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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영훈 형님이 남기고 간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내 수련장 벽면.

그곳에는 도흔들이 새겨져 무공 구결을 이루고 있었다.

"이건···."

단악검법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류 후반에 오른 내게 맞춰 또다시 한번 개량된 단악검법이었다.

원래는 12초로 이뤄졌던 단악검법이었으나, 개량되며 12 초식이 추가되어 총 24 초식이 단악검법에 담겼다.

다행히도 본래의 단악검법에 연계된 초식이 추가로 생긴 느낌이었기에 익히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거기에 검신합일의 경지에 이른 탓인지, 검법의 숙련도가 매우 빠르게 오르는 느낌이었다.

"고맙소, 형님."

나는 단악검법 개량형을 익히며, 나지막이 형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내 수명은 차근차근히 닳아 갔다.

그러나 나는 늙은 몸으로도 몸이 부서져라 검을 휘둘렀다.

일류 후반에서, 절정으로 넘어가기 위해.

조수월무록은 일단 구결을 머릿속에 기억해 둔 후, 필사해서 연국 대문파 곳곳으로 몰래 전달했다.

삼화취정의 고수들이 조수월무록을 얻고, 조금이라도 경지가 상승해서 수도자들에게 대항할 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내 몸은 서서히 생명력이 빠져나갔고.

육신 역시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더는 약할 수 없다.

약해서는 안 된다.

생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복되는 생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것이고.

또한 앞으로 다시 살게 될 생을 위해서.

그 생애에 무력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나는 절대로 약할 수 없다!

몇 년이 빠르게 흐르고.

나는 죽는 그 날 당일에도 검을 놓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내 수명이 다하는 날.

나는 검법을 펼치며, 끈질긴 이번 생을 마무리했다.

그것이, 나의 세 번째 회귀(回歸)였다.

3회차의 첫날

깜빡.

나는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회귀했군."

어쩌면 더 이상의 회귀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무한회귀인가···.'

그러나 회귀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나의 능력이 단발성, 혹은 유한성 회귀가 아닌, 끝이 없는 무한회귀라는 데에 점차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젠장."

나는 머리를 털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휘익!

전 과장의 손이 날아온다.

나는 녀석의 손을 스윽 피하고 손을 놀렸다.

파바밧!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손을 놀려, 전 과장의 마혈을 짚었다.

"어, 어엇···!"

녀석이 아가리를 놀리는 게 시끄러워, 내친김에 빠른 속도로 아혈까지 짚어 버렸다.

워낙 빠른 속도로 혈을 짚은 탓인지, 전 과장은 물론이고 옆에서 보던 이들도 뭐가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무, 무슨 일인가? 전 과장···."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전명훈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해 보았다.

"마비라도 온 모양입니다."

"저런, 이게 무슨 꼴인가?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몸이라도 주물러 주세."

"아, 제가 마비에 잘 드는 약초를 알고 있습니다. 약초학을 배운 적이 있어서요."

나는 근처에서 수면초를 뿌리째로 뽑아 전명훈의 앞으로 가져갔다.

"전명훈 과장님, 과장님은 지금 마비에 걸리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계속 그 상태로 있으시면 정말 큰일이 날 수 있으니, 이걸 꼭 드셔야 합니다. 계속 마비에 걸려 계시면 불구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전명훈에게 다가가며 은근슬쩍 그의 아혈을 풀어 주어 입은 움직이게 해 주었다.

"자, 잠깐! 흐, 흙은 좀 털어 주게!"

"안 됩니다! 이 약초는 지금이 제일 효과가 좋은 상태고, 지금 이 상태로 드시지 않으면 약효가 떨어집니다. 흙은 조금 털어 드릴 테니, 어서 드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평생 불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평생 불구를 강조하며, 흙이 덕지덕지 붙은 약초를 전명훈의 입으로 가져갔다.

전명훈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결국 흙과 약초를 함께 씹어 삼켜야 했다.

우득, 우드득, 우득···.

돌을 씹어 삼키는 소리가 유쾌하게 들려온다.

'영광으로 알아라, 그래 봬도 썩 정력에 좋은 풀이니까.'

물론 마비를 푸는 효과는 없다.

정력에 조금 좋고, 거기에 숙면 효과가 있는 약초다.

얼마 후 전명훈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나는 잠든 전명훈의 혈을 짚어 마비를 풀어 주었다.

"허 참. 안 그래도 기이한 일이 자꾸 벌어지는데, 전 과장은 또 왜 이러는 건지···."

"이상한 일이 일어나니 몸이 긴장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적당히 얘깃거리를 만들어 낸 다음, 주변을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제가 나무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인데, 근처에 있는 나무 모두 한국에서 보기 힘든 품종들입니다."

"흠, 그런가? 뭐 그나저나 우리 회사 차는 어디에 떨어진 건지···."

"조난당한 거로군요."

1차적으로 주변의 나무가 한국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점차적으로 이 세상이 우리 세상이 아니란 걸 각인시킬 요량이었다.

"조난당한 것 같으니, 근처에 인가나 도로가 어디쯤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흠, 어떻게 말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나무로, 날듯이 뛰어올랐다.

'내공은 없지만···.'

나무를 올라가는 것 정도는 육체가 가진 힘과 감각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물며 지난 생 잠입술을 익히며 이런 높은 곳을 올라가는 능력 역시 충분히 개발해 두었다.

슈슈슉!

나는 순식간에 나무 위쪽으로 올라가 주변을 몇 번 둘러보는 척 한 후, 다시 빠른 속도로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자, 자네···."

"어떻게 한 건가?"

"와, 서 대리님, 멋있어요."

"무슨 운동 하셨나 봐요?"

"대박이다···."

김영훈 부장, 오 차장, 강 대리, 오 대리, 김 주임이 차례대로 내 운동 신경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나무 타고 놀고는 해서요."

"그래도 굉장히 운동 신경이 좋은 거 같은데···."

"별거 아닙니다. 그나저나, 나무 위에서 봤습니다만. 시야가 닿은 곳 내에서는 마을이나 도로가 없었습니다."

"허, 허어··· 농담하는 게 아니겠지?"

"예, 저라고 노숙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정말로 근방에는 숲뿐입니다."

내 말에, 다른 이들은 전부 안타까운 듯 탄식을 내뱉었다.

"저희는 조난당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곧 밤이 될 텐데, 우선 자동차를 찾아볼 팀과, 근처에서 머무를 만한 곳을 찾을 팀으로 나눠 보지요."

"어, 알겠네."

"일단 그렇게 하지."

어차피 말려봤자 이들은 무조건 SUV를 찾으러 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팀을 나눠서 자동차를 찾아보게 한 후.

몇몇 사람과 전에 머물렀던 동굴을 찾아갔다.

"동굴에서 머물러 보지요."

"어머, 동굴이 딱 있네요."

"너무 다행이다···."

나는 오 대리와 김 주임을 데리고 동굴 바람을 막을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그런 후 모닥불을 만들어 열매들과 버섯을 구웠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자, 다른 이들이 모닥불의 불빛을 보고 우리를 찾아왔다.

"허어, 이거 셋이서 만든 건가?"

"아뇨, 저희는 한 거 없고 전부 서 대리님이 슉슉 만드시던데요?"

"네, 완전 보이스카우트 온 거 같았어요."

"서 대리, 몰랐는데 능력자였군그래."

나는 피식 웃으며 구운 나무열매와 버섯구이를 건넸다.

"어렸을 때 이것저것 배웠거든요. 이거 좀 드셔 보시죠."

"완전 캠핑 온 것 같구만. 아마 조난당하지만 않았어도 원래 목적지에서 캠핑을 하고 있었을 텐데."

"아, SUV에 고기랑 먹을 거 완전 많았는데. 아쉽다."

"그나저나 이 버섯 완전 맛있는데요?"

내 버섯구이는 절찬리에 전부 소진되었고, 버섯구이를 먹은 회사원들은 얼마 후 전부 잠들어 버렸다.

타닥, 타닥···.

나는 잠든 회사원들을 제대로 눕혀 준 후, 모닥불 앞에서, 아까 캐 온 황주삼을 꺼내 들었다.

우적, 우적···.

단전은 진즉에 천지심법으로 활성화시켜 놓았고,

지난 생 50년 동안 혈도에 인이 박인 용맥기공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우웅―

황주삼을 먹고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단전에는 활화산 같은 내공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나는 용맥기공의 길로 내공을 운용하며, 용솟음치는 삼의 기운을 다스렸다.

"후우우···."

전신에 힘이 찬다.

나는 주워온 나뭇가지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우웅―

그 후, 손에 내공을 불어넣고 그대로 나뭇가지를 맨손으로 다듬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내공을 불어넣은 손으로 나무를 다듬자, 나뭇가지는 빠른 속도로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뭇가지는 내 손에 의해 깔끔한 목검으로 재탄생했다.

부웅, 부웅!

나는 허공에 목검을 휘둘러 보았다.

썩 좋지는 않지만, 연습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후우···."

지난 생.

나는 일류 후반의 경지에서 검을 휘두르다가 죽었다.

'죽을 때, 특별한 깨달음이라도 얻을 줄 알았건만.'

생사의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는 건 아무래도 너무 소설 같은 일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고, 여전히 내 경지는 일류 후반에 불과했다.

'100년 동안 검을 잡았는데···.'

나는 아직도, 절정지경에 이르지 못했다.

'멀다.'

수도자는 물론이고.

수도자가 될 최소한의 조건인 오기조원의 경지도 멀었으며.

오기조원의 경지까지 나를 데려다줄 무공인 조수월무록은, 익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인 삼화취정에 다다르지 못해 이해할 수도 없었다.

삼화취정은 역시 한참 요원했고, 삼화취정을 이를 수 있는 절정지경 역시 까마득했다.

'얼마나 더 수련해야 하는 거지.'

지금껏 만나왔던 모든 절정 고수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절정의 경지부터는 일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실제로, 일류 고수는 절정 고수와 절대로 일대일로 무공 대결을 하여 쓰러뜨릴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리라.

'그런 다른 세계에, 내가 진입할 수 있을까.'

50년을 걸쳐 무공을 모르던 내가 이류까지 도달했다.

다시 50년을 걸쳐 이류였던 내가 일류 최고봉까지 올라왔다.

'절정지경은, 몇 년을 걸쳐 쌓아야 하는 경지인가.'

천재들은 그냥 몇 개월 만에 절정은 물론이고 삼화취정까지 슉슉 올라가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천재가 아니었다.

극한의 둔재.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 생들에서 일류 고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천하제일인의 옆에서 계속 지도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내가 혼자의 힘으로, 혹은 다른 문파에 가입해 무공을 수련했다면 백 년이 아니라 이백 년을 힘써서야 겨우겨우 일류 고수가 될 수 있었으리라.

'절정의 경지··· 이번 생 안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휘몰아친다.

내가 하는 모든 짓이 전부 소용없을 것 같기도 했다.

나 자신의 무력감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력감을 느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사라지지 않겠지."

백날을 고민해 봤자 내가 무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다.

재능 없는 둔재에, 쓰레기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차피 고민해도, 고민하지 않아도 찌꺼기라면.

노력하는 찌꺼기가 되자.

저벅, 저벅

나는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용맥기공을 운용하자 후끈한 열이 올랐다.

부웅, 부웅!

나는 잡념을 떨쳐 내며, 단악검법을 펼쳐 냈다.

지난 삶, 영훈 형님이 개량해 주어 12개의 초식이 늘어난 검법.

나는 24개의 초식에서 파생되는 변초와 파생절초를 모조리 펼쳐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동굴 앞을 울렸다.

슈칵!

내 목검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때려 날아가게 만들었다.

나는 문득, 그 모습을 보자 오기가 생겨 나뭇잎을 향해 다가가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내공을 담아 검기를 두르지 않은 탓인지, 이번에도 나뭇잎은 그저 목검에 맞아 날아오를 뿐이었다.

'더, 더···!'

더욱 더 잡념을 없앤다.

나는 나뭇잎을 쫓아 계속해서 검법을 펼쳤다.

단악검법의 24초.

파생되는 파생절초 86초,

연계기, 변초.

수많은 초식들이 내 손에서 뻗어나간다.

나는 어느 순간 계속해서 한 가지 나뭇잎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황홀경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몸이 무(武)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게··· 깨달음인가.'

부웅, 부웅!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내가 내공 없이 저 나뭇잎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을까.

나는 문득,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밤을 새운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된다!

동이 튼다.

파앗!

슈칵!

내공을 불어넣지 않은 목검이, 그대로 허공을 떠다니는 나뭇잎을 베어 갈랐다.

부스러진 낙엽이 아닌, 새파란 잎사귀였다.

'거의, 거의 다 왔다···!'

그때, 문득 내 왼팔이 떨려 오는 걸 느꼈다.

'이건···.'

떨리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검무를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잠시 검을 놓을 것인가.

'아, 안 돼. 깨달음이 코앞인데···!'

눈이 충혈된다.

하지만, 팔이 너무 떨려 온다.

'제길···!'

결국, 나는 검을 놓아 버렸다.

"허억··· 헉···!"

그리고, 나는 내가 팔을 떨어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귀자이기에.

이 시간 이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우가 곧 내 팔을 씹을 시간이 되었단 사실에, 지레 그 고통을 예견하고 팔을 떤 것이었다.

"···제길!"

나는 검을 잡고 다시 검무를 추었다.

그러나···.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검을 한 번 놓친 그 사이, 훌쩍 도망가 버린 것처럼.

"제길!!!"

뭐가 두려웠던 거냐.

도대체 뭐가!

절정의 길이 코앞이었거늘!

나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상관없다는데(朝聞道夕死可矣)!"

억울했다.

평생 한 번 찾아올 법한 깨달음을, 쓸데없는 두려움 때문에 홀연히 놓쳐 버린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고함을 지르며,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오늘부로, 저녁에 죽을지언정, 아침에 얻을 도(道)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검을 쥐며, 그리 맹세하였다.

하늘이 버린 재능(1)

나는 그 날 아침 찾아온 여우에게, 내 팔을 내가 잘라서 내 주었다.

앞으로의 망설임을 끊어 버리겠다는 의미에서였다.

여우는 내 팔을 먹어 버린 후, 우리의 거주를 허가해 준 후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다른 동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숲의 한적한 곳으로 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 깨달음을 다시 잡기 위해서!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어 수도자들이 동료들을 납치해 갈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음에도 깨달음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춘 건, 나흘째.

해룡왕 서휼이 오 대리를 납치해 간 직후였다.

나는 자리에 허탈하게 앉아 있는 김 주임과 김영훈 부장을 위해 버섯구이에 향신료 역할을 하는 약초를 발라 만찬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셋은 만찬을 먹으며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후, 김 주임이 능력이 각성하며 저 멀리서 곱사등이의 노인이 거대한 꼭두각시를 타고 나타났다.

얼마간 김 주임과 실랑이를 벌이던 노인은 나와 김영훈 부장을 공간 균열로 떠밀어 던져 버렸다.

나는 지난 생과 똑같이, 우리에게 손을 뻗는 김 주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여기는···."

눈을 뜨자, 이번에는 나무 위였다.

"흠···."

나는 나무 위에서 신법을 펼쳐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김영훈 부장도 역시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 그 역시 내려놓은 후, 주변을 살폈다.

"연국 서남부로군."

지난 삶.

신마전이니, 귀영각이니를 운용하며.

전국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이젠 슬슬 어디를 떨어지더라도 연국 안이기만 한다면 대강 어디쯤인지 맞출 자신이 있었다.

'지난 삶과 지지난 삶을 합치면 100여 년 동안 연국을 떠돌아다녔으니.'

물론 나라의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었기에, 나도 모르는 곳이 종종 있었지만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충분히 잡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부장님, 일어나시죠."

나는 기절한 김영훈 부장을 깨워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당황하는 듯했으나,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난 탓인지 적당히 받아들였다.

나는 그와 함께 근처 가장 가까운 성으로 향하며 그에게 문자와 언어를 가르쳤다.

며칠 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성인 호벽성에 도착해, 등선향의 약초를 팔아 장원을 샀다.

나는 그에게 문자와 언어, 그리고 그가 지난 삶 내 단악검법을 변형시켜 창시해 낸 단맥도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 가르침을 따라 단맥도법을 익힌 그는, 3개월 만에 절정 고수에 올라 버렸다.

'조금 허탈하군.'

누구는 평생을 바쳐도 일류 끝자락인데.

