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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자네, 무슨 고민이 있나?"

허 중관은 연우혁을 보며 물었다.

젊은 판관답지 않게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게 말입니다..."

연우혁은 이번 일을 돕기 위해 궁 판관에게 전후를 밝혔고, 궁 판관이 잘 부탁한다고 은자를 맡긴 것까지 말했다.

"판관 어른께서는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이걸 전해드려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아하."

허 중관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자기가 몰래 챙겼다면 탐욕스러운 놈이었고 아무 말 없이 바쳤다면 상대를 볼 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다.

그러나 진충비도는 둘 다 선택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직하게 밝히는 길을 택했다. 욕심을 버리는 건 물론이고 지혜가 없다면 하기 힘든 처세였다.

"잘 말해줬네. 주 공공께서는 그런 뇌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지. 바쳤다면 실망하셨을지도 모르네."

"과연. 주 공공께서는 실로 공명정대하고 지공무사한 분이시군요."

"자네는 참 망설이지도 않고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허 중관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환관들도 저렇게 아부가 줄줄 나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그렇군... 하여간 그 은 덩어리는 자네 갖게.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 되겠군."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그걸 그냥 챙기라니.

'...아, 아니. 걸리면 뒷감당이 어렵겠지.'

만약 궁 판관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궁 판관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궁 판관의 집념은 연우혁도 오싹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돌려주면서 은 덩어리 하나만 어떻게 받을 수 없나 생각하며 연우혁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가마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마를 멘 사람들은 모두 다 동창의 환관들이었는데, 각자 다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 움직임이 빠르고 안정되어 있었다.

"오셨군!"

-오래 기다렸나?

가마 안에서 주 공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혁과 허 중관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행이구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여기 이 진충비도가 쓸데없는 선물을 갖고 오려다가 말았는데, 잘 했다고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공공."

-...

가마 안에서 침묵이 돌아왔다.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3)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연우혁은 방금 대화에서 실수가 있었나 고민했다.

혹시 주 공공은 뇌물을 받고 싶었던 건가?

-무슨 선물?

"한경의 관리들이 성의를 보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선물이라기보단 뇌물이지요."

-아아.

허 중관의 설명에 주 공공은 그제야 목소리에 담긴 예기(銳氣)를 풀었다.

-뇌물은 필요 없다. 나랏일을 보는 자라면 무릇 받는 것도 주는 것도 부끄러워해야 하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잘 거절했다.

주 공공은 가마 안에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연우혁은 허 중관 옆에 있는 말 위에 올라탔다.

"혹시 제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겠습니까?"

"흐음."

허 중관은 가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가짜 수염은 동창의 환관들이 위장을 위해 사용하는 역용술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다.

이렇듯 동창의 일이란 건 대부분 비밀스러운 것이라, 금의위와 달리 오고 가면서도 신분을 밝히지 않고 끝낼 때가 많았다.

"먼저 동창인 걸 들키면 안 되네. 이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예."

"동창의 이름이 필요할 때는 당연히 밝히겠지만, 주 공공께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죽더라도 밝히면 안 되네. 저 뒤의 이들이 죽더라도 개의치 말게. 나는 지금 청오표국의 허팔달일세. 주 공공은 명문세가의 규방규수시고."

"청오표국, 허팔달, 규방규수. 예. 기억했습니다. 주 공공께서는 여인이신 거죠?"

"...어? 뭐라고 했나?"

"주 공공께서는 여인으로 위장하신 거냐고..."

허 중관이 당황하자 연우혁은 자신이 너무 무례한 말을 했나 싶었다. 동창의 환관이라면 좋아서 여인으로 위장하는 게 아닐 텐데 그걸 굳이 다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아. 그렇지. 아무래도 그게 편하거든."

"주 공공께서는 이런 위장을 싫어하십니까?"

"으음. 아니. 신경 쓰지 않으실 걸세. 방금은 잊어버리게."

허 중관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연우혁은 믿지 않았다. 허 중관이 당황한 기색이 영안으로 잡혔던 것이다.

'역린일 수도 있겠군. 여인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괜히 언급하지 말아야겠다.'

"신경 써야 할 다른 점들은... 사교와 엮이지 않은 일이라면 쉽게 처리해도 되지만, 사교와 엮인 일이라면 바로 처리하지 않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네."

"더 큰 정보를 얻기 위해서군요."

"그렇지!"

허 중관은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한 번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 만큼 일머리가 괜찮았다.

보통 인근의 벼슬아치들은 일을 제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책임이라도 질까봐 꼬리를 말고 눈치만 보는 것이다.

녹봉을 먹는 놈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했지만 사실 관리들은 원래 그랬다. 진충비도 같은 경우가 희귀한 거였다.

"예외적인 상황이 있는데, 그건 아주 드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이 일을 해결하러 왔을 때인데, 보통 그런 일이 많지 않지."

으슥한 마을에서 괴상망측한 일이 생긴다고 해서 사람들이 쉽게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심지어 그 마을을 다스려야 하는 관리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하러 오는 이들이 있는 법.

협행을 하러 나선 무림인이나 주변을 돌다가 우연히 소문을 들은 순안어사, 혹은 머리는 나쁘지만 운이 좋아서 들린 금의위 등이 있었다.

"음. 그렇군요."

금의위 욕은 대충 걸러듣고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거의 대부분 정답을 알고 있는 연우혁도 그걸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훨씬 더 고민을 해야 했었으니까.

"그보다 일에 대해서 짐작가는 건 좀 있나?"

"몇 가지 있긴 합니다만, 직접 가서 본 다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최근 제남 인근에서는 고명하고 법력 높은 대사(大師), 홍목대사가 명성을 높이고 있었다.

원래 어느 시대든 지역에 명성 높고 도력이나 법력 높은 도사나 스님 한 명은 있기 마련.

이 사람이 사이비든 진짜든 동창이 일일이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설령 사이비라 하더라도 하찮은 약장수 같은 놈을 다 잡아낼 만큼 동창이 한가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이 홍목대사가 꽤나 대단한지 주변의 거상들이나 관리들도 법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도 아슬아슬하게 괜찮았지만 그 뒤가 주 공공의 심기를 거슬렀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겠지요? 현령이 동시에..."

"몇 번이고 확인했네."

법회에 참가한 관리들 중에는 인근의 현령도 있었다.

원래 이런 법회는 체면이 있는 만큼 눈치껏, 적당히 참가해야 하는데 이 현령은 대사한테 홀딱 빠졌는지 꽤 노골적으로 참가한 모양이었다.

정무에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자꾸 법회에 참가해서 관아의 돈을 바쳐대니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소문을 들은 동창의 간자들도 확인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령이 두 자리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이다.

분명 법회에 참가했다고 증언이 올라왔는데, 동시에 관아에서 관무를 보고 있다는 증언도 올라왔다. 주 공공은 현령이 무슨 술법을 부린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술법을 부렸다면 가장 연관되기 쉬운 건 역시 혈교 같은 사교(邪敎)였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재주도 좋군.'

연우혁은 솔직히 좀 놀랐다.

저런 식으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손이 많이 들어가고 지혜가 필요한 방법들이었다. 법회 하나 보자고 하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혈교와 관련되어 있고 현령의 부탁에 혈교가 술법을 빌려준 걸지도 몰랐다.

"싸움이군."

"!"

허 중관이 앞을 보며 말했다. 가마를 메고 있던 가마꾼 환관들은 재빨리 가마를 내려놓고 싸움을 대비했다.

다행히 앞에서의 싸움은 목소리와 살기만 요란했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 중관은 목소리에 묵직하게 내공을 담아 외쳤다.

"여긴 청오표국의 허 모요! 대낮에 관도에서 이렇게 싸움을 일으키다니. 그대들은 도적떼요?"

살벌하게 외치던 두 무리의 사람들은 새로 나타난 자들을 보고 멈칫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일순 풀린 것이다.

"대낮에 흉한 꼴을 보여드린 건 사과드리겠소. 그러나 이 자들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 어쩔 수 없었소."

"우리가 할 소릴! 이 작자들이 정말!"

"그만! 싸울 거면 싸우시오. 하지만 이 허 모는 결코 방금 본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어느 누구든 간에 관에서 부른다면 그 책임을 지게 될 거요!"

단호한 압박으로 상대의 기세를 순간 끊은 허 중관은 압박을 풀고 슬며시 물었다.

"말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오?"

"우린 위의상단의 사람들이오.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저 자들의 마차가 보였소. 보아하니 마차의 굴대가 부러졌다더군! 도와달라고 부탁하길래 도와줬소."

"도와주긴 무슨! 저 자들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다가왔소."

상단의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마차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발끈했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도와주겠다고 자꾸 다가오더군. 그러더니 마차 굴대를 만지면서 안을 뒤지려고 하지 않소! 당연히 화를 낼 수밖에 없지!"

"누명도 이런 누명이 없군. 부러진 굴대를 고쳐주려고 했는데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상단을 이끄는 사람은 허탈한 표정으로 한탄했다.

둘의 말을 들은 허 중관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위의상단이 좀 더 믿음직스럽다.'

