자리의 가호를 받는 테레사의 고유 능력.

드디어 이걸 손에 넣었다.

'유적에 와서 얻은 게 정말 많긴 많네.'

'얼어붙은 눈물'이나 '브라함의 반지' 같은 아티팩트류도 쓸 만했으나.

천유성과 테레사의 고유 능력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정상급 랭커의 능력을 두 개나 얻다니....'

표정 관리를 하고 싶은데,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로또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입 꼬리가 자연스럽게 씰룩였다.

후우, 침착하자.

진혁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유 능력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여기에 안주할 순 없다.

게다가, '별의 가호'도 융합을 통해 더 상위 능력으로 대체가 가능할 터.

천외천(天外天).

랭커들이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갈 때까진. 잠시도 여유를 부려선 안 된다.

'우선, 가장 시너지가 좋게 나올 수 있는 스킬들부터 모아 봐야겠군.'

조합법은 이미 모두 머릿속에 있었다.

그때.

"저기, 진혁 씨?"

테레사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맞다.

이 여자가 있었지.

능력에 심취해 있느라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뭘 좀 확인하느라고요."

"괜찮아요. 그보다 방법은 생각하셨어요?"

"거창한 방법은 없고, 그냥 맨 손으로 한번 잡아 보려고요."

"...네?"

테레사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다재다능하더라도.

저주가 걸린 성유물은 신성력이 없으면 만질 수 없다.

그리고 이중에서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사실, 제가 신앙심이 매우 투철한 편에 속합니다. 어린이 주일 학교도 꼬박꼬박 다니고 군대에서도 종교 활동을 빼 놓지 않았죠."

"그, 그런 걸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요?"

"왜요? 못 믿겠어요?"

"당연히 못 믿죠!"

테레사가 그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여기 오면서 뭐라고 했죠?"

"무…조건... 믿으라고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역시 똑똑한 학생은 기억력이 출중하다.

"그럼 믿으세요."

"...."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말에, 테레사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믿지 않은 걸 후회한 게 바로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기 어려웠다.

"하,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예요."

그래.

이번엔 틀리지 않았다.

"흠. 이렇게 하죠. 만약, 제가 이걸 만지고도 멀쩡한지 아닌지. 내기 한번 할까요?"

"내기요?"

내기란 말에 테레사가 말끝을 흐렸다.

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이미 1만 코인을 넘기기로 약속한 상황.

더 이상 걸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지면, 이 성유물을 드리죠. 대신, 테레사 씨가 진다면 나중에 제 방송에 게스트로 한 번 출연해 주세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약속한 겁니다?"

"진혁 씨야말로 약속 꼭 지키세요."

지키고말고.

만약, 내가 진다면 말이지.

우우우웅!

바로 그때, 진혁의 손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마력.

틀림없다.

이건, 신성력이다.

"아...."

테레사의 입에서 폐 속 깊숙이 쌓여 있던 한숨이 흘러나왔다.

허무함과 허탈함.

그리고 그것을 넘어 자신이 믿고 지켜 온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쯤 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라.

비가 오면 젖듯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으니까.

"게스트, 잘 부탁드려요."

진혁이 가볍게 테레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걸로 든든한 지원군을 확보했다.

[멀린의 지팡이 파편(재료용)]

입수 난이도: AAA

공격력: ?

내구도: 5/5

내용: 전설적인 영국의 대마법사 멀린이 사용하던 지팡이의 파편입니다. 저주가 걸려 있기 때문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만 만질 수 있습니다.]

미궁이나 유적에서만 구할 수 있는 AAA급 재료.

코인 거래소나 블랙 마켓에 팔아도 쏠쏠하고.

마도구를 만들어도 쓸 만할 테지만....

이걸 써먹을 데는 정작 따로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나 보물을 함부로 다루는 법이지.'

아티팩트가 갖고 있는 진가의 백분의 일도 사용하지 못하는 바보들.

'뭐, 그런 놈들 덕분에 고인물들이 더욱 빛나는 법이지만.'

생각해 보라.

세상 모든 이들이 선구자적인 시야와 빠른 판단력을 갖고 있다면....

정보의 격차란 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찌 보면 그 사람들을 욕할 게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이번 레이드에선 여러가지로 운도 따라줬군.'

만약 테레사가 아니었다면 베드로의 서약서를 해독해 더욱 귀찮은 방법으로 지팡이를 손에 넣었어야 했을 거다. 그 외에도 엘리스를 속이는데 더 치밀한 빌드업을 짜야 했을 테고.

허나, 그녀의 존재로 인해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진혁이 파편을 잘 챙겨 넣었다.

이제 이 유적에서 나가야 할 시간이다.

***

"이거 특종이니까 무조건 잡아."

"하루고 한 달이고 일년이고 간에 망부석처럼 기다리란 말이야! 야...! 야 이 새끼야. 위에서 허가 떨어졌으니까 닥치고 대기하라고!"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와 각종 길드의 관계자, 짐꾼들과 채굴꾼들까지.

그야말로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입구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곧 있으면, 유적 공략이 끝날 거다.

낡아빠진 검을 든 채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던 남자가 남긴 말.

이 난리는 모두 이 한 마디 때문에 일어났다.

"부장님. 그 남자가 했다던 말. 사실일까요?"

각성자 협회에서 온 정재현 대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태춘 부장이 담배 하나를 꼬나물었다.

"글쎄다. 그냥 믿기엔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긴 하지. 젠장, 직접 들었으면 몇 가지 물어나 봤을 텐데, 하필이면 그 남자랑 만났던 짐꾼들이 완전히 쫄아서 그대로 보내버린 게 크긴 크네."

공격대는 전력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들어갔다.

아니, 만약 전력을 갖췄다고 해도 최소 3주는 걸려야 하는 레이드다.

그걸 이 단기간 안에 끝낸다고?

그렇게 간단한 거였으면, 애초에 이 유적이 이토록 악명 높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마냥 미친놈의 헛소리라고 넘겨 버릴 수도 없었다.

유적 안에서 나왔다는 건. 입구를 지키던 가디언을 단신으로 쓰러뜨렸다는 뜻이었으니까.

믿기도 안 믿기도 힘든 상황.

"골치 아프군."

김 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우웅!

유적 입구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두의 앞에 황금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이 공략되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은 내일 하루 동안 '명예의 전당'에 오릅니다.]

"부, 부장님!"

"진짜...였나."

김 부장이 멍하니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선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공격대의 주축인 발해 길드와.

시온 길드의 공격대였다.

촤촤촤촤촤촤촤촤!

카메라 셔터가 미친 듯이 터졌다.

"나왔다!"

"오오오오!"

사람들은 영웅들의 모습을 담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1층 유적을 공략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단기간에 공략을 성공한 방법에 대해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번 레이드에서 최고 활약한 MVP는 누군지 말씀해 주세요!"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인터뷰를 따 내려면 단연 이번 레이드를 이끄는 공대장을 찾아야 한다.

그때.

"호, 혹시. 공대장이신 송천화 플레이어님 맞으시죠?"

남기자 한 명이 맨들맨들한 대머리 남자에게 물었다.

얼핏 봤을 땐 설마 했는데.

자세히 보니 틀림없었다.

이번 레이드의 공대장을 맡은 송천화다.

"...."

그러나 동공이 풀려 버린 송천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그의 표정에, 기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세상에나.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이랑 속눈썹까지 죄다 없어졌잖아?"

"대체... 안에서 뭔 일이 있던 거지?"

"역시 유적인가. 엄청나게 처절했던 모양이구만."

"머리털을 대가로 2차 각성이라도 한 것 같은데, 발해 길드는 좋겠어. 완전 대박 났네."

비록 소중한 걸 잃긴 했지만, 2차 각성으로 전직을 완료했다면 몇십 배는 남는 장사다.

물론, 뒷사정을 아는 사람들 입장에선 기자들이 뱀파이어들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결국, 보다 못한 테레사가 끼어들었다.

"유적을 공략한 건 송천화 씨가 아니에요."

"그, 그럼 테레사 플레이어님이...?"

"시온 길드 쪽에서 성공한 겁니까?"

시선이 테레사에게 집중됐다.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위가 적막에 잠겼다.

"아뇨."

테레사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가리켰다.

기괴한 문양의 가면을 쓴 진혁을.

"유적 공략은 모두 이분 혼자서 한 거예요. 저희는... 그저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에 불과했습니다."

***

초대형 신인의 등장.

그 사실에, [시련의 탑] 커뮤니티를 비롯해 전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면을 쓴 플레이어. 그는 누구인가?]

[단신으로 유적 공략! 터무니없는 괴물의 등장!]

[세계 정상급 길드들.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조사단 파견 결정.]

[3시간 뒤, 명예의 전당에 그 활약상 대공개.]

그야말로 모든 관심이 쏠렸다.

특히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던 3층 보스몬스터의 공략의 시기와 맞물렸기에,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명목으로 이 사건을 더더욱 밀어줬다.

유럽의 정상급 랭커 테레사가 인정한 새로운 영웅.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 유적의 끝을 본 플레이어... 라고.

"거참, 온갖 수식어를 죄다 갖다 붙여놨네."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반응이 뜨거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상상 그 이상이다.

그나마 귀찮은 일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도록 가면을 쓴 게. 신의 한 수라면 한 수랄까?

'이제 곧 S급을 받을 테니. 그건 그거대로 활동하면 되겠지.'

100인의 플레이어.

랭킹 1위와 2위가 지금 정해졌다.

남은 건 그 사이를 적절하게 조율하면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을 설계하는 것뿐이다.

테레사도 함구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단 이 문제는 이 정도면 됐고.

다음은.

'꽁해 있는 진조와 대화를 좀 해 봐야겠군.'

유적에선 주머니 속에 쑤셔 넣는 걸로 해결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방치플을 시전 하긴 힘들다.

'다루긴 힘들어도 이 녀석만큼 쓸모 있는 카드도 없을 테니까.'

탑의 50층까지 가는 험난한 여정.

그 길을 쉽게 갈지, 어렵게 갈지 결정하는 첫 번째 선택지가 바로 이것이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히, 나를 어두컴컴하고 냄새 나는 주머니 속에 종일 가두다니! 인간. 너 내가 누군지는 아는...!]

"이보세요, 진조 아가씨 아니, 고조고조고조 할머니."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나 보네.

아직도 자신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뱀파이어인 줄 아나?

진혁이 반지를 움켜쥔 채 팔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우웅!

시계방향으로 빠르게 도는 어깨.

[꺄아아악! 멈춰. 어지러우니까 멈추라고!]

엘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진혁이 원운동을 멈췄다.

"어때, 정신이 좀 드세요?"

[너 같으면 정신이 들 것 같아? 똑똑히 기억해! 뱀파이어는 절대 원한을 잊지 않는다는 걸!]

아직도 먼 듯싶다.

좋아.

그래도 진조라고 뼈대가 있네.

너무 쉽게 굴복하는 것도 재미없지.

원래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섞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변했다.

아주 철저하게 채찍으로 조련시켜 주마.

"이변 역은, 구로역, 구토역입니다. 강한 어지럼증이 동반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은 주의해 주십시오."

진혁이 낭랑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을 자청했다.

[그... 그만 둬. 진짜로, 토할 것 같으니까 하지 말라고!]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다시 한번 헬조선식 다람쥐통이 개장되었다.

32화 검은 까마귀 길드 (1)

약 3시간에 걸친, 길고 긴 고문이 끝났다.

결국.

[...딸꾹. 끅.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엘리스가 가늘게 흐느꼈다.

높았던 콧대가 꺾여 버리고만 것이다.

가속도를 붙인 720도 회전에 엇박자 역회전까지 섞어 줬으니....

반지 속은 우주 비행사들의 중력 훈련에 버금가는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흠.

'내가 조금 심하긴 심했나?'

명색이 한 가문을 이끌었던 가주였는데, 너무 영혼까지 탈탈 털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연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주고 나발이고 간에.

지금은 반지 속에 갇힌 한 마리의 모기일 뿐이었으니까.

"그만 울고 나와."

진혁이 브라함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우우웅!

갇혀 있던 엘리스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깜짝 놀란 엘리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난데없이 자유를 주니 그럴 수밖에.

"드디어, 드디어... 복수할 차례가!"

