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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패치워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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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한 산성 검기를 다시 일으킨다.

- 파사사삭! 치이이익!

- 콰직! 콰직! 콰직!

수백 년 동안 한자리에 서, 강제로 주술사를 지켜 왔다는 골렘. 대장장이들의 혼이 봉인되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골렘.

녀석의 목 부분을 노렸다.

여기를 따고, 마력액인 루-륨을 흡수하면 싸움은 끝이다.

- 파갓!

검기가 도는 칼을 목 깊숙이 박았다. 피막이 깨져 나갔다. 정확한 포인트에 칼날이 들어갔다.

- 끼긱! 끼이익!

목을 지렛대처럼 들어 올린다.

- 퍽!

작동을 멈춘 골렘이 술 취한 것처럼 잠시 휘청거리다가, - 쿠구궁.

바닥에 쓰러진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빼곡하다. 웹슬링거 때보다 더 많은 레벨이 오르는 듯했다.

여기도 던전이고, '접근조차 할 수없다'고 설명되는 장소다. 이 정도레벨이 오르는 건 자연스럽다. 별다른 고민 없이 전부 지혜에 투자했다.

'골렘이라.

실제로 부딪쳐 보니 힘도, 속도도 내 쪽이 압도한다. 검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현명하다.

지혜가 7 올랐다.

쓰러트린 녀석의 머리에서 마력액이 흐른다. 준비한 병에 담는다.

고블린 심장에서 혈석을 착취하던 인간들과 정확히 같은 행동이다.

이게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다.

변명의 여지도, 변명의 의지도 없다.

동력이 다 빠진 골렘의 잔해가 자못 음산하다.

나는 모른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당을 지켜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수백 년 동안 가만히 서 있었는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조건에만 반응하는 기계일 수도 있다.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켜 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외면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을 파괴하고 약탈한다.

내 행동에는 한 꺼풀의 위선도 없다.

어쨌거나.

- 부우응!

짓쳐 오는 골렘의 주먹에 맞아 부서질 생각도 전혀 없다.

교차되는 두 발의 주먹 아래로 몸을 숙였다. 강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덩치는 거대하지만, 결국 합이 맞지 않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전술 Lv. 1이 활성화됩니다!]

'이러면 어떨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놈들의 주위를 빙빙 돌며 신경을 건드렸다.

- 부우옹!

삐걱거리는 골렘들이 거세게 주먹을 휘둘렀다. 두 골렘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주먹을 유도했다.

- 휘릭.

놈들이 힘을 주는 그 순간에 슬쩍 아래로 빠져 돌았다.

- 까가강!

- 쿵!

서로 주먹을 날린 두 기의 녹슨 골렘이 뒤로 쓰러진다.

[전술 스킬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갔습니다!]

'이 스킬도 쓸 만하군.' 두 녀석의 처리도 간단했다. 곧바로 뛰어들어 목을 분리했다. 쓰러진골렘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마력액도 다 담아냈다. 두 번 다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게. 루-륨이라는 건가?'

투명한 병에 담긴, 찰랑거리는 은빛 액체를 바라봤다. 레나에게 전해줄 물건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기이한 은빛 액체는 1.2L라고 새겨진 부분까지 찰랑거리고 있었다.

'지부장은 되겠군.'

세 사람도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었다. 큰 위기 없이 골렘 한 기를 처리하는 중이다. 하지만 집중한 탓인지 내 싸움은 지켜보지 못한 것같았다.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려 했지만,

다들 녹슨 골렘 한 기 정도는 그럭저력 처리하고 있었다.

- 까앙!

크리스티나가 골렘의 주먹을 대검으로 쳐냈다. 뒤로 네 발자국 물러나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라도 힘겨루기가 되는 게 제법.

- 까가강!

챈들러가 핀 부위에 칼을 박는다.

- 철컥!

- 퍼억!

레나가 프레스 장치를 이용해, 주저앉은 골렘의 목을 따 버린다.

'제일 빠르군.'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 여유로운 싸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무너진 골렘 세 구 근처에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나가 눈만 끔백이다가,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설마 벌써. 끝내신 건가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바닥에 무너진 녹슨 골렘들을 바라보며, 무언가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쩌엉!

어느새 크리스티나와 챈들러는 2 : 2로 싸우고 있었다.

합격 형태로 싸움이 전환되자 호흡이 맞는 둘이 꽤 유리해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지부진한 건 마찬가지다.

- 피이이이익!

산 속성의 검기를 일으킨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돌아보니,

곁에 있던 레나의 몸이 굳으며 눈이 커다래져 있었다.

"스승님. r이미 칼이 부식되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봤을 터다.

'이건 좀 색다른가?' 나는 칼을 바라봤다. 연푸른 검기자체가 연기를 내며 부식되며, 기묘한 오오 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게. 대체.!"

[잔여 출력 35%.]

미안하지만 대꾸할 시간은 없었다.

검기에 산 속성까지 불어 넣으면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 주지만, 그만큼 유지력이 약해진다.

[참격 Lv. 1을 발동합니다!]

한 번에 남은 출력이 흑 줄어든다.

- 치지지지지직!

일단 칼부터 박고 봐야 한다.

크리스티나가 상대하는 골렘의 왼쪽다리 핀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 퍼적!

아직 한 번에 베어 내는 건 무리다. 하지만 거대한 칼날이 핀 부위에 깊숙이 박혔다.

- 쿵.

녀석이 주저앉았다.

부피는 내 열 배.

무게는 스무 배가 되는 거대한 골렘이 칼질 한 번에 간단히 무너진다.

칼끝에서 타오르는 검기가 치지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검신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맴돈다.

부서진 강철의 단면에 내 모습이 어지럽게 비친다.

멈추지 않고 그대로 칼을 꽂아 목을 따 냈다. 녹슨 목이 따지며 마력액이 흘러내렸다. 골렘이 동작을 멈췄다.

크리스티나는 다섯 발자국 뒤로 물러난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살짝 겁먹은 표정이 바닥을 흐르는 은빛 마력액에 비춰진다. 레나에게 이야기를 들은 대로다. 루-륨은 땅에 흡수되지 않고 표면 위를 그저 흐른다.

"아.!"

레나는 탄식을 내지르면서도 재빨리 달려가 은빛 마력액을 병에 담았다.

- 까강!

챈들러를 공격하는 녀석의 팔을 향해 칼을 꽂았다. 막이 뜯어졌다. 덧댄 판이 깨지고 강철 핀이 어긋났다.

- 피릿!

몸에 회전을 걸어, 정강이 핀 부위에 칼끝을 강하게 찔러 넣는다.

- 퍼벅!

골렘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목 틈새에 정확히 칼을 꽂고 들어올렸다.

- 카앙!

골렘의 움직임이 멈추며 마력액이홀러나온다.

- 쿵!

몸이 쓰러지며 나도 다시 바닥에 착지한다. 하나씩 돌아보진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와 레나, 첸들러 모두 침착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등 뒤에서 그들의 경악이 느껴진다.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문득 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스승님."

"말해라."

"저희는. 이러면 왜 온 걸까요.?"

"혼자서. 다.

'좀 과했나.' 레나가 처리한 한 기를 제외하면전부 내가 해체했다.

기껏 잡으러 온 녀석들에게 너무 훼방을 놓은 건지도 모른다.

"아, 미안하군."

"아뇨! 그게 아니라. 저희가 너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 같아서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런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레나의 시나리오를 클리어해 보고 싶다는 생각.

제멋대로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세계가 '예정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방금도. 그냥 내가 경험치를 다 먹으려고 한 건데.'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빼곡하다.

'상태창.'

[Lv.39(173)]

[체력: 61](new!)

[힘: 73]

[민첩: 71]

[지혜: 61](new!)

다섯 마리의 골렘을 잡은 결과로 레벨은 총 21이 올라갔다. 지혜와, 수행 중 잔뜩 깎인 체력에 주로 분배 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 숨을 거칠게 내쉬며 칼을 땅에 짚었다. 모두 피로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가져온 폭탄들도 쓰지 않은 채.

던전을 지키는 골렘 여섯 기를 모두 처리해 냈다.

생각보다도 쉽다. 그만큼 내가 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 저벅.

몸을 돌렸다.

자루에 담아 꼭 묶어 놓았던 밤톨이를 안아 들고 몇 번 쓰다듬었다. 녀석이 마구 달각거리며 입을 열었다.

[밤톨이가 싸우고 싶어 합니다!]

"년 안 돼. 너무 위험해."

- 달각! 달각!

밤톨이가 작은 앞발을 들어 올렸다. 가볍고 여리다. 살과 털이 있을때는, 이 앞발도 지금보다는 두툼했겠지.

녀석을 바라보며 레나가 말했다.

"같이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골램은 다 처리했으니까요. 자루에만 있으면 답답하긴 할 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밤톨이를 안고 챈들러에게 물었다.

"방어는, 이게 끝인가?"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에게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저 앞으로 건너가면 아무것도 없는 장소가 나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장소?"

"예. 넓은 홀입니다. 그곳을 지나면 주술사가〈껍질〉속에 가사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지하 무덤은 차가웠다.

그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은 이미 날아가 있었다.

"죽일 준비는 된 거겠지?"

"그렇습니다."

첸들러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 가슴 안쪽주머니를 잠시 더듬었다.

'뭘 가져 왔나?'

잠깐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레나는 골렘들에게서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마력액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유리병도, 내가갖고 있는 유리병에도 모두 1L를넘는 은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생각보다 많군. 네 할 일은 이제 끝난 건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수백 년 동안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었던 탓에, 루-륨을 소모할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눈빛을 띠고 있다.

'다시 올라가라고 할까?'

그녀는 용건이 끝났다. 위로 올라가도 좋다. 하지만 이야기해 봤자듣지 않을 거다. 생각에 빠져 있는사이에, 곁에서 챈들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이번 생은. 너무 잘 풀리는데.'

인간의 내성內域. 그것도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까지 들어오다니, 처음의 삶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원래대로라면 달그락거리는 해골병사는 성 근처에만 가도 두개골이 부서져야 하는 것 아닌가?

대도시.

나를 적대하는 인간들로 가득 찬 곳.

그것도 가장 내밀하고 폐쇄된 곳을안내를 받아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완전한 외부자다.

이걸 챈들러 가문의 약점으로 잡고 협박할 입장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골칫거리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만한 무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음. 오히려 약간 싸게 일해 주는 건지도 모르겠군.'

후작 같은 괴물을 제외한다면.

나는 인간이 철저히 지배하는 이세계에서도, 자리를 억지로 비집고 앉을 수 있을 만큼 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속으로 약간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다.

- 쿠르르르르 !

- 쿠구구궁! 쿵!

134화 패치워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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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석벽 전체가 움직였다.

"스승님! 앞이요!"

레나의 외침을 듣고 앞을 바라봤다. 앞뒤 통로가 동시에 막히고 있었다.

- 팟!

몸을 솟구쳐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석벽이 움직이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 쿠르르르르. I눈앞에서 한 치의 틈도 없이 석벽이 닫혀 버렸다. 움직이는 건 앞뒤통로만이 아니었다. 양쪽 석벽 전체가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 퍼벅!

- 퍼버벅!

- 퍼버버벅.!

사방에서 무수한 호리병이 바닥에 쏟아지며 깨지기 시작했다.

- 화아아악!

깨진 호리병에서 솟아 나온 연기가 통로를 자욱이 메웠다.

뒤에 떨어져 있던 녀석들을 살펴봤다. 하지만 자욱한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부술까?'

이 무덤을 다 때려 부수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챈들러도 레나도 죽어 버리면 여기 온 목적 자체가 희미해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그럴 수는 없지.!'

살아남아야 한다. 살려야 한다. 죽더라도 이 장소에 대해 하나라도 더알아내고 죽어야 했다.

이런 함정에 대해 알려 주지 않은 영주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사실 녀석도 반항해 본 적이 없는데 이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챈들러 가문은 대대로 악몽에 순종해 왔던 것이다.

'곤란하군.'

나는 자욱이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단순히 연기로 끝날 리는 없다.

이 자체로 독연毒煙이거나.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라도 어딘가에서 나타날 게 분명했다.

연기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 부응!

거대한 양손 검이 빠른 속도로 내게 내리쳐 왔다.

한 손으로 칼을 들어 곧바로 쳐냈다. 하지만 손아귀에 제법 충격이 있었다. 뒤로 한 걸음을 물러나야했다.

'매복인가?'

*"나는■나? 는. 99크리스티나였다.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피어오른 연기는, 적어도 한번 들이쉬면 곧바로 절명하는 독연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곧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로 강했나?'

연습 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속도고 힘이었다. 방금의 검격은 챈들러보다 빨랐고, 녹슨 골렘보다 강했다.

- 피릿!

파공음이 다르다. 크리스티나는 두개골을 넘어 바닥까지 쪼갤 둣 강하게 양손검을 휘둘렀다.

- 까앙!

두 손으로 대검의 칼자루를 잡고 튕겨 냈다.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진 양손검의 강력한 풍압에 하얀 연기가 흩어졌다. 크리스티나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광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섬껏한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우람한 팔 근육은 우툴두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진 채 얼굴에 힘줄이 달리고 있었다.

'생소한 표정이지만. 어울리는지도.'

그녀의 공격은 계속 날카로워졌다.

단순한 힘만이 아니라 속도와 검의 센스까지도 놀라웠다.

- 피리릭!

강하게 휘두르는 양손검에 기술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 껑!

부딪친 뒤 비스듬히 칼을 기울여공격을 흘려 내더니, 한 걸음 다가오며 손잡이 끝 폼멜 부위로 나를 가격하려 들었다.

폼멜을 손으로 쳐내자 칼자루의 긴 가드로 연달아 두개골을 찍어 왔다.

"제법인데?"

픽 소리가 울릴 정도로 발로 강하게 정강이를 걷어차자 그제야 크리스티나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아파서 물러났다기보다, 힘에 뒤로 떠밀린 느낌이었다.

"의식이 없나?"

"세상의. 악을. 처단하겠다.

크리스티나는 의미 모를 소리를 웅얼거리곤, 줄줄이 붉은 안광을 홀리며 다시 내게 덤벼들었다.

무심한 성격의 아버지가 보내 준 검술 교습소에 여자라고는 크리스티나 혼자였다.

함께 배우는 다른 남자아이들은 무척 서툴렀다. 힘도 약하고 몸도 약했다.

대련이라도 붙으면 다치지 않게 신경 써 주어야 했다. 크리스티나는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휘두르는 거, 가르쳐 줄까? 〉

〈흥! 오우거 주제에. 얘들아! 가자! 〉

〈에이! 냄새나! 〉

허수아비도 제대로 때리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호의는 언제나 거절당했다. 집에서도 상황은 낫지 않았다.

〈발이 아파요. 〉

〈그래도 이런 신발을 신으셔야 해요.

참다 보면 발도 길들여진다니까요? 〉

옷은 불편했다. 거들은 숨이 막혔다. 신발은 발가락을 잔뜩 구부리지 않으면 신을 수 없었다.

〈어휴. 내 팔자야. 인형 같은 아가씨면 좀 좋아? 아가씨가 예뻐야 입힐 보람이 있는데. 〉〈어떡하니. 불쌍하다. 키가 너무 커서 맞는 옷도 없다며? 〉〈뭐, 그래도 얌전하긴 해서 괜찮아. 〉〈차라리 남자 옷을 입혀 볼래? 〉

〈사실 남자 옷도 맞는 게 별로 없을 거야. 호호호.! 〉눈도 귀도 쓸데없이 예민했다. 방에 있어도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칼을 버릴 수는 없었다. 혼자 휘둘렀다. 혼자 책을 읽었다.

그녀는 책과 칼의 세계에 살았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다른 인간들을 대하는 게 더욱 힘들어졌다.

〈약자를 보호하고 네 스스로 그들의 옹호자가 되어라. 〉〈불의와 악에 반대하며. 〉검은 안개가.

어두운 흑막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칼을 들었다.

.,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처음 기사도 소설을 읽었을 때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죽여야 했다.

정의가 실현된다.

거대한 양손검을 머리 위로 든 채, 잠시 응크려 자세를 낮춘 크리스티나가 몸을 솟구치며 칼을 내리쳤다.

눈동자는 만월의 라이칸스로프처럼완전히 붉게 풀려 있었고 몸은 잠재력을 다 폭발시키는 듯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이게 폭주 상태라는 건가? 평소에 얼마나 자신을 억누르고 지내면.!' 수련 과정에서 본 크리스티나가 아니었다. 적어도 두 배는 빠르고 강했다. 평소 무의식적으로, 낼 수 있는 힘과 속도에 강한 제약을 두는 게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공격력이다.

- 까앙!

챈들러보다 훨씬 더 강하다.

에라스트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끝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칼과 칼이 맞부딪쳐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을 어울리다 문득정신을 차렸다.

이 인간 여자와의 대련을 놀이처럼 즐기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오래 끄는 건 곤란해.'

레나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 부우옹!

다시 한 번 칼이 내리쳐졌다.

- 끼기기기긱!

왼쪽 팔꿈치로 검신을 슬쩍 받치며 왼쪽 아래로 대검을 흘려 냈다. 대검이 바닥을 때릴 때 왼팔을 뻗었다.

L득!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휘감듯이 꺾자 관절 꺾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 그녀는 근력으로 반항하려 했다. 손목을 옆구리에 끼어 제압한 채, 대검 손잡이 끝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 픽!

크리스티나가 정신을 잃고 몸을 축늘어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앵콜 쇼라도 보여주겠다는 것처럼 몸을 조금씩 움찔거렸다.

'곤란하군.'

움직임을 보아 얼마 후면 깨어날 것 같았다. 달리 묶을 만한 것도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꺾은 채 옆구리에 끼고 있을 때였다.

- 껑!

자욱한 연기 저편에서 다시 한 번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다!'

서둘러야 했다.

- 타다다닥!

크리스티나를 멀리 떠밀어 놓고 곧장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기합과 함께 강한 금속음이 들렸다. 칼부림이다. 하나는 레나고, 하나는 첸들러일 확률이 높다.

'연기 때문인가.'

둘 다 크리스티나처럼 미쳐 있을 거다. 나와 달리 그들은 한순간도 숨을 들이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 부응!

검면으로 일으키는 풍압에 자욱한 흰 연기가 헤쳐졌다.

보이는 광경은 독특했다.

'까마귀?'

음산한 컨셉의 가면무도회라도 참석한 것처럼 긴 부리의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있었다.

분장 시간이 부족했는지 팔다리나 몸은 덮지 않고 얼굴과 목 부분만 새까만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챈들러와 까마귀 가면은 서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미 몇 차례 스쳐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까마귀 가면이 한층 더 지쳐 보였다.

