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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인간성의 승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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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 던전이라고?"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

놈들을 쓱 돌아봤다.

무기를 쥔 녀석들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뭐, 한꺼번에 덤벼도 다 죽이는 데무리는 없을 것 같다. 자세만 보고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굳이 숨길 건 없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블린 던전."

"그건. 왜 묻는 거요?"

칼자국의 질문이다.

고블린 던전의 위치를 물었을 뿐,

별로 수상한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놈들은 지나치게 민감해 보인다. 던전과 관련이 있는 놈인 건가? 평범한 산적인 거 같은데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니까 물어보겠지."

"지금. 우리랑 장난하시오?"

"왜, 대답하기 싫은가?"

나는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산적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저분하고 음침한 인상이다. 검은 머리칼이 구불구불하다. 한 가닥씩 닿아 어깨까지 내려가 있다. 볼은 움푹 들어갔다. 턱은 넓고 각져서단단해 보인다.

말하자면 인상파.

얼굴로만 보자면 망치잡이 벤슨 프레쳐 놈이나, 유블람의 대머리 경비대장보다도 강해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대, 대답하기 싫냐니. 왜 묻는지부터 말해 달라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벌써 겁먹었군.'

칼자국의 공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는 방금 전, 불타는 구덩이에서 훌쩍 뛰쳐나왔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고, 풀플레이트 메일로 무장했다.

간단히 생각해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놈은 정체불명의 기사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은 거다.

놈의 무기를 흘끗 바라봤다.

흉흉한 가시가 달린 쇠몽둥이다.

피가 묻어 있다.

잡은 자세는 무척이나 형편없다.

잔혹해 보이는 놈이지만, 한눈에 보아도 몹시 약하다.

약자에게만 강해 온 기운이 한 번에 느껴진다.

놈들과 나의 거리는 멀지 않다. 서너 발자국만 디디면 된다. 다섯 명을 쉽게 베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곧장 다 죽일 생각은 없다.

그건 좀 곤란하다. 죽여도 길은 물어본 다음에 죽이는 편이 좋다.

"별건 아니고."

- 툭툭!

건틀랫을 털어 냈다. 새까만 재가바닥으로 떨어진다.

지도가 타고 남은 재다. 건틀렛에얇게 눌러붙어 있던 녀석들이다.

찌꺼기처럼 남았던 마지막 재가 제법 깔끔하게 사라졌다.

"거기 가야 하거든. 해야 할 일이좀 있어서. 아쉽게도 지도는 다 타버렸고."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해, 해야 할 일이 뭔데? 확실하게 말하라니까?"

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놈들이 잡은 무기에 힘이 들어간다. 싸움이라도 각오하는 것 같다.

'이것들은 던전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평범한 산적들로 보였다.

공격하거나 도망가는 건 납득하기 쉽다. 하지만 꼬치꼬치 던전행의 이유를 캐묻는 건 부자연스럽다.

뭐라고 할까.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 볼까?

"그거야 길드의.

그 순간이었다.

"어, 어어어!"

오른편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흘끗 돌아봤다. 도끼를 든 뚱뚱한 놈이 내는 소리다.

"저, 저건!"

뚱뚱한 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더듬거린다.

'왜 저러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뭔데?"

다른 놈들이 도끼를 돌아본다. 도끼는 더듬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 그 붉은색이. 전에 본 거랑 비슷한데. 자세히 좀 봅시다."

'붉은색이 뭐 어쨌다고?' 놈들의 눈이 내 허리춤으로 향한다. 나도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새까맣게 타 버린 행낭이 있다.

그리고.

형상도 거의 안 남은 잔해 바깥으로, 은은한 붉은빛이 비친다.

얼굴에 칼자국 난 놈이 화들짝 놀라서 외친다. 무언가를 뒤늦게 떠올리는 태도다.

"앗! 혹시 회에서 오셨습니까?"

회?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회에서 왔다고?"

"저거 아마.

"그러고 보니 방금 길드라고 말씀을. 우리 회를 말씀하신 게.

남자들은 무기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했다. 아직 긴장감은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반쯤은 허리를 굽실굽실 거리는 자세를 취한다.

칼자국이 황급히 묻는다.

"호, 혹시 그거, 정식 회원 신분증 아니십니까? 이번에 오시는. 감독관님이셨던 겁니까?"

'감독관? 신분증?' - 덥석.

나는 행낭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카드를 집어 들었다.

벤슨 프레쳐의 정밀한 초상이 그려져 있다. 신분증 아래에는 [네크론신사회] 라고 적혀 있었다.

네크론 신사회의 신분증이다.

'아, 이게 여기 있었지.'

돈은 대부분 레나에게 줬지만, 신분증은 내가 소지하고 있었다.

놈들이 말하는 감독관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신분증을 보고 나에게 굽실거리는 것은 알겠다.

회원증이라는 건, 이 신분증을 말하는 거겠지.

'네크론 신사회와 연관이 있는 놈들인가.'

일단 그냥 오해하게 놔둬야겠다.

놈들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떡, 하고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한 명 한 명에게 붉게 빛나는 신분증을 보여 준다.

"그래, 신분증이다."

날 둘러싼 다섯 남자.

그들 모두,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천천히 신분증을 확인했다.

"어휴.

직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이 약간 남아 있었지만, 신분증을 보여 주자분위기가 아예 확 풀려 버렸다.

놈들은 연달아 허리를 굽실 굽실거렸다. 칼자국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난다. 그가 대표로 말했다.

"감독관님께서 오신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요."

옆의 도끼가 끼어든다.

"오늘 즈음이라고 해서 길을 청소하러 나왔습니다만, 이렇게 딱! 하고 마주칠 줄은 몰랐습죠. 헤헤, 저녁쯤 오신다더니 예정보다 조금 일찍 오셨습니다요?"

"뭐, 어쩌다 보니."

나는 투구 안에서 침묵했다.

일단은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것같다. 아무 말이나 하다가는 정체가 드러날 확률이 높다. 당연히 알 만한 걸 물어보면 놈들도 의심을 시작할 것이다. 기왕 오해받은 김에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할 말은.

"던전으로 안내해라."

이거 하나다.

뚱뚱한 놈이 고개를 조아린다.

"예, 물론입죠! 암, 명령대로 하겠습니다요! 저희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던전을 관리하는지 보시면 놀랄 겁니다요!"

놈이 굽신거리며 슬쩍 저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던전을. 관리한다고?'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그렇다면.

이놈들이다. 이 남자들이 이번 의뢰의 목적이다. 제대로 만났다.

"저.

뾰족뾰족한 가시 검을 가진 성마른남자가,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한마디 끼어들었다.

"저, 신분증이랑 얼굴 확인을.

- 픽!

"야! 야, 인마!"

아까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칼자국이, 가시검의 뒤통수를 강하게 쳤다.

"아아! 형님, 뭐요?"

"뭐긴, 이 자식아. 이분 지금 화상 입으신 거 안 보여?! 투구랑 갑옷이랑 녹아 붙어 있잖어!"

순간 정체가 들통 나나 했다.

- 투둑.

나는 목 주변을 손으로 만져 봤다.

'그런가?'

연결 부위가 살짝 녹기는 했다. 하지만 투구를 벗으려면 벗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칼자국은 나를 배려해 주는 건가.

안 벗어도 된다는데 굳이 벗을 필요는 없다. 그러면 여기서 길잡이 다섯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관님!"

다섯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불구덩이에서도 뛰쳐나오시다니,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

피와 살점이 튄 무기를 들고 굽실거리는 놈들의 모습은 기괴한 데가 있었다.

'이 신분증이 이렇게 쓰이다니.'

망치잡이의 신분증이, 엉뚱한 곳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희 같은 예비 단원들은, 벤슨프레쳐 님 같은 분을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요."

한 놈이 내가 보여 준 신분증을 흘끗거리며 말한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다. 나는 슬슬 손에 든 신분증을 내렸다.

하지만 다 타 버린 행낭에 넣기도좀 어색하다. 내 멈칫하는 동작을보고, 뚱뚱한 도끼가 재빨리 작은 주머니를 대령한다.

"여, 여기 담으십시오!"

그리곤 알아서 주머니를 뒤집고,

손으로 먼지를 탈탈 털어 낸다.

"됐다."

거절한다. 신분증은 갑옷에 대충 꽂아 넣는다. 루비아가 샀던 갑옷은 곳곳에 수납공간이 있다.

'기능적이지.'

나는 놈들을 바라본다. 다행히 '회에서 오기로 한 자'의 이름은 놈들이 모르는 것 같다.

원래 오기로 한 놈은 어디쯤일까.

길이 겹칠지 모른다. 빨리 여기를 뜨는 게 좋겠다.

"프레쳐 님, 존경합니다!"

놈들이 심하게 굽실 굽실거린다.

단순한 정식 회원 따윌 대하는 태도는 아니다. 아무래도 감독관이라는 건, 놈들에게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존경합니다!"

상황을 정리해 본다.

이놈들은 네크론 신사회의 예비 단원이다.

내 의뢰의 목적인 고블린 던전을'관리'하고 있다.

나를 네크론 신사회에서 올 누군가로 착각했다.

"프레쳐 님, 한창 업무로 바쁘신 와중에 저희를 지도하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쁠 건 전혀 없지."

벤슨 프레쳐는 전혀 바쁘지 않다.

녀석의 인신매매 및 청부 살인 업무는 영구 폐업을 고했다.

내 손으로 무덤 속에 처넣은 지이제 일 년이 다 됐다. 한 놈이 신분증을 보며 말을 걸어온다.

"그나저나, 그냥 종이 하나처럼 보이는데 정말 대단합니다요. 단원의신분증이라는 거 말입니다."

"그을음 하나 안 묻질 않았습니까?

정말 소문처럼 회에 마법사가 있는 겁니까?"

"임마! 자연히 알게 될 텐데 뭘 묻고 있어!"

칼자국이 제지한다. 놈이 이 가운데 우두머리인 것 같다. 놈이 분위기를 정리하며, 앞장서서 걷는다.

≪ ㅇ"

적당히, 있어 보이게 침음을 홀리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

신분증은 불타지 않았다. 장시간의화염에서도 보호받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난다. 특수한 처리 가된 듯하다. 혹은, 놈들의 말대로 마법일지도 모른다.

'네크론 신사회에 마법사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앞에서 칼자국이 말을 걸어왔다.

"아까 그것들, 저희가 함부로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심기가 불편하신 거라면 사죄드립니다!"

나는 대충 손을 내저었다. 너무 침묵하는 것도 안 좋은가.

놈들이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게 만들면 안 된다. 나에 대해 궁금해 한다면 곤란하다. 말을 시키자.

"아. 그건 됐다. 고블린. 양식에 대해 보고해 봐라."

"예! 알겠습니다요."

칼자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고블린 던전을 어떻게 점거하고 있는지를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저희 예비 단원들은.

네크론 신사회의 예비 단원, 바깥은 놈들이 점령하고 있고, 주기적으로 안쪽으로 사냥을 간다.

종종 내부 부락에 최음탄을 터트린다. 고블린들이 강제로 흥분해 교미를 한다. 그렇게 고블린 숫자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별말을 하지 않았다. 별로 흥미 없는 태도를 취한다. 정체가 들통날까봐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다.

"수익은 한 달에 3세이론 정도입니다."

"3세이론?"

의외로 적은 금액에 의아했다.

그 정도라면, 내가 토너먼트에 나가서 받았던 금액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좀 적군."

솔직한 감상이었다.

"으, 그, 그게.

그러자 칼자국이 괜히 눈치를 보듯굽실거리며 말했다.

"고블린 혈석 구하는 놈들이라 고해 봐야, 별거 없는 잔챙이 놈들뿐이니까요."

"으음.

내가 책망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기색이다.

"그게. 돈 있는 놈들이야, 마법사에게 시약 제조를 부탁하지 누가 혈석 가루 따위를 마시겠습니까?"

"뭐, 글쎄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생각에 잠긴 척을 했다.

"헤헤. 가격을 올려 받기가 힘듭니다요. 감독관님께서 다리를 잘 놓아 주십쇼."

"헤햇, 헤헤햇."

웃음소리가 불쾌하다. 길은 점점 더 좁아졌다.

"거의 다 왔습니다요."

칼자국이 고개를 굽실거렸다.

곳곳에 목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 핏자국이 있었다.

붉은 피는 아니다. 초록색 피가 흙바닥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고블린.'

그들의 피다.

좀 더 걸어갔다. 널브러지고 쌓여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머리가 갈리고 심장이 조개져 있다. 혈석만 빼낸 채로 바깥에 버린 듯하다.

칼자국이 옆에서 조잘댄다.

"저것도 판매할 겁니다요. 시체 수거업자가 와서 가져가지요. 고블린이라는 게, 참 하나하나 알뜰하게 돈이 됩니다. 헤햇. 눈알도 연금술의 재료로.

그 때였다.

초록색 피를 홀리며, 죽어 있는 시체와 눈이 마주쳤다. 부릅뜨고 있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65화 인간성의 승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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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나무에 기대어 있다. 나무도 시체도 침울하게 시들었다.

"크군."

나는 지나가듯 중얼거린다.

인간 정도의 크기다. 다만, 다른 고블린보다 크다. 덩치도 키도 눈에될 정도.

턱뼈가 튀어나왔고, 상체 근육이 제법 발달해 있었다. 평범한 녀석은 아니다.

"예, 큰 놈입니다. 뛰쳐나오길래,

멀리서 제압했습니다. 헤헤햇.

"저 정도면. 전사 고블린인가."

전사 중에서도 베테랑일 터다.

고블린의 강약은 외모로 쉽게 알수 있다. 그들을 접한 경험은 많다.

가장 흔한 마물 중 하나다.

인간이 완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도, 특유의 번식력과 집착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역시 감독관님이십니다!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놈들이 옆에서 손을 비빈다.

고블린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시체는 온몸에 화살이 빼곡하다.

몸을 관통한 화살은 뒤쪽의 나무에 깊숙이 박혀 있다. 화살 탓에 쓰러지지 못한다.

부릅뜬 두 눈에 손을 뻗었다. 쓸어내리듯 스르르 감겨 주었다.

"감독관님, 어. 지금. 뭐. 하시- 픽!

질문을 하려는 놈의 뒤통수를 칼자국이 친다.

"쉿! 뭘 묻고 있어? 얌전히 안내해드려야지."

"아, 예.

남자들과 나는 길을 걸어갔다. 고블린 던전 앞이었다. 꽤 많은 인원이 사는 듯 던전 입구는 커다랬다.

"정지! 아, 오셨습니까? 그 사람은 누굽니까?"

입구 언덕 근처에, 몸을 가릴 방패를 세워 놓은 몇 명의 석궁수가 있었다.

"감독관님,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자국은입구를 지키는 궁수들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닥거렸다.

석궁 무리의 대장은 그럴듯한 사슬모자를 쓴 놈이었다. 그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끄덕거리며무언가 수긍했다.

무리에 돌아온 칼자국은, 함께 온네 명을 던전 밖에 대기시켰다.

"너희들은 이곳에 머물러라. 나 혼자 감독관님을 던전 안으로 데리고 가마."

"감독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놈의 분위기가 약간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던전 입구에 서자 허공에 메시지가 떴다.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점거됨)]

[던전 랭크: E마이너]

[적정 레벨: 10-20]

[현재 레벨에서 쉬운 던전입니다.]

[대규모 던전입니다.]

[적정 클리어 인원: 15? 20인]

적정 공략 레벨은 낮지만, 적정 인원은 많다.

'넓은 곳이라는 건가.' 나는 허공을 바라본다. 허공의 기괴한 메시지들. 다른 놈들에게는 이런 창이 뜨지 않는다.

놈이 나를 흘끗거린다.

"뭐. 보시고 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던전 문이 그럴듯하죠?"

"아니다. 들어가지."

나는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

[던전에 입장합니다.]

천장이 높은 동굴이 나타났다.

곳곳에 활을 든 인간들 몇몇이 버티고 있다. 원래 있던 건지, 인간들이 설치한 건지는 몰라도 곳곳에 환한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곳곳에 놓인 선반 위에는 추출한혈석이 쌓여 있었다.

쌓여 있는 혈석만 계산해도, 백여마리는 훌쩍 넘는 숫자를 죽인 것같았다.

무언가 장부를 열심히 기록하는 놈들도 있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칼자국은 동굴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나는 별말 없이 따라가다, 한마디를 건넸다.

"날 감독관으로 생각지 않는군."

놈의 태도는 동굴 밖에 있을 때와 달랐다. 날 전혀 감독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앞에서 안내하던 칼자국이 피식 웃었다.

"아, 그거야 당연히.

그 말과 동시에 좁은 동굴이 탁 트였다. 넓고 커다란 홀이 나왔다.

사방에 횃불 걸이가 있었다. 천장이 지금까지보다 훨씬 높았다.

- 구구구구! 쿵!

지금까지 걸어온 좁은 통로에서,

석벽이 튀어나와 퇴로를 차단했다.

'기관 장치다.' - 끼릭. 끼리릭.

석궁 장전되는 소리가 요란했다.

빠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열 명이 훌쩍 넘는 남자들이 석궁을 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장전을 마쳐 놓은 둣, 나를 가만히 겨냥하고 있었다.

얼굴에 다들 비웃음이 가득하다.

칼자국은 나에게서 빠르게 벗어났다. 석궁을 들고, 그럴듯한 사슬 모자를 쓴 녀석 옆에 섰다.

던전으로 향하는 골목을 지키고 있던, 아까 봤던 녀석이었다.

칼자국이 말을 이어 갔다.

"그거야 당연히, 네가 감독관이 아니니까 그렇지."

"신분증을 안 믿는 건가?"

그러자 칼자국이 키득거렸다.

"이봐, 이봐, 벤슨 플레 쳐는 내 직속 상사였거든? 그리고 그놈은 일년 전에 뒈졌어."

석궁을 든 남자들이 함께 킥킥거렸다. 칼자국이 말을 이었다.

"넌 대체 누구냐? 자칭 플레쳐 나으리? 무덤에서 돌아왔냐?"

- 터벅.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다.

칼자국 옆에 선 녀석이 외쳤다.

"꼼짝하지 마! 철판도 종이처럼 꿰뚫는 삼각촉이다!"

어깨를 으쪽했다.

- 철컥. 철컥. 철컥.

건틀렛을 낀 손으로 박수를 쳤다.

처음부터 알았다는 거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놈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연기가 훌륭하군."

"누구냐니까? 개 같은 플레쳐 놈을 죽여 준 걸 봐서, 고문은 안 하고그냥 죽여 줄 수도 있거든."

칼자국이 이죽거렸다. 물론 당연히 거짓말이다. 어차피 녀석에게 결정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는, 아까 보았던 놈들까지 함께 있었다.

가시 검이나 몽둥이 같은 저들의 무기를 버리고 다들 석궁을 들고 있다. 숫자는 도합 스물. 엄폐할 공간은 전혀 없고 퇴로는 막혔다.

결론은 간단하다.

'질주.'

네크론 신사회 예비 단원 질 러지스는 곤혹스러웠다. 러지스는 얼굴에 난 칼자국을 어루만졌다.

프레쳐를 사칭하는 놈을 잡았다.

길가에서 싸우면 도망가거나 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연기를 하고 계략을 짜내어, 놈을 여기까지 끌어들였다.

스무 개의 석궁이 놈을 겨누고 있다.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아무것도 없다.

압도적인 상황이다.

궁수들이 시위만 놓으면 단번에 벌집이 된다.

수십 발의 삼각 철촉이 온몸을 꿰뚫는다.