누구는 일류 무공을 배운지 3개월 만에 절정, 그것도···.

'삼화취정이라니···.'

나는 황주삼을 먹고, 머리 위에 세 개의 꽃을 띄운 그를 쳐다보았다.

"후우···."

얼마 후 운기조식을 마친 그가 가뿐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하하, 지금이라면 서 대리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

나는 기운찬 그를 보며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자는 내가 지난 삶에서 모셔 온 '영훈 형님'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신적으로는 나보다도 한참 어린 사람이었다.

'살아온 시간으로만 치면, 이젠 내가 김영훈 부장의 할아버지뻘이지.'

문득, 한창 신이 난 그를 보며, 이번 생은 그와 같이 다니지 말자고 생각했다.

"···부장님. 제가 오늘 아침 왠 거지 노인에게 밥을 사 주고 받은 무공서가 있는데, 도통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니, 한번 해석해 보시겠습니까?"

"엇, 서 대리 그거 분명 기연이야! 한번 나 줘 보게!"

나는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이 내게 전해 준, 그의 깨달음을 담은 무공.

조수월무록(眺修越武錄)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얼마간 조수월무록을 읽던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 서 대리··· 이, 이게 뭔가? 이건···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무공일세."

"···부장님, 할 말이 있습니다."

"뭐, 뭔가? 아, 그래. 걱정 말게. 이 무공을 익히게 되면 서 대리 역시 내가 잘···."

"오늘부터, 저는 부장님과 따로 다니겠습니다."

"···뭐?"

그는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 무슨 말인가, 서 대리. 아니, 서은현이."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부장님과 따로 다닐 예정입니다."

"이, 이유가 뭔가?"

"이유라···."

나는 뇌리로, 지난 삶에서의 영훈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승승장구하며 무림맹주가 되었으나, 결국에는 수도자의 세계에 대해 알고, 수도자들과 붙으러 다녔으나, 결국 진정한 수도자를 만나 절망하고 주저앉은 1회차의 김영훈.

천하제일문을 차리고, 수도자들에게 반역하며 수도자들을 참살하고 다녔으나 결국 무시무시한 수도자들에게 걸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무의 길을 포기한 채 수도자가 되기를 선택한 김영훈.

아마, 이번 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생 역시 조수월무록을 익히며 승승장구하다가, 아마 다시 수도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앞에서 절망하다가, 다시 무공의 길을 포기하고 수도자가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광경을 보기 힘들었다.

"···저는."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강호를 유람하며, 제 경지를 높여 보렵니다."

"그, 그거야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네만···."

"저 혼자 해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안 되네. 자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지내라는 겐가?"

"부장님 정도의 무공 실력이면 충분히 살아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말도 가르쳐 드렸고, 문자도, 무공도 다 가르쳐 드렸는 데다, 부장님은 본인의 힘으로 절정 고수까지 되셨으니. 이제 더 이상 걱정하실 것도 없으십니다."

"하지만···."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고향 사람과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단기간 내에 이세계에 떨어져 다른 직장 동료들을 전부 잃어버린 충격이 아직도 전부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2년에 한 번. 오늘 이 집에서 만나는 걸로 하지요. 어떻습니까?"

"···흐음."

나는 쓸쓸해하는 김영훈 부장을 잘 설득한 후, 그와 헤어져서 성을 나왔다.

그의 곁에 있으면, 천하제일인의 지도를 받으며 조금 더 빨리 절정지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가 절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성을 나온 나는 산천을 둘러보았다.

"우선, 서경성부터 가 봐야겠군."

나는 서경성의 사성삼마를 찾아갈 생각을 해 보았다.

연국의 수도인 서경성의 일곱 문파, 사성삼마에는 뛰어난 절정 고수들 역시 많으니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일단 비무나 해 보러 다닐까.'

물론 사성삼마 같은 대문파는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런 곳은 건드리면 괜히 후환이 심하니, 절정 고수가 되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서경성 외곽에 있는 문파인 팔경각(八敬閣)이라는 문파를 찾아갔다.

팔경각은 서경성의 중소문파로, 문주는 일류 최정상의 고수였다.

팔경각을 찾아가자, 문지기 둘이 나를 막아섰다.

"팔경각에는 어쩐 일이시오?"

나는 약초를 판 돈으로 썩 고급 무복을 입고 있었기에, 문지기는 정중한 태도로 물어 왔다.

나 역시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온 목적을 말했다.

"팔경각에 비무를 청하러 왔소."

내 말에, 문지기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 각은 아무나 찾아오는 곳이···."

슈칵!

나는 빠르게 발검해서 문지기의 옷 앞섬을 잘라 버렸다.

검이 닿지는 않았지만, 검기가 문지기의 앞섬을 자른 것이었다.

둘 역시 내가 검기를 썼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이 새하얘졌다.

"거, 검기···!"

"일류 고수!"

"이래도 내가 '아무나'처럼 보이시오?"

두 문지기는 내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후 팔경각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문지기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문 바깥으로 나왔다.

"안채로 드시지요. 문주께서 기다리십니다."

나는 문지기를 따라 팔경각 안으로 들어갔고, 팔경각 안채의 비무대로 따라갔다.

비무대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장년인이 구절편을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허어, 일류 고수가 찾아왔다 하여 누구일까 고민했소만. 이리도 어린 소협이라니."

"무명소졸 서은현이, 팔경각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허허, 어린 소협이 기도가 심상치 않구려."

"장문인의 기도 역시 범상치 않으십니다. 부디 이 무명소졸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우리는 짧게 인사치레를 한 후, 바로 비무에 들어갔다.

촤랑!

팔경각 장문인의 첫 수가 시작되었다.

구절편이 마치 뱀처럼 내게 짓쳐들어왔다.

움직임에 절도가 있다. 무공 자체가 그와 하나가 된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나는 단악검법의 초식을 사용해 그의 구절편을 걷어 내었다.

동시에 팔경각 장문인이 구절편 뒤로 나를 향해 발길질을 해 왔다.

부웅!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발을 피한 후, 하단세로 검을 휘두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촤랑!

그의 구절편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나는 빠르게 뒤로 다시 물러나며 기수식을 잡았다.

"···검형(劍形)과 기세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있군. 검신합일(劍身合一)··· 일류 후반!"

"장문인께서도 완전히 무공을 녹여 넣으셨더군요. 덕분에 한 수 견식했습니다."

"허허···."

그는 내 얼굴을 보며 탄식을 흘렸다.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 경지에 이르르다니. 자네는 정말로 천재군."

"천재라···."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 나는 엄청난 천재다.

고작 이십 대 후반에 일류 후기라는 것은, 그야말로 기함할 재능이니까.

이 일류의 경지조차도 일반인은 수십 년을 걸려서야 도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겉으로 보기에 나는 하늘이 내린 인재일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인재···.'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부족한 재능을 칭찬해 주어,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내게 천재라는 것 또한 칭찬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싱긋 웃으며 칭찬을 받아들였다.

평생을 수련해도 일류에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세상에 천재는 몇이 없지만.

둔재는 이 세상을 꽉 채우고도 넘쳤으니까.

그런 둔재 주제에, 천재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회귀를 통해 무(武)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시없을 사기적인 기적이니까.

천재는 내게 있어 칭찬이 아닐지라도.

이런 기적을 등에 업고서, 이런 기회조차 손에 넣지 못한 이 앞에서 천재가 아니니 하는 건 오히려 기만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천재이기로 했다.

"이제부터 검기를 사용하겠습니다."

"그러시게나. 나도 제대로 갈 테니."

그 말과 동시에, 우리는 서로에게 빠르게 돌격했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일 초(招).

월악(越岳).

나는 중단세로 검을 좌에서 우로 갈랐다.

초승달 형태의 검기가 지나며 팔경각 문주의 몸을 베어 갔다.

팔경각 문주는 허리를 굽혀 내 공격을 피하고 하단세로 구절편을 펼쳐 왔다.

단악검법.

이 초(招).

입산(入山).

슈칵!

나는 바로 하단세로 바꾸어 그와 같은 높이에서 검을 다시 휘둘렀다.

내 검과 그의 구절편이 서로 부딪히며 둘의 초수가 부딪혔다.

파앗!

팔경각 문주가 허공으로 뛰어올라 초식을 사용하며 구절편을 내리친다.

단악검법.

삼 초(招).

등맥(登脈).

나는 하단세에서 다시 검을 잡고 위로 올려치며 그의 구절편을 쳐 냈다.

공격을 쳐 낸 후, 기수식을 잡고 반격을 시도했다.

사 초(招).

유릉(流陵).

검을 중단세로 잡고 부드럽게 찔러 간다.

팔경각 문주는 구절편을 이용해 막아내려 했으나, 내 검은 더욱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며 문주를 찔러 들었다.

그는 몸을 뒤로 빼서 찌르기를 피했으나, 구불구불한 검기가 그의 옷깃을 스쳤다.

나는 그가 뒤로 물러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초식을 이어 나갔다.

오 초, 괴암(塊巖).

육 초, 기석(奇石).

검을 들고 검무를 추듯 회전하며, 덩어리진 검결의 사이로 공격이 들어올 수 없는 공방일체를 만들고,

그 회전 속에서 변초를 만들며 점차 검속을 높인다.

붕, 붕, 붕, 붕!

칠 초, 심산(深山).

나는 회전력을 이용해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팔경각주는 구절편을 이용해 나를 쳐 내려고 했으나, 육 초식으로 만들어 낸 기이한 변초로 인해 그의 품에 파고들 수 있었다.

"흠···!"

그의 거리 안으로 파고든 후, 우하(右下)에사 좌상(左上)으로 몸을 비틀어 베어 냈다.

피싯!

팔경각주가 한 바퀴를 돌아 가까스로 검격을 피했으나,

내 검기가 팔경각주의 옷 앞섬을 잘라 냈다.

동시에 그는 한 바퀴를 돈 회전력을 이용해 나를 향해 구절편을 휘둘렀다.

팔 초, 유곡(幽谷).

나는 다시 검을 휘둘러, 팔경각주의 구절편을 흘려내어 구절편에 담긴 힘을 무력화시켰다.

부웅, 부웅, 부웅!

팔경각주는 한 걸음을 물러나더니 구절편을 세 번 휘둘렀다.

나 역시 그에 맞서 검을 좌상(左上)으로 들어,

구 초, 산수화(山水畵).

우하(右下)로 내리치며, 다시금 내공을 이용해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내리치는 것을 세 번 반복했다.

도합 여섯 번의 참격이 구절편을 막아낸다.

나는 검을 들고 상단세로 내리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십 초, 용맥(龍脈).

용맥기공의 내공이 폭발하듯 솟구쳐오른다.

어마어마한 거력이 검에 깃들며, 패도적인 기세로 팔경각주를 베어 갔다.

"으읏!"

콰앙!

팔경각주가 그에 맞서 구절편을 휘둘렀고, 검과 구절편이 부딪히며 마치 화포가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일어났다.

"크윽!"

팔경각주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충격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서 회전하며 구절편을 휘둘렀다.

'네 번!'

이번에 쏟아지는 구절편의 공격 횟수는 네 번에 달한다.

십일 초, 단애(斷崖).

콰각!

내공이 실린 내 검에 천근추의 수법을 적용했다.

검이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진다.

동시에 검에 실린 검기에, 검은 그대로 비무장 바닥을 뚫고 박혀 버렸다.

나는 검이 바닥에 박힌 채로, 비무대 바닥을 잘라 버리며 팔경각주를 올려 베었다.

"크읏!"

슈칵!

검이 바닥에 박힌 상태에서도 빠르게 움직였지만, 바닥에서 빠져나온 순간부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속도가 빨라졌다.

팔경각주는 그 속도 차이에 당황하다가 내게 옷의 앞섬이 다시 한번 베였다.

'끝을 내면 되겠군.'

십이 초, 칠광일출봉(七光一出峰).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르며, 햇살이 온누리를 비추듯.

십일 초의 초식 너머로 일곱 갈래의 검기가 쏟아졌다.

챙!

결국, 팔경각주의 구절편이 검기에 잘려 나가며 비무대 바깥으로 떨어져 버렸다.

"허, 내 패배요."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그에게 포권을 한 후, 팔경각에서 나왔다.

'팔경각은 지난 삶에서도 정도문파였는지라 비겁한 짓은 잘 하지 않기로 소문난 문파였지.'

앞으로 지난 생에서도 올곧은 것으로 소문난 문파들을 찾아가 비무를 하고, 어느 정도 명성을 올린 후 찝찝한 문파들도 하나둘 상대할 요량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비무행을 하며, 언젠간 반드시···.

'절정지경에 오를 것이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하늘이 버린 재능(2)

나는 서경성 중소문파 넷을 더 돌았다.

그 중 언류보, 휘영문에서는 비무에 패배했고.

개주방, 유궐보 등의 문파에서는 비무에 승리했다.

그렇게 소소한 명성을 얻은 나는 사파로 분류되는 중소문파들 역시 찾아갔다.

회쟁파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최근 서경성 곳곳에서 비무를 청하고 다니는 어린 일류 고수가 있다 들었는데, 자네였구만."

서경성의 사파로 분류되는 회쟁파는, 내가 가자마자 껄껄 웃으며 나를 환대해 주었다.

회쟁파의 장문인은 수염을 기르고, 회색빛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그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마치 신선처럼 보였으며, 회쟁파의 장로들 역시 하나같이 도인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 요 며칠 사이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지라, 나는 비무를 하지 못할 듯싶네. 그래서 본 파의 장로들이 소협을 상대할 것이네만···."

회쟁파의 장문인의 말에, 풍채가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 인상 좋은 미소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협은 본문의 일 장로, 나 태즉엽이 상대해 드리리다."

"저 역시 한 수 부탁드립니다."

얼마 후, 우리는 비무대에 서서 기수식을 잡았다.

"비무, 시―"

파앗!

"작!"

심판을 보는 장문인이 채 시작을 외치기도 전, 태즉엽이 내게 돌진하며 참마도(斬馬刀)를 휘둘렀다.

'역시 사파로군.'

나는 딱히 상관하지 않으며 검에 검기를 불어넣고 맞섰다.

단악검법, 제이 초, 입산(入山)!

슈칵!

나는 중단세로 달려드는 참마도를 피해 허리를 숙인 후, 하단세로 태즉엽의 하반신을 베어 나갔다.

타앗!

그러나 태즉엽은 풍채 좋은 외모와는 달리 날렵하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내 검을 피한 후, 공중에서 참마도를 내리찍으며 떨어져 내렸다.

'정면으로 받으면 위험하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면 계속 수세로 몰아붙일 것이다.

단악검법, 제팔 초, 유곡(幽谷).

부웅!

쩌엉!

나는 참마도와 검을 마주친 후, 참마도가 내리치는 힘의 방향을 그대로 흘려서 공격 방향을 비틀었다.

내 바로 옆을 내리친 참마도가 굉음을 내며, 비무대 바닥을 찢어발기듯 박살 내 버렸다.

나는 태즉엽이 참마도를 내리친 직후 찰나의 틈을 이용해 다시 반격을 시도했다.

단악검법, 제오 초, 괴암(塊巖).

붕, 붕, 붕!

그 자리에서 검무를 추듯 회전하며, 검결이 나를 주위로 덩어리지게 만들어 공격이 파고 들어올 수 없는 공방일체의 태세를 취한다.

회전하는 검결에 휘말릴까, 태즉엽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검을 찔러 들어갔다.

단악검법, 제사 초, 유릉(流陵)!

파앗!

구불구불한 산의 능선과도 같은 검초가, 태즉엽을 향해 쏘아져 간다.

태즉엽은 참마도를 휘둘러 내 검을 걷어내려 했지만 검기는 구불구불하게 휘어지며 그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대로 끝을 낸···.'

피잇!

그때, 미세한 뭔가가 내 눈을 향해 정확히 쏘아졌다.

"···!"

나는 화들짝 놀라 검을 빼고 몸을 피했다.

"침(針)?"

그것은 미세한 침이었다.

태즉엽의 입으로, 침을 쏘아 발사하는 침구가 물려 있었다.

"이 역시 본인의 무공이니, 무어라 하지는 말기를 바라겠소."

태즉엽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참마도를 휘둘러왔다.

그러나 나는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사파는 기오막측한 기술을 많이 쓰는군.'

분명 팔경각주보다, 순수한 무공만으로 따졌을 때 태즉엽은 그보다 몇 수 아래였다.

