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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자신의 숙소에서, 실란은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도망쳐야 돼,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해."

평소의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손에 집히는 대로 막 옷이며 여행물품을 구겨 넣는 실란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실란."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실란의 어깨를 두꺼운 손가락이 꽉 붙잡았다.

"나야, 레펜하르트."

"아, 레펜 씨."

그제야 버둥대던 실란이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얼마나 넋이 나갔으면 레펜하르트의 음성조차 못 알아들을 수가 있지?

"크, 크리스틴은? 그녀는 어디 있죠?"

"일단 접대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좀 진정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실란을 애써 달래며 레펜하르트가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실란이 심호흡을 하며 침상 끝에 털썩 걸터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약혼했었냐?"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실란이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크리스틴 실 에스타나.

그녀는 대륙 남부에 위치한 할라인 왕국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미모는 왕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눈웃음을 칠 때마다 나이 든 남자들조차 부끄럽게도 가슴이 설레는 걸 자제할 수 없었으니, 그녀가 성장하면 그야말로 일국을 멸망시킬 정도의 엄청난 미녀가 될 거라며 수군대곤 했다.

과연, 크리스틴은 성장해 굉장한 미녀가 되었다. 문제는 너무 성장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절세 미녀라도 남자는 여자가 자신보다 키가 크면 좀 저어하는 면이 있다. 물론 개중에는 키 큰 여자 좋아하는 타입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2미터는 너무 크다.

어릴 적엔 그토록 무수하던 혼담도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자 뚝 끊겨 버렸다. 아무리 귀족가의 결혼은 정략이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서로에게 흠이 없을 경우다. 들어오는 혼담이라고는 상대 남자가 장애자거나 정박아 같은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에스타나 가문은 멀쩡한 상대에게 흠이 있는 딸을 밀어붙일 정도로 권세도 강하지 않았고, 또 뻔뻔하지도 않았다.

크리스틴의 아버지, 에스타나 백작은 고뇌했다.

불쌍한 딸, 차라리 못생기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미녀로 칭송받아 온 아이였다. 어떻게든 여자다운 행복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이어께 매일 기도를 올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무려 주신 세이어로부터 신탁이 내린 것이다.

-그녀는 신의 딸, 신의 힘을 행하기 위한 검으로 살며 위대한 이의 어미가 될 것이다. 태양의 사내와 마주치는 그날, 그 인연이 이어질지니.

세이어 교단은 크리스틴을 받아들이고, 신탁에 따라 성기사로서의 수행을 쌓게 했다. 그렇게 교단의 검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어느 날 바실리 왕국에 파견을 나갔을 때였다. 영지전이 격렬해져 세이어 교단에서 중재를 나서게 된 일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필라넨스 교단에서 신관들을 보내 부상자를 치유하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크리스틴은 운명의 연인, 실란 필 마르시스를 만났다.

그는 태양처럼 붉은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아하게 전장을 누비며 부상자들을 돌보는 실란의 모습은 그야말로 크리스틴이 꿈꾸던 이상형 중의 이상형이었다. 한눈에 반해 버렸다. 상대가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세이어 교단으로 돌아와 크리스틴은 선언했다.

신탁의 인연이 이어졌다고. 위대한 이의 아비가 될 자를 찾았다고.

교단은 발칵 뒤집혔다.

크리스틴과 달리 세이어 교단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 열두 살 어리디어린 소년을 덮치겠다는 엽기적인 주장을 좋다고 받아들일 만큼 변태들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당연히 그녀를 달랬다. '그대가 뭔가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 '설마하니 세이어께서 점지하신 인연이 저런 어린아이겠느냐?' 등등.

그때 또다시 세이어의 신탁이 내려졌다.

-걔 맞다.

뭔가 이번 신탁은 대단히 신성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세이어의 성직자들이 혹시 수신 잘못되었나 의심할 정도로.

하지만 어쨌건 주신 세이어께서 크리스틴의 주장을 증거하셨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세이어 교단은 정중히 필라넨스 교단에 청혼장을 보냈다.

주신 세이어는 인간을 가호하는 다른 열두 신보다 위에 선 신이다. 그런 만큼 세이어의 교단도 다른 교단에 비해 권세가 강했다. 필라넨스 교단 입장에서는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사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실란이 아무리 어려 보여도 사실은 그 당시 이미 열일곱이었다. 어쨌거나 숫자상으로는 나이 차가 크지 않다. 딱히 크리스틴의 취향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필라넨스 교단은 그 특성상 저런 변태적(?) 취향도 관대히 넘어가 주는 부분이 있었다.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려 주신 세이어의 신탁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필라넨스 교단은 애매한 조건 아래 승낙을 내렸다.

-그녀가 그의 사랑을 얻는다면, 허락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됐죠...."

실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참, 세상은 넓다더니 별의별 취향도 다 있구나 싶었다.

"한마디로, 교단 간의 정략결혼이네?"

"말하자면 그렇죠...."

일단 허락이 떨어지자 시작된 크리스틴의 대시는 정말이지, 맹목을 넘어서 광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제나 실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심지어는 침실이나 화장실에서도 불쑥불쑥 나타났다. 한밤중에 침대 발치에서,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틴의 모습에 실란이 경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 마침 레펜 씨를 만난 김에 순례자 핑계 대고 도망친 거예요. 순례 여행을 떠나면 크리스틴도 포기하지 않을까 싶어서."

곁에서 듣고 있던 시리스가 실소를 흘렸다.

"그럼 실란이 그렇게 남자다운 몸이 되고 싶어 한 것도...."

"뭐, 그거야 원래부터 꿈꾸는 것이었지만 크리스틴을 만난 후로 더 절실해지긴 했지. 내가 보통 남자처럼 변하면 결혼도 포기할 테니까."

말을 마치며 실란이 재차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레펜하르트도 시리스도,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뭐, 꼭 키가 맞아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여자 쪽이 좀 크면 어때? 남자 입장에서 저렇게까지 사랑해 주는 여자 만나는 것도 사실 행운인데 그렇게 생각은 안 해 봤어?"

레펜하르트도 전생에 시리스와 사귈 때는 그녀보다 키가 작았었다. 남녀가 진실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 키 좀 작은들 무슨 문제가 있겠냐는 소리였다. 물론 속으로는 그렇다 해도 저 신장 차이는 좀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키 문제가 아니에요. 성격이 너무 무섭다고요!"

하지만 실란이 크리스틴에게 치를 떠는 것은 단순히 키 문제만은 아니었다.

"남의 말 절대 안 들어요! 오로지 자기 생각으로만 움직이고 말한다고요! 난 죽어도 싫다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 듣기는커녕 벌써 가족계획까지 세워 놓았다니까요?"

"어, 그건 진짜 무섭네...."

"그렇죠? 심지어 벌써 낳지도 않은 애들 이름이랑 장래 계획까지도 세워 놓았어요! 아들을 낳으면 스테인이라 이름 짓고 세이어의 성기사로 키울 것이고, 딸을 낳으면 엘린이라고 이름 짓고서 세이어의 성직자로 키우겠다는데... 아니, 멋대로 가족계획 세우는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세이어의 성직자야? 애 아빠는 필라넨스의 신관인데."

순간 레펜하르트가 띵 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통수를 해머로 두들겨 맞은 듯한 얼굴로 그가 놀라 되물었다.

"뭐, 뭐? 잠깐! 지금 딸 낳으면 이름 뭐라고 짓는다고?"

"네? 아, 딸 낳으면 엘린이라고 짓겠다던데...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컥! 실란 이 녀석이 성녀 엘린의 아빠였어?'

☆ ☆ ☆

성녀 엘린.

주신 세이어의 신관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강대한 신성력을 지니고 마왕 레펜하르트 앞에 선 대륙 최강의 5인 중 한 명.

죽은 자조차 부활시킬 수 있다는 그녀의 엄청난 권능은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조차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강력한 신관이었던 마켈린도 결국 엘린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만 대군 전체에 신성 가호를 걸 수 있는 엘린의 어마어마한 권능은 평범한 병사들을 광전사처럼 날뛰게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호를 받는다면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용맹한 기사의 목을 딸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엘린은 성녀라고는 불렸지만, 보통 신관들이 자체 전투력이 낮은 것과 달리 직접적인 전투력도 높았다. 그녀 때문에 죽어 간 안타레스 제국 병사들의 숫자는 거의 네 자릿수에 달한다.

전생의 레펜하르트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악몽의 여인.

'그 저주받을 년이 이 녀석 딸이라고?'

레펜하르트는 기가 막혀 연신 실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실란은 어느새 짐을 다 싸고 정신없이 복도를 질주하는 중이었다. 어서 이 핸드릭 성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치겠다는 의지가 굳건해 보였다.

'설마 우연이겠지? 그냥 이름만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실란을 따라가며―실란 입장에서는 질주겠지만 레펜하르트에겐 그냥 좀 빨리 걷는 수준이었다. 둘의 다리 길이가 좀 차이가 나야지?― 레펜하르트는 유심히 실란의 얼굴을 살폈다.

'우연이라기엔 또 꽤나 닮았단 말이지.'

신성력만큼이나 성녀 엘린은 그 놀라운 미모로도 대륙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실란의 아름다운 외모 속에서 엘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실란과 엘린이 눈에 띄게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레펜하르트도 처음 실란을 만났을 때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틴까지 만나 양쪽의 외모를 모두 보고 나니 꽤나 닮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머릿속에 실란과 크리스틴의 얼굴 이미지를 서로 겹쳐 시뮬레이팅해 보았다. 마법사답게 둘의 외모가 가진 혈통적 특성을 뽑아내 자식의 외견을 예측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꽤나 높은 확률로 성녀 엘린의 얼굴이 나온다!

'어, 이거 진짠가 본데?'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단순히 성녀 엘린이 증오스러운 대상이기에 '저주받을 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었다.

검성 사이러스나 권왕 테스론처럼, 레펜하르트는 성녀 엘린의 정보에 대해서도 상당히 수집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엘린의 무지막지한 신성력의 실체 역시 알게 되었다.

성녀라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엘린의 저 엄청난 신성력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이어 교단에서 추진한 금단의 술법, 성배聖杯 계획에 의해 인공적으로 탄생한 존재였다.

성배 계획.

술법에 걸맞은 자질을 지닌 남자와 여자를 준비한다. 그리고 특수한 신성 주문으로 결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남녀가 서로 관계하여 정을 통하면 그 아이는 성배, 신성을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을 경주마 짝짓기시키듯 강제로 결합시키는 꽤나 추악한 계획, 하지만 이 성배 계획은 그것만으로 금단의 술법이라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귀족들은 정략결혼이니 혈통이니 따져 가며 비슷한 짓 얼마든지 하지 않은가? 레펜하르트도 저것만이었다면 저주받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저 '성배'의 탄생을 위해서 부모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잉태되는 순간 아비의 생명과 정을 모두 소모하고, 출산하는 순간 어미의 생명과 정을 모두 흡수해야만 비로소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거대한 신성의 그릇이 된다.

그야말로 어미 배를 찢고 나온다는 살모사처럼 엘린은 부모의 생명을 바탕으로 그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실로 독사 같은 년이라 하겠다.

'아니, 살모사도 씨 뿌린 아비까지는 잡지 않으니 독사보다 더한 년이지.'

성녀 엘린의 부모에 대해서는 레펜하르트도 거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검성 사이러스 때문에 완전히 잊혀 버린 황금기사 유서스처럼, 성녀 엘린의 엄청난 위명 앞에 그 부모의 존재는 세인들의 관심 밖이었다. 게다가 떳떳치 못한 일이니만큼 세이어 교단도 엘린의 출생에 대해선 필사적으로 감추었다. 세간에 엘린은 그저 이름 없는 고아 출신으로 아기 때 세이어 교단에 버려져 신의 딸로 자랐다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간신히 얻은 정보라 봐야, 어미 되는 자는 세이어의 성기사였고 아비는 다른 교단의 성직자로 꽤나 강력한 신관이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지금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했다. 이토록 강력한 권능을 지닌 실란이 왜 미래에 무명이었는지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우연도 이 정도로 겹치면 우연이라 볼 수 없다.

틀림없이 실란이 성녀 엘린의 아버지다!

복도를 질주한 실란은 슬슬 저택 현관을 나서서 성 앞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앞마당에서 야숙 중이던 병사들이 의아해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혹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그런 실란을 뒤따랐다.

조금 전까지는 그냥 웃기고 황당해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것은 실란의 생명이 달린 문제다.

"야, 실란. 너 그 결혼 하면 죽을 거다...."

실란 뒤를 따르며 레펜하르트가 굳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실란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레펜 씨도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고리타분한 속설을 믿고 있는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고 사실 결혼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위대한 의식으로서 사랑과 애정 앞에서 상대의 진심을 확인하는 성스러운 계약... 아니, 내가 지금 결혼 찬양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누가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신관 아니랄까 봐 본능적으로 설교를 해 버린 것이다. 실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무덤에 가게 될 건데....'

그렇다고 여기서 진실을 말해 버릴 수도 없다. 레펜하르트가 실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실란, 나도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해선 안 될 것 같다."

"아, 드디어 내 편이 한 명 생겼군요! 흑흑, 역시 레펜 씨밖에 없어. 도대체가 우리 교단 사람들은 하나같이 키 좀 클 뿐 미인인데 뭐가 싫냐고 밀어붙이기만 하고! 그럴 거면 자기들이 결혼을 하든가!"

"으음...."

감격하는 실란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신음을 흘렸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던 것 같았다.

"어쨌건 전 이대로 도망갑니다. 계속 함께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네요. 즐거웠어요, 레펜 씨. 그럼 이만."

당장이라도 줄행랑을 치려는 실란을 레펜하르트가 붙잡았다. 그리고 인상을 썼다.

"야! 너 지금 바로 떠나려고?"

"여기 있다가 잡히면 무슨 꼴을 당하라고요?"

"그건 그렇지만...."

실란의 미래를 알고 있으니 결코 결혼에 찬성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실란을 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최고급 약통 타령은 안 한다. 이미 실란은 레펜하르트의 꿈을 인정해 준, 몇 안 되는 소중한 동료였다.

"그럼, 이제 내 곁을 떠날 거냐?"

"그, 그건...."

실란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 역시 레펜하르트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홀로 이 험한 세상 떠돌고 싶지도 않았고, 레펜하르트도 시리스도 러스도 틸라도, 모두 그의 소중한 이들이었다.

"저도 떠나고는 싶지 않지만... 사정이 이렇잖아요. 그렇다고 한창 전쟁 중인데 레펜 씨나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실란이 풀 죽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레펜하르트도, 뒤를 따르며 상황을 지켜보던 시리스도 한숨을 내쉬었다. 앞마당의 병사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레펜하르트와 실란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음? 어린 성자시네."

"어디 가시지?"

"마법사님과 다투신 건가?"

시무룩한 실란을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단순히 동료와의 미련만을 남기고 있는 실란과 달리 레펜하르트는 지금, 다른 이유로도 절대 실란을 자기 곁에서 보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재 실란의 태도를 보면 아무리 봐도 크리스틴과 결혼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미래에는 성녀 엘린이 존재하지 않은가? 그렇다는 것은....

'나중에 세이어 교단에 강제로 납치, 감금당해서 강간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지.'

남자가 강간당한다는 것이 꽤 어색한 개념이긴 하다만, 지금 크리스틴의 태도를 보면 그 정도쯤은 충분히 강행할 것 같았다. 상당히 확률 높은 미래다.

"야야, 일단 좀 진정하고 의논을 해 보자. 네가 여기서 도망간다고 저 여자가 안 쫓아갈 것 같으냐? 여기까지 쫓아온 판인데?"

"그럼 대체 뭐라고 해요? 레펜 씨가 막아줄 거예요?"

"으음, 어떻게든 안 될까? 상대의 마음을 무시하고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라든가...."

"그런 말로 설득될 거면 제가 필라넨스 교단을 떠나기까지 했겠어요?"

확실히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성직자들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연애 전문가라 할 수 있었다. 프로 중의 프로인 그들조차 저 여자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레펜하르트가 대체 무슨 수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끄응...."

막기는 막아야 하는데, 대체 어떻게 막아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구기며 신음을 흘리던 찰나였다.

"실란! 벌써 돌아갈 준비를 갖췄군요! 어서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려요!"

어느새 2미터 장신의 미녀가 저택 대문을 가로막고 요염하게 웃고 있었다. 실란이 발작을 일으켰다.

"으악! 난 몰라! 레펜 씨 때문에 붙잡혔잖아요!"

4

핸드릭 백작 저택 대문, 강철로 주조한 그 거대한 철창 문 앞에서 크리스틴이 늠름히 가슴을 펴고 웃고 있었다.

"자, 실란. 어서 돌아가요. 그리고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자식은 아들 하나, 딸 하나만 낳고."

"아, 그러니까 난 싫다니까, 크리스틴! 싫어! 정말 싫다고! 사랑이고 결혼이고 당신 얼굴 보는 것도 질색이란 말이야!"

평소 여성에게 예의 바른 실란이 한 발언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직설적이다. 그런데도 크리스틴은 전혀 분노하거나 상처 입은 표정이 아니었다.

"아이, 실란도 참. 부끄러워하긴."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왜 실란이 저런 소릴 했는지 깨달았다.

'우와, 정말 남의 말은 눈곱만큼도 안 듣는 구나.'

어쨌거나 계속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레펜하르트가 슬그머니 실란의 앞을 가로막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리 실란이 좋다는 겁니까?"

그러자 크리스틴이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몸을 꼬았다. 실로 교태 어린 몸짓이었지만, 신장이 2미터가 되다 보니 교태가 아니라 교룡이 태동하는 듯한 웅장함이 엿보인다.

"그야 우리 둘이 결혼하면 그 자식은 적당한 평균 키가 태어날 테니까요!"

순간 레펜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의, 의외로 상당히 합리적인 이유가 아닌가?'

저따위 이유를 합리적이라 생각한 시점에서 레펜하르트도 어쩔 수 없는 마법사였다. 여심 따위는 전혀 모르는 탑 속의 마법사.

크리스틴이 안타까운 듯 실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실란, 당신은 자식에게도 그 천형을 물려줄 셈인가요?"

"아니, 키 작은 게 무슨 문둥병이냐? 천형은 무슨 천형?"

기가 막혀 실란이 고함을 쳤지만 역시나 크리스틴은 들은 체 만 체 자기 말만 이었다.

"물론 싫겠죠. 저 역시 싫어요. 당신은 자라지 않아서 고민이고 저는 너무 자라서 고민이니...."

크리스틴의 두 눈에서 섬광이 빛났다. 그야말로 강철 같은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자, 함께 가요. 이것은 여신께서 부여한 운명이에요."

"싫어! 안 가!"

"여신을 거역할 셈인가요?"

"여신이 언제 나더러 그쪽이랑 결혼하라고 했는데? 함부로 필라넨스님의 말을 곡해하지 마!"

"세이어께서 허락하셨어요! 그럼 당연히 여신께서도 허락하신 것이죠!"

자고로 남의 사랑 싸움만큼 관심을 끄는 화제도 별로 없다. 앞마당의 병사들이 수군덕대며 크리스틴과 실란을 번갈아 바라본다. 실란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봤다. 눈빛이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 레펜하르트의 근육을 찔러 댔다.

'나 좀 살려 줘요!'

레펜하르트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눈빛을 돌려보내 주었다.

'부디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갑자기 실란이 뭔가 결심한 듯 안색을 창백하게 굳혔다. 전설 속, 자기희생 주문을 구사했다는 성자와도 비견될 만한 엄청난 표정으로 실란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갑자기 크리스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해! 크리스틴! 하지만 내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순간 레펜하르트는 실소하며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실란의 내심이 익히 짐작이 갔다. 저것이야말로 남의 고백 거절하는 가장 상투적인, 그러면서도 효과는 지대한 방법 아니었던가?

