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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로텐 산맥 서부, 한때는 겔페인 자작령이라 불렸던 대지.

산을 끼고 세워진 커다란 성의 회견실에서 거구의 사내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청년이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국의 왕이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거구의 사내, 레펜하르트가 청년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러스 너도 마음만 먹었으면 이 정도 대접은 받았을 텐데, 뭘."

스피리어스 경을 물리치고 명성을 드높인 러스 역시 크로방스 왕가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그에 걸맞은 영지가 주어졌다. 공도 공이거니와 이미 내전으로 인해 두 오러 유저를 잃은 크로방스 왕가가 새로운 오러 유저의 존재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러스는 정중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언젠가 가문으로 돌아가야 하는 몸이라 유벨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는 처지라는 이유였다. 결국 금은보화로 포상을 받고 레펜하르트를 따라온 러스였다.

"하지만 저는 일국의 왕이 될 수는 없었겠지요."

"에이, 이걸 가지고 일국이라고 하면 부끄럽지."

창밖의 풍경을 손짓하며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는 백국의 주인으로서 크로방스 왕실 내가 아닌 한은, 대외적으로 백왕으로 칭할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겔페인 자작령, 이제는 안타레스 백국이 된 이 땅은 일국이라기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애초에 영민도 거의 없고 순 산맥뿐인, 어찌 보면 별장 같은 느낌의 영지였다. 아무리 법적으로 백국이 되었다지만 이 땅을 한 나라로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야 그렇죠. 조금 더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러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겔페인 자작령과 인접한 귀족들은 전부 카르사스 측으로, 이미 반역죄로 목이 잘린 후였다. 그들의 영지는 대부분이 포상으로 다른 귀족들에게 넘어갔고 레펜하르트는 약간의 농지만 더 받았을 뿐이었다. 그 농지는 물론 비옥한 토지였지만 그의 공적에 비하면 심히 적은 면적이었다.

"솔직히 인접한 남작령 한두 개쯤 통째로 달라고 했어도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요."

"대신 자치권을 받지는 못했겠지.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영지의 크기가 아니라 인간의 법이 허용하는 자치령이야."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귀족들이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초라한 영지에 자치권을 주어 봤자 큰 문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름 세심하게 귀족들의 생각을 예측해 이 정도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모자라는 땅은 차차 빼앗아 버리면 되니까. 영지전 좋잖아?'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며 레펜하르트는 웃었다. 귀족들이야 눈앞의 이득 때문에 자치령을 허용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때 인간 하인 한 명이 방으로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 드워프들이 회견실로 모였습니다."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겔페인 자작 가족들은 모두 반역죄가 적용되어 참수당하거나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레펜하르트는 겔페인 자작이 거느리고 있던 하인, 하녀 들을 모두 본인이 원한다면 그대로 성에 거주시켰다. 충성심이 강했던 집사나 몇몇 하인들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떠났지만 대부분 성에 남았다. 저 하인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가자, 러스."

"예, 형님."

러스를 대동하고 레펜하르트가 방을 나섰다.

회견실에는 이미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다들 백발이 성성한 이들로, 오래 사는 드워프들 중에서도 늙은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회견실로 들어오자 선두에 선 늙은 드워프가 머리를 조아렸다.

"백왕님을 뵈옵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이 드워프들은 겔페인 자작의 노예였던 이들이다. 레펜하르트가 원한 것은 단순히 겔페인 영지를 넘어서 자작이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었고, 이들 역시 그가 거두게 되었다.

드워프 노인이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왕께서 우리들의 구원자시라는...."

"그렇다더군."

"가족을 만난 이들 모두 구원자의 은혜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들은 그만큼 아첨이라는 개념에 약하다. 지금 이 늙은 드워프는 진심으로 레펜하르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광산의 남자 드워프들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드워프 노예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 삼아 거주지를 분리시키는 것은 광산업을 하는 이들의 상식이다. 겔페인 자작 역시 광산의 남자들과 그 가족들을 따로 살게 하고 가끔 만나는 것만 허용함으로써 드워프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제 언제나 가족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드워프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미 이 성 지하에서는 가족과 조우한 드워프들이 상봉의 기쁨을 느끼며 기뻐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드워프 노인이 문득 곤혹스러워하며 물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드워프들에게 행한 것은 이산가족 상봉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히 이들의 노예 문서를 전부 불태우고 그들이 이제 자유임을 선언했다.

어느 정도 조상의 문화와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드워프들이었기에, 엘프나 오크 노예들처럼 자유의 개념조차 이해 못 해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혹시, 저희들은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자유민, 원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소. 물론 원한다면 이곳에 있을 수도 있고."

드워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노예로서 이곳에서 살아온 이들이다. 자유를 얻었다 해서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물론 그랜드 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들 밑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드워프들이 살아가기에 그곳은 역시 너무 척박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도 이 드워프들을 놓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 양반들이 이 땅의 유일한 돈줄인데 떠나면 큰일 나지.'

이 영지의 주 수입원은 바로 드워프들의 광산업이다. 광산이 문 닫으면 기껏 생긴 안타레스 백국도 문 닫는다. 노예처럼 부리며 강제로 땅 파게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광신 놀릴 생각도 전혀 없다.

"그대들은 자유인, 하지만 저 광산은 명확하게 제 소유입니다."

"그럼 역시 광산을 떠나야 한다는?"

"아니오. 그대들이 광산의 채굴권을 주겠다는 소리입니다. 정확히는 광산을 임대한다고 해야 하려나?"

드워프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거저 모든 것을 넘겨줄 수는 없다. 이것은 전생에서도 지켜왔던 원칙이었다. 진정 자유로운 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

레펜하르트가 드워프 노인을 향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여태처럼 광산에서 일을 하라. 단, 이제부터는 광산의 관리를 전적으로 드워프들에게 맡기겠다. 어디서 살고 누구와 지내건 간섭하지 않는다. 드워프들은 광석을 캐고 무기며 갑옷을 제작해 그걸 판 돈으로 세금과 임대료를 내면 된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돈을 모아서 광산 소유권을 제게서 통째로 사십시오. 원하면 적당히 나눠서 받겠습니다. 뭐, 한 360개월 할부 정도?"

레펜하르트는 드워프들에게 인간처럼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하라고 권한 것이다. 드워프들이 눈을 껌벅이더니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아니, 상상도 못할 정도로 후한 조건이다. 360개월, 30년이면 인간에겐 강산이 세 번은 뒤바뀔 엄청난 기간이겠지만 오래 사는 드워프들에겐 그냥 적당한 시간이다.

"백왕께선 우리들에게 너무도 후한 대접을 해 주시는군요. 뭔가 원하시는 것은 없습니까?"

"제가 부를 원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은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래선 백왕께 전혀 득 될 것이 없어 보이는데...."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갖는 것은 당신들이 만드는 모든 무구에 대한 전매권이니까요."

쉽게 말해서, 이 드워프들이 만드는 모든 것은 레펜하르트를 통해서만 현금화할 수 있다는 소리다. 드워프들이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조건이면 레펜하르트 역시 그들을 통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노예였던 그들은 인간이 원하는 최저의 광물과 무기만을 대충 만들어 공급하곤 했다. 이제부터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땅을 파고 무기를 만들 것이다. 겔페인 자작이 그들을 노예로 부렸을 때보다 오히려 몇 배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같은 시절에 우리와 거래하려 하는 이는 어차피 백왕님뿐일 터, 전매권은 그저 명분일 뿐이군요. 다시 한 번 구원자께 감사드립니다."

연신 감사하며 드워프들이 회견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의 뜻을 펼칠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그는 회견실 창문을 통해 척박한 겔페인 영지, 이제는 안타레스 백국이 된 땅을 내다보았다.

"예전에 비하면 참 초라한 땅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시작이었다.

"뭐, 안타레스 제국도 첫 시작은 이랬으니까."

사실은 이것보다 훨씬 나빴다. 그때는 딱히 나라 세울 생각이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황무지에 마을 세운 정도로 시작했었으니까.

문득 레펜하르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여행은 어땠소, 마켈린?"

회견실 한쪽에 어느새 노회한 드워프 한 명이 서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수염을 자랑스레 쓰다듬고 있는 그는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이 세워지자 연락을 받은 그 역시 타오반 상회를 통해 은밀히 이곳으로 온 것이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습니다, 레펜하르트 님. 다들 레펜하르트 님의 노예라고 하니 전혀 귀찮게 굴지 않더군요."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사죄의 말을 건넸다.

"불명예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해 미안하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리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요. 우리들에게 시간은 그리 귀중한 자원이 아닙니다."

마켈린이 빙그레 웃으며 레펜하르트를 달랬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고, 인간에게 시간은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이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는 게 슬픈 점이지만."

☆ ☆ ☆

회색빛 석벽으로 둘러싸인 회견장에 여러 종족의 대표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를 대표하는 마켈린과 세 오러 유저.

푸른 곰 부족의 오크를 대표하는 세 명의 멘토,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

단하임 일족의 엘프를 대표하는 렐하드와 그의 부관, 데임.

그들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그려진 전도全圖였다.

칼켄이 지도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싸워서 이겼으니 이제 땅 줄 차례인가, 형제?"

"그렇습니다. 자, 여기서 여기까지가 이제 푸른 곰 부족의 영역입니다."

지도에 선을 그으며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질을 했다. 그가 짚은 지역은 안타레스 백국의 서쪽 일부와, 국경 너머의 글로텐 산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렐하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여기는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레펜하르트가 짚은 지역 대부분은 크로방스 왕국의 국경 밖에 있는 산맥 지역이었다. 자기 땅도 아닌데 멋대로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크로방스 왕국의 영토도 아니지요. 공식적으로 글로텐 산맥은 대륙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닙니다."

영토란 것은 지도 위에 슥 줄 긋는다고 다가 아니다. 그곳에 백성이 살고, 그 백성이 관리하에 있어야 비로소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험준한 글로텐 산맥은 인간이 생활하기엔 너무도 힘든 곳이었고, 그런 만큼 영토로서 관리할 가치도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나마 겔페인 영지도 광산이 있었기에 크로방스 왕국에 편입되었을 뿐, 글로텐 산맥 대부분은 무주공산이었다. 산맥에서 얻는 것보다 관리하는 노력이 몇 배나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푸른 곰 부족이 돌아다니는 땅은 고스란히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가 되는 겁니다."

설명을 마치며 레펜하르트는 싱글벙글 웃었다. 하지만 칼켄과 스탈라, 그랄타는 당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랄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 형제, 이 산맥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소?"

글로텐 산맥이 비유 상 무주공산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 드넓은 산맥에 인간 하나 안 산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국가 단위의 세력이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산맥 곳곳에 여러 산악 민족들이 부락 단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범위는 산맥 동부의 초원, 페틀랜드까지 퍼져 있다. 하나하나는 세력이 약하지만 다 합치면 그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함부로 건드리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덤벼 온다. 그리고 인간들은 우리보다 숫자가 너무 많지. 그래서 조상님들도 여태 이쪽으로 오지 못했던 것 아닌가? 우리는 우리 부족을 지켜야 하는데 전사들의 수는 너무 적다."

칼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 사기를 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의심은 아니었다. 일단 호투의 의식을 통과한 시점에서 그들은 레펜하르트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저런 식의 의심은 결코 품지 않았다. 단지, 레펜하르트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물론 오크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대마법사인 레펜하르트가 생각 못 할 리는 없다. 그가 웃으며 푸른 곰 부족의 땅, 그중에서도 안타레스 백국 내에 속한 지역을 가리켰다.

"그럼 본거지로 돌아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군!"

렐하드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못 알아들은 오크 3인방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게 뭔 소리요?"

렐하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국경 안쪽은 엄연히 크로방스 왕국의 영토입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안타레스 백국의 백성인 겁니다.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들이 병력을 모아서 몰려오면 그때부터는 국경 침입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대규모로 쳐들어오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반면, 우리들은 이제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고 당당히 산맥을 넘나들 수 있지요."

그래도 오크들은 이해를 못 하고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렐하드는 잠시 고민했다. 이 단순한 작가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제는 애들 지킬 사람들이 많다 이 소립니다. 이 땅에 댁들만 사는 거 아니잖습니까? 엘프도, 드워프도 살 것이고 레펜하르트 님 휘하의 인간들도 살게 될 겁니다."

"그래서?"

"본진 털릴 걱정 없다 이 소립니다."

그제야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오오! 그렇군!"

"이제 애 봐줄 사람들이 더 생긴단 말이지?"

"그럼 전사들이 마음 놓고 마을 비워도 되겠군!"

좋아하는 오크들을 보며 마켈린과 렐하드, 레펜하르트- 그러니까 좀 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이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오크들을 쉽게 이해시키느라 이렇게 설명하긴 했지만, 안타레스 백국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그보다는 더 복잡하다.

사실 이종족들이 나타날 때 인간들이 똘똘 뭉치는 이유는 그저 영토를 침범당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크들은 물론이고 엘프나 드워프들은 노예 종족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한마디로 야생의 이종족들이 발견되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한다 해도 쓰는 예산보다 얻는 이득이 많은 것이다. 주인 없는 노예들을 잔뜩 얻게 될 테니까. 그래서 이종족들과 조우한 당사자들뿐만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인간들도 욕심을 앞세워 힘을 합치려 한다.

하지만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땅의 이종족들은 엄연히 대외적으로 레펜하르트의 소유다. 자치권을 받았으니 크로방스 왕국법이 이종족들을 레펜하르트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보호해 준다.

즉, 여기를 기점으로 푸른 곰 부족이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과 부딪치게 되면 그때는 야생의 오크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안타레스 백국의 레펜하르트가 영토를 넓히는 전쟁이 되는 것이다.

"원주민들과의 마찰은 있겠지만, 적어도 욕심 때문에 참전하는 인간들은 정치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렐하드의 말에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후에 우리들의 숫자가 커진다면 인간들의 반응도 달라질 터. 하나 초기에는 별문제 없을 겁니다."

저 문제는 오크뿐 아니라 드워프나 엘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 역시 안타레스 백국을 등에 업고 안전하게 글로텐 산맥으로 진출할 수 있다.

"엘프의 영역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되겠군요."

레펜하르트가 백국과 연결된 산맥의 중앙, 능선을 따라 길게 펼쳐진 숲 지역에 동그라미를 그었다. 오크들의 영역과 인접하면서도 적당히 거리를 둔 지역이었다.

오크들이 채집, 수렵으로 살아가느라 활동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엘프들은 대체로 숲 속에서 경작과 재배에 열중하기 때문에 영역도 그렇게까지 넓을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 수림이면 천 명이 넘는 엘프들이 마을을 꾸리고 살기에 충분한 넓이였다.

"차후 엘프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다른 숲도 필요하겠지만 당분간은 이 정도로 충분할 겁니다."

렐하드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넓소. 단지 문제는 우리 일족이 전부 이곳으로 옮겨 와야 하는 것이냐인데...."

일족이 통째로 옮겨 올 생각인 푸른 곰 부족과 단하임 일족은 처지가 달랐다. 한때 통곡의 땅이라 불렸던 그들의 고향은 이제 은총의 대지라 불리며 녹음이 푸르른 땅으로 변해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되살린 세계수 엘븐하임의 권능 덕이었다.

렐하드가 난처한 듯 손가락을 꼬았다.

"세계수 곁을 떠나는 것은 역시 좀...."

물론 레펜하르트도 단하임 일족이 굳이 되살린 세계수 곁을 떠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대륙에는 여전히 노예로 살아가는 엘프들이 많으니까요. 이 숲은 그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단하임 일족 외에도 아직 오지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이 제법 있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단하임 일족의 일부가 이 숲에서 거하며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겠군. 알았소. 일족의 젊은이들을 추려 이쪽으로 보내도록 하지."

렐하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아쉬운 목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이럴 것이면 차라리 이곳에 세계수를 심는 것이 나을 뻔했군."

현재 세계수는 완전히 성장한 상태가 아니기에 엘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역시 약하다. 단하임 일족의 고향은 오지 중의 오지라 사막만 벗어나도 세계수의 힘이 거의 미치질 못했다. 그래서 현재 렐하드와 엘프 전사들도 품에 엘븐하임의 가지를 각자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 여기도 심을 겁니다."

그러자 렐하드가 기막혀 하며 되물었다.

"...세계수가 무슨 분재도 아닌데 그렇게 아무 데나 막 심을 수 있는 거였소?"

"아무 데나 심을 수는 있습니다. 아무거나 못 심어서 문제지."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그는 저 엘프들의 숲에도 세계수를 심을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물론 보통 나무들 가지치기 하듯 세계수 가지를 꺾어서 땅에 박는다고 다 엘븐하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궁 니힐렌처럼 세계수의 순수한 정精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야 새로운 거목이 될 씨앗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씨앗들의 위치는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

전생에서 레펜하르트는 일곱 그루나 되는 세계수를 대륙 곳곳에 심고 연동시켜 대륙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권능의 그물을 짠 바가 있었다. 원래의 엘븐하임처럼 어마어마한 권능과 크기를 가진 세계수로 성장시키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해 내린 편법이지만, 효과 자체는 그리 차이가 없었다. 이번 생에도 레펜하르트는 그 방법을 고수할 생각이었다. 단시간에 엘프들을 각성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니까.

'물론 시간이 지나면 각각의 세계수가 지나치게 대지의 정을 빨아들이게 될 테니 한 그루만 남기고 다시 꺾어 버려야겠지만, 그건 앞으로 수백 년 후의 일이니까.'

그렇게 렐하드와의 논의를 끝낸 뒤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마켈린을 돌아보았다.

"드워프들은 이런 식이면 되겠지?"

"충분합니다.

