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푸른 곰 부족의 참전으로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갑시다! 동지들!"
말로이드가 기세등등하게 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는 대열을 지키기 위해 발을 빼지 못했지만 오크들로 인해 적들의 진형은 붕괴되었다. 마음껏 날뛸 수가 있는 것이다.
슬로이틀도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엘프들도 사방으로 불꽃이며 바람의 정령을 날려 병사들을 쓰러트린다. 일단 한번 무너진 이상 천 명이나 되는 병력도 소용이 없었다. 다들 아우성을 지르며 뭘 어째야 할 지 몰라 허둥댈 뿐이다.
"아, 세이어시여!"
늙은 기사 한 명이 절망에 차 주신 세이어의 이름을 외쳤다. 정예 중의 정예라는 페르난도 기사단이 고작 야생의 노예 종족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전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절로 신을 찾게 된다.
그 앞을 거구의 오크 한 명이 가로막았다. 산처럼 거대하고 바위처럼 굳건한 전사 중의 전사, 푸른 곰 부족의 족장 칼켄이었다.
늙은 기사가 검을 겨누며 비탄에 차 울부짖었다.
"더러운 오크가 어찌 세이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해하는가!"
모욕이라면 모욕일 저 외침에 칼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가 생각해도 오크들이 안 씻고 살기는 했으니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데스트란드의 황량한 대지에서 물은 귀한 존재니까.
"하긴, 넌 깨끗해 보인다."
칼켄이 늙은 기사를 빤히 보며 어금니를 매만졌다.
"칼 든 놈이 연습 안 하고 목욕만 했나?"
투박하긴 했지만 알아듣는 데는 지장 없는 공용어였다. 노기사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기사로서 어찌 이런 모욕을 듣고 참을 수 있으랴!
"으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기사의 시야를, 한여름의 숲처럼 진한 녹색의 빛이 가득 채웠다.
"크억!"
목이 떨어지는 기사를 뒤로한 채 칼켄이 다이어울프를 몰고 달려 나갔다. 그의 손에 쥐인 것은 녹색으로 빛나는 위대한 파괴의 힘. 병사들의 경악 가득한 외침이 이어졌다.
"블레이드 오러다!"
"맙소사! 저기도?"
스탈라도 양손의 단검에 오러를 머금고 전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전장 곳곳에서, 평생 한 명 보기도 힘들다는 눈부신 오러의 빛이 연달아 솟구친다. 거대한 야수의 이빨이 되어 잔혹하게 생명을 앗고, 또 앗아 간다.
"도대체...."
테츠발트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여전히 카다마이트와 승부를 결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눈앞의 상대에만 집중하는 카다마이트에 비해 테츠발트는 전황이 신경 쓰이다 보니 점점 밀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세상이....'
사방에서 눈부신 블레이드 오러가 작렬하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 수행해 얻어 낸, 자부심 가득한 검의 경지가 너무도 흔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테츠발트의 노안에 흐릿한 빛이 맴돌았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이냐!"
그때, 카다마이트가 이를 악물며 도끼 창을 머리 위로 들었다. 테츠발트의 흔들림을 발견하고 마지막 승부를 거는 것이었다.
"으랏차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내리쳤다. 당혹 속에서도 테츠발트는 착실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정신은 이미 패닉 상태였지만, 단련을 거듭한 그의 육체는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의무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도끼 창과 장검이 서로 맞부딪치며 오러의 파문이 퍼져 나가는 그 순간.
우우웅!
카다마이트의 전신에서 적갈색 광채가 불길처럼 일렁이며 부풀었다. 격돌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대지 공명의 힘으로 오러양을 몇 배나 증폭시킨 것이다. 카다마이트가 상대의 검과 얽혀 있는 도끼 창을 밀어붙이며 소리 질렀다.
"가라! 할트론!"
이미 힘겨루기 양상이 된 상태에서 갑자기 상대의 힘이 증폭되어 밀어붙이니, 아무리 테츠발트라 한들 피할 방법이 없었다. 무지막지한 거력이 방어한 검째로 테츠발트를 짓눌러 갔다. 그의 두 눈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커어어억!"
비명과 함께 테츠발트의 머리통이 투구째 양쪽으로 갈라졌다. 찢어진 강철의 틈새로 선혈과 뇌수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죽어 가면서도 그는 눈을 부릅떴다. 아직도 이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악몽이다!
지독한 악몽일 뿐이다!
그때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가로로 휘둘러 테츠발트의 목을 가볍게 잘라 버렸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눈부신 적갈색 오러가 하늘을 찔러 댔다. 뒤이어 전장 사방에서 네 줄기 오러가 솟아나 화답했다.
"우리의 승리다! 이제 잔당들을 처리하자!"
말로이드가 음성에 오러를 실어 고함을 터트렸다. 하늘 가득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다. 이종족 연합군 모두가 용기백배해 요새 수비군에 달려들었다. 이미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시나이 요새군이었다. 거기에 테츠발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니 더 이상 전의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돌격하며 도끼를 휘두른다.
엘프들이 불꽃과 바람을 날리며 예리한 검격을 연신 흩뿌린다.
오크들이 검을 던져 피분수를 자아낸다.
수백 년의 학대, 수백 년의 아픔을 담아 그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그리고....
늦봄의 태양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크로방스 최강의 기사와 삼천의 병력이 지키던 시나이 요새는 결국 이백명의 이종족 전사들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5
크로방스 왕국 수도, 왕도 크로틴.
그 중심부에 위치한 궁성의 한 응접실에서 분노한 고함이 울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화려한 귀족의 의상을 걸친 20대 후반의 청년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크로방스 왕가의 핏줄이 진하게 드러나는, 눈부신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이 청년을 향해 중년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 하지만 사실입니다, 카르사스 님."
카르사스는 미간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만큼 중년인, 펠리크 남작이 가져온 소식은 경악스러웠다.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었다!
현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요새가 이미 막판까지 몰린 유벨 왕자군에 무너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놀랄 일이거늘 이어진 보고는 더더욱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삼천이나 되는 병력 대부분이 몰살당했다고 했다.
포로로 잡힌 이들만도 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정예 중의 정예라는 페르난도 기사단이 십여 명을 제외하곤 모두 고혼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위대한 기사, 테츠발트 폰 페르난도를 잃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테츠발트 경이...."
크로방스 왕국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비참한 패배였다. 게다가 그 내용을 듣고 나면 더욱 기가 막혔다. 상대 병력은 고작 이백여 남짓, 그것도 인간이 아닌 노예 종족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정녕 확실한가?"
"패잔병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는 카르사스를 향해 펠리크 남작은 쓰디쓴 표정으로 대꾸했다. 워낙 심각한 패배다 보니 도망친 패잔병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왕도 크로틴으로 돌아온 이들도 백여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적들은 드워프와 엘프, 오크 들이었다고.
하나하나가 기사들을 능가하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었으며, 다섯 명이나 되는 오크와 드워프 오러 능력자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그중 한 드워프가 적갈색 오러를 날려 테츠발트의 목을 치는 그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저 많은 패잔병들의 말이 모두 일치하니 도저히 거짓이라 치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피터란 백작의 소식을 들은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거늘...."
카르사스는 고개를 저었다. 유벨 왕자군의 군량미를 탈취하겠다던 피터란 백작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 고작 어제였다. 시나이 요새와 달리 피터란 백작은 카르사스 군내에서 그리 중요도가 높지 않았기에 뒤늦게 정보가 왕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카르사스는 상대가 드워프였다는 소리에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그저 패잔병들이 전장의 공포로 넋이 나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만 생각하며 흘러 넘겼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저 전투 역시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카르사스가 인상을 쓰며 뇌까렸다.
"혹시 단체로 강력한 마법으로 현혹된 것이 아닐까?"
펠리크 남작은 쓴웃음만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카르사스도 자신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을 했는지 알기에 금세 입을 다물었다.
마법으로 그 수많은 패잔병들을 전부 현혹시켰다고? 그건 드워프가 오러 능력자라는 말보다도 더 허황된 이야기다. 그런 마법사가 있다면 굳이 공성전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혼자서 요새 전체에 저주를 걸어 버리면 되니까.
"테츠발트 경의 시신은 어찌 되었는가?"
"그게, 유벨 왕자군 측에서 정중히 염을 하여 왕도 크로틴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사흘 뒤면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만...."
침울한 필레크 남작의 말에 카르사스는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정녕 이 소식이 사실임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진정, 진정 테츠발트 경이 돌아가셨단 말인가...."
테츠발트는 페르난도 공작가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카르사스 자신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숙부나 다름없는 이였다.
"아아, 나의 스승이여...."
슬픔에 잠겨 카르사스가 눈시울을 붉혔다. 필레크 남작은 그런 카르사스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로 처참한 패배였다. 전쟁사 속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참패였다. 아직 젊은 카르사스에겐 감당키 힘든 좌절일 터였다.
하지만 슬픈 와중에서도 카르사스는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가 침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군의 전력은 일만 이천이겠군. 시나이 요새를 빼앗겼으니 왕도 크로틴 역시 위험해졌구나. 그리고 현재 왕도의 수비 병력은 사천 남짓이니...."
갑자기 카르사스가 엄숙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아버님과 외할아버님께 연락해 주게. 그리고 다른 귀족들에게도 연락해서 모든 병력을 왕도로 집결시키게."
카르사스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라면 페르난도 공작과 브로젠 후작이다. 둘 다 각자의 병력을 지니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흉년으로 인해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일단 내실을 꾀하기 위해서였다.
펠리크 남작이 의아해했다. 비록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유벨 왕자군의 병력은 삼천뿐이었다. 아직 그들이 수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랬다가 저들에게 영지를 빼앗기면 보급선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만...."
하지만 카르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저들이 시나이 요새를 함락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전력을 숫자대로만 판단할 수는 없을 터. 빼앗긴 영지는 수복하면 되지만 왕도를 빼앗기면 재기할 수 없다. 저쪽은 왕관과 인장이 있으니 왕도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순간 중립을 표방했던 귀족들이 유벨 왕자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모든 힘을 한 곳에 모아야 한다."
