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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축하드립니다! 그럼 '최초의 체스판'은 왕관으로 입찰해 주신 숙녀분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자가 큰 소리로 엘리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드르륵!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이 유리 케이스 안에 밀봉된 체스판을 가지고 왔다.

"나 말고 이쪽한테 줘."

"알겠습니다."

대신 체스판을 건네받은 진혁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미안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의상 하는 표정 관리였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이런 서비스 정도는 해 줘야지.

"나야 고맙긴 한데, 무리한 거 아니야? 괜히 미안해지게."

크!

방금 표정.

거울은 안 봤지만, 100점 만점에 95점 정도였을 거다.

앞니로 입술을 살짝 깨물고 13.785도 각도로 숙인 고개에서 절실한 감정이 전해졌음을 확신했다.

"풀 컬렉션이 망가진 건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저 왕국을 상징하는 보물은 여러 개 있기도 하고, 그런 것보다 내 계약자한테 함부로 말하는 놈들이 웃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거든."

"...."

이 녀석.

기특한 말도 할 줄 아는구나.

'겉으론 별거 아닌 척해도 날 위해서 아끼던 소장품을 내놨다는 거잖아.'

솔직히 말해 살짝 감동했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랄까.

앞으로 엘리스에 관한 처우를 아주 조금은 개선해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 안에 쿠션이라도 좀 넣어주던가 해야겠군. 버릇이 너무 나빠지진 않게 5일장에서 파는 걸로다가.

그리고 진혁이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이.

캐드릭은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두 눈엔 어떻게든 난장판이 돼 버린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가득했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직 최후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캐드릭의 손이 알렉스의 어깨 위에 얹혀졌다.

"나는 보스 공략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만 가 봐야 한다."

진혁과 접촉하기 위해 무리해서 이곳에 참석했지만,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그러니.

"너는 경매가 끝나는 즉시. 강진혁을 납치해라."

"제가... 말입니까?"

"그래,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곳엔 쓸 만한 시체들을 많이 만들 수 있지 않느냐?"

아무리 상대가 S급 플레이어라도 조건이 갖춰진 네크로맨서를 상대할 순 없다.

대인전에서 백날 날뛰어 봐야 수많은 언데드 병사를 이끄는 흑마술 앞엔 무력할 뿐이었으니까.

거기에 탑이 나타나기 전까지 외과 의사였던 알렉스는 인체를 다루는 특유의 센스까지 갖추고 있었다.

물론, 각 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권력자들을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게 알려졌다간 타격이 크겠지만.

그거야 살아서 증언을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고.

죽은 자가 말이 없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여자 쪽은 어떻게 할까요?"

"제거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알렉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일전의 수모를 갚아 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

약 3시간 뒤, 경매에 나온 마지막 물품이 낙찰되었다.

성공적인 경매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누가 뭐래도 175회차는 최대 입찰액이 나온 것으로 경매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테니까.

"긴 시간동안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실 때는 오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를 통해.... 으아악?"

진행자가 고개를 깊이 숙이려던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쿠쿠!

원형 극장 전체에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콰앙!

쾅!

콰아앙!

천장에 금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고.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끄아아악!"

"사, 사람 살려!"

"이게 무슨 난리야!"

"피해. 일단 피하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사실, 인과관계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니까.

가야 한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1초라도 더 빨리!

모두들 생존해야 한다는 본능에 이끌려 필사적으로 발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이 간 곳은 탈출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옥에 가까웠지.

서걱!

번쩍이는 검광과 함께 핏줄기가 흩뿌려졌다.

"컥? 커억...?"

가장 앞서가던 남자가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목에 바람구멍이 났으니 그럴 수밖에.

"어딜 그리 급히 가시려고 그럴까? 내 재료가 돼 줘야 할 소중한 제물들이 말이야."

알렉스가 입구에 선 채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 옆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끔찍한 형상의 몬스터들이 있었다.

"키에에에!"

"키이익!"

다른 비상 출구는 반파된 기둥들로 인해 모두 막힌 상황.

이로써 원형 극장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 됐다.

결코 나갈 수 없는 감옥이.

그런데 바로 그때.

"꽤나 마음에든 파티였는데 말이지...."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진혁이 알렉스 앞에 나타났다.

"넌… 장난이 너무 과했어."

선을 넘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54화. 인과응보

"역겨운 네크로맨서답군. 지저분한 소꿉놀이가 취미인가 보지?"

"이런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을 보고 지저분하다라.... 하긴, 범인들의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알렉스가 좌우로 도열한 몬스터들을 쓰다듬었다.

녀석의 눈에는 피부 내부가 훤히 보이는 몬스터들이 정말로 사랑스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그 눈은 장식으로 달려 있는 것 같네. 라식 정도론 안 될 것 같고. 그냥 뽑아버리는 걸 추천할게."

파츠츠츠!

진혁의 단검을 따라 푸른 기운이 일어났다.

눈부신 빛이 단숨에 검 전체를 집어삼켰다.

"푸하하! 검강이라니. 과연, S급답군. 아니, 이 정도 마력이면 S급 중에서도 발군이겠어."

그러나 검강을 봤음에도, 알렉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네놈 뒤에 있는 누더기들을 믿고 큰소리치는 거라면, 그거 크게 실수하는 거다."

"아무렴. 고작 이것만으로 당신을 상대하려 했을까?"

알렉스가 생긋 웃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검은 기운이 몰아쳤다.

[알렉스가 Lv5 '마력 용해로'를 발동합니다!]

저택 전체를 범위로 하는 광역 스킬.

흉흉한 기운이 삽시간에 피부로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머리가... 내 머리가!"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아."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의 생기를 강제로 뽑아내는 저주.

때문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산 채로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말이다.

"크읍."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마력으로 신체를 보호한 덕분에 피부가 녹아내리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사, 살려...."

"제발...."

사람들이 목숨을 애걸했다.

대부분은 중년이나 노인이었지만.

"아빠... 엄마. 아파."

간혹 나이가 어린 아이도 있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의 가족인 건가.'

단지 이곳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죽기엔 너무 가혹한 처사다.

특히나 어린아이가 죽는 걸 내버려뒀다간 평생 꿈자리가 뒤숭숭하겠지.

완전히 용해돼 죽기 전까진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을 터.

그 안에 시전자인 알렉스를 제압해 용해로를 멈추게 한다면,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10분.

10분이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내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성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더욱더 없고.

그러나 걸리적거리지 않은 채 지금처럼 얌전히 바닥에만 누워 있는다면....

"...."

진혁이 알렉스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뭐가 불만스러운 표정인가 본데, 왜? 벌레들이 죽는 게 그렇게 신경에 거슬리나?"

"벌레들?"

"그래. 이렇게 마력의 재료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미물들을 보고 벌레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표현 방법이 있을까?"

피식.

알렉스의 말에 진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질 않는다.

"이래서 너희 마인 놈들하곤 안 맞는다니까. 어울려 주고 싶어도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거든."

"흐음. S급이면 좀 더 현실적이길 기대했건만. 역겨운 감성팔이들과 같은 종류였나? 이 세상은 동정심 따위로 굴러가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약육강식으로 지탱되는 거지."

"그건 말 잘했네."

약육강식.

다른 건 몰라도 저 말에는 동의한다.

"네 입으로 내뱉은 말이니까, 죽더라도 원망 마라."

"마치, 네놈이 나보다 강하다는 듯한 말투로군."

"아니라고 생각하나?"

순간.

파츠츠!

진혁의 검이 꿈틀거렸다.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알렉스가 사용했던 것보다 훨씬 짙고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푸른빛으로 타오르던 검강이 어느새 검게 물들었다.

동시에.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질주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역수로 쥔 단검이 몬스터들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키에에엑!"

"케에엑!"

제법 두꺼운 피하지방을 가지고 있었지만, 검강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콰!

닿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 버리는 최강의 스킬.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검격에, 10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수십 조각으로 토막 났다.

하지만.

['피의 결계'가 활성화됩니다!]

[범위 지정 '언데드를 대상으로 한 재생'이 시작됩니다!]

마력 용해로의 효과로 인해 발동된 추가 스킬 '피의 결계'가 활성화되었다.

꿀렁! 꿀렁!

절단된 살덩이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벌레들이라도 이 정도 숫자가 모이면 제법 쏠쏠하단 말이지. 회복용으로 쓰기에 이보다 좋은 재료가 없으니까."

알렉스가 킬킬댔다.

과연.

이런 식으로 나오면서 시간을 끌겠다 이거군.

사람들의 생기를 쭉쭉 뽑아내는 이상 몬스터는 계속해서 살아날 테고.

결국엔, 이쪽이 마력이 고갈돼 지쳐 버릴 테니까.

정석적인 방법이다.

정석적인 방법이긴 한데....

"안쓰럽네."

"뭐?"

"고작 이런 걸 비장의 카드라고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꼴이 안쓰럽다고."

재생? 회복?

그거야 할 틈도 없이 소거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진혁이 단검의 끝을 알렉스에게 향했다.

우우우웅!

한 점에 모이기 시작한 빛.

검은 강기가 걷히며, 눈부신 섬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Lv2 '데이 라이트'가 발동됩니다!]

망막마저 태워 버리는 백색 기운에 몬스터들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키에에에에!"

"케에에엑!"

괴로운 거겠지.

빛 속성 스킬은 발현되는 것만으로도 어둠 속성 몬스터에게 큰 피해를 줬으니까.

"쳇! 역시, 그걸 쓰는군!"

알렉스가 예상했다는 듯 혀를 찼다.

천유성과의 대결 영상에서 이미 봤었다.

한 점으로 압축시킨 마력을 일직선으로 방출시키는, 언데드에 있어 악몽과도 같은 바로 그 스킬.

그렇기에, 대비해 뒀다.

저 스킬이 발동한다면 그 즉시 산개하도록 말이다.

알렉스가 마력을 재분배했다.

언데드들의 뇌리에 지휘관의 명령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언데드들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뭐지?"

뭐긴.

"발바닥을 얼려 버렸으니 당연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뿐이지."

스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진혁은 보유하고 있는 스킬들로 몇 가지 조합을 짜 뒀다.

그중 하나가 광역 스킬인 '데이 라이트'와 움직임에 제한을 거는 '얼음 조형'을 이용한 것이었다.

'데이 라이트'의 유일한 단점은 발동까지 소요되는 시간이다. 허나, 얼음 조형이라면 보완할 수 있을 터.

이걸로.

"체크 메이트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

거대한 빛이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

치이이익!

지면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재생할 수 있는 세포 하나까지도 전부 증발해 버린 탓이다.

'처음 써 봤지만, 기대 이상이군.'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복사한 스킬들을 융합해 상위 버전의 새로운 스킬을 만들고.

그걸 조합해 전투에 최적화된 판을 짠다.

거기로부터 나오는 짜릿함이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반면.

"이, 이럴 수가...."

알렉스는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10분. 고작 10분만 버티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모두 용해된다면, 상위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피의 결계'까지 사용한 언데드들이 일격에 쓸려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빌어먹을!"

척!

알렉스가 품 안에서 외과용 메스를 꺼냈다.

예리한 칼날에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독이다.

아니, 절박한 건 알겠는데.

"진심이냐?"

네크로맨서가 근접전으로 덤벼 온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알렉스가 손에 있는 메스를 냅다 집어던졌다.

정확하게 안면을 노리고 날아온 공격을.

카앙!

진혁이 일격에 쳐내 버렸다.

반으로 잘린 메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실망인데. 기껏 한다는 생각이 도주였나?"

왜 무기로 시선을 끄나 했더니.

투척을 통해 잠깐이나마 주의를 돌리고 그사이 자신은 도망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알렉스의 몸 주위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수 스킬.

'비틀린 틈.'

단거리 공간 이동을 위한 도주기였다.

스스스스.

연기가 점점 더 짙게 물들었다.

스킬이 발동되려는 것이다.

물론.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진혁이 아니었다.

"투척은... 이렇게 하는 거야."

목표와의 최단 거리를 파악하는 게 기본.

그러면서 상대가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라야 한다.

퍼억!

진혁의 손을 떠난 단검이 알렉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묵직한 통증과 함께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다.

"어때, 눈높이 교육을 좀 해 줬는데. 이해가 좀 가?"

"쿨럭! 컥! 커어억!"

"아! 애써 대답하지 않아도 돼. 지금 단검이 박혀 있는 곳이 폐라서 숨 쉬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까."

