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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

나는 김영훈과 떨어져, 서경성으로 향했다.

서경성에 잠입한 나는 월수궁무록과 월수월무록을 운용하며 빠르게 황성에 침입했다.

그리고.

슈칵!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그의 의식영역을 베어내고 접근해, 소리소문없이 황제 막리정의 수급을 베어냈다.

현 시점에서는 암중호위대가 창설되지 않은 모양인지, 막리정을 호위하는 인원들은 근위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막리정의 수급을 들고,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법술과 결계를 베어내며,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황궁을 빠져나온 나는 발걸음을 놀리며, 몇날며칠을 걸려 익숙한 지형으로 들어섰다.

진씨세가의 영지가 있는 곳.

우우웅-

이전에는 몰랐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진씨세가의 영지.

그곳에 펼쳐진 결계의 영기가 훤히 보였다.

의식을 각성하며 천지영기를 볼 수 있게 된 덕인듯 싶었다.

진씨세가의 결계가 한밤중의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이 정도라면... 어렵지 않겠군.'

나는 어렵지 않게 진씨세가의 결계의 틈새를 베고 들어가, 그들의 영지에 몰래 진입하였다.

진씨세가의 영지라고는 하나, 대개 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이 모무는 곳이었고,

영지내의 대다수의 인원은 수도공법과는 인연이 없는 범인들인 탓인지.

결계가 그렇게 대단한 수준이 아닌 덕이었다.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존재감을 완전히 삭제하고, 익숙한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 옆.

단체숙소.

그곳에서 수많은 숨소리와 의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나는 천천히 숙소로 들어갔다.

땀 내음이 진동한다.

울컥

나는 어쩐지, 그 광경을 보자 가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제자들.

아니, 지난 시간선에서 제자였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이제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이들은, 나에게 훈련을 받았고, 나와 무학을 발전시켰으며, 나와 함께 성장해온 아이들이었다.

그래, 이 아이들은 내가 아는 아이들과 동일한 존재일지언정,

동일한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알던 제자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도 고통스러우냐."

나는 잠을 자는 아이들의 의념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아마 친지가 막리세가 수도자에게 살해당하던 악몽을 꾸는 듯.

대다수의 의념은 칙칙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 아이들에겐, 지금의 삶은 고통밖에 없을 터.

'이 아이들은 분명 내 제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너희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겠구나.'

내가 살아보니, 고통만이 끝은 아니었다.

터억..

나는 막리정의 수급을 훈련장 한 가운데에 올려놓았다.

그런 후, 잠을 자는 아이들을 뒤돌아보며, 작게 읊조렸다.

"살거라."

비록 삶이 곧 고통일지라도, 그것만이 끝은 아니니까.

고통 말고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삶은 충분한 가치를 지녔을 테니까.

"부디... 살아다오."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웃어준 나는, 진씨세가의 영지 뒷편 창고로 갔다.

음산한 기운에 잔뜩 휩싸인 창고.

나는 창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수백개의 수정구슬이 늘어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각각의 원혼들이 깃들어 있었다.

스릉-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죽은 분들은, 부디 그 한을 덜어내고 편안히 쉬십시오."

번쩍!

검에서 뻗어나온 검강은, 일순간 사방으로 비산하며, 수정구슬들에 박혔다.

수백개의 수정구슬들이 일거에 쪼개지며, 그 안에서 원혼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포옹, 퐁-

정작 구슬 안을 빠져나온 원혼들은, 어느새 그 한을 잊어버리고 맑은 빛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수한 이들의 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다, 어느덧 사라지는 그 광경은,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본 나는, 창고를 나와 허공을 박찼다.

무언가 안쪽의 법술을 건드린 모양인지, 창고 주변의 주술문자들이 잔뜩 활성화 되었으나, 나는 영기의 결들을 베어내며 빠르게 주술문자들의 포위를 벗어났다.

그런 후, 나는 황급히 진씨세가의 영지를 벗어나며, 마음 속으로 제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잘 있거라.'

이번 생에는,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기를.

진씨세가의 영지를 벗어난 나는 연국의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 너머, 벽라국(碧羅國).

그곳에 있다는 청문세가(淸汶勢家)로 찾아갈 계획이었다.

청문세가로 가, 수도자(修道者)의 길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수도자(修道者)(2)

벽라국(碧羅國)은 연국(鸢國)의 동남쪽에 위치한 국가로, 연국 너머 답천사막(踏天沙漠)에 자리한 비단길과 연국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였다.

답천사막 너머 먼 국가들과 교류하는 비단길의 길목에 자리를 잡은 국가였기에, 벽라국의 부(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곳곳에 비단과 유리그릇이 돌아다닌다.

낙타와 말을 탄 상인들이, 사막 건너편의 나라에서 건너온 담배를 물고 물건을 판다.

생전 처음 보는 약초와 과일들이 시장을 떠돌아다녔다.

'여전히 활발한 동네로군.'

나는 이전과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주변의 풍광을 보며 생각했다.

신마전을 꾸렸던 회차, 신마전을 창설하기 전 권태에 빠진 영훈 형님과 왔었던 곳이었었다.

그때 잠시 벽라국어도 배우기는 했었으나, 워낙 오랜만에 온 탓인지 영 단어들이 익숙치가 않았다.

'일단은 몇개월간 벽라국어를 다시 배워야겠어.'

청문세가를 찾아가든 말든, 일단 말이 통해야 수소문을 할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벽라국 국경 인근에는 연국어를 할 줄 아는 상인들이 굉장히 많았고,

나는 의약품을 주로 취급하는 약방에서 7개월간 일을 하며 벽라국어를 배웠다.

그렇게 7개월 후.

나는 제발 약방에서 더 일해달라고 사정을 하는 약방 주인을 내버려두고,

벽라국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자주는 오지 않았지만, 신마전을 꾸렸던 회차 이후로도 아주 가끔 와 보았기에 익숙한 곳들도 있었다.

하지만, 벽라국 역시 수도자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암약하는 것인지, 청문세가는 도무지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벽라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이한 지형이나 특이한 소문이 도는 지역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다닌 끝에, 나는 마침내 수도세가의 영지로 보이는 한 영지를 찾을 수 있었다.

파아앗-

"저건가."

오기조원에 이른 내 눈에, 천지영기로 이뤄진 결계가 한 협곡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찾았다, 수도가문의 영지!'

하지만 아직 저 영지가 청문세가의 영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연국에도 진씨세가와 막리세가, 두 수도가문이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벽라국 역시 둘 이상의 수도가문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나는 며칠간 결계 앞에서 숙식하며, 결계 내부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열흘정도를 기다렸을 때였다.

'드디어 나오는군.'

청포를 입은 한 사내가 결계에서 걸어나왔다.

'청포라...'

막리세가 수도자들이 주로 청색의 장포를 입었었다.

나는 그 기억 때문인지, 조금 사내가 꺼려졌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형장, 안녕하시오?"

"음, 안녕하시오?"

그는 나를 보고도 내색하지 않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것 참 소리소문없이 나타나는 형씨로군. 하하하, 범인(凡人)이었으면 수도가문의 영지를 들킬까 바로 없애버렸겠지만, 같은 수도자시니 다행이구려."

"하하..."

아무래도 오기조원에 올라 얻은 의식영역 탓인지, 아니면 내가 얻은 오영근 탓인지.

청포 사내는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껄껄 웃었다.

"그나저나 형씨도 국경 방향으로 가시는 거요? 나 역시 이번 달에 열린다는 영도회(靈圖會)에 참석할 예정인데. 형씨도 그쪽으로 가실 모양이외다?"

"영도회... 음, 형장. 미안하지만 제가 견문이 짧아 그러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지..."

"흠? 영도회를 모른다고?"

청포 사내는 잠시 나를 촌뜨기를 보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느 산골에서 수련하다 온 도우(道友)인지 참. 연국과 벽라국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2년에 한 벌씩 열리는 최고 교류회를 모른단 말이오? 우리 연기기 저계 수도자들이 교류할 수 있는 수많은 수도물품과 영약, 법기, 공법, 법부(法符) 등이 잔뜩 풀리는 교류회건만..."

"허어, 제가 산골에서 수련에만 매진하느라 세상사에는 어두우니, 부디 세상사에 밝은 형장께서 조금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흠. 이거 필수지식도 모르는 도우로군. 어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시구려."

나는 그의 기분을 띄워주며, 그에게서 조금씩 정보를 얻어냈다.

사내의 이름은 벽문(碧雯)으로.

벽라국 삼대선가(三大仙家)인 청문세가(淸汶勢家), 벽씨세가(碧氏勢家), 공묘세가(孔昴勢家) 중 벽씨세가의 자제라고 하였다.

"뭐, 벽씨세가의 자제라고는 하지만. 방계 중 방계에 가깝네. 때문에 수도자원도 거의 지원을 못 받고, 마땅한 가르침도 없어서 지금까지 연기기 4성 초반에 머문 신세지. 병(丙)의 진식까지는 깨우쳤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하하하, 그나저나 저 같이 마땅한 가문이 없는 수도자들보다는 나은 수준이시지 않습니까."

"자네같이 적을 둔 가문이 없는 산수(散修)들 보다야 낫긴 하지만. 내게도 고충이 꽤 많다네. 수련 자원만 좀먹는 식충이라면서 벌레 보듯이 하는 어른도 있는가 하면..."

나는 벽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며, 그가 진식이니 뭐니 등 자세한 수도지식을 말하려 할 때는 얼른 주제를 돌리며 여러 정보를 얻어내었다.

대표적으로, 나처럼 가문에 적을 두지 않고 홀로 수련을 하는 수도자는 산수(散修)라 불리는 듯 했다.

이런 산수들은 범인들의 귀족 가문이나 권세가의 뒤에서 숨어 그들을 지원해주며, 그들에게서 수련에 필요한 영초나 영단을 공급받는다고 했다.

혹은 수도가문의 일을 하청해서 해 주거나 그들의 일을 도우며 댓가를 받기도 한다 하였다.

'연국에서 주로 암약하던 연기기 1성 수도자들이 그쪽인가 보군.'

또한 기본적인 수도가문의 구성을 알 수 있었다.

가문의 직계인 본가.

그리고 본가에서 뻗어나온 방계.

그 방계들과 함께 일하는 수도가문의 외부 구성원.

여기까지는 기본적으로 '수도가문'으로 취급되었고.

이 아래로는 방계들이나 외부 구성원들이 하청을 맡기며 범인들을 영도해가는 하청산수들.

그리고 하청산수들과 함께 범인들의 국가를 운영해가는, 한 국가의 황조(皇祖).

여기부터는 반쯤은 범인들과 비슷하게 취급된다고 하였다.

황족은 수련자원이 썩 많이 지급되어 전반적인 실력은 뛰어나나, 워낙 범인들과 얽힐 일이 많으니 그리 취급되는 듯 했다.

그리고 아예 수도가문과 관계가 없는 그냥 산수들.

이들은 수도가문들로부터 크게 인정도 받지 못하고, 사실상 범인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지도 않고, 연기기 1성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지 않기에 그냥 대다수의 수도가문에서는 없는 취급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물론 서 도우 같은 경우는, 의식의 크기를 보아 연기기 3, 4성쯤 되어보이는데. 자네 같은 산수들은 예외지. 아마 자네 정도 수준이라면 어떤 수도세가를 가더라도 하청산수로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야."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흠흠, 그리고 또 수도종문에 대해서도 얘기해야지. 사실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수도종문'이라는 개념도 있었다고 하더군. 몇 개의 수도가문이 모여서 수도종파를 탄생시키고, 전 대륙의 좋은 자질의 제자들을 끌어모아 그 성세를 누렸다지.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고, 바람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네. 가문 어른들은 이유를 아는 것 같지만, 나 같은 방계한테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더군. 허허..."

"..."

아무래도 수도가문 말고, 그보다 큰 개념인 수도종문들은 9할9푼 이상이 등선향을 거쳐 승천문으로 가느라 갑자기 수도종문이 없어진 듯 했다.

벽문은 정말 쉴새없이 떠들어댔고,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는 정보 하나하나가 전부 내게는 필요한 정보였기에, 나는 아무말 않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가문 안에서는 수련을 해야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늘 마음껏 떠들수 없었던 벽문은, 나처럼 말을 잘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며 물 만난 고기처럼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영도회라는 곳에 가면, 그때부터는 떨어져야겠어.'

쉴새없이 떠드는 벽문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수도자의 경지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수도자의 경지는 결단기가 끝입니까? 수도가문의 가주들은 대부분 결단기라고 알고 있는데..."

물론 그 이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내가 무식한 산수인 척을 하며 떠보자, 벽문은 뭔가 또 아는 체를 할 건수를 잡았다 싶었는지 눈을 빛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저런, 저런. 서 도우는 정말 모르는 것도 많군. 수도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하늘에 올라 신선(神仙)이 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존재야. 신선이 되어 영생을 하기 위해 수도를 닦고, 그런 수도자들은 우선 크게 세 가지로 나뉘네.

수선삼계(修仙三界)라 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대경계(大境界). 신선에 근접한 중경계(中境界). 그리고 인도(人道)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소경계(小境界)가 그것이네.

소경계의 6단계.

단수(丹修). 연기(練氣). 축기(築氣). 결단(結丹). 원영(元靈). 천인(天人)의 경지.

중경계의 5단계.

사축(四軸). 합체(合體). 쇄성(碎星). 성반(星槃). 개열(開涅)의 경지.

그리고 대경계는 진선(眞仙)의 단계라는데. 나도 잘 모른다네.

어쨌든 이런 경지들이 더 있지."

'단수(丹修)?'

연기기가 가장 낮은 경지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런 것을 물어보면 정체를 들킬 수도 있었기에, 그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또한, 소경계의 수도자가 중경계에 이르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또 다른 상계(上界)로 비승하게 된다는 말이 있더군.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냥 전설일 뿐이라네.

사실 나는 중경계부터는 그냥 전설이나 신화 같은 느낌이고, 사실 소경계의 천인(天人)의 경지가 수도의 끝이라고 생각하네. 그저 신화가 와전되다 보니 중경계니 뭐니 하는 허황된 그런 경지가 전해지는 거지."

"하하하..."

허황된 경지라.

하지만, 나는 도리어 천인경 이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 동료들을 데려갔던 수도자들은, 모두 천인기의 수도자들이겠지.'

그들이 악을 쓰고 상계로 비승하려 하는 이유는, 분명히 천인기 이상의 경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흠흠, 그나저나 이제 영도회가 열리는, 영서산(靈緖山)에 거의 다 왔군. 자네는 이번 영도회에서 뭘 구매할 생각인가?"

"아, 구매요..."

"나는 영도회에서 좋은 단약들을 구하기 위해 영석(靈石)을 백이십여개나 가져왔다네. 허허, 나 같은 연기기 저계 수도자에겐 엄청난 지출인 셈이지."

"영석이라..."

나는 영석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듣자하니 영석은 수도자들 사이에서 화폐로 취급되는 물품이었고, 이것까지 몰랐다가는 정말 의심받을 것 같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연국과 벽라국의 국경에 위치한 영서산 산기슭에 도착했다.

'이건...'

나는 눈을 꿈틀거렸다.

뭔가 기이한 기운이 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전까지봐왔던 수도가문의 영지의 결계와는 달리, 이 산을 감싼 기운은 오기조원의 시야로도 실체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에 대해 묻자, 벽문은 껄껄 웃었다.

"자네, 정말 시골 산수였군. 보통 이런 큰 교류회나, 혹은 수도가문 본가를 뒤덮은 진법은 방계나 외부 구성원들이 머무르는 영지의 하찮은 진법과는 차원이 다르네.

용맥(龍脈) 그 자체를 동력으로 삼기에 주변의 기운과 완전히 동화되어 의식이 뛰어난 수도자라도 찾기가 쉽지 않지."

"허..."

'그래서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어도 진씨세가와 막리세가의 본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던건가.'

수도자들의 법술은 확실히 신통한 점이 많았다.

"자, 같이 영도회 안으로 들어가세나. 아, 잠시만. 자네 영도회를 몰랐던 것을 보니, 초대장은 없겠지?"

"초, 초대장 말입니까?"

"그래. 영도회에서는 괜히 범인들이 수도자들의 교류회에 섞여들어오는 일이 없도록 수도자들에게만 초대장을 발부한다네. 그래도 뭐 폐쇄적인 교류회도 아니니, 영석 10개만 지불하면 입장권을 받을 수 있다네. 가지고 온 영석은 당연히 있겠지?"