"영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필레크 남작이 감탄한 어조로 고개를 숙였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스승이자 의숙부인 테츠발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벌서 침착함을 되찾고 이름난 기사이자 지휘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이런 냉철하고 빠른 판단력이라니?
'역시 이 나라의 진정한 왕은 카르사스 님밖에 없다!'
명을 받들기 위해 펠리크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카르사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첩보대를 조직해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오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하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니 각별히 신경을 쓰게!"
카르사스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전술, 전략도 제법 공부를 한 바 있었다. 보통 기사들은 그저 용맹한 용사와 다수의 병력만 있으면 이길 수 있는 줄 알지만 사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 그리고 상대에 대한 정보다.
다섯 명의 이종족 오러 유저라는 허황된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적들이 노예 종족을 이용해 뭔가 계략을 쓴 것은 틀림없었다. 그걸 모른 채 전투에 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지휘관의 자세가 아니다.
"네, 카르사스 님."
필레크 남작이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남작의 모습이 사라지자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카르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왕좌가 눈앞에 도달했다 생각했거늘...."
☆ ☆ ☆
시나이 요새가 함락된 지 하루 뒤.
아직도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는 성벽 위에 서서 한 청년이 봄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구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니...."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껴 들판의 밀처럼 흔들린다. 녹색 눈동자로 요새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청년은 연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로브 차림의 덩치 큰 남자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실망하지 않으실 것이라 했잖습니까, 유벨 왕자님."
유벨 왕자는 고개를 저으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어제저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소."
시나이 요새 함락 소식은 그날 바로 유벨 왕자군 측으로 전해졌다.
출병하기 전, 레펜하르트는 다른 귀족들에게 감찰관을 보내 자신들의 전투를 확인하라는 전갈을 보냈다.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소식을 보내 봤자 어차피 믿을 수가 없을 테니 신뢰하는 수하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 말라며 거부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흔쾌히 귀족들은 저마다 한둘씩의 수하를 뽑아 요새 밖 여기저기에 은밀히 배치시켰다. 딱히 레펜하르트가 승리할 것이라 믿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패배하고 도망갈 경우 군량미의 소유권을 정당하게 주장하기 위한 증거 마련용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가차 없이 깨졌다. 그날 저녁 모든 감찰관들은 넋 나간 얼굴로 델피나 남작령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보낸 소식이라면 헛소리 말라며 무시했겠지만, 자신들의 충복이 저마다 한입으로 시나이 요새 함락을 주장하니 도저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신에게 홀린 듯한 얼굴로 유벨 왕자와 귀족들은 전 병력을 이끌고 델피나 남작령을 떠났다. 델피나 남작령과 시나이 요새는 지형 조건도 군사적 유용도도 차원이 다르다. 이곳을 장악하고 있으면 바로 왕도 크로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 된다. 함락 소식이 사실이라면 한시바삐 본진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들 어이없어하면서도 전 병력을 진군시켰고 오늘 새벽, 주인이 바뀐 시나이 요새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렇게 요새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을 꾸는 기분이구려."
자신의 깃발이 여기저기 나부끼는 요새 첨탑을 바라보며 유벨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요새 여기저기에서는 병사들이 전후 뒤처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벨 왕자군이 시나이 요새에 입성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요새 곳곳에 카르사스군의 시체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으니, 이백명밖에 안 되는 이종족 병력으로는 그 모두를 치우기가 요원한 일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멋진 모습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이백명의 인원으로는 포로를 관리하고 수용하기로도 벅차서 말입니다."
유벨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런 위업을 달성한 용사들에게 어찌 뒤처리나 시킬 수 있겠소? 다들 배불리 먹이고 푹 쉬게 하였소?"
"전원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유벨 왕자님."
현재 이종족 연합군은 요새 중심의 큰 건물 안에서 각자 방을 잡고 피로를 풀고 있었다. 유벨이 그것에 관해 물었다.
"귀족들의 반응은 어떻소?"
그 건물은 원래 페르난도 기사단이 쓰던 것이었다. 기사들이 쓰던 고급 침실에 노예 종족이 들어앉아 있으니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속으로야 배알이 꼴리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저들이 한 것이 없는 데다가, 요새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방 위치가 정해져 있었는데요."
딱히 공이 있고 없고가 아니더라도, 지금 시나이 요새에 들어온 귀족들은 감히 이종족들에게 뭐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요새에 입성하며 무수한 시체의 산을 보고 경악한 그들이었다. 게다가 수하들의 말에 따르면 저들 중에는 무려 오러 유저가 다섯 명이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노예 종족에 대한 선입견이 뼛속까지 박혀 있다 한들, 당장 현실이 이런데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저들의 전투를 두 눈으로 보았는데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유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마치 시나이 요새 전투를 직접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직접 본 것이 맞았다.
레펜하르트는 단순히 귀족들에게 감찰관을 보내라는 정도로 '이종족 홍보 전략'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인간이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은의 시대 유물을 이용해 전투를 죄다 '녹화'해 놓았던 것이다.
그가 본진에 있었던 이유는 물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전장이 모두 보이는 곳에서 자리 잡고 있을 필요가 있기도 해서였다. 그는 은의 시대 아티팩트인 영상 기록 크리스털을 이용해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기록하고 유벨 왕자군이 도착하는 대로 귀족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왕 홍보하려면 확실히 해야지, 암.'
그 상영회(?) 속에서 모든 귀족들은 똑똑히 보았다.
드워프와 오크, 엘프 들의 무시무시한 무력, 그리고 전장 곳곳에서 솟구치는 다섯 줄기의 오러를. 심지어 레펜하르트는 카다마이트와 테츠발트가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을 줌 인으로 당기는 배려까지도 잊지 않았다. 크로방스 왕국 최강 기사의 목이 잘리는 순간이 생생하게 확대, 재생되었으니 그걸 본 귀족들이 공포에 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문득 유벨이 이종족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승리의 영광에 취해 있는 것은 좋지만, 이 정도 전투를 그 숫자로 벌이려면 저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오. 피해가 어떻소?"
"드워프 전사 열일곱과 오크 전사 아홉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엘프들은 피해가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다들 많이 다쳤지요. 부상자의 숫자를 물으신다면, 저들 전부가 부상자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렇잖아도 실란과 유벨 왕자군에 속한 레단티의 성직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상당한 이종족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워낙 가혹한 전투였기에 그대로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이들도 많았다. 엄청난 신성력을 지닌 실란이 없었다면 사망자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도 컸다.
'아, 역시 쟤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한 건 이번 생애에 최고로 잘한 짓 같아.'
그때 유벨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허, 적들의 숫자에 비하면 경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실로 큰 피해구려."
진지하게 한탄하는 유벨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어? 이 녀석, 생각보다 훨씬 제대로 된 왕자였잖아?'
보통 왕자라면 이 정도 피해를 입은 걸 보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마음이 약해서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아까워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유벨은 정확하게 이종족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이름난 기사들을 잃은 것처럼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솔직히 카르사스 대신 이 녀석을 미는 게 좀 미안했는데....'
원래 전생에서 카르사스는 왕이 된 뒤 이름 높은 현군이 되어 크로방스 왕국을 다스렸다. 그가 왕이 된 이후 크로방스 왕국은 부강해지고 백성들도 평화롭고 부유한 삶을 살아 그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실로 드높았다.
그런 카르사스를 몰아내고 난봉꾼인 유벨 왕자를 대신 왕으로 앉히려 하면서 사실 레펜하르트도 양심이 많이 찔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벨을 보니, 피니아를 사랑하지만 않았다면 그런 험담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유벨 역시 명철하고 사리 판단도 빠르며 왕자다운 오만에 빠져 현실에서 눈 돌리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음, 양쪽 다 왕의 자격이 있다면, 역시 취향 맞는 사람 미는 게 옳은 거지.'
한층 후련해진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유벨 왕자님, 소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서."
"아, 그렇군. 이거 피로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구려, 어서 가서 쉬시도록 하시오."
레펜하르트가 전투 내내 한 짓이라곤 전장 해설하고 녹화한 것밖에 없다. 피로는 무슨?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성벽에서 내려왔다.
☆ ☆ ☆
귀족들의 태도는 분명히 바뀌었다.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가 친절하게 영상까지 틀어 주었고, 그 모든 광경이 수하들의 보고와 일치하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적어도 유벨 왕자군 중 이종족들을 무능하다 칭하는 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단지 문제는....
'그럼에도 이렇게 여전히 헛소리하는 것들이 있단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얄팍하게 생긴 남자, 데먼 자작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양손을 비비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희 가문의 재산은 실로 적지 않습니다. 어떤 가격을 부르셔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데먼 자작은, 카다마이트며 말로이드 등 드워프 오러 유저를 자신에게 팔라고 제의하고 있었다. 이종족들의 놀라운 위용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레펜하르트가 신기한 솜씨로 저들을 부려 저런 위력을 내게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착각하고 계시는데, 저들은 노예가 아닙니다. 당당한 저희 동맹군이지요. 예전부터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후, 역시 거절하시는군요. 하긴 저 같아도 저런 놈들을 돈으로 바꾸고 싶어 하지는 않을 테니...."
누누이 설명을 했거늘, 여전히 데먼 자작은 못 알아듣고 레펜하르트가 아까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써 좋은 말로 데먼 자작과 이야기를 끝내며 레펜하르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후려갈겨서 입을 막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현재 레펜하르트는 유벨 측 귀족들과 만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종족들의 힘을 보였으니 이제 다음 순서는 인간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뒤통수 맞을 일을 최대한 줄여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귀족들의 태도가 눈앞의 이 데먼 자작과 비슷했다. 레펜하르트의 솜씨는 칭찬할지언정 이종족들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개중에는 저들이 자유롭다고 했더니 그걸 야생이라는 소리로 알아듣고, 몰래 단하임 일족이며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을 붙잡아 길들이려는 수작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레펜하르트도 예측하고 있었던 사실이라 미리 대비를 시켜, 다들 얻어터지고 마는 선에서 끝났지만.
