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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지회 (1)

마음속으로는 '동창 환관들의 윤리의식, 이대로 괜찮은가?'란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지만,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연우혁은 안심하며 걸어 나왔다. 허 중관이 옆에서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나 원 참.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말게. 깜짝 놀랐지 않나."

"죄송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

"공공께서 자네를 좋게 보고 계신 건 맞네. 원래 재주 있는 자를 아끼시는 분이니, 자네 같은 인재를 아끼시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교만해져서는 안 되네. 공공께서는 원래 너그러운 분이 아니시니."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허 중관 같은 노련한 환관의 말은 귀기울여서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필요에 따라 동창의 연줄을 붙잡을 연우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미 반쯤 호랑이 등 위에 탔으니, 호랑이가 어떤 성격인지 잘 파악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동창에 환관 하나가 있었네. 젊었지만 재주가 뛰어나서 제독께서도 총애하실 정도였지. 공공께서도 그 환관에게 일을 맡겼는데, 처음에는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잘 해결했다네. 처음에는 말이야."

"어떻게 됐습니까?"

"많은 환관들이 겪은 것처럼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네. 교만해진 탓에 실수를 저질렀고 공공의 심기를 거슬렀지. 지금은 석신사(惜薪司)로 쫓겨나서 땔감이나 자르는 신세가 됐네. 아마 평생 출세는 힘들 거야."

'저런.'

남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관직에 오르고 동창의 연줄을 붙잡은 이상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관리들 사이에서는 실수 한 번에 한직으로 쫓겨나 거기에 평생 갇혀 사는 것도 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수는 정말로 커다란 실수일 수도 있었지만 윗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관리가 된 이상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었다.

'중관의 말이 맞다. 운이 좋았군.'

연우혁은 새삼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걸 깨달았다.

주 공공이 기분이 좋아서 수락해줬으니 망정이지, 만약 천박한 무부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역정이라도 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공공 앞에서는 말 한 마디도 조심해서 꺼내겠습니다."

"음!"

허 중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젊은 판관이 기특한 점은 그렇게 대단한 출세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교만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방금도 허 중관의 말을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것이라고 넘길 수 있었는데 저렇게 귀담아들어주다니.

어린 환관들이 보고 배웠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교만해진 환관은 무슨 실수를 저질렀답니까? 저처럼 무림인들의 비무라도 구경을 권한 겁니까?"

"아닐세. 그 환관은 교만해져서 관리들에게 뇌물을 받았네. 그들이 지은 죄의 증좌를 몰래 없애줬지."

"...?"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무림맹 비무 권한 게 뇌물 받고 증거 없앤 것과 동급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자와 비교했을 때 많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았지만, 연우혁은 허 중관의 판단을 믿어보기로 했다.

동창에서 보낸 시간이 몇 년인데 아무렴 자신보다는 더 잘 알지 않겠는가?

***

최근 보름 사이 궁 판관은 눈에 띌 만큼 초조해하고 불안해했다.

눈치 없는 지부 어른은 '연 판관의 재주를 얼마나 아끼면 그러나'하고 웃어댔지만, 궁 판관의 걱정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동창과 엮인 관리들 중 멀쩡하게 끝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관리들한테 동창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괜히 화를 입을까 싶어 궁 판관은 입만 다물고 기다렸다.

더 걱정되는 건 젊은 판관 놈이 처세술은 영 별로라는 점이었다.

온갖 기괴망측한 일들은 눈 감고도 맞히는 놈이 처세술에 관해서는 영 어리숙하니, 동창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오죽 신경이 쓰였으면 차를 끓일 때 찻잎을 두 움큼이나 넣었을까.

그걸 본 하인들은 '무슨 일이 생기셨나보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판관 어르신. 연 판관께서 돌아오셨답니다."

"!"

그렇기에 연우혁이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기뻐한 건 궁 판관이었다.

"팔다리는 멀쩡하더냐?"

"예? 예..."

"뒤에 따라온 무인들은 없고?"

"예."

"그럼 됐다!"

궁 판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밖을 나섰다. 하인이 말한 대로 연우혁은 팔다리가 잘려 있지도 않았고 뒤에 압송하기 위해 따라온 병사들도 없었다.

동창 앞에서 말실수를 하지도,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고생했다! 동창의 환관들 사이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염라대왕 앞에서 돌아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을 해낸 거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연우혁은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궁 판관의 걱정이 좀 과한 편이었다.

아무 연줄이 없으면 모를까, 친분이 있는 환관과 함께한다면 염라대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동창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참. 한 가지 돌려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젊은 판관이 낯익은 상자를 가볍게 들어 올리자 궁 판관은 어디서 봤나 싶어 이마의 주름을 잡았다. 이상하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번쩍!

열린 상자 안에는 묵직한 은덩어리가 가득 차있었다. 상자의 정체를 깨달은 궁 판관은 경악했다.

"공공께서 이런 건 필요 없다고 하셔서 다시 갖고 왔... 엇, 판관 어른? 여봐라! 판관 어른께서 쓰러지셨다!"

연우혁의 말도 안 되는 짓에 일각 정도 정신을 잃고 혼절했던 궁 판관은 찬물 세례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당황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동창한테 뇌물을... 아끼는 놈이 강호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 정말 미쳐버린 것이냐?!"

환관들이 짐짓 괜찮다고 말해도 억지로라도 쥐어줘야지 돌려준다고 그걸 그냥 갖고 오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궁 판관의 눈에 연우혁은 한경의 관리들을 모조리 저 깊은 강 속으로 끌고 들어갈 역귀처럼 보였다.

"오해하신 겁니다. 사실 제가 이번에 나온 동창의 환관들과 친분이 있어서..."

연우혁은 허 중관은 물론이고 주 공공 앞에서 재주를 선보인 적 있어서 이번에 불려나온 거라고 설명했다.

궁 판관은 이 젊은 놈이 정말 재주가 뛰어나서 동창의 눈에 든 건지, 아니면 재주가 뛰어난 탓에 하늘의 질투를 받아 실성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고민했다.

"...그래. 네 녀석 말이 맞든 틀리든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느냐. 동창 놈들이 지랄을 하면 그 때 다시 생각하도록 하자. 이건 쓰지 않고 보관해두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궁 판관은 연우혁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간덩이가 큰 건지 아니면 잘 몰라서 이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절대 멍청한 놈은 아닌데...

"그래. 동창의 일을 도우면서 알게 된 건 없고?"

궁 판관이 물은 건 어떤 일들을 해결했느냐가 아닌, 일들을 해결하면서 한경의 관리로서 쓸만한 사실을 주워들은 게 있느냐였다.

실리에 집중하는 궁 판관다운 말이었다.

연우혁도 할 말이 있었던 만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오. 뭘 알아냈느냐?"

"곧 무림맹이 한경 인근에서 용봉지회를 연답니다."

"커, 커헉. 커허헉."

기운을 차리려던 궁 판관은 다시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

"음. 정말 진행되는군."

무림맹에서 날아온 서신은 물론이고 개방 분타주나 다른 구파일방의 속가제자한테 접견 요청이 들어오자 연우혁은 곧 용봉지회가 열린다는 실감이 들었다.

금의위 교위의 헛소문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문파들이 움직이며 말을 꺼낸 이상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연우혁은 궁 판관이 업무를 보고 있는 관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근 한 달 사이 궁 판관의 심기가 매우 날카로워졌기에 말을 걸기가 조심스러웠다.

사실 궁 판관만 날카로운 게 아니었다. 한경의 관리들 중 이런 일을 반기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싫어했고 윗사람은 윗사람대로 싫어했다.

굳이 따지자면 지부 어른 정도만 호탕하게 웃으며 무림 명숙들의 인사를 즐거이 받을 뿐.

벼슬아치들이라면 이런 일에 한몫 크게 벌 수 있을 텐데도 싫어하는 걸 보면 정말 무림인들과는 견원지간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정 교위가 한심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러나 복식은 포쾌의 그것이라 별로 위세가 살지 않았다.

적 포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연우혁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변장을 해야 한다지만 금의위 교위가 포쾌로 지내다니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군..."

연우혁은 적조를 보며 '네가 할 소리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지금 금의위의 정 교위는 놀랍게도 포쾌로 위장한 채 용봉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위장해야지. 그럼 교위 신분으로 당당하게 검을 차고 돌아다니란 말이냐? 마두 놈들이 잘도 있겠군.

이번 용봉지회 같은 일에서 '나 금의위요'하고 모습을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건 위에서 크게 문책할 만한 일이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금의위 간자들의 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정 교위는 가장 쉽게 위장할 수 있는 신분으로 위장했다. 바로 포쾌였다.

지금 정 교위는 연우혁의 먼 친척으로 한경에 찾아와 출세를 노린다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혹시 교위께서 해줄 조언이라도 있나?"

"무림인 놈들은 믿지 마라. 여유만 되면 놈들에게 감시를 붙여놓는 게 좋겠지. 특히 거대문파일수록 더더욱."

"음. 금의위면 모를까 나는 무리겠군."

뛰어난 교위들을 여럿 부릴 수 있는 금의위면 모를까 연우혁이 부릴 수 있는 건 포쾌들밖에 없었다. 이런 포쾌들한테 무림인들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는 대번에 목이 날아날 터였다.

그건 정 교위도 알았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만큼 소문에 귀기울이고 정보를 캐내라. 지금 무림인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만큼 놈들이 가진 꿍꿍이도 수없이 많을 터. 마침 판관의 자리는 이런 꿍꿍이 가진 놈들을 긁어내기 딱 좋은 자리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든 꼬투리 잡히면 심문해서 아는 걸 다 토해내게 하라 이건가?"

"그래. 잘 이해했군."

'괜히 물어봤네 이 자식.'

연우혁은 한경의 명판관으로 불리고 싶었지 한경의 미친판관으로 불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자기 검이 사라졌다고 찾아온 무림인을 심문해서 어느 문파와 엮였는지 토해내라고 하면 무림에서 혈마판관 같은 별호 얻기 딱 좋았다.

"판관 나으리! 무림인들끼리 다툼을 해결해달라고 찾아왔습니다."

"!"

무림인들끼리의 다툼은 보통 자기들끼리 해결을 하거나 둘 중 한 명이 도망치는 식으로 끝나기 쉬웠다. 아무래도 국법 없이 사는 이들이 무림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양쪽 다 믿는 구석이 있고 체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 된 기회다. 놈들의 약점을 잡아서..."

"들어오라고 해라."

연우혁은 정 교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사람들을 불렀다.

***

북표 위가장 출신의 젊은 무인, 위명호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정파무림의 용봉지회에 참가해 명성을 알리기 위해 한경에 일찍이 찾아왔으나, 겪게 된 건 장가전장과의 구원(舊怨)으로 인한 낯부끄러운 다툼이었다.

위가장이 장가전장과 악연이 있다지만 자신을 도둑으로 몰 줄이야!

장가전장의 젊은 공자, 장적 놈의 검이 사라진 게 화근이었다. 그 근처에서 검이 발견되지 않자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위명호를 범인으로 몰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위명호는 장적 놈의 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놈의 검이 운철을 써서 만든 명검이든 황실에서 하사받은 명검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잘 됐다."

"?"

설명을 들은 정 교위의 말에 연우혁은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 이 교위도 진상을 알아차린 것일까?

"뭐가 잘 됐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 장가전장은 이번에 참가하는 여러 문파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상인 출신들은 고루한 무림인들보다 훨씬 더 타협하기 수월한 편이지. 장가전장의 편을 들어서 은혜를 베풀어줘라. 그럼 저들도 네 수족이 되어서 정보를..."

연우혁은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저 무인이 검을 가져간 게 아니다. 네 짐을 더 뒤져보도록."

"..."

대뜸 내뱉는 판관의 말에 정 교위는 물론이고 좌중에 몰려 온 무림인들까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봉지회 (2)

"아, 아니. 판관 어르신..."

장가전장의 무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자, 연우혁은 새삼 관직이란 게 편하단 걸 느꼈다.

예전 포쾌였을 때 저런 말을 했었다가는 '포쾌 놈아 미친 거냐'하며 대번에 쌍욕이 날아왔을 텐데 판관이 되고 나서 비슷한 말을 하자 '판관 어르신'하며 주저하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속으로는 욕을 해도 자칫 판관의 비위라도 거슬렀다가 한경에서의 앞일이 귀찮아질까봐 참는 게 분명했다.

판관 본인의 힘 또한 장가전장의 일을 훼방놓기에는 충분했고, 게다가 관리들이란 건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는 더 똘똘 뭉치기 마련.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판관 앞에서 난동이라도 부렸다는 소문이 돈다면 그 날로 한경의 관리들은 장가전장을 아주 집요하게 물어뜯기 시작할 터였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왜 말이 안 되느냐?"

"그,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번 장가전장의 상행을 책임지고 있는 부총관 오복고가 입을 열었다.

장주의 젊은 핏줄이 명목상으로는 책임자라지만 아무래도 실무에서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조리 있게 설명에 나서는 건 부총관이었다.

"저희는 만풍객잔을 통째로 써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포두들도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할 만큼 크고 작은 객잔들이 난립한 한경에서, 만풍객잔은 어지간하면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크고 번영한 객잔이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객잔을 통째로 빌릴 수 있는 건 이 객잔이 장가전장의 소유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객잔의 일층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은 전부 다 장가전장의 무인들이었다. 외부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장 공자께서는 분명 허리춤에 검을 차고 계셨습니다. 그건 제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 소협께서 객잔에 들어오신 겁니다."

"제기랄, 마땅한 객잔이 없어서 머물 곳을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소!"

위명호는 발끈했다.

한경의 크고 작은 객잔들이 전부 꽉 들어찬 탓에 머물 곳을 찾느라 객잔의 문을 열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한다니.

"말씀은 정확하게 하셔야지요. 위 소협.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셨잖습니까."

"여기 객잔이 그쪽 객잔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대뜸 꺼지라고 하니 시비거는 줄 알았을 뿐이오!"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있던 장가전장의 무인들은 대뜸 꺼지라고 외쳤다. 당연히 사정을 모르는 위명호가 그런 모욕을 참고 물러날 리 없었다.

위명호는 눈에 불꽃을 튀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무인들과 초식을 교환했다.

뒤늦게 부총관이 나타나 객잔의 주인을 알렸기에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장 공자의 검이 사라진 것이다.

"보십시오. 판관 어르신.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누굴 의심하겠습니까? 검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위 소협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 포쾌가 물었다.

"그런데 위 소협도 자리에 있었는데 어떻게 검을 빼돌렸답니까?"

"싸우느라 혼란스러웠으니 객잔 문 밖에 사람 한 명 대기시켜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객잔 문 주변의 발자국을 확인해보았습니까?"

"...!"

부총관은 일개 포쾌의 지적에 허를 찔려서 당황했다. 다른 무림인들도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리고 정 교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명장 밑에 약졸이 없다지만 이 놈들...!'

이 젊은 판관 놈의 재주를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 부하의 부하들마저 저런 재주를 보이자 믿기 힘들 정도의 패배감이 들었다.

'아니다. 놈은 아직...!'

정 교위는 연우혁이 이번 일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교위가 보기에 이번 일은 연우혁이 실수한 것 같았다.

"그, 그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위 소협이 갖고 갈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갖고 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층에서 내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그 위층에 있던 짐에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확언컨대, 공자께서는 일층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층에 있던 짐을 뒤져봤나?"

"뒤져보지 않았습니다만..."

"뒤져보고 와라. 적 포쾌, 정 포쾌. 같이 가서 확인하고 오도록."

"..."

몇몇 장가전장의 사람들은 뭐라도 씹은 것처럼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판관이 자기 할 말만 하는데 유쾌하게 '예, 예'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착각한 게 있었다.

여기는 판관이 일을 맡는 관아의 형관이었고 평소에 무림인들을 보며 굽신거리는 포쾌들도 여기 오면 목이 뻣뻣해졌다.

"지금 감히 판관 어르신의 명에 불만을 품는 것이냐! 장가전장의 위세가 국법을 무시하고 판관을 깔보는구나!"

"칼 찬 무림인들이 한경을 우습게 봐도 이렇게 우습게 보다니!!"

'아차.'

부총관 오복고는 아차 싶었다. 휘하의 무인들에게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용봉지회가 열리지도 않았는데 한경의 고관들과 문제가 생겨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부총관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외쳤다.

"오해입니다, 오해입니다! 포쾌 어르신들. 여기 무인들은 허약해서 오래 서있으면 햇빛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런 겁니다!"

급할 때는 포쾌 놈도 포쾌 어르신이 되기 마련.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무인들이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부총관은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뇌물을 갖다 바치라는 신호였다.

"감히 뇌물을 갖다 바치려고 하다니!!"

"...?!!"

부총관은 기겁했다.

살면서 뇌물 줬다고 지랄하는 포쾌 놈들은 처음 봤던 것이다. 그것도 한두놈이 아니라 일치단결해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정 교위도 황당했는지 포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놈들이 포쾌인지 금의위 교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금의위 교위도 뇌물을 거절하진 않는데...

"됐다. 장가전장이 한경에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한 모양이군. 확인이나 하고 오도록."

"감, 감사합니다. 판관 어르신!"

부총관은 깊숙이 감사를 표하며 재빨리 뛰어갔다 오라고 손짓했다.

이게 뭔 짓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헛짓거리라도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부총관. 이거 괜찮은 겁니까?"

장적이 황당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아무리 경험이 부족한 공자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이 이상하단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기다려보시죠."

"아니, 뭔 생각으로 저러는 겁니까? 무림인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저러는 건가?"

"쉿. 목소리가 큽니다. 일단 기다려보십시오. 짐에 없다는 걸 알면 고집을 더 부리던 꺾던 하지 않겠습니까."

부총관은 저 젊은 판관이 대체 무슨 생각인가 고민하며 초조히 기다렸다.

뇌물인가? 그렇다면 은밀하게 따로 만나길 원하는 건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암시를 했을 텐데? 정말 무림인들의 위세를 죽이려는 거라면 다른 문파들과 연락해서...

"돌아왔습니다!"

담벼락 밖에서 장가전장의 무인들과 두 포쾌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부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정문을 지나는 무인들에게 외쳤다.

"있었느냐?!"