상황을 보면 저기 마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괜한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일단 위의상단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들이었지만, 저들은 별다른 목적 없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만 밝히고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행객치고는 그 숫자와 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상단 입장에서 저 마차 안을 굳이 뒤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도적이나 흉흉한 꿍꿍이를 갖고 있는 자들이 마차 굴대가 부러졌다고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은 상단 사람들이 했습니다."

"?!"

예상이 빗나가자 허 중관은 깜짝 놀랐다.

"그런가? 어째서? 어떻게 알았나?"

"그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니? 그럼 뭐가 중요하단 건가?"

"저기 저 상단 놈들은 금의위고 저 마차 놈들은 무림인들 같습니다만..."

"...!"

* * *

"어떻게 알았지?"

보고를 들은 주 공공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가마 안에서 드리운 발을 치우고 봤을 때 상단이든 마차든 특별하게 수상한 점은 없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속 행동을 관찰했다면 모를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 알아차리는 건 힘들어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판관은 무엇을 근거로 상대의 신분을 파악했단 말인가?

"저들은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런 것치고는 마차 안에 지나치게 물건이 많았습니다."

"물건을 판 뒤 새 물건을 사들였을 수도 있지."

"예. 그러나 그런 여행이었다면 말들이 좀 더 지쳐있어야 합니다. 말들의 갈기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눈빛은 빳빳하니,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상행은 위장이었다는 뜻이겠지요."

허 중관은 자리도 잊고 탄성을 내뱉을 뻔했다. 같이 옆에서 봤는데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었다.

가마꾼 노릇을 하던 환관들도 연우혁의 말이 흥미로웠는지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니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복장을 눈여겨봤습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 평범해보이도록 칼집을 만들어놨지만, 거기에 달린 장식은 숨기지 않았더군요. 금의위 무인이 하고 다니는 패용 장식이었습니다."

저번에 만났던 하 교위면 모를까 저 눈앞의 금의위 무인은 조금 허술한 면이 있었다.

검도 완전히 숨기는 대신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을 조금이나마 남겨놓은 것이다.

덕분에 연우혁은 보자마자 상대가 금의위 출신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훌륭하구나! 벌써 데려온 보람이 있다."

주 공공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으며 재촉했다.

"그럼 저 마차 놈들은? 저 놈들 중에 무공을 익힌 놈들이 있다는 건 허 중관도 느꼈을 거다. 하지만 호신으로 익혔거나 보표일 수도 있을 텐데? 왜 무림인이라고 말한 거지?"

"금의위의 태도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연우혁은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금의위가 신분을 숨기고 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건 해야 할 일이 있어서인데, 저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가며 마차를 뒤지려고 하는 건 상대에게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마 마차 굴대도 저들이 부러뜨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러진 흔적이 인위적입니다."

"그 이유는?"

"저희와 비슷한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주 공공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저 무림인 놈들이 자체적으로 조사를 한 모양이구나. 금의위 놈들은 그걸 탐내는 모양이고. 마차 안을 뒤져볼 수 있겠느냐?"

"충분히 가능합니다."

허 중관은 맡겨만 달라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저기 무림인이나 금의위의 무리들이 투닥거리고 있었지만, 허 중관은 다른 환관들을 데리고 제압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이들의 무공과 합격진은 저 정도 이들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다. 힘을 쓰지 말고 조용히 해결하자꾸나. 말로 해결할 수 있겠나, 연 판관?"

"저 말입니까?"

연우혁은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무림인들이 마차 안에 뭘 숨겼는지 궁금하긴 했다. 괜찮은 정보라면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서 훨씬 빠르게 일을 진척시킬 수도 있었다.

문제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느냐였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

주 공공은 물론이고 환관들까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연우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과연 저 판관이 조용히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사건의 전후를 맞히는 건 지혜로 됐지만, 저렇게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는 자들까지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말도 안 되오!

-진실이오...

이야기를 끝낸 무림인들은 눈에 분노한 기색을 담고서 외쳤다.

"감히 살수가 우리의 짐을 노리다니. 누구의 의뢰를 받은 것이냐?! 역시 사교의 의뢰를 받은 것이냐!"

"뭐... 뭐? 살수라니. 무슨 소리요?"

"닥쳐라! 네놈들이 상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건 이미 파악했다. 그렇게 긴 거리를 뛴 말이 저렇게 건강할 리 없지!"

"아, 아니...!"

주 공공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 중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렇게 즐겁게 웃으시는 건 처음이군!'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4)

설득에 넘어간 무림인들이 살기를 노골적으로 뿜어내자 금의위 무인들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빨리 경공을 펼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이나 정체불명의 표사들이 괘씸하긴 했지만, 여기서 싸워봤자 정체만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만큼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멍청한 놈들 같으니!"

금의위들은 빠르게 멀어졌다. 그 모습에 무림인들은 더더욱 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상단의 인원들이 전부 다 무공을 익힐 수는 없는 것이다.

"살수가 맞았군!"

"쫓겠습니다!"

"기다려라. 짐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살수 놈들이 짐을 노린 거라면 더더욱."

다른 이들보다 나이가 조금 있는 무림인 하나가 말리자, 다른 무림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추적을 멈췄다. 연우혁은 그 모습에서 상대방이 꽤 이름 높은 문파 출신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저런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같이 호흡을 맞춘 무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했고, 그런 무인들은 보통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었다.

세가 특유의 사치스럽거나 과시하는 듯한 복장이 없는 걸 보니 아마 구파일방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리고 인근 지역을 생각해보면 구파일방 중에서도...

"종남파의 무인이로구나!"

가마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종남파의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놀라움이 끝나자 경계심이 올라왔다.

무인들은 경계심 섞인 눈으로 가마를 쳐다보았다.

"...누구시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오. 수상한 뜻이 있었다면 아씨께서 종남파의 무인이라는 걸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오. 우린 청오표국에서 나왔고, 나는 허팔달이요. 믿지 못하겠다면 얼마든지 연통을 넣어서 알아봐도 좋소."

허 중관의 태도가 워낙 당당한데다가 방금 연우혁이 살수의 습격도 알려준 만큼, 종남파의 무인들은 경계심을 줄이고 자신의 신분도 밝혔다.

"...종남의 장등원이라 합니다."

삼십 중반은 된 것 같은 무인이 입을 열었다. 아까 다른 젊은 무인들을 말리는 걸 봤을 때 이 무인이 조장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름을 밝히자 허 중관은 감탄했다.

"청불검(靑佛劍) 장등원! 장 대협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허명일 뿐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종남에서 나온 걸 어떻게 아셨는지 말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장등원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서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단단한 심지가 느껴졌다. 과연 구파일방 출신의 무림인이었다.

가마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수들이 접근한 걸 알아차린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알아챘다."

"예?"

"무림에서 너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협행을 하고 있으니 사파는 아닐 것이고, 복장이 검소하니 오대세가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구파일방일 텐데, 이 근처에서 보일 문파는 종남과 화산뿐."

"...!"

종남파의 무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경계심을 낮추고 감탄의 눈빛으로 가마를 쳐다보았다.

"화산파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매화를 달고 있지는 않지만, 잠행을 할 때에는 화산의 무인들도 매화를 숨깁니다."

"화산의 무인이라면 염주(念珠)를 차고 있지 않겠지."

"!"

장등원은 자신이 차고 있는 염주를 깨닫고 전율했다.

완전한 도가 문파인 화산파와 달리 종남은 도가의 무공이든 불가의 무공이든 가리지 않고 실용적으로 익히는 문파였다.

장등원의 별호 또한 도가 무공과 불가 무공을 같이 익혔기에 얻은 별호 아니던가.

하지만 그 사실과 염주만으로 정체를 알아차리다니. 과연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살수 집단의 접근을 알아차린 것도 저 가마 안에서 나온 지혜리라.

"저 분은 누구십니까?"

"신분을 밝힐 수 없소. 귀한 분을 모시고 가는 길이라."

허 중관은 당당하고 오만한 자세로 말했다.

무림에서는 때때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위세를 부리는 게 더 효과가 좋았다. 표국의 표사들이 이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무림인들은 귀한 신분인가보다 하고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로 종남파 무인들은 알아서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사해가 동도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종남의 의기는 강호에 그 이름이 높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셔도 좋소. 부러진 굴대 같은 것 말이오."

종남파 무인들은 어지간히 곤란했는지 반색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여봐라. 남는 물건이 있나 찾아 보거라."

표사로 위장한 환관들이 쓸만한 물건을 찾는 동안 연우혁은 종남파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마차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장등원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마차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소?"

"...서책이오. 양이 꽤 많지."

장등원은 그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인근에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과 결탁한 곳을 뒤져 장부를 싹 긁어낸 것이다.

뒤지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꼭 필요한 일인 만큼 남들한테 알려줄 수 없었다. 게다가 살수들이 찾아온 걸 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연우혁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중요한 물건인 것 같소."

"...그렇소만."

"그러면 조금 더 조심해서 지켜야 할 것 같소. 지금은 누가 들어가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으니."

"무슨...?"

장등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차의 문들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열쇠 또한 본인이 갖고 있었다. 수레 목적으로 쓰고 있는 만큼 창도 덧대서 빈틈이 없는데 누가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아까 굴대를 고쳐주겠다고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았소?"

"그렇긴 했지만, 문은 열리지도 않았고 그들이 건드리지도 못했소. 누가 어떻게..."

"그렇겠지."