하지만 개중에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끼는 귀족들도 있었다.
시나이 요새 안쪽 회랑에서 중년의 사내 두 명이 사이좋게 걷고 있었다. 하론 남작과 갈린 남작이었다. 이 두 사람은 페오닌 상가에 속한 상인 출신 귀족으로, 다른 귀족들과 달리 그래도 머리가 많이 깨어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가 저들과 교류했다면, 우리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소?"
"하지만 고작해야 노예들 따위와 무슨 교류를...."
"같은 그릇이라도 요강으로 쓰는 조악한 물건이 있는가 하면, 명장의 손에서 탄생한 천금의 가치를 지닌 도자기도 있는 법이지요."
"그건 그렇군. 노예 종족들이 저럴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아직 납득이 안 가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일단은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어쨌거나 저들이 보인 무력은 분명 현실로 일어난 일이니까."
"그래야겠구려."
두 사람은 그렇게 판단을 보류한 채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다. 둘의 발걸음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반대편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귀족들 반응을 살피려고 탐지 마법을 행하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그래도 아주 헛짓 한 것은 아니구나. 다행히 말귀가 먹힌 사람도 있기는 있으니."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종족들의 활약도 이제부터였다.
이제부터는 인간들도 저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싸우게 되리라. 그리고 같은 편에 서서, 이종족들과 함께 검을 휘두를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내 꿈도 한 발자국 더 나가는 것이겠지."
☆ ☆ ☆
왕도 크로틴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왕도를 지키는 굳건한 방패, 크로틴의 수호 관문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들도, 왕도를 수호하는 병사들도 모두 두려워하며 소문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테츠발트 경이라면 대륙 어디서도 꿀리지 않는 오러 능력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그 테츠발트 경을 벤 것이 드워프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
"하지만 실제로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지 않았는가?"
왕도의 시민들은 대부분 카르사스 공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름난 기사이며 명철한 두뇌, 공평무사한 태도로 이름 높은 카르사스 공자가 난봉꾼인 유벨 왕자보다 훨씬 인기가 좋았던 것이다. 저녁만 되면 왕도 곳곳의 술집에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진짜일까? 오크 같은 놈들이 그렇게 무섭다는 게?"
"모르지, 검투사로 나오는 오크 놈들은 난폭하지 않은가?"
"하지만...."
술집의 홀에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들이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어수룩하게 생긴 오크 하나가 장작을 가득 들고 그들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 술집에서 키우는 늙은 오크 노예였다. 농장 같은 데서 일하다 늙어 쓸모가 없어지니 잡일꾼으로 싼값에 팔린 것이다.
"주인님. 장작 팼다. 가져왔다."
장작을 든 채 오크 노예가 어눌한 목소리로 카운터 안쪽을 향해 말했다. 이내 두툼한 살집을 지닌 아낙이 나타나 손가락질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럼 당장 뒤뜰에 놓아야 할 것 아니니! 멍청한 것!"
"알았다. 칼투. 뒤뜰 간다. 장작 갖고 간다."
욕을 먹고 있는데도 그저 어슬렁어슬렁 시키는 대로만 하는 그 모습에 사내들은 고개를 저었다.
"보게, 저게 바로 오크 아닌가?"
"역시 헛소문이겠지?"
"그렇지, 뭐."
다들 헛소문이라 치부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무리 유언비어라 할지라도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고 삼천병력이 패배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유벨 왕자군이 이제 곧 반격에 나설 터, 그렇다면 왕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술맛이 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오크들을 부려서 그런 짓을 한 걸까?"
"음,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네. 피터란 백작군말일세."
"아, 난쟁이들에게 전멸 당했다는 그...."
"쉿! 귀족가의 명예가 달려 있으니 함부로 크게 떠들 일이 아닐세!"
말을 꺼낸 사내가 입단속을 시킨 뒤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이들도 덩달아 어깨를 움츠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듣자하니 그 드워프들을 부리는 필라넨스의 성직자가 한 명 있는 모양이야. 그 신관이 드워프들을 손끝으로 부리며 전후 처리하는 모습을 본 이가 있다고 하더군."
"허? 신전에서는 체면 때문에 보통 노예를 부리지 않지 않던가?"
"그러니 더더욱 이상한 일이지."
그때였다. 사내들의 대화 사이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미녀였다. 여행자 차림을 한 그녀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한 손에 청동 술잔을 들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내들의 테이블 곁으로 다가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8등신의 잘 빠진 몸에 요염해 보이는 얼굴, 남자라면 누가 봐도 아름답다 칭하지 않을 수 없을 굉장한 미모였다.
하지만 그녀를 본 사내들은 일제히 기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헉?'
'뭐야, 이 여자?'
분명 미인은 미인이었다. 초상화로 그려놓으면 백이면 백, 절세미녀라 칭송할 미모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여인의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했다. 앉아 있는 사내들 입장에서 고개를 한껏 젖혀야 할 정도로 높은 곳에 그 아름다운 얼굴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웬 여자가 이리 큰 거야?'
'무슨 전설 속 거인의 핏줄이라도 타고 태어났나?'
평소라면 이 정도 미녀를 만났으니 술김에 통성명이라도 시도해 볼 법하다. 하지만 키 큰 것도 정도껏이지, 이쯤 되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사내 중 한 명이 위축된 얼굴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신지?"
"방금 전, 필라넨스의 신관에 대해서입니다. 혹시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것이 없습니까?"
예의 바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명령조의 말투였다. 하지만 워낙 태도가 자연스러워 사내들도 무심결에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 예. 저도 많은 걸 들은 것은 아닙니다요. 그냥 오크들을 부리는 그 신관이 필라넨스의 성직자라는 거랑... 음, 굉장히 어려 보이는 소년이라고 하더군요. 기껏해야 열네 살 정도? 엄청 긴 장발의 붉은 머리인데 겉보기에는 미소녀로 보일 만큼 예쁘장하다고들 합디다."
순간 여인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섬뜩한 눈빛이라 사내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얼굴로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호!"
우드득!
그녀가 쥔 청동 술잔이 가차 없이 우그러졌다!
사내들은 공포에 질렸다. 악력만으로 청동 술잔을 우그러트리다니? 대체 이 언밸런스한 미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인은 그들의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발길을 돌리더니 여인이 술집 밖으로 향했다. 문을 밀어젖히며 여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찾았다. 실란 필 마르시스, 나의 혼약자!"
<6권에서 계속>
6권
제18장 모든 상식은 파괴된다
1
시나이 요새를 점령한 유벨 왕자군은 곧바로 왕도 크로틴을 향해 진군했다. 시나이 요새와 왕도 크로틴 사이에는 넓은 평야 지역뿐이라 지형적으로 가로막힐 것이 없었다. 괜히 시나이 요새가 왕도를 지키는 관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중간에 소규모 주둔군들이 있었지만 삼천 명의 병력이 밀려오자 대부분 바로 항복해 버렸다. 개중에는 카르사스 측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도 있어 간간히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수적 우세인 유벨 왕자군의 상대는 되질 않았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군할 수 있었다. 상대의 병력이 흩어진 틈에 왕도를 수복하려는, 일명 전격전이 유벨 왕자군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카르사스 측도 만만치 않았다. 발 빠른 대응과 마법을 이용한 정보 전달 능력으로, 카르사스는 고작 닷새 만에 전 병력을 왕도 크로틴으로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미 행군을 시작한 측보다 오히려 더 빠르게 집결하다니 그 속도에는 레펜하르트조차도 감탄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요새 함락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상황 판단을 했다는 의미인데? 게다가 휘하 귀족들도 바로 짐 챙겨서 움직였단 소리잖아? 대단하군. 전략적 능력이나 인망이나 병사들의 훈련도나... 나무랄 데가 없군."
시나이 요새가 함락되자마자 소식이 전해진 것도 놀라운데, 거기서 바로 군대를 집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연락 체계나 지휘 시스템의 구축 역시 탄탄하게 완비해 놓았다는 의미다. 카르사스는 전략이나 용맹뿐 아니라 행정적인 능력 역시 뛰어났던 것이다. 비록 적이라지만 진정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재다.
'역시 미래의 현군답네.'
반면 유벨 왕자군은 전격전을 주장한 주제에 정작 시나이 요새에서 이틀씩이나 지체한 상태였다. 급하게 달려오느라 제대로 군대 정비를 하지 못한 탓도 있었고, 레펜하르트를 믿지 못한 이들이 성급한 진군을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시나이 요새를 차지했다 해도 병력 차이는 여전하니 요새에서 시간을 끌며 병력을 더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레펜하르트가 보기엔 기가 찬 소리였다.
'기껏 승기를 잡고 적의 목에 칼날을 들이댄 상황인데, 상대 모가지가 의외로 단단할지 모르니 같이 칼 눌러 줄 사람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카르사스의 유능함과 유벨 진영의 무능함이 절묘하게 손을 잡아, 결국 이틀 차이로 유벨 왕자군보다 카르사스 공자군 측이 먼저 왕도에 집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루간의 휴식을 허락한 카르사스는 다음날 일만의 병력을 직접 이끌고 왕도를 떠났다.
그리고 하루 뒤.
크로방스 중앙의 레단트 대평원, 숲과 숲 사이의 넓은 평야에서 양 진영이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일만의 카르사스군과 삼천이 조금 넘는 유벨 왕자군이었다. 결국 전격전은 실패, 양측의 힘을 정면에서 겨루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뭐, 우리 입장에서야 그리 나쁠 것이 없지만."
본진에서 말에 탄 채 양쪽 진영을 살피던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군의 세력이 합류하기 전에 왕도를 탈환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며 유벨 왕자 측 참모들은 땅을 치고 있었지만, 사실 이종족들의 힘을 보이기 위해선 이렇게 정면 승부를 하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옆에서 시리스가 살짝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크지 않을까요?"
그녀는 가벼운 전투 복장에 시미터를 차고 말을 타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의 역량을 보니까 차라리 이렇게 흘러간 게 낫지 싶어."