"...예... 있었습니다."

"없다면 됐... 잠, 잠깐. 뭐라고?!"

"여, 여기... 이거 아닙니까?"

심부름을 맡은 장가전장의 무인들은 죄를 지은 것마냥 검을 들어올렸다. 누가 봐도 장적의 검이었다.

보는 눈이라도 없다면 수작이라도 고민했을 테지만 두 포쾌가 같이 간 탓에 그냥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순간 좌중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부총관이나 장 공자는 물론이고 교위의 얼굴도 썩어 들어갔다. 저 검이 짐 사이에 있을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저 놈은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아냈단 말이냐!'

스스로의 재주에 자부심을 가진 정 교위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었다. 정 교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 힘드시오?"

"...아무것도 아니다."

'진짜 이상한 놈인가?'

적조는 정 교위를 쳐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금의위 교위가 포쾌로 변장했을 때부터 참 특이하다 싶었는데...

"정, 정말 몰랐습니다. 판관 어르신. 저희가..."

경험 많은 부총관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는지 혀가 머뭇거렸다. 누가 봐도 장가전장이 애꿎은 젊은이를 모함하려고 한 것 같았다.

"절대... 그게..."

"장가전장의 잘못은 아니지."

"어, 어째서입니까!"

위명호는 발끈해서 외쳤다가 연우혁이 쳐다보자 압도되어서 고개를 숙였다. 젊은 판관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쌓은 무공의 경지 때문도, 가진 관직의 위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저 판관이 행동으로서 보여주는 신위 때문이었다.

연우혁은 사람들이 대충 들을 준비를 하자 입을 열었다.

"도둑놈은 아마 장가전장의 하인 중 하나였을 거다. 놈은 검을 빼돌려서 객잔을 빠져나가봤자 들키기도 쉽고, 별로 남는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검을 빼돌린 뒤 위층으로 올라가 짐에 던져 넣은 거다."

장가전장이 당한 수법은 꽤 치밀하고 집요한 수법이었다.

먼저 검이나 장신구처럼 사라지면 알아차릴 물건들을 훔친 뒤 갖고 가지 않고 상대의 짐 사이에 얌전히 숨겨놓았다.

이런 짓을 몇 번 반복하게 되면 상대는 물건이 사라져도 소란을 일으키기 꺼려하거나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닌가 조심하게 됐다.

바로 그 때 진짜 노리던 물건을 훔치는 것이다.

아마 장적이 소란을 다 피우고 나면 검의 진짜 위치도 슬쩍 발견한 척 했으리라.

"...그, 그런...! 지금 당장 놈을 잡아라!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해!"

'힘들 텐데.'

연우혁은 이제 와서 달려가 봤자 도둑을 잡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연우혁이 해결했을 때도 일이 다 터진 이후였고, 도둑 입장에서는 조금만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으면 몸을 뺐을 테니 아마 관아로 왔을 때 도망쳤으리라.

아니나다를까 장가전장의 무인들이 돌아와서 황망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하인 하나가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아... 이... 이..."

분해서 어찌할 바 모르던 부총관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연우혁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판, 판관 어르신 덕분에 전장의 보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판관 어르신께서는 실로 명판관이십니다!"

부총관은 물론이고 장적도 정신을 차리고 포권했다.

"나 장 모, 위 소협에게 사과드리오! 장가전장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소. 부끄러울 뿐이오."

"...도둑의 수작에 매몰차게 대했다가는 나 또한 도둑놈이나 마찬가지겠지. 사과를 받아들이겠소!"

"위 소협께서는 실로 대인이시오!"

장가전장의 사람들은 위명호에게 깔끔하게 사과했다.

이 상황에서 더 뻗댈 수 없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자기 가문의 하인이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충격이 컸다.

자칫하면 큰일날 뻔 했던 만큼 반성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림인들끼리 은원을 잊고 화해하는 모습에 포쾌들은 물론이고 관의 하인들까지 감격스러워했다.

연 판관의 재주가 아니었다면 저 무부 놈들이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검이 저기 위에 있단 걸 알아낸단 말이냐?! 아무리 신통력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하인 놈은 또 왜?!"

그 분위기 속에서 정 교위만 혼자 머리를 싸매쥐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본 적조는 혀를 쯧쯧 찼다.

뱁새가 황새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봤자 결국 뱁새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냥 받아들이면 될 텐데, 저 교위는 아직도 멀었군!'

***

두 무림인들을 화해시킨 뒤로도 연우혁은 몇 가지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했다.

주루에서 각자 은자를 냈지만 한 닢이 사라진 탓에 싸우던 무림인들, 절에서 머무르다가 개가 검을 물어간 탓에 주지 스님과 다투던 무림인, 노점에서 끼니를 때우던 도중 비급을 잃어버린 무림인 등등.

'도둑이 기승을 부리나?'

절도가 많아졌지만 연우혁은 무림인들이 많아졌기에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이라 생각했다.

"진충비도 되시오?"

"누구냐?"

연우혁은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볍게 긴장하며 대답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자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별호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할 말이 있소이다."

"말해라. 듣고 있다."

"당신 때문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소."

"...?"

상대의 말에 연우혁은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가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잘못 온 것 아닌가?'

다른 관리들과 달리 연우혁은 뇌물을 긁어내기는커녕 자기가 받은 포상금을 밑의 포쾌들한테 나눠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누가 굶어죽는다는 거지?"

"바로 도둑이오!"

"..."

연우혁은 비도를 꺼내들었다.

용봉지회 (3)

'무림인 놈들이 늘어나니 미친놈들도 따라서 늘어나는구나!'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범위를 확장시켰다. 평소에는 상단전을 혹사시키지 않기 위해 제한적으로 짧게 쓰는 걸 선호했었지만, 반복된 사용으로 훈련된 능력은 이런 것도 가능했다.

'다섯 명! 두 명은 몰랐다.'

본채 밖 담벼락 위의 한 명과 그 주변으로 포진한 네 명을 느끼고 연우혁은 놀랐다.

말을 걸고 있는 본인을 포함한 세 명은 기감으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두 명은 특별한 은잠술을 익혔는지, 딱히 연우혁보다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기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영안이 없었다면 놓쳤을 게 분명했다.

'그렇군. 애초에 세 명은 일부러...'

연우혁은 상대 도둑놈이 미친놈 같지만 생각보다 치밀하단 걸 깨달았다.

세 명은 일부러 기감을 희미하게라도 느끼게 해서 방심시키고, 만약 뛰쳐나오면 진짜로 은신했던 두 명이 예상을 찔러 당황시키는 것이다.

과연 무공 익힌 판관 저택의 앞마당까지 올 담력이었다.

"굶어죽는다니. 어째서지?"

연우혁은 뛰쳐나가서 탈혼비도를 던지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속셈을 좀 더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모르는 척 하지 마시오. 진충비도 당신은 판관으로 일하고 있지 않소. 기행을 벌이는 무림인이 한둘이 아니라지만 당신 같은 괴인도 드물 것이오."

"나는 그저 충군애민을 위해서 일할 뿐."

가식적인 말을 하면서 낯이 뜨거워졌지만 연우혁은 참고서 내뱉었다.

무림인들이 '너는 왜 무림인이 판관을 하느냐'라고 캐물을 때 '난 원래 무림이 싫었다'나 '판관을 해야 그 권세로 편하게 살지 않겠느냐'같은 대답은 썩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상대도 이런 황당한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

연우혁은 영안을 괜히 열었다 싶었다. 상대의 알고 싶지 않은 중얼거림까지 잡아주는 것이다.

상대는 미친놈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는지 자기 할 말을 바로 꺼냈다.

"진충비도 당신이 방해한 내 부하가 둘이나 되오. 알고 있소?"

"잠깐, 그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많이 잡았는데?"

"...몇 놈을 잡아넣은 것이오?"

담벼락 위의 도둑놈은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 판관 놈이 대체 몇 놈을 잡아넣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도역유도(盜亦有道)란 말을 아시는지 모르겠소."

도역유도.

보통 도둑들이 배때기에 기름이 차면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고 철학을 읊곤 하는데 그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도둑놈들에게도 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한경의 도둑들은 관리의 체면을 지켜가며 도둑질을 하고 있소.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도둑들도 도(道)를 지키지 않을 것이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슬슬 짜증이 난 연우혁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간단하오! 우리도 관리의 체면을 존중해줬으니 진충비도 당신도 우리의 체면을 존중해서 적당히 잡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한경의 모든 포쾌들이 밤에 잠을 자지 않아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물건이 사라지게 될 테니."

"..."

"혹시라도 이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나는 모금묘사(摸金墓師) 조의망! 내 별호는 들어봤겠지."

모금묘사 조의망.

별호에 '묘(墓)'가 들어간 걸 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조의망은 원래 도굴꾼 출신이었다.

도굴꾼들의 대부분은 묘를 파헤치다 죽거나 붙잡혀서 죽는 게 보통. 그 중 극히 일부만이 부를 얻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조의망은 그런 극히 일부 중에서도 더욱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묘 안의 비급을 찾아 무공을 익히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무공의 강함이야 그리 높지 않았지만 원래 도둑놈의 무공이란 것은 도망치거나 숨는 것만 잘하면 충분한 법.

그런 점에서 조의망이 익힌 무공은 제몫을 넘치도록 해주고 있었다.

강호에서 명성을 날린 신투들이 채 오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동안 십 년 넘게 살아남아 '모금묘사'라는 별호를 자처한다는 점이 바로 그랬다.

'저 멀리 북쪽에서 활동하는 줄 알았는데?'

연우혁은 상대가 용봉지회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온갖 잡놈들까지 다 같이 온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하들도 있었나?"

"물론! 수족 역할을 해줄 자들이 없다면 용(勇), 의(義), 인(仁)이 왜 있겠소? 명심하시오. 내 경고는 두 번은 없을 것이니!"

모금묘사는 상대가 자신의 명성을 알자 만족스러워하며 훌쩍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혹시라도 뛰쳐나올까 싶었는데 판관은 나오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한 모양이었다.

"조 대인. 저 판관 놈이 호락호락하게 말을 들을까요?"

부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하들은 모금묘사의 명령에 따라 도둑질에 나서는 부하기도 하면서 성과와 자질에 따라 은잠술의 초식 한두개를 가르침 받는 제자기도 했다.

가진 것 없는 도둑도 몇 년 일하면 목에 힘이 들어가는데 모금묘사 같은 신투를 업은 도둑들이 온순할 리 없었다. 이들은 모금묘사 앞에서는 조심스러워도 다른 자들 앞에서는 마치 낭중(囊中) 속의 물건이 이미 자기 물건이 된 것처럼 오만하게 굴었다.

그런 부하가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건 확실히 드문 일. 모금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판관 놈이 내 경고를 무시한단 말이냐?"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오나 저 판관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보니..."

말을 꺼낸 부하 말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는 부하가 더 있었다.

그만큼 한경 인근에서 진충비도의 소문이 자자하게 난 것이다.

눈을 감고서도 백 리 밖의 도둑을 탁탁 잡아내고 비도를 던져 천 리 밖의 죄인을 잡는다는 소문은 아무한테나 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한경 놈들 허풍도 잘 떠는구나'했던 도둑들도 자신들의 수법 몇 개가 순식간에 파훼되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인이긴 하지. 하지만 천치가 아니라면 내 경고를 이해했을 거다."

모금묘사는 단순히 자신의 명성만을 믿고 있지 않았다.

노련한 도둑답게 한경의 상황 또한 영리하게 읽고 있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무림인들이 몰려든 상황에서 판관이 들끓는 도둑들을 잡지 못하는 건 꽤 체면이 상하는 일.

관졸이나 군병들을 더 부르면 이제 조정에서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관리로 생각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무림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한경 관리들의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는 꼴이 됐다.

가장 현명한 건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었다.

모금묘사 본인도 용봉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무림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겨 목적을 이루고, 판관 노릇에 집착하는 괴인인 진충비도도 체면을 챙기면 어찌 서로 이롭지 않겠는가?

* * *

"..."

모금묘사는 황당함을 가득 드러내며 객잔에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삿갓을 푹 눌러 쓰고 얼굴을 가린 부하가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세 놈이 전부 다 잡혔다는 거냐?"

"예..."

"불가능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조의망이 신경질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판관 놈에게 경고를 한 게 이틀 전이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잡힌 놈은 없었다. 일이 방해만 받았을 뿐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당연히 휘하의 부하들도 더 경계를 하면서 일을 벌이면 벌였지 덜 경계하진 않았다. 판관에게 경고를 했다고 해서 방심할 만큼 이들이 멍청하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세 놈이 잡혔다고?!

"세 놈이다, 세 놈. 한 놈만 쫓아다녀도 보름은 걸릴 텐데 어떻게 이틀 만에 세 놈이 잡혔다는 거냐."

"사... 사실 오늘 세 놈이 다 잡혔습니다."

"...말해봐라! 어떻게 잡혔는지."

부하는 벌벌 떨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첫 번째 놈은 이 근처 무가(武家)의 묘를 뒤져보려고 했다.

일반적인 도굴꾼이 노릴 법한 목표는 아니었지만, 모금묘사는 보검이나 비급서도 매우 높게 쳐줬다.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는 도둑은 패물보다 무공을 귀히 여겨야 하는 법.

그래서 이 첫 번째 도둑놈은 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사흘에 걸쳐서 흙을 파내고 지하 통로를 만들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니 낮에는 입구를 덮어두고 밤에는 천으로 주변을 가린 채 파내려갔다.

"실수한 게 없는데, 무어냐? 왜 잡힌 거지?"

"그, 판관 놈이 묘 주변에 새 흙이 조금 흩뿌려진 걸 보고 바로 매복했다고 합니다..."

"..."

조의망은 귀를 의심했다.

물론 무덤을 파내려갈 때는 안의 흙을 밖으로 던져야 하는 만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당연히 모금묘사의 부하도 그걸 잘 알았다. 흙이 조금 흩뿌려졌다고 해봤자 정말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흙만 보고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리다니?

이런 바쁜 와중에 진충비도 놈 본인이 매복하고 있는 건 보통 자신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은? 다음을 말해봐라."

두 번째 놈은 판관에게 어이없게 동료가 잡혀가자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대담하게도 첫 번째 놈이 훔치려고 했던 묘에 대낮에 찾아가, 인적 드문 시간을 노려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이미 거의 만들어진 통로였기에 입구만 가리면 대낮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묘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자 두 번째 도둑은 신이 나서 관을 들어올렸다. 보통 부장품은 그 아래에 보관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 순간 기관진식이 발동되더니 마비독이 발라진 암기가 날아들었다. 두 번째 놈은 그걸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관 아래에 암기를 놓는 놈들은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모금묘사는 당혹스러워했다. 본인 또한 경험 많은 도둑이었기에 방금 들은 말이 얼마나 이상한 소리인지 잘 알았다.

물론 도굴꾼들을 막기 위해서는 부장품이 있는 곳에 기관진식을 설치해놓는 게 좋겠지만, 애초에 무덤이란 건 도둑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자를 잘 보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 아닌가.

부장품을 보관하는 곳에 암기를 놓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판관 놈이 첫 번째 놈을 잡은 다음에 허락을 받고 암기를 배치해놨다고 합니다..."

"..."

모금묘사는 놀라워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것에 화를 내거나 보복을 고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무슨 이런 놈이 있단 말이냐?

"세 번째 놈은?"

"세 번째 놈은 둘이 잡힌 다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려고 관아에 접근했습니다. 지게꾼으로 변장해서 지나가는 척 들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포쾌들이 포위하지 뭡니까. 그래서 대뜸 잡혔습니다."

"그게 다냐? 들킨 이유가 있을 텐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골똘히 생각하던 모금묘사는 의아함을 느꼈다.

물론 모금묘사는 하오문과 인연이 깊은 만큼 부하들도 하오문에 가서 소식이나 정보를 부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금방의 일이었다. 하오문이 무슨 쥐나 새도 아니고 일의 전말을 벌써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아낸 거냐?"

"그게 말입니다..."

부하는 우물쭈물댔다.

그 모습에 모금묘사는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팍!

모금묘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탁자를 박차고 생선요리와 국물이 든 그릇을 사방으로 던진 뒤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사악함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의 기감을 전혀 잡아내지 못했기에 모금묘사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고수다!'

눈빛과 손톱에서 보이는 목청색 빛과 유난히 길고 굵은 오른팔. 그리고 흉악하게 일렁거리는 눈동자와 목소리.

이런 고수는 무림에서 많지 않았다.

'...독혼수 당등!'

모금묘사는 오늘 자신의 운수가 흉이 가득하다는 걸 직감했다. 많고 많은 무림인들 중 독과 암기에 능통하고 독랄하기로 유명한 고수를 만나다니.

"야, 거기 서라. 모금묘사! 네놈이 도망치면 진충비도한테 호언장담한 이 당등의 체면이 뭐가 되겠냔 말이다! 도망치면 사지에 각기 다른 독을 꽂아주마!"

"..."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모금묘사는 욕설이 절로 나왔다.

무슨 놈의 판관이 이렇게 체면도 없이 무림인에게 일을 맡긴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사천당문의 고수란 자가 체면도 없이 그걸 날름 받는단 말인가!

106화

 '도망쳐야 한다...!'

 결심과 함께 모금묘사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그 기세도 같이 흐릿해졌다.

 걸견폐요공(桀犬吠堯功).

 모금묘사 조의망이 익힌 심법의 이름이었다.

 내공을 쌓는 속도도, 쌓인 내공의 정순함도 보장해주지 않았지만, 이 심법은 도둑에게는 신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려 쌓은 내공의 성질을 변화시켜 무인의 존재를 흐려지게 만드는 것이다.

 강호에 은잠술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내공 성질 자체를 변화시켜서 무인을 안전하게 만들어주는 심법은 흔치 않았다.

 게다가 이 심법은 다른 기공 하나와 같이 익히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견설고골결(犬齧枯骨訣).

 이름에 개가 들어가는 탓에 우스워 보일 수 있겠지만 이 기공과 걸견폐요공을 같이 익히면 눈앞에서도 잡기 힘들 만큼 기감이 흐릿해졌다.

 천하의 독혼수 당등도 모금묘사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러워했다.