드워프들의 영역은 오크나 엘프와 달리 전 지역 곳곳에 점의 형태로 퍼져 있었다. 지상보다는 지하에 관심이 많은 그들에게 지상의 영토는 크게 의미가 없다. 광산 근처의 마을과 농토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다 보니 푸른 곰 부족의 영토와 상당수 겹치긴 했지만 어차피 한쪽은 지상이고 한쪽은 지하이니 별문제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인구가 늘 경우 자급자족이 힘들어지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상관없겠군요."

"어차피 초기 드워프들의 주 수입원은 광물과 무기의 판매에 의존하게 될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말에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지의 지리적 위치는 좀 아쉽군요. 그랜드 포지와 왕래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차라리 세텔라드 산맥을 접한 영지를 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렐하드도 마찬가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그랜드 포지와 단하임 일족의 은총의 대지에서 이곳 안타레스 백국까지 오려면 너무도 긴 여정이 필요했다. 양쪽 모두 던전 다이만의 공간 포털을 이용해 세탈라드 산맥 외곽을 빠져나온 뒤 타오반 상회의 도움을 받아 차탄 공국을 통과, 크로방스 왕국을 동서로 주파해야 하는 것이다. 거리도 멀거니와 인간의 영역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너무 많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영지를 일부러 택한 것이라오. 여기, 글로텐 산맥에 있는 던전 클로이 때문에."

"거기에도 다이만 터미널과 연결되는 공간 포털이 있습니까?"

놀란 마켈린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괜히 이 겔페인 자작령을 콕 집어서 유벨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냥 글로텐 산맥을 끼고 있는 영지라면 조건 좋은 곳은 더 많다.

다 저 던전 클로이, 현 시대에도 살아 있는 공간 포털이 있는 던전 때문에 굳이 이 땅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훨씬 편해진 셈이군요. 다이만 포털을 통해 바로 이 영지로 올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클로이 던전으로 들어가서 포털을 활성화시켜야 하고, 또 그 던전을 깔끔히 청소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모인 각 일족의 전사들이라면 별로 힘든 일도 아니지요. 미리 공략법도 다 설명해 줄 것이고."

클로이 던전의 수준은 엘류시온 유적보다도 떨어진다. 황금기사 유서스와 테네스 기사단이 탐사했을 정도 수준이니 오러 유저가 남아도는 이들이 탐사를 고민해야 할 정도 레벨은 아닌 것이다.

말로이드가 가슴을 치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건 맡겨 주시오, 구원자여!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겠소!"

그렇게 레펜하르트는 이종족 우두머리들과 상의해 영역 밑 간단한 법령을 정했다. 법령이야 이미 안타레스 제국 시절 써먹던 것이 있으니 금세 정할 수 있다. 어차피 지금은 초기 단계라 복잡한 법도 필요 없었다. 각 종족 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과 예의 정도면 족했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렐하드의 부관, 데임이라 불리는 엘프 청년이 지도 귀퉁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은인이시여, 지도를 보니 여기 남는 땅이 있는데 이것은 뭡니까?"

지도상에 엘프와 오크의 영역 사이, 꽤나 넓은 지역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굳이 땅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일부러 비워 놓은 것이 명백해 보이니 그냥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곳은,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곧 만날 이들을 위한 지역입니다."

"...?"

다들 그의 뜻을 이해 못 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마켈린만이 뭔가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2

크로방스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지 어언 한 달.

이제는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이름을 바꾼 겔페인 성의 뒤뜰에서 두 사내가 검을 맞대고 있었다.

"타앗!"

"켈타!"

날렵하면서도 탄력적인 몸을 지닌 인간 청년과 두툼한 근육을 지닌 녹색 피부의 오크 전사였다. 완연한 초여름, 따갑도록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둘 다 얼굴 가득 신 난다는 표정으로 공방을 주고받는다.

"허리!"

공격 지점을 미리 가르쳐 주며 러스가 횡 베기를 날린다. 투박한 참마도로 공격을 막아 낸 타시드가 검을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가라! 다카르! 머리!"

참마도가 허공을 날아 러스의 머리를 노린다. 검을 휘둘러 공격을 방어하며 러스가 잽싸게 타시드에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타시드는 어느새 거리를 벌려 사정권 밖으로 벗어난 후였다. 멀리서 타시드가 소리쳤다.

"러스! 나의 맹우가 어깨를 노린다!"

러스가 혀를 차며 등 뒤로 정신을 집중했다. 튕겨 나간 참마도가 어느새 재차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몸을 비틀어 검을 튕기자 참마도가 다시 타시드의 손으로 돌아갔다. 러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윽! 알고 있어도 이건 역시 까다롭네."

현재 러스는 일부러 오러를 봉인한 채 타시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느꼈던 자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수많은 오러 유저를 상대해 온 러스였다. 확실히 오러를 다루는 실력은 예전에 비해 월등히 올랐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검술 같은 기본적인 기량이 오러에 비해 너무 떨어진 것이다.

오러를 각성한 시점에서 모든 신체 능력이 월등히 올랐으니, 아무리 달인이라 불리는 검사라 할지라도 현재 러스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검술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현재 러스의 수준은 내려 베기 하나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그 시절과 거의 나아진 것이 없다. 러스 특유의 그 '예측 불가능한 검술'은 그냥 멋대로 휘둘러도 먹힌다는 의미이지, 검술로서 정립되었다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자고로 모든 것은 고르게 발전해야 하고 하나 모자람이 없어야 하느니....'

러스는 오래토록 내려오는 무언武言을 읊으며 숨을 골랐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시행하지는 못하는 옛 가르침, 하지만 러스는 타고난 본능으로 그 길을 따르는 것이 강자가 되는 지름길임을 느끼고 있었다.

"후우우우."

숨을 고른 러스가 다시 타시드에게 돌진했다.

"크아아아!"

타시드도 전사의 포효를 터트리며 마주 돌격해 갔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까지 치솟았거늘, 이 두 젊은이들은 더위조차 느끼지 못한 듯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흥겹게 검을 나누었다.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잠시 쉬자고 손짓하며 러스가 타시드에게 다가갔다. 타시드가 물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러스에게도 다른 물수건을 던져 주었다.

이마를 훔치며 러스가 물었다.

"아, 타시드. 그 스피리츠 웨폰 말인데."

"오크어로 킨드라 카타."

"음, 여하튼 그거."

둘은 굉장히 막역한 말투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것이다.

타시드는 오크답게 호쾌하고 단순한 성품이면서도, 인간들 사이에서 자란 덕에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로부터 마법의 목걸이를 받아 공용어 역시 우아하게 구사하니, 러스에게는 오크가 아니라 인간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실 러스는 인간 친구도 없었다. 그냥 타시드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 하겠다.)

러스가 타시드의 애검, 다카르를 가리키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 기술 대단하긴 한데, 검을 던지면 넌 맨손이 되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검 한 자루쯤 더 차고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타시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전사에게 무기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 어찌 맹우를 배신하고 다른 무기를 쥘 수 있겠나?"

"하지만 잘카토란 오크는 쌍검을 쓰던데?"

"그 녀석이야 맹우가 둘인 것이고. 난 이제 와서 맹우를 하나 더 늘일 생각은 없거든."

"뭔가 복잡하네."

아리송해하며 러스는 혀를 찼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로부터 들은 스피리츠 웨폰의 특성을 생각하면 또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애당초 저 정도로 고지식하게, 얼핏 불합리해 보일 정도로 무기에 집착해야 잔존 사념이 깃드는 것이다.

'하긴, 만약 타시드가 다른 검을 쥔다면 도리어 스피리츠 웨폰의 힘마저 잃을 수도 있겠지.'

문득 러스가 고개를 돌리더니 실소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참 전장과 평소 모습이 갭이 크군."

그들이 싸우고 있던 뒤뜰 성벽의 그림자, 그 밑에서 거대한 다이어울프 하나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시드의 애랑, 흑왕이었다. 저 노회한 늑대는 '좋구나, 한창 때라 힘이 남아도나 보네~.'란 눈빛으로 둘을 보며 도롱도롱 졸고 있었다. 저 모습만 보면 그저 갈 때 다 된 늙은 개지 전혀 데스트란드를 지배하던 공포의 제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타시드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부끄럽군. 평소엔 어지간히 게을러야 말이지."

"그래도 전투에만 임하면 괴물처럼 변하니, 과연 대단한 늑대야."

둘은 그렇게 가볍게 농담을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타시드가 갑자기 러스에게 말했다.

"아, 그 오러란 거 한번만 더 보여 줘."

"이렇게?"

부우웅!

푸르른 블레이드 오러가 러스의 롱 소드를 찬란하게 감싼다. 타시드가 롱 소드를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거참, 알 듯 말 듯. 잘만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말이지, 쩝."

러스와 친구가 된 이래, 타시드는 은근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안 그래도 푸른 곰 부족 3위의 실력을 자랑하는 전사인 타시드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러스가 오러를 다루는 걸 보니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계속 검을 마주하며 뭔가 속에서 간질간질하게 올라오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딱 이거다 싶은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타시드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아, 역시 투혼의 축복을 받기엔 시간이 필요하려나."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 보통은 몇십 년 걸린다고, 이거."

"네가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지."

20대에 벌써 오러를 막 써 대는 러스를 향해 타시드가 핀잔을 던졌다. 그리고 포기한 듯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해 댔다.

"하암, 역시 열 살은 넘어야 하나?"

"쿨럭!"

순간 러스는 헛기침을 해 댔다. 타시드가 올해로 아홉 살이란 것은 이미 들었지만, 그래도 상기할 때마다 어색해 죽겠다. 타시드가 불만스러워하며 입을 삐죽였다.

"왜 또 그런 표정이야? 종족 나이로 치면 또래인데."

"그건 잘 알지만 말이지."

오크들의 성장 시스템이 인간과 다르니 현재 타시드의 종족 나이는 러스와 비슷한 20대 후반으로 봐야 한다. 태어난 지 5년 만에 청년기, 인간으로 치면 20대 중반까지 자라고 그 이후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오크들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기분이 영....'

머리를 긁으며 러스가 몸을 일으켰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한판 붙지?"

"좋지!"

타시드도 참마도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또다시 둘이 격돌하며 우렁찬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크아아!"

☆ ☆ ☆

안타레스 백왕성, 그 2층 발코니에서 한 소녀가 뒤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엘프 소녀, 시리스였다. 그녀는 단정한 평상복 차림으로 턱에 손을 괸 채 두 남자들의 땀내 가득한 결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들 열심이네."

러스와 타시드뿐이 아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실란이 오늘의 체력 단련을 위해 열심히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시리스도 어쩔 수 없는 소녀라, 한창 때의 남자들이 땀을 흘리며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든다.

"틸라 양도 나름 열심히 임무 수행 중이고."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른 구역, 회랑이 연결된 작은 정원에서 한 남녀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드워프 처녀 틸라와 검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틸라와 함께 정원을 거닐던 청년이 문득 연못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고 흠칫했다. 그가 얼굴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으음, 이 얼굴은 여전히 익숙해지지를 않는군."

청년의 정체는 레펜하르트의 포로가 되어 이곳까지 끌려온 카르사스였다. 카르사스를 구해 낸 레페하르트가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법으로 외모를 바꾸어 준 것이다. 원래의 얼굴에 비하면 미모도가 대폭 하락한 모습이지만,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닐 것이다.

카르사스의 생명을 살리고, 그의 신분까지 숨겨 데리고 왔으면서도 레펜하르트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틸라를 감시 삼아 붙인 뒤 성내라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용한 것이 전부였다.

적이었던 상대에게 내려진 처우치곤 지나치게 관대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생길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현재 카르사스에게 이 성을 떠나 달리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틸라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다. 아무리 카르사스가 강하다지만 무장이 해제된 채 틸라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카르사스도 전혀 반항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아는 기사였고, 포로가 취해야 할 예의 역시 잘 지키고 있었다. 왜 자신을 살렸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길 법도 하건만, 카르사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순순히 주어진 작은 자유를 즐길 뿐이었다.

"날씨가 꽤 더워졌군요."

"슬슬 여름이니까요, 카르사스 씨."

"항상 나를 감시하느라 피곤하지 않소, 틸라 양?"

"아마 제가 이 성에서 두 번째로 한가할걸요."

"흐음? 첫 번째는 누구요?"

"웅,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아직까지 자고 있을 저 위의 누군가?"

거리가 상당하지만 엘프의 가공할 청력으로 시리스는 틸라와 카르사스의 대화를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장난스러운 틸라의 손짓에 시리스가 표정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이그...."

틸라의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모두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한가하게 농땡이를 피우는 작자가 하나 있었다.

그 작자는 지금도 햇살을 피해 이불을 돌돌 말고 침대 위를 데굴거리는 중이다. 시리스가 척척 걸어가더니 이불을 휙 잡아당기며 외쳤다.

"어휴, 레펜하르트 님! 그러다 살쪄요!"

이불이 벗겨지며 건장한 근육질의 거한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자,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레펜하르트가 눈곱 가득한 눈으로 시리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며칠 데굴거린다고 군살 붙을 만큼 인간미 있는 몸이라면 얼마나 좋겠냐?"

레펜하르트 일행이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스무 날이 넘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도 초반 열흘 정도는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이종족들을 모아 토지를 나누고 법령을 제정하는 한편, 병력을 이끌고 던전 클로이를 탐사해 깔끔하게 던전 내 시스템을 장악하고 공간 포털을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한동안은 정말 바쁜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 영주가 새로 영지에 부임하게 되면 할 일이 태산이겠지만, 이 영지는 애초에 인간이 얼마 안 살았다 보니 딱히 관리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는 전적으로 각 이종족들에게 자율권을 주고 그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했다. 왕으로서 신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동맹으로서 조언을 하는 형식이다. 이게 의미 자체는 참 바람직한데 속 내용을 알고 보면, 복잡한 일 죄다 떠맡겨 버렸다는 소리도 된다.

초반 열흘 정도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니 정말 할 일이 없어졌다. 그렇다 보니 인간이 완전히 퍼져 버렸다! 허구한 날 늦잠에 매일같이 하던 무술 수행이며 마법도 야금야금 빼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그동안 워낙 열심히 달려왔으니 좀 쉬기도 해야겠지.'란 생각으로 그냥 넘어가던 시리스도 슬슬 두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아아암~!"

레펜하르트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여전히 완벽한 강철의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혹한 수행을 거친 이 육체는 고작 며칠 게으름 피운 정도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무인이 어떻게 매일의 수행을 빼먹을 수가 있어요?"

"나 마법사인데...."

"마법사가 어떻게 매일의 명상을 빼먹을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 없지...."

결국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레펜하르트가 어슬렁거리며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마치 동면중이던 곰이 막 깨어난 듯한 나태함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시리스가 계속 혀를 차며 그를 발코니로 이끌었다.

"얼른 잠 좀 깨요!"

구시렁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힐끔거렸다.

'아니, 얘는 내 마음은 전혀 안 받아 주면서 왜 바가지 긁을 때만 예전 모습이 보이는 거야?'

불공평하다! 불합리하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투덜거릴 때였다.

"아침 차려 놨어요. 식욕 없으면 차라도 드세요."

발코니엔 어느새 근사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입으로는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도 시리스는 착실하게 그를 챙겨 주고 있는 것이다.

'아, 요 예쁜 것!'

팔짱을 끼고 딴청을 피우며 시리스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잽싸게 의자에 앉아 레펜하르트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응! 잘 먹을게!"

참으로 지조 없는 전직 마왕이었다.

☆ ☆ ☆

발코니에 놓인 테이블 위엔 두꺼운 빵 덩이와 신선한 야채, 잘 구워진 새끼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아침 식사라기엔 지나치게 거한 만찬이었지만 지금의 레펜하르트에게 이 정도면 충분히 소식小食하는 편이다.

돼지 다리를 잡아 뜯고 우물우물 씹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이거 시리스가 직접 차린 거야?"

"네."

"그럼 하녀들은?"

혹시 하녀들이 엘프인 시리스를 업신여겨 일거리를 떠맡긴 건가 싶어 레펜하르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이미 권왕이 이끄는 이종족 전사들의 힘은 크로방스 왕국 전체에 자자하게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현재 백왕성에서 종사하는 인간 시종들은 그런 이종족들의 군대를 두 눈으로 보고 두려워하는 이들이었다. 적어도 안타레스 백국 내의 인간들치고, 아직까지도 이종족은 노예일 뿐이라는 착각을 하는 이들은 남아 있지 않다.

'뭐, 현재 백국 내의 인간들이라 봐야 이 성의 시중인들 스무 명 정도가 전부지만.'

과연, 시리스는 자발적으로 상을 차려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툴툴거리며 레펜하르트 곁에 와 앉았다.

"다들 제 할 일 하느라 바빠요.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누구처럼 한심하게 데굴거리고 있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밥때도 아닌데 상 차리라고 하기도 미안하잖아요."

빵 덩어리를 작게 뜯어 오물오물 씹으며 시리스가 눈을 흘겼다. 레펜하르트와 함께 식사하려고 기다렸던 터라 그녀도 아직 아침을 먹지 못했던 것이다. 창밖의 태양 위치를 살피며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했다.

확실히 너무 늦잠을 자긴 잤다. 지금 먹는 이 식사를 아침이라고 해야 하나, 점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마법사답게 입만 산 레펜하르트가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어기 할라인 왕국에선 브런치라고 해서 이런 식의 식사 문화가 최첨단 유행이라는데...."

"밥 하나 제때 못 챙겨 먹는 게 무슨 최첨단 유행? 자신의 게으름에 유행 핑계 대지 말아요!"

뾰족한 시리스의 말투에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움츠리고 열심히 돼지 다리를 뜯었다.