시리스도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도 알아서 연극에 맞춰 주겠다는 제스처였다.

그때, 실란이 레펜하르트의 굵은 팔뚝에 답싹 안기며 소리쳤다.

"난 이미 레펜 씨와 사랑하는 사이야! 그래서 너의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어!"

☆ ☆ ☆

우렁찬 실란의 선언 앞에 잠시 세상이 정지했다.

크리스틴이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

레펜하르트도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

앞마당의 병사들 모두가 입을 떡 벌린 채 말문을 잃었다.

"..."

그리고 시리스는 저만치 쪼그려 앉아 미친 듯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소리 내진 않았지만 눈물을 뽑을 정도로 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란이 레펜하르트의 팔을 잡고 자신을 감싸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미안해, 크리스틴. 하지만 나와 레펜 씨는 필라넨스 님의 붉은 실로 이어진 사이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차탄 공국에서 실란은 레펜하르트를 찾을 때 신성 주문, '운명의 교차점'을 구사한 적이 있다. 인연을 이어 주는 그 주법에 따르면 확실히 실란과 레펜하르트는 '여신의 인연'으로 이어진 사이긴 하다.

그래, 거짓말은 아니다.

"그럴 수가...."

크리스틴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남의 말 절대 안 듣는 그녀이긴 했지만, 그녀는 결코 실란이 필라넨스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게다가 건장한 레펜하르트와 아리따운 실란은 겉보기부터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실로 하늘이 내린 선남선녀 같았다. 사실은 근육남선남이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그녀였다.

"아아...."

좌절에 빠진 크리스틴이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 그랬었군!"

"어쩐지 심상찮은 사이 같았어."

"확실히 잘 어울려 보이는 두 사람이군."

"그러고 보니 아까 '내 곁을 떠날 거냐?'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들은 기분이...."

확실히 크리스틴과 실란 커플에 비해, 레펜하르트와 실란 쪽이 훨씬 상식적인 외견의 커플로 보였다. 뭐, 상식 따지면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도 같지만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존재인 법이다. 병사들이 하나 둘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레펜하르트와 실란을 향해 따스한 응원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혼절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허허허....'

안타레스 제국이 불타고 소중한 사천왕을 잃었을 때만큼이나 극심한 혼돈이 뇌리를 몰아치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그가 실란에게 속삭였다.

'야! 왜 하필 나야?'

여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으로 실란이 빠르게 대꾸했다.

'시리스는 안 돼요! 인간이 아니잖아요! 먹히지도 않을 거라고요!'

'그, 그래도 다른 여자가 있잖아!'

'어디에?'

순간 레펜하르트의 말문이 막혔다. 이 핸드릭 저택의 앞마당은 유벨 왕자군의 막사로 가득 차 있었다. 혈기왕성한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은 하녀들도 겁이 나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 자리에 있는 '인간 여성'은 크리스틴밖에 없었다.

'저, 저기 지나가는 하녀라도 하나 불러서....'

'보통 상대로는 안 돼요!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요!'

확실히 충격 요법 하나는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그토록 남의 말 듣지 않던 크리스틴이 지금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 대체 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눈앞에서 호랑이가 입 벌리고 있는데 뒷산의 늑대 걱정하게 생겼나요?'

실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사내다운 기개다. 그래 봤자 여자애처럼 새초롬한 표정으로 답싹 안겨 있으니 전혀 설득력은 없지만.

실란이 레펜하르트의 가슴을 매만지며(!) 애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이 우리 관계를 밝혀야겠어요. 내 사랑, 레펜."

"그, 그렇지. 나의 사랑스러운 실란."

애써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도 실란의 어깨를 감쌌다. 물론 속으로는 처절한 절규를 터트리고 있었지만.

'오! 신이시여!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비틀거리던 크리스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랬군...."

순간 실란과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그런 거였어...."

납득했다는 목소리였다. 실란이 희망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 포기해 주려나?'

레펜하르트가 절망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나 같아도 포기할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틴을 너무 얕본 것이었다.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래, 진정한 사랑에는 언제나 시련이 끼는 법이죠."

크리스틴의 두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전생에 마왕으로 군림하고 대륙의 절반 이상을 불태우고 다섯 자리의 인간을 학살했던 레펜하르트조차 오한이 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크리스틴이 허리의 검을 날쌔게 뽑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를 향해 겨누며 살기 가득한 외침을 터트렸다.

"진정한 사랑을 걸고! 나,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이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간신히 웃고 있던 레펜하르트의 안면에 또다시 금이 쩍쩍 갔다. 인상 구겼다는 소리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전개래?'

☆ ☆ ☆

날카로운 검 끝이 자신을 향한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하며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결투? 나랑 당신이?"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과 명예를 걸고 결투를 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성기사도 기사는 기사니까, 크리스틴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충분히 납득은 간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는 엄연히 마법사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기사가 마법사에게 결투를 청하는 것은 유례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사의 결투에 불명예가 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인식은 조금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신이 진정 실란을 사랑한다면, 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을 터!"

"아니, 그러니까 마법사와 기사가 무슨 결투를...."

레펜하르트가 더듬거리고 있는데 실란이 귀엽게 웃으며 응원을 던졌다.

"레펜 씨! 당신만 믿어요! 우리 사랑의 힘을 보여 주세요!"

그래 놓고 종종 걸음으로 시리스 뒤로 도망쳐 버린다. 레펜하르트는 뒤를 돌아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야! 나더러 지금 저 여자랑 결투를 하라고?'

'어차피 이길 것 아니에요? 나 좀 살려 줘요!'

둘은 눈빛만으로도 저 정도로 복잡한 내용을 무난하게 교환하고 있었다. 실로 이심전심이라 하겠다. 옆에서 보고 있던 시리스가 '이 두 사람, 사실은 정말 사귀는 걸지도....'라고 중얼거릴 만큼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아냐! 시리스!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사귀긴 개뿔!'

'...?'

당황한 레펜하르트가 시리스에게도 눈짓을 했지만, 그녀는 못 알아듣고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실란은 잘도 알아듣는데 시리스는 왜? 뭔가 살아온 세월이 허무해지는 걸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크리스틴이 검을 고쳐 쥐고 자세를 잡으며 소리쳤다.

"세이어의 성기사로서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마법사여! 결투에 임하세요!"

"뭐,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나."

툴툴대던 레펜하르트도 양손을 들어 올리며 크리스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저 여인으로부터 실란을 떼어 놓아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결투건 뭐건 간에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 아닌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레펜하르트가 양손으로 어지럽게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다행히 선공할 동안 기다려 준다고 했으니, 아예 거창한 마법 한 방 날려서 잠재워 버려야겠다!

"라 단트 바스 필라렌, 뇌격이여, 내 손에 임해 창공을 뒤덮는 폭풍이 되어 적을 섬멸할지니...."

룬어와 마법어를 조합해 스펠을 외우며,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복잡한 손짓을 남겼다. 도중에 두 손을 마찰시켜 정전기를 일으킴으로써 촉매도 활성화시킨다. 주문이 발동되자 거구의 레펜하르트 전신에 강렬한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새, 생각보다 고위 마법사였네!'

마법사와 상대할 때 주문 외울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무심코 평소 결투를 청할 때처럼 여유를 줘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창백한 크리스틴의 눈동자 위로 주문을 완성하고 양손에 거대한 전격을 머금은 레펜하르트의 모습이 비쳤다.

'미안하지만 후딱 끝내자!'

회심의 미소와 함께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라이트닝 스톰!"

우르르릉! 쾅!

전격이 회오리치며 폭풍이 되어 크리스틴의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라이트닝 스톰은 수십 줄기의 뇌격이 폭풍처럼 광범위한 지역을 일제히 두드리는 마법, 위력 자체는 낮은 편이지만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뭐, 죽이면 곤란하니 위력은 대폭 낮췄지만 이걸로 간단히 기절하겠지.'

레펜하르트가 다 이겼다는 표정을 짓고 뇌전이 크리스틴을 때리기 바로 직전, 갑자기 그녀가 검을 세우며 외쳤다.

"세이어시여, 당신의 검을 빛나게 하소서!"

부우우웅!

대기를 찢는 굉음이 울리며 그녀의 검이 순백색으로 찬란히 빛났다. 빛나는 검을 든 채 크리스틴이 어지러이 검을 놀렸다. 검광의 궤적이 허공을 난무하며 수십 줄기의 전격을 일일이 갈라 놓았다.

쾅쾅쾅쾅!

연이어진 폭음에 귀를 막은 채 병사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헉? 또 오러 유저야?"

"아냐! 좀 다른데, 저거?"

"그렇군! 세이어의 성기사들이 쓴다는 신성검이다!"

아티팩트의 힘으로 오러 유저와 필적하는 힘을 보이는 황금기사 유서스처럼, 세이어 교단에서도 신성력으로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저 순백의 칼날, 신성검이다.

겉보기에는 오러 유저의 블레이드 오러와 비슷해 보일 텐데 병사들은 놀랍게도 바로 두 차이를 구별하고 있었다. 요 며칠 워낙 오러 유저를 자주 보고 살았더니 일개 병사들도 이 정도 안목은 생긴 것이다.

블레이드 오러 정도는 아니지만 강력한 신성력이 응집되어 파괴력으로 화하는 저 신성검이라면 위력을 낮춘 라이트닝 스톰 정도는 쉽게 파훼할 수 있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도 신성검의 존재를 몰라서 마법을 쓴 것은 아니었다.

'윽? 신성검? 저 여자 의외로 제대로 된 성기사였나?'

세이어의 성기사 중에서도 신성검을 구사하는 경지에 다다른 이는 고작해야 열 중 하나, 당연히 레펜하르트는 저 정신 나간 여자가 제대로 된 성기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달리 기량만큼은 훌륭한 성기사였던 것이다.

"내 차례예요! 이 간악한 자!"

크리스틴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레펜하르트가 재빨리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방어의 장막, 파워 실드! 허공의 걸음, 윈드 스텝!"

레펜하르트는 마력의 방패로 신성검을 막아 내며 동시에 바람 걸음의 주문으로 잽싸게 전신을 뒤로 후퇴시켰다. 마력의 방패를 가르며 속도가 떨어진 신성검이 미처 뒤로 빠지는 레펜하르트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스친다. 그 틈에 레펜하르트가 다시 주문을 외웠다.

"에어로 블렛!"

바람의 탄환이 서른 개 이상 허공에 생성되며 일제히 크리스틴에게 쏟아졌다. 1서클 풍계 주문, 에어로 블렛이었다. 한때는 이거 하나 외우는 데만도 한 세월 걸렸던 레펜하르트지만 지금은 순식간에, 그것도 다량으로 쏠 수 있었다.

"으윽!"

크리스틴이 이를 갈면서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바람의 탄환이 그녀의 전신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하지만 그 공격에도 크리스틴은 머리카락이 조금 흩어졌을 뿐 전혀 피해를 입은 모습이 아니었다.

"흥! 이 정도 공격으로 세이어의 성기사가 굴복할 것이라 보나요?"

역시 에어로 블렛은 1서클 주문답게 위력도 그리 높지 않았다. 서른 개나 만들어 쐈지만 거의 효과가 없다. 뒤에서 보고 있던 실란이 고함을 질렀다.

"아니, 왜 아까부터 마법만 써요?"

세이어 교단에서 오러 유저를 겨냥하고 열심히 신성검을 만들긴 했지만, 사실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겉보기에야 비슷해 보여도 내용물은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위력으로 보나 뭐로 보나 제대로 된 블레이드 오러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권왕 레펜하르트의 기량은 오러 유저들 사이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그래서 실란도 안심하고 결투하라고 등 떠밀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오러 쓸 생각 안 하고 순 마법사로서만 싸우니 속이 뒤집히는 실란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마법사가 마법 쓰는 게 뭐가 이상해?"

레펜하르트는 지금 오러 유저로서의 자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튀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마법사로서 전투에 임하니 재미있었다는 면도 컸다. 그동안 마력이며 연산력이 달려서 얼마나 수모를 겪었던가? 이제야 슬슬 예전처럼 마법사로서 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솔직히 신도 좀 났다.

"아, 제발 좀! 이쪽은 인생이 걸려 있다고요!"

'거참,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니 은근 열받네.'

지금이야 이상한 몸에 들어온 덕에 주먹질하고 다니는 팔자가 되었지만 그는 한때 10서클의 대마도사로 마법의 극에 달했던 자다. 인류 역사상 최고, 최강의 마법사로서 자부심이 있는데 저런 불신의 눈빛이라니?

레펜하르트가 입을 삐죽였다.

"아, 나도 이 정도로 안 먹히는 거 몰라서 쓴 거 아냐! 좀 믿어 봐라!"

그가 일부러 바람의 탄환을 서른 개나 만들어 날린 것은 상대를 쓰러트리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정신 나간 여자라도 죽여 버리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터, 어느 정도 마법의 위력을 조절할지에 대해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바람의 탄환이 크리스틴에게 적중되며 오는 반발력으로 상대의 체력과 내구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들이 환자에게 하는 촉진觸診을 마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다른 마법사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놀라 자빠졌을 일이다.

'이게 얼마나 고도의 마법 운용인데 그것도 못 알아보고.'

속으로 구시렁대며 레펜하르트가 주문을 이었다.

"흑암의 천이 눈을 가린다, 다크니스 베일! 모든 것은 미끄러진다! 그리스! 흐르는 빙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낳나니! 프리즌 쉐도우!"

거리를 벌린 레펜하르트는 바로 크리스틴의 눈을 가리고 발밑을 미끄럽게 만들어 스텝을 막았다. 전생에서 전사를 상대하는 수법 따윈 지겹도록 익혀 온 그였다. 모든 주문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며 크리스틴의 움직임이 멎고, 곧바로 냉기를 머금은 그림자가 대지를 달려 그녀의 발목을 묶었다.

"크윽!"

발목 위까지 얼어붙어 두 발이 봉쇄되자 크리스틴이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그렇게 상대를 덫으로 몰아넣고 레펜하르트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힘으로 얼어붙은 발목을 빼려면 족히 30초는 걸릴 터, 슬슬 결투를 끝내도록 하죠."

손가락으로 꼼짝 못하는 크리스틴을 겨냥하며 레펜하르트가 영창을 시작했다. 크리스틴이 인상을 가득 찌푸리더니 갑자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군요, 세이어께서 내리신 힘을 쓰는 수밖에!"

그리고 길게 심호흡을 시작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놀라 영창을 멈췄다.

'저, 저건?'

마법사로서 경지에 오른 그가 영창을 멈출 정도면, 놀라도 보통 놀란 것이 아니다. 호흡을 바꾼 크리스틴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아앗!"

우지직!

발목을 얼리고 있던 얼음들이 일제히 깨지며 파편이 되어 비산한다. 얼어붙은 다리를 힘으로 빼내다니? 아무리 크리스틴이 거구라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결코 평범한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저 힘은 마치....

"어? 크리스틴이 오러 유저였나?"

실란이 멍하니 뇌까렸다. 하지만 오러 유저라 하기엔, 또 칼날에 맺힌 빛이 순백색 그대로였다. 검을 들어 올리며 크리스틴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는 오러를 깨닫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이어께서 저를 어여삐 여기시어, 그들과 맞먹는 육체를 주셨지요! 호호호호!"

신 나게 웃는 그녀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질문을 던졌다.

"이봐, 당신! 그 호흡법 누구한테서 배웠어?"

레펜하르트가 경악한 이유는 크리스틴이 갑자기 괴력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에 행했던 호흡법, 그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차분히 대답했다.

"아직 세이어를 섬기기 전의 어린 소녀일 때였지요. 한 노인께서 저를 찾아 건강해지는 비법이라며 이 호흡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지요. 저를 당신의 검으로 쓰기 위해 세이어께서 인도하신 분이었다는 걸. 이 호흡법으로 인해 저는 세이어의 성기사 중에서도 월등히 예리한 검이 되었으니까!"

세이어에 대한 끝없는 신앙심으로 크리스틴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분의 은총이 하해와 같으니 감사하기 그지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으아! 사부, 이 작자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그는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방금 크리스틴이 구사한 호흡법은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신체 성장 호흡, 쉽게 말해 키 크기 비법이었다.

저 호흡법은 물론 신체 성장에 가장 큰 효과가 있지만 원래는 육체를 강화하기 위한 비법이다. 잘 응용하면 저렇게 일시적으로 근력을 끌어 올릴 수도 있었다. 저 수준에 다다른 걸 보면 최소 10년 가까이 저 호흡법을 꾸준히 해 왔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애가 저렇게 무식하게 커버렸지!'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호흡법 운용을 해내는―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이 호흡법을 피해 왔으니까― 크리스틴을 보며 그는 한탄을 터트렸다.

제라드는 어린 테스론을 거두기 전, 대륙 여기저기를 떠돌며 짐 언브레이커블을 이을 인재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와중에 어린 크리스틴 역시 만난 모양이었다. 비록 짐 언브레이커블을 이을 정도는 아니어서 포기했겠지만, 아쉬운 나머지 뭐라도 하나 전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확실히 사부가 아쉬워할 정도 자질은 있는 것 같네.'

애초에 저 호흡법을 소화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재능이다. 저 호흡법은 아무나 배워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모두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이것만으로도 짐 언브레이커블은 떼돈을 벌었겠지. 키 작아서 서글픈 남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아이고, 사부....'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무조건 크면 클수록 좋은 줄 아는 제라드야 선의로 저 호흡법을 가르쳐 준 것이겠지만 결과는....

'앞날이 창창한 처녀 혼삿길 틀어막는 것도 유분수지!'

레펜하르트는 켕기는 심정으로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신장이 그 호흡법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 못 하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거 들켰다간 큰일 나겠네.'

실란을 그토록 피 말리게 했던 행위가 이번에는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랑의 눈길 대신 독 묻은 칼날을 들고서!

"그런데... 이게 지금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건가요?"

크리스틴이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손을 흔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아무 문제 없소!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요! 허허허!"

"그럼 결투를 계속하도록 하지요!"

"그럽시다. 빨리 결투합시다!"

갑자기 결투에 맹렬히 의욕을 보이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크리스틴며 실란, 시리스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든 빨리 화제를 바꾸고 싶은 레펜하르트가 바로 마법을 날렸다.

"날아오르는 칼날의 날개! 윙 커터!"

크리스틴도 마주 몸을 날리며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한껏 강화된 육체를 바탕으로 크리스틴이 맹렬히 공격을 가했다. 레펜하르트도 그때마다 침착하게 마법으로 받아쳤다. 폭염이 일렁이고 전격이 오가며 둘은 열심히 공방을 주고받았다.

상황은 당연하게도 레펜하르트의 절대적 우세였다.

명색이 마왕이었던 자다. 6서클 이하 마법을 구사하더라도 그 운용 수준은 10서클의 대마법사인 것이다. 아무리 오러 유저에 필적할 신체 능력을 지녔다곤 해도, 크리스틴의 실력으로는 레펜하르트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이 필적이지 그냥 근력만 비슷할 뿐 순발력, 동체 시력, 반사 신경, 스피드며 통찰력 등은 오러 유저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크리스틴은 용케 레펜하르트와 맞상대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죄 지은 것이 있다 보니 레펜하르트가 본격적으로 반격을 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달아 마법의 장벽으로 자신의 검격을 막아 내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크리스틴이 갑자기 악을 써 댔다.

"아아악! 왜 안 지는 거예요!"

"아니, 그럼 결투에서 상대가 꼭 져야 한단 말이오?"

"마법사답게 말만 잘하는군요! 그 감언이설로 저 순진한 실란을 꼬드겼겠지?"

당연한 대꾸를 했는데 그게 왜 말을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레펜하르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딱히 뭔 말 한 것은 없는데...."

그가 실란에게 한 짓이라곤 우람한 등짝을 보여 준 것뿐이다. 뭐, 그것도 따지고 보면 꼬드겼다고 할 수는 있겠다.