'레나. 가 맞는 건가?'

- 피리릭.!

까마귀 가면은 커팅 레이피어를 겨눈 채 챈들러를 아래위로 교란시키고 있었다. 칼은 그녀의 것이 맞다.

하지만 커다란 까마귀 가면의 의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연기가, 그녀를 말파스의 권속으로 변화시켜 버린 걸까?

- 파르르.!

까마귀가 쥔, 레이피어의 잔상이 빠르게 흔들렸다.

- 부응!

챈들러가 몸을 숙이며 칼을 강하게 올려쳤다. 까마귀는 레이피어로 챈들러의 도刀를 아래로 휘감듯 누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피리리릭!

빠른 스냅에 레이피어의 칼끝이 어지럽게 원을 그렸다. 잔상을 만들던레이피어가 한 점으로 모아지며 챈들러의 다리를 찔러 갔다.

'급소를 피했다.'

분명히 의도적인 행동이다. 크리스티나처럼 광화된 모습이 아니었다.

- 쨍!

챈들러는 레이피어를 통째로 쳐내며, 까마귀의 목을 깊숙이 베어 내려 했다.

레이피어 손잡이로 도를 막아 낸 까마귀가 세 걸음을 튕기듯 물러났다. 그리고 소리쳤다.

[스승님! 관전만 하시기예요?]

목소리가 둔탁하게 울린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기엔 충분하다.

"레나?"

[겨우 이거 하나 썼다고.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예요?]

다시 한 번 둔탁한 반향이 일어났다. 가면을 써도 알면 가면을 왜 쓰는 거냐는 물음을 할 여유는 없었다.

- 깡!

챈들러가 다시 까마귀 가면을 날카롭게 베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대검으로 강하게 챈들러의 칼아랫부분을 쳤다.

거대한 칼이 정확히 가드 위를 치자 챈들러는 충격에 주저앉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눈은 꽃씨가 터진 듯 붉게 물들었다. 크리스티나와 같은 현상이다.

- 휙!

빠르게 들어오는 사선 베기를 한 번 막아 냈지만, 챈들러는 튕겨진 반동을 이용해 칼을 270도 뒤집어 아래에서 위로 팔을 베어 왔다.

홈잡을 데 없는 정석적인 기술이다.

웬만큼 민첩한 녀석이라고 해도, 팔한쪽이 깊게 베어지거나 뒤로 아예 주저앉아 자세가 무너져야 한다. 물론, 나는 그냥 대검을 살짝 내린다.

'흡착.'

- 철컥!

날아오는 칼날이 살짝 내린 대검에 그대로 붙어 버린다.

- 픽!

칼을 쥔 챈들러를 흑 당긴 뒤 그대로 걷어찼다. 깔끔하게 먹힌 발차기에 챈들러가 도를 놓치고 몸이 붕떠서 날아간다.

- 털썩!

하지만 쉽게 기절해 주지 않는다.

녀석은 바닥에 뒤로 쓰러지고도 움찔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무슨 꿈이라도 꾸는 건지, 녀석이 날 누구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다.

伴우.]

곁에 선 까마귀 가면에서 긴 한숨이 울려 퍼졌다.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작은 폭탄이 쥐어져 있었다.

[의뢰인을 날려 버릴 뻔했네요. 전당 사용권이랑 같이.]

"으음."

싸움은 그녀가 불리했다.

여차하면 챈들러를 폭사시켜 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챈들러와 싸우는 자는 당연히 레나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말파스의 신전에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경계심을 가져 버렸다.

툭.

까마귀 부리를 손으로 잡았다. 손에 까슬까슬한 질감이 느껴졌다.

"신기한 가면이군."

길다란 부리 안에 뭔가 잔뜩 들어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읍.! 읍읍.!]

가면을 쓴 레나가 손을 내저었다.

"응?"

[거기. 읍! 숨 쉬는 데예요!]

부리가 응응거리며 울렸다.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갔다.

[파하. ? ? 파하.]

"이게. 대체 뭐지?"

[방독면이에요. 세상은 악취로 가득하고 인간은 점점 더 늘어만 나는데, 이런 거 하나쯤은 갖고 다녀야죠. 〈전당〉에서 주웠어요. 뭐가 탁, 터지자마자 바로 썼죠.]

"그런 게 있었나."

그녀가 일곱 시간 동안〈전당〉을뒤진 게 헛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쉽게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 봐야 귀찮다고 갖고 오지도 않았겠지만.]

이 연기를 마시고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눈이 붉어지며 날 공격했다. 레나도 저 가면이 없었으면 그들처럼 변했을 거다. 나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팬들러를 보며 말했다.

"저 녀석에게. 좀 밀리던데? 광화 탓인가."

[으옷.! 방독면을 쓰고 있으니까 그렇죠! 이런 건 그냥 쓰고만 있어도 답답하다고요. 전투력이 확 떨어져요.]

레나가 양팔을 앞으로 뻗어, 굳게주먹을 말아 쥐고는 바르르 떨었다.

[숨쉬기가 힘들어진다니까요!]

어서 납득하지 않으면 손안에 쥔 폭탄으로 챈들러를 날려 버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군.

나는 적당히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도 방호 효과는 좋아요. 잠시 만요. 일단 묶어 놔야겠어요.]

그녀는 폭탄의 도화선을 정리했다.

가방에 손을 넣어 커다란 원판을 꺼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저것도〈전당Hㅣ서 챙겨 온 걸까?

- 끼긱. 끼기긱.

원판 한쪽에서는 새까만 쇠줄이 끊임없이 나왔다. 레나는 칠흑의 쇠줄로 챈들러의 손목 발목을 꼼꼼히 꽉꽉 묶어 갔다.

포박이 능숙하다. 작업이 여유로운지, 긴 까마귀 부리에서 레나의 목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나온다.

[이 연기, 꿈에 빠지게 만드는 연기 같아요. 챈들러 저 인간, 엄마가 어쩌고 하면서 절 공격하던데요.]

"으음."

[크리스티나는요?]

"저쪽에."

첸들러를 다 묶은 레나가, 크리스티나도 꼼꼼히 관절을 꺾어 포박해가며 말했다.

[그런데. 밤톨이 못 보셨어요?]

135화 패치워크 (15)

***************************************************

"밤톨이?"

"네. 아까 어디로 달려가던데요. 싸우느라 챙기질 못했는데.

방독면 뒤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도 서서히 적응되고 있었다. 그 뒤 레나의 원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으음.

하지만 여기저기 둘러볼 것도, 탐지 스킬을 사용할 것조차 없었다.

격렬한 칼 소리가 멈춘 통로.

한편에서 연달아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군."

녀석은 달그락거리며 통로 전체를한 번씩 다 점검한 것 같았다.

- 달각! 달각!

달려온 밤톨이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양쪽으로 저었다. 짖는 것처럼 고개를 위로 하고 딱딱거렸다.

[뭘. 말하고 싶은 걸까요?]

녀석의 몸짓으로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높은 호감도가 밤톨이의 심리 상태를 자동으로 알려 준다.

- 교감:〈밤톨〉이 걱정합니다!

- 사방이 막혔습니다!

교감이 녀석의 심리를 알려 준다.

"탈출할 곳을 찾고 있던 것 같은데."

옆에서 밤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밤톨이는 작고 귀엽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처음 일으켰을 때도.

여기 데려올 때도 녀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도움이 되려 했는지 일행이 서로 싸울 때도 혼자 애써 준 것이다.

'수고했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철컥.

녀석을 꼭 안아 줬다.

수고를 인정받아 기쁘다는 듯 밤톨이가 꼬리를 흔들었다. 레나도 어느새 사방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 끼기긱.

- 철컥! 퍽!

그녀의 가방에서 다양한 모양의 도구들이 하나씩 나왔다.

하지만.

도구들을 하나씩 사용할 때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으며 주위를 살펴볼 때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처지고 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 물었다.

"막힌 건가?"

[하아.]

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요. 가장자리까지 봤는데. 답이 나오질 않네요. 비집고들 어갈 틈도 없고.]

나도 석벽 틈을 발견하지 못했다.

탐지 스킬을 써 봐도 마찬가지다.

움직이는 것이나 생명을 가진 것들은 쉽게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던전 같은 무생물의 구조 파악에는 취약한 편이다.

'아직 레벨이 낮은 탓인지도.'

다시 일어나 꿈틀거리는 챈들러와 크리스티나가 보였다.

그들을 보자 더욱 착잡해졌다.

생존은 했지만, 언제 제정신으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다. 레나는 아직도 석벽을 수색하고 있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미안해 괜히 뻔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연기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떤가?"

[ 3시간이에요.]

석벽을 수색하던 레나가 대답했다.

방독면 때문에 둔탁하게 반향되는소리 뒤로, 희미하게 떨리는 감정이 느껴졌다.

'3시간?"

[3시간 남았어요. 제가 미치기까지.

지금껏 썼으니 2시간 30분 남았네요. 방독면의 유효 시간이요.]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연기는 자욱하다.

사방은 막혀 있다. 빠르게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레나까지 미쳐죽어 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의 미래는 두 가지다.

미친 채 굶어 죽는 것.

내가 검기로 무리하게 무덤을 부술 동안, 쏟아지는 돌덩어리에 깔려서압사당하는 것.

나는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다 해도. 레나가 나 때문에 또다시 죽게 된다.

두 번째로 통로 전체를 점검한 레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미치면 그냥 목을 잘라서 죽여주세요. 굶어 죽기는 싫어요. 다시 굶는 건 미친 상태에서도 싫을 거예요.]

"방독면 여분은 없나?"

[없어요. 하나뿐이었어요. 아무래도. 그라스미어의 기술로 만든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 철컥.

나는 빈주먹을 꾹 쥐었다.

이번에도 레나는 내게 불안하다고 말했다. 대비가 충분하지 않은 것같다고 경고했다.

세 번 그녀의 감을 무시하고, 세번째로 레나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은 것이다.

다음에는 반드시 무조건 그녀의 말을 들을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은 정말 방법이 없을까?

레나가 석벽에 귀를 댄 채, 내가꽉 쥔 주먹을 흘끗 바라봤다.

[여기 주먹으로. 살짝 한 번 때려주실래요?]

- 까앙.!

요청대로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오는 소리로 석벽의 두께를 측정하는 것 같았다.

[하아. 최소한 1? 미터는 넘네요.]

[이제 1시간 남았어요.]

- 털썩.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에 주저앉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르렁거리는, 첸들러와 크리스티나의 성난 목소리가 통로에서 몇 번이고 거듭해서 울렸다.

'실패. 인가.

어떻게든 구해 주고 싶었다. 도와주고 싶었다. 이번 생에도 레나가내 앞에서 죽는 걸 본다면 그만한 악몽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정신을 무섭게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하핫. 이제 끝인지도 모르겠네요.]

레나가 과장된 소리로 웃었다. 침묵보다 슬픈 웃음이었다. 설마 그녀에게 또 한 번의 빚을 지는 걸까?

지금의〈그녀〉는 마지막이겠지만.

나는 마지막이 되지 못한다.

설사 죽더라도.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가서 그녀를 보아야 한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너. 내게 호의적인 이유가 뭐지?"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가 내게 호의적인 건 착각이 아니다.

[아하하하.]

레나가 흠칫 당황하며 웃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자 말이 술술 나오는지, 칼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방독면이 얼굴을 숨겨 줘서 좋네요. 하하. 지금 제법 빨개졌는데.]

'빨개졌다고? 무슨 말이지?' 1 시간.

내게는 끝없이 반복되는 만남이다.

그러나〈지금〉의 그녀에게는 마지막으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내 궁금증을 강요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누군가에게 뭘 받아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어머니 이후로.]

둔탁하게 반향 되는 목소리가 기다란 부리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숨을 골랐다.

까마귀 부리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숨결에 실린 어떤 기억과 삶의 결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목까지 덮은 새까만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뒤의 그녀가 한층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전 스승님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데, 제게 너무 많은 걸 주셨잖아요.]

[너무, 많은 걸.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요.]

'그랬나.' 칼을 약간 가르쳤다. 은괴 몇 개를 넘겼다. 자잘한 정보를 줬다.

"이 정도의 호의가 낯설었나?"

[그럼요. 경계할 정도로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원하는 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 알 수 있었는데. 그 누구와도 다르셨어요.]

마스크의 투명한 유리알 너머로,

잔잔하게 웃는 그녀의 눈이 보였다.

나는 침묵을 이었다.

[아까. 굶어 죽기 싫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랬지."

레나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항상 굶주려 있었어요.]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의자 위에서 죽은 시체를 버렸다.

동생을 안고 도망쳤다.

매일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

상해서 버린 음식을 먹고 죽을 뻔한 뒤로 방법을 바꿨다.

'왜 나만 죽어야 하는가?'

열 살.

세상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창녀를 가장했다. 육포 한 점에 입을 빌려주고, 동전 몇 닢에 아래를내어주는 학대하기 좋은 여자아이를 흉내 냈다.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고객들이 원하는 짜릿한 첫 경험을 내어주었다. 경동맥이 잘려 온몸의 피가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경험. 그건 당연히 모두에게첫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열 살 아이 앞에서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어진 상대의 목을 긋는 건생각보다 쉬웠다.

무엇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그럴싸한 이유나 구실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차갑게 굳어 있는 시체에게 남은걸 전부 털어 갔다.

그때부터 굶주림은 없었다.

꼬리가 잡힐 뻔한 적도 있었지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할 때마다 직감은 조금씩 더 발달했다.

나는 레나를 유심히 바라봤다.

세상을 부수기로 결심했던 열 살 인간 아이가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온통 그녀를 착취하려 했던 세계와, 약간이나마 호의를 베푼 내가다시 한 번 대조되는 효과일지도 모튼다.

[그러다 스승님을 만난 거죠.]

까마귀 가면, 유리알 너머의 레나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를 속이고 있는 기분이 죄책감이 느껴졌다.

뭐라고 끼어들려는 순간, 그녀가문득 이야기를 멈췄다.

[어. 스승님, 연기가 조금 옅어진 것 같은데요?]

주위를 돌아봤다.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던 탓에 의식하지 못했다.

레나의 말대로다. 자욱이 피어올랐던 하얀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 달각! 달각!

발치에 바싹 달라붙어 있던 밤톨이도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걷히네요!]

십 분 정도가 지나자 하얀 연기는 완전히 걷혔다.

"크헉.!"

챈들러와 크리스티나가 쿨럭거리며 작게 신음을 토했다. 새빨갛던 눈 이제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부풀어 올랐던 힘줄도 가라앉은 채였다.

"정신이 드나?"

"이상한.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후아아^- 답답했네. 꿈이라고 둘러대면 다예요? 이쪽은 심각했다구요."

답답했던 방독면을 벗어 던진 레나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에 붉은 방독면 자국이 나 있었다.

'오래 쓰면 저렇게 되는 건가.

땀에 살짝 젖은 머리칼이 얼굴과목, 쇄골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다가, 문득챈들러와 눈이 마주쳤다.

"저, 죄송합니다. 이런 함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다. 이제 연기가 걷혔으니.

좀 더 자세히 찾아보도록 하자."

"풀어 줄 테니 또 날뛰면 곤란해요. 다들 몸은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듯했다.

우리는 각자 구역을 정했다.

어딘가 이음매나 조작 장치 같은건 없나 나눠서 찾아보고 있을 때.

"여길 좀 보십시오!"

앞쪽 통로를 담당한 챈들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칼을 들어 바닥에서 3미터 즈음에 있는 석벽을 가리켰다. 안쪽으로 쑥 들어간 작은 틈새가 있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한번 쑤셔 볼까요?"

레나가 배낭에서 늘릴 수 있는 사다리를 꺼내 들었다.

- 툭!

긴 막대 하나를 들고 안쪽을 계속 두드렸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런데 워낙 깊어서 잘 안 보여요. 어디까지 연결된 건지 모르겠어요."

그때 였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사다리에 앞발을 얹었다.

몇 번이고 깡충거리며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네가 왜 그래?"

밤톨이를 덥석 안아 들었다.

그때 였다.

[〈밤톨〉이 희망을 찾았습니다!]

[특성: 예민한 감각이 발휘됩니다.]

[꼭 올라가 보고 싶어 합니다.]

.곤란한데J레나가 밤톨이를 내려다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 구멍으로 들어와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

"흐응. 괜찮을 것도 같고."

"위험하지 않나?"

"딱히 함정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송풍구 같은 건데, 갑자기 열렸어요. 연기가 다 여기로 빠져나간 거예요."

"으음."

"아까 봤을 때는 없었는데. 이상하네요. 밖에서 조작하는 장치도 전혀 안 보였고. 누른 것도 없어요."

나는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밤톨이가 끊임없이 달각거리며 나를 보챘다.

[〈밤톨〉이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보낼 것인가. 이대로 녀석을 안고 있을 것인가. 어려운 문제였다.

- 광!

천장에서 작은 돌덩이가 떨어졌다.

석벽이 움직인 여파 같았다.

'이런 식이면. 여기가? 더 인? 전하?

리란 법도 없지. 가 봐라.'

녀석을 잡은 손에서 힘을 렸다.

- 달각! 타다닥!

녀석이 빠르게 몸을 솟구쳐 안으로들어갔다.

갇힌 통로 안에서 고요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챈들러는 침을 삼켰다.

삼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교감 중인〈밤톨〉과의 거리가 너무 멈니다.]

[〈밤톨〉과의 연결이 끊어지기까지3분 남았습니다.]

'뭐라고.?' 역시 들여보내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순간.

- 띠링!

눈앞에 연달아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밤톨〉이 C더블 플러스급 기관장치를해제했습니다!]

[경험치가 몹시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레벨이.]

[올라갑니다!]

- 쿠르르르.!

굉음과 함께 석벽이 열리고 있었다.

136화 패치워크 (16)

***************************************************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뼈의 군주〉의 스킬 숙련도가25%를 달성했습니다!]

[손상된 뼈의 복구가 가능해집니다.]

[통제 하에 있는 상대에게 추가 스탯을 (2) 부여할 수 있습니다.]

[스탯을 받은 상대는 당신에 대한호감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당신의 통제 아래 있는 목록]

- 밤톨 (늑대 Lv.1l)

연달아 알림 메시지가 나온다.

나는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본다.

밤톨이가 이런 활약을 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으킨 게 아니었다.

무책임한 연민과 값싼 동정으로 녀석을 일으켰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 쿠구구구. 쿵!

모든 늑대는 자기의 날을 가진다.

오늘이 녀석의 날인지도 모른다.