내가 검초를 조금 더 밀어붙이면 아예 도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의 침과 같은 기이한 수법을 쓴다면, 실전에서의 순수한 전투력은 오히려 정파 무인보다 높을 수도 있었다.

'역시··· 이런 경험은 영훈 형님 옆에서는 얻을 수 없다.'

그는 천하제일인이었고, 또한 공명정대한 대협이었다.

비록 지난 삶에서는 무극신마니 뭐니 불렸으나, 그것은 수도자들에게 거스른 탓에 붙은 칭호였지, 그것이 그의 성정이 사이악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와 대련할 때는 항상 순수한 무(武)의 기예만을 얻을 수 있었지 이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앞으로 사파와도 무수한 비무를 거치며 내 경험은 계속 쌓여 나갈 것이다.

'지난 삶에서도 실전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 대규모 전투나, 수도자를 상대하는 합격진을 펼치거나, 혹은 지난 생의 영훈 형님을 따라 관청을 때려 부수는 일을 했으니···.'

나는 의외로 사파들과는 그리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이런 식으로, 일류에 이른 사파와의 실전 경험은 더더욱!

챙, 챙, 챙!

태즉엽의 참마도가 세 번을 내리 휘몰아치며 나를 압박했다.

동시에.

퓻, 퓻, 퓻!

그는 잘 보이지도 않는 얇은 침을 계속해서 내게 쏘아 댔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이런 귀찮은 부류는 단번에 찍어 눌러 버려야 한다.

단악검법, 제구 초, 산수화(山水畵).

단악검법, 제육 초, 기석(奇石).

도합 여섯 번의 대각선 베기에, 변초를 넣으며 검초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파아앗!

여섯 번의 참격이 날아드는 침과 참마도를 전부 쳐 내며, 그사이에 섞여 든 변초로 태즉엽의 빈틈을 잡았다.

단악검법, 제칠 초, 심산(深山)!

나는 그 빈틈으로 파고들어 가, 우하에서 좌상으로 몸을 비틀며 그를 베어 올렸다.

촤악!

나는 비무였기에 태즉엽의 옷만을 베어 넘겼고, 그렇게 비무의 승리자는 내가 되었다.

"비무, 도전자 서은현 승리!"

"좋은 비무였네. 허허."

"저 역시 많은 것을 견식했습니다."

나는 태즉엽에게 포권을 한 후, 비무대를 내려가려 했다.

그때였다.

선풍도골을 한 회쟁파의 장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크게 외쳤다.

"그럼 이어서 바로 연전(連戰)을 속행하겠네!"

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연전이라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사전에 들은 바가 없습니다."

"으음? 그랬나? 나는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자네가 못 들은 게 아닌가? 이보게들, 모두 분명히 내가 사전에 삼연전(三連戰)을 제안했고, 소협이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예, 장문인 말이 맞습니다."

"저 역시 똑똑히 들었습니다."

회쟁파의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놈들이···.'

이것이, 사파인가?

'비겁할 줄 예상은 했기에 정도문파 몇을 돌며 명성을 얻고 찾아온 건데···.'

"내 오늘의 비겁함을 다른 문파에 널리 알리면 회쟁파의 명성이 곤두박질칠 텐데요."

"저런, 걱정 마시게나, 소협."

회쟁파 장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협은 본파에서 비무를 하다가 상처가 살짝 날 테고, 상처가 도져서 파상풍에 걸려 죽을 것이라네. 본 파는 그런 자네를 극진히 보살펴 주겠으나, 극진한 보살핌에도 자네는 어쩔 수 없이 사망할 터라네."

"미친놈들이었군."

아예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내가 이겨서 나가는 걸 봐 줄 생각이 없었나 보오?"

"애초에 우리 회쟁파가 제대로 된 문파로 보였는가? 우리 사파들은 관아에서 인가도 제대로 못 받은 불법 조직인데, 불법 조직에 와서 비무행을 치른다는 소협의 정신 나간 기행이 죽음을 앞당긴 걸세."

"···뭐."

나는 히죽 웃었다.

"그딴 거야 알고 있었소."

정파, 사파로 무림이 나뉜 듯이 말하고는 하지만.

무림은 실제로 정파의 압도적인 강세였다.

기본적으로 정파란 정도공법을 익힌 무림문파들을 칭하기도 하지만,

연국에서의 정파란 관아에 제대로 된 인가를 받은 무술 도장을 의미했다.

그 외에 사파란 칼잡이들이 모여 불법적인 일을 하는 모든 조직을 의미했다.

그런 만큼 사파란 절대로 양지에서 일하지 못했고, 정파는 언제나 양지에 서 있었기에, 사파 조직은 절대다수가 관아에 인가를 받은 조직이 아니었다.

분명 일반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불법 조직에 비무를 신청한 내 행위는 정신 나간 짓이다.

산적 소굴에 쳐들어가 비무행을 외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물론 성내의 문파는 산적 소굴과는 달리 일반적인 정도문파와 어느 정도 비슷한 점이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만큼, 내 행동은 기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모든 사파가 정신 나간 불법 조직은 아니지. 내가 알기로 그래도 몇몇은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존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회쟁파는 아니었나 보군."

내가 마냥 아무 생각 없이 사파에 쳐들어와 비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지난 삶에서 얻은 정보들을 통해 무림문파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파 조직들을 추려, 그중에서 찾아온 것이 회쟁파인 것이었다.

꿈틀―

그 말에, 회쟁파 장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긍지가 밥을 먹여 주진 않는다네.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문파가 유복해지진 않아···."

"뭐, 내 생각을 당신들에게 강요할 건 없으나··· 최소한의 긍지조차 없는 이들은 평생 같은 자리에만 머물 뿐이오."

"···."

물론 내가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회쟁파가 수년 후 정도문파로 탈바꿈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네. 우리는 이 근방을 장악한 패주로서, 감히 멍청하게 우리에게 비무행을 신청한 얼간이를 손봐 줄 의무가 있는 것이야."

척, 척, 척, 척, 척!

일 장로를 제외한 열 명의 회쟁파 장로들이 나를 둘러쌌다.

"비무, 2연전을 시작하겠네!"

"···말은 잘하시는군."

10 대 1이 비무냐?

이 사파 놈들의 사고방식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애초에 이런 걸 노리고 온 거지.'

나는 히죽 웃으며, 나를 둘러싼 열 명의 장로들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덤비시오. 받아들이지."

그렇게, 비무가 시작되었다.

***

서경성에, 한 명의 젊은 일류 고수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도방파인 회쟁파에 비무행을 찾아갔고, 세인들의 비웃음을 샀다.

불법 조직인 사파에게 비무행이라니!

산적 소굴에 비무행을 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자는 다음 날 시체가 되어 나올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예상했다.

젊은 일류 고수가 회쟁파를 찾아가고 하루.

세인들은 일류 고수가 죽었을 것이라 떠들었다.

이틀.

세인들은 회쟁파가 일류 고수를 죽이고 그 시체를 문파 밑에 묻어 버렸을 것이라 떠들었다.

사흘.

세인들은 죽어 버린 젊은 일류 고수에게 애도를 표하였다.

그러나, 사흘째 저녁.

일류 고수는 회쟁파의 장원에서, 피 칠갑을 한 채 빠져나왔다.

그런 후 객잔에 가서 소면과 만두를 주문해 먹고,

바로 다음 문파를 찾아가서 비무를 벌였다.

후에 밝혀지길, 회쟁파는 그들을 찾아온 일류 고수와 끝없이 연전(連戰)을 벌였다고 한다.

회쟁파의 전투원 수십 명이 번갈아 가며 끝없이 일류 고수와 연전을 치렀고.

청년 고수는 그들 모두를 상대하며 사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모두와 싸워 쓰러뜨렸다고 한다.

회쟁파는 사파답게 패배한 인물이 체력이 회복된 이후 다시 연전을 벌이고는 했지만, 그 청년 고수는 재도전한 이는 경맥을 잘라 버려 불구로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사흘째.

회쟁파의 사파 고수들이 모두 합공해서 청년 고수를 상대했으나, 청년 고수는 그들 모두를 물리치고 회쟁파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소면을 먹고 바로 다시 비무행을 간 청년 고수.

그 정신 나간 청년 고수는 수많은 세인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서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세인들은 그 미치광이 고수에게, 딱 맞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무한투귀(無恨鬪鬼), 서은현!

그것이, 나였다.

***

"후루룩!"

나는 서경성의 중소문파 서른세 곳을 찾아다니고, 객잔으로 와 소면을 먹었다.

'정도문파는 사도방파와 달리 체력 소모가 그리 크지 않군.'

지난 번 회쟁파에서는 정말 죽을 뻔했다.

'그 뻔뻔한 새끼들···.'

내게 처음 패배했던 태즉엽도 내가 연전으로 체력이 떨어져 나가자, 체력을 회복한 후 다시 비무대로 올라왔었다.

놈들의 비열함이 그만큼 뻔뻔해졌을 때쯤, 내 쪽에서도 비열한 짓을 쓰기 시작했다.

검을 닦는 척하며, 독초의 즙을 묻힌 면포로 검에 독을 바르고 싸운 것이었다.

지지난 삶, 나는 무림맹주의 책사가 되기 전 의술을 공부하며 일류 의원 정도로 실력을 올렸고, 투룡보의 의당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류 의원이라는 건 달리 말하면 일류 독술사(毒術士)라는 의미도 된다.

사람을 살리는 기술과 죽이는 기술은 정말로 한 끗 차이였으니까.

독을 묻히고 싸우니, 한결 싸움이 수월했다.

몸 어디든 검 끝이 스치기만 해도 회쟁파 방도들은 곧이어 거품을 물며 쓰러져 버렸으니 말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자, 회쟁파 쪽에서도 내게 독을 쓰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일류 의원이었다.

'배합법이 뻔한 싸구려 독이나 써 대니 안 통하지.'

회쟁파에서 쓰는 독은 내가 미리 만들어 둔 해독단과 해독초 등으로도 충분히 해독해 버릴 수 있었다.

회쟁파 장문인은 악을 써 대며, 회쟁파 내의 모든 전투원들을 끌어모아 사흘 밤낮 동안 나를 잡아 두었었다.

'그 미친 늙은이 같으니···.'

무슨 클론 기술이라도 가진 것처럼 사파 잡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서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회쟁파 방도들은 내가 연전연승을 거두자,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창과 화살을 들고 방진을 짜서 내게 돌격해 오기도 했었다.

'인질을 잡지 않았으면 정말 죽을 뻔했어.'

나는 결국 회쟁파 장문인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인질로 잡고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회쟁파 장로들이 장문인을 무시하고 나를 죽이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마지막 날에는 문파 전체와 싸워야만 했다.

'독, 인질, 그리고 각성제(覺醒劑)와 마약(魔藥)을 먹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다.'

마지막 날에는 피로가 축적되어서 각성제를 미친 듯이 복용했다.

심지어 회쟁파를 빠져나와서도 각성 효과가 빠지지 않아, 다른 정도 문파를 찾아가 비무를 한 번 더 벌여도 끄떡없을 정도로.

"휴우···."

그 날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회쟁파 이외에도 사파들은 대개 비슷비슷했다.

찾아가 비무 신청을 하면 처음에는 비무를 해 주는 듯하다가, 내가 이기면 연전을 강요한다.

연전에서도 승리하면, 주변에 있던 방도들이 하나하나 품에서 병장기를 꺼내 들고, 한꺼번에 내게 덤빈다.

아예 초장부터 비무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덤벼드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수많은 사파 잡졸들이 내게 달려들어 체력을 빼 놓는다.

그러면 나는 각성제를 먹고, 독을 뿌려 대며 사파 놈들을 제압하며 싸운다.

그렇게 체력이 달리게 되면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체력이 꽤 남아돌면 사도방파 전체와 싸워서 놈들을 두들겨 패고 나온다.

그런 후, 그런 식의 [비무]가 끝나면 각성제를 한 번 더 먹고 근처 정도문파에 찾아가 비무 신청을 한다.

정도문파에서는 목숨 걱정이 없으니 져도 되고 이겨도 된다.

그런 후 지면 진 대로, 이기면 이긴 대로 정도문파에서 하룻밤 자고 갈 것을 청한다.

정도문파 내에서라면 사파 놈들의 습격을 걱정할 것도 없으니 편안하게 쉬고 가도 된다.

그런 식으로, 나는 서경성 내의 수많은 정파와 사파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비무행을 벌였다.

세간에서는 그런 나를 정신 나간 광인(狂人), 무한투귀라 불렀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재능이 없다.'

그러나, 내가 도달하려 하는 절정지경의 길은 내 재능으로 도달하기엔 한없이 까마득하다.

그러므로, 나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싸우며, 생사의 경계를 넘으며.

그렇게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재능이 없는 이가 벽을 넘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미쳐야 한다.'

재능이 없다면, 광기(狂氣)라도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둔재가 천재와 같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그렇게 서경성뿐이 아닌, 연국 곳곳을 헤집으며, 수많은 정사지간의 문파를 찾아다니며 비무행을 벌였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

"오랜만이군."

나는 김영훈과 산 첫 집에 도착했다.

지난 이 년간, 내 명성은 연국 곳곳에 펴졌다.

서경성의 문파 곳곳을 헤집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덕에 내 명성을 듣고 서경성 사성삼마에서 나를 영입하려는 시도 역시 있었다.

물론 나는 깔끔히 영입 제의를 거절했다.

조직에 관련된 일을 맡게 되면 무조건 개인 시간을 뺏긴다.

'안 그래도 재능이 부족한데 개인 시간까지 뺏기면, 이번 생애에는 절정의 벽을 못 넘을지도 몰라.'

2년 동안 그토록 분탕질을 치며,

정도문파에서 비무를 벌이고.

사도방파에서 비무를 빙자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심지어는 사도방파에서 내게 현상금을 걸어, 객잔에서 자던 중 왠 잡것들이 습격해 와서 죽을 뻔한 적 역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실전 경험은 가공할 만치 쌓였고, 이제는 동급의 일류 후반의 고수와 싸우면 실력의 고저에 상관없이 무조건 1할의 승률은 먹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도, 절정의 경지는커녕 벽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절정의 경지는 도대체 얼마나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김영훈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들어갔다.

"하하, 이게 누구신가. 명성이 자자한 무한투귀 서 소협이 아니신가?"

"···소생 역시 명성이 자자한 영 대협을 뵙습니다."

나는 무림 말투로 나를 맞아 주는 김영훈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놈의 영 대협은 당최 익숙해지지가 않는군. 이놈의 세상은 어찌 된 게 김 씨가 없단 말이냐?"

"뭐, 어쩌겠습니까. 영 대협이 싫으시면 금 대협이라고 불리셔야 할 텐데요."

"쯧, 마음에 안 드는군."

"천하삼대도객, 절산도(絶山刀) 영 대협께서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랬다.

조수월무록을 익힌 김영훈은 이번 생에서 2년 만에 천하삼대도객의 자리에 도달한 것이었다.

'지난 삶보다도 더욱 성장이 빠른 거 같군.'

그렇다면.

이번 생의 김영훈은, 수도자를 이길 수 있을까.

그의 무공은 지난 회차의 김영훈이 필생을 다해 쥐어짜 낸 깨달음을 전승받아, 지난 삶보다도 훨씬 빨리 강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는 더욱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뭐, 잡담은 그만하고, 오래간만에 대련이나 해 보죠."

"하하, 자네 천하삼대도객의 일도(一刀)를 받을 이 기회를 영광스럽게 여기게나!"

우리는 집 안의 비무장으로 들어가, 비무를 시작했다.

'김영훈에게는 잡다한 절기가 안 통한다.'

처음부터 진심으로 간다.

단악검법 일 초, 월악(越岳).

단악검법 십이 초, 칠광일출봉(七光一出峰).

나는 그에게 달려들어 횡 베기를 한 다음, 횡 베기 너머로 일곱 갈래의 검기를 쏘아냈다.

"기도가 2년 전보다는 나아졌군."

투웅!

그러나 김영훈은 칼집에서 도를 뽑지도 않은 채, 칼집 채로 도를 대강 휘둘렀다.

그것만으로도, 내 검기는 모두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어설퍼."

"조금 더 새로운 걸 보여 드려야겠군요."

단악검법.

십삼 초.

요산요악(樂山樂岳).

난 다시 그 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하며 세 번의 참격을 휘두르고, 다시 검을 높이 들어올려 세 번을 내리찍었다.

종횡의 참격이 김영훈을 덮쳐 갔다.