그동안의 수모를 갚아 줄 시간이다.

적어도 당한 것의 1000배 정도는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응?"

...뭔가 시야가 낮다?

아니, 낮아도 너무 낮다.

고개를 완전히 치켜들어야 겨우 상대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왜 이런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린 엘리스가 자신의 몸을 훑었다.

그제야 비로소 시야가 바뀐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늘씬했던 키는 간데없고 30cm까지 줄어 버린 신장.

심지어 강력했던 마력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빨간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봉인이 유지된 상태에서 신체의 일부만 실체화시킨 거지."

"일부만...?"

"그래. 극히 일부만."

정확히 말하면 엘리스의 미니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본신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제약을 걸었어도 평범한 뱀파이어보단 강하긴 했으나.

자신을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까불었다간 박살이 난다는 뜻이다.

"그럴 수가...."

엘리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근엄했던 첫 인상을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린 모습이었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슬슬... 당근을 줄 타이밍이군.'

채찍은 실컷 썼으니 말라비틀어진 당근이라도 그 무엇보다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진혁이 엘리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울지 말고 들어 봐."

그리고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

"내가 유적에서 했던 말, 그거 되는 대로 내뱉은 거 아니야."

유적에서 진혁은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엘리스와 그녀를 따르는 혈족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자유를 원하긴 했지만, 이런 식의 자유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알아. 누가 이것 보고 자유래?"

진혁이 답답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단순히 육체적인 자유 말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 그걸 되찾아 줄게."

"그게... 무슨 뜻이지?"

엘리스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이미 무얼 말하는지 짐작했지만, 확인을 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진혁은.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나를 도와준다면.... 너를 배신한 놈들을 제거하고, 잃어버린 아타락시아 가문의 가주 자리를 되찾게 해 주겠다."

***

[명예의 전당에 새로운 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시련의 탑] 커뮤니티 최상단에 10분짜리 동영상 하나가 업로드 됐다.

험난했던 유적 레이드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짧은 영상이다.

그나마도 전투신만 짜깁기해 만든 하이라이트였고.

하지만, 이를 본 시청자들은 시간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줄 알았던 레이드.

그러나 모든 예상을 뒤엎어 버린, 가면을 쓴 플레이어의 등장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모찌모찌: 살다 살다 결말을 알고 나서 보는 건데도 손에 땀을 쥐는 건 처음이네.

-흙당라떼: ㅇㅈ. 혼자서 뱀파이어 앞에 섰을 때, 내가 다 쫄리더라.

마법과 물리력을 모두 다룰 줄 아는 밤의 귀족들이 벌레처럼 짓밟혔다.

현실감 따위는 결여된 장면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김빠진 사이다: 미쳐 날뛰는 게. 강아지 죽고 자동차 도둑맞은 존윅 성님 보는 줄 알았음.

-토끼공듀: 그건 죽을 짓 하긴 했지.

-아이박슨: 닷씨는 은퇴한 킬러의 강아지를 죽이지 말라구.

-코리안 조커: 근데 진짜 움직임이나 연계가 고인 수준이 아니긴 하네.

-BBQ 뱀파이어 순한맛: ㅇㅇ. 어느 게 상극인지도 모조리 꾀고 있고.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완전히 만능캐구만.

쏟아지는 찬사.

감탄과 경탄 외엔 사실 딱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로 영상 속 플레이어는 압도적으로 뱀파이어들을 찍어 눌러버렸다.

그때였다.

-고인물 감별소: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 사람, 맹그로브랑 10강짜리 무기로 명예의 전당 올랐던 사람이잖아!

-흙당라떼: 3층 공략에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유적 간 거였어?

-여담충: 여담인데 송천화 머머리 만든 것도 저 사람이라고 함.

-흙당라떼: 엌ㅋㅋㅋㅋ 대머리가 세계 최강인 거 학계 정설 아니었음?

-여담충: 이 세계에선 그냥 못 먹는 타코야키임.ㅋㅋㅋ

-BBQ 뱀파이어 순한 맛: 와 암스테르담의 성녀가 인정할 정도면 다들 머리 박고 인정해야 할 듯.

-김빠진 사이다: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추가요!

***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영상에 뺏겨 있는 사이.

당사자인 진혁은 고층 빌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검은 까마귀 길드가 매입한 성북구의 본거지였다.

"길드들이 돈방석에 앉아 있다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 모양이네."

한강이 보이는 뷰에 35층짜리 빌딩이면, 대체 가격이 얼마냐 가격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억 단위로 호가가 널뛰기를 할 것 같은데?

가면 너머로 보이는 빌딩숲은 진혁이 살았던 원룸 촌과는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왜일까?

기가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자본력에도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건물의 주인은 이제 곧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건수! 그놈이 시킨 겁니다!

유적에서 박하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내부자가 실토했으니 다른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날... 죽이려 했다 이거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다.

대형 길드끼리 독과점을 하든, 비리를 저지르든.

하지만, 딱 하나. 나를 건드리는 건 예외다.

[냉혹한 심장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성이 메마릅니다.]

아마, 성격이 더욱 차가워진 이유는 특전으로 주어진 이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혁이 다리에 마력을 실었다.

그리고 냅다 유리문을 걷어차 버렸다.

콰콰콰콰!

굉음과 함께 5cm가 넘는 강화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뭐야? 유리가 왜?"

"덤프트럭이라도 돌진한 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내부.

진혁이 천천히 단검을 꺼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할게. 신건수 당장 데려와서 무릎 꿇려. 아니면 오늘 여기서 줄초상 치를 거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뭐라고 씨부린 거냐? 이놈?"

"여기가 어느 길드의 소유인지는 알고 싸움을 건 거냐?"

물론, 알고서 왔지.

"여기, 숯불 까마귀 고기 파는 곳 아니야?"

사람 뒤통수나 치려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3자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회사.

덕분에 단단히 화가 난 손님이 먼 길을 나섰다.

대표 면상 좀 보려고.

"진짜 제대로 미치긴 미쳤구나."

"어이. 경호팀 애들 싹 다 불러. 오늘 푸닥거리 한번 제대로 해 보게."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손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먼저 불법 침입을 했으니....

팔다리 몇 개 부러뜨려 놔도 정당방위다.

캉! 카앙!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쇠파이프를 쥔 채 진혁을 둘러쌌다.

대부분은 일반인이었지만, 마력을 다룰 줄 아는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었다.

"하...! 이 자식 봐라? 영상 속 고인물 콘셉트 그대로 따라했네?"

가장 앞에 있던 깍두기 머리의 남자가 진혁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기가 막힌다는 한숨은 덤이다.

"마블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애들 다 망쳐 놨어. 지가 스파이더맨인 줄 알고 벽 타다가 응급실 간 놈이 어디 한둘이야?"

"다 필요 없고, 일단 좀 맞자. 어차피 유리창값 물어낼 돈도 없지? 이거 비싼 거니까 만 원당 한 대씩 맞아."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쇠파이프가 정확히 진혁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카가각!

적중이다.

하지만, 들려온 소리는 뼈를 치는 둔탁한 음이 아니었다.

쇠가 잘리면서 나오는, 고막을 긁는 파열음.

동시에 반으로 잘린 쇠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분명, 만 원당 한 대라고 했지?

"이 단검, 돈으로는 못 사는 건데. 더러운 쇳가루가 묻었네?"

특별히 선심 써 준다.

"나는 10만 원당 한 대만 때려 줄게."

생긋 웃은 진혁이 주먹을 휘둘렀다.

"쿠어억!"

주먹이 안면을 파고들자, 콧대가 완전히 주저앉으며 붉은 피가 뿜어졌다.

퍽! 퍼어억!

이어지는 공격에 검은 양복 사내의 몸이 활어처럼 튀어 올랐다.

"30만 원. 40만 원. 이건 아팠을 테니, 100만 원으로 쳐 줄게. 합이 170이야."

주먹 4번 만에 남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의 자비도 없는 무자비한 구타였다.

"광혁이가 펀치 몇 방에 뻗었다고?"

"맷집이라면 어디 가서 밀리는 놈이 아닌데...."

그제야 검은 양복 사내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래서 말했잖아. 줄초상 치르기 싫으면 신건수 데려오라고."

"그건 곤란하군. 길드장님이 너 같은 양아치 놈들 일일이 상대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시거든."

이번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마력을 다루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 녀석이 경호팀을 이끄는 놈인가?

진혁이 남자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흠... 한 대여섯 대는 견디겠네."

"뭐?"

"다른 놈보단 조금 튼튼하니까 한두 대 맞고 기절하진 않을 것 같다고."

근육과 마력의 상태를 보고 내린 판단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중견 길드의 경호팀장을 맡으며, 자신이 누군가를 무시하면 했지.

무시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딜 가도 대접받는 포지션.

때문에 이런 굴욕은 난생처음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스릉!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일본도가 뽑혔다.

1.7m가 족히 넘는 칼이 예기를 뿌렸다.

호오.

이건 또 의외네.

"'사무라이'에서 파견 나온 놈이었나?"

진혁이 이죽거렸다.

세계 7대 길드.

그중에서 하나인 일본의 '사무라이'.

저 칼은 녀석들이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알고 있나?"

"들어는 봤지."

"그럼, 네놈이 얼마나 멍청한 도발을 했는지도 알겠구나."

"글쎄.... 공격대에 소속되지 못하고 타국으로 파견이나 다니는 머저리도 그쪽 길드의 소속으로 쳐 줘야 하나?"

실력이 없으니까 임대로 팔려 다니는 거 아니야?

억울하면 메인 공격대에 들어가든가.

"우와아아악!"

결국, 남자가 폭발했다.

빠른 발로 단숨에 좁혀 온 거리.

칼이 진혁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카아아앙!

하지만, 검은 살을 가르지 못했다.

이마에서 약 1cm 떨어진 지점에서 우뚝 멈춘 칼.

전력을 다해 힘을 주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런 장난감 같은 단검으로....

아니, 그것보다 한 손으로 막았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탱커 쪽이었나?

아니면 설마.

여러 가정으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듯이 혼란스러웠다.

바로 그때.

"어금니 꽉 깨물어라. 혀 다친다."

진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33화 검은 까마귀 길드 (2)

빌딩 최상층 펜트하우스.

개인 집무실에 있던 신건수는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혀, 형님! 경호팀 전멸했습니다."

"외부하고 통신도... 안 됩니다. 뭔가 장난질을 한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 모두 가동 중지. 놈이 계단 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빨라요. 벌써 20층 넘었습니다!"

좋은 소식 따위는 없다.

하나같이 최악을 예고해 주는 짜증나는 패전보뿐이다.

콰앙!

신건수가 책상을 내려쳤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난데없이 침입자라니.

길드의 특성상 적이 많긴 했지만, 이처럼 앞뒤 안 재고 쳐들어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고작 혼자서....

"절대, 뜨내기 청부업자 따위가 아니야."

처음에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줄줄이 무너지는 보안을 보며, 신건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의 적보다 단 한 명의 적이 더욱 무섭다는 걸.

바로 그때였다.

"컥!"

"끄아아악!"

문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캉! 카아앙!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신건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가운데, 마침내.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네가 여기 길드 마스터냐?"

모습을 드러낸 이는 기괴한 과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

[결계 지속 시간: 0h : 15m : 33s]

외부와의 통신을 끊어 둘 수 있는 시간이 약 15분 정도 남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겁대가리 상실한 까마귀 한 마리 처리하기에 충분하고말고.'

진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멈춰. 멈추지 않으면 베겠다!"

스릉!

신건수가 검을 뽑았다.

여러 개의 마법이 걸린 무구였는지, 칼날에 형형색색의 스파크가 일어났다.

한 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이다.

과연, 꼴에 길드 마스터는 마스터라 이거군.

하지만 왜일까?

서슬 퍼런 경고에도 진혁은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너무 어설픈데....'

얼마 전에 천유성과 싸워서 그런지,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곤두서 있는 상태다.

때문에 신건수 정도는 대충 손과 발의 움직임만으로도 예상이 갔다.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어디를 노리려 할지.

전부.

진혁이 계속해서 다가오자, 참다못한 신건수가 고함을 질렀다.

"멈추라는 말, 못 들은 거냐!"

[신건수가 Lv3 '쾌검(快劍)'을 발동합니다!]