"영석.."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작게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벽 형. 저는 사실 영도회 바깥에서 잠시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말입니다. 영서산 인근에 사는 벗인데, 그 친우와 만나서 추후에 함께 들어가보도록 하지요."

"허허, 그러게나. 그럼 나중에 봅세."

벽문은 영도회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자 신이 났는지, 산기슭의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얼마 후,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대장을 보여주거나, 입장권을 구매해라.]

"여깄습니다!"

벽문은 품에서 작은 문양이 그려진 부적을 꺼냈고, 부적은 저절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종이가 불타고, 문양만이 남아 벽문의 손등에 안착했다.

[영도회 참가를 환영한다.]

번쩍!

잠시 후, 주변 풍광이 일그러지는 듯 하더니 벽문의 모습이 사라졌다.

'쯧, 따라들어갈 수 있을까 했더니만.'

나는 혀를 차며 그를 따라들어가려던 계획은 포기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은연중 드러낸 의식의 크기는 축기기 후기, 막리황신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지난 한달간 벽문과 함께다니며 수도계에 대한 기반지식을 어느 정도는 쌓았으니 손해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교류회라는 것도 끝나기는 할 테니까. 추후에 저 진법결계 안쪽에서 나오는 청문세가 수도자를 찾아가 추천권을 보여주면 되겠지.'

유명한 교류회라면 청문세가의 수도자들 역시 잔뜩 올 테니, 나는 그냥 이 인근에서 대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였다.

번쩍!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빛무리와 함께 산기슭의 한 곳에서 청색 장포를 입은 수도자들 한 무리가 걸어나왔다.

7명 정도의 무리.

"하하하, 형님. 이번 영도회에서는 상당히 많은 영석을 만졌습니다."

"그래 그래. 분명 다른 가문 놈들도 하청산수를 시켜서 아닌 척 우리 단약(團藥)을 구매하더구나."

"그놈들도 내심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우리 막리세가의 연단술(練團術)이 최고라는 걸 말입니다."

피냄새가 난다.

그들의 옷에는 익숙한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막리세가.

연국의 황실이자, 최악의 마도 가문.

"심지어 이번에는 축허단까지 가져왔으니까요. 인기가 없을 리 없잖습니까. 하하하, 연기기 수도자가 먹으면 수명을 8년이나 늘려주는 그 절세의 영약이..."

"흐흐흐, 이번에 영지로 돌아가면 더욱 더 단약을 많이 만들어야겠어. 생포조 놈들한테 단약재료를 더 많이 잡아오라고 닦달해야겠군."

"생포조 놈들도 요즘 깐깐해졌습니다. 막리정 그 방계 놈이 왠 괴인에게 살해당해서 진씨세가 놈들이 격렬하게 내외로 연국 황조를 찬탈하려 하는 것 때문에, 생포가 어렵다는 겁니다."

"쯧쯧,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존재감을 지우고, 은식술로 의식을 집어넣으며 그들을 몰래 미행하였다.

그리고,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이 영서산에서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나는 은신을 풀고 막리세가의 수도자 한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하, 그나저나 저번에 제게 할당된 재료가 얼마나 발버둥을 치던지. 정혈을 수급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우선 팔다리를..."

부웅-

"잘ㄹ.."

내 일검에, 아까부터 역겨운 소리를 지껄이던 막리세가의 수도자 한 녀석의 목이 잘려나갔다.

"...어?"

막리세가의 수도자 놈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인지, 당황한 눈빛으로 갑자기 나타난 나를 바라보았다.

"영서산 인근에서는 뭐가 있을지 몰라, 참아주고 있었다만."

나는 이를 갈며, 이 더러운 마두(魔頭)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그 역겨운 얘기를 더 듣고 있기가 힘들구나. 금수(禽獸)보다도 못한 놈들."

생각해보니, 이 역겨운 것들에게 검을 쓰는 것조차도 낭비일 것 같았다.

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전부 죽어라."

콰광!

허공에 맺힌 강기가, 황급히 법술을 쓰던 또 한 명의 막리세가 수도자의 육신을 박살내 버렸다.

골육과 선혈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뭐, 뭐냐! 감히 대 막리세가의 사람에게 이런 짓을.."

단맥도, 산바람!

피웅!

내 수도에서 뻗어나간 강기가, 바람보다도 빠르게 입을 놀리는 수도자의 머리통으로 날아갔다.

퍼벙!

해당 수도자는 방어법술을 펼친 듯 했으나, 내 강기는 수도자의 방어법술을 통채로 박살내고 수도자의 머리를 수박처럼 으깨버렸다.

순식간에 일곱 명 중 셋이 죽었다.

"이이익, 연기기 4성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것이 우리를 혼자 공격해! 막리세가의 저력을 보여주마!"

연기기 5성 수준의 의식영역을 가진 수도자가 법결을 맺었다.

이 수도자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한 그 녀석에게서 강한 음기(陰氣)가 풍겨져 나오더니, 음기의 환(環)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하하하, 막리세가의 음환법술에 맞은 놈은 전부 살이 썩어들어가며 결국 한줌 혈수로..."

단악검법, 등맥

내가 손을 휘둘러 올려베자, 음환은 그대로 쪼개져 양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콰광, 콰과광!

내 뒤로 날아간 음환의 법술들이 각기 나무들에 적중했고, 나무 두 그루가 그대로 썩어버렸다.

"어, 어어..."

단악검법, 산수화!

양 손을 펼치고, 손가락 끝에 강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사방으로 난무(亂舞)한다.

콰광, 콰과과광!

사방에 검흔(劍痕)이 새겨지며, 내게 음환의 법술을 날렸던 녀석을 포함해, 세 명의 수도자들이 그대로 갈가리 찢겨나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막리세가의 수도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사, 사, 살려 주십시오! 가, 가진 건 다 드리겠습니다."

"...네 동료들의 사체에 남은 단약 같은 것이 있나?"

"예! 예! 있습니다! 저희 막리세가가 얼마나 단약으로 유명한 세가인지는 아실 겁니다. 여기, 다,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녀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벌벌 떨며 사체들에서 몇 개의 단약을 꺼내고, 자신의 품에서도 단약을 꺼냈다.

"흠, 이 단약들의 재료는 뭐지?"

"이, 이건 청아환이라고 하여, 여인의 팔 한쪽이 들어가는 피부미용 단약입니다... 산요초와 개진액. 또한... 그리고 이건..."

나는 그 단약들의 재료를 일일히 들은 후, 마지막 남은 녀석에게 물었다.

"단수(丹修)의 경지라는 것에 대해 설명해라."

"다, 단수 말입니까? 그걸 모르는 수도자가... 아, 아닙니다. 실언했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막리세가 수도자의 입에서 단수기(丹修期)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영질을 지닌 이는 모두 본격적으로 연기기에 들어가기 전에, 천지영력을 받아들일 법화단전(法化丹田)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 법화단전을 형성하는 기간을 단수기라 부릅지요.

사실 기(期)라 부르기에도 미약한 경지이고, 사실 몇십년 전에는 연기기가 14성이 아니라, 단수기까지 포함해서 15성이었던 적조차 있습니다. 최근에 조금 구분하자고 하여 단수기라고 따로 떨어진 것이지요."

"흠, 무림인들의 천지심법 같은 느낌인가."

무공도 역시 내공심법을 배우기 전 천지심법 등으로 단전을 활성화하는 단계가 있었다.

수도자들 역시 본격적으로 수도공법을 배우기 전 수선단전을 만드는 단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면 확실히 경지라고 부를 이유도 없을 정도긴 하군..."

"예, 예. 그렇습니다. 천영근자는 하루 이틀이면 법화단전을 완전히 생성하고, 진영근자 이상은 한달이면 넘어가고, 잡영근자들도 수도공법에 대한 이해도가 좋은 이들은 1년이면 충분히 법화단전을 형성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질이 극도로 안 좋은 이들은 3년에서 5년 정도 걸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둔재들이 수도자들의 전체 인구 중 8할 이상을 차지하니, 그런 이들을 위해 구분한 경지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벽문에게 묻지 못했던 몇몇 지식을 막리세가의 수도자에게 질문해서 수도계에 대한 기반지식을 더욱 더 보완하였다.

그렇게 질문이 끝난 후, 나는 이 녀석이 바닥에 늘어놓은 단약함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중 네가 직접 연단한 단약들이 있나?"

"예! 있습니다! 저는 이래뵈어도 나름 실력있는 연단사이고, 이 중 8할 이상의 배합법과 연단법을 알고 있습니다. 살려주신다면.."

"...이 중에서 직접 복용한 종류의 단약은?"

"저, 전부 복용해 보았습니다.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단약이 대인께 적합한지.."

나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를 노려보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연단을 하며, 무슨 생각이 든 적 없나?"

"예, 분명 연단을 할 때마다 실력이 느는 것에 뿌듯하고..."

"그렇군."

나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수도자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왜, 왜... 질문에 다 대답..."

푸콱!

이 뻔뻔하고 더러운 것에게, 손이 닿는 것조차 싫다.

나는 강기를 쏘아내서 수도자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뭘 저질렀는지 자각조차 없군. 아예 사고 방식 자체가 틀린건가..."

제아무리 수도가문의 일원으로 자라나, 범인들과 다른 세계를 보며 살아왔다지만.

아무리 그럴지라도, 인두겁을 쓴 이상 같은 인간에게 저럴 수가 있는가.

나는 막리세가의 수도자들의 시체를 길에 내버려둔 후, 녀석들이 모아온 단약들을 끌어모았다.

그런 후, 나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땅을 파고 단약들을 하나하나 나누어 묻었다.

얼마 후, 양지바른 곳에는 조그마한 봉분이 여러 개가 생겨났다.

"...시체를 찾을 수 없어 이렇게 묻어드렸습니다만.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길."

나는 위령의 제문을 짧게 읊어 명복을 빌어준 후, 다시 막리세가 수도자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너희 영석은 내가 좀 가져가마. 불만 있으면 말해라."

수도자들의 봇짐을 뒤지자, 나는 한 무더기의 영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막리세가의 수도자에게 영석의 값어치를 대충 들은 나는, 영석들을 잘 갈무리해 품에 넣었다.

약 1600여개의 영석이 단번에 내 품에 들어왔다.

'사람을 갈아넣어 만든 영석으로 돈 좀 만졌나 보군.'

수도공법 수련에 도움도 되고, 법력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귀한 자원이 내 손에 상당량 들어온 것이었다.

"그럼, 영도회라는 곳에 가 볼까."

나는 다시 영서산으로 향했다.

원래는 영서산 인근에서 청문세가의 수도자들을 기다릴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되면 그냥 안으로 들어가서 찾아도 될 것이다.

나는 영서산의 산기슭.

벽문이 걸어갔던 방향으로 걸어갔고, 주변 공간이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방향을 알기 어려운 도중.

왠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왔다.

[초대장을 보여주거나, 입장권을 구매해라.]

나는 영석 10개를 건냈고, 그러자 일그러진 풍광의 틈새로 빛무리가 날아들며 내 손등에 안착했다.

[10일 입장권. 열흘이 지나면 나가야 한다.]

"영도회는 총 며칠동안 열립니까?"

[총 40일간 열리며, 현재 영도회를 연지 20일이 지났다.]

"10일 입장권을 한장 더 주십시오."

[영석 10개.]

나는 영석 10개를 더 내고, 총 20일을 머물 수 있는 입장권을 받았다.

[영도회에 온 것을 환영한다.]

번쩍!

얼마 후, 풍광이 더욱 이지러지며, 나는 어느새 진법의 안쪽에 진입해 있었다.

"이곳이... 영도회?"

나는 그곳으로 발을 디뎠다.

수도자(修道者)(3)

"허어..."

나는 자연스럽게 탄성을 지르며 주변 경관을 구경했다.

압도적이다.

건물의 외관과, 곳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야 그냥 서경성의 번화가와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그것에서 느껴지는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

오기조원을 각성한 내 시야에, 영도회 곳곳에서 일렁거리는 광대한 천지영기의 흐름이 잡혔다.

천지영기의 흐름이 이곳의 대지 전체를 감싸안고 있었으며, 수천억 가지의 깨알같은 주술문들이 움직이며 결계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건물 곳곳에도 역시 용도를 알 수 없는 주술문들과 법술들이 수십 중첩으로 겹쳐져 있었다.

사람, 동물은 물론이고 길거리에 피어있는 잡초들마저 영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건물들마저 웅혼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거기에, 이 의식들...'

어디를 둘러보아도 전부 의식을 가진 수도자들뿐이었다.

의식이 없는 범인들의 시장만을 보다, 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둘러싼 수도자들의 교류회에 오니 새삼 기이한 느낌이었다.

범인들의 시장은 자신의 의념을 제어할 수 없는 수많은 인간군상들의 의념 덕에 거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수도자들의 교류회는 모두가 자신의 의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에, 집중해서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어떤 의념을 흘리고 있는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영적(靈的)으로 훨씬 깔끔해 보인다.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놀라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대략 이곳의 상황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수도자들의 교역회는 뭘 파는 곳인지...'

영적으로는 굉장히 달랐으나,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는 기본적으로 화려한 번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 곳곳에 부적 등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고, 처음보는 약재를 파는 약재상이 있는가 하면, 기이한 짐승들을 우리에 넣고 앉아있는 조련사도 보였다.

사고파는 물건과, 그 화폐의 가치가 범인들의 시전과 비할 수 없이 높다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와홍 한 근!"

"선령호로 팝니다!"

"특대 저물(貯物) 법기, 단 일곱 점 남았소!"

나는 신기한 기화요초와 기진이보를 파는 곳을 지나던 중, 한 가지 법기에 시선이 갔다.

물건을 파는 수도자가 작은 주머니에 손을 넣자, 그대로 어깨까지 들어가는 것이었다.

"허어... 신기하군."

나는 절로 모르게 그 상점으로 들어가, 저물법기(貯物法器)라는 것을 구경했다.

"저, 형장. 내가 시골뜨기 산수라서 잘 모르오만, 그 저물법기라는 것 안에는 대충 얼마나 들어가는 것이오?"

"음? 흐음.."

수도상(修道商)은 나를 게슴츠레하게 흝어보더니, 픽 웃었다. 그의 의식에 깔봄의 색조가 드러났다.

"본점에서 파는 저물법기 중 가장 성능이 안 좋은 것이, 일석(一石:약180L)의 용적이 들어가외다."

그는 작은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작은 것 하나에 당장 지금 내 봇짐을 전부 집어넣어도 되는 것이다.

'엄청나군.'

저 작은 주머니 하나만 있어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약독(藥毒)의 종류와, 암기의 갯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것이다.

암기 역시 주로 사용하는 내게 있어서는 썩 군침이 도는 기물인 것이었다.

점포의 상인은 내 차림이 무언가 마음이 안 든 것인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거 하나에 영석 50개요. 돈 없으면 가게 가리지 말고 어서 저리..."

"제일 비싼 게 얼마요?"

나는 작은 저물법기들을 지나쳐, 화려해보이는 저물법기로 시선을 돌렸다.

'암기를 빨리 뽑아쓰려면, 저게 좋겠군.'

나는 염주 형태의 법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게 마음에 드는군. 저걸로 주시오."

"이건 영석 300개.."

쿵!

나는 영석이 든 봇짐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영석 300개를 골라 점포 주인에게 건냈다.

그는 순간 당황하는 듯 하더니, 금세 안색을 바꾸고 살살 웃으며 내게 저물법기를 건내주었다.

"하하, 아이고 손님. 역시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 저물탁(貯物鐲) 법기야말로 물건을 저장하기에 최고의 법기지요. 이 염주알 27개 하나하나에 3석 크기의 용적이 공간법술로 확보되어 있으며..."

나는 대강대강 설명을 듣고, 저물탁 법기를 구매했다.

저물탁을 손목에 차고 기운을 불어넣자, 저물탁이 빛을 뿜으며 내가 지정한 짐들을 빨아들였다.

다시 손가락으로 짐들을 저장한 염주알을 톡 건드리자, 내가 원하는 물건이 바로 나왔다.

"저, 손님. 저희 가게에는 더 좋은 법기류들도..."

그는 내게 다른 법기들도 구경시켜주었으나, 저물법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당량의 법력을 요하는 것들이었다.