통로가 완전히 열렸다. 저편의 홀로부터 빛이 새어 들어온다.

- 달각! 달각!

활짝 열린 통로로 밤톨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대활약을 펼친 녀석이 내 발치에머리를 비벼 댔다.

"밤톨아! 정말 너니? 고마워!"

레나가 녀석을 뒤에서 꼭 껴안았다. 밤톨이의 머리 위에 상태창을띄워 확인한다.

[이름: 밤톨]

[늑대 Lv.1lKnew!)

[호감도 - 19]

[체력 - 10](new!)

[힘 - 9](new!)

[민첩 _ 13](new!)

[지능 - 14](new!)

[특성 목록]

? 자율행동 E+

- 예민한 감각 Lv.3 (new!)

- 물어오기 Lv.1 (new!)

- 치명타 상승 Lv.1 (new!)

폭발적인 레벨 업에 따라 스탯이전반적으로 크게 올라갔다.

스킬 두 가지를 새로 획득했고, 원래 가지고 있는 스킬도 레벨이 두단계나 올라갔다.

놀라운 성장이다. 녀석을 레나에게건네받아,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만져질수록 기분이 좋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힘 스탯이 상승한 탓일까? 뒤에 서약한 바람이 일어날 정도다.

[밤톨이가 매우 만족합니다!]

호감도가 1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떴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상태창을 띄웠다.

'보너스 스탯 부여.'

[부여 대상을〈밤톨〉, 늑대 Lv.1l로 확정하시겠습니까?]

'확정한다.'

[스탯을 분배합니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내 팔 위에서 배를 보이고 드러누웠다. 띠링,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녀석을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였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챈들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에게서 적지 않은 초조함이 느껴졌다.

골렘들을 처리한 뒤에는 곧장 주술사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텐데, 챈들러 본인이 독연에 취해한참 동안 지체한 것이다.

기뻐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었다.

고작 예상하지 못한 함정 하나를 돌파했을 뿐이다.

"그래, 가 보자고."

내 허락에 그가 빠르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크리스티나도 대검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레나가 곁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밤톨이가 해낸 걸까요?"

"밤톨이가 맞아."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의 여지는 없다. 녀석의 레벨이 올랐다. 덕분에 내 유니크 스킬숙련도까지도 크게 올랐다.

데려가 달라고 끝끝내 따라붙던 밤톨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산에서 일으킨 이후 밤톨이는 한번도 레벨이 오르지 못했다.

이런 순간이 찾아오길 간절히 노린 건 아니었을까?

녀석은 오랫동안 칼을 간 끝에,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찾아낸 것이다.

"대견하긴 한데, 궁금해요. 왜 처음에 구멍이 열린 걸까요? 송풍구요."

"처음에?"

"함정이라면 연기를 빼낼 필요 가없을 텐데. 제가 함정을 팠다면, 아주 넉넉히 여기에 가둬 뒀을 거예요. 뼈가 삭아 버릴 정도로 오래요."

"으음. 돌아갈까?"

레나의 목적은 달성했다. 골렘들도처리해 줬다. 복수를 마지막까지 참관해 줄 의리는 없다.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다고 더 안전하진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뒤를 보세요."

"열려 있는데?"

"앞쪽보다 열린 공간이 반쯤 더 적어요. 그리고 석벽이 흔들거리고 있어요. 이건 마치.

레나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여기로 오면 짓이겨 버리겠다는 느낌인걸요. 일단 앞으로 가 봐요."

챈들러와 크리스티나는 이미 빠르게 걸어가 앞쪽에 있었다.

'나도 서둘러야겠군.'

또다시 석벽이 닫힐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대검을 통로에 끼워 넣을 각오를 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탐지.'

함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 저벅.

통로가 끝날 때까지 다행히 석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넓은 홀에 발을 디딘 레나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석벽에 이겨져, 인간즙이 될지도 모르는 긴 통로를 지나온 것이다.

죽음이 몹시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복도였다.

긴 통로를 지나 나온 건 탁 트인 홀이 었다.

넓고 평평한 공간.

주위에는 조각도 골렘도 없었다.

먼저 와 있던 크리스티나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크리스티나의 손끝이 향하는 곳.

홀 중앙에, 구형의 기이한 조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알.

"저게. 주술사의 석관인가?"

"그렇습니다."

오기 전 영주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챔들러가 어떻게 처리할지도 이야기를 마친 상태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건 색달랐다.

"불길해 보이네요."

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회색석재로 돌로 조각된 알은 위에 껍질부위의 세공이 정교했다.

〈껍질〉은 곳곳이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각된 건지 어떤 힘으로 변형된 건지 알수 없었다.

어떤 부위는 녹아내리듯 뒤틀려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껍질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며 내부를 파먹는 모양새였다.

어떤 부위는 〈안쪽〉이 바깥으로 삐져나와 몇 차례씩 둥글게 말려 있었다. 갈라진 틈에서 저주가 솟아나와 흐르다 건조된 것 같았다.

- 저벅.

첸들러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알 가까이 다가섰다.

문득 밤톨이가 이쪽으로 오라는 둣나에게 신호를 줬다.

녀석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알 뒤쪽에 기관 장치가 있었다.

'이걸 움직였던 거군.'

레버 형태. 녀석이 잡고 움직이기만 만한 크기는 아니다. 바닥에 작은 송곳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부서진 송곳니를 손에 쥐었다.

"이게 부서지도록 물고 움직였나봐요."

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악착같이 움직였을 녀석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졌다.

[스킬: 뼈의 군주 Lv. 1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내 손에 쥐어진.

떨어진 녀석의 송곳니가 작게 멸리고 있었다.

'이건?'

밤톨이의 입을 부드럽게 벌렸다.

[통제 하에 있는 대상입니다.]

[뼈 복구를 실행하시겠습니까?]

- 우우웅.!

부러졌던 밤톨이의 송곳니가 작은 빛을 내며 다시 붙었다.

부러졌던 이를 다시 원래처럼 멀쩡끼 복구해 주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괜히 최강의 네크로멘서에게 흡수한 유니크 스킬이 아니다.

숙련도가 올라간 것만으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내 뼈가 부러졌을 때도.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겠군.'

밤톨이에게 한층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녀석을 이곳저곳 쓰다듬어 준 다음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차례다.

"여긴가?"

"그렇습니다. 주술사가.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챈들러는 자신을 몇 번이고 다잡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후의 처리는 그에게 맡기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수대를 걸쳐 내려온 가문의 복수.

마지막에 그가 칼을 꽂게 해 주는 것도 전부 의뢰의 일환이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서 의뢰를 망쳐 버릴 생각은 없었다.

_ 풍.

챈들러가 유리병 뚜껑을 땄다.

안에 담긴 제 피를 알의 틈 사이사이에 천천히 부어 갔다.

크리스티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몸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필요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그저.

- 쿠르르.!

알이 작게 진동했다.

레나도, 크리스티나도 멸리는 알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몸을 바치러 왔느냐.?]

돌로 된 알 안에서.

슬쩍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왕의 강림降臨을 기다리며.

알에 스스로를 가둔 옛 주술사가 인식하는 것은 저를 보호하는 노예들의 피 정도.

주위의 환경은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챈들러가 이를 악물었다. 실패할 수 없다는 다짐이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 끼기 이익.!

최후의 결계는 바로 이 석관.

기괴한 금속음과 함께〈알〉이 조금씩 그 틈새를 넓히기 시작했다.

- 끼긱. 끼기긱.

불길함이 흘러내리는 듯한 틈새로 길쭉한 관이 나왔다.

관 끝은 대나무를 자른 것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었다.

챈들러는 척수에 꽂혀야 할 그 관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은 이미 꺼내 든 작은 화염방사기를 꺼냈다.

- 콱!

그리고 좁은 발사대를 관 안에 송곳처럼 쑤셔 박고 방사기의 노즐 손잡이를 당겼다.

- 화? 르르르!

화염이 관 안으로 번식했다.

돌로 된 거대한 조각 안에서 불이 꽃처럼 타올랐다. 누대에 걸쳐 착취당한 분노의 화염이 주술사의 관에서 타오른다.

'그라스미어의 불.

챈들러 가문의 장자長子가.

〈대장장이의 분노〉를 주술사의 관안으로 태워 넣고 있었다.

제품이 정밀한 덕분인지 불은 역류하지 않았다. 오직 관 안으로만 폭발적으로 타들어 갔다.

금속으로 된 관을 녹이고 주술사가 잠든 알을 녹였다. 껍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폐쇄된 석관 안에서 뼈와 거죽이순식간에 사그라지는 소리가 났다.

구겨진 연기가 새까맣게 피어났다.

- 저벅.

빠르게 한 통을 다 비우고 챈들러는 뒤로 물러섰다.

어떤 반항도.

비명도 없었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던전 클리어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챈들러가 태워서 그런 걸까?

녀석에게 다 맡겨 버린 게 조금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 하하하하.

알에서 비명 대신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지?'

나는 팔짱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주위를 빠르게 돌아봤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기이하게도 나에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 으하하 하하하.!

웃음소리는 횡에서 종으로.

다시 종에서 횡으로 내 머릿속을 덮어 갔다. 검은 흙으로 만들어진 새까만 창자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웃음소리 였다.

가면을 쓴 사형수의 웃음소리였고태양을 향해 기어가다 죽는 벌레의 웃음소리였다. 썩어 문드러진 그림자가 웃는 소리였다.

큭즉큭큭큭.!

- 펑!

주술사의〈관〉에서.

새까만 연기가 날개를 치듯 내게 덮쳐들었다.

한 손에는 휴대용 화염방사기를.

다른 한 손에는 긴 칼을 든 첸들러의 양손이 모두 떨리고 있었다.

'해냈다.'

복수에 성공했다.

가문의 착취자를 죽였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가슴이 먹먹하게 벅차올랐다.

전신을 옭아매던 실들이 투두둑 끊기는 기분이었다.

얼떨떨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 퍼걱!

벌어진 껍질 틈으로 긴 칼을 집어넣었다. 안쪽을 마구 헤집었다.

- 끼긱! 끼긱!

새하얗게 타 버린 회색 재와, 오래묵은 안쪽의 돌가루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몇 번을 거듭 쑤시던 챈들러는 성공을 확신했다.

드디어 안도할 수 있었다.

악몽과 암시, 긴 착취는 끝났다.

챈들러 가문에 오랜 세월 얼룩져 있던 약점은 사라졌다.

굳이 멀리 동방까지 검을 수련하러갔던 건, 사실 가문으로부터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다음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 현실이 바뀌었다.

'모두 이분 덕분이지.'

챈들러는 기사를 바라봤다. 스스로는 부인하지만, 지하에서 다시 일어난 검주劍主인 게 분명했다.

사령술이건, 흑마법으로 일어난 존재건 챈들러는 상관없었다.

조상님들이 보내 준 귀한 사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챈들러는 해골을 보고 열의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외쳤다.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외쳤다. 하지만 역시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스승님.?"

가문의 구원자인 기사의 곁에 서있던 레나가 말을 걸었다.

뛰어난 역량을 가졌지만, 어쩐지항상 피 냄새를 풍기던 여자다.

'같은 편은 아니라도. 절대 적으로는 만들고 싶지 않은 타입이지.

제자라고 했나? 특이하단 말이야.'

챈들러는 흘끗 레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스승님!"

그녀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애타게 외쳤다.

- 딱딱!

기사는 새하얀 이를 아래위로 두 번 부딪쳤다. 그리고 레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37화 패치워크 (17)

***************************************************

"이거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참 경쾌하네."

어처구니없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의식은 생생했다.

하지만 몸이 무언가에 뒤덮인 둣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끝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정교하게 실이 묶여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기괴한 감각이 두려웠다.

몸을 바들거렸다. 투명한 실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떨었다는 것조차 착각이었다. 움직일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레나가 곁에서 의아한 얼굴로 나를바라봤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글쎄. 안 들렸니?"

'나'는 손을 뻗었다.

- 스르록.

레나의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무의식의 충동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인간 여자에게 그런 마음 따위 품은 적 없다.

가진 건 약간의 연민과 책임감뿐.

하지만 턱을 더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없이 부드럽고 능숙했다.

분명하다.

'내'가 하는 짓이다.

빠르게 답안을 도출했다.

1. 나는 미쳤다.

2. 무언가 에게 몸을 빼앗겼다.

며칠 사이 정신에 독이 풀어질 만한 일은 없었다. 광기에도 최소한의계기가 필요하다.

답은 두 번째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대부분의 문제가 그러하듯.

답은 한참 전에 제시되어 있었다.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

그의 몸이 〈그라스미어의 불〉에화르르 태워질 때, 내게 옮겨붙었다는 답안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울리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놈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놈은 첸들러에게 꿈을 꾸게 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젠장.'

그러나 의문이 하나 남는다.

대체 왜 나를?

강한 자라고 한다면 아쥬라의 탑주들도 있다. 검주들도 있다.

기스-제-라이나 별빛청여우가 속한 레드 플레이크도 있다.

만만해서라면. 내가 아니라 챔들러를 가졌어도 충분하다.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기에는 그편이 훨씬 쉬울 터.

한 번에 덮쳐 오는 연기는 실체 가없는 것처럼 빨랐다.

질주로 도망갈 생각도.

검기로 벨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내가 아니라도 잡아먹을 수 있을터인데, 어째서 나인가.

막막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몸은 그 어떤 감옥보다도 좁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챈들러도 한패인가?'

통제력을 잃은 시선 끝에 챈들러가 흐릿하게 비친다.

〈알〉을 태우고 난 후의 감격스러운 표정.

지금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전까진 연기였다 해도, 내가 몸을 완전히 빼앗긴 지금 가면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하아. 피부 감촉 좀 봐. 너무 부드러워. 너로 할 껄 그랬나?"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조차, 나는레나를 능숙하게 희롱하고 있다.

"스승님.?"

레나의 얼굴이 봉승아 꽃잎처럼 붉게 물들었다.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 스르록.

레나의 쇄골로 손가락을 뻗었다.

맥박을 점검했다.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레나의 새하얀 목덜미까지 한순간에 붉게 물들었다.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냐!'

- 달그락!

정신을 집중해 손가락을 회수하려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레나의 변해 가는 체온과 피부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미친 듯이 뛰는 맥박이 적나라하다.

나는 정신적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 그만.!'

[빙의에 저항합니다!]

[정신 저항 스킬이 없습니다. 지혜수치에 따라 저항 확률과 범위가 결정됩니다.]

[〈암시되는 세계의 운명〉이 발동합니다. 150 이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경우〈공포〉〈절망〉〈망각〉에 빠집니다.]

[지혜가 너무 낮습니다.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떠오르는 알림 창에 절망했다.

내 지혜가 충분히 높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50 이하는 상대도 안 한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

한쪽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나는고 개를 돌려 탄식이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챈들러였다. 잔뜩 고양된 표정의 남작이 입을 열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원수를 갚았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생했어. 네 역할이 제일 컸지."

"아닙니다! 제가 무슨.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다가.

- 톡톡.

'나'는 두개골을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나 같은 존재를 만났잖아?"

내 입에서 대체 무슨 소리가 튀어나오는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챈들러도 잠시 갸웃했다. 하지만적당히 추측한 걸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은공처럼 강한 분을 만난 건제 평생에 없을 운입니다!"

"뭐. 당장 강해서라기보다는. 가능성을 높게 샀다고 해 두지."

챈들러와 레나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없었다. 가능성을 보고 몸을 빼앗았다는 이야기.

혹시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이 내회 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걸까?

"이제 다들 올라가자고? 밤톨이!

너도 이리 와. 정말 잘했어."

- 달각.

밤톨이는 경계하듯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 덤석!

뒤로 물러나는 밤톨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내 의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멋대로 움직이는 손발에 적옹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이런 종류의 공격에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 이상의 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몸을 빼앗겨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다.

다시 죽고 살아나게 된다면.

반드시.

이런 종류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았다.

"큭큭. 두개골 곡선이 너무 앙증맞네."

- 달각! 달각!

밤톨이가 내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나는 밤톨이의 꼬리를 꽉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알아봐 주는 게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상념에 잠겼던 나는 갑작스러운 위기감을 느꼈다.

레나를 희롱하는 나.

밤톨이의 꼬리를 잡은 나.

'내' 몸이 얼마나 오래 빼앗겨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진득이 기다리면, 언젠가 죽기야 할 거다.

하지만.

'내'가, 레나나 밤톨이를 살해하는모습을, 생생히 의식을 가진 채로 지켜보게 된다면.

정신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했다.

죽음보다 몇 배는 더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다시 제대로 실감되기 시작했다.

- 달각. 달각.

시야 한쪽에 꼬리가 붙잡혀 흔들리는 밤톨이가 들어온다.

"왜 앙탈을 부리고 그래? 힘내서 들어갈 곳 찾을 필요도 없어. 저기봐 봐. 활짝 열렸잖아. 응?"

'나'는 들어온 통로를 가리켰다. 통로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앞도 뒤도 동일했다.

하얀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저렇게.!"

"주술사를 죽였으니까, 이제 던전이 끝난 거지, 뭐."

"그런데 스승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밤톨이처럼 눈치를 챔 건가.

레나는 감이 좋다. 지금까지 나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연기를 뒤집어쓴 후, 말투도 행동도 달라졌다.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최면 Lv.15를 사용합니다!]

[암시 Lv.15를 사용합니다!]

"그럼. 나야 완전 괜찮지. 그렇지 않아?"

목소리 톤이 기묘하게 낮아졌다.

말투에서 주술이 섞인 운율이 느껴졌다.

"그런. 가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괜찮아. 밖에 있는 사람들도 괜찮고, 영주도괜찮다면 멋진 일이겠지. 그렇지?"

'나'는 주위를 천천히 돌아봤다.

- 딱. 딱.

규칙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사람들은 귓속에 이명이 울리는 것같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크리스티나도, 챈들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면과 암시.

그런 스킬은 흡수한 적도, 배운 적도 없다.

'몸이 빼앗기면서. 스킬까지 심어진 건가.'

게다가 레벨도 지나치게 높다.

저항을 바라는 건 무리다.

"모두 괜찮은 것 같아요."

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른 그녀마저 말 한 마디에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비참한 마음과 상관없이 '내' 입은 자연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다들 괜찮지? 그럼 올라가자."

일행을 데리고 무덤을 간단히 빠져나갔다. 긴 회랑과, 무너진 골렘들을지나갔다.

밖은 이미 밤이었다.

"다들 쉬어. 영주도 한번 확인해보고. 뭐, 멀쩡할 거야."

일행에게 짧게 말했다.