연우혁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돌멩이를 들어 마차 아래를 향해 던졌다.

딱딱한 나무와 부딪치는 소리 대신 뭉툭한 소리가 났다.

-윽!

"?!"

욕설과 함께 마차 바닥에 딱 붙어있던 금의위 무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종남파 무인들은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경악해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비켜라!"

먼저 반응한 건 환관들이었다. 환관들은 재빨리 포위망을 만든 뒤 금의위 무인을 덮쳐들어갔다. 일개 표사라고 생각해 정면돌파를 하려던 무인은 생각보다 훨씬 엄중한 기세에 경악했다.

'무슨...!?'

"이 살수 놈!"

"커헉!"

금의위 무인의 손발이 어지러워지자 허 중관이 벼락 같이 출수했다. 얕보고 있던 표사들의 무공에 당황하던 금의위 무인은 그대로 제압당했다.

연우혁은 종남파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이 살수들은..."

"살수가 아니다. 제기랄!"

"...문을 열 생각이 없었소. 종남파의 무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가겠소. 그저 시선을 끈 다음 한 명을 아래에 남길 생각이었겠지."

"이... 이런 비겁한 살수 놈들!"

종남파 무인들은 살수들의 교묘함에 경악했다.

청불검은 허 중관을 보며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장 모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무림의 귀계가 무섭다는 걸 오늘 다시 한 번 배웠습니다.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했을지..."

"그, 그렇지. 무림의 귀계가 참으로 무섭소."

'말이나 좀 해주고 할 것이지...'

허 중관은 놀란 가슴을 속으로 쓸어내리며 연우혁을 원망했다.

금의위 놈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면 언질이나 주고 할 것이지 저렇게 대뜸 움직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저 젊은 판관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악취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이 살수는 우리가 심문하겠소. 인근을 돌아다니는데 이런 살수가 있다는 건 우리도 그냥 넘기기 힘들군."

"으음..."

장등원은 망설였다.

저 살수를 조사하면 그들이 찾는 수상한 무리의 비밀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저 표국 무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게 너무 많았다.

"혹시 심문한 결과를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허 중관은 인자하게 웃었다. 이 환관은 어느 누구든 신뢰할 수밖에 없는 넉넉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종남파 무인들도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버렸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소싯적에 연쇄하물절단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 * *

"네놈이 누구를 건드리고 있는 줄 아는 것이냐?"

"놈. 우린 동창이다."

"...살, 살려만 주십시오! 정 교위가 시킨 겁니다! 금의위 정 교위! 그 놈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목을 자르겠다고 협박을 해대서!"

마차 밑에 붙어 있던 금의위 무인은 교위가 아니라 무림에서 고용된 자였다. 사파 출신으로 나름 신투라고 자부할 만큼 재주가 있었지만, 금의위 교위한테 붙잡혀서 일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금의위의 위세를 믿고 역으로 성을 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동창이었다. 무인은 동창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살려주십시오. 아니, 차라리 그냥 편하게만 죽여주십시오."

"이보게. 우리가 그렇게 악독한 사람 같나?"

"예..."

"..."

"..."

연우혁과 허 중관이 어이가 없어 말이 멈추자 그제야 무인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대인! 대인!"

"됐고. 알고 있는 것만 말하게. 그럼 편히 죽이든 편히 살리든 해줄 테니."

허 중관은 바늘을 꺼내 탁탁 두드렸다. 그러자 무인은 겁에 질려서 알고 있는 걸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금의위도 홍목대사와 그 무리가 혈교나 혹은 다른 사교 무리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다 이건가?"

"예... 들어보니까 꽤 덩치가 크던데요..."

고명한 홍목대사는 검소한 행색을 하고 있었고, 머무르는 사찰의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엮인 무리의 크기는 생각보다 제법 되는 모양이었다.

절에 바친 돈을 옮기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소문을 내는 바람잡이들 등 결코 깨끗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허 중관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그냥 잡아다가 심문해도 될 것 같은데..."

이쯤이면 혈교와 엮인 사이비거나 혈교와 엮이지 않은 사이비거나 차이밖에 없어보였다. 그리고 후자여도 별로 억울하지는 않으리라.

"그, 저한테 일을 맡긴 정 교위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수상해보여도 증거 없이 저런 스님을 끌고 갔다가는 관리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무식한 동창 놈들이라면 모를까 금의위는 다르다고..."

"..."

"..."

환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첩자를 쳐다보았다. 첩자는 뒤늦게 깨닫고 굽신거렸다.

"살, 살려주십시오!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음. 자네는 참 용케도 살아있군그래. 그래서 그 증거가 저 마차 안에 있다는 건가?"

"예... 장부를 뒤지면 어느 세력이 지원하는지 나올 거라고 정 교위가... 근데 아마 힘들 겁니다."

"왜지?"

"종남 놈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암호로 되어 있나 봅니다."

"하여간 머리는 쓸데없이들 쓰는군."

허 중관은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근처에 똑똑한 유생이나 서생을 찾아가 일을 맡기면 되겠지만 시간이 낭비되는 게 거슬렸다.

"저. 중관 어른."

"왜 그러나?"

"아까 신통력으로 마차 안에 있는 장부 확인했습니다만..."

"암호는?"

"그것도 풀었습니다."

어차피 영안이 있는데 암호는 별 의미가 없었다.

허 중관이 경탄하는 동안 붙잡혀 있던 무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저 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란 말인가??

* * *

상황을 대충 마무리 짓자 허 중관은 주 공공의 허락을 받은 뒤 종남파 무인들에게 신분을 밝혔다.

"사실 우린 동창의 무인일세. 홍목대사가 수상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지. 이제 우릴 돕게."

"..."

"..."

종남파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지만 허 중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재촉했다. 갈 길이 바빴던 것이다.

장등원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가는... 겁니까?"

"황수장(黃手莊)에 가네. 홍목대사의 일을 도와주더군."

"황수장!"

장등원은 깜짝 놀랐다.

어딘가 수상쩍은, 사파의 무리들이 세운 장원 아닌가 생각하긴 했었는데 홍목대사와 엮여 있었다니!

"그 놈들이...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자네들이 갖고 있는 장부를 읽어봤네."

"언, 언제 어떻게 말입니까?? 그리고 암호가..."

그 때 마침 가마 안에 있던 주 공공이 허 중관을 불렀다. 허 중관은 가기 전 연우혁에게 손짓해서 오라고 했다.

"자. 저 친구가 다 했으니 알아서 물어보게."

"...?!!"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5)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허 중관은 가마 앞에 서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뒤에서는 장등원이 진충비도에게 온갖 질문을 던지며 귀찮게 하는 게 보였다.

"군병을 불러놓는 게 좋겠다."

"!"

근처 위소(衛所)의 장수와 병사를 불러서 대기시키겠다는 말에 허 중관이 놀라워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물론 병사들을 쓰면 훨씬 편했다. 동창 환관들의 무공이 뛰어나다지만 이들은 원래 싸움을 좋아하기보다는 아랫사람한테 시키는 걸 더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병사 천 명만 동원해도 어지간한 중소문파는 감히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강호에 이득만 있는 계책은 없는 법. 이제까지 주 공공이 병사들을 부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벼슬아치들이..."

관리들은 동창을 두려워하는 만큼 싫어하기도 했다. 당연히 반격의 기회가 찾아오면 칼을 휘두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나중에 위소를 맡고 있는 정천호가 보고라도 올리면 왜 군병을 동원했는지 해명해야 한다고, 공공이 사사로이 병사들을 불렀다고 귀찮게 굴 터.

주 공공 성격에 저런 식으로 트집을 잡힐 바에는 아예 깔끔하게 잘라내는 만큼 의외의 선택이었다.

"저만큼 증좌가 있으니 해명은 충분하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 대질을 귀찮아하셨던 것 아닌지..."

"편한 길이 있으면 가끔 그 길로 가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또,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판관을 불러와서 일을 시키는데 앞에서 싸우게 한다면 가혹하지 않겠느냐? 병사들을 대기시켜라. 싸움은 병사들에게 시켜야겠으니."

"감복했습니다, 공공!"

허 중관은 자신이 모시는 상관의 마음씀씀이에 크게 감명받았다.

젊고 뛰어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실로 나라의 홍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천 명에 가까운 군병을 과감하게 부리는 동창의 위세를 본다면, 저 젊은 판관은 자신이 선택한 연줄이 정말 대단한 연줄이라고 다시 한 번 느낄 것이다.

"병사들을 본다면 진충비도도 동창의 위세에 감탄해, 금의위와는 일을 해결하는 방식부터가 다르다고 느끼겠지요!"

"...허 중관 자네, 눈치가 빨라졌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위소부터 가도록 하자꾸나."

* * *

주 공공은 종남파의 무인들까지 데리고 위소로 향하진 않았다. 알아낼 건 다 알아낸데다가 무림인들을 데리고 위소에 들어가는 게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허 중관은 종남의 무인들을 먼저 황수장으로 보냈다.

-알겠나? 절대 먼저 들어가지 말게. 먼저 들어간다면 동창의 이름을 헌 짚신처럼 안다고 생각하겠네.

-걱,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 대인께서 크게 일을 도와주셨는데 어찌 멋대로 행동하겠습니까?