'역시 너무 놀았나?'

확실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며칠간 너무 나태하게 보내긴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한가한 시간인 데다가, 드디어 뭔가 이루어 냈다는 기쁨으로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다.

"하긴, 슬슬 이곳도 안정이 된 것 같으니 움직일 때가 되긴 됐네."

빵 덩이 하나를 통째로 꿀떡 삼키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슬슬 푸른 곰 부족도 이곳으로의 이주를 끝내고 새롭게 부락을 세웠다. 렐하드가 데리고 온 단하임 일족의 전사들도 숲 여기저기를 탐색해 쓸 만한 마을 자리를 선정했다. 원래 이곳에 살던 드워프들도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터전을 꾸리고 있다.

혹시나 예상 못 한 사건이 터질까 싶어 그동안 백왕성에 붙어 있던 레펜하르트였지만, 다행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돌아갈 것이다.

시리스가 희석한 와인을 따라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직여요? 어디로요?"

"엘븐 포레스트에 심을 세계수의 파편을 찾으러 가야지. 지금 제일 가까운 데 있는 것이면 역시 창천蒼天의 지팡이, 제룬팅이겠군."

"제룬팅? 마궁 니힐렌 같은 건가요?"

"비슷해. 그 역시 엘븐하임의 잔재로 세계수의 정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유물이거든."

"마궁 니힐렌이라...."

문득 시리스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참 좋긴 좋았는데...."

화살 재고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위력 조절도 자유자재인 데다가 휴대성도 끝내주는 마궁 니힐렌은 실로 시리스의 입맛에 딱 맞는 무기였다. 그런 좋은 활을 그녀는 몇 번 쏴 보지도 못하고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엘프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게 되었으니 불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간간히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머쓱해하며 대꾸했다.

"미안, 나중에 비슷한 걸로 하나 만들어 줄게."

"엥? 레펜하르트 님이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요?"

놀란 시리스의 눈빛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레 말했다.

"마력만 받쳐 주면 어려울 것도 없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시리스? 이래 봬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10서클 마법사라고."

"영 그렇게 보이진 않는걸요, 흥...."

시리스가 구시렁대면서도 희망 섞인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전생의 비밀을 공유하는 그녀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상대와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그런 의미에서 마력도 좀 올려야겠는데...."

자신의 두꺼운 팔뚝과 허벅지를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하여튼 이놈의 육체는 정말 마법이랑은 담을 쌓아서."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탱자탱자 놀았던 이유 중에는 이것도 있었다. 열심히 명상하고 또 명상을 해 댔지만 이 테스론의 육체는 도통 마력이 오를 기미가 안 보였다. 지저 태양 마그림으로 마력 체질을 싹 개조했는데도 이렇다. 그러다 보니 결국 지쳐서 퍼져 버린 것이다.

"아직 7서클의 관문도 못 뚫고 있으니, 원...."

사실 지금 정도면 평범한 마법사보다는 월등히 마력이 잘 쌓이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마법과 고속도로를 뚫은 몸이었던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좀 더 힘을 키워야 해."

레펜하르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상황이 잘 풀리고 있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될 리는 없으니까."

확실히 지금까지는 그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종족들을 규합하고, 인간과 손을 잡고, 이 땅을 받아 새로운 안타레스 제국을 세울 기틀까지 훌륭히 마련했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잘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레펜하르트가 행했던 일들은, 비유하자면 상대의 패를 몽땅 보면서 도박을 한 것과 같다. 이쪽은 전생의 정보에 따라 대부분의 일들을 예측할 수 있는데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느니 승승장구하는 것도 당연했다. 프로 도박사가 상대의 패를 훔쳐보며 초짜의 돈을 따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제 이종족들의 힘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종족 전사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도 알려져 버렸다. 이제 인간들도 이종족들을 상대할 때 지금처럼 맥없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레펜하르트가 싸워야 할 상대는 단순한 세력이나 국가가 아니다. 그는 이 시대, 자체와 싸워야 한다. 전생에서처럼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마법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룬팅 챙기러 가는 김에 거기서 마력 높은 유물들도 좀 거두어야겠어. 통 진도가 안 나가니 마나 드레인으로라도 마력을 올려야지."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묻은 기름기를 닦으며 시리스에게 말했다.

"다들 불러 줄래? 말 나온 김에 오늘 출발해야겠다. 틸라는 카르사스 감시 임무 때문에 못 데려가겠지만, 나머지는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안 그래도 데굴거리는 꼴 보기 싫었던 참이다. 시리스가 좋아하며 몸을 일으켰다.

"행선지를 어디라고 해요?"

"세텔라드 산맥 남서쪽, 마토스 산악 지대. 거기에 제룬팅이 있는 던전 켈테가 있어. 다이만 터미널을 통해서 가면 일주일 정도면 도착할 거야."

3

체타스 남작령, 글루텐 산맥과 라키디 산맥 사이에 위치한 이 영지는 크로방스 왕국과 바실리 왕국을 잇는 교역로가 관통하는 곳이었다. 그 교역로 위에 위치한 자루드 시, 수많은 상단이 오고 가는 교역 도시의 한 여관에서 거친 사내의 노성이 들리고 있었다.

"뭐? 지금 그곳에 없다고?"

사내 앞에 선 로브 차림의 여인이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대, 테스론."

여인, 마법사 필레나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검은 머리의 미청년, 테스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끄응...."

그라임 왕국을 출발한 지 스무 날째, 테스론과 그의 일행은 일단 교역 도시 자루드에서 머물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안타레스 백국이 주로 거래하는 타오반 상회는 반드시 이 자루드를 경유했기에 백국 내의 정보를 얻기에는 최선의 장소였다. 그런데 타오반 상회의 상인과 접촉한 필레나가 생각도 못한 소식을 가져온 것이다.

"상인의 말에 따르면, 할 일이 있어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울 거라며 사흘 전에 백왕성을 떠났대."

"간발의 차로 놓쳐 버렸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내, 유서스와 스테반도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상대가 없다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는 실로 허탈한 일이었다.

"어디로 갔다든가 하는 말은 없었나?"

테스론의 질문에 필레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인들도 그런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던데?"

"하긴, 굳이 알려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긴 하군."

상인들 입장에서는 그저 제 때 물건 넘기고 돈만 받으면 만족스러운 거래다. 굳이 상대의 행보까지 물어볼 이유가 없겠지.

"어쩌지, 테스론?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할까?"

"달리 방법이 없군. 하지만 한 달이라... 너무 긴데."

테스론이 난처해하며 중얼거렸다. 스테반이 술잔을 거칠게 들이켠 뒤 흥분해 외쳤다.

"빌어먹을! 레펜하르트 그 개새끼를 드디어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화장실이라도 갔다 왔는지 테스론네 테이블 곁을 지나던 중년인 하나가 스테반을 돌아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보게 청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조심하시게."

"무슨 입조심 말인가?"

상대가 평민임을 안 스테반이 대놓고 반말조로 대꾸했다. 불쾌했는지 중년인의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현재 테스론의 일행은 값비싼 여행복을 입고 있어 누가 봐도 권세 높은 이들로 보였다. 괜히 끼어들었다고 속으로 혀를 차며 중년인이 더듬더듬 말했다.

"상대는 그 이름 높은 권왕이 아닌가? 그렇다 보니 그냥 걱정이 되어 말한 것뿐이네만."

유서스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권왕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런데 뭐가 두렵단 말이오?"

역시 유서스는 스테반보다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많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연장자에게 반공대 정도는 써 주는 것이다. 중년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두렵다는 것이 아니라, 권왕 레펜하르트는 크로방스 왕국의 내전을 멈춘 영웅 중의 영웅이 아니오? 그의 수하들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 기사도를 지키며 명예와 긍지를 아는 이들로 왕국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더군. 그렇다 보니 요즘 젊은이들 중 권왕을 추앙하는 이들이 꽤나 많다오. 그래서 혹시 시비라도 일어날까 걱정해서 한 말일 뿐이오."

말을 마치고 중년인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유서스가 테스론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소문이 짜증 나게 퍼지고 있군요."

"좋지 않아."

테스론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난감해했다.

"역시 빨리 레펜하르트를 잡아야 한다. 더 시간을 끌다 세력까지 갖추면 골치 아파. 부하들의 벽 뒤에 숨어 있으면 다가갈 방법이 없어진다."

스테반이 불만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는 따로 돌아다니는 지금이 기회인데, 위치를 알 수가 없으니...."

그때 테이블 반대편에서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자의 위치를 알고 싶은가요?"

다들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일제히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헉?'

'이 여자 뭐야?'

'크, 크다!'

말을 건 것은 거구의, 거의 2미터 가까운 신장의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눈부신 미녀라는 것이 놀랍다. 저런 미녀가 저런 체구를 지니고 있으니 그 부조리가 도리어 두렵게 느껴진다. 필레나가 위축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여인이 허리에 찬 검을 알아보고 테스론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이어의 성기사시군요."

여인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세이어 님을 섬기는 한 자루 검, 팰러딘 크리스틴입니다."

레펜하르트와의 사랑 싸움(?)에서 패한 크리스틴은 눈물을 뿌리며 실란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실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계속 실란의 근처에 머물며 사랑을 되찾을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왕도 크로틴에서 전투를 벌일 때도, 레펜하르트 일행이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했을 때도 그녀는 계속 몰래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안타레스 백국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교역 도시 자루드, 크리스틴은 자루드에 머물며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약점을 찾아 어떻게든 실란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타오반 상회로부터 상황을 계속 받아 듣고, 백왕성에서 일하는 하녀도 매수하면서 그녀는 꽤나 상세하게 레펜하르트의 정보를 취득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여관에서 계속 묵은 것은 여기가 타오반 상회와 접촉하기 제일 지리적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테스론 일행 역시 그 이유로 이 여관에 묵고 있었으니, 크리스틴이 이들을 만난 것이 딱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틴이 테스론 일행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권왕 레펜하르트를 적대하는 것 같더군요."

그거야 테스론 일행은 애초에 그 태도를 숨기지 않았으니 옆에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테스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 바와 같소. 그런데 세이어의 팰러딘께서 방금 그자의 위치에 대해 언급하셨던데?"

크리스틴이 빙그레 웃었다.

"네, 저는 그자가 지금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매수한 하녀를 통해 얻은 정보였다. 어차피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행보를 딱히 숨기지 않았기에, 하인이나 하녀들도 현재 그가 세텔라드 산맥에 위치한 켈테란 이름의 던전으로 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자의 위치를 가르쳐 드리지요."

크리스틴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넸다.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말투를 보아 그 대신... 이란 말이 나올 차례 같군요?"

크리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당신들과 함께 가게 해 주세요. 저는 반드시 그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테스론은 눈을 빛냈다.

세이어의 성기사라면 훌륭한 전력이다. 게다가 현재 크리스틴의 눈동자엔 분노와 증오의 불길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자세한 것은 더 물어봐야겠지만, 레펜하르트에 대한 원한이 어찌 큰지 저 눈빛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지경이다.

테스론이 씨익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당신의 제안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군요.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이유를 가진 자들이니."

크리스틴이 힘차게 테스론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필레나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난 그런 이유 없는데.'

물론 원한이 차고 넘치는 유서스와 스테반은 반색을 하며 크리스틴을 환영했다. 일행에 합류하며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입에 담았다.

"그 저주받을 자가 지금 향한 곳은...."

☆ ☆ ☆

레펜하르트 일행이 안타레스 백국을 떠난 지 여드레째.

세텔라드 산맥 남쪽, 던전 켈테의 최중심부에서 한 악마가 울부짖고 있었다.

"크아아아!"

악마는 두꺼비 인간을 연상케 하는 상체에 도마뱀을 닮은 하체를 지닌 사족 보행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깨 높이만도 자그마치 3미터가 넘는 엄청난 거구, 긴 두 팔로 거대한 할버드를 휘두르며 악마가 바닥을 깊숙이 쓸어 갔다.

휘이이익!

콰콰쾅!

자루 길이만도 무려 5미터, 무기라기보다는 건축용 건물 지지대로 써도 될 법한 커다란 할버드의 창날이 바닥을 파헤치며 연달아 폭음을 터트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허점이다! 기회야, 타시드!"

푸른 광채의 롱 소드를 손에 쥔 인간 청년이 악마를 향해 돌진하며 고함을 질렀다.

"알았다, 러스! 내가 좌측을 맡지!"

커다란 참마도를 든 오크 청년이 빠르게 대꾸하며 반대편으로 크게 돌았다. 좌우로 파고드는 두 사내를 노려보며 악마가 다시 한 번 분노를 터트렸다.

"크윽! 타로브 마르비자드 루자리!"

악마어로 '이 빌어먹을 조그만 것들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분노와 달리 악마는 빠르게 창을 거두어 반격 태세를 갖출 수가 없었다. 방금 날린 공격은 강력한 만큼 창을 거두는 시간도 길었다. 휘두른 창을 채 회수하기도 전에 이 '조그마한' 것들은 그의 좌우로 다가와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타아앗!"

"가라! 다카르!"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악마의 오른팔을 깊숙이 벤다. 두터운 참마도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악마의 왼쪽 어깻죽지에 박혔다가 스스로 뽑힌다. 좌우로 푸른 핏줄기가 분출했다. 고통에 악을 쓰며 악마가 정신없이 할버드를 팔방으로 휘둘러 댔다.

"으아아아!"

하지만 그 가공할 공격 범위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공격은 헛되이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악마가 채 공격 자세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 작은 불청객들은 범위 밖으로 피해 있었던 것이다.

울분에 차 악마가 그 흉악한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이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그는 아몬 나이트, 그렐비스트와 함께 악마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존재였다. 비록 유적의 마력에 붙잡혀 수호자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작은 존재들과는 비견할 수도 없는 강대한 권능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런데 저 작은 인간과 오크는 너무도 쉽게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좋아, 1차 공격 지나갔다, 러스!"

"다음 공격 간다, 세븐 슈레더!"

인간이 뒤로 뛰어오르며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 일곱 개의 푸른 섬광이 초승달 형태가 되어 원거리에서 아몬 나이트를 두들겨 댄다. 할버드를 휘둘러 공격을 쳐 냈지만 그때마다 할버드 여기저기가 금이 간다.

뒤이어 오크가 참마도를 들고 날쌔게 아몬 나이트의 품으로 파고든다. 할버드를 휘두르던 차라 미처 반격할 여지가 없다. 정확하게 타이밍을 파고든 오크가 참마도를 길게 뻗었다.

푸욱!

아몬 비스트의 상반신이 깊숙이 베이며 또다시 선혈을 토했다. 잽싸게 거리를 벌리며 오크가 광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

통쾌하기 그지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또다시 상처를 입은 아몬 비스트가 굴욕감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크으으으!"

생각 같아서는 바로 이 할버드를 버리고 맨손으로 이놈들을 상대하고 싶었다. 이 할버드는 너무 커서 저런 빠르고 작은 존재를 상대하기엔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몬 나이트는 할버드를 놓을 수 없었다. 그의 전신 사지, 아니 육지六肢를 얽매고 있는 마력의 사슬이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아몬 나이트가 흉악한 입을 쩍 벌리며 다음 공격을 시도했다.

"데필 크라드 렌카타!"

일렁이는 환염의 폭풍, 아몬 나이트가 지닌 최강의 암흑 마법이 공동 안에 작열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새까만 어둠의 불길이 부챗살 형태로 퍼져 가며 전방 30여 미터를 모조리 뒤덮어 갔다. 상식적이라면 아무리 움직임이 날쌔다 한들 이 불길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터, 하지만 저 인간과 오크는 이번에도 아주 간단히 공격을 피해 냈다.

"아, 역시 이거 날아오네."

"범위도 정확하군."

이유는 간단했다. 저 작은 존재들은 애초에 아몬 나이트가 암흑 마법을 준비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공격 범위 밖으로 피한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내 공격 패턴을 미리 알고 있는 거냐!'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아몬 나이트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이미 적이 피한 자리에 마법을 날리는 병신 짓을 할 리가 있나? 하지만 지금 그는 유적에 묶여 있는 몸이었고, 유적이 강요하는 전투 프로토콜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유적에 묶여 있는 최상위 악마들, 일명 던전의 수호자라 불리는 이들은 결코 그들의 의사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움직임을 봉인당한 채 유적이 시키는 대로만 싸움에 임하는 꼭두각시 신세인 것이다. 전투를 행하는 아몬 나이트의 움직임에 정작 악마 본인의 의지는 조금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가자, 러스!"

"좋아, 타시드!"

오크와 인간 청년이 또다시 공격을 가해 온다. 아몬 나이트도 열심히 반격했지만 자신의 공격 방식을 훤히 꿰뚫고 있는 놈들을 상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계속 전신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어났다.

"제길, 이런 멍청한 전투를 시킬 거면 그냥 자율권을 좀 주란 말이다!"

울분에 차 아몬 나이트가 악을 써 댔지만 고장 나 버린 유적의 방어 시스템이 들을 리가 없다. 뭐, 자율권이 있었다면 애초에 아몬 나이트 자신이 유적의 제어 장치를 부수고 도망쳤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시스템이긴 하다.

게다가 더 열받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우와, 둘이서도 잘 싸우네요, 레펜 씨?"

"공략법 다 숙지하고 싸우는 건데 당하면 병신이지. 안 그래, 실란?"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이것도 꽤나 마력이 높은 유물인 것 같아요."

"응, 그것도 무한의 주머니에 넣어 줄래, 시리스?"

전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공동의 벽 아래, 상체를 벗은 근육질의 남자 하나가 미소녀 둘(?)을 끼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몬 나이트가 속으로 치를 떨었다.