신건수의 검이 사라졌다.

부우우웅!

잔상을 남기며, 칼끝이 진혁을 향해 폭사되었다.

'설마... 이것도 페인트를 줬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마음이 아플 정도인데 이거.

진혁의 손이 검의 궤도에 맞춰서 움직였다.

이 속도면 피할 필요도 없다.

덥석.

춤추던 칼날이 우뚝 멈췄다.

"헉!?"

신건수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킬로 인해 가속까지 된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오싹하고.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과거 조폭으로부터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경험들이 말해 주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겨.

가망이 없다고 판단이 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 넌 뭐냐? 누구 사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야?"

신건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도망가 봐야 50평 남짓한 방 안일 뿐이다.

툭.

등에 유리창이 닿았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운 거겠지. 든든했던 부하들도 더는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으니까.

"맞혀 봐."

"뭐?"

"내가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맞혀 보라고."

혹시 아나? 정답을 맞히면 살려 줄지?

푹!

진혁이 단검을 책상 한가운데 꽂았다.

그리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자체 골든 벨을 시작했다.

"단군이나... 발해 쪽에서 보낸 거냐? 우리가 성장하는 걸 견제하려고?"

"땡."

오답이다.

보통은 다시 맞혀 보라고 웃으면서 말할 테지만.

진혁이 주관하는 골든 벨은 규칙이 살짝 다르다.

틀렸을 경우 당연히 그에 따른 페널티가 있어야지.

오, 마침 좋은 게 있다.

진혁이 책상 한쪽에 있는 바둑알 하나를 집었다.

'씨알이 아주 굵네.'

돈이 많은 놈답게 제대로 된 걸 구해 놨다.

"바, 바둑알은 왜...?"

신건수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왜긴.

따악!

"끄아아아아! 내... 내 이마, 내 이마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

신건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도깨비처럼 이마에 튀어나온 혹.

마력을 실은 바둑알이 두개골을 두드렸으니 꽤나 고통스러울 거다.

"다시, 맞혀 봐. 이번엔 생각 잘해서."

진혁이 두 번째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으으... 블랙 마켓. 그래, 거기다! 막대한 보수를 받고 우리를 치라고 의뢰받은 것 아니었나?"

"땡."

이번에도 틀렸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누가 보냈든 내가 그쪽에서 제시한 금액의 2배를 주겠어. 응? 뭐가 필요한데. 말만 하라고. 다 맞춰 줄 수 있으니까!"

또다시 바둑알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신건수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신건수는 절박한 목소리로 새로운 딜을 제시했다.

"야."

"...?"

"내가 누구인지 맞히라고 했지, 내가 너보고 돈 달라고 했어?"

이건 한국말을 외국에서 배워 왔나.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초등학교를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세종대왕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일본어로 욕하실 수준이다.

따아악!

또다시 바둑알이 이마를 두드렸다.

아까보다 마력을 더욱 실어 뒀기에, 신건수는 미친 듯이 온몸을 뒤틀어야 했다.

"우와아악! 이마가... 이마가아아!"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틀리면 여기 있는 바둑알 전부 원샷 하는 거다."

"허억. 허억. 허억...."

신건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진혁의 가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강...진혁."

세 음절로 된 하나의 단어.

"이제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오네. 맞아. 네가 박하진을 보내 죽이라고 한 당사자가 바로 나야."

진혁이 가면을 벗었다. 맨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빌어먹을. 그래서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건가? 고작 그것 때문에 건물 전체를 들쑤셔 놓은 거였냔 말이다."

"고작? 고작이라고?"

진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너도 박하진을 비롯한 우리 쪽 놈들을 죽였을 것 아니냐. 그러면 그걸로 된 거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아하, 그러니까. 적당한 선에서 그만둬야 했다?"

"너무 삐딱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냉정하게 봐라. 탑을 공략하느라 지금 여기엔 없지만, 길드에 소속된 랭커들만 해도 오십이 넘어."

"그래서?"

"만약, 날 죽인다고 해도 네 뒤를 노리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올 거라는 소리다. 복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겠지."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어느 한쪽이 용서하지 않는 한, 살육전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

피, 복수 이런 건 편안한 잠자리에 방해되는 키워드들이지.

진혁이 결심한 듯 생긋 웃었다.

"오케이. 너까지만 죽이고 거기서 끝내자. 깔끔하게."

"뭣?"

"내가 마지막으로 복수할 테니까, 너희 쪽에서 용서하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 컥!"

진혁이 바둑알을 한 움큼 손에 쥐고 신건수의 입에 쑤셔 넣었다.

"꺽! 커어억!"

신간수가 입안 가득 들어온 이물질에 기침을 내뱉었다.

피거품이 흘러 나왔지만, 진혁은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더욱 주었다.

단 하나도 뱉어내지 못하도록.

"네가 끊어라. 그 복수의 고리인지 나발인지. 꼭 내 쪽에서 끊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뭐? 복수는 복수를 불러?

그런 걸 걱정하는 놈이 암살자들은 왜 보낸 건데?

"개소리 들어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만약 뒤에 검은 까마귀 길드의 떨거지들이 덤빈다면 그 녀석들도 모조리 처리하면 그뿐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은 한 트럭으로 몰려와도 무섭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만 꺼져라."

진혁이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쿠에엑!"

주먹이 신건수의 안면 깊숙이 박혔다.

이빨과 바둑알이 뒤섞이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즉사군.'

진혁이 잠시 쓰러진 신건수를 내려다봤다.

안면이 완전히 함몰됐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제 다음은....

"야, 거기 죽은 척하고 있는 놈. 일어나 봐."

"...."

"셋만 셀게. 하나."

"옙! 깨어 있었습니다."

복도에 쓰러져 있던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잽싸게 대답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마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고.

신건수의 비서쯤 되려나?

"자기소개 시작. 쓸모 있다는 걸 보여 주면 너는 살려 줄게."

"이름 김희웅, 나이 26세. 검은 까마귀 길드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5개 국어를 할 줄 알며, 스탠포드에서 컴퓨터 공학과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뭐든지, 뭐든지 맡겨만 주십쇼!"

"오오, 좋아 좋아. 아주 똑부러지네."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경력, 스펙.

이 정도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보다시피 지금 여기 상황이 영 좋지 않아. 길드장도 죽었고, 부상자도 넘쳐나고 있지."

"예... 예. 그렇죠."

"그래서 너한테 이 길드를 맡기려고 해."

"예... 예. 그렇... 예에에?"

김희웅의 동공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거창하게 생각할 건 없어. 솔직히 중견 길드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것도 아깝고. 적당히 허우대만 유지할 생각이니까."

처음 이곳에 오기로 했을 때부터 생각해 뒀던 계획이다.

바지사장을 한 명 내세우고 그 뒤에서 길드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어 보자고.

그리고 김희웅이라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비서로서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테니까.

"하, 하지만 제가 길드 마스터를 한다고 해 봤자 따라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비전투계열, 그것도 비서 출신이 갑자기 꼭대기 자리에 앉으면 반발이 생길 수밖에.

"반대하는 놈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직접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김희웅의 얼굴빛이 조금 밝아졌다.

방금 보여 준 무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신건수를 저토록 쉽게 제압했다면, 길드의 랭커들이 몰려와도 결과가 달리지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진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귀찮은 일을 왜 도맡아서 하나?

바로 옆에, 대신 처리해 줄 든든한 조력자가 있는데?

"전부 들었지?"

진혁이 힐끗 손에 낀 반지를 바라봤다.

그러자.

[설마, 나에게 말한 것이냐?]

잠자코 있던 엘리스가 말문을 떼었다.

"여기 너밖에 더 있어?"

[아타락시아 가문을 이끌었던 가주(家主)이자 가장 고귀한 피가 흐르는 이 몸에게 하찮은 인간들의 뒤를 봐주는 보모 역할이나 하라고?]

하....

이게 또 엄근진한 말투를 쓰고 있네.

"아직 정신 못 차렸지? 풍차 돌리기 한 번 또 해 줄까? 응? 왜 되지도 않는 무게를 잡고 그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그거 어지럽단 말이야! 이 말미잘 같은 인간 놈아!]

풍차 돌리기란 말에 화들짝 놀란 엘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미잘이라….

욕설 한 번 저렴하다.

"겨우 그걸 욕이라고 한 거야?"

[뭐? 이… 이정도면 심한 모욕 아냐?]

심한 모욕 같은 소리하네.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들도 그것보단 더 맛깔나게 말하겠다.

적어도.

"미천하고 xxxx한 인간아. 감히 고귀한 이 몸을 반지에 가둬놓고 다람쥐통 돌릴 듯 다뤘다간 xx해서 xxxx한 다음 xxxx로 xxxxxxx해주겠다. xxxx에 매달아놓고 3만년동안 xxxx로 삼아주마!"

이 정도는 돼야 협박과 욕설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엘리스가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고귀하신 귀족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나 보다. 하긴, 언제나 오냐오냐 하는 말만 듣고 살았을 텐데, 현대 한국인들의 언어를 필터링 없이 경험했으니 멘탈이 무너질 수밖에.

어쨌든 이제야 좀 고분고분해졌다.

"이 녀석이랑 함께, 말 안 듣는 놈들 있으면 전부 처리해."

[알았어. 근데 너는 뭐 하려고?]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유적 공략을 끝낸 이상, 더는 1레벨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진혁의 입 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장할 시간이다.

34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1)

[A급 이상 플레이어 분들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금 당장 최상층 펜트하우스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우우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후 사정이 생략된 짤막한 소집 명령이 하달됐다.

"젠장, 한창 바쁜데 왜 긴급 소집이야?"

"말도 마라. 난 한창 레이드 중이었다고."

"카악 퉤! 아무리 까라면 까야 한다지만, 요즘 들어 더 심해지는 거 아녀?"

검은 까마귀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플레이어들은 툴툴대면서도 빌딩으로 모였다.

조용한 내부.

바닥에 남아 있는 작은 유리 조각들.

평소와는 달랐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왜 이래?"

"여기 우리 건물... 맞지?"

짙은 위화감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덜컹!

그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불길한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건수 형!"

"힐러... 당장 치료해! 당장!"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길드 마스터, 신건수였다.

"이미 늦었어. 숨이 끊어진 지 최소 몇 시간은...."

신건수의 상태를 살피던 힐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상을 치료하는 건 몰라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힐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길드장이 죽었다.

그렇다면.

긴급 소집 명령은 누가 내렸단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방 안에 있던 또 하나의 인물에게 향했다.

신건수의 비서인 김희웅이었다.

초조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쓰는 모습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김희웅!"

플레이어 한 명이 무기를 꺼냈다.

우우웅...!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2m가 넘는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리한 흉기가 김희웅의 목을 향해 뻗어졌다.

"토씨 하나 빠뜨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라! 지금 당장!"

"하하... 그,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김희웅이 곤란한 듯 옆을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탁자 아래를 향해서.

누가 또 있는 건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저벅.

탁자 아래에서 굉장히 앳돼 보이는 백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긴 은발과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묘한 분위기를 간직한 소녀였다.

"하아."

소녀가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각종 무기로부터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그 무사태평한 모습에 기가 막힌 걸까?

"어이가 없군. 이딴 꼬맹이 하나 믿고 일을 벌인 거였냐?"

창잡이가 혀를 찼다.

바로 그 순간.

빠직하고.

엘리스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꼬... 꼬맹이? 꼬맹이라고?"

쿠쿠쿠쿠쿠쿠!

붉은 마력이 범람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Lv?? '피의 권역'이 발동됩니다!]

방 안에 팽팽하게 깔려 있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신의 혈관이 모조리 얼어 버릴 것만 같은 냉기.

이중에는 1층 보스 레이드에도 참여한 적 있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아예 차원이 다르다.

"세상에나...."

"무, 무슨 마력이?"

"괴, 괴물이다."

덜덜덜!

플레이어들이 제자리에 굳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누구 하나 감히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우와아악! 차, 참으셔야 합니다. 그... 대표님이 가능하면 죽이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당황한 건 김희웅도 마찬가지였다.

길드의 운영을 위해서는 핵심 자원들이 필요할 터.

진혁은 랭커들을 가능한 한 보존하라고 당부해 두었다.

하지만.