-나야 자네들을 믿네! 하지만 무림인들을 잘 알지 않나. 황수장 안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게 보여도 들어가지 말게. 하늘이 무너져도 들어가지 말라, 이 말일세. 알겠나?

-...예.

아까 장등원과 허 중관이 한 대화가 꽤 인상 깊었기에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청불검에게 그렇게 말하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연우혁이 보기에 장등원은 멋대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우직하고 고집이 있는 성격에 구파일방 출신이면 쉽게 약속을 어기진 않을 것이다.

만약 황수장 안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라도 하면 괜히 원한만 살 것 같은데...

"무림인들에게는 이 정도로 말해줘야 알아듣는다네. 이렇게 말했으니 어지간해서는 먼저 들어가지 않겠지."

"하지만 그 때문에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네!"

허 중관은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림인, 그것도 종남의 무인이라면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알아서 들어갈 걸세. 그런 다음에 자기 목을 내놓겠다 하겠지."

"과, 과연. 하나 배웠습니다."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에는 언제나 더 강하게 말해야 하는 법일세. 그리고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종남의 무인들이 그렇게 얼뜨기도 아닐 뿐더러, 적들도 아직 상황을 잘 모르고 있을 테니까. 시간은 충분하지."

저 멀리 천호소가 보이자 허 중관은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마침 병사들이 목책 너머로 주먹을 맞부딪치며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진충비도, 병사들을 부려본 적이 있는가?"

"제가 어떻게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겠습니까?"

군관도 아니고 그만한 고관도 아닌데 병사들을 부릴 일이 없었다. 허 중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라면 그럴 일이 없네. 하지만 동창에서 일하다보면 가끔 병사들을 부릴 일이 생기지. 그게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라네. 환관들 중에는 일부러 자원하는 이들도 있을 만큼."

손가락 하나로 천 명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강렬한 쾌감이었다. 괜히 관리들이 권력을 놓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매달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환관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권력의 쾌감을 누릴 일은 많지 않았다.

"과연 그렇습니까?"

연우혁은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허 중관은 살짝 당황해서 물었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나?"

"뭘 말입니까?"

"병사들을 부리는 것 말일세."

"전 지시를 내릴 자신이 없습니다만..."

"하나도 어렵지 않네.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무슨 복잡한 진법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서 뭘 하라는 명령만 내려도 충분하네. 어차피 세세한 일들은 장수들이 할 텐데!"

'이래도 되나?'

연우혁은 저번에 지부 어른이 군선을 빌려 강 위에서 호화롭게 놀던 일이 떠올랐다.

동창의 환관들이 병사들 부리는 걸 재밌어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전 정말 괜찮습니다."

"허허.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네."

"그보다 병사들을 이렇게 쉽게 빌릴 수 있는 겁니까? 좀 더 복잡한 절차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원래라면 지휘사에게 전갈을 보내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하지만 동창은 조금 다르네.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빌릴 수 있지."

허 중관은 동창의 권세를 이 젊은 판관에게 곧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이 판관은 특이하게도 재물에 욕심이 없는 만큼 권세에도 별로 욕심이 없어서 감탄하게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기껏 데려왔는데 실로 아쉬운 일이었다.

* * *

"안, 안 됩니다!"

"..."

"..."

허 중관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이 천호소를 맡은 장수, 정천호(正千戶)가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내가 귀를 먹은 건가? 이보게. 홍목대사는 자네도 들었을 것 아닌가. 최소한 흑도 무리 몇이 지원해주는 건 확실하네. 사교 무리가 엮였는지 아닌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이런 일이라면 급하게 병사를 빌려도 관례에 어긋나지 않는 일일세. 그런데 지금 못하겠단 건가?"

"제... 제대로 된 절차에 따르셔야 합니다."

"제대로 된 절차라니. 무슨 소린가? 설마 지금 지휘사한테 전갈을 보내서 허락을 받으라고? 보름은 넘게 걸릴 텐데?"

"..."

정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긍정이란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허 중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눈앞의 장수가 건방지게 굴어서가 아니었다. 뒤에서 주 공공이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놈...! 사교와 결탁한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무슨...!"

정천호는 그제야 동창의 환관들이 무력행사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걸 느꼈는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동창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설마 천호소 안에서 장수를 베려고 할 줄이야!

"여, 여기서 이런 짓을 할 수는 없..."

"쯧쯧. 건방진 짓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허 중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주 공공의 역린을 건드려도 이렇게 건드리다니. 젊은 판관 앞에서 체면이 보통 상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잘 가ㄱ..."

"알았습니다!"

"?"

허 중관과 주 공공은 물론이고 암기를 뽑아들려던 환관들도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뭘 알았나?"

"저 자가 왜 병사들을 안 내놓으려고 하는지 말입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나?"

허 중관은 생각치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정천호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자신이 무슨 대장군이라도 된 줄 착각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모든 이상한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주 공공. 공공께서도 느끼시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그렇구나."

정천호를 죽이고 시작하려던 주 공공은 암기를 내려놓더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홍목대사와 관련된 일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 정천호의 반응은 멍청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면 속에서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 공공은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일에는 어떤 내막이 숨어있단 말이냐?"

"간단합니다. 이 천호소에는 병사들에게 들려줄 병장기가 없습니다."

"...?!"

"생각해보십시오. 입구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창을 들고 있는 병사가 하나도 없었잖습니까."

"...그렇군!"

허 중관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전율했다.

생각해보니 맨주먹으로 대련하는 병사들만 보였지 그 흔한 창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그, 그...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천호는 겁을 먹은 와중에도 화들짝 놀라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했다.

천호소를 책임지고 있는 장수로서 병사들이 쓸 병장기가 없다는 건 목이 열 개여도 부족한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 가서 확인해보면 되는 일일세. 정말 고집을 부릴 텐가?"

"...크흑!"

정천호는 좌절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게..."

"아마 병장기를 옮기기로 한 부천호(副千戶)가 사라지면서 병장기도 같이 사라졌을 겁니다."

"???"

정천호는 좌절하는 와중에도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저 젊은 놈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저렇게 자세히 안단 말인가?

"어떻게...?"

"이 자리에 다른 부관은 보이지만 부천호가 없지 않습니까. 천하의 동창을 앞에 두고 부르지 않을 정도의 이유라면 범상한 이유는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걸... 그게 어떻게...?"

주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부천호가 병장기를 빼돌린 모양이구나."

"도적들한테 습격당했을 수도 있... 지 않습니까?"

정천호의 말에 연우혁은 바로 설명했다.

"병장기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쓰러뜨리는 건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보다는 부천호가 빼돌렸겠지요."

"이, 이 놈...! 내가 그렇게 믿었는데...!"

주 공공은 분통을 터뜨리는 정천호를 내버려두고 연우혁을 불렀다.

"내 생각에, 여기서 빼돌린 병장기를 둘만한 곳은 인근의 복양이나 구릉 아닌가 싶은데. 이 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주 공공은 젊은 판관이 이 두 도시 중 어디를 수상쩍게 여길지가 궁금했다.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는 만큼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혼자 했겠습니까?"

연우혁은 그렇게 말한 다음 정천호를 보며 재촉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빨리 나가서 동창이 부천호를 잡아왔다고 하십시오. 군관들 중에 제일 표정이 안 좋아진 놈이 내통한 놈입니다. 붙잡아서 심문하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주 공공은 사람의 재주가 너무 뛰어나면 그건 그거대로 예상을 벗어난다는 걸 새삼 느꼈다.

'기껏 좀 이야기하려고 했더니...'

* * *

"으음. 주의하는 게 좋겠군. 공공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 같네."

"역시 그 군관 때문이군요. 괘씸한 놈들 같으니."

연우혁은 멍청한 정천호를 탓하며 분개했다.

주 공공은 시늉만 내는 연우혁보다 훨씬 더 충신에 가까웠다. 그런 사람인만큼 저런 군관을 보면 격노할 수밖에 없으리라.

"맞는 말일세. 자네가 빨리 해결해서 망정이지, 거기서 시간을 끌었으면 공공께서 기분이 얼마나 편찮으셨겠는가."

"감사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자네 재주는 정말 대단하네. 탐관오리들이 눈빛만 봐도 벌벌 떨 거야. 황수장에 도착하면 바로 해결해버리게. 따라온 군관들이 놀라 자빠질 테니."

허 중관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의 가마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주 공공은 허 중관을 불렀다.

-예, 공공. 그냥 부르셨다고요? 제가 우둔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뒤에서 허 중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우혁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황수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서 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오는 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 같았다.

"저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차를 발견한 종남파 무인들이 달려오더니 외쳤다. 그들의 표정에도 당혹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저기 금의위 무인들이..."

"우리가 오기 전에도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정 교위는 발끈해서 외쳤다. 저 괘씸한 무림인 놈이 혈사의 책임을 금의위에게 돌리고 있었다.

"금의위 놈들이 한 것 같소?"

"아무래도 그럴..."

"확실히 그럴듯하군!"

허 중관까지 가세해서 떠들자 금의위 무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6)

"정황부터 확인하도록."

주 공공이 냉정히 명령을 내렸다. 허 중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남파 무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장등원이 이끄는 종남파 무인들은 지시받은 대로 황수장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만큼 빠르게 도착하진 못했다. 방해가 붙은 것이다.