챈들러는 그제야 영주가 생각이 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하 통로를 걸어오며 챈들러는 영주에 대해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들어가기 전에는 주술사가 죽으면 영주에게 충격이 갈까 봐 무척 초조해했는데도. 암시와 최면이 제대로 발동한 것이다.

챈들러와 크리스티나가 물러갔다.

"레나."

'내' 손길이 그녀의 쇄골을 거쳐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능숙하게 작은 턱을 움켜잡았다.

"네."

레나가 순종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흐음.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폈다. 턱을 받친 손에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목은 저항 없이 좌우로 가볍게 움직였다.

"오늘은 혼자 쉴게. 괜찮지?"

"알겠습니다. 오늘은 멀리 떨어져서 잘게요."

레나는 몽롱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밤톨이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아직 제정신이다.

암시나 최면을 걸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 저벅, 저벅.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긴 복도에 울려 퍼졌다.

- 털썩.

나는 소파 위에 앉는다. 푹신하다.

시야도 감각도 그대로다. 몸의 통제권을 빼앗겼을 뿐이다.

커다란 소파 앞에는 거울이 있다.

'내'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을 천천히 관조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다.

- 철컥.

'나'는 갑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보고, 몸을 하나씩 더듬었다.

- 달그락.

갈비뼈 안쪽에 손을 넣어 만졌다.

너비를 확인하듯 손끝으로 비볐다.

뼈마디가 뻣뻣해지며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죽어야 한다.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자살해야 한다.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도 두고두고 후회할 일들을 '내' 손으로 마구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소파 옆에 기대어 있는 대검이 보였다.

_ 달.

움직여라. 움직여라. 움직여라.

옴직여라. 제발.

대검을 쥐고 머리를 쪼개서 자살하겠다.

다시 시작한다면, 이 무덤 따위는 영원히 찾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 달그락.

손끝이 움직였다. 칼자루 쪽으로 살짝 뻗어 갔다. 그게 전부였다. 더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응?"

갑옷을 다 벗어던진 '나'는 두 손을 맞잡고 거울을 바라봤다. 수은이 뒤에 칠해진 유리 앞에서 갸웃거리는 새하얀 해골이 보인다.

"으음? 아직도. 의식이 남아 있어? 틈새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 우우우웅.!

이명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소리가 끈적거렸다. 정신을 새까닿게 덮어버릴 것 같았다.

- 우우우응.!

기괴한 이명이 끝없이 이어졌다.

곧이어 이명의 결 하나하나가 자세히 들리기 시작했다.

수천수만의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어 대는 소리였다.

거대한 까마귀가 하층 의식 속에 파고 들어왔다.

그 위에 탄 새파란 눈동자의 남자가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 아아. 좀 꺼림칙하다 했더니.

진짜 남아 있는 거냐? 말해 봐."

'넌 누구냐?'

= 나? 내가 너지 누구겠어. 이거 믿을 수가 없군. 환령換靈으로 정체성을 빼앗지 못하다니. 마계에서도 없던 일이다만.

'마계.? 혹시 네놈이 말파스라도 되는 거냐?'

이곳은 말파스의 신전이다. 주술사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 으하하 하하.! 하하하하.!

그러나 까마귀에 탄 남자는 배를 잡고 웃었다.

녀석의 귀에 달린 커다란 백금 귀걸이가, 지독한 웃음에 흔들렸다.

열 손가락에 끼운 반지부터 팔찌에, 내민 헛바닥에 뚫어 끼운 장신구까지 온몸을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녀석이었다.

"으하하하.!"

웃음은 의식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달그락거리며 거울 앞에서 마구 웃었다.

"주제넘은 소리는 하지 마라. 왕께서 너 따위에게 강림하겠느냐?"

= 주제넘은.

현실과 의식에서 목소리가 두 번씩 울렸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참이지? 마음에 안 들면 몸을 돌려내라.'

= 닥치고 있어. 가진 능력도 활용못 하는 머저리이긴 해도, 강림을준비하는 용도로는 쓸 만하거든.

온몸을 장신구로 휘감은 남자가 오만한 태도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능력 활용을 못 한다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 달그락.

내 몸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_ 풍.

맑은 소리와 함께 루-륨을 담은유리병 하나를 땄다.

'건드리지 마!'

레나에게 반드시 건네줘야 한다.

암시에 걸린 레나는 유리병도 전부내 방에 놓고 떠나갔다.

그녀가 지부장이 되려면.

= 중요한 시점이거든? 한순간이라도 방해한다면 오늘 밤 당장 그 여자를 죽여 버릴 거야.

"검기."

- 우우우응!

어느새 손에 든 단도 끝에서 연푸른 검기가 배어 나온다.

'나'는 거울을 보며, 세심한 손길로 갈비뼈 안쪽에 단도를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138화 No Sugar in my Coffin (2)

***************************************************

- 서걱.

칼끝이 움직였다.

주술사 아이작.

그는 연푸른 검기를 두른 채 내뼈를 깎기 시작했다.

깊게 들어오는 칼날에 뼛가루가 연기처럼 떨어져 나갔다.

대체 무슨 목적일까?

이대로 죽음을 맞는다면 차라리 좋은 결말이다.

그러나 어렵게 몸을 렛은 뒤 자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뼈도, 체력도 빠르게 깎여 갔다.

[체력이 0.17% 소모됩니다.]

[체력이.]

- 달그락.

갈비뼈 안쪽에 깊게 각인을 새긴 놈이 갑자기 칼을 멈췄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거울 앞에서 뼈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문양을 새기는 건가?

모든 통제권을 잃었지만 의식은 생생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똑똑히 보인다.

단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복잡한 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때 였다.

주술사가 내 의식에 말을 걸었다.

= 재밌네. 몸이 깎여 나가면서도반항이 없어?

'하던 거나 계속해라.'

= 의외인걸. 의식이 있으면서도,

소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그런 척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 나는 금빛 새벽의 주主이자 왕의 성막을 담당하는 대제사장이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멍청아.

이놈이 정말 수백 년 전 남부를 지배하던 대주술사일까? 말투가 왜이 따위인지 알 수 없었다.

터무니없이 거만한 놈의 인격과,

나를 흥미로워하는 감정이 조금씩 느껴졌다.

하지만 기억 같은 건 홀러 들어오지 않았다. 주술사도 나와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았다.

다음 순간.

=〈혈관〉을 그렸으니.

"이제〈피〉를 부을 차례야."

'내'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 단어가 어딘가 익숙했다. 은빛액체와 피라는 단어가 어쩐지 서로어색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 단어를 들었지?'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할 때였다.

- 달그락.

주술사가 바닥에서 유리병을 주워들었다.

- 찰랑!

준비된 은빛 루-륨을 망설임 없이 왼쪽 손끝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뼈가 깊이 깎여진 홈에 은빛 액체가 흘렀다. 부어지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다. 몸의 반신이 그대로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 치이익! 치이이익!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땅으로 흘러내려야 할 루-륨은 한 방울도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고 뼈에 달라붙어 흘렀다.

왼쪽 손끝에서 갈비뼈까지, 칼로 새겼던 각인.

마력액이 흐르는 각인이 하나로 이어져 반짝거렸다.

.회로?

문득.

잿빛 기사의 갑옷에 반짝이던 붉은 회로가 떠올랐다.

서로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열리고 닫히는, 반짝거리는 규칙.

그것만은 비슷하다.

- 저벅.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 드르륵.

오른손으로 창문을 열었다.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별도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그 밤을 향해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결빙."

- 사각!

그 말 한 마디에, 아무것도 없던 손끝에서 푸른 냉기가 일렁였다.

- 사가가각!

창문 밖의 공기가 시시각각으로 손끝 주변에서 얼어 가고 있었다.

보고도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밖으로 손을 뻗어밤을 얼렸다.

이게 정말 '내'가 한 일인가?

눈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내' 손짓 한 번에.

가을밤에 짙푸른 살얼음이 낀다.

의식을 집중해도 풍경은 그대로다.

허상이 아니었다.

'아무리 빙의된 상태라고 해도.!'

같은 몸이다.

아케인 하트는 고사하고 평범한 심장도 없는 몸.

결빙 스킬을 처음 흡수했을 때가 떠올랐다.

〈결빙 Lv. 1을 흡수합니다! 〉

〈아케인 하트가 필요합니다! 〉

〈'결빙'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흡수합니다! 〉

〈아케인 하트가. 〉

〈스킬을 사용할 수 없. 〉

2레벨의 정수 흡수는 마법사들의 스킬을 흡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케인하트가없으면 마법은 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진짜 마법.

실제하는 신비神秘.

보라색 로브를 입은 두 아쥬라의마법사가 보인 것과 같은 힘이, 내손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푸르게 얼어붙는 밤을 향해다시 한 번 작게 중얼거렸다.

"이중영창."

역시 마법사에게서 흡수한 스킬이다. 더블 캐스팅은커녕, 캐스팅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던 스킬.

[스킬 혼합이 가능합니다. 무엇을사용하 시겠습니까?]

'게다가 마법 혼합이라니!' 하지만 주술사는 반투명한 메시지를 바라보지 않았다.

'못 보는 건가?'

아까부터 떠오른 여러 메시지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내 눈에만 보이는군.'

반투명한 창들은 이번에도 오직 내 눈에만 보이고 있다.

의식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다행.

어쩌면.

이걸 이용해 반격을 시도해 볼 수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손을 앞으로 털어 냈다.

"뇌격雷擊."

- 파직! 파지직!

손끝에서 샛노란 번개가 뻗어 나갔다. 번개 줄기가 푸르게 얼어붙은 공기를 타고 그물처럼 밤하늘에 뻗어 나갔다.

- 사각! 파지지지직!

냉기는 수십 미터를 뻗어 갔고, 샛노란 번개는 별이 되듯 저 멀리 솟구치다, - 파지지직.

작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냉기와 번개의 조합.

마법으로 만들어 낸 차가운 폭죽.

밤하늘에 별빛 한 점 없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서늘한 환희가 느껴졌다.

'이건.!'

방금 내 몸에 행해진 건.

아케인 하트가 없어도 루-륨을 마력원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시술이 분명하다.

문득 막급한 후회가 몰려왔다.

'자세히 봐 둘걸.'

아케인 하트가 없어도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기적.

그 기적의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고 놓쳐 버린 것이다.

스킬 습득이 아니다.

명백한 신체 변형.

뼈를 뚫고 루-륨이 흐르는 회로를 만들었다.

다시 회귀했을 때 이 상태가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잘 봐 두었어야 했는데, 주술사와쓸데없는 대화를 하느라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주술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하자고 마음먹었다.

대검 근처로 걸어간 '내'가 대검을 잡아들고 중얼거렸다.

"검기.

- 우우우우응!

대검에서 연푸른 검기가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내가 발동했을 때보다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웠지, 못할 거 없는 능숙함이었다.

'주술사라고 하지 않았나?' 의문이 라기보다는 한탄이었다.

원래 이 정도는 가뿐히 소화하는건지, 아니면 스킬이 있는 내 몸을벳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왠지 전자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고 있었다.

'나'는 검기를 피워 올린 검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격발."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검에 서린 검기에.

- 화륵!

점화되듯 화염이 치솟았다.

푸른 검기에 붉은 화염이 섞였다.

검기가 다섯 배는 부풀어진 것처럼 이글거렸다.

- 회■르르르르!

검염 劍炎.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묵는 방의 천장이 높지 않았더라면, 당장 사방에 불이 옮겨 붙을 정도의 화염이었다.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이렇게 마법과 검술을 결합한다면 어쩌면 후작 같은 괴물과도 맞서 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을 흡수할 때, 놈에게 마법에 관한 스킬은 없었다. 의외로 마법에 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일단 이놈을 떼어 버릴 수 있어야 성립하는 이야기다.

"해제."

주술사는 대검에 타오르던 화염을 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었다.

= 음. 어이? 아직 있냐? 스킬 활용도 못 하던 몸을 개조해 줬는데.

뭐, 감사의 인사 같은 거 없냐?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보장만 있었어도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지 모른다.

드디어.

아케인 하트 없이도 마법을 사용할 실마리를 얻은 셈이니까.

마법까지 얻은 '이 몸'은 그 언제보다도 강해졌다.

하지만.

내 몸이 아니다.

강해지는 게 오히려 장애물이다.

이런 식이라면 죽을 확률도 크게 낮아진다.

회귀에 성공할 때까지.

몸을 되찾을 때까지,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 어이? 안 들려? 거기 있는 거다 느껴지는데. 불렀는데 없는 척하면. 콱 그냥!

'있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루-륨을 어떻게 사용한.

= 그냥 피라고 불러, 멍청아.

주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혈관'을 그렸으니. 이제 '피'를부을 차례야.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술사의 말투에서, 놈이루-륨을 말 그대로 '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피라고?'

= 그래. 사도使徒의 피다. 세이론이 잡아 죽인 사도들의 피지.

착 가라앉은 주술사의 서술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생소한 말이었다.

루-륨.

마법 장치의 동력 액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대체 여기서 왜 사도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세이론이 나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사도의. 피라고?'

= 어. 나냐우 그 애새끼는 삼백 년전에 뒈졌는데, 왜 아직 T&T가 이걸 모으고 있는 거냐?

트로핀 나냐우.

T&T 두 창립자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이번 생에 들어서 처음으로 이름을 들어 본 인간.

그가 남긴 룰북에 쓰여 있는 대로레나와 루-륨을 수집하기로 했다.

그걸 어떻게 안 걸까.

하지만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다면,

주술사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자와. 서로 아는 사이인가?'

= 내가 도시 아흡 개를 지배할 때나냐우는 여덟 살이었어, 여덟 살.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고 대답이 나제대로 해.

동시대인인가.

역시, 놈도 나름대로 궁금한 게 있어서 나에게 말을 건 것 같다.

몸 안에 갇혀 있으니 불쌍해서 말동무를 해 준 것 따위는 아니다.

"한데 사도라는 게, 정확히 뭐지?

인간을 잡아 고문용 가축으로 기른 존재라고 들었다. 예전에 강림한 마왕들을 말하는 건가?'

나도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러자 주술사는 갑자기 맥이 쭉빠진 듯한 태도를 취했다.

= 뭐야.?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사도들이 마왕이라고? 하.

그냥 의식 째로 녹여 없애야겠네.

- 팟.

녀석이 나와의 대화를 끊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주술사 벨'호멧 아이작.

짧은 순간에, 놈의 인성이 적나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주술사가 몸에 새긴 각인을 다시한 번 점검하고 있을 때.

나는 녀석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렸다.

'상태창.'

- 띠링!

[Lv.39(173)j[체력: 61]

[힘: 73]

[민첩: 71]

[지혜: 61]

원래 가지고 있던 스킬들이 주르륵 나열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열 번 넘게 죽어 가며얻어 온 귀중한 스킬들이다.

그 아래로.

낯선 스킬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결계에서 나올 때, 주술사가최면과 암시 스킬을 일행에게 사용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나에게 그런 스킬은 없다.

놈의 혼이 들어오면서.

힘 자체가 옮겨붙은 것이다.

[최면 Lv.15] (영혼귀속)

- 피최면자의 가치관에 강력히 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암시성을크게 고조시킴니다.

지속 시간: 4시간[암시 Lv.15] (영혼귀속)

- 피암시자의 생각을 안내합니다.

최면과 결합된 높은 레벨의 암시는 신체 현상까지 간단히 일으킬 수 있습니다.

지속 시간: 4시간피암시자의 정신력에 따라 스킬 효력이 크게 좌우됩니다.

최면과 암시 스킬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스킬 설명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쿨타임이 24시간.

지속 시간은 4시간이다.

큰 힘을 발휘하는 만큼 나름의 제약이 있었다.

상태창이 없었다면, 절대로 몰랐을 정보들이다.

주술사는 결코 나에게 이런 약점들을 말해 주지 않았을 테니까.

'놈도. 무적이 아니다.'

레나도, 첸들러도.

아침이면 원래대로 돌아오게 될 확률이 높았다.

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스킬을 꼼꼼히 살폈다.

또 다른 약점은 없을까?

[결계작성 Lv.15] (영혼귀속)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결계 지역에서는 스킬 위력이 크게 상승하며.

[제사 Lv.20] (영혼귀속)

- 번제를 바쳐 힘을 회복합니다.

- 제물이 고통스러울수록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 제사 특성 : 말파스의 대제사장-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말파스에게 가장 총애 받는 대제사장입니다.

- 영혼에 말파스의 각인이 새겨져있습니다. 당신이 지내는 제사는 모두 말파스에게 바쳐집니다.

- 말파스의 추종자들에게 호감도가 25 상승합니다.

-〈새를 사냥하는 마왕〉레라지에의 추종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적대하고, 못을 박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녹색 옷을 입은 사수射手.

달콤한 사냥꾼.

활과 쾌락, 부패의 마왕 레라지 에.

직접 엮일 일은 전혀 없었지만, 존재는 알고 있었다.

'서로 원수진 사이인가. 차라리 놈들과 마주쳤으면 좋겠군.'

하지만 일행이 있다면 곤란하다.

어떻게든 레나와 헤어지고,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잡다한 스킬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주술사의 영혼에 귀속된 스킬들.

'우울하군.'

지금은 물론.

다시 죽더라도, 내가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다른 약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제사 스킬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번제播祭.

제물을 태워 공양한다.

아이작은 제힘을 되찾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학살을 '내' 손으로 저지를 것인가?

산 제물들을 태우는 유황 냄새가,

벌써부터 커다란 방 안에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139화 No Sugar in My Coffin (3)

***************************************************

아이작은 책상에 앉았다. 만년필을 들고 얇은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적히는 글자들은 엄연한 제국공용어였다.

하지만 글자 자체는 알아보더라도,

문장과 문맥의 의미는 전혀 알아볼수 없었다.

일종의 암호문인 것 같았다.

[변화는 다시 기다리고 있다. 영향을 받지 않은 하나의 조끼.]

비슷한 내용으로 수십 장의 편지를쓴 아이작은 마지막 한 장 남은 종이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을 적어 갔다. 이번에는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 그라스미어 영주 허버트 챈들러아이작은 펜을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움직였다.

[해골기사를 첸들러 가家의 영원한 귀빈으로 대접하며, 다음과 같은 특전을 내린다.]

1. 영주 전용 내성內域 대장간의모든 사용 권한을 영구하게, 상시허가한다.

2. 도시 내에서 A급 이상의 무기가 제작될 경우 먼저 해골기사에게보인다. 해골기사가 원하는 경우 그에게 조건 없이 즉각 양도한다.

3. 〈선조들의 전당〉의 모든 물품을해골기사의 것으로 인정한다.

4. 내성 지하 전체와, 그곳에 묻힌 모든 물품의 권한을 해골기사에게양도한다.