단악검법의 십삼 초 부터는, 하나하나가 절초(絶招)로 불릴 기술들이다.

'못 피한다!'

하지만 김영훈은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칼집을 뻗어 왔다.

그리고, 느린 듯, 부드럽게 내 검초에 맞춰 자신의 도를 대각선으로 두 번 아래에서 위로 휘두른다.

그 부드러운 일격에, 내 검초는 모조리 걷어들여져 버렸다.

'그렇다면 못 걷어들일 일격을···'

단악검법.

십사 초.

기산심천(氣山心天)!

후웁!

전신의 기운이 크게 증폭된다.

웅혼한 내력이 전신 혈도를 타고 흐르며, 검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기운은 산과 같고(氣山), 마음은 하늘과 같아라(心天)!

본디 무형(無形)이어야 할 검기(劍氣)가 응축되며 희미한 형태가 모이기 시작했다.

절정지경에서나 쓸 수 있는 검사(劍絲)의 형태가 억지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우에서 좌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올려 베며 초식을 전개했다.

쿠과광!

가공할 검기가 김영훈을 향해 날아든다.

그리고, 김영훈이 칼집을 들어, 내 검기의 어느 한 곳을 찔러 들어갔다.

그 순간.

째앵!

일순간 강화된 검기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무화(無化)되어 버렸다.

"···."

나는 어이가 없어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산심천은 지금껏 내 나름의 구명절초로, 이 기술을 한 번 사용하면 어떤 상대가 어떤 기술을 쓰든 반으로 갈라 죽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 왔다.

심지어 절정고 수에게조차 어느 정도는 통할 것이라 믿었던 나였으나, 그의 일 초 만에 무화된 지금의 이 상황을 보자, 조금 허탈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힘이 너무 분산되어 있군. 검기를 더욱더 일념(一念)으로 집약시키게나."

"···조언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말을 마친 후, 채 반응할 틈도 없이 기수식을 잡은 그가, 나지막하게 초식 명을 내뱉었다.

"단맥도(斷脈刀), 사 초, 산바람."

피잉!

온다!

나는 '산바람'의 초식을 막기 위해 빠르게 초식을 펼쳤다.

단악검법.

십오 초.

첩첩산중(疊疊山中).

나는 검을 휘둘렀다.

일 검(一劍)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세 갈래로 갈라진다.

다시 검을 휘두르자, 세 갈래가 다시 아홉 갈래로.

다시 검을 휘두르자, 아홉 갈래가 다시 스물일곱 갈래로.

그렇게 계속해서 검무(劍舞)를 펼치며, 내 검기를 계속해서 쪼개 갔다.

얼마 후, 전방을 향해 검기가 무수한 가시덤불처럼 빼곡하게 들어찼다.

파앙!

단맥도 사 초의 산바람.

미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찌르기는 첩첩산중으로 펼쳐진 검기들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무화되어 버렸다.

"허억···! 헉···!"

그러나 나는 첩첩산중의 초식을 펼친 후,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다리로, 겨우겨우 쓰러지지 않고 버텨 냈다.

정신에 걸리는 부하(負荷)가 어마어마하다.

검기를 쪼개는 건 웬만한 집중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검기를 쪼개다 못해 수백 조각으로 잘게 나누어 마치 가시덤불처럼 전방에 세워 벽을 만드는 첩첩산중의 초식은, 펼치는 것만으로도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은 피로감을 선사해 주었다.

절초(絶招)는 괜히 절초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무예의 달인이 극한의 집중력을 짜내 필생의 의지로 펼쳐 내는 것이 절초이다.

보통의 무공에는 하나, 혹은 두 개나 들어있을 무시무시한 절초들이.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이 개량해 준 단악검법에는 열두 개나 더 생겨나 버렸다.

'미친 재능이지, 하여간.'

하지만 그 덕에 나는 단악검법을 펼치며 완전 죽을 맛이었고, 십삼 초 이후의 초식들을 펼칠 때마다 어마어마한 피로감을 느껴야 했다.

물론 효과야 좋았지만.

나는 이 기세를 모아, 다음 초식을 사용하며 김영훈에게 달려들었다.

단악검법.

십육 초.

산중호걸(山中豪傑).

좌상에서 우하로.

우상에서 좌하로.

각각 네 번.

총 여덟 번의 참격이 그를 향해 쏟아진다.

산수화의 초식과도 일견 비슷해 보였지만, 산수화가 참격을 사방으로 쏟아내는 난도질이라면,

산중호걸의 초식은 쏟아져 내리는 참격의 힘을, 상대의 일점(一点)에 집중시켜 터트려 버리는 기술이었다.

여덟 개의 참격이 모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점에 집중되어야 하기에, 이 역시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초식이었다.

"하체가 비었군."

그러나, 김영훈이 하단세를 취하며 내 다리를 노리는 것으로 산중호걸의 초식은 완전히 파해되었다.

부웅!

"크윽!"

나는 그의 칼집에 다리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예, 축하드립니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덕분에 초식들의 문제점들이 하나둘 보이는 듯싶었다.

얼마간 그는 내 약점과 개선점들을 알려 주었고, 나는 김영훈의 말들을 새겨들었다.

그는 나와 십 주야 간 지도 대련을 해 준 후, 다시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나 역시, 다음 비무행을 위해 떠났다.

그리고, 다시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삼 년이 지났다.

***

회귀한 햇수로는 5년째.

만날 당일도 아니었으나, 첨주성의 한 중소방파와 비무를 하고 나온 내게, 김영훈이 찾아왔다.

"오랜만이군, 무한투광(無限鬪狂), 서은현."

"···김영훈··· 맞습니까?"

"하하, 조금 어색하겠지. 이게 말일세···."

3년간, 내 별호는 투귀에서 투광(鬪狂)으로 변했다.

실전 경험은 더더욱 늘었고, 명성 역시 점차 커졌다.

그 외에도 사도방파들을 상대하며 독과 암기 등을 다루는 비열함 역시 늘었고,

지난 세월을 반증하는 흉터들 역시 몸 곳곳에 생겨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경지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일류 후반.

절정의 벽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

그러나, 다시 만난 김영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20대의 그의 모습.

'반로환동! 그렇다는 것은···.'

그는 벌써, 오기조원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나는 문득, 아주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는 5년 동안 끊임없이 실전 경험을 겪고 무공을 갈고닦아도 잡기가 조금 느는 것에 불과한데.

누구는 그저 가진 바 재능을 활성화하는 것만으로 벌써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하하, 오기조원에 경지에 이르르니 환골탈태가 이뤄지고 몸이 젊어지더구만. 그리고 또 삼화취정의 경지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이르렀고. 뭐 그렇게 됐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1년 전에 만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2년마다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처음 헤어진 후 2년. 그리고 다시 2년.

그때마다 만났고, 올해는 지난번에 만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음, 내가 오기조원에 이르고, 연국 각 대문파들을 찾아다니며 비무행을 다녀봤는데 말이지···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서 말이다."

"뭡니까?"

"그건, 이 연국에서는 이미 내가 천하제일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내 일초지적이 안 되더군. 그래서 말이다···."

그가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제안을 하며 말했다.

"이제 천하제일인의 이름으로, 문파나 조직을 운영해 볼 생각인데 말이다. 한자리 줄 테니 혹시···."

"됐습니다. 전 지금 상태가 편합니다."

벌써 저놈의 무림맹주 병이 도진 모양이었다.

아마 저 제안을 수락하면 이번에도 책사나 부문주 같은 게 되어서 소처럼 일할 게 뻔했다.

내 명성도 실력도 지난 삶들과는 달리 더할 나위 없기에, 아마 책사나 부문주가 된다면 훨씬 더 조직 운영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내게 시간은 언제나 부족한데, 조직 운영 때문에 뺏길 수야 없지.'

천재가 5년 만에 오기조원에 이를 동안.

둔재는 5년 동안 여전히 지지부진한 실력이었다.

내 재능으로 절정지경에 도달하려면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그런 만큼, 절대로 내 시간을 빼앗겨선 안 된다.

내 칼 같은 거절에, 김영훈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물러났다.

앞으로 조직을 세우면 지금처럼 몇 년에 한 번씩 만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자신과 함께 가면 늘 붙어서 지도 대련을 해 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이번 생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이미 지난 삶 동안 그에게 수없이 지도 대련을 받아 왔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수많은 실전 경험!

지난 삶의 영훈 형님조차도 내게 일류 후반에 오르면 무수한 실전을 겪어 보라고 했었으니만큼.

지금 그에게 가는 것은 오히려 손해였다.

나는 이번 생애에는 그저 그의 행적을 멀리서 지켜보기로 하며, 다시 끝이 없는 비무행을 이어 갔다.

하늘이 버린 재능(3)

쏴아아아―

나는 동굴 속에서 비를 피하며 빗소리를 들었다.

15년.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김영훈이 무림맹을 창설하고, 초대 무림맹주가 된 지 15년.

그는 천하제일인의 이름으로 3년 만에 연국 무림을 전부 손아귀에 넣었다. 혼란스러운 정사파의 문파들은 전부 안정을 찾았고, 수많은 무인들이 그의 업적을 칭송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몇 년간 무림맹의 대소사가 아닌 무언가 다른 일에 두문불출하는 듯 했다.

'아마 수도자들이 찾아왔겠지.'

수도자들의 힘에 놀란 그는 조수월무록으로 수도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뛰어다닌 것일 터였다.

그리고 무림맹주에 오른 지 5년째.

그는 돌연 무림맹주직을 은퇴하고, 심산유곡에 은거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나는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수도자들과 전 무림의 암중에서 암약하는 수도자들을 상대하러 떠났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10년째.

초대 무림맹주, 영훈의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죽었으려나.'

아니면 이전의 삶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자들에게 악착같이 쫓기면서도 살아있으려나.

나는 이상하게 그가 죽었어도 그리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15년간 미친듯이 비무를 하며.

얼굴 곳곳에 흉터가 남은 것처럼.

내 마음에도 어느덧 흉터가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흉터 속에서, 그는 어쩌면 내 삶에서 희미한 존재가 되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바뀐 15년동안, 내 별호도 다시 바뀌었다.

무한투광에서, 무한투괴(無限鬪怪)로.

그러나, 그 외에는 바뀐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일류 후기였으며, 절정의 벽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언제까지!"

나는 빗물을 쏟아내는 탁한 하늘을 보며, 왠지 속이 답답해져 고함을 질렀다.

"언제까지, 검만 휘두르라는 거냐! 대체 언제까지!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냐! 아직도!? 왜 누구는 검을 휘두르면 깨달음을 얻는데, 왜 누구는 흉터만 얻어야 하는 거냔 말이다!"

하늘은 답이 없었다.

"회귀하고 이십 년간! 이십 년간 쉬지 않고 싸우고, 죽이고, 수련했다! 단 한시도 검에서 손을 뗀 적이 없어!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해야 인정해 줄 것이냔 말이야! 왜 내게는 단 한 번의 깨달음도 주지 않는 거냔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미친 듯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쳤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은 비만 쏟아 낼 뿐이었다.

얼마 후, 내가 내지른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알고 있다. 내 잘못이지."

그래, 모든 것은.

회귀 첫 날.

내가 여우를 마주할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쳤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날 찾아온 돈오를 갈무리했다면, 어쩌면 그날 바로 절정지경에 올랐을 수도 있을 것을.

그날의 깨달음을 잡지 못해, 나는 아직도 나뭇잎을 쫓았던 그때의 검처럼.

여전히 이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그 마음을 되새기지 못한 탓이다.

뿌득···.

나는 이를 악물며, 동굴 속에서 검을 뽑고, 단악검법을 다시 연습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펼쳤던 검로(劍路)가 내 손에서 흘러나온다.

1초식부터 24초식까지의 식(式)과 비기(秘技)가 이어져 나왔다.

15년간 내가 펼칠 때 내보이던 허점을 개선하고.

더욱더 완벽한 검초를 펼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앞으로도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더 하란 말인가!

"아, 아아··· 아아아아!"

나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검초를 펼쳐 본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검초에 약점이 없어졌다.

더 이상 개선할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절정의 벽은 보이지 않는다.

"끄아아아아아!"

어째서 나는, 왜 아직도 이 경지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인지.

그런 의문과 분노를 품으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통스레 우짖을 뿐이었다.

***

비가 그쳤다.

나는 동굴에서 나와, 본래 목적지였던 소열현의 방립문을 찾아가, 비무행을 마치고 나왔다.

나와 방립문 문주, 장로들이 삼 연전을 치렀고,

나는 전부 5초식 안에 그들을 패퇴시켰다.

그들 모두 나와 같은 일류 후기의 고수였지만, 이제는 일류 후기 중에서도 압도적인 실전 경험을 가진 내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동급의 누구도 감히 내 검로를 막아서거나, 끼어들어 파해할 수 없었다.

지난 수 년간 연국 무림 곳곳으로 내 명성이 울려 퍼지며, 내 검법에 대한 연구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그 결과, 내 검법에 대한 파해식이 이곳저곳에 알려졌다.

나는 내 검에 대한 파해식을 찾은 수많은 무림인들을 찾아가 비무를 했고,

다시 파해식에 대한 역 파해식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내 검법에는 허점이 점차 사라져갔고, 오늘날에 이르러.

단악검법은 한없이 무결(無缺)에 가까워져 갔다.

'대문파의 절정 고수들 역시 내 검법을 내가 한층 진화시켰다고 칭찬했을 정도니.'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절정 고수들에게 삼초지적이 될 수 없었다.

절정 고수들을 찾아 비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무결에 가까운 검술로도 절정 고수들은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독과 암기 등의 잡기를 모두 동원해도 말이었다.

파해식에 역 파해식마저 만들어 둔 상황이었으나, 내가 검법을 펼치는 족족 절정 고수들은 내 검초를 모조리 파해해 버린 탓이었다.

역 파해식을 펼칠 새도 없이, 그들은 나를 제압하고, 나는 계속해서 그들과의 비무에서 패배할 수밖에는 없었다.

'일류와 절정을 가르는 벽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그들에게 무수히 패배하면서도, 나는 절정에 이르는 조건조차 알 수 없었다.

예전 무협 소설에서 본 것처럼 공력으로 전신의 미세 혈도를 뚫어보기도 하고.

외공(外功)을 익히기도 하고.

인간이 아닌 짐승들과 싸워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일류의 경지였다.

절정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내공의 화후가 깊어지고, 잡기가 늘고, 조금 더 검술이 강맹해지고, 조금 더 명성이 늘었을 뿐.

나는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

"···후우."

나는 한없이 우울해져, 객잔으로 가 술을 주문했다.

그때였다.

방립을 쓴 한 남자가 내가 앉은 탁자에 대뜸 합석을 했다.

"형장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오만?"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할 뿐이외다."

"나 역시 그 기분을 잘 알지. 해야할 것을 모두 했는데, 눈앞에 길 자체가 없어서 답답한 그 마음. 정말 숨이 턱턱 막히고 거대한 압박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지."

"···."

"하지만 그러고만 있어도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소. 내가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없던 길이 생기지는 않거든. 그러니 별 수야 있나. 어디 정말 다른 길이 없나, 별의별 짓을 다 해 봐야 알지."

나는 이내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떤가, 지금 형장의 심정이 이렇소?"

"···맞습니다, 대협. 초대 무림맹주께서 어인 일로 이 투괴에게 공감하여 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5년만에 보는 김영훈이었다.

그는 방립을 벗으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얼굴은 어쩐지 피곤에 쪄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은현."

"오랜만입니다."

우리는 서로 작게 웃고는 술을 시켜 마셨다.

"몇 년간 무얼 하다 오셨습니까."

"세상에는, 수도자란 족속들이 있더군. 우리가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보았던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괴물들과 같은···."

그는 내게 자신이 수도자들과 전투를 벌인 지난날의 일들을 말해 주었다.

"축기기 수도자까지는 내가 무공으로도 어떻게 상대가 가능했네. 하지만··· 결단기라는 경지의 수도자부터는, 말 그대로 재해였어. 난 결단기 수도자와 맞서며, 그의 손을 자르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을 뿐이었네."

"흠···?"

나는 무언가, 지난 삶과 달라진 부분을 눈치챘다.

'결단기 수도자에게, '도망'쳤다?'

이전의 삶들에서, 그는 그저 결단기 수도자에게 패배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삶에서는 결과가 달라졌다.

무려, 그가 결단기 수도자에게서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것이었다!