"추적자가 붙은 것 같아, 도중에 산으로 빠져서 놈들을 따돌렸습니다."

"추적자라니, 설마..."

"예! 저 자들이 분명합니다."

금의위 무인들을 노려보던 장등원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허 중관에게 말했다.

"참. 잘 됐습니다. 대인. 저 자들이 금의위의 아패(牙牌)를 갖고서 금의위라고 주장하던데,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대인께서 진상을 밝혀주십시오!"

장등원은 자기들이 금의위 무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아직 의심하고 있었다.

아패를 비롯해 금의위 교위를 증명하는 검을 갖고 있다지만 그건 얼마든지 죽이고 뺏을 수 있었다. 게다가 동창의 환관들도 저들이 살수 집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은 검과 아패를 존중해야 하니 앞에서는 금의위라고 인정해줬지만 속으로는 동창의 도착만 기다리고 있었다.

"음. 미안하네. 사실 저들은 살수 집단이 아니라 금의위가 맞네."

"..."

장등원을 비롯한 종남파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다.

살수 집단이 아니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빨리 설명 좀 해주게. 금의위 놈들이 추적해왔고 따돌렸다고? 추종향을 썼나보군..."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장등원은 충격에서 회복한 뒤 마저 설명했다.

살수 놈들, 아니 금의위 무인들이 쫓아오는 것 같아서 산을 돌아 따돌렸는데, 황수장에 도착하고 보니 안의 사람들은 전멸했고 살수 놈들, 아니 금의위 무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금의위 무인들이 먼저 도착해서 혈겁을 벌였다고 의심이 갔다.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금의위 무인들을 이끄는 정 교위가 경고했다.

"종남의 무인들은 잘 들어라! 감히 관의 일을 돕지 않고 방해한 건 괘씸하지만 넘어가주겠다. 그러나 범부의 하찮은 의협심으로 감히 금의위를 의심했다가는 용서가 없을 것이다. 알겠나?"

교위도 지금 상황이 매우 불리하단 건 잘 알고 있었다.

정파 무림인들의 뒤를 쫓다가 앞질러 도착했는데 살겁이 벌어져 있었으니, 정 교위도 만약 반대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심문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불리할 때일수록 큰 소리를 치고 권세를 휘둘러야 했다.

종남파의 명성은 조정이나 황실에도 알려져 있을 만큼 비범했지만, 금의위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경고하면 분명 잘 알아들을 것이다.

...상대에게 다른 연줄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쪽이나 잘 듣게. 우린 동창일세. 여기 가마 안에 계시는 분은 주 공공이고. 근처에는 천호소에서 데리고 온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네. 그러니 금의위 이름으로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게."

"..."

정 교위를 비롯한 금의위 무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본 종남파 무인들은 친근감을 느꼈다.

누구나 속고 속는 것이 무림 아니겠는가!

"어떻게 먼저 도착했나?"

"...종남의 무인들을 쫓다보니 황수장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놈들이 우릴 눈치 채고 빙빙 돌길래, 먼저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오.'

연우혁은 정 교위가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짧은 움직임만 보고서 목적지를 찾아내려면 애초에 그 목적지가 어느 정도 심중에 있어야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도착했을 때 상황은?"

"황수장 안의 무인들은 전멸한 상태였다. 전멸한지 한 시진 정도는 지난 것 같더군. 홍목대사로 보이는 놈도 죽어 있었다."

"홍목대사까지?!"

허 중관은 놀랐다.

홍목대사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여기서 같이 죽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 ...그보다 정말 이 주변에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나? 정천호가 까다로운 인물이라 병사를 안 내줄 텐데."

정 교위의 말에 허 중관은 피식 웃으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진충비도. 설명해주게."

"뭘 설명까지... 그냥 잘 부탁드린 거지요."

"진충비도?!"

장등원은 물론이고 정 교위까지 놀라워했다. 장등원은 연우혁을 보며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했다.

"이, 이렇게 젊은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선풍도골의 중년인일 줄 알았소."

"...?"

연우혁은 어떻게 소문이 퍼진 건가 의아해했지만 대답하기도 전에 정 교위가 먼저 말했다.

"네놈이 그 포두 놈이냐?!"

"이제는 판관이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그 건방진 하가 놈이 네놈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동창에 붙어?!"

신세를 졌던 하 교위 이름이 나오자 연우혁은 멈칫했다. 허 중관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은혜는 여기 진충비도가 베풀었지. 일의 앞뒤를 왜곡해도 정도가 있지 않나."

"무슨...!"

"그리고 지금 상황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서 핏물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입 조심하게! 난 솔직히 지금도 의심스러우니 말이야. 자네들이 여기 놈들을 고용한 뒤 들킬 것 같으니 싹 쓸어버린 것 아닌가?"

"...!"

허 중관 뒤의 환관들은 물론이고 종남파 무인들까지 그럴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금의위는 이번 일에서 성급한 행동들을 많이 저질렀다. 무림인의 짐을 뒤지고, 뒤를 쫓은 뒤 앞지르기까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음해를...!"

"그러게 누가 무도하게 행동하라고 했나? 지금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것도 주 공공의 자비라고 생각하게. 이 정도면 죽이고 나서 확인해도 될 테니."

서슬퍼런 환관의 말에 정 교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교위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서두른 건 그저 공을 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황수장의 일은 정말로 우리가 한 게 아니다. 의심가는 놈이 있다."

허 중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심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말하지 않고 여기까지 숨기다니.

괜히 금의위가 아니었다.

"누군가?"

"화산파다."

"..."

"..."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교위는 발끈해서 외쳤다.

"정말이다!"

"그냥 되는 대로 지껄이는 건가? 아니, 근처에 있는 유명한 문파라고 말하면 믿어줄 줄 알았나?"

"도착했을 때 멀리서 화산파 놈들이 도망치는 걸 봤단 말이다. 놈들은 분명 화산파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음!"

장등원은 신음소리를 냈다.

확실히 화산파도 황수장 같은 사파 무리들을 토벌할 만한 이들이었다. 인근의 정파 문파였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자들을 싫어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도둑놈처럼 습격해서 쓸어버리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의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금의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무엇이 아쉬워 저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런 무식한 무부 놈들이...!"

정 교위는 한탄했다.

멍청한 놈들밖에 없어서 정 교위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연우혁도 입을 열었다.

"화산파는 아닐 겁니다."

"아둔한 놈!"

"정 교위. 화산파 무인들이 도망치시는 걸 멀리서 보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무복 말고 화산파 무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점이 있었습니까?"

"화산파 특유의 검을 들고 있었다. 삿갓을 쓰고 있었고..."

"검은 어디에 차고 있었습니까?"

연우혁의 질문에 정 교위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이 벼락출세한 포두 놈은 뭘 안다고 캐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방향을 물은 겁니다."

"몇 놈은 왼쪽에 찼고 몇 놈은 오른쪽에 차고 있었다."

연우혁은 원하는 걸 얻어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화산파는 사이하고 독랄하다는 이유로 좌수검(左手劍)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검을 오른쪽에 차고 있던 자는 아마 흑도무림의 무인이었겠지요. 화산파의 무인으로 위장했지만 급해서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

정 교위는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것마냥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보고 넘긴 걸 눈앞의 포두 놈이 짚어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과연...!"

뒤에서 듣고 있던 주 공공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범인들은 도망간 건가?

"아닙니다. 공공. 생각해보면 그것도 이상합니다. 애초에 화산파의 짓으로 위장하고 싶으면 무복이든 검이든 몇 개를 남겨놓으면 그만인데, 무엇하러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망치는 귀찮은 방법을 선택하겠습니까? 잡히기라도 하면 일이 더 꼬일 텐데요."

-과연 그렇구나.

속임수치고는 희한한 속임수였다. 연우혁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화산파처럼 보이는 무인들은 금의위를 속이려고 대기하고 있다가 도망친 게 아니라, 이쪽으로 오다가 금의위를 발견하고 도망친 겁니다. 황수장에 금의위 무인들이 보이니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쳤겠지요."

주 공공은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그보다 장등원이 앞서서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하시오, 정말! 진충비도의 명성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알 것 같소!"

"하찮은 재주일 뿐이오."

"아니오. 진충비도가 없었다면 화산파는 괜한 누명을 쓰지 않았겠소!"

끼어들어서 떠드는 무림인의 모습에, 주 공공은 짜증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불행히도 가마 안이라서 시선은 닿지 않았다.

"잠깐, 그럼 범인은 어떻게 된 건가?"

"간단합니다. 화산파로 위장할 이들이 오다가 도망쳤으니, 범인은 안에 남아있습니다. 급한 만큼 시체로 위장해 있겠지요."

"..."

정 교위는 눈만 끔벅이며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태연하게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내뱉는 이놈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건 자기 자신도 저 말에 홀린 것처럼 설득되고 있다는 거였다.

'무슨... 이런 놈이...?!'

***

귀창괴걸이란 별호를 갖고 있는 마두, 봉홍은 귀식대법을 언제쯤 풀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제기랄. 흑교서 놈. 돌아가게 되면 죽여버리겠다.'

흑염방의 책사, 흑교서 우거는 값만 내면 지혜를 빌려주는 흑도의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흑교서가 제값을 하지 못한 적은 없었기에 봉홍은 흑교서를 나름 신뢰하고 있었다.