"이익! 내 사랑의 힘을 보여 주겠어요!"

신경질을 내며 크리스틴이 내려 베기를 연달아 시도했다. 바람 걸음의 주문으로 연신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해 내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니, 그 사랑의 힘이란 건 또 뭔데?"

"사랑의 힘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닥치고 결투나 계속합시다."

결국 레펜하르트의 에너지 볼트가 크리스틴의 복부에 정확히 명중하며 결투가 끝났다. 세심하게 위력을 조절한 그의 에너지 볼트는 정확하게 그녀의 육체를 마비시킨 것이다. 검을 떨군 채 쓰러진 크리스틴이 애써 머리를 들었다.

"으윽! 제, 제 패배로군요."

아무리 자기만의 세상에서 사는 그녀라 해도, 명확히 가려진 승패를 부인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기사니까.

레펜하르트가 뺨을 긁으며 더듬더듬 물었다.

"으음, 결투는 내 승리로군. 그럼 이제 그대는 실란을 포기하겠소?"

크리스틴이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이어 교단에서 파문을 당해도 저 정도로 절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크리스틴이 저 꼴이 된 것에 그의 무문도 지대한 공헌을 했으니 양심이 상당히 아팠다.

고개를 돌리니 저만치서 실란이, 무너졌던 하늘이 도로 복구된 걸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표정을 보니 아팠던 양심이 상당히 완치되어 갔다.

"그래요, 지금은 제가 물러날 수밖에 없겠지요...."

크리스틴이 처량한 시선으로 실란을 바라보았다.

"실란, 당장 힘이 모자라니 저 악적으로부터 당신을 구출하지 못하겠군요."

"내가 쟤 구속이라도 했냐?"

레펜하르트가 기가 차 소리쳤지만 물론 크리스틴은 듣지 않았다. 실로 가엾기 그지없다는 그녀가 울먹였다.

"아, 당신의 그 가녀린 몸이 저런 무자비한 남자에게 깔릴 것을 생각하면... 흑흑흑!"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기겁하며 동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상한 소리 돌 말 하지 마!"

"그래! 그런 일 없어! 나와 레펜 씨는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그렇죠, 레펜 씨?"

"너랑은 아무것도 나누고 싶지 않다만...."

"아, 막판에 판 엎을 거예요? 말 맞춰요!"

"그, 그렇지, 우리 가녀린 실란... 흑흑."

"울지 말고 웃어요! 자, 스마일!"

"...."

하지만 이미 병사들은 다들 그럴 법하다며 실란에게 힘내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반드시 돌아올게요! 그리고 꼭 당신을 구하겠어요, 실란! 흑흑흑흑!"

크리스틴이 눈물을 뿌리며 등을 돌리고 저택을 떠나 달리기 시작했다. 뒷모습만 보면 실로 배신당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가녀린 처녀였다. 물론 원근감이 상당히 뒤틀려 보인다는 것이 문제지만.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크리스틴은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실란을 돌아보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이제 뒷감당은 어떻게 할래?"

실란이 희희낙락하며 대답했다. 지금 실란은 그저 크리스틴이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천국의 자리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 ☆ ☆

어떻게도 되지 않았다.

실란의 희망이 통할 정도로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호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레펜하르트 공과 어린 성자님이...."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실로 잘 어울리는 분들이 아닌가!"

"풍류를 아는 분들이구먼, 허허허."

유벨 왕자군의 귀족들은 저마다 시간만 나면 이 갑작스러운 '스캔들'에 대해 떠들어 댔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전쟁 중이라 불안하던 이들이다. 전쟁의 공포를 잊기 위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재미있는 척 떠들어 대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겼으니 오죽할까? 다들 신이 나 수군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 역시 낳고 있었다.

"오오, 구원자께서 그런 취향이셨군!"

"그렇다더구려, 카다마이트 경. 역시 원래부터 그런 사이였을까?"

"글쎄, 그러고 보니 우리 도시에 있을 때부터 낌새가 보이긴 했던 것 같소만."

"호오, 역시."

핸드릭 백작의 저택 한쪽에서는, 인간 귀족과 드워프 오러 유저가 사이좋게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귀족들이 이종족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인 놀라운 위용에 생각을 바꾼 이들도 제법 있다. 이종족 전체에 대한 편견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함께 하는 이 이종족 전사들이 그들의 상식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어떻게든 드워프며 오크, 엘프들과 접근해 친분을 쌓아 보려 했다. 이종족들도, 비록 인간이라 해도 유벨 왕자군은 현재 같은 편이니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레펜하르트의 말을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족도 다르고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사이다 보니 서로 접근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뭔가 공통된 화제가 있어야 말을 꺼내고 그러면서 친분도 쌓고 그럴 텐데, 그 계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공통된 화제가 생겼다!

양쪽 모두에게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게다가 사랑 이야기는 종족과 고금을 막론하고 세인들의 흥미를 끄는 일이다. 오크며 엘프, 드워프들이 인간 귀족이며 병사들과 수다를 떠는 모습이 저택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인간, 남자끼리 사랑하나?"

"보통은 그렇지 않지만, 기사들은 미동美童이란 걸 거둔다고 하오."

"미동이 뭐지?"

"여자처럼 예쁜 아이요."

"모르겠다."

"어린 성자님 같은 아이요."

"오오, 잘카토 이해했다."

"그대 이름이 잘카토인 모양이군. 오크 전사. 나는 한스라고 한다오."

"나 잘카토, 그대 한스다. 알았다."

"하하핫! 어쨌거나 앞으로도 잘 지내 봅시다!"

일단 말문을 틔운 이들은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묻고 답하게 되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니 인간과 이종족들 사이에 쌓여 있던 보이지 않는 담장도 상당히 낮아졌다. 적어도 유벨 왕자군에 속한 이들에게는, 이제 이 이종족 전사들을 함께 목숨 걸고 싸우는 전우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펜하르트 님이 원하시는 꿈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죠. 안 그래요? 그러니 이제 좀 방에서 나오시죠?"

사각의 석실, 숙소로 배정된 그 침실에서 시리스는 방구석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곁에서 러스와 틸라, 타시드도 팔짱을 낀 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쏠린 방구석, 그곳에 한껏 쪼그려 앉은 레펜하르트가 있었다. 그는 지금 벽만을 바라본 채 연신 한숨을 내쉬며 세상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아아아...."

그리고 정확히 반대편 방구석에서, 똑같은 포즈로 똑같이 한숨을 쉬는 작은 적발의 소년도 있었다.

"에휴휴휴...."

눈앞의 위기를 넘긴 기쁨은 잠시, 실란도 비로소 자신이 무슨 가공할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아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들 앞에 얼굴 들고 다닐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다가 레펜하르트가 맹렬히 실란을 흘기며 뇌까렸다.

"다 너 때문이야!"

"아, 이제 와서 제 탓 한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실란도 마주 눈을 흘겼다. 날카로운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터지는 한숨.

"하아아아...."

"후우우우...."

이것이 요 며칠 레펜하르트와 실란이 계속 벌이고 있는 작태였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둔 시리스도 슬슬 걱정이 되어 두 사람을 달래러 온 것이었다.

시리스가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기, 레펜하르트 님."

사랑하는 연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펜하르트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시리스가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뭐가 걱정인가요? 애당초 실란이 워낙 예쁘장하니까 이런 소문이 일파만파 퍼진 것 아닌가요?"

러스도 옆에서 실란을 달래며 말했다.

"그리고 실란, 너는 그게 싫어서 매일같이 운동하는 것 아니었어?"

순간 쪼그려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그렇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의 저 헛소문들은 전부 그들의 너무 잘 어울려 보여서 신빙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깨 버리면 된다!

어떻게?

간단하지 않은가? 실란이 그 누구보다도 남자답고 우람해지면 된다!

레펜하르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실란!"

실란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레펜 씨!"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레펜하르트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특훈이다! 너를 강인한 사내로 만들어 주마! 믿어라! 너의 육체는 강철이 될 수 있다!"

"바라던 바입니다! 레펜 씨!"

실란도 두 눈 가득 의욕의 불꽃을 이글이글 태웠다. 필사의 각오로 두 사람이 방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당장 뒤뜰로 달려가 근육 단련 특훈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타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참 사이좋아 보인다."

"소문 더 퍼지겠네."

"그러게요."

틸라와 시리스도 헛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뭐, 어차피 소문이란 건 한때니까...."

러스가 두 팔을 으쓱거렸다. 당사자인 저 두 사람들은 못 느끼겠지만, 러스는 소문이란 것이 얼마나 수명이 짧은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난리를 치지만 며칠만 지나도 바로 사그라지는 것이 바로 소문이란 존재다.

빙그레 웃으며 러스가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어느새 상당히 실란에게 물들어 버린 러스였다.

제19장 진정한 왕

1

레단트 회전에서 대패한 카르사스는 패잔병 삼천에 왕도 수비군 이천을 합친 병력으로 수성전 준비에 들어갔다. 왕도 전체에 계엄령을 내리고 병력을 재편하고 왕도 수비 상태를 정비하며 그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냉철하게 전력을 재정비해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중립을 표방했던 귀족들이 대거 병력을 동원한 덕에 현재 유벨 왕자군의 전력은 일만에 육박했다. 카르사스의 인기 덕에 아직 병사들의 동요는 적은 편이었지만 민심은 달랐다. 이미 왕도의 시민들은 이미 유벨 왕자가 다음 국왕이 될 것이라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레단트 회전 사흘 뒤, 일만의 유벨 왕자군은 위풍당당하게 왕도로 진군했다. 왕도 크로틴은 삼중 구조로 세워진 도시. 제일 외곽에 시 전체를 두르는 성벽이 있고 안쪽에 왕성을 감싸는 외곽, 그리고 중심부에 왕궁을 방어하는 내곽 성벽이 세워져 있다. 왕도 남쪽에 진을 친 유벨 왕자군이 목소리 큰 병사들을 앞세워 고함을 질렀다.

"반역자 카르사스는 하늘의 뜻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았다! 이제 진정한 국왕 앞에 무릎 꿇고 문을 열어라!"

마법으로 증폭된 외침이 성벽 전체를 뒤흔든다. 이내 성벽 위에서 기사 한 명이 나타나 마주 소리쳤다.

"헛소리! 저 괴물들이 무슨 하늘의 뜻이란 말이냐! 유벨 왕자는 악마와 손을 잡았다! 이는 크로방스 왕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유벨 왕자야말로 지금 당장 병력을 해체하고 왕실의 명예를 더럽힌 죗값을 받아야 할 터이다!"

이어 마법으로 증폭된 욕설이 서로에게 오갔다. 본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어차피 싸울 건데 참 말들도 많아요들."

하지만 굳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 그가 마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저렇게 상대가 소리칠 때 별 헛짓 다 한다 싶어 대뜸 마법으로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레펜하르트 딴에는 마법사답게 그냥 쓸데없는 허식 빼고 얼른 본론 들어가자는 합리성에 기반한 행위였다. 그런데 그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괴물 같은 존재로 느껴진 것이다.

"같은 실수 또 할 수는 없지. 안 그래도 파격이란 파격 다 저질러야 할 처지인데, 맞출 수 있는 건 최대한 맞춰 가면서 싸워야지, 음."

이윽고 화려한 갑옷을 걸친 유벨 왕자가 진형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그리고 우렁찬 외침으로 개전을 선언했다.

"용사들아! 진정한 왕을 위해 그대들의 용맹을 떨쳐라!"

☆ ☆ ☆

"오오오오오!"

함성과 함께 사다리며, 갈고리 달린 밧줄을 든 보병들이 기세등등하게 성벽으로 달려갔다. 카르사스군에서도 북 소리가 울리며 지휘관들이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궁사대! 일제사격 개시!"

보병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오자 궁사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무수한 화살들이 죽음의 비가 되어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보병 선두에 선 고참병이 고함을 질렀다.

"전원! 방패 들어!"

방패 위로 화살들이 푹푹 박혀 간다. 개중엔 미처 막지 못한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모습도 보인다. 유벨 왕자군 측에서도 궁사대가 마주 응전했다. 화살비가 성벽으로 날아가며 카르사스군의 머리 위를 장악한다.

"화살이다!"

"성벽 뒤로 숨어!"

"후열 부대! 방패로 동료를 엄호해라!"

화살비로 인해 잠시 성벽 위의 공세가 주춤해진 틈을 타 보병들이 성벽 아래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다들 열심히 사다리를 놓고 갈고리 밧줄을 던져 댔다.

하지만 역시 카르사스군의 훈련도는 높았다. 화살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다들 U자형 장대로 사다리를 밀고 창칼로 밧줄을 잘라 가며 방어에 열심이었다. 결코 쉽게 성벽을 내주는 이들이 없었다.

그러나 유벨 왕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보병들의 공성전은 미끼였을 뿐, 진짜 전력은 따로 있었으니까.

유벨 왕자가 다시 손짓을 했다. 푸른 깃발이 번쩍 올라가 신호를 보냈다.

"부탁합니다! 여러분!"

왕자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제부터 등장할 이들은 모두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했으니까!

"으하하! 가자! 마누라!"

호쾌한 외침과 함께 다이어울프를 탄 거구의 오크가 대검을 뽑아 들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을 꿰뚫으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스탈라도 유쾌한 듯 마주 고함을 지르며 다이어울프를 몰았다.

"안 그래도 가고 있수! 남편!"

세 드워프 오러 유저들도 저마다 찬란한 빛을 뿌리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다들 노획한 준마 위에 그 짧은 몸통을 얹고 용맹무쌍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우, 이거 멀미 나는데, 말로이드?"

"이거 계속 타고 가야 되오?"

"말 타고 가야 폼 난대요. 그냥 좀 타고 가소!"

뭐, 대화는 그리 용맹해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블레이드 오러 휘두르고 있는 시점에서 용맹은 충분해 보인다. 기마술 자체는 어설펐지만 오러 유저의 균형 감각은 일반인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한다. 다들 처음 타 보는 말 위에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고 성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들 잘 타시면서 왜 그럽니까? 하하핫!"

푸른 오러를 안개처럼 피우며 러스도 말을 몰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풀 플레이트 차림으로 완벽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로 천상에서 내려온 장수 같은 기세로 러스가 남문을 향해 돌격했다.

"오러 능력자들이시다!"

"사이러스! 사이러스!"

"오오오!"

함성과 함께 눈부신 여섯 섬광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러스와 이종족 오러 유저들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돌진을 시작한 것이다.

"젠장! 역시 저렇게 나오는군!"

성벽 위 보루에서 지휘하고 있던 카르사스가 인상을 썼다. 결국 유벨 왕자군이 오러 능력자를 꺼냈다. 자신 역시 똑같이 했을 것이기에 당연히 상대의 전법도 예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갈며 카르사스가 고함을 질렀다.

"화살을 쏴라! 저 악마들을 맞추는 자에게 금화 백 닢을 내리겠다!"

화살 비가 여섯 섬광을 향해 쏟아졌다. 칼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뭇가지에 깃털 달았다고 매의 발톱이 되느냐? 가소롭도다!"

2미터짜리 대검이 거대한 빛의 원을 머리 위로 그린다.

우우우웅!

녹색 오러가 하늘 위로 뿜어져 나가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쳐 내 버린다.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박살난 화살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다른 오러 유저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화살 정도로는 결코 저들의 진격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투, 투창을 던져라!"

지휘관 중 하나가 덜덜 떨며 고함을 질렀다. 투창은 화살과 달리 두꺼운 기사들의 갑옷도 뚫을 수 있기에 수성전을 벌일 때 유용하게 쓰이는 무기다. 하지만 역시 소용은 없었다.

"화살 좀 두꺼워졌다고 뭐가 달라지나? 허허허!"

슬로이틀이 망치를 번쩍 들어 올리며 오러를 크게 펼쳤다. 섬광이 회오리치며 거대한 빛의 장막이 되어 투창들을 모조리 쳐 냈다. 이들 입장에서는 화살이나 투창이나 그게 그것이다. 솔직히 투창이 큰 만큼 도리어 막기도 쉽다.

단숨에 전장을 돌파한 러스가 두꺼운 성문을 바라보며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아앗!"

말을 몰며 러스가 롱 소드를 머리 위로 치켜 들었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점점 더 응집되며 거대해진다.

"저, 저건!"

거의 10여 미터에 달하는, 숫제 빛의 기둥이 되어 버린 오러를 보고 카르사스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스피리어스 경의 기간틱 블레이드가 아닌가!"

지금 러스가 선보이는 저 기술은, 전신의 오러를 계속 응축해 오로지 순수한 파괴력만으로 바꾸는 스피리어스의 절기였다. 카르사스를 호위하던 스피리어스 경이 기막혀하며 이를 갈았다.

"저! 저놈! 저놈이 남의 기술을!"

스피리어스 경의 표정이 한없이 일그러졌다. 저거 익히느라 2년이 넘게 걸렸는데! 무수한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며 겨우 만들어 낸 자랑스러운 기술인데! 그걸 한번 보고 베꼈단 말인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타아앗!"

우렁찬 기합을 터트리며 러스가 검을 내리쳤다. 허공을 꿰뚫은 빛의 기둥이 무너지며 성문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폭음이 울리며 성벽 전체가 흔들렸다. 단 일격에 마법으로 강화된 두꺼운 성문이 박살이 나며 파편이 날렸다. 파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테이블 이상의 크기였다. 날려간 파편이 집이며 벽을 강타해 대참사가 일어났다.

"으아악!"

"커어억!"

폭발에 휩쓸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러스가 이번엔 오러의 기둥을 가로로 휘둘렀다. 빛의 기둥이 목책과 병사들을 쓸어 가며 대지를 파헤쳤다. 흙먼지가 일며 피와 비명이 아우성친다. 단 일격으로 거의 20미터 가까운 거대한 크레이터를 만든 러스를 보며 병사들 모두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악!"

"도망쳐!"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잖아!"

성벽 밑으로까지 달려간 칼켄이 러스의 활약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오, 카루가 러스! 제법 호쾌하게 한 방 날렸구먼! 그럼 어디 나도...."

칼켄이 다이어울프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아우우우우!

칼켄의 애랑, 푸른 번개가 길게 울부짖으며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단숨에 성벽의 절반 높이까지 뛰어오르자 칼켄이 대뜸 성벽에 대검을 찔러 댔다.

"좀 높지? 이거 밟아라!"

마치 치즈라도 된 것처럼, 대검이 성벽에 쑤욱 박힌다. 다이어울프가 그 대검을 밟고 재차 점프했다. 날아오르며 칼켄이 손가락질을 하자 대검이 알아서 뽑히며 허공을 날아 그에게로 돌아갔다.

거대한 늑대와 거대한 오크가 성벽 위를 가득 장악한다. 태양을 등진 두 괴물의 그림자가 병사들의 머리 위로 길게 드리운다.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칼켄이 히죽 웃었다.

"자, 나도 뭔가 좀 보여 볼까!"

대검이 허공을 찔렀다. 찬란한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파괴의 힘을 담아 일렁인다. 칼켄이 검을 내리쳤다.

"벼락 떨구기!"

녹색 벼락이 성벽을 후려갈겼다. 대기가 찢어지며 처절한 뇌성의 비명을 터트린다.

우르르릉!

섬광이 성벽을 관통하고 대지까지 파괴의 여파를 꿰뚫었다. 성벽 전체가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폭발을 일으켰다. 누런 흙먼지 사이로 박살 난 성벽의 잔해가 확연히 드러냈다. 수백 년간 왕도를 수호했던 그 굳건한 성벽이 지금 생일 만난 케이크처럼 서걱서걱 잘도 베여 버린 것이다. 투석기를 일제히 발사해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이것이 오러 능력자의 힘인가...."

애써 성벽 아래까지 말을 몬 드워프 오러 유저들 역시 비슷한 짓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말을 버린 그들은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성벽을 타고 올라 여기저기를 오러로 신 나게 두들기는 중이었다.