심장과 폐를 뚫으면 신음도 못 뱉고 단번에 즉사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놈의 자세는 지나치게 태연하다.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이 수많은 석궁을 피할 자신이 있는 건가?

그 순간,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쏴! 쏴라!"

질 러지스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스무 발의 석궁살이 기사를 향해 날아갔다.

- 푸슛!

- 푸슈슛!

한 발 한 발이 철판을 충분히 꿰뚫을 수 있는 삼각 철촉이었다.

- 퍼버버벅!

겨냥하고 있었고, 준비된 사격이었다. 움직이는 대상이었지만 반 정도는 적중했다.

화살이 연달아 갑옷에 박혔다. 맞았다. 이제 놈이 쓰러지면, 투구를 벗겨서 시체를 확인해 보면.

- 서걱!

- 데구르르!

- 서걱!

- 으아 아아아!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부조리했다.

화살은 갑옷을 관통했다.

한두 발이 아니다. 심장과 폐가 있는 곳에 몇 발이나, 깊숙이 화살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기사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심장과 폐, 배에 화살이 박힌 채로 뛰어와 궁수들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저런 일은 불가능하다.'

팔다리에 화살이 박히면 운신이 어려워진다. 심장이나 폐에 박히면 두말할 것 없이 즉사다.

그런데도 기사는, 급소 곳곳에 화살을 박고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갑옷 밖으로는,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슴.

허벅지.

머리까지.

- 쩍!

또 한 명, 예비 단원의 머리가 수박처럼 쩍, 조개졌다.

고블린과 달리 인간의 뇌에서 혈석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두개골이 반으로 쪼개진 궁수들은 석궁을 놓고 뒤로 자빠졌다.

- 팅!

- 티딩!

재장전되어, 막 쏘아 내려던 화살들이 천장에 마구 부딪힌다.

"쏴, 쏴! 계, 계속 쏴!"

얼굴에 칼자국이 난 남자, 질 러지스는 눈을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발작적으로 사격을 외쳤다.

눈앞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없으면서도, 기적적으로 다음 장전에 성공한 궁수들이 몇 발을 더 박는 데 성공했다.

- 푸슛! 푸슈슛!

- 픽! 퍼벅! 퍼버벅!

등.

목허벅지.

골반.

하나같이 치명적인 곳에 화살이 박힌다. 석궁이 박히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곳에 살이 박힌다.

그런데도 기사는 쾌적하다는 둣,

옆으로 음직이며 궁수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 퍼걱!

또 한 명의 네크론 예비 단원이 이승에서 하직한다.

이제 슬슬, 단원들은 조건반사적인전의조차 상실해 가고 있었다.

"아, 아, 안 쓰러져?"

"부, 분명히 맞았는데! 끄하악!"

'그거야, 뭐.' 대부분의 화살은 텅 빈 공간을 지나가는 데다가.

『랭크 이하의 관통 공격!]

[받는 데미지가 40% 감소합니다!]

〈특전: 가시 미로의 정복자〉

시들어 버린 미로.

독 묻은 가시로 가득한 그곳의 공략 보상으로 얻은 특전이 제법 유용하게 발동되고 있다.

꼬박 열흘 동안 공략한 미로.

미로 전체가 움직이는 독 가시로이루어져, 찔리면 곧바로 피가 독이 되어 버리는 미로다. 바닥, 천장, 양옆에 독 가시가 가득하다.

인간이 공략한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난관.

미쳐 버릴 만한 난이도지만, 나에게는 그냥 길만 찾으면 되는 미로에 불과했다.

추적 스킬이 있는 레나와 함께 들어갔으면 열홀이 아니라 하루 만에 공략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들어갔다면 가시 때문에 곧장 죽어 버렸겠지.

어쨌거나.

[데미지가 40%.]

갑옷을 뚫고 들어와, 어쩌다 '뼈'에 적중한 화살들도 데미지는 대폭 감소되고 있다.

"으, 으, 으아아!!"

열 명쯤 베어 넘겼다. 몇몇은 그제야 석궁을 버리고, 근접 무기를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싸움은 기세가 중요하다. 레나에 게들은 말이다. 그 말에 따르자면, 놈들은 완전히 제압당했다.

한껏 준비한 공격이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무효화되자, 완전히 공황에 빠져 버린다.

"서, 석벽! 석벽 열어!"

사기를 책임져야 할 우두머리는 없었다. 칼자국은 기관 장치를 움직여 도망가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입구 쪽은 나에게 더 가깝다.

- 팟!

강하게 땅을 박찼다.

- 서걱!

도망가는 사슬 모자의 등에 칼을 꽂았다. 사슬 모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칼집에서 뽑는 것처럼, 놈의 등에서 곧바로 칼을 빼냈다.

옆에 도끼를 든 놈을 향해 휘둘렀다. 놈은 피가 엉겨 붙은 도끼를 간신히 들었다.

도끼로 고블린 머리를 얼마나 조개댔는지, 초록색 피가 도끼날에 엉겨 붙어 있었다.

- 퍼걱!

칼은 도끼 자루와 놈의 목을 동시에 치고 지나갔다. 잘려진 목이 피를 뿜었다.

남은 놈은 셋이었다.

"아, 아아, 사, 살려 주십시오!"

- 털썩! 털썩! 털썩!

셋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공포에 몸이 굳었는지 도망조차 포기한 것 같았다.

"일어나라."

나는 손가락을 위로 움직였다.

"히, 히곡!"

칼자국이 딸꾹질을 했다. 인상파인외모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죽인다고 한 적도 없는데?"

" 그, 그렇습니까?"

"공격은 너희가 먼저 했잖아? 그렇지?"

"예! 예.!"

세 남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민했다.

일단 자기 방위는 했지만, 여기서놈들을 전부 죽이는 건 좀 아쉽다.

놈들은 내게 살려 달라고 한다.

굳이 죽여야 할까?

아까처럼, 다시 긍정적인 관계 설정을 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잠시만."

갑옷을 뒤졌다.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신분증을 꺼냈다.

무덤에서 만났던 석궁의 신분 중이었다. 역시 붉은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석궁의 신분증을 놈들에게 내밀었다. 한 명 한 명에게 보여 주며자비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이 신분증으로 하자고.

어때, 괜찮겠지?"

세 놈이 거의 훌쩍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습니다!"

"그럼 안내해 봐. 고블린이 있는 쪽으로."

66화 인간성의 승리 (6)

***************************************************

[질주의 유효 시간이 끝났습니다.]

스킬이 끝났다. 아쉬움은 없다.

상황은 전부 정리됐다. 〈질주〉의유효 시간은 10분. 그 사이 스무 명의 인간을 정리했다.

모두 활을 쏘았고, 화살은 뼈 사이사이 빈 공간을 뚫었다. 놈들이 준비한 무기는 나를 상대하는 데 최악의 상성이었다.

관통 저항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제외하더라도, 해골을 상대하는 데화살은 전혀 좋은 무기가 아니다.

물론 상성의 우위만으로는 이 압도적인 상황이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그만큼 내가 강해진 거다.

제대로 몸 눕힐 관도 하나 없이,

요행히 부서지고 요행히 다시 일어나던 예전과는 다르다.

평범한 레벨 1 해골병사라면 고블린 하나 이기지 못하겠지만, 지금은그 고블린을 착취하는 인간들을 떼로 쓸어버리고 있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훑어본다,

놈들이 석궁이 아니라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다.

수고롭고 체력은 깎였겠지만, 못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이쪽으로.

항복한 세 남자가 굽실거린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가엾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안내한다.

한 시간 전을 생각한다.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쇠몽둥이로 다른 산적들을 쳐 죽이던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 겹쳐진다.

인간의 외면은 복잡하다.

상황에 따라 표정과 태도는 꽤나 다채롭게 변한다.

반면 내면은 단순하다. 작동 논리는 언제나 명쾌해 보인다.

약자에게는 빼앗고 벌을 주고 함부로 부리며, 강자에게는 바치고 빌붙고 굽실거린다.

떠오르는 생각을 슬쩍 정리하며,

안내하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예, 예. 뭐든 물어보십쇼!"

놈들이 음찔거리며 대답한다.

슬라임이 나에게 괜히 이 의뢰를 넘긴 게 아니다.

어디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슬라임 자신이 만들어 낸 의뢰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나에 대한 배려다.

내가 조직의 말단이 있는 곳을 치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활용해야 한다.

"〈우리〉조직에 대해 아는 대로말해 봐라."

"으으. 그게.

우리 조직이란 네크론 신사회다.

나는 당연히 네크론의 감독관이 아니다. 나도 안다. 놈들도 안다.

그래도 혹시나 했던 걸까?

노골적으로 티를 내며 물어보자 놈들이 쭈햇쭈뼛거린다. 놈들을 슬쩍 부추긴다.

"큰 도시마다 지부가 있는 인신매매 집단."

"경비대도 장악했고, 고문할 때 귀에 벌레 넣기를 좋아하지. 청부 살인도, 마약 제조도 하고."

유블람의 전 여관 주인을 만나며 알아낸 정보를 풀어놓는다.

거기까지.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히꼭!"

한 놈이 갑자기 딸꾹질을 했다. 다른 놈이 말을 받는다.

"다 아시는 거 같습니다만. 저희도 뭐, 잘 모릅니다요."

- 스르릉.

나는 칼을 빼 들었다. 놈들의 낯빛이 까맣게 변했다. 눈앞에서 동료 열일곱을 죽였다.

셋 정도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알아서 상상하는 듯한 눈빛이다.

나는 고통을 주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는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는 눈앞의 세 인간이 잘 알 거다. 훨씬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겠지.

놈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희는 정식 단원도 아니라서.

정말, 정말입니다!"

"가, 감독관이 머지않아 올 겁니다! 그놈은 뭘 좀 알지 않겠습니까?

놈을 함정에 빠뜨리실 계획이라면저희가, 저희가 돕겠습니다요!"

- 달그락.

나는 피식거리며 물었다.

"감독관은 왜 오는 거지?"

"그, 그게. 혈석 판매 루트를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겁니다. 연금술사와 연결시켜 주려고. 콧대 높은 연금술사들이 저희 따위와 직접 만날 리 없으니까요."

'연금술사라.

특급 연금술사는 마법사의 의뢰를 직접 수행하거나, 곁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본신의 강한 힘은 없지만, 인류의가장 윗줄에게 쓰여지는 만큼 자부심이 자못 대단하다.

아케인 Arcane을 느낄 수 없다면 원천적으로 사용 불가능한 마법과달리, 연금술은 누구나 시도해 볼 수는 있다.

자양강장제나 만드는 거리의 연금술사도 콧대는 제법 높다는 건가.

'음.

"좋아. 안쪽 놈들은 뭘 좀 아나?"

"열 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놈들 도아는 게 없습니다. 그. 방화범 출신이. 조장인데, 불 지르고 고문하는 것만 좋아하지. 머리는 텅텅 비었습니다요."

칼자국이 제 머리를 텅, 하고 때려보이며 말했다.

"조장?"

"예. 10명씩 3교대로 사냥을 합니다. 두 조는 쉬고 있었고, 다른 한조가 지금 들어가 있습니다."

앞의 두 조는, 이미 차가운 동굴바닥에 누워 단체로 쉬는 중이다.

"가지."

세 놈을 앞세웠다. 계속 들어갔다.

안쪽에서 서서히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위와 좌우가 확 넓어졌다.

하늘은 안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굴 안쪽에 수풀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학살당한 고블린시체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시체뿐이군."

세 남자는 조금씩 떨었다.

저질러 버린 살해를 내가 벌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물론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아, 아까 말씀드렸던 놈들이 한 짓입니다요."

괜한 변명은 무시했다.

잠시 더 걸어갔다. 무언가 익으며 타닥타닥 타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 피융!

- 퍽!

화살 쏘는 소리다.

- 크아아아!

곧바로 비명 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심장을 뚫고 나오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멀리서 그쪽을 바라봤다. 한 명의인간이 나무를 향해 실실 웃으며 활을 겨누고 있다.

나무를 바라봤다. 꿈틀거리는 한명의 고블린이 묶여 있었다.

어깨에 화살을 맞은 고블린은 고통스러운 둣 몸을 뒤틀었다. 붉게 핏발 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고블린은 주위에 널린 인간들을 사나운 눈동자로 노려봤다.

눈빛에 힘이 있다면 인간들은 모두심장이 꽉 움켜쥐며 죽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힘이 없다. 고블린은 커다란 나무에 칭칭 감겨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궁수는 시위를 한 발 더 메긴다.

- 피융!

- 퍽!

"크으아아악!"

양어깨에 화살이 꽂힌다.

- 짝짝짝!

"오, 나이스 샷인데?"

옆에서 고기를 구워 먹던 놈이 박수를 쳤다.

궁수와 고블린은 겨우 스무 발자국 떨어져 있다. 박수를 칠 만한 사격실력은 아니었다.

나는 나무에 묶인 고블린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머리 부위의 살은 찢어졌다. 화살이 꽂힌 어깨는 피를 흘린다. 몸에 상처가 가독하다.

싸우다 난 상처는 아니다. 천천히 느리게 그은 칼자국이다.

'으음.

사실 상처보다, 전반적인 외모가 먼저 눈길을 끈다.

'홉 고블린인가.'

나무에 묶인 고블린은 바닥에 널린 시체들과 생김새가 달랐다.

피부는 다른 고블린보다 더 진한진녹색인 데다 치열도 가지런했다.

키도 훌쩍 컸다. 성인 남성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눈동자도 탁하지 않고 맑았다. 고블린보다도, 멸종한 엘프를 닮은 듯한 모양새다.

상위 개체인 홉 고블린. 직접 본적도 있다.

드물게 나타나는 개체다.

지능도 전투력도 일반 고블린보다훨씬 뛰어나다.

자가 치유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잠재력에서, 웬만한 고블린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눈앞의 상황이 그 증거.

보통 고블린이라면?

저 정도라면 이미 몇 번 죽고도 남았을 상처다. 홉 고블린은 트롤 정도는 아니라도,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 크르르크르르르

나무에 묶인 홉 고블린이 신음 소리를 낸다. 흡 고블린은 지능만큼 언어 습득력이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는다. 어차피 통하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말로 상대해 봐야 고통과 치욕만더 커질 뿐이라고, 저 고블린의 왕족王族은 판단한 것이다.

- 크오오오! 크오오오!

이번에는 다른 고함이 들린다.

나무 맞은편 커다란 우리에서 들리는 소리다. 안에 열 명 정도의 고블린이 갇혀 있다.

- 크워워워워!!!

그들은 묶여 있는 홉 고블린을 보고 울부짖는다. 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쉿! 얌전히 있어! 아니면 이번에는 심장에 쓴다? 심장에?"

우리 근처에 서 있는 창잡이가 고블린들을 위협했다. 제 심장을 가리켜 가며 말한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란을 피우던 고블린들이 조용해졌다.

"와, 신기하다. 갑자기 조용해지네.

무슨 고블린 왕 같은 건가?"

"아, 년 새로 와서 모르지? 재한테 화살을 쏘면 다들 아주 발광을 한다. 그러다 죽인다고 위협하면 다시 조용해져."

"킥킥. 그치. 그게 너무 웃기지.

얌전히 한 명씩 죽어 주잖아. 아까는 저놈 귀를 잘랐었는데.

- 픽!

"야, 이것들아! 닥치고 고기나 제대로 구워. 너무 익혀서 질기잖아!

피 맛이 좀 나야 달달한 거 몰라?"

조장組長으로 보이는 놈이 그들에게 핀잔을 줬다.

놈들은 핏물을 뺀 고블린 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먹고 있었다.

특이한 광경은 아니다. 사냥과 식사는 자주 함께 간다. 막 사냥한 고기는 신선하다.

물론 고블린 고기가 특별히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다.

그냥, 놈들이 고블린 앞에서 어떤 종류의 인간성을 발휘하는 중일 거라고 짐작한다.

"조장님, 저기.!"

언제쯤일까 싶었는데, 연회에 빠져있던 놈들이 그제야 우리를 발견했다.

활을 든 놈은 시위를 반쯤 메긴채, 활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조장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칼자국에게 말을 걸었다. 얼굴에 의아심이 떠오른다.

"어, 뭐여? 아직 교대 시간도 안됐는데 왜 오셔? 일찍 일해 주게?"

칼자국이 눈치를 살피며 자연스레 말을 받는다.

"아, 그냥 산책이지, 뭘. 자네들은좀 어때?"

"뭐. 우리야 고기 좀 먹고, 느긋하게 있었지. 사격 연습도 좀 하고.

근데. 왜들 다 빈손이여? 옆엔 누구고?"

나는 신분증을 툭 던졌다.

"감독관이다."

"에, 감독관?"

놈이 신분증을 받아 들고 인상을 썼다.

"근데. 갑옷에 화살은 다 뭐요,

감독관님? 뭔. 장식이여? 얼굴 좀봅시다."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온다.

적의와 경계가 느껴진다.

이런 반응이 자연스럽다. 정체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칼자국의 반응과는 다르다.

길가에서 만났던 놈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날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꼬드겨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좋은 연기였다. 그는 프레쳐를 알았다. 그리고 프레쳐를 죽였을, 그 신분증을 내미는 내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아, 뭐 하셔. 투구 안 벗나?"

눈앞의 남자는 그런 걸 모른다.

- 스윽.

놈이 내 투구로 손을 뻗어 왔다.

나를 안내한 세 놈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툭.

나는 뻗어 오는 손목을 잡았다. 불쾌했다.

정체가 드러나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 처리할 생각이다. 목격자는 없을 것이다.

다만, 루비아가 남긴 유품에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손대지 마라."

"으, 으웃.!"

놈의 이마에 핏줄이 선다. 팔을 부들거린다. 힘을 쓰는 것 같다. 하지만 반응도 오지 않는다.

힘이 20 이하라는 건 명백하다.

"야! 빨리 포위해!"

다른 놈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기를 겨냥한다.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포위망이 조금씩 좁혀져 오는 순간이었다.

- 팟!

"우와아아아앗!"

나를 안내한 칼자국이 갑자기 앞으로 냅다 달린다.

67화 인간성의 승리 (7)

***************************************************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며 달린다.

"우아 아아아!"

그 뒤를 따라 두 놈도 도망갔다.

방향은 우습게도 고블린 거주지 쪽이다. 동굴 입구 쪽으로 도망가는 게 자연스럽다.

다만 그쪽은 내가 서 있는 방향.

사냥하던 동료들을 나와 자신들 사이에 두고, 숲속으로 도망가는 걸 택한 것이다.

사냥을 통해서, 안쪽 지형에 나름대로 익숙하다는 계산도 있겠지.

'숨을 생각인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차는 태도. 여기로 오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놓았던 것 같다.

칼자국뿐만 아니라, 다른 두 놈도 마찬가지. 제법 빠른 움직임이다.

"왜 갑자기 도망쳐?"

"재네, 뭐 하냐?"

손목을 잡힌 놈이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허리에서 짧은 칼을 빼 들었다. 칼을 투구의 좁은 눈틈에 찔러 넣으며 외쳤다.

"야! 일단 쳐!"

- 철컥.

하지만 그가 손끝으로 느낀 것은 물컹한 수정체의 파열이 아니었다.

텅 빈 감촉이었다. 좁은 투구 틈을 타고 칼날이 들어가다 멈췄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칼을 마구 움직였다. 칼둥으로, 손잡이 쪽으로 갈수록 두껍고 무거워지는 디자인이다. 해체용 칼이었다.

- 끼긱. 끼긱.

쇠 틈에 쇠가 끼어 움직이는 소리가 허공에 울린다. 그 소리는 제법 기괴했다.

무기를 든 인간들이 눈만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 끼긱. 끼긱.