이번 홍목대사의 일도 그랬다.

봉홍을 비롯해 정파에 추살령이 걸린 마두들이 모여서, 언변 좋은 약장수 놈 하나를 홍목대사란 거창한 이름과 함께 내세운다.

이 사찰을 후원해주는 자들이 생기고 떡고물에 관심을 가지는 문파들이 늘어나면 손을 잡고 암중에서 더욱 큰 이득을 누린다.

이 계획을 정교하게 다듬어 준 게 바로 흑교서였다. 흑교서의 재주가 아니었다면 난폭하기만 한 마두들이 일사불란하게 홍목대사와 사찰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흑교서의 재주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홍목대사라고 떠받들어지자 거만해진 놈이 마두들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나 관리와 손을 잡으려 하자, 흑교서는 놈을 죽이라고 냉철하게 조언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내버려두면 언제 마두들의 이름을 밀고할지 몰랐으니까.

또 그 말이 맞다고 여겼기에 봉홍은 놈과 손을 잡은 황수장에 찾아가 다른 마두들과 함께 살육을 벌였다. 물론 그냥 살육만 벌인 건 아니었다. 흑교서의 지시대로 추적을 혼란시킬 위장도 준비해왔다.

화산파의 무복이나 검이 발견되면 아무리 뻔한 수작이라 하더라도 화산파한테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을 터.

화산파가 인근 사찰이나 불문과 사이가 안 좋은 만큼 더더욱 효과적인 계책이었다.

그런데 이번 계책은 끝이 좋지 않았다. 화산파의 소행으로 위장시켜야 할 놈들이 오다 사라지고 밖에는 금의위 놈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영리하게 기지를 발휘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금의위 놈들을 상대로 도주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빨리 가라. 빨리...'

이렇게 시체가 쌓여 있으면 일일이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수상한 놈들이 따로 있다면 더더욱.

대충 확인만 한 뒤, 더럽고 냄새나는 일들은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게 무림인인 것이다.

"!"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귀창괴걸은 움찔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들켰나? 아니다. 들켰을 리가 없다! 어떻게... 하지만 왜 이쪽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귀창괴걸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생각을 했다. 다른 마두들도 비슷했을 것 같았다.

푹!

"커헉!"

귀창괴걸은 운이 좋았다. 다른 마두의 비명에, 귀창괴걸은 귀식대법을 풀고 튕겨 일어났다.

놀랍게도 앞에 금의위 놈들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까지 있었다. 종남의 청불검도 보였다.

"어... 어떻게...?"

"네놈을 여기서 죽이게 되어 반갑구나!"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지?"

"하. 네놈의 하찮은 재주로 진충비도 연 대협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

그게 대체 누구냐?

청불검이 확신을 가지고 내뱉은 말에 귀창괴걸은 당황했다.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7)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귀창괴걸은 호흡을 되돌리며 온몸의 세맥에 내기를 불어넣었다. 방금까지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었던 만큼 전신의 근골이 뻣뻣하게 굳고 내공의 순환이 느려진 것이다.

"귀창괴걸 봉홍. 네놈의 악행은 말하기도 지치는군. 대가를 치러라!"

"하. 사파 놈들끼리 죽였는데 별 참견을 다 하는군!"

봉홍은 한손으로는 장법을 펼치며 다른 한손으로는 단창을 꺼내들어 휘둘렀다. 무전대변(無前大變)이란 초식이었다.

이미 귀창괴걸의 난해한 창법에 대해 알고 있었던 장등원은 맞서 상대하는 대신 보법을 펼쳐 거리를 벌렸다.

"합(合)!"

외침과 함께 종남의 무인들이 모이며 검진을 펼쳤다. 귀창괴걸은 장법을 날리며 검진이 완성되기 전에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종남의 무인들이 한 발 빨랐다.

이를 뿌득 갈며 봉홍은 욕설을 내뱉었다.

"정파 놈들이 비겁한 짓은 더 잘 하는구나!"

"당신 같은 마두와 무엇하러 일대일로 겨뤄주겠소?"

순간 봉홍은 교활하게 눈빛을 빛내며 외쳤다.

사파의 마두는 언제나 한 수가 있는 법이었다.

"혈랑마도야, 뭐하냐! 도와라!"

외침과 함께 우지끈 대들보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위에서 혈랑마도 사관현이 튀어나왔다.

여기 있는 마두들이 다 시체 사이에 숨었다지만, 유일하게 혈랑마도는 위에 있는 비좁은 공간에 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고집에 마두들은 욕설을 내뱉었지만 이게 지금은 기사회생의 한 수가 되었다.

한 번 발동된 진법은 밖에서 흔들어야지 안에서 흔들면 안 되는 것이다.

혈랑마도는 살기 넘치는 함성을 지르며 도(刀)를 뽑아들었다. 절정 직전의 경지인 만큼 도신에서 미세하게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일어난 마두의 기습에 장등원은 짧은 순간 갈등했다.

진법을 풀고 맞서야 하는가, 아니면 진법을 유지한 채 싸워야 하는가?

다행히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푹!

혈랑마도의 목에 비도 한 자루가 꽂히더니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에 연우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쪽에서 꼼지락대던 놈을 굳이 잡지 않고 모르는 척 기다렸었는데, 덕분에 크게 이득을 본 것이다.

저 정도 되는 고수 상대로 일합에 처리하다니.

상대가 안일하게 방심해서 덤벼들지 않았다면 훨씬 걸렸을 터였다.

'그보다... 내공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진 것 아닌가?'

내공이란 것은 단전에 많이 쌓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쌓은 내공을 전신 세맥에 뻗어서 초식을 유려하게 펼치지 않으면 내공이 많아도 화중지병(畵中之餠)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공이 혼탁하거나 잡스러운 기운이 많으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공의 움직임이 더디고 느린 것이다.

특히 연우혁 같은 경우에는 영안이 있어서 자신의 상태를 꽤 예리하게 관조하는 게 가능했다. 분명 평소보다 내공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설마 범망공의 힘인가!'

짐작가는 건 저번에 받아 온 범망공밖에 없었다. 그래도 받아 온 만큼 하해불택신공으로 쌓은 내공을 범망공으로 운용해 본 것이다.

그렇게 내공이 혼탁하지 않아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멀쩡한 내공이라 하더라도 그 순도를 더욱 높일수록 위력은 올라간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심법이다. 왜 냉수사가 찾아 헤맸는지 알 것 같기도...'

"이... 이 놈...!"

귀창괴걸은 핏발 선 눈으로 연우혁을 노려보았다.

무인보다는 관인(官人) 같아 보이길래 크게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뒀었는데 저 놈이 혈랑마도를 일격에 격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고맙소, 진충비도!"

장등원은 검을 내질렀다. 귀창괴걸은 그 초식에 만만찮게 곤란함을 느꼈다.

귀창괴걸 본인의 초식도 난해했지만 청불검 놈의 검초도 마찬가지로 난해했다. 몇몇 문파들은 종남의 무공이 불가와 도가가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고 비웃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더 지독하고 숨이 막혔다.

황량취몽(黃粱炊夢)에서 범성불이(凡聖不二)로 이어지는 검초라니. 게다가 놈의 뒤에는 검진을 이루고 기세를 불어넣는 다른 종남 무인들이 있었다.

"합!"

고함과 함께 검진이 다시 한 번 칼날 같은 기세를 만들어내자 귀창괴걸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방금 청불검의 검에는 검진의 기세가 실려 있었다.

"...잠깐!"

"수작 부리지 마시오. 귀창괴걸. 이름이 아깝소."

장등원은 냉정하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걸 본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파일방의 무림인들은 실로 가차 없군.'

오대세가 무림인들은 직계면 모를까 어느 정도 좀 세속적인 면모가 느껴지는데, 구파일방의 무림인들은 상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문파 내에서 정종무공을 수련했기에 가능한 집중력이었다.

"이번 일의 전모를 알고 싶지 않느냐!"

귀창괴걸은 크게 외쳤다. 이대로 검진과 맞서 싸우면 크게 다칠 게 뻔했기에 외치는 것이었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놈들은 홍목대사와 관련되어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홍목대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을 잘 해줬고 덕분에 사찰로 찾아오는 관리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종남파 입장에서는 홍목대사가 대체 뭐하던 놈이고 어떤 꿍꿍이를 갖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번 일의 전모?"

"그렇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너희 놈들은 홍목대사의 비밀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장등원은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부탁의 눈빛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연우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마두들이 도망치다 지쳐서 적당한 놈을 골라 홍목대사로 위장한 것 아닌가? 그 세가 커지니 근처 사파 문파들에게도 협력하라고 요구했겠지. 여기 황수장의 무인들을 죽인 건 홍목대사가 너희 말을 듣지 않고 따로 독립하려고 해서겠고."

"...!"

"화산파가 한 짓으로 위장하려고 했지만 금의위 무인들이 오는 걸 보고 부하 놈들이 도망친 거 아니냐? 뭘 대단한 비밀인 것마냥 그러는지 모르겠군."

귀창괴걸은 아까 귀식대법을 한 자신을 찾아냈을 때보다 더 경악했다.

저 놈은 대체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안단 말인가?