"알 게 뭐야? 지금 저놈들이 나한테 한 말 못 들었어?"

엘리스의 이성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호소하듯.

거대한 마력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빌딩에 있던 창문들이 모조리 박살나 버렸다.

***

서초동에 있는 각성자 협회.

2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진혁은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았다.

오후 1시.

정확히 약속했던 시간이다.

스마트폰을 확인한 진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때.

"형!"

"오빠! 여기야. 여기!"

입구 옆에서 두 사람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태민과 유연화였다.

기간으로 따지면 다시 만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왜일까?

진혁은 두 사람이 진심으로 반가웠다.

"딱 맞춰서 왔네. 그동안 잘 지냈어?"

"저희야 잘 지냈죠. 2층에 있는 B급 미궁 하나도 공략 성공했습니다!"

이태민이 어깨를 한껏 치켜 올렸다.

"레벨도 꽤 올랐어. 진짜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사냥했거든."

유연화도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둘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달라지긴 했다.

단순히 전체적인 양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마력의 농도 또한 짙어졌다.

"나름 스펙터클하게 보냈나 보네."

"에이. 오빠만큼은 아니지."

"응?"

"모른 척하지 마. 어제 '명예의 전당'에 업로드된 영상. 그거 오빠잖아?"

유연화가 팔꿈치로 진혁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이태민도 한 마디 덧붙였다.

"형. 근데, 가면은 왜 쓴 거예요? 설마, 예전처럼 중2병 돋은 건... 아니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였어. 그보다... 그렇게 티 났어?"

가면 하나만으로 유추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중2병이랑 연관 지어서 정체를 꼭 집은 건 너무한 거 아니냐?

한때 그쪽 취향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슬프다.

"유적을 공략할 정도로 고인물은 오빠밖에 없으니까. 바로 눈치 챘어."

"사실, 뉴스 보는 순간 바로 형인 줄 알았어요."

"아…! 그런 거였어?"

시무룩해 하던 진혁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다행이다.

여러 의미로....

"그나저나 형 진짜로 [시련의 탑] 저희랑 비슷한 시기에 접은 거 맞아요?"

"영상 보니까 패턴을 외운 수준이 아니라 [시련의 탑] 제작자 뺨 때리는 수준이던데...."

두 사람이 의심과 경외심이 섞인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시련의 탑] 커뮤니티는 어제 올라온 동영상으로 인해 뜨겁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3층 보스 공략 실패와 난공불락으로 여긴 유적의 공략.

두 대사건이 맞물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가면을 쓴 플레이어에게 쏠렸다.

그의 정체가 누구인지.

과거, 탑의 몇 층까지 올라가 봤는지.

어느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취미는 물론, 심지어 오늘 입고 있는 팬티가 무슨 색인지조차 관심 대상이었다.

'반응이 격하긴 하네.'

진혁이 피식 웃었다.

대충 예상은 하긴 했으나, 이건 기대 이상이다.

'좋아.'

이 정도 조건이 갖춰졌으면 앞으로 행동하는 게 더욱 수월할 것이다.

가면을 쓴 자신과.

가면을 쓰지 않은 자신.

이렇게 두 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두 개다 모두 정상급을 찍어주지.'

세계 랭킹 1등과 2등.

얼핏보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일 테지만, 실상 그 둘은 동일 인물이다.

'그 두 개의 조건을 이용해 이득이란 이득은 모조리 취해주마.'

두근! 두근! 두근!

생각해 둔 수많은 계획들을 생각하자, 진혁은 조금씩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때.

"형? 대답 좀 해 줘요. 진짜로, 몇 층까지 가 본 거예요?"

"야.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솔직히 말해 봐. 오빠, 게임 운영진 중에 한 명이지?"

"누나, 그건 좀 너무 간 거 아니야?"

"아니긴. 그게 아니면 이렇게 고이다 못해 썩은 수준으로 움직이는 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밌겠지만....

"미안."

진혁이 생긋 웃었다.

동시에 스마트폰의 화면을 두 사람에게 보여 줬다.

[오후 1시 15분까지 2차 테스트 결과를 보고하러 와 주십시오.]

***

각성 테스트가 없는 날이어서 그런지, 협회 내부는 꽤나 한산했다.

안내데스크에 도착한 진혁은 신분증을 꺼냈다.

"2차 테스트 통과했다는 확인증을 수령하려 왔는데요."

"예, 잠시만요."

여직원이 진혁의 신분증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어...? 강진…혁 씨?"

토끼처럼 놀란 표정.

여직원은 신분증과 진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예?"

"잠시만요. 어디 가지 마시고 꼭 기다리셔야 해요."

할 말만 한 채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가는 여직원.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혁은 뭐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여직원과 함께 온 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이건 꽤나 의외로군.'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각성자 협회장, 한상진.

한국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총괄하는 인물을.

[Lv2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진실의 눈이 상대방의 상태창을 꿰뚫었다.

띠링!

——————————————————

이름: 한상진

성별: 남

나이: 45세

레벨: 15

힘 19 민첩 17 체력 15 마력 15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0

직업: 행정관(行政官)

고유 능력: 일괄지휘

스킬: Lv4 '관료제(官僚制)', Lv4 '굳건한 단결', Lv3 '중재', Lv3 '사상 검증'

——————————————————

[복사조건: 오류로 인해 복사조건이 업데이트 되지 않았습니다.]

진혁이 상태창과 복사 조건을 막 읽었을 때였다.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한상진이 악수를 청했다.

젠장.

왠지 이걸 맞잡으면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틀림없다.

한상진의 눈빛.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다.

'그렇다고 멀뚱멀뚱 서 있다간, 동방예의지국에 길이 남는 망나니가 될 테고.'

후우.

하는 수 없지.

그런데 손을 뻗으려던 진혁이 멈칫했다.

방금 한상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대화에서... 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잠깐,

잠깐만.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1차 테스트의 진짜 측정치를 아는 건 시험관 한 명뿐.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저 길바닥에 널려 있는 F랭크 중 하나다.

'최하위 등급의 플레이어를 위해서... 협회장이 직접 움직인다?'

말이 안 되잖아?

그렇다고 해서 시험관이 입을 열었을 가능성도 없다.

'염혼의 낙인'을 새긴 이상 진실을 말하는 즉시 잿더미가 되어 버릴 테니까.

...재밌네.

이번엔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대비를 해둔 놈들이라는 거잖아?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야."

"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한상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얼룩졌다.

난데없이 반말을 해 대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진혁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어설픈 연기는 그만두고 결계 풀어. 당장."

"결계라니 그게 무슨...."

"강진혁 플레이어님. 협회장님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말해 줘도 모른 척하시겠다?"

진혁의 입 꼬리가 더더욱 위로 올라갔다.

쉬운 길 말고 쪽팔린 길로 가겠다면야.

순식간에 단검을 꺼낸 진혁이 어깨를 크게 뒤로 젖혔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투척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단검이 천장에 박혔다.

정확히는 천장으로 '보이는 것'에 박혔다.

그 순간.

파츠츠츠!

공간이 일그러지며, 투명한 막에 잔잔한 물결이 일어났다.

35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2)

저릿저릿.

바늘로 찌를 듯한 살기에, 두 사람이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섰다.

"이것 참... 나름대로 공들여 만든 무대였는데 완전히 나가리가 됐군."

한상진의 외견을 하고 있던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투에서 허탈함이 배어 나왔다.

"그러게. 어디서 눈치를 챈 거지?"

짜증이 난 건 여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각성자 협회 빌딩 전체에 '차원 왜곡' 결계를 펼쳐 두고 인물 복제' 마법을 이용해 모습까지 재현했다.

게다가 개개인의 스탯과 고유 능력까지 파악해, 시스템 전체를 재구성해 두기까지 했다.

'투시'나 '마인드 리딩', 심지어 '눈'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문제 될 일이 없도록.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들통 났다.

너무나 허무하게.

설마, 진혁이 '염혼의 낙인'을 통해 담당자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까진 미처 계산하지 못 했던 탓이었다. 정체를 숨기더라도 최소한 협회장과 비밀 계약을 맺는 것까진 진행했을 거라 단정지은 거겠지.

그런 뒷계약도 없이 일부러 유리한 고지를 포기한 채 낮은 랭크를 고집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거기에 진혁이 보유한 '눈'이 하필이면 규격 외로 상정된 눈이라는 걸 간과한 것도 한 몫 했다.

녀석들이 만든 결계는 복사조건이란 시스템 구성까지 재현하는덴 실패했고 때문에 진혁은 시작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3성급 '차원 왜곡' 결계가 약화됩니다.]

[남은 시간: 0h : 2m : 59s]

단검에 의해 훼손된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심이 되는 부분이 파괴된 탓이다.

'3성급 차원 왜곡 결계라....'

저층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사용할 만한 걸 만들다니.

확실히 안타까워할 만하다.

이 정도 무대를 짜는 데 들인 코인과 마력만 해도 중소 길드의 한 달 예산을 훌쩍 뛰어넘을 테니까.

진혁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돈지랄만 잔뜩 한 장난질은 여기까지인 것 같으니, 이제 말해 봐. 왜 나한테 접근했는지."

"흐음. 접근한 목적보다 먼저 우리 정체를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닐까?"

"그걸 왜 물어봐? 이미 누군지 알고 있는데?"

진혁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호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허세야. 떠보는 거겠지."

허세긴.

이미 주어진 정보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예측한 건 어렵지 않았다.

부유하고 정보력이 뛰어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

아직 수면 아래 있는 인재들을 영입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조직은 단 한 곳밖에 없다.

"너희 마인들이잖아. 마력 수준을 보아하니 이제 막 직업 퀘스트 끝마친."

"...!"

"...!"

지진이 일어나는 동공.

남자와 여자는 순간, 표정을 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하... 진짜로 보통내기가 아니군. 이건 좀 충격인데?"

"간부들이 눈독 들인 이유도 이해가 되네. 고작 한 명 섭외하는 데 왜 이렇게 회(會)의 자원을 쏟아 붓나 했더니, 이래서 그랬구나."

지금까지 다양한 유망주들에게 접촉했었다.

과거 [시련의 탑]에서 이름을 날린 랭커도 있었고.

현실이 된 지금에 와서야 두각을 나타내는 루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그 누구도 첫 만남에 이쪽의 정체를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네놈들 감탄이나 들어줄 시간 없으니까 빨리 본론부터 말해."

이 의미 없는 대화에 어울려 주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베일에 싸여 있는 놈들이 어떤 흥미로운 제안을 할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진혁이 힐끗 천장을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약 2분.

결계를 파훼하고 난 후, 단검이 떨어지는 바로 그때가 이 대화가 끝나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살기등등하게 노려보지 말라고. 보아하니 마인들에 대해 안 좋은 선입견이 있나 본데, 그거 헛소문이 많이 섞여 있는 거야."

"흐음. '코인 농장'을 처음 만든 놈들이 이제 와서 이미지 세탁을 하시겠다?"

"실리주의라고 해 두지. 물론, 당신이 사람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개소리를 믿는 부류라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테지만."

"재밌네. 계속해 봐."

"첫 번째로, 우리와 함께한다면 계약금 대신 이걸 주겠다."

남자가 품속에서 주홍빛이 도는 보석을 꺼냈다.

저건 설마...?

진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고 있는 아이템이다.

'황혼의 이슬'.

반인반조이자 영수 중 하나인 '퀘이샤'가 갖고 있는 보물이다.

치유, 재생, 강화, 해독 등.

탑의 10층 아래에선 거의 만능기(萬能機)라 해도 좋을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얼어붙은 눈물'을 해동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그냥 주겠다고?"

당장 경매장에 올려놔도 한 시간 안에 성유물과 교환하자는 연락이 올 텐데?

"나도 개인적으론 아깝지만, 위 분들이 쓸 땐 쓰자는 주의라서 말이지. 아마, 정식으로 입사한다면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혜택이 주어질 거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곧바로 진혁을 향해 황혼의 이슬을 던졌다.

툭!

손아귀에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

진혁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보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야.

확실히 통이 크긴 하네.

이렇게 조건이 화끈하니 두 번째도 기대가 된다.

"그럼, 다음 조건은 뭐지?"

"두 번째로, 당신이 원하는 인물 하나를 처리해 주지."