"끄으으으... 사, 살려...."

"다른 사람이 고통 받는 건 그렇게 즐겼으면서, 본인은 싫은 건가?"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

진정한 네크로맨서라면 자기 고통도 즐길 줄 알아야지.

"커윽, 컥. 끄르르...."

알렉스가 진혁의 신발을 붙잡았지만, 진혁은 그 애원을 무시했다.

"지금부터 네가 어떻게 죽을 건지 말해 줄게."

인생 스포일러를 해 주는 거니 잘 들어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 대한 이야기니까.

"앞으로 한두 시간 동안 폐에 피가 천천히 찰 거야."

사람의 목숨이라는 건 의외로 질기다.

어떻게든, 단 1초라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게 전신에 있는 모든 장기들이 제 역할을 해 주거든.

"그리고 그 긴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폐에 피가 가득 차 질식사할 수 있을 거야."

불에 타 죽는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방법 또한 가장 처참한 죽음 중 하나였다.

자신의 최후에 대해 들을수록, 알렉스의 얼굴은 점점 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건... 아... 안 돼."

"물론, 길게 고통 받지 않도록 해 줄 수도 있어. 네 스스로 마력 용해로의 가동을 멈춘다면."

"...!"

"왜? 설마, 아직까지도 마인 협회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게 남아 있는 거냐? 어차피 죽으면 다 부질없을 텐데?"

최후까지 지조를 지키면 마인 협회에서 초상화라도 걸어 두고 1년마다 제사라도 지내 줄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알렉스의 가치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버림패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위험한 일에 쓰다가 필요 없어지면 새로운 놈으로 갈아치우겠지.'

그러니 그런 놈들을 위해 충성을 다할 필요는 없다.

그냥 배신하고 편해지라고.

그편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알...겠다. 약속. 쿨럭! 약속은...."

"지킬 테니, 마력 용해로나 멈춰."

"...."

결국, 알렉스는 결심한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알렉스가 '마력 용해로'를 파괴합니다!]

['피의 결계'가 해체됩니다!]

저택을 옭아맸던 마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손님들의 신음 소리 또한 잦아들었다.

"이제... 이 빌어먹을 고통...에서 날 해방시켜 줘. 커억! 쿨럭! 쿨럭!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아."

알렉스가 애걸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표정은 더욱더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폐부 깊숙이 달군 꼬챙이를 들쑤시는 느낌일 거다.

"미안하지만, 내가 살인을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지."

"...뭐?"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법이니까, 차마 내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더라고."

"그,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알렉스가 진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느려 터진 손으론 진혁의 바짓가랑이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쓰레기에게 어울리는 최후군.'

아니, 1시간도 너무 짧다.

녀석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악행을 생각하면 말이다.

네크로맨서의 전직 퀘스트. 그걸 성공한 것만으로도 일말의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가능하면 최대한 길고 고통스럽게 죽어라.

무고한 사람들로 인체 실험을 하고, 죽은 사람들을 능욕해 언데드로 만든 죄를 사죄하면서.

55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1)

"아, 안... 돼. 제발, 제발...!"

진혁은 절규하는 알렉스를 뒤로한 채 원형 극장의 안쪽으로 되돌아갔다.

굳이 최후까지 지켜볼 이유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후두둑!

쿠쿵!

마력 용해로의 여파로 인해 잔해들이 불규칙적으로 떨어졌다.

위협적이진 않지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싶진 않았다.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진혁의 몸 주위로 둥그렇게 펼쳐진 얼음막.

눈꽃 문양이 그려진 얼음 방패가 낙석들을 튕겨냈다.

진혁의 시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로 향했다.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워낙 육체‧정신적으로 큰 데미지를 입은 탓이다.

'덕분에 추가 소득은 쏠쏠하게 올릴 수 있겠어.'

재난에 가까운 상황 속에 낙찰된 경매품을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바위 파편 아래 깔려 있는 175회차의 보물들. 이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진혁은 그 사이를 거닐며 느긋하게 파밍을 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해 줬으니 당연히 이 정도 대가는 받아야지.'

오히려 너무 싸게 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목숨값을 겨우 몇 백 억 정도로 퉁쳐 줬으니까.

물론, 물에 빠진 걸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도 나올 순 있겠지만.

상관없다.

'정신이 들었을 땐 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테니.'

무엇보다 기절해 있는데, 어느 놈이 범인인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기껏해야 이번 참사를 만든 마인 놈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일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룰루랄라.

진혁이 콧노래를 부르며 잔해를 뒤적였다.

꽤나 많은 보물들이 파손됐지만, 다행히 가장 좋은 것들은 무사했다.

'완전히 보물 던전 안에 들어온 기분이군.'

이번 경매의 최고 인기품이었던 '어룡의 심장'과 '알 수 없는 철광석'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만든 금고' 또한 손에 넣었다.

겸사겸사 엘리스가 출품했던 왕관도 다시 회수했고.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진혁은 품 안에 넣어 놨던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회랑에서 얻은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였다.

레플리카나 탑 외에 존재하는 재료들로는 몇 십 톤 이상이 저장되는 플래티넘이나 다이아 등급까진 나오지 않겠지만,

'당장 몸에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은 막아 줄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어룡의 심장(A)', '알 수 없는 철광석(B)', '미켈란젤로가 만든 금고(C)'가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용량 아공간 인벤토리(골드 등급 +5000kg) 조합에 성공하셨습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노란색을 띤 아공간 인벤토리가 나타났다.

드디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쑤셔 넣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스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진혁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벌써 정신이든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잔해 더미에서 동그랗게 뜬 토끼눈과 마주쳤다.

어린 남자아이였다.

잔뜩 겁먹은, 그러면서 어딘지 모르게 동경과 감격에 가득 차 있는 눈빛을 가진.

'...애였나.'

진혁이 경계심을 풀었다.

"꺼내 줄 테니까 잠시만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네? 네."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서걱!

푸른빛을 머금은 단검이 단숨에 잔해더미를 잘라 버렸다.

잘린 파편이 무너지는 각도까지 계산한 터라 남자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고, 고마워요. 형."

"뭘, 이 정도 갖고."

진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형이 그 괴물들이랑 나쁜 놈 해치워 준 거 맞죠?"

"응?"

"아까 정신을 잃기 전에 봤어요. 마치, 마블 영화에서처럼. 진짜로... 진짜로 너무 멋있어요."

마블 영화라.

타노스랑 싸우는 어벤저스 정도로 생각한 건가.

뭐, 애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쓸어버리는 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을 테니까.

"저도 언젠간 형 같은 강한 플레이어가 돼서 탑에 오르고 싶어요. 그래서 막, 나쁜 놈들이 사람들 죽일 때 히어로처럼 나타서 구해 주고... 그렇고 싶고."

으음.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살짝 낯 뜨겁긴 하네.

순수해서 그런지 감정 표현에 필터링이 없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덴 그 어떤 이해타산이나 가식이 섞여 있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피식 웃은 진혁이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깨어날 경우를 대비해 이제 그만 가 봐야 했다.

그전에 한 가지.

"음, 나중에 사람들이 누가 그랬는지 물으면, 비밀 지켜 줄 수 있어?"

진혁이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폈다.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히어로는 정체가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소년도 생긋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마주 댔다.

***

시련의 탑 3층엔 아직까지 플레이어들이 그 끝을 가보지 못한 장소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4층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3층의 보스 방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이곳.

'증오의 성당'이라 불리며, 수없이 많은 공격대들을 절망시킨 미궁이다.

하지만.

그 악명과 다르게 사실 이 미궁은 오래 전에 공략이 끝났었다.

바로 마인들에 의해서 말이다.

"젠장, 여기 보안 장치는 왜 이렇게 까다롭게 설치해 놓은 거야? 이러다가 우리까지 당하겠네."

적발에 늘씬한 체구의 여자가 툴툴댔다.

말투에서 짜증이 잔뜩 묻어났다.

그야 그럴 수밖에.

플레이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겹겹이 설치해 둔 결계와 함정들.

거기에 수많은 고위 언데드 몬스터들은 이곳 지리에 익숙한 마인들조차 긴장을 놓을 수 없게 했다.

"쫑알쫑알 불평은 그만해라, 멜레나. 가뜩이나 그 멍청한 의사 놈 때문에 심기가 좋지 않으니까."

멜레나의 옆에서 걷고 있던 동양계 남자가 혀를 찼다.

덩치가 크진 않지만, 몸에 풍기는 차가운 기운만큼은 대형 몬스터 못지않았다.

"리챠오. 내가 네 녀석 심기가 편한지 불편한지까지 신경 써 줘야 해?"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재밌네, 그 말. 마치 네놈이 나보다 강한 것처럼 보이잖아?"

멜레나 역시 리챠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당장 무기를 꺼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두 사람 다 거기까지만 해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검은 두건을 쓴 남자다.

멜리나와 리챠오와는 달리, 오른쪽 어깨에 붉은색 역십자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로마 숫자 Ⅶ이 덧그려져 있었고.

"...알겠습니다."

"쳇!"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멜레나와 리챠오는 탑 밖에서 벌써 10년 동안이나 함께 임무를 수행해 온 사이였지만, 언제나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하긴, 마인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는 것부터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종말론자들, 살인하기 위해 용병이 된 쾌락 살인마, 돈을 위해서라면 인간성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괴물 등.

법과 질서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었으니까.

"헌데, 아무리 알렉스의 실력이 떨어진다 해도 재물이 그렇게 많은 상황에서도 졌다는 게 이해되질 않습니다."

리챠오가 입을 열었다.

"뭐, 강진혁이란 놈도 고인물 중 하나겠지. 그래 봤자 널려 있는 랭커들이랑 비슷비슷한 수준일 테지만."

"방심하지 마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높은 곳까지 갔던 놈일 수도 있으니까."

두건을 쓴 남자의 말에 두 사람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에이 설마. 간부들이 탑의 20층까지 간 것도 미친놈 취급 받았는데. 그것보다 높이 갔다고?"

"저도 조금 과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야 인터폴이나 CIA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가상현실 세계인 [시련의 탑]을 골랐으니, 그나마 남들보다 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지만...."

"맞아. 다른 놈들은 그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잖아? 짭새들 눈을 피해 가상현실 속으로 숨어들어갈 일 자체가 없을 테니까."

[시련의 탑]이 출시된 지 11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3년도 안 돼 게임을 접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극악의 난이도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정도를 넘어선 것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나아지는 맛이라도 있어야 지겨움을 견디지.

목적도 없이 반복되는 따분함에 인생을 던져 버릴 멍청이가 있을 리가.

하지만 왜일까.

남자의 얼굴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자신을 마인 협회의 간부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들어 준 직감이자 본능.

그리고 그걸 넘어선 두려움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다.

강진혁이란 놈을 결코 낮잡아봐선 안 된다고.

방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거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너희 둘이 캐드릭과 함께 가라."

만에 하나 있을 가능성마저 짓밟으면 된다.

***

시련의 탑 3층의 마지막 관문.

4층으로 가는 유일한 길 앞에 진혁이 섰다.

"후우...."

길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준비는 전부 끝났다.'

이유리에게 부탁했던 아이템들은 아공간 인벤토리에 전부 넣어 뒀고 몸의 컨디션과 마력도 최상의 상태로 만들었다.

남은 건, 보스전에 앞서 자신만의 방송 채널을 개설하는 것뿐.

'미래를 생각하면 코인을 최대한 많이 모아 놔야 해.'

24시간 동안 가장 먼저 본 영상만 조회수가 카운팅된다는 조건 때문에 이 바닥은 곧 심각한 레드오션이 될 것이다.

잘 나가는 놈들은 코인을 쓸어 담을 수 있지만, 네임드가 아닌 플레이어는 백날 해도 조회수 10을 가져가기도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전에 자리를 잡아 놔야만 한다.

그리고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

경쟁자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오늘 하루만 좀 고생하자.'

이번 보스 레이드에서야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기 위해 방송을 켰지만, 진혁은 앞으로 가능한 한 생방송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내보내는 것은 여러 의미로 위험했기 때문이다.

'첫 방송에서 모두에게 똑똑히 각인시킬 수만 있다면, 이후에는 동영상을 올리는 것으로 대체해도 충분해.'

그만큼 첫 번째를 잘 닦아 놓으면 이후가 편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채널명을 생각하던 진혁에게 갑자기 아프고 쓰린 기억이 떠올랐다.

'티모 대령은 안 돼.'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그 악몽에선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진혁이 손가락을 잘근 깨물었다.