우리에 갇힌 고블린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에서 두려음과 의아심, 기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히, 히이익!"

조장이 놀라서 칼을 떨어트렸다.

나는 왼손으로 칼을 받았다.

고블린을 해체한 뒤 제대로 닦지도 않았는지 초록색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대로 놈의 목을 찔렀다.

"끄, 끄어어.!"

찌른 칼을 다시 뽑았다. 목에서 세차게 피가 뿜어졌다.

칼에 묻은 초록색 피가 붉게 씻겨 내려갔다. 고개를 돌렸지만 피가 투구에 부딪쳤다. 더러운 피가 갑옷에 묻는다.

"어, 어어!"

고블린을 겨냥하던 궁수는, 외마디소리를 치며 활을 들려고 했다.

- 피릭!

나는 손에 든 칼을 던졌다. 칼은 똑바로 날아갔다.

- 퍽!

심장에 칼이 박힌 궁수는 비명도못 지르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수풀에 시체 두 구가 추가됐다. 처음으로 인간의 것이었다.

나무에 묶인 고블린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쪽을 쳐다봤다. 인간 여덟 명이 나를 에워쌌다.

"저, 저 미친놈들이 뭘 데려온 거야.!"

남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이밀었다. 긴 창과 칼, 날이 넓적한 도끼, 전투용 철제 곤봉이 한 번에 겨누어졌다.

"흐아압!"

처음은 긴 창이었다. 누군가 기합을 지르며 옆에서 찔러 왔다. 어설프고 느리다. 언제나 안전한 거리에서만 찔러 왔던 창인 것 같았다. 우리에 갇히고, 묶인 자들에게만.

- 덥석.

찔러 오는 창날 아래를 건틀렛으로 잡았다. 그대로 뒤로 힘을 줘서 강하게 밀어 버렸다.

"으어어어!"

힘에서 완전히 밀린 남자는 뒤로 자빠져 바닥까지 몇 번을 굴렀다.

- 툭!

"으으으.

그는 무언가에 부딪힌 뒤에야 간신히 멈췄다.

- 크르르르르.!

그건 고블린들이 갇힌 우리였다.

우리의 쇠창살엔, 팔이 뻗어 나올 만큼의 간격은 있었다.

"끄아아아아!"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은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어떤 놈은 뒤를 돌아보며 당황했고, 다른 놈들은 기합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도 이미 칼을 뽑은 뒤였다.

- 챙!

인간이 휘두른 칼은 반대 방향으로 튕겨졌다. 주인의 목을 뚫었다.

"흐아아압!"

옆에서 도끼가 떨어졌다. 오른쪽으로 한 발을 디뎌 피한 뒤, 가볍게 칼을 다시 휘둘렀다.

"끄, 꼬, 해, 히.!"

~ 푸슈슛!

동맥이 잘린 남자는 유언으로 무언가를 남기려다 그대로 죽었다. 유언은 궁금하지 않다.

놈을 죽였을 때 오른 경험치는 두자릿수에 불과했다. 유언을 들어 줄 가치 따위는 없었다.

자리는 금세 정리됐다. 다들 비숫한 수준이었다.

조장의 시체를 뒤졌다. 열쇠 꾸러미를 발견했다. 레나가 함께 있었다면 시체를 하나하나 다 뒤져 로티는 물론 위젯까지 털었겠지만, 내게 그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나는 고블린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열쇠를 들 고우리 가까이로 걸어갔다.

"크르르.!"

놈들은 한껏 긴장한 기색이었다.

붉은 피를 갑옷에 끼얹은 인간이 걸어온다. 자신들을 학대한 인간을 죽이긴 했어도, 같은 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녀석들의 편 같은 건 아니다.

고블린들이 우리 한쪽에 몸을 바짝 붙이며 나를 경계한다.

"취익.! 취익.!"

스트레스가 심한 듯하다. 하나씩 끼워 보자 금방 들어맞는 게 있었다.

- 철컥.

자물쇠가 풀렸다. 우리를 확 열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녀석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 툭.

나는 녀석들에게 열쇠를 던졌다.

"취익.! 취익.!"

고블린들이 열쇠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쪽을 보는 홉 고블린의 눈빛이 느껴졌다. 다른 고블린들의 미약한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몇 번에 걸쳐서 떴다. 고블린들은 나를 경계하며 나무에 묶인 홉 고블린에게 몰려갔다. 역시 녀석이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쪽을 바라보자, 고통으로 가득했던 녀석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난다.

- 투둑.

녀석의 몸을 옥죄던 밧줄이 칼로 전부 끊어졌다. 열쇠로 수갑이 풀렸다. 홉 고블린이 절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인간. 이세요?"

능숙한 공용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투가 조금 앳된 느낌이다. 물론 고블린의 나이 따위를 짐작하는 능력은 없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흡 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이라고 합니다. 직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저희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직스가 머리를 꾸뻑 숙인다. 다른 고블린들은 취익취익 하는 소리를 내며 주위를 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블린 어語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인간들을 쫓아가서 죽이고 싶어 합니다."

직스가 그들의 언어를 통역했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 때였다. 홉 고블린 앞에, 메시지가 떴다.

[던전 보스: 직스키세스 붐텅]

[랭크: F마이너]

[플레이어의 레벨: 33]

[적정 클리어 레벨: 5]

[난이도 판정: 매우 쉬움]

'이 던전의 보스라는 건가?' 문득,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간들을 정리하라고 했다. 고블린을 구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살려 둘 필요는 없다.

죽인다면 던전 포인트를 얻는다.

메시지가 뜬 이상 확실하다. 그만큼 강해지는 것이다.

F마이너 랭크의 보스. 매우 약하다. 〈어려움〉이하의 상대가 뜬 적은 지금이 아예 처음이다.

정말 얼마 되지 않는 포인트겠지.

하지만 그런 포인트라도 마다할 이유는 당연히 없다. 얻을 수 있는 건다 얻어야 한다. 베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 이름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직스가 나에게 묻는다.

이름.

"이름 같은 건 없다."

있다고 해도 벨 상대에게 알려 줄 이유는 없다. 심장을 찌를까? 목을 벨까? 단번에 끝낼 수 있다.

여기서 이 녀석을 베고, 다른 고블린들도 모두 베면 깔끔하다.

"저.

마음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빨리 꺼져라."

"네.

"숲 속으로 꺼지라고. 인간들을 안 쫓아갈 생각인가?"

"아, 예.!"

심장을 찔러야 할지, 목을 베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게 고민이었다. 결국 칼은 결국 뽑지 못했다. 칼자루를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취익! 취익!"

고블린들이 무기를 들고 눈을 빛냈다. 홉 고블린도 결국 칼 한 자루를 들었다. 그는 몇 번씩 나를 돌아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칼을 늘어뜨렸다. 놈들이 들어간 숲을 바라봤다. 동굴 안쪽에 조성된 숲은 고요했다.

나는 고블린을 죽이지 않은 내 판단에 대해 생각했다.

E랭크 던전. F랭크 보스.

죽이면 레벨이 오른다.

포인트를 준다.

스킬이 생기고, 시체에서는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보상이 주어진다. 반응이 생긴다.

상태창이 제공하는 지침은 언제나 명쾌하다. 폭력으로 빼앗아라. 더 많이 욕망해라. 그럴수록 보상은 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블린을 죽이지 않았다. 그 건에 관해,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었다.

연민? 동정?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그런 단어들을 애써 지워 버렸다.

역시 F마이너 랭크라는 건, 지나치게 약하기 때문이겠지.

- 달그락!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무 약하다.'

던전 랭크 〈E마이너〉.

안쪽에 있던 고블린들은 하나하나가 약해 보였다. 별 볼일 없는 인간들에게 간단히 사냥당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이 쳐들어오기 전, 잔뜩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랭크가 전혀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문제는 보스라고 뜨는 홉 고블린.

〈F마이너〉. 던전 랭크와, 보스의 랭크가 너무 차이 난다.

'수상한데.'

던전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거다. 없는 편이 이상하다.

나는 거주지 안쪽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감독관이 머지않아 온다고 했다.

인간들은 커다란 홀에 몰아넣고 죽였다. 기관 장치도 움직여서 일단 닫아 놓았다.

감독관의 입장에서 여기는 첫 방문일 거다.

하지만 던전 내부 지도라도 갖고 올지도 모른다. 시체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안쪽까지 와 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초소에 잔뜩 죽어있는 시체들을 보겠지.

그걸 본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거다. 그 뒤, 조직의 정예들을 잔뜩 데리고 온다면 곤란하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서둘렀다.

그 덕분일까.

'여긴가?'

5분도 채 걷지 않아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인간 시체 세 구를 발견했다.

싸운 흔적이 있었다. 시체들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물어뜯긴 것인지 목 근처가 너덜너덜했고, 신체 몇 군데가 없었다.

무기가 아니라 발톱에 의한 단면이었다.

'짐승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짐승에 의한 살육이었다.

인간에 의한 것도, 고블린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고블린에 의한 단체 린치라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이럴 만한 힘이 없다.

신체를 뜯어내고,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 없다. 기껏해야 약한 부위를 괴롭힐 뿐이다.

나는 바스타드 소드를 쥔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시체들의 일그러진 자세가, 죽음의 단말마를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사고가 생겼다.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았다면, 바로 쫓아갔어야 했다.

바닥을 살폈다. 고블린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 어딘 가로물려 간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성공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이든가.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이 숲에는, 인간 셋을 너덜너덜하게 물어뜯은 짐승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 뛰쳐나올지 모른다.

멍청하게 습격을 허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차가운 긴장감이 뼈마디를 타고 홀렸다. 가깝다. 짐승은 가까이에 있다.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피를 가진 무언가가 근처에 있다. 나는 바닥과 나무를 한 번씩전부 다 훑어봤다.

- 철컥!

한쪽 나무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재빨리 돌아보고 칼을 겨눴다.

하지만 작은 다람쥐였다. 나는 긴장을 풀었다. 그 때였다.

- 크르르르르.!

굵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주위를 빙그르르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68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1)

***************************************************

움직임이 제법 빨랐다.

다른 고블린이나 인간들은 얼마든지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한 속도였다. 녀석을 당해 낼 만한 상대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내가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무에 가려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유인하듯, 칼을 내려놓고 숲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와."

- 크아아아!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숲 속에서 짐승이 달려 나왔다.

'뭐야, 이 녀석?'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상대였다.

- 챙!

녀석이 휘두르는 칼을 쳐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에는 인간의 붉은 피와, 고블린의 조록색 피가 동시에 묻어있었다. 몸에 날카롭게 베인 자국들이 있었다.

'자해를 한 건가?'

녀석과 조우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어지럽게 상태창이 떴다.

[히든 보스 출현!]

[광화Mad enchantment 홉 고블린]

[랭크 D+]

[특수 스탯: 전의戰意가 300 생성됩니다.]

[발톱이 길게 솟아납니다.]

[힘과 민첩이 상승합니다.]

[전의, 혹은 체력을 모두 소모할 때까지 싸우게 됩니다.]

- 홉 고블린은 확고한 평화주의자입니다. 폭력적인 성향의 고블린들가운데에서도, 핏빛 사슴 홉 고블린은 지나칠 정도로 비폭력적입니다.

-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살해를 저지르게 되면, 그는 낮은 확률로 미쳐 버리게 됩니다.

[사이드 - 마물魔物]

[특전 개방 - 히든 퀘스트: 광화된 홉 고블린을 진정시키세요!]

'??? 별게 다 있군.' 상태창은 종종 짜증이 날 정도로 자세하다.

이건 용사들이 보는 것과 완전히 같은 메시지일까.

서큐버스님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죽이고, 부수고, 빼앗으라고 뜨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건 그냥 그들의 유희 같은 거였을까?

녀석은 이번엔 허리에서 칼을 빼- 부응!

바람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긋거리며 웃던, 직스키세스 붐텅이라는 이름의 홉 고블린이 휘두르는 칼이 날아왔다.

나는 바스타드 소드를 대충 들었다. 어쩐지 진지하게 상대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 쨍!

강한 쇳소리가 울렸다. 칼이 내 쪽으로 밀렸다. 두 손으로 휘두르는 칼을 한 손으로 막아서 그런지, 손목이 저릿했다.

'20후반, 혹은 그 이상.'

그 정도 힘은 될 것 같다. 속도도 빨랐다. 나는 몇 걸음 물러났다.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 크아아아 !

녀석이 뛰어오며 칼을 휘둘렀다.

나무에 묶여서 화살을 맞던, 앳된목소리의 홉 고블린이다.

진녹색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두 눈은 부릅떠지고, 얼굴 곳곳에 핏줄과 힘줄이 험하게 내달려있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었다.

나는 몇 번을 죽고 다시 살아났다.

이번 생의 레벨은 33이지만, 총합레벨은 이미 120에 달한다.

광화니 뭐니 하는 걸로 극복할 수있는 차이는 아니다.

오히려, 나를 상대로 이렇게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녀석은 대단한 것이다.

- 챙!

칼을 강하게 쳐냈다. 두 손으로 잡고 휘둘렀다. 완전히 상대를 압도했다.

- 퍽!

녀석의 칼이 저 멀리 날아갔다. 나무에 박힌 칼이 파르르 떨렸다. 녀석은 바닥에 쓰러졌다. 목에 칼을 들이댔다. 몸을 발로 밟고 제압했다.

"크아아아! 크아아앗!"

녀석이 울부짖었다. 몸을 꿈틀대며 발버둥을 친다. 온몸에서 힘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이 상태가 보스라면 납득이 된다.

죽이면 유의미한 보상이 주어질 거다. D+랭크 보스를 처리한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광화하기 전의 녀석을 그대로 놓아 보낸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 취익! 크르르! 취익!!

언제 왔는지 고블린들이 빼곡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 취익! 취익!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댄다. 손 에무기를 들고도, 의외로 녀석들은 덤벼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뭔지 알아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건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광화라면,

숲 속 어딘가에 놈이 죽인 고블린 시체도 널려 있을 가능성도 높다. 저기 있는 고블린 가운데, 내 발밑에 밟혀 있는 이놈 정도의 힘을 당해낼 상대는 하나도 없을 거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히든 보스를 살해할 것인가,

아니면 히든 퀘스트를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역시 어느 쪽의 보상이 크냐가 중요하다.

나는 고블린들을 돌아봤다. 그들의 눈에는 기대와,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이 모두 있었다.

"크아아아!"

내 발밑에서 홉 고블린 직스키세스붐텅이 몸부림친다.

이 녀석을 베어 버리면 저들 역시모두 베어야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기껏 받은 의뢰가 허무해진다.

의뢰는 고블린들을 구하라고 했던가? 깔끔하게 전부 죽여주는 게 구하는 게 될지도 모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어느 쪽이 이득일지 치열하게계산하며 광화된 홉 고블린을 제압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크아아아앗!"

녀석이 꿈틀거리며 울부짖었다. 나는 가만히 버텼다. 녀석을 밟고 서있다.

"크르르르.!"

홉 고블린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다.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다.

얼굴과 목소리로 봐선 나이도 어리다. 레벨도 낮은 개체일 거다.

그런데도 이런 전투력이면, 재능이 제법 뛰어난 개체다.

홉 고블린은 지능과 전투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고블린들에 대해 압도적인 지도력을 가진다.

마왕 군에 있을 때, 멀리서 본 적이 있다. 하나의 홉 고블린이 수백 수천 고블린을 통솔해 일제히 인간을 공격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꽤나 출세해서 마왕군의 높은 자리에 오른 녀석도 있었다.

죽음의 거상巨商으로서 행세하던 한 늙은 고블린이 떠올랐다.

아주 멀리서, 한 마왕의 수족처럼 행세하던 그를 보았다. 그의 피부색도 이 녀석만큼 짙었다.

이 녀석도 나중에 그 녀석처럼 쓸만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크, 크르르르.!"

과거이자 미래를, 그리고 현재를 비교한다. 발밑에 깔린 놈을 천천히 관찰한다. 상상에 지루할 틈은 없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의 눈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부림이 몇었다.

전신이 섰던 핏줄과 힘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에게서 천천히 발을 떼었다.

녀석이 쉰 목소리로 한 음절을 뱉어 냈다.

"??? 아,

그리고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직스키세스 붐텅은 막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온몸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손과 팔, 심장 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특히 이상했다. 다 뭉개졌다가 새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목이 쓰라릴 정도로 타들어 갔다.

혀가 따가웠다.

손을 내려다봤다. 인간들을 갈기갈기 찢은 손이었다. 새로 날카롭게 자란 손톱이 있었다. 마음을 먹자, 기이하게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모두를. 모두를 죽일 뻔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홀렸다. 동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인간에게 밟히고 있던 등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고마운 욱신거 림이 다.

"취익! 붐텅! 정신이 돌아오나!"

"걱정했다! 취익! 이제 전사로 각성한 건가? 휙휙!"

"취이익.! 붐텅가家가 각성할 때는 피바람이 분다 하거늘, 동족의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다. 페퍼스로켓 여왕님 만세! 취이익.!"

"여왕님께 금화 있으라! 취이익!"

축 늘어진 그에게 동족 고블린들이 다가왔다.

이들 하나하나가, 자신을 제압해준 갑옷 기사가 없었으면 죽었을 동족들이었다.

함께 인간들에게 끔찍하게 고통받았는데도, 그마저도 자기 손으로 죽일 뻔한 동료들.

"흑흑.

그들 하나하나를 껴안으며 직스는눈물을 홀렸다.

항상 그가 두려워하던 것.

붐텅 가문의 핏줄에 전해져 내려오는 광화Mad enchantment는 무서운 저주였다.

홉 고블린들 중에서도, 붐텅가家의핏줄은 지나칠 정도로 평화주의에비폭력주의.

하지만 살해를 저지르면, 낮은 확률로 광기에 빠져들게 된다.

능력이 크게 상승하고 몸이 전투에 알맞게 변형되지만, 모든 체력을 소진할 때까지 주위의 모든 것들을 공격하게 된다.

"취익! 괜찮다! 인간만 죽였다!"

"취익! 홉 고블린은 동족의 보물!

취익! 너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

"저 갑옷이 너를 막았다! 취익!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동료들이 다가와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강철 손톱이 돋아났던 손이었다.

직스는 서둘러 손톱을 숨겼다.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일어났다.

녀석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구원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좀 부담스러웠다. 녀석은 내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홀리며 감사를 표했다.

"저희를 전부 구해 주셨습니다. 뭐라도, 뭐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취익! 취익!"

다른 고블린들이 그건 안 된다는 듯 옆에서 날뛰었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그래서야 기껏 살린 보람이 없다.

구원자라니. 정작 구해야 할 상대는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엉뚱한곳에서 고블린이나 도와주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내게 매달리는 고블린을 잡고 일으켰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든 이야기해주십시오! 할 수 없는 것도 전부 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뜨는 상태창 덕분이었다.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홉 고블린 - 직스키세스 붐텅에게 '목숨을 두 번 구해 준'이라는개인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고블린은 모든 걸 철저히 거래로 파악하는 종족입니다! 홉 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의 당신을 향한 소모성 충성도가 200 부여됩니다! 이 충성도는 거래에 사용됩니다.]

[핏빛 사슴 고블린 부족에게 평판도가 70 상승합니다.]

[평판은 해당 단체/부족/종족의 당신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당신에게만 귀중한 아이템을 팔기도 할것이고, 당신을 냉대하고 침을 뱉기도 할 것입니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당신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목숨을 바칠 수도 있고, 당신을 죽이 기위해서라면 마지막 한 명까지 폭탄을 지고 당신의 침소로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

[70은 아주 우호적인 평판도입니다. 하지만 핏빛 사슴 고블린 부족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바로 이 메시지 덕분이다. 상세하기도 하지.