"누구든 상관없이?"

"그래. 대상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감 넘치는 말투다.

하긴, 마인이라는 이유로 공식 랭킹에 반영되진 않았지만 이 녀석들의 실력은 상위 랭커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없애 준다고 했으면 정말로 처리해 주겠지.'

사실상 성공을 보증하는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어라?

잠깐만....

진혁의 머리에 한 줄기 번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너희들이 대상을 죽이는 데 실패할 경우엔 어떻게 되는 거냐?"

"뭐?"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그럴 일은 없다."

"맞아. 암살 조는 우리보다 훨씬 강한 플레이어들로 구성되어 있거든."

두 사람이 확신하듯 못 박았다.

분명, 니들 입으로 말했다.

무조건 성공하겠다고.

"그렇다면 실패할 경우 이 계약은 없던 걸로 해도 되겠지?"

"그, 그건...!"

"왜? 이제 와서 자신이 없어졌어? 두 번째 조건 자체가 마인 협회가 갖고 있는 절대적인 힘을 보여 주겠다는 건데, 실패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 아니야?"

진혁이 이죽이며 도발했다.

능글맞게 웃어 주는 건 덤이다.

남자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좋다. 하지만, 의뢰에 성공할 경우 그 즉시 우리와 함께 간부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진과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 주소록을 클릭한 뒤, 두 사람에게 보여 줬다.

"이 녀석이 타겟이야."

"못 보던 놈이군."

"나도 처음 봐. 정말로 까다로운 놈 맞아?"

"그냥저냥... 밖에서 활동을 잘 안 하는 놈이라 낯설긴 할 거야."

아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다.

기껏해야 나와 유연화, 이태민... 그 외에 손에 꼽을 정도랄까?

"확인했다."

"다음엔 동료로 만나게 되겠네. 그때까지 잘 있어, 잘생긴 오빠."

때마침.

툭!

결계에 박혀 있던 단검이 떨어졌다.

시간이 전부 지난 것이다.

단검을 회수한 진혁이 주위를 훑었다.

'벌써 사라졌군.'

이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절되어 있던 본래 각성자 협회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야 2차 테스트 수료증을 받을 수 있겠다.

아! 그전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진혁이 재빨리 상태창을 띄웠다.

[귓속말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야, 잠깐 시간 되냐?

말을 걸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뭐냐?

딱딱하고 짜증 섞인 음성이 되돌아왔다.

귓속말을 건 대상은 다름 아닌 천유성이었다.

하여간 차가운 녀석 같으니라고.

-너,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냐?

-아니, 대답해. 그랬어, 안 그랬어?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럼, 내가 비결을 알려 줄게. 무조건 강한 놈들과 최대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아야 해.

-뭐?

-싸우고 또 싸우고 또 싸워. 죽을 정도로 위험한 사선을 넘어야 강해질 수 있어. 이게 나만 아는 비밀 수련법인데 특별히 너 생각해서 알려 주는 거야.

-이게 미쳤나? 뭐 잘못 처먹었어?

-사랑한다, 미래의 검성. 형은 널 믿고 있어. 혹시라도 심하게 다쳐도 나한테 복수하러 오면 안 된다.

-야 이...!

진혁이 일방적 귓속말을 차단했다.

후우.

나름대로 경고를 해 줬으니 뒤는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그나저나.

'검성과 마인들이 싸우면 결과가 어떻게 되려나?'

솔직히 말해 팝콘 각이긴 한데....

지켜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

1시간 정도 흘렀을까?

2차 수료증을 챙긴 진혁이 협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태민과 유연화 옆에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검은 까마귀 길드의 일을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던....

김희웅과 엘리스였다.

"오빠. 이 사람들이 오빠랑 아는 사이라고...."

"형. 저 사람, 검은 까마귀 길드의 비서실장 아니에요?"

이태민과 유연화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 검은 까마귀 길드는 안 좋은 기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전후 사정을 모르니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괜찮아. 아는 사람들 맞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서로의 안면을 트는 기회로 삼아야겠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말할 것도 있고.

진혁이 간단하게 서로를 소개했다.

물론, 정보의 일부는 각색했다.

예를 들어 엘리스는 북유럽에서 넘어온 플레이어라는 식으로 정체를 숨겼다.

'진조라는 걸 밝혔다간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까.'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이태민과 유연화도 시간이 지날수록 순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쪽은 김희웅 이 친구가 맡아서 할 거야. 연화나 태민이도 시간 날 때 종종 연락하고 지내. 던전 섭외부터 각종 편의까지 봐 줄 수 있으니까."

"예.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강 대표님 지인분들이라면,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김희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건수 밑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고 혹사당했다더니.

그 굴레를 벗어난 지금은 표정부터 밝아 보였다.

"와... 그, 그럼 오빠가 검은 까마귀 길드 마스터인 거야?"

"명목상으론 이 친구고, 실제로 운영하는 건 나지."

"형 진짜 며칠 만에 유적도 공략하고 길드도 먹고. 사람 맞아요? 아니 어떻게...."

이태민은 할 말을 잃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진혁이 고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상상했던 한계를 계속해서 경신하고 있지 않은가?

미쳤다.

진짜로 미쳤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동시에 그 괴물 같은 고인물과 알고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형과 만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야.'

세계에서 대형 길드와 랭커들이 자기 잘났다고 까불고 있지만.

진혁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스티븐 호킹 앞에서 미적분을 배웠다며 으스대는 꼴이랄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믿고 따른다.'

이미 이태민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김희웅이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진혁의 시선이 엘리스에게 향했다.

"그리고 넌... 하아."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됐다. 말을 말자."

"왜! 뭐! 나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어. 근데 저쪽에서 성질을 긁잖아!"

"꼬맹이라고 한 것 가지고 빌딩을 날려먹는 게 정상적이냐?"

김희웅에게 자초지종을 들었을 땐 내 귀를 의심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젠장. 한국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성격이었으면 한강의 기적이고 나발이고 한반도는 1년 안에 석기시대로 돌아갈 거다.

"뭣보다 몇천 년을 살아 왔으면서 그런 도발 하나 못 넘겨?"

"그, 그거야... 지금까지 나한테 도발하는 놈이 없어서 그랬지."

"...기가 막히는구나. 진짜로."

제멋대로인 여왕님이나, 오구오구 해 주는 밑의 혈족들이나.

뱀파이어란 놈들이 괜히 자존심 세고 왕자병, 공주병에 걸리는 게 아니다.

혀를 찬 진혁은 움직일 준비를 했다.

"바로 사냥하러 가야 하니까, 반지 안으로 들어오기나 해."

"응? 사냥은 너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아?"

"몰이사냥이라 서포터가 필요하거든. 아, 그리고 걱정하지 마. 이번만 도와주면 당분간 푹 쉬게 해 줄 테니까."

이번에야 효율성을 위해서 엘리스가 필요하지만, 이후부턴 혼자서도 충분했다.

"그렇다면야 뭐. 근데, 몰이사냥을 할 만한 곳이 남아 있어? 3층까지는 전부 길드 놈들이 독식하고 있다고 했었잖아."

시련의 탑은 50층까지라고,

그러니 4층이 개방되지 않는 한 남들이 모르는 사냥터 따윈 없을 거라고.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시련의 탑은 50층만 있는 게 아니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 고인물이 왜 고인물인지 제대로 보여 줄게."

36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3)

시련의 탑 1층에 있는 '달의 호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마치 수면 아래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인류의 존망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여가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지만, 그 어느 곳보다 고독한 명소.

그곳이 바로 달의 호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숫가에 누군가 다가왔다.

진혁이었다.

"여기도 참... 오랜만에 오네."

레벨이 낮았을 땐, 자주 왔었는데.

탑의 중반부를 넘어간 뒤부턴 거의 찾지 않았다.

다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운치는 제법 있어 보이는데, 여기서 무슨 수로 사냥을 한다는 거야?]

반지에서 엘리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있어 봐."

피식 웃은 진혁이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밤중에 산책이나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찾아야 할 게 있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동공 또한 빠르게 움직였다.

분명, 이 근처에....

'역시...!'

잉어를 닮은 조각상을 발견한 진혁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호숫가에 있는 12개의 조각상 중 하나일 뿐이지만, 사실 이 조각상은 단순히 호수를 장식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혁이 손을 뻗어 조각품을 더듬었다.

만져진다.

가장자리에 오목하게 파인 홈이!

[호오. 저 조각상에 비밀 버튼 같은 게 있는 거야?]

"그렇게 쉬운 거면 진즉에 모두가 눈치 챘겠지."

세계의 고인물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고작 조각상에 있는 버튼 하나 찾지 못했을 거라고?

실제로 이 홈을 발견한 플레이어의 수는 세 자리가 가볍게 넘었다.

커뮤니티에도 가끔 언급이 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소문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홈에 맞는 열쇠를 찾는 데 성공한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건 열쇠로 여는 게 아니거든.'

달의 호수.

그 이름에 따라, 이 조각상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조금 특별했다.

진혁이 손바닥으로 열쇠 구멍을 가렸다.

달빛이 차단됐다.

스윽.

손바닥을 치우자 달빛이 다시 홈을 비췄다.

'좋아.'

진혁은 같은 방식으로 손바닥을 이용해 빛이 들어오는 양과 각도를 조절했다.

침착하게....

둘 중에 하나라도 어긋났다간, 이 까다로운 녀석을 만족시킬 수 없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달빛이 독특한 리듬에 따라 홈을 두드렸다.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쿠쿠!

호수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이 좌우로 나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디, 가 볼까.'

진혁은 호수 바닥으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저벅.

한 번도 인간의 출입을 허락한 적 없는 비밀의 층.

그렇기에,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한 장소.

마침내.

[시련의 탑 지하 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시련의 탑의 히든 플레이스 중 하나인 '지하 산란장'.

드디어 미친 듯이 성장할 수 있는, 맞춤형 사냥터에 도달했다.

"나와도 돼."

바닥에 도달한 진혁이 브라함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우우우웅!

긴 은발을 지닌 뱀파이어가 현현했다.

정확히는 30cm로 줄어든 버전이지만.

엘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상에나. 탑 아래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어지간히 놀라긴 한 모양이다.

붉은 동공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게 우스울 지경이었으니까.

"어때?"

"응?"

"점점 더, 나랑 계약하기로 한 게 잘했다는 생각 안 들어?"

"뭐. 그때 했던 말이 완전히 허언은 아닌 것 같네. 아주 조금... 진짜 아주 조금은 믿을 만 한 것 같아."

엘리스가 진혁의 시선을 피한 채 대답했다.

자존심 하고는.

속으로 혀를 차던 진혁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탑에 있는 놈들은 플레이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야 게임이 현실화된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과연, 그들도 자신들이 게임 속 데이터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시련의 탑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사실, 지구가 아닌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가능성 있는 경우의 수는 많은데, 정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네이버나 구글에 검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허나 수천 년을 영위해 온 진조, 엘리스라면....

어쩌면 그 답을 알려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엘리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진혁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런데.

"𐠉𐠉𐠉... 𐠉𐠉𐠉𐠉...!"

입에서 나온 말은 한국어가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언어도 아니었다.

귀를 긁는 불협화음과 불쾌한 성조(聲調)의 조합뿐.

"뭐, 뭐라는 거야? 무섭게."

엘리스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과연.

이런 식인 건가.

플레이어와 탑 안에 존재하던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화감을 어떤 식으로 해소할 생각인가 했더니.

아예, 정보의 교류를 원천 차단해 버렸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아니야, 아무것도. 쓸데없는 헛소리였어."

적어도 이 주제로 탑 내부에 있는 존재들과 대화할 수 없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문자나 다른 방법도 막아놨겠지.'

진혁이 품에서 '얼어붙은 눈물'과 '황혼의 이슬'을 꺼냈다.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력의 절대량을 올려 둘 필요가 있었다.

['황혼의 이슬'이 '얼어붙은 눈물'과 접촉합니다.]

[두 번째 해동이 시작됩니다.]

따스한 빛과 함께.

츠츠츠츠....

진혁의 몸으로 새로운 마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력이 +18만큼 상승합니다.]

...좋아.

이걸로 두 번째 해동까지 성공했다.

차이점은 즉각 나타났다.

"후우!"