'법력이 없는 지금으로썬 대부분 쓰레기나 다름없다.'

거기에, 연기기 수준의 중, 하급 법기를 구매한다 하여도 어차피 내 강기보다 약한 것들이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내게는 그냥 비싼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흠, 미안하구려. 내 보니 더 살 건 없어보이는군."

내가 헛기침을 하며 나가려 하자, 점포의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물어왔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혹 뭔가 찾으시는 물건은 없으십니까? 단순 법기뿐이 아닌, 부적, 단약 등... 제가 영도회에 자리를 잡은 상인들과 친분이 깊어 좋은 가게를 소개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음, 그럼 혹시 서책을 판매하는 서점도 있소이까?"

"아하, 혹 수도공법(修道功法)에 대한 공법서적을 구매하시렵니까?"

"뭐 그것도 있고, 그냥 수도계에 대한 전반적인...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서적을 파는 곳이 있을런지.."

내 말에 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가게를 나와 영도회 길거리 한쪽을 가리켰다.

"저 거리로 쭉 가셔서, 세 번째 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청난서고'라는 서점이 있습니다. 온갖 잡다한 서적을 전부 판매하고, 서점 주인인 노인네가 손님에게 필요한 서적을 그때그때 잘 추천해주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오, 그렇구려.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손님. 추후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또 저희 점포에 들려주십시오!"

나는 법기가게에서 나와, 점주가 알려준 서점으로 향했다.

'청난서고라...'

서점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평범했고, 존재감이 없었다. 거기에 어쩐지 영도회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지 못하는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콜록, 콜록 콜록..."

서점의 문을 열자, 서점 곳곳에 쌓인 먼지가 흩날리며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 손님인가? 굉장히 오랜만이구만, 반갑네. 나는 엄씨 성의 청난이라고 하네."

자신을 서점의 주인이라고 칭한 엄 노인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엄 노인의 의식은 대략 연기기 정도로 보였으나, 어째서인지 의식의 경계가 굉장히 흐릿해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노인이 가슴에 찬 여러 자루의 판관필들이 각각 내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노인이 판관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거 말인가? 이건 자기 경지를 모호하게 해 주는 저계 법기로, 본 서점에서 책을 5권 이상 사면 주는 사은품이네. 왠지 자네는 사은품을 하나 받아갈 것 같구만. 허허.."

"나쁘지 않군요. 그나저나, 수도계에 대한 기본 교양상식서나, 단수기에 대한 서적, 그리고 연기기 수도자들이 익히는 수도공법에 대한 서적을 사고 싶습니다만.."

"음, 좋군. 미리 사은품 하나 주겠네. 껄껄..."

엄 노인은 가슴에 매달려 있는 판관필 중 하나를 풀어서 내게 건내고는, 서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몇 권의 서적을 가지고 왔다.

"보자, 여기 '수도계의 기본교양', '수도자로서의 예의범절', '수도자가 알아야 할 100가지 상식', '수도자의 경지에 대하여' 등 기본 교양서 4권. 그리고 단수기에 대해 해석한 '단수분석전'. 각 영질에 따른 최적의 단수공법을 적어놓은 '만계단수권' 등 단수기 관련서적 2권.

그리고 연기기 기초공법 총 13권."

그는 19권의 서책을 내 앞에 쌓아놓고는, 단수기와 기본교양 서적 6권을 내게 건낸 후, 연기기 공법서적 13권을 내 앞에 펼쳐놓았다.

"13권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보시게... 일단 이 대오행환세결로 말할 것 같으면..."

엄 노인은 내게 기초공법서들을 펼쳐놓고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본 청난서고에는 대략 이런 서적들이 있다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게, 이 기초공법서들은 전부 기초에 근간을 둔 공법인지라, 각 수준의 개념에 대해서는 잘 설명이 되어있고, 법력도 연기기 수준에선 상당히 정순하지만 특화된 분야가 딱히 없어.

예를 들어 진씨세가의 연기기 기초공법은 화염과 벽력계통에 특화되어있고, 막리세가의 기초공법은 음기와 수류, 그리고 풍 계통에 특화되어있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 가게 말고도 다른 가게에서도 대부분 구할 수 있는, 소위 저잣거리 기초공법이지.

물론 저잣거리에 그만큼 퍼진 이유는 그만큼 무난하고, 정순한 법력을 가졌기에 퍼진 것이라네."

"흐음, 엄 노야께서 추천해주실만한 공법은 없으십니까?"

"자네는 무슨 영통을 지녔나?"

"오영통을 지닌 오영질자입니다."

내 말에 엄 노인은 서적을 뒤적거리더니, '오월입도경(五越入道經)'이라는 공법서를 내밀었다.

"각각 영근에 맞는 지월입도, 수월입도, 화월입도, 목월입도, 금월입도의 다섯 공법이 수록된 공법서네. 하나하나가 전부 정순한 법력을 모으게 해 주는 공법서고,

비록 특화된 부분은 없어서 연기기 자체의 법술만 쓸 수 있지만... 다섯 공법 중 두 개 이상을 같이 익힌다면 법력의 회복속도가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네.

그리고 공법서 후반부에는 연기기 자체의 신통을 제외한 몇몇 기본법술, 방어법술이나 염동술, 은닉술, 의식술, 전음술 등 법술들을 수록해 놓았네."

"흠, 그럼 그걸로 주시지요."

난 어차피 수도선술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었기에, 별 생각은 않고 서적들을 전부 구입했다.

"전부해서 영석 마흔아홉개만 주시게나."

'서적들이 어지간한 하품 저물법기 가격이군. 하긴, 연기기 14성까지의 수행법이 적힌 수도공법인데 그럴만도 하지.'

나는 엄 노인에게 서적을 받아 저물탁에 집어넣고 한 가지를 질문했다.

"그나저나 엄 노야. 혹시 청문세가의 수도자들이 영도회의 어디쯤에서 머무는지 아십니까?"

"음? 숙박 등은 저 건넛거리쯤에서 자주 하는 걸로 안다네. 사실 나도 이번 영도회에 가게를 처음 들여온 거라 잘 모른다네. 본래는 책을 들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거든."

"아, 그렇군요. 그럼 잘 자리를 잡기를 바라겠습니다."

"됐네 됐어. 사실 이번에도 그냥 재미삼아 서고를 연 거지 뭐 자리를 잡자고 연 게 아니거든. 나는 오히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게 더 재밌다네. 서점 일 말고도 본업이 있기도 하고."

"그러면 다행이군요. 사은품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엄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청난서고를 나와 엄 노인이 말한 건너편 거리로 향했다.

그러던 도중, 난 뭔가 기이한 기분이 들어 청난서고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그 저물법기 가게 점주... 이번에 영도회에 처음 들어왔다는 서점을 내게 무슨 좋은 서점으로 정평이 났답시고 추천해준 건가? 나 이전에 손님이 많이 왔다기에는 엄 노인의 반응이 영 그렇던데... 쯧, 서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라도 한 건가보군.'

나는 잡생각을 하며, 숙박을 할 수 있는 주루들이 있는 거리를 거닐었다.

'숙박할 장소가 특정되었다고 해도 상당히 넓은데, 청문세가 사람들을 어찌 찾아야 할지...'

그러나, 내 고민은 아주 짧았다.

"으아아아! 저기 청문세가 망나니 놈들이다!"

"이런 젠장, 저 성질 더러운 놈들이 여긴 왜!"

"이보게, 괜히 여기 있다가 걸려서 시비걸리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게나!"

"..."

나는 말없이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둘은 짙은 남흑색 장포를 입고 있었고, 투기(鬪氣)를 줄줄 흘리며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중 남자쪽은 상당히 덩치가 큰 거한이었는데, 팔목에는 나와 같이 비싸보이는 저물탁을 차고 있었다.

'흠, 뭔가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이 있나보군. 의념 대부분이 시뻘겋게 물들어있다.'

청문세가의 남녀는 무언가 화나는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분노를 의미하는 피처럼 시뻘건 의념이 상단전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툭-

"하하하, 이것 참 잘 샀단 말이지..."

붉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주루 사이의 골목에서 튀어나와 청문세가의 거한과 부딪혔다.

'저 옷, 저 인장... 진씨세가인가.'

진씨세가의 사내는 거한을 보더니, 미안하다는 건지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다시 길을 가려고 했다.

그때, 청문세가의 거한이 진씨세가 수도자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지나가다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지?"

"음? 사과했잖나? 뭐가 문제지?"

"너... 이 새끼, 내가 우습나?"

"뭐? 크윽! 끄으윽!"

갑자기 거한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진씨세가 수도자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이, 이 개자식이...!"

틱, 티틱!

진씨세가 수도자의 주변으로, 화(火) 속성의 영력이 퍼지며 그에게서 불티가 튀기기 시작했다.

"이거 못 놓냐?"

"흠, 자기가 먼저 부딪혀놓고, 사과는 커녕 적반하장이구나.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

"이 개 같은 놈이 뭐라는 것이야! 네놈이야말로 손을 떼고 당장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 손을 다시는 못 쓰게 만들어주마..!"

'일 났군. 거한의 성격은 모르겠다만,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자존심이 세고 성격이 불같은데...'

그때, 거한의 옆에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영도회의 규칙을 모르시는 건 아니시지요? 이 안에서는 연기기 2성급 이상의 법술을 통한 공격은 사용이 금지되어있습니다. 또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도 금지되어있고요."

"하,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영도회의 규약을 이용해서 감히 나를 막아보겠다는.."

"그러니, '법술을 통한 공격'과 '상처를 입히는 행위'만 아니라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저번에 본가의 자제 중 하나가 이를 이용해서 한바탕 한 적도 있었고요."

여인의 말에, 거한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렸고, 진씨세가의 수도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번쩍!

거한의 주먹에서 밝은 빛이 터져나왔고, 그대로 진씨세가 수도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콰아앙!

진씨세가 수도자가 펼치려 하던 화염법술이 그대로 박살나며, 그가 1장을 넘게 날아가버렸다.

"크아아아악! 이, 이 개자식! 감히 나를 상처입혀! 네놈이 이러고도 영도회 안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흠, 시끄럽군."

퍼억! 퍼어억!

거한은 진씨세가 수도자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멱살을 들어올리고 빛이 나는 주먹으로 계속 때리기 시작했다.

"끄, 끄아악! 이, 이 놈 좀 말리시오! 이 녀석이 지금 영도회의 규약을 어기고 있소!"

그러나 어느 수도자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씨세가의 수도자는 상처를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한의 주먹에 서린 빛무리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창호자가 내 팔을 고쳐주었던, 그 법술이다.'

치유의 힘이었다.

그랬다. 거한은 지금 진씨세가의 수도자에게 치유의 법술로 구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커헉! 왜, 왜.. 연기기 2성급 이사으이 공격인데 왜 영도회 금제결계가 작동 안..커헉!"

그러나 맞는 입장에서는 그런 걸 알 겨를이 없는지, 영도회의 규약을 계속해서 반복해 말할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지나가다가, 부딪혔으면.."

"아, 아악! 아아악!"

퍽! 퍽! 퍽! 퍽!

진씨세가의 수도자는 계속해서 무언가 법술을 쓰며 거한의 팔에서 벗어나려는 듯 했지만, 거한의 손에서 나오는 푸른 빛이 그를 찐득찐득하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쯧쯧, 진가 수도자인 것 같은데. 임자 제대로 만났구만."

"저쪽이야 막리세가 수도자만 신경써오다가 다른 국가의 수도자는 처음 만나본 것 같은데..."

"청문세가가 인성이 더러운 걸로 유명한 것도 몰랐던 건가..."

다른 수도자들은 한쪽이 한쪽을 치유해주며 구타하는 이 기묘한 싸움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멀찍이서 구경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구경꾼들은 대부분 연기기 3, 4성쯤이었으나.

청문세가의 거한은 물론이고, 그 곁에서 구경을 하는 여인의 의식영역만 보아도 연기기 5성은 되어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시조인 창호자는 굉장히 사람이 호방하고 좋던데. 그 가문 방계들은 어째 좀 인성이 더럽나보군.'

나는 무지막지하게 진씨세가 수도자를 두들겨패는 청문세가 거한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진씨세가도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쨌건 지난 삶에선 같은 편이었는데 저렇게 두들겨 맞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진 않군.'

나는 이젠 숫제 기절하기 직전인 진가 수도자를 아직까지 두들겨 패는 거한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형장. 이제 진가 분도 교훈을 단단히 얻은 듯 하니 이만 용서해 주시지요."

"음? 네놈은 뭔데 나와 이 놈 사이의 일에 끼어드느냐."

"딱히 뭐가 아니더라도 형장의 태도가 좋아보이지는 않더이다. 이제 그만 용서하시지요."

"하,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내 손에서 이 건방진 놈을 빼내 봐라. 어디 연기기 3성 후반쯤 정도 되어 봬는 놈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월수궁무록 극의, 노중로무궁의 일식(一式)을 간략화해서 위력을 조절한 다음, 바로 거한에게 쏘아버렸다.

"크아아아아악!"

거한은 그대로 머리를 부여잡고 진가 수도자를 놓쳐버렸고, 나는 기절하기 직전인 진가 수도자에게 다가가 통증을 완화시키는 혈을 눌러주었다.

"괜찮으시오?"

"허, 허억...! 끄흑... 고, 고맙소. 정말 고맙소..."

연기기 4성에서 5성쯤 되어보이는 진씨세가의 수도자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추후에 연국 첨벽성으로 오신다면 내 보답하겠소. 첨벽성에서 이 전음부를 사용하시면 될 거요. 나,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오늘 일은 정말 고맙소!"

그는 내게 인사를 한 후, 거한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때릴까, 황급히 내게 부적 한 장을 쥐어주고는 달아나 버렸다.

"당신, 감히 우리를 상대로 위해를 가한 건가?"

청문세가의 여인이 나를 노려보며 거한의 앞을 막아섰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기술은 연기기의 법술 같은 게 아니니 딱히 영도회의 규약 같은 건 어기지 않은 것 같소만. 그리고 어디, 저 분에게 상처가 있소?"

"흥! 무언가 의식을 이용한 법술을 이용해서 악의적으로 규약을 빗겨간 것 같은데. 감히 청문세가 자제들에게 싸움을 건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여인의 손에서도 푸른 빛이 퍼져나왔다.

방금 진씨세가 수도자를 두들겨 팬 치유법술과 같은 법술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수도(手刀)를 휘둘러서 그녀의 법술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그녀의 손은 남아있었으나, 푸른 빛만 그대로 허공에서 잘려나갔다.

"무, 무슨..."

성큼 성큼

나는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가며 두 손가락을 펼쳐들며 그녀에게 느릿하게 찔러들어갔다.

"방(防)!"

청문세가의 여식은 놀랐는지 황급하게 언령으로 투명한 방어막을 소환했으나, 내가 순간 손 끝으로 강기를 뿜어내자, 방어막은 그대로 으스러져 조각나버렸다.

나는 빠르게 다시 강기를 흩어버리고, 그녀의 요혈을 짚었다.

"커헉!"

청문세가의 여식은 내게 짚힌 요혈을 움켜쥐고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유의 법술을 써서 사람을 구타하더군. 나 역시 사람 몸에는 정통한지라, 어디를 때리면 치유가 되는 동시에 고통스러운지 잘 안다만... 한번 해 보실테요?"

"이익, 네놈..."

"잠깐."

청문세가의 여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내게 무언가 법술을 펼치려 할 때였다.

청문세가의 거한이 그녀를 막으며 머리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흠. 죄송합니다. 경지를 숨긴 선배님이셨군요."

"음?"

내가 의아해할때, 그가 내 허리춤에 찬 판관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법기가 선배님의 경지를 흐릿하게 표현하여 제가 잘 인지를 못 하였습니다. 부디 후배들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지요."

그는 정중히 내게 포권을 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그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오, 오라버니. 저 자, 아니 저 분은..."

"방금의 일격을 보지 않았느냐. 우리 법술을 손을 휘둘러서 무화시키고, 나를 기절 직전까지 몰아가는 의식법술을 사용한다는 건 최소 연기기 7성 수준이시라는 거다."

"그, 그런... 저 역시 무례를 사과하겠습니다."

"..."

나는 괜히 뻘줌해져서 머리를 긁었다.