5. 해골기사가 무언가를 요구할 경우, 영주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화수분〉의 회원권을 통해서라도어떻게든 즉시 해결한다.

6. 해골기사는 도시 내에서 절대적인 치외법권을 가진다.

나는 계속 터무니없는 소리를 써내려가는 아이작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녀석은 15번까지 쓴 뒤에야 펜을 멈췄다.

하나하나가 차마 똑똑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요구였다.

= 목숨을 구해 준 거 아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랑 아들 목숨까지 살려 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바로 그 목숨을 네가 빼앗고 있지않았냐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때, 아이작이 다시 말을 걸었다.

= 그런데, 년 이름이 뭐냐?

'없다.'

아이작은 팔짱을 끼었다.

= 야, 인간들한테만 숨긴 거잖아.

정말 없어? 그게 말이 돼?

'없다. 모른다.'

=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아이작은 팔짱을 풀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야, 니 네크로멘서는 대체 어떻게 되어 처먹은 년이냐? 혹시 너보다 머저리냐?

'무슨 소리지?'

= 진명眞命을 개방해야지. 그래야 기량이 확 늘어나는 거 아녀. 그것도 몰라? 네놈 정도면, 생전에 이름깨나 날렸을 게 분명한데.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기스-제-라이의 다섯 듀라한도 모두 이름이 있었다.

동방의 길라우트.

견고한 오웨인.

심장을 부수는 안드레이.

민첩한 펜리르.

창백한 하멜라인.

정말 이름을 알게 되면 힘이 늘어나게 될까?

= 대체 얼마나 머저리 같은 년이기에, 검기를 쓰는 놈한테 진명 개방도 안 해 놨어?

루비아를 매도하는 소리를 듣자 내잘 못인 양 가슴이 아려 왔다. 아이작이 이리저리 서성대며 말했다.

= 무덤 위치나 정확히 불러 봐. 묘비 뒤져 보게.

'에라스트 근방, 야산의 묘지다. 예전에 난 홍수로 전부 파헤쳐져 있을 터.'

그러자 녀석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잔뜩 묻어났다.

= 그런 허접한 데 묻혀 있었어?

제국 기사 묘역이 아니라?

'거짓은 아니다.'

= 정말? 거기가 어딘데? 도저히못 믿겠군. 너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가 그런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실이라니까.'

나는 녀석에게 추가로 묘지의 위치를 좀 더 설명했다.

"킥킥.

아이작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으며 이를 딱딱 마주쳤다.

혹시 뭘 잘못 말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녀석이 내 무덤을 알아냈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일이 있을까?

이미 날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부지런한 참새들의 울음소리였지만, 아이작의웃음소리와 함께 들으니 어쩐지 수천 마리 까마귀가 동시에 우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때 였다.

- 똑똑.

"기사님, 기침하셨습니까?"

밖에서 어린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예. 옛!"

잔뜩 기합이 들어간 대답이 들려왔다. 나에게 뭐든 잘해 주고 싶어 하던 어린 인간 여자였다.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자 좋은침구를, 잠도 자지 않는다고 하자목욕물이라도 어떻게든 화려하게 준비해 주려고 했던 시녀다.

- 끼익.

아이작은 문을 열었다. 곁에는 레나가 서 있었다.

"어, 왔구나?"

커다란 가방에 담은 편지들을 레나에게 안겼다.

"이건.?"

"편지야. 목적지 다 써 놨어. 중요한 거거든? 너라서 믿고 맡기니까제대로 보내."

아이작은 레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예.! 알겠습니다.!"

레나가 무언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최면이 안 풀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킥.

뒤를 돌아 나가는 레나를 바라보고아이작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최면에 걸린 레나를 비웃고 있는게 분명했다.

"저, 기사님. 영주님께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가 말을 걸어왔다.

"어, 그래. 년 저거 들어."

아이작은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루비아의 갑옷을 손으로 가리 켰다.

"알겠습니다!"

시녀를 따라가며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짜식, 연기하네.

'연기라고?'

= 그래. 레나라고 했나? 암시에 당하는 척 연기하고 있어. 너 같은 멍청한 놈에게는 과분할 만큼 눈치가 있는 아이지.

'레나가.!'

= 그래도 내가 그거 하나 못 알아볼까 봐? 큭큭큭. 진짜로 당해 버린 놈들보다야 훨씬 낫지만 말이야.

잘 키우면 크게 되겠는데?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레나는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당하는 척 연기하고 있다.

추측컨대.

나를 구출해 낼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아이작은 그런 레나의 심리를 전부파악하고 있다.

차가운 한기가 마음 밑바닥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레나가 날 구해 주려다 살해당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또다시 이런 상황인가.

이번 생에는 꼭 제대로 도와주려고 했는데. 연기를 하며 기회를 노리는 레나의 심정을 생각했다.

외로우리라.

나를 구하기 위해서 위태로운 외줄위에 올라타 있다. 살얼음판 위에서 연기를 펼쳐 내고 있다.

몹시 괴로웠다.

그런 마음과 별도로, '나'는 발걸음도 경쾌하게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집무실에 모두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공!"

영주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혈색이 밝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챈들러의 표정도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밝았다.

주술사가 죽으면 영주에게 충격이갈까 봐 초조해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벌레들이 모두 불타 사라지면서,

그저 건강해진 모양이었다.

"저와 제 아들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집사, 챈들러, 크리스티나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크리스티나를 흘끗 바라봤다.

더없이 자연스럽게 챈들러의 옆자리에 녹아들어 있었다.

가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인정받은 모양이었다.

모두에게서 '나'를 향한 호감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순간에도호감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챈들러도.

크리스티나도.

최면은 풀린 듯했지만.

나를 다른 존재라고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영주가 만면에 그득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입술을 살며시 혀로 축이며 말했다.

"이런 은혜에 대한 보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작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와 펜을 슬쩍 내밀었다.

빈 종이가 아니다.

어젯밤에 작성한 빼곡한 목록이 적혀 있었다.

맨 아랫부분만, 뭔가 쓰라는 듯 널따랗게 비워졌다.

"이것은.?"

"읽고 서명."

"으홈, 나 그라스미어 영주 허버트챈들러는, 해골기사를 첸들러 가家의 영원한 귀빈으로 대접하며,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크흠, 다음과 같은. 특전을.

영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뭔데 그러십니까?"

"뭔지는 몰라도 은공께서 원하시는건데, 즉시 들어주십시오, 아버님!

아버님이 안 하시면 제가!"

천천히 목록을 읽어 내려가는 영주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과 눈동자가 떨렸다.

"영주 전용 내성內域 대장간의 모든 사용 권한을.

- 꿀 적.

보고 있는 내가 괴로울 지경이다.

1번 조항부터 막히면 많이 힘들 것 같은데.

"아니, 이. 이런 걸 어떻게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이게 무슨.

영주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실시간으로 바닥으로 빠져 홀러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건 없었다.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가만히 기다려 보거라. 이건. 밑천을 한 톨도 남김없이 다 탈탈 털어 달라는 말씀이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전부 아시는 거요?"

옆에서 종이를 바라보던 집사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집사는 내게 수여하려고 했던 듯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지만, 그 상자의 존재는 이미 스스로도 잊은 것같았다.

열다섯 개의 조항.

앞쪽은 주로 요구 사항이었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조항들이 제법 묘해지고 있었다.

은혜를 베풀지 않았더라도, 한 조항 한 조항을 읽을수록 거절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영주의 깊숙한 치부들.

가문과 도시의 은밀한 이야기를,

아이작은 기묘한 형식으로 엮어서뒤쪽 조항에 끼워 넣었다.

'저런 건 다 어떻게 안 거냐?'

내 질문에 아이작이 대답했다.

= 어떻게 알긴. 내가 꿈을 꾸면,

저들은 내게 현실을 공유하지.

영주는 결국 식은땀을 홀리며 종이에 서명을 마쳤다.

나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쨌거나 아이작은이 모든 걸 내 모습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돌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작이 곁에 선 시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 철컥! 철컥!

그녀가 고이 들고 있는 갑옷.

루비아가 유블람에서 샀던 40로티짜리 갑옷을 손으로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갑옷을 들고 있는 어린 시녀도 내손 짓을 따라 앞뒤로 흔들렸다.

"이건 녹여 버려. 제대로 된 거 하나 주고."

"알겠습니다. 바로 폐기 처분.

집사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갑옷을 잡았다.

'안 돼!' 나는 갑옷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걸 녹여 버린다는 건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루비아가 남겨 준 갑옷이었다.

다른 모든 물건을 잃는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아이작에게는 고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소중한 유품이다.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루비아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했던 흔적이다. 함께 꿈꾸던 미래가 녹아있다.

내게 갑옷을 입히고 함께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 했고. 함께 대로를 걷고 싶어 했다.

그녀는 땅에 묻혀 썩어 가겠지만.

갑옷은 아직 깨끗하고 반듯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희망은 없다.

손끝에서 손으로, 팔로 힘이 들어갔다.

갑옷을 아무렇게나 잡고 흔들던 오른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갑옷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처분. 합니까?"

집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이작이 당황했다.

"어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어쩌시겠습니까? 명품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만, 충실히 잘 만들어진 갑옷이기는 합니다."

집사는 갑옷을 슬쩍 훌어보고 품평까지 건넸다.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너, 뭐 하냐?

'안 돼. 녹이지 마라.'

= 딱 봐도 양산형이구만. 남부의지배자, 나 벨'호멧 아이작이 이딴 쓰레기를 걸쳐야 되겠냐?

'쓰레기가 아니다.'

= 품. 무슨 추억이라도 담긴 물건이냐? 해골 주제에 정말 가지 가지하는군. 건방진 놈. 안 버린다, 안버려.

- 달그락.

나는 힘을 풀었다. 마치 수십 일 동안 집중을 유지한 것 같은 정신적인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의식 저편의 새까만 무저갱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지만, 한 가닥 희망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잠깐이나마, 한 팔의 통제력을 발휘해 낸 것이다. 한 번 성공했으면 두 번도 가능하다.

아이작이 작게 투덜거렸다.

= 젠장할. 육을 빼앗았다고 해도,

역시 주인의 혼이 살아 있는데 통제권을 못 찾을 리가 없었구만.

'알면서도 내 몸을 벳은 거냐?'

= 네가 환령換靈에 저항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너 같은 놈은 한 명도 없었다니까?

뱉어 내는 내용과 달리 꽤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아, 일단 이건 냄둬."

"알겠습니다."

"상자에 있던 건 뭐냐?"

집사가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바닥에 있는 상자를 주워 열었다.

안에는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작게 양각된 금속 메달과, 백금으로 된줄이 놓여 있었다.

"목걸이냐?"

"예! 그게.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기념품입니다."

"흐흐흐. 정말 아무 쓸모없는 기념품을 주려고 했구만."

"크흠.

아이작은 킥, 하고 웃고 손가락을두 번 튕겼다.

- 딱딱.

"뭐, 좋아. 불에 달궈서 망가뜨려도되고, 전기 홀려도 되겠고. 크기 적당하니 잃어버릴 염려도 적고."

"무슨. 말씀이신지.

"도시 풍경도 새겨져 있고. 우리그라스미어 생각나게 말이야. 아주마음에 들어. 딱이야."

메달을 받아 든 아이작은 다음 주문을 내놓았다. 영주로서도 상당히 반가운 요청이었다.

"그럼 간다. 말 세 필 준비해 놔.

가장 빠른 녀석들로."

140화 No Sugar in My Coffin (4)

***************************************************

"잘 모시라고."

'나'는 말들의 눈앞에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물론 아이작의 움직임이 다.

검지 하나의 움직임에 세 마리 준마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최면.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높이만 160cm가 넘는 근육덩어리세 마리를 단번에 복종시킨다.

"이랴!

아이작은 그중 가장 큰 녀석의 위에 올라탔다. 강한 심장과 폐가 느껴졌다.

[승마 Lv. 2가 작동합니다!]

이번에도 메시지는 나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말은 머리를 낮게 내렸다가 다시 높이 들었다.

순종의 표현이었다. 흔한 투레질도 없다. 진 밤색 갈기부터 꼬리까지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가자!"

말 세 마리가 성문을 지나 넓은 가도를 달렸다. 에라스트 방면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왜 세 마리나 데리고 가는 거지?'

처음에는 짐을 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성문을 빠져나갔다. 물어 봐야 친절한 설명을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말 세 마리가 일렬로 달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나는 녀석의 행보를 방해하지 않았다. 통제권을 되찾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아이작에게 가만히 몸을 맡겼다.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도록 했다.

멀어지고 있다.

레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전서구들에 편지를 묶어 보낸 걸 체크한 뒤, 놈은 그녀에게 더 이상신경 쓰지 않고 에라스트를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계속 멀어져라.'

간절히 기원했다.

놈이 레나와 영영 떨어지게 되면.

나는 이 작은 감옥에 갇혀 고통받더라도, 적어도 내 손으로 그녀를 해칠 일은 없게 된다.

서서히 공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에라스트 성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며, 하늘이 조금씩 감흥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이작이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 어이! 야!

= 거참, 조용하네.

'그걸 원한 게 아닌가?'

= 너, 지금 내가 그 여자한테서 멀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멋대로 생각해라.'

= 큭큭. 뻔하지, 뭐. 근데 그거 아냐? 지금 그 여자애, 뒤에서 진짜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걸?

'레나가. 쫓아온다고?'

= 쯧. 당연한 거 아니냐? 눈치도 없는 멍청한 놈 같으니. 말이 통할만한 타락 사제라도 섭외해서 열심히 쫓아오고 있을걸?

- 휘이이잉!

바람이 얼굴에 강하게 불어왔다.

좌우로 스산한 늦가을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저녁이 한밤으로 바뀌고 있었다. 붉은 노을, 그 빛마저 하늘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아이작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라면. 탐지해 봐라.'

놈이 탐지 스킬을 사용하면 나도 레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놈은 즉콕 비웃기만 했다.

= 멍청아, 척 하면 척이지. 눈치도 더럽게 없어가지고. 그걸 꼭 없어보이게 스킬까지 써야 되냐?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알아."

'그녀를. 어쩔 셈이지?'

녀석의 말대로 레나가 오고 있다면, 알고 기다리는 쪽이 훨씬 유리한 싸움을 할 게 분명했다.

= 딱 보니 마음에 들더라고. 마약유통 관리하고, 걸리적거리는 애들숙슥 담그고. 이런 용도로 딱이야.

'그녀가. 널 알아챘다고 하지 않았나? 협조하지 않을 텐데.'

= 네가 이 몸에서 아예 사라지면,

그 아이는 겉으로나마 '너'인 날 따를 거야. 다른 놈이 든 줄은 알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배덕! 절망!

난 이런 게 너무 좋더라.

결계에 수백 년을 갇혀 있어서 저렇게 된 걸까? 원래부터 맛이 가있는 녀석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가 몸을 다시 탈환해야했지만, 아이작도 잔뜩 경계하는 것같았다. 손끝 발끝조차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 다그닥! 다그닥!

세 필의 말은 어느새 몹시 익숙한 장소에 접어들고 있었다.

에라스트 근방 ?〉산의 초입.

처음 루비아를 만났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아이작은 두 청부업자가 블루 마일 로를 타고 올라왔던 산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경사와 어둠 때문에 속도는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말발굽 소리는 내 어지러운 마음과 달리 여전히 경쾌하다.

묘지까지는 금방이었다.

= 이거 완전히. 개판이네?

묘지에 도착한 아이작의 감상이었다. 에라스트 ?〉산의 공동묘지. 그때는 겨울이었고, 지금은 늦가을.

10개월 정도가 지났다.

묘지 주변의 풍경은 한층 더 심해져 있었다. 내 무덤이 어디였는지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관이 사라진 무덤이 절반이었고,

비석이 제대로 꽂혀 있는 무덤도 반이 넘지 않았다.

= 이건 뭐. 묘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하나 봐?

'그렇겠지.'

에라스트는 지금쯤 전쟁 준비에 한창일 터다. 내년에 심을 씨앗조차군량이라고 빼앗아 가는 환경에서, 연고자도 없는 무덤의 정비를 바랄 수는 없었다.

= 그래서 니 무덤은 어디지?

'글쎄. 보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일단 뒤져 봐라.'

물론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네크론 신사회의 두 청부업자를 죽인 뒤, 내 관에 쑤셔 박아 놓았다.

시체 두 구가 들어 있는 무덤이내 무덤이다. 놈에게 사실대로 말해줄까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아이작이 여기저기를 뒤져 봤지만 어디에도 그런 무덤은 없었다.

= 뭐야? 어디야? 하긴 워낙 개판이니 모를 만도 하겠군.

다른 무덤의 시체는 그대로인 걸보면, 아무래도 누군가 놈들의 시체만 수거해 간 것 같았다. 물론 네크론 신사회일 확률이 높았다.

= 뭐, 그래도 이 정도 범위면 충분하겠는데?

'무슨 소리지?'

= 네 이름을 밝히는 거 말이야.

아이작은 묘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관과 비석, 암석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쿵!

가운데 커다란 암석이 놓였다.

옮기는 입장에서 보니 분명한 어떤 규칙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봤다면 알기 어려운 미묘한 규칙성이었다.

= 소멸되기 직전이니까, 잘 배워놓으라고. 원래 죽기 직전에 배워야팍팍 잘 꽂히는 법이거든.

'소멸이라고?'

= 그래. 진명眞名과 함께 의식을 완전히 소멸시킬 거거든. 정체성을 뽑아낸 다음에 죽일 거야.

= 이것 봐. 반응이 없으면 힘들어.

겁 안 나? 생각해 봐. 완전히 사라진다고. '너'가 아예 없어지는 거라니까?

전혀 겁나지 않았다.

이 사태를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반가운 심정이었다.

의식이 소멸된다느니 뭐니 해도,

이대로 죽으면 다시 시작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어. 두려워하질 않는군. 역시생각대로야.

더 말을 섞어 봐야 놈에게 말려들것 같았다. 침묵을 고수하고 감각을 집중했다.

아이작의 확신대로라면, 레나가 언제 이 장소로 도착할지 모른다.

통제권을 찾을 준비를 해야 한다.

레나가 다치기 전에 내 쪽이 먼저자살이라도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놈은 무덤 주위의 지형을 재배열한 뒤로는, 묘한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 저벅.

놈은 묘지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메달을 암석 위에 놓고, 내게 말을걸었다.

= 좋아. 마음이 바뀌었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메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 년여기 들어갈 거야. 나랑 정신이 이어져서 말이지. 한참 데리고 놀다 질리면, 깊은 바닷속에라도 던져 주지.