 무슨 사악한 무공인진 몰라도 눈앞에서 초점을 잡기 힘들 정도라니.

 '이건 단순히 은잠술이 아니라 환술의 요결까지 들어간 무공이다!'

 당등은 상대가 익힌 심법과 펼치는 기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했다.

 무력으로는 당등을 상대할 경우 순식간에 한 줌 핏물이 되겠지만 놀랍게도 이런 도주 상황에서는 저 모금묘사란 놈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푹!

 당등은 냅다 자신의 왼팔을 바늘로 세게 찔렀다. 독이 묻어 있었는지 찔린 곳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찾았다, 이 찢어 죽일 도둑놈 새끼!"

 "...!"

 으르렁거리며 쫓아오는 당등의 모습에, 모금묘사는 상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무림의 술법 중 환술은 고통이나 충격을 받으면 깨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모금묘사가 익힌 무공 또한 환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기에 상대가 눈앞에서 봐도 그 초점을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

 역으로 말하자면 고통을 주면 모금묘사의 무공도 그 효과가 줄어들었다. 독혼수는 그걸 노리고 자신의 왼팔을 찔러 고통스러운 독을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다루는 독이니 중독은 되지 않을 것이고 통증만 있을 테니 정확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팔에 바로 독 묻은 암기를 꽂아 넣는 독심이라니.

 "이... 당신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판관의 명령을 받고 쫓아온단 말이오!"

 "명령? 명령?! 방금 그 말로 네놈의 회음혈에 박힐 암기가 하나 더 늘었다! 아주 뾰족하게 박아주지."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당등의 말에, 모금묘사는 자신이 잘못 짚었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판관의 명령으로 쫓아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대체 왜 저렇게 죽일 기세로 쫓아오는 거냐...!'

*   *   *

 하루 전 한경에 도착한 당등은 아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지부 어른도 만나고 강 노인에게 약재도 좀 갖다 주고...

 그런 다음 기특한 포두, 아니 판관 녀석을 찾아갔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이 포두 녀석이 세운 공적으로 판관이 된 것이다.

 무림에서 진충비도란 별호를 얻고 명성을 날린 것보다 판관이 된 게 몇 배는 더 신기한 일이었다.

 '하긴, 조정의 썩어빠진 벼슬아치 놈들도 눈깔이 달렸다면 한 일들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했겠지!'

 낭중지추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말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걸 보니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유쾌해진 당등은 선물로 새로 만든 독이나 몇 개 전해줄까 싶어 관아에 방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다른 구역의 포쾌들도 몰려왔는지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대, 대협.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다. 무슨 일이냐고 두 번 물어봐야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게, 웬 미친 도둑놈이 판관 어르신을 협박해서 시끄럽습니다. 저희 포쾌들은 일치단결해서 놈들의 소란을 막아낼 생각인데, 궁 판관 어르신은 '니놈들을 믿느니 내 집의 늙은 개를 믿겠다'라고 하셔서...

 -도둑놈 하나 때문에 이 소란을?

 -그 자도 무림인입니다. 모금묘사 조의망이라고...

 -흥! 잘 됐군. 선물을 바꿔줘야겠다. 판관 어른 있소? 당장 얼굴 좀 봅시다!

 당등은 연우혁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사를 대충 마친 뒤 자신이 모금묘사를 잡아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연우혁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모금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판관 네가 찾아줘야지?

 -...예... 그렇군요.

 연우혁은 조금 당황했지만,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대응 가능할까 고민하던 차에 당등 같은 고수의 도움은 가뭄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부하들을 잡아서 심문해보겠습니다. 조금 걸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하루 안에 처리하겠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그리고 실제로 당등의 말대로 판관은 하루 안에 부하들을 여럿 잡아들였다. 모금묘사와 만나기로 한 객잔을 듣자 당등은 바로 그 부하 놈을 데리고 출발했다.

 -판관 취임 선물로 그 도둑놈 모가지를 잘라다주겠다!

 -가능하면 살려서 데리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고 맡겨만 두라고 했는데 놓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심지어 모금묘사가 숨은 위치까지 연 판관이 알려준 거였다.

 자신의 체면을 위해 당등은 살기 넘치게 쫓아왔다. 아무리 경공을 펼쳐도 거리가 점점 줄어들자 모금묘사는 이를 악물었다. 점점 등뒤가 서늘해지는 게 금세라도 암기가 날아올 것 같았다.

 "!"

 당등은 눈을 크게 떴다.

 하필이면 모금묘사가 담벼락을 넘은 쪽이 시전(市廛) 쪽이라 사람들이 서로 어깨가 부딪칠 만큼 꽉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죽었다 살아난 모금묘사는 역용술을 펼치며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누볐다. 걸견폐요공과 견설고골결이 모금묘사의 인기척을 줄이고 추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살... 살았다.'

 모금묘사는 십 년 동안 쓸 대운을 오늘 하루에 다 쓴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거나 다른 장소였다면 등의 요혈에 독혼수가 쏘아낸 암기가 날아들었을 것이다.

 뒤를 보니 독혼수 당등이 담벼락 위에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시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당문의 무인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일까 싶으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모금묘사를 재촉했다.

 '...빨리 빠져나가야겠군.'

 모금묘사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자 득실을 생각하게 됐다. 한경에 와서 참으로 손해가 컸다.

 독혼수한테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쓸만한 부하들이 잡혀간 게 뼈아팠다. 진충비도 놈을 윽박지른지 며칠이나 됐다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곤란한 상황이 됐다.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덤벼들 것인가, 아니면 물러날 것인가?

 '...물러나자.'

 젊은 판관 놈 하나 때문에 이렇게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에 굴욕감이 쓴물처럼 치밀었지만, 결심을 내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모금묘사는 자신이 진충비도한테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혼수도 아닌 진충비도한테 겁을 먹을 줄이야.

 다른 도둑들이 들으면 비웃을 소리였지만, 직접 겪어 본 입장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저 놈은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턱 밑까지 차올라왔다.

 '이번에 꼭 장로 자리를 얻으려고 했건만...'

 모금묘사 조의망이 용봉지회로 떠들썩한 한경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조의망이 노리는 건 하오문의 장로 자리였던 것이다.

 다른 문파와는 다른 이질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하오문이었지만, 그래도 문파의 장로라는 자리가 주는 무게감과 권한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건 어느 도둑이든 탐을 낼 자리였다.

 그러나 하오문의 장로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혹은 무공이 강하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문파를 위해 세운 공이 많아야 될 수 있는 게 장로의 자리였다.

 모금묘사는 각종 다양한 비급과 병장기, 보물을 하오문에 바침으로써 자신의 자격을 증명할 요량이었다.

 용봉지회 같은 경우에는 강호의 온갖 문파 출신들이 몰려오니 몇 개 빼돌린다 하더라도 태산에서 한 줌 흙을 긁은 정도일 터. 모금묘사와 모금묘사가 가르친 부하들이라면 충분히 한 몫을 모을 수 있었는데...

 ...하필 미친 판관 놈을 만나버릴 줄이야.

 "조훤사등수(鳥喧蛇登樹)?"

 "견폐객도문(犬吠客到門)."

 암어를 말하자 청월루의 뒷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들어오라고 문을 열었다. 모금묘사는 갑자기 한경을 뛰어다닌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끼며 안으로 들어갔다.

 "조 대협!"

 "무슨 일이오?"

 하오문의 후기지수, 취봉(醉鳳) 이교가 보기 드물게 질린 얼굴로 복도를 달려오자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한경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무슨 일이라니... 내 일이란 게 뭐가 있겠소? 알면서 왜 그러는 거요?"

 "지금 기루에 독혼수 당등이 사생결단할 각오로 와있습니다."

 "..."

 모금묘사는 오늘 자신이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보통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   *   *

 분노와 굴욕으로 눈이 뒤집힌 당등은 설욕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모금묘사는 하오문과 관계가 있는 놈.

 그렇다면 하오문으로 가서 놈을 끌어내겠다!

 "당 대협. 아무리 당문의 위세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일은 후회하실 겁니다."

 삼층에 모여 있던 하오문의 무인들과 하인, 기녀들은 녹색 얼굴로 당등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당문의 위세가 사천을 호령한다지만 하오문 또한 이렇게 무시 받을 문파는 아니었다.

 강호의 밑바닥들은 밑바닥대로 보복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세가나 구파일방이 하오문을 굳이 건드리거나 토벌하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등 또한 만만찮게 미친 사람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일 끝나면 네놈들 원하는 대로 보복해라. 대신 이 당등도 원하는 걸 하겠다. 난 그 개잡놈을 반드시 잡아 죽이고 말겠다!"

 '미친 새끼!'

 하오문의 무인은 새삼 당문의 무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자기 자존심과 감정이 풀릴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 독심이라니.

 오늘 독혼수는 대뜸 청월루에 쳐들어오더니 기녀들과 하인들도 물리치고 일층과 이층을 지나 삼층으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대뜸 말했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중독됐다. 살고 싶으면 모금묘사 놈을 불러와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인! 저희는 정말 그런 도둑놈을 알지 못해요!"

 기녀 중 한 명이 애절하게 외쳤다. 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간장을 녹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등은 냉정했다.

 "그럼 알아와라!"

 "천지를 돌아다니는 두 발 달린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어요?"

 "못하겠으면 죽어라!"

 "..."

 기녀들은 질린 눈빛으로 물러섰다. 정말로 미친 작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등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한 시진 정도 지나자 당등은 눈을 번쩍 떴다.

 "이층 놈들한테 전해라! 네놈들도 중독됐다고. 슬슬 독이 올라올 시간이군."

 "절대 안 되오!"

 하오문 무인이 쏘아보며 말했다.

 삼층의 하인들이나 무인들이면 모를까 이층은 손님들이 있는 곳 아닌가.

 그들이 중독되면 뒷수습이 정말로 까다로워졌다.

 "그들이 중독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독혼수!"

 "이 당등 걱정은 고맙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그 놈을 데리고 와라. 안 그러면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다 한 줌 핏물이 될 테니!"

 '미친 개새끼가...!'

 "내가 졌소! 독혼수! 그만두시오!"

 쿵!

 안쪽 문이 열리더니 모금묘사가 튀어나와서 엎드렸다. 그걸 본 당등은 살짝 놀랐다.

 하오문이 정보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확신했지만 하오문 쪽에 은신하고 있었을 줄이야. 생각보다 관계가 깊은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독을 풀어주시오!"

 "알겠다."

 독혼수는 선선히 손짓했다. 삼층 사람들의 얼굴에 걸려 있던 녹색 기운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대협. 아래층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새끼를 대협이라고 부르는 것도 화가 났지만 하오문 무인들은 참고 말했다.

 "아래층은 없다."

 "예?"

 "중독시키지 않았다고."

 "..."

 "한 번! 한 번은 하오문의 체면을 존중해서 넘어가준다.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네놈 눈깔을 꿰어버리겠다."

 "죄, 죄송합니다."

 무인들은 넙죽 엎드렸다. 새삼 독혼수의 괴팍한 성정을 느낀 것이다.

 이교가 모금묘사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하오문의 잠정적인 소문주로 대우받는 후기지수답게 이교는 침착하게 말했다.

 "독혼수께서는 무슨 일 때문에 모금묘사를 찾으신 겁니까?"

 "내가 말해줘야 하냐?"

 "말해주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하오문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냉정한 지적에 당등도 살짝 반성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이렇게 날뛰었으니 이유는 말해줘야겠지. 모금묘사는 내 체면을 훼손했다."

 "내가 무슨 당신의 체면을...!"

 모금묘사는 정말로 억울했다. 당문의 무인을 건드릴 만큼 모금묘사가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해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놈에게 물어봐라."

 "난 그저 판관 하나에게 경고했을 뿐이오! 진충비도란 놈 말이오. 그 놈이 이번 일에 방해가 되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모금묘사는 멈칫했다.

 삼층에 있는 하오문의 사람들 전원이 경악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107화

 "왜 그러시오?"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하오문도들이 이런 눈빛을 보내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몇몇 이들은 경악을 넘어서 경멸의 눈빛까지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충비도 나으리한테 그런 협박을 하십니까?"

 "무슨... 아니... 양상군자가 판관 놈 따위의 사정을 봐줘야 한다는 거냐?"

 다른 곳이면 모를까 하오문에서 이런 말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모금묘사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몇몇 하오문도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진충비도 나으리는 다른 판관들과 다릅니다. 그 분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밖의 하오문도들 중에서도 그 숫자가 제법 될 겁니다."

 "뭔..."

 모금묘사는 저런 말을 듣는 판관이 세상천지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변변한 뇌물 하나 바칠 힘 없는 하오문도들에게 좋은 말을 들을 판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걸 떠나서 한경의 하오문은 저번에 직접 신세를 졌습니다."

 이교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첨언했다. 그제야 슬슬 느낌이 왔는지 모금묘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놈... 아니, 그 자가 그러니까 하오문에게 은혜를 베푼 게 있다는 거요?"

 "예."

 "난 몰랐소. 판관 놈이 그런 놈인 줄 어떻게 알았겠소?"

 모금묘사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분명 있었다.

 판관이란 건 강호의 무림인들에게 절대 그 인식이 좋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사실 무림인들에게 인식이 좋은 고관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소사(小事) 하나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면 뇌물을 요구하고, 뇌물을 거절하면 반대쪽에게 이득을 주며 협박했으며, 가끔은 없는 사건도 만들어서 은자를 뜯어냈다.

 포쾌가 욕을 많이 먹는다지만 사실 진짜 큰 도둑은 판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모금묘사는 판관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을 때 그 재주를 비싸게 팔아먹는 놈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판관이 재주가 있는데 그걸 공정하게 쓴다니.

 백주대낮에 귀신 홀린 작자도 저것보단 그럴듯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그랬겠지."

 "!"

 독혼수가 갑자기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모금묘사는 당황했다.

 "어째서..."

 "네놈은 하찮은 도둑이니까! 진짜 대도(大盜)였다면 훔칠 물건에 눈이 벌게지기 전에 판관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하고 그 인품에 넙죽 엎드렸을 거다. 아까 네놈이 스스로를 양상군자라고 했느냐?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진식(陳寔)이 서까래 아래 숨어 있는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불러주자 그 도둑놈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넙죽 엎드렸다. 네놈이 뭔데 스스로를 양상군자라고 하는 거냐? 넌 도둑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소인배다, 버러지 새끼야!"

 "...!"

 모금묘사의 얼굴이 충격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독혼수의 지적이 어느 모욕보다도 더 날카롭게 모금묘사의 양심을 꿰뚫은 것이다.

 모금묘사가 평범한 도둑이면 모를까, 스스로를 대도라고 자부하고 도역유도를 읊어대는 모금묘사에게 저 반론할 수 없는 지적은 머리를 쇠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마냥 아팠다.

 "할... 할 말이 없소."

 "없겠지!"

 "부디 진정하십시오, 당 대협. 그런데 모금묘사가 연 판관을 건드린 게 어찌하여 대협의 체면을 훼손한 게 되는 겁니까?"

 "아. 내가 진충비도한테 모금묘사를 잡아다주겠다고 호언장담했거든."

 "..."

 "..."

 하오문 무인들은 묘한 눈빛으로 복도 바닥을 쳐다 보았다. 고개를 들고 당등을 쳐다보았다가는 무슨 소리가 날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모금묘사의 부하들도 당 대협께서 잡으신 겁니까?"

 "그건 진충비도가 잡았지."

 "?"

 이교는 그 총명함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하들도 연 판관이 잡고 정보도 연 판관이 캐냈으면 딱히 당등이 잡아다주는 게 아니지 않나...?

 갑자기 아래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외쳤다.

 "연, 연 판관께서 오셨습니다!"

*   *   *

 연우혁은 포쾌 중 하나가 '독혼수 대협께서 청월루 들어가셔서 무슨 짓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란 보고를 듣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연우혁에게 별로 좋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연우혁은 경공을 펼쳐 청월루 앞까지 날아들었다. 이렇게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건 처음이었다.

 "당 대협! 당 대협!"

 "왜 그렇게 소란이냐?"

 당등은 뒷짐을 진 채 위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연우혁은 시종이 가져다 준 천으로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혹시..."

 "혹시?"

 "청월루에서 싸우신 겁니까?"

 "아닌데? 무슨 소리냐?"

 당등은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은 것마냥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옆의 하인을 보며 물었다.

 "내가 여기서 싸우거나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나?"

 "아이고. 아닙니다. 당 대협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지요!"

 '개새끼.'

 하인은 속으로 욕했다. 저 새끼는 당문만 아니었어도 진작 강호에서 비명횡사했을 작자였다.

 들이닥쳐서 멋대로 중독시킨 것도 모자라 판관이 오니까 입단속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라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단 말인가?

 연우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의 판관이 얼마나 대단한 눈썰미를 갖고 있는지 잘 아는 당등은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돌리려고 애썼다.

 "여긴 왜 왔나?"

 "대협께서 청월루에 뛰쳐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싶어서 달려왔습니다."

 "아. 그거!"

 당등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금묘사를 붙잡느라 그런 거지."

 "모금묘사 말입니까?"

 "그래. 아까 도망친 놈을 쫓다보니 청월루까지 가게 되더군. 놈이 아주 교활해! 사람 많은 기루로 들어가면 못 쫓아올 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독혼수 대협이시지요."

 "그렇지. 그렇지. 바로 들어가서 놈을 쫓아갔다. 다행히 청월루의 사람들은 의협의 기풍이 있어 내 외침을 듣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주더군. 내 앞은 비켜서고 놈의 앞은 막아서니, 이렇게 놈을 잡을 수 있었지. 안 그런가?"

 "맞, 맞소이다."

 붙잡힌 모금묘사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뒤를 쳐다 본 독혼수가 시퍼렇게 타오르는 독망(毒蟒)의 눈동자로 모금묘사를 노려본 것이다.

 말을 맞추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렇게 불편한 여건에서도 도둑을 기어코 붙잡으실 줄이야. 다시 한 번 대협에게 탄복했습니다. 강호의 어느 누가 대협처럼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커험."

 어지간히 뻔뻔한 당등이었지만 연우혁의 칭찬을 듣자 조금 민망한 모양이었다. 슬쩍 창밖을 쳐다보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

 "아까 놈을 놓쳤을 때만 해도 저는 이 도둑을 절대 잡지 못하겠구나 싶어서 땅이 무너지는 듯..."