오러 실린 망치며 도끼가 성벽을 때릴 때마다 성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린다. 굳이 병사들을 노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다들 도망가거나, 무너진 성벽에 깔려 생매장되어 죽어 가고 있었다.

"다들 잘하네."

다른 오러 유저들을 보며 스탈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하기 전,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이 저것이었다.

-되도록 화끈하게!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성벽을 무너트려 주십시오. 굳이 병사들을 노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성벽만 무너트리세요.

전생에서 성벽 무너트리기로 짭짤하게 재미를 본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한 것이다. 뭐, 굳이 병사들을 안 노려도 이미 인명 피해는 세 자릿수를 넘기고 있었다. 스탈라가 성벽을 바라보며 잠깐 인상을 썼다.

'음, 난 어쩔까나....'

애초에 무식하게 힘만 추구하는 칼켄, 대지 공명의 힘을 쓰는 드워프들, 남의 기술 잘도 빼먹는 러스라면 모를까 사실 보통 오러 유저들은 저렇게 성벽을 무너트릴 정도로 엄청난 기술은 잘 쓰지 않는다. 쓸 재주도 보통은 없고, 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 잡는 데 저런 파괴력만 무식하게 높고 피하기는 쉬운 기술을 연마할 이유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까운 성벽을 왜 굳이 부수겠는가? 오러 유저라면 그냥 성벽 위로 날아올라서 근처 병사들 싹 죽이고 그 지역을 점거해 버릴 수 있는데.

'하지만 남들 다 하는데 나만 못한다고 하긴 또 쪽팔린데.'

스탈라의 실력이 저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오러를 운용하는 방식에서, 그녀는 무식한 파괴력보다는 섬세함과 정확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현 시대의 대다수 오러 유저들이 그렇듯이.

잠깐 고민하던 스탈라가 문득 눈을 빛냈다. 생각해 보니 방법이 있었다. 그녀가 차갑게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가라! 나의 열두 자매여!"

오러를 머금은 열두 단검이 섬광이 되어 발사되었다. 그 기세만으로도 대기가 갈라지며 폭풍을 일으켜 바닥을 파헤친다. 열두 줄기 섬광이 대지를 파헤치고 허공을 갈라 성벽 여기저기에 틀어박혔다.

쾅쾅쾅쾅!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성벽 여기저기가 흔들렸다. 스탈라가 그 상태로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울부짖어라! 나의 자매들!"

우우우웅!

성벽에 박힌 단검들이 일제히 귀곡성을 울리며 흔들린다. 단검에 실린 오러가 서로 공명하며 성벽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성벽뿐 아니라 근처 대지,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카르사스의 보루까지도 요동을 쳤다.

"으윽!"

"이건 또 뭔가!"

스피리어스가 욕설을 흘리며 카르사스를 부축할 때였다. 갑자기 성벽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르릉!

성벽 여기저기 박힌 스탈라의 단검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성벽의 구조 자체를 무너트린 것이다. 거의 100여 미터에 달하는 그 넓은 성벽이 일제히 붕괴하며 누런 뭉게구름을 피워 올렸다. 스탈라 혼자서, 다른 오러 유저들 전원이 일으킨 것만큼의 파괴를 보인 것이다.

칼켄이 조금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헐? 마누라가 저런 것도 할 줄 알았어?"

드워프들도 입을 동그랗게 말고 감탄을 터트렸다.

"오, 저 파괴 공법 신선하다."

"그러게, 오크들도 건축학에 재능이 있나?"

"저 아줌마 나중에 건물 철거할 때 부르면 되게 좋겠다."

그리고 러스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싸, 또 하나 건졌다. 저건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할 수 있겠는데?"

여섯 오러 유저들의 만행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왕도 크로틴의 남쪽 성벽은 더 이상 성벽이 아니게 되었다. 카르사스가 암담해하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나올 줄이야."

성문이 부서졌다거나, 성벽이 점거되었다거나 하면 그에 상대할 전법이 있다. 하지만 아예 성벽을 통째로 무너트려 버리니 대책이 없다. 스피리어스 경이 이를 갈았다.

"죄송합니다. 한두 놈이면 제가 어떻게 상대해 보겠습니다만...."

스피리어스 경은 현재 카르사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저 오러 유저들이 카르사스의 목숨을 노린다면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카르사스가 혀를 차며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어떻게든 수성전을 피하려 한 것이거늘...."

평야에서 회전會戰 형태로 전투를 벌인다면 오러 유저의 숫자가 부족해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전투 내내 전신 방어에 오러를 집중시킬 수는 없다. 육체를 그토록 무식하게 단련하는 집단은 대륙이 넓다 해도 짐 언브레이커블 하나뿐, 보통 오러 유저들은 집중력이 흐트러진다거나 피로가 쌓이면 눈먼 화살이나 검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해전술로 밀고 나가면 일반 기사들도 오러 유저를 해치울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 막대한 피해가 나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공성전 형태를 취하면 대책이 없다. 일단 다수로 밀어붙일 수도 없고, 오러 유저의 운동 능력으로 건물과 엄폐물 사이를 오가면 화살도 별 쓸모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왕궁으로 후퇴합시다."

"그래야겠군...."

스피리어스 경의 제안에 카르사스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이 완전히 무너졌으니 수성전이고 뭐고 없었다. 잽싸게 왕성으로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때, 놀랍게도 오러 유저들과 유벨 왕자군이 일제히 물러났다.

"응?"

"어째서 다 이긴 싸움을 스스로 물리는 거지?"

의아해하는 카르사스군을 뒤로한 채 유벨 왕자군이 본진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다시 전령이 나와 소리쳤다.

"반역자여! 그대의 목숨은 이미 유벨 왕자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 우리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이대로 왕성까지 진격할 수 있음을 이미 느꼈을 터!"

카르사스는 할 말이 없었다. 저쪽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복잡한 왕궁으로 후퇴하면 오러 유저들이 더더욱 설칠 수 있는 자리만 마련해 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국왕으로서 어찌 왕도의 시민들을 위험에 빠트리겠는가? 그대가 진정 저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스스로 백기를 올리고 굴복하여 심판을 받을지어다!"

카르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렇게 나오다니...."

유벨 왕자는 단순히 승리뿐이 아니라 카르사스가 가졌던 인기마저도 모조리 빼앗을 셈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카르사스는 왕도의 시민을 인질로 삼는 것이 되어 버린다.

물론 카르사스도 시민을 인질삼아 농성하는 걸 생각 안 해 보진 않았지만, 유벨 왕자의 성품상 시민들의 안전 따위는 별로 신경 쓸 것 같지 않아 작전을 폐기했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자기들이 시민을 인질삼아 카르사스를 협박하고 있다.

'대체 어떤 악랄한 인간이 이런 수법을 생각해 낸 것인가?'

'카르사스 성품상, 저런 소리 듣고도 수성전을 벌일 인물은 못 되지.'

악랄한 인간, 레펜하르트는 박살 난 크로틴 성벽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이미 카르사스의 성격을 모두 알고 있기에 일부러 이런 작전으로 나온 레펜하르트였다. 이렇게 하면 피해도 줄일 뿐 아니라 유벨 왕자의 인기도 상당히 올라가는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백성의 피해를 먼저 생각하는 왕자!

이 정도면 그동안 떨어졌던 유벨 왕자의 평판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레펜하르트 공은 진정 현자인 것 같소. 카르사스의 성격상 저런 소리 듣고도 계속 성안에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터, 아무래도 이 전쟁은 내 승리인 것 같구려."

유벨 왕자가 레펜하르트의 현명함을 칭찬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딱히 그가 전략, 전술에 뛰어나다기보다는 전생의 정보를 써먹었을 뿐이니 머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오닌 백작도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일단 지드린 자작의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이 정도 힘의 차이를 보았으니 저들도 곧 항복할 터, 굳이 이 이상의 피를 흘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유벨 왕자군은 절망에 빠진 카르사스를 뒤로한 채, 당당히 깃발을 올리고 왕도에서 물러났다.

완벽한 승리였다.

2

왕도 크로틴의 왕성 내 집무실.

한때 국왕이 왕국의 업무를 보았던 그곳에서 지금 여러 귀족들이 하나같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올해로 50세가 되는 건장한 장년인, 페르난도 공작이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시오, 카르사스 공자? 지금 우리에게 승기를 잡을 방법이 있겠소?"

페르난도 공작은 아들인 카르사스에게도 반공대의 어법을 쓰고 있었다. 왕위 계승자다운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마주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 브로젠 후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허, 난 모르겠소. 저 비천한 것들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오러 유저다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잖소?"

다들 성벽을 박살 낸 이종족 오러 유저들의 힘에 질려 있는 상태였다. 유능한 기사이며 지휘관이었지만 그 공포스러운 위업 앞에서 머리가 제대로 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직도 제대로 도는 카르사스조차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전력이 나온 것인지...."

여섯 명의 오러 유저라면 그냥 일국의 전력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놀라운 기책을 낸다 해도 통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귀족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타진했다.

"저들은 오만한 것인지 왕도 크로틴을 포위하지도 않고 물러났습니다. 일단 여기서 후퇴해 후일을 도모함이 어떠한지...."

카르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저들은 이미 인장과 왕관을 가지고 있어요. 신성한 홀을 빼앗기는 순간 유벨 왕자는 즉위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왕도를 빼앗기는 그 순간이 바로 패배를 의미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저들도 그걸 알고 안심하고 물러선 것이겠지요."

"그건 저도 알지만, 그렇다고 현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일단 물러나서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한편 차탄 공국이나 바실리 왕국에 도움을 청하면...."

카르사스가 일견의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랬다간 타국의 참전을 허용해 버리는 것, 우리가 이긴다 해도 크로방스 왕국은 몰락하게 될 겁니다."

유구한 크로방스 왕국의 역사에 타국의 간섭을 허용하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그러자 의견을 꺼낸 귀족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하지만 안 그러면 카르사스 님이 몰락하실 겁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카르사스는 그 속에 담긴 진의를 금세 읽어 냈다.

'정확히는 자신들이 몰락할 거란 소리겠지.'

나라를 팔아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챙기겠다는 그 말에 경멸조차 느껴진다. 카르사스의 표정에 귀족이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은근 그 생각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외조부조차도!

"후우...."

카르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언정 크로방스 왕국을 다른 나라에 팔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세력들은 다른 것이다.

그때 브로젠 후작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역시 그 더러운 왕자를 암살했어야 해."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 않습니까?"

카르사스 군은 이미 수차례나 유벨 왕자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왕국을 내전으로 몰아넣는 것보다는 희생이 덜하기에 카르사스도 그것에 대해서는 별 반감이 없었다.

하지만 암살 시도는 죄다 실패했다. 유벨 곁에 있는 피니아가 모두 가로막은 덕이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피니아는 아무리 신분을 숨기고 접근을 해도 암살자를 귀신같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암살자에게 처음부터 성에 잠입, 가로막는 경비들을 해치워 가며 유벨 왕자를 죽이라고 명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이야 이름난 암살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에게 접근해 슥 죽이고 바람처럼 떠나가는 줄 알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애초에 암살자가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뭐하러 암살자 노릇을 하겠는가? 그냥 아무데나 가도 기사 자리 하나쯤은 꿰찰 수 있을 텐데.

"그 정도 실력이 되고 또 믿을 수 있는 자라면 역시...."

귀족들이 일제히 스피리어스 경을 바라보았다. 단신으로 몸을 숨기고 잠입해 유벨 왕자의 목을 따 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역시 오러 유저인 그밖에 없었다.

페르난도 공작이 간청하며 물었다.

"스피리어스 경, 정녕 안 되겠소?"

안 그래도 예전부터 스피리어스에게 은근 이런 요구를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스피리어스는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아무리 패악무도한 자라 하나 폐하의 피를 이은 자입니다. 기사로서 그런 불충을 저지를 순 없습니다."

귀족들이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고지식하게 구는 스피리어스 경에 대한 비난이 섞인 한숨이었다.

그때 스피리어스 경이 표정을 바꾸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암살이란 면에서는 동감입니다."

"음?"

카르사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피리어스 경이 눈을 빛냈다.

"유벨 왕자가 아니라, 그 정체 모를 마법사 레펜하르트를 암살합시다."

어떤 사소한 정보라도 전부 수집하라 명했던 카르사스였다. 저 정체불명의 이종족들을 이끌고 온 것이 레펜하르트란 사실쯤은 전해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저 노예들은 그 마법사에 의해 저렇게 날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를 해치우면 저들도 다시 온순한 본성을 되찾을 것입니다."

카르사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그럴까?'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냥 마법으로 탄생했다고?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가 본 저 이종족들은 결코 조종당하는 이들로 보이지 않았다. 사람 보는 안목만큼은 자신 있는 카르사스였다. 저들 모두가 확실하게 자기 의지로 결정하고 이 전투에 참가하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모두들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그것 묘안이오!"

"저 괴상한 것들만 사라지면 희망이 있지!"

"저것들 때문에 상황이 이리 된 것이니!"

잠깐 고민했지만 카르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시도해서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정말 마법사를 죽여 이종족들이 얌전해지면 더 바랄 나위가 없고, 만약 실패한다 해도 지금 상황은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것이다.

단지 걱정되는 것이라곤....

"하지만 혹시 스피리어스 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카르사스는 스피리어스가 전장의 기사가 아닌, 암살자로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스피리어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르사스 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암살에 실패하더라도 제 한 몸 빠져나올 실력은 됩니다."

그때 브로젠 후작이 다른 걱정을 꺼냈다.

"하지만 스피리어스 경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쪽에서 암살을 노리면?"

스피리어스는 오러 유저가 카르사스 암살을 노릴 것을 대비해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저쪽에서 암살을 노린다면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스피리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지키고 있어도 오러 유저가 둘 이상 쳐들어오면 암살을 못 막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으음...."

러스에게 패한 것이야 실수라고 우겨도, 상대는 오러 유저가 여섯이나 있다. 저쪽이 작정하고 암살을 시도하면 스피리어스가 곁에 있건 없건 카르사스는 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군요, 내 목은 이미 반쯤 떨어져 있는 거였군."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피리어스 경, 죄송스럽지만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스피리어스가 각오를 다지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결코 카르사스 님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 ☆

핸드릭 백작 성을 떠난 유벨 왕자군은 현재, 왕도 외곽에 위치한 지드린 자작의 별장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지드린 자작의 별장 저택은 왕도 인근에 위치하고 주변에 막사를 설치할 넓은 지대가 있으며 숲과 샘도 가까워 숙영지를 설치하기에 최고의 조건이었다.

그날 저녁, 유벨 왕자는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 모든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주어졌고 귀족과 기사들도 지드린 자작의 저택에 모여 화려한―하지만 귀족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조촐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연회부터 여는 것이 조금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도 다 필요한 행위였다. 지금 유벨 왕자군은 중립 귀족들이 대거 참가해 거의 일만에 가까운 병력이 되어 있었다. 기존의 세력들과 저 중립 귀족들 간의 화합을 위해서도 이런 형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상석에 앉은 유벨이 벌떡 일어나 황금 술잔을 들고 외쳤다.

"크로방스 왕국의 미래를 위해 뜻을 함께해 준 그대들을 치하합니다! 오늘의 승리는 모두 그대들 덕분이니,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테이블에 앉은 귀족과 기사들이 일제히 잔을 들어 화답했다.

"진정한 왕을 위하여!"

곧바로 은 식기에 담긴 푸짐한 술과 고기가 이어졌다. 하인들이 열심히 음식을 나르고 하녀들이 테이블을 오가며 시중을 든다. 전쟁 중의 연회이니 무도회 같은 우아한 분위기는 아니다. 다들 갑옷을 걸친 채 술과 음식을 즐기는 전장의 잔치였다.

단숨에 연회장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리에 앉으며 유벨이 곁의 레펜하르트에게 중얼거렸다.

"말은 이렇게 했다만, 솔직히 저들이 뭘 했다고 치하하는지 참...."

이미 유벨 왕자군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된 레펜하르트는 당당히 왕자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레펜하르트도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대꾸했다.

"...한 게 없으니까 더더욱 치하해야 하는 겁니다."

정말로 오늘의 전투에서 저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한 것은 거의 없다. 귀족들은 미끼 역할을 한 보병들을 차출한 것이 전부고, 기사들은 그냥 말 타고 서 있다가 돌아온 것이 전부다. 실제 전투는 오러 유저들이 전부 도맡아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런 요식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저들에게도 공을 돌려놓아야 이종족들에게 가는 시기와 질투가 줄어들 것이기에.

레펜하르트는 태연하게 잔을 들며 이번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전투에서 빛을 발한 이들만을 찬양하지만 현명한 이들이라면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법이지요. 저의 동맹들이 강렬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그 뒤에 용맹한 기사들과 귀족 여러분의 병력이 위풍당당하게 포진해 있지 않았다면 어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있기에 진정 저 반역자들에게 위압을 가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다들 들으라고 대놓고 큰 소리로 뱉은 말이었다. 술을 마시고 있던 귀족이며 기사들이 반색을 하며 떠들어 댔다.

"레펜하르트 공께서 저희를 이리 띄워 주시니 부끄럽군요! 하하하!"

"그렇지! 어리석은 자들과 달리 레펜하르트 공은 전쟁에 대해 잘 알고 계시구려!"

"범인은 보지 못하는 곳을 확연히 보고 있으니 과연 현자시오! 하하하!"

귀족이며 기사들도 사실은 이 축하연에 대해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이 없다는 것은 자신들이 더 잘 아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자신의 공을 내세워 모두를 찍어 눌러도 솔직히 할 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는 속 시원하게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자신들 역시 전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았다. 한층 홀가분해진 얼굴로 귀족이며 기사들이 잔치를 즐기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한층 호감도가 올라갔음은 물론이다.

분위기가 바뀌는 걸 보며 유벨이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마법사라고만 듣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감각도 훌륭하지 않은가? 안 그래도 그의 존재로 인해 꺼림칙해하는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표정들을 보니 다들 불만이 상당히 사라진 모습이다.

'헤에, 이건 진짜 배워야겠네.'

유벨의 왼쪽에 앉은 페오닌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레펜하르트 공은 젊은 나이임에도 사람 대하는 법이 능숙하군. 이 페오닌, 진심으로 감복했소. 허허허!"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술잔을 마주 들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별로 젊지도 않거든?'

전생에 황제씩이나 해먹던 몸이다. 뭐, 어지간한 것은 마법으로 눌러버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사람 마음이란 건 다 거기서 거기다. 문화와 풍습이 아무리 달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리 변하지 않는다.

'남 잘되는 것 보고 배 아파하는 건 다 똑같지, 뭐.'

술잔을 홀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연회장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인간들 말고도 오크와 드워프, 엘프들의 우두머리급도 연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오크 측에서는 칼켄과 스탈라, 무기아비인 그랄타가 인간들 사이에서 고기를 뜯는 중이었고 드워프들은 세 오러 유저가, 엘프 측에선 단하임 일족의 족장인 렐하드가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 엘프를 대동한 채 우아한 태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인간도 이종족들도 모두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둔 상태였다.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 어린 성자, 실란이었다.

"칼켄 공, 이분은 크로방스 왕국에서도 명성 높으신 할튼 자작이십니다. 할튼 자작, 푸른 곰 부족의 족장이신 칼켄 공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칼켄 공. 할튼입니다."

"나도 반갑소, 할튼 자작. 칼켄이라 하오."

현재 칼켄은 대단히 유창한 공용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목에 걸려 있는 마법기, '의사 전달의 목걸이' 덕분이었다. 수준 높은 번역 주문이 걸려 있는 이 마법의 목걸이는 레펜하르트가 전쟁 틈틈이 짬을 내 만든 것으로, 오크어를 거의 완벽하게 공용어로 바꾸어 주었다.

레페하르트는 언어라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인간과 접촉이 많은 고위 계급 오크들에게는 빠짐없이 저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마력과 재료, 시간이 모자라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에게만 선물했지만....