'소멸시킨다지 않았나?'

= 큭큭. 왠지는 몰라도 너, 그거안 무섭잖아? 그럼 절대 안 하지.

- 달그락! 달그락!

나는 발의 통제권을 찾으려 노력했다.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심해에 파묻히면 탈출의 희망 따위는 없다. 대체 얼마나 오래 갇혀 있어야 할까? 금속 메달이 바닷물에다 부식될 때까지일까?

그때가지 내 의식이 버텨 줄까?

차라리 죽겠다.

죽는 게 훨씬 낫다.

그 무력감과 절망감은 상상하기도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놈도 대비하고 있던 둣 쉽게 통제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으하하하.! 이건 반응하네?"

아이작은 아예 입을 열어 함부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 퍼걱! 퍼걱!

꾸준히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 정도 범위면, 하나면 되겠지.

그래도 넉넉히.

- 히히힝!

아이작은 말 두 마리에게 최면을 걸어 저울 그림 위에 서게 했다.

제물로 바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저것 때문에 말을 세 마리나 끌고 온 모양이었다.

작업은 마무리 단계로 향하고 있었다. 암석 위에 놓은 메달을 중심으로 커다란 육망성. 그리고 그 안에 겹쳐지듯 그려진 오망성.

"아흐. 진짜 귀찮네. 뭔 장막 하나 뚫는 데도 별 지랄을 다. 빨리 힘을 되찾아야 되는데.

아이작이 중얼거리며 마지막 획을 그어 갔다.

"어쨌거나. 이제 네 정체를 한번 알아보기로 할까?"

문양이 완성되는 순간.

- 우우우응.!

그 속으로 주위의 어둠이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내 몸도 그에 따라 앞으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이우 아닌(누구나 그러하듯이).

낮고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둠 전체가 응응 울리며 주문을 읊어 간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미 비바스 보카네트 미안 노눔(제 이름을 부르며 삽니다)."

때론 타닥타닥 타 들어가고, 때론축축하게 적셔지는 주문이 어둠 속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언어지만,

의미가 생생히 와 닿고 있었다.

"시 티에 엔테리기타 볼바스(여기 묻혔던 이가 찾아와).

그 순간이었다.

- 투두두두투두두두투두두두두 !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작살이 나에게 날아들었다.

아이작이 바로 탐지 스킬을 발동했다. 소대 수준의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놀랍게도 적은 단 한 명.

누구인지는 정해져 있다.

익숙한 기척의,

= 호오? 살짝 일찍 왔네?

레나였다.

- 촤아악!

수십 발의 작살은 모두 꼬리에 쇠그물을 장착하고 날아들었다.

레나가 날 잡아서 끌고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내가 다치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괴로웠다.

차라리 폭탄이나〈그라스미어의 불〉

같은 걸 썼으면 좋았을 거다.

안타까웠다.

부서져서 죽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기라도 할 텐데.

물론 레나가 그 사실을 알 리가만무하다.

'젠장.' 게다가 그녀가 마음먹고 폭탄을 날린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쉽게 죽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몸 안쪽에 마력 회로가 새겨졌다.

하룻밤 사이, 본의 아니게 훨씬 더강해져 버린 것이다.

"검기.

- 우우우응!

"결빙. 질풍."

[더블 캐스팅 Lv. 1을 시전 합니다!]

[결빙 Lv.1 & 질풍 Lv. 1을 혼합사용합니다.]

[놀라운 숙련도입니다!]

[혼합 스킬 - 냉기 폭풍 Lv. 1을획득하셨습니다!]

아이작은 대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려쳤다.

처음 보는 메시지가 허공에 마구 떠올랐다. 하지만 자세히 볼 겨를은 없었다.

'안 돼!'

레나에게 향하는 공격이다.

검기 위에 타오르는 바람과 냉기의 힘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팔을 막을 수는 없다. 마법은 익숙하지 않다. 막을 수도 없다. 내가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검기 해제!'

- 부응!

대검이 휘둘러졌다.

그 끝에서 푸르게 어둠을 에는 냉기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다행히 대검에 피어오르던 연푸른 검기는 사라져 있었다.

기세를 한풀 꺾은 것이다.

- 휘이잉!

폭풍은 눈앞으로 짓쳐 오는 십여 가닥의 작살 그물을 하얗게 얼리고그 자리에 떨어뜨려 바닥에 붙였다.

서로를 휘감은 바람과 냉기는 잠시더 나아가다, 앙상하게 마른 나무한 그루를 반쯤 사르록 얼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매서운 바람이 나아간 앞쪽에는 곳곳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레나는 요행히 몸을 다른 곳으로 피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공격을 구사할 수 있다는 걸봤으니, 이제 조심한다면 상황은 좀더 나아질지도 모른다.

- 끼릭. 끼리 리릭. 끼리 리릭.

어둠 속에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작살을 쏘아 낸 병기를 다시 감는 소리 같았다.

아이작은 반격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결계 작동."

[〈결계: 악몽〉을 작동합니다.]

- 덜커덩! 덜커덩! .광!

무언가 거대한 것이 비탈길로 굴러가 이리저리 튕기며 비참하게 부서졌다.

마치 수레에서 루비아의 시체가 버려지는 소리를 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가슴에 차올랐다.

'이런.!,

레나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병기는 비탈길에 밀어 버린 것 같았다.

탐지 스킬에 그녀의 맥박이 잡혔다.

거친 숨소리와 잔뜩 긴장된 기색이또렷이 느껴졌다.

- 저벅.

레나가 밤의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름한 달빛에 온몸에 착용한 특수 장비들이 보였다.

'도망가.!,

도망가라고 외쳤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빠르게 눈동자가 흔들리며, 꽉 쥔 손과 깨문 입술에서 작게 핏줄기마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레나는. 놓아줘.'

아이작이 나를 비웃었다.

= 멍청한 놈,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저 아이는 이 일이 끝나면 내 총애를 받을 터.

- 털썩.

아이작이 대검을 내려놓았다.

다시 자세를 잡고 결계가 된 묘지가운데에 섰다.

"르우벤 엔 라 소르토 데 느보, 미프레가스 포르 노바 볼로(느보의육망성과 르우벤의 오망성 안에, 새 그릇을 놓고 기원합니다)."

"리 도니 알 씨 티오 노반 바존(여기 이자의 이름이 새겨질 그릇이 있사오니).

"본령本領을 드러내어, 새기소서!"

겹쳐 그려진 오망성과 육망성에 일제히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 파지직! 파지지직!

진하게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번개처럼 허공에서 방전되기 시작했다.

K주D兄: 진명탐색〉을 작동합니다.]

[〈주況: 영혼봉인〉을 작동합니다.]

- 휘이잉! 치릭!

어둠 속에서 솟아 나온 붉은 사슬이 몸을 휘감았다.

141화 No Sugar in My Coffin (5)

***************************************************

사슬이 길게 자란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메달에서 솟아오른 붉은 사슬이 암적색 빛을 뿜으며 뼈 마디마디를 죄어 가고 있었다. 갈비뼈 하나하나에 전부 얇은 사슬이 감겼다.

- 치리릭! 치리릭!

온몸을 묶는 사슬이 진홍빛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메시지조차 없었다.

[접근을 불허합니다.]

[결계 작동이 강제로 중지됩니다.]

[주술 폭주. 측정할 수 없는 역풍.

봉인의 사슬이 시전 자를 구속합니다.]

'주술 폭주라고? 무슨 소리지?'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79.4%.]

진홍의 사슬이 묶고 조이는 건 내 몸이 아니었다. 그 안의 무언가다.

= 이건 마, 말도 안 돼.!

사슬이 강한 묵음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발버둥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촘촘히 묶었다.

그리고 질질 끌고 돌 위에 놓인 메달로 가져갔다.

= 히, 끄, 끄, 끄아아아.!

갈비뼈를 타고, 척추를 타고 놈의 비명이 마구 울려 퍼졌다.

공포와 경악이 짙게 밴 비명은 거듭될수록 작아지고 있었다. 그리고곧 들리지 않았다.

- 펑!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돌 위의 메달에 붉은 글씨가 새겨졌다. 무덤가에 맴돌던 불길한 검은 기운도 한번에 사라졌다.

"히히 힘?"

제물로 놓여 있던 적갈색 준마가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다른 두 마리 말도 모두 멀쩡히 살아 있었다.

- 달그락.

두 손을 움직였다. 다리를 움직였다.

손가락을 하나씩 꼼지락거렸다.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이작은 없었다.

몸의 통제권이 완전히 되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멍하니 여유를 부릴 때는아니었다. 정적 가운데 한 가지 소리만이 들렸다.

- 저벅.

레나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앙다문 채,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그녀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건가?'

안쪽이 상한 건지, 그녀의 입에서 핏줄기 한 가닥이 홀러내렸다.

- 달각! 달각!

레나 곁을 맴돌던 밤톨이가 나를향해 한달음에 뛰어왔다.

녀석이 작은 몸으로 깡총거리며 빠르게 뛰어왔다.

날 곧장 알아본 것 같았다.

아이작이 내 몸을 차지했을 때도 바로 알아봤는데, 다시 내가 몸을 되찾자 또다시 알아본 것이다.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하고 기특했다.

자세를 낮춰 손을 내밀자, 밤톨이가 곧장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경계하며 계속 곳곳이 꼬리를 세우고 있던 녀석이,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힘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 띠링!

녀석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상태창이떠올랐다.

[〈밤톨(늑대 Lv.1l)〉이 히든 업적〈주인 알아보기〉를 달성했습니다.]

[〈밤톨〉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밤톨〉은당신의 영혼까지 알아봅니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크게 올라갑니다.]

[숙련도가 30%를 달성했습니다.]

[통제하에 있는 상대에게 보너스스탯을 (1)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통제 아래.]

'보너스 스탯 부여.' 망설일 것도 없었다. 곧바로 밤톨이에게 스탯을 부여했다.

[부여 대상을.]

[〈밤톨〉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스탯이 자동으로 분배되었다.

[밤톨이가 매우 행복해합니다!]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떠올랐다.

'성장이 빠르군.'

나는 녀석을 안고 레나에게 다가갔다. 악몽이 걷힌 둣 레나가 새롭게 눈을 떴다. 그녀가 내게 안겨 꼬리를 흔드는 밤톨이를 바라봤다.

"스승. 님? 돌아오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늦가을 밤공기가 유난히 맑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알아봐 줘서 고맙다."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요."

내 팔에 기대 오는 그녀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다친 거 아닌가?"

"괜찮아요. 꿈 자체는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깨어나기 위해 노력하는게 힘들었죠."

- 딸깍.

그녀는 팔에 장착되어 있던 포션을열고 꿀꺽 삼켰다.

후작이 가지고 다니던 엘 릭서 같은건 아니었지만, 자양강장의 효과는 충분한 듯했다.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레나가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물었다.

"어떻게. 벗어나신 거예요?"

"나도 모르겠어. 아까는 뭘 가져왔던 거지?"

"기동형 노포奪砲를 변형한 게〈전당〉에 있었어요. 눈여겨봐 뒀다가 가져왔죠."

"들고 온 건가?"

"아니요. 마차에 실어서요."

레나가 저 아래를 가리켰다.

좁아지는 산길 아래쪽.

희끄무레한 마차 윤곽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올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올라온 것 같았다.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였다.

"말만 다섯 마리군.

어딜 가더라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 달각! 달각!

아직 행선지도 정하질 않았는데,

밤톨이는 자기가 안내하겠다는 듯몇 걸음 앞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 가니?"

- 저벅.

레나가 밤톨이를 안아 들기 위해,

앞으로 한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 야.!

머릿속에서 작은, 그러나 필사적인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뒤쪽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여기야! 여기라고!

"스승님, 저거. 멸리는데요?"

레나가 암석 위를 가리켰다. 금속메달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메달. 의뢰를 해결해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영주가 준 메달이지만, 별 가치는 없어 보이는 물건.

"깜빡했군."

돌아가 메달을 바라봤다. 메달은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벨. 호멧. 아이작?'

그라스미어의 풍경이 새겨진 기념메달에는 주술사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메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층더 또렷하게 들렸다.

=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날 이렇게 두고 가지 마라! 여기 있다간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

- 달각! 달각!

밤톨이가 암석 위에 올라가 홁 묻은 앞발로 메달을 마구 밟았다.

= 이 개새끼가. 안 부수고 봐줬더니. 감히 누구에게.!

"좀 닥쳐 줄 수 없나?"

= 으으. ? ? ? 아아. J

"누구랑 얘기하시는 거예요?"

레나는 메달에 새겨진 붉은 글씨를 천천히 눈으로 읽었다.

"설마.

달빛이 메달 위를 비추고 있었고,

글씨 자체가 약하게나마 빛을 내기에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이작? 그 주술사 말이죠?"

= 그래! 나다!

하지만 레나에게는 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여기 갇힌 모양인데."

"호호호. 정말요?"

- 달그락.

레나가 밤톨이가 마구 짓밟던 메달을 손으로 들었다.

"놓고 가면 절대 안 되겠네요."

= 당연하지!

"후환은 제 손으로 없애야죠. 가서 용광로에 녹여 버려요. 아니면 염산 통에 던져 버려야 되나?"

=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없애면 혹시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겠죠? 불안하네."

"그건 모르겠군."

"늪에 던져서 버리거나, 바닷속 깊이 빠뜨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겠어요. 제가 잘 알아볼게요!"

??? 야! 안 돼! 재 말 듣지 마!

[꼭 그렇게 해 달라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데.]

= 나는. 난 널 제대로 도와줄 수있다고! 내 권능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느냐? 원하는 게 뭐냐?

[글쎄다.]

녀석의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레나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늪에, 바다에 빠뜨린다고?'

삼백 년의 차이를 두고 있는 두 인간이었지만, 서로 하는 말이 상당히 비슷하다.

둘은 혹시 비슷한 성격이 아닐까?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나는 레나에게 녀석과 있었던 일을 대부분 털어놓았다. 한참 동안 모험을 겪은 것 같은데, 말하기 시작하니 금방 끝나 버렸다.

감탄과 탄식을 거듭하며 듣던 레나가, 문득 품에서 특수한 문양이 새겨진 은촛대를 꺼냈다.

뾰족한 침에 양초 하나를 끼울 수있는, 원형의 간결한 촛대였다.

"그게 뭐지?"

"예메라의 촛대예요."

"참회의. 여신 말인가?"

"맞아요. 잘 아시네요."

근위대 시체 한 구에게, 예메라의 교리를 흡수한 적이 있었다.

〈고통이 없으면 참회도 없다. 〉

〈온몸으로 죄를 지었거든 온몸으로 고통을 받아 적으라. 〉〈반성은 비명과 함께 시작된다. 〉〈시시한 고통은 구원이 아니다. 〉

레나가 은촛대에 작은 양초 하나를 끼우며 말을 이었다.

"축성된 물건이에요. 파문된 주교에게 받아 왔어요. 이걸로 주술사를 협박하려고 했지만. 일이 해결되어버렸네요?"

- 화르록!

작은 양초가 환하게 타올랐다.

"뭘 하려는 거지?"

"써먹긴 해야죠. 스승님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죠?"

"응. 일단은."

"고통을. 느끼는지도 알아보실 수 있겠네요?"

그녀의 말투가 어딘지 서늘했다.

= 뭐야! 예, 예메라 그 미친년의 촛대는 또 어디서 난 거야!

다급한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문제지?]

= 그거 꺼! 끄라고!

굳이 놈의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끄라고 해서 레나가 끌 리도 없다.

그녀는 즐거운 듯 양초로 메달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 끄. 끄아아아악! 으아악! 히, 끄,

끄아아악.!

머릿속에서 놈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렸다.

불쌍할 정도였다.

"고통은 느끼는 것 같은데?"

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다행이네요. 이걸 산다고 아편굴을 통째로 내줬거든요. 효과는 확실한 물건인가 보네요."

"탈출할 기미는요?"

= 끄아아아아.! 히, 히익, 그만!

"딱히 없는 것 같군."

아이작의 비명이 이어졌다.

레나는 계속 메달을 이리저리 그을려 갔다. 아무래도 실험이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양초 하나가 다 녹아 없어졌을 때였다. 모든 걸 잃은 듯 흐느끼는 아이작에게 말을 걸었다.

[야.]

: 흑흑. 혹흑흑,

[어이.]

= 이럴 수가. 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나를 가두려고 한 거 아니었나?

왜 네가 갇힌 거지?]

= 내가 할 말이다! 내 주술이.

이렇게 장난처럼 튕겨지다니.!

봉인 단계도 아니었다.! 이름.

고작해야 네 이름을 찾으려고 하는 단계에서 튕겨 나갔어.!

그때 였다.

"스승님? 그놈이랑 얘기 중이세요?"

"아, 일단."

레나가 새 양초를 꺼내서 은촛대에 꽂는 동작을 취했다.

"구울까요?"

= 안 돼! 안 된다고 해!

≪ ?."

.?

= 제발. 부탁이다.

"잠시 보류하자."

"네, 스승님."

레나가 양초를 촛대 침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하지만 양초도 촛대도손으로 잡은 채로 있었다.

나는 아이작에게 말했다.

[네 말도 못 믿겠고, 솔직히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녹이다가 바다에 가라앉히는 게 딱일 것 같은데.]

= 너.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게 뭐든 들어줄 수 있다. 지금쯤 내 추종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거다. 내교 단을 찾아가. 너 안에 내가 있다고 말해! 수천수만의 교도가 네 손짓에 복종할 거다.

"그렇다는데?"

레나에게 놈의 말을 털어놓았다.

"흐음. 고민되네요."

= 고민할 게 어딨나! 당연히 날 데려가야지!

"거참, 시끄럽네."

"구울까요?"

아이작은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레나와 잠시 상담했다.

처분한다면 이곳에 두는 것보다 역시 우리 손으로 폐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 달그락.

나는 그을린 메달을 잡고 대검 가드 부분에 슬쩍 걸쳐 놓았다.

- 철컥.

배낭을 뒤졌다.

빈 병을 레나에게 보여 줬다.

몸에 전부 부어 버린 탓에 루-륨은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작이 내 몸의〈회로〉를 만드는데 전부 써 버린 것이다.

"미안하다."

"뭐가요?"

"네가 써야 할 물건인데. 놈을 막지 못했어."

레나가 수도에 가져가야 할 물건.

T&T의 지부장이 되는 데 사용해야할 은빛 액체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힘든 일을 당하면서도 계속 절 생각해 주셨다는 게 감동이에요."

레나가 다짜고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메달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밤톨이가 메달을 밟고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내가 안다!