[이들은 당신을 보면 아주 반가워할 것이고, 좋은 걸 발견하면 당신에게 몹시 싼 가격이나 공짜로 제공할 것입니다.]

[당신에게서 구원 받은 이 고블린들은, 동족을 만날 때마다 당신의이야기를 하고 다닐 것입니다.]

[이들이 오래 살아남을수록, 〈종족: 고블린〉의 당신에 대한 평판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동화율이 내려갔습니다.]

[88.61% -> 88.30%]

'0.31%.' 그 정도가 내려갔다.

일단은 고블린의 평판도 따위보다, 그게 훨씬 신경 쓰인다. 나는 상태창을 손으로 대충 치웠다.

'으음.'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나를, 흡 고블린 직스가 다급히 붙잡았다.

"제발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이름이라도.! 인간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 같은 건 없다."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나는 어깨를 으쪽했다.

"부르지 마라."

나는 놈을 바라봤다. 한차례의 광화를 거쳐서 그런지, 앳되고 유약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약간 강단 있는 얼굴이 되었다.

온몸에 힘줄이 선 자국이 남아 있었고, 무언가 변화한 느낌이 있었다.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 녀석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도망쳐라."

그건,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충동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숨어. 인간들의 전쟁이 일어난다. 휘말리지 마라."

이들은 약하다. 타자조차도 되지못하는 주변 존재들이다.

큰 싸움 작은 싸움에 휘말려서, 어떤 의미도 없이 아무렇게나 죽고 버려지는 것들이다.

그냥 화풀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유도 없이 우연하게 죽을 수도 있다.

최대한 떨어져 있고, 깊숙이 숨어있는 편이 좋다. 전쟁뿐 아니라, 인간이 관계된 모든 것으로부터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너희, 모두 나가라."

"취익! 취익!"

고블린들에게 직스가 내가 한 말을 통역해 주는 것 같았다. 고블린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하지만 모두 내말을 믿는 눈치였다.

평판 도라는 건, 말의 신뢰도에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고블린들에게 전쟁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1 년 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종족: 고블린〉에게 당신의 평판이 지속적으로 추가 상승합니다.]

"안쪽에서 동료들을 더 모아야 합니다. 함께. 떠나겠습니다."

"그래."

녀석들은 안쪽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말대로, 동료들을 모았다.

짐이라도 이것저것 챙겨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모인 고블린들은 모두빈손이었다. 포켓이 두둑한가 했더니, 전혀 그렇지도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뒤져도 뭐가 나오질 않아서.

"됐다. 따라오기나 해라."

나는 녀석들을 이끌고, 스무 명과 싸웠던 커다란 홀로 들어갔다. 인간들의 시체를 보고 녀석들이 입을 딱벌렸다.

"휙! 취익! 취익!

"취익! 취이이익!"

"구. 구원자님!"

"쓸 수 있는 건 써먹어."

어차피 내가 가져갈 것도 아니다.

자원은 활용되는 편이 좋다.

도와준다고 해도, 어차피 나와 헤어지고 하루 만에 모조리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놈들이지만.

어차피 나도,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서 머리가 깨질지 모른다.

지금은 슬라임의 치밀한 정보망 아래에서, 그가 세심하고 배려 깊게 선정한〈적정한 의뢰〉만 잔뜩 수행하고 있기에 안전한 거다.

직스의 소모성 충성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이제 250이 되었다. 소모성 충성도라. 재미있는 말이다.

"구, 구원자님. 이대로는 절대 못갑니다. 못 보내 드립니다."

그가 나에게 한껏 흥분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름만. 이름만 알려 주십시오.

나중에라도 어떻게든 이 빚은 갚아야 합니다.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고블린은 이利에 밝은 종족이다.

반짝이는 것들을 가장 좋아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부족마다 조금씩 성격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빚을 갚는〉성격을 가지고 있다.

은혜도 원수도, 절대 잊지 않는다.

그렇게, 서큐버스님이 말해 주셨다.

"필요 없는데.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 필요 없었다.

"그냥 값나가는 걸 찾아 돌아다니는 방랑자일 뿐이다."

"값나가는 것. 값나가는 것.

직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혹시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된다면 들어 주십시오."

"무슨 이야기지?"

"이 시대에 딱 한 명 존재한다는, 고블린 마법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자님만 알고 계셔 주시겠습니까?"

"마법사라고?"

69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 (2)

***************************************************

이 시대의 마법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마법사는 특별하다. 그리고 대부분의마법사는 인간이다.

물론 마왕군 강림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몇몇 마왕은 카르마karma라고 불리는 힘을 썼다.

그 힘으로 마법사를 능가하는 신비를 발휘했다. 폭풍과 지진을 일으켰다. 인간의 정신에 간섭했다.

일부 고위 마족도 그러했다. 얼음과 불을 부리고 허공을 디뎠다.

하지만 그건 9년 뒤의 일이다. 비인간 가운데 마법을 쓰는 자들은 극히 적다.

그런 자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들을 가치가 있었다.

"마법사가 어쨌다는 거지?"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어떤 경외와 신비가 밝혀질지 기대했다.

"종족의 비밀입니다만.

"누설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면 이야기해 봐라."

홉 고블린 직스가 입술을 살짝 깨문다. 무언가 결심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주제는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일한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쉬는 금화의 치명적인 유혹에 완전히 매혹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생애를 전부 바치기로 결심하지요. 아무것도 금화에 대한 그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금화라고?

나는 잠시 맥이 빠졌지만, 적당히맞장구를 쳐 주었다.

"금화라면 세이론 말인가?"

"그는 제국의 세이론도, 자유 연합의 두갓도 모두 사랑했습니다. 미스릴이 섞인 세이론은 요망하다고 좋아하고, 순금으로만 만들어진 두갓은 정숙하다고 좋아했지요."

"그래서?"

"금화의 숨 막히는 유혹에 마주한머드캐쉬는, 세상의 금화를 전부 다모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그건 참 급진적인데."

"그렇습니다."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직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법사였습니다. 그의 정결한 욕망은 결국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는.

옛된 얼굴의 홉 고블린이 꿀꺽, 하고 침을 삼킨다.

"금화들의 주체성을 전부 억압해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주머니에 전부 다 넣어 버리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직스는 옆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들었다. 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짤그랑,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안에 든 건 먼지와 보푸라기밖에 없는 듯하다.

직스가 상기된 채 말을 이었다.

"그는 금화를 전부 다, 여기에 넣어 버릴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었습니다. 끝도 없이 안에 집어넣을 수있는 겁니다. 〈머드캐쉬의 공간 주머니〉. 그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는 힌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부 공간이 왜곡된 건가?"

"예. 주인의 의지에 라라 끝없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활용도가 놀라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타자의 침해에서 자유로워진다.

세상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

내 목표는 원하는 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침해를 받지 않는 내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무작정 강해지지 않고도, 그런 게된다면.

"고블린도 들어갈 수 있나? 인간이라든지."

하지만 직스가 고개를 저었다.

"금화만. 됩니다. 다른 건 넣으면 다시 뱉어 낸다고 합니다."

"으음."

"그리고, 주머니 입구보다 큰 건 넣을 수 없습니다."

아쉬웠다. 하지만 쉽게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금화를 넣을 수 있다면, 다른 것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관심이 가는데. 그 마법사를 만날 수는 없나?"

이런 홉 고블린의 소개라면, 그도무작정 적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직스가 말한 고블린 마법사의 공간왜곡이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인지, 직스는 무척 뿌듯한 표정이었다. 추가로 소모 충성도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 가나만 들으라는 둣 속삭였다.

"동부 산맥으로 가십시오. 거기서취이이익, 휙, 취익! 이렇게 소리치고 돌아다니시면 됩니다. 마법사 머드캐쉬가 당신을 발견하는 순간, 접촉해 올 겁니다.

"따라 하기 힘든데."

취익과 휙 사이의 미묘한 어감을 알아채는 재주는 없다. 배운 언어는 인간의 언어뿐이다.

배울 필요가 없기도 했다.

어차피 마왕이 강림한 이후에, 마물의 언어는 전부 통합된다.

이종의 언어들은 두 마왕, 로노베Ronove와 부네Bune의 주술에 의해전부 하나로 엮인다.

"몇 번이고 들려 드릴 수 있습니다. 취이이익, 휙, 취익! 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정도는 말해주지 그래?"

"인간의 언어로, 돈 좋아? 좋아!

라는 뜻입니다."

"그거 참 직설적이군."

"그렇지요? 저도 들은 지 오래된 전설일 뿐입니다. 머드캐쉬의 시험을 끝까지 달성하면 그 주머니를 준다고 합니다."

"이종異種에게도 그런가?"

"사실 그걸 모르겠습니다. 다른고블린들도 안 되고, 홉 고블린만자격이 있다든가. 으으음.

직스가 급격히 자신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이 이야기가 녀석에게는 어지간한비밀이었는지, 소모 충성도가 150이나 줄어들었다.

고블린들에게 반짝이는 금화만큼 중요한 건 없을 거고, 무한정 금화를 넣는 주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그럴 것이었다.

나는 홉 고블린 직스를 성의껏 마중했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손을 한껏 흔들어 주었다.

직스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나와 멀어져 갔다.

흡 고블린 직스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 생각했다.

무한정 금화가 들어가는 공간 주머니라니, 레나가 들으면 무척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레나는 고블린 못지않게 까마귀의 습성을 가지고 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동화도, 은화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게 금화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이야기를 전해 주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면서 당장 동부 산맥으로 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그런 모습을 생각하니 경추가 가볍게 들썩거렸다.

물론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다.

동부 산맥은 하나의 산이 아니다.

제국 동부 전체가 얽히고설킨 거대한 산맥이다.

그곳을 헤매며, 고블린 어를 마구외치고 다닐 의향은 없다.

게다가 홉 고블린이 나름대로 종족의 비밀이라고 말해 준 내용은 레나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다시 길을 되짚어갔다. 지도는 다 타 버렸지만 지나온 길이기에기억하고 있었다.

감독관이라는 녀석을 기다렸다가정보라도 캐낼까도 했지만, 그럴 가치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기약이 없다. 오늘내일이면 오는 것 같았지만, 사실 반드시 만나서 캐내야 할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고블린 던전에서 수십 명을 죽였지만 레벨이 1도 오르지 않은 게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요즘 슬라임과 레나가 나를 과보호하는 둣한 느낌이 들었다.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쉬운 일만 부탁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레벨은 더디게 오른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이 건을 마지막으로 슬라임, 그리고 레나와 이별을 하고혼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던것 같다. 보호받는 입장이 된다면 곤란하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발목이나 잡을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화살 박힌 갑옷에 노을이 묻었다.

인간의 피와 노을은 어느 색이 더진한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늘 아래로 들어가 노을을 닦아 내고, 갑옷에 묻은 인간의 피도 닦아 냈다.

천천히 해가 졌다. 석양과 함께 날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가에는 아무도 오가지 않는다. 이미 인간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는지, 여행자들도 이 길을 피하는 것 같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날벌레 소리도 고요해졌을 때였다.

- 다그닥. 다그닥.

멀리서 땅을 딛는 말발굽 소리를 깨닫는다. 앞쪽에서 인간의 행렬이다가 온다. 말 탄 인간 하나와 걷는 인간 둘이었다.

달빛은 무척 환했다. 그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말 위에 뚱뚱한 남자가 앉았다. 손발은 짧고 가늘다. 허리만 불룩 튀어나와 있다. 반백의 머리칼은 가운데 가르마를 탄 채로, 양옆 위로 휘말려 있었다.

나이를 꽤 먹은 인간인 듯하다.

전투에 적합한 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기를 쥐어 본 적이 없는 인상이었다.

인간은 금속과 동그란 유리알, 고무줄이 결합된 시력 보조 구를 얼굴에 걸치고 있었다.

옆에는 수행원 두 명이 남자의 양옆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놈들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누구냐!"

이제야 나를 본 것 같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수행원이 나를 양옆으로 포위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상대를 보고 곧바로 누구냐고 묻다니, 마치 주거침입이라도 당한 듯한 태도다.

"이런 고얀 놈이! 여기는 우리가 관리하는 던전 구역이다! 칼을 내려놓고 신분을 밝혀라!"

말 위에서 소리치는 인간은 제법 독특한 말투였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갈 생각이다.

- 좌르록.

내 말에, 양쪽에서 두 수행원이 무기를 꺼내든다. 둘 모두 무거운 추가 달린 쇠사슬이다.

"이런 건방진 놈!"

두 인간이 곧바로 추를 허공에 돌리기 시작하더니, 곧 빙빙 돌던 추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뻗어 왔다.

하나는 발목을 향해서, 하나는 손에 든 무기를 향해서 날아왔다.

무기에 힘을 주는 사이에, 발목에사슬이 감겨 넘어지게 만드는 합격合擊이다.

효율적인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볍게 발을 움직이며, 칼을휘둘러서 두 추를 전부 바스타드 소드에 휘감았다.

"으, 으으으웃!"

놈들이 힘을 줬다. 이마에 핏줄이 돋아 올랐다. 나는 칼에 감긴 추를 바라봤다. 네 방향으로 날카로운 갈고리가 붙은 추였다.

끝에 살점과 피 같은 게 미세하게 붙어 있었다. 오래 놀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쇠사슬을 강하게 당기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두 놈의 목에 칼을 박았다. 시체두 구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때 였다.

- 퍼버버버벙!

주위에서 작은 폭음이 수차례 들렸다. 몸이 살짝 뜨는 게 느껴졌다. 하얗고 까맣고 노란 연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연기가 갑옷 틈으로 가득 스며들어 왔다.

- 피리리릭!

보우건 을 연사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몸이 붕 뜰 정도의 충격을 받은 데다, 지독한 연 기속에서 이런 화살까지 받아칠 수는 없었다. 몸이 다시 한 번 화살에 뒤덮였다.

- 풀썩.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체력이 20% 깎였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런 메시지가 뜨는 건 오랜만이었다. 연기 사이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핫! 나 다이로르 르주님께 저항하면 오직 죽음뿐이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멀리 있다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직 연기는 가시지 않았다.

내 주위의 땅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두 수행원이 죽자 당황한 녀석이 뒤로 빠져 각종 폭탄을 한꺼번에 던진 것 같았다.

- 쾅!

작은 폭탄이 또 한 번 던져졌다.

폭탄이 내 몸 위에서 터졌다. 체력이 5% 감소했다.

순간 엉뚱한 생각이 났다.

'한번 해 볼까.'

[죽은 척하기 Lv.1 스킬 발동!]

[종족: 해골]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보정: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크하하하하! 확실히 죽은 것 같구나. 칼 좀 쓰나 본데, 호홉기가 다뒤집어져 죽는 맛은 어떠냐?"

'화학탄이라도 쓴 건가.'

죽은 척하기 스킬은 잘 먹히고 있었다.

[스킬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히히 힘!"

인간은 말에서 내렸다.

연기가 전부 가신 뒤 인간이 천천히 다가왔다. 연기가 사라진 뒤 보는 인간의 모습은 꽤 색달랐다.

그는 재킷을 풀고 있었다.

배에 붙어 있는 것은 살이 아니었다. 거기엔 거대한 보우건 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는 실제로 가는 손발과 어울리는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받아라앗!"

- 피리리리릿!

십여 발의 화살이 발사되어 몸 곳곳에 맞았다.

이 정도면 어디까지 하는지 관찰해보고 싶기도 하다.

커다란 자켓 안쪽에는 빼곡하게 폭탄이 매달려 있었다. 반쯤은 방금 나를 공격하는 데 사용한 것 같았다.

"죽어라랏! 아, 이미 죽었지? 하하하하핫!"

놈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 덥석.

"구와 아아악!"

멱살을 잡자, 놈이 인간답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남자에게 궁금한걸 물어보기로 했다.

"다이로 르 루주."

"히, 끼힉, 끼히익!"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보우건을 배에 매달고 있는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린다.

"오늘 특별히 죽을 예정 있나?"

"히이, 히익! 아, 아닙니다!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남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버둥쳤다.

- 퍽!

나는 남자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자켓을 벗겼다.

목 근처에 가늘게 그려진 지렁이가보였다. 얼핏 뱀 같기도 했다.

"그럼 몇 가지 묻겠다."

70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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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죽을 예정 어, 없습니다!"

남자는 떨었다. 열은 흐느낌마저 느껴진다. 협박이 통한 것 같다.

사실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대로 살해한 채, 쓰레기처럼 버리고 가도 무방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남자가 다시 애원한다. 네크론 신사회의 감독관일 거다.

어쩌다 보니 그를 사칭했다.

나와 이 녀석 사이에는 작은 인연이 있는 셈이다. 나는 남자를 다시 한번 내려다본다.

벌어진 재킷 틈으로, 아직도 달려있는 재미있는 물건들이 보인다.

"폭탄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걸 이렇게 하면.

"움직이지 말고."

"앗, 예!"

알지도 못하는 물건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야 쓰나. 그런 건 전문가에게 일임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전문가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

"사실 널 기다린 건 아니야."

"예! 예! 죄송합니다!"

말 그대로다. 보육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네가 온다는 사실은 알았지. 하지만 기다릴 건 없다고 생각했어."

달빛을 받은 녀석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쯤 날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남자가 쓰고 있던 시력 보조 구는 몇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조각난 알이 바닥에 굴러다닌다.

알을 집어서 눈에 박아 줄 이유도,

주워서 보조 구를 맞춰 줄 이유도 없다.

그대로 방치한 채 질문을 던졌다.

"네크론의 감독관인가?"

녀석이 홈칫 몸을 떤다.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다. 살고자 하는 발작처럼 느껴진다.

"예, 예! 맞습니다!"

"여기 온 이유는?"

"혈석 수취와 판매 감독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조직은 어떻게든 자금을 모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답 잘하네."

"감사합니다!"

"잘하는 이유는?"

"그, 그게.! 사, 살려 주실 것 같아서!"

남자가 필사적으로 대꾸한다. 꽤눈치가 빠른 것 같다.

녀석의 짐작대로다. 순순히 대답하면, 놓아 보내 줄 작정이다.

한 번에 그걸 읽어 내다니 레나급 눈치라고 생각했다.

굳이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바다에서 소금 한 옴큼 덜어 낸다고세상이 덜 짜지는 건 아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가장 맑은 물도 소금물이, 아니 소금이 되어 버린다.

악취가 심하고 끈끈한 핏물이 배어나는 소금이 된다.

"그래서?"

눈치 있는 대화 상대란 편리하다.

고통을 가할 필요가 없다. 간단히 추임새만 넣으면 된다.

"황제가, 황제가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저희 조직이 돈을 모아서 전쟁을 지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직은. 전쟁에 투자해서 지분을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배후인가?"

네크론 신사회가 전쟁을 조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남자는 전혀 아니라는 둣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는 전쟁의 배후가 아닙니다! 다만. 전쟁에서 발생할 노예들을 저희가 꽤먹는 거래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노예 거래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가까운 지부는 어디지?"

"가, 가까운 지부. 지부는. 에라스트입니다! 여, 영주가.

그 외에 남자가 말하는 것은 이 미아는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것처럼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저 던지듯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너희 우두머리는 누구야?"

"그, 그건.!"

그때였다. 남자의 목에 그려진 무언가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문신인가?'

가는 선이 조금씩 굵어졌다. 선은 지렁이가 되었다. 지렁이는 점점 두껍고 길어졌다.

꿈틀거림이 지금 막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알 수없었다.