"무... 무슨... 설마 흑교서 놈이 나불댄 거냐??"

"?"

연우혁은 멈칫했다.

전혀 모르는 무림인의 별호가 나왔던 것이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연우혁은 고개를 저으며 거짓말을 하는 척을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흑교서 놈이 맞군...! 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교활한 쥐새끼...!"

귀창괴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등원의 검이 요혈을 노렸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허리가 깊게 베인 귀창괴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진충비도라고 했나...?"

귀창괴걸은 상처를 움켜쥐고 으르렁대듯 외쳤다.

"마두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으면 흑교서란 놈을 기억해둬라. 놈은 마두를 도와 온갖 악독한 책략은 다 짜내는 놈이니까!"

그 말과 함께 귀창괴걸은 단창을 단단히 붙잡았다.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였다.

"잠깐!"

연우혁이 귀창괴걸을 불렀다.

"...뭐냐?"

"흑교서에게 복수해주길 원한다면 좀 더 자세히 말해보시오. 어떤 자요?"

"놈은... 흑염방 소속이지만 사실상 소속된 문파가 없다고 봐도 좋다. 온갖 곳들을 들쑤시며 대가를 받고 책략을 짜주지."

"과연. 약점 같은 건 없소? 특징은?"

"놈의 무공은..."

귀창괴걸은 고통을 참으면서 흑교서에 대해 아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연우혁은 흥미로워하며 들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군. 더 말할 것 있소?"

"없다..."

"그러면 하려던 거 하시오."

"..."

귀창괴걸은 붙잡은 단창을 한 번 보더니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저 진충비도란 놈이 이번 일을 거의 망친 셈 아닌가.

숨어 있는 마두들을 찾아낸 건 물론이고 그 전말까지 전부 밝혔으니.

갑자기 분노가 치솟은 귀창괴걸은 일갈했다.

"네놈이 감히 이 귀창괴걸을...!"

서걱!

마두가 마지막 발악을 하기 전 장등원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귀창괴걸의 목이 위로 솟구쳤다.

"고맙소."

"음. 진충비도... 마두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건 좋지만, 지나치게 자극하는 건 위험하오. 놈들의 동귀어진 수법은 위험할 수 있으니 말이오."

"으음. 그렇군. 딱히 지나치게 자극하진 않았소만."

"..."

* * *

정 교위는 눈치를 보며 환관들에게 다가갔다.

황수장의 일은 마무리되었고, 홍목대사의 진상도 밝힌 만큼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 교위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일에서 금의위의 활약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활약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발목 잡지 않았다는 말이나 들으면 다행이었다.

이제 곧 서로 장계를 위로 올릴 텐데, 뒷일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지간해야 서로 다른 장계를 올리고 억지를 부리지 이 정도로 진상이 명확한 일은 억지를 부리기도 힘들었다. 몇 명만 대면해도 진상이 쉽게 드러났다.

바로 역공을 당할 일로 억지를 부릴 만큼 정 교위는 멍청하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환관들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동창이 장계를 올릴 때 정 교위의 체면을 어느 정도 배려해주면, 정 교위 또한 금의위로 돌아가서 무탈하리라.

"어떻게 생각하지?"

"자네 정신 나갔나?"

허 중관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정 교위를 쳐다보았다. 늙은 환관의 싸늘한 눈빛에 정 교위는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쪽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듣고 있네. 계속 말해보게. 동창의 일을 계속 훼방 놓고 몰래 뒤따라간 주제에 죄인도 놓친 자들이 무슨 변명을 할지 궁금하군."

굴욕감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정 교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도와준다면 나 또한 도와주겠다."

"호."

허 중관은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과연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던 간에 금의위 교위로서 협력하겠다 이 말인가?"

"...그렇다."

이런 약조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중에 동창과 금의위가 부딪쳤을 때 동창의 첩자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알 텐데도 저러는 걸 보니 이번 일에서 저지른 실수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금의위 교위가 혈판장(血判狀)을 쓰는 걸 보고 싶긴 한데, 아직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네."

"또 뭐냐?"

정 교위는 짜증을 냈다.

장계에 언급해주는 조건으로 혈판장을 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동창에게 이득인 거래였다. 교위 본인이 급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또 뭘 더 달란 것인가?

"허허. 짜증내지 말게. 난 금의위 무인이 아니니까. 자꾸 기분 나쁘게 굴면 혈판장이고 뭐고 다 없던 이야기가 될 걸세."

"...미안하다."

"문제는 공공께서 그런 거래를 받아들이실지, 안 받아들이실지지."

"무슨... 그쪽은 무조건 이득 아닌가!"

"그건 자네 생각이고. 공공께서는 의외로 이런 거래는 관심이 없으시네."

허 중관이 보기에 주 공공은 이 제안을 거절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일단 금의위 첩자가 굳이 더 필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번 장계에서 금의위에게 어느 정도 몫을 챙겨주게 되면 저 젊은 판관의 몫이 조금 줄어들게 될 것 아닌가.

"내가 직접 말해보도록 하지!"

"어엇.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 교위의 뒷모습을 보며 허 중관은 미소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교위는 가마 앞에 접근하자마자 환관들한테 제압당하고 얼굴을 흙바닥에 처박아야 했다. 제안은 당연히 거절당했다.

"..."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정 교위가 부들부들 떨며 돌아오자 허 중관은 쯧쯧거렸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나."

"...알겠다. 없던 일로 하지."

"아니. 방법은 있네."

"?!"

사람을 갖고 노는 허 중관의 모습에 정 교위는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무슨...?"

"저기 저 젊은 판관이 보이나?"

"보인다."

허 중관이 연우혁을 가리키자, 정 교위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운 좋게 금의위의 일을 거들어서 출세한 포두 놈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번 일이 끝나자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리 아니꼬운 놈이라 하더라도 능력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소문이 좀 덜 과장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저 젊은 판관을 설득해보게. 그럼 공공께서도 허락해주실지 모르지."

"날 놀리나!"

정 교위는 벌컥 화를 내더니 돌아서려고 했다. 허 중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게."

"...왜 저 놈을 설득하는 게 허락이 된다는 거냐?"

허 중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갈던 정 교위는 뚜벅뚜벅 젊은 판관에게 걸어가서 뭐라고 말을 걸었다.

-필요한 게 있나?

젊은 판관은 미친놈 보듯이 교위를 쳐다보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허 중관은 박장대소했다.

백성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동창 (8)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정 교위가 계속 씩씩대면서 쫓아오자 연우혁은 상대가 미친놈인가 싶었다.

"그냥 안 쫓아오면 좋겠는데. 대체 왜 쫓아오는 거지?"

저번에 신세를 진 하 교위면 모를까 연우혁은 눈앞의 금의위 무인과 별로 친분을 쌓고 싶지 않았다.

교만하고 성급한 성격이라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는데다가, 금의위 이름으로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연우혁을 언제든지 배신할 사람 아닌가.

금의위의 이름이 무섭긴 했지만 연우혁도 동창과 연분이 있는 만큼 굽신거릴 필요는 없었다.

"네놈이 납득을 해야 동창 놈들도 납득을 할 것 아니냐!"

"무슨...?"

연우혁은 교위한테 설명을 듣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허 중관이 친절을 베푼 것이다.

'아니. 그냥 재밌으셔서 한 걸 수도 있겠군.'

멀리서 낄낄 웃는 걸 보니 그냥 금의위 교위 놈을 괴롭히고 싶었던 걸 수도 있었다.

하여간 금의위 교위에게 빚을 얹혀두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분명 쓸 날이 오겠지만...

'괜히 나대도 되나?'

연우혁은 고민했다.

허 중관이야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고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는 걸 영안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이런 친절도 놀랍지 않았다.

그에 비해 주 공공은 갖고 있는 보물 때문에 영안이 통하지 않아 한층 더 조심스러웠다. 연우혁의 재주를 제법 높게 평가해주고 있긴 했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괜히 금의위 놈의 공적을 장계에 언급해달라고 부탁했다가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연우혁만 손해였다.

'괘씸죄라도 산다면...'

"네놈에게도 좋은 일이라니까!"

"아. 조용히 좀 해봐라. 고민 중이잖나."

연우혁은 허 중관에게 찾아가 다시 물어보거나 주 공공에게 슬쩍 운을 띄워볼까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정 교위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눈앞의 판관 놈이 전혀 혹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조용히 좀 해보라니까."

"네놈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잘 생각해봐라. 네놈은 모르겠지만, 곧 무림 놈들이 용봉지회를 연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나? 분명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다!"

"??"

용봉지회.

정파 문파들이 여럿 모여 후기지수들의 무공을 겨루는 대회였다.

말로는 정파무림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한다지만 원래 칼 든 무림인들이 그렇듯이 서로 모아 놓으면 싸움이 터지기 마련.

사파무림에서도 나름 용봉지회 비스무리한 걸 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정파무림에서 해도 문제가 많이 생기는데 사파무림은 얼마나 그 정도가 심하겠는가.

"용봉지회가 열리는데 왜 네 도움이 필요하지?"

"크윽... 이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극비에 가까운 정보니까. 아마 한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팔강산 쪽 평야에서 열릴 것 같다. 장로에게 들은 이야기니 거의 확실할 거다."

"!"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용봉지회가 한경 근처에서 열린다니!