 "그래, 그래! 자. 이놈은 여기 있군! 난 가보겠다. 진충비도. 네가 판관이 된 축하는 충분히 한 거다!"

 당등은 손을 흔들더니 후다닥 떠나버렸다. 하오문 사람들과 남은 연우혁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사과했다.

 "당 대협께서 난리를 치신 것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중독되신 분들은 괜찮습니까?"

 "...!"

 모금묘사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모금묘사가 보기에 위화감을 느낄 만한 흔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이, 이 자는 대체 어떻게...?'

 "다친 자는 없으니 괜찮습니다. 저번에 받은 은혜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사과를 해야 한다면 독혼수께서 직접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제가 부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연우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등이 독을 흩뿌리면서 날뛴 걸 깨달았을 때 하오문과 관계가 어디까지 악화될지 몰라 걱정했었는데, 보아하니 별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최소한 화가 났어도 당등에게 화가 났지 연우혁에게까지 화살이 돌려지진 않을 것 같았다. 당문의 괴팍한 소문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오히려 저희가 사과드려야 할 일입니다. 모금묘사가 판관 어른의 공무를 방해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오문도가 몇 명인데 그 행동을 모두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용봉지회가 열리는 동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방문해주십시오. 빈약한 재주지만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연우혁은 모금묘사를 끌고 나왔다. 꽁꽁 묶진 않았지만 어차피 당등이 점혈을 끝내놓은 상태라 끌고 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모금묘사는 묵묵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보시오. 진충비도."

 "듣고 있다."

 "할 말이 있소."

 연우혁은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경의 시세가 궁금한 거로군."

 죄를 지은 자는 태형(笞刑)이나 장형(杖刑), 도형(徒刑)이나 유형(流刑) 등 다양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매로 맞고 장으로 맞고 노역을 하고 유배를 가는, 얼핏 보면 서로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이 형벌들도 사실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속형(贖刑)이 가능하단 것이었다.

 죄에 맞는 은자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깔끔하게 풀려날 수 있는 이 인자한 국법은 몇몇 특정한 죄나 특별한 상황, 혹은 조정의 고관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당연히 한경도 마찬가지였다. 한경의 속형 시세는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연우혁이 봤을 때 모금묘사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값을 내고도 남았다.

 하오문과 관계도 깊고 아직 남은 부하들도 있지 않은가. 재물을 충분히 갖고 올 터였다.

 궁 판관도 아마 모금묘사가 속형하기를 정화수 떠놓고 빌고 있으리라.

 "북쪽에서 악명을 날렸으니 그걸로 한경에서 더 과하게 처벌받진 않는다. 하지만 한경에 와서 판관에게 겁박을 한 죄가 있으니 그건 추가되겠지. 값이 만만치 않을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우혁은 '음'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이 도둑에게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멋대로 속형을 깎아줄 수는 없었다.

 "...속형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오."

 "속형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

 연우혁은 깜짝 놀랐다.

 "설마 처벌을 그냥 받겠다는 거냐? 왜? 부하들이 도망이라도 갔나?"

 연우혁은 상관없었지만 모금묘사가 그냥 벌을 받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좀 많았다. 특히 궁 판관이 바로 그랬다.

 "...아니, 속형은 할 수 있소. 아무리 비싸도 그 정도는 별 거 아니지."

 '이 자식이.'

 자기보다 몇 십 배는 부유한 것 같은 도둑놈의 말에 연우혁은 살짝 분노했다.

 "네게 도둑질당한 자들이 찾아오면 속형이 늘어날 수도 있다."

 "내게 도둑질당한 자들은 대부분 내게 당한지도 모르고 있소."

 "..."

 "여하튼 그걸 말하려고 한 게 아니오. 진충비도. 난 이번 일에서 독혼수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소."

 "그렇군."

 연우혁은 대충 대답했다.

 도둑놈이 붙잡힌 다음 회개하고 반성했다는 말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연우혁이 붙잡은 놈들은 언제나 회개하고 반성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러니 좀 풀어달라 깎아달라 지랄염병들을 해대곤 했다.

 "나는 평생을 도둑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도(道)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소. 하지만 이번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눈이 멀어 실수를 저질렀군. 부끄럽기 그지없소."

 "그렇군."

 "원래 나는 하오문의 장로 자리를 노리고 있었소. 왜인지 아시오? 내 무공을 스스로 갈무리하고 더 높은 경지를 노리기 위해서였소. 나는 싸움에 관심은 없지만, 내가 익힌 무공의 경지를 올리는 것에는 관심이 많소. 절정의 경지에만 올라도 내 적수는 천하에 없을 것이오."

 "그렇군."

 "하지만 그건... 탐욕이었소. 도둑에게도 도가 있고 누구에게 뭘 훔쳐야 하는지 아는 것이 성도(聖道)인데 난 그걸 잊고 있었던 거요."

 "그렇군."

 "그래서 생각이 들었소. 마땅히 속신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번 일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그렇군."

 "다른 판관이었다면 보물을 바치는 것으로 죄를 갚았겠지만 진충비도 당신에게는 모욕일 거라 생각했소. 그래서 당신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주려고 하오."

 "그렇군."

 "혈교의 무인들이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려고 하오!"

 "그렇군. ...잠깐, 방금 뭐라고 했나?"

 "...설마 안 들었소?"

 모금묘사의 눈빛에 연우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다 들었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다시 한 번 들으려는 거지."

 "..."

108화

 상대의 태도가 워낙 당당했기에(그리고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따질 수 없는 처지였기에) 모금묘사는 했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혈교의 무인들이 용봉지회에 참가하려고 한다!

 "용봉지회에서 작은 소란을 일으켜서 체면을 깎으려는 수준이 아니오. 이들은 진지하게 용봉의 별호를 노리고 있소."

 "..."

 습격이나 소란이 아니라 진지하게 후기지수로 위장해서 성과를 노리고 있다니.

 이는 정파무림이든 사파무림이든 충격받을 일이긴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생각해보라.

 혈교 입장에서도 용봉지회에 제대로 참가하는 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위장할 만한 문파를 고르고, 온갖 자세한 역사와 상황을 전부 머릿속에 집어넣은 뒤 해당 문파의 후기지수로 위장해야 했다. 그 문파의 진짜 후기지수를 처리하는 건 덤이었고.

 어떻게든 문파의 후기지수로 잘 위장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만약 후기지수가 쌓은 친분이 있다면 그 친분에 맞춰서 의심을 받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교우관계가 넓다면 더더욱 난이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이건 시작이었다. 용봉지회가 열리면 후기지수로 위장한 혈교도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비무에서 이겨야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아주 조금의 수상한 사술도 써서는 안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가능성이 희박한 일 아닐까?

 "혈교가 무림에 원한이 많고 언제든 역천을 노린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혈교의 무인들이 이번 용봉지회에 그렇게 참가한다는 건 너무... 허황되게 들리는데. 안 들킬 수가 있나?"

 "그렇게 말할 것 같았소. 그 허황되게 들리는 것을 노리고 녹귀혈뇌 방종동이 계획을 짠 것이오. 헛소리처럼 들릴수록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가장 철두철미한 계책은 가장 허튼소리 같은 계책이라는 게 녹귀혈뇌의 말버릇이지."

 혈교의 여러 장로들 중 혈뇌가 들어간 별호를 가진 무인들은 교 내에서도 지략과 계모로 악명 높은 이들이었다.

 적면혈뇌가 적극적이고 사나운 계책을 펼쳤다면 녹귀혈뇌는 끈기 있고 철두철미한 계책으로 그 이름이 높은 책사.

 이번 계획 또한 녹귀혈뇌의 악명답게 철저했다.

 "혈교에 혈뇌란 자들이 얼마나 있는 건가?"

 "많지 않소. 왜 그러시오?"

 "저번에도 만난 적 있으니 그렇지. 자꾸 엮이는군."

 "..."

 연우혁의 짜증에 모금묘사는 경악했다.

 설마 마교의 다른 혈뇌와 맞부딪친 적이 있었을 줄이야.

 "어, 어떻게 됐소?"

 "뭐가 말인가?"

 "그, 혈뇌..."

 "동창의 도움을 받아서 잡았다."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모금묘사는 전율했다.

 혈교의 장로들 중 혈뇌의 별호를 가진 이들보다 무력이 강한 무인은 여럿이었지만, 누가 더 잡기 힘든지 비교한다면 당연히 혈뇌를 꼽을 터였다.

 자신의 무공만을 믿고 설치는 자들보다 더 지독한 것이 교활함과 음험함을 같이 겸비한 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저 나이에 혈뇌를 잡았다니.

 동창의 무인들이 무공을 빌려줬다 하더라도 혈뇌와의 계략 승부에서 이긴 건 진충비도 본인일 터. 새삼스럽지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말하겠는데, 녹귀혈뇌의 계획은 기존 문파의 후기지수를 납치하거나 죽이고 위장하는 게 아니오."

 "아니라고?"

 "이 계책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오. 원래는 녹귀혈뇌의 스승이 준비한 계책이라더군. 쓸만한 교의 첩자를 만들기 위해 준비한 계책."

 녹귀혈뇌의 스승은 제자와 비슷한 성정을 갖고 있는 만큼 대계를 그렸다고 했다.

 기존 정파 문파를 포섭하거나 매수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문파를 새로 만들면 어떨까?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그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정파무림은 의심하지 못할 터였다.

 불행히도 녹귀혈뇌의 스승은 녹귀혈뇌한테 암습당한 탓에 계획의 결말을 보지 못했지만, 녹귀혈뇌는 스승의 대계를 이어받아 자신이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쌓아놓은 문파와 그 후기지수를 활용해 정파무림의 폐부 깊숙한 곳에 쐐기를 박으려고 한 것이다.

 용봉지회에서 별호를 얻은 무림인이라면 차기 정파무림에서 무시못할 명성을 얻을 테니...

 "놀랍군. 그런 계책이라니."

 연우혁도 솔직히 감탄했다.

 자신은 언제나 단편적으로 사건을 해결했기에 이런 커다란 뒷배경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혈교 첩자는 여럿 잡아봤어도 그 첩자를 보내는 대계가 어떤 식으로 엮여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처럼.

 새삼 이렇게 보니 무림인들의 끈기가 지독하다는 걸 느꼈다.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수십 년을 기다리다니.

 '혈교 첩자라... 동굴 살인 사건인가? 아니면 사찰 범종 살인 사건? 옥경 도난 사건?'

 "...아마 진충비도 당신처럼 현명한 사람이라면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오. 내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모금묘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모금묘사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힘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판관한테 붙잡히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사실 난 혈교의 무인들과 일한 적이 있소."

 "그렇군."

 "...그, 그게 다요?"

 "어... 뭐, 보수가 좋았나?"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별 생각 없이 되물었다. 모금묘사는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수는 좋았소..."

 "그래. 잘 된 일이군."

 "아니! 그게 다요?!"

 "뭐 어쩌란 건가?"

 "혈교와 같이 일했다니까!?"

 "아."

 연우혁은 그제야 상대가 왜 지랄인지 이해했다.

 "그렇군! 내가 그쪽을 혈교도로 의심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혈교와 결탁한 놈이라거나..."

 "도둑이 무슨 사람 가려서 도둑질을 하겠나. 가진 거 많고 아는 거 많으면 손 잡아서 하겠지."

 연우혁은 시큰둥했다.

 만약 상대가 팽주성이나 제갈규였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하며 충격을 받았겠지만 상대는 도둑놈 아닌가.

 역적하고 결탁하든 사교도와 결탁하든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금묘사는 연우혁의 시큰둥한 태도를 잘못 이해하고 뜨겁게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이 자는... 믿어주는 건가!'

 정파의 무인들은 대의명분과 체면치레를 일 자체보다 더 중요시여길 때가 많았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자들이라면 모금묘사의 발언을 믿지 않거나 혹은 역으로 베려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진충비도는 달랐다.

 과연 판관으로 일하고 있는 기인답게 사람의 과거나 죄로 멋대로 선입견을 갖지 않고 일의 옳고 그름과 경중만을 엄중히 따졌다.

 한경의, 아니, 조정의 유일하게 공정한 판관이란 칭송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믿어줘서 고맙소!"

 "애초에 그쪽이 혈교도라면 이걸 왜 나한테 말해주겠나.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혈교 이야기나 더 해보도록."

 "알겠소."

 모금묘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는 이야기를 더 털어놓았다.

 이 도둑은 가끔은 사파 문파에게, 더 가끔은 정파 문파에게, 그리고 아주 더 가끔은 혈교에게 의뢰를 받아서 일을 처리하곤 했다.

 강호에는 칼부림보다 도둑질이 필요할 때가 은근히 많았던 것이다.

 "도역유도에서 훔쳐야 할 물건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을 바로 지(知)라고 했소. 실은 이 이야기가 물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오."

 "과연. 의뢰를 맡긴 자들이 더 위험하단 건가."

 바로 알아듣는 진충비도의 총명함에 모금묘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정파든 사파든 혈교든, 도둑에게 의뢰를 맡기는 자들만큼 위험한 자들도 없었다. 물건은 훔쳤지만 의뢰인에게 죽은 도둑이 강호에 얼마나 많던가.

 그걸 대비하기 위해 모금묘사는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리고 그런 조심함이 의외의 이야기를 엿듣게 만들었다.

 "일을 끝내고 혈교의 무인들과 만나기로 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먼저 가서 보름 동안 버텼소."

 모금묘사가 익힌 특수한 무공과 귀식대법은 뒤에 도착한 혈교도들이 모금묘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보름 동안?"

 "기다리게 하면 성질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날 죽일 자들은 보통 떠들기 마련이오. 그런데 그 때는... 의외의 이야기를 하더군."

 자신을 죽일 계획이 있나 귀 기울이던 모금묘사는 아주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바로 용봉지회에 첩자를 보내려는 녹귀혈뇌의 계획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무한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소. 하오문한테도."

 혈교는 원한을 잊지 않았다. 혹여라도 나중에 모금묘사가 입을 놀렸다는 사실이 들키기라도 하면 모금묘사는 평생 혈교한테 쫓겨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마땅한 증좌도 없고, 누가 첩자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둑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렇기에 모금묘사는 입을 다물고 그 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왔었다.

 "난 믿는다. 고맙군."

 "...!"

 영안으로 모금묘사를 본 연우혁은 상대가 한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모금묘사는 괜히 울컥 밀려오는 감정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왜 독혼수 같은 마두 새끼가 판관을 위해 일했는지 알 것 같았다.

 "더 아는 게 없어서 미안하오. 그저 계획이 있다는 것만 들어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서신을 보내야겠군."

 "그만두시오!"

 모금묘사는 깜짝 놀라서 연우혁을 말렸다.

 누구한테 보내려는 건지는 몰라도 서신을 보내는 건 최악의 행동에 가까웠다.

 무림의 어느 누가 받더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에 귀기울여줄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증좌라도 있어야 했다.

 "괜히 진충비도 당신만 힘들어질 것이오. 그 자가 당신을 믿어준다 하더라도, 그 자 또한 증좌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

 "으음. 그런가? 난 괜찮을 것 같은데."

 "누구한테 보내려고 했소?"

 모금묘사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진충비도가 보낼 법한 무인이라면...

 '독혼수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설마 천기수사!? 하지만 천기수사도 이런 일에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을 텐데...'

 "무송진인께 보내려고 했는데."

 "무송진인? 그게 누구요? 무당파의 무인인가?"

 "무당파... 출신이시지. 무림맹 맹주시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태극검존!?!?!"

 뒤늦게 연우혁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은 모금묘사는 경악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 판관은 대체 어떻게 태극검존을 알고 있단 말인가?!

*   *   *

 곤륜(崑崙)의 젊은 무인, 선도광은 형형한 눈빛을 내뿜으며 말을 내뱉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구파에서 마(魔)를 상대한 경험이 가장 많은 이들은 우리 아닙니까? 마땅히 혈교의 첩자를 찾는 일도 우리가 맡아야 하는데!"

 곤륜파의 무인으로서 선도광이 자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마교가 신강에서 그 세를 잃고 사라지기 전까지 곤륜의 역사는 마교와의 투쟁으로 인한 피의 역사였으니까.

 당연히 곤륜의 무인들은 마공을 상대하는 데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그 재주는 마인들을 찾아내는 것에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맹주는 곤륜파에게 전권을 주고 첩자를 찾게 하는 일을 거부했다.

 "입조심하거라. 도광아. 네 녀석이 검존의 뜻을 감히 얕잡아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장로님."

 곤륜의 서 장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검존께서는 구파일방의 체면을 신경쓰시는 거겠지... 설령 첩자를 잡는다 하더라도 서로 간에 앙금이 남으면 자승자박일 테니."

 그 말에 선도광은 속으로 가득 불만을 가졌다.

 다른 문파의 허영과 무능을 지켜주기 위해 중요한 일을 돌아가야 하다니.

 그 불만을 알아차렸는지 서 장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아직도 멀었다. 검존께서 전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첩자를 찾는 일을 금하지도 않으셨다. 이게 무슨 뜻이겠느냐?"

 "...!"

 그제야 선도광의 얼굴에서 불만이 사라졌다.

 곤륜에서 젊은 후기지수 중 무공은 물론이고 뛰어난 오성(悟性)으로 명성이 높은 선도광이었다. 산맥의 일월봉에서 은거하고 있는 몇몇 진인들에게 술법을 배울 만큼, 선도광은 문파 내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더 이상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시작할 생각이느냐?"

 "후기지수들 중 영리한 자들과 손을 잡겠습니다."

 서 장로는 대답하진 않지만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지모만을 믿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드물었다. 정파의 여러 문파를 폭넓게 확인해야 하는 만큼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들과 손을 잡는 건 좋은 계책이었다.

 "좋다, 시작 하거라."

 "예!"

 두 시진 후.

 선도광은 황망한 얼굴로 제갈세가 무인들이 머무는 장원에서 걸어 나와야 했다.

 '대체 진충비도가 누구길래?!'