목에 칼이 겨눠지고 있는 터라 그런지 남자는 제 목에서 뭐가 꿈틀거리는 지도 모르는 둣했다.

목에 있는 지렁이는 서서히 뱀의 형상을 갖춰 가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목에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좁은 면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할 수 없었다.

뱀의 머리 부분이 조금씩 커졌다.

남자의 목을 반쯤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 스르르르, 뱀의 머리에 뿔이 돋아났다.

두 개의 어금니가 길게 자랐다. 그제야, 남자는 무언가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으, 으으어어어.! 이, 이게. r그가 목을 손으로 마구 만졌다. 하지만 고개를 아무리 꺾어도 제 목은볼 수 없다.

뱀은 남자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괴한 모양의 뱀이었다.

두 눈이 없었다. 피부에 파묻혀 있었다. 뿔과 어금니만 달린 뱀이 남자의 목을 빙 둘러 조인다.

잘 보이지도 않던 검은 얼룩이, 순식간에 기괴한 뱀으로 변했다.

"히, 흐히, 히이, 흐, 하으아아. r남자가 목을 부여잡고 신음 소리를 냈다. 내 칼이 목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죽지 않도록 칼을 치웠다.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크, 되히헉, 흐키익!"

남자는 괴롭게 컥컥거렸다. 더는 호흡을 뱉어 내지 못했다. 혀가 꼬이며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크, 키, 크히히이익.!"

남자가 흙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피부 위에 그려진 뱀은 마치 발버둥을 즐기는 듯하다가, 잠시 후에 머리를 움직였다.

- 콰득!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피부위에 그려진 뱀이 어금니로 남자의 목을 깨물었다. 밤은 고요했고 남자의 신음 소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콰득콰득,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밤에 씌워진 얇은 장막 저편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끼, 끼히.!"

남자는 목에서부터 천천히 피부가새까닿게 괴사했다. 얼굴이 새까맣게 질려 더는 음직이지 않았다.

발작하던 그의 몸이 축 쳐졌다.

고통에 겨워 온몸의 근육이 뒤틀려있었다.

도와줄 방법 따위는 전혀 없었다.

- 스르르르-

남자의 입과 코에서 까만 연기가 폴폴 홀러나왔다.

목에 남은 뱀 문신이 양옆으로 길게 입을 쫙 벌렸다. 차아아악, 하는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기는 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 부르르!

뱀은 만족한 듯 몸을 한차례 거칠게 떨었다. 그리곤, 그대로 장막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 파르르르.

달빛이 걸린 나무 위로 날다람쥐가 뛰어갔다.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가지 위에 하얗게 내려앉아 있던 달빛이 부서졌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 철컥.

섬뜩함이 느껴졌지만 시체는 조사해 봐야 했다. 칼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몸을 조사했다.

은은한 붉은빛을 내는 신분증을 주웠다. 석궁이나 프레쳐의 신분증과달리, 얼굴이 그려진 부분 아래쪽에 묘한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웬 동그라미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봐야 할인간은 이미 죽었다.

본인이 예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역시도 놀란 기색으로 목을 부여잡곤 컥컥대며 죽은 것이다.

남자의 품 여기저기를 뒤졌다.

특별한 보물은 없겠지만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 짤랑!

품에 두꺼운 가죽 주머니가 있었다. 안에는 은화가 가득했다. 좀 더뒤지자 인신매매 장부도 나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별다른 건 없었다. 나머지는 폭탄 같은 것들밖에 없었다.

'이쯤 해야겠군.'

적당히 짐을 챙긴 뒤 보육원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자 슬슬 새벽이 되고 있던 참이었다.

- 똑똑.

나는 원장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슬라임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라임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흉내 내고 싶어 했다. 대화와 몸짓은 물론이고 먹고 자는 것까지.

물론 실제로 슬라임이 잘 필요는 없다. 그는 잠깐 졸린 척을 했지만 아주 멀쩡한 상태인 게 느껴졌다.

"의뢰한 일은 끝났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엔 너무 쉬웠다. 날 너무 보호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찾아가기도어렵고, 상대할 인간의 숫자도 많았지요. 게다가.

슬라임이 커피를 내리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우셨을 겁니다."

"그런가."

"인간이라는 거, 역시 역겹고 기괴하지 않습니까?"

그가 갑자기 꺼내는 이야기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어차피 인간의 혐오스러운 모습은 질리도록 보아 온 터였다. 고블린 던전에서의 모습이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인간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하핫, 그건 좀 복잡합니다."

슬라임이 머리를 긁적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녹색 점액질을 변형시켜 만들어 낸 것이다.

뭐든지 될 수 있기에, 한계를 가지고 변화하는 아이들이 좋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조금씩 변하는 게 참 사랑스럽다던.

뒤늦은 의문이 떠오른다. 왜 꼭 인간 아이여야 할까?

이자는 어째서 인간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걸까. 뒤늦게 그런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색인 슬라임의 눈동자가 새벽빛 속에서 반짝인다.

눈을 바라본다 하여 그의 의중을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가지고 온 궁금증부터 던져 놓기로 했다.

"궁금한 게 좀 있는데.

"아,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보태 버렸군요. 말씀해 주십시오."

"쓸데없는 소리?"

"인간이 역겹다는 거 말입니다. 궁금한 걸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혹시 이런 현상에 대해 좀 알고 있나?"

오면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슬라임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인상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마법입니다."

그는 머뭇거리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확답을 내놓았다. 잘 알고 있는것 같았다.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곧바로 죽여 버리는 술법이죠. 몸에 심은 각인이 발동되는 방식입니다."

"놈들에 대해 캐낼 수도 없겠군."

"그런 방법으로 조직원을 단속하고있다니, 저열하군요."

"파훼할 방법은 없나?"

각인을 파훼해, 굳이 네크론 신사회를 파헤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라임이 놀랄 정도로 곧바로 확답을내놓아서, 끌려가듯 물어본 것에 가까웠다.

"으음.

문득 슬라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살짝 늘어뜨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고민하는 인간을 흉내 내고 있다.

"저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술자의 힘에 따라서 다르지 않겠습니까? 누가 각인을 새겼느냐가 문제겠지요."

누가, 라는 말에서 묘한 강세가 느껴졌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가 엮인 술법이라면, 결코 풀수 없을 겁니다."

라임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색인 눈을 깜빡였다.

"뭔가 알고 있나?"

"글쎄요. 아직 뭐라고 이야기할 때는 아닙니다만.

"아, 레나에겐 금방 소식이 올 겁니다. 연락받는 대로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잘될^F?"

"다정하시군요. 역량 테스트는 혼자서 충분히 통과할 겁니다. 그럴만한 아이니까요."

슬라임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갑옷을 수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절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야.

나는 갑옷을 내려다봤다. 관통한 화살은 없었지만, 안쪽까지 박힌 화살들이 빼곡했다. 갑옷을 벗어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럼 수리를 시작하겠습니다."

- 꾸르르르슬라임의 몸 일부가 눈앞에서 녹았다. 갑옷 구멍 사이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선택적으로 화살대와 화살촉을 녹여 바깥으로 버리고, 다시갑옷을 봉합했다.

몇 번을 봐도 잘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슬라임은 태연히 작업을 계속했다.

- 치이이익! 치이익!

슬라임의 초록색 손은 꾸물거리는 녹색 액체가 되어, 갑옷 틈 사이사이로 금속을 용해시키고 있었다.

라임은 힘들거나 지치지도 않은, 매우 편안한 표정이었다.

'강하다.'

이런 곳에 틀어박혀 있을 존재는 아니다. 나에게 잘해 주니 그만이긴한데, 생각할수록 기이한 존재였다.

- 치익!

달궈지고 녹았던 갑옷이 형태를 갖추고 다시 식어 갔다. 화살에 뚫렸던 구멍이 모두 메꿔졌다.

슬라임은 갑옷의 핏자국까지 깔끔하게 제거했다.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빛나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역시 대단하군."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나가려고 하던 참에, 라임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71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 (4)

***************************************************

"아, 참. 의뢰의 대가를 말씀드리지 않았죠?"

"대가는 이걸로 충분한데."

빛나는 갑옷을 탕탕 두드렸다.

보상 같은 건 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레나가 있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지도모르지만, 그녀는 지금 없다.

슬라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의뢰주가 준비한 보상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드르륵.

슬라임은 차분하게 뒤편 서랍을 열었다. 흘끗 본 서랍 안쪽에 무언가눈에 익은 게 있었다.

작은 동상이었다. 물론 동상 자체가 눈에 익은 건 아니었다. 사자의 머리를 가진 인간.

- 드르륵.

뭔지 확인하기 전에 슬라임이 부드럽게 서랍을 닫았다.

- 툭.

그리고 꽤 묵직한 은화 주머니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안 주려고 해도, 레나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으음."

"개인적인 선물입니다만, 이것도 받아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라임이 목걸이 하나를 추가로 건넸다. 작은 트럼펫 모양의 흑색 비취가 달린 목걸이였다. 꽤나 정성 들여 만든 것 같았다.

"착용하셔 준다면 기쁘겠군요."

라임이 어쩐지 처연하게 웃었다.

조금 이상한 선물이었지만, 그동안 내게 보여 준 호의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지 싶었다.

"그래, 하도록 하지. 비취로 만들기엔 복잡한 문양 아닌가?"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슬라임 스스로 만든 목걸이인 모양이었다.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 서 있다가 슬라임에게 다른걸 요청했다.

"아, 책을 좀 빌리고 싶은데."

겨울밤은 길다.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추천해 줄 거라도 있나."

슬라임이 천천히 책장을 훌었다.

"〈이 세계의 지배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명의 독서가로서 꽤 즐겁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좀 한가해지면, 필사라도 시작해 볼까 싶은 문체입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소설도 좋지만, 배경 지식을 좀쌓고 싶어서."

시와 소설은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3년간 충분히 읽었다.

그분의 서재에는 바람을 노래하고달빛을 희롱하며, 꽃을 찾고 감정을 탐닉하는 소설로 가득했다.

나는 좀 더,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혀 나가고 싶었다.

문장은 적막하고 내용은 건조하다해도, 그렇게 지식을 쌓아 나가야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슬라임의 얼굴에 잠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감정이 읽히는 것은 드문 일이라 흠칫했지만, 그는 곧다시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 책은 어떠십니까?"

슬라임은 「엠버메어J 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엠버에 관한 책이군."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계신 내용도 많겠지만, 기초적인 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책은 얇았다. 간단히 읽기 좋을 것같았다.

"좋아."

책을 받아서 돌아간 뒤, 누워서 천천히 한 페이지씩 넘겼다.

〈??? 제국과 자유 연합을 이어 주는 좁고 긴 지협地賊. 그 가운데에 서배를 타고 24해리 올라가면. 〉하지만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읽으면서도, 네크론 감독관을 잡아먹던 뱀 문신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계속 신경 쓰였다.

잊혀지지 않았다. 그 문신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너무 작았어.'

하지만 남자의 목에 그려진 그림이 너무 작았다. 확신이 힘들었다.

'다시 한 번 보면 뭔지 알아볼 수 있을까? 그 뱀이.

돌아온 지 사흘째.

열 권 정도의 책을 읽었을 무렵,

반납을 위해 그를 찾아갔다.

'음?'

약간의 한기가 문밖으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 끼이익.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원목으로 만든 문이 조금 무거운 소리를 내며열렸다.

안은 서늘했다.

슬라임이 창문을 열고 서 있었다.

겨울 달빛이 여과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아, 오셨습니까?"

슬라임이 몸을 돌렸다.

창문 쪽에 서 있는 그의 손목 위에는, 회색빛 털을 가진 새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털에는 회오리 문양이 나타나 있었다. 슬라임이 쓰는 전서구였다.

"책을 반납하러.

슬라임이 살포시 웃었다.

"그러셨군요. 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레나가 테스트에 통과했다는군요.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례적으로 빠른 합격이라, 다들 놀라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된 일이다.

슬라임이 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곧 돌아올 겁니다. 그때, 아마 레나가 무언가 말씀드릴 겁니다."

다음 날, 두 명의 새로운 인간이 보육원으로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들은 원장실에서 슬라임과 무언가를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보육원은 몇 명의 고용인이 더 추가되었다. 원장에게 들은 게 있는지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 똑똑.

읽은 책을 반납하기 위해 원장실에 방문했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 똑똑.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슬라임은인간의 습성을 흉내 내길 좋아한다.

장단을 맞춰 주는 건 어렵지 않다.

"들어오십시오."

그제야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슬라임은혼자서 원장실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

창문은 잠겨 있었고, 화분은 사라져 있었다. 커피를 내리는 기구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물통도 거꾸로 뒤집혀져 있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자리를 비울 셈인가?"

"그렇습니다. 따로 말씀드리려 고했지만. 어딜 좀 다녀올까 합니다."

"그런가."

어디를 다녀오냐고 물을 권리 같은건 없다. 그건 이 슬라임의 고유한영역이다.

"금방 또 볼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방을 정리해 가는 모습을 보니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따로 캐묻지는 않았다.

"일단 책은 반납하지."

- 툭.

나는 슬라임의 책상 위에 그대로 책을 내려놓았다. 슬라임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빼곡히 꽂힌 책들을 가리켰다.

"놓아둔 책들은 언제든 자유롭게 보십시오. 마음에 든다면. 가지셔도 무방합니다."

가져도 된다고? 의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책들을 아꼈다.

빌려 읽는 건 내게 얼마든지 허용했지만, 책을 '가져도 된다'라는 말은 한 적 없다.

내가 그에게 당한 유일한 거절이'책을 가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가져도 된다고?"

"그렇습니다. 원하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아이들은?"

"내일 아침에 아이들과 인사를 나늘 겁니다. 그리고 떠나겠지요.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나를 마중하는 그의 말이, 어쩐지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낯선 거리감이 느껴진다.

나는 몸을 돌렸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차례 고개를 흔들었다.

착각일 거다.

거리감이라고? 낯설다고? 사실은 우스운 이야기다. 나는 이 슬라임에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아침이 밝았다. 창밖을 바라봤다.

슬라임이 아이들과 하나하나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혼자 말에 올라타 출발했다.

마차는 그대로 남겨 둔 채였다.

이틀이 더 지났다.

고용인들은 원장 대신 아이들을 성실하게 돌보는 것 같았다. 내가 할일은 없었다.

나는 방에 머물러 있었다.

슬라임이 사라진 원장실엔 가고 싶지 않았다.

항상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면, 그장소만 비는 것이 아니다.

마음 한쪽도 함께 비어 버린다. 틈새가 생기고 그곳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그날 밤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앙칼진 손길이 뒤에서 내 골반뼈가운데를 꽉 움켜잡았다.

"잡았다!"

- 달그락!!!

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펄 정도로 놀랐다.

"몰랐대요? 몰랐대요?"

갑옷도 벗어 놓은 무방비한 상태.

뒤를 내주고 습격을 당했다.

화들짝 돌아봤다. 하지만 등 뒤의 존재는 나보다 먼저 움직였다.

차가운 손을 등뼈 깊숙이 넣어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길래?

내가 오는 걸 몰랐을까? 다른 여자생각을 하셨나요?"

척추를 움켜쥔 채 내 뒤를 빙빙 돌던 목소리가 갑자기 살짝 놀란 기색을 띄었다.

"어? 이건 뭐야? 목걸이잖아?"

차가운 손이 쑥 뻗어 갔다. 근처에둔 흑색 비취 목걸이를 잡아챘다.

"감동이네. 선물하려고 놓아둔 거예요?"

척추를 감싸 잡은 손이 그제야 부드럽게 놓아졌다.

- 달그락.

나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레나가 제 목에 비취 목걸이를 걸며 좋아하고 있었다.

"와, 나랑 잘 어울리네."

슬라임이 준 비취 목걸이다.

강탈당한 걸 다시 빼앗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목걸이는 그냥 내버려둔 채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얼굴이 상했군."

며칠 동안 단단히 고생했는지, 눈아래가 살짝 들어가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핏발도 서있는 게 보였다.

입술이 메말라 살짝 터져 있었고쇄골 옆은 음푹 들어가 있었다.

한차례 목욕을 마친 것 같기는 했지만, 고생의 흔적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저, 상해 버렸나요?"

그녀는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쩐지 잔뜩 과장된 장난스러움이었다. 입 꼬리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느껴졌다.

걱정을 숨길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그녀가 목에 건 비취 목걸이를 바라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레나는 트럼펫 모양의 비취를 손으로 잡아 가슴 안쪽에 넣었다. 그 행동이, 묘하게도 긴장을 좀 더 팽팽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우리. 다 버리고 도망칠까요?"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대답했다.

"무슨 소리지?"

"길드나 이런 거 다 버리고, 그냥숨어 사는 거예요."

"동생이랑 셋이 같이 도망치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든 어쩌든, 우리셋 숨어 살 곳 하나 없겠어요? 아무도 못 들어올 산속으로 가서 살든지, 아니면 들어오는 인간들은 다죽여 버려도 되고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찰랑거렸다.

단단하고 01무져 보이는 그녀의 몸안쪽, 어딘가에서 흔들리는 물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황당한 소리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다."

레나는 분명히 야망과 목표가 있는 인간이다.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은 걸까? 그녀를 여기서 무너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레나가 내게 따졌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죠? 돈도 그동안 많이 모았잖아요. 내가. 내가둘 다 지켜 줄 수 있어요."

인간 여자 따위에게, 지켜지면서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그녀의 저의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냥.

레나가 어깨를 으족했다.

"다 지겨워졌어요."

황당한 이야기였다. 더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도망칠 거라면 너랑 함께할 이유도 없지. 서로 이용하자고 하지 않았나? 도망칠 거면 혼자 해라."

레나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길드에서 지부장이 되기로 한 거아니었나? 성장해라. 성장해서 내게 도움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하지만 도움을 받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 그녀는 이미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

나는 점점 짐만 되어 간다. 내가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요청할 생각은 없다.

그때 였다.

레나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스르르 흘러내렸다.

72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5)

***************************************************

"몰아세우시네요. 묶어서 제 마음대로 끌고 갈 수도 있어요."

레나가 나를 위협했다.

손목에서 홀러나온 건 길고 반투명한 와이어였다.

다용도 와이어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뱀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그 움직임에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며칠 전에 본 네크론 감독관을 죽인 뱀 문신이 떠오르며, 문득 긴장이 온몸의 뼈를 타고 흘렀다.

한쪽에 놓인 칼을 잡은 건, 그 탓이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무심코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눠 버렸다.

스스로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민망함을 덮기 위해 아무렇게나 길게 말을 내뱉었다.

"뭘 망설이는 거지? 길드에서 시험도 잘 끝났을 거고. 넌, 계속 올라갈 일만 남은 것 같은데."

"하아.

긴 한숨을 쉰 뒤, 체념한 어조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시험이 다 끝난 건 아니에요."

"더 해야 할 게 있나?"

"제가 길드에서 올라가는 걸 원하신다면, 도와주실 게 있어요."

"말해 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홀러나왔다.

"기사님을 꼭 그들에게 데려 와이^

한다고 하더군요."

당황했다.

"나를 말인가?"

"네. 구체적으로 언급했어요. 함께 오실 건가요?"

"나는.

"그들은 알고 있었어요. 인간이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알고 있다고?' T&T는 인간의 길드다. 녀석들이 갑자기 나를 원하는 건 이상하다.

정보 길드이니 내 정체를 아는 건 그렇다 쳐도, 정체를 알고도 나를 원한다는 건 더욱 이해가 어렵다.

내게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걸까.

"가시겠어요? 자세한 사항은 저도 몰라요.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 들은 게 아니니까요."

"아무 설명 없이 날 데려오라는 말만 했다는 건가?"