바닥에서 밟히고 있는 아이작이 필사적으로 외쳤다. 레나에게 어정쩡하게 안긴 채 대답했다.

[뭘 안다는 거지?]

142화 No Sugar in My Coffin (6)

***************************************************

= 루-륨이 있는 곳을 안다고! 내가 안내하마!

놈의 말에 경계심부터 들었다.

[못 믿겠군. 바닷속에 잠기기 싫어서 별소릴 다 하는 거 같은데.]

= 나를 왜 못 믿어! 마력 회로를 아무나 새길 줄 아느냐? 명계의 장막을 누가 뚫을 수 있겠느냐?

=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내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마.

아이작은 무척 절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지. 다른 게 문제라서.]

놈은 챈들러 가문의 골수를 대대로 빨아먹고, 챈들러 부자의 꿈을 조작해서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

그리고 무덤가에서는 단 한 톨의 거리낌도 없이 내 영혼을 봉인시키려고 했다. 못 믿는 게 당연하다.

= 뭐? 야, 내 인성이 어때서? 나만 한 참인성이 없거든?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정작 나는 그런 단어는 꺼내지도 않는데, 아무래도 다른 데서 무수히 들어 본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인성이 라.,

그 단어를 가만히 곱씹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 혹시 주술사랑 대화하고 계시나요?"

레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놀라운 눈치였다.

어정쩡하게 침묵하고 있는 걸 보고 단번에 알아첸 모양이었다.

"아, 미안."

"아니에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혹시 불이 필요하시면.?"

레나가 예메라의 촛대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에 전부 감싸 쥐어지는 작은 크기다.

달빛이 은촛대의 뾰족한 침 끝에 이슬처럼 맺혔다.

"붙일까요?"

그때 였다.

= 어이! 저년도 내 말을 들을 수있는 방법이 있는데. 알려 줄까?

아이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약간 의아했다. 놈이 보여 준 역량을 생각하면 그것 자체는 크게 놀랍지 않다. 하지만 놈이 앞장서 손을 내미는 게 신선했다.

[웬일로?]

= 기본적인 신뢰 관계를 좀 형성하자고. 그래야 앞으로 문제가 덜 발생하지 않겠냐? 부탁이니까. 서로 진심으로 대하자고. 다짜고짜 불부터 붙이려고 하지 말고. 응?

[음.]

= 제발 좀 편안한 분위기에서.

그래야 말도 잘 나올 거 아니야?

나는 레나를 잠시 제지했다.

[좋아. 어떻게 하면 되지?]

= 네가 의식을 집중해서아이작은 차근차근 방법을 알려 주었다. 나를 소통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꼭 필요한 거냐?]

= 그래! 반드시 네가 끼어야 돼.

그러니 내가 널 해치겠냐? 아무리 멍청하다지만 생각이란 걸 좀 해 보도록 해라. 네가 없으면. 나는 영원히 여기 갇혀 있어야 된다고.

[으음.]

나는 레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연결해 주세요. 그럼 제가 직접 물어볼게요."

나는 둘의 정신을 연결했다.

= 들리느냐?

"스승님? 얘예요?"

= 쥐방울만한 년이 무엄하구나. 남부 열두 도시의 지배자, 벨'호멧 아이작이 이 몸이니라.

"지금은 스물네 갠데. 되게 옛날분이네. 제대로 도움이 될까요?"

= ??? 이런 싸가지 없는 게!

어쨌건 레나가 아이작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확인된 셈이다.

"뭐, 그래도 유명한 분이시니까."

= 으흠. 그렇다. 내 이름은 들어보았느냐? 뭘 모르고 무례하게 군 행동은 괘씹하나,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해 주마.

레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다짜고짜 심문부터 들어갔다.

"루-륨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안다고 하셨죠?"

= 그렇다.

"그 전에, 일단 알고 있는 던전 정보들부터 쭉 불어 보세요."

= 던전. 정보를 원하느냐? 루-륨이 있는 곳부터.

"일단 던전부터. 편하게 해 줄 때잘합시다. 서로 힘들어지지 말고."

'왜 내가 무섭지?' 결빙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근처공기에 살얼음이 끼는 것 같았다.

레나는 아이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몰아쳤다.

"던전 랭크, 위치, 함정, 출현 몬스터, 보상."

= .어쩌라고?

"하나라도 거짓이 들어가거나, 진실이 빠지면 바로 달굽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느껴져도 바로 달궈요."

"불어 보세요."

"제가 아는 거랑 다르네요. 거긴불 함정인데, 제단에 향유를 바치라고요? 뜨거운 거 좋아하세요?"

- 화? 르르!

= 힉, 끄, 끄이이익, 으아아아악!

말이! 말이 잠깐 잘못! 으아아악!

"에이, 참아야죠. 300살이나 드시고 뭘 그렇게 아파하세요?"

달궈진 금속 메달이 부들부들 떨어댔다.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직접 말이 통하게 되면, 말이 통하는 영혼에게 심한 짓은 못 하지 않을까 생각한내가 바보였다.

처음에는.

던전 정보부터 물어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부터 차근차근 질문한다.

거짓이 나오면 곧바로 예메라의 촛대를 사용해 혼을 구워 버린다.

나중에 질문할 중요한 부분에서,

거짓말을 못 하게 하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기엔 너무 즐거워 보였다.

레나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메달을 세심하게 달궈 갔다.

'내가 다 괴롭군.

아이작이 내뱉는 비명이 그녀에게는 숙련된 테너의 훌륭한 독창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레나는 최상의 흡족함을 느끼는 음악회의 관객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 생에도 절대 적으로 돌리면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심한 거 아닐까? 그만하는 게 어떨지.

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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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그녀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이 메달에 잠겨서 저 바다아래 가라앉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이 녀석이 담긴 메달이 천 개쯤 있었으면 좋겠어요."

"천 개나?"

"네. 지금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망가뜨릴까 봐 너무 신경 쓰여요."

온몸에 오싹한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슬슬 정리됐네요."

레나가 뭔가를 꼼꼼히 표시한 지도를 보며 말했다. 루-륨이 숨겨져 있다는 놈의 교단 위치까지 전부 받아= 으윽흑. 끄흑억윽. 흑흑.

"음. 그렇군."

사실 정리됐는지 안 됐는지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투명한 태양빛이묘지 곳곳을 비쳤다.

"햇빛이 참 화사하네요."

"??? 맞아. 화사해."

밤새 아이작의 비명을 듣고 있자니,

레나의 말에 토를 달면 안 될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수작을 부릴까 봐 유심히관찰했지만, 아이작은 이미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녀석이 역살을 맞은 주술, 영혼봉인은 가진 능력까지 전부 봉인하는 술법인 모양이었다.

아이작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냥 소멸이나 시키지 그랬냐.]

= 흑흑. 흑. 끄흑?

"스승님?"

"아, 그래."

"정보는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제 선에서 검증이 어려운 게 많아요. 저. 원장님께 도움을 요청해야겠어요."

"원장이라고?"

서늘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분이에요.

보육원 원장으로 가장한 T&T 간부분이죠."

"정체가 어떻게 되지?"

"그게. 어. 음. 놀래켜 드리려고 했는데.

레나가 잠시 머뭇거렸다.

"슬라임 인가?"

잘 정리된 그녀의 눈썹이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한 손을 가슴에 얹으며 자세를 딱딱하게 굳혔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슬라임에게 너도, 나도 온몸이 녹아서 죽었다고 말해 봐야 믿을 리는 없었다.

"예전에 우연히 알게 됐지. 그쪽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꼭 놈을 통해서 검중을 해야 되는 건가?"

슬라임은 T&T 이너 서클의 멤버다.

녀석이 연관되면 푸르손의 추종자들이 우리를 구속하려 들 확률이 매우 높았다. 꺼림칙했다.

'회유하려고 하겠지. 거절한다면.

이너 서클의 간부들이 직접 우리를 살해할 거다. 그들과 연관되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직간접적으로 어딘가에서 사찰이 들어오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레나는 내가 허투루 하는 소리가아니라는 걸 즉시 알아챈 듯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가능해요. 공식적인 루트가있거든요. 엠버의 본부랑 통하는 루트요. 하지만 그쪽으로 가려면 좀 멀어요. 수도까지 가야 되거든요.

원장님 쪽이. 확실하긴 한데."

선택해야 했다.

슬라임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하지만 아이작이 끝내 거짓 정보를 뱉었을 가능성도.

슬라임과의 접촉이 의외로 뒤탈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양쪽 모두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수도까지 가기는 너무 멀었다. 나는 레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원장님이 확실히 꺼림칙하신 거죠?

그럼 그 선택지는 없앨게요."

레나는 지도 두 군데를 손으로 짚어갔다. 현재 있는 묘지에서 서남쪽에 있는 한 지점과 수도였다.

"수도까지는 북쪽으로 14일."

"아이작이 말한 교단까지는 서쪽으로 이틀 걸려요."

"수도에서 정보를 검증받고, 다시교단으로 가면. 비스듬하게 15일정도 걸리겠죠."

"비밀교단이니까, 수도 본부에서정보를 갖고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동선이 너무 비효율적이군."

"네. 확실히."

"교단을 바로 찾아보자."

마차는 서부를 향해 달렸다.

아이작이 가르쳐 준 최면을 사용하자 뒤쪽에서 말 세 마리가 나란히 우리를 따라 달렸다.

최면 스킬과 암시 스킬.

두 가지는 안타깝게도 아이작과 함께 전부 빠져나가 있었다.

다른 귀속 스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녀석이 가르쳐 주는 대로 손을 움직이자, 말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암시에 빠뜨릴 수 있었다.

= 어떠냐.? 쓸 만하지?

[시끄러우니까 부를 때만 말해.]

!

하루씩 녀석들을 교대해 가며 꼬박사흘을 달렸다. 사흘 정도는 가뿐하다는 듯 말들은 피곤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광활한 서부 사막지대에 조금씩 가까워져인지, 겨울이 가까워져인지공기가 조금씩 메마르기 시작했다.

예정된 전쟁이 가까워지는 탓인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들른 서남부의 작은 마을에서는 낙타를 팔고 있었다. 교단은 제법 외진 곳에 있었다.

"사막 쪽으로 가십니까? 여기서 더서쪽으로 가면 낙타 값이 오를 텐데, 말들은 슬슬 정리하시고 낙타로 갈아타십시오."

"아니요. 이제 남쪽으로 갈 거니까 괜찮아요."

"그러십니까? 그쪽은 정글인데.

정글 탐험용 넓적칼 한번 보시겠습니까? 있으면 참 좋은데 없으면 정말 아쉽거든요.

아이작이 말한 교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는 상인 꿈나무가 하나 자라고 있었다.

가격도 제법 양심적이었고, 사막이나 정글로 가는 여행자들이 혹할 만한 물건들도 구해 놓고 있었다.

레나는 돈을 넉넉히 쳐서 계산해주었다.

"물건도, 가격도 마음에 드네요. 잔돈은 필요 없어요."

"감사합니다!"

"좋은 거래였어요.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죠?"

"테레지아 마커라고 합니다. 다시뵙겠습니다, 손님!"

스무 살 정도나 되었을까.

머리를 뒤로 묶은 금발의 여성이고 개를 숙이며 우리를 마중했다.

왠지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느낌의 인간이었다.

그녀의 마중을 뒤로하고, 우리는마을 남쪽의 정글로 향했다.

두 시간 정도를 말을 타고 갔을 때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이 사는 것 같은 기색은 없었다.

[탐지 Lv. 5가 활성 상태입니다!]

[스킬 효율 1, 0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 0.0021%의 체력이 소모됩니다.]

마을을 떠날 때부터 탐지 스킬을 켜고 있었다.

고문으로 얻은 정보라고 해도.

아이작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건 당연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면 분명 교단이 있다고 하질 않았나?"

아이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과 계속 정신이 이어진 탓일까.

본의 아니게도, 어느 정도 녀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녀석에게서 낯선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걱정? 뭘. 불안해하고 있지?'

그때 였다.

"스승님?"

주위를 천천히 훌으며 나아가던 레나가 한쪽을 가리켰다.

반쯤 불에 타고 반은 부서진 돌 토템이 보였다.

위로 2미터 정도 높게 솟은 부엉이 모양의 토템이었다.

목에 매달린 인간들의 뼈가 시커떻게 그을려 있었다.

- 히히힘!

토템을 본 말들이 두려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말들을 뒤쪽 공터에 묶어 놓았다.

"걷자."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길이 좁아져서 걸어야 할 참이었다.

그 뒤로 한참을 더 걸었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건가?'

역시 좋은 말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이작에게 슬슬 따지려고 할 때였다.

- 부르르!

메달이 크게 떨렸다.

= .멈춰라.

아이작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어둡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143화 No Sugar in My Coffin (7)

***************************************************

"어휴."

- 화르르!

레나가 한숨을 쉬며 양초를 켰다.

아이작의 혼에 불길을 다시 한 번 체험시켜 줘야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걸 신경 쓸 정신조차 없는 듯했다.

절망과 불안이 반쯤 섞인 목소리가 메달에서 들려왔다.

= 이곳은. 원래 결계가 있어야할 자리다.

"결계라고?"

= 그래. 너희는 처음부터 진법의 사문死門으로 들어왔다. 반드시 죽는 문이지.

'사는 문은 어딘데?'

= 그런 건 안 만들었다. 손님이라고 해 봐야, 신전에서 나온 집행관들밖에 없으니까.

레나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멀껑히 살아 있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 .어. 미망述妄에 빠져 기운이 완전히 꺾인 채, 반쯤 미친 채로 사냥당해야 되지. 그런데. 아까부터 줄곧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이대로라면 교단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버린다.

"당당하시기도 해라. 우릴 잡아 줘야 될 결계가 없어졌다는 거죠?"

= 그래. 뒤로 십 분 정도 돌아가라.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 진짜 교단의 위치를 알려 주마.

뭘 걱정하는 건지, 놈의 목소리는 몹시 어둡고 진지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믿음이 가진 않는다. 이것도연기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건 또 어떻게 믿고. 어쩌죠? 일단 불부터 붙이고 시작할까요?"

tt ㅇ"

ㅍ.

나는 망설였다.

촛대는 유효한 성물聖物이다.

영혼을 울부짖게 만든다.

하지만 고문이 꼭 100% 효과가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레나는 밤새 녀석을 고문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아이작은 진작 이곳의 진실을 털어놓았을 거다.

"잠시만."

예메라의 은촛대를 들고 다가오는 레나를 제지했다.

"아이작, 그렇다고 쳐도.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빨리.

내 후손들이 어떻게 됐는지 조사해다오. 부탁이다.

"방금 사기 쳐 놓고 믿으래. 스승님, 우리 그냥 가요. 아무래도 제국수도로 갔다가. 여긴 천천히 확인하는 게 좋겠어요."

- 부르르!

메달이 웅웅 떨리더니, 다급하고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사를 바치는 왕, 말파스의 이름에 대고 서약한다! 나는 네게 진실만을 말하리라!

- 우우우응.!

그 순간이었다. 서늘한 기류가 메달 주위를 감싸고 흘렀다. 뭔지는 몰라도 어떤 맹세가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tt ㅇ"

f.

"괜찮을까?"

"뭘 하긴 한 것 같은데요. 사제들 같은 경우는, 자기가 섬기는 신의이름을 걸고 한 서약이 절대적이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 톡톡.

레나가 메달을 치며 말했다.

"이 사람, 사제 맞을까요?"

"일단 맞는 것 같은데.

아이작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봤던 상태창이 떠올랐다.

〈제사 특성: 말파스의 대제사장〉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말파스의 가장 총애 받는 대제사장입니다.)

'마왕을 섬겨도, 사제는 사제지.'

"뭐, 한번 믿어 보자고."

= 고맙다.

우리는 아이작의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왠지 녀석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놈은 온갖 주술을 다 사용했지만,

결국 내 몸을 빼앗는 데 실패했다.

레나의 반응도 조용했다.

그녀가 불안해하면 꼭 무슨 일이 생겼지만, 이번에는 내 의견을 얌전히 따라오고 있다.

아이작이 말한 방향으로 십 분 정도 걸었을 때였다.

"여기 보세요!"

앞장서서 걷던 레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나도 그녀 쪽으로 서둘러 따라갔다.

'토템?'

그 자리에 있는 건 2미터 정도의또 다른 토템이었다.

손을 앞으로 모은 개 모양 토템은 몸이 대부분 짓뭉개져 있었다.

등에 달린 여섯 장의 날개는 아랫부분만 남기고 다 깨지고, 얼굴도 뭔가로 속이 깊이 긁어내져 참담한 모양새였다.

= 조슈아.! 내 조슈아가.!

메달이 부르르 떨렸다. 아이작은 한참을 서럽게 통곡했다.

듣는 나조차 먹먹한 기분이 들 정도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모른척하고 그냥 걸을 수가 없었다.

"잠깐 쉬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밤톨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 달각! 달각!

녀석은 자신도 함께 모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쁜 둣, 아주 활기가 넘쳤다.

= 살아 있을 때는. 그런 크기였다.

문득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 조슈아. 내 작은 친구였다. 지금네 곁의 그 녀석만 했어. 죽은 뒤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기에 토템을 만들어 넣어 줬었지. 혹시 아직 있을까 했지만.

냇물 소리, 바람 소리, 벌레 소리가 적막한 숲속에서 간간이 울려왔다. 고요 가운데 아이작의 절망이 잔잔히 전해졌다.

내 몸을 탈취했을 때.

놈이 밤톨이를 해치지 않은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개였나 봐요? 개는 불쌍하네."

레나가 끼어들었다.

= 조슈아는. 결계의 심장이었다.

이게 파괴됐다는 건.

아이작은 말을 삼켰다.

= 가자. 안내하마.

녀석은 필요한 말만 하며 우리를 빠르게 안내했다. 수풀이 우거진 완만한 구릉을 지났을 때였다.

"끊겼잖아?"

더 이상 길이 나오지 않았다.

깎아지른 절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맞게 데려온 거 맞아?"

= 이 아래로 내려가라.

"무슨 헛소리지?"

= 일단 보고 말해라. 멍청한 놈.

앞쪽에서, 주위를 면밀히 살피고 있던 레나가 내게 소리쳤다.

"인공적인 흔적이 있는데. 스승님! 여기. 암벽이 일정하게 파여 있어요!"

= 반만 닮지?

"좀 닥쳐 봐."

나는 아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전한 거냐?"

= 물리적인 함정은 없다. 결계가 깨진 이상 그냥 걸어가면 된다.

"내가 먼저 내려가지."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무리 없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레나가 고집을 피워서 내허 리에 암벽등반 끈을 묶었다.