원래 유벨 왕자군의 전략은 상대의 병력이 모두 모이기 전, 왕도 크로틴을 탈환하고 나서 증원군을 상대로 수성전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작전은 어디까지나 왕도를 탈환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쓸모가 있다. 공성전을 벌이는 도중 증원군이 도착해 버리면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아하니, 카르사스 공자의 역량상 쉽게 왕도를 내주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쪽이 늦장을 부린 게 다행이지."
일단 왕도로 모든 병력이 집결하자 카르사스도 당당히 군세를 이끌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미래의 국왕이 될 몸이라면 민중의 여론 역시 신경 써야 한다. 왕도 크로틴을 전장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지녀야 하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굳이 인기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병력이 세 배가 넘는데 수성전을 벌일 바보 지휘관은 없다.
"그럼 저도 일단 가 볼게요."
"응, 조심해!"
"네!"
살짝 미소를 보낸 뒤 시리스가 말을 몰아 진영 저편으로 향했다. 단하임 일족의 엘프 전사들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이미 틸라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전사들에게, 타시드는 푸른 곰 부족의 진영에 가 있다. 실란은 레단티의 성직자들과 함께 치유병단에 속해 있었고 러스 역시 유벨 왕자의 친위기사단 사이에 껴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몸조심해야 할 텐데...."
아무리 그들의 힘을 믿는다지만, 역시 전쟁을 앞에 두고 소중한 이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레펜하르트가 목소리를 흘리자 바로 곁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주인이시여, 이 목숨 다 바쳐 당신을 수호하겠나이다!"
오크 검투사 탈카타였다. 그는 노략질한 페르난도 기사단의 갑주를 걸치고 레펜하르트의 호위 자격으로 곁에 있었는데, 여전히 얼굴 가득 충성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힐끔 그를 흘겨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라."
사실 탈카타도 타시드 따라 푸른 곰 부족으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거기 껴서 이것저것 좀 배워 오라고 하려고.
하지만 스탈라가 거절했다.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은 오랜 시간 함께 싸워온 하나의 생명체나 같으니, 아무리 같은 오크라지만 실력도 떨어지고 손발도 맞지 않는 탈카타를 대열에 끼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이번 일 끝나면 나한테 한 반년만 맡겨 놓으시게.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오크로 만들어 주지! 타시드도 내가 키웠는걸? 호호호!
그 말을 하면서 스탈라는 뭔가 신 난다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서 타시드가 정색을 하며 말리는 시늉을 한 걸 보면 그 교육이란 게 상당히 '오크스러운' 것임은 틀림없을 것 같았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측은한 눈으로 탈카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그래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다.'
"...주인님?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
"아, 아냐. 아무것도."
물정 모르는 탈카타를 보니 양심이 찔려 레펜하르트는 다시 진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만 대 삼천의 병력이지만, 양측의 사기는 우려했던 것보다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카르사스군이야 훈련도 잘되어 있고 지휘관에 대한 신뢰도 강한 데다가 병력이 세 배가 넘으니 사기가 높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벨 왕자군 측도 의외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물론 눈앞에 세 배나 되는 병력이 포진하고 있으니 다들 긴장한 얼굴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무려 다섯 명의 오러 유저가 있으며, 이백 명으로 삼천 명이 지키는 요새를 함락한 괴물(?) 군단이 함께 하는 것이다.
'결국 나머지는 하늘에 달린 것인가.'
어차피 그는 최선을 다했다. 레펜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를 기원하는 일뿐이군. 뭐, 정 밀린다 싶으면 나도 웃통 까고 나서야겠지만....'
전생의 일도 있으니 되도록 그 사태만은 피하고 싶은 레펜하르트였다.
양 진영의 앞에서 기수들이 깃발을 휘두르며 전투 준비를 알린다. 진영이 정돈되며 드넓은 평야 가득 전의 가득한 공기가 흘러넘친다.
부우우웅!
전장의 뿔피리가 양측에서 울리며, 크로방스의 왕위를 건 결전이 시작되었다.
☆ ☆ ☆
카르사스군과 유벨 왕자군은, 양쪽 모두 전장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진형을 짜고 있었다.
카르사스군은 본군을 수비에 강한 응집 대형으로 짜고 선두에 기사단을 위치해 중앙 돌파를 노리는 모습이었다. 나쁜 진형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군을 맞이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병력이 취하는 진형이다.
반면 유벨 왕자군은 오히려 대열을 가늘고 길게 늘려 두 팔을 벌린 포위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보통은 수적인 우위로 상대를 억누르려 할 때 쓰는 진형.
한마디로 양쪽의 진형이 반대가 된 것이다.
"물론 속사정을 알고 보면 꽤 합리적이지만 말이지."
레펜하르트는 턱을 매만졌다.
숫자도 적은 주제에 유벨 왕자군이 포위 대형을 갖춘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은 포위 대형이 아니라 돌격대가 여러 개일 뿐이다. 오러 유저가 여섯이나 있으니 그 강력한 힘을 굳이 한 점에 모아 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레펜하르트에게 공을 빼앗긴 다른 기사들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선두에 서겠다며 다투었으니, 에라 모르겠다 싶어 전부 앞장서 싸우라고 명해 버린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기사들은 앞장서 돌격해 주어야 전장에서 쓸모가 있는 존재들이니 후진으로 미룰 수도 없었다.
그리고 카르사스 역시, 이백 명으로 시나이 요새를 함락시킨 유벨 왕자군의 전력을 경계하고 있었다. 노예 종족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었지만, 어쨌거나 시나이 요새가 이백 명에게 함락당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눈앞의 현실을 외면할 만큼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기사급' 전력으로만 치면 오히려 유벨 왕자군이 카르사스군보다 더 우월한 병력을 지니고 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카르사스는 명철한 두뇌로 이것까지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비 진형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우우우웅!
뿔피리가 울리자 양측 진영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기를 고양시키는 우렁찬 고함 소리 속에서, 한 기사가 말을 타고 카르사스 진형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연한 적발에 수염을 근사하게 기른 40대 초반의 장년인이었다.
카르사스군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브로젠의 마검!"
"스피리어스 경이다!"
레이븐 폰 스피리어스. 브로젠 후작가를 섬기는 그는 카르사스군의 또 하나의 오러 능력자였다. 마흔 살에 오러를 각성, 3년이란 시간 동안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는 오러 유저치고는 신진이었지만 역시나 놀라운 무력을 지닌 자였다.
스피리어스 경이 검을 뽑아 들었다. 눈부신 붉은 블레이드 오러를 뽑아내 위용을 과시하며 그가 소리쳤다.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아! 나, 레이븐 폰 스피리어스가 대결을 신청한다! 그대들 중 용사가 있다면 나서라!"
카르사스군의 환호 소리가 높아졌다. 오러 유저의 찬란한 광검은 과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효과가 좋았다. 저 용맹한 모습만으로도 사기가 고양되고 흥분이 가슴을 때린다.
"용사가 없느냐? 역시 테츠발트 경을 쓰러뜨린 것은 비겁한 수법이었음이 틀림없구나!"
고함을 지르는 스피리어스 경을 보며 대기하고 있던 카다마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나가서 썰어 버릴까? 척 보니까 테츠발트인가 하는 양반보다도 약하구먼."
"에이, 나설 사람 정해져 있잖소?"
곁에 서 있던 드워프 전사가 그를 말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진영에서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나서고 있었다. 스피리어스 경의 표정이 조금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테츠발트 경이 드워프 오러 유저에게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온 저 사내는 누가 봐도 확연한 인간인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사내가 롱 소드를 뽑아들고 당당하게 마주 외쳤다.
"나는 유벨 왕자님과 뜻을 같이하는 자, 테네스 가문의 사이러스. 명성 높은 스피리어스 경과 겨루게 되어 영광이오!"
우우웅!
굉음과 함께 러스의 칼날 위로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이번엔 유벨 왕자군이 환호를 터트렸다. 스피리어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놀랍군. 아직 서른도 되어 보이지 않거늘."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30대 후반은 되어서야 겨우 오러에 각성한다는 현 시대의 상식을 보면, 러스의 존재는 실로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대의 무위에 경의를 표한다! 이제 그대의 목을 카르사스 님께 바치리라!"
스피리어스가 말을 몰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러스도 마주 달리며 고함을 질렀다.
"쉽지 않을 것이오!"
붉고 푸른빛이 격전의 중심에서 마주하며 폭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앙!
이름난 무장이, 전투 전 서로의 기량을 일대일로 승부 짓는 것은 일견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전략가라면 저 행위가 병사들의 사기를 결정짓는 데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지휘관 입장에서야 병력의 움직임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일개 병사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그저 시키는 대로 막 날뛰다가 재수 없으면 죽고 운 좋으면 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병사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전투 의식을 고양시키려면 역시 눈앞에서 '자, 보아라! 우리 편이 이토록 강하다! 안심하고 싸워라!'라고 직관적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타아앗!"
"하아압!"
블레이드 오러를 쉴 새 없이 교차하며 러스와 스피리어스는 화려한 잔상을 연거푸 허공에 새기고 있었다. 오러가 맞부딪쳐 파문을 떨칠 때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환호는 카르사스군보다 유벨 왕자군이 더 컸다.
"오러 능력자!"
"이제 우리에게도 오러 유저가 계시다!"
"그런데 저 기사는 누구여? 인간 같은데?"
"사이러스라던데? 뭔 상관이야? 어쨌거나 우리 편이잖아!"
내전이 일어난 이래, 여태껏 유벨 왕자군은 카르사스군이 일대일 대결로 도발을 할 때마다 애써 무시하고 바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오러 유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러 유저뿐이고 일대일 대결을 청하는 것은 언제나 테츠발트, 아니면 스피리어스였다. 나가 봐야 깨질 것이 빤하니 일대일 대결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유벨 왕자군은 언제나 카르사스군에 비해 사기가 떨어진 채로 전투에 임해 왔다. 저쪽의 승부를 피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병사들이 보기엔 자신들이 약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유벨 왕자군이 우위에 있음에도 사기에서 밀려 패배하는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러스는 놀라운 솜씨로 스피리어스 경과 호각을 이루고 있었다. 단순히 일대일 대결에 나설 오러 유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벨 왕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반면 상대측에 없던 오러 유저가 생겼다는 걸 안 카르사스군의 사기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꼭 승리해 주어야 하오, 스피리어스 경."