'남은 죽어라 싸우고 있는데 옆에서 물건 챙기지 마!'

이 던전 켈테의 중심부까지 쳐들어온 탐사자들의 숫자는 모두 다섯, 하지만 정작 아몬 나이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둘뿐이었다. 나머지 놈들은 아예 아몬 나이트는 무시하고 일찌감치 유물부터 털고 있었던 것이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악마 중의 악마로서 어찌 이런 굴욕을 참아 낼까?

"크르르르!"

아몬 나이트가 적의를 불태우자 그것을 느낀 유적의 전투 프로토콜이 저 따로 노는 놈들 역시 적의 범주 안에 집어넣었다. 공격 명령을 받은 아몬 나이트가 고개를 비틀며 불길을 토했다.

크라라라라!

굉음이 진동하며 불꽃의 창이 불꽃의 창이 길게 뻗어졌다. 그러자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근육 좋은 놈이 바로 다른 미녀들을 감싸고 공격을 가로막았다.

"스파이럴 가드!"

뭔가 눈부신 빛이 번쩍번쩍 빙빙 돌더니 그대로 불꽃의 창을 분쇄해 버린다. 자신의 공격이 무효로 돌아갔는데도 아몬 나이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저 따로 노는 놈들 공격해 본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 역시 항상 같았다.

'저건 대체 뭔데 아까부터 남이 때리건 말건 신경도 안 쓰는 거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유물 감식을 시작하는 놈들을 보니 정말 뒷목 잡고 쓰러지고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적의 전투 프로토콜은 아몬 나이트가 고혈압에 시달리건 말건 여전히 정해진 대로 명령을 내릴 뿐이다.

-침입자를 격퇴하라!

유적의 명령에 따라 한차례 공격을 날린 아몬 나이트가 다시 검 든 인간과 오크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꼴이라 계속 상처가 늘어났지만, 그때마다 유적이 마력을 동원해 아몬 나이트의 부상을 치유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연습 되네.'

아몬 나이트의 할버드를 피하며 러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비록 공격 패턴을 다 알고 있다지만 그렇다 해도 저 악마의 파괴력과 스피드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강자를 상대로 약속 대련을 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웃! 역시 굉장한 일격! 방심했다간 큰일 나겠어."

보아하니 타시드도 비슷한 기분인 듯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공략법을 다 아는 상황이니 죽거나 할 일은 없다. 진지하게 살기를 터트리면서 약속 대련을 해 주는 상대라니? 이렇게 기량을 높이는데 좋은 수행 방법도 그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계신 거지?'

그동안 던전 많이 털어 본 러스지만, 그래도 매번 던전을 탐사할 때마다 레펜하르트의 지식에 대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척척 진행하고 어디에서 무슨 마물이 나오며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죄다 알려 주는데, 그 정보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이곳, 던전 켈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켈테에 진입해 여기 중심부까지 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나절이었다. 보통 던전 하나 탐사하는 데 보름은 족히 걸리는 걸 감안하면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듣자하니 형님의 사부, 권황拳皇 제라드에게서 들은 정보라는데....'

새로운 권왕 레펜하르트가 탄생한 후 사람들은 전대 권왕이던 제라드를 권의 황제, 권황이라는 칭호로 높여 부르고 있었다. 이 또한 짐 언브레이커블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누누이 전해져 오는 전통이었다.

추후 레펜하르트가 제자를 가르쳐 세상에 내보내면 그가 권황이라 불리고 제자가 권왕이라 불릴 것이다. 뭐, 그때까지 제라드가 살아 있으면 호칭이 꼬이지 않을까 싶겠지만, 여태껏 짐 언브레이커블 3대가 동시에 나올 만큼 인재가 넉넉한 시대가 존재하지 않아 딱히 문제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여태 가르침이 이어진 것이 기적일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제라드 공께서 던전 탐사의 달인이셨다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것 같단 말이지?'

러스는 슬쩍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쯤 되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사람마다 감추고 싶은 비밀 한둘쯤은 있을 테니.'

러스는 의심을 거두었다. 의심하기엔 레펜하르트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는 형님도 모든 것을 말해 주시겠지.'

레펜하르트는 여전히 시리스와 실란을 데리고 유물 감식에 열중이었다. 틸라가 빠진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시리스와 실란, 러스와 타시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열심히 유물 감식 중이던 레펜하르트가 등을 돌리더니 고함을 질렀다.

"러스! 타시드! 슬슬 시간 됐어! 2페이즈로 바뀔 거다! 준비해!"

과연 곧이어 복잡한 고대어 음성이 유적의 공동 안을 웅웅 울렸다.

헤핀 랄타르 필로다. 렌 투 바이드 페이즈 타론.

-현 방어 시스템 감당 불가. 페이즈 2로 이행합니다.

아몬 나이트는 기막혀하며 저 덩치 큰 인간을 바라보았다. 묶여 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오늘 처음 이곳에 온 인간이 저토록 훤히 알고 있다니?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아몬 나이트의 검은 눈동자가 번득였다. 음성이 들리며 그를 감싸고 있던 마력의 사슬이 풀린 것이다. 이제 행보가 자유로워졌다!

"하하하핫!"

아몬 나이트가 할버드를 휘두르며 광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적의 꼭두각시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사슬에 묶여 있을 때보단 월등히 행동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이대로 저 건방진 인간들을 모조리 격살해 버리리라!

"크아아아!"

달려드는 아몬 나이트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좋아, 그럼 마력의 흐름을 끊어 볼까!"

레펜하르트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 영창을 시작했다.

"나는 마력의 지배자, 흐름을 거슬러 상대의 맥을 끊나니 모든 것이 뒤집히고 헝클어질지어다! 라인 포스 디스트로이어!"

강렬한 마력의 폭풍이 공동을 감싸며 휘몰아쳤다. 아몬 나이트는 당황했다. 유적으로부터 흘러들어오던 힘, 그의 상처를 계속 치유하던 바로 그 권능의 기운이 끊겨 버렸다?

"크, 크랄크?"

"훗, 유선 조종일 땐 몰라도 무선 조종이면 지금 수준으로도 방해가 가능하거든?"

의기양양하게 레펜하르트가 소리쳤다.

"러스! 타시드! 마무리해라! 이제 더 이상 재생은 없을 거다!"

"네, 형님!"

"알겠소, 은인이여!"

러스와 타시드가 동시에 대꾸하며 몸을 날렸다. 당황한 아몬 나이트의 좌우를 두 사내가 빠르게 파고든다. 수십 개의 참격이 아몬 나이트의 전신을 난자했다. 푸른 핏물이 사방으로 튀며 아몬 나이트가 비명을 질렀다.

"커어어억!"

아몬 나이트는 눈을 부릅떴다. 긍지 높은 고위 악마였던 그가 한낱 타 차원의 유적에 묶여 살았던 것도 서글픈데, 이제는 비천한 존재에게 죽음마저 당하게 된 것이다. 악마의 두 눈이 분노로 핏발이 섰다.

못 죽겠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이대로는 못 죽겠다!

하지만 야속한 육체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아몬 나이트의 거구가 서서히 지면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비참하게 꿈틀대면서도 아몬 나이트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못 죽는다!

절대 이대로는 못 죽는다!

"죽어, 좀."

퍼엉!

레펜하르트가 기격탄을 날려 아몬 나이트의 머리통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한 많던 악마 하나가 결국 생을 끝마쳐 버렸다. 실로 슬픈 죽음이라 하겠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차원에서는 약한 이들 신 나게 괴롭히며 살던 것들이 뭘 이제 와서 억울한 척 눈을 부릅뜨냐?"

아몬 나이트가 묶여 있던 자리로 달려간 시리스가 이내 큼직한 지팡이 하나를 찾아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레펜하르트 님! 이건가요?"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스가 감회어린 눈으로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이 창천의 지팡이, 제룬팅... 우리들의 새로운 세계수...."

☆ ☆ ☆

던전 켈테로부터 사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개척 마을, 산타라.

켈테를 빠져나온 레펜하르트 일행은 그 마을의 유일한 여관, '토끼 여우의 둥지'에 묵고 있었다. 이미 던전을 돌입하기 전에도 이곳에 묵었었기에, 여관 주인도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이하고 최상의 편의를 제공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푸짐하게 팁을 주는 던전 탐사자의 존재는 실로 하늘의 내려 준 행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통 크게 2층 전체를 임대한 뒤 레펜하르트 일행은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투의 피로를 달래는 중이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만큼은 좀 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열심히 명상을 하고 있었다.

"후우우."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시킨다. 자신의 정신을 오가는 마력의 흐름을 잡아 이끌며 동시에 두 손에 쥐어진 또 다른 권능의 응집체로 손을 뻗는다.

레펜하르트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유물, 가할의 황금상과 울림의 지팡이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천천히 유물을 빠져나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마나 드레인을 이용, 유물이 지닌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눈을 뜨고 유물을 내려놓았다.

"아오, 간신히 7서클에는 입문한 것 같군."

전신의 마력을 점검하며 레펜하르트는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제룬팅 말고도 던전 켈테에서 털어온 유물들의 숫자는 상당했고, 그것들에 열심히 마나 드레인을 시전한 결과 현재 그의 마력은 상당히 올라 있었다. 어차피 깨달음이나 경지 자체는 진작에 돌파한 그이니만큼, 마력만 받쳐 주면 바로 서클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하는 마력을 얻었음에도 레펜하르트는 그리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어휴, 많이도 거덜 냈다. 아까워라...."

레펜하르트의 등 뒤에는 한 무더기의 잡동사니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지금껏 그가 마나 드레인을 시전한 은의 시대 유물들이었다. 마나 드레인 안 걸고 전부 팔았으면 족히 금화 몇만 냥은 받았을, 지금은 쓰레기 더미가 된 그 유물의 잔해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이렇게 쪽쪽 빨아먹었는데도 고작 6서클 졸업이 다냐? 정말 이 몸뚱이 연비 나쁘구먼."

새삼 원래 자신의 육체가 그리워진다. 이 테스론의 몸이 아니었다면 이것만으로도 족히 8서클 초반까지는 마력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테스론이 이 시대에, 자신의 육체로 전생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레펜하르트도 한동안 원래의 육체로 돌아갈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또 원래 육체로 돌아가기에는 이 육체 단련시키느라 한 고생이 너무 억울하단 말이지. 게다가 권왕으로서 이종족을 이끄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이 되었는지도 절실히 느꼈고. 역시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절실하지도 않은 것이....'

이 몸의 마법적 성능은 아무리 올린다 한들 원래 육체의 70~8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사실 그 점은 진짜 아쉽다. 그러나 이 몸의 육체적의 성능은 원래 몸보다 몇백, 아니 몇천 배나 월등한 것이다. 그냥 단순 계산을 해 봐도 이쪽이 훨씬 좋다.

'내 몸이 아니라는 이질감도 솔직히 지금 와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워낙 죽어라 단련했어야 말이지?'

피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유물들 꺼내느라 짐을 통째로 늘어놓는 바람에 꽤나 방 안이 어지러웠다. 막 짐 정리를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 레펜하르트 님? 들어가도 돼요?"

"아, 명상 끝났어. 들어와, 시리스."

시리스가 힐끔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짐 정리를 도왔다. 둘이서 이것저것 무한의 주머니에 챙겨 넣던 중이었다. 문득 시리스가 양피지 하나를 펼쳐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건 뭔가요?"

세텔라드 산맥의 지형이 그려져 있고, 가운데 X 표시가 있는 지도였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껌벅이더니 무릎을 쳤다.

"아, 이거!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그의 스승, 제라드가 하산할 때 선물이라고 던져 준 바로 그 지도였다. 이래저래 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주머니 안에 처박아 둔 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의 설명을 들은 시리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그럼 여기에 혹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보 같은 것이 있는 건가요?"

"글쎄? 뭐가 있는지는 못 들었는데."

레펜하르트는 턱을 긁으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시리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곳도 가 보지 그래요? 전설의 무기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대대로 권왕이라는 전설적인 권사를 배출해온 짐 언브레이커블이다. 그런 무문의 가보라면 엄청난 위력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시리스가 흥분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영 회의적인 모습이었다.

"짐 언브레이커블에 대대로 내려오는 무기가 있기나 하려나? 뭐, 대대로 제자를 두들겨 팬 몽둥이 같은 거라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대충 보니까 이 근처 같은데요? 가 봐서 손해 볼 것은 없잖아요?"

"그건 그러네?"

어차피 지금 안타레스 백국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는 금방 결정을 내렸다.

"그래! 돌아가는 길에 여기도 들러 보자. 나도 뭐가 있는지 궁금하긴 하니까."

4

다음 날 아침, 레펜하르트 일행은 산타라 마을을 떠났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산타라 마을로부터 하루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언제나 척척 던전 위치를 찾았던 레펜하르트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여관 주인에게 근처 지형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이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까?"

사실 이 시대의 지도는 축척이 정확하지 않아 지도만 보고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힘든 것이다. 던전이야 예전에 가 봤으니 헤매지 않고 바로 직진했지만,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지역 주민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를 보니 마을에서 서쪽으로 가면 있는 파트 산 근처인 것 같습니다만. 산세가 험하고 사냥감도 거의 없어 마을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곳입니다. 마을을 나서서 남서쪽으로 하루쯤 가시다가 칼날을 닮은 봉우리가 셋 보인다면 파트 산입니다."

평소 팁을 후하게 준 덕인지 여관 주인은 파트 산으로 가는 길을 참 상세하게도 알려 주었다. 심지어는 안내인을 붙여 주려고까지 해서 극구 사양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고 한나절 뒤. 레펜하르트 일행은 무난히 파트 산 중턱에서 목표했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실란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뭐하는 장소일까요?"

파트 산 중턱에 폐허가 된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넓은 마당이 있고 반쯤 허물어진 담이 길게 이어진 커다란 규모의 건물이었다. 그렇다고 저택이나 성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낮은 건물 몇몇이 황폐해진 마당을 끼고 넓게 퍼져 있었다.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들의 연무장만 따로 떼어다가 규모를 크게 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음, 왠지 나 수행하던 곳이랑 비슷해."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담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근처 어디에다가 선물을 숨겨 놓으신 건가? 선물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러스도 입술을 매만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선물 갖다 놓을 만한 분위기가 아닌데요? 아까부터 던전도 아닌데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오러 유저답게 기감이 뛰어난 러스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이 일대, 겉으로 보기엔 폐허에 불과한 이곳에서 희미하게 이질적인 기운이 풍기는 것이다. 던전처럼 대놓고 마기와 사기를 풍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다고 하기엔 좀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뭐, 별것 있겠어? 얼른 선물이나 찾아보자."

레펜하르트 일행은 느긋하게 폐허 여기저기를 걸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폐허일 뿐이었다. 딱히 선물처럼 생긴 물건은 보이질 않았다.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아, 줄 거면 그냥 좀 주지 왜 보물찾기를 시키냐? 하여튼 사부, 그 양반 성격도 참...."

그렇게 건물 하나하나를 뒤지던 중이었다.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건물에 들어서서 막 마루며 천장을 살피던 레펜하르트 일행의 귀에 갑자기 묘한 소음이 들려왔다.

웅웅웅!

대기가 진동하는 기괴한 소음이었다. 러스며 타시드가 놀라 검을 빼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레펜하르트가 실소하며 그들을 말렸다.

"왜 긴장들을 하고 그래? 기껏해야 사부가 제자를 위해 선물 숨긴 곳일 뿐인데...."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진동하며 일행의 발밑, 그 넓은 마루가 통째로 푹 꺼졌다!

"으히힉!"

"허억!"

마루가 무너지며 몸이 아래로 낙하한다. 당황 속에서도 러스가 잽싸게 오러를 끌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타시드도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해 몸을 띄웠다. 시리스도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타시드의 참마도로 몸을 날려 매달린다. 다들 숙련된 전사들이라 이 상황 속에서도 대응이 빨랐던 것이다.

물론 레펜하르트와 실란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둘 다 노련하게 부양 마법과 신성한 깃털 주문을 써서 몸을 가볍게 하려 했다. 문제는 둘 다 너무 오지랖이 넓었다는 점이었다.

"으악! 실란! 신성 주문 쓰지 마! 충돌하잖아!"

"레펜 씨야말로 왜 갑자기 마법을 써요?"

일행 전원에게 건 부양 마법과 신성 주문이 서로 충돌해 버린 것이다. 덕분에 타시드의 다라크마저 부양력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은인! 이게 무슨 짓이오?"

채 다른 수단을 쓰기도 전에 일행은 일제히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어둠 속으로 티격태격하는 레펜하르트와 실란의 목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아, 진짜 손발 안 맞네!"

"그러게 레펜 씨는 왜 이제 와서 마법사 행세냐고요!"

"나 원래 마법사거든!"

"아, 둘 다 시끄러워욧!"

☆ ☆ ☆

갑작스럽게 낙하하긴 했지만 아무도 다친 이는 없었다. 마법과 신성 주문의 충돌로 잠깐 제어를 잃은 타시드의 스피리츠 웨폰이 이내 재발동해 모두 그 검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다. 천천히 부유해 바닥에 착지한 뒤 타시드가 검을 거두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군, 은인. 우리가 떨어진 구멍이 사라졌습니다."

일행이 위치한 곳은 네모난 형태의 커다란 방이었다. 사방이 석벽으로 이루어진, 그렇다고 던전 같은 분위기는 전혀 아니고 그냥 투박하고 평범한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타시드의 의문에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같이 고개를 들었다.

"음, 이건...."

분명 한참 동안이나 낙하했거늘, 어느새 그들이 떨어졌던 구멍은 사라지고 멀쩡한 석벽 천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뭐지? 공간이 꼬이기라도 했나? 하지만 여긴 던전도 아닌데 왜 이런 현상이?'