밤톨이에게도 따로 끈을 묶었다.

- 달각! 달각!

'용감하군.'

녀석을 안고 안으로 내려갔다.

밤톨이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아래는 까마득했지만, 떨어진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체력. 반 정도 깎이려나.'

- 툭. 투둑!

잡고 디딜 홈이 많아 쾌적했다.

아래로 30미터 정도를 내려가자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 여기다.

"으음."

직경 2미터 정도.

커다란 구멍이지만, 안쪽으로 쑥들 어간 곳에 있어서 발견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맞은편에 산봉우리도 없었다.

'천혜의 요새로군.'

- 달그락!

나는 가볍게 반동을 줘 안으로 들어갔다. 허리에 줄을 연결한 레나도곧 안으로 들어왔다.

"와. 절벽 가운데에 이런 데가 있네요!"

이런 데가. 이런. 데가.

그녀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지다 안쪽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레나는 육포를 씹으면서 배낭에서촛대와 커다란 양초를 꺼냈다.

- 화록!

"졸지 마요. 탐험용이니까."

직경 2미터 정도의 구멍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에이, 필요 없겠네."

레나가 양초를 가볍게 불어 꼈다.

햇빛이 닿지 않는 장소까지 들어갔지만, 동굴 곳곳의 야광석들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으로 십여 분을 더 들어갔을 때였다. 앞쪽이 커다란 바위 무더기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바위 하나하나의 길이가 인간 키의두 배를 넘을 것 같았다.

그마저 하나둘이 아니었다.

스물이 넘는 커다란 바위가 빼곡히 늘어선 채 앞을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뭐야?"

= .원래 없던 것들인데. 이걸 넘으면. 문이 나올 거다.

아이작의 목소리에서 한층 더 짙은 불안이 느껴졌다.

레나가 배낭에 손을 넣었다.

"폭탄 가져왔어요. 계속 터트리고조금씩 치우면 될 것 같아요."

"음. 잠시만 뒤쪽에 있어 줄래?"

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갔다.

"그럴게요."

이번 생에서 처음 레나를 만났을때, 사람 키만 한 바위를 반으로 갈라 버렸던 게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려나.'

"조금 더 뒤로."

"조금 더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가웃했다.

"흐."

하지만 내 말대로 한참을 더 뒤로 물러섰다.

'저 정도면 되겠지.,

"검기."

[검기 Lv.1 최대출력.]

- 우우우우응!

대검이 먹이를 달라는 둣 울었다.

연푸른 기운이 칼날에 피어올랐다.

오랜만에 내 손으로 발동하는 검기였다. 실처럼 흐르는 얇은 기운이서로 휘감겼다.

"산성."

[산성酸性 Lv. 5를 발동합니다!]

- 치이이이이익!

푸른 검기를 투명한 녹색 기운이 휘감는다. 뭐든 녹여 버리는 파괴력강한 연기가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라스미어의 3대 영주가 만들었다던 대검은 끄떡없었다.

나는 아이작에게 물었다.

"막혀 있으니. 흡착으로 당길까?"

= 돌가루 잔뜩 뒤집어쓰고 싶으면 맘대로 하든지. 검기를 써서 조금씩 부수면서 밀어내라.

"흠. 충고 고맙군."

물론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은 별로 없었다.

는 부풀어진 듯 이글거렸다. 힘이 제어되는 기분 좋은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질풍."

[질풍Blast Lv. 1을 발동합니다!]

[격발 Lv.2 & 질풍 Lv. 1을 혼합사용합니다!]

[숙련도가 매우 낮습니다.]

[마력 소모량이 300% 상승합니다.]

[너울거리는 불꽃 - 격발의 플레어Lv. 1을 발동합니다!]

온몸에 새겨진 〈회로〉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꽉 쥔 대검을 있는 힘을다해 앞으로 내리쳤다.

[참격 Lv. 2를 발동합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강렬한 화염,

산성, 바람의 충격파가 앞으로 쏟아졌다.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 콰과과광!

거대한 암석들이 돌먼지가 되어 사방으로 폭발했다.

- 투둑! 투두두두둑!

암석 아래 있던 동굴 바닥이 터져나가며 들썩였고, 천장에 박힌 야광석들이 그 자리에서 튀어나와 어지럽게 바닥에 떨어졌다.

- 휘이이잉!

희뿌옇게 피어오른 돌먼지는 검압에 밀려 동굴 양옆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었다.

앞을 바라봤다.

암석들 사이로 직경 2미터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부서지지 않은 부분들도 까맣게 그을리거나 조금씩 부서져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길 너머.

커다란 새가 중앙 원판에 새겨진 석문이 보였다.

"된 거냐?"

= .황당한 놈, 방금 벌인 짓으로,

네 몸에 흐르던 루-륨을 한 번에 절반은 소모했을 거다.

"반이나 썼다고? 그 많던 양을?"

과한 느낌이었다.

아이작이 내 몸에 부은 루-륨의 양은 2리터가 넘는다.

여섯 기의 골렘에 있던 마력액을 전부 내게 털어 넣었다.

= 멍청한 소리. 초반 회로 코팅에 거의 전부를 썼다. 원래 길 뚫는 게힘들지. 남은 건 얼마 없었어.

그 순간이었다.

"너. 너무해요!"

뒤에서 레나가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호감도가 떨어졌다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따라가라구요.! 제가지 켜 드릴 기회가 없잖아요!"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레나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레나가 당신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모든 종류의〈교육〉효과가 향후 크게 상승합니다.]

[안목을 넓혔습니다.]

[레나의〈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체계적으로 교육할 경우, 더 빠른 속도로 검술 랭크가 올라갑니다.]

'음. 좋은 거겠지?' 잔뜩 삐친 표정. 그러나 호감도 하락은 없었다.

그녀와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때, 아이작이 담긴 메달이 부르르 떨렸다.

= .문 안 여냐.

'깜빡했네.'

= 왼쪽으로 두 바퀴를 돌려. 뱀에새 부리를 고정시키고 아래쪽 육망 성을 눌러라. 그다음은 오른쪽으로두 바퀴 반을 돌리고.

"그냥 부수면 안 되냐?"

"알았다고."

결국 나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퍼즐을 풀어냈다. 아이작이 하나씩 천천히 말해 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 쿠궁!

딱 맞춰진 석문 안쪽에서 무언가기관이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 띠링!

[D+랭크의 퍼즐을 한 번에 해결했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퍼즐 해제 Lv. 0을 획득했습니다.]

[스킬 레벨 상승에 따라, 퍼즐에서힌트를 얻을 확률이 증가합니다.]

'의외의 소득이군.' 상태창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

- 쿵! 우르르릉.!

동굴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석문은 원래 그렇게 나눠져 있었던둣, 네 부분으로 나뉘며 천천히 동굴 벽 속으로 사라져 갔다.

144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1)

***************************************************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 드러났다.

잘 깎인 계단이 끝도 없이 늘어져있었다.

"가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점점더 넓어졌다.

십여 분 정도를 내려갔을 때.

안쪽 어딘가에서 은은히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굴 안에 이런 곳이 있다니.

탁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펼쳐진 수풀.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

한 채가 아니었다.

큼지막한 녀석만 다섯.

여러 건물이 일정한 패턴에 따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와. 여기서 살아도 되겠는데요?"

레나의 목소리에서 설레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 넓이만 해도 엄청나다.

단순히 넓기만 한 게 아니다.

절벽 가운데 있어, 밖에서는 극히 발견하기 어려운 입구.

문 역할을 하는 정교한 기관 장치.

완성되어 있는 커다란 건물들.

적당한 온도와 빛까지.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이 숨어 지내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을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사원은 수십 수백이 함께 살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수련에도 좋겠군.'

지금까지는.

줄곧 에라스트 근방 동굴 미로에서 수련했다.

발견되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다.

하지만 폭이 협소하다.

마법까지 습득한 지금.

마음껏 몸을 풀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사방 수백 미터가 훌쩍 넘는 이장소라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수련이 가능하다.

"이게 네 교단인가? 대단하군."

나는 아이작을 약간 치켜세웠다.

실제로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가볍게라도 우쭐하지 않았다.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조가 점점 어두워졌다.

= 안쪽. 으로.

아이작의 안내에 따랐다.

무성한 수풀을 지나 사원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층 더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었다.

사원 입구를 지나.

십여 분을 더 들어간 뒤였다.

"여긴가? 루-륨이 있다는 장소가?"

사원의 중심부.

십 층 높이.

족히 삼십 미터는 될 것 같은 탑앞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탑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작은 짧게 긍정했다.

= 그렇다.

"으음.

칼을 쥐고 탑을 향해 올라갔다.

여전히 어떤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 저벅.

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차가운적막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레나도 밤톨이도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고, - 구구궁.

돌로 된 문을 옆으로 밀어젖힌 순간이었다.

"아.

레나의 탄식이 들렸다.

곁에 선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무스.? w문을 여는 사이에 위쪽을 올려다본 모양이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탑 내부를 살폈다.

- 철컥.

몸이 굳어진 채 그 자리에 가만히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여기 있었네요."

레나가 서서히 떨림이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모두가 이 탑에 매달려 있었다.

= 이럴. 어떻게 이럴 수가.!

- 달그락.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우리가 들어간 탓일까.

탑의 공기가 작게 흔들렸다.

층층이 거꾸로 매달린 해골들이 텅빈 몸을 움직였다.

= 아. 아아.! 아아아아. I아이작의 감정이 출렁거렸다.

매달린 해골은 삼백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놈의 격렬한 반응으로 보아.

네 후손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꿀꺽.

레나가 작게 침을 삼켰다.

"죽은 지 얼마나 된 건지는 모르겠네요. 백 년? 이백 년.?"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여신의 사제? 성기사들?

고위급 모험가?

몇 가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혹시. 재의. 수도회일까요?"

레나가 속으로 생각한 내 의문을 읽는 것처럼 말했다.

재의 수도회.

사교도와 이단을 압도적인 폭력으로 절멸하는 무리들이다.

"아니, 방식이 달라."

그들은 전부 부수고 태운다.

하지만 사원 건물은 멀쩡했다.

방화의 흔적도 없었다.

이건 너무 깔끔하다.

= 아래를. 아래를. 봐라.

아이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아래로도 지하 2층 정도가 있었다.

"이게. 뭐죠?"

바닥에는 둘레를 따라 기괴한 글자가 새겨진 이중 원과, 원 안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가 보였다.

= 이놈들이었나. 내 후예들이.

그 찢어 죽일 곰 새끼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다니!

"곰. 이라구요?"

레나가 갸웃했다.

= 그래. 푸르손이다.

"푸르손이라고?!"

그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격한 반응에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아이작이 말을 이어 갔다.

= 그래. 혼에 각인을 새기는 제사가 지내졌다.

"동의가 필요할 텐데.

내 말에 아이작이 쏘아붙였다.

= 왜 아는 척이냐?

= 효율은 떨어지지만, 산 채로 고문하면서 제물로 바칠 수도 있다.

내 후예들은. 마지막 숨소리 하나까지 푸르손에게 바쳐진 거다.

푸르손.

각인.

그 단어의 조합이 낯설지 않았다.

나도 T&T의 이너 서클에게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제안은 거절했다.

나도 레나도 모두 살해당했고.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푸르손의 각인이 찍힐 수도 있었던 건가 싶어 섬뜩해졌다.

슬라임이 나름대로 날 배려해서,

깔끔하게 끝내 준 건지도 모른다.

슬라임이 준 목걸이를 버렸던 게 괜히 미안하게 느껴졌다.

= .일단 밖으로 나가라. 여기.

더 못 있겠다.

≪ ?"

ㅠ.

수많은 제 후예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도 아이작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감정을 수습했다. 충격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냉정해진다더니 마치그 모양인 것 같았다.

놈은 우리를 탑 왼쪽 벽 앞에 세웠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단단한 벽이었다.

"뭐지?"

= 나를 손에 감아쥐어라.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말고. 천천히 앞으로 손을 내밀어.

"그냥 벽이잖아?"

= 통과에는 강렬한 자기암시가 필요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조금씩 내 지시에 따라라. 앞으로.

- 쑤욱!

놀랍게도 손이 안으로 들어갔다.

- 툭.

손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어떻게 된 거지?"

= 잡아. 그대로 당겨.

아이작의 말을 따랐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쑥 하고 커다란 상자가 끌려 나왔다.

옆에 서 있는 레나가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흠. 너랑 어울리지 않는 똑똑한 인간이군. 보통 이런 건 지켜보는 녀석이 있으면 몇 번씩 실패하는데. 네 암시에 방해를 하기 않기 위해 신음도 안 흘리고 있었다.

"부끄러니까 닥치세요."

= 크흠. 칭찬해 줘도 지랄이냐.

"불붙일까요?"

.상자나 열어 봐라.

상자의 외관은 몹시 수수했다. 재질은 금도 은도 아니었다. 직육면체로 된 커다란 납상 자였다.

tt ㅇ"

잡.

- 덜컥.

손만 가져다 대자 상자가 덜컥 열렸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건.

"하나, 둘, 셋.

1리터짜리 유리병에 담긴 루-륨.

모두 열두 병이었다.

= 한 병만 꺼내 가라는 소리는 안하겠다. 다 가져라.

나는 놀라서 숫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열둘이 맞았다.

강철 골렘 여섯 기에서 빼낸 게전부 두 병인 걸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양이었다.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녀석에게 물었다.

"이 많은 양을 어디 쓰려고 했던 거지?"

= 연구와 실험. 다 끝내고 남은 양이다.

나는 열두 병의 루-륨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병만 있으면 레나 시나리오를클리어할 수 있는 은빛 마력액을, 열두 병이나 가져 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에서 열두 병을 보아 버렸지만, 이 마력액은 지금껏 열 번이 넘는 생을 반복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귀한 물질이었다.

그때 였다.

레나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협조하는 이유가 뭐죠? 복수. 인가요?"

= 당연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을 절멸시키는 걸 도와다오.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봉인되자 감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잘해 줬다고?"

= 전부 생매장시킬 수도 있었는데. 광산 노예로 대접해 줬다.

할 말은 많지만 안 하기로 했다.

레나도 같은 심정인 것 같았다.

= 내가 그릇을 찾는 걸 도와다오.

"새로운 그릇을 찾는다고요? 또 누굴 어쩌시려고."

레나가 톡 쏘아붙였다.

= 너희에게 빙의할 생각은 없다.

일단 푸르손의 무리를. 그리고 놈들을 도운 배후를 캐고 싶다. 부탁이다.

"스승님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죠?"

= 내 지식을 전수해 주마. 일단은. 루-륨 한 병을 열어 봐라. 지금 네 상황이 엉망이다. 〈혈관〉만 있고, 〈피〉가 돌지 않는 상태지.

"이건 레나에게 줄 건데.

"전 괜찮아요, 스승님."

= 많이 써 봐야 세 병이다. 저 아이는 한 병만 필요한 거 아니야?

"으음.

이미 레나는 뚜껑을 딴 유리병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 추르록!

아이작의 말대로 하자 루-륨이 몸으로 홀러 들어갔다.

우우우어두우면서도 은은한 빛이 온몸에서 새어 나왔다. 두정골 쪽에서 시작한 흐름이 쇄골로, 갈비뼈로, 손끝발끝으로 퍼져 나갔다.

= 한 병 더. 이번에는 손끝부터 부어.

아이작의 말을 듣고 있는지, 옆에서 레나가 이미 딴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받아 들고 다시 왼쪽 손끝부터 부어 갔다.

어떤 폭발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따듯하게 몸을 포근히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빛과 열이 온몸을 아울렀다.

- 우우우웅.!

세 병째를 오른쪽 손끝에 부었을 때.

은은하게 새어 나오던 빛은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하지만 몸 곳곳을 흐르는 어떤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 기본적인 세팅은 끝냈다. 이제.

네 수준에서는 아무리 힘을 써 봐야소모량보다 자동으로 채워지는 양이더 많을 거다.

"자동으로. 채워진다고?"

= 그렇다. 아까 했던 짓을 그대로해 봐라.

- 파앗!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며 크게 칼을휘둘렀다. 검기를 유지한 채로, 한쪽의 돌담을 향해 냉기 폭풍을 발동시켰다.

- 우우응!

몸을 타고 도는 기운이 전해졌다.

- 사가가각!

아이작이 내 몸에서 사용했을 때보다 두 배는 강한 위력의 냉기 폭풍이 대검에서 뿜어졌다.

- 퍼걱! 퍼걱! 퍼거걱!

높이 3미터가 넘는 돌담이 엉망으로 난자되며 얼어 갔다. 인간 부대에게 사용했다면 수십 명을 즉사시킬 정도의 강력한 위력!

"으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힘이었다. 게다가 힘을 뽑아내는 데전혀 부담이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러웠다. 힘의 출력이 전보다훨씬 강화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걸 온전한 내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스킬이 생긴 것도 아니지.' 기스-제-라이에게서 정수 흡수 스킬을 받았을 때와는 다르다. 죽고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루-륨으로코팅된 이 회로가 몸에 남아 있을지어떨지는 알 수 없다.

'원리를 알아내야 한다.' 이 회로에 대해 알아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아이작과 계속 동행해야 한다.

놈을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나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레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나."

"네, 스승님."

"챙길 건 챙겼으니까, 바로 제국수도로 들어갈까? 이것만 있으면 바로 지부장이 될 텐데. T&T에서 제한 없는 정보 열람 권한을 갖는 거야. 어떻게 생각하지?"

"저, 사실은.

"뭐지?"

"조금 천천히 움직이고 싶어요."

그녀를 최대한 배려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왜지?"

"절 그렇게 도와주시고 나면, 또떠나 버리실 지도 모르잖아요. 전 천천히 움직여도 좋아요."

뜨끔했다.

아니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반쯤은 떠보는 질문을 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한층 그녀에게 미안한마음이 솟아올랐다.

"음. 혹시 원하는 거 있나?"

"제국 수도로 바로 가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레나가 약간 부끄러운 태도로 눈빛을 아래로 돌리며 말했다.

그걸 원했던 건가? 물론 어려울 건 없었다.

= .놀고들 있군. 여기서 머물 거냐?

그렇다면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뭘 바라지?]

- 결계를. 교단의 결계를 복구해줘라. 내가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이렇게 된 꼴을 보니 비참하기 짝이 없군.

[흠.]

아이작의 후예들이 모두 제물로 살해당했지만, 놈은 아무도 없는 옛교단의 결계라도 다시 세우고 싶어 하고 있었다.

물론 나로서는 나쁠 거 없는 거래였다. 결계 술을 배워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좋지."

145화 공동의 적, 내부의 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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