본진에서 두 기사의 결투를 바라보며 카르사스는 손톱을 깨물었다.
초조했다. 분명 시나이 요새를 함락시킨 것은 두 명의 오크와 세 명의 드워프 오러 유저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보에도 없었던 인간 오러 유저가 또 나타난 것이다.
'저놈들은 오러 유저를 빵틀로 찍어 내나, 뭐가 이리 자꾸 튀어나와?'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금 저들이 지닌 오러 유저의 수는 크로방스 왕국 전체보다도 오히려 많다는 소리가 아닌가?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만큼 스피리어스 경이 저 젊은 기사를 멋지게 쓰러뜨려 주어야 한다.'
곁에 있던 참모가 조심스레 카르사스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것은 놀라우나, 그래 봤자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입니다. 경험이건 역량이건 스피리어스 경이 패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카르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불길함으로 차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 ☆ ☆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예리한 궤적을 남기며 급소를 쇄도해 온다. 푸른 블레이드 오러가 화려한 원을 그리며 공격을 쳐 낸다. 빛과 빛이 마주하고 화려한 윤무를 춘다.
연달아 마상 검술을 구사해 맞서는 러스를 보며 스피리어스가 안색을 굳혔다.
"젊은 친구가 실력이 대단하군!"
"그쪽 역시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오!"
고함쳐 대꾸하며 러스는 속으로 웃었다. 검을 맞댈 때마다 희열이 가슴 한구석에서 벅차도록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었다. 크로방스의 명성 높은 오러 유저, 스피리어스 경과도 전혀 밀리지 않고 승부를 결할 수 있다. 이는 놀라울 정도의 쾌감이었다.
스피리어스의 검술은 확실히 러스보다 우위에 있었다. 러스가 지닌, 특유의 예측할 수 없는 검술도 이미 경지에 오른 스피리어스의 정통 검술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검술만으로 보면 확실히 러스의 패배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러스는 스피리어스와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다. 우습게도 러스가 스피리어스보다 '경험'이 많기 때문이었다.
'정말 형님에게 감사해야겠군.'
젊은 시절 기사 수행으로 대륙을 떠돌며 무수한 사투를 겪은 스피리어스였다. 하지만 그는, 정작 오러 능력자가 된 이 후엔 진정한 사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였다.
크로방스 왕국은 지난 10여 년간 평화로웠고 다른 국가와 전쟁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왕국 최대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브로젠 후작가에 검을 겨누는 다른 세력도 없었으니 스피리어스에게는 진지하게 힘을 쓸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산적이나 도적들을 상대로 오러를 뿌려 대며 절대적 무위를 과시했을 뿐이다.
게다가 오러 유저들끼리는 서로의 정보를 빼앗길까 봐 대련도 잘 하지 않는다. 테츠발트가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것도 다른 국내 오러 유저들을 전부 검으로 꺾어 눌러서가 아니었다. 그냥 오러를 수행한 기간이 가장 길고, 또 오러를 발현하는 기세가 개중 제일 강렬하기에 자기들끼리 그렇게 여길 뿐이었다. 오러 유저끼리는 서로의 기세만 봐도 대충 상대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으니까.
반면 러스는 레펜하르트며 드워프 오러 유저, 오크 오러 유저 등등, 수많은 오러 능력자를 접해 보았다. 적어도 오러 유저와의 전투라는 면만 놓고 보면 마흔 평생 검술을 익혀 온 스피리어스보다도 이제 갓 오러를 각성한 20대의 애송이, 러스 쪽이 오히려 경험 면에서 우위였던 것이다.
"죽여 주마!"
"어린놈이 건방지다!"
고함을 터트리며 두 기사는 계속 공방을 나누었다. 보통 기사들의 대결과 달리 서로 장검 하나만을 지닌 처지지만,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환시킬 수 있는 오러가 있는 이상 창이나 방패 등은 별 의미가 없다. 저마다 붉고 푸른 블레이드 오러를 늘이고, 쏘아 대고 때로는 막고 흘리며 맹렬히 싸워 댔다.
분명 검술은 스피리어스가 우위였지만, 오러양은 별 차이 없고 운용 실력이나 경험은 오히려 러스가 위였다. 점점 승부는 러스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거참, 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내보낸 것인데.'
시나이 요새 전투에 참전하지 못한 러스는 이번에야말로 스피리어스 경과 상대하게 해 달라고 레펜하르트를 졸라 댔다. 그가 레펜하르트를 따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성을 떨쳐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니 당연한 요구였다.
그리고 이번엔 레펜하르트도 흔쾌히 허락했다. 시나이 요새 때야 이종족의 힘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종족의 힘을 증명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계속 저들만 두각을 드러내면 상대적으로 인간들의 모습이 묻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종족이 인간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이종족의 구도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유벨 왕자군의 대부분이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는 인간 오러 유저가 나서 주어야 다른 귀족들의 체면도 살고 불필요한 시기나 질투를 막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인간이 드워프나 오크들에게 밀린다는 인상을 주겠지만, 러스가 나서면 그냥 강력한 다종족 오러 유저 집단으로 봐 줄 테니 말이야. 뭐, 러스 녀석이 쓰러지면 그때 칼켄이나 카다마이트가 나서도 되는 것이고.'
나름 생각이 있어 러스를 내보낸 레펜하르트였다. 사실 승리할 것이란 기대는 별로 안 했다. 전생을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이의 러스가 스피리어스 경을 이길 확률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데 잘 싸운다. 상상 이상으로 잘 싸운다. 이건 뭐, 거의 상황을 압도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이대로라면 저 녀석, 몇 년 안에 검성 소리 듣겠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래 러스의 재능은 실로 하늘이 내린 것이라, 저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러스가 마흔이 넘겨서야 검성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은 워낙 오러 유저들이 서로 대련을 기피하다 보니 모든 것을 스스로 터득하느라 늦었을 뿐이다. 지금은 레펜하르트 덕분에 여기저기서 기술을 잔뜩 훔칠 수 있었으니 저 정도 진도를 뽑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크윽!"
블레이드 오러를 마주하던 스피리어스가 신음을 터트렸다. 오러가 맞붙은 순간, 상대의 블레이드 오러를 타고 은밀한 기운이 스며들어 그의 두 팔을 강타했다. 러스가 히죽 웃었다.
"스탈라 씨에게 배운 거다!"
정확히는 훔친 거라고 해야겠지. 물론 스피리어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인상을 쓰며 그가 더더욱 광폭하게 검을 휘둘러 댔다.
"이따위, 애송이에게 질 내가 아니다!"
스피리어스가 전력을 검에 실었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한층 굵어져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처럼 빛난다. 일격에 상대를 도려 낼 작정이었다.
"호오?"
그에 맞서 러스가 눈을 빛내며 검을 어지러이 흔들었다. 수많은 검의 잔상이 생겨나며 수십 줄기의 푸른 오러가 스피리어스에게로 쇄도해 갔다.
중검과 환검, 두 검술의 극치가 두 기사의 손에 구현되어 서로를 향해 날아간다. 서로의 검격이 맞붙는 순간, 스피리어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검과 마주친 푸른 오러 대부분이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허상이었나!'
강렬한 오러의 파동이 느껴지는 공격은 전부 가짜, 진짜 위력을 지닌 블레이드 오러는 소리 없이 은밀하게 그의 좌우를 파고들고 있었다. 스피리어스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당했다!'
눈앞의 이 젊은 오러 유저는 환검을 펼친 그 순간, 기척과 실체의 오러를 분리해 오러 유저인 스피리어스의 감각마저도 속였던 것이다. 상상도 못 해 본 무시무시한 기술이었다.
중후하기까지 한 붉은 오러가 허무하게 허공을 꿰뚫음과 동시, 스피리어스의 양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크어어억!"
피분수를 쏟으며 스피리어스가 검을 놓치고 말에서 떨어졌다. 카르사스 진영이 술렁거리며 여기저기 놀란 외침이 터졌다.
"스피리어스 경!"
"맙소사! 스피리어스 님이!"
낙마한 스피리어스는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경악에 차 러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오러 유저답게 러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저것이 가능한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재수 없을 정도의 천재인 러스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오러 운용법까지 훔쳐 내곤 했지만, 스피리어스같이 평범한(?) 오러 유저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재주인 것이다.
"저 나이에 어떻게 이런 엄청난 기술을...."
평생 수련이 허무해지는 절망감 속에서 스피리어스는 러스를 멍하니 노려보았다. 심지어 저 청년은, 승리하고 나서도 기뻐하긴 커녕 냉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실력뿐만이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착함까지 겸비하고 있다니?
물론 이것은 스피리어스의 착각이었다.
'아오, 또 실패했다, 팬텀 디바이드.'
러스는 사실 냉정한 게 아니라 침울해하고 있었다. 스피리어스는 기척과 실체를 분리하는 러스의 기술에 경탄해 마지않았지만, 사실 이건 어디까지나 공간을 뛰어넘는 팬텀 디바이드를 실패한 결과일 뿐이다.
'젠장, 다른 건 대충 다 하겠는데 이건 왜 이렇게 성공률이 낮아?'
뭐, 남들이 보기엔 스피리어스 '따위'는 이겨 봐야 기쁠 것도 없다는 오만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보이고 있다.
"크으윽!"
굴욕적인 신음을 흘리며 스피리어스는 재빨리 땅을 박차고 진영으로 도망쳤다. 러스는 그런 스피리어스 따위 벨 가치도 없다는 듯 굳은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은 기술 실패에 따른 실망에 잠깐 후속타를 날릴 타이밍을 놓친 것이지만, 보는 사람이야 속사정을 알 리가 있나? 비참하게 도망치는 스피리어스와 당당한 러스의 모습은 실로 좋은 대조였다. 유벨 왕자군이 일제히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우와아아!"