시련의 탑에 관해서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딱 하나.

작명 센스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질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고민하던 진혁의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언노운(Unknown)."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

그러자.

[채널 이름을 '언노운(Unknown)'으로 하시겠습니까?]

확인을 묻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래. 그걸로 할게."

리바린토스 미궁을 클리어했을 때, 신상 보호를 위해 시스템은 언노운이라는 코드네임을 권했었다.

'알려지지 않은 자'라는 뜻을 지닌 단어.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아서 그러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꽤나 마음에 드는 이름 같다.

'실제로 가면 뒤에 정체를 숨긴다는 게 주요 콘셉트니까.'

[개인 채널이 만들어졌습니다!]

[채널명 '언노운(Unknown)'!]

[방송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각 층의 보스몬스터와 싸울 경우에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BJ 등급: 일반 (수수료 90% 적용)

시청자 수: 0/1,000

구독자 수: 0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다 되네."

과거에는 실시간 스트리밍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다.

워낙에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은 탓이었다.

사실상 인생에 있어 첫 생방송.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시련의 탑 3층 보스전: 오늘 방송 처음 킨 고인물이 어떻게 공략하는지 보여 드립니다.>

제목은 이렇게 걸어 두면 어그로는 충분히 끌 것 같고.

'그럼, 이제 슬슬 가 볼까.'

진혁이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가면이 제대로 씌어졌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저벅.

그리고 일렁이는 게이트 너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56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2)

우우웅!

암전된 시야가 돌아왔을 땐,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고풍스러운 동양풍 절을 연상케 하는 장소.

이곳이 바로 3층의 끝이자 이번 레이드의 주 무대가 될 격전지였다.

[3층 '심장 없는 군대'의 영역에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했습니다.]

보스몬스터의 방에 진입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상태창.

이걸 보자, 드디어 '그 녀석들'을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며칠간은 정신없이 바쁘겠군.'

난전은 자신이었지만, 이번 레이드에선 그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요구됐다.

저벅.

진혁이 절 외곽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놈들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선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었다.

***

'역시, 여기 단풍이 탑 내에서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니까.'

절경이라는 건 바로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 정도로 몇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활한 단풍 숲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단순히 단풍 구경이나 하려고 외각을 겉 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이쯤에 있었는데....'

진혁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나무들.

그중에서 다른 것과 다른 특별한 나무가 있다.

'찾았다!'

진혁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인면목(人面木)이라며 불리며, 옹이구멍 대신 사람의 안면을 갖고 있는 거목.

커뮤니티에도 몇 번 올라왔던 터라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나무였다.

진혁이 나무에 다가가려던 바로 그때.

['하꼬탐방전문'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하꼬탐방전문: 방제에 낚여서 이 몸이 왔다. 대형 길드 공략 예정에도 없는 보스방에 어떤 호구가 온 거냐?

첫 시청자가 입장했다.

하지만 진혁의 얼굴을 확인한 시청자가 곧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하꼬탐방전문: 하, 이 새끼도 가면 쓰고 어그로 끄네. 요즘 왜 이렇게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컨셉 잡은 놈들이 많지? 난 간다 ㅂㅂ.

['하꼬탐방전문' 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음....

요즘 가면을 쓴 놈들이 부쩍 늘은 모양이다.

저토록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이해는 한다.

어그로 끄는 것이야말로 초보 방송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었으니까.

그리고 그중에서도 회랑을 공략한 가면을 쓴 플레이어라면, 확실히 모두가 눈독들일 만한 캐릭터였다.

비슷한 가면을 구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때.

['건빵이 미래다'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백수 위에 트수'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또 다른 시청자들이 들어왔다.

이번엔 두 명이다.

그것도 방송 끈 좀 길다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건빵이 미래다: 엌ㅋㅋ 뷰튜브 알고리즘 무엇? 3층 공략 방송이라 연관 검색에 뜬 건가?

-백수 위에 트수: 나도 그거 보고 들어옴ㅋㅋ 역시 킹튜브!

-건빵이 미래다: 와. 근데 솔플로 도전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똑똑! 저기요. 미쳤습니까 휴먼? 여기 100인 공격대가 와도 쩔쩔 매는 곳인 거 hoxy 모르심?

-백수 위에 트수: 길을 잃은 어린 고라니라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 주세요! 특별히 나가는 길 알려드림.

비웃음이 섞인 대화가 오고갔다.

'귀엽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시청자들이 떠드는 걸 보니 예전에 BJ 했던 생각도 나고, 간만에 추억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 이런 게 방송이지.'

시청자는 처음 보는 뉴비 BJ를 놀리지만.

BJ는 실력으로써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는다.

그렇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이 녀석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말이다.

진혁은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인면목의 코앞으로 다가갔다.

-건빵이 미래다: 어? 저거 인면목이잖아?

-백수 위에 트수: 하긴 아직까지 간혹 있긴 하더라. 로또 바라고 인면목이 내는 탑의 퀴즈에 도전하는 놈들.

-건빵이 미래다: 뷰튜브를 아예 안 보는 사람인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하는 거 봤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인면목이 내는 3가지 퀴즈를 모두 맞혀야 보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간혹 가다 한 문제를 맞히는 사람이 나올 뿐 2문제 이상 맞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탑을 오르는 것보다 탑 내부를 탐험하는 걸 즐기는 탐험가 플레이어들조차도 말이다.

때문에, 이 나무는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오늘 진혁이 오기 전까지는.

쿠쿠쿠쿠쿠!

인면목이 몸을 뒤척인 건 바로 그때였다.

"끌끌끌! 모처럼 만의 인간이로구나."

호박처럼 물든 눈동자가 진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동시에 기괴하게 뒤틀린 입에서 무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놈도 나의 퀴즈를 풀기 위해 온 것이냐?"

"그런 셈이지. 그럼 어디 한번 맛깔 나는 문제 좀 내 봐."

읏차.

진혁은 푹신하게 쌓여 있는 낙엽에 몸을 뉘었다.

푹신해서 좋다. 천연 매트리스에 파묻히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으론 귀를 후비적거리는 건 덤이었다.

그 모습에, 인면목이 괴성을 내질렀다.

"뭐, 뭐 하는 짓거리냐?"

"응?"

"감히 누구 앞이라고 함부로 그딴 버릇없는 자세를 취하냔 말이다! 내 기분을 거슬렀다간 아예 손도 대지 못하는 수준의 문제를 내 버릴 수도 있다!"

"아... 이거? 미안, 나는 몸이 편해야 집중이 잘되는 스타일이라서, 신경 쓰지 말고 문제나 내."

"이이이익!"

-백수 위에 트수: ㅋㅋㅋㅋㅋㅋ 와. 컨셉 한번 오지게 잡았네.

-건빵이 미래다: 맨날 플레이어들 놀려대는 인면목이 대노하는 거 첨 봄.

['피자탕수육 존맛탱'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피자탕수육 존맛탱: 이 방은 뭐냐?

-백수 위에 트수: 오. 새로운 시청자네. 꿀잼각 나오는 방임.

-건빵이 미래다: ㄹㅇ 좀 독특함. 플레이어가 쌍마이웨이 컨셉임.

['새영언환'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백수 위에 트수: 오 또 들어왔다.

-건빵이 미래다: 이야. 이 방 잘 나가네. 근데 님 닉네임 무슨 뜻임?

-새영언환: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라구!

-피자탕수육 존맛탱: 이건 또 뭔 컨셉이냐? 낮술 먹고 옴?

조금씩 늘어가는 시청자 수.

시작이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들어왔던 시청자들이 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시청해 주는 게 가장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 방송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해 가며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때.

"좋다. 만약 네놈이 세 개의 질문에 모두 대답한다면, 내가 가진 단풍잎 중 원하는 걸 주겠다."

인면목이 분노를 삼키며 대답했다.

쿨한 척 말하는 것치곤 목소리가 너무 떨리는 거 아니냐?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게 너무 훤히 보이잖아.

"나중에 가서 딴 말 하면 안 된다? 분명히 네가 갖고 있는 단풍잎 중에 내가 원하는 걸 준다고 했어?"

"나를 뭐로 보고! 나무 정령의 명예를 걸고 한 번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흐음. 그렇게까지 말하면 믿어 주지."

정령의 맹세까지 했으니, 나중에 가서 말을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첫 번째 문제를 내겠다. 해수종인 '켈고른'이 서식하는 수심의 최적 깊이와 최적 온도에 대해 대답해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차 따위가 있어선 안 된다."

시련의 탑 7층에 위치한 해구(海丘).

그곳에서 서식하는 몬스터가 바로 켈고른이다.

-백수 위에 트수: 와 첫 번째 문제부터 미쳤네. 켈고른이란 몬스터, 얼핏 들어보긴 했는데. 수심 온도를 어케 아누.

-건빵이 미래다: 정답! 존나 깊은 곳에 서식한다.

-피자탕수육 존맛탱: 얼음 물속이니까 차가울 듯. 한 5도? -5도? 아 모르겠다.

-새영언환: 그냥 틀리라고 낸 문제잖아 이건ㅋㅋㅋ.

시청자들이 질렸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하지만.

"깊이는 175m 수온은 1.5도."

진혁은 곧바로 답을 말했다.

'거기서 스노쿨링 한 게 몇 번인데, 그것도 모를까.'

한창 디즈니의 인어공주에 감명받아서 인어 코스프레를 한 뒤, 프리 다이빙을 지겹도록 했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수심과 수온은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조류의 흐름까지 전부.

"...."

인면목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할 말을 잃은 듯 입이 뻥긋거렸다.

"다음."

"아직...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정답인 거 아니까 다음 거나 내. 머리 좀 써서."

"...알겠다. 그럼 두 번째 문제를 말하지. 펠리아니의 해면체를 플레이어가 복용할 수 있는 방법...."

"'햇빛 사막의 소금'이랑 '2차 전식을 끝낸 프리스트가 만든 성수'를 냄비에 함께 넣고 겨울 동굴에서 자라는 백색 나무를 땔감으로 5시간 동안 조리하면 돼. 약불로 아주 천천히."

"...."

이번에도 정답이다.

인면목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로 까다로운 문제만 선별해서 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너무나 쉽게 맞혀 버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

인면목에게 주어진 출제 범위는 탑의 10층까지.

허나, 형평성이나 규칙 따위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3층의 가장 위대한 고목이자 수많은 지식을 망라한다는 자존심이 짓뭉개질 위기였으니까.

"마지막 문제다! '하늘 고원'의 자이언트 이글은 일 년 단 한 번만 짝짓기를 한다. 그게 몇 월 며칠이냐?"

-백수 위에 트수: 하늘 고원? 그런데도 있어?

-건빵이 미래다: 나도 처음 들어봄. 자이언트 이글이라는 몬스터도.

-피자탕수육 존맛탱: 와. 인면목. 저거 다 맞힐 것 같으니까 이상한 문제 낸 것 같은데?

-새영언환: 전부 모르는 걸 보면, 탑 저층에 있는 지역이 아닌 듯. 여기까지네.

그렇다.

하늘 고원이 있는 곳은 탑의 15층.

게다가 15층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에, 내로라하는 고인물들조차 가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이거라면 결코 맞히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저 건방진 인간도 좌절하고 또 절망할 것이다.

그게 당연하면서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래,

분명히 그래야 했는데....

"11월 17일. 탑에 첫눈이 내릴 때 말이군."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대답이 들렸다.

"어, 어떻게.... 대체, 대체 네놈은 누구냐? 누구길래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느냔 말이다!"

인면목이 온몸을 마구 흔들었다.

쿠쿠쿠쿠!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수많은 단풍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탑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고인물이야."

"웃...기지 마라. 고작 인간 따위가 내 문제에 전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흥분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면 네가 모르는 사실을 하나 알려 줄 테니까."

"내가 모르는 거라고?"

"그래. 보아하니 자이언트 이글이 1년에 한 번만 짝짓기를 한다고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 아냐? 자이언트 이글은 개체수가 부족해지면 특별식으로 영양을 보충한 다음에 짝짓기를 두 번 할 수 있다는 거?"

"지, 진짜로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대체 어떤 걸 먹고... 가 아니라. 커흠! 커흐으음!"

인면목이 다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늦었다.

이미 속에 있는 본심이 튀어나왔으니까.

-백수 위에 트수: ㅁㅊ! 나 이 퀴즈 돌파하는 사람 처음 봤음.