안정된 호흡과 부드럽게 흐르는 마력.

확실히, 엘리스를 유지하는 게 훨씬 더 편해졌다.

하긴, 편해질 수밖에 없겠지.

레벨로 치면 6레벨이 올라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서 빨리 시험해 보고 싶네.'

과연 증가된 마력으로 얼마만큼의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을지, 그것이 미친 듯이 궁금했다.

***

시련의 탑 지하 1층을 '산란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

바로 심연 속에서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기어 나오기 때문이다.

"키에에에!"

"크아아아!"

검은 외피로 몸을 감싼 곤충들이 비명을 질렀다.

투두두두두!

호랑이만 한 크기의 갑충류(甲蟲類) 무리들.

수십 개의 다리가 움직이며,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수도 수인데다, 레벨도 각 20이 넘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란 뜻이다.

투쾅!

콰앙!

거리가 가까워지자, 곤충들이 일제히 도약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진혁에게 닿기 바로 직전.

[고유 능력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호수 위에서 한 줄기 빛이 낙하했다.

쿠쿠쿠쿠쿠쿠!

별자리의 비호를 불러올 수 있는 힘.

바로 테레사의 고유 능력이었다.

[몬스터들의 마법 방어력이 30%만큼 약화됩니다.]

[몬스터들의 물리 방어력이 30%만큼 약화됩니다.]

"키에에에에!"

"케엑! 케에에엑!"

곤충들이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 왔기에, 이토록 밝은 빛은 견딜 수 없었다.

놈들 입장에선 두 눈을 불로 지지는 듯한 느낌일 거다.

그리고 이토록 무방비한 적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 줄 진혁이 아니었다.

"역시 벌레는 태워야 제 맛이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한 마리도 빠짐없이 숯덩이로 만드는 게 어울렸다.

화르륵!

왼손에 발현된 '불의 원소'가 점점 더 크기를 더했다.

야구공 크기에서 농구공 크기로....

농구공 크기에서 마침내 지름 1m에 이르는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진혁의 어깨가 크게 뒤로 젖혀졌다.

겁화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키이이이...."

"키이잉!"

곤충들이 완전히 땅바닥에 몸을 기었다.

전면부 외피에 틈이 보였다.

...지금!

진혁이 한계까지 끌어 모은 마력을 방출했다.

콰콰콰콰콰콰콰!

불줄기가 곤충들을 집어삼켰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눈 먼 몬스터들이 한 줌 재로 화했다.

"대충 정리된 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아니, 또 와."

엘리스가 힐끗 뒤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수십 마리의 벌레들이 새롭게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말만 하지 말고, 실력 발휘 좀 해 봐. 밥값은 해야지?"

"뭐? 이런 하등한 놈들을 상대로 고귀한 이 몸이 힘을 쓰라는...."

"고귀하신 분은 햇빛을 보면 안 되니 반지 속에 영영 가둬 줄까?"

아직도 왕좌 위에서 내려다보던 버릇을 못 고쳤네?

'제국의 여왕이었던 내가, 눈 떠 보니 인도의 수드라가 되었다' 뭐, 이런류의 로판 빙의물 좀 찍게 해 줘?

진혁의 서슬 퍼런 협박에 엘리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칭얼대다가 정말로 비참해질 수 있다는 걸.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엘리스가 Lv?? '블러드 바인드'를 발동합니다!]

우우우웅!

허공에 핏방울들이 나타난 건 바로 그때였다.

붉은 액체로 만든 거대한 원.

"키에?"

"켁?"

눈 깜짝할 사이에 곤충들의 몸이 굳어 버렸다.

무려 두 자릿수 레벨을 자랑하는 스킬이다.

아무리 제 몸무게의 몇십 배를 드는 곤충류 몬스터라도 옴짝달싹하지 못할 수밖에.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된다.

진혁이 단검을 움켜쥔 채 놈들에게 다가갔다.

'역시 쓸 만하네.'

죽이진 않되, 서포팅을 하는 선에서 멈춘다.

경험치는 최후의 일격을 가한 사람이 독식할 터.

굳이 마력을 나눠줘 가며 엘리스를 붙잡아 놓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서걱!

단검이 호선을 그렸다.

곤충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떨어졌다.

다음, 또 다음.

움직임이 봉인된 이상, 놈들을 처리하는 건 그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미친 듯이 오르는 레벨.

상태창이 쉴 새 없이 점멸했다.

'하하.'

진혁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날뛰는 게 이토록 즐거운 일일 줄이야.

아니, 진심으로.

그동안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1레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던 것 같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

드디어 강해져야 한다는 갈증을 만족스러울 때까지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투두두두두!

또다시 새로운 곤충들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번엔 나서지 마."

"직접 하게?"

"응. 지금 보유하고 있는 마력으로 이 능력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거든."

진혁이 단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검마의 재능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지는 기분이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갖춰진, 제대로 된 무대.

"부탁한다. 제발 멈추지 말고 끝없이 와라."

탓!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37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4)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진혁이 지하 1층에 들어온 지 24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

1이었던 레벨은 어느새 12레벨까지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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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2

힘 8 민첩 8 체력 8 마력 41 간극 100 행운 10 적응력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33

보유한 코인: 2274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스킬: Lv4 '불의 원소', Lv3 '진실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3 '독식', Lv3 '얕은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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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성장 속도다.

고인물 중 하나였던 이태민과 유연화도 10레벨을 넘기까지 이주일이란 시간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압도적인 성장에도 진혁의 표정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몰이사냥에 엘리스의 서포팅까지 있는 레이드야.'

12레벨이 높은 게 아니다. 당연한 거지.

그리고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할 생각도 없었다.

화르르륵!

[Lv4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등 뒤로 치솟은 불줄기.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불의 원소'의 위력과 활용도도 달라졌다.

'전투 감각은 거의 전성기 때로 돌아왔어.'

몸이 완벽하게 적응했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과 싸운 덕분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몬스터들 어그로 끌고 올까?"

진혁이 스킬을 발동한 걸 본 엘리스가 살포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등 뒤에 있는 작은 날개가 연신 파닥였다.

그 모습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완전히 숙달이 된 모양이네.'

투덜대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 주고 있는 이 꼬마 여왕님 덕에 심심할 겨를은 없을 것 같다.

"평소보다 많이 해 줘. 아, 그리고 이번엔 속박까지 사용할 필요 없어."

"응? 내가 묶어 두는 게 더 편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가능하면 네 마력을 보존해 두고 싶거든."

"마력을... 보존해? 왜?"

엘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해가 되질 않겠지.

적당히 어그로를 나눠 가며 사냥한다면, 마력을 아껴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진혁의 시선이 한가운데 있는 구덩이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곤충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몸 풀기는 충분히 했으니, 이제 슬슬 저 아래로 내려가 봐야지."

레벨업과 실전 감각 상승.

두 가지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그러니 이곳을 찾은 마지막 목적을 달성할 차례다.

'지금쯤 전 세계 길드들이 3층에 있는 보스 때문에 아주 안달이 나 있겠지.'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일 거다. 원래라면 시간을 들여 한참 성장한 뒤에 공략해야 할 보스전을 아직 준비도 안 된 채 클리어 해야 했으니.

하지만 백날 고민해 봐야 답은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아직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3층의 보스 몬스터.

그 난관을 속성으로 돌파하기 위한 열쇠는 바로 저 아래에 있었으니까.

***

중세시대에 어울릴 법한 고풍스러운 성.

이곳엔 현재 미국의 '타이탄'과 유럽의 '올림포스', 중국의 '중화'와 한국의 '싸울아비'까지.

7대 길드 중 무려 4개 길드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목적은 단 하나.

벌써 8번째 실패한 3층 보스 공략에 관한 회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엄청나긴 하네.'

계속해서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랭커들을 보며, 테레사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안이 심상치 않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모양이다.

이렇게 엉덩이 무거운 각 길드의 간부급들이 직접 움직인 걸 보면 말이다.

'하기야 초조할 수밖에 없겠지.'

이제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40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번 회의에선 큰 전환점이 될 이야기들이 오고 갈 것이다.

바로 그때.

와인 잔을 들고 있던 중년 남성이 입을 열었다.

미국 타이탄 길드의 대표로 참석한 S급 플레이어, 패트릭이었다.

"대부분 모인 것 같으니 시작하겠습니다."

웅성이던 소음이 사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패트릭에게 향했다.

"이미 다들 알고 계시다시피, 4층으로 가기 위한 8차 레이드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각기 100명으로 구성된 15개의 공격대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9명뿐이었죠."

꽤나 공을 들인 레이드였다.

1500명의 플레이어와 2개의 성유물까지 투입된 회심의 시도.

하지만 쏟아 붓다시피 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격대는 4층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을 뚫는 데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가 뭘까?

보스 몬스터가 압도적으로 강해서?

까다로운 함정들이 즐비해서?

아니.

3층의 마지막 보스 몬스터는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까다로운 함정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대군(對軍) 능력을 갖고 있는 성유물로도 실패하다니.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그 벌떼처럼 많은 놈들을 돌파하란 말입니까?"

그렇다. 문제는 질이 아닌 양.

4층으로 가려면 백이나 천 단위가 아니라. 몇 만이 넘는 조각상들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2층과 3층 공략이 너무 빨리 이루어졌어요. 결국엔, 봐요. 그 대가가 어떤지를."

올림포스의 대표로 참석한 마법사 마리아도 한 마디 덧붙였다.

15레벨이 넘는 플레이어들의 수만 충분했다면....

공격대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탑을 오르려한 욕심과 플레이어들의 레벨 사이에 격차가 벌어졌고.

결국엔 이 사달이 나 버렸다.

"맞는 말씀이구려. 그 모든 게 마정석을 독점하려는 중국 쪽 때문 아니었소?"

단군 길드의 제3 공격대 공대장 백진호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중국 측에서도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발언, 그냥 넘기긴 힘들군요. 저희는 인류를 위해 탑을 올랐을 뿐. 증거도 없이 호도하는 건 저희를 향한 도발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중화에 소속된 텐웨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푸하하! 인류 같은 소리 하네. 중화라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는 여기에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구만."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더 하면? 뭐 어쩔 건데?"

"그만!"

두 사람의 신경전이 도를 넘으려 하자, 패트릭이 끼어들었다.

"과거의 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이 눈앞에 있다.

잘잘못을 따지느라 힘 싸움을 할 때가 아니란 뜻이다.

"뭔가 생각해 두신 게 있는 건가요?"

"예. 딱 한 가지,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패트릭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마치,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결심한 듯 이내 이 회의를 주체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제 새벽... '마인'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저희를 도와주겠다고요."

패트릭의 말에, 회의장에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런!"

"설마, 그 녀석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잔 말입니까?"

"놈들은 전부 국제적으로 수배당한 쓰레기들의 집합소입니다."

"바퀴벌레와는 절대 함께할 수 없어요. 절대로요!"

각 길드의 대표들이 기함했다.

현재 대형 길드들의 영향력은 정부를 뛰어넘는 상황이다.

그만큼 대외 명분이 중요했고.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엄청난 파급력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모두들 마인과 엮이는 걸 극도로 꺼릴 수밖에.

"끌끌. 쓰레기들이라니. 듣는 쓰레기 마음 찢어지겠네."

모닥불로 생긴 그림자에서 무언가 꿈틀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불길하면서 기괴한 그림자다.

꿀렁꿀렁!

그림자는 곧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비쩍 마른데다 수염이 하얗게 새어버린 노인. 하지만 외견만으로 무시하기엔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너무 흉흉했다.

"자존심 세우는 건 좋은데, 어차피 너희들로는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지 않나?"

노인이 이죽거렸다.

"건방진!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패트릭 씨. 저런 놈을 여기까지 불러 온 겁니까?"

"당장 그 더러운 모가지를 잘라 내 주마!"

스릉!

철컹!

각종 무기가 뽑혔다.

마력이 폭주하며, 고요했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콰콰콰콰콰콰!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혈기왕성한 친구들만 잔뜩 모여 있군. 하지만, 이쪽의 조건을 들어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 우리에겐 보스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있거든."

"개소리! 수도 얼마 안 되는 놈들이 무슨 수로 그 대군을 넘어선다는 말이냐?"

마인들의 전력이라고 해 봐야 숫자로는 얼마 되지도 않을 터.