만약 내가 연기기 7성이 아닌, 아무 법력도 쌓지 않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나를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녀석이 경지 인식을 방해하는 법기를 보고, 내가 경지를 낮아보이게 하고 돌아다니는 고수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실상은 반대인데 말이지.'

"...그나저나, 혹여 이 문양을 알아보시오?"

나는 그들에게 내 손등에 남아있는, 창호자의 추천권 문양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거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외부 가원 추천권이로군요. 최소 본가 장로, 혹은 공봉급 이상의 추천권입니다. 저희 남매가 귀인을 몰라뵀습니다. 이 역시 용서해 주시기를."

"다행히 알아보는구려. 사실 이것때문에 청문세가 사람들을 찾고 있었소만... 그 이걸 가지고 외부 구성원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아, 간단합니다. 그냥 저희 가문의 영지로 오셔서, 장로급 어른 한 분께만 확인을 받으시면 바로 외부 구성원이 되실 수 있으십니다. 하하, 이리 된 것 영도회가 끝나고 바로 저희 영지로 뫼시겠습니다."

"음, 고맙소."

나는 갑자기 얌전해진 청문세가 남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근처에 숙소를 잡고 영도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렇게 20일이 지났고, 영도회가 끝났다.

나는 청문세가 남매의 안내로,

벽라국 청문세가의 영지에 도착하였다.

수도자(修道者)(4)

청문세가의 영지에 도착한 나는, 청문세가 영지에 출입할 수 있는 출입영패를 받은 후, 영지에 있는 축기기 장로를 만나러 갔다.

축기기 장로 청문목(淸汶鹜)은 그의 방 안에서 내 추천권을 확인하며 말했다.

"흠, 원로급 이상의 어른이 추천한 추천권이군. 이번에 올라가신 종문의 어른들 중 한분에게 추천받았나보구나."

"올라가신 어른이요?"

"됐다. 그런 게 있으니 넌 신경쓸 필요 없다. 어쨌든 추천권의 진위는 확실하니 너를 외부 가원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이후, 그는 간단히 내 이름과 나이, 그리고 국적과 내 현재 경지를 물었다.

"이름은 서은현이고, 현재 30세. 국적은 연국 연산성 출생이며, 현재 경지는... 아직 수도공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흠? 수도공법을 익히지 않아?"

청문목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의 의식이 내 의식을 흝고 지나갔다.

현재 나는 은식술로 의식을 압축해서 일부로 크기를 줄였기에, 상당히 크기가 축소되어 연기기 1성 수준이었다.

"수도공법을 익히지 않고도 연기기 1성 수준 의식이라니, 의식이 특출나군. 그래서 추천받은 건가. 그리고 무슨 영질을 가지고 있는지 혹시 아나?"

"오영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영질..?"

다시 한번 그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후우. 의식이 조금 특출난 걸 제외하곤 답이 없군. 왜 추천받은 거지..? 아니, 됐다. 내가 감히 가문 어른들의 일에 토를 달 수야 없지. 일단 외부 구성원을 상징하는 신분패를 주마. 그리고 네 거주지도 정해주지."

나는 장로를 따라 영지의 한 장소로 향했다.

청문세가의 영지는 막리세가나 진씨세가처럼 평탄한 곳에 세워져있지 않고, 험준한 산골짜기에 세워져 있었다.

그랬기에 수도자들의 처소 역시 집의 형태보다는, 산골짜기 협곡 곳곳에 석굴처럼 뚫려있는 형태가 많았다.

청문목은 나를 데리고, 한 석굴 앞에서 멈춰서더니,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이곳이 네 처소니라. 앞으로는 이곳에서 지내며 수행을 높이고, 네게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며 세가의 공적치를 쌓을 것이다. 그리고 공적치가 일정 이상 쌓이면 그 공적치로 하여금 세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본디 외부 구성원과 방계에게는 세가에서 한 달에 한번씩 기초적인 수도자원도 내려진다. 수행한 임무가 많을수록, 그리고 수행의 경지가 높을수록 기본으로 지원되는 자원이 많아지니 그리 알도록. 일단 너는 자질만 있을뿐 아무런 법력은 물론이고 법화단전조차 없기에, 네게 지원되는 기초지원은..."

그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함을 꺼내서 내게 주었다.

함을 받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새끼손톱만한 황주삼이 들어있었다.

등선향에서 캤던 팔뚝만한 삼보다는 한참 작은 크기였다.

'크기와 생김새를 보니, 자연삼은 아니고 양식되는 삼인가보군. 그리고 한 5년치 나이를 먹은 약초다.'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해라. 단수기를 거쳐 연기기에 오른다면 그때부터는 한달에 영석 하나 정도는 받을 수 있을게야. 그리고, 이것도 받거라."

나는 청문목에게서 두 권의 서책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는 단수기 공법서였고, 하나는 청문세가의 가율(家律)이 적힌 서책이었다.

"가율서는 꼭 한번 읽어보고, 앞으로는 단수기 공법서로 단수기에 오르거라. 그리고 어쨌든 너도 이제 가문의 구성원이 되었으니 한달에 네 번은 꼭 필수임무를 해야한다. 임무를 받고자 한다면 내게 와서 임무를 신청하면 된다. 네 수준에 맞는 임무를 할당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서책을 받고 인사를 한 후, 석굴로 들어갔다.

석굴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휑했으나, 몇 번의 삶을 거치며 노숙은 일상이었던 적도 많았기에, 천장과 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였다.

나는 우선 단수기 청문목이 주고 간 단수기 공법서, '청목법단(靑木法丹)'과 영도회에서 엄 노인에게 산 '만계단수권'을 꺼내 펼쳐보았다.

얼마 후, 나는 청목법단을 덮어버리고, 한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오영질자랍시고 너무 대충대충인 공법서를 준 것 같은데...'

청목법단은 만계단수권에 비해 설명도 불친절했고, 너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도 많았다.

그에 비해 만계단수권은 각 영근에 맞는 공법들이 전부 수록되어있는 것은 물론 '단수기'라는 경지에 대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법화단전을 만드는 단계는 대강 이러했다.

우선 자신이 가진 영질을 활성화시켜, 단전 자체를 그 영질에 최적화되게 변형한다.

그런 후 음양이기를 모아 단전 속에서 순환시키며 혼원(混原)의 기운을 가지게 하여, 천지영기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게 바꾸면 그것이 법화단전인 셈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천영근자는 하루, 진영근자는 한달, 잡영근자는 빠른 자는 1년, 느린 자는 3년에서 5년.'

가진 영근이 많으면 많을수록, 법화단전을 생성하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단일영질을 지닌 천영근자야, 하나의 영질만 활성화시켜 단전을 최적화시킨 후, 음양이기를 모아 혼원진기로 단전을 닦아내면 끝이었기에, 하루면 법화단전의 생성에 도달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영질 이상의 영질을 가진 수도자는 두 개의 영질을 활성화시키고, 영질의 기운으로 단전을 최적화시킬 때, 두 영질의 기운이 완벽하게 균일하게 단전에 깃들게 해야한다고 했다.

이영질은 그나마 두 개의 영기를 정확히 5대5로 최적화시켜 균일화시키면 되었지만, 삼영질부터는 굉장히 영기의 균일도를 맞추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렇기에 같은 진영근이라도 삼영질을 가진 이는 한달에서 세 달정도까지 영기의 균일화에 힘을 쏟는다 했다.

그리고 4, 5영질부터는 이제 지옥의 시작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네, 다섯 개의 영력의 농도를 완벽히 균일하게 맞춰야 하고, 혼원진기로 단전을 진화시킬 동안 그 영력의 농도들이 절대 변하면 안 된다고 했다.

'흠...'

나는 만계단수권과 단수분석전을 읽으며, 단수기에 대해 이해하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결론을 내렸다.

'아무 문제 없군.'

영기의 균일도?

그 문제는 내가 오기조원에 오르며, 전신을 환골탈태시킬 때 완벽히 해결했다.

지금 내 체내의 오영질은 전부 완벽히 균일하다.

그냥 영질을 전부 활성화시킨 후 단전에 불어넣기만 하면 끝이다.

그리고 혼원지기로 단전을 진화시킬 때 한 번도 영질의 균일도에 이상함이 생겨서는 안 된다거나, 한 번도 집중을 풀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내겐 의미가 없었다.

'검기를 하루 종일 유지하는 수련에 비하면야 어렵지도 않군.'

거기에 꼽추 괴인이 내게 선물로 준 은식술을 사용하면 수련 속도가 어느 정도 빨라진다고 하니, 내겐 시간도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문제는 수련을 하는 데에 쓸 영력이었는데.

와르르-

막리세가 수도자들에게서 가져온 영석 천여개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저물탁에서 쏟아낸 영석들을 석굴 곳곳에 깔아놓고, 그 영기를 음미했다.

"흠, 이 정도면 뭐..."

아무래도 수련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영석들의 영기를 가늠해본 후, 다시 영석들을 저물탁에 집어넣은 후 청문목을 찾아가 임무를 받았다.

한달에 4번은 꼭 해야 한다는 임무라면, 그냥 한번에 해치워버리고 마음 편히 수련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찾아가자 청문목은 내게 쉽고, 또 구차한 임무를 내려주었다.

벽라국 주령성에 있는 작은 마을에, 영질을 가진 이가 나타난 것 같으니 사실확인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청문세가의 방계 한 명과 조를 짜서 주령성으로 향하였다.

* * *

'그동안 수도자들이 어디에서 자꾸 새 인원을 확충하나 했는데, 이런 방식이었나.'

나는 청문세가의 방계와 임무를 수행하며,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알 수 있었다.

수도가문들은 보통 어디에서 새 인원을 계속 확충하기에 몇백년동안 계속 그 수를 유지하는가.

영근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가문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면 결국에는 유전병이 심화될테고, 그렇다고 경쟁관계로 보이는 다른 가문 가원과 혼인을 시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도가문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가문 방계들에게 임무를 내려, 나라 곳곳에서 영질을 지닌 사람들을 수급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영질을 타고난 사람을 찾기도 쉬웠다.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로군.'

마을에서 귀신을 본다는 아이나, 혹은 자꾸 헛것을 보는 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는 8할 이상이 영질을 타고난 자였던 것이다.

귀신 보는 아이나, 특이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 마을로 가면 영질을 지닌 자를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무슨 속성 영질인지 알아보는 것은 상세한 검증이 필요해도, 그냥 영질을 지녔는지 안 지녔는지 정도는 한 눈에 알 수 있으니...'

영질, 혹은 영통이 뚫린 이는 의식(意識)이 상단전 바깥으로 삐져나와, 미간을 중심으로 원구를 그리고 있었다.

비록 수도공법을 익히지 않은 탓인지, 그 의식의 크기는 머리보다 두어 배 큰 것에 불과했으나,

보통의 범인들은 의식이 아닌 의념의 형태로 의(意)를 흘리고 다니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알아보기는 쉬웠다.

"저 아이가 그 귀신을 본다는 아이로군."

청문세가의 방계, 이번에 나와 한 조를 짠, 연기기 1성의 수행을 가진 청문병이 주령성 구릅현, 매열촌의 다리 밑에서 뒹굴고 있는 거지 중 한 아이를 가리켰다.

아이는 전신에 멍이 들어있었고, 어쩐지 멍한 눈으로 천지영기의 흐름을 보고 있었다.

"영통이 뚫려 있군요."

나는 아이의 미간을 중심으로, 아이의 상단전을 둘러싼 의식의 형태를 보며 말했다.

청문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다리 아래 거지 일가는 갑자기 귀한 옷을 입은 청문병이 다가오자 당황한 모양인지,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봐라, 저 애의 이름이 뭐지?"

"아이고 나리. 저 애는 구삼(口三)이라는 놈입니다. 그, 저 애가 혹 나으리를 건방지게 쳐다본 것 때문에 내려오셨으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저 놈의 자식이 뭔 놈의 귀신을 본답시고.."

그때였다.

구삼이라는 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나와 청문병을 가리켰다.

"우에에엑! 괴, 괴물! 괴물들이다! 으에에에에엑!"

아무래도 우리같은 의식을 가진 이를 오늘 처음 보았는지, 반응이 썩 과격하였다.

거지 일가의 가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이를 갈았다.

"저 망할 놈의 자식이 귀한 분한테 무슨 막말을, 몽둥이 가져와! 저 놈의 입을 함부로 못 놀리게..."

"됐네. 그나저나, 저 애를 우리한테 팔 생각이 있나? 비싸게 사 주지."

쩔그럭!

청문병이 품에서 금전이 잔뜩 든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냈다.

거지 가장은 주머니를 보고,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어, 아, 아니 왜 이런 걸.. 아니, 저런 자식이 무슨 쓸모가 있으시다고.."

"시끄럽다. 팔 건가 말 건가?"

청문병의 말에, 거지 가장은 냉큼 가서 아이의 팔을 잡고 끌고왔다.

"아! 예, 예. 팔지요. 팔겠습니다. 하하, 이놈! 이리와라, 오늘 너는 횡재한 게다. 가서 좋은 옷 입고 더 좋은 밥 먹고 살 수 있어! 자, 저분들을 따라가거라!"

"아, 아부지 시, 싫어요. 저, 저 것들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은 실처럼 생각을 흘리는데 저것들은 생각이 둥구레요! 저 것들 요괴가 분명해요!"

"이런 망할 놈의 새끼가, 아직도 그놈의 귀신 요괴 타령이냐! 썩 저분들 따라가지 못해!"

거지 소년은 우리의 의식을 보며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청문병은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저 놈은 자네가 끌고 오게. 저 지저분한 녀석을 끌고 다니고 싶지는 않군."

"...그러지요."

결국 소년은 제 아비한테 몇 번을 얻어맞은 후, 우리에게 팔려왔고, 소년의 아비는 금전이 잔뜩 든 주머니를 받고 황금빛 의념을 마구 풍겼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소년은 내게 잡혀 끌려오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었다.

청문병이 시끄럽다며 법술로 입을 막아버리려던 것을, 내가 말려 실컷 울게나마 해 주었다.

'울어라, 가뜩 서러울텐데 울기라도 해야지.'

결국 청문병은 소년의 울음소리를 견디다 못해 빠르게 걸어가며 나와 소년과의 거리를 벌렸고, 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 가며 울음소리를 계속 들어주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결국 목이 쉬어버린 아이에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린 요괴가 아니다. 그냥.. 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생각하면 될 거다."

"훌쩍, 훌쩍..."

그러나 소년의 의식은 마치 먹장구름이 낀 것처럼 검푸른 색이었다.

슬픔의 의념이었다.

"...저희, 어머니 아부지는 다시 못 만나지요?"

"...글쎄, 네가 다 크면 다시 만나러 올 수도 있겠지. 네가 커서 수도공법을 익히고 차차 시간이 지나서 임무를 맡을 수준이 되면, 다시 올 수 있을 거다."

"...무슨 말입니까?"

"나중에 이해할 거다. 걱정하지 말아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내 말에, 구삼의 의식을 뒤덮은 슬픔의 의념이 조금 걷히는 듯 했다.

나는 앞서 가는 청문병에게 물어보았다.

"이 아이는 어찌 됩니까?"

"우선 가문으로 가서 자질을 검사받을 거네. 자질이 진영근 이상이라면 외부 가원들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게 한 후, 단수공법과 기초공법을 익혀서 연기기에 오르면 녀석도 외부 구성원 취급을 받겠지.

하지만 잡영근이라면 그 놈은 가문의 하청산수들에게 맡겨져, 그 녀석들의 양자로 들어갈 터지. 그 밑에서 몇 년 공부를 하고, 단수기를 거쳐 연기기에 오르면 그때부터 녀석도 하청산수가 될 거고. 공적치를 쌓으면 외부 구성원으로 승급도 노릴 수 있겠지."

"그럼 혹여 천영근자를 발견하면 어찌됩니까?"

"그럼 본가에서 직접 데리러 와 교육을 시키고, 수도공법을 익히게 한 후 본가의 직계와 혼인을 시켜 데릴사위로 들이겠지. 그리고 본가 직계급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것이네. 하지만 그런 사례는 내가 살면서 한 번도 겪은 적 없어."

"그렇군요..."

나는 대충 수도가문들의 인원 수급에 대해 이해하며, 그에게 또 다시 질문을 하였다.

"오늘은 이 아이의 집안이 거지인지라 쉽게 아이를 데려왔습니다만. 만약 아이가 양민이라면 어찌됩니까?"