'조수월무록을 통해, 그가 이전 삶에서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그것도, 이십 년은 더 빨리!

두근, 두근···.

나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번 생 안에, 무림인이 수도자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희미한 흥분을 느끼며 그를 격려했다.

"영 대협은··· 결국 결단기의 수도자들조차 이길 수 있으실 겁니다!"

"하하, 금칠은."

그는 조금 부정적인 듯 했으나,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그의 무공 재능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었으니까.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하늘이 내린 재능.

하늘이 버린 재능.

그것이, 나와 그의 차이다.

나는 이번 생 안에 절정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반드시, 이번 생 안에 더욱 더 높은 경지를 발견해 낼 것이다!

"자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할 수 있는 것도, 결단기 수도자의 힘을 목격하지 못해서겠지···. 뭐, 그런 건 둘째치고, 내가 오늘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다네."

"찾아온 이유?"

"그래, 바로··· 자네에게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야."

"···! 무슨."

그러나,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앞으로, 나는 결단기 수도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도전할 걸세. 그들에게 도전하며, 내 재능을 극한으로 갈고닦아, 무림인이 수도자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야 말 거야. 무림인의 무공이 더욱더 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일세.

그런 만큼 앞으로 내 목숨은 굉장히 불안정해지겠지. 나는 앞으로 살아 있다면, 5년에 한 번씩 자네를 찾아가겠네. 그리고, 자네에게 내가 그들에게 도전하고 살아남을 때마다 얻은 심득(心得)을 맡길 걸세."

탁!

그는 내게 한 권의 책자를 건냈다.

책자의 제목은 없었다.

"이번에 내가 결단기 수도자와 싸워 도망치며 얻은 심득일세. 그 심득을 바탕으로 조수월무록에 몇 가지 내용을 추가한 게지. 이 서책을 부디 잘 보관해서 후대에 전해주게."

"···."

"그리하여, 언젠가 후대가, 인간의 몸으로 하늘을 노니는 수도자들에게 맞설 수 있게. 그 길을 닦아 주게나. 이게 내가 맡기는 유언일세."

"···맡아 두겠습니다."

"고맙군."

그는 싱긋 웃으며 술잔을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역시 지금 일류 후반에서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해 답답한 모양이네만. 지도 대련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니 필요 없을 것 같고. 과제를 하나 주자면··· 검기(劍氣)를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럼 조금 도움이 될 걸세."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포권을 했다.

얼마 후, 김영훈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딱히 몸을 날리거나 신법을 펼친 게 아닌, 말 그대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지난 삶에서 봤던, 영훈 형님의 마지막 모습과 같다.'

지난 삶의 경지에, 벌써 이른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번 생에 정말로, 무림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왔던지라 아직도 구름이 조금 우중충했으나,

아까보다는 구름이 옅어져 그 너머로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 나 역시 계속 정진하자."

***

김영훈과 다시 헤어지고, 6개월이 지났다.

우웅―

"크윽···!"

나는 그가 내게 주고 간 과제.

'하루 종일 검기를 유지'하는 것을 시도하던 중, 집중력의 고갈로 결국 검기를 해제해 버리고 말았다.

'미친, 검기를 어떻게 온종일 유지하라는 거지?'

단순한 내공 고갈의 문제가 아니다.

검기란 검신합일의 경지에 들어서는 최소한의 조건.

한 마디로, 검기를 하루 종일 유지한다는 건 하루 종일 검신합일을 유지한다는 의미였다.

'사파 놈들이랑 하루 종일 싸울 때도 온종일 검신합일을 유지하는 건 무리인데.'

물론 가능이야 하다.

검신합일이라 함은, 익히고 있는 검법을 완전히 체화했다는 증거이니.

그 검법에 담긴 이치를 하루 종일 행동에 담는다면 가능은 했다.

이론상으론.

'밥 먹고, 똥 싸고, 얘기할 때마저 모조리 검신합일을 유지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 보통 사람의 정신력으로 가능이야 한 일인가.

'절정 고수들도 이렇게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온종일 검신합일을 유지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절정 고수들조차도 듣는다면 학을 떼며 당장 그만두라고 할 정도의 미친 짓.

하지만.

'미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그래.

절정 고수들도 하지 않을 짓이다. 아마 절정 고수들 역시 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해야 한다.

재능이 없기 때문에.

'둔재가 천재를 따라잡으려면.'

천재를 넘어설 정도로 미쳐야 하는 것이다.

부우웅―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검기를 검에 불어넣었다.

'천재보다도 훨씬, 훨씬 미쳐야 한다!'

뇌가 바싹 졸아들어 가는 느낌이다.

기혈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는 이 미친 수련을 이어 가다가, 원기가 상해서 김영훈보다도 일찍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하리.

'아침에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검기를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흡이 가빠 오고, 기혈이 요동친다.

머리가 텅 비어 가며 생각이 잘 되지 않는다.

점심때부터 불어넣은 검기를, 저녁때까지 유지하는 중이었다.

'저녁에 죽어도 좋다!'

나는 그렇게, 검기를 유지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한 중소방파에 들러 비무를 청했다.

***

"오랜만이군."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5년이 지났다.

김영훈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안색이 창백하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원기가 상하려 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서라도 절정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야."

그랬다.

검기를 하루 종일 유지하는 수련을 5년 동안 반복하며.

그동안에도 끝없이 비무와 실전을 겪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일류 후반이었다.

도무지 다음 경지의 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 말에, 김영훈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반로환동으로 젊어져 탱탱해진 그 미간에, 작게 주름이 졌다.

"그 수련을 끊이지 않고 했는데도 경지를 올리지 못한 건가?"

"예. 뭐, 덕분에 검기에 대한 이해도는 동급 무사들보다 훨씬 높아지긴 했습니다."

이제는 검이 아닌 젓가락이나 나뭇가지는 물론이고, 종이나 천에도 검기를 불어넣어 검처럼 사용이 가능하다.

이젠 동급 경지의 무사들에게는 무공에 상관없이 실전 경험과 검기의 이해도 하나만으로 무조건 3할의 승률은 먹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절정 고수들에게는 삼초지적이 되지 않았다.

"흐음···."

그의 눈이 검을 잡고 있는 내 손으로 향했다.

"기이하군. 이전보다도 훨씬 검과 하나가 되었는데, 아직도 절정경에 이르지 못했다라. 자네 정도의 실전 경험을 겪은 이라면 그 수련으로 충분히 절정경에 이르리라고 생각하고 내준 과제였네만···."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것이 내 재능이다.

하늘이, 내팽개쳐 버린 재능.

"···휴우. 그래도 너무 상심 말게. 자네 정도의 열의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절정지경에 오를 걸세. 솔직히 내가 내준 수련 과제이긴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정말로 해내고 있을 줄은 몰랐네."

"감사합니다."

나는 검에 검기를 불어넣으며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제 반나절 동안은 쉬지 않고 검에 검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반나절을 넘어가면 슬슬 머리가 아파 오고 기혈이 요동쳤으나, 그래도 반나절을 더 버티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그 시간을 버티면 기혈이 뒤틀리기 시작하고, 한 시진에 한 번 꼴로 코피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도 아직 의지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을 버티면 정말로 죽을 것을 알기에, 그 이상은 억지로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

'깨달음이 찾아올 때라면 몰라도, 아무 감도 잡히지 않는 지금에야, 그냥 죽는 건 개죽음이다.'

그 때문에 나는 굳이 무리해서 죽기보다는, 그 시점부터는 검기를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아마 정말로 하루 종일 검기를 무리 없이 시전할 수 있다면, 그때는 조금 길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꼭 성공하길 바라겠네. 그리고 여기."

김영훈은 나와 잡담을 나눈 후, 또 한 권의 무제의 책자를 건네주었다.

"이번에 결단기 수도자와 싸우고 얻은 심득이네. 이번에는 내 실력을 정확히 가늠하고, 최대한 시간을 끄는 방법으로 결단기 수도자의 법술을 최대한 버티다가 도망치는 것에 성공했지."

"단지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심득이··· 이 정도인 겁니까?"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 그가 내민 책자의 두께를 보았다.

조수월무록 총본과 두께가 비슷하다.

"결단기 수도자는 자연재해야. 자연재해에게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으니, 이 정도 심득이면 충분히 자연스러운 게지."

"허어···."

나는 혀를 내두르며 그가 내민 심득을 받아들였다.

"···제가 잘 보관하여 후대에 전하겠습니다."

"고맙다, 은현."

그는 껄껄 웃으며, 술을 잔 따라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다시 결단기 수도자를 찾아 다녀 보지. 다음번에도 살아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겠다. 그리고··· 이번에도 수련 과제를 하나 주자면, 이번에는 지나다니는 주변의 '모든' 풍광과 공간을 항상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다녀 보면 좋을 거다."

"주변의 모든 풍광 말입니까?"

"그래, 전투나 비무 시에, 항상 주변의 지형지물을 활용하기 위해 주변의 공간을 머릿속에 담아두곤 하잖느냐. 전투 시에만 행하는 그 작업을, '항상' 할 수 있게 해 보라는 거다."

"그건 무슨···."

지난번 검기에 대한 수련 과제 역시 그랬지만, 이번에 주고 간 수련 과제 역시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말이 풍광을 머릿속에 담는다지, 사실상 나보고 인간 CCTV가 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간각을 항상 깨우고 있으라는 건데.'

안 그래도 검기를 시종일관 유지하느라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데, 여기에 또다시 시종일관 공간각을 유지하라는 소리였다.

'···머리가 터지진 않겠지?'

나는 불길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휴우. 됐다. 김영훈은 지금껏 무림인 중에서 그 누구도 오른 적 없는 고금제일의 경지에 오른, 천하제일무(天下第一武). 그가 저런 과제를 내주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날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은 전부 기억에 담아 두고, 어느 위치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

회귀한 지 햇수로는 30년째.

그리고 공간각을 항상 켜 둔 지는 5년째에 이르렀다.

이제, 검기에 대한 이해도는 그 누구보다도 높아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항상 검기를 유지하고 다니는 이 정신 나간 행위 역시, 이제는 아예 인이 박여 버려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검기를 항상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공간각 역시 머리가 아프기는 했으나, 꾸준히 연습을 한 바.

결국에는 인간 감시 카메라처럼 항시 주변의 풍경과 사물의 위치, 공간의 크기 등을 계산하는 것 역시 아예 습관으로 자 리잡게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니 할 만해졌다.

상시 검기 유지와, 상시 공간각을 수련한 후.

이제는 동급 경지의 일류 무사를 상대로, 공간각과 검기의 이해도, 실전 경험으로만 4할의 승률을 무조건 먹고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고무적인 일은.

'절정 고수를 상대로, 3초가 아니라 4초를 받아 내는 데에 성공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절정 고수와 한 합이라도 더 주고받는 게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니 말이었다.

그래.

나는 분명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언젠간 반드시, 절정에 이르고 말리라!

***

나는 다시 김영훈과 만났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김영훈은.

얼굴에 흉터가 한둘 생겨나 있었다.

"그 흉터는···."

"결단기 수도자와 싸우다 생겼지."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껏 그는, 몇 번의 생을 걸쳤어도 몸에 흉터가 생기는 일 따위는 없었다.

무공을 익히며, 한 번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수도자들과 싸울 때조차 흉이 남을 뻔한 상처는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런 그가 흉터를 입은 모습은, 참으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번에는···."

그러나, 흉터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결단기 수도자의 손을, 두 번 연속해서 자를 수 있었다! 그러고도 도망쳤지! 하하! 하하하하!"

"···!"

"하하하, 너도 봤어야 하는데. 그 고고한 수도자 놈이 한낱 범인(凡人) 따위에게 당해서 분노에 눈이 돌아간 모습을!"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지금 무림인의 한계를 점차 뛰어넘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씩, 전승된다.'

내 회귀에 의해 이득을 얻는 이는, 비단 나 자신뿐이 아닌 것이다.

세기의 천재 역시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자신의 한계를 넘어, 그 너머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턱―

난 그가 내게 내민, 이번에 결단기 수도자의 손을 두 번 연속해서 자르며 얻었다는 심득을 받아들었다.

'이 심득들을, 다음 삶의 김영훈에게 준다면···.'

어쩌면, 그는 또다시 한계를 벗지 않을까?

그의 천무(天武)의 자질이라면.

계속해서 길을 개척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무림인의 몸으로, 수도계를 평정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내 목표는 기본적으로 오기조원에 이르러 수도자가 되어, 경지를 높이고 다시 이전 세계로 돌아가 회귀 능력이 없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꼭 무림인이 수도자를 이기는 것이 삶의 목적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그의 행적을 보고 있노라면.

무공(武功).

수도선술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익힐 수 있는, 그런 무(武)가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과 기대가 샘솟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맡아 두겠습니다."

나는 그의 심득을 받아들였고,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넌···."

문득,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어쩐지 동정의 빛이 어렸다.

"···아직도 절정경에 이르지 못했군."

"척 보면 알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네 시선만 봐도 알 수 있다. 너도 절정경에 이르면 이해가 될 거고. 사실 검기를 상시 유지하라느니, 공간각을 상시 활성화하라느니 하는 건 모두 절정경에서 얻을 수 있는 [시야]를 네 육신의 감각을 이용해서 최대한 모방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정도만큼이나 절정경의 세계를 모방하게 했음에도, 어째서 네 시야는 모방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를 않는 건지···."

"···."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재능이 둔재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숫제··· 네가 아예 무(武)에 맞지 않는 체질인 건지도."

"···."

김영훈은 내 침울한 표정을 보며 다시 잔을 들이켰다. 나 역시 말없이 잔을 들이켰다.

"좋다, 그럼 될 때까지 네게 절정경의 세계를 모방시킬 수밖에 없지. 앞으로, 네가 해 왔던 것처럼.

공간을 기억하고. 소리를 기억하고, 피부에 닿는 온도와 촉감을 기억하고, 미각마저도 기억해라.

오감의 모든 것을 끊임없이 활성화해서 극한까지 단련해,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상태에서도 역시 검기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계속해서 실전과 비무를 겪어라. 이것만이 재능이 없는 네가, 절정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절정 고수들의 '시야'라.

"···제게 그런 것들을 알려 주시는 이유는."

지금껏, 절정경 이상의 무인들은 절대로 일류 이하에게 절정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이해도 못하고,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이 일류 고수에게, 단편적으로나마 절정지경에 대한 정보를 전해 주는 경우는 하나.

"제가, 절정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까?"

일류의 극의에 달해.

절정의 영역을 넘보는 이들.

초일류의 무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경우였다.

"···솔직히, 네 손을 보면 어째서 아직도 일류 후반인지 알 수 없다."

김영훈이 검을 잡은 내 손을 보며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절정 이상의 무림인들은 그 아래의 존재들과는 완전히 다른 눈을 가지게 되지. 삼화취정, 오기조원도 각자 마찬가지고. 그리고··· 오기조원의 극한에 달한 내 시선으로 봤을 때.

넌 지금 네 검과 손이 반쯤 녹아들어 있는 형태다. 보통의 일류 무사는 그즈음 되면 절정 고수로 넘어가곤 하는데, 넌 어째서 아직도 '시야'가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단편적으로 정보를 주는 거다."

검과 손이 반쯤 녹아들어 있다라···.

나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냥 손이 검집에 올려져 있는 형태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내가 최근 간혹 느끼는 기분이었다.

마치 검과 손이 녹아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데 오기조원에 이른 고수는, 내 심상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멀다.

도대체 저 경지에 도달하려면···.

아니.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감사합니다. 귀한 조언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수련하겠습니다."

끄덕.

그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금 내 눈 앞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객잔에서 시킨 요리를 전부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간을 기억하고, 다음은···.'

그래, 소리를 기억해 보자.

나는 들려오는 모든 잡다한 소리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뇌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 역시 익숙해질 것이다.

소리가 점차 익숙해지면, 다음번엔 온도와 습도, 촉각 등의 정보를.

다음 번엔 미각에 대한 정보를.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실전을 겪어.

'반드시, 절정 고수에 도달할 것이다!'

하늘이 버린 재능(4)

시야에 들어오는, 내가 거니는 모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인지하는 것은 보통 어지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것을 상시 검기를 유지하는 수련과 함께한다면 더더욱.

그런데, 이 일에 내가 지나는 모든 순간에 들리는 청각적인 청보를 인지하는 수련이 추가되었다.

단순히 저잣거리에서 떠드는 청각 정보만 포함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락, 사라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

후우, 후우, 후우.