"사이러스! 사이러스! 사이러스!"
"사이러스 경 만세!"
대륙 전역에 오러 유저, 사이러스의 명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 ☆ ☆
카르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피리어스 경의 비참한 패배에 자신의 병사들이 동요하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여기서 더 사기를 떨어트렸다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할 판이었다.
그가 수신호를 보내며 외쳤다.
"전군! 진격하라!"
기사 한 명이 검을 뽑아 들고 용맹하게 소리쳤다.
"진정한 국왕을 위하여! 가자, 브로젠 기사단이여!"
"오오오오!"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기사단 전원이 용맹한 외침을 터트리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유벨 왕자도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전원, 돌격하라!"
러스가 블레이드 오러로 하늘을 찌르며 고함쳤다.
"가자! 용맹한 전사들이여!"
최전방에 선 푸른 곰 부족의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포효를 터트리며 다이어울프를 몰고 돌진했다.
"크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양군의 기사들이 일제히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강철의 물결이 양방향에서 밀려와 대평야 한복판에서 유혈 가득한 파도를 일으킨다. 선두에 선 오크 기병들이 투지의 노래를 부르며 검을 내던졌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전사의 영혼이 우리를 가호하리라!"
오백의 브로젠 기사단과 백의 푸른 곰 부족 오크 전사들. 그 장엄하기까지 한 승부는 오크 전사들의 압승이었다.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시키며 오크 전사들은 가차 없이 기사들을 베고 달리며 전장을 유린해 갔다.
"크아아악!"
"이 괴물들!"
브로젠 기사단의 비명이 전장 여기저기서 울려 왔다.
페르난도 기사단과 함께 크로방스 왕국의 쌍벽을 이룬다는 브로젠 기사단이다. 즉, 페르난도 기사단이랑 별 다를 것 없다는 소리다. 기량이건, 오크들에 대한 정보건 별 차이가 없으니 이들의 운명도 시나이 요새를 지키던 페르난도 기사단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 뒤를 따라 유벨 왕자군의 인간 기사들도 용기백배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전황을 살피던 카르사스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적들의 수는 여전히 적다! 대열을 갖추어 저들을 낙마시켜라!"
기사들의 돌격에 대비해 카르사스군은 보병들이 대열을 짜 기사들의 말을 노리는 전법도 충실히 훈련해 왔다. 물론 성공률은 1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기사들의 돌진에 무대책으로 병사들의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과연 훈련이 잘 된 카르사스군답게 빠르게 대열을 갖추며 연습한 대로 빠르게 대열을 갖춘다.
그때, 문득 카르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응? 낙마?'
분명 그의 병사들은 말을 탄 기사들을 상대하는 전법을 익숙하게 익혔다. 그런데 저놈들이 탄 것이 말이던가?
"아우우우!"
칼켄이 탄 다이어울프가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병사들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뒤를 이어 스탈라의 다이어울프가 앞발로 걸리적거리는 병사들을 후려갈긴다. 충실히 대열을 짠 병사들이지만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배운 것은 '말'을 탄 상대를 떨구는 법이지 '늑대'를 탄 상대가 아닌 것이다!
"아아악!"
"사람 살려!"
게다가 말과 늑대는 일단 비주얼부터가 공포의 레벨이 다르다. 흥분한 말과 이빨을 드러낸 늑대 중 뭐가 더 무섭겠는가? 게다가 말과 달리 늑대는 익숙하지도 않다.
대열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이어 화살들이 죽음의 비가 되어 카르사스군을 강타하고, 보병대가 기세등등하게 뒤를 쫓는다.
"죽여!"
"몽땅 죽여 버려!"
일만이나 되는 카르사스군이 삼천의 유벨 왕자군에 형편없이 밀린다. 그 선두에는 눈부신 빛의 오러가 여섯 줄기나 솟구쳐 있었다. 하나만 솟구쳐도 절망적인데 여섯이나 되니 사기가 안 떨어지려야 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카르사스가 이를 갈았다.
"젠장! 정말 그 소문은 사실이었단 말인가!"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를 앞세운 유벨 왕자군은 압도적으로 전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카르사스가 부관에게 악을 썼다.
"도대체 세이드 경은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카르사스는 전군을 진격시킴과 동시에 이천의 병력을 따로 빼 적진의 좌측을 노리는 별동대를 조직했다. 아무리 저들의 돌진력이 강하다 해도 수적으로 열세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쪽이 병력 수는 압도적으로 많으니 별동대로 하여금 본진을 바로 덮치게 하여 유벨 왕자의 목을 베면 그들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대군인 카르사스군이 취할 정석적인 전법이었다. 어떤 전략가에게 물어도, 카르사스가 훌륭하게 병사들을 운용했다고 칭찬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통하지 않고 있었다.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것이... 세이드 경이 적들의 본진을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저들의 본진은 고작해야 이백 명 정도의 병력이 아닌가!"
카르사스는 악몽을 꾸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게도 세이드 경이 이끄는 이천의 별동대가 고작 이백 명이 지키는 유벨 왕자의 본진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 이백 명 중 절반가량이 바로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전사들이었던 탓이다.
"으허허! 우리가 말이야!"
"다리가 짧아서 여기저기 들쑤시지는 못하는데!"
"뿌리박고 버티는 것은 전공이라고!"
드워프 전사들은 기동력은 없지만 한 자리에서 대열을 짜면 그야말로 움직이는 요새라 할 정도의 방어력을 자랑한다. 기마와 보병의 물결에도 그들은 전혀 밀리지 않고 본진을 사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 파괴의 연속이었다. 월등한 오크 전사들의 기동력과 압도적인 드워프 전사들의 방어력, 거기에 광범위한 공격력을 지닌 엘프 정령사들마저 있다.
"작열하는 나의 친우여!"
엘프들이 고함을 지를 때마다 불의 거인, 이그나시스가 웅장한 거체를 드러내며 병사들을 불사른다. 비명과 함께 탈영병들이 속출했다. 카르사스군 측의 마법사들이 애써 그 정령들을 상대로 마법을 쓰려 했지만....
"커억!"
"또 실패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동료 마법사를 보며 마법병단의 단장, 마법사 고르트는 비명을 질렀다. 아까부터 마법을 쓰려고만 하면 뭔가 이상한 기류가 마나 흐름에 끼어들어 마법을 봉쇄하고 있었다. 계속 마법을 방해당해 전신의 마나 회로가 삐걱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마법사답게 고르트는 의문부터 가졌다.
'도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가 훼방 놓고 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벌써 스무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제대로 마법을 시전하지 못하고 계속 차단당하고 있었다. 이게 가능하려면 적측에, 최소 8서클이나 9서클 급의 엄청난 대마법사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정도 대마법사라면....
"아니, 이럴 재주가 있으면 그냥 고위 마법을 날리면 되지 왜 이런 골치 아픈 짓을 하는 거야!"
'그게, 재주는 되는데 아직 마력이 안 되어서 말이야.'
또 하나의 마법 주문을 차단시킨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측 마법사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했다.
그는 아까부터 마법사들의 마나 흐름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이 뭔가를 시도하면 앞서서 흐름을 방해해 마법을 파훼하고 있었다. 일단 발동된 마법은 막을 수 없지만, 발동 전이라면 미리 끊어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가 무슨 마법을 쓸지 미리 예측해야 가능한 곡예였다. 고위 서클이 필요하다기보다는 통찰력과 마나 운용법, 마력 감지 능력이 월등해야 가능한 것이어서 마력은 낮고 경지만 높은 지금의 레펜하르트에게 딱 맞는 수법이었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마법사를 견제하는 동안 유벨 왕자군의 마법사들은 마음껏 전장에 화염구며 뇌격 등을 날리고 있었다. 다들 신 나게 마법을 쓰면서도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레펜하르트의 존재에 경외 어린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시리스는 잘 하고 있나?"
또다시 하나의 마법을 차단하며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전장 저편을 바라보았다. 마법 차단하느라 바빠 원견의 주문을 시전할 여유는 없지만, 애초에 오러 유저다 보니 기본 시력도 장난이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니 저만치 엘프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날뛰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친구 사라나, 우정의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요...."
시리스는 이번에도 바람의 정령, 사라나를 불러 놓고 마음껏 '밟아 가며' 전장의 허공 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역시 정령들은 붕어 대가리가 맞았는지 밟힐 때마다 인상 구기면서도 부르면 또 착실히 나와 주는 사라나였다.
그녀가 날아오를 때마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진다. 시미터가 휘둘러질 때마다 절규를 흘리며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마녀다!"
"엘프 마녀가 사람 잡는다!"
다른 엘프들에 비해 월등한 무위를 지닌 그녀의 모습은 전장 가운데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시리스의 이름 또한 꽤나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릴 것 같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고, 비명과 신음이 아우성친다. 참혹한 전장과 참혹한 아군의 모습을 보며 카르사스는 결국 깃발을 들었다.
"후퇴 명령을 내려라...."
절망에 찬 와중에도, 카르사스는 냉정하게 병사를 지휘해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지휘여서 유벨 왕자군도 감히 뒤쫓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아무리 대승이었다 해도 수적으로 열세였으니 괜히 추격전을 벌여 병력이 나뉘기라도 하면 각개격파당할 수 있는 것이다.
총사령관인 유벨이 검을 들고 고함을 질렀다.
"환호를 질러라! 우리의 승리다!"
피에 물든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악을 질러 댔다. 통쾌한 외침이 평야를 가득 울렸다.
"우오오오오!"
"와아아아아!"
훗날, 크로방스 왕국의 사가史家들이 레단트 회전이라 명명한 이 전쟁은 수많은 카르사스군의 시체를 낳은 채 유벨 왕자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2
카르사스군은 삼천 정도의 병력만을 남긴 채 왕도 크로틴으로 후퇴했다. 대승을 거둔 유벨 왕자군은 바로 왕도로 진군하지 않고 레단트 평야 인근에 위치한 핸드릭 백작의 성으로 향했다.