이곳의 건축 형태를 보면 여기가 은의 시대 유적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고대는 고사하고 드워프들이 만든 현대의 건축물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 덕분에 제법 시야는 확보되어 있었다. 문득 방 한쪽에 글귀가 적혀 있는 걸 보고 시리스가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 님? 저기에...."

"응?"

레펜하르트가 가까이 다가가 글귀를 읽었다. 그 문구는 고대어도 잊힌 이종족의 언어도 아니었다. 현 시대의 인간들이 쓰는 공용어였다.

-언젠가 거둘 사랑하는 나의 제자야. 너의 하산을 미리 축하하며 이 사부가 남긴다. 이곳의 선물이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제라드.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저 문구를 보면 뭔가 제대로 오긴 온 것 같은데....

"아니, 뭐가 선물이라는 거야?"

아무리 봐도 그냥 텅 빈 창고가 아닌가?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방 안을 살펴보았다. 네모난 석실 한쪽에 커다란 문이 뚫려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또다시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거라! 나의 제자야! 위대한 가르침을 받은 너라면 이 선물을 필시 기뻐하겠지!

"...뭐래는 거야?"

점점 아리송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통로를 지났다. 조금 걷고 나니 이번엔 조금 전의 석실보다 월등히 큰, 무슨 대규모 광장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여긴?"

러스가 주위를 살피던 중이었다. 갑자기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러스뿐이 아니었다. 타시드도 시리스도, 심지어는 실란마저도 갑작스레 변한 공기를 감지하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응?"

"뭐지?"

공동 사방에서 자욱한 사기가 밀려온다. 실로 무지막지한 사기였다. 어지간한 던전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어둠의 기운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막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려던 찰나였다.

"우우우!"

괴이한 신음이 들렸다. 동시에 석실 여기저기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신음을 흘리며 서서히 다가온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그 존재를 보며 순간 실란이 혀를 깨물었다.

"켁? 저 유령들은 뭐야?"

성직자답게 실란은 바로 저 그림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고스트, 그것도 오랜 시간 땅 위에 묶여 원한을 불태워 온 지박령들이었다. 얼마나 큰 원한을 간직하고 있는지 유령 주제에 육신이 거의 투명하지 않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 묵직한 소리가 난다. 현세에 물리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악령들인 것이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던전의 악마들과 맞먹는다!

물론 실란이 놀란 이유는 저들이 강력한 악령이어서만이 아니었다.

"괴, 굉장히 낯익게 생긴 유령들인데요?"

실란의 말에 레펜하르트도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타난 유령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낯익다'라는 표현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무지하게 낯익었다. 하나같이 신장이 2미터는 우습게 넘는 거구에, 전신 근육이 알차게 짜여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단련되어 있는 유령들이었다. 그래, 하나같이 레펜하르트처럼 생겼다?

"으으으으...."

"아아아아...."

유령들이 맹렬한 적의를 가지고 일행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아니, 뭐야? 이것들은?"

선물 놔뒀다더니 그건 어디 가고 악령이 출몰하냐? 기막혀하는 레펜하르트의 눈에 문득, 공동 위쪽에 매달린 커다란 패널이 보였다. 그곳에도 역시, 익숙한 느낌의 공용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곳은 초반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문을 열었던 장소란다. 그리고 그 유령들은 전부 위대한 가르침을 소화하지 못하고 맞아 죽은 것들. 따지고 보면 네 선배쯤 되겠지만,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것들이니 굳이 선배 대접해 줄 필요는 없단다. 그래도 생전에는 별 볼 일 없던 것들이 유령이 되니 꽤나 강해졌더구나. 제법 손맛이 있을 테니 그놈들을 두들겨 패며 수련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기 바란다. 사랑하는 제자의 건투를 빌며 사부 제라드가 남긴다.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일행 전원이 말문을 잃었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저딴 글귀를 남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 유령들이 선물?"

러스와 시리스가 사이좋게 멍한 음성을 흘렸다. 유령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신음처럼 흐릿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언브레이커블...."

"짐 언브레이커블...."

유령들의 시선이 일제히 레펜하르트에게로 향했다. 순간 모든 유령들의 등 뒤로 무지막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유령들이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러 댔다.

"짐 언브레이커블!"

"권왕의 후계자!"

순간 레펜하르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유령 따위를 무서워할 수준은 이미 옛날에 지났거늘, 지금 저 '선배님'들이 풍기는 살기와 적의는 그런 레펜하르트조차도 오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 언브레이커블!"

"부르다가 저주받을 그 이름이여!"

"우리의 한을 받아라!"

위대한 꿈을 꾸며, 위대한 무인이 될 거라 믿고 수행을 쌓다가 결국 한만을 남긴 채 죽어 간 이들, 그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기 제자들이 사기가 가득 어린 우람한 근육을 씰룩거리며 일제히 레펜하르트 일행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원한을 풀겠다아아아아아!"

허겁지겁 전투태세를 갖추며 레펜하르트가 악을 써 댔다.

"아, 이 빌어먹을 사부! 이딴 걸 선물이라고 갖다 놔?"

☆ ☆ ☆

유령들은 강했다.

그리고 단단했다.

살아 있을 때는 재능이 모자라 가르침을 소화시키지 못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품은 원한이 유령이 되어 현실에 구현되며, 하나같이 자신이 바랐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러스가 블레이드 오러를 채찍처럼 길게 펼쳐 악령 하나를 후려갈겼다.

"타아앗!"

그 순간 악령이 가슴을 늠름히 펴고 소리쳤다.

"스파이럴 가드!"

황금빛 회오리가 휘몰아치며 러스의 블레이드 오러를 튕겨 냈다. 생명기, 오러가 아닌 죽은 자의 기운, 사기邪氣가 황금빛으로 구현된 것이다. 곧바로 악령이 웅장한 펀치를 내뻗었다.

"기격탄!"

황금빛 탄환이 타시드의 정면을 치고 왔다. 다카르를 들어 막았지만 순간 뒤로 수 미터 가까이 밀려났다. 타시드가 신음을 흘렸다.

"크윽!"

시리스가 바람의 하위 정령, 실프를 불러내 검에 휘감고 연달아 찌르기를 날렸다.

"하아압!"

정령력이 실린 지금 그녀의 찌르기는 강철조차도 관통할 수 있었다. 그런 날카로운 찌르기가 가슴팍을 가차 없이 찔러 댔거늘, 저 강철 같은 대흉근은 흠집조차 남지 않고 튕겨 낼 뿐이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짐 언브레이커블!"

악령들은 노도처럼 일행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죄다 레펜하르트처럼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를 마음껏 구사하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다. 레펜하르트에 비하면 물론 손색은 있었지만, 저 단단한 육체와 흔들리지 않는 영체는 오러 유저인 러스조차도 일순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러스가 악을 질렀다.

"크윽! 도대체 형님네 무문은 얼마나 많은 제자들을 패 죽인 겁니까?"

레펜하르트가 면구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두 자릿수는 넘는다더라...."

빠른 몸놀림으로 근육 악령(?)들 사이를 오가던 시리스도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최소 백 명이 넘게 맞아 죽었단 소리네요?"

"그렇겠지?"

악령들의 내구도는 분명 엄청났지만, 그 움직임은 아무래도 오러 유저에 비해 손색이 있었다. 공격 스피드나 움직임은 그냥 오러를 각성 못한 달인 수준, 그래서 시리스도 어째저째 상대할 수가 있었다.

시리스가 기가 차 다시 소리쳤다.

"아니, 그럼 이런 악령이 백 명이나 있다는 거예요?"

"그, 그럴지도...."

암담해하며 러스는 눈앞의 악령들을 세어 보았다. 워낙 덩치가 커서 많아 보였지만 사실 여기 있는 악령의 숫자는 끽해야 스무 개체 정도였다. 그럼 앞으로도 여든 명 가까이 되는 '선배님'들이 더 나타날 거란 말인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형님 대에서 그 무문, 대를 끊어 버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도 지금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둥글게 원을 짜고 서로에게 등을 맡긴 채 레펜하르트 일행은 열심히 악령들을 상대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졸업 못하고 중퇴(?)한 것들이라 그런지 공격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물론 높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레펜하르트와 비교해 그렇다는 소리지, 이 정도면 어지간한 던전의 고위 악마와 맞먹는다. 다들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는 있었지만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레펜하르트가 눈앞의 악령들을 향해 연신 권격을 날렸다.

"크윽! 기격탄!"

"스파이럴 가드!"

"가스트리젠!"

"스파이럴 가드!"

"연환 기격탄!"

"스파이럴 가...."

"아, 대체 저 기술은 왜 저리 사기적인 거야!"

연달아 기격탄이며 발차기을 날려 보았지만 저 근육질 악령들은 죄다 튕겨 낼 뿐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신경질이 나 고함을 터트렸다. 등 뒤에 숨어 있던 실란이 실소를 흘렸다.

"아니, 레펜 씨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지금 구박할 때 아니거든? 아직도 준비 안 됐냐?"

"안 그래도 슬슬 기도 끝났어요."

자고로 유령의 천적은 강력한 성직자인 법이다. 지금껏 실란은 일행의 보호를 받으며 이들을 일제히 날려 버릴 턴 언데드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워낙 악령들이 강력해서 기도를 올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것이다.

두 손을 모아 성호를 그리며 실란이 혀를 찼다.

"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었기에 이렇게 강한 악령이 된 거야?"

실란의 앞을 막아서며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믿고 따랐던 사부에게 맞아 죽었으면 나 같아도 악령 될 것 같긴 하다."

믿고 따랐던 형에게 칼 맞았던 러스이기에 아무래도 악령들의 심정을 익히 공감하는 것 같았다. 실란이 두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필라넨스시여! 부정한 자를 지울 신성한 빛을 비추게 하소서!"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마치 분홍빛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엄청난 광량이 악령들을 일제히 휩쓸어 갔다. 악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빛 속에서 녹아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원통하도다!"

"분통하도다!"

"짐 언브레이커블! 저주받아라!"

햇살 속의 아침 이슬처럼, 그 모든 악령들이 실란의 신성한 빛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러스며 타시드가 혀를 내두르며 실란을 바라보았다. 실란이 강력한 성직자라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그들도 힘겨워하는 악령 스무 개체를 단숨에 소멸시키는 걸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대단하다, 실란."

"고마워요, 타시드."

"그런데 치유술은 왜 그리 아픈가?"

"아니, 그건 그때만 그런 거였다니까요? 나 참...."

하여튼, 실란의 터닝 주문으로 인해 짐 언브레이커블의 억울한 원혼들은 일제히 성불해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씁쓸한 표정으로 텅 빈 공동을 바라보았다. 참, 덤비니까 어쩔 수 없이 처리하긴 했다만....

'거참, 뒷맛이 씁쓸하네.'

그러던 중이었다.

"음? 뭔가가 다가온다?"

기감만큼은 레펜하르트보다 월등한 러스가 또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공동 반대편에 뚫린 또 하나의 통로에서 한 무리의 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악령? 아니, 이번엔 확실하게 물리적 존재가 느껴지는 기척인데?"

잠시 후 다른 일행들도 기척을 느꼈다.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짐 언브레이커블에서 제자들 지박령 만든 걸로도 모자라 근육질 좀비로까지 만들었나?'

아무리 막 나가는 짐 언브레이커블이라도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지만, 솔직히 이 꼴 당하고 나니 무문에 대한 무한한 불신감이 싹트는 레펜하르트였다.

그때, 한 남자가 통로를 빠져나오며 툴툴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여긴 뭐요? 뭔 던전이 유물은 하나도 없고 유령만 득시글거려?"

뒤이어 검은 갑주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게다가 그 유령들, 무섭게 나타나서 한번 훑어보더니 도로 사라지는 이유는 또 뭔지?"

그러자 로브를 걸친 여인이 거구의 여인과 함께 종종 걸음으로 뒤따르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는 던전이 아니라니까요? 설명 이미 들었잖아요, 여긴...."

통로를 빠져나온 이들이 무심코 공동 안쪽을 바라본다.

레펜하르트 일행과 통로를 빠져나온 이들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다.

순간 러스의 표정이 굳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남자, 그의 얼굴이 너무도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저 황금의 갑주를 걸친 사내는....

"유서스 형님?"

"러스! 역시 여기 있었군!"

실란도 거구의 여인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크리스틴? 어떻게 저 사람들이랑?"

"아, 실란!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검은 갑주를 걸친 사내가 레펜하르트를 바라보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터트렸다.

"드디어 찾았구나, 레펜하르트!"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 사내를 보고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지 못 알아봤다. 현재 그의 정신은 저 검은 갑주의 사내 뒤에 서 있는, 여마법사에게로 온통 쏠리고 있었으니까.

'필레나? 쟤가 어떻게 여기에?'

어린 시절 마탑에서 함께 자랐던 전생의 죽마고우, 필레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설마 테스론인가!"

통로 안쪽에서도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찾았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곧이어 검은 머리의 잘생긴 미청년이 통로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펜하르트도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검은 머리의 미청년과 거구의 근육질 거한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테스론!"

"레펜하르트!"

전생에서도 이렇게 노려보았던 두 사람, 하지만 현재 둘의 위치는 완전히 바뀌어 있다.

시공을 넘어 드디어 조우한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보며 적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 적의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둘 다 상대를 보며 적의 대신 다른 감정을 느낀 탓이었다.

당혹해하며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누구냐, 너?"

<7권에서 계속>

7권

제21장 운명의 격돌

1

테스론은 경악에 차 눈앞의 거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 분명 자신의 몸이었다.

그럼에도 테스론은 저 육체가 자신의 몸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

저게 정말 레펜하르트? '내 몸'에 들어간 그 마왕이란 말인가?

"몸이 왜 저렇게 왜소해진 거냐아아아!"

2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를 보고 왜소하다고 한탄하는 그 모습에 유서스며 다른 동료들이 잠깐 테스론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테스론은 진심이었다.

230센티미터에 달했던 신장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있다.

어지간한 성인 여성 허리 굵기였던 자랑스러운 팔뚝이 고작(?) 어린애 허리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두툼했던 어깨며 가슴도 사이즈가 팍 줄어 버렸다.

테스론이 울분을 터트렸다.

"남의 몸을 가져가서 제대로 간수도 못 하다니!"

레펜하르트 역시 비슷한 기분으로 테스론, 자신의 육체를 차지한 전생의 권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날렵한 턱선, 오똑한 콧날에 살짝 치켜 올라가 색기마저 느껴지는 눈매, 분명 그의 원래 얼굴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

단지 그 감상은 테스론과 정반대였다.

'우와! 저 근사한 총각은 대체 누구여?'

얼굴이야 엇비슷했다만 몸이 완전히 달랐다. 전생의 시리스가 잘 벼려진 칼날 같다고 칭찬한,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냥 말라비틀어진 멸치 쪼가리였던 그 육체가 놀랍도록 변모해 있었다.

"그, 그거 내 몸이냐?"

레펜하르트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여자인 시리스와 날씬함을 경쟁하던 그 좁던 어깨가 딱 벌어져 완연한 남성미를 자랑한다. 그렇다고 울퉁불퉁한 근육질도 아니다. 흑표범처럼 날렵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한 치의 군살조차 없이 단련된 몸이었다. 전신의 균형이 완벽히 잡혀 있고 키도 상당히 커져서 거의 185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허, 내 몸에 저 정도 잠재력이 있었단 말인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버럭 성질을 냈다.

"잠재력은 무슨 잠재력? 정말 네놈 몸 저질이었다! 이걸 그나마 이만큼이나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삿대질까지 해 가며 테스론이 타박을 해 댔다. 그간 이 비실거리는 육체를 여기까지 단련하느라 그가 한 고생은 거의 왕년 제라드 밑에서 수행할 때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걸 잠재력 따위로 치부하려 하다니?

물론 레펜하르트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울컥하며 받아쳤다.

"그, 그러는 네놈 대가리는 뭐 고성능이었는 줄 알아! 이게 머리냐? 모자걸이지?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마법 하나 외우는 데 10분이 넘게 걸리냐? 원숭이한테 시켜도 이것보단 빨리 계산하겠다!"

씩씩대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본다. 다른 이들이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실란이 모두를 대변하듯 중얼거렸다.

"뭐야? 고향 친구인가?"

그제야 테스론과 레펜하르트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나타난 자신의 몸이 너무 충격적이라 잠시 적의를 잃긴 했지만, 지금 그들이 이렇게 사이좋게 수다나 떨고 있을 사이가 아니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테스론이 허리춤의 장검을 뽑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전의를 끌어내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마왕 레펜하르트!"

"아니, 이제 와서 근사한 척 목소리 깔아 봤자...."

옆에서 필레나가 초 치는 소리를 했지만 테스론은 애써 무시했다. 분위기를 바꾸며 그가 근엄하게 소리쳤다.

"또다시 대륙을 전화의 불길에 휩싸이게 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서 그대를 처단하고 정의를 되찾겠다!"

☆ ☆ ☆

테스론이 검을 뽑자 그의 동료들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유서스를 본 러스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스는 이미 전투준비에 들어갔지만 타시드나 실란은 도통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굴릴 뿐이었다.

실란이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뭐예요, 레펜 씨? 아는 사람?"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대꾸했다.

"적이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의아해하면서도 실란이 안색을 굳히며 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타시드도 참마도를 들고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공동 속에서 두 일행이 서로를 노려보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레펜하르트가 문득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우리가 있는 줄 알았지?"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산타라 마을에 흔적을 남겼더군."