레나가 어쩐지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와 시간을 말해 줬어요. 마지막 절차라고 했고요."

"네가 간부가 되는?"

"이 절차를 거치면, 지부장 자리정도는 '남아돌 거'라고 했어요."

레나는 미래형에 미묘하게 강세를 줬다.

"남아 '돌 거라'고?"

"그게 불길한 점이죠. 무슨 말 을하고 싶었던 걸까요?"

"으음?"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감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지금 저랑 같이 가는 거, 돌이킬수 없는 선택이 될지도 몰라요. 감이 안 좋아요."

레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감이 좋다. 지금껏 그녀의 말을 따라서 손해 본 적은 없었다.

반면 납골당에서는 끝까지 말을 안 들어서 레나를 고생시키고, 결국 알수 없는 푸른 갑옷의 기사에게 몸에 반으로 쪼개져서 죽었다.

'관둘까?'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나아가 보고 싶었다.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알고싶은 것들이 많았다.

이쯤에서 과감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도망치는 것도 돌이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네 길드 커리어는 끝장일 거다."

촉촉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깟 길드, 별로 상관없는데.

'상관없다고?' 내 쪽에서 상관있다.

레나를 지부장으로 만들어〈시나리오 클리어〉를 달성할 경우,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알고 싶었다. 꺼리는 레나에게 억지를 썼다.

"이번에는 내 느낌대로 가 보자."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는 확신은 힘들다. 악의를 갖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왜 부르는 건지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최악의 경우,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냥 죽으면 된다.

'해쳐도 나만 해치겠지.'

길드는 시험을 치렀다. 레나를 한번 온전히 놓아주었다.

굳이 다시 불러서 해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거 알아요? 가끔 보면. 길드활동을 하고 싶은 건 제가 아니라 기사님 같아요."

"농담이 심하군. 아, 원장이 사라졌는데.

"원장님이요?"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원장실도안 보고 곧바로 내 방부터 찾아온 모양이었다.

"? 으."

- xn ?

레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도 안 하나?"

"미심쩍은 게 있어서. 최대한 빨리 출발하죠. 동생 얼굴만 보고.

챙길 것만 금방 챙길게요."

날이 밝았다. 마차에 올랐다. 슬라임이 마련해 둔, 우리가 계약해서 전용하는 마차였다.

방향은 북동. 레나가 길을 알았다.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 덜커덕. 덜커덕.

겨울의 햇빛은 창백했다. 땅을 녹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언 땅은 굴곡이 되었고 우리는 혼들렸다.

옆을 바라봤다.

레나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무릎에 따듯한 담요를 덮은 채 내 어깨에 기대어 있다.

덜커덕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그 자세가 편한지 두어 시간 동안을 계속 그렇게 기대 있었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잠들었는지 혹은 잠든 척을 하는지 더 이상 판단할 수는 없다.

짧은 시간, 그녀는 그만큼 변했다.

그녀의 3개월 동안 내 20년과 비교하기 힘든 큰 변화가 있었다. 더는 보호해 주거나 키워 주는 입장이 아니다.

문득, 무언가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레나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같은 눈빛이었다.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던졌다.

"아직 인가?"

"한참 남았어요. 그냥.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앞에 표지판이 보였다. 수도로 가는 길과, 동부 산맥으로 가는 길로 나눠졌다.

우리는 그 사이로 갔다.

인적이 드물어졌다. 새소리만 가끔 들렸다. 사람은 없었다. 산길을 지나고 황야를 지났다.

양옆에 네모난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레나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네요. 이제 곧 도착이에요."

양쪽에 돌무더기를 가득한 도로를 얼마간 지나서, 레나가 말했다.

"여기서 내려 줘요."

마부는 마차를 한쪽에 세웠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막 어두워지는 하늘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시간 때문만은 아닌것 같았다. 이 장소에는 태양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으음.

커다란 석재 더미가 도로 양쪽으로 빼곡해 미처 보지 못했다. 도로 옆에 움푹 파인 대분지가 있다.

규모는 웬만한 콜로세움 다섯 배.

인간을 위한 장소가 아닌 느낌이다. 규모와 크기가 그러했다.

"이쪽이에요. 약속 장소."

레나를 따라 걸었다. 아래로 가파른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은 수직으로 뚝 꺼져 내려갔지만 중간부터는 계단식이었다.

레나는 그 절벽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바위를 몇 번 연달아 디뎌 내려간 뒤중간 지점에서 손짓을 했다.

"내려오세요."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나를 불러낸 무리는 무슨 짓을 할생각인 걸까. 목적과 정체가 무척 궁금해졌다.

당장이라도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장소에 대한 불안이나후회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지."

곳곳에 돌출한 바위를 붙잡고 내려갔다. 내려가며 본 절벽 곳곳에 거대한 동공이 있었다.

'음.

자연적인 동공은 아니었다. 끌과정으로, 먼 옛날 정성 들여 깎고 다듬은 석굴인 것 같았다.

석굴들에는 기둥과 지붕이 양각되어 있었다.

'마치 집 같은데.'

죽은 자를 위한 무덤 같기도 했지만, 산 자가 기거해도 전혀 무리 가없을 정도로 석굴들은 크고 깊어 보였다. 어둡고 깊은 안쪽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 쿵.

중간 지점에 발을 디뎠다. 기다리던 레나가 지나가는 둣 뱉었다.

"망토는 거추장스러웠나요?"

"타 버렸다."

"갑옷은 줄곧 입고 계시네요."

딱히 해 줄 말은 없었다.

레나는 됐다고 하며 앞장서 갔다.

우리는 그때부터 계단식으로 깎인 절벽을 뛰어 내려갔다.

경사는 가팔랐지만 계단 하나하나가 무척 넓어 내려가기 쉬웠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바위 곳곳에 새겨진 낯선 글자들과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구경했다.

"신전 같군."

"그렇죠? 별로네요."

레나는 도형들을 흘끗흘끗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신을 안 믿나?"

"알지도 못하는 기만자의 호의에기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레나의 말을 홀려들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 거대한 분지는 볼수록 누군가를 섬기는 신전 같았다.

바위로 만들어진 커다란 조각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거대한 사자, 뱀, 곰. 대부분 쩍쩍 갈라졌고 반쯤은 무너져 있다.

계단이나 석굴, 절벽 자체도 마찬가지다. 지축이 마구 뒤틀려, 찌그러지고 기울어지고 폭발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래전, 아주 커다란 지진이 있었던 장소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자, 뱀, 곰 조각들이 아련하게 눈에 익었다. 어떤 돌에는 커다란 트럼펫이 조각되어 있다.

'저건.'

레나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슬라임에게 받고, 내가 그냥 줘 버린 흑색 비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것 역시 트럼펫 모양. 크기는 달라도 모양은 비슷했다.

'연관이 있는 건가?'

생각을 끝맺지 못하고, 분지 가운데에 섰다. 거기엔 거대한 돌로 된 커다란 단이 있었다.

절벽에 빼곡한 석굴들에 일제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늦지 않게 왔어요.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어요."

"이건 무슨 단일까.

"제물을 공양하는 제단이군요."

거대한 단을 바라봤다.

가로세로가 15미터는 훌쩍 넘고,

높이가 5미터는 될 것 같은 계단식제단이 었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치러지지 않은 둣, 혹은 아주 옛날에 치러진 듯핏자국도 시체도 없었다.

거대한 계단 한 칸마다, 별자리가 움직인 성흔星疫들과 기하학적인 무늬들만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건 이상하게 멀쩡하네."

다른 조각과, 절벽들과 달리 제단만은 손상되지 않은 채 반듯했다.

재질도 다른 것 같다.

"불길하기 짝이 없네요, 정말."

우리는 그 제단에 가서 섰다.

그때, 달이 떴다.

흠택 젖은 만월滿月이 대분지의하늘, 그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원형 경기장 곳곳에 있는 무너진 조각들이 촉촉한 달빛을 받았다. 일제히 조각들에 생명이 부여되어, 마치 오물오물 움직이는 듯했다.

- 달그락.

나는 깨달았다.

조각들은 너무 조악한 데다 너무작았고, 실체와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몰랐다. 달빛을 받은 조각들을 보자 그제야 느낌이 왔다.

여기는 마왕의 제단.

단정왕端正王 푸르손.

그의 신전이다.

신장 30미터의 검은 곰, 아인슈타인을 타고 다니며 사자의 머리를 하고 트럼펫을 불어 대는 마왕.

스물여섯 군단을 한 손으로 지휘하는 전격電擊의 마왕. 이 장소의 부서진 조각들뿐만 아니다. 그의 상징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슬라임이 준 목걸이의 트럼펫.

그리고 그의 서랍 속에서 흘끗 봤던 사자 머리를 한 인간. 모두 푸르손을 상징하는 물체였다.

게다가.

'마왕의 상징이라면.

조각들의 정체를 깨닫자 연달아 이해되는 게 있었다.

네크론 감독관의 목에 그려져 있던 문신. 비밀을 누설하려 하는 그 남자를 목 졸라 죽이고, 혼을 잡아 삼킨 뱀.

그 뱀 역시, 다른 마왕을 뜻한다.

'보티스.'

지옥의 육십 군단을 지휘하는 자.

날카로운 뿔, 긴 어금니를 가진 눈먼 마왕.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보면 고통을줄 생각에, 긴 혀를 내밀고 빼곡히 가시가 박힌 온몸을 뒤틀며 즐거워하는 추악공醜惡公 보티스.

네크론 감독관의 목에 그려져 있던 문신은 그의 모습을 조악하게 재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네크론은 보티스, T&T는 푸르손의 영향 하에 있다는 건가.

머리가 복잡했다.

'마왕들이. 이미 인간계에 손을 뻗은 거라면.'

마왕 강림은 10년 후에 일어날 일.

하지만.

세력을 전개해 놓는 것 정도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이 대분지.

상징이 새겨진 조각들과 제단은 한눈에 봐도 매우 오래된 것들.

마왕들에 대한 신앙은.

예전부터 곳곳에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알 방법이 없었을 따름이다.

첫 번째 삶의 20년.

그 시간은, 엉뚱하고 초라한 장소들에서 달그락거리고 부서지기를 끝없이 반복했을 뿐이니까.

비참했고, 그 비참함에서 헤어날 수 없던 20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 터벅터벅.

달빛이 비치는, 주변의 수많은 석굴에서 하나둘씩인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73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6)

***************************************************

수십 명의 '인간'이 곳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우리를 둘러쌌다. 그들과의 거리는 꽤 멀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압박감이 느껴졌다.

거대한 대분지. 천 명을 동원해도전부 둘러싸는 건 어려워 보인다.

그 넓은 곳에서 고작 수십 명의 인간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수천 명에게 포위당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빙 둘러봤다. 인간들의 외모는 다양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에, 어깨가비정상적으로 우람한 역삼각형 체형의 남자도 있었다.

두껍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자도 있었다.

우아하게 선이 떨어지는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가슴은 제 머리보다 컸지만 기이하게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리고도 가장 험한 절벽 사이를 자연스럽게 걸어 나와, 긴 계단 끝에 걸터앉았다.

그밖에도 수십 명의 인간이, 다들편할 대로 앉거나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를 짙푸른 터번으로 꼭꼭 싸맨 노인이 정면에서 다가왔다.

그가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터번은 두껍고 커다랬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레나에게 물었다.

"아는 얼굴들인가?"

"몇몇은 그래요. 간부 승급 시험관도 보이네요."

레나는 왼쪽에 얌전히 서 있는 앙상한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레나에게 인사한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터번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알아볼 수 없는 룬 문자들이 나선으로 복잡하게 양각되어 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초대에 응해 주어서 고맙네."

걸치고 있는 회색 로브가 무척 어울렸다. 우스꽝스럽던 루비아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는 평생 저런 로브만 입어 온 자 같았다. 지팡이가 스스로 조금씩 떨리며 하얀빛을 냈다.

"당신은 마법사인가?"

"그냥 초라한 마술사라네."

반복되는 시간에 대해 물어볼까 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제국 3본부장 레트릭 아에자르. 이쪽에 서있는 자들은.

노인이 넓게 지팡이를 움직이며,

주위를 가리켰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이네. 대부분 T&T의 간부들이라네."

"무슨 뜻을 함께한다는 거지?"

"우리는.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뜻에서 모였다네."

인간을 줄이고자 하는 뜻이라.

"너희가 T&T를 대표한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냐."

"길드 내부의, 작은 계파 정도라고생각해 주시게."

레나가 끼어들었다.

"작지 않잖아요? 간부 승급 시험은 당신들이 꽉 잡은 거 같던데?"

노인이 웃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적지. 하지만 그 말대로 힘은 강하다네. 자리는 물론 넘쳐나고. 지부장을 원하나? 기록 없는 정보 열람 권한?"

"흐응."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분석과? 수사대? 처분 전문가? 모두 얼마든지 줄 수 있다네. 지금 당장이라도 말이야."

레나에게는 매우 좋은 제안이다.

하지만 중요한 의문이 있다. 노인에게 물었다.

"레나야 그렇다 치고, 나는 대체왜 부른 거지."

노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르지 않을 수 있겠나?"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자네들의 행적을 줄곧 조사했네.

놀랄 정도로 빠르게 부각하더군."

'너무 눈에 띄었나.'

"레나는 이해할 수 있었어. 〈재능〉

은 인간의 것이니까. 특출한 자들이 있지. 하지만.

노인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네 같은 해골은 정말이지 처음 본다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무덤에서 일어나자마자 네크론의벌레 두 마리를 죽이고, 납골당에서한동안 멍청한 인간 모험가들을 학살하고, 위험해질 때쯤 재주 좋게 빠져나가더군."

"웹 슬 링거를 불태우고, 유블람의흉악한 경비병들을 몰살한 데다가 타락한 켄타우로스, 구울 영주와 맹독 하이에나를 살해하다니.

죽 듣고 보니 좀 민망했다.

"자네가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벌어진 일이야. 자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지금까지의 행적을 모두 조사한 듯하다. 망치와 석궁을 죽인 것까지 아는 건 조금 놀라웠다.

'정보 길드라는 게 허명만은 아니었나. 하긴.

지금까지 쾌적하게 성장해 왔다.

슬라임이 제공해 준 최적의 장비.

빈틈없는 정보들. 그 덕에 한 번도 위험에 빠지는 일 없이 무척 빠르고 안전하게 성장해 왔다.

슬라임은 T&T 소속.

그걸 생각하면, T&T의 역량이 높은 수준인 건 당연한 일이다.

손바닥 안에서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구나, 하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져잠시 침묵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우린 자네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네."

엉뚱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새로운 세상이라고? 왜 그런 걸 만들려고 하지?"

노인이 진지한 어조로 말한다.

"최근 고블린 던전에 다녀왔다고 들었네. 살아 있는 고블린의 머리와 심장을 쪼개서, 안에 있는 혈석을 추출하는 곳에 말이야."

잘 쪼개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던고블린 시체들이 떠올랐다.

"그랬지."

"최음 가스를 부락에 살포해서, 고블린들을 강제로 번식시키지."

"다 자라지도 않은 아이의 머리와 심장마저 쪼개는 모습을. 전부 자네 눈앞에서 보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가설득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표정으로, 노인이 말을 이어 간다.

"자네는 그들을 구원했네. 도망친고블린들이 모두 자네를 칭송했어.

부족의 구원자라고 말이야. 자네는 그들의 영웅이라네."

- 짝짝 짝짝.

노인이 박수를 쳤다.

주위에서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사고와 행동을 원하는 대로 몰아가려는 박수 따위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끝까지 들을 생각이다. 요란한 박수가 한차례 지나갔다.

"자네가 살던 납골당은 어떤가. 인간들은 해골의 목숨만 억지로 붙여놓은 상태에서, 끝도 없이 착취하지 않았나. 거긴 인간들의 경험치 공장이었네."

노인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다.

내가 겪어 온 세계가 그러했다.

- 스르록.

다음 순간, 노인은 두꺼운 푸른 터번을 풀었다.

이마에는 잘린 뿔이 있다. 잘린 단면에는 붉은 기가 돈다. 잘린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다.

'사슴인가?'

"내 동족들도 마찬가질세. 인간에게 사육당하고 있지."

사슴의 뿔은 인간이 좋아하는 약재가 운데 하나다. 고블린의 혈석과 비숫한 용도로 쓰인다.

"신경이 살아 있고 피가 도는 뿔을잘라 내고, 다시 잘라 낸다네."

"빨리 자라라고 목에 영양제를 꽂고, 피까지 뽑아 마시지. 병에 걸려죽을 때까지 말이야."

"그런가."

"죽으면 그 시체는 냉동고에 보관하다가 갈아서 다른 사슴의 먹이로 준다네."

"네 뿔도 인간에게 잘린 건가?"

"내가 직접 잘랐지. 동족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네."

'하긴.' 저런 존재감을 가진 이족異族이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노인이 뱉어 놓는 이야기는 전부 알고 있는 거다.

구태여 공감을 유도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들이 어떤 종족이라는 건내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모든 타자池者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나 역시 인간에게서, 언젠가 만날 마스터를 지킬 작은 영역을 만들 기위해 싸우고 있다. 서큐버스님이,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런 꼴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비슷한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네. 세계를, 이대로 놓아두어야 하겠나?"

"어쩌자는 거냐."

"균형을. 조금 맞추고 싶네."

"균형?"

"인간은 세계의 병病이 되었어. 증상을 약화시켜야 해. 일단. 숫자부터 대폭 줄여 봐야겠지."

말은 좋다. 인간이 사라지는 만큼,

다른 이족異族과 마물魔物이 번성할 것이다. 그걸 굳이 균형이라고 부른다면 균형이리라.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 일을 누가 할 수 있지?"

인간은 이미 이 세계의 지배자다.

그 지배는 너무나 깊고, 너무나 견고하다. 나는 말을 이어 갔다.

"폭력의 우열 문제다. 당위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인의 눈이 살짝 꼬리를 그렸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호오. 물론 자네 말 대로라네. 힘의 문제겠지."

"멸종되거나 가축이 되거나, 숨어있는 이족異族들이 그런 걸 할 수있단 말인가? 이건 분열의 문제도 아니야. 죄다 끌어 모아도 인간에게 상대도 안 될 텐데."

의외였다. 내 말에 노인은 조금도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나보군. 훌륭해. 역시 멋진 친구야. 물론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네."

"그렇다면?"

"인간은. 전쟁을 일으킬 걸세. 우리는 거기서 흐르는 피를, 위대한왕또께 바치면 된다네."

푸르손을 말하는 건가. 노인이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왕께서 강림하실 걸세. 스스로 정화淨火가 되셔서, 인간들을 소각하실 거야."

"왕이라면. 저자 말인가?"

나는 주위의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곰을 타고 사자의 머리를한 인간의 조각.

노인이 진한 감탄사를 홀렸다.

"역시. 눈치가 정말 대단하군. 범상치 않아. 지식인가? 신화에 대해알고 있는 건가?"

"뭐, 그럭저럭. 푸르손 아닌가?"

내 말에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노인이 고개를 몇 번이고 크게 끄덕였다.

"그분의 진명을 알다니! 정말 박학다식한 친구로군. 그렇다네. 설명도 필요치 않겠어."

20년 전에서 돌아왔으면, 세계에강림한 마왕들의 이름을 모르는 편이 이상하다.

"바로 그분께!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바칠 생각이네. 제사는 준비되어있어. 공양 받은 왕께서 강림하시면. 인간은 끝이라네."

나는 주위를 쭉 돌아봤다.

이런 그룹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삶을 돌이켜 보았다.

확실히 이때쯤 황제가 전쟁을 일으킨다.