"양민이라도 속세에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네. 뭐, 가끔 돈을 주더라도 싫다는 이들은 범인들의 권세가를 통해, 그들이 양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며 데려가곤 하지. 돈 혹은 권력이면 다 된다네."

"양민은 그렇다 치지만, 권세가문의 아이라면 어쩝니까?"

"더 쉽지. 큰 권세가라면 수도가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에 옳다구나 하며 자식을 보낼 것이고, 작은 세가라서 수도가문을 모른다 해도 더 큰 권세가의 힘으로 압박하면 결국 내어주게 되지."

"흐음, 그렇군요..."

그렇게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수도가문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아이를 달래며, 그와 함께 청문세가의 영지로 돌아갔다.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아이는 결국 잡영근자로 판명이 되었고, 벽라국 권세가의 뒤에 있는 하청산수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했다.

어찌되었든 아이의 삶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질 터였다.

나는 청문목에게 또 다시 임무를 받아 새로운 영근보유 후보를 찾으러 갔고, 세 달치 임무를 전부 완수할 수 있었다.

벽라국을 돌아다니는 데에도 시간은 걸렸지만,

이 임무는 소문을 찾고 소문의 근원지에 가서 영통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하나의 임무로 취급되었고.

영근 보유자를 영지까지 데려오는 임무는 또 따로 취급되었기에 시간에 쫓기지는 않았다.

나는 약 세 달의 시간을 손에 넣고, 내 석굴로 돌아갔다.

'이제, 시간도 벌었으니 한번 단수공법을 익혀볼까.'

나는 석굴의 입구를 적당한 나무판자로 막아놓은 후, 주변에 영석 1000여개를 깔아놓은 후 그 중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만계단수권에 수록된 오영근자 전용 단수공법, 오행결(五行訣).

나는 오행결의 공법을 운용하며, 주변에서 흐르는 천지영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우웅-

영기를 흡수하며, 체내에 있는 영질들을 구결에 따라 활성화시킨다.

그리고, 나는 오기조원에 이를 당시, 오행영기가 내 육신에 조화롭게 들어왔었던 감각을 떠올리며 오행결을 운용하였다.

오행결의 인도대로 오행영기가 운용되며, 내 단전으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다섯 영질을 통해 영기가 단전에 쏟아진다.

다른 수도자라면 본래 이 단계에서 영기를 균일화시키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하며, 영기의 균일화에만 수 년을 쏟았을 터.

하지만 나는 이미 전신의 영기 자체가 완벽하게 균일한 상태였기에, 그냥 있는 영기를 단전에 붓기만 해도 완벽하게 균일한 농도로 영기가 조화를 이루었다.

삽시간에 단전이 완벽한 영기의 균일화를 이룬다.

나는 이 상태에서, 오행결의 구결에 따라 단전을 오행영기에 최적화시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닷새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결국 모든 영기를 단전에 최적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반 왔다.'

앞으로는 음양이기를 흡수하여, 순환시키고 혼원진기로 만들어 단전이 법력(法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화시키는 작업이 남았다.

일반적인 오영근 수도자는 이 단계에서 천지영기를 흡수하는 속도가 느려 몇 개월, 혹은 몇 년씩이나 걸렸으나, 나는 달랐다.

우우웅-

주변에 있는 1000여개의 영석에서 그대로 영기를 끌어온다.

쿠구구구구!

나는 양손에 영석을 한움큼씩 쥐고 미친듯이 영기를 빨아들였다.

오영근자인 탓인지, 영기의 흡수 효율은 굉장히 안 좋았지만, 그 정도 효율은 영석의 물량으로 때우기로 하였다.

그렇게 무수한 영기를 흡수하며, 영기를 다시 오행결의 구결대로 음양이기로 나눈다.

그런 다음 다시 단전에서 순환시켜 음양이기를 섞어 혼원진기로 만든다.

그렇게 만든 혼원진기로, 단전을 한가득 채우며 단전 자체를 새로이 진화시킨다.

쿠구구-

단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과격한 변화에 균일화된 오행영기의 균형이 흐트러지려 했으나, 나는 굳센 의식으로 영기의 균형을 완벽히 다잡고 혼원진기의 작용을 참오하였다.

끊임없이 오행결을 운용하며 혼원진기를 단전에 밀어넣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마침내.

번쩍!

단전에서 빛이 나는 듯 하더니, 혼원진기가 더 이상 단전에 흡수되며 단전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단전이 혼원진기를 저절로 운용하며, 혼원진기를 정제하여 정순한 기운으로 모아 쌓기 시작했다.

"하아..."

나는 숨을 내뱉으며 체내의 오행영기를 운용해 보았다.

오행영기가 내 뜻대로 움직인다.

후으읍-

숨을 들이쉬자, 의지에 따라 천지영기가 자연스럽게 내게 흡수되었다.

나는 오행결을 대성(大成)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이제, 연기기(練氣期)에 오를 수 있다.'

나는 눈을 뜨고 석굴 바깥으로 나가, 청문세가의 영지에서 잡일을 하는 범인들에게 오늘 일시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폐관에 든지 한달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세 달치 임무는 미리 해 놨으니, 두 달 정도는 시간이 남는군.'

결정은 빨랐다.

나는 다시 석굴로 들어가, 오월입도경을 꺼냈다.

"남은 시간 동안, 연기기 1성으로 진입해 볼까?"

연기기(練氣期)(1)

연기기(練氣期)는 총 14성으로 이뤄져있다.

예전에는 단수기를 연기기에 포함하여 15성이었다고 하나, 그 때에도 연기기의 근간이 되는 단계는 법화단전을 형성한 이후였었다고 한다.

나는 오월입도경을 읽어내리며, 연기기에 대한 정보들을 탐독해 나갔다.

연기기는 1성부터 14성이라고 편하게 불리우지만, 그 하나 하나의 단계를 이루는 경계는 상당히 복잡하였다.

연기기 1성은 칠십이지살진언(七十二地地煞眞言)의 칠십이 가지 진언구결을 모두 이해하고, 체내에 칠십이지살에 대응하는 영맥(靈脈)을 활성화해야 하며.

연기기 2성은 삼심육천강법결(三十六天罡法訣)의 법결을 모두 이해하고, 칠십이지살맥을 뼈대로 삼십육천강에 대응하는 영성(靈性)을 응집해야 한다.

연기기 3성은 십이지율(十二地律)에 해당하는 열두 종류의 영력을 받아들이도록 72영맥과 36영성을 진화시키고.

연기기 4성은 십천간도(十天干圖)에 해당하는 10가지 영력의 변화를 전부 수용하여야 한다.

연기기 5성은 구궁(九宮)의 이치에 따라 108가지 영맥영성과, 60가지 영력의 변화를 아홉 점으로 귀일시켜야 하며.

연기기 6성은 팔괘(八卦)의 운행에 따라 영력의 길을 전부 완성한다.

연기기 7성은 칠성(七星)에게 제사를 지내어 천지영성(天地靈性)에게 수선(修仙)의 길을 걸어가겠다 고하며 더욱 많은 영력을 받아들이도록 허락받는 경지라 하였고.

연기기 8성은 육합(六合), 천지사방(天地四方)에 대응하는 영기를 완성된 영력의 길로 운행시키며 전신 영맥을 가득 채운다 하였다.

연기기 9성은 오행(五行) 속성과 상징을, 지금까지 익혀온 공법의 주 속성에 보조시키며, 공법의 속성을 완전히 각성하는 경지였으며.

연기기 10성은 사상(四象)의 이치로 하여금 지금껏 완성하고 채워오며 결국 속성을 특화시킨 팔괘의 영맥을 완전히 이어, 음의와 양의의 양맥(兩脈)으로 만드는 경지였고.

연기기 11성은 삼재(三才)에 대응하는 상중하단전을 영력으로 하여금 완전히 관통하여 천지인(天地人)을 합일하는 경지라 하였다.

연기기 12성은 쌍극(雙極)의 음맥과 양맥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며 결국 음양맥을 전부 통합하고 무결(無缺)해지며.

연기기 13성은 일원(一元)으로 변한 맥(脈)을 통해 영력을 가속시켜, 영력을 단전 안에 일점(一点)으로 귀일시킨다.

연기기 14성은 무극(無極), 일점으로 귀일시킨 영력 덩어리를 폭발시켜 단전 안쪽을 진화시킨다.

단전이 완전히 진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단전 안에 영운(靈雲)이 생겨나며 그 안쪽으로 영성(靈星)이 탄생하면 그렇게 축기(築氣)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연기기의 시작과 끝이었다.

'...이번 생 안에 끝을 볼 수는 있는가.'

일류에서 절정, 절정에서 삼화취정, 삼화취정에서 오기조원은 그래도 일생(一生)을 파고들면 그래도 성취는 있었다.

하지만 연기기는 연기기라는 단계 내에서도 어마어마한 단계와 경지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왜 지금껏 연기기 수도자들이 겨우 1성 차이로 어마어마한 실력차를 보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무림인들은 경지 안에서의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절정 초기도 절정 중기를 이길 수 있고.

절정 중기도 삼화취정 초입 정도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연기기 수도자는 1성만 높아도 감히 대항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동시에 왜 수많은 연기기 수도자들이 평생 1성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법술에 대한 오성이 뛰어나지 않으면 평생을 수련해도 칠십이지살진언의 구결도 전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쉽지 않군그래...'

나는 연기기 14성의 경지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고, 우선 오월입도경에 적힌 공법들을 찾았다.

지월입도(地越入道), 수월입도(水越入道), 목월입도(木越入道), 금월입도(金越入道), 화월입도(火越入道).

다섯 가지의 공법이 수록되어 있었고.

나는 그 중에서 지월입도(地越入道)의 공법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본래 익힌 무림의 내공심법인 용맥기공은, 수도자들의 천지영력을 구분하는 분류에 따라 토(土) 속성에 속하는 내공심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익숙한 쪽을 수련하는 게 낫겠지.'

나는 지월입도경의 적힌 구결을 읊으며, 칠십이지살진언을 읊었다.

칠십이지살진언은 칠십이개의 영맥을 활성화시키는 주문이자, 동시에 그 자체로 기초법술이었다.

예를들어 지각(地角)의 진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외면 지각성(地角星)에 대응하는 영맥에서 기운이 뻗어나와 땅에서 흙으로 된 송곳이 솟구치는 식이었다.

'거기에 수인(手印)까지 맺어야 하는군.'

물론 연기기 상위경지로 갈수록 수인이나 진언은 생략이 가능했지만, 지금으로선 수인과 진언을 전부 읊어야 법술을 시전 가능했다.

'일단... 지괴성(地魁星)에 해당하는 영맥부터 활성화시켜야겠군.'

어쨌든 영맥을 하나라도 활성화시키면 연기기 1성에는 진입하는 것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지괴(地魁)의 진언을 외워 영맥을 활성화시켰다.

* * *

두 달이 지났다.

나는 석실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맡았다.

어찌어찌 첫 번째 영맥인 지괴의 맥은 활성화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괴의 맥을 활성화시키기까지, 100개에 달하는 영석을 소비해야만 했다.

'너무 효율이 극악하다.'

이래서야 남은 영석을 전부 써도 언제쯤 72지살맥을 전부 활성화시킬지 모른다.

'...그래, 어차피 수도가문에 들어온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닌가.'

사실 청문세가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 산수가 되어 수도를 이어가는 방법도 있었다.

수도공법이야 막리세가 수도자 한둘쯤 죽이고 빼앗으면 될 일이었으니, 사실상 굳이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굳이 내가 청문세가에 온 이유.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막막할 때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우선 청문목을 찾아가, 내가 연기기 수도자가 되었음을 밝혔다.

축기기 장로인 청문목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나를 바라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 맥을 짚어, 영맥이 활성화된 것을 보고서야 믿었다.

"허, 허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오영질을 가진 놈이 세 달만에 단수기에서 영력의 균일화를 모두 이루고 연기기에 올라? 이 무슨 미친... 허, 그래. 과연 가문의 어른이 네게 추천권을 준 이유를 알겠구나. 허허..."

그는 신기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내가 영맥을 활성화한 공법을 물었다.

"무슨 공법을 써서 연기기에 입문한 거지?"

"오월입도경이라는 공법인데, 그 중에서 지월입도결을 사용했습니다."

"아, 오월입도경. 그거 말인가."

저잣거리 공법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듯, 청문목도 바로 알아채는 모양이었다.

"그 공법은 확실히 기본 중의 기본 공법이긴 하지. 말 그대로 연기기에 필요한 기본이 정확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하지만 말 그대로 기본만 수록되어 있다보니.

영맥에 대응된 진언으로 펼치는 기초 법술을 제외하면 특별한 속성법술을 펼칠 수는 없을 거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기다리거라, 흠..."

그는 자신의 저물탁을 만지작거리더니, 저물탁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지주원법(地住院法)이라는 토 속성 공법서다. 청문세가의 기본공법 중 하나로, 단단한 방어력에 특화되어있지. 지월입도결 대신 이걸 익혀도 되고, 같이 익혀도 된다. 어차피 같은 속성을 병행해서 익히는 것이니 수행 속도가 크게 둔화되진 않을 것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법의 성취가 느리다고 했지? 그건 오영질을 지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공법의 성취를 빠르게 할 방법이 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차분히 청문목의 말을 경청했다.

"기본적으로, 선통후각(先通後覺)이라 하여. 영맥을 뚫으면, 성취를 올리면, 경지를 올리면, 그 아래에 있는 깨달음들은 본능적으로 이해가 되기 마련이야.

너도 지괴성에 대응하는 영맥을 활성화시켰으니 알겠지만, 어떻느냐. 지괴진언(地魁眞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강 이해가 되지 않더냐?"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연기기 1성에서 2성이 되면, 연기기 저계에서 고계가 되면. 연기기에서 축기기가 되면. 그 이전에 배웠던 진언과 법결들이 의미하는 바가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영근이나 진영근을 가진 이들은 빨리빨리 영맥을 뚫고 경지를 돌파하여 아래의 깨달음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 같은 잡영근자들은 빠르게 수행을 돌파하고 싶다면 반대로 해야지."

"반대라면..."

"선각후통(先覺後通)! 먼저 진언과 법결이 의미하는 것을 전부 깨닫고, 체화하여 혼에 새기는 것이다. 네가 진언을 완벽히 이해한다면 엄청난 수도자원이나 좋은 자질이 없어도 저절로 진언에 따라 영맥이 활성화되고, 경지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야."

'선각후통이라...'

나는 대강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자질을 타고난 천영질, 진영질의 수도자들은 가만히 앉아 운기만 해도 경지를 돌파하고 진언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질이 한참 뒤떨어지는 잡영질의 수도자들은 먼저 진언들을 이해해야만이 영맥을 활성화하고 경지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해 본적이 있었다.

'수도자들은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의식과 영질을 얻기위해, 무림인이 오기조원에 도달해야 하는 것과 같은 거로군.'

수도자들이 숨쉬듯이 사용하는 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무림인은 의념을 깨닫고, 의념 속에서 삶을 깨달으며, 결국 삶의 모든 의념을 각성하여 의식에 이르는 것.

천재가 한 번에 깨닫고 펼치는 기술을.

둔재는 그 기술에 도달하기 위해 몇 번이나 노력하고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천재와 같은 눈높이에 서는 것.

그런 경험은 이미 수없이 해 보았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어려워할 것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것과 똑같이.

똑같이 노력하면 될 뿐.

"그래. 그리고 영지 내에선 열흘에 한번씩 영지내 방계들과 외부 구성원들이 모여 토론을 하며, 진언과 법결에 대해 깨달음을 나누는 토론회가 있으니 참여하면 도움이 될 터다.

그리고, 방금 네게 해준 조언들과 네게 준 공법서는 네가 연기기에 오른 선물로 준 것이고, 내 조언을 듣고 싶다면 다음부터는 공적치를 모아 헌납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럼 가 보거라."

"감사합니다."

나는 청문목에게 감사인사를 한 후, 그가 머무르는 석굴에서 나왔다.

며칠 후.

나는 청문세가의 영지 내에서 벌어지는 토론회에 참여하였다.

영지내의 연기기 1, 2, 3성 수도자들이 모여 깨달음에 대해 토론하는 토론회였다.

토론회에는 방계뿐이 아닌, 나 같은 외부 구성원이나, 혹은 공적치를 많이 쌓은 하청산수들도 꽤 들어와 있었다.