'여건이 되면 빨리 대량 생산해서 적어도 오크 전사들에게는 하나씩 걸어 줘야지.'

그리고 인간 귀족들은 난생 처음 '유식한' 오크를 만나 컬처 쇼크에 빠져 있었다.

"고, 공용어에 능숙하시군요."

"레펜하르트 형제가 좋은 선물을 했지. 말이 제대로 통하니 나도 즐겁다오. 허허...."

"귀공의 부하들은 오크답지 않게 굉장히 용맹하더군요."

오크답지 않다는 소리에 칼켄이 막 인상을 찌푸리려는 찰나였다. 스탈라가 잽싸게 끼어들어 말을 받았다.

"호호, 그것이야말로 진정 오크다운 모습이랍니다. 우리들은 전사를 숭상하고 비겁자를 경멸하지요. 할튼 자작은 실로 용맹한 분이니 저희들도 기쁘게 사귈 수 있군요."

"하하, 이거 부인께서 이 모자란 이의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오러를 다루는 부인이 보기에 어찌 제 기량이 눈에 차겠습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적당히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할튼 자작이 다른 이들과 안면을 넓히려 잔을 들고 떠났다. 칼켄이 여전히 호탕하게 웃는 얼굴로, 오크어를 중얼거렸다.

"오크답지 않다니, 열받네. 게다가 저런 부실한 놈이 무슨 전사?"

"어차피 이런 소리 나올 줄 미리 들었잖소? 술이나 드시구려."

"그래야지, 쩝."

우아한 스탈라의 대응은 전부 레펜하르트의 반복 학습 덕분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전생에서 인간들이 오크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질릴 정도로 경험해 본 레펜하르트였다. 이번엔 아예 연회 전에 이종족 우두머리들을 모아 놓고 리허설(?)까지 열어 가며 인간을 상대하는 법을 교육시켰다.

-인간에게 많은 걸 바라지 마세요. 저놈들, 어차피 당신들 이해 못 합니다. 그냥 그려려니 하고 맞춰 주세요.

처음에는 다들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크로서, 드워프로서, 엘프로서 자신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이들이다. 어찌 인간들을 상대로 그들의 문화와 풍습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레펜하르트도 그들의 의견 자체는 옳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 그랬다가 결국 마왕으로 불리고 대륙 왕창 태우고 제국 홀딱 말아먹었다. 같은 실패를 또 할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는 간신히 그들을 달래며 찬찬히 이유를 댔다.

-다 억압받는 그대들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대륙이 인간의 것임은 다들 인정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것을 주장하려면 우선 남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쪽이니 일단 저들을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이쪽을 이해시키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자 드워프들은 구원자가 빈말할 리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엘프들도 합리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현 상황이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님을 바로 인정했다.

하지만 오크들은 반발했다.

-전사로서의 자긍심이 있거늘 어째서 우리가 인간들에게 맞춰야 한단 말이오?

칼켄이나 스탈라, 그랄타는 여전히 레펜하르트의 제안을 못마땅해했다. 단순 명쾌한 사고를 지닌 오크들에게 저 행위는 영 비겁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 수많은 오크들을 다뤄 본 레펜하르트였다. 이럴 경우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쯤은 지겹게 숙지하고 있었다.

-쟤들이 땅 주잖아요.

오크들도 식량 챙겨 온 전사들을 칭송하지 않느냐? 지금 가르쳐 주는 것은 땅 주는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간들의 방식이다. 댁들 방식으로 칭찬했다간 인간들은 모욕으로 여긴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칭찬해야 할 상대를 제대로 칭찬하지 않는 것 또한 전사로서 불명예가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결국 오크들도 레펜하르트의 말이 타당함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랐다.

사실 정말 힘든 것은 그 이후였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저놈들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 못 한다고 잔뜩 폄하하긴 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사실 이종족들에게도 그런 면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이종족들이라고 뭐, 인간들을 그리 쉽게 이해하겠는가?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다. 자신과 다른 이를 기피하고 이해 못해 꺼려하는 것은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별 차이 없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 꺼내면 저렇게 대답해라, 저런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답해라 등, 일일이 주입식 교육을 통해 어휘를 골라내느라 진땀을 뺐지, 음.'

어색하게나마 귀족이며 기사들을 상대하는 오크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뿌듯해했다.

교육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저런다고 저들이 서로를 진정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저것이면 된다. 저러다 보면 인간들도 이종족에 대해 이해는 못 해도, 인정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종족들의 문화도 서서히 인식이 되리라.

'그러다가 인간들의 문화에 오염될 가능성도 많지만 그것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고.'

한 종족의 문화와 전통, 정신까지 모두 레펜하르트가 챙길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잘할 것이라 믿을 수밖에. 그는 어디까지나 판을 벌일 뿐, 거기서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저들의 몫이다.

'예전엔 내가 주사위 던지고 판돈까지 거는 바람에 망했지. 이번엔 좀 더 저들을 믿어야지.'

따듯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연회장 내의 이종족들을 바라보았다. 실란은 미리 언질받은 대로 연회장 여기저기를 바쁘게 누비며 종족들 사이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었다.

"이쪽은 그랜드 포지에서도 손꼽히는 전사인 카다마이트 경입니다. 카다마이트 경, 크로방스 왕국에서도 무명이 높으신 기사, 드란 경입니다."

이종족 수장들이 열심히 대사(?) 외우는 동안 실란도 놀지는 않았다. 미리 유벨 왕자군의 수많은 귀족들의 신상명세를 외우느라 진땀을 빼야했던 것이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자연스럽게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있는 실란이었다.

"오오, 테츠발트 경의 목을 벤 바로 그 용사시구려!"

"허허, 운이 좋았을 뿐이오. 자, 한잔 합시다!"

"오러 유저의 잔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카다마이트와 드란 경이 사이좋게 술잔을 건넨다. 이후 적당히 이야기를 진행시킨 실란이 또 한 건 올렸다는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그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이 숙덕거렸다.

"저분이 레펜하르트 공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그렇다더구려.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 음음."

"호오? 대체 어떤 분위기였기에?"

"시간만 나면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져서는, 땀범벅이 된 채로 돌아오곤 했소. 대체 뭐 그리 둘이 땀 흘릴 일이 있었는지...."

"그렇군! 역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구려!"

근육을 탐닉하는 자신의 뜨거운 노력이 어떤 가공할 소문으로 퍼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실란은 그저 좋다고 또 다른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고 있던 레펜하르트로서는 실로 우울한 광경이었다.

'으윽, 실란이 잘 하고 있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저건 좀....'

어쨌거나 사이좋아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레펜하르트는 애써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엘프들은 놔둬도 잘 하고 있네.'

렐하드와 부관인 엘프 사내는 굳이 실란이 끼어들지 않아도 상당히 잘 어울리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조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엘프들은 인간들의 문화에도 금세 적응했다. 적당히 맞장구 치고, 불쾌한 말을 들어도 우아하게 상대의 말을 교정해 주는 등, 실로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반면 러스는....

"스피리어스 경과의 전투를 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무위를 지니게 되셨는지?"

"수련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어떤 식으로 수행하셨기에 그런...."

"검을 휘둘렀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기사의 검술을 함부로 물어보는 것이 아닌데."

"...."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하고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친 러스는 이 연회의 주역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를 다지고 싶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 차가운 인상의 검사는 결코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딱딱한 얼굴로 묻는 말에만 싸늘하게 대꾸하는 러스의 태도에 다들 눈치만 볼 뿐 함부로 다가가질 못했다.

'러스 경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오.'

'으음, 이런 연회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가?'

'그렇겠지. 진정한 무인이 검 대신 잔을 들었으니 불쾌할 법도 하잖소.'

'역시 오러 유저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많다더니.'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혀를 차고 있었다.

'아이고, 저 자식.'

그동안 꽤나 밝아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도로 옛날처럼 냉혹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연 오러를 각성한 검사답게 한 자루 벼려진 칼날 같다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왜 저리 낯가림이 심해?'

사실 러스는 정말 성품이 차갑다기보다는, 워낙 테네스 백작가에서 천덕꾸러기였던 신세라 평소 사람 대하는 것이 서투르다는 것이 옳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이종족들을 상대하기가 편하다. 어차피 종족이 다르다 보니 오해 살 태도나 발언을 해도 그냥 '종족 차이려니~.' 하고 다들 넘어간다. 인간들 대할 때처럼 자신의 태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러스는 홀로 고고하게 연회장 한쪽을 장악하고 고요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반감 같은 것 없이 다들 그럴 법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반 기사가 저렇게 굴면 그냥 왕따인데, 오러 유저가 저러고 있으니 저것조차도 신비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전체적으로 계획대로 돌아간다. 레펜하르트는 내심 즐거웠다.

'그럭저럭 잘되어 가는군.'

애초에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일단 드워프와 오크들의 전력이 투입된 마당에, 국가 단위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한손 거드는 입장에서 유벨 측이 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진짜 전쟁은 승리한 다음부터지.'

지금은 저런 태도를 보이는 귀족들도 정작 유벨이 왕위에 오르고 논공행상이 시작되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다. 그 속에서 바라는 대로 영지를 받고 뜻을 펼치려면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다.

'뭐,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술을 들이켰다. 연회 분위기도 무르익었고 다른 이들도 잘하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그가 할 일은 더 없다.

정신적으로 한가해지자 시리스가 생각났다. 엘프 여성에 대한 세인들의 눈이 어떤지 알기에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연회에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불쾌한 경험을 당할 것이 뻔하니까.

'그래, 여기서 더 신경 쓸 일도 없는데 이제 시리스나 보러 가야겠다.'

☆ ☆ ☆

적당히 핑계를 대고 레펜하르트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밖에도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잔치를 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궁리하며 레펜하르트는 저택 반대쪽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잔치에 열중한 탓인지 기본적인 초병들을 제외하고는 저택이 한가했다. 사람 없는 회랑, 달빛을 받아 기둥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어둑어둑한 공간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응?"

회랑 반대편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냥 병사인가 싶지만, 그렇게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저건 보통 유령이거나....

'기척을 완벽하게 지운 오러 능력자!'

레펜하르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확실히 오러 능력자가 작정하고 기척을 지우면 같은 오러 유저라 할지라도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마법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딱히 경계 마법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다.

어둠 속에서 상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비록 전신에 화려한 갑주 대신 가벼운 복장을 걸쳤지만 저 손에 든 검과 중후한 얼굴은 기억 속에 있었다.

"스피리어스?"

스피리어스가 레펜하르트를 노려보며 검을 들어 겨누었다. 그가 차갑게 뇌까렸다.

"용서하라, 마법사! 모든 것은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일 뿐이니!"

3

스피리어스가 단숨에 허공을 가르며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했다. 강철의 칼날이 레펜하르트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레펜하르트가 오른팔을 들어 막았다.

탕!

맨살과 강철이 부딪혔는데 금속음이 울린다. 스피리어스가 혀를 차며 뇌까렸다.

"아이언 스킨 마법인가! 반응이 빠르구나, 마법사!"

물론 현재 레펜하르트의 기량으로 5서클 고위 주문인 아이언 스킨 마법을 시동어도 없이 구사할 재주 따윈 없다. 그냥 맨팔뚝으로 막은 것이다.

스피리어스가 이번엔 좀 더 강력하게 칼을 휘둘렀다. 굳이 오러를 구현하지 않아도 심기체가 합일된 그의 일격은 강철조차 벨 수 있었다.

"하압!"

낮은 기합성과 함께 스피리어스가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베어 왔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피하려면 못 피할 공격은 아니었지만....

'어, 어쩌지?'

그는 지금 어디까지나 마법사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걸 피해서 본색을 드러내도 될지 판단이 안 선 것이다.

생각은 길고 공격은 짧다. 고민하는 동안 스피리어스의 검이 시원하게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두들겼다. 당연하게도 또 튕겨 나갔다.

탱!

그제야 스피리어스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언 스킨 마법이 이토록 강할 리가 없는데?"

아이언 스킨은 피부를 강철처럼 만들어 주는 강력한 방호 마법이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지속 시간도 짧은 데다가 화살 정도는 막을 수 있지만 혼신을 다한 그의 검을 튕겨 낼 정도는 아닌 것이다. 안 그러면 모든 마법사들이 아이언 스킨 걸고 전장을 질주했겠지.

그때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시동어를 외쳤다.

"파괴의 불꽃! 플레임 블렛!"

작은 화구가 연달아 손끝에서 떠올라 스피리어스에게 쏘아졌다. 마법을 시전하면서도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으, 오러 유저에게 이런 게 먹힐 리가 없지.'

역시나, 스피리어스는 가볍게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모든 불꽃의 탄환을 사그라뜨려 버렸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레펜하르트를 노려보았다.

"하긴, 노예들에게 그런 짓을 가능케 할 정도면 보통 마법사는 아니겠지. 나도 본격적으로 힘을 쓰겠다!"

어차피 그의 목표는 레펜하르트였다. 지금까지야 다른 오러 유저들의 감각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오러를 억제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다해 그를 암살하고 도망치는 쪽이 낫다.

우우웅!

스피리어스가 검을 늘어뜨렸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푸른 달빛을 가르며 섬뜩한 이빨을 내민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당연히 이럴 줄 예상했어야 했는데!'

궁지에 몰린 카르사스 측에 남은 것은 이제 유벨을 암살하거나 아니면 이종족들을 지휘하는 그를 죽이는 것뿐이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도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본적인 걸 여태 못 떠올리다니?

'아오, 이 빌어먹을 테스론 헤드!'

너무 자주 욕을 해서 이제는 숫제 고유명사(?)까지 붙여 버린 이 육체의 아이큐를 원망하며 레펜하르트는 고민했다. 마법의 힘을 상당히 되찾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오러 유저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법사로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정체를 드러내 세인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도 않다.

'도망칠까?'

하지만 스피리어스 경의 기량은 결코 낮지 않다. 도망치느라 등을 내줄 만큼 허술한 이는 절대 아니다.

그때 스피리어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바닥을 박찼다. 강렬한 찌르기가 붉은 섬광이 되어 레펜하르트의 심장을 노린다.

'에잇! 어쩔 수 없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며 오른 정권을 뻗었다. 공격을 피하며 상대의 급소에 바로 스매시를 날린 것이다.

퍼억!

육중한 타격음이 울리며 레펜하르트의 정권이 스피리어스의 늑골 부위를 강타했다. 타이밍이 완벽해 제대로 반격이 들어가 버렸다. 스피리어스가 눈을 치켜뜨며 놀라 외쳤다.

"이 체술은? 전투 마법사였나!"

오러로 전신을 방어하고 있어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적의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놀란 스피리어스를 쳐 낸 뒤 레펜하르트가 바로 자세를 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 오러를 직접 구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전투 마법사라고 우길 수 있어!'

스피리어스가 검을 고쳐 쥐더니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긴, 저 덩치를 보면 전투 마법사라고 이상할 것도 없겠군."

상대의 오해를 기뻐하며 레펜하르트가 외쳤다.

"지금 이 저택에서는 오러 유저만 여섯이 있소! 그들이 금방 그대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오!"

"흥! 그때까지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보나?"

스피리어스가 콧방귀를 꼈다. 자세를 보니 전투 마법사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그래 봤자 오러 유저에 비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검을 겨누고 매서운 살기를 피웠다.

우우웅!

붉은 기운이 공기를 흔든다. 레펜하르트는 침을 삼켰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살기를 담고 그의 미간을 아프도록 찌르고 있었다. 아까는 상대를 얕잡아 보고 그냥 찔렀을 뿐이지만, 지금 날아올 공격은 제대로 된 검술일 것이다.

'끙, 오러 구현 안 하고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방어법에는 회피란 개념이 거의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회피술은 있지만 그 수준은 대륙의 흔한 무술 레벨이다.

"이번 일격으로 끝내 주마!"

눈부신 찌르기가 회랑을 붉게 물들인다. 레펜하르트는 긴장한 얼굴로 차분히 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섰다. 붉은 섬광이 유성처럼 그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애써 피한다고 피했는데 역시 로브가 찢어지며 핏줄기가 배어 나왔다.

"크윽!"

레펜하르트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를 지닌 레펜하르트였지만, 역시 스파이럴 가드 없이 블레이드 오러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스피리어스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허어?"

블레이드 오러에 실린 기운은 실로 강렬하다. 일반인이라면 스치는 것만으로 근육이 찢어지고 뼈를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치' 보통 검에 베인 것 정도의 부상이라니?

'몸뚱이 하나는 신기할 정도로 튼튼하군! 마법인가? 하지만 별 소용없을 것이다!'

비웃음을 흘리며 스피리어스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웅웅대는 소음과 함께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3미터 가까이 되는 거대한 칼날로 화했다.

그의 절기, 기간틱 블레이드였다. 평소처럼 10미터나 되는 무식한 크기는 아니지만 이 좁은 회랑에선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디 이것도 피해 보시지!"

스피리어스의 대검이 레펜하르트에게 쏘아졌다. 거대한 붉은 장막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 광경에서 레펜하르트는 데자뷰를 느꼈다. 하산한 뒤 처음으로 막심한 부상을 입었던, 황금기사 유서스와의 첫 번째 전투가 떠오른 것이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도 이렇게 정체 숨기겠다고 꼴값 떨다가 호되게 당했었다!

"에잉! 병신 짓 두 번 할 수는 없잖아?"

콰아앙!

폭음이 울리며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응축된 힘이 흩어지며 회랑 전체가 요동을 치며 무너져 내렸다. 돌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스피리어스의 두 눈이 더 이상 뜨일 수 없을 정도로 경악에 차 부릅뜨였다.

"저, 저, 저건!"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레펜하르트, 그의 전신에서 눈부신 황금빛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이, 이럴 수가...."

스피리어스는 검을 늘어뜨린 채 입을 쩍 벌렸다. 눈앞의 마법사, 분명 마법사인 저자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밤이라 참 찬란하게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이다.

"오러 능력자?"

"아, 역시 세상일 마음먹은 대로 쉽게는 안 풀린다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는 넝마가 된 로브를 북 찢었다. 단련된 근육이 달빛 아래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로 태어나 평생을 단련한 스피리어스조차도 기가 질릴 정도로 우람한 육체였다. 스피리어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극도로 단련된 강철의 육체에 찬란한 황금의 오러.

저것은 대단히 유명한 한 권사의 특징이었다. 너무도 독특한 사상과 무술을 지닌 그 권사의 이름은, 적어도 무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제라드의 후예였나!"

그러고 보니 그라임 왕국에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황금기사 유서스를 해치우고 명성을 떨친 그자의 이름이 분명히....

"그럼 당신이 '그' 권왕 레펜하르트?"

스피리어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이름이 같았다. 그럼에도 둘 사이를 연관 짓지 못한 것은 어지간히 머리 좋지 않고는 입문조차 불가능하다는 마법사란 존재와, 대륙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최악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권왕의 후예가 마법사라고?"

기가 막혀 스피리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냐, 그러니까 눈앞의 저 인간은 인류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육체를 지닌 주제에 마법사가 될 만큼 머리도 좋다는 의미인가? 불공평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레펜하르트가 느긋한 목소리로 주먹을 쥐었다.

"살다 보면 별일 다 생기는데 이런 일로 일일이 놀라서야 세상 살겄소?"

정체 까발려지고 나니 마음도 편해진 레펜하르트였다. 여전히 놀라고 있던 스피리어스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요 근래 계속 놀랄 일만 있었다. 노예 종족에 불과한 것들이 오러 유저랍시고 대거 튀어나오고 서른도 안 된 젊은 놈이 오러로 자신을 꺾었다. 그것에 비하면 오러 유저가 마법사 겸직하는 것쯤은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 임무는 달라진 것이 없으니!"

스피리어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레펜하르트도 두 다리를 넓게 벌려 안정된 자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산악처럼 중후한 자세로 오러를 불태우는 그를 보며 스피리어스가 눈을 빛냈다.