-건빵이 미래다: 와, 이게 말이 돼? 무슨 네이버 지식인도 아니고. 완전히 줄줄 꿰고 있잖아?

-피자탕수육 존맛탱: 완전 썩은물 같은데. 지린다. 진짜 이 방 들어온 게 신의 한 수인 듯.

-백수 위에 트수: ㅇㅈ. 덕분에 처음으로 보상 얻는 거 볼 수 있을 듯.

-새영언환: 과연 어떤 걸 고르려나.

인면목의 퀴즈를 통과하면 녀석이 보유한 특수 아이템 중에 하나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

붉은색 단풍은 화염 속성을 부여하고.

노란색 단풍은 방어력을 강화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초록색 잎은 이동 속도를 증가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건빵이 미래다: 당연히 공격력을 올려 주는 붉은 단풍이지. 공격대도 저 단풍 얻어서 4층 공략하려고 악착같이 퀴즈에 도전했잖아.

-새영언환: 나는 차라리 노란 단풍 고를 듯. 그놈들한테 버티려면 방어력이 필수지.

-백수 위에 트수: ㄴㄴ. 초록 잎으로 이속 올려서 아예 안 맞으면 그만임. 이속! 이속! 이속! 언노운 형아, 이속으로 가즈아!

-건빵이 미래다: 남자는 닥공! 닥공! 닥공!

-새영언환: 어허 무슨 소릴! 방어야말로 상남자의 자존심이오!

채팅창이 아주 난리가 났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

자신들의 채팅 또한 공개될 게 뻔하니 당연히 흥분될 수밖에.

"어서 말해라. 이중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인면목이 재촉했다.

시청자들의 시선 또한 집중됐다.

어느 걸 선택하느냐에 따라 3층 보스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 같은 단풍잎은 네 머리 감추는 데나 많이 쓰고. 검은색 잎 있지? 그거 내놔."

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번에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어 버렸다.

57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3)

"거, 검은색 잎이라고?"

인면목이 말을 더듬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건빵이 미래다: 뭐야?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잎은 3가지 아니었어? 검은색 잎은 대체 뭐임?

-백수 위에 트수: 인면목이 놀라는 걸 보면, 히든 보상 같은데?

-피자탕수육 존맛탱: 와, 저런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커뮤니티에서도 저런 이야기는 아예 없었는데.

-새영언환: 석유급 고인물이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말이 되긴 해.

-건빵이 미래다: 말이 되냐? 석유급이 왜 솔플로 다님? 대형 길드에 소속되어 있겠지.

-새영언환: 왜? 하나 있잖아.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홀로 다니는 고인물이.

-백수 위에 트수: 설마.

-피자탕수육 존맛탱: 어...!?

그래. 사실 한 명이 있기는 하다.

가면을 쓴 채 홀로 회랑을 클리어했던 최강의 플레이어가.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워낙에 수천 명의 가짜들에게 낚인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 사실이라면?

정말로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그 플레이어의 채널에 온 거라면?

-새영언환: 뭣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잖아.

탑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히든 보상까지 모조리 꿰고 있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이 정도로 탑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다.

의심은 머지않아 확신으로 변했다.

-피자탕수육 존맛탱: 허어어얼? 레알로 찐이라고?

-백수 위에 트수: 우ㅗ망라아아아. 언노운 형님 진짜로 팬이에요! 회랑 공략 영상 하루 12번씩 다시 보고 있습니다.

-건빵이 미래다: 우선 빤스부터 벗고 인사 오지게 박겠습니다.

180도 달라진 채팅창.

하지만, 진혁은 안달이 난 채팅들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런 반응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 검은 잎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넘기기나 해."

"하지만... 그건!"

인면목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부패' 효과가 있는 검은 잎.

허나, 검은 잎을 만들기 위해선 나머지 잎들을 모두 말려 죽여야 한다.

두 번 다시는 플레이어들과 퀴즈를 낼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변명이나 늘어놓지 마라.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갖고 있는 건 무엇이든 주겠다고."

정령의 명예니, 약속이니 하면서 큰소리쳤던 걸 벌써 잊은 건가?

에이 설마.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데, 말을 바꾸진 않겠지.

"...크윽. 부탁이다. 제발 그것만큼은. 대신, 다른 게 있다면 뭐라도 해 주겠다."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검은 잎이야."

생방송 스트리밍을 하는 이상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잎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탑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퍼질 때쯤엔, 퀴즈에 합격하는 사람 또한 나오게 될 터.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지.'

이후에라도 다른 사람이 속성 마법이 부여된 단풍잎을 얻게 해 줄 수는 없다.

'내가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은 다른 사람도 사용하지 못해야 하니까.'

그게 지극히 정상적이고 올바른 플레이다.

진혁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타협의 여지 따위는 없다.

결국.

파스스스....

인면목의 머리 위를 뒤덮었던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모두 검게 타들어 갔다.

[인면목이 낸 3가지 질문에 모두 답하셨습니다!]

[검은 잎(×1280개)을 획득하셨습니다!]

[검은 잎]

입수 난이도: AAA

내용: 무기나 방어구에 사용시 '부패' 속성의 특수 효과(피격시 3분당 대상 전체 체력의 1%만큼 추가 피해를 가함)가 부여됩니다. 시전자는 피해를 입지 않으며, 오직 적에게만 부패 효과가 적용됩니다.]

좋아.

드디어 마지막 퍼즐까지 전부 모았다.

"...."

진혁은 1000년은 더 늙어 버린 인면목을 뒤로한 채 절을 향해 몸을 돌렸다.

***

고적한 분위기를 간직한 절.

진혁은 동서남북 총 4개의 입구 중 동쪽 입구를 선택했다.

-건빵이 미래다: 동쪽은 위험한데. 여기가 가장 난이도 극악 아님?

-백수 위에 트수: ㅇㅇㅇ. 다른 입구는 그나마 4층짜리 석탑까지라도 구경할 수 있는데, 동쪽은 입구부터 지옥임.

-피자탕수육 존맛탱: 왜 일부러 가장 어려운 걸 고른 거지?

굳이 가장 어려운 곳을 고른 이유?

별거 없다.

'동쪽이 가장 재밌으니까.'

그렇기에 이 루트를 가장 많이 애용했었다.

수백 번, 수천 번,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로 도전하고 또 도전하다보니 나중에는 싫어도 몸이 기억하게 되더라.

어떻게 하면 보스에게까지 갈 수 있는지 말이다.

진혁이 붉은빛이 도는 단검을 꺼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쿠!

입구 양쪽에 솟구쳐 있던 솟대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침입자에 반응해 방어기제를 발동하려는 것이다.

"그오오오!"

"그르르...."

벽을 따라 도열해 있던 석상들이 움직인 건 바로 그때였다.

전신이 바위로 이루어진 1m 크기의 석상들이 진혁을 바라봤다.

-건빵이 미래다: 젠장, 역시 나왔네. 저 빌어먹을 석상들.

-백수 위에 트수: 생명석 파괴하려면 더럽게 빡세긴 하지.

-피자탕수육 존맛탱: 손톱만 한 크기인데, 몸 안에서 계속해서 움직이니까 석상 자체를 아예 잘게 박살내지 않으면 찾아내는 게 불가능함.

석상들이 까다로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명석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생명석 자체가 어디 있는지 모를뿐더러 계속해서 움직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석상 자체의 공격력과 이동 속도 또한 치가 떨릴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총 일곱 개의 석상이 진혁을 둘러쌌다.

주먹을 움켜쥔 채 조금씩 포위망을 좁혔다.

쿠웅!

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석상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온다.'

진혁이 가볍게 팔다리를 풀었다.

정교하게 짜인 합격진을 파훼하려면, 놈들의 호흡을 끊어야 한다.

먼저 오른쪽.

상단을 노리는 공격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지만, 무시하지 못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건 피해야 한다.

진혁이 무게중심을 낮췄다.

부우웅!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번엔 허리를 노린 발차기가 날아왔다.

정교하면서 허를 찌르는 이격(二擊)은 대신 위력이 떨어진다.

카아아앙!

진혁이 단검을 세워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피해야 할 것과 막아야 할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격 속에서 진혁은 천천히 상대의 호흡이 무너지는 순간을 찾기 시작했다.

-건빵이 미래다: 와 저걸 다 피하네. 미쳤다, 움직임.

-백수 위에 트수: 이 정도면 거의 패턴을 모조리 다 암기하고 있는 수준인데?

-새영언환: 역시 지금까지 고인물이라고 어그로 끌 놈들이랑은 아예 수준이 다른 듯.

-피자탕수육 존맛탱: 5252, 믿고 있었다구!

이대로라면 동쪽 문의 입구를 돌파하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물론, 혼자인 만큼 생명석을 파괴하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성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믿기 힘든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광경에 시청자들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건빵이 미래다: 이거... 실화냐?

-백수 위에 트수: 다시 보기 기능 없지 여기?

-피자탕수육 존맛탱: 대체 내가 뭘 본 거임? 지금?

석상의 움직임이 멈췄다.

곧바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파편들이 후두둑 무너져 내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단 하나.

생명석이 파괴되었을 때뿐이다.

콰득.

진혁이 석상의 어깨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러자 반으로 잘린 생명석이 보였다.

'생명석은 놈들이 공격하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가려는 성질이 있지.'

오른팔로 공격하면 왼팔로 이동하고 오른다리로 공격하면 왼다리로 움직인다.

어떻게든 약점을 숨기려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확한 위치는 돌의 미묘한 흔들림과 지겹도록 쌓아온 경험으로 찾아냈다.

'예전에 개고생했던 게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었어.'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덕분에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시간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싸움이 끝났다.

고작 3분 만에.

***

[현재 참여중인 시청자 수: 38,350명]

방송을 킨 지 30분도 안 돼 벌써 3만 8천명이란 시청자들이 모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첫 방송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더욱더.

-고인물 감별소: 보면 볼수록 소름 돋긴 하네. 진짜로 보스전도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백수 위에 트수: 가능하지. 내가 이 형 방송 키자마자 보기 시작했는데, 그냥 믿고 보게 됨.

-dead998: 에이, 대형 길드들의 정예 공격대도 실패한 걸 혼자서 클리어 한다고? 애초에 솔플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레이드임.

-빅파이: 나도 이거 동감. 탱, 광딜, 어그로, 힐 등등 각자의 역할이 괜히 나뉘어 있는 게 아니지.

-마감인생: ㅇㅈ. 게다가 아직 네임드 몬스터들은 나오지도 않았음.

혹시 하는 기대와 어림도 없다는 비관 섞인 의견들이 교차했다.

그때.

"믿건 말건 상관없는데,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쫑알거려 줬으면 좋겠어."

진혁이 성가신 듯 머리를 긁적였다.

-빅파이: ㅇㅇ? 설마 우리한테 한 말임?

-응가맛 카레: 에이, 설마.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시청자한테 그랬겠음?

-분노조절 잘해: 그치. 시청자 무시하면 구독자 떡락하는 거 저 사람도 알 테니까.

"너네한테 한 말 맞아."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해라.

시청자들 기분 따위 맞춰 줄 생각 없으니까.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되고 보고 싶으면 봐도 돼. 그런데 한 가지만 명심해. 이 채널의 주인은 너희가 아닌 나란 걸."

꼭 그런 플레이어들이 있다.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시청자들에게 온갖 아양을 떠는.

그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들어주려고 하고 뭐든지 맞춰 주면서 플레이어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버린다.

물론, 조회수는 확실히 오른다.

자신들이 원하는 걸 모조리 들어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렇게 질질 끌려 다녔다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게 된다.

'멍청한 놈들이지.'

주객이 전도가 된다면, 조회수가 아무리 높아 봐야 소용없을 터.

진혁은 그런 호구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채널을 운영할 생각이었다.

고인물만이 아는 공략법과.

압도적인 실력.

이 두 가지가 받쳐 준다면....

'시청자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양질의 콘텐츠만 제공해 준다면 시청자는 알아서 붙을 테니까.

'컨셉을 유지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

그래, 그것이야말로 '언노운'이란 플레이어가 가져야 할 핵심이었다.

그리고 진혁의 예상처럼.

-강호두: 이 형 컨셉 오지게 잡았누ㅋㅋㅋ.

-마감인생: 와 겁나 시크해. 쌍마이웨이식인가?

-백수 위에 트수: 원래 기분 나빠야 정상인데, 뭔가 기분이 나쁘지 않음. 뭐지 이거? 내가 변태인가?