'아니...'

물론 한경이 그만큼 번화한 대도시긴 했지만 관리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특히 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연우혁 입장에서는 두 배로 최악이었다.

한경 근처에 칼 든 무뢰배들이 수백, 수천 명 넘게 몰려온다는 소리 아닌가!

그 무뢰배들 중에 뒷배가 든든한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눈이 절로 질끈 감기는 일이었다.

"...안 돼! 절대 그럴 순 없다!"

"나도 동의한다. 무림인 놈들. 국법도 무시하고 칼을 휘두르는 것도 괘씸한데 저렇게 모여서 건방지게 위세를 자랑하다니."

정 교위는 생각만 해도 괘씸했는지 이를 갈았다.

금의위로서 무림인들은 세상에 도움 되는 것 하나 없는 잡스러운 종자들이었다. 이들이 일으킨 사고만 생각해도 치가 떨렸다.

더욱 화가 나는 건 황족이나 조정의 고관들 중 이들의 편을 드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었다.

그놈의 고승이나 도사의 힘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세가 놈들의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다면 저렇게 편을 들어준단 말인가!

"잠깐. 그러면 이 부탁을 들어줄 경우 용봉지회 때 금의위의 힘을 빌려준단 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한 번 정도는 도와주겠다."

"아니. 그 정도론 안 되지."

"뭐가 안 된다는 거냐!"

정 교위는 금의위의 칼을 우습게 보는 젊은 판관의 대답에 발끈했지만, 연우혁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연우혁에게 필요한 건 금의위의 칼이 아니었다. 무력은 어차피 아는 무림인들이 많았던 만큼 그들한테 빌려도 충분했다.

연우혁이 필요한 건 다른 거였다.

"용봉지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금의위 무인들도 당연히 감시하고 있겠지? 필요한 정보를 같이 공유해줬으면 한다. 아무래도 한경에 앉아 있으면 한계가 있을 테니."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그런 정보를 계속 달라니! 그런 게 되려면 내가 네놈 옆에 붙어서 말해줘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보냐?"

"오. 좋은 생각이군."

"?!"

연우혁이 동의하자 정 교위는 기겁했다.

"교위 정도면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않나? 판관의 협조를 받아 한경을 감시한다고 하고 옆에서 도와주면 되겠군."

이미 포쾌로 살막의 조장이 있는 만큼 연우혁은 금의위 교위 한 명 정도 더 있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판관의 제안에 정 교위는 이를 악물고 고뇌했다.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물러나기에는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아니. 나도 생각보다 위험을 안고서 하는 제안이다. 내 입장을 생각해봐라. 공공께 금의위 교위의 공적을 챙겨주라고 말을 올려야 하는데, 너 같으면 어떻겠나?"

"으음."

연우혁의 말에 정 교위는 바로 설득되었다.

확실히 교위 본인이 저 판관 놈이었어도 고민되었을 것이다. 기껏 잡은 동창의 연줄이 휙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좋다...! 도와주겠다. 대신 용봉지회가 끝나기 전까지만이다!"

"알겠다. 기다리고 있어라."

젊은 판관은 주 공공의 가마로 걸어갔다. 정 교위는 초조한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창 환관들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생각해봤을 때 저 판관이 욕만 먹고 쫓겨날 수도...

"장계에 언급해주겠다고 하시는군. 잘 됐다."

"..."

일다경도 안 지났을 법한 짧은 시간에 다시 돌아오자 정 교위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운이 좋군. 공공께서 이렇게 허락해주시다니. 기쁘지 않나?"

"으, 으음... 그렇... 그래. 잘 됐군..."

***

교위의 일이 끝나자 주 공공은 허 중관과 연우혁을 불렀다.

"다들 수고가 많았다. 비록 혈교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 또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지."

"공공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수많은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허 중관은 순간 자신이 말한 줄 알고 황당한 표정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조금의 틀림도 없는 정확한 아부였다.

"금의위 교위가 부탁했다고 해서 걱정할 것 없다. 너희의 공적은 분명히 장계에 기록해 줄 테니."

허 중관은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동창의 고관들 중에서 주 공공만큼 논공행상이 정확한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부하들의 공을 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 만큼 더더욱 그랬다.

"이번 홍목대사와 관련된 관리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도가 심한 자들은 경고를 줘야겠지."

주 공공은 가마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속은 자들한테까지 엄하게 책임을 묻지는 않겠지만, 그 중에서 관의 재산까지 사용해 홍목대사한테 바친 자들은 문제가 있었다.

꼭 처벌하진 않더라도 약점을 잡고 있다고 경고를 해두는 게 나았다. 그래야 앞으로 허튼 짓을 하지 않을 테니.

"그러고 보니 두 자리에서 발견된 현령은 어떻게 한 건지 알아내지 못했군요."

허 중관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마두 놈들이 하도 저항하는 바람에 놈들의 정확한 수법을 세세하게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법회에 자꾸 참가하던 현령이 관아에서도 발견되고 법회에서도 발견됐다는 증언에 어떻게 된 건지 의아했었는데...

"그건 직접 심문하면 알아볼 수 있겠지. 일을 마무리 지을 겸 가보자꾸나."

"그러실 것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

허 중관은 젊은 판관이 입을 열자 기대와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알아낸 건가!"

"예."

"..."

늙은 환관은 젊은 판관의 재주에만 집중한 나머지 눈앞의 상관의 기분이 탐탁찮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기하고 있던 간자들이 시간을 확인했다는데, 어떤 방식으로 확인했겠습니까?"

"음? 그렇군. 향을 태우는 건 부정확했을 테고..."

"이런 일일수록 더더욱 정확해야 했을 겁니다. 관아 근처에 있던 간자들은 종소리로 시간을 확인했을 겁니다."

보통 성은 해시(亥時) 때 성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한다는 뜻으로 종을 스물여덟 번 울리고, 인시(寅時) 때 성문을 열고 통행을 허가한다는 뜻으로 종을 서른세번 울렸다.

"현령 입장에서는 종을 치는 자만 일찍 치라고 매수하면 되니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과연...!"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꾀였구나."

주 공공은 심드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령한테 사람을 보내라. 감히 국법을 어기고 종지기를 매수해 몰래 법회에 참가하다니. 녹을 먹는 자로서 감히 용서할 수 없음이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허 중관은 생각보다 높은 처벌에 의아해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파직될 수 있었지만, 원래 관리들은 그 놈이 그 놈이라 주 공공께서는 약점만 잡아두고 실제로 자르는 일은 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아해하던 허 중관은 연우혁과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젊은 판관은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뭐지?'

연우혁은 헛기침을 했다. 주 공공의 생각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 공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금의위 교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곧 무림의 무인들이 용봉지회를 연다고 합니다."

"알고 있다. 꽤 진척이 있다고 들었는데... 확정이 되었나보구나."

"예. 한경 인근에서 열릴 것 같다고 합니다. 공공께서는 무림인들의 비무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영안이 통하지 않아도 연우혁은 주 공공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주 공공이 느끼는 건 권태감이 분명했다.

다른 고관처럼 권력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재물에 집착하는 것도 아닌 사람이라면, 일 자체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우국충정으로 일을 하더라도 일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은 법. 연우혁이 일을 빨리 끝낼 때마다 시큰둥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가 분명했다.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내막을 가진 사건이라니.

그 얼마나 시시하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라면 무림인들의 비무가 흥미로울 수 있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다 벌어질 것 아닌가.

'아, 아이고.'

허 중관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젊은 판관이 반은 맞게 짚었지만 반은 틀리게 짚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주 공공께서 느낀 건 권태감이 맞았다. 평소 자신의 지혜를 꺼낼 일이 드문 분인 만큼, 그럴 필요가 있는 사건을 좋아하셨던 것이다. 그게 빨리 끝났으니 시큰둥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무림인들의 비무는 역효과였다.

용봉지회라고 해봤자 결국에는 후기지수들의 대결이고, 명문보다는 그 외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더 많을 텐데, 황궁에서 온갖 고수들의 대결을 보며 무공을 배운 주 공공에게 성에 찰 리 없지 않은가.

허 중관은 언제 어떻게 저 젊은 판관을 도와줄까 고민하며 땅바닥을 노려보았다.

"나쁘지 않구나."

"!?"

허 중관은 예상 밖의 대답에 당황했다.

"하긴, 무림인들이 그렇게 모이면 감시를 하긴 해야겠지..."

"공, 공공. 괜찮으시겠습니까? 천박한 무부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상관의 대답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 천박한 무부들끼리 자기가 맞니 틀리니 하며 검으로 정답을 가리려고 하는 짓거리들을 싫어하는 주 공공 아니었던가.

물론 용봉지회가 열리면 감시는 보내야겠지만 그건 다른 환관들에게 맡겨도 되는 잡일이었다.

"비무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습니까...?"

"그리고 비무 말고 흥미로운 일들도 일어날 수 있겠고. 누군가 암습을 당해 죽는다거나 말이다."

"과연."

그제야 조금 납득이 되었는지 허 중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 중 누군가 암습을 당해 죽는다면 주 공공께서 흥미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 그건 좀..."

"걱정 말게. 꼭 죽으란 일은 없지 않나. 부상 정도만 당해도 꽤 흥미로울..."

"..."

용봉지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