이런 회동을 가질 정도라면. 이런 정도의 조직이라면.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너희가 전쟁을 조장했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황실의 의지라네."

주위의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저, 전쟁을 좀 더 소모적으로 만들 생각이라네. 휴전을 방해하고, 전쟁 영웅을 계속해서 조작할 거라네. 제국과 연합은 서로를 끝없이 증오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걸세."

노인은 잔뜩 들떠 있다. 한없이 진지하다. 제 계획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나는 이들이 가여웠다.

계획은 반만 성공한다. 전쟁은 길어지고 마왕은 강림한다.

하지만 마왕은 용사들에게 밟혀 죽고, 맞아 죽는다.

이들의 신은 응답을 준다.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제물로 받아푸르손은 실제로 강림한다.

그러나 차라리, 이뤄지지 못한 신앙이 아름답다. 세계에 강림한 신이, 걸레처럼 찢겨 죽는다면 신자들은 어떤 마음이 될 것인가.

물론 그들의 마음까지 신경 써 줄 여유는 없었다.

마왕들은 적어도 10년 동안은 인간은 마음껏 유린한다.

이자들은 거기에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어쨌건, 약간 더 실용적인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74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7)

***************************************************

"뭐든 말하게."

"별건 아니고. 제국이 어디부터칠 거라고 생각하지?"

노인은 고개도 갸웃거리지 않고 확답을 내놓았다.

"그야 엠버겠지."

놀랐다. 알고 있다는 건가.

"그곳은 너희 본부 아닌가?"

"물론일세. 당연한 얘기지만, 엠버에서도 알고 있다네."

"그러면.

"엠버는 전쟁을 막으려고 했네."

"그런데?"

노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 대응은 실패했네."

슬라임이〈대응〉에 대해서 말하던 게 기억났다.

"가장 강하고 가장 흉악한 대응이. 있었네. 하지만 그 대응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네. 이후 전쟁준비는 훨씬 빨라졌지. 황실이 단단히 각성한 것처럼 말이야."

'전쟁을 막으려는 대응이 실패했다고? 그렇다면.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거, 너희가 막은 거냐?"

"으하하 하하.!"

그때였다. 노인이 몸을 구부리며 크게 웃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내리찍는 달빛을 흔들었다.

원형 계단 곳곳에 서서, 사방에서우리를 내려다보는 인간들 가운데몇몇이 킥킥거리며 비웃었다.

"미안하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서. 엠버의〈대응〉이 뭐라고 생각하나, 자네?"

물론 알 리가 없다. 침묵했다.

"나 따위가 막을 수 있는 대응은 절대 아니네.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들어도 막을 수가 없어. 우리가 막으면 제국이 못 막겠나? 그 라위대응이라면 엠버의 대응이라고 불릴 수도 없지."

"그럼 누가 막은 거지?"

"누가 막은 게 아닐세. 그건 그냥〈실패〉한 거라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대응은 누가 막을 수 있는 게아니었는데. 결국 황실은 계속 전쟁을 준비하지 않나? 그럼〈실패〉했다고 봐야지."

노인의 어조가 진중해졌다.

"세계의 뜻인지도 몰라. 운명이야.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우린물살을 타는 것뿐이네."

"이렇게 쉬운 일은 없지. 함께하세.

자네들도〈힘〉을 가지게나."

"길드 권한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것도 물론이지. 하지만 진짜〈힘〉을 주겠다는 말일세.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몸에서 뭉클한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우묵하고 맑은 그의 눈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느껴지는 존재감이 순식간에 수십 배로 증폭됐다.

주위에서도 인간들의 두 눈이 검게 물들어 가며, 모습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노인의 지팡이가 연기에 녹아 스르르 사라졌다. 뿔이 잘린 자리에서, 머리카락보다 한참 긴 갈색 뿔이 위로 쑥 솟아났다.

뿔은 뒤로 살짝 구부러졌다가 중간쯤에서 다시 앞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1 자 모양.

가장 높은 끝 부분은 화려하게 펼쳐졌다. 날개 같았다. 넓게 긴 뿔에는 룬 문자가 빼곡했다.

- 뿌에에에에!

웃음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났다.

얼굴이 앞으로 길어지고 온몸에 하얀 털이 수북해졌다. 노인은 곧 네발로 섰다. 키는 성인 남자만 하고, 길이는 4미터가 넘는 커다란 사슴이 되었다.

새하얀 털이 달빛을 받아 환각처럼 빛났다. 목에는 검은 각인이 새겨져있었다.

'푸르손의 문양인가.'

인간들이 하나둘 변해 갔다.

- 투두두둑!

2미터가 훌쩍 넘는 키의 남자는,

터질 듯한 근육이 실제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몸이 급격히 거대화되며 전신에 긴 회색 털이 빼곡하게 덮여 간다. 코와 입이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칼날 같은 이빨이 보였다.

- 아우 우우우!

남자가 달을 향해 울부짖었다.

눈가의 붉은 흉터가 짙어지며, 은색 손톱이 길게 돋아났다.

- 파드득! 파드득!

울긋불긋한 날개를 펼친 하피도 있었다. 하피는 반은 독수리, 반은 여자의 육체를 가진 마물이다. 나체이지만, 허벅지 아래와 팔꿈치 아래부터는 깃털로 뒤덮여 있다. 이빨은 날카롭고 성정은 포악해 보인다.

- 사르르륵! 사르륵!

하반신이 수 미터로 주욱 늘어져꼬리를 치며, 몸 곳곳에 비늘이 빼곡히 돋아나는 여자도 있었다.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근육만 살짝 부풀어 오르며, 검은 핏줄만 얼굴에 몇 가닥씩 서는 인간들도 드물게 보였다.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눈동자는 모두 검게 물들었다.

몸 주위에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피어오르거나, 전기처럼 파직거리며떠다닌다.

주위를 둘러싼 압박감이 수십 배로중폭되는 것 같았다.

공간이 꽉 조여 왔다.

'한심하군.'

용사들에게 벌레처럼 썰릴 마왕.

눈앞의 이들은.

그 마왕 앞에 직접 서지도 못할 한참 아래의 종복들이다.

몇 번이나 다시 살아났으면서도,

고작 그런 자들에게 압박감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했다.

뭔가 보여 주려는지, 사슴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

앞발 주위에는 검은 안개가 진하게 뭉쳐 있었다.

사슴이 앞발을 강하게 내리쳤다.

- 콰광!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 쩌저저저적!

단단해 보이는 돌로 된 계단이, 얇은 유리가 깨지듯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수십 가닥으로 난 바닥의 금 사이로 검은 뇌전이 지지직거렸다.

전격電擊의 마왕.

저건 푸르손이 가진 힘의 미약한 파편에 불과하다. 실제 마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힘에도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끼는 게 내 현실.

바닥을 내리친 사슴이 자신만만한태도로 나를 본다.

새까맣고 우묵한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주시한다.

공기 중에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의 축복이라네. 지금 자네가 가진 힘을 몇 배는 증폭시켜 줄 수 있어.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 왕의강림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힘 아닌가?]

"??? 그런가."

어차피 전쟁은 벌어진다.

저런 힘이라면, 격화를 조장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사슴을 향해 물었다.

"힘의 대가는?"

[그저 믿으면 된다네. 그분께서 강림하실 거라는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면 되네.]

믿음은 취향이 아니었다. 침묵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각인을 새기는 대로, 그분의 힘이 곧바로 몸에 임한다네. 이보다 더명확할 수 있겠나?]

사슴이 앞발로 제 목을 가리켰다.

"그분과의 통로만 열어 놓으면 되네. 만월의 밤마다 정해진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된다네. 의식은.

사슴이 길게 의식을 설명했다.

나는 문득 다른 궁금한 게 생겨,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

"너희는 그냥 인간 아닌가?"

모습이 변형되지 않은 채, 그냥 눈동자만 검게 물들어 있는 인간들이 곳곳에 몇 명이 있었다. 그러자 한인간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맑은 회색빛이 되기도 했다가, 다시 검게 물들곤 했다가를 반복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로브를 벗었다. 앙상했지만 제법 미남자였다. 여자로 착각할 만큼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로브 아래로 흘러내렸다.

"맞습니다. 저는 그냥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에 오나?"

남자가 어깨를 으쑥했다.

"동족 혐오는 꽤 흔한 삶의 방식 아닙니까?"

"그 동족에 너도 포함되는데?"

"자기혐오는 더 흔한 삶의 방식이죠남자가 다시 어깨를 으쪽했다. 그리고 다시 로브를 썼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항상 여러분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 녀석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 발호 이후.

마왕군에 가담하는 인간은 열 명,

혹은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는 되었다.

대세에 따르는 게 좋아서 그런 자들도 있고, 이미 흑마법을 연구하고 있어 마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만 명 가운데 하나 정도는 진심으로 인간을 미워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이 멸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동족을 공격했다.

푸른 로브를 쓴 남자가 뒤로 몇 걸음 물러갔다. 사슴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자네도 각인을 받게나. 균형을,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걸세.]

하지만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 패배할 광대 무리와 어울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너나 실컷 해라."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말했다.

"굳이 말리겠다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실패할 왕에게 삶을 의탁하는 것도 선택이다."

"신성 모독이다!"

하피가 붉은 날개를 거세게 파닥이며 소리쳤다.

"신성 모독?"

나는 비웃었다.

"지금의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능성을 보고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거늘!"

옳은 말이다. 첫 문장은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눈앞의 하피 하나 당해 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나의 성장 속도는 한계에 다다랐다.

가능성을 보고문을 열어 주었다고? 그렇다면 더더욱 놈들과 함께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강해지는 느릿느릿한 속도를 보고는 약하다고 실망해 버릴 거다.

힘을 증폭시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놈들이 새긴 각인이다음 생애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꺼려졌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날지 모른다. 그 기간 내내 푸르손의 노예가 되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떤 힘을 준다고 해도 사양이다.

"건방진 놈! 얌전히 받아라!"

하피는 자꾸 짖어 댄다. 성난 외침을 무시했다. 레나를 돌아봤다.

ㅡ넌 어쩔 셈이지?"

"했으면 좋겠어요?"

어떨까. 그녀가 이들에게 붙게 되면, 시나리오는 간단히 달성할 수있다. 내 궁금증은 해결될 거다. 하지만 남은 시간선의 그녀는? 푸르손의 노예로 살아가다가, 그의 몰락이후에는 모든 힘을 빼앗긴 채 비참한 최후를 맞으리라. 나는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10년은 즐거울지도 모르지. 그 하지만 그 뒤에는 몰락한다. 모든 힘을 렛길 거야."

"예언자 나셨네. 정말, 몰라서 물어요? 100년을 잘나가도 혼자서는 안해요. 같이한다면. 오늘 죽어도 상관없어요."

레나는 팔짱을 끼고 나를 흘겨봤다.

[거절할 줄은 몰랐네만. 의외로군, 그래. 모든 인간을 가축으로 만들겠다는 얘긴 아닐세. 그랬다면 저들이 함께하지도 않았겠지.]

사슴이 턱짓을 하며 주위의 인간들을 가리켰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의 뜻에 이의는 없다. 그냥.

싸움에 질 개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때 였다.

"신성 모독이다!"

- 퍼드드득!

좋아하는 단어라도 되는 걸까.

내 태도에 열이 뻗쳐 있던 하피가그 말을 또 다시 내지르며 빠르게 날아왔다.

깃털 사이로 빠져나온 길고 날카로운 발톱에는 파직거리는 검은 기운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빠르고 강해 보였다.

'막을 수 있을까?'

레나가 소리쳤다.

"멈춰요! 곱게 나가게 해 주지 않으면.

그녀는 갖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바닥에 특 놓았다.

손을 획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낭입구가 자동으로 풀리며, 빼곡히 박혀 있는 폭죽 발사대가 드러났다.

"이게 다 하늘로 쏘아지게 되어 있어요. 제국군 신호탄이에요!"

하피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저런 건 또 언제 홈친 거야?'

침음과, 매도하는 소리와 비웃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레나는 굴하지 않고 끗끗이 할 말을 했다.

"여기서 이게 쏘아지면, 당분간 여긴 뭔가 하고 수색이 들어오겠죠?

귀찮은 거 싫잖아요. 그냥 우릴 보내 주지 그래요?"

75화 이 세계는 구원되어야 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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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 수호자! 봄의 투구! 새벽의 랜서!"

레나가 앙칼지게 외친다.

사슴이 움찔했다. 긴 뿔이 아래부터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다.

"여기에서 쏘면, 개네한테 전부보이거든요?"

레나가 말을 잇는다. 호명된 이름들을 안다. 제국의 기사단이다.

모두, 전장에서 한 번쯤 들어 본이름이다.

그들의 주둔지가 이 근처라는 건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조사하고 준비했다. 대단한 여자다.

아무런 대비도, 생각도 없이 여기까지 온 나와는 다르다.

그때였다.

- 쿵!

사슴이 발을 굴렀다.

하피를 노려본다. 두 눈에서 새까만 기운이 일렁인다.

[물러나게.]

의지가 허공에 전해진다. 하피는 날개를 접었다. 잠시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 파드드득 하고 날개를 쳤다. 다시 뒤로 날아갔다.

레나가 내게 말했다.

"마음 안 변했죠?"

뭘 묻는지 안다. 저들에게 붙지 않을 거냐는 질문이다.

"각인은 안 한다."

그녀의 안색은 어두웠다.

"역시, 아무래도 힘들 거 같아요."

"탈출 말인가?"

"살아남는 거요."

그녀의 배낭을 바라봤다. 안은 뾰족한 폭죽으로 빼곡하다.

일단, 눈앞의 사슴에게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가요."

앞으로 한 발 내디딜 때였다.

? ㅍㅍ피. I거친 울음소리가 들린다. 공기가 떨려 온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왼쪽이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고개를 한참 위로 꺾어야 마주할 수 있었다.

'늑대인가.'

몸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며, 달을 향해 울부짖던 웨어울프.

그가 두 발로 서서 으르렁거렸다.

밤 전체가 나를 향해 적의를 표하는 것 같다. 무겁고 흉포한 압박이 느껴졌다.

'커다랗군.'

인간형일 때도 2미터가 넘었다.

투두둑 근육이 터지며 변한 뒤에는 3미터에 가까웠다. 부피로 따지면 여섯 배는 늘어났을 거다.

온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았다.

그러나.

움직임은 조금도 둔하지 않다.

- 휙! 휙!

늑대는 장난을 치듯 절벽 사이를 오갔다. 한 번에 제 키의 몇 배를 가볍게 솟아올랐다.

회색 번개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늑대가 거대한 입을 열었다.

"허풍일지도, 모른다."

우리에 관하여 하는 이야기다. 목소리는 겨울밤처럼 낮았고, 장례식종소리처럼 굵었다.

웬만한 자들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풀려 버릴 거다.

'진다.'

부딪친다면 무조건 우리가 진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저 늑대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근처 인간, 와도 좋다. 개미처럼 약하다. 개미보다 숫자 적다."

말이 조금씩 끊어졌다.

늑대는 절벽 계단 위에 서 있다.

언제든 뛰어내려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자세다.

회색 털에서 윤기가 난다. 그 위로 새까만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칼날 같은 이빨, 길게 자란 손톱에도 검은 기운이 일렁인다.

"어휴, 저 새끼 눈깔 좀 봐. 뭐가 저렇게 살벌해?"

레나가 투덜댔다. 늑대에게 느껴지는 압박감이, 그녀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온몸으로 흐른다. 저 정도 크기의 웨어울프는 존재만으로도 재앙.

여기서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문득 궁금하다. 늑대는 타고난 사냥꾼. 독립자. 스스로의 직감과 본능에 의존하는 자들.

목줄을 결코 반기지 않는다.

그가 마왕의 각인을 받는 상황이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웨어울프는 상대가 이름을 물으면 반드시 대답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를 버렸다고 여긴다.

전투 중에도 마찬가지.

그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역시, 성의껏 대답했다.

"브로디 발도프. 최후의 〈보름달복수자〉. 〈사나운 그림자〉. 마지막 〈깨어진 이빨〉. 〈별빛 울음소리〉."

소개가 길다. 뒤에 붙는 건 클랜명이다. 그런데 네 개나 붙는다.

의아했다. 레나가 핀잔을 줬다.

"무슨 이름이 그렇게 길어요?"

- 크르르,

늑대는 으르렁거렸다. 몸을 한 번 푸르르 털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그 하나가 상대라고 해도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강하다.

그가 우리에게 몇 발자국 가까이 걸어왔을 때.

[모두, 저들에게서 떨어지게.]

사슴 아에자르가 허공에 의지를 전달했다. 거대하고 단단한 뿔이 하얀빛을 냈다.

곧 의의가 들어왔다.

"꼭. 그래야 할까요?"

한 여자가 사슴에게 질문했다.

목소리에서 독한 향기가 나는 것같았다.

- 끼기기기긱! 끼기기기기긱!

여자는 하반신을 넓은 돌계단에 비볐다. 그 부분은 뱀이었다.

10미터가 넘는, 길다란 하반신에 빼곡히 돋은 비늘이 계단 모서리에 닿았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꽉꽉 조여서 다 으스러뜨리고, 잡아먹으면 안 될까요?"

[제단이 발견되길 원하지 않네.]

여자가 빨간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제단은. 우리 몸 하나하나가 다제단인데요? 각인만 새겨져 있으면, 어디서든 지낼 수 있잖아요?"

사슴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의지가 허공에 울렸다.

[이곳은 왕께서 강림하시기에 최적의 장소! 인간들의 관심은 끌고 싶지 않네. 그들을 가도록 두게나.]

진정성이 느껴졌다.

- 터벅.

사슴이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파지직거리는 검은 전기가 사슴의 앞발에서 사라져 갔다.

거대한 늑대도, 뱀도 양옆으로 비켜서 기세를 죽였다.

'놓아주는 건가?'

"우린 간다. 뭘 하든 맘대로 해라. 내 알 바 아니니까."

나는 레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 스르릉.

한 손으로는 칼을 빼 들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걸었다.

우릴 둘러싼 수십 마리 이족異族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사슴이 옆으로 계속 움직였다. 빈공간이 생겼다. 그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이족에게서 멀어졌다.

사슴 쪽으로 절벽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사슴이 머리를 숙였다. 우리에게뿔을 겨눴다. 끝에서 빛이 반짝였다. 허공에 의지가 울린다.

-

[굳어라(Paralyse).]

발이 땅에 눌어붙었다. 발목이,

허벅지가 굳었다. 허공이 양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 딱딱.

간신히 이를 부딪쳤다. 여기까지만 허락한 모양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레나는 완전히 굳어 있다.

더 강하게 마법을 건 모양.

'속임수였나?'

끌어당겨서, 마법을 쉽게 겨냥하기 위한 함정인 듯했다.

하지만 걸려들 수밖에 없다.

이미 죽을 곳에 와 버린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가? 옆의 인간은 입까지 막아 버렸네.]

사슴이 머리를 들었다. 뿔에 빼곡히 각인된 룬 문자들에서 하얀빛이 나고 있다.

"마법인가?"

내가 물었다.

[그렇다네.]

[자네들은 너무 많이 들었어. 이대로 보내 주긴 곤란해. 여기서 소멸시킬 수도 있네만.]

사슴이 잠시 망설였다.

[어떤가. 마지막 기회를 주겠네.

우리와 함께하게.]

'공격 마법의 타깃이 되는 경험은 처음인데.' 전장에서도, 해골병사 따위로 이루어진 선단先端에는 광역 마법조차 아까워서 보통 잘 쓰지 않는다.

급박해야 할 상황이지만,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레나를 바라봤다.