레단트 평야의 곡창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핸드릭 백작은 유벨 왕자 편을 든 탓에 그동안 영지를 빼앗기고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자신의 영지를 되찾은 핸드릭 백작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무수한 병사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본 영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안 그래도 대흉년으로 인해 흉흉해질 대로 흉흉해진 인심, 얼마나 가혹한 수탈이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곡량을 지닌 유벨 왕자군은 약탈은커녕 오히려 굶주리고 있던 영민에게 곡물을 풀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딱히 유벨 왕자 측 귀족들이 영민들의 후생복지에 관심이 지대해서라기보다는, 워낙 상인 출신들이 많다 보니 철저히 앞뒤 재 보고 한 짓이었다. 어차피 군량은 충분하니 지금은 베풀어서 민심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이다.
덕분에 핸드릭 영지 곳곳에서는 유벨 왕자의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병사들도 영민들도 모두 유벨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먹고 마셨다.
"유벨 왕자님 만세!"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여!"
핸드릭 백작의 성, 그 발코니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유벨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르사스를 환호하던 이들이 잘도 태도를 바꾸는군요. 외조부님."
까놓고 말해서, 카르사스와 유벨의 인기도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카르사스의 압승이었다. 그것이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곁에 있던 페오닌 백작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진정한 국왕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을 밝혀 길을 여는 법이지요. 전하의 국왕으로서의 휘광이 미혹에 홀린 저들의 눈을 뜨게 했으니, 어찌 전하의 성명을 연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입에 기름칠을 한듯 온갖 미사여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유벨이 조소를 흘렸다.
"제가 무슨 화톳불입니까? 휘광은 무슨...."
일반 백성들에겐 그저 밥 제때 먹여 줄 수 있는 왕이 최고의 왕인 법이다. 피니아와 사랑에 빠진 덕에 난봉꾼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지만, 유벨도 사실 결코 어리석은 왕자는 아니었다. 눈앞의 환호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냉철함은 지니고 있다.
유벨의 비아냥에 페오닌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진실이야 전하도 알고 저도 알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귀족다운 어법이라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겠지요."
어깨를 으쓱거린 뒤 유벨이 발코니를 떠나 거실로 돌아왔다. 페오닌 백작이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카르사스 공자는 왕도 크로틴에 틀어박힌 채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웨트 백작과 테르젠 남작이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달려왔다 하니 곧 알현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웨트 백작과 테르젠 남작은 이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던 귀족들이었다. 오러 능력자인 하츠버겐 경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는 그들은 그것을 믿고 여태껏 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속사정을 뻔히 짐작한 유벨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다들 너구리군요."
현재 유벨 측에는 저런 식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중립 귀족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승부를 관망할 뿐이었지만, 유벨 왕자군에로 확실히 승기가 기울자 조금이라도 이권을 챙기기 위해 달려드는 것이다.
"그저 귀족적일 뿐이지요."
페오닌 백작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카르사스가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을 때는 잠자코 있던 중립 귀족들이 지금 와서 유벨에게 손을 거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 중립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기고 있는 카르사스 편을 들어 봤자 별로 이득이 없었다.
유벨 왕자군의 귀족들은 대부분 상인, 많은 부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인의 부일 뿐이다. 각국과의 연계 상단이며 매매 시스템, 상업권 등 한마디로 상인이 아니면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유동적인 재산이다. 영지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는 소리다.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가 있는 이상 그들은 아무리 카르사스 밑에서 공을 세워도 정치에 참여할 정도로 엄청난 보상은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영지로 보상을 받자니 유벨 왕자군이 패해 봐야 나오는 영지가 빤한 것이다. 저 양대 귀족가 휘하의 귀족들에게 다 떼어 주고 나면 그들에게까지 돌아올 것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중립을 선언하고 가문의 힘을 보전하는 것이 나았다.
반면 카르사스를 지지하는 양대 귀족가,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는 왕국 내에서도 가장 넓은 영지와 세력을 지닌 전통의 강호였다. 그 휘하 귀족들의 영지도 광대하다. 자고로 재산 중 제일은 부동산이라! 유벨이 승리한다면 상당한 넓이의 영지를 하사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하츠버겐 경이나 그란디아드 경, 제클릭 경 같은 오러 유저들은 여전히 중립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전하."
내전에 참전하지 않은 크로방스 왕국의 세 오러 유저들의 이름을 뇌까리며 페오닌 백작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문득 그가 유벨을 보며 물었다.
"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유벨이 단호하게 외할아버지의 말을 자르며 반문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요?"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페오닌 백작이 수염을 꿈틀거렸다.
"그, 그건 그렇군요."
한때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참전해 주길 바라며 열심히 매달린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유벨 왕자의 외척인 페오닌 백작 자신이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그만큼 오러 유저의 존재가 절실했던 페오닌 백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오러 유저는 여기에도 썩어난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다. 오러 능력자랍시고 잘난 척하던 작자들에게 굳이 손 벌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카르사스 쪽에서 손을 내밀 가능성은 있지요."
"괜찮을 겁니다. 세 분 모두 실리 따져서 중립 선언할 성품이 못 되거든요."
하츠버겐 등 세 오러 유저는 내전이 발발하자 병을 핑계로 은거해 버렸다. 오러 유저가 병에 걸린다는 것은 농담도 못되는 이야기다. 당연히 중립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왕궁에서 그들을 만나 본 유벨은 저들의 성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 실리 따져서 중립을 선언한 것이랑은 달라요. 그 양반들은 진짜, 진지하게 저나 카르사스 어느 쪽에도 검을 들이댈 수가 없어서 저런 것일걸요? 국왕과 국가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나를 선택하면 국가를 배신하는 게 되고 카르사스를 선택하면 국왕을 배신하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런 만큼 이제 와서 카르사스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 그들의 성품상 뜻을 굳혔다면 벌써 유벨이나 카르사스 둘 중 하나에게 몸을 의탁했을 테니까.
페오닌 백작이 유벨의 차분한 말에 펄쩍 뛰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부분입니다! 어찌 유벨 왕자님을 선택하는 것이 국가를 배신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카르사스가 잘났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페오닌 백작은 이 눈앞의 외손자 역시 못지않은 왕의 그릇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지금도 속세의 풍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상황을 관조하는 침착함과 냉철함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저런 젊은 나이에 자신의 이야기까지도 담담히 받아들여 현실을 볼 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정말이지 그 기벽만 없었더라면...."
페오닌 백작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금도 거실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벨을 지키고 있을 드워프 처녀를 떠올린 탓이었다.
'저 천한 것만 없었더라도 그런 소문도 퍼지지 않았을 테고, 그럼 처음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았을 터인데!'
불만 가득한 외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유벨은 뺨을 긁었다.
'사실, 나도 피니아가 있어서 그나마 이렇게 된 거지....'
어렸을 때부터 왕자로 자라 온 유벨이었다. 텔리온이라는 확고한 왕위 계승자가 있기에 제2왕자로서 의무는 적고 권력은 많은 위치였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에게 향한 아부가 모두 진실일 거라 착각하는 어리석은 왕자가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걸 막은 것이 피니아였다. 그녀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였고, 그렇기에 유벨에게 신하들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 줄 수 있었다. 드워프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인간들 사이에서는 잊힌 이야기다. 다들 짐작도 못 하고 피니아 앞에서 마음껏 거짓 가득한 아부를 해 댔다. 피니아는 그때마다 진실과 거짓을 가려 충신과 간신을 구별해 주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유벨이 이토록 명철하게 현실을 바라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뭐, 저도 제가 그리 못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유벨은 슬쩍 말미를 흐리며 속으로 웃었다.
'그래도 카르사스가 더 잘나긴 했지?'
유벨 자신은 피니아 덕분에 권력을 지닌 왕자 주제에 이 정도까지 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사스는 그런 것도 없이 아부꾼과 충신을 구별했고, 성실한 수련으로 놀라운 무용을 지닌 기사가 되었으며, 전략과 행정면에서도 노력을 거듭해 경지에 올랐다.
'나도 그래서 사실은 카르사스가 왕위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유벨은 알고 있었다. 카르사스가 왕위에 어울리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인물인 만큼 그가 국왕이 되면 결코 자신을 살려 둘 리가 없다고.
단순히 권력욕 때문이 아니다. 카르사스 자신이 국왕으로서의 혈통에 흠집이 있는 만큼 유벨의 존재 자체가 계속 나라를 혼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피를 나눈 사촌으로서 슬퍼하면서도, 국왕으로서 국가의 미래와 안녕을 위해 유벨 왕자의 목을 가차 없이 칠 사람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는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진정한 국왕의 자질을 가진 자였으니까!
'어쩌겠어? 팔자가 이렇게 되었으니 죽기 싫으면 국왕이 되는 수밖에.'
카르사스가 진정 크로방스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왕위에 오르려 했다면, 유벨은 그저 제 한 목숨 살기 위해 국왕이 되어야 했다. 왕국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실로 미안한 일이다.
창밖을 내다보며 유벨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이 되어야 한다. 진정 백성들을 위하는 왕이."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테니까.
☆ ☆ ☆
핸드릭 백작성의 뒤뜰.
인적이 없어 한가한 그 공터에서 한 소년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서른두우우울...! 서른세에에에엣!"
고작 팔굽혀펴기 하는 주제에 백만 대군을 상대하는 비장한 표정을 연출하는 붉은 머리의 소년, 바로 이번 전투로 인해 유벨 왕자군 사이에서 '어린 성자'라는 불리며 명성을 떨친 실란이었다.
고작해야 10대 중반의, 게다가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이 창칼도 두려워하지 않고 참혹한 상처조차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치유술을 펼치는 그 모습은 적과 아군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다른 성직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 엄청난 신성력이라니? 실란 덕분에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병사며 기사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다들 생명의 은인인 실란을 경외하며 그와 필라넨스 여신을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었다.
물론 실란은 누가 뭐라고 떠들건 관심 없이, 오늘도 열심히 퍼스널 트레이너(?) 레펜하르트의 지도 아래 근육 키우기에 열중할 뿐이었다.
"서른네에에에엑! 서른다다다다다...!"