연기기 3성까지가 최대 경지인 토론회는 1성, 2성, 3성 수도자들이 저들끼리 모여 모임을 구성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연기기 1성 수도자들의 모임에 끼여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우선, 최근에 제가 막힌 벽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토론회는 연기기 수도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빙 둘러앉아, 한명한명씩 자신의 깨달음과 최근에 느낀 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나 역시 지괴성의 영맥에 대해 몇 마디를 했고, 나는 그날 청문세가의 다른 수도자들과 어느 정도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청문세가의 토론회에서 토론을 하고, 임무를 수행하기를 한 달.

나는 청문세가의 수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썩 충격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안 보인다는 겁니까?"

"그렇소만. 서 도우는 뭔가 특이한 의식공법을 익힌 거요?"

"아... 뭐, 그런 셈이지요."

나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나와 대화를 나누던 청문세가의 다른 외부 구성원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오늘,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수도자는, 의념의 색(色)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저 형태를 인식하는 정도는 가능한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은 그저 투명한 의식과 의념을 볼 뿐인 셈이었다.

'썩 충격적인 사실이군. 수도자들은 전부 나처럼 의념의 색을 볼 수 있는줄 알았더니만... 하긴, 지금껏 비교 대상도 없기야 했지. 애초에 오기조원에 이른 무인이 흔한 것도 아니니...'

나는 오기조원의 무인이 갖는 의식의 크기를 생각해보았다.

약 연기기 3, 4성쯤 되는 크기.

나는 은식술을 써 의식의 크기를 연기기 1성 수준으로 낮춰보이게 하고 있었지만, 본디 내 의식영역은 훨씬 거대했다.

거기에, 얘기를 들어보니 연기기 3성은 물론이고 축기기 수도자들 역시 나처럼 의념의 색조를 보는 이는 없다고 했다.

간혹 특이한 의식공법을 익힌 수도자가 아니고서야.

'무림인이 각성해서 얻는 의식영역은, 기본적으로 수도자보다 우월하다.'

어찌보면, 무림인이 수도자를 이기는 유일한 분야인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토론회에서의 교류로 인해, 청문세가의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투도(鬪道)를 숭앙하는 가문이라... 창호자의 영향인가? 그리고, 그 영향으로 매년 투선회(鬪仙會)라는 경기를 연다라...'

투선회는 청문세가의 혈통들이 1년에 한번씩 모여 치룬다는 비무회라고 하였다.

청문세가의 직계, 방계 등 청문씨를 달고 있는 이는 모두 투선회에 강제로 참여해야 하고, 투선회에서의 성적에 따라 청문씨들간의 서열이 정해진다고 하였다.

때문에 청문씨들은 매 투선회가 열릴 때마다 죽기살기로 싸워댔으며, 1년동안 투선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하였다.

'왜 청문씨들이 성격이 더럽다고 소문이 났는지 알 것 같군.'

가문 내에 투선회라는 경기가 있으니 그를 준비하며 성격이 거칠어진 것 같았다.

'아쉽군, 청문씨가 아닌 이도 참여할 수 있으면, 서열을 올려서 수도자원을 잔뜩 받을 수 있을텐데.'

나는 나직히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급보일세! 급보야!"

토론회가 열리는 석굴로, 한 청문세가의 방계가 황급히 뛰어들어오며 외쳤다.

"진씨세가가 결국 연국 황조를 찬탈하고, 막리황조 대신 진씨황조를 세웠다고 하네! 진씨세가가 연국의 정세를 움켜쥔 거지.

때문에 본가에서 진씨세가의 승리를 축하하며 진씨세가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사절단은 굳이 청문세가 사람들뿐이 아닌 외부 구성원도 전부 지원 가능하다네. 그리고, 사절단은 진씨세가가 막리세가의 황조를 찬탈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축기기급 인물과도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

"허어, 진씨세가의 장로급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어떤 장로시지?"

"그게... 처음듣는 분이었네. 이름이, 영훈이었던가.."

문득, 나는 입가에 미소가 이는 것을 느꼈다.

김영훈이, 이번 삶에서도 성공한 것이었다.

"...사절단에 지원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청문세가의 법도야 늘 간단하지. 강자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사절단의 자리 20여개를 두고 지원자들을 전부 싸움붙여, 최후까지 남은 20명에게 기회를 부여할 걸세.

자네는, 그냥 포기하게나. 연기기 1성 정도나 되는 것 같은데 괜히 무리하지 말고."

그러나 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지원신청은, 다른 것들과 비슷하게 청문목 장로님께 신청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긴 하다만, 이번 사절단에는 투선회를 준비하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많이 참여할 걸세. 괜한 생각 버리게. 축기기급 인사 하나 만난다고 인생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잖나?"

나는 그를 지나치고, 청문목이 있는 석실로 걸어갔다.

'인생이 뒤바뀌지는 않지. 그저... 옛 고향동료를 만나러 가 보는 것일뿐.'

진씨세가를 도와 막리황조를 찬탈했다면, 분명 그의 무공경지는 최소한 오기조원에는 도달했을 터.

그는 과연, 이번 생에 어디까지 도달했을까.

그의 무(武)는 또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동급 이상의 무인(武人)과 검을 겨루고 싶었다.

* * *

사절단에 참여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다른 이들이 전부 한 자리에 모여 싸울때,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존재감을 감추고 숨어있다가 최후에 남은 20인 중 가장 지친 자를 기습해서 기절시키고 승자가 되었다.

누구는 나를 보며 비겁하다고도 손가락질했으나, 사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 모였던 연기기 5, 6성 수준의 중저계 수도자들은 전부 몰살시킬수도 있었다.

'안 싸워주고 얌전히 있어준 걸 고마워해야지.'

그저 튀고 싶지 않아 조금 얌전히 있었을 뿐이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나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고.

나는 청문세가의 축기기 장로 중 한 명과 함께 진씨세가의 사절로 향하였다.

"모두 탑승하라!"

사절단 출발일.

축기기 장로는 커다란 배 형태의 법기 뱃머리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소리를 쳤다.

나는 청문세가의 영지 중 요지라 여겨지는 곳에서 다른 사절단 참가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고, 곧이어 배가 하늘로 떠올랐다.

'봐도봐도 신기하군.'

나도 하늘을 걸어다닐 수는 있었지만, 천지영기와 공기의 결을 박차고 뛰는 허공답보는 이 법기와는 전혀 원리가 달랐다.

천지영기 자체가 배에 흡수되며, 기이한 부력을 발한다.

그리고 배는 그 부력 속에서 둥실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촤아아아아!

배는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라 구름을 뚫고 치솟았으며, 배의 용골이 운해(雲海)를 스쳤다.

법기의 속도로 보아, 약 하루 정도면 연국에 도착할 것 같아보였다.

'비행법기가 인기가 많던데, 그 이유를 알겠어.'

단순히 허공답보를 사용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쾌적한 비행기를 탄 느낌이었다.

나는 뱃마루에서 구름을 스치는 배의 아랫부분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무인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그리고, 김영훈은 이번 삶에서 월수월무록을 과연 진화시켰을까?

무림인의 경지는 삼류, 이류, 일류, 그리고 절정.

절정의 극한이라 일컬어지는 심화취정.

그리고 삼화취정을 넘어선 오기조원.

그것이 끝이다.

오기조원까지는 그래도 전설상의 경지로, 수백년에 한 명씩 도달하고는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 너머를 본 무인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김영훈을 빼면 말이지.'

김영훈이 만들어낸 강기압환의 경지.

그건, 여태껏 무림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기적과도 같은 경지였다.

'그래, 작금의 무(武)의 경지는, 계속해서 개척되고 있다.'

무림인에겐 더는 위가 없다.

그렇기에, 무림인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그 '위'를 만들어가야하는 존재인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 찬 검을 쓰다듬었다.

수도자의 길에 들어서도, 수행을 하면서도, 한번도 이 검을 몸에서 떼어놓은 적은 없었다.

진언을 외면서도 끊임없이 검을 동시에 수련했고, 다음 단계에 대한 실마리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래봤자 아직도 오기조원 초창기였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위로 가지 못할지언정.. 김영훈은, 그 너머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내게 말해줄 것이다.

무공을 수련해온 시간들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고.

나는 이제 수도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무인이었다.

무인으로서도, 수도자로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달려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니까.

'올라가고 올라가서. 반드시... 이 회귀를 끝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주마.'

나는 그렇게, 굳세게 다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위에서 보는 하늘은,

높고도 아득했으나, 티없이 맑고 창명했다.

* * *

하루 뒤.

우리는 진씨세가의 본가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진씨세가의 본가(本家)!'

그곳은 화산(火山)이었다.

그것도 아직도 살아서 활동이 되는듯, 밑에서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활화산!

그곳의 중심부에, 진씨세가의 본가가 위치해 있었다.

'연국에 화산이 있었나?'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왜냐하면 몇 번의 삶을 살며, 화산 지형은 이번 삶에서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이보시오, 혹시 진가의 본가가 있는 위치가, 연국의 지리상 어느곳인지 아시오?"

나는 함께 사절로 온 동료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저 밑으로 보이는 진씨세가 본가의 위용에 침을 삼키면서도 내 말에 선선히 답을 해 주었다.

"연국 균강성의 인근이라 하더군. 나도 잘은 모르네."

'균강성? 이전에 와봤던 곳인데, 화산 같은 건 없었다. 아니, 설마...'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저 화산 전체를 환영결계로 덮고 있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건가!?'

나는 진씨세가의 본가에 쳐진 진법의 아득한 규모에 기함하며 본가를 쳐다보았다.

"내려간다!"

청문세가의 축기기 장로가 배 법기를 하강시켰고, 우리는 진씨세가에 진입하였다.

우리는 진씨세가로 들어가, 축기기 장로를 필두로 본가에 가 청문세가 가주의 친서를 진씨세가 가주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그 덕에 여태껏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결단기 수도자를 볼 수 있었다.

'저게... 결단기...'

찌릿, 찌릿

그 여우와도 비슷하다.

30여장에 달하는 광대한 의식영역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적포를 입은 장년인이 가주의 가좌에 앉아 청문세가 가주의 친서를 읽었다.

찌릿, 찌릿..

결단기 수도자가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기세에, 사절단으로 함께 온 청문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들은 모두 나를 제외하고는 기가 눌려 죽을려하는 안색이었다.

나 역사 결단기 수도자가 뿜어내는 영력에 피부가 찌릿거리기는 했으나, 그 정도였다.

'오기조원의 경지라면, 이 정도 압박은 충분히 흘려낼 수 있다.'

나는 의식을 이용해 내게 가해지는 압박을 눈에 띄지 않게 베어내며 압력을 흘려넘겼다.

얼마간 의례적인 인사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이번 황조 교체전에서 공을 세운, 진씨세가의 최고 외부 구성원을 소개하겠소!"

김영훈이 작은 단상 위로 올라갔고, 우리에게 인사를 하였다.

"다른 세가에서 와 주신 귀빈분들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무림인인 영훈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는 이미 오기조원에 올랐는지 의념이 의식의 형태로 진화해 있었고, 외모 역시 젊어져 있었다.

"무림인??"

"무슨 소리지, 저 자는 수도자가 아닌가?"

"우리를 놀리는 건가?"

그때, 진씨세가의 장로 중 한 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분명 극성에 이른 무림인이외다. 그리고 분명 이번 교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자요. 이전에도 사절 분들께 공지했듯, 각 가문의 친선을 위해 무림인인 그와 각 가문의 인재들의 수준을 재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대강 상황을 이해했다.

진씨세가는 황조를 찬탈하고,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저력을 주변 수도가문들에게 자랑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문에서 키우는 무림인이, 다른 가문의 수도자들을 때려잡는 것만큼 자신들의 콧대를 높이기에 좋은 기회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무림인 따위가 수도자와..."

"진가는 농이 심하시구려.."

청문세가의 사절단은 물론이고, 다른 세가에서 온 사절들도 조금 불쾌한 안색을 지었다.

그리고, 진씨세가의 가주가 입을 열었다.

"그의 실력은 본 가주가 보증하지. 비무를 하기 싫은 자는 먼저 숙소로 가도 좋다."

"..."

"..."

그렇게 되자, 아무도 항변하는 자는 없었다.

결단기 가주가 보증한 인물을 무시한다면, 이제는 가주 본인을 무시하는 격이 되니 말이었다.

"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여흥의 형식으로 간단한 친선비무를 벌여볼 생각이다만. 마음에 안 드는 자가 있나?"

가주의 물음에, 누구도 답하는 이가 없었다.

"싫은 소리가 없는 걸 보니 다 긍정하나 보군. 그럼 한번 친선비무를 시작해보지."

첫 타자는 벽라국 공묘세가의 연기기 방계 중 하나였다.

김영훈과 공묘세가 수도자의 대치를 보며, 이곳저곳에서 불만스러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축기기급의 인물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사절로 참여한 건데.."

"어찌 무림인 따위와 손속을 겨루게 되다니.."

"무림인이 축기기급의 인물이라고? 의식의 크기도 연기기 저계 정도로 보이는데... 차라리 길가에 사마귀가 연국의 고관대작이라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겠군."

"모두 조용! 가주님의 앞에서 그 무슨 망발이냐!"

청문세가의 장로 역시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 역시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비무가 시작되었다.

투쾅!

김영훈의 신형이 번뜩였고, 뭔가 법술을 시전하려던 공묘세가의 연기기 수도자는 그대로 튕겨져 나가떨어져버렸다.

"....!"

"무슨..."

"저, 저.."

김영훈은 여유롭게 손을 털며 말했다.

"비무 끝."

그리고, 앉아있는 사절단들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 퍼져나갔다.

"어, 어찌..."

"방금 제대로 본 자가 있나?"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고, 어느새 다음 세가에서 도전자를 보냈다.

벽씨세가의 연기기 10성 정도의 수도자였다.

저쪽에서도 나름 후기지수를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고, 다시 비무가 시작되었다.

타앗!

김영훈이 벽씨세가 수도자에게 달려들었고, 벽씨세가 수도자가 손을 움직여 법결을 쏘아냈다.

푸른 법결이 김영훈에게 쏘아지는 듯 싶었으나, 그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법술을 전부 피해내고, 벽씨세가 수도자에게 접근하여, 일수에 그의 방어법술을 박살내버리고 그를 던져버렸다.

"끝이오."

다시금 수도자들이 기함했고, 객석이 떠들석해졌다.

"어찌 저런..."

"분명 무림의 무공이었소."

"범인 따위가 어떻게.."

이제는 누구도 가주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분위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각 가문에서 너나할것없이 김영훈에게 도전자를 내보냈다.

이제 김영훈에게 이기는 것이 각 가문의 자존심 싸움이 된 듯 했다.

청문세가에서도 몇 명인가 후기지수를 내보냈으나, 전부 김영훈에게 5초 안에 패배했다.

고작 진씨세가의 무림인에게 연이어 가문의 후기지수가 패한 것 때문인지, 뜨거워지는 듯했던 분위기는 점차 침울해져 갔고,

그와는 반대로 진씨세가 수도자들은 콧대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벽씨세가의 수도자가 김영훈에게 패배하고, 청문세가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였다.

"...누가 갈 거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가 나가든 청문세가의 체면만 구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후. 아무도 없으면.."

"제가 나가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이럴려고 온 것이 아니던가.

나를 보던 청세가의 장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연기기 1성이면 져도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

나는 비무대로 내려갔고, 김영훈과 눈을 마주쳤다.

흠칫!

나를 본 김영훈이 몸을 흠칫 떤다.

마치 나를 이곳에서 볼 줄 몰랐다는 듯.

스릉-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어디, 한번 신명나게 놀아보았으면 하외다."

김영훈은 과연, 이번 생에 어떤 경지까지 개척했는가.

어떤 무(武)에 도달했는가!

김영훈은 당황하는 듯 했으나, 씨익 웃으며 처음으로 도(刀)를 뽑아들었다.

"그래, 한번 놀아보지."

파앗!

서로의 의념이 허공을 갈랐다.

연기기(練氣期)(2)

시작은 우선 각각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의 1초식이었다.

월악(越岳), 그리고 뫼얼의 초식이 부딪힌다.

중단세로 가로를 베어들어가자, 상대는 똑같이 가로를 벤 후 바로 하단세로 들어온다.