일개 집단의 힘으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천 명 단위로 구성된 공격대마저 삼 일을 버티지 못한 채 전멸했으니까.

"흠. 수야 만들면 그만이지 않겠나?"

노인이 해골로 만들어진 지팡이로 땅을 두 번 내리쳤다.

쿵! 쿵!

둔탁한 소음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고유 능력 '저주받은 무덤의 묘지기'가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

대리석으로 만든 지면에 여러 개의 금이 쩍하고 갈라졌다.

"뭐, 뭐야?"

"이건...!"

사람들이 갑자기 생겨난 균열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동시에, 깊은 땅 속에서 백골이 된 시체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끌끌. 이 땅에는 제법 쓸 만한 시체들이 많이 묻혀 있군. 덕분에 좋은 품질의 병사들을 얻을 수 있겠어."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 해골 병사들.

외견은 오랜 세월의 풍파로 인해 닳아 있었지만, 검과 방패는 생전의 예기를 잃지 않았다.

"병력은 병력으로 상대하면 그만이야. 보다시피 마인들 중엔 강령술이나 소환술에 능통한 친구들이 많거든."

"네크로...맨서였나? 하지만, 이 정도 규모를 부리려면...."

중얼거리던 텐웨이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지팡이!"

노인이 쥐고 있는 지팡이.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과거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을 때 봤던 기억이 있었다.

"호오?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구만?"

노인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99가지 재료를 모아야만 만들 수 있는 특수 아이템.

'탐욕의 지팡이.'

워낙 기괴하고 잔인한 재료들을 요구했기에, 만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합성에 성공할 경우, 이 아이템은 네크로맨서를 위한 최상의 능력을 발휘했다.

"과연... 탐욕의 지팡이와 네크로맨서의 조합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군. 9번째 시도는 가능할지도 몰라."

"텐웨이 씨! 설마?"

마리아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만약, 놈들이 어설픈 수작을 부리려고 접근한 거였다면, 나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나쁘지 않아."

"흠. 미안하지만, 나도 이번엔 저 중국 놈의 말에 동의한다. 물론,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야겠지만."

백진호도 무겁게 입을 뗐다.

하나둘, 분위기가 기울었다.

마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레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인들과 손을 잡으려 하다니.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었다.

절대 이 일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그러나 다른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도 무턱대고 반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다못해 진혁 씨만 참가해 줬었어도.'

그랬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 있는 '가짜'들과는 다르게 진혁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진짜' 고인물이었으니까.

난공불락의 유적에서 보여 준 수많은 활약들을 생각하면, 4층으로 가는 방법 또한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그래. 어쩔 수 없다.

혼자만의 의견으로는 이 상황을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우우우웅!

눈앞에 푸른색 상태창이 활성화됐다.

[외부로부터 화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다른 플레이어의 연락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두근! 두근! 두근!

내용을 읽은 테레사의 심장이 미친 듯 고동치기 시작했다.

[대상은 플레이어 강진혁.]

왔다.

[통화 요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사람으로부터의 연락이.

"진혁... 씨!"

떨리는 손으로 승낙을 누르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유로운 표정과 눈매.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를 지닌, 테레사가 익히 알고 있는 진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진혁은.

"뭡니까? 저 골다공증 걸린 해골바가지들은?"

가장 그다운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38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5)

진혁의 음성이 너무 컸던 탓일까?

노인도 그 말을 듣고 말았다.

곧바로 분노로 얼룩진 고함이 터져 나왔다.

"뭐, 뭐라고? 골... 골다공증? 지금 그 말. 감히 내 소환수들한테 한 것이냐!"

흠.

초면에 너무 심했나?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해?

어중간한 놈들에겐 막강해 보이질 몰라도, 고인물의 눈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화면 뒤에서 목소리만 내지 말고 당장 모습을 보여라!"

화상 통화는 친구한테만 얼굴이 보이는 특성 탓에 제3자는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물론, 당사자가 동의한다면 전체 통화로 전환이 가능했다.

"괜찮겠어요?"

테레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보아하니 꽤 골치 아픈 순간에 연락드린 모양인데, 재밌겠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상 통화가 전체 통화로 전환됩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기묘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진 것은 거대한 동요였다.

"저, 저 가면은!"

"유적! 유적을 공략했던 그 장본인이잖아요!"

"세상에나. 접점이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줄 알았는데, 테레사 씨랑 개인적으로도 알고 지냈던 겁니까?"

모두가 고함을 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면 뒤에서 완전히 정체를 감춘 플레이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찾고자 했지만, 단서조차 없던 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잡아야 한다. 누구보다 빨리.

그것이 여기 있는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테레사 씨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으니, 저 사람도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먼저 낚아채는 게 임자라는 뜻.'

'코인이든 아이템이든 돈이든 아끼지 말고 쏟아 부어야 해.'

'당연하지. 길드의 수준 자체가 완전히 바뀔 텐데 뭐든 안 아깝겠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각 길드의 대표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건을 제시할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웃기는군."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나도 들어는 봤다. 1층 유적에서 활약한 플레이어인지 어쩌고 하는. 하지만, 이번 보스 공략은 그곳과는 다르다."

유적에선 몬스터 하나하나의 힘이 강력한 대신 수가 많지 않았다.

반면, 3층에 있는 보스 몬스터에게 가는 길은 각 몬스터의 전투력이 낮은 대신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했다.

아예 분야가 다르다는 뜻이다.

"흠. 당신은 가능하다는 말이야? 적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진혁이 검지로 가면 위를 긁적였다.

"그래. 다수의 소환수를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나의 특기니까."

다수의 소환수를 거느린다라....

소환수란 여기 있는 해골들을 지칭하는 말이겠지?

수가 제법 되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글쎄.

"그 짝퉁 지팡이로는 힘들 텐데."

"뭐, 뭐라고?"

"반쪽짜리잖아, 그거? 보니까 '성인의 심장'이랑 '성유에 적신 수의'를 빠뜨리고 합성했구만."

"그,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알긴.

"그거야 진짜 탐욕의 지팡이랑 생김새가 다르니까. 재료를 전부 갖춘 완제품은 오른쪽 해골 아래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거든. 무엇보다 해골병사들의 질이 너무 낮아."

"완성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턱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이었다.

"궁금해? 원한다면 나머지 재료를 찾는 장소를 알려줄 수도 있는데."

"정말인가? 대체 어디에서… 크읍!"

노인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

거의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간 그거야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니까.

'보나마나 그럴듯한 말로 길드한테 한 몫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반쪽짜리 지팡이로 허세를 부리는 것만 봐도 놈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계약금 명목으로 코인이나 아이템을 챙긴 뒤 잠적해 버리려는 그 얄팍한 의도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결국 노인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좋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지. 그리고 너. 누군지 몰라도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 주겠다."

"와... 그 대사. 실제로 하는 놈은 처음 봐."

"...뭐?"

"아니, 말하면서도 안 창피해?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다니.' 90년대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대사 썼다간 방송사 사장한테 귓방망이 맞을 수준이잖아."

그냥 조용히 사라졌으면 흑역사 찍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여간 저놈의 알량한 자존심이랑 입이 문제다.

"네놈…!"

노인이 진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꿀렁!

그림자가 솟구쳤다.

"다음에 직접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지켜보지. 그리고... 여기 있는 분들도 명심하십쇼. 군단급 병력을 보유한 세력은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노인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삼켜졌다.

***

적막에 잠긴 연회장 내부.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다들 현실을 직시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저런 어설픈 사람한테 맡겨서 또다시 실패하겠다면야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아 보이네요."

진혁이 패트릭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긴 왜 없어?

진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맡겨 주세죠. 마인들과 손잡지 않아도 되는 명분도, 탑을 공략해야 하는 실리도 모두 챙겨 드리겠습니다."

"서, 설마 가능하시다는 말씀입니까?"

패트릭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혼자서 공략이 가능하다니.

만약, 상대가 유적을 공략한 그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농담으로라도 걸러들었을 것이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가능하고말고.

그걸 위해서 지금 지하 1층에 와 있는 거였으니까.

"그, 그럼 계약금과 보수는 어느 정도를 드려야 할지...."

"안 주셔도 돼요."

"예?"

"저 혼자서만 들어가게 해 주시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얼씬도 못 하게 구역 전체를 봉쇄해 준다면, 보수는 받지 않겠습니다."

진혁의 말에, 패트릭이 금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렸다.

마치, '고작 그런 조건으로?'라고 되묻는 듯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그거야."

진혁이 힐끗 테레사 쪽을 바라봤다.

"인류를 위해, 그리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료를 위해서 당연한 일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말을 하자마자 진혁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젠장.

'내가 말하고도 손발이 오그라드네.'

'조금 전에 그 노인의 심정이 이랬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소스라치는 진혁과 달리 이 발언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테레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료라는 말에 보조개가 연신 씰룩였다.

"허허. 이것 참... 길드의 대표로서 할 말이 없구만."

"멋지네요."

"진정한 영웅이로군. 우리도 반성 좀 해야겠어."

"하. 나도 저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이리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감탄과 탄성.

대형 길드를 대표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알아서들 착각해 준다.

'겉치장은 이 정도 해 두면 되겠지.'

계약금을 안 받겠다고 한 이유는 인류애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형 길드의 편의를 봐 주겠다는 이유는 더더욱 아니고.

진혁이 힐끗 어깨 위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현재 모든 화면과 대화 내용이 녹음 중입니다.]

인류를 위해 보상까지 포기하는 플레이어.

이 문구 하나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길드들이 제시하는 보상보다는 몇 곱절은 많을 것이다.

바보들이야 넙죽 계약금을 받아먹겠지만.

'나는 작은 것을 쫓으려다 큰 걸 놓치는 머저리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초반부의 길드들이 줄 수 있는 계약금이라고 해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등급 낮은 성유물 하나?

아니면 코인이나 현금 조금?

'그런 것 따위는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대중에게 비치는 탄탄한 입지와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혜택은... 이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첫 방송 기능. 만약 첫 데뷔전에서 모두가 실패한 레이드를 솔플로 성공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두근! 두근! 두근!

다음 주 로또 번호가 뭐가 나올지 미리 아는 것처럼, 진혁의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성공하면 언제 다 같이 뵙고 식사라도 한번 하고 싶네요."

"무, 물론이죠."

"저희 역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꼭 그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다들 기대에 찬 얼굴로 한 마디씩 덧붙였다.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나만 할까?'

진혁이 군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영계가 인삼과 대추를 물고 끓는 물 앞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게 이런 느낌일까?

'와! 저기 있는 랭커들 중 두 세 명 정도의 능력만 복사할 수 있어도....'

대박이다 이건.

***

[화상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

진혁이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이 테레사에게 향했다.

양떼를 노리는 늑대의 눈빛을 한 건 덤이었다.

"테레사 씨, 혹시 방금 그 남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름, 나이, 국적.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허허, 유럽 쪽은 이번에 새로운 유망주를 영입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저희한테 양보 좀 하시죠."

"A급 간당간당하게 넘은 것도 유망주라고 해야 하나요? 원한다면 한 트럭으로 드릴 테니, 대신 그쪽이 이번엔 한 발 물러서세요."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어머나. 왜 발끈하세요? 아... 하긴. 꼭 말에서 지는 사람이 언성부터 높이더라고요."

"우와아아악!"

또 다른 주제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자리.

그 한가운데서.

테레사가 곤란한 듯 울상을 지었다.

'진혁 씨... 바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렸군.'

진혁은 만족한 듯 기지개를 켰다.

마인들이 설쳐 준 덕분에 대형 길드들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지금쯤 쟁탈전을 펼치며, 김칫국을 아주 한 사발씩 마시고 있겠지.

'흠. 테레사한테 뒷감당을 맡긴 게 살짝 미안하긴 한데....'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한 끼 사 주든가 해야겠다.

그때였다.

"하아. 하아. 하아. 날, 날 죽일 셈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스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 맞다.

이 녀석을 깜빡했네.

테레사와 화상 통화를 하는 동안, 올라오는 벌레들을 상대하기 위해 살짝 무리를 좀 시켰다.

혼자서 놈들을 모조리 막으라고.

그 결과, 남아 있던 마력을 전부 사용해 버린 엘리스는 실신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불평할 수 있는 걸 보면 괜찮아.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말할 힘도 없거든."