성직자가 환자 치료한 것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니 딱히 자랑스러울 것도 없다. 그보다는 남자다운 몸이 되어 미녀들 앞에서 어깨 떡 벌리고 가슴을 펴는 것이 더 좋아!
이것이 실란의 사고방식이었다. 참으로 성자인지 속물인지 애매한 인품이라 하겠다.
"껙! 못 하겠다...."
풀썩!
결국 35회째의 팔굽혀펴기를 실패한 실란이 풀썩 바닥에 엎어진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좋아, 일단 여기까지. 근육을 풀고 좀 쉰 다음 스쿼트로 가자."
뻗은 손에서 황금빛 오러가 안개처럼 흘러나와 쓰러진 실란의 전신을 감쌌다. 전신 근육을 풀고 피로를 회복시키는 짐 언브레이커블 특유의 용법이었다. 좀 살만해진 실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두 다리를 벌리며 자세를 잡았다.
"좋아요, 스쿼트라 이거죠."
스쿼트, 하체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으로 쉽게 말해 앉았다 일어나기다. 후들대면서도 바로 다음 운동으로 들어가려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일류 전사의 근성과도 맞먹어 보인다. 레펜하르트가 얼른 실란을 만류했다.
"야야, 일단 쉬랬지? 오버 워크는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아, 그렇죠. 쩝."
전신이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을 텐데도, 실란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뭐랄까, 이쯤 되면 정신력으로 육체를 움직이는 경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쩌다가 이런 육체로 태어났는지 서글플 지경이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문득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시리스는 저기서 뭐하고 있대요?"
저만치 떨어진 공터의 한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엘프 소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것은 반투명한 형상의 한 소녀.
레펜하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음... 친목 활동?"
시리스는 열심히 애원하고 있었다.
"미안해, 사라나, 응? 화 풀어."
그리고 그 앞에서 반투명한 육체를 지닌 소녀,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한껏 뿌루퉁한 얼굴로 연신 콧방귀를 뀐다.
"...흥흥!"
원래 시리스는 실란처럼 이 공터에 모여서 정령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단하임 일족이 아직 불의 정령만을 능숙히 다루는 것과는 달리 그녀는 벌써 바람의 정령 사라나, 불의 정령 이그나시스에 물의 정령 님피아까지 7대 정령 중 셋을 부르는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역시 마궁 니힐렌의 계약자였던 점이 컸던 것이다. 물론 수준 자체는 역시 오랜 세월을 보낸 다른 엘프들만 못해, 이그나시스가 고작 사람 크기이긴 했지만.
그래서 이그나시스와 님피아를 소환해 연습을 한 뒤 바람의 정령 사라나를 불렀는데, 역시 최근 너무 밟고 다녔는지 사라나가 시리스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정령이니만큼 붕어보다는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목숨이 걸린 전투여서 어쩔 수 없었어. 우린 친구잖아, 응? 화 풀 거지?"
"...흥흥흥!"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열심히 달래 보지만 사라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결국 흐릿해지며 사라나가 관용구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쳇...."
엄지를 깨물며 인상을 쓰는 시리스의 등 뒤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봐, 내가 삐칠 거랬지?"
의기양양해 보이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눈을 흘긴 뒤, 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한 이틀쯤 뒤에 다시 부르면 다 잊어버리겠죠. 붕어보다는 낫지만 그래 봤자 정령들 기억력이 거기서 거기지."
"...너, 정말 정령이랑 친구이긴 한 거냐?"
"호호호, 진정한 우정은 상대의 장단점을 모두 받아들이는 거랍니다."
생긋 웃는 시리스를 보니 묘하게 오한이 든다. 레펜하르트는 살짝 떨었다.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어째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 사실 전생의 성격은 죄다 내숭이었단 말인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시리스가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문득 그녀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카르사스 공자란 사람, 보통이 아니었어요. 기사로서,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도."
"그렇겠지."
원래는 크로방스 왕국의 역사에 남을 현군이 될 자였으니까.
"사실은 카르사스 공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크로방스 국민들에게는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뭐든지 다 잘하는 놈이 꼭 좋은 왕이 되라는 법은 없어."
왕은 무엇이든 할 줄 아는 자가 아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를 훌륭히 다루는 것이 바로 훌륭한 왕의 자격이다.
무엇을 하건, 그에 걸맞은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제왕학의 본질인 것이다. 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전문가를 고르는 안목 또한 높을 테니 역시 훌륭한 국왕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요소 중 하나이지 가장 중요한 자격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바보나 딴마음 품은 놈만 안 골라도 어지간해서는 좋은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 세상에 좋은 국왕이 드문 것이고 간신들이 날뛰는 것이지만....
"유벨 왕자도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거야."
피니아라는 고성능 거짓말 탐지기를 가진 유벨은, 적어도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안목만큼은 카르사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거짓이라면 확고하게 내칠 수 있을 만큼 공정한 성품 역시 지니고 있다.
"세상에는 머리로 알면서도, 눈앞의 칭찬에 감정이 흔들려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군주가 얼마든지 있지. 저 왕자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어."
이해했다는 듯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벨 왕자의 자질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시리스가 갑자기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일인가요?"
"응?"
"예전에 레펜하르트 님은 말씀하셨죠. 원래는 카르사스 공자가 왕위에 올라야 했었다고."
차분한, 그러나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시리스가 추궁하듯 질문을 이었다.
"미래의 일, 보통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죠. 하지만 정말 모르나요? 당신이?"
레펜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사실 카르사스가 국왕이 되고 나서 크로방스 왕국은 상당한 태평성대를 누렸지."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태평성대를 박살 낸 게 나긴 하지만.'
확실히, 안타레스 제국의 전쟁의 불길이 전 대륙을 뒤덮기 전까지의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강한 국가였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운명이 정한 진정한 국왕이군요."
시리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대를 거슬러 온 누군가가 그의 운명을 희롱하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말이야말로 이 전쟁에 참가하며 계속 가슴 한구석을 찔러 오던 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분명 이종족을 위해 유벨 왕자를 선택했지만, 그로 인해 정당한 인간의 국왕과 한 국가의 운명을 희롱한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카르사스가 폭군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편한 마음으로 일을 진행했을 텐데....'
"그를 죽일 건가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레펜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시리스의 말이 옳았다.
인간의 운명을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목숨까지 취해야 하는가?
자신의 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물론 그는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각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카르사스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모르겠다. 확실히 그는 이런 내 손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지."
레펜하르트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리스가 차분한 얼굴로 입술을 닫고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마법사니임!"
공터 저편에서 병사 하나가 뛰어오고 있었다. 볼일이 없다면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 했으니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전원 경계 어린 표정을 취했다. 하지만 정작 병사의 얼굴을 보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듯했다. 그냥 당혹스럽고 놀랍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렵다거나 하는 그런 표정은 아니다.
"무슨 일이오?"
다가온 병사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찾아온 여자가 있습니다요."
"엥? 나를?"
"아니, 정확히는 어린 성자님을 찾아온 분입니다만...."
병사가 갑자기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레펜하르트의 거구를 올려다보며 뺨을 긁었다.
"아무리 봐도 마법사님을 찾아온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게?"
3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손님이 와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연한 흑발에 검은 눈을 지닌 미녀였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여인이 레펜하르트를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펜하르트 공. 세이어 님을 섬기는 한 자루 검, 팰러딘 크리스틴입니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는 병사가 왜 그리 애매한 말을 했는지 바로 이해해 버렸다.
'허? 테스론에게 여동생이라도 있었나?'
물론 처음 뵙겠다는 저 인사말을 볼 때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눈앞의 이 미녀는 무려 레펜하르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슬슬 신장이 2미터를 넘을락 말락 하다 보니 요즘 고민이 많은 그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에서 배운 일명 '신장 촉진 호흡법'은 조금도 안 하고 있거늘, 그럼에도 이 무자비한 테스론의 육체는 여전히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뭔 놈의 키가 20대 중반이 되도록 멈추질 않고 자란단 말이냐!'
이러다가 정말 전생의 테스론처럼 230센티미터의 무식한 괴물이 될까 봐 요즘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이 요염한 미녀는 그런 레펜하르트와 거의 비슷한 거구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당황하면서도 애써 레펜하르트는 표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상대를 살폈다. 성기사답지 않게 여행객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틴의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주신 세이어의 성기사만이 쓰는 검이었다. 자루에 두 개의 칼날이 구름과 뇌격을 동반한 문양이 그려져 있으니 틀림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주신 세이어를 섬기는 성기사께서 어쩐 일로 저를?"
크리스틴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제가 찾은 이는 필라넨스의 신관, 실란 필 마르시스입니다. 왜 그런 오해를 하시는 건지는 잘 알겠지만요."
"무슨 일로 실란을 찾아온 것인지 물어도 될는지?"
막 크리스틴이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뒤늦게 시리스와 함께 실란이 방으로 들어섰다.
"누가 절 찾았다던데...."
크리스틴과 실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실란이 창백해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크리스틴!"
"아, 실란!"
크리스틴이 실란을 보더니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피웠다. 눈부신 미녀가 웃음꽃을 피우니 그것만으로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뭐, 사이즈가 사이즈다 보니 좀 지나치게 밝아진 것도 같다.
크리스틴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사랑에 빠진 목소리로 실란에게 다가갔다.
"내 사랑, 언제까지 운명을 피할 건가요?"
사자 우리에 갇힌 토끼 같은 표정으로 실란이 사정없이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왜 당신의 사랑이야?"
"그야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기 때문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운명이냐고!"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멍한 표정으로 저 두 남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울의 손톱 앞에서도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악마의 칼날 앞에서도 담대하기 그지없던 실란이 지금 극도의 공포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으이이익!"
결국 계속 뒤로 물러서던 실란이 후다닥 방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눈을 빛내며 막 쫓아가려는 크리스틴을 레펜하르트가 가로막았다. 도저히 이 질문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실란과 무슨 관계입니까?"
자신을 가로막은 레펜하르트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며, 크리스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혼약을 허락받은 사이입니다."
"에에에에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