109화

 용봉지회를 앞두고 한경에 찾아온 무인들 모두가 금침 펼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오대세가 정도쯤 되면 말만 꺼내도 머물게 해줄 가문들이 여럿이었고 아예 가문의 이름으로 장원을 갖고 있는 세가도 있었다.

 지금 선도광이 찾아온 장원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이번 용봉지회를 위해 멀리서 찾아온 제갈세가 무인들이 머무르는 장원.

 그리고 여기서 선도광이 만나려고 했던 제갈세가의 무인은 바로 제갈규였다.

 선도광과 동년배인데다가, 오대세가 출신이라 다른 오대세가와 인연이 깊고, 무엇보다 선도광의 일을 충분히 도울 만큼 머리가 좋은 인물.

 그런데 시작부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거절을 당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형장이 제갈규 맞소? 나는 곤륜의 제자 선도광이라고 하오.

 -무슨 일로 이렇게...?

 -형장도 첩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오. 검존께서는 별다른 명을 내리지 않으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움직임을 금하지도 않으셨소. 나는 재주 있는 무림 동도들과 첩자를 찾아보려고 하오.

 -아. 그 이야기였소.

 제갈규는 불쑥 찾아온 곤륜파의 무인이 꺼낸 제안에 당황하다가도 금세 침착을 되찾았다. 과연 제갈세가의 핏줄다운 총명함이었다.

 그 모습에 선도광은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골랐음을 깨닫고 내심 기대했다.

 만약 범속한 자라면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절거리며 예의가 어떻느니 당신이 누구느니 떠들었을 것이다.

 '오대세가 무인의 힘을 빌리고 싶었는데...'

 곤륜 인근 마을에서 협행을 하며 선도광은 여러 깨달음을 얻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을 방심시키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선도광 혼자서 의심스러운 태도로 캐묻고 다니는 것보다, 동년배 오대세가 무인과 함께 허랑한 태도로 친분을 쌓으려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훨씬 의심을 덜 사는 것이다.

 "곤륜파의 무인인가?"

 "!"

 선도광은 말을 건 상대의 커다란 덩치와 허름해 보이면서도 결코 싸구려는 아닌 의복에 주목했다. 게다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저 도(刀)는...

 "맞습니다. 형장께서는 하북팽가, 그리고 혹시... 도룡 팽주성...?!"

 "맞네! 눈이 좋군. 하지만 도룡이란 별호로 부르지는 말아주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

 팽주성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선도광의 눈빛은 방심하지 않고 반짝였다.

 상대는 놀랍게도 저번 용봉지회에서 도룡(刀龍)의 별호를 받은 기재였던 것이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평생 그 별호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텐데,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별호를 받지 않고 버리다니. 과연 결심하면 행동에 거리낌이라고는 없는 하북팽가의 무인다웠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팽주성이 지혜롭기로 소문난 무인은 아니었지만 선도광보다 나이가 많고 무공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쩌면 제갈규보다 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공자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게."

 "예. 혹시 첩자의 암약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들었네."

 자세한 정황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번 용봉지회에 혈교의 첩자가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혹시 저와 같이 첩자를 수색하실..."

 "아. 미안하네."

 팽주성은 보기 드물게 미안해하며 즉답했다. 설마 팽주성까지 거절할 줄은 몰랐던 선도광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겠나? 나보다 더 잘 할 아우가 있는데. 별호는 진충비도인데 아주 재주가 뛰어난..."

 "...?!!"

*   *   *

 선도광은 시작부터 일이 막히자 인상을 찌푸린 채 객잔의 구석에 앉았다.

 다른 오대세가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모용세가의 무인들은 지나치게 오만하고 비정해서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았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친분이 깊지 않은 곤륜파 무인의 제안은 받지 않을 터였고.

 사천당문은 그냥 정신 나간 놈들이었고...

 '대체 진충비도가 뭐하는 자길래?'

 시끄러운 객잔 안을 한 번 둘러보며 선도광은 예리하게 눈빛을 보냈다. 한경에 사람들이 몰려든 만큼 객잔은 붐볐고, 또 그만큼 소문을 캐기도 좋았다.

 어떤 놈이 소문을 캐기 좋을까?

 "이보시오. 혹시 진충비도에 대해 아시오?"

 선도광은 포쾌처럼 보이는 자에게 말을 걸었다. 지위가 낮아서 편히 말을 걸기 좋았고, 또 돌아다니는 일이 많으니 소문에 대해 환한 게 바로 포쾌였다.

 "진충비도? 아... 연 대인을 말하는 거로군! 그건 왜 묻소?"

 "이야기를 몇 번 들었는데 궁금해서 물어본 거요. 자."

 선도광이 술을 한 잔 따라주며 묻자 살집 있는 포쾌도 얼굴이 훤해지더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원래 진충비도란 무인은 포쾌의 신분이었는데 워낙 가진 재주와 무공이 뛰어나 여러 악인들을 무찌르고 지금은 한경의 명판관으로 계시는...

 '???'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당혹스러운 이야기에 선도광은 이 포쾌 놈이 헛소문을 좋아하거나 벌써 술에 취했나 싶었다.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잘못 물어봤군.'

 "알겠소. 고마웠소."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 정도면 된 거 같소. 자. 한 잔 더 하시오."

 "으음. 뭐 그럴까..."

 툭!

 지나가던 무인이 선도광과 부딪쳤다. 선도광은 살짝 짜증이 났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벌컥 화를 내며 선도광에게 소리쳤다.

 "눈깔이 어디 달린 것이냐? 이 어르신의 옷자락이 더러워졌지 않으냐!"

 상대 무인은 얼굴이 벌겋고 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선도광은 바로 검을 뽑고 싶었지만 다시 한 번 참았다. 더 큰 일이 있는데 괜한 객기로 후환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출신이냐? 북쪽? 서쪽? 보아하니 촌구석 도관에서 올라온 도사 놈 같은데..."

 "나와라."

 선도광은 차갑게 내뱉었다. 사문에 대한 모욕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뭐라? 이 애송이가?"

 "밖으로 나와라. 여기서 베어버릴 수도 있으니."

 "건방진 놈이! 그렇게 지껄이면 겁먹을 줄 아느냐?"

 상대 무인은 코웃음을 쳤다. 점소이가 달려오더니 애걸복걸하며 외쳤다.

 "아이고,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그래, 나가서 싸워라!"

 "오늘 절세지존무공을 보겠구나! 어디 견식 좀 해보자!"

 객잔에 있던 무인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환호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다른 무인들의 대결은 자신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좋은 술안주였다.

 선도광은 상대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삼류 이하의 무인이었다. 저 정도면 숨겨진 한 수가 있어도 차이를 뒤집기 힘들었다.

 "윽!"

 아니나 다를까 싸움은 다섯 초도 펼쳐지기 전에 결판이 났다. 도가 문파에서는 삼재검법만큼이나 흔한 소청검(少淸劍)의 세 초식도 막지 못하고 상대 무인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계속 하겠느냐?"

 선도광은 안광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상대는 무릎을 꿇은 채 고통스러워하더니 입을 열었다.

 "잘... 잘못했소. 목숨만 살려주시오."

 "복창해라. 다시는 곤륜의 명예를 함부로 더러운 혓바닥에 담지 않겠다고."

 "다시는 곤륜의 명예를..."

 "여기입니다, 여기!"

 "?"

 아까 이야기를 나눴던 포쾌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구경꾼들이 우르르 비켜섰다. 외지에서 온 몇몇 무인들은 '내가 왜 비켜야 하나'싶어서 뻗댔는데, 대번에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감히 판관 어른의 앞을 막아?!"

 "이래서 밖에서 온 놈들은!"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판관 나으리시다!"

 고집을 부리던 무인들은 찔끔 놀라 길을 비켰다. 판관이 온 것도 놀라웠지만 한경 백성들이 대뜸 욕설을 퍼붓는 것도 만만찮게 놀라웠다.

 연우혁은 오 포쾌를 보며 물었다.

 "여기라고?" "예? 예... 그, 작은 소란이라도 빼놓지 말고 말하라고 하셔서... 저, 술 사서 마시지 않았습니다. 무림인이 저한테 마시라고 한 겁니다."

 괜히 찔렸는지 오 포쾌는 주절주절 변명했다.

 이번 용봉지회 동안 사소한 일이라고 지나친 탓에 중요한 단서를 놓칠까봐, 연우혁은 포쾌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소란이라도 보고해라'라고 말했다.

 오 포쾌도 그래서 객잔에서 벌어진 소란을 재빨리 보고한 것이었는데, 지금 보니 사소해도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벌써 싸움은 끝났고 무림인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괜히 말씀드렸나...?'

 이 정도면 그냥 자신의 선에서 잘랐어야 하나 하고 오 포쾌가 후회하고 있는 사이 연우혁이 입을 열었다.

 "잘 했다. 오 포쾌.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군."

 "감, 감사합니다!"

 오 포쾌는 감사해하면서도 왜 중요한 일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왜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객잔 주인이 뇌물이라도 바쳤나...? 아니, 안 받으실 텐데?'

 연우혁은 선도광을 불렀다. 눈앞의 무인이 진짜 진충비도 맞나 생각하던 선도광은 놀라서 움찔했다.

 "도인. 곤륜파 출신 맞소?"

 "...맞습니다. 그리고 별 일 아니었습니다. 저 자가 곤륜의 이름을 모욕했기에..."

 상대가 무림인이 아닌 판관의 신분으로 접근하자 선도광의 태도도 조심스러워졌다. 아무리 구파일방이라 하더라도 고작 이대제자가 관리한테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사실 중요한 일이오."

 "...?"

 판관의 말에 선도광은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사문을 모욕한 자를 죽이지도 않고 관용을 베풀어줬는데도 무림인이라고 뇌옥에 가둔다면 선도광 또한 곤륜파의 무인으로서 맞설 생각이었다.

 "분명 저 자가 곤륜의 이름을 모욕했다고..."

 "그건 들었소. 문제는 지금 당신 자리의 술에 독을 탄 자가 있다는 거요. 늦게 와서 누군지 찾기 힘드니, 술을 마시고 쓰러지는 척을 하시오. 그 때 슬쩍 빠져나가는 자가 바로 범인이오."

 "...?!?!?"

 선도광은 터무니없는 말에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지만 판관은 매우 진지했다.

 "지금 오셨지 않습니... 까? 그런데 어떻게 이걸 다..."

 "빨리 하시오. 상대가 의심하겠소."

 "..."

 태도에 압도된 선도광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도광이 자리로 걸어가는 사이 연우혁은 모인 구경꾼들에게 오늘 일은 끝났고, 한경에서 멋대로 싸움을 일으키면 중벌이 있을 거라고 신신당부했다.

 '독이 들었다고?'

 선도광은 반신반의하며 술잔을 홀짝이는 척을 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피를 토하는 시늉을 하며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크헉! ...저 놈!"

 놀랍게도 선도광은 정말로 사람들 사이에서 슬쩍 빠져나가려는 무인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도광은 벌떡 일어나 놈에게 덤벼들었다.

 "?!"

 도망치던 범인은 설마 독을 먹은 선도광이 벌떡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놈을 점혈한 뒤 선도광은 홱 고개를 돌렸다.

 젊은 판관도 아까 팔에 칼을 맞고 쓰러진 무인을 제압한 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선도광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설, 설마 이 자들이...?!"

 혈교 말고 본인을 습격할 자들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판관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용봉지회에서 당신 반대편에 은자를 건 자들이오."

 "..."

 선도광은 매우 머쓱해졌다.

110화

 용봉지회는 무림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그 실력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자리기도 했지만, 그 후기지수들에게 은자를 거는 사람들의 살벌한 자리기도 했다.

 곤륜파의 이름을 걸고 출전하는 선도광 같은 무인이라면 꽤 많은 은자가 걸려 있을 터.

 이렇게 교묘하게 암습해서 결과를 바꾸려는 자가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선도광은 자신이 방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곤륜의 울타리 밖에서 활동할 때에는 언제나 경계를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부끄러움을 느끼며 선도광은 젊은 판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고, 고맙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괜찮소. 이 자들은 어떻게 할 거요. 데리고 가시겠소?"

 "...?"

 판관의 질문에 선도광은 살짝 당황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보통 관리들은 무림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관이 해야 할 일을 멋대로 해버리는, 무식한 무부(武夫) 취급하는 게 현실이었다.

 판관의 경우도 비슷했다. 죄를 지은 자를 잡았으면 형옥에 가두고 엄하게 처벌한 뒤 장계를 올려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면 삼았지 무림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뭐가 아쉬워서 그런 배려를 해준단 말인가.

 심지어 이번 같은 일은 판관이 혼자서 잡아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선도광이 잡았어도 뺏는 게 보통인데 오히려 자기가 잡아놓고 데리고 가겠냐고 묻자, 선도광은 그 배려에 역으로 당황했다.

 "데리고 가도 되는 겁니까?"

 "한 번 이런 암습을 당했다면 두 번, 세 번째도 일어날 수 있소. 곤륜파라면 심문으로 충분히 뒷배나 동료들을 찾아낼 수 있겠지."

 연우혁은 안 그래도 한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런 잡범까지 심문해서 뒤를 쫓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장계에 올릴 공적은 저게 아니더라도 수없이 많았고, 저 잡범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만큼 내줘도 별 문제될 게 없는 상황.

 귀찮은 일은 곤륜파 무인들을 시키는 게 서로 편했다.

 "감... 감사합니다."

 선도광은 평소 관리들을 대할 때 드러내던 날카로운 태도를 버리고 감사 인사를 했다.

 제갈규에게 꽤 괴팍한 무인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말을 나눠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 그것도 판관의 자리에 앉아서 저렇게 아량을 베푸는 사람은 드물었다.

 게다가 주변에 있던 한경 백성들의 반응만 봐도 저 진충비도란 사람이 만민의 존경을 받는 관리라는 게 느껴졌다. 선도광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시간이 걸리는 질문이오?"

 "빨리 물어보겠습니다!"

 판관이 바빠 보이자 선도광은 다급하게 말했다. 연우혁은 고개를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술에 독을 탄 자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게 궁금했던 거였군. 당신에게 베인 자는 상처는 깊었으나 그 부위가 치명적이지 않았소. 그 자가 당신이 어느 문파 출신의 고수인지 미리 알고서 쓸데없는 발악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구파일방 출신의 무인이라면 쓸데없이 피를 보는 일이 적은 만큼, 먼저 시비를 걸었다 하더라도 대놓고 팔을 내밀면 그쪽을 제압하고 끝내주기 마련이었다.

 상대는 그걸 알았기에 한쪽 팔로 싸게 끝내려 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자는 당신의 눈치를 보며 겁먹은 척 해도 어딘가 기대하는 구석이 엿보였소. 그걸 보고서 다른 한패가 어딘가에 있겠구나 생각했지."

 "하, 하지만 그걸로 어떻게 술에 독이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선도광은 놀라워하면서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그 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상 쓸 수 있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겠소? 객잔 안쪽을 보니 탁자 위쪽이 술에 젖어 있고 접시는 흐트러져 있었는데 술병과 잔은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서있었소. 아마 독을 넣은 뒤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점소이가 치울지 몰라 둘을 세워놓은 거겠지."

 "...정말 놀랐습니다. 진충비도란 별호가 오히려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군요!"

 "별 거 아닌 재주요. 궁금한 건 다 풀렸소?"

 "예.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던 선도광은 문득 또 궁금해졌다.

 '내가 저 자들의 정체를 누구로 추측했는지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또 저 자들의 정체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고?'

 연우혁은 선도광이 '혹시 이 자들은 혈교의 첩자 아닌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젓고 정체를 밝혔었다.

 선도광은 진충비도가 어떻게 알아맞힌 건가 고민했다. 이것까지 물어보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렇군. 놈들은 같은 방식으로 손등에 입묵(入墨, 문신)을 하고 염왕채(閻王債)가 적힌 수결까지 갖고 있다. 혈교의 무인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 없지. 놈들은 흑도의 하루살이 같은 놈들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어떻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또 말이오?"

 가려던 연우혁은 다시 부르자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선도광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고견을 듣고 싶어서..."

 "물어보시오. 아는 거면 말해주겠소."

 "제 생각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저 자들이 첩자라고 생각한..."

 "팽 형이 말해줬소. 소협이 용봉지회를 어지럽히려는 첩자를 찾고 있다고."

 "..."

 생각보다 시시한 진실에 선도광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짧은 사이에 판관의 귀로 소문이 흘러갈 줄은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다.

 "그, 그런... 아니... 팽 공자는 왜..."

 "혹시라도 팽 형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시오. 맡은 한경의 일이 많아 조금이나마 도와주려고 그런 거니."

 "알, 알고 있습니다."

 선도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하긴 했지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다른 무인이면 모를까 지금 눈앞의 판관은 용봉지회에 숨은 혈교의 첩자들을 잡아낼 자격이 넘치고도 남았던 것이다.

 "대인. 부탁이 있습니다!"

 "질문이 끝난 게 아니었소?"

 "저도 대인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예상 밖의 말에 연우혁은 의아하다는 듯이 선도광을 쳐다보았다.

 "첩자 일을 말하는 거면, 따로 찾는 게 나을 수도 있소.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그 일에만 주목할 순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대인의 일을 돕고 한 번 배워보고 싶을 뿐입니다!"

 선도광이 원래 쉽게 허리를 굽히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방금 젊은 판관이 보여준 재주는 선도광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늘 위에는 언제나 하늘이 있구나!'

 질시나 적대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따라다니면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감탄한 것이다.

 "괜찮긴 한데... 뭐, 그러시오."

 연우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곤륜파와 인연을 쌓아서 나쁠 것도 없을 뿐더러 부릴 무인이 있으면 언제나 더 편했으니까.

 객잔을 나서는 연우혁의 뒤를 쫓으며 선도광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동창 무인들을 만나러 가오."

 "...예?"

 판관의 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말에 선도광은 귀를 의심했다.

*   *   *

 제갈규는 앉아서 연우혁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내가 너무 옹졸했던 것일까?'

 곤륜파의 선도광은 제갈규가 이름을 들었을 만큼 뛰어난 기재였다. 인근에서 협행을 하며 해결한 문제들만 여럿이었으니 분명 능력은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성격이 불의(不義)를 보고 넘기지 못할 만큼 괄괄하고 고집이 세단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저 정도 결점 때문에 같이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무림에서 같이 돌아다닐 상대가 없었다.