레펜하르트의 종적을 찾아 세텔라드 산맥에 도착한 테스론 일행은 인근 산촌을 뒤져 정보를 모았다. 그 와중에 산타라 마을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 늦어, 이미 레펜하르트가 던전 켈테 탐사를 끝내고 떠났다는 소리도 들었다.

실망하며 혹시나 싶어 여관 주인에게 혹시나 다음 목적지에 대해 들은 것이 없냐고 물었었는데, 의외로 여관 주인이 행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관 주인은 바트 산 근처라고만 답했지만 테스론은 바로 알아차렸다.

"사부님이 남긴 선물을 찾으러 간 것일 줄 알았지."

그도 전생에 제라드가 남겼던 저 선물을 받은 바 있었다. 참으로 신 나는 경험이었다. 부담 없이 팰 수 있는데 손맛도 짜릿하고 숫자도 백 명이 넘는다. 하루 밤낮을 미친 듯이 날뛸 수 있던 훌륭한 수행이었다.

"역시 사부님다운 선물이었지. 후, 사부님의 진심이 느껴져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부의 은혜는 하늘같구나! 감동하며 열심히 유령들을 패고 그 후 진짜 '선물'도 받아 챙겨서 나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테스론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자 레펜하르트가 질린 얼굴을 했다. 역시 저게 '제대로 된'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저렇게 안 돼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테스론이 손에 든 장검을 레펜하르트에게 겨누며 차갑게 웃었다.

"결국 운명이 내 손을 이끌어 그대 앞에 서게 했지. 이제 모든 악몽을 끝낼 시간이다, 마왕 레펜하르트!"

주먹을 내밀며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무식했던 놈이 말 하나는 잘하게 됐군. 남의 좋은 머리 가져간 덕을 톡톡히 보나 보지?"

차가운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살기가 피어올라 아지랑이처럼 둘 사이를 맴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공기가 팽팽해진다.

"레펜하르트...."

"테스론...."

시간을 거슬러 온 두 사람이 운명의 대적자를 노려보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 변해 버린 자신의 육체에 순간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저건 더 이상 내 몸이 아니야.'

혹여나 테스론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와 싸우게 되었을 때 과연 자기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고민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는 더 이상 없다.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지금 이 육체야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그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실감해 버렸다.

부우우웅!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그가 양손 가득 오러를 머금은 채 고함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지. 이 기회에 확실하게 후환을 없애 주마!"

☆ ☆ ☆

"타아아앗!"

기합을 길게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땅을 박차고 돌진했다. 테스론이 검을 든 채 옆으로 몸을 날려 공세를 피했다. 빗나간 주먹이 대기를 찢으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검은 갑주의 사내, 스테반이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레펜하르트!"

흑색의 대검을 뽑아 들고 스테반이 레펜하르트의 옆으로 내달린다. 그 순간 타시드가 참마도를 세운 채 앞을 가로막았다.

"은인의 싸움을 방해하지 마라!"

타탕!

참마도와 흑색의 대검이 허공에서 맞붙으며 불꽃이 튀었다. 스테반이 악을 쓰며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오크 따위가 내 앞을 막아!"

유서스와 러스도 움직였다. 푸른 오러를 덧씌운 롱 소드를 든 채 러스가 차분한 눈으로 유서스의 앞에 섰다.

"형님...."

힐끔 레펜하르트를 노려본 유서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네놈이 우선이겠지."

레펜하르트에 대한 원한도 원한이지만, 유서스에게 있어 가장 최우선적인 목적은 바로 눈앞의 사생아, 비천한 몸에서 태어난 주제에 오러를 각성해 버린 러스다.

"이번에야말로 가문의 수치를 씻겠다!"

마검 엘드란을 겨누며 유서스가 살기 어린 목소리를 띄운다. 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의 형님이야말로 가문의 수치요."

한때는 그토록 존경하고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형님'을 보며 러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시기와 질투로 휩싸여 살의를 피우는 유서스의 얼굴에 그가 알고 있던 명망 높은 황금기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기억 속 마지막 얼굴, 자신의 배에 검을 찔러 넣던 그때의, 그 추악한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그 표정뿐이다.

한탄하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기사도를 추구하던 긍지 높던 형님은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시끄럽다!"

고함을 지르며 유서스가 검을 들었다.

"눈을 떠라, 엘드란!"

마검 엘드란의 힘을 일깨우며, 동시에 유서스가 마갑 엘드라드로부터 온갖 강화 마법을 끌어내 자신의 몸에 걸었다. 러스가 긴장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쥐었다. 아무리 오러에 각성했다지만 그라임의 황금기사는 마검사로서 오러 유저와 맞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진정한 테네스의 검을 보여 주마!"

이를 갈며 유서스가 러스에게 돌진해 갔다. 마주 몸을 날리며 러스도 기합을 터트렸다.

"타아앗!"

엘드란의 황금빛 광채가 푸르른 블레이드 오러와 맞붙어 석실 가득 빛을 뿌렸다. 그 섬광 속에서 실란은 침을 삼켰다.

"꿀꺽...."

현재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레펜하르트의 고향 친구(?)도, 러스의 배다른 형도, 몇 달 못 봤다가 이상하게 강해져서 나타난 저 스테반도 아니었다.

방실방실 웃으며 다가오는 저 거구의 여인, 이보다 더 큰 공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실란,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저 악적으로부터 구하겠어요!"

너무도 예상대로 흘러가는 크리스틴의 발언에 실란이 잽싸게 시리스 뒤로 몸을 숨겼다.

"너만 믿을게, 시리스!"

"에휴, 알았어요."

시리스가 시미터를 늘어뜨린 채 크리스틴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리스틴이 검을 뽑아 들며 쌍심지를 켰다.

"노예 따위가 감히 주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게 맞서려 하느냐? 주제를 모르는구나."

"예전 같았으면 화도 안 났을 텐데, 이제는 그런 소리 들으니까 슬슬 화가 나네요."

차갑게 웃으며 시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빛에 살기가 서서히 피어오른다. 차가운 살의로 무장한 두 여인이 서로 몸을 날렸다.

"내 친구, 실프! 나의 검을 수호해 줘요!"

"세이어시여! 당신의 검을 빛나게 하소서!"

정령력으로 감싼 시미터와 세이어의 신성검이 맞붙으며 대기가 일렁였다. 순백의 광채가 퍼져 나가고 돌풍이 불어닥친다.

휘이이잉!

공동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뒤로 물러서며 필레나가 잽싸게 상황을 살펴보았다.

'일단은 스테반을 원호해야....'

그녀는 마법사, 마법사의 임무는 앞장선 전사의 전투를 보호하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필레나는 스테반과 싸우고 있는 덩치 큰 오크 전사를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테스론이 말하길, 오크가 마법에 특히나 취약하다고 했겠다? 그럼 일단 저놈부터....'

목표를 정한 필레나가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겔 타른 일렌디 필, 지옥의 공기여, 이 땅에 임하라! 내 적을 치는 창이 되라! 헬즈 스피어!"

그때였다. 실란이 성호를 그으며 바로 그녀의 마법을 방해했다.

"필라넨스시여! 사악한 힘에 맞설 신성한 방패를 허하소서!"

분홍색 성광이 방패 형상으로 나타나며 날아가는 필레나의 마법을 가로막았다. 마력과 신성력이 맞붙어 폭음을 일구었다.

콰아아앙!

폭연 속에서 필레나가 혀를 찼다. 실란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스나 러스에게 지겹게 들은 필레나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위 성직자란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쳇, 역시 굉장한 신성력이네.'

실란이 곧바로 시리스와 타시드를 위한 가호 주문을 준비했다.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나 러스에겐 별 쓸모가 없겠지만 오러에 각성하지 못한 타시드나 시리스에겐 그의 보조 주문이 큰 힘을 발휘한다.

"필라넨스시여, 그대의 종에게 사자의 힘을...."

막 기도를 올리려는 실란이 순간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자리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필레나가 기도를 못 하게 마법으로 그를 견제한 것이다.

"그렇게는 안 되지, 어린 성자!"

"쳇...."

혀를 차며 실란이 다시 기도를 준비했다.

"필라넨스시여! 저 여자 좀 어떻게 해 줘요!"

오랜만에 터진 오만불손한 기도문이다. 물론 관대한 필라넨스께서는 알아서 기도를 해석하시어, 권능을 내려 주셨다.

웅웅웅!

분홍빛 망치가 허공에 형성되어 필레나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신관, 프리스트의 공격력은 사실 별것 없다. 언데드에겐 절대적이지만 물리력 자체는 변변찮은 것이다. 필레나가 가볍게 마력장의 배리어를 치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이 막혀 버렸다.

"호호, 아무리 고위급이라 봤자 프리스트일 뿐인걸?"

마법사의 공격력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 주겠다! 필레나가 의기양양하게 에너지 볼트를 준비했다. 5개나 되는 에너지 볼트를 구현시킨 그녀가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날렸다.

"매스 에너지 볼트!"

에너지 볼트가 실란뿐 아니라 레펜하르트며 러스, 시리스와 타시드에게까지 골고루 날아간다. 성직자인 실란과 달리 마법사인 그녀는 동시에 여러 목표를 노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실란이 비웃음을 흘렸다.

"흥! 필라넨스시여! 그대의 종'들'을 가호하소서!"

날아가는 에너지 볼트를 성광의 방패가 모조리 가로막아 버렸다. 공격력은 별것 없지만 프리스트의 방호 능력은 감히 마법사가 따라올 수 없다. 직종 차이는 있어도 실란은 필레나에 비해 몇 수나 높은 급의 신관, 그녀의 마법 따윈 얼마든지 막을 자신이 있었다.

"쳇!"

혀를 차며 필레나가 실란을 노려보았다. 실란도 긴장한 얼굴로 필레나를 노려보았다. 양쪽 모두 근접전에는 취약하다 보니 이렇게 서로를 견제할 뿐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그렇게 둘 다 서로를 견제하며 눈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 ☆ ☆

"연환 기격탄!"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터트리며 두 주먹을 연달아 뻗어 냈다. 황금빛 오러가 탄환이 되어 테스론의 사방으로 융단 폭격을 해 댔다.

쾅쾅쾅쾅!

폭발이 끝없이 이어지며 공동이 우르릉 흔들린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연달아 날린 기격탄, 그 무수한 공격을 테스론은 자연스럽게 모조리 피해 버린 것이다.

"단순한 공격이구나, 마왕! 나의 연환 기격탄은 이렇지 않아!"

역시 자신의 기술이었던 만큼 테스론은 연환 기격탄이 발동하는 순간 이미 궤도와 파괴 범위를 모조리 파악한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잘도 피하는군. 짐 언브레이커블에 회피 따위는 없다더니."

짐 언브레이커블은 진정한 사나이라면 당당하게 모든 공격을 받아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제라드로부터 아주 기본적인 회피법 밖에 배우질 못했다. 그런데 지금 테스론은 미꾸라지처럼 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다.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 부분은 나도 좀 부끄럽군. 이 몸뚱이가 너무 부실해서 말이지."

전생에서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몸으로 때운 테스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육체로 그 짓 했다간 곧바로 황천행인 것이다. 다행히 테스론은 전생에 무수한 무인들과 싸우며 터득한 경험이 있었다. 지금 그의 발놀림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것이 아니라 그가 싸웠던 상대로부터 훔친 회피 기법이었다.

"내 몸으로 그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 건 정말 대단하다만...."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날렸다.

"피하기만 해서 뭐가 될 것 같나?"

곧바로 테스론에게 접근하며 레펜하르트가 길게 미들킥을 날렸다. 전생에 비해 신장이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2미터에 달하는 거구다. 무시무시한 범위의 킥이 테스론의 눈앞을 휩쓸어 버린다. 역시 아무리 단련해 봤자 육체의 성능 차이가 너무 극심하다.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한 테스론이 뒤로 물러나며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파괴의 노래! 섬광의 일격! 루인 송 & 라디언스 블래스트!"

동시에 두 마법이 완성되어 레펜하르트의 좌우로 쏘아졌다. 멀리서 보고 있던 필레나가 놀라 소리쳤다.

"맙소사, 더블 캐스팅?"

지금 테스론이 선보인 것은 단순히 두 마법을 빠르게 외운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외우는 더블 캐스팅이었다. 마법의 경지보다는 연산력과 마법적인 센스가 받쳐 주어야 가능한 것이라 설사 대마법사라 할지라도 더블 캐스팅이 가능한 자는 극소수였다. 그런데 테스론이 그것을 해내다니?

감탄하며 필레나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역시 테스론이야...."

반면 레펜하르트는 전혀 감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실망한 표정이었다.

"고작 더블 캐스팅? 내가 그 나이 때는 주문 네 개까지 동시 영창이 가능했었는데?"

참고로 마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엔 일곱 개까지 동시 영창이 가능했다. 실로 괴수 중의 괴수라 하겠다.

음파의 파동과 백색 섬광이 레펜하르트를 직격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두 팔을 벌리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스파이럴 가드!"

어지간한 것은 다 튕기는 몸뚱이를 어지간하지 않은 것도 튕기게 만들어 주는 사기적인 기술, 스파이럴 가드가 두 마법을 모조리 분쇄해 버린다. 테스론이 순간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그 회전력은? 스파이럴 가드가 왜 저렇게 느려?"

마법을 튕겨 낸 레펜하르트가 분노해 소리쳤다.

"남의 좋은 머리 들고 가서 고작 그거밖에 못하냐!"

"내가 할 소리다! 남의 몸 차지하고 이렇게 몰락시키다니!"

싸우다 말고 열심히 비난을 던지는 둘의 모습에 필레나와 실란이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도대체 뭔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뭔가 굉장히 분노하고 원통하다는 듯 떠들곤 있는데 양쪽 모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인 것이다.

또다시 테스론이 연달아 더블 캐스팅을 구사, 온갖 마법들을 쏘아 댔다. 화염구며 뇌격, 마법의 탄환이 레펜하르트를 노리고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스파이럴 가드를 쓰지 않았다.

"이 정도 마법에 굳이 오러 소모가 심한 기술을 쓸 필요도 없다!"

돌진하는 대신 레펜하르트가 연거푸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나는 흐름을 끊는 자, 정명한 언령에 개입해 일점을 찍는다! 아드란 린포스!"

현재 레펜하르트의 연산력으로 더블 캐스팅은 무리다. 하지만 그는 모든 마법의 흐름과 맥을 깨달은 자다. 게다가 테스론의 마력 패턴은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의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하면 발동된 마법의 맥을 끊을 수 있는지 손바닥 보듯 알 수 있다.

뒤늦게 마법을 발동했음에도 레펜하르트의 마력장이 날아든 마법들을 일제히 분쇄해 버린다. 테스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 저 가공할 마왕은 내 덜 떨어지는 머리로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나!'

레펜하르트가 재차 몸을 날리며 펀치를 날린다. 교묘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테스론이 감탄해 중얼거렸다.

"내 머리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는 테스론을 보며 레펜하르트도 감탄을 터트렸다.

"내 몸으로 이렇게까지?"

싸우기도 바쁜 와중에 열심히 떠들어 대는 테스론과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 하는 거냐, 저 사람들....'

생사대적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하는 말들이 참 대구가 척척 맞는다. 사실은 저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이 들 정도다.

물론 저 풀풀 날리는 살기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으면 절대 그럴 리 없다. 마법을 파훼하며 레펜하르트가 계속 테스론을 몰아붙였다. 잘도 피하고 있지만 일단 거리에만 들어오면 테스론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으아아아!"

레펜하르트가 전력을 다해 화난 들소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는 테스론이 전력을 다한 레펜하르트의 신체 능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오러를 끌어 올리며 레펜하르트가 막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타아아앗!"

순간 테스론이 곧바로 스텝을 밟아 거리를 좁히며 검을 찔러 갔다. 물론 그토록 단련한 이 강철의 육체가 저 따위 쇠꼬챙이에 어떻게 될 리가 없다. 레펜하르트가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때, 테스론이 눈을 빛냈다.

"걸렸구나!"

우우웅!

싯누런 오러가 검을 감싸며 레펜하르트의 심장을 정확히 찔러 갔다.

"으윽?"

2

뚝뚝뚝.

핏방울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다. 레펜하르트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강철과도 같던 대흉근, 그것이 길게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 깊이도 상당했다. 긴 자상이 두터운 가슴 근육을 절반 가까이 파고들어 있다.

테스론이 혀를 찼다.

"쳇, 눈치도 빠르군."

오러로 상처 부위를 지혈하며 레펜하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려드는 순간 테스론의 눈빛을 보고 경각심을 가져 몸을 뒤로 뺀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말 심장까지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저, 싯누런 오러를 머금은 칼날이!

"오러...인가?"

레펜하르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테스론의 검, 그 칼날에 머금어져 소용돌이치는 누런 오러를 바라보았다. 꽤나 낯익은 형태의 오러였다.

"스파이럴 가드? 아니, 검날에 씌웠으니 스파이럴 블레이드라고 해야 하나?"

"이 육체로 스파이럴 가드를 쓸 수는 없으니까. 용법만을 살려 관통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이지."

어떻게 테스론이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는 이제껏 오러를 구현시키지 않은 채 육체 강화에만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이 오러를 발현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테스론이 태연하게 반문했다.

"내 머리가 마법 쓸 재능이 있어서 그대가 마법을 쓰나?"

검을 겨눈 채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육체로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을 따를 수는 없었지."

확실히 지금 보이는 테스론의 오러는 레펜하르트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누런 색 계통이긴 하지만 황금빛의 찬란함은 없고 그저 칙칙한 색이었다. 틀림없이 저것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권왕 테스론이다!"