-관짝송둠칫둠칫: 하앍하앍. 날 더 괴롭혀 줘.

-새영언환: 솔직히 자존심 부릴 만하지. 난 오히려 신선해서 더 좋은 듯.

시청자들은 능력 있고 까칠한 플레이어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채팅창이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이건...?'

진혁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58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4)

절의 북쪽에 위치한 문.

그곳에서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다.

대형 길드의 공격대는 아니다.

혼자 하겠다고 회담에서 못을 박아 놨으니까.

우우우웅!

끈적끈적 피부에 달라붙는 기분 나쁜 기운.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다.

네크로맨서, 정확히는 마인 협회에서 온 게 틀림없었다.

'역시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가.'

완전히 꼬여 버린 마인 협회의 일정을 풀어내기 위해 캐드릭이 부하들을 이끌고 직접 이곳에 왔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방송, 조금 있다가 킬 수 있으면 다시 켜겠습니다."

진혁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dead998: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내가 고자가 아니라... 갑자기 급방종이라니!

-백수 위에 트수: 형. 지금 시청자수 떡상하고 있는 거 안 보임? 물 들어오는데 노 저어야지.

-피자탕수육 존맛탱: ㄹㅇ. 100만 뷰튜버 각 세게 나왔는디.

-고인물 감별소: 이 중요한 타이밍에 방종을 때리는 비제이가 있다?

-새영언환: 최소한 몇 시에 다시 켤 건지나 알려줘.

시청자들은 이제 막 방송에 재미를 붙이고 진혁의 콘셉트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발이 거셀 수밖에.

"몇 시에 다시 켤지는 나도 모르니까 알아서 들어오세요."

-dead998: 이런 식으로 구독 알림 설정을 유도한다고?

-피자탕수육 존맛탱: 까칠 컨셉 오지게 잡으면서 챙길 건 다 챙기려 하네.

-새영언환: 이기적인 모습 좋다. 고인물이라면 그래야지ㅋㅋㅋ

-고인물 감별소: 한 번 낚여 준다. 보스 레이드 기대하겠음.

그 채팅을 끝으로.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첫 번째 방송이 끝났다.

정신없이 빠르게 올라가던 채팅창이 멈췄다.

"생각보다 피곤하네."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BJ 생활 오래 하면서 방송은 꽤나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몇 십 명을 이끌고 하는 거랑 몇 만 명이 난리치는 건 레벨이 다르긴 다르다.

그래도 뭐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처음부터 유명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제 보는 눈이 사라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캐드릭과 놀아 줄 시간이다.

'제발 등골 빠지게 열심히 준비했으면 좋겠군.'

성격이 살짝 꼬여서 그런가.

남이 열심히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

그 대상이 쓰레기들이라면 더욱더 말이지.

***

절의 북문 '태화문(太和門)'.

내실로 가는 열쇠가 보관된 4층 석탑에 도달하기 위해, 수십 명의 네크로맨서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벌써 1시간 가까이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좀처럼 길이 열리지 않았다.

석상들의 방어벽이 워낙에 두꺼운 탓이었다.

"병력을 모아라! 한 점으로 돌파해야 한단 말이다!"

캐드릭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마력을 쏟아 붓고 있는데, 결과가 나오질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이대로 질질 끌리다간 보스한테 가기 전에 네크로맨서들이 전부 탈진해 버릴 판국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듀라한을 가장 앞선에 세워! 방어력이 높은 놈들이 어그로를 끌어 줘야 된다!"

"저주도 걸고, 디버프 있는 거 다 퍼부어!"

[캐드릭이 Lv5 '시체들의 밤'을 발동합니다!]

[요한이 Lv3 '약체화'를 발동합니다!]

[세츠나가 Lv2 '피로'를 발동합니다!]

"케에에엑!"

"키이이!"

언데드 군대가 거칠게 포효했다.

대부분 스켈레톤 워리어나 아처들이었지만, 간혹 듀라한급의 중형 몬스터들도 보였다.

'확실히, 보는 맛이 있네.'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팝콘과 콜라를 꺼냈다.

엄청난 규모가 서로 맞부딪치는 장관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나 다수를 부리는 데 특화된 네크로맨서의 집단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오오오!"

"쿠우우우!"

입구에서 쓰러뜨린 크기가 작은 석상들이 이곳엔 수백 기가 넘게 존재했다.

주먹과 다리를 휘두르던 그때와는 다르다.

갑주와 방패, 창으로 무장한 모습은 완전한 군대와 같았다.

바로 그때.

콰콰콰콰콰!

제1열이 격돌했다.

"크아아아!"

"그오오오!"

뼛가루가 날리고 바위 파편이 무너져 내린다.

서로 다른 군대.

하지만 상대를 쓸어 버리겠다는 목표만큼은 같았다.

피아를 식별하기 힘든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팽팽하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하게, 허나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호오. 설마 돌파하려나?'

의외로 네크로맨서들과 언데드 군대가 선전하고 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채 배수진을 친 사람들 같다고 해야 할까?

독기 어린 눈에선 집념마저 느껴졌다.

"흐음...."

그건 좀 곤란한데.

여기서 캐드릭이 열쇠를 얻는 건 별로 달갑지 않다.

물론, 열쇠 하나 얻는다고 해 봤자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 레이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나 하나만 족하니까.'

경쟁자는 일찍 제거해 버리는 게 답이겠지.

스윽.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상황이라면 몰라도 둘이 엇비슷한 상황이라면.

살짝만....

아주 살짝만 개입해도 팽팽했던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지리라.

'가장 아픈 곳부터 노려야겠군.'

어디를 찔러야 상대가 피눈물을 흘릴지는 이미 확인해 뒀다.

우우우웅!

진혁이 마력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전장에 새로운 변수가 끼어들었다.

"뭐, 뭐야?"

정신없이 흑마법을 사용하던 네크로맨서가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놀란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갑자기 측면에서 인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인간이 들고 있는 검에서 눈이 시릴 정도의 검강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쉴드를 펼쳐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는 확률이 1%라도 오른다.

순간, 네크로맨서의 몸 주위로 검은 막이 펼쳐졌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방어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물론, 그런 유리 한 장 따윈....

있으나 마나였다.

"...어?"

서걱!

깔끔하게 잘려 나간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목을 잃은 남자가 몇 걸음인가 비틀대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네크로맨서들이 진혁의 존재에 대해 눈치 챈 그로부터 몇 초가 흐른 뒤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진혁이 마력 소모를 아끼기 위해 검강을 거둔 타이밍에.

운명의 장난처럼, 네크로맨서들의 눈엔 고작 단검 하나 들고 설치는 불나방으로 보였다.

"기습이다!"

"플레이어인가? 몇 명이지?"

"혼자야. 주위엔 아무도 없어!"

"어이가 없네. 이 정도 수를 상대로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기껏해야 날벌레 한 마리쯤.

바로 정리하고 다시 전투에 집중하면 그뿐이다.

"죽여라!"

짜증 섞인 명령과 함께 스켈레톤 아처들의 활이 진혁을 향했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독, 냉기, 화염.

각기 세 가지 속성을 띤 마법 화살이 동시에 발사됐다.

그러나 화살이 명중하기 바로 직전.

쿠쿠쿠쿠쿠!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별의 가호'가 발동됩니다!]

격이 다른 마력이 솟구쳤다.

눈꽃 문양이 새겨진 얼음 기둥들이 날아온 화살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자욱한 얼음 가루들이 흩날렸다.

"크으윽."

"무슨 놈의 냉기가...."

네크로맨서들이 어금니를 깨물며 뒷걸음질 쳤다.

전신에 솜털이 전부 일어날 정도로 지독한 냉기다.

게다가 하늘에서 쏟아진 빛으로 인해 몇몇 상위 언데드들이 통제에서 벗어났다.

"크아아!"

듀라한들이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박살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이 미친놈들이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다시 사념 제어에 집중해. 신성력 때문에 이 녀석들 전부 이성을 잃었어!"

"사, 살려 줘!"

순식간에 질서와 통제가 무너져 버린 전장.

이건 캐드릭에게 보내는 선전포고다.

'초인종을 거하게 눌러 줬으니까. 어디 손님 접대 한 번 제대로 해 보라고.'

***

가장 후방에서 모든 병력을 지휘하던 캐드릭은 천국에 있다가 지옥으로 가는 듯한 기분을 제대로 느끼는 중이었다.

"저 망할 놈은 나타나도 꼭 최악의 타이밍에 나타나는 것이냐!"

승기는 이미 잡았다.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4층 석탑 안에 숨겨진 열쇠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목표까지는 단 한 걸음만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면을 쓴 플레이어로 인해 모든 계획은 완전히 진흙탕 속에 빠져버렸다.

"캐, 캐드릭 님. 3번째 거점까지 박살났습니다."

"일부러 거점들만 노리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스켈레톤이나 듀라한 정도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언데드 몬스터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둔 4개의 거점.

간이 마력 공급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소중한 중개소가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캐드릭이 괴성을 내질렀다.

정말로 열이 받는 건 단순히 아픈 곳을 찔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재 이곳엔 엄청난 자원을 투자해 만든 데스 나이트가 무려 세 기나 존재했다.

검강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와 보스 몬스터까지 처리하기 위해 갖고 온 비밀 병기였다.

문제는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 그걸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이쪽이야 이쪽!"

실컷 거점을 유린하던 진혁이 이번엔 석상들 쪽으로 갔다.

그리고 있는 힘껏 무언가를 불렀다.

바로 석상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대형급 종.

'모아이 석상'이었다.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날 잡을 수 있겠어?"

진혁이 상대를 도발한 뒤, 이번엔 언데드 한복판으로 파고들었다.

"그오오오!"

"그아아!"

얼굴만 있는 거대한 석상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언데드 몬스터와 네크로맨서들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으아악! 왜 이쪽으로 와, 이 미친놈아!"

"피해! 깔렸다간 즉사다!"

비명과 고함이 오고가는 바로 그 순간.

모아이 석상이 낙하했다.

콰아아앙!

운석이 충돌한 것처럼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밑에 깔린 언데드 몬스터들과 네크로맨서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물론.

이 일을 일으킨 당사자인 진혁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이야, 아프겠네. 아무리 뼈가 튼튼해도 이건 못 버티겠어. 칼슘 과다 섭취정도론 해결이 안 되는 레벨이구만."

골다공증 걸린 것 마냥 스켈레톤들의 뼈가 아주 가루로 변해 있었다.

역시나 일반 언데드로는 안 된다.

모아이 석상을 막으려면, 데스 나이트를 투입하는 수밖에 없겠지.

캐드릭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노리자니 병력 전체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고,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이런 식으로 천천히 말라 죽을 테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녀석에게 밝은 미래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캐드릭이 진혁을 향해 소리쳤다.

"이... 이 자식이. 대체 우리랑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게냐?"

"응?"

"우리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헌데,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초를 치냔 말이다!"

아.

그 이야기였나.

진혁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내가 먼저 침을 발라 놓은 장소거든."

그런데 너희들이 와서 침 발라 놓은 사탕을 삼키려 하니, 당연히 고춧가루를 뿌려야지.

"게다가 마인이라는 놈들이 무슨 초를 지니 뭐니를 따지고 있어?"

던전 안에서 '하하, 이쪽 자리는 제가 먼저 맡아 놨습니다.', '어이쿠 그러시구나. 제가 몰랐네요. 사냥 끝나면 자리 예약 좀요.' 뭐, 이런 걸 원하는 건가?

그런 게 어디 있냐?

먼저 먹는 놈이 임자고 언제든지 뒤통수 때릴 수 있는 게 이 바닥인데?

약자면 죽어서 땅에 묻히고 강자는 살아서 탑을 오른다.

그것이 시련의 탑이 허락한 단 하나의 규칙이었다.

"징징대지 말고 불만 있으면 힘으로 말해."

진혁이 캐드릭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59화. 3층의 끝, 심장 없는 군대 (5)

"자꾸 도발하지 말거라. 제대로 싸운다면 우리도 피해가 크겠지만, 네놈 또한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

캐드릭이 분노를 삭이려 애를 썼다.

목소리만 들어도 새파란 애송이한테 도발을 당하니 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예예. 어르신. 그쪽이 언데드 병력도 많고 준비도 많이 한 거 알겠으니까 치아 좀 그만 혹사시키세요. 요즘 임플란트 하려면 돈 많이 든다던데."