"훗, 마법사를 암살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죄책감이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부담 없이 전력을 다할 수 있겠군!"

"아, 편한 대로 전력을 다하시게."

"건방지구나!"

호통을 치며 스피리어스가 몸을 날렸다. 레펜하르트도 마주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앙!

둘의 격돌로 인해 회랑 전체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대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사이로 붉고 누런 두 섬광이 서로 떨어지더니 다시 맞붙는다. 그때마다 연신 파문이 회랑을 뒤흔들었다.

"기간틱 블레이드!"

우렁찬 외침과 함께 스피리어스가 검을 내리쳤다.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붉은 기둥이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내리쳐진다. 러스라면 간단히 피했겠지만, 아쉽게도 레펜하르트는 그런 식의 회피법은 배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검에다 대뜸 주먹을 내질렀다.

"타아앗!"

짐 언브레이커블의 응전 사상은 매우 간단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기둥에는 기둥!

우르릉!

황금빛 기둥이 솟구치며 붉은 기둥을 강타했다. 파괴의 빛이 서로 맞붙어 수십 줄기의 잔광을 낳았다. 흩어진 오러가 대지를 뒤엎고 회랑 기둥을 싹 다 뭉개 버렸다. 회랑 전체가 무너지며 저택 서편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폭연 사이로 두 개의 빛이 솟구쳤다.

날아오른 두 오러 유저가 저택 지붕 위에 안착했다. 붉은 오러로 전신을 감싼 채 스피리어스가 고함을 질렀다.

"무식하긴! 마법사 흉내 내더니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먼저 기둥 내려친 건 댁이거든?"

억울한 듯 맞받아치며 레펜하르트가 스피리어스의 좌우로 펀치를 날렸다. 황금빛 오러가 깃든, 펀치라기보다는 그냥 캐터펄트라고 해야 더 어울릴 웅장한 정권이 하늘을 찢고 스피리어스의 붉은 오러에 맞부딪쳤다.

쾅! 콰쾅!

전력을 방어로 옮긴 스피리어스가 간신히 공격을 버텨 낸 뒤 다시 기간틱 블레이드를 날렸다. 적색 섬광이 레펜하르트의 좌측을 통째로 후려갈기는 순간, 레펜하르트가 가슴을 활짝 펴고 고함을 질렀다.

"스파이럴 가드!"

전신으로 오러의 소용돌이가 맹렬히 일어나며 붉은 블레이드 오러를 갈아 버린다. 오러로 오러를 가는 그 황당한 광경에 스피리어스가 기막혀할 때, 레펜하르트가 바로 접근전을 시도하며 앞차기를 날렸다.

"가스트리젠!"

전신 탄력을 뒤꿈치에 실어 체중 이동과 함께 파괴력을 높이는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앞차기가 스피리어스의 명치를 두들겼다. 충격파가 붉은 오러를 흩어 놓고 스프리어스를 관통했다. 그가 비명을 터트렸다.

"크어억!"

관통한 충격파가 저택에까지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저택 여기저기서 때아닌 봉변을 당한 하인이며 병사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으헤헥!"

"뭔 난리여, 이게?"

충격을 받은 스피리어스가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레펜하르트가 바로 접근해 후속타를 날렸다. 좌우 킥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스피리어스를 강타했다. 대검을 휘두르며 스피리어스가 애써 전신 급소를 방어했다. 그때 레펜하르트가 팔을 뻗어 스피리어스의 왼팔을 붙잡았다.

"잡았다!"

"크윽!"

분명 사람 손가락에 잡힌 것인데 무슨 바위에라도 깔린 것 같은 압력이 느껴진다. 스피리어스가 당황하며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보다 레펜하르트가 더 빨랐다.

"으랏차차!"

스피리어스를 붙잡은 채 레펜하르트가 몸을 빙빙 돌렸다. 오러의 힘과 육체의 힘이 원심력과 결합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화한다. 힘과 스피드가 정점에 달했을 때, 레펜하르트가 그를 던졌다.

"래리어트 스윙!"

붉은 유성 한 줄기가 자이딘 자작의 저택 상공을 스치고 지나가 앞마당으로 향했다. 그 유성(?)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퍼어어엉!

정말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대폭발이 일어났다. 얼마나 무식한 위력이었는지 심지어 크레이터까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구덩이 중심에서 스피리어스가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처맞았는데도 명색이 오러 유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끄, 끄으윽...."

신음을 흘리며 스피리어스가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마저 죽어 버리면 카르사스 공자에겐 단 한 명의 오러 유저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이렇게 죽을 순 없....'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 스피리어스의 눈에 절망적인 광경이 비쳐졌다. 저택 지붕에 있던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허어업!"

황금빛 오러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지상으로 하강한다. 솟구친 기세와 폭발적인 오러의 힘이 합세해 이번엔 황금빛 유성이 되어 하늘을 가로지른다!

"타아앗!"

무릎에 전력을 집중시킨 채 레펜하르트는 그대로 플라잉 니 어택을 날렸다. 자그마치 20여 미터 가까운 높이에서 떨어진 그의 육중한 거체가 스피리어스를 강타했다.

콰앙!

온천이라도 터진 것처럼 흙먼지가 솟구쳐 올랐다. 오러 유저의 내구도를 아득히 뛰어넘는 그 엄청난 타격 앞에서 스피리어스는 처절한 절규를 터트렸다.

"크아아아악!"

☆ ☆ ☆

스피리어스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다른 오러 유저와 달리 스피리어스는 철저한 카르사스 공자 측 사람이었다. 살려 두어 봤자 후환만 될 뿐이라, 레펜하르트도 독하게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스피리어스의 시체를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는 크레이터를 걸어 나왔다. 앞마당은 어느새 무수한 인파로 메워져 있었다. 두 오러 유저가 이렇게 대놓고 힘을 써서 대난동을 부렸으니, 눈과 귀가 멀쩡한 인간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연회는 중단된 지 오래, 병사들도 귀족들도 모두 아까부터 두 사람의 사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오러는...."

그 말이 시발점이 되어,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황금의 오러!"

"제라드의 빛이다!"

"그렇군! 저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소!"

기사 중 한 명이 경외를 담아 소리쳤다.

"권왕!"

"권왕 레펜하르트!"

"오오오오!"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다들 저 정체불명의 현자가 사실은 새로운 권왕이었다는 사실에 놀란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분위기를 살피며 말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구원자가 오러 유저인 줄 아무도 몰랐던 건가?"

렐하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체를 숨기고 싶다고 하셨지 않소?"

"아, 그게 그 소리였소? 난 덩치 숨기느라 그 로브 입는 줄 알았지."

이종족들이야 다들 왜 이 난리를 벌이나 싶어 멀뚱히 서 있었지만, 유벨 왕자군에 레펜하르트의 정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유벨이 입을 쩍 벌린 채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 사람이 당대의 권왕이었어?"

어차피 지금 유벨 왕자군에 오러 유저는 잔뜩 있다. 레펜하르트가 그냥 보통 오러 유저였다면 이 정도 반응까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는 단순한 오러 유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보통 무문이라면 강한 스승 밑에서 사사했다 해서 반드시 강한 제자가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스승이 아무리 강해도 제자가 그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해 무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짐 언브레이커블은 달랐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자치고 약한 자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야 약하면 세상 나가기도 전에 맞아죽으니까 그렇지, 뭐.'

주변의 반응을 살피며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이리 반응이 격렬한지 익히 짐작이 갔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는 일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반드시 권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검성이라는, 그 시대 최강의 검사가 매 시대마다 다른 유파에서 나오는 것에 비해 권왕이라는 칭호는 언제나 짐 언브레이커블이 독점했다. (뭐, 짐 언브레이커블이 일인전승이 아닌 만큼 두 후계자가 나올 경우 칭호의 문제가 생길 법도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워낙 후계자 찾기가 힘들어 여태 한 시대에 하나 나오면 다행이었다.)

즉 세인들의 인식 속에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는 곧 약속된 최강의 권사라는 의미, 평범한 오러 유저와는 존재감부터가 다른 것이다.

"우오오오!"

"권왕! 권왕! 권왕!"

다들 한목소리로 새로운 권왕의 등장에 환호를 올렸다. 권왕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정체 숨겼던 건데. 아, 요새 왜 이렇게 뒷감당 안 되는 일만 자꾸 생기냐그래....'

4

스피리어스 경의 사망 소식은 바로 왕도에 전해졌다. 단순히 그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그 대상이 그라임 왕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당대의 권왕이라는 사실은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피리어스 경을 쓰러뜨린 자가 새로운 권왕이라는군!"

"스피리어스 경은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어."

"그에 비해 테츠발트 경은... 쯧쯧."

"고작 드워프 따위에게 죽음을 당하다니."

"테츠발트 경이 사실은 명성만큼 대단하지 않았던 거겠지."

웃기게도 암살하러 들어갔다 맞아 죽은 스피리어스는 진정한 기사 취급을 받고, 전장에서 용맹스럽게 전사한 테츠발트는 바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처음 테츠발트 경의 사망 소식을 접했을 때와 비교하면 사뭇 다른 반응이다.

시민들의 반응에 대해 들은 실란이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들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텐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종족을 무시하네요."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오히려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저건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거지. 둘은 엄연히 다르다고. 잘되어 가고 있는 거야."

옆집 개에게 친구가 물려 죽었다면 보통은 '개가 사람을 물어 죽이다니!'라고 화를 내지 '개 따위에게 물려 죽다니! 부끄럽다, 친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테츠발트의 죽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이종족들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상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무의식의 반발이니까.

옆에서 유벨 왕자가 저 멀리, 거대한 사자가 새겨진 거대한 성문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자의 문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기 집으로 돌아온 이다운 감회 어린 표정이었다. 지금 유벨 왕자군은 왕도 크로틴의 도시 성벽을 쉽게 건너, 왕성을 감싸는 외곽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미 성벽이 무너진 마당이라 저항은 거의 없었다.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거나 집안에서 문을 틀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다.

왕성을 통하는 거대한 성문, 사자의 문을 바라보다 말고 문득 유벨이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조금 당혹스럽구려. 카르사스의 성품이면 이렇게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남부 성벽을 무너뜨리고 사흘간 대답을 기다렸으나 카르사스군은 결코 항복을 표하지 않았다. 왕성으로 수비군을 옮긴 뒤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놀랄 것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 밑의 수하들의 의지겠지요. 승승장구할 때야 다들 카르사스 공자의 뜻을 충실히 따랐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야...."

"그런 것 같소. 자, 그럼 공격 명령을...."

쓴웃음을 지으며 유벨이 뒤를 돌아보았다. 공성전을 위해서 저 성문을 부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내보낼까? 오러 유저들이 잔뜩 있으니 누굴 보내도 저까짓 성문쯤은 쉽게 부수겠지?'

여섯 명이나 되는 오러 유저를 부릴 수 있다니, 전장의 지휘관으로서 이렇게 즐거운 상황도 별로 없다. 그렇게 유벨이 행복한 고민을 하던 차였다.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말에서 내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그냥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페오닌 백작이 반색을 했다.

"오오! 권왕께서 직접? 그 무위를 다시 한 번 견식할 수 있겠구려."

유벨과 그 수하 귀족들이 모두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낸다. 실란이 조금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라?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다 까발려졌는데 이제 와서 의미도 없고... 게다가 잘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상의를 벗고 늠름한 근육을 드러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쪼르르 달려와 상의를 받아들고 공손히 물러선다.

'쩝, 이젠 아예 전투 전에 옷 벗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구먼.'

제라드가 한겨울에도 셔츠만 입고 알통 드러내는 차림으로 지낼 때마다 '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사람답게 의복 다 갖춰 입고 살아야지.'라며 되뇌었는데, 어느새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무문의 가르침 자체가 옷을 벗게 만들잖아. 끙.'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예들이 전투 때마다 바지만 입고 설친 이유는 단순히 근육 자랑하려고가 아니다. 뭐, 근육 자랑하려는 것도 맞기는 한데 사실은 옷 아끼려는 의미가 더 컸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방어에 회피란 없다. 어지간한 건 전부 몸으로 때운다. 말인즉슨, 필연적으로 싸우다 보면 옷은 찢어지게 되어 있단 소리다. 아무리 역대 권왕들이 돈 잘 벌었다고는 해도 싸울 때마다 옷 버리는 낭비를 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레 다들 전투 시 탈의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면 테스론이 맨날 웃통 까고 덤빈 것도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게지.'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나서자 등 뒤에서 환호가 터졌다.

"오오! 권왕님이시다!"

보통 기사들이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감싸는 것에 비해 지금 레펜하르트의 모습은 실로 남자들의 근원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자고로 전쟁이란 수컷들끼리 누가누가 더 마초인가를 겨루는 행위다. 전장의 병사들답게 모두 레펜하르트를 보며 열광했다. 우람한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며 레펜하르트가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황금빛 거인이 포장된 도로 위로 천천히 걸어온다. 왕성 외곽을 지키던 병사들이 그 위압감에 몸서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권왕이다!"

레펜하르트가 걱정했던 대로, 그의 명성은 단 며칠 만에 카르사스 군 쪽에도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강철의 근육에 황금빛 오러, 존재 자체가 이름표다 보니 알아보기도 참 쉽다. 삽시간에 진득한 공포가 병사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두려워 마라! 아무리 그래도 저자 역시 일개 인간일 뿐이다!"

지휘관들이 애써 병사들을 다독였다. 물론 병사들은 별로 납득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일개 인간은 아니잖아, 저거!

더 사기가 떨어지기 전에 지휘관이 명령을 토해 냈다.

"궁사대! 전원 일제사격!"

화살비가 레펜하르트를 향해 쏘아졌다. 무수한 강철 촉이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빽빽이 두들겼다.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거렸다.

'간지럽지도 않네.'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성벽 위 병사들이 치를 떨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투석기를 쏘아라!"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돌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투석된 돌들이 바닥에 박히며 굉음을 울린다. 잘 포장된 도로가 삽시간에 금이 쩍쩍 가며 박살이 난다. 하지만 정작 그 파괴의 중심부에 서 있는 레펜하르트는 멀쩡히 돌덩이들을 튕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걸음조차도 멈추지 않았다.

'이건 좀 간지럽네.'

역시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크윽! 역청에 불을 붙여 쏘아라!"

수많은 불덩이들이 일제히 날아왔다.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새삼 옷 벗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몸에 묻은 '불'들을 털면서 계속 걸었다.

거리가 가까워오자 지휘관이 절망에 차 악을 썼다.

"끓는 물을 부어라!"

멀쩡한 돼지 하나 수육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고온의 물길이 레펜하르트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졌다. 안 그래도 바지에 붙은 불을 끄기 힘들었던 레펜하르트가 고마워하며 샤워를 했다. 머리도 감았다.

"어, 뜨시다."

지휘관 입장에선 실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단 말이냐!"

성벽 위에서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보통은 성을 공격하는 데 쓰는 온갖 무기들이 한 사람을 향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여전히 그냥 걸었다.

"으으으!"

"저 괴물!"

마음만 먹으면 단걸음에 달려올 수 있었지만, 레펜하르트는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성벽의 병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그 모습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이는 없었다.

성문 아래로 도달한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들며 고함을 질렀다.

"목숨이 아까운 자! 모두 성문에서 피하라!"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군사 훈련 따윈 저 절대적 공포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순식간에 성문 근처가 싹 비어 버렸다. 병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지휘관이나 기사들조차도 죄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유벨 왕자군 쪽에서 또다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

"역시 불굴의 육체!"

"언브레이커블!"

"과연 권왕님이시다!"

다들 레펜하르트의 무위에 감탄하며 신을 내고 있었다. 등 뒤로 닿는 열렬한 환호에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거참, 전생에 하던 짓이랑 별 차이도 없는데 이렇게 다른 반응이라니.'

☆ ☆ ☆

스피리어스와의 전투 이후,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난 레펜하르트는 사흘 내내 엄청나게 고민했었다.

'큰일 났네. 이러다가 전생대로 일이 돌아가면 어쩌지.'

마왕 레펜하르트의 명성이 너무 높았기에 사람들은 오로지 그만 보았지, 그 뒤의 이종족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생애에서는 되도록 안 나서려고, 절대 이름을 날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레펜하르트의 소문을 일파만파로 퍼뜨리고 있었다.

"오크며 드워프, 엘프들을 끌고 온 수수께끼의 현자가 사실은 권왕이었다는군!"

"어쩐지! 역시 권왕쯤 되니 그런 놀라운 위업이 가능했구먼!"

"그렇다면 그 오러 유저들은 모두 권왕이 가르쳤던 것인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은 이종족들의 그 무위도 레펜하르트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착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계속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좀 지켜보다 보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호오, 그럼 저 오크들은 권왕이 선택할 만큼 놀라운 전사들이었나!"

"권왕께서 그들을 계몽해 사람답게 만든 모양일세."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 놈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들일지도...."

"드워프들이 부럽구먼. 권왕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어째, 소문이 레펜하르트가 상상했던 것과 좀 달랐다. 사람들은 저 이종족들이 권왕에 의해 선택받은 뛰어난 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떠들고 있었다. 칼켄이나 카다마이트 등, 이종족 오러 유저들이 들었다면 상당히 억울한 소문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쁜 반응은 아니다.

레펜하르트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반응이 왜 이래?"

마왕으로서 이종족을 이끌었을 땐, 노예 종족이 마성에 깃들어 사악해졌다며 있는 욕 없는 욕 다 먹었다.

그런데 권왕으로 이끌었더니 노예 종족도 사실은 말귀를 알아먹는 뛰어난 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는 레펜하르트의 고민을 풀어 준 것이 시리스였다.

"그야, 전사와 마법사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기분 자체가 다르잖아요."

"다르다니? 대체 뭐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레펜하르트 님?"

"뭐가 다른데? 어차피 양쪽 다 양민 학살하는 건 똑같잖아?"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혀를 찼다. 이 놀라운 지식과 지혜를 지닌, 시간을 되돌릴 정도의 강력한 마법사가 이런 단순한 것은 오히려 모른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은 말이죠,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예요."

모든 영웅담 속에서, 결국 왕이 되는 이는 반드시 전사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전사의 보조일 뿐 자신이 주역이 되진 못한다. 사람들은 전사에는 자신을 투영할 수 있어도 마법사에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시리스의 설명에 레펜하르트가 더더욱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마법사는 그렇게 기피한다는 거야?"

"전사는 누구나 꿈꿀 수 있으니까요."

"마법사는 대체 뭐가 그리 나빠서 안 꿈꾼다는 건데, 그럼?"

억울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달래며 시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전사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마법사는 선택받아야 될 수 있는 존재거든요."

이해 불가능이란 단어를 안면 전체로 표현하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사가 누구나 될 수 있다고? 세상에 재능이 없어 좌절하는 삼류 무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도 누구나 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재능이 타고나야 한다는 면은 전사나 마법사나 마찬가지잖아? 어차피 양쪽 다 재능이 받쳐 주지 않으면 대성 못하는데."

"입문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예요."

시리스가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뛰어난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 뛰어난 마법사보다도 더한 재능이 필요하다. 육체적, 감각적으로 타고나야 훌륭한 전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분명 진실이긴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질 않는 것이다.

칼은 누구라도 휘두를 수 있다. 어설플지언정,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마법사는 재능을 타고난 자만이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흉내조차도 내지 못한다.

전사들의 모습은 직관적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뛰어난 전사를 보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나도 노력하면 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지금은 기회를 못 잡아서 그렇지, 운이 따르면 나도 전장의 영웅이 될 수 있어!

저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저런 훌륭한 전사가 되었구나. 나도 노력해야지.

반면 마법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다. 그저 입술을 달싹이고 허공에 손짓을 함으로서 기적이 일어난다.

이 느낌의 차이가 바로 지금 상황을 낳은 것이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이종족들을 이끌었을 때, 인간들은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권왕 레펜하르트가 이종족을 이끌자 인간들은 과연 용사다운 모습이라며 찬사를 터트린다.