숨소리.

그 모든 소리를 항상 의식적으로 인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지럽다.'

이 모든 짓을 동시에 하자, 머리가 아픈 것은 둘째치고, 어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 상태라면 비무를 할 수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더 이상 비무할 문파도 없는 와중에.'

약 30년간 연국 곳곳을 쏘다니며, 절대 다수의 중소방파에 들러 비무를 해 보았다.

간혹 대문파들 역시 최소 한 번씩은 들러 비무를 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연국에서 안 가 본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제는 연국에서 날뛰는 산적 내지는 수적 놈들과 싸우며, 그들을 잡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런 사파 녀석들을 비무도 아니고, 잡으러 들어가면 녀석들은 절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막장인 놈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벽력탄까지 구해서 던지는 놈들도 있을 지경이었으니.

그런 놈들을 상대로, 이 어지러운 상태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을런지.'

후우.

나는 한숨을 쉬고, 검을 다잡았다.

어차피 모두 내가 선택한 길.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길을 걸어갈 것이다.

***

나는 눈 앞에 쌓인 6권의 책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살아남으셨습니까."

"그래, 이번에도다."

15년이 흘렀다.

회귀한 햇수로는 45년.

김영훈과는 그동안 세 번을 더 만났고, 세 권의 심득을 더 맡아, 내가 받게 된 김영훈의 심득은 총 6권 분량에 이르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시각, 청각은 물론이고.

촉각, 미각, 후각 등의 정보 처리 역시 상시로 능숙하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일류 후기의 무인을 만나면, 오감을 이용한 정보의 파악.

그리고 검기의 이해도와, 막대한 실전 경험으로 인해.

동급 경지의 무인을 상대로는 무조건 7할의 승률을 점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는 단악검법의 검초가 가진 위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시의 가정이기 때문에, 내 무공의 위력까지 생각하면 승률은 9할 9푼에 이르렀고.

비무가 아닌 실전이어서 독과 암기 등 잡기의 사용까지 허용된다면, 나는 일류 후기의 무인을 상대로 10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오감을 사용한 정보 처리 능력과, 상시 검기 사용으로 인한 검기의 이해도를 더한다면,

나는 이제는 절정 고수와도 약 10~20합까지를 맞붙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상은 대결을 이어가기가 힘들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나는.

아직도.

절정 고수가.

되지.

못했다.

아직도!!!

아직도!!!

"결단기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내 존재가 퍼졌는지. 수배가 된 모양이더군. 두 명의 결단기 수도자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도망쳤지. 그래도, 한 녀석의 뺨에 작은 상처를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더욱 더 많은 심득을 얻으셨군요."

"심득은 무슨. 그래 봤자··· 아직도 결단기 수사와는 제대로 맞붙을 수 없다. 도망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그들의 백초지적이 될 수 없어. 유의미한 타격조차 입히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했다.

"솔직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이르른 이··· 오기조원의 극한이. 무림인의 [끝]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조수월무록을 창시한 무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 수 있겠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무공으로는 수도자들을 이길 수 없어."

나는 잠잠히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천하무림을 경악하게 할 심득을 여섯 권이나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찻잔을 쥔 채 허망한 웃음을 짓는 그 모습.

분명 그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이 버린 재능을 가졌다.

분명 나와 그는 극과 극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김영훈에게서 내 모습이 비춰졌다.

몇 번의 생을 노력해도, 절정지경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내 모습.

몇 번의 생을 반복해도, 수도자들을 이길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

분명 하늘이 내린 천재와.

하늘이 버린 둔재이거늘.

어째서, 이렇게 닮아 보이는 걸까.

"그나저나, 저는 왜 아직도 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하는 건지. 저도 역시 답답하군요."

김영훈은 조금 씁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검기를 비롯해서, 절정경의 고수들이 사는 세계를 최대한 모방하게 했음에도 결국에는 이르지 못한다라··· 뭐가 필요한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군."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오랜만에 지도 대련이나 해 보지."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요."

나와 김영훈은 객잔에서 나와, 인근 숲속으로 향했다.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나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현재 칠 주야간 쉬지 않고 유지 중인 검기가 내 검에서 일렁인다.

"검기의 이해도가 상당하군. 아마 절정지경에 오르면 검사(劍絲)의 단계까지는 빠르게 올라가겠어."

김영훈이 내 검기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절정지경에 오르면이란 가정은 의미없다.

이제 회귀 45년째이다.

내 수명은 이제 약 5년이 남았고, 그 안에 절정 고수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무려 평생을 바쳐 와도 오르지 못했던 절정지경이다.

5년 안에 무슨 특별한 깨달음이라도 오겠는가.

"그럼, 가겠습니다."

나는 형형한 안색을 빛내며,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십육 초.

산중호걸(山中豪傑).

촤아악!

좌상에서 우하로 여섯 갈래.

우상에서 좌하로 여섯 갈래.

총 열두 갈래의 검기가 김영훈의 심장.

일점을 향해 몰려든다.

티잉―

김영훈은 도를 뽑지도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튕겨 내자 내 초식이 단번에 무화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른 초식을 펼쳐 냈다.

단악검법.

십이 초.

구광일출봉(九光日出峰).

이전보다도 한층 진화한 검식이, 아홉 갈래의 검기를 그에게 쏘아 낸다.

"허점이 많이 없어졌군."

슈슈슉!

김영훈은 빠르게 신법을 펼쳐 내 검기를 모두 피해 내며 나직히 칭찬을 해 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다시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십칠 초.

능곡지변(陵谷之變).

부웅, 붕, 붕!

사방팔방으로 검기(劍氣)를 날려, 땅 아래 곳곳에 침투경의 원리로 대지에 흡수시킨 후, 시간차를 투고 폭발시키는 단악검법의 절초.

콰광, 콰앙!

콰과광!

곧이어 주변의 지형 전체가 내 의지 아래 변화한다.

땅 속 곳곳에서도 지형을 흔든 검기 몇몇이 튀어나와 김영훈에게 쇄도해 갔다.

부웅―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다시 가로로 휘두르자, 내가 쏘아 낸 검기들은 모조리 그 힘을 잃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단맥도, 팔 초, 산허리."

부웅!

그리고, 그가 내게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

쿠과과광!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도강(刀罡)이 지반을 뒤집어 엎으며 나를 향해 쇄도한다.

단악검법.

십팔 초.

공곡전성(空谷傳聲).

부웅―

검에 검기를 불어넣는다.

동시에, 검에서 힘을 뺀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으나, 공곡전성의 초식은 실제로 그렇다.

검에 검기를 불어넣지만, 검기의 형태는 유지하되 검기에서 모든 의(意)와 잡다한 힘을 빼버리고, 그저 기(氣)만이 들어있는 공(空)의 형태를 취하게 한다.

"하아아아아···!"

나는 필생의 집중력을 다해, 공(空)을 유지한 검을, 나를 향해 쇄도해 오는 도강에 가져다 대었다.

꾸웅―

거대한 압박이 내 팔을 타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향해 쇄도해 왔던 도강이, 내 검에 들어찬다.

내 검에 나의 뜻을 비우고, 상대의 뜻을 채워 넣는다.

그런 후.

빙글―

나는 그대로 반바퀴를 돌아,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방향으로 강기를 떨쳐 내 버렸다.

쿠과과광!

김영훈이 날린 산허리의 초식이 날아간 곳은, 수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거대한 암반이 무너졌다.

"허억··· 허억···!"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리를 부들거렸다.

공곡전성은 본디 내 검에 상대의 기(氣)와 의(意)를 그대로 담아, 다시 상대에게 되치는 반격기였다.

그러나 방금 그 공격에는 겨우 떨쳐 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기수식을 잡으며 달려들었다.

단악검법.

십구 초.

산명곡응(山鳴谷應).

투웅!

검음(劍音)이 진동한다.

동시에, 내 검기가 파(派)의 형태로 변하여 천지사방으로 뻗쳐나가는 듯하더니, 일순간 김영훈을 향해 응집되었다.

피하는 게 불가능한 절학!

그러나,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도강이 뿜어져 나왔다.

부웅, 붕, 붕, 붕, 붕!

그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동시에, 그가 한 번 손을 놀릴 때마다 파(派)의 형태로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검기가 모조리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투웅, 퉁, 퉁, 퉁, 퉁!

수십, 수백, 수천 갈래는 될 무수한 검기를, 모조리 쳐 낸 그는 춤을 멈추고는 다시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단맥도, 구 초, 용릉(龍陵)."

쿠구구구!

다시금 가공할 도강이, 마치 구불거리는 용과 같은 형세로 내게 날아왔다.

'받아 낼 수 있을까?'

아니, 받기는커녕 떨쳐 내기 위해 검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저 초식에 담긴 변화에 휘말려 전신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조금 무리를 해야겠군.'

정면에서 받아 낸다.

단악검법.

이십 초.

구산팔해(九山八海).

그 자리에서 검을 들고 한 번 회전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그렇게 한 번의 회전을 할 때마다, 검속과 검력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총 아홉 번의 회전을 마쳤을 때 즈음.

내 검에 담긴 검력(劍力)은 가공할 만치 거대해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전신전령을 다해,

팔방(八方)으로 눈앞의 도강을 베어 갔다.

콰과과광!

거대한 폭음이 들렸고,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이 박살 나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곧이어,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나는 뒤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커억! 컥···."

나는 뒤로 나동그라져, 아름드리나무에 그대로 박혀 버린 후 피를 한 줌 토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나 내 패배였다.

"제길.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 같습니까."

"흠···."

김영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르겠군. 너는··· 왜 아직도 그 경지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너는 진즉에 절정 고수가 되었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나는 여지껏 절정은커녕 그 비슷한 깨달음도 얻은 적이 없었다.

"기이하군. 기이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흠···."

잠시 고민하던 김영훈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계기가 부족한걸지도 모르겠군."

"계기···?"

"그래. 계기. 간절함이나, 원동력 같은 것 말이다. 네가 극한의 집중력을 짜내서, 재능의 한계를 넘어 버리게 할 만한···."

"계기는 무슨 계기란 말입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50년을 넘게 검을 잡고 휘둘러 댔습니다! 평생을! 이 일생을 바쳐서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대체 어떤 계기를 얼마나 더 간절하게 갈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나는 전신이 쑤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평생을 일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어! 그런데 도대체 뭐가 부족하냔 말이야! 뭘 더 해야 하냔 말이다! 전신 세맥도 전부 타통하고, 이제는 잘 때마저 검에 손을 대고 검기를 흘리면서 잔다!

꿈에서도 꿈속 풍경과 꿈속의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왜! 왜!!! 도대체 왜 내게 다음 경지를 보여 주지 않는 거냔 말이다!

도대체 왜!!!"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일흔이 다 된 늙은 몸으로 이러는 것이 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생을 검을 쫓아 다음 경지를 갈구했음에도 다음 경지가 무엇인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랬을진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까.

"왜··· 대체··· 왜···."

끄흑, 끅···.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김영훈은 그런 나를 착잡하게 쳐다보는 듯하더니, 손가락을 펼쳐 내가 날아가 박혔던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스팟―

아름드리 나무에는 곧이어 상당한 분량의 무공 구결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너와 대련하며 네 부족한 부분을 메워 줄 무공을 창안해 보았다. 위로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이것이나마 익히며 마음을 다스리길 바라지."

말을 마친 김영훈은 다시금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얼마간 하늘을 쳐다보다가, 그가 남겨 둔 무공 구결에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남긴 무공은 두 개였다.

산군무(山君武)와 월악보(越岳步).

그 짧은 지도 대련을 하며, 무공을 두 개나 날름 창안하고 간 것이었다.

난 그 가공할 무공 재능에 혀를 내두르며, 천천히 두 개의 무공을 탐독했다.

산군무의 경우, 신법(身法)에 속했다.

산을 지배하는 산군(山君)의 기세로 적을 압박하며, 범과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방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월악보는 보법(步法)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 어떤 보법을 밟더라도 단악검법 일 초, 월악(越岳)의 태세를 취할 수 있는 보법이란 것이었다. 단악검법의 특성상, 일 초 월악의 다음으론 어떤 초식도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보법을 밟으며 무수한 연계기를 사용하는 게 가능한 무공이었다.

'산군무와 월악보를 동시에 사용하면.'

산군(山君)의 기세로 적을 압박하며 월악보로 끊임없이 몰아치는 게 가능하다.

상대의 피를 말려 죽이는 무공인 것이다.

'거기에, 이 둘은 단악검법에 완벽히 짜 맞춰진 무공이다.'

단악검법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는 무공들이었기에, 단악검법에 맞춰서 익히기도 쉬운 편이었다.

나는 문득, 내 무공 실력을 생각해 보며 혀를 찼다.

"이제는··· 일류 무사를 상대로는 잡기를 쓰지 않고도 10할의 승률이겠군."

나는 이제, 일류의 테는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절정은 도달하지 못했다.

일류와 절정의 사이 그 어딘가.

그것이 현재의 내 실력인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경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계기라."

나는 김영훈이 해 준 말을 곱씹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

세월은 다시 유수처럼 흘렀다.

다시금.

회귀 후 50년이 흘렀다.

이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일류는 넘었으나, 절정은 아닌 상태였다.

이젠 검을 휘두르는 것도 지쳤다.

지난 삶에서야 죽기 직전까지도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 삶은, 지난 삶보다도 실력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고됬다.

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

50년 동안 검을 휘둘렀다.

그랬음에도 절정 고수가 되지 못했다.

죽을 때가 다 되어 검을 휘둘러 봤자 뭘 하나.

어차피 똑같을 거다.

"···죽었소?"

나는 그날도 검을 휘두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김영훈은 5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결단기 수도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했으니, 어쩌면 결단기 수도자 두어 명에게 합공을 받아 잡혀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당신이나 내 천명인가 보군."

내가 죽을 날이 언제였더라.

아마 사흘 내로 내 원기가 다하고, 나는 죽을 터였다.

지금 나와서 검을 휘두르는 것 역시 필생의 의지력으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한계를."

붕!

"넘으려 해도."

붕!

"인간인 이상."

부웅!

"더 나아갈 수··· 없는 거요."

붕, 붕, 부웅!

후우···.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망연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재능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여기까지인 거고. 당신의 재능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인 것이겠지."

그래.

다음 생부터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어차피 절 정고수는 평생을 바쳐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차라리 수도자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영질을 얻게 할 약이라도 달라고 부탁해 보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우리 범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하늘이 정한 운명은 벗어날 수···."

"커헉!"

"허엇···!"

순간, 김영훈이 내 옆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피를 토하면서.

"커헉, 쿨럭···컥···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서은현."

"아, 아니···."

"커억··· 크극. 끄르륵···."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의 양 팔은 잘려 있었고, 한쪽 눈 역시 참흔(斬痕)이 새겨져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런 젠장, 뭐 하다가 온 거요. 상태가 심각하군."

나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를 진맥하고 의료 도구를 가지러 가려 했다.

그때, 뭔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으응?"

뭐지?

양팔이 잘린 것 아니었나?

무언가, 투명한 뭔가가 내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피를 토하면서도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봐라!!!!! 결단기 수도자의, 한쪽 팔을 터트린 댓가다!!! 이 내가, 결단기 수도자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

"뭣···?"

"이 내가!!!"

그의 눈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필시.

가이없는 광기(狂氣).

"내가! 이 내가!!! 무림인이 도달할 수 있는, 오기조원 저 너머의 경지를!!! 이 두 눈으로 보았단 말이다!!!"

그는 미친 듯이 피를 토해 내면서도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불태워 도달했다! 자, 봐라. 네게, 네게 보여 주기 위해 수백 리를 주파해 왔다. 네게, 내 유언을 맡기기로 했으니까!"

우웅―

김영훈의 머리 위로 도기(刀氣)가 맺혔다.

그러나 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허공에 내공을 투사해 기운을 덧씌우는 건 그가 오기조원에 이르고 나서도 몇 번 보여 준 신기였으니.

점차 도기가 빛을 뿜으며, 그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강기(罡氣)였다.

'여기까지는, 오기조원의 경지에서도 하던 건데.'

그러나, 그의 강기가 또 한 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건···."

강기가, 동그랗게 말리며 압축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삶 동안 김영훈을 따라다닌 나 역시도 처음 보는 변화였다.

마치, 그가 오기조원에 처음 진입했던 그 날.

그의 머리 위에서 떠 있던 다섯 개의 작은 구체들과 같이.