 제갈규가 거절한 이유는 좀 더 솔직한 부분에 있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구파일방의 무인이 보면 나를 멍청한 놈으로 알 것 아닌가!'

 제갈규는 다른 제갈세가 무인들과 비교한다면 자신의 두뇌에 나름 겸손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자부심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제갈세가 출신으로서 지략에 자부심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우혁은 그런 제갈규를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만약 선도광이 옆에서 함께한다면 분명 이런 생각을 할 터였다.

 -제갈규란 놈은 명성만 그럴듯하지 아무것도 하는 게 없구나!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다. 제갈규가 멍청한 게 아니라 연우혁이 비정상적으로 영리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강호 사람들이 그런 변명을 이해해줄 리 없었고, 제갈규는 결국 선도광을 돌려보냈다. 자신의 부족함을 정말 외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찜찜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갈규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을 해도 좀 더 잘 하지, 하필 연우혁이 괴팍하다는 핑계를 대다니.

 "판관 어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 고맙다. 지금 가도록 하지."

 하인의 말에 제갈규는 연우혁을 맞이하러 일어났다.

 그런데 돌아온 연우혁 뒤에는 낯익은 무인이 한 명 더 추가되어 있었다.

 "...무,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잘 부탁드리겠소. 제갈 공자! 진충비도의 일을 옆에서 보고 배우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더니 허락해주셨소."

 "..."

 제갈규는 선도광의 행동력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물러날 줄 알았는데 저렇게 행동할 줄이야!

 "잘... 잘 됐소."

 "진충비도도 그렇지만, 공자의 일 또한 배워보고 싶소."

 "내게 배울 건 별로 없는데..."

 "아니오. 분명히 있을 것이오."

 선도광은 저번 만남보다 더 존중의 뜻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진충비도 같은 무인과 같이 일을 해결할 정도면 제갈규 또한 그에 버금가는 재주가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의 저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그 눈빛의 뜻을 대충 짐작한 제갈규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소...?"

 "참. 제갈 공자. 진충비도는 그렇게 괴팍하지 않던데."

 "내가 그런 말을 했소? 기억이 잘..."

 "?!"

 둘이 대화를 하는 사이 연우혁은 주 공공을 뵈러 갈 준비를 했다.

 혈교의 첩보를 들은 이상 당연히 주 공공에게도 보고를 해야 했던 것이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는지 선도광은 중얼거렸다.

 "관의 관리들은 보통 동창 환관들과 엮이기 싫어해서 그 그림자만 봐도 도망을 간다던데, 진충비도는 놀랍소. 동창과 같이 일을 하다니."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아니지만 실력은 확실하니."

 "그렇긴 하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오. 진충비도가 뛰어난 사람이란 건 알겠지만, 환관들과 어울려서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는 것도 사실이잖소. 무림인은 관과 가까워져서 좋을 게 없소."

 선도광은 구파의 무인답게 '관'자가 들어간 거라면 불신감부터 물씬 드러냈다.

 "이러다가 금의위도 엮이는 거 아니겠소."

 "금의위는 아까 보고를 보냈소만. 들어보니 그쪽 교위한테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연락을 보냈다는군."

 "..."

 제갈규의 말에 선도광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대체 이 판관은 인맥이 얼마나 넓단 말인가?!

*   *   *

 "...그렇게 해서 무림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지부 대인의 궁전 같은 저택에 도착한 연우혁은 별채로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평소 호화롭고 방탕하게 지내는 지부도 자기 저택에서 동창 환관들이 머무를 때는 등골이 서늘했는지 저택이 조용했다.

 주 공공은 연우혁의 보고를 흥미롭게 듣고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무림인들이 좋은 미끼가 되겠구나. 혈교의 무리들이 이쪽을 노리고 있다니."

 "예."

 "금의위 놈들에게도 말해준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 자들이 아예 듣지도 못한다면 괜히 성가시게 굴 테니까..."

 주 공공은 금의위들도 혈교의 무리가 용봉지회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들어봤자 그 자들의 재주로는 해결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혈교의 무리들은 보통 교활하고 끈질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용봉지회 같은 정파의 소굴에서 벌이는 일이라면 몇 배는 그럴 터였다.

 이런 자들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주 공공의 앞에 있는 사람이 그 드문 기재 중 하나였다.

 "무림인들의 힘을 굳이 빌려야 하나?"

 "송구스럽습니다만, 아무래도 한경 곳곳을 수소문해야 하는 일인 만큼 동창의 중관보다는 거친 무림인들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긴 하겠구나."

 주 공공도 한경 곳곳을 들쑤실 때 환관보다는 이름 있는 문파 출신 무인이 편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다른 중관들은 제외하고, 나 혼자라도..."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공공께서 흥미로워하실 만한 정보를 갖고 오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

111화

 잠깐 침묵이 이어지더니 주 공공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물 때문에 영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한심하다는 감정이 짙게 느껴졌다.

 "나도 함께하겠다. 판관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직접 보고 들어야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니."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연우혁은 의아해했다.

 기본적으로 환관, 그것도 높은 지위의 환관들은 무림인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 공공 정도 되는 지위라면 느긋하게 앉아서 부하들을 부려도 될 텐데 직접 나서려고 하다니.

 "귀관도 판관의 자리에 올랐으면서 왜 직접 돌아다니려 하지? 국사에 힘쓰는 자라면 지위가 높다고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되는 법이거늘."

 "과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연우혁은 주 공공의 말에 살짝 감동했다. 높은 자리에 앉은 관리로서는 당연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저런 관리는 보기 드물었다.

 당장 한경의 모 지부만 해도 용봉지회를 맞아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출신 손님들을 맞아 축연은 매일 같이 열어대고 있었지만 그걸 일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궁 판관이나 금 통판이 찾아가서 넌지시 권할 정도였다.

 -그, 조금 관무를 신경 쓰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네, 괜찮아. 자네들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자네들은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인 것 같네. 자. 한 잔 하게나.

 -...지부 어른. 과전불납리(瓜田不納履)에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밭에서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치지 말라)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기인지우(杞人之憂)란 말도 있네.

 -아시다시피 무림인들의 용봉지회라면 금의위나 동창도 관심을 가질 터인데...

 -괜찮네. 괜찮아. 연 판관은 금의위의 일을 도운 적이 있지 않나. 또, 동창의 일도 도운 적이 있지! 그것도 두 번이나. 그 정도면 총애를 받고 있지 않겠나?

 -...

 궁 판관이나 금 통판 모두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금의위든 동창이든 일 한 번 도와줬다고 좋게 봐줄 만큼 너그럽고 인심 좋은 조직이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부 어른도 설득이 통할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고, 결국 궁 판관은 돌아와서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한가 같으니! 그 놈이 국문을 받으면 나도 받는 것인데!

 -실로 안타깝습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네 녀석이 금의위의 총애를 받고 동창의 총애를 받을 테니 별 문제 없을 거라는구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그러니까 말이다!

 이런 관리들만 봐온 입장에서 주 공공의 적극성은 꽤 감명 깊은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봐온 주 공공은 뇌물도 별로 탐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새삼 대단한 사람이군.'

 동창의 높은 자리에, 능력도 뛰어나고, 청백리라니. 이런 소수의 인재가 있기에 조정이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참. 공공께서는 어떻게 위장하실 생각이십니까?"

 "규수로 위장하는 게 좋겠구나. 용봉지회가 머지않았으니 구경 나온 이들이 많을 터. 신분을 숨기기 좋겠지."

 "과연. 원하신다면 포쾌로 위장하셔도 좋습니다. 목소리나 말투는 벙어리라고 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흐음... 아니다. 규수가 낫겠구나."

 고민하던 주 공공은 포쾌로 위장하는 걸 거절했다. 아무래도 신분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괜히 포쾌로 위장해서 곤욕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대답을 들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제 벗들이 모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혹시 여장을 좋아하시는 건가?'

 포쾌라는 편한 위장이 있는데 규수로 여장을 고집하는 걸 보면, 혹시 여장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주 공공 본인이 환관인 만큼 그런 쪽에 친숙할 가능성도 높았고.

 '배려해드려야겠군.'

 주 공공만큼 뛰어난 관리라면 여장이 아니라 허 중관처럼 하물을 절단하고 다녀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연우혁은 뛰어난 상관을 존중하는 만큼 취향 또한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   *   *

 "동창의 당두라니...!"

 "공공께서는 뛰어난 분이니 분명 도움이 될 걸세."

 연우혁은 놀라워하는 선도광에게 설명했다. 무림인들 중 동창을 두려워하거나 꺼림칙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은 만큼, 괜한 무례를 저지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진충비도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틀림없을 겁니다. 자, 무엇부터 하실 겁니까?"

 선도광은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번쩍이는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한경 외곽을 순찰할 걸세. 공공께서 직접 둘러보고 싶어하시더군. 안에서 소문을 듣는 것도 좋지만 결국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

 연우혁은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포쾌들까지 동원해서 한경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용봉지회로 인해 한경 안은 물론이고 밖에도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거지나 부랑자처럼 보이는 이들도 제법 됐다.

 사실 가난한 무림인들이 먼 길을 여행하게 되면 거지나 부랑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긴 했지만, 저들 중에는 사람들의 전낭을 노리거나 한경에서 무언가를 훔치려는 이들도 분명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포쾌들은 긴장 섞인 시선을 던졌다.

 "제갈 공자. 저 자들을 보십시오."

 선도광은 산길 아래 공터에 자리 잡고 있는 무림인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곤륜파의 젊은 무인이 보내는 눈빛에 옆에 있던 제갈규는 괜히 부담 가는 걸 느꼈다.

 같이 움직이기로 결정내린 뒤, 제갈규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선도광은 그보다 나이 많은 제갈규를 형으로 대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원래라면 문제될 게 없었지만 선도광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아는 제갈규 입장에서는 부담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 곤륜파의 젊은 무인이 왜 제갈규를 저렇게 존중하겠는가.

 아마 진충비도와 맞먹는 재주를 보여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어서가 분명했다.

 "...보이는군. 선 소협은 왜 그러시오?"

 "저 자들이 조금 수상하지 않습니까?"

 "으음!"

 제갈규는 선도광의 말을 듣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확실히 공터에 앉아 있는 저 무림인들은 조금 수상한 점이 있었다.

 행색이나 복색은 부랑자처럼 초라했는데 차고 있는 검은 잘 갈무리되어 있어서 칼집에도 진흙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물론 오는 동안 꼴이 엉망이 된 걸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숫자가 신경이 쓰였다.

 저렇게 모여 다닐 정도의 무림인이라면 어느 정도 권세가 있을 텐데 저런 꼴이라니.

 "확실히 이상한 것 같소."

 "고견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공자?"

 "저들의 행색은 앞뒤가 맞지 않소. 복색은 너무 초라한데 병장기는 좋지. 게다가 저런 자들이 저렇게 모여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소."

 "과연, 무리의 숫자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선도광의 대답에 제갈규는 들키지 않게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체면치레는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내 생각에는 사파 출신의 무림인이나 낭인들 같소. 용봉지회 기간 동안 칼 든 낭인을 찾는 곳도 많으니 저렇게 일확천금을 찾아올 수도 있겠지."

 "저희가 찾는 첩자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의 첩자는 의심 받지 않을 자로 위장하고 숨어있지, 저런 식으로 공터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요. 당장 의심 받기 좋지 않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선도광은 제갈규와 의견이 일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의 첩자라면 저런 식으로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인. 저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견을 갈무리한 선도광이 질문을 하자 연우혁이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연우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주 공공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저들의 정체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들은 사파 무인처럼 위장한 개방도다. 아마 정보를 캐기 위해 나왔나보군."

 연우혁의 대답에 주 공공은 동의한다는 듯이 첨언했다.

 "잘 변장했지만 검의 매듭고리가 반대로 묶여있구나. 또, 주먹이 발달했는데 저건 권법의 달인이다. 굳이 검을 들고 다닐 이유가 없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파 무인인 척 변장해서 정보를 캐려고 하는 거겠지요. 아무래도 같은 낭인이면 입이 가벼워지니 말입니다."

 "개방도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구나. 무슨 연유로 알아차린 것이냐?"

 "저 중에 아는 얼굴이 보였습니다. 역용술을 썼지만 알아볼 수 있더군요."

 "이런!"

 둘의 대화를 듣던 선도광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 생각은 못했습니다.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나야 개방도들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 알아차린 거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제갈 공자도 저와 같이 판단했습니다만."

 "..."

 연우혁은 상대가 제갈규를 끌고 오자 살짝 당황했다. 설마 제갈규도 틀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누구나 틀릴 수 있는 일이지. 한 번 틀렸다고 해서 그리 마음을 쓰면 안 되오.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일이니. 진정 지혜롭기 위해서는 대범하게 마음을 써야 하오!"

 "과연...!"

 선도광은 젊은 판관의 조언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 판관과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꼈다. 곤륜파와 곤륜산 근처에만 머물며 경험했던 것이 강호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심하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시오."

 연우혁은 선도광을 격려해줬다. 곤륜파 출신 무인인 만큼, 돌아가서 진충비도 칭찬을 하게 만드는 것도 제법 쏠쏠한 일일 터였다.

 그 격려 덕분인지 선도광은 순찰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저 자들이 다투고 있습니다! 청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상단의 짐을 훔쳤다는데, 제갈 형. 중재에 나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 소협은 누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시오?"

 "청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수상합니다. 저들의 위치를 보면 저건 육합검진의 진법. 적을 포위해서 노리는 진법인데 저런 무인들의 실력으로는 금세 펼치기가 힘듭니다."

 "음. 일리가 있소! 저 무인들의 수준으로 육합검진을 빨리 펼치는 건 힘들었을 거요. 아마 상단의 짐을 뺏은 뒤 진법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겠지."

 연우혁은 살짝 미안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저건 육합검진이 아니라 팔괘망절진이고, 적을 포위해서 노리는 진법이 아니라 공격을 막는 진법이오. 저 상단 무인들은 짐을 도둑맞았다고 하지만 행색에 곤궁함 하나 없으니, 저들은 도둑맞은 게 아니라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자들일 거요."

 "..."

 "..."

 이런 일들이 몇 번 더 반복되자(그 중에는 강물을 잘못 마셔 복통으로 쓰러진 줄 알았지만 십년지기 친우가 독을 먹인 무인과 보름 가까이 수상한 서찰을 받은 도사들도 있었다) 주 공공은 슬슬 무림인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기에 눈빛이 보이지 않아 망정이었지, 만약 눈빛이 보였다면 선도광과 제갈규는 수치심에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 공공을 제외하더라도 둘의 부끄러움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 연우혁은 물론이고 포쾌들도 옆에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포쾌들은 하늘 같은 무림인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그게 역으로 둘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선 소협. 사실 말할 게 있소."

 제갈규는 더 이상 수치스럽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열었다. 선도광은 침울한 눈빛으로 저 먼 산 너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사실 진충비도만큼 뛰어나지 못하오. 이번에 첩자를 찾기 위해 같이 움직인다고 했을 때, 사실 내 부족한 재주가 발각날까봐 그렇게 말한 것이었소."

 "...!"

 선도광은 놀란 눈으로 제갈규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자신처럼 하나도 못 맞춘다 했더니 저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제갈세가의 이름을 등에 업은 사람이... 부끄러울 뿐이오."

 "아닙니다. 제갈 공자!"

 자책하는 제갈규의 모습에 선도광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 또한 내 재주가 별 것 아니란 걸 새삼 느꼈습니다. 문파에 있었더라면 아마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모자람을 알았다면 정진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선 소협... 선 소협은 나보다 훨씬 나은 무인이로군!"

 "제갈 공자야말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분 아니겠습니까!"

 나름 자기 문파에서 지모(智謀)로 자신 있었던 둘은 부끄러움을 떨쳐버리고 의기투합했다.

 부족함을 느꼈다면 다시 정진하면 될 뿐!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주 공공은 연우혁을 불러서 물었다.

 "저 자들이 정말 꼭 필요한 것인가?"

 "...순, 순찰에 의욕이 넘쳐서 그렇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무인들을 상대할 때면 도움이 될 겁니다."

112화

 생각했던 것보다 둘이 멍청하게 행동하자 연우혁도 살짝 당황한 상태였다.

 저렇게 다 빗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다. 저건 운이 나쁜 거다.'

 연우혁이야 정답을 알고 있고 영안이 있는 만큼 십 할의 정답률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저 둘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능력 하나 없이 스스로의 지혜만으로 저 정도 추측을 하는 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틀리긴 했지만.

 주 공공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책망하진 않았다. 대신 나지막하게 혀를 한 번 차고는 중얼거렸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상대할 때 데리고 올 걸 그랬구나!"

 "곧 능력을 보여줄 겁니다. ...아마도."

 "귀관이 이렇게 자신감 없이 말하는 건 처음 같은데? 여하튼, 저들에게 돌아오라고 전하거라. 오늘은 이 정도 돌았으면 된 것 같으니."

 "예."

 연우혁도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순찰 한 번에 이렇게 문제를 여럿 해결하는 것도 꽤 드문 일이었다. 연우혁이 만난 자리에서 바로 해결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는 중요치 않은 일이라 미루고 지나갔을 터였다.

 "두 분께서는 슬슬 돌아오시오!"

 다시 의기충천해서 인근 언덕 위로 달려가 있던 둘은 연우혁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화답하지 않고 속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연우혁은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그러나 그런 의아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둘은 금세 돌아왔다.

 "대인.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그렇소. 이 정도면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편이니."

 연우혁의 말에 둘도 동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단 무인으로 위장하고서 남에게 누명을 씌운 도적들부터 시작해서, 십년지기 친우가 독을 먹인 무인과 보름 가까이 수상한 서찰을 받은 도사 등등이 있었지만 무림에서 이 정도는 사소한 다툼에 불과했다.

 대규모 혈사가 일어나거나 거대문파끼리의 싸움이 없는 것만으로도 용봉지회 직전치고는 평화로운 셈이었다.

 '그런데...?'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둘을 확인했다. 둘의 감정에서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불편함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고민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아직 덜 친한 선도광보다는 제갈규가 편했다. 연우혁은 제갈규를 따로 불러낸 뒤 친근하게 물었다.