마왕은 그저 이해 불가의 두려운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육체를 다루는 권왕에게는 자기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것이다.

"마력은 특별한 소수만 지닌 힘이지만 주먹과 근육은 누구나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 그런 거야?"

오로지 마법사로만 살아온, 게다가 마법사 중에서도 천재였던 레펜하르트에겐 실로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엘븐하임에서 검술을 익히며 50년 가까이 수많은 인간 전사들을 만나 본 시리스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마법사를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다가 레펜하르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냥 나 막 날뛰어도 되는 거야?"

시리스가 방긋 웃었다.

"네, 권왕인 레펜하르트 님이라면요."

"마법은 대놓고 쓰면 안 되고?"

"그렇죠."

"이 무슨...."

거참. 맨살로 칼 튕기는 게 마법으로 사람 죽이는 것보다 친근감을 느낀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더 비상식적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답니다."

단언하는 시리스의 말에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역시 사람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계속 들 뿐이었다.

☆ ☆ ☆

'그래서 내심 반신반의하면서 설쳐 보긴 했는데....'

성문 밑까지 다가간 레펜하르트가 성을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반응이 다르단 말이지.'

전생에서 그는, 온갖 방호 마법으로 몸을 감싸고 성벽으로 날아가 8서클 파괴 주문 아케인 블래스터로 성벽을 부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홀로 성을 상대하는 그 모습에 적은 물론, 휘하의 아군들조차 공포에 질리곤 했다.

지금과 하는 짓 자체는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오러로 똑같은 짓을 하니 적들은 그렇다 치고 아군의 반응이 대단히 호의적인 것이다. 자신을 응원하는 아군의 눈빛에 경외와 존경은 보일지언정, 공포와 기피의 빛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뭐, 결과적으로 좋으니까 됐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성문을 퉁퉁 두들겼다. 확실히 왕성을 지키는 대문다웠다. 높이만 해도 10미터에 달하고 두께 역시 엄청나 공성추를 들이대도 부수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자, 그럼!"

히죽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무릎을 굽히고 주먹을 뒤로 뺐다. 그리고 외침을 터트리며 길게 뻗었다.

"캘러미티 혼!"

황금빛 오러가 한 점으로 응축하며 네 개의 파문을 낳는다. 파문이 연달아 주먹 끝으로 보이며 거대한 빛의 뿔이 되어 성문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성문은 물론이고 성문에 연결된 성곽과 그 위의 보루며 보초병, 크게 지어놓은 건물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왕성 전체가 뒤흔들리는 그 위업 앞에 유벨 왕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돌격하라! 반역자를 물리쳐라!"

"와아아아아!"

5

유벨 왕자군은 물밀듯이 왕성으로 진군해 갔다. 선두에 여섯, 아니 이제는 일곱 명의 오러 유저를 내세운 그들은 순식간에 왕성 수비군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카르사스 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미 패배했음이 분명한 전쟁임에도 카르사스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들은 생명을 던져 가며 저 절망적인 파괴의 빛무리에 몸을 던졌다.

"우리의 충성을 증명하라!"

"기사답게 죽겠노라!"

"카르사스 님, 만세!"

카르사스의 기사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 용맹하게 달려 나왔다. 왕성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기사다운 충성심으로 공포를 마비시킨 채 기사들은 용맹하게 싸워 댔다. 심지어는 오러 유저에게도 거리낌 없이 달려들었다.

"나의 왕이여! 부디 뜻을 이루소서!"

다이어울프를 탄 칼켄을 향해 창을 찔러 가며 기사 하나가 고함을 지른다. 물론 용기가 아무리 뛰어나 봐야 절대적 역량 앞에선 소용없다. 녹색 섬광이 번득이고 곧바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피분수를 쏟아 낸다.

"크아아악!"

비명과 아우성이 왕성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고풍스럽게 장식된 테라스 위로 선혈의 폭포가 흘러내리고 아름답게 꽃핀 화원 위로 인간의 살점이 색상을 더한다. 선두에서 달리던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다! 무익한 저항을 거두고 생명을 보전하라!"

어떻게든 쌍방의 피해를 줄이고 싶어 소리친 것이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기사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기사들이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향해 돌진했다.

"진정한 왕을 위하여!"

"이곳에서 명예롭게 죽겠다!"

두 기사가 말을 몰며 레펜하르트에게 창을 찔러 온다. 말이 달리는 기세와 창을 찌르는 힘이 합세에 강력한 위력을 낳는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마주 몸을 날렸다.

"어리석은 자들!"

두 개의 창이 레펜하르트의 몸을 찔렀다. 물론 오러조차 깃들지 않은 창이, 오러로 방어하는 그의 몸에 상처를 줄 수 있을 리 없다. 창대가 부러지며 그 반동으로 기사들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뻗어 그대로 말목을 하나씩 붙잡았다. 그리고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하아압!"

말이 하늘을 날았다.

말 목을 붙잡고 그대로 던져 버린 것이다. 허공으로 떠오르며 말들이 그 초롱초롱한 눈을 껌뻑였다.

히잉?

히이잉?

"으아아악!"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낙마했다. 나가떨어지는 기사들은 무시하고, 레펜하르트가 잽싸게 몸을 놀려 떨어지는 말들을 받아 냈다.

"으차! 죄도 없는 말들, 굳이 죽일 필요 없지."

말로 태어난 주제에 사람 품에 안겨 보기는 처음일 것이다. 준마가 버둥대며 난동을 부리자 레펜하르트는 얌전히 말을 놓아주었다. 황당해하며 준마들이 여기저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왠지 말 울음소리에 비난이 섞여 있는 기분이다.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용맹하게 달려들던 그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으으, 저 괴물...."

"어떻게 저런 힘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목숨을 도외시한다곤 해도, 말째로 던져 버리는 저 무식한 괴력 앞에서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나가떨어진 기사들을 보니 실로 서글픈 몰골이었다. 다들 머리부터 처박혀 엉덩이 죽 빼고 엎드려 있는데, 평소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입장에서는 정말 기피하고 싶은 자세였다.

"젠장! 저렇게 당하고 싶진 않아!"

이왕 싸우다 죽을 거면 멋지게, 기사답게 죽고 싶다. 기사들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식 웃으며 레펜하르트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모두 항복하라!"

유벨 왕자군은 빠른 속도로 왕성 이곳저것을 점거했다. 카르사스 군도 용감히 맞서 싸웠지만 전력 차가 너무도 컸다. 결국 수비군들이 하나 둘 항복의 표시로 무기를 버렸다. 이종족 오러 유저들이 왕성을 제압하는 동안 유벨 왕자는 카르사스 공자를 찾아 궁내를 질주했다. 드워프 처녀 피니아와 레펜하르트, 그리고 몇몇 귀족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은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찬란한 오후의 햇살이 창문 사이로 내리쬐는 그 홀 중앙에는 한 남자가 중무장을 한 채 홀로 서 있었다.

유벨 왕자가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카르사스!"

카르사스도 유벨을 마주 보며 힘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오랜만이군, 유벨."

왕위를 바라는 두 사내가, 왕위를 결정짓는 신성한 홀에서 서로 만났다.

☆ ☆ ☆

즉위식을 행하는 신성한 홀, 브라스티나.

순백의 그 거대한 대리석 건물 한가운데서 카르사스는 홀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유벨이 레펜하르트며 시리스, 러스며 수많은 수하들을 대동한 것과는 실로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새하얀 망토를 걸친 채 카르사스는 무심한 눈으로 좌중을 오시했다.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결코 좌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은 채 의연히 유벨 일행을 맞이하는 그 모습에는 실로 왕다운 기개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낯익은 광경이었다.

'나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심연의 홀에서 최후를 대비했을 때의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미래지만, 그때의 그 절망과 좌절은 여전히 현실처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이제 반대편에 서서 저런 표정을 짓는 이를 보고 있자니 실로 미묘한 기분이다.

유벨 왕자가 주위를 살펴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나, 카르사스?"

카르사스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가문을 멸망시킬 수는 없지. 아버님과 외조부님은 뒷길로 미리 피신하셨다."

어쩐지 저항이 약하다 했더니, 이미 카르사스 측 귀족들 대부분은 북문을 통해 왕도 크로틴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페오닌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흥, 어차피 반역자의 낙인이 찍혔거늘! 이 왕국에 그들이 발 디딜 대지가 있을 것 같은가?"

지금 이 전쟁은 단순한 영지전이나 세력 암투 같은 것이 아니다. 왕위를 건 전쟁, 패한 자는 반역자가 되어 3대가 멸족하게 된다. 특히나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는 카르사스를 지지하는 양대 거대 귀족가, 그들이 맞이할 운명은 멸망뿐이다. 이 크로방스 왕국에서 저들은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

카르사스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겠지. 그래서 두 분 모두 가솔들을 이끌고 차탄 공국으로 향하셨다. 예전의 권세는 모두 잃겠지만 가문은 보전할 수 있겠지. 그것으로 족하다."

페오닌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차탄 공국으로 도망쳤나."

황금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차탄 공국은 예로부터 거액의 돈만 내면 어떤 망명자건 넙죽넙죽 받아 주곤 했다. 그리고 일단 받아들인 이는 타국에서 어떤 압박을 가해도 보호해 주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테이칸 왕국의 전설적인 변태 오러 유저, 란타스 경이다. 수백의 어린아이를 간살하고 도주한 추악한 강간살인마조차도 돈만 된다면 받아 주는 곳이 바로 차탄 공국인 것이다.

덕분에 대륙의 수많은 지식인들로부터 무수한 도덕적 지탄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차탄 공국은 꿋꿋하게 저 정책을 고수했다. 한번 망명자를 받을 때마다 차탄 공국이 얻는 수익은 어지간한 소국의 일 년 치 예산에 가깝다. 그리고 어느 나라건 정치적 암투가 없는 국가는 없다. 차탄 공국에게 있어 망명자란 소중한 잠재 고객인 것이다.

한 번이라도 망명자를 버리게 되면 미래의 수익을 놓치게 되니, 아무리 크로방스 왕국에서 난리를 쳐 봐야 저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음,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니 크게 놀랄 것도 없지."

잠깐 당황했지만 유벨은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당신은 왜 함께 가지 않았지, 카르사스?"

"왜일 것 같나, 유벨 왕자?"

카르사스가 살짝 비웃음을 띄우며 유벨을 바라보았다. 유벨이 눈을 껌벅이더니 대답했다.

"그렇군. 그 둘이라면 모를까, 당신까지 차탄 공국으로 가 버리면 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겠지."

페르난도 공작과 브로젠 후작 정도라면 크게 문제가 없다. 이미 모든 세력도 명분도 잃은 이들이다. 그냥 차탄 공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차탄 공국에서도 저들을 이용해 크로방스 왕국에 뭔가를 벌일 명분이 없다.

하지만 카르사스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유벨과 동급의 왕위 계승 서열을 지니고 있다. 전쟁에 패했다 해서 그의 혈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카르사스가 차탄 공국으로 망명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크로방스 왕국이 차탄 공국보다 국력이 강하다면 망명 자체를 거부하겠지. 하지만 지금 크로방스 왕국은 오랜 내전과 대흉년으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 카르사스라는 명분을 얻은 차탄 공국이 쳐들어온다면 막아 낼 힘 따윈 전혀 없다.

크로방스 왕국은 차탄 공국의 속국이 되고, 카르사스는 꼭두각시 국왕이 되어 손발 다 잘린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럼 남는 것은 타국의 수탈에 신음하는 가련한 백성들뿐.

유벨이 혀를 찼다.

"...꼭두각시 왕이 되느니 이곳에서 죽을 작정이었군."

카르사스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왕국의 백성을 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적이지만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마음가짐이다.

카르사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유벨을 바라보았다.

"듣던 것과 달리 제법 생각이 깊군, 유벨 왕자."

난봉꾼이라 들었는데 바로 여기까지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유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끝내 주지."

카르사스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오만한 눈으로 외쳤다.

"자, 누가 내 목을 벨 텐가?"

유벨 왕자 측 기사들이 일제히 눈을 빛냈다. 카르사스의 목을 베는 것은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전공이다. 더구나 카르사스는 이름 높은 기사, 그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 승리하면 실로 명예와 부가 보장된다. 나름 무예에 자신 있는 기사들이 자신을 호명하길 기대하며 유벨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유벨이 검을 든 채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의 사촌 형제여."

그리고 자세를 취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반역자라 하나 그대 역시 왕의 핏줄을 지닌 이, 그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겠다."

☆ ☆ ☆

유벨 휘하의 귀족이며 기사들이 일제히 당황한 표정으로 유벨을 바라보았다. 다들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저 '유벨'이, 저 '카르사스'와 직접 칼을 마주하겠다는 건가? 허구한 날 드워프 처녀나 끼고 살았던 주제에 무수한 전투를 겪어 온 기사 중의 기사와 싸우겠다고? 아니, 그보다 유벨 왕자가 칼을 쓸 줄이나 알기는 하나?

페오닌 백작이 자신의 외손자를 향해 놀라 소리쳤다.

"유, 유벨 왕자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레펜하르트도 허겁지겁 유벨에게 다가갔다.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작정이었지만 이렇게 되니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레펜하르트가 작게 속삭였다.

"위험합니다. 여기서 유벨 왕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지 않습니까? 무릇 진정한 왕은 위험에 가까이 하지 않는 법입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속 내용은 전혀 달랐다.

너 미쳤냐? 지금 몇 번 승승장구하더니 그게 다 네 덕인 줄 아냐? 주제 파악 못 하는 것도 유분수지!

그때 유벨이 씨익 웃으며 작게 대꾸했다.

"나도 알고 있소."

"네?"

"나도 내가 카르사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단 말이오."

"그, 그럼 왜?"

당혹스러워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유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인기가 좀 심각하게 없어서 말이지, 적어도 일국의 왕다운 용기는 지니고 있다고 어필할 필요가 있지 않겠소?"

확실히 유벨 왕자는 카르사스 공자에 비해 지나치게 평가 절하되고 있었다. 이 기회에 저 카르사스와 맞서 싸웠다고, 비록 기량에서 밀릴지언정 당당히 검을 휘두를 정도의 용맹을 지니고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눈치 봐서 상황 안 좋게 흘러간다 싶으면 잽싸게 끼어들어 주길 바라오. 왜 핑계 많잖아? 왕자님이 위험하시다! 이렇게 외치면서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척 보호해 달라 이 소리지."

"...."

레펜하르트는 순간 말문을 잃었다. 무모함은 젊음의 특권이라는데, 이 눈앞의 소년은 고작 열일곱 살인 주제에 무슨 노회한 중년인 같은 대사를 읊고 있는 것이다.

"오러 유저가 등 뒤에 있으니 참 든든하오, 그렇지?"

말을 맺으며 유벨이 피니아에게 슬쩍 윙크를 건넨다. 피니아가 살며시 미소로 화답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지금 즉석에서 떠올린 생각이 아니라 미리 둘이 상의해서 내린 결론인 것 같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이건가?'

이 정도면 말릴 수 없다. 레펜하르트가 슬쩍 유벨 곁에서 떨어졌다. 카르사스가 그들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던졌다.

"내 목을 베겠다더니,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조소를 태연히 받아넘기며 유벨이 검을 뽑고 등 뒤의 방패를 꺼내 들었다. 카르사스도 한 자루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쥐었다.

두 왕위 계승자가 신성한 홀 아래 서로를 바라보며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유벨이 고함을 질렀다.

"크로방스의 진정한 왕으로, 이제 그대의 목숨을 거두겠다!"

검을 허공에 휘저어 자세를 잡으며 카르사스가 날카롭게 화답했다.

"와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무능한 자여!"

☆ ☆ ☆

유벨 왕자가 방패를 앞세우며 용맹스럽게 카르사스에게 돌격해 갔다. 카르사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술을 제대로 익힌 자라면 움직임부터가 확실히 차이가 난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날쌔고 신체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듣던 것과 달리 상당한 수준이었다.

'기사 수업 만날 빠지고 드워프 암컷과 놀기만 했다더니?'

의아해하며 카르사스도 마주 달려갔다. 유벨이 방패 뒤로 롱 소드를 길게 찔러 갔다.

"타아앗!"

제법 예리한 찌르기였다. 예상 밖의 실력이었지만 카르사스는 간단히 공격을 피했다. 기사라면 아무리 약자라 해도 결투에서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 모두가 난봉꾼이라 욕하는 유벨을 상대로도 그는 경각심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며 카르사스가 바스타드 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유벨이 잽싸게 방패로 공격을 막았다. 카르사스는 양손으로 검을 강하게 짓눌렀다. 방패째로 나뒹굴게 할 셈이었다. 그렇게 막 방패를 밀어붙이려던 찰나였다.

"헙!"

짧은 기합과 함께 유벨이 방패를 밀며 카르사스를 떨쳐 내 버렸다!

터엉!

요란한 쇳소리가 성스러운 홀을 가득 울렸다. 방패에 밀린 카르사스가 거의 2미터가 넘게 허공을 날며 뒤로 밀려갔다. 모든 이들이 눈을 의심했다.

"허억?"

"어떻게 유벨 왕자님께 저런 힘이?"

갑옷을 제대로 걸치고 바스타드 소드를 든 카르사스다. 체구도 결코 작지 않아 180센티미터에 잘 단련된 육체를 지니고 있다. 체중과 갑옷 무게를 합치면 족히 100킬로그램은 될 텐데, 상대적으로 작은 유벨이 그를 밀어 날린 것이다. 어지간한 기사들에게도 무리인 괴력이었다.

날려간 카르사스가 애써 자세를 바로 잡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냥 밀려났을 뿐이라 육체적 충격 따윈 없었지만, 정신적 충격은 확실히 받은 표정이었다.

"너, 너 실력을 숨겼구나!"

"아니, 딱히 숨긴 적 없는데? 발휘할 일이 없었을 뿐이지."

유들유들한 유벨의 대꾸에 카르사스가 눈을 치켜뜨며 재차 검격을 뿌렸다. 과연 이름난 기사답게 모든 공격이 예리한 각도로, 강렬한 힘을 동반하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유벨은 결코 밀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모든 공격을 받아치고 있었다. 일단 방패가 있는 시점에서, 아무리 공격 궤도가 현란해도 막기는 쉬운 것이다.

탕, 타탕!

카르사스의 칼날이 유벨의 방패를 두들기며 연달아 쇳소리가 울린다. 카르사스가 소리쳤다.

"방패 뒤에만 숨어 있느냐? 기사의 수치구나!"

확실히 방패 뒤에서 저렇게 거북이처럼 틀어박혀만 있다면 검술로 제압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저것은 제대로 된 기사라면 결코 취하지 않을 방식이었다. 검이야 막겠지만, 그냥 체중을 실어 밀어 버리면 바로 자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접근하며 카르사스가 유벨의 방패에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유벨이 뒤로 넘어졌어야 하겠지만....

"흐읍!"

유벨은 또다시 방패 치기로 카르사스를 밀어젖혔다. 전신 체중을 실어 돌진한 카르사스보다도 제자리에 선 유벨의 힘이 더 우위였던 것이다. 또다시 뒤로 튕겨 난 카르사스가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힘이 이리 좋아?"

"어릴 때부터 피니아랑 놀았거든."

유벨 왕자가 피니아를 만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우연히 왕실에서 사온 야생의 드워프 처녀를 그의 어머니가 유모 삼아 붙여 준 것이었다. 피니아는 어린 유벨을 키우며 이런 저런 장난을 가르쳐 주었고, 그 장난은 대체로 전사로서 자란 그녀가 어릴 적 하던 짓이었다.

드워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기를 가지고 놀고, 그 무기로 나무며 바위를 두들기며 즐긴다. 그리고 그 무기는 드워프답게 목재로만 되어 있을 뿐, 진짜 무기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강도와 무게를 자랑하는 것이다.