"이... 이 이! 개자식이! 죽여 버리겠다!"

캐드릭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양손으로 움켜쥔 지팡이에서 거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쿠쿠쿠쿠!

[캐드릭이 고유 능력 '검은 무덤의 묘지기'를 발동합니다!]

[특수 스킬 '피라미드의 수호자'가 발동됩니다!]

"캐, 캐드릭 님! 여기서 그걸 사용하시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마력이 남지 않게 됩니다!"

네크로맨서들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상대를 찢어 죽여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캐드릭에겐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너희는 닥치고 내 명령에 따라라!"

만약 보스전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가면을 쓴 저 녀석만 죽일 수 있다면!

마인 협회에도 할 말은 생긴다.

문제 될 건 없다.

지금은 오직 저 가증스러운 놈을 죽이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아야만 한다.

쿠쿠쿠쿠쿠쿠!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크아아아!"

"키에에엑!

땅 속에서 새로운 언데드들이 일어났다.

전신을 붕대로 감은 미라들.

금과 보옥으로 만든 화려한 갑옷과 이집트 특유의 초승달 모양의 검이 눈에 띄었다.

"허억! 허억! 허억...."

캐드릭의 가슴이 연신 들썩였다.

대량의 마력을 소모한 탓에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으나, 얼굴엔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득 차 있었다.

"파라오의 친위대를 불러오는 능력이라...."

이런 걸 보면 참.... 뼈골 빠지게 혼자서 날뛰는 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네크로맨서나 소환계열 능력자들은 부하들한테 다 맡기고 뒤에서 명령이나 하고 있다는 거잖아?

솔직히 말해 부럽다.

만약.

"그 부하들이 정말로 쓸모 있는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말이지."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천이 아닌 만이 모인다 한들 오합지졸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더 최악이다.

이 많은 놈들을 유지하려면 소모되는 마력 또한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여전히 그 오만방자한 주둥아리는 여전하구나. 좋다. 단순히 수만 많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마."

캐드릭이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 모았다.

츠츠츠츠! 츠츠....

지팡이가 빛나는가 싶더니, 이내 깜빡이며 점멸했다.

마력이 뜻대로 모이지 않았다.

"쳇! 너무 무리를 한 건가."

캐드릭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이리 오너라. 지금 내가 몹시 시장하니."

캐드릭이 바로 옆에 있는 네크로맨서의 목을 움켜잡았다.

"캐, 캐드릭 님...? 끄아아악!"

쭈우우욱!

손바닥을 통해 흡수되는 생기.

목이 졸린 네크로맨서가 온몸을 마구 비틀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다.

한 번 손에 넣은 먹잇감을 캐드릭이 놓아 줄 리 없었으니까.

"얌전히... 얌전히 있거라. 발버둥 쳐 봤자 고통만 길어진다."

쭈욱! 쭈우욱!

"끄어어...어억!"

비명이 점차 잦아들었다.

곧,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네크로맨서의 몸이 산산이 바스러졌다.

"역겹군. 같은 편 아니었나?"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후. 물론 같은 편이지. 그러니 우리의 승리를 위해 소중한 한 목숨을 헌신한 것 아니겠나?"

"동의도 받지 않고 죽였으면서 말은 잘하네."

"아마, 녀석도 동의했을 걸세. 나중에 저승에 가서 만나면 직접 물어보라고."

마력이 충분하게 공급된 캐드릭이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쿵! 쿵! 쿵! 쿵!

미라 병사들이 전선에 가세했다.

모아이 석상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선. 그러나 새로운 원군으로 인해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콰쾅!

쾅!

황금으로 만든 창들이 석상 몸에 바람구멍을 만들었다.

자로 잰 듯한 움직임. 게다가 위력 또한 압도적이다.

'열이 모이면 데스나이트 하나 정도는 되겠어.'

아무리 모아이 석상이 일격에 수십 마리의 언데드를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했다 해도, 이 정도 전력 차를 좁힐 순 없었다.

"어떤가? 이걸 보고 나서도 큰 소리를 칠 수 있겠나?"

캐드릭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진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

그 모습에 캐드릭이 더욱 신난 듯 너스레를 떨었다.

"푸하하! 할 말마저 잃어버린 건가? 괜찮다. 두려워하는 게 정상이니까!"

"응?"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 녀석,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거였어. 진심으로 겨우 이 정도 갖고 보스 몬스터한테 덤빌 생각이었냐?"

아무리 좋게 봐 줘도 5분이면 전멸할 것 같은데....

그것도 상처받지 않을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평가해 준 거지 실제로 만났으면 보스 몬스터한테까지 가지도 못하고 전멸할 것이다.

하지만.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캐드릭은 이 모든 걸 단순히 허세라고 판단했다.

"궁지에 몰리니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구나. 뭐, 됐다. 따분한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캐드릭이 손짓을 하는 것으로 대신 명령을 내렸다.

"키에에!"

"케엑!"

미라 병사들이 거칠게 포효했다.

주둥아리가 세로로 길게 찢기며, 검은색 연기가 흘러나왔다.

"죽여라."

***

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숲.

빼곡히 솟아 있는 나무 중 가장 높은 곳엔 두 명의 남녀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채 전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마인 협회에서 보낸 멜레나와 리챠오였다.

"흐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무모한데?"

멜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리챠오가 곧바로 대답했다.

"처음 거점을 무너뜨리는 의도까진 좋았지만, 이후에 빠져나가지 않은 건 멍청한 짓이지."

"풉! 하긴, 저건 용기가 아니라 멍청한 거 맞네.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망가지 않은 걸까?"

"상대와의 전력 차를 잘못 판단한 걸 거다. 녀석은 스켈레톤과 듀라한만 보고 할 만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완전히 오판이었지. 캐드릭의 고유 능력은 그것보다 훨씬 성가시거든."

고대 시체들을 부활시키는 흑마법은 확실히 쓸 만하다.

때문에 캐드릭이 이번 레이드를 맡게 된 거였고.

반면.

간부가 그토록 경계하던 상대는 의의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저렇게 멍청해서야. 굳이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어."

캐드릭 선에서 충분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때.

파츠츠...!

가면을 쓴 남자로부터 이상한 기운이 일렁였다.

"음?"

"뭐지 저건?"

조금 전까지 보여 줬던 냉기 속성의 마법이나 신성력이 아니다.

불길하고 짙은 기운.

단검을 완전히 뒤덮은 흉흉한 마력에, 두 사람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자, 장난해? 뭐 저리 터무니없는 스킬이 다 있어?"

멜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건 리챠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저 규모를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더라도.

저 많은 대군을 상대로 그 누가 승리를 장담한단 말이냐?

꿀꺽!

리챠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석상과의 전투로 인해 전력의 절반이 묶여 있는 데다 마력 거점 역시 3군데나 파괴된 상태.

만약 이 모든 것들이 상대가 설계한 함정들이었다면.

캐드릭을 도발하고 스스로 적진 한가운데 포위되는 것까지 계산한 거였다면....

...어쩌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몰랐다.

***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오싹하고.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래, 이거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전신에 구석구석 스며드는 고양감.

'얼음 조형'이나 '별의 가호'도 좋았지만, 특히나 '검의 무덤'을 선호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이나 신성계열 능력들은 이 짜릿한 맛이 없단 말이야.'

방어 따위는 일체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롯이 공격만을 추구하는 이 능력이야말로 진정 고인물을 고인물답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었다.

'음..., 이런 식이었나?'

진혁이 검은 기운을 머금은 단검을 좌우로 그었다.

점에서 선으로 부드러운 궤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몇 번의 시도 끝,

마침내.

'오! 됐다.'

천유성이 익혔던 '추혼검무'의 편린(片鱗)이 재현되었다.

[추혼검(追魂劍)에 대한 이해력이 상승합니다.]

진혁이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정교한 검무를 펼쳤다.

아마 천유성이 이 장면을 봤다면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것이다.

10년을 넘게 검 하나만 파고 들었던 세월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검마의 재능을 발현한 지금 그런 것 따위는 하등 문제되질 않았다.

부우웅!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이제 알겠다.

어떻게 해서 추혼검이라는 절기가 탄생했는지.

[추혼검에 대한 이해력이 높은 수준으로 상승합니다.]

어떻게 해야 추혼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

전부.

[추혼검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상승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과 함께 진혁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기억들이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추혼검무(追魂劍舞)'.

검은 불꽃이 사방으로 흐드러졌다.

'제5식(第五式)'.

천유성조차 도달하지 못했던 검의 끝.

그리고 그 끝을 넘어선 탈마(脫魔)의 영역.

'추혼멸천(追魂滅天)'.

추혼검의 정수라 불리는 다섯 번째 초식이, 지금 이 자리에서 펼쳐졌다.

"무슨...."

캐드릭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동시에 검이 횡으로 가로질렀다.

콰콰콰콰콰콰!

먼저 밀려온 건 검풍이었다.

단순히 바람뿐 아니라 마력이 실려 있는 흉기.

그렇기에 가장 앞에 있던 미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키에에엑!"

"케에엑!"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며, 검게 변한 살덩이가 쏟아졌다.

"크읍!"

캐드릭의 쉴드에도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쿠쿠쿠!

"으으으으...!"

3겹이나 둘러싼 방어막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하지만,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추혼멸천'의 진짜 검격이 날아왔다.

이번엔 쉴드에 거센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서걱!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졌다.

캐드릭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당연히 보여야 할, 당연히 있어야 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그저 한 번 휘두른 검에 미라 병사들이 모조리 토막 났다고?

그것도 모자라서 쉴드를 박살내고 팔까지 잘라?

덜덜덜!

자신도 모르게 턱이 떨렸다.

바로 얼마 전까진 허무하게 죽어 버린 제자, 알렉스를 욕했었다.

언데드를 부리고 대체 왜 졌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 됐기에.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이 돼서야 왜 알렉스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이런 괴물은 이길 수 없다.

도망가는 것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데스나이트... 당장 저자를 막...아라!"

이젠 석상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설령, 나머지 언데드들과 네크로맨서들을 모두 잃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캐드릭이 잘린 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쓰러지기 직전의 몸을 채찍질하며 북쪽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무대에서 퇴장하려면 상대에게 허락을 먼저 받았어야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흑월야(黑月夜)가 발동됩니다.]

캐드릭의 얼굴 위로 검은 달이 드리웠다.

60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1)

"어, 어느새...."

캐드릭의 동공에 검은 달이 맺혔다.

죽음의 순간.

캐드릭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걸 느꼈다.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어느 틈에 온 걸까?

아니,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망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기는 했던 걸까?

온갖 가능성과 가정들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서걱!

캐드릭이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쿠웅!

목을 잃은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키에에에."

"케엑!"

캐드릭이 죽자, 그가 부리던 모든 언데드들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네크로맨서들이 있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었다.

분노한 석상들이 곧바로 녀석들의 뒤를 쫓았으니까.

"으아아악!"

"사, 살려 줘!"

피로 물들기 시작한 전장.

일방적으로 사냥하던 네크로맨서들은 어느새 쫓기는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으음. 다들 뭔가 바쁜 거 같네.'

진혁은 경계가 허술해진 4층 석탑으로 다가갔다.

***

거대한 화강암을 깎아 만든 4층짜리 석탑.

내실로 가는 열쇠가 보관된 금고 앞엔, 창과 검으로 무장한 세 기의 석상이 있었다.

"그오오오!"

"그아아!"

본래, 이 규모의 10배가 넘는 병력이 있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세 마리는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이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뇌가 없는 게 좋긴 하겠어."

방금 그렇게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 줬어도 겁먹지 않을 테니.

그저 보스 몬스터가 명령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들.

어찌 보면 심장 없이 움직이는 군대야말로 최강의 군대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과 방패를 집었다.

'이 무기로 싸우는 것도 간만이네.'

왼손에 든 둥근 원형 방패로 정면을 가린 뒤 그 사이로 창을 뻗는다.

한창 영화 '300'에 빠져 살았을 때 질리도록 연습해 둔 바로 그 자세였다.

비록 혼자여서 영화에서처럼 300명이 펼치는 합격전은 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손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창과 방패를 다뤘었다.

아! 물론, 창술과 방패술 외에도 한 가지 더 연습해 뒀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지.

"내가 갈까? 아니면 너희가 올래?"

진혁이 자세를 잡은 상태로 천천히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슬쩍슬쩍 허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도 오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것처럼.

그 도발이 먹힌 걸까?

석상들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쾅!