강기는 그렇게 작은 환(丸)의 형상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으로···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터트릴 수 있었다. 이전에는 암습이나 기습으로만 싸워야 했던 축기기 수도자들과도, 이것만 있다면 정면에서 힘싸움을 벌이는 게 가능하다! 봐라, 은현아! 이게, 내가 평생을 추구하여, 기존 무림의 무학을 뛰어넘은 결과다!"

부웅!

김영훈은 허공에 맺힌 환 형태의 강 덩어리를, 그대로 저 뒤쪽.

그러니까 내 집이 있는 곳으로 날렸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오며, 내가 마련한 집이 폭발해 버렸다.

무한투괴로 50년을 살며 쌓아 온 모든 돈을 쏟아부어 지은 내 저택이, 그의 일 초에 박살이 나 버린 것이었다.

"내··· 집···."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분노가 치밀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가 펼쳐 낸 무공의 위력을 살펴보았다.

'삼 층 건물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잔해도 거의 남지 않았어. 하인들이 마침 없어서 마련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능히 수백 명을 일격에 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마 남지 않은' 잔해에서 보이는 수백, 수천, 수만에 달하는 도흔(刀痕).

저 강기 덩어리에는, 수만에 달하는 도강(刀罡)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다. 지금껏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이르러 보여 주었던 그 어떤 무공보다도 강인한 위력이야.'

축기기 수도자와도 정면에서 힘 싸움을 벌일 수 있다던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닌 듯싶었다.

더군다나 월수궁무록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암습과 도주에 특화되어 있기에, 결단기 수도자에게 암습을 했다면 충분히 팔이라도 터트릴 위력인 것 같았다.

"이걸··· 보여 주러··· 네게, 왔다. 은현아···."

그는 죽어 가며 작은 목소리로 몇몇 구결을 읊조렸다.

"이··· 구결들을··· 잘 기억해 다오··· 그것들이··· 내가 얻은 심득을, 압축한··· 것이니. 부디, 내 무공들을, 후대에, 후대에···."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의 혈을 짚어 지혈을 한 후, 가까운 의원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부웅―

내 집의 상공으로, 한 청포 중년인이 날아왔다.

"찾았군. 무극괴(武極怪). 이런 곳에 도망을 온 건가. 여봐라, 범인(凡人)! 그놈은 하늘에 오를 수도를 닦던 수도일족에게 큰 죄를 범한 악인이니, 그 녀석을 두고 떠나라!"

"···이 자를 벌하시려 찾아오셨습니까."

"그렇다. 설마 네놈. 무극괴의 지인인가? 그래서 그를 감싸려는 것이야? 소용없는···."

타닷!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 김영훈을 등에 업고 가까운 산지로 향했다.

"쯧, 무극괴의 지인인 것 같은데. 무극괴에게 우리 수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가?"

중년인의 목소리가 천지사방을 웅웅 울리는 듯 했다.

"하하, 뭐 그래. 마지막 여흥이라 생각하고 조금 즐겨 주지. 자, 도망쳐 보거라."

촤악!

중년인이 있던 방향에서 검녹빛이 터져나오는 듯 하더니, 새카만 덩어리 대여섯개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쿵, 쿵, 쿵!

지상으로 떨어진 덩어리들은 이내 몸을 일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쫓아왔다.

'저건··· 시체?'

움직이는 시체.

강시(剛屍)였다.

키야아아아!

크르르륵!

크웨에엑!

강시들이 나를 쫓아온다.

하늘에서는 청포 중년인이 둥실둥실 떠서 나를 내려다보며 쫓아왔다.

"젠장, 늘그막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나는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나무가 빽빽한 숲속으로 도망쳤다.

강시들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늙은 나와는 다르게, 이미 죽은 저것들은 쉬지도 않고 돌진해 왔다.

"그나저나 무극괴라니, 수도자들이 붙인 별호입니까? 독특하군요."

"···."

나는 숨이 옅어져 가는 김영훈이 의식을 붙들 수 있도록, 도망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무극괴와 무한투괴, 두 괴(怪)가 늘그막에 강시한테 쫓기다니, 정녕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젠장, 당신 수도자들 쫓아다니며 싸움 걸겠다 할 때부터 이리될 건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아예 이기시든지, 팔 하나만 터트려 놔서 이게 뭡니까? 예?"

키야아아악!

어느새 가장 가까이 나를 따라온 강시가 나를 향해 손톱을 뻗쳤다.

"빌어먹을, 시체니 독이 통하지도 않을 테고."

푸콱!

나는 암기를 날려 강시의 발목 관절에 정확히 암기를 박아 넣었다.

그 덕에 한참 달려오던 강시는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쳐박혔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더더욱 멀리 도망쳤다.

"이런 젠장. 반로환동해서 젊은 몸인 당신이 날 업고 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숨차서 뒈지겠군요. 왜 양팔은 또 잘려서 와 가지곤."

크아아아아!

강시들은 내게 지칠 줄을 모르고 달려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지나고, 밤이 지났다.

해가 몇 번이나 뜨고 졌을까.

"허억, 허억···."

나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야 말았다.

등 뒤로는 커다란 절벽이 길을 막고 있었고, 앞으로는 강시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놀랍군. 범인 주제에 내 강시들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버티다니."

"허억··· 헉···."

나는 하늘에 떠 있는 청포 중년을 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이미 그 무극괴는, 죽지 않았느냐. 범인아."

"헉···허억···."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50년을 단련해 온 마지막 오기로 쓰러지지 않으며 수도자에게 말했다.

"그런 건··· 알고 있소. 일류 의원이, 시체도 못 알아볼까 봐. 김영훈, 이 미치광이가 결국 과다출혈로 죽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러면 왜 도망 다닌 거지? 범인, 나는 그 무극괴의 목에만 관심이 있다. 네 하찮은 신병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냥 시신을 버리고 도망쳤으면 됐을 것을."

"흐, 흐흐··· 흐흐흐."

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천천히 김영훈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자는··· 내 무공 스승이기 때문이오. 스승의 사체를, 당신이 수도자라곤 하나, 외인에게 넘겨주는 것이 맞겠소?"

단악검법도.

용맥기공도.

산군무와 월악보도.

그 외에, 내가 이 경지까지 올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도.

김영훈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는 내 고향 사람인 동시에, 내 무공 스승인 셈이었다.

"내 무공 스승의 목을 가져가려면, 우선 내 목부터 쳐야 할 것이오!"

"흠, 감히 수도자에게 큰소리를 치다니. 배짱이 두둑하군. 보아하니 원기가 소진되어 가는 듯한데. 수명이 남지 않았다고 배짱을 부리는 건가?"

내 고함에, 청포 중년인이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범인 주제에 수도자를 이리 무시하다니. 범인들은 수도자가 뭔지 이해를 잘 못 하는 듯하군. 곧 죽을 거라 겁이 없는 것이냐?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게지? 그렇다면 보여 주마. 수도자에게는,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웅―

청포 중년인이 무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무언가 법술이 날아올까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법술이 향한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이, 이건···."

수도자의 법술은, 김영훈의 시체에 깃들었다. 동시에, 죽었던 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우리를 포위하던 강시 둘이, 각자 한쪽 팔을 떼어내서 막 일어난 김영훈의 시체에게 던졌다.

김영훈의 시체의 어깻죽지로, 강시들의 팔이 날아가 척 붙었다.

"강시···?"

수도자는, 그의 법술로 김영훈을 강시화시킨 것이었다.

"버러지 같은 범인 놈. 감히 수도자의 앞에서 고함을 지른 값을 치르게 해 주마. 자, 무극괴여. 네 제자라는 놈을 네 손으로 죽여 봐라."

"끄···아아아···."

김영훈의 시체가 휘청이는 듯싶더니, 내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황급히 검을 꺼내 그의 일격을 막고 뒤로 물러났다.

"이··· 간악한 수도자 놈···!"

죽은 이의 고혼(考魂)을 이리 모독하다니!

나는 이를 악물며, 강시가 된 그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 냈다.

'다행히 생전의 무학은 쓰지 못한다.'

그저 강시의 힘과 속도로만 나를 밀어붙일 뿐이었다.

물론 수도자가 불어넣은 힘이 상당히 무시무시한 모양인지, 단순한 힘과 속도로만 따져도 늙은 몸인 내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제길, 제길!'

일 검 일 검을 내리칠 때마다, 눈이 충혈된다.

죽은 김영훈을 향해 내리치는 내 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모독이나 다름없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기수식을 잡았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빨리 끝내 주자.

단악검법.

이십일 초.

천지(天池)!

옛 기억이 흘러든다.

―단악검법의 이십일 초는 천지(天池)라는 초식인데··· 다른 초식들은 다 협곡이나 봉우리, 혹은 산이 들어가는 이름입니다만, 왜 이십일 초는 이런 이름일까요?

이번 생애 초기.

김영훈에게 떠보듯이 물었던 질문.

지난 삶의 그가 개량해 준 단악검법에 들어 있던 초식이니, 혹시나 알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음, 천지라. 나는 백두산 천지가 생각나는구만.

―백두산 말입니까?

―하하, 그래. 이 세계에도 백두산 천지 같은 게 있나 보지? 하하, 아니면 우리처럼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지은 초식 명이거나.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천지(天池).

하늘을 비추는 거대한 호수.

가장 높은 산 위에 자리한 광대한 웅덩이.

그 지형의 기세가, 자연히 내게서 뿜어져 나온다.

천지의 심상과 더불어, 김영훈에게 무공 지도를 받았던 무수한 순간이 떠올랐다.

단악검법의 구결이 스쳐 지나간다.

천지(天池)는 하늘의 천태만상을 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아니한다.

구결에서 상징하는 하늘이란, 나와 무(武)를 겨루는 대상을 의미하고.

그를 담는 호수는, 나 자신의 일검(一劍)을 의미한다.

파앙!

검기(劍氣)가 김영훈의 전신을 쓸고 지나가고, 내 검은 검집에 납검(納劍)되었다.

찰나, 그의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단악검 이십일 초 천지는 상대의 경맥을 흐르는 모든 '힘'을 일순간 내 검기로 빨려들게 해 상대의 움직임을 잠시간 제압하여 내 검 속에 가두는 기술이었다.

일류 의원이자 기경팔맥의 달인인 나이기에 펼칠 수 있는 기술.

오로지 나에게 짜 맞춰져 만들어진 무공이기에, 내가 아니면 펼칠 수 없는 초식.

쿠구구구―

납검한 검 속에서, 잠시간 빼앗은 힘이 날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사라지겠지만, 나는 이 기운을 그대로 보전하며 다시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이십이 초(二十二 招)."

일종의 개념이자, 이론인 이십삼 초, 이십사 초를 제외한.

사실상 단악검법의 오의(奧義).

'시체가 멀쩡하면, 수도자 놈에게 강시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평안히 잠드시길.'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

단악검법 오의의 내용물은 거창하지 않았다.

산악을 자르기 위해(斷岳) 만들어진 무공답게, 무식하게 칼질을 하는 것뿐.

단악검법의 일 초 월악(越岳)부터 시작해, 이십일 초 천지(天池)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식을 일거에 상대에게 쏟아붓는 것!

그것이, 단악검법 오의, 단악이었다.

일 초, 월악(越岳).

발검과 함께 그의 시신에게서 빼앗은 힘의 흐름을 타고, 가로로 그를 베어 들었다.

이 초, 입산(入山).

빠르게 하단세로 전환해 그의 다리를 가격하고.

삼 초, 등맥(登脈).

하단세에서 검을 잡고 올려 베며.

사 초, 유릉(流陵).

구불구불한 검기를 날려 찌른 후.

오 초, 괴암(塊巖).

회전하며 수 번의 참격을 날린다.

육 초, 기석(奇石).

파지법을 바꿔 변초를 주고.

칠 초, 심산(深山).

다시 품 안으로 들어가 대각선으로 올려 벤 다음.

팔 초, 유곡(幽谷).

반격을 하지 못하게 내게 향하려는 힘을 비틀어 흘려 무화시킨다.

구 초, 산수화(山水畵).

좌우로 대각선 형태의 검기를 연달아 세 번 날리며 도합 여섯 번의 참격을 꽂아 넣고.

십 초, 용맥(龍脈).

기공을 끌어올려 크게 다시 베어.

십일 초, 단애(斷崖).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고.

십이 초, 구광일출봉(九光日出峰).

그 너머로 아홉 갈래의 검기를 쏘아 냈다.

이쯤 되자, 김영훈의 시체는 이제 숫제 너덜너덜해졌다.

'완전히 조각낸다.'

수도자가, 고혼을 모욕하여 다시 일으킬 부분조차 없도록!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도 꿈틀거리며 다시 내게 공격을 가해 왔다.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

'피해야 한다!'

아니, 피해서 어쩌려고?

어차피 내 수명은 곧 끝이다.

이미 죽을 목숨.

지금 이 순간, 내 스승의 마지막이 더는 모독되지 않게, 모조리 불태워라!

"흐아아아아아!!"

십삼 초, 요산요악(樂山樂岳)

다섯 번의 참격을 내리찍고, 다시 다섯 번의 참격을 그었다.

열 번의 참격이 종횡무진하며 그를 덮친다.

키야아아아!

그러나 그의 손이 참격의 막을 뚫고 내게 덮쳐 왔다.

죽는다.

'아직 죽을 수 없다.'

더, 조금 더!

더욱더 기력을 끌어올려라!

뇌가 더욱더 빨리 정보를 입력하고 처리한다.

주변의 공간, 그의 소리, 냄새, 주변의 습도와 온도, 혀 끝으로 감기는 피비린내.

뇌가 터질 것 같다.

'터지라지.'

더욱더!

더욱더!

뇌가 불타 버릴 때까지!

십사 초, 기산심천(氣山心天).

용맥기공이 크게 끓어오르며 내 기세가 거대해진다.

동시에 검기가 졸아들며, 검사(劍絲)의 형태로 유형화된다!

이대대로라면 맞찌르기가 될 상황.

그리고 그때.

빠지직―

터질 것 같던 내 뇌가, 죽음을 각오한 지금의 압력을 받아들이다 못해, '뭔가'를 뚫었다.

아아―

이것은.

내 망상(望想)인가?

붉다.

그리고, 푸르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오직 두 가지의 색만이 내게 허용되었다.

붉은색.

그리고 푸른색.

아아―

이것은.

붉은색의 실선(失線)이 김영훈의 손끝에서부터 내 머리에 이어져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다음 공격]임을 예감했다.

부웅!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 공격을 피한 후, 나는 검을 들었다.

푸른색의 실선이 내 검에서 이어져, 그의 늑골로 향해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동선]임을 예감했다.

나는 홀린 듯, 푸른색의 실선을 따라 검을 그었다.

촤악!

내 검이 그의 상반신을 베어 나갔다.

어쩐지, 그는 이미 시체에 불과할 터인데.

김영훈의 얼굴은 웃고 있는 듯했다.

그 희미한 웃음을 보며.

나는 이전에 했던 생각을 반복하게 되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

그리고 하늘이 버린 둔재.

극과 극이지만 우리가 닮아 보였던 이유.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그 운명 속에서,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천재도 둔재도 없다.

평생을 운명에 저항해 발버둥 치다 죽은 이와.

평생을 운명에 저항해 발버둥 치다 죽을 이가 있을 뿐.

그래.

우리는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재능 따위는 상관없이 닮은 인간인 것이다.

―이대로 끝낼 셈이냐?

그의 시체 위로, 살아생전 김영훈의 얼굴이 비취는 듯했다.

'물론 아니지.'

홀린 듯,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몰아쳤다.

십오 초, 첩첩산중(疊疊山中).

수천 개의 검기가 얇게 갈라져, 폭풍이 되어 그의 전신을 덮쳤다.

본디 상대의 검기를 무화시키기 위해 펼치던 방어 초식이, 최적의 동선으로 상대에게 내리꽂히며 살초(殺招)로 진화한다.

십육 초, 산중호걸(山中豪傑).

첩첩산중에 사는 산중호걸의 발톱과 엄니가 최적의 동선으로 일점 집중되며 전신을 찢어발긴다.

십칠 초, 능곡지변(陵谷之變).

땅으로 쏘아 낸 검기가 지형을 바꾸며 그의 중심을 뒤흔들고.

십팔 초, 공곡전성(空谷傳聲).

검기에 마음을 비워 반격을 다시 되치며.

십구 초, 산명곡응(山鳴谷應).