왕실의 사람들은 그냥 장난감 칼이나 도끼 가지고 노는 줄 알았지만 어린 유벨에겐 사실 꽤나 가혹 행위였던 것이다. 물론 어린 유벨은 '아, 역시 노는 것도 힘이 필요하구나. 어쩐지 아버님이 밤마다 다른 엄마들 방에서 나오면서 저런 말을 뇌까리시더니.'라고 속편하게 받아들였다.

왜, 씨앗 심어 놓고 나무가 자라는 속도에 맞춰 매일매일 그 위를 뛰어서 도약력을 높이는 암살자 훈련이 있지 않은가? 유벨이 피니아와 지낸 세월이 어언 10년, 그렇다 보니 절로 이런 괴력을 얻은 것이다. 단지 피니아 기준으로 근력을 측정하다 보니 유벨은 여태껏 자신이 힘 좋은 줄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도 이번 전쟁 벌어지고 나서야 내가 힘 좋은 줄 알았다. 그 전까진 다들 내가 왕자라서 봐주는 줄 알았어."

어이없어하며 카르사스는 혀를 찼다.

"그냥 힘이 좋은 것이 아닌데, 이건...."

힘도 힘이지만, 저 자세로 그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은 하체가 장난 아니게 강인하다는 의미다. 하체 단련은 무인의 기본 중 기본이지만 그만큼 제대로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저 유벨이 사실은 기본부터 착실히 단련한 기사였단 말인가?

유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피니아랑 동침하려면 하체 단련은 필수라서... 쟤가 저래 보여도 흥분하면 사람 꽉 껴안아 버리는 습관이 있어서 허리 나가지 않으려고 매일 데드리프트며 스쿼트 미친 듯이 했었지, 음."

"유벨 님!"

결투를 보고 있던 피니아가 시뻘게진 얼굴로 꽥 소리를 질렀다. 이 중요한 순간에 무슨 프라이버시 노출도 유분수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다행히도 지금 사람들은 눈앞의 기적(?)에 다들 정신이 팔려 두 연인의 밤일 따윈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카르사스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과연 믿는 것이 있어 이렇게 나섰다 이거지."

순간 그가 두 눈을 불태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모자란다!"

카르사스가 앞으로 나서며 맹렬히 검격을 뿌려 댔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예리한 칼날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유벨을 때려 댄다. 유벨도 열심히 방패로 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힘에 비해 역시 기량은 카르사스에게 한참 못 미쳤다. 방어는 가능한데, 도저히 카르사스를 맞힐 수가 없었다. 반면 카르사스는 슬슬 유벨의 전투 방식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유벨의 무술은 피니아가 가르쳐 준 것, 기본적으로 드워프 전사의 기술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따라 하기에는 신체 중심이 너무 높았다. 무릎을 굽히고 방어할 때는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는데 공격으로 전환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크윽!"

방패 치기도 몇 번 당하고 나니 바로 타이밍을 읽혔는지, 카르사스가 바로 피해 냈다. 역시 기사 중의 기사라는 칭호는 거저먹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카르사스는 바로 유벨의 바닥을 알아보고 쉽사리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정도로 기사와 상대하려 했느냐! 가소롭구나!"

분명 상황은 카르사스의 절대적 열세이거늘, 그럼에도 카르사스는 전혀 투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유벨이 계속 방패로 공격을 막으며 혀를 찼다.

'끙, 역시 밀리는구나. 하긴 초반에 어째 너무 잘 풀린다 했다.'

방패 뒤로 연신 몸을 숨기며 유벨이 레펜하르트에게 눈짓을 보냈다. 참으로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레펜하르트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살려 주소!'

'O.K!'

눈짓으로 화답하며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왕자님이 위험하시다!"

눈부신 황금의 오러를 넘실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단숨에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벨이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우와, 정말 그 대사를 그대로 써먹다니.'

결투를 가로막힌 카르사스가 분노해 검을 휘둘렀다.

"신성한 결투에 끼어들다니! 그러고도 명예로운 권왕이란 말이냐!"

"원래 우리 무문에 명예 같은 건 별로 없거든?"

레펜하르트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바로 손발을 놀렸다. 유벨은 방패로 검을 막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신이 그냥 방패다. 카르사스가 화려한 검술로 그를 찌르고 베어 갔지만 허무하게 튕겨 날 뿐이었다. 애초에 오러에 각성하지 못한 카르사스가 레펜하르트를 이길 방법 따윈 없다.

카르사스가 이를 갈며 통한의 외침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타앗!"

기합을 터트리며 레펜하르트가 주먹을 내뻗었다. 황금빛 오러가 장막처럼 터져 나와 카르사스를 강타했다. 눈부신 빛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파아아앗!

"윽!"

"크윽!"

강렬한 섬광에 모두 눈을 가리고 시선을 돌리며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이윽고 세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에 카르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박살이 난 홀의 담벼락, 잔뜩 무너진 그 위에서 무엇인가를 들고 당당히 서 있는 레펜하르트만이 남아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손에 든 것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은 잘려 나간 인간의 머리였다.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선명한 금발과 부릅뜬 녹색의 눈동자는 저 머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여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반역자 카르사스의 목을 베었다!"

유벨이 천천히 홀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며 그가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 왕가의 인장을 보이며 레펜하르트에게 왕으로서 명령했다.

"반역자의 머리를 효수하라!"

"명하신대로 행하겠나이다."

레펜하르트가 정중하게 대답한다. 그를 스쳐 지나가며 유벨이 허리춤에서 황금의 왕관을 꺼냈다. 페오닌 백작이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왕관을 받아들고 유벨의 머리 위에 씌웠다.

왕관을 쓰고 반지를 낀 유벨이 성스러운 홀, 브라스티나의 가운데에 오롯이 섰다. 피니아가 감격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새로운 왕의 탄생을 찬양할지어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유벨을 향해 환호를 질렀다.

"왕이여! 나의 왕이시여!"

크로방스 왕국의 신 국왕, 유벨 2세의 탄생이었다.

6

크로방스 왕국의 내전은 전 대륙에 빠르게 퍼져 갔다. 모두가 유벨 왕자의 패배를 점쳤기에 그의 승리는 정녕 놀라운 것이었다. 놀라운 만큼 소문은 널리 퍼졌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안 그래도 왕자 때부터 오르내리던 인물이다 보니 다들 관심이 지대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또 하나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꺾은 그가 갑자기 크로방스 왕국에 나타나 내전을 종식시킨 것이다. 그는 놀라운 무위로 이종족들을 다루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했다. 전장에서 보인, 상식을 벗어난 오크와 드워프, 엘프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놀랍다는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권왕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하다 보니 그가 마법을 구사한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레펜하르트는 로브만 뒤집어썼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된 마법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끽해야 실란 찾아온 거구의 여인, 크리스틴과 상대할 때나 썼을까? 그렇다 보니 다들 권왕이 자신의 무력으로 이종족들을 감복시켜 수하로 삼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소문은 그라임 왕국에서 머물고 있던 테스론에게도 들어갔다.

"마왕 레펜하르트! 벌써 그 정도까지 힘을 되찾았던가!"

테이블을 박살 내며 테스론은 이를 갈았다. 아직 그는 제대로 힘을 되찾지도 못했는데 저 사악한 마왕은 벌써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초조해하며 테스론은 손톱을 깨물었다.

'제길, 카르사스 대왕께서 서거하시다니.'

전생의 그 인자하고 현명했던 크로방스의 국왕, 카르사스를 떠올리며 테스론은 침울해했다. 현명하고 전술, 전략에도 뛰어났던 카르사스 대왕은 암흑 제국을 상대하는 데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동료였다. 최후에 마왕을 물리치기까지, 그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작전을 구상했을 때도 카르사스 대왕의 조언이 실로 컸다. 그런데 지금 그는 빛을 보기도 전에 마왕의 손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비열한 자 같으니! 아예 싹이 트기도 전에 자신의 대적자들을 모두 없애 버릴 셈인가!'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미래의 소중한 동료들이 모조리 죽어 나갈 것 같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테스론은 부들부들 떨며 심호흡을 했다. 예전에는 아무리 흥분을 가라앉히려 해도 쉽지가 않았는데, 이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워낙 차가운 성품을 지녔던 것인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내 머릿속이 맑아졌다.

"후우우...."

숨을 길게 몰아쉬며 테스론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마왕이 아직 완벽하게 힘을 되찾지는 못한 것 같다.'

지금 들려오는 소문 속에 권왕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테스론은 자신의 무문, 짐 언브레이커블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단순 무식하기로 이름 높은 권왕이 만약 마법까지 구사했다면, 도저히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직 레펜하르트가 높은 수준의 마법까지는 회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지.'

그래,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그렇게 테스론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들어왔다. 황금기사 유서스와 단호의 기사 스테반이었다.

유서스가 테스론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테스론 경! 소문을 들으셨소?"

테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서스가 말한 것은 레펜하르트에 대한 소문이 아니었다.

"러스가 죽지 않았소! 그뿐 아니라 크로방스 왕국에서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쳤다는군!"

크로방스 내전으로 인해 명성을 떨친 것은 레펜하르트뿐만이 아니었다. 고작 20대 후반의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천재 검사, 사이러스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권왕의 소문이 더 컸겠지만, 기사들이나 귀족들에게는 오히려 러스 쪽이 더 관심이 많았다. 저 나이에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칠 정도라면 대체 앞으로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성장하겠는가? 게다가 러스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주군이 없는 것이다. 그런 러스를 휘하로 두게 되면 어느 가문이건 단숨에 두세 단계는 위로 상승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러스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던 유서스로서는 실로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 더러운 천한 핏줄이! 그런 놈의 소문이 내 귀까지 들리고 있소! 게다가 레펜하르트 옆에 달라붙었어? 배신자! 역시 천한 핏줄은 어쩔 수가 없군!"

자기가 배때기에 칼 꽂은 주제에 유서스는 러스를 배신자라 매도하고 있었다. 참 성격 많이 변했다 하겠다. 하지만 유서스는 진지했다.

"진정 명예를 안다면, 테네스 가문에게 입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당장 돌아와 목을 내놓고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아닌가!"

테스론은 기가 차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같은 편이라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솔직히 적반하장도 저런 적반하장이 없다.

'거참, 원래 저 친구가 저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처음 은의 현자로서 유서스를 접했을 때만 해도 그는 가문에 긍지를 가지고 명예를 아는 훌륭한 기사였다. 그런 유서스가 저렇게 변한 걸 보니 영 입맛이 쓰다.

'하지만 어쨌거나 레펜하르트를 적대하는 이상 믿을 수 있는 동료인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유서스 옆에서 스테반도 이를 갈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오만하긴 했어도 잘생기고 활발한 청년이었던 스테반은 지금 상당히 섬뜩한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 밑은 퀭하고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거린다. 테스론이 그에게 물었다.

"스테반, 슬슬 버서커 아머는 익숙해졌나?"

스테반이 살기를 피우며 대답했다.

"그자와 상대할 일만 남았소. 테스론 경!"

테스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이르다고, 좀 더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미루어 왔지만 마왕이 벌써 행동을 시작한 이상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법의 힘마저 되찾기 전 손을 써야 한다.

"결행의 시기가 온 것 같군."

각오를 다지며 테스론은 오른손을 들었다.

우우웅!

싯누런 오러가 그의 손을 감쌌다. 원래 테스론의 빛, 짐 언브레이커블의 황금빛 오러와 비교하면 찬란함은 전혀 없고 거무튀튀하게까지 보이는 황색의 오러였다. 더 이상 언브레이커블의 육체가 아니게 된 테스론이 전생의 깨달음과 경지를 되새기며 간신히 새롭게 만들어 낸 현재의 힘이다.

'그래, 지금의 나도 결코 약하지 않다.'

테스론이 두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여행 채비를 갖추게."

유서스가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스테반이 흥분하며 물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겁니까?"

"그렇다. 레펜하르트를 죽인다!"

☆ ☆ ☆

"으음...."

청년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쑤셔 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의아해하며 그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손을 뻗어 보니 아무래도 커다란 상자 같은 것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애써 뇌리를 정리하며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난 분명... 권왕 레펜하르트와 싸우고... 그의 공격에 맞았던 것 같은데....'

그때였다. 밖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어이, 이 친구 깨어난 것 같은데?"

동시에 상자 위쪽이 열리고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 왔다. 청년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귀여운 인상의, 어려 보이는 소녀 한 명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소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카르사스 씨. 저는 레펜하르트 님의 동료, 틸라라고 합니다."

순간 카르사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했는데, 저 풍만한 유방을 보니 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드워프!"

카르사스는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잠깐 버둥대다가 도로 쓰러져야 했다. 채 못 느꼈는데, 그의 전신은 이미 굵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냥 자유롭게 해 둘 리가 없지.'

신음을 흘리며 카르사스가 틸라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난 죽은 것이 아니었나?"

눈앞을 뒤덮는 그 황금의 빛을 본 순간 죽음을 떠올렸다.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전신이 좀 쑤실 뿐, 별다른 부상도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너무 안 깨어나서 조금 걱정은 했어요. 레펜하르트 님도 참, 그냥 기절만 시켰다더니 무슨 기절한 사람이 하루 반나절이 지나도록 안 깨어난담?"

틸라가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카르사스는 인상을 썼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가 나를 살린 것인가? 유벨 왕자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텐데?"

"네, 대외적으로 당신의 머리는 왕도 크로틴의 중앙 광장에 걸려 있답니다."

틸라가 방실거리며 대답했다. 카르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로군."

"비슷하게 생긴 시체 머리 잘라서 마법으로 머리랑 눈알 색깔만 바꿨다고 하던데요."

"그렇군, 그럼 유벨 왕자 측도 내 생존 사실을 모른다는 건가. 하지만 눈앞에서 어떻게 그런 속임수를? 아, 그 이상하게 눈부셨던 오러가 그런 용도였나? 길거리 마술사들이 쓰는 트릭이었군."

머리 좋은 놈을 상대하는 것은 이래서 편하다. 아주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도 카르사스는 냉철하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거의 전부를 파악한 것이다. 틸라가 혀를 차며 첨언했다.

"정확히는 신성한 홀 뒤쪽의 비밀 통로에 저희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머리랑 당신을 바꾼 거지요. 그리고 흔적 안 들키게 레펜하르트 님이 통로를 아예 뭉개 버렸고."

"하지만 왕성의 비밀 통로는 왕족들에게만 은밀히 전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어찌 알고?"

"그냥 눈으로 보면 보이는데요, 그런 건."

드워프들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축학의 대가들이다. 왕도 크로틴은 드워프의 손길을 타지 않았지만, 드워프들은 그저 외견을 살피는 것만으로 숨겨진 비밀 통로의 위치를 거의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리 통로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봐야 하중을 견디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벽의 강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구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비밀 통로가 있는 장소를 안 들키게 하기 위해 모든 왕성의 기둥과 벽을 두껍게 하면 예산이 너무 높아지니까. 어떠한 비밀도 예산 앞에서는 전모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세상의 차가운 현실이다.

하여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한 카르사스는 한숨을 쉬며 상자 속에서 몸을 뉘었다. 살아났으니 응당 기뻐해야겠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라 기쁘긴커녕 모든 것이 당혹스럽고 허탈할 뿐이었다.

"권왕 레펜하르트... 그가 대체 왜 나를 살렸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레펜하르트가 왜 자신을 살렸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짐작이 가는 것이 너무 많아 문제였다.

'유벨 편을 드는 척하며 크로방스 왕국을 분열시키는 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이었나? 나를 숨기고 이번엔 유벨 왕자에게 반기를 들기 위해? 아니야, 그럴 거면 이토록 전쟁을 빨리 끝낼 이유가 없어. 그럼 왕국의 귀족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타국의 음모? 젠장, 어느 것이나 말이 되고 어느 것도 말이 안 돼!'

고민하는 카르사스를 보며 틸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것이 표정만으로도 보였다. 그녀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깝대요."

"음?"

눈을 치켜뜨며 카르사스가 신음을 흘렸다. 틸라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죽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라더군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카르사스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틸라가 그의 이마를 짚고 살짝 밀었다.

"그럼 좀 더 주무세요."

"윽! 자, 잠깐!"

카르사스의 애원에도 불구, 상자가 다시 닫혔다. 어둠에 휩싸이자 왠지 조금 전까지 못 느끼던 전신의 피로가 맹렬히 몰려왔다. 전신을 강타했던 그 황금빛 오러가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삽시간에 졸음이 몰려오며 정신이 흐릿해졌다.

'대, 대체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하는데....'

중얼거리며 카르사스는 다시 잠들었다. 의식이 끊긴 그를 담은 상자, 그것을 실은 마차 안을 바라보며 틸라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마부석으로 걸어 나왔다.

"자, 그럼 계속 갈 길 가죠."

마차 밖에는 다섯 명의 드워프들이 무장을 하고 호위 중이었다. 틸라가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가볍게 때렸다.

"이랴! 가자!"

덜컹덜컹.

어둠이 짙게 깔린 숲 속의 밤길, 그 속으로 마차와 드워프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20장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은가?

1

유벨 2세가 국왕으로 오르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운 권왕 레펜하르트는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레펜하르트의 성을 국왕이 인정하고 지위를 부여했으니 그는 이제 당당한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 안타레스 백작이 되었다.

타국인인 그가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이 되는 것에 대한 반발은 전혀 없었다. 아무 공이 없더라도 레펜하르트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어느 나라를 가건 저 정도 대우는 받을 수 있다. 타국인 오러 유저가 자국의 귀족이 된 사례는 많이 있기에 귀족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레펜하르트 정도의 공이라면 공작이나 후작위를 주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많이 깎아서 백작위를 받은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야 작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가 원했던 부분, 겔페인 자작의 영지와 그에 따른 조건 부분은 역시 말이 많았다. 레펜하르트는 단순히 영지를 원한 것이 아니라 크로방스 왕국법과 완전히 독립된 자치권을 원했다.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의 관계처럼, 크로방스 왕국 안에 새로운 국가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역시 전례에 없던 일이기에 반대도 심했다.

귀족들은 두 파로 갈려 열심히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중립이었던 귀족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편이었고, 원래부터 유벨 왕자를 지지하던 이들은 찬성을 표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데다 눈앞에서 그의 군대, 이종족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똑똑히 본 그들은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낸 것이다.

"좋지 않은 선례입니다. 아무리 공이 크기로서니 어찌 자치권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의 공은 현실적으로 너무 크오. 실로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지 않소?"

"그렇소. 그런 공신에게 고작 백작의 작위와 척박한 겔페인 자작령만을 내린다는 것이 어찌 형평성에 맞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에 걸맞은 다른 상을 내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자치권은 역시 과합니다."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이번에도 새로운 국왕, 유벨 2세였다.

"그럼 대신 다른 영지를 내리는 것이 낫겠소? 하지만 땅의 크기는 정해져 있으니 그만큼 다른 공신들에게 주어질 포상이 줄어들 텐데? 음, 그의 공적을 생각하면 페르난도 공작령 정도는 통째로 주어야...."

그러자 반대하던 중립파 귀족들이 싹 안면몰수하고 찬성으로 돌아섰다. 처음부터 유벨과 함께 했던 이들에 비해 그들은 아무래도 공이 적었다. 레펜하르트에게 공적에 맞는 영지를 내려야 한다면 그 영지는 보나 마나 중립파 귀족들이 받을 포상에서 잘릴 가능성이 컸다. 눈앞에서 자기 몫이 뭉텅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소릴 듣고 나니 다들 참 간사하게도 태도를 바꾼 것이다.

결국 이 역시 대다수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다. 유벨 2세가 왕가의 인장을 내밀며 단호하게 선언하니....

"레펜하르트 공에게 땅을 내리고 자치권을 부여하니, 이제부터 그 영지를 안타레스 백국이라 칭하겠노라!"

크로방스 왕국 내에 새로운 국가, 안타레스 백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