그러나, 내 의념이 하단세를 짓밟고 다시 김영훈의 얼굴을 베어넘길 수 있는 형식으로 전환된다.

시작은 절정경 수준.

붉은 선과 푸른 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티잉, 팅, 팅, 팅, 팅!

동시에 맑고 경쾌한 검명과 도음이 비무장을 울렸다.

일합에 수십 번의 공격이 부딪힌다.

단애, 산수화, 용맥, 유릉, 입산, 등맥...

올려베고 난무하며 다시 내려베고 찔러간 후 하단세. 그리고 올려베기.

그러나 단애의 초식은 산지기의 초식으로 회전하며 쳐내고, 산수화와 용맥은 산능성이의 유함으로 흘려버린 후.

산새의 초식으로 유릉을 피한 후 접근하며.

입산과 등맥의 초식으로 떨쳐내려 하니 산허리의 초식으로 지반을 흔들어 중심을 흔든다.

단악검, 사십구광일출봉(四十九光日出峯)!

마흔아홉갈래의 검기가 김영훈에게 날아들었고.

단맥도, 산열림!

산수화보다 더욱 흉폭한 김영훈의 난무가 내 검기를 모조리 쳐내었다.

나의 검과 그의 도가 부딪히며, 수십 갈래의 붉고 푸른 의념이 허공을 교차한다.

그 짧은 틈새로 어마어마한 간합이 오간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절정경 수준.

나와 그의 시선이 오갔다.

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약속한 듯이 서로의 의념을 통하게 하며, 자색(紫色) 이상의 세계로 발을 딛었다.

이제 삼화취정 수준!

방금 전까지는 그저 한 수 주고받는 인삿말.

이제부터가 그나마 할만한 전초전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의념을 읽어내리며, 일보(一步)를 딛을 때마다 몇 번이나 자세를 바꿨다.

삼보를 걸으며 일곱 번을 자세를 바꾸고, 다시 여덟번의 기수식을 가다듬으며 최후에 도달한 한 초식으로 손속을 겨룬다.

김영훈이 산바람의 초식을 취하는 체 하다가 바로 자세를 바꾸어 산울림의 기수식을 취한다.

나 역시 산명곡응의 초식에서 공곡전성의 기수식으로 자세를 바꾸며, 산울림의 경력을 전부 내 검에 담아 되쳐버렸다.

의념의 교류 속에서, 우리가 뿜어내는 의념의 색조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검을 내지를 때마다 일념을 주고받는다.

[잘 지냈느냐.]

부웅!

괴암(塊巖)의 초식으로 공격을 쳐내고, 입산(入山)으로 하단세의 기수식을 취하는 척 하며, 유릉(流陵)의 초식으로 위로 부드럽게 찔러들어간다.

[잘 지냈습니다. 무탈하셨는지요.]

서로가 드러내는 의념의 색조가 오간다.

[무탈하다. 나야말로, 네가 잘 지내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김영훈의 보법이 경쾌해진다.

그는 순간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 하더니, 어느새 내 품 속으로 파고들어와 검을 올려베고 있었다.

산새의 초식!

[그나저나, 슬슬 제대로 놀아볼까요.]

[좋지.]

전초전은 끝낸다.

우리 둘은 약속한듯이 오기조원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서로의 의식영역이 서로에게 겹쳐진다.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초식으로 사방팔방으로 검강을 흩뿌리며 김영훈의 일격을 막아낸다.

직후, 산중호걸(山中豪傑)의 초식을 사용하여 흩뿌려진 검강을 김영훈에게 일점으로 쏟아붓는다.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구름을 뚫고 용의 머리가 치솟는다.

백두(白頭)의 초식으로 수십 갈래의 도강을 올려베며, 승룡이 산중호걸을 물어뜯어 집중된 강기를 찢어발긴다.

[단맥도법은 네가 내게 기연을 얻었다며 알려준 것이지.]

단맥도, 대간(大干)의 초식이 백두에 이어 바로 연계된다.

그의 도강이 모두 한 갈래로 이어지며, 천년고송조차 베어낼 일참(一斬)이 되어 내게 쏘아졌다.

[혹, 이 무공은 기연이 아닌, 네가 만든 무공이 아니더냐?]

단악검, 능곡지변의 초식으로 맞선다.

그의 도강에 내 검강을 흘려넣어, 마치 지진을 일으키듯이 뒤흔들어 강기를 흩어버린다.

또 다시 둘의 사이로 간합이 오간다.

오기조원의 간합싸움은 이미 절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순한 의념의 궤도를 통한 예측이 아닌, 하나하나가 미래예지나 다름없는 아득한 환영을 내뿜는다.

김영훈의 도가 내 수급을 베어나간다.

내 검이 김영훈의 심장을 꿰뚫는다.

하지만 전부 서로가 서로에게 쏘아보내는 의식영역에서의 살기로 인한 환영.

동시에, 오기조원에서의 수싸움이기도 했다.

콰앙, 콰앙, 콰앙!

단순한 수싸움에, 허공에 강기가 덧입혀지며 사방팔방으로 검강과 도강이 튀겨나간다.

그저 간합을 벌이는 와중이었지만, 오기조원에서는 단순한 살기에 강기가 입혀지니, 수싸움이 그대로 현실화되어 사방으로 검흔(劍痕)과 도흔(刀痕)이 난무하였다.

청강석으로 된 비무장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어느새 비무장의 경계에는 연기기 14성 이상의 공격을 막아내는 법진이 작동하며 우리의 강기를 막아내는 중이었다.

하나 그마저도 강력한 강기의 충돌에는 뒤흔들렸다.

빛이 번쩍인다.

이젠 아마 나와 김영훈의 움직임은, 의식이 약한 연기기 저계 수도자들은 완전히 놓쳐버렸을 터.

비무장의 끝에서 끝까지를 수 번이나 오간다.

비무방의 허공에 우리가 뿜어내는 강기의 궤적이, 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리 둘이 부딪혔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검광과 도광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각기 용호(龍虎)의 기세를 수놓았다.

[알지 않느냐? 나에게 이 무공을 가르친 너라면, 이 무공에 깃든 의(意)가 무엇인지 잘 알 텐데.]

무공에 깃든 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니, 애초에 김영훈이 단맥도법을 창시할 때 그 옆에서 지켜본 것이 나이니.

단맥도법은 신마전을 꾸렸던 2회차 당시.

김영훈이 내 단악검법 12초를 몇 달 동안 개량해서 만들어낸 절세무공.

애초에 둔재를 위해 만들어진 단악검법에서, 둔재를 상승의 경지로 이끌기 위한 친절한 초식은 전부 빼버리고, 각기 초식들을 통합(通合)하여.

그 요체만을 뽑아 만들어낸 도법.

그것이, 단맥도법이었다.

단맥도법은 김영훈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천재용 무공이었으며.

동시에 도법을 만들 당시 그의 생각이 녹아들어간 무공이었다.

아직 회차 초반이었던 당시.

그는 무를 수련하면서도, 헤어진 동료들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초식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단맥도, 환향(還向)!

그의 도 너머로, 단악검 사십구광일출봉과 흡사한.

그러나 훨씬 기오막측한 변화를 품은 도강들이 쏟아져 나온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천재가 아닌 인간 김영훈이 만들어냈던 초식들이 내게 쏟아진다.

김영훈이 내게 묻는 이유 역시 이런 이유일 터였다.

무공 그 자체에서, 집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 한 인간의 의(意)가 절절히 풍겨졌으니까.

그는 지금.

내게 집을 그리워하느냐고.

그리 돌려묻는 것이었다.

[물으시는 이유는, 제가 집을 그리워함을 물으신 것이겠지요.]

그러나 지금 회차의 김영훈은, 단맥도법을 내가 만든 무공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내가 고향을 그리워하느냐고 묻는 것일 터다.

[분명 그립습니다. 간혹, 사무치게 그리워 검을 들고서 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산팔해의 초식으로 수십번 회전하여 김영훈의 공격을 튕겨낸다.

그런 다음 수십번의 공격을 일점으로 귀일시키며 그를 압박해갔다.

콰앙, 콰과광!

우리의 싸움에 이미 비무장은 완전히 흙밭이 되어버렸다.

파앙!

다시금 서로의 도검이 부딪히며, 부숴진 청강석의 파편이 둘의 사이로 튀어올랐다.

오기조원에 달한 의식이, 더욱 극한으로 집중된다.

파편 하나뿐이 아닌, 주변으로 튀어오른 수많은 파편.

강기의 궤적들. 먼지구름 사이로 우리를 쳐다보는 수많은 경악의 시선.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의 모든 면이 전부 뇌리에 들어온다.

나는 그 전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나 아시지 않습니까. 단맥도법의 오의. 도묘(刀墓)의 의미를.]

그와 나의 의념이 오고갔다.

[그런가...]

그는 약간 서글프게 웃으며, 기수식을 잡았다.

나 역시 그의 뜻을 알아채고, 기수식을 제대로 잡았다.

[네가 이 무공에 남겨놓은 마음이, 처음에는 사무치게 공감되었다.]

사실 내가 남긴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지난 삶의 김영훈이 남겨놓은 마음.

하지만 나는 그의 의념을 들으며, 그와 동시에 초식을 펼쳤다.

월악, 입산, 등맥...

[하지만 무공을 익히고, 경지를 높여나가며. 마침내 월수월무록을 접하던 그 때. 나는 맹세했다.]

김영훈의 도가 허공을 가른다.

뫼얼, 산지기, 산능성이...

[반드시... 반드시 경지를 높여. 수도자를 넘고, 무의 극한을 넘어서...]

극속을 넘어선 공방이 둘 사이에서 벌어진다.

더욱 더 빠르게 초식을 펼친다.

유릉, 괴암, 기석, 산수화, 용맥, 단애, 사십구광일출봉

...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을 것이라고!]

산바람, 산열림, 산새, 산울림, 산소리, 산허리...

도검의 사이로 일어나는 폭발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

감각이 마비될 듯한 전투 속에서, 나는 그의 의지를 느꼈다.

'허황되다...'

그의 도법이 끊임없이 연이어진다.

용릉(龍陵), 백두(白頭), 대간(大干), 월산(越山), 환향(還向)...

나와 그의 기수식이 이어지며, 마침내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의 오의(奧意)가 뻗어나온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제이십이초(第二十二招)

"단악(斷岳)!"

김영훈의 의념이 흘러나오며, 초식명이 허공으로 흘러나온다.

단맥도법(斷脈刀法)

제십오초(第十五招)

"도묘(刀墓)!"

천재를 위한 무공과, 둔재를 위한 무공의 극의가 서로를 향해 광휘를 터트렸다.

뫼얼의 정신으로,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어.

용이 고개를 넘듯이(龍陵), 백두대간(白頭大干)이 있는 우리의 고향으로.

그 어떤 산을 넘더라도(越山), 너무도 돌아가고 싶었다(還向).

하지만 그것은 불가하니, 이 생애에는 그저 이 칼 아래를 내 무덤 삼으리(刀墓).

아스라이 빛살 너머로 단맥도법으로 흘려지는 김영훈의 의지가 들리는 듯 하다.

강기가 부딪히며, 충격파가 일어났고, 비무장을 뒤덮은 진법이 깨져나간다.

동시에 축기기 수도자 몇이 일어나 황급히 새 결계를 덧씌운다.

본래라면,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과 단맥도법 오의 도묘(刀墓)는 동등한 무학이다.

그렇기에, 부딪힌다면은 양패구상, 혹은 무승부여야 옳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김영훈은 월수월무록(越修越武錄)을 펼치고 있었다.

생을 이어가며 전승되는, 한 명의 천재가 만들어낸 새로운 무학의 역사!

그것이, 그의 손에서, 아주 천천히.

마치 나에게 풀어서 해설하듯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아, 그런가.'

이것이, 오기조원의 [다음 단계].

그는 집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저 마음을 바탕으로, 언제고 경지를 올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맹서를 보여주었다.

허황되고 또 허황되다.

우리는 승천문과 관련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일 확률이 높았고, 결국 돌아가고자 한다면 승천문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하지만 승천문은 1000년에 한 번씩 열린다는 문. 이번에 한번 열렸으니.

무림인의 짧은 수명으로는, 이번 생 안에 절대로 승천문에 도달할 수 없다.

내 목적도 수도자가 되어 긴 수명을 바탕으로 더더욱 강해져 승천문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는 나와 같은 목적을, 순수한 자신의 재능과 의지로 헤쳐나가겠노라.

그리 말하는 것이었다.

'칼 아래에 뼈를 묻겠다던, 그 삶의 김영훈을...'

넘어선다!

도묘(刀墓)의 초식을 넘어 보여지는 월수월무록.

그 너머에서 펼쳐지는, 강기압환!

나는 그가 펼치는 상세한 월수월무록의 구결을 보며, 어떻게 하면 오기조원을 넘어설 수 있는지.

그 조건을 이해하였다.

[...나는 앞으로, 끊임없이 무의 경지를 개척하며. 언젠가 진씨세가의 도움을 받아, 승천문이라는 곳으로 가 볼 것이다.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에게 듣기를, 우리가 있던 곳은 승천문으로 향하는 등선향이라 했으니.

그곳으로 가 볼수만 있다면...]

허황되고 또 허황되다.

하지만, 나는 감히 진실로 그의 희망을 짓밟을 수 없었다.

이번 승천문은 이미 닫혔으니, 일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어찌 말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에게 그런 잔인한 진실을 말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어째서 제게 그런 것을 알려주십니까.]

[...너도. 희망을 가졌으면 해서다.]

그렇습니까.

나는 그가 펼치는 강기압환을 두 눈으로 똑똑히 새기며, 내 검이 검강째로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대한 반탄력에 튕겨나가 버렸다.

콰아아앙!

나는 매섭게 뒤로 튕겨나가, 진법에 등을 부딪혔고,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그 경지는. 이름이 뭡니까."

의념으로 대화하던 것을 멈추고, 그에게 씨익 웃으며 물었다.

어차피 무림 역사상, 저 경지에 이른 것은 그가 최초일 테니.

이름 짓는 것도 그의 뜻대로 지음이 맞으리라.

그는 이미 훨씬 빠르게 저 경지에 도달하였다.

어쩌면, 이번 생 안에 월수월무록을 또 진화시킬수도 있는 일!

김영훈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등봉조극(登峰造極)."

"하, 하하하... 당신다운, 이름입니다."

나는 그렇게, 무의 깨달음을 되새기며 기절하였다.

연기기(練氣期)(3)

눈을 뜨자, 코를 찌르는 약내가 물씬 풍겨왔다.

'홍감주, 원량초, 구릅지... 아는 것도 있다만 모르는 게 과반수군...'

나는 약재 냄새를 맡으며 약재의 배합을 떠올렸으나, 역시 내가 모르는 배합의 약이 더 많은 듯 했다.

나는 기운을 돌려 몸 상태를 점검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아무래도 진씨세가의 의약당인 듯 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볼 때, 내 옆에 있던 작은 소반 위쪽.

다소곳이 올려져있던 붉은 옥석이 푸른 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내 의식영역에, 옥석에 걸린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연동되며 어떠한 연계를 형성하는 것이 잡혔다.

'이건..내 몸 상태를 바깥으로 알리는 건가...?'

주술문자들의 연계가 삽시간에 방 바깥으로 뻗어나갔고, 잠시 후 의약당 안으로 청문세가의 축기기 장로, 청문벽과 진씨세가의 의원으로 보이는 자가 들어왔다.

"장로님을..."

"앉아있어라. 하하하. 몸 상태는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거의 아무 상처도 안 입은 느낌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진씨세가의 가주님조차 둘의 비무를 보며 흥이 돋았다며 극진히 보살피라 명했으니. 축기기 수도자도 아니고, 고작 무공을 익힌 연기기 수도자 둘의 싸움에 그 정도 흥을 느끼시다니. 하하하, 네 공이 크다."

껄껄거리며 내 어깨를 두드린 청문벽이 진씨세가의 의원에게 말했다.

"진맥을 해 보고 딱히 이상한 곳이 없다면 퇴원해도 되겠나."

"예, 알겠습니다."

진씨세가의 의원은 내 몸을 진맥해 보더니, 바로 완치 판정을 내리고 나를 내보내 주었다.

나는 청문벽을 따라, 청문세가에 배정되었다는 숙소로 들어갔다.