콰앙!

온다.

진혁이 방패를 비스듬히 세웠다.

방패술의 묘미는 충격을 분산시키는 것.

카가가가각!

석상의 검과 창이 방패의 빗면을 긁고 지나갔다.

'지금이다!'

충격을 흘려버린 진혁이 그대로 몸을 360도 가량 회전했다.

콰앙!

회전력이 가미된 창이 그대로 석상의 머리통을 꿰뚫어 버렸다.

거의 동시라도 해도 좋을 찰나.

진혁은 두 번째 석상의 다리를 향해 창을 내리쳤다.

"...그오?"

석상의 다리가 꺾이며, 무게중심이 무너졌다.

정확하게 관절 부위를 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는 얼어 죽을 관상이야."

투욱.

창이 석상의 가슴에 닿았다.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쩌저적!

창끝에서 뿜어진 냉기가 석상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냉기.

전신이 얼어버리는 데까진 채 3초가 넘지 않았다.

'이걸로 두 마리째.'

이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다.

진혁이 뒷걸음질 치는 석상을 향해 다시 기본자세를 취했다.

창과 방패가 완벽하게 공격과 수비를 분담했다.

그런데.

"그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른 석상이 갑자기 석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석탑 내부에 있던 황금색 열쇠를 꺼냈다.

뭐지?

열쇠를 넘기고 목숨 구걸이라도 하려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꿀꺽!

석상이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삼켜 버렸다.

[내실(內室)로 가는 열쇠가 반응합니다.]

[게이트가 활성화됩니다!]

[게이트 너머의 존재가 부름에 응답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들.

우우웅!

공기가 급변했다.

"이거, 생각보다 패기 있는 놈이었네."

설마, 자신을 희생해 게이트를 열 줄이야.

진혁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바로 그때.

쿠쿠쿠쿠쿠!

열쇠를 삼킨 석상의 배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자신을 희생해서, 내실에 있는 상위 몬스터를 불러오려는 것이다.

저릿저릿!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력이 용솟음 쳤다.

피부에 타고 전해지는 살기에, 진혁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뜻밖의 상황에 두렵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다.

두근! 두근! 두근!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 전투에 달아오른 몸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드디어 제대로 싸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나와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어차피 상대해야 할 네임드 몬스터라면 내실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상대하는 편이 좋았다.

잠시 뒤, 일렁이는 게이트 너머로 무언가 다가왔다.

저벅.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수많은 팔을 갖고 있는 관음상이었다.

[네임드 몬스터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이 현현합니다!]

"흐음."

천수관음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애로운 미소 너머에서 짙은 피 비린내가 풍겼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진혁에게 멈췄다.

"이건 의외로구나. 침입자 중에 석탑에 있는 열쇠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 며칠 안으로 여기 보스 몬스터도 베어 버릴 건데."

"하하하! 맹랑한 인간이로고. 다른 건 몰라도 그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구나."

천수관음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은 진심인데 녀석에겐 농담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젠장.

이래서 지성체 몬스터랑 싸우는 게 성가시다.

'교감'의 효과로 인해 의도하지 않아도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무게는 그만 잡고, 덤벼. 빨리 끝내고 쉬고 싶으니까."

"나는 너와의 문답을 좀 더 즐기고 싶다만, 너는 아닌 건가?"

"나도 수다 떠는 걸 싫어하진 않는데, 그 자리엔 칼이랑 피 대신 맥주랑 치킨이 있어야 하고. 얼굴이 각진 석상 말고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 찰나 또한 소중하게 여기거라, 어린 인간아. 죽을 때가 되면 지금 이 시간조차 그립게 느껴질 터이니."

스릉!

천수관음이 등에 있던 검 한 자루를 뽑았다.

그걸 시작으로.

스릉! 스릉! 스릉!

수없이 많은 손에 무기가 쥐어지기 시작했다.

검, 칼, 도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창과 도끼 심지어 철퇴와 활까지 나타났다.

이건 뭐, 완전히 걸어 다니는 무기고 수준이다.

"건방지게 입을 놀린 대가로 우선 그 왼쪽 팔부터 잘라내 주마. 그 다음은 왼쪽 다리다. 그 다음은 오른쪽 팔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목을 치겠다."

"미안하지만, 난 내 팔다리의 위치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그냥 원래 있던 자리에 붙어 있게 하려고."

"베는 맛이 있을 것 같구나. 이래서 너희 인간들을 싫증 낼 수가 없어."

천수관음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츠츠츠...!

유형화된 살기가 마력과 뒤섞였다.

녀석을 일반적인 석상들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진혁이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언제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후우우."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깨웠다.

한 자루의 칼처럼 예리해진 신경들.

지금부터는 눈 하나 깜빡해선 안 된다.

그때.

파앙!

공기가 찢어졌다.

추진체도 없이, 한 순간에 음속을 돌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왼쪽 어깨.'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혁은 방패를 이용해 검격을 빗겨냈다.

카카카칵!

철과 철이 부딪치자 눈부신 불꽃이 튀어 올랐다.

"호오."

천수관음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놀라? 공격 막는 거 처음 봐?"

"음속의 영역에 반응하다니...."

보고 반응하는 게 아니다.

이미 수없이 상대해 봤기에 공격이 오는 궤도와 타이밍을 암기하고 있는 것뿐이지.

물론,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하. 이거 점점 더 흥미가 돋는구나."

천수관음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엔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동시에 노리는 공격이다.

'방패로 둘 다 방어할 순 없다.'

그렇다면....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눈꽃 문양의 얼음 방패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콰득!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정도로는 천수관음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공격의 궤도를 살짝 비트는 것쯤은....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진혁이 완전히 만개한 눈꽃 사이로 몸을 감췄다.

물론, 그걸 두고 보고 있을 천수관음이 아니었다.

"어딜!"

곧바로 9개의 창이 투척됐다.

콰콰콰쾅!

모조리 박살나는 얼음 방패들.

그러나 정작 그중에 진혁에게 적중한 창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맞췄거늘?"

정확히 노렸고.

정확히 맞췄다.

그런데 어째서?

"이건, 시각을 왜곡시켜 주는 효과도 있거든."

겹겹이 펼쳐진 얼음들이 빛을 반사하면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어느새 천수관음의 아래로 파고든 진혁이 창을 좁게 잡았다.

사거리를 줄인 대신 속도를 살릴 수 있는 간격.

그리고 창날에 발현시킨 '혈마기(血魔氣)'로부터 검붉은 마력을 꿈틀거렸다.

"크윽!"

천수관음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방어하기 위해 천 개의 팔을 움직였다.

허나 너무 늦었다.

퍼퍽!

이미 진혁의 손을 떠난 창이 천수관음의 팔 속으로 파고들었으니까.

"크아아악!"

천수관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

통증.

그 생소하고도 날카로운 경험은 천수관음의 이성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인간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팔을 따라 퍼져 가는 검붉은 마기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독... 같은 건가."

"비슷해."

혈마기는 검의 무덤보다 파괴력이 훨씬 떨어진다.

대신, 한 번 상처를 입히면 지속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뿌드득!

천수관음이 가차 없이 창이 꽂혀 있는 팔을 뽑아 버렸다.

이야.

"그래도 살고는 싶나 보네."

적어도 몇 분은 고민할 거라 생각했는데.

스스로 팔을 뽑아 버릴 정도면, 삶에 대한 애착이 보통이 아니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노릴 거면 머리를 노렸어야지. 고작 팔 하나 가져간 걸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거야....

"머리를 노렸다고 해도 널 죽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 존재하는 네임드급 몬스터를 죽이려면, 일반적인 무기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일부러 팔을 노렸다.

정확히는 수많은 무기 중에 '보옥'을 들고 있는 팔을 노렸지.

진혁이 잘린 팔에서 푸른색 보석을 빼냈다.

그리고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보관해 뒀던 아이템을 꺼냈다.

61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2)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나무 조각 하나를 꺼냈다.

회랑에서 얻은 성유물.

'멀린의 지팡이'의 파편이다.

"그건...?"

천수관음의 미간이 좁아졌다.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자세를 취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팔 하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너 자신을 탓해라.

진혁이 두 개의 아이템을 하나로 합쳤다.

우우우웅!

['멀린의 지팡이 파편(AAA)'와 '천수관음의 보옥(AA)'이 융합합니다!]

강렬한 빛과 함께 성유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멀린의 지팡이(불완전)]

입수 난이도: S

내용: 아서왕을 섬기던 잉글랜드의 대마법사이자 현인, 멀린. 이 지팡이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성유물로서 마법계열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단, 완전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능력의 최대 상승폭이 제한됩니다.)

잠시 뒤, 빛이 사라진 자리엔 보옥이 박혀 있는 나무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드디어 이걸 손에 넣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또한 빠르게 뛰었다.

비록, 완전한 성유물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애초에 완전한 멀린의 지팡이는 3차 전직을 끝낸 대마도사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좋아. 다음은.

진혁이 '탐식의 눈'을 통해 천수관음의 상태창을 엿봤다.

녀석과 싸우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다.

——————————————————

이름: 천수관음

성별: 무(無)

나이: 30,985살

레벨: ??

힘 ?? 민첩 ?? 체력 ?? 마력 ?? 카르마 ??

고유 능력: 만다라(曼茶羅)

스킬: '탐식의 눈'의 레벨이 부족해 개별 스킬창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

[복사 조건: 천수관음은 서양의 마법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제한 시간 5분 안에 빙계 마법을 사용해 상대를 모욕하는 크고 아름다운 조형물을 만들어 주세요. (단, 조형하는 동안 어울리는 적절한 노래 또한 선곡해 주셔야 합니다.) 성공할 경우 상대의 고유 능력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응?

잠깐, 잠깐만....

이거 잘못 본 거 아니지?

진혁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복사 조건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스템이 갈수록 미쳐 가는구나.'

저번에 캐드릭에게 네크로맨서에 관한 수업을 들으라고 했을 때만 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건 어떻게 된 게 갈수록 가관이다.

'노래와 조형물이라...고?'

그것도 적절히 어울려야 한다는 추가 사항까지 붙었다.

진혁이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대를 능욕하라는 명제를 이렇게 창조적으로 꾸밀 줄이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게 느껴졌다.

허나, 아무리 기괴한 조건이라도 포기할 순 없다.

25층 아래에서 '만다라'를 얻을 수 있는 건 이곳 하나뿐이었으니까.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쉰 진혁이 '방송 시스템'을 활성화시켰다.

스트리밍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BJ를 위해 갖춰져 있는 몇 가지 기능 중 하나.

바로.

[BGM을 선택해 주세요.]

방송 배경음악이다.

'빙계 마법과 어울리는 음악은 역시 이것밖에 없지.'

노래를 선택한 진혁이 사운드를 최대로 올렸다.

곧바로 익숙하면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겨울, 전 세계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대작 '겨울왕국'.

그리고 거기서 사용됐던 메인 히트곡 'Let It Go'다.

[Let It Go~! Let It Go~! Can't hold it back any more.]

점점 높아지는 곡조에 얼굴이 뜨거워진다.

뭐랄까.

과거의 추억에 젖어드는 기분이랄까?

간만에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반면, 뜬금없는 노래에 천수관음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놈! 이게 무슨 짓이냐?"

노도와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생과 사를 가르는 진검 승부.

그 와중에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해 대니 그럴 수밖에.

"부탁인데 이유는 묻지 마라."

나도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물론.

"대답해라! 인간!"

녀석에게 구렁이 담 넘듯이 넘기는 게 통할 리 없다.

대노한 천수관음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쿠쿠쿠쿠!

손에 쥔 무기에 황금색 기운이 덧씌워졌다.

검강과도, 신성력과도 다른 힘.

만다라(曼茶羅).

삼라만상을 구현화한 불교 최강의 능력이 지금 이 순간 발동되었다.

"장난은 이제 끝이다.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해 네놈을 찢어발겨 주마."

어지간히 열 받긴 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을 학살해 온 천수관음이지만, 지금까지 만다라를 꺼내 든 적은 없었으니.

"근데, 괜찮겠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뜻이냐?

"만다라까지 발동하고 지면 변명할 거리도 없을 텐데, 괜찮겠냐고?"

이게 내 전력의 100%다! 라고 말한 놈치고 이기는 꼴을 못 봤는데.

어떻게 하나같이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뱉어 대는 걸까?

나 같으면 그냥 조용히 있겠다.