레나는 꼼짝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다. 손가락 하나, 입술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음.'

일단 시간을 벌어 보기로 했다.

나는 사슴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 각인이라는 거, 강제로는 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네. 계약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네.]

"네크론 신사회는 보티스의 추종자들인가? 비밀을 누설하자 곧바로 살해당하던데 말이야. 너회도그런 처지가 된 건가?"

사슴이 눈이 이채를 띄었다.

[우리와 함께하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잊게 될 텐데. 궁금한 게 많군.]

"몰랐나? 원래 죽기 전엔 궁금한 게 많아진다. 마지막 선물로 알려주지 그러나."

시간을 끄는 이유도 있지만, 지금들은 지식은 다시 살아나도 두고두고 쓰일 것이다. 내 말에 사슴은 피식 웃었다.

[마지막 선물이라. 네크론이 섬기는 뱀은 의심이 많지. 제사장 하나에게만 힘을 주고, 그를 통해 철저히 신자들을 구속하네. 그 살해는, 제사장이 한 짓일 걸세.]

"제사장?"

[이야기는 됐네. 슬슬 결정하게.

우리를 따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텐가. 아니면 여기서, 아무 의미 없이 부서질 텐가?]

그때였다.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피이이잉! 피이이잉! 피이이잉!

한 번이 아니었다. 수십 번을 연거푸 울려 퍼졌다.

- 피이이이잉! 피이이이이잉!

레나의 가방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수십 발의 신호탄이 놀라운 속도로 동시에 솟아올랐다.

화려한 붉은 연기가 몇 번이고 높이 솟아올랐다가 흩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자동으로 터지게 해 놓은 건가?'

특정한 시간에 조작되게 해 놓았거나, 일정한 시간 동안 건드리지 않으면 자동으로 발사되게 해 놓은 건지도 모른다.

- 피이잉! 핑! 핑! 핑! 핑!

폭죽은 계속 솟아올랐다. 하늘에 붉은 연기가 자욱했다. 검은 하늘한 켠이 전부 물들었다.

보름달이 붉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 크르르르 ??? 크르르르르.!

거대한 늑대가 눈을 감았다.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건가?'

사슴이 발을 굴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그때 누군가 빠르게 절벽을 뛰어왔다. 두꺼운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여자였다.

여자는 사슴의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사슴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흩어지게!]

사슴은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른 무리도 그렇게 했다. 곧 장내에는 괴로워하는 늑대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여자만 남았다.

마비에 걸린 우리 둘을 포함해총 넷이었다.

마비는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늑대는 머리를 땅에 박고 있다. 회색 털이 올올이 뾰족뾰족하게 선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낮고 흉포해진다.

두 눈을 가린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는 내 몸에 바싹 붙었다. 나와 레나는 가까웠다. 결국여자는 우리 둘 모두에 닿은 것이다.

내가 물었다.

"저 늑대, 뭐냐?"

"붉은 만월을 보면 미치는 늑대가 있습니다. 기막힌 우연이죠. 설마의도하신 건 아니겠지요?"

나야 당연히 몰랐다.

레나는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특이체질의 웨어울프가 오는 것까지 알았으리라고는, 상상이 힘들다.

처음 그녀가 이야기한 것은 그저 신호탄이다. 신호탄은 초록색, 노란색, 붉은색까지 다양하다.

이건, 그녀의 지독한 악운惡運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의도는 아니다. 그런데, 너는 도망도 치지 않나?"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여자가 작게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나에게?"

"그렇습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을 가린 천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두꺼운 검은 천이한 겹씩 풀려 갔다.

두 눈이 드러났다.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색인 무기질의 눈이 달빛 아래 반짝였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목걸이는, 버리셨습니까?"

"누구냐."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군요.

쓰레기통에 라도 버 리 셨습니 까?"

"?"

원장인가."

놀랐지만 크게 티는 내지 않았다.

여자는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질의 오드아이로 레나를 응시했다. 시선이 차가웠다.

"아, 목걸이는 여기에 있었군요.

받자마자 다른 분에게 곧바로 줘버리신 거군요?"

""? 기분 상했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살포시 웃었다.

하얗고 가는 손끝으로, 뭐든 녹여버릴 수 있는 녹색의 점액으로 레나의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레나는 굳어 있었다.

입을 열지 못했다. 나보다 훨씬 강하게 마비된 것 같았다.

여자는 점점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여린 손이 흑색 비취로 만들어진 작은 트럼펫을 쥐었다. 여자는 그걸 뜯어냈다. 바닥에 내팽개쳤다.

왜인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동생은 제가 잘 돌봐 주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두 분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정도 들었으니까요."

조금 머뭇거렸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면, 날 도와주려고 했나?"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전혀 모르겠습니다."

뒤에서 늑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여자는 내갑옷에 몸을 붙였다.

- 치이이익.!

갑옷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 투둑! 투두둑!

뜨겁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점액이 갑옷 사이로 흘러들어 왔다. 몸이 엉망으로 허물어졌다. 나는 여자에게 소리쳤다. 마지막 기회였다.

"너, 인간 아이들을 좋아하는 거아니었나? 전쟁이 일어나면.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올렸다가, 다시 씁쓸하게 내리며 대답했다.

"충분히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 데구르르르!

내 몸 전체가 녹아들었다. 머리만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꿈틀거리는 녹색 점액질이 내 두개골 툼새 사이사이까지 스며들어, 전체에 도포되었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인간은 멸종하는 게 옳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함께하지 못해 아쉽군요."

두개골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의식도 함께 녹았다.

흔적처럼 기억나는 것은, 레나가 녹아내린 자리에 혼자 남아 있던 작은 목걸이 하나였다.

76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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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

깜깜하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자욱하던 신호탄의 연기도, 보름달도 보이지 않는다. 나를 둘러싸던 수십의 짐승도 없다.

육중한 동굴 벽이 나와 세계를 분리한다. 주위를 흘끗 본다. 풍경은 고요하다. 레나가, 언제나처럼모포 위에 잠들어 있다.'여기인가.'

녹아내렸던 온몸이 다시 달그락거리며 움직였다.

갑옷도 칼도 그대로.

놀라지 않았다.

이 루프가, 세계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제 익숙하다.

'몇 번이지? 일곱 번? 여덟 번?'

용사에게 죽었다. 망치와 석궁에게 세 번 연달아 죽었다. 트롤에게 죽었다. 푸른 갑옷에게 죽었다.

〈불〉에 녹아 죽었다. 마지막으로, 푸르손을 섬기는 T&T의 간부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서 있다.

'꽤 길었나.'

그런 생각이 났다. 직전의 삶은 제법 길었다. 그냥 길기만 한 게아니었다.

던전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처리한 산적과 인간 모험가만 해도두 자릿수가 넘는다.

심지어 에라스트에 직접 들어가, 영주가 주최하는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위험은 없었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렸다. 그냥 주어진 일만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빠르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모두 슬라임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T&T의 백업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기 때문. 하지만 또다시 그들과 연관될 수는 없다.

'그건 안 돼.'

저번 삶에서 나를 죽인 게 바로그 슬라임이니까.

그는 갑옷 사이로 흘러들어 왔다.

머리뼈도 다리뼈도, 햇살 아래 눈송이처럼 녹여 버렸다.

그 감각은 치욕적이라기보다 압도적이었다. 몸이 흠칫 움츠러든다.

인간 아이들을 좋아한다던 그 슬라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슬라임이 속한 T&T 내부의 이너서클. 섭외를 거절하면 살해당한다.

각인을 받는다면 모르겠지만, 거절할 입장.

녀석들과 얽히는 건 위험하다.

'레나 말을 들었다면 괜찮았을까?'

그녀 말대로 도망쳤다면.

녀석들은 우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곧 전쟁이 벌어지고, 그걸 격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을 테니. 레나는 감이 안 좋다고 몇 번을 경고했다.

그녀의 감이 옳다는 건 안다. 그 장소에 간 건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녀까지 억지로 휘말리게 한 동반 자살. 사실 어렴풋이 알았는지도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레나까지 죽게 될 거라고.

알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죽을 장소로 뛰어들었다. 그녀까지 던져 버렸다.

지독한 짓을 했다.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되돌아온다.

슬라임에게 죽은 나와, 지금의 나사 이엔 뚜렷한 연속성이 있다.

시간은 분절된다.

그러나 존재는 같다. 기억과 자아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힘, 민첩, 체력, 지혜. 가진 기술 하나하나까지.

하지만 레나는 끝이다.

사슴의 마법에 몸이 굳었던 레나.

슬라임에게 녹아내려, 바닥에 비취목걸이만 남겼던 그녀는 없다.

그 세계의 레나는 완전히 죽었다.

이제 어디서도 만날 수 없다.

죄책감이 나를 휘감는다.

한참 늦은 채찍질이다. 고통을 느낄 자격도 없다.

뻔뻔하게도,

? 띠링시효과음은 언제나 명랑하다.

[계승되었습니다!]

[이름: ]

[해골병사 Lv.1(120)]

[체력-53 힘-55 민첩-55 지혜-28]

'똑같군.' 레벨은 1로 초기화되어 있다.

하지만 레벨 1에 가질 수 있는 능력치는 아니다.

체력과 힘, 민첩이 전부 50을 넘는다. 게다가 레벨 30 정도까지는 금방 올릴 수 있다.

객관적으로 대단한 스탯.

조무래기를 상대하는 건 쉽다. 산적 토벌이나, D랭크 모험가 정도까지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 후.,

속으로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스탯을 올린다고 해서, 웨어울프 발도프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슴 아에자르의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까?

천천히 휘두르는 검집으로 나를 반으로 갈랐던 푸른 갑옷을 어쩔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창을 쭉 내렸다. 스킬과 특전이 펼쳐진다. 스킬은 검술과 질주.

그 외에 별다른 건 없다. 특전은 화염 저항, 관통 저항이 주요하다.

[E마이너] 랭크의 통찰도 있다. 물론 전혀 쓸모없는 수준.

슥슥 창을 치웠다. 새로운 창이나타난다. 빨리 봐 달라는 듯 메시지가 밀려온다.

[사망기념관]

[계승된 이후 일곱 번째 죽음을 달성하셨습니다!]

1. 네크로멘서의 연인2. 둔기 저항3. 두개골 저항4. 화염 저항5. 산성 저항(new!)

수식으로 계산하기 힘든 초산Superacid 에 녹아 죽으셨습니다.

산에 닿았을 경우, 반사적으로 신체를 중화시킵니다.

- 산성 저항이 20 상승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될 거예요!

산성 저항이라.'

어차피 슬라임을 피해 다닐 생각.

그와 싸울 일은 없다. 굳이 산성저항을 익힐 필요는 없다.

게다가 고작 20 정도의 저항이다. 슬라임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섯 번째 선택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기도 전, - 띠링!

[특전을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네크로멘서의 연인: 영웅급 특전입니다. 다른 영웅급 특전이 활성화될 때까지 강제로 이 특전이 선택됩니다.]

사망기념관 목록 중에서.

호감도 특전이 강제로 장착된다.

다른 특전을 키우기 전에는 계속이 특전이 강제되는 듯하다.

'계속. 다른 방식으로 죽어 봐야하나?'

그래야 새로운 특전을 장착할 수있을지도.

[네크로멘서의 연인]에 딱히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실용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이 특전은 네크로멘서들의 호감도를 크게 올린다. 그들의 사령술숙련도를 약간 올려 준다.

쓸모가 없다.

이번 삶에서, 나는 혼자 움직일 계획이니까.

'일단 레나는 좀 키워 주고.'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최대한 빨리 떨어져 주자.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의 상태창을 열었다.

- 띠링!

뭐가 좀 이상했다.

레나의 이름 위에, 처음 보는 메시지들이 떠 있다.

[동화율: 88.119%]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달성 호감도(60)에 따른 초기보정이 이루어집니다.]

[달성 레벨(30)에 따른 초기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보정이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름: 레나]

[호감도: 11]

[호감도 상한: 60] ( 플러스 )

[도적 Lv.5]

[트릭스터 Lv.1] ( 플러스 )

[사냥꾼 Lv.1] ( 플러스 )

[체력: 21( 플러스 )

[힘: 19] ( 플러스 )

[민첩: 25] ( 플러스 )

[지혜: 19] ( 플러스 )

[다음 특성이 강화됩니다.]

- 탁월한 손재주: 대부분의 무기를 다룰 수 있습니다. 전혀 새로운 종류라도 몇 번 만져 보면 금세 익숙해집니다.

- 범죄 친화: 그녀는 인간의 도덕률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찔리지 않습니다. 찌릅니다. 털리지 않습니다. 팁니다. 금기는 없습니다.

경비들에게 마약을 품니다. 영주의성에 불을 지릅니다.

'변했잖아?'

능력치가 그대로가 아니다.

하나씩 천천히 계산해 보았다.

처음 보았던 그녀와 비교해 도합32의 스탯이 올랐다.

기본 스킬과 특전, 칭호에는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직 낮은 호감도 때문인지, 세부내역은 보이지 않았다.

[동화율: 88.119%] 이라는 글자를 뚫어져라 가만히 바라봤다.

[동화율: 88.118%]

그러자 끝자리가 이지러지며 숫자가 하나 변했다. 계속 노려보자, [동화율: 88.117%]

숫자는 8에서 7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신경쇠약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

살과 근육이 다 떨어지고 뼈만 남았는데 대체 뭐가 쇠약해진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라는 게원래 이따위가 아닐까?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동화율이 떨어졌습니다!]

[동화율: 87.75%]

메슥거리는 어지러움이 덮쳐 온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레나를 바라봤다. 특성이 강화된다는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범죄 친화 특성은 우습다. 손재주특성은 유용하게 사용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가.' 스탯도, 스킬도 그대로인 것보다야 이게 훨씬 낫겠지만.

- 터벅터벅.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캐빈 애슈턴의 책 두 권이 보인다.

차르룩.

지혜나 올릴까 싶어 책을 펼쳤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죽고 다시 살아나면서, 한 번에 들어온 정보량이 너무 많다.

책을 다시 덮은 순간.

"후아아암.

레나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눈에 살짝 물기가 고였다. 그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허공에서 잠시 시선이 얽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요."

목소리가 몽롱하다.

전에는 저런 말이 없었다.

꿈 애기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었는데.

무슨 영향을 받은 걸까?

호감도 달성에 따른 '초기 보정'같은 것들 때문일까.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꿈을 꿨다고?"

레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냥. 이상한 꿈을 꿨어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몽롱한 표정이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더 묻지 못했다.

"끄으으웃????"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한 태도로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기지개를 켰다. 팔다리를 쭉쭉 폈다.

뼈 사이에서 뚜두둑 거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레나가 품에 손을 넣었다. 나에게 손을 내민다. 손에 줄 달린 작은 장식이 있다.

"저.

어머니의 펜던트다.

"신뢰의 증표인가?"

레나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받아 두지."

나는 팬던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목에 걸었다.

그러고 싶었다.

- 툭.

낡고 작은 장식이 뼈에 닿았다.

아련한 기분이 몸으로 퍼져 나갔다.

레나가 나를 바라본다.

"목에 걸어 주시는 거예요? 보석은 가짜예요."

"사연만 진짜면 상관없어."

"사연. 이요?"

"신뢰의 증표라며. 뭔가 있지 않겠어?"

당황한 기색이다.

레나가 눈을 몇 번 깜빡인다.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뜬다. 현재 호감도는 14로표시되고 있다.

묘한 일이었다.

'안 받았을 때도 올랐는데.'

인간에게는 악의로, 나에게는 호의로 가득한 이상한 여자다.

빛이 바랜 큐벅을 조심스레 갑옷 아래로 집어넣었다. 이제 그녀와헤어지면, 레나를 기억할 물건 은이 목걸이밖에 없다.

기념품 하나쯤은, 갖고 있어도 좋지 않을까.

나는 못을 박는 것처럼, 단호하게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떨어진다."

"네?"

당황한 기색이다. 나는 멋대로 설명을 이어 갔다.

"유블람으로 들어가서.

레나에게 지금껏 거쳐 온 던전들과 의뢰에 대해 전부 말했다.

자세한 위치.

던전에서 처할 수 있는 위험.

각 던전의 보스를 상대하는 방법.

중간 중간에 의뢰를 받아 처리한, 인간 산적들이 재화를 숨긴 장소.

하나하나 전부 다 털어놓았다.

"어.

레나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런 걸. 왜 저한테 말해 주시는 거예요? 같이 가면 되지 않아요?"

- 달그락.

단호한 척 고개를 젓는다. 지금껏 그녀를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 전부 나 때문이다.

"나는 떠난다."

"떠난 다구요?"

갑작스러운 통보의 연속에서 레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래.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원장을 조심하라고 말할까 했지만, 관뒀다. 레나는 감이 좋다.

위험은 알아서 피할 거다.

슬라임에 대해 경고해 봐야 괜한 위화감만 주겠지.

나만 없으면, 레나가 T&T의 이너 서클에 섭외될 가능성이 꽤 줄어들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는 인간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여기에 보름 정도는 있어도 괜찮아. 한 달은 넘기지 마라."

한 달 뒤에는 푸른 갑옷이 온다.

녀석에게선 시체의 악취가 났다.

아예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

"보름. 알았어요."

"다른 것도 다 기억했지?"

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다가,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서. 다시 만나요? 진짜 갈 거예요?"

"만날 일 없어."

"오래 매달아서 미안하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살아."

- 팟!

나는 밖으로 몸을 튕겨 빠르게 빠져나갔다. 왠지 부끄러웠다.

아예 〈스킬: 질주〉를 사용해서 도망쳤다. 당황한 채 굳어 있는, 레나의 기색이 점점 멀어져 갔다.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이건 옳은 판단이다. 이건 옳은.

여기서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

나는 죽음을 거듭하며 여기저기 부딪쳐 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누군가와 얽히게 되면 곤란하다. 상대의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상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식이라면, 마음이 조금씩 닳아 버리게 된4??? 아.

- 팟!

세차게 땅을 디딘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갔다.

[질주의 유효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10분이 지나, 질주의 유효 시간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 서서 두개골을 잡고 깊이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난 어디로 가지?'

레나를 두 번 연속 죽게 한 죄책감에, 서둘러 그녀와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다.

대책도 없다.

레나와 떨어지기만 한 것이다.

알고 있는 던전은 전부 레나에게다 말해 줬다.

내가 갈 수는 없다.

내 영향을 받아 시간선이 뒤틀려버릴지도 모른다.

기껏 그녀에게 준비해 준 선물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양손에는 캐빈 애슈턴의 책이 각각 한 권씩 들려 있다.

읽다가 집중이 안 되어 덮었는데,

엉겁결에 들고 나온 모양.

'일단 이거나 읽어야겠군.'

책을 읽으면 지혜가 오른다.

지혜 스탯을 올려서 해가 될 일이 있을 턱이 없다.

'밖에서 읽는 건 좀 그런가.

어디 조용한 곳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망령의 납골당이 딱 좋았다.

하지만 방금 뛰쳐나온 터.

짧게 고민하던 나는, 곧 목적지를 정했다.

'거기로 가면 되겠군.'

목적지는 〈메마른 지하 묘지〉.

E급 던전. 망령의 납골당과 가장 가까운 던전이다.

다른 던전들보다 훨씬 가깝다.

여기서도 금방.

저번 생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미 새끼한 마리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횃불도 없었지.'

하지만, 최심부 홀에는 을올이 야광주가 박혀 있던 게 기억난다.

- 터벅터벅.

나는 〈메마른 지하 묘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책 읽기 딱 좋겠군.'

그런 예감이 들었다.

77화 재밌는 걸 할 수 있게 될 거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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