내 숙소는 청문벽의 바로 옆 방으로 배정되었고, 나는 내 숙소로 들어가기 전 청문벽이 나를 불러, 먼저 그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덜컥

숙소의 문을 닫은 청문벽이, 자리에 앉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의 앞에 방석이 날아와 놓였고, 그가 방석을 가리켰다.

"앉거라."

"예."

"일단, 오늘 비무는 매우 잘 해주었다. 타 세가들의 앞에서 청문세가의 체면을 세울 수 있었어. 오늘의 일은 청문세가의 가주님께도 보고될거고, 너는 분명 공을 세웠다 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본가에서 네게 상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군."

그는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젊은 시절, 고서(古書)에서 본 적이 있지. 몇백년에 한 명 꼴로 나타난다는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에 대해서. 오기조원은 범인들이 일생(一生)을 극고(極苦)로 단련하여, 무공의 재능을 갈고닦고 또 갈고닦아도 도달하기 불가능하며. 범인이 죽음을 각오하고서 덤벼들어야 겨우 각성 가능한 경지라고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김영훈이라는, 무재(武才)의 이단아나.

나라는 시간의 이단아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천재들은 일생을 갈고닦고도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오기조원에 도달할 수 없다.

삼화취정의 극한에 오르더라도, 환골탈태를 제대로 완료해서 육신을 강화하지 못한다면 상단전이 부풀어 오르다가 터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도 안되는 확률로 탄생하는 존재들인만큼, 오히려 일반적인 연기기 수도자들보다도 의식이 훨씬 뛰어나고 세밀하며. 축기기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정순지력(貞純之力)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일반적인 연기기 수도자들을 압도하는 전력을 지닐 수 있다고 하더군.."

"정순지력...?"

"모르느냐? 축기기에 오르면 연기기에서 활성화시킨 영로를 따라, 법력이 극도로 정순해져... 이런 것을 가지지."

우웅-

청문벽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강기(罡氣)...!"

"범인들은 강기라 부르던가...? 축기기 수도자들은 정순한 법력이라 하여 정순지력이라 부른다. 불순물을 최대한 제거한채, 기존의 법력을 수십 배 이상 압축하여 만들어낸 기운이지."

나는 어떤 의념도 없이 그냥 바로 손 위에서 강기를 뿜어내는 청문벽을 보며,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던 중, 나는 그가 내뿜는 정순지력을 관찰하며, 강기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검강(劍罡)과 달리, 저 힘에는 의념이 깃들어있지 않다.'

그저 막대한 기(氣)를 압축해 놓았을 뿐이었다.

내가 검사(劍絲)를 사용할 당시, 기산심천의 초식으로 검사에 기운을 욱여넣어 몇 초간 강기를 만들어냈듯이.

축기기 수도자는 천지영력을 무식하게 압축해 놓은 기운을 뿜어낼 뿐이었다.

'내 검강이 절삭력에서는 조금 나을 수 있겠지만...'

나는 아무런 깨달음이 없이, '몇초'가 아닌.

'꾸준하게' 강기를 뿜어내는 청문벽을 보며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출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거기다가, 내 검강과 비교해도 기(氣)의 정순함이 훨씬 높다. 훨씬 기에 불순물이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렇게 무식하게 강기를 뿜어낼 수 있다는 말은 곧.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축기기에 오른다면... 그 강기... 아니, 정순지력이란 것이..."

"축기기에선 이 정순지력이 '기본'이다."

"....!"

"경맥 곳곳에 기력 대신 정순지력이 흐르지. 정순지력이 밀도높게 전신을 흐르며 자연스러운 반탄력도 만들어주기에, 너희 무림인들이 말하는 호신강기인지 하는 것 역시 실시간으로 펼치고 있는 셈이다."

경맥에, 기가 아닌 강기(罡氣)가 흐르는 괴물!

강기가 흐르다 못해 매분 매초 매순간 아예 쉴새없이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인외(人外)의 존재!

그것이, 축기기(築氣期)의 수도자인 것이었다.

'강환(罡丸)이 축기기 수도자와 힘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축기기 괴물들이 실시간으로 호신강기를 뿜어대는 괴수들이기에. 축기기 수도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는, 강기를 넘어선 공격력이 필요한 거로군...'

저런 개념은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기에, 나는 조금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기운 대신 강기가 경맥을 돌고 있다니!

이게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하기사, 축기기 수도자부터 수명이 크게 늘어난다고 했었던가...'

왜 수명이 늘어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몸 안이 강기로 꽉 차있다 못해 계속해서 수도공법을 운용하며 강기의 용적을 늘려갈 테니까.

그런 괴물들이 수명에 변화가 없으면 오히려 그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뭐 어쨌든. 너희 무림인 중 삼화취정에 다다른 이들부터는 우리 축기기 수도자의 정순지력을 흉내낼 수 있고.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은 꽤나 자유자재로 정순지력을 흉내내니... 연기기 이하는 당해낼 수가 없겠지.

하나, 정작 그런 딱 봐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제외하면... 너희 오기조원의 무림인들은 너무 희소해서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하여, 청문세가에서 줄 상에 대하여 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보거라."

"필요한 것이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제가 있는 영지의 관리수사이신 청문목 장로께서 제게 선통후각, 선각후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영질이 오영질이라 수행속도가 빠르지 못하니.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법결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각후통... 법술들과 진언의 이해에 관한 것이라면, 본가로 돌아간 후 너를 청문령이라는 녀석의 제자로 추천해주마. 청문령 녀석은 결단기에 이르기에는 포기했지만 법술들과 진언들을 연구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특이한 녀석이니, 선각후통을 추구하는 네게 도움이 될 터다."

"...!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수염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진씨세가에서도 가주께서 네 무위를 흥미로워하셨다 하여. 한 가지 상을 주기로 결정이 났다. 너무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무엇이든 바라면 들어주실 것이니, 무엇을 받고 싶은지 생각해 두거라."

말을 마친 청문벽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나가보라고 하였고, 나는 바깥으로 나와 읇조렸다.

"진씨세가에서도 상을..."

말투를 보아하니 특정한 상품을 주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사소한 선에서 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가능하려나...'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무엇을 받을지를 생각해 두었다.

* * *

며칠 후, 나는 진씨세가의 가주, 진여운을 배알할 수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해 아주 흥미로워해하며,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본 가주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부탁하도록 하라."

나는 가주를 배알하기 전날.

청문벽에게 '너무 과하지 않는 선'이란 연기기 이하 수준에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받은 바가 있었다.

"하면, 가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저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생각해놓았던 바람을 꺼내놓았다.

"...이전에. 연국에서 잠시 지냈을 당시. 연국의 범인들과 연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 다만 추후에 소식을 들은 바, 그들은 전부 막리세가의 연단 재료로 사용되었고. 그 자식들이 진씨세가에서 의탁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을 가 보고 싶습니다."

"흠, 진가에서 일하는 범인들을 말하는가보군..."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옆에 있던 진씨세가의 장로 중 하나를 불렀다.

"막리가에게 희생당한 범인들의 친지들이라면, 분명 영지 곳곳에서 이전에 암살을 훈련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다들 무공 재능도 없고. 이전 막리정이 아예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해버려서, 암살부대로 키울 필요도 없어진지라... 다들 그냥 영지내에서 농사를 짓거나 잡일을 하게 교육을 시켜두고 그리 인원을 편성시켰습니다."

"흠, 그렇다면 그 정도야..."

진가의 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하겠다. 단, 아무리 범인들의 처소라 해도, 그들은 우리 진가에서 일하는 이들. 청문세가의 식솔인 네가 진씨세가의 영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다. 하니 너는 범인들의 터전 외에는 영지내의 다른 곳을 돌아다닐 수 없으며, 본가에서 감시역을 둘 붙일 것이다."

"가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물러가거라."

나는 진가의 가주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범인들의 터전으로 나를 데려다줄 안내역 겸 감시인 둘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또 만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김영훈은 진씨세가를 상징하는 적색 장포를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림에서 활동할 시절 만났던 동생이네. 잠시 얘기 좀 해도 되겠지?"

"...그러시게나."

다른 한 명의 감시역은 연기기 10성 수도자였는데, 김영훈의 눈치를 조금 보며 은근슬쩍 빠져버렸다.

"그나저나 정말 놀랐다. 네가 청문세가의 사절단에 있다니... 아니, 거기에, 그 의식의 크기를 보아... 넌 수도공법을 익힌 거로군? 잘 느껴보니 영기의 압력도 은은히 느껴지는 것 같고."

"잘 알아보셨습니다."

오기조원의 무림인은 아무리 무공을 단련하고 검을 휘두르며 의식을 단련해보았자, 그 의식의 크기가 커지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더 세밀해지고, 월수월무록의 깨달음에서 볼 수 있듯 의식을 다루는 데에 있어 자유자재가 되거나 의식을 쪼개서 사용하는 등 수도자보다 세밀한 영역을 다룰 수는 있지만.

의식이 세밀해질지언정 절대 크기가 커지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등봉조극에 이른 김영훈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 등봉조극에 올랐음에도 의식의 크기는 나보다 조금 작은 상태였다.

"너는 수도자가 되기로 한 거구나. 그래, 그 역시 하나의 방법이겠지."

"...김 형이 저와 합을 겨룰 당시, 의식을 통해 했던 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하하, 그것 말이냐."

그는 나와 함께 걸으며 진씨세가의 건물을 나왔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당시. 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내게 알려준 단맥도법을 익히며. 그 생각은 더욱 더 가중되었지. 그 무공에 깃든 의지를 느끼며... 하하, 초식명부터가 도묘(刀墓)라니! 너무 잔인한 게 아니냐?"

"..."

"여하튼. 분명 오기조원의 단계에 있을 당시까지는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등봉조극의 경지를 창시하고, 생각을 바꿨다. 월수월무록을 통해, 등봉조극의 극한까지 올라갈 확신을 얻으며..."

그가 손을 펼쳤다.

그의 장심에서 기가 뭉치더니, 환(丸)을 만들어냈다.

환이 쪼개진다.

세 개로 나뉘며 쪼개진 환은 빙글빙글 돌며, 다시 삼분되어 총 아홉 개의 환이 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고작 축기기 수도자를 상대하는 정도고. 목숨을 걸어야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하나 가져갈 정도다. 뭐, 결단기라는 놈들은 인간 형상을 한 자연 재해인지라... 팔 하나정도는 한달쯤 안에 다시 회복한다는 걸 알고 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

"하지만."

그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알 수 있다. 분명 이것은... 끝이 아니라고! 분명 끝이 아니라고! 나는,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이 이상의 경지를, 분명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단맥도법과 단악검법의 16초, 23초는 둘 다 똑같이 산외산부진이지. 산 바깥에도 산이 있다지만, 분명 네가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의 최후절초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느냐?"

나는 침묵했다.

내가 단맥도법과 단악검법을 창시했다고 생각하여 벌어진 오해였다.

두 검도법의 최후절초가 그런 이름인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였다.

"분명, 나는, 우리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가능하다!"

"...김 형은."

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천문에 가는 것이 목적이라 말하셨지만, 제 눈에는 마치... 승천문은 그저 이유일 뿐이고, 어쩌면 그저 무공의 극한을 보는 것이 더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고향이 그립다는 건 사실이다. 이 향수병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아. 내가 무공에 이리 집착하는 것 역시, 가끔은 이 향수를 잊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더구나."

향수를 잊기 위해서라.

나는 무색으로 변한 의식영역의 세계에서, 의식을 해체하여 의념의 색조를 다시 관찰하였다.

내 시선을 알아챈 김영훈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의념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쁨(喜)의 의념.

중간중간 그리움과 슬픔 역시 섞여있지만, 무공을 이야기하는 김영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뭐. 무공을 익히는 게 재미있는 것은 맞지 않느냐. 솔직히, 내 적성에 이렇게 꼭 들어맞는 것이 이제껏 없기도 했고... 어쩌면 네 말대로 나는 그냥, 무공을 익히는 것이 기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기쁘다라..."

어쩌면, 저것이 김영훈의 재능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내게 무공은 분명 삶의 일부일지언정.

내가 이뤄온 역사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기쁜' 감정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감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내가 향수 때문에 무공을 익히든. 그저 기뻐서 무공을 익히든. 내가 등봉조극 그 너머로 향하고자 함은 분명 진심이다. 그리고, 너도 무인(武人)인 이상. 더욱 더 높은 경지에 이르르자 하는 마음은 있겠지."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끔 찾아오거라. 오기조원에 이른 무인은, 현 세대에는 이 세계 전체에서 너밖에 없으니. 언제는 기껍게 가르침을 주마."

"...예. 감사합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 웃음을 받아주었다.

분명 그가 승천문에 도달하고자 함을 알았을 때는 걱정이 앞섰었다.

그는 이번 생애에 승천문에 도달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오히려 김영훈의 목적이 승천문보다는 무(武)의 궁구에 초점이 더 맞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니.

되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자, 그나저나 몸도 다 나은 것 같으니 가볍게 한 수만 부딪혀 볼까?"

"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나는 가볍게 다시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손 위에 띄워올렸던 강환 중 하나를 내게 날렸다.

그 일수(一手)에 월수월무록의 진의가 담겨져 있었다.

월수월무록은, 타인의 의식과 인지를 베어내던 월수궁무록에게서 출발하여.

의식을 동화시키는 조수월무록의 깨달음을 지나.

자신의 의식을 베어내어 떼어내서 조종하는 무학이었다.

나 역시 허공에 강기를 씌운 이후 월수월무록으로 의식을 떼어내서 강기에 행동을 입력시킨 후 허공에서 조작이 가능했다.

물론, 저런 식으로 강기를 압축시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하게 하는 것은 아직 엄두도 못 낼 정도였지만.

그러나 나는 월수월무록을 운용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내 의식을 베어내고, 내 의식에 행동을 입력시킨다.

동시에 검에 강기를 불어넣는다.

부웅-

파아앗!

검이, 손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하앗!"

의식을 집중하자, 손에서 떠난 검이,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한다.

콰아아아!

검은 월수월무록의 구결에 따라, 강기를 담고 허공에 떠올라 김영훈의 강환과 부딪혀갔다.

이기어검(以氣馭劍)!

나는 원거리에서 몇 번이고 의식을 잘라내어, 내 어검에 던져내며 끊임없이 행동을 입력시켰다.

부웅, 붕, 붕!

검이 허공을 헤집으며, 내 의지에 따라 월수궁무록의 구결을 운용하며 인식을 베어낸다.

그러나 김영훈의 강환 역시 똑같이 인식을 베어내며 허공에서 없어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미친 듯이 눈으로 의념의 결을 좇으며, 김영훈의 강환을 찾았다.

문득, 허공에서 의념의 결이 비틀린다.

'저기!'

나는 내 어검에 다시 의념을 입력시키며 황급히 김영훈의 강환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그의 강환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내 어검을 쫓아온다.

그와 동시에 김영훈의 의념이 내 의념에 달라붙으며, 내가 어검에 행동을 입력하는 것을 방해한다.

비무와 같이 직접 손발을 부딪히진 않았으나, 허공의 사이로 어마어마한 의념의 폭풍이 부딪힌다.

수많은 실선과 실선이 부딪혔고, 나는 그 의식과 의념의 폭풍을 뚫고 기어코 내 어검에 마지막 행동을 입력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

촤락!

그의 강환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듯 하더니, 바로 내 검강에 담긴 내 의념과 충돌하였다.

그와 동시에, 내가 어검에 입력한 의식들이 전부 소멸되었고, 그 자리에 강환의 의식이 들어차 버렸다.

어검을 김영훈에게 뺏긴 것이었다.

"...뭐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저 강환은 뭐 살아있기라도 한답니까."

"그럼, 살아있지."

"...농담입니까, 아니면 진짜입니까."

그는 씨익 웃으며 강환을 회수하고, 내 어검을 몇 번 움직여본 후 다시 내게 검을 돌려주었다.

"진짜다. 월수월무록의 길을 따라가면 등봉조극의 깨달음을 알게 될 테고, 그 때는 내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될 터다."

"...새겨듣지요."

나는 다시 검을 집어넣으며 그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하, 이제 충분히 놀았으니 한번 네가 가고 싶다는 곳으로 가 볼까?"

그리고, 나는 김영훈과 또 다른 진가 수도자의 안내에 따라 진씨세가의 변두리 영지 중 하나로 향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