"그,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한 거야? 우리... 협력 관계가 아니라 노예 계약인 거였어?"

엘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뭐야?

갑자기 왜 진지하게 말하고 그래.

양심에 가책 느껴지게.

"쯧!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부려먹기만 하는 줄 알아? 안 그래도 코인 거래소에서 '마력 보충제'를 구입해서 줄 생각이었어."

가장 싸구려를 구입해두긴 했지만, 어차피 엘리스는 코인 거래소를 볼 수 없으니 상관없다.

이게 가장 비싼 거라고 우기면 뭐 어쩔 텐가?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보충제 따위는 통하지 않아."

엘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부려먹기만 하지는 않는다고 했지?"

"그,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후후. 걱정 마. 소모한 마력은 확실히 받아낼 테니."

엘리스가 생긋 웃었다.

입가에 있는 뾰족한 어금니가 빛났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분명.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먹음직스러운', '맛있는 냄새가 나는 피'. 그래, 두 개의 키워드가 들어간 문장이었다.

젠장. 이건 위험하다.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섰다.

39화 무한 증식 (1)

액체가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한 생명을 살리는 헌혈(?)이 끝났다.

"하아. 맛있었다."

엘리스는 만족한 듯, 입가에 묻은 핏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반면, 진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목덜미에 난 두 개의 잇자국을 어루만졌다.

어우야.

머리가 다 어지럽네.

대체 피를 얼마나 빤 거냐, 이 녀석.

"진심으로, 밥값 못 하면 반지 속에 한 달간 가둬 버린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 마력이면, 지하에 있는 벌레들을 전부 날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하여간 말은."

혀를 찬 진혁이 곧바로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그리고 조금 전 찍어 뒀던 동영상을 등록했다.

[동영상이 업로드 되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는 여러 번 올랐었지만, 직접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신규 BJ로 시작할 테니, 상단 노출이나 배너 이벤트 같은 건 받을 수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될놈될이라고.

콘텐츠만 알차면, 결국엔 뜰 영상은 뜨게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입소문을 타면, 조회수야 금방 오르는 게 이 바닥 생리였으니까.

'좋아, 이건 됐고.'

다음은 '코인 거래소'에서 쇼핑을 할 차례다.

진혁이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저 아래에서 원하는 걸 모두 달성하기 위해선 몇 가지 사야 할 아이템들이 있었다.

[거대화 알약(C): 11,500]

[알 수 없는 정육면체(D): 2,500]

[능력 촉진제(D): 5,000]

[끈끈이 풀(F)×4: 400]

[칼투리스 숲의 거미줄(F): 300]

[트윈헤드 오우거의 콧물 100mg(F): 300]

진혁은 순식간에 아이템을 구매했다.

이미 뭘 사야 할지 정해 뒀기 때문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쓸데없어 보이는 걸 잔뜩 샀네."

엘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많은 코인을 투자해서 왜 이런 쓰레기들을 사?'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완전히 코인 낭비로 보이겠지.

"있어 봐."

피식 웃은 진혁이 심연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내려가려고?"

"그래, 지금부터는 정신없이 바빠질 거야."

아주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 할 거다. 오늘 안에 지하 1층의 끝을 봐야 하니까.

말을 마친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

부우우우웅!

바람이 전신을 두드렸다.

'불의 원소' 조차 유지할 수 없는 돌풍.

때문에 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대책은 있는 거야? 왜 말이 없어. 대답해! 서, 설마... 자살할 생각은 아니지?"

엘리스가 진혁의 어깨를 붙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진조인 자신이야 유성우에 매달려 지구에 떨어져도 멀쩡할 테지만.

인간의 신체는 그렇지 못했다.

운이 좋아도 전신 골절로 사망.

재수 없으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중력 마법이나 비행 마법도 무리야.'

끝이 언제일 줄 알고 계속해서 마력을 쏟아 붓는단 말인가?

본래의 몸으로 현현한다면 모를까.

이런 몸으론 무리였다.

하지만 엘리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카운팅을 계속할 뿐.

'17분 13초... 17분 20초... 17분 44초.'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머릿속의 초침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침묵하던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엘리스가 Lv?? '리버스 그래비티'를 발동합니다!]

순간, 진혁의 몸이 중력을 거슬렀다.

중력 마법이 발동된 타이밍은 지면에서 1m 떨어진 남짓.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됐어. 이제 뛰어서 내릴 수 있는 높이니까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

"어? 어어...."

엘리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다시금 중력이 되돌아오며, 진혁이 땅 위에 안착했다.

'우선 시야부터 밝혀야겠군.'

한 줌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기에, 주위는 어두운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화르르륵!

[Lv4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4개의 불덩이가 사방을 비췄다.

축축한 진흙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장소.

여기가 바로 시련의 탑의 최심부다.

그런데.

"뭐 해?"

어깨 위에 있어야 할 엘리스가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이번만큼은 숨기지 말고 꼭 말해 줘. 대체 어떻게 바닥의 위치를 알았던 거야?"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거였어?"

"그, 그거야... 말이 안 되잖아, 이건! 무슨 수로 정확한 타이밍을 알려줄 수 있는 건데?"

"감이야."

"응?"

"그냥 찍은 거라고."

정확히는 암기하고 있던 거였지만.

한창 시련의 탑에 질렸을 때였나?

새로운 스릴을 찾는다고 미친 짓들을 시도했었다.

높이 3km가 넘는 설산 꼭대기에서 눈사태 일으킨 뒤, 눈썰매타고 내려오기라든가.

맨몸으로 드래곤 레어 들어가서 잠자는 드래곤 목에 방울 달고 나오기라든가.

외뿔 고래 배 속에서 일주일간 생존해 보기라든가.

기타 등등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을 했었다.

물론, 여기서 맨몸 다이빙 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한 200번 정도 다이빙을 시도했을 때쯤 되니까....

싫어도 몸이 기억하게 되더라.

이 구덩이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아 진짜. 감이니, 찍은 거니 말고. 제대로 좀 말해 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숨기는 게 진짜 많은 것 같은데. 파트너끼리 이러면 안 되지!"

"너 하는 거 봐서 나중에 말해 줄게."

엘리스가 계속해서 캐물었지만, 진혁은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쳤다.

바로 그때.

"...."

"...이건!"

두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동시에.

"우우우웅!"

"끄륵! 끄르르!"

갑자기 진흙이 꿀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습하고 축축한 오물 속에서 쉬고 있던 이들이 반응한 것이다.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먹잇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스릉.

진혁이 단검을 뽑았다.

'자이언트 웜이라....'

중형종답게 5m에 이르는 육중한 몸이 인상적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외피가 워낙 두꺼운 탓에, 어지간한 공격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특히나 면적이 작은 단검이라면 더욱더.

그렇다면.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파츠츠!

검신을 타고 푸른빛이 일렁였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검강이라면, 아무리 두툼한 지방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을 터.

"앞에서 오는 순서대로 전부 묶어."

"알겠어."

엘리스와는 이미 수백 차례 호흡을 맞춰 봤다.

눈을 감고 있어도 상대가 어떤 식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또 파고들지 훤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콰앙!

진혁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렸다.

"크오오오오!"

"우우웅!"

지렁이들의 아가리가 쩍하고 벌어졌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며, 지저분한 침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먹잇감을 삼키기 직전.

놈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또옥! 또옥!

붉은 핏방울로 이어진 수천 개의 가느다란 선들이 보였다.

엘리스의 속박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진혁이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수십 마리 지렁이 사이를 누비며, 단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서걱! 콰득!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지름 1m에 이르는 육편이 세로로 미끄러졌다.

움직임이 구속된 이상, 지렁이들은 그저 덩치만 큰 과녁에 불과하다.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콰콰콰콰콰콰!

구덩이가 잘린 살덩이들도 가득 찼다.

그렇게 절반을 넘게 쓰러뜨렸을 무렵.

"크아아아!"

"크오오!"

지렁이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가는 실들로 묶여 있었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이것 참, 자학하는 것도 아니고.'

백날 날뛰어 봐야 벗어날 수 없을 텐데....

설마, 몸의 일부를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조의 속박은 그리 간단히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살을 깎아먹는 지렁이들을 보며, 진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콰앙!

절벽 쪽에서 굉음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전갈과 거미를 닮은 곤충들이 틈새 쪽으로 기어 나왔다.

"키에에엑!"

"케엑!"

엄청난 수다.

게다가 놈들 중에는 날개가 달린 비행종도 섞여 있었다.

순식간에 지상과 하늘을 빼곡히 덮은 곤충들.

"이야. 이 많은 걸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

엘리스가 토끼눈을 떴다.

그러나.

"그걸 질문이라고 한 거야?"

어깨를 으쓱한 진혁이 단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츠츠츠츠...!

푸른빛을 낸 검강이 어느새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유형화된 기가 하나의 형(形)을 이루었다.

검은 달, 흑월야(黑月夜).

'레이드의 꽃은 역시 광역기지.

콰콰콰콰콰콰콰!

천유성을 일격에 무너뜨린 최강의 스킬이 적들을 집어삼켰다.

***

검게 물드는 시야.

곤충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더듬이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이곳, 지하에서 자신들은 언제나 최상위에 랭크된 포식자였다.

다른 종은 그저 배고플 때 잡아먹은 먹잇감에 불과했고.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깨달았다.

필살을 자랑하던 이빨과 발톱 그리고 압도적인 수조차 저 인간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치이이익!

붉게 달아오른 지면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남아 있는 생명체 따위는 없다.

전멸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워낙 많은 수의 몬스터를 쓸어 버린 덕에, 레벨도 2개나 올랐다.

욱씬!

큰 기술을 사용한 직후라 전신에 근육이 삐걱거렸다.

혈관도 타들어가는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나아졌어.'

현재 보유한 마력은 41.

'얼어붙은 눈물'을 흡수한 효과가 온몸으로 체감됐다.

이 정도라면 흑월야도 세 번까지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리라.

후우.

들썩이던 가슴이 진정됐다.

진혁이 어둠속을 향해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그만 직접 나오지 그래? 하급 수준의 벌레들로는 아무리 많아 봤자 소용없다는 거... 슬슬 알 때도 되지 않았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이유.

그것은 바로 이 지하의 주인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호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답했다.

저릿저릿!

단순히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압박이 느껴졌다.

엘리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위압감이다.

'과연, 신의 몸을 담았던 그릇답군.'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시한 놈들하고만 싸우느라 지겨웠는데, 모처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대답해라. 나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목소리에 실린 마력이 더욱 짙어졌다.

"물론 알고 있지. 사막을 배회하는 사냥개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봤거든."

사막의 사냥개.

그것이 이집트의 신격, 아누비스를 낮잡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이곳에 처음 온 인간이라 잠깐의 담소 정도는 나눈 뒤 죽이려 했건만,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수다나 떨 생각은 없고, 빨리 덤비기나 해. 네 녀석이 직접 모습을 보여야만 둥지도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무한대로 벌레들을 증식시킬 수 있는 특수 아이템, '하이브'.

지하 1층이 최고의 사냥터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놀랍군.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그것 외에도 더 많은 걸 알고 있지. 기왕이면, 서로의 시간 절약을 위해 벌레 뒤에 숨지 말고 직접 나서 줬으면 좋겠지만."

"푸하하하! 고작 네까짓 거를 상대로 이 몸이 직접 나서란 말이냐?"

어림도 없다는 듯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하긴, 이런 반응이 정상이겠지.

아직까지 저 녀석의 입장에서 나는 미물이나 마찬가지일 터.

결국, 녀석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복사하려면 더욱더 얄밉게 도발해야 한다.

[아누비스의 심판]

내용: 아누비스가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대상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면, '저주'가 발동됩니다. 저주가 걸린 자는 모든 스탯이 50%만큼 감소하며, 고유능력과 스킬이 1분간 봉인됩니다.]

절대 판정 효과를 갖고 있는 사기적인 고유 능력.

그리고 저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복사 조건: 아누비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어 그의 의식을 담고 있는 그릇을 파괴하십시오.]

아무리 녀석이 본신이 아닌, 의식의 일부만 현현된 석상에 불과할지라도.

신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조건을 달성할 경우.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40화 무한 증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