 "규 형. 무슨 일 있었습니까?"

 "으음, 그게, 별 일 아니었네."

 "별 일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언제나 규 형의 고견을 듣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제갈규는 연우혁의 말에 살짝 솔깃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호인들이야 지모로 이름 높은 무림명사들이면 다 대단한 줄 알았지만, 제갈세가 출신인 제갈규는 눈앞의 동생이 얼마나 똑똑한지 아주 잘 느끼고 있었다.

 본인이야 제갈세가 출신이기라도 하지, 두뇌 하나만으로 포쾌에서 판관으로 출세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지혜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는 제갈세가 사람들은 많았지만, 제갈규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연우혁처럼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예. 규 형이 아니었다면 산채의 일은 어떻게 해결했을 것이고 정 소저는 어떻게 찾았겠습니까?"

 "그런... 잠깐. 둘 다 자네가 다 알아서 한 일이잖나?"

 제갈규는 생각보다 똑똑했다. 연우혁은 아차 싶어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까 올라갔던 언덕 나무 아래에서 검 한 자루를 찾았는데, 말하려다가 너무 사소한 것 같아서 넘어가려고 했지."

 "!"

 선도광과 제갈규는 올라간 언덕 나무 아래에서 떨어진 검 한 자루를 찾았다. 검집을 감싼 가죽끈이 삭지 않은 걸 보니 떨어뜨린 지 그렇게 오래 된 검은 아니었다.

 -이 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갈 공자? 검을 잃어버릴 곳 같지는 않습니다만.

 -확실히 그렇소.

 -혹시 연유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요?

 -으음. 쉬다가 검을 두고 갈 무인은 없을 테고, 또, 짐더미를 놓기에도 적당한 곳은 아닌데, 혹시 어떤 비표일지도...

 -그렇다면 내려가서 말합시다!

 -...잠깐. 기다리시오. 선 소협.

 -??

 -우리가 오늘 부족함을 느꼈던 건, 우리가 우리의 재주에 비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아무 증좌도 없이 주장하면 안 되오.

 오늘 겪은 일들로, 제갈규는 반성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제까지 해결해왔던 일들이 사실 세가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한 게 아니었나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었지만 제갈세가란 이름을 보고 참은 것이었다면?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비웃을 게 아니었다. 정작 본인이 호해(胡亥)였던 꼴 아닌가.

 -으음!

 그 말이 통렬했는지 선도광도 신음성을 흘렸다.

 자신이 이제까지 협행을 벌이며 해결해왔던 일들이 사실 곤륜파의 이름을 보고 넘어가 준 거였다면?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공자께서도 군자는 눌언민행(訥言敏行, 말은 느리더라도 행동은 빠르다)라고 하셨지요. 내뱉고 우기기보다는 깊게 곱씹겠습니다.

 -나 또한 동의하오!

 그렇게 반성한 둘은 앞으로 주장부터 던진 뒤 아랫사람을 시켜서 검증하는 대신, 진충비도처럼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된 걸ㅅ..."

 제갈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혁은 경공을 펼쳐서 언덕 위로 달려가 떨어진 검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돌아와 외쳤다.

 "금의위 무인들이 혈교의 함정에 걸린 것 같습니다! 주 공공, 지금 동창의 무인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만일을 대비해 한경에 영반(領班) 두 명을 대기시켜놓았다."

 동창 영반과 그들이 이끄는 무인들이라면 구파일방의 검대(劍隊)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전력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그만한 무인들을 한경에 따로 배치해놨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연우혁은 물었다.

 "그들을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도록 하거라. 놈들의 위치는 쫓을 수 있느냐?"

 "예."

 "그렇다면 쫓아라! 따라가겠다."

 연우혁은 무인들이 오기 전에 쫓아도 되겠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주 공공 정도 되는 사람이 그걸 생각 못 했을 리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주 공공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젊은 판관은 쓸데없이 충성심을 자랑하려는 부하들과 달라서 편했다. 할 필요 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다.

 제갈규와 선도광도 연우혁의 뒤를 쫓아 경공을 펼쳤다. 급박한 상황인데도 둘의 머릿속은 혈교가 아닌 다른 일로 가득했다.

 증좌가 없으면 침착하게 기다렸어야 했던 게 아니었나?

 그냥 지혜의 차이였을지도...

*   *   *

 금의위, 하 교위는 동굴 입구를 막아선 혈교 무인들을 노려보았다.

 "...놀랍군. 이렇게 일을 벌일 줄이야. 뒷감당이 두렵지 않나?"

 교위를 따라온 금의위 무인들은 동감의 뜻을 표했다.

 용봉지회를 앞두고 수상한 정황을 들어 탐문을 하긴 했지만, 하 교위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혈교의 무리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함정을 파고 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금의위 무인들이 무슨 촌구석의 표사도 아니고 이들이 전멸하는 혈사가 벌어졌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 용봉지회에서 꾸미던 음계가 있는 혈교 입장에서 이런 혈사는 타산이 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황실이 분노해 금의위의 혈채를 받아내야겠다는 명령이 떨어지면 정파무림은 대대적인 척살령과 토벌령을 내려 의심스러운 분타들을 쓸어버리고 정사지간의 문파들을 제압하게 되니, 용봉지회에서 꾸미던 음계가 무엇이든 간에 물거품이 되기 마련이었다.

 정파무림의 체면에 먹칠 한 번 하고 금의위 무인 조금 죽이는 것치고는 너무 값비싼 대가 아닌가?

 "궁금한 것도 많군. 교위. 곧 죽을 목숨인데 그런 게 궁금한가? 혹시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궁금하진 않나?"

 "그런 게 궁금하군. 말해주면 경청하겠네."

 "하!"

 혈교 무인들을 이끄는 고수는 한 번 비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 벼슬아치 놈들은 우리 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 그 위대한 성의(聖意)를 어떻게 알겠나?"

 "..."

 마교가 멸문한 뒤 그 중 흘러나온 타락한 명교 분파 몇몇과 배교 내부에서 쪼개져 나온 배화교 광신도들이 모여서 세운 잡탕 사교도가 혈교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 교위는 꾹 참았다.

 받아들인 수많은 교리 중 강자지존만을 남긴 이 사교도 무리들의 자존심을 건드려봤자 괜한 반응만 나올 터.

 "우리 교 또한 너희 벼슬아치 놈들처럼 뜻이 다른 자들이 안에 있는 법이다."

 "내부... 내부 세력 다툼을 말하는 건가?"

 하 교위의 말에 혈교의 고수는 선선히 인정했다.

 "그래. 어느 순간부터 교는 지나치게 장로들의 뜻에 좌지우지됐지. 그놈의 혈뇌들 말이다! 아직 적의 세력이 강대하니 권토중래를 기다려야 한다, 섣부른 행동은 안 된다, 이놈들이 교의 장로인지 정파 놈들의 첩자인지 알 수가 없더군."

 '과연.'

 하 교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확실히 혈교 내에도 정쟁이 있는 모양이었다.

 혈뇌의 별호를 갖고 있는 장로들이 포함된 주화파(이걸 정파 입장에서 평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와 반란과 혈사를 일으켜서 즉각적인 싸움을 추구하는 주전파.

 그리고 눈앞의 혈교 고수는 주전파에 속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 용봉지회를 앞두고 이런 습격을 벌이는 이유도 설명이 됐다.

 어차피 혈교의 계략이란 것도 자기 파벌이 세운 계획이 아니었으니까!

 혈교 고수는 오로지 커다란 싸움을 만들고 그 와중에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모양이었다.

 혈교의 마공이란 게 수많은 인신공양과 핏물을 대가로 하는 만큼 몇몇 호전적인 고수들이 반란을 원하는 것도 당연히...

 "자. 이 어르신이 설명해줬으니 네놈도 대가를 내놓아라."

 "그게 뭐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그러면 고통스럽게 죽이진 않으마. 네놈들에게도 좋은 거래일 텐데."

 "그럴 순 없겠군."

 교위의 거절에 혈교 고수의 기세가 갑자기 살벌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래도 침착하게 말했던 목소리가 짐승처럼 변하더니 으르렁거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은혜를 베풀어줬더니 감히 기어올라?"

 "다들 침착해라. 놈은 마공을 익혀 감정이 불안정하다."

 상관의 말에 무인들이 농을 내뱉었다.

 "자기 부하를 죽이진 않겠습니까?"

 "조금 더 자극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저 자를 상대할 테니,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게. 만약 나간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나가고."

 "저희가 저 놈을 상대하겠으니 교위님께서 나가시지요. 경공이 가장 뛰어난 건 교위님 아닙니까."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자가 상대해야지."

 "그만 떠들어라, 쥐새끼들아!"

 혈교 고수는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핏빛 안광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상대가 절정의 경지, 그것도 초입을 능히 넘은 고수라는 걸 아는 만큼 하 교위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곤(坤)!"

 금의위 무인들은 진법을 갖추며 맞섰다. 혈교 고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법에 달려들어 조법(爪法)을 펼쳤다. 길쭉한 손가락이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변해 이리 할퀴고 저리 할퀴었다.

 "진(震)!"

 "그렇게 막아봤자 이 어르신 앞에서는 먹잇감일 뿐이다!"

 혈교 고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하 교위는 상대의 무공이 초식을 거듭할수록 그 위력이 강해진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런 고수를 상대할 때 이런 수비적인 진법은 오히려 자승자박인 것이다.

 "흔들리지 마라. 놈의 내공도 빠르게 소모될 테니."

 혈교 고수는 잠깐 뒤로 물러나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옆의 부하 한 명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부하의 몸이 순식간에 목내이(木乃伊, 미라)로 변하더니 고수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자, 더 버텨봐라! 삼초를 버티면 한 놈은 깔끔하게 죽여주마!"

 "곧 지원이 올 거다. 놈의 빈틈이 생길 때까지 인내해라!"

 금의위 교위의 말에 혈교 고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네놈들의 흔적은 내 혈견대가 깨끗이 지워버렸는데 어느 놈이 찾아온단 말이냐?"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란 말도 모른단 말인가?"

 "결심했다. 네놈의 혀는 따로 뽑아서 잘 말려주마. 들어라, 쥐새끼들아! 여기 찾아오는 놈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탐혈광랑이 아니라 탐혈광견이다! 알겠느냐?"

 "저기 혈교 마두 놈들이 있습니다! 저쪽입니다!"

 "..."

 "..."

113화

 탐혈광견, 아니 탐혈광랑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 밑의 혈견대 무인들도 마찬가지로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혹독하게 훈련 받은 혈교의 무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방심이었다.

 "불가능합니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 놈들은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냐?"

 "그건..."

 말을 꺼낸 혈견대 무인은 탐혈광랑의 눈빛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나불거린 것이다.

 탐혈광랑의 눈빛에서 살기가 폭사되더니 그대로 손가락이 갈퀴처럼 휘둘러졌다.

 주인의 심기를 읽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는 죄로, 혈견대 무인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제법 재주가 있는 놈이군."

 탐혈광랑은 하 교위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눈앞의 금의위 교위 놈에게 한 수가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손수 키운 혈견대 무인들의 감시를 뚫고 흔적을 남기다니.

 덕분에 랑(狼)이 아닌, 부하들에게나 어울리는 견(犬)의 별호를 스스로 자처한 꼴이 되었다.

 "어떻게 흔적을 남긴 것이냐? 추종향? 비표?"

 "..."

 하 교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교위 본인도 다른 무인들이 이곳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침묵을 다르게 생각했는지 탐혈광랑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곧 뒤질 놈이 혓바닥은 납덩이처럼 무겁구나. 고통 없이 편하게 죽고 싶지 않나?"

 "탐혈광견 당신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금의위 교위가 빙그레 웃으며 조롱하자 탐혈광랑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가락 끝에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더니 짐승의 발톱마냥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지원이 오기 전에 끝장을 보겠다는 살벌한 의도가 느껴졌다.

 "멈춰라, 마두 놈들아!"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진 목소리가 들렸다. 탐혈광랑은 턱 끝으로 혈견대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동굴 안의 적들을 해치우는 동안 막고 있으란 뜻이었다.

 "탐혈광랑. 멈춰라!"

 이제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외치는 소리에 탐혈광랑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다.

 "멈추라고 하면 이 어르신께서 멈춰줘야 한단 말이냐?"

 "그래, 삼 년 전 네놈을 암습한 혈교 장로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다면 멈추지 마라!"

 "...?!!"

 처음 보는 놈이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대뜸 외치자 탐혈광랑의 눈빛이 크게 떠졌다.

*   *   *

 "혈견대, 그렇다면 저 놈은... 탐혈광랑! 저 마두가 여기에 있었다니!"

 혈견대를 알아본 선도광의 다급한 외침에 연우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탐혈광랑은 연우혁도 들어본 적 있는 혈교의 마두 중 하나였다. 최소한 절정 중입 이상의 경지인 만큼 예전에 상대했던 적면혈뇌나 옥면살검 같은 마두하고는 급이 달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아니. 정말 뭘 믿고 이러시는 거지?'

 연우혁은 주 공공의 호언장담에 당황했다.

 물론 상대가 갖고 있는 보물 때문에 영안으로 정확한 확인은 힘들었지만 주 공공의 경지가 연우혁보다 크게 높지는 않았다. 높게 잡아줘도 절정의 경지 미만일 터였다.

 내공은 확실히 대단했지만, 자신보다 몇 단계 위의 고수를 상대할 때는 내공이 많다는 것만으로 이길 수 없었다. 높은 경지의 고수는 한 줌의 내공만으로도 전신 세맥에 진기를 정확히 흘려보내 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저번처럼 휘하의 동창 무인들도 없는 상황 아닌가. 연우혁과 선도광, 제갈규가 전부였다.

 주 공공도 분명히 알 텐데 저런 자신감이라니.

 '...믿기로 한 이상 믿는다.'

 연우혁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주 공공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수가 없다면 다 같이 죽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연우혁이 할 수 있는 건?

 '탐혈광랑, 혈견대를 이끄는 혈교의 고수. 조법에 능하고. 호전적이고 난폭한 성격에, 피를 사용한 마공을 익혔다. 내가 놈에 대해 아는 건... 잠깐. 혈견대주면 혹시 그 사건의 당사자인가? 검으로 금의위를 찾은 사건과 시간 차이가 대충...'

 상대를 어떻게 도발할지 고민하던 연우혁은 기억 속에서 사건을 떠올린 뒤 외쳤다.

 "탐혈광랑. 멈춰라!"

 "멈추라고 하면 이 어르신께서 멈춰줘야 한단 말이냐?"

 "그래, 삼 년 전 네놈을 암습한 혈교 장로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다면 멈추지 마라!"

 "...?!!"

 '통했나!'

 상대의 반응을 보자마자 연우혁은 자신이 제대로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전에 연우혁이 해결한 사건들 중에는 혈교와 관련된 일들도 있었던 것이다.

 "네놈이... 네놈이 어떻게?"

 탐혈광랑은 정말 놀랐는지 손끝에 맺힌 붉은 기운을 흩어버리고 공격을 멈췄다.

 삼 년 전에 혈교 내부에 있던 탐혈광랑을 암습한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절정의 고수인 탐혈광랑을 죽일 뻔한, 실로 지독한 흉계였었다.

 이런 계략을 꾸밀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연히 혈교 장로 중 하나일 터였고, 그 중에서도 혈뇌의 별호를 가진 책사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사건건 탐혈광랑과 충돌하는 앙숙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탐혈광랑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암습을 벌인 무리들의 정체를 찾고 있었다.

 정체만 잡아낸다면 그걸 빌미로 혈교 내부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놀랐나보군."

 "...하. 속을 뻔했군. 첩자 놈에게 들은 건가?"

 아무리 피에 미친, 마공을 익힌 고수라 하더라도 탐혈광랑이 이지(理智)가 없진 않았다.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서 침착을 되찾았다.

 혈교가 다른 문파나 관아에 첩자를 심어놓듯이 금의위 또한 혈교 내부에 첩자를 심어놨을 터.

 그렇다면 누군가 탐혈광랑을 암습했다는 소문을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첩자 정도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소문이었다.

 그걸 저렇게 이용해서 아는 척을 할 줄이야.

 제법 교활한 놈이었다.

 "말재간이 제법이구나. 다른 놈이었다면 속았을 거다. 하지만 이 어르신을 속일 수는 없지. 소문을 듣고 아는 척을 한다고 통할 줄 아느냐?"

 "믿기 싫으면 마라. 네 손해지. 난 홍혈지독(紅血之毒)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다. 혹시 그 날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눈앞이 붉게 가려지지 않았나? 이것도 첩자가 알 만한 소문인가?"

 "...?!!!!"

 탐혈광랑은 자신이 암습 때 당한 독을 정확히 맞히는 젊은 놈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건 탐혈광랑 본인과 습격자들을 제외하면 알 수 없는 정보였던 것이다.

 의심 많은 무인인 탐혈광랑은 부하들도 믿지 않았고, 암습 이후에도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밝히지 않았다.

 스스로 독을 조사했고, 해독 때 재료를 구해 온 부하들은 모조리 죽여서 비밀을 지켰는데...

 저 놈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실 네가 냉정히 생각했으면 진작 맞혔을 일이지. 그 날 주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봐라."

 "주연에서 있었던 일?"

 "그래. 자리에 처음 들어온 자가 누구던가?"

 "...그건 왜 물어보는 거냐?"

 탐혈광랑은 어느새 연우혁의 말에 홀려 있었다. 이제까지 연우혁에게 홀렸던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됐다. 됐어. 내가 뭐하러 알려줘야 한단 말이냐?"

 "말해라, 이 찢어죽일 놈! 네놈이 정말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면 말해라!"

 탐혈광랑이 포효했지만 연우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격장지계를 쓰는 건가?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

 "..."

 자신의 속마음이 들켰다는 걸 깨닫자 탐혈광랑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어지간히 범인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탐혈광랑은 설득하듯 연우혁을 불렀다.

 "뭘 원하는 거냐? 말해봐라. 제대로 말해준다면 하늘에 맹세코 네놈은 살려서 보내주마!"