아. 하긴, 노래나 틀면서 싸우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이... 망할 놈의 인간 따위가! 고작해야 100년도 살지 못하는 미물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패배를 논한단 말이냐!"

지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작이다.

콰콰콰콰콰콰!

거침없이 다가오는 황금색 물결.

하지만, 지면을 박살내던 만다라의 기운은 진혁의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빙하조형(氷河造形) '블리자드'가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얼음 가루들이 형(形)을 갖춰 나갔다.

3m 크기의 거대한 육망성.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대마법진에서 새하얀 냉기가 피어올랐다.

'끝내주네.'

진혁이 두 손으로 지팡이를 붙잡았다.

손이 격렬하게 떨렸다.

폭주하는 마력을 제어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았다.

'과연, 상위 버전의 스킬이라 이건가.'

새로 얻은 스킬, '빙하조형(氷河造形)'.

조금 전 사용했던 '얼음 조형'과는 아예 구조 자체가 다르다.

얼음 조형이 공기 중에 녹아 있는 수분을 응고시켜 얼음으로 활용한 거였다면.

멀린의 지팡이를 손에 얻은 지금은 냉기 자체를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서양의 잡술 따위가...!"

천수관음이 어금니를 갈았다.

"서양의 잡술이라...."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

나무 위에 있던 리챠오와 멜레나는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검...뿐만 아니라 빙계 마법도 저렇게 대성을 했다고? 다중 클래스라는 게 가능한 거였어?"

전투가 지속될수록 지켜보던 리챠오와 멜레나의 동공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뿐이었으니까.

천수관음이 보여 주는 압도적인 무력.

과연 네임드 몬스터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걸 정면에서 막아내는 진혁 또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아득히 말이다.

"보조 수준이 아니야. 마인 협회 내에서도 저 정도 수준의 빙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리챠오가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차마, 근접계열의 플레이어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없다는 말을 하긴 힘들었기에.

그리고 그 심정은 멜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달싹이던 멜레나가 결국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우리 둘이 덤빈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까?"

대인전에 특화된 전투계열 흑마법사가 무려 둘이나 왔다,

설령 상대가 S급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전력이다.

하지만 멜레나에겐 확신이 없었다.

과연 저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힘들겠지."

리챠오도 굳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냉정하게 봤을 때 둘만으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마저 가정해야 하는 상황.

"포기하자, 리챠오. 우리만으론 안 돼. 적어도 간부급이 오지 않는 이상은...."

"아니. 그랬다간 우리가 지금껏 쌓아 올린 입지가 한 번에 무너진다."

"그럼 어쩌라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하자는 거야?"

"아니."

리챠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모한 도박을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할 생각도 없다.

"성유물을 사용하겠다."

만에 하나를 위해 마인 협회에서 가지고 온 성유물.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사용하기까지 무려 3개월이란 제약이 걸려 있던 터라, 가능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임무를 완수하려면 갖고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할 수밖에.

***

이것 봐라?

'캐드릭만 온 게 아니었군.'

진혁이 힐끗 옆쪽을 바라봤다.

전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위.

그곳에서 낯선 마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한 걸 보면, 적어도 캐드릭보다 더 윗줄에 있는 놈들이다.

아마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 마인 협회에서 준비한 히든카드들이겠지.

'잘됐어.'

이번 기회에 마인 협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때.

콰아아앙!

손목에 저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어디서 한눈을 팔고 있는 것이냐."

천수관음이 던진 창이 얼음벽을 반쯤 뚫고 들어왔다.

부르르 떨리는 창날.

재빨리 빙하조형을 발동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손과 함께 몸까지 꿰뚫어 버렸을 것이다.

그래. 이 녀석이 있었지.

마인 협회 놈들을 심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있는 골칫거리부터 처리해야 된다.

[빙하조형(氷河造形) '극빙 화살'이 발동됩니다!]

츠츠츠츠!

순식간에 20개가 넘는 얼음 화살이 만들어졌다.

확실히 예전에 얼음 조형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크기부터 다르다.

3m가 넘는 거대한 흉기는 화살이라기 보단 오히려 고래를 잡는 작살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 천수관음에게 치명상을 주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다라는 상대의 마력을 갉아먹는 능력 외에도 공격의 궤도를 예측하는 힘 또한 가지고 있었으니.

괜히 공수 모두가 완벽한 능력이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중거리와 근거리를 모두 활용한다.'

아무리 예측하는 힘이 뛰어난들, 읽을 수 있는 공격의 한도가 있을 터.

진혁이 지팡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지팡이가 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곧바로 아공간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검신을 따라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

만다라에 대항하기 위해, '검의 무덤'까지 발동했다.

"지금까지 멀리서 얼음 덩어리만 날려 대더니 이제야 직접 다가올 생각인가 보구나."

"노래가 끝나기 전에 슬슬 결판을 내고 싶거든."

어느새 'Let It Go'도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쿠쿠쿠쿠쿠쿠!

두 개의 마력이 맞부딪치며,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지금이다!'

20개의 얼음 화살과 함께.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질주했다.

62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3)

시야가 빠르게 바뀌었다.

달리는 속도를 높일수록, 투척되는 창들을 쳐낼수록, 조금씩 호흡이 가빠졌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이전에 복사해 둔 '얕은 호흡' 덕분일 것이다.

장기전을 대비해 뒀던 게 여기서 빛을 발했다.

바로 그때.

"...!"

진혁이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정면에서 날아온 창을 또 다시 쳐냈다. 창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회전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쐐애애액!

이어서 날아온 창들이 하늘을 빼곡히 덮었다. 하나같이 필살을 자랑하는 만다라를 덧씌운 채.

마치, 먹구름을 품은 폭풍이 몰려오는 것처럼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하하, 이건 뭐....

'지루할 틈을 안 주는구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핏 보면 불규칙해 보이는 광역기(廣域技).

하지만, 저 공격들엔 하나의 규칙이 있다.

대상의 급소를 노려야만 하는 규칙이.

찰나의 순간, 진혁은 날아오는 창들의 궤도를 파악했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수도 없이 해 봤던 일이었으니까.

'그때의 리듬을 기억하고.'

진혁이 전신에 힘을 뺐다.

가볍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화르륵!

단검에 실린 검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들이 머리카락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모조리 쳐낸다.'

바로 그때.

카카카캉!

눈부신 불꽃이 일어났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굉음이 연신 고막을 두드렸다.

카카카카카카칵!

진혁이 제자리에 선 채 미친 듯이 단검을 그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위로.

콰앙!

콰아앙!

이미 어디로 공격해 올지 암기라도 해 뒀다는 듯 진혁은 단 하나의 창도 놓치지 않았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신들린 곡예다.

천수관음의 고함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빌어먹을... 이건 어떠냐!"

창 하나가 진혁의 몸통이 아닌, 바로 앞에 있는 지면을 노렸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이용해, 변칙적인 루트를 개척하는 기술.

도탄(挑彈)이다.

빗발치는 창들 사이에 슬며시 섞여든 터라, 인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반응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고.

하지만 그것조차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콰악!

진혁은 바닥에 튕겨 날아온 창대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이, 이것도 막았다고?"

천수관음이 말을 더듬었다.

회심의 일격이 막혔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어느새 수많은 무기가 들려 있던 손은 대부분 텅 비어 버린 상태였다.

"이제, 보여 줄 건 다 보여 준 것 같은데, 더 참신하고 재밌는 게 없으면 슬슬 끝낼게."

진혁이 앞으로 걸었다.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이다.

[And one thought crystalizes like an icy blast.]

그리고 때마침, 방송 시스템에선 노래의 종막 부분이 흘러나왔다.

이제 이 싸움의 결판을 지을 시간이라고 말하듯이.

그 태연한 말투가 신경을 거스른 걸까?

천수관음의 속에서부터 분노에 쌓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싸움이 언제 끝날지 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몸뿐이다!"

[천수관음이 '만극창(卍䪂槍)'을 꺼냅니다!]

"죽어라!"

천수관음이 만다라를 극한까지 발현시킨 황금빛 창을 뻗었다.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창은 탄환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콰앙!

창이 진혁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시... 신기루?"

비릿한 미소를 머금던 천수관음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얼음의 난반사로 인한 착시 효과. 거기에 코앞에서 방심을 유도했기에,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천수관음의 턱밑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나도 좀 때려 보자."

계속해서 방어만 하느라고 지쳤다.

짜증나고 답답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제대로 맞아 봐라.

진혁이 작게 변한 멀린의 지팡이를 하늘로 던졌다.

동시에 단검을 바닥에 꽂았다.

[빙하조형(氷河造形) '하늘의 검'이 발동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얼음 줄기와.

[빙하조형(氷河造形) '땅의 검'이 발동합니다!]

땅에서 솟구치는 얼음 줄기가 하나로 맞닿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냉기로 인해 눈앞이 자욱해질 정도의 수증기가 뿜어졌다.

"크아아악!"

그 안에 갇혀 버린 천수관음이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무리 네임드급 몬스터라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냉기가 전신을 옭아맸다.

"끄으으. 이걸로... 날 가뒀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이건 그냥 시간 끌기용이다.

아직 해야 할 게 한 가지 남아 있거든.

파츠츠츠.

진혁이 천수관음의 앞에 얼음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는 굵고 길쭉하게.

여기는 완만하고 매끄럽게 깎아야겠군.

조금씩 얼음의 모양이 갖춰졌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얼음 조형이 완성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걷히자, 마침내 완성품의 모습이 드러났다.

'훌륭해.'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가운데 손가락이 우뚝 솟아 있었다.

크고 아름답다. 거기에 늠름하기까지 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물이다. 아. 물론, 상대를 조롱하기에 완벽한 조형물이지.

"이, 이... 이 이 망할 인간이! 무간지옥에 가둔 뒤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 받게 하겠다. 수천 번, 수만 번 벌레로 환생하게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우아아악!"

천수관음이 얼음 속에서 몸을 마구 흔들었다.

열이 받아 미칠 지경인데, 갇혀 있으니 더욱 견디기 힘들겠지.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만다라(S)'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다라(曼茶羅)]

입수 난이도: S

내용: 불법(佛法)을 습득한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 능력으로 검강이나 신성력과 마찬가지로 무기에 특별한 힘을 덧씌울 수 있습니다. 또한 심법 수련을 통해 상대의 공격이 오는 방향을 예측하게 해 주는 효과 또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온갖 괴랄한 조건들을 달성하고 드디어 손에 넣었다.

새로운 고유 능력, 만다라를!

'그럼 어디.... 간만에 한번 사용해 볼까.'

진혁이 조심스럽게 마력을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따스하면서 포근한 기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기운이 모두 한 손 안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끄으으... 이까짓, 이까짓 얼음쯤은...!"

그 와중에도 천수관음은 온몸을 마구 뒤틀며 얼음 속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만다라로 인해 황금색 스파크가 튀었지만, 얼음을 박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쯧쯧.

보기 안쓰럽네.

보검을 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을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마. 그래 봤자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헛소리! 내 능력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곳은 없다."

"아니, 무리다. 만다라가 좋은 고유 능력인 건 맞지만, 넌 그 능력을 완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거든."

"뭣이?"

"참선을 통해 '문'을 열었으면, 그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알아야지. 아직까지 분노에 휩싸여서 마력의 흐름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그러니 전력의 반의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네놈이 이 능력에 대해서 뭘 안다고!"

뭘 알고 있냐고?

적어도 몇 만 년이란 시간 동안 허송세월한 너보다는 많을 걸 알고 있다.

이 능력이 갖고 있는 본질도.

그리고 그 능력이 갖고 있는 가치까지도, 모두.

그러니 보여 주마.

만다라라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건지.

[고유 능력 '만다라(曼茶羅)'가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형언하기 힘든 운무가 만들어졌다.

어느새 진혁의 오른손에 금빛으로 물든 번개가 발현되어 있었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네놈이 그 능력을!?"

천수관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를 수가 없는 능력.

바로 자신이 사용했던 능력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도 훨씬 완성도 높고 완벽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간 따위가, 대체 무슨 수로 만다라를 배운단 말인가?

수십 년의 수행을 한 고승들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눈부시게 타오르는 만다라의 기운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저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이제 그만 꺼져라."

진혁이 번개를 쥐고 있는 손을 크게 뒤로 젖혔다.

전완근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기, 기다려라! 잠깐, 잠까아아안!"

천수관음이 황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쐐애애액!

진혁의 손을 떠난 번개가 천수관음의 몸을 꿰뚫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