검성 사이러스와 함께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무인으로 군림하던 테스론이었다. 그만큼 그가 깨달은 오러의 경지 또한 드높은 것, 그는 전생의 깨달음을 통해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를 개조, 이 육체에 걸맞게 바꾸어 낸 것이다.

"마왕인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못할 거라 생각했나?"

"내가 그대를 너무 얕보았군, 테스론."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껏 그리 걱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한 분야에서 끝을 본 자는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검성 사이러스와 함께 대륙 최강자 자리를 양분했던 그대였지.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다."

"그 최강자 중 나머지 하나가 그쪽에 붙었다는 것은 속 쓰리지만."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옆을 힐끔 보았다. 저만치서 유서스와 맹렬히 싸우고 있는 러스의 모습이 보였다.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젊디젊은 모습이지만 그렇다 해도 테스론은 그 속에서 함께 무술을 겨루던 친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니 새삼 입맛이 썼다.

'설마 저 사이러스가 유서스에게 칼 맞고 쫓겨날 줄은 몰랐지.'

애초에 테스론이 유서스와 연락을 취했던 것도 러스의 존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현 시대의 러스는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기에 유서스와 친분을 쌓은 뒤 자연스럽게 그를 자신의 동료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펜하르트의 개입으로 테스론이 알고 있던 미래가 꼬여 버리며, 결국 현 시대의 사이러스는 마왕 측에 붙어 버렸다.

"이번 생애의 사이러스는 꽤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모양이더군? 친구도 생긴 것 같고."

무심코 나온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했다.

"원래는 친구 하나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뭐, 러스가 워낙 낯가림이 심하기야 하지만...."

"없었지. 아마 나 정도가 유일한 친구였을걸?"

전생을 떠올리며 테스론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검성 사이러스에게 친구 따윈 없었다. 본인의 차가운 성격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아무도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 컸다.

너무도 위대한 검사, 사이러스를 보통 사람들은 그저 외경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이러스와 어깨를 함께할 수 있는 오러 유저는 오히려 그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지나치게 뛰어난 그의 재능 때문이었다. 보기만 하면 남의 기술 알맹이만 쏙쏙 빼먹는 사이러스였다. 오러 유저치고 가장 친구 삼고 싶지 않은 자 1순위인 것이다.

하지만 테스론은 달랐다. 사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법은 그리 복잡하지가 않다. 기법 자체는 굳이 러스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오러 유저라면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애초에 그리 머리가 좋은 무문도 아닌지라 어려운 건 가르쳐 보았자 이해도 못 한다.

하지만 따라 하면 죽는다.

스파이럴 가드건 기격탄이건, 기본적으로 육체를 기반으로 쏘는 기술이다. 그리고 다른 오러 유저가 그런 식으로 오러를 운용했다간 기격탄 날리기 전에 포대인 팔뚝이 먼저 박살 나는 것이다.

즉, 짐 언브레이커블은 절대 기술 도용당할 염려가 없다! 물론 육체 단련법 역시 마찬가지다! 탐나면 얼마든지 훔쳐 가라! 그 기법으로 육체를 강철처럼 만들 수 있으면 오히려 환영이다! 재능이 모자라도 육체가 강철처럼 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준다면 오히려 짐 언브레이커블 쪽에서 큰절 올리면서 스승으로 모셔 갈 용의도 있다!

물론 슬프게도 대륙의 역사 속에 그런 엄청난 천재는 없었다. 심지어는 검성, 사이러스조차도.

"검성 사이러스도 꽤나 우울한 인생이었군."

주위에 우정을 나눌 만한 상대는 하나도 없고, 기껏 친분이 있는 이가 단순, 무식, 과격한 권왕 테스론이었다니.

어째 불쌍하게까지 느껴진다. 레펜하르트가 피식거리자 테스론이 마주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가 계속 이렇게 대화나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확실히... 필레나도 우리가 무슨 고향 친구 사이가 아니냐는 표정을 짓고 있군."

테스론과 레펜하르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교차했다.

분명 그들은 운명적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사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기억을 공유하는 자 역시 눈앞의 대적자뿐인 것이다.

"우리는 시공을 거스른 시간의 유배자, 미래라는 같은 곳에서 왔으니 고향 친구라는 말도 틀리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

레펜하르트가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테스론도 미소를 띠우며 검을 겨누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호호 웃으며 지낼 사이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겠지!"

차가운 살기가 두 사람의 미소 위로 흘러간다. 테스론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를 해치우기 위해 절차탁마로 힘을 키웠다, 마왕 레펜하르트.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받아 내겠다!"

레펜하르트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내 몸으로 거기까지 해낸 것은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그 정도로 설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아무리 테스론이 오러를 각성할 정도로 힘을 키웠다지만,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러 유저쯤 되면 상대의 기량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육체의 성능도 오러양도 레펜하르트의 절대적 우위다. 방금도 방심해서 당했을 뿐이지, 제대로 오러 유저를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역시 레펜하르트 쪽에 승기가 기운다.

"마법으론 날 어떻게 못해."

콰아아앙!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빛 오러가 폭발하며 터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오러양을 선보이며 레펜하르트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무인으로서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하지. 그대도 이미 이 격차를 느꼈을 터. 대체 무슨 수로 나를 해할 셈이지?"

그러자 테스론이 비웃음을 흘렸다.

"마법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은 말이지."

그리고 갑자기 검을 버렸다. 레펜하르트가 순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맨손 체술로 싸울 셈인가? 아무리 권왕의 영혼이라곤 해도, 권왕의 '육체'를 지닌 그를 상대로?

그때 테스론이 두 손을 벌리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무인의 싸움은 그저 오러양이 높다고 다가 아니다!"

순간 테스론이 화살처럼 레펜하르트의 정면으로 돌격했다.

"이제부터 그것을 증명해 주지!"

☆ ☆ ☆

필레나는 유서스 쪽을 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서스 경이 밀리는 것 같은데....'

마갑 엘드라드의 힘을 총동원하며 유서스는 연달아 마법을 날려 화려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이 화려하게 폭발하는 그 속에서, 정작 밀리는 쪽은 유서스였다.

"제, 제길! 깨어나라, 엘드란!"

"그 수법을 내가 한두 번 본 것 같소, 형님?"

황금빛 섬광이 밀어닥친다. 러스는 차가운 눈으로 가뿐히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창처럼 길게 뻗어 유서스의 어깨를 강타한다. 오러가 적중될 때마다 마갑 엘드라드가 조금씩 금이 가며 유서스가 고통으로 인상을 썼다.

"크윽!"

마검사와의 전투는 비록 겪어 보지 못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질시 어린 눈으로 유서스를 보고 또 본 러스였다. 유서스가 어떤 식으로 싸우고 어떤 마법을 쓰는지는 손에 잡힐 듯 훤하게 알고 있었다.

반면 유서스는 러스가 오러를 각성한 후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서로간의 정보가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이 명예도 모르는 비천한 놈이!"

"명예를 아는 자가 그래, 동생의 배에 칼을 꽂았소?"

"너 따위가 무슨 동생이란 말이냐!"

그럼 동생이 아니면 배에 칼 꽂아도 된단 말이냐? 러스가 기가 막혀 눈을 부라렸다.

"그래, 말 잘했다! 나도 너 따위 더러운 기사를 형으로 인정할 생각은 더 이상 없다, 유서스!"

둘 다 극도의 분노 속에서 눈동자를 벌겋게 물들이며 검을 교환하고 있었다. 필레나는 혀를 찼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격을 회피하는 러스에 비해 유서스는 아까부터 계속 여기저기 공격을 허용한다. 마갑 엘드라드가 워낙 강력한 갑옷이라 치명상은 없었지만 조금씩 체력이며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리고 크리스틴과 시리스의 전투 역시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 사라나! 우정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요!"

바람의 정령 사라나를 불러 연신 허공을 누비며 시리스는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을 압도하고 있었다. 크리스틴도 성기사답게 신성검을 휘두르며 열심히 맞상대하고 있었지만 공격 회수가 점점 시리스에 비해 떨어진다.

"이, 노예 주제에 감히 이런 괴이한 짓을!"

한쪽은 두 발 땅에 붙이고 싸우는데 한쪽은 허공을 3차원적으로 유용하며 전투를 벌이니 움직이는 범위가 너무 차이가 났다. 게다가 정령술을 익힌 시리스는 더 이상 단순한 검사 수준이 아니었다.

물의 정령 님피아를 전신 혈맥에 깃들여 민첩성을 높이고 바람의 하위 정령 실프를 검에 깃들여 파괴력을 높인다. 대지의 정령력으로 근력을 보조하며 싸우는 그녀는 이제 어지간한 오러 유저와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위급한 순간마다 축복의 호흡법―사실은 저주받은 호흡법이지만―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졌을 크리스틴이었다.

연거푸 밀리며 크리스틴이 치를 떨었다.

"노예 주제에 이렇게 사납다니! 네년도 혹시 실란을 노리는 거냐?"

이 상황에서 저런 엉뚱한 소리를 내뱉다니, 시리스가 기가 차 말을 더듬었다.

"아니, 뭐...."

안 그래도 여기저기 레펜하르트에게 원한 품은 이들이 많은 판이다. 그냥 노린다고 하는 게 좀 더 편해지려나? 레펜하르트를 걱정하며 시리스가 갈등 어린 표정을 지을 때였다. 크리스틴이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잉, 역시 우리 실란이 참 인기가 많다니까?"

정신없이 싸우다 말고 갑자기 부끄러워하다니, 정말 정신세계가 궁금한 아가씨다. 고개를 저으며 시리스는 결심했다. 뭔 소리를 하건 말리지 말고, 그냥 열심히 싸우기나 하자.

"나의 맹우, 이그나시스! 나를 위해 싸워 줘요!"

거대한 불의 거인이 허공에서 나타나 크리스틴에게 돌격한다. 크리스틴이 절망에 차 소리쳤다.

"세이어여! 그대의 종을 가호하소서!"

화염에 대한 방어 주문을 몸에 감싸고 크리스틴이 애써 검을 휘둘러 댔다. 그 모습에 필레나는 초조해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장이라도 마법으로 원호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걸요, 마법사 아가씨?"

그때마다 저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 신관이 그녀를 견제한다. 저렇게 어린 주제에 대체 얼마나 전투 경험이 많은 것인지, 필레나가 뭘 좀 하려고만 하면 칼같이 타이밍 맞춰 훼방을 놓는데 신경질이 날 지경이다. 이를 득득 갈며 필레나가 테스론 쪽을 돌아보았다.

'누구건 빨리 상대를 해치워야 이 대치 상황이 끝날 텐데....'

그렇게 막 테스론과 레펜하르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필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나? 저, 저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 ☆ ☆

테스론이 두 손을 내밀며 낮은 자세로 돌진해 온다. 의아해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무릎치기를 날렸다. 상대의 자세가 워낙 낮다 보니 무릎을 살짝만 들어도 정통으로 테스론의 머리를 갈길 수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테스론이 무릎 공격을 피하며 레펜하르트의 다리 밑으로 몸을 던졌다. 뱀이 땅 위를 기는 것처럼 빠른 스피드, 그렇게 바로 레펜하르트의 발목을 잡아 넘어트리며 무릎 관절을 꺾는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 빨라, 정말 뱀이 삽시간에 먹이를 휘감는 것처럼 보였다.

"으엑?"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앞으로 엎어졌다.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균형 감각이 교란되며 몸이 발랑 넘어가 버린다. 동시에 무릎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억!"

레펜하르트가 비명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테스론이 그의 오른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두 다리로 레펜하르트의 다리를 제압하고 옆구리에 그의 오른발목을 끼운 채 몸을 눕히고 있는데, 도저히 몸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뭐, 뭐야, 이거!"

전신에 힘을 준 채 테스론이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라운드 레슬링 계열은 전혀 모를 줄 알았다. 짐 언브레이커블은 서서 하는 관절기 외에는 전혀 가르치지 않으니까!"

'케엑? 이게 레슬링이었나?'

사부, 제라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제라드는 말했었다.

세상엔 그라운드 레슬링이라고 해서 건장한 사내 둘이서 살을 비벼 대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놈들이 있다고. 나름 깊이 파고들면 오묘한 기술이니 제법 인정할 만은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사지육신 멀쩡한 사내놈이 뭐가 아쉬워서 바닥을 뒹굴며 서로의 몸을 더듬어야 한단 말이냐? 자고로 남자라면 서서 싸워야지,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구차하게 바닥을 뒹굴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짐 언브레이커블은 오로지 서서 구사하는 관절기만을 가르친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허약한' 상대를 '상처 없이' 제압하기 위한 보조 기술로써 익힐 뿐이다. 공격 기술이 아닌, 제압 기술의 개념이랄까? 그렇다 보니 지금 테스론이 선보인 것처럼 본격적인 그래플링 기술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제대로 싸울 거면 남의 관절 붙잡고 깔짝댈 시간에 그냥 한 대 더 때리라고 했지, 아마?'

제라드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잠시 암담해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자세에서 어떻게 때리라는 거야?'

양 다리가 제압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두 팔을 아무리 뻗어 봐야 상대의 몸에 닿지 않는 것이다. 버둥대다가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에라이!'

제라드가 가르쳐 준 기법은 그냥 패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지!

상대가 달라붙으면 갈아 버리면 된다고!

"스파이럴 가드!"

붙잡힌 오른 다리를 축으로 황금빛 오러가 찬란히 솟아올랐다. 테스론이 눈을 빛내며 싯누런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고 생각하나!"

싯누런 오러가 황금빛 오러와 충돌해 섞여 버린다. 두 이질적인 오러가 뒤섞이며 입자 상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익힌 오러는 내가 볼 땐 애송이에 불과한 것! 그런 느려 터진 스파이럴 가드쯤은 기혈氣血만 차단하면 별것 아니다!"

생명기, 오러는 오러 유저의 육신으로부터 발현되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은 영체를 흐르는 기맥을 통해 현실로 구현된다. 테스론은 지금 자신의 오러를 마개 삼아 레펜하르트가 스파이럴 가드를 발동시키는 기혈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오러의 발동이 막혀 버린 레펜하르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이런 건 배운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이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거든."

애초에 스파이럴 가드는 테스론이 원조다. 육체가 바뀌어 구사할 수는 없어졌다지만, 영혼에 깃든 깨달음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혀를 차며 레펜하르트가 한 팔로 바닥을 짚고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애초에 마법사인 그가 무술가인 척했던 것이 잘못이다.

"그렇다면...."

엎드린 자세로 레펜하르트가 맹렬히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바로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은 미끄러질지어다! 그리스!"

붙잡혀 있던 레펜하르트의 다리가 쑥 빠졌다. 사물의 마찰력을 극도로 줄여 주는 마법, 그리스를 자신의 다리에 걸어 버린 것이다. 원래 이 그리스란 마법이 사람 몸에 걸리는 게 아닌데, 역시 실란 때의 사례도 있듯 현재 레펜하르트의 육체는 인간 몸뚱이로 인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헉헉!"

숨을 헐떡이며 레펜하르트가 허겁지겁 몸을 빼냈다. 하지만 테스론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도망치려는 레펜하르트를 날쌔게 따라붙으며 재차 태클을 건다. 레펜하르트가 수도를 내리치며 태클을 막으려 하던 찰라.

"흥!"

콧방귀를 끼며 테스론이 내려친 레펜하르트의 오른팔을 붙잡고 두 다리로 팔을 감쌌다. 그리고 곧바로 양다리로 팔목 관절을 엮으며 허리를 죽 폈다. 기껏 일어난 레펜하르트가 이번엔 뒤로 발라당 자빠져 버렸다. 팔 꺾기 기술, 암 바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아오! 대체 이거 뭐야!"

바닥에 드러누운 채 레펜하르트가 치를 떨었다. 분명 힘으로는 레펜하르트가 테스론을 압도한다. 그런데 어째서 붙잡힌 팔이 꼼짝도 안 하는 거지?

오로지 서서 하는 서브미션 계열, 그것도 순 제압하는 법만 배운 터라 방어 쪽은 개념조차 없는 레펜하르트다. 그렇다 보니 당하고 있으면서도 대체 왜 당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제압한 채 테스론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거참, 그냥 재미 삼아 익혀 둔 기술이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지금 그가 구사하고 있는 기술은 대륙 서북부에서 생겨난 무술, 카르지안 유술이었다.

판크라티온이나 레슬링 등과 달리 오로지 관절기만을 특화시킨 이 카르지안 유술은 현 대륙의 무인들에게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무기를 든 상대에게는 위력이 제한되는 데다가, 상대와 엉겨 붙어 땅바닥을 구르는 경우가 많은 무술이라 아무래도 보기 추하다는 이유로 세인들이 기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대일 대결에서만큼은 상당한 강력함을 자랑하는지라 대륙 서북부 지역에서는 제법 세력이 있는 유파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이 카루지안 유술을 전생의 테스론이 익혔던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이 먹어 가면서 이런저런 무술을 섭렵하다 보니 그 와중에 끼어 있었을 뿐이다. 전생의 테스론은 쉰 평생 무술만을 익혀 온 무인 중의 무인,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체술은 물론 어지간한 무기술들도 전부 통달한 달인인 것이다.

"그리스!"

이번에도 레펜하르트가 마찰력 제어 주문으로 팔을 빼려 시도했다. 암 바를 건 테스론이 씨익 웃었다.

"차단의 마력, 내 손을 떠난다! 매직 브레이커!"

레펜하르트의 그리스 마법이 발동 도중 테스론에게 차단되었다. 테스론이 더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마법은 이제 나도 쓸 줄 안다!"

"크윽!"

믿었던 마법마저 차단당한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세상에 살다 살다 테스론에게 마법으로 밀리게 될 줄이야! 마왕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위대한 마법의 깨달음을 선보이고 싶다.