 물론 탐혈광랑은 맹세를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에 연우혁은 조금 솔깃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

 "그래! 이 어르신이 비록 마두란 말은 많이 들어도 맹세한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은 없다."

 "...그래. 좋다. 저기를 봐라."

 연우혁은 손가락을 뻗어 탐혈광랑 뒤쪽의 소나무를 가리켰다. 굽이굽이 휘어진 소나무는 꽤 특이한 모양새였다.

 "뭐냐?"

 "저걸 보고 생각해봐라."

 "...뭔 말을 하는 건지... 잠깐, 설마?"

 탐혈광랑은 소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굽을 곡(曲)이라면 설마 염곡수(捻曲手), 그러니까 장로 청살혈뇌의 독문무공을 암시하는 것인가?

 '청살혈뇌! 놈이... 그런데 주연과 무슨 상관이지? 소나무에 다른 깊은 뜻이 더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몸의 본능이 탐혈광랑에게 경고를 날렸다. 탐혈광랑은 보법을 펼치며 몸을 비틀었다. 번뜩이는 빛과 함께 공간을 찢듯이 날아들던 비도가 따라서 궤도를 비틀었다.

 푹!

 한쪽 팔뚝에 비도가 꽂히자 탐혈광랑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속았다 하더라도 고작 일류 경지 정도 되는 무인 놈의 암습에 당하다니?

 '뭐냐, 이 공격은?'

 단순히 빠르고 강해서, 혹은 도중에 술법이라도 썼는지 궤도가 비틀렸다고 해서 놀라운 게 아니었다. 방금 일격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일류 경지의 무인이 던진 공격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놀라워하던 탐혈광랑은 찰나의 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격노해서 울부짖었다.

 "놈!!!!!"

 "주인님!"

 혈견대원 한 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놈이 시간을 끄는 동안 다른 적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금의위 무인들이 동굴 안에서 재빨리 뛰쳐나오고 있었다!

 "네놈들은 뭘 한 거냐? 됐다. 찢어 죽여주마!"

 탐혈광랑은 비도를 뽑아서 던진 뒤 혈도를 짚어 지혈하고서는 달려들었다.

 애초에 적의 말을 듣고 있었던 건 여기 있는 자들이 전부 다 같이 덤벼도 탐혈광랑 혼자서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의 지원이 오는데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잘 했구나. 설마 탐혈광랑을 속일 줄은 몰랐는데!"

 주 공공은 연우혁을 치하하며 암기를 꺼내 날렸다.

 날아오는 암기를 본 탐혈광랑은 더욱 더 분노해서 독문기공 탐혈현기공을 펼쳤다.

 본인이 익힌 사악한 심법을 대성해야만 쓸 수 있는 이 기공은 스스로의 피를 마치 내공처럼 끌어내 잠력을 격발시키는 강력한 기공이었다.

 별호와 무공에 들어간 탐혈이란 단어만 제대로 해낸 상태라면 잠력을 격발시켜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강력한 무공.

 연우혁은 안 그래도 강력한 탐혈광랑의 내공이 증가하고 기세가 더욱 살벌해지자 순간적으로 압도됨을 느꼈다.

 "!"

 상대를 도발하고, 시간을 끌어 금의위 무인들을 빼돌리고, 심지어 기대하지도 않은 상처까지 입혀서 반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절정 중입의 고수는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한 수가 있는 만큼 방심하지 못하는 게 절정 중입의 고수였다.

 탐혈광랑은 조법을 펼쳐서 암기를 막아내지도, 보법을 펼쳐서 암기를 피하지도 않았다. 귀찮다는 듯 입에서 핏물을 뱉어내서 암기를 부숴버리려고 했다. 혈폭각(血爆咯)의 수법이었다.

 '무슨 내공이...!'

 강호의 고수들 중 숨결이나 뱉는 침을 무기로 삼는 자가 있다지만, 대부분은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고수였다.

 무림에 왜 검을 쓰는 무인이 많겠는가? 그만큼 효율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내공을 낭비해가며 숨결이나 침을 무기로 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탐혈광랑은 경지에 오르면 내뱉는 핏물도 살벌한 암기가 된다는 걸 보여주듯이 움직였다. 주 공공이 날린 암기는 탐혈광랑의 핏물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약해보였다.

 그 순간 암기가 번쩍이더니 탐혈광랑의 핏물을 찢어발기고 회전하듯 날아들었다. 탐혈광랑이 분노로 반쯤 미친 와중에도 비명을 질렀다.

 "빙백표(氷白鏢)!"

 운철로 만든 삼백 년 전 북해빙궁이 잃어버린 보물.

 속설에 빙백표의 위력은 강기를 능히 쪼갠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직접 보게 되자 탐혈광랑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빙백표는 허공에서 얼음을 뿌리듯 움직이며 다시 한 번 적을 찔렀다.

 주 공공은 상대가 절정 중입의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보법을 펼쳐 앞으로 덤벼들었다. 허리춤에서 뽑아드는 검에서는 마두들을 본능적으로 제압하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녹... 녹옥탕마검(綠玉蕩魔劍)?!!!"

 탐혈광랑은 날아드는 검광에 소문으로만 듣던 소림 장경각 깊은 곳의 보물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적이 휘두르는 검은 소림의 지보를 연상시켰다.

 내공을 회복시키던 연우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동창의 힘이... 정말로 대단하구나!'

 아무리 동창이라지만 어떻게 소림의 보물을 일개 당두가 갖고 다닌단 말인가?

 소림 방장의 약점이라도 잡지 않은 한 절대로 불가능했다.

114화

 '아니다.'

 주 공공이 앞에서 꺼낸 두 개의 보물과 다른, 연검(軟劍) 형태의 보물과 보주(寶珠) 형태의 보물까지 꺼내 탐혈광랑을 몰아붙이자 연우혁은 깨달았다.

 아무리 동창의 힘이 대단하고 소림 방장의 약점을 잡았다 하더라도 그걸로는 저 보물들이 다 설명되지 않았다.

 정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권신!'

 흔히 조정에서 권력은 품계의 높낮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었다.

 황제와 가까운 관직은 그 품계가 가장 낮다 하더라도 막대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환관들로 이뤄진 동창이었다.

 대부분의 환관들은 관료들과 비교하면 그 지위가 낮고 천했지만, 어느 누구도 황제의 옆에서 대소사를 돌보고 명을 전달하는 환관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런 환관들 중에서 황제가 특별히 총애하는 환관이라면?

 일개 당두라 하더라도 태감 못지않은 권세를 휘두르는 게 설명이 됐다. 지금 주 공공이 갖고 있는 보물들을 보면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군. 더욱 잘 보여야겠다.'

 안 그래도 나름 권력자라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읍소할 수 있는 권력자였다니. 없던 충성심도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이 찢어죽일 잡놈이!"

 탐혈광랑은 자기보다 몇 수는 아래인 무인을 바로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세에 몰리자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정종무공을 대성한 고수라면 이런 상황에서 좀 더 유연하게 대응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마공을 익힌 마두는 이런 부분에서 약점이 더욱 드러났다.

 녹옥탕마검이 탐혈광랑이 쌓은 사악한 내공을 진탕시키고, 이름 모를 구슬이 발하는 술법이 팔다리를 묶었으며, 빙백표와 이름 모를 연검은 강철도 찢어발기는 탐혈광랑의 손가락을 마치 두부를 꿰뚫고 자르는 것처럼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탐혈현기공을 펼쳤는데도 이렇게 밀리다니. 굴욕감에 탐혈광랑은 심맥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다친 자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여긴 우리가 맡겠소!"

 주 공공이 탐혈광랑을 붙잡은 사이 제갈규와 선도광은 혈견대 무인들을 상대했다. 과연 곤륜파의 무인답게 선도광은 마두들을 상대하는 데에 매우 익숙한 모습을 보였다.

 촌선척마(寸善尺魔)의 초식으로 시작해서 영승지회(榮勝之會)의 초식까지 이어지는 검법, 유룡척마검에 혈견대 무인들의 피가 튀었다. 제갈규는 속으로 감탄했다.

 '곤륜파의 무공이 과연 대단하구나!'

 보통 도가의 무공이라고 하면 현묘함과 선기(仙氣)를 떠올리기 쉬웠지만 곤륜파의 무공은 살기가 넘치면서 격렬했다. 어딘가 느껴지는 현묘함이 없었다면 사파나 마공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도가의 진전을 이음과 동시에 마두들을 척살하기 위해 그들의 약점을 찌르는 비결을 만들어낸 것이다.

 덕분에 혈견대 무인들은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제갈규는 소천검법을 펼쳐서 가까운 무인을 찌른 뒤 보법을 펼쳐 간단한 진법을 완성시켰다.

 제갈세가의 무공은 무공 그 자체보다 무인이 술법과 같이 펼치는 위력에 그 진면목이 있었다. 혈견대 무인들은 주변이 뒤흔들리는 감각에 움찔했다.

 '제갈세가의 무공, 역시 명불허전!'

 "돕겠네!"

 다친 부하들을 물러서게 한 뒤 하 교위도 뛰어들었다. 제갈규와 선도광은 여기서 교위의 무공이 가장 뛰어나단 걸 깨닫고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평소 금의위를 좋게 보진 않았지만, 지금 마두들과 맞서 같이 싸우게 되자 존중하는 마음이 절로 솟아났다.

 "저 놈부터 죽여라!"

 몇 안 되는 정파 무인들이 예상보다 단단하자 혈견대원들은 시선을 연우혁에게 돌렸다. 아까 암기를 던진 걸 보니 가까이 붙으면 제압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다른 무인들이 싸우는 동안 내공을 어떻게든 회복시킨 연우혁은 비도 하나를 꺼내 달려오는 적 하나를 쓰러뜨리고 구궁수전을 꺼내 다른 적에게 쏘았다.

 그러나 혈견대는 동료의 죽음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달려들었다. 두 명 죽어서 정파의 고수를 잡을 수 있으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촤르륵!

 갑자기 채찍이 솟구치더니 다가오던 혈견대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처를 참고 접근하려던 혈견대원은 중독되었다는 걸 깨닫고 피를 토했다.

 "사천당문...!"

 상대가 오해하고 있었지만 연우혁은 대답하는 대신 마저 백사격각편을 휘둘렀다. 혈견대원 한 명이 더 쓰러지고 마지막 혈견대원이 접근했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혈견대원의 가슴팍이 뭉개졌다. 연우혁은 권격을 날린 주먹을 되돌리고 방금 던진 채찍을 다시 주웠다. 혈견대원은 쓰러지면서도 믿기 힘들었는지 연우혁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권, 권법을...?!"

 혈옥갑으로 권법의 파괴력이 올라간 만큼, 혈견대원은 연우혁이 원래 권법의 고수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우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한다, 길을 막아라!"

 탐혈광랑은 이를 한 번 빠득 갈더니 크게 외쳤다. 그러자 혈견대원들의 눈빛이 탁해지고 사지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탐혈광랑이 보여준, 내공을 급증시키는 기공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거칠고 부작용이 심한 방식이었다.

 주 공공은 혀를 차며 내뱉었다.

 "혈고(血蠱)!"

 혈교가 사람 뱃속에 벌레를 넣어 부리는 고독(蠱毒) 술법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그리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두가 부하들에게 먹인 혈고는 명령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선천진기까지 쥐어짜내게 만드는 혈고인 모양이었다. 벌써 몇몇 혈견대원은 눈과 코,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만 지나도 저 자들은 전부 죽으리라.

 "도망치는 거냐, 마두?"

 "탐혈광견, 약속을 안 지키는 것도 모자라서 도망까지 친단 말인가!"

 여유를 되찾은 하 교위까지 합세해서 조롱했지만 탐혈광랑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굴욕적인 것과 별개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일개 동창 환관 놈도 제압을 못했는데, 적의 지원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 여기서 자존심을 챙기겠다고 무리해서 덤벼들다가는 정말로 이 자리가 무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탐혈광랑은 마지막으로 교활하게 눈빛을 번뜩였다.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저 보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환관 놈도 아니었고, 건방진 금의위 교위 놈도 아니었다.

 "놈!"

 광폭한 일갈과 함께 탐혈광랑이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보법으로 적들을 혼란시킨 뒤 갖고 있는 경신법을 극한으로 펼쳐 오직 연우혁만을 노렸다.

 어떻게든 놈을 생포해서 데리고 간 뒤 삼 년 전 습격에 대한 진상을 쥐어짜낼 생각이었다.

 허를 찔린 주 공공은 다급하게 출수했다. 설마 탐혈광랑이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빙백표와 연검이 탐혈광랑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탐혈광랑은 광소를 터뜨리며 왼팔을 휘둘렀다. 빙백표가 왼손을 꿰뚫고 연검이 왼팔을 날렸다. 그럼에도 마두는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에서 오직 연우혁만이 냉정했다. 탐혈광랑이 일갈을 터뜨렸을 때부터 영안으로 놈의 의도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쌍사보법과 함께 사심불구경공을 펼치자 몸이 뒤로 젖혀지며 흐릿하게 멀어져나갔다. 탐혈광랑은 연우혁의 보법과 신법이 예상을 뛰어넘자 놀랐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탐혈현기공을 더욱 끌어올리고 남은 피를 불태워가며 덤벼들었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강하다!'

 그 살기 어린 집념에 연우혁은 압도됨을 느꼈다. 영안으로 상대를 정확하게 읽고 있는 만큼 절정 고수의 전력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경지에 오른 고수는 그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중단전이 발달되기 시작한데다가, 스스로 익힌 무공을 다듬어 칭체재의(稱體裁衣)의 경지를 추구하는 만큼 방심할 수 없이 매 순간 새로운 수가 흘러나왔다.

 "잡았다!"

 '거리가...!'

 탐혈광랑이 외치자 연우혁은 거리가 아슬아슬하게 좁혀졌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예상을 넘어 탐혈광랑의 보법이 한 수 위의 위력을 보여준 탓이었다.

 피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거리를 벌려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연우혁은 영안으로 지금 자신의 쌍사보법이 움직임의 끝에 도달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탐혈광랑과 달리 연우혁은 무공을 자신에게 맞춰서 완성시키지도 못했으며 내공 또한 부족했다. 상단전의 영기를 억지로 끌어내서 쓸 수야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움직임이 끝난 보법이 갑자기 생명력을 되찾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당장 탐혈광랑이 핏발 선 눈으로 오른손을 뻗어오고 있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연우혁은 이상하게 태극검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움직여라!'

 본능적으로, 연우혁은 초식이 끝나고 멈춘 쌍사보법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공의 이치를 거스르는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보법이란 멋대로 발을 뻗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단전의 내공을 이치에 따라 기경팔맥과 십이경맥, 그리고 전신세맥에 정확히 운행해야 하는 기술인 것이다.

 보법의 한 초식이 끝나면 그 다음 초식이 이어지고 또 그 다음 초식이 이어지는 것 또한 이래서였다. 초식이 끝나가는 도중에 그 초식을 억지로 다시 펼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연우혁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심불구경공 또한 그 움직임을 도와서 움직였다. 하해불택신공으로 쌓은 내공과 현청벽사신공으로 인한 허공섭물도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도왔다. 연우혁은 자신이 익힌 범망공이 다른 두 내공심법과 어우러져 내공을 더욱 정순하게 만드는 걸 영안을 쓰지 않고도 느꼈다.

 "...!"

 연우혁보다 더 놀란 건 탐혈광랑이었다.

 눈앞의 애송이가 믿기 힘든 움직임으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의념(意念)!!!'

 미약하지만 분명 의념이었다.

 예전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보여줬던 경지. 검을 한 번 휘둘러 세 개의 검대를 도륙하고 시산혈해를 만들었던 그 경지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몇십 갑자의 내공을 쌓더라도 의(意)를 모아 념(念)을 이루지 못하면 펼칠 수 없는 상승의 무공절기를 여기서 보게 되자 탐혈광랑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미약하다지만, 어떻게 절정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놈이 의념을 쓴단 말인가?

 '놈이 아까 던진 비도도 설마...!'

 처음에는 방심해서, 속아서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무공의 묘리가 일격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놈을 죽여라!"

 탐혈광랑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발을 박찼다. 놈을 잡지 못한 건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도망칠 수밖에.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기억해둬라!"

 마두가 빠져나가자 주 공공은 추격하지 말라고 외쳤다.

 원래 상처 입은 맹수가 더욱 위험한 법.

 직접 상대할 때는 보물의 힘을 빌려서 우세에 설 수 있었지만 추격전을 펼친다면 몇 명이 죽어나갈지 알 수 없었다.

 "진충비도. 고생했... 왜 그러나?"

 "내, 내력이..."

 주 공공은 연우혁이 괴로워하며 비틀거리자 의아해했다. 제갈규가 서둘러 상황을 확인했다.

 "대, 대체 뭘 한 건가?!"

 "피, 피하려고 억지로 보법을 썼더니..."

 "보법을 억지로 펼친다고 몸이 이렇게 될 리가 없지 않나!"

 제갈규는 당황해서 외쳤다.

 보법을 억지로 펼쳐봤자 기껏해야 근맥이 조금 다치거나 기혈이 조금 상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연우혁의 상태는 기경팔맥부터 전신세맥까지 내상이 골고루 퍼져 있는 기묘한 상태였다. 만약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막대한 내공을 억지로 운기하면 이런 상태가 될 것 같았다.

 "컥, 커헉."

 "이걸 먹고 운기요상하도록."

 주 공공은 환약을 꺼내 연우혁의 입에 던져 넣었다. 심각한 내상으로 괴로워하던 연우혁의 안색이 아주 조금 괜찮아졌다.

 "이건 무슨 약입니까?"

 "그걸 왜 말해줘야 하지?"

 제갈규는 동창 환관의 말에 당황했다. 오대세가 출신으로서 이런 대답은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인."

 다행히 하 교위 덕분에 분위기가 풀렸다. 금의위 교위의 인사에 주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금의위가 이렇게 무능할 줄은 몰랐구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부끄러울 뿐입니다."

 "장계에 포두의 재주를 뻔뻔스레 적어넣을 줄은 알면서 마두의 함정은 알아채지 못하다니."

 "...?"

 하 교위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적지 않은 게 뻔뻔한 짓이면 모를까, 적어넣은 게 왜 뻔뻔한 짓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