검기를 파(派)의 형태로 바꾸어 피하는 게 불가능한 일격으로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십 초, 구산팔해(九山八海).

그 자리에서 수 번의 회전을 한 후 팔방 베기를 하여 형체를 찢고,

이십일 초, 천지(天池).

다시 검을 휘둘러 내가 지금껏 휘두르며 생겨난 모든 파(派)와 흐름(流), 힘(力)을 걷어들이며 납검한다.

구구구구구―

단악검법 이십 초식의 모든 파와 류, 력의 힘을 걷어들인 힘이다.

그 광대한 기운이, 납검한 검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과 같이, 다시 검을 발검(發劍)했다.

이 모든 힘을 집중해서 다시금 참격을 내지르는 일격.

단악검법(斷岳劍法).

"제 이십이 초."

오의(奧意)

"단악(斷岳)!"

일 검(一 劍)에 담기는 단악검법의 총체(總體)!

마지막 검을 내지르며, 나는 이번 생의 주마등이 눈앞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

아하, 그래.

이것이 끝이구나.

번쩍!

내 일검에, 김영훈의 시체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는 아무리 수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시신을 더는 욕보일 수 없으리라.

그렇게, 나는 내가 염원해 왔던 새로운 경지에 오르며.

끈질기고 끈질겼던 이번 생을 마무리했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회귀(回歸)였다.

4회차의 첫날

아.

나는 눈을 떴다.

익숙한 기분.

"또 회귀했군."

지난 삶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드디어, 올랐다."

그래, 제대로 정신이 든다.

나는 분명, 마지막 순간.

"절정지경(絕頂之經)에 올랐다!"

너무 흥분되어, 나는 주변도 신경쓰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드디어! 드디어!!!"

평생을 갈구해 온 그 경지에, 닿았다!!!

부웅!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전명훈 과장이다.

하지만 나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휘이익!

공기를 뚫고 오는 전명훈의 손길.

나는 그의 움직임을 느끼며, 죽기 직전 도달했던 '그 감각'을 일깨웠다.

'보인다!'

눈을 감았는데도 생생하다.

붉은빛의 궤적이 내 뺨을 향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최적의 움직임으로 전명훈의 귀싸대기를 피했다.

"이 자식이, 피해?"

붕, 붕!

전명훈이 몇 번 더 손을 후려쳤으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그의 손길을 전부 피해 냈다.

'보인다. 전명훈의 다음 움직임이. 녀석의 손길이 어디로 향할지. 아주 또렷하게 보여.'

이전에도 전명훈 정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공격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건 전부 수십년 동안 무술 수련을 한 경험을 통해 경험적으로 어디를 때릴지를 '예상' 하며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붉은 실선이 녀석의 경로를 말해준다.

실선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고 있어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듯 생생하게 보였다.

이건 '예상'이라기보단, 차라리 '예지(豫知)'에 가까웠다.

'이게, 절정경 고수들의, [시야]인 건가?'

나는 그제야 어째서 일류 고수는 몇 명이 모여 있든 절정고 수를 이길 수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거다. 자기보다 하수(下手)인 일류 무사들은 몇 명이 모여있든 공격의 방향과 궤적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야. 공격이 절대로 닿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일류 무인이 절정 무인을 이길 수 있겠나.'

이 때문에 절정 고수를 일류 무인이 상대하기 위해선, 수십 명 이상이 인해전술로 덤벼드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상대의 공격 방향과 궤적은 둘째치고.'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전명훈을 향해, 투지를 세웠다.

동시에, 녀석의 궤적을 알려 주던 붉은 선들이 전부 사라지고, 시야를 푸른 선들이 한가득 메웠다.

얼굴을 포함해, 어깨, 가슴, 팔, 옆구리, 배, 하초, 골반, 다리, 무릎, 발 등.

수십 군데를 향해 푸른 선이 옹기종기 향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 푸른 선이 향하는 곳이 상대의 허점이자, 내가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동선이다.

아무래도 나와 전명훈의 싸움 실력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허점이 드러나는 것이리라.

'그렇군. 그때 붉은색과 푸른색은.'

―삼화취정의 고수시로군. 나 말고 이 성에서 삼화취정에 이른 자는 처음 보는구려.

―세 번째에 이른 놈들이 흔하지야 않지. 절대 다수가 평생을 빨갛고 파란 그 안에서만 살아가니. 나 또한 자네같은 고수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군.

회귀 2회차 당시.

김영훈과, 가천보라는 문파의 원로원주 팔직태의 대화.

분명 그때 가천보 원로원주 팔직태는 '빨갛고 파란'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때 당시에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으나, 나는 지금에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절정 고수들이 보는 이 '시야'에 대해 말한 것이었었나.'

상대의 공격을 읽을 수 있는 적색(赤色)의 선.

내가 최적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청색(靑色)의 선.

서로의 간합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쌍색(雙色)의 세계가 바로 절정 고수들의 세계였던 것이며, 동시에 그가 말했던 '빨갛고 파란' 세계였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주륵―

'어?'

나는 문득 내 코에서 코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나는 '고통스럽다'는 감각을 느꼈다.

아프다!

마치, 뇌가 타 버리고 있는 것 같다!

'젠장, 이 [시야]를 사용하면 뇌에 과부하가 오는 건가?'

나는 손을 들어, 내게 달려드는 전명훈의 마혈을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점혈해 버린 후, 지난번과 같이 해독초랍시고 수면초를 먹여서 잠재워 버린 후, 빠르게 [시야]를 해지했다.

사실 [시야]를 켜는 순간부터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무시했다.

하지만 시야의 사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통증이 심해졌고, 결국에는 뇌가 타 버릴 듯한 통증이 된 것이었다.

'방금 전명훈과의 투덕거림에서 '시야'를 쓴 시간은 촌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통스럽다니···.'

뭐가 문제일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우선 아직도 혼란에 떠는 동료들을 진정시킨 후.

그들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가 불을 지피고 나무열매와 버섯구이를 구워 먹으며, 동료들을 잠재웠다.

해가 지고, 동료들이 모두 잠든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동굴 밖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절정지경에 대해 정리해 보자.'

절정경이란 기본적으로 뇌를 과부화시켜, 상대의 투로(鬪路)를 읽어 내어 시각화시켜 준다.

물론 말이 시각화지, 맹인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투로를 읽을 수만 있다면 뇌리에 두 가지 색깔이 체험과도 같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시각화라기보다는, 내가 예지하는 적의 투로를 내 뇌가 멋대로 색을 입혀 청색과 적색으로 만든 듯했다.

'이 시야를 사용하면 상대의 움직임이 모두 읽히고, 나는 최적의 동선으로 상대의 허점을 노릴 수 있다.'

이래서 지난 삶의 김영훈이 내게 오감의 극대화를 상시 적용하는 것을, '절정경의 모방'이라고 한 듯했다.

오감을 극대화시켜 상대의 투로를 간접적으로 계산하게 한 것이다.

다만 내가 너무 재능이 없어서 절정지경의 세계를 모방해 왔음에도 끝끝내 마지막에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절정지경을 각성한 것일 터.

'엄청나군.'

나는 다시금 절정지경의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한밤중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푸른 선을 떠올렸다.

수백 수천 가지의 푸른 실선이 나뭇잎을 향해 생겨났다.

나는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나뭇잎을 향해 휘둘렀다.

내공도 없고, 나뭇가지는 검처럼 생기지조차 않은 뭉툭한 가지였다.

심지어 나뭇잎은 생기가 돋은 파릇파릇한 잎사귀였으며, 밤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단악검법의 검초로, 푸른 선이 그려 준 최적의 동선을 통해 나뭇가지로 나뭇잎을 내리친 순간이었다.

파삭!

나뭇잎이, 그대로 베여 버렸다.

나풀거리는 부드러운 나뭇잎이, 내공도 담기지 않은 뭉툭한 나뭇가지에 반으로 잘린 것이었다.

지난 삶의 회귀 첫 날.

절정경의 깨달음을 얻을락 말락 할 때 잠시 이뤄 냈던 경지였다.

그때는 무의식적으로 해낸 것이었지만, 지금 내 의식은 아주 또렷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뭇가지를 들고 검무(劍舞)를 추었다.

내 검무에, 밤바람에 흩날리던 나뭇잎들이, 내공도 담기지 않은 나뭇가지에 전부 잘려 나갔다.

슈칵, 슈칵!

무수한 검초가 나뭇잎들을 꿰뚫는다.

최적의 동선이 내 눈 앞에 수천 가지가 뻗어 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주변에서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전부 일류 고수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공이 없고, 목검도 아닌, 적당히 조금 두꺼운 나뭇가지를 쥔 상태다.

이 많은 일류 고수들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

일류 고수들이 각자 병장기들을 집어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구절편, 연검, 암기, 철퇴, 극, 권, 창, 호조, 참마도, 환도 등 무수한 병장기들이 내게 쏟아진다.

어째서일까.

무섭지 않다.

붕, 붕, 붕!

나는 끊임없이 검무를 추며, 일류 무사들의 병장기를 피해 내고, 최적의 동선으로 최적의 검로를 이었다.

내 일 검에 그들의 초식이 모두 파해되고, 이 검에 그들의 균형이 파괴되고, 삼 검에 모두의 목이 잘려 나가 있었다.

"하아···."

눈을 뜨자, 주변에는 잘려 나간 나뭇잎들이 즐비해 있었다.

주륵―

얼마나 '시야'를 사용했다고, 다시 뇌가 타 버릴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코피가 흘렀지만.

내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나도, 이젠 절정 고수다!'

***

나는 지혈초를 뜯어 코피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백 년 묵은 황주삼들을 캐러 다녔다.

'아마 시야를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건 내공의 유무도 있겠지.'

내공이 어느 정도 몸의 내구도를 받쳐 줘야 시야의 유지도 지속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난 황주삼들을 캔 후 적당히 흙만 턴 후 그 자리에서 전부 씹어서 삼켜 버렸다.

이미 절정 고수에 오른 이상, 딱히 이것들을 팔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김영훈 것만 남겨 두고 전부 먹어야지.'

등선향의 이 근방에서 찾을 수 있는 황주삼은 약 10개.

조금 더 먼 곳으로 탐색 범위를 넓힌다면 뭔가 더 나오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추후 김영훈이 먹을 2개 정도의 삼을 제외한 나머지 8개의 삼을 전부 뽑아 먹어 치워 버렸다.

쿠구구구―

용맥기공의 인도에 따라, 삼들의 막대한 영력이 전신 혈도를 타고 용솟음친다.

후우―

삽시간에 어마어마한 내공 화후가 쌓였다.

황주삼을 하나만 먹고 나머지는 그냥 팔아 버린 후, 50 평생을 꾸준히 공력 수련만 해서 깊은 화후를 가졌던 지난 삶보다도 오히려 많은 내공이 단전에서 꿈틀거린다.

"어디, 다시 볼까?"

막대한 내공을 끌어올리며, 나는 다시 절정 고수의 '시야'를 일으켰다.

그리고 시야를 일으킨 채 약 한 시진 동안 검무를 펼쳐 보았으나, 크게 문제는 없었다.

다시 타는 듯한 괴로움이 시작된 것은 한 식경 후.

그때부터 다시 두통과 뇌가 타는 듯한 괴로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약 한 시진 반 정도가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이군.'

또한 아무리 내공이 많아도 결국에는 이 고통이 찾아오는 시간을 조금 늘릴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인가.'

계속해서 절정 고수의 시야를 펼치는 것을 반복 수련한다.

그렇게 해서,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을 줄여 나가고 점차 뇌 자체가 이 시야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

'수련, 끝없는 수련만이 답이다.'

천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내게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이번 생의 목표는 우선적으로는 절정 고수의 시야를 사용할 때 느껴지는 이 타는 듯한 고통의 극복.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삼화취정(三花聚頂)···!'

절정의 극한(極恨)이라고도 불리는 삼화취정에 도달할 것이다.

"오기조원까지 이번 생애에 바라겠다는 건 좀 도둑놈 심보인 듯싶고. 그리고 어차피 오기조원은 감도 안 잡히는 데 반해서···."

삼화취정의 경지는, 지금으로서도 대략 감이 잡혔다.

―세 번째에 이른 놈들이 흔하지야 않지. 절대다수가 평생을 빨갛고 파란 그 안에서만 살아가니.

가천보 원로원주가 말했던, [세 번째].

적의 의도를 상징하는 붉은색.

내 의도를 상징하는 푸른색.

이것 외에도, [세 번째] 색이 존재하며, 그것이 삼화취정과 그 이하의 존재들을 가르는 기준선이다.

세 번째.

'뭔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

일류에서 절정으로 넘어갈 때 느꼈던 아득한 벽보다, 절정에서 삼화취정에 도달하는 것이 조금 쉽다는 것이 어렴풋이 예상된다.

나는 동굴 안에서 자고 있을 김영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이전보다는 훨씬 더 그의 가르침을 잘 소화할 수 있겠지.'

절정고수에 이른 만큼, 김영훈을 따라다니며 얻을 수 있던 가르침의 수준 역시, 일류 고수이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6권에 달하는 지난 삶의 김영훈이 남긴 심득과, 그가 마지막에 남긴 구결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번 생의 김영훈은 지난 삶의 김영훈을 분명히 뛰어넘을 것이다!

'나 역시, 이번 삶에서 삼화취정을 얻고, 수도자에 한 발 더 가까워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을 하며, 동굴 앞에서 평안히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절정 고수(1)

아침이 밝았다.

여느 회차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 숲의 주인이라는, 꼬리가 세 개 달린 집채만 한 흰 여우가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간단하게 여우에게 예를 올린 후, 여우에게 팔을 주겠다고 하며 팔을 내밀었다.

그러던 도중,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이 여우에게도 붉은 선이 보일까?'

침을 흘리며 내 팔을 물려 하는 여우를 보며, 나는 절정 고수의 시야를 발동했다.

동시에, 나는 가공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붉다!

천지사방이 붉다!

"허, 허억···!"

이전까지의 인간들이 내게 '선' 형상의 궤도를 보여 주었다면, 여우는 여우의 미간을 중심으로 시뻘건 빛이 천지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단순한 선이 아니다.

면을 넘어서, 입체의 형태로 붉은빛이 주변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모, 못 이긴다.'

나는 여우의 붉은빛, 그의 '영역'을 확인하며 아연한 표정으로 팔을 내밀어야 했다.

와드득, 와득!

여우가 내 팔을 산채로 씹어먹는 와중에도, 나는 여우의 영역을 확인하며 아연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공간이 전부 붉은 빛으로 채워지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생물은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며칠 후 다시 찾아온 수도자들 덕에 또다시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부, 붉다!'

전명훈, 오현석, 강민희를 데리러 온 세 괴물들 역시 여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적색이 사방의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수도자와 무림인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무림은 잘 해 봐야 그 투로와 의도가 선의 형태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도자들은, 어째서인지 그들의 의도가 공간 전체를 잠식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내가 저 수도자들의 붉은 빛이 잠식된 공간에서 그들과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못 이긴다···.'

나는 어째서 수도자 중 가장 밑바닥, 연기기 1성인 존재들이 절정 고수와 맞먹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적인 전투 경험은 없을지언정, 저렇게 자신의 의도로 공간을 잠식해 버리고 있다면, 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수도자의 의도를 읽는 게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수도자는 자신이 잠식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 손에 잡히듯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상성에서 패배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동료들을 데리고 간 다음 날, 오혜서 대리를 데리러 온 해룡왕 서휼에게 틈을 타서 질문을 던졌다.

"해룡왕께 불초 범인이 질문을 올리옵니다."

[흠, 뭐지?]

나는 그에게 내가 본 것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한 후, 수도자들의 붉은 영역에 대해 질문했다.

서휼은 껄껄 웃으며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수도자들은 모두 식(識)이라는 걸 가지고 있다네. 신식이니 의식이니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런 능력이 있다네. 범인들의 식은 그들의 뇌 바깥으로 나오지 않지만, 수도자들은 그 식을 뇌 바깥으로 뻗쳐 주변의 공간을 뒤덮어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알 수 있지. 나 같은 요수선사 역시 그는 마찬가지이고. 답이 되었는가?]

"감사합니다."

나는 연국의 언어로 그와 대화를 이어 갔기에 김영훈 등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얼마 후 서휼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다시금 꼭두각시를 탄 곱사등이 괴인이 나타나 김 주임을 데려가겠다 하고, 나와 김영훈을 공간 균열로 밀어 넣었다.

나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