'그런데 수인을 못 맺잖아? 젠장!'

한 팔이 완전히 붙잡혀 있으니 쓸 수 있는 마법이 극히 제한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 손으로 가능한 마법은 그리스 같은 하위 마법뿐, 3서클 이상의 마법은 아무래도 양손이 필요했다.

물론 수인 못 맺는 것은 테스론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그는 레펜하르트의 가공할 두뇌를 지닌 상태, 같은 주문이라도 수인 없이 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연산력만 치면 여전히 테스론 쪽이 우위다.

자빠진 채 레펜하르트가 악을 썼다.

"젠장! 네놈은 사부님의 가르침도 잊었냐! 구차하게 살아 보겠다고 땅바닥을 뒹굴다니!"

하지만 테스론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 시대의 난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자도 아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잠시의 수치쯤이 뭐가 대수이겠느냐!"

"남의 팔뚝 가랑이에 끼고 대륙의 평화 운운해 봐야 설득력 없거든?"

확실히 암 바는, 상대의 팔을 잡고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축으로 삼아 지렛대 원리로 팔을 꺾는 기술이다. 테스론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그, 그건 네놈이 무술에 대해 몰라서 그런 것이고! 이거, 사실은 굉장히 고도의 기술이란 말이다!"

"그래 봤자 자세는 발정난 개가 허리 비비는 것 같잖아! 저기 필레나 눈빛을 봐라!"

참고로 필레나가 두 사람을 바라본 것이 딱 이 시점이었다.

'어머나? 저, 저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테스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안 그래도 필레나는 지금 뺨을 감싼 채 어머어머를 연발하며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이 그라운드 레슬링이 참 효율적인 기술인 건 분명한데, 문외한이 보기에 굉장히 야시시한 것도 사실이다.

"돌겠네...."

혀를 차면서도 테스론은 계속해 레펜하르트의 팔을 꺾었다. 현재 테스론은 보통 레슬러들이 기술을 겨루듯 천천히 힘을 주며 관절을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잡은 순간 바로 스냅을 주며 전력으로 관절을 꺾고 있었다.

대련이 아닌 실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바로 관절이 꺾이며 뼈가 살을 찢고 나와 개방 골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이 '자신의' 육체가 너무 강인하다는 점이었다.

'썩어도 내 육체군. 더럽게 질기네.'

분명 기술은 제대로 들어갔는데, 인대가 너무 질기고 견고해서 스냅을 주었음에도 늘어나며 붓기만 할 뿐 끊어지지를 않는다.

그렇게 교착 상태로 들어간 두 사람이 저마다 힘을 주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왜 이렇게 몸이 안 움직여?"

"제길, 왜 이렇게 몸이 질겨?"

☆ ☆ ☆

'아이 참, 대체 테스론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필레나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두 사람이야 나름 맹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겠지만 무술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엔 도대체 저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저 보면 볼수록 남사스럽고 부끄러워 보일 뿐이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하는 짓이 더 괴이하다.

"에어로 블렛! 플레임 볼트! 선더 스피어!"

팔을 제압당한 레펜하르트가 급한 대로 수인이 필요 없는 에어로 블렛이나 기타 공격 주문을 날린다. 하지만 그 정도론 오러로 전신을 방어하는 테스론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다. 모든 공격 주문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폭발한다.

쾅! 쾅! 콰쾅!

이제는 정신없이 싸우던 크리스틴과 시리스조차 저쪽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남정네 둘이서 엉겨 붙어 비비는 것도 모자라 이제 주위에 화려한 불꽃(?)이 터지며 배경 효과까지 날리고 있다. 필레나와 달리 둘 다 무인인 만큼 저들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조, 좀 보기가 그러네요."

"그, 그러네...."

다행히 크리스틴도 이런 면에서는 제대로 된 여성의 감성을 지닌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보는 쪽 기분이야 어찌 되건 당하는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미칠 지경이었다.

"아으윽!"

남사스럽다느니 야시시하다느니 하는 건 전부 관전자의 입장, 일단 당하고 나면 그딴 생각 머리에 안 남는다. 어서 풀려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경각심만 가득할 뿐.

"이익!"

마법이 통하지 않자 레펜하르트가 자유로운 왼팔을 뻗어 기격탄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용없다니까?"

스파이럴 가드 때와 마찬가지로 기격탄 역시 발동 전에 기혈이 막혀 차단된다. 오러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엔 지장이 없지만 체외로 발현하려고만 하면 막히는 것이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서로의 오러가 뒤섞일 정도로 달라붙어 있으니 테스론 입장에선 얼마든지 레펜하르트의 오러에 간섭할 수가 있었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레펜하르트도 얼마든지 테스론의 오러에 간섭할 수 있지만....

'그런 거 배운 적 없단 말이야!'

슬프게도 주입식 교육으로 오러를 익힌 레펜하르트에게 저런 고도의 용법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기격탄을 시도한 덕에 왼팔이 테스론의 발목에 닿기는 했다. 손아귀 힘으로 발목을 부러트리겠다는 심보로 레펜하르트가 힘을 주려는 찰나였다.

"안 되지!"

또다시 테스론이 자세를 바꾸며 레펜하르트의 상체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상대의 왼팔을 다리 사이로 끼워 넣으며 재차 오른팔을 꺾었다. 이제는 숫제 두 팔이 전부 봉쇄된 상태, 깔린 채 버둥대는 레펜하르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크윽! 일단 이 자세부터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하지만 두 팔이 붙잡힌 채 상체 전체가 깔려 있으니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때 문득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냈다.

"으아아아!"

드러누운 채 레펜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등근육과 엉덩이 근육을 튕기며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으랏차!"

일반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결코 몸을 일으킬 수 없었겠지. 하지만 오러 유저의 초인적인 근력은 손가락 힘만으로도 성인 장정 한둘쯤은 가볍게 들 수 있다. 하물며 권왕의 육체라면 말이 필요 없다. 엉덩이를 씰룩거려 몸을 띄우는 황당한 짓거리도 가능하다!

"켁! 이런 짓도 가능한가?"

역시 힘에서 밀리는 테스론이 얽힌 팔을 풀고 떨어져 나갔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내둘렀다.

"젠장! 살다 보니 별 괴상한 짓을 다 해 보네."

"내 몸이지만 정말 어이없군!"

다시 테스론이 달라붙었다. 레펜하르트도 나름 손발을 놀리며 어떻게든 타격전으로 몰아가려 했지만, 슬프게도 그의 공격법은 이미 테스론이 훤히 꿰고 있는 상태였다. 순식간에 피해 가며 뒤로 돌아가더니 등에 달라붙어 목을 조른다. 캑캑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뒤로 날려 등째로 테스론을 벽에 밀어붙였지만, 어느새 빠져나오며 다리를 붙잡고 넘어트리는 테스론이었다.

계속해 밀리기만 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오러 유저의 레슬링 기술은 처음 보네."

문외한인 필레나와 달리 실란은 비록 성직자지만 그라운드 레슬링 계열에도 조예가 깊었다. 물론 할 줄은 모르고 그냥 안목만 있다는 소리다. 평소에도 교단의 근육질 몽크들이 저런 식으로 기술을 겨루는 광경을 익히 봐 온 바가 있어 지금 테스론이 어떤 짓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완전히 레펜 씨가 밀리잖아?"

실란은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모든 움직임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도저히 레펜하르트가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뭔가 하고 싶어도 필레나가 견제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다.

"헙!"

가볍게 숨을 멈추며 테스론이 또다시 암 바를 걸어 레펜하르트의 팔을 꺾었다. 막 넘어지려는 레펜하르트가 그야말로 힘으로, 무식하게 버텨 내며 테스론을 팔째 들어 올렸다.

"이대로 바닥에 처박아 주마!"

악을 쓰며 테스론을 바닥에 내려치는 순간, 테스론이 몸을 빙글 돌리며 원심력을 이용해 레펜하르트를 정면으로 고꾸라트렸다. 상대의 상체를 앞으로 눕히며 반대로 거는 암 바, 리버스 암 바였다. 덕분에 레펜하르트 본인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켁!"

철면피라는 관용구를 물리적으로 실천하는 짐 언브레이커블답게, 얼굴로 바닥 좀 부쉈다고 딱히 충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역시 굴욕감은 굉장했다. 이를 갈며 레펜하르트가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바닥에 박치기를 날렸다.

콰앙!

반동력으로 레펜하르트와 테스론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엉덩이로도 떠오르는 괴랄한 육체니 박치기로 못 뜰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보려 했지만....

"껙!"

테스론은 심지어 허공에서조차 밧줄처럼 레펜하르트를 옭아매고 있었다. 상대의 육체를 발판 삼아 힘을 쓰는 카르지안 유술은 장소가 공중이건 물속이건 가리질 않는다. 계속해 레펜하르트가 엉덩이, 복근, 어깨 등 말도 안 되는 부위의 근력으로 몸을 띄워 봤지만 그때마다 착실히 자세를 바꾸며 전신 관절을 집요하게 노려 댄다.

실란이 입을 쩍 벌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스카이 레슬링이라고 해야 하나?"

레펜하르트가 공처럼 공동 여기저기를 튀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스론은 그때마다 관절을 노리며 계속 레펜하르트를 압박한다.

둘 다 서로를 붙잡은 채 붕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 탁 하고 벽에 부딪치는 짓거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붕~ 탁! 붕~ 탁! 붕~ 탁!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이가 관절기를 쓰니 참으로 굉장한(?) 광경이 펼쳐져 버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얽힌 채 공동 여기저기를 붕붕 날아 다녔다.

테스론이 압도적으로 레펜하르트를 누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워낙 레펜하르트의 몸이 튼튼하다 보니 관절을 완전히 꺾어 전투 불능으로 만들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대로 계속 상황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당할 터, 레펜하르트가 이를 갈았다.

'젠장!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마법을 섞어서 싸웠으면 이렇게 안 되었을 텐데!'

상대를 너무 몰랐다는 것이 문제다. 이미 이런 상황이 되어 버리니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레펜하르트가 다른 동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누구건 하나라도 상대를 쓰러트리고 이쪽을 한 번만 견제해 주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장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고.'

유서스를 맹렬히 몰아붙이면서도 러스는 최후의 일격을 좀처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을 상대하는 시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이기긴 하겠지만, 당장 몸을 뺄 수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이제는 레펜하르트도 기억해 낸 저 검은 갑주의 기사, 스테반과 싸우는 타시드 쪽은....

'타시드가 밀리고 있어? 고작 스테반 따위에게?'

3

"죽어라! 오크 놈!"

광기에 찬 채 스테반이 흑색의 대검을 내리쳤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들어 막으며 신음을 흘렸다.

"크윽!"

공격을 막아도 실린 힘이 너무 강해 전신으로 충격이 온다. 일격을 막을 때마다 몸이 주루룩 뒤로 밀릴 정도니 반격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스테반이 기합을 흘리며 계속 참격을 날렸다.

"타아앗!"

검은 칼날이 연달아 참마도, 다카르의 검면을 두들겨 댔다. 그때마다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검신이 삐걱거린다. 그나마 아직 다카르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스피리츠 웨폰의 힘도 있었고, 또 타시드가 칼날이 아닌 검면으로 공격을 받아넘기고 있는 덕이었다.

드워프들의 기술이 온 대륙에 퍼진 이래 대부분의 명검들은 이제 칼날과 칼날을 마음껏 부딪쳐도 쉽사리 날이 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무기 제조술이 조악한 오크들은 여전히 검면을 눕혀 방어하는 형식 또한 익혀 두고 있었다. 스피리츠 웨폰을 구사하기 전의 허술한 오크들의 무기가 인간들과 칼날로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이내 이가 빠져 버릴 테니까.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내며 타시드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젠장! 뭔 인간이 이렇게 힘이 강하단 말인가!'

기술적인 면에선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은 물론 세련되었지만, 그렇다고 타시드가 감당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문제는 육체의 기본 성능 차이였다.

그리 거구도 아니고, 근육이 두껍지도 않은 스테반이다. 그냥 평범한 인간 기사 수준의 단련된 육체를 지닌 자다.

그런데 그런 스테반의 힘이 근육 덩어리인 타시드를 간단히 압도하고 있었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검풍이 일어 오르며 타시드가 사정없이 뒤로 밀려난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괴력이었다.

거기에 스피드도 엄청나게 빠르다. 저런 괴력으로 대검을 휘두르고 다시 자세를 잡아 후속타를 날리는데, 그 스피드가 너무 빨라 반격은 고사하고 연달아 가드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건 마치 러스 그 친구나 칼켄 족장님을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군....'

그렇다고 투혼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니다. 카루가, 투사의 힘을 쓰는 오러 능력자가 어떤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지는 타시드도 누누이 보아 왔다. 초월적인 기운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들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압감과 경외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눈앞의 저 흑기사는 그런 류가 아니었다. 분명 오러 유저처럼 강하고 빨랐지만, 흘러나오는 기운은 불쾌하고 음습한 어둠의 그것이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저건 전사가 아니다! 저건 절대 올바른 전사라고 칭할 수 없다!

불쾌감 속에서 타시드가 악을 썼다.

"제기랄! 다카르, 나의 맹우여!"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시키며 타시드가 참마도를 던졌다.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다카르가 스테반의 등 뒤를 노린다. 스테반이 코웃음을 쳤다.

"또 그 괴상한 사술을 쓰는구나!"

왼손으로 망토를 크게 휘두르며 스테반이 날아드는 다카르를 휘감았다.

"어림없다!"

망토에 휘감긴 다카르를 스테반이 강하게 떨쳐 낸다. 그리고 대검을 뻗어 허공에 휘둘렀다.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한 줄기 채찍이 되어 타시드를 노리고 쇄도해 갔다.

쌔애액!

강렬한 파공음이 공동을 울린다. 허겁지겁 피한 타시드의 발치에 땅이 깊숙하게 파였다. 숨을 헐떡이며 연신 바닥을 구른 타시드가 손을 뻗었다. 저만치 날아간 참마도가 움찔하더니 다시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헉헉...."

숨을 고르면서 타시드가 다시 투지를 끌어 올려 전투태세를 갖췄다. 흑색 기운의 채찍을 거두며 스테반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역시 못 배워 먹은 종자답게 상황 파악도 못 하는구나. 너 따위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으냐? 어서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지 못할까!"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에 타시드가 눈을 부라렸다.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별소릴 다 하는군. 자기가 무슨 기사라도 된 줄 아는가?"

타시드를 간단히 압도하면서도 스테반은 전혀 기쁘다거나 흥이 돋는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스테반이 입고 있는 마갑, 버서커 아머는 애초부터 오러 유저인 레펜하르트를 상대하기 위해 위대한 은의 현자가 내려 준 무구였다. 고작 오크 따위를 상대하며 무위를 떨쳐 봐야 전혀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살려 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이거늘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계속 덤비다니. 역시 야생의 오크들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구나."

한심해하며 스테반이 검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 검은 기류가 칼날을 통해 휘감긴다. 그대로 검을 내리치며 스테반이 고함을 질렀다.

"꺼져라! 미천한 놈!"

검은 기운이 해일처럼 타시드의 눈앞을 뒤덮었다. 참마도를 들어 막아보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전신을 후려갈긴다. 기류에 휩쓸려 날려 가며 타시드가 비명을 터트렸다.

"커어억!"

콰아앙!

날려간 타시드가 공동 벽에 부딪치며 폭음이 터졌다. 등째 벽에 부딪친 타시드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피를 토했다.

"쿨럭!"

부들부들 떨며 타시드가 애써 고개를 쳐들었다. 전신으로 고통이 밀려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쓰러진 타시드를 내려다보며 스테반이 비웃음을 던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발목을 잡은 것은 칭찬해 주마."

경멸의 시선을 보낸 뒤 스테반은 레펜하르트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레펜하르트였을 뿐, 타시드에게는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무시당한 타시드가 굴욕감에 치를 떨었다.

'제기랄....'

익숙한 눈빛이었다.

경멸과 무시가 가득한, 짐승이나 가축을 바라보는 저 무감정한 눈빛.

인간들이 오크를 보는 눈빛은 언제나 저랬다.

노예 검투사로서 키워지던 시절, 가축 취급 받으면서도 반항은 고사하고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만 행하는 동족들을 보며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분노하고 좌절했던가?

그래서 탈출했다. 대륙을 떠돌다 죽어갈지언정, 인간 밑에서 짐승처럼 살지는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 와중에 은인을 만났고, 푸른 곰 부족을 만났다. 그들 덕분에 그는 가축이 아닌, 긍지와 명예를 아는 진정한 오크가 될 수 있었다.

그 긍지가 짓밟혔다.

그 명예가 더럽혀졌다.

그는 전사다. 진정한 전사는 설령 목숨을 잃을지언정 결코 긍지와 명예를 잃어서는 안 된다!

"으으으...."

고통 속에서 타시드가 몸을 일으켰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며 전신으로 땀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타시드는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흔들리는 두 손으로 다시 한 번 검을 쥐었다.

'나는 푸른 곰 부족의 전사다....'

강렬한 울부짖음이 영혼 가득 메아리쳤다.

'나는 위대한 전사의 후예다!'

가슴 한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휘몰아친다. 무너져 버린 육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전사의 영혼을 떠받들고 그를 일으켜 세운다.

"으아아아!"

괴성을 터트리며 타시드가 다시 참마도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 한구석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둑이 터져 버렸다.

부우우웅!

청록색의 빛이 참마도, 다카르의 검신을 통해 섬광처럼 솟구쳤다. 파괴를 구현화한 빛이 대기를 찢으며 파공음을 흘렸다.

막 레펜하르트에게 향하려던 스테반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저건 대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